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60
미노타우로스 사냥 개시다.
"라분. 배낭에 붉은 천 있지?"
"있다."
"꺼내. 레이나. 너는 나랑 땅 좀 파자."
어리둥절해하는 레이나에게 첨언했다.
"우리가 어떻게 고작 두 명이 미노타우로스를 잡았는지 아직 설명 안 해줬지?"
"!"
내 목적을 깨달은 레이나가 퍼뜩 놀랐다.
"그러면 지금 미노타우로스를 사냥하시려는 거예요?"
"그래."
"너무 위험⋯"
나는 손을 들어 레이나의 말을 끊었다.
"너를 8층으로 데려오기 전에 내가 말했어. 미궁에서는 내 명령이 절대적이라고. 지금 나는 미노타우로스를 잡기로 결정한 거야."
"하지만 그건."
"왜. 못 미더워?"
레이나가 라분을 돌아보며 허둥지둥거렸다.
라분은 아무 말 없이 붉천을 막대기에 조립하고 있다.
이쪽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 눈치다.
나는 책갈피 아티팩트를 레이나에게 던져주었다.
얼떨결에 아티팩트를 받은 레이나.
"그러면 떠나. 틈의 입구에서 우리를 기다려. 하지만 너와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야."
단번에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나는 내 결정이라면 사지가 확실해도 걸어가야 하는 동료가 필요하다.
하는 일마다 딴지를 거는 동료는 필요 없다.
처음에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에 레이나를 대피시켰다.
지금은?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레이나까지 끌어들여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레이나는 고개를 숙이며 한참을 중얼거렸다.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그러더니 곧 고개를 들고 빼액 소리 지른다.
"미쳤어요!"
나는 레이나가 내게 다시 던진 아티팩트를 솜씨 좋게 낚아챘다.
"흐흐. 합격."
"웃지 마요! 제가 뭘하면 되는데요?"
"여기랑 여기. 이 정도 크기로 땅을 파."
곧 천을 조립한 라분까지 합류해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래도 두 번째라고 요령이 생겨 무려 4개의 구멍을 팔 수 있었다.
"자. 레이나도 있으니 작전 개요를 다시 설명할게."
예전에 라파가 내게 설명해 준 사항을 그대로 말해주자 레이나가 그래도 납득한 표정이 되었다.
"가능성은, 확실히 가능성은 있네요."
좋게 말해도 높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자. 이제 온다."
호숫가로 돌격해 온 미노타우로스가 곧바로 우리들을 발견했다.
"무어어어어어!"
미노타우로스의 포효에 레이나가 찔끔했다.
"라분. 깃발 잡아."
"알았다."
자신 있게 깃발을 잡고 돌진해오는 미노타우로스의 방향을 조절한다.
그리고.
당연히 실패했다.
"꺄아아아악! 이 미친 새끼! 믿는 게 아니었어!"
레이나의 원색적인 욕설과 함께.
"미안! 다음에는 성공할 테니까!"
"뭔 개소리야!"
우리의 질긴 반항을 뚫고 미노타우로스의 몽둥이가 내 머리를 짓이겼다.
-키릭.
⋯⋯
두 번째.
"꺄아아아악! 살려줘! 도망가!"
"정말 미안하다!"
"닥쳐!"
-키릭.
⋯⋯
세 번째.
"오 걸렸! 야! 저거 누가 팠어! 안 넘어졌잖아!"
"제가⋯⋯ 온다!"
"레이나! 다음에는 더 깊게 파! 검사한다!"
"대체 다음이 어디 있다고!"
-키릭.
⋯⋯
네 번째.
"무오오오오오오!"
달려오던 미노타우로스의 발이 그대로 함정에 빠졌다.
"제대로 걸렸다! 성공이야!"
"와!"
레이나의 눈이 동그래지고, 미노타우로스의 발이 그대로 꺾이며 무릎이 기이한 각도로 기울었다.
거대 몬스터의 몸이 갑작스러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호수에 빠졌다.
"달려들어!"
"우어어어!"
"하앗!"
메뚜기처럼 미노타우로스를 향해 점프한 우리 세 명. 라분이 배 위에서 미노타우로스의 관심을 끌고, 나와 레이나가 무릎에 붙었다.
나와 레이나의 눈이 맞았다.
레이나의 눈은 다시 볼 수 없을 흥분에 가득 차 있었다.
"썰어!"
두 자루의 검염이 교차하며 부러진 미노타우로스의 무릎을 썰었다.
라분이 옆으로 엎어진 미노타우로스의 살갗을 얕게 베었다.
상처에서 나온 피가 물속에 스며들자 프라냐가 광분하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물을 먹은 미노타우로스가 발광했지만 다리는 땅속에 고정되어 있었기에 썰기가 쉬웠다.
더군다나 검염 서린 검이 두 자루다.
나와 라분이 악전고투했을 때보다 속도가 두 배는 빨랐다.
라분이 검과 방패를 휘둘러 미노타우로스를 최대한 방해하고, 우리는 박자를 맞춰 무릎을 썰었다.
"헛둘헛둘!"
그 결과.
뚝하는 소리와 함께 질기디질긴 미노타우로스의 무릎힘줄이 끊어졌다.
"라분! 됐다!"
라분이 풀쩍 뛰어 미노타우로스의 몸에서 내려오고, 우리도 빠르게 안전거리를 확보했다.
물장구를 치며 허우적거리던 미노타우로스가 드디어 몸의 균형을 잡고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푸허어어!"
얼굴에 달라붙어 있는 수십 마리의 프라냐.
피를 흘리는 몸통에는 100마리가 넘었다.
기어코 가죽을 반쯤 들어 올리고 몸속으로 파고드는 놈들까지 있다.
거기다가 달려오던 엄청난 힘이 주는 반동에 꺾여버린 무릎, 나와 레이나의 활약으로 힘줄도 반쯤 잘려있다.
잠깐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몬스터가 고개를 확확 저었다.
프라냐들이 이리저리 날아가 호숫가 곳곳에 흩어졌다.
"리더! 지금이 기회 아니에요?"
"아니. 궁지에 몰린 소가 더 무서운 법이지. 어차피 저거 이제 못 움직여."
나는 그 와중에도 근처에 떨어진 프라냐들을 칼로 꾹꾹 찔렀다.
⋯⋯
[인과를 축적하십시오. 다음 보상까지 7/100.]
[인과를 축적하십시오. 다음 보상까지 8/100.]
미노타우로스는 잠깐 비틀거리더니 이내 미궁 벽에 몸을 기댔다.
"천천히. 휴식을 취하지 못할 정도로만 괴롭혀! 라분. 저번처럼 무리하게 나가지 말고!"
"알겠다!"
"레이나. 무릎이 없어도 녀석의 몽둥이 공격은 충분히 위협적이야. 방심하면 한 방에 죽는다."
"네!"
레이나의 초롱초롱한 눈은 나에 대한 신뢰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전 삶에서 작전이 실패했을 때의 나를 원망했던 눈길은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라분과 레이나는 다소 소극적으로, 나는 내 감지를 믿고 적극적으로 미노타우로스를 괴롭혔다.
아예 미궁벽에 기대어 주저앉은 미노타우로스가 몽둥이를 이리저리 휘둘러보지만, 파워도 스피드도 반감된 공격은 누구도 맞추지 못했다.
마치 몽둥이로 파리를 잡으려는 느낌일까.
그런데 이 파리는 소고기를 써는 나이프를 들고 있는 파리다.
결국 다리에 집중된 상처에서 흐른 피가 웅덩이를 만들고, 그 웅덩이가 호수로 흘러가자 프라냐들이 발광하며 땅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펄떡이며 미노타우로스의 몸에 닿고, 이내 포식을 시작한다.
"무어어!"
미노타우로스가 고통에 발광하며 몽둥이로 프라냐들을 찍어 죽였지만, 점차 손이 어지러워지더니, 몽둥이가 그만 손에서 빠져버렸다.
라분이 검과 방패를 집어던지고 얼른 달려가 몽둥이를 끌고 왔다.
"⋯⋯."
"⋯⋯."
"⋯⋯."
"⋯⋯잘했어."
미노타우로스는 결국 하체에서 뼈가 드러날 때쯤 질긴 눈을 감았다.
[인과를 축적하십시오. 다음 보상까지 39/300.]
"진짜 죽었어."
"진짜죠?"
10분 전에 죽은 줄 알고 미노타우로스한테 다가갔다가 혼쭐이 난 레이나였다.
"확실해. 잠깐 쉬고 있어. 프라냐는 내가 다 잡아야하니까."
감지 능력을 사용해 미노타우로스의 몸속에 있는 프라냐를 전부 찔러 죽이고, 밖의 프라냐들도 한 마리씩 천천히 정리했다.
"후."
저번과는 달리 앉아있는 채로 죽어 작업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뿔은 완전히 잘라내야 한다.
"레이나. 진척도는 몇 퍼센트야?"
"잠시만요. 14%네요."
"그래?"
어차피 이 미노타우로스는 공양해봤자 별 필요 없는 레이나의 진척도만 올라가게 된다.
"잠깐. 60% 올라간다고 치면 74%. 100% 채울 수도?"
보상은 중급 마정석일 테고.
시세를 감안하면 대략 2골드 중반.
나는 미노타우로스의 토벌 보상금과 중급 마정석의 가치를 비교했다.
"⋯⋯2골드보다는 많겠지."
역시 코를 베어 가는 게 낫겠다.
100% 만들겠다고 며칠 더 사냥할 수는 없다.
우리는 시간을 들여 등산하듯 미노타우로스의 위로 올라가 뿔을 뜯어내고, 코도 깊게 베어냈다.
안타깝게도 마정석은 없었다.
거대 몬스터는 마정석이 나오는 비율이 높다고 알려져 있으니 운이 없는 셈이다.
"우선 여기까지만 하고 쉬자."
이곳이 새로운 미노타우로스의 영토로 확인된 이상 홉고블린이 쳐들어올 여지는 없었다.
우리는 프라냐 몇 마리와 함께 이전에 사용했던 좁은 은신처로 이동했다.
그렇게 프라냐 구이로 식사를 해결했다.
"레이나. 어때. 미노타우로스 잡았지?"
"네. 한 끗만 실패해도 몰살당했을 텐데. 정말 신기하네요."
"내가 원래 운이 좋아."
사실 운이 없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도달한 모든 과정이 생략되고, 레이나 앞에는 결과만 떡하니 나타낸 셈이니 녀석의 시점에서는 운이 좋다고 생각할 만하다.
이 결과가 적절한 시도 한 번으로 이뤄낸 것과 다름없으니 내가 얼마나 대단해 보이겠는가.
당연히 진실을 말해줄 수는 없다.
"평생 다시 없을 경험이었어요. 고작 3명이서 대형 몬스터를 잡아내다니."
"앞으로 더한 경험을 하게 만들어줄게."
"네!"
"너 줄 제대로 잡은 거야."
세상에 무한 회귀자의 줄을 누가 잡을 수 있겠냐.
"주인. 대단한 사람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주인 말. 잘 들으면 자다가도. 낙타가 나온다."
"네!"
레이나와 라분은 어느새 만담을 할 정도로 친해져 있었다.
나는 묵묵히 프라냐를 씹었다.
'파티에 들어오는 건 확정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지.'
이걸로 임무 완수다.
* * *
체감 시간 3일 뒤, 우리는 미궁 8층의 안전지대로 무사히 복귀할 수 있었다.
미노타우로스의 뿔 한 쌍과 인과가 가득 들어찬 반지를 가지고.
꽁꽁 싸매 놓기는 했지만 이걸 들고 오면서도 들키지 않으리라고는 기대 안 했다.
안전지대로 돌아오는 과정에도 수많은 시선과 말들이 들렸다.
"뭐야."
"설마 미노타우로스 뿔인가?"
"⋯⋯."
"⋯⋯."
"⋯⋯."
우리는 안전지대에 도착하자마자 외쳤다.
"귀환!"
[미궁 1층으로 귀환하시겠습니까?]
[현재 진척도 21.8%.]
바로 미궁 1층에서 리디엠의 상흔을 지나 칼리움으로 복귀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사무소에도 들르지 않은 채로 우선 집까지 뛰어갔다.
다행히도 우리를 추적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집 문을 열고 쾅 닫고 나서야 몸의 긴장이 풀렸다.
"후!"
막 빨랫감을 들고 있던 라파가 우리를 반겼다.
"주인님! 오라버니! 고생 많으셨어요."
"어."
"다녀왔다."
라파가 우리의 전리품을 보고 눈을 빛냈다.
"미노타우로스의 뿔? 8층에서 또 잡으신 거예요?"
"그렇게 됐어. 처리는 부탁해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둘은 쉬고 있어. 나는 복귀 신고 좀 하고 올게."
찌뿌둥한 몸을 달래며 로브를 뒤집어쓴 뒤 빠르게 미궁 사무소로 복귀했다.
역시나 근처에는 미궁 8층에서 기억해 뒀던 마나를 가진 놈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내가 1층으로 갔다는 사실을 깨닫고 따라 올라온 놈들이다.
평소라면 당당하게 얼굴을 내밀었겠지만 지금은 레이나라는 약점이 있다.
미궁 3층 실습생을 데리고 몰래 미궁 8층으로 갔다?
좋게 마무리하기는 힘들 일이다.
나는 나를 주시하는 시선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사무소 직원에게 다가가 복귀 신고를 했다.
미노타우로스의 코는 안 썩게 잘 보관했다가 나중에 돈으로 바꿔 먹을 생각이다.
"미궁 3층 복귀했습니다. 루카스, 라분, 레이나입니다."
"네. 그런데 나머지 분들은 어디에?"
"아. 먼저 술집으로 달려갔어요. 별수 없죠."
"그렇군요. 신고 완료됐습니다."
이제 막 미궁 사무소를 나가려는데, 사무원이 나를 붙잡았다.
"루카스 님. 편지가."
"편지요?"
"네."
들고 있는 편지를 보아하니 에릭이 보낸 것이 분명했다.
나는 일전에 에릭 파르밀과 나눈 대화를 기억해 냈다.
[당신의 인맥으로 저를 올바르게 가르쳐 줄 스승을 구해주십시오. 당신이 말하는 내 재능을 훼손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훌륭한 스승으로요.]
"⋯⋯."
벌써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다.
나는 편지의 보관료를 치르고 바로 편지를 뜯어보았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61
나는 미궁 사무소 밖에 앉아 에릭 파르밀이 내게 전달한 편지를 천천히 읽었다.
두 장짜리 편지의 내용은 단 두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검술 스승을 초빙했습니다. 벨프란의 달 20일에 제 저택에서 뵙겠습니다.]
나는 귀족들의 종이 낭비에 치를 떨며 편지를 접었다.
그동안 라파와 콜린의 상식 교육으로 날짜 개념이야 많이 익숙해졌다.
벨프란의 달 20일이면⋯⋯
'앞으로 3주 뒤로군.'
꽤 넉넉한 시간이 남은 셈이다.
나는 이쪽의 생각은 덮어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는 이미 라분과 레이나, 어느새 합류한 콜린까지 술판을 벌이고 있다.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라파는 음식을 나르는 중.
나는 얼른 이들 틈에 끼어 술을 원샷했다.
원래 탐험에서 돌아온 직후에는 술을 마셔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살 수가 없다.
뒤풀이에 지난 탐험의 성과 분석을 겸했다.
"마정석도 적당히 벌었고, 미노타우로스의 뿔도 얻었으니 당분간 돈 걱정은 없어."
"라분. 스테이크 또 먹고 싶다."
"그래. 내일 먹으러 가자. 형이 쏠게."
"그러고 보니 레이나. 우리 파티에 오는 건 확정이야?"
콜린이 레이나를 향해 직설적으로 질문했다.
"얌마. 너는 미궁 들어가지도 못하면서 '우리 파티'가 뭐냐?"
"어? 나도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고! 정보 수집, 문서 해독, 집 지키기!"
"어이구. 잘 한다."
레이나는 한참 웃더니 입을 열었다.
"네. 최대한 빨리 정식으로 합류할게요. 이 파티 말고 다른 파티 들어가면 재미없을 것 같아."
"좋아! 그러면 오늘 회식은 레이나 환영회도 겸하는 거네? 나는 선배님이라고 부르면 돼."
"⋯⋯저 녀석은 그냥 콜린이라고 불러. 우리 파티는 평등주의니까."
"네. 리더."
내 평등주의에 기반하여 라분과 라파의 노예 각인도 없애고는 싶지만 비용과 절차가 엄청나게 복잡해서 반쯤 포기한 상태다.
라분도, 라파도 별문제 없이 생활하고 있다니 딱히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있고.
"레이나. 졸업까지 며칠 남았지?"
"졸업 전에도 소속을 정하면 바로 활동할 수 있어요. 내일 저랑 같이 아카데미로 가시면 될 것 같아요."
"그렇군!"
나는 다음 탐험 일정을 생각했다.
탐험이 한 번 끝나면 최소 5일간은 휴식을 취해야 한다.
