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 70-80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70

미궁 1층에 들어선 수백 명의 사람들.

한 명 한 명 만만한 사람들이 없다.

콜드릭은 그들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도 조금의 긴장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미궁 4층 탈환을 오늘 바로 시작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미궁 5층에서 하지."

"!"

이는 미리 이야기된 바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이야기가 진행될 줄은 몰랐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탈환 작전에 참가하지 않을 사람들은 1층의 감시조에 지원할 수도 있다."

눈치를 보던 일부 사람들이 감시조에 지원했다.

주로 용병과 해결사 출신이다.

사무소의 당부를 무시하고 무장을 가볍게 하고 온 사람들도 지원했다.

애초에 이런 갑작스러운 원정을 예상하기가 쉽지 않기도 했고.

나는 레이나와 라분을 슬쩍 돌아보았지만 두 사람은 내게 결연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역시 내 파티원답다.

"음. 감시조에 지원한 사람들은 사무소 직원들의 통제에 따라주게. 미궁에서 귀환할 탐험가들을 통제하고, 혹시라도 클라이머가 도주해올 경우 전투를 치러야 할 수도 있으니."

마법사, 데른이 나서 인원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녀석에게는 이미 이야기가 된 듯 일처리가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부사무장 님. 탈환조 354명. 감시조 기존 50명에 추가 34명입니다."

"좋다! 탈환조 354명은 지금 바로 나와 미궁 5층으로 이동한다!"

미궁 5층.

나와 라분, 레이나 모두 첫 방문이었다.

특히 레이나는 진척도도 모자라다.

나와 라분은 미궁 8층의 개척으로 진척도를 100%까지 쌓아놓았지만 레이나는 아예 처음인 상황이다.

[미궁 5층으로 진입합니다.]

[현재 진척도 0%.]

[주의! 파티에 미궁 5층의 입장 자격이 없는 파티원이 있습니다.]

[해당 파티원은 다른 층으로 이동할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자격 부여 조건 : 진척도 20% 달성.]

그럼에도 4층 탈환 작전에 5층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레이나를 투입한 이유가 있다.

"4층 안전지대에 무슨 장치를 해놨을지 모른다."

아무리 5위계의 실력을 자랑하는 콜드릭이라고 해도, 마법사를 포함한 미지의 적들이 직접 준비한 전장에 진입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만약 354명이 즉시 미궁 4층으로 진입한다면 난전으로 진행될 수는 있겠지만, 그런 짓을 자진해서 할 미친놈들은 없다.

미궁 5층에 도착하자 엄청난 광경들이 보였다.

"와!"

"진짜 전쟁이구나."

수많은 사무소의 직원들이 먼저 보였고, 그 뒤로 각종 물자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식량과 물, 소모품, 커다란 미궁 5층의 지도까지.

콜드릭이 단출하게 마련된 단상 위에 섰다.

"주목!"

아티팩트도 사용하지 않고 단순한 마나만 사용하였음에도 주변의 소음이 모두 멎었다.

들려오는 소리는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밖에 없다.

"미궁 4층을 점령한 클라이머들을 섬멸하는 것이 목표다! 모두 지도를 주목하도록!"

지도에는 미궁 5층의 상세한 지도와 그 지도의 길을 따라 붉은 선들이 그려져있었다.

그 붉은 선들은 결국 미궁 5층의 한 지점으로 모여들어 있었다.

"시간이 생명이다. 가장 빠르게. 해당 지점으로 이동해 미궁 4층으로 이동한다."

미궁 4층부터 6층까지는 특수한 통로로 연결되는 일이 잦다.

보통의 경우 파티가 그 통로를 통과할 경우 통로가 사라지지만, 통로를 시야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통로는 반영구적으로 유지된다.

"해당 통로는 미궁 4층 점령 즉시 사무소의 인력이 탐사해 확보한 통로로, 적 클라이머들은 전혀 파악하지 못한 통로라 확신한다."

콜드릭이 통로의 위치를 짚었다.

"부족한 시간에 적절한 인력 배분은 불가능하다. 최대한 빠르게 이 통로로 이동해 미궁 4층으로 이동한다. 다음. 미궁 4층의 지도다."

미궁 5층의 지도가 단상 아래로 내려오고, 미궁 4층의 지도가 나타났다.

"미궁 5층에서 통로까지의 거리는 통상적인 경로로 하루, 통로를 통해 이동한 미궁 4층에서 안전지대까지의 거리가 또 하루다."

각 하루 거리에 떨어진 미궁 4층과 5층의 연결통로.

더군다나 각 층의 안전지대에서 얼마 떨어지지도 않은 이상적인 위치다.

'미리 관리하고 있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겠지.'

이렇게 형편 좋게 통로를 확보해놨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 필요한 일일 터다.

"적의 상세는 미정! 하지만 괜찮다."

모두들 숨죽여 콜드릭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다시 새로운 지도가 나왔다.

이번에는 미궁 4층의 안전지대.

푸른색 선이 안전지대 내부에 둘러져 있다.

일반적으로 미궁 4층에 진입했을 때 탐험가들이 이동하는 지역이 더.

"안전지대에 돌입해 해당 지점까지만 진입해라. 진입한 뒤에는 바로 1층으로 귀환하든, 전투를 지속해 추가적인 전과를 기록해도 좋다."

"⋯⋯."

"나머지는 내가 한다."

콜드릭은 1층에 대기하고, 우리가 신호하는 순간 사무소의 정예들과 4층에 진입한다.

안전지대의 안과 밖에서 동시에 공략을 진행하는 방법이다.

"밖에서 공격하는 전력의 경우 다소 위험성이 강하다. 하지만 칼리움 시 차원에서 준비된 보상이 있고, 내 보증이 있다."

콜드릭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탈환조의 모든 인원들에게 이미 보장된 보상 외에 착수금으로 금화 10개를, 성공했을 경우에도 금화 10개를 추가로 지급하지. 추가 전공이 인정될 경우, 별도 합의를 통해 납득할 수밖에 없는 수준의 보상이 지급될 예정이다."

"와아아!"

"와아아!"

모두가 환호의 비명을 내질렀다.

당장 우리 파티만 해도 인당 금화 5개의 착수금을 보장받았다.

비교적 전력이 낮았지만, 구트란 1차 토벌전의 전공을 인정 받았기에 참가를 할 수 있었던 셈이다.

당장 탈환조의 수준은 장난이 아니다.

'라분밖에 2위계가 없어.'

대부분이 3위계에, 내 짐작으로 최소 40명 이상의 4위계가 참가했다.

더군다나 5위계의 켄드릭까지.

'질 수 없는 전투로군.'

"시간 관계상. 적절한 인원 배분은 불가능하다. 미궁 4층 지도에 집결지 세 곳을 분산시켜놨다. 각 파티 당 한 지점을 배분 받아 그곳으로 정해진 시간까지 이동하면 된다. 제시간에 이동하지 못할 경우 착수금 이외의 추가 보수는 받을 수 없다."

콜드릭이 팔을 펼쳤다.

"1시간 뒤에 이동을 실시한다! 빠르게 준비를 마치도록!"

레이나가 얼른 내 뒤에 붙었다.

"우리는 조공이네요. 주공의 시간을 버는."

"조공? 주공?"

"말이 어렵다. 레이나. 쉽게 말해라."

"⋯⋯."

레이나가 헛기침을 하고 다시 말했다.

"바깥에서 미끼 역할을 하며 클라이머들의 시선을 흩어놓으라는 말이에요. 콜드릭이 안전하게 4층에 진입할 수 있도록."

"그렇군. 바람잡이?"

"네. 예상보다 위험한 역할 같아요."

"하면. 된다."

"너무 나대지 않는 게 좋겠어."

개인에게는 엄청난 보상을 약속해 불만을 잠재우는 전략이다.

"그래도 한몫 당당히 잡아보자고."

"네!"

얼른 마련된 보급소로 달려가 배낭을 받아 식량과 식수 등 미궁 탐험에 필요한 필수품들을 배정받았다.

모두 평소 탐험을 위해 구매하는 것들보다 좋은 최상품들이었다.

육포를 꺼내 질겅이고 있는데 카리나와 켈른이 다가왔다.

붉은 송곳니 길드의 전력이었다.

"여!"

"형님!"

"너희 세 명인가?"

나는 뒤에 도열해있는 붉은 송곳니 길드의 사람들.

'4위계 세 명에 3위계 여섯 명.'

강력한 전력이다.

켈른에게 듣기로 붉은 송곳니 길드의 간부가 세 명이라더니. 모두 참석한 모양.

"네. 세 명이서 가려고요."

카리나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우리랑 같이 행동할래? 믿을만한 사람은 많을수록 좋거든."

나는 뒤쪽을 살짝 바라보았다.

콜드릭은 그 짧은 시간 때문에 우리들을 통제에 넣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개인의 기량에 맡겨 성과를 내주기를 요청했다.

용병이나 해결사 출신 등, 비교적 미궁에서의 경험이 적은 사람들은 탐험가 파티와 어울리거나, 아예 강제적으로 사무소 직원들이 탐험가 파티와의 협동을 주선하기도 했다.

물론 붉은 송곳니 길드와 합류하면 생존 가능성은 올라갈 것이고, 우리 파티의 부담은 적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 결정은 내 무한 회귀라는 능력의 총량을 깎아먹는 결과를 낳는다.

'그럴 순 없어.'

카리나와 켈른의 제안은 분명 고마운 제안이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음? 동생. 잘 선택해. 상당히 지독한 싸움이 될 거야."

"⋯형님과 카리나 님이기에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내 말은 뒤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붉은 송곳니 길드의 길드원에게도 분명히 들릴 거리다.

"건방지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제 판단 능력이 지금 미궁 5층에 있는 모든 사람들보다도 좋다고 자부합니다."

"⋯⋯."

"제가 모든 의사결정의 전권을 가질 수 있다면, 합류하겠습니다."

유일한 조건이자, 반드시 얻어야 할 조건이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붉은 송곳니 길드의 나머지 4위계 두 명이 콧방귀를 뀌며 몸을 돌렸다.

카리나와 켈른도 곤란한 표정이었다.

켈른이 멀어지는 길드원들을 보며 일을 수습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

"감사합니다."

"그래도 위험하면 언제든 찾아 와. 우리도 위험하면 찾아갈 테니까."

"네."

비록 함께하지는 못하더라도 카리나와 켈른은 충분히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짧은 회동을 마치고 라분과 레이나에게로 돌아갔다.

둘 다 나를 믿고 있는 표정이다.

그래. 이 둘과 함께라면 나는 내가 낼 수 있는 최대의 성과를 낼 수 있다.

'몇 번 죽을지 감도 안 오는군.'

사무소 직원들은 용병과 해결사들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지만 우리를 힐끗 쳐다보면서도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만큼 인원이 적기 때문이다.

우리는 채비를 마친 채로 지도 앞에 있는 직원에게 다가갔다.

"루카스, 라분, 레이나. 세 명이 한 파티입니다."

"네."

종이에 뭔가를 빠르게 적은 직원이 미궁 4층의 한 지점을 지목했다.

"이곳으로 가시면 됩니다. 앞으로 42시간 안에 도착하셔야 합니다."

그러면서 미리 그려진 지도를 건네준다.

나는 지도에 책갈피 아티팩트를 끼워 새로운 지도를 머릿속에 갱신시켰다.

"가자."

"라분. 간다."

"네. 리더."

전투를 위한 탐험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감지 능력을 십분 활용해 벌어지는 전투와, 벌어질 전투를 모두 회피하며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덕분에 미궁 5층의 통로까지 단 한 번의 전투도 치르지 않을 수 있었다.

웬만한 지역에서는 벌써 탈환조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빠르게 미궁 4층에 진입한 순간.

[미궁 4층에 진입합니다.]

[주의! 탐험을 통한 신규 층 진입이 이루어질 경우 반드시 해당 층의 안전지대로 복귀해야 층 진입이 인정됩니다.]

[기존 층으로 복귀할 시 해당 층으로 재진입할 수 없습니다.]

"레이나. 떴어?"

"네."

5층에서 4층으로의 등반이다.

미궁 4층 안전지대로 진입했을 시 미궁 5층의 진척도가 100%가 될지, 미궁 4층의 진척도가 100%가 될지 궁금해진다.

우리는 천천히 미궁의 길을 걸어나갔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71화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71

우리들은 천천히 미궁 4층을 걸어나갔다.

내 감지에 약 스무 명의 사람들로 구성된 파티가 잡혔다.

먼저 미궁 4층에 도달한 사람들이다.

"빠르군."

일반적으로 미궁 탐험은 인원이 적을수록 기동이 빠르다.

우리는 세 명의 인원으로 휴식 없이 이동했다.

거기에 내 능력으로 모든 싸움을 회피했기에 하루 거리를 18시간 정도에 주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들은 온갖 전투를 거치고도 우리보다 더 빠르게 4층에 도달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속도다.

"어쩌면, 페이스를 모르고 움직였을 수도."

저들이 우리보다 훨씬 많은 체력을 소모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미궁 4층은 현재 클라이머들의 영역이다.

"한 번 가봐야겠는데."

"네?"

"저쪽."

나는 걸으면서 상황을 설명했다.

"20명 정도와, 40명 정도가 만난다."

"40명 쪽의 클라이머 인가요?"

"접근하는 움직임을 볼 때 십중팔구는."

20명의 경우 지속적으로 관찰해왔기에 탈환조임은 확실하다.

"20명과는 5분 거리. 40명과는 3분 거리."

"40명이 더 가깝네요?"

"어."

그런데 40명은 20명에게 천천히 접근하고 있다.

탈환조 20명도 40명의 접근을 알아차리고 태세를 점검하고 있었다.

그런데 방어 태세가 이상하다?

"뭐지? 10명은 40명을 향해 후방으로 돌아섰고, 나머지 10명은 전방으로 향하고 있어."

"만약 기습이라면 양쪽에서 기습하는 것 같은데요?"

가장 가능성이 높은 추측이었다.

레이나의 말대로, 곧 20명의 전방에서 그들을 노리는 적이 감지되었다.

"오크다. 운이 안 좋았네."

오크의 움직임을 볼 때 20명의 위치를 알고 있고, 미리 기습을 준비하는 것이 분명하다.

계속해서 울리는 호각 소리가 이를 증명한다.

20명을 기습하는 만큼, 공격에 동원된 오크의 숫자는 감지된 것만 50마리가 넘는다.

50마리의 오크와 40명의 클라이머의 기습이다.

아무리 3위계 이상으로 구성되었을 탈환조의 전력으로도 감당하기 쉽지 않을 전력이다.

주변에 우리를 제외한 다른 탈환조의 파티는 없다.

곧 무언가를 결심한 듯 탈환조가 쐐기 모양의 진형을 만들어 오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영악한 클라이머보다는 우직한 오크를 노리는 판단이었다.

"쯧."

나는 혀를 찼다. 잘못된 선택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오크는 몬스터다.

보통의 오크는 강력한 통제가 없는 이상 최후의 한 마리가 죽을 때까지 싸운다.

바로 마무리하지 못하는 이상, 전투가 오랫동안 지속될 확률이 높았다.

차라리 클라이머들을 공격했어야 했다.

이들은 자기 목숨 아까운 것을 아는 놈들이다.

초반에 격렬하게 밀어붙이면 사기를 꺾을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탈환조가 우리랑 멀어지는 방향으로 이동한다. 조금 속도를 높이자."

"알았다.

탈환조는 클라이머들이 습격하기 전에 전열을 가다듬고, 그대로 오크들이 돌진해오는 곳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오크들의 움직임이 급변했다.

"!"

오크들이 무식하게 돌격할 것이라는 내 예상과 달리, 탈환조들의 돌진을 따라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닌가?

"이런 미친!"

"리더. 왜 그래요?"

"잠시만. 뭔가 이상해."

탈환조도 오크가 뒤로 물러나자 크게 당황하는 모양새였다.

미궁 4층의 오크에게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움직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크가 번 1분은, 탈환조에게는 패닉의 1분이었지만 클라이머들에게는 기회의 1분이었다.

-삐이이익!

-삐이이이익!

-삐이이익!

호각 소리가 어지럽다.

하지만 그 어지러운 호각 소리에서 규칙성이 느껴지는 것은 내 착각일까?

감지 능력을 가진 나는 마치 늑대 무리처럼 합을 맞춰 움직이는 오크와 클라이머의 움직임을 그림 그리듯 파악할 수 있었다.

마침내 탈환조가 오크와 클라이머 두 측과 같은 거리를 두고 멈춰 섰을 때.

-삐이이이익!

-삐이이이익!

오크와 클라이머가 그대로 탈환조를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

나는 거듭 감지 능력을 사용해 다른 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며 이동했다.

커다란 갈림길을 돌자 전투가 벌어지는 미궁의 넓은 통로에 진입할 수 있었다.

"죽어!"

"이 씨발 새끼들!"

"캬하하하!"

[심성류(心成流). 제1식. 방하착(放下着).]

"흡!"

"크아아아아!"

