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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 30-40

30. 조력자

"석궁 일은 어떻게 됐어? 잘 됐어?"

"자세한 건 가서 이야기할게요."

"그래그래. 어디로 갈까?"

"제 방으로 가죠. 김호정 씨 방은 계단 더 올라가야 하니까."

강승현은 김호정을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이야기를 나눌 만한 장소는 여기 말곤 없으니까.

"어제 빌려주신 돈부터 갚을게요."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던졌다. 주머니를 낚아챈 김호정은 묵직함에 놀랐다.

"이게 다 얼마야? 5천 골드의 무게가 아닌데?"

"5만 골드."

"5천 골드 투자했더니 5만 골드로 불려준 거야? 선생 코인 최고다!"

김호정은 낄낄거리며 주머니를 챙겼다.

"이번에 돈 많이 깨졌을 텐데, 이렇게 많이 줘도 돼?"

"그 정도는 드려야죠."

"석궁 사느라 한동안 돈 부족할 텐데, 급하면 언제든지 빌리러 와!"

김호정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아주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나 오늘 나가서 벌어온 돈까지 합치면 무려 6만 5천 골드나 있다구!"

'이번에 거머리 팔아서 300만 골드 번 거 알면 기절하시겠네.'

강승현은 오랜 지인의 정신 건강을 위해 진실을 숨겼다.

"본론으로 들어가죠."

그리고 어제 있었던 일을 김호정에게 전했다.

-"그, 그게 진짜야?"

"진짭니다."

"아니...."

김호정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자신이 이런 낯선 세상에 끌려온 이유가 고작 포인트 노예로 부려먹기 위해서라니. 믿기지 않는 게 당연하다.

"그럼 나 지금 참치잡이 어선에 팔려온 거야?"

"그렇죠."

"무슨 거창한 이유도 아니고. 고작 그런 이유로...."

김호정은 얼굴을 감싸며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웅얼거렸다.

"그래도... 돌아갈 방법이 있기는 하다는 거지?"

"그놈 말에 의하면."

"다행이다.... 고향 땅도 못 밟아보고 죽는 줄 알았는데...."

김호정이 눈물 콧물을 줄줄 흘렸다. 강승현은 창가에 기댄 채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만 울고 이야기 좀 들어봐요."

이런 청승맞은 이야기를 하겠다고 김호정을 부른 건 아니었다. 정 울고 싶다면 지구로 돌아가기 직전에 울어도 늦지 않다.

"대충 설명 들어서 아시겠지만, 제가 포인트를 빡세게 모아야 해요."

"하긴, 선생은 포인트 벌기 까다롭지?"

"그렇죠. 상처를 치료하면 되는데...."

야매 힐러가 포인트를 벌 방법은 환자의 부상 치료다. 기본적으로 환자를 치료하면 포인트를 벌 수 있지만, 여기에 몇 가지 예외가 있다.

"일단 자기 자신의 치료는 카운트되지 않습니다."

힐러는 자신의 몸에 일부러 만든 상처를 치료해선 포인트를 벌 수 없다. 즉, 자해공갈은 안 먹힌다.

"그게 됐으면 자해, 치료, 자해, 치료를 반복해서 포인트 재벌이 됐겠죠."

"듣고 보니 그렇네...."

"그리고 제가 입힌 상처를 치료하는 것도 카운트되지 않아요."

남의 몸에 일부러 만든 상처는 치료해봤자 포인트를 벌 수 없다. 병 주고 약 주는 건 안 통한다는 소리다.

"그게 됐으면 지나가는 사람 잡아다 팬 다음에 치료해서 포인트 부르주아가 됐죠."

"생각보다 까다롭네."

"하지만 다친 동료를 치료할 땐 상관없습니다."

힐러가 포인트를 벌기에 가장 이상적인 방식이다. 싸우다 다친 동료를 치료하는 건 자해공갈도 아니고,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니까.

"동료가 다칠 때마다 그때그때 치료해주면 포인트를 빠르게 벌 수 있죠."

"오...."

지금 강승현에게 필요한 건 조력자. 포인트 수급을 도와줄 믿을 만한 동료다.

"그래서 김호정 씨가 절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도와달라고?"

"저랑 함께 행동해달라는 거죠. 동료로서."

강승현은 자신의 조력자, 첫 번째 동료로 김호정을 선택했다.

"김호정 씨를 고른 이유는... 사정을 알고 계시니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강승현이 실력 있는 '야매' 힐러라는 걸 알고 있으며, 동시에 포인트와 상태창 시스템에 대해 아는 차원 이동자.

이 조건에 모두 해당하면서 강승현에게 협력해줄 사람은 현재로선 김호정뿐이다.

'하나는 죽었고, 하나는 또라이 새끼고, 하나는....'

결론을 내린 강승현은 입을 열었다. 역시 지금 당장 도와줄 만한 사람은 김호정밖에 없다.

"물론 공짜로 도와달라는 건 아닙니다. 섭섭하지 않게 보상해드릴게요."

비록 야매이긴 하나 강승현은 어엿한 힐러. 김호정 같은 허접한 모험가보다는 훨씬 많은 돈을 벌고 있다.

"후회하시진 않을걸요."

일단 힐러와 함께 다니면 모험하기 편한 것도 있고.

"안 되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좀 힘들어도 다른 사람을 찾아야...."

물론 너무 비굴하게 나가면 없어 보이니까, 예의상 한 번 정도는 튕겨줘야 한다.

'뭐, 이 아저씨는 무조건 승낙하겠지만.'

"강 선생 부탁인데 당연히 들어줘야지."

예상대로 김호정은 흔쾌히 승낙했다.

오히려 거절했으면 놀랐을 것이다. 그는 강승현이 아는 차원 이동자 중 몇 안 되는 믿을 만한 인간이었으니까.

"선생 졸졸 따라다니면 포션 값 걱정은 안 할 거 아냐?"

김호정은 맡겨만 달라며 신신당부했다.

"그리고 내가 선생을 도와주면 집에 빨리 갈 수 있는 거잖아? 그렇지?"

"일단은 그러겠죠? 포인트를 갖다 바치면 노예 신분에서 풀어주겠다니까."

관리자 녀석이 약속을 제대로 지킨다면 말이다.

"좋아! 내가 이 한 몸 희생한다!"

갑자기 김호정이 나이프를 꺼냈다.

"뭐하시게요?"

"선생 코인에 투자한다아앗!!!"

그러더니 자신의 손등을 찍었다.

푹!

"끄아아아아아!!! 선생 빨리 힐 해줘 힐!!! 힐해주고 포인트 벌어!!!"

김호정이 눈물과 함께 울부짖었다.

강승현은 손등에 박힌 나이프를 뽑아주며 말했다.

"자해공갈은 포인트 안 들어오는데요."

힐러는 물론이고 환자의 자해공갈도 포인트를 벌 수 없다.

"뭐? 안 들어와...?"

"만약 그게 되면 노예 하나 굴리면서 포인트 갑부 됐겠죠."

"빠, 빨리 말하지이이이!"

"치료는 해드릴게요."

강승현은 김호정을 치료하기 위해 스태미나를 쓸데없이 낭비했다.

"아까 설명했지만, 자해공갈을 할 필요는 없고 그냥 평소 하던 대로 하시면 됩니다."

일부러 몬스터한테 돌진하거나 얻어맞는 미친 짓하지 말라는 뜻.

이걸 말해 주지 않으면, 이 아저씨는 몬스터한테 돌진해 일부러 얻어터질 것이다.

"알았어. 그냥 평범하게 몬스터 잡고... 그러면 되는 거지?"

"자해공갈 말고도 김호정 씨가 해줄 일이 많아요."

"좋아. 뭘 도와줄까? 말만 해!"

"새로 얻은 프리아의 석궁 테스트 좀 도와주세요."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강승현의 손에 검은 오오라와 함께 프리아의 석궁이 생성됐다.

"그게 프리아의 석궁이야? 이야, 멋있네~!"

김호정은 감탄사를 날리며 석궁을 감상했다.

"근데 내가 뭘 도와주면 돼?"

"아이템을 석궁 화살로 바꾸는 보조 스킬도 얻었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이게 이렇게 하는 건데요."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소형 체력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인벤토리의 소형 체력 포션이 소멸하면서 붉게 빛나는 화살이 장전됐다.

"화살 보이시죠?"

"오. 신기하게 생긴 예쁜 화살이네."

"지금부터 이걸 쏠 거니까 맞아주세요."

지금 강승현이 테스트하려는 건 체력 포션 화살. 힐을 대신해 상대의 체력을 회복시키는 회복탄으로 쓸 생각이다.

'사람이 이걸 맞았을 때 대미지가 안 들어간다면 회복용으로 쓸 수 있어.'

하지만 포션 화살에 대미지가 들어간다면 회복용으로 쓸 수 없다.

'내 몸에 쏴봤을 땐 대미지가 없었지만, 남에게 쏠 때는 또 모르니까.'

그러니 실전에 앞서 테스트가 필요했다.

"뮁?"

김호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보고 화살을 맞으라고?"

"김호정 씨 말곤 이걸 맞아도 괜찮은 사람이 없어서요."

"맞아도 괜찮긴 하지만, 맞아도 되는 사람은 아냐!"

김호정은 심하게 반발했다. 역시 이거까진 오케이 해주지 않았다.

"화살이 얼마나 아픈데!"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치료해드릴게요."

"아니, 그래도 그렇지."

"그럼 하는 수 없죠."

강승현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100만 골드 줄게요."

"지금 그딴 돈으로 날 매수하겠다고?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라고 따지고 싶었으나, 전 재산이 6만 5천 골드밖에 없는 김호정에겐 너무 많은 돈이었다.

"마음대로 쏴!"

김호정은 인간 과녁이 되었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 과녁이야! 머리에 쏴도 돼!"

"돈을 먼저 주고 부탁할 걸 그랬네."

실험체도 준비됐다. 강승현은 프리아의 석궁을 겨누었다.

'이걸 가장 먼저 써보는 상대가 몬스터도 아니고 악당도 아니고 내 동료라니.'

웃긴 상황이지만 어쩔 수 없다. 강승현은 방아쇠를 당겼다.

'5연발 연속 체력 화살!'

파바바밧!!

프리아의 석궁에서 화살 5개가 연속으로 발사됐다. 체력 포션 화살이 김호정의 몸을 꿰뚫었다.

"우왁!"

김호정이 비명을 질렀으나 엄살이었다. 몸에선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 아프네?"

김호정은 자신의 몸을 살폈다.

피가 나긴커녕, 오히려 체력이 회복됐다.

"이걸로 확실해졌네요."

체력 포션을 제조해 만든 화살은 대미지를 주지 않고 체력만 회복한다. 거기다 [투척★]의 효과를 받아 효율성이 증가한다.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겠어요."

"잘됐네!"

"그다음엔...."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바람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강승현이 방아쇠를 당기자 바람의 기운을 담은 화살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우헉!"

이번에도 어김없이 김호정의 몸을 꿰뚫었다.

[공기 속성 강화 +2.5%]

[지속 시간 3분]

바람 포션을 사용할 때와 마찬가지로 대상에 공기 속성이 부여됐다. 속성 포션 역시 대미지가 들어가지 않았다.

"이것도 제대로 먹히네요."

테스트 결과 화살은 재료의 특성을 그대로 따라간다는 걸 알게 됐다. 포션이 썼을 때 몸에 해가 없다면 화살로 사용해도 문제없다.

"수고하셨습니다."

"뭘! 이쯤이야!"

강승현이 김호정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럼 일하러 갑시다."

"...벌써?"

"실전에서 써봐야죠."

31. 벨로토 산악지대 1

여관을 나온 강승현은 모험가 조합으로 향했다. 그동안은 힐러 의뢰 위주로 살펴봤지만, 이제는 굳이 힐러 의뢰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들어가죠."

"오케이!"

오늘부터는 자신을 따라다니며 환자가 되어줄 동료가 있으니까.

두 사람은 조합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일반 의뢰 위주로...."

"어서 오세...헉!"

들어가자마자 접수원의 얼굴이 굳어갔다.

'의뢰 브레이커!'

모험가 조합 직원답게 미소는 잃지 않았지만,

'오늘은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무척 불안한 눈빛으로 강승현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제 아이베르 교단의 최상급 사제 허이스를 물 먹인 남자였으니까.

"안녕하세요."

그러거나 말거나 강승현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인사했다. 접수원은 비즈니스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 어쩐 일로 오셨나요...."

"오늘은 평범한 의뢰 받으러 왔습니다."

"네?"

"오늘은 힐러 의뢰 받으러 온 거 아니니까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다는 뜻이에요."

강승현은 보란 듯이 일반 의뢰 게시판으로 향했다. 접수원은 살짝 안도하며 말을 이어갔다.

"아, 네.... 원하시는 의뢰를 가져오시면 바로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어떤 상황에도 프로 정신을 잃지 않는 훌륭한 조합 직원. 그녀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의뢰 접수를 준비했다.

'강승현 님은 힐을 못 써서 그렇지, 꽤 실력 있는 모험가니까....'

모험가 조합도 강승현의 실력 자체는 인정하고 있다. 힐러로서는 꽝이지만 모험가로서는 훌륭하니까.

"선생, 도대체 뭘 하고 다니길래 접수원 표정이 저래?"

접수원을 힐끔거리던 김호정이 속닥거렸다.

"모험가 조합이 싫어할 만한 짓이요."

강승현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싫어할 만한 짓?"

"본사 지원금 삭감."

각 마을의 모험가 조합은 아즐 대륙 중앙에 있는 본사에서 지원금을 받는다. 의뢰 성공률이 높으면 보너스를 받고, 의뢰 실패율이 높으면 지원금이 삭감된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의뢰를 성공시키려 하지만....

"제가 하인드 마을에 온 이후로 힐러 의뢰 취소율이 엄청나게 늘었으니, 모험가 조합 입장에선 돌아버리겠죠."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아닌데 합법적으로 엿을 먹여대는 존재.

조합 직원들이 강승현만 보면 긴장하는 이유다. 그가 방문하기만 하면 의뢰가 취소됐으니까.

"벌벌 떨 만하네."

김호정이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강승현을 힐러로 인정하기만 하면 아무 문제 없지만, 그것만은 죽어도 못 해주겠다나 뭐라나.

"그렇게 됐으니 오늘은 정상적인 방식으로 의뢰를 진행해보죠."

"어디, 뭐 할 만한 의뢰 없나?"

두 사람은 일반 의뢰 게시판으로 향했다.

덕지덕지 붙은 의뢰서를 살펴보는데, 눈에 띄는 단어가 있었다.

{벨로토 산악지대}

벨로토 산악지대는 하인드 마을 동쪽 출구로 이어지는 지역이다. 이름에 걸맞게 크고 작은 산이 모여있고 산짐승 몬스터들이 서식한다.

"이것도 벨로토 산악지대 의뢰, 저것도 벨로토 산악지대 의뢰...."

벨로토 산악지대는 이 주변 사람들한테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다. 식량은 물론이고 동물 가죽이나 약초 같은 온갖 재료를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하인드 마을의 특산품인 벨로토 산딸기 벌꿀술의 재료는 벨로토 산악지대에서만 구할 수 있다. 괜히 이름에 '벨로토'가 붙는 게 아니다.

"오늘따라 뭔가 벨로토 산악지대 의뢰가 많네."

"몬스터 개체 수가 급증했대."

벨로토 산악지대는 이곳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곳이지만, 몬스터가 살기에도 좋은 곳이었다.

"그래서 저희 모험가 조합은 주기적으로 소탕 의뢰를 공고한답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 영업 정신. 뒤에서 구경하던 접수원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지금이 벨로토 산악지대 몬스터의 급증 기간이거든요."

몬스터 수가 급증할 때는 모험가들이 처리해줘야 한다. 안 그럼 마을 사람들이 산에 들어갈 수 없으니까.

"이 시즌에는 모험가 조합에서 설치한 베이스캠프를 이용하실 수 있어요."

