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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 20-30

20. 지켜보고 있었나

'뭐야 이거....'

강승현은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그걸손에넣으세요]

[반드시]

'그걸 손에 넣으라고?'

정말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문장이었다.

'꼭 뒤에 사람이 있는 것 같잖아.'

아즐 대륙으로 끌려온 이후, 강승현은 상태창이 보여주는 온갖 메시지와 함께했다.

[룰렛 1회 이용 시 20포인트]

[포인트를 소모합니다]

[업적 달성]

[스태미나 소진!]

[사용할 수 없는 스킬입니다]

갑자기 메시지가 나타난 건 놀랍지 않았다. 평소에도 상태창은 이런저런 메시지를 보내왔으니까.

'하지만 어떤 메시지에서도 인격이 느껴지진 않았는데.'

어떤 차원 이동자는 상태창에 말을 걸어보기도 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상태창은 언제나 시스템과 상황에 맞게 필요한 메시지를 띄울 뿐이었다.

[그걸손에넣으세요]

[반드시]

'하지만 이번에는 달라.'

프로그램이 띄우는 문장이 아니라, 누군가 급하게 타이핑한 듯한 문장.

누군가 메시지를 통해 말을 걸어온 것이다. 마치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것처럼.

'....'

강승현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눈에 띄는 건 없었다. 보이는 거라곤 달라진 게 없는 무기점 벽과, 자신을 의아하게 보는 무기점 주인뿐이다.

"손님?"

"아,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강승현은 적당히 둘러대며 다시 메시지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솔직히 뭔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는데.'

당연히, 차원 이동자한테 이런 메시지를 보낼 존재는 '그 녀석'뿐이다.

'지구인을 아즐 대륙으로 끌고 온... 무언가.'

강승현은 자신들을 아즐 대륙으로 납치해온 존재를 떠올렸다.

녀석의 정체가 뭔지, 의도가 뭔지는 모른다. 딱 하나 알 수 있는 건, 녀석이 상태창을 이용해 차원 이동자들을 돕고 있다는 점.

'일단 우리한테 적대적이진 않은데.'

단지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거나 소통한 적이 없었을 뿐이다. 적대적이진 않지만, 적극적으로 돕지도 않았다. 결국, 차원 이동자들은 집에 돌아가기 위해 이름도 모르는 무언가를 찾아다니는 중이었다.

'도대체 뭐 하는 새끼야.'

강승현은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지금처럼 '무언가'가 자신의 존재를 알린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3년 동안 한마디도 없다가 이제 와서.'

강승현은 뭔지 모를 놈의 의도를 파악하느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메시지를 받은 적이 있나?'

'있다면 무슨 이유로? 없다면 왜 나한테만?'

좀 더 기다려봤지만 다른 메시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더 얻어낼 정보는 없는 것 같다.

'일단 시키는 대로 따라야겠지.'

강승현은 메시지에 적힌 대로 프리아의 석궁을 손에 넣기로 했다. 아무 이유 없이 이런 메시지를 보내진 않았을 테니까.

'내가 저걸 손에 넣으면, 다음 메시지를 보낼 수도 있으니까.'

이런 식으로 놈의 요청을 들어주다 보면 '무언가'와 소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갈 방법도 알 수 있겠지.'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돌아갈 힌트라도 얻은 게 어딘가. 강승현은 상황을 정리했다.

'일단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걸 손에 넣어야 하는데....'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무언가'와 소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강승현은 생각에 잠겼다.

'부족한 돈을 어떻게 마련하지?'

반지와 목걸이를 팔아서 1000만 골드 정도를 마련한다 쳐도 400만 골드가 더 필요했다.

'지금 당장 400만 골드라는 거금을 마련할 방법은....'

역시 이 방법밖에 없다.

강승현은 무기점 주인의 시선을 피해 입을 움직였다.

"...여기 보고 있으면 인벤토리로 400만 골드만 입금해라."

그 녀석이 돈을 보내주면 된다. 강승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벤토리를 뒤적여봤다.

'그럼 지금 당장 살 수 있다고.'

인벤토리를 열심히 뒤져봤지만, 당연히 400만 골드 같은 건 없었다. 강승현은 한숨을 쉬었다.

'사라고 할 거면 돈이라도 주면서 말하든가.'

강승현은 허공을 슬쩍 바라보았다. 지금도 지켜보고 있을 텐데 아무런 답도 없었다.

'혹시 메시지를 보내는 게 생각보다 힘든 작업인가? 아니면 누가 방해라도 하는 건가.'

어느 쪽이든 '무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건 확실했다. 강승현은 당장 돈을 마련할 방법을 궁리했다.

'400만 골드. 작정하고 벌면 금방 모을 수 있는 돈이긴 한데.'

힐러는 돈을 벌기 쉬운 직업이다. 비록 야매이긴 하지만.

'내가 돈 벌어오는 사이에 누가 사가면 곤란하단 말이지.'

레어 아이템은 인기가 많아서 눈 깜짝할 사이에 팔려나간다. 좀 비싸긴 하지만, 귀족이나 실력 있는 모험가라면 얼마든지 낼 수 있는 금액이니까.

'김호정 씨한테 돈 좀 빌려달라고 할까.'

"혹시 돈이 부족하시다면...."

그때 무기점 주인이 입을 열었다.

"예약 물품으로 등록해둘 테니, 나중에 와서 사 가시는 건 어떠신가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예약한다면 누가 사갈 걱정은 없다.

"그래도 됩니까?"

"그럼요. 지금 가지신 돈에 조금만 보태면 살 수 있으니까요. 손님 같은 분이라면 금방 벌어 오시겠죠."

무기점 주인은 허허 웃으며 말했다. 정말 김호정 말대로 아즐 대륙에서 보기 드문 좋은 사람이었다.

"예약하실 거라면 여기에 손님 이름을 적어주세요."

무기점 주인이 예약 서류를 내밀었다. 강승현은 이름을 적고 서류를 돌려주었다.

"여기요."

"반지 대금 660만 골드에 목걸이 값 300만 골드입니다."

무기점 주인이 돈주머니를 가져왔다. 적지 않은 금액이다 보니 꽤 묵직했다.

"400만 골드, 제가 이틀 안에 꼭 마련해 오겠습니다."

"천천히 오셔도 됩니다. 손님이 많은 가게는 아니라서요."

강승현은 무기점 주인의 배웅을 받으며 가게를 나섰다.

'눈 뜨자마자 모험가 조합으로 가야겠다.'

내일 조합에서 의뢰를 찾을 생각이었다. 급전 벌기에는 모험가 의뢰보다 좋은 게 없으니까.

'지금 가진 돈에 의뢰비를 보태면 1400만 골드는 충분히 모을 수 있겠지. 부족한 금액은 비상금으로 채우고.'

강승현은 내일 일정을 생각하며 여관으로 돌아왔다.

'그전에....'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기 전, 강승현은 김호정의 방에 들렀다.

-"뭐? 메시지가 말을 걸었다고?"

"설명하자면 복잡한데...."

강승현은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했다. 김호정은 다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진짜 잘하면 집에 가는 거 아냐?"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집에 갈 방법에 가까워지긴 했죠."

"혹시 뭐 내가 도와줄 일 있어?"

"그럼 돈 좀 빌려주세요. 두 배로 갚을 테니까."

일단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니까.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봤으나.

"나 5천 골드밖에 없어."

상상 이상으로 거지였다. 분명 200만 골드를 벌었다고 했는데.

"199만 5천 골드는 어디로 간 거야."

"딱 밥값만 남겨놨지."

김호정은 핫핫하 하고 웃으며 5천 골드를 내밀었다.

모험가 사이에선 흔한 일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뭐하러 저축하겠는가. 차원 이동자는 잘 안 죽긴 하지만.

"감사합니다. 돈 빌릴 사람이 김호정 씨밖에 없었거든요."

"에헤이. 같은 한국 사람끼리 타지에서 돕고 살아야지."

"푼돈이지만...."

"도로 내놔, 짜샤."

"아무튼, 뭔가 알아내면 알려드릴게요."

-그리고 다음 날, 강승현은 눈을 뜨자마자 모험가 조합으로 달려갔다.

"어서 오세요. 모험가 조합입니다!"

오늘도 접수원은 반갑게 웃으며 인사했으나, 강승현은 고개만 끄덕이며 지나쳤다.

'일찍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많군.'

강승현이 향한 곳은 모험가 조합 안쪽의 의뢰 게시판이었다. 꽤 이른 시간인데도 일거리를 찾는 모험가들로 바글거렸다.

"나도 의뢰서 좀 봅시다!"

"볼일 봤으면 비켜!"

강승현은 인파를 뚫고 게시판 앞으로 다가갔다.

'어디 보자....'

게시판에는 각종 의뢰서가 붙어 있었다.

{붉은 어금니 멧돼지 퇴치}

{3일 안에 카마르까지 물품 운반}

{흰수염가래꽃 10송이 채집}

{하카트 언덕 던전 조사}

이중 아무도 손대지 않은 의뢰서는 하얀색.

다른 모험가가 진행 중인 의뢰는 파란색.

모험가가 의뢰에 실패했거나, 약속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은 의뢰는 연두색이다.

이 중 마음에 드는 의뢰가 있다면, 의뢰서를 뜯어다 접수처로 가져가면 된다. 물론 누군가 진행 중인 파란 의뢰서는 가져가봤자 진행할 수 없지만.

'오늘 내가 볼 건 이쪽이겠지.'

강승현은 힐러 의뢰 게시판으로 향했다. 이름 그대로 힐러의 도움이 필요한 의뢰만 모여있다.

{파티에 동행할 힐러 구함}

{힐러 급구}

{어깨 부상을 치료해주실 힐러를 찾습니다}

"강승현 님,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게시판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접수원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그쪽 의뢰는 강승현 님이 받으실 수 없는 의뢰라...."

접수원은 무척 미안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사실 모험가가 모든 의뢰를 맡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의뢰 중에는 제한 조건이 붙은 것도 있기 때문이다.

하급 헌터 사절, 도적 계열 직업 사절, 마법사 우대, 힐러 전용 등등.

당연히 이런 의뢰는 일반 의뢰에 비해 비싸다.

"아시다시피 힐러 의뢰는 모험가 조합에서 인정받은 공인 힐러한테만 맡기는 의뢰라서요...."

강승현은 분명 힐러였지만, 힐을 쓸 수 없다 보니 모험가 조합에서 인정해주지 않았다. 당연히 힐러 전용 의뢰는 손도 댈 수 없다.

"접수처에 가져가셔도 저희가 통과시켜 드릴 수가...."

접수원은 강승현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강승현은 모험가 조합 요주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힐도 쓸 줄 모르면서, 힐러를 자칭하고 다니는 모험가....'

그냥 보기엔 평범한 모험가였으나, 그는 법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모험가 조합을 농락하는 걸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제가 언제 의뢰 맡는다고 했나요? 그냥 보는 거예요. 보는 건 자유잖아요."

강승현은 방긋 웃으며 의뢰서를 팔랑팔랑 넘겼다.

자세히 보니, 강승현이 손에 쥔 의뢰는 죄다 파란색. 이미 누군가 진행 중인 의뢰들이었다.

'합법적으로 의뢰를 받을 수 없으니 꼼수를 부려야지.'

힐러 의뢰를 받을 수 없다면, 다른 힐러가 실패할 만한 의뢰를 찾아서 해결하면 된다. 의뢰인은 누가 됐건 자신을 고쳐준 사람한테 돈을 낼 테니까.

한마디로 '모험가 조합의 힐러 의뢰 먹튀하기'.

'이거 괜찮네.'

강승현은 파란 의뢰서를 팔랑팔랑 넘기다 씩 웃었다.

{힐러 급구. 다리의 출혈이 멈추질 않습니다.}

21. 그치지 않는 출혈 1

-다리의 출혈이 멈추질 않는다.

-출혈이 생긴 건 일주일 전부터.

-힐러 급구.

의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어떤 모험가가 부상을 치료해줄 힐러를 찾는다는 소리였다.

사실 힐러를 찾을 거라면 교회 근처를 어슬렁거리기만 해도 된다. 그런데 수수료까지 내면서 의뢰를 맡겼다?

'치료를 받았는데 효과가 없었나 보네.'

힐러 의뢰는 모험가 조합이 수수료를 떼어가지만, 힐러가 치료에 실패하면 돈을 낼 필요 없다.

이 의뢰인은 이미 한 번 힐러를 찾아간 게 틀림없다. 하지만 치료에 실패해서 어쩔 수 없이 의뢰를 맡긴 모양이다.

'피가 멈추지 않는다....'

강승현은 눈으로 훑은 의뢰서를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이 짧은 문장만 봐도 의뢰인한테 무슨 일이 있었을지 예상이 간다.

지혈은 치료에 있어서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게 실패한다는 건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소리다.

'평범한 상처가 아니라는 소리지.'

힐러가 치료에 실패했다는 건 힐이 통하지 않는 상처라는 뜻이니까. 강승현 같은 야매 힐러를 위한 일이다.

'주소는 어디 보자.... 비츠폴 여관이군.'

강승현은 의뢰인이 머무는 방을 확인하고 여관으로 향했다.

-강승현은 다른 힐러한테 종종 이런 이야기를 듣곤 했다.

-너는 상도덕도 없냐?

-어떻게 남의 의뢰를!

-네가 끼어들지 않아도 치료할 수 있었다고!

-힐도 쓸 줄 모르는 놈이....

주로 환자를 뺏어간 야매 힐러를 향한 원망과 저주. 따지고 보면 강승현이 하는 짓은 남의 밥그릇을 뺏는 일이다.

-절 원망하는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닌데요.

강승현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이렇게 돌려줬다.

-그럼 제대로 치료했어야지.

사실 강승현이라고 아무 환자나 뺏어가는 건 아니다. 힐러가 힐로 고칠 수 있는 환자는 건들지 않았다.

'그건 옳은 치료법이니까.'

하지만 힐로 고칠 수 없는 환자가 힐만 받고 있을 땐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건 잘못된 거니까. 그냥은 못 넘어가지.'

일이 잘못된 걸 떠나서, 까딱하면 죽는다. 잘못된 치료 때문에 살 사람이 죽는 것이다.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일단 도와주고, 아니다 싶으면 말고.'라는 게 강승현의 생존 철학 15번.

워낙 치안이 나쁜 동네라 인권이 후달려서, 모험가 한둘 죽는다고 놀랄 일은 아니지만.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살리면 좋잖아.'

강승현은 자기 나름의 철학을 지켜가며 아즐 대륙에서 살아갔다. 살기 팍팍한 동네지만 사람이 아주 못 살 곳은 아니었으니까.

"어서 오세요... 앗!"

비츠폴 여관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종업원 줄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즉, 여기는 강승현이 묵고 있는 여관이다.

'비츠폴 여관 302호 숙박 중이라고 했지.'

루스도 그렇고 김호정도 그렇고 개나 소나 비츠폴 여관에 묵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게 맞다. 최근 장기숙박객들이 확 빠져서 빈방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강 선생님? 뭐 두고 가셨어요?"

줄리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방금 밥 먹고 나갔을 사람이 돌아왔으니까.

