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 - 80-90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80

켈리어의 시련의 주관자.

에릭 파르밀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나와 라분을 맞이했다.

"루카스 님. 오랜만입니다."

"인연이 생각보다 질기군요."

"저는 그 인연을 앞으로도 계속, 그리고 더 깊게 유지하고 싶습니다만."

"사양하겠습니다."

"하하하!"

이제는 하도 얼굴을 많이 보다 보니 이런 농담 따먹기 정도는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그래도 그 속에 잠들어있는 사이코패스의 본성은 주의할 필요가 있었지만.

"그나저나 놀랐습니다. 루카스 님께서 데른 님의 마법을 받아들이신 사람이었다니."

"좋은 경험이었죠."

"이미 친분이 어느 정도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맞습니다."

미궁 4층 탈환전.

내가 아스모데우스를 죽였다는 사실 자체는 숨길 수 없었다.

목격자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무소는 데른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머리를 짜냈다.

바로 내가 데른의 마법을 받아 악마를 무찌를 수 있었다는 시나리오를 만들어낸 것이다.

사무소의 일방적이고도 직선적인 홍보에 힘입어, 데른은 악마를 죽여 칼리움의 미궁을 구한 영웅 대접을 받고 있었다.

"⋯⋯."

의외인 점은, 데른은 무슨 약이라도 빨았는지 영웅의 역할을 너무나도 훌륭하게 수행하는 중이라는 사실이다.

나도 사정을 모르고 봤다면 데른을 칼리움이 낳은 영웅으로 보고 있었겠지.

그만큼 데른의 위상이 올라간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이렇게 철저히 통제된 정보는 시민들은 물론 귀족조차도 속일 수 있을 만큼 은밀했다.

실제로 지금 에릭도 사무소가 퍼뜨린 헛소문을 진짜라고 믿고 있었고.

"데른 님을 한 번 뵙고 싶은데, 루카스 님께서 도움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야기가 슬슬 마무리되려는 것 같다.

나는 얼른 준비된 과일들을 먹어치웠다.

어차피 내가 시련에 도전하는 게 아니니까 컨디션 관리는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소에 이런 신선한 과일을 먹기는 힘드니까 될 수 있을 때 많이 먹어야 했다.

아무리 부자가 되었어도 그동안 살아온 습관이 한순간에 바뀌지 않는 법이다.

적당히 눈치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분, 준비됐어?"

"음."

"에릭 님. 가능하면 바로 시련에 도전하고 싶습니다만."

"좋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시련에 도전하시는 분은 언제나 환영이니까요. 다만 예전에 루카스 님께서도 들으셨겠지만 시련의 통과 가능성은 무척이나 낮고, 그에 따라 동료의 끔찍한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라분. 각오했다."

"저도 상관없습니다. 라분을 믿습니다.

"좋습니다. 가시죠."

에릭은 켈리어의 시련을 시작하는 의식을 빼먹지는 않았다.

내가 도전했을 때처럼 저택의 사용인들만 모여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칼리움 시에서 파견된 직원들이 몇 명 보였다.

의식을 시작하기 전, 직원들이 라분에게 다가갔다.

그중 마법사로 보이는 직원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라분. 맞나?"

"맞다."

"노예 각인을 확인하겠다."

라분이 나를 살짝 바라보았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장갑을 벗어 노예 각인을 보여주었다.

마법사는 마법을 사용해 노예 각인을 스캔한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등록된 대로군. 확실하다."

마법사가 물러나고, 이제는 다른 직원이 나섰다.

"라분. 시련으로의 도전은 네 자유의지에 따른 도전이겠지?"

"자유. 의지. 자유의지. 자유의지다."

"?"

라분의 대답이 못 미더웠던 직원이 말을 간단하게 바꿔 다시 했다.

"이 시련. 네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맞냐는 말이다. 주인의 강요가 아니라 오로지 네 의지여야만 한다."

"그렇다."

"알겠다."

알고 보니 바로 이걸 확인하러 온 모양이다.

주인의 경우 노예에게 시련의 도전을 강제로 시킬 수도 있었으니까.

칼리움의 노예법이 상당히 빡빡하다더니, 확실히 그렇기는 한 모양이었다.

내가 시련에 참가할 때는 오지도 않았던 놈들이 노예가 참가하자 올 정도니까.

우리가 작성한 몇몇 서류를 꼼꼼하게 확인한 직원들이 의식을 보지도 않고 그대로 돌아갔다.

'서류. 무슨 서류였지.'

이런저런 설명을 들었지만 같은 제국어인데도 전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라파를 불러올 걸 그랬다.

에릭은 직원이 나가기를 기다린 뒤 의식을 시작했다.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하다.

"오. 선조시여. 이곳에 용기를 가지고 당신에게 도전하는 젊은이가 있습니다. 당신의⋯⋯"

하품이 나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으니 허례허식 가득한 의식이 끝났다.

나는 처음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아무런 감흥이 없었지만, 라분은 의식이 진행됨에 따라 눈에 띄게 긴장감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라분의 어깨를 툭 쳤다.

퍼뜩 놀라는 모습에 심히 걱정된다.

"긴장 되지?"

"...그렇다."

"긴장은 좋은 거야. 하지만 긴장이 너무 심해서 네가 낼 수 있는 실력에 영향을 미치면 안 돼."

"알겠다."

"내가 당부한 것들. 절대로 잊지 마."

라분을 시련에 내보내기 전, 나는 라분에게 몇 가지를 당부했다.

첫째.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 싸울 것.

둘째. 통과가 불가능하다고 판단이 될 때는 즉시 저항을 중지할 것.

만약 라분이 죽었을 때, 라분을 살리기 위해 죽은 내 회귀가 라분이 시련에 도전한 시점 이후로 이루어진다면 라분은 그대로 끝장이다.

최대한 빨리 결과를 알아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실패했을 때 라분이 일찍 죽어주는 것이 최선이다.

내 무한 회귀 능력은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비밀이기에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빨리 죽으라는 내 말.

이렇게나 허점 가득한 부탁에도 라분은 일말의 의심도 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알겠다. 주인의 당부. 잊지 않았다."

"그래. 믿는다."

"믿어라."

곧 우리는 에릭의 안내를 받아 파르밀 가문의 저택 지하실 입구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이 자리에 서니, 내 99번의 회귀가 새록새록 기억이 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미친놈이 따로 없었다.

아무리 무한 회귀가 있다고 하더라도 검술 하나 얻겠다고 99번을 죽다니.

에릭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라분. 시련 앞에서 당신의 용기를 증명하십시오."

"음."

지하실의 문이 열리고, 나는 그 너머에서 전해져오는 미궁의 압박감과 같은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마지막 대련은 미궁에서 했다.

'준비는 완벽해.'

마지막 순간, 라분이 나를 돌아보았다.

"다녀오겠다."

"그래."

다치 몸을 돌린 라분이 거침없이 지하실로 걸어들어갔다.

곧 지하실의 문이 닫혔다.

에릭이 나를 돌아보았다.

"기다리시겠습니까?"

"당연합니다."

라분의 시체가 튀어나오는 순간 곧바로 머리를 터뜨려야 하니까.

"에릭 님. 보통 시련에 통과를 실패하면, 시체가 몇 분 뒤에 튀어나옵니까?"

"따로 기억을 하지는 않았지만, 비교적 짧은 경우에는 10분 정도. 긴 경우에는 30분 정도입니다."

"그렇군요."

나는 학즉사법의 마나를 장전하며 지하실의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1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나고.

지하실의 문은 아직까지 열리지 않았다.

* * *

켈리어의 시련.

대검호이자 대마법사였던 켈리어가 만든 인공 영혼의 목적은 간단했다.

자신의 인과를 받고 성장한 인간이 미궁 19층, 혹은 20층에 있는 또 다른 자신에게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선별'한다.

[도전자가 왔군.]

켈리어의 꼭두각시가 덜그럭 몸을 일으켰다.

가장 최근에 합격한 도전자, 루카스는 너무나도 특이했다.

미궁을 탐험하는 탐험가이기는 했지만 실력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분명 처음 입장했을 때는 불합격이었는데, 죽이려고 검을 휘둘렀을 때, 죽지 않았다.

몇 번이고 죽이기 위해 검의 경지를 올려보았지만 악착같이 따라오는 모습을 보였다.

마치 싸우면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인공 영혼에게 주어진 경험에 대입해 보면 '투신(鬪神)'의 특성을 가졌으리라 짐작되었다.

[신기한 경험이었지.]

마침내 루카스가 자신의 합격점을 넘어섰을 때, 켈리어는 루카스를 죽일 생각을 그만두었다.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충분히 19층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루카스 뒤로도 복수의 도전자가 왔지만 모두 처음부터 불합격이었고, 루카스처럼 죽음의 기점에서 스스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고작 몇 번의 검으로도 그대로 죽어버리는 도전자들.

켈리어는 그들을 비웃지는 않았다.

이것이 정상이었기 때문이다.

꼭두각시를 움직여 검을 들었다.

도전자는 자신을 보자마자 고개를 끄덕였다.

"목각인형. 주인의 말이 맞군."

도전자는 이국인이었다.

라분의 내면을 꿰뚫어 보자마자 켈리어는 마음속으로 이미 결정을 내렸다.

[합격.]

2위계에, 마나가 보기 좋게 정돈되어 있다.

계기만 있다면 충분히 3위계에 도달할 수 있고, 그 이상을 바라볼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인과를 보아하니 현재 미궁 9층 이상을 탐험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탐험 층수에 비해 경지가 조금 모자라는 부분이 있었지만, 제대로 성장한다면 결국에는 자신에게 다다르게 될 것이다.

켈리어는 어떻게 라분을 죽이지 않으면서 자신의 합격을 설득시켜 인과를 부여할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켈리어의 합격 기준은 간단했다.

루카스라는 예외를 제외한다면 이미 시련에 도전한 순간, 합격 여부는 결정되어 있었다.

아무리 실력이 없어도 상관없다. 4위계를 넘어서 자신의 인과를 크게 입힐 수 없어도 안 된다.

오로지 하나. 자신의 인과를 받고 성장한 인간이 미궁 19층, 혹은 20층에 있는 또 다른 자신에게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져야 한다.

켈리어는 천천히 검을 들었다.

이 도전자에게 자신의 인과를 입히기 위해서.

* * *

라분이 켈리어의 시련에서 걸어 나온 것은 세 시간이 지나서였다.

"만세!"

"음!"

녀석의 안색은 초췌해져 있었지만, 두 눈은 활활 불타고 있었다.

엄청난 자신감을 얻고 온 모양이다.

에릭도 상당히 기분이 좋은지 라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역시. 루카스 님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군요."

"하하! 라분! 잘했다. 정말 잘했어!"

확실히 라분의 실력은 켈리어의 시련에 통과할 때의 내 실력보다 더 강했다.

같은 기준으로 심사한다면 통과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실전의 변수 때문에 긴장하고 있었는데, 라분이 이를 완벽하게 뚫어내었다.

정말 자랑스러운 녀석이다.

"루카스 님. 경사로운 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마침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축하의 의미로 함께 드시죠."

"그럴까요?"

나와 라분은 옳다구나 수락한 뒤 차려져 나오는 고기와 와인을 퍼먹었다.

나는 우리를 바라보는 에릭의 웃음이 생각보다 묘한 시선을 더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우선 이 생존과 성장의 기쁨을 라분과 누리는 것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에릭은 여전한 표정으로 우리를 잠자코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81화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81

미궁 9층을 탐험하기 전, 저택에 모여 늘 하던 회의를 진행했다.

이른바 '탐험전 회의'.

탐험의 목적과 기간을 대략적으로 설정해 목표를 명확하게 하고, 탐험 관련 정보를 공유하는 회의다.

라파의 제안을 수용해 시행했는데, 꽤 효과가 좋아 정기적인 회의로 자리 잡았다.

당연히 첫 회의 안건은 라분이 얻어낸 성과였다.

"방패와 함께 쓸 수 있는 검법을 받았다고?"

"그렇다. 구천(九天)이라 한다."

"구천검법."

"음."

검법을 얻었다고 해서 바로 강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익히고, 실전에 쓸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더군다나 우리의 실전은 미궁 9층, 10층에서 통용되는 수준의 실전이다.

당연히 기준을 높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구천검법은 꾸준히 익히되, 실제 본격적인 사용은 나와 레이나의 검증을 받고 진행할 것!"

"알았다."

그래도 곧 훨씬 강해진 라분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은 이번 탐험의 목표였다.

"미궁 9층의 진척도를 100%로 만들고, 가능하다면 미궁 10층도 가보고 싶어. 라파. 미궁 10층에 대한 정보를 간단하게 브리핑해 줘."

물론 우리도 미궁 9층을 탐험하면서 선배 탐험가들에게 틈틈이 정보들을 얻기는 했다. 하지만 그 수준은 선배가 후배에게 알려주는 조언 정도였다.

미궁 10층의 도전 기회는 오직 한 번.

실패하면 죽고, 성공하면 산다.

탐험의 목표는 11층으로 내려가는 길을 찾는 것이다.

"미궁 사무소도 미궁 10층으로의 도전자를 위해 최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정보를 얻기 수월했어요. 물론 콜드릭 님의 배려로 보다 질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덕도 있었고요."

라파가 미리 준비한 종이를 우리에게 배포했다.

종이 안에는 각종 정보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우선 탐험 기간입니다. 최소 기간은 5일에서, 최대 20일까지 다양해요. 다만 5일에 성공한 경우는 4위계 4명이 포함된 파티이니만큼 일반적으로 달성이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어요. 적어도 보름은 탐험을 해야 한다고 가정하는 게 좋습니다."

"보름이라."

세 명이서 탐험을 하기에는 상당히 긴 기간이다.

못할 것도 없지만, 충분히 주의를 해야 하는 건 맞다.

탐험이 진행될수록 체력이 저하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니까.

여차하면 죽으면서 전진해도 되지만, 죽음의 횟수는 최대한 줄이고 싶다.

정신적인 부담이 꽤 심하기 때문이다.

120번이 넘는 죽음으로 확실하게 알았다.

'무한 회귀, 너무 많이 하면 정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

콜린이 삐딱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일단 10층 전용 물자는 전부 준비해뒀어. 목록에 있으니까 확인하면 돼. 간단히만 설명하자면 식량은 30일 치로 넉넉하게, 물은 15일치야. 정보에 의하면 물을 구하기가 비교적 쉽다고 해서 조절했어."

"물이 너무 적지 않아?"

"리자드맨이 주로 출몰하니까 걱정 없어. 간이 여과기를 넣었으니까 물을 걸러 마시면 될 거야. 사용법만 잘 배우면 돼."

"그렇군."

리자드맨은 보통 오크보다 더 강력한 개인 기량을 가졌다고 평가받는 몬스터다.

레이나는 거의 실전 경험이 없으니까, 주의해서 진행해야겠다.

"좋아. 여기까지. 내일 9층 탐험에 나선다. 10층에 너무 한 눈이 팔려 있어도 안 돼. 모두 푹 쉬고. 내일 보자."

다음 날. 우리는 곧바로 미궁 사무소로 직행했다.

"미궁 9층이요."

"네. 미궁 9층. 접수하겠습니다."

사무적으로 일을 처리하던 직원의 태도 내 목덜미를 스캔하더니 180도 변했다.

"루카스 님이셨군요?"

"?"

나는 물론 뒤에 서 있던 라분과 레이나의 얼굴에도 물음표가 둥둥 떠올랐다.

"미궁 4층에서의 활약, 전해들었습니다. 데른 님과 호흡을 맞췄던 그 모습은 듣기만 해도 놀라움의 연속이었답니다."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빨리 진행해주세요."

"네. 접수 완료되었습니다. 부디 안전한 탐험 되세요!"

