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100
야만족 우두머리와의 전투.
이미 녀석과 싸우면서 두 번의 죽음을 겪었다.
외부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순수한 전투로만 두 번을 죽었다.
"⋯⋯."
내 실력은 객관적으로 봐도 뛰어나다.
학즉사법 2성을 통해 증가한 신체 능력은 웬만한 3위계는 가볍게 찜쪄먹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고, 상황에 따라서는 심상 구현을 뚫고 4위계의 전사에게도 위협을 가할 수 있을 정도다.
웬만한 3위계는 두 명, 잘하면 3명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장담한다.
그런데 이 야만족 우두머리는 나와 1대1로 겨뤄 승리를 가져가고, 경험을 쌓아 올린 나를 아티팩트의 도움을 받아 한 번 더 죽였다.
"대단한 녀석이야."
그야말로 역전의 용사다.
더군다나 현재 진행형으로 성장 중이다.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4위계에 도달하겠지.
내가 없었다면.
나는 녀석이 팔찌의 아티팩트를, 외력에 사용해 나를 죽인 것에 대해 아무런 유감도 없었다.
'아. 한 번 더 늘었네.' 정도의 생각만이 있을 뿐.
석로검법을 통해 이미 저 야만족의 호흡은 온전히 내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레이나. 라분. 내가 우두머리를 죽일 때까지 철저하게 수비해. 말했다시피 저 야만족은 조심하고."
"네."
"알겠다."
곧 나타난 우두머리는 자신감 넘치는 동작으로 나와 검을 맞댔다.
하지만 곧 이상함을 느낀 듯 몸이 경직되었다.
자신의 공격을 막는 내 움직임에는 일말의 낭비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팔찌를 쓰기 전에 죽일 수 있으려나.'
분명 이전 생에서 팔찌를 사용하기 직전에 우두머리 야만족은 약간의 덜컥거림을 보였다.
그건 녀석의 호흡을 거의 파악한 나만이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미세한 차이였지만, 절대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는 틈이었다.
그 틈을 노린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이번 생에는 거기에 걸어보자.
나는 이전의 움직임과 같이 야만족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내게 맞서는 우두머리의 검은 여전히 깊이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미 그 깊이는 내게 측정당했다.
너무 깊은 곳은 피하고 철저히 얕은 곳만 공략하면 된다.
언제나 정답만을 찾아 대응한다.
덕분에 녀석의 공격은 점차 자신에 대한 확신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응수하든 내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
그렇게 녀석의 정신과 신체의 피로가 기하급수적으로 빠르게 누적되기 시작했다.
"크르르!"
"후."
그렇게 틈은 찾아왔다.
녀석의 몸이 뭔가에 걸린 듯 아주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빛내며 몸을 던졌다.
팔찌의 마나가 번쩍이며 녀석의 몸을 감싸는 찰나.
빛 속에 몸이 들어가는 순간, 아주 살짝 드러난, 그야말로 바늘의 구멍 같은 틈을 그대로 찌른다.
'생각보다 틈이 좁다!'
거의 우연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타이밍에 내 검이 나아갔다.
그 끝에는 야만족의 배가 걸려있었다.
뒤를 생각하지 않고 몸을 날렸기에 나는 야만족에게 안기듯 달려든 모양새가 되었다.
"!"
길을 잃은 야만족의 검이 한 박자 늦게 내 옆구리를 내려치려고 했다.
나는 뱃속으로 찔러 넣은 검에 빠르게 검염을 뿜어내며 그대로 아래로 내리그었다.
검이 뼈와 살을 갈라 녀석의 사타구니를 양분하며 빠져나온다.
기분 나쁜 액체와 고체가 내는 불협화음, 야만족의 신음.
휘둘러진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까지.
빠져나온 검을 급하게 돌려 야만족의 마지막 일격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이미 죽음을 직감한 전사는 모든 마나를 이 일격에 쏟아부은 상태였다.
"으아아아!"
불안한 자세로 방어한 내 검이 점차 밀리며 내 팔까지 닿았다.
나는 녀석에게 짓눌리며 내 검염에 팔이 베이기 시작했다.
"큭!"
그렇다고 검염의 출력을 낮추면 내 팔이 검과 함께 그대로 베어 나갈 터였다.
"으아아아! &₩%@#!"
터질 듯이 붉어진 야만족의 눈이 오직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담담하게 그 눈을 바라보았다.
내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녀석의 것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평온했다.
"계속해 봐. 네가 이기는 미래는 이미 없으니까."
내 말은 녀석이 터뜨리는 처절한 비명에 묻혔지만, 이 순간을 기점으로 나를 압박하는 야만족의 힘이 약해졌다.
곧 무게를 받치던 녀석의 다리가 미끄러지며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다.
녀석은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리더!"
"주인! 잘했다!"
나는 크게 베인 내 팔을 바라보았다. 베인 상처가 뼈까지 닿아있었다.
이거, 라파에게 한 소리 듣겠다.
레이나와 라분이 얼른 내 곁으로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어. 죽을 상처는 아니야. 그런데 적들은?"
"저 야만족이 뭐라고 외치자마자 그대로 도망갔어요. 리더에게 가려는 걸 제가 견제했어요. 도망치는 걸 굳이 쫓지는 않았어요."
"그렇군."
마지막에 녀석이 지른 비명은 나에 대한 분노의 목소리가 아니었나 보다.
자신의 부하들에게 후퇴할 수 있는 시간을 벌고자 모든 힘을 쥐어짜낸 모양이다.
나는 내 상처를 봐주려는 레이나를 잠시 뒤로 물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만족 우두머리는 하체에서 내장과 피를 쏟은 채 널브러져 있지만 아직 죽지는 않았다.
나는 검을 들고 녀석을 향해 나아갔다.
내 팔을 타고 흐른 피가 손목을 넘어 검 손잡이까지 붉게 물들었다.
솔직히 진짜 아프다.
나는 검염을 일으키며 야만족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불타는 붉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아무 말 없이 검을 들어 올렸다.
녀석에게서 어떠한 말도 들을 자격이 없다는 사실은 내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두머리 야만족은 기어코 한 마디를 내게 남겼다.
"컬비스."
"⋯⋯."
내 검이 그대로 녀석의 목을 갈랐다.
나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야만족의 유언이 '대단하다'라는 뜻의 단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감상을 느끼는 대신 이성적으로 움직였다.
"레이나. 시체 뒷정리. 팔의 팔찌는 반드시 회수해. 공양하지 않을 거니까 조심히 다루고. 뒷정리 후에는 바로 따라붙어."
"네? 하지만 상처 먼저."
"괜찮아. 도망친 녀석이 지원군을 불러올 수도 있으니까 우선 갈림길까지 길을 뚫어야 해."
"아. 그렇군요."
내 부상에 판단력이 흐려진 레이나였다.
나는 가죽 갑옷의 조각을 대충 잘라내고 붕대로 빠르게 팔을 지혈했다.
미치도록 아프다.
하지만 고통에 신음할 시간은 없다.
"라분. 가자."
"음."
달리며 서서히 감지 능력을 확장하니 곧 빠르게 멀어지는 야만족들의 기척이 잡혔다.