그래야 골병이 나지 않고 오래오래 탐험 활동을 할 수 있다.
3주 뒤에는 에릭과의 약속이 있다.
그렇다면 대략 2주가 넘는 시간이 남는다.
머릿속 계산을 끝낸 내가 잔을 들었다.
"9층 탐험. 일주일 뒤에 바로 도전한다."
한 번 좌절했던 도전,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는 선택지는 재도전밖에 없다.
"성공하자."
모두 잔을 들고 나의 잔에 부딪혔다.
* * *
다음 날. 나와 레이나, 라파까지 탐험가 아카데미에 방문했다.
미궁 실습 귀환 수속을 밟기 위해서다.
당연히 레이나가 제출하는 기록은 거짓으로 작성된 미궁 3층의 탐험 기록이다.
잠깐 기록을 읽어본 아카데미의 교수가 의아해했다.
"레이나, 네 보고서에서 등장하는 오크가 상당히 강해 보이네? 네가 오크에게 애먹을 리가 없을 텐데."
이렇게 말하는 교수의 기준은 미궁 3층, 레이나가 묘사한 오크는 미궁 8층이다.
레이나가 표정 하나도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읊어댔다.
"제가 조금 긴장했나 봐요! 막 몸이 딱딱하게 굳어서 리더가 고생했달까?"
"리더?"
"네. 리더."
"벌써 마음은 정한 것 같구나."
교수가 빙그레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눈 뒤에서 스승의 불안과 걱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내 가장 강력한 무기인 감지 능력이 4위계인 교수의 심리 상태를 알려준 덕이다.
"레이나는 저희가 반드시 잘 데리고 다닐 테니까. 걱정은 그만하셔도 됩니다."
"어머. 티가 났나요?"
"제가 눈썰미가 좋아서요."
"그래요. 본인의 결정이고, 저렇게 확신에 차 있으니 스승 된 제가 길을 막는 것도 도리가 아니겠지요."
"감사합니다."
레이나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교수님! 자주 찾아뵐게요!"
"호호. 그런 말 한 애들이 한둘인 줄 아니? 그동안 고생 많았다."
훈훈한 면담 이후 라파가 끼어들었다.
레이나 관련 절차를 마무리하기 위해서다.
"주인님. 조금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두 분이서 산책이라도 하고 오시죠."
"그래. 레이나. 학교 안내 한 번 해줘. 라파는 좀 부탁할게."
"네. 편안히 다녀오세요."
레이나가 신나게 돌아다니며 내게 아카데미 이곳저곳을 안내해 줬다.
성격답게 가는 곳마다 아는 사람들이 한두 명씩은 꼭 있었다.
"여기는 내가 들어갈 파티의 리더, 루카스 님이야."
"잘생기셨다!"
"하하하."
"검은 잘 쓰세요? 레이나. 어때?"
역시나 몬스터 죽이는 학생들답게 바로 검 쓰는 실력으로 넘어간다.
"최고. 내가 상대가 안 될 정도."
"진짜? 레이나 네가? 4위계?"
"아니, 3위계이신대도 엄청나."
이대로 가다간 목검 들고 한바탕 할 판이다.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친구들도 졸업반?"
"네! 졸업반이에요!"
총 세 명의 여학생. 슬쩍 감지를 돌려보니 셋 다 2위계다.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권유하지 못할 것도 없다.
"혹시 졸업 후 진로는 다 정했니? 우리 파티는 언제나 열려있는데."
"앗? 스카우트하시는 거예요?"
"어. 뭣하면 잠깐 체험만 해도 되니까."
세 명의 여학생이 쿡쿡 웃으며 자기들끼리 떠들었다.
결론은 간단했다.
"죄송해요. 역시 미궁 9층으로 바로 가기는 쉽지가 않아서. 이미 정해둔 길드도 있고."
"그래? 그러면 뭐 어쩔 수 없지. 어느 길드로 가?"
"저랑 얘는 하얀 십자가 길드고,얘는 붉은 송곳니 길드요!"
"오호라."
나는 붉은 송곳니 길드에 간다는 주근깨 많은 여학생을 더 꼼꼼히 살펴보았다.
딱히 모난 곳 없이 성장한 2위계 중반이다.
'내 파티에서는 짐꾼을 맡으면 되겠군.'
아무래도 붉은 송곳니 길드의 스카우터인 헨리의 솜씨가 그렇게 좋지는 않은 모양이다.
내 생각을 고민으로 보았을까?
여학생들에게서 벗어나 식당 쪽으로 걸어가는데 레이나가 말했다.
"말했죠? 재미없는 애들이라고."
"응? 그렇긴 하지."
"더군다나 하얀 십자가는 공장형 길드라고요."
"공장형 길드?"
"네. 미궁 사무소와 연계한."
보통 길드는 1군 파티를 운용해 미궁 탐험을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무소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다.
하지만 사무소와 계약해서 미궁의 적당한 층에 주력하는 길드도 있다.
이른바 공장형 길드.
단조롭게 마정석을 채취하는 공장이나 다름없다.
"하얀 십자가 길드는 지원하기만 하면 합격하는 길드란 말이죠. 자랑거리도 못 돼요. 저런 걸 좋다고 시시덕거리고 있으니."
"마음에 안 드나 봐?"
"리더의 굉장함을 모르고 있으니까 그렇죠. 빌리도, 아. 빌리 알죠? 처음에 저랑 같이 면담 신청했던 애."
"어."
레이나와 처음으로 나를 찾아오기도 했고, 상당히 숙련된 2위계였기에 기억에 남았다.
"걔도 뭐, 무서웠는지 도망가 버리고요."
"그건 각자의 선택이니까 어쩔 수 없지."
"걔도 미노타우로스 사냥 같이했으면 홀딱 반해버렸을걸요? 어때요? 슬쩍 말해보는 것도."
솔직히 마음이 동한다.
탱커가 한 명 더 있다면 단박에 파티의 안정성이 배는 올라갈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참이나 고민했지만 결국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우리 셋이 해보자."
이미 두려움에 한 번 포기한 놈이다.
시작도 전에 포기한 녀석이 중요한 순간에 내 명령을 따를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적어도 내게 책갈피 아티팩트를 던져버리는 레이나 정도의 패기는 있어야 한다.
레이나는 내 단호한 결정에 따로 토를 달지는 않았다.
식당, 실습실, 기숙사까지 도는데 내 감지에 익숙한 인물이 잡혔다.
고개를 살짝 돌려 확인해 보니 마침 나를 보고 있었는지 눈이 마주쳤다.
"루카스 님!"
"자주 만나네요. 인연은 인연인가 봅니다."
소피아였다.
정갈한 3위계의 마나가 일렁거린다.
나는 머릿속으로 소피아와의 싸움을 그렸다.
어찌어찌 해보면 승기를 잡을 수 있을 것도 같다.
"소피아 님은 여기 왜?"
"이번에 영입한 친구가 짐 정리를 한다고 해서요. 기다릴 겸 잠깐 산책 중이었어요."
"아하. 그러면 같이 걸을까요?"
소피아와 같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듣자 하니 소피아 파티의 미궁 진척도는 8층 70% 정도로, 3개월 이내에 미궁 9층으로 진입하는 것이 목표란다.
"꼭 성공하실 수 있기를 빕니다."
"고마워요!"
"오늘은 그렇고, 다음에 만나면 말도 놓죠. 보아하니 저보다 연상이신 것 같은데."
"앗. 네⋯⋯."
그 후로 소피아가 급속도로 말이 없어졌다.
내가 뭘 잘못 말했나?
"쿡."
레이나가 웃자 나는 레이나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아! 좀!"
"시끄러워."
그즈음 소피아가 기다린다던 친구가 나왔다.
"오."
내 감탄은 감지 능력의 결과였다.
레이나와 비견될만한, 완연한 3위계의 경지. 소피아가 대어를 물었다 싶었다.
"소피아 님! 늦었습니다."
"고생 많았어."
"어? 레이나?"
"로웬."
둘의 마주치는 시선이 마냥 따뜻하지는 않다.
실력도 비슷해 보이는 게, 나름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레이나. 진로를 결정한 거야? 파티로?"
"너도 파티로 결정했네."
"그럴 줄 알았어."
"⋯⋯나는 더 내려갈 거야. 한 번 따라와 봐."
"좋지. 지금은 네가 앞서있네. 두고 보자고."
그냥 라이벌이 아닌 모양이다.
레이나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이제 가요!"
나는 굳건히 서서 소피아와 로웬과 악수와 덕담을 나누고 나서야 움직였다.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나를 보는 레이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다시 교실로 돌아가는 길에 궁금해져 질문했다.
"둘이 무슨 사이야. 사귀기라도 했어?"
"말도 안 돼요. 옛날에 친구였어요. 그러다가 멀어졌지만."
"그래?"
"자기는 길드 갈 거라더니, 결국 파티로 정할 거였으면서."
중얼거리며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 레이나.
나는 피식 웃으며 막내의 호승심을 대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눈 뭐예요. 징그러워."
"⋯⋯."
교실로 돌아오니 라파와 아카데미의 교수가 차를 마시며 즐거운 얼굴로 대화하고 있었다.
"아. 주인님. 오셨습니까. 일은 다 마무리되었습니다. 교수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이 시기에 가장 한가한 직업이 아카데미 교수니까요. 그나저나 식견이 대단하시네요. 아카데미 교육을 받지도 않으셨는데 웬만한 조교들보다 나아."
내 부하를 칭찬하는 모습에 내 어깨까지 덩달아 올라갔다.
레이나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교수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래. 괜히 민폐 끼치지 말고,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라는 사실을 잊지 마."
"감사합니다!"
아카데미 정문을 나온 뒤 잠깐 아카데미를 돌아보았다.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라고?'
그 말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라는 말이 된다.
나는 피식 웃으며 탐험가 아카데미를 등졌다.
일주일 뒤, 우리는 미궁 9층으로의 도전을 시작했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62
미궁 9층의 진입.
레이나에게는 아주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레이나는 미궁 8층 진척도를 100%로 달성하고 9층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미궁 9층에서도 기존 8층과 같이 진척도 20%를 달성하지 않으면 다시는 미궁 1층으로 돌아갈 수 없다.
미궁 8층의 경우 이미 나와 라분이 길을 닦아놓았기에 비교적 안심하고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미궁 9층은?
미궁 9층은 나에게도 미지의 영역이다.
나도 나름대로 걱정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레이나 쪽에서 먼저 찾아왔다.
결심을 아주 단단히 해놓은 모양이다.
"인생은 도전이라는 그 말, 잊지 않으셨죠?"
나는 그 말에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미궁 9층에 진입했다.
[미궁 9층으로 진입합니다.]
[현재 진척도 0%.]
[주의! 파티에 미궁 9층의 입장 자격이 없는 파티원이 있습니다.]
[해당 파티원은 다른 층으로 이동할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자격 부여 조건 : 진척도 20% 달성.]
나는 내 시야를 가리는 미궁의 신비를 바로 치워냈다.
"사무소로 가자."
"네."
"알겠다."
레이나는 기존과는 다르게 넓어진 미궁 9층의 공간이 신기한지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막 미궁 9층에 진입한 초짜라는 티를 팍팍 냈지만 뭐 어떠랴.
어차피 최대한 빠르게 9층을 졸업하고 10층을 도전할 텐데.
이번 탐험 기간은 최대 10일로 잡고 있다.
첫 탐험치고는, 거기다가 세 명이 진행하는 탐험치고는 꽤 긴 탐험이다.
'진척도 20%를 채우는 탐험이라고 하면 짧지.'
미궁 사무소에 들어서니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무소의 직원.
이름이 네이슨이라고 했었나?
4위계의 전사가 나를 보더니 반갑다는 표정을 짓는다.
"살아있었네? 지금까지 얼굴도 안 비추고."
"동료를 구해오느라."
내가 턱짓하자 레이나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사무소 직원에게 밉보일 필요는 없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탐험가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고용된 사람이었으니.
"레이나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허허. 앳된 거 보소. 응?"
레이나른 위아래로 훑어보던 네이슨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설마 이번 아카데미 졸업생?"
"맞아요. 어떻게 아셨죠?"
"뻣뻣한 자세에, 어색한 걸음걸이. 흔들리는 눈빛만 보면 다 알아. 뭐야. 그러면 9층 입장 조건도 못 갖춘 거야?"
"그렇습니다만."
네이슨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겉보기에는 분노에 차 있다. 겉보기에는.
"야. 너 미쳤어? 이 판에 쌩신입을 끌어들여?"
"⋯⋯."
"미노타우로스 잡았다고 주변에서 떠받들어주니까 뭐라도 되는 줄 알지?"
순식간에 냉랭해지는 사무소의 분위기.
우리는 신경도 안 쓰고 술이나 마시던 사람들의 시선도 우리에게 집중되기 시작한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조용히 네이슨을 바라볼 뿐이다.
"둘이 안 된다고 저런 신참 데리고 와서 다시 탐험하겠다고? 너 미궁이 아주 쉬워 보이지? 얄팍한 재능 믿고 죽어 나간 놈들 이름이라도 읊어줘?"
"그런 병신들하고 비교하시면 안 되죠."
"뭐?"
"지 주제도 모르고 깝치다가 죽은 놈들이랑 비교하시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너는 뭐가 다른데?"
나도 말하면서 찔린다.
내 무한 회귀가 없었다면 나는 진작에 미궁에서 깝치다가 죽은 수많은 시체 중 하나가 되었을 테니.
하지만 이건 기싸움이다. 밀리면 진다.
지면 레이나와의 신뢰는 물론, 미궁에서의 내 평판도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지금 네이슨은 나를 시험하고 있다.
아직도 미동조차 없이 잔잔한 그의 마나가 그 사실을 대변한다.
"탐험가가 보여줄 수 있는 건 한 가지밖에 없죠."
나는 천천히 사무소의 벽에 다가가 적당한 종이를 뜯었다.
[샌드웜의 어금니 두 쌍.]
라파가 조사하기로 샌드웜은 미궁 9층에서 이틀 떨어진 거리에 있다고 한다.
이 정도면 충분히 완수할 수 있겠다.
"임무 접수. 부탁드립니다."
동화 10개를 덜그럭 내려놓고 네이슨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이가 없는 웃음을 짓고 있다.
"패기는 알겠는데, 정말 증명할 수 있다고?"
"뭐, 손해 보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아저씨 정도가 아니면 제 상대도 없는데. 그냥 믿으십쇼."
눈을 좁히는 네이슨.
곧 그의 마나가 가시처럼 내 몸을 찌르고 들어왔다.
나는 내 마나로 부드럽게 공격을 걷어내고, 사방으로 마나를 뻗어 내 주변 공간을 점했다.
4위계의 전사가 약간 놀란 표정을 짓는다.
"역시, 숨겨놓은 수가 있었군."
네이슨이 동전을 집으려는 찰나, 의자가 거칠게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 꼬맹이. 아까 전 그 말은 그냥 듣고 넘어가기 힘들겠는데?"
나는 검집에 왼손을 올린 채로 고개만 돌러 뒤를 보았다.
웬 덩치가 손목을 뚜두둑 꺾으며 일어나고 있었다.
"여기 네 적수가 없다고? 내가 안 보이나?"
"보일리가."
"뭐야?"
"그만."
네이슨의 한 마디에 일동이 조용해진다.
그만큼 4위계의 존재감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사방으로 흐느적거리며 흘러나오는 네이슨의 마나에 피부가 저릿저릿해질 정도다.
"나도 싸움 구경은 좋아하는데. 오늘은 그만 보내주지. 루카스. 너도 기 죽이고."
"⋯⋯."
나는 덩치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고, 덩치도 콧방귀를 뀌며 센 척을 했지만 결국 자리에 앉았다.
네이슨이 접수가 완료된 의뢰서를 내게 내밀었다.
"한 번 보겠어. 어디 네 실력을 증명해 봐."
"싫습니다."
"뭐?"
"제가 증명해 봐야 뭐 떨어지는 것도 없고. 그냥 지켜나 보시죠."
네이슨이 괴상한 표정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이런 놈은 처음 본다는 표정이다.
네이슨이 뭐라 입을 열려는 찰나, 내가 선수를 쳤다.
"그러면 저랑 내기라도 하실래요?"
"내기?"
"만약 제가 실패한다면 당신이 내리는 어떤 처분이라도 받겠습니다. 레이나를 내놓으라면 내놓고, 미궁 9층 도전도 당신이 원하는 조건에서 진행하죠. 대신 성공하면."
"성공하면?"
"은화 10개 주십쇼."
"뭐?"
네이슨의 눈이 의문으로 물들다가 이내 번쩍하고 뜨였다.
내 발언에 사무소 곳곳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내게 시비를 걸던 덩치도 환호에 동참하고 있었다.
잠깐 주변을 둘러본 네이슨이 헛웃음을 짓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뭔가 함정에 걸려든 것 같은데?"
"함정이라뇨."
"무조건 내가 이기는 도박인데, 왠지 이길 것 같지 않은 이 느낌은 뭐지?"