"그런 건 아니고, 찾을 사람이 있어서요."

"찾을 사람? 어떤 사람인데요?"

"302호 사람들, 지금 방에 있나요?"

"아까부터 휴게실에서 어떤 분이랑 대화하고 계세요."

줄리아가 1층 휴게실을 가리켰다. 여관 이용객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곳이다.

"감사합니다."

강승현은 가볍게 인사하며 휴게실로 향했다.

휴게실 안에는 남자와 여자 하나, 안색이 무척 나빠 보이는 환자. 그리고 이번 의뢰를 맡은 힐러로 추측되는 남자. 이렇게 네 명이 모여있었다.

"확실히 치료해드리겠습니다."

'응?'

힐러는 뜻밖에도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사제?'

보통 사제들은 모험가 조합의 의뢰를 맡지 않는다. 교회 안에 처박혀서 기도만 하기에도 바쁜 놈들이니까.

그러니 사제가 모험가 조합의 의뢰를 맡았다면, 크게 두 가지 경우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교단의 명령을 받아 모험가 조합과 협력하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교회 밖을 돌아다니는 사제라는 소리다.

'이 녀석, 방랑 사제인가.'

사제들은 보통 교회에 죽치고 앉아서 사람들의 골드를 빨아들이지만, 드물게 교회 밖을 떠돌아다니는 놈들도 있다. 그런 자들을 방랑 사제라 부른다.

성지 순례를 목적으로, 혹은 신성력을 갈고 닦기 위해 수행을 떠난 사제다.

'게임으로 치면 교회 사제들은 NPC, 방랑 사제들은 플레이어겠지.'

세상을 돌아다니며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라는 의미로 만들어진 제도지만, 보통은 신성력으로 잘난 척하는 놈들이 많다.

'사제는 모험가보다 신성력이 높아서 힐빨이 좋으니까.'

강승현은 방랑 사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놈들도 힐에 의존하느라 시야가 좁은 놈들이야. 일반 사제보다는 살짝 낫지만....'

그나마 나은 점이 있다면, 방랑 사제는 일반 사제처럼 돈을 왕창 뜯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유는 수행 중이라 여행에 필요한 여비만 받는 게 규율이라서.

"이아 아이베르."

방랑 사제는 가볍게 기도했다. 치료하기 전에 꼭 신한테 기도를 드려야 한다나 뭐라나.

"부탁드려요. 사제님.... 포션으로 버티고 있지만, 더는 못 버틸 거 같아요."

안색이 하얗게 질린 환자가 바지를 걷어 올렸다. 드러난 다리는 붕대에 감겨 있었다. 붕대가 피로 젖어서 새빨간 걸 보면, 여전히 지혈이 안 되는 것 같다.

"지금도 어지러워?"

여자 동료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응.... 하지만 괜찮겠지.... 사제님도 오셨고."

환자는 애써 웃어 보이며 붕대를 풀었다.

붕대 아래에 있던 상처가 드러나는 순간, 강승현은 [관찰의 눈]을 발동했다.

[감염][출혈]

[날카롭게 베인 상처 부위에 뾰족한 이빨 자국이 남아 있다.]

[언뜻 봐선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아주 작다.]

'출혈에 감염. 당연하겠지.'

아무 이유 없이 피가 흘러나올 리가 없다. 그것도 일주일 내내.

지금까지는 포션으로 어떻게든 버텼지만, 그것도 오늘이 한계인 모양이다.

'출혈량이 많은 건 아닌데.'

사제와 대화하는 동안에도 환자의 상처에선 피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음을 편히 드시게나. 이제 치료를 시작할 테니."

주절주절 떠들던 사제가 힐을 쓰려는 듯 신성력을 뿜어내려 했다.

"아 잠깐만요. 잠깐."

강승현은 그 상황에 끼어들었다.

"뭔가?"

구경하던 사람이 갑자기 말을 걸자, 사제는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지금 치료 중인 거 안 보이나?"

중년의 사제는 방해하지 말라며 잔소리했다. 강승현은 사제의 말을 무시하고 제 할 말을 했다.

"힐 하시려구요?"

"무척 당연한 걸 묻는군."

"해봤자 소용없을 텐데요."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사제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환자의 상처를 가리켰다.

"이 상처를 못 본 건가? 눈이 있다면 알겠지. 힐러가 아니라면 참견하지 말게나."

"힐러로서 말씀드리는 건데, 힐 써봤자 소용없습니다."

강승현이 스스로 힐러라고 밝히자, 사제는 무척 어이없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침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자네가 어떤 힐러인지는 모르겠으나, 내 간단히 자기소개하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이베르 님을 모시는 사제 허이스 핀."

그렇게 묻지도 않은 허이스의 자기소개가 시작됐다.

"내 입으로 말하기 쑥스럽지만, 어마어마한 신성력을 가진 사제라고 자부하고 있지."

입으로 말하기 쑥스럽다면서 아주 잘만 말하는 사제였다. 강승현은 허이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지금은 몸과 마음을 갈고 닦기 위해 세상을 돌아다니며 수행 중일세. 신성력이 높아질수록 치유의 힘이 증가하는 건 상식이니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지?"

허이스는 쉬지 않고 나불거렸다. 돌려 말하고 있지만, 해석하자면 '자네와 나는 수준이 다르다.'라는 뜻이다.

'역시 방랑 사제들은 하나같이 자기 자랑에 푹 빠져 사는군. 혼자 여행하다 보니 심심해서 그러나?'

방랑 사제는 수행을 떠나는 게 목적이다. 임시 동행은 종종 하지만, 어지간해선 동료를 만들지 않는다.

'혼자서 헤쳐 나가는 고독한 여행이 진정한 수행이라나 뭐라나.'

강승현은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자네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걸 보게나."

허이스가 환자의 다리를 가리켰다. 일주일은 지난 상처라고 했지만, 방금 다친 것처럼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인간의 치유력에는 한계가 있네.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선 신의 도움, 신이 보이는 기적, 신이 내린 은총인 힐을 쓰는 건 당연지사라네."

사제 놈들은 교과 과목 중에 쓸데없는 잡담하기가 있는 모양이다.

'나도 힐은 회복에 있어서 중요한 스킬이라 생각하긴 해.'

그 어떤 사람도 힐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상처를 회복하진 못한다. 엄청난 재생력을 가진 오크들도 힐보다 빠르게 회복할 순 없다.

'하지만 힐이 만능은 아니지.'

최고의 스킬이긴 하지만 단점이 없는 건 아니다. 힐 만능주의자들은 그 점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힐이 답이라며 찬양했다.

"사제님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 상처는 신성력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없거든요."

애초에 힐이 안 통할 상처였으니까.

"나보다 신성력이 한참 모자란 친구가 할 발언은 아니군."

허이스는 거만한 얼굴로 말했다. 사제들은 사람의 가치를 신성력으로 판단한다더니만.

"무턱대고 힐을 쓰기 전에 원인을 알아내라는 소리입니다."

"원인? 몬스터의 공격으로 인한 부상. 그로 인한 출혈. 더 알아볼 것도 없지 않은가."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게 아닙니다."

"저기요."

환자의 일행 중 하나인 노란 머리 여자가 입을 열었다.

"힐러라고 하셨죠? 근데 힐을 쓰지 말라니.... 도대체 뭔 소리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진짜 힐러는 맞나요?"

여자는 강승현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가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여자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힐러 배지를 보여주시든가, 아니면 물러나세요. 방해하지 마시고."

"힐이 안 통한다는 건 그쪽이 더 잘 아실 텐데."

강승현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여자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인드 마을에 오자마자 힐러를 찾아가긴 했죠. 효과는 없었지만."

"그런데 왜 또 힐을 받으려는 건데요? 돈 낭비하고 싶어서?"

"아이베르 교단의 사제님이니까. 어중이떠중이 힐러와는 차원이 다른 분이잖아요."

힐이 안 먹히는 게 아니라 힐러의 실력이 모자랐을 뿐이다. 뛰어난 힐러의 힐이라면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여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전형적인 힐 만능주의자의 사고방식이다.

"자, 자. 알았으면 방해 말고 물러나시게나. 자네가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끄는 동안에도 환자분의 안색은 더욱 나빠지고 있다네."

허이스가 물러나라는 듯 손짓하며 앞으로 나왔다.

"저는 분명 말했습니다. 힐 해봤자 헛수고라고."

"됐으니까 나가세요. 방해하지 말고."

"네네, 갑니다."

여자의 말에 강승현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휴게실 밖으로 나갔다.

"거룩한 빛."

휴게실 밖에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신성력이 뿜어져 나왔다. 본인이 말한 게 허풍은 아니었는지, 정말 어마어마한 신성력이었다.

"뭐, 뭐지? 분명 힐을 썼는데!"

하지만 이어서 허이스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피가 멎질 않는 거지?"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신성력이 많아봤자 애초에 힐이 안 먹힐 거라고.

22. 그치지 않는 출혈 2

"사, 사제님. 어떻게 된 거예요?"

"모, 모르겠네...."

허이스는 당황했다. 분명 힐의 치유력으로 상처는 회복되고 있었다. 하지만 출혈이 그치질 않았다. 상처가 회복되건 말건, 피는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상처가 나으면 피가 멎는 건 상식이건만, 어째서...."

이대로는 치료해도 아무 의미 없다. 겉 상처를 치료해봤자 피가 계속 흘러나온다면 핏물이 고일 테니까.

허이스는 반쯤 넋이 나간 채 힐을 멈췄다.

"이래선 지난번 힐러랑 똑같잖아...."

아이베르 교단 일류 사제의 힐도 통하지 않는다니. 여자는 착잡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즐 대륙의 어떤 힐러를 데려와도 레나를 고칠 수 없는 걸까?'

여자는 절망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동료, 환자 레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욱 창백해 보였다.

"아까 그 힐러님은...."

그때, 레나가 입을 열었다.

"힐이 안 통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는 방을 나가기 직전까지 몇 번이나 말했다. 힐은 소용없으니 관두라고.

허이스도 여자도 그 말을 듣지 않았지만.

"그 사람이라면 내 상처를 어떻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힐러 배지도 없는 놈이잖아. 그런 새끼가 무슨 수로...."

"지금까지 단 한 명도 눈치채지 못했어."

지난 일주일간, 이들은 레나를 치료하기 위해 힐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어떤 힐러도 레나의 상처를 낫게 하진 못했다. 힐을 사용해도 피가 멎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 힐러님만 빼고."

지금까지 만난 힐러 중, 힐이 무용지물이라는 걸 눈치챈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상처를 보기만 했을 뿐인데 눈치챘잖아."

"하지만...."

"지금 믿을 수 있는 건 그 힐러님뿐이야."

레나는 초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러는 동안에도 피는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포션으로 버티는 것도 이제 한계다.

"아, 알았어! 내가 그 사람 데려올게. 조금만 더 기다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휴게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생각해보니 그 녀석... 어디로 갔지?'

여자는 그의 이름도 모르고 어디 사는 누군지도 모른다. 아는 정보라곤 수상스러운 힐러라는 것뿐.

'모험가 조합이라도 가야 하나? 돌겠네, 진짜!'

다른 힐러는 의미가 없다. 반드시 그 힐러를 데려와야 했다.

'심지어 사기꾼 취급까지 했고....'

기껏 찾아냈는데 기분 나빠서 치료하기 싫다고 하면?

다른 힐러나 찾아가라고 하면?

여자는 아까 강승현을 쫓아낸 걸 후회했다.

"이미 떠났으면 어쩌지?"

하인드 마을을 떠나는 모험가가 한둘도 아닌데, 그중에서 힐러 하나를 어떻게 찾겠는가.

여자의 마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평범한 힐러라면 더러워서 피한다고 진작 다른 마을로 갔겠지...."

여자는 한숨을 쉬며 1층 중앙으로 나왔다. 일단 여관 종업원한테라도 물어볼 생각이었다.

여자는 줄리아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신가요?"

"지금 힐러 하나 찾는 중인데 혹시 보신 적 있나요? 머리랑 눈은 까만데 하얀 가운 입고 키는 엄청나게 큰...."

"강 선생님? 저기 계시는데요."

"...?!?"

줄리아가 가리킨 곳은 1층 구석 테이블. 강승현이 스태미나 포션을 마시며 뻔뻔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아까 진짜 힐러만 찾으신다고 하지 않으셨나?"

"다, 당신...."

"저는 힐러 배지가 없어서, 그쪽 분이 찾는 힐러는 아닌 거 같은데요."

그는 마을을 떠나기는커녕, 여관조차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 있었어?"

"아이베르 교단의 일류 사제님 힐이 실패하는 걸 또 어디 가서 보겠어요. 신성력은 죽여줬지만."

심지어 아까 그 난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재밌다는 듯 포션을 마시며.

"...."

여자는 강승현에게 할 말이 무척 많았으나, 지금 꼭 해야 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당신 말이 맞았어요.... 허이스 사제님의 힐도 소용없더라구요."

"당연하죠. 제가 그럴 거라고 했잖아요."

"...그쪽은 뭐가 문제인지 아시는 거죠?"

"대충은? 자세한 건 환자분 이야기를 들어봐야겠지만."

파삭!

강승현은 다 마신 스태미나 병을 깨트렸다. 여자는 벌게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염치없지만, 정말 염치없는 거 나도 알지만... 제발 어떻게 좀 해주세요.... 당신 말곤 아무도 몰랐다구요...."

여자는 벽에 머리를 박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아까 그 난리를 쳐놓고 도와달라고 부탁하다니! 내가 생각해도 양심 없지!'

하지만 동료를 구할 수 있다면 감당할 수 있었다. 지금 이 남자가 아니면 레나는 결국 죽을 테니까.

"...?"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여자는 고개를 들었으나 눈앞에 아무도 없었다.

"뭐 하세요? 계속 거기서 그러고 있을 거예요?"

뒤를 돌아보자 강승현은 벌써 휴게실 앞으로 나와 있었다. 여자가 고개를 숙이는 동안 일어나서 가버린 것이었다.

"빨리 오세요. 환자 치료해 드릴 거니까."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

"평소였음 좀 더 놀렸지만, 환자분 상태가 안 좋으니까 이쯤에서 봐 드릴게요."

이러더니 휴게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 진짜 뭐 저런 힐러가.... 같이 가요!"

여자는 황급히 강승현을 뒤쫓아갔다.

-휴게실로 돌아온 강승현은 내부를 둘러보았다.

아까와 별로 다를 건 없었다. 환자는 얼굴이 더 수척해졌고, 허이스는 넋이 나가 있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리지가 아까 그 힐러님을 데려왔어!"

방에 있던 남자가 레나에게 말했다. 힘겹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레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저, 힐러님.... 아까 무례하게 군 점은...."

"아 괜찮아요. 사과라면 이 친구가 다 했어요."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여자를 가리켰다. 리지라는 이름의 여자는 지친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환자분은 저한테 아무 말도 안 했잖아요.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아, 레나라고 합니다."

"레나 씨, 상처 좀 볼게요."

"네."

레나는 다리에 감고 있던 붕대를 풀었다. 상처는 아까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힐의 영향으로 살짝 회복된 것만 빼고.

"허이스 사제님?"

"어...? 어? 자네는...."