"감사합니다."

고작 조연급 활약을 했다고 알려졌는데도 이 정도 대접이다.

과연 데른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가자."

내 정체를 알고 다가오기 시작하는 탐험가들의 시선을 받아내며 살짝 마나를 뿜어 공간을 장악했다.

접근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다행히 내 경고를 알아들은 탐험가들은 더는 접근하지 않았다.

[미궁 9층으로 진입합니다.]

[현재 진척도 91.7%.]

익숙한 미궁 9층의 압박감을 느끼고 나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는 기분이다.

레이나도 똑같은 감정을 느꼈나 보다.

"휴! 이제 좀 제대로 탐험하겠네요."

"유명인이 돼도 곤란해."

"그러게요. 따라가기도 힘들어요."

"이미 충분하니까 걱정하지 마."

라분은 주변의 시선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그렇게 이틀 뒤, 우리는 미궁 9층의 진척도 100%를 달성할 수 있었다.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진척도. 100.0%]

[진척도 100%를 달성하였습니다!]

[달성 등급. C+]

[보상 : 중급 마정석 1개.]

[미궁 10층으로의 입장이 가능해집니다.]

나는 내 손에 떨어지는 영롱한 마정석을 낚아챘다.

옆에서는 라분이 샌드웜의 체액으로 범벅된 검을 닦아내고 있었다.

"고생했다. 하룻밤 푹 쉬고 복귀하자."

"네!"

그렇게 3일차에 목표를 이루고 미궁 1층으로 복귀했다.

곧바로 이어진 미궁 10층으로의 이동.

사무소의 허가는 받지 않았지만 단순 안전지대의 확인은 문제가 없는 편이었다.

[미궁 10층으로 진입합니다.]

한 가지 신기한 점이, 미궁의 신비가 진척도를 표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항상 진척도의 표시를 보던 나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한 광경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미궁 10층은 전체적인 풍경 자체는 미궁 8층과 다르지 않았다.

넓디넓었던 미궁 9층과 달리 다시 좁아진 폭이 그대로 느껴졌다.

"미궁 사무소는, 저기인가."

미궁 9층에도 건물은 거의 없었지만, 10층에는 아예 건물이 미궁 사무소 밖에 보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리더. 안전지대에 우리들 밖에 없네요?"

"그러게. 한 명도 없는 건 생각도 못 했어. 그래도 건물 안에는 누가 있겠지."

우리들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미궁 사무소의 표식이 적혀 있는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이미 밖에서 감지하고 있었지만, 건물 안에 있는 사람도 고작 한 명.

콧수염이 멋들어지게 난 30대 중후반의 남성이었다.

"오. 손님이 왔군. 도전자인가?"

"그렇습니다만."

"행색을 보니 바로 도전하지는 않겠군."

"맞습니다. 도전하기 전에 분위기나 살피려고 왔습니다."

"그래. 나는 카브라고 하네. 이름이?"

"루카스입니다. 제 동료인 레이나와 라분입니다."

내 이름을 듣자 카브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흠. 요즘 들려오는 그 루카스인가."

"뭐, 아마 맞겠죠."

"2달 전에 9층에 도달했다고 들었는데 탐험 속도가 상당히 빠르군."

카브가 품에서 목덜미의 문신을 확인하는 아티팩트를 꺼냈다.

"10층에서는 확인이 필수라 양해를 부탁하지."

"⋯따로 신고 없이 내려왔습니다만."

"걱정 마. 정식으로 보고하지는 않을 테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순순히 카브에게 목을 맡겼다.

"본인이 맞군. 예상 10층 탐험일은?"

"정확히 6일 뒤입니다."

"5일 뒤에 하루 일찍 오게, 아니면 6일 뒤에 오고 하루 늦게 시작할 텐가?"

"감안해서 6일로 잡은 겁니다."

"꽤 조사를 많이 했군."

라분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레이나는 당연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라분 이녀석. 라파가 준비해 준 자료 하나도 안 읽었다.

"모르는 친구도 있는 것 같고, 필수 고지 사항이라 설명하지. 생존율이 낮은 미궁 10층의 탐험 특성상, 조금이라도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서 10층에 도전하는 모든 탐험가들은 5시간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

"음. 그렇군!"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라분. 한 대 때려주고 싶다.

"뭐, 중요한 것은 본신의 실력이라 내 교육이 쓸모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규정은 규정이니까."

별로 규정을 신경 안 쓸 것 같은 외모를 했으면서 규정은 또박또박 지킨다.

그러니까 미궁 10층을 맡았겠지.

카브라는 이 직원은 의외로 3위계의 전사였다.

실력 자체도 내 상대가 안 될 정도.

그런데도 이런 중책을 맡았다는 건, 다른 능력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음을 의미했다.

'보통 특성이겠지.'

감지 능력을 통해 보니 역시나 마나의 흐름이 특이하다.

더 자세히 관찰하고 싶지만 어차피 5일 뒤에 다시 볼 사람이다.

그때 시간을 들여 관찰하면 되겠지.

"그러면 6일 뒤에 뵙겠습니다. 다른 파티는 있습니까?"

"아직. 9층을 돌고 있는 후보들은 있지만 아예 통과한 파티는 없어."

미리미리 체크하는 건가.

나는 그냥 가려다가 마침 생각난 사람이 있어 혹시나 하고 찔러봤다.

"소피아도 그 후보 중에 있습니까?"

"아는 사이인가?"

"어느 정도는요."

소피아. 미궁 8층에서 만나고, 탐험가 아카데미에서 잠깐 인연을 맺은 여성 탐험가다.

꽤 실력이 출중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물론이지. 진척률은 대충 30% 수준. 안정적으로 탐험을 하는 성향이더군, 느리지만 꾸준히 나아가고 있어. 사무소에서도 주시하는 편이다."

카브가 이런 개인적인 정보를 알려준 데는 이유가 있었다.

나는 정보 값으로 은화 하나를 건넸다.

"흐흐. 이런 부수입이 짭짤하단 말이야. 왜. 그 여자한테 관심 있나?"

"그냥 인연이 있어서 궁금한 정도입니다."

"더 알아봐 줘?"

"됐습니다. 6일 뒤에 보시죠."

나는 손을 휙 들어 올리고 사무소를 나섰다.

"리더. 소피아라면, 로웬이 소속된 파티의 리더죠?"

"아 맞다. 네가 라이벌 의식을 가졌던 친구지?"

"그런 거 아니에요! 그나저나, 정말 소피아한테 관심 없으신 거 맞죠?"

"너까지 왜 이래? 미궁 내려가기도 바쁜데 연애 사업이라도 시작할 까봐?"

무한 회귀를 가진 나에게 동료애 이상의 감정을 갖는 것은 위험하다.

내 목숨을 맡겨도 좋을 상대. 그것이 사랑이라는 감정이다.

'애초에 내 목숨이 뭐지?'

나는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더 이상의 비효율적인 죽음을 강요하는 요소는 사양이다.

"그렇구나."

나는 왜인지 안심하는 레이나의 머리를 다시 헝클였다.

"앗? 하지 마세요!"

라분도 동참해 레이나의 머리를 같이 문질렀다.

솔직히 반응이 재미있다는 사실은 인정이다.

"돌아가자."

그 뒤, 5일 동안 나와 레이나는 명상을, 라분은 구천검법을 수련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마침내 6일째가 되는 날.

"준비됐지?"

라분과 레이나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내 동료들의 각오를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한 마디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절대 실패 안 해. 내가 그렇게 만들지 않을 거니까."

"네!"

"음."

"가자."

[미궁 10층으로 진입합니다.]

그렇게 미궁 10층으로의 도전이 시작되었다.

물론 교육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진입은 다음 날이었지만.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82화

미궁 10층은 생각보다 습한 환경이었다.

안전지대의 가장 바깥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미궁 10층의 직원, 카브가 우리를 배웅했다.

"잘 다녀오시게."

"그러죠."

카브의 교육 내용은 그야말로 평이했다.

교육에 영양가가 없다? 그건 아니다.

카브의 교육 내용 중에는 만약 라파가 우리들을 철저히 교육시키지 않았다면 전혀 알 수 없는 사실들도 더러 있었다.

다만 라파의 교육의 철저함이 너무 심했다.

카브가 무슨 말을 하든지, 이미 라파가 달달 외우게 한 것들이랑 똑같은 말만 할 뿐이었다.

역시 라파는 대단했다.

카브는 그렇게 5시간 내내 잠이나 잤으면서 마지막에 실시한 시험에 모두 합격점을 맞은 우리들을 보고 어이가 나간 표정을 지었다.

"뭐냐."

"특성입니다. 자면 교육 효율이 더 올라가는."

"농담 따먹기를 하는 걸 보니 쌩쌩하네."

이 수업에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수업을 들으면서 감지 능력을 이용해 카브를 정밀하게 관찰했다.

감지에 들어온 카브에게서 언제나 약간의 위화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카브의 마나는 정말로 은밀해서, 약 30분을 관찰하고서야 그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저거. 분신이로군.'

그랬다. 10층의 사무소에서 우리를 맞이하고, 지금 교육을 진행하고, 우리를 바라보는 저 카브는 본체가 아니었다.

나는 겨우 찾아낸 미세한 끈을 이어 카브의 본체가 있는 곳도 알아낼 수 있었다.

사실 후보지가 하나밖에 없기도 했다.

'사무로 건물 뒤쪽.'

그곳은 사무소의 특별한 손길이 들어가 있는지 나의 감지 능력으로도 내부를 관찰할 수 없는 장소였다.

그제야 카브가 미궁 10층의 유일한 관리자로 선정되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생존성이 높다.'

"뭐, 교육을 제대로 듣지 않았으니, 하룻밤 묵지 않고 바로 10층에 들어가도 되겠군."

"괜찮겠습니까?"

"그건 자네들이 판단할 일이지."

나는 레이나와 라분을 돌아보았다.

모두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좋아. 가겠습니다."

"그래. 무운을 비네."

그렇게 우리는 미궁 10층에 전격적으로 진입했다.

[미궁 10층에 도전합니다!]

[도전 목표 : 미궁 11층 도달.]

[살아남은 모든 파티원이 11층에 도달해야 목표 달성으로 인정됩니다.]

[목표 달성 시 자동적으로 미궁 11층의 안전지대로 이동합니다.]

무미건조한 음성의 미궁의 신비와 함께 우리의 도전이 시작되었다.

고작 10분 정도밖에 걷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바닥에 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바로 물이네."

"리자드맨 밖에 없다더니. 정말인가 봐요."

"모두 장화 신어."

우리는 곧바로 장화로 갈아 신은 뒤 탐험을 이어갔다.

구불구불한 길이 연속되고, 갈림길이 수없이 나타났다.

"리더. 어때요?"

"뭐가?"

"머릿속에 있는 지도와 같은 길이 있어요?"

"아니. 하나도 없어."

미궁 10층의 길을 도전자마다 달라진다고 한다.

그래도 라파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미궁 10층을 통과한 사람들의 지도를 몇 장 구해왔다.

책갈피 아티팩트에 지도를 기억해놓고, 지나가는 길마다 대입해 봤지만 역시나 맞는 길이 하나도 없다.

"오로지 감, 그리고 철저한 탐험 밖에 답이 없어.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이 있으면 나한테 보고해.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말고."

"알겠다."

"네!"

발목까지 물에 잠기고, 마침내 첫 몬스터가 내 감지에 잡혔다.

"전투 준비. 리자드맨 다섯 마리. 챔피언은 없어."

모두들 어깨에 힘이 빡 들어갔다.

첫 전투이니만큼 보다 적은 숫자와 상대하고 싶지만, 괜히 길을 돌아갈 필요도 없다.

"정석대로 가자고. 미궁 10층의 몬스터다. 4층의 리자드맨을 생각하면 안 돼. 전력으로 싸워."

우선 빠르게 리자드맨에게 접근해서 주변 지리를 파악한다.

하지만 딱히 매복하기 좋은 장소가 없었다.

"정면으로 싸워야 할 것 같은데."

"호각이 있으면 어쩌죠?"

"근처에 다른 놈들은 없어. 빠르게 마무리한다면 포위당할 걱정은 없을 거야."

"네."

레이나가 일말의 의심도 없이 내 말에 수긍했다.

역시 이래라저래라 설명할 필요도 없는 나만의 파티가 중요한 이유다.

리자드맨들은 엉성하게 몸을 숨긴 우리들의 매복을 빠르게 알아챘다.

"크랴!"

곧바로 이어지는 다섯 마리 리자드맨의 돌격, 라분이 정면으로 달려가 동굴의 폭이 일시적으로 좁아지는 지역을 먼저 선점했다.

이어지는 리자드맨 두 마리와의 몸통 박치기.

방패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지만 라분의 몸은 끄떡없었다.

오히려 라분의 기술적인 방어에 당한 두 마리 중 한 명이 나가떨어졌고, 나머지 한 명은 교묘하게 라분을 넘어선 뒤에 땅에 머리를 박았다.

당연하게도 녀석은 뒤에서 대기하던 우리의 검에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

돌격이 실패하자 리자드맨들의 기세가 크게 줄었다.

"좋아! 그대로 가자!"

"음!"

라분이 천천히 뒤로 물러나 두 마리의 집중 공격을 받는 상황을 회피했다.

순간 열린 공간으로 검염을 뿜어내는 나와 레이나가 짓쳐들어갔다.

날뛰듯 움직이며 검염을 휘두르자 리자드맨들이 속수무책으로 밀려났다.

그 뒤로는 학살이었다.

이미 전열이 무너지고 마구잡이로 부상당한 리자드맨이 우리들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레이나가 마지막 리자드맨의 머리에 검을 쑤시는 것을 끝으로 모든 전투가 마무리되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감지를 돌려 리자드맨의 시체 속에서 마정석을 찾았다.

하지만 마정석은 전혀 없었다.

미궁 10층의 특징이다.

아무리 몬스터를 잡아도 마정석을 얻을 수 없다.

이는 미궁 10층의 몬스터가 정상적인 몬스터가 아니라는 의견이 대세였다.

'미궁이 탐험가를 시험하기 위해 신비로운 기적을 사용해 만든 몬스터.'

미궁 10층은 신비로 가득한 미궁에서도 독보적으로 신비가 가득한 구역이다.

단 한 번도 같은 길이 나타나지 않고. 마정석 조차 얻지 못한다.

그저 미궁 11층에 도달하기 위한 움직임만이 가장 효율적인 장소가 바로 미궁 10층이다.

우리는 리자드맨의 시체를 구석구석까지 뒤졌다.

"호각은 안 보이고, 마정석도 없고. 물도 안 가지고 있고. 완전히 빈털터리인데요?"

"처음이잖아. 식량은?"

"뭘로 만들었을지 모를 육포가 있긴 하네요."

"일단 챙겨. 인육은 아닐 테니까."

"네."

최악의 경우 장기전에 대비해야 할 수도 있다. 30일이 최대 기록이라고는 하지만, 30일을 넘길 수도 있는 노릇이니 항상 최악을 생각해야 한다.

"라분. 어땠어?"

"확실히. 힘이 더 강하다."

"4층의 녀석들과 비교하면?"

"두 배는 아니지만, 비슷하다."

"1.8배 정도인가."

확실히 난이도가 높다.

미궁 9층의 경우에는 단독 행동을 하는 샌드웜만을 사냥하며 모든 전투 상황을 내가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미궁 8층과 같이 주변의 상황을 조절하며 움직여야 한다.

더불어.

"잠깐."

나는 일행을 멈춰세우고 검을 꺼내 물에 잠긴 바위를 살짝 건드렸다.

-피잉!

어디선가 날아온 돌덩이가 원래라면 돌을 건드렸어야 할 자리를 스쳐 지나갔다.

