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안 들키면 그만
몬스터를 잡다 보면 가끔 구슬 아이템을 얻을 수 있다. 구슬에 걸린 봉인을 풀면 다양한 아이템으로 변한다. 모험가들은 이걸 유물이라 부른다.
'무기도 나오고 방어구도 나오고, 먹을 것도 나온다지.'
한마디로 아즐 대륙식 뽑기 아이템.
'몇 번 본 적은 있지만 내가 가져보는 건 또 처음이네.'
강승현도 봉인된 유물을 얻은 건 처음이었다. 힐러는 다른 모험가에 비하면 몬스터 사냥할 일이 드무니까.
'힐러용 아이템이 나오면 좋겠는데. 시궁쥐한테서 나온 거니까 싸구려겠지.'
봉인이 풀리지 않은 유물은 그냥 구슬이다. 쓸 수도 없고, 비싸게 팔 수도 없다. 무슨 아이템인지도 모르는데 뭐하러 비싼 돈을 주고 사겠는가.
비싸게 팔고 싶다면 일단 봉인부터 풀어야 한다.
'유물 감정사.... 힐러가 싹수없다면 이 새끼들은 양심이 없어.'
유물 감정사.
모험가들이 가져온 유물을 감정해서 봉인을 풀어주는 놈들.
힐러만큼은 아니지만, 이들도 쓰레기 집단이다. 유물 감정하면서 심심하면 사기를 쳐대기 때문이다.
-이건 싸구려 유물이네요. 그래도 저희 가게에 파신다면 시장가보다 1.5배로 매입하겠습니다.
-이게 이번에 들어온 꽤 귀한 유물인데! 고객님이 지금 사신다면 50% 가격으로 드립니다!
좋은 유물은 헐값에 사고, 나쁜 유물은 비싸게 파는 게 대표적인 사기다.
'특히, 초짜 모험가 상대로 바가지 씌우는 걸 좋아하지.'
이런데도 유물 감정사들이 안 잡혀가는 이유는 유물 감정은 힐보다 배우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족이나 왕족처럼 높으신 분들만 건드리지 않으면 대체로 봐주는 편이었다.
'싸구려라도 사기당하기 싫은데.'
1000골드짜리 유물이라도 1000골드에 팔라고 할 놈들이다.
강승현은 잠시 생각하다 포션 하나를 만들었다.
'이거면 사기는 안 당하겠지.'
-"어서 오세요. 모험가 조합 유물 감정소입니다!"
유물 감정사는 반갑게 웃으며 강승현을 반겼다. 강승현도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유물 감정하러 왔습니다."
"모험가 조합 소속 모험가분은 기본적으로 10% 할인가에 감정해드리고 있습니다."
유물 감정사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속으로는 '10% 할인해주는 대신 30% 떼어가 주마.'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떤 유물을 감정해드릴까요? 맡겨만 주세요."
"여기 이 녀석인데...."
강승현이 유물을 꺼내 놓은 순간이었다.
"...!"
아주 잠깐이지만 유물 감정사의 눈빛이 바뀌었다. 바로 원래 얼굴로 돌아오긴 했지만.
'아, 생각보다 좋은 건가 보네?'
태도를 보아하니 싸구려는 아닌 모양이다.
"그럼 바로 감정해드리겠습니다."
유물 감정사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으나, 속은 그렇지 않았다.
'이거 꽤 좋은 물건인데? 이 새끼는 이런 걸 잘도 구했네.'
유능한 유물 감정사들은 그냥 보기만 해도 유물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다. 평범한 유물인지, 싸구려인지, 아니면 귀한 유물인지.
'등급은 B+급. 상등품이군.'
B+ 등급의 유물은 잘하면 몇백만 골드까지 받을 수 있다. A급보다는 못 하지만 B급보다는 좋은 등급이니까.
유물 감정사는 유물의 가치를 확인하자마자 머리를 굴려댔다.
'이걸 어떻게 해야 헐값에 사들일까? 가장 간단한 방법은 가격 장난인데.'
일부러 최저가를 알려준 다음 가격을 살살 올려서 사는 수법이다. B+ 유물은 최저가도 비싼 편이라 이득이 그렇게 크진 않다.
'아니면 봉인 상태로 매입?'
하급 유물은 봉인을 푸는 것보다 구슬 상태로 팔 때 더 비싸게 팔 수 있다. 봉인된 유물은 분해하면 마력으로 가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게 일반 유물이 아니라 레어 유물이라는 거야.'
감정사는 강승현이 내민 유물이 레어 몬스터 유물이라는 걸 간파했다.
'싸구려니까 이대로 팔라고 하면 안 믿겠지.'
아무리 모험가라도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다.
레어 유물은 같은 등급이어도 일반 유물보다 비싼 아이템이 나올 확률이 높다. 싸구려라도 레어 유물을 봉인 상태로 파는 건 손해다.
'봉인 상태로 팔라고 하면 뺨 맞을지도 모르겠다. 레어 몬스터를 잡을 정도면 실력자일 거 아냐.'
감정사도 레어 몬스터를 때려잡는 실력자한테 맞고 싶진 않았다.
사실 순순히 감정비만 받아 가면 아무 문제없다. 모험가가 이유 없이 사람을 패진 않으니까.
'B+ 유물, 그것도 레어 유물! 이건 포기 못 하지!'
하지만 감정사는 포기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다른 거로 바꿔치기하면 그만이지.'
유물은 각 등급에 따라 독특한 기운을 뿜어낸다. 유물 감정사는 유물에서 나오는 미약한 기운을 감지해 가치를 알아본다.
당연하지만 일반인은 감지할 수 없다. 오직 유물 감정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건 파란색 B+ 레어 유물이니까....'
감정사는 카운터 안으로 손을 뻗었다. 카운터 안은 이런 식으로 바꿔치기할 때를 위해 모아 둔 싸구려 유물로 가득했다.
'파란색 C+ 유물로 바꿔치기하자.'
감정사는 서랍에서 장갑을 꺼내는 척 싸구려 유물을 꺼냈다.
뛰어난 프로 감정사들은 유물에 손만 대도 가치를 알아볼 수 있다. 그런 실력을 사기 치는 데 써먹고 있다는 게 문제지만.
-유물 감정으로 먹고살려면 가장 먼저 남 속이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사기는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다.
유물 감정을 가르친 스승에게서 배운 명언이다.
'안 들키면 그만이지.'
아무리 대단한 모험가라도 유물 감정 스킬이 없다면 유물을 감정할 수 없다.
원래 가치를 모른다면 따질 수도 없겠지. 레어 유물이라고 꼭 좋은 아이템만 나오는 건 아니니까.
"그러면 감정을 시작하겠습니다."
감정사는 장갑을 착용하며 싸구려 유물을 숨겼다.
'이제부터는 쉽지.'
이쪽 업계에는 이런 명언이 있다.
속임수를 공연에 사용하면 마술사가 되지만.
속임수를 사기에 사용하면 유물 감정사가 된다.
샥.
감정사는 감정하는 척, 손에 숨겨둔 싸구려 유물과 레어 유물을 바꿔치기했다.
'손기술을 이용한 간단한 트릭이지.'
마력을 쓰는 것도 아니라서 들킬 일도 없고. 혹시 알아차린다고 해도 상관없다. 다시 눈 깜짝할 사이에 바꿔치기하면 되니까.
"자, 감정 끝났습니다."
감정사의 손에 닿은 유물이 밝은 빛을 뿜어냈다.
강승현의 눈에는 투명한 빛이 뿜어져 나왔지만, 감정사의 눈에는 C급을 의미하는 노란 빛이 뿜어져 나오는 중이었다.
"감정 결과 C급 유물. '작은 생명이 담긴 부적'입니다."
몸에 지닐 경우 체력을 겨우 5% 올려주는 아이템이다. 그렇게 나쁜 물건은 아니지만, 레어 유물에서 나온 이상 꽝이다.
"8만 골드 정도에 매매되는 물건이네요."
감정사는 웃겨 죽을 것 같았지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말을 이어갔다.
"봉인된 유물은 마력으로 분해할 수 있습니다."
감정만 하고 봉인은 풀지 않아서 유물은 아직 구슬 형태였다.
"혹시 봉인을 풀지 않겠다면 저희 가게에서 매입할 생각도 있는데...."
C급 봉인된 유물은 평균 10만 골드에 거래된다. 이건 내용물이 8만 골드라 많이 쳐줘봤자 11만 골드다.
"파신다면 12만 골드까지 내겠습니다."
감정사는 다른 곳에 가서 팔아봤자 10만 골드 밖에 못 받을 거라며 여기서 파는 걸 추천했다. 어차피 수백만 골드짜리 유물을 손에 넣었으니 거절하든 승낙하든 손해는 없다.
"이걸 12만 골드에 사신다구요?"
생각에 잠긴 것처럼 내내 다물고 있던 강승현이 입을 열었다.
"혹시 봉인을 해제하실 건가요? 이 경우에는 매입하지 않지만, 봉인해제 비용을 받습니다."
쓸 만한 아이템이 없다면 작은 생명이 담긴 부적을 쓰는 것도 좋다. 체력 5% 상승은 꽤 유용하니까.
감정사는 싱글벙글 웃으며 그쪽도 나쁘지 않을 거라며 추천했다.
"작은 생명이 담긴 부적은 부피도 작고, 주머니에 넣고만 있어도 체력을 올릴 수 있어서 편리한 아이템이죠."
"그래요?"
강승현은 대충 대답하며 유물을 손에 쥐고 들여다보았다.
'아직 현실이 안 믿어지나 보네. 불쌍한 놈. 그런다고 뭐가 보이겠냐.'
감정사는 강승현을 비웃었다.
'레어 유물에서 고작 8만 골드짜리가 튀어나왔으니, 믿기 어렵기도 하겠지.'
하지만 눈알이 빠지도록 들여다봐도, 유물 감정사가 아닌 이상 알아차릴 수 없다. 이게 바꿔치기 된 유물이라는 것을.
'수백만 골드가 8만 골드로 바뀐 거 알면 기절하는 거 아냐?'
이 맛에 유물 감정사 한다니까. 감정사는 속내를 티내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유물 봉인 해제 비용은 1만 골드입니다."
"그 전에 잠깐...."
그때, 강승현이 포션 하나를 꺼냈다. 투명한 액체가 담긴 병이었다.
'웬 포션?'
그러더니 포션을 유물에 뿌렸다. 뭔가 하고 지켜봤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 뭐 하시는 건가요?"
"이 나이프 보이세요?"
그러더니 이번에는 나이프를 꺼냈다.
"제가 아까 레어 몬스터를 죽일 때 쓴 나이프거든요."
그러더니 나이프에 대해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뭐야, 미쳤나?'
감정사는 강승현이 미친 줄 알았다. 고생해서 얻은 레어 유물에서 쓰레기가 나오면 미칠 법도 하겠지만.
"물로 씻어서 깨끗해 보이지만, 피는 원래 잘 안 지워지는 거 아시죠?"
"그렇죠. 그래서요?"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아직 칼날에 남아있어요."
그러면서 이번에는 나이프 위에 포션을 뿌렸다. 감정사는 아까처럼 아무 일도 없으려니 하고 신경 쓰지 않았다.
'미쳤으면 곱게 꺼질 것이지.'
모험가 조합에 연락해서 쫓아낼까 하고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파아앗!
나이프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정확하게는 칼날에 묻은 포션이 빛나고 있었다.
"어, 어?"
"대충 보시면 알겠지만, 이 포션은 피에 닿으면 발광하는 효과가 있어요."
강승현이 포션병을 흔들며 말했다.
이건 과학 수사에 자주 나오는 루미놀 용액과 비슷한 효과를 가진 포션이다. 정확한 효과는 피를 소모해서 빛을 내는 것.
"이름은 라타시아 포션. 주로 북부 사람들이 사용하는 포션이죠. 빨래할 때 넣어서 핏물 뺄 때."
"아, 그, 그런 포션도 있었군요. 좋아 보이네요."
감정사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타시아는 북부 약초라서, 북부 출신이 아니라면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원래 피는 잘 안 지워지고 얼룩 오래가잖아요."
"알죠. 옷에 묻은 피 제거하려면 돈도 많이 들고...."
"근데, 이건 왜 멀쩡할까요?"
감정사는 강승현의 말을 듣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강승현은 유물을 가리키고 있었다.
"왜 라타시아 포션을 부어도 아무 반응이 없는지 모르겠네. 물로 씻어낸 나이프도 포션에 반응하는데."
강승현은 다시 한번 라타시아 포션을 뿌렸다. 포션병이 텅 빌 때까지 뿌렸지만 유물은 여전히 아무 반응도 없었다.
"이 녀석도 오늘 레어 몬스터 뱃속에서 꺼내와서 피범벅이었거든요."
지금은 물로 씻어놔서 깨끗해 보이지만, 사실 유물도 나이프와 마찬가지로 피투성이였다.
"당연히 나이프보다 더 발광해야 맞겠죠?"
오늘 가져온 유물이라면 당연히 피투성이였을 터. 라타시아 포션에 반응하는 게 정상이다.
결국, 이 유물은 강승현이 가져온 레어 유물이 아니라는 소리다.
"누가 바꿔치기한 게 아니라면!"
강승현은 감정사의 머리를 잡아 책상에 처박았다.
11. 사기 칠 거면 들키지 마라
쾅!!
"끄아아아악!!!"
감정사는 비명을 질러댔다. 어찌나 세게 박았는지 이마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여기가 유물 감정소인지, 도적 소굴인지."
강승현은 다시 한번 감정사의 머리를 처박았다. 책상이 부서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하게.
콰아아악!
"으각!"
"모르겠네!"
감정사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사방으로 튀면서 밝은 빛을 뿜어냈다.
촥!
이걸로 라타시아 포션이 가짜라는 변명도 못 하게 됐다. 머리를 두 번 더 내려찍자 감정사가 고개를 쳐들고 소리쳤다.
"지, 지금 실수하는 거야!"
"실수?"
"너, 너! 여기가 모험가 조합 안이라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감정사의 말대로 이 유물 감정소는 모험가 조합 2층 시설이다. 문만 열고 나가면 다른 모험가나 조합 직원들과 만날 수 있다.
"내가 신호만 보내면...."
"아 그러네요?"
하지만 강승현은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감정사를 테이블에 처박았다. 찢어진 이마에서 피가 콸콸 쏟아졌다.
쾅!!!
"아아아아아악!!"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승현은 웃는 얼굴로 스킬을 사용했다.
[지혈]
동시에 감정사의 이마에서 흘러나오던 피가 멎었다. 감정사는 순간 놀란 얼굴로 몸을 움찔거렸다.
"어...?"
손을 댔을 뿐인데 피가 멎었다고?
감정사가 아는 직업 중,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건 한 명뿐이다.
"서, 설마... 힐...."
"깜빡하고 말을 안 드렸네. 저는 힐러 강승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감정사를 테이블에 처박았다.
쿵!!
"흐그악!!"
이마가 테이블에 처박히면서 멎었던 피가 다시 줄줄 흘러나왔다. 강승현은 이번에도 [지혈]을 사용했다.
"보셨죠? 이렇게 터치만 해도 피를 멎게 할 수 있거든요."
"히, 힐러라고?"
감정사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남을 속여 먹기로 유명한 유물 감정사들도 절대 건드리지 않는 모험가들이 몇 명 있다. 그중 하나는 봉인된 유물을 가져오는 힐러다.
'취미로 몬스터를 사냥하는 미친놈이거나, 어마어마한 실력자거나.'
어느 쪽이든 건드리면 안 되는 놈이다. 평범한 힐러라면 봉인된 유물을 얻을 일이 없으니까.
-힐러한테 사기 칠 거라면 절대 들키지 마라.'
언젠가 선배 감정사가 꼭 명심하라며 해준 말이었다.
-힐러한테 들키면 어떻게 됩니까?
-죽을 때까지 패다가 죽기 직전에 치료해주고 다시 팬다.
