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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 - 70-80

70. 마력 중심부 1

강승현은 발목에 들러붙은 연결 회로를 바라보았다. 연결 회로는 겨우살이처럼 기어 올라와 마력을 흡수하려 했으나.

파스스스....

곧, 닿아선 안 될 물체에 닿기라도 한 듯 강승현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자네, 무사한 건가?"

탄셀 교수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들은 조금도 버티질 못하고 쓰러졌는데.

"보시는 대로."

강승현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비정상적인 마력 회로를 지나쳐 걸어갔다.

스르륵.

앞으로 걸어가는 동안 일그러진 연결 회로가 몸에 달라붙고 휘감겼으나,

파스스스...

아까와 마찬가지로 황급히 몸에서 물러났다.

뜨거운 물에 손이 닿기라도 한 것처럼.

'빨아먹을 마력이 없어서 그러겠지.'

강승현은 멀어지는 연결 회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있어선 안 되는 존재한테 닿은 것처럼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할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존재.'

기겁하면서 물러나는 것도 이해는 간다.

강승현은 탄셀 교수한테 다가갔다.

"동력 시스템에 뭔가 문제가 있는 건 알겠습니다."

방 안에 그려진 거대한 마법진과, 중앙에서 연결 회로를 뻗어 마탑 전체를 지배하는 동력 시스템.

원래는 진홍의 마탑 전체를 안전하게 관리해야 하지만, 지금은 심각한 오류를 일으킨 상태다.

"그냥 때려 부수면 될까요?"

"소용없네. 저건 우리가 어찌해볼 게 아니야."

탄셀 교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자세히 설명 좀 해주시죠."

"우리는 동력 시스템을 끌 생각이었어. 이대로 놔뒀다간 과도하게 흡수한 마력이 강력한 폭발을 일으킬 테니까."

탄셀은 마탑에 남아 있던 최고위 마법사들과 함께 동력 시스템을 저지하러 마력 중심부로 향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이베 부마스터와는 연락이 되지 않았네. 별수 없이 우리끼리 진행했지."

사실 그 이유는 잘 알고 있지만,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다. 강승현은 모른 척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우리가 시스템 정지 마법을 준비하려던 순간...."

갑자기 마법사들이 쓰러졌다.

'마력 연결 회로가...!'

'으아아악!!'

'도망쳐!'

마탑 곳곳에 뻗어 나가야 할 연결 회로가 갑자기 사람들한테 들러붙은 것이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마력을 뽑아갔지."

"단기간에 대량의 마력을 소모하면 정신적 타격을 받죠. 기절한 이유가 그 때문이었군요."

마력 연결 회로는 특별한 스킬이 없으면 눈으로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거기다 물리적 실체가 없어서 벽이나 벽을 뚫고 다가오기 때문에, 마법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알겠나?"

마법사들이 시스템을 정지시키려고 하자, 동력 시스템이 반발하며 마법사들을 공격했다.

"동력 시스템이 몬스터로 변한 거군요."

"그렇네."

강한 마력을 받은 물체는 몬스터로 변할 수 있다. 동력 시스템은 오류로 인해 강한 마력을 품게 됐으니, 몬스터로 변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평범한 약초도 마력 좀 받았다고 괴물이 되는 세상이니.'

강승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 곳곳에 거미줄처럼 늘어진 마력 연결 회로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들은 덩굴식물처럼 기어와 사람의 몸에 들러붙어 마력을 뽑아갔다.

"마법이라고 부르기엔 움직임이 너무 정교하긴 했죠."

먹이를 포식하는 생물에 가까운 행동이다.

실제로 방 안에 쓰러진 사람들은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온몸에 마력 연결 회로가 휘감긴 상태였다.

'무슨 SF영화 같네. 인공지능 컴퓨터가 반란하는 그런 거.'

강승현은 쓰러진 사람들을 살피며 자신의 동료 김호정을 찾아다녔다.

'김호정 씨는 어딨을까.... 아, 찾았다.'

강승현은 김호정을 발견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마력 연결 회로에 감겨 있었다.

김호정의 몸 위로 손을 뻗자,

파스스스스....

휘감겨 있던 연결 회로가 물러났다.

이건 아무리 봐도 마법이 아니라 몬스터의 움직임이다.

"나는 가까스로 버텼지만... 그것도 곧 한계야."

탄셀 교수가 힘겹게 숨을 뱉어냈다.

"저 녀석은 이제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어."

동력 시스템은 더 많은 마력을 먹기 위해 연결 회로를 계속해서 뻗어 나갈 것이다.

"나는 이제 틀렸네. 하지만 자네는 움직일 수 있으니,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이 마탑에서 도망치게."

마탑에서 멀리 도망가는 것.

지금으로선 그게 유일한 희망이다.

"저걸 부숴버리면 될 것 같은데요."

강승현이 동력 시스템 중앙의 크리스털을 바라보았다. 시스템이 몬스터로 변했다면, 저게 몬스터의 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너무 위험해! 아무리 자네라도...."

"슈이레한테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마력 연결 회로를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한 병 마시고 마력 중앙의 크리스털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대단한 몬스터라도 약점이 뻔히 보인다면 무서울 게 없죠."

[관찰의 눈]

크리스털은 지금도 마법사들의 마력을 쉬지 않고 뽑아 먹고 있었다. 그런 크리스털의 위로, 정보가 나타났다.

[중앙의 크리스털에 마력을 비축하고 있다.]

[마력] [마력]

[경고] [마력을 원한다.] [경고]

[크리스털에 큰 충격이 가해지면 폭발한다.]

[더 많은 마력을 흡수하고자 한다.]

[접촉할 경우 마력을 흡수한다.]

[계속해서 마력을 흡수하면 폭발할 것 같다.]

정보 메시지만 봐도 무척 불안정한 상태라는 게 느껴졌다.

'계속해서 마력을 흡수하다간 폭발할 텐데. 죽어도 상관없다는 건가?'

주변 생물은 물론, 자신이 소멸하더라도 상관없다. 마력을 흡수하는 것 외에는 아무 목적도 이유도 없는 괴물이니까.

"그런 놈은 물리 치료가 약이지."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강승현은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파바박!

빠른 속도로 발사된 나무 화살이 크리스털을 향해 날아갔다.

지지지직!

동력 시스템이 격하게 마력을 뿜어내며 자신의 핵을 지키기 위한 마법을 펼쳤다.

[마나 프로텍터]

팅!

크리스털 주위로 강력한 보호막이 펼쳐졌다. 나무 화살은 보호막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마나 프로텍터? 저것이 기어이 스킬까지 사용하는군...!"

"몬스터가 됐으니 이상할 것도 없죠."

"정말 무시무시한 괴물이 탄생해버렸군."

어마어마한 마력을 품고 있는 데다, 마탑이 가진 방대한 마법 지식까지 얻은 몬스터라니.

탄셀 교수는 크게 탄식하며 말했다.

"방금 녀석이 사용한 스킬은 방어 마법 중 하나인 마나 프로텍터. 꽤 상위 마법일세."

"그럼 약한 화살로는 못 뚫겠네요."

[마력탄]

이어서 허공에 마법진이 그려지더니 마력 덩어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파바바바바바!!!

"저건 또 무슨 마법입니까?"

"마력탄일세!"

마력탄. 마력 덩어리를 생성해 던지는 기초 마법. 복잡한 마나 프로텍터와 달리 쉽게 배울 수 있어서 마탑 입학의 필수 마법이다.

"마력탄? 초짜들이 배우는 기초 마법이라고 들었는데요."

"마력탄은 기초 마법이긴 하나, 사용자가 보유한 마력량이 많을수록 위력이 증가하네."

그래서 초짜 마법사들의 마력탄은 맞아도 간지럽지만,

"마력이 넘쳐나는 존재가 사용한다면...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하겠지."

"이 정도면 미사일 폭격에 맞먹겠는데요."

콰아앙!!

빠른 속도로 날아온 마력탄 하나가 강승현의 팔을 스쳤다.

"큭!"

팔이 뜯겨나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강력한 대미지였으나,

[슬롯에 등록된 아이템 효과가 발동합니다.]

[2 : 키르카라슈텔의 보주]

슬롯에 등록한 보주 덕분에 들어온 대미지가 반 토막 났다.

"자, 자네 괜찮은가? 그런 걸 몸으로 받아내다니...."

"괜찮아요. 제가 이래 봬도 신의 성유물을 가진 몸이라서요."

강승현은 얼얼한 팔을 털며 중얼거렸다. 키르카라슈텔의 보주가 아니었다면 팔이 소멸했을 것이다.

"신의 성유물?"

"이름이 길어서 외우기 힘들지만, 아무튼 좋은 아이템 하나 있어요."

"자네 설마, 신에게 선택받은 사도였던 건가?"

탄셀 교수가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저는 신 같은 거 안 믿어요."

강승현은 키르카라슈텔의 보주를 꺼냈다. 그냥 보기엔 비싸 보이는 구슬이지만, 마법사를 조지기 위해 특화된 아이템이다.

"하지만 비싸고 성능 좋은 성유물은 믿죠."

강승현이 이 보주를 갖고 있는 한,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라도 쉽게 쓰러트릴 수 없다.

그게 마탑의 마력을 전부 흡수한 괴물이라고 해도 말이다.

'가진 마력을 다 쏟아부어서 폭발한다면 또 모를까.'

강승현은 보주를 다시 슬롯에 넣었다. 탄셀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쩐지 보통 인간은 아니라 생각했건만... 신에게 힘을 받았다면 납득이 가는군."

'사실 받은 게 아니라 뺏은 건데.'

탄셀 교수가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었지만, 굳이 정정해줄 필욘 없을 것 같다.

"마력탄은 어찌어찌 막을 수 있겠지만, 마나 프로텍터가 문제군."

'사실 깰 수는 있는데....'

키르카라슈텔의 보주를 휘두르면 마나 프로텍터를 깰 수 있다.

'그랬다간 내 몸이 터지겠지.'

하지만 마나 프로텍트를 깨기 위해 보주를 몸에서 떼어내면 사방에서 날아오는 마력탄을 막을 수 없다.

'그렇다고 마나 프로텍터를 안 깨면 저 자식을 팰 수가 없고.'

콰아앙!

강승현은 날아오는 마력탄을 피해 물러났다. 지금은 마나 프로텍터 때문에 크리스털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가까이 접근해야 놈한테 한 방 먹일 텐데. 저 망할 방어막이 문제네요."

"마나 프로텍터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해제된다네."

탄셀 교수가 말함과 동시에 크리스털을 보호하던 방어막이 사라졌다.

[마나 프로텍터]

하지만 마나 프로텍터가 사라지자마자, 동력 시스템은 다시 한번 스킬을 발동했다.

"원래는 마력이 많이 소모되는 스킬이라 자주 발동할 수 없지만, 동력 시스템에겐 아무 의미 없는 모양이군...."

녀석은 워낙 마력이 넘쳐나다 보니 상위 마법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다. 마나 프로텍터쯤이야 수백 번을 사용해도 거뜬했다.

"저걸 어떻게 하려면 방어 해제 마법을 써야겠지만... 지금 나는 그걸 사용할 만한 마력이 없네."

탄셀 교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포션을 마셔서 마력을 채운다 해도 마력 연결 회로가 달려들어 순식간에 흡수할 것이다.

[마력탄]

콰아아아앙!!

두 사람이 이러는 동안에도 동력 시스템은 사방에서 끌어모은 마력을 아낌없이 써서 공격을 퍼부었다.

"그럼 탄셀 교수님, 지금은 마력을 못 쓰게 되어도 상관없겠네요?"

"그렇지. 지금도 이미 못 쓰는 것과 다를 바 없네만."

탄셀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강승현은 마나 프로텍터를 향해 석궁을 겨눴다.

"그럼 일단 마나 프로텍터부터 무력화시키고...."

"혹시 뭔가 방법이 있는 건가?"

강승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아쇠를 당겼다.

파바바박!!

"얼마 안 남아서 아끼려 했는데."

프리아의 석궁에서 우윳빛 화살 하나가 날아갔다.

[마나 프로텍터]

동력 시스템은 어김없이 프로텍터를 발동했으나,

"이번 건 못 막을 거다."

주르르르륵.

생성된 방어막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강승현이 이번에 날린 건 평범한 화살이 아니라,

'가향초 젤 화살!'

마력을 녹이는 화살이었기 때문이다.

71. 마력 중심부 2

가향초 젤 화살이 발사된 순간, 가향초 효과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주르르르...

동력 시스템이 펼친 방어막은 물론이고, 날아오던 마력탄과 사방에 뻗어 있던 연결 회로까지.

화살의 영향으로 마력 중심부 안의 모든 마력이 녹아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설마, 마력을 녹이는 가향초 연기인가?"

탄셀 교수가 자신의 입가에 묻어나는 마력 찌꺼기를 보며 물었다.

"잘 아시네요. 모르는 사람 많던데."

"일단은 남을 가르치는 처지이니, 이거저거 배워둬야 할 게 많거든."

"이건 가향초를 이용해서 만든 화살입니다."

정확하게는 가향초 연기를 젤로 가공해 만든 화살. 사용 시 주변 마력을 죄다 녹여버리는 효과가 있다.

"가향초의 위험성은 알고 있었만... 정말 어마어마한 힘이군."

탄셀 교수가 놀랍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마나 프로텍터는 물론이고, 마력 연결 회로까지 녹아내렸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난리가 났겠지만, 지금은 써도 상관없겠죠?"

"그렇겠지. 지금은 마력 연결 회로를 끊어내는 게 마탑을 구하는 일이니까."

주르르르르.

가향초 젤 화살의 효과로 사방팔방에 끈적한 마력 찌꺼기가 쌓여갔다.

지지지직!

일반 마법사였다면 가진 마력이 전부 녹아내렸겠지만, 상대는 마탑 전체를 조종하는 동력 시스템.

'겨우 화살 하나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화살 하나로는 동력 시스템이 가진 마력을 전부 녹일 수 없다.

'어차피 프로텍터만 뚫으면 돼.'

하지만 녀석이 발동한 방어막 정도는 눈 깜짝할 사이에 녹일 수 있었다.

주르르륵.

마나 프로텍터가 녹아내린 걸 확인한 강승현은 동력 시스템 가까이 접근했다. 마력을 가득 품은 크리스털이 눈에 들어왔다.

'움직이지 않는 것만큼 맞추기 쉬운 과녁은 없지!'

강승현은 크리스털을 향해 석궁을 겨누었다.

파바바바박!!

방아쇠를 당기자 화살이 빠른 속도로 쏟아져 나왔다.

[마력탄]

동력 시스템은 강승현을 막기 위해 온갖 마법을 펼치려 했으나,

주르르르륵.

생성된 마력탄은 반쯤 녹아 있었기 때문에,

[슬롯에 등록된 아이템 효과가 발동합니다.]

[2 : 키르카라슈텔의 보주]

강승현에게 별 피해를 주지 못했다.

까각!!

그러는 사이 날려 보낸 화살은 동력 시스템 크리스털을 공격했다.

까가가각!!

고작 화살 하나로 부술 수 있는 물건은 아니지만, 효과는 있었다. 동력 시스템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한 것이다.

"역시 저 크리스털이 약점이었군."

이대로 계속 공격한다면 부술 수 있겠지만,

[마나 프로텍터]

다시 방어막이 생겨나 크리스털을 감쌌다.

"가향초 효과가 사라진 모양일세!"

"성능이 사기인 만큼 효과가 짧아서요."

동력 시스템도 가향초 효과가 사라진 걸 알아채고 마나 프로텍터를 2중, 3중으로 깔았다.

파아아앗!

그리고 강승현을 확실하게 조지겠다는 것처럼 허공에 거대한 마법진을 그려냈다.

"저, 저 마법진은... 연속 마법!"

탄셀 교수가 마법진을 보며 소리쳤다. 특정 마법을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고, 발동할 때마다 위력이 증가하는 마법이다.

[다중 연속 마력탄]

파바바바바바!!!

수백 개의 고농도 마력탄이 속사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평범한 인간은 시도조차 쉽지 않은 엄청난 마법이었다.

"마력이 많으니 별짓을 다 하네."

"위험해! 아무리 자네라도 저걸 전부 맞았다간 몸이 못 버텨!"

"그러게요. 저건 좀 위험해 보이네요."

강승현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수백 개의 마력탄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리 보주의 힘으로 대미지를 줄여도, 저걸 다 맞았다간 몸이 버틸 수 없다.

"일단 물러나게. 자네까지 쓰러지면 저 괴물은 아무도 못 막으니...."