몬스터 급증 기간에만 운영하는 베이스캠프. 지금은 벨로토 산악지대 중턱에서 운영 중이다.

"새 의뢰를 받거나 받을 때 베이스캠프의 조합 직원을 찾아가시면 되거든요. 엄청 편하죠?"

베이스캠프에는 숙소나 가게를 비롯한 간단한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다. 덕분에 마을까지 왔다 갔다 할 필요가 없다.

"혹시 일을 찾고 계시거나, 몬스터 소탕 일에 흥미가 생기신다면... 여기 의뢰서를 읽어보시는 것도...."

접수원은 이렇게 말하며 슬그머니 소탕 의뢰서를 내밀었다.

"소탕 의뢰 좋죠. 의뢰 맡겠습니다."

"나도 찬성! 마을 왔다 갔다 하는 게 얼마나 귀찮은데!"

고민할 것도 없다. 두 사람은 고민하지 않고 의뢰서를 받았다.

"의뢰 확인했습니다."

접수원은 두 사람의 의뢰서에 도장을 찍었다. 하얀 의뢰서가 새파랗게 물들었다.

-"벨로토 산악지대 중턱 캠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저는 바셀로라고 합니다!"

그리고 두 시간 뒤, 강승현 일행은 벨로토 산악지대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오, 베이스캠프인데 있을 건 다 있어. 화장실도 있네."

원래 나무 말고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울타리와 모닥불, 온갖 천막 때문에 작은 마을처럼 보인다.

"이런 걸 하루 만에 설치하려면 직원들을 얼마나 부려먹었을까요."

"하루 만에 설치했으니 하루 동안 부려먹지 않았을까...?"

베이스캠프는 마을 못지않게 북적거렸다. 바쁘게 움직이는 조합 직원들 사이로 일하러 온 모험가들이 눈에 들어왔다.

"의뢰 게시판부터 찾죠. 바셀로 씨, 게시판은 어딨죠?"

"이쪽에 있습니다."

강승현은 의뢰 게시판으로 다가갔다. 마을에 있는 것과 똑같이 생긴 게시판이 세워져 있었다.

{잡은 몬스터의 수에 따라 보상을 드립니다.}

의뢰 내용은 간단했다.

벨로토 산악지대의 몬스터를 일정 수 잡을 때마다 보상을 받는 형식. 당연하지만 몬스터의 잔해를 가져와야 인정해준다.

"여러분들이 오신 서쪽 길에는 몬스터가 별로 없었겠지만, 다른 쪽에는 몬스터가 득실거립니다. 철저하게 준비하세요."

두 사람은 바셀로의 충고를 들으며 캠프 밖으로 나갔다.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강승현은 석궁을 소환하고, 김호정은 검을 꺼냈다.

부스럭.

바셀로의 말대로, 캠프 밖으로 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몬스터의 기척이 느껴졌다.

파바바박!!

땅을 파헤치는 소리와 함께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발톱이 단단하고 날카로운 두더지 계열 몬스터다.

"철 두더지인가?"

돌 두더지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발톱이 번뜩이는 금속으로 이루어진 두더지였다.

"별거 아니네. 처리합시다."

강승현은 바닥에 굴러다니던 돌멩이 한 주먹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돌 화살을 생성합니다]

곧장 석궁 방아쇠를 당기자 돌 화살 5개가 발사됐다.

파바바밧!!

돌 화살은 철 두더지의 몸을 가볍게 꿰뚫었다. 5발 연속으로 맞다 보니 철 두더지의 몸은 순식간에 걸레짝으로 변했다.

'길에서 주운 돌로 급조한 화살인데, 대미지 좋네.'

역시 평범한 무기가 아닌 만큼 성능도 훌륭했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돌 화살을 생성합니다.]

파밧!!

강승현은 계속해서 방아쇠를 당겼다.

철 두더지는 접근조차 못 하고 화살에 쓰러져갔다.

'이건 원거리 공격이라 좋네. [절개]는 불편했는데.'

[절개]를 쓰려면 상대한테 접근해야 한다. 그것도 엄청 가까이 붙어야 발동할 수 있어서 귀찮은 스킬.

하지만 [프리아의 석궁]은 그런 불편함이 없다.

파바바박!

강승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방아쇠를 당겼다.

팍!

마지막으로 철 두더지의 이마를 꿰뚫어 확인 사살.

강승현은 옷깃 하나 스치지 않고 철 두더지를 처리했다.

'기본 대미지 괜찮고. 화살 수급 쉽고. 룰렛 좀 돌려서 성능을 더 올리면 유용하게 쓸 수 있겠는데.'

강승현이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이었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인벤토리에 '돌멩이'가 없습니다.]

'돌멩이 자동으로 주워주는 스킬 없나.'

강승현은 화살을 보충할 겸 돌멩이를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부스럭!

그때, 철 두더지 한 마리가 강승현의 배후에서 튀어나왔다. 아까 화살을 피해 땅속으로 숨어들었던 모양이다.

철 두더지는 강승현을 향해 발톱을 휘둘렀으나,

"어딜!"

김호정이 뛰쳐나가 공격을 몸으로 막아냈다.

'동료를 들인 보람이 있네.'

김호정은 안경에 로브까지 입어서 마법사같이 생겼지만, 마법은 전혀 쓸 줄 모른다. 할 줄 아는 건 몸빵 정도.

'일단은... 탱커지. 지금은 약하지만.'

샤악!

"윽!"

철 두더지의 금속 발톱이 김호정의 팔을 할퀴었다. 김호정은 인상을 쓰며 포션을 꺼내려 했다.

"체력은 신경 쓰지 마세요."

강승현은 곧바로 김호정을 향해 석궁을 겨누었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중형 체력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파팟!

체력 포션 화살이 김호정을 향해 날아들었다. 화살이 몸을 관통한 순간, 깎였던 체력이 회복됐다.

"아! 그랬지!"

"피통은 힐러한테 맡기시고, 하던 일 하시면 됩니다."

이제 원거리에서도 체력을 채워줄 수 있다. 석궁 방아쇠만 당기면 체력 회복 화살이 날아갈 테니까.

[+3]

덤으로 김호정의 체력을 채울 때마다 일정 확률로 포인트가 들어오는 것도 확인했다.

'영혼 결정의 효과로 추가 포인트.'

최소치 1포인트에 추가로 2포인트. 랜덤이긴 하지만 김호정의 체력을 채울 때마다 3포인트씩 벌 수 있게 됐다.

'제대로 된 치료에 비하면 엄청 적긴 하지만, 이 속도면 5000포인트 금방 모으겠는데.'

강승현은 만족스러워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진짜 편하네! 포션 먹기 귀찮았는데!"

푸욱!

체력이 회복된 김호정은 검을 휘둘러 철 두더지를 베었다.

"근데 어째 아픈 건 그대로다?"

"그야 이건 체력 포션으로 만든 화살이니까요."

체력 포션은 그냥 깎인 체력만 채워주는 아이템이다. 이걸 쓴다고 상처가 낫는 건 아니기에, 통증도 그대로다.

"상처는 전투 끝나고 한 번에 치료해드릴게요."

"그래그래. 일단 해치우고 보자고!"

김호정이 앞에서 어그로를 끌어주니, 뒤에 있는 강승현은 화살을 편하게 쏠 수 있었다. 가끔 한두 마리가 굴을 파고 튀어나오긴 했지만,

파바바밧!!

5연발 돌 화살로 가볍게 처리했다.

-"대충 다 잡았나 본데? 더 없지?"

"없나 본데요."

"그럼 휴식."

그렇게 40분 뒤, 두 사람은 근처의 철 두더지를 전부 쓸어버렸다.

벌컥벌컥!

강승현은 목을 축일 겸 스태미나 포션을 꺼내 마셨다. 사실 스태미나 화살을 몸에 쏴도 되지만, 화살은 맞아봤자 아무 맛이 안 나니까.

"이제 어쩌지? 이 근처 몹은 다 잡은 거 같은데."

"우리가 씨를 말려버렸네요."

"일단 캠프로 복귀할까?"

소탕 의뢰는 몬스터 사체를 가져가야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게임처럼 몬스터를 잡을 때마다 어디에 표시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앞이잖아. 슬슬 인벤토리 터질 거 같은데."

이쯤에서 슬슬 캠프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인벤토리는 중요하니까.

"어차피 이런 잡몹 잡으려고 여기까지 온 것도 아니고."

"그건 그렇죠.... 철 두더지보단 벨로토 산개나, 암석 엄니 멧돼지... 요런 놈들이 보상을 많이 줄 테니."

사실 낮이나 저녁에 나타나는 몬스터는 대체로 별 볼 일 없다. 좋은 보상을 노릴 거라면 밤 시간대를 노려야 한다.

"그럼 겸사겸사 저녁밥도 해결할까요."

"좋지!"

두 사람은 야간 소탕을 대비해 캠프로 복귀했다.

32. 벨로토 산악지대 2

강승현 파티가 캠프로 복귀했을 땐 막 해가 질 무렵이었다. 캠프는 출발할 때보다 훨씬 북적거렸다.

"의뢰 보상받으러 왔습니다!"

"의뢰 보상이요!"

"순서대로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줄 서 주세요."

바셀로를 포함한 모험가 조합 직원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보였다.

"아이고 뭔 줄이 이렇게 길어. 이러다 날 새겠네."

"이 시간이 제일 바쁠 때긴 하죠."

저녁은 하루 일과를 마친 사람들이 마을로 돌아오는 시간대. 모험가들이 몰리는 게 당연하다.

"거기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밥 먹기도 쉽지 않겠네요."

"컥! 저게 다 줄이야? 무슨 맛집도 아닌데!"

식당 천막 앞에도 긴 줄이 생겼다. 여관 음식에 비하면 형편없지만, 그나마도 줄 서지 않으면 못 먹을 판이다.

"보상은 제가 받을 테니 김호정 씨가 식당 줄 서주세요."

"그래야겠다. 굶기는 싫으니까."

강승현은 캠프 구석 취사장으로 눈을 돌렸다. 몇몇 모험가들이 불을 피워다 요리하고 있었다.

"능력만 되면 사 먹는 것보단 직접 만들어 먹는 게 좋긴 한데."

요리도구는 취사장에서 무료로 빌릴 수 있고, 식재료는 산속에서 구하거나 천막에서 살 수 있다. 굳이 식당 앞에 줄 서서 기다릴 필요 없이 만들어 먹는 것도 좋은 선택이나.

"나나 선생이나 음식은 젬병이잖아...."

"여관에서 도시락 하나 싸 올 걸 그랬나."

두 사람의 요리 실력은 쓰레기였다. 아즐 대륙에 온 지 3년이나 지났지만, 먹을 만한 요리를 만들 줄 몰랐다.

"한국 돌아가면 요리 학원부터 끊어야겠어...."

21세기 현대 지구인의 폐해. 편의점과 냉동식품, 각종 인스턴트로 저녁을 때운 자들의 말로다.

"어차피 맛은 거기서 거기니까... 가장 빨리 나오는 메뉴로 주문해주세요."

"오케이!"

김호정은 식당 줄로 향했다. 강승현은 보상 줄에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다음 분!"

그리고 얼마나 기다렸을까, 강승현의 차례가 다가왔다.

"여기요."

강승현은 두더지 사체가 담긴 자루를 내밀었다.

"어, 엄청 많이 잡아 오셨네요?"

"많이 잡아 오래서요."

직원은 놀란 얼굴로 자루를 바라보았다. 강승현이 다른 사람들의 몇십 배나 되는 사체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설마 이걸 혼자서 다 잡으신 건가요?"

"네."

"세, 세상에나."

직원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사실 둘이서 잡은 거지만.

"어디... 어떤 놈인지 보겠습니다."

자루에서 사체를 꺼내던 직원이 감탄하며 말했다.

"세상에, 이놈들을 이렇게나 많이 잡아 오시다니... 정말 대단하세요."

"철 두더지가 많아봤자 철 두더지죠."

그러지 직원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네? 아, 비슷하게 생기긴 했는데, 요놈들은 철 두더지가 아니에요."

"그럼요?"

"철 두더지는 이 녀석이고, 모험가님이 잡아오신 건 강철 두더지입니다."

직원이 다른 두더지 사체를 보여주며 말했다. 두더지 사체를 나란히 두고 비교해보니, 강승현이 잡아 온 두더지의 발톱이 훨씬 단단하고 예리했다.

"강철 두더지는 이름하고 생김새는 비슷해도 철 두더지보다 훨씬 강한 놈이거든요."

"어쩐지 평소보다 좀 강한 것 같더라니...."

알고 보니 착각이 아니라 실제로 강한 놈들이었다. 너무 쉽게 잡아서 눈치 못 챘던 것뿐이다.

"이런 놈들을 상처 하나 안 입고 쓰러트리시다니...."

강철 두더지는 힘과 지능, 속도 등 모든 면에서 철 두더지를 압도한다. 한두 마리라면 모를까, 떼로 몰려오는 강철 두더지를 상처 하나 없이 쓰러트리는 건 어렵다.

"야, 저거 봤어? 그 잽싼 놈들을 화살 쏴서 잡았나 봐."

"한두 마리도 아니고... 저게 다 몇 마리냐?"

"저 친구, 평범한 모험가는 아니군. 최소 20년은 구른 실력자야."

"20년? 그럼 저 사람, 몇 살부터 모험가로 일한 건데?"

사체를 옮기고 나르던 다른 직원들도 강승현을 힐끔거렸다. 그가 이번 베이스캠프에서 가장 많은 몬스터를 잡아 왔기 때문이다.

'수준 차이가 크게 나긴 하구나.'

원래 차원 이동자들은 평범한 아즐 대륙민들의 수십, 수백 배는 강하다. 강승현은 그런 차원 이동자 중에도 압도적으로 강하다 보니 이렇게 될 수밖에.

'내가 힐러만 아니었어도 진작 지구로 귀환했겠는데.'

밸런스 패치를 위해 일부러 힐러 컨셉을 준 걸지도.

-"사체만 가져오면 보상을 계속 받으실 수 있으니, 언제든 찾아오세요."

강승현은 모험가 조합 직원의 배웅을 받으며 보상 천막을 떠났다.

'이쪽은 내가 해결했고, 저쪽은 어떻게 됐지?'

식당 천막을 바라보자 아까보다 줄이 두 배는 늘어나 있었다.

'더럽게 많네.'

천막 안에 테이블이 있긴 하지만 사람이 너무 많았다.

'안에서 먹는 건 불가능할 거 같은데.'

실제로 음식을 주문한 모험가들은 대부분 밖에서 먹고 있었다.

"이 아저씨는 어디 있지?"

김호정은 어디쯤 있을까 하고 찾던 참이었다.

"강 선생! 여기로 와! 자리 잡아놨어!"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김호정이 모닥불 하나를 피우고 자리를 잡아둔 상태였다.

강승현은 모닥불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뭐 시키셨어요?"

"벨로토 산토끼 스튜."

벨로토 산토끼 고기와 각종 야채를 푹 끓여 만든 스튜. 만들기 쉽고 재료를 구하기 쉬워서, 주문했을 때 가장 빨리 나온다. 한국으로 치면 국밥 같은 요리.

"맛은 어때요?"

"그런대로 먹을 만해."

김호정이 스튜가 담긴 그릇을 내밀었다. 식지 않도록 모닥불 옆에 둬서 뜨끈했다.

"일부러 매콤하게 해달라고 했어. 약간 매운탕 느낌 나지 않아?"

"매운탕보다는 좀 걸쭉하니... 찌개 같은 느낌이네요."

"찌개 하니까 된장찌개 먹고 싶다. 선생은 뭐 좋아해?"

"순두부찌개요."

"순두부찌개 좋지! 집 근처에 맛집 하나 있었는데...."

김호정은 신이 난 얼굴로 떠들어댔다. 낯선 땅에서 고향 음식 이야기를 하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없다.

'여기 사람들도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건 같은 한국인뿐이니까.

'나만 끌려온 게 아니라 정말 다행이야.'

