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은혜 갚은 힐러
"이놈들이 웬일이래? 보상으로 이런 좋은 걸 다 주고."
다음 날 아침. 모험가 조합이 약속대로 김호정 몫의 보상을 지급했다.
"뭐 받았는데요?"
"피를 갈구하는 혈석."
김호정이 보상으로 받은 핏빛 보석을 보여주었다.
"좋은 거 받으셨네요."
피를 흡수할 때마다 공격력 상승 버프를 걸어주는 아이템. 성능도 성능이지만 보석으로서의 가치도 높은 젬 애뮬릿이다.
'대충 챙겨줄 줄 알았는데, 꽤 신경 써서 구해줬네?'
리웬 지부장이 온갖 욕을 하며 창고를 뒤지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건 그렇고, 이건 어떻게 할까요?"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여명의 성수를 꺼냈다. 병을 열지도 않았지만 강력한 신성력이 느껴진다.
"그게 여명의 성수야? 확실히 비싸 보이네."
"아이베르 교단 사제들이 새벽마다 난리 쳐서 만든 성수라잖아요."
모험가 조합도 노리는 귀중한 성수. 이번 사건을 해결하고 얻어낸 값진 보상이다.
"아무튼, 이건 우리 공동 보상이니까 반으로 나눠야 할 거 같은데. 좋은 아이디어 있어요?"
"음... 이것도 화살로 만들어서 쏠 수 있는 거 아냐?"
김호정이 석궁 방아쇠를 당기는 것처럼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냥 강 선생이 쓰지 그래?"
"그래도 괜찮겠어요? 김호정 씨는 이득 보는 게 없는데."
"솔직히 선생이 혼자서 다 잡은 거잖아. 나는 이거면 충분하다구."
김호정은 들고 있던 혈석을 가리켰다. 팔아서 돈이나 아이템으로 만드는 것보단 낫다면서.
"마음은 고마운데, 화살로 쓰긴 좀 그렇죠."
"왜? 신성 스킬처럼 쓸 수 있는 거 아냐?"
"저도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닌데...."
스킬로 만든 화살은 시간이 지나면 소멸한다. 그래서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로 만든 화살은 전부 일회용이다.
"이런 귀한 성수를 일회용 필살기로 날려 먹기는 좀."
"아... 한 번 쓰면 사라지는구나."
"쓸 거면 차라리 싸구려 성수를 사서 쓰는 게 낫죠."
여명의 성수를 팔면 일반 성수 수백 개를 사고도 돈이 남으니까.
"아깝네. 저런 좋은 물건을 관상용으로 둬야 한다니."
두 사람이 잡담으로 쓸데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긴급! 동쪽에서 몬스터 침입 발생!"
"이어서 북쪽, 남쪽! 몬스터가 침입합니다!"
모험가 조합 직원이 캠프 광장으로 달려와 소리쳤다.
"여유가 있으신 모험가님들은 캠프 방어전에 참가해주세요!"
"드디어 오는구만."
"하여간 몬스터 새끼들...."
그 말을 모험가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캠프 방어전.
몬스터 급증 기간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다. 몬스터가 하인드 마을을 습격하려면 모험가 캠프를 돌파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막아야 마을이 안전해진다!"
"사지 멀쩡한 모험가라면 당연히 해야지!"
모험가들이 며칠 동안 캠프 주변 몬스터를 사냥한 이유이기도 했다. 미리미리 수를 줄여두지 않으면 마지막 날에 몰려오는 몬스터를 감당할 수 없으니까.
"옵니다! 모두 전투 준비!"
감시탑에서 캠프 주변을 감시하던 캠프 직원이 나팔을 불었다. 몬스터의 습격이 시작됐다.
"끼이!!!!"
"키히! 키히히!!"
광분한 몬스터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모험가들이 각자 무기를 꺼내 몬스터와 싸우기 시작했다.
벨로토 산악지대 특성상, 캠프 방어전에 출몰하는 몬스터는 산짐승들. 수는 많아도 강력한 스킬을 가진 몬스터는 없다.
"심심한데 우리도 가죠."
"오케이!"
강승현과 김호정도 캠프 방어전에 참가했다.
두 사람이 남쪽 출구로 달려가자,
"캥!!!"
"캐갱!!"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붉은 여우 떼가 습격했다.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강승현은 곧장 방아쇠를 당겨, 붉은 여우 떼를 저격했다.
파바박!!
"캐행!"
"캥!"
덤벼든 붉은 여우 떼는 돌 화살을 맞고 산길을 나뒹굴었다. 움직임은 꽤 날렵하지만, 벨로토 산개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다.
"죽여도 죽여도 다시 살아나는 산개 수십 마리랑 싸웠더니, 그거에 비하면 진짜 쉽네요."
"그러게 말야. 어제 그 고생에 비하면 이 정도는 껌이지!"
김호정이 씩 웃으며 혈석을 손으로 강하게 쥐었다.
푸욱!
날카로운 보석에 손바닥이 찔려 피가 쏟아져 나왔다.
[흡혈 충동!]
[일정 시간 동안 공격력이 상승합니다.]
김호정의 피를 흡수한 혈석이 공격력 상승 버프를 발동했다.
"다쳐도 선생이 치료해줄 테니... 치료비 걱정 없고 좋네!"
촤아아악!!!
김호정이 검을 휘둘러 여우 떼를 공격했다. 공격력이 올라가서 훨씬 쉽게 쓰러트릴 수 있었다.
"잡몹은 대충 치웠고, 이제 남은 건...."
"크워어어어어!!"
보스 몬스터를 처리할 시간이다.
"긴급! 캠프 북쪽에 강석 불곰 출현! 강석 불곰 출현!"
키가 3미터는 될 듯한 거대한 곰이 캠프를 향해 접근해왔다.
저 곰의 이름은 강석 불곰. 이번 캠프 침공을 이끄는 보스 몬스터다.
"동굴에서 잠이나 잘 것이지!"
"북쪽으로 가죠."
강승현 일행은 캠프 북쪽으로 향했다.
"쏴라!"
"공격해!!!"
모여든 모험가들이 강석 불곰을 향해 총공격을 쏟아붓고 있었다.
"저 녀석만 쓰러트리면 돼!"
"다들 힘냅시다!"
보스만 물리치면 나머지 몬스터는 전투를 포기하고 서식지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돌 화살을 생성합니다.]
강승현은 강석 불곰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탁! 타닥!
하지만 화살은 강석 불곰의 가죽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놈의 가죽을 뚫으려면 좀 더 단단한 화살이 필요할 것 같다.
"돌 화살은 안 먹히겠는데."
"그럴 것 같아서 준비해놨죠."
프리아의 석궁에 단단하고 예리한 금속제 화살이 장전됐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강철 두더지 발톱 화살을 생성합니다.]
화살의 정체는 강철 두더지 발톱. 캠프 방어전을 대비해 남겨둔 물건으로 만들었다.
파바바바박!!
강승현이 방아쇠를 당기자 날카로운 강철 화살이 발사됐다.
탁, 타닥!
처음에는 가죽을 뚫지 못하고 스쳤지만, 같은 자리를 계속해서 공격했더니....
쫘아악!
마침내 강석 불곰의 가죽이 찢어졌다. 그걸 본 모험가들이 기뻐하며 소리쳤다.
"가죽이 뚫렸다!"
"다들 저길 노리자고!"
"집중 공격!"
가죽이 찢어졌다는 건 방어력이 떨어졌다는 뜻. 모험가들은 찢어진 가죽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강석 불곰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이 많은 공격을 버틸 순 없다.
"쿠워어어어어...."
녀석이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체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증거다.
"강 선생!"
앞으로 달려나간 김호정이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이 강석 불곰의 가죽을 완전히 뜯어냈다.
"크어어어!!!"
강석 불곰이 앞발을 휘둘러 공격했으나 김호정은 씩 웃으며 소리쳤다.
"지금이야! 던져!"
"투척 갑니다."
강승현은 석궁을 집어던지고 청은단검을 꺼냈다. 미리 독을 발라둬서 푸른 검날이 검게 빛났다.
[투척★]
강승현은 강석 불검을 향해 독이 발라진 단검을 투척했다.
푸욱!
[크리티컬!]
[상태이상 '중독' 상태!]
"쿠워어어어어!!"
강석 불곰은 고통스럽게 울부짖더니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러자 나머지 몬스터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러났다.
"이, 이겼다!! 이겼다고!!"
"해냈어! 방어전에 성공했어!"
"끝났다!!!!"
"마을을 지켰다!"
모험가들은 쓰러진 강석 불곰을 보며 환호했다. 동시에 마지막에 나이프를 날린 모험가의 정체를 궁금해했다.
"막타 나이프 미쳤네."
"저 파티가 마무리 지었지?"
원래 막타를 날린 사람들은 주목받는 법. 모험가들은 강승현 파티를 힐끔거렸다.
"아까 가죽 뚫은 것도 저 녀석이었어."
"저 아저씨는 겁도 없네. 강석 불곰한테 그렇게 근접했다가 맞아 죽으면 어쩌려고."
"야야, 저 파티 그 사람들이잖아. 벨로토 산개 잡은 파티!"
모험가 하나가 강승현 일행을 보며 소리쳤다. 어제 활약이 모험가 사이에 쫙 퍼진 모양이다.
"아, 어제 밤새 구른 보람이 있네. 뿌듯하다!"
김호정은 기분이 좋은지 싱글벙글이었다.
"모험가님들, 수고하셨습니다!"
이걸로 이번 몬스터 소탕 의뢰가 끝났다. 모험가 조합 직원들이 감사 인사를 하며 사방팔방을 돌아다녔다. 이제 모험가들이 떠나면 캠프가 철거되고, 여기는 아무것도 없던 중턱으로 돌아갈 것이다.
"자자, 마을로 갈 준비하자고."
"오늘 방어전은 쉬웠네."
"어제 레어 몬스터가 잡혀서 쉬웠던 거야."
"보상은 마을에서 받는 거지?"
모험가들은 하나둘 정리를 마치고 캠프를 떠나기 시작했다.
"우리도 돌아가죠."
"뭐 빠진 거 없지?"
강승현 일행도 떠날 준비를 하던 참이었다.
"응?"
그때 어떤 레인저 하나가 화살통을 들고 강석 불곰한테 다가갔다.
"화살 회수!"
그리고 손을 뻗어 스킬을 사용하자,
스르르르.
강석 불곰의 몸에 박혀 있던 화살이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강승현은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화살 회수 스킬인가요?"
"네. 사용한 화살을 주워주는 스킬이에요."
레인저는 화살통을 보여주며 말했다.
"다 주울 수 있는 건 아니고 몇 개만 주워주는 거지만."
레인저가 보여준 화살통 안에 화살 몇 개가 담겨 있었다. 그중엔 아까 강승현이 사용한 강철 두더지 화살도 있었다.
"이 강철 화살은 스킬로 만든 화살인데요."
"스킬 숙련도가 올라가면 일반 화살 말고 스킬로 만든 화살도 주울 수 있어요. 덕분에 마력과 화살 값을 아낄 수 있죠."
레인저는 말을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
"오, 편리한 스킬이네.... 화살 줍는 것도 일이잖아."
"저 스킬만 있으면 여명의 성수를 재활용할 수 있겠는데요."
강승현은 상태창을 열었다.
일반 룰렛에선 나오지 않겠지만, 프리아의 석궁 관련에선 나올 가능성이 있다.
[누적 포인트 : 1900포인트]
빡세게 일한 덕분에 포인트는 꽤 많이 쌓여 있었다.
프리아의 룰렛은 1회 50포인트. 5연속 룰렛을 7번 돌릴 수 있다.
"엥? 설마 룰렛 돌리게? 그런 이유로?"
"해봐야죠. 꼭 화살 회수가 아니더라도, 비슷한 스킬만 얻어도 되니까."
"그거, 뭐 바라고 돌리면 절대 안 주잖아."
"또 모르죠."
[포인트를 소모합니다.]
강승현은 룰렛을 돌렸다.
"제가 운이 좋아서 금방 뜰지도."
-[※룰렛 결과]
☆[기타(화살촉 +1)]
☆[스탯(화살대 +1)]
☆[스탯(추가 대미지 +1)]
☆[기타(나무 화살 +1)]
☆[기타(나무 화살 +1)]
"아 시발."
강승현은 룰렛 결과를 보자 욕을 뱉었다. 이 녀석도 기본 룰렛 못지않게 쓰레기였다.
"화살 나오는 것도 빡치는데, 화살 재료는 진짜 양심이 어떻게 된 거 아냐?"
[누적 포인트 : 400포인트]
심지어 한 번 돌린 것도 아니다. 이번이 6번째였다.
스킬은커녕, 룰렛에선 영혼 결정조차 나오지 않았다. 석궁 화살만 잔뜩 쌓였을 뿐이다.
"난 분명 말렸다. 룰렛은 바라면 절대 주지 않는다구."
김호정이 안타깝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강승현이 이를 악물고 룰렛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선생님들!"
"응?"
"접니다! 저! 카이텔!"
힐러 카이텔이 손을 흔들며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겨를이 없어서 감사 인사를 제대로 못 했네요. 저번 일은 감사했습니다!"
"동료들은 다들 무사했나요?"
"덕분에요!"
그래서 싱글벙글 웃는 얼굴인 모양이다.
"그런데 무슨 일 있으세요? 안색이 안 좋으신데."
"노름하다가 싹 다 날려 먹었는데, 아직도 포기를 못 하신답니다."
김호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상태창에 대해 설명해줄 순 없으니 에둘러서.
"아앗, 그렇게 강하신 분도 도박은 어쩔 수 없으시군요."
카이텔이 안타깝다는 얼굴로 강승현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면... 제가 돈을 빌려드릴 순 없고!"
"빌려달라고 한 적 없는데요."
"축복을 걸어드려야겠네요."
"축복?"
"저는 행운의 여신 니카마테 님의 신도거든요."
그녀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소리쳤다.
니카마테 교단.
아이베르 교단에 비교하면 신도 수가 매우 적은 소수종교지만, 열성 신자들이 많은 단체다.
"니카마테 님의 축복을 내려드리겠습니다! 당신에게 행운이 함께하기를!"
카이텔은 이렇게 말하며 강승현의 손에 부적을 쥐여주었다. 부적에는 니카마테의 이름과 교단 본거지가 적혀있었다.
"이거 부적이라기보다는 명함 같은데요."
"저희 교단이 좀 작다 보니 기회만 생기면 선교해야 해서, 부적을 명함처럼 만들었어요."
행운의 여신을 따르는 니카마테 교단은 그 특성상 도박꾼들이 많이 믿는다. 그래서 사제들이나 신도들이나 도박꾼들만 보이면 명함을 건네고 다닌다고.
"이걸 갖고 있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좋은 패가 나올 겁니다! 힘내십쇼! 화이팅!"
카이텔은 강승현을 응원하며 동료한테 돌아갔다.
"카이텔의 진심 어린 응원도 받았겠다...."
"그거, 응원이라기보다는 영업이었지."
"마지막으로 도전해봅니다."
[포인트를 소모합니다.]
강승현은 남은 포인트를 다 써서 룰렛을 돌렸다.
"아이고, 결국 포인트 다 썼어? 안 나온다에 10만 골드 건다."
김호정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상식적으로 종이 하나 가졌다고 나올 리가.
[※룰렛 결과]
"김호정 씨."
"왜?"
그러나 룰렛 결과를 보던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10만 골드 주셔야겠는데요?"
41. 누구시더라
3번째 보상까지는 평범했다.
☆[스탯(장전 속도 +1)]
☆[기타(나무화살 +1)]
☆[스탯(추가 대미지 +1)]
☆[기타(화살대 +1)]
하지만 4번째 보상이 뜬 순간,
파아앗!
부적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스킬(프리아의 화살 회수)]
그리고 나타난 다섯 번째 보상.
강승현이 그토록 원하던 화살 회수 스킬이었다.
"뭐, 마, 말도 안 돼! 그게 나온다고?"
겨우 종이 하나 받았을 뿐인데, 노리던 스킬을 뽑았다?
김호정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 게 어딨어? 빨리 농담이라고 해!"
"제가 운이 너무 좋은가 봅니다."
"운이 좋아도 이건 사기지!"
강승현은 프리아의 석궁을 들어올렸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여명의 성수 화살을 생성합니다.]
그리고 강력한 신성력을 띤 여명의 성수 화살이 장전됐다.
"사출!"
하늘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자 신성한 화살이 빛을 내며 날아갔다. 화살이 나아간 자리마다 신성력이 흩뿌려졌다.
"화살을 잃어버렸으니 회수할게요."
"스킬 보여주려고 일부러 날려버린 거야? 그 비싼 화살을?"
"그래야 김호정 씨가 믿어줄 거 아니에요."
[프리아의 화살 회수]
[여명의 성수 화살을 회수합니다.]
스킬을 사용하자 어딘가에서 빛이 날아왔다. 날아온 빛은 강승현의 몸에 닿는 순간 사라졌다.
[회수 성공!]
[여명의 성수 화살.]
인벤토리를 열어봤더니 '여명의 성수 화살'이 담겨 있었다.
"이제 믿으시겠죠?"
"우, 우와...."
회수한 성수 화살을 보여주었으니, 믿고 싶지 않아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진짜 뽑은 거냐고... 우와아...."
