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90화
미궁 11층의 쇠나무 숲에는 쇠숭이만 사는 것이 아니었다.
숲속을 빠르게 걸어가는 우리 파티를 주시하는 수많은 생물체들이 내 감지 능력에 잡혔다.
"봐봐. 저기 이상한 거 있어."
"다람쥐네요. 색깔이 이상하지만."
"저기도."
"사슴 같은데요? 역시 색깔이 이상하네요."
"낙타 닮았다."
"⋯제 기준으로는 전혀 안 닮았어요."
"닮았다. 목이 길고, 네 발로 걸어 다닌다."
"⋯⋯."
레이나의 말로는 사슴의 경우 뿔이 원래 저렇게 가시처럼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원래는 엄청 길고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데, 지금 멀리 보이는 저 사슴은⋯
"잘못 상대하면 사지가 분해되겠어."
"그러게요."
저만한 뿔을 가진 동물이 질량을 앞세워 돌격해오면 피하는 것 밖에 방법이 없다.
하지만 이곳은 쇠나무 숲.
돌격하는 것도 어렵겠지만, 만약 돌격을 허용한다면 크게 위험해질 수도 있겠다.
"고기는 먹어도 된다고 하니까. 기회가 되면 사냥해 보자고."
우리 파티는 내 감지 능력을 이용해 숲을 점차 파악해갔다.
조심스레 움직이며 동물과 몬스터의 분포를 감지하면 어느 정도 영역과 영역의 경계가 보인다.
눈치는 없지만 눈썰미는 좋은 라분이 발견하는 생명체들의 영역 표시도 크게 도움이 되고.
덕분에 우리가 마주치는 몬스터나 동물들의 숫자는 한 번에 다섯을 넘기지 않았다.
전투에 적응하기에는 적당한 숫자다.
쇠숭이 네 마리와 싸울 때는 꽤 고전하기도 했다.
"돌 던진다!"
"우끼끼!"
순식간에 날아오는 돌들, 정확히는 쇠나무 잎 뭉치.
나는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모든 돌을 피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레이나와 라분은 아니었다.
"꺄악!"
레이나가 몸을 피하며 라분의 뒤로 몸을 피했다.
그냥 던지는 것이 아니다.
쇠숭이 특유의 긴 팔을 최대한 뒤로 젖혀 마치 화살처럼 발사하는 돌팔매였다.
레이나의 반응 속도로 감당할 수 있는 공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라분이 있었다.
레이나가 뒤에 위치한 것을 확인한 라분이 방패를 치켜들었다.
방패의 각도를 트는 아주 약간의 움직임으로도 날아오는 돌들을 매우 쉽게 쳐내는 라분.
곧 신색을 회복한 레이나도 검으로 돌을 쳐내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쇠나무의 잎으로 만드는 돌은 순식간에 만들어낼 수 있는 모양은 아닌 것 같았다.
돌팔매질이 멈추고, 쇠숭이들은 정체 모를 소음이 가득한 대화를 나누더니 일제히 돌격해왔다.
가장 돌출해있던 나를 노리는 쇠숭이들.
"흡!"
검염을 일으켜 한 놈을 그대로 베어내자 달려들던 쇠숭이들이 흠칫 몸을 멈추더니 그대로 다시 나무를 타며 도망간다.
"⋯⋯."
기존의 몬스터들에게서는 관찰할 수 없었던 움직임이다.
동물에서 진화한 몬스터라더니, 맹목적으로 돌격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나는 객관적인 분석으로 우리들과 쇠숭이의 전력을 계산했다.
'역시 열 마리 이상은 위험해.'
라분과 미궁 9층에 처음으로 도전했을 때, 바위산 위에서 고블린들의 공격에 고전했던 것이 떠올랐다.
차라리 같은 숫자의 오크를 상대하는 것이 더 상대하기 편하겠다.
오크는 적어도 돌팔매는 안 하니까.
숲에서 쇠숭이 다음으로 마주친 몬스터는 고블린이었다.
종족 특유의 기운을 감지하여 정체를 추측할 수 있었다.
"총 열 마리야. 아직 시야에 잡히지는 않지만 이동 경로 상에 있어. 돌아가려면 시간 좀 써야 할 것 같아."
"치울 수 있으면 치울까요?"
"일단 접근해 보자. 주변에 다른 고블린들이 없으면 전투야."
다행히도 고블린은 몬스터의 본능을 가지고 있었다.
주변에 다른 적이 없음을 확인하고 모습을 드러내자 그대로 달려들기 시작한다.
희한하게도 전신에 검은색 문신을 하고 있는 놈들이었다.
"끼에에엑!"
"진형 짜고, 한 면은 나무를 방패로 쓰면서 대응한다!"
고블린들이 광란에 몸을 맡기며 번쩍 뛰어올랐다.
순간 쇠나무와 직각으로 몸을 세운 고블린이 나무를 박차고 튕기며 상상 이상의 속도로 달려들었다.
예상외의 움직임이었지만 대응하지 못할 정도까지는 아니다.
검염 서린 검이 녀석이 찔러오는 창과 부딪혔다.
놀랍게도 한 번에 창이 쪼개지지 않았다.
"큭!"
곧바로 이어진 연격으로 놈의 몸을 반으로 쪼갰다.
역시 미궁 11층.
고블린 한 마리 한 마리가 평균적으로 미궁 6~7층의 오크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
특히 내 일격은 막아낸 놈은 더 강했고.
아마 이대로 성장했으면 곧 챔피언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쇠나무의 지형을 제대로 이용하는 놈들 때문에 전투가 끝났을 때는 온몸이 고블린들의 피범벅이 되어있었다.
"헉헉."
"헉헉."
엄청나게 지친 건 덤이고.
우선 전투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고블린들을 모두 공양했다.
[시체를 공양합니다.]
[고블린 열 마리. 확인.]
[미궁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라분과 레이나를 살폈다.
눈을 감고 책갈피 아티팩트에 저장된 지도와 내가 대충대충 그려놓은 지도를 대조했다.
1일차에 원하는 거리까지는 전진했다.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네!"
"음."
우리는 왔던 길을 20분 정도 돌아가 미리 봐뒀던 바위들의 틈으로 향했다.
미리 내가 감지 능력으로 안쪽에 위협이 있는지 확인했음은 물론이다.
미믹 주머니에서 바닥에 깔 가죽과 침낭을 꺼내니 그것만으로도 야영 준비가 끝났다.
"와. 놀러 온 기분이에요."
"불침번을 서야 한다는 것만 빼면 말이지."
우리의 가운데에는 따뜻한 열을 내는 돌이 있었다.
이번에 장만한 '발열석'이다.
마정석만 꽂아주면 빛을 내지 않고 열을 내주는 아티팩트인데, 미궁 11층이 조금 추운 환경이라는 말을 듣고 큰맘 먹고 구매했다.
"이 돌덩어리가 4골드라니."
"그래도 성능은 확실하네요. 으 따뜻해."
전용 받침대 위에 올라간 발열석이 내는 열기에 몸이 후끈해졌다.
"3일 만에 하급 마정석 반 개를 잡아먹는 것도 그렇고."
"따뜻하면. 좋다."
"그렇지."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1일차의 전투에 관한 피드백을 나누고 있는데, 레이나가 바위를 뚫어져라 살펴보더니 이내 탄성을 내뱉었다.
"엇!"
"?"
"?"
우리는 레이나의 시선을 따라 바위를 바라보았다.
"왜?"
"이 바위. 뭔가가 인위적으로 새겨져 있었어요!"
"인위적?"
"사람이 만들었다는 거야."
나는 레이나를 따라 자세히 바위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자연적으로는 생길 수 없는 파인 자국이 이곳저곳에 새겨져있었다.
레이나가 물을 이용해 진흙을 만들더니 손가락에 묻혀 슥슥 선을 따라 긋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림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슴?"
"아까 그 사슴이네."
"여기도 있어요!"
이번에는 쇠숭이, 다음은 고블린이다.
"요건 오크 같지?"
"멧돼지같이 생긴 것도 있어요."
"낙타 같다."
"절대 아니에요!"
"그런가."
이제 보니 우리를 둘러싼 바위들 전체에 조각이 새겨져있었다.
"새긴 자국을 보니까 몇십, 몇백년은 된것 같은데."
"그러게요."
웬만한 상흔은 곧 복원되고 마는 미궁에서 지금까지 이 그림이 남아있다는 것은 일반 탐험가가 특수한 방법으로 새겼거나, 몬스터나 다른 종족이 새겼다는 것을 의미했다.
"11층에 다른 종족이 있었다고 했지? 야만족 이랬나?"
"네. 그런데 상당히 깊은 곳에서 살아서 탐험 중에 마주칠 일은 없다고 했잖아요."
"그랬었나?"
이 정도로 정교한 자국을 남길 정도면 아무래도 오래전에는 이곳도 야만족의 영역이었을 수도 있겠다.
야만족.
미궁 11층에서 20층까지 공통적으로 출현하는 종족이다.
온몸이 털로 뒤덮여있어 사람과의 구별은 쉽지만 털을 다 밀어놓으면 피부색이 흰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고.
대화가 통하는 경우가 있지만⋯⋯
"절대로 신뢰를 주면 안 돼."
야만족을 죽이면 몸속에서 마정석이 나온다.
미궁 사무소가 규정하는 몬스터의 정의와 정확히 부합하는 놈들이라는 의미다.
지금까지의 모든 우호적인 접근은 실패했고, 포획해서 안전지대로 데려온 적도 있지만 안전지대에 도착하자마자 모두 심장이 멎어 죽어버렸다.
그래도 미궁 밖 사람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존재이기는 하다.
라파가 받아온 의뢰들도 야만족과 관련된 것들이었으니.
[미궁 11층의 야만족이 착용한 목걸이.]
[야만족 포획 후 야만족이 뱉는 언어의 발음 상세.]
라파가 받아온 의뢰다.
11층에서 야만족과 마주치려면 최대한 깊숙하게 들어가야 하기에 일부러가 아닌 이상 마주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잘하면 마주칠 수도 있었다.
우리가 바로 일부러 미궁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콜드릭 포인트'의 탐색 때문이다.
대체 포인트에 뭐가 있기에 이렇게 먼 곳에 꽁꽁 숨겨져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본인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이럴 줄 알았으면 콜드릭의 숨이 넘어가기 전에 제대로 물어볼 걸 그랬다.
"야만족과 여기서 마주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불침번은 철저하게 서. 놈들의 지능이 사람보다는 낮은 편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높으니까. 잘못해서 포위당하면 그대로 끝장이야."
"네! 조심할게요."
"음. 알겠다."
야만족과 일반 탐험가의 탐험 범위가 겹치는 층은 16층 이후로 알고 있었다.
그곳에서부터의 탐험과 과제가 중요해지는 이유다.
라분과 레이나는 자기 직전까지도 의미를 알 수 없는 여러 암각화들의 정체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이건 풀 같아요."
"뱀이다."
"앗! 그럴지도?"
"바닥으로 이어지는 선도 있다."
"파볼까요?"
"야야. 손 더러워져. 씻는데 물 못 쓰게 할 거야."
내 말을 들은 라분이 본인의 방패로 땅을 퍽퍽 팠다.
저 비싼 방패가 저럴 때 쓰라고 있는 게 아닌데.
사실 나도 이어지는 선이 궁금해서 그대로 내버려뒀다.
이어지는 선을 따라 10분 정도 땅을 팠을까?
이제 잘 시간이라 그만하라고 말하려고 했을 때였다.
라분이 탄성을 내질렀다.
"엇!"
"왜요왜요왜요?"
라분이 흙 틈 사이로 뭔가를 꺼내들었다.
"선 끝에 이게 있었다."
칼 모양으로 깎여있는 푸른색 돌이었다.
"오."
이리저리 돌칼을 돌려보던 레이나와 라분이 내게 칼을 건네주었다.
커다란 돌을 모양에 맞게 깎아내어 만든 듯했다.
나는 근처에 있는 암각화에 돌칼을 가져다 대었다.
돌칼의 폭과 암각화의 폭이 완벽하게 일치했다.
"오."
상당히 세련된 디자인의 돌칼이었다.
"이걸로 새긴 게 맞는 것 같은데?"
나는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벽에 돌칼을 가져다 대고 힘을 빡 주며 벽을 긁었다.
아니 긁으려고 했다.
-뚝.
힘을 준 돌칼의 끝이 어이없게도 뚝 떨어져 나갔다.
"어?"
"리더!"
"주인!"
내게서 돌칼을 뺏어든 라분과 레이나가 울상을 지었다.
괜히 미안해졌다.
"끝이 뭉툭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바로 부러질 줄은 몰랐네."
"유물인데 조심히 다루셨어야죠!"
"맞다!"
"미안. 검염을 쓰고 했어야 했는데. 그냥 갖다 버려."
"됐어요! 기념품으로 가져갈 거니까."
기름 묻힌 천으로 열심히 닦더니 미믹 주머니에 쏙 집어넣는다.
우리들은 잠깐 투닥투닥거린 뒤 라분의 불침번을 시작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미궁 11층의 첫 날이 저물었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91화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91
미궁 11층의 쇠나무숲은 3일간 이어졌다.
3일을 이동하자 빽빽했던 나무들이 밀도가 줄어들어 듬성듬성 틈이 보였고, 쇠나무와는 다른 마치 이끼가 잎을 뻗어 자라난 것 같은 풀들이 그 틈을 메꾸고 있었다.
나는 책갈피 아티팩트를 잠깐 본 후에 선언했다.
"첫 번째 숲은 돌파했어."
숲을 통과하는 것 자체가 그렇게 큰 업적은 아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지나온 길을 직선으로 환산하면 이틀이면 주파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 사이에 있는 쇠숭이와, 고블린과, 가시 달린 사슴과, 다시 고블린의 영역을 돌파할 수 있다면 말이다.
실제로 미궁 11층을 탐험하는 탐험가들의 평균 숲 돌파 기간은 일주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겨우 3일 만에 숲을 돌파해 냈다.
이건 자랑할 만하다.
우리가 이렇게 빨리 첫 번째 숲을 돌파할 수 있었던 비결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단연 감지 능력이다.
"리더! 만능!"
"에헴."
"주인! 최고!"
"그래, 그래."
내 능력을 이용하면 각 몬스터와 동물들의 영역을 높은 정확도로 유추하여 회피할 수 있다.
괜히 적들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불필요한 전투를 벌일 필요가 없어진다.
두 번째는 적은 인원으로 인한 이득이다.
미궁 11층을 고작 3명이 탐험한다? 전례가 없지는 않지만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소수의 탐험은 이동 과정의 은밀성을 강화했고, 7\~8명이라면 피할 수 없었을 전투를 피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 결과, 우리는 라파가 일주일은 걸릴 것으로 예상한 숲을 3일째에 돌파하는 쾌거를 이뤄낼 수 있었다.
그 보상은 굉장했다.
"탐험 기간이 전체적으로는 8일. 길면 9일까지 단축될 거야."
시간을 번 만큼 컨디션이 좋아지고, 몸에 가해지는 부담도 덜할 것이다.
숲의 반대편으로 향하니 간간히 느껴지던 몬스터들의 기운도 점차 사라진다.
지형이 변화하면서 생물의 분포도 크게 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는 쇠나무들이 있는 이곳이 일종의 완충지대 역할을 한다 하겠다.
쇠나무들은 점차 줄어들다가 일정한 수준이 되면 그 숫자를 유지한다.
더불어 저 멀리 보이는 미궁의 벽도 부채꼴 모양으로 확장하기 시작한다.
본격적인 탐험의 시작이다.
우리가 지나온 쇠나무가 빽빽한 숲에는 쇠숭이들이 주로 살지만 이런 숲에는 쇠숭이가 잘 살지 않는 대신 다른 여러 동물과 몬스터가 산다.
이 지역의 대표적인 몬스터는 바로 붉은 오크. 우리가 사냥해야 할 놈들이다.
나는 미궁의 벽과의 거리를 확인해 우리의 위치를 짐작했다.
"대략적으로 이 방향으로 전진하면 붉은 오크들이 출몰할 거야. 조심히 한 번 이동해보자."
"네. 그런데 역시 지도가 있으니까 편리하네요. 미궁 8\~9층과는 느낌이 달라요."
"여기는 선배 탐험가들이 제공한 데이터가 쌓여있어서 그런거고. 12층부터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야."
"그렇군요."
뭐든 시작이 가장 어렵다.
심부 탐험의 시작이라는 11층에서 좌절하는 탐험가들이 전체의 절반이나 된다.
제대로 된 길드의 지원을 받고 진행하는데도 그렇다.
그만큼 몬스터들의 전반적인 수준이 올라가고, 평균 탐험 기간도 길어진다.
고작 세 명, 그것도 3위계 두 명과 2위계 한 명이 포함된 파티가 받은 미션이 챔피언 10마리에다가 다음 층으로 가는 통로의 발견이다.
일반적인 7~8명, 더군다나 객관적인 전력 자체는 우리보다 훨씬 앞설 파티들이 받는 과제는 얼마나 더 힘들겠나.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닌 게, 과제의 수행에는 외부의 협력이 전면적으로 제한된다.
아무리 실력 있는 파티라도 단 한 명이 그만두거나 죽을 경우, 그대로 탐험이 중단되는 경우는 흔했다.