[인간 부수기.]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탈환조의 4위계들과 오크 히어로가 맞붙는 광경이었다.

히어로 몬스터.

챔피언 몬스터가 전사라면 히어로 몬스터는 영웅이다.

무려 4위계의 전사에 필적하는 전력.

미궁 저층에서의 목격 정보는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저층에서 활동하는 일반 탐험가들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존재다.

이 오크 히어로는 무려 탈환조의 4위계 둘을 감당해 내고 있었다.

[인간 찌르기.]

[심성류(心成流). 제1식. 방하착(放下着).]

[심성류(心成流). 제3식. 일성(一成).]

두 명과 한 마리가 빚어내는 심상 구현의 여파가 미궁의 공기를 울렸다.

"미치겠군."

오크 히어로가 클라이머와 함께 등장했다?

그것도 호각을 불며 서로의 위치를 공유하면서?

우연이 계속해서 겹치면 필연이라고 했다.

'고작 클라이머들이 미궁 4층을 도모하는 자신감이 어디서 나왔나 했더니만.'

이거 상당히 골치 아프게 생겼다.

"일단 지원한다. 기습으로 클라이머의 뒤를 치자. 라분!"

"음!"

라분이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적 클라이머를 향해 돌격했다.

나와 레이나가 라분의 양옆에서 라분의 뒤를 받쳤다.

난전 상황을 이용해 클라이머들의 뒤로 다가간 라분이 그대로 적의 배에 검을 박아 넣었다.

불의의 기습이다.

"끄억!"

나와 레이나는 검염을 끌어올리며 2위계 클라이머를 각자 한 명씩 맡아 그대로 베어내었다.

"뒤에 새로운 적이다!"

"경계해!"

"인원이 적어!"

하지만 난전 중의 의사소통에는 한계가 있었다.

우리는 최대한 빠르게 이동하며 적들을 노렸다.

역시나 클라이머들의 머리는 4위계 전사였다.

탈환조의 나머지 4위계가 맡아 상대하고는 있지만, 숫자의 우위를 살려 붙은 3위계 둘을 추가로 상대하고 있어 열세가 명확하다.

본래 클라이머들만 상대했다면 4위계 세 명이 포함된 탈환조가 압살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크 히어로를 포함한 오크의 변수가 싸움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도 탈환조 쪽이 경험이 높아 잘 버티는 것이 다행이었다.

"라분! 오른쪽으로 돌아!"

"우어어어!"

우리 셋은 철저히 뭉쳤다.

현재 탈환조 20명은 희생자가 속속 나오며 고통받고 있지만, 아무리 우리라고 해도 급하게 달려들면 유리한 점이 없다.

셋이 하나를 노리면 결국 3대1의 싸움이 가능해진다.

우리는 그동안 맞췄던 호흡을 통한 완벽한 협력으로, 모든 전투를 3대1로 치르고 있었다.

약 3분에 걸친 전투에서, 우리들은 적 3위계 둘을 포함한 클라이머 5명을 처리할 수 있었다.

"흥분하지 마! 천천히!"

곧 적 클라이머들도 우리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 우리는 클라이머들의 뒤에서 움직이며 포위를 견제하는 데에 만족해야 했다.

여전한 전력 차에서 너무 깊게 들어가면 살아나오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장기전으로 이어질 기미를 보인 전투는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끝났다.

-삐이이이익!

마나를 담은 호각 소리와 함께 오크 히어로의 움직임이 크게 달라졌다.

[인간 자르기.]

오크 히어로가 부상을 각오한 승부수로 비교적 실력이 떨어지는 탈환조의 4위계를 노렸다.

덕분에 다른 4위계에게 틈을 노출한다.

하지만 공격권을 얻은 4위계는 히어로를 공격하는 대신에 동료를 살리는 길을 택했다.

[심성류(心成流). 제5식. 부동심(不動心).]

반원으로 크게 휘둘러진 검이 오크 히어로의 검을 단호하게 막아섰다.

심상 구현의 충격파를 받아들여 뒤로 날아간 오크 히어로가 4위계들과 거리를 벌리고 섰다.

"크르르르."

오크 히어로가 등을 휙 돌리며 유유히 전장을 벗어났다.

그와 동시에 클라이머들과 오크들이 우르르 물러나기 시작한다.

"쫓지마라!"

리더로 보이는 4위계가 외치자 거칠게 달려들려던 탈환조들이 발걸음을 멈췄다.

20명이었던 인원 중 멀쩡한 사람은 14명.

나머지 6명 중 4명이 죽고, 2명이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오크 수십 마리와 클라이머 15명의 시체도 있었다.

준수한 교환비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질적인 교환을 고려하지 않은 수치다.

"참사야."

"그러게요."

6명이 죽는 동안 적 4위계를 잡은 것도 아니고, 히어로에게 유효타를 입힌 것도 아니다.

결국 중상을 입은 두 사람이 소생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받고 유언을 남긴 채 목이 살짝 베여 죽었다.

"⋯⋯."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바라볼 뿐이다.

곧 주변을 정리한 4위계 중 한 명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도움을 줘서 고맙네. 심성류의 크리스일세."

"탐험가 루카스입니다. 욕보셨습니다."

"예상보다 피해가 크군."

클라이머와 오크의 연합. 도대체 어떠한 연유로 이루어졌는지 모를 동맹이다.

"심성류. 전문 탐험가 집단이십니까?"

"아닐세. 칼리움에서 무류를 닦고 있네. 이번이 첫 탐험이지."

"아니. 첫 탐험을 이런 위험한 곳에서 하면 어떡합니까? 애초에 어떻게 5층으로 이동하셨어요? 이동이 불가능했을 텐데?"

"사무소 직원의 도움을 받았네."

"그게 무슨⋯⋯."

내 시선을 이기지 못한 크리스가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내 생각이 짧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

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싸늘하게 식고 있는 시체들을 돌아보았다.

이미 벌어진 일. 탓을 더 해봤자 남는 것도 없다.

그렇다고 내가 이들을 살리기 위해 자살해 줄 의리도 없었고.

"오크와 클라이머들을 먼저 감지하셨습니까?"

"그렇네. 오크를 선택했지."

"미궁의 격언이 있죠. 클라이머는 인간이 아니라, 몬스터다. 하지만 몬스터만큼 집요하지는 않습니다. 불리해지면 누구보다 빠르게 와해되죠."

"내가 실수를 했네."

크리스는 본인의 실수를 선선히 인정했다.

이미 엄청난 피해를 입었기에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나는 감지를 최대한으로 운용했다.

띄엄띄엄 탈환조로 보이는 파티들이 감지에 잡히고 있었다.

이제는 클라이머의 습격이 있다고 해도 곧바로 응원군이 올 수 있을 것이다.

"당분간 습격은 없을 것 같군요.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이동하십쇼."

암울한 분위기에 오래 있는 것도 좋지 않았다.

얼른 인사하고 떠나려는데, 크리스가 나를 붙잡았다.

"루카스. 자네는 셋이서 활동하는 건가?"

"맞습니다만?"

"우리가 미궁을 너무 얕봤네. 전투력만 있지 지식이나 지혜가 전혀 없어. 더 이상의 희생을 낼 수는 없네. 집결지에 도달하기 전까지 자네들이 우리를 선도해 주지 않겠나?"

나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붉은 송곳니 길드의 제안과 비슷하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갑을 관계가 바뀌었다는 것.

"근처 아무 파티에나 가도 저보다 뛰어난 전력을 가진 탐험가들이 있을 겁니다."

"그들은 숫자가 너무 많아. 우리들을 경원시할걸세. 애초에 그런 제안을 거절했기에 우리가 홀로 올라온 것이고."

크리스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피로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나라면 미궁 4층 탈환이고 뭐고 바로 미궁 5층으로 후퇴했을 것이다.

이 전력이라면 진척도를 쌓기도 어렵지 않을 데니.

즉, 저놈은 좋은 리더는 아니다.

하지만 무려 4위계가 셋. 전투력 자체는 뛰어나다.

더군다나 클라이머들의 습격을 대비하기 위해 연합하는 것도 우리에게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앞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판단을 저에게 맡기신다면, 받아들이죠."

크리스가 심성류의 다른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일부는 눈을 감고 있고, 일부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좋네."

"그러면 하루 동안만이라도 잘 부탁드리죠."

이 빚은 꽤 질 좋은 대가를 받아낼 수 있을 듯했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72화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72

심성류와 함께 집결지로 이동하는 동안 곳곳에서 산발적인 교전이 일어났다.

나는 감지 능력을 통해 곳곳에서 나타나는 오크 히어로의 기척을 감지해낼 수 있었다.

"오크 히어로는 최소 두 마리. 한 놈은 4위계 둘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지만, 나머지 한 마리는 그 정도로 강하지는 않아."

거기다가 클라이머의 전력으로 4위계 셋이 돌아다니고 있다.

처음에는 심성류같이 미궁 4층에 먼저 도달한 사람들의 피해가 속출했지만, 점차 파티들이 올라오면서 피해가 줄어들었다.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기 때문이었다.

'역시 첫 주자가 피를 보는 군.'

하필이면 처음 습격을 당한 게 실력만 있지 미궁에 대한 경험이 없던 어중이떠중이였던 것도 문제다.

여러모로 운이 없었다 하겠다.

마지막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기 전에 우리 파티와 심성류의 연합은 나중에 도착한 다른 파티들과의 짧은 교류를 통해 서로의 위치를 파악했다.

나는 시간을 체크하며 일행을 선도하다 적당한 자리에 멈춰 섰다.

"여기서 야영하죠."

크리스가 조심스럽게 내게 다가왔다.

"너무 탁 트인 곳에다가 세 갈림길이 시야에 보이는 곳이라니. 습격 받기 딱 좋은 장소 아닌가?"

이녀석.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지금까지 괜히 시간을 들여가며 다른 탈환조들과 소통한 이유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나는 반문하는 크리스를 바라보다 툭 내뱉었다.

"저는 이곳이 좋다고 결정했습니다만, 더 좋은 곳을 찾을 수 있다면 양보하겠습니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면 시간 낭비. 말한다고 바로 알아들을 것 같지도 않다.

이래서 내 말만 들을 수 있고 내 말을 즉각적으로 따를 수 있는 동료가 필요한 것이다.

라분과 레이나는 크리스의 말을 들은 체도 안 하고 배낭을 내려놓고 찌뿌둥한 몸을 풀고 있었다.

"알람용 종. 필요할까요?"

"음. 갈림길과 이 정도 거리. 따로 필요없다."

"역시 그렇죠?"

크리스가 잠깐 고민하더니 순순히 내게 주도권을 내밀었다.

"결정에 따르지."

그 말을 듣고서야 남아있던 심성류의 수련자들도 야영을 준비했다.

"장작은 있지만 여러분들은 따로 챙겨오지 않으셨으니 양이 부족하군요. 피우지 않겠습니다. 식사는 육표와 말린 과일로도 충분합니다. 대신 물에 불려서 최대한 많이 드세요."

"..."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식욕이 없을 테지만, 먹지 않으면 내일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합니다."

레이나와 라분은 벌써 통에 육표와 말린 과일을 넣고 신나게 흔들고 있다.

"라분. 피곤하다."

"9층에 비하면 껌이죠. 사람 죽이는 게 찜찜하기는 하지만."

"그건 맞다."

나는 레이나가 건네주는 육표를 질겅질겅 씹으며 말을 이었다.

"불침번은 두 명씩 1시간 30분 서면 얼추 맞겠네요."

그렇게 야영 준비를 하는데 우리의 뒤를 따라오던 탈환조의 다른 파티가 우리와 접촉했다.

"여기서 마무리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자리를 펴실 거면 조금 뒤에서 하시죠."

"알았다."

"오크 히어로나 클라이머의 습격은 있었습니까?"

"몇몇 파티가 습격당하긴 했다더군. 피해는 대부분 미미하다."

나와 파티의 로그가 지도를 비교하며 불침번 자리를 정했다.

"이 곳을 막아주시면 좋겠군요. 뒤를 따라오는 파티가 있으십니까?"

"그곳에서라면 대략 두 파티와 접촉할 수 있을 것 같다. 몇 시간 정도 휴식할 계획인가?"

"10시간입니다만. 지금 우리가 입은 피해가 큽니다. 무려 여섯 명이나 죽었습니다."

"이런! 그런데도 계속할 셈인가?"

"칼을 뽑았으니 고블린이라도 베어야지요."

크리스는 대화를 따라가지 못해 눈만 굴리고 있을 뿐이다.

옆에서 똑똑한 레이나가 사정을 설명했다.

"저희들이 거의 1등으로 미궁 4층에 도착했잖아요."

"그런 것 같군."

"저희가 선두에요. 우리가 숙영하려고 멈추니까 다른 파티들도 멈추는 거구요."

크리스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러면 지금까지 우리가 길을 개척하고 있었던 건가?"

"⋯모르셨어요? 그래서 지금 리더가 협상하고 계시잖아요."

나는 감지 능력이 알려주는 두 사람의 대화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나와 접촉한 탐험가의 로그가 입을 열었다.

"자네는 어떤 집결지로 배정받았지?"

"왼쪽에서 두 번째입니다."

"우리는 왼쪽에서 첫 번째라네.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선두에 서지."

"감사합니다. 적당한 거리에서 뒤를 받치죠."

라분과 레이나가 눈치를 채고 재빨리 펼쳤던 자리를 정리했다.

나는 이야기를 마무리한 뒤 로그와 함께 이동했다.

로그가 본인이 소속된 탈환조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우리와 자리를 바꿔주었다.

서로를 스쳐 지나가며 무언의 감사가 오갔다.

저들은 피해를 입으며 길을 개척한 희생에.

우리는 다음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에.

'수지 안 맞는 장사군.'

그래도 덕분에 우리는 보다 안전한 곳에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감지 능력이 보여주는 탈환조들의 위치와 지도상의 위치를 대입했다.

우리와 5분 거리에 연결된 두 개의 파티가 감지에 잡혔다.

일전의 파티가 말해준 탈환조일 확률이 높았지만, 내 감지 능력으로 클라이머와 탈환조를 구별하기는 불가능하다.

나는 레이나와 함께 걸음을 옮겨 이들과 접촉했다.

우연찮게도 우리와 접촉한 파티는 붉은 송곳니 길드의 파티였다.

대표로 넉살 좋은 켈른이 나와 우리를 반겼다.

"여!"

"형님. 공교롭군요."

"켈른 님 안녕하세요!"

"레이나도 안녕. 뭐, 예상할 수 있는 우연이지. 파티가 많지는 않으니까. 많아봐야 30파티 되려나?"

"생각해 보니 그러네요."

"그나저나 뭐야. 우리 앞에 너네가 불침번 서려고? 세 명으로?"

세 명으로는 불침번 서기도 빠듯한 숫자다. 켈른이 이를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클라이머들의 습격이 진행된 이상 서로가 서로의 방패가 되어주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믿고 의지할 방패의 단단함을 확인하는 것은 필수였다.

"아뇨. 심성류의 사람들과 합류했어요."

"심성류? 탐험가 집단이 아니잖아? 그곳도 참가했어?"

"유명한 단체?"

"어. 무예로는."

켈른이 한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무예만 아는 집단의 단점을 이미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었으니.

하지만 어차피 집결 지점에서 헤어지는 사이다.

불침번을 편안히 보내고, 적당한 대가도 받아낼 수 있다면 충분히 남는 장사다.

나는 켈른에게 우리의 야영지와 경계 방향을 설명했다.

"음. 그러면 우리는 이곳에서 야영하면 되겠군."

"감사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방진이 서서히 완성되고 있었다.

나는 반대편의 탐험가들에게도 접근하다가 우리 쪽을 향해 접근하는 인영과 마주쳤다.

아무래도 서로 목적이 겹친듯했다.

"탈환조인가?"

나는 오른발의 소매를 살짝 들어 올렸다. 얼핏 보면 잘 보이지 않는 하얀 천이 매달려있었다.

콜드릭이 지시한 간단한 피아식별표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피아식별표를 보여준 로그와 불침번 위치를 조율했다.

이렇게 하면 우리가 불침번을 통해 주목해야 할 장소가 고작 한 방향으로 정리된다.

임시로 만든 거미줄 모양의 경계 태세의 완성이다.

불침번의 초번은 나와 크리스가 맡았다.

크리스가 내게 요청한 것으로, 속이 보이는 배치였지만 뭐라도 해보려고 하는 노력이 가상했기에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둘의 대화의 자리가 만들어졌다.

크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하고 싶군."

"됐습니다. 대가는 받을 거니까."

"...."

잠시 뜸을 들이더니 바로 말을 돌린다.

"심성류는 미궁으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네."

"그렇군요."

"한 고수가 우리의 도장을 찾아왔었지. 우리 모두를 제압한 그 고수는 우리를 우물 안의 개구리라고 하더군."

"무례하군요."

"힘을 보여준 뒤라면야. 패자에게 건네는 충고로 받아들여야지. 그 뒤 그는 우리에게 미궁 탐험을 제안했다. 미궁에서 넓은 세계를 보고 오라고."

