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의 무한회귀자 20
미궁도 다녀왔겠다, 정산도 끝났겠다. 짐을 풀자마자 라분과 콜린을 데리고 코가 삐뚤어지게 마실 생각이다.
우선 숙소로 돌아왔다.
콜린은 공사판에 갔는지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라분. 적당히 짐 풀고 있어. 나는 장비 정리부터 할 테니까."
"알겠다."
라분의 방패는 고작 한 번의 탐험을 다녀왔음에도 많이 망가져있었다.
비교적 방패를 이용한 타격을 많이 하는 라분의 성향이 한몫 했겠으나, 방패를 다루는 요령이 없었던 탓도 크다.
방패는 아예 새로 맞춰줘야겠다. 라분의 전투 스타일에 맞게 주요 부위에 철을 덧댄 것으로.
라분이 배낭의 짐을 다 정리하고 내게 합류했다.
검을 빡빡 닦고, 기름으로 살살 문질러준다.
"라분."
"?"
"새 방패 사줄게. 딱 맞는 걸로."
"오!"
"따로 생각해둔 디자인이 있어?"
"여기는⋯ 이렇게⋯ 저기는⋯ 이렇게⋯"
몸짓 발짓 다 섞어보지만 뭔 소린지 모르겠다.
원래 자기가 쓰던 방패를 건네주자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설명을 시작한다.
이제야 좀 알아듣겠다.
"아래를 무겁게 해달라는 거지? 철판을 덧대서."
"그렇다."
"좋아. 내일 볼 일보고 대장간에 들르자."
어느 정도 짐 정리를 마무리하자 마침 콜린이 터덜터덜 집에 돌아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한숨을 푹 쉬는 게 여간 고생한 것이 아닌 듯하다.
그나저나 이 거리에서 콜린의 한숨소리까지 구분해내다니.
나도 정상인은 아닌 모양이다.
'고작 학즉사법 1성에 이 정도면. 2성은 대체 어떻게 되먹을지 상상도 안가네.'
머릿속 지식은 3위계부터 학즉사법 2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조만간 학즉사법 2성에 도전해야 한다.
내게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혼잣말로 투덜거리며 문을 연 콜린이 깜짝 놀란다.
"라분?"
"오. 콜린. 오랜만이다."
"돌아왔구나. 고생했어."
"고맙다."
"여! 콜린! 잘 지냈냐?"
"루카스. 똥처럼 생긴거는 여전하네."
콜린이 괴상한 신음을 내더니 대자로 뻗었다.
"뒤지겠다. 아이고. 벽돌을 뭐 그리 많이 쌓는지."
끙끙거리며 허리를 만지작거리는 콜린, 물론 남자 허리를 마사지해 줄 의리는 없었기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나가자!"
이제는 진짜 즐겨야할 때다.
콜린도 어기적거리다가 내가 산다는 말을 듣고는 동작이 빠릿해진다.
이번에는 조금 비싼 음식점으로 둘을 데리고 들어갔다.
"일단 맥주부터!"
일주일 넘게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술이다.
차가운 맥주가 입안으로 넘어가니 그야말로 극락!
"캬!"
이 맛에 산다!
콜린도 찌르르한 속을 달래고 입가심으로 나온 스프를 퍼먹었다.
라분은 벌써부터 헤롱헤롱한 상태다.
피로에 술까지 더해졌으니 오죽하랴.
"탐험은 잘 돼가?"
"뭐 그럭저럭. 4층 들어갔어."
"어? 4층? 벌써 4층이야?"
"내가 바로 네 형이잖아."
"지랄은."
콜린은 라분을 제외하면 가장 믿을 수 있는 놈이다.
천성이 약하지만 배신은 하지 않는다.
듣자 하니 우리의 예전 숙소를 차지한 토리코 파티가 나를 설득하라고 한 번 팬 적이 있다는데, 얻어맞으면서도 끝까지 대들었다고 한다.
"토리코 새끼. 반 죽여놓을까?"
"아서라. 괜히 너도 쳐맞는다."
"그 정도는 아니거든?"
확 검염 보여줘?
아니, 학즉사법 2성도 익히고 가서 제대로 한 번 털어주자.
나는 나를 건드리는 건 참아도 내 사람을 건드리는 건 못 참는다.
"하암. 근데 밖이 왜 이렇게 시끄러워?"
"어이고. 이제는 건국제도 까먹냐?"
"뭐? 벌써 건국제야?"
미궁 도시 칼리움은 제국의 직할령이다.
다른 도시에서는 소소한 기념일인 제국의 건국제가 칼리움에서는 축제가 되는 이유다.
"에휴. 역시 미궁 탐험가들은 시간 감각이 지랄났다니까. 앞으로 일주일 뒤다 임마."
사실 탐험도 일주일만 한 줄 알았는데 8일을 했단다.
이게 수시로 모래시계를 통해 시간을 확인하려고 하는데 탐험이 이어지면 그조차도 여의치 않아 어쩔 수 없다.
워낙 다급한 상황이 많기도 하밋고.
"아! 그리고 내일 라분이랑 어디 같이 좀 가자."
"어디?"
나는 어느새 술을 마시다 말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라분을 툭툭 처서 깨웠다.
안 되겠다. 집에서 더 마시든 해야지.
"얘. 탱커에 재능 있어. 제대로 좀 가르치려고. 용병 길드 같이 가서 적당한 은퇴 탱커 좀 같이 찾아보려고 하는데, 내가 까막눈이니까 네가 좀 도와줘."
"나 일 가야 하는데."
"챙겨줄게 임마."
지난 탐험에서 나는 라분에게 짐꾼 이상의 역할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는? 첫 탐험에 오크를 때려잡고, 심지어 오크 챔피언에게도 두려움 없이 맞서는 모습을 보여줬다.
아무리 학즉사법의 보조가 있었다고 해도 본인 자체가 재능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에? 원래 주인한테 허락은 맡았어?"
"내가 얘 주인이야."
콜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설마했는데. 진짜였어?"
"그래. 이제 노예라고는 생각 안 하지만."
라분은 목숨을 걸고 나를 구해준, 그야말로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다.
라분의 희생을 발판 삼아 마음을 다잡고 3위계에 도달할 수 있었다.
만약 그런 결심 없이 오크 챔피언과 맞섰다면?
아마 기본 몇십 번은 더 죽었을 터다.
나를 추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에 도망도 못 쳤겠지.
나는 1골드를 척 내밀었다.
"한 달에 10번 정도. 한 번에 10실버, 10번에 1골드면 되겠지."
"음. 가봐야 알겠지만. 꽤 비싸게 치는거 아냐?"
"그런가."
내 예전 파티를 가르쳐 주던 노인이 한 번 교육에 동화 50개를 받았다.
정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으러면 이 정도는 지불해줘야지 싶다.
용병 길드에 의뢰를 넣으면 용병 쪽에 끈이 있는 은퇴 탐험가가 바로 미끼를 물 거다.
어차피 돈이 최고니까, 그쪽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바가지 잡히지 않게, 그나마 똑똑이인 콜린을 앞세워야겠다.
콜린이 이런 쪽에 재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없으면 어떠랴!
어차피 인생은 기합이다.
우리는 라분을 어르고 달래며 집으로 다시 돌아와 더 마셨다.
라분은 잘 재워놓고.
그나저나, 라분을 탱커로 쓰면 또 짐꾼 자리가 빈다.
"흠. 짐꾼이 필요한데."
콜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지만 여전히 질색을 하니.
그냥 집이나 지키라고 해야겠다.
다음 날 우리 셋은 먼저 대장간을 찾았다.
하수구에서 실력만으로 양지에 올라간 능력자가 있는 곳이다.
하수구 출신인 덕분에 덕분에 나와 콜린도 안면이 좀 있다.
대접을 위해 적당한 와인 한 병 사들고 갔다.
이상하게 이 아저씨는 와인을 좋아한다는 말이지. 남자답지 않게.
"코랄 아저씨!"
"여. 루카스, 콜린. 나머지 애들 소식은 들었다. 쯧쯧쯧."
침 튈라.
내 얼굴마담 콜린이 붙임성있게 코랄에게 말을 걸었다.
"잘 지내셨어요?"
"그래. 뭐 나야 먹고 살 만큼은 벌지. 왜, 단검이라도 하나 사려고?"
"아뇨. 방패. 비싼 걸로 주문 제작."
"호오? 돈 좀 벌었나 본데?"
나는 골드 하나를 엄지와 검지 사이에 껴놓고 바람을 후 불었다.
코랄이 바람에 날려가는 시늉을 한다.
여전히 웃긴 아저씨다.
"양손검 다루는 녀석이 왜. 탱커로 전직하려고?"
"내가 아니고 이 녀석이⋯⋯ 야 라분! 안 들어오고 뭐 하고 있었냐?"
"에, 어."
"빨리 들어와."
"어, 알았다."
라분이 우물쭈물하더니 대장간 안으로 들어왔다.
나중에 물어보니 사막의 열기와 비슷한 따뜻한 불가에서 고향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모양이다.
"자, 이분은 코랄 아저씨다. 아저씨. 라분이예요. 듬직한 내 파티의 탱커."
"호오라. 이 친구가 쓸 방패라?"
"라분. 방패. 갖고 싶다."
"그래그래."
예상대로 코랄은 지역 차별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것저것 이야기하다 보니 라분과 죽이 잘 맞는 모양이다.
콜린과 내가 이리저리 대장간을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주문을 마친 라분이 합류했다.
눈이 아주 부담스러울 정도로 초롱초롱하다.
"선수금, 줘야 한다."
"선수금? 얼마?"
"은화. 10개."
코랄한테 가서 은화를 건네니 낼름 받아 간다.
"저 친구. 말만 어눌하지 아주 싹싹하던데? 요즘 나이답지 않아."
"요즘 나이? 그러고 보니 라분이 몇 살이지?"
"라분. 18살."
"⋯⋯."
내가 동생이군.
그래도 내가 주인이니까 그냥 평소같이 대하기로 하자.
동갑인 콜린도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잽싸게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이런 쪽은 합이 잘 맞는다는 말이지.
건국제가 코앞이기에 각종 노점상들이 줄지어 서있다.
우리들은 적당히 끼니를 때운 뒤 여기서 가장 가까운 용병 길드로 향했다.
칼리움 내의 용병 길드는 도시 안에 있기에 미궁 4층의 사무소보다는 풀어진 분위기다.
그래도 기세가 중요한 법.
예전에 탐험가가 되기 전 용병이 되겠다고 들어갔다가 엉덩이를 한 10대쯤 맞고 쫓겨난 기억이 났다.
"⋯⋯."
지금 생각해도 트라우마다.
하지만 이제는 거리낄 것이 없다. 누구보다도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들어가자.
길드 안은 뻑뻑 담배를 피워대며 카드 게임을 하는 용병들이 드문드문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는 모습이 크게 달라진 모습이 없다.
예전에 나와 같이 엉덩이에 불이 났었던 콜린은 이미 발걸음이 떨리고 있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고 접수대를 찾아갔다.
어차피 접수대에 서 있는 놈이라고 해봤자 2위계.
미궁 4층 사무소 직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놈이다.
그때는 왜 그리 무서웠는지.
"적당한 사람을 찾는데."
"응? 처음?"
"그래. 전직 탐험가 탱커 출신. 탱커 교육을⋯"
"처음이냐고 물었는데?"
"그렇다고 답했다만? 다시 말하지, 탱커 교육을 맡기고 싶다."
"어쭈."
접수원이 발끈하려고 할 때, 나는 조용히 이쑤시개를 집어 들고 검염을 피워올렸다.
콜린은 이미 눈을 깔고 있었기에 검염을 보지도 못했다.
"⋯⋯."
벌떡 일어나려던 놈이 그 속도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구인 의뢰는 개인 의뢰라 시간이 좀 걸릴텐데⋯요."
"며칠 정도?"
"넉넉히 이틀은 주셔야 할것 같은데요."
나는 동화 10개를 팁으로 내밀었다.
"내일 올 테니까. 몸값은 얼마 정도? 대충 한 번에 몇 개면 되지?"
내가 손가락을 움직이며 1, 2, 3을 그리자 어느새 템포를 회복한 접수원이 너스레를 떤다.
"어휴. 요즘 동화 4, 50개로는 어림도 없지요. 제대로 된 강습 받으려면 하루에 은화 두어 개쯤은 내미셔야 합니다."
"엥?"
"많이 비싸죠?"
한 번에 은화 10개 내려고 했는데?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콜린이 내 말을 가로챈다.
"그럼 한 번 교육에 은화 3개를 보수로 하면 어때?"
"어이쿠. 안 올 놈들이 없을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으로 불러. 너도 좀 챙겨줄테니까. 최소 미궁 5층 이상으로."
나는 콜린의 말에 맞춰 동화 10개를 더 챙겨줬다.
그러자 내게 시비 걸려던 건 벌써 잊었는지 놈이 함박웃음을 짓는다.
나름의 생존법이겠지만 밉지는 않았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내일 이 시간에 뵙겠습니다!"
딸랑이는 종소리와 함께 용병 길드를 나왔다.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진 뒤 콜린이 심호흡을 했다.
"휴. 떨려서 죽는 줄 알았네."
"꽤 싸네? 은화 10개는 될 줄 알았는데."
"나도 처음에는 몰랐지만 눈치가 있지 눈치가. 생각해 보니 은화 10개면 엄청나잖아?"
어쨌든 소비가 크게 준 것은 다행이다.
"제대로 된 사람이었으면 좋겠는데. 라분. 교육받을 준비됐어?"
"제대로. 배우겠다."
"그래. 그렇게만 하자고."
그렇게 할 일을 마치고 나니 이제는 먹는 일만 남았다.
이번에는 어제 못마신 만큼 술을 잔뜩 먹었다.
마침 노점상도 많으니 낮술부터 시작해 밤까지.
라분도 술을 못 마시는 놈이 아니었기에 넙죽넙죽 목구멍으로 마법의 음료를 넘겼다.
"수련은 내일부터 하면 되니까!"
그렇게 숙취에 찌든 다음 날.
콜린은 몸이 식는다고 공사판에 일하러 갔고, 나와 라분만 용병 길드로 향했다.
용병 길드에는 접수원이 모셔놓은 중년의 남성이 있었다.
"이 분?"
"넵! 제대로 모셨습죠!"
"흠."
일단 내 감지능력으로 관찰하기에는 3위계는 아니고 완숙한 2위계 같다.
그리고 나이.
아무리 많이 쳐봤자 40대 정도로 밖에 안 보이는데?
우리는 접수원이 안내하는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잠깐의 정적.
말이 많은 스타일은 아니었다.
이럴 때는 어쩔 수 없이 말주변 없는 내가 말문을 터야 했다.
"에. 저는 루카스. 이 친구는 라분입니다. 잘 부탁드러요."
"켄드릭이올시다."
"아. 반갑습니다. 그래도 제가 고용하니만큼 이력을 좀 듣고 싶은데. 아. 가르칠 친구는 이 친구입니다."
"라분. 잘 배운다."
"호오. 근골이 튼튼하군."
이제 와 보니 켄드릭은 오른손 엄지와 검지, 두 개의 손가락이 없었다.
아직 마나 사용자로 한창일 나이에 소일거리나 하는 이유가 있었다.
'강제 은퇴했었구만.'
내가 별말 없이 켄드릭의 말을 듣고 있자 그의 말투가 뭔가 다급해지더니 이윽고 고개를 푹 숙이고 만다.
"내가 손가락이 이래도 꽤 잘 가르칠 자신이 있으니. 한 번 믿고 맡겨보시게나!"
"에? 에?"
내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니 자기 멋대로 착각한 모양이다.
아니, 내가 손가락 세 개 없다고 바로 쫓아내거나 하는 나쁜 놈은 아닌데.
사실 영 못 미덥기는 하지만.
하지만 나는 그동안 별로 맛보지 못했던 감정에 휩싸이고 있었다.
'나보다 한창 윗줄의 사람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네.'
이게 갑질인가? 본의가 아니기는 했지만.
역시 돈이 최고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21
은퇴한 베테랑 탐험가, 켄드릭이 내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물론 나도 검술 한 번 가르치는데 은화 3개를 준다면 토리코에게도 고개를 숙일 수 있다.
아니, 무한 회귀를 알기 전이었다면 아예 신발까지 핥았을 것이다.
또 그렇게 생각하면 켄드릭의 저 태도가 딱히 놀라운 것도 아니다.
나는 책상을 탁 쳤다.
구구절절이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던 캔드릭이 입을 딱 멈췄다.
"좋습니다! 한 번 교육을 참관해 보고 결정하죠. 가르칠 곳은 있습니까?"
"내 집 뒷뜰이 있네. 좁지만 가림막을 치면 누구도 볼 수 없는 장소일세."
"가봅시다!"
전격적인 결정!
어차피 라분이 배워야 하는 것은 방패 다루는 법의 기초 중의 기초다.
영 시원치 않으면 바꿔버리면 그만이다.
지금의 라분은 독학으로도 한 번 더 탐험을 갈 수 있을 만큼 실력이 있었으니.
시간 낭비도 최소화할 수 있다.
그렇게 도착한 켄드릭의 집.
등급을 따지자면 하수구보다 딱 한 단계 높은 등급의, 호구조사원이 들어갈까 말까 고민할 정도의 집이다.
"흠흠. 들어오시게."
문을 열고 들어오니 여러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된다.
반짝이는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두 쌍의 눈.
그 눈을 단속하는 엄한 한 쌍의 눈.
켄드릭의 아내와 두 자식들이었다.
그래봤자 나보다 한 두살 어린, 성인 대접받을 나이다.
