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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 60-70

60. 진홍의 마탑 3

"다들 일어나세요."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언제 안 만든다고 했나요? 연기만 제거되면 바로 치료제를 만들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뭐든지 하겠습니다!"

마법사들이 눈물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연기를 제거하지 않으면 치료제는 소용없어요."

열심히 치료제를 먹어봤자, 연기 마시면 도루묵일 테니까.

"그럼 빨리 연기를 제거해야...."

"어떻게 제거하지?"

"젠장, 마법만 쓸 수 있었어도!"

"역시 우리가 마시는 수밖에 없어. 연기를 마시자!"

마법사들은 의욕으로 가득했지만, 정작 연기를 없앨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그냥 마시기로 했다.

"강 선생, 역시 저놈들이 연기를 다 마셔서 없애야 해? 그거 말곤 방법이 없어 보이는데."

"그것도 재밌겠지만, 너무 오래 걸릴걸요."

강승현은 마나 워치로 시간을 체크했다. 마법사들이 열심히 마시면 없앨 수 있겠지만, 1시간 안에 다 마시긴 힘들다.

"다 마시기 전에 연기가 포션 가게를 부수고 나가겠죠."

강승현은 연기를 열심히 마시려던 마법사들을 불러모았다.

"연기를 없애려면 몇 가지 재료가 필요합니다. 여기가 마침 포션 가게라서 다행이네요."

"재료? 포션을 만드는 겁니까?"

"네. 포션으로 제거할 겁니다."

가향초 연기에는 칼도 마법도 통하지 않지만, 포션은 효과가 있다. 그렇다고 아무 포션이나 통하는 건 아니지만.

"다들 흩어져서 제가 말하는 재료를 찾아오세요."

이들 중 몇 명은 포션 제조를 배운 마법사다. 상세하게 설명해주지 않아도 포션 재료를 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

"넵!"

"알겠습니다."

마법사들이 가게 안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김호정 씨는 이렇게 생긴 재료를 찾아주세요. 생각보다 찾기 쉬울 겁니다."

"알았어."

김호정은 포션 재료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간단한 그림을 그려 설명해줬다.

"여기가 포션 가게 안이라서 편하구만."

마법사들이 재료를 찾으러 간 사이 강승현은 포션 제작을 준비했다.

'연기를 없애려면 환기가 제일 좋지만, 여건상 환기는 힘들고.'

마탑은 마력을 이용해 환기 시설을 가동한다. 가향초 연기를 내보냈다간 환기 시설이 망가진다.

'역시 이 안에서 없애는 수밖에.'

연기는 손으로 잡을 수 없다. 형태가 일정하지 않은 기체 같은 녀석이니까.

'거기다 가향초 연기는 마력으로 만들어진 물질을 녹여버리지.'

환기가 제일 편하겠지만, 현재 환기는 불가능한 상황이고 손으로 잡을 수도 없다.

'그럼 해결책이 없냐면 그건 또 아니거든.'

형태가 일정하지 않아서 제거하기 힘들다면 제거하기 편한 형태로 바꾸면 그만이다.

"여기요! 부탁하신 실리카 파우더입니다!"

"말린 모래덩굴 뿌리도 찾았어요."

마법사들이 하나둘 재료를 구해서 가져왔다.

"전부 이리 주세요."

강승현은 재료를 솥단지에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재료를 잘 저어주며 혼합한 뒤, 푹 끓여내 건져내고 다시 한번 끓였다.

"강 선생, 부탁한 재료 여기... 콜록!"

김호정이 기침과 함께 끈적한 액체를 토해냈다.

"젠장 나도...."

김호정은 수치가 낮긴 해도 마력이 없진 않다. 가향초 연기 흡입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력이 낮은 김호정 씨도 가향초 연기 중독 증세를 보이는 걸 보면...."

가향초 연기는 몸 안에 마력이 많을수록 효과가 빨리 나타난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소리네요."

마력이 적은 김호정마저 마력 찌꺼기를 토하는 걸 보면 곧 시간이 다 되어가는 모양이다.

'소중한 동료가 스킬 하나 못 쓰는 쓰레기가 돼선 안 되니까.'

강승현은 끓여낸 포션을 포션병에 담았다.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포션은 완성했다.

"한 번 식히는 게 좋겠지만 그럴 여유는 없고... 이대로 써야겠네요."

"오... 근데 그걸로 뭘 어쩌려고?"

김호정이 완성된 포션을 가리키며 물었다.

"연기는 치우기 힘들죠?"

"그렇지. 손에 안 잡히니까."

"하지만 이걸 사용하면 손으로 치울 수 있어요."

이름은 솔번트 포션. 연기나 가스를 젤 비슷한 물질로 바꿔버리는 포션이다.

"하지만 허공에 뿌리려면 힘들겠는데?"

가향초 연기는 가게 천장 위로 높게 올라간 상태다.

"분무기라도 있으면 모를까...."

"분무기는 없지만 비슷한 건 쓸 수 있어요."

쩌적!

강승현은 솔번트 포션을 흡수했다. 이어서 [살포]를 사용하자, 형언할 수 없는 색상의 오오라가 뿜어져 나왔다.

"오, 그거라면 되겠어!"

"제가 이걸 뿌리면 연기가 젤 형태로 변해 떨어질 겁니다. 그걸 전부 수거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가게 안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아악!

강승현은 가향초 연기를 향해 오오라를 흩뿌렸다. 그러자 오오라와 뒤섞인 가향초 연기는,

철퍽! 철퍽!

젤 비슷한 물질로 변해 바닥으로 떨어졌다.

"연기가 사라지고 있어!"

계속해서 솔번트 포션을 [살포]하자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하얀 연기가 사라졌다. 대신 하얗고 물컹한 덩어리가 곳곳에 생겨났다.

"이것들은 형태만 변한 거고, 마력을 녹이는 성질은 그대롭니다. 빨리 수거하세요."

연기를 제거하기 쉽도록 젤 덩어리로 만들었을 뿐이다. 그냥 놔두면 마력을 녹이고 아래층으로 흘러가게 된다.

"다들 시작하자고!"

"포션 상자! 여기 빈 상자가 있어!"

누군가가 가게 안쪽에서 빈 상자를 가져왔다. 마법사들은 정신없이 젤을 주워 담았다.

"빨리 모아!"

"감촉이 뭔가 드럽다!"

"입 닥치고 일이나 해."

다들 필사적으로 움직인 덕분에 가향초 젤 덩어리를 빠르게 회수할 수 있었다.

"다, 다했다...."

"빠트린 거 없지?"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마법사들이 고생해서 젤을 모으는 동안,

"그건...."

"가향초 완화제. 머릿수대로 만들었으니 줄 서서 받아가세요."

강승현은 치료제를 만들고 있었다.

강승현이 완성한 치료제를 내밀자,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힐러님!"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마법사들은 기뻐하며 치료제를 받아갔다. 다들 정말 죽었다 살아난 얼굴이었다.

벌컥! 벌컥!

치료제를 받아 마신 마법사들은

"몸에 마력이 돌아온다!"

"마법을 쓸 수 있어!

다들 몸 안에 차오르는 마력을 느끼고 무척 기뻐하며 마법을 써댔다.

"이건 김호정 씨 몫. 이번에 고생하셨어요."

"뭘, 진짜로 고생한 건 강 선생이지."

김호정 역시 치료제를 받아 마셨다. 표정이 별로인 걸 보면 맛은 없는 모양이다.

'시간이... 좀 아슬아슬했네.'

마나 워치로 시간을 확인한 결과, 제한 시간을 7분 남겨둔 시점이었다. 가향초 완화제와 솔번트 포션을 연속으로 만드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아무튼 성공했으니 상관없지만.'

강승현은 구석에 쌓인 상자에 다가갔다.

"이건 이제 어쩌지? 폐기물로 버려?"

"제가 가져가려구요. 포션 재료로 연구해봐야죠."

이것들을 잘 연구하면 마력을 녹이는 포션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강승현은 상자를 인벤토리에 쑤셔 담았다.

"연기는 제거했고, 사람들도 치료했지만... 난장판이네요."

강승현은 굳게 닫혀 있던 가게 문을 열었다.

초반에 퍼져나간 가향초 연기가 포션 가게는 물론 마탑 벽과 바닥에 손상을 입혔다.

'손상된 벽과 바닥은 마탑에서 수리하겠지. 가게는 가게 주인이 직접 고쳐야겠지만.'

이번 사건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여기 포션 가게 주인이 아닐까. 실제로 가게 주인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러니 뒷수습은 하셔야죠?"

강승현은 이번 사건의 원흉, 포션을 만들던 마법사를 붙잡았다.

"죄, 죄송합니다...."

"잘못한 건 아시는구나."

"하긴, 저 녀석이 강 선생 말만 들었다면 이 고생 안 했을 테니까."

"따라오세요."

김호정이 쫑알거리며 덧붙였다. 강승현은 마법사를 가게 주인 앞으로 데려갔다.

"가게 내부 수리비랑 가게 바깥 수리비, 포션 재료 값... 그 외에 피해보상까지 전부 제가 지불하겠습니다."

마법사가 가게 주인한테 고개 숙여 사과했다. 보기와 달리 돈은 넉넉한 모양이다.

"그럼 일단 청소부터 해주세요...."

가게 내부는 사람들이 토해낸 마력 찌꺼기 때문에 엉망진창이었다.

"저희도 도울게요."

"우리도 힐러님 말 안 듣고 사고 친 건 마찬가지니...."

다른 마법사들도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뒷일은 저들에게 맡기면 될 것 같다.

"우리는 빨리 나갑시다. 곧 마탑 관계자들이 몰려올 거 아니에요."

일단 수습은 끝냈지만, 마탑에서 이번 일을 조사하러 올 것이다. 약간이지만 벽과 바닥이 녹았으니 난리가 났겠지.

"붙잡혀서 시간 낭비하기 싫으니까 빨리 뜨죠."

"마침 배도 고프고 말이지.... 뭐 먹을까?"

"글쎄요."

"손님!"

가게를 나서려는데 가게 주인이 말을 걸었다.

"덕분에 살았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힐러님 아니었다면 한동안 장사를 접었어야 했을 거예요...."

"아니에요. 제가 뺨을 때려서라도 마법사를 말려야 했는데."

물론 그렇게 했으면 다른 의미로 난리 났겠지만.

강승현이 사건을 미리 막지 않는 이유다. 일단 사태가 벌어지지 않으면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안 믿으니까.

"이걸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저는 포션 재료를 공짜로 사용했으니, 그걸로 괜찮지 않을까요."

물론 그 돈은 원흉 마법사가 대신 갚을 예정이다.

"그래도... 뭐라도 드리고 싶은데...."

가게 주인은 무척 고마워하며 스크롤 하나를 내밀었다.

"제가 드릴 거라곤 이런 것밖에 없네요. 필요 없으실 수도 있지만... 받아주세요."

"감사합니다."

강승현은 인사와 함께 스크롤을 받았다. 가게를 나서자, 기다리고 있던 김호정이 물었다.

"뭐 받았어? 돈?"

"돈은 아니고...."

펄럭!

촤르르!

강승현은 받은 스크롤을 펼쳤다.

"이건 포션 제조 레시피네요."

"포션 제조?"

스크롤에 적힌 레시피는 얼음 포션 제조법. 초급 포션은 재료를 구하기 쉽다.

"얼음 포션 제조법이에요."

"오... 그것도 바람 포션하고 비슷한 거야?"

강승현은 속성 포션 중 하나인 바람 포션을 제조할 수 있다.

"아뇨 그건 속성을 부여하는 버프 포션이고, 이건 공격 포션이에요."

얼음 포션은 얼음 대미지를 입히는 포션이다.

"냉기 버프를 받으려면 냉기 포션을 써야죠."

냉기 포션은 사용해도 대미지가 없지만, 얼음 포션은 사용하면 대미지가 들어간다. 그게 두 포션의 차이다.

"아이고, 포션은 너무 복잡해."

김호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댔다.

'이걸 쓰면 얼음을 수급하기 쉬워지겠는데.'

얼음은 쓸 곳이 많다. 환자의 체온을 내리거나, 부기를 빼거나.

"바람 포션과 달리 공격용으로 써먹을 수도 있어서 좋네요."

"그렇네. 이제 얼음 화살도 날릴 수 있겠어!"

얼음 포션을 사용하다 보면 상대를 일정 확률로 '냉동' 혹은 '동상' 상태로 만들 수 있다.

"조만간 재료를 구해서 몇 병 만들어 둬야겠어요. 이래저래 유용하게 쓸 수 있으니."

강승현은 얼음 포션 제조 스크롤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런 강승현을 옆에서 가만히 보던 김호정이 입을 열었다.

"근데 표정이 안 좋네. 뭔 일 있어?"

"사실 아까부터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요."

강승현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이번 사건이 벌어진 이유는 마법사가 수향초 대신 가향초를 넣었기 때문에다.

"사실 가향초는...."

"헉...헉... 찾았다!"

여기까지 말한 순간,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승현 힐러님! 김호정 탱커!"

"슈이레 씨?"

뒤를 돌아보자 잘 아는 마법사 한 명이 서 있었다.

61. 진홍의 마탑 4

"여긴 어쩐 일로?"

강승현은 슈이레를 바라보며 물었다. 모험가 관두고 마탑에서 공부하겠다던 사람이 공부는 안 하고 싸돌아다니고 있으니까.

"당연히 두 분 마탑 안내해드리러 왔죠."

슈이레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외부인들은 마탑에서 길 헤매는 경우가 많거든요. 워낙 복잡한 곳이라."

슈이레의 말대로 마탑 내부는 꽤 복잡했다. 탄셀 교수가 약도를 그려주긴 했지만 길이 워낙 복잡해서 돌아다니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길 안내는 저한테 맡기세요. 진홍의 마탑 엘리트 마법사가 안내하는...."

"저거저거 딱 보니까 땡땡이친 거야. 수업 듣기 싫어서 쨌구만."

"탄셀 교수님한테 연락하는 게 좋겠네요."

"저 교수님한테 허락받고 왔거든요?"

슈이레가 투덜거리며 덧붙였다.

"제 목숨 구해주신 것도 있고, 아는 사람이 마탑에 왔으면 안내해주는 게 도리라구요."

"농담이에요. 안내해준다면 고맙죠."

강승현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손에 든 그건 뭔가요?"

"아, 이거요?"

슈이레는 품에 종이봉투 같은 걸 안고 있었다. 안에 든 건 알록달록한 양털이었다.

"마법 양탄자 재료예요. 두 분 안내하러 가는 조건으로 물건을 전달해달라고 하셨거든요."

"마법 양탄자? 하늘 날아다니는 그런 거?"

김호정은 알라딘 같은 걸 떠올렸다.

"그런 게 아니라, 마법진이나 주문을 새겨 넣어서 짠 양탄자를 말하는 거예요."

"맞아요. 마법진을 일일이 그리기 귀찮다고 만든 물건이거든요."

마법 양탄자.

마법진을 매번 그릴 필요 없이, 양탄자를 펼치기만 하면 마법을 쓸 수 있는 아이템. 귀한 만큼 마탑에서만 구할 수 있다.

"마법사들은 마법진 그리는 거 좋아할 줄 알았는데."

"마법사도 사람이에요. 마법진을 매번 그리려면 귀찮다구요."

한마디로 마법사들의 게으름이 만들어낸 발명품.

"그럼 그거 전달해주고... 식당 안내 좀 해주세요."

"배고파 죽을 것 같아...."

"그럼 빨리 전해주고 밥 먹으러 가요. 제가 살게요!"

강승현 일행은 슈이레를 따라 마법직조실로 향했다.

-'여기가 마법직조실.... 커튼 가게 같네.'

마법직조실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방 안은 온통 실과 천으로 가득했다.

"비타마니 교수님, 부탁하신 실뭉치 가져왔어요."

"감사합니다."

슈이레가 마법직조실 안에 있던 어떤 남자한테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아, 그쪽은...."

강승현을 발견한 남자는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종이가 아닌 천에 마법을 담아내는 기술. 마법직조술 교수 비타마니라고 합니다."

