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의 무한회귀자 1
트롤의 몽둥이가 내 머리를 내리치기 직전, 나는 생전 처음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인생을 체험했다.
한심한 인생이었다.
하수구에서 태어난 고아의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검술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미궁의 탐험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미궁 3층. 나는 내 머리를 향해 떨어지는 몽둥이를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씨발."
미궁 3층에 트롤이라니.
7층에서도 보기 힘든 괴물이 뭐하러 3층에 올라왔단 말인가.
하필 내가 소속된 파티랑 마주쳤다고? 그것도 가장 처음으로?
"씨발!"
트롤의 몽둥이가 내 머리, 아니. 내 온몸을 짓이기는 것을 느끼고 내 생을 끝냈다.
그래. 내 생이 끝났다.
찰나였지만 미친 듯이 아팠다.
"⋯⋯."
아스라이 사라지는 의식 사이로 무언가가 감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 키릭.
⋯⋯
트롤의 몽둥이가 내 머리를 내리치기 직전, 나는 생전 처음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인생을 체험했다.
한심한 인생이었다.
하수구에서 태어난 고아의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검술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미궁의 탐험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미궁 3층. 나는 내 머리를 향해 떨어지는 몽둥이를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씨발."
미궁 3층에 트롤이라니.
7층에서도 보기 힘든 괴물이 뭐하러 3층에 올라왔단 말인가.
하필 내가 소속된 파티랑 마주쳤다고? 가장 처음으로?
"응? 씨발?"
트롤의 몽둥이가 내 머리, 아니. 내 온몸을 짓이기는 것을 느끼고 내 생을 끝냈다.
찰나였지만 미친 듯이 아팠다.
-키릭.
트롤의 몽둥이가 내 머리를 내리치기 직전, 나는 생전 처음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인생을 체험⋯⋯하지 않았다.
"씨발?"
뭐지?
나는 멈칫하며 앞을 바라보았다.
트롤의 내 몸통만 한 팔 근육이 당겨지는 것이 보였다.
'뭐야?'
내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트롤의 몽둥이가 내 머리, 아니. 내 온몸을 짓이기는 것을 느끼고 내 생을 끝냈다.
찰나였지만 미친 듯이 아팠다.
-키릭.
트롤의 몽둥이가 내 머리를 내리치기 직전, 나는 생전 처음 주마등이라는 것을⋯⋯.
"그만!"
나는 공포에 질려 손에 쥐고 있던 검을 떨어뜨리고 뒤를 바라보았다.
나를 미끼로 멀리 도망치고 있는 내 파티원들이 보였다.
"저 씨발럼들!"
더 말을 잇기도 전에 트롤의 몽둥이가 내 머리, 아니. 내 온몸을 짓이기는 것을 느꼈다.
찰나였지만 미친 듯이 아팠다.
-키릭.
-키릭.
-키릭.
밝아졌던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다. 비틀거리는 몸.
어느새 주저앉은 내 머리 위로 거센 바람이 불어오고.
끔찍한 고통과 함께.
-키릭.
다시 시야가 밝아진다.
다시 몽둥이가 떨어진다.
-키릭.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키릭. -키릭. -키릭.
⋯⋯
"으아아아아아!"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오른쪽을 향해 몸을 던지고 있었다.
섬뜩한 바람이 내 머리를 스쳤고, 무엇인가가 이마를 크게 긁었다.
삽시간에 흘러나오는 피가 시야를 가리기 시작했다.
트롤은 눈알만 굴려 내 위치를 찾았다.
나는 그 시선을 느끼면서도 환희에 젖었다.
"안 죽었어⋯!"
내리쳐진 채로 횡으로 휘두르는 몽둥이가 내 가슴을 강타했다.
훨훨 날아간 내 몸이 미궁의 벽에 부딪혔다.
끔찍한 고통과 함께 바닥에 털썩 떨어진다.
"끄어어어."
움푹 내려앉은 가슴과 부러진 양팔.
시야가 붉게 물들었지만 눈은 멀쩡했다.
괴물은 자신의 폭력이 빚어낸 참상을 잠깐 감상한 뒤 도망치는 놈들을 쫓아 멀어져 갔다.
"끄륵⋯ 끄르륵⋯⋯"
그 뒤, 내 끈질긴 숨은 5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다시 살아날 경우 취해야 할 다음 움직임을 미친 듯이 생각하고 있었다.
점점 정신이 멍해졌다.
그러다가, 스러졌다.
-키릭.
⋯⋯
'지금!'
시야가 회복되자마자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다.
이번에는 머리에 긁힌 상처조차 나지 않았다.
스쳐지나가는 인생 따위는 없었다.
트롤은 잠시 멈칫하더니 몽둥이를 옆으로 쓸었다.
방금 전 나를 벽으로 날려버렸던 공격이다.
나는 두 손과 두 발로 땅을 박차 몸을 뒤로 던졌다.
몽둥이가 만들어낸 무시무시한 풍압이 발끝으로 느껴졌다.
'좋아. 됐다!'
나는 뺨이 쓸리는 것도 모른 채 벌떡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얼어붙은 나를 버리고 도망가던 비겁한 놈들의 뒤통수가 보였다.
그리고 그대로 넘어졌다. 살아나기 직전 겪었던 공포에 다리에 힘이 풀렸기 때문이다.
"윽! 썅!"
나는 바로 일어나려다 오싹한 기분이 들어 잠깐 몸을 멈췄다.
내가 넘어진 머리 위로, 과장 보태 신전 기둥만 한 몽둥이가 날아갔다.
몽둥이는 도망치던 놈들의 뒤를 그대로 덮쳤다.
인간의 사지가 분해되고, 육편이 피와 함께 흩어지는 비현실적인 광경.
나는 발작적으로 일어나 달렸다.
뒤에서 쿵쿵거리는 발걸음이 들려올 때마다 내 심장이 더없이 덜컹거렸다.
시야가 흐려지고, 머리가 뜨거워졌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갈림길이 나왔다. 한 쪽은 트롤이 몽둥이를 던진 곳이고, 다른 쪽은 텅 비어있다.
'무기를 챙길 거야. 어차피 던지면 피하지도 못해.'
나는 본능적으로 판단을 마치고 몽둥이가 없는 길을 골랐다.
"그어어어!"
내 예상대로 트롤은 다 잡은 나 대신에 자신의 몽둥이가 있는 갈림길을 선택했다.
나는 그나마 벌린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필사적으로 달렸다.
하지만 비루한 체력으로 달려봤자 얼마나 달릴 수 있겠는가.
지독한 두통과 터질 것 같은 심장의 두근거림을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자 나는 길이 막혀있는 갈림길을 찾아 몸을 쑤셔 넣었다.
"커억, 커억! 쿨럭!"
안간힘을 다해 숨을 참으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숨이 흘러나왔다.
쥐꼬리만큼 남은 마나를 회전시키며 몸을 진정시켰다.
트롤의 발소리가 들려온다면 다시 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10분이 지나도 트롤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10분을 더 세고서야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휴. 살았나."
살았나가 아니다. 살아났나?
나는 두 손을 펼쳐 내려다보았다.
이제야 좀 상식적으로 생각을 이어갈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트롤에게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 아니. 꼼짝없이 죽은 순간, 나는 죽기 직전의 상황으로 돌아와있었다.
그것도 몇번이나.
"이게 말이 되는 건가?"
말이 안 됐다.
물론 나는 특성도 없고, 이렇다 할 기술조차 없는 평범한 탐험가다.
내가 죽기 직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이 설명되지 않는다.
"미치겠군."
마나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근처 지리는 빠삭해서 다행이다. 이제 몸조심해서 도시로 돌아가기만 하면⋯⋯
오크 세 마리가 내 눈앞에 있었다.
"되는게 없구나. 씨발."
손에는 검도 없고, 내 앞은 오크가 막고 있다. 뒤는 막혀있어 탈출로도 없었다.
검이 있어도 오크 세 마리를 상대하는 것은 기적이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미친 듯이 발악했지만, 오크의 창에 몸이 뚫렸고, 몽둥이에 맞아 머리가 터져나갔다.
머리에서 흐르는 피가 눈을 적셨다.
털썩 무릎을 꿇고 머리부터 앞으로 처박혔다.
죽어가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내 생각은 의외로 차분했다.
'만약, 다시 살아난다면.'
이제는 확실해지는 것이다.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내 머리에 수복할 수 없는 상흔이 새겨지고.
나는 죽었다.
-키릭.
⋯⋯
내 시야는 바위 틈에서 빠져나가기 직전의 상황에서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모든 힘을 다해 오른쪽으로 몸을 던졌고, 그대로 미궁의 벽에 머리를 부딪혔다.
"으악!"
엄청난 고통에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앞을 바라보았다.
트롤의 앞이 아니라, 오크를 만나기 전의 상황이라고?
"이게 무슨⋯⋯."
내가 부들거리는 사이 오크들이 들이닥쳤다.
"잠깐만, 잠깐만!"
머리가 어지러워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끔찍하게 죽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게,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신체와 정신의 유리.
이제 끊어지는 의식 속에서 조금은 침착해질 수 있다.
시야가 암전하고.
-키릭.
미궁의 무한회귀자 2
-키릭.
다시 내 눈높이가 달라지고, 오크의 창에 꿰뚫렸던 목도, 몽둥이에 얻어맞아 어긋났던 팔도 모두 원래대로 돌아와있었다.
지체하지 않고 틈을 빠져나오니 막 포위를 시작하려는 오크 세 마리가 보였다.
"틈!"
나는 찰나에 크게 소리 지르며 아직 엉성한 포위망을 몸으로 돌파했다.
"크워어어!"
오크가 휘두르는 몽둥이를 날렵하게 피해내고 다시 미궁 속으로 뛰어든다.
도망가는 길을 선택하는 데에 망설임은 없었다.
휴식을 취하면서 도시로 돌아가는 길은 머릿속으로 수십 번이나 되새겼기 때문이다.
'첫 번째 갈림길에서 오른쪽! 두 번째 갈림길에서 왼쪽!'
오크는 인간보다 근력이 강한 대신 지구력이 부족하다.
나를 쫓아오던 오크들은 점차 내게서 뒤처지자 추격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나는 오크가 보이지 않게 되자 달리는 속도를 늦췄다.
"또 살아났어."
나는 본능적으로 내 두 손을 펼쳐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잔뜩 까져있는 상처에 땀이 스며들어 쓰라렸다.
어쩔 수 없이 덜덜 떨리는 손을 움켜쥐었다.
온 힘을 다해 움켜쥐자 떨림이 조금 멎었다.
상처가 눌려 아팠다.
고통.
나는 이 고통 너머에 있는 또 다른 느낌을 받았다.
바로 내가 살아있다는 감각이다.
* * *
나는 1시간을 내리 걸어 미궁의 3층의 초입에 도착했다.
하도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어 잘 정비된 미궁의 통로가 보였다.
이 정도면 안심해도 되었다.
나는 벽에 몸을 기대 주저앉으며 허리춤을 뒤졌다.
본능적으로 행한 물을 찾으려는 움직임이다.
하지만 몇 번이나 확인했듯이 물은 없었다.
"목 말라 뒤지겠네."
바짝 마른 입에서 단내가 났다.
'조금만 지나면 안전지대인데⋯.'
"귀환."
[안전지대에서 귀환이 가능합니다.]
"제기랄."
긴장이 풀리니 머리가 핑핑 돌아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반쯤 정신을 잃은 채로 얼마나 지났을까.
"어?"
막 미궁의 안전 파티가 반죽음 상태가 된 나를 발견했다.
나는 간신히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봐!"
파티의 로그는 신중함을 발휘했다.
고블린이나 코볼트들이 살아있는 사람을 미끼로 함정을 파는 것은 익히 알려진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개척과 개발이 거의 다 완료된 안전지대 근처 미궁 3층에서 이런 신중함은 호들갑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은 미궁. 지나친 신중함은 오히려 탐험가의 미덕이다.
물론 내게는 아니었다.
"좆까고. 그냥 빨리 와서 물부터 좀 줘봐."
다행히도 저들은 내 싸가지 없는 말을 듣지 못했다.
쩍쩍 갈라지는 목에서는 웅얼거리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탱커를 필두로 긴장을 유지하며 내 안전을 확보한 파티가 건네주는 물을 퍼마시며, 나는 슬쩍 그들의 눈치를 살폈다.
'나름 선량해 보이는 파티다. 목숨 값을 요구하지는 않겠군.'
하기야 클라이머(Climber)나 몬스터에게 습격당하고 있던 상황도 아니고, 탈진했을 뿐 목숨이 위험한 상황도 아니었으니.
나는 필사적인 자기합리화를 마친 뒤 컥컥 기침을 내뱉고 말을 이었다.
그래도 선의를 베풀어줬으니 뭐라도 말해줘야겠다.
목숨 값과 비견될 만한 정보다.
"어이 형씨들. 오늘 사냥은 공쳤어."
"응?"
"여기에 트롤이 나타났다고. 트롤."
"뭐? 트롤이?"
딱 봐도 2위계 파티다.
4위계 없이 트롤과 대화가 되려면 숙련된 3위계 탐험가들이 있어야 했다.
내 예상대로 술렁이는 파티.
잠깐 의논을 거듭하더니 내게 말했다.
"대략적인 위치는?"
"지도 있나?"
파티의 로그가 품에서 3층의 지도를 펼쳤다.
하지만 내가 주로 활동하는 곳과 차이가 있어 내가 원하는 지역이 나타나지 않았다.
"여기가 아니라."
나는 내 지도를 꺼냈다.
나는 딜러였지만 길잡이 역할도 했기에 지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곳. 이곳에서 만났어."
"흠. 여기서 거기까지 거리가 대충⋯."
"빠른 행군으로 1시간 정도."
"지척이야. 이건 안 되겠는데."
결국 이 파티는 도시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돈 보다 목숨을 우선시한 현명한 선택이다.