딸과 아들.
"흠흠. 소개하겠네. 내 아내 카릴, 큰 딸 안나, 동생인 둘째 마이크."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안녕. 난. 라분."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지자 어린애들의 입이 열렸다.
나는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까딱이고 말았다.
사실 부모님 얼굴도 기억 안 나는 내게는 부모 있는 자식에 대한 자격지심이 넘쳐났다.
내 또래로 보여 부럽기도 하다.
"뒤뜰은 여기일세."
단출한 부엌을 넘어가니 집 뒤로 문이 있었다.
문밖에는 가림막으로 둘러싸인 조그마한 공터가 자리했다.
확실히 두 사람이 수련하기에는 적당한 장소다.
한 사람이라면 칼춤 춰도 될 정도고.
"바로 시작하시죠."
나는 일부러 문 입구에 덜커덩 부딪히며 앉았다.
문 뒤에서 귀를 바짝 대고 있던 놈이 펄쩍 뛰며 뒤로 물러난다.
라분이 척 방패를 들었다.
이제는 저 모습만 봐도 듬직하다.
"흠."
하지만 켄드릭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분. 방패를 든지 얼마나 됐지?"
"일주일. 정도?"
"뭐? 일주일이라 했나?"
켄드릭이 펄쩍 뛰었다.
"일주일이면, 미궁 4층에 다녀왔다던 그때 아닌가!"
기본적인 정보는 설명했기에 켄드릭은 우리의 사정을 대충은 알고 있었다.
말 그대로 '대충'.
"미궁 4층 탐험가라기에는 너무 미숙하고, 방패를 든지 고작 일주일밖에 안 된 초보자라기에는 너무 성숙해."
켄드릭은 말로 라분의 자세를 고정하려는 시도를 했다.
켄드릭의 지시에 따라 이리저리 방패 쥐는 각도를 다르게 하는 라분.
하지만 내가 봐도 영 엉성하다.
"음. 이 방법은 안 되겠군. 말도 잘 못 알아듣고."
켄드릭은 내 눈치를 쓱 보더니 방패를 들었다.
손가락 두 개가 없음에도 연습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는지 방패를 쥐는 폼이 나름 능숙하다.
"한 번 내게 방패를 앞세워 돌진해보게."
"어. 손가락. 없는데."
"어서!"
"다칠텐데⋯."
라분이 나를 보며 어물쩡거렸다.
솔직히 나도 답답하다. 그동안 쌓아온 정이 아니었으면 이미 머리 한 대 맞았다.
"라분. 네가 마주하는 사람은 너의 스승이다. 너를 가르치겠다는 사람의 말을 안 들으면, 누구 말을 들을래? 내 말은 잘 듣고."
"⋯알았다."
라분이 자세를 잡고 거리를 벌린 뒤 켄드릭에게 돌격했다.
켄드릭은 라분의 방패를 회피하려는 동작도 없이 정면에 버티고 서서 라분의 방패를 받을 준비를 한다.
어? 내 예상과 다른데?
나는 켄드릭이 기술적으로 라분의 방패를 흘려내거나 회피할 줄 알았다.
그야 손가락 두 개가 없지 않은가.
제대로 방패에 힘이 전달될 리가 없고, 외부의 충격에 대한 저항력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켄드릭은 여유로운 표정이다.
라분과 켄드릭의 방패가 서로 정면충돌했다.
놀랍게도 비틀거리며 물러난 사람은 라분이었다!
"대박."
켄드릭이 방패를 내리며 말했다.
"알겠나?"
"모, 모르겠다."
"라분. 자네는 타고난 힘이 좋아. 좋은 호흡법을 익혔는지 마나를 다루는 효율도 뛰어나지. 하지만 주먹구구식으로 방패를 배웠기에 가장 기본적인 걸 모르고 있어."
"?"
"그렇게 길게 말하면 라분 못 알아듣습니다!"
켄드릭이 삐걱였다.
라분이 얼굴이 붉어진 채로 나를 돌아보았다.
"라분. 바보 아니다."
"알고 있어."
헛기침을 연발한 켄드릭이 말을 이었다.
"방금 라분 너는 나를 상대한 것이 아니다."
"??"
"나와 내가 내딛고 있는 이 땅을 상대한 거지."
"!"
"기본적으로 오크의 경우 덩치가 너보다 크다. 그리고 힘을 앞세워 내리치는 공격에 능하지. 그럴 때는 자연적으로 충격을 땅에 흡수시켜야 한다. 방금 네 공격을 받은 내 자세를 보아라."
땅에 충격을 분산시키기 위해 준비하고, 충격 순간에 방패를 트는 모습을 보여주는 켄드릭.
라분이 자세를 따라했다.
"좋아. 역시 한 번 겪게 하니 낫군. 오늘은 이 자세를 중점적으로 배워보자."
그렇게 한 시간 동안 라분의 교육이 이어졌다.
그리고 잠시 쉬는 시간.
"루카스 님."
"네?"
"기왕 오셨는데, 이렇게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지치지 않습니까."
"어, 네."
사실 학즉사법 2성 도전을 위해 계속 마나를 운용하고 있었기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사회생활을 잘 하는 놈.
눈치가 있었기에 일단 켄드릭과 호흡을 맞췄다.
"지루했습니다."
"공격의 예시를 위해 공격자 한 명이 필요합니다. 원래 제 아들 놈을 시키려고 했는데, 루카스 님께서 한 번 힘써주시지요."
"뭐, 그러죠."
다음 한 시간은 내가 교보재가 되어 공격 순간의 방어에 대한 교육을 도왔다.
라분은 직전 1년까지 미궁 탐험가로 활동했던 베테랑의 지식을 쑥쑥 흡수했다.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팔팔한 2위계에, 이 정도 실력이면 라분을 가르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후. 이것으로 오늘 교육은 마무리하겠네."
"고맙다."
라분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루카스 님. 시장하실 텐데 식사라도 하시고 가시죠."
"어이쿠. 감사히 먹겠습니다."
미리 이야기가 됐는지 켄드릭의 아내 카릴이 식사 준비를 모두 마쳐놨다.
빵과 토마토 스튜, 남정네 셋이서 사니 이렇게 가정적인 음식을 먹는 것도 처음이다.
"맛있네요⋯."
왠지 모를 감동을 느끼고 있자 카릴이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 오시면 또 만들어드릴게요."
이게 남편의 구직활동을 위한 서포트일지 몰라도 일단 들으면 감동이 되는 말이기도 하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풀어지자 사춘기 아들이 돌발행동을 했다.
"루카스 님! 저 탐험가가 되고 싶어요!"
"이 놈이!"
켄드릭이 눈을 부라리며 아들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내 눈치를 보는지 더 이상 말은 하지 않는다.
사춘기가 괜히 사춘기겠는가.
켄드릭의 타들어가는 속도 모르고 본인 할 말을 계속한다.
"짐꾼이라도 좋아요! 같이 탐험에 데려가주시면 안 될까요?"
"흠."
"어머, 우리 아이가 실례되는 말을. 정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나는 잠깐 정신을 집중하며 마이크를 바라보았다.
감지 능력이 발달되니 이제 타인의 마나를 보는 것도 때에 따라 가능하다.
물론 마이크의 마나는 제로. 1위계도 되지 못한다.
만약 마이크를 받아들인다면 탐험 속도를 마이크의 움직임에 맞춰야 할 판이다.
당연히 안 된다.
"마이크?"
"네!"
나는 켄드릭을 살짝 보았다.
배려심이 넘치는 내가 어떻게 설명을 해야 이 상황을 적당히 넘어갈 수 있을까.
"자식을 탐험가로 키우는 탐험가는 없어."
"?"
"누구보다 탐험가가 더러운 직업인지 알거든. 아버지를 봐라. 그런 탐험가로 지금까지 너를 먹여살린 사람이야. 대단하신 분이지. 켄드릭 씨. 자식을 탐험가로 키울 생각이 있으십니까?"
"결단코 없습니다."
"아버지를 믿어. 그게 정답이다."
켄드릭이 고개를 끄덕였고, 마이크는 풀이 죽었다.
집을 나오며 켄드릭에게 은화 4개를 주었다.
"아들 맛있는거 사주십쇼. 많이 실망했을 텐데. 이틀 뒤에 또 오겠습니다. 아마 라분 혼자 올 거예요."
"감사합니다."
감동한 켄드릭이 내게 고개를 숙이려 하는 것을 눈짓으로 막았다.
문틈으로 아들과 딸이 지켜보고 있음을 넌저시 알리자 어느새 가장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아버지.
귀가하는 길에 라분에게 물었다.
"괜찮았지?"
"배운 게 많았다."
"뽑아먹을 수 있을 만큼 뽑아먹어. 그걸로 나 지켜줘야지."
"최선을 다하겠다."
"좋아."
라분에 대한 걸 마무리 지었으니 이제는 내 일을 마무리 지을 때다.
지금까지 무서워서 미뤄왔지만 어찌 도전하지 않을 수 있으랴.
'학즉사법 2성!'
도전의 결심을 마치자마자 머릿속 지식이 활짝 열렸다.
[2성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최소 3위계의 실력이 필요하다. 3위계 미만의 수련자가 2성에 도전할 경우,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온몸이 터져버린다.]
알아!
그래, 마정석도 단번에 뽑으라고 했다.
하기로 결정한 거, 그냥 단번에 해치우자!
나는 집에 돌아와 라분에게 말했다.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절대. 아무도 이 방에 들이지 마. 너도 마찬가지로 들어오면 안 돼."
원래 호흡법을 수련할 때는 반드시 안전이 보장된 장소에서 해야 한다.
특히 호흡법의 경지를 높이기 위한 시도는 더더욱.
나에게는 호법을 서줄 든든한 탱커가 있다.
몸빵, 라분.
"부탁한다!"
"우어어어! 아무도 못 들어간다!"
"오바하지 말고."
"⋯⋯."
나는 방 안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마치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머릿속의 지식이 열렸다.
[학즉사법의 1성은 마나가 통할 큰 통로를 몸속에 개척했다. 그렇다면 마나가 신체 곳곳에 뻗어나갈 수 있는 아주 작은 통로를 개척하는 것이 2성의 목표라 하겠다.]
그것으로 설명은 끝.
다음은 1성을 익힐 때와 마찬가지로 마나를 가공하는 작업이 적혀있었다.
역시 어렵지 않은 가공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약 한 시간을 들여 완성된 붉은색 마나.
그런데 마나 모양이 마치⋯
"송곳?"
대충 봐도 불길하다.
[가공된 마나를 오른쪽 팔다리, 왼쪽 팔다리, 그리고 몸통에 집어넣고, 안정시켜라. 다음으로 그 마나를 모아 머리 위로 올려라. 마나의 결을 깨달아 몸을 자유롭게 하라.]
"?"
뭔 개소리야!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알려주니 도저히 실전을 겪지 않고서는 감도 잡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다섯 명 중 한 명만 1성에서 살아남는 거고, 이 호흡법도 전승자가 없어져 사라져버린 거겠지!
송곳 모양으로 가공된 마나가 마치 찔러달라는 듯 그 첨단을 빛내고 있었다.
이 마나의 형성은 검염의 생성 원리를 기초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3위계가 아니면 시도조차 못한다는 거였구나."
그래. 앞으로의 내 인생은 도전으로 시작해서, 도전으로 끝날 것이다.
"도전!"
나는 마나를 오른팔 정중앙에 그대로 찔러 넣었다.
고통도 없이 내 몸을 찌른 송곳이 그대로 팔 전체에 퍼진다.
신기하게도 겨드랑이를 경계로 하여 그 이상 넘어가지 않는다.
그렇게 1분.
"설마 끝?"
혼잣말을 내뱉자마자 팔이 자기 멋대로 덜컥이기 시작했다.
수천 개의 바늘이 팔을 동시에 찔렀다.
트롤이 휘두른 거대한 망치가 팔을 직격했다.
켈리어의 검이 팔을 난도질했다.
아니, 내 착각이다. 팔은 멀쩡하다.
"으아아아아악!"
"주인?"
"들어오지 마! 절대로!"
나는 팔을 부여잡을 생각도 못 하고 그저 시선만 고정했다.
붉은 마나가 팔 전체를 장악하며 울부짖고 있었다.
수백, 수천 갈래로 뻗어나가는 마나가 팔을 뚫고 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팔로 모든 마나를 불어넣으며 고통을 줄이기 위해 발버둥 쳤다.
팔 속의 마나가 움직일수록 고통은 커져갔다. 하지만 일부 자리를 잡고 얌전해지는 마나들이 있다.
[마나의 결을 깨달아 몸을 자유롭게 하라.]
"닥치라고!"
알고 있다.
이 마나를 이용해 몸에 미세한 마나의 통로를 뚫어야 한다는 걸.
하지만 이 고통 속에서 그런 섬세한 작업을?
마침내 고통이 임계점에 다다랐을 때, 내 팔이 터져나갔다.
-펑!
파이어볼 터지는 소리와 함께 오른팔이 형체도 없이 터져나간다.
나는 본능적으로 오른팔을 보며 헛웃음 지었다.
"미친."
학즉사법.
그야말로 마공 중의 마공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는 흐흐 웃었다.
오른팔을 희생하며 얻은 감각으로 어느 정도 요령을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감이 넘치는 외팔이를 조심하라. 학즉사법의 2성을 습득한 자일 가능성이 높다.]
"이 미친 새끼가! 안 닥쳐!"
"주인?"
"라분. 나는 괜찮아."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마나를 운용해 오른팔의 지혈을 마쳤다.
다시 자세를 잡고 머리를 비웠다.
아직 팔다리는 3개나 남았다.
그리고 마나를 가공해 오른발에 그대로 집어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른발이 폭발했다.
"흐흐흐흐."
왼팔에 마나를 집어넣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의식이 머나먼 곳을 향해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머리가 멍해지고, 어쩔 수 없이 팔을 제어하던 마나의 통제력이 약해졌다.
왼팔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의식을 잃었다.
죽음이었다.
-키릭.
⋯⋯
라분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오른팔을 두드리던 감각을 다시금 되새기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학즉사법. 넌 오늘 뒤졌다."
아니, 역시 내가 먼저 죽을지도.
미궁의 무한회귀자 22
학즉사법 2성.
라분을 다시 호법으로 세운 뒤 마음을 가다듬었다.
내 모든 정신을 몸에 집중한다.
컨디션은 만전이다.
"도전!"
사지 4개 중 3개가 터지고.
-키릭.
"도전!"
사지 4개 중 2개가 터지고.
-키릭.
"씨발. 도전!"
사지 4개 중 3개가 터지고.
-키릭.
"못 먹어도 간다. 도전!"
오른팔을 성공했지만 다시 나머지 3개 중 2개가 터지고.
-키릭.
"으아아아아! 도전!"
사지 4개 중 3개가 터지고.
-키릭.
⋯⋯⋯
"제기랄!"
대로에서 엄청나게 큰 소리를 내자 주변의 이목이 한순간에 집중된다.
하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으아아아!"
도저히 안 된다.
이건 패턴을 외우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마나 통제력.
오른팔을 막 안정시켰을 때, 이 상태를 유지하며 나머지를 성공하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안정되었다고 생각한 오른팔은 끊임없이 내 몸을 자극해 통제를 유도했고, 통제를 하지 않으면 폭발하리라 예고하고 있었다.
내 주의력 일부를 오른팔에 할애할 수밖에 없었기에, 이어지는 오른발을 실패하고 말았다.
사지 중 하나는 어찌어찌 성공할 자신이 있었지만.
"이 상태로는 성공 못한다. 일단 보류."
아마 백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실제로 죽었다 깨어나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3위계는 학즉사법의 2성에 도전하기 위한 최소 조건일 뿐이었다.
보다 완숙한 3위계가 되어야 학즉사법 도전이 가능하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기에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다 하고 도전해야 하는 마공.
그것이 바로 학즉사법이었다.
나는 내가 준비가 너무 부족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한 회귀로도 성공할 수 없는 건 있기 마련이다.
"후."
라분은 기특하게도 이런 내 지랄발광을 아무 말 하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집으로 돌아오고, 여전히 풀이 죽어있는 내게 라분이 말을 걸었다.
"주인."
"왜."
"기분, 안 좋아 보인다."
"그래. 나 기분 안 좋다."
"힘내라."
나는 잠깐 라분을 바라본 뒤 피식 웃으며 라분의 어깨를 탁 쳤다.
"역시 너 밖에 없다."
그래. 실패하면 어떠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실패를 허락받은 사람일 텐데!
라분이 집 안에서 방패를 휙휙 휘두르는 것을 보며 하루를 보냈다.
다음 날 아침.
우리 셋은 다음 미궁 탐험을 구상했다.
왜 셋이냐고?
콜린의 머리는 은근히 쓸모가 있다.
"루카스, 라분. 너네는 미궁의 더 깊은 곳으로 갈 거잖아?"
"그래."
"그렇다."
"나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미궁 10층을 넘어가면 환경이 변한다는 말이 있어. 지나가다 들어서 확실한 건 아냐."
나도 얼핏얼핏 들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미궁 사무소는 탐험가들의 생존성을 보장하기 외해 정보 공개에 인색하지 않지만, 그것은 자격이 있는 자에 한해서다.
현재 내가 제공받을 수 있을 정보들은 미궁 4층의 정보가 전부다.
물론 정보 자체도 꽤 비싼 돈을 주고 사야 하고.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할 필요가 있어. 다음 탐험 때는 리자드맨의 구역으로 가봐."
"리자드맨. 그래. 네 말이 맞아."
리자드맨.
말로는 많이 들어봤지만 실제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몬스터다.