강승현은 스튜를 퍼먹으며 중얼거렸다. 이런 곳에 혼자 떨어졌다면 얼마나 짜증 났을지.

-강승현은 식사를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이제 야간 소탕을 대비할 시간이다.

"상처 치료해드릴게요."

"어어! 부탁할게! 피는 멎었어."

김호정이 팔을 걷어 올렸다. 팔은 날카롭고 예리한 물체에 베인 흔적으로 가득했다. 죄다 강철 두더지의 솜씨다.

'약은 준비해 놨지.'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약을 꺼냈다. 소독제로 상처를 깨끗하게 소독하고 피부 상처 재생 연고를 꺼내 상처 부위에 발랐다.

"스튜 맛 끝내줘~!"

꽤 쓰라릴 법도 한데 김호정은 태연한 얼굴로 스튜를 들이켤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완치판정].'

지금처럼 상처가 그리 깊지 않을 땐 간단한 처치만 해도 [완치판정]을 쓸 수 있었다. 스킬을 사용하자 바로 상처가 회복되는 게 보였다.

"다 됐습니다."

"역시 강 선생이야! 화타가 따로 없어!"

김호정은 상처를 살피며 소리쳤다. 강승현은 그 말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답했다.

"화타라니 영광이네요. 그런데... 그 말은 김호정 씨가 관우라는 뜻인가요?"

"이 정도면 관우 사촌이지."

독화살 맞으면서 바둑 둔 사람하고 비교하는 건 좀.

강승현은 붕대를 꺼내며 말했다.

"관우 사촌네 팔촌 이웃사촌의 먼 후손의 이웃 나라 사람쯤 되겠네요."

"그럼 그냥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잖아?"

"당연하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김호정의 팔에 붕대를 감아줄 때였다.

"저 녀석, 붕대를 쓰고 있네."

"붕대 같은 거 써봤자 너덜너덜해질 텐데, 왜 쓰는지 모르겠어."

근처를 지나가던 몇몇 모험가들이 이쪽을 보며 비웃어댔다. 그중에는 힐러도 몇 놈 있었다.

저놈들 말대로 붕대는 몇 번 전투하다 보면 금방 누더기가 된다. 애초에 힐을 쓴다면 붕대를 쓸 일이 없으니, 붕대는 힐 쓸 돈 없는 모험가를 상징하는 물품이기도 했다.

"차라리 힐 한 번 받고 말지."

"어쩌겠냐. 돈 없는 애들은 저거라도 써야지."

아주 흔하고 전형적인 힐 만능주의자들이다. 너무 흔해서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와 구별이 안 될 정도다.

"저저 싸가지 없는 것들이...!"

"놔둬요."

김호정은 발끈하며 한소리 하려고 했으나 강승현이 막았다.

"강 선생은 화도 안 나?"

"저런 놈들한테 일일이 화내면 이 일 못 해 먹죠."

강승현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이런 일에 하나하나 화내다간 고혈압으로 죽는다.

"저것들이 선생 실력도 모르면서.... 선생이 얼마나 대단한 힐러인데!"

"그러니까 타이밍을 재야죠."

"타이밍?"

강승현은 오랜 지인이 고혈압으로 죽는 걸 막기 위해 입을 열었다.

'쓸데없이 실력을 보일 필요는 없다.'

야매 힐러 3년 차 경력직 강승현의 생존 철학 9. 그는 재수 없는 인간을 물 먹이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늘 보이시죠? 이제 늦저녁을 지나서 밤이에요."

"어어... 한밤중 다 됐다야. 벌써 날 저물었네."

산은 해가 빨리 진다는 말이 있다. 두 사람이 저녁밥을 먹는 사이, 하늘은 새까맣게 물들었다.

"이제 난폭하고 강력한 야행성 몬스터들이 활동할 시간이라서...."

지금 캠프로 돌아오지 않은 모험가들은 전부 야행성 몬스터와 마주쳤을 것이다.

"조금만 기다리면 환자들이 몰려오겠죠."

아니나 다를까, 저녁 시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게 다친 모험가들이 캠프로 귀환했다.

"힐러! 힐러 찾습니다!"

"여기 치료 좀 해주세요!"

"힐러 여깄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힐러들은 부상자에게 다가갔다. 대부분은 힐로 치료할 수 있는 상처지만,

"한 명 정도는 힐러가 어찌할 수 없는 놈이 나오는 법이거든요."

타이밍을 노린다는 건 그걸 뜻한다.

생존 철학 10.

'다만 실력을 보일 순간이 온다면 확실하게 보일 것.'

환자를 100명 치료한 힐러보다는, 그가 치료하지 못한 101번째 환자를 치료하는 야매 힐러가 더 대단해 보이기 때문이다.

"끄아아아아아악!!!!"

어디선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선생, 저쪽이야!"

강승현은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태가 무척 안 좋아 보이는 모험가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힐러한테 힐을 받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고통스러워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분명 상처는 낫고 있는데 왜, 왜 이러는 거야!"

"일단 힐 멈춰봐!"

힐러는 당황스러워하며 힐을 멈췄다.

힐을 받으면 통증이 사라져야 정상일 텐데. 모험가는 통증이 더 심해진 것처럼 고통스러워했다.

"저, 저거! 힐이 안 통하는 환자 맞지?"

"네. 제가 기다리던 환자네요."

강승현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힐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힐러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

"실례합니다."

"누구...?"

"그 환자, 제가 좀 봐도 될까요?"

그 말은 야매 힐러가 나설 때라는 소리다.

33. 벨로토 산악지대 3

"...누구시죠?"

환자를 살펴보던 힐러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강승현은 아주 태연한 얼굴로 답했다.

"보시다시피 힐러입니다."

"힐러?"

그러자 힐러는 경계하는 눈으로 강승현을 노려보았다.

모험가 하나 치료하지 못해서 다른 힐러가 기웃거리는 상황. 자존심 강한 힐러 입장에선 달갑지 않은 상황이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남의 도움을 받을 정도로 무능하진 않아서요."

정중한 말투였으나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좋은 말 할 때 당장 꺼지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물론 꺼지라고 곱게 꺼질 거라면 애초에 끼어들지도 않았지만.

"그쪽은 도움받을 필요 없겠지만, 거기 환자분은 아닌 것 같은데요."

강승현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으극, 아아아아아악!!"

환자는 여전히 괴로운 얼굴로 신음하고 있었다.

"당신한테는 볼일 없고, 환자한테 볼일 있으니 비켜주시죠."

"뭐, 뭐 이런 무례한 사람이...."

"그럼 10초 안에 치료할 방법을 말해 보시든가요."

"...."

힐러는 입을 다물고 얌전히 물러났다.

"우선 몸 상태부터 살필게요."

강승현은 환자의 몸을 살폈다. 상처만 잘 살펴봐도 그가 어떤 이유로 다쳤는지 알 수 있다.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신데?"

옆에서 기웃거리던 김호정이 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환자는 아까 힐러한테 힐을 받아서 몸의 상처가 회복된 상태였다.

"누가 쓸데없이 힐을 써놔서 그래요."

"이거야 원! 힐만 안 썼어도 강 선생이 진작 치료했겠네!"

"부상자한테 힐을 쓰는 게 뭐 어떻다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힐러가 발끈했으나,

"제가 언제 힐이 나쁘다고 했나요? 그런 말 한 적 없는데요."

"아까 방금...."

"환자를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힐을 써대는 힐러가 나쁘다는 소리였지."

강승현의 말을 들은 힐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늘 하는 말이지만 힐은 나쁘지 않다. 좋은 능력을 멍청하게 쓰는 힐러가 문제다.

'핏자국은 남아 있어서 다행이야. 힐은 상처만 지워주지, 피는 못 지우니까.'

상처는 없었으나 환자의 몸 곳곳엔 혈흔이 남아 있었다. 이를 통해 어딜 공격당했고 어떤 식으로 다친 상처였는지 대강 추측할 수 있었다.

'하반신보다는 주로 상반신. 팔이나 어깨 위주로 물렸군.'

가장 심하게 물린 것으로 추측되는 왼쪽 팔은 피범벅이었다. 그리고 어찌 된 일인지 무척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그래서 강 선생? 뭔가 좀 알아냈어?"

"대충은 알아냈지만... 좀 더 자세히 봐야겠죠."

육안으로만 봐도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그에겐 [관찰의 눈]이 있다.

'[관찰의 눈].'

강승현의 눈이 푸르게 빛났다. 동시에 눈앞에 상세한 정보가 떠올랐다.

[부패][감염][마비][출/혈]

[몸 곳곳에 무언가에 물린 이빨 자국]

[들짐승의 이빨]

[처음엔 출혈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졌다]

[상처 주위에 짐승의 발톱 자국이 흐릿하게 남아있다]

[관찰의 눈]을 쓴다면 아주 약간 남은 상처에서도 정보를 얻어낼 수 있다.

'부패에 감염 키워드는 예상했지만, 마비까지 나올 줄이야.'

거기에 이빨 자국을 포함하면 답이 보인다.

"들짐승한테 물린 상처였어요."

"들짐승? 그래서 이렇게 피범벅이구나."

이야기를 전해 들은 김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관찰의 눈]을 통해 얻어낸 정보는 타인에겐 보이지 않는다.

"그럼 도대체 몇 마리한테 물린 거야?"

"최소 7마리 이상. 제가 볼 땐 10마리예요."

"우와... 이 양반, 거기서 잘도 살아남았네."

"거기다 여기 팔을 보면 알겠지만...."

강승현은 환자의 왼쪽 팔을 가리켰다.

"뻣뻣하게 굳은 거 보이시죠? 마비 증세가 나타나고 있어요."

이유 없이 몸이 마비될 일은 없다. 이 환자는 마비 능력을 가진 무언가한테 당한 것 같다.

"마비 스킬을 쓰는 들짐승 몬스터... 아!"

김호정이 손가락을 튕기며 소리쳤다.

"혹시 벨로토 산개?"

"정답입니다."

벨로토 산개. 벨로토 산악지대에서 서식하는 들개 계열 몬스터다. 본래는 마을에서 키우던 애완견이었으나, 산에 버려지거나 집을 나오거나 해서 야생화됐다.

"하, 하지만 고작 들개한테 물린 거라면 힐이 안 통할 리가 없다고!"

이야기를 듣던 힐러가 소리쳤다.

"고작 들개가 아니니까 그렇죠."

벨로토 산개는 소탕 의뢰 1순위에 속한다. 놈들은 늑대와 교배해서 교배종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벨로토 산악지대 몬스터 중에선 꽤 강한 편에 속하고, 번식력도 좋은 데다... 독도 갖고 있죠."

놈들의 이빨엔 마비독이 묻어 있다. 그래서 벨로토 산개한테 물리면 이 환자처럼 신체가 마비된다.

"하지만 마비독은 이런 식으로 통증을 일으키진 않아!"

"일반적인 마비독이라면 그렇겠죠. 하지만 벨로토 산개의 마비독은 조금 특별한 놈이라서."

강승현은 환자를 바라보았다. 환자는 여전히 고통스럽게 신음하고 있었다.

"설명하는 것도 좋지만, 눈으로 직접 보고 판단하세요."

강승현은 나이프를 꺼내, 거의 치료된 상처를 베었다.

[절개]

베인 살점 사이로 부패한 속살이 드러났다. 이 환자가 독에 감염됐다는 걸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 이게 뭐야...."

"벨로토 산개의 독에는 특징이 하나 있어요."

기겁한 힐러와 달리, 강승현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평상시에는 마비의 효과만 나타나지만, 특정 조건을 만족하면 부패성 독의 효과가 발동하거든요."

"특정 조건?"

힐러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아마 당신이 힐을 썼을 땐 약간의 마비 증상만 보이고 독 증상은 없었을 겁니다."

그걸 알았다면 다짜고짜 힐을 써대진 않았을 테니까.

환자를 힐끔거리던 김호정이 입을 열었다.

"그럼 아까까진 독성이 안 나타났다는 거야?"

"그렇죠."

"도대체 조건이 뭐길래...."

"벨로토 산개의 약점이 뭔지는 알죠?"

"아, 그건 알지. 벨로토 산개는 공기 속성 공격에 약하잖아."

나무 속성 몬스터가 불에 약한 것처럼, 벨로토 산개의 약점은 바람이나 공기다.

"마찬가지로 벨로토 산개의 독도 바람이나 공기에 닿으면 약해집니다."

"그렇구나! 본체의 약점은 스킬의 약점이기도 해!"

"그러니 벨로토 산개한테 물렸다고 해도 그냥 방치해두면 독은 자연스럽게 소멸합니다."

벨로토 산개의 마비독은 약을 쓰지 않아도 치료될 정도로 약하다. 물린 상처를 봉합하지 않고 벌려두기만 해도 독을 제거할 수 있다. 단순하게 따지면 흑진월귤나무 독이 훨씬 강하다.

"하지만 이건 바람이나 공기에 닿아서 독성이 약해졌을 때 한정이거든요."

벨로토 산개의 부패성 독이 발동하는 조건은, 독에 공기나 바람이 닿지 않을 때다. 조건을 만족할 경우, 벨로토 산개의 독은 흑진월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한 독성을 발휘한다.

"근데 멋모르고 힐을 써서 상처를 치료한다면?"

"상처가 치료되면... 공기가 닿지 않겠지!"

"바로 그겁니다."

결국, 부패성 독이 발동한 원인은 힐러가 사용한 힐 때문이었다. 힐러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환자를 바라보았다.

"이럴 수가...."

"힐을 쓰기 전에 무슨 몬스터한테 당한 건지 상처를 살펴보기만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벨로토 산개한테 물린 상처를 바로 치료해선 안 된다. 하인드 마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상처의 원인이 벨로토 산개라는 것만 알아냈어도, 이 환자가 고통을 겪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지, 지금이라도 상처를 찢어서 공기에 닿게 하면...."

"상처가 한두 군데가 아니잖아요. 환자 몸을 다 찢어놓으시게요?"

다친 곳이 한 곳이라면 효과가 있겠지만, 이 환자는 전신을 물어 뜯겼다. 응급처치로 치료할 만한 상황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공기 속성이 약점인 독에 중독됐다면, 육체의 공기 속성을 강화하면 되죠."

"공기 속성 강화?"

"이렇게."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강승현의 손에 검은 오오라와 함께 석궁이 생성됐다. 강승현은 환자를 향해 석궁을 겨눴다.

"지, 지금 뭐 하려는...."

"당신 미쳤어?"

주위의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강승현을 말리려 했다. 환자에게 다짜고짜 석궁을 쏘려고 하니 당연하겠지만.

"김호정 씨, 사람들 좀 치워주세요."

"오케이! 선생 방해 말고 다 꺼져!"

이럴 때 필요한 게 동료의 힘. 강승현은 김호정을 시켜 귀찮게 하는 사람들을 막았다.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건 속성 포션이지.'

강화된 벨로토 산개의 독을 치료하려면 환자에게 바람 포션을 사용하면 된다. [살포] 스킬을 써도 좋지만, 속도가 너무 느리다.

'포션을 여러 부위에 빠른 속도로 깊숙이 박아넣으려면....'

역시 석궁으로 쏘는 게 제일이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바람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5연발 연속 바람 포션 화살!'

파바바바밧!!

공기의 힘이 담긴 화살이 쏟아져나와 환자의 몸을 꿰뚫었다.

"이, 이 미친놈! 캠프에서 사람을 죽여? 제정신이야?"

주위의 모험가 하나가 소리쳤으나.

"멀쩡한 사람을 왜 고인으로 만드십니까."

강승현은 실실 웃으며 환자를 가리켰다. 환자는 멀쩡했다. 그의 몸엔 화살에 맞은 상처 하나 없었다.

"사, 살아 있잖아?"

무엇보다 고통스럽게 내뱉던 신음소리가 사라졌다. 환자는 한결 편해진 얼굴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사람을 석궁으로 쐈는데 멀쩡하잖아?"

"심지어 독을 치료했어!"

주변에 몰려온 모험가들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환자와 강승현을 번갈아 봤다. 그 광경을 넋 놓고 보던 힐러가 입을 열었다.