나는 특유의 넉살을 발휘해 파티에 껴서 안전지대로 돌아갈 수 있었다.
"어떻게 살아났쇼? 트롤이랑은 체급이 안 맞아뵈는데."
약간의 각색을 더해 트롤에게서 도망친 경위를 설명했다.
원래라면 구사일생이라는 구절이 문자 그대로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내게 생긴 이 기이한 능력을 밝힐 수는 없었다.
"어이구. 귀 두 번 빠지셨구먼."
"하하. 덕분이지."
안전지대로 돌아가는 데에는 다시 20분 정도 걸렸다.
그동안에 전투다운 전투는 없었다.
로그가 혼자 길을 잃고 돌아다니는 고블린 한 마리의 엉덩이에 화살을 박아 넣은 것이 유일한 사냥이었다.
서로에게 빚이 있다 보니 나름 우호적으로 대화가 흘러갔다.
"동료들은?"
"몽둥이 날아갔을 때 최소 둘은 죽었고, 나머지 둘은 제대로 못 봤네요. 살아있다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그래. 일단 살아남은 것만 생각하라고.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고아라 가족이고 뭐고 없었지만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그 뒤로 나는 내게 일어난 기이한 일을 되새기기 위해 말을 끊었다.
내가 골몰히 생각에 잠기자 파티도 더는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무한 회귀. 그래. 이 특성의 이름은 무한 회귀이라고 하자.'
아직 무한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특성인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까지 하나뿐으로 알고 있던 목숨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내게 내 목숨은 마치 무한대같이 느껴졌다.
'죽음이 끝이 아닌, 기대를 할 수 있는 것이 됐다.'
그렇다고 쉽게 죽을 생각은 없지만.
죽음은 끔찍한 고통을 동반하고, 내 기억 속에는 매 죽음의 순간들이 생생했다.
'무한 회귀.'
내 새로운 특성의 이름이다.
* * *
안전지대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한목소리로 외쳤다.
"귀환!"
[미궁 1층으로 귀환하시겠습니까?]
[현재 진척도 36.8%.]
"귀환한다."
아직까지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빛무리에 휩싸여 미궁 1층으로 이동했다.
미궁 1층은 완벽히 공략된 상태.
몬스터 발생은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다.
우리는 별말 없이 천천히 걸어 도시로 복귀했다.
미궁 1층과 도시를 연결하는 계단 중간에는 '리디엠의 상흔'이 있다.
2년간 이루어진 탐사를 마친 제국 최강의 탐험가 파티의 딜러, 리디엠 올버스가 이 계단을 오르며 남긴 흉터와도 같은 벽의 틈.
나와 같은 생계형 탐험가들은 리디엠의 상흔을 보면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된다.
'돌아왔구나.' 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탐험가들에게는 오늘도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증거인 셈이다.
내 고향이자 남쪽 미궁의 입구가 있는 요새도시 칼리움.
우리는 곧 도시에 도달했다.
트롤의 몽둥이를 볼 때까지만 해도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생각됐던 태양이 내 눈에 보였다.
미궁 출입구 사무소는 언제나와 같이 북적였다.
"형씨들. 감사했습니다. 나중에 술이나 한 잔 하죠. 제가 살게요."
"그래요. 욕 봤수다."
나는 터벅터벅 걸어 귀환 수속을 진행했다.
물론 순탄하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미궁 3층에서 트롤 습격이라는 말씀이시죠?"
"정말이라구요!"
상담사는 이해할 수 없는 장황한 말을 이어갔다. 미궁 안은 제국 법에서 정한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이라느니, 긴급 상황에서는 사망한 동료의 탐험증과 목덜미를 챙겨오지 못한 위법성이 조각된다느니, 내가 소속된 파티에서 한 명의 생존자가 똑같은 증언을 하니 교차 검증이 필요하다느니⋯⋯ 응?
"저 말고 생존자가 있다고요? 제 파티에?"
"네. 지금 청취실에서 증언 청취 중입니다."
"누구에요? 마크? 밥? 콜린? 페트?"
"콜린 님입니다만."
"콜린? 하."
내가 소속된 탐험가 파티는 모두 뒷골목 출신이다.
좋게 말하면 소꿉친구, 나쁘게 말하면 패거리들이 모여 전설의 탐험가가 되자고 만든 파티다.
우리의 밥벌이 수단을 전해들은 하수구 인생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장례식은 없다⋯고 했었지."
그나마 내세울게 나이를 더 먹은 게 전부인 놈들의 말은 꼭 쓸데없는 곳에서 들어맞았다.
파티를 결성할 때 외쳤던, 명성을 떨쳐
S급 탐험가와 부와 명예를 동시에 얻겠다는 꿈은 결국 3명의 사망 신고와 함께 좌초되었다.
하지만.
'좌초된 거지. 침몰한 게 아니야.'
나는 다시 한 번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무한 회귀.
내 능력을 이용하면 부와 명예는 물론 미궁의 끝을 보는 것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고개를 푹 숙인 나를 보고 사무원이 이런저런 위로의 말을 내뱉었다.
나는 무한 회귀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사실대로 증언한 뒤 청취실에 반쯤 구금되었다.
"세 사람의 흔적을 찾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는 조치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뭐, 어쩔 수 없지요."
탐험가는 본인의 오른쪽 목덜미에 탐험가를 증명하는 문신을 새긴다.
일종의 신분증 개념으로, 동료가 죽었을 시에는 신분패와 함께 목덜미를 같이 가져가야 한다.
그래야 사망 확인이 되기 때문이다.
문신은 마법적 도구로도 기능하여 문신을 분석하여 사인이나 사망까지의 경위를 판단할 수도 있다고 한다.
사실 나도 잘 모른다. 그냥 그렇게 들었을 뿐.
나는 계속된 조사 후에 콜린과 마주할 수 있었다.
눈이 퀭하게 죽은 콜린은 트롤과 마주치기 전과 후에 엄청난 차이가 났다.
"얌마!"
"루카스. 살아있었구나."
"그래 임마. 너라도 살아서 다행이다. 나머지는?"
"다 죽었어."
"그러냐."
어쩌면 나를 미끼로 삼고 도망친 콜린에게 화를 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실 내가 저 녀석 입장이라도 똑같이 버리고 도망갔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 말도 없자 지레 겁먹은 콜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야. 미안하다. 버리고 가서."
"응? 괜찮아. 어떻게든 살아났잖아."
"고맙다."
침을 꿀꺽 삼킨 콜린이 말을 이었다.
"트롤이 거기서 몽둥이를 내려치지 않고 던질 줄은 몰랐어."
콜린은 도망치는 데에 바빠서 내가 몽둥이를 피하는 장면조차 목격하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선선히 콜린의 착각을 인정해 주었다.
"마크, 밥, 페트. 녀석들은 몽둥이 한 방에 모두 죽었어."
"그래."
이 말을 끝으로 고개를 푹 숙인 콜린이 점차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도 차오르는 눈물을 느끼며 친구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다음 날.
트롤의 타액으로 점철된 녀석들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나와 콜린의 혐의가 완전히 풀리게 되었다.
우리는 미궁 운영 사무소에서 지급해 준 보상금 5실버와 함께 칼리움의 거리로 나왔다.
우리의 쉼터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콜린이 걸음을 멈췄다.
나는 몇 걸음 더 걷다가 콜린이 따라 걷지 않는 것을 알고 멈췄다.
뒤를 돌아보기 콜린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루카스. 나 탐험가 못하겠다. 그냥 막일이나 하련다."
"⋯⋯그래."
콜린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풀어 내게 건넸다.
"맨날 검 바꾸자고 했었지? 너 가져."
"응."
"먼저 가. 난 좀 앉아있다가 갈 테니까."
어쩌면 콜린은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미궁은 내려갈 수 있는 깊이만큼 어둡고, 미지에 휩싸여 있다.
시체라도 확인한 마크, 밥, 페트가 그나마 운이 좋은 거다.
대부분의 시체는 몬스터와 미궁의 밥이 되어 뼛조각 하나도 찾지 못하고, 영구 실종 처리되어 평생 햇빛을 보지 못한다.
"루카스 너는⋯⋯ 어떻게 할래?"
"나는, 크흠. 조금 더 해보려고. 마침 도전하고 싶은 곳도 있고."
"도전? 무슨?"
"켈리어의 시련."
내 대답을 듣고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콜린이 헛웃음을 켰다.
"그래. 네가 날 웃게 해주는구나. 고맙다."
녀석이 웃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만큼 말도 안 되는 개소리였기 때문이다.
켈리어의 시련.
대마법사이자 대검호인 켈리어가 무슨 이유인지 미궁 도시들마다 자신의 인조 영혼을 남겨두었다.
도시 한구석에 존재하는 켈리어의 별장에 들어가 인조 영혼의 시험에 통과하면 자신에게 꼭 맞는 기술과 영약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마냥 좋아 보이지만 매년 켈리어의 시험에 도전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도전에 실패하는 대가가 죽음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걸린 시험을 대충 준비할 사람들은 없다.
시험에 통과할 정도면 이미 기술이 확립된 상태이고, 영약도 크게 메리트가 없다.
'심지어 3위계 끝자락의 전사가 통과에 실패한 적도 있으니까.'
고작 2위계인 내가 도전하기에는 큰 결심이 필요한 것이 바로 켈리어의 시련이었다.
하지만 나는 진지하게 시련에 도전하고자 한다.
'무한 회귀. 내 목숨으로 다시 한번 시험해 보는 수밖에 없어.'
이미 죽어본 목숨. 도전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만약 정말로 죽어버리면?
"⋯⋯."
특성이 사용 횟수가 정해져있다는 말을 못 들어봤으니 문제는 없지 않을까?
검증해 볼 수도 없고.
나는 그쯤 생각을 그만두었다.
이미 끝났다고 생각한 목숨이다. 만약 죽으면 아까운 일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다.
'그게 되겠냐마는.'
그렇게 나는 너무나도 무모한 일생일대의 도전을 할 결심을 했다.
내가 가진 능력의 진정한 가능성을 시험해 볼 순간이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3
켈리어의 시련은 미궁 도시 칼리움 내 귀족 거리에 있는 파르밀 가의 저택에서 이루어진다.
켈리어의 후손에 의해 엄중히 관리되는 저택은 나와 같은 무지렁이들에게는 오로지 시련에 도전할 때만 개방된다.
시련을 치르는, 소위 '죽으러 가는 멍청이'는 매년 30명가량 있고, 파르밀 가는 매년 그 정도 숫자의 장례식을 치른다.
쇠뿔도 단 김에 빼라고 했다.
나는 콜린을 먼저 보내고 혈혈단신으로 파르밀 가의 저택 앞에 섰다.
제국 공신의 저택은 비록 제국의 수도와 한참 떨어진 별장 같은 곳이라도 철저한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저택의 경비병이 설마 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 설마였다.
"시련에 도전하기 위해 왔습니다."
경비병의 표정이 살짝 경직되더니 풀어졌다.
"이름은?"
"루카스입니다. 성은 없습니다."
"평민이겠군. 미궁 탐험가인가?"
내 끄덕임을 본 경비병은 정해진 대사를 읊듯
내 신상을 캐물었다.
마지막 질문이 이러했다.
"본인의 의지인가?"
"네?"
"본인의 의지인지 물었다."
"맞습니다."
내 행색을 본 경비병이 한숨을 숨긴 헛숨을 들이켰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경비병에 대한 평가를 한층 더 높였다.
콧방귀나 손짓, 비웃음을 당하지 않은 게 어디인가.
동네 상인들에게도 그런 취급을 당했던 나에게는 이 정도의 반응도 그냥저냥 받아들일만했다.
그 와중 먼저 보고를 위해 들어간 경비병이 돌아왔다.
"들어와라."
나 같은 하류층 인생에게는 절대로 열리지 않을 저택의 문이 열렸다.
꿈에 그린 듯 아늑한 저택이었다.
이름 모를 나무와 덤불들이 잘 포장된 길을 따라 오와 열을 맞춰 정렬되어 있고, 심지어 중앙광장에서도 운용 비용 문제로 정해진 시간에만 작동하는 분수가 손님 하나 없을 이 시간에도 물을 펑펑 쏟아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다른 세계였다.
멍 때리는 것도 잠시, 경비병의 안내를 받아 본관이라고 부르는 곳에 도착했다.
문 입구에는 서글서글한 인상의 청년이 웃는 낯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루카스 님. 환영합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스스럼없이 내 꼬질꼬질한 손을 잡고 자신을 에릭 파르밀이라 소개하는 청년.
잠깐, 파르밀?
나는 얼른 무릎을 꿇었다.
"어이쿠! 나리. 귀한 분께서 어찌."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내가 이렇게 오버하지 않더라도 딱히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세상살이 어차피 눈치다 눈치.
일부러 저자세로 나오는데 대놓고 엿을 먹일 비정상인은 많지 않다.
에릭은 다행히 정상인의 범주에 들어갔다.
"아닙니다. 선조께서 내리신 시련에 도전하시는 분께 어찌 귀족의 지위를 내세우겠습니까."
"보다 편하게 부르셔도 됩니다."
"하하. 괜찮습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분들께 이렇게 대해왔으니 특별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다만?"
"이곳에 들어오시면, 확정입니다."
"확정?"
주어를 뚝뚝 끊는 귀족의 화법에 도저히 적응이 안 됐다.
내 얼빠진 질문에도 에릭은 전혀 귀찮아하는 낯 없이 대답했다.
"시련에 대한 도전입니다. 이곳에서 시련을 들먹이며 파르밀 가의 용역을 제공받으시게 될 경우 어떠한 일이 있어도 도전을 취소하실 수 없게 되는 겁니다."
"⋯⋯."
에밀이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이 와중 은근히 드러난 입가의 비틀림은 내가 익히 알던 귀족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도전하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하하. 그러면 들어오시죠."
금세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본관 안으로 들이는 에릭.
그 미소를 본 나는 에릭에 대한 평가를 재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정하겠다. 비정상인이다.