고유의 언어를 쓰는 오크와는 달리 인간의 언어를 일부 구사하는 종족이다.
어떻게 얻었는지는 뭐 대충 짐작할 수 있었지만.
"절대 소통하지 마. 언어를 사람을 죽이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놈들이니까."
"그래."
"꿀꺽."
"라분. 왜 침을 삼켜?"
"도마뱀. 맛있다."
"뭔 개소리야!"
들어보니 사막에도 도마뱀이 산다고 한다.
라분의 별식이었다고.
도마뱀 몬스터라는 말을 들으니 괜히 옛날 생각이 나는가 보다.
"몬스터 고기를 먹겠다고?"
"도마뱀 고기는. 괜찮다."
"그건 네 생각이고!"
미궁에서 수일을 조난당해 먹을 것이 다 떨어진 루덴의 파티도 최후의 보루로 남겨둔 것이 바로 몬스터 섭취다.
맛도 더럽게 없고, 인간을 먹는 몬스터를 먹고 있다는 자괴감과 혐오감은 덤이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돼."
"주인에게 대접하겠다."
"필요없어!"
라분은 이미 본인만의 세상으로 가 있었다.
아주 쓸데없는 부분에서 고집이 센 놈이다.
"하지만, 탐험 시점은 건국제 이후로 잡아."
"왜?"
"축제잖아. 즐겨야지."
"⋯그래."
역시 콜린은 맞는 말만 한다.
어차피 돈도 적당히 있겠다.
나는 콜린을 은화로 꼬셔 놓고 켄드릭에게 교육받지 않는 라분을 가르치게 했다.
덕분에 라분의 하루가 바빠졌다.
하루는 콜린이 알고 있던 미궁의 잡지식들을 배우고, 하루는 켄드릭에게서 탱커 교육을 받고.
내 지갑이 텅텅 비어가는 것과 별개로 기분은 매우 좋았다.
나는 뭐 했냐고?
미리 정해진 날짜에 맞춰 미궁 사무소에 갔다.
안내된 방에서는 중년의 마법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테이블에 깔린 오크의 옷 두 벌.
내가 늙은 오크들을 사냥한 후 얻은 전리품이다.
마법사는 연신 옷을 살피기 바쁘다.
"오오. 자네가 이 옷의 주인인가?"
"그렇습니다만."
"그래. 내 모두 매입할 용의가 있네."
"그거야 저도 바라는 바인데, 결국에는 돈 아니겠습니까."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섭섭지 않게 챙겨줘야지. 어디 보자, 원래 의뢰를 1골드에 했으니. 두 벌 전부 3골드 어떤가?"
나는 가격을 듣자마자 당당한 표정으로 손을 척 내밀었다.
"거래 성립입니다."
"하하. 화끈해서 좋군. 혹시라도 수실을 또 얻는다면 내게 연락하게. 내 당장 달려오지."
"알겠습니다."
마법사는 기분이 좋은지 몸속의 막대한 마나를 풀풀 흘리며 옷을 들고 갔다.
애초에 흥정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괜히 마법사와 사이가 틀어지면 밤에 잠도 제대로 못할 테니.
다음 일정은 루덴과의 술자리였다.
적당히 비싸고 분위기 있는 술집. 당연히 목숨을 두 번이나 빚진 루덴이 사는 거다.
"여."
"오. 형님."
"그래. 말 편하게 하기로 했지?"
벌써 두어 잔 마셨는지 얼굴이 살짝 붉어져있었다.
루덴의 옆에는 웬 남자가 자리 잡고 있다.
"동행이 있으셨네요."
"안녕하십니까. 켈른이라고 합니다. 루덴 이 녀석과 같은 클랜에서 일하죠."
"그렇군요. 안녕하십니까."
악수를 하는 손에서 묘한 압력이 느껴진다.
의식적으로 마나를 제어하는 움직임.
3위계, 그것도 꽤 완숙한 수준이다.
켈른이 이 술자리에 낀 이유는 다른게 없었다.
"오크 챔피언과 1대1로 싸워서 이기시다니. 엄청난 실력, 잘 전해 들었습니다."
"자랑할 일은 아닙니다."
정말 자랑할 일이 아니다.
필사의 결심을 하고도 꼬박 6번을 죽어서야 이뤄낸 성과다.
하지만 내 말이 켈른에게는 겸양으로 보였나 보다.
"하하. 저도 오크 챔피언과 1대1이라면 죽음을 각오해야 할 것 같은데요. 대단하십니다."
"감사합니다."
"뭐, 별다른 의도 없이. 루카스 님과 친해지고 싶어서 왔습니다. 이 친구 말 들어보니 미리 침을 발라놔야겠더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물론 내 딱딱한 태도는 초반부 한정이다.
어찌 됐든 루덴이 켈른과 나를 서로 소개해 주는 것도 탐험가 인맥이 거의 없는 나에게는 커다란 배려다.
루덴과 켈른이 분위기를 화끈하게 띄우고, 술이 얼큰하게 들어가자 어느새 우리 셋은 호형호제하게 되었다.
"한잔 해!"
"술 넘친다!"
"어이쿠!"
켄드릭에게 교육을 받고 온 라분이 한심한 표정으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잠깐 눈을 마주친 뒤 합심하고 라분에게 술을 몰아주었다.
곧 라분도 우리와 함께 얼씨구나 춤을 추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휴식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축제. 건국제.
미궁 도시 칼리움이 귀족, 평민 구분할 것 없이 난리가 나는 날이다.
그중 가장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 해도 콜로세움의 마상창시합과 토너먼트.
피가 튀기는 전투에 모두가 열광했다.
축제하면 빠지지 않는 도박.
나는 무려 3골드를 준비했다.
"흐흐. 대박을 치는 거야."
정 안되면 머리를 터뜨릴 용의도 있었다.
꾸역꾸역 밀고 들어가 맨 앞자리를 차지했다.
기어코 반항하는 놈들에게는 검염을 슬쩍 보여줘 정신을 차리게 하면 되었다.
이제 콜로세움 출전자들이 소개되면서 경기장을 한 바퀴 돌 때, 그들의 마나를 관찰한다.
학즉사법이 내게 선물해 준 감지 능력을 이용하면 쉬운 일이다.
그다음 손짓으로 큰 가방을 메고 관객석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꼬마애를 부른다.
"빨간 머리에 1골드!"
"1골드 넣었슴다!"
확인증을 낚아챈다.
아무리 꼬마애라고 해도 2위계. 더군다나 칼리움에서 공증한 놈이다.
만약 이놈을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그 날로 즉결 처형이 될 거다.
하수구 출신인 나는 도박장이 얼마나 미친 곳인지 잘 알았기에 웬만한 도박장은 얼씬할 생각도 없다.
도박장에서 돈을 제대로 따고 나와 손을 씻는다?
아무리 내가 3위계라도 일주일 안에 죽는다에 3골드를 건다.
그만큼 깊고, 한 번 빠져나오면 헤어나올 수 없는 마굴이 도박장이다.
하지만 이런 속임수 없는 도박은 언제나 환영이다.
내 도박 전략은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3골드가 5골드 50실버가 되고, 다시 7골드가 되고, 9골드 20실버가 되고, 그게 4골드 20실버가 되고.
"씨바아아아알!"
아니, 4.8배가 터진다고?
죽어 나자빠진, 내 5골드를 먹어치운 놈에게 세상에 더없을 쌍욕을 했다.
그 뒤 머리를 부여잡고 탄식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가슴으로 가져간다.
내 5골드. 대략 0.2 라분.
"어쩌지?"
눈이 충혈되었다.
머리를 터뜨리려면 지금이다.
하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내 목숨이 고작 5골드?
내가 무한 회귀라고 이름 붙였지만, 이 특성의 정체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렇게 특성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에야 안 되면 터뜨리려고 했지만.
역시 죽음은 무섭다.
나는 일전에 내가 세웠던 방침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죽지 않을 수 있으면,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깟 5골드, 목숨보다 중요하지 않다.
원금을 까먹은 것도 아니지 않는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골드들을 애써 무시하고, 크게 기합을 넣었다.
"합!"
양옆에 앉아있던 라분과 콜린이 나를 정신병자 보듯이 한다.
"요즘 저 녀석,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니야."
"동감한다. 저번에, 길에서 소리 질렀다."
"뭐?"
"갑자기 비명. 그리고 욕. 무서웠다."
"야, 루카스. 너 괜찮아? 요즘 막 기분이 좋아졌다가 나빠졌다가 그래?"
"시끄러 이놈들아. 돈 잃어서 그렇잖아. 돈!"
그 뒤로는 즐기고, 즐기고. 또 즐겼다.
내 인생에 이렇게 행복한 시절이 언제 있었는지 모르겠다.
라분도, 콜린도 다 같이 웃으며 마셨다.
트롤에게 죽기 직전에만 해도, 내 무한 회귀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때만 해도 내 인생은 암흑으로만 가득할 줄 알았다.
그렇기에, 이 희망을 다시는 놓칠 수 없다.
이 희망은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쟁취해야 한다.
하지만 무지렁이에 머리조차도 나쁜 나는, 이 길밖에 알지 못한다.
건국제가 끝나고.
라분과 나는, 행복한 추억을 간직한 채로 다시 미궁 4층에 발을 내디뎠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23
거의 2주만에 맡아보는 미궁의 냄새. 그리고 압박감.
생존 감각에서 비롯된 긴장감이 그동안 나태해졌던 내 정신을 다시 일깨워 준다.
"흐읍! 하."
"이 느낌. 오랜만이다."
물론 도시에서 수련을 게을리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동안 주로 행한 수련은 마나 통제력을 기르기 위한 명상이다.
이렇게 몸을 쓰는 환경에 오니 마음이 새로워진다.
"라분. 사무소 지부로 가자."
"알겠다."
두 번째 입장은 첫 번째보다 비교적 익숙하게 이루어졌다.
그렇게 세 번째, 네 번째 입장도 있겠지.
사무소 직원이 아는 체를 했다.
"여. 이야기 들었다."
"?"
"오크 챔피언을 단신으로 잡았다면서, 3층에서는 트롤도 잡고."
"!"
"크크. 이 바닥이 은근히 소문이 잘 돌아. 특히 새로운 다크호스의 등장은 훨씬 더."
직원의 목소리는 작지 않았다.
순식간에 주위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럴 때의 내 방침은 정해져 있다.
태연하게, 당당하게.
"뭐, 그런 것 같네요. 이번에는 리자드맨 챔피언이나 사냥해 보렵니다."
"패기도 넘치네. 기대하고 있다고."
나는 당당하게 의뢰들이 자리한 벽으로 걸어가 리자드맨과 관련된 의뢰를 살폈다.
기본적으로 오크와 관련된 의뢰를 찾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만만한 거 두 개, 어려운 거 한 개.
[리자드맨의 온전한 꼬리 5개]
[리자드맨의 발 3개]
[리자드맨 주술사의 지팡이 1개]
의뢰를 챙겨 밖으로 나오니 라분이 당당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번에는 시비를 거는 놈들을 꽉 눌러줬던 기억이 나는데, 정말 소문이 났는지 힐끔거리는 시선은 느껴지지만 접근하는 사람은 없었다.
"응?"
나는 그나마 가까이 있는 탐험가들의 면면을 살피던 중, 익숙한 사람을 발견했다.
나에게 시비를 걸어 손목이 반쯤 잘린 놈의 동료들이었다.
내게 참교육을 당한 놈은 역시나 없었다.
아무래도 제때 치료를 못한 모양이다.
'미궁에서 다시 볼 일은 없겠군.'
녀석들은 나를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더니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며 멀어져 갔다.
충분히 기분 나쁜 상황.
하지만 나는 그러려니 하고 넘기기로 했다.
나 같은 대인배가 또 없다.
"라분. 가자."
"알겠다."
켄드릭이 재검수하고 라분의 체형에 맞게 조절한, 본인을 위한 전용 방패를 든 라분은 보기만 해도 든든했다.
나를 보고 수군거리던 놈들은 나를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 뿐 내 목적지를 알아내려는 움직임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그러면 신경 끄고 내 할 일을 할 뿐이다.
기합과 함께 안전지대를 벗어났다.
"아자. 아자. 화이팅!"
리자드맨의 구역으로 분류되는 통로를 선택했다.
리자드맨이 등장하는 구역을 찾아 이동하던 중, 떠돌이 고블린들을 상대로 라분과의 호흡을 점검했다.
마주하기 10분 전부터 계획된, 내가 원하는 시점에서 이루어지는 전투다.
"우어어어!"
은밀히 접근한 우리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고블린들.
"케엑?"
라분의 중량감 있는 돌진과 뒤이은 방패 차징이 고블린들의 진형을 붕괴시킨다.
그 뒤를 바짝 따라온 나의 칼춤이 이어졌다.
그렇게 고블린 7마리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우어어어!"
"시끄러워. 잘했어."
"후우. 후우."
오랜만에 이뤄진 전투의 흥분을 마구 뽐내는 라분.
자신감이 아주 넘친다.
그런데 신경 쓰이는 기척.
"근처에 파티들이 꽤 있네."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학즉사법으로 인해 강화된 감각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니까.
이렇게 민감해진 감각도 3위계로 오르며 생긴 부작용이다.
어쩌겠는가, 이 감각은 생존을 위해서라면 포기할 수 없는 장점이기도 했다.
내가 적응하는 수밖에.
그렇게 미궁 깊숙한 곳으로 나아가자 바닥이 축축해지는 것이 확인되었다.
"좋아. 오늘 탐험은 여기까지."
"얼마, 안 왔다."
"첫 날이잖아. 몸풀기 정도는 됐어. 내일 본격적으로 갈 거니까 각오하라고."
"좋다."
미리 봐두었던, 양쪽 길이 뚫려있는 홈에 자리 잡았다.
라분이 먼저 자고, 나는 모래시계를 올린 뒤 마나 통제력을 수련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두 시간 뒤.
"얌마. 얌마!"
"으. 으으."
라분을 달달 흔들어 깨우고 얼른 잠에 들었다.
미궁에서는 쪽잠을 잘 자는 것도 능력이다.
⋯⋯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순간 본능에서 비롯된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라분이 벌떡 일어나는 소리가 머나먼 곳에서 들려온 메아리처럼 내 머릿속을 울렸다.
그리고, 명확히 들려오는 종소리.
딸랑!
"주, 주인!"
어? 음냐?
순간 몸이 덜컥이고.
어어?
-키릭.
⋯⋯⋯
나는 야영지에서 종을 설치하던 자세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곧 전신에 힘이 풀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뭐지?
상황을 받아들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죽었어.'
아무런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로. 무기력하게.
의아함에 이은 허무함.
'누가 나를 죽였다.'
이렇게 이유조차도 알지 못한 죽음은 처음이었다.
점차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분노가 몸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아직 뭔지는 모르겠지만, 다 죽었다."
머리가 미친 듯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꿀잠자다가. 죽었다.
이것만 해도 억울한데 가장 억울한 부분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고 죽었다는 사실이다.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는 라분을 보았다.
생각해보자.
라분에게는 공격 방지 마법이 걸려있다.
무엇보다 저 착한 놈이 나를 죽일 리도 없고.
당연히 라분은 제외.
"분명⋯"
죽기 전에 종소리를 들었다.
야영지 밖에서 접근한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내가 종을 설치하다 말고 생각에 잠기자 라분은 별 말 없이 설치를 마무리하고 내 옆에 앉았다.
나는 라분을 신경 쓰지 않고 생각을 이어나갔다.
종소리가 들리자마자 죽었다.
하지만 종과 야영지는 거리가 있다.
즉, 종을 울린 놈과 나를 죽인 놈은 다른 놈이다.
만약 적이 종소리를 일부러 냈다면?
"종소리는, 불침번을 보던 라분의 시선을 돌리고 나를 죽이기 위한 연막."
사실 그게 아니라 반대쪽에서 실수로 냈다면?
먼저 접근하던 적이 빠르게 날 죽인 거라면?
"적이 여러 명일 수도 있겠어."
둘 다 좋지 않은 방향이다.
하물며 적이 몬스터인지, 인간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오늘은 탐험을 중간에 멈췄기에 체력이 넉넉하다는 점이다.
이 점을 이용해야겠다.
"라분."
"주인. 표정이 좋지 않다."
"아무래도 자리를 옮겨야겠어. 예감이 좋지 않아."
"알겠다."
라분은 아무런 불만 없이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라분이 움직이는 동안 지도를 펼쳐 이곳에 오기까지의 기억을 되살렸다.
'가장 습격을 대비하기 좋은 구역이.'
나는 이곳에서 30분 거리에 있던 갈림길을 기억해 냈다.
분명 갈림길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막힌 길임.]
막힌 길은 야영지로 적합한지 알아보는 편인데, 끝이 있는 길 치고는 그 끝이 바로 보이지 않아 그냥 지나쳤던 기억이 있다.
'그곳으로 가자.'
어쩌면 습격을 당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장소가 문제였을 가능성이 높으니.
너무 걸어 자기 발을 주무르고 있는 라분을 달래며 점쳐둔 갈림길로 이동했다.
'근처에 감지되는 다른 파티는 없어.'
갈림길 입구에 종을 쳐 최소한의 대비를 했다.
라분은 아무 걱정 없이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강화된 감각에 모든 능력을 집중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아주 은밀하게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제기랄."
인간, 사람이다.
숫자는 3명, 아니 4명, ⋯5명.
모래시계를 보니 내가 불침번을 선지 4시간이 지난 시점이다.
만약 잠을 자고 있었다면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을 시간이기도 했다.
'클라이머? 아니면 살인강도 짓을 하는 탐험가?'