"과제가 아니라 시련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라니까."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 챔피언 10마리도 쉬운 과제가 아니었어요."
"우리야 항상 위험 속에서 탐험을 진행하다 보니 이 정도야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고."
내 능력을 모르는 레이나나 라분이 보기에, 나는 미궁 10층에서 혼자 리자드맨 히어로를 상대하고, 미궁 4층에서는 아무리 만신창이가 되었다고는 하나 아스모데우스와도 혈전을 벌인 놈이다.
챔피언 10마리가 쉽다니.
아무래도 확실하게 미친놈 주변에 있다 보니 같이 미친놈년이 된 모양이다.
"어쨌든 긴장하자고,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담아두고."
"네."
라분도 방패를 텅텅 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우리는 속도를 올려 숲속으로 거침없이 진입하면서도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참을 걷던 중 레이나가 정지 신호를 보낸 되 귀를 쫑긋했다.
"리더. 잠깐만요. 물소리 나지 않아요?"
"응?"
감지 능력과 청력은 기본적인 구조부터 다르다. 레이나의 말을 듣고 청력에 마나를 집중하자 정말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이네? 가보자."
"근처에. 강. 없었다."
미리 예습을 한 라분이 웬일로 맞는 말을 했다.
내가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라분이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맞받아쳤다. 아예 머리까지 쓰다듬어 제대로 도발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다.
내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불만 가득한 표정이 한층 강해졌다.
"지형이 변하는 거야 미궁에서는 흔한 일이니까. 한 번 가보자."
우리는 물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이내 숲의 낮은 지대를 따라 흐르는 물줄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느리게 흐르는 시냇물이다. 돌 몇 개만 밟으면 금방 건너편으로 건널 정도로 폭이 좁다.
그래도 경계로 쓸 수 있을 만큼은 넓었다.
"와. 깨끗해 보이네요."
"먹어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 미믹 주머니에서 여과기를 꺼내 한 번 걸렀다.
고블린이나 오크가 직접 마시는 것을 봐야 안심할 수 있다.
이렇게 멈추지 않고 흐르는 물을 마실 때조차도 의심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 번의 방심이 죽음을 부르는 곳이 바로 미궁이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죽음은 보통 되돌릴 수 없는 것 중 하나로 꼽힌다.
"주인. 프라냐가. 나오지는 않겠지?"
"음. 깊이도 얕고, 수면 아래에 감지되는 생명체도 딱히 없어.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
여과기를 거친 시원한 시냇물을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미궁 11층은 워낙 넓은 지역이라 몬스터를 만나는 것도 일이었다.
영역 자체는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진입하게 되면 수십 마리의 몬스터들에게 그대로 쓸려나갈 게 뻔하다.
"며칠 전에 선배를 만나서 들었는데, 예전에는 수백 명의 탐험가들을 모아서 도전했었대요."
"오! 되게 괜찮은 방법인데?"
"리자드맨 부족을 전멸시키는 과제가 나왔고, 엄청난 피해가 나왔다고 해요."
"⋯⋯."
미궁의 신비는 정말 알 수 없는 부분에서 우리에게 시련을 준다.
휴식을 마친 뒤, 나는 작성해 둔 지도와 책갈피 아티팩트로 현재 우리의 위치를 최대한 분석했다.
"나무지대에 들어서고 2시간 정도 콜드릭 포인트를 향해 걸었으니까, 대략 여기. 물이 흐르는 방향은⋯⋯"
지금 이 방향대로 흘러간다면 우리가 가는 길과도 얼추 맞다.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바로 멀어져야겠지만.
"물가에서 거리를 조금 두고 나아가자. 이제 슬슬 오늘 잘 곳도 찾고."
그렇게 다시 30분을 걸었을 때, 우리는 시내 건너편에서 붉은 오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시야가 트여있었기에 내 감지 능력과 거의 동시에 발견했다.
당연하게도 붉은 오크들도 우리를 발견했고.
붉은 피부는 말 그대로 피부 전체가 붉은 오크다.
더불어 검을 가지고 있는 개체의 비율이 높은 것도 특징이다.
보통 미궁 저층에서는 챔피언들만 검을 사용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11층과 저층의 수준 차이가 보인다.
"모두 전투 준비해."
우리는 잠깐 멈칫했지만 붉은 오크에게 먼저 다가가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왔던 길은 감지 및 탐색을 통해 안전을 확보해 놓은 공간이다.
괜히 전투의 흥분에 더 접근했다가 다른 붉은 오크들의 협공을 받을 수도 있었다.
우선 저 녀석들만 유인해야 했다.
우연찮게도 녀석들의 수는 딱 3마리.
첫 상대로도 더할 나위 없다.
"3마리 다 검을 들고 있어. 기본 포메이션으로. 첫 전투이니만큼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맞선다. 계속 뒤로 물러나."
우리가 천천히 물러나자 사냥감이 도망간다고 생각한 오크들이 괴성을 지르며 시내를 우선 건너왔다.
물을 건너기 전 방해하며 전투를 치르는 것도 좋았지만, 현재 오크가 있는 곳 너머에 또 어떠한 위협이 있을지 몰랐다.
되도록 지형을 아는 곳에서 변수를 없앤 전투를 하고 싶다.
뭍으로 올라온 오크들이 진형도 갖추지 않고 돌격해 오기 시작했다.
"성격은 여전하군. 맞춰주지 마. 계속 물러나며 체력을 뺀다."
오크들은 우리를 따라오기 위해 거의 3분 동안 뜀박질을 하며 따라붙었다.
이것도 길이 잘 다져져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지, 엄청난 거리를 달린 셈이다.
"챔피언은 없군. 다만 검염은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편해. 레이나. 검이 막힌다고 놀라지 말고."
"당연하죠."
오크는 지구력이 약하다.
벌써부터 큰 숨을 몰아세우고 있다.
우리를 완전히 따라잡고 잠시 숨을 고르는 오크들.
다 잡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제 누가 사냥감인지를 제대로 가르쳐 줄 시간이다.
"가자!"
"우어어어!"
라분이 방패를 앞세워 붉은 오크들을 향해 돌격했다.
라분의 걸음이 특정한 리듬을 가지고 있었다.
켈리어의 시련에서 얻은 구천검법에 수록된 보법의 활용이다.
호전적인 몬스터도 당황하지 않고 우리를 맞아 마주 포효했다.
"크아아아!"
"우어어어!"
라분의 방패 박치기를 정면으로 받아낸 선두의 오크가 뒤로 쭈욱 밀렸다.
보통 미궁 8층의 오크라면 버티지 못하고 날아갔을 텐데, 역시 11층은 수준이 높다.
무게중심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노하우가 있었다.
잠깐 무방비가 된 라분을 노리는 붉은 오크들의 검은 나와 레이나가 걷어냈다.
라분이 틈을 노려 자세가 낮아진 오크의 배를 그대로 찔렀다.
"크아!"
깊게 찌르고, 바로 아래로 내리그으며 회수한다.
그것만으로 치명상이다.
나와 레이나는 검염을 일으키고 각자 맡은 붉은 오크를 빠르게 몰아세웠다.
사실 전력으로 덤빈 만큼 억지로 밀어붙여 빠르게 승부를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첫 전투이니만큼 상대를 제대로 알아내는 과정이 필요했다.
라분과 레이나가 빠르게 오크를 마무리했음에도, 나는 일부러 질질 시간을 끌며 붉은 오크를 천천히 요리했다.
"불쌍해."
"주인. 이제 놓아줘라."
되도 않는 소리들은 무시하며 붉은 오크가 검도 제대로 들지 못할 만큼 괴롭혀준 뒤, 깔끔하게 목을 베어냈다.
앞으로 털썩 쓰러지는 오크의 몸이 유독 가벼워 보였다.
"후. 수고했어."
우리는 바로 붉은 오크의 품을 뒤지며 전투를 피드백했다.
"아직 기준이 확실하지 않지만, 일반 오크보다는 훨씬 강해."
"네. 챔피언 두 마리면 위험할 수도."
"2위계 수도 중요해. 열 마리 이상, 또는 챔피언 세 마리 이상이면 전투를 회피하자고."
"허리 아래. 고정하는 힘도. 강하다. 하지만 상체보다는 약하다."
"항상 무리하지 말고."
품에서는 알록달록한 돌멩이들을 빼고는 별다른 물건이 나오지는 않았다.
"오늘은 이 근처에서 야영할 거니까 공양한다."
"네."
[시체를 공양합니다.]
[붉은 오크 세 마리. 확인.]
[미궁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공양을 마쳤을 때였다.
내 감지 능력이 나무를 무시하듯이 달리며 우리에게 접근해 오는 기척들을 발견했다.
강렬한 마나의 파동. 챔피언이 포함되어 있는 전력이다.
"12시 방향. 방금 녀석들이 왔던 방향이다. 대략 6마리. 계속 온다. 6마리. 맞아."
라분과 레이나가 흠칫 놀라며 내가 알려준 방향을 경계했다.
곧 녀석들의 시야에도 접근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진다.
"저것들만 정리해 보자. 챔피언 한 마리."
호각은 불지 않았다.
'동료의 흔적을 쫓아왔나?'
어찌 됐든 좋았다.
우리는 다가오는 적들을 맞이하기 위해 검을 치켜들었다.
곧, 검과 검이 부딪혔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92화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92
붉은 오크 챔피언은 기존 내가 알고 있던 오크 챔피언과는 모든 면에서 달랐다.
가뜩이나 붉은 오크는 다른 오크보다 덩치가 컸는데, 챔피언은 다시 한 단계 진화한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덩치로만 보면 지금까지 본 모든 오크들 중에 가장 크다.
더군다나 세련된 견갑에 무릎보호대까지. 저렇게 중무장한 오크 또한 인생에서 처음으로 본다.
챔피언에 대한 정보는 제대로 얻지 못했는데, 모든 챔피언이 저 정도의 무장이라면 10마리 사냥이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님은 분명해진다.
"조심해. 상당히 강한 개체 같아. 미리 봐놨던 길로 가자."
"네!"
정면에서 오크 6마리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아직 붉은 오크에 대한 데이터가 제대로 쌓이지 않았다.
특히 저 챔피언의 강함은 내 예상을 뛰어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감지 능력으로 파악한 마나량 자체는 지금까지 만나온 어떤 챔피언보다도 더 많았다.
물론 히어로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가자."
우리는 사방이 커다란 바위로 둘러싸인 지역까지 후퇴했다.
소수로 움직이는 탐험에는 이런 지형을 미리미리 봐두고, 적당한 상황에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곳에서 싸우면 적 6마리와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은 피할 수 없지만, 측면과 후면으로 이루어지는 공격은 방지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바위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자 한참을 따라오던 붉은 오크들도 전열을 가다듬었다.
"주변에 다른 적은 없어. 저 녀석들에게만 집중해."
레이나와 라분은 대답 없이 전투를 기다리며 달뜬 숨을 내쉬었다.
바위가 적당히 전투 범위를 제한해 준다지만 상당히 넓은 지형에서의 3대6의 전투.
불리를 넘어선 전투다. 보통 탐험 파티라면 즉시 회피하거나,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나 전투를 고려할 터다.
이대로 우리가 전멸한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전투다.
하지만 이런 전투는 셀 수도 없을 만큼 치른 것 또한 우리가 맞다.
그 증거로 라분과 레이나의 전의는 전혀 꺾이지 않았다.
"방심하지 마. 온다."
붉은 오크들도 결국 오크다.
사냥감을 앞에 둔 채로 머리를 굴리지 않는다.
숨을 고르자마자 그대로 정면으로 부딪쳐오기 시작한다.
원래라면 챔피언이 있어도 라분이 먼저 나서서 적의 돌격을 흘렸겠지만, 지금은 적의 전력을 제대로 상정하지 못했다.
때문에 내가 먼저 앞으로 나서 붉은 오크 챔피언이 내려치는 검을 받았다.
-쾅!
석로검법의 마나를 듬뿍 담아 검을 받아내자 찌릿한 감각이 내 팔을 타고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여느 오크에게서 느껴지는 그 감각이다.
하지만.
'더 위력적이고, 더 강하다.'
내가 챔피언의 연속되는 투박한 공격을 받아내는 동안, 레이나와 라분이 일반 오크들을 맞이했다.
레이나는 검염을 십분 활용해 세 마리의 오크들을 압박하고, 라분은 수세로 전환해 두 마리의 공격을 일일이 받아내고 있다.
라분의 구천검법은 검법 중에서도 방어에 특화된, 탱커들을 위한 검법이다.
그동안 철저하게 익혔는지, 내가 보지 못했던 움직임을 선보이며 오크의 모든 공격을 차분하게 막아낸다.
이미 한 마리의 팔을 베어내고 있는 레이나는 더 볼 것도 없고.
나는 그 뒤부터 챔피언에게 내 역량을 온전히 집중했다.
"크아아아!"
내려친 검에 힘을 더하는 챔피언. 확실히 힘은 여느 오크 챔피언보다 강하다.
힘 만은.
나머지는 그대로다. 게다가 녀석은 내려치기만 고집하는 것이 우직하기까지 하다. 이렇다면 평소보다 더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겠다.
나는 붉은 오크 챔피언의 힘을 역이용하기 위해 검을 급격하게 틀었다.
내 예상대로 내리누르는 목표를 잃은 챔피언의 검이 땅에 처박혔다.
빠르게 틀어진 몸을 회복하고, 다시 무게를 실어 녀석의 노출된 오른팔을 베어 가는 내 판단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베스트였다.
내 검이 녀석보다 두 호흡은 빠르다. 충분히 오른팔을 크게 벤 뒤에 몸을 빼낼 수 있을 속도였다.
막 공격을 마치려는 순간, 챔피언의 팔근육이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각도로 껶이는 것이 보였다.
내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었다.
"읏?"
생각해볼 것도 없다. 나는 분리된 내 몸이 땅에 떨어지기 전 내리치려던 검의 힘을 바꿔 다시 검염을 불태웠다.
나를 처리한 줄 알고 방심하는 붉은 오크 챔피언의 목을 그대로 찔러준다.
그다음 떨어지는 몸을 느끼며 도대체 내가 어떻게 당했는지 분석하기 시작했다.
"주인!"
"리더!"
철퍼덕 소리와 함께 내 몸이 바위 바닥에 그대로 쓰러졌다.
나는 입으로 들어온 흙을 퉤 뱉으며 내게 목이 찔린 챔피언의 검을 바라보았다. 챔피언이 자신의 목을 잡고 휘적거리며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검이 약간 붉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특이한 점, 감지 능력으로 느껴지는 붉은 오크의 팔의 근육들이 크게 손상되어있었다.
나는 근육들의 모양에 주목했다.
마치 누가 억지로 쥐어짜낸 것처럼 뒤틀려있다. 사람이라면 평생 근육을 쓰지 못할 수도 있는 부상이지만, 오크들에게 어떻게 적용될지는 몰랐다.
'강제로 자세를 변경한 건가.'
완전히 내려쳐버린 검을 다시 돌리는 동작은 삽당히 많은 호흡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붉은 오크 챔피언은 반호힙, 아니, 반의 반호흡만에 내려치기에서 올려치기로 바꾸는 신공을 선보였다.
"특성은 아니겠고, 기술이겠군."
기술.
마나를 사용하며 수련과 전승, 창조를 통해 체득할 수 있는 기예.
오크 같은 몬스터라고 익힐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리더! 괜찮아요?"
"레이나. 우선 적을 마무리해. 나는 글렀으니까."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이미 레이나는 적 오크를 모두 처치한 모양이다.
내 상황을 보고 급하게 마무리했는지, 오른팔이 베여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나는 아직 고전하고 있는 라분을 곁눈질했다.
"빨리!"
레이나가 덜덜 떨리는 검을 다시 부여잡고 라분을 지원했다.
나는 학즉사법 3성에 도전해 즉시 무한 회귀의 시동을 걸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죽음을 겪더라도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고 가야한다.
지금 막 숨이 넘어가려는 저 붉은 오크 챔피언을 감지 능력으로 관찰하는 것도 그 정보 중 하나다.
"헉헉."
오크들을 빠르게 마무리한 레이나가 내게 다가왔다.
이미 몸에서 피가 너무 많이 흘러나와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수백 번 이런 상황을 겪어본 내가 아니었다면 벌써 죽었다.
나는 필사의 힘을 쥐어짜 내어 내 성대를 울리는 것에 사용했다.
"레이나."
"네."
"내가 어떻게 당했는지 봤어?"
"지금 이 상황에 그런 말씀이 나와요?"
이미 레이나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 범벅이다.
하지만 좁아지기 시작하는 시야로는 팔을 들어 올려 눈물을 닦아주지도 못한다.
"빨리."
"봤어요. 오크의 검이 바닥에 닿자마자 붉게 빛나더니, 팔이 꺾이면서 검이 치켜올라갔어요."
전혀 예상치 못한 상대의 빈틈을 공략할 수 있으니, 가히 필살기라 부를 만하다.
하지만 팔의 근육이 그대로 뒤틀리는 부작용이 있다. 1회용이다.
이 정도면 다음 생을 위한 정보는 대충 얻었다.
마지막으로 마무리다.
"라분."
"...음."