"당신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아까 말했잖아요. 힐러라니까요."

[프리아의 석궁이 소멸합니다.]

"힐은 쓸 줄 몰라서 붕대나 쓰고 다니지만."

"그, 그러고 보니... 저 녀석... 아까...."

힐러의 동료 중 하나가 강승현을 가리켰다. 자세히 보니 아까 근처를 지나가며 조롱하던 놈 중 하나다.

"세상에! 저런 대단한 분을 몰라보고 비웃던 인간들이잖아?"

김호정이 슬그머니 모험가 무리 속으로 들어가 선동을 시작했다.

"그래요?"

"그렇다니까요? 자기들은 멀쩡한 사람 하나 죽일 뻔했으면서."

다른 모험가들도 김호정의 선동에 넘어가 떠들어댔다.

"맞아, 나도 아까 화내던 거 봤어. 막 노려보던데?"

"힐러들은 원래 다른 힐러 견제하는 거 잘하잖아."

주변 모험가들이 힐러와 그의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힐러가 잘나도, 환자를 치료하지 못한다면 순식간에 웃음거리가 된다.

"큭...."

"가자."

힐러와 힐러의 동료들은 새빨개진 얼굴로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아~ 개운하다! 선생도 개운하지?"

"제가 이 맛에 힐러 일하는 거 아니겠어요."

김호정은 슬쩍 강승현의 곁으로 돌아왔다. 정말 부추기기 하나는 잘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

환자를 힐끔거리던 김호정이 입을 열었다.

"이 사람 말이야.... 왜 혼자 왔지? 다른 동료들은 어쩌고?"

"그러고 보니."

평범한 모험가가 이런 밤에 혼자 사냥을 나갈 리가 없다. 분명 다른 동료들이 있을 텐데.

"이봐요, 다른 동료들은 어딨어요?"

"저희 파티는 습격을 받아 흩어졌어요...."

환자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흩어졌다고?"

"산길에서 갑자기 벨로토 산개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한두 마리도 아니고 무려 수십 마리. 그 과정에서 파티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자신은 겨우겨우 목숨을 건져 캠프로 돌아왔다고 한다.

"벨로토 산개 수십 마리?"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 수가 많아도 너무 많은데?"

벨로토 산개는 그렇게 많이 몰려다니는 몬스터는 아니다. 보통 7~8마리, 많으면 10마리까지 모이긴 하지만, 수십 마리는 상식적이지 않다.

"설마 저만 온 겁니까? 아직까지 아무도 안 온 거예요?"

"당신 말고는 아무도 안 왔어요."

캠프 북쪽 출구로 나갔다가 돌아온 모험가는 아직까진 이 남자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모험가 파티도 돌아오지 않은 상황이다.

"벨로토 산개 수십 마리가 나타났는데 돌아온 사람이 한 명? 이거 이상한데? 설마 다 죽었나?"

"죽은 사람이 없진 않겠지만, 전멸하는 건 말이 안 돼요."

모험가가 몬스터의 습격을 받아 죽는 건 흔한 일이다. 하지만 벨로토 산개는 다수의 파티를 전멸시킬 정도로 위협적인 몬스터는 아니었다.

"적어도 파티 한둘 정도는 돌아와야 정상일 텐데."

캠프 북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

'급격하게 증가한 몬스터 개체 수, 돌아올 때가 지났지만 소식이 없는 모험가들.'

강승현은 그 이유를 떠올렸다.

"...그 녀석인가."

이런 일을 벌일 만한 놈은 하나뿐이다.

"뭐 알아냈어?"

"레어 몬스터. 이거면 앞뒤가 맞아요."

산악지대 어딘가에 레어 몬스터가 나타났다.

34. 벨로토 산악지대 4

"레어 몬스터?"

"틀림없어요."

이상할 정도로 늘어난 벨로토 산개. 아무런 소식이 없는 모험가들.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건 레어 몬스터뿐이거든요."

정황상 벨로토 산개의 레어 몬스터가 나타난 것 같다. 동족 몬스터를 소환해 조종하는 [우월감]을 쓰면 대량의 벨로토 산개를 이끌 수 있으니까.

"그럼 다른 모험가들이 돌아오지 않는 이유는...."

"[공간 지배]에 당했을 가능성이 커요."

[공간 지배]. 주위 공간을 왜곡시켜 미니 던전을 만드는 스킬. 레어 몬스터를 쓰러트리지 않으면 [공간 지배]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다들 던전에 갇힌 것 같습니다."

지금 모험가들은 벨로토 산개의 던전 속에서 헤매고 있을 것이다.

"이거 야단났네. 벨로토 산개는 특수 독을 쓰잖아."

김호정은 옆에 있던 환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절망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난리 통에서 나만 살아 돌아오다니...."

그는 [공간 지배]에 휘말리기 전에 숲에서 빠져나온 유일한 모험가다. 탈출한 사람도 벨로토 산개의 독에 당했으니, 다른 모험가들의 상태는 말할 것도 없다.

"사실상 힐을 봉인 당한 것과 다를 게 없죠."

괜히 상처를 치료하겠다고 힐을 썼다간, 마비된 신체가 부패할 테니까.

"벨로토 산개 특성상, 시간만 끈다면 독성을 제거할 수 있긴 하지만요."

"문제는... 시간을 끌기 힘들다는 거지. 밖으로 도망칠 수가 없잖아."

던전 안에 갇혀있으니 도망쳐서 시간을 끄는 건 불가능했다. 그럼 답은 남은 체력으로 버티는 수밖에 없지만....

"맞아요. 거기다 [위압감]까지 쓰겠죠."

레어 몬스터의 스킬 중 하나인 [위압감]. 대상의 피해량이 증가하기 때문에 체력과 마력 소모가 훨씬 빨라진다.

"힐은 쓸 수 없고, 대미지는 증가하고, 도망치는 건 불가능한 데다 몸에 독까지 퍼지다니."

모험가 입장에선 이거보다 끔찍한 상황이 있을까? 일단 힐이 봉인된 시점에서 지옥이 따로 없다.

"다들 바람 포션을 갖고 있길 바라는 수밖에."

바람 포션이 있다면 벨로토 산개의 독을 제거할 수 있다. 그러면 힐도 쓸 수 있으니 사정이 훨씬 좋겠지만.

'아마 없는 사람이 더 많겠지.'

늘 하는 말이지만 모험가들의 주머니는 좁다. 바람 포션을 갖고 다닐 만한 여유가 없을 것이다.

"정말 다 죽었으면 어쩌지?"

"그건 아닐 겁니다. 살아있는 사람들도 많을 거예요."

해가 지고 난 뒤의 산에는 벨로토 산개 이상으로 강하고 위험한 몬스터들이 나타난다.

"이 시간에 나간 모험가들은 심야 소탕을 노린 참가자들이잖아요."

그런대로 실력은 있는 놈들이다. 하필 재수 없게 레어 몬스터한테 걸려서 그렇지.

"그럼 이제 어떡할 거야?"

"뭐 고민할 것도 없죠."

강승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한 건 하려고 여기 온 거잖아요."

"역시 그래야 강 선생이지!"

레어 몬스터. 꽤 강하고 빡센 놈이지만, 상대할 가치는 차고 넘친다.

'유물 하나 덤으로 얻을 수 있고... 무엇보다.'

강승현은 지난번 레어 시궁쥐와 싸우며 개고생했던 일이 떠올랐다.

'말 안 쳐 듣고 쓸모없는 파티원들과 휴지 같은 멘탈을 가진 힐러.'

지옥 같은 파티를 겪고 나니 뭘 해도 희망적이다.

'이번엔 제대로 된 동료도 있으니까.'

아즐 대륙의 흔해 빠진 모험가가 아니라, 포인트 노예로 끌려온 차원 이동자 둘. 레어 몬스터쯤이야 가뿐하게 잡을 수 있다.

"벨로토 산개의 약점도 알고 있으니, 아이템부터 준비합시다."

레어 몬스터 공략을 위한 포션 세트.

벨로토 산개 공략을 위한 공기 속성 포션.

지금 준비해야 하는 건 이 정도다.

"뭐 빼먹은 거 없지?"

"출발하죠."

두 사람은 캠프 천막에서 필요한 물품을 사고 캠프 북쪽 출구로 향했다.

-한밤중의 산속은 정말 어두웠다. 캠프에서 멀어지자 불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게 됐다.

"한국에선 주변 도시 건물의 불빛이라도 보였는데... 여긴 진짜 해 지면 끝장이라니까."

김호정은 인벤토리에서 램프를 꺼냈다. 불을 붙인 상태로 인벤토리에 넣어두면 불을 피우지 않아도 쓸 수 있다.

"좀 낫네요."

"정말?"

"아뇨."

램프 덕분에 시야만 살짝 확보됐을 뿐이다. 여전히 사방은 어둡고 깜깜했다.

"불 속성이나 빛 속성 스킬이 있었다면 램프 필요 없었을 텐데."

"남들은 판타지 세계 와서 파이어볼 날리고 썬더볼트 날린다는데, 우린 뭘까?"

"그냥 포인트 노예."

안타깝게도 강승현에게 스킬은 없었다. 더 안타까운 건 그런 스킬을 가진 동료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큰 거 안 바란다. 정말 큰 거 안 바란다.... 그냥 라이터나 손전등 하나만 주면 좋겠다고!"

"아니면 성냥불이라도... 스킬로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아요."

두 사람은 잡담을 나누며 어두운 산길을 훑어 나갔다. 아직까진 눈에 띄는 게 없었다.

"...._[;.&....!.?/'...$$'@#...."

캠프를 떠나고 15분쯤 걸었을까. 어딘가에서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불 끄세요."

"응?"

김호정이 램프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불빛이 사라지자 주변은 순식간에 암흑이 됐다.

"무슨 소리가 들려요."

"잠깐만.... 흙 파먹는 들짐승 냄새도 나는데?"

"잘 찾아온 것 같네요."

강승현은 걸음을 멈추고 방향을 찾았다. 소리가 나는 방향은 서쪽이었다. 서쪽으로 나아갈수록 소리가 뚜렷해졌다.

"이, 씨발! 개새끼들!"

나뭇가지를 치우고 앞을 바라보자, 모험가 하나가 벨로토 산개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강승현은 망설임 없이 석궁을 꺼냈다.

"김호정 씨, 램프!"

"오케이!"

지금까진 어두워서 잘 안 보였지만, 김호정이 램프를 꺼낸 순간 눈앞의 상황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크르르르르컹!!"

이를 드러내고 달려드는 벨로토 산개의 얼굴이.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돌 화살을 생성합니다.]

녀석은 눈앞의 인간만 신경 쓰느라, 강승현이 바로 근처까지 다가온 걸 눈치채지 못했다.

'5연발 돌 화살!'

강승현이 방아쇠를 당기자,

파바바바밧!!!

쏟아져 나온 돌 화살이 벨로토 산개의 눈을 꿰뚫었다.

"깨갱!!!"

벨로토 산개는 고통스럽게 날뛰며 몸부림쳤다. 강승현은 틈을 주지 않고 이어서 공격했다.

[절개]

들고 있던 석궁은 집어 던지고, 나이프를 꺼내 녀석의 목을 찢었다.

쫘아아악!

벨로토 산개는 괴로운 듯 몸을 비틀었다.

"죽어라!"

그 직후 램프를 던지고 뛰쳐나온 김호정이 검을 휘둘렀다.

서거억!

그가 휘두른 검이 벨로토 산개의 찢어진 가죽을 베었다. 베여나간 가죽 사이로 시뻘건 살덩어리가 드러났다.

[프리아의 석궁이 소멸합니다.]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강승현은 던져버린 석궁을 다시 불러들였다. 방아쇠를 당기자 석궁에서 단단한 돌화살이 쏟아졌다.

파바바바박!!!

화살은 벨로토 산개의 가슴팍에 박혀 들어갔다.

"끄르르르...."

예상치 못한 기습을 당한 벨로토산개는 반격 한 번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오케이. 나가떨어져쓰!"

김호정은 내팽개친 램프를 주워들고 돌아왔다. 강승현은 다친 모험가한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사, 살았다... 살았다!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모험가의 이름은 카이텔. 심야 소탕에 참가한 사람 중 하나였다.

"당신은 제 생명의 은인...."

"잡소리는 됐고, 일단 상처 치료부터 해드릴게요."

당연하지만 카이텔은 벨로토 산개한테 잔뜩 물어뜯긴 상태였다. 처음에 석궁을 들이대자 놀란 얼굴이었으나,

"김호정 씨."

"크헉!"

"봐요, 사람한테 쏴도 멀쩡하죠?"

"미리 말하고 쏘라구!"

화살에 맞은 김호정이 멀쩡한 걸 보고, 카이텔은 순순히 바람 화살을 맞았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바람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파팟!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힐을 쓸 수 있겠어요!"

벨로토 산개의 독을 치료해주자, 나머지 상처는 본인이 스스로 치료했다.

"힐러였구나."

"그래서 혼자 도망칠 수 있었죠. 체력은 회복할 수 있었으니까."

독 때문에 상처를 치유할 순 없어도, 깎인 체력은 채울 수 있다.

카이텔은 체력 회복을 하며 도망쳤지만 결국 벨로스 산개한테 따라잡혔다.

"대신 다른 사람들은 돕지도 못하고.... 이상하게, 가도 가도 미로처럼 끝이 없더라구요."

"레어 몬스터 때문입니다."

"레어 몬스터? 젠장, 어쩐지...!"

아무리 도망쳐도 캠프 불빛 하나 안 보이더라!

카이텔은 길길 날뛰며 소리쳤다.

"다른 모험가들은 어딨는데요?"

"저쪽이요. 저쪽에 벨로토 산개가 엄청 모여있는데... 저는 거기서 도망쳤어요."

카이텔이 가리킨 곳은 좁은 오솔길. 아마 저곳에 레어 몬스터가 있을 것이다.

"저희는 다른 사람들을 구하러 갈 겁니다. 따라오라고 하진 않겠지만."

어차피 평범한 힐러는 벨로토 산개와의 전투에 도움 되지 않는다. 굳이 데려갈 필요는 없다.

"부상자를 발견하면 이쪽으로 보낼 테니 치료해주세요."

대신 다른 부상자를 회복시켜줄 순 있다. 그 일은 카이텔한테 맡기기로 했다.

"알았어요. 제 동료들도 안에 있을 테니... 꼭 좀 부탁드립니다!"

강승현은 카이텔의 램프에 불을 붙여줬다. 이러면 부상자들이 카이텔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강 선생, 이쪽! 이쪽!"

먼저 오솔길로 들어간 김호정이 강승현을 불렀다. 김호정을 쫓아 들어가자 쓰러진 모험가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으...으으... 아파...."

"...."

"살려주세요.... 누가 좀... 제발...."

움직임이 없는 모험가도 있었지만, 아직 살아있는 모험가들이 많았다.

"이 사람들, 아직 숨이 붙어 있어!"

김호정은 사람들을 살피며 말했다.

"근데 왜 끝장내지 않은 거지?"

"끝장내지 않은 게 아니라. 죽을 때까지 방치하는 겁니다."

자비롭게 숨통을 끊어주는 게 아니라, 고통스러워하며 천천히 죽도록.

실제로 많은 모험가들은 숲속에 버려진 채 죽어가고 있었다. 지금 구하러 오지 않았다면 다들 싸늘한 시체로 발견됐을 것이다.

"이런 짓을 하는 놈들은... 생명을 우습게 보는 놈들뿐이죠."

"생명을 우습게 본다고?"

"죽었다 살아난 놈들은 대체로 그래요."

아무래도 사람들을 한가하게 구경할 상황이 아닌 것 같다. 강승현은 앞으로 달려가며 방아쇠를 당겼다.

'좀 미친 놈 같겠지만 어쩔 수 없지.'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바람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파바바바박!!

강승현은 눈에 보이는 것마다 화살을 쏴댔다. 시체와 사람을 하나하나 구분하는 것보단, 닥치는 대로 바람 화살을 쏘는 게 낫다.