"4분 거리야. 따라잡기는 불가능."
그래도 갈림길에서 병력을 남겨두지 않은 채로 전부 후퇴하는 점은 우리에게 호재였다.
우리는 갈림길에 도달한 후 그대로 발걸음을 멈췄다.
"여기까지 왔으면 됐어. 쉬자."
"헉헉."
나는 점차 뻐근해지는 팔을 잡으며 천천히 주저앉았다.
아프다. 뒤지게 아프다.
'그냥 리셋했어야 했나?'
아니다. 다시 시도했어도 단기간의 죽음 내에 이것보다 더 좋은 결과는 얻지 못했을 터다.
팔찌 아티팩트를 사용할 때 보이는 한순간의 틈.
그 틈을 완벽하게 공략한 것은 반쯤은 운이었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죽는 횟수는 최대한 줄이는 것이 좋다. 이 정도의 상처라면 충분히 감내할만하다.
'3일 정도만 쉬면 될 것 같아.'
3위계의 회복력은 일반인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체력이 받쳐준다면 마나를 이용해 회복력을 더 빠르게 할 수도 있다.
라분이 헐레벌떡 달려와 내 갑옷과 붕대를 벗기고, 팔 주변의 옷을 단검으로 잘라내었다.
"미믹 주머니. 어디있나?"
"레이나가 가져올 거야. 일단 지혈부터."
피는 거의 멎어있었지만 아직도 찔끔찔끔 흘러나오고 있다.
라분이 붕대로 피를 조심스레 닦아내고 있자 레이나가 도착했다.
"헥헥!"
레이나가 넘어지듯 내 옆에 주저앉은 뒤 내 상처를 살폈다.
"꿰매야겠어요!"
"그래야겠지?
"가만히 계세요."
레이나 소독된 물로 내 상처를 닦아내고, 동봉되어 있던 바늘과 실을 쥐었다.
"후."
여러 차례 심호흡으로 몸을 진정시킨 레이나가 눈을 빛냈다.
바늘과 실을 연결하고, 열심히 살을 이어붙인다.
"빨리. 포션을. 사놓던지. 해야지. 안 그래요?"
말끝마다 바늘을 푹푹 찔러대는 레이나. 나는 따끔한 느낌이 들 때마다 움찔거리며 고통을 참았다.
그래도 탐험가 아카데미에서 배운 건 맞는지 꿰매는 실력 하나는 완벽하다.
마무리를 한 후 손을 내려칠 듯 확 올리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내가 자기에게 하던 짓을 흉내 내려고 했던 모양인데, 부상의 정도가 다르기에 자제하는 듯했다.
"팔찌는?"
"챙겨왔어요. 야만족 시체의 마정석은 없더라구요."
"공양은 안 했지?"
"네."
레이나가 가방에서 팔찌를 꺼내 건넸다.
정말 재수가 없으면 이 아티팩트가 사라질 수도 있었기에 공양은 금물이었다.
나는 팔찌를 더 자세히 관찰했다.
박혀있는 마정석은 중급 마정석으로, 눈대중으로 대충 보기에도 중2급은 되어 보인다.
"그나저나 이게 대체 뭐예요? 어떻게 야만족이 이렇게 화려한 팔찌를."
"보면 알 거야."
나는 팔찌를 얼른 팔에 걸었다.
어떻게 조이는 줄 몰라 헐렁한 상태로 두려는데, 팔찌의 크기가 그대로 줄어들더니 이내 내 팔에 꼭 맞게 줄었다.
"와."
팔찌에 살짝 마나를 흘려보내자 마치 미궁의 신비와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회복하시겠습니까? 소유자의 경지에 따라 요구하는 혼돈의 양이 늘어납니다.]
"라비팩트!"
라비펙트
미궁에서 나오고, 미궁과 같은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아티팩트.
오직 미궁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아티팩트를 따로 구분하여 라비팩트라고 부른다.
내가 가지고 있는 다른 라비팩트는 내가 왼손에 착용하고 있는 반지가 있다.
"그나저나 혼돈?"
미궁의 신비에서 상당히 많이 보이는 단어다.
나는 개의치 않고 팔찌를 가동해 보았다.
'회복.'
그와 동시에 팔찌의 마정석에서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읏!"
일전의 야만족의 몸을 감싸던 빛이 내 몸을 감싸고.
'차오른다.'
소모되었던 마나가 차오르고, 몸에 쌓였던 피로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바로 팔의 상처에 주목했다.
상처에 얼마간 머물러있던 빛은 포근한 느낌과 함께 사라졌다.
그렇다고 상처가 많이 낫지는 않았고, 약 하루치의 회복을 한 느낌이다.
"대박."
이 정도면 크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활동을 다시 시작해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내가 크게 만족하며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팔찌의 마정석이 그대로 산산이 부서져 쏟아져내렸다.
[재사용 대기시간. 72시간.]
"?"
재사용 대기시간은 그렇다 치고 중급 마정석이 그대로 사라졌다고?
내가 마정석의 잔량을 측정했을 때, 최소한 절반은 충전치가 남아있었다.
중급 마정석이 괜히 중급 마정석인가.
하급 아티팩트에 사용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중급 마정석이다.
그 가치는 엄청나다.
"그런 마정석으로 고작 두 번?"
3시간만 있으면 차오르는 마나와, 반나절 간 쉬면 회복될 체력과, 하루만 지켜보면 나아지는 상처에 이 정도의 마정석을 사용하다니.
무슨 일이 있어도 일상용으로 사용하면 안 될 물건이다.
콜드릭이 이 물건에 욕심을 내지 않은 이유도 알겠다.
"경지에 따라 정해진다고?"
분명 5위계인 콜드릭은 상급 마정석을 요구할 테고, 상급 마정석 쯤되면 차라리 포션을 사 먹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나는 빠르게 이 아티팩트의 사용법을 확정할 수 있었다.
"긴급 시에만 사용하면 되겠네."
라분과 레이나에게 팔찌에 대해 설명했다.
"음."
"대단한 라비팩트네요. 그걸로도 집 한 채는 우습게 사겠어요. 한 채는 무슨. 두 채, 세 채도 살 걸요?"
"응? 그 정도야?"
"리더는 너무 탐험 쪽으로만 사고가 치우쳐져 있어요."
아직도 어리둥절한 내 표정을 본 레이나가 한숨을 포옥 쉬었다.
"미궁 밖에, 돈만 넘치고 위계는 낮은 졸부들이 경매장에서 이 라비팩트를 알게 된다면?"
"!"
"돈이 썩어넘치는 귀족, 특히 왕족이나 황족들이 이 라비팩트의 존재를 알아챘다면?"
"!"
"라분. 이 아티팩트는 우리 셋만의 비밀로 가져가요. 욕심 없는 사람도 욕심이 생길 정도의 물건이니까."
우리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팔에 끼워진 이 아티팩트의 성능을 다시 보게 되는 순간이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101화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101
미궁 11층.
팔찌의 힘으로 체력을 회복하자마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리더. 괜찮으시겠어요?"
"어. 감지 능력만 쓰면 문제없을 것 같아."