"!"

"!"

"발동에 마나를 사용해서 다행이지. 아니라면 내 능력으로도 발견 못해."

레이나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결국 발견할 수 있다는 말씀이시잖아요."

"그렇긴 해. 단, 앞으로는 절대 나보다 앞서나가지 마."

"네."

계속해서 탐험을 이어나가며, 나는 내 감지 능력에 의지하며 움직였다.

함정을 발견한 뒤로, 나는 레이나에게 지도를 그리는 일을 맡겼다.

감지에 온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 것이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탐험가 아카데미를 졸업한 인재인 레이나는 지도 그리기에도 어느 정도 빠삭했다.

사실 일자무식으로 선만 대충 그리는 나보다는 훨씬 그럴듯한 지도를 그린다.

"다섯 갈림길이네."

그중 두 개는 사람이 지나가기 힘들 정도로 좁고, 남은 세 개의 길 중 하나도 울퉁불퉁함이 도를 지나쳤다.

결국 선택지는 두 개 중 하나인 셈이다.

"오른쪽 길로 가자."

내가 왼쪽 길을 고르지 않은 이유는 왼쪽에 내 감지 능력의 끝에 리자드맨 두 무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왼쪽 길로 들어갔다면 그대로 적과 조우했으리라.

이미 견적을 뽑은 이상, 전투는 최대한 피하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30분을 이동하던 도중 또다시 리자드맨 3마리와 전투를 치렀다.

"세 갈림길이네."

나는 이번에도 리자드맨 두 무리, 한 무리가 있는 길 대신 아무것도 없는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20분을 이동하며 또 한 번의 전투를 치렀다.

"후."

나는 땀을 훑어 넘기며 라분과 레이나를 돌아보았다.

적당히 지쳐 조금 가쁜 숨을 내쉬고 있다.

나는 경험적으로 지금이 쉴 타이밍을 알았다.

"고생했어. 적당한 장소에서 쉬자."

2일차. 똑같이 다섯 번의 전투를 치르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3일차. 똑같이 네 번의 전투를 치렀지만, 11층으로 향하는 길에 대한 어떠한 단서도 찾지 못했다.

⋯⋯

4일차. 네 번의 전투를 치렀지만 11층으로 향하는 길에 대한 어떠한 단서도 찾지 못했다.

5일차 아침.

나는 피로가 가득한 동료들을 불러 모았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자. 일주일 동안 쉬지도 않았잖아."

"네!"

5일차에는 미궁에 자리 잡고 놀면서 적당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피로를 달랬다.

⋯⋯

6일차. 탐험.

7일차. 탐험.

8일차. 탐험.

9일차. 휴식.

10일차. 탐험.

11일차.

나는 출발 준비를 하던 일행들을 멈춰세웠다.

불침번을 서며 한 수많은 생각들을 정리한 결과다.

"뭔가 이상해."

"네?"

"탐험이 길어지는 건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탐험이 너무 단조로워."

"?"

"?"

두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10일 동안 탐험하면서, 두 마리의 리자드맨과 동시에 전투를 치른 적이 있었어?"

"음? 있었⋯나?"

"라분 기억으로.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 내가 감지로 미리 갈림길에서의 위험을 회피해서야. 봐봐. 여기에서부터가 중요해."

두 사람은 내 말이 뭔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리자드맨 두 무리와 만나는 모든 선택지는, 바로 갈림길에서만 있었어. 10일 동안 어떠한 상황에서도 두 무리와 만나는 선택지가 없었다고. 여기 리자드맨은 호각도 들고 있지 않고."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는 두 사람.

나는 바로 말을 더했다.

"지금까지의 내 경험으로 봤을 때, 무려 10일 연속으로 평지에서 두 무리와 만나는 일이 없었다는 건 너무나도 이상한 일이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레이나가 내 말을 곱씹더니 이내 눈이 동그래졌다.

"그렇다면. 단계가 있다는 건가요?"

"단계.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

나는 오늘까지 레이나가 그려준 미궁의 지도를 펼쳤다.

오로지 직진으로만 이동했기에, 지도를 모두 이으면 칼리움의 시내를 횡단하고도 남을 거리다.

"내가 앞으로도 리자드맨 한 무리와의 전투를 선택하면, 이 길은 끝없이 이어질 거야. 그렇게 생각해."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서는 두 무리와의 전투를 준비해야겠군요."

"그래."

아무래도 미궁의 신비는 10층에서 우리 파티의 끝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나와 레이나는 아직까지 우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라분을 납득시킨 뒤, 리자드맨 10마리와의 전투를 치렀다.

다소 어려웠지만, 내 감지 능력을 이용한 각개격파로 꽤 손쉽게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 뒤 이어진 다음 갈림길.

나는 지금까지 와는 다른 존재를 감지할 수 있었다.

"리자드맨 챔피언이다."

그동안 전혀 감지하지 못했던 챔피언이 내 감지 능력의 끝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네요."

"그래. 하나씩 제대로 상대해 보자고."

미궁 10층이 우리를 시험하는 목적은 모르겠지만, 이 시험을 통과하는 방법은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83화

지난 열흘 동안 내가 느낀 미궁 10층의 길은 무한히 뻗어나가는 끝없는 나뭇가지와 같았다.

아무리 미궁이 넓다지만 이렇게 앞으로만 나아가는 길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는 내가 가진 감지 능력 때문이었다.

보통 탐험가들이었다면 자신의 직감을 믿고 길을 선택했을 것이고, 갖가지 상황들을 마주하고 점차 성장해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들과는 다르게 움직였다.

항상 가장 위험성이 적은 길로만 나아갔고, 언제나 선택지 중에는 그러한 길이 있었다.

이 미궁이란 놈은 계속해서 같은 선택지를 내보였고, 나는 당연하게도 똑같은 길을 선택했다.

"가장 안전한 길."

미궁 10층에서의 내 목표는 안전하게 미궁 11층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였고, 아무래도 미궁은 우리를 시험하는 것이 목표였던 모양이다.

서로 목표가 다르니 길이 열릴 리가 없었다.

미궁은 양보할 생각이 없어 보여 내가 양보했다.

미궁이 제시하는 목표에 맞춰 리자드맨 두 무리와 전투를 완료하자 새로운 선택지가 생겼다.

새로운 갈림길에 리자드맨 챔피언이 감지된 것이다.

안전한 길만을 선택했던 지난 10여일 간 전혀 감지할 수 없었던 몬스터였다.

"과연."

나는 내가 얻어낸 추론을 일행들에게 설명했다.

"와. 정말 보이지 않는 단계가 있었던 거네요?"

"그런 것 같아. 아마도 챔피언을 처리하면 다음 단계가 나타날 거야."

"음. 그렇다면 점점 강한 적을 상대하면 되겠군."

"라분. 많이 똑똑해졌구나."

"라분. 바보 아니다."

"그래."

리자드맨 챔피언.

챔피언이라고 해봤자 3위계의 몬스터라고 생각하면 된다.

우리의 전력은 3위계 두 명과 2위계 한 명.

주변에 붙어있는 2위계 수준의 리자드맨 셋을 감안해도 객관적으로 우위에 있는 병력이다.

전투를 회피한 지금의 전략을 수정한다면 상대하지 못할 적도 아니다.

감지 능력에 갈림길에서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 어슬렁거리는 챔피언의 기척이 느껴진다.

"가보자."

나는 일행을 선도해 챔피언에게로 나아갔다.

주변에 당장 지원을 올 수 있는 다른 리자드맨도 없었다.

그렇다면 정면 승부다.

"우어어어!"

라분이 방패를 앞세워 리자드맨 챔피언을 향해 돌격했다.

우리의 냄새를 미리 맡고 준비하고 있던 리자드맨들이 일제히 마주 포효했다.

"크라라라!"

라분이 방패에 몸을 완전히 맡기며 챔피언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라비팩트인 반지에서 얻은 방패는 이번에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본인의 역할을 다 했다.

\-쾅!

검염과 방패가 부딪히며 일으키는 엄청난 소음.

라분의 방패는 이 모든 충격을 견뎌내며 주인의 앞을 든든하게 받쳤다.

방패를 뒤트는 기술이 챔피언의 검의 궤도를 바꿔놓았다.

라분이 기세 좋게 검을 찔러 챔피언의 목을 노렸지만 챔피언의 반응이 조금 더 빨랐다.

아쉽게 챔피언의 목의 비늘 몇 점을 잘라내는 데에 그쳐야 했다.

챔피언이 크게 물러나 전열을 가다듬다가 몸이 굳었다.

"⋯⋯."

라분과 검을 맞댄 그 짧은 틈에 이미 2위계의 리자드맨들이 모두 죽어있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검염을 아끼지 않고, 라분을 위해 다소 위험을 감수한 덕이다.

"라분. 잘했어."

"음."

탐험에 1대1 대결 같은 유치한 짓은 없었다.

나와 레이나의 합동 공격에 리자드맨 챔피언의 목이 그대로 달아났다.

"후."

그렇게 마무리를 했을 때였다.

\[인과가 축적되었습니다. 500/500.]

\[보상을 수령하시겠습니까? 보상 : 혼돈의 상자.]

"오."

그동안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있던 반지에서 인과가 전부 축적되었다는 알림이 떴다.

이곳 미궁 10층은 진척도가 없어 공양도 소용이 없고, 마정석도 주지 않았다.

어차피 11층으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미궁 깊숙한 곳으로 갈 것이었기에 인과나 쌓기 위해 시체를 그대로 두었는데, 마침 새로운 보상이 완료된 모양이다.

그나저나 500개의 인과를 채웠음에도 보상은 역시나 혼돈의 상자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잠시 반지를 이대로 놔두기로 했다.

'인과 500개.'

이미 300개의 보상인 방패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정말 운이 없지 않다면 인과 500의 보상은 방패보다 더 좋은 무엇인가가 나올 터다.

미궁 10층의 난이도를 아직 가늠하지 못하는 이상 새로운 선택지는 최대한 늘려두는 것이 좋겠다.

리자드맨 챔피언의 시체에서도 이렇다 할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계속 전진하자."

새로운 갈림길.

총 5개의 갈림길을 천천히 분석했다.

곧바로 세 개의 갈림길을 후보에서 지웠다.

리자드맨의 수가 너무 적거나, 일반 리자드맨의 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도저히 다음 단계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리자드맨의 배치였다.

나머지 두 갈림길 중 하나는 리자드맨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지막 하나는 함정만 잔뜩 있었고.

"뭐가 좋을까?"

내 물음에 라분과 레이나가 각각 의견을 냈다.

"함정."

"저는 함정이 없는 거요."

의외로 두 사람의 의견이 갈렸다.

"왜?"

"함정이. 많으면 뭔가. 숨겨져 있을 확률이 높다. 미궁이 준비한. 보물이 있을지도."

"음. 그럴듯해."

레이나 쪽으로 눈길을 주니 얼른 입을 연다.

"그럴 가능성도 있어요. 하지만 먼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미궁 10층에서 보물을 얻은 사람은 없었어요."

"그렇지. 있었다면 라파가 알려주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까."

"그것보다도, 미궁의 의도를 파악해 봤어요."

"호오?"

미궁의 의도?

미궁을 마치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생각하는 레이나의 말에 흥미가 돋았다.

"미궁이 함정을 엄청나게 설치한 길을 준비했다는 건, 함정에 걸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컸을 거라 생각해요."

"함정에 걸리기를 의도했다라. 그러면 함정에 걸리는 게 다음 단계가 아닐까? 함정에 걸린 뒤의 대처능력을 보고 싶을 수도 있잖아?"

"그, 그럴수도 있겠네요."

레이나의 말문이 턱 막혔지만 아이디어는 좋았다.

둘의 의견을 받고 선택한 길은.

"아무것도 없는 길로 가보자."

만약 함정 대처 능력이나 함정을 통과하는 게 다음 단계라면 어차피 갈림길에서 주야장천 나올 터다.

차라리 아무것도 없는 길로 이동해 여기에 뭐가 있는지 알아보는 게 낫겠다 싶었다.

다음 단계면 더 좋고.

이렇게 설명해 주니 다들 납득한 눈치다.

나는 감지 능력을 최대한으로 활성화하며 천천히 앞서나갔다.

하지만 허무하게도 길의 끝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생각해 보니 지난 11일간의 탐험에서도 리자드맨이 없던 갈림길은 많았었다.

"허허."

편견에 사로잡혀 미궁의 모든 갈림길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 것이 잘못이었다.

다음 갈림길의 시작 지점에서 일행을 멈춰세웠다.

"그만.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다들 고생했어."

"고생하셨습니다!"

"주인도, 레이나도. 고생 많았다."

잠시 머리를 식혀줄 필요가 있겠다.

아무리 다음 기회가 있을 가능성이 높아도, 죽음이 습관이 되면 안 되는 법이다.

오늘은 조금 일찍 하루를 마쳤기에, 식사 후 쉬는 시간을 이용해 라분의 구천검법을 감상했다.

"방패와 검. 다르지 않다. 공격과 방어. 동시에 사용한다. 검과 방패의 역할. 바꾸기도 한다."

과연 그 말대로 라분이 보여주는 움직임에는 검으로 방어를, 방패로 공격을 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몬스터 단순해서. 방패의 역할을 방어로 단정 짓는다. 그렇기에 구천검법이. 잘 먹힌다고 한다."

"그렇구나."

구천검법을 상대하는 자는 항상 방패가 자신의 몸을 찍어올 수도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일반 방패술도 방패를 무기로 사용하기는 하는 편이지만 이건 마치.

"방패가 방패가 아니라 마치 쌍검을 들고 있는 것 같네."

"그렇게 봐도 된다."

레이나가 호승심이 들었는지 라분에게 아주 간단히 대련을 청했다.

라분도 기다렸는지 검과 방패를 마주 든다.

나를 보는 두 사람의 시선에 어깨를 으쓱였다.

"이 근방에 리자드맨은 없으니까. 마음대로 해봐. 단, 부상 입기만 해봐. 나한테 죽는다."

"물론."

은근히 둘이 별로 친한 것 같지 않다가도 이런 쪽으로는 궁합이 잘 맞는다.

나는 두 사람의 대련을 지켜보면서 남아있는 물과 식량의 양을 계산하고, 그동안 그려놓은 지도를 정리했다.

대련의 결과는 레이나의 아슬아슬한 승리였다.

달뜬 숨을 몰아쉬며 레이나를 올려다보는 라분의 눈이 투지로 불타고 있었다.

다음 갈림길에서는 챔피언 두 마리가 있는 길을 선택했다.

함정이 있는 갈림길을 선택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이번에는 그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두 챔피언은 거리를 조금 두고 떨어져 있었지만, 싸움이 일어나면 바로 지원을 올 수 있는 거리였다.

"라분. 거리 조절 잘해."

"알겠다."

감지 자체의 감각은 내가 라분보다 월등히 높았지만 전투 상황에서의 센스는 라분이 나보다 더 나은 점이 있었다.

라분이 장소를 선정하고, 미약한 소음으로 적 리자드맨 챔피언의 한 무리를 유인했다.

다른 챔피언도 동료를 따라 움직였지만, 적이 먼저 우리에게 접근한다는 것이 중요했다.

마침내 적이 우리의 위치를 확신하고 속도를 높일 때, 라분이 돌격을 시작했다.

"우어어어!"

나와 레이나가 라분의 뒤를 받치며 이동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일반 리자드맨이라고 생각했던 무언가가 지팡이를 꺼내들었기 때문이다.

지팡이가 보이자마자 감지 능력에 리자드맨이 발하는 마나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

내 감지의 빈틈을 찌른 매복이었다.

"주술사다! 조심해! 방어적으로 간다!"

이미 충돌은 피할 수 없다.