강승현은 허이스를 불렀다. 넋이 나가 있던 허이스가 정신을 차렸다.

"제가 말했죠? 힐은 안 통할 거라고. 괜히 신성력만 낭비하셨네."

"...."

"이건 애초에 힐이 소용없는 부상이에요. 힐을 백번 해봤자 소용없죠."

"힐이 통하지 않는 상처.... 자네 지금, 이 아가씨가 독에 중독됐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허이스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 말대로 독으로 인한 피해에는 힐을 써봤자 소용없다.

"확실히 중독은 힐이 통하지 않는 대표적인 부상이지만... 내가 봤을 때 이 아가씨는 중독 환자는 아냐."

"독에 대해 좀 아시나 봐요?"

"힐밖에 쓸 줄 모르는 힐러는 풋내기지. 이래 봬도 다양한 해독 스킬을 마스터한 몸일세."

허이스가 다시 거만한 얼굴로 말했다.

차원 이동자들은 포인트만 모으면 스킬을 뽑을 수 있지만, 아즐 대륙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빡세게 공부하고 수련을 해야 스킬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해독 스킬을 얻기 위해선 독에 대한 지식이 많이 필요하지. 다양한 종류의 독에 대해 알고 있어야 다양한 독을 해독할 수 있으니까."

즉, 해독 스킬을 쓸 줄 안다면 흔해 빠진 허접한 힐러는 아니라는 뜻. 허이스는 독이라면 자신 있다며 우쭐거렸다.

"그런 내가 판단했을 때, 이 아가씨는 독에 중독되지 않았네. 100여 가지의 독을 해독할 수 있는 사제의 판단이니 더 말할 것도 없지."

"저는 중독 환자라고는 한마디도 안 했는데요."

"무, 뭣?"

의기양양하게 떠들던 허이스는 강승현의 말을 듣고 당황했다.

실제로 강승현은 중독이라는 말은 한 번도 안 했다. 허이스가 지레짐작했을 뿐이지.

"일단 자세한 건 환자한테 들어보도록 하죠."

강승현은 얼빠진 허이스를 무시하고 레나에게 물었다.

"이 상처는 어쩌다 생긴 거죠?"

"하인드 마을에 오기 전에 돌 두더지한테 습격당했어요. 처음에는 아무 문제없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심각해져서...."

레나가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

'돌 두더지, 아즐 서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몬스터지.'

돌처럼 단단한 발톱으로 땅을 마구 파헤쳐서 농작물을 망치는 걸로 유명한 놈. 농부들이 누구보다 증오하는 몬스터다.

"별로 강한 몬스터도 아니고, 신경 쓸 정도로 심각한 상처는 아니었어요. 그래서 응급처치를 제대로 하지 않았더니...."

당시 레나 파티는 온갖 종류의 몬스터한테 쫓기고 있었다. 그래서 돌 두더지한테 당한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고 도망쳤다.

"카이테오 정글에선 정글 고블린 떼한테 쫓기고, 므이카 늪에선 악어 떼한테...."

레나는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정말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면서 온 모양이다.

"겨우 하인드 마을에 도착해서 이제 살겠다고 한숨 돌리려는데, 갑자기 몸 상태가 나빠졌어요...."

"마지막으로 묻는 건데, 이 상처 통증은 있나요?"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강승현이 입을 열었다. 레나는 그 말을 듣고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통증...? 그러고 보니, 피가 이렇게 나는데 통증은 없어요!"

"통증이 없다고?"

이야기를 듣던 허이스도 덩달아 놀란 얼굴을 했다.

상식적으로 이런 상처가 통증이 없을 리가 없다. 따로 약을 쓴 것도 아닌데 말이다.

"힐러님이 말하기 전까진 저도 눈치 못 챘어요.... 피 나는 것만 신경 쓰다가...."

"그렇게 중요한 걸 왜 이제 말하는 건가!"

허이스도 심각함을 눈치채고 소리쳤다. 뛰어난 사제라고 떠들어댄 게 허풍이 아니었던 모양.

"설마 흑마술인가?"

흑마술.

사제들이 쓰는 신성력과 반대되는 사악한 흑마력을 다루는 스킬.

교단 사제들이 무엇보다 혐오하는 스킬이다.

"저주 계통이라면... 힐이 안 통하는 게 당연하지!"

허이스는 열을 내며 소리쳤다. 저주에 걸린 사람한테 힐을 써봤자 오히려 대미지로 들어갈 뿐이다.

"진정하세요, 사제님. 흑마술 아니니까."

물론 헛발질이다. 강승현은 허이스를 말렸다.

"그럼 뭔가? 흑마술도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이런 짓을...."

"저주라면 힐을 썼을 때 대미지를 입었겠죠."

지혈은 실패했지만, 상처는 나았다. 힐이 먹히긴 먹혔다는 소리다.

"정말 저주에 걸렸다면 힐이 완전히 무효화됐겠죠."

"그러고 보니 흑마력이 느껴지지는 않는군...."

"수행 더 하셔야겠네. 최고의 사제라면서요."

이런 기본적인 걸 착각하다니. 어지간히 당황한 모양이었다.

"크으...."

허이스는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사제들은 자존심이 강하다. 강한 만큼, 자존심에 금이 가면 못 견뎌 한다.

"이래서 의뢰비 받아가실 수 있겠어요?"

"그럼 자네는 할 수 있다는 건가?"

"그럼요. 제가 레나 씨 치료하면, 의뢰 보상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흥! 마음대로 하게!"

허이스는 벌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강승현이 성공할 경우, 의뢰 보상을 넘기겠다고.

"자네가 할 수 있다면 말이지!"

강승현은 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끔 힐러들은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은 남도 못 할 거라고 착각한다. 그런 착각은 강승현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만들어주곤 했다.

"간단합니다."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병 하나를 꺼냈다. 진한 연녹색 액체가 담긴 포션이었다.

"이거 하나면 되거든요."

23. 그치지 않는 출혈 3

"포션이라고?"

"네. 보다시피 평범한 포션입니다."

강승현이 포션 병을 흔들자 톡 쏘는 상쾌한 박하 향이 풍겨왔다. 허이스는 박하 향을 싫어하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그 고약한 냄새는 또 뭔가. 방향제인가?"

"출혈을 멎게 할 치료제요. 임시 조치지만."

"어처구니가 없구만."

허이스는 기가 찬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힐도 통하지 않는 상처인데, 거기에 포션을 쓰겠다고?"

"힐이 안 통하니까 포션을 쓰는 겁니다."

"흥! 포션 같은 건 아무리 마셔봤자...."

"아, 허이스 사제님은 모르시나요?"

"뭐?"

"이건 마시는 포션이 아니에요."

강승현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못 먹을 건 아니지만... 별로 추천하고 싶은 맛은 아니라서."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시큼 떨떠름한 맛에 톡 쏘는 향이 첨가된 맛이다. 이런 걸 누가 먹고 싶어 하겠는가.

"마시건 아니건, 그런 게 뭐가 중요한가! 포션 같은 건 써봤자 소용없네!"

"아, 잡소리는 집어치우시고."

"뭬야?"

"일단 보고 말하시죠."

쩌저적!

강승현은 허이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포션 병을 깨트렸다. 포션 병이 깨지며 진한 연녹색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흡수]

강승현이 [흡수]를 발동하자 쏟아져 나온 액체가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일단 흡수하고....'

강승현은 레나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살포]

진한 연녹색 오오라가 뿜어져 나와 레나의 다리 상처를 감쌌다.

"이, 이럴 수가...."

얼마 지나지 않아 출혈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쩌적!

그리고 마침내.

강승현이 두 번째 포션 병을 사용하자, 그치지 않던 출혈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아이베르 교단의 최상급 사제조차 어찌하지 못한 상처였는데.

"말도 안 돼! 피가 멎었어!!"

"힐도 통하지 않았는데... 이런 포션으로?"

다들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강승현을 바라보았다.

'힐 만능주의자들은 이런 거 보면 기절하겠지.'

이것이 야매 힐러의 즐거움.

강승현은 직업 만족도 100%를 즐기며 입을 열었다.

"허이스 사제님, 이래도 포션 같은 게 소용없나요?"

"끄응...."

강승현과 달리 허이스는 입을 열 수 없었다. 포션 같은 건 쓸모없다고 소리쳤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출혈이 멎는 걸 보게 됐으니.

'무슨 수로 입을 열겠어.'

그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임시 조치이긴 한데...아무튼 출혈은 멎었네요."

"도, 도대체 어떻게...."

겨우겨우 입을 연 허이스가 꺼낸 말은 아이베르 교단 일류 사제의 발언이라기엔 무척 비참했다.

"힐조차 통하지 않던 출혈을... 포션 같은 걸로...!"

힐이 포션보다 못하다는 걸 본인 입으로 인정해야 했으니까. 자존심 강한 힐러에겐 엄청난 굴욕이다.

"궁금하세요?"

"당연히 궁금하지!"

"별로 대단한 건 아닌데요."

"이 늙은이 속 터지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당장 말하게!"

허이스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소리쳤다.

"그 전에, 힐을 써도 레나 씨의 피가 멎지 않았던 이유부터 설명할게요."

사실 왜 포션이 통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중요한 건 왜 힐이 통하지 않았는가.

"그건 이물질 때문입니다."

"이물질이라고?"

"몸 안에 이물질이 들어있어서 힐을 써도 지혈이 제대로 안 된 거죠."

아주 간단한 이유다. 레나의 몸 안에 이물질이 있었기 때문이다.

힐은 상처를 치료하는 스킬이지, 이물질을 제거하는 스킬이 아니기 때문이다.

"칼날이 박혀 있는 환자한테 힐을 써봤자 수명을 약간 늘려줄 뿐이잖아요."

제대로 치료하려면 이물질을 제거해야 한다.

"하지만 안에 파편 같은 게 박혔다면 당사자가 모를 리가 없네."

"마, 맞아요. 뭔가 박힌 적은 없어요. 그랬다면 제가 알았을 테니...."

허이스의 말에 레나도 동의했다. 돌 두더지의 공격에 당한 것만 빼면 뭔가에 찔린 적도, 꿰뚫린 적도 없다면서.

"어떤 이물질이냐에 따라 다르죠."

칼날이나 파편 같은 이물질이라면 환자도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평범한 건 아니다.

당사자는 눈치채지 못했다.

지속적인 출혈을 일으킨다.

결정적으로, 아무런 통증이 없다.

'여기에 [관찰의 눈]에서 얻은 정보를 더하면 답이 나오지.'

[감염][출혈]

[날카롭게 베인 상처 부위에 뾰족한 이빨 자국이 남아 있다.]

[언뜻 봐선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아주 작다.]

"언뜻 보기엔 돌 두더지한테 당한 상처가 원인인 것 같지만... 여길 잘 보세요."

"으음...."

"상처 부위에 다른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고."

아주 작은 이빨에 깨물린 상처. 정말 자세히 들여다봐야 알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상처였다.

"아주 작은 뭔가에 물리고 나서 피가 멎지 않게 됐다.... 전형적인 벌레 감염이죠."

이야기를 들어보면 금방 추론할 수 있다. 벌레 감염이라면 당사자가 눈치채지 못해도 이상하지 않다.

"감염이라고...?"

"버, 벌레요?"

"아까 말씀하셨죠? 므이카 늪을 지나왔다고."

"그랬죠...."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므이카 늪은 하인드 마을 근처의 대표적인 늪지대다.

'카이테오 정글에선 정글 고블린 떼한테 쫓기고, 므이카 늪에선 악어 떼한테....'

이들은 하인드 마을에 오기 전 므이카 늪을 지났다. 늪은 지형 특성상 벌레 몬스터들이 많이 서식하는 장소다.

"악어 떼한테 쫓기느라 응급처치도 못 하고 도망쳤다면서요."

"네.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럼 상처를 그냥 내버려 둔 채로 늪에 뛰어드셨겠네요."

"아...! 그래서 레나만!"

뒤에 있던 리지가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사실 나랑 펠도 돌 두더지한테 습격당했거든요. 근데 레나만 몸 상태가 나빠져서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거라면 이 상황이 납득 가는군."

"뭐, 뭔데? 무슨 이유인데?"

리지도 허이스도 드디어 눈치챈 모양이다. 옆에 있던 펠이라는 남자만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이런 건 친절한 힐러인 제가 설명해드릴게요."

강승현은 아주 친절하게 설명하기로 했다.

"리지 씨와 펠 씨도 돌 두더지한테 습격당했다고 하셨죠?"

"네. 금방 나아서 티도 안 나지만."

"어딜 다치셨는데요?"

"저는 손등을 다쳤고, 리지는 뺨을 긁혔어요."

펠이 손등을 보여주었다. 돌 두더지 발톱에 긁힌 자국이 살짝 남아 있다. 리지도 자세히 보면 뺨에 긁힌 자국이 있었다.

"사실 이게 정상이죠. 돌 두더지가 발톱으로 긁어봤자 얼마나 아프다고."

원래는 힐러를 만날 필요도 없는 상처다. 실제로 두 사람의 상처는 거의 다 나아서, 아주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근데 왜 레나만...?"

"레나 씨는 다리를 다치셨잖아요. 그게 제일 중요한 건데."

"어...아!"

펠은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소리쳤다.

"저랑 리지는 허리 위쪽인데, 레나만 허리 아래쪽을 다쳤어요!"

즉, 므이카 늪에 뛰어들었을 때 상처가 물에 닿은 사람은 레나뿐이었다. 다른 두 사람과 달리 다리를 다쳤으니까. 레나만 벌레한테 감염된 건 그 때문이다.

"하다못해 붕대라도 감아놨다면 상황이 좀 나았을 겁니다."

"휴, 우리가 몬스터한테 쫓기지만 않았어도."

결국, 운 나쁜 레나는 다친 상태로 늪에 뛰어들었고 '녀석'은 상처를 통해 몸 안으로 침입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출혈을 일으킨 것이다.

"설마 벌레였다니. 생각도 못 했어."

"나도. 그냥 다친 줄만 알았는데."

리지와 펠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러니 어떤 힐러를 찾아가도 낫지를 않지.

"저, 아까 그 포션은 뭐였나요? 그게 대체 뭐길래 출혈이 멎은 건지...."

"아, 이거요?"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포션 병 하나를 더 꺼냈다.

"덴트롤 박하 오일 농축액. 제가 직접 만든 수제 포션입니다."

진한 연녹색 빛깔에 코를 찌르는 박하 향이 특징인 포션. 덴트롤 박하로 만드는 하인드 마을 살충제다. 이전에 시궁쥐 떼를 잡을 때 사용했다.

'그때는 시간도 재료도 없어서 하나밖에 못 만들었지만, 지금은 한 박스 준비해놨지.'

여기 있는 사람이 전부 벌레한테 감염된다 해도 문제없다. 쓰고 남을 정도로 많이 만들어 놨으니까.

"약한 벌레는 이걸 쓰기만 해도 죽거든요. 만들기도 쉬워요."

"고작해야 살충제 따위로 출혈을 멎게 하다니...."

"출혈의 원인이 벌레라면, 죽이면 되잖아요."

강승현이 상처에 덴트롤 박하 오일을 쓴 이유다. 움직일 수 없다면 출혈도 일으킬 수 없으니까.