"그게 이번 탈환에 참여한 이유입니까?"

"절반은. 이것을 계기로 미궁 4층부터 빠르게 시작하려고 했었지."

"좋은 선택이 아닙니다. 미궁은 실력만 있다고 내려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무한 회귀라는 희대의 특성만 믿고 누구보다도 무모하게 미궁을 내려가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이 녀석에게는 이런 말이라도 해줘야겠다.

"밑바닥에서부터 부딪히고, 배워나가십쇼. 절대 믿을만한 구석 없이 미궁을 얕봐서는 안 됩니다."

"새겨듣지."

"미궁 경험이 많은 용병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고용해 기본적인 미궁에서의 생존법을 교육받으시면 될 겁니다."

"고맙네."

그 뒤 미궁 탐험에 대한 이런저런 조언을 해줬다.

나에게는 당연한 미궁의 지식들인데도 크리스는 들을 때마다 놀랍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말 세상 물정 모르는 놈이겠다 싶었다.

그렇게 다음 날.

우리들은 10시간의 추가 행군 끝에 집결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 와중에 클라이머나 오크들의 습격이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라분. 불안하다. 고요한 사막. 모래폭풍의 전조."

"안전지대에서 전력을 다듬고 있을 거예요."

미궁의 폭은 9층의 예외를 제외하면 1층부터 8층까지 모두 좁다.

수십 명의 전투는 가능한 환경이지만 인원이 수백 명이 넘어가면 아예 전투가 불가능하다.

특히 군인으로 육성되지 못한 탐험가는 더더욱.

때문에 집결지에서는 미궁 4층의 안전지대로 통하는 수십 개의 통로에 각각의 파티를 배정했다.

나는 우리 파티를 심성류와 엮어 배정하려는 사무소 직원의 행패를 바로 차단했다.

"세 명이서 가겠습니다. 가장 알맞은 출구로 배정해 주세요."

"⋯배정에 문제는 없습니다만. 신호와 동시에 돌격하셔야 합니다."

"문제없습니다."

"만약 정도 이상의 적에게 노려질 경우 후퇴하셔도 됩니다. 어디까지나 목숨을 최우선으로 여기세요."

"알겠습니다."

네 곳의 집결지에 각각 80명에 육박하는 탐험가들이 배치되었다.

각자 사무소가 배정한 통로를 향해 걸어나간다.

그렇게 두 시간 후.

나와 라분에게 익숙한 지형이 보이기 시작한다.

"라분. 여기 다닌 적 있어. 기억나?"

"기억난다."

"저는 처음이에요."

나는 품속에 있는 아티팩트를 꺼내들었다.

내 감지의 끝자락은 미궁 4층의 안전지대의 일부를 느끼고 있었다.

현재 내가 확인할 수 있는 안전지대는, 너무나도 고요하다.

"여기서부터는 속도를 줄여 천천히 접근하자. 안전지대까지 적들은 없어."

나는 안전지대의 끝만 시야에 담으며, 감지 능력을 점차 축소해 감지의 범위를 줄이는 대신 밀도를 높여갔다.

밀도가 거의 최대치까지 높아지자 느낄 수 있었다.

내 앞에 펼쳐져 있는, 미묘한 실과 같은 마나를.

정지신호가 떨어지자 모두의 몸이 덜컥 멈춘다.

"가만히 있어."

감지를 천천히 풀며 내가 포착한 실이 느껴지지 않는 지점까지 감지를 확장시켰다.

"⋯⋯."

그 뒤 천천히 마나를 관찰한다.

미궁 8층의 홉고블린이 설치한 함정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은밀성을 가지고 있는 마나다.

하지만 은밀성을 위해 위력을 희생했다.

실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마나로는 내게 피해를 줄 수 있는 마법의 구현은 불가능해 보였다.

나는 무한 회귀자이기에 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했다.

'걸려보자.'

생각과 동시에 행동이 이루어졌다.

내 몸이 그대로 마나의 선을 통과했다.

선은 이 통로를 지나가는 사람이라면 지나칠 수밖에 없는 길목에 설치되어 있었기에 걸리는 것도 자연스럽다.

나는 내 몸을 통과한 마나가 빠르게 움직여 안전지대를 향해 움직였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주 찰나지만 마나가 몸 전체를 훑었다.

아무래도 내 위계 정도는 읽힌 느낌이다.

"목적은 통로를 지나는 사람에 대한 정보 전달⋯ 이겠군."

만약 이 함정이 4위계조차도 발견하기 힘든 함정이라면, 우리는 미궁의 어느 지점에서 얼마나 되는 수의 사람이 통과할지에 대한 모든 정보를 노출하게 되는 셈이다.

"머리 썼군."

미궁 사무소도 마법사를 파견해서 수일 간의 정찰을 실시했다면 이런 함정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태가 발생한지 고작 일주일.

준비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사무소가 확보한 쓸만한 마법사 전력은 전부 1층에서 돌입을 준비하고 있고. 이곳에 파견된 마법사들도 급하게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형편이다.

나는 최대한의 정보를 몽니기로 했다.

"레이나. 여기 함정이 있어. 느꺼져?"

"네? 정말로요?"

"그래. 마나의 선이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해서 여기까지 이어져있어."

내가 구체적인 설명과 마나의 흐름까지 읽어줬음에도 레이나는 끝끝내 함정을 발견하지 못했다.

구트란. 향수를 발명했을 때부터 보통 마법사가 아님을 짐작했지만 이 정도 실력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2차 토벌대가 구트란을 죽이지 못하고, 심지어 죽인 것으로 착각한 이유가 여기서 드러났다.

애초에 어중간한 전력으로 싸울 수 있는 놈이 아니었던 셈이다.

"이번에는 당해줘야겠네."

내가 품에 든 임시 아티팩트에서 약간의 진동이 느껴졌다.

돌격 5분 전 신호다.

"아직 움직이지 마."

나는 조심스레 안전지대를 향해 더 깊숙이 접근했다.

안전지대 끝까지 다른 함정은 없어 보였다.

대신 안전지대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보나 마나 클라이머겠지.

"레이나. 라분. 함정 신경 쓸 필요 없어. 내 뒤로 와."

레이나와 라분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두 사람이 함정을 통과하고, 곧잘 내 뒤로 붙는다.

나는 곧바로 우리의 출구에 추가되는 두 명의 클라이머와, 다섯 마리의 오크를 느낄 수 있었다.

함정을 통과한 우리의 전력을 파악하고 배치가 늘어난 것이 분명했다.

"클라이머 넷 중 3위계가 둘, 오크 다섯 마리 중 챔피언이 하나."

객관적으로 우리를 여유롭게 상대할 수 있을만한 전략이다.

이렇게 인원을 파악하고, 전력을 효율적으로 분산해 공격에 대응한다.

정말 놀라운 방법이지만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내부에서의 습격에는 어떻게 대응할 거지?'

레이나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미끼. 실제 전력은 미궁의 신비를 이용해 4층으로 진입할 5위계의 전사 콜드릭이다.

과연 클라이머들은 여기까지 내다보고 준비했을까?

돌격 3분 전을 알리는 아티팩트의 진동이 느껴졌다.

"곧 확인할 수 있겠군."

나는 레이나와 라분에게 적의 상세에 대해 설명했다.

거의 두 배나 차이 나는 전력에 두 사람의 몸이 굳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긴다. 알겠어?"

"네!"

"음!"

"아직 적들은 우리가 자신들의 전력을 파악했다는 것을 알지 못해. 그 틈을 노린다."

빠르게 작전의 개요를 설명하자 3분이 빠르게 지나갔다.

-삐이익!

"가자!"

우리들은 함정이 있을 것이 뻔한 안전지대로 부나방처럼 달려들어갔다.

구트란이 단 하나 놓친 것이 있다면, 바로 나의 존재다.

니콜라스와 카일.

두 사람의 목숨 값은 반드시 받아낼 생각이다.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73화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73

"와아아아!"

미궁 4층의 탈환을 위한 탈환조의 공략이 개시되었다.

우리도 타이밍을 맞춰 안전지대로 달려가 미리 기다리고 있는 적에게 맞섰다.

안전지대에 바로 들어간다고 미궁 1층으로 귀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면으로 약 15m 정도를 극복해야 미궁의 신비를 발동시킬 수 있다.

이 15m를 전진해 미궁 1층에 공격 신호를 전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오크와 클라이머들이 어설픈 방진을 갖춘 모습이 보였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지 약간 거리가 떨어져 있다.

나는 수십 번의 사선을 넘은 본능적인 선택으로 왼쪽을 골랐다.

오크가 방진을 구성하고 있는 곳이었다.

"라분! 레이나! 잠깐 동안만 뒤에서 버텨!"

"네!"

아주 찰나의 시간이었다.

감지 능력을 최대로 활용한 나는 오크 챔피언의 공격을 검 한번 휘두르지 않고 피했다.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품에 파고들었기에 가능한 기예였다.

"!"

이어지며 물러나 휘두른 검이 챔피언의 목을 부드럽게 베어냈다.

단 한 번의 교환으로 챔피언과의 전투를 마무리 지었다.

그 뒤 검염을 이용해 일반 오크들도 빠르게 마무리했다.

"우어어어!"

3위계 클라이머의 맹공을 버텨내는 라분과 레이나. 반격이 제대로 먹혔는지, 오히려 검에 맞아 배를 부여잡고 있는 클라이머 한 명이 보인다.

나는 빠르게 달려가 전투의 균형을 맞췄다.

내가 라분의 왼쪽을 마크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클라이머들의 손발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한다.

애초부터 합이 맞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으니, 동일한 전력으로는 우리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나는 여유를 찾자마자 감지를 끌어올려 주변 상황들을 눈에 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내 왼쪽에 있는 파티. 심성류가 배정된 파티였다.

[심성류(心成流). 제3식. 일성(一成).]

[인간 찌르기.]

[심성류(心成流). 제5식. 부동심(不動心).]

막강한 심상 구현의 파동이 일어났다.

오크 히어로의 검과 부딪히는 크리스의 검이 밝게 빛났다.

곳곳에서 전투가 일어났지만, 전체적인 우위는 명확히 탈환조에게 있었다.

절대적인 전력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클라이머와 오크 모두 숫자는 많았지만 질적으로 우위에 있지는 않았다.

오크들이 곳곳에서 몰려들며 탈환조의 힘을 빼고 있었지만, 곳곳에 포진한 4위계들이 활약하며 오크를 무자비하게 베어 나가고 있었다.

나는 나를 맡아 공격해오는 3위계와 2위계 한 명씩을 여유롭게 상대하고 있었다.

내 파티는 인원이 고작 세 명이었기에 오크의 추가적인 증원조차도 없었다.

나는 몰래 레이나와 라분에게 신호를 보냈다.

[적당히 시간을 끌어.]

이기적인 선택이었지만 꼭 필요한 선택이기도 했다.

원래 이 전투에서 2, 3위계는 보조 전력으로 취급받는다.

핵심은 칼리움 곳곳에서 모인 4위계들의 활약이다. 이들이 얼마만큼 활약해 주는가에 따라 전체적인 결과가 판가름 난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 봤자 판이 바뀌지는 않는다.

우리가 힘을 죽이고 수비 태세에 들어가자 전투에 목숨을 걸던 클라이머들이 이를 바로 알아차렸다.

"씨발! 지금 시간 끄는 거냐?"

"몬스터가 말을 하네?"

"이 새끼가!"

하지만 적 클라이머의 능력은 나는 커녕 레이나도 제압하지 못할 정도로 약했다.

나는 일부러 시간을 끌며 안전지대의 안쪽으로 천천히 클라이머들을 끌어들였다.

혹시라도 측면에서 적의 지원이 올 경우를 대비해서다.

나는 감지에 걸리는 통로의 곳곳에서 탈환조들이 승리의 환호를 지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애초에 아무리 적절히 인원을 배분했다고 하더라도, 무너질 수밖에 없는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치고 나갈 타이밍이다.

"다 죽여!"

내 말에 레이나와 라분이 즉각적인 공세 태세로 응수했다.

레이나의 검염이 2위계 클라이머의 목을 갈라내고, 라분의 몸통 박치기가 3위계 클라이머에게 작렬했다.

내 검은 욕을 내뱉는 것에 한눈을 팔던 3위계의 심장을 그래도 갈랐다.

나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나머지 2위계 클라이머도 빠르게 정리했다.

그리고 안전지대 밖으로 달려나갔을 때였다.

"흐흐흐. 많이도 왔구나."

안전지대의 안쪽에서 지팡이를 든 중년 마법사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구트란."

미궁 4층에 있는 용모파기가 내가 봤었던 것과 똑같다.

다른 사람들은 각자의 전투에 집중하느라 구트란의 등장을 눈치채지 못한 사람이 다수였다.

일부 시야가 넓은 로그가 활을 이용해 구트란의 목을 노려봤지만, 주변 오크들이 방패를 들어 올려 모든 공격을 차단했다.

"방패라니."

오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비의 등장이다.

방패 안에서 구트란이 어떠한 행동을 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내 감지 능력에 불길한 마나가 잡히고, 클라이머와 오크가 동시에 뒤로 물러나며, 우리가 죽였던 모든 오크와 클라이머의 시체가 동시에 터진 것은 한순간이었다.

몸이 덜컥 움직이고, 내 앞을 라분이 막아서는 것이 느껴졌다.

시야가 암전했다.

"주인!"

"!"

우리가 나온 통로에서 터진 시체는 오크들의 시체뿐이다.

클라이머들의 시체는 안전지대 건너의 미궁 안쪽에 있었다.

나는 찰나의 시간 동안 터지는 모든 시체를 느낄 수 있었다.

방패로 내 앞을 막아선 라분의 튕겨진 몸이 나를 덮쳤다. 라분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내가 미궁 벽에 부딪혔다.

귀를 터뜨릴 듯 울렸던 굉음은 한참이 지나고서야 사라졌다.

"으윽."

나는 억지로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시야는 온통 뿌연 연기만이 가득했지만, 감지 능력은 이 상황에서도 빛을 발했다.

구트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미궁을 울렸다.

"살아있는 놈들을 모두 포획해!"

"네!"

"크르르르르!"

라분은, 살아있었지만 방패가 가리지 못한 두 발이 부러져 있었다.

레이나는, 왼쪽 머리가 함몰된 채로 즉사했다.

나는 라분의 희생 덕에 당장 활동에 무리가 없을 만큼은 멀쩡했다.

"...."

나는 차오르는 눈물을 집어삼키며 라분의 방패를 받아들었다.

"주인. 살아남아야 한다."

"걱정 마. 최대한 빠르게 죽을 테니까."

내 말에 고통 속에서도 얼굴에 물음표를 띄운 라분이 입을 열려고 했지만 이미 나는 멀리 달려나가고 있었다.

어차피 클라이머들도 오크들도 이런 단체 행동은 처음이다.

더군다나 뿌연 연기가 시야를 막고 있다.

나는 그대로 감지 능력을 사용해 모든 적들이 나를 스쳐 지나가게 만들고 빠르게 길을 개척했다.

그리고 미궁 1층으로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약 5m 정도가 남은 순간.

내 온몸에서 빛이 났다.

"흐흐. 역시 쥐새끼가 있었구나."

나는 이 빛이 안전지대에 돌입하기 전, 내가 일부러 걸려준 그 함정 때문에 발생하는 빛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씨발."

내 몸의 빛을 보고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클라이머들이 달려왔다.

"절대로 통과하게 하지 마라!"

나를 시작으로 곳곳에서 푸른빛들이 터져 나왔다.

미궁 1층으로 이동하기 위해 나와 같은 선택을 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방패를 힘껏 집어던지고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

하지만 내가 지나쳐온 적들까지도 내 몸의 빛을 보고 다가오는 바람에 순식간에 포위되고 말았다.

최후의 최후까지 버텨보았지만 1층 이동까지 가능한 선까지 다다르는 탈환조들은 없었다.

대략 절반이 피해를 입고, 나머지 절반이 후퇴해서 탈출한 것 같았다.

어림잡아 170명이 넘는 인명피해. 적에게 입힌 피해를 감안해도 대패나 다름없었다.

마법사.

준비된 전장에서 그 누구보다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존재다.

단 한 명, 이 엄청난 전력 차를 가지고도 마법사 단 한 명에게 무너져 패주해야만 했다.

역시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미친 짓이다.

나는 클라이머와 오크의 검에 전신이 찔리면서도, 내가 취할 수 있는 다음 수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우선, 어느 시점으로 되돌아가는지 확인하는 게 먼저다.

"다음에 보자."

"뭐라는 거야? 병신이."

한 클라이머가 내 머리를 내리치는 것을 끝으로, 강력한 고양감과 함께.

-키릭.

⋯⋯

"⋯이상의 적에게 노려질 경우 후퇴하셔도 됩니다. 어디까지나 목숨을 최우선으로 여기세요."

"윽!"

나는 갑작스러운 시야의 변동에 멀미를 하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깜짝 놀란 직원이 뒤로 물러나는 반면, 레이나와 라분이 내게 달려왔다.

"주인!"