힐러는 대상이 죽지만 않으면 얼마든지 고쳐줄 수 있다. 사람을 패도 아무 증거가 안 남는다는 게 이들의 무서움이다. 멀쩡한 몸으로 모험가 조합에 항의해봤자 무시당할 테니까.
-만약 놈이 이단심문관 출신 힐러라면, 그때는 그냥 좋게 자수하고 감옥으로 도망가라.
놈들은 사람을 웃으면서 고문하는 괴물들이다. 수백, 아니 수천 번 처맞는 것보다는 차라리 죄를 인정하고 감옥에 가는 게 낫다.
-그러니 힐러가 손님으로 왔다면 절대 건들지 마라.
일반 힐러는 무서울 게 없지만, 유물 감정소를 찾는 힐러는 괴물이니까.
-'서, 설마 힐러라고는....'
유물 감정사가 힐러를 알아보는 방식은 유물 가치 판단과 비슷하다. 모험가의 몸에서 나오는 마력과 신성력을 보면 알 수 있다.
'좀 강하다 싶으면 적당히 떼어먹기, 별 볼 일 없어 보인다 싶으면 털어먹기.'
오늘 가게를 찾은 강승현이라는 남자는 후자였다. 신성력은 벌레 이하, 마력은 어찌나 낮은지 프로 감정사인 그도 느낄 수 없었다.
'일단 힐러는 아니고. 검사라기엔 몸에 상처가 별로 없는 거 같은데....'
저런 바닥을 기는 마법으로 마법사를 할 리는 없고. 레인저는 무기를 늘 늘고 다녀서 구분하기 쉽다.
'그럼 로그 새끼네. 무기 숨기고 다니는 놈들이 그 새끼들 말고 더 있나.'
도둑놈 주제에 스킬 얻었다고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것들. 로그라면 신성력이 밑바닥을 기어도 이상할 게 없다.
'오랜만에 로그 주머니 좀 털어볼까.'
감정사는 강승현을 로그라고 생각했지, 절대 힐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이, 이런 미친... 말도 안 돼.'
강승현이 이단심문관인지는 모르겠으나 이것만은 확실했다. 놈은 레어 몬스터를 쳐 죽이는 실력자에, 엄청난 치유 능력을 가진 무시무시한 힐러다.
'하지만 그런 신성력으로 무슨 힐러를 한다고.... 혹시!'
신성력이 바닥인 게 아니라, 너무 강해서 눈치챌 수 없는 게 아닐까. 이 힐러는 자신의 감정 실력을 뛰어넘는 신성력을 가진 게 아닐까?
'레어 몬스터 잡고 다니는 힐러라면 가능성 있지.'
거기다 동료도 없이 혼자 왔으니 말할 것도 없다.
감정사는 공포와 함께 깨달았다. 자신은 정말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것을.
"사, 사, 살려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감정사는 깨달음이 끝나자마자 엎드려 빌었다.
"B+ 등급 유물이라 탐나서 그랬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바로 돌려드릴 테니 한 번만 선처해주세요!"
지금은 싹싹 비는 수밖에 없다. 차라리 감옥에 가는 게 다행인 상황이니까.
"일단 유물부터 주세요."
"여, 여기! 여깄습니다!"
감정사는 카운터 안에 숨겨둔 레어 유물을 내밀었다.
강승현은 받은 유물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냥 봐서는 아까 받은 C급 유물과 다를 게 없었다.
"또 가짜 아닙니까? 내가 볼 땐 다 똑같이 생겼는데."
"감정해드릴게요! 지금 바로!"
감정사는 레어 유물에 손을 살짝 댔다가 떼어냈다.
"감정 끝났습니다...."
감정사는 유물 감정을 10초 만에 끝내고 축 늘어졌다.
"아니 10초밖에 안 걸리는 걸 사기 치겠다고 질질 끈 거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까는 5분은 걸린 것 같았는데."
강승현은 어이없어하며 감정사를 바라보았다.
"유물 등급 B+, 아이템 등급 A.... 이름은 정신 집중의 반지.... 가격 예상 640만 골드입니다...."
이런 상황에도 유물을 설명하는 걸 보면 프로는 프로인 모양이다.
"봉인도 풀어주세요."
"네, 네! 바로 풀겠습니다...."
감정사가 유물을 다시 한번 건드리자 유물이 눈부시게 반짝이며 반지 형태로 바뀌었다.
"이게 640만 골드?"
강승현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반지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600만 골드짜리를 10만 골드에....'
양심이 없어도 이렇게 없는 놈이 있구나.
강승현은 마음 같아선 한 대 더 패고 싶었다. 여기서 더 때리면 죽을 때까지 팰 것 같으니 참았지만.
"얜 뭔데 이렇게 비쌉니까?"
비싼 건 알겠는데, 생긴 거만 봐선 6백만 골드 같진 않다. 그냥 봐서는 단순한 디자인의 은반지다. 안쪽에 이런저런 문장이 새겨져 있다는 특징이 있지만.
"정신 집중의 반지는 찾는 사람이 많은 아이템입니다."
착용시 마력 상승, 대미지 상승.
거기에 캐스팅 속도도 10%나 증가.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정신력을 50%나 올려준다는 점이다.
"알고 계시겠지만 마법사는 멘탈이 무너지면 끝장이잖아요."
착용하면 웬만한 상황에서도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정신력을 갖게 해주는 반지. 마법사라면 탐낼 수밖에 없는 물건이다.
"거기에 착용 시 엄청난 정신 집중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대중 앞에서 떨지 않고 연설을 하거나, 학생이라면 딴생각하지 않고 공부에 집중할 수 있다. 덕분에 귀족 자제한테 인기가 엄청 많다고.
"꼭 모험가들만 찾는 물건이 아니라서 가격대가 좀 높은 편입니다."
"그래요? 쥐새끼 드롭템치고는 훌륭하네?"
강승현은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반지를 인벤토리에 넣었다. 감정사는 눈치 없이 실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희 가게에 파신다면 655만 골드까지 가능한데...."
"그렇게 맞고도 부족하신가?"
"죄송합니다! 농담이었습니다!"
쾅!
감정사는 알아서 고개를 테이블에 처박았다.
알아서 처박았으니 한 번은 봐준다.
'여기서 더 팼다간 진짜 죽을 거 같고....'
정식 힐러는 패고 고치면 그만이지만, 강승현은 야매 힐러다. 다른 힐러처럼 사람을 죽을 때까지 패고 고쳐줄 순 없다.
'유물도 돌려받았으니 이쯤에서 손 떼야지.'
강승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생각했다. 야매 힐러인 걸 알면 펄펄 날뛰겠지만, 멍청한 유물 감정사는 알 길이 없다.
'유물 감정사들이 꼴에 힐러를 겁내는 건 유명하니까.'
애초에 사기를 안 치면 맞을 일도 없을 것을.
"어쩔 수 없죠. 저는 너무 착한 사람이라 남이 엎드려 비는 걸 보면 마음 아프거든요...."
강승현은 아주 뻔뻔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맘씨 좋고 착한 힐러니까 이번 한 번만 봐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러고 또 사기 치는 건 아니겠죠?"
"절대 안 합니다! 절대! 아이베르 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신의 이름까지 거는 거 보면 진심 같지만, 그럴 리가 없다. 유물 감정사들은 종교 안 믿는 거로 유명한 놈들이니까.
"그럼 봐주는 대신에."
강승현은 작은 생명이 담긴 부적을 챙겼다.
"이건 제가 가져갑니다."
"그럼요! 드려야죠! 가져가세요!"
감정사는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작은 생명이 담긴 부적은 고작해야 8만 골드짜리다.
'저런 쓰레기는 널리고 널렸지. 얼마든지 가져가라. 이딴 마을은 떠나면 그만이니까.'
유물 감정사는 강승현이 떠나자마자 바로 짐 싸서 도망갈 생각이다. 다른 마을로 도망쳐서 새 유물 감정소를 차리면 되니까.
"다른 건 딱히 필요 없어 보이네요. 다 싸구려 유물 같은데."
강승현은 테이블 안쪽을 살폈다.
안에 온갖 색상의 유물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귀한 유물이라면 이런 식으로 보관하지 않을 테니, 전부 싸구려겠지.
"비싸고 좋은 건 다른 곳에 따로 보관해두겠지만... 그거까지 탐내면 너무 날강도 같고."
그런 이유로 강승현은 C급 유물 하나만 받아가기로 했다. 감정사는 고맙다고 인사했지만,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럼 나야 고맙지. 다른 마을로 옮기려면 돈이 엄청 많이 든다고.'
모험가 조합에 낼 돈과 거주지 이전 비용에 이것저것 추가로 드는 돈을 계산하면 몇천만 골드가 그냥 날아간다. 잃은 돈은 모험가를 털어서 충당하면 그만이지만.
"그 대신."
감정사가 이런저런 계산을 마치는 와중에 강승현이 입을 열었다.
"반성하는 의미로 한 달간 봉사활동 하세요."
"봉사활동?"
"모험가를 위한 이벤트를 여는 거죠. 이제 나쁜 일 안 하고 착하게 살겠다는 뜻에서."
<유물 감정비 무료. 봉인 해제 비용 무료.>
<유물 매입 시 2배. 유물 판매 시 반값.>
강승현은 앞으로 한 달간 감정소 특별 할인 이벤트를 열라고 명령했다. 그게 용서해주는 조건이라고.
"예? 매입가는 2배 판매가는 반값? 선생님, 저 그렇게 팔면 거지 됩니다!"
감정사는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하지만 강승현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유물 감정사는 힐러보다 더 잘 벌기로 유명할 텐데요. 모험가 조합 지원도 받을 거고."
"선생님 아무리 그래도 한 달간은...."
"좀 더 맞으면 할 마음이 들겠죠."
"아, 아뇨. 하겠습니다! 하겠습니다!"
감정사는 엎드려 빌며 애원했다. 한 달간 이런 이벤트를 했다간 가진 돈을 싹 털어야 할 것이다.
'이사 가는 건 글렀구나....'
감정사는 한동안 이 마을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 수고하세요."
강승현은 넋 나간 감정사를 버려두고 감정소를 떠났다.
-"이게 그렇게 비싼 물건이란 말이지."
강승현은 정신 집중의 반지를 던졌다 받으며 중얼거렸다. 아까 받은 120만 골드가 푼돈으로 느껴졌다.
'이번에 쓴 돈이 많아서 좀 손해 봤다 싶었는데. 포션 값만 해도 얼마야.'
정신 집중의 반지가 아니었다면 오늘 번 120만 골드는 포션 값으로 깨졌을 것이다.
'같이 갈 사람은 없지만, 오늘 같은 날에 술을 안 마시면 언제 마시겠어.'
강승현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술집으로 향했다.
12. 반가운 사람
주점 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얼굴이 벌게지도록 마시는 사람들 사이로 후드를 뒤집어쓰고 술을 먹는 남자나 동료들과 술잔을 부딪치는 여자, 술 대신 안주만 먹는 마법사.
그리고 취객의 주머니를 노리는 로그까지.
"이걸 어쩌나. 손님, 지금은 자리가 없네요."
"사람이 많긴 하네요."
주점 여주인이 무척 미안한 듯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합석하시거나 다른 가게로 가셔야 할 것 같은데."
"음...."
여기서 파는 버섯감자스튜는 칼칼한 맛이 일품이다. 거기에 곁들여 먹는 꼬치구이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강승현은 다른 가게로 가고 싶지 않았다.
'합석할까.'
아즐 대륙에서 합석은 흔한 일이다. 안면이 없는 모험가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정보를 교환하고 즉석에서 팀을 짜기도 하니까.
"강 선생!"
그때 누군가 강승현을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야, 여기!"
남자는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안경 쓰고 동그란 눈에 턱수염을 기른 작은 아저씨였다.
"어! 김호정 씨!"
"이야, 이게 얼마 만이더라?"
강승현은 반가워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남자의 이름은 김호정. 강승현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아즐 대륙으로 끌려온 차원 이동자다.
'안 그래도 다른 차원 이동자 붙잡고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는데, 마침 잘됐다.'
강승현은 김호정의 테이블에 합석했다.
"아마 한 달은 넘었지. 두 달이었나?"
힐러가 아닌 이상, 한 마을에 오래 머무는 모험가는 무척 드물다. 김호정 역시 의뢰 때문에 꽤 먼 곳까지 나갔다 돌아온 참이었다.
"나 이번에 돈 좀 많이 벌었걸랑.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오늘 내가 쏜다!"
김호정은 이번 의뢰가 성공적으로 끝났다며 자랑했다.
"오, 얼마 버셨길래?"
"크흠흠. 강 선생 놀라지 말고 들어."
김호정은 남들에게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무려... 200만 골드라고. 대박이지?"
"와, 정말 대박이네요."
"그러니까 먹고 싶은 거 다 골라!"
김호정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나 오늘 돈 많아하하하! 여기 맥주 추가요!"
"에이 김호정 씨. 오늘 같은 날에 맥주 가지고 되겠어요?"
강승현은 맥주를 시키려는 김호정을 막았다. 그리고 메뉴판을 가리켰다.
"이런 걸 먹어봐야지."
[벨로토 산딸기 벌꿀술.]
[1,900,000골드]
벨로토 산악지대에서 채취한 산딸기와 벌꿀로 빚는 술. 아즐 대륙 모험가들이 의뢰를 대박 냈을 때 마시는 대표적인 축하주다.
"컥! 강 선생! 그건 좀... 비싸지!"
김호정은 깜짝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당연하지만 하인드 마을 주점에서 가장 비싼 메뉴다. 귀족한테는 푼돈이겠지만.
"물론 내가 오늘 대박 낸 건 맞지만, 액수가 살짝 모자라는데...."
"그럼 제가 사죠."
"엥?"
"여기 벨로토 산딸기 벌꿀술 하나 주문할게요."
"진짜 시키게?"
김호정은 놀란 눈으로 소리쳤다. 강승현은 씩 웃으며 정신 집중의 반지를 보여주었다.
"오늘 유물 하나 주웠거든요. 그것도 레어 유물."
"유물? 그 비싼 놈?"
김호정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뭐야, 강 선생 나보다 더 대박 났네? 200만 골드는 자랑 축에도 못 끼겠잖아!"
"거기에 120만 골드 플러스."
"크! 부럽다 부러워!"
김호정은 잔에 남은 맥주를 콸콸 따르며 소리쳤다.
"두고 봐! 다음엔 내가 400만 골드 벌어서 벌꿀술 두 병 쏜다! 딱 기다려!"
"아휴, 그럼 저야 좋죠."
오늘 얻은 유물이 640만 골드인 걸 알면 진짜 울겠네. 강승현은 오랜 지인의 정신력을 위해 유물 가격을 비밀로 했다.
"벌꿀술 한 병에 버섯감자스튜 하나랑 고기 꼬치구이 3인분 주세요."
"나는 토끼 뒷다리 구이 한 접시 추가!"
각자 먹고 싶은 요리를 주문하고 잠시 기다렸다.
"주문하신 요리랑 벨로토 산딸기 벌꿀술 나왔습니다."
여주인이 싱글벙글 웃으며 음식을 내려놓았다.
"이 귀한 놈을 주문하신 걸 보면 오늘 좋은 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오늘 축하주 마실 만큼은 벌었습니다."
고생은 더러웠지만, 보상은 달콤했다.
강승현은 잔에 벌꿀술을 따랐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황금빛 액체였다.
"강 선생. 스태미나 안 마셔도 돼?"
"아 그렇지."
강승현은 자리를 떠나려던 여주인에게 말했다.
"스태미나 포션도 주문할게요. 세 병 정도."
"알겠습니다."
여주인은 곧 샛노란 포션 세 병을 가져왔다. 강승현은 벌꿀술에 스태미나 포션을 섞었다.
"일명 스태미나 칵테일."
"강 선생도 참 번거롭겠어. 스태미나 스탯까지 신경 써야 하니까."
"뭐 그렇긴 하죠."
스태미나는 체력과는 별개의 스탯이다.