본격적인 전투는 아직 무리다.
그렇다고 위험요소를 전부 제거하지 못했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가운데 길. 확인만 해보자."
"네. 전투 상황이 되면⋯⋯."
"무조건 도망가는 걸로."
이 부분은 확실히 해야 했다.
나는 지금 짐이다.
객관적인 전력이 현저히 앞서지 않는 이상 어떠한 전투 상황도 허락하면 안 된다.
"3위계 적이 두 마리가 넘어가면 바로 도망가자고."
"좋다."
앞으로의 방침을 합의한 후 가운데 길을 천천히 걸어나갔다.
의외로 10분을 넘게 걸었음에도 감지에 걸리는 적이나 함정은 하나도 없었다.
앞서나가는 라분과 레이나를 위해 입은 쉬지 않았다.
"지금 3분 거리까지 감지하고 있는데. 앞에 생명체는 아무것도 없어. 계속 걸어가면 돼."
그렇게 10분을 더 걸어가니 길이 끝나고 넓은 공동이 나타났다.
"오."
넓어진 공간 곳곳에 야만인들이 생활했었던 흔적이 드러나있었다.
한 장소에 가지런히 널려있는 버섯과 고기들, 그 옆의 벽에서는 물이 샘솟아 흐르고 있었다. 손으로 만져보니 벽의 영향을 받았는지 따뜻했다.
"아직도 감지에 잡히는 놈은 없어. 아마 다 도망간 것 같아."
우리는 천천히 시간을 들여 야만족의 거처를 수색했다.
"분명 이곳으로 갔는데 사라졌다는 건, 이동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있는 게 분명해."
혹시 모르니 괜히 흩어지지 않고 세 명이서 천천히 모든 구역을 샅샅이 뒤져보았다.
이렇다 할 가치가 있는 물건은 따로 발견하지 못했지만, 이 장소의 원래 용도는 대충 알 수 있었다.
가지런히 정리된 길, 길 옆에 심심찮게 보이는 기둥을 표현하기 위해 조각된 벽. 뾰족한 천장.
더불어 공동의 끝에는 계단이 조각되어 있었고, 계단 위에는 사람 두 명이 누워도 남을 크기의 제단이 있었다.
제단 뒤에는 조각상이 있다.
다만 인위적인 훼손이 너무나도 심해 조각의 주인을 알아보기는커녕, 어떤 종족인지도 모르겠다.
"신전 같아요."
"어."
우리가 찾던 통로는 제단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서 발견되었다.
이 장소에서 다른 곳으로 통하는 길은 이곳 밖에 없었다.
"리더. 기척은?"
"전혀 없어."
남아있는 야만족이 몇 명인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빠르게 도망갔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누군가가 침입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대피를 준비한 모양이다.
"계속해서 가보자."
제단 뒤편의 길은 완만한 오르막길로 이루어져 있었다.
조금씩 구불거리며 이어지던 길 끝에는 다시 바위산으로 올라가는 출구가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출구는 밖에서 인위적으로 막아놓은 상태였다.
커다란 바위가 입구를 완벽하게 틀어막고 있다.
"이런 망할."
라분과 레이나가 바위를 끙끙거리며 밀어보지만, 아예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정밀하게 감지 능력을 발동해도 바위를 움직이는 장치는 발견되지 않았다.
라분이 단검을 꺼내 검염으로 바위를 긁어보지만, 저렇게 해서 바위를 뚫으려면 몇 달은 걸릴 것 같다.
"그만해. 여기까지만 하자."
나는 바위 틈으로 살짝 보이는 바깥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탐험은 여기서 마무리다.
"원하는 아티팩트도 얻었고, 충분한 경험도 쌓았어. 이제 푹 쉬고 복귀할 생각만 하자."
이렇게 본인들도 꺼내지 못할 바위를 깔아놓은 것을 보니 야만족의 습격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그렇다고 콜드릭 포인트 안에서 하룻밤을 보낼 생각은 없다.
들어갈 곳이 하나가 됐다는 것은⋯⋯
'그곳만 막아버리면 우리는 독 안에 든 생쥐나 다름없게 되니까.'
그렇게 우리는 빠르게 콜드릭 포인트를 벗어났다.
엄청난 수의 계단을 오르니 발이 다 뻐근했다.
"으으! 진짜 피곤해요. 리더만큼은 아니겠지만."
"팔찌 때문에 컨디션 자체는 나쁘지 않아. 라분은?"
"졸리다."
우리는 곧바로 어제의 야영지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그로부터 10일 뒤, 우리는 어기적거리며 미궁 11층의 안전지대로 돌아왔다.
"으으."
"라분. 죽는다."
돌아오는 와중에도 산양, 동굴 오크, 붉은 오크, 쇠숭이들과의 지속적인 전투가 이루어졌다.
웬만해서는 싸우고 싶지 않았지만 반드시 지나가야만 하는 길에 적이 있을 경우, 싸움을 피하지는 않았다.
특히 붉은 오크 챔피언에게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싸움을 걸어 과제의 할당량을 채웠다.
그렇게 두 마리의 챔피언을 더 사냥해 총 다섯 마리의 챔피언을 사냥할 수 있었다.
[과제가 갱신됩니다.]
[붉은 오크 챔피언 5/10]
절반의 성과를 한 번의 탐험으로 이루어낸 것이다.
물론 다른 과제인 미궁 12층으로 향하는 길을 찾기는 해야 한다.
그렇게 막막하지는 않다.
과제를 완수해야 다음 층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는 미궁 11층~20층의 특성상, 아래층으로 가는 통로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안전지대에서 미궁 1층으로 돌아가려는데, 아까부터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다가왔다.
"자네들. 인원이 적군. 혹시 탐험에 실패했나?"
"⋯누구슈?"
잘 손질된 갑옷과 검, 깨끗한 머리.
보아하니 이제 막 탐험을 시작하려는 파티 같았다.
인원은 총 8명. 정석적인 미궁 11층의 파티라 하겠다.
일단 클라이머는 아닌 것 같으니 바로 미궁 1층으로 복귀하지는 않았다.
"탐험에 실패했다면 소속을 알고 싶군. 마침 우리 길드에도 탐험에 실패한 파티가 있어서, 그래도 탐험 의지가 높아 다시 파티를 꾸리고 싶어 하네."
탐험에 '실패'했다고 말할 정도면 총 파티원 중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는 말이다.
인원이 반토막 났음에도 기존의 과제는 변하지 않아 체감 난이도가 올라가게 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외부 인원을 들여야 한다.
그렇다고 이미 과제를 받은 마당에 외부 인원을 들일 수도 없다.
유일한 방법은 마찬가지로 인원 절반을 잃은 다른 파티와 연합하는 것이다.
우리가 고작 세 명에다가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닌 상태로 돌아왔으니 이런 의심을 한 모양이다.
"애초에 세 명이서 탐험했고. 일 없어요."
"잠깐! 바깥도 어수선한데 어떻게⋯"
"됐고. 탐험 힘내요."
나는 남자의 말을 무시하고 그대로 미궁 1층으로 귀환했다.