"안 맞으면 그만이죠."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날아오는 마력탄을 향해 석궁을 겨누었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가향초 젤 화살을 생성합니다.]

후욱!!

석궁에서 우윳빛 화살이 발사된 순간,

주르르르륵...

촤아악!

수백 개의 마력탄이 일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꼭 건물 안에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져서 그런지, 시끄럽게 요동치던 동력 시스템이 잠깐 얌전해졌다.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화살을 꺼냈다.

'내가 언제 가향초 화살이 하나뿐이랬나?'

머릿속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가향초 화살이 하나밖에 없다고 한 적은 없다.

"자네는 도대체 그 위험한 화살을 몇 개나 갖고 있는 건가?"

"방금 그게 2개째. 아직 4개 더 있어요."

강승현이 석궁 방아쇠를 당기자, 3번째 가향초 화살이 날아갔다.

파악!

날아간 화살은 동력 시스템이 열심히 깔아둔 2중 3중의 마나 프로텍터를 꿰뚫었다.

주르르르륵.

꿰뚫린 방어막은 끈적하게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두껍고 강력한 보호막이라도 마력으로 만들었다면 가향초 화살을 이길 수 없다.

'빈틈 좋고.'

크리스털을 보호하던 방어막이 소멸했다.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일반 화살을 날렸다.

파바바박!!!

날아간 화살로 인해,

까가가각!!!

크리스털에 금이 가면서 그 사이로 진한 마력이 흘러나왔다.

"아, 까먹기 전에 미리 말하는 건데."

[프리아의 화살 회수]

[가향초 젤 화살을 회수합니다.]

밝은 빛과 함께 방금 사용한 가향초 젤 화살이 회수됐다.

[회수 성공!]

[회수된 가향초 젤 화살.]

"저는 '화살 회수' 스킬을 쓰면 화살을 회수해서 재활용할 수 있거든요."

이 스킬을 쓰면 다 써서 효과가 바닥난 화살이라도 새것처럼 재활용할 수 있다.

'물론 한 번 회수한 화살은 다음 날 아침이 돼야 다시 회수할 수 있지만.'

어차피 가향초는 여명의 성수보다는 구하기 쉽다. 화살을 다 써도 아쉬울 건 없다.

"6개의 화살을 쓸 때마다 회수해서 전부 다시 사용한다고 가정하면...."

즉, 지금 강승현은 가향초 젤 화살을 최대 12개까지 쓸 수 있는 셈이다.

"저놈도 어찌 못하겠죠."

"그렇군.... 아무리 마력이 많아도 크리스털이 파괴당하면 시스템이 부서질 테니."

효과가 떨어질 때마다 화살을 쓰면 녀석은 크리스털을 보호할 수단이 없다. 혹시라도 12개의 화살이 다 떨어질 때까지 버틴다면 기적적으로 역전할 수 있겠지만,

"아무리 강한 놈이라도 약점이 노출된 상태에선 싸우기 힘들지."

기적은 잘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기적이라 부르는 것이다.

[마나 프로텍터]

동력 시스템은 가향초 효과가 사라질 때마다 필사적으로 방어막을 펼쳤으나.

팍!

방어막을 생성하자마자, 강승현이 날린 가향초 화살이 날아왔다.

주르르륵...

동력 시스템의 방어 마법은 헛수고로 변했다. 마력 중심부 곳곳에 녹아내린 마력 찌꺼기가 쌓여갔다.

철퍽!

강승현은 끈적한 찌꺼기를 발로 짓밟으며 크리스털을 향해 석궁 방아쇠를 당겼다.

파박!

팍!

화살에 공격당한 크리스털은 몸 안에 품고 있던 마력을 흘렸다. 꼭 사람이 피를 흘리는 것처럼 말이다.

쩌적!

방아쇠를 당기면 당길수록 크리스털 겉표면에 생긴 금이 커졌다. 이런 식으로 반복해서 공격한다면 완전히 부서질 것이다.

"자네가... 자네가 저 괴물을 이기겠어!"

탄셀 교수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무리 가진 마력이 많아도 그걸 활용할 수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마법을 쓸 수 없는 마법사는 그 어떤 위협도 되지 않으니!"

마탑을 지배하는 동력 시스템과 싸운다는 건 마탑 자체와 싸운다는 것과 같다.

개인이 마탑을 쓰러트린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나, 강승현은 혼자서 진홍의 마탑을 무력화시킨 것이다.

'다 틀렸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구만!'

그는 제자의 심정을 절절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는 상황을 기어코 살려내는 남자.

'혹시 자신을 힐러라 지칭하는 건 그 때문인가!'

"...."

무척 들떠서 기뻐하는 탄셀 교수와 달리, 강승현은 묵묵히 방아쇠를 당겼다.

파악,

팍!

날아간 화살은 계속해서 크리스털을 공격했다. 이대로만 간다면 동력 시스템이 붕괴할 것이다.

'근데 정말 이걸로 끝일까?'

강승현은 손으론 방아쇠를 당기며 머릿속으로 유적 던전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여명의 성수 화살.

-크아아아아아악!!!!

보스를 한 방에 죽이려고 보스전 시작부터 필살기를 썼더니

-제가 이 던전의 보스 몬스터, 아일 크로아입니다.

알고 보니 파티원 중 하나가 정체를 숨긴 진짜 보스 몬스터였고.

그렇게 2회차 보스전이 시작됐다.

'역시 사람은 쉽게 가려고 하면 안 되는 건가.'

그래서 이번엔 가향초 화살을 시작부터 쓰지 않은 것이다. 최대한 아꼈다가, 필살기는 필살기답게 마지막에.

'탄셀 교수가 갑자기 자기가 진짜 보스라며 공격해오진 않을 것이고.'

강승현은 탄셀 교수를 힐끔거렸다. 그는 지금 사람들을 입구로 옮기고 있었다. 가향초 효과로 인해 마력 연결 회로가 끊어져서 몸이 조금 회복된 모양이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입구까지 옮겨두겠네. 혹시 싸움에 휘말리면 안 되니까...."

"아, 김호정 씨는 그냥 둬도 안전하니 놔두세요. 옮길 거라면 다른 사람부터."

강승현의 말을 들은 탄셀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걸 보니 갑자기 달려들 일은 없겠군.'

강승현은 다시 크리스털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아무리 자기가 유리한 입장이라도 방심해선 절대 안 된다. 한 번의 방심으로 훅 가는 게 아즐 대륙의 삶이니까.

'내가 저놈 입장이라고 생각해보자.'

녀석은 가향초 때문에 가진 스킬을 전부 봉인 당했다. 지금으로선 강승현의 공격을 막을 수단이 전혀 없다.

'하지만 돌파구가 없는 건 아냐.'

가향초 효과만 막을 수 있다면 승산이 있다.

그렇다면 효과를 막을 방법은?

'가향초 효과가 통하지 않는 물체를 사용한다.'

강승현은 주위를 살폈다. 사방팔방에 끈적하게 녹아내린 마력 찌꺼기가 보인다. 이미 녹아서 찌꺼기만 남은 마력은 가향초 효과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강승현 힐러! 저걸 보게!"

그때, 탄셀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스르르르.

사방에 널려 있던 마력 찌꺼기가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이건 대체...!"

"탄셀 교수님, 가까이 가지 마세요."

강승현은 황급히 [관찰의 눈]을 발동했다.

스르르르.

시스템이 사방에 뻗은 연결 회로를 이용해 마력 찌꺼기를 긁어모으는 게 보였다.

"연결 회로를 뻗어서 마력 찌꺼기를 긁어모으는 중이니까."

"...마력 연결 회로를 써서?"

"저 녀석은 그걸 손발처럼 써먹고 있잖아요."

동력 시스템은 그렇게 긁어모은 찌꺼기를 중앙의 크리스털로 끌어오기 시작했다.

"도대체 저런 걸로 뭘 어쩔 생각이지?"

"뻔하죠."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입에 물고 말했다.

마력을 녹여버리는 가향초는 효과는 끈적한 마력 찌꺼기에는 통하지 않는다.

이미 녹았으니까.

철퍽!

철퍽!

긁어모은 마력 찌꺼기가 크리스털에 들러붙었다. 마치 물컹한 젤리 속에 크리스털이 담긴 것 같았다.

팍! 파박!

강승현은 재빨리 석궁 방아쇠를 당겼지만, 날아간 화살은 찌꺼기 덩어리에 가로막혔다.

이걸로 녀석의 의도를 확실히 깨달았다.

"크리스털을 보호하기 위한 육체."

"육체라고?"

동력 시스템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마법 대신 다른 수단을 선택했다. 물리적인 보호를 위해 육체를 만든 것이다.

'어쩐지 쉽게 끝난다 했다.'

마력 찌꺼기를 긁어모아 몸을 만들었으니, 이제부턴 가향초 효과가 통하지 않는다. 녀석도 나름 머리를 굴린 셈이다.

'근데, 나라고 그 생각 안 했을 거 같냐?'

강승현은 미소를 지었다. 동력 시스템이 가향초 효과를 막기 위해 마력 찌꺼기를 사용할 거라는 건 예상했다.

'당연히 대처법도 생각해뒀지.'

72. 마력 중심부 3

꿀렁.

크리스털이 담긴 찌꺼기 슬라임이 새로 만든 몸을 꿈틀거렸다. 비록 마력 찌꺼기로 만든 몸이지만 날아오는 화살 정도는 쉽게 막아낼 정도로 튼튼했다.

"강승현 힐러, 조심하게."

탄셀 교수는 그걸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이제 화살이 통하지 않으니 가까이 접근해서 싸울 수밖에 없다.

"저 추악한 놈.... 자네가 접근하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알았어요. 조심할게요."

강승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석궁을 들었다. 동력 시스템은 기다렸다는 듯 허공에 마법진을 그려냈다.

"저 괴물 놈! 이번에도 연속 마법진을!"

"또 그거예요?"

[다중 연속 마력탄]

동력 시스템은 이번에도 마력탄을 속사포처럼 쏘아댔다. 허공에서 수백 발의 마력탄이 비처럼 쏟아졌다.

파바바바!!

탄셀 교수는 불안한 얼굴로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가향초를 사용하면 마력탄을 녹일 수 있지만... 그러면 결국 저 괴물의 육체를 강화시켜주는 꼴이 돼!'

녹아내린 마력 찌꺼기가 많아질수록 동력 시스템의 양분이 늘어난다.

그렇다고 가향초 화살을 쓰지 않으면 속사포처럼 날아오는 마력탄을 몸으로 맞아야 한다.

'어느 쪽을 골라도 강승현 힐러에게 불리한 상황이긴 하지만... 저 친구라면 뭔가 생각이 있겠지.'

탄셀 교수는 뒤로 물러났다.

강승현이라면 분명 무슨 생각이 있을 테니까.

-'장전!'

강승현은 날아오는 마력탄을 향해 석궁을 겨눴다. 우윳빛 화살이 허공으로 날아가 날아오던 마력탄을 단숨에 녹여버렸다.

철퍽! 철퍽!

마력 찌꺼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력 시스템은 떨어진 마력 찌꺼기를 자신의 몸으로 흡수했다.

이제 그런 짓은 소용없다는 것처럼.

'머리를 열심히 굴리긴 했네.'

찌꺼기를 이용해 물리 보호막을 만든다는 발상은 정말 기발했다. 지금 강승현에겐 찌꺼기 보호막을 뚫을 만한 석궁 스킬이 없기 때문이다.

'저거라면 화살은 확실하게 막을 수 있겠어.'

상대의 공격을 역으로 이용해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기회를 노린다. 몬스터치고는 나쁘지 않은 발상이다.

'근데, 내가 화살만 쓸 줄 아는 게 아니라서.'

강승현은 가향초 효과가 사라지기 전에 재빨리 앞으로 뛰쳐나갔다.

화살이 먹히지 않는다면 다른 걸로 공격하면 그만이다.

'지금 동력 시스템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덩어리는... 녹아내린 마력의 찌꺼기.'

이미 녹아서 가향초 효과가 통하지 않을 뿐, 크리스털을 감싼 물질은 분명 마력의 일종이다.

'즉, 이게 통한다는 소리지.'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키르카라슈텔의 보주'를 꺼냈다.

'...마법과 마력에 관해선 엄청난 저항력을 가진 아이템!'

즉, 보주로 냅다 패버리면 된다.

"키르카라슈텔의 주먹!"

강승현은 보주를 손에 쥐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찌꺼기 슬라임을 향해 주먹을 꽂아 넣자,

퍼억!!!

물풍선 터지는 소리와 함께 동력 시스템의 육체가 비참하게 부서졌다.

'녹고 남은 마력 찌꺼기가 신의 힘이 담긴 성유물을 버틸 리 없지!'

강승현은 보주를 꽉 쥐며 중얼거렸다.

"저, 저걸 주먹으로 부쉈다고?"

탄셀 교수는 경악했다. 비록 줄줄 녹아내린 마력 찌꺼기이긴 하나, 날아오는 화살도 막을 만한 방어력을 갖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마법 방패와 비슷한 건데, 강승현은 그걸 주먹으로 부순 셈이다.

'아니, 대체... 강승현 힐러... 그는 정녕 사람이란 말인가?'

탄셀 교수는 넋이 나간 채 중얼거렸다. 그는 강승현이 손에 보주를 쥐고 있다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니 맨주먹으로 마법 방패를 부순 것처럼 보일 수밖에.

[마력탄]

동력 시스템이 발악하며 마법을 사용했다.

원래는 키르카라슈텔의 보주를 장착해서 막아야 할 공격이었으나.

주르르르륵...

가향초 효과가 사라지지 않는 한, 마력탄은 물론 녀석의 마법에 당할 걱정은 없다.

'보주를 무기로 써도 아무 문제 없다는 거지!'

강승현은 다시 한번 보주를 쥔 주먹을 휘둘렀다.

퍼억!!!

찌꺼기 덩어리를 뚫고 들어간 주먹이 동력 시스템의 크리스털을 공격했다.

째애앵!!!

"...!"

강승현은 팔에서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얼굴을 찌푸렸다. 강력한 마력이 담긴 물질을 스킬도 아닌 맨주먹으로 부수려 했으니까.

"손이 좀 얼얼하긴 하지만... 효과는 있네."

으깨진 슬라임이 끓는 것처럼 부글거렸다. 크리스털에 생긴 금도 더 커졌다. 이번 공격은 동력 시스템한테도 타격이 컸던 모양이다.

'좋아. 이제 한 번만 더 때리면....'

지지지지직!!!

꿀러어엉!

그때, 심하게 요동치던 점액 덩어리 몸에서 갑자기 팔 같은 형태가 솟아났다. 꼭 사람의 팔을 젤리로 흉내 낸 것 같은 생김새였다.

"이건 또 뭐야."

"육체를... 변형시키는 건가?"

부글부글부글.

동력 시스템이 주변 찌꺼기를 마구 흡수하더니 육체를 변형하기 시작했다.

점액 덩어리에서 팔다리가 만들어지고 머리까지 만들어지자 꼭 찰흙을 빚어 만든 점토 인형 같았다.

"저, 저건 대체!"

탄셀 교수가 질색하며 소리쳤다.

녀석은 지금 인간을 흉내 내고 있었다.

"가지가지한다 진짜."

강승현은 동력 시스템을 바라보았다. 저 괴물은 인간을 먹이로 삼은 것도 부족해서 이제 인간이 되고 싶은 모양이다.

"저것이 인간이 되려는 것인가? 정말이지 기괴하기 짝이 없군!"

"하지만 겉만 보고 흉내 냈네요."

자기 나름대로 인간을 본떠 만든 것 같지만, 머리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장식이었고 다리가 아니라 팔만 4개 달린 괴물이었다.

"저런 건 오히려 역겹지."

강승현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인간을 아예 닮지 않는 것보다 어설프게 닮은 녀석이 더 기분 나쁜 법이다.

'[관찰의 눈].'

혹시나 하는 마음에 [관찰의 눈]을 사용하자, 찌꺼기 몸 중앙에 박힌 크리스털이 사방으로 마력 연결 회로를 뻗어가는 게 보였다.

마치 인간의 혈관처럼 말이다.

철퍽!!

그리고 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괴한 덩어리가 찐득한 덩어리로 이루어진 팔을 휘둘렀다.

쿠웅!!!

휘둘러진 팔이 벽을 과자처럼 으스러트렸다.

마력 중심부가 마탑에서 가장 단단한 장소라는 걸 생각하면 정말 무시무시한 파워였다.