"바로 후퇴해. 아마 내 바지에 지도가 있으니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왔던 길로 되돌아가. 더 쉬워 보이는 길이 있어도 안 돼. 무조건."
"알겠다."
라분의 코가 빨개졌다.
나는 그 모습을 더 보고싶지 않아 눈을 감았다.
어찌 보면 내가 지금 하는 이 행동은 그저 나 자신만의 만족을 위한 행동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둘만 남을 경우 생존율이 그다지 높지는 않았기에.
이 세상은 지워져야 한다. 반드시.
나는 학즉사법 3성에 도전하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내 머리가 폭발하게 되면 그 잔해가 근처에 있는 라분과 레이나에게도 튈 테고, 내 시체는 공양으로 처리할 수도 없다.
녀석들의 생존성을 크게 저해하는 행위다.
모순이다.
지워질 세계에서 남겨질 사람을 걱정하다니.
[과제가 갱신됩니다.]
[붉은 오크 챔피언 1/10]
빌어먹을 미궁의 신비는 그 와중에도 내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몸이 잠깐 붕 뜨고, 라분과 레이나가 내게 건네는 마지막 말도 멍해진 정신 앞에 문장을 이루지 못하고 그저 음성인 채로 스러져간다.
이미 시야가 사라져 내 손을 잡는 녀석들의 얼굴조차 볼 수 없다.
아. 역시 개 같다.
죽음이었다.
-키릭.
.....
"후."
세상에는 미궁의 신비가 주로 알려져 있지만, 나는 나 자신만이 알고 있는 또 다른 신비가 있다.
바로 무한 회귀의 신비다.
나는 붉은 오크 챔피언에게 맞서기 위해 도착한 바위들의 틈에 서있었다.
양옆에서 라분과 레이나가 각자의 자세를 잡고 있다.
'어떻게 이렇게 원하는 시점으로 돌아오는지.'
일순간에 변한 내 기세에 두 사람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힐끗거렸다.
나는 머리를 크게 흔들고 우리를 향해 돌격을 시작하려는 붉은 오크들을 바라보았다.
"방심하지 마. 온다."
처음이 포메이션 그대로 나와 챔피언이 검을 나눴다.
나는 이 모든 상황을 겪고 나서야 챔피언이 내려찍기를 굉장한 기세로 사용하며 내 동적울 유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누구보다 방심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나였다.
녀석이 챔피언의 지위를 가지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내려찍기를 고집한다면, 그 고집에 이유가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하지만 나는 녀석이 가장 선호하는 패를 받으며 내 다음 동작을 생각하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미궁 탐험에서의 실수는 보통 돌이킬 수 없다.
붙어있어야 할 몸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럴 일은 없겠지만.
"크아아아!"
나는 녀석의 내려찍기를 받아치는 대신 회피하는데에 중점을 두었다.
챔피언은 빠른 연속 동작으로 어떻게든 기술을 사용하기 위한 틈을 만들었지만, 나는 철저하게 맞받아치며 녀석의 검의 경로에 내 검을 가져다 대었다.
오히려 틈을 노리고 검을 내지르자 챔피언의 몸에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자잘한 상처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아!"
기술을 제외한다면 객관적인 전력은 내가 위다.
일발역전을 노리던 챔피언이 결국 내가 건넨 미끼를 물었다.
내가 일부러 녀석에게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틈을 약간 열어줬다. 패배의 위기에 몰리던 챔피언이 수용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함정이었다.
나는 감지 능력을 사용해 챔피언의 근육이 크게 꺾이는 장면을 관찰할 수 있었다.
녀석의 검염 가득한 검은 내 검에 그대로 막혀버렸다.
-쾅!
챔피언의 검이 내 반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허공을 날았다.
팔의 근육이 망가져 있었기에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한다.
나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 붉은 오크의 목을 그대로 베었다.
반응조차 못한 챔피언의 목이 뚝 떨어졌다.
[과제가 갱신됩니다.]
[붉은 오크 챔피언 1/10]
승자와 패자가 바뀌었다. 오로지 내가 가진 특성의 효과였다.
'내가 비겁하다는 사실은 나만 알 수 있겠지.'
곧 나머지 오크들을 처리한 라분과 레이나가 합류했다.
녀석들의 눈은, 내가 당연히 이길 것이라는 신뢰가 가득 찬 눈이다.
결코 배신하고 싶지 않은 눈이기도 하다.
"어땠어요? 상당히 쉽게 사냥하시는 것 같던데."
"무서운 녀석이야."
"네?"
별다른 말없이 녀석의 배를 찔러 마정석을 꺼냈다.
색깔이 꽤 영롱하다.
나는 녀석의 시체를 더는 더럽히지 않기로 했다.
나만이 아는, 나만의 위선이다.
"공양."
[시체를 공양합니다.]
[붉은 오크 챔피언 한 마리, 붉은 오크 다섯 마리. 확인.]
[미궁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선 움직이자. 다른 적들이 우리를 발견할 수도 있으니까. 걸으면서 설명해 줄게."
"음. 상당히 어려운 적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10번만 하면 11층도 금방이겠네요."
"⋯⋯하지만 더 조심하고. 항상 주의해야 하는 것도 잊지 말고."
"물론이죠."
미궁에 녹아들어가는 챔피언의 시체를 보면서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방심. 남들과는 다른 세상에 사는 내가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내 특성을 믿고 계속해서 방심하게 되면 내 꿈을 결코 이루어내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번 죽음이 나를 한 층 더 성장시켰다는 사실을.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93화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93
미궁 11층.
우리는 하루 더 탐험을 진행하며 붉은 오크의 영역에 대한 지도를 만들어나갔다.
내 능력과 라분의 눈썰미, 레이나의 그림 실력이 더해지니 우리가 사냥에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지도는 만들어졌다.
그 지도와, 내 직감에 의거한 결론이 내려졌다.
"우리가 사냥했던, 또 사냥할 붉은 오크는 정기적으로 순찰을 도는 것들이야."
어제 처음으로 상대한 세 마리는 아마 가장 외곽에 있는 순찰조로 보였다.
다음으로 등장한, 챔피언을 포함한 6마리는 그 순찰조의 본대 같았고.
굳이 이름을 붙이면 순찰조장이라 할 수 있겠다.
"숲은 넓어. 도시 몇 개가 들어가도 공간이 남을 정도니까."
아마 경계의 안쪽에는 수많은 붉은 오크들이 살아가고 있을 터였다.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될 벌집이다.
"리더. 어떻게, 여기서 챔피언 할당량을 채우실 생각이세요?"
"아니. 사냥은 여기서 하겠지만 지금 목적지가 있으니까. 적당히 머무르다가 다시 이동하자."
이미 쇠숭이의 숲을 통과하면서 4일이라는 시간을 절약했다.
식량도 물도 체력도 아직 충분하다.
이 체력을 부가적인 목표에 소비하면 애초의 목표인 콜드릭 포인트에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이후 하루를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휴식을 취했고, 다음 이틀 동안 챔피언 두 마리를 더 사냥했다.
두 번째로 만난 챔피언은 나를 죽인 첫 번째보다는 비교적 쉬웠지만 마지막 세 번째 챔피언과는 혈투를 치렀다.
여섯 마리와 전투를 치르는데, 중간에 세 마리가 더 난입했기 때문이다.
즉시 대응해 직접적인 상처를 입지는 않고 마무리했음에도 하루를 더 쉬어줘야 했다.
"우리 수준으로 상대하기에는 난이도가 높긴 해."
한 사람이라도 잘못할 경우에는 그대로 전멸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믿고, 가장 완벽한 실력을 발휘해야 했다.
사실 탐험을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
안전하게, 또한 확실하게.
기본적인 탐험가의 미덕은 인내와 끈기이며, 도전정신은 탐험 전의 결심은 몰라도 탐험 중에 발휘하기에는 상당히 위험한 태도다.
그렇기에 확인할 수밖에 없다.
"라분. 괜찮아?"
"괜찮다."
"흠."
하루 종일 푹 쉬면서 라분을 세심하게 관찰했다.
역시 표정에는 불만이 가득하다.
"초조하냐? 3위계가 못 돼서?"
"아니다. 언젠가는 될 거라 믿고 있다."
"잘 따라와. 우리는 멈추지 않을 거니까. 뒤처진다고 기다려주지는 않아."
"⋯⋯."
사실 라분조차도 없으면 바로 탐험을 중단하고 새로운 탱커를 모집해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탐험이 아예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라분 말고 어떤 미친놈이 세 명이서 미궁 탐험을 가겠는가.
그럼에도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온전히 동기부여를 위해서다.
3위계의 달성에는 계기가 필요하다.
레이나의 생생 경험담은 이러했다.
"로웬이 먼저 3위계에 도달해서⋯⋯"
"로웬?"
"리더가 라이벌이라고 물었던 그 녀석이에요."
"아. 소피아 쪽에 붙은?"
나와 조금은 인연이 있는 소피아 파티가 아카데미에서 수급한 인재다.
그 로웬이라는 녀석도 특이한데, 3위계씩이나 도달해놓고 대형 길드가 아닌 소피아 파티에 들어간 것이다.
길드에 소속되지 않고 미궁 저층을 목표로 하는 탐험을 진행하는 소피아 파티도 일반적인 탐험가의 기준으로는 별종이다.
당연히 나만큼 별종은 아니었지만.
"네. 너무 분해서. 혼자 마구 검을 휘둘렀어요. 체감상 6시간? 그랬더니 검염이 나왔어요."
"허허."
전사의 위계가 상승하는 계기가 제각각이라지만 레이나의 경우는 정말 특이하다.
"진짜 분했나 보네."
"뭐, 그런 면이 있었던 것 같기도."
"내가 3위계에 도달한 경위는 라분이 더 잘 알 테고."
"음. 오크 챔피언과의 전투 때였지."
도저히 승기가 보일 것 같지 않은 전투에서, 마지막 마나가 고갈되었을 때, 마치 마른 줄 알았던 우물에서 물이 샘솟듯 검염이 피어났다.
그 뒤에 바로 오크 챔피언에게 죽었지만, 무한 회귀를 이용해 다시 살아났을 때, 나는 3위계가 되어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조언해 줄 수 있는 방법은 아니다.
라분은 내 3위계 각성을 강자를 만난 뒤의 마음가짐이 변화하여 이뤄낸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어쨌든, 누가 봐도 라분 네 몸은 3위계에 도달할 준비를 마쳤어. 아주 작은 계기만 있으면 자연스럽게 3위계가 될 거야."
"계기."
"그래. 계기."
"계기. 처음듣는 단어다. 뭐지."
"⋯⋯."
다음 날. 우리는 몸을 추스르고 새로운 영역의 탐사에 나섰다.
챔피언 10마리 사냥 목표를 달성하는 것도 좋지만, 그동안 한자리에서 세 마리를 연속으로 사냥한 상황이다.
부족 사회로 생활하는 오크들은 유대감이 상당하고, 붉은 오크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은 낙관론에 불과하다.
최악의 경우, 히어로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도망칠 수도 없고, 이길 수도 없어.'
미궁 10층의 리자드맨 히어로처럼 1대1의 전투 상황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3명 이상의 챔피언과 같이 다닐 텐데, 그렇다면 수십, 수백 번을 죽어도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겠지.
반드시 피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나는 그 시점을 오늘로 판단했다.
원래라면 여기서 탐험을 중단하고 11층의 안전 지대로 귀환하거나, 다른 사냥 포인트를 잡아야 했다.
하지만 지금 목적은 콜드릭 포인트로의 도달이다.
"가자."
다시 미지의 땅을 향해 몸을 던졌다.
지금부터는 파악한 붉은 오크의 영역을 최대한 우회하며 완충지대를 찾아다녔다.
어쩔 때는 길의 개척을 위해 고블린의 영역에 들어가기도 했고, 붉은 오크의 영역에 들어가기도 했다.
두 영역을 구분하는 것은 내 감지 능력의 역할도 있었지만, 녀석들이 해놓는 영역 표시의 위치도 있었다.
오크의 영역 표시는 쇠나무의 높이로 따지머ㅏㄴ 사람 머리 부분에 주로 새겨져 있었다.
누가 봐도 인공적으로 나무를 검으로 베어낸 흔적이다.
반면 고블린은 주로 바닥에 배설물을 묻혀놓는 식으로 영역을 표시했다.
더불어 숲에는 사람 키는 우습게 넘길 만한 바위들이 곳곳에 있었는데, 이런 지역은 보통 완충지대로 관리되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바위 지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숲을 개척했다.
어느 순간부터 바위가 많아지기 시작했고, 쇠나무들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바위산을 오르고 있었다.
"와."
급격히 높아지는 경사에 우리들이 끔찍한 감탄을 터뜨렸다.
해당 바위산은 지도에도 나와있었다.
하지만 라파가 고용한 용병들은 바위산까지 진출하지는 않았기에 그들이 멀리서 본 대략적인 높이만 알려줬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경사가 심할 줄은 몰랐다.
"어떡하죠?"
"어."
잠깐 사고가 정지한 나는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왼쪽을 봐도 바위산이고, 오른쪽을 봐도 바위산이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콜드릭 포인트는 바위산의 건너편 중턱에 위치하고 있었다.
미궁 11층을 탐험하기 전, 라파와 나는 바위산을 개척하는 데에 3일 정도를 예상했다.
하지만 지금 이 바위산은 그정도 수준이 아니다.
"정상까지 대체 얼마나 걸리려나."
어이가 없게도 바위산의 높이를 따라 미궁의 천장이 확장되어 있었다.
원래라면 바위산 중턱쯤이면 미궁의 천장에 닿았어야 한다.
그런데 미궁의 천장은 마치 구멍이 뻥 뚫린 것과 같이 바위산을 따라 높이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 있었다.
"이게 무슨."
"세상에나."
"미쳤다."
콜드릭 포인트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은 당연하게도 바위산의 중턱을 넘는 길이다.
"갈 수 있을까?"
미궁 9층에서 고블린들의 습격을 견디며 올랐던 바위산이 하수구의 판자촌이라면, 미궁 11층의 이 바위산은 황궁이었다.
어떻게든 걷는다면 정상에 다다를 수 있을 것도 같다.
하지만 저 정도의 경사면 내려가는 것도 문제다.
바위산에도 고블린, 동굴 오크 등의 몬스터가 산다는데, 도저히 이 지형에서 전투를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래도 은엄폐물이 많아 내 감지 능력을 활용하기에는 적합한 장소라 다행이다.
의외로 레이나가 힘을 냈다.
"가봐야죠! 흥!"
"그렇다. 가야 한다."
"좋아."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아예 바위산 초입을 돌아가면 안전하겠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저기. 엄청 튀어나와있는 바위 보여? 11시 방향에."
"저 바위 말씀이세요?"
마치 밀면 굴러떨어질 위치에 아슬아슬하게 세워진 바위가 있었다.
지금 위치가 0, 정상이 100이라고 하면 60 정도의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 바위다.
"저 바위까지 올라간 뒤에 더 올라가지 말고 산을 따라 한바퀴 돌자. 그 뒤에 콜드릭 포인트로 가는 방향으로."
"네!"
그렇게 우리의 등산이 시작되었다.
바위 틈 곳곳에는 정체 모를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마치 어린 쇠나무처럼 생긴 조그마한 나무들도 자라고 있었다.
"미궁이 가면 갈수록 이상해지네."
"헉헉! 그러게요. 무슨 체력 테스트도 아니고."
"라분. 끄떡없다."
"우리는 끄떡있어. 안 되겠다. 10분만 쉬자."
등산을 하던 도중에 한 번 멈추면 다시는 그 페이스를 회복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었다.
정말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미믹 주머니에서 2시간짜리 모래시계를 꺼내 바닥에 올려놓았다.
"1시간 푹 쉬었다가 가자!"
"네!"
"음. 이제 막. 달아오르고 있었는데."
주변의 바위를 휙휙 던지자 어느 정도 앉아있을만한 흙바닥이 나왔다.
우리는 발열석을 꺼내 놓고 바위에 기대 마음껏 휴식을 취했다.
"응?"
라분이 본인의 자리를 더 넓히려고 바위를 이리저리 들어내다가 뚝 하고 멈췄다.
"주인. 바닥에서 물이 샘솟고 있다."
"엥?"
"봐라."
자리를 옮겨 라분의 자리로 가니 정말이었다.
라분이 파낸 바위 아래에서 물이 샘솟고 있었다.
바위 아래로 조금씩 흐르는 물이라서 마나로 강화된 감각으로도 미처 파악하지 못한 물이다.
"미궁은 정말 신기하다."
"그러게."
이게 실제 미궁 밖에 자연에서도 생기는 일인지 정말 궁금하다.
미궁에서만 일어나는 일일지도.
누가 봐도 깨끗해 보이는 물이었지만 방심하지 않고 여과기를 사용해 확실하게 물을 걸러낸 뒤에 마셨다.
"음?"
"엑?"
"퉤!"
물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고 톡 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꿀꺽 삼켰지만 나머지는 퉤하고 뱉어냈다.
"리더! 마시지 마세요! 우에엑."
"쩝쩝. 맛있는데?"
"물. 아니다. 이상한 거. 들었다."
어차피 여과기로 걸렀으니 유해한 물질은 없을 거라고 믿고 한 모금 더 마셨다.