"미, 미친 인간이다!"

화살에 맞은 모험가 하나가 비명을 질렀으나,

"...안 아프네?"

"해독제 같은 거예요."

아프지 않다는 걸 알고 눈을 끔뻑거렸다.

"화살에 맞은 사람은 밖으로 나가서 불빛을 찾으세요."

"거기에 카이텔이라는 힐러가 있다구! 몸 괜찮아졌으면 다른 사람들도 도웁시다~!"

"아, 알겠습니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모험가 서너 명이 오솔길을 빠져나갔다.

'뒷일은 저 사람들한테 맡기자.'

하나하나 도와줄 시간은 없다. 응급처치는 해줬으니 나머지는 본인들이 알아서 해야지.

"강 선생! 저, 저기...."

강승현이 오솔길을 빠져나오자 좀 더 처참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숲 안쪽에 시체가 잔뜩 쌓여 있던 것이다.

짐승의 시체는 물론이고,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것도 섞여 있었다. 그중에는 백골이 된 시체도 있었다.

"이상하네.... 벨로토 산개는 살아있는 먹이를 선호하지 않아?"

"보통은 그렇지만."

벨로토 산악지대의 육식성 몬스터들은 대부분 신선한 고기를 선호한다. 저런 식으로 시체를 쌓아두지 않는다.

"썩은 고기도 안 가리고 잘 먹는 놈들도 있잖아요."

붙잡은 인간을 즉사시키지 않고 일부러 천천히 죽어가게 하는 악랄함. 부패한 고기도 가리지 않는 습성.

"크르르르르르...."

쌓인 시체 무더기 위에 거대한 벨로토 산개 한 마리가 나타났다. 놈의 몸은 군데군데 썩어서 뼈가 드러나 있었고, 사악한 흑마력과 악취가 풍겨왔다.

"한 번 죽었다가 되살아난 놈들."

녀석은 되살아난 시체, 흔히 말하는 언데드였다.

35. 역린

언데드.

이미 한 번 죽은 생명이 흑마력에 의해 다시 움직이는 것. 사제들이 무엇보다 싫어하는 존재들이다.

"좀 귀찮아지겠네요."

당연히 언데드의 약점은 신성 스킬. 평범한 힐도 언데드에겐 대미지로 들어간다. 신성력이 강한 존재라면 스치기만 해도 몸이 가루가 된다.

"신성 스킬만 갖고 있다면 그냥 잡몹들이지만...."

"나나 선생이나 신성 스킬하곤 거리가 머니까."

언데드는 신성 스킬에 약한 대신 끈질긴 생존력을 갖고 있다. 몸 안의 흑마력을 전부 소진시키든가, 육체를 완전히 훼손시키지 않는 한 죽지 않는다.

"크르르르르...."

이어서 수많은 벨로토 산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레어 몬스터가 [우월감]을 사용해 동족 개체를 불러낸 모양이다.

"왜 이런 곳에 언데드 몬스터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시체로 탑을 쌓아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적어도 한두 달 이상 이곳에 머물고 있던 것 같다.

"하루이틀 사이에 나타난 몬스터는 아니겠죠."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김호정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시체탑에 [관찰의 눈]을 사용한다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닌 것 같고."

두 사람은 엄청난 수의 벨로토 산개 무리에 포위당했다. 주변의 벨로토 산개를 전부 끌어모은 것 같다.

"우리가 이것들 뚫을 수 있을까?"

"일단 미친 산개 예방 주사부터 맞으시죠."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바람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파바바박!!

강승현은 자신의 몸과 김호정을 향해 바람 화살을 발사했다.

[공기 속성 강화 +2.5%]

[지속 시간 15분]

이러면 지속 시간이 끝날 때까진 벨로토 산개의 독을 견딜 수 있다.

"크어어어엉!!"

레어 몬스터의 울음소리를 신호로 주위의 벨로 토산개가 달려들었다.

"썩 꺼져!"

김호정의 검이 벨로토 산개의 가슴을 베었다. 한 마리를 처리하자마자, 바로 다음 녀석이 뛰어들었다.

"김호정 씨, 숙여!"

파바바박!!

강승현은 석궁 방아쇠를 당겼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바람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깨애앵!!!!"

화살에 맞은 벨로토 산개가 몸부림치며 총에 맞기라도 한 듯 비명을 질렀다.

"역시 이게 효과가 더 좋네."

바람 포션은 기본적으로 공격용 포션이 아니지만, 공기 속성에 약한 상대에겐 대미지로 들어간다. 덕분에 바람 화살에 맞은 벨로토 산개는 고통스러워하며 날뛰는 중이었다.

"커컹!"

그때, 틈을 노리고 달려든 벨로토 산개 한 마리가 강승현의 팔을 물었으나,

[공기 속성 강화 +2.5%]

지금 강승현은 몸에 바람 포션을 잔뜩 도핑한 상태였다.

"깨갱!!"

벨로토 산개는 강승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공기 속성을 견디지 못하고 물러났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돌 화살을 생성합니다,]

강승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녀석의 이마에 돌 화살을 박아넣었다. 녀석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이 정도면 할 만한데?"

김호정이 흐르는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평범한 벨로토 산개라면 그렇겠죠."

강승현은 시체 탑 위로 시선을 돌렸다.

"...."

벨로토 산개를 이끄는 레어 언데드 몬스터.

좀비 벨로토 산개.

[땅 밑에서 기어 나온 부패한 벨로토 산개]

녀석은 아까 공격 신호를 보낸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공격은 물론이고 [위압감] 역시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졸개들이 죽어 나가는 걸 지켜볼 뿐이다.

'이 개새끼가 지금 뭐 하자는 거지?'

놈이 뭔가 수작을 부리려는 것 같다. 강승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

두 사람이 계속해서 쓰러트린 덕분에, 이제 벨로토 산개는 몇 마리 남지 않았다. 대부분 시체가 되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강승현은 놈의 의도를 눈치챘다.

'이 개새끼.'

저 새끼는 일부러 동족이 죽어가도록 내버려 둔 것이다. 정확하게는 동족들을 죽여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사령술을 쓰려고.'

신이 아니고서야 죽은 생명을 온전히 되살릴 수 없지만, 꼼수를 부려서 살리는 건 가능하다. 그중 하나가 시체에 흑마력을 담아 움직이게 하는 사령술이다.

"커겅!"

녀석이 허공을 향해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그러자 바닥에 굴러다니던 벨로토 산개 사체가 흉흉한 기운을 뿜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크르릉...."

"으르르를...."

죽은 벨로토 산개 무리가 언데드로 되살아났다.

"저 녀석, 네크로맨서였나."

사령술사, 네크로맨서.

사령술을 써서 망자를 움직이게 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생명을 완벽하게 되살릴 순 없지만, 새로운 몬스터로 탄생시키는 건 가능했다.

"뭔 시발 개새끼가 사령술을 써? 사람도 하기 어려운데!"

"레어 언데드 몬스터라면 가능하겠죠."

저 녀석은 그냥 레어 몬스터가 아니라 레어 호칭을 가진 언데드 몬스터. 유물의 힘을 받는다면 사령술을 못 쓸 것도 없다.

"컹!"

맞췄으니 칭찬이라도 해주겠다는 건가?

레어 벨로토 산개가 울부짖자 몸에서 검은 오오라가 뿜어져 나왔다.

"[위압감]이다!"

피해량을 증가시키는 끔찍한 오오라가 두 사람을 덮쳤다. 동시에 되살아난 좀비 벨로토 산개 무리가 덤벼들었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재생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물론 [위압감]에 대한 대비책은 준비해놨다. 강승현은 김호정을 향해 재생 화살을 발사했다.

파바바박!

재생 포션이 [위압감]의 효과로 지속적으로 깎이는 체력을 보충해줬다.

"저세상으로 돌아가!"

푸욱!!

파바바박!

두 사람은 몰려오는 좀비 벨로토 산개를 상대로 온 힘을 다했다. 검을 휘두르고 방아쇠를 당겨 덤벼드는 적들을 공격했다.

"컹!"

"깨갱!"

두 사람의 공격에 하나둘 쓰러져갔으나,

"으르르르르...."

"크르르!"

레어 벨로토 산개가 쓰러진 놈들을 언데드로 다시 되살려냈다. 기껏 쓰러트려도 다시 살아나는 상황이었다.

"끝이 없잖아! 심지어 한 번 죽인 놈은 포인트도 안 들어와! 이거 개 뻘짓이라고!"

김호정의 절규가 들려왔다. 이대로 가다간 포션이 먼저 바닥날 판이다.

'잡몹들은 죽여봤자 끝이 없군. 역시 우두머리를 처리해야 하는데.'

네크로맨서는 자기 자신은 되살릴 수 없다. 되살릴 수 있는 건 오직 타인의 시체뿐이다. 그러니 레어 몬스터만 쓰러트리면 나머지 좀비 떼도 처리할 수 있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바람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강승현은 레어 벨로토 산개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파박!

석궁에서 바람의 힘이 담긴 화살이 발사됐으나,

"컹!"

좀비 벨로토 산개 한 마리가 달려와 화살을 대신 맞았다. 동족을 방패로 쓰는 건 레어 몬스터의 주특기다.

"저 망할 것들이 방해해서."

심지어 부려먹는 부하들은 언데드 몬스터. 방패로 쓰다 죽어도 다시 부활시키면 그만이다.

"접근할 수가 있어야지."

강승현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틈을 만들려 했으나, 고기 방패들이 끈질기게 달라붙어서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본 김호정이 입을 열었다.

"접근하면 이길 수 있겠어?"

"당연하죠."

"그럼 또 내가 나서야지!"

그는 씩 웃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안경에 로브까지 입고 있어서 비실비실한 마법사처럼 생겼지만....'

김호정은 힐러인 강승현과 달리, 일단은 탱커였다.

"믿는다, 선생! 내가 유인할 테니까, 그 틈에 어떻게든 해주셔!"

앞으로 나아간 김호정이 손가락을 튕겼다.

"커거겅!"

"커겅!"

그 순간, 일대의 모든 벨로토 산개가 그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집단적 어그로]

[이쪽을 봐라!]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듯, 이건 어그로를 끄는 스킬이다. 정확하게는 근처 몬스터의 모든 공격을 자신에게 돌리는 스킬.

'꽤 유용한 것 같지만, 단점이 하나 있지.'

그건 [집단적 어그로]에 걸린 몬스터의 스피드가 증가한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빨리 죽을 수 있는 스킬이지!"

김호정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전속력으로 도망쳤다.

"으르르를!!!"

"커겅! 컹!"

어그로에 끌린 좀비견 무리가 김호정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고맙습니다. 김호정 씨."

덕분에 주위의 벨로토 산개가 전부 사라졌다. 지금이라면 레어 몬스터에게 접근할 수 있다.

-'레어 몬스터를 쉽게 잡는 방법?'

언젠가 약재상 라페이한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레어 몬스터의 유물이 힘의 원천이라는 건 말해줬지?'

레어 몬스터들은 유물을 몸에 품고 엄청난 힘을 얻었다. 그 대가로, 유물이 파손되거나 잃어버리면 죽음을 맞이한다.

'혹시 귀찮은 레어 몬스터랑 만났다 싶으면 유물을 찾아서 부숴버려. 그럼 바로 뒈지거든.'

유물은 레어 몬스터의 힘의 원천이자 동시에 치명적인 약점, 급소다.

"라페이 씨한테 들어두길 잘했네."

강승현은 석궁을 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관찰의 눈]

그의 눈이 푸르게 빛나며 레어 몬스터의 정보를 띄우기 시작했다.

[땅 밑에서 기어 나온 부패한 벨로토 산개]

[레어 몬스터][언데드]

[턱 밑에 유물이 숨겨져 있다.]

'일단 유물의 위치는 파악했고.'

[투척★]

슈욱!!

강승현은 청은단검을 꺼내 투척했다. 날아간 단검이 놈의 레어 몬스터의 턱을 건드렸다.

"크르아아아!"

레어 벨로토 산개는 눈에서 안광을 뿜으며 크게 분노했다. 유일한 약점인 만큼, 레어 몬스터들은 누군가 자신의 유물을 건드리면 이성을 잃는다.

'어그로 스킬이 따로 필요 없구만.'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저길 공격해 유물을 파괴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바람 포션 화살은 그럴 만한 힘이 없지.'

그래서 떠올린 것이 바람 포션의 재료로 쓰고 남은 윈드 스톤. 이걸 화살로 만들어 쏜다면 뼈와 가죽을 뚫고 유물을 파괴할 수 있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윈드 스톤 화살을 생성합니다.]

강승현이 석궁을 겨눈 순간이었다.

"컹!"

분노한 레어 몬스터가 크게 울부짖었다. 그러자 탑처럼 쌓인 시체 속에서 좀비 벨로토 산개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

다른 벨로토 산개는 김호정의 어그로에 끌렸으니, 이놈은 방금 부활했다는 소리다. 이럴 때를 대비해 숨겨둔 모양이다.

"이 개새끼가 진짜...!"

콱!!!

뛰쳐나온 벨로토 산개는 강승현의 손목을 물었다. 그것도 손목을 끊을 기세로 말이다.

-우득!

텅!!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석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좀비 벨로토 산개는 떨어진 석궁을 물고 잽싸게 달아났다.

'멍청한 인간 놈! 감히 유물을 건드려?'

레어 벨로토 산개는 자신의 승리를 직감했다. 이제 강승현의 수중엔 무기가 없고, 혹시 더 있다 하더라도 손목을 아작냈으니 무기를 쓸 수 없을 테니까.

'산 채로 씹어먹어 주마!'

레어 벨로토 산개는 강승현을 무참하게 씹어먹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놈이 몰랐던 게 있었다.

[프리아의 석궁이 소멸합니다.]

[프리아의 석궁]은 잃어버려도 다시 불러들일 수 있으며.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그가 양손잡이라는 점이었다.

강승현은 잘린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석궁을 쥐었다.

"이렇게 가까이 왔으니 빗나갈 일은 없겠네."

강승현은 레어 벨로토 산개의 턱 밑에 석궁을 들이밀고 방아쇠를 당겼다.

"뒈져, 이 개새끼야!"

36. 두 번은 못해 먹겠네

파바박!

화살이 벨로토 산개의 턱을 꿰뚫었다.

질긴 가죽이 찢어지면서 턱뼈가 부서졌다.

빠가악!

부서진 턱뼈 사이로 반짝이는 물체가 드러났다. 저게 놈이 숨기고 있던 약점, 유물이다.

"크륵!"

벨로토 산개는 다급하게 물러나려 했으나, 강승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쩌적.

파가악!

발사된 화살이 벨로토 산개의 아래턱을 날려버린 순간,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에 담겨 있던 유물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였다.

"끄러러, 끄럭...."

레어 벨로토 산개는 몇 번 경련하더니 바닥에 축 늘어졌다. 동시에 좀비로 부활한 다른 벨로토 산개들 역시 시체로 돌아갔다.

"드디어 뒈졌네, 이 개새끼."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걸 보면 확실히 죽은 것 같다. 강승현은 석궁을 바닥에 집어던지고 주저앉았다.

"레어 몬스터를 잡았으니 이제 [공간 지배]도 사라졌겠지."

[공간 지배]가 소멸하고 비틀린 공간이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이제 주위의 모험가들이 캠프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

'진짜 두 번은 못해 먹겠네....'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입에 물고 오른팔을 바라보았다.

벨로토 산개의 공격으로 손목이 뜯겨나간 상태였다. [지혈] 덕분에 피가 콸콸 쏟아져 나오지는 않았으나, 통증이 느껴졌다.

'남의 손모가지를 아작내다니.'

손목 절단.

꽤 심각한 부상이긴 하지만 별로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그는 힐러였으니까.

'뭐, 도로 붙이면 되지.'

잘린 손목 정도는 쉽게 붙일 수 있다.

'그럼 내 손목이나 찾으러 갈까....'