"우리 마탑에서 저런 괴물이 탄생하다니!"

탄셀 교수는 경악하며 소리쳤다. 녀석은 지금 전신에 마력을 둘러 찌꺼기 몸을 강화하고 자유자재로 조종하고 있었다.

간단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너 개의 마법을 결합해서 사용해야 하는 꽤 복잡한 테크닉이다.

"물론 저 몸을 조종하는 동안 다른 마법은 쓸 수 없겠지만...."

"애초에 마법을 쓸 필요가 없겠죠."

먹히지 않는 마법을 뭐하러 쓰겠는가. 이제부턴 물리 공격으로 강승현을 때려죽이려 할 것이다.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마시며 생각했다.

'이 괴물 새끼가 진짜 별짓을 다 하네.'

키르카라슈텔의 보주와 가향초 화살은 어디까지나 마력과 마법을 막는 데 특화되어 있다.

결국, 상대가 물리 공격으로 나오면 막을 방법이 없다.

'괴물이 주먹을 휘두르는 것까진 안 막아준단 말이지.'

강승현은 손에 든 보주를 바라보았다. 물론, 저 찌꺼기 슬라임 역시 마력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보주로 부술 수 있긴 하다.

'어떻게든 접근한다면 부술 수 있겠지만....'

강승현은 찌꺼기 괴물을 바라보았다.

콰아아앙!!

쿠구구궁!!

녀석이 양팔로 바닥을 내려치자 강력한 충격파가 일어나면서 부서진 바닥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올랐다.

'접근할 수가 있어야지....'

강승현은 찌꺼기 괴물의 공격을 피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전신에 강화 마법을 걸고 돌진하는 탓에 대미지 하나는 정말 어마어마했다.

'무슨 지진 일어난 줄 알았네.'

강승현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벽과 천장에 금이 간 게 보인다.

'여기가 마탑 지하인 이상, 놈이 계속 날뛴다면 무너질 거야.'

강승현은 마탑 지하를 자신과 마법사들의 공동묘지로 만들 생각이 없었다.

'이제 조금만 더 공격하면 되는데.'

그의 시선이 찌꺼기 괴물 중앙의 크리스털로 향했다.

'[관찰의 눈].'

동시에 강승현의 눈이 푸르게 빛나며 크리스털 위로 정보 메시지가 떠올랐다.

[접촉할 경우 마력을 흡수한다.]

[중앙의 크리스털에 마력을 비축하고 있다.]

[경고] [당신을 죽이고자 한다.] [경고]

[마력을] [마력을 원한다.] [마력]

[더 많은 마력을 흡수하고자 한다.]

크리스털을 자세히 살피자, 처음과 메시지가 많이 달라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크리스털에 큰 충격이 가해지면 폭발한다] 메시지가 사라졌어.'

지금 동력 시스템은 강승현과 싸우느라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을 소모한 상태다.

'지금이라면 크리스털을 부숴도 폭발하지 않겠지.'

녀석을 파괴할 절호의 찬스다.

어쩌면 다시없을 기회일지도 모른다.

'틈만 만들 수 있다면... 그걸 사용할 수 있는데.'

콰앙!!

하지만 녀석이 미친 듯이 주먹을 내려치니 틈은커녕 피하기도 쉽지 않다. 강승현은 공격을 피하며 생각했다.

'녀석의 시선을 끌 만한 게 뭐 없을까.... 아!'

강승현의 눈에 '[마력을 원한다]' 메시지가 들어왔다.

녀석의 삶의 목적은 오직 하나.

'마력!'

동력 시스템은 마력을 흡수할 수 있다면 자신이 죽는 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

강승현은 찌꺼기 괴물을 향해 다가갔다.

'저놈은 마력에 환장한 괴물이었지.'

당연히 동력 시스템은 강승현을 죽이기 위해 주먹을 내려치려 했다.

'그러니 이걸 그냥 지나치진 못하겠지!'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대형 마력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석궁 방아쇠를 당기자, 마력이 담긴 푸른 화살이 날아갔다.

스스스스....

그 순간, 주먹을 내려치려던 동력 시스템은 날아가는 화살을 향해 마력 연결 회로를 뻗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만약 상대가 인간이었다면, 신경 쓰지 않고 날 죽였겠지만....'

녀석은 강승현을 죽이는 것보다 당장 눈앞의 마력에 눈길을 돌렸다. 그게 함정이라는 걸 모를 리 없는데도.

'아무리 인간을 흉내 내려 해도 근본은 괴물이지.'

강승현은 녀석의 주의를 돌린 틈에 인벤토리에서 아이템 하나를 꺼냈다.

'이걸 사용하면... 동력 시스템을 잠깐 멈출 수 있다고 했지.'

리제이한테서 받은 마력 오염 스크롤이었다.

이걸 쓰면 동력 시스템을 정지시킬 수 있지만, 지속시간이 매우 짧고, 딱 한 번밖에 쓸 수 없다.

'그렇다면 막타를 남겨둔 지금 써야겠지.'

아무 방해 없이.

동력 시스템을 확실하게 부술 수 있도록.

찌이익!!

강승현은 마법 스크롤을 손으로 찢어냈다. 그러자 눈 깜짝할 사이에 주위 마력이 흑마력으로 물들어갔다.

지직, 팟!

동시에 크리스털이 눈부신 빛을 잃었다. 동력 시스템이 정지한 것이다.

퍼억!!

강승현이 보주를 휘두르자 크리스털을 보호하던 찌꺼기가 터져나갔다.

주르륵...

터져나간 마력 찌꺼기 사이로 빛바랜 크리스털이 모습을 드러냈다. 힘을 잃어서 가벼운 충격에도 박살 날 정도로 약해진 상태다.

'하지만 지금은 크리스털을 보호할 방어막도, 찌꺼기 몸체도 없지.'

녀석은 이제 화살을 방어할 수단이 없다.

강승현은 크리스털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73. 진압

파각!

날아간 화살이 크리스털의 정중앙에 꽂혔다.

파각, 파각!

이어서 날아간 두 번째, 세 번째 화살 역시 크리스털에 꽂혀 들어갔다.

쩌적!

쩌저적!

그리고 마침내.

다섯 번째 화살이 크리스털에 꽂힌 순간,

쨍그랑!

빛바랜 크리스털이 무참히 깨져버렸다.

진홍의 마탑 전체를 아우르던 동력 시스템이 작은 화살을 버티지 못하고 박살 난 것이다.

쩌어어억...

크리스털이 깨짐과 동시에, 마력 찌꺼기로 이루어진 괴물의 몸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철퍽! 철퍽!

혈관처럼 뻗어 나간 연결 회로가 끊어지고, 마력으로 뭉쳐져 있던 찐득한 덩어리가 흩어졌다.

촤아악...

몬스터로 변이한 동력 시스템은 움직임을 멈추고 소멸했다.

"끝났네."

[프리아의 석궁이 소멸합니다.]

강승현은 들고 있던 석궁을 소멸시켰다.

"강승현 힐러! 강승현 힐러!"

탄셀 교수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달려왔다.

"자네가! 마탑에서 탄생한 괴물을 무찔렀어!"

마력을 남김없이 흡수하는 몬스터. 마탑에서 탄생했지만, 마법사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존재.

강승현은 그런 끔찍한 괴물을 혼자서 쓰러트렸다.

"이걸 어찌 감사해야 할지...."

"그건 됐고, 어디 다친 곳은 없으세요?"

"나야 문제없지. 마력을 빼앗기긴 했지만, 몸에 상처 하나 없네."

탄셀 교수가 자신이 몸을 둘러보며 말했다. 바닥에 쓰러지면서 생긴 생채기는 있지만 눈에 띄는 외상 같은 건 없다.

"다른 사람들도 처지는 비슷하고."

다들 대량의 마력을 단숨에 빼앗긴 탓에 충격으로 의식을 잃긴 했지만, 다친 곳은 없다.

"나 같은 것보다 자네가 걱정이네...."

"저야 좀 다치긴 했죠."

강승현은 자신의 몸을 살폈다. 아무리 키르카라슈텔의 보주를 갖고 있다 해도, 강력한 마력탄을 맨몸으로 받아냈다.

'상태가 좋다고 하긴 그렇지.'

찌꺼기 괴물이 날뛰면서 입은 피해도 있고, 치명상은 없지만 강승현의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일단 나가서 힐러를...."

"아뇨, 괜찮습니다."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붕대와 약을 꺼냈다.

"제가 힐러인데 다른 힐러를 뭐하러 찾아요."

붕대로 손과 팔을 감싸고 어깨에 고정한 다음, 스태미나 포션을 몇 개 빨면서 약을 발랐다.

물론 힐러의 힐을 받는다면 이 정도 상처는 눈 깜짝할 사이에 낫겠지만.

'굳이 힐 받고 싶진 않아서.'

힐 없이 먹고 사는 야매 힐러인 이상, 자신의 몸은 자신이 치료해야 한다.

"힐러를 불러오실 거라면, 저보다는 쓰러진 사람들을 치료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렇지 참."

탄셀 교수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 주위에 사람들은 몇 명을 제외하곤 마탑 최고위 마법사들이다.

다들 동력 시스템을 정지하러 왔다가 마력을 쭉쭉 빨려서 쓰러진 상태였다.

"지금 마탑 마법사들이 무척 혼란스러워할 상황이지.... 이런 상황에 윗선들이 쓰러져 있어선 안 될 일."

마탑 우두머리들이 죄다 쓰러져 있는 관계로 지금 마탑에서 가장 높으신 분은 탄셀 교수뿐. 지금 상황은 탄셀 교수가 수습하기로 했다.

"일단 위에서 힐러를 불러와야겠군. 강승현 힐러, 자네는 어쩔 건가?"

"저는 여기서 쉬겠습니다. 피곤해서요."

가서 힐러를 불러오는 것뿐이라면 굳이 따라갈 필요 없다. 강승현은 적당한 곳에 자리 잡고 앉았다.

"내 금방 갔다 옴세."

탄셀 교수는 서둘러 계단을 올라갔다.

'나는 그럼 내 상처 치료나 계속하고....'

강승현은 [완치판정]을 발동했다. 상처 처치에 성공했다면 회복 속도를 증가시키는 좋은 스킬.

'여기에 [진정의 목소리]까지 더하면....'

몸의 상처가 빠른 속도로 회복되는 게 느껴졌다. 힐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긴 하지만, 마력의 영향받지 않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쓸 수 있다는 엄청난 강점이 있다.

'이걸 잘 써먹으면 생각보다 더 유용하겠는데.'

아즐 대륙에서 스킬을 쓰려면 무엇보다 마력이 중요한 만큼, 마력 무력화에 관한 연구도 활발하다.

야매 힐러가 활약할 무대는 아직 많다.

'지금은 이 정도면 되겠지. 푹 쉬면 금방 낫겠어.'

강승현은 상처를 살피며 생각했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이번에도 큰 문제 없이 해결했다.

-"여기 마력 포션 부족해요!"

"힐러님! 이쪽에 환자요!"

탄셀 교수의 부름을 받은 마탑 힐러들이 쓰러진 사람들을 치유했다.

몸에 부상을 입은 게 아니라 급격한 마력 소모로 정신력과 스태미나가 바닥난 거라 금방 회복할 수 있었다.

[기력의 빛]

힐러가 환자한테 손을 뻗을 때마다 금빛 오오라가 퍼져나갔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으음... 습격을 받은 건가?"

쓰러진 사람들이 깨어나 주위를 살폈다. 슈이레도 정신을 차리고 부스스한 머리를 정돈했다.

'나는 김호정 씨만 깨워주면 되겠지.'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살포]했다. 노란 오오라가 퍼지며 김호정이 눈을 떴다.

"아이고 머리야...."

"이제 일어나셨어요? '빠른 기상' 스킬 하나 장만하시지 그래요."

[빠른 기상]

[로그 계열 스킬]

[상태이상 '수면'에 걸린 경우 남들보다 빠르게 깨어날 수 있다.]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강 선생 꼴을 보니 또 한바탕 하셨나 봐."

멀쩡했던 사람이 어깨에 붕대를 감고 있네. 김호정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이번엔 뭐랑 싸웠어? 마법사?"

"마탑 동력 시스템이요."

강승현은 뭉개진 찌꺼기 괴물을 가리켰다.

"마탑 녀석들 무섭네.... 지하에서 저런 괴물을 키우고 있던 건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동력 시스템이 만들어낸 몬스터겠죠!"

뒤에서 슈이레가 달려와 소리쳤다.

"슈이레 씨는 몸 괜찮으세요?"

"저는 괜찮아요! 그보다!"

쾅!

슈이레가 스태프로 바닥을 내려치며 소리쳤다.

"자느라고 강승현 힐러님의 활약을 못 봤어! 아일 때도 그랬는데!"

그녀는 자신이 쓰러져 있는 동안 강승현이 싸우는 걸 보지 못한 게 서러웠다. 심지어 처음도 아니고 두 번째라서.

'생각해보니 저번에도 다들 자고 있었지.'

강승현은 유적 던전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그때는 강승현을 뺀 파티원들이 아일의 공격에 당해 잠들었다.

"그때도 못 봐서 아쉬웠다구요. 흑마술을 쓰는 사도와 1:1로 싸우는 힐러라니!"

"사도랑 싸우는 게 뭐 대단하다고."

"거기다 이번에는... 끔찍한 마력 덩어리 괴물과 혼자서 맞서다니!"

슈이레는 눈을 반짝이며 소리쳤다. 지금까지의 행적만 봐도 알 수 있지만, 그녀는 모험과 싸움을 무척 좋아했다.

일반적인 마법사들은 마법 연구에 관심 있지 싸움질에는 관심 없는데 말이다.

"답이 없는 상황을 살려내는 진정한 힐러의 모습! 자세히 듣고 싶어요!"

"지금은 피곤한데요."

정 궁금하면 탄셀 교수한테 물어보시든가. 강승현이 이렇게 말하자 슈이레는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탄셀 교수님은 빠짐없이 생생하게 보셨겠죠? 좋겠다."

"직접 본 입장에서 말하자면... 정말 굉장했지."

"교수님!"

때마침 탄셀 교수가 자리로 돌아왔다. 그뿐만 아니라 마탑의 고위 마법사들도 함께.

"자네가 강승현 힐러인가?"

그중 가장 화려한 옷을 입고 가장 서열이 높아 보이는 노인이 앞으로 다가왔다.

"네. 힐러 강승현이라고 합니다."

"허허, 만나서 반갑네. 나는 진홍의 마탑을 이끄는 마탑의 수장. 마스터 로케르라고 하네."

이자가 현 진홍의 마탑 마스터. 마탑 윗대가리의 최고 윗대가리. 진홍의 마탑 대표자 로케르다.

"세상에 마스터 로케르 님이 직접 나섰다니...."

"이번 일은 엄청났잖아. 강 선생 모시려면 마스터 정도는 나와주셔야지."

뒤에서 슈이레와 김호정이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만나서 반갑긴 한데. 뭔가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이번 일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네."

마스터 로케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끈적하게 녹아내린 마력 찌꺼기들과 망가진 마법진. 그리고 처참하게 부서진 크리스털까지.

"둘러보니 사정은 알 것 같지만, 다른 누구보다 당사자한테 직접 듣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이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예상은 가지만, 가장 정확한 건 당사자의 설명을 듣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강승현은 여기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결론은 동력 시스템에 큰 오류가 일어났기 때문이네요."

오류를 일으킨 동력 시스템은 마력을 마구 끌어모으면서 폭주했다.

"그러다 몬스터로 변이해 사람들을 공격한 거죠."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맛이 간 동력 시스템은 기능을 정지시키려는 것에 반발했다. 자신을 만들어낸 마법사들을 공격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인간이 되려고 발악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시스템을 끄려고 했을 때 그런 일이...."

"으음...."

"강승현 힐러의 말은 전부 제가 보증합니다."

탄셀 교수가 강승현의 말을 거들었다.

"덤으로 추측하자면, 관리자가 관리를 허술하게 한 탓에 동력 시스템에 오류가 생긴 것 같습니다."

강승현은 부마스터 하이베를 떠올렸다. 중심부로 가는 걸 필사적으로 막은 걸 보면 녀석이 이번 사태의 원인인 게 틀림없다.

마스터 로케르는 크게 분노하며 소리쳤다.

"하이베 비헬, 네 이놈을 그냥...! 하이베가 도피하기 전에 생포해라! 그놈에게 이번 일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안타깝지만 하이베는 진작 도망쳤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알겠습니다!"

"어서 움직이자!"