주술사의 지팡이가 빛나고, 라분의 몸이 기우뚱거렸다.

"읍!"

라분이 다리에 문제가 생겼는지 돌진의 스텝이 엉키며 몸이 급격하게 앞으로 기울었다.

억지로 몸의 균형을 잡았지만 돌진의 기세가 크게 줄었다.

리자드맨 챔피언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라분을 향해 검염이 서린 검을 내리쳤다.

도저히 방패로 방어할 수 없는 공격이다.

그렇다고 검으로 막으면 검염에 검이 잘려나갈 것이 뻔하다.

"라분!"

내가 어쩔 수 없이 회귀를 머릿속의 선택지로 넣었을 때였다.

라분이 검을 살짝 돌리면서 챔피언의 검을 받아냈다.

돌아가는 검에 맞물린 챔피언의 검이 라분의 검을 베지 못하고 막혔다.

"!"

위기에 순간 임기응변으로 나온 구천검법의 응용이었다.

나는 무너진 챔피언의 몸을 보며 기회를 잡았다.

"레이나! 라분을 지켜!"

"네!"

덕분에 한 호흡을 번 우리가 움직였다.

레이나가 라분을 대신해 챔피언을 맡고, 나는 주술사를 향해 내 분노를 토해냈다.

주술사의 지팡이가 다시 빛을 토해내고, 이번에는 내 시야를 앗아갔다.

하지만 이는 내 예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미궁 4층을 탐험할 때에도 당해본 적이 있는 공격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연스레 눈을 감고, 감지 능력을 이용해 모든 적을 감지해냈다.

뒤에서 오는 공격도, 측면에서 오는 공격도 내 감지 범위 내에 있었다.

모든 공격을 보지도 않고 피해낸 뒤에 주술사의 목을 깔끔하게 베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 주술사의 저주가 풀렸을 때, 내 근처에 서있는 리자드맨은 아무도 없었다.

"후."

그렇게 미궁 10층의 위기였던 유일한 전투가 끝나자, 다음 갈림길에서 미궁 11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와!"

"와."

레이나와 라분이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지만 나는 덤덤하게 계단을 바라볼 뿐이었다.

"⋯⋯."

잠깐 내 눈치를 본 두 사람이 조용해졌다.

"리더. 혹시 이거 함정인가요?"

"아니. 1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확실해."

"그런데 왜 전혀 기뻐하지 않는 거예요?"

"기쁘기는 한데."

나는 미궁 1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옆에 있는 길을 바라보았다.

내 감지 능력이 말하고 있었다.

저 갈림길 뒤에, 리자드맨 히어로 한 마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레이나."

"네."

"미궁 10층에서 다른 보상을 가져온 탐험가가 단 한 명도 없다고 했지?"

"네. 알려진 바로는요."

그럴 만도 했다.

통로 옆에 보상이 있다면 누가 찾으러 가겠나.

그것도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아마 비밀로 하겠지만, 보상.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내 모험심은 이미 리자드맨 히어로와의 1대1 대결을 그려나가고 있었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84화

미궁 10층의 끝에서, 우리는 자리를 잡고 채비를 점검했다.

라분과 레이나의 시선이 바로 옆에 있는 계단으로 쏠린다.

시작부터 지금까지 장장 2주가 넘는 여정이었다.

계속되는 불침번과 격렬한 전투로 모두의 꼴이 말이 아니다.

라분도 레이나도 제대로 씻지 못해 마치 하수구의 어린애들 같다.

아니, 그것보다 더 심하다.

하수구에서는 더러운 물이라도 나오기는 했으니까.

바로 직전에는 리자드맨 챔피언 두 마리에 주술사 한 마리가 포함된 적과 혈투를 벌이고 왔다.

지금까지 누적된 피로는 미궁에서의 휴식으로 풀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

그런데도 나는 지금보다 훨씬 강한 적. 4위계의 심상 구현을 사용하는 리자드맨 히어로와의 결투를 제안하고 있었다.

이 탐험의 목표점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이를 마다하고 죽을 확률이 훨씬 높은 전투에 도전한다?

일반인의 시각에서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이것보다 더 합리적인 선택은 없었다.

'모든 가능성을 검증해야 해.'

지금 파티를 배려해 도전을 포기한다면 밤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것이다.

내 결연한 눈을 본 두 파티원들이 이내 피로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를 마주 보는 눈빛은 죽지 않아 있었다.

나의 결정을 믿고, 아무리 가능성이 낮은 일이라도 목숨을 걸기로 결심한 눈빛.

그거면 됐다.

"좋아. 고맙다.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컨디션을 회복한 뒤에 도전하자."

라분과 레이나의 의지는 확인했다.

우리는 계단에서 가장 가까운 갈림길에 들어갔다.

이 앞으로 나아가면 리자드맨이 만들었을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아주 조금만 들어간 뒤에 멈춰 서면 오히려 함정이 천연의 방패가 된다.

만약 리자드맨이 접근하게 되면 함정을 피해서 와야 하고, 그렇게 되면 엄청나게 부산스러워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궁에 지대가 높고 움푹 파인 곳에 자리 잡았다.

"함정지대는 여기서 50보 정도 밖에 있어. 혹시라도 접근하지 마. 웬만한 눈썰미로는 알아보기 힘들 거야."

"알겠습니다."

"어떻게든 오늘이 미궁 10층에서의 마지막 밤이 될 테니까. 방비는 최대한 해놓자."

"네. 저는 함정 쪽. 라분 씨는 입구 쪽."

"음."

"종은 있는 대로 다 써. 빽빽할 만큼."

"서로서로 딱 절반씩 가져갈게요."

두 사람이 열심히 방범용 종을 설치하는 동안 나는 음식 준비를 맡았다.

이번에는 큰맘 먹고 장작 남은 것을 싹싹 긁어 불을 피웠다.

물에 육포와 마른 야채를 넣고 끓이니 어느 정도 먹을만한 국물이 되었다.

스프라고 부르기에는 뭐 하지만 미궁에서는 감히 특식이라고 부를만하다.

'부드러운 빵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리자드맨들과의 전투에서 체력을 엄청나게 소진한 우리는 거의 10인분의 양을 한 끼에 먹어치웠다.

내가 일부러 유도한 것이기도 하고.

그렇게 내일의 전투를 위한 토론과 즐거운 이야기를 번갈아 하던 우리는 라분의 불침번을 필두로 잠에 들었다.

약 4시간 뒤.

조용한 목소리가 완전히 곯아떨어져 있던 나를 깨웠다.

"리더. 리더."

"으음."

"불침번 서실 시간이에요."

"그래. 고생했어."

"고생하세요."

나는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4시간은 격렬한 운동을 한 몸에 주는 하룻밤의 휴식으로는 적절하지 않은 시간이지만, 다음 전투를 위해 예열하는 휴식으로는 나쁘지 않은 시간이다.

나는 약 10분 동안 불침번을 서며 내 동료들을 관찰했다.

새근새근한 레이나의 숨소리, 천둥이 치는 듯한 라분의 코골이 소리까지.

내 감지 능력은 이들이 모두 깊은 잠에 빠졌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감지 능력의 반경을 유지한 채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히어로와의 거리는. 갈림길에서 2분 정도인가."

이 정도면 히어로와 싸우면서도 아슬아슬하게 우리의 야영지까지 감지 능력을 돌릴 수 있겠다.

그렇다.

나는 리자드맨 히어로와 혼자 싸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죽을지 모를 선택, 이번에는 죽음으로의 길을 내 스스로의 의지로 향하는 것이다.

나는 내 목숨을 도구로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목숨을, 그것도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의 목숨을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연히 그것밖에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겠지만, 지금은 선택지가 있었다.

내가 그렇게 선택했다면 그 결과는 오로지 내가 받아들여야만 한다.

방범용 종이 잔뜩 깔려있는 줄을 넘어 미궁 11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있는 갈림길로 도착했다.

"⋯⋯."

계단에 잠깐 눈길을 준 뒤, 계단 바로 옆에 있는 갈림길을 향해 걸었다.

물론 감지 능력으로 야영지를 계속 주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만약 라분과 레이나가 내가 전투하는 도중에 리자드맨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면 그것만큼 주객이 전도되는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리자드맨과의 전투 중에 습격 상황이 발생할 경우 즉시 자살하고 품에서 호각을 꺼내 불 생각이다.

'놀라서 일어나겠지.'

호각은 그야말로 탐험가들에게는 공포의 소리다.

몬스터가 몬스터를 불러들이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미궁에서 아무리 깊게 자더라도 호각 소리를 듣고 일어나지 않을 탐험가는 없었다.

나는 조용히 홀로 있는 리자드맨 히어로의 기척을 계속해서 주시하며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검을 빼어들고, 날을 바라보며 마음을 천천히 가라앉힌다.

이미 검에서는 석로검법의 마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역시 혼자인가."

아무리 감지의 범위를 넓혀봐도 주변에는 리자드맨 히어로 한 마리밖에 없다.

그 존재감이 그동안 미궁 10층에서 봐왔던 어떤 무리들의 존재감보다 크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미궁의 모퉁이를 돌자 바위에 앉아 육포를 뜯고 있던 리자드맨이 나를 바라보았다.

이미 내가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 움직임은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여기까지 기척을 숨기라고 하면 숨길 수 있었겠지만 어차피 소용없다.

모퉁이를 돈 다음에는 리자드맨 히어로가 있는 곳까지 몸을 숨길 어떠한 지형지물도 없었기 때문이다.

도마뱀의 입으로 씹어 먹던 육포를 집어던진 히어로가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검염이 피어나고, 이내 안정적으로 정돈되어 검에 그대로 맺힌다.

나는 그 정도의 마나 컨트롤 실력은 없었기에 검염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조금 날뛰었다.

4위계와 3위계의 절대적인 차이다.

즉, 장기전으로 가면 불리한 사람은 무조건 나다.

'허를 찔러 최대한 빨리 끝내는 걸 목표로.'

그 기회가 올 회귀까지는 최대한 시간을 끌며 검을 받아내자.

히어로에게 다가가는 내 발걸음이 점차 빨라지고, 이내 커다란 달음박질이 되어 짓쳐들어간다.

히어로가 마주 검을 내밀어 응수했다.

아스모데우스를 상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투박한 움직임의 몬스터, 하지만 기교가 없는 만큼 우직하고, 단순하기에 오히려 견고해 파고들기 힘들었다.

검을 맞대자 석로검법의 마나가 리자드맨 히어로의 마나를 가져왔다.

나는 우선 검을 크게 휘둘러 히어로와의 거를 두었다.

아니, 두려고 했다.

"!"

리자드맨 히어로가 틈을 주지 않고 달려들어 내게 검을 휘둘렀다.

나는 순간 흔들리는 검을 바로잡은 뒤 곧바로 반격했다.

검과 검의 충돌은 마치 벽을 부수는 파괴음 같았다.

하지만 내가 명백히 열세인 상황이다.

아스모데우스를 상대할 때는 힘의 고하를 걱정하지는 않았다.

이미 콜드릭에 의해 오른손이 잘린 상태였고, 허벅지도 베인 상태라 무게중심이 제대로 무너져 있었다.

하지만 이 녀석은 그런 부상조차도 없다.

마주치는 검마다 느껴지는 압도적인 힘의 격차.

그래도 틈을 보지 못할 것도 없다.

"흡!"

짧은 시간이나마 녀석의 호흡을 빼앗은 내 검이 리자드맨 특유의 비늘이 덮여있는 허벅지를 베어냈다.

석로검법의 원래 사용법이다.

상대의 검을 흉내 내어, 그 빈틈을 파고드는 악랄한 전술.

비교적 단순한 몬스터의 검술 정도는 이렇게 간단하게 따라 할 수 있다.

"!"

히어로가 잠시 뒤로 물러나 자신의 상처를 살펴봤다.

비록 비늘을 약간 가르고 피를 내는 정도에 그쳤지만 명백한 상처다.

그것도 나는 어떠한 상처도 입지 않은 채 입힌, 어찌 보면 일방적인 이득이다.

원래 여기에 라분과 레이나가 있었다면 보다 깊숙하게, 보다 확실한 상처를 입힐 수 있었을 것이다.

"크아아아!"

하지만 히어로를 죽일 수는 없다.

그리고 이 한 수에 모두의 전의가 사라졌을 것이다.

[인간 부수기.]

강력한 심상 구현의 힘과 함께 수십 번의 참격이 사방을 휩쓸으며 내게 달려들었다.

그 결과.

"헉! 헉!"

나는 살아있었다.

4위계의 심상 구현에 의한 공격을 맞고서도 살아남은 것이다.

비록 몸 곳곳이 베여 피가 나고 있었지만 치명상을 입은 것도 아니었다.

즉시 전투를 실시할 수 있을 만큼의 여력이 남아있었다.

"그르르르."

리자드맨이 잠깐 바라보다가 그대로 달려들었다.

약간이지만 숨이 거칠어져있었다.

나는 그 뒤로 끈질기게 100여 합을 버텨내는 데에 성공했다.

마침내 리자드맨의 호흡에 대한 감이 잡힌다고 느껴졌을 때.

[인간 죽이기.]

두 번의 참격이 내 목과 허리를 향했다.

목을 향한 참격은 막아선 내 검을 반쯤 잘라냈고, 허리를 향한 일격은 그대로 내 몸을 반으로 갈라내었다.

'여기까지인가.'

나는 내 피를 털어내고 천천히 뒤돌아서는 리자드맨 히어로를 바라보았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잘 싸웠다.

지금까지의 내 경험으로 판단해보건대 녀석의 실력은 4위계 초중반.

대충 붉은 송곳니 길드의 카리나나 심성류의 크리스 수준이다.

그런 상대를 맞이해 2백여 합을 버텨냈다?

이제는 충분히 내 실력을 자랑스러워해도 될 것 같다.

'어쩌면.'

정말 라분과 레이나가 완벽한 합으로 내 뒤를 받쳐줬다면 승리를 바라봤을 수도 있었겠다.

서로가 서로의 한계를 돌파한다면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홀로 도전했고, 실패했다.

동료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내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다.

"실패하지 않았어."

내 도전은 여기까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고통 속에서도 사색을 이어나갈 수 있게 만들어준 리자드맨 히어로에게 오히려 감사했다.

'이번에는.'

가슴이 위험하게 뛰는 느낌, 머리와 몸에 힘이 빠져나가 그대로 의식이 튀는 느낌이 몰려왔다.

너무나 많이 겪어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여전히 생소하다.

이성은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 본능이란 놈은 어쩔 수 없이 마나를 쥐어짜 내 생명을 붙들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의식이 사라졌다.

죽음이었다.

-키릭.

⋯⋯

내 의식은 리자드맨 히어로가 있는 모퉁이를 돌기 전으로 돌아와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가 순식간에 식었다.

감지 능력을 점검하며 학즉사법의 마나를 최대한 끌어올렸다.

"넌 죽었다."

검염을 몸에 두른 채 망설임 없이 모퉁이를 돌아 리자드맨 히어로를 맞이한다.

내가 녀석을 죽일 때까지, 이 굴레를 끝낼 생각은 없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85화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힘은 등급으로 나누어져 있다.

간단하다.

몸을 쓰는 전사는 위계, 마법이나 신성력을 사용하는 마법사, 사제들은 써클.

등급은 말 그대로 등급이다.

1등급의 고기와 2등급의 고기 중 어떤 것이 더 맛있겠는가?

먹어볼 필요도 없다.

마찬가지로 4위계의 전사와 3위계 전사 중 누가 더 강하겠는가?

붙어볼 필요도 없다.

4위계의 최저점과 3위계의 최고점이 맞붙는다고 가정해도 십중팔구는 4위계의 승리를 점칠 것이다.