다만, 강승현의 손목은 아까 벨로토 산개가 석궁과 함께 물고 갔다.

'소환 스킬로 석궁은 불러왔지만, 손목까지 돌아오는 건 아니니까.'

결국, 손목을 붙이려면 직접 찾으러 가야 했다.

터벅, 터벅.

밑으로 내려왔더니 더 많은 벨로토 산개의 시체가 굴러다녔다. 강승현은 그것들을 발로 툭툭 차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김호정 씨는 어떻게 됐을까.'

어지간해선 죽을 사람이 아니라 큰 걱정은 들지 않는다. 어디 있는지 안 보여서 그렇지.

"김호정 씨, 살아있어요?"

강승현은 자신의 손목과 김호정을 찾아 돌아다녔다.

"가, 강 선생! 나 좀 꺼내줘!"

한참 돌아다녔더니 어디선가 김호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야!"

김호정은 벨로토 산개 시체 속에 파묻혀있었다. 들짐승 찌꺼기를 치워주자 네발로 기어 나왔다.

"깔려 죽는 줄 알았어...."

그는 사람의 몰골로 살아있었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긴 했지만.

-화르륵.

김호정이 모닥불을 피웠다. 모닥불에 마른 나뭇가지 몇 개를 주워 던지자 불이 활활 타올랐다.

강승현은 불 옆에 앉으며 말했다.

"둘 다 어찌어찌 살아남았긴 했네요."

"그러게."

강승현 일행은 무사히 살아남았다. 한 명은 손목이 날아갔고, 한 명은 짐승에 긁히고 뜯겨서 온몸이 너덜너덜했지만.

"캠프로 돌아가기 전에 치료나 하고 가죠."

"지금 출발하면 가다가 쓰러질 것 같긴 해."

섣불리 돌아가기엔 둘 다 부상이 너무 심했다. 여기서 부상을 치료하고 가기로 했다.

"손목은 찾았어?"

"저쪽에 있더라구요."

강승현은 자신의 손목을 훔쳐 간 벨로토 산개를 찾아냈다. 이미 시체가 되긴 했지만 너무 괘씸해서 석궁으로 조져버렸다.

"일단 찾기만 하면 붙일 수 있으니까."

"어우... 아프겠다야."

"안 아픈 건 아니지만... 모험가 일하면서 다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생리식염수를 꺼내 손목을 세척했다. 엄청 쓰라렸으나 이 정도 고통은 별거 아니었다.

"근데 저쪽에 힐러 있잖아. 걔한테 붙여달라고 하지?"

"저도 힐러인데 제가 왜요."

김호정의 말대로 보통 힐러라면 잘린 손목을 빠르고 편하게 붙여줄 것이다.

하지만 강승현은 다른 힐러에게 의지하고 싶지 않았다. 야매이긴 해도 힐러니까.

"그, 그치만 손목을 다쳤잖아? 다리라면 몰라도 한 손으로 할 수 있겠어?"

"한 손으로도 붙일 수 있어요."

평범한 힐러라면 손으로 터치만 해도 붙일 수 있지만, 강승현은 야매 힐러. 신체를 붙이려면 손으로 하나하나 꿰매야 한다.

'왼손으로 오른쪽 손목을 들고 있어야 하지 않나?'

한 손으로 다른 손을 어떻게 붙이려는 걸까.

김호정은 궁금하다는 얼굴로 강승현의 손을 바라보았다.

'방식은 지난번 손가락 접합수술과 비슷해.'

강승현의 두 눈이 푸르게 빛났다.

[관찰의 눈]

우선 [관찰의 눈]을 써서 잘린 절단면을 자세히 확인했다.

뼈가 끊어지고 혈관과 신경이 전부 잘린 상태다. [지혈] 스킬을 발동하는 중이라 피가 흘러나오진 않았다.

"내가 손목 좀 들어줄까? 그럼 좀 낫지 않아?"

"괜찮아요. 대신 마력 포션 좀 빌려주세요."

"어어! 알았어!"

김호정이 마력 포션을 건네줬다.

건네받은 마력 포션에 스킬을 사용하자,

[실 뽑기]

포션 병에서 마력 실이 뽑혀 나왔다.

강승현은 바늘을 꺼내 실을 연결했다.

"오... 이제 어쩌려고?"

"이런 식으로."

강승현은 이빨로 바늘을 물었다. 그리고 입에 문 바늘로 손목을 꿰매기 시작했다.

'손으로 꿰매는 것보다 불편하지만... 못할 것도 없지.'

마력으로 이루어진 실이 강승현의 잘린 손목을 이어갔다.

"이, 입으로 꿰맨다고? 그래도 돼?"

"이건 임시방편이에요."

당연히 손으로 하는 것만 못하다. 디테일이 떨어지고 [봉합] 스킬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놔두고 살덩어리만 연결하는 중이죠."

강승현은 대충대충 인형 꿰매듯 자신의 손목을 팔에 연결했다. 혈관이나 신경은 전혀 건들지 않고서.

"왜...?"

"지금은 왼손으로 잘린 손목을 들고 있어야 하지만, 일단 붙여두기만 하면...."

손으로 들고 있을 필요가 없다. 실로 손목을 고정하는 간단한 작업이라면 이빨로도 충분하니까.

"이렇게 안 떨어지죠."

강승현은 잘린 손목을 잡고 있던 왼손을 떼어냈다. 엉성하게 꿰매긴 했지만, 손목과 팔이 실로 고정되어 있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김호정은 그걸 보며 소리치며 감탄했다.

"오...! 그런 방법이 있구나!"

"혈관과 신경은 연결하지 않아서, 아직 움직일 순 없지만요."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새 바늘을 꺼냈다.

자유로워진 왼손으로 바늘을 쥐고,

[봉합]

손목을 처음부터 다시 꿰맸다.

아까 내버려 둔 혈관과 신경을 잇고, 아까와는 달리 아주 정밀하고 세심한 바느질로 혈관을 이어붙였다.

"그거 언제 봐도 신기하다니까."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빠른 속도의 [봉합]. 봐도 봐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임시로 고정한 마력 실을 끊어내고, 새로운 실로 혈관과 신경을 잇는다....'

강승현은 [관찰의 눈]으로 [봉합]의 속도를 따라가며 실수 하나 없이 끊어진 부위를 이어갔다.

파바바바밧!!

그리고 마침내, 잘린 혈관이 전부 이어졌다. [지혈]을 해제하자 피가 돌면서 생기가 돌아왔다.

"이게 야매 힐러라면 반드시 알아둬야 할 셀프 접합술이죠."

강승현은 붕대를 꺼내 이로 물고 손목을 고정했다.

꽉!

"붕대는 왜 묶어?"

"뼈가 부러졌잖아요. 붙을 때까진 고정해놔야죠."

지금 강승현은 뼈를 붙일 스킬이 없다. 알아서 붙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완치판정].'

다만, [완치판정]을 사용하면 뼈의 회복 속도를 올릴 수는 있다.

"자, 이쪽은 끝. 이제 놔두면 붙겠죠."

진정한 힐러는 자가치료도 문제없는 법.

강승현은 손목치료를 끝냈다.

"이번엔 김호정 씨 치료해드릴게요."

자가치료는 포인트를 벌 수 없지만, 동료치료는 포인트를 벌어다 주는 귀중한 행위.

강승현은 김호정의 상처를 치료해줬다.

"그렇게 심각하진 않네요."

온몸으로 어그로를 끈 사람치고는 괜찮았다. 피부는 뜯기다 못해 벗겨진 부분도 많고, 뼈가 조금 아작 나긴 했지만.

"아무튼 죽진 않았으니까."

"숨만 붙어있으면 되는 거야?"

"당연하죠."

강승현은 피부 재생 연고를 잔뜩 퍼부었다. 심하게 찢어진 부분은 마력 실을 이용해 이어붙였다.

"숨만 붙어있으면 대체로 살릴 수 있어요."

붕대를 이용해 팔과 다리를 고정하고, 마찬가지로 [완치판정]을 사용했다.

"볼 때마다 신기하다니까. 분명 힐은 아닌데 회복력 하나는 기가 막혀요!"

김호정은 재생력이 상승한 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몸의 상처가 서서히 회복되어갔다.

"그건 그렇고."

김호정의 치료를 끝낸 강승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벨로토 산개 시체 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뛰어난 네크로맨서가 되살려낸 망자들은 네크로맨서가 죽어도 쓰러지지 않는다던데."

"그래? 쟤네들은 다 죽었는데."

"아무래도 이 들개 녀석은 뛰어난 네크로맨서는 아니었나 봅니다."

잔머리를 굴리긴 했지만, 그래봤자 들개는 들개였다.

강승현은 레어 몬스터의 사체를 인벤토리에 던져 넣었다.

"상처는 대충 수습됐고, 챙길 건 다 챙겼고... 슬슬 캠프로 복귀하죠."

"그러자고. 들개 시체 더미에서 자고 싶진 않으니까."

-"저, 저기 봐! 그 사람들이 돌아왔어!"

"두 분 다 무사하셨군요! 저예요! 카이텔입니다!"

터덜터덜 걸어서 캠프로 돌아갔더니 힐러 카이텔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뿐만 아니라 다른 모험가들도 강승현을 향해 다가왔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모험가님 아니셨으면 저는 거기서 죽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들은 아까 오솔길에 쓰러져 있던 사람들이었다. 강승현이 레어 몬스터를 처치한 덕분에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아무리 기다려도 오시질 않아서 걱정했습니다!"

"역시 무사하실 줄 알았어요!"

다들 무사히 돌아온 강승현 일행을 보며 안도했다. [공간 지배]가 사라졌는데도 돌아오질 않아서 무척 걱정했다고.

"가, 강승현 님! 김호정 님! 두 분 다 무사하셨군요!"

캠프 관리자 바셀로가 창백해진 얼굴로 다가왔다. 그는 숨을 헐떡거리며 입을 열었다.

"레어 몬스터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그 이야기 하러 왔어요."

"혹시 몰라서 하인드 마을 지부에 지원 요청을 했습니다."

바셀로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지원 요청을 보냈다.

"두 분이 레어 몬스터를 상대하러 갔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걱정되어서...."

만약 레어 몬스터가 캠프까지 내려와 [공간 지배]를 사용했다면 지옥도가 벌어질 테니까.

"하지만 역시 쓸데없는 짓이었네요. 지원 요청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굉장한 실력을 갖고 계시니!"

바셀로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공간 지배]가 사라졌다는 건 레어 몬스터가 죽었다는 증거니까.

"아뇨, 지원 요청 잘하셨어요. 이왕 하는 김에 아이베르 교단에도 연락하세요."

"네? 치료라면 여기 있는 힐러들로도 충분합니다만."

"그냥 힐러가 아니라 사제들이 필요합니다."

"사제님들이요?"

"이건 그냥 레어 몬스터가 아니라...."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레어 몬스터 사체를 담은 자루를 꺼냈다.

"좀비 벨로토 산개였으니까."

"허, 허억...! 이건... 언데드?"

바셀로가 놀란 얼굴로 사체를 바라보았다.

"세상에나...."

그냥 레어 몬스터도 위협적인데, 심지어 레어 언데드 몬스터였다니. 바셀로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런 걸 고작 둘이서 쓰러트리셨단 말입니까...?"

"고생하긴 했죠."

모험가 조합의 정보대로라면 자칭 힐러 강승현은 힐을 쓸 줄 모른다. 즉, 신성 스킬도 없이 언데드를 처치했다는 소리다.

'괴, 괴물인가? 사람 맞아?'

바셀로가 놀라건 말건, 강승현은 자기 할 말을 계속했다.

"일단 발견한 건 이놈뿐이지만, 언데드 몬스터가 한 마리만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벨로토 산악지대는 하인드 마을을 포함한 여러 마을과 인접해있는 지역이다. 만약 다른 언데드 몬스터가 남아 있다면 마을까지 내려와 민가를 습격할 확률이 높았다.

"교단 사제들한테 요청해서 산을 수색하는 게 좋을 겁니다."

"바, 바로 연락하러 가겠습니다!"

바셀로는 창백해진 얼굴로 달려갔다.

37. 뭘 좀 아는 놈들

잠시 후, 모험가 조합의 연락을 받은 아이베르 교단 사제들이 캠프에 도착했다.

"이게 대체 무슨...!"

"신이시여...."

캠프 북쪽으로 향한 교단 사제들은 주위를 둘러보고 경악했다.

사방팔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독한 흑마력. 몇 번이고 되살아나면서 부패하고 으스러진 벨로토 산개의 사체들.

그리고 산처럼 쌓인 끔찍한 시체까지.

"우웩...!"

모험가 조합 직원 중 하나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바닥에 토했다.

"더럽고 불쾌해라...."

"구역질 나고 사악한 언데드 놈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생명을 희생시킨 거지?"

사제들은 이런 일에 익숙한지, 인상을 구기긴 했지만 토하진 않았다.

화르륵.

모닥불 곁에서 쉬고 있던 강승현은 사제들이 다가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고 피곤하다.... 사제들이 알아서 어련히 잘하겠지. 난 자러 갈래.'

김호정은 아까 이렇게 말하고 이상한 베개를 들고 자러 갔다. 그래서 이번 일에 관해 설명해줄 사람은 강승현뿐이었다.

"정말 끔찍한 광경이군요."

사제들 중 가장 높아 보이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저는 아이베르 교단 하인드 마을 지부 소속 사제 카르닐 아숄로라고 합니다."

그의 이름은 카르닐 아숄로. 이번에 파견된 사제들을 이끄는 사제단장이었다.

'사제라고 온몸으로 광고를 하고 있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몸에서 엄청난 신성력이 느껴졌다. 다른 사제들의 몸에서도 신성력은 흘러나왔지만, 가장 강력한 신성력을 뿜어내는 사제는 카르닐이었다.

'수많은 사제들을 이끄는 집단의 우두머리이니 저 정도 신성력은 갖고 있어야겠지.'

아이베르 교단에서 거물급 인사를 보낸 것 같았다. 그만큼 이번 일이 심각하다는 의미겠지.

'그래도 허이스 사제에 비하면 별거 아니네.'

강승현은 카르닐의 인사를 대강대강 들으며 생각했다.

"여기 이분이 레어 언데드 몬스터를 쓰러트리신 모험가님입니다."

바셀로가 카르닐 사제에게 강승현을 소개했다.

"반갑습니다. 힐러 강승현이라고 합니다."

강승현은 늘 그랬듯 미소지으며 사제들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카르닐을 비롯한 사제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가, 강승현이라고?"

"그 강승현? 야매 새끼?"

"저, 저 자식!"

사제 무리 속에서 온갖 투덜거림이 새어나왔다.

이들은 전부 하인드 마을 교회에서 먹고 자고 하는 교단 사제들. 하인드 마을에 머물며 사제와 힐러들을 털고 다니는 강승현을 모를 리가 없었다.

"힐도 모르는 주제에 힐러랍시고 설치는 놈이잖아!"

"젠장... 하필 왜 저놈이냐고...."

"나, 나 저놈만 보면 무서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사탄이나 언데드면 죽여서 없앨 수라도 있지...."

실제로 이들 중 몆몇 사제들은 강승현에게 망신당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치욕스러운 얼굴로 강승현을 노려보았다.

"저자가 그 강승현이란 말이지."

"신성력도 없는 주제에... 사람을 고치는 힐러."

"인간의 껍질을 뒤집어쓴 괴물이라더니, 소문에 비하면 평범하게 생겼군."

강승현을 처음 본 사제들도 다들 잔뜩 경계하는 얼굴이었다. 워낙 소문이 자자한 인물이었으니까.

"조용! 다들 정숙해라!"

사제들이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시끄럽게 떠들어대자 카르닐이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카르닐 사제님!"

사제들은 바로 고개 숙여 사과했다.

'이 남자가 아이베르 교단 최상급 사제를 물 먹인 힐러.'

카르닐 역시 강승현과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다. 하지만 다른 사제들한테 강승현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당연히 좋은 감정이 있을 리 없었다.

"당신이 허이스 사제가 말했던 강승현 님이군요."