그걸 모르는 로케르는 하이베를 잡아 오라며 마법사들을 파견했다.

"자네가 아니었다면 진홍의 마탑, 아니... 카마르까지 위험에 처할 뻔했군."

진홍의 마탑이 무너졌다면 마탑이 지켜주던 카마르도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문제는 결계 마법이 무력화됐을 텐데...."

"그 건은 카마르에 연락했습니다."

마탑이 무너지는 건 막았지만 동력 시스템은 완벽하게 박살났다. 덕분에 진홍의 마탑은 결계를 비롯한 온갖 보호 마법을 쓸 수 없는 상황이다.

"일단 도시를 폐쇄하는 게 우선이겠죠."

"잘했네. 안전이 우선이니까."

마스터 로케르는 다른 마법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더니 강승현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네는 진홍의 마탑뿐만 아니라 카마르를 구원했네."

마스터 로케르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 어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군. 수백 명의 마법사도 해낼 수 없는 일을 자네가 혼자서 해냈으니...."

"제가 생각해도 대단하긴 하네요."

가향초 연기 중독 환자를 치료.

약초 재배실 사태를 수습.

마법사를 구출하겠다고 30m 높이의 마탑에서 뛰어내리기.

마탑 최하층의 동력 시스템을 정지시킴.

'이 모든 걸 하루 만에 해내다니.'

강승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좀 피곤하더라.

"많이 지쳤을 테니 푹 쉬게나. 혹시 뭔가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말하게. 진홍의 마탑은 자네에게 큰 은혜를 입었어."

"뭐든?"

강승현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초대형 사태를 해결했으니 좀 특별한 보상을 요구해도 되지 않을까.

"그럼 보답으로 진홍의 마탑이 가진 아이템을 하나 받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자네가 원한다면야! 말씀하게나. 어떤 걸 원하지?"

"마법직조술로 제작한 <정신적 휴식의 결계 마법진> 양탄자."

마력 회복 속도를 증가시켜주고 자동으로 주변 오염을 정화하는 마법을 짜 넣은 양탄자.

굉장히 어려운 마법인 만큼,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특별한 아이템이다.

"그걸 받고 싶은데요."

"정신적 휴식의 결계 마법진 양탄자라면...."

"그, 그 귀한 것을?"

뒤에 있던 마법사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저는 그거 외에는 바라는 게 없습니다."

"그 아이템은... 오직 진홍의 마탑 마법사에게 지급하는 기념물품."

양탄자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마탑에서 중요한 업적을 이룬 마법사뿐이다.

원칙적으로 외부인은 받을 수 없다.

"자네는 마탑을 구원한 엄청난 업적을 이뤘지. 하지만 마탑의 외부인에겐 기념물품을 지급할 수 없네."

'쯧, 역시 안 되려나?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양탄자를 못 주겠다면 다른 보상이라도 뜯는 수밖에.

강승현이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니, 진홍의 마탑 마스터 로케르의 권한으로...."

로케르가 무슨 주문을 외우자 그의 손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힐러 강승현에게 진홍의 마탑 '명예 회원' 자격을 부여하고 마탑 소속원으로 인정한다!"

74. 마탑의 일원이라

주위에 모인 마법사들이 놀란 얼굴로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며, 명예 회원?"

"저자를 마탑 소속원으로...!"

"확실히 소속원이 된다면 기념물품을 지급해도 문제가...."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걸 본 마스터 로케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즐 대륙의 마탑은 그 마탑을 상징하는 대표 마법을 갖고 있지."

진홍의 마탑을 상징하는 대표 마법은 천과 실에 마법을 담는 '마법직조술'.

아직까지 마법직조술로는 진홍의 마탑을 따라잡을 곳이 없다.

"<정신적 휴식의 결계 마법진> 양탄자는 뛰어난 업적을 이룩한 마탑 소속원에게만 지급하는 기념물품."

사용 시 마력 회복 속도를 증가시키는 매우 진귀한 아이템.

지금도 많은 마법사들이 '정신적 휴식의 결계 마법진'을 손에 넣기 위해 진홍의 마탑을 방문하고 있다.

"마법사들이라면 정말 환장할 수밖에 없는 물건이네요."

"오직 진홍의 마탑에서만 만들 수 있는 귀한 아이템이라구요."

슈이레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속닥거렸다.

<정신적 휴식의 결계 마법진> 양탄자는 워낙 만들기 어려운 아이템이라, 다른 마탑은 시도조차 할 수 없다고.

"양탄자를 받고 싶다면 무조건 우리 마탑에서 업적을 이뤄야 한다는 소리죠."

마찬가지로 다른 마탑에도 마법사를 낚기 위한 각종 레어, 유니크 아이템이 존재한다.

"그런 이유로 소속원이 아닌 사람에겐 줄 수 없는 물건이네."

즉, 양탄자의 존재 이유는 뛰어난 마법사들을 진홍의 마탑으로 끌어모으기 위한 일종의 미끼상품인 셈이다.

"하지만 자네를 소속원으로 받아들이면 상관없겠지."

소속원이 아니라서 받을 수 없다?

그럼 소속원으로 만들어주면 그만이다.

간단한 결론이다.

"...본래 마탑은 마법의 자질을 가진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집단."

로케르의 말을 듣던 강승현이 입을 열었다.

마탑은 마법에 뜻을 가진 자를 보호하고 마법을 연구하는 절대적인 기관이다.

"하지만 전 마법에 뜻을 가진 것도 아니고,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강승현은 마법의 자질은커녕 마력을 1도 갖고 있지 않았다.

마탑의 마스터가 그런 걸 모를 리가 없다.

'기준 이하를 넘어서 마탑 가입 가능성이 0이지.'

본래라면 강승현은 그 어떤 마탑에도 발들일 수 없는 인물이다.

강승현의 마력이 0이라는 건 몰라도, 마력이 낮다는 것까지 모르는 마법사는 없을 테니까.

"자네는 비록 마법의 길을 걷지는 않으나, 그는 진홍의 마탑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다."

마스터 로케르의 손에 생겨난 붉은빛이 강승현을 향해 날아갔다.

"마탑의 파멸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고, 수많은 마법사를 구원한 자. 그 어떤 마법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업적."

강승현은 진홍의 마탑을 위기에서 구하고, 진홍의 마탑에 소속된 수많은 마법사들의 목숨까지 구했다. 마탑 소속원이 아님에도 말이다.

"이러한 자를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또 누가 우리를 돕겠는가?"

비록 마법을 쓸 줄 모른다고 하더라도, 마탑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하거나 큰 도움을 준 사람을 소속원으로 인정하는 제도.

"그게 '명예 회원' 자격이네."

마탑을 위해 목숨을 건 사람을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내치는 건 도리가 아니니까.

로케르는 다른 마법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강승현 힐러,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물론, 우리 모두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제아무리 강한 마법사라도, 마력을 눈 깜짝할 사이에 흡수하는 괴물은 상대할 수 없다.

오직 강승현이기에 놈을 이길 수 있던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힐러 강승현이 진홍의 마탑의 소속원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원래 마탑의 '명예 회원' 자격은 최고위 마법사들의 논의를 받아야 한다.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과반수가 동의할 경우에만 그를 명예 회원으로 인정한다.

"혹시 내 결정에 이의가 있더라도 전부 기각하겠네. 마스터의 권한을 사용하였으니."

하지만 마스터의 권한을 사용하면 논의를 거치지 않고 '명예 회원'으로 인정할 수 있다.

로케르는 강승현을 소속원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권한을 망설임 없이 사용한 것이다.

"이의 없습니다."

"저는 마스터의 발언에 동의합니다."

"저 또한 동의합니다."

"그는 진홍의 마탑의 일원이 될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스터의 권한을 쓸 것도 없었다.

마탑의 모든 고위 마법사들이 강승현의 '명예 회원' 자격을 동의했으니까.

"자네들 전원 찬성이라고?"

"그렇습니다!"

"마스터가 망설임 없이 권한을 쓴 것도 모자라, 고위 마법사들이 전원 찬성하다니...!"

탄셀 교수가 감탄하며 말했다.

진홍의 마탑 역사상, 전원 찬성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긴 논의가 벌어지고, 갈등과 갈등 끝에 겨우 합의하곤 했는데."

"마탑의 모두가 찬성하는 '명예 회원'이 탄생했어!"

"세상에 살다 살다 이런 일도 있네!"

"그만한 업적이잖아. 반대하는 놈이 있다면 목을 달아야 해!"

구경하던 일반 마법사들 역시 고위 마법사들의 결정에 찬성했다. 강승현은 마탑을 구원한 영웅이었으니까.

이런 결정에 반대할 만한 마법사는 죽은 하이베 말곤 없을 것이다.

"강승현 힐러. 자네는 오늘부터 진홍의 마탑의 일원일세."

마스터 로케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탑의 일원이라...."

강승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곳곳이 조금 부서지긴 했으나, 하늘 높이 치솟은 붉은 마탑이 눈에 들어왔다.

"자네는 마탑 소속원이 누리는 모든 혜택을 누릴 수 있으며, 마탑의 지원을 받을 수 있네."

마탑 허가증과는 비교할 수 없다.

손님이 아니라 정식 소속원이 되는 거니까.

"마탑에 정식으로 가입하면 뭐가 좋냐면요...."

뒤에서 기웃거리던 슈이레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실력을 쬐끔만 보여주면 장학금도 펑펑 퍼주고! 강의도 공짜로 들을 수 있고! 보고서만 잘 쓰면 연구에 필요한 연구비도 팍팍 지원받을 수 있거든요. 거기다 아즐 대륙 최고의 마법직조술로 만든 진홍의 마탑 로브는 다른 마탑의 로브와는 비교가 안 되는...."

"슈이레 페르나! 중요한 대화에 끼어들지 말거라!"

"아야야야야!"

탄셀 교수가 쫑알거리는 슈이레를 끌고 갔다.

아무튼 강승현이 '명예 회원'이 된 이상, 외부인이 아닌 내부인으로 마탑을 이용할 수 있게 됐다.

"자네는 모험가 힐러. 소속원이 되었다곤 해도 마탑에 오래 머물진 못하겠지."

모든 소속원이 마탑에 머무는 건 아니다. 연구나 재료... 그외 여러 목적을 가지고 아즐 대륙 곳곳에 흩어져 마법의 길을 걷고 있다.

강승현 역시 모험가 힐러로 살기 위해선 마탑을 떠날 수밖에 없다.

"혹시 외부에서 부당한 일을 겪는다고 해도 걱정하지 말게. 진홍의 마탑이 물심양면으로 자네를 지원할 테니."

마탑은 그런 식으로 외부로 나간 마법사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방패 역할을 한다.

마탑을 떠났다 하더라도 그들이 마탑의 일원이라는 건 변함없으니까.

"소속원이 위험에 처했다면 다른 걸 다 치워두고 소속원의 안전을 우선으로 여기는 게 마탑이 해야 할 일이네."

진홍의 마탑은 강승현이 도움을 요청한다면 언제든지 그를 도울 것이다.

"방금 전달한 붉은빛은 진홍의 마탑을 상징하는 엠블럼."

"엠블럼?"

마탑 엠블럼은 힐러 배지와 마찬가지로 실체는 없으나 스킬 형식으로 생성하는 소환물.

마탑 로브와 함께 마탑 마법사를 상징한다.

"마탑 엠블럼을 제시한다면 각 마을의 마법협회 시설을 이용할 수 있고, 마법도구를 싸게 구입하는 등 각종 혜택을 누릴 수 있지."

마법협회.

하인드 마을 같은 깡촌 시골에는 없지만, 조금 큰 마을이나 도시로 가면 볼 수 있는 마법사 전용 시설이다.

'마법사들은 거기서 각종 정보를 얻거나 물품을 구입한다고 하지.'

일반 모험가들은 들어갈 수 없는 마법사 전용 모험가 조합이라 할 수 있다.

강승현은 과거, 마법협회에 들어가려다 입구컷 당한 기억을 떠올렸다.

'...한번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잘됐네.'

이제 마법협회는 강승현의 마력 수치가 밑바닥이라 해도 배척할 수 없다.

진홍의 마탑 엠블럼을 쥐고 있으니까.

"감사합니다. 마스터 로케르 님."

강승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탑 엠블럼을 손에 넣었으니 이제 지금보다 더 재밌는 일을 꾸밀 수 있을 것 같다.

"혹시 모험하다 재능 있는 친구를 발견하면 진홍의 마탑으로 추천서를 보내겠습니다."

"자네 같이 뛰어난 모험가의 안목이라면 우리야 환영이지."

마스터 로케르 역시 웃는 얼굴로 말했다.

소속원들이 아즐 대륙으로 곳곳에서 활약한다면 마탑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늘어나게 된다.

즉, 외부의 마법사들을 신경 쓰는 건 결과적으로 마탑을 위하는 일이다.

"혹시 모험하다 이 근처를 지난다면 언제든 찾아오게나. '명예 회원'은 전용 숙소를 사용할 수 있으니."

"전용 숙소?"

"그렇네. 명예 회원에게 지급되는 숙소는 아주 크고 넓지."

마탑의 마법사들은 실력을 인정받을수록 훨씬 크고 좋은 방을 쓸 수 있다.

강승현은 엄청난 업적을 이룬 만큼, 훌륭한 방을 지급해줄 거라고.

"자네의 집이나 다름없는 장소이니 편하게 쉬다 가게나. 마음대로 꾸며도 좋고."

그곳을 연구실로 사용하거나, 창고로 사용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거주지로 쓰거나.

어떻게 쓰는지는 소유자 마음이다.

'집이라....'

아즐 대륙에 온 지 어느덧 3년이나 흘렀다. 강승현은 지금껏 모험가 조합의 모험가 소속으로 있긴 했으나 딱히 소속감을 느끼진 못했다.

'차원이동자들이 다 그렇지만 늘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는데.'

아즐대륙민들이 보는 차원이동자는 과거도 불분명하고 지금까지의 행적도 알 수 없다.

아무 기반 없는 사람들은 신분제 사회에서 배척받는 법이다.

'차원이동자라는 걸 밝히면 능력을 탐내는 찌꺼기들이 달라붙고, 숨기면 수상하다고 꺼려하고.'

정말 압도적인 힘으로 누르지 않고서야.

정말 엄청난 활약을 하지 않고서야.

차원이동자들은 아즐 대륙의 이방인으로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런 상황에서 나를 인정하고, 지지하고, 받아줄 집단을 찾게 된다니.'

강승현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즐 대륙에 온 지 3년 만에, 영향력 있는 집단에게 인정받은 것이다.

'힐 쓸 줄 모르는 야매 힐러도 모자라서, 이제 마법 쓸 줄 모르는 야매 마법사인가.'

문제는 이게 모험가 조합도 아니고,

힐러 집단인 '치유재단'도 아니고,

사제들의 본거지인 '교단'도 아니고...

마법사들의 모임인 마탑의 인정을 받았다는 점이다.

'뭐, 지금도 야매 힐러에 야매 약제사, 야매 레인저 노릇까지 하고 있는데... 여기에 야매 마법사 타이틀 좀 단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웃겨서 계속 웃음이 나오긴 했지만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치료에 도움만 된다면 뭐든 상관없지.'

75. 태연한 구원자

"강 선생! 축하해!"

"강승현 힐러님이 진홍의 마탑에!"

김호정과 아까 끌려간 슈이레가 달려와 자기 일처럼 기뻐하기 시작했다.

"이야, 대박 났네 대박 났어! 마법사도 아닌데 마탑 소속이라니!"

"그것도 고위 마법진 전원 찬성으로!"

"그렇게 됐네요."

오늘 하루 종일 고생한 보람이 있다.

슈이레가 자신의 엠블럼을 보여주며 말했다.

"마탑 엠블럼은 모험가 조합에서도 유용하게 쓸 수 있어요. 접수원한테 제시하면 마법사 전용 고급 의뢰도 보여줄걸요?"

"거 좋네요. 힐러 의뢰도 보여주면 참 좋을 텐데."

하지만 마탑 엠블럼을 제시해봤자 모험가 조합 놈들이 힐러 의뢰를 보여줄 일은 없다.

마탑 엠블럼은 마법사 증표지, 힐러 증표가 아니니까.

"하지만 귀한 녀석이라 이래저래 써먹을 곳은 많을 것 같고... 이왕 얻은 김에 잘 써먹겠습니다."

강승현은 상태창을 열었다. 엠블럼이 스킬로 소환하는 소환물이라면, 상태창에 등록되어 있을 것이다.

[크림슨 엠블럼]

[진홍의 마탑 소속임을 증명한다.]