"카이텔 씨가 준 부적이 생각보다 영험하더라구요."
다른 행운 아이템은 룰렛에서 효과를 본 적이 없었다. 신의 축복이라는 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나도 부적 좀 달라고 할걸!! 사기 치는 줄 알았는데!"
김호정은 방방 날뛰었으나 카이텔은 이미 캠프를 떠난 지 오래였다.
"강 선생 부적이라도 빌려주면 안 될까?"
"그게 말이죠."
강승현은 카이텔한테 받은 부적을 보여주었다.
"이거 일회용인 거 같습니다."
부적은 빛과 함께 기적을 일으켰지만, 그 직후 힘을 잃어버렸다.
"아까는 '당신에게 니카마테의 축복을'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안 적혀 있잖아요."
"이, 일회용...."
"더 받고 싶다면 교단을 찾아가면 되지 않을까요."
물론 니카마테 교단에 가입하고, 열심히 활동해야 얻을 수 있겠지만.
"혹시 관심 있으면 가보시는 것도."
"됐어...."
김호정은 늙고 지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이 스킬을 사용하면 여명의 성수 화살을 얼마든지 회수할 수 있어요."
"그럼 이제 막 쏴대도 되는 거야?"
"그건 아니고... 조건이 있습니다."
지금 강승현이 손에 든 건 여명의 성수 화살. 정확한 이름은 '회수된 여명의 성수 화살'이다.
[프리아의 화살 회수]
[사용한 화살 하나를 인벤토리로 회수한다.]
[회수한 화살은 '회수된'이라는 타이틀이 붙는다.]
['회수된' 타이틀이 붙은 화살은 회수할 수 없다.]
[다음 날 해가 떠오르면 '회수된' 타이틀이 제거된다.]
즉, 회수한 여명의 성수 화살을 다시 회수하려면 내일 아침이어야 가능하다는 소리다.
그 전에 사용하면 회수할 수 없다.
"그럼 일반 '화살 회수' 스킬이 더 좋은 거 아냐?"
"그건 아니에요. 화살 회수는 랜덤으로 회수하는 스킬이라."
[프리아의 화살 회수]는 쿨 타임이 존재하지만, 자신이 사용한 화살을 확실하게 회수할 수 있다.
여명의 성수 화살을 안전하게 쓰려면 이게 낫다.
"어차피 능력 자체가 워낙 막강해서, 여러 발 쏠 필요도 없고."
일회용 필살기에서 하루에 한 번 쓰는 필살기로 진화했다.
"잘 써먹을 수 있겠어요."
"잘됐네! 이거면 언데드도 한 방 아냐?"
"그런 관계로, 김호정 씨...."
강승현이 손을 내밀었다.
"10만 골드. 내기하셨잖아요."
"으으으!!!"
이래서 함부로 내기 같은 걸 해선 안 된다. 김호정은 눈물을 머금고 소리쳤다.
"나도 니카마테 부적만 있었어도!"
-"의뢰도 해결했겠다... 오늘은 김호정 씨가 쏘는 걸로 하죠."
"내, 내 피 같은 돈...."
"그래서 밥 사는 걸로 퉁쳤잖아요. 주점으로 갑시다."
두 사람은 캠프를 떠나 마을로 돌아가기로 했다.
"자, 잠시만요! 강승현 님, 김호정 님!"
멀리서 두 사람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자 캠프 담당자 바셀로가 서 있었다.
"바셀로 씨."
"이번에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두 분 덕분에 큰 참사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강승현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날뛰는 리웬 지부장과 달리, 캠프 담당자 바셀로는 무척 고마워했다.
"그런데 캠프는 철거하지 않는 건가요?"
강승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험가들은 거의 다 떠났지만, 캠프를 철거하는 듯한 낌새가 없었다.
"철거는 며칠 미루기로 했어요. 사제님들이 이 주변을 조사하는 동안 아이베르 교단에서 경비를 지원하겠다고 해서."
바셀로와 캠프 직원들은 며칠 더 머물 예정이라고 한다. 새로 조사 캠프를 설치하는 것보단 이미 설치된 캠프를 활용하는 게 이득이니까.
"벨로토 산악지대가 워낙 넓어서, 하루 이틀 안에 조사하긴 힘들겠다고 판단한 모양이에요."
지금도 카르닐 사제가 이끄는 사제단은 산속 곳곳을 뒤지며 언데드에 대한 정보를 찾으러 다니고 있었다. 마무리 지으려면 며칠은 걸릴 거라고.
"사제님들의 식사와 잠자리... 숙식 문제는 전부 저희가 맡게 되었습니다."
"그쪽도 고생하시네요."
"중요한 일이잖아요. 위협적인 언데드가 마을 가까운 곳에서 나타났는데."
바셀로는 이렇게 말하며 티켓 두 장을 꺼내 강승현과 김호정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이건 저희 캠프에서 두 분께 지급하는 특별 보상입니다."
모험가 조합과 아이베르 교단에서 지급한 보상과는 별도의 보상.
바셀로가 캠프를 대표해 두 사람에게 보상을 지급했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받아주세요."
"이, 이건! 주점 교환권!"
§벨로토 산딸기 벌꿀술§
교환권을 살펴보던 김호정이 소리쳤다.
"그것도 벨로토 산딸기 벌꿀술 교환권이잖아!"
하인드 마을 평민들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 벨로토 산딸기 벌꿀술 교환권이었다.
"이 교환권을 하인드 마을 주점에 가져가면 벨로토 산딸기 벌꿀술 한 병으로 교환하실 수 있습니다."
"안 그래도 축하주 한 병 따고 싶었는데!"
"하인드 마을 주점이라면 어디에서나 쓸 수 있으니 편하게 써주세요."
"잘 마실게요."
여명의 성수나 황금빛 활력 버섯 엑기스에 비하면 정말 구하기 쉽고 흔한 물건이다.
하지만 바셀로와 캠프 사람들의 진심 어린 감사함이 느껴졌다. 캠프 사람들이 한 푼 두 푼 모아 마련한 물건일 테니까.
"모험가님들이 몬스터를 퇴치해준 덕분에 만들 수 있었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벨로토 산딸기 벌꿀술이 축하주로 인기 있는 이유를 알 것 같다. 하인드 마을에서 고마움과 기쁨을 나누기엔 이것만 한 게 없을 테니까.
"바셀로 씨도 그렇고, 여기 캠프 사람들은 다른 조합 직원들과 좀 다르네요."
모험가를 철저하게 사무적으로 대하는 그들과 달리, 이들은 모험가를 좀 더 인간적으로 대했다.
"저나 캠프 직원들은 대부분 하인드 마을 출신이거든요."
모험가 조합 직원들은 대부분 하인드 마을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마을을 떠나 다른 지부로 옮겨갈 수 있는 외부인. 그러니 모험가들한테 별생각이 없다.
"저희 같은 하인드 마을 출신 직원들은... 모험가님들께 늘 감사하죠!"
그들에게 모험가란 마을을 지켜주고, 사람들을 도와주는 은인들이다. 그러니 인간적으로 대하는 건 당연했다.
"비록 저희는 잡일만 하는 임시 직원들이라 큰 영향력은 없지만...."
"하인드 마을 지부인데, 정작 하인드 마을 사람은 영향력이 없다니."
뭔가 마음 아픈 이야기다. 김호정은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리웬 녀석 대신 좀 더 멀쩡한 인간이 지부장 자리에 앉았으면 달랐겠지?"
"그러겠죠."
모험가 조합 정직원들은 본사의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바셀로 같은 임시 직원들은 하인드 마을 지부의 지원을 받는다.
'모험가한테도 돈 쓰기 싫어하는 놈이 직원들에게 얼마나 투자하겠어.'
모험가들은 다른 마을로 떠나면 그만이지만, 이들은 떠날 수 없는 인생이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나중에 또 만나면 좋겠네요."
강승현은 바셀로와 헤어져 캠프를 떠났다. 캠프 서쪽으로 내려가자 저 멀리 하인드 마을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 리웬을 치료할 일이 생기면 실수인 척 저세상으로 보내버릴까요."
하인드 마을이 발전하기 위해선 모험가 조합부터 바뀌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리웬 지부장을 처리해야 했다.
"힐러가 그런 말 해도 돼?"
"야매 힐러니까 괜찮습니다."
"리웬 지부장이 들으면 난리치겠다. 암살자 보내는 거 아냐?"
김호정이 킥킥거리며 웃어댔다. 겁 많고 돈 많은 귀족은 별것도 아닌 걸로 유난을 떠니까.
"솔직히 암살자보다 좀비 벨로토 산개가 더 위험하겠죠."
"아 그건 인정. 인정!"
그렇게 떠들면서 걷다보니 하인드 마을에 도착했다. 하인드 마을은 오늘도 변함없었다.
"역시 마을이 최고라니까. 바닥에서 천 깔고 자려니 등이 배겨서."
"저는 샤워부터 하고 싶어요. 천막 샤워실은 너무 열악해서."
아무리 마을과 비슷하게 꾸몄다고 해도 캠프장은 캠프장. 마을 여관에서 먹고 자는 것만 못하다.
"잠을 자건 목욕을 하건, 일단 배부터 채우자고. 오늘은 내가 쏜다!"
"아까까진 울상이더니."
"공짜 벌꿀술이 생겼잖아."
두 사람은 주점으로 들어가 자리 잡고 앉았다. 아직 낮이라 그런지 빈자리 찾는 건 쉬웠다.
"뭘 시킬까?
"전 일단 버섯감자스튜 하나랑...."
"어디 토끼 고기는 질렸고...."
"벌꿀 범벅 스테이크도 괜찮아요."
"해산물 먹고 싶은데 하인드 마을에선 사 먹기 힘들겠지. 아쉬운 대로 민물고기 차우더로 할까."
민물고기 차우더.
각종 야채와 민물고기를 넣어 걸쭉하게 끓인 수프. 하인드 마을에서 먹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해산물 요리다.
"주문하시겠어요?"
"교환권도 쓸게요. 스태미나 두 병 추가해서."
강승현이 벌꿀술 교환권을 내밀자 주점 주인이 웃는 얼굴로 받았다.
"교환권 받았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주점 주인이 자리를 떠나고 김호정이 입을 열었다.
"강 선생은 포션을 화살로 만들 수 있잖아."
"그렇죠."
"그럼 벌꿀술 화살도 가능해?"
"가능하긴 한데... 그런 걸 어디에 써요."
190만 골드짜리 벌꿀술 화살. 별 쓸모는 없지만, 여명의 성수 화살보다는 싸다.
"그래도 괜찮지 않아? 술 안 마시고 술 취한 기분만 내고 싶을 때!"
"도대체 왜 그런 짓을."
이런저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주문한 요리가 나오는 걸 기다리던 참이었다.
"힐러 선생님! 강승현 힐러 선생님!"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42. 부식된 유적 1
뒤를 돌아보자 주황색 머리의 모험가 하나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루스 씨?"
누군가 했더니 흑진월귤 독에 중독됐던 환자, 루스 테이커였다.
"누구야? 아는 사람이야?"
"얼마 전에 치료해준 환자예요."
강승현은 루스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줬다. 독에 중독됐으면서 힐만 받는 멍청한 짓을 하다 돈을 날린 전형적인 환자라고.
"여기서 뵙네요! 저번엔 신세 많았습니다!"
루스는 강승현한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제 멀쩡하게 걸어 다니는 걸 보면 다리는 다 나은 모양이다.
"지난번엔 정말 감사했습니다. 선생님! 이건 저번에 못 드린 치료비입니다!"
"아, 그거 완전 잊고 있었는데."
솔직히 그대로 먹튀할 줄 알았다.
돈 안 갚고 튀는 놈은 생각보다 많으니까.
"성실하게 일해서 벌었습니다!"
"그렇지. 맡고 있던 칼은 돌려드릴게요."
당시 루스는 치료비가 없어서 자신의 칼을 담보로 맡겼다. 강승현은 인벤토리 구석에 처박혀 있던 루스의 칼을 꺼냈다.
"오, 오! 오! 내 파트너! 케레스! 무사했구나! 그리웠어! 잘 지냈지?"
루스는 무척 기뻐하며 받아갔다.
김호정은 기분 나쁘다는 얼굴로 속닥거렸다.
"왜 저래? 칼한테 말을 걸고 있잖아."
"그만큼 아끼는 칼이었나 보죠...."
강승현 일행은 루스 모르게 살짝 거리를 뒀다. 루스는 그것도 모르고 기쁘게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오늘은 제가 사겠습니다! 여기 주문이요!"
루스는 뭐든 주문하라며 큰소리쳤다. 저번에는 땡전 한 푼 없는 빈털터리였지만 오늘은 주머니 사정이 여유롭다고.
"뭐? 진짜? 아싸!"
덕분에 김호정은 술값 내기 10만 골드를 지켰다.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크햐~ 꽁돈 날아갈 줄 알았는데 이게 웬 떡이야."
"그럼 저는 버섯 양념 꼬치구이 하나 추가요."
"나는 버섯 버터구이 하나랑 아힐라 맥주!"
"아 토마토 스튜도 같이 주세요."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주문한 음식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이 집 버섯 감자 스튜는 언제 먹어도 술술 넘어간다니까.'
뜨끈한 스튜를 한 입 뜨자 입에서 살살 녹았다. 역시 가장 맛있는 음식은 의뢰를 마치고 먹는 밥이다.
'그리고 맛있는 음식에 곁들여 먹는 스태미나 칵테일 한 잔.'
강승현은 벌꿀술에 스태미나 포션을 섞어 칵테일로 만들었다. 향긋한 꿀 냄새에 섞인 새콤한 향기. 강승현은 부드럽게 넘어가는 칵테일을 즐겼다.
"자자, 자네도 한잔해!"
김호정이 루스의 잔에 벌꿀술을 따라줬다.
"아니 이거 벨로토 산딸기 벌꿀술 아닙니까? 비싼 놈인데?"
"우리 강 선생이 사는 거야!"
사실은 교환권 주고 교환한 거지만.
"역시 힐러 선생님은 다르십니다! 혹시 명문가 후계자이신가?"
진상을 모르는 루스는 강승현을 부르주아로 착각했다.
"힐러 선생님은 그간 어떻게 지내셨나요?"
"늘 그랬듯 사람 치료하고 그러고 살았죠."
치료도 하고. 모험가 조합도 털어먹고.
사제도 물 먹이고. 언데드도 때려잡고.
신 같은 놈이랑 소통도 하고.
"이번엔 벨로토 산악지대 캠프에 묵다 오는 길이야."
"몬스터 소탕 의뢰가 있었거든요."
"아 들었어요. 저도 참가하고 싶었는데 바빠서 못 갔죠."
모험가 조합에 돈을 빌린 사람들은 보수가 낮거나 남들이 하기 꺼리는 일을 해야 한다.
말 그대로 모험가 조합 노예 신세.
"조합 놈들이 시키는 의뢰는 군말 없이 해야 해서... 좀 멀리까지 다녀오고 그랬어요."
"내가 그래서 굶어 죽어도 조합에 돈은 안 빌리잖아."
김호정이 킥킥거리며 말했다.
모험가 조합은 돈 빌려준 모험가가 죽으면 사령술로 되살려서 부려먹을 놈들이다. 차라리 그냥 굶어 죽는 게 낫다.
"아, 그럼 지금은 의뢰 끝나고 쉬는 중이신 거죠?"
이야기를 듣던 루스가 뭔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그렇죠."
"혹시 두 분, 시간 괜찮으세요?"
루스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파티 신청서?
"제 사촌 동생이 파티 멤버를 구한다면서 와달라고 부탁했거든요."
파티 멤버를 구성할 때 제일 믿을 만한 사람은 혈연이다. 그다음이 지인이고, 그다음이 모르는 사람.
"근데 저는 모험가 조합의 노예 신세라서 가고 싶어도 못 가요."
사촌 동생의 부탁이니 거절하기도 그렇고.
루스는 자신 파티에 대신 들어갈 대타를 구하고 있었다.
"제가 하인드 마을에 아는 사람이... 선생님 말고 없어서요. 부탁드릴 사람이 얼굴 두 번째 보는 선생님 말곤 없네요!"
"혈연도 지인도 아니면 가장 못 믿을 사람 아닙니까."
"선생님은 믿을 수 있습니다! 아이베르 교단 사제놈들보다야 백만 배, 천만 배!"
저번에 사제한테 된통 당한 이후, 루스는 사제 불신자가 되었다.
"상관은 없는데. 파티에 힐러는 이미 있을 거 같은데요."
"그게 필수 직업은 다 구해서 아무 직업이라도 상관없댔어요. 머릿수만 맞춰주면 된다고."
"...무슨 일이길래."
일반적인 의뢰는 아닌 모양이다.
"하인드 마을 근처에 포탈 던전이 발생했대요."
포탈 던전.
공간이 뒤틀리면서 다른 공간과 이어진 아공간이다. 일단 내부를 확인하기 전에는 뭐가 나올지 모르고, 강력한 몬스터들이 서식하는 게 특징이다.
"던전은 계속 내버려 두면 안에서 몬스터가 나타나잖아요. 그래서 제 동생이 던전을 제거하러 간다고 합니다!"
던전 제거는 간단하다. 강력한 힘으로 입구 포탈을 부수거나, 아니면 보스 몬스터를 죽이면 된다.