"그...그럼 이제 다 끝난 건가요?"

"아뇨. 아까도 말했지만 이건 임시 조치예요. 움직임을 아주 잠깐 멈추게 한 것뿐이라."

강승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늪에서도 아무 느낌 없었죠? 다리를 물었다면 따끔해야 했는데."

"네.... 전혀 몰랐어요."

"그건 놈이 마취 스킬을 갖고 있다는 뜻이에요."

므이카 늪에 사는 몬스터 중, 마취 스킬을 가진 몬스터는 그리 많지 않다. 마비 스킬이라면 또 모를까.

"그런 놈 중에 약 한 번 맞고 죽을 정도로 약한 몬스터는 없습니다."

그저 그런 잡벌레 몬스터는 아니라는 소리다.

"더군다나 마취 스킬을 갖고 있으면서 사람 몸에 기생할 정도로 작은 몬스터는 더더욱 적어요."

꽤 강력한 벌레 계열 몬스터.

특징은 흡혈과 마취.

서식지는 므이카 늪.

이 모든 걸 합쳐보면 놈이 대략 어떤 몬스터일지 눈앞에 그려진다.

'약으로 완전히 죽일 수 없다면 몸 밖으로 끄집어낼 수밖에 없지.'

슬슬 덴트롤 박하 오일의 효과가 떨어질 시간이다. 강승현은 잽싸게 나이프를 꺼냈다.

[절개]

강승현은 나이프로 상처를 그었다. 나이프가 지나간 자리에서 피가 촤아악 튀어 올랐다.

"헉...."

평범한 상처였다면 난리가 났겠지만, 레나는 아무 고통도 느낄 수 없었다. 자신의 다리가 나이프에 찢어지는 걸 남의 일처럼 바라볼 뿐이었다.

'이걸로 마취 스킬은 확정.'

마취 스킬 때문에 아무 고통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범위는 그리 넓지 않다. 상처 주위를 조금만 벗어났다면 바로 비명을 질렀을 테니까.

'마취 스킬과 동시에, 피가 멎는 걸 방해할 만한 스킬을 가진 몬스터는 딱 하나!'

촤아악!

"허, 허억...."

레나는 경악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갈라진 살덩어리 사이에서 시커먼 이물질이 꿈틀거리며 튀어나왔다.

"검은 늪 거머리!"

이놈이 그치지 않는 출혈의 원인이었다.

24. 그치지 않는 출혈 4

검은 늪 거머리.

녀석은 물가에 서식하는 거머리 계열 몬스터다. 본래 크기는 수십 분의 일이지만, 지금은 일주일 내내 사람 몸에 처박혀 있었던 탓인지 무척 통통했다.

철퍽!

상처에서 뛰쳐나온 거머리는 휴게실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레나는 소름 끼친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세상에...."

"저거 좀 귀찮은 놈이라. 지금 잡아야 해요."

검은 늪 거머리는 피를 먹기 전에는 약하디약하지만, 다른 생물의 피를 빨면 강해지는 특성이 있다. 거기다 저 거머리는 일주일 내내 포식하면서 덩치를 엄청 불렸다. 저 정도 크기라면 절대 만만하지 않다.

철퍽!

철퍽!

바닥에서 꿈틀거리던 거머리가 전속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놈이 향한 곳은 휴게실 배수구였다.

"다들 무기 꺼내세요."

놈은 물만 있으면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는 몬스터. 배수구를 통해 도망칠 속셈이다.

'그냥 놔뒀다간 다른 인간에게 기생하겠지.'

그렇게 되면 찾을 방법이 없다. 강승현은 다른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빨리!"

"아, 알았어요!"

"무기가 어딨더라...."

다들 허둥지둥 무기를 꺼내려 했다. 그사이 검은 늪 거머리는 점점 멀어져갔다.

'쓸모없는 놈들.'

다른 사람을 기다릴 시간이 없다. 강승현은 다시 한번 나이프를 휘둘렀다.

[절개]

스킬을 사용함과 동시에 검은 늪 거머리가 몸을 움직였다.

놈은 자신의 이빨로 강승현의 나이프를 받아쳤다. 벌레의 움직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스피드로.

카각!!

강승현은 인상을 쓰며 뒤로 물러났다. 단단한 쇳덩어리에 나이프를 휘두르는 기분이었다.

"이럴 줄 알았지...."

예상은 했지만, 엄청 강해진 상태였다. 사람 피를 일주일 내내 빨았으니 당연하겠지만.

'귀찮지만 그렇다고 그냥 놔둘 수도 없고.'

내버려 뒀다간 무시무시한 몬스터가 될 것이다. 강승현은 귀찮다는 얼굴로 나이프를 휘둘렀다.

[절개]

싸구려 나이프는 빛을 발산하며 거머리의 몸을 베어내려 했다.

캉!!!

거머리는 어김없이 받아 쳐냈다. 언뜻 보기엔 바위로 계란을 깨려는 것처럼 의미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의미 없진 않지.'

강승현이 나이프를 휘두를 때마다 거머리의 크기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맨 처음에 비하면 많이 줄어들었어....'

검은 늪 거머리는 싸울 때 빨아들인 피를 사용한다. 강승현의 공격을 막으려고 계속 싸우다 보니 비축해둔 피가 조금씩 줄어든 것이다.

'조금만 더 공격한다면 온몸의 피를 쏟아내고 말라비틀어질 텐데.'

강승현은 거머리를 살피며 생각했다.

'문제는 이 새끼가 배수구에 닿기 직전이라는 점....'

거머리도 가만히 앉아서 맞아준 건 아니었다. 녀석은 강승현의 나이프를 받아치며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거머리는 배수구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

'한 발짝만 더 물러난다면 배수구로 도망치겠지.'

아무래도 이번 공격이 마지막이 될 것 같다. 공격에 실패하면 거머리가 도망칠 것이고, 공격에 성공하면 거머리의 몸은 반 토막 난다.

[절개]

강승현의 나이프가 거머리를 내려찍었다.

촤악!!

드디어 강승현의 나이프가 거머리를 베었다. 나이프가 긋고 간 자리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잡았다!"

아직 숨은 붙어 있었지만, 이제 한 번만 더 베면 된다.

강승현이 승리를 확신한 순간,

빠가각!!

그의 나이프가 부러지면서 칼날이 튕겨나갔다. 거머리가 마지막 힘을 짜내 나이프를 부러트린 것이다.

"시발!"

강승현의 유일한 무기, 싸구려 나이프는 그렇게 최후를 맞이했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거머리는 피를 줄줄 흘리면서 배수구를 향해 기어갔다. 이대로 가다간 놈을 놓칠 것이다.

"빛의 속박 - 시간!"

촤르르르르!

그때, 허공에서 황금색 사슬이 나타나 거머리를 속박했다.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거머리의 움직임이 멈췄다.

"잘했어요. 나이스 타이밍."

"오, 오래는 못 버티네."

허이스가 식은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신성 스킬을 써서 거머리를 붙잡은 모양이다.

"일류 사제님이라면서요. 이런 건 눈감고 하셔야죠."

"뭐라고? 이게 얼마나 어려운 스킬인 줄 알고서 하는 말인가? 빛의 속박은...."

"아 네네. 허이스 사제님 최고네요."

대충 대답했지만, 허이스 덕분에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가 거머리를 잡지 않았다면 분명 놓쳤을 테니까.

'시간은 벌었지만... 무기가 없어. 예비용 나이프 하나 사둘걸.'

나이프가 없으면 [절개]를 쓸 수 없다. 안타깝게도 강승현의 인벤토리에 다른 나이프는 없었다.

'부러진 칼날이라도 써야겠다. 까짓 거, 치료하면 되니까.'

강승현은 손이 베이는 걸 각오하고 칼날에 손을 뻗었다.

탁!

동시에 뒤에서 뭔가 날아와 강승현의 손에 잡혔다.

나이프였다. 그것도 자신이 쓰던 싸구려와는 비교도 안 되는 훌륭한 나이프.

리지가 자신의 나이프를 던져준 것이다.

"쓰세요!"

"감사합니다."

강승현은 망설임 없이 나이프를 뽑았다. 동시에 황금빛 사슬이 소멸하며 거머리가 속박에서 풀려났다.

하지만 놈이 배수구로 들어갈 일은 없었다.

촤아아아악!!

푸른빛을 띤 나이프가 거머리를 반으로 갈랐기 때문이다.

-반으로 갈라진 검은 늪 거머리는 비참하게 꿈틀거렸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움직임을 멈췄다.

"덕분에 살았네요, 허이스 사제님. 이거 필요하세요?"

"그런 더러운 건 손도 대고 싶지 않네."

"그럼 제가 가져갈게요."

강승현은 놈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춘 걸 확인하고 검은 늪 거머리 잔해를 수거했다.

"죽었나요?"

"네."

"다행이다...."

레나는 안심하며 털썩 주저앉았다. 자기 몸 안에 저런 몬스터가 기생하고 있었다는 것도 충격인데, 그게 눈앞에서 날뛰었으니.

"조금 있으면 마취가 풀려서 아플 테니, 그 전에 치료해드릴게요."

"부탁드립니다."

"지금이라면 힐이 먹히겠지. 그렇다면 내가...."

강승현이 레나를 치료하려는데 허이스가 끼어들려 했다.

'아이베르 교단 최고 사제가 포션한테 밀려나다니!'

허이스는 이번 일로 자존심이 많이 깎였다. 그래서 어떻게든 실력을 입증할 생각이었다.

"안 됩니다."

"뭣?"

하지만 강승현이 막았다. 허이스는 당황한 얼굴이었으나 강승현은 단호했다.

"일주일이나 몸 안에 기생하고 있었으니...알을 까놨을 가능성도 있죠. 확인해서 제거하는 게 우선입니다."

"그러면...."

"여기는 제가 알아서 그냥 할 테니 앉아계시죠."

"알았네...."

자신보다 신성력도 낮은 모험가한테 이런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다니. 허이스는 무척 굴욕적인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누구 맘대로 내 밥그릇을 노려.'

사실 허이스를 막은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가 레나를 치료한다면 보상을 나눠야 하니까.

허이스가 앉는 걸 확인한 강승현은 레나의 상처를 살폈다.

"조금만 늦었어도 위험할 뻔했어요."

실제로 상처 안에서 수많은 알이 발견됐다. 이걸 눈치채지 못하고 방치했다면 조만간 부화했을 것이다.

'아마 쇠약해져서 죽었겠지. 원인도 모르고.'

모험가의 사망 원인은 대부분 몬스터와 연관되어 있다.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면 더 그렇다.

강승현은 상처 내부를 열심히 소독했다.

'알은 제거했고. 이제 남은 건 꿰매기.'

강승현은 마력 포션을 꺼냈다.

[실 뽑기]

포션 속 마력이 실처럼 뽑혀 나왔다. 이번에는 혈관을 잇는 게 아니라, 찢어진 피부를 꿰맬 때 쓸 생각이다.

'[관찰의 눈]은 필요 없지.'

찢어진 피부를 꿰매는 건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혈관보다 훨씬 쉬우니까.

[봉합]

파바바밧!

고민 없이 [봉합]을 사용하자 강승현의 손이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다. 바늘과 실이 빠른 속도로 찢어진 피부를 꿰맸다.

"허, 헉...."

"실로 피부를...?"

"무슨 재봉틀 같아!"

지켜보던 사람들은 넋 놓고 바라봤다. 실과 바늘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살과 살을 이어 붙였다.

"그런데 하나도 안 아파.... 신기하다."

검은 늪 거머리의 마취 효과가 남은 것도 있지만, 꿰매는 속도가 워낙 빨라서 레나는 아무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사, 사람의 몸을 인형처럼 꿰매다니!"

허이스는 매우 불쾌해했다. 힐이 있는데 왜 사람 몸을 인형 취급하냐고 날뛰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보시고 말씀하시죠?"

봉합을 마친 강승현은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상처를 보여주었다.

"이, 이럴 수가...."

허이스는 눈을 의심했다.

방금까지 찢어진 상처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붙어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실로 꿰맸다는 걸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꼭 힐을 쓴 것 같아!"

"실과 바늘로 이런 게 가능하다니."

실이 무척 가는 것도 있지만, 강승현의 봉합 실력이 무척 뛰어나다는 걸 의미했다.

"이건 확실히 힐보다 회복력은 느립니다. 하지만 실로 [봉합]하면 한 가지 특별한 효과가 생기거든요."

"그게 뭔가?"

"방어력 상승."

상처 회복만 하고 끝나는 힐과의 결정적인 차이. 마력 실을 사용해 [봉합]하면 상처 부위의 방어력이 크게 상승한다.

"방어력 상승?"

"이렇게 해두면 한동안 다리를 다칠 일은 없을 겁니다."

빠른 회복도 중요하지만, 또 다치면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마력 실로 봉합하면 완전히 나을 때까지 마력보호를 받을 수 있다.

"이게 2차 감염을 예방하거든요."

"하지만 회복이 끝난 이후에도 몸에 실이 남아 있을 텐데...."

"상처가 치유되면 알아서 소멸하니까, 실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마력 실은 마력 포션으로 만드는 실이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마력으로 분해된다.

"끄응...."

허이스는 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마지막으로 [완치판정].'

레나의 상처에 스킬을 사용하자 회복력이 상승했다. 영양분을 섭취하면서 푹 쉬면 예전처럼 돌아다닐 수 있을 것이다.

"이걸로 치료는 끝났습니다. 앞으로 일주일간 세끼 꼬박꼬박 챙겨 드시면서 몸 회복하세요."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힐러님!"

레나는 눈물을 흘리며 일어났다. 몇 날 며칠간 그녀를 괴롭힌 원인 모를 출혈이 완전히 사라졌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 힐러님을 놓쳤다면... 아, 생각도 하기 싫다."

레나의 동료들도 고개를 숙이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보, 보답을 어떻게 해야...."

"의뢰 보상으로 받아갈게요."

강승현의 목적은 처음부터 그거였다. 모험가 조합에 맡긴 의뢰 보상.

"아, 나이프 잘 썼어요. 성능 좋네요."

휴게실을 나가기 전, 강승현은 빌린 나이프를 돌려줬다. 나이프 손잡이에는 [리지]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냥 쓰세요. 나이프 박살 나셨잖아요."

리지가 부러진 칼날을 가리켰다.

"그래요? 그럼 사양 않고."

강승현은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챙겼다.

처음은 예의상 돌려주는 게 맞다. 하지만 주겠다면 받는 게 예의 아니겠는가.

'안 그래도 새 나이프 필요했는데.'

그간 쓰던 싸구려 나이프와 달리 칼날이 무척 예리해서 탐나는 물건이었다.

"이건 청은석으로 만든 청은단검이에요."

"청은석이라면 북부 지방에서만 나는 금속일 텐데."

"저는 북부 이펠리아 마을 출신이거든요. 모험가가 되겠다고 하니까 마을에서 만들어준 거에요."

아즐 대륙 모험가들은 마을을 떠나기 전 마을 특산물로 모험 장비를 만드는 전통이 있다. 무사히 돌아오길 기원하는 부적 같은 거라나 뭐라나.