'있다.'

강승현은 [크림슨 엠블럼] 스킬을 확인했다.

스킬 자체는 정말 아무 능력 없는 관상용이지만,

'일단 이걸 제시하는 순간, 사람들이 날 마법사로 인정하겠지.'

이걸 손에 넣은 이상, 강승현은 어딜 가나 마법사 취급받을 수 있게 됐다.

혹시 상태창에 문구를 추가할 수 있다면.

[사용 시 마력이 0이거나 마법을 쓸 줄 몰라도 마법사로 인정받는다.]

[이 엠블럼의 효과는 절대적이다.]

라고 적어두고 싶을 정도로 유용한 스킬.

"대신 교단... 특히 '아이베르 교단' 광신자 놈들하고 접촉할 때는 마탑 소속인 걸 숨기는 걸 추천해요. 그놈들 진짜 까탈스러워서."

슈이레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사히타 사제 같은 방랑사제들과 달리, 교단에 소속되어 움직이는 사제들은 좀 더 꼰대 같은 경향이 있다.

'교단 사제들은 마탑과 사고방식이 정반대라고 했지.'

신을 향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과 마력을 이용한 성장과 연구로 살아가는 자들.

사이가 좋으려야 좋을 수가 없다.

"마탑하고 교단 사이가 나쁜 건 전에도 말했죠? 교단에 갈 거라면 무소속 일반 마법사인 척하는 게 좋아요."

교단 사제들은 일반 마법사들도 썩 좋아하지 않지만, 마탑 마법사들은 특히나 혐오한다.

물론 보는 눈이 있으니 대놓고 공격하진 않겠지만, 적대감을 숨기지 않을 거라고.

"모험가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아무 생각 없이 마탑 로브 입고 교단에 들어갔다가... 아오, 독한 놈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충고였다.

"뭐, 지금도 교단 놈들하곤 사이가 나쁘니."

안 그래도 힐 쓸 줄 모르는 힐러가 사람을 치료하는 것도 아니꼬운데, 심지어 마탑 엠블럼까지 꺼낸다?

'어그로를 두 배로 끌 수 있겠는데?'

강승현이 실실 웃으며 생각하던 참이었다.

"헉, 헉... 강승현 힐러님!"

"비타마니 교수?"

그때, 어떤 마법사 하나가 다가왔다.

마법 양탄자 짜기의 달인 비타마니. 그는 진홍의 마탑에서 마법직조술을 가르치는 교수다.

"여기 계셨군요! 지금 마법직조실에서 '정신적 휴식의 결계 마법진' 양탄자를 꺼내고 있습니다!"

'정신적 휴식의 결계 마법진' 양탄자는 제작하기 어려운 희귀한 아이템이다.

그 때문에 이중 삼중의 봉인을 걸어서 엄중하게 보관하고 있었다고.

"그럼 제가 본 그 양탄자는요?"

"하하하, 그건 샘플이에요."

마법직조실 입구에 걸려 있던 양탄자는 마력은 담겨 있지만 아무 효과 없는 가짜다.

가끔 양탄자를 노리고 찾아오는 도둑들이 있어서 일부러 걸어놨다고.

"진짜는 마법직조실 안쪽 깊은 곳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지금 막 봉인을 풀었다는 연락을 받았으니 가시죠."

중요한 순간이라 비타마니 교수가 강승현을 직접 안내하러 왔다고 한다.

"알겠습니다. 가죠, 김호정 씨."

"오, 그럴까?"

"계속 이런 칙칙한 지하에 있기도 그렇잖아요."

"저도 갈래요!"

강승현은 일행들을 데리고 마력 중심부를 빠져나왔다.

-계단을 한참 동안 밟고 올라가자 깜깜해진 밤하늘이 강승현을 반겼다.

"흠."

그 많은 일이 있었는데,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는 게 체감됐다.

"아까 들어갈 땐 저녁이었던 거 같은데."

"시간이 많이 지나긴 했죠."

마탑 입구로 나오자 분주하게 움직이는 마법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쪽 구석에선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다른 쪽에선 마법사들이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다들 마탑을 복구하기 위해 마력을 모으고 있어요. 마력 중심부가 파괴되었으니 모두의 마력을 모아야죠."

바빠 보이는 마법사들을 지나쳐 갈 때였다.

앞쪽에서 어린애 한 명이 달려왔다.

"모험가님! 무사하셨군요!"

까만 머리의 꼬마 마법사.

하급 마법사 리제이였다.

"저는 모험가님이 해내실 줄 알았습니다!"

"리제이, 기다리렴! 같이 가야지!"

그 뒤로 이헤르 교수가 어린애 둘을 안고 달려오고 있었다.

시간이 너무 늦어서 루시와 타리스는 잠든 모양이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기쁘네요. 다른 애들은 잠들었는데, 리제이는 모험가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해서...."

달려온 이헤르 교수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리제이는 조금 피곤해 보이지만 아직은 괜찮다며 미소지었다.

"좀 더 빨리 올 걸 그랬네요."

강승현은 리제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리제이한테서 받은 스크롤 덕분에 살았어요. 덕분에 괴물을 편하게 잡았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에요."

리제이는 안심한 얼굴로 웃었다.

그는 무척 기다렸을 것이다. 강승현이 무사히 돌아와,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이 순간을.

"모험가님 덕분에 마탑이 구원받았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리제이는 여전히 어린아이답지 않은 정중한 말투로 감사 인사했다.

"그걸로 끝이 아니라, 이번 일로 진홍의 마탑 명예 회원이 되셨어."

"마탑 명예 회원이요?"

뒤에 있던 슈이레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그래. 어마어마한 업적을 마스터 로케르 님이 인정하신 거지."

"그리고 이번 업적을 인정하여 강승현 힐러님이 '정신적 휴식의 결계 마법진' 양탄자를 받게 되었습니다."

비타마니 교수 역시 슈이레의 말을 거들었다.

"세상에 축하드려요! 요 몇 년간 양탄자를 받는 사람이 없었는데!"

"지금 받으러 갈 건데, 시간 괜찮으면 두 분도 구경 오세요."

리제이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제, 제가 가도 될까요?"

"당연하죠."

리제이가 선물한 마법 오염 스크롤 덕분에 동력 시스템을 깔끔하게 쓰러트릴 수 있었다.

그러니 리제이는 따라올 자격이 있다.

"저도 가고 싶지만... 이 아이들 때문에 안 될 것 같네요. 리제이,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이헤르 교수는 아이들을 재우느라 돌아가고 리제이만 강승현을 따라 마법직조실로 향했다.

-"이쪽입니다."

마법직조실 안쪽, 길게 늘어진 커튼을 치우자 안쪽에 숨겨져 있던 방이 나타났다.

비타마니 교수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진 장소가 나타났다.

"이게 '정신적 휴식의 결계 마법진' 양탄자 실물이구나.... 나두 갖고 싶다...."

슈이레가 빛나는 눈으로 감탄했다.

귀한 아이템인 만큼, 실물을 직접 볼 일은 거의 없다고.

"굉장해요. 겉보기에는 실과 실이 엮여서 표면에 마법진을 그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겉과 속에 이중 삼중으로 마법진을 겹쳐서 엮었기 때문에 보다 안정적이고 강력한 형태로 마법진을 담아둘 수 있네요."

"어? 응?"

"그래서 마법 양탄자는 마법 스크롤과 달리 외부의 충격에도 마법의 형태가 쉽게 망가지지 않는...."

리제이는 여전히 어린아이답지 않은 감상문을 늘어놓았다.

"어... 무슨 말인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만들기 어렵다는 뜻이겠지?"

"그러겠죠."

"거참 멋있네. 이건 뭐 거의 예술품 아니신감?"

김호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돈으로는 살 수 없고, 오직 마탑을 위한 명예로 얻을 수 있는 아이템.

"강승현 힐러님, 당신은 누구도 해낼 수 없는 업적을 이루며 마탑을 구원하였습니다."

비타마니 교수가 마법진을 해제했다.

마법진 중앙의 빛이 사라지고, 허공에 떠 있던 양탄자가 천천히 내려왔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긴 역사를 자랑하는 진홍의 마탑이 아즐 대륙에서 사라졌겠죠."

내려온 양탄자가 둘둘 말렸다.

비타마니 교수는 강승현을 향해 둘둘 말린 양탄자를 내밀었다.

"그 업적을 인정하여 '정신적 휴식의 결계 마법진' 양탄자를 선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강승현은 <정신적 휴식의 결계 마법진> 양탄자를 손에 넣었다.

품에 담긴 양탄자에서 강력한 마법이 느껴졌다.

'이름이 쓸데없이 거창하고 기네. 휴식 결계 양탄자라고 부르자.'

"지금, 이 순간부터 <정신적 휴식의 결계 마법진> 양탄자의 주인은 강승현 힐러님입니다."

이 직후, 강승현의 머릿속으로 양탄자 사용법이 흘러들어 왔다.

"사용하기 그리 어려운 아이템은 아니지만, 보다 편리하게 쓸 수 있도록 사용법도 함께 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건 진홍의 마탑 명예 회원이 된 걸 기념하여 지급하는 로브입니다."

비타마니 교수가 진홍의 마탑 로브를 내밀었다. 마탑 로브에 엠블럼까지 갖췄으니 어엿한 마법사가 된 셈이다.

'마법은 쓸 줄 모른다만.'

강승현은 로브를 이리저리 살폈다. 이름에 걸맞게 붉은 계열의 천으로 만들어진 옷이었다.

슈이레는 입고 있던 로브를 펄럭이며 말했다.

"진홍의 마탑 로브는 냉기 저항 옵션도 붙어있어서 추운 곳에서도 걱정 없어요."

아즐 대륙 최강의 마법직조술로 만들어진 옷이다 보니 다른 마탑 로브에 비해 인기가 많았다.

"이 로브 한 벌만 있으면 아즐 북부 지방이라 해도 걱정 없죠."

"그럼 갖고 다니다 추워지면 겨울옷으로 입을게요."

강승현은 인벤토리에 로브와 양탄자를 넣었다.

"엥? 지금 안 입으시게요? 이거 마법 방어력도 올려주고 마법 캐스팅 속도도 올려주는 데다...."

"저한텐 딱히 필요 없어서요."

야매 힐러한테 마법 캐스팅 속도 증가 옵션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마법 방어력이라면 키르카라슈텔의 보주로 충분하다.

"그리고 그런 걸 입으면 힐러 같지 않잖아요."

강승현은 자신이 입은 하얀 가운을 펄럭였다.

평범한 옷이라 아무 성능도 없지만.

'의사... 힐러는 역시 하얀 옷이지.'

하얗고 단정한 옷을 입는 것만으로 사람들한테 호감을 살 수 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그럼 김호정 탱커는? 진홍의 마탑 로브! 다시없을 기회인데!"

슈이레는 이번엔 김호정에게 물어봤으나,

"나? 나는 됐어."

김호정도 자신의 검은 로브를 펄럭거렸다.

"로브라면 이미 있고, 나는 요 녀석 아니면 다른 옷은 좀 그렇거든."

결국, 외부인 중 진홍의 로브를 입은 사람은 없었다.

슈이레는 분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마법직조술 최강 진홍의 마탑 로브가... 거부당했어...."

'그야 김호정 씨의 "그림자 로브"는 이런 양산형 로브랑 비교할 물건이 아니거든.'

하지만 이걸 알려주면 슈이레가 슬퍼할 테니, 그녀의 정신건강을 위해 숨기기로 했다.

슈이레는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보통 마탑하고 엮이면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모험가들은 물론이고 돈 많고 잘난 귀족들도 마탑과 인연을 맺을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강승현은 마탑 소속원이 됐어도 덤덤한 태도를 유지했다. 마치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힐러님은 어쩜 그렇게 태연할 수 있죠?"

"저한테는 별 가치 없는 것들이니까요."

모두가 부러워하고 탐내는 마탑 마법사 자리를 별 가치 없는 일이라고 평가하는 태도.

평생 마탑에서 살았던 슈이레에겐 무척 인상 깊게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그럼 양탄자도 손에 넣었겠다, 저희는 이만 숙소로...."

이야기를 끝마친 강승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다들 여기 있었군. 안에 비타마니 교수 있나? 급한 일이 있어서 왔네."

그때, 탄셀 교수가 서류를 잔뜩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무척 지친 얼굴로 말이다.

76. 이게 정답이네

"양탄자는 이미 받았나 보군.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비타마니 교수는 무슨 일로?"

"이래저래 할 일이 많아서 말이지."

탄셀 교수가 한숨을 푹 쉬며 중얼거렸다.

강승현의 활약으로 마력 중심부 사태는 해결 됐지만, 그 뒷수습은 고위 마법사들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부상자 치료나 실종자 수색은 물론이고 부서진 마탑 건물 복구, 마법진 및 마력 연결 회로 재설치 등등."

이 중 가장 급한 건 완전히 박살난 마력 중심부를 재건하는 일이다.

마탑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대량의 마력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선 마력을 축적할 마력 중심부가 필수였으니까.

"동력 시스템이 작동을 중지했으니 조만간 카마르 보호 결계가 소멸하겠지."

결계가 사라지면 주위 몬스터들이 카마르를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진홍의 마탑은 그걸 무엇보다 걱정하고 있었다.

"당장은 임시 결계로 버틴다고 쳐도, 가능한 한 빨리 복구해야 하는데...."

"뭔가 문제가 있나 보죠?"

"그게... 애들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하이베 부마스터가 시체로 발견됐네."

하이베는 이번 대참사의 원흉이긴 했으나, 동시에 마력 중심부를 담당하던 관리자였다.

"몹쓸 인간이긴 하지만, 마력 중심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아는 인간이었는데...."

마탑은 이번 사태의 책임을 물을 겸 하이베를 생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법사들이 그를 발견했을 땐 이미 죽은 뒤였다.

"그거 안타깝네요. 구해주러 온 사람이 '한 명'도 없으셨나?"

"대부분 폭발에 휘말려 죽었더군."

하이베의 방 주변에는 하이베의 부하들이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시체로 발견됐다.

물론 그 녀석들도 마력 중심부를 방치해서 대참사를 일으킨 원흉들이다.

"마력 중심부 관리자는 물론이고 관계자들도 대다수가 사망했으니 일이 골치 아프게 됐지."

이번 사태를 책임져야 할 인간들이 싹 다 죽어버린 상황. 덕분에 마탑 높으신 분들이 모여서 긴급회의를 진행하게 됐다고.

"어... 부활시키는 건 안 돼? 사령술이라든가...."

이야기를 듣던 김호정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죽어버린 하이베나 관계자들을 좀비로 살려서 물어보는 게 어떻겠냐고.

"사령술로 되살린 망자가 이성을 유지할 확률은 그리 높지 않네. 뭣보다 우리는 흑마술사가 아니라 마법사 집단이고."

"음... 그건 그렇지."

김호정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때문에 사령술이 부분 합법이긴 해도 일상적으로는 쓰이지 않는다. 기껏 죽은 사람이 살아나도 이성이 없으면 몬스터와 다를 게 없으니까.

"그렇게 됐으니, 비타마니 교수. 자네도 어서 따라오게. 다들 회의하느라 정신없어."

"마력 중심부 재건을 위한 회의라니, 빠질 수가 없겠군요."

비타마니 교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 중심부 재건 회의...."

"저희도 따라가면 안 돼요?"

"절대 안 돼. 애들은 가서 자거라."

슈이레와 리제이는 무척 따라가고 싶어 했으나, 단호하게 거부당했다.

"데려가면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은데요."

그때 잠자코 있던 강승현이 입을 열었다.

슈이레와 리제이. 두 사람 모두 이번 사건 해결에 큰 도움을 준 관계자다.

'뛰어난 마법 지식으로 약초재배실 사태를 함께 해결한 슈이레.'

'관찰력과 이해력으로 동력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걸 간파한 리제이.'

비록 나이는 어리고 경험은 부족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취급받을 사람들은 아니다.

"사실 마력 중심부의 문제점과 해결책을...제 나름대로 생각해둔 게 있어요."

"할 말은 많죠! 나한테 물어보질 않아서 그렇지."

발언할 기회가 없었을 뿐, 두 사람 모두 해결책을 생각하고 있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한번 들어는 보시죠."

"으음... 하지만 다른 교수들이 아이들의 의견을 들어줄지 모르겠군. 다들 각 분야의 권위자들이라...."

"한마디로 꼰대들이라는 소리군요. 그럼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알겠네. 자네가 따라와준다면 괜찮겠지."