"출발은 언제 하는데요?"
오늘 당장 가는 거라면 거절할 생각이었다.
오늘 막 돌아와서 쉬고 싶기도 하고. 아직 잘린 오른손이 다 낫지도 않았고.
'왼손으로도 충분하긴 있긴 한데, 혹시 모르잖아.'
"사흘 뒤요."
사흘 뒤라면 여유가 있다.
손목도 다 나을 것이고, 피로도 풀릴 테고.
"음... 김호정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난 괜찮아! 선생은?"
"저도 괜찮습니다."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다. 던전을 클리어하면 좋은 보상도 얻을 수 있고.
무엇보다 얻어터질 샌드백, 아니 파티원이 늘어나면 대량의 포인트를 벌 수 있다.
"저희 둘 다 참가할게요."
"아 감사합니다! 살았어요! 이모님이 꼭 같이 가달라고 애원하셔서 큰일이었는데."
루스는 안도한 얼굴로 말했다. 이번 일로 집안에서 귀찮게 굴었던 모양이다.
"제 사촌 동생 잘 부탁드립니다! 이건 미리 드리는 수고비예요!"
그렇게 강승현은 루스의 파티 땜빵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사흘 뒤,
준비를 마친 강승현은 약속 장소로 향했다.
"손목은 다 나았어?"
"다 나았어요."
[완치판정]의 효과로 꿰맨 손목이 깔끔하게 붙었다.
"또 손목 잘릴 일은 없었음 좋겠네요."
이런 말 하면 뭐하지만, 강승현은 자신의 손목보다는 남의 손목이 잘리는 게 좋았다.
그래야 포인트를 버니까.
"저기 저 사람인가 보다."
약속장소로 가자 루스가 말한 사촌 동생이 있었다. 그녀는 루스와 마찬가지로 주황 머리였다.
"루스 씨의 사촌 동생이신가요?"
"안녕하세요! 티나 퓨테인이라고 합니다!"
루스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여성 모험가.
이름은 티나 퓨테인. 숏소드와 작은 방패를 손목에 착용하고 있었다.
"힐러 강승현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동료 김호정 씨."
"잘 지내자고. 나는 탱커야."
셋은 서로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마쳤다.
"이야기는 루스한테 대충 들었어요. 루스를 치료해주셨다면서요?"
"흑진월귤나무에 중독된 걸 치료해줬죠."
"루스가 추천하는 사람이니 엄청난 실력자시겠네요!"
"실력은 확실합니다. 장소는 어디죠?"
"하카트 언덕이에요. 하인드 마을하고 꽤 가깝죠?"
하카트 언덕은 마을 남쪽, 피트리 숲을 통해 갈 수 있다. 티나의 말대로 확실히 마을 가까운 곳이다.
그냥 방치하면 입구 포탈에서 나온 몬스터가 마을을 습격할 위험이 있다.
"저쪽이에요."
강승현은 티나와 함께 하카트 언덕으로 향했다.
수풀 속으로 들어갔더니 마력을 뿜어내는 포탈과 그 앞에 모인 모험가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번 던전 공략을 함께할 파티원들이라고.
"다들 좋은 사람들이세요."
티나는 방긋 웃으며 말했지만 모험가들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티나 씨, 왜 이렇게 늦었어요?"
"조금만 더 늦었다면 두고 갈 생각이었다."
"하여간에 이래서 칼쟁이들은 시간 아까운 줄 모른다니까."
마법사로 보이는 여자와 리더로 보이는 남자, 그리고 힐러로 보이는 남자가 티나를 극딜했다. 그렇게 늦은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어딜 봐서 좋은 사람들이라는 거야."
"인성이 아니라 머리가 좋은가 보죠."
뒤에 뻘쭘하게 서 있던 강승현과 김호정은 그 광경을 보며 속닥거렸다.
"별로 늦은 것도 아닌데 다들 너무 그러지 마세요."
"마, 맞아요...."
티나를 두둔하는 건 검은 옷을 입은 남자뿐이었다. 구석에 있던 사제로 보이는 여자는 아주 작게 웅얼거려서 별 도움이 안 됐으니까.
"이런 기본적인 약속도 못 지키면 던전에서 믿고 싸울 수 없지."
리더로 보이는 남자는 거만하게 말했다. 티나는 무척 새빨개진 얼굴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여기 길이 처음이라...."
이런 일로 얼굴이 새빨개진 걸 보면 티나는 모험가가 된 지 얼마 안 된 것 같다. 좀 연차 쌓인 모험가라면 뻔뻔하게 나갈 테니까.
'늦게 온다고 던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연차 쌓인 강승현은 뻔뻔하게 나갔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티나 씨의 동료, 힐러 강승현입니다."
"나는 김호정. 탱커이올시다."
"나는 이 파티의 리더 에르간이다."
에르간은 크고 탄탄한 몸을 가진 모험가였다. 별다른 무기가 없는 걸 보면 주먹을 쓰는 격투가다.
"시간이 없으니 간단하게 소개하지. 이쪽은 힐러 라크라마티, 아이베르 교단 사제 사히타, 로그 아일, 마법사 슈이레."
에르간이 빠른 속도로 파티원을 소개했다.
싸가지 없는 힐러가 라크라마티.
구석에서 웅얼거리는 사제가 사히타.
티나를 두둔해준 남자가 아일.
그리고 싸가지 없는 마법사가 슈이레.
"저게 힐러? 어딜 봐서?"
"저쪽 분은... 신성력이 바닥인데요...."
라크라마티와 사히타가 강승현을 쳐다보며 말했다. 신성력이 느껴지지 않다 못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거의 인간 이하 짐승 수준... 아니, 짐승도 이거보단 높을 텐데...."
"보통 힐러가 사제보다 신성력이 낮다고 해도 이건 좀 아니지!"
아무리 봐도 힐러라고 할 수 없는 녀석이 힐러라고 주장하는 상황.
"저 녀석도 그래. 무슨 탱커가 저런 옷을 입어."
마법사 슈이레는 김호정을 보며 어이없어했다.
"내 옷이 왜?"
"그거 로브잖아?"
그녀의 말대로 김호정이 입고 있는 옷은 새까만 로브였다.
보통은 마법사들이나 입고 다니지, 탱커가 입을 옷은 절대 아니다.
"이거 나름 귀한 옷이라고!"
"안경에 로브에 슬리퍼까지... 저게 대체 어디가 탱커야? 마법사지."
마찬가지로 아무리 봐도 탱커라고 할 수 없는 녀석이 탱커라고 주장하는 상황.
에르간 파티의 눈에 보이는 강승현 일행은 정말 수상하기 짝이 없는 집단이었다.
"자자, 다들 진정하세요."
아일이 웃는 얼굴로 세 사람을 말렸다.
"뭔가 사정이 있으시겠죠. 우리끼리 싸우자고 모인 건 아니잖아요."
"저 녀석은 좀 낫네."
김호정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강승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파티원들이 불안해하니... 강승현 씨, 혹시 실력을 보여주실 수 있나요?"
아일이 정중하게 물었다. 남에게 실력을 보여달라는 건 무례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겠지.
"그러면 저... 제가 아까 살짝 다쳤는데."
티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했다.
"치료해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보여주세요."
강승현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걸 본 라크라마티와 사히타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부, 불가능할 텐데....'
'세상에 저런 처참한 신성력으로 남을 치료할 수 있는 힐러가 어딨어?'
43. 부식된 유적 2
"심하게 다친 건 아니에요. 그냥 아주 사소한 상처?"
티나가 웃으며 손목에 찬 방패를 풀었다. 그녀의 손목은 벌겋게 부어있었다.
"아까 오는 길에 몬스터의 습격을 받았는데... 방패로 막긴 막았거든요."
"방패로 막긴 했지만, 충격을 막진 못했나 보네요."
"네에...."
티나가 쑥스러워하며 답했다.
직접적인 공격은 막았지만, 충격까지 흘려보내진 못 한 모양이다.
'초보자한테선 흔한 일이지.'
그녀의 손은 굳은살도 얼마 없었고 자잘한 흉터도 보이지 않았다. 무기를 많이 잡아본 사람의 손이 아니다.
'이런 녀석이 던전 포탈에 들어간다고 하니 집안이 뒤집어지지.'
가족들이 루스를 들들 볶은 이유가 있었다.
"지금 통증은 있나요?"
"그,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
손목을 살짝 눌러보자,
"아야야야야!"
티나가 고통을 호소했다.
"다시 묻겠는데 통증이 있으신가요?"
"이, 있네요...."
"일단 깎인 체력부터 채워드릴게요."
강승현은 체력 포션 하나를 꺼냈다.
파삭!
[흡수]
[살포]
포션을 깨트려 몸으로 흡수하고, 오오라 형태로 뿜어냈다. 붉은 오오라가 티나의 몸에 닿자, 깎여나간 체력이 회복됐다.
"저 스킬... 혹시 체력 회복술인가요?"
"일단 체력은 채울 수 있는 모양이군."
"저 정도는 해야지."
강승현을 지켜보던 파티원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대부분 아직은 지켜보자는 태도였다.
"뭘 모르네. 강 선생이 얼마나 대단한 힐러인데."
김호정만 의기양양한 얼굴이었다.
"나 원, 그냥 포션 붓는 것도 아니고."
라크라마티만 아니꼽게 바라볼 뿐이었다.
'포션 붓는 거 맞는데.'
역시 힐러는 힐러인지, 일반인들에 비해 예리했다. 그래봤자 근본적인 건 알아채지 못했지만.
"체력도 회복했으니...."
[관찰의 눈]
강승현은 관찰의 눈을 발동했다. 대강 무슨 상태인지는 알아냈지만, 혹시 모르니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다.
[염좌]
[인대 손상으로 인한 통증]
[골절이나 인대 파열의 징후는 없음]
[손목에 강한 충격을 받은 것 같다.]
티나의 손목 위로 현재 상태가 간단하게 적힌 메시지창이 나타났다.
'이럴 줄 알았다.'
인대 손상이니 염좌니 뭐니 거창한 말을 쓰고 있지만, 쉽게 말해서 손목을 삐었다는 소리다.
'부러진 것도 아니고, 인대가 끊어진 것도 아니고.'
티나의 말대로 손목이 잘리거나 몸을 꿰뚫리는 것에 비하면 가벼운 상처다.
'하지만 아무리 가볍다고 해도, 아프지 않은 건 아니지.'
얇은 종이에 살짝 베이기만 해도 아픈 것처럼, 아무리 가벼워도 부상은 환자에게 고통을 준다.
'꽤 아팠을 텐데.'
치명상과 비교하면 무척 가벼운 부상이라, 힐러한테 치료해달라고 말하지 못한 모양이다.
"티나 씨."
"네?"
"모험가는 아무리 사소한 부상이라도 방치해선 안 됩니다."
강승현은 붕대를 꺼내 티나의 손목을 고정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면 주저 없이 치료받으세요. 파티에 힐러가 있을 땐 망설일 필요가 없잖아요."
"그치만 별거 아니라...."
티나는 우물쭈물 눈치 보며 말했다.
'정말 모험가가 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구나.'
강승현은 인벤토리를 뒤지며 말했다.
"사소한 상처 때문에 실수를 저지르고, 사소한 실수 때문에 죽는 게 모험가들의 삶이죠."
이렇게 말하면서 꺼낸 건 차가운 얼음 조각.
주점에서 구입해 인벤토리에 넣어둔 것이다.
"...티나 씨, 마력 끌어내실 수 있죠?"
"마력이요?"
"약간이면 됩니다."
"아 네, 가능해요."
"얇게 종이처럼 펼쳐주세요."
"알겠습니다."
티나의 손끝에서 마력이 일렁였다. 뿜어져 나온 마력이 얇은 막처럼 변했다. 마력을 이용해 생성하는 마력 장막이다.
"좀 쓸게요."
"이걸 어디에 쓰시려구요?"
"이런 식으로."
강승현은 마력 장막으로 얼음을 둘둘 감쌌다. 이러면 아이스팩 대신 쓸 수 있다.
'손목이 삐었을 땐 얼음찜질이지.'
얼음 마법을 쓸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는 힐도 쓸 줄 모르는 야매 힐러. 얼음 계열 스킬 같은 게 있을 리가.
"이걸 이렇게 손목에 대면...."
강승현은 아이스팩을 손목에 가져다 댔다. 차가운 얼음이 통증을 줄이고 손목의 붓기가 서서히 가라앉는 게 보였다.
"아까부턴 힐은 안 하고 도대체 뭘 하는 거야?"
라크라마티가 뒤에서 투덜거렸다.
쓸데없는 짓 말고 빨리 힐이나 하라면서.
"저는 치료 속도가 좀 느린 편이거든요."
강승현은 여전히 티나의 손목에 시선을 고정한 상태로 입을 열었다.
"그래선 몇 날 며칠 걸리겠다. 빨리 힐이나 쓰라고."
"느리긴 해도 몇 날 며칠 걸리진 않습니다."
라크라마티의 말대로 힐을 사용하지 않고 치료하려면 시간이 꽤 걸린다.
그래서 필요한 게 치료 시간을 단축해줄 히든카드.
[완치판정]
강승현이 [완치판정]을 발동하자, 회복 속도가 증가했다. 손목 통증이 크게 줄어들고, 붓기 가라앉는 속도가 빨라졌다.
"오, 와... 신기해라."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손목을 다친 티나였다. 힐에 비하면 느린 속도였지만 회복되고 있었다.
"출혈도 없고, 골절도 없는 가벼운 상처니까... 7분 정도면 완치되겠네요."
"감사합니다!"
티나가 밝게 웃으며 자신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저 정도면 뭐... 좀 특이하긴 하지만 보조 힐러로 들어와도 괜찮겠는데?"
"티나 씨의 손목이 낫고 있는 걸 보면 사기꾼 같지는 않네요."
슈이레와 아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지켜보던 사람들도 티나의 손목이 회복됐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다.
"손목이 낫고 있다고?"
"어, 어떻게 된 거지...?"
다만, 힐러와 사제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저 자식, 도대체 뭘 한 거야?'
'신성력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힐을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몸이 회복되다니. 그들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신성력을 쓰지 않고 상처를 회복하는 수단이 없는 건 아니야.'
라크라마티는 재생 계열 스킬을 떠올렸다.
신성력 없이 상처를 빠르게 회복할 수 있는 대표적인 스킬. 보통 오크족이나 몇몇 몬스터들이 타고나는 걸로 유명하다.
'하지만 재생 계열 스킬은 타인에게는 쓸 수 없어. 자기 자신의 상처만 회복할 수 있다고!'
결국, 다른 사람을 회복시켜주려면 신성력을 소모하는 힐을 써야 한다. 하지만 강승현은 신성력도 쓰지 않고 남을 회복시킨 것이다.
"너, 너 도대체 뭘 한 거야?"
재생 계열도, 힐 계열도 아닌 힐링 스킬이 존재한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크라마티가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걸 제가 말해야 하나요?"
"아니? 말할 의무야 없지! 선생의 실력을 밝히는 자리니까."
김호정이 잽싸게 맞장구를 쳐줬다.
"역시 그렇죠? 제가 알려줄 필요는 없네요."
"그러니 궁금하면 본인들 머리로 열심히 생각해보라구."
"하, 하지만...."
"에르간 씨."
강승현은 당황한 라크라마티를 무시하고 에르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대단한 솜씨는 아니지만 시키는 대로 환자를 치료했습니다. 그러니 제가 더 추궁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맞아요. 이제 안 아파요."
티나가 자신의 손목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제 붓기가 완전히 가라앉아서 방패를 착용해도 될 것 같다.
"그래도 계속 추궁하겠다면 저희는 파티에서 나가겠습니다."
"우리가 이런 취급 받으려고 온 건 아니라고?"
"루스 씨가 하도 사정사정해서 도와주러 온 건데, 이런 식이면 도와줄 이유가 없죠."
강승현 일행이 이렇게 선언하자, 티나가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뿐만 아니라 다른 파티원들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나가고 싶으면 나가라고 해!"
"...아니, 그래선 우리가 곤란해."
눈치 없는 라크라마티만 소리칠 뿐이었다. 에르간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라크라마티, 너도 눈으로 봐서 알겠지. 힐에 비하면 느리지만, 그가 환자를 치료한 건 사실이다. 속임수라고 할 수 없어."
"...."
"그리고 저 친구 말이 맞아. 애초에 도움을 요청한 건 우리다. 무례하게 구는 건 그쯤 해둬."
"쳇... 알았다고."
라크라마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본 에르간은 무척 미안하다는 고개 숙이며 말했다.
"미안하다. 동료들이 무례하게 군 점은 내가 대신 사과하지."
그래도 리더라고 동료들이 친 사고를 책임지려는 눈물겨운 모습. 이것이 참된 리더의 모습이다.
"뭐, 더 추궁하지 않겠다면 저도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강승현은 무척 관대한 얼굴로 말했다. 루스의 부탁이 있으니 티나를 도와주기는 해야 하니까.
"던전 공략에 실패하고 돌아온 참이라 다들 신경이 날카로워진 모양이군."
"그럴 거 같았어요."
저것들이 쓸데없이 툴툴거린 이유가 있었다. 던전에 도전했다가 실패하고 돌아온 패배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아즐 대륙 모험가 사이에선 흔한 일이지.'