어찌 됐든 저들의 이동 경로는 명백히 내가 있는 곳을 향하고 있었고, 그 목적은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얼른 기척을 죽이고 라분에게 가 라분을 깨웠다.
"라분."
"으, 주인. 시간인가."
"조용히 하고 들어. 인간의 습격이다."
"!"
"5명이야."
"!"
"명심해.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
"⋯알았다."
"준비해."
나는 천천히 갈림길의 입구로 돌아갔다.
이대로 전력으로 도망간다는 선택지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적의 실력을 가늠한다는 선택지를 골랐다.
저들은 장소를 바꿨음에도 나를 특정하여 추적해왔다.
이번에 장소를 옮길 때, 나는 라분을 앞세우며 최대한 우리의 흔적을 지우며 왔다.
애초에 미궁의 돌바닥은 흔적도 거의 남기지 않는다.
'어떻게 추적을 했는지 알아내야 해.'
그 대가가 죽음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도망친다고 해도 추적이 거세지면 풀어낼 자신이 없었다.
걸음이 비교적 느린 라분도 있는 상황이라 더 그렇다.
내가 검을 매만지고 있을 때, 적 선두가 갈림길이 보이는 장소에 진입했다.
나는 일부러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무릎 위에 뽑은 검을 올려놓고, 한 손으로는 기름 먹인 천을 들었다.
충분히 검을 손질하다 자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게끔 상황을 만들었다.
하지만 습격자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내 모습을 보고 잠깐 멈추더니 이내 등에 걸려있던 활과 화살을 들었다.
'망할.'
시위 당겨지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화살이 발사되었다.
화살은 제압용인지 정확히 내 팔을 노리고 들어왔다.
보통 실력이 아니다.
나는 칼자루를 살짝 들어 올려 날아오는 화살을 쳐냈다.
화살에 마나가 잔뜩 담겨있어 검 전체가 징징 울렸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냐?"
습격자들은 대답하지 않고 빠르게 나와의 거리를 좁혀왔다.
일련의 움직임은 전문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애초에 사람 죽이는 일을 업으로 하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클라이머. 아니면 살인강도가 전문인 탐험가.'
가장 원한이 있을 만한, 예전에 4층 안전지대에서 나와 시비가 걸린 놈들은 아니다.
아예 뿜어져 나오는 마나의 성질부터 달랐다.
'안정적이야. 3위계군.'
나와 비슷한 실력으로 예상되는 검사 한 명과 조금 쳐지는 세 명.
세 명 중 하나는 로그다.
그즈음 라분이 내 옆에 섰다.
"무조건 방어해. 여기 입구가 좁아서 둘이 막으면 충분하니까. 그리고 버텨."
"알겠다."
적이 지척에 다다랐다.
복면을 쓰고 있어 정체를 알 수는 없었지만 처음 보는 얼굴인 것만은 궁금했다.
의외로 적은 우리의 방비를 보더니 바로 공격하지 않고 자리에 멈췄다.
마나를 한껏 끌어올리며 긴장하고 있었는데, 뭔가 이상했다.
"⋯⋯."
잠깐의 대치 상황.
나는 당황해하며 소리쳤다.
"뭐야 이 씨부랄 새끼들아!"
"⋯⋯."
리더인 것으로 보이는 3위계 남성이 나를 빤히 살펴봤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너는 귀족이냐?"
"⋯아닌데?"
"이곳에 온 목적은 뭐냐."
"⋯탐험하러."
"돈은 많겠지?"
"천애 고아에, 땡전 한 푼 없습니다만."
"이런. 속았나."
리더의 마나가 흔들렸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손에 몰래 숨겨놨던 단검을 던졌다.
"!"
리더는 바로 반응해 피했지만 애초에 내 목적은 리더가 아니었다.
리더 옆에 있던 다른 놈이 왼팔을 크게 베여 뒤로 물러났다.
"이 씨발놈이!"
하지만 그 분노도 남자가 손을 들어올리자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파티 장악력이 꽤 강한 모양.
나로서는 아쉬운 일이다.
"이미 모습을 보인 이상 살린다는 선택지는 없다. 그냥 죽어라. 로비슨, 너는 뒤로 빠지고."
"네, 대장."
이제 쉽게 죽어줄 생각은 없다.
리더와의 간격을 가늠하며 검에 마나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일단. 저놈은 죽이고 생각해야겠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24
갑작스러운 클라이머, 또는 질 나쁜 탐험가들의 습격.
지금까지의 관찰 결과를 감안하건대, 그들의 습격은 명백한 목적성을 띠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할 틈은 없었다.
두 명과 다섯 명.
명백하게 불리한 싸움이었다. 모든 신경을 전투에 집중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미리 한 명을 전투에서 제외했다는 점.
불안함 점은⋯
'자신감에 넘치는 군.'
아직 실력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3위계의 적이다.
절제된 검염을 뿜어내는 모습을 보니 3위계의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라분. 무조건 막아. 화살 조심하고."
"알았다."
인간은 몬스터보다 영악하다.
고블린, 오크의 기본적인 전법은 우직함이다.
항상 정면 승부를 선택한다.
하지만 인간은 아니다.
적 로그의 화살이 연속으로 나의 몸을 노리고 날아왔다.
"우어어어!"
라분이 내 앞을 막아서며 화살을 연이어 튕겨냈다.
2위계에 학즉사법 1성이 결합된 반사 신경으로 화살의 궤도를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 틈을 노려 이루어지는 적 리더의 검염이 서린 일격.
내가 나섰다.
라분의 방패를 개시일부터 망가뜨릴 수는 없다!
사실 적에게 붙어 로그의 화살 공격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함도 있었고.
검염과 검염이 맞닿은 파열음이 미궁의 벽을 울린다.
"!"
마나의 양은 내가 우위, 힘은 조금 뒤처진다.
적이 검을 튕겨내어 거리를 벌리고자 했다.
여기서 더 따라가면 통로 밖으로 나가게 되어 우리가 불리하다.
4명의 합공을 받아내고 사지 멀쩡하기는 힘들다.
결국 뒤로 물러서는 적 리더를 놔줄 수밖에 없었다.
전투가 다시 소강상태로 들어간다.
"퉤!"
리더가 땅에 침을 뱉었다.
"이상한 놈이 걸려가지고는. 뒤가 막힌 길인 건 알고 있어."
"⋯⋯."
"로비슨. 애들 더 불러와."
"!"
"넵."
"괜히 위험하게 정면으로 맞서줄 필요는 없지. 안 그래?"
로비슨이 비웃음을 흘리고 미궁 속으로 뛰어들어간다.
'이러면 클라이머인 건 확정이군.'
내 감지 범위 내에서 인간들의 기척은 잡히지 않는다.
당장 응원을 부른다고 해도 5분 정도는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결국에는 패배할 수밖에 없다.
쪽수 앞에 장사 없기 때문이다.
나는 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라분에게 신호를 주었다.
'신호하면 돌격.'
입은 쉬지 않았다.
"털어먹을 것도 없는데 왜 지랄들이야 이 미친 클라이머 새끼가!"
"어이. 흥분하지 마. 방금까지는 털어먹을 게 있는 줄 알았다고."
"뭔 개소리야!"
"그러니까 누가 팔에 냄새를 잔뜩 묻히고 돌아다니래?"
"?"
"어차피 뒈질 놈한테 더 해줄 말은 없⋯"
내 신호를 받은 라분이 방패를 앞세워 적들에게 돌진했다.
적 로그가 날린 화살을 튕겨내고 방패를 그대로 던진다.
켄드릭에게 전수받은 방패 던지기다!
적 로그가 혼비백산하며 몸을 튕기는 사이, 내가 틈을 파고들어 로그의 목을 베어⋯!
"어이. 그건 안 되지."
리더가 검염이 줄기차게 뿜어져 나오는 검으로 내게 검을 휘둘러왔다.
그대로 휘두르면 로그를 벨 수 있지만 나도 죽는다!
나는 검을 걷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공방.
라분이 방패를 집어들고 3대 1의 싸움을 시작했다.
비교적 잘 버텨주고 있지만 전투의 결과는 나와 클라이머의 싸움에 달려 있었다.
아까와 같이 적이 몸을 빼려고 했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달라붙었다.
어차피 시간을 끌면 죽는 건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필사의 단기전.
연속에 연속으로 휘몰아치는 내 검격이 적을 몰아붙였다.
마침내 틈이 벌어졌고, 학즉사법의 마나를 최대한으로 끌어낸 내 검이 적 클라이머의 목을⋯⋯
"어?"
어딘가에서 튀어나온 검은 칼날이 내 팔을 찔렀다.
"하하."
자세가 무너진 내 팔을 적이 베어넘겼다.
나는 오른팔이 날아가는 건 신경도 쓰지 않고 물러나며 적의 검을 보았다.
올곶게 쥔 검 아래로, 넘실거리는 그림자와 같은 검이 있었다.
"⋯⋯."
"이 기술에는 못 당하지. 응?"
"주인!"
"라분! 나 죽는다! 도망쳐!"
역시나 라분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우어어어!"
자신의 배가 검에 뚫리는 것도 개의치 않는 돌격으로 적 로그에게 그대로 박치기를 먹인다.
방패에 끝에 턱이 제대로 꿰인 적 로그가 즉사했다.
리더가 경악했다.
"저, 저 맷돼지 같은 새끼가!"
학즉사법 2성을 수련할 때의 고통으로 사지 하나 떨어져나가는 건 내게 고통도 아니었다.
뭔가 보통 사람의 카테고리에서 벗어나고 있었지만 뭐 어떠랴.
이쯤 되니 적의 응원이 내 감지에 잡히기 시작했다.
라분이 배의 통증을 이기지 못해 무릎을 꿇었다.
적절한 조치가 있으면 살아날 수 있지만, 최소한 지금은 불가능하다.
"주인, 어떻게든, 도망가라."
나는 라분이 건네는 검을 왼손으로 받아들었다.
빙글빙글 돌리며 여유롭게 검의 무게중심을 찾은 뒤 천천히 적을 향해 내밀었다.
"미안. 내 삶에 그런 비겁한 선택지는 없어."
"주인⋯"
적 리더가 자신의 검과, 그 아래에서 넘실대는 검은 마나로 이루어진 검을 내게 내밀었다.
"특성인가?"
"⋯그래."
"이름은?"
"그림자 검."
"간단하군."
"내가 지은 거니까. 이봐. 어차피 죽을 텐데. 그냥 죽어주지 않겠어? 목덜미 정도는 미궁 밖으로 보내주지. 저 녀석도 깔끔하게 죽여주마."
"거절한다."
클라이머가 피식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내 처절한 저항을 통해 나는 이후로 두 번 동안 '그림자 검'을 견식할 수 있었다.
'검의 위치에 따른 직선 공격만 가능하군. 길이가 늘어나지도 않고. 알고 있으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을 정도다.'
이래서 정보가 중요하다.
만약 미리 저 특성의 정보를 알고 있었다면 이렇게 쉽게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렇다면 다음 대응은⋯
아. 생각이 끊겼다.
머리가 베였구나.
죽음이었다.
-키릭.
⋯⋯⋯⋯
방범용 종을 매달기 위해 묶었던 매듭이 완성되자마자 그대로 풀어졌다.
"라분!"
반대편에서 열심히 매듭을 묶고 있던 라분의 대답은 약간 느렸다.
"주인! 불렀나?"
"정리해!"
"?"
"움직인다! 하던 거 다 정리해!"
내 말을 듣고 멈칫거린 라분이 이내 한숨을 푹 쉬었다.
"주인. 또 뭔가 이상하다."
"빨리빨리!"
"알았다."
그래도 별다른 저항 없이 내 말을 들어주는 라분.
요즘 머리에 든 게 많아지자 점점 기어오르려고 하는데, 기강을 잡아줘야겠다.
그래도 언제나 날 위해 몸을 던져주는 모습을 보면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만.
궁시렁거리면서도 야영지를 정리해 다시 출발할 준비를 마쳤다.
"냄새라."
나는 클라이머의 대사를 기억해 냈다.
[그러니까 누가 팔에 냄새를 잔뜩 묻히고 돌아다니래?]
냄새. 대체 무슨 냄새지?
내 몸에서는 사람 냄새 말고는 별다른 냄새도 나지 않았다.
몬스터 피가 튈 경우에는 바로 공양해서 피냄새도 안 날 테고.
클라이머가 쓰는 은어가 아닐까 싶다.
"꼭 알아내주마."
"주인. 자꾸 혼잣말한다."
"아. 밤에 클라이머들이 습격해 올 거야."
"?"
처음에 의아해하던 라분의 몸이 내 말의 뜻을 이해하고 경직되었다.
"!"
"앞으로 대충 4시간 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두라고."
나를 철석같이 믿는 라분은 별다른 의심도 없이 내 말을 받아들였다.
덕분에 별다른 설명을 할 필요가 없어 편하다.
"훅. 훅."
"긴장하지는 말고. 긴장하면 될 일도 안 된다."
"알았다."
우리는 이전 생에 적을 맞이했던 갈림길 입구에 걸터앉아 저녁을 먹었다.
몸 상태를 만전으로 유지하기 위해 무기를 손질하며 드문드문 대화를 나눴다.
"4명. 한 명은 3위계야."
"이길 수. 있나?"
"이겨."
그러던 중 살아온 이야기로 대화가 흘러갔다.
사막에서의 삶을 들으며, 내 관심은 라분의 하나뿐인 혈육, 노예로 팔려간 여동생에게로 흘러갔다.
"보고 싶지?"
"⋯⋯."
"미안. 당연한 건데 내가 그 생각을 못 했네. 돌아가면 용병에 의뢰라도 넣어보자."
"고맙다."
"됐고. 살아남아야 그런 것도 할 수 있는 거니까. 힘내자고."
이 대화가 내 무한 회귀에 갇혀 사라진다고 해도, 내가 살아있는 한 무조건 이행될 것이다.
'돈이면 안 되는 게 없으니까.'
나는 시간이 되자 기합을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비하자고."
"알겠다."
라분이 미리 안에 들어가 자는 척을 하고, 나는 검을 손질하다 자는 척을 했다.
역시 접근한 적이 화살을 날려왔고, 나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로비슨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이제 시작이다.
"라분!"
"우어어어!"
당당하게 내 옆에 자리한 라분. 여동생을 찾아주겠다는 말이 동기부여가 되었는지 기합이 여간 기합이 아니다.
나는 씨익 웃으며 검을 내밀었다.
"대화는 필요 없고. 일단 좀 맞자."
"지랄하는 군. 이미 얼굴을 보였으니 살려준다는 선택지는 없다."
리더가 손을 들어 올리고, 라분이 날아오는 화살을 쳐낸다.
그리고 적 클라이머와 내가 검염이 어린 검을 맞댄다.
이제는 지지 않는다.
수십 번의 공방 뒤.
라분의 분전에 힘입어 나와 리더의 1대1이 성사되었다.
"이 돼지 새끼!"
"뭔 힘이⋯!"
"우어어어!"
이미 녀석의 수를 알고 검을 나누다 보니 녀석이 한 방을 노리고 미묘하게 내 몸의 방향을 유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녀석의 특성. '그림자 검'은 맞댄 검 아래에 일직선으로 새로운 검이 솟아나는, 간단한 특성이다.
그렇기에 내 몸의 위치가 알맞은 위치에 있어야 특성을 발동할 수 있었다.
'이렇게 움직이고.'
내 몸의 위치를 본 클라이머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지금!'
그림자 검이 뻗어 나오는 순간에 맞춰 검을 놓고 몸을 숙인다.
검은색 칼날이 내 이마를 스쳐 지나가고, 적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든다.
특성의 발동의 반동으로 덜컥이는 클라이머의 몸.
그대로 허리를 잡고 미궁의 벽에 밀어붙였다.
"읍!"
숨이 턱 막힌 녀석이 검을 놓쳤다.
허리에서 단검을 꺼내서 옆구리를 찔렀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마지막은 목을 찔러 마무리한다.
그러면서도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역시. 내 특성은 사기다.
'1%의 확률이, 100%가 되는 능력.'
처음 세 번을 찔렀을 때만 해도 내 머리를 쥐어뜯던 놈이 마침내 힘을 잃고 쓰러진다.
라분이 내게 붙고, 나는 땅바닥에서 검을 잡아 들어 올렸다.
녀석에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머리를 적신 뒤 내 얼굴을 따라 흘러내린다.
"후."
한 명만.
딱 한 명만 살려놓을 생각이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25
미궁 4층. C급 위험지역.
클라이머와 우리들의 혈투가 이어진 현장.
나는 적 3위계 클라이머를 제거하는 데에 성공했다.
리더의 시체를 본 클라이머들의 몸이 순간 경직된다.
"라분. 괜찮아?"
"후욱. 후욱. 괜찮다."
"자잘한 상처가 있네."
"문제 없다."
숙련된 클라이머 3명을 상대로 장시간 버텨준 라분.
그야말로 재능의 영역이다.
'켄드릭에게 교육을 받게 하기를 잘했지.'
재능도 갈고닦아야 빛을 발휘하는 법.
아무래도 더 많은 투자를 해야겠다.
피칠갑을 한 나를 본 클라이머들의 얼굴이 공포에 질리기 시작했다.
라분을 포위하기 위해 깊게 들어와 있었기에 우리와 클라이머들의 방향은 반대가 되어있었다.
즉 나와 라분 두 명이 클라이머 셋을 포위한 모양새.
라분이 방패로 한 쪽을 꽉 틀어막고 있으니 녀석들의 눈은 자연스레 내게 향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내 뒤는 눈조차 감지 못한 채로 죽은 리더의 시체가 있다.