아스모데우스를 상대하면서 내 실력은 3위계 중에서도 독보적이 되었다.

이제 정면의 1대1 승부로 나를 이길 수 있는 3위계는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런데도 나는 리자드맨 히어로에게서 승기를 가져오지 못했다.

물론 절대적인 위계의 차이는 뼈저리게 알고,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용납할 수 없다.

'내가 아직 꺾이지 않았으니까.'

패배한 것은 내가 아니다. 지난 생의 나다.

지금의 나는 아직 패배하지 않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무한 회귀자만이 납득할 수 있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리자드맨 히어로에게 다시 맞섰다.

"그르르르."

이번에는 조금 천천히 모퉁이를 돌았기에 이미 전투 준비를 마치고 서있는 히어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리자드맨에게 맞섰다.

승리의 여신이 내게 미소를 지을 때까지.

⋯⋯

최초의 격동은 두 번째 도전에서 바로 찾아왔다.

리자드맨 히어로의 호흡은 생각보다 훨씬 더 단순했다.

첫 번째 삶에서 얻은 석로검법의 경험을 소화하며 검을 받아내자 곧 리자드맨의 호흡을 따라갈 수 있었다.

'너무 쉬운데.'

아스모데우스를 상대로는 120번 넘게 했어야 할 단계가 고작 1번의 죽음으로 이루어졌다.

그래도 호흡을 이해하는 깊이는 훨씬 낮았다.

내 회심의 일격이 리자드맨의 가슴을 깊게 베어냈지만 여기까지였다.

[인간 부수기.]

총 4번의 심상 구현을 얻어맞은 끝에 손끝 하나도 움직일 수 없게 된 내 목을 리자드맨의 검이 깔끔하게 베어냈다.

죽음이었다.

-키릭.

⋯⋯

세번째 삶.

나는 리자드맨 히어로의 왼팔을 잘라내고, 깊숙하지는 않지만 뱃속에도 검을 박아 넣을 수 있었다.

"크아아!"

성난 리자드맨 히어로의 검이 내 목을 잘라냈다.

-키릭.

⋯⋯

⋯⋯

다섯 번째 삶에서, 드디어 나는 리자드맨 히어로를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내 몸에 총 3개의 상흔이 새겨져있었다.

모두 리자드맨의 호흡을 착각한 내 실수로 입은 상처들이고, 그중 하나는 꽤 위험한 수준이기도 했다.

응급처치를 받으면 넉넉하게 생존할 수 있었다.

"⋯마음에 안 들어."

나는 곧바로 학즉사법의 3성에 도전해 내 머리를 부쉈다.

-키릭.

⋯⋯

여섯 번째 삶.

나는 조금의 피로감을 안고 리자드맨 히어로의 앞에 섰다.

의자처럼 앉고 있던 미궁의 바위에서 내려와 검을 뽑아내는 몬스터.

녀석은 알고 있을까.

이미 4위계 전사의, 자신의 모든 움직임이 내 계산 안에 있다는 사실을.

"크아아아!"

히어로의 돌격.

4위계의 흉포함을 담아내고 있는 어마 무시한 돌격이다.

하지만 내게는 맞아주려고 해도 맞아주기 힘든 공격일 뿐이다.

부드럽게h 검을 치켜올리며, 이미 훤히 보이는 호흡의 빈틈을 찌른다.

"!"

히어로가 깜짝 놀라며 검을 회수하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내 검이 히어로의 왼팔을 깊숙하게 베어냈다.

'나쁘지 않아.'

세 번째 도전부터는 항상 첫 반격으로 리자드맨 히어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전투를 시작했었다.

지금 입힌 상처가 가장 깊은 상처다.

몬스터가 기세를 가져오기 위해 무리하게 공격을 시도했다.

[인간 베기.]

심상 구현의 발동 시에 느껴지는 기운은 마나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사용자의 호흡이 묻어 나온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심상구현이 베어 오는 경로를 모두 파악하고, 내 공격보다 두 배는 더 빠른 공격들을 일일이 쳐내는 데에 성공했다.

활짝 열리는 4위계 전사의 가슴속으로 내 몸이 빨려 들어갔다.

"!"

"닿았다."

올려친 내 검이 리자드맨 히어로의 목을 그대로 뚫고 튀어나왔다.

히어로가 급하게 내려찍은 검이 내 어깨에 닿았지만 마지막에 힘이 빠져 그리 깊숙하지 못했다.

이 정도면 되겠다.

피를 있는 대로 뿜어낸 리자드맨의 몸이 무너져 나를 덮쳤다.

나는 엄청난 무게에 부드럽게 깔리며 녀석의 마지막 숨소리를 들었다.

본래라면 나를 무참하게 살해했을 몬스터의 죽음이자, 내가 회귀를 그만두고 고정시킬 미래의 모습이었다.

나는 피범벅인 몸을 빠르게 빼냈다.

온몸이 아주 리자드맨의 피로 흠뻑 젖어있었다.

"이건 공양해야겠군."

우선 히어로가 들고 있던 검을 들어보았다.

오크의 것과는 달리 리자드맨의 무기들은 그들 특유의 무게중심이 있었다.

자세하게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리자드맨 특유의 꼬리가 그 이유인 듯했다.

어쨌든 리자드맨의 무기는 오크의 것과는 달리 사람이 쓰기는 힘들다.

내 검보다 질도 별로 좋지 않았고.

이름 없는 검이었지만 아스모데우스가 빙의한 오크 족장이 쓰던 검이다.

질적으로는 최상급의 검이다.

"좋아."

습관적으로 마정석을 탐지하고, 놈의 품을 뒤졌다.

역시나 이렇다 할 성과는 나오지 않았다.

보통 히어로쯤 되면 금붙이나 보석들을 품에 넣고 다닌다는데, 미궁 10층이라 그런지 보상이 한없이 짜다.

"후."

나는 흐르는 피를 닦지 않고 야영지로 돌아가 종을 몇 번 울렸다.

잠깐 갈림길 안쪽이 들썩이더니 레이나와 라분이 허둥지둥 뛰쳐나왔다.

무기만 들고 달려온 둘이 내 몰골과 마주쳤다.

"헉!"

"주인! 괜찮나!"

"내 피 아니야. 상처는 입었지만 일단 너네들한테도 보여줘야 할 것 같아서 이대로 왔어."

"그게 무슨 말이냐."

"따라와보면 알어. 그냥 와."

어리둥절해하던 둘이 이내 나를 따라왔다.

중간에 내 어깨에 난 상처를 발견한 레이나가 난리를 치며 배낭을 가지러 돌아간 것 외에는 사고가 없었다.

곧 라분과 레이나에게 내가 사냥한 히어로의 시체를 보여줄 수 있었다.

"이건⋯."

"어. 히어로야. 육포 까먹다가 그냥 사냥해버렸어. 몰래 가보니까 혼자서도 될 것 같더라고."

"허허."

"봤지. 공양한다."

내 몸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리자드맨의 피가 모두 떨어져 나가고, 곧 뻣뻣해졌던 몸이 편해졌다.

레이나가 바로 나를 앉히고, 아직도 피가 조금씩 나오고 있는 어깨를 지혈했다.

"리자드맨 히어로. 혼자 잡으신 거예요?"

"뭐, 그렇지."

"저희를 걱정해서?"

"그렇게 생각해도 되고."

"⋯⋯."

감동했나?

하지만 레이나의 반응은 내 예상과는 180도 달랐다.

"흥!"

레이나가 내 어깨에 감아준 붕대의 양쪽을 잡고 힘을 꽉 줬다.

붕대가 어깨에 조여지며 내게 엄청난 통증을 선사했다.

"으악!"

"누가 고마워하기라도 할 줄 알았어요?"

"?"

나는 어깨를 부여잡고 어느새 일어나 나를 내려다보는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얼굴에 아주 심술이 가득 차 있다.

"뭐야? 왜 그래?"

"주인이 잘못했다."

"라분 너마저?"

"다치셨잖아요!"

레이나가 빼액 소리 질렀다.

"아스모데우스의 일은 어쩔 수 없었다고 쳐요. 만약 저와 라분 씨가 도우러 갔었다고 해도 죽어서 아스모데우스의 양분이 되었을 테니까. 그런데 지금은 어때요? 리자드맨 히어로와의 싸움에서 우리가 도움이 안 됐을까요?"

"⋯됐을 거야."

"그러니까요!"

씩씩거리며 나를 보는 레이나.

사실 레이나의 말이 어느 정도 맞는 면도 있었다.

첫 번째 삶에서도 라분과 레이나가 있었다면 어찌저찌 승리를 거머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이 입을 피해는 둘째치더라도.

하물며 두 번째 전투에서는? 세 번째는?

말할 것도 없다.

"우리가 짐이에요? 지켜줘야 할 존재인가요?"

"⋯아니. 레이나 너는 내 동료야."

"저는 리더가 가자고 하면 어떤 길이라도 가겠다는 생각으로 이 파티에 참가했어요. 저를 위해 다친 리더를 보려고 참가한 게 아니라고요."

"내가 잘못했어."

라분이 나를 보며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나는 라분을 엄청나게 째려다 본 뒤에 다시 혼나는 사람이 되었다.

"리더가 바라보는 곳을 같이 바라보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리더의 뒤를 쫓아가는 머리 빈 사람이 아니라. 미궁의 끝을 보려면 그래야겠죠. 맞죠?"

"응."

"그러면 됐어요."

슬쩍 고개를 올려 레이나를 보았다.

몸을 돌리고 있어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 기분이 풀린 것 같기는 했다.

라분이 이 틈을 보고 얼른 끼어들었다.

"주인. 나도 할 말이 있다."

"뭔데."

"나도 주인과. 같은 곳을 바라보고⋯"

"닥쳐."

"응?"

"너는 내 말만 잘 들으면 돼."

"음⋯ 맞는 것 같다."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라분이 조용히 찌그러졌다.

나는 붕대를 감은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가볼까? 대체 저 뒤에는 뭐가 있는지 보자고."

미궁 11층으로 가는 계단 옆의 길.

이미 미궁의 시험으로 인해 한계를 경험했을 탐험가들의 한계의 한계를 경험하게 한 시험이었다.

우리들은 다시 포메이션을 잡았다.

사실 내 감지 능력을 아무리 확장해 봐도, 감지에 잡히는 몬스터는 없었다.

그야말로 무(無).

내가 리자드맨 히어로를 마무리한 뒤부터, 마치 바람과 같이 모든 몬스터가 사라졌다.

결국 내 앞에 남은 것은 길이고, 미궁이었다.

과연 이 길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

마치 누구도 닿은 적이 없는 미답지를 걷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미궁 10층을 탈출할 수 있는 선택지를 내버려두고 나머지 길들도 탐사할 만한 탐험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최초는 아니더라도, 엄청나게 적을 거야.'

그렇게 리자드맨 히어로의 시체를 넘어 광장에 진입했다.

우리의 앞에는 검은 상자가 놓여져 있었다.

"응?"

"상자다."

"상자네요."

커다란 공간이 있었지만 주의할 것이라고는 정중앙에 있는 단상, 그리고 그 단상 위에 놓인 상자 하나뿐이다.

말 그대로 상자다. 누가 봐도 상자라고 할만한 외견이다.

우리들은 천천히 검은색 상자를 향해 다가갔다.

오히려 좋았다.

모호한 보상보다, 이런 직관적인 보상이 더 좋은 경우가 많으니까.

"주인. 내가 열어보고 싶다."

"그러던지. 주변에 다른 위협은 없으니까."

라분이 검과 방패를 내려놓은 뒤 천천히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의외로 꽤나 부드럽게 열린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

"뭐지?"

그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라분이 열었던 상자 그 자제가 펼쳐졌다.

"!"

"!"

"!"

우리들은 튕겨나가듯이 상자에서 떨어졌다.

"모두. 전투 준비!"

라분과 레이나가 검을 추켜올리며 전의를 불태웠다.

하지만 우리들의 투지를 배신하듯, 펼쳐진 상자는 스스로 자신의 몸을 접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주먹만한 모양이 되더니 이내 그 움직임을 멈췄다.

한참이나 미동도 없는 상자를 바라보았다.

"대체 뭐야?"

"라분. 무섭다."

"네가 열었잖아. 일단 가 봐."

물론 라분 혼자만 보내지는 않았다.

우리도 뒤에 바짝 붙어 라분을 보조했다.

라분이 칼끝으로 상자를 툭툭 건드리더니, 곧 상자를 들어 올렸다.

"⋯⋯."

"뭔데?"

"라분 씨. 어때요?"

"그냥. 상자다."

라분이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가 주먹만한 구멍 안으로 손을 집어넣는데.

"?"

"!"

라분의 손이 끝도 없이 쑤욱 들어간다!

"라분!"

내가 얼른 라분에게 달려들어 몸을 강하게 밀쳤다.

라분이 내게 밀려나자 상자에 먹히는 것처럼 보였던 녀석의 팔이 그대로 빠져나왔다.

상자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

"⋯⋯."

"⋯⋯."

우리는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검은색 상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86화

미궁 10층의 막다른 길에서 등장한 정체불명의 상자.

11층으로 가는 길조차 마다하고 리자드맨 히어로를 사냥하는 업적을 세운 우리 앞에 나타난 상자다.

리자드맨 히어로보다 더 강한 적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이건 보상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

하지만 저 상자는 라분의 팔을 집어삼켰다.

미궁 깊숙한 곳에서는 미믹이라는 몬스터가 산다.

상자와 외관이 비슷한 몬스터로 보물 상자처럼 위장해 접근하는 인간을 잡아먹는다고 한다.

저 상자가 보상이 아니라 보상으로 위장한 미믹일 가능성도 있었다.

"라분. 괜찮아?"

"괜찮다. 조금 놀랐다."

"팔은?"

"아무렇지도 않다."

팔을 휙휙 휘두르는 것이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터뜨리려던 마나의 움직임을 멈췄다.

자살은 최대한 빨리하는 것이 회귀에 이롭다.

라분이 조금의 이상이라도 보였다면 내 머리가 터져나갔을 것이다.

"자. 조심히 접근하자."

우선 감지 능력을 이용해 상자를 면밀하게 관찰했다.

주변에 다른 위협이 없는 상황이니 만큼 눈까지 감고 감각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자 감지해낼 수 있었다.

상자에 바닥에, 핵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물건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간다."

우리는 미동도 하지 않는 상자에 슬금슬금 다가갔다.

칼끝으로 상자를 톡 건드렸다.

상자는 너무나 쉽게 옆으로 넘어가 자신의 아랫면을 내게 보여주었다.

이윽고 볼 수 있었다.

바닥 한가운데에 떡하니 박혀있는 작고 동그란 돌멩이를.

그 정체는⋯

"마정석?"

"마정석이네요?"

"마정석이다."

상자 모양의 몬스터 미믹은 들어봤어도 마정석이 달린 몬스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검을 집어넣고 성큼성큼 다가가 상자를 두 손으로 잡고 들어 올렸다.

무게감은 딱 같은 크기의 나무로 만든 상자 같았지만, 재질은 생전 처음 보는 것이다.

라분과 레이나도 무장을 해제하고 다가왔다.

"라분. 손을 집어넣었었지?"

"그렇다. 뭐가 들었으면 만져보려고. 안이 안 보였다."

라분의 말대로 상자를 열었는데 안이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마치 검은 물로 이루어진 바다가 펼쳐져 있는 것 같았다.

"감지도 되지 않고. 이거 방법이 없겠는데?"

나는 다시 라분이 한 것처럼 손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손목 높이의 상자에 팔뚝을 집어넣어도 끝이 닿지 않는다.

내 손을 보던 라분과 레이나가 기겁했다.

"주인!"

"리더! 빨리 빼요!"