체력이 흔히 말하는 생명력을 뜻한다면 스태미나는 기력, 기운이다. 스태미나가 0이 된 사람은 지쳐서 자버리거나 기절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피로도. 스태미나 포션은 아즐 대륙산 피로회복제지.'
보통 스태미나 포션은 모험가들이 피로를 풀 겸 한두 병씩 사 먹거나, 술에 섞어 먹는 용도로 쓰인다. 스태미나는 쉬기만 해도 금방 회복할 수 있어서 굳이 포션을 갖고 다닐 필요가 없다.
하지만 강승현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에겐 필수품이었다.
"난 이게 없으면 스킬을 못 쓰니까."
강승현은 상태창을 열었다.
그의 상태창엔 마력 스탯이 뜨질 않았다. 대신 체력과 스태미나 스탯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다.
-아즐 대륙 사람은 누구나 마력을 갖고 있다. 귀족은 물론이고 농사짓는 평범한 농부도.
'사람마다 가진 마력의 양이 다르고, 일반적인 평민들의 마력이 바닥을 기어서 그렇지.'
하지만 강승현은 마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낮은 정도가 아니라, 몸 안에 마력이라는 게 존재하질 않았다.
'나한테 마력이 1이라도 있었다면, 교회 사제한테 거금을 주고 산 [초급 힐링] 스크롤을 쓸 수 있었을 테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이런 생각도 했다.
'혹시 내가 아즐 대륙 사람이 아니라 다른 차원에서 와서 마력이 없나?'
하지만 강승현을 뺀 다른 모든 차원 이동자들은 마력을 갖고 있었다. 눈앞의 김호정도 마찬가지였고.
"처음에 듣고 장난치는 줄 알았다니까."
"알고 보니 문제 있는 건 나였고...."
"그래도 뭐. 나보단 낫지 않나? 아무튼, 스킬 쓰는 게 불편하진 않잖아!"
김호정이 낄낄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강승현은 마력이 없는 대신, 스킬을 사용할 때 스태미나를 소모했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스태미나 스킬은 남들의 마력 스킬과 다를 게 없었다.
'오히려 스태미나 포션은 마력 포션보다 훨씬 싸서 가격 면에선 이득이긴 하지.'
스태미나가 0이 되면 움직일 수 없게 되거나, 마력을 이용하는 물건을 사용하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지만.
"뭐, 장점이 없는 건 아니죠."
마력 대신 스태미나를 쓰는 덕에 강승현은 마력을 무효화 하는 상황에서도 스킬을 쓸 수 있다.
불편한 점도 있지만, 분명 이점도 많았다. 그래서 강승현은 그에 대해선 아무 불만이 없었다.
'지금 문제는 힐을 쓸 수 없다는 점이지.'
강승현은 다른 사람을 치료해줄 때 포인트를 획득하는 힐러 컨셉의 차원 이동자다.
그래서 힐러한테 가장 중요한 스킬은 힐이지만, 정작 강승현은 힐을 얻지 못했다.
포인트를 얻는 족족 룰렛을 돌렸음에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요한 스킬은 시작할 때부터 줘야 하는 스킬 아니냐고."
"내 말이. 나는 평소엔 스킬을 쓰지도 못해!"
"기껏 스킬 스크롤을 구매했는데, 쓰지도 못 하고."
처음에는 다른 일을 해볼까 생각해봤지만, 차원 이동자가 강해지려면 무슨 일이 있어도 포인트를 모아야 했다.
'힐러 적성을 줘놓고 정작 힐은 못 쓰는 기적의 밸런스.'
그리고 강승현이 포인트를 벌 방법은 오직 하나, 남을 치료하는 것뿐이다.
'까짓거, 힐 없이 힐러짓 하면 되지.'
힐은 쓸 수 없지만, 그걸 대신할 만한 스킬은 있다. 그렇게 강승현은 야매 힐러로 사는 법을 터득했다.
비록 스킬 하나하나는 힐에 비하면 후달리지만, 조합해서 사용하면 힐 못지않은 성능을 낼 수 있었다.
"솔직히 비싼 돈 주고 힐 받을 거면 강 선생한테 싸게 치료받는 게 훨씬 낫지."
"힐은 분명 좋은 스킬인데, 쓰는 놈들이 멍청해서 그래요."
강승현이 아즐 대륙에서 야매 힐러로 살아갈 수 있는 건 힐의 허점 때문이다.
대표적인 허점, 힐만으로는 독과 질병을 치료할 수 없다. 루스 테이커만 봐도 알 수 있다. 독에 힐을 써봤자 증상만 미뤄질 뿐이고, 그걸로 치료하는 건 불가능하다.
"해독 스킬도 분명 있거든요?"
"그렇지, 그렇지. 안티 포이즌 이런 거."
"근데 힐이 최고인 줄 알고 힐만 써대는 멍청이들 덕분에 치료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니까요."
제대로 된 치료는 환자에겐 증상에 맞는 적절한 치료법을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대다수의 힐러는 대충 힐을 퍼붓고 돈을 뜯어간다.
"힐 받으면 다 낫는 줄 알고 그냥 돌아갔다가 밤새 독 퍼져서 아침에 시체로 발견되기도 하고."
강승현은 그런 불쌍한 친구들을 구해주고자 욕을 먹어가며 그들을 치료해줬다. 약간의 보수와 포인트는 그 덤.
"어쨌든 힐 쓸 줄 모르는 이상한 또라이 힐러 소리 듣긴 하지만, 재밌으니까 밀고 나가려구요."
"나나 강 선생이나 둘 다 컨셉 이상한 건 매한가지니까."
김호정은 낄낄 웃으며 자신의 잔에 벌꿀술을 가득 채웠다.
"자자, 또라이 컨셉 가진 놈들끼리 건배하자고!"
"이딴 능력으로 아즐 대륙에서 살아가는 자들을 위하여!"
두 사람은 잔을 맞부딪쳤다. 값비싼 축하주의 명성에 걸맞게 정말 훌륭한 맛이었다.
"아, 그렇지."
"응? 왜?"
술을 마시던 강승현은 김호정한테 물어보려던 말이 떠올랐다.
"김호정 씨한테 뭐 하나 물어보려고 했는데."
"뭐야, 뭔데? 중요한 거야?"
강승현은 주위를 살폈다.
이번에 새로 얻은 스킬 [투척★]에 붙어 있던 별에 관해 물을 생각이다. 차원 이동자라면 혹시 뭔가 아는 게 있지 않을까 해서.
"엿들을 귀가 많네."
술집에서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는 건 바보짓이다. 겉보기에는 자기들끼리 떠드느라 남에게 관심 없어 보이지만, 속은 모른다.
'모험가들은 정보에 민감한 족속들이니까.'
제일 좋은 건 자리를 옮기는 거지만, 강승현은 그보다 더 간편한 방법을 알고 있다.
"신의 소통 잠깐 꺼봐요."
강승현이 [신의 소통]을 해제하자,
"&$*8#...."
"...##&*!@++."
주위에서 들려오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변했다. 동시에 아즐 대륙 사람들도 강승현의 말을 이해할 수 없게 됐다.
13. 선행 좀 해볼까 1
"진짜 중요한 건가 보네."
김호정 역시 더 묻지 않고 [신의 소통]을 껐다. 이걸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을 사람은 사라졌다.
"그놈들, 이런 이야기에 관심 많잖아."
아즐 대륙 사람들은 차원 이동자의 엄청난 성장 속도를 부러워한다.
차원 이동자들 사이에서 [신의 소통]을 끄겠다는 신호는, 아즐 대륙 사람들한테 알리고 싶지 않은 정보를 전달하겠다는 뜻이다.
'대표적으로 상태창 시스템.'
이걸 알아낸다고 아즐 대륙민들이 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상태창을 훔칠 수도 없고, 따라 할 수도 없으니.
하지만 전에 상태창에 관한 이야기를 엿들은 아즐 대륙민 하나가,
'그 상태창인지 뭔가 하는 아이템을 내놔!'
라면서 차원 이동자를 공격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 엿들은 사람은 한 명뿐이라 금방 제압했지만, 앞으로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숨기는 게 낫겠다. 어차피 이 동네 사람들은 이해 못 할 소리잖아. 진짜 무슨 전설의 레어 아이템인 줄 알고 내놓으라고 하겠네.'
일개 모험가는 죽이면 그만이지만, 귀족이나 왕족 같은 권력자들이 알게 되면 어쩌겠는가. 병사를 풀어서 차원 이동자들을 귀찮게 할 것이다.
"술 마시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막 내뱉는 녀석도 있고."
차원 이동자끼리 중요한 대화를 해야 한다면 [신의 소통]을 꺼버리는 게 제일 안전하다. 서로 국적이 다르다면 좀 곤란하겠지만.
"그래서 뭔 얘기인데? 집에 갈 방법이라도 찾으셨남?"
"그런 거면 신의 소통 안 껐죠."
아즐 대륙 사람들도 스킬을 쓸 줄 알지만, 상태창 스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사람은 차원 이동자뿐이다.
"이번에 스킬을 하나 얻었는데, 좀 특이한 게 있더라구요."
같은 차원 이동자라고 해도 남의 상태창을 볼 순 없다. 자신의 상태창을 볼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다.
'상태창을 훔쳐보는 스킬이 있다면 모를까.'
김호정한테 상태창을 보여줄 순 없으니 이번에 얻은 [투척★]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던 김호정이 놀랍다는 얼굴로 말했다.
"스킬에 별이 붙어 있다고? 나는 그런 거 없는데."
"저도 이번에 처음 얻었어요."
그 대신 온갖 개고생은 다 했지만.
"성능도 일반 스킬에 비해 강하단 말이지.... 나도 혼자 레어 몬스터 잡으러 갈까?"
"업적 보상도 룰렛인 거 아시죠? 화이팅."
"아니, 룰렛으로 뽑은 거야? 와 이게 진짜 망겜이지."
김호정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안주를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그래서 뭐 들은 거 없으세요?"
"글쎄올시다. 나는 그 스킬 얻어본 적도 없는데... 아!"
곰곰이 생각하던 김호정은 뭔가 생각난 듯 소리쳤다.
"예전에 만났던 녀석이 별 어쩌구 스킬 어쩌구 이야기한 거 같아!"
모험가 일을 하다 보면 가끔 다른 차원 이동자와 파티를 맺기도 한다. 김호정은 오래 전에 만났던 차원 이동자를 떠올렸다.
"이름이 아마... 김재형 아니면 김재영 아니면 김진영, 아니 김진형...이던가? 아무튼 그런 놈이었어."
이 아저씨는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다.
김호정은 한참 생각하더니 결론을 내렸다.
"그냥 김재형이라고 하자."
"이 아저씨가 남의 이름을 막 개명해버리네."
이어진 김호정의 말에 따르면, 김재형(가명)은 강승현과 마찬가지로 ★스킬을 가진 차원 이동자다. 심지어 그것도 1개가 아니라 3개나.
"그 녀석 엄청나게 강했거든. 혼자서 다 쓸어버리더라?"
"★스킬이 강하긴 하죠."
"같은 차원 이동자인데도 수준차가 엄청 나서 뭘 먹고 그렇게 강하냐고 물어봤더니 알려주더라고."
★스킬은 일반 스킬의 강화형이라고 한다. 일반 스킬에 별이 붙는 순간 강력한 옵션이 추가된다.
"그 녀석도 이거저거 알아봤는데, 아즐 대륙 스킬에는 그런 게 없다더라."
★스킬은 차원 이동자한테만 주어지거나, 차원 이동자만큼 강해지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 같다.
아즐 대륙 사람이 듣는다면 미치고 팔짝 뛸 것이다. 안 그래도 강한 놈들이 거기서 더 강해진다고 하니까.
"어떻게 얻는지는 모른대요?"
"자기도 잘은 모르지만 맨날 빡세게 구르다 보니까 얻었다더라."
김재형은 차원 이동자 중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쪽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필사적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았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스킬이 손에 들어왔다고.
"★스킬 성능이 좋긴 한데, 그런 짓을 또 해야 한다면... 그냥 안 얻고 말지."
강승현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얻으면 좋지만, 없어도 사는 데 지장은 없다.
"그런데 의뢰 마지막 날에... 김재형이 4번째 ★스킬을 얻었어."
"개고생해야 얻는 스킬을 얻었다는 건...."
"진짜 끔찍했지."
김호정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지옥 같았다며 회상했다.
그날 같이 간 나머지 동료들은 다 죽고, 김호정과 김재형 단둘만 살아남았다. 차원 이동자 정도는 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지독한 싸움이었으니.
"아마 그 녀석, 내가 죽은 줄 알았을 거야. 난 바위에 깔렸거든."
혼자 살아남았다고 생각한 김재형은 죽을힘을 다해 몬스터를 쓰러트렸다. 바위에 깔려 있어서 잘 보이진 않지만, 몬스터가 죽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으니까.
"근데 그 녀석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더라고? ★스킬을 얻었다면서."
거기까지는 별로 놀랄 게 없었지만, 문제는 그다음.
김재형은 이렇게 말했다.
"이거라면, 어쩌면... 돌아갈 방법을...."
김호정이 기억하는 건 거기까지였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땐 김재형은 어딘가로 사라진 상태였다. 그 뒤로 다시 만난 적은 없었다.
"돌아갈 방법이라고? 지구로?"
강승현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렇다니까. 뒷말은 못 들었는데 확실해."
분명 김재형은 지구로 돌아갈 방법이나, 그에 관한 정보를 얻은 게 틀림없었다.
"★스킬을 4개 모으면 집으로 돌아갈 힌트를 알 수 있는 건가."
"아마 그럴 거 같아. 그전에는 그런 소리 안 했거든."
그 뒤 김호정도 ★스킬을 얻어보겠다고 일부러 죽을 고생을 했다. 하지만 고생만 뒈지게 하고 ★스킬은 구경도 못 해봤다고.
"나도 한번 얻어보려 했는데 안 나오더라고. 다른 애들한테 물어봐도 그딴 게 있냐는 반응이었고."
김호정은 자기가 김재형한테 속았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눈으로 직접 본 것도 아니고, 근거라곤 김재형의 말뿐이었으니까.
"그때는 죽기 직전이라 헛소릴 들었다고 생각했어.... 근데 오늘 강 선생이 그러잖아! 별이 붙은 스킬!"
그 뒤로 잊고 있었지만, 강승현의 말을 듣다 보니 떠올랐다고 한다.
별이 붙은 스킬에 대해서.
"혹시 그거 4개 모으면 집에 가는 포탈이 생기는 거 아냐?"
"포탈?"
"그래서 김재형이 안 보이는 거지. 혼자 집에 갔나 보다!"
"우릴 끌고 온 놈이 그렇게 친절하게 보내줄 놈이었음 미리 설명을 해줬겠죠."
★스킬을 모은다고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갈 힌트는 얻을 수 있겠지.
"그래도 강 선생이 얻은 걸 보면 희망이 있잖아?"
"솔직히 여기 와서 고생 안 한 사람이 어딨어요. 개처럼 구르고 죽을 뻔했는데.... 아무래도 빡세게 구른다고 얻을 수 있는 스킬은 아닌 거 같네요."
★스킬의 습득 조건은 뭔가 따로 있는 것 같다. 그게 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나 같은 어중이떠중이들은 집에 못 간다는 거지~! 아! 라면에 소주 먹고 싶다!"
김호정은 서럽다는 듯 술잔에 벌꿀술을 들이부었다. 이러다 혼자 다 마실 거 같았다. 강승현은 김호정의 술잔에 스태미나 포션을 부었다.
"라면은 모르겠고, 아즐 대륙 중앙으로 가면 한국 요리를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뭐? 아니 왜? 거기 코리아타운이라도 있어?"
"한국 출신의 차원 이동자 하나가 거기에 식당을 차렸다고 했으니까... 10년쯤 지나면 코리아타운이 생기겠죠."
차원 이동자는 각각 자신만의 스킬 컨셉을 갖고 있다. 아마 그 사람은 요리사 컨셉이었을 것이다.