"그렇게 중요한 걸 그냥 줘도 됩니까?"

"그것보다 동료의 목숨이 더 중요하죠."

레나를 치료해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한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혹시 이펠리아에 들를 일이 생긴다면 가족들에게 전해드릴게요."

가족들에게 전달한다면 언젠가 다시 주인 손에 돌아가겠지.

"자, 그럼."

환자 일도 마무리했겠다, 강승현은 지친 얼굴로 앉아 있던 허이스에게 말했다.

"허이스 사제님, 의뢰 실패 보고하러 가시죠? 그래야 제가 보상을 받잖아요."

허이스의 표정이 휴지처럼 구겨졌다.

25. 의뢰 브레이커

"뭐라고?"

"제가 대신 성공했으니, 허이스 사제님은 의뢰에 실패하신 거잖아요."

강승현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힐러는 의뢰에 실패하는 걸 굴욕으로 여긴다. 의뢰에 실패한다는 건 환자를 치료하지 못했다는 소리니까.

'내, 내가 힐러 의뢰에 실패하다니.'

그런 의미에서 사제 허이스(만 47세/방랑 사제)는 평생 동안 맛본 적 없는 굴욕을 맛보는 중이었다. 그것도 새파랗게 어린놈한테.

"사제님이 의뢰 실패 보고하면, 레나 씨가 그걸 빌미로 의뢰 취소하세요."

현재 강승현이 받을 보상은 모험가 조합에 맡겨진 상태다. 받으려면 레나가 의뢰를 취소해야 한다.

"좀 번거롭지 않나요? 의뢰 취소하려면 돈을 내야 한다던데...."

의뢰를 취소하면 돈을 돌려받을 수 있지만, 정당한 이유 없이 취소할 경우 수수료를 떼고 돌려준다.

"의뢰 실패는 정당한 취소 사유잖아요."

강승현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의뢰 실패를 빌미로 취소할 땐 수수료를 떼어가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레나 씨는 수수료 절반을 돌려받고, 저는 수수료를 떼이지 않고 보상을 받을 수 있거든요."

거기다 맨 처음에 뜯어간 수수료 절반을 환불해준다. 모험가 조합 입장에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아! 모험가 조합을 거치지 않고 그냥 바로 드리면 수수료를 못 떼어가겠네요!"

"바로 그겁니다."

야매 힐러로 아즐 대륙에서 산 지도 어느덧 3년. 강승현은 모험가 조합과 힐러를 털어먹는 데 도가 튼 상태였다. 그것도 합법적인 방법으로.

"그럼 허이스 사제님. 잘 부탁합니다."

"끄응...."

허이스는 굴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강승현의 말투는 공손했으나, 실상은 이런 뜻이다.

'빨리 의뢰 취소하고 나한테 넘겨.'

속내가 뻔히 들여다보이는 행동. 그러나 허이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의뢰에 실패한 힐러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여기서 버텨봤자 평판만 떨어질 뿐이다.

-"의뢰 실패... 보고하러 왔습니다."

"네? 실패요?"

허이스는 이를 악물고 의뢰서를 내밀었다. 모험가 조합 접수원 필은 믿을 수 없어서 다시 물었다.

"실패, 했습니다."

몇 번을 되물었지만 허이스의 반응은 같았다.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말도 안 돼.'

접수원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생각했다.

허이스 사제는 최근 모험가 조합을 방문한 모험가 중 가장 실력 있는 힐러였다. 무려 아이베르 교단의 최상급 사제 중 하나였으니.

'교단 고위직도 노릴 수도 있는 분이신데....'

당사자는 좀 더 수행이 필요하다며 방랑 사제로 떠도는 중이었지만, 실력만은 보증된 힐러였다.

'그런 사람이 의뢰 실패라니?'

그간 가져간 의뢰를 전부 성공한 사람이라, 이번 의뢰도 당연히 성공할 거라 생각했다.

'의뢰 취소 확정이다....'

모험가 접수원은 좌절했다. 그 대단한 허이스가 어찌할 수 없다면, 하인드 마을 모험가 조합에선 손쓸 방법이 없다. 취소 절차를 밟는 게 당연했다.

"그래도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접수원은 영혼 없이 단골 멘트를 뱉으며 의뢰서를 수거했다. 의뢰서에 녹색 도장을 찍자 파란 종이가 연두색으로 변했다.

{의뢰 실패}

모험가 조합도 모험가도 전부 원치 않는 순간이다. 접수원 필도 사제 허이스도 굳은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의뢰인 레나의 대타로 온 리지만 웃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의뢰 취소 가능하겠죠?"

"네.... 정당한 취소 사유입니다."

이름난 힐러가 실패했다는데 무슨 말을 하겠는가. 접수원은 서글픈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 의뢰의 폐기 절차에 들어가겠습니다. 모험가 조합 정책상 정당한 사유로 의뢰가 취소 될 경우... 지불하신 수수료의 절반을 환불해드립니다."

접수원이 받은 수수료의 절반과 맡긴 보상을 돌려주었다. 리지는 웃음꽃을 피우며 돈주머니를 받았다.

그리고 옆에 있던 강승현도 그 모습을 보며 활짝 웃었다. 모험가 조합의 의뢰를 취소시키는 것만큼 재밌는 것도 없다.

'내가 이 맛에 이 일 한다니까.'

의뢰를 정당한 이유로 취소시키는 것. 야매 힐러 일을 하면서 가장 짜릿한 순간 중 하나다.

'또, 강승현 님이....'

접수원은 허이스와 리지, 두 사람의 뒤에 서 있는 강승현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길래!'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가 개입하면 높은 확률로 의뢰가 취소됐다.

원래 의뢰인들은 어지간해선 의뢰를 취소하지 않는다. 실패했더라도 의뢰를 계속 걸어놔야 새 모험가를 찾을 테니까.

'결국... 의뢰인이 의뢰를 취소한다는 건, 다른 이유로 문제가 해결됐다는 소리라고.'

힐도 쓸 줄 모르는 저 남자가 허이스 대신 의뢰를 해결한 게 틀림없다. 한 번이면 우연이라 생각하겠지만, 이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의뢰 브레이커.'

강승현은 하인드 마을 모험가 조합에서 꽤 유명한 모험가였다. 좋은 쪽은 아니고 나쁜 쪽으로.

'힐도 쓸 줄 모르는 사람이 도대체 무슨 재주를 부리는 건지.'

모험가 조합은 강승현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불법을 저지른다면 출입 금지하겠지만, 힐을 못 쓰는 거만 빼면 꼬투리 잡을 게 없는 인간이었다. 그는 언제나 룰의 허점을 교묘하게 이용해 합법적으로 움직였다.

'정식 힐러가 아니라서 힐러 의뢰는 못 받지만, 남이 실패한 의뢰에 간섭하는 건 자유니까....'

과거에 이 점을 지적했더니,

'불만 있으면 힐러로 인정해주시면 됩니다. 아니면 저보다 실력 있는 힐러를 보내시든가? 실패 안 할 놈으로.'

이렇게 말하며 모험가 조합을 도발했다. 이러니 모험가 조합 입장에선 요주의 인물일 수밖에.

-"그럼 수고하세요."

강승현은 기분 좋게 웃으며 접수원에게 인사했다. 접수원은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험가 조합 입구로 향하자 리지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레나는 그 어떤 힐러도 치료하지 못했겠죠. 정말 감사합니다."

그녀는 의뢰 보상이었던 돈주머니를 내밀었다.

"이건 얼마 안 되지만 의뢰 보상이에요. 모험가 조합이 가져간 수수료도 포함했어요."

"감사합니다. 지금 제가 돈이 꼭 필요해서...."

그것도 아주 많이.

강승현은 기쁜 얼굴로 돈을 받았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차라도 한잔하고 싶은데, 여유가 없네요."

"뭐 다른 일이라도 있으세요?"

"간단한 의뢰라도 해야죠. 레나 밥 먹이려면."

리지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이번 일로 저금을 다 털어서 빈털터리 신세라고.

"줄리아 씨한테 말하면 싸고 맛있는 영양식을 만들어 줄 거예요. 강승현 힐러한테 들었다고 하세요."

"당신 정말, 별난 사람이네요."

보통 힐러는 환자를 고치면 그걸로 끝이다. 강승현처럼 환자를 계속 신경 써주는 힐러는 드물다.

"그럴 땐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해주셔야죠."

"친절하고 못된 사람이겠죠."

"그 말도 맞네요."

강승현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친절하고 못된 사람.

모순적인 것 같지만 모순적이라 마음에 들었다.

"다음에 또 오시면 10% 할인해드릴게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너무 다치진 마시고 살살 다쳐서 오세요."

강승현은 떠나는 리지한테 손을 흔들어줬다.

"자 그러면."

강승현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멍하니 서 있는 허이스가 보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허이스 사제님."

"...."

"아까 허이스 님 아니었으면 거머리를 어떻게 잡았겠어요."

감사하다는 건 진심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런 좋은 의뢰를 뺏어 먹지 못했을 테니까.

"힐 능력도 뛰어나시고, 해독 능력도 뛰어나시고, 몬스터 사냥 능력도 뛰어 나시고. 정말 최강의 사제님이십니다!"

"...."

"이제 여기에 벌레 생태학만 공부하시면 되겠네요."

"자네는 남을 놀리는 게 그렇게 좋은가?"

"네. 그럼요."

모험가 조합의 의뢰를 망치는 것만큼이나, 의뢰에 실패한 힐러를 놀리는 건 즐거운 일이다.

"이, 이런 고얀 놈!"

허이스는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으나 강승현은 싱글벙글 웃었다.

'그러니까 누가 신성력 가지고 잘난 척하랬나.'

그저 받은 만큼 돌려줄 뿐이다.

"오늘 기분도 좋은데 제가 쏩니다! 술 한잔합시다!"

"됐네."

"사제님이 이런 큰돈을 양보해주셨는데 어떻게 그냥 넘어갑니까. 제가 살 테니 돈 걱정 마세요."

"이이이익...! 몹쓸 놈!"

허이스는 화를 내더니 다시는 보지 말자며 자리를 떠났다.

"공짜 술을 사준대도 난리야."

강승현은 멀어지는 허이스를 보며 웃어댔다.

-'어디, 얼마쯤 들어있지?'

의뢰를 마무리한 강승현은 돈주머니를 확인했다.

'60만, 65만, 70만.'

리지가 내민 주머니에는 70만 골드가 담겨 있었다.

'역시 의뢰 하나로는 부족하네.'

괜찮은 돈을 벌긴 했지만 아직은 모자랐다. 비상금으로 200만 골드가 있으니, 대충 200만 골드만 더 모으면 된다.

'모험가 조합에서 새 의뢰를 찾는 건 시간이 좀 걸리는데.'

뺏어 먹을 만한 의뢰를 찾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모험가 조합이 강승현을 인정하고 힐러 의뢰를 맡긴다면 모를까.

'일단 이거라도 팔아볼까.'

강승현은 검은 늪 거머리의 사체를 떠올렸다.

몬스터 잔해는 쓰이는 곳이 많다. 포션 재료는 물론이고 무기 재료, 마법 연구 재료... 기타 등등.

쓰이는 곳은 많지만 개인이 구하기는 어려워서, 잔해만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아즐 대륙에선 '약재상'이라고 부른다.

'석궁 값에 보탤 수 있겠지. 한 10만 골드쯤 하려나?'

강승현은 하인드 마을 골목길로 향했다.

사방에 약재상 천막이 널려 있지만, 그가 향하는 천막은 언제나 딱 하나. 가장 구석의 보라색 천막이다.

-"실례합니다."

안으로 들어가자 어떤 여자가 몬스터 잔해를 감별하고 있었다.

여자의 이름은 라페이. 이 천막의 주인이다.

"목소리 들으니까 강 선생이네. 뭐 사러 왔으면 대충 알아서 꺼내 가."

라페이는 몬스터 잔해한테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사러 온 건 아니고 팔러 왔습니다."

"그럼 진작 말을 하지."

라페이는 그제서야 이쪽을 바라보았다.

"무슨 가게가 사러 오는 손님보다 팔러 오는 손님을 좋아합니까."

"잔해 파는 건 재미없으니까."

약재상은 몬스터 잔해를 감별해서 가격을 매기는 직업이다. 기본적으로 돈이 목적이지만, 드물게 몬스터 잔해 연구를 좋아하는 녀석도 있다.

라페이가 그런 케이스였다.

"방금 막 잡은 녀석인데 감정 좀 해주세요."

강승현은 검은 늪 거머리 사체를 꺼냈다.

"검은 늪 거머리 아냐? 므이카 늪이라도 갔다 왔어?"

"가긴 갔죠."

직접 간 건 아니고 다른 사람이.

"음.... 반 토막 나서 많이는 못 받을걸. 긁히고 베인 자국도 꽤 많네."

몬스터 잔해는 상태가 좋을수록 비싸다. 사체를 반 토막 내버렸으니 가격은 반의반의 반 토막.

"놓치는 것보단 반 토막 내서 잡는 게 낫죠."

"그래도 이 정도면 상태가 괜찮은 편에...."

"그래서 얼마쯤 합니까? 10만 골드?"

라페이는 거머리 사체를 핀셋으로 집어 들었다.

"어?"

그때, 거머리를 살피던 라페이의 눈빛이 변했다.

26. 변이체

"너, 이걸 므이카 늪에서 잡았다고?"

"뭐 문제 있습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므이카 늪이 아니라 하인드 마을 여관에서 잡긴 했다. 하지만 검은 늪 거머리가 므이카 늪에서 왔다는 건 변함없다.

"환자가 므이카 늪에 갔다가 감염된 건 맞거든요."

"...너, 이게 뭔지 몰라?"

"거머리잖아요."

"이건 검은 늪 거머리 변이체야."

"변이체?"

"일반 몬스터와 좀 다른 놈이라고. 잘 봐."

라페이가 돋보기를 꺼내 보여주었다. 원래 검은 늪 거머리는 검은색 이빨을 갖고 있지만, 이번에 잡은 녀석은 빨간색이었다.

"일반적인 개체하고 이빨 색이 다르잖아."

일종의 돌연변이. 아즐 대륙에선 변이체라 불린다.

"정말이네."

"변이체 몬스터들은 일반 몬스터한테서 볼 수 없는 특징을 갖고 있어."

몸의 형태가 조금 다르거나, 특별한 힘을 쓰거나, 괴상한 물체를 뱉어내거나.

"거기다 생긴 것만 다른 게 아니야. 변이체 몬스터는 하나같이 일반 몬스터보다 강력하거든."

라페이는 거머리 변이체를 이리저리 살폈다.

"잡느라 꽤 고생했겠네."

"고생 좀 했죠."

강승현은 아까의 싸움을 떠올렸다. 그냥 살짝 강한 몬스터인 줄 알았는데, 초레어 유니크 변이체였을 줄이야.

"반으로 갈라져서 상태는 안 좋지만...."

"한 30만 골드쯤 하려나요."

라페이는 계산기를 두드리며 말했다.

"300만 골드 어때?"

"예?"

"부족하다면 더 올려 줄 수도 있어. 돈 마련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300만?"