약간 톡쏘는 느낌이 드는 게 나름 별미다.
"아 참! 마시지 말라니까!"
"알았어."
나는 여과기로 거른 물을 수통에 한 움쿰 담았다.
나중에 미궁 1층으로 가져가서 한 번 뭐가 들었는지 알아봐야겠다.
그렇게 휴식을 마치고 일어나려는데, 내 감지 능력에 생명체가 잡혔다.
"쉿. 위쪽에 뭐가 있어. 상당히 빨라."
"!"
"!"
"처음 느껴보는 기운이라서 아마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새로운 몬스터 같아. 정상을 기준으로 정확히 1시 방향. 거리는 대략 100m."
우리들은 바위 옆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어 내가 감지한 생명체를 관찰했다. 검은색 무언가가 바위 위를 깡총깡총 뛰어다니고 있었다.
눈에 자세히 관찰하니 복슬복슬한 검은 털에다가, 근육질의 남자 허벅지만 한 뿔을 가지고 있다.
"뭐야 저게."
"산양... 같은데요?"
"양?"
"산양은 산을 막 뛰어다닌다고 들었어요."
"그래?"
산양 열댓 마리가 깡충깡충 뛰며 어딘가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방향이 영 좋지 않다?
나와 산양의 눈이 마주쳤다.
"좆됐다! 여기로 온다!"
전혀 예상치 못한 습격이었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94화
확실했다.
산양과 내 눈이 맞았다. 꽤 먼 거리에 있었지만 내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번뜩 소리 질렀다.
"모두 고개 숙여!"
내 비명에 라분과 레이나가 얼른 몸을 숨겼다.
나도 몸을 숙인 후, 속으로 30초를 센 뒤에 다시 머리를 내밀었다.
어느새 한참이나 가까워진 산양 무리가 보였다.
또다시 눈이 맞았다.
이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산양들의 눈이 붉다. 우리를 노리는 흥분으로 가득 차 있다.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새로운 적과의 조우, 전혀 대비하지 못했기에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하지만 맞설 수밖에 없다.
"모두 전투 준비!"
우리는 잠깐 고민한 뒤에 가장 평평하고 넓은 바위 위에 올라섰다.
바위 아래 땅에 있으면 저 엄청나게 큰 뿔로 공격할 시에 대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올라서고 나니 굴곡이 어느 정도 있었지만 거의 공터만 한 바위다.
우리는 바위 한가운데에 자리 잡았다.
"삼각진으로 응수해. 만약 몸으로 밀고 들어오면 어떻게든 피하고."
각자 피할 방향을 지정하자마자 짖쳐들어오던 산양 무리도 속도를 점차 줄이기 시작한다.
천천히 우리를 둘러싸기 시작하는 놈들.
아직 몬스터인지 동물인지도 잘 모르겠다.
"제기랄."
포위당한 상태라 먼저 공격할 수도 없고, 오로지 접근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우리를 둘러싼 산양은 모두 7마리.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숫자다.
우리들의 입은 적을 분석하면서도 쉬지 않았다.
"다행히 뿔말고 크게 주의할 건 없어 보여."
"이빨은요?"
"그건 기본이고."
"뒷발. 조심해라."
"뒷발?"
"뒷발에 차이면. 뼈 부러진다. 낙타도 그랬다."
"그래. 일차적으로만 그 정도만 주의하자고."
"리더. 저 뿔이 제일 큰 녀석이 우두머리 같아요."
"그렇네. 보통 저럴 때는 우두머리가 가장 먼저 돌격하니까. 특히 주의해."
"음. 알겠다."
라분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우두머리로 보이는 산양이 침을 질질 흘리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이지도 않는 뒤쪽의 바위들을 골라서 밟는지.
"눈과 눈 사이가 넓고, 눈이 튀어나와 있어요. 아무래도 뒤를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말이랑 같은 구조로."
"말이 뒤를 볼 수 있었어?"
"⋯⋯."
우두머리가 가장 먼저 돌격한다는 내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하지만 나머지 6마리의 산양도 거의 동시에 돌격해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정면에서 맞서지 마! 바위에서 떨어지면 죽는 거야!"
바위가 평평하고, 나름 넓이도 있어 다행이다.
나는 산양의 뿔을 앞세운 돌격을 아슬아슬한 간격을 유지하며 피했고, 다음 공격도 피한 다음 그대로 한 마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깡!
내 공격은 우두머리 산양의 뿔이 내 검 옆면을 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목표의 앞다리를 얕게 베어내는 데에 그쳤다.
"!"
검염 서린 검의 옆면을 정확히 치고 지나갈 수 있는 관찰력.
아마 내 몸을 노렸다면 내 감지 능력으로 그대로 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연찮게도 우두머리 산양의 공격은 내 검을 노렸다.
평소에 나는 내 검을 전투 능력의 안에 집어넣지 않았기에 바로 대응하지 못했다.
모골이 송연해진다.
'설마. 내 감지 능력의 틈을 노린 건가?'
아니, 우연히 들어맞았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즉시 감지 능력의 활용 범위 안에 내 검도 포함시켰다.
계속되는 산양의 돌격 공격.
그런데⋯⋯
"리더! 아무래도 한 사람만 집중적으로 노리는 습성이 있나 봐요!"
레이나와 라분은 산양의 경계를 받을지언정 직접적인 공격을 받지는 않았다.
각각 한 마리가 뿔을 들이밀며 라분과 레이나를 견제하고 있을 뿐이다.
나머지 다섯 마리는 지금 실시간으로 나를 노리고 있었고.
오히려 좋다.
무한 회귀가 있는 나는 얼마든지 리스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최대한 버텨볼 테니까 틈을 노려 지원해 줘!"
"네!"
레이나가 검염 서린 검을 내밀며 천천히 산양에게 다가갔다.
산양은 투레질을 거듭하며 천천히 거리를 벌리다가 다가오는 동작을 반복하며 레이나를 경계했다.
나는 마치 곡예와 같은 동작으로 산양들의 공격을 피하며 기어코 한 마리의 몸통을 두 쪽으로 것에 성공했다.
그때였다.
"끼에에에엑!"
우두머리 산양의 끔찍한 소음과 함께 반전한 6마리의 산양이 일제히 라분과 레이나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
"!"
내가 5마리의 산양을 상대하기 위해 나머지와 거리를 벌리는 순간을 노린 일격이다.
"라분! 레이나!"
유연한 레이나는 몰라도 라분은 저 공격을 한 번에 피할 방법이 없다!
"제기랄!"
나는 급하게 달려나가면서도 학즉사법 3성의 도전을 준비했다.
거리가 너무 벌어져있어 내가 아무리 빨리 도착하더라도 이미 산양들이 두 바퀴는 쓸고 지나간 뒤가 될 터였다.
'지금이라도 해야 하나? 아니야.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어.'
둘이 작은 목소리로 말들을 주고받은 뒤 검이 닿을 정도로만 서로의 거리를 벌렸다.
레이나는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세 마리의 돌격을 모두 피해내는 기예를 선보였다.
레이나를 스쳐 지나간 산양들이 급하게 브레이크를 잡았다.
반면 라분은?
한 마리의 공격을 피했지만 다른 한 마리의 뿔 공격은 피할 수 없었다.
방패로 급하게 튕겨올리자 몸이 덜컥이는 것이 보였다.
"라분!"
우두머리 산양이 그대로 훤히 드러난 라분의 옆구리를 향해 뿔을 찔러왔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각도다.
내가 내 머리를 터뜨릴 결심을 마쳤을 때였다.
"라분 씨!"
레이나가 몸을 튕기며 우두머리 산양의 머리를 베어갔다.
이미 라분을 직접적으로 지키기에는 늦은 레이나의 검이 빛났다.
레이나의 검염은 우두머리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했다.
라분을 죽이고 본인도 레이나의 검에 의해 죽느냐.
아니면 레이나의 검을 피해 살아남고, 라분을 살려주느냐.
우두머리의 선택은 후자였다.
라분의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우두머리의 뿔.
레이나의 목적은 성공했다.
하지만 반대급부로 레이나의 자세가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읏!"
레이나가 불규칙적인 바닥에 미끄러져 균형을 잃었다.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레이나의 양 옆을 두 마리의 산양이 노리며 달려들었다.
나는 아직 두 호흡 정도의 거리가 모자랐다.
이번에야말로 도저히 피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라분이 앞으로 두 발자국 걸어가 레이나에게 다가가기 전까지는.
"음!"
라분은 레이나를 방패로 툭 치며 균형을 잡아줌과 동시에 레이나의 옆구리를 찌르려는 오른쪽 산양의 뿔을 향해 검을 정면으로 휘둘렀다.
검염이 없는 라분의 검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그대로 튕겨 나올 것이다.
레이나의 옆구리는 여지없이 뚫려버릴 것이고.
그때였다.
눈을 부릅 뜬 라분의 검에서 노란색 검염이 피어올랐다.
"!"
"!"
"!"
라분의 검과 부딪힌 산양의 뿔이 갈려나갔고, 이내 3위계의 힘에 의해 머리부터 땅에 쳐박혔다.
한편 반대쪽 산양의 공격을 막기 위해 내민 방패에도 노란색의 검염이 피어올랐다.
방패와 정면으로 부딪힌 산양이 오히려 반대로 튕겨 나와 내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왔다.
나는 달려오던 기세 그대로 몸을 일으키려는 산양의 목을 베어넘겼다.
레이나가 겨우 균형을 잡고 라분의 뒤를 노리려는 우두머리 산양에 맞섰다.
우두머리는 돌격을 멈추고 침을 질질 흘리며 레이나를 노려보았다.
"흐르르! 흐르르!"
라분은 양손에 쥔 검과 방패에서 검염을 줄기차게 뿜어내며 자세를 재정비했다.
겨우 도착한 내가 둘과 호흡을 맞춰 다시 삼각진을 형성했다.
다시 대치가 이어졌다.
라분의 검에 머리가 바닥에 찍힌 산양은 바둥거리며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했다.
이내 그 바둥거림도 사라지고, 몸이 굳으며 죽어버리자 우두머리 산양도 결정을 내린 듯했다.
"흐르르!"
살아남은 산양들이 바위를 껑충껑충 뛰며 그대로 우리에게서 멀어져 갔다.
쫓아갈 엄두조차 나지 않는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우리는 한참을 자리에 서있다가, 곧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주저앉아 서로의 등에 등을 기댔다.
숨을 고르고 뱉는 내 목소리는 어쩔 수없이 잠겨있었다.
"정말, 정말 잘했어."
"라분 씨. 고마워요. 죽을 뻔했어요."
"레이나. 나를. 구하려고 하지 않았으면. 위험할 일도 없었을 거다. 고마워할 필요. 없다."
"라분. 축하해. 넌 충분히 대단한 놈이야. 최고야."
"음. 나도. 3위계 됐다."
"최고예요."
레이나가 헤헤 웃으며 말했다.
"위기에 처하면 올라갈 확률이 높다더니. 정말 맞나봐요. 이게 바로 전화위복인가?"
"전화. 뭐?"
"처음 듣는다."
"모르면 됐어요."
우리는 잠깐 웃은 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이대로 시체들을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잠을 잘 장소도 다시 구해야겠고.
우선 산양들의 시체에서 마정석이 있는지 감지했다.
내가 죽인 두 마리에게는 마정석이 없었지만, 나머지 한 마리에게서 마정석이 나왔다.
라분이 단검에 검염을 담아 뿔을 가른 뒤 영롱한 마정석을 꺼냈다.
"오. 꽤 괜찮은데?"
중5급 정도는 되어 보이는 마정석이다.
여섯 단계로 이루어진 세부 등급 중에서는 낮은 편이지만 중급이라니.
"난이도에 비하면 짠 편인 느낌이지만."
첫 조우에서부터 산양의 위협은 대단했다.
정말 아주 조금이라도 삐끗했으면 그대로 전멸했을 정도다.
"마정석이 나왔으니 몬스터는 확실하고 이름이 뭔지 궁금하네. 공양해 보자."
"주인. 잠깐만."
라분이 한 마리의 배를 갈라 내장을 뒤적거린 뒤 간을 꺼냈다.
나와 레이나가 비위가 상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라분은 아랑곳 않고 단검으로 간을 슥슥 잘라내더니 아주 작은 조각을 입에 넣었다.
"음!"
이어 간을 감싸고 있던 고기도 조금 잘라 입에 넣었다.
"아주 맛있다!"
이내 피가 잔뜩 묻은 손으로 산양을 끌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공양."
[시체를 공양합니다.]
[바위 산양 두 마리. 확인.]
[미궁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라분의 입가와 손에 묻어있던 피가 전부 빨려 들어가고, 깊게 베어진 배도 마치 시간을 되감듯이 원래의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라분이 어어 하는 사이에 바닥의 바위와 산양의 몸이 동화하기 시작했다.
공양이 진행되는 것이다.
"어! 주인! 이거 맛있다!"
"맛있다 없다는 둘째치고. 너무 더럽잖아. 저기 한 마리 더 있어."
내가 일부러 한 마리를 남겨놨다는 것을 알자 라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장 말고, 고기만 한 끼 먹을 정도로 베어가자. 피 안 묻게 조심하고."
우리는 잠깐 고민하다가 왼쪽 뒷다리를 가져가기로 결심했다.
라분이 단검을 몇 번 휘두르자 원하는 다리만 뚝 빠져나왔다.
보관 방법은 간단하다.
미믹 주머니에 넣기만 하면 된다.
미믹 주머니의 또 다른 기능이 있다.
음식이 썩는 건 방지할 수 없지만, 이렇게 피가 뚝뚝 떨어져야 할 다리를 넣어도 다른 물건이 전혀 더러워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집안을 어지럽히는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아티팩트다.
라파가 장담하기로, 경매에 이 아티팩트를 내놓으면 가격이 어마어마할 것이라고.
내 목숨을 걸고 얻은 것이니 그 정도는 해줘야 했다.
우리는 적당한 장소에 자리를 잡고 한참 떨어진 곳에 불을 피웠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장소에서는 상당히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충분히 위험을 감수할 만했다.
라분이 3위계에 도달한 날에, 이런 진수성찬 하나 없으면 말이 안 된다.
물론 굽는 건 라분이 도맡아 했지만.
곧 라분이 바싹 익힌 큼지막한 산양 다리를 들고 돌아왔다.
이거 굽겠다고 가져온 장작을 정말 최소만 남기고 다 썼다.
발열석이 있어서 할 수 있었던 사치다.
그리고 라파 몰래 가져온 와인 한 병.
"한 잔씩만 먹자."
나무 그릇에 졸졸 따라 먹는 와인과. 뜨거움을 참고 손으로 죽죽 찢어서 입에 넣는 산양의 고기.
그리고 내 목숨을 맡길 수 있는 동료들.
"라분. 다시 한번 축하한다."
"축하해요."
"음."
고기를 꿀떡 넘긴 라분이 우리를 보며 당당하게 말했다.
"앞으로도, 내가 앞을 막겠다. 끝까지. 함께하겠다."
말없이 서로 잔을 들고, 쭉 들이켰다.
지금까지 미궁에서 이보다 더 행복한 날은 없었다.
확실했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95화
사실 라분의 3위계 달성 축하 파티는 내 무한 회귀에 기댄 감이 있었다.
이 바위산은 우리가 전혀 모르는 장소다.
그런 장소에서, 아무리 최소한의 대비는 했다지만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워 먹는다? 거기다가 술까지 마신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이 정도로 미친 짓을 다시 할 것 같지는 않을 정도로.
그래도 운이 좋았다.
우리는 술을 마시고 다시 장소를 옮겨 하룻밤을 보낼 때까지 어떠한 몬스터들의 습격도 받지 않았다.
그래도 반성은 필요했다.
"⋯⋯분위기를 너무 탔어. 다음부터는 절대로 이러지 말자."
"네."
"라분. 피곤하다."
라분이 고개를 꾸벅꾸벅 숙였다.
갑작스러운 3위계 각성에 몸이 적응을 하지 못해 피로가 몰려온 듯했다.
신체 능력이 증가했을 테니 적응 시간도 필요하고.
나는 큰 바위 위에 올라간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동안 바위산을 꽤 높이 올라와 얼마 멀지 않은 지점에 통상적인 미궁의 천장이 보일 정도다.
물론 내 머리 위에는 아직 천장이 까마득했지만.
"우선 여기는 쉴만한 곳이 못 되니까. 1시간만 더 움직여서 적당한 장소를 찾자. 내일까지는 푹 쉬자고."
라분의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황이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콜드릭 포인트의 탐색을 그만두기에는 지금까지 투자한 시간이 아까웠다.
그래서 나는 타협점을 찾았다.
앞으로 이틀, 이틀 동안 라분의 몸 상태가 돌아오지 않으면 탐험은 중지다.
"최대한. 빨리 회복해 보이겠다."
"무리하지 마. 원래 조급할수록 될 일도 안 되는 법이니까."
"알겠다."
적당히 넓은 바위 밑의 공간을 찾고, 감지 능력만 활성화한 채로 이틀을 푹 쉬며 보냈다.
라분은 마지막 날에는 몸을 이리저리 튕기더니 자고 일어난 아침에는 컨디션을 완전히 회복했다.