"이 녀석들, 한 번 실패하고 온 거면서 저렇게 잘난 척한 거야?"
그 광경을 보던 김호정이 조용히 속삭였다. 무척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이다.
"아즐대륙민이 잘나봤자 얼마나 잘나겠어요."
"난 또 엄청 대단한 분들인 줄 알았네."
"마음에 여유가 없으니 별것도 아닌 걸로 꼬투리 잡고 성질을 부리죠."
그래서 강승현은 언제나 태연할 수 있었다. 그는 늘 여유가 넘치는 남자였으니까.
"기존 멤버로는 클리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급하게 복귀했더니 다들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야."
그 말을 하는 에르간의 얼굴은 착잡해 보였다. 멀쩡해 보이는 건 아일이라는 남자뿐이고, 다른 파티원들은 다들 맛이 간 상태였으니. 파티를 이끄는 리더로서 답답할 것이다.
'인원을 늘리면 자기 몫의 보상이 줄어드니까, 예민하게 구는 게 당연하긴 해.'
파티 증원은 신중해야 하는 법.
"특히, 라크라마티 저 녀석은 힐러로서의 프라이드가 강해서...."
"괜찮습니다. 그만큼 유능하다는 뜻일 테니까요."
힐러 중에 잘난 척하는 놈이 한둘도 아니고.
'저런 놈일수록 실수 한 번 저지르면 물어뜯기 쉽거든.'
강승현은 웃는 얼굴로 넘겨버렸다.
"잡소리는 됐고, 던전에 대해 듣고 싶은데요."
"던전에 대한 건...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여주는 게 낫겠군."
에르간이 포탈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세한 건 들어가서 이야기하지."
포탈 너머에는 하카트 언덕과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44. 부식된 유적 3
"여기는 유적 던전인가?"
안으로 들어오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돌을 깎아 만든 천장이었다. 건물이 심하게 부식돼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꽤 낡은 유적이었다.
"건축 양식만 봐도 알겠지만, 상당히 오래된 건축물이지."
이어서 들어온 에르간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벽에 횃불이 걸려 있긴 하지만 별 의미가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어우 음침해. 진짜 싫다."
포탈을 넘어온 마법사 슈이레가 투덜거리며 손을 펼쳤다.
"라이트."
주문을 외우자 빛나는 구체가 생성됐다.
우중충했던 유적 내부가 확 밝아졌다.
"이제 불 켰으니까 들어와도 돼."
"감사합니다, 슈이레 님."
"덕분에 한결 낫네요."
이어서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유적 안으로 들어왔다.
"첫 도전 때는 몬스터의 수가 생각보다 많아서 실패했지만, 이번에는 돌파할 수 있다."
에르간은 파티원들을 자리에 모아두고 말했다.
"목표는 던전 심층부의 보스 몬스터를 쓰러트리고 던전 포탈을 없애는 것."
보스 몬스터를 쓰러트리면 던전이 붕괴하면서 포탈이 소멸한다.
따라서 내부의 모험가들이 빠져나오기 위해선 탈출용 임시 포탈이 필요했다.
'방법은 크게 세 가지. 보스의 핵을 깨트려서 생성하거나, 마탑에서 귀환 스크롤을 주문하거나. 아니면 마법사가 마법진을 그려서 만들든가.'
"마법진을 미리 그려둘 필요는 없지? 유지하려면 마력이 많이 드니까."
마법사 슈이레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귀환 스크롤은 비싸서 일반 파티에서 쓰기 힘들고, 보스의 핵은 분해해서 강력한 마력 정수로 바꿀 수 있다.
그래서 보통은 파티에 마법사를 넣는 편이다.
"다들 준비 끝났으면 출발하지."
리더 에르간이 앞장서서 걸어갔다. 다른 사람들도 그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강승현은 걷는 대신 벽을 손으로 쓸었다. 물기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부식된 유적....'
보통 암석이 부식되는 이유는 물과 공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는 유적 내부 깊숙한 곳이니 공기는 아닐 것이고, 물기도 없으니 물도 아니다.
'그렇다면... 마력이겠군. 그것도 흑마력.'
오염된 마력은 주위 물질에 영향을 준다. 건물 내부가 이 정도로 부식된 걸 보면, 짙은 흑마력이 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는 소리다.
'아무래도 이 유적의 주인은 흑마력을 다루는 놈인가 본데. 신성력에 의존하는 녀석들은 눈치 못 챈 건가?'
흑마력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사제가 모를 리가 없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서 남아 있던 흑마력이 전부 사라진 모양이다.
"강 선생, 왜 그러고 서 있어?"
"잠깐 생각 좀 하느라요."
생각을 정리한 강승현은 다른 일행을 뒤따라갔다.
-유적 내부를 얼마나 나아갔을까. 강승현은 좁은 통로에 도착했다.
"여기다. 다들 준비해라."
"또 그놈들하고 싸워야 한다니."
에르간 파티는 여기까지 탐험했으나, 몬스터의 습격을 받고 물러난 것 같다.
"온다!"
에르간의 외침과 함께 파티원들이 무기를 꺼내들었다.
사사사삭.
사방에서 바글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카라베다!"
풍뎅이 비슷하게 생긴 끔찍한 벌레 몬스터. 그것들이 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하나하나는 약한 몬스터지만, 이런 좁은 공간에서 몰려온다면 재앙이 따로 없다.
"역겨워!!!"
슈이레가 비명을 지르며 스태프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발밑에 마법진이 그려지더니 수십 발의 마력탄이 날아들었다.
파방! 팡! 파바방!
순수한 마력 덩어리가 스카라베를 터트려댔다. 그걸 시작으로 다른 사람들도 제각각 무기를 꺼내 스카라베를 공격했다.
"으아아아아아 세스코!!!"
김호정이 기겁하며 검을 휘둘렀다.
스카라베 시체가 바닥에 쌓여갔으나,
스스스슷.
사스삭.
다른 스카라베가 동료의 시체를 밟고 기어왔다.
"이거 끝이 없잖아!"
"도대체 얼마나 몰려오는 거죠?"
김호정과 티나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잡아도 잡아도 끝이 없었으니까.
"전부 잡는 건 불가능하다. 끝도 없이 몰려올 테니."
에르간이 벌레를 손으로 으스러트리며 말했다.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지."
"머릿수로 뚫는 수밖에 없다는 소리구만."
에르간 파티가 추가 멤버를 들인 이유가 있었다. 다섯이서는 아무리 용을 써도 뚫을 수가 없었으니까.
"슈이레 씨, 혹시 바람 마법 쓸 수 있나요?"
"당연히 쓸 수 있지. 근데 왜?"
"벌레 떼를 뚫을 방법이 생각났거든요."
벌레를 쫓을 때는 살충제가 최고 아니겠는가. 강승현은 덴트롤 박하 농축액을 꺼냈다.
쩌적!
병을 깨트려 내용물을 흡수하자,
[살포]
손에서 진한 연녹색 오오라가 뿜어져 나왔다.
"이걸 사방으로 퍼트리세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야!"
슈이레가 스태프를 휘두르자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짙은 돌풍!"
동시에 덴트롤 박하 오오라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툭.
투둑.
효과는 굉장했다. 퍼져나간 오오라가 바글거리던 스카라베를 한 마리도 남김없이 몰살시킨 것이다.
"우와아아."
"그 많던 스카라베를 한 방에 쓸어버리다니."
그걸 본 에르간 파티는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6명이 고생해서 잡은 스카라베 숫자보다, 강승현과 슈이레의 합동 공격으로 잡은 스카라베 숫자가 훨씬 많았으니까.
"아까 무슨 스킬을 쓴 거야? 그거 마법은 아니잖아."
놀란 건 슈이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궁금하다는 듯 물었으나,
"글쎄요? 마법일 수도 있죠?"
"그런 마법 들어본 적 없다구! 알려줘!"
"영업상 비밀."
강승현은 웃기만 하며 알려주지 않았다.
-"드디어 빠져나왔군. 다들 몸은 괜찮나?"
강승현의 활약으로 에르간 파티는 좁은 통로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어찌어찌...."
"주, 죽을 것 같아...."
파티원들은 녹초가 된 채 바닥에 널브러졌다. 다들 스카라베한테 긁히고 물려서 몸이 엉망이었다.
"여기서 좀 쉬었다 가죠. 다들 많이 지친 것 같으니."
"그래야겠군. 잠시 휴식이다."
아일의 제안을 들은 에르간이 장작을 꺼내 모닥불을 피웠다.
"배고파...."
"다친 사람은 이쪽으로 와."
파티원들은 휴식을 취하면서 음식을 먹거나 상처를 치료했다.
"치유의 빛."
라크라마티가 힐을 써서 파티원들의 상처를 단숨에 치료했다.
"그쪽은?"
"저는 됐습니다."
"흥, 꼴에 힐러라는 건가."
강승현은 자가치료하겠다며 라크라마티의 힐을 거절했다. 라크라마티는 더 묻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다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한 병씩 드세요."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
아일이 돌아다니며 마력 포션을 나눠줬다.
"티나 씨는 모험 경험이 적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대단하세요."
"아직 한참 부족하죠.... 포션 감사합니다."
티나는 한숨을 쉬며 포션을 받았다. 그래도 그녀는 초보자치고는 능숙한 편이었다.
"무서워...."
"자자, 진정하세요 사제님."
사히타 사제는 아직도 덜덜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티나보다는 모험가 경력이 길 텐데, 하도 떨어서 아일이 포션 뚜껑을 열어줘야 했다.
"강 선생, 나 치료 좀."
김호정 역시 라크라마티의 치료를 받지 않았다. 포인트를 위해 일부러 안 받았다고.
"감사합니다."
"살다 살다 힐러한테 치료 받으면서 감사 인사 듣긴 또 처음이네."
강승현이 김호정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있을 때였다.
"두 분도 드시죠."
"오, 땡큐! 잘 마실게!"
아일이 다가와 마력 포션을 내밀었다. 김호정은 포션을 받자마자 말릴 틈도 없이 벌컥벌컥 들이켰다.
'대형 마력 포션?'
아일이 내민 마력 포션은 500㎖짜리 페트병만 한 대형 포션. 소형 포션이 50㎖짜리 요구르트병 크기라는 걸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양이다.
'파티원한테 포션을 나눠주는 일이 없는 건 아니지만.'
소형 포션이면 몰라도 대형 포션을 나눠주는 사람은 없다. 그것도 비싼 마력 포션이라면 더더욱.
강승현은 포션을 먹는 대신 아일에게 물었다.
"마력 포션을 이렇게 많이 준비하려면 돈이 꽤 많이 들 텐데요."
"아, 괜찮습니다. 아시는 분이 약제사라서 평균가보다 싸게 받을 수 있거든요."
그러더니 신경 쓸 거 없다며 덧붙였다. 자기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파티원들이 무사해야 의뢰도 쉽게 깰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
"다들 푹 쉬었다면 슬슬 출발하지."
에르간이 모닥불을 꺼트리자 파티원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승현은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엥? 선생은 안 마셔?"
"안 마시려구요."
강승현은 인벤토리 안에 마력 포션을 던져 넣었다. 그 대신 스태미나 포션을 꺼냈다.
"하긴 선생은 마력 포션 먹을 필요가 없었지. 저 친구는 쓸데없는 돈을 썼네."
김호정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실 강승현이 포션을 마시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다.
'이유 없이 친절하게 구는 놈은 경계해라.'
라는 게 그의 생존 철학 4.
지난 3년간 아즐 대륙을 살아가며 깨달은 것 중 하나다.
'저런 식으로 착한 척하는 놈들은 뒤가 구린 법이거든.'
세상에 이유 없는 선행은 없고 모든 행동엔 목적이 있다.
'저 새끼 수상한데?'
이유 없이 친절을 베푸는 자들은 믿을 게 못 된다. 분명 무슨 속셈이 있을 게 틀림없다.
'혹시... 0.1%의 확률로 정말 착한 사람일 수도 있지만.'
어차피 자신은 마력 포션을 마실 필요가 없다. 이러나저러나 안 마시는 게 이득이다.
"휴, 다들 입 꾹 다물고 있어서 떠들기 힘든 거 있지."
김호정이 빈 포션 병을 깨트리며 투덜거렸다.
"지금 떠들 분위기는 아니죠."
어둡고 끝을 알 수 없는 음침한 유적 내부.
바글거리는 벌레 몬스터가 쉬지 않고 쏟아져나오는 공간.
어딜 봐도 으스스한 감각이 감돌고 있다. 이런 곳에서 떠들 수 있다면, 그것도 재주다.
'무엇보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부식이 심해지고 있어.'
부식된 벽과 천장이 으스스한 분위기를 가중했다. 입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심한 손상이 눈에 띈다.
'보스 몬스터한테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겠지.'
보스 몬스터는 분명 흑마력을 다루는 흑마술사.
신성력과 흑마력은 서로에게 큰 피해를 주기 때문에, 보통 파티에 사제가 있다면 크게 걱정할 건 없지만....
'문제는, 저 겁쟁이 사제가 할 수 있겠냐는 거지.'
강승현은 사히타 사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덜덜 떨면서 성서를 꼭 쥐고 라크라마티의 뒤에 꼭 붙어 있었다.
'믿음이 전혀 안 가네.'
신성 스킬과 흑마술 스킬이 붙을 경우 승패를 가르는 건 결국 시전자의 실력과 경험이다. 하지만 사히타 사제는 겁이 너무 많아서 도움 될 것 같지 않았다.
'역시 내가 나서야 하나.'
강승현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다들 정지."
몬스터를 쓰러트리며 나아가던 도중이었다. 앞장서서 걷던 에르간이 동료들을 멈춰 세웠다.
"앞에 갈림길이 있다."
지금까진 계속 일방통행이었는데, 여기는 왼쪽 길과 오른쪽 길로 나뉘어 있었다.
강승현이 벽과 바닥을 살펴보았다.
'양쪽 다 부식이 심한걸.'
그냥 봐선 눈에 띄는 차이점은 없었다. 똑같이 흑마력의 영향으로 부식됐을 뿐이다.
"어디로 가야 좋을지 모르겠군."
"인원을 둘로 나누자. 나는 왼쪽으로 갈게."
슈이레가 왼쪽 길로 다가간 순간이었다.
"자, 잠깐! 멈춰!"
라크라마티가 큰소리로 외쳤다. 그 뒤의 사히티가 덜덜 떨면서 웅얼거렸다.
"외, 왼쪽 길에서 강한, 엄청난 흑마력이 느껴져요...."
"그래? 그럼 오른쪽 길은?"
"그쪽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라크라마티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왼쪽은 강한 흑마력이 느껴지는 길. 오른쪽은 지금까지와 별 다를 바 없는 길.
갈림길 특성상 둘 중 하나는 함정일 게 뻔하다.
"그럼 고민할 것도 없네. 왼쪽은 꽝이겠지?"
"오른쪽으로 가면 되겠군."
에르간이 오른쪽 길로 나아가려던 참이었다.
"아뇨, 오른쪽이 아니라."
강승현이 막아서며 말했다.
"왼쪽 길로 가야 합니다."
45. 사제를 노린 덫 1
"내 말 못 들었어?"
그 말을 들은 라크라마티는 강하게 반발했다. 그는 벌컥 화를 내며 강승현한테 다가왔다.
"너같이 신성력이 바닥 치는 놈은 모르겠지만! 왼쪽 길은 흑마력으로 가득하단 말이다! 근데 일부러 흑마력 사이로 뛰어들자고?"
라크라마티가 강승현의 멱살을 잡았다.
"너 이 새끼 제정신이야? 혹시 흑마술사냐?"
"놓고 이야기해, 놓고!"
"지, 진정하세요! 우선 들어보고...."
다들 놀란 얼굴로 라크라마티를 말렸다.
"들을 가치도 없어! 흑마력을 느끼지도 못하는 놈의 말을 들어서 뭐해?"
"...."
다른 파티원들도 이것만은 반박하지 못했다.
한 명은 신성력을 잘 다루는 뛰어난 힐러.
한 명은 신성력이 바닥 치는 허접한 힐러.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는 이미 정해진 셈이다.
"저런 구역질 나는 공간에 가고 싶다면...."
라크라마티는 강승현을 확 밀치더니 오른쪽 길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혼자 가시지!"
이러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저...저도... 왼쪽 길은 가고 싶지 않아요...."
사히타 사제 역시 오른쪽 길로 향했다. 그녀는 허둥지둥 라크라마티를 쫓아갔다.
파티의 힐러와 사제가 죄다 오른쪽으로 가버리자,
"나도 오른쪽으로 갈래."
마법사 역시 오른쪽 길로 가버렸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군."
리더인 에르간 또한 오른쪽 길로 향했다.
그는 오른쪽 길에 들어서기 전,
"정말 왼쪽으로 갈 생각인가?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꾼다면 라크라마티는 내가 입 다물게 하지."
하고 강승현에게 물었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하지만 강승현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보스 룸 앞에서 기다리겠다. 무사히 도착했으면 좋겠군."
에르간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갈라진 동료들을 신경 썼다. 정말 훌륭한 리더의 귀감이다.
'하지만 오른쪽 길로 가봤자, 보스 룸에 도착할 수 없거든.'
-"갈 사람들은 다 간 거 같고."