"허이스? 아, 네. 저번에 만난 방랑사제님? 저 그 사제님하고 꽤 친합니다."

강승현은 천연덕스럽게 받아쳤다.

물론 그 말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최상급 사제 중 하나인 허이스를 물 먹였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였으니까.

"...아이베르 교단 하인드 마을 지부를 대표해서 말씀드립니다."

하지만 카르닐은 아무 말 않고 고개를 숙였다.

"타락한 존재를 찾아내 외로운 싸움 끝에 쓰러트린 당신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카르닐 사제가 감사 인사를 하자 다른 사제들 역시 고개를 숙였다.

'의외네? 자기들 일 뺏어갔다고 난리칠 줄 알았는데.'

다들 강승현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었다. 몇몇은 이를 악물긴 했지만.

"언데드 몬스터. 그것도 사령술을 사용하는 레어 몬스터. 그런 존재를 막아내지 못했다면 더 많은 희생자가 생겨났을 겁니다."

아이베르 교단은 강승현한테 불만이 많긴 하지만, 그 이상으로 이번 업적을 높게 평가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정말 대형 사고가 일어났을 테니까.

"저희는 아이베르 교단은 물론이고, 하인드 마을을 대표해 감사 인사를 전하러 온 것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강승현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저는 사악한 언데드를 용납할 수 없는 위대한 힐러니까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몇몇 사제들의 얼굴에 힘줄이 솟아났다.

'저저... 사기꾼.... 언데드한테 별생각 없는 거 다 아는데!'

'너, 돈만 내면 언데드도 치료할 거잖아!'

'신앙심이라곤 개미 눈물만큼도 없는 놈이!'

그 말대로 강승현은 언데드에 대해 별 감정이 없다. 그냥 아이베르 교단 사제들 빡치라고 하는 소리였다.

'그치만 어쩔 수 없지....'

'분하지만 저 녀석이 쓰러트린 건 사실이니까.'

'젠장! 저 녀석 신앙심도 낮으면서 왜 저렇게 강한 건데!'

사제들은 당장이라도 따지고 싶었으나 입을 꾹 다물었다. 어찌 됐건 강승현은 끔찍한 언데드를 쓰러트리고 마을을 지켜낸 영웅이었으니까.

"아름다운 벨로토 산악지대가 흑마력으로 오염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카르닐 사제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신성력을 가진 사제들에겐 엄청난 거부감이 드는 모양이었다.

강승현에겐 흑마력이나 마력이나 그게 그거였지만.

"지금부터 이 일대는 아이베르 교단에서 맡겠습니다."

"힘내십쇼."

언데드가 더럽힌 땅을 정화하는 건 사제들의 몫이다. 카르닐은 사제들에게 명령했다.

"1팀은 이 일대의 흑마력을 정화한다. 2팀은 흩어져서 근처를 수색해라. 언데드가 남아 있을지 모른다. 3팀은 시신을 캠프로 운반하도록. 4팀은 오염된 사체를 수거해 소각해라."

"알겠습니다!"

사제들은 일제히 자기가 맡은 일을 수행하러 흩어졌다. 말은 거창하지만 결국 이번 일의 뒷수습이다.

"성스러운 화염!"

사제들은 널브러진 벨로토 산개의 시체를 한곳에 모았다. 그리고 신성 스킬을 사용해 사체를 소각했다.

화르르륵!

신성력이 담긴 불꽃이 사체와 흑마력을 동시에 불태워버렸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빛이 정말 아름다웠다.

"오... 언데드 소각은 처음 보는데, 멋지네요."

관리자 바셀로가 중얼거렸다.

"언데드로 변한 사체는 깔끔하게 소각하지 않으면 다시 살아나기도 합니다."

"그러니 사체 소각은 중요한 업무죠."

사제들이 시체를 소각하며 말했다. 사체에 흑마력이 남아 있다면 부활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일종의 캠프파이어인가.'

캠프의 꽃은 역시 캠프파이어. 강승현은 신성 불꽃쇼를 구경했다. 불타고 있는 게 들개 시체라는 것만 빼면 완벽한 캠프파이어였다.

"강승현 님."

"예."

한참 불꽃쇼를 구경하는데 카르닐 사제가 다가왔다.

"레어 언데드 몬스터의 사체를 가져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살펴볼 수 있을까요?"

"이 녀석이요?"

강승현은 아까 챙긴 레어 벨로토 산개를 보여주었다.

군데군데 썩어있는 데다 고약한 악취를 풍기는 사체. 정말 빈말로라도 좋다고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정말 지독하군요."

카르닐 사제는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냄새가 고약하긴 하지만, 그걸 말하는 건 아니겠지.'

사체에서 풍겨오는 흑마력을 말하는 것 같다.

이 녀석은 들짐승이면서 동시에 사령술을 쓰는 네크로맨서니까.

"어쩌다 이런 녀석이 평화롭고 조용한 산속에 나타난 건지."

사체를 유심히 살피던 카르닐이 입을 열었다.

"강승현 님, 이 녀석을 저희한테 맡겨주시지 않겠습니까?"

"이걸요?"

"사체를 교회로 가져가 조사하고 싶습니다."

사체를 조사하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사체가 자연적으로 발생한 언데드인지, 아니면 네크로맨서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언데드인지.

카르닐 사제는 그걸 조사하고 싶었다.

"물론 공짜로 받아가겠다는 건 아닙니다. 거기, 준비한 걸 가져와라."

카르닐이 명령하자 사제 하나가 성스러운 기운을 내뿜는 상자 하나를 가져왔다. 아이베르 교단 특유의 문양도 새겨져 있었다.

"사체를 넘겨주신다면 아이베르 교단에서 만든 성수로 값을 치르겠습니다."

"성수?"

성수.

깨끗한 물을 올려두고 기도하거나 성스러운 축복을 내려 만드는 특수한 포션. 만들 때 어마어마한 신성력이 필요해서, 성직자가 아니면 만들 수 없는 물건이다.

"사악한 힘을 쫓을 수 있는 강력한 신성력이 담긴 물건입니다."

카르닐은 가져온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성수가 담긴 포션이 들어 있었다. 특이하게도 성수의 빛깔은 새벽녘을 연상케 하는 은은한 연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보통 성수는 투명한 색 아닙니까?"

"이건 조금 특별한 성수, 여명의 성수라고 합니다."

"여명의 성수!? 그 귀한 물건?"

옆에 있던 바셀로가 입을 떡 벌리고 중얼거렸다. 여명의 성수는 아침이 되기 전, 동이 틀 무렵에만 만들 수 있는 진귀한 성수다.

"그렇습니다. 여명의 성수는 새벽녘의 기운을 담은 맑고 깨끗한 물을 제단에 올려두고 1년간 기도를 올려 만드는 성수. 일반 성수에 비해 훨씬 더 많은 노력과 신앙심이 필요한 물건이죠."

여명의 성수는 일반 성수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력한 신성력을 담고 있다.

"이 한 병으로 수백, 수천 마리의 언데드를 정화할 수 있고, 병에 담고만 있어도 신성력이 뿜어져 나와 사악한 것을 내쫓을 수 있습니다."

이렇듯 여명의 성수는 만들기 어려운 만큼 값을 매길 수 없었다.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아무한테나 팔지 않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번 일은 좀 손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이런 걸 얻어가네.'

레어 몬스터의 사체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런데 그런 쓸모없는 쓰레기를, 몇억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성수와 바꿔준다?

"교단 사람들이 뭘 좀 아시네요."

고민할 것도 없다. 강승현은 레어 몬스터의 사체를 넘겨주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 뭔가 알아낸다면 강승현 님께도 전하겠습니다."

카르닐 사제는 레어 벨로토 산개의 사체를 가지고 교단으로 돌아갔다. 남겨진 강승현의 손에는 여명의 성수가 쥐어졌다.

'음, 이건 어떻게 할까.'

강승현은 여명의 성수를 바라보았다. 그냥 들고만 있을 뿐인데 강력한 신성력이 느껴진다. 팔겠다고 말만 하면, 사겠다는 사람이 몰려올 것이다.

"아, 강승현 님! 지금 시간 괜찮으십니까?"

그때, 바셀로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38. 제안을 하지

"시간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죠?"

"그게... 지부장님께서 오셨습니다."

"모험가 조합 지부장?"

"리웬 님께서 강승현 님을 만나고 싶으시다고...."

바셀로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놈이 날 만나고 싶어 한다고?'

모험가 조합 지부장.

각 마을에 위치한 모험가 조합의 최고 권력자다. 일개 모험가는 얼굴 보기도 어려운 거물 중의 거물이다.

그가 강승현을 만나기 위해 이 캠프에 온 모양이다.

"헛헛헛, 뭘 그리 긴장하시나."

"리, 리웬 님!"

그때, 뒤에서 비싸 보이는 옷을 입은 남자가 다가왔다.

가슴에 달고 있는 모험가 조합 임원 배지. 양옆으로 대동한 건장한 체격의 기사들. 굉장히 재수 없는 웃음소리까지.

두말할 것도 없이 하인드 마을 모험가 조합 지부장 리웬이다.

"이렇게 뵙게 돼서 여, 영광입니다!"

바셀로는 리웬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모험가 조합 인턴이나 다름없는 바셀로에겐 자기 자리에 회사 사장이 찾아온 기분일 것이다.

"편하게 있어, 편하게."

리웬은 웃으며 말했지만, 기사단을 끌고 온 사람이 말해봤자 설득력이 없다.

'언데드 몬스터가 나타났다는 소식 듣고 쫄아서 보디가드를 잔뜩 불렀나 보네.'

놈의 풀네임은 리웬 허셔. 아즐 대륙 남부의 명문가 '허셔' 가문 출신.

하인드 같은 서부 지방 시골 마을에선 거의 들을 일 없는 이름이지만, 남부에선 꽤 유명한 가문이다.

'허셔 가문. 대대로 실력 있는 검사를 배출해온 집안. 남부 최고의 검사를 거론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이름이라던데.'

명문가 출신에 모험가 조합 지부장을 맡고 있는 남자. 설명만 보면 대단한 사람 같지만,

'저건 그냥 쓰레기 새끼지.'

그는 가문의 명성과 달리 검 실력이 허접하고, 마법 재능도 없는 데다 신성력도 평민 수준이었다.

'능력도 없는 놈이 욕심은 더럽게 많아요.'

남의 것 뺏어서 자기 주머니 채울 궁리밖에 안 하는 전형적인 쓰레기. 그런 놈이 모험가 조합 지부장이 된 이유는 집안 빽 덕분이었다.

'아즐 대륙에 온 지 하루도 안 된 차원 이동자보다 약한 놈이 지부장이라니.'

리웬을 향한 강승현의 평가는 이랬다.

'수저 잘 물고 태어나서 가문 빨로 거들먹거리는 쓰레기.'

무능한 놈이 낙하산으로 들어오면 아랫놈들만 고생하는 법.

실제로 리웬은 하인드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기면 늘 부하들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안전한 조합 건물 안에 숨어있었다.

"모험가 조합 지부장님이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그래서 강승현은 저 겁쟁이가 마을 밖 캠프에 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런데 다른 일도 아니고 자신을 만나겠다고 일부러 찾아오다니.

"강승현 모험가가 레어 언데드 몬스터를 쓰러트리셨다는데, 지부장인 내가 당연히 나와봐야지!"

이렇게 말하며 사람 좋은 척 웃었다. 하지만 녀석은 하인드 마을 모험가 조합 지부장.

'웃기고 있네.'

하인드 마을 의뢰 평판을 깎아 먹는 강승현한테 좋은 감정이 있을 리가 없다.

'보나마나 속셈이 있어서 달려온 거겠지.'

강승현이 리웬을 싫어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무능한 주제에 욕심이 많기 때문이다.

'모험가 조합 식단 좀 개선하라고 몇 번을 말해도 예산이 부족하다면서 무시하고, 모험가 조합 지부장실은 틈만 나면 뜯어고치는 놈.'

투자는 안 하면서 노예를 싼값에 부려먹는 전형적인 귀족 마인드. 정말 죽창이 꼭 필요한 놈이다.

'요즘은 보너스를 못 받아서 리모델링 못 하는 모양이지만.'

그래서 리웬 역시 강승현한테 이를 갈고 있었다. 그런 인간이 갑자기 친한 척하며 찾아오는 이유가 뭐겠는가?

'뭐 떡고물이라도 얻어먹으러 온 건가.'

따로 의뢰를 받은 건 아니었지만, 강승현은 강력한 언데드 몬스터를 퇴치했다. 이건 없는 의뢰를 만들어서라도 보상할 일이었다.

"덕분에 하인드 마을의 평화를 지킬 수 있었네. 내가 모험가 조합을 대표해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며...."

리웬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늘어놓더니, 갑자기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상자 하나를 꺼냈다.

"소정의 보상을 준비했지. 강승현 모험가의 마음에 쏙 들 물건이야."

번쩍이는 상자 속 아이템은 포션 병. 병 안에는 노랗다 못해 금빛으로 빛나는 액체가 들어 있었다.

'아이베르 교단도 그렇고, 이것들은 나한테 포션 말고 줄 게 없는 건가.'

물론 강승현이 포션을 잘 써먹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선물로 포션만 받고 싶다고 한 적은 없다.

'방금 포션 받은 사람한테 또 포션을 주는 건 무슨 매너....'

강승현은 노랗고 황금빛을 띤 포션을 집어 들었다.

"그래서 이건 무슨 포션인가요?"

"황금빛 활력 버섯 엑기스. 아주 귀한 물건이지."

"화, 황금빛 활력 버섯 엑기스!"

이야기를 듣던 바셀로가 또 경악했다. 저러는 걸 보면 뭔가 좋은 물건인 모양이다.

"거기 자네. 포션에 대해 설명하도록."

"네, 넵! 황금빛 활력 버섯이라 하면 스태미나 포션 제작에 쓰이는 활력 버섯의 하나로... 활력 버섯 중 가장 희귀한 아이템입니다!"

리웬의 명령을 받은 바셀로가 정보를 줄줄 불었다. 확실히 이름만 봤을 땐 스태미나 포션 같긴 했다.

"이건 황금빛 활력 버섯을 재료로 만든 포션으로... 스태미나 포션에 속하지만, 평범한 스태미나 포션이 아닙니다!"

"저 친구 말이 맞아. 마시면 스태미나의 최대치가 증가하는, 아주 진귀한 포션이지."

스태미나로 먹고 사는 강승현에게 딱 어울리는 아이템이었다.

"스태미나는 체력이나 마력에 비하면 신경 쓸 필요 없긴 하지만... 강승현 모험가는 틈만 나면 스태미나 포션을 마시고 있잖아? 스태미나가 부족한 거지?"

"잘 아시네요."

강승현은 하인드 마을의 스태미나 포션 매출 기여도 1위다. 틈만 나면 스태미나 포션을 퍼마셨으니까.

'포션을 그렇게 마셔대는데, 모르는 게 병신이지....'

모험가 조합 놈들도 강승현이 스태미나를 많이 소모한다는 건 알아챈 모양이다. 스태미나로 스킬을 쓴다는 사실까지는 모르겠지만.

"최대치를 증가시켜주는 아이템은 늘 귀한 법이지. 내가 그거 구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야기하면 끝도 없어."

스태미나 증가 포션은 체력 증가 포션이나 마력 증가 포션에 비하면 싸다. 그렇다고 해도 최대치 증가 포션은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이런 걸 구하려면... 나 같은 모험가 조합 지부장쯤 돼야 하지."

리웬은 본인의 권력을 아낌없이 써서 황금빛 활력 버섯 엑기스를 구했다.

"없어서 못 먹는 걸 구하셨네. 정말 감사합니다. 역시 모험가 조합 리웬 지부장님. 평소에도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세요."

강승현 역시 마음에 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포션을 들이켰다. 포션을 마시자 몸 안으로 강력한 활력의 기운이 퍼져가는 게 느껴졌다.

[스태미나 최대치가 3% 상승했습니다.]