"저는 힐러 강승현입니다. 이쪽은 제 동료인 김호정 씨."

"탄셀 교수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비타마니 교수 역시 탄셀 교수의 지인이었다.

'탄셀 교수는 도대체 우리 이야기를 얼마나 떠들고 다닌 걸까.'

만나는 사람마다 탄셀 교수를 언급하는 걸 보면 그는 상상 이상의 인싸일지도 모른다.

"혹시 마음에 드는 양탄자가 있으신가요? 모험에 도움 되는 유용한 물건도 많고, 실생활용 러그나 손수건도 있답니다."

한 번 사용하면 소멸하는 스크롤과 달리, 마법직조술로 제작한 천은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다만, 만들기 어렵고 까다로워서... 스크롤처럼 대량생산이 힘들고 복잡한 마법진일수록 천에 담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죠."

그래서 스크롤과 달리 대중화되진 못했다.

'기념으로 몇 개 사갈까.'

마법직조술로 만든 천은 마탑에서만 구할 수 있는 물건이다. 덕분에 기념품으로 인기가 많다고.

"이 러그는 마력을 주입하면 따뜻해진대."

김호정이 전시된 러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즐 대륙식 전기장판인 것 같다.

"나 이거 하나 살까? 겨울에 달달 떨 필요 없고 좋아 보이는데.... 하지만 마력을 주입하면 시원해지는 러그도 탐나고...."

김호정이 양탄자를 구경하는 사이 강승현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응?'

그러다 방 안쪽에 전시된 양탄자 하나를 발견했다.

지금까지 본 양탄자와 달리, 상당히 복잡해 보이는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슈이레 씨, 저 마법진은 뭐죠?"

"아, 저건 정신적 휴식의 결계 마법진이에요. 대상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몸 안의 마력이 차오르는 걸 돕는...."

간단하게 말해서 마력 회복 속도를 증가시키는 마법이다.

"그런가요."

마력이 없는 사람과는 관계없다.

강승현은 흥미를 잃고 시선을 돌리려 했다.

"또, 체력을 회복시켜주진 못해도 체력 떨어지는 속도를 늦춰줘요. 일종의 안전지대 같은 거죠."

실제로 치명상을 입은 마법사가 마법진 안에서 힐러가 올 때까지 버틴 기록이 있다고 한다.

"체력 떨어지는 속도를 늦춰준다고?"

"덤으로 마법진 내부는 늘 청결함을 유지해주거든요. 야외 취침할 때 아주 편하다나 뭐라나."

"거기다 청결함 유지까지?"

강승현의 시선이 다시 양탄자로 향했다.

'이 양탄자, 치료에 활용할 수 있겠는데?'

치료에 있어서 위생은 매우 중요하다.

오염된 환경은 상처를 악화시키고 상처 회복을 방해한다.

'지금까지는 상황이 급해서 어쩔 수 없이 길바닥에서 환자를 치료했지만....'

저 양탄자만 손에 넣는다면 더 안전하고 깨끗한 환경에서 사람을 치료할 수 있다.

"비타마니 교수님, 저건 얼마쯤 하죠? 꼭 사고 싶은데."

"아. 그건 파는 물건이 아닙니다."

비타마니 교수가 무척 안타깝다는 얼굴로 말했다.

"저건 마탑에서 중요한 업적을 이룬 인물에게 선물하는 기념물품입니다."

정신적 휴식의 결계는 술식이 매우 복잡한 최상급 마법 중 하나다.

"마탑에서도 극소수 인물만 발동할 수 있는 마법이에요."

슈이레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그냥 그리는 것도 어려운 마법진이라, 양탄자로 제작하는것 또한 쉽지 않다고.

"만들기 어려운 물건이다 보니... 외부인에게 지급하는 물건은 아닙니다."

"비매품이라면... 어쩔 수 없죠."

등급으로 따지면 레어 이상의 진귀한 아이템이라고 한다. 실제로 양탄자를 받은 사람은 마탑에서도 극소수에 속한다.

'파는 거라면 돈을 모으면 그만인데....'

특별한 일이 없다면 손에 넣긴 힘들 것 같다.

돈보다 아이템을 우선시하는 마탑 특성상 억만금을 가져와도 팔지 않을 테니까.

"슬슬 배도 고프고.... 강 선생,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제가 잘 아는 가게로 안내할게요."

"그러죠."

강승현은 아쉬운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슈이레를 따라간 곳은 마탑 내부의 식당. 마법직조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맛집은 맛집인데...."

"우리, 꼭 이런 곳에서 먹어야 해?"

하지만 식당이라기보다는 디저트 카페 같았다. 천장도 벽지도 바닥도 죄다 핑크빛이었으니까.

정말 슈이레가 좋아할 법한 디자인이다.

"왜요? 예쁘고 보기 좋잖아요. 칙칙한 가게보다 낫고 음식도 진짜 맛있는데."

"그렇게 맛있다고 하니...."

슈이레가 추천하는 메뉴를 시켰다. 가게 디자인 때문에 걱정했지만, 음식은 생각 외로 먹을 만했다.

"좀 달긴 하지만 먹을 만하네요."

"마탑에서 열심히 가꾼 신선한 식재료로 만든 음식이니까 당연하죠."

마탑은 온갖 분야에서 마력과 마법을 이용한다. 보안, 청결, 연구는 물론이고 기본적인 생활 시설까지.

마법 재료를 수확할 때도 마력을 이용한다고.

"근데 그렇게 마력이 많이 들어가면... 마력이 부족하진 않아?"

옆에서 음식을 먹던 김호정이 물었다.

"그거라면 문제없어요. 마력 동력 시스템이 있거든요."

"시스템?"

마력 동력 시스템.

마탑 내부에 거대한 마법진을 펼쳐 마법사들이 가진 마력을 흡수하고 마탑 곳곳으로 마력을 공급하는 시스템이다.

"흡수한 마력은 마탑 지하의 마력 중심지에 모아둬요. 마력 중심지에서 마탑 전체를 마력으로 연결하고 필요할 때마다 끌어 쓰는 거죠."

요약하자면 마법사들한테서 마력을 조금씩 떼어서 모으고, 그렇게 모아둔 마력을 마탑 각 시설에서 사용한다는 소리다.

"그럼 약초도 마법으로 키우겠네요."

"네. 여기 약초 재배실에서."

슈이레가 약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약초 재배실은 마법으로 각종 약초를 생산하는 장소다.

"약초 재배실...."

"기온 조절, 환경 조절... 전부 가능해요."

덕분에 아주 희귀한 약초가 아니고서야 대부분 마탑에서 재배할 수 있다고.

"그럼, 수향초도 약초 재배실에서 재배하겠네요."

"수향초는 약초 재배실 D구역에서 재배해요. 마법진만 설치해두면 알아서 쑥쑥 자라죠."

약초 재배실에 설치된 마법진 덕분에 마법사들은 손대지 않고 약초를 기르고 수확할 수 있었다.

"그럼 약초 재배에 사람이 간섭하진 않는다는 소리네요."

"그렇죠. 마법사가 약초 키울 시간이 어딨어요. 연구하느라 바쁜데."

강승현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사실, 아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슈이레한테 포션 가게에서 일어난 가향초 연기 사태를 설명했다.

-"그,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근데 그걸 또 수습해?"

슈이레가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도대체 강승현 힐러님은 못 하는 게 뭐예요?"

"힐...인데,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마법사는 어쩌다 가향초를 손에 넣은 건가. 포션 가게는 어쩌다 가향초를 팔게 된 건가.

지금으로선 그게 가장 중요했다.

"일단 향초는 마력을 주입하면 성질이 바뀌는 특성이 있어요."

성질이 바뀐 향초는 다른 향기를 풍기게 된다.

"문제는 향초가 좀 약한 식물이거든요."

너무 많은 마력을 주입하면 견디지 못하고 시들거나 죽어버린다. 물을 너무 많이 줬다가 뿌리가 썩어 죽는 꽃처럼.

"보통은 시들거나 말라 죽지만, 가끔 특이한 녀석들이 나와요."

대량의 마력을 주입 당하면서, 품고 있던 향이 사라져버린 변종 향초.

이걸 가향초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서 불량품입니다."

슈이레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보통 약초는 약초 재배실에서 재배하거나, 외부에서 들여와요. 하지만 마탑에 들여오는 약재나 수입품은 전부 검문을 거칠 텐데."

마력을 녹이는 성질을 가진 향초.

제정신이라면 이런 풀을 마탑에 들일 리가 없다.

"그럼 역시 답은 약초 재배실밖에 없네요."

강승현은 결론을 내렸다.

외부에서 들어온 물건이 아니라면 내부에서 만들어진 물건이라고.

"하지만 약초 재배실은 마법진을 작동해서 운영하는걸요. 불량품이 나올 리가...."

곰곰이 생각하던 슈이레의 안색이 나빠졌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마법진에 문제가 생겼다면... 불량품이 나올 수도 있어요."

"자세한 건 약초 재배실에 가보면 알게 되겠죠."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약초 재배실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건 확실하다.

"그러면 교수님한테 요청할게요. 허가 없이 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서... 저도 아직 가본 적 없어요."

슈이레는 곧장 탄셀 교수한테 연락했다.

-=포션 가게에서 생긴 소동에 대해서는 나도 들었다.=

"알고 계셨군요."

=한데 그게 약초 재배실과 관련 있다고 한다면... 조사할 수밖에 없겠군.=

탄셀 교수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마음 같아선 직접 가고 싶다만, 망할 회의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어.=

탄셀 교수는 통신 마법을 통해 슈이레와 소통하는 중이었다.

회의 때문에 꼼짝도 못 하는 상황이라고.

=솔직히 너 혼자라면 절대 보내지 않았을 거다. 다른 놈들한테 맡겼지. 하지만 강승현 힐러가 동행한다고 하니까... 허가하는 거다.=

단독 행동은 하지 않는다.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귀환할 것.

이 두 개의 조건으로 마탑 약초 재배실 입장 허가를 받아냈다.

강승현 일행은 약초 재배실에 도착했다.

"여기가 약초 재배실이에요."

평소에는 사람이 드나들 일이 없어서 굳게 닫혀 있다.

팟-!

받은 열쇠를 가져다 대자, 문에 걸려 있던 잠금 마법이 일시적으로 풀렸다.

"들어가죠."

강승현 일행은 재배실 안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재배실 안에 진입한 순간,

"이, 이게 뭐야? 저게 약초야?"

"뭔진 모르겠지만...."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손에 무기를 쥘 수밖에 없었다.

"안전해 보이진 않네요."

62. 약초 재배실 1

"정글이야 뭐야...."

약초 재배실 내부는 기괴하게 뒤틀린 식물로 가득했다. 언뜻 보면 건물 안이 아니라 정글이나 밀림에 들어온 것 같았다.

"여기가 정말 약초 재배실이야? 던전 들어온 게 아니고?"

"여기 약초 재배실 맞아요.... 하지만."

슈이레가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어딜 봐도 빽빽하게 자라난 잡초나 덩굴투성이였다.

"마력 수치가 필요 이상으로 높아요."

"그럼 이것들은 약초 재배실에서 기르던 약초들이란 소리군요."

본래 마탑에선 약초를 빠른 속도로 성장시키기 위해 마력을 투여한다.

이 기괴한 식물들은 너무 많은 마력 때문에 과하게 성장한 약초들이었다.

"이게 약초라고? 잡초 같은데?"

"잡초 맞아요."

강승현은 약초 가까이 다가가 살폈다.

약초들은 과한 마력 때문에 약효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이런 폐급 약초는 포션 재료로 쓸 수 없죠. 잡초랑 다를 게 없어요."

"비료를 너무 많이 줘서 맛이 갔구나."

"마법진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면 이럴 일이 없는데...."

슈이레는 불안한 얼굴로 약초 재배실 내부를 살폈다.

"분명 보조 마법진이 여기 어디 있다고... 찾았다!"

빽빽하게 자라난 잡초를 뜯어내자, 파묻혀 있던 마법진이 나타났다.

"어어어...."

"마법진이 부서졌네요."

마법을 잘 모르는 강승현이 보기에도 마법진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심하게 뒤틀리고 깨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건 습도 조절용 마법진이에요!"

망가진 마법진을 유심히 살피던 슈이레가 소리쳤다.

"이러니까 정글에 온 것처럼 눅눅하지!"

약초 재배실 내부가 정글처럼 변한 이유가 있었다.

습도를 조절해줄 장치가 망가졌기 때문이다.

"설마 습도 마법진뿐만 아니라 다른 마법진도...."

습도 조절에 이어서 날씨 조절, 기온 조절... 약초 재배실의 모든 보조 마법진은 처참하게 박살 난 상태였다.

"누가 일부러 부순 겁니까?"

"그건 아니고... 메인 마법진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메인 마법진은 어딨는데요?"

슈이레가 정글 안쪽을 가리켰다.

빽빽하게 자라난 식물 줄기가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막고 있었다.

"직접 본 적은 없는데, 구조상 안쪽에 있다고 들었어요."

"그러려면 저걸 뚫고 가야겠군요."

"일단 교수님한테 연락부터...."

슈이레가 다급하게 통신 마법을 준비하려는 순간이었다.

"그건 나중에 하셔야겠는데요."

바스스스스.

안쪽에서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무슨 소리...."

김호정이 여기까지 말한 순간, 강승현은 김호정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파바박!

동시에 소리가 난 쪽으로 방아쇠를 당기자, 수풀이 심하게 흔들리며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스스스스!

수풀에서 나타난 건 기괴한 식물 덩굴이었다.

"으... 저건 또 뭐야?"

"뭐긴 뭐에요 몬스터죠."

당연하지만, 저렇게 움직이는 덩굴이 평범한 식물일 리가 없다.

김호정은 질색하며 중얼거렸다.

"이런 곳에서도 몬스터가 나오는 거냐구."

"몬스터가 생겨나는 원인은 다양해요.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건...."

"너무 강한 마력을 받은 생물은 몬스터로 변한다."

슈이레가 스태프를 집어 들며 말했다.

"약초 재배실이 정글이 될 정도로 마력이 흘러넘치는데... 몬스터가 없을 리가요."

스르르륵. 스륵.

촤악!

기괴한 식물 덩굴이 줄기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강승현은 뒤로 물러나 피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나무 화살을 생성합니다.]

팍!

날아간 화살이 식물 줄기를 끊어냈다.

끊겨나간 식물 줄기는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저건 뭐라고 불러야 해? 기어 다니는 덩굴? 식물인 척하는 동물?"

"저건 마틴 아이비예요."

마틴 아이비.

본래는 잎사귀와 덩굴줄기를 재료로 쓰는 식물이지만, 지금은 마력 때문에 식물형 몬스터로 변했다.

"본명으로 불러줍시다."

"시발! 마틴 아이비!"

촤악!

마틴 아이비가 다시 한번 덩굴을 휘둘렀다.

"어딜!"

"윈드 커터!"

김호정은 검을 휘두르고, 슈이레는 윈드 커터를 날려 덩굴을 베어냈다.

"뭐야, 생각보다 쉬운데?"

"벌초다 벌초!"

"잠깐."

하지만 두 사람이 덩굴을 자를 때마다, 잘린 덩굴에서 새 줄기가 자라났다.

촥!!

"끄악!"

새롭게 자라난 줄기가 김호정의 팔을 내려쳤다. 김호정은 인상을 쓰며 팔을 움켜쥐었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대형 체력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파박!

강승현은 김호정의 체력을 회복시켰다.

"땡큐! 살아쓰!"

"상처 치료는 다 끝나고 해드릴게요."

"근데 말야.... 이러면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거 아냐?"

김호정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덩굴을 잘라도 잘라도 새롭게 자라났기 때문이다.

"제초제가 필요할 판이야."

"그냥 베는 건 안 되겠네요."

심지어 새로 자라난 덩굴은 자르기 전보다 더 쌩쌩해 보였다.

슈이레는 스태프를 바닥에 내던지며 말했다.

"어차피 잡초! 불로 태워버리면 되겠죠!"

화륵!

그녀의 양손에 시뻘건 불덩어리가 생겨났다.

"불새!"

슈이레가 뿜어낸 강력한 불길이 마틴 아이비를 덮쳤다.