"그럼 한번 가봐야겠네!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우리가 한국 가는 것보다는 빠르겠죠."
"그럼 언제 한번 날 잡고 가볼까? 한국 요리 먹으러!"
한국에 돌아갈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이것도 어디인가. 사람은 이런 작은 희망이라도 있어야 팍팍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전 이걸로 만족하렵니다."
강승현은 버섯감자스튜를 한 입 떠먹었다. 몇 번을 먹어도 맛이 일품이다.
-"오늘 잘 먹었수다. 나중에 내가 400만 벌면 바로 달려와! 벌꿀술 2병 쏜다!"
두 사람은 술자리를 마치고 가게를 나왔다.
김호정은 술에 잔뜩 취해 빈 벌꿀술 병을 챙겼다. 기념품으로 보관할 거라면서.
"나는 이제 여관방으로 돌아갈 건데.... 강 선생은?"
"포션 좀 사려구요."
"어어! 그럼 나 먼저 갈게! 다음에 또 보자고!"
"먼저 들어가세요."
강승현은 김호정과 헤어져 포션 가게로 향했다. 재료를 구해다 직접 만드는 게 싸지만, 편하기로는 사서 쓰는 게 제일 편하다.
강승현은 포션용 빈 병과 재료, 포션 완제품을 구매했다.
'내일부터는 포인트 모으기에 집중할까.'
여관방으로 돌아온 강승현은 자기 전 생각을 정리했다. 오늘 김호정과의 대화에서 ★스킬에 대한 간단한 정보를 얻었다.
'★스킬를 4개 모으면... 뭔가 변화가 생긴다는 거 같은데.'
구체적인 건 모르지만, 집으로 돌아갈 힌트와 관련이 있다. 이렇게 됐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스킬을 얻어야 했다.
'오늘 진짜 죽는 줄 알았다고.... 스태미나 딸려서.'
지금까진 룰렛에서 나오는 스탯과 스탯 증가권을 이용해서 짬짬이 올렸지만, 이제 그걸로는 안될 것 같다. 이런 스탯으론 ★스킬을 얻기는커녕, 스킬 얻는 방법도 알아낼 수 없다.
'좋은 스킬을 얻어도 스태미나가 딸려서 못 쓰면 안 되겠지.'
마력은 바닥나도 스킬만 쓸 수 없을 뿐이지 아무 일 없지만, 스태미나는 바닥나는 순간 기절한다.
강승현은 사람 고치다 기절하는 힐러가 되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다음에 ★스킬이 나온다면 공격 스킬 말고 힐러용으로 쓸 만한 거면 좋겠는데.'
엄청난 성능으로 힐링충들을 압살해버릴 수 있도록.
'여유도 생겼으니, 내일은 포인트 모을 겸 선행 좀 해볼까.'
-강승현은 평소엔 환자 겸 돈주머니를 찾기 위해 모험가 조합이나 교회 근처를 어슬렁거린다.
'힐러한테 바가지 치료를 받는 멍청이가 하나 정도는 꼭 있으니까.'
문제는 이 방식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일반적인 모험가들은 야매 힐러의 말을 안 믿으니까.
그래서 강승현은 돈을 포기하는 대신, 빠른 시간에 포인트를 벌어들이는 방법을 연구했다.
"오늘은 여기가 좋겠네."
강승현은 하인드 마을 시장 구석 자리에 표지판을 세웠다.
<상처 싸게 치료해 드립니다>
<돈 말고 다른 것도 받습니다>
자리를 깔고 앉았지만, 모험가들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뭐야, 힐러 배지도 없네. 그냥 가자."
"힐도 쓸 줄 모르는 놈이 무슨 치료를 하겠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강승현은 신경도 쓰지 않고 무시했다. 애초에 저런 건 고객이 아니다.
"저기... 실례합니다."
그때 어떤 여자 하나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무기도 없고, 방어구도 없는 데다 마력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모험가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사람.'
이 여자는 하인드 마을 근처에 사는 평민이었다.
"제가 팔을 다쳐서 그러는데... 정말 돈 말고 다른 것도 받으시나요?"
"그럼요. 음식도 받고, 물건도 받습니다."
그리고 강승현이 기다리고 있던 진짜 고객이다.
14. 선행 좀 해볼까 2
모험가는 치료법을 말해줘도 거의 듣지 않는다. 포션 몇 개만 쓰면 낫는 가벼운 상처인데도 불구하고.
-힐 쓸 줄 모르는 놈의 말은 믿을 수 없다.
라면서 가버리곤 했으니까.
'하지만 평민들은 좀 다르지.'
평민들도 힐을 신봉하는 건 마찬가지였으나 이들은 돈이 없다.
모험가들이야 돈 좀 모으면 힐러를 찾아갈 수는 있지만, 평민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도 바쁘다.
-돈도 없는데 힐은 무슨.
-그냥 놔두면 낫겠지.
-포션이라도 사 마셔.
그러다 보니 평민들은 가벼운 상처가 악화되어서 죽는 일이 많았다. 힐러는 푼돈은 받아주지 않으니, 그들은 푼돈으로 몸을 고칠 방법을 찾아다녔다.
그중 하나가 포션이었다. 포션은 힐에 비하면 훨씬 싸고, 쉽게 구할 수 있었으니까.
-포션을 마시면 상처가 빨리 낫는다.
-힐에 비하면 보잘것없지만 안 쓰는 것보다는 낫다.
모험가들은 약제사를 힐러와 비교해 낮잡아보지만, 평민들에겐 없어선 안 될 사람들이었다.
약제사들은 재료만 가져다주면 포션을 공짜로 만들어주거나, 푼돈이나 물건을 받고 싸구려 포션을 교환해줬으니까.
'모험가가 눈이 높아서 가리는 게 많다면, 평민은 가릴 처지가 못 되거든.'
강승현이 힐을 쓸 줄 알건 모르건, 평민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상대가 힐러건 약제사건 구분하지 않고, 싼값에 치료를 받을 수 있다면 누구든 환영했다.
'어떻게 보면 모험가보다 더 똑똑한 거 아닐까?'
강승현도 틈틈이 물물교환 진료소를 운영했다. 다른 약제사처럼 음식이나 포션 재료 같은 걸 받으면서.
'겸사겸사 포인트도 벌고.'
힐러가 돈을 안 받고 치료해준다고 하면 옆 마을에서도 찾아온다. 덕분에 날 잡고 치료하면 포인트는 금방 쌓이곤 했다.
"이걸로 될까요?"
여자가 내민 건 감자가 담긴 바구니였다.
"그럼요."
강승현은 웃는 얼굴로 감자를 받았다. 오늘 저녁 반찬으로 먹으면 딱이다.
"일단 상처 좀 볼까요. 어느 쪽 팔인가요?"
"여기...."
여자가 왼쪽 팔을 걷어 올렸다. 팔에 낡고 오래된 천이 감겨 있었다. 피가 묻어 있는 걸 보아 급하게 응급처치한 모양이다.
스르륵.
천을 풀자 상처가 드러났다. 날카로운 물건에 베인 듯한 상처였다. 그냥 봤을 땐 농기구에 베인 상처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여자가 초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에 아는 사람이 일하다가 호미에 손가락을 살짝 베였는데, 그대로 큰 병이 나서 죽었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파상풍을 말하는 것 같다. 예방 주사를 맞으면 괜찮지만, 그게 불가능한 이곳에서는 정말 무시무시한 병이다.
"그래서 너무 무서웠거든요.... 걱정하던 참에 마침 힐러님께서 진료소를 여셨다는 얘기를 듣고 왔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즐 대륙에 예방 주사 같은 건 없지만, 약재를 사용하면 파상풍 치료제를 만들 수 있다. 재료 모으기가 좀 까다롭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일단 상처 좀 자세히 볼까.'
강승현의 눈이 푸르게 빛났다.
[관찰의 눈]
관찰의 눈으로 살펴보자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호미에 팔을 긁혀서 생긴 가벼운 찰과상.]
[상처가 생긴 건 이틀 정도.]
[오래된 붕대를 계속 사용한다면 감염될 위험이 있다.]
그 외에는 나타나는 정보는 없었다. [감염] 키워드가 따로 뜨질 않는 걸 보면 파상풍에 걸린 건 아니었다. 말 그대로 가벼운 찰과상 환자.
"다행히 그렇게 심각한 상처는 아니네요."
"그렇군요. 다행이다...."
여자는 안도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일단 소독부터 하고...."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포션 하나를 꺼냈다. 피부 상처 재생을 돕는 약이다.
"하루에 두 번씩 사흘 동안 발라주면 금방 나을 겁니다."
"명심할게요."
모험가는 치료가 끝나도 상처가 눈에 띄게 좋아지지 않으면 사람을 사기꾼 취급하며 귀찮게 한다.
'다 낫고 나면 "아이고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러면서 엎드리긴 하지만.'
그런 모험가들과 달리, 평민들은 힐을 쓰지 않으면 치유에 시간이 걸린다는 걸 이해해준다. 그래서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시키는 대로 잘 따르는 편이었다.
"이 포션은 신기하게 생겼네요."
여자는 신기하다는 눈으로 포션을 바라보았다.
"이건 반고형 포션이에요."
흔히 보이는 액체형 포션이 아니라 반고형 포션. 쉽게 말해서 연고였다.
"액체형 포션은 마시자마자 효과가 나타나지만, 지속 시간이 짧죠."
그래서 전투에는 유용하지만 치료할 때는 미묘하다.
"반대로 반고형 포션은 효과는 느리지만 그만큼 지속 시간이 길구요."
"아하, 그렇군요."
"전투할 때 쓸 일은 거의 없지만 치료할 때는 이쪽이 좋아요."
아즐 대륙의 포션 산업은 주로 모험가 위주로 돌아간다. 그래서 액체형 포션은 인기가 많지만, 반고형 포션은 고인물 약제사가 아닌 이상 거의 만들지 않는다.
"만드는 법은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조은나무 줄기와 노란 달팽이 기름, 덴트롤 이끼를 2:1:1의 비율로 조합해서 재생 포션에 섞어서 끓이면 되거든요."
전부 하인드 마을 근처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이다.
"그리고 하루 정도 두고 식히면 이렇게 변하죠."
재료와 재생 포션을 팔팔 끓이면 걸쭉해진다. 그걸 시원한 곳에 놔두면 완성.
"하루에 두 번 바르는 거랬죠? 아무 때나 바르면 되나요?"
"네. 아침저녁으로. 편하게 밥 먹고 나서 바르세요."
강승현은 피부 재생 연고를 상처 부위에 발라주었다. 당장은 변화가 없지만, 자고 일어나면 눈에 띄게 좋아질 것이다.
"그러면 흉터도 안 남고 싹 나아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치료는 이걸로 끝났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께 아이베르 님의 은총이 있기를."
여자는 무척 고마워하며 낡은 붕대로 팔을 감으려 했다.
"아, 잠시만요."
상처 자체는 별거 아니지만 그건 2차 감염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다. 계속 낡은 붕대를 사용했다간 상처가 다 낫기 전에 감염될 것이다.
"이건 폐기하시고 새 붕대를 사용하세요."
"그러고 싶지만 지금은 남는 천이 없어서...."
평민들은 쓰고 남은 자투리 천을 붕대로 만들어 쓴다. 일반 붕대는 비싸니까. 그래서 붕대를 재활용하거나, 낡고 오래됐어도 그냥 쓰는 경우도 많았다.
'아예 안 쓰는 것보단 낫지만, 그렇다고 아주 좋은 것도 아니지.'
외부 감염을 막으려다 도리어 오염된 붕대 때문에 감염되기도 하니까.
그러니 가장 좋은 건 새 붕대를 쓰는 것이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올게요."
"네? 네...."
강승현은 여자를 두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금방 돌아올 테니 기다려 달라면서.
'여분용 붕대 만드는 걸 깜빡했네!'
모험가들은 새 붕대를 사서 다니지만, 평민들은 집에서 직접 만든 수제 붕대를 사용했다. 포션도 싸구려만 사 먹는데, 붕대라고 좋은 걸 살 리가 없지 않은가.
'모험가 치료할 땐 붕대 신경 쓸 필요가 없지만, 평민 치료할 땐 붕대까지 신경 써야지....'
마을 잡화점에서 사는 게 가장 빠르지만, 한두 푼도 아니고 일일이 돈 주고 사긴 그렇다.
"어서 오세요. 뭘로 드릴까요?"
"잡초 열 다발 주세요."
강승현이 향한 곳은 잡화점이 아니라 시장의 노점상이었다. 가게 주인은 앞에 쌓아둔 잡초 열 다발을 내밀었다.
"하나당 5골드니까... 50골드입니다."
"여기요."
"뭐하러 이렇게 많이 사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또 오십쇼."
어딜 가나 보이는 잡초를 뭐하러 돈 주고 사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잡초는 쓸모가 많다.
먼 길 떠날 때 동물 먹이로 줄 수도 있고,
잘 말려서 불쏘시개로 써도 좋고,
연금술 재료나 포션 재료, 요리 재료나 청소할 때도 아주 좋다.
'그리고 붕대도 만들 수 있지.'
강승현은 잡초로 붕대를 만들 수 있다. 정확하게는 천을 만드는 스킬이지만.
[천 만들기]
처음에 룰렛에서 이 스킬이 나왔을 땐 꽝인 줄 알았다. 이런 걸 힐러가 어디에 쓰냐고 생각했는데, 막상 써보니 유용했다.
'잡초로 식물성 섬유를 뽑아낼 수 있을 줄이야.'
[천 만들기] 스킬은 비단이나 울 같은 동물성 섬유뿐만 아니라, 삼베나 모시 같은 식물성 섬유도 만들 수 있었다. 잡초만 있어도 천 하나를 뽑아내는 기적의 스킬.
그냥 힐러라면 몰라도 야매 힐러에겐 최고의 스킬이다. 길바닥에서도 붕대를 뽑아 쓸 수 있으니까.
'물론 재료가 싸구려면 나오는 천도 싸구려이긴 한데... 낡은 붕대보단 낫지!'
[천 만들기]
잡초를 한 움큼 쥐고 스킬을 사용하자 풀잎이 천으로 변했다. 물레나 베틀로 짠 천에 비하면 형편없지만, 붕대로 쓰기엔 충분했다.
'이런 걸 피륙이라고 부른다고 했나.'
사각, 사각.
기다란 천을 적당한 길이로 잘라 둘둘 말자 그럴싸한 붕대가 됐다. 강승현은 수제 붕대를 가지고 자리로 돌아왔다.
"자, 이걸 쓰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여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설마 새 붕대를 가져올 거라곤 생각도 못 한 모양이다. 팔에 새 붕대를 감아주자 치료가 끝났다.
[+3]
포인트도 문제없이 들어왔다. 여자는 강승현에게 감사인사를 하며 자리를 떠났다.
"정말 돈 안 받고 고쳐주십니까?"
"선생님! 상처 좀 봐주십쇼!"
첫 번째 손님을 보내고 뒷정리를 하는 사이 두 번째, 세 번째 손님이 찾아왔다.
"그럼요. 어서 앉으세요."
하인드 마을 사람들은 직업 특성상 주로 베인 상처나 긁힌 상처가 많았다. 강승현도 그 점을 계산하고 상처 회복용 약을 많이 만들었다.
'잔뜩 준비하길 잘했네.'
미리 준비해둔 약과 붕대 덕분에 문제없이 치료할 수 있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복 받으실 겁니다!"
이렇게 돌아간 환자들이 입소문을 내면 다음 손님과 다음 손님이 계속해서 찾아오는 법이다. 강승현은 쉴 틈 없이 환자를 맞이했다.
'진짜 포인트 벌기 편하다.'
강승현은 상태창을 확인했다.
[누적 포인트 : 72 포인트]
강승현은 쌓여가는 포인트를 바라보았다.
야매 힐러 생활은 무척 만족스러웠다. 몬스터랑 치고받고 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마을에서 편하게 남 치료해주고 포인트를 버는 게 훨씬 좋았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손님들만 왔으면 좋겠다."