탄셀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의 동행을 허가했다.

-강승현 일행은 마탑 회의실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마탑 최고위 마법사들이 모여 있었다.

"탄셀 교수! 이런 중요한 자리에 저런 어린애들을!"

아니나 다를까.

마탑 꼰대들은 뒤따라 들어온 슈이레와 리제이를 보고 벌컥 화를 냈다.

"생각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어서 내보내게!"

"두 사람은 제가 데려왔습니다. 불만 있으면 저한테 말씀하시죠."

강승현은 바로 앞으로 나가 입을 열었다. 펄펄 날뛰던 마법사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저 친구는 폭주하던 마력 중심부를 진압한 모험가 강승현!'

'어마어마한 실력자라고 하던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번 사태를 해결한 영웅이 직접 데려왔다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자네가 그렇다면야...."

"뭐, 하는 수 없지. 흠흠."

잠시 눈치를 보던 마법사들은 다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이어갔다.

"또 이런 일이 반복되면 그에 대한 해결책은?"

"철저하게 조사를...."

"우선 마법진을 그리는 게 우선 아닙니까?"

"문제점을 보완해야 마법진을 그릴 수 있지 않겠나!"

고위 마법사들의 이견은 좁혀지질 않았다. 서로 자기 생각만 늘어놓을 뿐이었다.

'이럴 거 같았지.'

강승현은 토론을 구경하며 생각했다.

'마력 중심부 관계자가 있었다면 좀 나았겠지만, 죄다 죽었으니 별수 있나.'

결국, 이들은 마력 중심부와 관계없는 높으신 분들. 기술을 실현할 능력은 있지만 문제점을 파악하는 능력은 떨어진다.

흔히 말하는 탁상공론만 늘어놓을 뿐이었다.

'이 사람들한테만 맡기면... 한 달 넘게 걸리겠구만.'

마탑의 복구가 늦어질수록, 외부의 침입과 습격을 받을 확률이 늘어난다.

'침입과 습격이 벌어지면 명성이 깎이겠지. 그러면 진홍의 마탑을 찾는 마법사도 줄어들 거고.'

그렇게 되면 기껏 손에 넣은 진홍의 마탑 엠블럼 가치가 떨어진다.

'그렇게 둘 순 없지.'

강승현은 이 엠블럼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농락할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선 진홍의 마탑은 명성 높은 마탑으로 남아야 한다.

"제가 생각하는 마력 중심부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강승현이 입을 열자 와글와글 떠들던 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법사들은 입을 다물고 강승현을 바라보았다.

"마력이 한곳에 과도하게 몰린다는 점입니다."

동력 시스템이 맛이 간 결정적인 이유는 크리스털에 모이는 대량의 마력 때문이었다.

"이 힘을 분산하지 않으면 마력 중심부를 재건해도 오늘 같은 일이 반복되겠죠."

그리고 강승현은 리제이를 바라보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강승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리제이가 입을 열었다.

"진홍의 마탑이 막 세워졌을 당시에는 크리스털 하나로 마탑 전체를 관리할 수 있었습니다."

리제이는 어린이용 작은 칠판을 가져와 그림을 그려 설명하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슈이레는 그림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지금은 중앙 탑뿐만 아니라 4개의 탑이 추가로 건설된 상태죠."

즉, 현재 진홍의 마탑은 동력 시스템 하나로 무려 5개의 탑 전체를 관리하는 중이었다.

동력 시스템이 망가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앞으로 마탑 전체에 마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선... 마나 크리스털의 개수를 늘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리제이가 분필로 찌글찌글한 원을 그렸다. 모은 마력을 크리스털 한 개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여러 크리스털에 나누어 보관하자는 소리였다.

"이런 식으로 마나 크리스털 3개를 이용해서 마법진을 발동시키면...."

슈이레가 찌글찌글한 원 위에 삼각형을 그렸다.

"트리니티 마법진인가!"

마법사 하나가 감탄하며 말했다. 일반 마법진보다 훨씬 안정적이면서 몇 배의 성능을 볼 수 있는 형태의 마법진.

"그래! 저거라면... 문제없겠는데."

"마력 동력 시스템의 과부화를 방지할 수 있겠어!"

"이럴 때가 아냐! 빨리 마법진을 구상하자고!"

마탑 마법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시작했다. 의견을 통일하지 못하고 싸우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 정도면 걱정 없겠군.'

강승현은 슈이레와 리제이를 바라보았다.

"성공!"

"우리가 해냈어요!"

두 사람은 자신의 의견이 채택된 걸 기뻐하며 하이파이브했다.

저렇게 든든한 인재들이 있으니 진홍의 마탑은 앞으로도 문제없을 것 같다.

-긴 회의가 대충 마무리되었다. 본격적인 마법진 설계는 내일부터 진행할 예정이다.

강승현 일행은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으으! 피곤해라.... 리제이는요?"

"잠들었네요."

강승현은 등에 업힌 리제이를 가리켰다.

리제이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저도... 내일부터 마력 중심부 설계 작업에 이름을 올리게 됐어요! 이러다 교수 되는 거 아닌가 몰라!"

슈이레는 다른 고위 마법사들과 마찬가지로 마력 중심부 재건 작업에 참여하게 됐다. 리제이는 아직 어리니 보조 역할로.

"전부 강승현 힐러님 덕분이에요. 힐러님 아니었으면 그 꼰대들이 우리 말 들어주지도 않았겠죠."

슈이레는 싱글벙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일부터 엄청 바빠질 테니... 한동안 마탑에서 꼼짝 못하려나."

"그러겠죠. 마탑 보수작업을 하려면."

지금 진홍의 마탑은 외부의 마법사들을 다시 불러와야 할 정도로 시급한 상황이다.

적어도 한 달 정도는 마탑 밖으로 나갈 수 없을 것이다.

"힐러님은 내일 진홍의 마탑을 떠나실 거죠?"

"그래야죠."

마탑 소속이긴 하나, 강승현은 마법사가 아니다.

더 이상 진홍의 마탑에 남을 이유가 없다.

"그럼 이렇게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겠네...."

슈이레는 무척 아쉽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강승현 힐러님하고 만난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그 지난 며칠 동안이 제 인생에서 가장 재밌던 거 알아요?"

목숨 걸고 치열하게 싸우고, 괴물도 쓰러트리고. 기적 같은 광경을 몇 번이나 목격하고.

강승현과 함께하는 동안은 재미가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었다.

"아마 다신 못할 경험이겠죠. 실컷 즐겼으니 이제 미련 없어요."

슈이레는 모험가에 대한 미련을 확실하게 접었다. 최고의 마법사가 되어 훌륭한 업적을 이루고 자신도 <휴식 결계 양탄자>를 받을 생각이라고.

"그래서 저는 한동안 마탑을 못 떠날 것 같으니... 모험하다가 다른 파티원들 만나면 안부 전해주세요!"

슈이레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강승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와 악수했다.

"다음에 또 볼 수 있겠죠."

-슈이레와 헤어진 강승현은 리제이를 이헤르 교수에게 데려다줬다.

"흐아암.... 강 선생, 일은 잘 해결됐어?"

"대충은요."

마법직조실로 돌아가자 김호정이 하품을 하며 졸고 있었다.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마시며 말했다.

"여기서 자긴 그렇고, 제 숙소로 가죠."

"아, 그렇지.... 선생 방 생겼지?"

강승현은 김호정과 함께 '명예회원' 전용 숙소를 찾았다. 모든 할 일을 끝냈으니, 이제 휴식을 취할 시간이다.

"열쇠는 받았어?"

"방 열쇠는 마탑 엠블럼이래요."

"오."

입구에서 스킬을 사용하자,

[크림슨 엠블럼]

강승현의 손에 붉은빛이 솟아나며 엠블럼 형태로 변해갔다.

철컥!

그걸 갖다 대자 잠금장치가 해제되면서 문이 열렸다.

"이야, 방 넓고 좋네."

"가구가 하나도 없어서 훨씬 더 넓어 보이긴 하네요."

전용 숙소는 손님용 방과는 비교가 안 되게 넓었다. 침대나 책상 같은 기본 가구는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텅 비어있었다.

"달리 할 일도 없고... 나는 누워서 잘까."

"...."

"응? 왜 그래, 강 선생?"

"나올 법한데."

강승현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뭐가? 귀신이?"

"...업적 달성이요."

차원이동자가 무슨 행동을 할 때마다 [업적 달성!]을 알리며 나타나는 시스템. 종류가 꽤 다양한 편이라, 마탑 관련 업적도 분명 있을 것이다.

'마탑 엠블럼을 획득하는 걸로 해금되는 조건이 있을 텐데.'

강승현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기껏 엠블럼을 소환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마탑 가입 기념 업적... 있을 법하지 않나? 있어야 할 텐데?"

강승현은 허공을 바라보았다.

없으면 빨리 쳐 만들라는 눈빛으로.

"으음.... 업적이 없는 게 아니라, 조건이 부족한 거 아닐까?"

김호정이 곰곰이 생각하면서 말했다.

"조건이요?"

"예를 들면 엠블럼을 마탑 1층에서 써야 한다든가?"

"음...."

강승현은 턱을 만지며 생각했다. 필요조건을 완벽하게 달성하지 않으면 업적은 해금되지 않는다.

'프리아의 석궁 때도 그랬지.'

그때도 석궁을 인벤토리에 넣고 나서야 업적을 깰 수 있었다. 이번에도 뭔가 빠진 조건이 있는 것 같다.

'내가 마탑 가입 업적을 달성하려는 거니까....'

강승현은 마탑 신입생의 모습을 떠올렸다. 마탑에 막 가입한 마법사는 마탑 엠블럼과 함께 마탑 로브를 입고 있다.

'부족한 건... 진홍의 로브!'

로브를 입은 상태로 엠블럼을 소환한다면 업적을 깰 수 있을지도 모른다.

펄럭!

강승현은 붉은 로브를 몸에 걸치고 다시 한번 엠블럼을 소환했다.

'[크림슨 엠블럼].'

손에서 붉은빛이 솟아나며 진홍의 마탑 엠블럼이 생성됐다.

[업적 달성!]

동시에 업적 달성 메시지가 나타났다.

"이게 정답이네."

77. 멤버십 리스트

강승현의 눈앞에 업적 달성을 알리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업적 달성!]

[업적 달성!]

'...메시지가 두 개.'

보통 한 업적에 나타나는 [업적 달성!] 알림은 한 개다. 하지만 이번에 나타난 알림 메시지는 두 개였다.

'두 개의 업적이 동시에 깨진 건가?'

강승현은 일단 첫 번째 업적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업적 달성 : 붉은 탑의 마법사]

[진홍의 마탑에 가입할 경우 달성.]

"성공했어? 뭐가 나온 거야?"

"[붉은 탑의 마법사]라는 업적이네요."

진홍의 마탑 소속원이 될 경우 해금되는 업적. 보통은 마법사가 아니고서야 깰 수 없는 업적이다.

"마법 쓸 줄 모르는 야매 마법사가 마탑 업적을 깨려니 좀 웃기긴 한데...."

"그러니까 대단한 거지!"

마법사도 아니면서 '붉은 탑의 마법사' 업적을 달성한 차원이동자. 아마 강승현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보상 수령]

"보상부터 확인해보죠."

강승현은 보상 버튼을 눌렀다.

타르르르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룰렛 돌아가는 악랄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

"또 룰렛이야?"

"관리자 면상 룰렛처럼 돌려버리고 싶네."

강승현은 구겨진 얼굴로 나타난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젬 애뮬릿 중 하나를 습득할 수 있습니다.]

"보상은 젬 애뮬릿.... 생각보단 괜찮네요."

젬 애뮬릿은 특별한 힘이 담긴 보석 형태의 아이템을 통틀어 부르는 말이다.

"젬 애뮬릿이면 이거?"

"네, 그거요."

김호정이 피를 갈구하는 혈석을 꺼냈다. 이 역시 젬 애뮬릿이다.

"오, 그럼 쓸 만하겠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일단 보석이라 귀족 놈들이 환장하죠."

젬 장신구는 훌륭한 능력치를 가진 아이템이지만 사치품으로서도 가치 있다. 덕분에 비싼 값에 거래된다고.

"혹시 필요 없는 게 나와도 팔아서 돈으로 바꾸면 그만이고."

"이건 손해 볼 거 없는 장사네."

[※장비(진홍의 신중한 루비) 획득]

[진홍의 신중한 루비]

[사용시 '집중력' 버프를 받는다.]

보상으로 얻게 된 젬 애뮬릿은 붉은 보석. 한 손에 들어오는 사이즈의 루비였다.

"언뜻 보기엔 그냥 비싼 보석 같지만...."

"만져보면 다르지."

"짝퉁 구분하긴 쉽겠네요."

직접 만져보면 묘한 감각이 들어서 평범한 보석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사이즈는 내 거랑 비슷하네. 이거 성능은 어때?"

"나쁘지 않아요. 집중력을 걸어줘서."

집중력은 '명중률' '회피율' '손재주' 세 가지 스탯 중 하나를 랜덤으로 증가시키는 버프다. 세 가지 스탯 모두 야매 힐러가 유용하게 쓸 수 있다.

'일단 한번 써볼까.'

강승현은 진홍의 신중한 루비를 움켜쥐었다. 손에 쥔 루비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정신 집중!]

[일정 시간 동안 '집중력'의 효과를 받습니다.]

[명중률 상승!]

'명중률 상승이라면....'

휙!

강승현은 허공에 동전 3개를 던진 다음.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석궁을 소환해 방아쇠를 당겼다.

팍! 파박!

날아간 3개의 화살이 동전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이거 괜찮네요. 쓸모가 많겠어."

강승현은 석궁을 메인 무기로 쓰긴 해도 레인저가 아니라 야매 힐러다. 그 탓에 화살 명중률이 살짝 딸리는 편이었지만, 집중력 버프로 그걸 메꿀 수 있게 됐다.

"야매 힐러 겸 야매 레인저 겸 야매 약제사를 겸하는 저한테 딱 맞는 버프."

"강 선생은 뭘 줘도 잘 써먹을걸."

"좋은 걸 주면 더 잘 써먹죠."

강승현은 인벤토리에 루비를 넣고, 두 번째 업적을 확인했다.

[업적 달성 : 멤버십 리스트]

[특정 집단에 가입할 경우 달성.]

★[시스템(멤버십 리스트)]

두 번째 업적을 달성하자 상태창에 새로운 시스템이 추가됐다.

[※이제부터 '멤버십 리스트' 시스템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특정 단체에 가입해서 조건을 달성하면 멤버십 스킬을 받을 수 있다.]

[멤버십 스킬은 가입한 단체와 연관 있는 능력치를 올려준다.]

"두 번째 업적은... 멤버십 리스트인가."

"그건 또 어떤 업적이야?"

"새로운 시스템을 추가해주는 업적이네요. 마탑이나 기사단 같은 곳에 가입하면 효과를 받을 수 있대요."

"오."

[현재 소속된 단체]

-[진홍의 마탑]

[등록 조건]

-[진홍의 마탑에 가입한다.][달성]

-[마탑 소속원한테 인정받는다.][달성]

-[마탑 교수한테 인정받는다.][달성]

-[마탑 마스터와 대화한다.][달성]

멤버십 리스트.

차원이동자가 마탑이나 기사단 같은 곳에 가입하면 보너스 효과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

강승현은 진홍의 마탑 명예 회원 자격을 얻으면서 멤버십 스킬 효과를 받게 됐다.

'이번 마탑 사태를 해결하면서 조건이 달성된 모양이군.'

강승현은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창을 바라보았다.

[※진홍의 마탑 멤버십 스킬 중 한 가지를 선택하세요.]

[기초마법학]

[명상을 통한 정신 수련]

[진홍의 불꽃]

[엘리멘탈 연구]

[마법직조술의 대가]

'이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는 건가.'

강승현은 멤버십 스킬을 찬찬히 살폈다. 스킬을 눌러보자 간단한 설명을 볼 수 있었다.

'[기초마법학]은 마력탄이나 마법 방패 같은 기초 마법의 효율증가. [명상 수련] 어쩌구는 명상 스킬과 정신력 회복 속도 강화....'

이름에 걸맞게 마법사 집단인 진홍의 마탑과 관련 있는 능력치였다.

'[엘리멘탈 연구]는 속성력을 올려주긴 하지만, 속성 마법 위주라서... 죄다 필요 없는 것들이네.'

문제는 이 스킬들이 마력 0 야매 힐러에겐 쓸모없는 쓰레기라는 점. 하나같이 마법 관련 스킬이라 강승현에겐 있으나 마나다.