화르르르르륵!!!

"좋아! 붙었다!"

불은 순식간에 옮겨붙었으나, 마틴 아이비가 불에 타는 속도보다 재생하는 속도가 더 빨랐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불로 태워 죽일 수 없는 식물이라니.

어딜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화르륵!

촤아악!

마틴 아이비의 불붙은 덩굴이 슈이레를 향해 날아들었다.

"야, 야! 일단 불이라도 꺼!"

"바다 안개!"

슈이레는 물안개를 날려 마틴 아이비의 불을 꺼트렸다. 하지만 날아오는 덩굴은 막을 수 없었다.

슈이레는 급하게 마법 방패를 발동했다.

텅!

"으아앗!"

덩굴에 얻어맞은 슈이레는 뒤로 엎어졌다.

몸에 두른 마법 방패 덕분에 큰 부상은 없었지만, 충격으로 정신력이 떨어지는 것까진 막지 못했다.

"헉, 헉...."

"슈이레 씨, 괜찮으세요?"

[진정의 목소리]

강승현은 넋 나간 슈이레를 일으켜 세웠다.

스킬 효과로 깎인 정신력을 회복시켜주자 슈이레의 안색이 좋아졌다.

"가, 감사합니다."

"저 녀석 생각보다 귀찮네요."

"우리 힘으로는 안 될 거 같아요. 일단 도망쳐서 교수님한테...."

슈이레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린 참이었다.

"김호정 씨. 그 칼 좀 빌려주세요."

"알았어."

잠시 생각하던 강승현은 김호정한테 칼을 빌렸다.

"두 분이 싸우는 걸 지켜봤는데...."

그러더니 빌린 칼로 덩굴을 베었다.

베여나간 덩굴은 어김없이 새롭게 자라났다.

"저랑 김호정 씨가 베었을 때는 느리게 재생하고."

강승현은 이번엔 슈이레한테 덩굴을 베라고 지시했다.

슈이레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뻗었다.

"윈드 커터."

날카로운 바람이 마틴 아이비 덩굴을 베었다.

그러자 단검으로 베었을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재생하며 자라났다.

"슈이레 씨가 베었을 때는 더 빠르게 재생하더라구요."

"아...!"

"뭐, 뭐야.... 무슨 차이가 있길래?"

김호정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지만, 슈이레는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마력이 담긴 공격을 받으면 덩굴 재생 속도가 증가해요!"

"맞습니다. 여기 있는 식물들은 과한 마력 때문에 급성장한 약초들이죠."

마틴 아이비는 그 과정에서 태어난 몬스터.

지금 녀석은 마력을 흡수해 몸을 성장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마력을 흡수해서 성장하는 능력?"

"그러니까 베어도 베어도 끝이 없던 겁니다. 지금 약초 재배실 안은 마력으로 가득하니까."

즉, 주위 마력을 어찌하지 않는 한 녀석을 죽일 수 없다.

마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으니까.

"그럼 저놈을 쓰러트릴 수가 없잖아?"

"지금은... 물러나는 게 좋겠어요. 약초 재배실에 마력이 너무 많아요."

슈이레가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

저런 괴물을 상대하려면 다른 사람들을 불러와야 한다고.

하지만 강승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요. 마력만 제거하면 쉽게 쓰러트릴 수 있습니다."

주위 마력을 흡수해서 성장한다면, 흡수할 마력을 없애버리면 그만이다.

살펴본 결과, 마틴 아이비는 재생 말고는 특별한 능력이 없는 몬스터였으니까.

"하지만 무슨 수로...."

"아까 좋은 걸 손에 넣었거든요."

강승현이 씩 웃으며 말했다.

마력을 녹여서 찌꺼기로 만들 수 있는 물질. 그 물질이 지금 강승현의 인벤토리 안에 있다.

"마력을 녹일 수 있는 화살."

"아! 가향초 연기!"

김호정이 손가락을 튕기며 소리쳤다.

"맞아요. 정확하게는 가향초 젤 덩어리."

가향초는 마력을 녹이는 효능을 갖고 있다.

이걸로 화살을 만든다면 마틴 아이비가 가진 마력과 주위 마력을 전부 녹일 수 있다.

'젤은 멀리 퍼져나갈 위험도 없어.'

가향초 연기가 젤 형태로 변하면서 위력이 줄어든 대신 사용하기 편리해졌다.

'연기도 화살로 만들 순 있지만, 그랬다간 뒤처리가 귀찮아질 테니....'

가향초 젤로 만든 화살이라면 사용해도 마탑에 문제는 없을 것이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가향초 젤 화살을 생성합니다.]

강승현은 스킬을 사용해 화살을 생성했다.

프리아의 석궁에 불투명한 우윳빛 화살이 장전됐다.

"뭐, 뭐야! 그런 스킬이 있었으면 진작 써주시지 그랬어요!"

슈이레가 기뻐하며 외쳤다.

"성능은 좋은데, 이게 쓰기 좀 까다로워요."

"까다로워요?"

"잘 쓰면... 팀킬도 가능해서."

강승현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화살을 사용하는 건 강승현이나, 가향초 효과는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김호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그러겠지? 스킬을 쓰려 하면 녹아버릴 테니...."

"거기다 몸 안의 마력이 줄줄 녹아내릴 테니 다 끝나고 치료제를 먹어야 하구요."

그러니 함부로 사용할 수가 없었다.

강승현이야 마력이 없으니 아무 영향 없지만 다른 두 사람은 그렇지 않으니까.

"쓰기 까다롭구만.... 한 번 쓸 때마다 약까지 먹어야 해?"

"가향초 완화제는 아까 만들고 남은 게 있긴 해요. 그러니 그건 걱정 안 하셔도...."

강승현이 석궁을 겨누며 말했다.

"됩니다."

그가 방아쇠를 당기자 우윳빛 화살이 앞으로 나아갔다.

팍!

화살에 맞은 마틴 아이비가 덩굴을 경련하더니 끈적한 액체를 뿜어냈다.

몸 안의 마력이 녹아내린 것이다.

"효과가 있어요! 그럼 빨리...."

슈이레는 마법을 쓰려고 했으나, 손끝에 몰려든 마력이 마법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어? 어? 콜록!"

동시에 기침과 함께 마력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뭐, 뭐야.... 마법이 안 나와...."

"가향초 효과가 지속되는 동안에는 주위 마력이 전부 녹아버립니다."

공기 중의 마력의 물론이고 몸에 담고 있던 마력도 마찬가지다. 가향초 효과 범위 안에 있는 존재는 마력을 다룰 수 없게 된다.

"적은 물론 아군도 스킬을 쓸 수가 없죠."

마틴 아이비는 물론이고, 슈이레도 마찬가지.

그래서 함부로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그, 그럼 저 자식을 어떻게 처리하죠...? 스킬을 못 쓰면...."

"간단해요."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단검을 꺼냈다.

"평타로 죽을 때까지 패면 됩니다."

63. 약초 재배실 2

서걱!

강승현이 단검을 휘둘러 질긴 덩굴을 베어냈다. 하지만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새 줄기가 자라나지 않았다.

서걱! 석!

강승현은 계속해서 덩굴을 베어냈다. 잘려나간 덩굴은 몇 번 꿈틀거리다 움직임을 멈췄다.

"효, 효과가 있어요! 재생이 멈췄다구요!"

슈이레가 덩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강승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마력이 원인이었네요."

일대의 마력을 싹 날려버리자 마틴 아이비의 재생이 멈췄다. 놈을 쓰러트리려면 지금이 기회다.

"화살 효과가 바닥나기 전에 처리하죠."

가향초 연기가 젤 형태로 변하면서 위력이 많이 약해졌다. 효과가 오래 가진 않을 것이다.

'이쪽도 저쪽도 마력은 쓸 수 없다면...남은 건 피지컬 싸움뿐!'

파악!

슈이레가 스태프를 휘두르자 마틴 아이비가 덩굴로 받아 쳐냈다. 재생력을 잃긴 했지만, 덩굴을 휘두르는 건 할 수 있는 모양이다.

쫙!!

마틴 아이비가 휘두른 덩굴이 바닥을 내려쳤다.

콰아악!!

바닥이 부서지며 파편이 튀었다.

"마법 방ㅍ... 아차!"

슈이체는 평소처럼 방어 마법으로 공격을 막으려 했으나.

주르르르륵.

마법 방패는 형태를 갖추지도 못하고 줄줄 녹아내렸다.

"지금은 마법을 못 쓰...."

파박! 파악!

"악...!"

슈이레는 날아온 바닥 파편에 맞아 쓰러졌다.

"저쪽도 스킬을 못 쓰지만, 이쪽도 스킬을 못 쓰는 건 마찬가지라... 쉽지가 않네요...."

슈이레는 바로 몸을 일으켰으나, 몸에 입은 상처 때문에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체력은 회복시켜드릴 테니 슈이레 씨는 물러나 계세요."

"네? 하지만 지금은 스킬을...."

슈이레가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소형 체력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팍!

강승현이 방아쇠를 당기자 체력 화살이 날아갔다.

"체, 체력회복?"

슈이레는 놀란 얼굴로 자신의 몸을 살폈다. 깎인 체력이 회복됐기 때문이다.

"방금 스킬 쓰신 거예요?"

"네."

파박!

강승현은 방아쇠를 한 번 더 당겼다. 날아간 화살이 슈이레의 체력을 회복시켰다.

"어, 어떻게...."

"거기서 쉬고 계세요."

마력을 녹이는 가향초 효과로 인해 그 누구도 스킬을 쓸 수 없는 상황이지만,

'[관찰의 눈]'

스태미나를 사용하는 강승현만큼은 스킬을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덩굴을 휘둘러 공격한다.]

[뿌리를 이용해 마력을 흡수한다.]

[관찰의 눈]을 발동하자 마틴 아이비의 몸 위로 자세한 정보가 떠올랐다.

"줄기만 베어선 소용없네요."

줄기를 열심히 잘라내도 뿌리가 살아 있다면 소용없는 짓이다. 마력이 돌아오면 다시 재생할 테니까.

"뿌리를 공격해야 합니다."

"저놈을 말려 죽이려면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거지?"

"네."

김호정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뭔가를 던졌다.

탁!

강승현의 손에 잡힌 건 붉은 보석. 피를 갈구하는 혈석이었다.

"막타는 선생한테 맡긴다아앗!!"

그 말과 함께 김호정은 땅속에 칼을 처박았다. 그리고 칼을 삽처럼 퍼 올렸다.

푸욱!

땅속에 박혀 있던 마틴 아이비 뿌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는 못 버텨! 한 방에 끝내!"

뿌리가 드러난 지금이라면 마틴 아이비한테 치명타를 먹일 수 있다.

강승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혈석을 손바닥으로 꽉 쥐었다.

푸욱!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혈석으로 스며들어 갔다.

[흡혈 충동!]

[공격력 상승 버프]

혈석의 효과로 공격력이 크게 치솟았다.

강승현은 단숨에 앞으로 뛰쳐나갔다.

[절개]

그가 휘두른 시퍼런 칼날이 마틴 아이비의 뿌리를 찢어냈다.

쫘아악!

[절개] 자체는 위력이 그렇게 강하진 않다.

하지만 혈석 버프를 더하면 꽤 준수한 파워를 낼 수 있다.

바스스스스...

마틴 아이비는 덩굴을 몇 번 꿈틀거리긴 했으나, 뿌리가 뜯겨나간 이상 의미가 없었다.

곧, 덩굴의 움직임이 멈췄다.

-"세상에...."

슈이레는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강승현의 일격에 마틴 아이비가 쓰러졌다.

누구도 마력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스킬을 사용했다.

'강승현 힐러님은 도대체 정체가 뭘까....'

그녀가 느끼기엔 상식을 초월한 상황이었다.

'마력 대신 스태미나를 쓴다는 거... 생각보다 훨씬 더 편하네.'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마시며 생각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슈이레는 넋 놓고 있었지만 굳이 알려줄 이유는 없다.

"잘 썼어요."

탁!

강승현은 김호정한테 혈석을 돌려줬다.

이것도 생각 이상으로 쓸모 많은 아이템이다.

"막타 칠 때는 버프 몰아줘야지."

김호정은 싱글벙글 웃으며 혈석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일단 방해꾼은 처리했으니... 슈이레 씨."

"에...."

"슈이레 씨."

"아, 네!"

넋 놓고 있던 슈이레가 정신을 차렸다.

"길을 뚫었어요. 메인 마법진에 대해 조사하러 가야죠."

"그, 그래야지 참!"

"일단 가향초 완화제 드세요."

강승현은 아까 만들고 남은 치료제를 두 사람한테 나눠줬다.

"가향초 젤은 가향초 연기보다 위력이 낮아져서 약 안 먹어도 시간 지나면 낫긴 해요."

하지만 몸 안의 마력을 빨리 회복하려면 치료제를 먹어야 한다.

"으, 맛없어...."

"아까 먹어봐서 그 맘 알지.... 우웩."

슈이레와 김호정은 일그러진 얼굴로 치료제를 마셨다. 약효가 퍼지며 두 사람의 몸에 마력이 돌아왔다.

"휴... 다행이다. 평생 못 쓰면 어쩌려나 했는데...."

슈이레는 손끝에 몰려드는 마력을 보며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

"다들 몸은 괜찮으세요?"

"뭐 그런대로?"

"일단 상처부터 치료하죠."

강승현은 약과 붕대를 꺼내 자신과 동료의 상처를 치료했다.

'지금은 딱히 진정시킬 사람은 없지만....'

[진정의 목소리]와 [완치판정]을 동시에 사용하자 회복 속도가 상승했다.

"오, 상처 회복이 좀 빨라졌는데?"

"힐만큼은 아니지만요."

눈에 띄게 좋아진 건 아니지만, 스킬을 쓴 보람이 있었다.

"정말 봐도 봐도 신기해요...."

신성력을 사용하지 않고 타인을 치료하다니.

슈이레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상처는 대충 치료됐고, 이제 움직입시다."

강승현은 손바닥에 감은 붕대를 묶으며 말했다.

"그래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지금 약초 재배실은 약초가 몬스터로 변이할 정도로 강한 마력이 흘러들어온 상태다.

"외부의 침입 흔적은 없으니... 내부에 문제가 있다는 거겠죠."

"메인 마법진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소리...."

세 사람은 약초 재배실 안쪽으로 다가갔다.

아까까진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지만, 가향초 젤 화살의 효과로 지금은 죄다 말라 죽어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앞장서서 걷던 슈이레가 앞으로 달려나갔다.

"메인 마법진이 붕괴됐어!"

벽면에 나타난 거대한 마법진. 약초 재배실을 관리하는 메인 마법진이다.

지금은 손쓸 수도 없이 처참하게 망가진 상태였다.

"원인이 뭐죠?"

"한계치 이상의 마력이 유입돼서... 메인 마법진이 감당하지 못하고 붕괴한 것 같아요."

평소 사용하는 마력량이 100이라면 지금 마법진에 유입되는 마력량은 대략 3000.

정상적인 수치가 아니다.

"그 말은...."

"마력 중심부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거예요!"

슈이레의 안색이 나빠지다 못해 새하얗게 질렸다. 마력 동력 시스템에 문제가 생기지 않고서야 이런 비정상적인 양을 보낼 리가 없다.

"마력 중심부?"

"그거 말곤 이유가 없어요. 빨리 교수님한테 알려야...."

파지지직!

그때 마법진 주위로 강렬한 스파크가 터져 나왔다. 전기 같지만, 실제로는 밖으로 터져 나온 강력한 마력이다.

"세상에, 마력 역류까지!"

슈이레가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마력 역류.

너무 많은 마력이 한곳에 몰릴 경우 스파크를 일으키며 터져 나오는 현상이다.

파직!

파지지직!!

마법진 곳곳에서 스파크가 터져 나왔다. 저런 식으로 터져 나온 마력이 모이면 강력한 폭발이 발생한다.

간단하게 마력 폭발이라 부른다.

"이, 이러다 터지겠어.... 다들 도망쳐요!"

"마법으로 못 막아?"

"양이 너무 많아서 저 혼자는 못 막아요."