"리더. 괜찮아요?"

"⋯⋯어."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이곳은 집결지다. 집결지에서 막 내게 진입해야 할 통로가 배분되고 있는 상황이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내가 얻어낸 정보를 정리했다.

구트란의 수를 알아냈다.

하지만 이 수를 받아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숙제가 있다.

지금 탈환조들은 각각의 집결지 네 곳에 갈라져 있었다.

이들을 모두 설득한다?

어려운 과제다.

직원이 가진 아티팩트로 부호를 통한 소통이 가능하기는 하다.

단순한 신호 몇 개로 글자를 만들어 말을 전하는 방식이다.

그나마도 한 번 한 번의 시간이 오래 걸리고, 너무 복잡한 말을 전할 수도 없다.

그래도 우선 직원들을 설득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출발 몇 분 남았죠?"

"30분 정도 남았습니다."

"다른 곳에 갈 시간은 있겠군. 라분! 레이나!"

"네!"

"음."

"가자!"

"잠깐. 어디 가시는 거예요?"

나는 직원의 말을 무시하고 심성류의 크리스에게 다가갔다.

"크리스. 이곳에 도착하는 것을 도와드린 댓가. 바로 요구하겠습니다."

"음? 그래. 좋네. 웬만한 부탁은 모두 들어줌세."

"옆 집결지로 이동할 겁니다. 당신만 제 파티를 따라와 주세요."

"그러지."

나는 머릿속 지도를 떠올리며 몸을 내달렸다.

나 혼자서 이야기하면 약발이 너무 떨어진다.

최소한 공신력 있는 자의 보증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다다른 옆 집결지에는 내가 찾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붉은 송곳니 길드의 간부. 카리나다.

"카리나!"

"루카스?"

간부들과 지도를 보며 회의를 하던 카리나가 깜짝 놀라 나를 보았다.

켈른도 고개를 돌려 내 모습을 보고 반색했다.

"루카스! 합류하러 온 거야?"

"네. 다만 먼저 이야기 드릴 건이 있습니다."

"뭐지?"

"구트란이 판 함정에 대해서입니다."

"마법사가 함정을 팠다는 건 모두가 예상하고 있어. 그 함정의 정체를 알 수가 없다는 게 문제지."

나는 과거의 경험을 섞는 것을 선택했다.

"제가 1차 구트란 토벌전에서 미끼 역할을 맡으셨던 것. 기억하십니까?"

니콜라스의 부하, 클라크의 목걸이에 든 향수를 미끼로 구트란을 자극하는 역할을 내가 맡았다.

구트란은 미끼를 그대로 물고 게랄프를 스스로 함정에 빠뜨렸었다.

"그랬지."

켈른도 내게 한 마디 거들었다.

"그때 네 활약이 대단했어."

"저는 구트란이 신호를 보냈다고 판단하자마자 구트란에게서 시간을 끌기 위해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지점을 통과하는 순간, 아주 미묘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뭐지?"

"미세한 마나가 제 몸을 훑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마나는 밖으로 빠져나가 구트란에게로 흘러들어갔죠."

"그래서?"

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다행히도 카리나는 내 말의 진실성을 의심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집결지에 도착하기 한 시간 전, 미궁의 벽을 통과할 때 다시 그 미묘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확실합니다."

사실 그런 느낌은 전혀 받은 적이 없다.

하지만 내 말에 거짓이 숨겨져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닿았을 때, 저는 이 마법이 어떤 마법인지 깨달았습니다."

"정보, 구트란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마법이겠군."

"맞습니다. 감지에 일가견이 있는 저도 걸리기 전까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의 마법입니다. 그만큼 은밀하기에 보다 적은 마나로도 발동할 수 있겠죠. 각 통로에 이 마법이 걸려있다면."

"좋지 않아."

붉은 송곳니의 또 다른 간부가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당신이 그 마법의 존재를 알아챘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지?"

"칼. 루카스의 감지 능력은 내가 보증할게. 그는 뛰어난 탐험가야."

"⋯⋯."

"만약 제 느낌이 기우였다면 다행이겠지만, 사실이라면 불특정 다수의 통로에 무작위로 인원을 배치해 예측 못한 공격을 하겠다는 우리의 의도가 모두 들통나고 맙니다."

"공격 시간을 늦추더라도 확인할 가치는 있겠어."

크리스도 눈치 좋게 내 편을 들어주며 같이 사무소 직원에게 갔다.

카리나의 조곤조곤한 말과 크리스의 밑도 끝도 없는 확신이 담긴 말에 설득당한 직원이 사무소 소속의 마법사를 불렀다.

"렉트 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능성이 있으니까 검증해 볼 필요는 있겠지. 빠르게 이동해 보자."

나와 카리나, 크리스, 렉트까지 네 명은 근방의 가장 가까운 통로로 이동을 시작했다.

구트란을 천천히 무너뜨리는 작업의 시작이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74화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74

구트란이 펼쳐둔 함정을 미리 탈환조에게 알리고, 이를 대비하게 해야 한다.

우선 내가 죽음으로 파악한 구트란의 마법은 총 세 가지.

첫 번째.

통과한 사람의 인원수, 경지를 파악할 수 있는 마법.

두 번째.

오크와 클라이머의 시체를 폭발시켜, 4위계조차도 죽일 수 있는 마법.

그리고 마지막.

첫 번째 마법을 통과한 사람의 몸에서 빛이 나게 하는 마법.

하나하나가 쓰기에 따라 강력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마법이다.

하지만 첫 번째 마법만 피할 수 있다면, 세 번째 마법을 전혀 쓰지 못하게 할 수 있고, 두 번째 마법의 위력도 반감시킬 수 있다.

미리 집결지에 배치된 사무소 직원들이 우리를 기다리면서 놀고먹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침투로를 미리 정찰하고, 클라이머와의 가벼운 교전도 진행했다고 한다.

사무소 소속 마법사인 렉트의 말이다.

"안전지대 근처에 정도 이상으로 접근하지는 않았지만 말이야."

"그렇군."

내 주장에 의해 실시된 정찰은 나와 카리나, 렉트, 그리고 크리스가 맡았다.

마법사인 렉트는 몸을 빨라지게 하는 마법으로, 카리나와 크리스는 4위계의 증가한 신체 능력을 발휘해 움직였다.

반면 나는?

"좀 천천히 좀 가요! 감지도 하면서 가야지!"

아무리 3위계 중에서는 특출나다고 할지라도 결국 3위계는 3위계다.

학즉사법의 마나를 이용해 처음에는 이들과 발걸음을 맞출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쳐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처음 30분을 무리 없이 쫓아갔으니, 단기 체력은 비등하다고 봐도 되겠다.

나머지 셋이 내 페이스에 맞춰주고서야 겨우 숨통이 트인다.

대화도 나눌 수 있을 만큼 체력을 회복하고서야 입이 트였다.

"함정을 감지하지 못하면 계획대로 가야겠지."

"어차피 몸으로 부딪히는 일이었으니까."

"전체적인 피해가 어느 정도 발생했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차례대로 카리나와 렉트, 크리스의 말이었다.

크리스의 질문에는 렉트가 답했다.

"사망인지, 실종인지, 임무 포기인지는 집계되지 않았지만 최초 출발 기준으로 35명이 집결지에 도달하지 못했어. 체력 안배를 감안하면 지금 도착해도 안전지대 진입 전력으로 쓰기에는 무리가 있지."

"35명인가⋯⋯."

크리스가 쓰게 웃었다.

그중 6명이 자신과 동고동락하던 동료였으니.

이 대답으로 본인의 수준이 얼마나 낮았는지 깨달았을 것이다.

앞서가던 내가 손을 들어 일행을 잠시 정지시켰다.

"잡담은 그만. 이제 다 왔습니다."

집결지에서 안전지대로 통하는 가장 가까운 통로에 진입했다.

통로는 상당히 넓어 이곳에 파티가 배정된다면 20명이 넘는 인원을 투입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다.

"여기서부터는 천천히 접근하죠."

"그 마법이 펼쳐져 있을 거라 확신하나? 마법사인 나도 별다른 마법을 감지하지는 못했어."

"없으면 다행이죠. 위협 하나를 줄였으니까."

하지만 마법은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고, 이 마법을 어떻게든 하지 못하면 전멸한다는 사실은 이미 증명되어 있다.

단지 내 머릿속에만 있는 이 지식을 이들에게 납득시키는 일만 남았을 뿐.

'귀찮군.'

라분과 레이나였으면, 단 한 마디로 끝날 일을 이루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귀찮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게 신뢰가 없는 사람에게 내 말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이런 수고도 들여야 하는 법이다.

"가시죠."

나는 감지 능력을 구트란의 마법을 감지할 수 있을 만큼으로만 조절한 뒤 성큼성큼 앞서나갔다.

뒤에서 세 사람이 잠깐 주춤하다가 나를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한참을 말없이 걷자 구트란의 마법이 느껴졌다.

내가 보여주기 식으로 잠깐 주춤하자 카리나가 다가왔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인다.

"4층 안전지대까지 겨우 50m도 남지 않았어. 더 들어갔다가는 발각될지도 몰라."

"마법. 찾았습니다."

"뭐?"

렉트가 내게 다가왔다.

"어디?"

"5m 앞입니다. 들키지 않으려면 제 지시에 따라주셔야 합니다."

나는 이들을 마법 바로 앞으로 인도했다.

"향수보다 감지 난이도가 더 높습니다."

내 말에 카리나는 바로 마법을 감지하는 것을 포기했다.

애초에 향수조차도 제대로 감지 못했으니, 나름 현명한 선택이다.

"어디있다고?"

심성류의 크리스와 마법사 렉트가 아리송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가느다란 실 형태입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마나가 미세하게 흐르고 있어요."

나는 이 통로를 통과하려면 지나갈 수밖에 없는 가상의 선을 그어 보였다.

렉트가 마법사의 호기심을 발동했다.

"일단 너를 믿어야지. 실의 끝은? 느껴지는 실의 색깔이 있나? 마나는 얼마나 투입되었다고 생각하지?"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 마나의 실에 대해 알려주자 렉트가 고심하기 시작했다.

의외로 먼저 단서를 잡은 사람은 렉트가 아닌 크리스였다.

"이것인가!"

목소리가 너무 커서 나와 카리나가 기겁을 했다.

렉트는 아직도 집중하고 있었기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고.

질책받은 크리스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흠흠. 미안하네. 실은 끝이 없군. 실의 양 끝이 미궁 4층의 안전지대로 이어져 있어."

"제대로 짚으셨습니다."

"호흡법으로 정신을 도야시키고 나서야 겨우 이질감을 찾을 수 있었네. 정말 대단한 마법이야."

마법사보다 전사인 크리스가 먼저 단서를 찾았다는 점이 놀랍다.

내 감상에 크리스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심성류는 주변 사물을 느끼는 데에 다른 무류보다 더욱 특화되어 있다네. 적의 위치나 인원을 미리 알 수 있게 되기도 하지."

"음. 확실히."

심성류들은 이전에 6명이 죽은 전투에서, 분명 거리가 어느 정도 떨어져 있음에도 오크와 클라이머의 거리를 재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었다.

물론 내 감지 능력보다는 못했지만.

"이 능력으로 미궁을 편하게 다닐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내 오산이었지."

아닌데요?

감지 능력. 잘만 쓰면 미궁 진짜 재미있게 다닐 수 있는데요?

물론 내 대답은 속으로 삼켰다.

그 뒤로 한참을 마나를 운용하던 렉트가 식은땀을 훔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보였다. 하지만⋯⋯ 이렇게 어려운 함정이라니."

"이게 수준이 엄청난 겁니까?"

"은밀성으로만 비교하자면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실력을 발휘했어. 구트란이 4써클 마법사라고? 웃기고 있네. 5써클 마법사가 분명해."

"!"

5써클 마법사.

왠지 4위계 전사들을 엄청나게 죽이고 다닌다고 했다.

다 믿고 있는 실력이 있기에 나대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잠깐만. 그러면 전력은 비등비등한 거 아냐?'

5위계의 전사 콜드릭과 5써클 마법사 구트릭을 동수로 생각하자.

클라이머와 오크의 연합. 그리고 탈환조들의 연합.

둘 다 조직력은 없다시피 하다.

질은 우리가 위라고는 하지만 양에서 부족하다.

구트란은 그 양을 시체 폭발이라는 엄청난 마법으로 승화시켰고.

"⋯⋯."

어쩌면 이번 회귀로도 마무리하지 못할 수 있겠다.

내 감상과는 별개로 렉트는 구트란의 마법에 대한 정밀한 분석을 진행했다.

"마법을 접촉한 자의 마나를 분석⋯ 아니, 먼저 다시 은밀성을 강화하는군⋯ 필요한 정보를 얻고⋯ 뭐? 마법을 이식한다고?"

혼자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린 렉트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눈이 비정상인 특유의 형형함으로 물들어 있다.

저런 인상을 가진 놈에게는 접근하지 않는 것이 상책인데⋯

어째 점점 내게 다가온다?

"루카스라고 했냐?"

"그렇습니다만?"

"이름. 꼭 기억하지. 만약 이 작전이 성공한다면, 네가 일등 공신이 될 테니까."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라 별 감흥도 없다.

이미 전멸해버린 탈환조를 본 나이기 때문이다.

"돈이나 두둑하게 챙겨주시죠."

"좋지. 빨리 돌아가자."

우리는 조용히 집결지로 돌아갔다.

렉트는 우리를 계속해서 재촉했다.

뛰어가며 아티팩트의 발신 가능 거리에 도착하자마자 신호를 보내며 일행들을 불러 모았다.

"헥헥!"

"리더!"

"주인! 돌아왔구나."

"개고생 했다. 라분. 어땠어? 주변 분위기는."

"사무소 직원. 마구 몰려왔다. 주인이. 해냈다."

"해내기는. 할 일 한 거야."

나는 간략하게 지금의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면 우리도 그 함정을 통과했다는 말씀이세요?"

"어. 아마도."

"아마도?"

"그렇게 알아둬."

레이나나 라분에게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내 무한 회귀는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최대의 비밀이다.

이렇게 얼버무리는 수밖에.

마침 카리나가 대책 회의를 하다가 나를 불렀다.

나는 옳다구나 하고 임시로 마련된 탁자 근처로 갔다.

이미 회의는 결론이 나 있었다.

렉트가 다짐하듯 말했다.

"공격은 무조건 감행한다."

"함정이 있다는 것이 확실한대도 간다는 말이죠?"

"없어도 공격했을 테니까. 함정의 존재를 알았으니 오히려 기회지."

맞는 말이기는 했다.

나는 시큰둥하게 물었다.

"마법언 대한 대책은?"

"대책이라기보다는 대비지. 그 대비를 위해 공격 시점을 조금 늦추기로 했다. 3시간 정도."

"안전지대를 한 번 왕복할 수 있는 거리로군요."

"감지 능력도 좋고, 눈치도 빨라."

약 30분 동안의 소집으로, 감지 능력에 일가견이 있는 4위계 전사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나와 렉트, 크리스는 이들과 함께 구트란의 마법이 설치된 장소로 은밀하게 이동했다.

이들 20명 중 구트란의 마법을 인식한 자들은 겨우 8명.

심성류의 4위계들은 모두 인식한 것을 보아하니 감지에 특화되어있다는 크리스의 말이 허언은 아닌 모양이다.

"우리 셋을 합하면 11명. 충분해."

빠르게 복귀한 렉트가 작전의 개요를 설명했다.

"나는 머리를 잘 쓰지는 못하지만, 누구나 아는 평범한 작전보다는 조금 더 진보된 작전을 구상할 수 있어."

"⋯⋯."

"적의 함정을 알았으면 이용해야지."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11명으로 구트란을 교란시킨다. 정예가 빠르게 안전지대를 돌파해 미궁 1층의 지원을 부르는 거야."

우리의 인원에 대한 상세는 알려졌다고 봐도 좋다.

만약 구트란의 마법을 이용하겠다고 마법에 걸려드는 인원수를 조절하면 구트란이 우리의 작전을 알아차릴 가능성이 높다.

"10명만 줄어들어도 발각될 거야. 나라도 그렇게 생각할 테니까."

렉트가 파티의 배치를 이리저리 바꿨다.

"그렇다고 마법에 걸린 인원을 다른 통로로 이동하면 발각될 확률이 높아. 정확히 분석하지 못한, 마법 속에 숨겨져있던 마법이 걸려."

정확히 그 마법은 접근하는 적의 몸을 밝게 해주는 마법이지만.

그렇다고 위치 탐지 마법이 붙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

"내가 생각한 작전은 이거야."

그렇게 작전이 시작되었다.

우리 파티는 일전에 배치된 그 통로를 걷고 있었다.

"여기 구트란의 마법이 있어."

나와 레이나, 라분은 침을 꿀꺽 삼키며 구트란의 마법에 일부러 걸려들었다.

하지만 우리 뒤를 따르는, 한 명의 마법사와 여덟 명의 4위계 전사들은 내 인도에 따라 함정을 피해내는 데에 성공했다.