저택의 본관은 외관만큼이나 내부도 훌륭했다.
시립해있는 메이드들은 절도 있었고, 그 끝에서 고개를 숙인 시종장도 특유의 중후함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생각을 이어가고 있을 때 메이드가 공손하게 나를 접대실로 안내했다.
홍차 한 잔과 함께 덩그러니 앉아 있자 잠깐 "실례합니다."라고 중얼거린 메이드가 두 손으로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들어 올렸다?
"억?"
"가만히 계세요."
갑작스러운 사태에 사지를 발버둥 치며 저항했지만 흐느적거리기만 할 뿐 전혀 벗어날 수 없었다.
내 마나를 부드럽게 밀어내는 메이드의 마나 운용을 느끼며 깨달았다.
'3위계!'
3위계는 일반적으로 평범한 인간이 고된 수련을 통해 이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라 일컬어진다.
그런데 고작 메이드가 3위계라고?
'과연 제국 공신 가문!'
나는 그즈음 저항을 포기하고 메이드들이 내 몸을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
"읏!"
"⋯⋯이상한 소리 내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잠깐 사이에 나는 몸이 말끔히 씻겨지고, 면도와 이발이 완료됐으며, 생전 처음 보는 옷으로 갈아 입혀진 후에, 에릭 파르밀과 겸상하여 식사하고 있었다.
응?
나는 고기를 씹으며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너무나도 일이 급하게 진행되어 생각 자체를 할 틈이 없었다.
대신 음식에 집중하기로 했다.
지금 먹는 고기는 소고기였는데 생전 처음 먹어보는 부위였다.
하수구에서 주워 먹던 손질 후 남은 소고기 지방보다 훨씬 두꺼웠는데 부드럽기는 어찌나 또 부드러운지.
더군다나 접시가 비워질 때마다 조금씩 채워지는 걸 보니 계속해서 만들고 있는 모양이다.
이어지는 레드 와인 한 잔까지.
"크!"
이게 바로 호강이구나 싶었다.
여태까지 천천히 식사를 하며 나를 지켜보고 있던 에릭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루카스 님. 시련을 위해 따로 준비해오신 게 있으신가요?"
나는 입 한가득 물고 있던 소고기를 와인으로 꿀떡 삼켜 넘긴 뒤 에릭을 바라보았다.
귀족의 눈이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대충 대답하면 안 되겠군.'
그렇다고 무한 회귀를 드러낼 수도 없으니 적당한 답을 찾아야겠다.
"음, 기합으로 어떻게 되지 않을까요?"
"기합?"
"넵!"
"⋯⋯."
잠깐 우리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흐르고 있을 때, 식당의 문이 열리고 거한이 들어왔다.
도복이 더 어울리는 외관인데, 입은 옷은 나와 같은 정복이었다.
"오. 코리손 님. 오셨군요."
"음. 에릭. 오늘은 처음 뵙습니다."
에릭은 식기를 놓고 자리에 일어나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코리손이라는 인물이 범상한 인물이 아닌 모양이다.
코리손을 위해 순식간에 세팅된 식기와 음식들.
코리손이 자리에 앉기 전에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이 사람은?"
"아. 루카스 님, 인사하시죠. 렐드 남작가의 사남이신 코리손 렐드 님입니다. 루카스 님보다 먼저 시련에 도전하실 분이죠."
나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난 자세 그대로 코리손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 안녕하십니까. 루카스라고 합니다."
"가문은?"
"성은 없습니다."
"2위계인가?"
"그렇습니다만."
"특성은?"
"딱히⋯⋯."
"흥!"
코리손은 콧방귀를 뀌고 그대로 식사를 시작했다.
내 눈길을 외면하는 꼴을 보아하니 나와 말도 섞기 싫다는 투다.
"하하. 내일 시련으로의 도전을 앞두고 있어 코리손 님의 신경이 꽤나 예민하신 모양이군요. 루카스 님이 이해해 주시길."
"시련 따위. 바로 통과해 아버님께 제 위용을 자랑하겠습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코리손은 덩치와 면상에 맞지 않는 귀족적인 손놀림으로 고기를 자르고 입에 집어넣었다.
나도 더이상 코리손을 신경 쓰지 않고 다시 리필된 소고기와 리조또를 퍼먹었다.
보기와 다르게 소식한 코리손이 먼저 일어나고, 에릭과 내가 남았다.
나는 소고기를 먹다 말고 살짝 눈치를 보았다.
"먼저 들어가셔도 됩니다. 저는 조금 더 먹고 들어갈 생각이라."
"어찌 손님을 두고 먼저 일어나겠습니까. 저도 한 식탐하는 사람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까부터 15분째 빵 한 조각 안 먹은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나는 결국 쩝쩝거리며 식기를 손에서 놓을 수밖에 없었다.
막 화이트와인을 마시려는데 에릭이 내게 말을 걸었다.
"루카스 님."
"네? 아. 저녁은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코리손 님이 무례하게 대하신 점은 대신 사과하겠습니다. 원체 다혈질이신 분이라."
"하하. 괜찮습니다."
"따로 화가 나시지는 않으십니까?"
나는 이쯤에서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비록 출신은 하수구지만 뒷골목 출신이기에 느낄 수 있는 감이 있다.
'내게 뭔가 바라고 있군.'
화난 척이라도 해야 하나?
설마 싸움을 붙이는 건 아니겠지?
숟가락으로 꾹 누르면 튕겨져 나오는 푸딩을 한 입에 먹으며 대답했다.
"귀족 나으리께서 저 같은 걸 무시할 수도 있죠."
"그렇군요."
에릭이 살짝 고개를 숙인 사이 과일 세 종류를 연달아 집어먹었다.
사과와 포도, 그리고 초록색 과일이었다. 마치 그물과도 같은 껍질이 장식처럼 달려있었는데 이름이 멜론이랬나?
나는 얼른 껍질을 벗겨내고 입에 가득 물었다.
"루카스 님."
"읍. 예."
"코리손 님이 시련에 도전하시는 걸 참관하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자연스럽게 방울토마토를 한 움큼 집어먹은 후에 답했다.
참관?
"뭐, 네. 알겠습니다. 제가 바로 도전할 예정이기도 하니까. 미리 정보를 알 수 있다면 좋죠."
그 대답을 듣자 영 좋지 않아 보였던 에릭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감사하긴요. 제가 더 감사드려야죠. 이렇게 귀빈 대접을 해주시니 감개무량할 뿐입니다."
어디선가 주워들었던 고급진 대사를 읊었지만 에릭은 별 반응이 없었다.
아주 잘 익은 복숭아 한 알을 끝으로 내 인생 최고의 식사가 끝났다.
"그러면 식사도 다 마쳤으니 저는 일어나 보겠습니다. 잠자리는 준비가 되어있으니 부디."
"넵."
그 뒤로 다시 목욕도 하고, 잠옷으로 갈아 입혀지고 잠도 잘 잤다.
코리손의 시련 도전? 좋은 구경이 될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요란한 행사, 격려와 환호 속에 저택 지하실의 문을 열고 들어간 코리손이 30분 만에 시체가 되어 튀어나왔다.
나도 모르게 새된 비명이 튀어나왔다.
"끼야아아아악!"
하지만 에릭도, 메이드도, 시종장도 당연한 결과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시체를 가지런히 정리했다.
"⋯⋯."
코리손의 시체는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목에 크게 베여 몸과 간당간당하게 붙어있고, 사지가 기괴하게 꺾였으며, 뱃가죽 아래에 있어야 할 내장이 모두 사라져있었다.
나는 천천히 내팽개쳐진 시체를 향해 다가갔다.
끔찍한 참사.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끔찍한 꼴은, 죽은 뒤에 당하는 거겠죠?"
"네?"
내게는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4
나는 허둥지둥 달려가 코리손의 팔을 살펴보았다.
"팔 보세요. 원래 살아있을 때 칼 맞으면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올려서 상처가 생기는데, 여기 코리손 씨의 상처는 그런게 없단 말입니다? 즉 이 훼손은 죽고 나서 이루어졌단 말이죠!"
"⋯⋯그렇군요."
내 대단한 발견에 대한 에릭의 감상이었다.
평소의 포커페이스가 무너진 얼굴에는 나를 무슨 괴상한 생명체로 보는 일면이 드러나있었다.
나는 코리손의 피가 묻은 손을 허벅지에 붙어있는 바지의 나풀거리는 부분에 슥슥 닦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편하게 할 수 있겠어."
"루카스 님."
"네?"
"이런 의심을 말하는 게 실례인 줄은 압니다만 그러지 않을 수가 없군요. 혹시 시련의 도전을, 편리한 자살법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닙니까?"
"아뇨? 진지하게 도전하고 있습니다만."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 이후 내게는 죽음이 끝이 아니게 되었다.
아니, 아니게 되었다고 믿는다.
새로운 삶에 대한 확신을 위해서는 죽음을 도구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차피 이대로 비루한 삶을 살 바에는 죽음을 딛고 올라가 최고에 도전하리라.
미궁의 끝을 보리라.
'나는 죽지 않는다.'
도전에 실패하면 죽는다는 켈리어의 시련은 나에게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선택이다.
죽지 않으면 성공하니까.
죽지 않는 나에게는 성공밖에 답이 없는 셈이다.
편리한 자살법? 하늘에 맹세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죽을 생각이 없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완전한 죽음이라는 단어를 선택지에 넣을 생각이 없다.
"저는 반드시 시련에서 살아남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겁니다."
"⋯⋯저도 물론 그러기를 바랍니다. 루카스 님의 시련으로의 도전은 내일, 코리손 님이 들어간 이 시간입니다."
이후 점심을 같이 먹으며 코리손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나눴다.
나는 잘 구워진 애플파이를 우걱우걱 먹었다.
"코리손 님은 귀족가의 사남이었습니다. 평민이신 루카스 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코리손 님이 시련에 도전하시게 된 사유는 조금 복잡합니다."
나는 입을 쓰윽 훔치고 오물거리며 답했다.
"대충은 압니다. 뒷골목에서도 첫째만 잘 챙겨주고 둘째부터는 동냥을 시키기 마련이죠. 그게 귀족적으로 이루어진 모양입니다?"
"⋯⋯맞습니다."
"사람 사는 곳 어디가나 똑같다더니."
"흠흠. 젊은 나이에 3위계에 도달한 코리손 님은 자신감이 넘쳤고, 자신의 위명을 떨칠 야망이 가득했습니다."
물론 미궁 탐험가로 명성을 드높이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직 무(武)로 계승 남작의 위를 얻어낸 렐드 남작가의 기준에 맞는 수준은 '미궁 탐험가의 성공'이란 단어로는 부족한 면이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켈리어의 시련이었다.
코리손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도박을 감행했고, 모든 도박이 그렇듯이 리스크의 대가는 참혹했다.
"덕분에 렐드가의 계승 경쟁은 첫째로 굳어졌군요. 이남, 삼남은 경쟁에서 배제된 지 오래니."
딱히 무재(武才)가 없는 두 아들과 달리 첫째는 이미 완숙한 3위계의 경지에 도달한 상황이라고 했다.
그 자리를 위협하던 사남이 죽었으니 더 이상 첫째의 지위를 방해할 요소는 없는 셈이다.
역시 귀족 가문의 암투는 복잡하고 음울하다.
그 일면을 증명하듯 도시의 하수구에서는 잊었다 하면 시체가 떠내려온다.
일단 건진 뒤 품을 뒤지는데, 이 사업이 꽤나 쏠쏠할 때가 많았다.
기본적으로 입고 있는 옷이 비쌌고, 검을 차고 있는 시체들도 더러 있었다.
정말 가끔씩은 금과 보석으로 만든 장신구들이 발견되기도 한다.
'그때는 하수구에 잠깐 피바람이 불지만.'
보나 마나 암투에 진 귀족들의 시체일 것이라는 생각이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느낌이다.
하기야 이렇게 흔적을 알아서 지워주는 하류층 인생들이 있으니 시체를 처리하기 얼마나 편하겠나.
뭐, 미궁 탐험가로 먹고사는 나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일이다.
"내일 시련, 꼭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루카스 님에게 거는 기대가 큽니다."
"넵."
되는대로 대답을 주워삼긴 뒤 이제 마음 놓고 식사를 이어갔다.
홍차와 함께하는 티타임에는 에릭이 시련에 대한 정보를 읊어줬다.
"켈리어 님께서는 미궁에서 발견한 아티팩트를 사용해 인조 영혼들을 만드셨죠."
"여기. 칼리움에서 제가 관리하는 인조 영혼은 무술의 시험을, 북쪽의 나디움에서 관리되고 있는 인조 영혼은 마법의 시험을 맡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2, 3위계 도전자들 중 시험에 통과한 사람은 10명 이하입니다. 루카스 님의 의욕을 위해 도전자의 총 숫자를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인조 영혼의 유지를 위해, 도전자가 사망할 경우 도전자의 영혼은 인조영혼의 동력원으로 사용됩니다."
"에? 뭐라고?"
이게 뭔 개뼉다구 같은 소리인가?
내 영혼이 뭐?
"아. 걱정하실 수도 있는데, 잡아먹는다는 게 아닙니다. 영혼에 잠재된 힘을 가져가고, 영혼 자체는 성불하게 되니까요."
"그런가요?"
"네. 그리고 어차피 루카스 님은 시련을 통과할 생각이시니, 실패했을 때의 일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알면 알수록 저 에릭이란 놈. 정상이 아니다.
눈치를 보아하니 이 새끼. 코리손에게는 영혼에 관한 이야기 절대로 안 했다.
"그러면 이제 저는 물러나겠습니다. 내일 아침까지 저는 저택을 나가있을 예정이니, 심신의 수련을 하며 하루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필요하신 것들이 있으시다면 메이드에게."
"네 알겠습니다."
나는 그날 저녁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내 방에서 명상을 하며 보냈다.
무한 회귀.
내가 임의로 붙인 내 특성의 이름이다.