'딱 한 가지만 빼고 말이지.'

비록 5개 중 4개는 고를 가치가 없는 스킬이었으나, 딱 한 가지는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었다.

그건 바로 [마법직조술의 대가]다.

[마법직조술의 대가]

[마법직조술로 유명한 진홍의 마탑을 상징하는 멤버십 스킬.]

[옷과 직조, 재봉 관련 효과를 받을 수 있다.]

효과는 마법직조술과 관련 있는 능력치 상승.

평범한 힐러에겐 쓸모없는 스킬이지만, 야매 힐러는 유용하게 쓸 수 있다.

강승현이 보유한 스킬 중 [실 뽑기], [천 만들기], [봉합], [실타래 풀기]는 직조 계열 스킬이기 때문이다.

[효과를 받을 수 있는 스킬]

[봉합]

-[바느질 속도 +3.5%]

-[스태미나 소모 -3.5%]

[실 뽑기]

-[제작 속도 +10%]

-[실 내구도 +10%]

[천 만들기]

-[제작 속도 +7%]

-[천 내구도 +7%]

[실타래 풀기]

-[해제 속도 +12%]

-[성공률 +12%]

[추가 보너스 효과]

-[마법직조술 +5%]

-[마법천, 마법양탄자 효과 보너스 +10%]

-[마법직조술 성공시 추가 옵션 +0.2%]

그 결과, 강승현이 보유한 직조 계열 스킬에 강화 보너스가 붙었다. 마법직조술 관련 보너스 효과는 덤.

"스킬 강화 효과에 이런저런 보너스 효과까지... 이거 생각보다 훨씬 좋은데요."

강승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새로운 보너스 효과도 좋지만, 평소 자주 사용하는 스킬이 강화됐다는 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검 스킬을 강화하고 싶다면 칼잡이 집단. 활 스킬을 강화하고 싶다면 레인저 집단."

"아~ 도장깨기를 하라는 거구나!"

"...가서 깽판 칠 필요는 없고, 가입만 해도 돼요."

아즐 대륙에는 100인 이상의 대형 집단부터, 10인 미만의 소규모 집단까지 다양한 단체가 존재한다. 그만큼 많은 멤버십 스킬을 얻을 수 있다는 소리다.

"모험가 조합도 조건을 달성하다 보면 멤버십 리스트에 올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이런 좋은 시스템이 있다는 걸 이제 알다니.... 진작 좀 알려주면 안 되는 건가."

"관리자가 그렇죠 뭐."

강승현은 업적 확인을 끝내고 상태창을 닫았다.

"스킬 테스트를 하고 싶긴 한데, 시간이 좀 늦었네요. 슬슬 피곤하기도 하고."

"피곤하긴 하다. 밤이니까... 잘까."

김호정은 그렇게 말하며 이상한 베개를 꺼냈다.

"...그럼 김호정 씨 업적 하나 깨고 일과 마무리하죠."

"업적?"

"아이템 슬롯 업적이요."

레어 등급 이상의 아이템을 인벤토리에 3개 넣으면 깰 수 있는 업적. 장비를 몸에 착용하지 않아도 효과를 받을 수 있는 [아이템 슬롯]이 추가된다.

"키르카라슈텔의 보주에, 휴식 결계 양탄자...."

"그리고 내가 가진 피를 갈구하는 혈석을 포함하면 조건 달성이구만."

김호정은 강승현이 빌려준 아이템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러자 [아이템 슬롯] 업적이 달성됐다.

[업적 달성 : 아이템 슬롯]

[레어 등급 이상의 아이템을 3개 보유할 시 달성.]

[※상태창에 아이템 슬롯이 추가됐다.]

"오, 오오... 이거 좋다아!"

김호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귀찮게 아이템 들고 다닐 필요가 없잖아?"

"엄청 편해요. 저는 보주 등록해놨죠."

"난 뭐, 등록할 만한 아이템이 없네."

김호정이 웃으며 자신의 혈석을 바라보았다. 피를 갈구하는 혈석은 발동형 아이템이라 슬롯 효과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뭐라도 좋으니 등록할 아이템 하나 구해야겠네. 내일 일정은 어떻게 돼?"

"하인드 마을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죠."

"그렇지. 여관방 오래 비우면 방 뺏기니까."

이제 진홍의 마탑에서 볼일은 끝났다.

더 이상 여기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

"저도 정확한 길은 모르니 지도부터 구하고."

"여기서 나가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지?"

"네. 배랑 다리."

진홍의 마탑이 설립된 카마르는 커다란 호수 위에 세워진 호수 도시다.

여기서 다른 마을로 가기 위해선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거나, 하나밖에 없는 다리를 건너는 수밖에 없다.

"뭐가 됐든... 우리가 멀쩡한 다리 놔두고 호수를 건너야 할 필요가 있을까?"

"지금은 딱히 없죠."

"그러니까 마차 타고 편하게 가자고. 멀쩡한 다리가 사라지진 않을 거 아냐."

"그럼 내일 일정은 정해졌네요."

카마르로 가서 하인드 마을로 돌아갈 마차를 찾는 것. 별일 없다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78. 도시 카마르 1

다음 날.

강승현은 해가 중천에 뜨고서야 눈을 떴다. 어제 아침부터 밤까지 일했더니 몸에 피로가 많이 쌓인 모양이다.

'손하고 팔은....'

강승현은 가장 먼저 어제 다친 손과 팔을 확인했다.

'심하게 다친 게 아니라서 그런가, 이제 멀쩡하네.'

크게 다치지 않아서 [완치판정]의 효과로 말끔하게 나은 상태였다.

'그럼 슬슬 떠날 준비나 할까.'

강승현은 마탑을 떠날 준비를 하며 인벤토리를 정리했다.

'이건 필요 없고, 이건 필요하고....'

누군가를 치료해주고 기념으로 받은 장식품이나 하도 읽어서 너덜너덜해진 책들. 딱히 놔둘 둘 곳이 없어서 쭉 가지고 다닌 물건들이다.

'마탑에서 새로 산 책도 있으니, 다 읽은 책은 두고 가자.'

이제 강승현은 자신 소유의 공간이 생겼다. 모험에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라면 두고 가도 상관없다.

"흐아암.... 아이고 잘 잤다."

인벤토리를 정리하고 있는데, 누워 자던 김호정이 몸을 일으켰다.

"좋은 아침... 아니 점심인가? 뭐해?"

"인벤토리 정리요. 김호정 씨도 정리하시죠."

"그래도 돼?"

"어차피 창고로 쓸 곳이니까요."

카마르는 하인드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넓고 안전하지만 자주 들락거릴 수 없다면 창고로 쓰는 게 낫다.

"그럼 나도 정리하고 갈까."

김호정도 인벤토리에서 온갖 잡동사니를 꺼냈다. 그가 꺼낸 건 TV 리모컨과 연어색 잠옷이었다.

"그걸 아직도 갖고 있었어요?"

"당연하지. 여기 처음 올 때 가져온 물건들이잖아."

아즐 대륙으로 소환된 차원이동자들은 갖고 있던 소지품을 함께 가져온다. 어떤 이유로 소지품이 없을 땐 흰색 셔츠와 바지를 입은 상태로 소환된다.

"한국 돌아갈 때 가져가려고 소중히 간직했다구."

이렇듯 차원이동자들은 아즐 대륙으로 소환됐을 때 가져온 소지품을 소중히 여긴다.

심한 경우에는 자기 물건에 말을 걸고 다니기까지 한다. 한국에서의 추억이 담긴 소중한 아이템이라면서.

"김호정 씨는 집에서 잠옷 차림으로 TV 보다가 끌려왔다고 했죠."

"어. 컵라면 먹으려고 물 부어놨는데 눈 떠보니 동굴 속이었어."

덕분에 김호정은 잠옷과 리모컨, 베개처럼 쓸모없는 물건만 들고 왔다.

그것도 진짜 생선처럼 생긴 이상한 베개를.

"아무것도 안 가져온 저보단 낫지만, 참 쓸모없는 것들만...."

"이 베개는 유용해. 옵션 생성권으로 옵션도 붙여놨다구."

김호정이 생선 베개를 집어 들고 말했다.

[빨간 도미 베개]

[도미 생선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베개. 선물 받았다.]

[베고 잘 때 이하 효과를 받는다.]

-[정신력 회복 속도 +0.3%]

-[숙면 확률 +3%]

옵션 생성권은 아무 능력 없는 아이템에 옵션을 부여할 수 있는 아이템이다.

원래는 그냥 베개였지만, 김호정이 룰렛에서 뽑은 생성권을 사용해서 옵션이 추가됐다.

"이 녀석은 내가 차가운 동굴 바닥에서 잘 때도, 흙바닥에서 잘 때도 함께한 소중한 녀석이지.... 선생도 빌려줄까?"

"그런 비린내 나게 생긴 걸 뭐하러."

"비린내 안 나! 아저씨 냄새는 나지만!"

김호정은 처절하게 외쳤지만, 앞으로도 강승현이 사용할 일은 없을 것 같다.

-"나는 인벤토리 정리 대충 끝났는데, 강 선생은?"

"저도 다 끝났어요. 슬슬 출발하죠."

강승현은 마지막으로 액자 하나를 꺼내 선반에 올려두었다.

'이건 여기에 두고 갈까.'

액자 안에는 어떤 세 사람과 함께 그려진 강승현의 그림이 담겨 있었다. 세 사람은 산발머리 남자, 묶은 머리 여자. 그리고 모자를 쓴 남자였다.

"오, 이 사람들은 누구야? 친구야?"

"전에 같이 다니던 동료들이에요."

지금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강승현은 한때 차원이동자 동료들과 다녔던 적이 있었다. 이 세 사람은 그 당시 함께한 파티원들이다.

"모험가 파티원들이구나! 다들 잘 지내?"

"알아서 잘살고 있겠죠. 한 친구만 빼고...."

강승현은 작게 중얼거리고 등을 돌려 방을 나섰다.

-"비상용 마력 포션 가져와!"

"마력 좀 아껴 써!"

밖으로 나오자 마법사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다들 마탑을 복구하느라 정신없는 상태다.

마탑 입구로 가자 입구에서 대기하던 경비병들이 강승현을 알아보고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강승현 힐러님!"

"당신 덕분에 저희가 살았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이들도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들은 모양이다. 이제 외부인이 아니라 내부인이 되었으니 더 깍듯하게 모시라고.

"강승현 힐러."

"모험가님!"

그리고 경비병을 지나쳐가자 탄셀 교수와 리제이가 서 있었다.

"바쁘실 텐데 여기까지 나오셨어요."

"그래도 아쉬우니까 말이지."

"슈이레 선배님도 데려오려 했는데... 자기는 할 말 다 했으니 괜찮다고 해서 우리끼리만 왔어요."

두 사람은 먼 길 떠나는 강승현을 배웅하러 나왔다. 탄셀 교수는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말 고마웠네. 자네는 나와 내 제자, 그리고 우리 마탑의 은인이야."

"헤어지는 건 아쉽지만... 모험가는 모험을 떠나셔야겠죠."

곁에 있던 리제이도 아쉽다는 얼굴이었다. 강승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금은 헤어지지만, 언젠가 또 만날 일이 오겠죠."

"조심해서 가게나."

"안녕히 가세요!"

강승현은 두 사람과 헤어져 진홍의 마탑을 떠나갔다.

-마탑을 떠나 조금 걸어가자, 크고 작은 건물들이 세워진 도시를 발견했다. 도시 밖으로 새파란 호수가 눈에 들어온다.

"여기가 카마르인가."

카마르.

마탑의 가호를 받아 마법사들이 호수 위에 설립한 도시. 하인드 마을에선 볼 수 없는 마법 협회나 도서관, 공방이나 극장 같은 시설들을 볼 수 있었다.

"확실히 하인드 마을 같은 촌구석에 비하면 대도시네."

"여기는 돈 많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잖아요."

카마르는 일반 마법사뿐만 아니라 귀족들도 많이 거주하는 도시다. 마탑이 펼치는 보호 결계가 몬스터의 습격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다양한 시설이 세워진 이유가 있구만."

"마탑 마법사의 가족들도 카마르에 살고 있고, 마법 교육을 받기 위해 찾는 마법사들도 있고.... 아무튼 잘 나가는 도시죠."

물론 마법사와 별 상관없는 삶을 사는 강승현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도시다.

"일단 잡화점에서 지도를 구하고, 돌아갈 루트부터 짜도록 하죠."

"그러자고."

하인드 마을로 돌아갈 마차를 빌릴 생각이긴 하지만, 마차를 타고 가는 동안 안전할 거라는 보장은 없다.

"마차 타다 보면 산적의 습격을 받거나, 몬스터의 공격을 받는 일도 흔하니까."

"산사태나 폭우로 길이 끊기는 경우도 많구요."

주변 지리를 파악해두는 건 모험의 기본.

출발할 때는 마차를 타고 갔어도, 최종적으로 마을에 도착했을 땐 걸어서 도착하는 경우도 꽤 있다.

딸랑.

"어서 오시오. 뭘 드릴까?"

잡화점으로 들어가자 가게 주인이 친절하게 반겨줬다.

"카마르 근방 지도 한 장이요."

"나도 뭐 하나 사갈까?"

마법사들의 도시 잡화점인 만큼 다양한 마법 도구와 재료를 팔고 있었다.

"하인드 마을에선 살 수 없는 물건도 팔고 있으니... 필요하다 싶으면 사는 것도 괜찮죠."

"으음...."

김호정은 가게 선반을 기웃거리더니 나무를 깎아 만든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짐승이 달을 입에 물고 있는 형태다.

'나는 그럼... 얼음 포션 재료를 살까.'

바람 포션 제작에 윈드 스톤이 들어가는 것처럼, 얼음 포션 제작에는 아이스 스톤이 필요하다.

자연산은 북부 지방이 아니면 구하기 힘들지만, 싸구려는 얼음 마법사들을 쥐어짜서 구할 수 있다.

덕분에 마법협회나 마탑처럼 마법사들이 모이는 장소에선 쉽게 구할 수 있는 편이다.

"얼음 결정 한 박스에 끈적한 슬라임 젤리 한 박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재료와 포션을 구입했다.

포션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감사합니다, 손님들!"

가게 주인이 행복한 얼굴로 미소지었다. 강승현이 물건을 많이 사가서 기쁜 모양이다.

"바깥 테이블 좀 빌릴 수 있을까요?"

"그럼요. 마음껏 쓰십시오!"

강승현은 잡화점 밖 테이블에 지도를 펼쳤다.

"일단 지도부터 확인하죠."

"좋아. 여기서 하인드 마을로 가는 가장 안전하고 빠른 루트!"

"카마르는 동서남북 사방이 피츠타 호수에 둘러싸인 호수 도시입니다."

호수에서 나가기 위해선 배를 타고 건너거나 카마르 남쪽의 피츠타 대교를 지나야 한다.

"피츠타 대교를 지나면 그대로 마카로치 숲에 진입할 수 있구요."

"마카로치 숲은... 이쪽에 마구간이 있네."

"네. 근처에 마을이라 할 만한 곳은 없지만 마구간이 있어서 쉬어갈 수 있죠."

강승현이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마카로치 마구간에서 강을 따라 걷다 보면 칸타타 평원에 도착한다.

"여기는 우리가 아는 동네네."

"맞아요. 칸타타 평원은 크고 광범위하게 넓어서 여러 지역하고 이어져 있죠."

칸타타 평원을 지나 피트리 숲으로 향하면 하인드 마을 남쪽 입구로 갈 수 있다.

"이쪽 루트로 가면 몬스터의 습격 위험이 적어요."

"안전한 대신 시간이 좀 걸리겠네."

"시간을 단축하려면... 배로 피츠타 호수를 건너서 붉은 숲을 통해 가는 방법도 있지만."

김호정이 배를 싫어하는 것도 있고, 붉은 숲은 마카로치 숲보다 좀 더 강한 몬스터가 서식한다.

뭣보다 호수를 건널 땐 마차를 탈 수가 없다.

'거기다 붉은 숲은 엄청 넓어서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이 없으면 헤맬 확률이 높아. 나나 김호정 씨나 이 근처는 처음이니 100% 헤매겠지.'

몬스터야 딱히 신경 쓸 필요 없지만, 길을 헤매는 건 피곤해서 싫다.

"안전하고 쉽고 편하게 가는 게 좋겠죠."

"그럼 그럼."

김호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루트는 대충 파악했으니, 우릴 태워줄 마차를 고용하러 가자고."