"그러면 그런 걸로 알겠습니다."
나는 손을 들어 의뢰서를 펄럭이며 사무소를 나왔다.
처음에 어쩔 줄 몰라 하던 레이나도 이내 굳은 결심을 마친 얼굴이 되어 네이슨을 향해 배꼽인사를 한 뒤 나를 따랐다.
라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평온한 마나를 유지하고 있었고.
레이나가 얼른 내게 따라붙었다.
"가능하겠어요?"
"10실버? 주지 않을까? 그래도 체면이 있지."
"그게 아니잖아요! 샌드웜! 샌드웜 말이에요!"
"크크. 레이나."
"네?"
"네가 나와 함께 다니면서, 잊어야 할 단 한 가지 단어가 있어. 뭔지 알아?"
"⋯⋯."
"라분?"
"실패다."
나는 씩 웃으며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절대 실패하지 않아."
* * *
우리는 바로 미궁 9층의 안전지대를 벗어나 왼쪽 길로 진입했다.
샌드웜 사냥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왼쪽 길 : 주로 고블린, 오크, 홉고블린, 미노타우로스, 샌드웜 출현.]
라파가 탐험가들에게서 조사한 정보에 의하면, 미궁 9층의 왼쪽 길에서 벽을 따라 걷다 보면 모래 지형이 나타난다고 한다.
샌드웜을 전문적으로 사냥하는 탐험가들이 아니라면 피하는 장소라고 한다.
"천천히 가자고."
저번에는 너무 정보를 모르고 갔다.
아무리 내가 무한 회귀가 가능하다고 해도 내 목숨값이 싼 건 아니다.
시간이 있다면 미리 정보를 얻고, 충분히 조사를 하고 움직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거기다가 지금 나는 나를 위해 바깥에서 활동하고 있는 라파와 콜린도 데리고 있지 않은가.
이번에는 둘이 물어다 준 정보로 완벽하게 무장하고 있었다.
"저번에는 바위산을 오르지 않고 돌아갔다가 혼쭐이 났지만. 사실 바위산을 오르는 것이 맞는 거였어."
고블린들은 바위산 아래에 호각을 든 미끼를 던져놓는다.
바로 나와 라분이 처음에 죽였던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늙은 고블린들이다.
그 녀석들이 미끼가 돼서 호각으로 신호하면 주변의 모든 고블린이 튀어나와 돌팔매질하는 방식으로 사냥한다.
이놈들을 해결하는 법은 간단하다.
미궁 9층의 고블린이라고 해봐야 고블린은 고블린이다.
수직적 우위를 없애기만 한다면 고블린의 돌멩이도 무서워할 것이 못 된다.
"이야기했던 대로 움직이자."
우리는 최대한 조용히 바위산을 올랐다.
고블린과 탐험가들이 만들어놓았을 수많은 길 중 하나를 골랐다.
곳곳에 뾰족하게 솟아오른 바위들이 시야를 가려주었고, 내 감지가 고블린들의 움직임을 수시로 감시하고 있었기에 몬스터의 시선을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바위산 중턱에 도달했을 때, 내가 정지신호를 보냈다.
동료들이 잠깐 숨을 고르는 사이 내 손가락이 커다란 바위를 지목했다.
"저 바위를 돌면 고블린 6마리가 있을 거야. 신속하게 처리하자."
"네. 리더."
우리는 은밀하게 접근하고, 바위를 돌자마자 고블린들을 덮쳤다.
음지에 자란 이름 모를 이끼를 퍼먹던 고블린들이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하지만 첫 전투이기에 검염까지 뽑아 든 우리들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케에엑!"
고블린들이 내는 소리는 길지 못했다.
아쉽게도 마정석은 없었다.
우리는 고블린들의 시체를 툭툭 치운 뒤 공양했다.
[시체를 공양합니다.]
[고블린 여섯 마리. 확인.]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진척도. 0.1%]
첫 시작이 나쁘지 않다.
"좋아. 계속 가자."
애초에 안전지대에 가까운 지역이다.
고블린의 밀도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세 번째 사냥 중.
-삐이이이익!
열 마리의 고블린 중에서 잠깐 놓친 한 마리가 호각을 불고 말았다.
그러면 어떻게 하냐고?
"뛰어!"
빠르게 공양을 마치고 달려 적당한 바위틈에 숨었다.
고블린들 수십 마리가 발작하며 달려들었지만 바위틈에 숨어버린 우리를 찾아낼 수는 없었다.
감지도 못하는 놈들 따돌리기야 쉽다.
공양이 진행되는 동료의 시체를 파먹는 고블린들.
이빨로 인해 끊어진 살점들이 미궁의 신비에 의해 자꾸 본인의 신체로 돌아가려
하지만, 입에만 삼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멈추기에 먹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내게 상황을 전해 들은 레이나가 혀를 내둘렀다.
"으에엑. 마치 살아서 꿈틀대는 생고기를 먹는다는 거잖아요. 진짜 미쳤어."
나는 검자루를 매만졌다.
"스무 마리. 습격해도 되겠는데?"
"⋯해볼까요?"
"천천히 가보자."
"앞장서겠다. 신호 대신 등을 쳐라. 바로 돌격하겠다."
라분이 천천히 앞서가고, 나와 레이나가 순서대로 뒤를 따랐다.
광란의 파티를 마친 고블린이 배를 떵떵거리고 있을 때, 그대로 습격했다.
"크에엑?"
습격은 대성공.
순식간에 스무 마리를 잡고 공양까지 한 뒤 다시 바위틈으로 숨었다.
"이거 생각보다 재미있는데?"
"두 번 하면 위험할 거예요."
"당연히 알지. 더해서 이렇게 사냥하면 마정석 뽑을 시간도 없어서 손해야. 천천히 벗어나자."
4시간이 지나자 바위산 하나를 겨우 넘을 수 있었다.
미끼로 심어놓은 고블린들의 이목을 피해 미궁 벽을 따라 최대한 멀리 걸은 뒤, 적당한 벽의 틈을 잡아 휴식을 취했다.
"이렇게 가면 문제 없겠어."
"고블린 쉽다. 저번과 다르다."
"아무것도 모르고 도전한 저번이 무식했던 거야. 그건 사과할게."
오늘 쌓은 미궁 9층의 진척도는 2% 남짓. 10일을 계획한 탐험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다.
"이대로 하자고."
그렇게 이틀 동안 고블린을 사냥하고 바위산 두 개를 더 넘었다.
마침내 바위산 아래로 내려오는 길에 보이기 시작하는, 바위 없이 둥그스름하기만 한 언덕.
"⋯도착이다."
"모래!"
보이는 시야 전체가 모래로 둘러싸여 있다.
미지의 몬스터 샌드웜이 살고 있다는 모래 지형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63
바위산을 내려갈수록 점차 모래가 많아지더니, 어느새 모래가 주변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어쩌다가 이런 지형이 만들어진 것인지.
역시 미궁의 신비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을 초월해 있었다.
나는 바닥으로 손을 가져가 모래를 건져 올렸다.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가는 모래알이 부드럽다.
"라분. 어때? 사막 같아?"
"전혀."
"응?"
"덥지 않다. 춥지 않다. 선인장 없다. 낙타 없다."
"아. 선인장? 그 가시 달린 몽둥이?"
"몽둥이 아니다."
"저도 들었어요! 식물이래요 그게."
"엑? 나무 같은 거라고? 말도 안 돼."
모래로 이루어진 바닥이라고 해도 생각보다 단단해 발이 푹푹 빠지지는 않았다.
나는 라파의 충고를 머리에 담아두고 있었다.
[모래 지형에서는 더더욱 미궁 벽을 시야에 넣어두세요. 단조로운 지형은 길을 잃기 쉬우니까요.]
어차피 숙박은 미궁 틈에서 해야 한다.
샌드웜의 습격에 전전긍긍하며 잠을 잘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미궁 벽에 너무 붙어 다니면 샌드웜이 출몰하지 않는단다.
활동 범위의 미묘한 줄타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나는 대충 그린 지도를 마무리하고 잠시 시간을 가져 책갈피 아티팩트에 각인시켰다.
"우선 미궁 벽을 따라서 쭉 전진하자."
"네!"
"라분. 간다."
모래 언덕 하나를 오를 때마다 지도에 약간의 굴곡을 그렸다.
그렇게 수 시간의 행군이 지나자 지도에 그려진 굴곡은 20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숙식을 하기에 적당한 틈을 찾았다.
적당히 깊고, 몬스터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틈이다.
더군다나 다른 탐험가들도 자주 사용하는지 불을 피운 흔적들도 곳곳에 있다.
최근에 머무른 흔적은 없는 것 같으니 우리의 숙식처로는 제격이다.
"오늘은 이 틈을 기점으로 올라가 보자고."
진로를 그대로 수직으로 꺾어 본격적인 모래 지형 탐험을 시작했다.
가장 가까운 모래 언덕에 올라가 보니 현재 보이는 시야에 보이는 건 모래밖에 없다.
라분이 미노타우로스를 사냥하기 위해 만든 붉은 천을 잘라 만든 깃발을 모래 언덕에 꽂았다.
미리 이야기된 행동으로, 사막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고안한 수단이다.
[모래 언덕을 포인트로 움직여야 해요. 모래 언덕마다 깃발을 세우면 방향감각을 유지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기다란 나무 막대기를 꺼내 꽂아 넣은 깃발과 수직이 되도록 미궁 벽 방향으로 놓았다.
몸을 옮겨 나무 막대기의 뒤로 돌아가 막대기가 향하는 방향에 가장 가까운 모래 언덕을 찾았다.
"저기. 저 언덕으로 간다."
혹시라도 방향이 틀어지지 않게 일행들에게 다음 목표를 숙지시키는 것은 물론이다.
그렇게 총 다섯 개의 모래 언덕을 건넜을 때, 미궁 벽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꽤 멀리 왔다는 증거다.
우리는 모래 언덕 위에서 간단히 휴식을 취했다.
"라분. 사막에는 뭐가 살아?"
"음. 꼬리가 길고 사지가 있는 뱀. 꼬리에 침을 가진 바퀴벌레. 쥐."
"도마뱀이랑 전갈이에요!"
"도마뱀⋯ 전갈⋯ 알았다."
모래 언덕이라고 하지만 풀도 조금씩 있었다.
물이 근처에 있기는 한 모양.
"저 지형. 조심해야 한다."
"응?"
라분이 모래 언덕 아래를 가리켰다.
확실히 다른 곳과 달리 색깔이 조금 진한 땅이 있었다.
"라분. 왜요?"
"물이 지나간 흔적이다. 아무래도, 지하수나, 미궁 벽에서. 물이 흐르는 때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왜?"
"물이 한 번에. 많이 흐르면. 휩쓸린다."
"오호라."
라분의 설명을 종합하면 사막에는 한 번에 비가 많이 내리는 시기가 있는데, 그럴 때 저런 곳에 있으면 딱 죽기 좋다고 한다.
지형을 보아하니 저 땅이 물길이라고.
"사막. 듣기만 해도 신기하네요."
"시간 되면. 가자. 안내하겠다."
"그것도 재밌겠네."
이제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려는데. 내 감지 능력에 미묘한 진동이 감지되었다.
"응?"
아주 약간의 떨림. 우리 바로 옆에 있는 모래언덕이다.
"라분. 저기. 느껴져?"
"음?"
"뭐가요?"
아무래도 감지 능력이 발달한 나만 느낄 수 있나 보다.
"저쪽 모래 언덕에서 미묘한 진동이 느껴져. 아무래도 샌드웜일 가능성이 있겠는데?"
내가 검을 들고 일어나자 라분과 레이나도 따라 일어난다.
"라분? 시선 좀 끌어봐."
"알겠다."
라분이 벗어놓은 배낭을 힘껏 땅바닥에 내리쳤다.
-쿵! 쿵! 쿵!
모래 언덕을 울리는 진동과 함께 옆 모래 언덕의 진동이 멈췄다.
"반응 온다. 긴장하고. 내 손짓 따라 움직여."
내가 손을 휘저을 때마다 라분이 배낭을 바닥에 내리쳤다.
진동은 멈췄다 울렸다를 반복하더니 이내 우리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물었다. 천천히 내려가자."
모래 언덕 꼭대기는 싸움에 적합한 장소는 아니었다.
우리는 신발에 모래가 들어올 정도로 급하게 움직여 평지로 이동했다.
다시 한번 라분이 배낭을 내려치자 진동의 방향이 확실하게 우리 쪽으로 이동했다.
"이제 됐어! 대형 잡고 전투 준비!"
샌드웜의 습격은 언제나 땅속에서 수직으로 솟아오르는 것으로 시작된다.
가장 처음이 제일 위험하다.
이곳에서만큼은 탱커와 딜러의 구분이 크게 의미가 없다.
나는 일부러 잰걸음으로 이동하며 샌드웜의 시선을 끌었다.
"좋아! 내 쪽으로 온다!"
마침내 진동이 내 바로 아래로 왔다.
나는 손가락으로 내 아래를 가리켰다.
"여기에 있어. 곧 올라올 것 같아. 다들, 진동을 언제부터 느낄 수 있는지 확인해."
"네!"
"알겠다!"
"지금 대략 5m 깊이야."
레이나도 라분도 이 거리에서조차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할 정도다.
왜 탐험가들이 모래 지형 탐험을 기피하는지 알 수 있을 만큼 은밀한 기동이다.
마침내 자세를 잡은 진동이 엄청난 기세로 솟구쳤다.
"!"
생각보다 훨씬 빠른 속도에 제대로 된 신호를 던지지도 못하고 몸을 던졌다.
모래를 부수듯이 뚫고 튀어나온 샌드웜이 이빨을 딱하고 닫는 소리가 소름 돋을 정도로 크게 들렸다.
급하게 자세를 잡아 샌드웜의 모습을 확인했다.
샌드웜은 이름답게 몬스터보다는 벌레에 더 어울리는 외관을 가지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구더기 같은 생김새. 신전 기둥만 한 몸뚱아리는 마디로 나뉘어 있으며, 겉보기에는 매끈했다.
"하아아압!"
"우어어어!"
레이나와 라분이 샌드웜에게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키야아아아아!"
초록색 체액이 팍 튀었지만 샌드웜의 거체에 비하면 큰 상처는 아니었다.
"빨라! 조심해!"
샌드웜의 몸이 완전히 빠져나오기까지 몇 번의 칼질을 더 할 수 있었다.
그때였다. 계속 칼질을 하던 라분에게 샌드웜의 꼬리가 기습적으로 휘둘러졌다.
"윽!"
라분이 방패를 들었지만 그대로 직격당해 뒤로 날아갔다.
"라분!"
나는 얼른 뒤로 물러나 라분에게 달려갔다.
중간에 라분이 놓친 방패를 낚아챘다.
"괜찮아?"
"괜찮다. 일부러 날아갔다. 방패도 일부러 놓쳤다."
"몸은."
"문제없다."
한숨 돌렸다. 만약 라분이 다치거나 죽었으면 그대로 내 머리를 터뜨릴 뻔했다.
"피하는 게 낫겠다. 막기 힘들다."
"그래. 항상 주의하라고."
라분을 돌보는 틈에 레이나가 몇 번 칼질을 추가적으로 했지만, 샌드웜이 결국 모래를 파고들어 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레이나가 얼른 검을 털고 우리에게 달려왔다.
"라분 씨! 괜찮아요?"
"아무렇지 않다."
"리더. 샌드웜이 들어갔어요."
"아직 아래에 있어. 다시 전투배치로 들어가자."
나는 지속적으로 샌드웜의 위치를 브리핑하며 삼각형의 포메이션을 완성했다.
서로 떨어진 거리는 이전보다 비교적 좁아져 있었는데, 이는 샌드웜의 크기를 고려한 조치였다.
역시 샌드웜은 몬스터 답게 기습이 실패했음에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또다시 쿵쿵거리며 샌드웜을 유인했지만, 샌드웜이 노리는 목표는 아무래도 레이나인 것 같았다.
"레이나. 언제 샌드웜을 느꼈어?"
"리더를 습격하기 1초쯤 전이에요."
고작 1초.
숙련된 3위계 전사여도 대응하기 힘든 시간이다.
"1초는 곤란해. 내가 신호할 테니까 바로 뛰어. 방향은 상관없으니까."
"네!"
샌드웜은 곧잘 습격해 오지 않고 가만히 레이나의 아래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아직 있어."
이놈. 먹잇감의 힘을 빼놓는 방법을 알고 있다.
보통의 탐험가였다면 언제 샌드웜이 공격할지 몰랐기에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다가 허점을 노출했겠지.
하지만 내가 있는 우리 파티는 다르다.
"바로 습격하지 않네. 가만히 있어."
우리는 대형을 유지한 채로 고민에 빠졌다.
10분이 지나도 아래에 웅크리고만 있을 뿐 습격이 없자 아무리 나라도 점점 초조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리더. 그러면 긴박한 상황을 연출하는 건 어때요?"
"그거다!"