에르간 일행이 자리를 떠나자, 강승현은 남은 사람들한테 말했다.
"남은 분들은 절 따라올 생각인거죠?"
"당연하지. 뭔진 몰라도 선생 말이 다 옳아!"
김호정은 오른쪽 길로 가지 않았다.
"아즐 대륙민 100명을 믿는 것보다는 강 선생 1명을 믿는 게 낫지."
아주 당연한 결론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이유가 있으실 거 같아서요."
티나 퓨테인 또한 이쪽에 남았다.
'루스가 소개해준 사람이니까.'
티나는 여기서 딱 한 명을 믿어야 한다면 당연히 강승현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촌인 루스 테이커가 극찬한 힐러였으니까.
"그렇게 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여기까지는 예상했다. 김호정은 당연히 따라올 것이고, 티나 퓨테인 역시 루스의 소개도 있으니 자신을 신뢰할 거라 생각했다.
"그럼 저까지 모두 4명이네요."
하지만 예상 못 한 인물이 한 명 더 있었다.
에르간 파티의 아일. 그는 동료들을 따라가지 않고 여기 남았다.
"아일 씨도 왼쪽으로 가실 겁니까?"
"네."
"왜요?"
여기선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동료들을 따라가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굳이 남았다는 건 뭔가 이유가 있다는 소리다.
"저도 오른쪽 길로 갈 생각이었지만... 이유가 궁금해서요."
강승현이 왜 왼쪽 길을 선택했는가. 아일은 그게 궁금해서 남았다고 말했다.
'웃기고 있네.'
당연히 거짓말이다.
상식적으로 그딴 이유로 동료를 버리고 남는 놈은 없다.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거와는 별개로, 내가 왜 여기 남았는지는 궁금한가 보군.'
이유가 궁금하다는 건 사실인 모양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남았다는 건 거짓말이겠지만.
"오른쪽 길에 몬스터라도 있어?"
"아니면 왼쪽 길이 지름길...?"
아일뿐 아니라 김호정과 티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 다 강승현이 왜 왼쪽 길을 골랐는지 궁금해 미칠 것 같다는 얼굴이다.
"시간도 많은데 차분하게 설명해드릴게요."
강승현의 생각대로라면 오른쪽 길은 분명 함정이다.
"라크라마티 씨 말대로 저는 흑마력을 느낄 수 없어요. 뭐, 제가 느낄 정도라면 정말 강력한 흑마력이겠죠."
즉, 왼쪽에서 느껴지는 흑마력은 강력한 편이긴 하나 일반인이 느낄 정도로 위협적인 수준은 아니라는 소리다.
"기껏해야 중급 마족이나 언데드 몇십 마리가 대기하는 정도겠죠."
"그, 그것도 무시무시한데요?"
확실히 아즐 대륙 기준으로는 좀 빡셀 법도 하다. 하지만 차원 이동자 기준으로는 할 만했다.
"그 정도는 저랑 김호정 씨 둘이서 잡을 수 있어요."
"우리가 얼마나 강한데~ 믿고 맡기셔."
"신성 스킬이라도 있으세요?"
"없어도 잡습니다."
신성 스킬 없이 레어 언데드 몬스터도 잡았는데, 설마 일반 몬스터를 못 잡을까.
"여기서 중요한 건, 유적의 몬스터 중 흑마력을 다루는 놈이 있다는 점입니다."
"흑마력을 다루는 놈?"
"부하 몬스터가 흑마력을 쓴다면, 보스 역시 흑마력을 쓸 가능성이 높아요."
이건 유적의 부식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던전의 보스 몬스터는 흑마력을 쓰거나, 흑마술을 다루는 다루는 흑마술사다.
"그렇죠. 던전의 피조물들은 보스 몬스터가 창조하니까...."
아일이 실실 웃으며 강승현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렇다면 흑마력을 가진 보스가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 누굴까요?"
"신성력을 가진 사제나 힐러요."
티나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흑마력의 카운터는 신성력이니까요."
"맞아요. 신성 스킬을 쓰는 녀석들이겠죠."
신성 스킬을 다루는 힐러와 사제. 흑마술사 입장에서 가장 거슬리는 존재다.
"특히 거슬리는 건 신성 스킬을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사제겠죠."
사제들은 마족과 언데드 잡기에 특화된 직업. 흑마술사 보스 입장에선 1순위로 처리해야 할 모험가다.
"그러니 제가 던전의 보스라면 함정을 깔아뒀을 겁니다."
모험가를 처리해야 한다면 보스 룸에 도달하기 전에 처리하는 게 편하니까.
강승현은 갈림길로 눈을 돌렸다.
"당연히 저 갈림길은 함정입니다."
왼쪽은 흑마력이 느껴지는 길. 오른쪽은 흑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길.
일반 모험가들은 눈치챌 수 없다. 이 사실을 알 수 있는 건 실력 있는 힐러와 사제뿐이다.
"사제는 왼쪽을 함정이라 생각하겠죠. 보통 흑마력이 없는 오른쪽 길을 안전하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그러니 사제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왼쪽 길은 일반 모험가들을 낚기 위한 함정!'
당연히 사람들을 오른쪽 길로 유도할 것이다.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안전해 보이도록 위장한 것뿐이거든요."
왜냐면 이 함정은 일반 모험가를 노린 게 아니니까. 진짜 타겟은 따로 있다.
"이 함정이 노리는 건, 흑마력을 느낄 수 없는 일반 모험가가 아니라...."
왼쪽 길의 흑마력을 알아차리고 오른쪽 길로 향할 사람들.
"높은 신성력을 가진 자."
즉, 사제를 노린 덫이다. 일반 모험가는 50% 확률로 걸리겠지만, 사제라면 100% 확률로 걸릴 테니까.
"실제로 라크라마티 씨와 사히타 사제님은 주저 없이 오른쪽 길로 가버렸잖아요."
"어, 어떡해."
강승현은 그 점을 경고하려 했으나, 둘은 듣지도 않고 그냥 가버렸다.
"저는 들을 생각 없는 사람들을 붙잡고 설명해줄 만큼 친절하진 않아서요."
그냥 받은 만큼 돌려줄 뿐이다. 나중에 따져봤자 안 듣고 간 놈이 잘못이지.
"그런 관계로, 오른쪽 길로 간 사람들은 보스 방에 도착할 수 없겠죠."
결국, 왼쪽 길로 가는 게 정답이다. 모험가들의 목표는 보스 몬스터 처치니까.
짝짝짝.
"강승현 씨, 정말 대단하시네요. 안전해 보이는 길이 사실은 함정이었다니."
아일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런 건 생각도 못 했다면서.
물론 거짓말일 게 뻔하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이 향한 오른쪽 길에는 뭐가 있죠?"
왼쪽 길에는 흑마력을 뿜어내는 무언가가 있다.
그렇다면 오른쪽 길에는?
"뻔하잖아요."
"아아아아악!!!!!"
그때, 오른쪽 길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사히타 사제님의 목소리예요!"
강승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사제의 목숨을 노린 진짜 함정."
-몇 분 전.
에르간 일행은 강승현 일행을 두고 오른쪽 길로 들어왔다.
"아무 일도 없잖아."
"몬스터도 없어요...."
"그 자식 뭐야, 진짜."
다른 사람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왼쪽 길로 가버린 강승현을 비웃을 뿐이었다.
'...왜지?'
하지만 에르간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강승현이나 다른 사람들이 왼쪽 길을 택한 건 그렇다 쳐도, 아일 역시 그 자리에 남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당연히 따라온 줄 알았으나, 문득 깨닫고 보니 근처에 아일이 없었다.
'아일은 그들과 안면이 없을 텐데.'
무언가 이유가 있는 건가?
에르간이 앞을 바라보며 걷던 참이었다.
틱.
티티티틱.
"이게 무슨 소리지?"
"마법진이야!"
마법사 슈이레가 바닥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것도 특정 조건을 만족하면 해제되는 형태의 마법진이었다.
"이 형태는 보통 뭔가를 봉인해둘 때 쓰는 건데...?"
동시에, 마법진에서 강력한 흑마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온 흑마력은 검은 가시로 변해 솟구쳤다.
파바바박!!!
"피해라!"
검은 가시가 사히타의 온몸을 꿰뚫기 전, 달려온 에르간이 그녀를 밀쳐냈다.
푸우욱!!!
검은 가시는 사히타의 온몸을 꿰뚫는 대신 다리를 관통하는 걸로 그쳤다.
"아아아아악!!!!"
사히타는 고통스러워하며 비명을 질렀다. 다리가 잘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피가 뿜어져 나왔다.
푸욱!
"크으으윽!!!"
동시에 라크라마티 역시 마법진에서 솟구친 검은 가시에 찔렸다. 잽싸게 몸을 피하긴 했지만, 이쪽도 팔을 찔린 모양이다.
"라크라마티!"
"제, 젠장... 이게 뭔 일이야...."
그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팔을 움켜쥐었다. 피가 뿜어져 나오긴 하지만, 치명상은 아니다.
"일단 사히티 사제부터 치료하고 나서...."
라크라마티는 멀쩡한 팔을 뻗고 주문을 외웠다.
"치, 치유의 빛."
그가 사히티를 향해 힐을 사용한 순간이었다.
"아아악!! 아악!! 아파!!"
사히티가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크아악!!"
동시에 라크라마티도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힐을 사용한 순간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서, 설마...."
라크라마티는 황급히 힐을 멈추고 자신의 상처를 살폈다. 검은 가시에 찔린 피부가 시커멓게 물들어갔고, 상처 부위에 시커먼 덩어리가 번져가고 있었다.
"왜 그래?"
"저주에 당했어...!"
흑마술의 일종인 저주 계통 스킬.
저주에 걸린 사람에게 힐을 사용하면, 상처가 치유되는 게 아니라 엄청난 고통과 함께 무효화 된다.
"이거 그냥 가시가 아니라... 커스 스피어야!"
커스 스피어.
찔린 사람에게 강력한 흑마력을 퍼부어 저주를 발동시키는 흑마술이다.
거기다 단순히 저주를 거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 커스 스피어는 실제 창과 똑같이 대미지를 입힌다.
"으, 아...아...."
실제로 다리를 관통당한 사히타는 숨소리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놔두면 과다출혈로 죽을 것이다.
"빨리 사히타의 상처를 치료해야 해. 이러다간...."
"라크라마티, 저주를 풀 순 없나?"
"저주를 풀 수 있는 건 사제뿐이라고!"
문제는 파티의 유일한 사제가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는 점이다.
쓰러진 사제를 치료하려면 힐러가 필요한데, 정작 그 힐러는 저주 때문에 힐을 쓸 수가 없다. 말 그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밖에! 밖에 힐러 있잖아! 강승현!"
그때, 슈이레가 생각났다는 듯 소리쳤다. 신성력이 부족하긴 해도 강승현 역시 힐러였다.
"그 녀석도 힐러잖아! 빨리 쫓아가면 따라잡을 수...."
"야! 내 말 못 들었어? 그 녀석이 와도 소용없다고!"
라크라마티뿐 아니라, 사히타 역시 저주에 걸린 상태. 몸에 걸린 저주를 풀지 않으면 상처를 치료할 수 없다.
"강력한 신성 스킬이나 성수를 갖고 있다면 모를까!"
라크라마티가 그렇게 외친 순간이었다.
"있는데요?"
야매 힐러 강승현.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모습을 드러냈다.
46. 사제를 노린 덫 2
"강승현, 여긴 어떻게...?"
"이렇게 될 것 같아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강승현은 태연하게 말하며 앞으로 걸어갔다.
에르간은 크게 당황한 얼굴이었으나,
"조심해라. 발밑에서 함정이 작동했다. 라크라마티도 사히타도 그 함정에 당했다."
다시 평정심을 되찾고 침착하게 말했다.
강승현은 발밑을 살펴보았다.
'마법진인가?'
마법진이 발동된 흔적과, 거기서 솟아난 듯한 검은 가시가 남아 있었다.
'보스 몬스터가 설치한 진짜 함정이군.'
이 함정은 오른쪽 길에 들어선 사제를 잡기 위한 덫이다. 그러니 평균 이하의 신성력을 가진 강승현에겐 아무 효과 없을 것이다.
'역시 아무 일도 없네.'
시험삼아 마법진에 발을 올렸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강 선생! 거기 어떻게 된 거야? 사제님은 괜찮아?"
"강승현 선생님! 같이 가요!"
이어서 김호정과 티나가 뒤에서 달려왔다. 둘 다 헥헥거리는 걸 보면 숨이 차도록 달려온 모양이다.
"이, 이건 봉인 마법진!"
티나가 바닥에 나타난 마법진을 보고 소리쳤다.
"이 문양은 봉인 해제 형태예요! 뭐가 풀려난 거죠?"
"흑마술... 커스 스피어를 봉인해뒀어."
라크라마티가 검은 가시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에 흑마력을 잔뜩 담아뒀다가 목표물이 나타난 순간 발동하는 형식. 라크라마티와 사히타는 보기 좋게 걸려들었다.
"내가 밀쳐내긴 했지만, 완전히 피하진 못했다."
에르간이 사히타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히타는 피를 잔뜩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친 곳 없이 무사했다.
'강한 신성력을 가진 사람이 접근하면 풀리는 마법진이었군. 봉인으로 숨겨뒀으니 흑마력이 새어나갈 리도 없고.'
만약 에르간이 사히타 사제를 밀치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 자리에서 즉사했을 것이다. 작정하고 죽일 생각으로 짜둔 트랩이니까.
"이렇게 될 걸 예상했다고?"
라크라마티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말을 듣지 않고 갔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겠지만, 강승현은 그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줄 생각은 없었다.
"함정일 게 뻔하잖아요."
"제대로 설명해!"
"그러니까 누가 말 안 듣고 가시랬나."
강승현은 분명 처음에 경고했다. 왼쪽 길로 가야 한다고.
결국, 안 듣고 간 놈이 잘못이다.
"정 궁금하면 아일 씨한테 물어보세요."
"뭐? 뭐가 어째?"
강승현은 다가온 라크라마티를 지나치며 말했다.
지금 이러는 동안에도 사히타의 상태는 계속 나빠지고 있었다. 지금은 이런 한심한 힐러랑 말싸움할 때가 아니었다.
"아니면 설명해주는 동안 사히타 사제님 죽는 거 구경하시든가."
"...."
라크라마티는 더 말하지 못했다. 지금 자신이 힐러를 방해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실수했다. 힐러 강승현."
라크라마티는 예의를 갖추고 고개를 숙였다.
물론 힐러로서의 능력은 자신이 뛰어나다. 강승현은 신성력도 낮고, 힐도 형편없으니.
'하지만 지금 나는 저주에 걸린 상태. 힐러로서의 가치가 없지.'
강승현이 정말 신성 스킬을 가졌는지, 저주를 풀 수단이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사히타 사제를 구할 유일한 힐러임은 틀림없었다.
"다 내 잘못이다.... 사히타 사제가 다친 것도 전부 내 탓이야."
강승현의 경고를 들었다면 사히티 사제는 오른쪽 길에 들어서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겁 많은 사람이니까.
"그러니, 제발... 사제를 치료해줘."
"저, 저... 저 건방지고 싸가지 없는 새끼가? 저런 말을 쓸 줄도 아네? 어?"
상황을 구경하던 마법사 슈이레가 어이없다는 듯 소리쳤다. 동료들 사이에서도 어지간했던 모양이다.
"자존심 센 라크라마티가 고개 숙여 부탁하다니."
심지어 리더 에르간도 감탄했다.
"도대체 저 새끼는 뭘 하고 다니길래... 사과 좀 했다고 동료들이 하나같이 기겁을 하냐."
"저도 만난 지 얼마 안 됐지만 굉장한 분이었죠."
"뭐, 더 잠깐 본 내가 봐도 그러긴 하다."
김호정과 티나가 소곤소곤 쏙닥거렸다. 강승현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주워듣고 피식거렸다.
"솔직히 더 놀려주고 싶긴 한데."
강승현의 삶의 낙 중 하나는 자기 말을 안 들은 놈들을 놀리고 비꼬는 것. 하지만 옆에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자제하는 편이었다.
"사히타 사제가 죽을 것 같으니 오늘은 특별히 봐 드릴게요."
라크라마티는 이렇게 대화라도 나누고 있지만, 사히타 사제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축 늘어져 있었으니까.
"저는 사제님 상처를 치료할 테니까, 다른 분들은 설명이나 들으러 가시죠."
"하지만...."
"옆에서 보고 있음 방해됩니다."
강승현이 손짓하자, 다들 어쩔 수 없다는 듯 물러났다.
"아일! 설명 좀 해줘!"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우리에게도 설명해주게."
대신 아일에게 우르르 달려갔다. 정말 궁금했던 모양이다.
-'이걸로 방해꾼들은 사라졌고.'
강승현은 바닥에 쓰러진 사히타 사제를 쳐다봤다.
'이건 관찰의 눈을 쓸 필요도 없겠는데.'
다리를 관통당해 생긴 상처가 과다출혈을 일으킨 상태다. 빨리 대처하지 않으면 죽는다.
'일단 [지혈]부터 하자.'
강승현은 [지혈]을 써서 흘러나오는 피를 멎게 했다.
'아직 포션으로 회복할 수 있는 상황이군.'