우리의 앞에 배치된 적들의 숫자는 기존과 같다.

"클라이머 넷 중 3위계가 둘, 오크 다섯 마리 중 챔피언이 하나."

적의 대응 능력을 넘는 엄청난 과잉 전력의 투입은 전황을 크게 바꿔 놓기에 충분했다.

나머지는 통로에서는 마법의 존재를 알면서도 모두 마법에 걸려들어 적의 전력 분산을 유도했다.

"시작한다."

아티팩트가 울리고, 우리 파티가 선두에 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미궁 4층 안전지대 공략.

그 두 번째 도전의 시작이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75화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75

처음의 전투 양상은 이전과 동일하게 진행되었다.

탈환조가 튀어나오는 모든 출구에 적절하게 배치된 클라이머와 오크의 병력들.

사람 죽이는 것이 일인 놈들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탈환조에게 달려든다.

"죽어!"

"크라아아아악!"

곳곳에서 난무하기 시작하는 검염과, 심상 구현의 여파.

나는 이전의 전투와 같이 오크의 틈을 파고들어 챔피언을 간단하게 제압했다.

다만 여기서 조금 더 집중했다.

내 검이 챔피언의 몸을 가르는 순간, 나는 감지 능력을 최대로 집중해 챔피언의 몸속을 살폈다.

구트란의 두 번째 마법, 시체 폭발.

그 폭발이 클라이머와 오크의 시체에서 일어났다면 분명 마나의 흔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챔피언과 일반 오크들을 베어나갔음에도 구트란의 흔적을 바로 찾아낼 수는 없었다.

'뭐지?'

시체 폭발 마법은 4위계를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보통이라면 내재된 마나를 느낄 수 있어야 정상이다.

'내 능력이 모자란 건가? 아니야. 구트란이 마음먹고 숨겨놓은 마법조차도 찾아낸 나다.'

당황스러웠지만 잡념을 버렸다.

어차피 시체 폭발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고, 사전에 라분과 레이나에게도 미리 공유를 했다.

더불어 내가 죽기 전, 라분은 시체 폭발의 전조를 알아차리고 놀라운 반사 신경으로 나를 보호했었다.

기습적으로 폭발했을 때도 짧게나마 방어가 가능했으니, 미리 시체에 잔뜩 신경을 쓰고 있는 지금은 충분히 방어가 가능했다.

우리는 미리 이야기한 대로 크게 밀리는 모습을 그려내며 점차 안전지대 밖으로 물러났다.

마침내 우리의 유인에 걸려든 클라이머들이 미궁 안으로 발을 디뎠을 때.

[심성류(心成流). 제3식. 일성(一成).]

[청염검법(靑炎劍法). 제4식. 화염꽃.]

[귀살검(鬼殺劍). 제2검. 그림자 베기.]

곧바로 퍼부어진 과잉 전력이 클라이머들을 말 그대로 도륙 냈다.

적 3위계의 목을 손쉽게 효수한 크리스가 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이제 우리에게 맡기게."

"잘해보슈."

결사대의 역할을 맡은 4위계의 8명이 안전지대 밖으로 튀어나갔다.

"리더!"

"어디 다친 곳은 없지?"

"네!"

"라분. 멀쩡하다."

나는 심상 구현을 얻어맞고 조각조각 나버린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라분과 레이나는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난다는 표정이다.

"정말⋯ 이게 폭발한다는 말씀이세요?"

"가능성은 있어."

이미 내가 맡은 역할은 다 했다.

"라분. 레이나와 같이 바깥 상황을 지켜봐 줘. 나도 곧 따라갈 테니까. 오크 시체에 너무 가까이 있지 말고."

"알겠다."

라분과 레이나가 바로 안전지대를 향해 달려갔다.

나는 감지 능력을 최대한으로 집중하면서 시체를 뒤지기 시작했다.

분명 흔적은 있다.

향수 범벅인 시체 조각을 하나씩 수색했다.

이내 수상한 부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머리."

정확히는 오른쪽 눈 뒤편.

확실한 인간의 시체인데 마정석이 존재했다.

나는 마정석의 조각을 들어 올렸다.

"이거군."

원래라면 뇌에 박혀있었을 법한 조각이다.

다른 시체에도 똑같은 위치에 각각 마정석이 박혀 있었다.

아무리 미궁에서 클라이머를 몬스터로 여기라고 해도 클라이머는 인간이다.

머리에서 마정석이 나올 리가 없다.

"이러니 바로 발견을 못하지."

마정석의 조각은 작았지만, 안에는 구트란의 마나가 잔뜩 들어있었다.

이 정도 마나라는 충분히 시체 폭발 마법을 일으키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래도 자신의 뇌에 마정석을 박아 넣게 허락하는 놈이 있다니.

정말 이 새끼들은 미친놈이다.

우선 마법의 정체를 알아냈으니 다음은 외부 탐색이다.

나는 얼른 안전지대 밖으로 이동했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4위계 결사대의 출진 후 1분.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이런 전투에서는 충분히 긴 시간이기도 하다.

"주인!"

"어때?"

"나쁘지 않다."

포위를 뚫은 8명의 4위계들이 빠르게 전진하고 있었다.

급히 모습을 드러낸 구트란이 손을 뻗으며 각종 마법을 전개하고 있었지만, 개별로 움직이는 4위계들을 상대하지는 못하고 있다.

"좋네."

나는 우리 근처에 널브러져 있는 오크들의 머리를 잘라낸 뒤에 멀리 내던졌다.

"리더. 머리를?"

"머리에서 내가 말한 마법이 발동될 거야. 조심해."

"그렇군요."

클라이머와 오크들이 4위계들을 막지 못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적들의 틈을 뚫은 4위계들이 곳곳에서 미궁 1층으로 이동했다.

안전지대에서는 전투 상황과 관계없이 미궁 1층으로 이동할 수 있다.

그 모습을 본 탈환조가 일제히 환호했다.

이미 안전지대의 출구를 둘러싸고 있는 적들과의 전투는 마무리되고 있었다.

"크크크. 이 썩을 놈들."

구트란이 흉흉한 눈으로 지팡이를 낮게 휘둘렀다.

지팡이 끝의 보석에서 비롯된 검은색 마나가 안전지대의 바닥을 훑었다.

나는 도의상 외쳤다.

"시체가 폭발한다! 피해!"

마나를 담아 소리쳐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했다.

황급히 목소리의 주인을 찾은 구트란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나는 씨익 웃으며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븅신."

"!"

곧 엄청난 폭발이 미궁 4층의 안전지대를 울렸다.

하지만 내 첫 번째 죽음과는 달리, 사상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내 말에 마법사의 무서움을 느끼고 자리를 피한 탈환조가 많았기 때문이다.

"으으!"

"아아아아악!"

물론 부상을 입거나 즉사해버린 자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내 파티 근처에는 머리가 없었기에 어떠한 폭발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폭발로 발생한 분진이 비교적 적었고, 그 분진을 뚫은 구트란의 눈이 여전히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이번에는 양손의 중지를 내밀었다.

"어쩔 건데?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

귀도 좋은지 내 말에 반응한 구트란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내게 지팡이를 내밀었다.

나는 얼른 근처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마법은 날아오지 않았다.

바로 고개를 내미니 주변 클라이머들의 호위를 받은 구트란이 안전지대의 입구를 포기하고 후퇴하고 있었다.

폭발의 분진을 뚫은 탈환조의 마법사, 렉트의 외침이 들려왔다.

"계속 추적해! 끝장을 본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내 감지 능력이 미궁 4층 안쪽에 속속들이 등장하는 기척들을 잡아냈으니까.

나는 최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앞서나갔다.

곧 콜드릭과 대치하는 구트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크크크. 칼리움의 늑대가 납셨군."

"클라이머 마법사. 구트란."

두 사람이 뿜어내는 마나가 주변을 압도했다.

콜드릭은 세워놓으면 웬만한 여자 몸 정도는 완전히 가릴만한 대검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느껴지는 콜드릭의 몸이 이리저리 흐려지고 있었다.

'구트란의 함정!'

역시나 구트란은 미궁 1층에서의 급습을 대비한 대책을 세워놓고 있었던 모양이다.

"재미있는 함정을 파 놨군. 하지만 술사가 집중하지 못하면 이런 결계는 힘을 못 쓰지."

[개천(開天). 화우(花雨).]

콜드릭이 쏘아보낸 마나가 주변에 배치된 마정석들을 모두 부숴냈다.

사방으로 쏘아내지는 검기(劍氣)는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 있는 클라이머와 오크들에게도 피해를 입힐 정도로 강력했다.

"크크크크."

"깔끔하게 죽여주지. 포로로 잡은 300명을 넘겨라."

기묘하게 이어진 대치 상태에서, 구트란의 목소리는 음흉함을 넘어서 오히려 편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콜드릭 하네스."

"⋯⋯."

"내가 너를 이곳에 초대하면서, 너를 위해 고작 결계만 준비했으리라고 생각했나?"

그 순간. 유일하게 멀쩡했던 건물, 미궁 사무소의 문이 열리며 한 마리의 오크가 걸어 나왔다.

그 생김새는 오크였지만 체형은 놀랍도록 인간과 닮아있었다.

더군다나 머리 양쪽에서 자라난 뿔.

나는 지식으로나마 저 오크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오크 족장⋯!"

하지만 구트란이 꺼내는 말은 내 예상과 한참이나 동떨어져 있었다.

"크크크. 보아라. 포로 300명의 영혼을 먹고 깨어난, 미궁의 악마다."

미궁의 악마?

내가 구트란의 말을 해석하기도 전에 콜드릭이 대검을 높게 들어 올렸다.

"전군!"

"!"

"타협은 없다! 오늘 끝을 본다! 클라이머, 오크들을 처단하라!"

콜드릭이 오크 족장에게 달려들어 일검을 내질렀다.

오크 족장도 마주 검을 내밀며 콜드릭의 검을 받았다.

콜드릭의 검에서 5위계의 상징. 검기가 일렁거렸다.

전투의 결과는 놀라웠다.

"백중세!"

누구도 손해와 이득을 얻지 못한 결과였다.

콜드릭의 실력과 위상을 생각하면 정말 믿지 못할 상황이었다.

그 경과를 관찰할 틈도 없이 탈환조와 사무소의 정예들이 클라이머와 구트란을 향해 달려들었다.

온갖 심상 구현과 검염이 난무하며 클라이머와 오크의 군세를 깎아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서도 오크 족장의 중얼거림 거리를 무시한 채로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저게 내 새로운 몸인가?"

"크크크. 그렇습니다. 제가 선사해드리는 선물이죠. 모쪼록 만찬을 즐기시기를."

"이 몸은 너무 좋지 않군. 이곳에서 수확할 영혼을 전부 공양해라. 어서 힘을 더 사용하고 싶군."

"물론이지요!"

오크 족장은 명백히 콜드릭을 무시하고 있었지만, 콜드릭은 신경조차 쓰지 않으며 검에 모든 일념을 불어놓고 있었다.

"호오?"

검기가 점차 반듯해지기 시작하자 오크 족장의 탈을 쓴 무언가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 모든 실력을 발휘해라. 기다려주지."

나는 이 틈을 노려 라분과 레이나에게 다가갔다.

"일단 미궁 1층으로 돌아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간다."

"주인은?"

"조금 더 상황을 보다가 갈게."

"같이 가요!"

내가 이들을 어떻게든 보내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데른이 외쳤다.

"케빈, 질! 1층으로 이동해! 지원을 불러!"

악마가 그 말에 반응했다.

"그건 안 되겠구나. 제물들아."

악마가 우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악몽의 강림!]

[미궁의 악마. 아스모데우스가 이곳을 저주합니다.]

[미궁 1층으로의 이동이 제한됩니다. ]

[안전지에 밖으로의 이동이 불가능해집니다.]

[해제 조건 : 24시간 경과 또는 아스모데우스의 죽음]

"미친!"

나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궁의 악마?

신화에서나 나올법한 존재다.

그런 존재를 포로 300명을 제물로 소환하다니.

역시 구트란은 미친놈이 틀림없었다.

전투조차 멈춘 채로 잠시 멍하니 미궁의 신비를 바라보는 탐험가와 클라이머들.

심지어 오크도 허공을 바라보는 것이, 저들도 신비의 영향에 들어간 듯했다.

잠시 주춤한 우리를 깨운 것은 콜드릭의 일갈이었다.

"전군 돌격! 적을 섬멸해라!"

다시 정신을 차린 탈환조와 지원군이 적을 공격했다.

죽음과 피가 난무했다.

구트란과 데른, 렉트가 마법을 나누고, 클라이머들의 저항이 점차 약해졌다.

이쯤 되자 구트란도 평정심을 잃고 점차 다급해졌다.

"태초의 존재시여! 어서 적들을 물리쳐주소서!"

"시끄럽다."

"!"

"버러지들이 죽으면 영혼을 더 수확할 수 있으니 좋지 아니한가. 내 종인 너의 목숨만은 살려줄 터이니 걱정하지 말도록."

"무슨!"

안전지대 전체에 쩌렁쩌렁 울린 악마의 선언에 클라이머와 오크들이 얼음이 되었다.

오크들에게도 악마의 뜻이 전해진 모양이다.

그 발언을 기점으로 클라이머들의 전열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클라이머들 중 일부는 구트란을 노리기까지 했다.

"이 씨발 새끼가! 약속이 다르잖아!"

"크크. 잠깐. 나도 몰랐다고."

4위계임이 분명한 클라이머가 구트란을 기습했지만, 오히려 그의 목이 사라졌다.

구트란이 폭발 마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크크크크! 마법사에게 몸을 함부로 맡기는 게 아니지."

구트란이 주변 클라이머들의 머리를 모두 폭발시키고 뒤로 훌쩍 날아 악마의 뒤에 착지했다.

"위대한 존재시여. 그대의 뜻에 따르겠나이다."

"내 약속대로, 너에게 영생을 보장하지."

"감읍할 따름입니다."

절망에 휩싸인 클라이머와 오크의 잔당이 빠르게 정리되었다.

포로가 고작 10명도 남지 않은, 너무나도 잔혹한 마무리였다.

그와 동시에 콜드릭이 검을 내밀었다.

역시 그는 일생일대의 전투를 준비하기 전에 우리에게 적을 섬멸할 시간을 끌어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악마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던 모양이다.

"인간. 준비는 되었나?"

"그래. 악마."

"좋다."

악마의 검이 검은빛 검염을 뿜어내며 들어올려졌다.

그제야 나는 악마의 경지를 자세히 관찰할 생각을 했다.

'4위계! 5위계가 아니군!'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었다.

콜드릭과 악마가 다시 검을 맞댔다.

도저히 1대1의 전투라고는 믿기지 않을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었다.

악마와 인간의 대결이 펼쳐졌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76화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76

악마. 아스모데우스의 검은 마치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콜드릭의 검기가 아무리 아스모데우스를 공격해도, 악마의 검은 인간에게 정도 이상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개천(開天). 범람.]

[%&₩=%]

아스모데우스의 심상 구현은 알 수 없는 언어로 점철되어 있었다.

"악마어(惡魔語)야. 정말 악마가 맞군."

어느새 내 옆으로 온 사무소의 마법사, 데른이 중얼거리는 말이었다.

"악마어?"

"이름만 들어도 알잖아. 미궁에 사는 악마가 쓰는 언어지."

"전혀 모르겠는데. 그보다 미궁에 악마가 산다고?"

"그래. 20층을 넘어선 미궁의 심부에는 마족이라는 종족이 산다. 마족의 왕을 악마라고 부르지."

"20층."

당장 9층을 탐험하고 있는 내가 전혀 접할 수 없었던 정보가 사무소 간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300명의 목숨으로 악마를 미궁 4층에 현현시키다니. 미친 마법사의 광기가 도를 넘었어."

"광기고 뭐고, 저렇게 나대면 결국 토벌되는 거 아니야?"

"너. 생각보다 머리가 단순하구나."

"⋯⋯."

데른이 전투의 현장에 눈을 고정시킨 채로 말했다.

"만약 여기서 우리가 전멸하면 아스모데우스는 1,000명이 넘는 영혼을 먹고 미궁 4층 속으로 잠적할 거야. 그러면 대체 어떻게 찾아낼 건데? 저 녀석은 몬스터처럼 멍청이가 아니라고."

"그렇군."

"더군다나 몬스터 웨이브가 얼마 남지 않았어. 그 틈에 미궁 1층으로 올라와 지상에 도달하면, 저 악마가 칼리움에 출몰하는 거지. 시간문제야."

데른이 콜드릭이 싸우는 현장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부사무장 님이 어떻게든 해주셔야 하는데."

콜드릭의 현란한 검은 전방위적으로 아스모데우스를 압박했지만, 이상하게도 유효타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분명 아스모데우스의 반격도 검술에 기반하고 있었다.

정형화된 식(式)이 보이고, 형(形)에 맞추어 검이 전개되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만 검술을 관찰하려고 하면 마치 뿌연 안갯속을 바라보듯 식과 형이 전혀 눈에 잡히지 않았다.