우리는 우선 대형을 유지하면서 천천히 이동했다.
샌드웜이 내는 진동이 우리를 따라오는 것을 보니 역시 우리에 대한 사냥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잠깐 뛰자!"
1분간 뛰자 샌드웜도 급하게 쫓아오기 시작했다.
모래를 뚫고 움직이는 속도는 우리보다 약간 느렸다.
그렇다고 달리기로 습격을 따돌리기는 불가능할 정도다.
'한번 표적이 되면 귀찮다는 것은 확실하군.'
두 번째 습격은 세 번의 달리기가 끝나고 나서야 진행되었다.
"피해!"
내 신호를 받은 레이나가 그대로 몸을 튕겼다.
처음 샌드웜의 습격 속도를 감안하지 못한 나와 달리 레이나는 완벽한 타이밍을 잡았고, 몸을 돌리면서 피했기에 바로 반격할 수도 있었다.
"이번에 죽여야 해!"
나와 라분이 달려들어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새겨지는 십 수개의 자상.
마지막 꼬리가 이번에는 나를 노렸지만, 나는 여유롭게 피하며 오히려 꼬리를 조금 잘라내었다.
"땅속에 들어가게 하지 마!"
내가 선두로 달려들어 모래 속에 머리를 박으려는 샌드워의 얼굴 쪽을 자비 없이 찔렀다.
"키야아악!"
샌드웜이 검을 털어내기 위해 얼굴을 거칠게 휘두르는 순간, 레이나의 검이 바로 옆을 찔렀다.
라분도 동참했다.
"밀어붙여!"
과연 거대 몬스터의 힘은 엄청났다.
찔러놓은 검을 이리저리 꺾었음에도 쉽게 죽지 않았다.
"머리 쪽으로!"
꼬리가 우리를 노리고 지속적으로 휘둘러졌지만 이미 주의하고 있었기에 피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최후의 순간, 샌드웜이 검을 머리에 단 채로 모래 속에 머리를 박았다.
그 무리한 움직임에 우리 셋은 박아놨던 검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셋은 약속이라도 한 듯 단검을 들고 이번에는 샌드웜의 목부분을 찔렀다.
팍 하고 튀는 초록색 체액이 우리들의 온몸을 적셨다.
'공양해야겠군.'
샌드웜이 결국 움직임을 멈추고 몸통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멈췄다.
-쿵!
수직으로 꼿꼿이 세워졌던 몸이 그대로 축 늘어졌다.
"헉헉!"
"헉헉!"
"⋯성공, 한 건가요?"
[인과를 축적하십시오. 다음 보상까지 723/1,000.]
"죽었어. 확실해."
여전히 경련이 멈추지 않지만 인과가 올랐으니 죽은 것은 확실하다.
"성공이다!"
힘이 없어 조용한 두 사람분의 환호가 뒤를 이었다.
미궁 9층. 새로운 몬스터 샌드웜의 첫 사냥을 한 번도 죽지 않고 멋지게 성공한 것이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64
샌드웜은 미노타우로스와 같은 시그니쳐 몬스터다.
샌드웜의 시그니쳐 부위는 바로 송곳니.
채취만 한다면 공양해도 사라지지 않는 특수한 부위다.
진척도를 모아야 하는 내가 이번 의뢰로 샌드웜의 송곳니를 고른 이유이기도 했다.
샌드웜의 시체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본 레이나가 울상을 지었다.
"리더! 머리가 아예 땅에 박혀버려서 몸이 안 움직여요! 거기다가 체액으로 미끌미끌해서⋯⋯."
"안 되겠다. 모래를 파야겠어."
모래에 익숙한 라분의 주도로 모래를 파 공간을 마련했다.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 검을 뽑아내고, 송곳니까지 뜯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세 시간이 넘게 걸린 대작업이었다. 거의 맨손으로 작업했다.
"허⋯ 개고생했네."
"고생하셨어요."
"다음에는. 머리 내놓고. 잡자."
라분도 나도 레이나도 초록색 체액 범벅이었다.
잠시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된 서로를 보고 한참 웃어준 뒤에 공양을 실시했다.
"공양."
[시체를 공양합니다.]
[샌드웜 한 마리. 확인.]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진척도. 7.3%]
대략 5% 정도 진척도가 올랐다.
"3마리만 더 잡으면 목표 달성인가."
이렇게 사냥하면 크게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우리는 지친 몸을 이끌고 꾸역꾸역 걸어 미리 봐두었던 미궁의 틈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정지. 선객이 있네."
우리는 모래 언덕 위에서 처음에 숙소로 잡은 미궁 벽의 틈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서 불을 피우는 연기가 솔솔 올라오고 있었다.
"하암. 어떡하죠? 피곤한데."
"자리를 맡아둔 게 아니니까. 어쩔 수 없지."
나는 언덕 위에 꽂아둔 붉은 깃발을 뽑았다.
"조금만 더 고생하자. 다른 틈을 찾자고."
"으으."
"엄살. 사절이다."
"언제 엄살 부렸다고요!"
조용히 몸을 돌리려는데, 깃발을 뽑은 우리를 발견했는지 미궁의 틈에서 사람이 나와 흰색 천을 휙휙 휘두르기 시작했다.
"리더. 보여요? 흰색 깃발."
"어."
"저건 우호의 의사를 표현하는 거예요. 이런 경우에는 보통 하룻밤 같이 보내자는 신호죠."
"그래?"
"괜히 탐험가 아카데미 졸업생이 아니라고요."
나는 레이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아래를 바라보았다.
뭐, 상관없나.
최악의 경우라도 문제없을 테니까.
"그러면 신세 좀 져 볼까?"
지친 몸을 이끌고 새로운 길을 개척할 생각에 질려있던 두 사람의 얼굴에 화색이 피었다.
우리는 모래 언덕을 천천히 내려가 모닥불에 접근했다.
총 7명의 기척이 감지되었다.
나는 검을 적당한 위치로 조절한 뒤에 우리를 맞이한 여성을 바라보았다.
"안녕하십니까."
"그래요."
적대적인 의사가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악수하는 손에서 무수한 굳은살이 느껴진다.
'3위계. 상당히 숙련되어 있군.'
무의식적으로 상대의 경지를 판단하고, 나와의 전투를 상정한다.
감지 능력이 발달하면서 생긴 부작용이다.
내 감지 능력이 알려오는 결과는 간결했다.
'상당히 강하지만, 내 상대는 아니야.'
물론 특성과 기술의 변수는 이런 감지로 탐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언제나 확신은 금물이다.
"세 분이 전부이신가요? 혹시 무슨 일이 있었다거나⋯"
"아뇨. 세 명이 탐험 시작 인원입니다."
"어머나. 패기가 대단하시네요."
"별말씀을. 그러면 오늘 하루만 불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일행들도 상당히 지쳐있어서."
"물론이죠."
"루카스입니다."
"피넬이라고 불러주세요."
우리는 모닥불에 합류해서 7명의 파티원들과도 통성명했다.
피넬의 파티는 샌드웜을 전문으로 잡는 파티라고 한다.
미궁 10층에 도전하기 위한 진척도를 모으는 와중이라고.
다들 상당히 어린 축에 속하는 우리에게 관심을 가졌다.
라분과 레이나는 보글보글 끓고 있는 스튜에 모든 관심이 쏠려있었기에 모든 답변은 내가 담당했다.
잠깐 이야기를 나눈 피넬이 감탄했다.
"아! 이야기는 들었어요. 미궁 8층에서 미노타우로스를 잡은 파티가?"
"네. 저희입니다."
"두 분이라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최근 있었던 일까지는 모르는 모양이다.
내가 적당히 양념을 섞어 네이슨과의 내기를 말하자 모두 환호했다.
"패기가 있어."
"대단하네!"
나보다 외견상으로 10살은 많아 보이는 사람들이 감탄하는 모습이 영 어색하다.
"말 그대로 루키네 루키!"
"이거, 술 한잔 사주고 들을 말인데. 줄 수 있는 건 대충 만든 스튜밖에 없구만."
"하하. 감사합니다."
어느새 레이나와 라분은 그릇과 수저까지 받아놨다.
레이나가 내게 슬쩍 그릇을 건넸다.
침투력이 대단하다.
"불침번은, 셋이 함께 마지막 1시간만 서 줘."
명백히 우리를 배려한 배치다.
선배 탐험가들이 후배 탐험가들을 배려하겠다는데 거절하면 예의가 아니라 배웠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동선이 겹치면 서로 불편한 점이 있었기에 피넬과 최소한의 정보 교류를 했다.
피넬은 이곳보다 더 깊은 곳에 제대로 된 숙소를 차리고 사냥을 시작한다고 한다.
"저희는 여기서 사냥할 생각입니다. 더 깊은 곳으로 가기에는 무리가 있으니까."
"그러는 게 좋겠어요. 제가 권해드리고 싶은 말이었는데."
사실 라파의 의견이었지만 뭐 어떠랴.
더불어 알게 된 사실.
피넬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노련한 탱커가 준 정보였다.
"네? 저희가 잡은 샌드웜이 성체가 아니었다고요?"
"그래. 거의 성체 수준이지만, 여기 자네가 잡은 송곳니를 보면, 선이 보이지? 이 선이 사라져야 성체야. 아성체 정도라고 할 수 있겠어. 그 정도도 대단한 거야."
덩치가 오늘 잡았던 것보다 더 크다면 과연 셋이 제대로 잡을 수 있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새끼도 인정해 주겠지?'
10실버를 꽁으로 벌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피넬은 같은 여자가 신경 쓰였는지 레이나를 붙잡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쁘지 않은 광경이다.
탐험가들이 가장 몰리는 4~6층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클라이머들 또한 몰려있는 해당 층의 특성상, 기본적인 경계가 훨씬 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틈의 가장 안쪽을 배정받고, 꽤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
다음 날, 불을 정리하고 피넬의 파티와 헤어졌다.
"그러면, 안전한 사냥 되시기를."
"감사합니다."
멀어져가는 피넬의 파티를 보며 레이나가 말했다.
"좋은 사람들이네요."
"그러게. 우리도 나중에 똑같이 갚아주면 되지. 내려가다 보면 기회는 있을 테니까."
물론 레이나를 배려한 당부의 말도 잊지는 않았다.
"이런 경험이 일반적이라는 생각은 하지 마. 특히 저층에서는 절대 하면 안 되는 행동 중에 하나야."
상대를 믿고 잤는데 클라이머 소굴로 끌려갈 수도 있고, 아예 목이 달아날 수도 있다.
이번에도 웬만큼 대범한 내가 아니었다면 그냥 무시하고 갈 길 갔을 것이다.
"자. 다시 가보자."
처음 샌드웜을 잡았던 곳에서 감지 능력을 활용했지만 이렇다 할 기척은 잡히지 않았다.
"아직 영역 외곽인가? 천천히 안쪽으로 움직여보자."
라분이 조심하라고 한 강바닥을 건너, 가장 높은 언덕을 올라가 보았다.
주변에 보이는 것들은 전부 모래언덕이다.
바람조차 불지 않는 미궁의 풍경에 스산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어? 오크가 있네?"
고지대에서 아래를 보다 보니 꽤 멀리 볼 수 있었다.
나는 얼른 레이나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정말 오크가 있었다.
그것도 20마리는 되어 보이는 대규모 병력이다.
이런 개활지에서 마주치면 전투보다 도망을 먼저 생각해야 할 정도.
내 감지 능력 밖에 있어 그 이상의 상세를 알 수는 없었다.
"뭐지?"
우리는 깃발을 다시 뽑고 몸을 숙여 우리가 발견될 가능성을 미리 차단했다.
오크들은 적당히 평평한 지형에 멈춰 선 뒤 들고 있던 창으로 땅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설마. 샌드웜 사냥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 샌드웜 한 마리가 모래를 뚫고 솟구쳤다.
샌드웜의 입에는 운이 없었던 오크의 상체가 물려있었다.
"캭캭!"
오크들이 일제히 투창하며 샌드웜의 몸통을 노렸다.
초록색 체액이 팍 튀었지만 샌드웜이 다시 땅속으로 들어가는 데에 성공했다.
"⋯⋯접근해 볼까."
"네? 괜찮겠어요?"
"어차피 인생 도전이야."
우리는 오크의 시야 밖에서 빠르게 움직여 모래언덕을 타고 이동했다.
오크들이 내 감지 범위 안에 들어왔다.
"17마리. 챔피언이 셋. 주술사도 있네. 한 마리. 땅 아래에 샌드웜 두 마리."
17마리 정도라면 어떻게 일을 꾸며봐도 될 것 같다.
"하자."
"리더가 말씀하신다면."
"라분. 준비됐다."
"작전명은 '오크 먹고 샌드웜 먹고'야."
우리는 오크들과 상당히 가까운 곳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레이나와 라분에게 챔피언들과 주술사의 위치를 빠르게 알려주었다.
"내가 먼저 난입해서 한 번 휘저을 테니까. 레이나, 라분은 같이 챔피언 한 마리를 급습해. 무조건 죽인다는 마음으로."
"네."
"레이나. 라분이. 앞장서겠다."
샌드웜 한 마리가 쓰러질 때쯤, 내가 미리 감지한 새로운 샌드웜이 나타나 다시 오크를 잡아먹었다.
오크들이 당황해하면서도 발 빠르게 움직였지만, 멀쩡한 샌드웜은 그대로 다시 한 마리를 또 입에 넣은 뒤 땅속으로 들어갔다.
사냥의 마무리에 난입한 또 다른 샌드웜에 무리 전체의 마나가 불안감에 요동쳤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먼저 간다!"
학즉사법의 마나를 최대한으로 운용하며, 두 번째 샌드웜이 사라지자마자 그대로 돌격했다.
"!"
오크 주술사가 가장 먼저 나를 발견하고 지팡이를 내게 내밀었다.
하지만 내 검이 약간 더 빨랐다.
검염이 어린 검이 주술사의 목을 치고 지나갔다.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키야아악!"
주변 오크들이 경악하며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이미 다음 스텝을 밟고 있었다.
챔피언을 철저히 피하며, 주변의 일반 오크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적이 8마리가 되었을 때, 샌드웜이 재차 솟구쳐 오크 한 마리를 물었다.
'7마리.'
오크 챔피언 셋은 아직 건재했다.
라분과 레이나가 기습하기 전까지는.
"우어어어!"
가장 바깥에 있던 챔피언 한 마리를 노린 라분의 돌진.
뒤에 레이나가 바짝 붙어있다.
나는 챔피언 두 마리의 합공을 피해 상당히 물러나 있는 상황.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라분의 방패가 검염을 막는 사이, 레이나의 쾌검이 그대로 오크 챔피언의 옆구리를 반쯤 절단했다.
힘이 빠진 챔피언의 몸이 그대로 무너졌다.
"좋아! 일반 오크들을 정리해!"
내가 상대하는 두 챔피언의 마나가 요동쳤다.
나는 부드럽게 공격을 피하고 받아치며 내 모든 힘을 쏟아내었다.
레이나와 라분이 일반 오크들을 정리했을 때, 나는 챔피언 한 마리의 목을 베어내고, 나머지 한 마리의 팔을 잘라낼 수 있었다.
"후."
나는 나를 감탄의 눈으로 바라보는 레이나에게 말했다.
"샌드웜 조심해! 네 아래에 있으니까!"
레이나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라분과의 거리를 벌렸다.
나는 아직까지도 투지를 잃지 않은 챔피언을 바라보았지만,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단 두 번의 공방 만에 마지막 챔피언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검의 피를 턴 다음 레이나에게 붙었다.
"나머지 한 마리는요?"
"아직 아래에 있어. 사실 우리를 노리지는 않아."
"에? 그러면 방금 말은?"
"긴장은 항상 유지해야지."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샌드웜이 튀어나와 챔피언의 시체를 낼름 집어먹었다.
"저 새끼가. 내 성과를!"
저러면 공양도 못 한다.
오크 세 마리를 집어먹은 샌드웜이 유유히 떠나는 것이 느껴졌다.
"갔네."
"갔어요?"
"어."
우리는 한숨 돌린 뒤 성과를 점검했다.
오크 챔피언 두 마리, 오크 주술사 한 마리. 일반 오크의 시체 다수.
그리고 샌드웜의 시체 한 구.
오크가 사냥했지만 그 오크들을 내가 사냥했기에, 미궁의 신비가 인정하는 소유권은 나에게 있었다.
우리는 전투에 지친 몸을 다독이며 오크들의 시체에서 마정석을 채취했다.
"리더! 샌드웜에게도 마정석이 있어요!"
"파내!"
레이나에게 받아보니 트롤의 것보다 영롱한 마정석이다.
"트롤 이상, 미노타우로스 이하인가."
이 정도도 엄청난 수확이다.
오크의 물주머니로 목을 축인 뒤, 샌드웜의 송곳니를 챙기고 공양을 실시했다.
[시체를 공양합니다.]
[샌드웜 한 마리, 오크 챔피언 두 마리, 오크 주술사 한 마리, 오크 일곱 마리. 확인.]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진척도. 18.3%]
"크!"