사실 특성인지도 잘 모르겠다.
특성의 발동은 일반적으로 정신력의 소모를 야기하는데, 나는 어제 하루 수십 번을 죽고 살아났음에도 이렇다 할 정신력의 소모가 없었다.
'아닌가?'
미궁 2층에 올라왔을 때, 목이 마르기는 했지만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정신줄을 잠깐 놓은 채로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정신력의 소모?'
만약 그렇다고 가정한다면 무한 회귀에는 사용 횟수가 정해져있을지도 모른다.
무한 회귀라는 단어도 내가 지어냈을 뿐.
확실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걸 감안하지 못했어."
검증이 필요하다.
사실 진작부터 이 가능성을 생각했어야 했다.
항상 이 멍청한 머리는 위험이 닥쳤을 때 돌아가는 것이 문제다.
하지만 검증을 위해서는 죽어야 하는데, 자연스럽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더군다나 시련을 위해 파르밀 가의 저택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상황이다.
방법의 제한이 많을 수밖에 없다.
당장 생각나는 건 칼로 자살하는 법이지만, 그렇게 끔찍하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해도 죽음은 엄청난 고통과 스트레스를 동반한다.
"으으. 명상에 집중할 수가 없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 검을 뽑아들었다.
'심장을 찔러도, 목을 찔러도 3분은 걸릴 거야.'
그래도 심장이 낫겠지?
나는 심장을 향해 검을 들었다.
마나를 듬뿍 넣고, 찔러 넣으면 된다.
하지만 다가올 고통을 이미 학습해버린 몸이 어찌할 바 없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래. 그냥 시련에 들어가자! 미친 짓거리 하지 말고. 어쩌면 죽지 않고, 죽어도 적당히 죽고 통과할 수 있을지 누가 알아?'
한심한 수준의 자기 합리화로 결국 검을 내려놓으려고 했다.
내 두 팔이 잘려나갔다.
"어?"
뎅그렁 떨어지는 칼과 털썩 떨어지는 팔들이 내는 불협화음.
몸을 순환해야 하는 피가 길을 찾지 못해 바깥공기와의 접촉을 시도했다.
진득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내 생명이 길을 잃었다.
"으, 으아아아아아!"
나는 뒤로 나자빠지며 팔을 마구 휘둘렀다.
순식간에 온몸이 피범벅이 되었다.
내 시선에 한 남자가 자리 잡았다.
분명 오늘 자리를 비운다고 말했던 에릭 파르밀이었다.
에릭은 특유의 웃는 낯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런. 분명 시련에 도전하시겠다고 하시더니. 왜 심장에 검을 대고 있으셨을까?"
"으악! 으아아아!"
나는 버둥거리며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끔찍한 고통에 말을 잇지 못하자 에릭이 벽에 걸려있던 창을 뽑아 내 오른쪽 어깨를 꿰었다.
"질 나쁜 영혼을 대접하겠군."
"제발! 제발!"
피를 흩뿌리며 끌려간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의식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과다출혈로 시야가 희미해지고 있었다.
이내 시련을 치러야 하는 저택의 지하실 입구까지 끌려간 내가 안으로 던져졌다.
"루카스 님."
"으으? 어째서⋯"
"어째서? 이유가 궁금하신 겁니까."
나는 처절하게 답을 구했다.
만약 내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이 대답은 중요한 정보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 발언에 뒤이은 에릭의 말은 너무나 폭력적이었다.
"그러면 씨발 너라면 안 죽이겠냐!"
"!"
"도전한다 뭐다 해놓고 막상 죽을 것 같으니까 무섭지? 그래. 네가 뭘 하든 뭐라 안 해. 그런데 그건 안 되지. 무서워서 뒤지려고 들어?"
"!!"
"대답 안 하냐? 대답. 대답!"
"으."
"필요 없어!"
미친 새끼!
에릭의 발차기가 내 명치에 틀어박혔고, 나는 데굴데굴 굴러 지하실 구석에 처박혔다.
에릭은 상큼한 미소를 지은 뒤 지하실의 문을 닫았다.
한 점의 빛도 없는 철저한 암흑이 나를 맞이했다.
이제는 쏟을 피도 없어 멈춘 출혈 속에서 의식이 점차 흐려져갔다.
무언가가 내게 다가온다고 느껴졌을 때, 생각이 멈췄다.
공기가 차가웠고, 달뜬 마지막 숨은 뜨거웠다.
짧은 주마등마저 끊긴 정신의 낙하에는 어떠한 감각도 없었다.
죽음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익숙해진 소리가 내 귀를 스쳤다.
-키릭.
미궁의 무한회귀자 5
준비되지 못한 순간에 생긴 시야의 변동은 마치 멀미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메스꺼움보다도 내 몸을 사로잡은 것은 환희와 자신감이다.
또 살아났다!
나는 검을 들고 내 심장을 찌르려는 자세를 하고 있었다.
"⋯⋯."
가만히 생각해 보자.
내 기억이 맞는다면 단 몇 초 뒤, 어디선가 나타난 에릭 파르밀에 의해 내 양팔이 잘려나간다.
그 공격은 명문가 검술의 오의를 담고 있다.
내 실력으로는 팔이 잘리고 나서야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다.
절대로 그 고통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내 머리가 미친 듯이 굴러갔다.
그렇게 내린 결론은 하나다.
나는 천천히 검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에릭 님. 제가 이렇게 자살이라도 할 것 같습니까?"
내 허세에 한쪽 구석에서 미묘한 마나의 일렁거림이 느껴졌다.
찾았다.
천천히 검을 바로잡으며 자연스럽게 그 방향을 향해 몸을 틀었다.
분명 기척이 느껴졌지만 저곳에 사람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고도의 기술이다.'
'기술'.
후천적으로 갈고닦아 완성되는 능력.
아마 저 은신 능력은 파르밀 가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기술이리라. 물론 특성일 수도 있고.
나는 내가 다시 기척을 숨긴 에릭을 찾지 못할 것을 깨닫자마자 자연스레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몸을 돌렸다.
지금 에릭의 시선으로는 내 등만 보일 터다.
여유로운 것처럼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니 그렇게 깊은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시선을 보아하니 제 양팔이라도 베어내고 싶어 하시는 것 같은데."
정확히 사실을 근거로 한 발언이다.
다시 주춤거리는 마나가 느껴졌다.
신경을 잔뜩 곧추세운 내 마나의 공간 속에서 에릭이 눈 깜짝할 사이에 스며들었다.
'내가 마나로 진작에 확보해놨던 공간에 이목을 속이고 잠복해있었다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방 한구석에서 모습을 드러낸 에릭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불신이 가득 차 있다.
여기서는 망설이면 안 된다.
그대로 밀어붙여야 한다.
"어떻게 아셨죠?"
"그거야 물론⋯⋯."
"루카스 님. 저를 속일 생각은 마십시오. 방금 전까지 당신은 분명 제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당신의 기도가 일변했고, 제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깨달으셨죠."
"⋯⋯."
"저는 루카스 님의 지금까지의 행동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수많은 도전자를 겪어본 제 눈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에릭 님. 당신은 속았습니다. 저는 에릭 님이 보는 것만큼 어수룩한 사람이 아닙니다."
당당하게! 당당하게!
에릭이 당황했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계획도 없이 멍청하게 저택을 찾아온 바보 같은 경솔함이, 예법 하나도 따라 할 생각 없이 밥이나 쳐먹는 식충이 같은 행동이, 명상한답시고 잡생각에 빠지는 머저리 같은 시간 낭비가 모두 거짓이었다는 겁니까? 제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렇습니다. 감시를 도저히 풀지 않으니 집중할 수가 없어서요."
"그러면 지금 자해를 연출한 행동은 어떤 의미가?"
"음. 크흠. 그건⋯⋯ 에릭 님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죠."
"반응?"
내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에⋯릭 님께서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몰랐기에 어떻게 나오나 보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행동하실 줄은 몰랐지만."
"⋯⋯저는 아직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 네. 그렇죠. 그래도 제가 위협을 느꼈으니까요."
"그렇군요."
한참 동안 서서 고민하던 에릭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제가 시련의 도전자들을 봐오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한 편견이 박혀버렸나 봅니다. 무례에 사과드립니다."
나는 살짝 목례하는 에릭에게 손사래쳤다.
"아닙니다! 그동안 제가 너무 바보같이 행동했나 보군요. 에릭 님이 도를 넘은 의심을 하게 만들다니."
"네. 너무나도 병신 같은 행동이라 저 조차도 깜빡 속아넘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
"그래도 다행입니다. 루카스 님에게 제공한 파르밀 가의 용역은 헛된 것이 아니었군요."
그 뒤로 잠깐의 사과와 겸양의 말이 오간 뒤에야 에릭은 내 방을 나섰다.
"지금부터 시련 도전 전까지, 어떠한 형태의 감시라도 사양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실례했습니다."
문이 닫히고 나서 한참을 문고리를 바라보았다.
이내 긴장이 풀린 나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됐다."
'됐다'라는 내 혼잣말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었다.
첫 번째는 어떻게든 에릭을 속여넘겨 죽음의 위기를 회피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바로.
'무한 회귀.'
또 회귀하고 말았다.
비록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죽음이었지만 어쨌든 살아났다.
비록 발밑이 개똥으로 가득 찼다고 해도 이승이 최고다.
나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간격을 두고 살아나 이승으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네 번, 열 번도 있을 법했다. 이미 죽은 횟수로는 두 자릿수를 넘어섰다.
"좋았어. 이대로 가자."
켈리어의 시련이 뭐가 됐든, 몇십 번 죽어서 통과하지 못할 것은 아닐 거라 확신한다.
실제로 공인된 통과자들이 나오기도 했고.
에릭도 2위계 중에 합격자가 있다고 했다.
나는 누구보다 유리한 조건에 서있다.
'켈리어의 시련. 도전해주마!'
다시 명상을 이어가려 했지만 최근에 있었던 죽음에 따른 스트레스, 에릭과의 심리전에 따른 피로가 너무나도 심했다.
나는 옷을 휙휙 벗어 의자에 대충 걸쳐놓은 뒤 낮잠을 자기 시작했다.
그 뒤 메이드가 저녁 시간에 맞춰 나를 깨웠고, 나를 위해 차려진 저녁을 게걸스럽게 먹었다.
내가 돼지처럼 퍼먹는 모습을 봐도 에릭은 싱글벙글이었다.
굳이 저 착각을 수정해 줄 필요는 없다.
전혀 개의치 않고 방으로 돌아와 따뜻한 물로 목욕까지 마친 뒤 잠자리에 들었다.
* * *
에릭 파르밀은 집무실에 돌아와 책상에 앉았다.
초에 불을 붙이고 일렁이는 불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루카스.'
정말 죽여버리려고 했었다.
온몸을 부들거리며 자신의 심장을 찌르려고 하는 모습이 꼴사납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살심을 품으려던 찰나에 루카스의 기세가 변했다.
망설임에서 호기심으로.
그야말로 극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그 뒤에 이어진 행동들은 에릭의 상식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팔을 노릴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예언의 특성을 가지고 있나?'
아니다.
예언의 특성이 그렇게 극소의 범위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
근 한 세기 내 최고의 예언 특성 보유자로 대접받던 유르질.
그녀가 길거리에서 만난 꼬마 아이의 부탁으로 내일의 날씨를 구체적으로 예언하고 반동으로 사망한 사건은 유명하다.
'살기감지?'
그럴 리가 없다.
식사 시간에 일부러 살기를 드러냈을 때에도 루카스에게서는 어떠한 외적, 내적인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왜 지금은?'
에릭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책을 덮듯 고민을 물렸다.
답을 알 수 없는 문제와 씨름하는 것만큼 무익한 일도 없었다.
대신 허리춤에 걸려있는 검을 풀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루카스⋯."
어차피 내일 결과를 알 수 있을 일이다.
에릭은 이마에 팔을 걸친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다음 날, 어제와 같이 시련에 도전하는 도전자를 위한 의식이 시행되었다.
어제와 다른 점은 코리손이 있던 위치에 내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관람자가 열 명 정도 적다는 사실이다.
어제는 렐드가에서 방문한 여섯 명, 칼리움 시청에서 방문한 네 명이 의식을 참관했다.
하지만 내 의식에는 그중 아무도 오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귀족과 하수구 출신의 고아의 목숨값은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칼리움 시청의 담당자는 분명 에릭을 통해 내가 시련에 참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방문하지 않았다.
내가 지금까지 겪어본 공무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오. 선조시여. 이곳에 용기를 가지고 당신에게 도전하는 젊은이⋯⋯"
멍 때리며 에릭의 구구절절을 들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니 어느새 나는 저택의 지하실 문 앞에 서 있었다.
"⋯⋯."
바닥을 쓰윽 훑어보니 아직 어제 흘렀던 코리손의 피가 남긴 흔적이 보였다.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옆에서 에릭이 미심쩍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았지만, 한 번 시작된 긴장은 멈출 줄을 몰랐다.
내가 가만히 핏자국이 아로새겨진 바닥을 바라보고만 있자 에릭이 내게 다가왔다.
"루카스 님?"
"네?"
"도전하셔야 할 시간입니다."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쉰 뒤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다.
어차피 안 들어가겠다고 발악해 봤자 죽을 것이 뻔하다.
바로 내 옆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 남자에 의해서.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은, 죽음으로 가득하구나.'
아니, 내가 죽음을 찾아가고 있는 건가?
이미 엎질러진 물.
나는 허리에 찬 검을 매만진 다음 천천히 열리는 지하실의 문 안으로 몸을 던졌다.
"헉! 헉!"
서늘해지는 몸.
지하실의 문이 닫히자 오직 암흑만이 나를 맞이했다.
더불어 몸이 약간 짓눌리는 느낌이 났다.
"?"
정신에 작용하는 기묘한 압박을 느꼈다.
나는 이 느낌과 가장 유사한 경험을 이미 해본 적이 있다.
"마치, 미궁에 들어온 듯과 같은 감각."