피를 꽤 많이 흘리긴 했지만, 수혈이 필요한 정도는 아니었다. 강승현은 체력 포션을 [살포]했다.
[살포]
붉은 오오라를 뿜어내 퍼트리자 사히타의 안색이 살짝 좋아졌다.
'급한 불은 껐으니, 남은 건 사히타 사제의 몸에 걸린 저주인가.'
[관찰의 눈]
강승현의 눈이 푸르게 빛났다.
[출혈] [그림자 벌레의 저주]
[날카로운 물체에 관통당함.]
[뼈가 부러지진 않았다.]
[상처에서 강한 흑마력이 느껴진다.]
사히타 사제의 몸 위로 각종 정보가 떠올랐다.
'대충 정보는 알았고....'
강승현은 흑마력도 신성력도 제대로 느낄 수 없지만, [관찰의 눈]을 사용하면 확인할 수 있었다. 스태미나를 많이 먹어서 자주 쓰진 않지만.
'그림자 벌레의 저주....'
상처 부위에 시커먼 그림자 덩어리가 달라붙어 있었다. 저게 사히타 사제한테 걸린 저주의 정체다.
"강 선생, 치료할 수 있겠어?"
"일단 저주부터 풀어야겠는데요."
[그림자 벌레의 저주]
[흑마력을 품은 벌레가 들러붙는다.]
[대상의 생기를 남김없이 빨아들인다.]
[마력, 체력, 신성력, 흑마력, 활력.]
[어느 것 하나 가리지 않는다.]
"그림자 벌레는 대상을 쇠약하게 만드는 저주입니다. 사히타 사제처럼 치명상을 입은 환자라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겠죠."
"이야, 함정을 제대로 깔아놨네."
커스 스피어를 이용한 즉사 트랩을 깔아두고, 혹시 운 좋게 목숨을 건지더라도 저주로 마무리.
대상을 기필코 죽이겠다는 악의가 느껴졌다.
"이 던전의 보스 몬스터는 아닌 척 성격 더러운 놈일 것 같네요."
이런 귀찮은 짓을 정성 들여 해둔 걸 보면 틀림없다.
"근데 저주를 어떻게 제거해야 하지? 나나 선생이나 신성 스킬 같은 거 없잖아."
저주를 제거하기 위해선 사제가 가진 저주 정화 스킬이나 성수가 필요하다. 물론 강승현에게 저주 정화 스킬 같은 건 없지만.
"강력한 성수는 하나 있죠."
그것도 어지간한 사제보다 뛰어난 신성력을 품고 있는 성수. 아이베르 교단에서 온갖 정성을 들여 제작한 여명의 성수다.
"정확하게는 성수의 힘을 가진 화살이지만."
강승현은 여명의 성수 화살을 꺼냈다. 인벤토리 밖으로 꺼내기만 했을 뿐인데, 강력한 신성력이 퍼져 나왔다.
"이거라면 저주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아! 그 녀석이 있었지!"
김호정이 손가락을 튕기며 소리쳤다.
"강 선생. 빨리 팍~! 하고 쏴버려!"
"한번 쓰면 내일 아침까지 못 쓰잖아요. 또 쓸 일이 있을지 모르니 아껴놔야죠."
"어...그럼 어쩌려구?"
"화살에서 나오는 신성력을 이용할 겁니다."
강승현은 여명의 성수 화살을 상처 부위로 가져갔다.
'가지고만 있어도 하급 언데드를 몰아내는 강력한 성수라면....'
검은 덩어리에 여명의 성수 화살을 대자,
파아아아아-!
덩어리가 강한 빛을 뿜어내며 소멸했다. 마치 불에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역시 저주 같은 건 가볍게 지워버리는군.'
강승현의 예상이 맞았다. 그림자 벌레의 저주는 여명의 성수 화살에서 흘러나오는 신성력을 버티지 못했다.
"자 그럼, 이거 받으시고."
"응?"
강승현은 김호정한테 화살을 내밀었다.
"어? 내가? 내가 해?"
"저는 상처 치료해야죠. 서포트 부탁드려요."
강승현이 웃는 얼굴로 말하자,
"오케이! 서포트! 노력할게!"
김호정은 화살을 쥐고 저주를 지져갔다. 신성력이 워낙 강력해서 몸에 들러 붙어있던 저주가 남김없이 증발하기 시작했다.
'저쪽은 신경 안 써도 되겠네.'
이래서 사람은 동료가 있어야 한다. 포인트 벌이도 중요하지만, 치료할 때 옆에서 보조해줄 사람이 꼭 필요하니까.
'저주는 해결했고, 이제 남은 건 커스 스피어로 인한 관통상인가.'
커스 스피어는 사히타 사제의 다리를 꿰뚫고 몸에 저주를 퍼트리며 소멸했다. 그 때문에 과다출혈이 일어났지만, 안에 남은 이물질은 없었다.
'몸 안에 잔해가 남아 있었다면 좀 귀찮았을 텐데. 따로 제거할 필요 없어서 좋네.'
머리나 복부 같은 급소 부위가 아니라 다리를 찔린 게 천운이라면 천운. 덕분에 출혈 외에는 크게 신경 쓸 게 없다.
'뼈가 부러지지도 않았고 감염도 없으니, 바로 봉합하면 되겠어.'
강승현은 소독을 마치고 봉합 도구를 꺼내더니 김호정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력 포션."
"어? 어! 오케이!"
김호정이 마력 포션을 꺼내주었다.
[실 뽑기]
포션에서 뽑혀 나온 마력 실을 바늘에 걸고 스킬을 발동했다.
[관찰의 눈]
[봉합]
물론 이 두 스킬은 스태미나가 어마어마하게 소모되는 조합이었으나,
"스태미나 포션."
"오케이!"
이번에는 옆의 조수가 스태미나 포션을 제공해줘서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훨씬 낫네.'
진작 조수를 들일 걸 그랬다. 강승현은 만족스러워하며 봉합을 시작했다.
-"어떻게 됐을까? 잘 됐을까?"
"...."
치료에 방해된다며 쫓겨난 에르간 파티원들. 그들은 초조한 얼굴로 강승현을 기다렸다.
"나는 그렇다 쳐도, 사히타는 큰 부상을 입었으니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죽겠지."
라크라마티가 착잡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파티원 중에 사망자가 나올지도 모른다. 다들 이 사실을 깨달은 순간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강승현 힐러가 사히타를 고칠 수 있을까?"
"모르겠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지금은 믿고 맡기는 수밖에 없군."
에르간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어차피 자신들은 어찌할 방법이 없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기다리는 것뿐.
"아무래도 힘들지 않을까요?"
그때, 쭉 입 다물고 있던 아일이 입을 열었다.
"강승현 씨는 신성력이 낮은 데다, 저주가 워낙 강력해서 성수가 있어도 쉽게 풀긴 힘들 겁니다."
"그럼 방법이 없어?"
"지금으로선... 없다고 봐야겠죠."
그가 그렇게 말한 순간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강승현이 웃는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웃음을 기다렸다는 듯, 에르간 파티가 우르르 몰려갔다.
"사히타는 어떻게 됐어?"
"그녀는 무사한가?"
"치료는 물론이고 저주 해제도 성공했습니다. 직접 보시죠."
강승현이 뒤를 가리키자 김호정이 사히타를 등에 업고 나타났다. 그녀의 다리에 들러붙어 있던 저주 덩어리는 사라진 상태였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로...."
업혀 있던 사히타 사제가 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강승현은 사히타한테 다가가 손수건 대신 자른 붕대를 건네주었다.
"눈물 닦으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히타는 훌쩍이며 붕대로 눈물을 닦았다.
'안 그래도 겁이 많은데, 죽다 살아났으니.'
저렇게 훌쩍거리는 것도 당연했다.
"다행이다. 평소처럼 우는 거 보면 멀쩡한가 보네."
슈이레가 한숨을 쉬더니 옆에 있던 아일을 쿡 찌르며 말했다.
"야, 너 때문에 괜히 겁먹었잖아. 강력한 저주라 해제하기 어렵다면서."
"...."
슈이레는 웃으며 말했지만, 그걸 본 아일의 표정은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하지만 금방 평소의 얼굴로 되돌아갔다.
"...다행히 고비는 넘기신 것 같네요. 하지만 저주의 여파로 몸이 많이 쇠약해지셨으니 걷는 건 힘드시겠죠."
"밖에 나가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야 하는 거 아냐?"
슈이레는 당장이라도 귀환 마법진을 그릴 기세였다.
"그럼 제가 사히타 사제님을 데리고 임시 귀환하겠습니다. 마침 가져온 포션이 다 떨어진 참이라...."
아일이 이렇게 말하며 사히타한테 다가가려는 순간이었다.
"아, 사제님은 걱정하지 마세요."
강승현이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잡았다.
"1~2시간만 쉬시면 회복하실 겁니다. 지금도 걷는 건 문제 없으신걸요?"
그러니 굳이 데리고 나갈 필요는 없다. 강승현은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아일은 불신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 강력한 저주에 걸렸던 사람이 당장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못해도 하루 이틀은 쉬어야 할 테니, 마을로 데려가는 게 옳다고 봅니다."
아일은 아까 티나를 치료할 땐 별말 없었지만, 지금은 유난스럽게 물고 늘어졌다. 슬슬 짜증 날 정도로 말이다.
'이런 놈 꼭 있지. 내가 죽어가던 사람 살려놔도 따지고 드는 놈들.'
힐 못 쓰는 힐러 놈 말은 믿지 못하겠다며 발광하는 놈.
제대로 치료한 건 맞냐며 따지는 새끼.
혹시 뭔가 속임수라도 부린 건 아니냐고 지랄하는 녀석.
야매 힐러로 살다 보면 자주 만나게 된다.
"정 못 믿겠다면 어쩔 수 없죠."
하지만 그런 인간들을 입 다물게 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사히타 사제님, 잠깐만 내려와서 걸어보시겠어요?"
환자가 멀쩡하다는 걸 보여주면 되니까.
47. 유적 심층부 1
"아, 알겠습니다...."
사히타는 힘없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바닥으로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정말 걸을 수 있을까?'
'다리를 꼬챙이처럼 꿰뚫린 데다, 저주까지 받았으니 걷는 건 무리겠지.'
'사히타 녀석, 더 이상 모험하는 건 힘들지 않을까.'
사실 아일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 역시 강승현의 실력을 믿지 않았다. 사히타의 부상이 워낙 심각했으니까.
'역시 안 믿는 눈치로군.'
물론 강승현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남들이 자길 저평가하는 게 좋았다.
'나야 좋지. 그러면 그럴수록 반응이 더 재밌으니까.'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사히타를 바라보았다.
"저, 저는...괜찮아요. 그러니까...."
바닥으로 내려온 사히타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더니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같이 가게 해주세요...."
조금 비틀거리긴 했지만, 걷는 데는 아무 문제 없었다.
"이, 이럴 수가."
그걸 본 아일은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마치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걸 본 것처럼.
"벌써 움직일 수 있다고?"
"진짜 괜찮은 거야? 너 무리하는 거 아니지?"
다른 사람들도 사히타를 보고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며칠은 쉬어야 할 사람이 멀쩡하게 걷고 있었으니까.
"아일 씨, 이 정도면 됐겠죠? 하루 이틀이나 쉴 필요는 없어 보이는데요."
"...."
강승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아일은 잠깐 무표정한 얼굴로 강승현을 바라보더니,
"강승현 씨의 말대로군요. 제가 사제님을 너무 걱정했던 모양입니다."
무척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그는 고집을 부렸던 것과 달리, 의외로 순순히 잘못을 인정했다.
'이 새끼 딱 보니까 속으로 내 욕하고 있네.'
물론 야매 힐러 경력 3년 차인 강승현은 그런 가식적인 사과에 속지 않았다.
"야 라크라마티, 이게 가능한 거야?"
슈이레가 사히타를 이리저리 살피며 물었다.
가벼운 상처도 아니고 다리가 꿰뚫리는 치명상에 강력한 저주. 이렇게 빨리 회복할 만한 부상은 아니었다.
"보통 몸에 걸린 저주를 풀어도 어느 정도 영향이 남아 있기 때문에... 힐 효율이 떨어지는 게 정상이야."
그래서 저주 피해자들은 힐을 써도 몸이 빠르게 낫지 않는다. 원래는 며칠 쉬면서 몸을 천천히 회복하는 게 상식이건만.
"저 녀석은 그런 걸 무시하고 치료해버린 거고."
"진짜 뭐 하는 놈이야. 힐러 맞아?"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군."
마침내 리더 에르간까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강승현은 죽기 직전이던 사히타 사제를 살려낸 것도 모자라, 그녀가 파티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완치시켰다. 이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네, 정말 대단한 힐러였군.... 미처 알아보지 못해서 미안했다."
"이제라도 알아보시니 다행이네요. 안목이 전혀 없진 않으시네."
강승현은 뻔뻔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것이 야매 힐러의 즐거움이다.
"그럼 다들 많이 지친 것 같은데 여기서 좀 쉬어가죠."
"난 찬성. 더는 못 걸어."
"강 선생 말이면 무조건 찬성이지."
"딱히 반대하시는 분 없죠? 잠깐 휴식."
그렇게 파티의 주도권은 자연스럽게 강승현의 손으로 넘어왔다.
-"식사 준비라도 해야겠군. 음식을 먹다 보면 기분이 좀 나아질 테니."
"따뜻한 꽃차 마시고 싶어.... 피곤해."
화르르륵.
에르간 파티. 아니, 강승현 파티는 모닥불을 피우고 휴식을 취했다.
'이제 남은 건 라크라마티인가.'
라크라마티의 저주는 아직 풀리지 않았다.
여명의 성수 화살을 사용하면 가볍게 지워버릴 수 있지만,
'화살에 대해 설명하기 귀찮으니까 사히타 사제한테 맡기자.'
원래 저주를 해제하는 건 사제가 할 일이다.
"사히타 사제님, 스킬은 쓰실 수 있겠어요?"
"해볼게요...."
사히타가 손을 뻗으며 주문을 외웠다.
"정화의 종소리...."
황금빛 종이 나타나 신성한 울림을 만들어냈다. 울려퍼진 종소리가 라크라마티의 팔에 닿자, 들러 붙어있던 저주가 씻겨 내려갔다.
팟!
그때, 종소리가 약해지더니 빛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사히타 사제는 스킬을 다시 써보려 했으나, 결국 고개를 저으며 손을 거두었다.
"더, 더는 안 되겠어요."
'멘탈에 문제가 생겨서 스킬이 안 나오나 보군.'
마법 스킬도 그렇지만, 신성 스킬 역시 정신상태에 큰 영향을 받는다.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으면 스킬이 제 위력을 못 내거나 발동할 수 없게 된다.
'죽을 뻔했으니 당연한가.'
아무래도 다시 스킬을 쓰기 위해선, 몸은 물론이고 마음을 안정시켜야 할 것 같다.
"억지로 쓰려고 하면 더 안 나와요. 지금은 일단 쉬세요."
"하, 하지만 라크라마티가...."
"그건 걱정할 거 없어요."
다행히 라크라마티의 저주는 잠깐 발동한 스킬로 해제됐다. 그는 커스 스피어에 살짝 스치기만 했을 뿐이라, 몸에 걸린 저주도 약했기 때문이다.
"다, 다행이다.... 그럼 저는 저쪽에서..."
사히타는 무척 안도한 얼굴로 한숨을 쉬더니 구석으로 가서 성서를 펼쳤다. 사제는 저런 식으로 마음을 진정시키는 모양이다.
"...."
라크라마티는 그녀의 옆에 앉아 명상을 시작했다. 저 녀석은 할 일이 없는 모양이다.
'이쪽은 대충 해결됐고, 다른 사람들은....'
에르간은 덤덤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까보다 얼굴이 어두웠다. 이런저런 일을 겪어서 지친 모양이다.
"배고파.... 던전에 들어오면 시간 개념이 없어진다니까."
"짠, 저는 시계 있어요! 마도공학자들이 만든 마나 워치!"
"이야 좋겠네."
물론 모든 사람이 지친 건 아니었다. 티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자기 시계를 자랑하고 있었다.
"강 선생, 저런 거 얼마쯤 해? 나도 살 수 있을까?"
"김호정 씨 목을 팔아서 받을 현상금의 100배 정도."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 산다는 뜻이잖아...."
"혹시 얻게 되면 김호정 씨 것도 구해드릴게요."
"진짜?"
울상을 짓던 김호정이 환하게 웃었다. 이렇듯 김호정과 티나는 둘 다 단순해서 처음하고 똑같았다.
"다들 기운 내세요. 조금만 더 힘내봐요."
그리고 아일 역시 처음과 마찬가지로 지친 동료들을 격려했다. 비싸디비싼 마력 포션을 나눠주면서 말이다.
'흠....'
강승현은 모닥불을 살피던 에르간한테 다가갔다.
"티나 씨하고 초면인 건 알겠는데, 다른 분들은 다 구면인가요?"
"구면이다. 전부터 함께 행동했지."
에르간과 슈이레, 라크라마티.
여기에 라크라마티의 소개로 들어온 사히타가 기존 파티원이라고 한다.
"그럼 아일 씨는요?"
"그와는 이번 일로 처음 합류했지."
"혹시 이 던전을 발견한 사람이 아일 씨였습니까?"