미궁에 진입한 지 이제 겨우 4일 차다.
그런데 벌써 18%의 진척도라니.
돌아가면서 고블린만 사냥해도 20%의 진척도를 달성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목표 달성이야. 그것도 초과 달성."
아직 순수 사냥 시간으로 3일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이 시간을 이용해 최대한 진척도를 끌어올릴 생각이다.
내 의식은 벌써 미궁 10층을 향하고 있었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65
진척도를 모으기 위한 미궁 9층 탐험.
결과적으로 4일의 시간 동안 샌드웜 세 마리를 사냥했고, 한 번 죽었다.
내 9층에서의 첫 죽음은 세 마리의 샌드웜이 동시에 공격했을 때 이루어졌다.
샌드웜의 구역으로 너무 깊숙하게 들어온 것이 원인이었다.
"엇!"
레이나를 밀쳐 무방비가 된 내 몸통을 샌드웜의 이빨이 갈랐다.
왜 그랬을까.
원래라면 레이나의 죽음을 토대로 조금이라도 샌드웜의 정보를 얻은 뒤 죽었어야 했다.
하지만 본능은 내 회귀가 레이나의 죽음 뒤에 이루어질 약간의 가능성도 허락하지 않았다.
'물러.'
이미 마음속으로 레이나를 동료로, 가족으로 받아들였기에 일어난 일이다.
"리더!"
나는 레이나의 처절한 비명과 함께 죽었다.
당연히 지워진 과거였지만.
내 기억 속에만 남은 채 사라진 처절한 표정의 레이나는 지금, 그저 피곤이 가득한 모습만 남아있을 뿐이다.
"돌아가면 맥주부터 마실 거예요!"
"아주 술 중독이야."
"그 정도는 아니고⋯"
나는 샌드웜이 한 번 씹어버렸던 내 배를 문질렀다.
확실히 위험한 탐험은 맞았다.
'6일에 걸친 사냥에서, 한 번 죽고 말았어.'
다른 변수를 다 빼놓고 봐도 6분의 1이면⋯
"얼마야?"
"음. 대략 16%일걸요?"
"6분의 1? 그게 뭐냐."
"라분 넌 알 필요 없고."
"라분. 바보 아니다."
"알고 있어."
84%의 탐험 성공률이다.
다른 탐험가들이 우리의 탐험 불가능을 말하는 이유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보통 탐험가들은 단 한 명의 부상자가 나와도 그 탐험 자체를 실패로 간주한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성공률 84%?
'오만의 극치.'
일반 탐험가는 고개를 저을 것이고, 대박을 노리는 탐험가는 유서를 쓴 뒤 도전할 것이다.
내 입장이야 당연했다.
"84%? 무조건 도전이지."
이미 40%의 진척도를 달성했다.
산술적으로 보건대, 두 번의 탐험이 끝나면 미궁 9층도 졸업이다.
"이렇게 빠르게 내려갈 수 있다니! 역시 리더 밑으로 들어가기를 잘했어요! 아카데미 가서 자랑 엄청엄청 해야지!"
"그래. 친구 있으면 데려오고. 짐꾼이라도 좋으니까."
"네!"
고블린의 바위산은 최대한 전투를 하지 않는 방향으로 일행을 선도했다.
이미 많이 지쳐있다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미궁 9층의 안전지대로 복귀했을 때, 우리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있었다.
"수고했어."
"고생 많았다."
"고생하셨습니다!"
우리는 당당하게 미궁 9층의 사무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를 본 네이슨이 한숨을 푹 쉰다.
"대접이 부실한 거 아닙니까?"
"표정 보니 성공했나 보네."
나는 의뢰서와 함께 샌드웜의 송곳니들을 쏟아부었다.
"총 6쌍. 2쌍은 의뢰 완수했다 치고, 나머지 4쌍은 맡겨도 되겠죠?"
"그냥 2쌍 의뢰한 놈이 다 사갈 거야. 일주일 뒤에 1층으로 와서 돈 받아 가면 돼."
"아직 계산이 남았을 텐데요?"
"에휴."
네이슨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괜히 이상한 데에 코를 꿰여가지고는. 뭐, 시비 턴 대가라고 하면 싼 것 같기도 하고."
"돈은 됐습니다."
"응?"
"여기 계신 분들께 비싼 술로 한 잔씩 쫙 돌리시죠."
알음알음 퍼진 소문으로 나와 네이슨의 내기를 전해 들은 탐험가들이 환호했다.
원래 술은 탐험을 마치고 마시는 술이 가장 달다.
탐험가들이 내게 다가와 열렬한 악수를 청했다.
"어린 친구가 대단해. 능력 있나 봐?"
"길드 안 들어갑니다."
"뭐, 예언자냐?"
네이슨에게 맥주를 주문하고, 20명 정도의 탐험가들에게 일일이 인사하며 얻어먹자 딱 10실버 어치가 됐다.
네이슨도 표정이 좋다.
"경비 처리하면 난 손해가 없지! 짜식. 뭘 좀 아는 놈이야!'
뭔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맥주 한 잔만 딱 마시고 미궁 1층으로 복귀했다.
"아. 잠깐. 4층으로 가보자."
탐험가 아카데미에서 만난 붉은 송곳니 길드의 켈른이 내게 말해준 정보가 생각나서다.
[구트란 토벌전, 제대로 시작되었어. 이른바 2차 토벌전.]
구트란은 현재 내 얼굴을 알고 있는 유일한 클라이머다.
토벌전의 상세를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레이나. 너는 4층 진척도 없지?"
"네."
레이나와 같이 가면 꼼짝없이 갇힌다는 말이다.
"그러면 라분이랑 다녀올게. 먼저 돌아가도 돼."
"오래 걸려요?"
"모르겠어."
"조금 기다리다가 너무 늦으면 돌아갈게요."
"빨리 올게."
괜히 나중에 들쑤시고 다니는 것보다야 지금이 낫다.
[미궁 4층으로 진입합니다.]
[현재 진척도 100%.]
"미궁 4층도 오랜만이네."
"얼마 안 지났다."
"그래도 몇 년은 지난 것 같은 느낌이야."
미궁 9층과는 다르게 사람들의 밀도부터 달랐다.
안전지대에 몇백 명은 있는 것 같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미궁 4층 사무소로 향했다.
실제로 2차 구트란 토벌전이 일어난 장소는 미궁 5층이다.
더 정확한 정보를 알기 위해서는 미궁 5층으로 향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5층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다.
미궁 4층의 비밀통로로 8층까지 한 번에 뚫었으니까.
"여! 오랜만입니다."
미궁 4층 사무소의 직원, 카일이 나를 반겼다.
"오! 루카스. 4층은 졸업한 거 아니었어?"
"얼굴이나 비칠 겸 왔죠."
"카일. 오랜만이다."
"라분. 이 친구는 여전한가 보네."
은화 하나를 던져주니 곧잘 술을 말기 시작한다.
"조금만 주세요. 일찍 가야 해서."
"그래."
"사실 궁금한 게 있어서 왔어요. 구트란 토벌은 어떻게 됐어요?"
사실 어느 정도 짐작되는 점은 있다.
이 양반. 표정이 말이 아니다.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카일의 대답은 긍정적이었다.
"성공했지. 구트란 그 자식 죽었어."
"오?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이에요?"
"우리 피해도 엄청났으니까."
"⋯⋯."
"니콜라스를 포함해 4위계 셋이 죽었다. 제대로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더군."
"허."
해결사 니콜라스,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하지만 이미 니콜라스는 구트란에게 죽은 적이 있었다.
'인간 상성이었나.'
나와 라분이 잔을 들며 니콜라스에게 간단한 조의를 보냈다.
"생환율 30%. 5층 클라이머들도 거의 작살났어. 구트란의 죽음은 확인했지만 시체도 못 가져왔어. 향수도 얻지 못했고."
"향수요?"
"그래. 조제 원리를 알아내서 탐험가에게 시험할 계획이었는데 말이야."
"아하."
구트란이 개발한 소모성 아티팩트. '향수'.
멀리서도 향수를 바른 자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다.
이 사실만으로도 향수의 이용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좋은 의도로 사용되어야겠지만.
"참가하지 않기를 잘했어. 너도 말려들었으면 무사하기 힘들었을걸?"
"그랬겠네요."
사실 그런 장소에서야말로 내 능력이 더 빛을 발하게 되겠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니 넘어가도록 하자.
"그래서 요즘 미궁 4~6층이 뒤숭숭해. 살아남은 클라이머들이 대규모로 연합한다는 정보도 속속들이 올라오고 있고. 아. 이건 비공개 정보야. 정보 검증이 안 됐어."
미궁 4~6층의 경우 임의로 생성되는 통로로 연결되는 경우가 비교적 많다.
대부분의 통로는 미궁 깊숙히 위치해있고, 탐험가보다는 클라이머가 이용하기 좋은 환경이다.
5층의 일이 4층에도 빠르게 공유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역시 카일을 선택하기를 잘했다.
"지금 미궁 8층이랬나?"
"9층입니다."
"그래. 그 쪽은 영향 없을 테니까 당분간 탐험에만 집중하라고."
"알겠습니다."
나는 남은 잔을 쭉 들이켰다.
"바깥에 계시면 연락하슈. 술이나 한잔 합시다."
"그래."
기약 없는 약속을 끝으로 라분과 함께 미궁 1층으로 복귀했다.
레이나는 미궁 1층 구석에서 로브를 쓰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는 몰래 다가가 레이나의 어깨를 확 붙잡고 그대로 흔들었다.
"왁!"
"쓰흡. 오셨어요?"
"⋯놀란 표정 지을 줄 알았더니만."
"그럴 힘도 없어요. 빨리 돌아가요."
"그래."
"가신 일은 잘됐어요?"
나는 적당히 경과를 설명해 줬다.
구트란의 죽음과, 미궁 저층의 혼란.
"그렇구나. 4층은 이제 제 친구들도 많이 다닐 텐데. 벌써부터 걱정이 되네요."
"클라이머 놈들도 대놓고 나서지는 못할 거야. 이렇게 휘저어 놨으니까."
솔직히 크게 걱정은 되지 않는다.
내가 잃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내 시선은 미궁 9층과 10층에 집중되어 있었다.
* * *
에릭 파르밀이 소개해 준 내 검술 스승은 초로의 신사였다.
'초로의 신사. 이럴 때 쓰는 말이 맞겠지?'
라파와 콜린의 덕으로 어느 정도 문장 구사력이 늘어난 느낌이다.
사실 라파의 덕이 훨씬 컸는데, 콜린이 가르치는 능력이 영 젬병이었기 때문이다.
희끗희끗한 머리를 가진 중년의 남성이 나를 보았다.
"그래. 자네가 에릭이 말한 미궁의 탐험가겠어."
"그렇습니다."
4위계 중반.
신체 접촉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역시 에릭은 귀족이었다. 한 번 뱉은 말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지키는 자존심 가득한 귀족.
"에릭은 자네를 희대의 천재로 묘사했는데, 겉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군."
"하하하! 저도 깜빡 속아 넘어간 적이 있었죠. 하지만 루카스 님을 직접 겪어보시면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나를 죽인 적이 있는 놈이 말은 잘한다.
그래도 녀석이 물어온 이 사람이 내게 둘도 없는 기회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4위계의 교육.
그저 단순한 교육이어도 감지덕지할 텐데, 검술까지 가르쳐줄 용의가 있다고 한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루카스라고 합니다."
"홀란일세. 어디, 실력이나 볼까?"
홀란이 다짜고짜 검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황을 보이는 것은 하수다.
"⋯좋습니다."
어느새 마련된 연무장에 나와 홀란이 거리를 두고 섰다.
"진검으로."
"알겠습니다."
어차피 내가 홀란에게 첫 싸움에 이길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된다.
그렇다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부딪칠 뿐!'
빠르게 접근한 나의 중단 베기가 홀란의 몸을 가르고 들어왔다.
"처음부터 살초! 역시 실전을 밥 먹듯이 겪는 전사로군!"
홀란이 부드럽게 나의 검을 걷어내고, 곧바로 반격했다.
그 후 오십여 합의 공방이 이어졌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공격을 가했지만, 홀란의 방어를 뚫어낼 수 없었다.
어째 검이 가는 곳에 홀란의 검이 마중 나와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허허허!"
여유로운 웃음소리까지.
"잘 봤네."
그 말이 끝났을 때, 홀란의 검이 내 목에 닿아있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말 그대로 엄청난 격차!
하지만 홀란이 마지막에 어떻게 움직였는지는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다시 겨룬다면, 직전의 그 한 수에는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하나씩 경우의 수를 줄여나가면.'
언젠가는 닿을 수밖에 없다.
홀란이 검을 집어넣고 에릭을 바라보았다.
"3위계 중에서 특출나다는 사실은 인정하겠지만, 정말 익힌 검술이 하나도 없는 건가?"
"본인의 말로는 그러했습니다."
"허허, 이거 참."
에릭이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홀란의 표정을 보며 생각을 굳혔다.
'가르침을 얻고, 죽어야겠군.'
그가 나를 인정할 때까지.
그렇게 결심하고 입을 열려고 했을 때였다.
"제대로 찾았군!"
"⋯⋯?"
나는 의문을 가졌고, 에릭은 경악했다.
"정말 어떤 검술도 익히지 않았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구식 검술의 잔재는 있지만, 정형화된 보법도 없고, 그렇다 할 검술도 없어."
"허허."
검을 집어넣은 홀란이 터벅터벅 걸어와 내 어깨를 짚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새싹을 찾았군. 내 잘 부탁하네!"
"⋯⋯!'
뭔 개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장단을 맞추자.
나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째, 뭔가 일이 잘 풀리는 느낌이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66
홀란, 풀네임은 홀란 맨드릭.
제국 북부에 있는 카르뷸트에 터를 잡은 맨드릭 자작가의 방계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귀족의 예를 차릴 필요는 없네. 이미 성을 버린 지 오래니까."
"네."
"내가 익힌 검법은, 그리고 자네에게 가르쳐줄 검법의 이름은 '르텐 플레이드'라고 하네."
"⋯⋯?"
듣자 하니 이 검법은 제국의 검법이 아닌, 동쪽 대륙에서 넘어온 검법이라고 한다.
"더이상의 정보는 자네가 내 가르침을 배우겠다는 것을 확실히 말해줘야 알려줄 수 있을 것 같군."
"배우겠습니다! 가르침을 주십시오!"
어차피 배울 거, 시원하게 대답해야 한다.
"그래. 그러면 지금부터 자네에게 말을 편히 하겠네."
"네! 스승님!"
"스승이 아니다. 너는 내 제자도 아니고."
"네?"
아니, 사용자를 4위계에 도달하게 하는 검법을 전수하는데,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나도 스승 없이 이 검법을 전수 받았고, 너도 그렇게 될 테니까."
홀란이 에릭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부탁하지."
"네. 빠르게 돌아오겠습니다."
에릭이 조용히 연무장을 나갔다.
홀란은 문이 완전히 닫긴 것을 확인하고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의 명칭으로 이 검법을 부른다면, '석로검법(夕露劍法)'이라고 하면 된다."
"석로?"
"저녁에 맺힌 이슬이라는 뜻이다."
이 검법을 창안한 자는 검법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우연히 제국으로 건너와 검법의 존재를 깨달았지만, 이미 자신은 검법을 익히기에는 늦은 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만학도가 익힐 수 있는 검법을 창안하고자 했다. 하지만 도저히 성공할 수 없었다."
"⋯⋯."
"그래서 그는 최후의 방법을 선택했다. 바로 켈리어의 시련에 도전한 것이지."
"!"
"들었다. 너도 켈리어의 시련에 도전했다고?"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것을 보아하니 통과했음이 분명한데, 검법을 얻지 않았군?"
검법을 원했지만 켈리어는 내게 학즉사법이라는 기괴한 호흡법을 전수해 주었다.
처음에는 켈리어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을 많이 없앴다.
결과적으로 학즉사법은 내가 빠르게 미궁을 내려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었으니까.
"대신 호흡법을 얻었습니다."
"호오."
스승이 아니라고 해도 스승이나 다름없다.
호흡법의 이름 정도야 알려줄 수 있다.
"학즉사법이라고 합니다."
"익히면 죽는다? 기괴하기 그지없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 석로검법은 어떤 호흡법에도 잘 어울리니 문제없다."
"다행이군요."
홀란이 말을 가다듬었다.
"말이 샜군. 켈리어의 시련에 당당히 통과한 창안자는 켈리어에게 자신을 위한 검법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켈리어는 거절했지. 이미 제대로 된 검법을 익히기에는 너무나도 멀리 와버린 게야."
"⋯⋯."
"대신 켈리어는 창안자와 그를 위한 연구를 시작했고, 결국 그에게 어울리는 검법을 만드는 데에 성공했지."
"석로검법."