"라분. 이제 괜찮다."
"정말?"
"음!"
"제가 봐도 괜찮아 보여요."
"확실히."
감지 능력으로 관찰해도 큰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면 됐다.
이번에는 큰일을 해낸 라분을 많이 배려해 줬다.
원래 내가 가진 특성은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해야 하는 특성이 아니다.
"그러면 다시 탐험을 시작하자. 어제 판단한 우리의 대략적인 위치는 이곳. 그리고 콜드릭 포인트는 이곳이야."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내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라분과 레이나가 침을 꼴깍 삼켰다.
"나도 정확히 이 지점에 뭔가가 있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가치 있는 뭔가가 있는 것은 분명해."
"그렇군요."
앞으로 이틀이면 도달이 가능한 거리.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건 안전이라는 사실만 잊지 말고, 가자."
바위산의 울퉁불퉁함은 이동에 큰 제약을 줬다.
그렇다고 상대적으로 편한 바닥의 길을 따라가면 꾸불꾸불 돌게 된다.
때문에 어쩔 때는 길을 따라가야 하지만, 어쩔 때는 바위 위에서 움직여야 할 때도 있었다.
이 바위산에서, 맨몸으로 바위 위에 올라선 우리의 모습은 너무나도 시인성이 좋다.
감지 능력의 범위를 넘어선 거리에서조차도 충분히 관찰할 수 있을 정도.
덕분에 적과의 전투는 피할 수 없다.
이번에는 우리가 사냥당하는 역할이다.
적들이 내 감지 능력을 짐작조차 못하는 것만 빼면.
"긴장하지 말고 들어. 전방에 몬스터다. 오크와 같은 기운이지만 약간 달라. 짐작하자면 동굴 오크."
동굴 오크는 주로 바위나 동굴 지대에서 발견되는 오크로, 일반 오크보다 덩치가 작은 대신 더 민첩하다.
어찌 보면 인간과 흡사하다고 하겠다.
물론 털만 깎으면 인간과 거의 비슷하게 생긴 야만족 만큼은 아니었지만.
"총 10마리. 챔피언은 없어. 적들은 우리가 매복을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몰라. 선택은 크게 두 가지. 우회해서 매복의 이점을 없앨 수도 있고, 정면 돌파할 수도 있고."
"정면 돌파가 좋겠다."
"왜?"
내 물음에 대답하는 라분의 목소리가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내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겠다."
"⋯⋯."
나와 레이나가 잠시 눈을 맞췄다.
서로의 의견을 확인한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동료가 할 수 있다고 하면, 믿어야 한다.
"한 번 가보자."
우리는 천천히 매복 지점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동굴 오크에 대해서는 용병들의 교육을 받아 잘 알고 있었다.
용병들은 바위산 근처에 가지는 않았지만 바위산 근처에서 사냥을 한 적이 있었고, 동굴 오크와도 자주 조우했다고 한다.
"갈색에, 붉은 오크보다 단순한 편이야. 하지만 민첩하고 순간 속도가 높아 방심하면 쉽게 선수를 뺏길 수 있어."
아무리 오크보다 덩치가 작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오크다. 기본적인 힘도 빼놓을 수 없다.
"투척 무기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 하지만 확실하지 않으니까 항상 주의하고 있어."
우리의 잡담을 가장한 작전회의도 점차 끝나가고 있었다.
동굴 오크가 매복한 지점을 통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습을 준비하기 위해 놈들이 움찔거리는 순간.
"지금!"
힘을 비축하고 있던 우리가 그대로 최대의 속력으로 매복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특히 라분의 속도가 엄청났는데, 2위계 시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에 나와 레이나가 깜짝 놀랄 정도였다.
새삼 라분의 성장이 놀라워지는 순간이다.
'2위계 시절에도 오크 챔피언을 이겼는데, 3위계에는 과연?'
우리는 갑작스러운 접근에 얼떨결에 창을 내미는 동굴 오크들의 얼굴에 각각 검을 박아 넣었다.
창이 짧고, 근처에 여러 개 놓여있는 것이 누가 봐도 투척용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녀석들의 기습을 허락했다면 투창 세례에 시달릴 뻔했다.
'정보가 잘못됐군.'
용병들이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은 낮았다.
거짓말을 해봤자 얻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이쪽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자.
"투창에 주의해! 라분!"
"우어어어!"
매복의 단점이 있다.
넓은 지역에 퍼진 채로 적을 기다리는 만큼 자칫하면 각개격파를 당하기 쉽다는 사실이다.
라분은 동굴 오크들에게 조금의 시간도 주지 않고 바윗길을 성큼성큼 달려나갔다.
동굴 오크들은 그때까지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허둥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첫 기습에 죽은 오크 중 하나가 우두머리 였던 모양.
"우어어어!"
검염이 가득 서린 검과 방패와 함께 동굴 오크를 기습하는 라분.
이보다 더 든든할 수 없다.
나는 레이나가 라분과 합류하는 것을 확인하고 뒤를 돌아 왼쪽에서 투창을 준비하던 나머지 동굴 오크에게 달려들었다.
투창의 속도는 생각보다 엄청나다.
아무리 3위계라고 해도 전투 중에 날아드는 투창을 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크르르르!"
내가 검을 휘둘러오자 투창을 날리려던 오크는 검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검조차도 내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틀을 내리쉰 만큼 몸 상태는 그야말로 최고였다.
내 일격에 미궁 11층의 몬스터가 무기째로 잘려나갔다.
그렇게 벌어진 학살.
마지막 오크가 억지로 던진 투창을 낚아채고, 녀석의 입속에 그대로 돌려주는 것으로 전투가 마무리되었다.
"후."
이미 적을 전멸시키고 내게 오고 있던 라분과 레이나가 엄지를 척 올려주고 시체를 뒤지기 시작했다.
올린 수확은 하급 마정석 하나였다.
"영 수지가 안 맞네."
"그러게요. 의뢰랑 겸하지 않으면 힘들다는 말이 이해가 가요."
미궁 10층의 직원, 카브가 말했었다.
미궁 11층부터는 몬스터의 사냥으로 수지를 맞출 수 없다고, 의뢰를 겸해야 수지가 맞고, 그나마도 최소한의 수익이라고.
대형 길드가 탐험 전문 파티를 대대적으로 운용하지 않는 이유가 있는 셈이다.
"뭐, 우리야 상관없지만."
인원이 적으니 돈 문제는 전혀 신경 쓸 것도 없다.
이미 레이나와 라분은 수익을 분배 받으며 상당한 돈을 번 상황이고.
라분의 돈은 라파에게 다 빼앗기는 모양이지만.
"주인. 왜 갑자기. 그런 눈으로 보냐."
"어? 왜?"
"주인. 이상하다."
"아무것도 아니야."
나와 레이나는 뽀송뽀송한데, 라분은 온몸에 오크의 피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나는 라분이 처리한 동굴 오크만 공양했다.
[시체를 공양합니다.]
[동굴 오크 네 마리. 확인.]
[미궁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곧 라분의 몸에서 피가 쭉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바로 이탈할 거니까. 나머지는 그대로 두자고."
미궁 11층에 들어오면서 공양의 필요성이 많이 적어졌다.
때문에 라비팩트 반지 안에 꽤 많은 인과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인과를 축적하십시오. 다음 보상까지 834/1,000.]
이 속도로만 간다면 다음 탐험에는 반지에 축적한 인과의 숫자를 천까지 끌어올릴 수 있겠다.
무려 800까지의 보상은 단 하나였다.
'혼돈의 상자.'
다음 보상도 혼돈의 상자가 나온다면, 나는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고 인과를 수령해버릴 생각이다.
정말 최악의 경우라면 죽어버리면 되니까.
죽음은 되도록 피하고 싶었지만, 결국 이 호기심이 문제다.
인과가 천까지 쌓이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리더. 손보면서 뭐해요?"
"아. 아냐. 가자."
살육의 현장에서는 빠르게 도망가는 것이 좋다.
수풀이 우거져있어 멀리서 발견될 확률은 낮지만, 그래도 조심은 해야 했으니.
그 시점부터는 동굴 오크와 전투를 치르는 비율이 높아졌다.
더불어서 수풀이 점차 크게 자라기 시작했다.
종아리 언저리에나 자라던 풀이 허벅지에 닿기 시작했다.
"이거, 한 쪽은 바위산이고, 한 쪽은 바위랑 풀이 섞인 산인가 본데?"
"콜드릭 포인트가 수풀에 있다면 찾기 힘들겠어요."
콜드릭 포인트의 좌표는 확실하지만, 정확한 지점은 감에 의존해야 했다.
아무리 미궁 사무소가 우리의 편의를 봐준다지만, 미궁의 좌표를 측정하는 아티팩트를 대여해 주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엄청 귀한 거라고 했으니까."
웬만한 좌표 측정 아티팩트는 미궁의 차원을 넘는 순간 그대로 박살 난다고 한다.
때문에 대부분의 좌표 측정 아티팩트는 미궁 고유의 아티팩트인 라비팩트로 구성되며, 공급 없이 수요만 치솟는 최고급 아티팩트다.
만약 우리에게 빌려줬다가 우리가 죽거나 파손이라도 한다면?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덕분에 파티에 마법사가 없을 경우, 대부분 스스로 지도를 그려 정식 지도와 대비하며 움직여야 한다.
이것도 물론 정식 지도가 있을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지만.
"그래도 내 미궁 짬이 있으니까. 빗나가도 근처일 거야. 확실해."
내 감지 능력에 의해 증가한 거리 감각도 도움이 될 테고.
그렇게 하루를 더 이동한 결과, 우리는 한 장소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쯤."
자리를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커다란 바위들이 사방에 깔려있었고, 수풀이 무릎까지 자라나있었다.
주변에 동굴 오크들의 기척이 느껴졌지만 감지 능력으로만 겨우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먼 거리였고, 그밖에 다른 기척도 없었다.
"여기 맞을까요?"
"어, 아마도?"
레이나가 볼을 부풀리며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나른 바라보았다.
나는 내가 그린 두 지도를 겹치며 길을 다시 찾았다.
"조금 왼쪽으로 치우친 것 같은데? 오른쪽으로 가자."
오른쪽으로 가니 도저히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 큰 바위가 우리를 막고 있었다.
"⋯⋯."
"⋯⋯."
의심 가득한 두 쌍의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급히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니 치우친 게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이었네. 다시 돌아가서 왼쪽으로 가자."
레이나의 볼이 아까보다도 더 크게 부풀었다.
의심이 확신이 됐나 보다.
"망했다."
라분의 한 마디가 창이 되어 내 가슴을 찔렀다.
"왼쪽. 가자 왼쪽⋯."
사실 왼쪽도 확신이 없기는 하다.
그렇게 어기적어기적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여기는 길이 뚫려있어 어찌저찌 이동을 계속할 수는 있었다.
콜드릭 놈이 다 죽어가면서 은인에게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다.
'설마. 아니겠지?'
거짓말이라면 가만히 두지 말아야겠다.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걸음을 걷고 있을 때였다.
내 몸이 아래로 쑥 꺼졌다.
"엇!"
갑작스럽게 나타난 구멍에 발이 디딜 곳을 잃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나는 괜히 3위계가 아니다.
곧바로 몸 밖으로 마나를 폭사해 주변 지형을 파악하고, 안전히 착지할 수 있었다.
내가 발을 디딘 곳은 딱딱한 돌바닥이었다.
"리더!"
"주인!"
"움직이지 마! 나 무사해!"
위에서 들려오는 안도의 한숨을 뒤로하고 주변을 관찰했다.
그리고 확신할 수 있었다.
"여기다."
콜드릭 포인트.
내가 서있는 곳은 누군가가 만든 것이 분명한 계단의 위였다.
계단은, 바위산을 뚫고 아래로 계속해서 뻗어나가고 있었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96화
갑작스러운 추락과 계단의 발견.
나는 우선 계단에서 올라와 둘과 합류한 후 계단을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가 딛고 서있는 땅은 조금만 파내려 가면 커다란 암반이 나온다.
지상의 돌과 다르게 엄청나게 딱딱해서 웬만한 도구로는 흠집조차 나지 않는다.
내 검염으로도 천천히 시간을 들여야 베어내는 시도라도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이런 바위를 이렇게 말끔히 베어내고, 거기다가 계단까지 만들었다고?
"뭘까요? 리더, 알고 계셨어요?"
"아니. 알고 있던 건 좌표뿐이었어. 이런 게 있을 줄은 몰랐지."
야만족이 만들었나?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한 가설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검증할 수 없는 가설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도전밖에 남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탐험이지만, 준비됐지?"
라분과 레이나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리더와 함께라서 이런 신기한 경험들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레이나 말이. 맞다."
"앞으로 더 엄청난 일들이 벌어질 거야. 가자."
그렇게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초반의 계단은 제대로 각져 있었지만, 내려갈수록 점점 조잡해지기 시작했다.
점차 바닥이 울퉁불퉁해지더니, 이내 흙으로 변해갔다.
정확히는 계단으로 깎인 바위 위에 흙이 내려앉은 모양새다.
다행히도 벽은 미궁 특유의 빛을 내고 있어 미궁 8층의 비밀 통로처럼 횃불을 만들어 탐사할 필요는 없겠다.
약 5분 정도를 걸었을까? 계단의 끝이 나타났다.
그 뒤로는 직선으로 쭉 이어진 복도가 나왔다.
우리는 계단에서 복도로 내려선 뒤에 잠깐 휴식을 취했다.
"온도가 조금 올라갔네요?"
"그러게. 공기가 뜨거워진 느낌이야."
특정 층, 또는 특수한 곳에서 온도가 변한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다.
나는 우선 감지 능력의 범위를 최대로 확장했다.
그러자 감지 범위의 가장 끝에서 미약한 기척이 잡혔다.
"저 멀리 생명체가 있어."
"생명체?"
"그래. 사람 같아."
"사람."
우선 감지되는 기척은 약간의 이질감이 느껴지지만 사람이다. 동물도, 몬스터도 아니다.
그런데 나는 아직 야만족을 만난 적이 없다.
야만족의 외양은 온몸에 난 털만 제외한다면 사람과 같다고 한다.
과연, 내가 감지하고 있는 생물은 사람일까, 아니면 야만족일까?
나는 이 생각을 라분과 레이나에게도 공유했다.
"야만족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만, 다른 파티가 이 장소를 발견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요. 리더. 확실하게 사람이에요?"
"애매해. 기척도 개인차가 있는데, 사람은 특히 개인차가 심하단 말이야."
"흠."
"뭐. 만나보면 알겠지. 우선 접근해 보자."
우리는 탐험을 진행하면서 이 공간을 가득 채운 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벽 자체가 뜨거워요. 달아올라있어요."
"천장도, 바닥도 똑같아."
"음. 공기가. 데워진 거군."
라파에게 교육받는 라분은 요즘 말이 부쩍 늘었다.
뚝뚝 끊어 말하는 습관은 여전하지만 사용하는 단어의 질이 훨씬 높아졌다.
내가 기특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나를 노려본다.
그렇게 5분을 걷자 내가 감지한 기척의 주인과 1분 거리로 가까워졌다.
"대기."
목표물은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벽을 쓸어넘겼다.
아직도 인공적으로 다듬어진 느낌이 강한 공간이다.
그렇기에 보통의 미궁이라면 반드시 있었을, 기습을 위해 숨을 수 있는 지형지물이 없었다.
"목표는 통상적인 걷는 속도로 움직이고 있어. 그런데."
"그런데?"
나는 길의 정중앙에서 오른손을 쭉 뻗었다.
"?"
"엥? 뭐 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은 직선으로 뻗어있었잖아. 틀어짐 없이."
"네. 약간 휘었을 수는 있겠지만."
나는 감지 능력을 사용하며 뻗은 팔을 오른쪽으로 30도가량 움직였다.
"내가 감지한 적은 이쪽 방향에 있어."
"직선거리에 있지는 않다. 그렇다면⋯⋯."
"앞에 갈림길이 있을 가능성이 높아."
평소의 미궁이라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곳은 누군가가 만들어낸 장소다.
"천천히 접근하자. 적은 다섯 명. 상대하기에 많은 숫자는 아니야. 구성은 3위계 하나. 2위계 넷."
"네."
일단 사람으로 추정되니 세는 단위는 '명'으로 하자.
내 예상대로 곧 번듯한 십자 모양의 갈림길이 나타났다.
우선 적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오른쪽 갈림길에서 이쪽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우리와의 거리는 대략 50m. 지척이다.
여기서부터는 수신호로 대화를 대신했다.
[여기서 매복. 정체 확인 후. 인간. 공격하지 않음. 야만족. 공격.]
라분과 레이나가 차례로 알아들었다는 신호를 보냈다.
한 손으로 빼어든 검을 쥐고 앞에 나머지 손으로 앞으로 나선 라분의 등을 짚었다.
내가 라분의 등을 놓는 순간이 습격의 시간이다.
50m, 40m, 30m, 20m.
정확히 13m.
나는 라분의 등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흡!"
라분이 3위계의 힘을 폭사시키머 달려들었다.
반대쪽 벽에서 대각선으로 달렸기에 첫 출발의 힘을 코너를 도는 데에 낭비하지 않았다.