[미궁 1층으로 귀환하시겠습니까?]
"귀환."
너무나도 오랜만에 미궁 1층으로 돌아왔다.
리디움의 상흔을 만지며 천천히 계단을 올라 칼리움으로 복귀했다.
비로소 느껴지는, 미궁의 압박감을 벗어난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엄청난 상쾌함!
미궁의 먼지만 들이마시는 저층의 클라이머들은 다시는 겪을 수 없는 기쁨이다.
미궁 11층의 압박감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미궁에서 긴박하게 탐험을 진행할 때는 몰랐지만, 이렇게 돌아와보니 그동안 얼마나 몸에 부담이 쌓였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미궁 옆 바닥에 주저앉았다.
벽에 기대 늘어진 모습이 그야말로 거지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끄아아아."
"흐으으."
"라분. 피곤하다."
지나가는 다른 탐험가들이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지나간다.
뜨내기 탐험가들이 고된 탐험을 마치고 녹초가 됐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
"응? 루카스?"
"?"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내 이름이다. 누군가하고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나를 내려다보는 소피아가 보였다.
"어? 오랜만이네요?"
"어?"
"?"
"우리. 다음에 만날 때는 말 놓기로 했잖아."
그, 그랬나?
소피아.
첫 만남에는 미궁 8층에서 나를 영입하기 위해 소리 지르는 당돌한 모습을 보이며 만났고, 두 번째는 탐험가 아카데미에서 만났다.
생각해 보니, 그때 헤어지면서 말을 놓자고 내가 먼저 말했었다!
"아. 그렇지?"
소피아는 레이나와 라분에게도 반갑게 인사했다.
라분은 평소의 무뚝뚝함으로 소피아의 인사를 받았지만, 레이나는 영 내켜하지 않는 표정이다.
"안녕하세요."
레이나는 건성으로 꾸벅 고개를 숙이고 다시 눈을 돌린다.
평소 레이나의 붙임성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나는 과거를 생각하자 레이나가 저러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기운도 대충 되찾은 것 같으니까. 한 번 놀려볼까?
"탐험 나가는 중?"
"어. 미궁 9층."
"혹시 그때 봤던 친구도 있어? 이름이 로웬이었나?"
레이나의 아카데미 동기 로웬. 레이나는 그 녀석에게 자격지심 비슷한 것이 있다.
일전에 3위계 이야기를 할 때, 로웬이 먼저 3위계를 달성한 것을 보고 질투했다고도 했었고.
소피아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아마 곧 올 거야. 그러고 보니 레이나 너하고 아는 사이라고 했지? 아. 말 편하게 해도 돼?"
"네. 뭐⋯⋯."
"조금만 기다리면 올 텐데. 인사라도 하고 가. 로웬이 네 이야기 많이 해."
"네. 뭐⋯⋯."
레이나가 저러는 모습을 보니 신선해서 자꾸만 놀리고 싶다.
"저번 탐험에서 레이나도 로웬 이야기를 하더라고. 그런데⋯ 으악!"
내 허벅지 안 쪽을 무자비하게 꼬집는 레이나.
그 모습을 보며 소피아가 쿡쿡 웃고, 레이나의 얼굴이 홍당무같이 붉어진다.
"아! 마침 오네."
소피아의 곁으로 파티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총 8명. 사이에 예의 그 로웬이 껴있다.
아카데미 때 안면을 텄던 남성도 보였다.
솔직히 이름은 까먹었다. 조⋯⋯ 나중에 라파에게 물어봐야겠다.
"다들! 인사해. 루카스 님의 파티원 분들이야."
데면데면하게 서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로웬은 레이나를 보고 눈을 빛냈지만, 사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루카스. 그나저나 몇 층 다니고 있어?"
"11층."
"11층? 아직도 세 명이서?"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심으로 놀라워하는 눈치다.
특이한 경우이기는 하니까 별로 새롭지도 않다.
"대박. 우리는 아직 9층이야. 85%."
그때 로웬이 치고 들어왔다.
"리더, 루카스 님이 특이한 거지, 우리도 충분히 빠릅니다. 더군다나 이번에 9층 탐험을 마무리하게 되면 10층에 도전할 테고, 11층도 금방이겠죠."
"그렇긴 하지."
생각보다 호전성이 높은 녀석이다.
왜 저런가 하고 보니 어느새 레이나가 입꼬리를 살짝 말아올린 채로 로웬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치하기는.
"그나저나, 소피아. 바깥이 왜 이렇게 시끄러워?"
그랬다. 미궁은 이리저리 오가는 사람들로 항상 분주한 편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가 훨씬 더했다.
시간을 볼 때 새벽인것 같은데, 지금 이럴 정도면 오전, 오후가 되면 사람들로 가득 들어찰 것이다.
심지어 탐험가가 아닌 사람들이 거의 절반이다.
"아. 11층 탐험이면 2주 정도 했겠구나. 그러면 모를 수밖에 없지."
"?"
"이번에 발표했어. 미궁 2층 완전 정복."
"완전 정복?"
"어. 미궁 2층의 모든 몬스터를 청소한다고 하던데? 원정에 참가할 탐험가들도 모집하고, 미리 2층에서 장사할 사람들도 모집하나 봐."
미궁 2층 정복이라.
사실 왜 하는지, 뭐가 좋은지는 잘 모르겠다.
라파와 콜린이라면 분명 이 상황에 대한 조사를 끝내놨겠지.
얼른 돌아가서 물어봐야겠다.
"그랬었구나. 고마워."
"아. 이번에 우리가 미궁 9층을 완전히 끝낼 건데, 미궁 10층 공략 관련해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나중에 한 번 집에 들러도 될까? 그리고 미궁 4층 탈환전 때의 이야기도 듣고 싶어."
"그러던지. 대신 조건, 아니 부탁이 있어."
"부탁? 뭔데?"
"무리한 건 아니고. 간단한 친선전."
"친선전?"
원래 탐험가들 사이는 땀 한 번 빼고, 피 좀 흘리면 다 친해지게 되어있다.
그리고 라분도 3위계가 된지 얼마 안 된 시점이다.
전투 경험을 쌓아놓으면 얼마나 좋겠나.
내 생각을 들려주자 소피아는 물론 다른 파티원들도 상관없다는 듯 수긍하는 눈치였다.
슬쩍 라분을 돌아보니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
반면 레이나는 로웬을 보며 두 눈을 제대로 불태우고 있었다.
내가 원하던 상황이다. 아주 좋다.
나는 소피아에게 선선히 집 주소를 적어주었다.
"그럼. 나중에 보자."
"응. 루카스 너도."
잊을 듯, 끊어질 듯하지만 어느새 다시 이어져있다.
이런 인연이 보통 질기기 마련이다.
라분을 발로 툭툭 쳐서 깨우고, 사무소에 복귀 신고를 마쳤다.
미궁 2층 탈환으로 바쁜지 내가 아는 얼굴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자 우리의 무사귀환을 바라며 기도를 하고 있는 라파의 모습이 먼저 보였다.
그 너머로는 열심히 무언가를 읽고 있는 콜린까지.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모두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집중되었다.