"그래. 창안자는 켈리어가 이 검법의 창안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맥을 잇기 위해 전인은 두되, 사승의 연은 맺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대검호 켈리어, 과연 제국 최고의 검호라는 칭호를 받을만하다.
"석로검법은 네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검법이 아니다."
"네?"
이건 또 무슨 개소리라는 말인가?
"검법을 흉내 내는 검법이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켈리어의 힘으로도 창안자에게 어울리는 완벽한 검법을 만들기는 불가능했다는 말이다. 직접 보여주어야겠지. 나도 처음에는 믿지 못했으니. 에릭을 기다리자."
그러고는 연무장의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
뭐지?
나도 조심스레 홀란과 마주 앉았다.
홀란은 나를 바라보며 자신의 과거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과거, 자작가의 방계이자 막내였던 자신은 검에 재능이 있었음에도 가문의 비전 검법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다른 검법을 익히지도 못하게 했고.
어영부영 3위계 중반까지 도달하고 나서야 재능을 인정받아 검법을 사사하였지만.
"이미 내게는 맞지 않는 검법이 되어있었지. 매일 봐왔던 검법이었음에도."
홀란은 절망하며 가문과 연을 끊고 용병이 되었다.
그렇게 떠돌던 와중 스승을 만나 석로검법을 배웠다고.
"⋯그러면 저도 마찬가지로 3위계 중반인데, 애초에 석로검법이 아닌 다른 검법을 배울 수 없었던 겁니까?"
"배울 수 없는 건 아니다. 다만 종류가 현저히 적어지고, 난도는 증가하겠지. 다른 검술을 익히겠다면 말리지 않으마. 파르밀 가문이 보유한 검술에는 너에게 어울리는 검술이 분명히 있을 테니."
나는 잠깐 고민하고 고개를 저었다.
"배우겠습니다."
"잘 선택했다."
잠시 후 에릭이 돌아왔다.
에릭과 동행한 사람은 바로.
"셀레나?"
"⋯친한 척하지 말아 줄래?"
흑야혈투회에서 나를 무려 아홉 번이나 죽인 전적이 있는 셀레나였다.
켈리어를 제외한다면 가장 많이 내 목을 벤 사람이기도 했다.
"말씀주신대로 식객 중 루카스 님과 겨뤄본 경험이 있는 분을 모셨습니다."
"에릭 님. 이분이세요?"
셀레나가 홀란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셀레나라고 합니다."
"음! 검법이 제대로 잡혀 있군!"
"거두절미하고,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좋네!"
홀란이 천전히 검을 뽑아 셀레나를 겨누었다.
셀레나도 이에 질세라 현란한 손놀림으로 쌍검을 뽑아 자세를 잡았다.
"선수는 양보받겠습니다!"
"음."
셀레나가 더 볼 것도 없이 홀란에게 돌격했다.
"하압!"
셀레나에게 아홉 번을 죽으면서 이미 그녀의 검법은 대부분 알고 있었다. 쌍검을 사용하는, 속도와 연속 공격으로 승부를 보는 타입.
자신의 특기를 십분 발휘한 셀레나가 홀란을 몰아세웠다.
홀란이 처음에는 약간 수세에 몰리는 듯했다.
"?"
나는 의심 가득한 시선으로 홀란을 보았다.
4위계 중반의 전사가, 고작 3위계와 그럴듯하게 검을 나눈다고?
홀란은 공격과 방어를 적절히 섞어가며 셀레나와 검을 나눴다.
'석로검법, 왜 쓰지 않는 거지?'
홀란의 움직임에서 셀레나처럼 검법의 정형화된 움직임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그렇게 약 오십 합이 지나갔을 때, 홀란이 검을 크게 휘둘러 셀레나를 뒤로 물러나게 했다.
"그렇군."
홀란의 움직임이 크게 변했다. 언제나 셀레나가 먼저 달려들었지만, 이번에는 홀란이 먼저 다가가며 검염을 두른 검을 휘둘렀다.
단 세 번의 휘두름이었다.
첫 번째 휘두름이 만든 기이한 마나의 움직임이 셀레나의 쌍검을 튕겨 나가게 했다.
두 번째 휘두름이 방어를 취하던 셀레나의 몸을 찍어눌렀다.
마지막 휘두름이 셀레나의 머리 위에서 멈췄다.
"..."
셀레나가 굳은 자세로 멈췄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완벽한 길을 찾아냈다!'
항상 수세에 몰리던 홀란이 자신이 언제 그런 적이 있었냐는 듯 곧바로 셀레나를 공격해 대련을 마무리한 것이다.
"수고했네."
셀레나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공방의 전환이 미숙하네. 검법이 살초를 기본으로 하기에 공격을 위주로 단련하는 것이 순리겠지만, 검법이 최소한으로 요구하는 방어의 기준을 충족해야할 걸세."
그러면서 홀란은 몇 가지의 시범을 보였다.
그것만으로 셀레나가 크게 깨달은 듯 아예 땅에 머리카락이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여댔다.
"감사합니다!"
"그래. 이제 자리를 비켜 주시게나."
에릭과 셀레나가 같이 연무장을 나가고, 다시 홀란과 둘이 되었다.
홀란이 내게 물었다.
"방금 내 대련을 보면서 무엇을 느꼈나?"
기대 가득한 눈빛이다.
나는 홀란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셀레나와의 전투에서, 아홉 번을 죽으며 그녀의 검에 대해서 파고든 나다.
그런데 홀란은 고작 몇 번의 공방만으로 나 이상으로 셀레나의 검법의 파훼식을 구성했다.
내 감지 능력으로 그 과정에 기이한 마나가 관여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홀란 님의 실력이었다면 검법 없이도 셀레나를 제압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셨을 겁니다. 검법을 파훼하기 위해 시간을 두셨군요. 그 공방 후에 파훼식을 만들고 바로 제압하신 겁니다."
"하하! 그래! 정답이야!"
홀란이 호방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이미 검법 없이 본인의 경지를 쌓은 창안자에게 켈리어가 제안한 바지. 몸에 꼭 맞는 검법을 익히지 않아도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거야."
"그 말은."
"석로검법은, 상대방의 검법을 부수는 검법일세. 형도, 식도 없지. 그저 검을 받아내며, 상대가 가진 호흡의 틈을 찾아내는 것이 이 검법의 요지이지."
"!"
나는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음을 깨달았다.
"어떻게든 검을 맞대는 것을 유지할 수 있다면, 무조건 승리할 수 있는 검법이라는 말씀입니까?"
"너는 너무 간단히 상황을 정리하려는 습관이 있군."
"..."
"그래도 너에게 맞춰 간단히 설명을 해줄까. 상대의 호흡에 내 호흡을 맞춘다. 그게 이 검법의 핵심이지. 자. 직접 보여주겠네."
홀란이 검을 꺼내 들었다.
"내 공격을 받아보게."
내가 검을 꺼내기 무섭게 홀란이 내게 달려들었다.
조금 전 나와의 대련에서는 전혀 보여주지 않았던 쾌검!
갑작스러운 변화에 어지럽게 검을 받아내던 나는 이내 깨달았다.
지금 홀란의 움직임은 셀레나고 보여주던 고유의 움직임과 똑같다!
"이건!"
홀란이 검을 멈추고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알겠나?"
내가 분석한 셀레나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홀란의 움직임.
셀레나는 두 개의 검을 들고 홀란은 하나의 검을 들었지만 그 절대적인 차이가 무색할 정도로 두 사람은 똑같았다.
"셀레나 양의 호흡을 가져온 것이야."
"그렇군요!"
"하지만 호흡만 가져온다고 되는 일이었으면 호흡법이지 검법으로 분류가 되겠나."
"그것도 그렇군요!"
"조금 창의적인 대답을 해."
"⋯⋯."
홀란이 검을 들었다.
"내 자네에게 단 한 가지의 검로를 알려주겠네."
홀란이 천천히 검을 휘둘렀다. 나는 한 시간 동안 홀란의 교육을 받고서야 검로를 완전히 익힐 수 있었다.
"아주 느리군. 이런 쪽의 감각은 통 없는건가?"
"⋯⋯."
"다음으로는 마나를 가공하는 법을 알려주겠네."
홀란은 내게 6시간 동안 마나를 가공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감이 통 잡히지 않았다.
내가 이리저리 헛손질을 하자 여유로웠던 홀란의 표정이 점점 딱딱해졌다.
나는 홀란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고 내 마음대로 수련을 이어 나갔다.
"나는 내일 급한 일정이 있어서 가야 하는데, 혼자 할 수 있겠나?"
"걱정 마십쇼. 다 방법이 있으니까."
다시 두 시간이 지나자 에릭이 정중히 노크하며 연무장 안으로 들어섰다.
"홀란 님, 루카스 님. 식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래. 루카스. 구결은 알려줬네. 이 이상은 알아서 하게."
"싫은데요?"
"뭐?"
나는 학즉사법 3성에 도전했다.
내 가슴이 터진 것도 그와 동시였다.
"뭣?"
"이런 미친!"
에릭과 홀란이 황망한 눈으로 쓰러지는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는 한껏 웃으며 그들은 유언이라고 여길 말을 내뱉었다.
"다시 하시죠."
-키릭.
⋯⋯
"다음으로는 마나를 가공하는 법을 알려주겠네."
"흐흐."
"응? 왜 그러나?"
"아닙니다."
나는 단 한 번의 마나 운용으로 지난 6시간 동안의 진도를 따라잡았다.
"오오. 역시 빠르군!"
홀란의 감탄이 들렸지만 나는 무시하고 내 궁금증을 채웠다.
"여기까지는 한 번에 이해가 가는데, 이후부터는 잘 모르겠네요."
"?"
홀란이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67
석로검법의 마나 연공 수련.
아무리 첫 수련자를 3위계 중반이라 가정하고 만든 연공법이라고 해도, 이미 마나 패턴이 박혀버린 내가 새로운 마나를 받아들이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으으."
"처음의 진도는 매우 훌륭했지만, 이후에는 굼벵이가 따로 없군."
"연공이 왜 이리 어려운 겁니까?"
학즉사법을 익힐 때의 마나 가공은 몇 시간 만에 뚝딱 완료했다.
하지만 석로검법의 마나 연공은 너무나도 어렵고, 복잡해서 연공한 마나를 몸에 이식하려고 하면 풀려버리기 십상이었다.
"아무리 검술을 익히지 않았다고 해도 네 마나를 생전 처음 보는 검법에 맞게 동조시키는 것이다. 쉽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그래도 진도는 훌륭하다. 그대로 계속해 보자꾸나."
하지만 내 진도는 별 발전 없이 지지부진했고, 처음에는 감탄하던 홀란이 내게 흥미를 잃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마침내 에릭이 노크를 하며 문을 열었다.
"홀란 님, 루카스 님, 식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래. 루카스. 진도가 나쁘지 않군. 내 3일 뒤 다시 방문할 때 더 자세히 전수할 테니 일단 여기까지 하자."
"⋯⋯."
나는 즉각적으로 학즉사법 3성에 도전해 내 심장을 터뜨렸다.
"읏!"
"이게 무슨!"
"다시 한번."
-키릭.
⋯⋯
"그래. 루카스. 진도가 나쁘지 않군. 내 3일 뒤 다시 방문할 때 더 자세히 전수할 테니 일단 여기까지 하자."
-키릭
⋯⋯
"처음에는 상당히 좋았는데 말이야."
-키릭
⋯⋯
"요령은 잡은 것 같군,"
-키릭.
⋯⋯
⋯⋯
⋯⋯
"이봐! 루카스!"
"헛!"
몇 번째 시도였을까? 그래. 열세번째 시도다.
홀란의 말에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잠시 멍하니 정신을 놔두고 있었다.
빠르게 제정신을 찾고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홀란을 바라보았다.
홀란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너무 힘들면 구결만 외워가도 좋네. 아무리 천재라도 단 하루 만에 익힐 수 있는 기예는 아니니까."
"⋯⋯."
"오늘은 여기까지 합세."
"그럴 수는."
나는 부들거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어? 왜 이러지? 무한 회귀를 하면 체력도 정신력도 원래대로 돌아오게 되어있는데?
억지로 마나를 연공하려는 내 손을 홀란이 잡아챘다.
"그만. 스승을 자칭하지는 않을지라도 나도 너와 같은 석로검법의 수련자다. 내가 볼 때 지금의 너는 한계를 넘었어. 고작 4시간 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그만 해야 할 때다."
"이럴 리가 없는데."
덜덜 떨리는 손을 바라보았다.
분명 체력은 멀쩡하다. 하지만 어째 머리가 이상하게 둔해진 느낌이다.
13번째 수련.
한 번 수련한 시간을 대충 6시간으로 잡으면 약 4일을 쉬지 않고 수련한 것과 다름없다.
이 연속 수련의 과부하가 내 신체를 넘어 정신에 영향을 미친 건가?
아니다. 켈리어의 시련에서 나는 99번을 죽었다.
99번을 넘어 100번째가 되었음에도 도전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그때와 비교해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지금과 그때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시간?'
확실히 시간이 더 길기는 하다.
그러나 내 직감으로, 시간은 전혀 문제가 아니다.
나는 홀란의 시선을 무시한 채로 털썩 주저앉아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홀란은 뭐라고 말하다가 내 심각한 얼굴을 보고 먼저 연무장을 떠났다.
그러자 뭔가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손에 쥔 마나를 천천히 연공하여 석로검법의 마나로 만들었다.
뭉쳐진 마나를 몸에 넣자마자 역시나 스러진다.
쉽게 되지 않았다.
처음에 비하면 능숙하게 마나를 연공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해 보였다.
'이 과정을 몸속에서 간단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지.'
우선 무엇인가 나도 모르는 한계로 인해 석로검법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마음을 다잡았다.
원인을 알아내야 한다.
이 원인을 깨닫고 극복할 수 있다면 보다 높은 곳으로 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끝끝내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채 연무장을 나섰다.
에릭 파르밀이 마련한 저녁 식사 시간.
자리에는 나와 홀란, 에릭과 더불어 셀레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루카스. 지금도 충분히 훌륭한 결과다. 내 3일 뒤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테니, 수련을 이어서 하자."
"네."
"좋겠네. 이렇게 좋은 스승님을 둬서."
셀레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하! 셀레나 님. 혹시 루카스 님을 질투하시는 겁니까?"
"당연하죠. 이미 실력으로는 저 녀석이 저보다 더 강한데, 스승까지 얻어서 더 도약하려는 걸 보니까 질투가 안 생길 수 있겠어요?"
"이런. 루카스 님이 특이하신 경우는 맞죠."
나는 주변인들의 말을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고기를 뜯어 먹었다.
가끔 목이 막히면 와인과 야채를 집어먹기도 하고.
식사가 끝나고. 셀레나가 먼저 일어났을 때, 홀란이 나를 보고 말했다.
"조급해할 필요 없다."
"?"
"바로 눈에 보이더군. 연공을 시작한 순간부터 너무 다급하게 움직이고 있던데."
"그랬습니까?"
"나는 석로검법의 마나 연공을 익히는 데에 정확히 2개월이 걸렸지."
나는 놀란 눈길로 홀란을 바라보았다.
입으로 나를 자비 없이 팰 때는 한 이틀 만에 성공한 줄 알았다.
"지금의 네 진도는 비정상적이야. 더 천천히 익혀도 될 정도로. 급하면 언제나 탈이 나기 마련이지."
"천천히."
"그래. 마음을 가다듬고 수련하게. 3일 뒤에 처음부터 다시 가르쳐줄 테니."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오니 라파는 집 정리를 하고 있고, 콜린과 라분은 카드게임 중이다.
"주인님. 오셨습니까."
"어. 밥은 먹고 왔어. 레이나는?"
"오늘은 본가에 갔고, 내일 온다고 합니다."
레이나의 가족은 칼리움의 상업지구에 살고 있다고 했다. 하수구 옆의 내 집에서는 걸어서 30분 정도 떨어진 거리.
평소에는 우리와 같이 지내지만 가끔 집에 들러서 하룻밤을 묵고 오고는 한다.
듣기로 레이나는 다섯 남매 중 넷째. 결혼과 독립의 기로에서 독립을 선택한 셈이다.
당연하게도 선택지가 주어진 것만 해도 축복이다.
하수구 인생은 삶이 곧 생존과 다름 없었으니까.
지금도 그 신조는 변하지 않았다.
대신 미궁 정복에 대한 꿈이 생겼을 뿐.
"레이나 부모님께도 슬슬 인사를 드려야 할 텐데. 라파. 그때는 동행하자."
"물론입니다."
말주변이 좋은 라파라면 믿고 맡길만하다.
그러면서 나는 일행들을 불러 모았다.
나는 그리 똑똑하지 못하다. 하지만 내가 믿고, 나를 믿는 사람들에게 내 고민을 털어놓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나는 오늘 에릭 파르밀의 저택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이래서, 이랬어."
내가 겪은 감각, 마치 온몸이 멍하니 공중에 떠 있어 어지럽고, 토가 나올 것 같은 기분.
라파도 고개를 갸웃할 뿐 이렇다 할 답을 내지 못했다.