그렇게 보이는, 내 기척으로 감지한 적.
온몸에 난 털이 보인다.
야만족이다.
"죽여!"
"우어어어!"
야만족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손에 들고 있지는 않았다.
등에 매달려있었고, 손에는 뭔가가 들어있는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야만족은 우리를 보더니 즉각적으로 바구니를 집어던졌다.
등의 무기를 꺼내지는 못하고, 손톱을 세운 뒤 자세를 낮춘다.
평소에는 손톱을 안에 숨겨놨다가 전투 상황에 꺼낸다더니, 드러난 손톱의 길이가 일반적인 클로의 길이 정도는 된다.
3위계인 야만족은 손톱에 검기까지 드리워져있다.
-쾅!
적 3위계를 노린 라분의 박치기.
하지만 적 야만족이 피하려는 움직임을 취하자 급히 경로를 변경해 왼쪽의 야만족을 노렸다.
털북숭이 야만족이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방패에 얻어맞고 날아갔다.
나와 레이나가 라분의 뒤를 받쳤다.
위치상 레이나가 3위계의 야만족을 상대하게 됐다.
"큭!"
손톱을 이용한 적과 상대하는 것은 처음일 것이다.
레이나가 크게 고전하는 것이 보였다.
"라분! 레이나를 서포트해!"
"음!"
나는 전력을 다해 검염을 흩뿌리며 2위계의 적들에게 달려들었다.
레이나는 손톱에 얕게 베인 뒤 라분에게 야만족을 넘겼다.
"읏!"
"괜찮아?"
"네!"
2위계 넷은 나와 레이나의 검염에 바로 정리되었다.
반면 적 3위계는 라분과 격렬한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야만족은 복슬복슬한 털을 가졌음에도 꽤나 민첩했다.
하지만 야만족의 손톱은 라분의 방패 앞에서 어떠한 위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곧 틈을 찾은 라분이 구천검법을 활용한 움직임으로 야만족의 팔을 잘라내고, 뒤이은 공격으로 목을 베어내었다.
전투 자체는 상대적으로 빨리 끝났다.
"후."
나는 라분의 등을 툭 두드렸다.
"고생했어. 당장 근처에 적은 없어. 레이나는 상처 좀 보자."
레이나가 가죽 갑옷을 벗었다. 검염이 어린 손톱에 베여 가죽 갑옷이 예리하게 잘려있었다.
"마지막에 마나로 방어해서 온전하게 베이지는 않았어요. 애초에 스치는 공격이기도 했고."
레이나와 나는 두손검을 사용한다.
아무래도 10개의 손톱을 방어하기에는 꽤 어려운 대진이기는 하다.
"음. 깊지는 않네. 쓰라리지?"
"네."
미믹 주머니에서 가장 깨끗한 물을 꺼냈다.
라파가 정성스레 끓인 물이다.
유리병에 완전히 밀봉되어 있어 어떠한 외부의 오염도 없다.
"드디어 한 번 써보네."
"그러게요. 헤헤."
미믹 주머니 안에 보관된 목함을 꺼내니 소독된 천이 나왔다.
라분이 유리병을 열고 물을 부어줬고, 내가 천을 잡아 레이나의 상처를 정성스레 닦았다.
"으으."
"조심해. 이거보다 더 심하게 다쳤었으면 바로 귀환이었어."
"네⋯⋯ 죄송합니다."
만약 그랬다면 진지하게 리셋을 고려했을 것이다.
편도의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깨끗한 물과 천으로 상처 부위를 닦아낸 후에는 약을 꺼내 발랐다.
일반적인 약에, 포션을 극미량 섞어 놓았다고 한다.
이거 하나에 1골드다.
손이 벌벌 떨리는 돈이지만,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만큼 아낄 생각은 없었다.
정성스레 약까지 바르고 붕대까지 감으니 임시 조치가 완료되었다.
"좋아."
탁하고 상처 부위를 치자 레이나가 앙탈을 부린다.
"전투에 지장은 없겠지?"
"네. 문제 없어요."
이리저리 팔을 휘두르며 자세를 잡는 레이나.
감지 능력으로 관찰해도 크게 문제는 없어 보인다.
"일단 주변에 접근하는 적은 더 없어."
우선 야만족의 시체를 조사했다.
먼저 녀석들이 가지고 있던 바구니. 안에는 회색 버섯들이 들어있었다.
"으. 이거 먹을 수 있는 걸까요?"
"완전 처음 보는 버섯이기는 한데⋯⋯."
일단 미믹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나중에 라파에게 분석을 부탁하면 될 일이다.
지금은 절대로 먹지 말아야 하고.
야만족의 시체에서 확인한 물품은 다양했다.
옷을 입고 있지 않아 웬만한 물품들은 주로 허리띠에 걸려있었는데, 공통적으로 투척용 단창, 수통과 주머니 여럿, 그리고 호각이 발견되었다.
주머니에서는 정체 모를 씨앗들과 조그마한 쇠나무 막대기 등이 들어있었다.
우리가 우선 주목한 것은 투척용 단창이다.
적 한 마리당 세 개씩 가지고 있다.
"기습이 아니라면 단창에 의한 공격을 받는다고 가정해야겠어."
까다롭다. 그래도 감지 능력을 이용해 전장을 선택할 수 있다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
지금 전투만 해도 야만족은 단창을 단 하나도 사용하지 못했지 않았나.
'감지 능력이 없었다면 세 명으로 공략은 엄두도 못 냈겠지.'
우리는 적 3위계의 얼굴에 난 털을 걷었다.
안쪽에 있는 사람의 이목구비가 드러난다.
"와. 정말 사람 같아요."
"그러게. 여자였네."
"적이다. 잊으면 안 된다."
"당연하지."
나는 3위계의 간이 있을 부위를 단검으로 찍었다.
곧 피범벅인 간에 붙어있던 마정석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마정석을 봐. 몬스터야. 확실히 기억해. 그리고 공양."
[시체를 공양합니다.]
[&%#@₩. 다섯. 확인.]
[미궁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야만족이 야만족이라 불리는 이유가 있다.
바로 이 미궁의 신비 때문이다.
만약 조우한 몬스터의 이름을 모를 경우 공양을 하게 되면 미궁의 신비가 이름을 알려준다.
하지만 야만족은 미궁이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탐험가들은 이들을 '야만족'이라는 멸칭으로 그들을 정의했다.
'어차피 죽여야 하니까.'
나는 미궁에서 정체불명의 언어를 사용하던 또 다른 종족을 생각해냈다.
"악마. 아스모데우스."
녀석이 펼치던 심상 구현의 언어도 인간의 인지를 벗어나있었다.
물론 악마어와 야만족의 진정한 이름이 비슷한지는 모른다.
그래도 확실한 사실이 있다.
야만족은 죽이면 마정석이 나오고, 공양 또한 가능하다.
"몬스터야. 무조건 죽여."
"네."
"음."
사라지는 야만족들의 시체에 필요 없는 물건들을 전부 닿게 했다.
이러면 사냥의 완벽한 증거 인멸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터벅터벅 걸어 십자 모양의 갈림길로 돌아왔다.
"이곳은 야만족들의 영역이라고 보는 게 좋겠어."
"바위산을 넘어가야 야만족의 영역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 야만족들은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던 걸까요?"
"탐험을 해봐야 알 수 있겠지. 아직은 모든 게 불명이야."
콜드릭은 마치 이곳에 엄청난 물건이 있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콜드릭 포인트에 도달한 우리를 반겨준 것은 만족할 만한 성과가 아닌 야만족 무리였다.
만약 콜드릭이 이곳에 야만족 무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나에게 알려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죽기 직전이었더라고 해도.
나는 조심스레 콜드릭이 다녀간 이후에 야만족이 이곳을 발견해 이주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아직은 가능성이 높은 추측에 불과했지만.
'천천히 알아가 봐야겠군.'
우리 앞에는 세 가지 갈림길이 선택지로 자리잡고 있었다.
먼저 야만족이 버섯을 딴 바구니를 들고 온 갈림길.
"버섯을 따고 돌아가려고 했어요. 나머지 두 갈림길 중 하나에 다른 놈들의 거주지가 있을 확률이 높아요."
"보통 깊숙한 곳에 거처를 잡는다고 가정하면 정면인가."
"저쪽. 갈림길에는. 버섯이 있겠다."
"그렇지."
우선 정면이 거주지라고 가정하면, 가장 마지막으로 탐험할 장소가 되겠다.
나머지 두 군데 중 먼저 탐험을 진행할 곳은⋯⋯
"아주 조금이라도 정보가 있는 길을 선택하자. 다만, 속도를 조금 높일 거야. 우리가 죽인 야만족을 동료가 찾으러 올 가능성이 높으니까."
"네."
야만족은 사람처럼 사회를 이루고 산다.
다른 몬스터들의 느슨한 사회와는 질적으로 다른 결속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실종된 동료를 찾을 가능성은 100%다.
이 탐험이 빠르게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다.
아직 컨디션은 괜찮다.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미궁의 길을 가로질렀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97화
미궁 11층의 콜드릭 포인트 내부.
사거리 중 야만족이 출현한 오른쪽 길을 탐험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이동하며 주변을 시야에 담았다.
내 감지 능력 덕분에 근처의 적을 걱정하며 소리를 줄일 필요는 없었다.
"미궁 11층에서 받은 의뢰 내용, 기억하지?"
"네."
미궁 10층의 직원, 카브가 소개해 준 길드가 없는 11층 이상의 탐험가들을 위한 커뮤니티이자 의뢰소.
그곳에서 라파가 우리를 위해 가져온 미션은 총 두 개였다.
[미궁 11층의 야만족이 착용한 목걸이.]
[야만족 포획 후 야만족이 뱉는 언어의 발음 상세.]
라파는 우리에게 의뢰를 건네주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
[주인님. 이번 탐험에서 야만족을 만날 확률은 없다고 봐도 좋아요. 지금 이 의뢰도 첫 탐험의 패기를 일부러 보여주면서 가져온 거랍니다. 아예 없다고 생각하셔도 좋아요.]
아무리 라파라고 해도 우리가 첫 탐험에 야만족과 조우한다는 사실은 몰랐겠지.
야만족과는 처음으로 치르는 전투였기에 두 번째 의뢰는 수행할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
적의 전력을 제대로 상정하지 못한 채로 포획이라는 어려운 행동을 시도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첫 번째 의뢰는 사냥을 마친 뒤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의뢰였다.
하지만 아무리 시체를 뒤져봐도 우리가 사냥한 야만족에게서 의뢰된 목걸이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목걸이가 없었다라."
나는 의뢰서의 뒤에 적혀있는 자세한 의뢰 내용을 다시 되짚었다.
분명 모든 야만족은 각자의 신분에 걸맞은 목걸이를 착용한다고 적혀 있었다.
"야만족도 야만족 나름이니까요. 이곳의 야만족은 목걸이를 착용하지 않는 야만족일 수도 있어요."
"그게 중요한 부분이야."
"네? 뭔가 알아내신 부분이라도?"
"아직 추측에 불과한 부분이야. 조금 더 정보를 모아보자."
목걸이를 제외하고도 아직 단서가 남았다.
우리가 처음에 죽인 다섯 마리의 야만족.
그들이 들고 있던 버섯 바구니도 단서가 될 수 있다.
그들이 채취해 들고 있었던 버섯의 양을 가늠했다.
"하루에 걸쳐서 먹는다고 치면, 몇 명이 먹을 양이었을까."
"충분히 많았어요. 버섯이 주식이라면 50명이 하루 동안 먹어도 남을 거예요."
"주식이 아니라 반찬이라면?"
"100명은 먹을 양이라고 생각해요."
곧잘 요리를 하는 레이나의 말이라 충분히 신뢰할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버섯은 바로 먹는 게 아니라 말리기도 하니까. 저장용이라고 생각하면⋯⋯ 으, 끝이 없네요."
"생각만 해보는 거지."
그것만 해도 적의 규모를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미지의 적을 윤곽으로나마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실제 탐험에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었다.
계속해서 빠르게 나아가던 우리의 발걸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멈췄다.
내 감지 능력이 적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전방. 3분 거리에 야만족 세 마리."
잠깐 풀어졌던 분위기가 다시 팽팽하게 조여졌다.
나는 야만족의 존재를 인지하자마자 함정의 가능성을 우려해 감지 범위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야만족이 함정을 곧잘 사용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3분 거리까지 가까워지고 나서야 야만족의 존재를 탐지할 수 있었다.
이것만 해도 다른 파티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능력이기는 했지만.
"긴장할 필요는 없어. 세 마리인데, 2위계 둘과 1위계 하나야."
"1위계요?"
"어."
"전투할 수 없는. 수준이다."
1위계는 마나를 배운 일반인이 보통 3개월 만에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다.
재능이 있다면 하루 만에 도달하는 것도 가능하고.
즉, 비전투 인력이라는 말이다.
"이번에는 두 번째 의뢰를 시도해 보자. 무조건, 가운데에 있는 야만족을 포획한다."
"네!"
"음. 내가 맡겠다. 적당히 튕겨내겠다."
"좋아. 매복이나 기습은 불가능한 지형이야. 적당한 거리에서 내가 신호하면 달려."
우리는 통상적인 속도를 유지하며 적에게 접근했다.
점차 적을 향해 접근할수록 벽을 지지대 삼아 자라는 버섯의 숫자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얼핏 보니 야만족들이 채집하던 그 버섯이 맞다.
"가자!"
내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마자 나와 라분이 위치를 바꾸고, 라분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1분 거리에 떨어져 있던 야만족의 움직임이 뚝하고 멈췄다.
3위계 전사 셋의 전력을 다한 달리기는 야만족에게 생각의 시간을 고작 20초밖에 주지 않았다.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다.
야만족들이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내팽개치며 등 뒤에서 단창을 꺼냈다.
곧바로 이어진 투척. 착지 지점이 나름 정확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한 번 더 땅을 박찼다.
미리 이야기가 된 움직임으로, 더 강하게 가속하자 야만족들이 던진 단창이 우리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키야아아악!"
다음 단창을 뽑을 타이밍을 놓친 야만족들이 손톱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우리에게 학살당했다.
미리 이야기된 한 마리를 제외하고는.
라분의 기술적인 방패 움직임에 턱을 내주고 기절한 야만족만이 살아남았다.
우연찮게도 가장 전투력이 낮은 1위계의 야만족이다.
라분이 기절시킨 야만족을 밧줄로 묶고, 나와 레이나가 죽인 두 야만족을 정리했다.
이번에도 첫 번째 의뢰품인 목걸이는 나오지 않았다.
"공양."
[시체를 공양합니다.]
[&%#@₩. 둘. 확인.]
[미궁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서서히 미궁의 양분이 되어가는 시체 두 구를 잠깐 지켜본 뒤 자리를 옮겼다.
기절한 1위계 야만족에게 이 모습을 보여봐야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적당히 떨어진 곳에 야만족을 내려놓고. 녀석의 품에 있던 물통에 있는 물을 뿌려 깨운다.
"켁켁!"
정신을 차린 야만족이 잠깐 멀뚱멀뚱 눈을 뜨더니 가만히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키야아아아악! %&₩#@! @\\*₩=%!"
"레이나. 잘 받아 적어."
"네."
우리의 발음으로 받아 적으면, '켈룸피야캭! 콥드리얍피!'. 전혀 알 수 없는 발음이다.
"겔버노밍닉비. 인가니푸? 인간이라고 했어요!"
"말이 통하기는 한다더니. 정말이네."
"거기다가."
레이나가 살짝 녀석의 털을 걷어내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남자아이의 얼굴이 나타난다.
"어려. 생각보다 귀엽네요."
"몬스터 외모 품평하지 말고."
"네."
"다 받아 적었지?"
내가 야만족을 죽이기 위해 검 손잡이를 잡았을 때였다.
"리더! 잠깐만요!"
"왜?"
내가 의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자 레이나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시는 그런 게 아니고요. 이거. 말이 통한다면 정보를 빼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정보?"
"단 하나. 안쪽에 야만족이 몇 명이나 있는지만 알아내볼게요. 잘하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해요. 실패하면 바로 죽이면 되니까. 리스크도 없어요."
"성공하면?"
"그래도 죽여야죠."
"좋아."
말이 통하는 적에게서 정보를 빼낸다라, 나름 그럴듯한 말이다.
문제는 시간이다. 내 입장으로는 우리의 안전을 위해 최대한 빨리 탐색을 마치고 싶다.
여기서 시간을 추가로 사용하는 것은 별로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레이나의 말도 시간을 투자할 일리는 있다.
그렇다면.
"라분."
"음."
"레이나와 함께 있어. 내가 전방을 탐사하고 올게."
"리더 혼자서요?"
"탐험을 지체할 수는 없어. 갈림길을 발견하거나, 혼자서 감당하지 못하는 적을 발견하면 돌아온다. 너네는 적과 조우하는 즉시 전투는 하지말고 포로를 죽이고 내 쪽으로 달려와. 달려오기만 하면 감지해낼 테니까."
"네."
"정보를 빼내는 시간은 내가 돌아올 때까지야. 어떤 결과가 나오던지 내가 돌아오면 바로 죽여. 라분. 레이나를 부탁한다."
"알겠다."