쉽고 편하고 즐겁고 포인트도 벌고. 오늘 강승현의 직업 만족도는 최고치를 찍고 있었다.
"야, 포션 몇 개 줘봐."
진상 손님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15. 명예를 걸고 맹세한다
"이런 구질구질한 천막을 가게랍시고 운영하다니. 어이가 없구만."
거만한 남자는 혀를 차며 의자에 앉았다.
"어떤 포션을 찾으십니까."
"네가 만든 거 아무거나 줘보라고."
어딜 가나 진상 손님은 존재한다. 특히 아즐 대륙처럼 지독한 계급사회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귀족 새끼네.'
눈앞의 남자는 귀족 집안 자제였다. 평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옷차림만 봐도 알 수 있다.
"지금 가진 건 이런 것밖에 없습니다."
강승현은 피부 재생 연고를 내밀었다.
"이 녀석이 만든 게 맞군. 이런 시시한 일은 너 혼자 해도 될 것을."
"죄송합니다. 도련님. 어르신의 명령이라."
남자의 곁에 있던 병사가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혀를 차며 거만하게 말했다.
"영광으로 생각해라. 구질구질한 약쟁아."
뭘 영광으로 생각하라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말은 들어보기로 했다.
"나는 리하트 이아레프다. 너 같은 약쟁이는 평생 말도 붙일 수 없는 몸이지."
"이아레프?"
이아레프 가문. 이 근방의 유명한 가문 중 하나다.
리하트는 이아레프 가문의 수장, 허스 이아레프의 셋째 아들이다.
"아~그런 위대하신 분이 저희 가게엔 어쩐 일로...."
그런 가문 사람이 여기에 찾아올 이유는 없다. 귀족은 물론이고 모험가조차 눈길 하나 안 주는 천막 노점상이니까.
"내가 오고 싶어서 온 줄 아냐? 주제도 모르는 건방진 녀석!"
'할 말 있음 빨리 좀 해라.'
진료소를 찾은 손님들은 귀족 나으리 때문에 차마 다가오질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평민이 귀족 주변을 어슬렁거렸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니까.
'갑질로 모자라 장사 방해까지. 정말 거를 타선이 없는 진상 손놈이군.'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사람을 이렇게 귀찮게 하는 건가.
"받아라."
리하트는 다짜고짜 자루 하나를 던졌다.
"이건 뭡니까?"
"그것도 모르는 거냐, 약쟁이 놈!"
"이건 약재입니다."
보다 못한 리하트의 병사가 입을 열었다.
"테헤스 치료제를 만들기 위한 재료지요."
"테헤스 치료제라면, 서부 오염지대에서 걸리는 병이군요."
"그렇습니다."
오염지대는 여러 이유로 일반적인 생물이 살 수 없게 된 지역을 말한다. 아즐 대륙의 각 지역에 하나씩 존재하며, 오염지대의 확산을 막기 위한 특수 부대가 존재한다.
허스 이아레프는 서부 오염지대의 책임자인 모양이다.
"서부의 오염지대, 테헤스 지역은 땅이 썩어들어가며 독소가 뿜어져 나오는 아주 심각한 오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무척 아름다운 지역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오염된 몬스터들이나 어슬렁거리는 생지옥으로 변했다.
평범한 인간이 아무 준비 없이 테헤스로 들어가면 병에 걸려 죽거나, 오염된 몬스터 꼴이 될 것이다.
"어르신께서는 오염이 확산되는 걸 막기 위해 병사들과 함께 오염된 몬스터를 처단하고 계십니다만."
아무래도 그 과정에서 몸이 오염된 모양이다. 보통 테헤스 병이라고 부른다.
오염에 너무 오래 노출되면 가망이 없지만, 가벼운 오염이라면 힐과 치료제로 중화할 수 있다.
"부하를 구하려다 오염에 노출되는 바람에...."
"즉, 이아레프 가문에서 저한테 포션 제작 의뢰를 맡기겠다는 소립니까?"
"그렇습니다"
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수는 섭섭하지 않게 주겠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이런 노점상에 맡길 일은 아니라고 보는데."
하인드 마을에 번듯한 약제사가 없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저택에서 일하는 하인 하나가 여기서 포션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아까 치료한 환자 중에 이아레프 가문의 하인이 있던 모양이다.
"오염 중화를 위해선 액체형 포션이 아니라 반고형 포션이 필요하지요."
"오염 치료는 오래 걸리니까 연고가 어울리죠."
이 마을에 약제사가 없는 건 아니지만 반고형 포션을 만들 줄 아는 놈은 없다. 그래서 노점상에 의뢰를 맡기려는 모양이다.
"어르신께선 정식 의뢰를 맡기기 전에 실력을 확인하고 싶다 하셨습니다."
자루에는 1회용 오염 중화 포션을 만들 수 있는 재료가 담겨 있었다.
"지금 쓰는 중화제는 조금 먼 곳에서 만들고 있습니다. 어르신께선 가까이 사는 약제사가 만들어주길 원하십니다."
만약 만든 포션의 성능이 좋다면 정식으로 포션 제작 의뢰를 맡기겠다고.
"그렇습니까."
오염 중화제.
만들기 까다롭긴 해도 못 만들 정도는 아니다. 심지어 재료까지 저쪽이 다 구해줬고.
'그래서 병사 하나만 보낸 게 아니라 아들을 보내셨군.'
그냥 약 하나 지어오는 거라면 병사나 하인을 보내면 된다. 하지만 정식 의뢰를 맡기는 거라면 가주가 직접 방문하는 게 맞다.
'모험가 조합 의뢰도 어지간하면 당사자가 직접 찾아오니까.'
지금 이아레프 가문은 가주가 직접 방문할 상황이 아니었다. 몸이 오염되었다면 움직이기 어려울 테니까.
'대신 이아레프 가문의 도련님을 보냈지.'
그만큼 중요한 일이고 기대가 크다는 소리다.
"운 좋은 녀석이군. 아버님 눈에 잘 들면 이런 노점상이 아니라 훌륭한 가게 하나를 차려 주실 거다."
리하트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이아레프 가문에 약을 지어주는 놈이 길바닥에서 만든다고 하면 가문의 수치니까."
그런 게 수치라면 길바닥 노점상한테 의뢰를 맡기는 거부터 수치 아닌가.
"너 같은 놈이 평생 갚아도 모자랄 은혜를 받게 된다는 소리지. 정말 운 좋은 약쟁이놈이군."
실제로 이아레프 가문은 돈도 많고, 오염지대 수비로 인해 대중에게 존경받는 가문이다.
'이런 사람들과 연을 맺는다면 앞으로 살기 편해지겠지.'
귀족의 후원을 받는 모험가는 왕족이 아니고서야 무서울 게 없는 법이다.
"이럴 시간에 약 10병은 만들겠네. 빨리 시작 안 하고 뭐 해?"
리하트가 하도 재촉하길래 강승현은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뭐?"
"예?"
병사도 리하트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지금 뭐라고 했냐?"
"말씀은 감사하지만 제가 맡을 의뢰가 아닙니다."
그런 전문 약제사한테 맡기시지요.
강승현이 이렇게 말하자 리하트는 벌컥 화를 냈다.
"주제 파악은 잘하고 있네. 네 말대로 너 같은 길거리 약쟁이가 맡을 일이 아냐!"
"...."
"단지 아버님은 네게 기회를 주시겠다고 했을 뿐이지. 널 당장 고른다는 이야기는 한 적 없다, 이 건방진 놈아!"
그러니까 되건 안 되건 따지지 말고 약이나 만들라는 소리다.
하지만 강승현은 리하트의 말을 대충 들으며 말했다.
"애초에 사람을 잘못 보셨습니다. 저는 약제사가 아니라 힐러거든요?"
실제로 강승현은 약제사라는 비아냥을 많이 듣곤 했다. 힐러라고 사칭하면서 약만 써댄다고.
하지만 강승현은 약제사가 아니고, 무엇보다 약제사는 남들이 무시할 직업이 아니다.
"뭐? 네가 힐러라고? 어이가 없구만."
리하트는 코웃음을 치며 손을 펼쳤다.
"치유의 빛!"
리하트의 손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 남자는 힐을 쓸 수 있었다.
"리하트 도련님은 어르신의 오염 치료를 담당하고 계십니다."
병사가 슬그머니 알려주었다.
귀족 중에서도 힐러의 재능을 타고난 놈들이 있긴 했다. 굳이 힐러 짓을 하지 않아도 돈이 많으니 안 하는 것뿐이지만.
"저 하찮은 것들한테 약 좀 팔아보니까 네가 무슨 힐러라도 된 줄 알고 착각하는데."
리하트는 거만한 얼굴로 신성력을 흩뿌리며 말했다.
"진짜 힐러는 나같은 사람을 말하는 거다. 힐도 못 쓰는 놈이 아니라!"
"아무튼, 저는 의뢰를 맡을 생각이 없으니 돌아가시죠."
리하트가 재수 없어서 거절하는 것도 이유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이아레프 가문의 의뢰를 승낙하면 그쪽 일만 해야 하니까.'
가주가 쓸 약부터 시작해서 병사들이 쓸 치료제까지. 그러면 돈은 넉넉하게 벌 수 있겠지만, 포인트를 벌기 힘들어진다.
'내가 약제사였다면 포션을 만들기만 해도 포인트가 쌓였겠지.'
단지 약만 만드는 거로는 상대를 치료했다고 할 수 없다. 힐러로서 포인트를 벌기 위해선 환자와 마주보고 직접적인 치료를 해야 한다.
"지금 이아레프 가문의 명령을 무시하겠다는 거냐?"
"힐러한테 약을 만들어달라는 건 마법사한테 약을 만들어 달라는 것과 다를 게 없죠."
"힐도 못 쓰는 놈이 무슨...."
"서, 선생님!"
리하트가 말하려는 순간, 뒤에서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 선생님!"
그는 하인드 마을 사람 중 하나인 월이다. 월은 동생을 등에 업고 달려왔다.
"뭔 일 있으세요?"
"제, 동생 놈이 손가락을 다쳤습니다! 어떻게든... 해주십쇼!"
월은 업고 온 동생을 조심스럽게 내려두었다. 동생은 손을 천으로 감싸고 있었다. 물어볼 것도 없는 부상이다.
"손가락이 잘렸군요."
"아까 손이 미끄러졌는지, 이 멍청한 놈이...."
드디어 올 것이 왔다. 그냥 약 좀 바르면 낫는 상처와 차원이 다른 부상. 그럼에도 자주 벌어지는 일.
그는 손가락 절단 환자였다.
사실 손가락 절단은 절단 상처 중에는 가장 무난한 편이다.
'목이나 팔다리보단 낫지.'
힐을 사용해 절단된 신체를 붙일 때도 손가락 치료는 무척 쉽고 실패하는 일도 적었다.
"웃겨서 못 봐주겠군."
리하트가 월을 비웃으며 말했다.
"이봐, 거기 평민놈. 이놈은 힐러가 아냐. 포션이나 팔아 재끼는 약쟁이라고."
"리, 리하트 님...?"
"약쟁이가 병이나 독을 고쳐줄 수 있어도 잘린 손가락은 어찌 못 해. 그런 것도 모르는 거냐?"
모험가들은 손가락 한두 개 잘린다 해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평민들은 아니었다. 절단 상처는 포션으로는 절대 치료할 수 없었다. 오직 힐을 사용해야만 고칠 수 있다.
'그러니 힐을 받을 돈이 없는 평민들에겐 죽음과 다를 게 없지. 다친 몸으론 일할 수 없으니 결국 굶어 죽을 테니까.'
약제사들이 아무리 뛰어난 포션 제조 능력을 갖춰도 힐러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이유다. 모험가는 질병보다 절단상으로 죽을 확률이 높으니까.
"잘린 상처에 포션 좀 붓는다고 붙어? 이런 건 나 같은 힐러만 고칠 수 있는 거다."
"그럼 리하트 도련님께서 붙여주시지요. 힐링이 뛰어나시던데."
"내가 뭐하러? 이 하찮은 놈이 내게 돈을 지불할 능력이 있나?"
리하트는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 돈은 핑계다. 이자가 거금을 낸다 해도 다른 이유로 거절할 것이다. 귀족 힐러는 하찮은 몸에 손대기 싫다는 이유로 평민을 돕지 않는다.
"뭐, 네놈이 사정사정한다면야. 오염 중화 포션을 제작하겠다면 특별히 치료해주지."
"아 그러세요?"
의외의 대답을 들은 강승현은 그 순간 깨달았다.
'이 새끼, 내가 만든 포션을 꼭 가져가야 하나 보네?'
리하트는 자신이 이 일을 거절하면 엄청 곤란해질 것이라고. 귀족놈이 평민을 치료하겠다고 말하는 걸 보면 확실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저렇게 나올 리가 없지.'
혹시 자신을 설득하지 못하면 아버님한테 두들겨 맞기라도 하는 건가.
'그럼 무조건 거절해야지.'
문제는 리하트가 뱉은 말 때문에 월이 강승현을 간절한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강승현이 고개만 끄덕이면 동생의 잘린 손가락을 붙일 수 있을 테니까.
'리하트도 그걸 노린 거겠지.'
물론, 강승현은 리하트의 의도에 속아줄 생각이 없었다.
"아뇨 그럴 필요 없습니다."
"뭐? 뭐라고?"
"제가 붙일 수 있으니까요."
처음부터 힐러의 도움 같은 건 필요 없었다.
얼굴이 벌게진 리하트가 강승현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
"약쟁이 놈이 무슨 수로 잘린 상처를 붙이겠다고!"
"힐러라니까요."
"헛소리 말고 빨리 약이나 만들어! 그럼 내가 자비를 베풀어 저 평민 놈을 고쳐줄 테니까!"
"만약 제가 붙인다면요?"
"어이가 없구만. 만약 네가, 진짜로 저 평민 놈의 손가락을 붙인다면."
리하트는 걸고 있던 목걸이를 빼냈다.
"이 행운의 목걸이를 주마. 너희 같은 약쟁이들이 환장하는 거지?"
행운 수치는 추가 효과를 발동할 확률을 높여준다. 약제사의 경우 더 좋고 희귀한 성능의 포션을 만들 수 있게 된다.
리하트 말대로 약제사라면 탐낼 만하다.
"아까도 말했잖아요. 저는 힐러라니까요? 약제사한테 좋은 걸 줘봤자 필요 없는데."
사실 줘도 상관없다. 어디 가게나 모험가한테 팔면 되니까.
"그럼 돈을 원하는 만큼 주마."
"돈은 됐고."
강승현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 녀석이 가장 싫어할 만한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하인드 마을에서 3일 동안 천막 치고 평민들한테 무료봉사 하시죠. 힐러로서."
"뭐?"
"남의 도움 안 받고 본인이 직접."
리하트의 얼굴이 구겨졌다.
거만한 귀족들은 평민과 한 공간에 있는 것도 싫어한다. 그런데 진료소를 차리고 평민들을 치료한다? 리하트 입장에선 3일간 돼지우리에서 돼지를 돌보라는 말로 들렸을 것이다.
"싫으면 관두시고. 참고로 저는 손해 볼 거 없습니다."
"이런 건방진 자식.... 뭐, 좋아. 네가 잘린 손가락을 붙여낸다면, 평민 놈들한테 치료는 물론이고 식사도 대접하지."
리하트가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죽었다 깨어나도 그럴 리는 없겠지만."
강승현은 그 말을 듣더니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약속하신 겁니다?"
16. 가장 중요한 건 신속함이다
"가문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마."
"알겠습니다."
가문의 명예를 걸었으니 제아무리 귀족 나으리라도 발뺌할 수 없다.
"리하트 님께서 가문의 명예를 거신다니, 저도 약속하겠습니다."
만약 실패할 경우 오염 중화제를 만들겠다고.
"거기에 하나 더. 다시는 힐러랍시고 설쳐대지 말도록."
리하트는 강승현이 힐러 일을 하고 다니는 게 어지간히 거슬린 모양이다.