"잠깐만."

팔꿈치까지 넣고 조금 더 들어가자 바닥이 만져진다.

"닿았다. 바닥이 있어."

"네?"

벙찌는 두 사람.

손을 이리저리 휘저으니 벽도 만져진다.

"오."

나는 팔을 각지게 휘두르며 상자의 부피를 계산했다.

대략 배낭 두 개? 그 정도의 공간이 만져졌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네."

우선 손을 빼낸 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안전을 점검했다.

역시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

"자."

상자를 건네자 라분이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별문제 없는 것 같아. 넣어봐."

라분과 레이나가 차례로 손을 집어넣었다 뺐다.

처음에는 불안에 가득하던 둘의 표정이 시간이 지나면서 흥분으로 가득 차기 시작한다.

"배낭 아티팩트!"

"그거다!"

"그런 것 같지?"

아무래도, 대박을 건진 것 같다.

우선 라분이 던져놨던 배낭을 들어 상자에 가져다 대었다.

"안 들어가네?"

"⋯⋯예상과 다르네요."

"하나씩. 넣어보자."

이번에는 배낭에서 냄비를 꺼내 입구에 가져다 대었다.

그래도 반응이 없다.

"뭐야?"

억지로 쑤셔 넣자 쏙 들어간다.

다시 손을 집어으니 바닥에 떨어져 있는 냄비가 만져진다.

냄비를 꺼내는 데에도 한참이 걸렸다.

"원래 대기만 해도 빨아들이는 거 아니었어?"

"네? 그런 것도 있어요?"

"아니. 그냥 그럴 것 같았는데."

우리는 배낭의 내용물을 하나씩 집어넣기 시작했다.

배낭 두 개 안에 있던 물건을 다 집어넣자 상자의 공간이 거의 다 없어졌다.

"와. 그걸 다 집어넣었는데도 하나도 안 무거워요!"

"그건 신기하네."

또 다른 기능도 있었다.

손을 집어넣고 원하는 물건을 생각하면, 어느새 그 물건에 손이 닿아있었다.

"봐. 가장 처음에 넣었던 냄비. 원래라면 다른 물건 다 꺼내고서야 꺼낼 수 있었을 텐데."

"대박."

상자는 원래 가지고 있던 배낭에 집어넣으면 위장도 완벽하다.

"이거 팔면 얼마나 나올까?"

"경매에 내놔야 할 것 같은 아티팩트인데요?"

아무리 보수적으로 잡아도 집 한 채 값은 하지 않을까 싶었다.

굳이 미궁에서 쓰는 것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어 범용성이 넓다.

"탐험 기간이 두 달은 더 늘어나겠네."

다시 미궁 11층으로 가는 계단이 있는 갈림길로 돌아왔다.

다행히 계단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자리하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소감을 말했다.

"이번에도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성공했고, 예상보다 훨씬 더 좋은 성과를 얻었어. 모두 너희들 덕이다. 고마워."

"리더가 거의 다 하셨는데요 뭐."

"라분. 더 강해지겠다."

"저도요!"

"그래. 모두 수고했고. 앞으로도 잘 부탁해."

낯간지러운 말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자.

미궁 10층의 계단을 걸어내려가니 어느 광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곧 미궁의 신비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미궁 11층에 도달하였습니다.]

[달성 등급. B+]

[보상 : 지급 완료.]

[미궁 11층의 안전지대로 이동합니다.]

그렇게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끼고 눈을 떴을 때, 우리는 미궁 11층의 안전지대로 도착해있었다.

미궁 11층은 라파가 따로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기에 탐험가들에게서 주워들은 정보밖에 없었다.

"미궁 9층이랑 비슷하다더니."

"넓네요."

하지만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단지 미궁이 넓어서가 아니었다.

바로 주변의 풍경이다.

"나무가 있네?"

미궁의 벽을 따라 자라나있는 나무가 있다.

색깔이 불길한 검은색이었고, 나뭇잎도 없었지만 일단 나무는 나무가 맞았다.

"와. 교과서에서 봤던 대로네요."

"이 나무가?"

"네. 미궁 저층부터는 이런 식물이 자라다가, 어느 층은 엄청난 숲이 펼쳐져 있대요."

햇빛조차 들지 않는 미궁에서 식물이라니.

생각만 해도 신기한 광경이다.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이런 정보들은 앞으로 미궁을 계속해서 탐험하는 파티의 리더인 내가 알고 있어야 한다.

11층의 정보를 다음 탐험 전에 제대로 조사하고 움직여야겠다.

주변에는 이제 미궁 사무소의 건물도 없다.

이제 이곳부터는 사무소가 관여하지 않는다.

오로지 탐험가들에 의해서만 개척되었고, 이제 우리가 개척해야 하는 곳이다.

"우선 돌아가자."

"네."

[미궁 1층으로 귀환하시겠습니까?]

이제 진척도 표시가 나타나지 않는 게 생소하다.

단순하게 몬스터를 사냥하며 다른 층을 개척할 수 있는 단계는 지난 모양이다.

우리는 미궁 10층의 상주 직원, 카브의 당부를 잊지 않았다.

1층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다시 미궁 10층으로 돌아와 복귀 신고를 했다.

"오. 살아돌아왔군."

"진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욕봤네."

카브가 서랍장을 열어 위스키 병을 꺼냈다.

"한잔하고 가지."

"그러죠."

우리들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카브가 따라주는 위스키를 한 잔씩 마셨다.

상당히 독한 술이었다.

"자네들은 길드 없이 행동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앞으로도 그 기조를 유지할 텐가?"

"그렇습니다만."

"알다시피 11층부터는 미궁 사무소의 관할 밖이야. 이렇게 자네들을 직접적으로 후원할 수 없게 된다는 말이지."

"그래서요?"

카브가 품에서 뱃지 하나를 꺼냈다.

"하지만 미궁의 깊숙한 곳에는 수많은 보물과 유적이 가득하고, 이를 원하는 사람들도 많아. 우리는 재능 있는 탐험가들과 의뢰자들을 1대1로 연결해 주는 사업을 하고 있어."

나는 카브가 건네는 배지를 받아들었다.

"11층을 탐험할 정도의 인재들이 마정석만으로 수입을 얻는다면 아무도 탐험을 하지 않을 걸세. 몇몇 미치광이들을 제외한다면 말이지."

"⋯⋯."

우리 파티가 그 미치광이들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은 잠시 비밀로 하자.

"탐험 1주일 전에 미리 탐험계획을 사무소에 제출하면, 우리가 가장 알맞은 의뢰를 매칭해주지. 물론 그전에 정식으로 요청이 갈 수도 있고. 이 뱃지는 단순한 출입증이라고 보면 되네."

"출입증? 어디요?"

"사무소 뒷편에 건물이 있네. 사전 탐험 등록을 진행하는 건물. 뭐, 자세한 건 가보면 알아."

뱃지를 내 손에 쥐여준 카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네가 직접 가도 좋고, 사무일을 대신하는 대리인이 있다면 개신 보내도 좋아. 어차피 하는 일은 똑같으니까."

"그렇군요."

"이제야 내 일이 다 끝났군. 적당히 쉬다 가게."

카브는 테이블에 적당히 남은 위스키를 두고 갔다.

우리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남은 위스키를 비우고 돌아갔다.

팁으로 은화 몇 개를 놓고 갔음은 물론이다.

13일 만에 귀환한, 상당히 긴 탐험이었다.

우리가 집으로 돌아오자 바닥에 수놓은 양탄자를 깔고 기도하던 라파가 반색했다.

"주인님! 오라버니! 돌아오셨군요!"

"그래. 근데 이게 다 뭐야?"

화려한 무늬가 수놓아진 양탄자에, 검은색 두건과 옷을 두르고 기도하고 있는 라파에, 이상한 음식들이 두런두런 깔려있다.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콜린이 손을 들었다.

"말도 마."

라분이 라파 앞으로 가 방패로 라파의 양팔을 톡톡 두드렸다.

라파는 눈을 내리깔고 있다가 다시 무릎을 꿇고 중얼중얼 거렸다.

"어휴. 사막 전통 의식이란다. 말려보려고는 했는데 말이 통해야지."

라파는 라분과 합을 맞춰 또 이상한 짓을 하더니 한참이 지나고서야 두건을 벗었다.

"주인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 일단 씻을게. 레이나. 먼저 씻고 와. 너 냄새난다."

"아이씨."

레이나가 내 어깨를 꽉 누르며 지나갔다.

리자드맨 히어로의 칼에 맞아 다친 상처가 있는 곳이었다.

"으앗!"

내 비명에 놀란 라파가 그제야 내 부상을 알아챘다.

"콜린! 구급상자 가져와요!"

"넵!"

콜린이 우당탕 방으로 달려가더니 이내 커다란 상자를 가져왔다.

조심스레 내 옷과 붕대를 벗겨낸다.

"상당히 최근에 생긴 상처 같은데, 몇 시간 전에 생기셨나요?"

"2시간 됐나?"

"다행히도 응급처치가 빨랐나 보네요."

콜린이 끓인 물과 차가운 물을 가져왔다.

어느새 머리를 질끈 동여맨 라파가 천을 물에 넣어 짠 뒤에 내 상처를 조심스레 닦았다.

소독이라나 뭐라나.

내가 보기에는 쓸데없는 행동 같지만 나를 위해서 하겠다는데 말리지는 않았다.

천이 내 상처를 닦을 때마다 상당히 따갑고 뜨겁다.

"으으."

"깊지도 않아서 신전에 가거나 할 필요는 없겠어요. 일상생활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고, 2주 뒤에는 아물것 같아요."

"그냥 사제한테 치료받으면 안 될까? 엄청 아픈데."

"안돼요. 사제의 치료라는 게 치료받는 사람의 회복력을 끌어올리는 치료라서 오히려 완벽하게 낫는 데에 시간이 더 걸리는 수가 있어요. 이런 상처는 자연스럽게 치료하는 게 나아요."

"그, 그렇구나."

너무나도 논리정연한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콜린은 라파의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고, 레이나가 욕실에서 나와 라분과 교대했다.

라파는 내 상처를 닦는 것을 마무리하고, 나는 계속해서 상처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미궁 10층 탐험의 마무리이자, 미궁 11층 탐험의 시작이었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87화

미궁 10층에서 돌아온 날.

나는 파티에게 일주일 간의 휴식을 지시했다.

수련은 명상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 완전한 휴식이다.

미궁 10층 탐험은 무려 2주일에 걸쳐 계속되었다.

5명 이상인 일반적인 파티와 다르게 우리들은 고작 3명이다.

3명이서 2주일간 진행한 탐험.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탐험 성공 직후, 기쁨과 흥분으로 몸을 더 혹사시켰다가는 부상을 입기 딱 좋았다.

나도 철저하게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몸과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래도 라파의 말대로 5일 동안 푹 휴식을 취하니 어깨의 상처가 많이 아무는 것이 느껴졌다.

복귀 6일차에는 어느 정도 기운을 되찾은 의미로 10층 탐험 성공 축하 파티를 열었다.

원래라면 복귀한 당일에 파티를 여는 게 우리의 전통이었지만, 내 부상으로 음주가 금지당했기에 부득이하게 미뤄졌다.

아니, 부득이하지는 않고 확실한 이득이 있었지만.

1차로 상업 지구에 위치한 고급 식당에서 우아하게 스테이크와 와인을 먹고, 2차로는 일반 지구에서 맥주를 퍼마셨다.

술이 들어가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라파. 내가 말해줬던 좌표는 대충 찾았어?"

아스모데우스와의 혈투를 반복하던 와중에 악마와 동귀어진에 성공한 5위계의 전사, 콜드릭이 내게 유언처럼 남긴 말이 있었다.

\[미궁 11층. 사무소 일반 지도 기준 A1124, C123 구역. 그곳으로 가보게. 연자에게 손이 닿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소년이 그 물건에 어울리겠어.]

물론 내 회귀로 사라진 말이 되었고, 콜드릭은 영원히 내게 이 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일단 물건이라고 했으니 아티팩트의 종류겠고, 잘하면 미궁의 유물인 라비팩트일 수도 있겠다.

맥주를 홀짝이며 라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라파가 답했다.

"물론이죠. 내일 보고드릴 수 있도록 할게요."

"그래."

"간단히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상당히 깊은 곳이에요. 대략 가시는 데에만 8일 정도는 잡으셔야 할 정도로."

편도 8일이면 왕복했을 경우 16일이다.

넉넉히 20일은 걸리겠고, 그곳에 정확히 뭐가 있을지도 모르니 최악의 경우 한 달이 걸릴 수도 있었다.

"음."

솔직히 세 명이서 탐험을 진행하기에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못할 것도 없다.

특히 전해 들은 미궁 11층의 특성에 의지하면 더 가능성이 올라가고.

더군다나 내게는 꽤 많은 물건들을 담을 수 있는 상자 아티팩트가 있었다.

최소한 보급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든든하기 그지없다.

"그나저나 미궁에 숲이라니."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그 숲이 맞다.

미궁 11층부터 15층까지는 숲과 늪, 들판 등의 지형이 펼쳐진다고 한다.

평생 칼리움에서 살아온 나는 지상에서도 제대로 된 숲을 본 적이 없었다.

아예 칼리움 밖을 나가본 경험이 없으니 당연했다.

제대로 된 신분이 없는 하수구 출신이기에 칼리움 외부로 나갔다가 잘못하면 아예 들어오지도 못한다.

실제로 담력 시험으로 성 바깥에 나갔다가 경비병에게 잘못 걸려 맞아죽은 놈도 있었고.

지금이야 미궁 탐험가로 등록해 목덜미의 문신을 신분증 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지만 굳이 칼리움 밖에 나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미궁에 한 번이라도 더 갔지.

"내가 숲을 미궁 속에서 처음으로 보게 될 줄이야."

"어? 리더는 숲 보신 적 없으세요?"

"너는 본 적 있어?"

"뭐, 아카데미 시절에 가끔 도시 밖으로 나가기도 했으니까. 조금만 움직이면 바로 근처에."

"그렇구나. 들어가 본 적도 있고?"

"당연하죠."

다행이다.

리자드맨이 출몰하는 늪 지형이야 하수구 같았으니 문제없었지만 숲은 약간 걱정이 있었다.

그래도 레이나가 경험이 있다니 레이나의 의견을 들으며 탐험을 진행하면 되겠다.

"주인. 라분도 경험 있다."

"그래?"

"칼리움으로 올 때 들어가 봤다."

"그래. 술이나 마시자. 자. 건배."

"⋯⋯."

"뭐. 몸으로 부딪히면 안될게 없어. 한 번 도전해 보자고."

역시 이런 면에서는 라분보다야 레이나를 더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안 돼요!"

라파가 갑자기 우리의 말에 끼어들었다.

"어?"

"숲은 보기보다 훨씬 위험해요. 제가 알아본 바로는 미궁의 숲은 지상의 숲보다 훨씬 주의해야 할 것이 많다고 해요. 제대로 된 경험을 갖추는 게 생각보다 더 중요할 수 있어요. 제가 사람을 구해 놨어요."

라파가 또다시 엄청난 속도로 말을 이어나갔다.

콜린은 이미 질린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미궁 11층의 탐험 경험이 있는 사람이야?"

"네. 기본적인 교육을 요청했습니다. 3일 뒤에 방문할 거예요. 제가 받고 전달교육을 할 계획입니다만, 직접 들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주인님께서 선택해 주시면 됩니다."

"그렇군. 고마워."

사실 직접 몸으로 부딪히는 게 내 적성에 맞고, 무한 회귀와도 어울린다.

그래도 정보를 얻읕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얻고 가는게 여러모로 좋다. 죽으면서 배우는 것도 심신의 피로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내가 신경 쓰지 못하는 부분을 하나하나 확인해 주는 라파가 고마울 뿐이다.