고작 팔이 묶인 1위계 포로에게 라분과 레이나가 당할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레이나가 야만족을 향해 손가락을 드는 것을 보며 나는 빠르게 전방으로 달려갔다.
'해보겠다고 했으니.'
레이나가 나를 존중하는 만큼, 나도 레이나를 존중해야 했다.
그것이 동료의 자세다.
길을 달려나갈수록 양옆의 버섯들의 분포가 점차 감소하고, 벽에는 야만족이 낸 것으로 보이는 구멍만이 자리했다.
조금 더 가자 길의 끝이 나타났다.
길의 끝 벽 아래에는 인공적으로 다듬은 것이 분명한 네모난 돌이 있었다.
그 주변의 벽들은 10m가량에 걸쳐 상당히 손상되어 있었는데,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았다.
바닥에 힘을 잃어버린 마정석들이 굴러다니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아티팩트가 사용된 느낌이다.
"아무것도 없어."
흔적들은 비교적 최근이다. 길어봐야 1년이 넘지 않은 것들이다.
그래도 저 네모난 단상 모양의 바위 위에 무언가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누가 가져갔어."
아마 콜드릭이 말한 이 장소의 성과일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더 지체하지 않고 빠르게 왔던 길을 거슬러 레이나와 라분에게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곧 느껴지기 시작하는 두 사람과 한 마리의 야만족의 기척을 감지하자 그제야 조금 마음이 안심되었다.
"후."
동료를 믿는다지만, 일반적이지 못한 상황에서 볼안이 몰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리더. 오셨어요?"
"성과는?"
레이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레이나의 주변에는 우리가 야만족을 죽이고 얻은 성과들, 고기나 빵, 심지어 첫날 바위에서 습득한 돌칼까지 있었지만 다 쓸모가 없었던 듯했다.
"말은 다 알아듣게 했다고 생각하는데, 영 먹히지가 않네요. 하지만 하나는 알았어요."
레이나가 야만족의 턱을 잡았다.
그러고 보니 궁금한 점이 있었는데, 뭔가를 물어본다고 했던 야만족의 입에 재갈이 물려있었다.
야만족에게서 정보를 들으려면 입을 열어놔야 할 텐데, 입을 막아놓았다는 것이 이상하기는 했다.
레이나가 한 손으로 야만족의 양 볼을 찢을 듯이 틀어막고, 나머지 한 손으로 재갈을 풀었다.
"보세요. 녀석. 이빨 몇 개가 없죠?"
"뭐야. 네가 뽑았어?"
"그럴리가요."
라분이 손에 들고 있던 이빨들을 야만족의 옆에 떨어뜨렸다.
인간의 것과는 달리 끝이 유난히 뾰족한 이빨이었다.
"레이나가 말하던 도중에. 입으로 뱉으면서 날렸다. 꽤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글쎄, 멀쩡한 자기 생이빨을 뽑아서 뱉더라니까요?"
"맞지는 않았고?"
"당연히 피했죠. 미리 알고 있었다고요. 생각보다 빨라서 당황하긴 했지만."
분노에 잇몸에 피가 나도록 이를 깨물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아예 생니를 뽑아 무기로 쓸 줄은 몰랐다.
야만족이 가진 인간들에 대한 증오가 얼마나 엄청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 저 녀석이 뭐 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지?"
"물론이죠."
그 순간 야만족을 구속하고 있던 밧줄이 잘려나갔다.
야만족이 손톱을 이용해 아주 천천히 잘라낸 결과다.
마침내 풀려난 야만족의 손이 눈앞의 레이나를 노렸지만, 라분의 검이 야만족의 두 팔을 잘라냈고, 내 검이 야만족의 머리를 그대로 내리쳤다.
내 검은 야만족의 머리를 앞뒤를 경계로 그대로 잘라내며 등의 입구에서 빠져나왔다.
레이나가 자신의 얼굴에 잔뜩 튄 야만족의 피를 닦아내며 말했다.
우리를 믿었기에 야만족의 공격조차 피하지 않고 녀석의 죽음을 그저 노려볼 뿐이다.
역시 레이나도 정상인은 아니다.
내가 가장 마음에 들아하는 부분이다.
"사람과 닮은 괴물이라더니. 바꿀 수 없겠네요."
"밖에서는 그런 쓸데없는 기대를 하는 놈들이 산더미야. 이상론자들이지."
실제로 미궁에서 탐험을 진행하는 현장에서는 바로 알 수 있다.
그냥 야만족과 눈만 마주쳐도 안다.
이 녀석들은 도저히 대화가 통하는 녀석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레이나는 적당한 구슬림으로 대화를 시도해 보려고 한 모양이지만, 본인도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양."
[시체를 공양합니다.]
[&%#@₩. 하나. 확인.]
[미궁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레이나의 몸에 튀었던 야만족의 피가 마치 시간을 거꾸로 되감는 것처럼 빠져나가 원래의 몸으로 돌아갔다.
잠시 미궁에 먹히기 시작하는 야만족의 시체를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동하자."
우리는 미련 없이 통로를 벗어났다.
점차 주변과 동화하는, 눈을 감지 못한 시체에서 비롯된 공허한 시선이 초점을 잃고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98화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다시 처음의 분기인 네 갈래의 갈림길로 돌아왔다.
다행히도 그동안 다른 야만족들이 접근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다들 체력은 어때?"
"멀쩡해요. 오히려 부족할 정도예요."
"좋아. 라분은?"
"문제없다."
나는 둘의 대답을 들으면서도 감지 능력의 범위를 최대로 확장하고 있었다.
5분 거리 내에는 어떠한 생명체도 없었다.
다음 목표를 정하기 위한 간단한 회의가 이루어졌다.
"생각해 보자. 가운데 길이 야만족들이 서식하는 곳이라 감안할 때, 녀석들이 버섯의 길을 탐사하고 우리의 칩입을 알아차리려면 몇 분이 필요하지?"
레이나가 빠르게 펼친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답했다.
"리더의 감지 거리 밖에서 접근한다면 여기까지 빠른 걸음으로 5분. 다시 버섯의 길을 끝까지 가는 데에는 10분이 필요해요."
"버섯의 길에서 다시 갈림길로 돌아오기까지 10분. 내 감지 능력의 밖에서 벗어날 때까지 또 5분."
"네. 편도 15분. 왕복 30분이에요."
즉, 어디로 가든 30분 내에 이곳으로 돌아온다면 적의 침입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야만족들이 바로 수색을 진행할 것 같지는 않다.
이럴 때는 빠른 결정이 필요하다.
왼쪽 길이 야만족의 거처일 가능성도 고려해야 했다.
"바로 왼쪽 길로 가보자. 단, 30분이 넘어가면 다시 돌아오자고."
"네."
왕복 1시간. 내가 감수할 수 있는 가장 큰 리스크다.
더 이상 시간을 쓰면 위험할 가능성이 높다.
왼쪽 길은 계속해서 나아갈수록 점차적으로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은 평범한 미궁의 길이 되어갔다.
나는 잠시 자리에 멈춰 울퉁불퉁한 미궁의 벽을 쓰다듬었다.
"여기에 야만족이 살 것 같지는 않아."
"확실히. 여기를 먼저 갔더라면 차라리 버섯의 길이 더 나았을 것 같네요."
레이나는 끝에 본인의 의견을 덧붙였다.
"그보다 리더. 조금 더워지지 않았어요?"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라분이 레이나에게 말했다.
"더워진 게 맞다. 마치 사막과 같은 날씨."
이런 쪽으로는 둔감해서 잘 모르겠다.
감지 능력이 온도를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일단 길이 이어지니까 계속해서 나아가 보자. 여기에 야만족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콜드릭이 말한 '물건'이 나올 것 같지도 않다.
오히려 '물건'이 있었을만한 장소는 버섯이 있는 갈림길 끝의 제단이었다.
제단 위에 있을 만한 무언가는 사라져 있었고, 굴러다니는 마정석의 잔해는 아티팩트의 사용을 암시했다.
"과연 뭐였을까."
지금의 상황에서는 해결하기 힘든 의문이다.
우리는 다시 빠른 걸음으로 탐험을 이어나갔다.
애초에 1시간의 탐험을 계획한 만큼 30분을 채울 때까지는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다.
그렇게 다시 10분을 걷자, 이제는 나도 더위를 느끼기 시작했다.
"와. 저 땀나려고 해요."
"마치. 사막의 오후와. 같은 날씨. 그립구나."
"역시 사막은 사람 사는 곳이 아니었어."
"주인. 그 말 취소해라."
"취소."
"⋯⋯."
우리는 평지처럼 생긴 길을 걸었지만 사실은 아주 약간씩 내려가고 있었다.
각도로 치면 2도 정도 아래다.
30분보다 조금 일찍 발걸음을 돌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마치 바람과도 같은 열기가 살짝 느껴졌다.
"바람?"
"읏?"
"나도 느꼈다."
더불어 라분이 3위계의 마나를 사용해 강화한 시각이 저 멀리서 빛나는 무언가를 포착했다.
"주인. 저 앞에. 빛나는 뭔가가 있다."
"빛났다고?"
"잠깐 스쳐 지나갔지만, 분명 빛났다."
"네. 저도 봤어요."
나는 감지 능력에 모든 마나를 투자하고 있었기에 오감은 라분과 레이나보다 좋지 않았다.
그래서 녀석들이 본 것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저곳에 마나를 가진 무언가가 없다는 사실은 감지하고 있다.
배낭끈에 달아놓은 1시간짜리 모래시계를 바라보았다.
아직 20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일단 뭐가 있다는 건 확실하니까. 뭔지나 확인하자."
"네."
내리막길이던 길이 다시 평평한 길로 돌아왔다.
레이나와 라분이 발걸음을 뚝하고 멈췄다.
"왜 그래?"
"주인. 귀. 귀에 마나를 집중해라."
"왜?"
"소리가 들린다."
"안 돼. 지금 최대 감지 거리야. 지금 끊었다가 다시 최대 거리로 감지하려면 1분은 더 걸려. 레이나. 무슨 소리인데?"
"저정도의 거리에서 이 소리면 너무 커요. 마치 폭포가 떨어지는 소리."
"폭포?"
그 순간, 이번에는 내 눈에도 보였다.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붉은색 무언가가 넘실거리며 지나갔다.
시간의 간격을 두고 몰아치는 열풍.
그리 뜨겁지는 않지만 바람이 불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미궁에서 바람이 아예 불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처럼 감각에 마나를 투자하지 않은 사람이 느낄 수 있는 바람이 부는 장소도 아니다.
더불어 이 열기.
"미치겠네."
나는 감지 범위를 천천히 줄이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곧 길의 끝이 나타났다.
마치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발열석에서 나오는 열을 쬐고 있는듯한 느낌.
거기에다.
"빛나고 있어."
우리는 길의 끝에 도달하고서야 지금까지 우리가 있던 길이 절벽에 난 구멍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절벽 아래에는.
"망할."
거대한 마그마의 강이 있었다.
엎드린 채로 구멍의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눈이 아플 정도로 엄청난 빛과 함께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때, 바라보고 있던 마그마가 볼록 솟아오른다 싶더니 기포를 만들어내며 터졌다.
음식이 끓고 있는 냄비의 뚜껑을 열었을 때와 같은 열이 훅하고 몰려왔다.
"!"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빼니 예의 그 빛과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으앗!"
"뜨겁다!"
우리는 엉금엉금 뒤로 몸을 피했다.
"미쳤어."
잠시 서로의 눈을 보며 같은 감정을 공유했다.
내가 아래를 보고 있을 때 정면을 보던 레이나는 나와는 다른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한다.
"건너편에 구멍이 있었어요."
"구멍?"
다시 엉금엉금 기어가 확인해 보니 확실히 이곳에서 일직선으로 떨어진 거리에 구멍이 있었다.
"있기야 있는데⋯⋯."
설마 콜드릭이 나를 죽이려고 이 포인트를 알려줬을 리도 없고, 야만족이 저 구멍과 이곳을 넘나들 것 같지도 않다.
구멍 건너편에 도달할 방법이 떠오르지도 않으니 아예 호기심조차도 사라진다.
아래가 물이었다면 어떻게 건너보려고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일단 무시해. 이 길의 끝을 확인했으니까 돌아가자."
어떤 미친 미궁의 신비가 마그마의 갑을 뚫고 길을 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쯤에서 생각을 접었다.
도달할 수 없는 길을 생각하기보다는 당장 가야만 하는 길을 생각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
"이 포인트는 기억만 해 두자."
"네."
"그러면 야만족이 있는 길은 가운데 확정이네."
내가 콜드릭 포인트에서 얻으려던 '물건'도 그곳에 있겠고.
다시 감지 능력을 확장한 뒤 이번에는 10분 동안 빠르게 달렸다.
곧 갈림길을 감지할 수 있게 되자 손을 들어 일행을 멈춰세웠다.
"헉, 헉. 어때요?"
나도 숨을 고른 뒤에 답했다.
"당장 느껴지는 적은 없어."
일단 갈림길을 내 감지 범위에 넣었으니 더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천천히 진행해야 한다.
"버섯의 길은 빠른 걸음으로 왕복 20분. 내가 감지할 수 없는 사이에 야만족들이 버섯의 길로 들어갔다면."
"최소 20분은 갈림길을 주시하고 있는 게 낫겠어요."
"그래. 괜히 경솔하게 길을 꺾었다가 앞뒤로 공격당하면 곤란해."
나와 레이나가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라분이 뭔가 뻘쭘했는지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음! 이해했다!"
"⋯⋯."
"정말이다! 20분! 가만히 있으면. 주인이 알아서. 잘한다."
"완벽해."
우리는 여기서부터는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고 천천히 걸어갔다.
5분이 걸리던 길을 25분이라는 긴 호흡을 가지고 이동했다.
마침내 갈림길을 30초가량 남겨둔 시점에서 몸을 낮췄다.
"말하지는 말고. 최대한 몸을 쉬어놔. 앞으로 20분 뒤에 다시 움직일 테니까."
갈림길을 처음으로 인식한지 대략 30분. 20분 정도면 버섯의 길에 야만족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렇게 10분이 지났을까?
내 감지 능력의 끝에 이곳으로 접근하는 생명체의 기척이 느껴졌다.
버섯의 길에서는 아니었다.
"5분 거리. 가운데 갈림길의 끝.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거리가 멀어서 경지는 아직이야."
"!"
"!"
가만히 몸을 늘어뜨리고 있던 두 사람이 벌떡 일어났다.
"크게 말해도 돼. 아직 거리가 있으니까."
"7마리면 너무 위험한 거 아니에요? 경지를 봐야겠지만."
"3위계가 셋이 넘어가면 위험할 수도 있겠지."
나는 미믹 주머니에 넣어놨던 야만족의 투척용 창들을 꺼내들었다.
그나마 가장 쓸모 있는 물건들이라 미믹 주머니의 용량에 맞게 집어넣고 있었다.
"이걸로 제대로 기습해 보자. 단, 적 전력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하면 바로 후퇴야."
두 사람이 단창을 들며 침을 꿀꺽 삼켰다.
"할 수 있지?"
"음. 당연히. 한다."
"네. 이게 리더가 생각하는 정답이라면."
놀랍게도 레이나가 그 말을 마치자마자 떨리던 녀석의 몸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레이나에게는 본인만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있는 듯했다.
아니, 믿음을 넘은 확신.
하기야 라분에 이어 두 번째로 내 발자취를 지켜봐왔던 레이나다.
그런 생각을 가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
나는 굳이 녀석의 확신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사실이기도 했고.
"경지. 7명 중 3위계 넷. 2위계 셋."
적은 객관적으로도 엄청난 전력이었다.
여기서 3위계와 2위계가 한 명씩 추가된다면 11층을 탐험하는 정규 탐험대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보통 탐험가들이라면 이런 승률 낮은 전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내게는 도전이 운명이니까.'
실패해도 다음 기회가 있다면,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아직 생각할 시간은 3분이나 더 있다.
"녀석들이 버섯의 길로 꺾을 때를 노리자. 내가 신호할게. 투창은 해봤어?"
"아뇨. 하지만 한두 개 던지는 것쯤은 충분히 가능해요."
"좋아. 라분은?"
"사막에서. 몇 번 해봤다. 걱정 마라."
"나는 별로 자신 없어. 돌팔매는 자신 있는데."
"⋯⋯."
"⋯⋯."
나는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딱 두 개씩만 던지고 전면전이야. 라분."
"음."
"나와 최대한 3위계를 노리자. 레이나. 우리가 3위계를 맡을 테니까. 30초 안에 2위계를 모두 죽여. 실패하면 진다고 생각하고."
"네. 무조건 해낼게요."
"좋아. 이제부터는 조용히."
여기서부터는 선택이다.
최대한 갈림길에 가깝게 접근해서 갈림길에 막 접근하는 야만족들을 노리느냐.
아니면 버섯의 길로 이동하기 위해 우리에게서 등을 돌린 야만족들을 노리느냐.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후자 쪽을 골랐다.
'무조건 버섯의 길로 들어갈 수밖에 없어. 전자는 어설픈 투창을 바로 쳐낼 가능성도 있다.'
내 생각은 바로 수신호를 통해 둘에게 전달되었다.
[목표지점까지 1분. 내가 신호. 돌격.]