'나도 조건을 추가했으니 따질 필요는 없지.'
강승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리하트는 거만한 얼굴로 환자를 가리켰다.
"괜히 시간 끌 생각 마라. 저 평민 놈은 얼마 못 버틸 테니까."
'꼴에 힐러는 힐러라는 건가.'
절단 상처의 문제점은, 아무리 뛰어난 힐러라도 때를 놓치면 어찌해볼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신체가 괴사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힐러가 아니라 네크로맨서의 영역으로 넘어가니까.
'그래도 아직은 힐러가 손댈 수 있는 영역이지.'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수술용 장갑을 꺼냈다. 라텍스 장갑을 대신해서 만든 얇고 투명한 마력 장갑이다.
"손가락이 완전히 잘려나갔나요?"
"어찌어찌 붙어는 있었습니다."
완전 절단은 아닌 모양이다. 생각해 보니 잘린 손가락을 따로 들고 오진 않았다.
'그럼 조각이 많이 남아 있겠군.'
절단 부위는 많으면 많을수록 손가락을 살릴 가능성이 커진다. 강승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월한테 말했다.
"일단 환자를 안쪽으로 옮겨주세요."
"네, 네!"
월은 동생을 천막 안으로 옮겼다. 동생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아프냐고 물어볼 필요는 없겠네.'
강승현은 환자를 살피며 장갑을 착용했다.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디 한번 보자고. 힐도 못 쓰는 놈이 무슨 재주를 부릴지 궁금하니까."
뒤따라온 리하트가 낄낄거리며 팔짱을 꼈다.
강승현은 리하트를 무시하고 환자의 상태를 살폈다.
"의식은 없네요. 없는 게 낫지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찢어져서 너덜거리는 손가락이었다. 운 좋게 뼈가 잘리지 않았을 뿐, 정말 끔찍한 상처였다.
"으...."
월이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일반인은 보기 힘든 상처이긴 했다.
"월 씨는 밖에 나가 계세요."
"네? 하지만...."
"마음은 알겠지만, 밖에서 기다려주세요."
리하트 하나만으로도 귀찮은데 보호자까지.
강승현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저한테 맡겨주세요. 동생분은 제가 반드시 고쳐내겠습니다."
도와줄 것도 아닌데 보호자가 옆에 있을 필요가 있나? 여기선 빨리 비켜주는 게 도와주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제 동생 잘 부탁드립니다."
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막을 나갔다.
'방해꾼 A도 사라졌으니 맘 편하게 집중할 수 있겠네.'
손가락 절단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신속함이다. 힐도 그렇지만, 빠른 시간 안에 손가락을 붙이는 것. 그게 무엇보다 가장 중요했다.
강승현은 다시 환자로 눈을 돌렸다.
"자세히 좀 보겠습니다."
강승현의 눈이 푸르게 빛났다.
[관찰의 눈]
피범벅이 된 손가락이 더욱 자세히 보이기 시작했다.
[예리한 낫에 손가락을 베였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은 상처.]
[하지만 뼈가 잘리진 않았다.]
[이대로 방치하면 괴사한다.]
'혈관, 신경, 인대. 뭐 하나 빠짐없이 전부 완벽하게 찢겼네.'
상처라는 게 다 그렇지만, 단면이 깔끔하게 썰리는 경우는 드물다. 거기에 이 환자는 농사일하다가 다치는 바람에, 상처에 이물질이 잔뜩 묻어 있었다.
'일단 세척부터 해야겠는데.'
잘린 손가락을 붙이려면 상처 부위의 이물질을 제거해야 한다. 이때 평범한 힐러들은 힐링 스킬을 이용하겠지만, 야매 힐러에겐 그런 거 없다.
'진짜 물 속성 스킬 하나만 있었어도 이 고생 안 하는 건데.'
강승현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물뿌리개 수준이라도 상관없는데 말이다.
'힐을 안 줄 거면 세척 스킬이라도 하나 줄 것이지.'
하지만 룰렛은 그런 좋은 스킬을 선물해주지 않는다. 나온다고 해도, 어마어마한 포인트를 잡아먹은 뒤다.
'좋은 스킬이 나오길 기대하지 말고, 가진 스킬과 지식을 어떻게든 활용해라.'라는 게 강승현의 생존 철학 5번.
'오늘도 어쩔 수 없이... 평범한 생리식염수로 세척하자.'
강승현은 수제 생리식염수를 꺼냈다. 그걸 본 리하트가 재수 없게 웃어대기 시작했다.
"뭐냐 그거? 접착제냐? 지금 포션으로 손가락을 붙이겠다고 용쓰는 거냐? 하하하하하!"
"이건 상처 세척용 물인데요. 리하트 님은 상처에 이물질을 놔둔 상태로 치료하십니까?"
강승현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생리식염수가 담긴 병을 흔들었다. 그걸 본 리하트는 벌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럼 뭔데? 힐도 쓸 줄 모르는 놈이 무슨 수로 잘린 손가락을 붙이냐고!"
리하트의 말대로 포션만으로는 손가락을 붙일 수 없다. 그러니 강승현은 손가락을 붙일 수 없다. 이건 아즐 대륙의 상식이다.
'아즐 대륙민들이라면 그렇게 생각하겠지.'
하지만 강승현은 아즐 대륙 사람이 아니다. 그는 포션도 없고 힐도 없는 세계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런 게 없어도 손가락을 붙이는 방법 정도는 알고 있어.'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바늘과 핀셋을 꺼냈다.
"절단된 상처 부위를 하나하나 연결해서 붙일 겁니다."
"연결한다고?"
"네. 실로 이렇게 하나하나 꿰매서."
"어이가 없구만."
리하트는 기가 찬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냥 지금이라도 내게 애원해라. 이 평민의 손가락을 고쳐달라고."
"제가 왜요? 그럴 필요 없는데."
강승현은 리하트의 말을 깔끔하게 잘랐다. 무시당한 리하트는 벌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내가 도대체 몇 번을 말하는 거지? 멍청한 놈아! 절단 상처는 힐이 아니면 절대 고칠 수 없다고!"
"수지접합술."
"뭐?"
"수지접합술이라면 가능합니다."
좀 더 길게 쓰면 수지재접합수술. 끊어진 혈관, 뼈, 피부 같은 걸 연결해서 절단된 신체를 붙이는 수술이다.
그냥 갖다 대고 힐만 쓰면 찰싹 붙는 아즐 대륙의 치료법과 달리, 지구의 접합수술은 혈관이나 신경을 하나하나 이어줘야 한다.
'특히 수지접합술은 접합수술에서도 가장 어려운 녀석이라.'
손가락 붙이기가 가장 쉬운 아즐 대륙과는 정반대. 수지접합술은 고도의 집중력과 뛰어난 실력이 없으면 해낼 수 없다.
"저는 설명해 드렸으니까 이제 방해하지 마시고 지켜나 보시죠."
"이 건방진 놈이.... 사람이 무슨 인형인 줄 아는 거냐?"
이제 리하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이렇게 옆에서 소리를 질러대면 아무리 뛰어난 의사라 해도 수술에 집중하기 어렵다.
'이거나 써볼까.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물건 같으니까.'
[정신 집중!]
반지를 착용하자 정신력과 집중력이 엄청나게 상승했다.
'오, 이거 돈값은 하네.'
강승현은 반지 효과에 감탄했다. 바로 옆에서 사람이 죽어도 신경 끄고 제 할 일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이런 게 없어도 수술을 못 하진 않지만.'
실제로 강승현은 주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상황에서 수술에 성공한 적이 있었다.
'좋은 아이템이 있으면 쓰는 게 낫지.'
강승현은 사전 작업을 마치고 수술 준비에 들어갔다.
"내가 정말, 이 미친놈이 만드는 약을 아버님께 가져가야 하는 거냐?"
"죄송합니다, 도련님. 이건 어르신의 명령입니다."
옆에서 리하트와 리하트 따까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음 방지 기능은 없군.'
정신 집중의 반지는 어디까지나 집중력을 올려주는 아이템이다. 그래서 옆에서 하는 말은 다 들린다.
"이 멍청한 자식! 그냥 실로 꿰맨다고 손가락이 움직일 리가 없잖아!"
"저, 저... 그 말이 사실입니까?"
리하트가 하도 시끄럽게 굴어서, 밖에 있던 월이 다시 들어왔다. 월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제 동생의 손가락을 실로 꿰매신다고...."
'치료 방해하는 인간들을 쫓아낼 보디가드 하나 고용할까.'
강승현은 아니꼽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꿰매야죠. 지금 손가락이 끊어졌잖아요."
"시, 실로? 옷을 꿰맬 때 쓰는 실로?"
"그런 평범한 실로는 안 됩니다."
수지접합수술에는 아주 가느다란 수술용 실이 필요하다. 끊어진 손가락을 살리기 위해선 혈관과 신경을 연결해야 하니까.
'모세혈관만 해도 직경이 1㎜도 안 되는데 그걸 평범한 실로 꿰매겠냐.'
물론 현대 지구에서 사용하는 수술용 실 같은 건 아즐 대륙에 없다. 접합 수술의 개념도 없는 곳에 그런 게 있을 리가.
'하지만 그걸 대신할 만한 물건은 만들 수 있지.'
그렇다. 없으면 만들면 된다.
강승현은 마력 포션 하나를 꺼냈다.
[실 뽑기]
강승현이 스킬을 사용하자 포션 속 마력이 실처럼 뽑혀 나왔다.
원래 [실 뽑기] 스킬은 자신이 가진 마력을 실 형태로 변환해 생성하는 스킬이다.
'나는 마력이 없으니 마력 포션을 따로 사용해야 하지만.'
이렇게 뽑아낸 실은 다양한 용도로 쓸 수 있다. 전투용으로 쓰기도 하고, 아이템 제작에 쓰기도 하고.
강승현은 주로 상처를 꿰맬 때 사용했다.
'굵기와 길이는 사용자 마음대로 조절 가능하지.'
덕분에 [실 뽑기]를 이용하면 수술용 실 못지않게 가느다란 실을 생성할 수 있다.
'우선 [지혈]부터 하고....'
[지혈]을 사용하자 환자의 손에서 나오던 피가 멈췄다. 피가 계속 나오면 수술을 할 수 없으니까.
'이어서 [관찰의 눈].'
강승현의 눈이 푸른빛을 뿜어냈다.
[관찰의 눈]을 사용하면 정보가 나타나는 건 물론이고, 사물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이게 없으면 좀 힘들지.'
환자의 손에 [관찰의 눈]을 사용하자, 피범벅이 된 손가락 단면에서 잘린 혈관이나 신경 하나하나를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만약 가진 스킬 중 딱 하나만 남기고 다 없애야 한다면, 강승현은 망설임 없이 [관찰의 눈]을 고를 생각이었다.
이 스킬은 그만큼 가치 있으니까.
'문제는 이게 스태미나를 너무 많이 잡아먹어.'
[관찰의 눈]은 다른 스킬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스태미나가 많이 든다. 일단 쓰면 스킬을 끌 때까지 계속해서 스태미나를 빨아가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잠깐 켰다가 꺼서 정보를 습득해서 상관없지만. 수술할 때는 끝날 때까지 발동해야 해서 문제란 말이지.'
결국, 스태미나가 바닥나기 전에 수술을 끝내야 한다는 소리다.
'뭐, 못할 것도 없지만.'
강승현은 준비한 도구를 들었다.
"시작합니다."
17. 이번에도 변함없이
강승현이 힐 없이 치료할 때면 많은 사람들이 비난을 퍼부었다.
"멍청한 놈! 잘린 손가락을 꿰매서 붙이겠다고? 멀쩡한 손가락이 썩는 꼴이나 보겠구만."
지금의 리하트처럼 말이다.
-힐 없이 사람을 치료한다는 게 말이 되냐?
-사기꾼 자식!
-힐러도 아닌 주제에 주제도 모르고.
-건방진 약제사.
한때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반박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지.'
실력으로 입 닥치게 하면 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수술 도구는 준비됐고, 어딜 꿰매야 하는지도 다 보인다.'
[관찰의 눈]은 많은 스태미나를 먹어치우는 대신, 강승현에게 더 많은 정보를 보여주었다.
'살덩어리에 파묻혀 잘 보이지 않는 신경도, 찢어진 혈관의 형태까지도.'
이제 그것들을 연결하기만 하면 된다.
스르르르.
강승현은 가느다란 마력 실로 지름이 1㎜도 되지 않는 혈관을 이어갔다.
'문제는, 이렇게 느린 속도로는 [관찰의 눈]의 스태미나를 감당할 수 없다는 거지.'
수술을 끝내기 전에 스태미나가 먼저 고갈될 테니까.
'여기서 필요한 스킬이...[봉합]!'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스킬을 사용했다.
파바바밧!!!
그 직후, 그의 손이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다. 절단된 힘줄과 혈관이 빠른 속도로 이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게 무슨!"
"헉...."
지켜보던 사람들은 물론, 리하트 역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의 눈으로는 강승현의 손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손을 저렇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다니!"
더 놀라운 점은, 저렇게 빠른 속도로 직경이 1㎜도 되지 않는 혈관을 실수 없이 꿰맨다는 점이었다. 마치 정밀한 기계를 보는 듯했다.
"어떻게 저런 짓을 할 수 있는 거지?"
이아레프 가문의 병사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힐은 전혀 사용하지 않는데도, 뜯겨나간 손가락이 본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정말 믿을 수가 없군."
힐이 신의 힘을 빌려 환자를 치유하는 행위라면,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은 치료의 신이 직접 나타난 것 같았다.
-'역시 [봉합] 스킬은 좋다니까.'
[봉합]은 사용 시 손을 빠르게 움직여 물체를 꿰맬 수 있는 스킬이다.
'전투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지만, 야매 힐러에겐 꼭 필요하지.'
일반적인 속도로 꿰맸다면 2~3시간 넘게 걸렸겠지만, [봉합]을 사용하면 10분 밑으로 단축시킬 수 있다. 수술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게 엄청난 장점.
'꼭 꿰매는 게 아니더라도 손을 빠르게 움직일 수 있어서 이래저래 써먹기 좋네.'
다만, [봉합]을 발동했을 때 손의 움직임을 따라가려면 [관찰의 눈]이 필요하다. 손의 속도를 올려주는 거지, 동체 시력을 올려주는 스킬이 아니니까.
'슬슬 어지럽긴 하군.'
안 그래도 [관찰의 눈]은 스태미나를 많이 먹는 스킬이다. 여기에 [봉합] 스킬까지 사용하려니 스태미나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그나마 [봉합] 덕분에 시간이 단축돼서 망정이지.'
[봉합]으로 수술 시간을 단축하지 않았다면 스태미나 고갈로 쓰러졌을 것이다.
'수술하는 동안 [관찰의 눈]을 유지하기 위해 [봉합]이 필요하고. [봉합]의 움직임을 따라잡기 위해 [관찰의 눈]이 필요하지.'
이렇게 두 스킬을 연계하면 서로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었다.
'그래도 [봉합]에 [관찰의 눈]을 동시에 쓰는 건 좀 부담스럽긴 해.'
이러는 동안에도 강승현의 스태미나는 엄청난 속도로 사라져갔다.
'누가 스태미나 포션 한 병만 부어주면 좋겠지만... 그래 줄 녀석이 없군.'
안타깝게도 주변 사람들은 강승현의 [봉합]을 넋 놓고 보느라 정신없었다. 정말 도움 안 되는 구경꾼들이다.
'그냥 빨리 끝내고 마시자.'
강승현은 손을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강승현의 스태미나도, 손가락 절단 부위도.
파바바바밧!
손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지면서 스태미나의 소모 역시 더더욱 빨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강승현의 스태미나가 전부 바닥나기 전.
"오케이...!"
손가락의 잘린 혈관과 신경, 힘줄... 모든 부위가 예전처럼 복구됐다. 정말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다.
'오늘은 좀 아슬아슬했나?'
타이밍이 조금만 늦었다면 스태미나 부족으로 기절했을 것이다. 강승현은 곧바로 스태미나 포션을 꺼냈다.