콜린의 눈이 커지고, 라파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다녀왔어. 이번에도 한 건 했어."
아무래도 오늘은 제대로 마셔줘야겠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102
내 예상대로 라파는 미궁 2층 정복 소식을 듣자마자 콜린과 함께 움직였다고 한다.
우리는 피로를 마친 다음 날 바로 회의를 실시해 미궁 2층 정복에 대한 의견들을 공유했다.
라파가 제시한 내 선택지는 '신경 쓰지 않는다'를 제외하면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원정 참가. 직접 뛰시는 거예요."
"참가."
"먼저 말씀드리자면 미궁 2층은 고블린 군락지, 오크 군락지를 제외한 80% 정도가 정복되었다고 알려져 있어요. 사실상 초보 미궁 탐험가를 육성하기 위한 수준으로 운용되고 있었던 셈이죠."
나는 과거 막 미궁 탐험가가 되었던 시절의 나를 되돌아봤다.
2위계 시절의 나는 1층에서 간단한 교육을 받고 2층에 참가했다.
어쩌다가 보이는 고블린과 오크들을 잡으며 미궁 탐험에 적응해왔었다.
"그게 육성이었다고?"
"네. 약간 험악한 방식이기는 합니다만. 어차피 미궁 사무소의 목표는 4~6층에 통용되는 탐험가들의 수급이니까요."
"⋯⋯그렇군."
역시 라파. 따로 말해주지 않았음에도 미궁 사무소의 비공식적인 설립 목적을 이해하고 있었다.
"어쨌든 80%를 장악한 미궁 2층의 나머지 20%를 소거하는 일이니까. 그렇게 위험한 임무는 아니에요. 소일거리로 가셔도 충분히 성과를 내실 수 있으실 겁니다."
"고려해 봐야겠어."
다음 선택지는?
"투자입니다."
"투자? 미궁 2층으로의 투자?"
"네. 사무소에서는 미궁 2층을 정복하고 난 후에 남은 공간에 각종 탐험가 육성 시설을 개발한다고 한다고 해요."
"그 시설에 투자해라? 그런데 우리한테 투자라고 할 정도의 돈이 있어?"
라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저택을 담보로 대출한다면 투자할 돈은 충분해요."
"담보? 대출? 돈을 빌린다는 거야?"
"그런 셈이죠."
나는 라파를 바라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저 맑은 눈에 거짓은 하나도 없어 보였다.
"원정이 끝나고 한 달까지는 초기 투자 기간으로, 투자를 진행했을 때의 혜택이 가장 커요. 이때가 가장 투자 효율을 높일 수 있어요. 아니면 남는 미궁 2층의 땅을 받아 사업을 벌일 수도 있고요."
"사업이라."
"네. 만약 땅을 받게 된다면 탐험가들을 위한 소매업을 생각하고 있어요."
말이 빠른 것을 보니 이미 생각해둔 사업 아이템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우선 고개를 저었다.
"원정의 결과를 보고 결정할 문제야. 아직 진행하지는 말자. 콜드릭에게도 물어봤어?"
"아뇨. 아무리 우리의 편의를 봐준다고는 해도 바로 만날 수는 없으니까요. 이번 원정도 콜드릭 님이 주관한다고 하시니 워낙 바빠서 말도 못 꺼내봤습니다."
미궁 부사무소장 콜드릭. 5위계의 전사이고, 이전에 악마 아스모데우스를 처단할 때 제대로 빚을 지워놨다.
우리가 지금 거주하는 이 집도 그때 얻은 것이고.
"그런데 참가, 투자 말고 다른 대안이 있다고?"
"네. 대리 참가가 있어요."
이번에는 가만히 듣고만 있던 콜린이 말을 받았다.
"참가 특전이 대부분 미궁 탐험가의 편의를 봐주는 것들이니까 일반 용병들의 메리트는 없다시피 해. 대리 참가는 우리가 혜택을 얻기 위해서 용병을 고용하는 방안이야."
"우리는 아예 참가하지 않고 용병을 보낸다?"
"참가하면서 추가로 고용해도 되고. 인원수가 기준이니까. 쉽게 말해서 용병이 참여해서 받는 특전을 우리가 돈으로 구매한다는 방식이야."
"호오."
"주인님. 신청은 5일 뒤에 마감됩니다. 원정은 19일 뒤에 실시해요."
처리하고 가기에는 딱 좋은 시점이다.
"라분. 레이나. 따로 의견 있어?"
라분의 답은 언제나 간단했다.
"주인이. 하자는 대로 한다."
"그렇겠지. 레이나는?"
"네? 저도 뭐. 언니 말씀만 들어보면 크게 문제없어 보이기도 하고."
나는 대리 참가에 무게를 두었다.
나와 레이나, 라분은 미궁 11층을 탐험하는 전력이다.
미궁 2층 탐험을 위해 시간을 쓰는 것은 시간 낭비가 될 가능성이 높다.
"어차피 우리가 참가한다고 해도 주전력은 길드들이 담당할 테고, 보조 역할밖에 하지 못할 가능성이 커."
"들러리인 셈이네요?"
미궁 11층을 탐험하며 날카로워진 감을 미궁 저층의 떨거지들을 상대하며 소비하고 싶지는 않다.
"라파. 대리 참가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아봤어?"
"말씀만 하시면 성사될 부분입니다."
"좋아. 진행해."
"네."
회의의 다음 안건은 11층 탐험에 대한 결과 전달이었다.
사실 이쪽을 먼저 진행하는 것이 맞았지만, 내가 미궁 2층에 대한 질문을 먼저 했기에 순서가 바뀌었다.
라파가 이어지는 내 말에 놀라워했다.
"의뢰를 완료하셨다고요? 야만족을 만나셨어요?"
"어. 어쩌다 보니."
"아마 11층 첫 탐험에서 야만족과 만난 탐험가는 주인님밖에 없을 거예요."
"그 정도인가?"
라파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11층의 야만족은 그 수가 너무 적고, 깊숙한 곳에 있어서 만나기가 쉽지 않아요. 의뢰자와 잘 이야기를 하면 발견 장소를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추가 보상을 받을 수 있을지도⋯⋯."
"그쪽은 부탁할게."
콜드릭 포인트를 다른 이에게 노출하는 것에는 일말의 저항감도 없다.
팔찌 아티팩트를 얻어낸 시점에서 이미 내게서 콜드릭 포인트의 가치는 사라졌다.
무엇보다 콜드릭 포인트는 이미 콜드릭이 존재를 알고 있는 장소다.
아티팩트를 건들지 않았다고 하지만 전체적인 탐사는 끝났을 확률이 높다.
어차피 나는 더 아래를 노리는 몸이다.
저층에서 무슨 일이 생기든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나는 회의의 말미에서 레이나와 라분에게 당부했다.
"아직 탐험의 흥분이 남아있겠지만 절대 무리하지 마. 앞으로 3일간은 명상을 제외하고는 무조건 쉴 것. 라분 너는 그 뒤로 나와 훈련이 예정되어 있으니까 각오하고 있어."
"네."
"알겠다."
"그러면 회의 끝!"