그 돈이면 프리아의 석궁을 사고도 남는다. 강승현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물었다.

"이게?"

"당연하지! 내가 말했잖아!"

탕탕!

라페이가 테이블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이건 변이체라고!"

"그건 알겠는데, 그래 봐야 결국 레어 몬스터 비슷한 거 아닙니까?"

일반 몬스터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특별한 힘을 가진 강력한 몬스터. 레어 몬스터도 비슷한 성질을 갖고 있다.

"레어 몬스터와 비슷하긴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잖아. 몰라?"

"...레어 몬스터의 잔해는 재료로 쓸 수 없다."

"잘 아네."

라페이가 씩 웃으며 말했다.

일반 몬스터와 달리 레어 몬스터의 잔해는 아무런 능력이 없다. 심지어 고기 맛도 별로라 식용도 불가능. 잔해를 노릴 거라면 차라리 일반 몬스터를 잡는 게 낫다.

"레어 몬스터 힘의 원천은 유물이라고 하잖아. 그 대가로 유물이 훼손되면 힘이 소멸하는 모양이야."

레어 몬스터는 모종의 이유로 유물을 얻고 기존의 힘을 잃어버린 게 아닐까? 약재상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변이체는 레어 몬스터랑 정반대야."

변이체는 엄청난 힘을 품고 있어서 인기가 많다. 하지만 워낙 물량이 적고, 아직 연구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고가에 거래된다고.

"약재상들이 탐낼 만하네요."

"그래서 결론은? 팔 거야, 안 팔 거야?"

"당연히 팔아야죠. 제가 갖고 있어봤자 쓸 곳도 없고."

벌레 사체를 팔아서 귀한 석궁을 살 수 있다는데, 안 팔 이유가 없다. 라페이는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한 선택이야. 내가 이래서 강 선생을 좋아해."

"저야말로. 라페이 씨가 쿨해서 좋아요."

협상 성사.

두 사람은 서로 만족해하며 악수했다.

강승현은 큰돈이 들어와서.

라페이는 좋은 물건이 들어와서.

"안에서 돈 좀 꺼내올게. 싸구려만 거래했더니... 요즘 큰돈 쓸 일이 없어서."

"그러세요."

라페이는 천막 구석 안쪽으로 들어갔다. 돈을 꺼내올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할 일도 없는데 룰렛이나 한번 돌릴까.'

[누적 포인트 : 172포인트]

[룰렛 1회 이용 시 20포인트]

포인트는 넉넉하게 남아 있었다. 강승현은 룰렛을 돌렸다.

'5회 연속 룰렛.'

[포인트를 소모합니다.]

[누적 포인트 : 72포인트]

100포인트가 소멸하며 룰렛이 생성됐다.

[※룰렛 추첨 중]

룰렛은 빠른 속도로 돌아갔다.

'골드만 나오지 마라, 제발.'

[※룰렛 결과]

☆[기타(1골드)]

☆[기타(2골드)]

☆[기타(1골드)]

☆[기타(1골드)]

'시발!'

오늘도 룰렛에선 쓰레기만 쏟아져 나왔다. 그것도 일부러 노린 것처럼 푼돈만.

'골드러시!'

강승현은 룰렛을 보고 분개했다.

골드러시. 룰렛을 돌렸더니 골드만 쏟아져 나오는 현상을 뜻하는 차원 이동자들의 은어.

의외로 자주 발생해서 수많은 차원 이동자들에게 고통을 선사한다.

'어차피 쓰레기만 줄 거면 스태미나 스탯이라도 주든가!'

하다못해 스탯도 아니고 골드러시라니. 오늘은 정말 운이 더럽게 없는 날인 모양이다.

'...그래서 마지막 건 뭐냐.'

강승현은 오만상을 쓰며 5번째 룰렛 보상을 확인했다.

'보나 마나 골드겠... 응?'

☆[스킬(속성 포션 제조법-공기)]

마치 쓰레기만 줘서 미안하다는 듯, 새 스킬이 뽑혀 나왔다.

'...진작 이럴 것이지.'

어느새 오만상이 사라지고 강승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속성 포션 제조법.... 그런대로 쓸 만한 스킬이지.'

속성 포션은 이름 그대로 속성의 힘이 담긴 포션이다.

불 속성은 화염 포션, 물 속성은 습기 포션.

물 속성의 파생인 얼음 속성은 냉기 포션 등등.

'공기 속성이면 바람 포션인가.'

속성 포션을 사용하면 물체에 속성을 부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화염 포션을 무기에 사용하면 불 속성 스킬의 위력이 강해지고 열기가 뿜어져 나온다.

'바람 포션은 환자의 열을 식힐 때 유용하지. 한두 병 만들어 둘까?'

초급 속성 포션 재료는 구하기 쉽다. 물과 마력 포션, 거기에 속성스톤만 있으면 된다.

'물과 마력 포션은 이미 갖고 있으니, 남은 건 윈드스톤인가.'

이건 약재상을 찾아가면 구할 수 있다.

'마침 여기가 약재상 천막이고.'

강승현은 라페이가 나오는 걸 기다렸다.

"여기 300만 골드."

쿵!

밖으로 나온 라페이가 테이블에 돈주머니를 내려놓았다. 내용물이 300만 골드라서 그런지 묵직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윈드스톤 하나 주세요. 얼마죠?"

"윈드스톤? 그냥 가져가."

라페이가 선반에서 윈드스톤 한 봉지를 던져줬다.

"검은 늪 거머리 사체 받은 걸로 충분해."

"감사합니다."

"고맙기는, 내가 고맙지."

라페이는 씩 웃으며 검은 늪 거머리 사체를 가리켰다.

"이게 얼마나 귀한 건데. 돈 있어도 안 팔면 못 사."

"그렇게 귀해요?"

"자연산 변이체는 희귀하거든. 설마 므이카 늪에서 잡힐 줄이야."

레어 몬스터도 희귀한 편에 속하지만, 변이체 몬스터에 비하면 흔한 편이다.

"자연산? 그럼 양식도 가능해요?"

"일반 몬스터 수백, 수천. 수만 마리를 제물로 합성을 시도하면... 가끔 만들 수 있지."

이러한 변이체는 인공 변이체라고 한다. 자연산 변이체는 극히 드물어서, 실질적으로 시장에서 거래되는 건 인공 변이체다.

"하지만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건 아냐. 가능했으면 내가 진작에 만들었겠지."

특히 검은 늪 거머리 같은 상급 몬스터라면, 최고위급 술사가 아니고서야 인공 변이체를 만들 수 없다.

"이 주변에 그런 놈이 있다는 말은 못 들어봤고... 선생이 운 좋게 자연산을 잡았나 봐. 부러워라."

일주일 내내 고통받던 레나를 생각하면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할지. 강승현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생각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좋은 물건 들어오면 또 팔러와."

볼일을 마친 강승현은 라페이의 천막을 떠났다.

이번 일로 강승현의 수중에 들어온 돈은 무려 300만 골드. 이게 다 검은 늪 거머리 덕분이다.

'허이스가 몰라봐서 다행이다.'

다행히 허이스는 거머리 사체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다. 신성력은 뛰어나지만, 벌레에 관한 지식은 유치원생 수준이었던 모양이다.

'목표로 했던 1400만 골드도 모았겠다, 가게로 가볼까.'

하늘을 올려다보니 이제 막 노을이 지려는 참이었다. 강승현은 기어이 해가 지기 전에 석궁 값을 마련했다.

딸랑.

"계세요?"

"아, 어서 오세요."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주인이 반갑게 맞이해줬다.

"어제 오셨던 그 손님이군요."

그는 강승현을 기억하고 있었다. 600만 골드짜리 정신 집중의 반지 거래를 했으니 기억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돈 준비해왔습니다. 석궁은 잘 있겠죠?"

"아니, 벌써요?"

"1400만 골드. 세어 보세요."

쿵!

강승현은 가져온 돈 자루를 내려두었다. 어마어마한 양의 골드가 담겨 있어서 한눈에 봐도 묵직해 보였다.

가게 주인은 돈 자루를 보며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평범하신 분은 아니라 생각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굉장하신 분이었군요. 적은 돈은 아니었는데...."

하루도 안 돼서 400만 골드를 벌어오다니. 정말 놀랍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어지간히 강하지 않고서야 하루 만에 이런 거금을 벌어오긴 힘들 테니까.

"그 석궁이 꼭 필요해서요."

가게 주인이 놀라건 말건 강승현은 덤덤한 얼굴이었다.

"물론 드려야죠. 여기 있습니다."

무기점 주인이 프리아의 석궁을 가져왔다. 석궁은 흠집 하나 없이 새것처럼 반짝였다.

'이 석궁, 뭔지 모를 놈이 택할 정도니 평범한 물건은 아니겠지.'

새까만 몸체와 독특한 문양. 그리고 알 수 없는 오오라까지. 무언가 신비한 힘이라도 잠들어 있는 것 같다.

"잘 쓰겠습니다. 이제 이건 제 거네요."

"훌륭한 무기가 훌륭한 주인을 찾게 돼서 저도 기쁘군요."

가게 주인이 대답했지만, 애초에 강승현의 말은 가게 주인을 향한 발언이 아니었다.

'됐냐? 시키는 대로 손에 넣었다.'

뒤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무언가'에게 하는 발언이었다.

탁!

손으로 건드리자, 석궁은 검은빛에 휩싸이면서 팔찌 형태로 바뀌었다.

찰칵!

강승현은 팔찌를 손목에 착용했다.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벼웠다.

'확실히 가볍네.'

기습 전투할 때 유용할 것 같다. 팔찌 형태일 때는 석궁일 거라곤 생각할 수 없으니까.

'아직은 별말이 없군.'

강승현은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팔찌 형태로 착용하기까지 했지만, '무언가'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일단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길까.'

27. 질의응답 1

강승현은 자신이 묵는 여관방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문을 걸어 잠그고 주변을 살폈다.

'눈에 띄는 건 없고.'

아즐 대륙은 치안이 개판이고, 인권은 시궁창에 처박혀 있다. 모험가 하나가 큰돈을 벌었다는 게 소문나면 암살자 서너 명이 밤손님으로 찾아오는 일도 많다.

'찾아올 놈도 없겠지.'

하지만 강승현은 모험가 조합을 통하지 않고 거래하는 편이라, 돈을 벌어도 입소문이 크게 나진 않았다.

'덕분에 귀찮은 일은 없어서 좋지.'

강승현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제 방해할 사람도 없고, 엿들을 사람도 없다. 놈이 시키는 일도 깔끔하게 완수했다.

'뭐가 됐든 메시지를 보내기 딱 좋은 상황인데.'

강승현은 침대에 앉아, 오늘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메모했다. 메모하는 동안 '무언가'의 답변을 기다렸으나,

'뭐야, 안 나타나나?'

아무 일도 없었다. 강승현은 얼굴을 찌푸렸다.

'왜 아무 소식도 없어?'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해서 손에 넣었구만.

'설마... 그냥 정말 좋은 아이템이라, 놓치는 게 아까워서 알려준 건가?'

그럴 리는 없다. 아무 말 없다가 3년 만에 반응했다는 건, 무언가 이유가 있다는 소리니까.

'내가 뭔가 놓친 게 있나?'

강승현은 다시 한번 메시지를 살폈다.

[그걸손에넣으세요]

강승현은 착용한 팔찌를 바라보았다. 손에 넣으라고 해서 손에 넣었는데 아무 반응이 없는 이유가 뭘까.

'...혹시 여기서 말하는 손이 진짜 손을 말하는 게 아닌가?'

차원 이동자들 사이에서 쓰이는 은어 중 하나로 '손에 넣다.'가 있다. 이건 정말 손에 들라는 게 아니라, 인벤토리에 물건을 넣으라는 뜻이다.

'하긴, 그놈도 우리를 지켜봤는데 차원 이동자들 은어를 모를 리가 없지.'

강승현은 팔찌를 석궁으로 되돌렸다. 팔찌에 검은 기운이 휘감기며 석궁으로 되돌아왔다.

'석궁을 인벤토리에 넣어보자. 넣고 나서 안 되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 보고.'

강승현은 프리아의 석궁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해냈군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놈한테서 메시지가 날아왔다.

"...힌트 정도는 주시든가."

강승현은 메시지를 노려보며 말했다.

[업적 달성!]

동시에 업적 달성을 알리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이 정도는 예상했지.'

이런 귀찮은 일을 준비했다면 업적 하나쯤은 만들어 놨을 테니.

"응?"

하지만 평범한 업적은 아니었다.

[업적 달성 :□□□□의 □□]

[□□□□이남긴□□을□에□을경□□성.]

'뭐야, 이거 왜 이래?'

글자가 깨지기라도 했는지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알아볼 수 있는 말은 '업적 달성'과 '남긴' 뿐.

"지금 시스템 오류 난 거 같은데요?"

강승현은 '무언가'를 향해 소리쳤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본인도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그동안 나타난 업적 달성 메시지를 생각하면....'

[업적 달성 : 레어 1:1]

[레어 몬스터를 혼자서 사냥할 경우 달성.]

강승현은 최근에 달성한 업적을 떠올렸다.

'마지막 부분 [경□□성]은 이거겠지? [경우 달성].'

모든 업적 메시지는 이렇게 끝났으니까.

'가운데 글자 [□에□을]은 [손에 넣을].'

석궁을 손에 넣는 게 업적 달성 조건이었다. 정확하게는 인벤토리였지만.

'대충 빠진 글자를 추측해보면... 이런 문장인가?'

□□□□이 남긴 □□을 손에 넣을 경우 달성.

여기까지는 추측할 수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앞 단어 두 개는 알아낼 수 없었다.

'[무기]인가? 그럼 [을]로 끝날 리가 없는데. 석궁도 아닌 것 같고.'

강승현은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유물]이구나."

그거 말고는 마땅한 단어가 없다. 프리아의 석궁도 유물에서 얻은 아이템일 테니까.

알아낸 단어로 문장을 완성하면 이렇게 된다.

"...이 남긴 유물을 손에 넣을 경우 달성."

지지직.

강승현이 빈칸을 소리 내서 읽자, 상태창 화면이 지직거렸다.

[업적 달성 :□□□□의 유물]

[□□□□이 남긴 유물을 손에 넣을 경우 달성.]

'변했다.'

정답을 맞히자 텍스트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아직 맞추지 못한 '□□□□'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건 도대체 뭐지? 그래서 누가 남긴 유물인데?'

지금으로선 알 방법이 없다. 딱히 힌트 같은 것도 없으니까.

'이건 나중에 천천히 생각하자.'

궁금하긴 하지만, 당장 급한 건 아니다.

'지금 중요한 건....'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프리아의 석궁을 꺼냈다.

"보이시죠? 시키는 대로 이거 손에 넣었어요. 업적도 하나 깼고."

강승현은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근데 나한테 뭐 하실 말 없으십니까? 설마 이게 끝은 아닐 거 아냐."

상태창 너머에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건 확인했다. 놈의 부탁도 들어주었다. 남은 건 새로운 정보를 얻는 것뿐이다.

"그만 지켜보고 좀 나와 봐요. 얘기 좀 하게!"

[★]

강승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은 별을 띄운 메시지창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건 이 녀석을 상징하는 아이콘 같은 건가?'