벌컥벌컥!
목구멍에 스태미나 포션을 붓자, 새콤한 시트러스 향기가 입안 가득 퍼져갔다.
'그리고 이제 [지혈]을 해제해서....'
[지혈]을 해제하자 이어진 혈관을 통해 피가 흘러갔다. 피가 통하지 않아 새하얬던 손가락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좋아, 제대로 이어졌다!'
강승현은 쾌재를 불렀다.
수술은 성공했다! 이번에도 변함없이!
'이걸로 마지막...!'
강승현은 환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는 모든 치료를 끝낸 가장 마지막 순간에 쓸 수 있는 스킬이 하나 있다.
'힐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회복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완치판정]
'지구처럼 몇 날 며칠 누워있을 필요는 없단 말이지.'
스킬을 사용하자, 환자의 상처가 빠른 속도로 아물어갔다.
[완치판정]은 대상의 회복력을 엄청나게 상승시키는 스킬이다.
'다 죽어가던 환자라도 2~3일 만에 회복할 수 있으니까.'
강승현이 가진 스킬 중 유일하게 힐에 비벼볼 만한 녀석. 치료가 끝난 환자에게 써주면 보통 하루 이틀 만에 털고 일어난다.
'대신 치료가 다 끝나고 나서야 쓸 수 있다는 점이 아쉽단 말이지.'
[완치판정]은 치료가 끝난 환자의 회복 기간을 줄여주는 스킬이다. 회복력은 높지만, 이걸로 사람을 치료할 순 없다.
'그래도 이 스킬 덕분에 내가 힐러라는 걸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좋긴 해.'
즉, 평소에는 못 쓰지만 막타용으로 쓰는 일종의 필살기. 강승현은 [완치판정]을 필살기로 받아들였다.
-"자, 다 끝났습니다."
"어...."
"어어어어...."
강승현은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구경꾼들은 여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도대체 내가 뭘 본 거지?"
"손의 상처가 낫고 있잖아."
아까는 엄청난 속도로 손가락을 꿰맸고, 지금은 엄청난 속도로 상처를 회복시켰다.
"분명 힐은 사용하지 않았는데."
"신성력도 없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강승현은 이 모든 과정을 힐을 쓰지 않고 해냈다.
그게 구경꾼들의 넋이 나가게 된 이유다. 자신들의 상식을 초월한 상황이었으니까.
"우, 웃기지 마!"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리하트였다. 리하트는 고함치며 다가왔다.
"그딴 말도 안 되는 짓으로 손가락이 붙을 리 없어!"
"붙었습니다. 아주 잘 붙었네요."
강승현은 환자의 손가락을 가리켰다. 조금 전까지 잘린 손가락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생기 넘쳤다.
"비켜! 무슨 속임수를 썼을지 어떻게 알아? 뭔가, 뭔가 속임수를...."
리하트는 횡설수설하며 환자에게 다가갔다. 과정을 직접 보고도 이런 말을 내뱉는 걸 보면 머리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양이다.
"정 못 믿겠다면 리저렉션을 써서 환자를 깨워보시면 되겠네요."
정신 차린 환자가 손가락을 움직인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리하트는 벌레 씹은 표정으로 강승현을 노려보더니,
"리저렉션."
환자를 향해 리저렉션을 사용했다. 눈부신 빛이 환자의 몸을 감쌌다.
"으...으...."
의식 없이 쓰러져 있던 월의 동생은 천천히 눈을 떴다.
"방금 눈 떠서 정신없으시겠지만, 제 말 들리세요?"
"예?"
"저는 힐러 강승현이라고 합니다."
"아... 예...."
월의 동생은 흐리멍덩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쥐었다 펴 보세요. 거기 왼손."
그는 멍한 얼굴로 왼손을 쥐었다 펼쳤다. 왼손은 아무 문제없이 움직였다.
"우, 움직인다!"
월이 동생의 손가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아까 잘렸을 손가락 역시 왼손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거기까지. 완벽하게 붙이긴 했지만, 너무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강승현은 환자를 말리며 말했다. [완치판정] 덕분에 회복력이 엄청나게 상승했지만, 몸이 1초 만에 회복되는 건 아니니까.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월은 솔직히 포기하고 있었다. 아무리 대단한 힐러라도 힐 없이 손가락을 붙이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제 동생의 손을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강승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해낸 것이다. 월은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치료는 잘 마무리됐지만, 하루 이틀 정도는 무리하지 않게 조심해주세요."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마시며 말했다.
"그 뒤에는 다시 예전처럼 일하셔도 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치료비는 어떻게든 마련해서...."
"아, 치료비는 괜찮습니다."
월한테 치료비를 받을 필요는 없었다. 누가 이미 내줬으니까.
"치료비는 리하트 이아레프 님께서 지불해주셨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강승현은 방긋 웃으며 리하트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내가 평민 놈의 치료비를 지불했다고? 무슨 개소리냐!"
"아직 한 시간도 안 지났는데 벌써 잊으셨나요?"
강승현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아까 약속하셨잖아요. 제가 수술에 성공하면 무료 봉사 하신다고."
평민을 누구보다 하찮게 여기는 귀족 힐러가 마을 광장에서 3일간 무료 봉사에.
덤으로 직접 만든 요리까지 제공?
'그런 재밌는 구경을 언제 또 하겠어.'
치료비는 그걸로 충분했다.
"리하트 님이 좋은 일을 하신다니 기분이 좋아져서요. 치료비는 그걸로 대신하겠습니다."
"뭐, 뭐가 어째?"
"그럼, 3일간 수고하십쇼. 진심으로 응원할게요."
"이 하찮은 것이...!"
"설마 약속을 어기실 건 아니겠죠? 가문의 명예와 이름도 거셨는데."
강승현은 웃겨 죽겠다는 얼굴로 빈정거렸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런 순간이 찾아오면 기운이 솟았다.
"못 하시겠다면 제가 허스 이아레프 님을 만나 오늘 일을...."
"...건방진 놈!"
리하트는 목에 걸고 있던 행운의 목걸이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리고 강승현을 노려보며 어딘가로 가버렸다.
"줄 거면 곱게 줄 것이지."
강승현은 바닥에 떨어진 행운의 목걸이를 주웠다. 흙먼지가 묻긴 했지만, 성능에 지장은 없다.
"리하트 님이 약속을 지킬까요?"
"지킬 겁니다."
이아레프 가문은 명예를 매우 중요시하는 놈들이다. 가문의 이름까지 내걸고 약속했으니, 이걸 어겼다간 가주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자, 그렇게 됐으니."
"네?"
목걸이를 챙긴 강승현은 옆에 서 있던 월에게 말했다. 월은 성격이 좋아서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많다.
"주변 사람들한테 소문 좀 내주세요."
"소문이요?"
좋은 일은 널리 알려야 하는 법.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일부터 광장에 가면 공짜로 치료받으면서 밥도 얻어먹을 수 있다고."
18. 정리 좀 하자
"휴."
여관으로 돌아온 강승현은 지친 얼굴로 테이블에 앉았다.
"피곤해 죽겠네...."
스태미나를 계속 보충하긴 했지만, 스킬을 하루 종일 써댔으니 몸이 멀쩡할 리가 없다.
벌컥벌컥!
강승현은 틈나는 대로 스태미나 포션을 들이켰다. 이제 몇 병째인지 기억도 안 난다. 새콤한 향이 목구멍에 흘러 들어가자 기분이 좋아졌다.
"선생님! 혹시 그 소식 들으셨어요?"
스태미나 포션을 30병 정도 들이켜고 있으니 줄리아가 다가왔다.
"무슨 소식이요?"
"글쎄, 이아레프 가의 도련님이 마을 광장에 무료 진료소를 여셨대요. 평민이든 모험가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더라구요."
줄리아는 무척 신기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게, 귀족은 평민을 벌레만큼... 아니, 벌레보다 더 싫어한다. 그런 인간이 돈도 안 받고 평민을 치료해주겠다니 놀랄 수밖에.
"심지어 식사도 무료로 제공해주신대서 지금 광장이 사람들로 북적거려요. 심지어 하인드 주변 마을 사람들까지 찾아오셨다니까요."
지금 하인드 마을 광장은 발 디딜 틈도 없다. 인맥왕 월의 활약으로 소문이 쫙 퍼졌으니까.
"한동안 강 선생님을 찾을 환자가 없을 것 같아서 걱정이네요. 다들 무료 진료소로 갈 테니."
"저는 괜찮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료를 받을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한걸요."
강승현은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3일 내내 노예처럼 죽어라 일할 리하트를 생각하니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강 선생님은 정말 마음이 따뜻하시다니까.... 선생님 같은 힐러가 많아지면 좋겠어요."
속내를 모르는 줄리아는 감동한 얼굴로 눈물을 글썽였다.
"참, 줄리아 씨."
"네?"
"이거 오늘 받은 건데요.... 아시다시피 제가 요리를 못하는 놈이라."
강승현은 아까 치료비 대신 받은 요리 재료를 꺼내놓았다.
그는 힐 빼고 다 잘하는 힐러였지만, 요리 실력은 형편없었다. 그나마 잘하는 요리가 있다면 라면 끓이기 정도.
"괜찮다면 줄리아 씨가 써주세요."
강승현은 받은 재료를 전부 내밀었다. 좋은 재료는 좋은 요리사의 손을 거처야 하는 법.
"감사합니다!"
줄리아는 무척 기뻐하며 바구니를 받았다. 바구니 안에는 하인드 마을 사람들이 정성껏 기른 채소와 과일이 담겨 있었다.
"전부 싱싱해서 좋네요. 이걸로 뭘 만들어볼까...."
"오늘 저녁도 맛있게 부탁드립니다."
"맡겨만 주세요!"
줄리아는 받은 재료를 가지고 식당으로 향했다.
강승현은 뻐근한 몸을 풀었다.
'저녁밥은 해결됐고... 어디 보자.'
강승현은 상태창을 열었다.
[누적 포인트 : 342포인트]
[룰렛 1회 이용 시 20포인트]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한 결과, 강승현에겐 룰렛을 10번 넘게 돌릴 포인트가 쌓였다.
'그럼 10회 연속 룰렛.'
강승현은 모아둔 포인트로 룰렛을 돌렸다.
[포인트를 소모합니다.]
[누적 포인트 : 142포인트]
열심히 모은 200포인트가 사라지며 사악한 룰렛이 나타났다.
타르르르르르!
룰렛이 빠른 속도로 돌아갔다. 강승현은 룰렛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많은 보상 중에 힐이 없다니.'
야매 힐러로 사는 것도 즐겁긴 하지만, 가끔은 시스템의 의도가 궁금했다.
왜 자신은 힐러인데 힐을 쓸 수 없는 건지.
남들처럼 마력을 쓸 수 없는 건지.
'물론 손으로 슥 터치하면 고쳐지는 힐보다 재밌긴 하지만, 남들보다 불리한 건 맞으니.'
혹시 자신은 무의식적으로 하드 난이도를 원해서 고난이도 직업을 받게 된 게 아닐까. 강승현은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거면 납득은 가는데. 내가 고인물 플레이 좋아하니까.'
강승현이 잡생각을 하는 사이, 룰렛이 보상을 뱉어냈다.
[※룰렛 결과]
☆[스탯(체력 +1)]
☆[스탯(체력 +1)]
☆[기타(인벤토리 확장권)]
☆[기타(1골드)]
☆[스탯(스태미나 +1)]
☆[스탯(스태미나 +2)]
★[기타(활력의 크리스탈)]
☆[기타(소형 체력 포션 x2)]
☆[스탯(정신력 +1)]
☆[기타(1골드)]
처참한 결과였다. 스킬 같은 건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진짜... 골드를 뱉을 거면 룰렛도 골드로 돌리게 해줘라, 좀.'
도대체 1골드는 왜 나오는 건가. 화끈하게 십만 골드, 백만 골드면 인정할 텐데.
'원래 이게 정상이고, 저번처럼 스킬이 툭 튀어나오는 게 비정상이긴 하지만.'
강승현은 툴툴거리며 보상을 확인했다.
'가장 필요한 스태미나 스탯은 별로 안 나왔네. 체력 스탯은 솔직히 필요 없는데.'
힐러가 체력을 올려서 어디에 쓰겠는가. 물론 야매 힐러이긴 하지만.
'체력 포션은 또 왜 나오는 거야! 나올 거면 마력 포션이나 나오든가.... 오!'
쓰레기 템을 정리하는 강승현의 눈에 [인벤토리 확장권]이 들어왔다.
[인벤토리 확장권]
[사용 시 인벤토리 한 칸이 늘어난다.]
'이건 좋지.'
인벤토리 확장권은 인벤토리 여유 공간을 늘려주는 아이템이다. 잘 안 나오는 건 아니지만,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인벤토리는 쓰다 보면 금방 부족해지니까.'
강승현은 인벤토리 확장권을 상태창에 투입했다.
[인벤토리 확장권을 사용합니다.]
[인벤토리 여유 공간이 증가합니다.]
'그럼 이제 대충 다 확인했나?'
보상목록을 살피던 강승현의 눈에 ★표시가 붙은 보상이 들어왔다.
★[기타(활력의 크리스탈)]
활력의 크리스탈은 스태미나의 기운이 담긴 재료용 아이템이다. 보통 가공해서 무기나 장신구를 만들 때 쓰인다.
'안 그래도 스태미나 아이템 하나 갖고 싶었는데.'
강승현은 기쁜 얼굴로 활력의 크리스탈을 꺼냈다. 이걸로 유용한 장신구를 제작할 수 있을 것 가다.
"오, 강 선생! 식사하려구?"
크리스탈을 던졌다 받으며 장난치고 있는데 김호정이 1층으로 내려왔다.
"김호정 씨도 여기 묵으셨어요?"
"여기가 밥이 제일 맛있잖아. 가격도 싸고."
김호정의 말대로 싼값에 배 채우기엔 이 여관만 한 곳이 없다. 가격도 싸고, 음식 맛도 좋고. 강승현이 이 여관에 장기 숙박하는 이유다.
"잘됐네요. 아까 음식 재료 많이 구했는데, 같이 드실래요? 줄리아 씨한테 맡긴 참이라."
"나야 그럼 좋지!"
김호정은 히죽거리며 테이블에 앉았다.
"줄리아 씨, 밥 만드는 김에 김호정 씨 몫도 부탁합니다."
"네에~!"
부엌 안쪽에서 줄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와 함께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오, 그거 크리스탈 아냐?"
밥을 기다리는데, 김호정이 강승현의 크리스탈을 가리켰다.
"아까 룰렛에서 뽑았어요. 활력의 크리스탈."
"잘됐네! 나 아까 이런 거 뽑았거든."
그러면서 아이템 하나를 꺼내 보여주었다. 인벤토리 확장권과 비슷하게 생긴 쿠폰 아이템이었다.
"크리스탈 강화권이네요."
[크리스탈 강화권]
[사용 시 크리스탈이 한 단계 강화된다.]
"난 크리스탈 아이템 필요 없잖아. 월광석이면 모를까."
김호정은 실실 웃으며 강승현한테 강화권을 넘겨줬다.
"이거 팔면 꽤 비싸게 팔릴 텐데요."
"그래서, 안 받게?"
"아뇨. 감사히 잘 받겠습니다."
강승현은 방긋 웃는 얼굴로 강화권을 챙겼다. 주는 건 거절하지 않는 게 예의니까.
"하지만 이건 일반 모험가들 사이에서도 인기 많잖아요."
"내가 선생한테 빚진 게 한두 번도 아니고. 큰돈을 어떻게 받아? 밥값으로 퉁치자구."
김호정도 웃으며 대답했다. 원래는 다른 차원 이동자한테 팔 생각이었으나, 강승현이 크리스탈을 갖고 있길래 넘겨주는 거라면서.
"그럼 저야 고맙죠."
강승현은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했다. 혹시 월광석을 얻는다면 김호정에게 넘겨주자고 생각했다.