회의가 끝나자마자 가장 바빠진 사람은 바로 라파와 콜린이다.
정확하게는 라파와, 라파의 명령을 듣는 콜린이다.
"콜린. 30분 뒤에 출발할 거예요. 먼저 켄드릭 씨의 집에서 미리 말해놨던 용병을 소개받고, 이후에는 미궁 사무소에 들러서 의뢰 보고를. 가장 최근에 도서관 사서가 누구였죠?"
"덴티."
"음. 덴티는 제가 직접 가야겠네요. 그러면 의뢰 보고 이후에는 흩어져서⋯⋯"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해 보이는 라파다.
'몸종이라도 붙여줘야 하나?'
콜린이 라파의 말이라면 끔뻑 죽으며 손발이 되어주고는 있지만 아무리 봐도 좀 벅찬 것 같다.
길드의 인원은 탐험가들이 절반, 그 탐험가들을 행정적으로 받쳐주는 인원들이 절반이라고 했다.
나는 머릿속으로 후보를 추렸다.
라파는 얼마 지나지 않아 꾸벅 인사를 하고 집으로 나섰다.
"언니도 열심이시네요."
"나야 고맙지."
"라분. 졸리다."
"자자."
어제 피로한 몸으로 술을 뱃속에 들이부었기에 아직도 피곤하고 졸리다.
우리는 쏟아지는 햇살을 느끼며 그대로 낮잠에 빠져들었다.
* * *
그로부터 3일 뒤.
켄드릭이 미리 약속된 시각에 찾아왔다.
"루카스 님. 오랜만입니다."
"네. 건강하셨어요?"
켄드릭의 뒤에는 이번에 우리를 대리해 미궁 2층 정복에 참가할 용병들이 있었다.
그런데 얼굴이 꽤 낯이 익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이전에 내 의뢰를 받고 라파를 찾아주었던 그 용병들이다.
"페트릭, 메트. 오랜만입니다."
"하하. 기억해 주셨군요."
"당연한 말씀을. 새로운 분도 같이 오셨네요."
"크렌입니다. 녀석들과는 오랜 친구죠."
"루카스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페트릭은 라분을 무시했다가 라분에게 참교육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 뒤로는 감정이 풀려 큰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감지 능력으로 확인한 페트릭, 메트, 크렌의 실력은 평균 2위계 후반.
미궁 2층에 투입하기에는 나쁘지 않은 전력들이다.
"주인님. 기본적인 이야기는 이미 끝난 상황입니다.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셔도 문제없습니다."
라파와 내가 용병들에게 제시한 조건은 간단했다.
미궁 2층 탈환에 참가해서 공적을 올릴 것.
개인이 받는 미궁 탐험에 대한 모든 특권은 우리에게 양도할 것.
"각자 은화 50개를 기본으로 드리고, 만약 큰 공적을 올려 더한 보상을 받으신다면 추가적인 보상을 드리겠습니다. 그 경우에는 다시 만나 논의하도록 하시죠."
용병 셋은 고개만 끄덕이기로 한 모양이다.
라파가 미리 준비된 계약서를 내밀었다.
"켄드릭 씨. 부탁해요."
"흠흠! 내가 읽어주겠네."
글을 온전히 읽지 못하는 용병들을 배려해 켄드릭이 계약서 내의 내용을 읊었다.
나와 라파가 말해줄 수도 있지만, 보다 공정한 진행을 위해 켄드릭이 읽었다.
"⋯이상일세. 서명하면 되네."
세 용병은 그 말만 기다렸다는 듯 켄드릭이 말한 위치에 본인의 이름을 슥슥 적었다.
"⋯⋯."
켄드릭이 또박또박 말해주는 말조차도 듣지 않고 무작정 서명을 한다.
이제 와서야 멍청해 보이지만, 미궁 3층을 탐험했던 시절의 나와 전혀 달라 보이지 않는 모습이다.
글도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뭐가 중요한 건지도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모른다.
아마 라파가 없었다면, 무한 회귀가 없었다면 나도 저러고 있었을 테지.
내가 쓸데없는 상념에 젖어있을 때쯤 계약이 끝났다.
"루카스 님? 계약 체결 됐습니다."
"아.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나는 미리 준비한 주머니를 건넸다.
"선금으로 은화 20개. 제가 두 개씩 더 추가했습니다. 술값으로 쓰시죠."
"어이쿠! 이렇게 감사할 데가."
"하하.
고용비용 1골드 50실버에, 켄드릭에게 줄 소개료, 또 우리가 지원할 탐험 물품까지 하면 2골드에서 조금 모자란 금액이 든다고 했다.
이 정도 금액으로 앞으로의 미궁 탐험에서 혜택을 받을 수 있다면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하다.
용병들이 희희낙락하며 떠나는 모습을 본 후, 나는 라분을 찾아갔다.
라분은 내가 나오기 직전의 모습 그대로 땅바닥에 그대로 엎어져 있었다.
"뭐야. 빨리 안 일어나? 30분은 더 누워있었잖아."
"으으. 힘들다. 아프다."
"시끄러워."
어기적어기적 일어나는 라분.
불쌍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게 다 널 위한 거다 이 말이야."
"정말인가."
"그래. 학즉사법 1성. 엄청 아팠지?"
그때의 기억이 나는지 몸을 부르르 떤다.
사실 2성도 1성 못지않게 아프다.
그래도 동기부여를 위해 비밀로 하자.
"이번에 피땀 흘려 수련하면 아프지 않게 2성에 도달할 수 있다. 이 말이야."
"라분. 열심히 하겠다!"
"좋아. 본 조교는, 감동했다."
'세밀한 마나 컨트롤.'
학즉사법 2성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익혀야만 하는 능력이다.
자신의 몸속에서 얽히고설킨 마나를 풀어내어, 내부에서부터의 완벽한 흐름을 유도해야 한다.
오른팔부터 시작해 오른발, 왼발, 왼팔의 마나를 정립하면 신기하게도 몸통은 자동으로 정리된다.
그 마나를 끌어올리면 학즉사법 2성의 완성이다.
물론 당장 라분을 학즉사법 2성에 도전하게 할 생각은 없다.
'자살 행위지.'
적어도 3위계 중반은 되어 능숙하게 마나를 다뤄야 도전할 자격이 생긴다.
나는 감지 능력에서 비롯된 마나 컨트롤로 라분 내부의 마나를 꼬아놨다.
원래라면 라분이 내 마나에 저항했기에 불가능한 방식이었지만, 라분이 억지로 내 마나를 받아들이고 있기에 가능했다.
"끄으윽!"
"꼬인 마나를 풀어! 꼬여진 마나만으로만 풀어야 해!"
사실 마나를 아무리 꼬아놔도 본인의 마나를 넣으면 그대로 해결된다.
하지만 그러면 수련이 안 된다. 꼬인 마나를, 그 마나만 이용해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긴 고민 끝에 고안해 낸 학즉사법 2성의 예습법이다.
"으윽!"
"어떻게든 풀어!"
이게 다 라분을 위한 일이다. 마나 컨트롤을 상승시키는 데에도 크게 도움이 될 테고.
그런데, 왜 이렇게 상쾌하지?