레이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리더, 전황은 어떤 것 같아요?"

"좋지 않아. 콜드릭의 검이 전혀 닿고 있지 않잖아."

제국 남부에 10명 이하로만 존재한다는 5위계의 전사중 한 명이 바로 콜드릭이다.

그런 그의 검이 악마에게는 먹히지 않고 있었다.

데른이 지팡이를 꽉 쥐었다.

"악마가 그런 존재다. 고작 4위계인 오크 족장의 몸을 차지하고서도 5위계랑 검을 나눌 수 있다는 말이지."

"20층을 넘어가면 저런 괴물이 득시글대는 건가?"

"그 중에서도 특출난 놈이야. 너도 내려가 보면 알겠지만, 20층 부터는 탐험 방식이 조금 달라지거든."

"?"

"나중에,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다면 설명해 주지."

[개천(開天). 용오름.]

[%₩*&&*₩@]

한순간에 뿜어져 나오는 콜드릭의 검기가 마치 폭포를 거슬러올라가듯 아스모데우스의 전신을 덮쳤다.

"해치웠나?"

하지만 모두의 염원이 무색하게, 검기의 폭풍이 걷히고 드러난 아스모데우스의 모습은 생채기만 몇 개 있을 뿐 너무나도 멀쩡했다.

자신의 몸의 상처를 살핀 악마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대단하군. 좋은 육체가 되겠어."

"으음."

콜드릭이 다시 검을 다잡았지만 이전의 위세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제기랄. 왜 저렇게 강한 거야?"

내 중얼거림에 데른이 답했다.

"분명 느껴지는 건 4위계의 육체에 4위계의 마나야. 부사무장 님의 공격이 먹히지 않을 리가 없어."

"우리가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지금 이곳에 집결한 병력만 해도 3백을 훌쩍 넘었다.

어차피 악마라고 해도 전사다. 인해전술로 밀어붙여 한 칼이라도 찔러 넣으면 이길 수밖에 없지 않을까?

"안 돼. 상대는 악마다."

"?"

"악마에 대해 모르는 군. 악마는 시체의 영혼을 흡수해 성장한다고."

데른의 목소리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들으라는 듯 평소보다 몇 배는 컸다.

"다른 사람이 바치는 영혼은 흡수에 시간이 걸리지만, 악마는 자신이 죽인 시체의 영혼은 즉시 흡수할 수 있어. 영혼을 흡수한 악마는 영혼의 질에 비례해 본인의 능력을 강화하거나 소모한 힘을 회복할 수 있다."

"그 말은⋯⋯."

"괜히 나대다가 죽으면 오히려 놈을 도와주는 꼴이라는 말이지."

데른의 말에 탈환조의 기세가 죽어버렸다.

이미 악마에 대해 알고 있는 몇몇 유명 길드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고.

"내 마법도 구트란이 전부 상쇄하고 있어. 어떻게든 부사무장 님께 걸어야지."

데른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무소의 다른 마법사와 함께 쉬지 않고 마법을 연성하고 있었다.

구트란이 눈을 빛내며 모든 마법을 저지하지 않았다면 큰 힘이 됐으리라.

"주인. 구트란을 먼저. 죽이는 건 어떤가."

"⋯현실적이지 않아."

이미 구트란은 미궁 사무소의 건물을 방패 삼아 자리를 마련한 상황이다.

아스모데우스가 정면을 굳건하게 지켜주는 한, 구트란은 안전하다.

콜드릭의 검은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웠다.

내가 콜드릭을 상대했다면 단 10합 안에 목이 달아났으리라.

'첫 번째 죽음에 한정한 경우지만.'

아스모데우스는 고작 4위계의 육체로 콜드릭의 공격을 부드럽게 받아넘기고 있었다.

악마의 반격을 수백 차례에 걸쳐 받아내는 콜드릭.

하지만 악마는 인간 전사에게 점차 적응하고 있었고.

약간의 틈은 결국 찾아오고 말았다.

-피슉!

아스모데우스의 검이 마치 뱀처럼 흘러들어와 콜드릭의 오른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콜드릭이 빠르게 물러나며 검을 가다듬었다.

"천려일실을 수습하지 못했나. 인간."

"흥!"

"너에게 승산은 없다. 계속할 텐가? 내게 스스로 동화하면, 영혼은 살아남을 수 있다."

"말이 많군."

콜드릭이 다시 달려들었다.

또다시 전개되는 수백 합의 교환.

하지만 콜드릭의 기세는 이전과 달리 크게 죽어있었다.

이번에는 콜드릭의 왼팔에 커다란 검흔이 새겨졌다.

콜드릭이 낭패한 표정으로 크게 물러났다.

"갇혀있군. 육체의 가능성을 100% 끌어올리지 못하고 있어."

"⋯⋯."

"이 오크의 육체의 능력을 완전히 개화하고, 300명의 영혼의 힘을 담으면, 아직 완성되지 못한 너에게 닿을 수 있지."

콜드릭의 팔에서 나오던 피가 곧 멎었다.

아직 5위계 전사의 눈에서는 불꽃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악마. 부숴주지."

"한 번 해봐라."

콜드릭이 접근 방식을 다르게 했다.

어차피 아스모데우스의 몸은 4위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그렇다면.

[개천(開天). 용오름.]

다시 한번 이루어지는 5위계의 상징, 검기로 만든 소용돌이가 심상 구현에 힘입어 아스모데우스를 덮쳤다.

악마도 심상 구현의 경지를 끌어올려 이를 방어했지만 검염 쯤은 그대로 베어버리는 검기들을 전부 받아낼 수는 없었다.

아스모데우스는 전신에 얇은 자상을 입었지만 피조차 나지 않았다.

"훌륭해. 분명 내게 타격을 줄 수 있는 공격이야."

"⋯⋯."

"10번 정도 사용하면 나를 이길 수 있겠어.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지금까지 방어만을 고수해오던 아스모데우스가 처음으로 먼저 몸을 날렸다.

콜드릭은 예상했다는 듯 검을 받아넘겼지만 누가봐도 지쳐있다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주변 4위계들이 그런 모습을 보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심상 구현의 광역기로 밀어붙여야 하지 않아?"

"그만둬. 콜드릭 님도 휘말린다."

"그게 중요하지 않잖아! 콜드릭이 당하면 다음 차례는 우리라고!"

누구도 먼저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아스모데우스의 공격은 날카롭지는 않았지만 결코 경시할 수 없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악마는 콜드릭의 심상 구현을 맞받아치면서 점차 상처가 늘어나고, 이내 온몸에 핏방울이 솟아날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콜드릭도 심상 구현의 여파로 몸의 밸런스가 무너져가며 점차 공방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콜드릭의 몸에 새겨지는 상처가 점차 깊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참지 못한 4위계들이 나섰다.

"그만!"

미리 그 움직임을 감지한 콜드릭이 크게 거리를 벌리며 외쳤다.

"누가 나서도 죽어 악마의 양분이 될 뿐이다. 내가 쓰러지기 전까지는 나서지 말도록."

"⋯⋯."

"⋯⋯."

데른이 4위계들을 불러 모았다.

나도 한 쪽에 끼어들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마법사가 품에서 수신용 아티팩트를 꺼냈다.

"부사무장 님의 전언이다. 어차피 몸을 차지하기 위해 자기를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최대한 타격을 입히겠다는 군. 이후의 일은 맡긴다고 한다."

우리는 작전의 내용과 별개로 절망에 휩싸였다.

이미 콜드릭은 악마를 상대로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5위계의 일격도 최소한의 피해로 막는 저 괴물을, 4위계만으로 처리한다?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지⋯⋯."

그때였다.

"크허어억!"

생각보다 너무 빨리, 콜드릭이 쓰러졌다.

가슴을 크게 베인 5위계의 전사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

"!"

"!"

모두가 경악하며 전투의 현장을 바라보았다.

"흠. 역시 탐이 나는 육체야. 어서 흡수하고 싶은데."

콜드릭이 그냥 쓰러지지는 않았다.

아스모데우스의 왼팔이 잘려나가 있었고, 허벅지도 조금 베어져있었다.

"지금!"

이름 모를 4위계의 전사가 낮은 자세로 검을 빼들고 달려들었다.

[초중검(超重劍). 제1검. 심발도(深拔刀).]

[%₩#&]

달려들던 4위계의 일격이 간단하게 틀어막혔다.

"이런!"

곧이어 아스모데우스의 검이 현란하게 움직이며 4위계 전사의 사지를 해체했다.

"으아아아악!"

"흐음. 뭘 믿고?"

마지막 주먹 한 방에 남자의 심장이 뜯겨져 나왔다.

곧 부서진 심장이 녹아 사라지고, 아스모데우스가 입었던 허벅지의 상처가 조금 아물었다.

"저항은 끝인가?"

악마가 쓰러진 콜드릭의 몸을 바라보며 물었다.

탈환조의 모두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여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크크크. 콜드릭. 칼리움의 늑대도 개화한 악마에게는 닿지 못하는구나."

구트란의 비웃음과 함께 악마의 발걸음이 우리를 향했다.

어찌 보면 지금이 악마가 가장 약할 때다. 전투를 치른다면 가장 적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도 쉽게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섣불리 나서면 죽는다.

죽으면 영혼이 악마의 양분이 되어 소멸한다. 패배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셈이다.

"저자가 죽기 전에 끝내겠다."

마치 오크들을 압박하는 오우거 같은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악마.

모두가 아스모데우스의 걸음에 맞춰 물러날 때, 앞으로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나였다.

"호오? 두 번째 도전자인가?"

"그건 아니고."

나는 마음을 가볍게 먹었다.

어차피 더 있어봐야 죽음을 면하기도 힘들고, 더 얻을 정보도 없다.

'이제 죽을 타이밍이군.'

다시 돌아가면 내 특성을 적당히 꾸며 이번 위협에 대해 확실히 경고해야겠다.

"한 번 겨뤄볼까."

"눈빛이 죽어있어. 죽음을 직감하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있구나."

"감상은 별로 궁금하지 않은데."

나는 곧바로 아스모데우스에게 달려들었다.

검에는 지금까지 수천 번은 넘게 연습한, 석로검법의 마나가 맺혀있었다.

한 번 검을 맞대자 아스모데우스의 호흡이 내게 실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야말로 혼돈.

도저히 석로검법의 마나로 해석할 수 없는 혼돈이 잠들어 있었다.

"웁!"

순간 메스꺼움을 참지 못한 나의 검이 흐트러졌다.

"고작 이 실력인가. 한심하기 그지없군."

어찌할 틈도 없이 악마의 검이 내 머리를 갈랐다.

죽음이었다.

-키릭.

⋯⋯

나는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미궁 4층의 집결지로 회귀하리라 생각했지만, 이곳은 미궁 4층의 안전지대였다.

그리고 내 앞에 있는 자는, 악마. 아스모데우스였다.

"눈빛이 죽어있군. 죽음을 직감하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있구나."

이 상황에서의 나의 반응은 악마의 예상과는 분명 달랐을 것이다.

"하하하하!"

"?"

나는 그대로 검을 들어 올렸다.

"너. 이제 죽었어. 네가 사는 미래가 방금 사라졌거든."

"재미있군."

"마찬가지다."

역시 인생. 쉽게만 진행되지는 않을 모양이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77화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77

아스모데우스. 미궁의 악마.

클라이머 마법사가 현현시킨 악마가 오크 족장의 몸에 깃들어 콜드릭을 쓰러트렸다.

콜드릭이 누구인가.

5위계에 오른 전사이자, 칼리움이 자랑하는 검사였다.

그런 콜드릭이 악마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

아스모데우스를 바라보았다.

왼팔이 잘려나가있었고, 허벅지에도 깊은 상흔이 새겨져 있다.

뿜어져 나오는 마나도 조금 뒤틀려져 있었다.

내 감지 능력을 사용하고서야 관찰할 수 있는 아주 조금의 뒤틀림이었지만.

"인간. 죽을 테냐?"

"죽는 건 너라고. 네가 여기서 살아나가는 미래가 방금 사라졌어."

"하하. 입은 살아있구나."

나는 검에 석로검법의 마나를 피워올렸다.

아스모데우스의 혼돈, 그 혼돈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

악마가 내게 검을 휘둘렀다. 분명 너무나도 빠르지만 내 능력으로 맞받아칠 수 없는 공격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흡!"

나와 아스모데우스의 검이 맞닿는 순간, 어찌할 수 없는 혼돈이 석로검법의 마나에 실려 묻어 나왔다.

그야말로 무질서한, 암흑으로 가득찬 혼돈.

"으읏!"

나는 삐걱거리는 손과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억지로 진정시켰다.

한 달간의 수련으로 석로검법을 실전에 적용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레이나와 라분의 도움을 받아 시험할 기회가 있었다.

라분의 검은 하루 만에, 레이나의 검은 3일 만에 호흡을 찾아 내게 입힐 수 있었다.

물론 두 사람이 나보다 경지가 낮고, 내게 많이 맞춰줬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 뒤, 실전의 첫 상대가 바로 이 아스모데우스다.

아스모데우스의 삼연격을 막아낸 뒤, 나는 크게 거리를 벌리고 물러났다.

"우웨에엑!"

어찌할 수 없이 올라온 메스꺼움에 그대로 위를 비워냈다.

하지만 눈은 아스모데우스에게 고정한 채였다.

의외로 악마는 내게 바로 검을 들이밀지는 않았다.

"신기한 검술을 쓰는구나. 아니, 검술의 탈을 쓴 주술인가."

"말이 많군."

"참. 건방진 인간이로구나."

아스모데우스가 다시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악마와 십여 합을 나누며, 어떻게든 악마의 호흡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역시 단기간에는 무리였다.

조금이라도 더 검을 나누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스모데우스의 검이 내 복부를 꿰뚫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재미없군."

"흐흐."

나는 죽어가면서도 악마의 호흡을 분석하고 또 분석했다.

내 예상으로 아주 약간의 진전이 있었다.

-키릭.

⋯⋯

"눈빛이 죽어있군. 죽음을 직감하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있구나."

"말이 많아."

이번에는 내가 먼저 아스모데우스에게 달려들었다.

석로검법은 분석에 수많은 정보를 요구한다.

지금은 공격을 방어할 때 내뱉는 악마의 호흡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홀란은 내게 남긴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상대의 호흡을 따라 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실전이 선행되어야 한다. 어떤 적은 수십 합 만으로, 어떤 적은 수백 합이 지나도 호흡을 가져오지 못할 수 있다.]

얼핏 이해가 되는 글귀다.

이 검법은 경지가 높은 적을 이기게 해주는 기적의 검법은 아니다.

감당할 만한 적의 호흡을 가져와, 틈을 만들어주는 검법에 가깝다.

그것도 몇십 합의 교환이 있어야 가능하다.

하지만.

'수백 합이 안 된다면, 수천 합은? 수만 합은?'

이번에는 채 열 합을 채우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방어가 아닌 공격을 지속하면서 본의 아니게 틈을 노출했기 때문이다.

"역시. 쉽지 않네."

"영혼을 먹어주마. 응?"

아스모데우스가 잠깐 나를 바라보는 사이에 내 눈이 감겼다.

-키릭.

⋯⋯⋯

네 번째 전투에서 아스모데우스와 10여합을 나눴고, 악마의 혼돈을 몸으로 받아들였다.

-키릭.

⋯⋯⋯

열 번째 전투에서 아스모데우스와 20여합을 나눴고, 악마의 혼돈을 몸으로 받아들였다.

-키릭.

⋯⋯⋯

78번째 전투에서 아스모데우스와 30여합을 주고받았고, 악마의 혼돈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죽기 직전, 나는 혼돈 속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음?"

그 감각을 붙잡기 전에, 악마의 검이 내 목을 갈랐다.

-키릭.

⋯⋯⋯

어느 시점에서부터 내 의식은 허공을 유영하듯 떠다니고 있었다.

아스모데우스의 검을 받아내는 나와,

내 검을 받아내는 아스모데우스를 몰아붙이는 나와,

아스모데우스의 검에 몸이 갈라지는 나와,

피를 뿜어내면서도 혼돈의 마나를 받아들이는 나.

"⋯⋯."

회귀를 거듭하며 내 내면에 쌓이고 있는 무언가가, 아스모데우스의 혼돈과 동화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그것은⋯⋯

-키릭.

⋯⋯⋯

"눈빛이 죽어있군. 죽음을 직감하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있구나."

나는 아스모데우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시만."

끝없는 회귀와 부딪힘 속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아스모데우스에게서 느꼈던 혼돈은 악마의 공허한 삶에서 태어난 파편이라는 사실을.

"⋯⋯넌 몇 년을 살았냐?"

"그런 걸 세고, 또 확인하는 어리석은 종족이 바로 인간이지."

"그렇지?"

나는 아스모데우스의 말에 직접적인 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사는 건 모르겠지만, 몇 년의 삶을 느낄지 정도는 나도 짐작이 안 되거든.

아스모데우스와 나의 공통점을 찾자마자 악마가 가지고 있던 혼돈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이 회귀가 얼마나 지속될지 모른다는 중압감, 그리고 권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그 마음.