수도관이 터질 땐 혼자 막을 수 있지만, 댐이 터지면 사람 혼자선 못 막는 것과 같다.

지금도 마력이 계속해서 유입되는 중이라 슈이레 혼자서 막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저런 게 터지면... 난리 날 거 같은데?"

김호정이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건물 안에서 저런 게 터진다면 폭탄 테러가 일어난 수준일 것이다.

"그렇긴 해요.... 난리 나겠죠. 거기다 우리는 바로 앞에 있으니 무조건 죽겠죠...."

슈이레가 질색하며 고개를 돌렸다.

당장 도망치지 않으면 폭발에 휘말려 크게 다치거나 죽게 된다.

"일단 밖으로 나가면 목숨은 건질 수 있을 테니...."

"강 선생, 뭔가 좋은 생각 없어?"

"잠시만요."

잠시 생각하던 강승현이 입을 열었다.

"연결 회로를 끊어버리면 어떨까요."

마법진에 이어진 연결 회로를 끊어버리면 작동이 멈추면서 마력 역류가 소멸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폭발을 막을 수 있다.

"그게... 마탑이 걸어둔 강력한 마법이라, 저 같은 일개 마법사 눈에는 안 보여요."

하지만 슈이레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마탑 최고위급 마법사가 아니고서야 보통은 마력 연결 회로를 볼 수 없다고.

"아, 그래요?"

곰곰이 생각하던 강승현은 [관찰의 눈]을 사용했다.

그의 눈이 푸르게 빛남과 동시에 마법진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과도한 마력으로 붕괴된 마법진]-

-[지금은 사용할 수 없다]-

마법진을 중심으로 빛나는 선이 퍼져나가는 게 보였다.

역시 [관찰의 눈]이다.

'저게 마력 연결 회로인가?'

마력 연결 회로.

마법진에 마력을 공급하는 선이다.

저걸 끊어버리면 마법진을 멈추고 폭발을 막을 수 있다.

"설마... 연결 회로가 보이세요?"

"잘 보이는 건 아니고 대충은요."

보통은 볼 수 없겠지만 강승현은 [관찰의 눈]을 사용하면 형태를 어렴풋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물론 스태미나가 쭉쭉 닳기 때문에 틈나는 대로 포션을 마셔야 하지만.

"교수님도 마력 연결 회로는 못 보는데.... 당신 진짜... 힐러 맞아요?"

"맞는데요."

"...."

"힐은 못 쓰지만."

슈이레는 강승현이 덧붙인 말을 듣고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다른 사람이면 안 믿었지만... 강승현 힐러님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긴 했다. 지금까지 별의 별 기적을 보여주었으니까.

슈이레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마력 연결 회로는 변형 마법진 비슷한 거예요."

벽을 부순다고 해도 소멸하지 않는다.

마법으로 특수하게 제작했기 때문이다.

"그냥 때려 부술 순 없다는 거군요."

"회로를 끊어내려면 높은 마력 저항력을 가진 물체가 필요해요."

대표적으로 마력을 베는 검.

항마검을 사용하면 마력 연결 회로를 끊을 수 있다.

하지만 검이 있다고 무조건 벨 수 있는 건 아니고, 마력 연결 회로를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마탑에서도 극소수의 인물만 가능하다고.

"연결 회로는 볼 수 있다고 하지만, 강승현 힐러님한테 그런 물건이 있을 리가...."

"...음."

"설마... 있어요? 있어요?"

슈이레가 경악한 듯 소리치자

"네. 칼은 아니지만...."

강승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강력한 마력 저항력을 가진 아이템은... 하나 갖고 있어요."

강승현이 꺼낸 건 주황빛 구슬.

[키르카라슈텔의 보주]였다.

64. 키르카라슈텔의 보주

'잊혀진 신, 키르카라슈텔의 보주.'

강승현은 자신의 손에 들린 커다란 주황색 보주를 바라보았다.

'아까는 아일을 때려잡을 때 사용했지만....'

키르카라슈텔 보주의 메인 능력은 강력한 마력 저항력과 마법 방어력.

한마디로 마법사를 조지기 위한 아이템이다.

'이거라면 연결 회로를 끊을 수 있겠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신의 힘이 담긴 성유물이니까.'

사람들에게 잊혀졌다고 해도 신은 신.

이런 강력한 마력 저항력을 가진 성유물이라면 항마검을 대체할 수 있다.

강승현은 메인 마법진으로 시선을 옮겼다.

파직,

파지지직!

메인 마법진에선 지금도 시도 때도 없이 마력 역류가 일어나는 중이다.

"강 선생, 조심해!"

뒤에 있던 김호정이 불안한 얼굴로 소리쳤다.

"가까이 다가가면 저 스파크에 닿을 거야!"

파직, 파지직!

언뜻 보기에는 전기 스파크 같지만, 실제로는 한계치 이상으로 쌓인 마력이 밖으로 터져 나오는 현상이다.

"저건 순수한 마력이에요. 약간의 충격만 가해져도 폭발하겠죠."

슈이레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가능한 한 다가가지 않고 거리를 둬야 한다고.

"거리를 둬야 한다...."

강승현은 손에 든 보주를 바라보았다.

검이나 스태프 같은 무기라면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으니 스파크에 닿지 않고 연결 회로를 끊을 수 있다.

'문제는, 이게 검이 아니라 구슬이라는 거지'

지금 강승현이 들고 있는 건 한 손에 들어오는 야구공만 한 구슬이다. 이걸 사용해 연결을 끊으려면 마법진 가까이 접근해야 한다.

"확실히 그냥 접근하는 건 위험하겠네요."

강승현은 키르카라슈텔의 보주를 던졌다 받으며 중얼거렸다.

"뭐... 이렇게 하면 어떻게든 되겠죠."

잠시 생각하던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포션 하나를 꺼냈다.

"그건 뭐야?"

"점착 포션."

강승현이 꺼낸 건 점착 포션이었다.

"점착 포션...?"

"그걸로 뭘 어쩌시려구?"

"이렇게 쓰려구요."

[실 뽑기]

강승현은 스킬을 사용하자 점착 포션에서 끈적한 실이 뽑혀 나왔다.

"실?"

두 사람은 자느라 몰랐겠지만, 강승현은 이걸로 아일을 농락했다. 이번에도 비슷한 짓을 할 생각이다.

촥!

강승현은 끈적한 실을 보주에 휘감아 붙였다.

"키르카라슈텔의... 주먹!"

그리고 보주를 철퇴처럼 휘둘러 벽에 충돌시켰다.

쿵!

이걸 지옥에 있을 아일이 봤다면 분명 바닥에 엎드려 오열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휘두르면 가까이 접근할 필요가 없지.'

강승현이 보주를 휘두르자 슈이레가 당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그거 귀한 아이템 아니에요? 그런 식으로 써도 돼요?"

"뭐 어때요. 귀해봤자 아이템이지."

이렇게 줄에 매달아 공격하면 거리를 두고 공격할 수 있다. 직접 다가갈 일이 없으니 마력 역류에서도 안전하다.

강승현은 다시 한번 보주를 휘둘렀다.

'[관찰의 눈].'

동시에 [관찰의 눈]을 사용했다.

연결 회로에서 유독 크고 강렬하게 빛나는 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선에서 나타나는 정보는 단 두 글자.

-[위험]-

곧 마력 역류가 발생하거나, 마력 폭발이 일어날 거라는 경고다.

'하지만 마력이 터져 나오기 직전이라는 건, 그만큼 약해진 상태라는 뜻!'

쉽게 끊을 수 있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쿵!!

강승현은 일부러 [위험] 정보가 나타난 선을 노렸다. 본래는 마력이 터져 나오며 강력한 스파크가 발생하겠지만,

파지지지직...

키르카라슈텔의 보주가 터져 나오려던 마력을 억눌렀다.

"마력 역류가... 잦아들고 있어?"

"오... 진짜다. 스파크가 사라지고 있어."

마력 연결 회로를 볼 수 없는 슈이레도 이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저 괴상한 구슬이 터져 나오는 마력을 억누르고 있어!'

저 구슬에는 항마검에 맞먹는, 아니 그 이상으로 강력한 힘이 담겨 있다는 것을.

"저거라면 마력 연결 회로를 끊을 수 있어요!"

슈이레가 안도한 얼굴로 소리치자, 강승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보주를 휘둘렀다.

쿵!

벽을 부술 기세로 계속 휘두르자.

파지지직...

터져 나오려던 마력이 억눌러지며.

팟!

마법진에 이어진 빛나는 선 하나가 끊어졌다.

마력 연결 회로 하나가 소멸한 것이다.

'끊어졌다!'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보주를 휘둘렀다.

쿠웅! 쿠웅!!

파악!

계속해서 보주를 벽에 처박자 두 번째, 세 번째 연결 회로가 끊어졌다.

"저, 점점 약해진다!"

"이야, 저게 효과가 있긴 하네?"

마력 연결 회로를 끊을 때마다 마법진에 몰려드는 마력량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파아악!

마법진에 이어져 있던 빛나는 선이 전부 사라졌다.

'끝났다.'

마력 연결 회로가 전부 소멸하면서 마력이 약초 재배실로 흘러오지 않게 됐다.

"머, 멈춘 거지?"

"대충 멈춘 것 같네요."

더 이상 마력이 흘러들어오지 않자 고장 난 마법진이 작동을 멈췄다.

김호정이 마법진에 슬금슬금 다가갔다.

"오... 진짜 아무 일 없어!"

마법진을 손으로 건드려봐도 아무 일 없었다.

김호정은 신기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역시 강 선생이야!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

"이게 다 아일 덕분이죠. 제사상이라도 차려줘야겠네요."

강승현은 보주를 인벤토리에 넣으며 말했다.

지금쯤 지옥에서 불타고 있을 아일에게 고마워하면서.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사람이라니까.... 진짜 힐러 맞으세요?"

"치료만 할 줄 알면 힐러죠."

"네네.... 힐 빼고 다 잘하시는 힐러님."

슈이레는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걸로 다 끝났네요. 힐러님 덕분에 살았어요. 교수님한테 말해서 좋은 보상을...."

"아뇨, 다 끝난 건 아니죠."

"네...?"

"생각해보세요. 약초 재배실이 이 지경이 된 걸 보면...."

강승현 일행은 마탑에 유통된 불량품 약초를 조사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기준치를 초과한 대량의 마력이 약초 재배실에 흘러들어왔다는 걸 알아냈다.

"마력 중심부도 무슨 문제가 벌어졌을 거 아니에요."

"마, 맞아요! 당장 마력 중심부로 가봐야 해요!"

이런 대량의 마력이 흘러왔다는 건 마력 동력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다는 소리다.

"거기다, 대량의 마력이 약초 재배실로 몰리는 건 막았지만...."

강승현은 약초 재배실 천장과 벽을 살폈다.

마법진에 이어진 연결 회로는 끊었지만 다른 연결 회로는 멀쩡한 상태다.

"이제 그 많은 마력이 어디로 가겠어요."

약초 재배실로 몰려오던 마력은 다른 구역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빨리 막지 않으면 사방팔방에서 마력 역류가 발생할 것이고...."

"죄다 폭발하겠구만!"

마력 연결 회로를 끊는 건 어디까지나 임시조치였을 뿐이다.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선 마력 중심부로 가야했다.

슈이레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일단,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교수님한테 보고해야겠어요."

"그게 좋겠네요."

-슈이레는 통신 마법을 사용해 탄셀 교수한테 이번 일을 설명했다.

=약초 재배실에 그런 일이....=

이야기를 들은 탄셀 교수는 착잡한 목소리로 탄식했다.

"이건 그냥 넘어갈 상황이 아닙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냥 넘어갈 상황이 아냐. 자네의 설명대로라면... 마력 중심부에 뭔가 큰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어.=

탄셀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마법진이 망가질 정도라면 마력 중심부 역시 정상은 아닐 테니까.

"이런 식으로 곳곳에서 마력 폭발이 벌어진다면 아무리 마탑이라도 버틸 수 없겠죠. 건물 자체가 붕괴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건 상상도 하고 싶지 않군.=

탄셀 교수가 한숨을 쉬었다. 마탑이 붕괴하면 지금까지 연구하던 자료는 전부 소실되고 수십, 수백 명의 사상자가 나올 것이다.

"거기다 마탑이 무너지면 도시를 지키던 보호 결계가 소멸할 거예요!"

슈이레가 초조한 얼굴로 소리쳤다. 보호 결계가 사라지면 이 일대의 몬스터들이 카마르로 몰려올 게 뻔하다. 그것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했다.

"지금 당장 마력 중심부를 조사해야 합니다."

마탑에 펼쳐진 회로를 일일이 끊는 건 불가능한 상황. 그렇다면 이 사태의 원인인 마력 중심부를 손보는 수밖에 없다.

탄셀 교수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마력 중심부는, 마탑의 근원이나 다름없는 장소일세.=

마탑의 힘. 마탑을 움직이는 원천. 아무튼 굉장히 중요한 장소.

마탑의 시작과 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연히... 아무나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죠."

슈이레가 탄셀 교수의 말에 덧붙였다.

마력 중심부는 슈이레 같은 일반 마법사는 물론이고, 교수조차 함부로 드나들 장소가 아니다.

"교수도 갈 수 없다니. 이번엔 좀 빡세겠는데."

김호정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약초 재배실은 탄셀 교수의 허가를 받아 입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력 중심부는 탄셀 교수도 쉽게 드나들 수 없는 상황.

=그곳은 내 권한 밖이니까.=

이번엔 탄셀 교수의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면 마력 중심부를 관리하는 사람은 누구죠?"

=진홍의 마탑 부마스터 중 한 사람인 하이베 님이지.=

마탑은 소속원들의 투표를 통해 마스터를 선출한다. 부마스터는 마스터의 바로 아래 계급이자 차기 마스터가 될 후보들이다.

=지금 마스터 자리에 앉아계신 로케르 님은 조만간 마스터 자리에서 물러날 예정일세.=

"마스터 로케르 님이 은퇴요? 아니 왜요? 몸 건강하고 멀쩡하신 분이."

슈이레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 마탑 밖에 있어서 몰랐던 모양.

=나이도 있으니 슬슬 쉬고 싶다고 하셨다.=

"아... 나이가 많으시긴 하죠."

=마스터 자리에서 물러나면 대륙 중앙으로 가신다고 하셨지.=

그런 관계로 현재 진홍의 마탑은 조만간 공석이 될 마스터 자리를 놓고 후보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중이다.

=하이베 님은 현재 가장 유력한 차기 마스터 후보일세. 별일이 없다면 수월하게 마스터 자리에 앉으시겠지.=

"한마디로 어마어마하게 높으신 분이라는 소리구만...."

마력 중심부 관리자다운 스펙이다.

사실상 진홍의 마탑 2인자.

"그 정도 권력을 가져야 마력 중심부를 관리할 테니까요."

"그건 그렇지."

=아무튼, 마력 중심부에 드나들 수 있는 권한은 하이베 님이 쥐고 있네.=

마력 중심부로 들어가기 위해선 그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야기를 들은 강승현은 몸을 일으켰다.

"그럼 고민할 것도 없죠. 찾아가 봅시다."

마탑 최고 높으신 분 중 하나.

부마스터 하이베한테.

65. 후회할 텐데

강승현 일행은 부마스터 하이베를 찾아갔다. 

하이베의 방은 부마스터 직위에 걸맞게 쓸데없이 화려하고 웅장했다.

"실례합니다. 저는 강승현 힐러라고 합니다."

"강승현 힐러? 아, 탄셀 교수가 이야기하던 그 친구로군."

하이베 역시 강승현에 대해 알고 있었다. 탄셀 교수는 정말 어마어마한 인싸인 모양이다.

"내게 무슨 볼일이지? 곧 회의가 있어서 나가봐야 하네."

"잠깐만 시간 내주시면 됩니다."

"잠깐이라면야...."

하이베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사실 오늘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강승현은 약초 재배실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뭐, 이렇게 말해도 우리를 마력 중심부로 들여보내 주진 않겠지. 마탑 교수도 함부로 못 드나드는 곳이니까.'