콜린은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흥! 하고 숨을 내쉰 뒤 말했다.
"난 알것 같은데."
"뭐?"
콜린이 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재미없던 거 아냐?"
"?"
"다른 때는 100번도 한 걸 20번도 못 했다고 했잖아. 재미없던 거 아니냐고."
"재미가 없었다고?"
"너 어렸을 때부터 흥미 없으면 맨날 금방 때려쳤잖아."
"⋯⋯."
"100번 할 때는 그렇게 많이 할 정도로 재미있었고, 오늘 한 거는 재미없었겠지."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콜린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켈리어의 시련에서는, 한 번 한 번의 죽음이 내 성장의 계기가 되었다.
셀레나에게 죽을 때에도, 조금 더 셀레나를 공략할 수 있게 되는 나를 보며 희열을 느꼈고, 나에게 다음 기회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석로검법을 익힐 때는?
마나를 뜻대로 주물러 원하는 형태로 바꾸는 연공은 성장에 임기응변과 암기가 중요하지 않았다.
바로 감각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짧은 순간의 반복으로 결과를 얻는 것이 아닌, 시간이 주는 익숙함에 기대야 했다.
즉, 죽음의 효율이 너무나도 낮았다.
게다가 그 방식조차 자살로 진행됐다.
"⋯⋯."
"주인. 정말 그런 거냐?"
"검 실력만 좋아졌지 여전히 멍청해. 쯧쯧."
나는 벌떡 일어나 콜린과 격렬한 박투를 시작했다.
2위계 초반에 성장이 멈춰버린 콜린과 3위계인 나의 힘 대결은 간단한 내 승리였다.
"항복! 항복! 항! 복!"
마지막 마무리를 해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분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고, 라파는 어느새 책을 꺼내서 읽고 있다.
"흥!"
역시 나는 몸을 쓰는 게 최고다.
3일 뒤, 내가 발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 홀란은 실전보다는 지식을 알려주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루카스. 나는 앞으로 동부 원정을 떠난다. 적어도 반년은 돌아오지 못할 것 같군."
"⋯그렇군요."
"그래서 3일 동안 내 석로검법에 대한 지식을 책으로 엮어 두었다."
홀란이 내게 어설프게 엮은 책을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반년이면 충분히 석로검법을 익히고, 실전에 적용할 수 있게 될걸세. 그때 다시 보지."
"네."
내 어깨를 두드린 홀란이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없이 저택을 나섰다.
이제부터는 검법을 익히기 위한 스스로의 노력이 시작되었다.
* * *
석로검법의 책을 받은 지 약 한 달의 지났다.
그동안 두 번의 미궁 9층 탐험을 진행했고, 단 한 번도 죽지 않는 쾌거를 이뤄냈다.
세 번의 탐험으로 달성한 미궁 9층의 진척도는 무려 91%.
"정말, 아무도 안 믿을 수치예요. 파티에 5위계가 있다면 모를까."
가끔 괴물들이 있다.
밖에서 활동하는 유명인이 갑자기 미궁 탐험에 뜻을 두고 빠르게 층을 내려가는 경우.
하지만 우리는 그런 괴물들의 층 탐험과 전혀 다른 정석적인 미궁 개척을 진행하고 있었다.
"뭐, 그런 놈들은 다들 소리 없이 사라졌지만."
자신들이 얕보던 미궁에 잡아먹히거나, 큰 곤란을 겪은 뒤 탐험을 그만두거나.
미궁은 힘만 있다고 개척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우리는 미궁 9층의 안전지대로 이동하자마자 그대로 미궁 1층으로 이동했다.
딱히 의뢰를 가져온 것도 없어 사무소를 들를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미궁 1층으로 귀환하시겠습니까?]
[현재 진척도 91.7%.]
"모두 수고했어. 다음이 9층 마지막 탐험이 될 거야. 응?"
미궁 1층이, 너무나도 조용했다.
나는 말을 멈추고 미궁 1층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놀랍게도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뤄야 할 미궁 1층에는 아무도 없었다.
미궁 필수품을 파는 상인들도, 검이나 방패를 손질해주는 닦개도, 심지어 점쟁이마저.
"뭐지."
그런데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나는 본능적으로 감지 능력을 끌어올려 주변의 마나를 점했다.
"주인. 시선이 있다."
"알아. 전투 준비. 레이나. 후방을 맡아."
"네."
검을 뽑은 레이나와 등을 맞대고, 라분은 내 앞을 막아서며 방패를 끌어 올렸다.
나는 텅 빈 미궁 1층에서 몇몇 시선이 나를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만.
"전부 4위계 이상이로군."
"⋯!"
"괜찮아. 어떻게든 된다. 앞으로 가자."
어차피 외통수에 빠져 죽을 거라면 빨리 죽어야 한다.
미궁 9층으로 회귀하는 게 이곳으로 회귀하는 것보다야 훨씬 안전할 테니까.
현재 상황을 모른 채 미궁의 다른 층으로 이동하는 것도 권장되지 않았다.
어떻게든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해야 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은 채 10초가 지나지 않았다.
나는 미궁 1층의 입구에서 우리를 향해 손짓하는 사람을 발견했다.
"사무소 직원 같은데?"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네요."
"무슨 일이. 생겼다."
"그래. 일단 가자."
우리는 경계를 유지하며 천천히 사무소 직원에게 다가갔다.
"빨리 오세요! 검 집어넣고!"
사무소 직원이 우리가 무기를 거두자 얼른 다가왔다.
옆에는 최소 4위계 이상의 검사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여기서 설명해 드리기는 복잡하고요. 일단 신분 검사부터 할게요."
돋보기 모양의 아티팩트를 내미는 직원.
목덜미의 문신을 스캔하는 아티팩트다.
나는 내 목을 내밀었다.
"루카스 님. 미궁 9층. 세 명 맞죠? 미궁 9층에서 오셨나요?"
"그게 중요합니까?"
"꼭 필요한 확인 절차예요."
"⋯⋯네. 미궁 9층에서 왔습니다."
"좋아요."
라분과 레이나의 목덜미를 검사한 뒤에 가지고 있던 명부에 이름을 기재했다.
"이제 됐고. 네. 통과하셔도 됩니다."
"설명은?"
"우선 미궁 1층을 비워둘 필요가 있어요. 죄송하지만 올라가시면 됩니다."
"⋯⋯."
어이가 없었지만 뭐, 죽지만 않을 상황이면 된다.
나는 근처에 있는 익숙한 마나를 가진 자를 돌아보았다.
붉은 송곳니 길드의 간부, 카리나가 감정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아는 척을 하며 다가가려던 순간이다.
"왔다!"
"?"
주변 모든 실력자의 시선이 미궁 1층의 한 점에 고정되기 시작했다.
나도 물론 미궁 1층으로 누군가가 이동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으로 시선을 가져갔을 때,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
"!"
"!"
단 한 사람.
아니, 한 사람과 한 사람이었던 것의 일부다.
살아있는 한 사람은 두 팔이 없고, 목에 줄로 연결된 무엇인가를 목에 걸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사람의 목이었다.
그것도 내가 아는 사람의 목.
"카일."
미궁 4층의 사무소 직원의 눈이 초점을 잃은 채 흔들리고 있었다.
카리나가 내게 다가왔다.
"미궁 4층이 클라이머들에게 점령당했어."
"뭐?"
카리나는 실력자들이 달려와 시체와 예비 시체를 수습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클라이머의 미궁 4층 점령.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68
일전에 미궁 사무소는 클라이머 마법사 구트란의 향수에 대한 정보를 받고, 그를 잠재적인 위협으로 판단했다.
이에 일반적인 4써클 마법사의 위협을 가정한 1차 토벌전을 벌였다.
첫 토벌전은 내 무한 회귀를 이용한 보이지 않는 활약에 힘입어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지만, 다음으로 이어진 2차 토벌전은 그렇지 못했다.
지금 이곳에 목만 남아있는, 미궁 4층 사무소 직원인 카일에 말에 의하면 서로의 피해는 백중세.
하지만 4~6층의 클라이머들이 연합한다는 정보도 떠돌았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 그 연합의 결과가 펼쳐져 있다.
한 사무소 직원이 카일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들고, 다른 직원이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 다른 사무소 직원을 수습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모두들 당장에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모습이다.
하기야, 사무소 일반 직원이 이런 끔찍한 광경을 볼 일이 있었겠는가.
그들이 자진해서 수습을 해주는 행위는 좋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적절하지는 않았다.
나는 흥!하고 크게 숨을 내쉬며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저렇게 두면 안 됩니다."
"무슨 말이지?"
"온몸에 향수가 가득하잖아요. 저렇게 수습하면 다 묻습니다."
"!"
카리나가 예전 기억을 떠올리고 점차 몰려드는 직원들을 멈춰세웠다.
"그만!"
"후."
이런 일에 나설 생각은 없고 그저 탐험이나 열심히 하고 싶은데.
하지만 내가 나서지 않으면 다음 탐험에 걸리는 시간이 훨씬 더 늦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별 수 없지."
카일의 복수도 해줘야겠고.
서로 밖에서 술 한잔하자는, 그저 말 뿐인 사소한 약속도 이제는 영원히 지킬 수 없게 되었다.
내 무한 회귀로 카일을 살리는 시도를 해볼 수는 있다.
하지만 가능성이 너무 낮은 일이다.
물론 라분이나 레이나가 이 꼴이었다면 즉시 머리를 터뜨리고 봤을 테지만.
"모두 물러나."
카일의 시체를 내려놓고 물러선 사무소 직원들.
이제는 곱게 눈이 감겨 있었다.
나는 나를 계속해서 따라오려는 레이나와 라분을 멈춰세웠다.
주변 4위계들의 경계수위가 점차 올라갔기 때문이다.
"먼저 올라가 있어. 나는 저기서 한 따까리 하고 와야 할 것 같으니까."
"기다리겠다."
"그러던지. 안 피곤하겠어?"
"괜찮아요. 얼른 다녀오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터덜터덜 사무소 직원들을 향해 다가갔다.
카리나를 포함한 4위계 세 명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향수가 묻어있다고?"
"바로 안 보이는데?"
"니콜라스도 겨우 발견했을 정도로 은밀해. 한 번에 발견하는 게 이상한 거야. 저 녀석처럼 말이야."
4위계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나는 우선 향수가 옮겨 묻은 사무소 직원들부터 지목했다.
"이분이랑 이분! 저분까지 세 명! 움직이지 마세요. 더해서 지금부터 향수에 대한 대책없이 전송된 사람과 접촉하는 사람들은 예외없이 클라이머로 간주하겠습니다."
4위계의 전사들은 내가 상황을 주도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카리나가 나를 두둔하고 들었다.
"괜찮아. 믿을 만한 탐험가야. 실력도 좋고. 같이 작전도 했었어. 내가 보증할게."
그제야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 누그러졌다.
나는 그러한 모습들을 보며 고인이 된 4위계의 해결사, 니콜라스가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자기네들은 서로가 서로의 보증으로 엮인 관계라고 했었지.'
이렇게나 남을 믿는 것이 힘든 세상이다. 믿을만한 사람의 확신이 없다면 쉽게 사람을 신뢰하기도 여의치 않다.
나는 니콜라스에 대한 감상을 치우고 현실로 돌아왔다.
"4위계 분들 중 감각이 좋으신 분이 필요합니다. 저 혼자 보이는 걸로 뻗대며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여러분들도 사양이시겠죠."
"내가 보지."
선이 매끈한 남자가 걸어나왔다. 성숙한 4위계의 마나를 숨기지 않는 자다.
'실력자로군.'
두 팔이 잘린 사무소의 직원은 사무소가 초빙한 사제에게 원거리에서 지속적으로 치료를 받고 있었다.
고개를 계속 앞뒤로 까딱거리는 것이 잘못 건들면 죽을 것 같아 보인다.
나는 카일의 목을 보며 다시 감상에 젖었다.
'불안하다고.'
걱정이 현실이 되어, 카일은 결국 살아남지 못했다.
아니다. 카일이 안전지대에서 도망치지도 못할 만큼 실력이 형편없지는 않다.
살아남을 기회를 쓸데없는 의무감에 발이 붙잡혀 놓쳐버리고 말았겠지.
"자. 저분은 치료를 그만두면 위험해 보이니 잠시 두고, 이 카일의 머리를 잠시 빌리도록 하죠. 옮겨 묻은 사무소 직원들의 향수는 너무 옅으니까 확실하게 하려면 이게 낫습니다."
카일을 향해 잠시 묵념한 후 조심스레 머리를 들어 올렸다.
죽은 지 꽤 시간이 지난 듯 피가 다 빠진 머리는 지나치게 가벼웠다.
"구트란이 만든 향수가 머리 곳곳에 묻어있습니다. 가장 짙은 곳은 왼쪽 이마로군요."
"음. 이곳 말인가?"
"네. 조금만 집중하면 보이실 겁니다."
남자가 눈을 좁히며 마나를 운용했다.
내 감지 능력이 남자가 시야에 적용하는 섬세한 마나의 변화를 관찰하고 있었다.
다양한 패턴의 마나가 눈에 덧씌워졌다가 사라지는 광경은 감지하는 것만으로 배울 수 있는 점이 있었다.
나는 여기서 학즉사법의 위용을 다시 느꼈다.
예전 고작 학즉사법 1성의 마나로도 관찰할 수 있었던 향수를, 4위계의 전사는 바로 관찰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진수다.
물론 이는 내 학즉사법의 효과가 감지에 특화되어있었기 때문이지만.
내가 장담하건대 라분은 향수 죽어도 발견 못한다.
굵은 땀방울을 몇 방울 흘린 남자가 이윽고 눈을 빛내며 손을 들었다.
"이제 보이는 군."
남자가 손의 마나를 피워내며 카일의 왼쪽 이마를 쓸었다.
향수가 뿜어내던 미약한 마나가 쓸려 사라졌다.
남자가 향수가 조금 묻은 손가락을 들어 올려 내게 보여주었다.
"이게 향수인가?"
"그렇습니다.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더군요."
예를 들면 내 옆에서 카일의 이마를 째려보고 있는 카리나가 있다.
"카일의 머리에 있는 향수는 치료를 받고 있는 저 직원분이 가지고 있는 향수와 동일합니다. 수습을 위해 전부 지우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4위계 사람들과 사무소 직원의 무언의 동의를 얻고 카일의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아니, 가져가려고 했다.
내 팔이 무엇엔가 붙들린 듯 턱하고 멈췄다.
"?"
감지를 했지만 막아내지 못했다. 내가 지금껏 받아본 적이 없었던 종류의 공격이었기 때문이다.
빠르게 상황을 깨닫고, 내 팔을 잡고 있는 마나를 분석했다.
자유분방한 전사들의 마나와 달리 체계적으로 얽혀있는 마나들이 느껴졌다.
나는 학즉사법 2성에 도전하며 마나를 가공할 때 얻었던 지식을 활용해 내 마나를 송곳 모양으로 연공한 뒤 내 팔에 붙어있는 마나를 그대로 찔러들어갔다.
-팟!
한 곳의 마나를 찌르자 마치 바스라듯이 사라지는 마나가 보였다.
나는 마나의 흐름을 따라 그 마나를 방출한 주인을 찾았다.
"마법사?"
일전에 내게 미궁 8층의 지도를 제공해 줬던 사무소의 마법사가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귀중한 샘플을 훼손하시면 안 되죠!"
마법사가 지팡이를 다시 휘두르자 내 팔을 잡았던 마나가 다시 형성되어 이번에는 내가 들고 있는 카일의 머리를 노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휘둘러 마법사의 마법을 직격했다.
내 마나에 휩싸인 마법사의 마나가 빠르게 와해되었다.
어느새 내 앞에 도착한 마법사가 짜증을 내었다.
"당신. 아까부터 자꾸 뭡니까?"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대체 어떤 방법으로 내 마나를 감지하는 거예요?"
"제가 워낙 감지가 뛰어나서."
"됐고. 샘플 주세요. 아직 많이 망가지지는 않았네."
마법사가 손을 척하고 내밀었다.
나는 바로 반응하지 않고 조용히 카일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루카스. 카일에게서 당신에 대한 칭찬을 좀 들었어요. 잘 아는 사이 같던데? 물론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지금 사태도 대충 알 거 아닙니까. 샘플의 확보가 무엇보다도 중요해요."
"샘플이라면 저 사람한테도 잔뜩 있습니다만."
"그게 아니잖아. 살아있는 샘플과 죽은 샘플. 종류도 달라. 그리고 샘플은 다다익선! 많을수록 좋아요."
카리나가 내 어깨에 팔을 올렸다.
키가 내 어깨쯤 되는 여자가 그러고 있으니 자세가 조금 우스웠다.
"그냥 드려. 지금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니까."
"...."
나는 어쩔 수 없이 카일의 머리를 마법사가 가져온 나무 상자 안에 집어넣었다.
"휴. 이해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
마법사는 다음으로 사제의 치료를 받고 있는 다른 사무소의 직원을 향해 다가갔다.