잠깐 멈칫한 클라이머들이 일제히 라분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본 내게 좋은 생각이 났다.
그대로 클라이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잠깐!"
나는 검지를 척하고 들어 올렸다.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마지막 한 놈만 살려준다."
"?"
잠깐 동요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클라이머들.
내가 노린 타이밍이다.
"그게 되겠냐!"
바로 몸을 날려 놈들의 진형을 헤집는다.
검염의 기세 앞에서 녀석들은 늑대의 습격을 받는 양 떼와 다름없었다.
단, 흩어지지 못하는 양 떼.
탱커라도 있었으면 잠깐이라도 농성이 가능했겠지만 녀석들에게는 이렇다 할 방패조차도 없다.
일격에 한 놈의 팔을 날려버리고 다시 검을 휘둘러 다른 놈의 가슴을 찍어넘겼다.
도망치려는 적 로그가 라분의 방패를 앞세운 박치기에 몸을 강타당해 기절해버렸다.
그것으로 전투 끝.
잠깐 숨을 고르고 있으니 내 감지 범위 끝에 적들의 응원이 감지되었다.
추가로 다섯 명.
만약 상대하게 될 경우 높은 확률로 회귀하게 될 숫자다.
나는 로그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내려쳐 확실히 기절시킨 뒤 라분에게 건넸다.
"라분. 요거 업고 이쪽 방향으로 출발해. 배낭은 나 주고. 우선 안전지대로 복귀하자."
"알았다. 주인은?"
"잠깐 할 일이 있어. 먼저 가. 바로 따라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라분이 굳게 고개를 끄덕이며 빠른 발걸음으로 미궁의 어둠 속을 걸어나갔다.
나는 클라미어들의 시체를 바라보며 검을 쥐어들었다.
* * *
라분과 루카스가 떠난 뒤 10분 정도 지났을까. 식어가는 시체만이 남아있던 광장에 한 클라이머 무리가 들어왔다.
가장 선두에 있던 남자가 목 잘린 시체를 발견했다.
"뭐야 이게."
시체의 훼손 상태는 심각했다.
마치 전시장을 방불케하는, 그야말로 '해체된' 시체.
"흠."
남자가 시체의 목을 유심히 관찰하고는 앞에 다가가 발로 몸체를 툭툭 건드렸다.
"이게 마이트 몸뚱이 같은데, 그렇지?"
"맞는 것 같습니다."
한 클라이머의 말에 시체를 밟고 있던 남자가 광소했다.
"쌤통이다. 이 병신 새끼가!"
마나를 실은 발차기. 마이트의 몸뚱이가 날아가 벽에 처박힌다.
팔다리가 기이하게 꺾인 채로 바닥에 쓰러지는 몸.
그 모습을 보며 휘파람을 불던 남자가 망연자실하는 로비슨을 돌아봤다.
"얌마."
"어, 어버, 어버버."
"로비슨! 이 떨거지 새꺄!"
"어, 넵! 파우엘 님!"
"마이트 이 새끼가 좀 아껴줬다고 상황 파악이 안 되지? 네 연, 줄이 끊어졌어. 너 나한테 안 붙으면 뒤진 목숨이야. 알겠어?"
"네!"
"마이트가 꼴통이어도 쉽게 뒈질 놈은 아니란 말이야. 적들, 확실하게 설명해 봐."
로비슨은 단검에 다친 팔을 움켜잡으며 아는 정보 모르는 정보 다 불었다.
"두 명? 고작 두 명한테 죽었다는 말이지."
파우엘이 처절한 표정으로 죽어있는 마이트의 머리에게 다가갔다.
"자. 질문. 이렇게 시체를 훼손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어, 제 생각에는 쫓아오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파우엘은 벌벌 떠는 로비슨의 머리를 헝클인 뒤 바닥에 털썩 앉았다.
"녀석들. '냄새'는?"
"남아있습니다."
추적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있을까?
로비슨의 말로는 마이트는 이 사냥을 꽝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자신과 비슷한 실력의 적을 오로지 복수만을 위해 큰 위험을 감수하고 추적할 가치가 있을까?
파우엘은 통로 안쪽까지 이어져 있는 육편들을 살폈다.
몇 분 사이에 어찌나 독하게 작업을 해 놨는지 통로의 끝까지 피 범벅이다.
더 들어가고 싶지도 않을 정도.
파우엘은 나름 베테랑 클라이머였다.
이 살육의 세계에서 베테랑이라는 말은, 본인의 목숨 소중한 것을 안다는 말이다.
파우엘은 온전히 본인의 입장에서 합리적인 결정을 내렸다.
"에잉! 그냥 돌아가자. 이 새끼 머리만 챙겨. 보고해야하니까."
"!"
로비슨은 파우엘이 복귀를 결정하고서야 파티의 로그, 스롬의 시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보를 캐내기 위해 살려 데려간 것이 분명했다.
'너무 늦게 알았어.'
로비슨이 어버버거렸다.
지금 그 사실을 말한다면 아마 뒤지게 맞을 것이 분명했다.
왜 이렇게 늦게 말하냐고.
로비슨이 덜덜 떨고 있자 그 모습을 보던 파우엘이 한참을 웃은 뒤 등을 팡팡 때린다.
"새끼! 마이트 밑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생각보다 귀엽네? 신고식은 각오해라. 으잉?"
"네, 넵! 알겠습니다!"
로비슨도 충분한 개인주의자다.
결국 로비슨은 입을 다무는 것을 선택하고 말았다.
그렇게 시체의 냄새를 맡은 고블린들이 몰려오기 전까지, 클라이머들의 시체는 길가의 돌멩이처럼 미궁에 방치되었다.
* * *
나와 라분은 꾸역꾸역 걷고 있었다.
"이게 뭔 일이다냐."
"라분. 힘들다."
"조금만 참아."
나는 감지 범위의 끝에서 사라지는 적들의 기척을 느끼고서야 긴장을 풀었다.
"자. 여기서 잠깐 쉬자."
라분이 들고 있던 짐을 던지듯 내려놨다.
복면을 벗겨 확인해 보니, 스무 살 정도 되었을까?
나랑 비슷한 연배다.
"깨우자."
"어떻게?"
"이렇게 하면 돼."
눕혀놓은 다음, 코로 물을 넣어주면.
"켁! 켁켁!"
"오오."
라분이 적 로그의 뒤를 잡고 단검을 목에 가져다 대었다.
"라분아.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물어보는 건 좀 그렇지만. 사람 죽이는 거 괜찮아?"
"?"
"아니. 사람 죽이는 거. 나야 뭐 아무렇지 않지만 너는 처음 아니었어?"
"콜린이."
"콜린?"
여기서 콜린이 왜 나와?
"그리고 스승이. 클라이머. 사람. 아니라고 했다. 사람의 탈을 쓴. 몬스터."
"어, 그거면 돼?"
"그거면 된다."
"⋯⋯."
라분의 단순함이 여기서 도움이 되는 모양이다.
나는 라분에게 잡혀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는 적 로그가 상황을 파악할 때까지 기다려줬다.
이윽고 나와 눈을 맞추는 로그.
"이름."
"⋯⋯."
"좋게 가자고. 이름."
"스롬⋯입니다."
"그래. 스롬. 이름 참 이상하네. 자. 클라이머 맞지?"
"네."
나는 시체에서 뜯어온 목덜미들을 꺼내들었다.
한때 동료였던 자들의 조각을 본 스롬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녀석들도?"
"맞습니다."
"좋아. 눈은 뜨고. 자, 괜히 시간 낭비하기 싫으니까 빠르게 가자고. 뭐 대답 안 하면 하게 만들면 되니까 문제없지만."
"⋯⋯."
스롬에게서 들은 정보는 간단했다.
"미궁 4층에 마법사 클라이머? 구트란?"
"네. 저희 패거리의 리더입니다."
그러고 보니 미궁 사무소의 클라이머 수배지에서 본 것도 같다.
상당히 꼬장꼬장하게 생긴 중년 남자였던 것 같은데, 이번에 복귀하면 더 자세히 봐둬야겠다.
"중년 남자 맞지?"
"맞습니다."
구트란은 여러 루트를 통해 바깥과 소통하고 있었고, 그중 하나가 일반 탐험가로 위장한 패거리와의 교류였다.
그 패거리들은 인간 사냥의 표적을 정하는 일도 담당한다.
자신의 마법으로 가공한 무색무취의 향수가 붙은 표적은 고가치 표적으로 인식되어 사냥 대상이 된다.
"나한테 그 향수가 묻어있다고?"
"네. 저는 감지하는 법까지는 모르지만, 묻어있다고 했습니다."
여기까지 듣고 나서야 일의 전모를 대충 알 수 있었다.
얼마 전 미궁 4층의 안전지대에서 시비가 붙었을 때, 분명 내게 손목을 반쯤 베인 녀석이 내 팔을 붙잡았었다.
내게 향수가 묻을 타이밍은 그때뿐이다.
"왠지 웃고 있더라니. 씨발 새끼들."
보이면 다 죽었다.
내가 죽인 3위계의 적, 마이트는 향수를 감지하고 내 전투 흔적을 따라가 인원이 두 명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진 습격.
하지만 나는 고가치 표적은 절대 아니었고, 결국 개인적인 원한에 클라이머들이 놀아난 꼴이 된 셈이다.
"그렇군. 라분. 다시 기절시켜. 안전지대로 데려간다."
"알겠다."
"제발, 살려⋯으악!"
라분이 자비 없이 단검의 칼자루로 스롬의 목덜미를 쾅쾅 내리쳤다.
꽤 아프게 기절하는 스롬.
불쌍하지는 않다. 어차피 사무소로 돌아가면 더 심한 꼴을 당할 테니까.
나는 내 팔에 시선을 가져갔다.
확실히 그때 그 옷이기는 하다. 옷을 쉽게 바꾸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봐도 향수가 발라져있는 것 같지는 않다.
"라분. 냄새 안 나지?"
"킁킁. 주인 땀 냄새만 난다."
"이 새끼가."
라분의 대가리를 한 번 때려준 뒤 가부좌를 틀었다.
"잠깐만 보고 가자. 주변 좀 봐줘."
"알겠다."
분명 인공적으로 만든, 마법사의 작품이라면 미묘한 마나가 남아있을 터였다.
나는 마음속을 텅 비우고 마나를 끌어올려 오감을 극대화했다.
그리고 눈을 떠, 내 팔을 바라본다.
이제야 보이기 시작한다.
옷의 팔 부분에서 미묘하게 흘러나오는, 초록색 마나를.
"이건가."
손으로 잡고 내 붉은색 마나를 덧대버리자 초록색 마나가 점차 사라지더니 끊어진다.
꽤 정신을 집중해야 해서 피로감이 확 몰려오는 작업이다.
시선을 옮겨 스롬을 바라보니, 이쪽은 완전히 향수가 덕지덕지 발라져 있어 안 발린 부분을 찾기가 힘들 정도다.
하지만 내게 발린 향수와는 뿜어내는 마나의 결이 약간 다르다.
"저건 내부 통제용인가? 어쨌든 오래 미궁에 있으면 안 되겠어."
아마 살아있는 걸 알아내면 끝까지 추적해올 게 뻔했다.
"라분! 가자."
"힘들다."
"누구는 안 힘들어? 한 4시간만 걸으면 돼."
리자드맨 사냥은 무슨.
의뢰는 보증금도 못 건지게 생겼다.
그렇게 터덜터덜 걸어가니 어느덧 안전지대 근처다.
드문드문 탐험에 나서는 다른 파티들이 보인다.
공용으로 사용하는 길이니 당연한 일이다.
내가 배낭 두 개를 메고 있고, 라분이 사람 하나를 들고 있으니 은근히 보는 시선이 많다.
턱짓하며 도움이 필요하냐고 묻는 탐험가들.
아무래도 스롬이 우리 동료인 줄 알고 있나 보다.
착각은 자유니까.
나는 고개를 저으며 어떠한 형태의 접근도 차단했다.
그런데.
"오? 루카스?"
"형님!"
"오. 켈른. 오랜만이다."
붉은 송곳니 길드의 멤버이자 루덴의 지인.
저번에 술을 같이 퍼먹었던 켈른이 4명의 탐험가들과 걸어오고 있었다.
"라분. 잘 지냈냐?"
"딱히 잘 지내지는 않았어요. 4층에는 무슨 일이세요? 분명 8층에서 활동하신다고 하셨는데?"
"우리 신참들 교육한다. 나름 중간관리자라서. 애들아. 인사해라. 내 아는 사람이야."
"안녕하십니까!"
나는 어색한 손짓으로 인사들을 쳐냈다.
켈른 정도의 실력자가 이런 잡일이나 하다니.
역시 소속을 갖는다는 건 무한 회귀와는 영 궁합이 안 맞는다는 말이지.
나는 켈른을 보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켈른이 클라이머도 아니고, 그에게라면 충분히 말할 수 있겠다 싶었다.
"형님. 긴히 할 말이."
"저거 때문이지? 너네 두 명이서 다니는데. 저 놈. 클라이머야?"
라분이 업고 있는 스롬을 가리키는 켈른.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목표는 잠재적 위험의 완전 제거.
켈른이 있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사정과 계획을 듣고 켈른이 완전 협조를 약속했다.
"그 새끼들, 다 뒤졌다."
내게 죽음을 두 번이나 겪게 만든 대가는 톡톡히 치르게 할 생각이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26
우리는 자연스럽게 켈른의 파티에 합류하여 사람이 없는 미궁의 구석으로 갔다.
켈른이 파티원, 같은 길드의 후배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그나저나. 향수라고?"
"네. 저놈한테도 묻어있어요. 집중하고 보시면 힘들지만 보입니다."
"그래?"
켈른의 눈으로 마나가 집중되었다.
눈이 푸른색으로 빛날 지경.
한참을 그 눈으로 클라이머 포로, 스롬을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젓는다.
"후. 나는 영 모르겠는데? 전혀 안 보여."
내가 향수가 묻은 부분을 알려줬음에도 켈른은 그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제 마나가 감지 쪽으로 특화되어 있어서 그런가봅니다."
"그래? 하기야 나는 감지 쪽에는 완전히 젬병이지. 로그 없이는 탐험도 못 나가."
켈른은 스롬의 목젖을 탁 쳤다.
쥐 죽은 듯 자는척하던 스롬이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다.
"어이. 클라이머."
"넵!"
"지금까지 있었던 일. 자세하게 다시 말해봐. 하나도 빠트리지 말고."
"알겠습니다."
스롬은 체념한 듯 모든 것들을 술술 말했다.
4써클 마법사 구트란과 그 부하들, 그리고 그들의 사냥 비법까지.
켈른이 향수 이야기를 듣고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이야. 아예 돈 많은 탐험가들을 납치해서 몸값을 뜯어낸다고? 살인청부까지? 아니, 어차피 미궁에서 뒤질 인생들인데 뭐 그렇게 힘들게 산다냐?"
"그러게 말입니다."
"그나저나 구트란이라. 제법 거물인데?"
"그래요?"
"4층부터 6층까지 그 녀석 이름으로 된 세력이 존재하는 골칫거리야. 현상금이 100골드쯤 되려나."
"100골드! 대단하다. 주인. 잡으러 가자."
"되겠냐."
어떻게 구트란이 4층부터 6층까지 복수의 층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냐고?
미궁의 개척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진척도. 공양을 통하여 진척도를 100%로 만들면 다음 층으로 향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탐험. 미궁 깊숙이 탐색을 진행하면 다음 층, 혹은 더 아래층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찾을 수 있다.
물론 일반적인 방법은 아니다.
어떤 층은 아예 진척도로 개척이 불가능하고 오로지 탐험으로 길을 찾아야 하는 층도 있다고 하니, 장기적인 탐험 능력을 기르는 것도 중요하다 하겠다.
"그럼 통로를 꽉 잡고 있겠네요? 통로에 사람 없으면 그 통로는 곧 사라지니까."
"그래. 내가 알기로는 클라이머들이 공동관리를 한다고 들었다. 거기는 거의 요새나 다를 바 없어."
스롬이 알고 있는 구트란 휘하의 4층 클라이머는 최소 34명.
엄청난 숫자다.
"이거, 신입 교육하러 왔다가 일이 커지는데?"
"하하. 동생 도와주십쇼."
"당연히 도와줘야지."
켈른은 스롬을 일으켜 세웠다.
나는 증거 제출을 위해 잘라왔던 클라이머들의 목덜미도 켈른에게 넘겼다.
"자. 가자. 동생은 1시간쯤 뒤에 오라고."
"알겠습니다."
신입들과 켈른, 여섯 명이 다시 안전지대로 귀환했다.
이는 나와 라분이 스롬을 잡고 돌아가면, 내게 향수를 묻힌 놈들이 이상을 눈치채고 도망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작 시비 걸린 걸로 나를 클라이머의 먹이로 던져버리다니.
녀석들도 단단히 미친 녀석이 맞다.
2시간짜리 모래시계가 절반쯤 떨어지고 나서 나와 라분도 미궁 4층의 안전지대로 복귀했다.
사무소에 들어가니 테이블에서 물을 마시던 켈른이 내게 손을 들어 보였다.
"클라이머는요?"
"직원들이 데리고 갔어. 이제 슬슬 끝날 때가 됐는데. 어이쿠! 저 친구도 귀족은 못 되는군."
사무소의 직원이 맥주를 들고나와 내 옆자리에 앉았다.
몸에서 약간이지만 피비린내가 났다.
"이거. 대어인데?"
"그렇지?"
"구트란. 그 새끼 오래는 못 살겠다. 너무 위험한 걸 만들었어."
직원이 맥주를 원샷하고 다시 카운터 안으로 들어갔다.