"근데 반지 아직 안 팔았어? 손에 끼고 있네."
"아, 네. 잠깐 쓸 일이 있어서요."
강승현은 손가락에 끼고 있던 정신 집중의 반지를 빼냈다. 오늘 하루 유용하게 쓰인 녀석이다.
"팔 만한 곳은 생각해 뒀어? 꽤 비싼 거면 아무 데서나 팔긴 그렇잖아."
"그건 그렇죠."
큰돈이 오가는 아이템 거래는 신중하게 해야 한다. 한국에서도 중고품 거래는 조심해야 하는데, 한국보다 막장인 아즐 대륙은 어떻겠는가.
"모험가 조합 놈들 끼고 거래하는 게 가장 안전하긴 한데, 그 새끼들은 수수료를 너무 많이 떼어가고."
일반 무기점은 가격이 들쑥날쑥한 편이다. 가끔 작정하고 사기 치는 놈들도 있고.
'거래할 때 가장 좋은 건 믿을 만한 가게를 뚫는 건데....'
강승현은 무기 판매에 관해선 관심이 없었다. 포션 가게라면 모를까, 힐러가 무기점에 들를 일은 별로 없으니까.
"딱히 없으면 저~쪽 골목 가게로 가볼래?"
그때, 김호정이 가게 하나를 추천했다.
"파란 줄무늬 간판 달고 있는 무기점인데, 주인장이 사람이 좋아. 바가지는 안 씌우더라!"
"그래요? 김호정 씨 추천이면 그럭저럭 믿을 만하겠네요."
"그럭저럭 믿지 말고 확실히 믿으라구."
"좀 이따 가볼게요."
팔아치울 물건도 있고, 크리스탈 장신구 제작을 위한 재료도 살 생각이다.
"활력의 크리스탈 장신구를 얻으면 살기 좀 더 편하겠죠."
"식사 나왔습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사이, 줄리아가 음식을 가져왔다.
"맛있게 드세요."
"잘 먹겠습니다."
늙은 호박 속을 파서 채소와 고기를 꽉꽉 채워 넣고 통째로 쪄서 만든 호박찜이다.
"이야, 진짜 줄리아 요리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호박찜을 우걱우걱 먹던 김호정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좋은 재료에 좋은 요리사가 합쳐지니 정말 환상적인 맛이었다.
"밥 한 그릇만 있으면 딱 좋겠네. 김치 올려서...."
"남부 쪽은 쌀농사를 지어 먹으니까, 그 근처로 다니는 상인한테서 구할 수 있을걸요."
"여기 생활 다 좋은데, 집밥 먹고 싶어 죽겠다구."
김호정은 투덜거리며 호박찜을 입으로 가져갔다.
"맛 좋다! 한 그릇 더!"
투덜거림도 잠시, 김호정은 다시 호박찜을 찬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식사를 마친 강승현은 여관을 나왔다. 잠을 자기엔 이른 시간이고, 달리 할 일도 없으니까.
'정신 집중의 반지에 아까 얻은 행운의 목걸이까지 전부 팔아치우자.'
이런 비싼 물건을 들고 아무 가게나 가는 건 위험하다.
아는 사람이 소개해준 가게라면 괜찮겠지. 강승현은 김호정이 소개한 가게로 향했다.
'혹시 이상한 가게면... 김호정 씨를 털면 되고.'
골목 안으로 들어가서 조금 걷자 김호정이 말한 가게가 보였다.
파란 줄무늬 간판을 단 작고 소박한 가게. 영업한 지 꽤 오래된 듯한 가게였다.
"실례합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을 읽는 중년의 남성이 보였다. 저 남자가 가게 주인인 듯했다.
"손님이신가요? 어서 오시지요."
가게 주인은 방긋 웃으며 강승현을 맞아줬다.
19. [그걸손에넣으세요]
가게 안을 가볍게 둘러보자 전시된 무기와 방어구가 눈에 들어왔다. 상태가 좋은 걸 보면 주인이 신경 써서 관리하는 모양이었다.
'나쁘지 않은데.'
강승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게 안이 난장판인 것보다는 깔끔하게 정리된 게 낫다.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팔러 오셨나요?"
"둘 다요. 우선 이것들은 팔 거고, 베이스 장신구 하나 주세요."
크리스탈 아이템을 만들기 위해선 보석을 박아 넣을 베이스 장신구가 필요하다. 귀고리, 반지, 목걸이, 벨트 등등 종류는 다양하니 본인 취향에 맞는 걸 고르면 된다.
"베이스 장신구는 어떤 걸 드릴까요?"
"브로치로 할게요."
강승현은 선반 안에 있는 브로치를 가리켰다.
"여기 있습니다."
무기점 주인이 베이스 브로치를 내밀었다. 지금은 아무 능력도 없지만, 활력의 크리스탈을 박아 넣으면 스태미나 관련 옵션이 추가된다.
'목걸이나 귀고리는 너무 거추장스럽고, 이왕 쓸 거면 브로치가 낫지.'
강승현은 구입한 브로치를 인벤토리에 넣었다.
"판매하실 물건은 어떤 건가요?"
"여기요."
"이 행운의 목걸이는...."
무기점 주인이 목걸이를 찬찬히 살피며 말했다.
"크리스탈 부분에 금이 갔네요."
"네?"
"행운의 크리스탈은 조심해서 다뤄야 합니다. 바닥에 떨어트리기만 해도 금이 갈 정도로 약한 물건이거든요."
무기점 주인이 안타깝다는 얼굴로 목걸이를 보여주었다. 목걸이 중앙에 박힌 녹색 보석에 금이 가 있었다.
'아, 리하트 이 개새끼!'
강승현은 리하트가 목걸이를 벗어 던진 걸 떠올렸다. 그때 금이 간 모양이다.
'아무래도 제값 받긴 힘들 것 같군.'
금이 간 아이템을 누가 비싸게 사가겠는가. 강승현은 크게 기대하지 않고 물었다.
"그럼 얼마죠? 한 3만 골드쯤 합니까?"
어차피 공짜로 얻은 거니까.
'길 가다 주운 거니까 물약 값만 나와도 이득이지.'
"300만 골드 정도에 매입할 수 있겠네요."
"300골드 아니고 300만 골드?"
놀랍게도 300만 골드짜리 아이템이었다. 금이 가서 비싸게 받긴 글렀다고 생각했는데.
"행운 상승 아이템은 늘 인기 있는 물건이라서요. 살짝 금이 가긴 했지만, 이 정도면 신경 안 쓰실 분들이 많아요."
가게 주인이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300만 골드! 고맙다, 리하트. 너 대신 잘 써먹으마.'
강승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반지를 가리켰다. 목걸이가 300만 골드라면 반지는 더 비쌀 터.
"그럼 이 녀석은요?"
"오, 이건 정신 집중의 반지로군요. 아주 좋은 녀석이죠. 어디서 구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축하드립니다."
무기점 주인이 미소를 지었다. 유물 감정사의 말대로 인기 많은 물건이었다.
"심지어 새것 같군요."
"어제 유물에서 구한 신상입니다."
사실 한 번 쓰긴 했지만 그것까진 눈치 못 챘는지, 무기점 주인은 기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좀 더 비싸게 매입하겠습니다. 중고라고 성능이 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귀족분들은 새 제품을 좋아하시거든요."
"귀족놈들이 다 그렇죠 뭐."
모험가들이 쓰던 땀내 나는 물건은 쓰기 싫다나 뭐라나. 귀족들도 재수 없기는 힐러나 유물 감정사 못지않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최근 거래 내역이...."
"저는 구경 좀 하고 있을게요."
"그러시지요. 천천히 보셔도 됩니다."
무기점 주인이 서류를 찾는 동안, 강승현은 진열된 장비를 구경하러 갔다. 검이나 창은 물론이고, 목걸이나 글러브까지 다양한 종류의 아이템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왕 투척 스킬을 얻은 김에 뭔가 쓸 만한 무기 하나가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그냥 투척도 아니고 ★이 붙은 특별한 스킬이다. 써먹을 수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써먹어야 한다.
'어디 괜찮은 무기 없나?'
장갑 중에 투척 대미지를 올려주는 옵션이 있지 않을까 하고 구경하던 참이었다.
"안쪽에도 진열된 물건이 많으니 천천히 구경하시지요."
무기점 주인의 말을 듣고 벽을 바라보자, 안쪽에도 문이 있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안으로 들어가자 무기점 주인 말대로 더 많은 무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뭐 쓸 만한 무기 없을까?'
강승현은 무기를 열심히 살펴봤다. 검이나 방패부터 시작해서 단검이나 스태프 같은 온갖 종류의 무기가 있었다.
'이런 것들은 딱히 필요 없는데.'
강승현이 진열된 무기를 살피는 동안, 가게 주인이 서류를 들고 다가왔다.
"정신 집중의 반지라면 최근 660만 골드에 거래된 내역이 있군요."
무기점 주인이 서류를 보여주었다. 최근에 있었던 주변 상가 거래 내역을 기록해둔 종이였다.
"저희 가게에서도 660만 골드에 매입하겠습니다."
"660만?"
무려 행운의 목걸이 값의 두 배 이상. 역시 유물에서 얻은 레어 아이템은 다르다.
"나쁘지 않네요. 여기서 팔게요."
"감사합니다. 혹시 뭔가 더 찾으시는 물건 있으신가요?"
"혹시 투척 스킬을 활용할 만한 무기 없을까요?"
"투척 스킬이라면 원거리 무기가 좋겠네요...."
무기점 주인은 잠시 기다려 달라며 자리를 떠났다. 역시 이런 건 전문가에게 묻는 게 빠르다.
"마침 좋은 물건이 하나 들어왔답니다."
무기점 주인이 아이템 하나를 가져왔다. 방아쇠를 당겨 화살을 발사하는 한손용 석궁이었다.
"석궁? 투척 스킬에 응용하긴 좋겠네요."
힐러가 쓸 무기로는 안 어울리지만.
"이 녀석의 이름은 프리아의 석궁. 이번에 유물에서 발견된 귀한 물건입니다."
"유물 아이템이면 평범한 건 아니겠네요."
"그렇습니다."
전체적으로 뭔가 있어 보이는 디자인에 독특한 문양. 그리고 아주 잠깐이었지만, 알 수 없는 오라 같은 게 느껴졌다.
'가격도 안 평범하겠지.'
딱 봐도 비싸 보이는 물건이다. 정신 집중의 반지보다 더 비싸지 않을까.
"이 녀석의 특징은...."
무기점 주인이 프리아의 석궁을 건드리자, 석궁이 검은빛에 휩싸여 사라졌다. 동시에 팔찌 하나가 나타났다. 프리아의 석궁과 비슷한 디자인의 팔찌였다.
"팔찌 형태로 변형시킬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팔찌 형태로 수납하다가 전투 시에 석궁 형태로 변형시키는 아이템이죠."
석궁 형태일 때는 조금 거추장스럽지만, 팔찌 형태일 때는 무척 가볍고 보관하기 쉽다. 갖고 다닐 짐이 많은 모험가에겐 엄청난 메리트.
하지만 차원 이동자한텐 있으나 마나한 능력이다.
'인벤토리가 있어서 말이지.'
아직까진 별 메리트 없는 무기였다. 차원이동자들은 무기를 인벤토리에서 쉽게 꺼내 쓸 수 있으니까.
"그리고 또 하나...."
무기점 주인이 어떤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붉은빛이 감도는 비단 주머니였다.
"이건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라고 합니다. 프리아의 석궁과 한 세트를 이루죠."
"혹시 화살을 무한으로 담는 주머니인가요?"
그런 거라면 사고 싶은데.
"허허허, 그런 아이템이 있다면 제가 쓰고 싶네요."
"그럼 그건 뭐에 쓰는 건가요?"
"이 아이템은... 설명하는 것보단 눈으로 보여드리는 게 낫겠네요."
무기점 주인은 다시 팔찌를 석궁으로 되돌렸다. 그리고 동전 하나를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이 주머니는 넣은 아이템을 석궁의 화살로 바꿔 생성할 수 있습니다."
석궁에 동전으로 만든 화살이 장착됐다. 동전을 납작하게 펼쳐 만든 것 같았다.
"넣은 동전이 화살처럼 변했네요."
"그렇습니다."
어떤 물건이든 화살로 바꿀 수 있고, 주머니에 넣어두기만 하면 일일이 재장전할 필요도 없다. 이것이 프리아의 석궁이 가진 힘이다.
파각!
무기점 주인은 석궁 방아쇠를 당겼다. 동전 화살이 빠른 속도로 날아가, 가게 안 허수아비를 관통했다.
"재료에 따라 화살 위력이 다릅니다."
"생각보다 위력이 괜찮네요."
"기본적으로 일반 화살을 사용하는 걸 추천하지만, 급할 땐 돌을 주워다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죠."
무기점 주인이 이번엔 돌멩이를 잔뜩 가져와 주머니에 넣었다.
"거기에 프리아의 석궁은...."
파바바밧!!
돌 화살 5개가 연속으로 발사됐다. 허수아비가 순식간에 걸레짝으로 변했다.
"최대 5연발까지 가능한 연사 석궁입니다. 흔치 않은 물건이죠."
"오... 그건 진짜 탐나네요."
총도 아닌데 연사 기능까지. 정말 마음에 쏙 드는 물건이다.
특히 마음에 드는 건, 어떤 아이템이든 화살로 만들어주는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만약 포션도 화살로 만들어준다면, 회복 화살 같은 걸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게 된다면 지금보다 좀 더 편하게 야매 힐러 짓을 할 수 있게 된다. 사상 최초, 석궁으로 쏴서 회복시키는 힐러.
"괜찮은데요? 얼마쯤 하나요?"
"알려진 지 얼마 안 된 물건이라 놔두면 가격이 오르겠지만, 일단은 1500만 골드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1500만...음...."
예상은 했지만 역시 비싼 물건이었다.
'그래도 능력에 비하면 싼 편이지.'
부피 줄이기, 연속발사 기능, 뭐든 재료로 만들 수 있는 특수 능력. 이런 걸 1500만에 구할 수 있다면 이득이다.
"놔두면 더 비싸지겠네요."
"그렇겠죠. 아직은 입소문이 안 났을 뿐이라. 혹시 지금 사시겠다면 1400만까지 깎아드릴 수 있습니다만."
"1400만... 음...."
강승현은 무기점 주인의 제안을 듣고 머리를 굴렸다. 지금 가진 돈으로는 택도 없는 상황이다.
'반지랑 목걸이 팔면 960만. 500만 골드는 더 있어야겠네.'
무척 탐나는 무기지만, 이걸 샀다간 한동안 빈털터리가 된다. 비상금을 전부 털어야 하니까.
'비상금도 없이 지내는 건 좀 위험하지.'
연고 없는 차원 이동자가 믿을 거라곤 돈밖에 없다. 아쉽지만 프리아의 석궁은 포기하기로 했다.
'이게 없다고 힐러 일을 못 하는 건 아니니까.'
"한번 써보시지요."
그때, 무기점 주인이 석궁을 쏴보라며 권유했다.
"그래도 괜찮겠어요? 귀한 무기를 함부로 빌려줬다간...."
"무기점 장사만 30년을 했습니다. 사람 보는 눈은 있지요."
그가 보기에 강승현은 무기를 훔쳐 가거나 그걸로 위협할 사람은 아니었다.
"손님이 가게를 믿듯, 가게도 손님을 믿는 겁니다."
"그럼 이것도 기회인데... 한번 쏴볼게요."
"혹시 화살로 만들고 싶은 아이템이 있으신가요?"
"그러면 스태미나 포션으로."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내밀었다. 무기점 주인이 주머니에 포션 병을 넣자, 스태미나 특유의 노란 빛을 띤 화살이 생성됐다.
"받으세요."
무기점 주인이 장전된 석궁을 건네주었다.
"네."
강승현이 프리아의 석궁에 손대는 순간,
[그걸손에넣으세요]
[반드시]
"...!"
눈앞에 알 수 없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20. 지켜보고 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