"그렇다만."
던전을 발견한 아일이 모험가 조합에 파티 모집 공고를 내걸었고, 그걸 발견한 에르간 파티가 합류했다고.
'그 자식, 기존 파티원도 아니었어?'
동료들한테 무척 친절하게 구는 것과 달리, 그렇게 오래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었다. 강승현은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이제 푹 쉰 것 같으니 슬슬 움직이죠."
"오케이!"
그렇게 약 1시간 뒤. 푹 쉰 강승현 파티는 왼쪽 갈림길로 들어섰다.
왼쪽 길에선 여전히 흑마력이 풀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동시에 흑마력을 품은 무언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다들 준비하세요."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강승현의 말을 신호로, 모든 파티원들이 전투 태세를 갖췄다. 직후, 맨 앞에서 걷던 에르간이 소리쳤다.
"좀비 떼가 몰려온다!"
왼쪽 길에서 나타난 몬스터는 예상대로 언데드 몬스터, 걸어 다니는 시체들이었다.
"아까 저주에 걸린 탓에 위력이 조금 낮아지긴 했지만... 못 싸울 정도는 아니지!"
쾅!
라크라마티가 앞으로 뛰쳐나가 좀비의 안면에 신성력이 담긴 주먹을 내질렀다.
"성권!"
"%$#!*(!!!!"
좀비들은 비명과 함께 터져나갔다.
[성권]은 일반 생물에겐 별 타격을 못 주지만, 언데드에겐 강력한 대미지를 입히는 공격 스킬 중 하나다.
"오, 저 녀석 생각보다 잘 싸우는데?"
"라크라마티 씨는 물리치료사였군요."
"몽크라고, 몽크!"
"농담입니다."
몽크는 격투가와 사제를 합쳐준 직업이다. 일반 힐러와 달리 격투술로 적을 제압하고, 동시에 치유 능력으로 아군을 치료할 수 있다. 그래서 당사자들은 싫어하지만 물리치료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저 친구도 대단하긴 한데, 몬스터 사냥은 우리가 전문이거든!"
김호정이 혈석을 손에 쥐며 말했다. 찔린 손바닥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흡혈 충동!]
[일정 시간 동안 공격력이 상승합니다.]
서걱!
공격 상승 버프를 받은 김호정이 언데드를 썰어나갔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돌 화살을 생성합니다.]
파바바바박!!!
강승현은 좀비 떼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발사된 돌 화살이 좀비 떼의 머리를 무참하게 꿰뚫었다.
파가악!! 파악!
털썩!
머리가 으깨진 좀비들이 바닥으로 쓰러지며 움직임을 멈췄다.
원래 언데드 몬스터와 대치할 땐 신성 스킬이 가장 효과적이긴 하나, 압도적인 힘으로 밀어붙이면 그런 거 없어도 때려잡을 수 있다.
"신성력도 별로 없으시다면서 좀비 머리를 그냥 갈아버리시네...."
좀비의 공격을 방패로 막고 있던 티나는 그걸 보고 감탄한 듯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강해지나요?"
"노예로 팔려와서 개고생하면 됩니다."
강승현이 마지막 남은 좀비 머리를 따며 말했다. 더 움직이는 것들이 없는 걸 보면 이번에 잡은 좀비가 마지막이었던 모양이다.
"그 많은 걸 셋이서 다 쓸어버렸네."
"정확하게는 강승현 힐러 혼자서 절반을 처리했지."
"저 녀석, 사실 취미로 힐러 하는 거 아닐까."
다른 파티원들은 아무 생각 없이 쓸려나가는 좀비들을 구경하고 있었지만,
"강 선생, 좀비들을 왜 그렇게 봐? 아직 안 죽었어?"
"그게 말이죠."
강승현은 살짝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이 좀비들을 자세히 보세요."
강승현이 쓰러진 좀비들을 가리켰다.
머리가 으스러져서 쉽게 알아보긴 힘들지만,
"생긴 게 다 다릅니다."
옷차림은 물론이고 머리 모양이나 나이, 성별... 뭐 하나 같은 좀비가 없었다.
"원래 던전의 몬스터는 보스 몬스터가 마력으로 만들어 낸 존재들이잖아요."
던전 밖의 몬스터가 영혼을 가진 자연산이라면, 던전 속 몬스터는 자아가 없는 양산형이다.
'즉, 마력으로 만들어진 소환수.'
보통 소환수들은 틀에서 찍어낸 것처럼 똑같이 생겼다. 세밀하게 만들수록 시간과 마력이 많이 소모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던전의 좀비들은 양산형이 아니라 전부 다른 생김새를 갖고 있었다.
"이 경우엔 좀비들이 소환수가 아니라 사령술로 되살려낸 진짜 시체들이거나...."
보스 몬스터가 이렇게 디테일한 소환수를 만들 정도로 강력하다는 뜻이다. 어느 쪽이든 귀찮은 타입인 건 확실하다.
"그럼 각오 단단히 해야겠군."
"하긴, 저런 치밀한 함정까지 파놨는데 평범한 놈은 아니겠지."
파티원들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무기를 꼼꼼히 살피고, 사소한 상처 하나하나 남겨두지 않고 치료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좀비를 해치우고 앞으로 나아가던 강승현 파티는 거대한 문을 발견했다.
"드디어 도착했네."
이 문이 보스 몬스터가 거주하는 던전의 최심부, 보스 룸으로 이어지는 입구다.
"다들 조심해라."
맨 앞에서 걷던 에르간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의식을 치르기 위한 제단이었다.
"...어서 와라. 하찮은 제물들이여."
그 제단 앞에 던전의 주인, 보스 몬스터가 모험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화아아악!
"크으윽!"
"엄청난 흑마력이다!"
놈한테서 아주 강력한 흑마력이 느껴졌다. 신성력이 없는 사람들도 느낄 수 있을 정도 말이다.
"저, 저런 놈을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 없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잖아."
여기서 놈을 막지 않으면, 언데드 군단이 하인드 마을을 공격할 것이다. 그것만은 목숨을 걸어서라도 막아야 했다.
"쉽진 않겠지. 우리 중 누군가가 목숨을 잃을 수도...."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뭐?"
"이 유적에서...."
그때, 강승현이 입을 열었다. 모두 일제히 강승현을 바라보았다.
"저 녀석이 제일 쉬운 몬스터일 테니까."
48. 유적 심층부 2
"가장 쉬운 몬스터라고?"
에르간이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보스 몬스터는 지금까지 싸웠던 몬스터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하다.
"저 녀석이 마음만 먹으면, 여기까지 오면서 싸웠던 몬스터를 전부 불러내는 것도 가능할 터...."
"저, 저게 어딜 봐서 가장 쉽다는 거야."
"반어법이지?"
에르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던전의 지배자이며 던전 최강의 몬스터한테 가장 쉽다는 말을 붙이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으나,
"저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거든요."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것도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 없다는 말과 함께.
"호, 혼자 잡겠다구요...?"
"저건 잡몹도 레어 몬스터도 아니고, 보스 몬스터라고!"
"상관없습니다."
일반 몬스터건, 레어 몬스터건, 보스 몬스터건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저놈이 엄청난 흑마력을 가진 흑마술사라는 게 중요한 거라."
"자네는 저 괴물을 쓰러트릴 방법이 있다는 소리군. 그것도 혼자서."
"네.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강승현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답했다.
'보통은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강승현, 이자라면... 해낼지도 몰라.'
지금껏 강승현이 해낸 일을 생각하면 이번에도 기적을 보여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생각하던 에르간은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자네한테 모든 걸 맡기지."
보스 몬스터를 잡아서 얻는 보상도 전부 강승현한테 넘기기로 했다.
"물러나 계세요."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강승현의 손에 프리아의 석궁이 나타났다.
"선생, 혹시 그거?"
"네, 그거요."
김호정은 대충 눈치챈 모양이다.
"지금 쓰려고 아껴둔 겁니다."
하루에 단 한 번만 쓸 수 있는 대신, 어마어마한 신성력을 쏘아 보낼 수 있는 화살.
'여명의 성수 화살.'
"어리석은 것들. 이 몸의 이름은...!"
흑마술사가 자신의 이름을 외치며 스킬을 사용하려는 순간이었다.
"장전."
강승현이 장전과 동시에 방아쇠를 당기자,
파아아앗!
화살이 강력한 신성력을 퍼트리며 흑마술사를 향해 날아갔다.
"크아아아아아악!!!!"
흑마술사는 고통스럽게 몸부림쳤다. 화살이 몸에 닿지도 않았는데 화살에서 나오는 신성력에 압도당한 것이다.
'성능 확실하고 좋네.'
여명의 성수 화살은 상대가 흑마력을 많이 갖고 있을수록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 그야말로 흑마술사 최종병기.
'아무리 보스 몬스터라고 해도, 힘의 원천이 흑마력이라면....'
여명의 성수 화살을 절대 견딜 수 없다.
"이, 이럴 수...."
흑마술사는 어떻게든 발악하려 했다. 하지만 흑마력을 모아 스킬을 쓰려 해도 여명의 화살이 남김없이 지워버렸다.
"없...크아아아아아악!!!!"
파아아아아-!
그리고 마침내, 화살이 몸을 관통하자 흑마술사는 새하얀 빛에 휩싸여 소멸해버렸다.
"아니, 이건 대체 뭔...."
"세상에...."
"내가 뭘 본 거지?"
다른 파티원들은 입을 벌리고 흑마술사가 사라지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분명 신성력이 밑바닥이라 들었는데...."
"바, 방금 그 스킬은 뭐예요?"
[프리아의 화살 회수]
[여명의 성수 화살을 회수합니다.]
강승현이 스킬을 발동하자, 소멸한 여명의 성수 화살이 인벤토리로 돌아왔다.
[회수 성공!]
[회수된 여명의 성수 화살.]
"이거 어차피 하루에 한 번밖에 못 써요."
회수한 화살을 다시 쓰기 위해선 다음 날 해가 뜰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대단하긴 하지만, 자주 사용할 수 없다는 게 단점.
"방금 그거 설마, 자신의 신성력을 한 번에 모아서 터트리는 스킬인가?"
"호, 혹시 저 녀석 신성력이 바닥인 게 아니라 힘을 비축하고 있어서...."
"그럼 방금 보여준 그 신성력이 강승현 힐러가 가진 진짜 신성력이라고?"
강승현이 자세한 설명을 안 해준 관계로 파티원들은 큰 오해를 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저런 신성력을 가질 수 있어?"
"인간 맞아? 사실 신 아냐? 그러지 않고서야...."
"어, 어쩌면 신과 계약한 사도, 성자님일지도 몰라요."
다들 여명의 성수 화살에서 나온 신성력을 강승현의 신성력이라 착각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정말 엄청난 인물과 함께 행동하는 걸지도 모르겠군...."
에르간이 근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게 착각인 것도 모르고.
-"보스 몬스터가 죽었으니... 곧 던전이 소멸하겠네."
"그럴 테지."
이제 유적 던전과 하카트 언덕을 잇던 입구 포탈이 소멸했을 것이다.
"탈출용 마법진, 지금 그릴까?"
마법사 슈이레가 지팡이로 바닥을 툭툭 내려치며 말했다.
"어차피 던전이 소멸하려면 시간이 걸리니... 이 안을 좀 더 살펴본 다음에 그리는 건 어떠세요?"
"그래? 그래 그럼!"
아일의 말에 슈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말이야."
"강승현 선생님 덕분이네요!"
원래는 보스 몬스터와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어야 하지만... 그 녀석은 화살 하나 처맞고 소멸해버렸다.
"시간도 넉넉하니... 각자 보스룸을 조사하도록 하지."
에르간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보스룸에서 찾아내는 아이템은 본인 몫이다. 파티원에게 배분할 필요가 없지."
몬스터를 무찌르고 마을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던전을 돌면서 돈이 될 만한 물건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 모험가는 영웅이 아니라 근로자니까.
"보스 몬스터가 보관해둔 아이템이 있을 것이다. 던전이 소멸할지도 모르니 최대한 빠르게 수색하도록."
"알겠습니다!"
파티원들은 보스룸 곳곳으로 흩어져 수색을 시작했다.
"우와... 이 제단 좀 봐요."
제단을 살펴보던 티나가 중얼거렸다.
"제단에 말라붙은 피가 어우... 얼마나 많은 제물을 바쳤을까."
"제단 같은 건 못 가져가잖아. 그런 거 살필 시간에 이런 걸 챙기라구."
김호정은 불을 밝히는 촛대를 챙겼다. 디자인도 화려해서 꽤 값나갈 거라며.
"제단 밑을 살펴보면... 뭔가 들어 있을 거 같은데."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마시며 제단 아래쪽을 살펴봤다.
덜그럭.
손으로 더듬자 제단 아래쪽이 서랍 같은 구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쪽에 서랍 같은 게 있네요."
"오, 열려?"
"열립니다."
원래 이런 건 보스 몬스터가 강력한 마법으로 봉인해두는 게 정석이다. 흑마술사니까 흑마술로 봉인해놨겠지만,
"아까 날린 여명의 성수 화살이 봉인까지 싹 다 풀어버렸나 봐요."
"캬하~ 아까 그거 굉장했지!"
여명의 성수 화살이 뿜어내는 강력한 신성력이 전부 지워버린 모양이다.
"그래도 최종 보스인데 필살기 한 방에 끝내는 건 너무한 거 아녀? 자기소개할 시간은 줘야지~."
김호정이 낄낄거리며 웃어댔다.
"필살기를 막판에 쓰는 놈들이 이상한 거죠."
"것도 그렇네!"
김호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드르륵.
강승현은 열린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쪽에 들어 있던 아이템은 신비한 기운이 느껴지는 커다란 구슬이었다.
'이건... 보주인가?'
야구공만 한 크기의 주황빛 보주. 그냥 봐도 평범한 아이템은 아니었다.
[□□□□□□의 보주]
-[알 수 없음]
보통 아이템은 인벤토리에 넣으면 상세 정보가 뜨지만, 몇몇 아이템은 정보를 볼 수 없다.
'이래선 무슨 효과를 가진 아이템인지 모르겠네.'
이 경우 유물 감정사를 찾아가거나 아이템 감정 스킬을 쓰면 상세 정보를 알 수 있다. 하지만 하인드 마을의 유물 감정사는 사기꾼이라, 딱히 찾아가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강승현은 보주에 [관찰의 눈]을 사용했다. 아이템을 향해 [관찰의 눈]을 쓰면 감정 스킬처럼 드러나지 않는 정보를 볼 수 있다.
파지지직!
하지만 스태미나 소모가 너무 크고, 아주 간단한 정보만 알 수 있어서 자주 쓰진 않는다.
실제로 스태미나가 반절이나 날아가서 강승현은 포션을 들이켜야 했다.
'역시 두 번 할 건 못 된다니까.'
강승현은 언젠가 아이템 감정 스킬이 나오길 기대하며 아이템 정보를 확인했다.
[키르카라슈텔의 보주]
[강력한 마력 저항]
[강력한 마법 방어]
[그 외엔 알 수 없음]
'마력 저항에 마법 방어 능력이 있는 건가.'
보주의 이름은 키르카라슈텔의 보주. 마법 공격의 대미지를 낮추고, 마력 저항력을 증가시켜 주는 아이템이었다.
'디자인도 그렇고, 능력치도 그렇고 보통 아이템은 아니고, 최소 레어 아이템이네.'
[업적 달성!]
보주를 인벤토리에 넣는 순간 업적 달성 메시지가 나타났다.
'이건 생각 못 했는데.'
[업적 달성 : 아이템 슬롯]
[레어 등급 이상의 아이템을 3개 보유 시 달성.]
프리아의 석궁, 여명의 성수에 이어서 키르카라슈텔의 보주. 세 아이템을 소지한 결과 업적이 달성됐다.
'아이템 슬롯이 뭐지?'
보상 수령 버튼을 누를 필요도 없이 다음 메시지창이 날아왔다.
★[시스템(아이템 슬롯)]
[※이제부터 상태창에서 '아이템 슬롯' 시스템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장비 아이템을 아이템 슬롯에 넣어두면 몸에 지니지 않아도 효과를 받을 수 있다.]
"오...."
꽤 유용한 시스템이 해금됐다. 아이템을 인벤토리에 넣고 있을 땐 효과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냥 들고 다니면 잃어버릴 수도 있는데, 이제 그럴 걱정이 없겠네.'
강승현은 바로 아이템 슬롯을 확인했다.
[아이템 슬롯]
[1 : 없음]
[2 : 없음]
[3 : 없음]
레어 아이템 3개로 해금해서 그런지, 아이템 슬롯 초기 칸은 3칸이었다.
[※룰렛에서 아이템 슬롯 확장권 아이템이 등장합니다.]
인벤토리와 마찬가지로 칸을 늘리기 위해선 룰렛에서 뽑는 확장권이 필요했다.
물론 순순히 줄 리는 없고 낮은 확률로 나올 것이다.
[아이템 슬롯]
[1 : 활력의 브로치 +1]
[2 : 키르카라슈텔의 보주]
[3 : 없음]
강승현은 이번에 얻은 키르카라슈텔의 보주와 옷에 달아둔 활력의 브로치를 등록했다.
이제 소매치기당할 걱정은 없다.