미궁의 층을 내려갈 때마다 몸에 기본적인 부담이 조금씩 더해진다.
어떤 사람은 그저 심리적인 압박감이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미궁 자체에서 칩입자를 거부하는 작용이라고도 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부담은 모든 탐험가에게 예외 없이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작용이 이곳에서 나타난다?
"그러면 이 장소는 미궁과 같은 종류의?"
[보기보다 감이 좋은 도전자구나.]
"힉!"
[감지 면에서는 좋지 않군.]
"뭐, 뭐?"
소리, 아니 울림이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사지를 축 늘어뜨린 채 서있는 목각인형이 보였다.
[그래. 여기다.]
"당신이, 켈리어?"
[질문은 자신을 증명한 뒤에 받지. 검을 들어라.]
"뭐?"
[세 번 말하지 않는다. 검을 들어라.]
나는 목각인형을 바라보며 검을 뽑아 올렸다.
목각인형이 관절을 덜컹 움직이더니 낡아빠진 검을 들어 올렸다.
[2위계구나. 그러면 세 번 공격하겠다. 피하거나 막아 결과적으로 살아남거나, 혹은 내게 한 번이라도 유효타를 먹이거나. 가겠다.]
목각인형이 덜컥이더니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어어 하다가 검을 들어 올려 목각인형의 일검을 받아냈다.
[쯧.]
목각인형이 맞닿은 검을 세우더니 아래로 쓸어내렸다.
내 검의 가드에 걸리고, 그대로 찌른다.
마치 기계와도 같은 움직임 끝에는 내 어깨가 걸려있었다.
"으악!"
다시 내리긋자 내 왼어깨부터 겨드랑이까지 혈선이 그어졌다.
[공격 끝이다.]
"끄아아악!"
나는 검을 놓치고 어깨를 붙잡으며 나동그라졌다.
내 비명소리 끝에 목각인형의 의지가 전달되었다.
[그래. 도전자여. 내가 켈리어의 인조 영혼이다. 그나저나, 그대는 가까운 시일의 도전자에 비교하면 형편없는 실력을 가지고 있구나.]
"끄어어어."
나는 필사적으로 마나를 운용해 출혈을 잡아낼 수 있었다.
내가 부들거리며 무릎을 꿇은 자세를 잡자 목각인형이 검을 들었다.
"잠깐만!"
[그래.]
어?
나는 순간 당황했다.
진짜로 멈춰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트롤도, 오크도, 에릭도. 한 번도 멈춰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성도 없어 보이는 저 목각인형은 나를 위해 멈춰주었다.
이 의외성에 힘입어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나름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겪었던 고통에 비해서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눈빛이 꽤 좋아졌군.]
"⋯내가 이 도전에 실패하면, 당신이 내 영혼을 가져가게 되는 건가?"
[가져가는 건 아니다. 영혼의 인과율을 가져가 이 영혼에 동조시키는 것뿐.]
뭔 소리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영혼을 아예 가져가는 게 아니라는 건 알겠다.
여기서 더 파고들면 한참을 질문할 것 같았기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
"방금을 1단계라고 치면, 도전은 몇 단계까지 있는 것인지?"
[다음 질문은 검을 나눈 뒤에 받지. 다섯 번 공격하겠다. 가겠다.]
"자, 잠깐!"
이번에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내게 달려든 목각인형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오른손만으로 그 공격을 막는 것은 무리였다.
첫 수에 손아귀가 찢어지며 검이 날아갔고, 내 허망한 시선이 그 궤적을 쫓는 사이.
목각인형의 검이 내 목을 부드럽게 갈랐다.
"끄륵!"
[세 번 남았군.]
남은 세 번의 검격은 배에 집중되었다.
물론 그 고통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끔찍한 고통이다.
'코리손. 저항흔이 없던 이유가 죽은 뒤에 훼손한 게 아니었구나. 저항을 못 했던 거였어.'
목각인형이 나를 짊어지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씨발. 존나 아프네.'
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어둠 속에 빛이 다가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내 기다렸다는 듯이.
-키릭.
역시 아직 저승에 갈 때는 아닌 모양이다.
내 시야가 일변했을 때, 나는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는 지하실의 문을 보고 있었다.
"흐흐."
고통은 어느새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고, 내 몸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나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던 에릭이 눈썹을 약간 치켜들었다.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지하실의 문을 향해 걸어들어갔다.
'세 번의 공격을 말끔하게 막자.'
하나씩 이뤄나가면 끝이 보이겠지.
나는 여전히 죽음을 내 인생의 선택지에 넣지 않았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6
다시 지하실에 들어오니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
역시 미궁과 같은 느낌이다.
나는 냉철하게 생각했다.
'내가 아는 미래를 바꾸면 안 돼.'
내가 죽기 전에, 이곳에서 어떻게 행동했더라?
주변을 과하게 두리번거리면서.
"미궁과 같은 느낌?"
[보기보다 감이 좋은 도전자구나.]
같은 대사를 유도했다!
다음은 어떻게 했었지? 맞다!
"힉!"
[감지 면에서는 좋지 않군. 매우.]
⋯뭔가 대사에 사족이 붙었다?
"당신이 켈리어?"
[질문은 자신을 증명한 뒤에 받지. 검을 들어라.]
나는 검을 뽑아 자세를 잡았다.
이에 화답하듯 목각인형이 내 어깨와, 목과, 배를 벤 전적이 있는 낡아빠진 검을 들어 올렸다.
[2위계구나. 그러면 세 번 공격하겠다. 피하거나 막아 결과적으로 살아남거나, 혹은 내게 한 번이라도 유효타를 먹이거나. 가겠다.]
좋아! 그대로다.
나는 나를 향해 달려드는 목각인형의 내려치기를 알고 있음에도 엉성하게 받아냈다.
[쯧.]
목각인형의 검이 내 검을 미끄러지듯 내려가 칼등에 닿았다.
이미 그 공격에 당한 적이 있었기에 미리 예상할 수밖에 없는 행동이다.
나는 검을 크게 떨쳐올려 찌르기를 빗겨낸 뒤 검을 위로 쳐올렸다.
'됐다!'
그래도 탐험가 되어 미궁에 들락날락거린 짬이 헛되지는 않았다.
눈을 빛내며 자세가 크게 흐트러진 목각인형의 배를 찔렀다.
하지만 목각인형은 내 공격을 이미 예상했다는 듯 내 검을 부드럽게 걷어내었다.
현재 내 실력으로는 어떻게 무너진 자세에서 다시 정상적인 자세로 돌아왔는지도 모르겠다.
[나쁘지 않군. 통과다.]
통과!
"그러면 잠깐 쉴 텐데. 그동안 내가 질문해도 될까요?"
[그러지.]
여기까지는 예상했던 대로다.
나는 이제는 사라진 시간대에서 답을 듣지 못한 질문을 했다.
"방금을 1단계라고 치면, 도전은 몇 단계까지 있습니까?"
목각인형이 검을 매만지며 답했다.
[내가 만족할 때까지다.]
"어? 그러면 그게 대충 몇 단계까지인지?"
[다음 질문은 검을 나눈 뒤에 받지. 다섯 번 공격하겠다. 가겠다.]
"흡!"
기다려주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나는 방어자세를 잡았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목각인형의 공격은 날카로웠지만 피하거나 방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집중하며 목각인형의 검을 바라보았다.
실패해도 다시 재도전의 기회가 있다고 생각이 드니 긴장감이 많이 희석되었다.
'정직한 공격이야!'
총 다섯 번의 공격을 막았다.
하지만 팔과 다리에 조그마한 자상을 허용했다.
"읏!"
[반응이 느리군. 내 공격을 외워봤자 바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
[묘하게 침착해. 미리 말하지만 두 번의 기회는 없다. 이미 입은 상처가 낫는 일도 없지. 그래도 도전할 텐가?]
도전?
켈리어의 시련을 포기했다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통과, 아니면 죽음.
이 질문은 어쩌면 내게 불가능한 선택지를 주는 시험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계속하겠습니다."
[패기는 있군. 그러면 가겠다.]
"몇 번 공격하는지 아직 안 말해주셨습니다만?"
[실전에서 그런 걸 일일이 말해주는 경우가 있나?]
목각인형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오며 공격을 이어갔다.
다섯 번째 공격에 가드가 풀렸고, 되는대로 막아봤지만 열 번째 공격에 왼팔이 크게 베였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으아악!"
[반응이 역량보다 늦어. 왜 그러지?]
내가 왼팔을 부여잡고 부들부들 떨고 있자 목각인형이 검을 빼들었다.
[다시 가겠다.]
"잠깐! 질문이 있습니다."
[그래. 한 번의 질문을 허락하마.]
"제 검술에서 보완할 점은 무엇이죠? 곧 죽을 놈한테 한 수 알려주시죠."
목각인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는 이제 죽을 건데. 그걸 알아서 뭐 하지?]
"대답만 해 주십쇼. 제가 지금이라도 당장 수정해서 적용할 수 있게 구체적으로."
내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웃자 목각인형이 검을 치켜들었다.
공격을 방어하던 내 자세를 흉내내며.
[이 부분. 기억하나?]
"물론이죠. 방금 제가 취했던 자세인데."
[오른쪽 허벅지의 마나 배분이 쓸데없이 많다. 그러면 동작이 커지고, 상대방도 이를 눈치채기 쉽지.]
목각인형이 다가와 내 허벅지를 집으며 마나를 불어넣었다.
[네 지금 실력에 불어넣는 마나의 양은 이 정도가 좋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의외로 감이 좋군.]
목각인형은 내가 적절한 마나 배분으로 자세를 취하는 것까지 봐주고서야 검을 들었다.
[그러면 가겠다.]
나는 비틀거리며 자세를 잡았다.
목각인형은 곧 내 검을 쳐냈고, 자비 없이 내 목을 찔렀다.
[8번 남았군.]
감흥 없이 이어지는 칼질.
하나하나의 고통이 너무나도 끔찍하다.
덜컥이는 몸을 가누지 못한 채, 나는 내 피에 익사하며 주마등을 느꼈다.
-키릭.
⋯⋯
"⋯후."
"루카스 님?"
"아닙니다. 들어가겠습니다."
세 번째 도전에서 두 번의 가르침과 행동을 교정 받았다.
-키릭.
네 번째 도전에서 두 번의 가르침과 행동을 교정 받았다.
-키릭.
다섯 번째 도전에서 세 번의 가르침과 행동을 교정 받았다.
-키릭.
열 번째 도전에서 여덟 번의 가르침과 행동을 교정 받았다.
-키릭.
열다섯 번째 도전에서 두 번의 가르침과 행동을 교정 받았다.
-키릭.
열여덟 번째 도전에서⋯⋯
[왜지?]
지금까지의 패턴과 다른 말에 나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에?"
[왜지?]
정신을 차리자 내 상태를 인지할 수 있었다.
온몸이 피투성이다. 왼손의 손가락 두 개가 없었고, 이마를 타고 흐르는 피가 시야를 가렸다.
[왜 가르침을 갈구하는 거지? 너는 이제 죽는다. 내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어.]
"⋯⋯."
[포기해라. 편히 죽여주겠다.]
"포기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
나는 잘 잡히지 않는 검을 치켜들었다.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손에 닿지 못해, 뻗을 생각도 못 해 놓친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항상 포기해왔어. 처음에는 내가 뭐라도 된 줄 알았어. 하지만 뭔가에 도전하면 도전할수록 이건 아니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 그만두는 게 오히려 좋은 선택이었다고 위안삼는 내가 싫었어."
내 검이 목각인형을 겨냥하자 감정이 없어 보였던 나무의 몸이 움찔했다.
그래. 나는 항상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는 포기하지 않을 수 있어, 오히려 포기하는 나를 죽일 수 있는 삶이 있어!"
[이해할 수 없군.]
"당신의 이해를 바라지 않아!"
내 절규에 목각인형이 검을 치켜들었다.
[너를 죽이겠다.]
"당신은 나를 죽일 수 없어! 영원히!"
[⋯⋯.]
분노의 감정은 전투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몇 번의 검격 뒤로 내 목이 꿰뚫려있었다.
나는 꺼져가는 불빛 속에서 목각인형을 바라보았다.
의외로, 무정물은 나를 비웃지 않았다.
역시, 개 같은 기분이다.
-키릭.
⋯⋯
무한 회귀의 굴레 속에서, 정신력이 회복됨과 동시에 깎아져가는 이 감각은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었다.
얼마의 회귀가 지났을까.
[크게 문제 있는 점은 없군.]
"?"
[방어하는 자세의 문제점은 없다고 했다.]
목각인형의 30연격을 방어해낸 뒤 들을 수 있었던 말이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내 뺨을 쌔게 때렸다.
'내가 몇 번 회귀했지?'
53번. 정확히 53번이다.
그 말은 켈리어의 시련은 나 같은 놈은 50회 넘게 죽었다 깨어나도 통과할 수 없는 시험이었다는 것이 된다.
"목숨 하나로는 못할 짓이 맞았군."
[자세가 아닌 다른 질문을 받겠다.]
"⋯이 시험의 통과를 위해서는 당신의 인정을 받아야 하죠."
[그렇다.]
"어떻게 해야 당신의 인정을 받을 수 있죠?"
[방어만 해서 인정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
[그러면 가겠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이번에는 방어 와중에 손을 뻗어 공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바로 반격 받아 배를 얕게 베이고, 다시 방어 자세로 돌아왔다.
[방어는 괜찮은데, 공격이 허술하군.]
"⋯⋯공격에서의 제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망했다.
방어와 공격의 조합은 방어만 신경 쓰던 때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나는 그렇게 정확히 46번을 더 죽었다.
⋯⋯
[어설프군.]
⋯⋯
[어설퍼.]
⋯⋯
[내 공격을 알고 있다는 듯한 움직임이군.]
⋯⋯
[머리로는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몸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
[좋은 움직임이다.]
"감사합니다."
[계속하지.]