그리고 메시지창이 날아왔다. 증가한 스태미나가 상태창에 반영된 모양이다.

'한 번에 스태미나가 3%씩 올라가다니... 생각보다 많이 올려주네.'

스태미나는 마력과 마찬가지로 정말 올리기 어렵다.

마력은 쓸 일이 없으니 상관없지만, 강승현에게 스태미나는 필수 스탯. 올릴 수 있으면 꼭 올려야 한다.

'짜식, 비싼 값하네.'

모험가 조합 지부장이 힘들게 구할 만했다. 그런 만큼, 순수한 의도로 준 건 아닐 것이다.

쨍강!

강승현은 빈 병을 던져 깨트리며 말했다.

"잘 마시긴 했는데... 선물 하나 주겠다고 지부장님이 여기까지 행차하실 리는 없죠?"

좋은 걸 주니까 먹긴 했지만, 이건 분명 미끼다. 속셈이 뻔히 보이는 미끼.

그것도 자신의 환심을 사려는 의도로 뿌려진 미끼.

'싫어하는 놈한테 아무 이유 없이 선물 주겠다고 찾아오는 놈이 어딨겠어.'

강승현은 미끼를 일부러 물었다. 거절할 이유도 없고, 저 겁쟁이가 무슨 이유로 여기까지 왔는지 궁금해서.

"지금 제가 많이 피곤해서 그러는데 길게 시간 끌지 말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핫핫핫, 역시 강승현 모험가야! 말이 잘 통해서 좋아!"

'아저씨, 사기 치지 마쇼.'

"본론으로 들어가지!"

먹이가 미끼를 물었으니, 낚시꾼이 줄을 당겼다. 리웬은 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물론, 큰일을 해낸 모험가한테 보상을 주기 위해서 찾아온 것도 맞긴 해. 그건 모험가 조합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까."

리웬이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한밤중에 이런 산속으로 달려오진 않는다.

보상을 줄 거라면 내일 아침에 부하들을 시켜도 되니까.

'그런데 굳이 이 시간에 지부장이 직접 찾아왔다?'

그건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소리다.

'이 시점에서 지부장급이 움직여야 할 만한 일이라면....'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밖에 없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이번 보상과 전혀 관계없으니... 거절한다고 방금 마신 포션을 뺏어가진 않을 테니 안심하도록."

"그냥 본론만 말하세요. 이것 때문에 오신 거잖습니까."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여명의 성수를 꺼냈다. 성수를 꺼낸 순간 리웬의 눈이 커졌다.

"오오오, 저것이 바로 아이베르 교단에서 만든 여명의 성수!"

'그럴 줄 알았다.'

리웬 지부장이 찾아온 이유는 아이베르 교단이 건넨 여명의 성수 때문이었다.

'부르는 게 값이라는 진귀한 포션. 억만금을 줘도 쉽게 팔지 않는 물건을 손에 넣은 모험가가 근처에 나타났으니... 탐이 나셨겠지.'

여명의 포션은 모험가 조합뿐 아니라, 귀족도 탐낼 만한 물건이다. 다른 누군가가 선수 치기 전에 달려온 모양이다.

"이야기가 빨라서 좋군. 나는 정당한 값을 치르고 여명의 포션을 매입하고 싶네."

여명의 포션은 존재만으로도 언데드를 몰아낼 수 있다. 이런 물건을 모험가 조합이 보유한다면 하인드 마을이 더욱 안전해질 것이다.

리웬은 거만한 얼굴로 생각했다.

'동시에, 본부에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겠지.'

귀한 물건을 손에 넣은 모험가 지부는 본사에서 더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비싼 포션까지 준비하면서 강승현한테 잘 보이려는 이유가 이거였다.

"돈이 있다고 쉽게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 나 또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으로 거래하고 싶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자네는 그러니까... 정식 힐러 자격을 갖고 있지 않지?"

강승현은 힐을 쓸 수 없어서 힐러로 인정받지 못하는 야매 힐러. 하지만 실력은 정식 힐러를 뛰어넘는다.

"안타까운 일이야.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하는 모험가가 있다니."

원칙적으로 힐을 쓸 수 없다면 힐러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여기는 지독한 신분제가 존재하는 아즐 대륙. 귀족이 마음만 먹으면 노예를 성기사로 만들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니 모험가 조합 지부장의 권한으로, 자네한테 힐러 배지를 발급해 주도록 하지."

하인드 마을 모험가 조합이 제안했다. 여명의 성수를 준다면 강승현을 정식 힐러로 만들어 주겠다고.

39. 말씀은 감사하지만

"힐러 배지를 발급해 주겠다?"

"자네를 정식 힐러로 인정해주겠다는 뜻이지."

리웬 지부장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명문가 출신 귀족이 모험가 조합의 지부장이 되면 그만한 권력이 주어진다.

"자네는 비록 힐은 사용할 수 없지만...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정식 힐러가 되는 건 일도 아니야."

그리고 아즐 대륙은 그런 권력을 대놓고 휘둘러도 뭐라 하지 않는 세상이다.

"정식 힐러가 되면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를 거야. 모험가 조합이 주는 각종 혜택을 전부 받을 수 있고, 신성력을 기를 수 있도록 아이베르 교단과 협력해서 수련도 할 수 있어."

그 외에도 각종 상점에서 할인을 받거나, 고난이도 의뢰에 참가할 땐 지원금도 받을 수 있다.

"칼질 좀 할 줄 아는 일반 모험가와 수준이 다르지."

힐러 배지를 갖고 있다는 것부터 모험가 조합이 신원을 보증한다는 것이니까.

귀족들도 일반 모험가는 낮잡아보지만, 실력 있는 힐러들은 높게 평가한다.

'그래서 그렇게 건방진 건가.'

왜 만나는 힐러마다 재수 없는지 알 것 같다.

온 사방에서 빨아주고 오냐오냐해주니 인성이 그 모양이 되지.

"하인드 지부장의 권한으로 힐러가 되는 거라면, 다른 마을에선 쓸 수 없는 거 아닙니까?"

잠시 생각하던 강승현이 입을 열었다.

"뭘 모르는 소리!"

그러자 리웬이 분개하며 소리쳤다.

"임시 힐러가 아니라 정식 힐러일세! 모험가 조합 본사에 자네 이름이 올라가는 거라고!"

모험가 조합에 이름이 올라가면 하인드 마을은 물론이고 아즐 대륙 어디에서든 정식 힐러로 인정받을 수 있다. 모험가 조합은 그만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 같은 인물이 정식 힐러 하나 못 만들 것 같나?"

"...."

"거기다, 나는 자네의 실력이나 여태까지의 경력을 인정할 생각이야."

모험가가 그렇듯, 힐러 또한 실력에 따라 등급을 나눈다.

막 힐러가 된 사람에게 주어지는 {초급}을 시작으로, {하급} {중하급} {중급} {중상급} {상급} {최상급} 순으로 성장하게 된다.

"초급 힐러가 아니라 중상급 힐러 자격을 주지."

중상급 힐러. 여기까지만 올라와도 실력 있는 힐러라 칭송받을 수 있는 등급이다.

"자네는 워낙 솜씨가 좋으니까 꾸준히 노력하면 상급, 최상급도 노려볼 수 있겠지."

초급 힐러가 최상급 힐러가 되기 위해선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중상급에서 시작한다면? 남들보다 몇 배는 빠르게 최상급에 도달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왕정 힐러도 노릴 수 있어. 밑바닥 신분에서 인생 펴는 거야!"

왕정 힐러.

힐러 인생 최고의 승진 루트.

왕정 힐러가 되기 위해선 우선 최상급 힐러 자격을 얻은 뒤, 4년에 한 번 선발하는 왕국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중상급 힐러만 되어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은 없겠지만, 왕정 힐러가 되면 그 이상의 것을 누릴 수 있지."

지독한 신분제를 가진 아즐 대륙에서 왕실 소속으로 일한다는 건 무시할 수 없는 권력자 중 하나가 된다는 소리다. 모험가 조합 지부장도 왕실 힐러에 비하면 별 거 아니다.

"자네, 그거지? 다른 세계에서 아즐 대륙으로 넘어온 차원 이동자."

리웬이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역시 모험가 조합 지부장쯤 되면 눈치채는 모양이다.

"그렇다면요?"

"차원 이동자들은 하나같이 성장 속도가 엄청난 데다 강력한 힘을 가졌다고 들었거든."

실력으로만 따지면 차원 이동자들은 아즐 대륙 고위직에 올라도 이상할 게 없다.

"뭐, 출신도 불분명하고 이렇다 할 신분도 없는 놈을 왕궁에 들이진 않지."

하지만 아즐 대륙은 지독한 신분제 사회. 실력보다 신분이 더 중요한 세상이라, 차원 이동자들은 고위직에 올라가기 힘들다.

'이름 없는 가문 출신이어도 승진하기 어려운데, 다른 차원 출신이라면 말 다 했지.'

물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왕정 힐러나 왕실 정예 기사단에 들어간 차원 이동자들도 있기 때문이다.

"본래는 오를 수 없지만, 예외적으로 귀족의 후원을 받으면 차원 이동자도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죠."

"잘 아는군."

신분제 사회인 만큼, 신원을 보증할 든든한 빽을 만들면 된다. 아즐 대륙 귀족의 후원을 받으면 고위직에 앉을 수 있다.

"실력은 입증되니까, 밀어주는 귀족만 있으면 왕실 입성이야 쉽겠지."

"그 말은...."

"그래. 여명의 성수를 넘겨준다면 우리 '허셔' 가문이 널 후원해주마."

리웬이 아주 거만한 얼굴로 말했다. 남부 지방 명문가 허셔 가문의 후원을 받는다면 정말 어마어마한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자네는 우리 '허셔' 가문의 후원을 받고 왕실에 입성하는 거지."

당연하지만 이 모든 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다.

"여명의 성수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거든."

성수 한 병으로 정식 힐러 배지, 상급 힐러 자격뿐만 아니라 허셔 가문의 후원까지. 힐러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조건들이다.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아. 자네 손에 여명의 성수가 들어온 것 자체가 기적이지만, 거기에 더 큰 기적이 나타난 셈이지."

리웬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여명의 성수만 손에 넣으면 이런 시골 마을 지부장이 아니라 더 크고 좋은 곳으로 옮겨갈 수도 있어!'

그는 비전 없고 좁아터진 하인드 마을을 지겨워했다. 기회만 있으면 빠져나가고 싶었으나, 워낙 무능력해서 그럴 기회가 없었다.

'혹시 못 옮기더라도 저 재수 없는 놈이 의뢰 취소하는 짓은 안 할 거 아냐.'

강승현이 정식 힐러가 된다면 이제 합법적으로 힐러 의뢰를 받을 수 있다. 그러면 남의 의뢰를 취소시킬 필요가 없다.

'다시 예전처럼 의뢰 보너스를 타 먹을 수 있겠지!'

리웬은 자신의 빛나는 미래를 상상하며 들떠있었다.

"생각해 봤는데요."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강승현이 입을 열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그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그래그래, 당연히 그래야... 방금 뭐라고?"

리웬이 눈을 크게 뜨고 소리쳤다.

"다시 말해봐!"

"제안을 거절하겠다고 했습니다."

강승현은 망설임 없이 다시 말했다.

"이, 이런 제안을 거절하겠다고?"

리웬의 얼굴이 단숨에 구겨졌다.

정식 힐러 자리에, 허셔 가문에서 후원하겠다는데 그걸 거절한다고? 리웬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이런 건방진 자식! 주제도 모르고! 설마 이걸로는 부족하다는 거냐?"

"부족하다는 게 아니라, 필요 없을 거 같아서 거절한다는 소리입니다."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다. 강승현은 리웬의 제안을 거절할 생각이다.

"확실히 힐러 자격이 있으면 살기 편해지겠죠. 절 무시하는 놈들도 없을 거고."

"그래! 그러니까...."

"하지만 이런 귀한 물건을 뇌물로 바치면서까지 얻고 싶진 않습니다."

자기 실력을 입증하기만 하면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굳이 돈을 주고 사다니. 그런 건 사기꾼들이나 하는 짓이다.

"제가 왜 돈을 주고 사야 하죠? 모험가 조합이 저를 힐러로 인정하는 게 맞지."

강승현은 자신을 사기꾼 힐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힐을 못 쓸 뿐, 힐러로서의 자격은 충분했으니까.

'니들이 나한테 숙여야지, 내가 왜 니들한테 숙이냐.'

그래서 거절했다. 애초에 모험가 조합이 좋아할 일은 할 생각 없고.

"그, 그럼 후원은? 우리 '허셔' 가문의 후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

"아 그거요?"

강승현은 귀족의 후원에 관심이 없었다. 온갖 특혜를 받는 대신, 귀족이 이래라저래라하는 걸 참고 살아야 하니까.

"듣자 하니 리웬 지부장님은 허셔 가문 내의 발언권이 별로 크지 않다고 들어서요."

"뭐, 뭐라고!"

실제로 리웬 허셔는 본가가 있는 남부가 아니라 서부 지방 시골 마을에 살고 있다. 이것만 봐도 가문 내 위치를 알 수 있다.

"많은 혜택을 못 누릴 것 같아서 거절하겠습니다."

"이, 이런 건방진 놈이!!!"

"힐러 자격은 제 실력으로 쟁취할 거고, 가문 후원은... 다른 인연이 있겠죠."

강승현은 웃는 얼굴로 리웬의 제안을 전부 거절했다.

'그딴 조건으로 날 스카웃하려고? 어림도 없지.'

"가, 감히! 하인드 마을 모험가 조합 지부장인 이 나 리웬 허셔를 모욕했겠다?"

리웬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그는 안 그래도 가문에서 가장 무능하다는 게 콤플렉스인 남자였다. 강승현이 그걸 제대로 찔렀으니 날뛸 수밖에.

"네 놈이 정식 힐러가 되는 건 죽었다 깨어나도 없을 줄 알아! 내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막을 테니까!"

'그러시든가.'

"이 기회를 놓친 걸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이 미천한 것아!"

그리고 그대로 등을 돌려 캠프를 떠나려 했다.

"아, 리웬 지부장님."

"뭔가! 이제 와서 빌어봤자 소용 없...."

"그게 아니라. 레어 언데드 몬스터는 저 혼자 잡은 게 아니라서요."

강승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천막을 가리켰다.

"저기서 자고 있는 제 동료랑 같이 잡은 겁니다."

강승현뿐만 아니라 천막에서 자고 있는 김호정 역시 이번 사냥의 VIP.

즉, 이번 일에 대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제 동료가 받을 보상도 준비해주실 거죠? 아까 주신 황금빛 활력 버섯 엑기스는 제가 마셔버려서 나눠줄 수가 없네요."

"뭐라고?"

강승현이 싹싹 빌려나 했던 리웬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빌기는커녕 보상이나 더 내놓으라니.

"그 친구 아니었으면 못 이겼을 겁니다. 당연히 황금빛 활력 버섯 엑기스와 동급의 귀한 보상을 주시겠죠?"

모험가 조합의 정책상, 파티 개개인에게 지급하는 보상은 동급이어야 한다.

황금빛 활력 버섯 엑기스는 어디까지나 강승현 개인을 위한 보상. 그러니 김호정에게도 동급의 보상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 이런... 망할 놈이! 내가 그 귀한 걸 꺼낸 건 여명의 성수 때문이었다고! 내 사비로 구매한 물건이란 말이다!"

"그건 제가 알 바 아니죠. 저는 모험가 조합의 정책을 따르는 것뿐인데요."

강승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누가 그러니까 사비 들여서 비싼 물건 사랬나?

"그러니 좋은 보상 기대하겠습니다. 리웬 지부장님!"

"이, 이런 천한 것이! 강도가 따로 없구나!"

"전 이만 자러 가겠습니다. 물건은 내일 아침까지 천천히 가져다주시면 됩니다."

리웬 지부장이 날뛰건 말건, 강승현은 웃는 얼굴로 인사하며 자리를 떠났다.

40. 은혜 갚은 힐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