돌아올 때는 맥주 3잔이 들려있었다.
"내가 한 잔 산다고 했지? 어차피 오늘 탐험은 공쳤으니까 들어."
"감사합니다."
"고맙다. 목말랐다."
"저 친구 말투는 여전히 웃기네."
직원은 이번에는 잔에 입만 가져다 대었다.
"그나저나 존함이?"
"오우. 내 이름도 안 가르쳐 줬었나. 카일이다."
"그렇군요."
"쨌든 네가 말해준 걔네들은 우리 직원이 잡으러 갔어. 아직 혐의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사실 나야 심증이 강력하지, 그놈들이 범인이 아닐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 향수를 묻힐만한 놈은 그놈밖에 없다.
애초에 미궁 4층에서 그놈 말고는 신체 접촉을 한 사람이 없었으니까.
곧 우당탕탕 하는 소리와 함께 사무소 안으로 세 사람이 끌려왔다.
"씨발!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사무소가 사람 잡는다!"
"다짜고짜 설명도 없이. 장난해?"
"닥쳐라. 따라오면 안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모여있던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강해졌다.
카일이 의자를 끌며 일어났다.
"너네들도 따라와. 진행 상황은 알아야지."
우리가 향한 곳은 사무소 건물 지하에 있는 임시 수용소였다.
가장 안쪽 방에서 끌려온 3인이 미친 듯이 구타당하고 있었다.
스롬이 저놈들을 보자마자 내통자라고 그대로 불어버렸기 때문이다.
"악! 제발! 악!"
카일이 구타하던 직원의 어깨를 집었다.
그러자 직원이 구타를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카일이 쪼그려앉아 놈들을 내려다봤다.
"다 알고 왔어. 향수 줘봐."
"대체 그게 무슨 소리⋯⋯."
"야. 이 새끼 덜 맞았다."
직원이 다시 놈을 패기 시작했다.
머리를 집중적으로 맞은 놈이 기절하자 물을 뿌려 다시 깨운다.
"향수."
"패, 팬티 안에."
"아오 씨발. 네가 꺼내."
남자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지춤을 뒤져 조그마한 병을 꺼냈다.
크기가 엄청 작아 액체가 열 방울도 안 들어가겠다.
"이거 위로 넘기고 와."
"네."
"구트란이 준 거야?"
"저, 저희는 하수인에게 전달만 받았을 뿐이라서."
"접선 장소랑, 다음 접선 시간."
"⋯⋯."
카일이 잠깐 뜸을 들인 뒤 벼락같이 검을 뽑아 놈의 손등에 그대로 찔러 넣었다.
"으, 으아아악!"
"접선 장소랑, 다음 접선 시간."
왼손이 벌벌 떨며 자신의 오른손을 찌르고 있는 검을 향해 다가왔다.
카일은 기다리지 않고 검을 뽑았다.
녀석이 고통에 자지러지자 옆에 엎어져있던 녀석의 동료를 바라본다.
"너도 알고있겠지. 접선 장소랑, 다음 접선 시간."
다음 녀석은 그래도 눈치가 있었다.
"이틀 뒤, 장소는 지도가 있어야⋯"
카일이 턱짓하자 직원이 책을 하나 가져왔다.
책을 펼치니 체계적으로 정리된 미궁의 지도가 나왔다.
저것만 해도 10골드는 우습게 나갈 물건이다.
"천천히 짚어. 시간 많아."
덜덜 떨리는 손이 지도의 한 점을 짚어내었다.
카일이 접선 장소를 확인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 끝나고 다시 보자."
테이블로 돌아오니 탐험가들이 우리의 눈치를 봤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카일은 그쪽으로는 눈짓도 주지 않고 맥주만 퍼마신다.
"어이 카일. 붉은 송곳니가 좀 거들어도 되나?"
"물론이지. 대신 조건이 있어."
"음?"
"청염(靑炎) 정도는 왔으면 좋겠는데. 우리도 지원 요청하겠지만."
"그거야 어렵지 않지. 마침 스케쥴도 딱 맞으니까. 우리가 부탁하고 싶을 정도야."
"청염?"
"아. 루카스 동생은 잘 모르겠구나. 붉은 송곳니 간부 중 한 명이야. 이름은 카리나 헤리슨. 4위계지."
"오호."
카일의 턱짓이 나를 향했다.
"어떻게, 너도 한 손 보탤래?"
"에?"
"동생. 나쁠 거 없어. 미궁 사무소 놈들한테 빚 좀 지워놓는 거지."
카일도 말을 거들었다.
"이틀 뒤면 빠듯해. 특히 믿을만한 놈들을 추려야 하는 상황이라서. 너 정도 실력이면 환영이지."
아무래도 미궁 사무소와 붉은 송곳니는 4써클 마법사 구트란을 이참에 건드려볼 생각인 것 같았다.
"보상은 섭섭지 않게 줄 테니까. 사실 장담은 못 하고, 기안은 올려놓을게."
"해야죠 뭐. 위험하지도 않을 것 같고."
켈른 말대로 미궁 사무소와 사이가 좋아서 나쁠 건 없다.
"좋아. 내일 점심에 다시 모이자고. 켈른. 믿을만한 친구들로 모아와. 새어나가면 끝장인 거 알지?"
"당연하지."
켈른이 멀리서 눈치만 보던 신입들을 끌고 얼른 밖으로 나갔다.
카일도 아쉬운 눈빛으로 빈 맥주잔을 만지작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은 좀 바쁘겠구만?"
"고생하십쇼."
"그래. 내일 보자고. 아. 클라이머 현상금 챙겨가고. 마이트만 현상금이 있는데, 나머지도 클라이머는 확실하니까 기본값은 줄게."
순식간에 금화 두 개를 벌었다.
하루 만에 번 돈이라고 생각하면 많고, 두 번 죽고 번 돈이라고 생각하면 턱없이 적다.
그래도 왜 현상금 사냥꾼이 존재하는지는 알겠다.
나와 라분은 털레털레 사무소 밖으로 나와 미궁 1층으로 돌아갔다.
[미궁 1층으로 귀환하시겠습니까?]
[현재 진척도 27.6%.]
바로 집으로 돌아와 발 뻗고 누웠다.
"으. 콜린 오면 소고기나 먹으러 가자. 라분 너는 안 피곤해?"
"쌩쌩하다."
"난 좀 잘게."
"주인. 자기 전에 돈 좀 줘라."
"응? 돈은 왜?"
"스승에게 간다."
이놈이 미쳤나?
나는 잠깐 멍 때리다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고 있는 라분을 보고 씨익 웃었다.
"왜, 클라이머랑 목숨 걸고 싸우니까 배운 게 많아?"
"그렇다.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다."
"몸 상하니까 적당히 하고 와. 저녁 먹지 말고⋯ 아니다. 거기 있어. 켄드릭한테도 밥 먹지 말라 하고. 콜린이랑 데리러 갈 테니까."
"알았다."
나는 은화 3개와 함께 라분을 보내고 잤다.
두 시간쯤 자니 콜린이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대자로 뻗어 누워있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란다.
"뭐야. 왜 벌써 와? 아침에 가고 저녁에 오네?"
"됐고, 소고기나 먹자."
수련을 마친 라분과 켄드릭, 그의 가족, 콜린.
우리들은 근처 비싼 레스토랑에서 소고기를 구웠다.
가족들은 여전히 나를 조금 어려워하는 눈치였지만 뭐 어떠랴.
이렇게 조금씩 인맥관리를 해줘야지.
하루에 두 번이나 죽었으니 조금 쉴 필요도 있다.
소고기와 와인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발 뻗고 자니 어느새 날이 밝았다.
하품을 쩍쩍 뱉으며 다시 미궁 4층으로 향했다.
"여! 루카스 동생. 여기야."
"잘 주무셨어요."
"라분. 간다."
켈른의 안내를 받아 지하 감옥으로 가니 총 9명의 탐험가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우리까지 합하면 12명.
그중 가장 출중한 기도를 가진 탐험가에게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간다.
금발에 청안.
가느다란 몸과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검을 차고 있는 여성.
붉은 송곳니의 간부. 청염. 카리나 헤리슨.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제대로 싸우면 백 번 죽어도 못 이기겠군.'
4위계. 여기서부터는 천재의 반열에 들어선다.
특출난 재능의 검사가 고련을 거듭한 끝에 다다를 수 있는 경지다.
"자자. 간단히 모였으니 자기소개나 하자고."
붉은 송곳니 탐험가 4명과 사무소가 고용한 해결사 6명.
4위계가 각각 한 명씩, 지원을 위한 2위계 4명, 나머지는 3위계다.
해결사 측의 4위계는 니콜라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카리나와는 다르게 자신의 마나를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카일이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커다란 지도를 버거에 붙였다.
"자, 오늘 미리 들어가서 각 포인트에 매복한다. 안전지대로 통하는 포인트 두 곳, 구트란의 지역으로 통하는 포인트 두 곳이다. 녀석들이 어디로 튈지는 모르지만 구트란 쪽 포인트를 4위계 친구들이 맡는다. 질문 있나?"
니콜라스는 로그인 모양이다. 지도 이곳저곳을 가리킨다.
"아마 이쯤에서 적을 발견할 텐데. 발견하면 바로 요격해도 문제없나?"
"당연하지. 다만 호각은 불어달라고, 적이 더 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알겠다."
카리나는 검자루를 만지작거리며 영 대화에 집중하지 않는 모습이다.
"됐으면 정해준 순서대로 포인트로 가. 모래시계로 시간 맞추고, 호각 받아 가고."
나와 라분, 켈른과 2위계 로그가 한 조가 되었다.
우리는 안전지대에서 가장 가까운 통로를 배정받았다.
카일이 떠나는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구트란이나 다른 4위계 클라이머가 나타나면 무조건 도망가. 덤비면 죽는다. 추적할 수 있으면 추적해. 절대 무리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하암. 잘 다녀오라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미궁 안으로 들어갔다.
로그의 보조를 받으며 탐험을 진행하니 감회가 새롭다.
"확실히 체계적이네."
"걷기. 편하다."
이제 슬슬 인원을 충원하고는 싶은데, 로그로 알아봐야 되나?
나는 미리 스프부터 마시며 이쁜 여자 로그가 우리 파티에 합류하는 상상을 했다.
그렇게 8시간을 걸어 포인트에 도달했다.
우리가 제일 늦게 출발했으니 나머지는 이미 포인트 답사도 끝내놨겠지.
2위계인 로그가 열심히 주변을 수색한 뒤 말햇타.
"여기를 감시하면 됩니다. 근처에 막혀있는 야영지가 있으니 거기서 하룻밤 보내시죠."
"그래. 요 튀어나온 바위 뒤에서 매복하면 되겠어."
우리는 야영지로 들어가 거기서 쉬고 있던 고블린들을 전부 죽였다.
공양을 전제로 했기에 피가 튀든 말든 속전속결로 쓸어버렸다.
그렇게 결행 당일.
멀리서 걸어오는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우리 쪽은 아닌 것 같네요. 세 명."
"오. 루카스. 감지 능력 좋다더니. 거리는 어느 정도야?"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네요."
사실 거리도 알 수 있었지만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원래 본인의 실력의 30%는 숨기라는 말이 있으니까.
내통자가 말한 장소에 정확히 도착한 인영들이 한참을 머무르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희랑 반대쪽으로 갑니다. 대충 카리나가 매복한 방향."
"조이고 들어가자."
우리는 일반 탐험가 흉내를 내며 천천히 적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러던 중, 적이 카리나의 매복에 걸려들었다.
-삐이익!
"뛰어!"
곳곳에서 매복했던 소탕조 인원들이 튀어나왔다.
그대로 100m의 거리를 주파해 호각을 불었던 자리에 도착했다.
거기서 보았다.
4위계. 카리나 헤리슨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청염검법(靑炎劍法) 제4식, 역류(逆流)]
푸른 불꽃이 피어 나오고, 클라이머의 몸이 그대로 양단되었다.
'4위계의 증거.'
3위계의 증거가 검염이라면, 4위계의 증거는 바로 저 심상 구현이다.
심상 구현.
검법의 숨겨진 오의를 끌어내 현실에 구현하는 기술.
말로만 들었지 직접 마주하기는 처음이다.
나도 도달할 수 있을까?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카리나를 응시했다.
카리나는 여전히 지루한 눈으로 자신이 죽인 시체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잠깐 고개를 들어 올린 카리나와 내 눈이 마주쳤다.
나는 일부러 카리나와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아니. 될 거야. 무조건."
더 큰 힘에 대한 갈망이 커져갔다.
그렇게 뒷정리라도 하기 위해 몸을 돌린 순간, 라분이 나를 살짝 밀치고 내 뒤를 막아섰다.
"응? 라분아. 뭔데?"
덜컥인 내가 뒤를 돌아보자 라분이 막아선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카리나 헤리슨.
"여자. 물러나라."
아무런 감정이 없어 보였던 그녀가 나와 라분을 보며 처음으로 감정을 내비쳤다.
그것은 의아함이었다.
오히려 내가 느껴야 할 감정이었다.
라분이 앞세운 방패 너머로 4위계에 다다른 완성된 전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들. 무슨 호흡법을 익힌 거지?"
"!"
카리나의 얼굴은 완연한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27
붉은 송곳니 길드의 간부이자 4위계의 검사.
카리나 헤리슨이 의문스러운 눈으로 나와 라분을 보고 있었다.
"호흡법. 어디서 익힌 거지?"
이년이?
내가 뭐라 입을 열기 전, 켈른이 나와 라분을 잡고 뒤로 살짝 끌었다.
진정하라는 신호다.
"하하. 카리나 님. 길드 소속도 아닌 타인의 호흡법을 물어보시다뇨.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카리나는 켈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여자. 무례하다."
라분은 4위계의 검사가 무섭지도 않은지 계속해서 내 앞을 막고 카리나를 보고 있었다.
카리나는 잠깐 우리 둘을 훑어보더니 이내 한숨을 쉬고 기세를 거뒀다.
그러고는 살짝 고개를 숙인다.
"실례했다. 익숙한 기운에 그만."
카리나가 몸을 돌려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그녀를 멈춰세웠다.
"호흡법의 정체를 알고 궁금해하시는 겁니까?"
"⋯⋯."
카리나가 다시 나를 바라본다.
라분의 어깨를 살짝 짚으니 라분이 움찔하더니 방패를 천천히 내렸다.
하지만 카리나를 바라보는 눈은 그대로다.
카리나는 약간 먼 곳을 바라보았다.
"당신들과 똑같은 기운을 가졌던 남자를 알고 있었어. 내게 그 호흡법을 알려주지는 않았다만. 그냥 궁금할 뿐이야. 그와 당신이 익힌 호흡법의 정체가."
"당연히 알고 계시겠지만 자신이 익힌 호흡법은 이름조차도 비밀로 하는 게 보통입니다."
상대에게 자신의 호흡법을 알려준다는 것이 가위바위보에서 뭘 낼지 알려주는 정도까지는 아니다.
그렇지만 포커에서 자신의 스타팅 핸드 중 하나를 알려주는 정도는 된다.
카리나가 말을 더 해보라는 듯 가만히 나를 응시한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키인데도, 뿜어내는 중압감이 엄청나다.
하지만 나는 전혀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어떻게 하냐에 따라서 이 상황은 아주 큰 기회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몇 가지 조건만 들어주시면 알려드리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계속해. 조건이 뭐지?"
"두 가지 입니다. 첫째. 저와 같은 호흡법을 익힌 그 사람이 누군지 알려주십시오."
"어럽지 않아. 살아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니까."
"둘째. 이게 바로 용건입니다만, 나중에 시간을 내서 저와 대련해 주십쇼."
"좋아."
카리나는 크게 고민하지도 않고 내 조건을 수락했다.
이렇게 굴러들어온 돌을 놓칠 수야 없지.
더불어서 학즉사법은 전혀 대중적인 호흡법이 아니다.
학즉사법을 전수해 준 켈리어의 후손인 에릭도 모르고 있을 정도니.
이름 정도야 유출되어도 거의 리스크가 없다.
즉 전혀 리스크 없이 리턴을 얻은 셈이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거래이기도 했다.
"여기는 그다지 적합한 장소가 아니니 자세한 이야기는 이 원정이 끝나고, 셋이서 다시 모여 말씀 나누시죠."
카리나는 무언의 동의를 표시한 뒤 자신의 팀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지켜본 켈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체 뭔 일인지."
"그러게 말입니다."
"그나저나 대련? 저 카리나 헤리슨과 대련이라고? 루카스. 여전히 당돌하네?"
"흐흐.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죠."
"그래. 순식간에 끝나겠지만 경험만 쌓는 거라면야."
켈른은 나와 카리나의 실력 차를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는 내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발언이다.
'4위계와의 진지한 대련이면, 세 번까지는 죽어도 괜찮아.'
조금이라도 실력이 늘 가능성이 있다면 불길에도 뛰어들리라.
학즉사법 2성에 도전하며 결정했던 맹세이기도 했다.
나와 카리나가 떠들건 말건, 또 다른 4위계 니콜라스의 주도 하에 생포한 클라이머에게서 정보를 빼내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어찌나 강하게 고문을 하는지, 재갈을 물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행을 하는 데에도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니콜라스가 피 묻은 손을 털고 나왔다.
"일단 이 녀석들 파티의 본거지를 알아냈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아. 여기서 다시 결정이군."
최속으로 적을 치느냐. 아니면 중간지점을 알아냈으니 다시 정비하고 치느냐.
결국 결정권은 가장 실력 있는 두 사람의 의견이 주가 되었다.
카리나가 입을 열었다.
"둘 다 선택하지."