뭐가 됐든 ★와 엮이면 놈에게 가까워질 수 있는 것 같다.

[알겠습니다]

"뭘?"

[당신의질문]

[답해드리]

[겠습니다]

드디어 놈과 소통할 기회가 손에 잡혔다. 어쩌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질문]

[5개]

그리고 이어서 날아온 메시지.

메시지의 문장이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이 녀석도 모든 걸 알려줄 순 없는 모양이다.

'혹시 시간제한이라도 있나? 아니면 글자 수 제한?'

물어보면 대답해주겠지만, 그런 걸 물어보는 건 질문 낭비다.

'신중하게 생각하자.'

물어보고 싶은 건 많지만, 할 수 있는 질문은 5개. 지금은 신중하게 생각해야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가장 궁금한 걸 물어보자.'

강승현은 허공을 향해 첫 번째 질문을 외쳤다.

"당신은 우리를 아즐 대륙으로 데려온 존재인가?"

잠시 기다리자 메시지 하나가 날아왔다. 글자 하나만 덩그러니 적혀있었다.

[O]

[4개남음]

"역시...."

예상대로 '무언가'는 지구인을 아즐 대륙으로 끌고 온 당사자였다.

"그래서 넌 도대체 누구야? 뭐 하는 놈이야?"

두 번째 질문을 던졌으나 답은 없었다. 같은 질문을 한 번 더 해봐도 마찬가지였다. 대신 질문이 줄었다는 메시지는 없었다.

"혹시 예 아니오. 이것밖에 못 하는 건가.... 아, 이건 질문 아니니까 대답하지 말고."

강승현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구체적인 이유는 못 듣겠지만... 이건 꼭 물어봐야 해. 이 녀석 말고는 답해줄 사람이 없으니까.'

강승현은 준비해둔 두 번째 질문을 외쳤다.

"우리가 지구로 돌아갈 방법은 있나?"

가장 중요한 질문. 그건 바로 집에 가는 방법이다.

'고작 질문 5개로 구체적인 방법은 알기 힘들지만, 있으면 언젠가는 찾을 수 있겠지.'

만약 없다고 하면?

'사람을 납치해 놓고 집에 갈 방법을 안 만들어놔?'

여기서 평생 살다 죽는다고 해도 상관없다. 저놈을 반드시 찾아서 죽일 것이다.

[O]

[3개남음]

다행히 강승현이 상태창 너머의 무언가를 죽일 필요는 없었다.

"있긴 있구나."

강승현은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구체적인 건 알 수 없지만, 집에 갈 방법은 분명 존재했다.

"진작 알려주든가."

작게 중얼거렸으나 놈한테서 답은 없었다.

'가장 급한 두 가지 질문은 해결했고. 남은 질문은 3개.'

이걸 어떻게 활용해야 가능한 많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인가. 강승현은 머리를 굴려댔다.

'나에 대해 궁금한 것도 많지만... 솔직히 별로 중요한 건 아냐.'

마력을 쓸 수 없는 이유라든가, 힐을 쓸 수 없는 이유라든가.

이런 것들도 궁금하긴 하지만, 이유를 알아낸다고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지금도 마력과 힐 없이 잘 먹고 잘살고 있으니까.

"지금까지 지구로 돌아간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강승현은 세 번째 질문을 꺼냈다. '무언가'가 어떤 답을 하냐에 따라 다음 질문이 정해질 것이다.

[X]

[2개남음]

"역시."

지난 3년간 지구로 돌아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 누구도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했다는 소리다.

'찾기 엄청 어렵거나, 일반적인 방법으론 알아낼 수 없거나.'

강승현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생각해 봤는데. 그쪽도 우리를 이유 없이 잡아 온 건 아닐 거 아냐. 뭔가 목적이 있는 거지."

지구인들을 아즐 대륙으로 끌고 온 이유. 거기에 뭔가 있을 것이다.

"아마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선 특별한 목적을 달성해야겠지. 지금까지 목적을 달성한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것 같지만."

지구로 돌아간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지난 3년간 목적을 달성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소리다.

'그 목적이 뭔지 알아내야 하는데.... 남은 질문 2개로.'

고작 질문 2개로, 원하는 답을 들으려면.

'OX 퀴즈로 가능한 많은 정보를 알아내려면 이 방법밖에 없지.'

엄청 길고 자세한 질문을 던지는 수밖에.

"당신은 지구인을 아즐 대륙으로 납치해왔다. 당신은 지구인들이 무슨 일을 해주길 원한다. 다음 보기 중 정답에 가장 가까운 걸 고르시오."

강승현은 수첩에 적은 문장을 허공에 보여주었다.

1)

{포인트를 모으는 것}

{아이템을 모으는 것}

2)

{스킬을 사용하는 것}

{성장해서 강해지는 것}

차원 이동자는 누구나 상태창을 쓸 수 있다. 그렇다면, 놈이 목표를 숨겨두기엔 상태창만 한 게 없다.

'상태창으로 할 수 있는 건 크게 4가지. 이중에 답이 있으면 좋겠는데.'

이 4가지 행동 중 가장 우선으로 해야 할 일은?

"1번에 정답이 있으면 O. 2번에 정답이 있으면 X. 이 중에 답이 없거나 전부 정답이면 5분간 대답하지 말고."

강승현은 허공을 향해 말했다.

이렇게 하면 질문을 아끼면서 정보를 얻어낼 수 있다. 놈의 답변에는 제한이 있지만, 강승현의 질문에는 딱히 제한이 없으니까.

'이제 남은 건 놈한테서 답을 듣는 것뿐이군.'

그리고 정확히 5분 뒤.

답이 적힌 메시지가 날아왔다.

28. 질의응답 2

[◎]

강승현은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녀석의 목적은 1번. 포인트를 모으거나 아이템을 모으거나 둘 중 하나였다.

'왜 5분이나 걸렸나 했네.'

설마 새 이모티콘 찾느라 오래 걸린 건가. 강승현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이제 마지막 질문. 포인트를 모으는 것과 아이템을 모으는 것 중 뭐가 더 중요하죠? 포인트는 O. 아이템은 X를 보내주세요."

강승현은 녀석의 대답을 기다렸다.

[◎]

이번에는 5분이나 기다릴 필요 없이 곧바로 답이 날아왔다. 녀석의 대답은 YES.

'역시 이거였나.'

'무언가'가 차원 이동자들을 돕는 이유는 그들이 벌어오는 포인트 때문이었다. 차원 이동자가 강해지면 더 많은 포인트를 벌어올 테니까.

녀석이 포인트를 모아서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이것만은 확실했다.

'이 새끼가 우리를 포인트 벌이 노예로 쓰려고 잡아 온 거네.'

보상을 게임처럼 룰렛 뽑기로 주는 이유가 있었다. 너무 많이 퍼줘서 강해지면 노예가 일은 안 하고 놀러 다닐 테니까.

"포인트 벌이 노예를 부리고 싶으면 아즐 대륙 사람들이나 부려먹든가."

강승현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아즐 대륙엔 강해질 수 있다면 영혼도 팔 놈이 수두룩한데, 뭐하러 지구 사람을 납치해다 노예로 부리는 건지.

'더 물어보고 싶지만, 방금 그게 마지막 질문이었지.'

놈은 이제 질문에 답변해줄 수 없다. 녀석한테도 뭔가 사정이 있는 듯했으니까.

"...아무튼."

강승현은 인상을 쓰며 말을 이어갔다.

"여기서 중요한 건, 차원 이동자 말고는 '포인트'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다는 점인데."

아즐 대륙 세계관에는 '포인트' 개념이 없다. 상태창과 마찬가지로 차원 이동자만 아는 개념이다.

그런데 '무언가'는 포인트를 모으기 위해 다른 차원에서 노예까지 불러왔다.

"토착민들도 모르는 시스템을 알고 있는 걸 보면 평범한 존재는 아닐 테고."

어쩌면 이 녀석이 포인트와 상태창 시스템을 만든 걸지도 모른다. 강승현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당신은 아즐 대륙의 신인가?"

신.

지구라면 웃어넘길 소리지만, 아즐 대륙에는 실제로 신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아이베르 교단이 숭배하는 아이베르 여신이 있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여럿 존재하지.'

아즐 대륙의 신은 인간 세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진 않지만,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힘을 내려준다. 아즐 대륙의 성직자들이 강한 이유가 그 때문이다.

"신도 아닌데 이런 짓을 벌이는 거면... 그게 더 대단한 거고."

다른 차원에서 노예 데려오기.

데려온 노예들 성장 도와주기.

새로운 시스템 창조하기 등등.

아무리 봐도 신이나 할 법한 짓거리다.

'...여기까지 알아낸 건 내가 처음인 것 같은데.'

애초에 차원 이동자들은 놈과 대화하긴커녕, 놈의 목적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여기까지 파고든 건 강승현이 유일했다.

"솔직히 댁이 포인트 모아서 뭘 하려는지는 관심 없고."

아즐 대륙에서 지내는 것도 재밌긴 하지만.

"내가 궁금한 건 집에 갈 방법이거든요."

강승현에겐 지구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 그러니 어떻게든 대답을 들어야 했다.

"이제 남은 질문 횟수는 없긴 한데, 내가 댁이라면 어떻게든 답변할 거예요."

현재 '무언가'의 목적을 이룰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은 강승현뿐이니까.

"뭔가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건 알겠는데, 남이 도와주길 바라면 어떻게 발악이라도 해보든가."

지지지지직.

그때, 괴상한 잡음과 함께 상태창 화면이 멋대로 켜졌다.

[포인트를 소모합니다.]

[누적 포인트 : 52포인트]

"응?"

[포□트□소□모합□□□다□]

[누□ 포인트 : □32포□인트]

[포□모합□□□다□]

[누적 포□트 : 12포□트]

[포□□인□니다.]

[누적□□트 : 2□인□]

[□트를□모□합□□□□]

그리고 기괴한 메시지와 함께, 모아둔 포인트가 갑자기 사라졌다.

"아니 시발? 뭐 하는 거야?"

강승현은 어이가 없었다. 발악하라곤 했지만 이런 짓을 하라는 건 아니었는데.

[□□□□□ : 0포인□]

그렇게 모아둔 포인트는 바닥났다. 많이 모아둔 건 아니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흔적도 없이 증발한 것이다. 마치 통장에 넣어둔 돈이 빠져나간 것처럼.

"내 포인트 안 내놔?"

강승현이 허공을 향해 소리치자,

[Q] [5000포인트를 모아주세요.]

[보상] : [★]

[천□히 모으ㅅ[ㅔㅇ요]

눈앞에 이런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아무리 봐도 게임에서 자주 나오는 그거다.

"...퀘스트 창?"

좀 엉성하고 대충 만들어지긴 했지만 틀림없는 퀘스트 창이었다.

'지금까지 퀘스트 시스템 같은 건 없었는데.'

업적 시스템은 존재하지만, 이런 식으로 특별한 행동을 유도하는 퀘스트는 없었다. 애초에 녀석은 차원 이동자에게 접촉한 적이 없었으니까.

'대뜸 내 포인트를 가져가더니 퀘스트를 보낸 걸 보면... 혹시 포인트를 사용해서 시스템을 관리하는 건가?'

그렇다면 지금까지 있었던 일이 납득 간다.

그동안 왜 차원 이동자한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지.

뭐 때문에 뚝뚝 끊기는 대답을 한 건지.

왜 남의 포인트를 멋대로 훔쳐 간 건지.

'저 녀석, 포인트가 없으면 이쪽에 개입할 수가 없구나.'

강승현은 포인트의 용도를 깨달았다.

포인트는 상태창 시스템을 관리할 때 쓰는 에너지다. 새로운 시스템 추가는 물론이고, 메시지를 보낼 때도 포인트가 소모된다.

'메시지 하나 보내는데도 포인트가 들어가니... 쉽게 말을 못 걸었던 거지.'

그것도 적은 수가 아니라 상당히 많은 양이 필요했다.

'뒤로 갈수록 메시지 길이가 짧아진 이유가 그거였군.'

강승현의 질문에 대답하느라, 모아둔 포인트가 바닥났기 때문이다.

'퀘스트 창을 만들려는데 포인트가 부족해서 내 걸 뺏어간 건가.'

강승현은 퀘스트 창을 다시 바라보았다.

[Q] [5000포인트를 모아주세요.]

[보상] : [★]

[천□히 모으ㅅ[ㅔㅇ요]

예정에 없던 걸 급하게 만드느라 오타투성이가 된 모양이다.

'천천히 모으라는 걸 보면, 한동안은 소통이 힘들 거라는 소리겠지.'

강승현의 생각대로라면 녀석은 비축해둔 포인트가 바닥난 상태. 글자 하나도 보낼 수 없을 것이다.

"뭐, 대답은 못 해도 내 목소리를 듣고는 있을 테니... 아무튼 5000포인트 모으라는 소리죠?"

5000포인트. 1회 20포인트 룰렛을 250번 돌릴 수 있는 양.

적은 양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못 모을 양은 아니다.

'보상은 검은 별. 십중팔구 ★이 붙은 스킬.'

김호정의 말에 의하면, 차원 이동자가 ★이 붙은 스킬을 4개 모으면 무슨 일이 일어난다.

'★스킬을 모으라는 건가.'

이런 식으로 퀘스트를 깨다 보면 '무언가'와 다시 접촉할 수 있을 것 같다. 강승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쪽을 계속 '무언가'라고 부르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이름 모를 신 새끼라고 부를 수도 없고...."

신이라고 부르는 건 왠지 좀 재수 없으니까. 강승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세계 노예를 부리며 포인트를 버는 노예상인.'

'아니면 월급도 룰렛으로 받아 처먹어야 할 병신새끼.'

이래저래 할 말이 많았지만, 일단은 멀쩡한 명칭으로 불러주기로 했다.

"상태창을 관리하고 있으니 상태창 관리자... 편하게 '관리자'라고 부를게요."

놈한테서 대답은 없었지만, 원래 무소식은 희소식. 강승현은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됐으니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룰렛 확률 조정 좀 해주시면 고맙겠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심을 담았지만, 딱히 룰렛 확률이 조정되는 일은 없었다.

-"...피곤해 죽는 줄 알았네."

강승현은 뻐근한 몸을 풀며 중얼거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관리자'는 인간을 초월한 신적 존재. 그런 녀석과 OX 퀴즈를 했으니 피곤해지는 게 당연하다.

'여기 와서 온갖 마법도 경험하고 괴물이란 괴물은 다 겪어봤지만, 설마 신하고 대화하는 날이 올 줄이야.'

강승현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생각했다.

아즐 대륙에 신이 실제로 존재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들과 엮일 일은 거의 없었다. 강승현은 딱히 믿는 종교도 없고, 교단을 갈 일도 없었으니까.

'흔하디흔한 힐 한 번 받아본 적 없지.'

강승현 자신이 야매 힐러라, 사제와 교단하고 사이가 나쁜 것도 한몫했다. 툭하면 교단이 싫어할 짓만 해대는데, 신하고 대화할 일이 있을 리가.

'신 같은 거, 나랑 관계없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렇게 가까운 곳에 신이 있었을 줄이야.