⋯⋯
[내 시험의 정보가 알려졌나? 마치 나를 상대하기 위해 준비된 도전자 같군.]
"⋯빨리 진행하시죠."
⋯⋯
죽음. 죽음. 죽음.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내 검이 목각인형의 목을 찌르고 있었다.
목각인형은 내 목을 내리치려는 자세를 한 채로 무너졌다.
인형의 몸 안에 깃들어있던 마나가 일시에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검을 치켜올린 채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공간 안에 흩어져 있던 마나가 일시에 한 점으로 모여들며 한 인간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로만 이루어진 사람.
십중팔구 켈리어 파르말. 본인의 인조 영혼이겠지.
"재미있었다. 다시 한 수 나누자꾸나."
"기꺼이."
나는 몸을 낮추고 켈리어에게 달려들었다.
켈리어가 내 공격을 부드럽게 막았다.
일부러 교착 상태를 만드려는 움직임.
나는 다급해하지 않고 켈리어와 호흡을 맞췄다.
"자세를 낮게, 검은 높게. 기본적인 자세지. 마나의 배분도 좋아. 스승이 궁금하군."
당신입니다만.
내 말할 수 없는 대답을 침묵으로 해석한 켈리어의 검이 공격을 이어갔다.
다섯 번의 연격을 막으며 이루어진 두 번의 공격.
켈리어의 손목 스냅이 내 검을 기가 막힌 각도로 걷어냈다.
'썩을. 아직도 수가 남아있었나.'
가슴이 활짝 열리고, 켈리어의 검이 당겨졌다가 내뻗어졌다.
이번에는 심장이 찔려서 죽는 건가?
나는 온몸에 힘을 쭉 빼고 죽음을 기다렸다.
하지만 켈리어의 검은 내 가슴의 첨단을 살짝 찔렀을 뿐이다.
응?
"무슨⋯."
[아. 이제는 죽이지 않는다. 교만에 찬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실력을 증명해 낸 동량을 쉽게 죽일 수는 없지.]
"아."
나는, 성공한 건가.
나도 모르게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잠깐 쉴까.]
켈리어가 내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잠깐의 침묵 뒤, 내가 진정이 된 것을 확인한 켈리어가 입을 열었다.
[미궁은 몇 층까지 개척되었나?]
"잘 모르겠는데요?"
[흠. 올해가 제국력 몇 년이지?]
"그것도 잘⋯⋯."
[상식이 부족하군.]
"죄송합니다."
[되었다. 다음 도전자에게 의문을 풀면 되지.]
나는 켈리어가 나와 검을 나누고 싶어 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 궁금증을 해결하는 것이 먼저였다.
"켈리어. 당신은 왜 이곳에서 시련을 진행하는 겁니까?"
[의외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하는군.]
켈리어가 잠깐 고민했다.
[내 인과율을 최대한 소모하지 않는 방향으로 답변하겠다.]
"감사합니다."
[모든 것은 영생을 바라는 내 아집과 교만 때문이었지. 미궁. 영혼. 인과. 이것이 내 대답의 전부다.]
"⋯⋯?"
괜히 물어봤다 싶었다.
전혀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들의 향연이었다.
켈리어가 미궁에서 가져온 아티팩트로 인조 영혼을 만들었다는 것은 유명하다.
하지만 내 사고는 여기서 더 이어지지 않았다.
'대답은 머릿속에 잘 넣어둬야겠군.'
[이제 시작하지. 내가 너에게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그 뒤로 이어진 것은 내가 그동안 무한 회귀를 통해 100번 가까이 진행해왔던 켈리어의 개인 지도였다.
나는 그동안 많이 받아왔기에 별 감흥 없이 진행했지만 켈리어가 보기에는 그게 아닌 듯했다.
[상당히 익숙해 보이는군.]
"네. 뭐."
그렇게 체감 시간 6시간 정도의 개인 지도가 이어졌다.
대검호가 1대1로 해주는 지도는 하나하나가 엄청난 경험이 되었다.
나는 당장에 이해하지 못한 가르침을 머릿속에 최대한 쑤셔 넣었다.
[이제 너에게 가장 알맞은 기술을 알려줘야 하는데.]
켈리어의 침묵이 길어졌다.
"에? 왜 말을 중간에 끊으십니까?"
[무슨 검술을 배웠지?]
"육합검법입니다만."
[육합검법?]
내가 지금까지 관찰한 캘리어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줬을 때 더 이해가 빠른 모습을 보였다.
나는 쉬지 않고 내가 알고 있는 육합검법의 모든 초식을 펼쳤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에 이어진 켈리어의 총평은 그 모든 시간을 한 점으로 압축한 듯했다.
[허접하군.]
"네?"
[원형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수십, 수백 번의 변형이 있었겠어. 그 과정에서 검법의 오의가 흩어져 버렸다.]
"⋯⋯."
[초식의 대부분이 막싸움을 고려하고 있으니 말 다 했군.]
켈리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얼떨결에 따라 일어났지만 켈리어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너는 어떤 보상을 원하지?]
"⋯⋯."
나는 고민했다.
이미 이곳에서만 100번 가까이는 죽었다.
이제 무환 회귀를 의심할 필요는 없겠지.
그렇다면 내 앞으로의 방침은 정해져 있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위험이 높아질수록 그 위험을 돌파했을 때 얻는 대가는 커진다.
그렇다면 나는 나 자신을 위험 속으로 빠져들게 해야만 한다.
이러한 말을 두서없이 꺼내니, 켈리어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너에게 딱 알맞은 것이 있다.]
나는 가슴의 두근거림을 숨기지 않으며 켈리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7
켈리어의 시련.
대마법사이자 대검호 켈리어의 시험을 통과하면 보상을 얻을 수 있다.
나는 마침내 시련을 통과하여, 그 보상의 수령을 앞두고 있었다.
[너에게 꼭 맞는 호흡법이 있다.]
"호흡⋯법?"
[제대로 된 기술을 품고 있는 검술을 전수해 주고 싶지만, 아예 기초도 제대로 잡혀있지 않으니 오히려 독이 될 가능성이 높다. 호흡법이 옳다.]
호흡법.
있는 집 자식이 마나의 활용을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우는, 마나의 흐름을 인도하는 법이다.
각각이 가진 고유의 호흡법으로 마나를 운용하게 되면 마나는 독자적인 속성을 띄게 된다.
물론 그런 체계조차 없는 내게는 호흡법도 감지덕지다.
"근데,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고 했는데?"
[충분히 고려한 선택이다. 백 번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부딪혀 이해하도록 해라. 더불어 전언도 남겨 놓았다.]
"응? 그게 무슨?"
[또 보자. 그 수련을 익히고 살아남는다면.]
켈리어의 영혼이 내 이마를 툭 건드림과 동시에 머릿속으로 무언가가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머리를 강제로 열고 송곳을 쑤셔 넣는 듯한 고통!
나는 그대로 까무러쳤다.
* * *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눈을 뜨기보다는 내 머릿속을 관조하는 것을 선택했다.
의식에 한편에, 내가 알지 못하는 지식이 잠들어있었다.
켈리어가 내게 전해준 호흡법. 그 이름은 '학즉사법(學卽死法)'이었다.
'이름이 뭐 이래?'
나는 조용히 머릿속 지식의 서장을 펼쳤다.
[흔히 사용자의 수련을 위해 사용자를 죽거나 미치게 만들거나, 그 사용에 다른 이의 생명, 또는 영혼을 요구하는 공부를 마공이라 부른다. 그러한 관점을 적용하면 내가 지금 서술하는 호흡법 또한 능히 마공이라고 칭할 수 있다. 이 호흡법을 수련할 시, 반드시 죽기 때문이다.]
'⋯⋯.'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그만 읽도록 하자.
나는 의식의 시선을 돌려 켈리어가 내게 남긴 전언을 읽었다.
[미궁 19층, 혹은 20층의 남서쪽, 코렐의 신전. 세 번째 통로, 아홉 번째 등불. 다섯 번째 조각상. 또 다른 내게 그동안의 성과를 보여라. 오지 않아도 상관없다. 인과의 끈이 그대를 내게로 인도하리라.]
"으."
이쪽은 그나마 이해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미궁 어딘가에 또 다른 켈리어의 영혼이 있다는 말이렸다?
그런데 이 학즉사법은 대체 뭐지?
배우면 죽는다고?
"썩을."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읽어보자.
라고 생각했을 때, 내 귀를 때리는 에릭의 목소리.
"루카스 님. 기침하셨습니까."
"!"
에릭? 역시 전혀 기척이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완벽하게 무방비했던 내 몸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마나를 움직여 나 자신만의 공간을 확보한 것이다.
에릭의 마나는 내 마나에 닿자마자 조금씩 자리를 내어주었다.
내 마나의 확장은 일정한 범위를 점하자 점차 둔해져 에릭의 마나와 일종의 교착 상태를 만들었다.
"제가 얼마나 오래 잠에 들었죠?"
"시련에서 기절하신 채로 나오신지 꼬박 7시간 걸렸습니다."
그렇게나 오래 잤다고?
확실히 피로가 전혀 없고, 머리가 상쾌하다.
"그나저나 이 절제된 마나 통제력과 감각. 이게 바로 루카스 님의 원래 실력이겠군요."
"⋯⋯."
켈리어의 집중 교습을 받고 한 단계 진화한 내 능력에 알아서 개연성을 더해주는 에릭.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으로 응수했다.
"시련에 통과하신 것.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시련 내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네? 에릭 님은 그냥 들어가시면 되잖아요?"
"하하.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우선 4위계 이상으로는 지하실에 들어가 봤자 빈 공간밖에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3위계 이하를 들여보내면 살아돌아올 확률이 너무 적고.
"제가 3위계이기는 합니다만. 저라고 시련을 받지 않는게 아니라서요."
"그렇군요."
나는 잠깐 에릭의 눈치를 보다가 그냥 말할 수 있는 정보는 말해주기로 했다.
에릭은 내가 전해준 정보를 곱씹었다.
"따로 인과율의 부족이나 처지의 개선점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네."
"보상으로는 무엇을?"
"호흡법을 받았습니다. '학즉사법'이라고."
에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는 처음 듣는 이름이군요."
"그렇습니까?"
"아마 세상에 공개된 적이 없거나, 전승자가 거의 없는 모양입니다. 이름이 이름이다 보니."
배우면 즉시 죽는다.
이름부터 기괴한데, 아예 서문에서 이를 못 박아놓으니 대체 누가 이를 익히겠는가.
하지만 나는 켈리어에게 분명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에 대해 설명했다.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면 분명 엄청난 리턴이 있으리라.
그러면 일단 수련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하는데.
여기서는 영 내키지 않는다.
삭제된 미래이지만 에릭 파르밀은 실제로 나를 한 번 죽이기도 했었고.
'뭔 짓을 할지 몰라.'
속을 알기 어려운 인간이다. 아니, 반쯤 미쳤다.
최대한 부딪치지 말고 피하는 게 상식이다.
"시련도 통과했으니, 이제 떠날 시간이군요."
"그렇습니다."
에릭은 여전히 웃는 낯이었지만 아직 용건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귀족.
나는 답답함을 느꼈다.
"에릭 님."
"네. 루카스 님."
"저는 천민 무지렁이라. 돌려 말하는 걸 잘 못합니다. 용건이 있으면 바로 말씀해 주십쇼."
내 직접적인 말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포커페이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전달되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루카스 님이 시련을 통과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알려드리지 말아야 할 정보들까지 알려드렸죠."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으며.
"코리손 가문의 내부 정보, 인조 영혼의 동력원, 제가 사용하는 기술까지. 원래라면 전부 알려드리면 안 되는 정보입니다."
"그렇군요."
"물론 맨입으로 루카스 님께 부탁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이를 위해 조금이나마 성의를 준비했습니다."
금속이 찰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 앞으로 주머니가 놓였다.
은화를 많이도 넣어놨군.
살짝 주머니를 열어보니 모두 금화였다.
금테를 두른 동전 한가운데에 양각된 조그마한 금덩이가 박혀 있었다.
확실했다.
"⋯⋯."
거절하기에는 너무나도 큰돈이었다.
거절할 이유도 없었고.
나는 시원하게 에릭과 악수했다.
"비밀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선조 님의 인정을 받은 루카스 님은 이제 가문의 외인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에릭은 나에게 은근히 파르밀 가의 식객이 되지 않겠냐고 물어봤다.
식객.
파르밀 가의 대접을 받으면서 때로는 대외적인 일, 때로는 도시의 해결사들이 맡는 일을 하는 애매모호한 직책이다.
나는 물론 에릭의 요청을 거절했다.
저 정상이 아닌 놈에게서 빠르게 멀어지는 것이 내 1차 목표였기 때문이다.
'시련에 미친놈.'
에릭에 대한 나의 평가였다.
나의 확고한 거절에 에릭은 안타까워하면서도 오래 붙잡지는 않았다.
"언제라도 들러 주십시오. 특히 19층에서 선조 님의 영혼을 영접하신 뒤에는 꼭 들러주시기를 바랍니다."
"네. 그렇게 하죠."
나는 그 후로는 에릭이 건네는 어떠한 물건도 사양하고, 들어왔던 복장 그대로 저택의 뒷문을 통해 나왔다.
품 속의 금화 주머니를 어루만지며 미궁 출입국 사무소에 들러 금화 하나만 남겨 놓고 돈을 모두 맡겼다.
어차피 쓸 일도 없으니.
그제야 큰돈에 뻣뻣해졌던 몸의 긴장이 풀어졌다.
자연스럽게 뒷골목으로 녹아들어갈 수 있었다.
더 깊은 곳으로 다가갈수록 안면을 익힌 놈년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미궁 3층에서의 참사에 대한 위로나 조롱의 말들을 모두 한 귀로 흘렸다.
어차피 감정 없는 말들이다.
'괜히 휘둘릴 필요 없어.'
그리고 내 자체의 체감 시간으로는 이미 머나먼 일처럼 느껴지는 일이기도 했다.