"인원을 나누자는 건가?"
"그래. 일부는 돌아가서 사무소가 추가로 모집한 지원군을 데려오고, 우리는 우리대로 상황을 보면서 움직이자."
다소 위험성이 증가하는 선택지.
하지만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순조로운 대화 과정을 거쳐 중간 집결 지점을 습격 장소 근처로 설정했다.
니콜라스가 모여있는 인원들을 돌아보았다.
"2위계는 전부 돌아가고, 3위계 중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있나?"
"⋯⋯."
모두들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기를 탁 쳤다.
해결사들은 모두 니콜라스의 의견을 따르고, 붉은 송곳니 길드원들이야 카리나의 의견을 따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실 여기서 결정할 선택지가 있는 사람은 라분과 나밖에 없었던 셈이다.
"좋아. 그러면 바로 움직이지."
라분은 탱커의 필요성을 인정받았기에 이 파티에 남을 수 있었다.
습격은 속도가 생명이다.
우리는 포로를 처리하고 쉬지 않고 움직였다.
1시간 쯤 걸었을까? 곧 여러 명의 존재가 감지되는 장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니콜라스가 코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얼굴을 찌푸리며 입맛을 다시던 니콜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5명의 기척. 여기인 것 같다."
카리나가 검을 빼어들었다.
"습격하자. 한 명만 남기고 다 죽이면 다음 단서를 얻을 수 있겠지."
"그래."
결정이 빠르다.
하지만 돌입하기 전, 나는 내가 느끼는 감지가 뭔가 수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원래 내 능력이라면 이렇게 짧은 거리는 뚜렷하게 적의 위치를 감지할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마치 안개가 낀 듯 감지 대상이 약간 흐릿하다.
그래도 내가 감지한 적의 수는 니콜라스와 같다.
5명.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적 클라이머의 본거지로 진입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응?"
본거지 안에서 내가 느꼈던 5명의 기척이 순간 사라져버린 것이다.
마치 우리가 진입하는 것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기다려?
"잠깐!"
내 비명이 일행을 멈춰세웠다. 곧 나와 같은 사실을 깨달은 니콜라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런! 함정이다! 모두 후퇴!"
"호오. 본거지 안까지는 진입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감이 좋은 친구가 있었군."
허공에 울리는 소리에 우리들의 소란이 그쳤다.
"환영인사다."
보이지 않는 칼날이 날아와 니콜라스 옆의 3위계 전사의 몸을 양분했다.
"!"
타겟이 되었다면 절대 피할 수 없었을 공격.
라분이 방패에 마나를 잔뜩 불어놓고 내 앞을 막았다.
니콜라스에게로 날아오는 칼날의 기척이 느껴졌다.
[낭혼검법(狼魂劍法). 첫 번째 이빨. 물어뜯기.]
니콜라스의 검과 칼날이 부딪혀 서로 상쇄되었다.
하지만 연속으로 날아오는 칼날이 니콜라스를 몰아붙였다.
니콜라스가 방어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미궁의 벽에 등을 붙인 순간.
벽이 폭발해 니콜라스를 그대로 덮친다.
"크억!"
머리가 반쯤 날아간 니콜라스가 그대로 허물어졌다.
실력있는 전사의 너무나도 허망한 죽음이었다.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4위계인 니콜라스 조차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는 함정을 팠다고?
우리가 올 줄 알고 준비를 한 것이 분명했다.
"미쳤어."
우리의 뒤에서 기척들이 느껴진다.
지원군일 리는 없고, 적 클라이머들이겠지.
카리나가 마침내 은신한 구트란을 찾아냈다.
구트란이 기다렸다는 듯 모습을 드러낸다.
"흐흐. 살려놓을 맛이 있는 여자로군."
"⋯⋯."
[청염검법(靑炎劍法). 제6식. 파도 가르기.]
"이런, 이런. 이빨이 꽤 날카로운데."
구트란 옆의 벽이 불쑥 솟아올라 카리나의 앞을 막아섰다.
4위계 전사의 강력한 공격은 미궁의 벽을 부술만큼 강력했지만, 그 너머에 서 있는 마법사에게 닿을 만큼의 힘은 없었다.
구경할 틈이 없다.
"뒤에서 온다!"
적 클라이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감지에 걸리는 숫자만 최초 20명.
고작 다섯 명밖에 남지 않은 우리의 숫자를 생각하면 절망적인 차이다.
켈른이 혀로 입술을 싹 씻었다. 손이 긴장으로 덜덜 떨린다.
"제기랄! 어디서 정보가 새어나갔어! 그렇게 조심하라고 했건만!"
"내통자가 있다는 거죠?"
"그래. 우리들 중 내통자가 있어. 확실해. 씨발!"
켈른이 앞서나가 적 3위계 전사와 검을 맞대었다.
하지만.
[척살검(刺殺劍). 제1결. 사망의 바람.]
적과 검을 맞댄 켈른의 전신이 허무하게 찢겨나갔다.
조각난 검의 파편 중 하나가 내 뺨을 긁었다.
"4위계!"
미리 알고 덤볐다면 조금이라도 더 버틸 수 있었을 텐데. 상대를 착각한 대가는 컸다.
베테랑 3위계의 허무한 죽음은 나머지 사람들의 전의를 꺾기에는 충분했다.
"어이. 떨거지들."
남자의 시선이 우리들을 향한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이 상황을 지켜봤다.
어차피 살아나기는 글렀으니 최대한 정보를 모아놔야겠다.
"미궁밥 먹을 놈은 살려주지."
"⋯⋯."
"이제는 죽이지 않아. 반항하는 놈이 있다면, 사로잡아서, 죽음 보다 더한 고통을 보여주마. 농담 아니야."
토벌대의 동요가 마나의 흔들림으로 나타났다.
카리나가 분전하는 소리가 저 멀리 들려왔지만 이미 습격을 준비했던 마법사와의 전투는 누가 봐도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응? 무서워? 좋아. 그럼 처음 무릎 꿇는 놈은 신고식 면제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해결사 중 한 명이 달려나가 검을 내던지고 무릎을 꿇었다.
"살려주신다면, 살려주신다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너는 내가 얼굴 기억했어."
흠.
나는 비교적 차분하게 상황을 지켜봤다.
나머지 해결사들이 동료를 따라 발 빠르게 무릎을 꿇기 시작한다.
어차피 고용된 놈들이니 어떻게든 도망갈 틈을 노리는 거겠지.
나는 검자루를 만지작거리며 이들이 하는 짓을 지켜보았다.
본인들끼리 진을 치던 붉은 송곳니 길드원들은 천천히 물러나며 자기들끼리 뭉치기 시작한다.
카리나의 전투를 기다리는 모양.
적 4위계 클라이머가 검을 빼들었다.
"간 보는 건 나쁘다고 너네 엄마가 안 가르쳐 주던?"
이미 해결사들은 무장해제 당하고 뒤에 있던 클라이머들에게 두들겨 맞고 있는 상황.
3위계 해결사들이 2위계 클라이머에게 두들겨 맞는 모습이 처량하기 그지없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쯤 하면 됐나."
"주인."
"라분. 나는 무릎같은거 절대 안 꿇어."
"알고 있다."
나는 저 멀리 쓰러져있는 니콜라스의 시체를 힐끗 쳐다본 뒤 검을 빼어들었다.
천천히 클라이머의 앞으로 다가간다.
'죽을 자리는 확정이고. 어디로 회귀하려나.'
회귀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애자.
그러면 그것으로 내 인생은 끝이니까.
만약 지금 이 시점으로 회귀한다면?
'천 번은 넘게 죽겠군.'
천 번이면 내 회귀도 끝나지 않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검에 집중했다.
"크! 이런 패기가 있어야지. 너, 마음에 들었다. 이름이 뭐냐?"
"알거 없다. 병신아."
"흐흐흐. 난 게랄프다. 너는 내가 특별히 귀여워해주지."
들은 채도 하지 않고 검을 내게 가장 익숙한 위치로 가져간다.
피어오르는 정갈한 검염이 너무나도 평온한 내 정신 상태를 대변한다.
게랄프의 얼굴에 순수한 감탄의 빛이 서린다.
"평정심은 대단하군. 그걸 깨뜨려 내 노예로 삼아야겠어."
"⋯⋯."
모든 신경을 검에 집중하고, 내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일격을 뻗어낸다.
게랄프도 검을 내어 내 일격에 맞선다.
나를 생포하겠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지 심상 구현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명백한 방심.
나중에 무기로 삼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흡!"
서로의 검이 맞닿고, 내 검이 찌르르 울린다.
'부서지지 않았어!'
하지만 내 혼신의 첫 일격은 게랄프에게는 그저 제대로 받아줄 가치가 있는 공격 중 하나일 뿐이었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이어진 게랄프의 검이 내 검을 강타했다.
그대로 검이 두 동강 나고, 게랄프의 검이 내 목에 닿았다.
"역시 제법이야. 키우면 크게 되겠어."
"흐흐."
"웃어?"
나는 내 발차기가 게랄프의 발에 막히는 틈을 이용해 그의 검으로 내 목을 그어버렸다.
게랄프가 아연실색한다.
"이런 개또라이를 봤나!"
검염이 서려 있었기에 검은 일부러 방어하지 않은 내 목을 반쯤 썰어버렸다.
목 안으로 밀려들어오는 피를 느끼며 의식이 조금씩 사라져가는 것을 기다렸다.
역시. 엄청나게 뭐 같은 느낌은 여전하다.
라분의 비명인지 모를 고함 소리가 멀어지며.
-키릭.
⋯⋯
울렁이는 시야를 회복한 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니콜라스가 일행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일부는 돌아가서 사무소가 추가로 모집한 지원군을 데려오고, 우리는 우리대로 상황을 보면서 움직이지."
"스탑!"
한창 말하고 있는 일행의 리더 격인 니콜라스의 말을 끊자 좌중이 조용해진다.
나는 씨익 웃으며 목을 매만졌다.
차가운 금속이 줬던 고통 대신, 따뜻한 손가락의 부드러운 감촉만이 느껴질 뿐이다.
"우리. 지금 이 상황. 아무래도 처음부터 다시 접근해야 할 것 같은데?"
내 말에 의아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
나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28
미궁 4층. 나는 내 앞에 있는 4위계에 이른 역전의 용사들을 보았다.
붉은 송곳니 길드의 간부, 카리나.
사무소가 고용한 해결사, 니콜라스.
모두 든든한 전력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내가 이들을 막지 않았을 시에 진행될 미래를 알고 있다.
이대로 가면 모두 죽거나, 죽는 것만도 못한 삶을 살게 된다.
절대로 준비도 없이 돌격한다는 선택지를 내밀면 안 된다.
때문에 나서게 되었다.
내가 건넨 말은 그들이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말이었다.
니콜라스가 내게 관심을 보이며 카리나에게 물었다.
"누구지? 카리나. 붉은 송곳니인가?"
"사무소에서 고용한 용병. 자세한 건 나도 잘 몰라."
"그래도 말을 꺼냈으니 생각이 있겠지. 이야기를 들어보자."
"흠, 흠."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좌중과 시선을 맞췄다.
"여기 이곳에 구트란의 내통자가 없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습니까?"
"호오?"
니콜라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통자?"
"그렇습니다. 내통자. 만약 내통자가 있어서 우리가 습격할 거란 정보를 구트란이 이미 알고 있었다면? 그러면 우리는 전부 죽은 목숨입니다."
게랄프. 분명 4층 수배 명단에 있었다.
하지만 게랄프는 미궁 4층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클라이머로, 독자적인 세력으로 알려져 있다.
구트란이 휘하로 넣고 부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둘이 협력해 우리들을 쳤다.
그 말은, 저들이 이 습격을 미리 예상하고 준비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래. 틀린 말은 아니야. 하지만 신뢰의 문제가 있지."
"신뢰의 문제?"
"내가 고용한 해결사들은 내가 보증하지. 카리나?"
"붉은 송곳니 길드원들은 내가 보증하겠어."
"자. 너는 저 탱커를 보증할 수 있겠군. 서로가 서로의 신뢰와 보증으로 엮여있는 셈이다."
니콜라스가 단검을 꺼내 날을 만지작거렸다.
딱히 위협은 아니고, 습관처럼 보이는 무의식적인 행동이다.
"내통자의 이야기를 꺼냈으면, 내통자를 찾을 수 있는 방법도 알고 있겠지? 적당한 근거도 없이 말을 꺼냈을 리는 없으니까."
"⋯물론."
확신은 없지만. 거의 먹힐 방법이기도 하다.
나는 이들을 아직 숨이 붙어있는 포로 클라이머에게로 안내했다.
"이번에 당신들이 소집된 계기가 있었지요. 바로 구트란이 만들어낸 향수입니다."
"그래. 말은 들었다."
"향수는 비교적 먼 거리에서도 흔적을 남기죠. 저는 제가 이전에 포획한 포로, 스롬에게서 구트란이 묻혔던 향수의 잔재를 찾아냈습니다."
나는 포로 클라이머의 품 속을 살펴본 뒤, 꽁꽁 묶여있는 녀석의 맨살이 드러난 발목을 짚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살결이다. 하지만 내 눈에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무언가가 묻어있다.
"이녀석도 여기에. 구트란이 만든 향수가 묻어있군요."
"?"
카리나와 니콜라스. 두 명의 4위계 전사조차도 의아해하는 반응이다.
나를 지원사격하기 위해 켈른이 끼어들었다.
"이 친구가 감각이 꽤 뛰어납니다. 아마 맞을 겁니다. 저는 눈에 불을 켜고 향수의 흔적을 찾아봤는데 못 찾겠더라고요."
카리나는 이런저런 방법으로 감지를 시도했지만 영 감을 잡지 못하는 듯했다.
반면 니콜라스는 한참을 뚫어져라 발목을 바라보더니 이내 탄성을 흘렸다.
"그래. 이건가."
이내 내가 내 몸에 묻어있던 향수를 지운 것처럼 자신의 마나를 손에 묻혀 향수에 접촉하는 데에 성공했다.
향수의 성질이 니콜라스의 마나에 감응하여 조금 변형되는 것이 느껴졌다.
"맞습니다."
"자네. 대단하군. 나도 감지 쪽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한다만. 존재한다는 걸 알려줬음에도 한참이 걸렸어."
현직 4위계 해결사의 칭찬에도 나는 무덤덤했다.
지금은 친목보다는 생존에 초점을 더 맞춰야 할 때니.
"자. 이 포로에게는 향수가 한 군데 더 묻어있습니다. 보이십니까."
"음?"
다시 눈에 집중한 니콜라스가 포로의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놈의 상의 주머니를 뒤지고서야 단검의 자루에 묻어있던 향수를 찾아낸다.
"도구에도 묻어있었군."
"그렇습니다. 우리 해결사들과 붉은 송곳니 길드원분들은 한 번도 향수와 접촉해 보신 적이 없으시겠죠."
"자네 말이 맞아. 내가 알기로는 우리 해결사들도 최근 미궁 4층에 입장한 적이 없어."
"그러면 만약 향수가 묻어있는 사람이 있다면."
"내통자겠어. 카리나."
"좋아. 시간을 쓸 가치가 있겠네."
카리나의 말을 듣고 모든 사람들이 일렬로 섰다.
소지품을 뒤진다는 말에 해결사들이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본인들의 목숨이 달려 있는 일이기도 했기에 큰 저항은 없었다.
니콜라스가 모두를 중재하며 앞으로 나섰다.
"이 친구와 나, 둘만 향수를 구분할 수 있으니 두 사람이 동시에 한 사람씩 검사하겠네."
"나부터 하겠어."
유일한 여성인 카리나가 머리띠를 풀더니 배낭을 내려놓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속옷 차림이 된다.
"이 안도 보겠어?"
"그런 취미는 없다만. 예외는 없어."
라분이 침낭으로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가리고, 카리나를 완전히 검사했다.
물론 나는 구트란과 사생결단을 하던 카리나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기에 그녀를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일은 일이다.
"됐다."
바로 카리나의 옷을 검사하고 그녀에게 얼른 입혔다.
카리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돌아가 유일한 통로 쪽에 자리 잡았다.
남자들과 거리를 두려는 의도도 있지만, 혹시라도 도망치는 놈을 잡기 위한 뜻도 있었다.
이제 최소한 여기서 도망칠 수 있는 놈은 없다.
카리나를 뚫고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수상한 행동을 하면 내통자로 간주하겠다. 붉은 송곳니 길드원부터 한 명씩."
리더인 카리나도 파격적인 선택을 한 마당에 일개 길드원들이 거절할 수는 없었다.
한 명씩 순식간에 속옷 바람이 된다.
우리 앞에서는 그 속옷조차도 벗어야 했다.
"없군."
"없어."
소지품 하나하나까지 모두 검사를 마쳤다.
"내통자인데 향수가 없을 가능성은?"
"과연 그 노괴가 그럴까 싶습니다. 묻혀놓기만 하면 우리의 동선을 파악할 수 있는데요. 본인이 모르는 사이에 몰래라도 묻혀놨을 테죠."
"그렇군."
다음은 해결사. 한 명씩 검사를 통과하고, 우리를 안내하던 로그가 걸어 나와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차고 있는 목걸이도 벗어 짐 속으로 집어던진다.
나는 목걸이를 집어 살펴보다가, 목걸이가 안에 그림을 넣을 수 있는 로켓 목걸이임을 알고 입구를 열어젖혔다.
그리고 닫았다.
"니콜라스. 저 녀석 잡아요."
"큭!"
한순간 발작하듯 움직인 로그가 낭패한 표정을 지으며 쓰러진다.