잘려나간 양팔의 출혈은 멎어있었지만 여전히 눈이 풀려있다.
"이봐. 레프. 나 데른이야. 꼴이 말이 아니군. 괜찮아?"
"으으."
"레프! 어이!"
"으으으."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간 직원, 레프 대신 신성력을 불어넣기를 계속하던 사제가 답했다.
"정신적인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렇게 멀리서 조치하면 힘들어요. 촉진해야 제대로 된 치료를 도모할 수 있습니다."
마법사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세요. 향수가 묻어도 사제님의 안전은 저희가 보증할 테니까."
마법사가 교통정리를 마치고 마나를 손에 둘러 양팔이 잘려나간 레프의 볼록 튀어나온 주머니를 뒤졌다.
꺼낸 것은 종이 뭉치.
"3일 전 경고대로 의견을 정리했나 봅니다. 편지네요."
그때.
마법사의 뒤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
나는 본능적으로 놀라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내 반경 3m 내에 접근하고서야 그곳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만큼 은밀했다.
이런 적은 학즉사법 1성을 달성한 뒤로 처음이었다.
'누구지?'
"데른. 편지인가?"
"그렇습니다. 부사무장님."
부사무장? 미궁 사무소의 부사무장이라고?
나는 깜짝 놀라 남자를 바라보았다.
"콜드릭 하네스⋯⋯!"
5위계 강자의 등장이었다.
콜드릭 하네스. 제국 남부 7검 중 1좌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남부 7검 중에서는 가장 그 행적이 뚜렷한 편이고, 활동도 활발하다.
무엇보다 그의 경지. 5위계.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 6위계는 제국의 역사를 뒤져야 드문드문 찾아볼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가장 알려진 6위계의 전사는 의외로 칼리움에 있었다.
정확히는 미궁.
그 제국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당당히 차지하는 자, '탐험가 파티'의 딜러 리디엠 올버스다.
물론 리디엠의 경우 전설이나 다름없기에 제외한다고 치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대의 경지는 5위계가 한계라는 말이 된다.
99%의 4위계가 좌절하는 5위계의 경지에 도달한 인간 초인.
콜드릭 하네스는 그러한 사람이었다.
"편지를 보지. 데른 자네가 읽어주게."
"네. 부사무장님."
데른이 향수가 덕지덕지 묻은 편지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내 먼저 선물을 같이 보내지. 그래도 한 사람은 살려보냈으니 단 한 명도 살려주지 않은 자네들보다는 자비롭지 않은가? ⋯⋯미친놈."
"사견은 넣지 말고."
"네."
구트란은 살아있었다.
심지어 구트란의 편지에는 자신을 도와준 내부의 배신자에 대한 암시까지 들어있었다.
미궁 4층을 점령한 클라이머들을 대표한 구트란의 요구는 간단했다.
1. 미궁 4층을 중립지역으로 지정하고, 탐험가와 클라이머 사이의 공존을 꾀할 것.
2. 미궁 4층에 있는 클라이머들의 안전을 보장할 것.
대가는 자신들이 포로로 잡은 300명의 탐험가들이었다.
종이가 굵은 이유는 300여 명의 이름과 소속 등이 전부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콜드릭은 데른에게 편지를 건네받아 직접 읽어보았다.
당연하게도 콜드릭에게 향수가 묻는 일은 없었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들어줄 가치도 없군."
"부사무장 님. 그렇다면⋯⋯."
"저들이 얼토당토않는 요구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이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군요. 300명을 인질로 삼아서."
"최대한 빠르게 토벌을 실시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클라이머와 타협은 없다.
미궁의 오랜 철칙이 300명의 목숨을 이기고 다시 지켜지고 있었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69
5위계의 전사이자 미궁 사무소의 부사무장, 콜드릭의 행동은 그야말로 거침이 없었다.
마치 자신의 말이 항상 옳다는 듯한 자신감이 넘치는 언동.
여기의 공인된 그의 실력과 배경까지 더해지니 믿음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즉시 회의를 소집하게. 장소는 바로 이곳. 3시간 뒤에 실시한다."
그렇게 말하고서는 곧장 사무소 직원에게 다가가 그들의 몸에 묻어있던 향수들을 지워냈다.
직원들이 바짝 군기가 들어있다.
"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음!"
다음으로 콜드릭은 나를 비롯한 4위계들이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수고가 많았어. 지금부터는 내가 이곳에서 귀환자들을 맞이하겠네. 3시간 뒤 회의에서 보지."
콜드릭은 5위계의 강자이기 이전에 미궁 도시 칼리움의 유명인이다.
나처럼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된다.
미궁에서 발생한 사태를 모르고 귀환할 탐험가들을 진정시키는 데에 콜드릭만한 적임자도 없으리라.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자 할 일이 없어진 4위계들이 삼삼오오 모여 미궁 1층을 떠났다.
"카리나."
"왜?"
"이 사태가 발생한 지 며칠이나 지났습니까?"
"3일 되었어."
"그렇군요."
생각보다 긴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궁 진입 통제가 3일이나 지속되었다? 전례가 없는 사태임은 분명하다.
나는 카리나를 보내고 나를 기다리고 있던 레이나와 라분이 있는 곳으로 갔다.
"돌아가자."
"네."
"알았다."
가뜩이나 미궁 9층을 탐험하며 피로가 가득 쌓여있는 상태였다.
최대한 빨리 미궁을 벗어나고 싶었다.
리디엠의 상흔을 넘어 도착한 칼리움은 더없이 시끄러웠다.
우리는 미궁의 압박감을 벗어난 상쾌함을 느끼기도 전에 귀를 막아야 했다.
"사무소는 지금의 사태에 해명하라!"
"해명하라!"
"실종 탐험가들의 명단을 공개하고 대책을 발표하라!"
"이래서 사무소를 믿고 가족들을 미궁에 보내겠냐!"
탐험가들이 수시로 드나들던 정문이 폐쇄되어 있었다.
내 평생 정문이 닫히는 광경을 본 적은 10년 전에 있었던 몬스터 웨이브 딱 한 번밖에 없었다.
닫힌 정문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가 이렇게 시끄러운데, 바깥은 얼마나 시끄러울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리더. 큰일은 큰일인가 봐요."
우리는 평소보다 이중, 삼중으로 강화된 복귀 신고를 진행했다.
"미궁 9층에 다녀왔다는 증거를 제시해 주세요."
"샌드웜의 송곳니랑, 샌드웜의 마정석입니다. 특히 송곳니는 뽑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피가 묻어 나오죠."
"출발 인원 3명, 도착 인원 3명."
직원의 뒤에서는 어느새 자리한 사무소의 마법사, 데른이 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향수 없음."
아무래도 향수 탐지기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활자가 빽빽한 책을 읽고 있는 것이 천생 마법사다.
잠시 나를 바라보던 데른이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눈이 놀란 토끼처럼 커졌다.
"어이! 루카스!"
"⋯언제 봤다고 반말이세요."
"너도 반말 써. 그것보다. 잠시 자리 좀 맡아주지 않겠어? 라파와 콜린이 자주 우리 도서관에서 네 이름 대면서 책 빌려 가는데, 그 값은 좀 치러야지."
"싫어. 나도 막 복귀했다고."
"그러지 말고!"
나는 데른을 무시하며 직원을 바라보았다.
"복귀 신고 끝났죠?"
"네. 돌아가셔도 됩니다. 다만 앞으로 미궁 출입은 무기한 정지입니다. 이점 양지해 주세요."
"제발!"
"오늘은 안 된다. 분위기도 살필 겸, 내일 다시 올 테니까 그때까지 기다리던지."
희망을 잃은 데른의 처절한 비명을 뒤로하고 미궁 사무소를 나왔다.
"리더. 지금 클라이머가 미궁 4층을 장악했다는 거죠?"
"어. 포로만 300명이래. 명단도 있는 거 보니까 확실하겠지."
"제 친구들도 있으려나."
사무소의 밖은 정말 인산인해였다.
칼리움의 모든 사람이 몰려온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미궁 도시 칼리움. 그 이름에도 알 수 있듯이 도시의 모든 기능은 미궁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런 미궁이 3일 동안 출입이 불가능해졌다는 말은, 도시 전체의 기능이 3일 동안 마비되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 가족이 실종된 사람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에 생계가 막막해진 사람들, 그냥 구경 나온 사람들까지.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내는 소음에 머리가 어지러워질 지경이다.
천천히 준비된 통로를 통해 이동하는데, 레이나가 누군가를 발견하고 얼른 다가갔다.
"피나!"
"레이나!"
"무사했구나. 걱정했어."
"겨우 도망쳤어. 루터가 아직 4층에 있어서⋯ 혹시 소식 들은 거 없을까?"
피나라는 친구는 눈물을 하도 쏟았는지 눈이 완전히 빨개져있었다.
나는 레이나의 어깨에 손을 살짝 올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부 정보를 유출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었다.
내 의사를 확인한 레이나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나도 아는 건 거의 없어. 우리도 막 9층에서 돌아온 상황이라서."
"그래⋯⋯."
피나가 다시 훌쩍이기 시작했다.
이런 사람들이 수만 명이다.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심지어 군중들 중에는 라파와 콜린도 있었다.
콜린이 흔들고 있는 깃발이 탐험가 아카데미에서 썼던 그 깃발이라 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주인님! 무사하셨군요!"
"어. 기다렸어?"
"네! 다행이에요!"
"에휴. 꼭두새벽부터 지금까지 기다렸다. 3일 내내. 라파가 가는데 안 따라갈 수도 없고."
콜린이 깔아놓은 자리를 빠르게 정리했다.
그러면서도 입은 쉬지 않았다.
"일은 4층에서 났다는데 미궁 9층에 들어간 놈을 왜 걱정하는 거야. 라파가 이상한 춤 추려고 했던 거 알아? 내가 필사적으로 저지시켜서 망정이지."
"그래도 기다려줘서 고맙긴 하네."
"밥이나 사줘. 비싼 걸로."
"그래. 바로 가자."
일은 일어난 일이고, 우리들이 일단 무사하다면 다음 행동을 생각할 시간이 있다.
나는 맥주와 스테이크를 썰며 내가 들었던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미치겠네. 그런 일이 있었어? 구트란?"
"어. 나름 유명한 클라이머야. 마법사."
"그러면 미궁 4층 토벌은 바로 이루어지겠네?"
"콜드릭의 행동력을 보면, 그렇겠지."
조물조물 고기를 씹어넘긴 라파가 내게 질문했다.
"주인님은 토벌전에 참가하실 건가요?"
"기회가 된다면. 생각보다 위험하지는 않을 것 같고, 사무소가 보상은 확실하니까."
라파가 모은 정보에 의하면 이미 실력 있는 용병이나 해결사에게 의뢰가 들어갔다고 한다.
이런 정보를 대체 어디서 모으는지, 라파와 콜린의 수완이 어느새 장난 아니게 좋아지고 있었다.
"사무소의 의뢰를 받은 대부분은 주인님과 같은 의견이에요. 상당히 질 좋은 의뢰가 들어왔다는 여론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어차피 칼밥 먹고 사는 인생이다.
사무소에 빚을 더 크게 지워놔도 득이 될지언정 해가 될 일은 없다.
"라분. 레이나. 나는 참가할 생각인데, 너희는 어때?"
"음."
"저도 문제없어요."
라분은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다시 스테이크에 열중했고, 레이나는 나름 결의가 찬 표정을 지었다.
"레이나는 사람 죽여본 적 없지?"
"클라이머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 모습을 한 몬스터라고 배웠어요."
"그래. 하지만 조심해. 최후에 순간 망설이면 죽는 건 너니까."
"알겠습니다."
순간 경직된 분위기에 콜린이 잔을 들었다.
"되도않는 소리 말고 술이나 먹어! 고생 많았다!"
그러면서 혼자 와인을 뭔 맥주처럼 벌컥벌컥 들이마신다.
나는 어이없는 눈으로 콜린을 바라보았고, 나머지는 신경도 쓰지 않으며 와인을 홀짝인다.
이제는 자연스러워진 일상이다.
* * *
다음 날. 우리 파티는 미궁 사무소 앞에서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녔다.
평상시에는 폐쇄하는 탐험가들의 출입로에서 서있자 내가 원하던 놈이 달려왔다.
미궁 사무소 소속 마법사, 데른이다.
"루카스! 왔구나. 믿고 있었다고! 빨리 들어와!"
"잠깐만 도와주는 거다."
"일당으로 은화 10개 줄게. 자자."
은화 10개?
역시 마법사가 통도 크다.
내가 마법사의 도움을 받아 사무소 안으로 들어서자 성난 관중들에게서 온갖 야유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시선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레이나는 아니었다.
레이나의 탐험가 아카데미 동창인 피나가 레이나를 향해 소리쳤다.
"레이나! 루터 소식 좀 알아봐 줘!"
"응!"
나는 레이나의 머리를 잡고 앞으로 고정시켰다.
"윽."
"괜히 알아보려고 하지 마."
"네⋯⋯."
데른은 우리를 끌고 사무소 직원 옆자리로 안내했다.
"자. 좀 부탁한다고. 내가 웬만하면 이런 부탁은 안 하는데, 사건이 사건이니만큼 조금 움직여야 해서."
"안 할 건데? 나는."
"뭐?"
"레이나."
"네. 리더."
레이나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오?"
"파티원, 레이나. 어제 교육시켰으니까 향수 판별할 수 있어."
어제 나는 감지 능력으로 4위계 전사가 향수를 판별하는 법을 관찰할 수 있었다.
마법사는 마법으로, 전사는 감각으로 향수를 감지했다.
마법사는 마법이기에, 전사는 본능이기에 방법의 전수가 힘들다.
하지만 감지 능력으로 4위계의 마나 패턴을 읽어낸 나는 다르다.
나는 하룻밤 동안 레이나에게 향수를 감지하는 눈을 가지게 하는 데에 성공했다.
물론 이것도 재능이 필요한 영역이다.
라분, 심지어 만취한 콜린에게도 시도해 봤는데, 오직 레이나만 성공했다.
"엥? 루카스 너 말고 감지를 할 수 있는 3위계가 있다고?"
"그래."
데른이 두 손을 뒤로 돌리더니 이내 손가락을 펼쳐 레이나에게 내밀었다.
"자. 어디에 향수가 묻었게?"
"오른쪽 가운데 손가락이네요."
"음. 이번에는?"
"왼손 새끼손가락."
"진짜네?"
검증이 끝난 레이나가 자리에 앉았다. 레이나는 데른에게서 아주 기초적인 교육만 받고 실무에 투입되었다.
"어휴. 죽는 줄 알았네."
나는 얼른 사무소에 온 본론을 꺼냈다.
"어제 회의는 어떻게 됐냐."
"회의? 오늘 사무소 공고가 뜰 거야. 탈환은 필수니까. 왜. 지원하고 싶어?"
"물론이지."
"너 정도면 믿을 만하지. 그러면 명단에 넣어둔다?"
"어? 그래."
순식간에 이곳에 온 목적이 달성되고 말았다.
"....."
그러면 이제 더 이상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다.
"레이나. 그럼 수고해. 밤에 보자."
"네? 리더? 어디 가세요?"
"당연히 집에 가야지. 여기 더 있을 필요 없잖아."
"저는요?"
"일당이 은화 10개야. 이런 기회 흔치 않다."
"그렇기는 해도⋯⋯."
"먼저 간다!"
"으아아앗!"
물론 바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나는 데른에게 다가가 구트란이 보낸 실종자 명단이 있는지 물었다.
"어. 머리에 있으니까. 말해봐."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당연하지 않은 사실을 말하는 데른.
'그걸 다 외웠다고?'
역시 마법사와는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되겠다.
"루터. 갓 탐험가 아카데미를 졸업한 풋내기."
"음. 포로 명단에 있어. 루터. 18세. 남자. 상업지구 출신. 탐험가 아카데미 지난달 졸업. 비트 길드."
"그렇군."
"왜. 아는 사람?"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
"그렇군. 그러면 나는 일이 있어서 이만. 땜빵 진짜 고마워!"
데른이 부리나케 레이나의 눈빛을 외면하며 도망갔다.
"주인. 라분. 배고프다."
"밥이나 먹으러 갈까?"
"좋다."
우리는 레이나를 그대로 버리고 사무소를 나섰다.
삐진 레이나는 가져다준 샌드위치 하나와 루터에 대한 정보로 해결되었다.
그리고 이틀 뒤, 우리는 1차 소집일에 맞춰 미궁 사무소로 향했다.
단순한 브리핑이었지만 각자의 무장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장비의 착용을 주문했다.
그렇게 수많은 실력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단상에 오른 콜드릭이 좌중을 둘러보며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미궁 4층 탈환을 오늘 바로 시작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미궁 5층에서 하지."
"!"
미궁 4층 탈환 작전이 시작되었다.
미궁 4층 점령 사태가 발생한 지 6일 만의, 클라이머들의 요구가 담긴 편지가 전해진 지 3일 만의 일이었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70화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