옆에서 명상을 하던 레이나가 소음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갔다.
나는 레이나가 나가는지도 모르는 채, 하루 종일 라분을 전담했다.
라분이 내 진심을 알아주기만 바랄 뿐이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103
페트릭, 메트, 크렌.
우리 파티를 대신해서 미궁 2층의 완전 정복 작전을 나갈 세 명이다.
나는 신청 마감일에 이들과 함께 미궁 사무소로 가서 신청을 대리해 줬다.
자잘한 진행은 라파가 다 했지만.
"출발일 전일에 켄드릭 씨와 함께 저택으로 오시면 됩니다. 리더는 페트릭 씨?"
"네. 아가씨."
아가씨?
페트릭은 라파가 이상한 눈길로 자신을 쳐다보자 살짝 윙크를 하는 대범함을 보였다.
라파의 얼굴이 미묘하게 썩어들어갔다. 하지만 이는 라파와 오랜 시간 함께한 나 정도만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미묘한 찡그림이었다.
"됐고, 저택에서 하룻밤 주무시다가 원정에 나가시면 돼요. 켄드릭 씨와 콜린이 같이 움직일 겁니다."
이 또한 계약서에 명시된 사항이었다. 이들이 참가 신청만 하고 참가하지 않을 경우도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다.
켄드릭과 콜린도 이들처럼 미궁 탐험가 자격이 있다.
둘이 동행해 미궁 2층에서 원정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예정이다.
'돈을 썼으면 뒷마무리도 확실하게.'
감지 능력으로 파악한 녀석들의 마나는 전혀 정순하지 못했다.
보나 마나 계약금으로 목돈을 받고 밤새 술이나 퍼마셨겠지.
선배 탐험가의 입장에서 이들에게 조언을 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떨거지라도 어쨌든 나를 위해 탐험을 해주는 사람들이 아닌가.
"되도록 먼저 나서지 말고, 최대한 사무소의 지시에 복종하십쇼. 탐험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라분을 찾으시고."
"에헤이. 루카스 님은 걱정하지 마십쇼. 이래 봬도 미궁 3층까지 다녀본 몸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요."
"불침번 꼬박꼬박 서시고, 불 함부로 피우지 말고."
페트릭이 메트와 크렌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기왕 시간이 비는데, 한 잔 안 하시겠습니까? 한 잔 들어가면 더 잘 알게 될 것 같은데. 라파 아가씨도 어때요?"
"저는 예정이 있어서."
"어이쿠. 제대로 차였네."
아직도 술이 안 깼나 보다.
보다 못한 켄드릭이 주의를 주고 나서야 페트릭이 얌전해졌다.
그런데 켄드릭이 혼내는 말이 가관이다.
"라분에게 당하고, 이제는 라파한테도 당할 모양이지?"
"...."
페트릭과 메트의 얼굴에 약간의 의구심과 놀라움이 서렸다.
사실 라파는 어떠한 전투 능력도 없다.
하지만 켄드릭의 공증 아닌 공증이 들어가자 그것만으로도 긴장이 되나 보다.
라파와 나는 사무소의 뒤편으로 걸어가 미궁 11층 이상을 탐험하는 탐험가만 드나들 수 있다는 건물로 들어왔다.
라파의 가슴에 있는 뱃지를 확인한 사무소 직원이 문을 열어주었다.
건물 안은 우리가 주로 드나드는 사무소와는 달리 움직이는 인원이 극히 적었다.
미궁 깊숙한 곳을 탐험하지만, 자신을 지켜주거나 내세울 길드가 없는 탐험가들을 중개해 준다.
사무소는 중개 수수료와, 실력 있는 탐험가들과의 인맥을 유지할 수 있고, 탐험가들은 사무소나 개인의 의뢰를 받아 탐험의 부가가치를 더욱 키울 수 있다.
의뢰자는 길드에 의뢰할 수 없는 자잘하거나 비밀스러운 의뢰를 할 수 있다.
그야말로 필요에 의해 결성된 느슨한 연합. 일반적으로 이 연합의 이름을 '커뮤니티'라고 부른다.
내가 이 커뮤니티에 방문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내가 미궁 11층에서 가져온 성과 때문이었다.
"약속 시간 10분 전이에요. 딱 맞춰 왔네요."
종종걸음으로 카운터에 다가간 라파가 자연스럽게 직원과 대화하기 시작했다.
내가 다가갈 때쯤에는 이미 모든 이야기가 끝나있었다.
"루카스 님. 의뢰자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직원을 따라가면서도 라파의 입은 쉬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아침 8시부터 10시까지가 탐험가들의 모이는 공식적인 활동 시간이에요. 나머지 시간에는 이렇게 의뢰자와 탐험가 간의 개인적인 면담이나 보수의 정산이 이루어져요."
"시간이 딱 탐험가 기준이네."
탐험가는 기본적으로 아침이나 점심을 먹고 탐험을 하는 것이 권장된다.
새벽에 출발하는 경우는 특별하다고 봐도 된다.
기본적으로 탐험은 가장 컨디션이 좋은 시간에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찍 일어나서 비몽사몽인 상태에서 탐험을 진행한다?
'미궁에 잡아먹히기 딱 좋지.'
커뮤니티 활동은 탐험가들의 사교활동의 장이 되기도 한단다.
나도 다음부터는 참가해 봐야겠다.
사무소의 직원이 안내한 접견실에서는 의외로 젊은 마법사가 나와 라파를 맞이했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성이다.
"오. 라파양. 저분이?"
"네. 제 주인님입니다."
"루카스라고 합니다."
먼저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했다.
"폴킨이라고 합니다. 마나에 뜻을 두고 있죠."
미리 일정량의 마나를 손에 불어넣고 진행하는 악수.
내 감지 능력이 빠르게 남자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역시 마법사도 눈치채지 못하는군.'
마법사의 몸은 그야말로 마나 덩어리였다.
감지 능력으로 느껴보니 그야말로 거대한 화염 덩어리가 몸 속에 있는 것 같다.
폴킨은 내가 자기 몸을 관찰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방에서 수첩과 펜을 꺼냈다.
"자! 얼른 미궁 11층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야만족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부터."
"우선 아직 말할 수 없는 장소를 탐험하고 있는데⋯⋯"
그렇다.
웬일인지 라파가 의뢰의 마무리를 위해 커뮤니티에 들러 간단한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바로 폴킨의 연락이 왔다.
임무 완수 인정은 물론,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말이었다.
라파도 의뢰자가 야만족이 발견된 장소를 궁금해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나는 내 감대로 얄팍한 거짓보다는 확실한 진실만을 이야기하며 잔꾀를 부리지 않았다.
"좋아. 버섯을 식용하고, 목걸이를 가지지 않았으며, 털이 짙은 갈색이라고 하셨죠?"
"네. 맞습니다."
"그래요. 우선 의뢰비 정산부터."
폴킨이 주머니에서 금화 두 개를 꺼내 내게 건넸다.
2골드!
2위계 후반의 용병을 미궁으로 내모는 데에 드는 비용이 은화 50개다.