마치 몇 년이 지난 느낌이다.
실제로는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지만.
'슬프지도 않아.'
슬픔 대신에 채워진 것은 켈리어로부터 전수받은 검의 지식들이다.
부정적인 감정 보다야 훨씬 가치 있는 것들이다.
내가 찾은 곳은 강변 구석의 허름한 움막이었다.
움막의 입구 같지 않은 입구를 들추니 백발이 무성한 노인이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어이! 아저씨!"
"루카스냐? 에잉. 스승이라고 불러라."
"스승은 무슨. 잠깐 나와보슈."
근처에서 산 딱딱한 빵을 던져주자 잽싸게 이를 낚아챈 노인이 엉덩이를 질질 끌며 고개를 내밀었다.
"얘기 들었다. 콜린 말고 나머지는 모두 죽었다고?"
"뭐, 그렇게 됐슈."
"그래서. 계속 미궁 밥 먹고살려고?"
"배워먹은 게 그거 아니면 소매치기밖에 없는데, 뭘 하겠어?"
노인의 왼팔이 휑하다.
전직 은패 용병이자 6층의 미궁 탐험가 출신이라는데, 이제는 푼돈에 검술을 파는 처지다.
나를 위시한 패거리들이 육합검법이라는 쓰레기 검술을 배울 수 있었던 것도 노인 덕분이다.
이제 나와 콜린 밖에 남지 않았지만.
"한 번 어울려주쇼."
은화를 틱 던지자 귀신같이 낚아챈 노인이 어기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른손에는 이가 다 빠진 검이 들려있었다.
"웬일로 은화냐? 동화가 아니라?"
"마지막이 될 것 같아서."
"잉?"
"들어갑니다."
자연스레 자세가 낮아지고, 검이 곧추세워진다.
평소에 노인이 가르쳐 준 육합검법의 모양이 묻어있지만, 이제는 도저히 같은 검법이라 부를 수 없다.
켈리어의 교육을 받고 변형된, 나만의 육합검법이다.
노인의 허둥지둥 검을 뻗어 내 일격을 막았다.
하지만 물 흐르듯이 이어진 강격에 검을 놓치고 말았다.
"어이쿠!"
나는 검 끝으로 노인의 앞섬을 쿡 찌른 뒤 물러났다.
"뭐, 뭐야?"
"그렇게 됐네요."
"다시 하자."
노인은 이번에야말로 진지한 자세로 검을 들었다.
가라앉은 눈. 나름 진심이었다.
하지만 나는 별다른 감흥 없이 다시 노인에게 달려들었다.
소싯적의 경험에 의존한 체계 없는 마나 배분.
실전적이지만 허점 투성이다.
검성에게서 직접 지도 받은 나의 배분에 발끝에도 못 미친다.
'그동안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단 5번의 검격으로 노인의 손에서 검을 놓게 만들 수 있었다.
다시 한번 엉덩방아를 찧은 노인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으으."
"괜찮슈?"
"이게 무슨⋯."
"졸업이라는 소리지."
나는 금화를 환전한 은화 10개를 노인의 품에 넣어줬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노인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내 실력도 어느 정도 확인했으니, 다시 본업으로 돌아갈 때다.
'미궁 3층.'
마크, 밥, 콜린, 페트. 그리고 나 루카스.
이 다섯 명이서도 엄청난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가야 했던 미궁 3층.
하지만 이제는 두려운 마음이 먼 옛날의 추억으로 느껴질 정도다.
내게는 최강의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미궁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그 어떤 때보다 가벼웠다.
이때의 나는, 미궁에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8
파르밀 가의 저택에서 분에 넘치는 휴식을 취하고 나왔기에 이미 상태는 만전이다.
나는 한걸음에 미궁 출입구 사무소로 달려가 출입 신청을 했다.
등에 맨 배낭에는 미궁 공략에 필요한 각종 물자들이 가득 담겨있었다.
나는 사무소 직원의 앞에 동화 5개를 올려놨다.
미궁 저층의 1인당 입장료다.
"미궁 3층. 탐험인수 1인. 맞습니까?"
"네."
"등록되었습니다."
등록 사무소 직원의 대답은 언제나 무감정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애초에 눈조차 마주치지 않는 모습이다.
그렇게 내 다음 사람에게 차례를 양보했다.
"미궁 28층. 탐험인수 6인. 맞습니까?"
"네."
28층!
엄청나게 높은 층수에 내 귀가 쫑긋했다.
"등록되었습니다. 이번에도 편안한 탐사되세요!"
응?
말이 뭔가 많이 다른데?
내가 고개를 휙 돌리니 초롱초롱한 눈의 사무소 직원이 보였다.
시선을 따라가니 실용성 있는 갑옷을 입은 금발의 사내가 사무소 직원을 향해 손을 살짝 들어 올리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뭘요! 이게 제 일인 걸요!"
"⋯⋯."
나를 대할 때와는 너무나도 다른 태도!
빨리 성공해야겠다.
나는 리디엠의 상흔을 넘어 미궁 1층으로 진입했다.
안전지대에 진입하자마자,
"미궁 입장. 3층."
[미궁 3층으로 진입합니다.]
[현재 진척도 36.8%.]
잠깐 어지럽다는 느낌이 들자마자 내 시야가 급변했다.
다섯 명이서 두 달을 넘게 고생하고서 진척도 36.8%를 달성했다.
그보다 실력은 한참 나아졌지만 다섯 명이었던 그동안의 탐험과 다르게 이제는 고작 나 혼자.
앞으로 과연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식량 팝니다! 싸다 싸! 몬스터 코로 대체 가능!"
"숙박 가능! 1일 1식 무료 제공!"
"장비 말끔하게 손질해 드립니다!"
안전지대에서 돈을 벌어먹는 장시치들.
미궁 1층으로 돌아가기 귀찮고, 의무적으로 내야하는 출입료가 아까운 탐험가들이 자주 이용하기에 언제나 성황이다.
안전지대 내의 미궁 사무소가 정한 범위 안에서만 장사가 가능하고, 그 범위를 벗어나면 사무소의 보호를 받지 못하기에 밀집도도 높다.
더군다나 어쨌건 미궁 3층에 입장 가능한 몸.
젊었을 때 꽤 실력을 발휘한 놈들이거나, 그런 놈들과 동반 입장할 능력이 있는 놈들이다.
막 대하기는 껄끄럽다는 말이다.
"형씨! 구두가 더러운데 좀 닦아줄까?"
"됐네요. 됐어."
다섯 명이서 왔을 때는 달라붙을 생각도 못 했던 장사치들이 혼자 오니 지랄들이다.
아무래도 내가 파티원들을 구하기 위해 꽤 오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
나는 빠른 걸음으로 내게 접근하는 놈들을 물리치고 안전지대를 벗어났다.
당분간은 솔로로 다닐 생각이다.
목표는 그동안 잃어버린 미궁에서의 감을 되찾는 것!
무한 회귀를 안 뒤로 두려움이 많이 없어졌다.
"하루에 진척도 10% 이상!"
엘리트 탐험가들이나 이뤄낼 수 있는 목표였지만 전혀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한 법.
이미 탐험한 곳을 지나는 것에도 체력을 꽤 많이 소비했다.
"헥헥. 5%. 5%만 하자."
켈리어의 개인 교습으로 검 쓰는 실력은 많이 늘었지만 기본적인 체력은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미궁의 불문율.
'항상 절반의 체력을 남겨둬라.'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 안전지대로는 무조건 돌아와야 한다.
전력을 다하고 귀환하는 길에 죽어버리면 그만큼 한심한 일도 없다.
그렇기에 체력을 안배하는 것은 필수.
호흡법은 몸의 기초적인 체력을 증진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역시 호흡법을 익히고 왔어야 했나."
하지만 내가 일부러 호흡법을 익히지 않고 미궁에 온 이유가 있었다.
'거기서 익히라고? 말도 안 되지.'
도시 내 거처에서는 다섯 명이서 공동생활을 했었다.
그런데 세 명이 죽어버렸고, 나는 자리를 꽤 오래 비운 상태.
약육강식의 논리가 철저하게 적용되는 하수구의 특성상 이 소식을 들은 놈들이 꽤 자리 좋은 내 거처를 내버려뒀을 리 없다.
아마 콜린은 자리를 정리하고 구석탱이로 밀려났겠지.
내 옷이라도 좀 챙겨놨으면 좋겠다만,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다.
어쨌든 그런 곳에서 호흡법을 수련한다면 개나소나 다 구경하라는 말이다.
'여관도 싫고.'
괜히 돈을 쓰고 하루를 버리기는 싫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낸 기가 막힌 방안.
'미궁만한 곳이 없어.'
미궁 특유의 압박감만 감수하면 된다.
3층이면 사람 마주칠 일도 적고, 몬스터는 여기보다 더 깊숙한 곳에 산다.
내가 밟고 있는 이 지점. 이곳이 바로 몬스터와 탐험가의 분포가 가장 적은 지역이다.
나는 예전에 야영하기 좋은 장소로 봐뒀던, 입구가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고, 안은 비교적 넓은 호리병 모양의 공간을 찾았다.
호흡법을 수련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여기가 바로 떠올랐다.
배낭을 벗어 종을 꺼내 입구에 매달아 1차적인 방비도 해놨다.
입구에서는 종이 바로 보이지 않고, 들어오자마자 줄을 건드리면 종이 울리게 하는 아주 간단한 장치다.
미궁 저층은 바람이 불 일이 거의 없으니 이것만 한 것이 없다.
내가 마법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좋아."
나는 바위의 평평한 면에 걸터앉고 뭔가 있어 보이게 가부좌를 틀었다.
왜 수련하는 사람들은 이런 자세를 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다.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학즉사법의 서장을 훑었다.
[흔히 사용자의 수련을 위해 사용자를 죽거나 미치게 만들거나, 그 사용에 다른 이의 생명, 또는 영혼을 요구하는 공부를 마공이라 부른다. 그러한 관점을 적용하면 내가 지금 서술하는 호흡법 또한 능히 마공이라고 칭할 수 있다. 이 호흡법을 수련할 시, 반드시 죽기 때문이다.]
'⋯⋯.'
역시 적응하기 힘들다.
하지만 계속 읽어보도록 하자.
[이는 이 호흡법의 수련법에 기인한다. 혈맥을 정해진 방법으로 뚫지 않기 때문이다. 사용자의 신체에 가장 걸맞은 방향으로, 호흡법의 지시에 맞게 변화된 마나로 뚫어야 한다. 자세한 사항은 1장에 서술한다.]
그 뒤 이어진 1장은 체내의 마나를 호흡법에 맞게 정제하는 법이 적혀있었다.
"오."
마나를 정해진 방법으로 가공하니 호흡법이 말하는 붉디붉은 마나가 만들어졌다.
생각보다 쉬웠다.
'나 꽤 재능이 있을지도?'
가속이 붙어 빠르게 다음 장을 읽었다.
[그 마나를 심장에 스며들게 하라.]
응? 이게 끝이야? 그 다음은?
아무리 머릿속의 페이지를 넘겨봐도, 이 문구만 떠올릴 수 있을 뿐이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손안에 일렁이고 있는 마나를 바라보았다.
피처럼 붉고, 뜨겁다.
"마공⋯."
이 마나를, 내 심장에 넣으라고?
침을 꿀꺽 삼킨 뒤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를 탈탈 털었다.
까짓것 넣어주지! 안 되면 죽으면 되니까!
한 손으로 잡은 붉은 마나 덩어리를 심장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마나가 내 가슴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흘러내렸다.
"으으."
마치 독한 술을 한 입에 털어넘긴 것과 같은 느낌이 배꼽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부풀어올랐다, 수축했다. 그것의 반복,
한 번의 팽창 뒤에는 배가 폭발하는 듯한 고통이 뒤따랐다.
"크악!"
그야말로 오장육부가 녹아내리는 듯한 아픔!
순간 잃어버린 뻔한 정신!
나는 그동안의 죽음으로 단련된 고통에 대한 면역으로 겨우 이성을 붙잡았다.
'미친⋯⋯.'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내가 더 생각을 이어가기도 전에 붉은 마나는 내 배 안쪽에 자리를 잡더니 천천히 몸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길을 뚫듯이 움직이는 마나.
곧 명치 부분에 이르러 잠시 움츠렸다.
뭔가 수줍은 듯한 움직임.
그동안의 폭거에 어울리지 않게, 이 부분에서는 내 통제가 필요하다는 듯한 감각을 부여한다.
어째서? 라는 의문은 중요하지 않다.
이 마나를 통제하지 못하면 내 죽음이기에.
나는 마나를 어루달래며 마나의 방향을 바라보았다.
내 몸을 다섯 방향으로 보는 미친 마나.
나는 토혈하며 외쳤다.
"다섯 방향? 개 미친 새끼가!"
본디 호흡법은 하나의 길을 제시한다.
그것이 당연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섯 방향?
나는 무슨 길을 선택하라는 말인가?
[너에게 가장 어울리는 길.]
"닥쳐!"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마나가 쏠리는 길, 아니 혈맥으로 마나를 인도했다.
혈맥을 마나가 강제로 두드렸다.
'크어억!'
피가 섞인 그을음을 토해냈다.
하지만 시각적인 충격 외의 아픔은 없었다.
이게 맞는 길인가?
잠시 안심하고 있었던 내게, 마나의 새로운 갈림길이 아로새겨졌다.
이번에는 세 군데의 선택지가 주어졌다.
마나가 다시 주춤하며 내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음."
세 곳 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중 조금이라도 더 마나가 쏠린 곳을 선택했다.
내 의지가 원하는 길을 마치 진리인 것으로 알고 들이치는 마나.
다음 두 갈래길.
정확히 절반으로 나뉜 마나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자신을 인도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뭐지?'
하나는 심장으로 향하려고 하고, 하나는 머리로 향하려고 한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아니 애초에 내가 선택하는 게 말이 돼?