모두의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을 확인하고 점차 녀석들의 접근에 따라 감지 능력을 줄여갔다.
마침내 야만족들이 갈림길에 도달하고, 녀석들은 잠깐 갈림길에 멈춰 섰다.
[대기.]
마나로 강화된 청각에 녀석들이 알 수 없는 언어로 떠드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알 수 없는 여성 야만족의 고음과, 마찬가지로 뜻 모를 남성 야만족의 맞대응까지.
그러다 녀석들의 일부가 갈라져 버섯의 길로 진입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속으로 횡재를 외쳤다.
[3위계. 하나. 2위계. 둘. 떨어진다. 아직 대기.]
곧 버섯의 길에 들어선 야만족이 내 줄어든 감지 범위를 벗어났다.
나는 모래시계를 보고 인내심 있게 10분을 기다렸다.
마침내 10분이 지났다.
갈림길에 있는 적은 총 4명. 3위계 셋과 2위계 하나.
단순한 전력으로 계산한 승률은 반반.
나에게는 도전하지 않을 수 없는 전투다.
[돌격 3초. 2초. 1초.]
단창을 들고 10초간의 전력 질주를 하자 갈림길에 앉아있는 야만족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의 매복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아예 등을 돌리고 있다.
곧 소음을 느끼고 분분히 고개를 돌려 우리 쪽을 바라본다.
이내 털에 반쯤 가려진 야만족들의 두 눈이 커진다.
"죽어!"
내 신호와 함께 우리가 전력으로 던진 단창이 날아갔다.
두 개를 동시에 날리고 검을 빼어들어 가장 먼저 적과 맞섰다.
우리의 단창은 미처 반응하지 못한 2위계의 야만족의 등을 뚫어냈다.
나머지 단창은 허공을 날거나 땅에 박혔고.
그렇게 성사된 3대3의 전투.
나는 단 20합만에 내가 목표한 녀석의 목을 베어냈다.
실전 경험이 그리 많지 않은지 틀에 박힌 단조로운 동작뿐이었다.
내 상대는 아니었다.
야만족의 목을 베어냄과 동시에 단검을 꺼내 레이나를 상대하던 놈의 등을 향해 그대로 던졌다.
두 번 연속 땅에 박혔던 단창과는 달리 정확히 야만족의 등에 꽂히는 단검.
"끼야아아악!"
줄곧 수세에 몰리던 레이나가 틈을 보고 그대로 야만족의 배에 검을 쑤셔 넣었다.
레이나는 아예 검을 놓고 뒤로 굴러 야만족의 마지막 공격까지 아무렇지 않게 피했다.
라분은 그때까지 적을 제압하지 못했지만 단 한 번의 어려움도 겪지 않고 있었다.
나는 투지에 가득 찬 라분의 눈빛을 보며 끼어들 생각을 접었다.
'여전히 목걸이는 없군.'
나는 둘의 싸움이 100합을 넘어가자 끼어들었다.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뒤에서 등을 향해 검을 쑤셔 박았다.
이어진 라분의 검이 녀석의 목을 베었다.
"헉. 헉."
"얼마나 더 싸워야 할지 몰라. 이 이상은 못 기다려."
"미안하다."
"아냐. 어차피 시간이 지났으면 네가 이겼어."
더군다나 장기전을 통해 얻은 정보도 있다.
3위계 야만족의 검염은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졌다.
마지막에는 엄지와 검지를 제외하고는 아예 검염을 생성하지조차 못했고.
"장기전에 약해."
10개의 무기에 검염을 집어넣는 것과 다름없으니 그런 것 같았다.
우리는 버섯의 길에서 돌아오는 나머지 야만족들도 최대한 빠르게 처리했다.
이로써 여기서 처리한 야만족의 수는 총 15마리가 되었다.
"좋아."
"리더. 어떻게 할까요?"
"여기서 기다려보자."
우리는 공양을 마친 갈림길의 중앙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그렇게 1시간이 지났을까?
"왔다. 4마리."
곧 정보가 갱신되었다.
"전부 3위계."
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그중 한 마리는, 3위계 중에서도 독보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 1분의 거리까지 좁혀졌을 때, 야만족들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우리의 존재를 감지한 것이다.
"이거, 기습은 안 되겠는데."
잠시 가라앉았던 전투의 흥분을 끌어올리며 적을 기다렸다.
곧, 야만족들이 우리를 향해 다시 접근해오기 시작했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99화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99
나의 특성, 무한 회귀를 사용하면서 점차 늘어난 것이 있다.
바로 감. 그것도 다가오는 죽음을 느끼는 기묘한 감각이다.
나는 우리를 향해 접근하는 야만족들을 보면서 예의 그 감각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저것이 이번에 내가 극복해야 할 죽음이다.
즉. 맞서면 죽는다.
하지만 내게 죽음은 또 다른 시작과 다름없었다.
"기습은 소용 없겠어. 레이나, 라분. 따라와."
적의 전력은 3위계 넷. 정면으로 상대해 본다면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나는 정면 승부의 성사 가능성을 상당히 낮게 보고 있다.
가장 선두에서 접근하는 단 한 명의 야만족 때문이다.
'4위계는 아니지만, 3위계의 끝에 근접해있어.'
거기에다 더해 숙련된 3위계 셋과 함께 접근해오는 상황이다.
내가 우두머리를 상대한다고 해도 남은 3위계 셋을 레이나와 라분이 상대해야 한다. 분전을 기대해 볼 수도 있지만 상황이 영 좋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마음을 먹고 갈림길의 왼쪽 길로 이동했다.
이곳은 콜드릭 포인트의 내부에서 유일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공간이 있는 곳이다.
중간쯤 들어가면 미궁의 여느 벽과 같이, 좁아지는 구역과 넓어지는 구역이 불규칙하게 생긴다.
우리는 10분을 걸어 이 길에서 가장 좁은 지역을 골랐다.
마그마의 열기를 받아 공기가 살짝 더워진다.
"여기인가."
"그래. 여기서 대응하자."
내가 선택한 장소는 딱 세 명이 나란히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지점이다.
적은 3위계 4명.
이곳에서 맞이한다면 어느 정도 숫자에 맞춰 싸워볼 수 있겠다.
적 야만족의 발걸음은 전체적으로 느긋했다.
하지만 우리를 포착한 이후로는 절대 일정한 거리 이상 멀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야만족은 힘은 인간보다 비교적 약하지만 지구력은 훨씬 더 뛰어나다. 힘이 더 강하지만 지구력은 약한 오크와는 정반대다.
아마 우리가 도망쳤다고 하더라도 얼마 가지 못해 체력만 뺀 채로 대치했으리라.
"배수(背水)의 진, 아니. 뒤에 용암이 있으니까 배화(背火)의 진이네요."
"그게 뭔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그럴 줄 알았어요."
레이나는 피식 웃으며 질끈 묶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전투의 준비를 마쳤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앉아있으니 이내 야만족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붉어진 눈. 털이 수북한 인간의 모습.
총 네 쌍의 눈이 우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가장 강렬한 기운을 뿜어내는 우두머리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
"뭐라는 거야. 이 괴물아."
"@^#\$%#인간%^."
야만족의 말 중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는 오직 인간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알려고 하지조차 않았다.
이미 적과 우리의 사이에는 절대로 채워질 수 없는 간극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우두머리 야만족은 검을 꺼내들었다. 나머지 3위계 야만족들 중 한 마리도 검을 꺼내고, 나머지 두 마리는 손톱을 꺼낸다.
우리는 통로의 가장 좁은 지점을 막고 섰다.
"크르르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걸어오는 우두머리. 나도 선두에 서 우두머리 야만족의 기세에 맞섰다.
어차피 나와 맞붙은 순간 녀석의 죽음은 확정이다.
패배해서 죽는다고 해도, 절대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거리를 좁혀오던 우두머리가 점차 속력을 높이더니 나와 강하게 검을 부딪혀왔다.
나는 석로검법의 검을 이용해 맞섰다.
-쿵!
인간보다 힘이 약하다는 것이 거짓말은 아닌지 그럭저럭 일격을 받아낼 만했다.
연속되는 공격에 내 검이 바쁘게 움직였다.
석로검법이 전해주는 녀석의 호흡은 나름대로 복잡했다.
석로검법은 상대방의 검법을 파훼하는 검법이다. 상대방의 검법이 불안한 흐름을 가지고 있을수록, 그리고 내가 그 검법을 확실하게 이해할수록 파훼하기가 쉬워진다.
하지만 보통 몬스터들의 검법은 공격 일변도였고, 이는 미궁 10층에서 4위계에 도달한 리자드맨 히어로를 상대할 때도 변하지 않았다.
석로검법을 통해 고찰할 가치가 비교적 부족한 놈들이었다.
하지만 이 야만족은 아니다.
악마, 아스모데우스 만큼 깊이 있는 검법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고유의 호흡을 가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검술 실력 자체는 나와 거의 비슷하다.
그때, 라분과 레이나도 내 양옆에서 적들과 부딪히기 시작했다.
전투 상대를 찾지 못한 검을 든 야만족 한 마리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가만히 멈춰 서서 전황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괜히 공간을 차지하며 끼어들기보다는 힘이 부족한 곳으로 지원을 가려는 모양이다.
"큭!"
나는 일부러 검을 크게 휘둘러 우두머리의 검을 튕겨냈다.
그러던 중, 녀석의 털에 가려져있던 고풍스러운 팔찌가 살짝 그 모습을 드러냈다.
팔찌에는 꽤 커다란 마정석이 박혀있다.
'저건가.'
콜드릭이 말한 이 장소에 있었던 '물건'이.
나는 재차 검을 휘둘러 야만족을 몰아세웠다. 야만족은 갑작스러운 내 압박에 당황해하면서도 모든 공격을 차분히 받아내었다.
이런 내 돌발적인 움직임은 석로검법에 녀석의 다양한 호흡을 축적시키기 위한 시도였다.
그렇게 호흡을 조금씩 이해하면 이 경험은 내 다음 생에도 전승되어, 내 승리 확률을 작지만 확실하게 높여주기 때문이다.
전투가 3분을 넘어가기 시작했다.
라분도, 레이나도 쉽게 적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뒤에서 우리들의 싸움을 구경하고 있던 야만족이 벼락같이 검을 움직인 것은.
그 속도는 일반적인 3위계가 낼 수 있는 속도를 아득히 넘어섰다.
'기술!'
라분이 대체 어떠한 틈을 보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내 모든 능력을 적 우두머리에게 쏟고 있었으니까.
눈 깜짝할 사이에 라분에게 돌진한 야만족의 찌르기가 라분의 가슴을 그대로 뚫고 들어갔다.
라분이 미처 반응하지 못한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다.
"라분!"
"라분 씨!"
"으윽."
나는 라분의 가슴을 뚫고 들어가는 검을 확인하자마자 내 모든 마나를 한 번에 폭사시키며 우두머리에게 달려들었다.
어차피 이 삶은 포기다.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고 죽어야겠다.
내가 가장 궁금한 것은 야만족 우두머리가 착용하고 있는 저 아티팩트로 보이는 팔찌의 힘이다.
하지만 야만족은 본인의 실력만으로 내 허점 가득한 호흡을 뚫고 내 배에 검을 찔러 넣는 데에 성공했다.
"윽."
자비 없이 비틀어 뽑는 움직임에 사지에 힘이 저절로 빠졌다.
나는 뜨거운 무언가가 배를 뚫고 쏟아지는 것을 느끼며 무릎을 꿇었다.
"리더!"
"미, 미안. 어떻게든. 도망가."
"클. 클. 클."
우두머리 야만족이 그런 나를 보면서 기분 나쁘게 웃기 시작했다.
잠깐 동안 전투의 승리를 만끽하던 우두머리 야만족이 마무리를 위해 내게 검을 휘둘렀다.
부들거리는 검을 끌어올린 나는 단 한 번, 녀석과 검을 맞댔다.
이미 승리의 열광에 도취된 녀석은 무방비로 나에게 검을 부딪혀 왔다.
"흐흐."
나는 이 순간이 가장 좋다. 아스모데우스도 그랬다.
승리의 안도감, 열광, 환호. 이 모든 긍정적인 감정은 녀석의 호흡을 단순하게 만들었다. 이는 석로검법이 가장 편하게 작동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석로검법으로 이어진 나의 내부로 녀석이 호흡이 읽히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내가 얻은 어떤 정보보다 더 많은 정보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다음 공격을 막기 위해 검을 들어 올렸으나, 야만족의 검이 훨씬 더 빨랐다.
그렇게 내 목이 그대로 잘려나갔다.
나는 죽기 전, 감지 능력을 사방으로 퍼뜨려 내가 수집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수집했다.
날아가는 내 목을 바라보는 레이나의 비명과 함께, 의식이 뚝하고 끊겼다.
죽음이었다.
-키릭.
⋯⋯⋯
다시 시야가 돌아왔을 때, 나는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비틀거리는 몸. 옆에 서있던 라분이 내 몸을 받쳤다.
"주인?"
"아니. 아무것도 아냐."
울퉁불퉁한 벽과 좁아진 벽면.
이곳은 우리가 결전을 위해 선택한 장소 바로 앞이다.
"후."
됐다.
일단 라분이 죽은 시점 이후로 회귀하는 최악의 선택지는 면했다.
다만 이제는 명확해졌다.
"여기서 더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없어."
"네. 배수의 진, 아니. 뒤에 용암이 있으니까 배화의 진이네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그럴 줄 알았어요."
나는 라분의 허망한 죽음을 기억했다. 미처 신경 쓰지 못한 마지막 야만족이 사용한 기술. 번개처럼 순식간에 찌르는 일격.
엄청난 속도를 내서 그런지 라분을 찌른 녀석의 상태도 좋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레이나도 내가 죽을 때까지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연속 사용이 불가능한 기술, 마치 며칠전 11층의 숲에서 나를 한 번 죽인 붉은 오크의 기술과도 같았다.
이런 일회성 기술은 모르고 있을 경우에는 허를 찔리지만, 미리 알고 있다면 의외로 대응하기도 쉽다.
"⋯⋯."
나는 잠깐 고민한 뒤에 결심을 마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나를 믿고 도망칠 수 없는 곳까지 들어와준 라분과 레이나다.
이들에게까지 모든 걸 숨긴다면 차라리 혼자 미궁을 탐험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물론 내 무한 회귀까지 알려줄 수는 없겠지만.
마침내 네 마리의 야만족들이 다가왔을 때, 나는 마치 지금 알아차렸다는 듯 둘에게 말했다.
"라분, 레이나. 가장 뒤에 있는 놈을 조심해."
"가장 뒤."
"아무래도 기술을 익힌 것 같다. 봐. 다른 야만족들보다 몸이 더 날렵하고, 기본적으로 상체를 숙이고 있지?"
내 말은 모든 것을 알고 있기에 끼워 맞출 수 있는, 아주 미묘한 차이다.
하지만 이미 내 말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둘에게는 보다 설득력 있게 들릴 것이다.
"확실히⋯."
"갑작스럽게 돌격해올 수도 있겠어. 전투 중에 항상 대비해."
나름 실력이 넘치는 라분과 레이나다.
이 정도만 말해주면 충분히 대응하고도 남을 센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각자의 위치를 잡고, 야만족과의 두 번째 전투를 시작했다.
검과 검이 부딪혔다.
-쾅!
이번에는 내가 적극적으로 검을 휘둘렀기에 우두머리가 당황해하며 뒤로 물러났다.
마치 본인을 알고 있다는 듯이 적극적으로 공격해오는 나의 검.
우두머리 야만족이 호흡을 빼앗겨 고전하기 시작했다.
'이거 잘하면.'
고작 한 번의 회귀로 녀석을 죽일 수 있겠다.
나는 모든 체력을 지금의 연격에 쏟아 넣으며 우두머리를 점차 무너뜨려갔다.
서로의 살을 베고, 서로의 체력을 교환하며 바닥까지 끌어내는 끝장 싸움.
마침내 힘이 풀린 녀석의 검이 점차 느려지기 시작하고, 내 공격이 우두머리가 내보인 찰나의 빈틈을 노려 녀석의 배를 찔러들어갔다.
'이겼다!'
우두머리 야만족이 차고 있던 팔찌가 번쩍 빛났다.
"!"
일말의 시간차도 없이 우두머리 야만족의 몸을 감싼 성스러운 빛.
그와 동시에 야만족의 검이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각도의 검을 튕겨내고 내 목을 베어냈다.
"하!"
나는 기가 찬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내 검을 막은 녀석의 호흡을 느낀 결과, 마치 녀석의 호흡은 나와 처음으로 검을 맞대었을 때로 돌아와있었다.
'마나의 완전 회복? 아니면 체력? 설마 둘 다?'
아직도 빛나고 있는 팔찌의 힘이 녀석의 체력과 마나를 회복시켜준 것이 분명했다.
라분과 레이나의 경악이 가득 찬 비명을 뒤로하고, 내 시야가 점차 흐려졌다.
이제 녀석이 감춰둔 수는 다 봤다.
아니, 더 있어도 상관없다.
얼마든지 더 보여라.
'죽고, 죽어서, 죽여주마.'
그리고 저 팔찌는, 내가 가져야겠다.
세상이 다시 어두워졌다.
-키릭.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10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