자신의 몸을 만지던 니콜라스의 손이 턱을 그대로 강타한 탓이다.
나는 니콜라스에게 목걸이를 던져주었다.
목걸이 안쪽을 살펴보던 니콜라스가 크게 한숨을 쉰다.
"클라크."
"켁! 켁!"
"얼마 전 미궁 5층에서 실종되었다던 네 연인이군."
"쿨럭!"
순식간에 포박된 클라크가 포로의 옆에 던져졌다.
"나머지도 진행하지."
다행히도 해결사 측의 내통자는 클라크가 유일했다.
잠깐의 정리 후 모두의 시선이 클라크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래도 옛정이 있는지 입을 막아놓지는 않았다.
니콜라스가 무심하게 가치가 없어진 클라이머 포로의 목에 단검을 찔러 넣는다.
하지만 그 손길에 분노가 서려있음을 알아채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끄륵!"
바로 직전까지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지 못한 예비 시체의 눈이 부릅떠졌다.
곧 서서히 그 초점을 잃어간다.
'죽었네.'
너무나도 익숙한 죽음을 보며, 문득 죽음의 종착지는 어디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항상 문을 두드리다 돌아오는 입장에서, 그 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과연 그곳에 갈 수 있는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천국이었으면 좋겠군."
나는 적 클라이머의 눈을 감겨주었다.
옆에서 니콜라스가 클라크 앞에 쭈그려 앉았다.
"클라크."
"⋯⋯."
"너를 안지 3년이 지났다."
"⋯⋯."
"너를 전부 알지 못했어도, 네가 믿을 수 있는 놈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너는 내 기대를 보기 좋게 배신했어."
"마리가! 마리가 지금 5층에서 잡혀 있다고! 클라이머 놈들한테 잡혀서 살려달라고 울부짖고 있다고! 이번에만 잘 해주면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클라크가 미친놈처럼 몸을 꿈틀거리며 피를 토하듯 소리 질렀다.
하지만 주변의 반응은 없었다. 그가 다시 조용해지자 니콜라스의 입이 열렸다.
"발설하면 죽인다고 했겠지."
"⋯⋯."
"이미 늦은 것이 분명했다. 마리가 죽은 뒤에야, 그녀가 내뱉던 말이 생각나 너에게 접촉했을 거야. 태생이 그런 놈들이니까. 미궁에 먹힌 놈들이니까."
클라크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를 동정하는 사람은 니콜라스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아는 정보를 다 말해. 마지막 속죄의 기회다."
클라크가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조가 나뉘면 기회를 봐 같이 가던 놈들을 모두 죽이고 합류, 우리의 공격 시점을 말해주고.
조가 나뉘지 않으면 그저 옆에서 가만히 있기만 해도 된다고 했다고.
"매복이 있는 것이 확실하군."
"⋯그렇습니다."
"더 할 말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동생 놈에게는 탐험 중에 죽었다고 말해주십쇼."
"그래. 다른 이들이 비밀을 지켜줄지는 모르지만."
"걔는 당신 말만 들으니 상관없습니다."
니콜라스는 그대로 클라크의 목을 찔렀다.
단검의 피를 닦고 일어난 니콜라스가 우리를 보더니 그대로 무장을 해제하고 무릎을 꿇었다.
"내가 보증한 이가 내통자였군. 면목 없다. 불만이 있는 자는 내 목을 쳐라."
정말 치겠냐마는.
살짝 분위기가 풀어졌다.
해결사들의 반응은.
"형님. 괘념치 마십쇼."
다들 니콜라스를 감쌌다. 니콜라스가 보증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붉은 송곳니는.
"의뢰 한 번, 아니 두 번 공짜로 부탁할게."
"물론이다."
실리 있는 농담으로 넘어가고.
나와 라분은?
"언제 한 번 우리들과 대련이나 화끈하게 부탁드리죠."
"좋다.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어울려주지."
"술도 사주시고."
"당연하지."
니콜라스 이용권을 얻었다.
두 명의 시체를 미궁 구석으로 정리하고 다시 모여 회의를 했다.
니콜라스가 클라크의 유품인 목걸이를 꺼내 보이며 답했다.
"선택지가 변했군. 저기 적이 매복해있다. 맞서거나, 포기하거나."
포기하는 것도 충분히 선택할 만하다. 매복이 있는 것을 알고 접근하는 것만큼 위험한 행동도 없으니.
하지만 나는 도전을 위해 살아가는 놈이다.
누군가는 안정을 바랄지도 모르지만 나는 나를 불길 속으로 내던지는 데에 망설임이 없다.
"니콜라스."
"말해라."
"목걸이를 가지고 접근하면, 분명히 구트란은 우리가 온다고 생각하고 매복을 진행하겠죠."
"그렇지."
"각개격파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나는 나를 보며 비릿하게 웃던 게랄프의 얼굴을 떠올리며 웃었다.
녀석에게 미래를 알고 있는 자의 무서움을 제대로 보여줄 때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29
미궁 5층을 주 무대로 활동하는 클라이머 마법사 구트란.
웬만해서는 움직이지 않는 거물 클라이머가 4층의 외곽으로 나온 이유는 간단했다.
"4위계 둘? 흐흐. 하나는 잡을 수 있겠군."
평소처럼 납치와 고문을 통해 그 가족을 꼭두각시로 만들던 도중, 꼭두각시가 물어온 정보가 꽤나 가치 있었기 때문이다.
곧바로 게랄프에게 접선해 합류 제의를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클라이머들을 미끼로 함정을 팠다.
놈들은 의심할 수 없을 테다.
미끼들의 진술은 한 점 거짓 없는 진실이니까.
가장 강력한 거짓은 진실로부터 비롯된 거짓이었다.
하지만 미끼의 생각과는 달리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다.
4써클 마법사. 마나의 진리를 깨달은 자.
꼼꼼히 준비를 마쳤으니 4위계 둘이 와도 문제없다.
그렇게 대기하던 도중, 딱 기다린 타이밍에 성수를 바른 미끼가 접근하기 시작했다.
"켈켈켈."
아무래도 총공격을 결심한 듯하다.
사무소와 해결사들의 질이 아무리 높다 해도 이미 전력 상정이 끝난 상태다.
덫에 걸려든다면 어렵지 않게 사냥할 수 있다.
하지만.
"안 들어오는 건가."
성수를 묻힌 놈이 입구 시작점에서 가만히 서있는 것이 감지되었다.
하지만 괜찮다. 시간은 자신의 편이었으니.
조금 시간이 지나자 놈이 조심스럽게 함정을 향해 접근하는 것이 느껴졌다.
"클클."
구트란이 게랄프에게 신호를 보냈다.
단순히 특정 신호만 일회성으로 전달하는 아티팩트.
습격의 신호를 알리기에 적합하다.
게랄프가 배신하더라도 좋다.
어차피 여기는 뒷길도 있고, 미끼에 제대로 걸려든다면 전부 자신이 처리할 수도 있으니.
그만큼 자신이 원하는 전장에서 싸우는 마법사는 무서운 존재다.
마침내 적이 함정에 걸려들고, 구트란이 적들을 향해 모습을 드러내었다.
잔뜩 흥분에 젖은 구트란이 눈에 보이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지팡이를 멈췄다.
"으응?"
자신의 눈앞에 있는 존재는, 껄렁이는 자세를 한 청년 한 명이었다.
심지어 자신이 포섭한 하수인도 아니다.
"꼬마야. 넌 뭐냐."
"꼬마라니."
"왜 혼자 있는 거냐."
"이 목걸이를 찾나?"
청년이 꺼내든 목걸이는, 거짓말로 자신이 가둬둔 여자를 확인한다고 건네받아 몰래 성수를 묻힌 그 목걸이가 맞았다.
"쯧. 성수의 정보가 새어나갔나."
아무래도 매복은 실패인 모양이다.
이미 정보가 새어나갔다면 괜히 무리할 필요가 없다.
구트란이 눈 앞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굳이 죽여 게랄프를 상대할 전력을 줄일 필요는 없었다.
"살아있다면 배신자에게 전해라. 그 여자. 별로 맛없었다고."
"쯧. 할배가 주책이군. 허리 놀릴 힘도 없어지기 전에 빨리 자살이나 하쇼."
"⋯⋯."
구트란이 청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곧바로 모습을 감췄다.
목걸이를 주머니에 쑤셔 넣은 루카스가 뒤를 돌아 전투의 현장으로 걸어나갔다.
내심 쫓아오기를 기대했던 구트란이 켈켈 웃으머 어둠 속으로 몸을 감췄다.
동맹 전선을 구축했던 게랄프의 안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사이가 틀어지겠지만, 어차피 미궁 4층에는 큰 볼일도 없었다.
'기왕이면 죽었으면 좋겠군.'
동맹의 담보로 내세운 물건이 무사했으면 좋겠다.
* * *
"성공했나?"
나는 물러나는 구트란을 굳이 쫓아가지 않았다.
니콜라스를 죽이고, 카리나도 곤경을 겪게 만든 녀석이다.
따라가봤자 죽는 건 분명 나였을 테니까.
아무리 무한 회귀가 있다고 해도 개죽음은 사양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구석에서 20명에 달하는 기척이 나타났다.
이쪽을 향해 빠르게 접근한다.
게랄프와 녀석의 수하들이 분명했다.
"걸려들었군."
나는 씨익 웃었다.
게랄프는 4위계의 전사다. 하지만 우리가 보유한 4위계는 두 명.
전체 파티의 숫자로는 불리하지만 경지 앞에서는 숫자가 무의미하다.
당장 나도 2위계 중 떨거지들은 혼자 열 명 넘게 상대할 수도 있었으니.
"이런. 빨리 가야지."
괜히 본대와 합류하지 못해 분단된다면 위험할 수도 있다.
나는 부지런히 달려 함정이 설치된 본거지를 벗어나려 했다.
잠깐 달리니 내 감지에 게랄프와 니콜라스가 맞부딪히는 것이 걸려들었다.
격렬한 마나의 파동!
어렴풋이 들러오는 심상 구현의 여파가 여실하다.
[낭혼검법(狼魂劍法). 네 번째 이빨. 쏟아지는 구름.]
[척살검(刺殺劍). 제1결. 심연의 불.]
마침내 도착한 현장은 처참했다.
격돌하고 있는 니콜라스와 게랄프.
니콜라스는 한 손에는 장검, 한 손에는 단검을 든 특이한 모습으로 게랄프의 대검을 받아내고 있었다.
그 뒤에서는 카리나의 학살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청염검법(靑炎劍法). 제6식. 파도 가르기.]
말 그대로 물 만난 물고기. 아니, 불 만난 드래곤처럼 거침없이 전장을 휘젓는 카리나의 푸른 불꽃을 담은 검.
고작 3위계와 2위계들로 구성된 클라이머들이 그 검을 받아낼 수 있을 리가 없다.
"크아아아! 구트란 이 씹새끼! 막내야!"
"네!"
가장 안전한 곳에 있던 클라이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친다.
아직 살아있는 놈들이 필사적으로 막았기에 녀석은 도망치는 데에 성공했다.
"지원을 부르러 간다. 쫓아!"
카리나가 길을 열고, 붉은 송곳니 단원들이 주축이 되어 클라이머를 쫓았다.
라분은 어느새 해결사들과 어울리며 2위계의 적을 방패로 때려죽이는 위용을 실시간으로 달성 중이다.
게랄프는 이 모든 광경을 보고서도 어찌하지 못하고 니콜라스의 검을 받아내는 데에 급급했다.
힘을 아끼지 않는 니콜라스와, 전투 뒤를 대비해야 하는 게랄프의 대결이다.
게랄프는 카리나가 자신의 부하들을 다 정리하자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다.
"이 씨발 새끼들! 다 죽여버린다!"
[척살검(刺殺劍). 제8결. 흩어지는 죽음.]
"큭!"
니콜라스가 게랄프의 일격을 견디지 못하고 나가떨어진다.
게랄프가 향하는 곳은 내가 막고 있는, 구트란이 사라진 본거지가 있는 장소다.
"비켜!"
"싫은데."
게랄프가 검을 들어 올리는 순간 카리나가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게랄프에게 돌진한다.
[청염검법(靑炎劍法). 제4식. 화염꽃.]
게랄프가 힘겹게 카리나의 검을 받아낸다.
팔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아무래도 힘에 부치는 모양.
그런데 자세가 뭔가 될 것 같은 자세다?
카리나가 찍어누르는 힘을 버텨내고 있는 게랄프.
심상 구현을 시도하고 있지만 아직 준비가 필요해 보인다.
4위계의 필살기나 다름없기에 연속해서 사용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나는 검을 뽑아들고 빠르게 게랄프에게 접근했다.
"씨발! 씨발! 개새끼 오지마! 죽인다!"
카리나가 모든 힘을 다해 누르는 검을 쉽게 떨쳐내지 못하는 게랄프.
아직 카리나의 검에는 심상 구현의 여파가 남아있기에 더 힘이 강화되어 있다.
게랄프가 접근하는 내게 눈을 돌렸다.
"잠깐만! 잠깐만!"
크게 올려친 내 검이 게랄프의 오른팔을 어깻죽지부터 잘라내고, 곧 힘을 얻은 카리나의 검이 게랄프의 왼팔을 팔꿈치부터 잘라낸다.
카리나의 검 끝이 게랄프의 옆구리 또한 깊게 베어낸다.
"끄아아아악!"
순식간에 팔 두 개를 모두 잃은 게랄프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그렇게 전투가 끝났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니콜라스가 호각을 크게 불자, 막내라는 놈을 추격하던 붉은 송곳니 길드원들이 돌아왔다.
별 성과를 얻지는 못한 모양이다.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른 니콜라스가 내게 물었다.
"구트란은?"
"매복이 실패한 것을 알자마자 뒤로 도망갔습니다. 굳이 쫓지는 않았습니다."
"잘했다. 덕분에 일이 이렇게 잘 풀리는 군."
내 어깨를 두드려주고 게랄프에게 다가가는 니콜라스.
게랄프가 발을 휘두르며 날린 단검을 어렵지 않게 잡아챈다.
"게랄프. 본인이군."
"씨발. 오지 마! 오지 마!"
곧 사람들에게 제압되는 게랄프.
니콜라스가 게랄프의 품을 뒤져 붉은색 포션을 꺼냈다.
포션.
트롤의 피를 주성분으로 만든 액체로, 마시면 내상이 치료되고, 바르면 외상이 치료된다.
그야말로 '여벌 목숨'이라는 명칭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귀한 물건이다.
"그거 내놔! 씨발 놔!"
니콜라스가 빠르게 손을 움직여 게랄프를 그대로 기절시켰다.
본능적으로 부상 부위의 피를 막던 마나가 기절하며 풀리자 피가 철철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니콜라스가 끈적한 포션을 손에 묻혀 절단면에 바르니 신기하게도 출혈이 그대로 멎어버린다.
"와."
저게 바로 포션.
라분으로 저 포션을 몇 개나 살 수 있을까.
어느새 내 옆에 붙은 라분을 바라보자 나를 보는 녀석의 표정이 묘해진다.
"주인. 또 쓸데없는 걸 생각하고 있다."
"미안."
해결사 중 한 명이 자처해 몸수색을 끝낸 게랄프의 몸을 묶어업었다.
니콜라스가 격렬한 전투 현장을 둘러본 뒤 모두를 불러들였다.
"도망간 놈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어서 복귀한다."
카리나가 니콜라스의 말을 거들었다.
"구트란이 이미 우리의 습격을 알고 있었으니. 이 이상의 성과를 얻기는 불가능해. 돌아가서 재정비하자."
방향이 정해지자 모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상자 없이 경상자만 여럿이었다.
경상자 중 처치가 필요한 이는 니콜라스가 포션을 발라주었다.
"포션은 전부 쓰도록 하지. 어중간하게 남겼다가 배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나는 의아해했다.
"니콜라스. 포션이 그렇게 비싸요?"
"경매에 나올 정도니까. 시가라고 봐야지."
시가!
돈을 부르는 황홀한 단어였다.
미궁 탐험이 무엇인가.
결국에는 돈이다. 돈을 벌기 위한 일이다.
나는 복귀를 위해 전열을 정비하는 니콜라스에게 다가갔다.
"게랄프 저 녀석의 본거지가 어디입니까?"
"음? 뭐. 사전 조사 때 외워두기는 했지."
역시 로그의 위치에서 4위계에 다다른 니콜라스는 꼼꼼했다.
나는 여기서 얼마 멀지 않은 게랄프 패거리의 지역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유명 클라이머답게 본거지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없었지만.
이거면 됐다.
"그러면 먼저 돌아가시죠. 저는 게랄프 녀석 잔당 좀 털어보겠습니다."
"허, 루카스. 자네 정말로?"
니콜라스는 이제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다.
하기야 내가 생각해도 그렇다.
향수의 존재로 매복을 알아내고, 미끼 역할을 자처해 완벽하게 역습을 성공시키기까지 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5인분은 하고도 넘는다.
거기에 더불어 추가 전공까지 노린다?
"제가 없어도 복귀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겠죠."
"그거야 그렇다만."
"그러면 여기서부터 우리는 개별적으로 움직이겠습니다."
언제나 든든한 라분이 얼른 내 옆에 붙었다.
나는 욕심쟁이다.
그리고 아무리 욕심을 부려도 그 욕심을 무한히 받아줄 수 있는 특성이 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아니다. 모든 리스크는 내게 없는 것과 다름없다.
"그쪽 뒷일은 맡기겠습니다."
"⋯⋯."
"최대한 빠르게 돌아오죠."
나는 게랄프 패거리의 막내가 도망갔던 장소를 향해 달려나갔다.
뒤에서 라분이 조용히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