마력 중심부는 마탑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마탑의 핵심 시설이다. 아무리 심각한 상황이라 해도 외부인을 들여보내 줄 리가 없다.

'이제부턴 마탑에서 직접 조사할 테고... 나는 여기서 손 떼야지.'

그러니 강승현은 약초 재배실 사태 해결 보상만 받고 이번 일에서 손 뗄 생각이었다.

여기서 더 얽히면 귀찮아질 테니까.

'제정신이라면 이런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있지 않을 거 아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마력 중심부로 가는 문을 열어달라고?"

하지만 하이베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강승현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고개를 돌렸다.

"어처구니가 없구만!"

"문을 열어달라는 게 아니라, 마력 중심부에 문제가 있으니 마탑 측에서 직접 조사하라는 뜻입니다."

강승현은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했으나,

"허튼소리! 마력 중심부에 문제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하이베는 탁상을 내려치며 강승현의 말을 잘라먹었다.

'전형적인 꼰대 윗대가리 새끼구만.'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자기 말이 맞으니 아랫놈들은 입 다물라는 꼰대새끼.

강승현은 이런 타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곳은 진홍의 마탑 최고의 기술력으로 탄생한 시설이다. 마탑이 무너지더라도 안전할 장소지...."

"...."

"그런데 그런 곳에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인가! 문제 같은 건 없네!"

"...음?"

하이베의 개소리를 듣던 강승현은 눈썹을 찌푸렸다.

'왜 이렇게 유난을 떨지?'

하이베는 아까부터 계속 마력 중심부에 문제가 없다는 걸 강조하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과하게.

'마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라면 더더욱 신경 써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 하이베의 태도는 너무 이상했다. 마력 중심부에 정말 아무 문제가 없다면 저렇게 소리칠 이유가 없다.

오히려 뭔가를 숨기는 것 같았다.

"하이베님! 지금 약초 재배실이 어떤 상황인지 알고 하는 말이세요?"

"맞아! 우리가 얼마나 개고생한 줄 알아?"

참다못한 슈이레와 김호정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정상이 아니라구요! 메인 마법진이 붕괴될 정도로...."

"보나마나 엉터리 마법진을 설치했겠지. 그 건에 대해선 징계 처분을 내릴 생각이다."

하지만 하이베는 듣는 척도 하지 않고 제멋대로 결론 내렸다.

"마법진은 아무 문제 없었어요!"

"그 말은 내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건가? 나보다 한참 모자란 어린 것이 감히!"

사제나 힐러나 마법사나 다 그렇지만. 꼰대들은 아랫놈들 의견을 뭉개버리는 취미가 있다.

보통 마법사라면 여기서 기가 눌렸겠지만,

"그쪽이 약초 재배실 상황을 직접 본 것도 아니잖아요!"

재능충이라 꿀릴 게 없는 슈이레는 굴하지 않고 반박했다.

"뭐라고? 어린 것이 말버릇하고는!"

"마법진에 문제가 생긴 이유는 한계치 이상의 마력이 유입돼서...."

"그만! 마력 연결 회로는 진홍의 마탑 최고의 마법사들이 만들어낸 마법이다!"

하이베는 고함을 치며 슈이레의 말을 잘라버렸다. 논쟁에서 밀릴 것 같으면 화를 내는 게 꼰대의 특징이다.

"너는 지금 진홍의 마탑 자체를 모욕할 생각이냐?"

"저는 그런 적 없...."

"슈이레 페르나! 마탑을 뛰쳐나갔던 녀석이 뻔뻔하게 기어들어 와서 하는 말이 마탑에 대한 모욕이냐?"

"으...."

슈이레는 할 말이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탄셀 교수가 제자를 잘못 가르쳤군. 너무 오냐오냐 가르치니 버릇이 없어진 게야."

"...."

"부마스터에게 대든 것에 대해선 따로 징계를 내리도록 하지."

하이베는 주제와 상관없는 방향으로 슈이레의 입을 막았다. 정말 꼰대다운 발상이다.

"...하이베 부마스터님."

생각에 잠겨 있던 강승현이 입을 열었다.

"이제 마탑 곳곳에서 폭발이 일어날 겁니다. 많이 사람들이 다치고 죽겠죠."

"그런 일이 있을 리 없고, 있다 하더라도 마법으로 막으면 그만이야!"

하이베는 끝까지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이게 마지막 경고입니다. 지금이라도 사람들을...."

"괜히 시간만 낭비했군. 내 방에서 썩 나가게!"

하이베는 노발대발하며 소리쳤다. 당장 나가지 않겠다면 사람을 부르겠다면서.

마탑의 부마스터라는 녀석이, 마법사들의 안전은 뒷전이다.

[관찰의 눈]

강승현은 고개를 들어 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씩 웃으며 말했다.

"...후회하실 텐데."

-그 직후, 강승현은 일행을 데리고 하이베의 방을 떠났다.

"...드디어 사라졌군."

강승현 일행을 쫓아낸 하이베는 주변을 살피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저, 저것들.... 도대체 어디까지 알아낸 거지?"

그리고 불안한 얼굴로 손톱을 물어뜯으며 중얼거렸다.

'동력 시스템이 고장 났다는 걸 눈치챈 건 아니겠지...?'

사실 하이베는 이미 알고 있었다.

마력 중심부, 동력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그동안 마스터 자리싸움에 신경 쓰느라 마력 중심부 관리를 소홀히 했더니....'

마력 동력 시스템은 정말 어렵고 복잡한 마법이다. 약간의 오류만 생겨도 큰 문제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력 중심부 관리자는 매일 시스템을 점검하며 문제가 없는지 살펴야 한다.

'이런 일이.... 젠장, 그 멍청한 놈들!'

하지만 하이베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마스터 후보 일에 집중하기 위해 중심부 관리를 부하들에게 떠넘긴 것이다.

'이런 것 하나 제대로 수습 못 해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하지만 부마스터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마법사들이 동력 시스템 오류를 발견할 리가 없다.

하이베는 이마를 짚으며 착잡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후우.... 지금 동력 시스템은 기준치 이상의 마력을 흡수하고 있어. 그렇게 모은 마력을 마구잡이로 방출하고 있지.'

그가 이 사실을 눈치챘을 땐, 이미 시스템이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맛이 간 상태였다.

'이대로 가다간 마력을 비축하는 크리스털이... 폭발한다.'

좀 더 일찍 발견했다면 모를까, 이제는 수습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유일한 해결책은 동력 시스템을 정지시키고 마력 중심부를 전면 교체하는 것뿐....'

마탑에 당장 알려야 할 긴급 사항이었으나, 하이베는 이 사실을 일부러 숨겼다.

'하지만 내가 업무를 소홀히 하느라 동력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다는 게 알려지면....'

하이베는 마력 중심부 업무를 부하들에게 떠넘겼고, 그 때문에 동력 시스템이 고장난 걸 몰랐다.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중죄다.

'내가 마스터 후보 자리에서 쫓겨날 거 아냐!'

만약 이 사실이 마탑에 알려진다면 마스터가 되기는커녕, 부마스터 자리에서 쫓겨날 것이다.

'내가, 내가 이 자리에 어떻게 올라왔는데!'

'절대 안 돼! 절대 안 된다고!'

'지금은 이 방법밖에 없어!'

하이베는 고민 끝에 관계자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 동력 시스템 문제를 은폐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마력 이상 현상이 보고될 때마다 부하들을 보내 수습했다.'

당연히 마탑 곳곳에서 크고 작은 문제가 벌어졌지만, 하이베는 부하들을 파견해 조용히 수습했다.

"하필... 약초 재배실에서!"

약초 재배실은 관리하는 사람이 따로 없다. 그러니 그 누구도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채지 못했다.

'설마 몬스터가 발생할 정도로 심각했을 줄이야.... 사람이 안 다니는 곳도 꼼꼼하게 조사해야겠어.'

하이베는 초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틀만 있으면 현 마스터가 은퇴하고 새 마스터를 선출하게 된다.

'지금 가장 유력한 마스터 후보는... 하이베 비헬! 나 자신이다!'

하이베가 기를 쓰고 이번 일을 은폐하려는 이유다. 진홍의 마탑 마스터 자리가 코앞이었으니까.

'내가 마스터가 되면, 마력 중심부를 점검한다는 핑계로 동력 시스템을 정지시킬 수 있어.'

동력 시스템은 마스터가 된 다음에 손보면 된다. 하이베는 그때까지 버틸 생각이었다.

'겨우 이틀이다. 이틀! 그때 교체해도 늦지 않아!'

하이베는 손톱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강승현, 슈이레. 고놈들이 쓸데없이 쑤시고 다니지만 않으면...."

약초 재배실 사태를 해결해준 건 고맙지만, 그냥 뒀다간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더 늦기 전에 빨리 치워버려야겠어.'

강승현 일행은 마탑에서 당장 내쫓고, 슈이레는 징계를 들먹이며 연구실에 이틀간 처박아두면 될 것이다.

"그러면 아무 문제 없이 마스터 자리에...."

파지지직....

"응...?"

어디선가 스파크 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이베는 뒤를 돌아보았다.

파직, 파직....

파지지지직!!!

"이, 이건...! 마력 역류!"

하이베의 방에 이어진 마력 연결 회로에서 강력한 스파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강승현이 경고한 대로 마탑 곳곳에서 폭발이 벌어진 것이다.

당연히 하이베의 방도 예외는 아니다.

"제, 제기랄! 다중 마법 방패!"

하이베는 바로 마법 방패를 펼쳐 폭발 대미지를 막아냈다.

콰아아아앙!!!!!

쿠르르릉!

"크, 크으으윽...!"

대미지를 막는 건 성공했으나 폭발의 여파로 벽이 무너졌다. 하이베는 쓰러진 책장에 깔리고 말았다.

"제, 젠장.... 이까짓...! 마법만 있으면...."

히이베는 마법을 써서 빠져나가려 했다.

파지지직!!

그 순간, 하이베의 몸에서 스파크가 터져 나왔다.

"끄아아악!"

하이베는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서, 설마! 내 몸에서 마력 역류가...!'

강력한 마력 폭발에 휘말리는 바람에 몸속 마력이 역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래선 마법을 쓸 수 없잖아...!'

그 여파로 마법을 사용하기는커녕,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게 됐다. 하이베는 발버둥을 쳤으나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크윽...! 거기 누구 없는가? 건물 잔해에 내 몸이 깔렸네!"

혼자 힘으로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한 상황.

당황한 하이베가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빨리 구해주게! 그렇지 않으면...."

파직, 파지지직....

이러는 동안에도 스파크는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하이베는 안간힘을 썼지만 여기서 빠져나가는 것도, 마법 방패를 펼치는 것도 할 수 없었다.

'망가진 마력 회로에서 더 많은 마력이 흘러나오고 있어!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폭발이 일어날 거야!'

당장 도망치지 않으면 이번에는 폭발 대미지를 온몸으로 받게 된다. 그랬다간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

"빌어먹을! 마법만 쓸 수 있었어도...!"

저벅, 저벅.

'발소리?'

발버둥치던 하이베의 귓가에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하이베는 온 힘을 짜내 소리쳤다.

"거기! 당장 이리 와서 날 구하게! 여기야! 이쪽이야!"

저벅, 저벅.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하이베는 안심한 얼굴로 말했다.

"어서, 어서 꺼내주게! 곧 폭발할 거야!"

그때, 다가오던 발소리가 멈췄다.

"뭐 하는 건가? 당장 와서 구해...."

"빨리 도망치길 잘했네요."

"뭐라고...?"

하이베는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계속 있었으면 우리도 폭발에 휘말렸을 테니까."

"허억! 자, 자네는...."

"제가 후회할 거라고 했죠?"

발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강승현이었다.

66. 마력 폭발 사고 1

"아무 일 없을 거라고 큰소리치더니만."

강승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책장은 무너졌고, 온갖 장식품은 쏟아졌거나 박살났다.

아까까진 화려하고 웅장하던 방이 지금은 폭발로 인해 엉망진창이다.

"서, 설마... 자네는 폭발이 일어날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건가...?"

"당연하죠."

지금부터 약 15분 전.

강승현은 이 방에서 [관찰의 눈]을 사용했다.

'여기는 부마스터가 사용하는 방이니까 잔뜩 깔아뒀을 거고.'

연결 회로가 많은 곳일수록 폭발할 확률이 높다. 실제로 방 안을 둘러보자 엄청난 수의 회로를 볼 수 있었다.

──[위험]──

예상대로 방 안의 연결 회로는 죄다 폭발 직전이었다.

'하이베 저 새끼는 모르는 건가?'

강승현은 하이베를 살펴봤다. 녀석은 아주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하긴, 모르니까 저러고 있겠지.'

마탑 부마스터라고 해도 맨눈으로 연결 회로를 보는 건 어렵다. 복잡한 마법을 사용해야 실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진짜 [관찰의 눈] 덕분에 먹고 산다.'

생각을 정리한 강승현은 입을 열었다.

"이게 마지막 경고입니다. 지금이라도 사람들을...."

만약, 하이베가 중심부를 조사하겠다면.

하다못해 사람들을 대피시키겠다고 했다면.

'이 녀석도 데리고 도망치려 했는데....'

강승현은 하이베를 구해줄 생각이었다.

밤톨만큼이지만 양심이 있긴 한 것일 테니까.

"괜히 시간만 낭비했군. 내 방에서 썩 나가게!"

그러나 하이베는 듣는 척도 하지 않고 강승현을 방에서 쫓아냈다.

'그렇게 나오시겠다면 어쩔 수 없지.'

그래서 알려주지 않았다. 이 방에서 마력 역류가 발생할 거라는 사실을.

"저는 아까 분명 경고해드렸어요. 그걸 안 들은 건 본인이지."

강승현은 뻐근한 몸을 풀면서 말했다. 하이베는 주먹을 꽉 쥐더니 비굴한 얼굴로 말했다.

"아, 아까는 내가 잘못했네!"

"예?"

"자네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내가, 내가 몰라도 한참 몰랐어!"

하이베는 지금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 누군가 올 법도 한데, 아무도 오질 않는다.

'이 주변 녀석들은 죄다 폭발에 휘말렸다는 거겠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강승현은 폭발을 예상해서 무사한 것 같다.

하이베는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이놈을 놓치면 희망이 없어.'

파직, 파직....

마법 방패도 쓸 수 없는 상황인데, 지금도 등 뒤에선 스파크가 터져 나오는 중이다.

'아까처럼 폭발이 벌어지면 끝장이야!'

겁에 질린 하이베는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제발 구해주게나! 나는 이런 곳에서 죽을 사람이 아닐세!"

"...."

그러나 강승현은 팔짱을 낀 채 하이베를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 폭발이 일어날 걸 알면서 굳이 여기로 다시 찾아왔다는 건... 나와 협상을 하려는 거겠지?"

"협상?"

"내 목숨을 구해주면, 이걸 자네한테 주겠네."

하이베가 꺼낸 건 화려한 장식이 달린 열쇠였다.

"그게 뭔데요?"

"마력 중심부! 자네는 거기에 들어가고 싶은 거잖아! 내 허가하겠네!"

마력 중심부로 향하는 문에는 강력한 봉인이 걸려 있다. 이 열쇠를 사용하면 봉인을 일시적으로 해제할 수 있다.

"자네는 이걸 원하는 거지? 어서 날 구해주고 이걸 받아가게...!"

하이베는 필사적으로 애원하고 있었으나 속내는 따로 있었다.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기만 하면, 네놈은 바로 처리해주마!'

보상은 그저 미끼일 뿐. 하이베는 여기서 무사히 탈출한다면 부하들을 시켜 강승현을 죽일 생각이었다.

'시체는 폭발에 휘말려 죽은 것처럼 위장하면 돼! 감히 하찮은 모험가 주제에 이 나를... 이런 꼴로 만들어?'

하이베는 분노를 꾹 눌러 참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자네 말대로... 마력 중심부에 무슨 일이 있는 게 틀림없어!"

"...."

"그리고 날 구해준다면... 자네한테 어마어마한 보상을 주도록 하지. 나는 진홍의 마탑 차기 마스터가 될 몸이네."