강승현 일행은 카마르 성문 밖 마구간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마구간에 도착했을 땐 오후 4시였다.

"아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

"점심 지나서 마탑을 출발했으니 좀 늦긴 했죠."

보통 마차는 아침이나 점심시간에 출발한다. 저녁 시간을 피하는 이유는 밤의 아즐 대륙이 낮보다 위험하기 때문이다.

"마차들이 많이 떠났겠네요. 더 늦기 전에 빨리 말이라도 빌려야...."

그러니 마차를 타고 싶다면 아침 일찍 준비해야 했다. 늦게 가면 마차가 떠나고 없으니까.

"응? 뭐야 많은데?"

"많다구요?"

"저기 봐. 밥 먹고 있잖아."

걱정하며 갔더니, 말들이 먹이를 태평하게 먹고 있었다. 이 시간에는 보통 마차들이 출발했어야 정상인데.

'...말들이 왜 이 시간까지 남아 있지?'

강승현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마구간 주인에게 물었다.

"실례합니다. 하인드 마을로 향하는 마차를 빌리고 싶은데요."

"아이고, 지금은 마차 운행을 못 해요."

마구간 주인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혹시 마구간에 무슨 일 있습니까?"

"아니 우리는 별일 없는데... 도시 밖으로 못 나가는 상황이잖수. 사람도 못 나가는데 말이라고 나가겠소?"

"도시 밖으로 못 나간다?"

마구간 주인의 말에 의하면 마차는 물론이고, 사람도 도시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한다.

또 무슨 일이 일어난 모양이다.

"궁금하면 카마르 관문으로 가보시오. 병사들이 자세히 알려줄 테니."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승현 일행은 마구간을 나와 카마르 도시 관문으로 향했다.

관문 출입구로 가자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79. 도시 카마르 2

"왜 도시 밖으로 못 나가는 겁니까?"

"우리는 바쁜 몸이라고!"

"다들 조용! 카마르 상부와 마탑의 명령이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갔더니 카마르 병사들이 모인 사람들을 쫓아내고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인데 저래?"

"가서 물어봐야죠."

강승현은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 있습니까?"

"더 이상 질문은 듣지 않겠다! 돌아가라!"

우두머리는 강승현의 말을 듣지도 않고 쫓아내려 했다.

"이걸 보시면 생각이 달라질 것 같은데요."

강승현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손에서 붉은빛을 뿜어냈다.

"그, 그것은... 크림슨 엠블럼?"

"마탑 소속을 상징하는 증표!"

강승현이 마탑 엠블럼을 제시하자 병사들의 태도가 확 달라졌다.

"마, 마력이 전혀 안 느껴져서 몰랐는데."

"당연히 모험가... 아니 평민인 줄 알았어. 마력이 너무 낮아서."

"아무리 모험가라도 마력이 저렇게 낮으면 스킬 하나 못 쓸 거 아냐."

벌레만도 못한 마력을 가진 마법사의 등장에 카마르 병사들은 혼란스러워하며 속닥거렸다.

"그렇다면 설마 마력 차단을 쓴 건가?"

"몸 밖으로 새어나가는 마력을 차단하는 스킬?"

"그건 엄청 어려운 마법이라고 들었는데...."

"모,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그들은 눈앞의 상대가 자신보다 마력이 낮다는 것도 모른 채 굽신거렸다.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을 숨길 수 있는 강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홍의 마탑 소속 겸 모험가 조합 소속 강승현 힐러라고 합니다."

강승현은 아주 태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금 왜 도시 밖으로 못 나가는 거죠?"

"아, 마탑에서 못 들으셨나 보군요."

병사는 주위 눈치를 살피더니 귓속말을 했다.

"현재 마탑의 명령으로 안전을 위해 카마르 도시를 폐쇄한 상태입니다."

"도시를 폐쇄했다구요?"

"그렇습니다."

병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금은 마력 중심부에 문제가 생겨서 카마르 보호 결계 마법이 해제된 상태라고 합니다."

카마르는 마법사들이 모여 사는 도시인 만큼, 도시 전체에서 강한 마력이 뿜어져 나온다.

'몬스터들은 마력에 이끌려 마을이나 도시를 습격하는 경우가 많지.'

그래서 마탑은 카마르를 보호하기 위해 결계 마법을 펼쳤다. 도시 밖으로 마력이 새어나가는 걸 방지하고, 접근하는 몬스터를 막기 위해서.

덕분에 카마르 일대는 지금까지 매우 평화로웠지만, 마력 중심부가 파괴된 지금은 그렇지 않다.

"결계가 사라진 상황에서 카마르 밖으로 나가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성 안쪽까지는 마법사들이 임시 결계를 펼쳐 버티고 있지만...."

카마르에서 조금만 멀어지면 마력에 이끌린 강력한 몬스터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병사는 착잡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마탑을 보수할 때까지는 도시를 폐쇄하기로 했습니다."

마탑에 문제가 생겨서 결계가 사라진 이상, 다리를 철거하고 출입구를 폐쇄하는 게 외부 침입을 막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저희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카마르 주변을 지키기 위해 파견됐습니다. 현재 카마르 시민들한테 이번 사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병사는 몰려든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들에게 마탑에 문제가 생겨서 통행을 막았다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줬지만.

"시민들이 말을 들어주질 않습니다."

다들 병사들의 말은 듣지도 않고 다리를 쓰게 해달라며 아우성이었다.

'마법사 놈들은 싸가지 없으니까.'

카마르 시민들은 대부분 마법사인 만큼, 마력이 낮거나 마법사가 아닌 사람을 무시하는 버릇이 있다.

"나는 빨리 도시 카론으로 가야 한단 말이오!"

"어서 다리를 설치해라! 마차를 이용할 수 있게!"

"일개 병사 주제에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마법사들은 더러운 성질을 드러내며 소리쳤으나,

"다리를 놓았다간 몬스터가 카마르로 진입하게 된다!"

"그렇게 가고 싶다면 배 타고 가시오!"

"다리는 결계가 고쳐지기 전까진 절대 설치할 수 없다!"

카마르를 지키는 병사들도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카마르 시민들과 병사들이 대치한 가운데 우두머리 병사가 입을 열었다.

"호수를 건너가는 것까지는 막지 않겠다. 하지만 지금 카마르 밖으로 나갔다간, 마력에 이끌려 몰려온 많은 수의 몬스터와 대치하게 될 것이다."

우두머리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카마르를 지킬 뿐이다. 밖으로 떠난 사람들의 안전까진 보장할 수 없다!"

카마르 측의 입장은 이렇다.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대기하거나, 정 나가고 싶다면 몬스터한테서 몸을 지켜줄 모험가를 고용해서 나갈 것.

"우리가 왜 모험가 같은 놈한테 의지해야 하는데?"

"잔말 말고 다리나 세우라고!"

하지만 카마르 도시 사람들은 병사들의 말을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너희들이 다리를 만들지 않겠다면... 내가 만들겠다!"

마법사 하나가 앞으로 나아가더니 호수를 향해 주문을 외웠다.

"아이스 로드!"

호숫물이 단숨에 얼어붙더니 얼음 다리가 생겨났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조금 미끄럽긴 하지만, 이거라면 마차도 호수를 건널 수 있습니다!"

당황한 병사를 무시하고, 마법사들은 얼음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망할! 저놈이 마법을 사용했잖아!"

"물에 다가가지 마시오! 방금 사용한 마법의 영향으로...."

촤아아악!!!

병사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물속에서 물기둥이 솟구쳤다.

"으아아아아악!!!"

"끄아악!"

물속에서 튀어나온 몬스터 무리가 얼음 다리 위를 걸어가던 마법사들을 습격했다.

"어인이다!"

"피츠타 어인 놈들이다!"

"젠장, 어서 무기를 들어라!"

피츠타 어인.

인간과 물고기가 뒤섞인 듯한 끔찍한 외형의 몬스터. 인간에게 매우 적대적인 몬스터 중 하나다.

본래는 결계 때문에 피츠타 호수 깊은 곳에 머물고 있었으나, 결계가 사라져서 그런지 물 위까지 올라왔다.

"여기서 막지 않으면 놈들이 카마르에 진입한다!"

"싸워라!"

병사들이 창과 방패를 들고 어인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민들을 구출하면서 어인들을 상대하는 건 쉽지 않다.

"아이고, 저러다 다 죽겠네!"

"저희도 합류할까요."

"좋지!"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강승현은 석궁을 꺼내 들었다.

아직 물 위로 올라온 어인의 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 차원 이동자 둘이면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

'일단 물에 빠진 사람들부터 해결하자.'

어인들의 공격을 받은 마법사 몇 명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사, 살려주세요!"

"어풉풒...."

팍! 파박!

강승현은 물에 빠진 사람들한테 바람 화살을 날려 보냈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바람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공기 속성 강화 +2.5%]

[지속 시간 3분]

더운 곳에서 냉기 포션을 사용하면 열기 속에서 버틸 수 있는 것처럼, 바람 포션을 사용하고 물에 들어가면 숨을 쉴 수 있다.

'이러면 익사하진 않겠지.'

일단 물에 빠진 사람들은 조치가 끝났다. 강승현은 김호정을 향해 소리쳤다.

"김호정 씨는 가서 얼음 다리를 끊으세요. 물고기는 제가 맡죠."

지금 급한 건 마법사가 만든 얼음 다리다. 저걸 그냥 놔뒀다간 어인은 물론이고 다른 몬스터들도 카마르로 쳐들어올 것이다.

"간다! 혈석 버프!"

촤악!

김호정은 혈석을 꺼내 팔을 그었다. 팔에서 흘러나온 새빨간 피가 혈석에 스며들었다.

[흡혈 충동!]

[일정 시간 동안 공격력이 상승합니다.]

첨벙!

김호정은 몸에 혈석 버프를 걸고 어인들이 득실거리는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당연히 어인들이 김호정을 향해 달려들었으나,

'장전!'

파바바박!!!

"우그르르르르!"

강승현이 쏘아보낸 화살이 놈들의 몸에 처박혔다.

'내가 탱커는 아니지만... 이런 몬스터 어그로 끄는 거야 쉽지.'

어인은 물과 육지를 자유롭게 드나드는 몬스터다. 놈들은 피부호흡을 하기 때문에 자신의 피부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다.

'물 밖에선 피부를 몇 번 긁어주기만 하면, 빡쳐서 달려들거든.'

실제로 어인들은 김호정을 무시하고 자신들을 공격한 강승현한테 달려들었다.

"우르르르르!"

"흐웁."

어인들은 볼을 크게 부풀리더니 강력한 물줄기를 뿜어냈다. 수중 몬스터의 기술인 수령포다.

푸우우우우우!!!

"어인 놈들이 수령포를 사용한다!"

"다들 방패를 들어라! 강력한 수령포는 바위도 부수는 위력을 갖고 있다!"

"마, 마법 방패!!"

"마법은 안 돼! 몬스터가 이끌려 온다고!"

"아니 그럼 어째?"

"병사들 뒤에 숨어야지!!"

카마르 병사들과 마법사들은 제각각 물줄기를 막기 위한 방어수단을 준비했다.

'나는 방패 같은 게 없으니....'

강승현은 진홍의 신중한 루비를 꺼냈다.

콱!

루비를 손에 쥐고 발동하자, 붉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정신 집중!]

[일정 시간 동안 '집중력'의 효과를 받습니다.]

[회피율 상승!]

촤아아아악!!

강승현은 쏟아지는 물줄기를 피해 앞으로 달려나갔다.

'어인들은 피부가 촉촉하고 물에 젖어 있어서 돌 화살은 잘 안 먹혀. 더 날카로운 물체가 필요해.'

주위를 둘러보던 강승현의 눈에 병사들이 가진 투척용 창이 들어왔다.

"그거 투척용 창이죠? 빌려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병사 몇 명이 강승현에게 창을 내밀었다. 강승현은 창을 인벤토리에 쑤셔 박고 어인 무리를 향해 석궁을 겨누었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카마르 스피어 화살을 생성합니다.]

파악!!

카마르 스피어 화살이 어인 서너 마리의 몸을 동시에 꿰뚫었다.

'역시 투창은 다르구만.'

창을 화살로 만들었더니, 화살의 특성과 창의 특성이 합쳐진 물체가 탄생했다.

"우르르르!!"

"우르아아!"

어인들은 계속해서 수령포를 쏘아댔으나, 강승현은 날아오는 물줄기를 가볍게 피하며 방아쇠를 당겨댔다.

첨벙! 첨벙!

카마르 스피어 화살이 발사될 때마다 어인 서너 마리가 물속으로 사라져갔다.

"오케이! 올라왔수다!"

그러는 사이 김호정이 얼음 다리 위로 올라갔다. 물을 헤엄쳐가느라 스태미나가 꽤 많이 깎여나간 상태였다.

'일단 스태미나 회복부터.'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중형 스태미나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팍!

김호정을 향해 노란빛의 화살을 날려주자 깎인 스태미나가 단숨에 차올랐다.

"다리 중간 지점을 끊으세요."

"좋아! 이런 건 곡괭이가 있음 딱일 텐데... 없으니 어쩔 수 없지!"

김호정은 검으로 얼음 덩어리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김호정 씨는 칼 말고 다른 무기를 드는 게 효율적일 것 같은데.'

콰악! 콰악!

쩌적, 쩌저적!!

혈석 버프를 받은 김호정은 칼로 차가운 얼음 다리를 쪼개버렸다.

"임무 완수!"

파각!!

부서진 얼음 조각이 호수 곳곳으로 흘러갔다.

이걸로 바깥 몬스터들이 카마르에 진입하는 건 막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중형 체력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중형 스태미나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부상을 입은 병사들과 마법사에게 체력 화살과 스태미나 화살을 날려보냈다.

이걸로 상처가 낫진 못하지만, 치료받을 때까지 버틸 순 있을 것이다.

"체, 체력이 회복됐다."

"저 사람, 힐러였구나...."

"감사합니다!"

화살에 맞은 사람들이 안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강승현 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우두머리 병사가 강승현에게 달려왔다. 부상자는 있지만, 사망자는 없고 물에 빠진 사람들은 전부 구출했다.

"몬스터가 마력에 이끌리다 보니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몬스터가 나타날 확률이 증가합니다."

"여러분은 다들 카마르 안에서 대기해주세요."

"지금 밖으로 나가시면 저희가 도움 줄 수 없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나가겠다고 난리를 치던 사람들은 호되게 당하고 나서야 카마르로 얌전히 돌아갔다.

"어인 사체는 어쩝니까?"

"부패한 어인의 사체에선 기생충 몬스터가 발생하지. 밖으로 끌어내서 폐기해야 한다."

우두머리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이 피츠타 어인을 건지기 시작했다.

"으아악!!"

"무슨 일이냐?"

그때, 병사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죽은 척 버티고 있던 어인 한 마리가 병사에게 피를 토해낸 것이다.

촤아악!

어인은 그 직후 숨을 거두었다. 병사는 어인의 피에 흠뻑 젖은 채 말했다.

"이, 이 녀석이 제 몸에 피를...!"

"어인의 피는 위험한 독성을 띠고 있지.... 당장 닦아내야 한다."

어인의 피가 인간의 피부에 닿으면 심한 통증과 함께 피부가 파랗게 변해가는 중독 증상이 나타난다.

"도, 독성이요?"

"걱정할 건 없다. 빨리 피를 닦아내고 피부를 건조시키면 독성이 약해지니까."

우두머리 남자가 흰 천으로 병사의 팔에 묻은 어인의 피를 닦아냈다.

"독성이 약해지면 힐로 치료할 수 있지. 바로 힐러에게...."

강승현은 병사의 팔을 바라보았다.

'저 남자의 말대로 어인의 피가 몸에 묻었을 땐 바로 닦아내면 별문제가 없긴 하지.'

문제는 피에 닿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피부가 엄청난 속도로 파랗게 변해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정상적인 속도가 아냐.'

분명 뭔가 문제가 있다는 소리다.

'[관찰의 눈]'

바로 [관찰의 눈]을 사용하자,

[감염]

[온몸에 어인의 피가 묻어 있다.]

[피부가 끔찍하게 변이하고 있다.]

[어인의 피가 상처를 통해 혈관으로 들어갔다.]

온갖 정보 키워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방심한 탓에."

"괜찮다. 일단 응급처치는 끝났으니 힐러를 불러서...."

우두머리 병사가 사람을 부르려던 참이었다.

"소용없어요. 힐은 안 통할 겁니다."

강승현이 그를 저지하며 말했다.

80. 반어인 변이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