마침내 깨달은 아스모데우스가 가진 혼돈의 규칙 속에서 내지른 일격이 악마의 호흡과 맞았다.

"!"

악마의 눈에서 미묘한 감정이 일었다.

잠깐 거리를 두고 서로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 검. 대체?"

"알면 뭐하게?"

틈을 주면 안 된다.

석로검법으로 가공된 마나가 내 검에 깃들고, 그 검이 아스모데우스의 검과 부딪힐 때마다, 나는 기하급수적으로 혼돈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렇게 대화가 되지 않았을 전투가, 어느새 백여 합 넘게 지속되고 있었다.

"건방진!"

[%&$$%#$]

결국 참지 못한 아스모데우스의 심상 구현이 내 온몸을 덮쳤다.

원래라면 내 몸을 수십 갈래로 찢어발겼을 공격이다.

하지만 아스모데우스의 검격은 나의 검에 의해 완벽하게 중화되었다.

이미 악마의 호흡은 내 검에서 완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심상 구현의 모든 공격을 받아치고 잠깐 틈이 생겼다.

가만히 검을 쥔 나를 보며 아스모데우스가 경악했다.

악마의 몸에서 피가 줄기줄기 뿜어져나왔다.

반쯤 죽어가는 몸으로 심상 구현을 발현한 여파가 드러났다.

아스모데우스는 자신의 몸에서 나는 피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무슨, 이 마나는?"

"너를 죽일 검이다."

나는 혼돈으로 점철된 검을 내밀었다.

아스모데우스의 칼끝이 미묘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중상을 입은 신체가 마음의 동요를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그 정신이 얼마나 높은 곳에서 왔던지, 육체에 깃든 정신은 결국 그 육체에 동화되어가는 법이었다.

"이런."

나는 승기를 잡고 그대로 아스모데우스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나보다 먼저 움직인 자들이 있었다.

내가 시간을 끄는 사이 공격의 방향과 강도, 기술을 협의한 4위계 전사 10명이었다.

"안 돼!"

경악 어린 내 비명을 무시한 4위계들이 각자의 심상 구현을 완성해갔다.

[심성류(心成流). 제3식. 일성(一成).]

[청염검법(靑炎劍法). 제6식. 불꽃벼림.]

[귀살검(鬼殺劍). 제6검. 검은 악몽.]

...

엄청난 마나의 포화가 아스모데우스를 덮쳤다.

일렁이는 흙먼지 속에서 4위계들이 속속 빠져나와 주변을 둘러싸고 섰다.

"제대로 먹혔어."

"루카스. 괜찮아?"

나는 나를 돌아보는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잠깐의 반격으로도 팔이 베여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요동치는 엄청난 마나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내 감지 능력은 빛을 잃지 않았다.

이 격돌의 결과를 나는 미리 알고 있었다.

"카리나. 지금이라도 물러나는 게 좋을 겁니다."

"뭐?"

마침내 소용돌이가 진정되고, 4위계들은 10명이 공격하고 고작 8명이 탈출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머지는?"

그 말에 대답하듯 아스모데우스가 흙먼지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한 명의 심장을 씹고, 나머지 한 명의 몸을 툭툭 차면서 말이다.

"원래 이래야 정상인데 말이지. 이상해. 혹시 모르니까 살려둘 필요가 있겠어."

두 명의 영혼을 흡수한 아스모데우스의 몸이 눈에 띄게 치료되어가고 있었다.

모두의 눈에 절망 어린 감정이 서렸다.

"나머지는 죽어라."

악마가 몸을 돌려 자신과 가장 가까운 4위계를 공격하려고 했다.

나는 어떻게든 아스모데우스를 막기 위해 몸을 날렸다.

그때였다.

[개천(開天). 승천(昇天).]

번개처럼 뻗어 나온 대검이 아스모데우스의 목을 그대로 베었다.

"읏?"

본능적으로 휘두른 악마의 반격이 콜드릭의 몸을 절반으로 갈라내었다.

하지만 콜드릭은 몸이 붙어있는 단 1초의 시간 동안 아스모데우스를 총 네 번 내리쳤다.

그야말로 신기나 다름없었다.

정확히 여섯 토막 난 악마가 그대로 몸을 무너뜨렸다.

"크크큭."

그와 동시에 하체와 분리된 콜드릭의 상체가 바닥을 굴렀다.

콜드릭의 몸은 우연찮게도 아스모데우스의 머리가 있는 곳으로 쓰러졌다.

악마는 담담한 얼굴로 콜드릭을 바라보았다.

"전사여. 이 죽음이 정녕 가치 있는 죽음이라고 생각하는가?"

"내 죽음의 가치는 악마가 예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사여, 네가 만약 원한다면⋯⋯"

콜드릭의 두꺼운 손이 아스모데우스의 머리를 그대로 짓이겼다.

[미궁의 악마, 아스모데우스의 영혼이 처단되었습니다.]

[미궁 1층으로의 이동이 가능해집니다.]

[안전지대 밖으로의 이동이 가능해집니다.]

[모든 상황을 마무리하였다고 판단 될 경우. 정산이 이루어집니다.]

갑작스럽게 울린 미궁의 신비에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탈환조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장 먼저 냉정을 되찾은 미궁 사무소의 마법사, 데른이 외쳤다.

"모두! 구트란을 잡아!"

반사적으로 데른의 말에 반응한 4위계 전사들이 구트란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움직임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목숨을 버린 영웅을 향해 걸어갔다.

콜드릭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전사는 삶의 마지막 순간을 나를 위해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소년. 자네는 정말 대단하군."

"뭐가."

"고작 그 정도 나이에 악마의 마음을 흔들고, 내게 반격의 틈을 내어줄 수 있다니."

"더 할 말 있나? 감상적인 이야기 말고, 내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 말이야."

"소년. 상당히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구나."

"당신도 나랑 같은 상황이 되면 이렇게 될 거야."

잠깐 눈을 감은 콜드릭이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전부터 눈치를 보던 사람들이 다가오자 눈을 감은 채로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다가오면 대화가 새어나갈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궁 11층. 사무소 일반 지도 기준 A1124, C123 구역. 그곳으로 가보게."

"...."

"연자에게 손이 닿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소년이 그 물건에 어울리겠어."

나는 엉덩이를 툭툭 털고 몸을 일으켰다.

"A1124, C123. 기억했다."

"그럼 먼저 떠나겠네."

생명을 잃어가는 콜드릭의 절단면은 비롯한 전신의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나가 흩어져 피를 막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누구 마음대로 죽어?"

"?"

"넌 못 가. 내가 아직 이기지 못했거든."

나는 주저 없이 학즉사법 3성에 도전했다.

내 머리가 기다렸다는 듯 터져나갔다.

-키릭.

....

"눈빛이 죽어있..지 않군. 흠."

나를 보던 아스모데우스가 흠칫 놀라며 검을 들어 올렸다.

나는 악마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뒤를 향해 외쳤다.

"라분!"

"음!"

"콜드릭 좀 옮겨. 치료해 봐."

나대지 못하게 말이지.

라분이 아직 기절해있는 콜드릭을 업고 전장에서 벗어났다.

아스모데우스의 표정은 너무나 신중해져서, 라분이 뭘 하든 말든 나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내가 검을 들고 석로검법의 마나를 뿜어내자, 아스모데우스가 내게만 들리는 음성으로 속삭였다.

"너는, 내 동족인가?"

"인간이다."

"흠. 뭐, 영혼에 대고 물어보면 되겠지."

나와 악마가 다시 격돌했다.

내 혼돈과 악마의 혼돈이 다시 검을 맞댔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78화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78

아스모데우스와의 125번째 격돌.

악마의 검에 담긴 혼돈은 더 이상 내게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오히려 검을 부딪힐 때마다 아스모데우스의 검격을 더 자세히 익힐 수 있었고, 그 호흡에 내 호흡을 제대로 맞춰나갈 수 있었다.

원래의 석로검법은 이렇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의 아주 작은 호흡을 동화시켜 그 틈을 포착하고, 상대의 검법을 파훼하는 단초로 쓰는 검법이다.

하지만 석로검법의 창안자가 가정하지 못했을, 살초를 수천, 수만 번 동안 주고받은 나의 검은 완벽하게 아스모데우스의 검과 동화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석로검법의 부작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간이라고?"

"그래."

"네가 내 동족이 아니라고? 그럴 리가 없지. 전신에서 끓어오르는 혼돈을 가지고 있는 네가 어찌."

"닥쳐."

악마의 말은 묘한 느낌을 지니고 있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가슴 깊숙이 잠들어있는 무언가를 자극하는 느낌이다.

마음이 점점 초조해지고, 무슨 행동이라도 취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감각이 내 전신을 사로잡는다.

이 감각에 나 자신을 맡기지 않는 방법은 단 하나다.

그저 검을 휘두르는 것.

내 혼돈의 호흡을 담아낸 검이 아스모데우스를 위협하며 뻗어나갔다.

만약 같은 검법으로 카리나에게 덤빈다면 또 수십 번을 죽어나겠지.

하지만 이 검은 아스모데우스가 무의식적으로 노출하는 아주 작은 틈이라도 간단하게 파고들 수 있는, 이른바 아스모데우스의 맞춤 검법이다.

[$%#@#$]

전방위적으로 나를 덮쳐오는 수십 개의 검격을 맞받아친 내 검 끝이 악마의 가슴에 닿았다.

"!"

아스모데우스는 크게 뒤로 물러났지만, 나는 기어코 검을 내리그어 오크 족장의 몸을 가진 악마를 깊게 베어냈다.

피가 찔끔 뿜어져 나오다가 멈췄다.

마나를 이용해 억지로 출혈을 잡은 것이다.

나는 그동안의 전투로 일부러 아스모데우스를 뒤쪽으로 몰았다.

4위계 녀석들이 괜히 끼어들지 않게 하지 위해서다.

그러다 보니 필연적으로 구트란과의 거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구트란이 아스모데우스에게 말하는 소리마저 들릴 거리다.

"크크크. 태초의 존재시여. 어찌 3위계의 허접한 전사와 그리 많은 검을 나누시는 겁니까. 주변에서도 틈틈이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이제 마무리를 하시죠."

"닥쳐라! 내가 알아서 할 것인즉."

"...."

아스모데우스가 또다시 내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그대여. 먼저 올라가 유희를 즐기고 있었는가? 어떤가? 나와 같이 그 유희를 지속해 봄은."

"흠."

잠시 나를 관찰하던 아스모데우스가 이내 크게 기뻐했다.

"역시. 그 혼돈을 담은 검이 고작 인간 따위에게서 나와서는 안 되는 법이지."

내 어이가 없다는 듯한 반응을 아스모데우스는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한 모양이다.

사실 이대로만 밀어붙이면 이미 내 승리는 확정된 상황이다.

124번의 죽음을 제물로 아스모데우스가 가진 혼돈의 호흡을 간파한 지금 이 상황에서, 아스모데우스가 내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바로 직전의 죽음에서도 아스모데우스는 내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토벌당했었고.

말하자면 지금 이 제안은 악마의 살아남기 위한 목숨 구걸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아스모데우스는 구걸을 제안으로 바꾸어 내게 내밀고 있었다.

그것도 내게 전혀 먹히지 않을 제안을.

건방지기 그지없었다.

"자. 동족이여. 같이 인간을 죽이자."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용할 수 있다면 어디까지 이용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도록 하자.

만약 20층 이상을 탐사하게 된다면 이 정보가 유용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스모데우스의 혼돈의 호흡을 체현해낸 이상, 얼마든지 다시 사용할 수도 있었다.

우선 아스모데우스에게 집중하자.

나는 감지 능력과 마나를 이용해 이 대화가 아스모데우스에게만 들리게 조절했다.

괜히 다른 사람이 들으면 엄한 오해를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조건이 있다."

"그래. 얼마든지 말해 보라. 내 반드시 들어주지."

"저 마법사의 목을 가지고 싶군. 그동안 너무 죽이고 싶었던 녀석이라."

"좋다."

뒤로 몸을 날린 아스모데우스가 검을 휘둘러 구트란의 목을 잘라내었다.

마지막 순간 반응한 구트란이 눈을 크게 떴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강력한 마법사라고 해도 자신이 믿고 있었던 4위계 전사에게 이 정도 거리에서 기습을 당하면 목을 내어줄 수밖에 없는 법이었다.

300명의 목숨을 바쳐 목적을 이루고자 했던 클라이머 마법사의 허무한 죽음이었다.

아스모데우스는 검조차 집어넣은 채로 남아있는 오른손에 뽑아낸 구트란의 심장을 들고 있었다.

"자. 동족이여. 질 좋은 마법사의 영혼이다. 내 우리의 유희에 대한 결속의 증표로 기꺼이 너에게 양보하지."

악마가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나도 마주 검을 집어넣으며 아스모데우스에게 다가가다가 그대로 발도해 아스모데우스의 목을 베어갔다.

"!"

아스모데우스가 발작하면서 뒤로 물러났지만 내 검 끝에 목이 걸리는 것을 피하지 못했다.

감지 능력을 극한으로 발휘해 내가 발하는 살기와 마나를 숨겼기 때문에 가능한 기예였다.

이번에야말로 목이 반쯤 베인 악마가 뒤로 넘어갔다.

"어째서."

"어째서는 무슨. 너에게서 볼 건 다 봤다 이거지."

나는 그대로 검을 내리쳐 아스모데우스의 목을 잘라내었다.

그리고 혹시 몰라 심장과 뇌에도 검을 휘둘러 확실하게 마무리를 했다.

곧 내가 생각했던 미궁의 신비가 울려 퍼졌다.

[미궁의 악마, 아스모데우스의 영혼이 처단되었습니다.]

[미궁 1층으로의 이동이 가능해집니다.]

[안전지대 밖으로의 이동이 가능해집니다.]

[모든 상황을 마무리하였다고 판단 될 경우. 정산이 이루어집니다.]

"후."

124번의 죽음으로 이루어낸 마무리였다.

숨을 고르고 있는 내게 곧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가장 먼저 내게 다가온 사람은 라분과 레이나였다.

"주인?"

"어. 생각보다 쉬웠네."

라분과 레이나는 내 생각과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처음에는 이 업적과도 같은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가가 문제였다.

하지만 라분도 그렇고, 레이나도 그렇고. 뭔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이나 뒤에 떨어진 다른 탈환조도 마찬가지였다.

"?"

내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자 라분의 눈이 빛났다. 레이나도 마찬가지로 눈을 빛냈다.

생긴 건 천지차이로 다른데, 나를 바라보는 눈 하나는 지금 완전히 똑같았다.

"주인이 맞다."

"리더가 맞아요."

"뭔 개소리야?"

레이나가 머뭇거리며 나를 바라보며 우물쭈물거렸다.

내가 지그시 바라보자 이내 입을 열었다.

"악마랑 겨루실 때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

"응?"

"그게, 마치 악마와 같은 느낌이 나서⋯⋯."

"뭐라는 거야? 아오 답답해. 라분. 나 뭐 이상했어?"

그래도 라분은 레이나와 달리 우물쭈물거리지 않고 답변했다.

"주인. 검지 않았는데, 검었다. 마치. 주인이 아니었던 것. 같은."

"⋯⋯."

표현력이 아주 많이 아쉬웠지만 대충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알겠다.

아무래도 석로검법이 뽑아낸 아스모데우스의 혼돈의 영향일 것이다.

"괜찮아. 이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검법 때문이야."

"그런가?"

"다행이에요. 저는 악마가 무슨 짓이라도 한 줄 알고."

곧 주변 사람들이 다가오면서 이제는 말 붙일 틈도 없었다.

나는 내게 다가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하기 바빴다.

먼저 카리나.

"검은 마나. 대체 뭐였지?"

"...비밀입니다."

"비밀?"

"네. 제 비전과 관련된 문제라, 함부로 밝힐 수 없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완벽히 진실만이 담긴 말로 주변 사람들의 궁금증을 끊어냈다.

교통정리는 어느새 정신을 차린 콜드릭이 맡았다.

포션을 세 개나 쓰더니, 어느새 상처가 거의 아물어있었다.

그렇다고 전투에 의해 소모된 체력과 정신력을 회복하지는 못했는지, 살이 거의 10kg는 빠진 듯한 모습이다.

그래도 콜드릭의 목소리 자체는 여전했다.

"소년! 자네 정말로 대단하군!"

"뭐,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충분히 대단한 일을 했다. 자랑하지는 않더라도 겸양을 떨 필요는 없다.

콜드릭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사무소는 자네의 도움을 잊지 않을걸세."

"잊어도 상관은 없는데요. 보상만 확실하게 해준다면."

"하하! 그 와중에 보상을 걱정하는 건가?"

콜드릭이 별로 남지도 않은 마나를 쥐어짜내며 외쳤다.

"전사들이여! 미궁 4층 탈환 작전의 종료를 선언하겠다. 코르비!"

"넵!"

코르비라 불린 사무소의 직원이 미궁 1층으로 가더니 수십 명의 직원과 함께 복귀했다.