하이베는 마지막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모험가 따위가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지.'

진홍의 마탑 마스터의 후원을 받는 것.

일개 모험가는 꿈도 꿀 수 없는 기회다.

"나를 구한다면 진홍의 마탑은 자네를 영웅으로 떠받들 거야. 마탑의 구원자!"

"...."

"그러니 돈이건 아이템이건... 자네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아까 그렇게 부탁했을 땐 듣는 척도 안 하더니."

강승현은 더는 못 들어주겠다는 듯, 차가운 목소리로 하이베의 말을 잘랐다.

"대충 아시겠지만, 지금 밖에 난리가 났어요."

하이베의 방뿐만이 아니다. 이 주변 시설은 폭발로 죄다 무너져 내렸다.

"어떻게든 사람들을 대피시켜보려 했는데...."

한두 명이라면 모를까, 15분 안에 이 층 전체 인원을 대피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뭐, 부마스터님 말대로 마법사들은 마법으로 피해를 줄일 수 있긴 하죠."

대표적으로 마법 방패. 그걸 사용하면 마력 폭발 피해를 어느 정도 막을 수 있긴 하다.

"하지만 아무리 마법을 쓸 줄 안다고 해도, 실전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쉽지 않습니다."

중급 이상의 마법사들은 마법 방패로 폭발 대미지를 막아냈겠지만.

'마법 방패는 하급생부터 배우는 마법이지만... 능숙하게 쓰려면 중급생은 되어야 한다구요!'

아직 마법이 미숙한 초짜 마법사들은 대부분 폭발에 휘말렸을 것이다. 이건 일개 마법사인 슈이레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 걸 부마스터인 당신이 모를 리가 없는데요."

필사적으로 부정했지만, 하이베는 마력 중심부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유난 떨 리가 없어.'

마력 중심부에 무슨 문제가 생겼다면 제일 먼저 눈치챘을 사람이다. 그런데 하이베는 사태를 수습하긴커녕 아무 문제 없다며 덮으려 했다.

"다른 사람들이 다치고 죽는다고 했을 땐 듣지도 않더니만."

그런 놈이 자기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망설이지도 않고 중심부 열쇠를 꺼냈다.

'뭐 이런 개새끼가 다 있지.'

마탑의 마스터라면 그 무엇보다 마법사들의 안전을 우선시해야 한다. 마탑은 마법사를 육성하고 보호하는 안전지대니까.

'이런 인간이 마탑 마스터 유력 후보라니. 진홍의 마탑도 맛이 갔네.'

하지만 하이베는 마법사들의 안전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자기 자신만 걱정하는 이기적인 쓰레기였다.

강승현은 기가 차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렇게 됐으니... 저는 다른 사람들 구하러 가겠습니다."

"뭐, 뭐라고?"

강승현은 마나 워치로 시간을 확인했다.

마음 같아선 하이베를 걷어 차주고 싶지만, 그건 그냥 시간 낭비다.

"자, 잠깐 기다려! 날 두고 가겠다는 건가?"

"네. 저는 바빠서요."

"자, 자네.... 사람들을 구하겠다며? 마력 중심부를 어떻게 하지 않으면 마탑 전체가 폭발하겠지!"

이번에는 한 층만 폭발했지만, 이다음에는 마탑 전체가 무너질 것이다.

"그래서 지금 해결하러 갈 건데요."

"그래. 자네 말대로 나는 마스터 되기는 글렀어. 그렇다면 목숨이라도 보전해야지...."

하이베가 씩 웃으며 열쇠를 움켜쥐었다.

"마력 중심부로 가고 싶다면 이게 필요할 텐데."

"...."

"혹시나 하는 말이지만 힘으로 뺏어가려 해도 소용없다. 열쇠에도 봉인이 걸려 있으니!"

그 봉인을 풀 수 있는 건 마탑 중심부 관리자, 하이베뿐이다.

"내 허락이 없으면 누구도 마력 중심부에 들어가지 못해! 다른 사람들을 구하고 싶으면 나부터 구해라! 이 하찮은 모험가 놈아!"

이제 숨길 것도 없는지 하이베는 본색을 드러냈다.

"날 구하고 안전한 곳으로 안내해! 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지경까지 왔는데도...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인질로 잡지?"

강승현은 피식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 뭐라고?"

"제가 말 안 했나요? 생각해보니 안 한 거 같네요.

"무슨 소리냐!"

"지금 말해드릴게요. 폭발 때문에 마력 중심부에 걸린 봉인도 다 박살 났거든요."

하이베는 모르는 것 같지만, 강승현은 아까 탄셀 교수한테 전해 들었다.

강력한 마력 폭발로 인해, 마탑 지하의 봉인 마법진이 부서졌다고.

"그러니까 그 열쇠는 필요 없다는 소리죠."

동시에, 하이베를 구할 가치도 없어졌다.

관리자가 없어도 중심부로 갈 수 있게 됐으니까.

"그럼... 자네가 여기 온 이유는...."

하이베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협상 같은 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야 지금 상황을 설명해주려고 왔죠."

"그, 그런 이유로 나한테 왔다고?"

"그거 말곤 딱히 없는데요?"

혹시라도, 하이베가 다른 사람들을 구해달라고 했다면 덤으로 구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녀석은 양심이라곤 1도 없는 쓰레기. 대화할 가치도, 구할 가치도 없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강승현은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파직, 파직!

파지지직!

하이베는 뒤에서 들리는 스파크 소리가 더 격렬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기, 기다려!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으니까 제발 구해줘!"

"구해드릴게요. 다른 사람들 다 구하고 나서."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강승현은 웃는 얼굴로 덧붙였다.

"자네 힐러잖아! 힐러가 사람을 죽게 내버려 둬도 된단 말인가?"

하이베가 분통을 터트렸으나,

"제가 그냥 힐러가 아니라... 야매 힐러라서요. 불만 있으시면 다른 힐러를 찾으세요."

강승현은 기분 좋게 웃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혹시 또 모르죠? 누가 지나가면서 구해줄지...."

물론 방금 그 폭발 때문에 이 근처에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파직, 파직....

파지지지직!!!

마력 폭발이 일어나기 직전이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마력 중심부가 어떤 꼴인지 궁금하거든요."

"기다려! 기다려!!!"

등 뒤에서 하이베의 필사적인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콰아아아아아앙!!!!

곧 강력한 폭발음에 묻혀 사라졌다.

-"이쪽은 대충 해결됐고...."

강승현은 하이베의 방을 떠나 마탑 복도로 나왔다. 벽과 바닥은 폭발에 휘말려 어디 하나 멀쩡한 곳이 없었다.

파직, 파지직....

거기다 곳곳에서 크고 작은 스파크가 일어나고 있었다. 아까보다 더 크고 강력한 폭발이 일어날 것이다.

"빨리 가자! 어서! 서둘러!"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테러야?"

"몰라! 일단 내려가자고!"

"머리 조심해!"

복도를 통해 앞쪽으로 나오자 마법사들이 다급하게 대피하는 게 보였다. 옷차림을 보니 마탑 학생들이었다.

"그쪽은 아까 폭발 때문에 길이 막혔습니다. 저쪽으로 가세요."

"가, 감사합니다!"

"다들 이쪽으로 가자!"

강승현의 말을 들은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혼자 살겠다고 발악하던 부마스터보다 낫네.'

한심한 하이베와 달리, 학생들은 서로 힘을 합쳐 탈출하고 있었다.

상급생은 길을 안내하면서 하급생을 보호하고, 하급생은 힘을 합쳐 부상자를 부축하는 식으로.

'다친 사람도 없어 보이고, 내가 도와줄 필요는 없겠군.'

강승현은 마법사들을 잠깐 바라보다 자리를 옮겼다. 이제 한시라도 빨리 마력 중심부로 내려가야 한다.

'이쪽 복도는 사람이 많이 몰릴 것 같은데, 다른 길을 찾을까.'

다행히 강승현의 손에는 탄셀 교수가 그려준 약도가 있었다. 강승현은 약도를 살피며 내려가는 계단을 찾았다.

'...응?'

그때, 복도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약도상으로 막다른 길이라 사람이 있을 이유가 없는데 말이다.

'저쪽에 누가 있나?'

67. 마력 폭발 사고 2

강승현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다가갔다. 그러자 복도 안쪽, 방문 앞에 마법사 두 명이 서 있는 게 보였다.

'꼬맹이들이잖아.'

하급 마법사 로브를 입은 갈색 머리 여자애와 같은 차림의 노란 머리 남자애. 많아봤자 초3, 초 4쯤 되어 보이는 애들이었다.

'대피 안 하고 뭐 하는 거지.'

다른 학생들은 정신없이 도망치느라 바쁜데 두 꼬맹이는 무슨 이유인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 있습니까?"

"저, 저기요...."

강승현을 발견한 두 마법사는 다급한 얼굴로 문을 가리켰다.

"이것 좀 열어주세요.... 친구가...."

"친구가, 친구가아아아...!"

뭔가 부탁하려는 건 알겠지만 둘 다 횡설수설하느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우으... 우으으읏...."

"와아아아아앙!!"

급기야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마탑 마법사라고는 해도 애들은 애들. 이런 상황에서 침착할 리가 없다.

[진정의 목소리]

"둘 다 진정하고, 차분하게 다시 말해봐요."

"네에."

"알았어요...."

스킬을 사용하자 울던 아이들이 눈물을 그치고 입을 열었다.

"저는 타리스구요.... 얘는 루시인데요...."

"루시 헤베카예요."

갈색머리 여자애가 루시.

노랑머리 남자애는 타리스.

두 사람 모두 진홍의 마탑 소속 하급 마법사였다.

"둘 다 자기소개를 했으니 저도 해야겠죠. 모험가 힐러 강승현이라고 합니다."

강승현도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힐 쓸 줄 모르는 야매 힐러이긴 하지만.

"저 형아, 모험가래."

"멋있다."

"그리고 힐러래."

"나두 들었어."

두 꼬맹이들은 신기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신기할 만도 하겠지.'

애들은 모험가와 만날 일이 별로 없다. 마탑 소속 마법사라면 더더욱.

"서로 자기소개도 끝냈으니, 이제 무슨 일인지 설명 좀 해주실 수 있나요."

"여기 안에 제 친구가 있어요."

"맞아요! 제이! 리제이!"

두 꼬맹이는 문을 가리켰다. 마력 폭발의 영향으로 문이 심하게 뒤틀린 상태였다.

틈새로 안을 들여다보자 엉망진창인 교실 내부가 보였다.

'난장판이네.'

박살 난 테이블과 의자가 굴러다니고 책장과 선반은 죄다 넘어져 있었다. 사람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잡동사니 때문에 잘 안 보이기도 하고.'

[관찰의 눈]

강승현의 눈이 푸르게 빛났다. [관찰의 눈]을 켜고 다시 살피자,

[책장에 무언가가 깔려 있다.]

넘어진 책장 사이에서 짤막한 정보가 나타났다. 너무 멀어서 자세한 정보가 뜨진 않지만, 이걸로 위치 파악은 할 수 있다.

'책장에 뭔가가 깔려 있다고.'

책장 사이를 유심히 살펴보자 아이의 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너무 늦은 건 아니겠지?'

강승현은 몸을 최대한 밀착해 [관찰의 눈]을 사용했다.

[의식 있음]

[움직일 수 없다.]

다행히 죽었다는 정보는 뜨지 않았다. 의식이 있다는 걸 보면 아직은 살아 있다는 소리다.

'늦진 않았나 보네.'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스태미나 포션을 꺼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설명 해주세요."

그리고 루시와 타리스한테 포션을 한 병씩 주면서 물었다.

"아까 방에서 저랑 타리스랑 리제이랑 셋이서 같이 숙제하고 있었는데...."

"벽하고 바닥이 막 폭발했어요!"

두 마법사는 포션을 요구르트처럼 마시며 말했다. 난장판이 된 교실만 봐도 알 수 있지만, 이 꼬맹이들도 마력 폭발에 휘말린 모양이다.

"저는 너무 무서워서 울고 있었는데... 리제이가 마법 방패를 써줬어요."

"우리보고 빨리 도망치라고... 밖으로 나가라고...."

리제이라는 녀석은 친구들을 돕느라 정작 본인은 빠져나오지 못한 것 같다.

"마지막에 책장이 무너져서... 리제이가 깔렸는데...."

"가서 도와주려 했어요.... 근데 문이, 문이 안 열려서...."

"나도 마법 방패 쓸 줄 아는데... 쓸 수 있는데... 무서워서...."

루시와 타리스는 다시 훌쩍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마법사이긴 하나 아직 마법에 미숙하고, 어린아이다.

'보통은 겁먹는 게 당연하지.'

마법은 정신상태에 영향을 받는다. 어른들도 충격받으면 마법을 쓰지 못하는데, 어린애들이야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 상황에 마법 방패를 펼치다니.'

리제이는 침착하게 마법 방패를 펼쳐 친구들을 지켜냈다. 보통내기는 아닌 모양이다.

"알았어요. 리제이라는 친구는 제가 구할게요."

그런 인재를 죽게 내버려 둘 순 없다.

하이베 같은 놈은 좀 죽어도 되지만.

"교실 안에 저 친구 말고 다른 사람은 없나요?"

"없어요!"

"안에 우리 셋만 있었어요...."

정말 다행스럽게도 셋만 살아남은 게 아니라, 처음부터 세 명만 있던 모양이다. 강승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두 사람은 일단 대피하세요. 저쪽 복도 끝 모퉁이로 돌아 나가면 다른 마법사들이 도망치고 있거든요."

"저희도... 도울래요!"

"솔직히 말해서 방해...."

라고 대놓고 말하면 울겠지?

강승현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가 아니라, 위험해서 그래요."

강승현을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폭발의 여파로 벽에 금이 가고 천장이 무너져 내려서 폐허 같았다.

파직, 파직....

그리고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마력 스파크.

아직은 조용하지만 언제 또 폭발할지 모른다.

"알았어요...."

"모험가님! 리제이 꼭 구해주셔야 해요!"

두 꼬맹이들은 손을 꼭 잡고 달려갔다. 마음 같아선 무사히 대피하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여기서 시간을 더 끌긴 그렇지.'

지금은 책장에 깔린 꼬맹이가 걱정이었다.

'[움직일 수 없다] 키워드가 신경 쓰이기도 하고.'

강승현은 교실 문을 살폈다. 폭발의 충격으로 부서고 뒤틀린 데다, 쏟아진 철제 선반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냥은 안 열릴 것 같으니 부수고 들어갈까.'

강승현은 아쉽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런 건 김호정 씨한테 맡기면 딱인데 말이야.'

그럼 훨씬 편했겠지만, 아쉽게도 김호정은 슈이레와 함께 탄셀 교수를 만나러 갔다.

'슬슬 마력 중심부에 도착했겠지. 이쪽 일 빨리 해결하고 따라가자.'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강승현은 석궁을 소환하더니 문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혹시 망가져도 다시 소환하면 되니까.

쾅!

쾅!

콰직!

문은 두세 번 정도 내려쳤더니 가볍게 부서졌다. 강승현은 문 잔해를 걷어차고 철제 선반을 밀어 넘어트렸다.

쿵!

꽤 묵직하긴 했지만,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좋아.... 이제 지나갈 수 있겠네.'

먼지가 풀풀 날리는 방 안으로 들어가자,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처참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쓰레기장이 따로 없군...."

파직, 파직...

이곳 역시 사방팔방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이렇게 튀어나온 마력이 쌓이다 보면 아까보다 더 강력한 폭발이 일어날 것이다.

'그 전에 나가야겠는데. 나는 마법 방패도 없고.'

강승현은 주변을 가볍게 훑어보며 기울어진 책장 가까이 다가갔다. 책장 사이에 어린아이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리제이! 그쪽 이름 리제이 맞죠?"

"누, 누구...."

검은 머리 꼬마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친구들 부탁으로 구하러 왔습니다. 괜찮으세요?"

"로브를 입지 않은 입은 걸 보면 모험가님이시겠군요.... 저는 틀렸으니, 제 친구들 데리고 여기서 빠져나가세요."

리제이는 어린애답지 않게 침착하게 말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인데도 말이다.