이번에는 두 선택지에 머무르는 마나의 양이 완벽하게 동일하다.
'뭘 선택해야 되지?'
[너에게 가장 어울리는 길.]
"닥쳐!!"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머리로 향하려는 마나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가슴의 따끔한 고통과 함께 마나의 길이 뚫리고.
시야가 암전했다.
파직!
-키릭.
⋯⋯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나는 내 손에 들린 붉은 마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내 몸속에 있어야 하는 게 왜 밖에 나와있지?
[그 마나를 심장에 스며들게 하라.]
"⋯⋯어?"
이 마나를 몸에 집어넣기 전 들었던 대사였다.
내부에 감각을 집중해 보니 한참 내 몸을 휘젓고 있어야 할 마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내 몸에 들어오고 싶어 넘실대는 마나를 다시 보았다.
"어어?"
나. 죽었던 거야?
미궁의 무한회귀자 9
아직도 멍한 정신을 가다듬었다.
학즉사법을 익히다가. 죽었다.
'죽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로 죽었다.'
최근 나에게 목숨의 무게는 비교적 가벼워진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쉽게 죽어서는 안된다.
"제기랄."
학즉사법. 이름값을 한다.
뭘 해보지도 못하고 죽어버렸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익히지 말아야 하나?
아니, 내게 익히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다.
이미 목숨을, 죽음을 수단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이번 일은 일종의 사고였다.
나는 내 손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오래되어 점차 사그라드는 불꽃같은 마나가 내 시야에 잡혔다.
"그래. 다시 해 보자."
하지만 이런 주먹구구식으로 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한 회귀. 보다 체계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
나는 배낭을 뒤져 나무로 만든 숟가락을 꺼내들었다.
땅을 파며 숫자를 세기 위해서다.
글은 잘 못쓰지만 숫자는 셀 줄 안다.
"지금까지 회귀한 횟수부터 정리하자."
가장 먼저 트롤, 내 기억이 맞는다면 트롤에게 총 14번 죽었다.
세상에 가벼운 죽음은 없다.
모든 죽음의 순간은 끔찍하게 내 기억 속에 박혀 있어 잊으래야 잊을 수 없었다.
"그 뒤, 오크에게 두 번, 에릭에게 한 번."
그리고 켈리어에게, 99번.
방어를 배우는 데에 53번, 공격을 배우는 데에 46번이다.
"99번?"
아무리 기억을 되새겨봐도 99번이다.
100번에 한 번이 모자란.
한 상황에 100번의 죽음을 보지 못했다는 점이 찝찝하다.
그리고 지금, 학즉사법을 배우면서 한 번.
정리하면 다섯 번의 상황에서 117번. 한 상황에서의 최대 죽음은 99번이다.
"보수적으로 생각해야 해."
총횟수가 정해져있을 수 있고, 상황마다 한계 횟수가 정해져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상황 당 10번, 총횟수는 300번을 마지노선으로 두자."
앞으로의 방침이다.
회귀 10번을 넘기기 전에 상황을 해결하고, 총 300번을 넘게 죽지 말자.
물론 내 마음이 정한 경계다.
이보다 더 많이 죽는다면, 상황을 회피하거나 끝낼 있는 방법을 찾자.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학즉사법을 시행하다 죽은 건 단순한 사고 취급할 수 있다.
만약 지금 9번을 더 죽어 10번을 죽는다면 학즉사법의 수련을 그만둘 것이다.
상황을 회피해야 하니까.
"좋아."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다시 마나를 연성했다.
다시 붉은 마나가 내 손에 쥐어졌고.
이번에는 주저하지 않고 마나를 심장에 집어넣었다.
"크흑!"
내장을 녹이는 듯한 고통은 그대로!
하지만 이미 겪어봤던 아픔이다.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칼에 맞았을 사람일 나에게 이 정도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기합!"
나는 마나를 어루만지며 이전에 취했던 선택지대로 길을 뚫었다.
곧 내가 죽어버렸던 선택지로 돌아왔다.
머리? 심장? 이번에는 심장이다!
심장으로 향하는 길을 뚫자 마나가 물밀듯이 흘러들어갔다.
마치 갈퀴로 심장을 긁어내는 듯한 격통이 몸을 덮쳤다.
하지만⋯
"죽지 않았어!"
다음 선택지. 내장. 머리.
"아래로!"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고통은 길지 않았다.
내장에 머물던 마나가 전신으로 얕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점차 안정되더니.
전신에 뜨거운 활력이 돌았다.
샘솟는 듯한 기운!
[학즉사법 1성에 도달하기까지 다섯 명의 수련자 중 네 명이 사망한다. 하지만 성공하기만 한다면, 타 호흡법을 3성 익힌 것보다 더한 효율을 낼 수 있다.]
학즉사법의 다음 장!
그렇다면 1성을 익힌 건가?
[2성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최소 3위계의 실력이 필요하다. 3위계 미만의 수련자가 2성에 도전할 경우,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온몸이 터져버린다.]
"미친!"
터져버린다고?
내가 저번 죽음을 자각조차 하지 못한 이유가 몸이 그냥 터져버렸기 때문에?
과연 마공이라 부를 만하다.
보통의 호흡법은 안정적이다.
호흡법은 마나의 효율적인 사용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해진 길에 얼마만큼 마나를 투입할 수 있느냐로 호흡법의 성취가 결정된다.
하지만 학즉사법은 아니다.
정해진 길이 없다. 수련자가 자신에게 적합한 길을 만들어야 한다.
수련자에게 최적화되었기에 강력하다.
하지만 불안정하다.
너무 불안정해서 사용자를 죽여버릴 만큼.
대신 얻는 것이 확실하다.
새로 뚫린 길을 따라 마나가 용솟음친다.
'전신의 힘이 강해졌어.'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건대, 학즉사법을 운용하면서 검을 휘두르면 속도는 1.5배. 위력은 2배 정도 빠를 것 같다.
순식간에 전력이 3배는 상승한 기분이다.
그래. 성공 확률 20%의 도박에 걸었는데 이 정도 성능은 나와줘야지.
이렇게 경험을 쌓다 보면 3위계도 머지않았다는 느낌이 든다.
'3위계.'
평범한 재능의 인간이 고된 수련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
3위계만 되어도 칼로 먹고사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내게 육합검법을 알려준 스승도 고작 2위계일 정도니 말 다 했다.
나는 한 시간 동안 내 몸속의 마나를 가다듬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작 한 번 죽고 성공하다니, 행운의 여신이 내게 미소를 짓는 기분이다.
몸을 낑낑거리며 굴에서 빠져나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 탐험도 하나의 상황이라고 가정하면, 아직 9번은 죽어도 돼.'
그렇다면 돌아올 상황 감안할 때, 4번 죽으면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좋아! 좋아! 탐험 좋아!"
나는 내게 전혀 득 될 것 없는 큰 소리를 지르며 나아갔다.
가끔 이런 기합도 필요한 법!
하지만 이 기합 때문이었을까?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발걸음이 들렸다.
이 정도 소리면, 바로 지척!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이족 보행. 세 마리. 무게로 볼 때 오크 같군. 30m 앞이야.'
나도 모르게 이러한 정보들이 머리로 쏙쏙 들어오는 것이다!
"뭐지?"
나는 전투 상황이라는 것도 잊어버린 채 잠시 멍하니 내 감각에 집중했다.
마나가 자연스레 학즉사법이 뚫어놓은 길을 순환하고 있었다.
이 붉은 기운의 마나는 팔다리는 물론, 눈, 귀, 심지어 입에서까지 그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이거였나!"
감각 강화!
[이 호흡법은 위험하지만 그만큼 타 호흡법을 능가하는 효율을 낸다. 다만 그 성취를 한 단계 올리는 데에는 그에 걸맞은 실력과 행운을 필요로 한다.]
기다렸다는 듯 떠오르지 말라고!
모퉁이를 돌아나온 오크 세 마리가 나를 보며 근육을 부풀렸다.
나는 마나를 눈에 집중하며 녀석들의 모습을 훑었다.
'좋아. 평범한 오크다.'
오크들은 특유의 근육질 몸에 기반한 터프함을 뽐내며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마주 달려들 듯 자세를 취하다 오크의 도끼가 내 몸에 닿기 전 스텝을 밟아 몸을 뒤로 뺐다.
허무하게 내가 있던 자리를 가르는 오크의 도끼.
빠지면서 휘두른 내 검은 도끼보다 리치가 길었다.
검 끝이 오크의 목울대를 얕게 가르고 지나간다.
잠깐 서있다가 주르륵 푸른 피가 흐르는 목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오크.
저 기분 잘 안다.
전신의 모든 힘이 빠지는 느낌이지.
뒤를 따르던 오크가 주춤하는 사이, 내가 발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쾌검으로 왼쪽 오크의 팔을 날려버리고, 오른쪽 오크의 머리를 비스듬하게 갈라버렸다.
한 마리에 한 번의 휘두름.
총 세 번의 휘두름으로 오크들을 제압했다.
오른팔을 잃은 오크가 내게 육탄전을 걸어왔다.
당연히 나는 그 시도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았다.
발에 마나의 배분을 더해 빠르게 옆으로 빠진 뒤, 나자빠진 오크의 목덜미에 몸무게를 실어 검을 꽂아 넣었다.
뼈갈리는 특유의 느낌과 함께 땅에 닿은 검.
나는 검자루를 꽉 잡은 채 오크의 숨이 끊어지기를 기다렸다.
"후."
불과 며칠 전에 오크의 몽둥이에 머리가 두 번이나 깨진 나다.
순식간에 이렇게 강해지다니.
감개가 무량하다.
조금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으며 휴식을 취했다.
다행히 몸에 오크의 피가 튀지는 않아 탈취제를 사용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크의 품을 뒤져 물주머니를 꺼내 목을 축였다.
"크."
찝찝하지만 오크도 생물. 보통 탐험가들의 물 충당은 이런 식이다.
그 외에는 돈 될 물건은 없었다.
무슨 고기로 만들었는지 모를 육포와 오크들이 좋아하는, 전혀 가치 없는 색깔 예쁜 돌멩이들. 마지막으로 고블린 가죽으로 만든 속옷이 다였다.
도끼의 날을 가져가 팔면 돈이 되겠지만 이렇게 무거운 물건을 들고 돌아갈 힘은 없다.
마지막으로 오크의 시체마다 내 마나를 퍼뜨렸다.
어떠한 반응도 없다.
'첫 사냥에 마정석이 없다라. 운이 안 좋은데.'
보통 다섯 마리의 오크를 잡으면 한 마리 정도는 마정석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뭐 나쁘지 않다.
첫 술에 어찌 배부르랴.
이제 선택이다.
시체를 공양해 진척도를 올리거나, 코를 베어 포상금을 받거나.
시체를 공양하면 미궁이 시체를 잡아먹는 대신 진척도를 올려준다.
현재 내 미궁 3층 진척도는 40% 남짓.
미궁 4층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3층의 진척도 100%를 달성해야 한다.
사냥한 시체의 공양은 미개척지 탐험과 더불어 진척도를 올리는 정석적인 길이다.
하지만 공양은 시체를 전부 사라지게 하기 때문에 코를 베어갈 수 없게 한다.
코를 미궁 사무소에 제출하면 포상금을 주기에, 이것도 나름 중요한 사항이다.
돈이냐, 더 큰 돈을 위한 투자냐.
내게 이미 답은 정해져있었다.
막 사냥했기에 이 시체의 소유권은 당연히 나.
"공양."
공양하는 법은 간단하다.
어떤 방식이든 시체를 공양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하면 된다.
[시체를 공양합니다.]
[오크 세 마리. 확인.]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진척도. 37.3%]
내가 잘라낸 팔이, 비스듬히 잘려나간 머리가 다시 도로 붙는 방식은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곧 푸른색으로 빛나던 오크의 몸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미궁의 국룰을 준수하기 위해 몸에서 떨어져 나갔던 무기나 천 쪼가리들을 툭툭 발로 차 오크의 몸에 닿게 했다.
이러면 오크의 시체와 같이 사라지기 때문에 미궁을 보다 깔끔하게 유지할 수 있다.
잠깐 시체가 사라지는 모습을 본 뒤 발걸음을 이어나갔다.
아마 이곳에 다시 오게 된다면, 어떠한 흔적도 남아있지 않게 될 것이다.
'진척도가 0.5%나 올랐어.'
다섯 명이서 했던 사냥과는 질적으로 다른 성과였다.
그때는 코를 베는 게 거의 절반이었으니까,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또 안전 사냥을 지향했기에 몬스터 출몰 빈도가 낮은 지역만 돌아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더 깊게. 더 많이.'
이미 내 실력이 얼마나 늘어났는지는 확인했다.
오크 세 마리면 다섯 명이서 3분은 넘게 싸워야 했던 상대다.
그런 적을 혼자서 30초 내로 처리했다.
어쩌면 트롤과도 한 판 해볼 만할지도.
나는 피식 웃었다.
2위계 따리가 혼자서 트롤을 잡는다고?
트롤이 어떤 몬스터인가.
3위계의 숙련된 탐험가 여럿이, 아니라면 한 몸으로 움직일 수 있는 2위계 탐험가가 10명 이상이 되어야 대화를 나눠볼 수 있는 몬스터가 트롤이다.
그런데 내가?
하지만 뭐지? 이 넘쳐나는 자신감은?
"트롤 새꺄! 덤벼!"
나는 호기롭게 외치며 미궁을 힘차게 나아갔다.
예전부터 생각하는 거지만, 나는 역시 이 입이 문제였다.
그렇게 한 시간 동안 총 오크 8마리를 사냥한 뒤, 나는 미궁 3층의 조금 큰 공동에 들어설 수 있었다.
"⋯⋯."
내 앞에 오크의 몸을 들고 내장을 빨아먹고 있는 트롤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주춤거린 나와 트롤의 눈이 마주쳤다.
"이런 망할⋯."
나는 흥분으로 몸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검을 추켜올렸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