한곳에 모인 직원들은 콜드릭의 초췌한 모습에 가장 먼저 놀라고, 다음으로 구석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오크들과 클라이머의 시체에 다시 한번 놀랐다.

하지만 그들이 가장 놀란 것은, 그 많았던 포로들 중 생존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탈환조의 일원들은 그런 쪽으로 머리가 돌아가지는 않았다.

콜드릭이 외쳤다.

"탈환조 중 부상이 심하거나, 휴식이 필요한 자는 직원들에게 통보한 후에 돌아가도 좋다! 미궁 4층에서 도움을 줄 인원들은 직원들의 통제에 따르도록. 손을 거드는 인원들에게는 상응하는 보상이 있을 것이다!"

직원들은 미리 이야기된 듯 빠르게 움직였다.

일부 직원은 포로의 후송을, 일부 직원은 아스모데우스와 구트란의 시체와 같은 주요 물건들의 수습을, 원래 포로 관리를 위해 배정된 직원들은 시체의 처리를 맡았다.

심지어 이들을 통솔하는 콜드릭은 어느새 마련된 커다란 의자와 책상에 앉아 이런저런 문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피로를 숨기지 않으면서도 맡은 일을 끝까지 해내는 모습, 그야말로 정열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얼른 그 모습에서 눈을 떼었다.

너무나도 몸이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124번의 죽음을 겪었다.

겨우 한고비 넘긴 지금, 더는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켈른과 크리스, 카리나 등등.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말을 걸어왔다.

대체 어떻게 악마를 잡을 수 있었는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왜 악마가 구트란의 목을 베었는지⋯⋯

나는 피로한 눈을 숨기지 않으며 모두에게 같은 말을 했다.

"나중에 설명드리겠습니다."

물론 내가 설명할 일은 없겠지만.

우선 현재 내 상태도 말이 아닌 만큼 어떻게든 몸을 쉬어두고 싶었다.

"레이나. 진척도는 어떻게 됐어?"

"아. 미궁 4층의 진척도가 100%가 됐어요. 하급 마정석도 하나 받았고요."

"그건 너 가져."

"네."

5층에서 출발해 4층에 도달하고, 4층의 안전지대로 도달했다. 그래도 4층의 진척도가 채워지는 모양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엄청나게 지쳐있는데, 미궁 5층까지 다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돌아가서 일단 뻗은 뒤에 생각하자."

도저히 머리가 굴러가지 않아 닥치는 모든 상황에 대응이 힘들었다.

쏟아지는 무수한 악수 요청들을 뒤로하고 복귀 신고까지 마쳤을 때, 콜드릭이 내게 다가왔다.

"소년. 이름이 루카스라고?"

"그렇습니다만."

"자네가 탈환조 300명의 목숨을 구한 것이나 다름없네. 내 감사를 표하지."

"더 후한 보상 기대하겠습니다."

나는 바로 미궁 1층으로 귀환했다.

[미궁 1층으로 귀환하시겠습니까?]

[현재 진척도 36.8%.]

기나긴 원정의 끝이었다.

* * *

"데른."

"네."

콜드릭은 소년이 마지막으로 사라졌던 자리에서 눈을 거두지 않았다.

5위계의 전사이자 칼리움의 관료는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서도 직감을 잃지 않았다.

"기본적인 정보는 있겠지? 보다 확실하게 조사하게. 24시간 뒤에 서면 보고하도록."

"네."

"보아하니 안면이 있어 보이는데."

"최근 떠오르는 유망주로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친분도 있습니다."

"그래. 부탁하지."

데른이 얼른 물러났다.

콜드릭은 아스모데우스의 검을 받아내던 마나를 다시 기억해 냈다.

자신의 눈썰미가 틀리지 않았다면, 분명 소년의 검은 악마와 같은 혼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깨에 손을 올릴 때 살펴본 바로는 소년은 인간이 확실했다.

악마일 가능성은 없다.

"인간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면 그 검은⋯⋯"

콜드릭은 깊게 생각에 잠겼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79화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79

집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지듯 잠을 잤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피곤함이 몰려왔다.

'무한 회귀의 부작용인가.'

이런 피로와 권태감을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기야 무려 124번이나 죽었으니 정신이 놀랄 만도 하다.

그래도 이런 감정들은 정신없이 자고 나자 어느 정도 희석되었다.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거실로 나오는데 식탁에 콜드릭이 앉아 있었다.

"응?"

정갈한 마나를 가진 5위계의 전사가 조용히 눈을 감은 채 라파가 내온 차를 마시는 상황은 나에게 너무나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뭐야."

"리더! 일어나셨어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직도 제대로 회복되지 않아 온몸이 아프고 머리가 띵하다.

하지만 집주인으로써 손님을 내칠 수는 없는 법.

나는 찌뿌둥한 몸을 끌고 자리에 앉았다.

우리 집에 온 손님은 총 4명. 콜드릭과 데른, 그리고 사무소의 직원 두 명이다.

"음. 루카스. 푹 쉬었나?"

"쉬기야 잘 쉬었습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로⋯⋯."

"무슨 일이냐니. 자기 객관화가 아직 덜 되어 있나. 당연히 자네가 이룬 업적에 관해 논하기 위해서지, 그나저나."

콜드릭은 같이 차를 먹던 라파를 바라보았다.

"이 여성이 네 첩인가?"

"?"

"아닌가보군. 집의 안주인 역할을 하고 있기에 그런 줄 알았더니만."

라파와 콜린과 조금 친분이 있는 데른이 대신 답했다.

"저와도 조금 안면이 있습니다. 이들은 탐험 외적으로 이 친구를 도와주는 동료라고 보시면 편할 것 같습니다."

"허허. 그런가. 앞으로도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게. 그대들은 앞으로 사무소에서 내 이름을 대도 좋네."

"감사합니다."

라파는 기다렸다는 듯 다소곳하게, 콜린은 허둥지둥 고개를 숙였다.

녀석은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둘에게서 눈을 돌린 콜드릭이 품 속에 손을 넣으며 말했다.

"루카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하게 됐군. 그래도 꼭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 있어서 말이야."

그가 품에서 꺼낸 것은 가운데에 마정석이 박혀있는 투명한 수정 구슬이었다.

"아스모데우스와의 전투에서, 자네는 명백히 내면에 혼돈을 보유하고 있었지. 부정하지는 못할 걸세."

"그렇다고 칩시다."

"그런데 혼돈은 마족들만 보유할 수 있는 물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나?"

당연히 몰랐다. 내가 고개를 젓자 콜드릭이 말을 이었다.

"마족의 혼돈. 굳이 인간족들과 비교하자면 마나가 이에 대응되겠지."

난생처음 듣는 정보에 귀가 쫑긋해졌다.

어차피 미궁을 내려가다 보면 알게 될 정보라고 해도 미리 알아서 나쁠 건 없었기 때문이다.

"자네가 혼돈을 뿜어내는 것을 본 사람들이 많아. 이 수정구슬은 자네가 혼돈을 가진 존재인지 아닌지 판별할 수 있는 아티팩트일세. 이 구슬에 힘을 불어넣어 줄 수 있겠나?"

"거절하겠다면요?"

괜히 한 번 튕겨봤다.

"그러면 그만둬야겠지만, 사무소 차원에서 자네가 인간이라는 보증을 서줄 수는 없게 되겠지."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내 행동은 정해져있었다.

어차피 선택이 잘못됐으면 돌릴 수 있었으니.

안 그래도 나도 궁금했다.

내가 석로검법을 시전하며 아스모데우스와 동화할 수 있었던 까닭은, 회귀를 거듭하면서 쌓인 내 내면의 무언가가 악마의 혼돈과 반응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마족인가? 인간인가?

솔직히 나도 장담할 수는 없다.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내면에서 아스모데우스의 호흡을 가진 혼돈을 불러올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주저 않고 수정 구슬에 내 마나를 주입했다.

결과는 의외로 빠르게 나왔다.

"완벽한 인간이군."

"당연한 결과지요."

나는 푸른색으로 빛나는 마정석을 관찰한 뒤에 콜드릭에게 넘기려고 했다.

콜드릭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자네가 가져도 좋네. 자네를 시험한 대가일세. 부디 받아주게."

"⋯뭐, 그러시다면야."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수정 구슬을 덤으로 얻었다.

"참고로 인간으로 화한 마족이 마나를 불어넣으면 마정석이 붉은색으로, 마족에 영향을 받은 인간이 마나를 불어넣으면 보라색이 된다네. 유용하게 쓰시게."

"그러죠 뭐."

"이제 확인은 끝났으니, 자네 의견을 듣고 싶군."

여기서는 라파가 대신 나섰다.

"주인님이 일어나실 때까지 1시간 동안 제가 콜드릭 님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주제넘었지만 잠깐의 협의도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라파는 콜드릭의 보상 제안들을 하나씩 읊어줬다.

그중 단방에 내 마음을 사로잡는 보상이 있었다.

"집? 집을 준다고?"

"정확히는 주인님에 한한 영구 임대 형식이며, 구매를 원하실 경우 절반 값에 제공하는 조건입니다."

"절반 값이라면?"

"1,000골드입니다."

"헉!"

2천 골드짜리 집을 준다고?

더 볼 것도 없었다.

"집으로 하시죠."

"알겠네."

미궁 사무소가 준비한 수많은 보상이 있었지만 결국 당장의 가치로 볼 때 2천 골드의 집을 넘어서는 보상은 없었다.

무엇보다 내 마음에 쏙 들었고.

"오히려 내가 미안하군."

"?"

"아마 자네가 없었으면 300명이 넘는 탈환조는 모두 전멸했을 걸세."

콜드릭은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있었다.

사실이기도 했다.

아스모데우스는 4위계 11명의 습격에서도 둘을 기습해 그대로 죽인 전적이 있었으니까.

구트란의 마법 서포트까지 받고 있었으니 이길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원래는 콜드릭이 다 죽인 녀석을 마무리했다는 식으로 넘어가려고 했는데, 이건 안 되겠다 싶다.

"그런 자네의 공적을, 내 뒤를 이어 마무리했다고 축소해야 하는 것이 미안하네."

"응?"

"그래. 실망했겠지. 하지만 이건 이미 이야기가 끝난 상황일세."

나는 위아래, 양옆으로 눈알을 굴렸다.

데른과 사무소 직원 두 명도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정작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

나는 하수구에서 얻은 눈치를 십분 발휘해 짜증 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수구 양아치 시절 배운 표정이다.

"콜드릭 님. 아시겠지만 제 역할은 그 정도로 폄하?될 것이 아닙니다."

폄하. 이럴 때 쓰는 단어가 맞겠지?

"물론이네."

"무슨 사정인지는 궁금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보상이나 빵빵하게 더 주시면 됩니다."

"?"

"?"

어? 이게 아닌가?

잠깐 서로 간에 생긴 정적을 라파가 주전부리를 가져오며 깨뜨렸다.

먼저 얼굴색을 회복한 사람은 콜드릭이었다.

"흠흠. 알다시피 이번 습격으로 인한 인명피해만 500명일세. 그것도 미궁의 허리를 담당하고 있는 4층의 탐험가 500명."

"네."

"칼리움이 뒤집어지기 직전이지. 포로 300명이 단 한 명도 생환하지 못했기에 사무소의 무능을 성토하는 반응이 늘고 있어."

콜드릭이 데른을 앞세웠다.

데른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콜드릭의 옆에 섰다.

"그렇기에 우리는 불만을 덮을 영웅이 필요해. 대신 사무소의 통제에 넣을 수 있는 영웅이."

"영웅이 설마."

내가 데른을 바라보자 그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래. 나다. 왜. 네가 할래?"

"⋯⋯."

내 목표는 미궁에 내려가는 거다.

미궁 4층 탈환전에 참가한 이유도 결국에는 탐험을 빠르게 재개하기 위해서였고.

쓸데없는 영웅놀이는 사절이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사무소의 차원에서 자네에게 의뢰를 하지."

"?"

"우리와 입을 맞춰 데른을 미궁 4층 탈환의 영웅으로 만들어주게."

"보상은?"

"그 집."

"예?"

내가 뭘 잘못 들었나?

"방금 자네가 고른 집. 그대로 양도하겠네."

"!"

그야말로 완벽한 보상이 따로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미궁 사무소에서 가까운 곳의 3층 집을 내 명의로 얻을 수 있었다.

더군다나 일시불로 받은 토벌 보상금 200 골드까지.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의 수입이다.

"라분아."

"왜 그러나."

"나 부자 됐다."

당장 이 집만 팔아도 10대는 놀고먹을 수 있을 만한 돈을 벌었다.

레이나와 라파, 콜린은 뛸 듯이 좋아했지만 라분의 반응은 의외로 시큰둥했다.

"반응이 영 시원찮다?"

"주인."

"어?"

"부자 됐다. 그러면 미궁. 안 갈 건가?"

나는 라분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씨익 웃었다.

"당연히 가야지."

"그러면 달라질 건 없다."

"그것도 그렇네. 좋아!"

나는 이사 온 집의 커다란 식탁을 쾅 내리쳤다.

한창 시끌벅적하던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5일 뒤에, 다시 탐험에 나갈 거야. 라파."

"네."

"10층에 대한 정보는 준비되어 있겠지?"

"물론이에요."

"다음 탐험으로 9층의 진척도를 100%로 만들 거니까. 그때 브리핑해 주고, 더불어 콜린과 알아봐 줘야 할 정보가 있어."

나는 콜드릭이 알려줬던 좌표에 대한 정보를 말해주었다.

라파가 자신감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 식사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네요. 콜린. 나가요."

"새집 냄새도 제대로 못 맡았는데?"

콜린이 앓는 소리는 라파의 사나운 눈길에 그대로 쪼그라들었다.

둘이 나간 후, 나는 레이나를 보았다.

"라분. 석로검법. 배우고 싶다고?"

"음. 배울 수 있다면."

석로검법은 아직 규칙적인 검술의 호흡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만 배울 수 있었다.

단, 3위계가 되어야 한다.

그 사실을 말해주자 라분이 눈에 띄게 실망해했다.

"지금은 시기가 일러. 3위계가 되고 난 뒤에 이야기해 보자. 그전에 좋은 검법을 얻을 수 있게 되면 좋겠건만."

"라분. 주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응?"

"나도. 켈리어의 시련. 도전하고 싶다."

켈리어의 시련?

"주인도. 성공했다. 나도. 도전하고 싶다."

"라분. 도전에 실패하면 죽음이야."

"알고 있다."

"진심으로?"

사실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보낼 마음은 전혀 없었다.

라분이 성장이 많이 뒤처지더라도 좋았다.

이미 라분과는 내 인생을 걸고 끝까지 가기로 정해놓은 상황이다.

실력이 없으면 짐꾼으로, 짐꾼도 힘들어지면 집을 지키게 하면 된다.

굳이 라분에게 위험한 행동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라분에게는 또 그게 아니었나 보다.

"라분. 강해지고 싶다. 주인의 앞을 지키고 싶다."

"⋯⋯."

레이나가 어떻게든 말려보려고 했지만 라분은 요지부동이었다.

"라파한테는 말했어?"

"말했다."

"동의하든?"

"모두 내게 맡긴다고 했다."

나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라분이 저렇게 결심했는데, 내가 그 마음을 꺾을 수는 없었다.

최후의 보험이 있기도 했고.

"5일 뒤 탐험은 미루고, 라분. 나랑 지금부터 대련하자."

"?"

"내가 이래뵈도 그쪽 방면으로는 전문가야."

켈리어에게 99번을 죽으며, 켈리어의 호흡과 습관을 꿰뚫어 보고 있는 나다.

켈리어의 시련의 가장 적절한 교관이 바로 나인 셈이다.

"대련해서, 나한테 허락을 맡지 못하면 도전은 절대 할 수 없어."

"음."

"대신 일부러 너를 도전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 기준치를 높이지는 않으마. 어때."

"좋다."

라분의 대답은 시원시원했다.

레이나는 이래도 되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라분이 죽으면 즉시 회귀를 시도하겠지만, 라분이 켈리어의 시련이 들어간 뒤가 회귀 시점이 될 수도 있었다.

나름 리스크가 큰 셈이다.

물론 라분이 스스로 지고 있는 리스크에 비하면 나 자신의 리스크는 없는 셈이지만⋯⋯

'라분을 잃을 수도 있다는 리스크가 나에게는 너무 커.'

그렇다고 저렇게 결심한 녀석을 보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최대한 통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야지."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후로는 집 안에 마련된 연무장에서 하루 종일 대련하는 일상을 가졌다.

라분의 스승, 켄드릭을 아예 집으로 초대해 같이 교육을 하기도 했고.

그렇게 5일이 지났다.

나는 미리 이야기를 해 놓은 에릭 파르밀의 저택에 방문했다.

내 얼굴을 기억한 경비병들이 이제는 누군지조차 묻지 않고 문을 열어주었다.

"라분. 할 수 있어."

"알고 있다."

나와 라분은 발걸음도 당당하게 파르밀 가의 저택에 발을 들였다.

이제는 라분이 도전할 시간이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80화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