그렇게 2차도 적당히 마무리되고, 집에서 3차를 계획하고 있을 때였다.

내 뒤에서 나를 향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기본적으로 감지 능력을 이용해 주변을 장악하고 있기에, 나를 목적으로 한 접근은 항상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이미 간격을 모두 계산한 상태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이거 루카스 아니야?"

"응?"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확인해 보니 나보다는 훨씬 어른스러운 인상의 얼굴이 보인다.

나는 그 얼굴의 주인을 익히 알고 있었다.

나름 기억하기 쉬운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뭐야. 토카리잖아?"

"오랜만이다. 루카스."

예전 트롤에 의해 미궁 3층을 탐험하던 내 파티가 공중분해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하수에 있던 내 거처를 차지한 놈이었다.

두어 달 전쯤에는 콜린을 괴롭히기도 했다고.

내게 그 상황을 설명해 줄 때 녀석은 거의 반쯤 울고 있었다.

슬쩍 콜린을 돌아보니 녀석은 놀랍게도 아무런 티를 내지 않고 맥주만 들이키고 있다.

그러면서 라파 쪽을 계속 곁눈질하는 것을 보아하니 저 허세의 근원이야 뻔하다.

"뭐야. 적당히 술 좀 마신 것 같은데, 뜬금없이 왜 아는 척이야? 우리가 그 정도로 친했나?"

"그건 아니고. 루카스.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

"듣자 하니 꽤 성공했다면서? 하수구도 졸업하고 이사도 갔다고 들었다. 축하한다."

"그런데?"

슬슬 녀석의 말이 거슬리기 시작한다.

"다른게 아니야. 나도 좀 끼워달라고. 응? 짐꾼이어도 되니까. 지금 너네 다섯 명이서 탐험하는 거야? 다섯 명이서 되겠어?"

"다섯 명 아니라 세 명인데. 그리고 우리가 미궁 몇 층을 탐험하고 있는지는 알아?"

"어? 6층?"

"11층이다 임마. 감당 가능하겠어?"

"11층? 지랄하고 자빠졌네. 야. 취해도 적당히 취해야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혀가 반쯤 꼬여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그보다 먼저 레이나가 게슴츠레 눈을 뜨며 토카리를 바라보았다.

"리더. 저 새끼 치워요?"

"적당히 해. 집에 가서 더 마셔야 되잖아."

"생긴 건 돼지같이 생겨서. 정육점이 아니면 영 정이 안 갈 얼굴이네요."

아무래도 레이나. 많이 취했다.

그런데 취한 건 나도 마찬가지다. 레이나의 말에 킥킥거리자 토카리의 얼굴이 대번에 붉어졌다.

"뒤질래?"

녀석이 주먹을 치켜들었다.

예전에 내게 덤비다가 한 번 참교육을 당한 것을 잊었는지, 아니면 술이 녀석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는지.

하지만 녀석이 주먹을 전부 들어 올리기도 전에 레이나가 던진 포크가 엄청난 속도로 토카리 눈 옆에 있는 기둥에 틀어박혔다.

-팍!

포크에 검염을 담아 아주 깊숙하게도 들어갔다.

거의 끝트머리만 남긴 포크는 마치 못을 박아 넣은 듯 미동조차 없었다.

아무래도 저거는 못쓰겠다.

"⋯⋯."

"⋯⋯."

막 일어나려는 싸움에 환호할 준비를 마친 주점의 손님들이 조용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여기가 미궁도 아니고, 3위계의 실력자를 볼 일이 흔하지 않다.

토카리는 본인의 눈 바로 옆에 일렁거리는 검염의 잔상을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는 얼른 상황을 정리했다.

"됐어. 그냥 갈 길 가라."

토카리의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보니 괜히 안쓰럽다.

원래 내 성격이었다면 이렇게 시비를 거는 놈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하수구의 생리가 그렇다. 싹은 짓밟아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무한 회귀를 제대로 활용하기 시작하고 나서 이런 내 가치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직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사람을 보는 시작이 조금 달라진 느낌이다.

"씨발. 씨발⋯."

토카리는 덜덜 떨면서도 쉽게 도망가지 않았다.

공포에 몸이 굳었나 싶어 녀석을 잠깐 관찰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우리가 자리를 정리하고 직원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포크 값을 팁으로 줄 때까지도 녀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말을 걸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귀찮은 놈이 따로 없었다.

"뭔데. 갈 길 가라니까?"

"다 죽었다고."

"뭐?"

"내 애들. 클라이머한테, 미궁 4층 습격 때 전부 죽었다고. 도르, 아프론, 다스, 나머지도. 나 혼자 2주일을 버티고 겨우 살아돌아왔어. 씨발."

"⋯⋯그래? 안타깝게 됐네."

나는 녀석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미 일행들이 주점 밖에서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떠나려는데 토카리가 소리를 빼액 지른다.

"그게 다야? 그게 다냐고!"

"그래. 그게 다야."

나는 품에서 은화 두 개를 꺼내 녀석의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탐험가 그만두고, 딴 일하면서 건실하게 살아라. 그리고 잘 들어."

"⋯⋯."

"한 번 더 이딴 쓸데없는 일로 내 눈에 띄면 죽는다. 알겠지?"

토카리의 몸이 흠칫하고 떨렸다.

내 마나를 느끼고 내 말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하수구에서는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다시는 보지 말자고."

내가 떠나고, 토카리의 몸이 그대로 벽에 기대며 무너졌다.

그 뒤로 나는 토카리를 전혀 안중에 넣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토카리는 나와 같은 놈이다.

똑같이 하수구에서 살았고, 같이 동료를 잃었다.

아마 녀석은 자기 목숨이 아까워서라도 우리들을 다시는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하수구에서 15년 넘게 버텨온 내가 보증한다.

'한심하군.'

나는 무한 회귀를 가졌지만, 녀석은 그러지 못했다.

단 한 가지의 차이가 이런 극과 극의 결과를 낳았다.

그래도 토카리의 모습과 내 모습이 조금은 겹쳐 보이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리더! 뭐해요! 빨리 와요!"

"주인님! 저랑 같이 안주 사러 가요!"

나는 얼른 고개를 들고 내 사람들을 향해 달려갔다.

그래. 이게 내가 지금까지 쌓아 올린 삶이고, 쌓아 올려야 할 삶이다.

나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아직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나만의 힘은 아직 변하지 않았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88화

미궁 11층부터는 진척도가 없다.

대신 다음 층으로 넘어가기 위한 각종 과제들이 주어진다.

또한 이 과제를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해당 층에서 파티가 해야 할 모든 일들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층 탐험가들은 과제를 받는 것이 크게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과제 수여식'은 미궁 10층대를 탐험하는 탐험가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의식이 되었다.

미궁 11층의 안전지대를 벗어나 과제를 받게 되면 웬만한 경우가 아닌 이상 과제를 바꿀 수 없게 된다.

게다가 과제를 클리어할 수 있는 사람은 과제를 받았을 순간에 파티원으로 한정된다.

즉.

"우리 세 명이서 과제를 받으면, 우리 세 명이서 무조건 11층을 클리어해야 하는 거야. 죽지 않는 이상."

"라분. 어렵다."

"과제 수여식이 끝나면 새로운 인원을 받지 못한다고. 새로운 인원과 아예 안전지대를 벗어날 수 없게 돼."

토카리의 합류 요청을 매몰차게 거절한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이거다.

만약 11층에서 과제 수여식을 토카리와 함께 받게 되면, 11층의 탐험에서는 토카리와 운명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만약 토카리가 미궁 탐험을 거절하면 미궁 11층의 안전지대를 벗어날 수조차 없다.

'죽인 다음에 하면 되지만.'

본인에게 속박된 과제를 벗어나 다른 파티와 함께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예외가 있다.

"과반수의 죽음. 예를 들어, 우리 세 명 중 두 명이 죽게 되면, 나머지 한 명은 다른 파티의 과제에 참가할 수 있어. 10명이면 다섯 명이 기준이 되겠지."

"음."

"이해할 필요도 없어. 그럴 경우는 전혀 없으니까."

"그렇군!"

정말 최악의 경우에 미궁 11층에서 라분과 레이나가 죽어 나 혼자 남는다면,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진다.

과제를 포기하고 새로운 과제를 받기 위해 다른 파티를 찾느냐.

아니면 다른 파티의 과제에 끼어들어 함께 미궁을 공략하느냐.

"다만 추가 인원을 받을 수 있는 파티는 과반수 인원이 이미 사망한 파티여야 해."

"패배자들끼리 다시 모여 미궁을 공략할 수 있다는 말이네요."

"그렇지."

탐험가 아카데미는 보통 생계형 탐험가들이 탐험하는 3\~6층의 교육에 그 역량이 집중되어 있다.

레이나도 미궁 11층에 대해서는 숲이 있다 정도의 막연한 지식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라파의 교육을 통해 내 시야, 그리고 파티원들의 이해력을 높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항이 되었다.

모두가 처음이다.

라파의 철저한 준비가 충분히 빛을 발할 수 있는 상황이다.

"미궁이 파티의 역량을 측정한다는 게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야. 조건을 달성하기 힘든 과제는 웬만해서는 나오지 않는다고 하니까. 크게 긴장하지 말자고."

과제를 받은 파티는 미궁 11층을 자유롭게 움직오갈 수 있다.

하지만 파티 당 과제를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오직 한 번이다.

우리는 이번 회의에서 미궁 11층 공략에 대한 개요를 결정해야 한다.

라분이 웬일로 가정 먼저 의견을 냈다.

"3명. 항상 적었다. 노예 두 명만 더 사서 불침번 담당. 어떤가?"

"⋯⋯."

"⋯⋯."

나와 레이나의 시선을 본 라분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자기를 기특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는 빠르게 녀석의 착각을 정정할 필요를 느꼈다.

"너. 라파 교육 제대로 안 들었지?"

"?"

"마음대로 인원을 늘리면 과제의 난이도가 올라가. 난이도는 인원수에 비례한다고 분명 라파가 어제 설명해 줬잖아."

"!"

"더군다나 미궁의 압박감은 어쩔 건데. 아무 대비도 하지 않고 노예를 덥석 11층에 데려오면 미쳐버릴걸?"

"!!"

"더불어서 자격 없는 사람을 11층 이상으로 데려왔을 때의 추가 페널티, 못 들었어?"

"⋯까먹었다."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라파가 우리를 교육해 줄 때 분명 눈 뜨고 있는 것을 봤는데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자격이 없는 사람과 11층으로 이동하면 파티 전부가 미궁 1층으로 못 돌아가. 12층을 뚫을 때까지."

방법은 두 개다. 자격이 없던 동행인이 죽거나, 과제를 완료하거나.

아니라면 그 파티는 영원히 미궁 11층에서 과제를 진행해야 한다.

내가 토카리를 매몰차게 거절한 두 번째 이유다.

위험성이 너무 크다.

아무리 내가 리스크를 찾아가는 놈이라도 이 정도의 리스크를 감당할 깜냥은 못된다.

"인원이 문제라는 점은 동의해. 그렇다면 인원에 따른 위험성을 방지하는 법은 하나야. 11층에 도전하는 다른 파티를 찾는 것."

실제로 라파는 내가 건네준 뱃지로 사무소에 다녀온 뒤 후보 파티를 3파티나 추려왔다.

다들 적당한 인원에, 합류하면 든든한 전력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라파가 건네준 명단을 레이나와 라분에게 보여주었다.

"세 개의 파티의 인원수는 7\~8명 정도로, 우리가 합류하면 10명 정도의 파티가 된다. 어떻게 생각해?"

둘의 결정은 빨랐다.

"싫어요."

"거절한다."

나는 의외의 반응에 놀랐다.

"왜?"

"우리보다 많은 파티에 합류하면 보나 마나 지휘권을 넘겨야 할 텐데, 그러면 우리 파티의 가장 큰 장점이 사라져요."

"장점?"

"리더의, 정답을 찾는 능력."

정답을 찾는 능력.

라분과 레이나가 둘이서 소곤거리던, '내 말만 잘 들으면 된다'의 발전형이다.

내 무한 회귀를 모르는 레이나는 어느새 본인이 생각하는 내 능력을 저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표면상으로는 레이나의 저 말을 부정했다.

하지만 레이나는 내 대답에서 오히려 확신을 얻은 모양이다.

나는 레이나의 뜨거운 시선을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그래. 레이나는 그렇다 치고, 라분은 왜? 다른 파티와 합류하면 난이도는 더 올라가겠지만 안정성은 좋아질 텐데."

"다른 사람과 함께하면. 개성. 없어진다. 이리저리 휘둘리는거. 사절이다."

"음."

"그리고 우리. 가야한다. 주인이 말한 좌표에."

그렇다.

콜드릭이 알려준 미궁 11층의 모처로 가는 것이 다음 탐험의 목표다.

그런데 합동 파티로 움직인다?

11층을 클리어하고 나서야 움직일 수 있을 터였다.

비효율의 극치다.

"사실 나도 반대였어. 열심히 돌아다녀 준 라파한테는 미안하지만 합동 파티 건은 없는 걸로 하자."

회의 결론을 라파에게 알려주자 라파는 선선히 우리의 뜻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우리는 드디어 미궁 11층에 도전하게 되었다.

[미궁 11층에 진입합니다.]

미궁 10층을 클리어 한 직후에 잠깐 들렀던 그 풍경이 다시 펼쳐젔다.

동굴이라면 경이로울 정도로 넓은 동굴이고, 오히려 천장이 있는 절벽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정도다.

바위를 뚫고 자라난 나무들이 벽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라파가 데려온 용병들에 의하면 이름은 '쇠나무'라고 한다.

불에 타기는 하는데, 굉장히 느리게, 또 열감도 낮게 탄다.

더군다나 질기기는 엄청나게 질겨서, 검염으로 잘라내야 할 정도란다.

역시 미궁의 나무는 나무조차도 대단하다고 하겠다.

"자. 우리 파티의 첫 과제 수여식이다."

대형 파티의 첫 과제 수여식은 그야말로 길드의 주요 행사라고 해도 좋을 만큼 성대하게 이루어진다고 한다.

우리는 귀찮은 행사 대신 낙타의 우유로 만든 술을 가져왔다.

라파가 구해왔는데, 대체 어떻게 구해왔는지 모르겠다.

"아이릭이었나?"

"아이락이다."

내게서 술이 든 가죽을 받아든 라분이 바닥에 점점이 술을 뿌리더니, 사막의 언어로 뭐라 중얼거리고는 내게 건넸다.

"한 모금씩 마시자."

"그래."

내가 먼저, 다음이 라분. 마지막이 레이나다.

아이락을 처음 먹어본 나와 레이나의 반응은 대동소이했다.

"으엑."

"텁텁해! 라분! 이거 상했어요!"

"아니다. 맛있다."

라분은 레이나에게서 술주머니를 건네받고 쩝쩝거렸지만 이내 남아있던 내용물들을 전부 털어버렸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나무로 걸어가 가죽 주머니를 걸었다.

"끝이다."

"무슨 의미가 있던 거야?"

라파가 부탁하고, 더해서 라분의 멘탈 관리를 위해 진행하기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왜 하는지 모르겠다.

"사막의 신에게. 무사히 돌아오는 것을. 바라며 술을 바친다. 사막의 전사. 누구나 한다."

자부심이 가득한 라분.

하기야, 녀석도 처음에는 1위계였다. 마나를 쓸 줄 알았다는 말이다.

'그래봤자 지금 2위계에서 벗어나지도 못하지만.'

현재 라분의 성장 둔화는 녀석의 트라우마니까 괜히 건들지 않기로 하자.