왠지 재수 없게 느껴졌다.

'뒤에서 사람 고생하는 거 구경하느라 얼마나 재밌었을까.'

강승현은 지친 몸을 이끌고 침대에 누웠다.

그간의 망한 룰렛 보상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불필요한 스탯과 꽝이나 다름없는 푼돈을 받고 분노한 자기 자신. 정말 빡치는 순간들이었다.

'아무래도 지금 중요한 건 지구로 가는 게 아닌 것 같아. 그 새끼를 패주는 게 중요하지.'

그냥 집에 갔다간 억울해서 잠을 못 잘 것 같으니까. 강승현은 무슨 일이 있어도 관리자의 본체를 패주겠다고 다짐했다.

'아, 관리자하고 대화하느라 이걸 깜빡했네.'

강승현은 침대에 누운 상태로 업적 창을 열었다.

[업적 달성 :□□□□의 유물]

[□□□□이 남긴 유물을 손에 넣을 경우 달성.]

"이것도 업적이면... 업적 보상이 있을 거 아냐."

강승현은 아까 나타난 업적을 확인했다.

비록 부분부분 글자가 깨지긴 했지만, 틀림없는 달성 업적. [보상 수령] 버튼을 누르면 보상을 받을 수 있다.

'뭘 주려나. 좋은 거 주면 좋겠는데.'

[보상 수령]

포인트 벌기 좋은 스킬이 나오기를 바라며 강승현은 버튼을 눌렀다.

'설마 또 랜덤 보상은 아니겠지?'

다행히 이번엔 룰렛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랜덤 보상이 아니라 지정 보상인 모양이다.

'양심이 없는 줄 알았건만, 있기는 한가 보네.'

당연히 그래야지. 포인트를 그렇게 많이 뜯어갔는데.

강승현은 차분하게 보상을 기다렸다.

파아앗!

그때, 손목에 차고 있던 프리아의 팔찌가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어?"

강승현은 깜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착용하고 있던 팔찌가 빛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이거 어디 갔어?"

급하게 인벤토리를 뒤져봤지만 석궁은 보이지 않았다.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있는데 눈앞에 보상창이 나타났다.

★[스킬(프리아의 석궁) 획득!]

업적 보상으로 얻은 건 스킬이었다.

그것도 꽤 익숙한 이름의 스킬.

29. 프리아의 석궁

'프리아의 석궁?'

갖고 있던 프리아의 석궁 아이템이 사라진 대신, 그것과 똑같은 이름의 스킬을 습득했다.

'이게 보상이라고?'

실제로 스킬 창을 열어보자 [프리아의 석궁]이라는 스킬이 추가되어 있었다.

'내 무기를 스킬로 바꿔준 건가.'

강승현은 스킬 정보를 확인했다.

[프리아의 석궁]

[발동 시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한다.]

[다시 한번 발동 시 소환을 해제한다.]

['프리아의 석궁'은 당신에게 귀속된다.]

['프리아의 팔찌'로 변형할 수 있다.]

'귀속된다고?'

스킬 정보창에 새로운 정보가 추가됐다. 아이템이 강승현에게 귀속된다는 내용이었다.

'일단 꺼내서 테스트해볼까.'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스킬을 사용하자 손에 검은 오오라가 몰려들더니 석궁 형태로 변했다.

'인벤토리에서 꺼내는 것보다 좀 더 편하긴 하네.'

무기를 꺼내서 착용하는 게 아니라 손으로 소환하는 방식. 편리함으로 따지면 비교가 안 된다.

'거기다... 귀속템이라 이거지?'

강승현은 창문을 열고 프리아의 석궁을 냅다 집어 던졌다.

텅!!

석궁이 길 한복판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한밤중이라 소리가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하늘에서 석궁이 떨어졌다!"

소리를 듣고 나온 마을 사람 하나가 프리아의 석궁을 집어 들고 기뻐했다. 공짜 무기가 떨어졌는데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딨겠는가.

"이게 왜 작동이 안 되지? 고장인가?"

마을 사람은 프리아의 석궁을 이리저리 만지며 중얼거렸다. 강승현에게 귀속된 무기라 타인은 쓸 수 없다.

'마지막으로, 소환 해제.'

[프리아의 석궁이 소멸합니다]

강승현은 다시 한번 [프리아의 석궁]을 사용했다.

"어??!!"

그러자 마을 사람이 들고 있던 프리아의 석궁이 검은 오오라에 휩싸여 사라졌다.

'이거면 잃어버릴 일은 없어서 좋네.'

누가 훔쳐 갈 일도 없고, 인벤토리를 한 칸이라도 더 절약할 수 있다.

강승현은 프리아의 석궁을 팔찌로 변환했다.

찰칵!

팔찌를 손목에 착용한 순간,

[업적 달성]

뜬금없이 추가 업적이 나타났다.

"...진짜 퍼주려고 작정했나?"

[업적 달성 : 프리아의 룰렛]

[프리아(유물) 관련 스킬을 획득할 경우 달성]

"룰렛이라고?"

보상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메시지 창이 날아왔다.

[※상태창에 프리아의 룰렛이 추가됐다]

[프리아의 룰렛을 사용할 경우, 프리아의 석궁을 강화하거나 관련 스킬과 아이템을 뽑을 수 있다.]

"이야, 이건 또 뭐야."

보상은 프리아의 석궁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관리자 녀석이 정말 작정하고 퍼주려는 모양.

"전용 아이템에 전용 스킬도 모자라 전용 룰렛까지?"

지난 3년간 아즐 대륙에서 살았지만 이런 일은 없었다. 아마 그 어떤 차원 이동자도 이런 특혜를 받진 않았을 것이다.

'이런 걸 줄 거면 좀 더 빨리 줬으면 얼마나 좋아.'

강승현은 [프리아의 룰렛]을 확인했다.

[누적 포인트 : 0포인트]

[룰렛 1회 이용 시 20포인트]

[프리아의 룰렛 1회 이용 시 50포인트]

[룰렛에 등록된 아이템 : 프리아의 석궁]

프리아의 룰렛은 기존 룰렛보다 비싼 50포인트. 평소처럼 5회 연속 룰렛을 돌리려면 250포인트가 필요하다.

하지만 포인트가 많이 들어가는 만큼 보상이 좋다.

'그럼 업적 보상은 룰렛 이용권이겠군.'

[보상 수령]

강승현은 보상 수령 버튼을 눌렀다.

[※기타(프리아의 룰렛 5회 무료 이용권) 획득]

강승현의 예상대로, 보상으로 받은 건 룰렛 무료 이용권. 프리아의 룰렛 전용 아이템이었다.

'여기 처음 왔을 때도 튜토리얼 업적 깼을 때 룰렛 무료 이용권을 줬지.'

이번에도 어김없이 룰렛 이용권을 선물해준 모양이다.

"일단 한번 돌려보자."

[룰렛 5회 무료 이용권을 소모합니다.]

무료 이용권을 꽂아 넣자 룰렛이 작동했다. 프리아의 석궁과 마찬가지로 검고 보랏빛을 띤 룰렛이었다.

타르르르!

[※룰렛 결과]

☆[스탯(추가 대미지 +1)]

☆[스탯(추가 대미지 +1)]

☆[스탯(공격 속도 +1)]

'여기서도 푼돈 튀어나오면 관리자 멱살 잡으러 가려고 했는데.'

다행히 골드는 안 나오는 것 같다.

[프리아의 석궁]

[추가 대미지 +2]

[공격 속도 +1]

프리아의 룰렛에선, 기존의 룰렛에선 볼 수 없는 스탯이 나왔다. 여기선 석궁을 강화하는 스탯만 나오는 모양이다.

"거기다... 스킬까지."

★[스킬(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프리아의 석궁이 소멸하면서 함께 사라졌던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가 스킬로 돌아왔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인벤토리 추가 +10]

[이하 프리아의 석궁 전용 스킬.]

[인벤토리 아이템을 '프리아의 화살'로 바꾼다.]

['프리아의 화살'은 재료에 따라 성능이 달라진다.]

"이게 훨씬 좋네."

이제 귀찮게 주머니에 따로 넣을 필요가 없게 됐다. 인벤토리에 넣기만 하면 화살로 만들어 쏠 수 있으니까.

'인벤토리 10칸 추가는 보너스.'

차원 이동자를 생각한, 배려 넘치는 스킬이다.

"그리고 마지막 보상은...."

깨진 유리 조각처럼 생긴 물체였다.

★[기타(영혼 결정 - 포인트 증가)]

처음 보는 아이템. 하지만 이름을 보면 용도가 짐작이 간다.

'크리스탈과 비슷한 강화 아이템이군.'

[※영혼 결정이란?]

[당신의 영혼에 특별한 힘을 추가하는 소모품입니다.]

혹시 모를까 봐 친절하게 설명문까지 띄워줬다. 한마디로 크리스탈이 아이템 강화용이라면, 영혼 결정은 자기 자신을 강화할 수 있다.

[영혼을 강화합니다.]

영혼 결정을 사용하자 상태창에 새로운 스탯이 생성됐다.

[영혼의 힘]

[추가 포인트 습득 : +2]

이제 포인트를 얻을 때마다 2포인트를 추가로 얻을 수 있다.

'앞으로 포인트 쓸 일이 많으니, 모으기 쉽게 도와주는 건가?'

오늘 얻은 보상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보상이다. 물론 +2가 아니라 x2를 줬다면 훨씬 마음에 들었겠지만.

'이렇게 퍼주는 걸 보면, 지금보다 더 열심히 포인트 노예짓을 하라는 소리군.'

포인트를 벌어오라며 채찍과 당근을 휘두르는 관리자의 모습이 눈앞에 스쳐지나갔다.

'그 새끼, 내가 힐러라는 걸 까먹고 있는 거 아닐까.'

딜러들은 몬스터만 잡아도 포인트를 벌 수 있지만, 힐러는 사람을 고쳐야 포인트를 벌 수 있다.

이왕 퍼줄 거면 힐러 짓에 도움 될 만한 스킬을 주면 좋을 텐데.

'일단 대충 오늘 받은 보상은 정리된 건가.'

강승현은 상태창을 살폈다. 아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풍족해졌다.

'프리아의 석궁, 이거 완전 사기네.'

전용 스킬에 전용 아이템. 거기에 룰렛만 잘 돌리면 끝도 없이 강화할 수 있다니. 이러다 아즐 대륙 최강의 무기가 탄생하는 거 아닐까 싶다.

'스태미나를 좀 많이 잡아먹는 것만 빼면 말이지.'

프리아의 석궁 스킬은 스태미나를 꽤 많이 잡아먹는 편이었다.

'거기다 프리아 룰렛에선 스태미나 관련 보상이 나오지 않는 것 같고.'

안 그래도 스태미나에 허덕이는 강승현에겐 큰 타격이었다.

'프리아 룰렛만 돌릴 순 없겠네. 기존 룰렛과 병행해야겠다.'

강승현은 상태창을 끄고 눈을 감았다.

-'좋아, 다 됐다.'

다음 날 아침.

강승현은 눈을 뜨자마자 활력의 장신구를 제작했다.

달칵.

베이스 장신구에 활력의 크리스탈을 끼워 넣자, 보석에서 강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활력의 브로치 +0]

[추가 스태미나 +1%]

[스태미나 회복 속도 +1%]

평범한 능력치를 가진 브로치가 탄생했다.

'여기에 크리스탈 강화권을 사용하면.'

[크리스탈 강화권을 소모합니다]

[(활력의 브로치 +0)]

깡! 깡! 깡!

쇠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크리스탈 강화권이 소멸했다.

[※강화 결과]

[활력의 브로치 +1]

[추가 스태미나 +3%]

[스태미나 회복 속도 +3%]

[+ 스태미나가 0이 될 경우 강화치를 1 깎는 대신 랜덤 옵션을 추가한다.]

[효과 발동 시 위의 옵션을 제거한다.]

활력의 브로치에 새로운 옵션이 추가됐다.

"그럭저럭 나쁘진 않네. 일회용 옵션이긴 하지만."

강승현은 완성된 브로치를 살폈다. 가운데 박힌 활력의 크리스탈이 아름답게 반짝였다.

'역시 제일 급한 건 스태미나 보충이야.'

활력의 장신구는 강승현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다. 스태미나가 부족하면 일하다 쓰러지니까.

강승현은 브로치를 옷에 착용했다. 스태미나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는 게 느껴졌다.

'이걸로 스태미나는 한동안 문제없겠고.'

강승현은 침대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할 일을 구상하기 위해서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관리자 새끼가 시키는 대로 5000포인트를 모으면 되겠지만....'

강승현은 상태창 너머의 관리자를 떠올렸다. 놈은 차원 이동자를 전적으로 후원해주는 든든한 아군이지만,

'솔직히 믿을 놈이 못 되거든.'

잘 생각해보면 그 새끼가 모든 일의 원흉이다. 애초에 차원 이동자가 아즐 대륙에서 고생하게 된 이유는 관리자 때문이니까.

'거기다 숨기는 게 너무 많아. 3년간 입 다물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것만 봐도 섣불리 믿을 놈은 아니지.'

신이니 뭐니 하면서 남에게 떠받들어지는 놈들은 믿을 게 못 된다. 그것들의 사고방식은 인간의 것이 아니니까.

'관리자의 정체를 알아내야 해.'

녀석이 아즐 대륙의 신적 존재라면 어딘가에 놈과 관련된 정보가 있을 것이다.

'애초에 누구 밑에서 얌전히 일하는 건 성미에 안 맞기도 하고.'

강승현은 대놓고 관리자의 뒤를 캐기로 결심했다. 만약 조사를 방해한다면 뭔가 껄끄러운 게 있다는 뜻일 테니까.

'그럼 앞으로 할 일은 이건가?'

5000포인트를 모으면서 겸사겸사 관리자 뒷조사하기. 다른 차원 이동자들에겐 없는 강승현 전용 특별 시나리오 퀘스트다.

'재밌을 것 같지만... 혼자 하려면 좀 귀찮겠지.'

강승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일단 아침부터 먹고 생각해볼까.'

-우적, 우적.

여관 1층으로 내려온 강승현은 아침을 간단히 해결했다.

'오늘 아침은 구운 토끼고기를 빵과 빵 사이에 끼워 먹는 샌드위치.'

누린내가 심한 편이지만 모험가들이 자주 먹는 메뉴다. 토끼는 들판에 널려 있고 번식력이 좋아서 고깃값이 싸니까.

'싼값에 고기 맛보기엔 이게 최고거든.'

"어젯밤에 잘 못 주무셨나요?"

다가온 줄리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걸었다.

"뭐 그렇죠."

"안색이 안 좋으세요."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요."

강승현은 관리자를 떠올렸지만 입 밖에 꺼내진 않았다. 설명해봤자 못 알아 들을 테니까.

"샌드위치나 하나 더 주문할게요."

강승현이 추가 주문을 하려던 찰나였다.

"아이고 피곤하다...."

"드디어 오셨네."

자신과 마찬가지로 관리자한테 포인트 노예로 부려 먹히는 남자. 김호정이 어깨를 두드리며 여관으로 들어왔다.

"김호정 씨, 할 말 있으니까 따라와요."

30. 조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