'뭐야, 얜 뭐 이렇게 어른스러워.'

마력 방패를 능숙하게 사용한 것도 그렇고. 이런 상황에 침착하게 대처한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슈이레 같은 재능충인 것 같다.

"지금 책장에 다리를 깔렸어요. 아, 아무래도 부러진 것 같아요...."

리제이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강승현은 푸르게 빛나는 눈으로 리제이를 살폈다.

[관찰의 눈]

실제로 [관찰의 눈]을 사용하자,

[의식 있음][출혈]

[지금은 마법을 쓸 수 없는 것 같다.]

[움직일 수 없다.][다리 골절]

[마력 역류][큰 충격에 휘말렸다.]

리제이한테서 [다리 골절] 키워드가 나타났다.

'고통이 심했을 텐데.'

"출혈 때문에 머리도 어지러운 걸 보면... 오래는 못 버틸 거 같아요...."

그렇게 말하는 리제이의 이마는 피투성이였다. 넘어진 책장에 부딪힌 모양이다.

강승현은 거치적거리는 장해물을 치우며 말했다.

"그 정도 상처는 금방 치료할 수 있습니다. 저는 힐러거든요."

"그렇다면 더더욱... 이쪽으로 오시면 안 돼요. 이 주변 마력 회로가 전부 터져서 대량의 마력이 흘러나오고 있거든요."

리제이가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파직, 파직....

파지지직!!

"지금 제 몸에서 스파크가 터지는 거 보이시죠? 마력 역류 현상이에요...."

리제이 역시 강한 마력 폭발에 휘말린 탓에 몸속 마력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력 역류가 발생하면 스킬을 사용할 수도 없고... 받는 것도 위험해요.... 이게 진정되기 전까진 힐은 통하지 않겠죠."

마력 역류가 나타난 사람한테 힐을 사용하면, 마력이 심한 반발을 일으킨다. 상처가 치료되긴커녕 짜릿한 고통만 맛볼 것이다.

"저는 이미 틀렸어요.... 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치명상을 입었으니... 구해봤자 소용없죠...."

리제이는 숨을 가쁘게 쉬며 말을 이어갔다.

"괜히 절 구하려다 스파크에 닿기라도 하면... 모험가님의 몸에서도 마력 역류가 발생할 거예요."

그렇게 되면, 강승현 역시 스킬을 쓸 수 없게 된다. 마력 역류는 몸속 마력이 죄다 터져 나오는 현상이니까.

"그러니... 저는 신경 쓰지 말고 제 친구들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 주세요...."

리제이는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이제 지쳐서 말할 기력도 없었다.

눈앞의 힐러가 가망 없는 자신을 놔두고 친구들을 구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무슨 꼬맹이가 이렇게 멋있는 소릴 하지. 혹시 회귀했거나 환생하거나 빙의하셨나?"

리제이의 말을 들은 강승현은 보란 듯이 책장을 들어 올렸다. 리제이는 그걸 보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모, 모험가님...! 그럴 필요 없어요!"

그러나 강승현은 대답 대신 한 손으로 책장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책장을 어깨로 떠받친 다음, 리제이한테 나머지 손을 뻗었다.

"다른 사람들을 구하러 가세요!"

"그쪽은 자기가 위험에 처할 걸 알면서도 친구들을 구했잖아요."

강승현은 부마스터 하이베를 떠올렸다.

"아까 만난 어떤 녀석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거든요."

어린아이도 친구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데. 어른, 그것도 마탑의 부마스터라는 녀석이 자기 욕심 때문에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렸다.

'그래놓고선 자기 목숨이 위태로워지자마자 자기부터 구해달라고 떼를 쓰던 쓰레기.'

정말 죽어도 싼 놈이다.

"구할 필요가 없는 사람은 그런 놈을 말하는 거죠."

강승현은 리제이의 몸에 손을 뻗었다.

리제이는 절망스러운 얼굴로 생각했다.

'어차피 가망도 없는데... 이제 나 때문에... 이 사람은 스킬을 쓸 수 없게 될 거야.'

이제 심한 스파크가 일어나면서 강승현의 몸에서도 마력 역류가 발생할 것이다. 리제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통증은 어떻게 못 하지만."

그때였다.

"피는 멎게 할 수 있어요."

[지혈]

강승현의 손이 리제이의 몸에 닿은 순간, 이마에서 흘러내리던 피가 멎었다.

"어, 어떻게...?"

리제이는 놀란 눈으로 강승현을 바라보았다. 몸에서 스파크가 일어나긴커녕, 보란 듯이 스킬을 사용한 것이다.

"힐러는 힐러인데, 제가 야매 힐러라서요."

강승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힐러였기 때문이다.

68. 마력 폭발 사고 3

"지혈은 대충 끝났고."

강승현은 리제이의 몸을 살폈다. 가장 심각한 부상은 다리와 발목이었지만, 그 외에도 자잘한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파직, 파직...!

파지직!

그리고 리제이의 몸에서는 여전히 스파크가 터져 나왔다. 보유한 마력이 많을수록 마력 역류 지속 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이다.

'일단 이걸 진정시켜야겠는데.'

파직!

강승현이 손을 뻗자 리제이의 몸에서 터져 나온 스파크가 손끝에 닿았다. 본래 마력 스파크는 인간한테 닿으면, 안으로 흡수되면서 마력 역류를 일으킨다.

파지지지....

하지만 스파크는 흡수되기는커녕 약해지면서 지면으로 흘러가 버렸다. 그걸 몇 번 반복하자, 리제이의 몸에서 일어나던 마력 역류가 점차 잦아들었다.

'마, 말도 안 돼.'

리제이는 그걸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서 자신이 아는 상식과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가능하려면 마력을 전혀 쓰지 않아야 할 텐데.'

마력 스파크를 무시하는 데다, 마력 역류를 일으키는 대상한테도 아무 문제 없이 스킬을 사용하기까지.

평범한 아즐대륙민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이 사람... 정체가 뭘까?'

'스태미나를 쓰는 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되네.'

강승현은 리제이의 시선을 느끼며 웃었다. 그가 마력 역류를 무시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몸속에 마력이 없으니까.'

마력 역류의 효과를 받으려면 몸 안에 마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마력이 1도 없어서 스태미나를 쓰는 사람한테 통할 리가.

'거기다 나는 마력을 흡수하는 것도 불가능해서.'

몸이 마력을 받아들이질 않으니, 자동으로 차단. 강승현은 사실상 [마력 역류 면역] 스킬을 가진 것과 다름없다.

마력 대신 스태미나를 사용하는 건 관리하기 귀찮고 더 빨리 소모된다는 단점이 있지만,

'마력을 활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스킬을 쓸 수 있다는 건 비교할 수 없는 장점이지.'

이런 상황에선 어마어마한 강점이 있는 셈이다.

"어깨나 팔은 다친 곳 없나요?"

"네. 다리는 좋지 않지만... 다른 곳은 괜찮아요."

강승현은 리제이의 몸을 살피며 물었다. 다행이 다리를 제외한 나머지 신체는 크게 다치지 않았다.

"그럼 제가 책장을 받치고 있을 테니... 빠져나오실 수 있겠어요?"

"지, 지금 몸에 힘이 안 들어가서...."

리제이는 폭발에 휘말린 데다, 무거운 책장에 깔려 있었다. 어른이었어도 지쳤을 텐데 어린아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럼 깎인 체력이랑 스태미나부터 채우고."

강승현은 체력 포션을 꺼내더니 가볍게 깨트려 흡수했다.

[살포]

손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오오라가 리제이의 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체력이 서서히 차오른다....'

리제이는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본래라면 몸에서 터져 나오는 스파크 때문에 강한 반발력이 일어났겠지만, 강승현의 스킬은 그 모든 걸 무시했다.

"도대체 어떻게 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 말 많이 들어요."

강승현은 바로 스태미나 포션을 흡수해 샛노란 오오라를 뿜어냈다. 깎인 체력과 스태미나가 얼추 회복된 리제이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이 정도면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아요."

강승현은 무거운 책장을 끌어올렸다.

"그러면 들어 올릴 테니 힘내서 빠져나오세요."

엎어진 책장을 전부 한 번에 들어 올리는 건 정말 귀찮은 작업이었다.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입에 물고 책장을 어깨로 떠받쳤다.

'김호정 씨가 옆에 있으면... 나 대신 책장 들어줄 텐데.... 나 대신 문도 부쉈을 텐데....'

옆에 도와줄 사람이 더 있었다면 정말 편했겠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어쩔 수 없다.

'이래서 동료가 필요하다니까.'

강승현은 한숨을 쉬며 소중한 방패, 아니 동료를 그리워했다.

"모험가님, 감사합니다...!"

리제이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기어나갔다. 강승현은 리제이가 멀어진 걸 확인하고,

쿵!

강승현은 바닥에 책장을 내려두었다.

"쓸데없이 무겁네."

강승현은 손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며 생각했다.

야매 힐러의 생존 철학 22.

'내 몸이 튼튼해야 남도 구해줄 수 있다.'

야매 힐러는 일반 힐러와 달리 육체단련도 해야 한다. 이렇듯 몸으로 때울 일이 많으니까.

강승현이 별다른 공격 스킬이 없어도 강한 이유였다.

"그럼 이제 부상치료를...."

파직, 파직!!

리제이의 상처를 치료하려는데 바닥에서 강렬한 스파크가 올라왔다.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 훨씬 격해졌어.'

[관찰의 눈]으로 볼 것도 없다. 마력 연결 회로가 폭발 직전이다.

'다리 골절... 꽤 큰 부상이긴 하지만....'

당장 리제이의 목숨을 위협하는 부상은 아니다.

'이렇게 폭발 직전인 곳에서 사람을 치료하는 게 더 위험하지.'

슬슬 다른 장소로 이동해야 할 것 같다.

급한 불은 껐으니까.

"응급처치만 하고, 빨리 밖으로 나가죠."

"그래야겠어요. 마력이 심상치 않은 걸 보면...."

"일단 다리를 고정할게요."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부목과 붕대를 꺼냈다. 나무를 직접 깎아 만든 수제부목과 잡초를 뜯어서 짠 수제붕대다.

'엉성하긴 하지만, 꽤 유용하거든.'

강승현은 리제이의 다리에 부목을 대고 붕대로 조심스럽게 감았다.

파직, 파지지직!!!

"마력 역류가 더 심해졌어요!"

"응급처치는 이 정도면 충분하니까... 튑시다!"

강승현은 리제이를 등에 업었다. 체구가 작은 어린아이라 야매 힐러에겐 솜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혹시 모르니 붕대로 몸을 묶는 게 좋겠지....'

붕대로 감쌌으니 떨어질 걱정은 없다. 이렇게 하면 손도 자유롭게 쓸 수 있고.

파지지직!!!

펑!! 퍼벙!!

강승현이 교실 밖으로 나오자 크고 작은 폭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모험가님 조심하세요! 아까보다 폭발 위력이 강해졌어요!"

"고개 숙여요!"

콰아아아앙!!!

강력한 마력 폭발이 강승현의 몸을 덮쳤으나,

[슬롯에 등록된 아이템 효과가 발동합니다.]

[2 : 키르카라슈텔의 보주]

보주가 가진 마력 저항력과 마법 대미지 반감의 효과로 폭발 대미지가 크게 떨어졌다.

"저런 강력한 마력 폭발을 받았는데도 멀쩡하시다니...."

"아는 사람한테 좋은 걸 받았거든요."

정확하게는 보는 앞에서 훔쳤지만.

강승현은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쿠르르르르!!!

폭발로 인한 충격이 마탑을 뒤흔들었다. 천장이 무너지면서 돌과 파편이 쏟아져 내렸다.

강승현은 쏟아지는 건물 잔해를 피하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방패 하나 사둘 걸 그랬나."

"모험가님! 계단은 이쪽이에요!"

리제이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길을 찾았다. 지금 두 사람이 있는 층은 12층. 마력 폭발이 가장 심한 장소 중 하나였다.

"일단 9층까지만 내려가도 지금보다 훨씬 안전할...."

강승현은 계단 가까이 다가갔다.

"아."

"이...이럴 수가...."

폭발 때문에 무너진 천장이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막아버렸다.

"이 생각은 못 했네."

"이, 이제 여기 말고는 다른 길이 없는데...."

리제이가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 아까 천장이 무너지면서 복도 통로 역시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벽을 부수고 저쪽으로 돌아가야 하나."

"그건 힘들 것 같아요."

리제이가 불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팔방에서 격렬한 스파크가 터지고 있었다.

파지지지직!!!

지금 벽을 부수겠다고 충격을 가했다간 강력한 폭발이 일어날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터지기 일보 직전이니까.

'나 혼자라면 보주 효과로 버틸 수 있지만, 리제이는 못 버틸 텐데.'

강승현은 혀를 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앞에서 오는 폭발은 몸으로 방어할 수 있지만, 뒤에서 오는 폭발은 방어할 수 없다.

'어쩌지.'

리제이한테 보주를 주면 괜찮겠지만, 그럼 자신의 몸이 걸레짝이 된다.

'차원 이동자니까 한 번에 죽지는 않겠지만... 다리는 부러지겠지.'

여기서 움직일 수 없게 된다는 소리다.

'셀프 치료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텐데, 그 전에 마력 중심부가 터질 것 같단 말이지.'

지금은 연결 회로만 터지고 있지만, 이다음에는 마탑이 통째로 날아가지 않을까.

'보주의 효과로 폭발은 막을 수 있지만, 건물이 무너지는 건 못 막아. 빨리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데.'

무슨 좋은 방법 없나.

강승현은 리제이를 보호하면서 1층으로 내려갈 방법을 궁리했다.

'마력 폭발 때문에 무너진 천장과 돌덩어리... 그리고 금이 간 벽.'

강승현은 벽 가까이 다가갔다. 힘을 살짝 줘서 밀자, 벽이 부서지면서 바깥 풍경이 보였다.

'뭐, 하는 수 없지. 좀 무식한 방법이긴 한데....'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이런저런 잡동사니를 꺼냈다. 그걸 본 리제이가 입을 열었다.

"뭘... 하시려구요?"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강승현이 꺼낸 건 쇠꼬챙이와 붕대였다.

"고소공포증 있어요?"

-하늘로 높게 솟은 마탑에서 12층은 그리 높은 곳이 아니다.

'마탑은 기본이 50층이랬지.'

하지만 지면을 기준으로 잡는다면 12층은 고층이 맞다. 한 층을 대충 3m로 잡았을 때 12층이면 지상 36m니까.

'36m면 떨어지는 데 얼마나 걸리더라.'

그리고 지금, 강승현은 36m 고층 건물 밖으로 탈출할 생각이었다.

"저, 저는 준비 됐어요."

등에 업힌 리제이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떨었다. 고소공포증은 없다고 하지만 이런 상황이면 누구나 무서워하는 게 정상이다.

"좀 무섭겠지만, 이게 최선이거든요."

도망갈 길은 막혔고. 누가 구하러 올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폭발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혹시 먼저 간 탄셀 교수 일행이 마력 중심부 사태를 수습했다면 여기서 기다리겠지만....'

스파크가 계속 터지는 걸 보면 사태를 수습하지 못한 것 같다.

좋든 싫든, 지금은 이 방법뿐이다.

"제가 꼭 구해드릴 거니까."

"네...!"

"걱정 말고, 눈 감고 계세요."

강승현은 태연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리제이는 엄청나게 무서웠지만,

'왠지 이 모험가님이라면 어떻게든 할 것 같아.'

이 남자는 탑에서 뛰어내려도 살아남을 것 같았다. 도저히 평범한 인간으로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파지지직!!

리제이가 강승현의 어깨를 잡으며 소리쳤다.

"뒤, 뒤에서 마력 폭발이...!"

"그럼 갑니다."

리제이가 눈을 질끈 감은 걸 확인하고 강승현은 등을 돌렸다.

콰아아앙!!!

그리고 마력이 폭발하는 순간, 부서진 벽 밖으로 몸을 던졌다.

후우욱!!!

몸을 휘감는 엄청난 바람이 느껴졌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면 누구보다 빠르게 1층에 도착할 수 있다.