새로운 검법인 구천검법을 익혀도 2위계의 벽이 뚫릴 생각을 하지 않는단다.

라분은 침울해져 있지만, 해답은 정해져 있다.

'끝없는 실전이 답이지.'

아무리 대련을 실전같이 한다고 해도 대련은 대련이다.

서로 목숨을 거는 실전과는 들어오는 경험치가 다를 수밖에 없다.

"자. 어제 말했다시피. 이번 탐험은 그냥 탐색 정도로 생각해. 적응을 위한 탐색."

우리에게 11층에 대해 알려준 용병들은 하나같이 '안정적인 탐험'을 강조했다.

자신들이 아무리 말해줘 봤자 직접 경험하는 것보다 나은 게 없고, 직접 경험하고서도 피해를 입지 않으려면 안정적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물론 나와는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 미궁 10층 공략으로 얻은 상자 아티팩트, '미믹 주머니'에 식량과 각종 생존 물품들을 가득 채워왔다.

조금이라도 할만하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장기 탐험으로 전환할 예정이다.

"이제, 가자."

"네."

"음."

미궁 11층의 안전지대에는 우리 파티 말고 아무도 없었다.

정말로 아무도.

안전지대의 생소한 정적이 우리가 정말로 미궁 11층에 도전한다는 실감을 준다.

그래도 우리는 쉬지 않고 걸어 미궁 11층의 안전지대를 벗어났다.

[미궁 11층에 도전합니다. 참가인원 3명.]

[생성 과제 : 붉은 오크 챔피언 10마리 처치 후 미궁 12층으로 진입.]

[과제 진행 중 단 한 번이라도 외부의 개입이 있다고 판정될 경우 과제 달성도가 초기화됩니다. 이는 예외가 없습니다.]

[과제 완료 시 즉시 미궁 12층의 안전지대로 이동합니다.]

[현재 진행 상황.]

[붉은 오크 챔피언 0/10]

"좋아."

붉은 오크.

용병들에게서 들은 적 있는 몬스터다. 미궁 11층에서 13층까지 주로 분포하며, 11층 생태계의 주류를 차지한다고 한다.

첫 과제로 나쁘지 않은 상대라 하겠다.

그런데.

"12층 통로까지 찾아야 해?"

"이거 쉽지 않겠는데요."

미궁 하층으로 향하는 통로는 랜덤으로 생성된다는 것이 중론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통로가 사라져버린다.

"그렇다고 찾은 통로를 사람을 남겨서 고정시키기도 부담스러워."

"우리는 고작 3명뿐이니까요."

"음!"

라분은 걱정도 없는지 방패를 휙휙 휘두르며 아주 빨리 들어가자고 난리다.

원래라면 과제를 확인했으니 다시 미궁 1층으로 돌아가 다시 전략을 짜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용병들의 말을 빌리자면, 백 마디 말보다 단 한 번의 경험이 나은 법이다.

"그래. 가자!"

나는 눈을 감고 책갈피 아티팩트에 저장된 미궁 11층의 대략적인 지도를 보았다.

군데군데 빈 공간들이 있지만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은 완벽하게 그려져있다.

미궁 4층 탈환의 공로로 콜드릭이 편의를 봐줬기에 만들 수 있었던 지도다.

물론 라파가 고생해 줬다.

"붉은 오크.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이라도 보자고."

"네!"

그렇게 우리는 미궁 11층으로의 첫 발을 내디뎠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89화

우리의 미궁 11층 탐험 목표는 두 가지로 정해졌다.

첫째. 붉은 오크의 서식지 탐색.

둘째. 콜드릭 포인트로의 루트 탐색.

내가 내가 찍은 포인트를 '콜드릭 포인트'라고 지칭하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 내가 정보를 얻어왔는지 지레짐작한 모양이다.

나는 일부러 녀석들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으니 의심이 확신이 되는 분위기다.

내가 의도한 대로다.

'이게 낫지.'

내가 어떻게 이 포인트를 알아냈는지 설명하기는 귀찮고, 또 어려운 일이다.

무한 회귀의 비밀이 밝혀질 여지도 있고, 이미 레이나와 라분도 내가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짐작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미궁 11층의 안전지대를 벗어나자마자 보이는 평야. 저 멀리 미궁의 숲이 보인다.

나는 눈을 감고 책갈피 아티팩트에 미리 저장해 놓은 경로를 되짚었다.

이곳은 꽤나 유명해서 고유의 이름도 붙어 있다.

"고요의 평원."

미궁 11층의 초입은 고층에 도전한 수많은 탐험가들의 발을 거친 장소다.

근방의 지형은 그들이 사무소에 제공하여 비교적 정확하게 알려져 있었다.

라파가 우리를 반복 교육했기에 근방의 지리는 빠삭하다.

하지만 복습을 위해 배웠던 사실을 되짚었다.

"출현 몬스터는 따로 없고. 미궁 11층으로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쉬는 장소야."

"풍경은 좋네요. 저기 멀리 보이는 숲까지 걸어서 두 시간 거리라고 했었죠?"

"어."

쇠나무들이 상당히 커다란 군락을 이룬 숲이다.

미궁 9층에서라면 절대 보이지 않았을 거리가 미궁 11층에 오니 또렷하게 보인다.

이렇듯 미궁에서의 가시거리는 층에 따라 가지각색으로 변화한다.

특정 층에 너무 익숙해지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가시거리의 증가는 이런 탁 트인 평원에서 서로가 서로를 보다 확실하게 볼 수 있게 한다.

되도록 조용히 숲을 지나가고 싶은 우리에게는 아주 큰 핸디캡이 된다.

"숲에서 이렇게 저희를 지켜봤었다니, 생각만 해도 무서워요."

"음. 라분도. 무섭다."

"뻥치지 마."

과거 미궁 사무소가 정립되지 않았던 시절, 수많은 탐험가들을 잡아먹은 고요의 평원의 함정이 있었다.

바로 이 가시거리를 통해 평원에서 접근하던 파티를 습격하는 몬스터들이었다.

평원을 가로질러 숲에 진입하면 멀리서 보고 있던 몬스터들이 단체로 습격하는 방식이다.

간단한 함정이지만, 효과는 실했다.

너무나 많은 탐험가들이 희생당해서, 결국 한 사람이 저 숲에 있는 모든 몬스터들을 청소했다고 한다.

바로 '탐험가 파티'의 딜러, 리디엠 올버스다.

그 뒤, 정기적으로 이름있는 탐험가들이 자진해서 이 숲을 청소하는 것은 미궁 탐험가들의 전통이 되었다.

"마지막 청소가 일주일 전이었으니. 지금은 아무도 없겠네요."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야. 이런 장소는 내 감지 능력이 크게 소용이 없으니까."

내 감지 능력은 적과의 절대적인 거리가 중요하다.

복잡한 동굴이 잔뜩 엉켜있는 4\~8층까지의 미궁은 내 감지 능력을 십분 확인할 수 있는 장소다.

그런 장소에서는 단 5m 떨어진 거리에 적이 있어도 그 사이를 벽이 가로막고 있으면 서로가 서로를 인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내 감지 능력은 적을 바로 감지할 수 있었다.

반면 이런 탁 트인 공간에서는?

내 감지 능력을 사용하는 것보다 눈에 의지해 탐지를 하는 것이 더 효과가 좋을 정도다.

그렇기에 나는 미궁에서 오랜만에 감지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매번 내 신경의 일부를 감지 능력에 할애해왔기에 불편함이 있었기에 지금의 탐험은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평원을 가로질러 숲에 진입했을 때, 나는 여지없이 감지 능력을 사용했다.

"일단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어."

아직 2시간 정도밖에 탐험을 진행하지 않았기에 활동 가능 시간은 넉넉하다.

초입의 숲은 정기적으로 청소가 이루어지기에 몬스터의 비율이 극히 적다고 한다.

몬스터들이 이곳을 인간의 영역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는 숲의 지형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미궁 11층의 쇠나무는 칼리움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나무와는 180도 달랐다.

나무껍질은 마치 강철과도 같이 단단했으며, 주먹으로 때리면 마치 라분의 방패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텅!

"봐봐. 똑같지."

"정말로요."

"⋯⋯."

나무의 가지에는 나뭇잎 대신 마치 갈대와도 같은 이파리가 달려있었다.

'갈대'라는 말은 우리를 교육해 준 용병이 된 탐험가들이 강가에서 본 식물이라고 한다.

나뭇잎들은 제각각 길게 늘어져있어 어쩔 때는 시야를 방해하기도 하고, 어쩔 때는 위에서 물방울을 뚝 떨어뜨리기도 했다.

엄청나게 단단한 나무와는 다르게 나뭇잎은 엄청나게 얇고, 부드러웠다.

"나무가 맞기는 한 거예요?"

"뭐, 일단 나무라니까."

이걸 나무라고 부르지 않기도 뭐 하기는 하다.

숲 곳곳에는 꽤 큰 바위들이 솟아있기도 했다.

바위가 겹겹이 있는 곳은 야영을 하거나 몸을 숨기기에 좋아 보였다.

전체적으로 용병들이 말해준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숲길이 빠른 걸음으로 6일 동안 이어지는 거야."

"정말 크네요."

"넓다."

통상적인 탐험 속도를 유지하고 직선길로 숲을 가로질렀다.

첫 탐험치고는 대담한 움직임이었지만 나도, 라분과 레이나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5시간을 내리 걸었다.

세 번째 휴식을 위해 적당한 장소를 찾아보려는데.

"음?"

드디어 내 감지 능력에 우리를 제외한 다른 생명체가 감지되었다.

"전혀 모르는 생물이야. 아. 사람은 아니고 몬스터다. 천천히 접근해 보자."

"네."

피곤에 절어있던 둘의 눈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천천히 적을 향해 접근했다.

"눈 돌리지 말고 들어. 1시 방향에 위치한 나무에 매달려있어. 시선이 우리 쪽을 향하고 있어서 보면 눈을 마주칠 수도 있다."

"⋯⋯."

"나무 원숭이다."

곁눈질로 녀석의 위치를 살폈다.

쇠나무 원숭이. 탐험가들이 줄여서 부르는 말은 쇠숭이.

쇠나무의 늘어진 잎과 몸통에 매달려 사냥감을 기습하는 몬스터다.

그런데 몸의 색깔이 쇠나무와 너무나도 흡사하여 눈으로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실제로 지금 보이는 쇠숭이도 우리에게 뚫어지게 고정된 누런 눈을 제외하면 몸의 윤곽조차 잡아내기 힘들다.

우리는 쇠숭이를 발견하지 못한 척 천천히 놈에게 다가갔다.

쇠숭이는 가만히 쇠나뭇잎 사이에서 보였다 가려졌다 하는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을 알면서 나아가니 오히려 긴장이 더해지는 느낌이다.

나는 쇠숭이에게로 어떠한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말했다.

"3m거리야. 대비해. 딱 한 마리다. 첫 사냥감으로 나쁘지 않아."

대답 대신 침을 꿀꺽 삼키는 두 사람.

이내 쇠숭이와 우리의 거리가 1m 남짓 남았을 때, 쇠숭이가 소리도 없이 우리 파티의 상공을 향해 몸을 던졌다.

하지만 이미 쇠숭이에게로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우리가 그 광경을 놓칠 리 없었다.

"라분!"

"음!"

라분이 곧장 쇠숭이의 낙하 예상지점으로 이동해 방패를 들이대었다.

레이나를 향해 떨어지며 칼처럼 예리한 손톱을 들이대려던 쇠숭이가 급하게 꼬리를 아래로 휘둘렀다.

공중에서 방향을 전환하는, 쇠숭이의 특유의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나와 레이나의 검이 더 빨랐다.

"끼에에엑!"

검염이 서린 검에 꼬치처럼 꼬인 쇠숭이가 부들부들 거리더니 이내 추욱 늘어졌다.

레이나는 검염을 사용했고, 나는 검염을 사용하지 않았다.

내 검은 쇠숭이의 살을 파고들어가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근육까지 완전히 뚫지는 못했다.

반면 검염이 서린 레이나의 검은 쇠숭이의 몸을 그대로 꿰뚫는 것에 성공했다.

확실히 미궁 11층부터는 몬스터의 방어력 자체가 증가한 느낌이다.

'빨리 라분을 3위계로 만들어야겠군.'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짐꾼 노릇 밖에 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물론 나와 레이나의 성장도 중요하다.

레이나는 실력적으로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지만, 나는 아니었다.

이미 4위계와의 전투에서도 심심찮게 승기를 가져올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특출난 3위계지, 4위계가 아니니까.'

상념을 뒤로하고 레이나가 가지런히 눕힌 쇠숭이의 시체를 관찰했다.

"으으."

"진짜 사람 닮았어. 그리고 생각보다 귀여워요. 불쌍해."

"못생겼다."

쇠숭이는 정말 이목구비가 또렷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멀리 남방의 밀림에서 살고 있는 원숭이라는 동물이 몬스터화한 것이라고 하는데, 정말 사람과 닮은 동물이 있나 보다.

"이미 남쪽 사람들을 잡아먹은 원숭이가 사람 행세를 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런 제국 멸망 시나리오 짜지 말고."

나는 잠깐 쇠숭이의 시체를 관찰한 뒤에 녀석의 팔을 단검으로 쪼갰다.

오크의 것보다 실한 마정석이 나왔다.

"괜찮군."

쇠나무 원숭이는 기본적으로 무리 지어 서식한다.

녀석들의 영역 외곽에서 홀로 떨어져 있는 개체를 사냥하는 것은 꽤 어려운 편.

아주 조금의 실수가 있으면 나무를 타고 넘나드는 쇠숭이들의 포위를 받기 십상이다.

내 감지 능력으로 능숙하게 줄타기를 할 수는 있겠지만 말 그대로 외줄 타기다.

조금의 실수라도 할 경우 포위당한다.

그렇게 된다면 인원수가 적은 우리는 꽤나 힘겨운 전투를 치르게 된다.

더군다나 쇠나무 원숭이는 쇠나무 잎을 뭉친 덩어리를 던져 사냥을 한다고 한다.

우리가 그 공격에 걸리면 꽤 곤란해질 것이다.

"전반적인 상성은 좋지 않아. 웬만해서는 우회해서 가자."

다시 감지 능력을 활성화하고 돌아보자 죽은 쇠숭이의 팔을 들어 올리는 레이나가 있었다.

위로 높이 들린 팔은 들어 올리던 레이나의 힘이 사라지자 바닥에 툭 떨어지고 만다.

"불쌍해."

"⋯⋯역시 정상은 아니야."

"주인. 동감이다."

사람 닮은 얼굴에, 쇠나무 색깔에, 가죽의 얼룩은 쇠나무 잎과 기둥을 섞어놓은 것 같다.

아무리 좋게 봐줘야 사람 탈을 쓴 괴물같은 몬스터가 뭐가 귀엽다는 건지.

"공양."

[시체를 공양합니다.]

[쇠나무 원숭이 한 마리. 확인.]

[미궁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정말이네."

미궁 11층의 과제에 진척도가 없을 경우 몬스터의 시체를 공유하면 '미궁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라는 미궁의 신비가 나온다고 한다.

아직까지 미궁이 왜 탐험가를 지켜보고 있는지, 어떻게 지켜보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려진 사실은 하나도 없다.

이 또한 미궁을 내려가며 풀어나가야 할 탐험가들의 숙제 중 하나라고 하겠다.

"당연히 우리에게는 먼 이야기지만."

앞으로 다가올 미래이기도 하다.

쇠숭이의 시체가 사라지기 시작하자 시체를 가지고 기괴한 장난을 치던 레이나도 검을 정리하고 다시 합류했다.

"출발하자."

우리는 미궁 11층의 깊숙한 곳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숲을 뚫고 나아가는 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9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