'가만, 이게 레어 아이템 3개를 인벤토리에 넣기만 하면 해금할 수 있는 업적이니까....'
이 업적은 레어 아이템을 남한테서 빌리기만 해도 해금할 수 있다.
'김호정 씨의 혈석도 레어 아이템이었지?'
모험가 조합에서 받은 피를 갈구하는 혈석도 레어 등급 이상의 아이템이다.
'내 거 빌려주면 김호정 씨도 업적 깨겠는데? 프리아의 석궁은 전용 아이템이라 안 되려나.'
그래도 두 개는 갖고 있으니, 앞으로 하나만 더 모으면 된다.
거의 다 깬 거나 마찬가지.
"김호정 씨, 잠깐 이리 와서...."
강승현은 이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 김호정을 부르려 했다.
"가, 강 선생.... 나 갑자기... 왠지 엄청 졸린데...?"
털썩!
그때, 비틀거리며 다가오던 김호정이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김호정 씨?"
서둘러 달려가 붙잡았으나 김호정은 움직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흔들어봤지만 깨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죽은 건 아닐 테고... 수면 상태인가?'
아무래도 상태이상 수면에 당해서 잠든 것 같다.
강승현이 주위를 둘러보자,
"...."
"...."
김호정뿐만 아니라 다른 파티원들도 의식 없이 바닥에 쓰러진 상태였다.
"나만 멀쩡한 건가."
강승현은 김호정을 바닥에 놔두고 몸을 일으켰다.
'보스 몬스터의 짓인가? 아까 쓰러트렸을 텐데?'
강승현은 흑마술사의 잔해를 살폈다. 여명의 성수 화살로 날려버린 탓에 천 쪼가리만 남은 상태였다.
'...핵이 없잖아?'
원래 던전 보스가 사망하면 핵을 떨어트리나, 흑마술사 잔해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즉, 이건 보스 몬스터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 내가 방금 잡은 건... 분신이었군.'
그거라면 지금 일어난 일이 설명이 된다. 본체는 아마 보스룸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지금 보스룸 안에 있는 건 나랑, 김호정 씨랑....'
바닥에 쓰러진 에르간 파티뿐이다.
"그럼 이 녀석들 중 하나가...."
강승현은 석궁을 꺼냈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져 있던 사람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진짜 보스라는 거지."
파박! 파박!
석궁에서 샛노란 화살이 발사됐다. 맞았을 때 체력이 깎이는 대신 스태미나를 채워주는 스태미나 화살이다.
"갑자기 화살 쏴서 죄송한데, 방금 그건 스태미나 화살이었습니다."
물론 처음 보는 사람이 느끼기엔 그냥 냅다 화살을 날린다고 생각할 것이다.
"맞아도 대미지는 안 들어가요. 물론 잠든 사람들은 자기가 화살에 맞았는지도 모르겠죠."
실제로 다른 사람들은 화살을 그냥 맞았지만,
샤아악!!
딱 한 녀석만 몸을 일으켜 화살을 쳐냈다.
"근데 남들은 보스 몬스터의 능력에 당해 잠들었는데 혼자 일어난 녀석이 있다면...."
"...쳇."
에르간 파티의 아일.
화살을 쳐낸 사람은 아일뿐이었다.
"그 녀석이 보스 몬스터겠죠."
49. 유적 심층부 3
"이거 신기하네요. 화살에 맞았는데 스태미나가 회복되다니...."
아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
강승현이 말없이 쳐다보자, 그는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지금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오해?"
"보시다시피 저는 로그입니다."
아일이 자신의 단검을 보여주었다. 흰 천에 둘둘 감싸진 금속제 단검이다.
"단검을 쓰는 로그죠."
로그.
단검이나 암기를 다루는 모험가를 대충 싸잡아 부르는 직업.
능력이 능력이라 도둑질이나 암살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놈들이 많지만, 착실하게 일해서 먹고 사는 놈들도 많다.
"로그의 스킬 중 하나인 '빠른 기상'은 상태이상 수면에 걸렸을 때 남들보다 빠르게 깨어날 수 있는 스킬입니다."
아일의 주장에 의하면 자신 역시 어느 순간 잠들었으나 빠른 기상의 효과로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정신을 차린 순간 공격이 날아오길래 적이라 생각해서 본능적으로 방어했다고.
"아무래도 타이밍이 나쁘게 겹쳤던 것 같습니다."
"...."
"그리고, 강승현 씨 역시 잠들지 않고 멀쩡했잖아요. 우리 중에 보스 몬스터가 있는 게 아니라, 몸을 숨기고 있는 게 아닐까요?"
파티원 중에 범인이 있는 것처럼 꾸며서 내분을 일으키려는 게 목적. 언뜻 들으면 그럴싸하다.
"그게 이상하단 말이에요. 남들은 다 잠들었는데 왜 저만 멀쩡한 건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차이가 뭐길래.
"강승현 씨가 무척 강해서, 보스 몬스터도 어찌 못 한 게 아닐까요?"
아일이 한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 강승현이 다른 파티원보다 압도적으로 강해서 능력이 먹히지 않은 게 아니었을까 하고.
'내가 차원 이동자라서? 그랬다면 김호정 씨도 멀쩡했어야지.'
김호정은 남들보다 좀 더 버티긴 했지만 결국 잠에 빠지고 말았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생각해봤는데, 딱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더라구요?"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포션 하나를 꺼냈다. 그건 아일이 건넨 마력 포션이었다.
"저만 당신이 준 마력 포션을 안 마셨거든요."
강승현을 뺀 나머지 파티원은 전부 이 포션을 마셨다. 겉보기엔 평범한 마력 포션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수면 가루를 탔거나, 마시면 수면 상태이상에 걸리는 포션이겠죠."
이게 강승현을 제외한 모두가 잠든 이유다. 혼자만 포션을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잠들지 않은 것이다.
아일은 당황한 듯한 얼굴로 반론하려 했다.
"그, 그런 이유로 사람을...."
"그리고 한 가지 더."
강승현의 눈이 푸르게 빛나자,
[관찰의 눈]
아일이 가진 단검 위로 간단한 정보가 떠올랐다.
[은마의 천으로 봉인된 희생의 에더메]
[흑마력 증폭]
'내 이럴 줄 알았지.'
에더메는 의식용 단검. 즉, 마법 단검이다.
거기다 단검을 둘둘 감싸고 있던 붕대의 이름은 은마의 천. 마력을 억눌러 숨기는 힘을 가진 아이템이다.
"보통 로그가 '흑마력 증폭' 옵션이 붙은 마법 단검을 쓰진 않죠?"
아무리 봐도 흑마술사나 흑마력 관련 직업이 쓸 무기지, 로그가 쓸 법한 무기는 아니다.
"정말 억울하시다면 그 천을 푸세요. 그럼 믿어드리겠습니다."
아일이 은마의 천을 풀었을 때 죄 없는 모험가라면 아무 일도 없겠지만, 던전의 보스 몬스터라면 강력한 흑마력이 뿜어져 나올 테니까.
"...그거까지 알아냈을 줄이야."
아일이 단검의 흰 천을 풀어냈다. 그러자 신성력 쓰레기도 느낄 수 있는 어마어마한 흑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이래선 변명도 못 하겠네요. 거의 다 정답입니다."
아일은 시커먼 흑마력을 뿜어내며 지금까지처럼 웃는 얼굴로 말했다.
"제가 이 던전의 보스 몬스터, 아일 크로아입니다."
역시 녀석의 정체는 던전 보스였다.
'...솔직히 파티 사기꾼일 줄 알았는데.'
파티 사기꾼.
동료를 구하는 파티에 접근해서 새 동료가 되는 것처럼 연기하다가, 신뢰가 쌓이면 금품을 훔쳐 가는 악질 범죄자.
강승현은 아일 역시 파티 사기꾼일 줄 알고 경계했다. 마침 직업도 로그였으니까.
'설마 던전의 보스 몬스터였을 줄이야.'
알고 보니 사기꾼이 아니라 상상 이상의 거물이었다.
"로그 흉내를 내길래 사기꾼일 줄 알았는데."
"흉내? 지금은 흑마술사 비슷한 게 되긴 했지만, 과거에는 로그였습니다."
아일이 단검을 붕붕 돌리며 말했다.
"과거에는?"
"원래는 이 던전을 클리어하러 온 평범한 모험가였거든요."
"날 때부터 던전의 보스는 아니셨군."
-아일은 본래 동료들과 모험하던 평범한 로그였다.
"보면 아시겠지만, 이 던전은 지금은 잊혀진 고대의 신을 모시던 유적의 일부입니다."
어느 날, 아일 파티는 우연히 유적 던전 포탈을 발견했다. 그리고 다른 모험가들처럼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 안으로 진입했다.
"처음 보스룸에 도착했을 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보스 몬스터는 물론, 일반 몬스터도 없었다. 있는 거라곤 거대한 제단뿐.
아일과 동료들은 흩어져서 보스 몬스터를 찾기로 했다.
"저는 제단에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이걸 발견했죠."
제단 위에 놓여 있던 건 마법 단검 한 자루. 그가 가진 희생의 에더메였다.
아일은 별생각 없이 단검을 집어 들었다.
"제가 그걸 집어 든 순간, 신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 유적 던전의 진짜 주인. 모두에게 잊혀진 신의 목소리였다.
:나에게 제물을 바치거라:
:그렇게 하면 네게 힘을 주도록 하마: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단검에서 강력한 흑마력이 느껴졌습니다."
아즐 대륙의 신은 다른 생물이 자신을 숭배하고 따를수록 강해진다. 그래서 인간이나 몬스터에게 강력한 힘을 내려주고 신도가 되어 자신을 섬기게 한다.
그중, 신과 계약해서 강한 힘을 받고 최초의 신도가 된 존재를 사도라 부른다.
"정말 어마어마한 힘이었죠...."
의심할 여지가 없는 강력한 힘. 아일은 망설임 없이 제물을 바쳤다.
"그 제물은 당연히 동료들이었겠지?"
아일이 처음 왔을 때, 이 던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있는 거라곤 아일과 그의 동료들뿐.
"네. 저는 제 손으로 제 동료를 모두 죽였습니다. 그리고 손에 넣었죠."
즉, 이놈은 강한 힘에 눈이 멀어 자기 동료들을 제물로 바친 것이다.
"그분을 모실 자격과 이 던전을 관리할 엄청난 힘!"
잊혀진 신을 모시는 아일. 그게 이 던전 보스의 정체였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뒤통수치는 건 변함 없구만."
역시 사람의 근본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아일은 강승현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실실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제가 모시는 존재는 과거의 싸움으로 소멸하면서 가진 힘을 대부분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아즐 대륙의 신은 불멸의 존재이며 다른 생물의 신앙심을 얻을수록 강해진다.
하지만 따르는 신도가 적어서 신앙심을 많이 얻지 못하면 약해지고, 신도가 한 명도 남지 않게 되면 모든 힘을 잃고 소멸한다.
'물론 신은 불멸의 존재라서 시간이 지나면 다시 부활할 수 있지만.'
부활 직후엔 모든 힘을 잃어버린 상태라, 신이 예전의 힘을 되찾기 위해선 신앙심을 다시 모아야 한다.
"힘을 되찾기 위해선 더 많은 제물이 필요했죠. 제가 가진 믿음, 신앙심을 그분께 증명하기 위해...."
"그래서 보스 몬스터가 던전 밖에서 영업을 다니셨군."
아일은 모험가로 위장해 파티를 구하는 척 제물이 될 인간들을 찾아다닌 것이다.
"본래 보스 몬스터는 던전 밖으로 쉽게 나올 수 없지만, 저는 일단은 인간이라 포탈을 사용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보스 몬스터가 던전 밖으로 나가면 던전은 형태를 잃고 소멸한다.
"이 유적은 던전이면서 동시에 신을 모시는 신전. 소멸하게 둘 순 없죠."
아일은 자신의 힘을 둘로 나눠 분신을 만들었다.
하나는 던전을 관리할 보스 몬스터 역할, 다른 하나는 밖으로 나가 제물을 데려올 미끼 역할.
"모험가 조합 덕분에 편하고 쉽더라구요."
아일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모험가 신분을 이용해 희생자들을 끌어들였다.
{던전을 발견했습니다.}
{함께 공략할 동료를 모집합니다.}
모험가 조합에 파티 공고를 올려두기만 하면 제물이 될 희생양들이 알아서 다가왔으니까.
"그분이 죽은 것은 제물로 받지 않으셔서, 꼭 살아 있는 걸 제물로 바쳐야 했거든요."
제물을 바치는 장소는 보스룸의 제단. 잊혀진 신은 살아 있는 인간을 데려와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했다.
"보스룸에 도착하기 전엔 제물이 죽거나 던전 탐색을 포기해선 안 될 일이죠."
그래서 아일은 위험에 빠진 동료를 구해주거나 희망을 잃지 않도록 격려했다. 제물이 무사히 보스룸에 도착할 수 있도록.
"이런 치밀한 새끼를 봤나."
그렇게 친절한 모험가 행세를 하던 아일은 보스룸에 도착한 순간 본색을 드러냈다. 모험가를 무참하게 공격하고, 죽기 직전 제물로 바친 것이다.
"그럼 왼쪽 길에서 만났던 좀비들은?"
"제물을 바치고 남은 빈껍데기입니다."
아까 만났던 좀비 떼의 정체는 아일에게 속아 제물로 바쳐진 모험가들의 시체였다.
"그냥 버리기 아까워서 재활용했죠. 그분이 요구한 건 제물의 신선한 피였으니까요."
"쓸데없이 디테일하다 했더니만."
정말 가지가지 하는 놈이었다. 사기와 배신으로 모자라 고인 능욕까지.
"솔직히 조금 당황했어요. 제가 도와주지 않아도 함정을 간파하질 않나, 풀어둔 좀비를 다 쓸어버리질 않나. 분신을 한 방에 쓰러트리질 않나."
아일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솔직히 분신을 그렇게 빨리 잡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거든요."
원래 분신은 아일이 제물 의식을 준비하는 동안 시간을 끌어주는 역할이었다. 근데 이번엔 분신이 1초 만에 소멸했으니.
"좀 당황했죠. 아니, 어떻게 시작부터 그런 공격을...."
"필살기를 나중에 쓰는 게 미친놈이지."
"그래도 저는 준비성이 철저해서."
아일이 마력 포션을 꺼냈다.
"혹시 모를 상황을 준비해두는 편입니다."
여기엔 스킬만 발동하면 바로 재울 수 있는 수면제가 담겨 있다.
"잠든 대상은 제물로 바칠 수 없거든요. 하나씩 깨워서 바칠 생각이었는데...."
하지만 강승현이 잠들지 않으면서 문제가 생겼다. 다 잠들었는데 혼자만 멀쩡했던 것이다.
아일은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설마 포션을 안 마셨을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필요 없어서요."
강승현은 마력 포션을 마실 이유가 없다. 스태미나 포션이면 또 모르겠지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저도 잠든 척했죠."
일단 잠든척하며 틈을 노리고 기습할 생각이었으나, 강승현은 그것조차 알고 있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절 놀라게 할 줄이야."
아일은 지금까지 별의별 모험가를 만났다. 그중 함정을 간파하거나, 좀비를 쉽게 쓰러트리고 분신을 쓰러트린 놈들도 없진 않았다.
그러나 그들 중 아일이 진짜 보스라는 걸 알아차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걸 알아차리기 전에 제물로 바쳐졌으니까.
"제 정체를 눈치챈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었거든요."
강승현은 아일이 잠들지 않았던 건 물론이고, 그가 보스 몬스터라는 것까지 간파했다.
"마지막으로 묻는 건데. 사히타 사제를 계속 데려가겠다고 난리 친 이유는?"
"그야 신성력을 쓰는 사제하곤 상성이 안 맞기도 하고, 살려두면 이래저래 귀찮으니까요."
아일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함정으로 죽이는 데 실패했으니 데리고 나가는 척 죽여버릴 생각이었다고.
그마저도 강승현 때문에 실패했지만.
"그럼 더 들을 것도 없네요."
이 녀석은 살려둘 이유가 1도 없다. 강승현은 아일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파바바박!
석궁에서 발사된 화살들이 아일을 향해 날아들었다.
"당신은 정말 대단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샤악!!
아일은 단검으로 화살을 받아치더니, 자신의 팔을 단검으로 찔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물로 바치겠습니다."
파밧!
동시에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분을 위해!"
아일은 엄청난 속도로 다가와, 자신의 피가 묻은 단검을 휘둘렀다.
"이건...."
"제물 의식은 여러 방법이 있긴 한데...."
그것도 그냥 휘두르는 게 아니라,
"이번엔 좀 복잡한 걸로 가겠습니다."
단검을 휘둘러 허공에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이 자식, 흑마술을 다루긴 하지만 근본은 로그였지?'
로그의 단검 실력으로 마법진을 그려대니 눈 깜짝할 사이에 마법진이 완성됐다.
콱!
마법진에서 검은 손아귀가 뻗어 나와 강승현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제물이 되어라!"
수많은 사람들이 이 손아귀에 붙잡혀 산채로 제물이 되었다. 강승현 역시 제물로 바쳐졌을 것이다.
[슬롯에 등록된 아이템 효과가 발동합니다.]
파아아앗!!
강력한 힘에 의해 검은 손아귀가 소멸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50. 유적 심층부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