'동시에 저승에도 먼저 도착하겠지.'

당연히 그럴 생각은 없다.

'내가 소환사라면 날개 달린 새 한 마리를 불렀을 것이고, 로그라면 벽을 타서 내려갔겠지.'

하지만 강승현은 야매 힐러였기에 야매 힐러 식으로 탈출하기로 했다.

"우으으으...!"

리제이는 눈물을 꾹 참고 있었다.

'보통 애들이었다면 울다가 기절했을 텐데.'

정신력 하나만큼은 어른 못지않은 녀석이다.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이런 녀석이 죽으면 아즐 대륙의 미래가 어둡겠지?'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강승현은 불러낸 석궁을 마탑 벽을 향해 겨누었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엉성한 갈고리 붕대 화살을 생성합니다.]

'쇠꼬챙이를 구부려 만든 엉성한 갈고리에 수제붕대를 묶어 만든 임시 갈고리 로프.'

프리아의 석궁이 가진 가장 큰 특징은 어떤 아이템이든 화살로 만들 수 있다는 것.

동시에 가장 큰 장점이기도 했다.

'이걸 화살로 만들어 박으면... 벽에 매달릴 수 있어!'

강승현이 방아쇠를 당기자 갈고리 붕대 화살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일명 후크 샷.

파악!!

빠른 속도로 날아간 화살이 마탑 벽에 박혔다. 동시에 붕대가 팽팽하게 당겨지면서 추락하던 강승현의 몸이 벽에 매달렸다.

"내가 살다 살다... 별짓을 다 해본다 진짜."

강승현은 실실 웃으며 중얼거렸다.

69. 걱정 말라니까

아즐 대륙에 떨어진 이후 별의별 일을 겪어보긴 했지만,

"이게 되네."

지상 36m 높이 건물에 매달리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후우우우.

발밑에 차가운 공기만 감돌고 아무것도 없어서 느낌이 묘했다.

'남들은 판타지 세계로 와서 마법을 날리고 검을 휘두른다는데.'

자신은 왜 재난영화를 찍고 있는 건가.

'야매 힐러가 그렇지 뭐.'

강승현은 실실 웃으며 스태미나 포션을 꺼냈다. 왼손은 석궁을 잡고 있어서,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건 오른손뿐이다.

'일단 어찌어찌 성공하긴 했는데....'

강승현은 위를 올려다봤다. 마탑 벽에 처박힌 갈고리 화살과 화살에 묶인 붕대가 석궁하고 이어진 상태였다.

'수제붕대는 잡초로 만들긴 했지만, [천 만들기] 스킬로 만들었으니 쉽게 찢어지진 않겠지.'

[천 만들기] 역시 룰렛에서 뽑은 스킬. 이걸로 만든 붕대는 꽤 질겨서 로프로 써도 될 정도다.

'문제는 갈고리....'

갈고리는 평범한 쇠꼬챙이로 급하게 만들어서 품질이 좋지 않았다. 지금은 프리아의 석궁으로 벽에 박아놨지만 언제 부서질지 모른다.

'시간 끌 상황은 아니겠지.'

여기서 꾸물거렸다간 자유낙하할 지도 모르고. 강승현은 포션을 입에 물고 조심스럽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끼긱.

붕대를 잡고 올라가자 벽에 박힌 갈고리에서 금속음이 들려왔다. 갈고리가 휘어지는 소리였다.

'좀만 버텨라.'

강승현은 양팔과 다리에 힘을 주고 마탑 로프 등반을 시작했다.

끼긱.

끼이익.

위로 오르면 오를수록 금속음이 심해졌다. 강승현은 혀를 차며 생각했다.

'이게 진짜 후크샷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위로 자동으로 끌어 올려줄 텐데....'

하지만 야매 힐러답게 후크샷도 야매. 그런 기능은 없어서 스스로 올라가야 했다.

'찾았다.'

붕대를 로프처럼 의지하며 올라가던 강승현은 9층 발코니를 발견했다. 저길 통하면 건물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탁!

강승현은 발코니 쪽으로 뛰어서 난간을 붙잡았다. 벽에 박힌 갈고리는 그때까지 아슬아슬하게 버텨주다가.

끼이이익....

파각!

난간에 매달리려던 참에 부러졌다.

'그래도 생각보단 오래 버텼네.'

강승현은 쥐고 있던 석궁을 놓고 양손으로 난간에 매달렸다.

텅!

후우우우!!

부러진 갈고리가 밑으로 떨어지면서 붕대와 연결된 석궁도 아래로 추락했다.

놓친 석궁은 발밑 호수 속으로 사라졌다.

[프리아의 석궁이 소멸합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프리아의 석궁은 일반 무기가 아니라 소환 스킬 무기. 손 한 번 까딱거리면 재소환할 수 있다.

'스킬 아니었으면 석궁 찾겠다고 호수 밑바닥 뒤질 뻔했네.'

그래서 강승현은 신이 선택한 무기를 둔기마냥 내려치고 갖다버리는 등, 자신이 가진 아이템 중 가장 험하게 다루곤 했다.

'이렇게 보니 호수가 꽤 크고 깊네.'

강승현은 이때 처음으로 발밑 경치를 구경했다.

높게 솟은 마탑 주위를 둘러싼 거대한 호수. 그리고 마탑 아래로 보이는 마법사들의 도시, 카마르가 눈에 들어왔다.

'저게 카마르인가.'

카마르는 피츠타 호수 위에 지어진 호수 도시다. 다른 지역으로 나가기 위해선 카마르와 마카로치 숲을 이어주는 피츠타 대교를 지나야 한다.

'그게 아니면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거나.'

저 멀리 호수 건너편에 붉은 숲이 보였다. 푸른 호수와 이질적인 새빨간 색감이 어딘가 기분 나쁘게 느껴졌다.

'딱 봐도 몬스터 출몰하게 생겼네.'

이 주변 지리는 잘 모르지만, 하인드 마을로 돌아가려면 마카로치 숲을 통하는 게 편할 것 같다.

'마차는 호수를 건널 수 없고, 김호정 씨가 뱃멀미가 있다고 하니.'

강승현은 마탑 사건이 수습되면 카마르에서 하인드 마을로 가는 마차를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구경은 다 했으니 슬슬 올라갈까.'

강승현은 난간을 잡고 발코니로 올라왔다. 내내 허공에 매달려 있다 땅을 밟으려니 몸에서 힘이 쫙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벌컥! 벌컥!

한숨 돌린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마셨다.

"역시 사람은 땅을 밟고 살아야지."

"모, 모험가님.... 저희 살아 있는 거예요?"

등 뒤에서 리제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승현은 리제이한테도 스태미나 포션 한 병을 주면서 말했다.

"이제 눈 떠도 됩니다."

리제이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지금 강승현은 허공에 매달린 것도 아니고, 바닥으로 추락한 것도 아니었다. 무사히 마탑 안으로 복귀한 상태였다.

"제가 말했잖아요. 꼭 구해준다고."

-마탑 9층부터 1층까지 내려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쪽은 계단이 막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서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괜찮겠지. 여기 진홍의 마탑이잖아!"

"또, 또 폭발한다!"

1층 밖, 마탑 입구로 나오자 수많은 마법사들이 모여있는 게 보였다. 다들 마력 폭발을 피해 대피한 사람들이다.

"저기!"

"나오셨다!"

강승현이 입구로 나오자마자, 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험가님 왔어요!"

"모험가님!"

갈색머리 꼬마와 노란머리 꼬마. 아까 먼저 대피한 루시와 타리스였다. 두 꼬맹이들은 곁에 서 있던 마법사의 로브를 잡아당겼다.

"저, 저...저는 기초마법학을 담당하는 이헤르라고 합니다...."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마법사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꼬맹이들의 선생님으로 보인다.

"리제이라면 무사합니다."

"교수님, 저는 괜찮아요. 모험가님 덕분에 살았어요."

강승현이 등에 업고 있는 리제이를 보여주었다. 다리에 붕대를 감고 있긴 하지만 그 외에 심각한 부상은 없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이들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헤르는 눈물을 흘리며 허리를 숙였다.

"지금 리제이는 책장에 깔려서 다리가 부러졌어요. 지금은 마력 역류 증세도 없으니... 빨리 힐러를 불러와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이헤르는 바로 힐러를 부르러 갔다.

사실 야매 힐러가 직접 치료할 수도 있지만,

'통증을 덜어낼 방법이 없어서 말이야.'

어른들이라면 모를까, 애들이라면 힐러한테 맡기는 게 낫다. 애들은 아픈 걸 못 참으니까.

"편하게 있으세요."

넓은 천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리제이를 눕혀두자 꼬맹이 둘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리제이... 다리 다쳤어?"

"많이 아파?"

"난 괜찮아. 이제 힐 받으면 돼."

리제이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리제이 미안해.... 나 때문에...."

"나도 마법 방패 쓸 줄 아는데... 아는데...."

"우으으으...으애애앵!"

"와아아아앙!"

"얘들아 울지 마.... 나 괜찮다니까...."

루시와 타리스는 리제이를 안고 울어댔다.

"정말 괜찮은데... 우으...으으...."

리제이 역시 참았던 눈물을 펑펑 흘리며 친구들을 끌어안았다.

"우으으...우아아아아앙!"

"우애애애애앵!!"

"와아아아앙!"

아무리 어른스럽고 천재적인 마법 실력을 가졌어도 애는 애. 강승현은 꼬맹이 셋이 부둥켜안고 우는 걸 감상했다.

-이후, 이헤르가 데려온 힐러가 리제이의 다리 부상을 치료했다. 리제이는 몇 번이나 고마워하며 말했다.

"모험가님 정말 대단하신 거 같아요. 저는 아직도 몸이 떨리는데...."

다리 부상은 다 나았지만, 아직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서 일어설 수가 없다고.

"모험가님은 그런 엄청난 일을 겪고서도 흔들림 없이 서 있으시잖아요."

"이쪽 일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사건을 많이 겪어서...."

이런 걸로 일일이 놀랐다간 진작 죽었지.

강승현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리제이도 만만치 않게 대단했어요."

친구들 구하겠다고 미법 방패 걸어주는 마법사가 어디 흔한가. 그것도 어린 녀석이 자기 목숨을 버려가면서.

"그게 사실 좀 이상해요."

강승현의 말을 듣던 리제이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뭐가요?"

"지금 저는 동시에 마법 방패를 3개까지 생성할 수 있어요."

리제이는 어른 못지않게 마력을 많이 갖고 있지만, 아직은 어려서 실제로 다룰 수 있는 마력은 얼마 되지 않는다.

"같은 마법을 반복해서 쓸수록 마력 운용력을 키울 수 있거든요."

리제이는 마법 방패 타이밍을 익힐 겸 스킬 반복 수련을 해왔다고 한다. 물론 하급 마법사용 수련이 아니라 중급 마법사용 수련법으로.

"친구들도 마법 방패는 쓸 수 있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당황할 거 같았어요."

마력 폭발이 일어났을 때, 리제이는 친구들이 마법 방패를 쓰지 못할 거라 판단했다.

"실전 경험이 없는 마법사들은 제때 대처하기 힘드니까."

실제로 그 판단은 정확했다. 폭발에 겁먹고 당황한 루시와 타리스는 마력을 끌어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리제이는 두 사람에게 마법 방패를 시전하고, 자신의 몸을 지킬 마법 방패를 꺼내려 했다.

"그런데 마력 소모량이 갑자기 증가해서, 방패를 쓸 수 없었어요."

"소모량이 증가했다?"

리제이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강승현이 눈썹을 찌푸렸다.

"설마 마력 동력 시스템이 고장나서?"

"아마 그럴 거예요."

리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 중심부에 문제가 생겼다면, 사람한테서 뽑아가는 마력량도 증가했을 거라면서.

"거기다 마력을 흡수하는 범위가 넓어지고 있어요. 원래 마탑 입구에선 마력을 흡수하지 않을 텐데."

리제이의 말을 듣고 [관찰의 눈]을 사용하자 발밑에 흐릿하게 빛나는 선이 나타났다.

죽죽 그은 것처럼 괴상한 형태로 말이다.

'모양이 이상하지만... 마력 연결 회로다.'

본래는 존재하지 않던 연결 회로가 생겨난 상황. 누가 일부러 깔았을 리는 없으니, 동력 시스템 오류로 생긴 것 같다.

"거기다 마력 중심부에 가까울수록, 더 많은 마력을 흡수당하게 돼요."

마탑이 마력 중심부에 사람을 함부로 들이지 않는 이유다. 마력이 적은 사람은 중심부에 들어가자마자 가진 마력을 다 털리고 쓰러질 테니까.

'그렇다면 김호정 씨랑 탄셀 교수 일행은....'

이들은 한발 먼저 마력 중심부로 향했다. 지금까지 소식이 없는 걸 보면 무슨 일이 생겼다는 소리다.

'그럼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휴식은 끝났다. 강승현은 몸을 일으켰다.

"알려줘서 감사합니다."

"마력 중심부로 가시려구요?"

"가야죠. 사람들 구해야 하니까."

마탑 동력 시스템을 어떻게 하지 않으면 여기 있는 마탑 마법사들은 물론이고, 카마르 도시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저, 모험가님...."

그때 리제이가 강승현을 붙잡았다.

"마력 중심부로 가실 거라면... 이게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그러더니 품에서 마법 스크롤 한 장을 꺼냈다.

"이건?"

"마력 오염 스크롤이에요. 제가 직접 만들었어요."

마력 오염의 효과는 사용 시 주변 마력을 흑마력으로 물들이는 것. 본래는 흑마술사들이 사용하는 스킬을 스크롤에 담았다고.

"진홍의 마탑 동력 시스템은 흑마력을 흡수할 수 없어요. 마력 중심부에서 이걸 사용하면... 동력 시스템을 잠깐 멈출 수 있겠죠."

대신 스킬 지속시간이 꽤 짧다. 정식 제품이 아니라 마탑 과제용으로 만든 스크롤이라서.

"정말 잠깐이라... 큰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지만...."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잘 쓸게요."

강승현은 스크롤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리고 고민 없이 마탑 지하, 마력 중심부로 향했다.

-저벅 저벅.

계단을 내려갈수록 강력한 마력이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마력과는 다른 기분 나쁜 감각이 느껴졌다.

'꼭 누가 지켜보는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인데.'

주위를 둘러봐도 별건 없었다. [관찰의 눈]을 써봐도 마력 연결 회로만 보일 뿐이다.

계단을 다 내려가자, 굳게 닫힌 문이 보였다.

쾅!

강승현은 문을 걷어차고 들어갔다. 방 중앙에 그려진 크고 작은 마법진과, 그 중앙에서 시퍼렇게 빛나는 크리스털. 그리고 쓰러진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게 마력 동력 시스템인가?"

"으으...."

다른 사람들은 의식이 없었으나 딱 한 명은 의식이 있었다. 슈이레의 스승인 탄셀 교수였다.

"탄셀 교수님."

"이, 이쪽으로 오지 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간 순간, 발밑에서 기분 나쁜 감각이 휘몰아쳤다.

[관찰의 눈]

서둘러 [관찰의 눈]을 켜고 보자, 기괴한 형태의 마력 연결 회로가 자신의 발목에 달라붙은 상태였다.

"느, 늦었어...!"

약 20분 전.

탄셀 교수 일행은 마력 중심부로 진입했다.

그러나 그들이 마력 중심부에 발 들인 순간,

그으으으으.

불길한 기운이 감돌더니, 변형된 마력 연결 회로가 몸에 달라붙어 마력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연결 회로는 맨눈으로는 볼 수도 없는 데다 워낙 흡수 속도가 빨라서, 사람들은 저항도 못 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미안하네.... 내가 조금만 더 빨리 말했더라면...!"

탄셀 교수는 절망스럽게 탄식했다. 강승현 역시 몸에 마력 연결 회로가 휘감겼으니 다른 사람들과 같은 꼴이 될 것이다.

"아, 괜찮아요."

"어...?"

하지만 강승현은 쓰러지긴커녕, 멀쩡한 얼굴로 서 있었다.

"저한테는 안 통할 테니까."

70. 마력 중심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