그런데 미궁 11층은 부가적으로 받는 의뢰조차 기본 가격이 금화 1개부터 시작이다.
그야말로 빈부의 격차가 실력의 격차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었다.
"자. 그러면 다음 의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볼까요?"
여기서부터는 사전 교감이 있었던 라파가 나섰다.
콜드릭 포인트에 대한 정보와 우리가 개척한 도달 루트, 소요 시간, 야영 포인트까지.
탐험에 필요한 모든 정보의 거래 가격은 다시 2골드.
정말 유익한 거래가 아닐 수 없다.
"여러 정보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시 의뢰가 있는데."
"네?"
라파도 이 사항에 대해서는 전혀 듣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몸을 앞으로 당겨앉으며 폴킨을 바라보았다.
"이 부분은 저와 이야기하시죠."
"좋습니다. 이번 의뢰는 저와 제 동료를 이 포인트까지 안내해달라는 것입니다."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4골드면 마법사에게서 빼낼 돈은 다 빼먹었다.
"우리 파티는 더 깊은 곳을 지향합니다. 미궁에서의 원치 않는 동행은 사양하고 싶군요."
"이런, 제대로 된 길잡이가 필요한데. 의뢰비를 넉넉히 드릴 테니 어떻게 안 될까요?"
"죄송하지만 돈이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파티의 컨디션을 위해 미궁 2층 완전 정복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법사 똥이나 닦으면서 다시 2주간 탐험을 한다?
주객이 전도되어도 한참 전도된 일이다.
"흠. 정말 아쉬운데. 거기는 꼭 가야겠고."
필사한 탐험 루트와 콜드릭 포인트의 좌표를 전달해 주겠다는데도 난리다.
폴킨이 미궁 11층을 그린 지도를 한참 펄럭이다가 말했다.
"그러면 이 바위산, 바위산의 초입까지만 같이 탐험을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음."
"미궁 11층의 과제를 수행하신다고 들었는데, 저희들은 최소 1시간 거리에서 따라가 과제를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고심하며 살짝 폴킨을 바라보았다.
폴킨이 검지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따라가기만 하고! 위험할 때는 도와주고!"
"⋯⋯."
"절대 방해 안 하고! 아. 잠만 같이 잡시다. 저희도 다섯 명 밖에 없으니."
"⋯⋯."
"의뢰비 3골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당당하게 미소 지으며 폴킨에게 다시 악수를 청했다.
"11층에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하! 제가 드릴 말씀을."
역시 마법사는 공통적으로 돈이 많다.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며 뜯어먹을 수 있을 때 뜯어먹어야겠다.
라파가 꼼꼼히 살핀 계약서를 작성하며 의뢰 접수를 마무리한 뒤, 나는 지나가듯 물었다.
"그런데 이 야만족에게 왜 그렇게 관심이 많으신 겁니까? 그것도 11층의 야만족인데."
"음. 궁금하실만하군요."
폴킨의 반응이 딱히 비밀은 아니라는 투다.
"야만족에도 여러 계파가 있죠. 제 스승님은 특정 계파를 연구하시며 그들의 마법을 배워 당신의 실력을 향상시키셨습니다."
"마법이라."
특정 야만족들이 마법을 사용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물론 그 비율은 현저히 적어서 야만족이 자주 출몰하는 15층 이후에서나 만날 수 있을 정도지만.
"지금 제출된 정보나, 말투에는 제가 찾는 계파가 사용하는 말이 있더군요. 투자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야만족들에게서 어떻게 마법을 배우신다는 건지."
"이렇게 배우면 됩니다."
순간 폴킨의 몸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
"!"
나와 라파가 벌떡 일어나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폴킨의 변형은 멈추지 않았고 이내 약간 구부정한 몸의, 새하얀 얼굴을 가진 무언가가 되었다.
"이건."
나는 내가 죽인 야만족의 털을 걷어냈을 때를 떠올렸다.
곧 쑥하고 짙은 갈색의 털이 솟아 나왔다.
"이렇게 하면 됩니다."
"와우."
"이들은 외부에서 온 동족을 배척하지 않죠. 만약 그 동굴에 저들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추적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세상은 넓고, 정말 이상한 놈들이 많았다.
하지만 역시 마법사 만큼 이상한 직업은 없었다.
왠지 별로 친해지고 싶지 않아졌다.
폴킨과 탐험 날짜를 협의한 뒤, 그때까지 먹고 싶은 것을 잔뜩 먹으며 체력을 보충했다.
라분과 레이나는 불편한 동행인이 생겼다는 말에도 별 반응은 없었다.
"뭐. 상관없어요."
"음."
"탐험 전에 간단히 저택에 들를 거야. 안면이라도 익혀."
그렇게 탐험 전날 저택을 방문한 다섯 명의 인원.
폴킨과 여자 검사. 그리고 짐을 든 세 명의 노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여검사는 3위계의 끝에 도달한 자 특유의 마나를 뿜어내고 있었다.
기회만 된다면 한 번 붙어보고 싶을 정도로 강력하다.
여검사의 이름은 엘리사라고 한다.
붉은 오크 챔피언 정도는 단칼에 베어낼 수 있을 만큼 강력해 보인다.
"그나저나, 엘리사님 말고 나머지는 노예들인 것 같은데. 미궁 11층에서 활동이 가능하겠습니까?"
"허허. 별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이래 봬도 미궁 11층 과제까지 완료한 인력들이니."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2위계 중후반.
꽤 쓸만한 전력이지만 그렇다고 미궁 11층에 통용될만한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마법사니까, 어떻게든 수를 썼겠지.
5인 파티의 미궁 11층 과제를 본인이 알아서 해결해 줬을 수도 있었다.
다음 날, 우리는 바로 미궁 11층으로 출발했다.
미궁 2층 완전 탈환 작전의 일주일 전이었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104
나는 살면서 이 정도 거리에서 마법사가 공격 마법을 쓰는 것을 처음 봤다.
"와."
"리더. 대박."
미궁 11층 2일차 숙영.
불침번을 서던 내가 쇠숭이들의 접근을 발견하고 종을 울려 모두를 깨웠다.
기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마법사, 폴킨은 지팡이를 들더니 수십 마리의 쇠숭이들을 겨냥했다.
"쇼크웨이브(Shockwave)."
폴킨의 말이 끝난 순간 폴킨의 마나가 나머지 사람들이 점유했던 지역을 그대로 휩쓸었고, 마지막 사람을 통과한 마나가 그대로 터져나갔다.
쇠나무잎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전후좌우로 몰려오던 쇠숭이들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끼에엑!"
"끼아아아악!"
쇠숭이들이 들고 있던 쇠나무 잎뭉치를 놓치며 비명을 지르다 한 마리씩 나무에서 떨어졌다.
하나같이 양쪽 귀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후."
내 감상은 너무나도 솔직했다.
"대단하다."
"주인. 압도적인 마나를 느꼈다."
"어. 저항하는 게 고작이었어."
마법이 발동되기 전, 마법을 담은 마나가 우리의 주변을 훑고 지나갔다.
그 안에 담긴 힘은 그야말로 엄청나서 함부로 저항하기도 힘들 정도다.
'이것이 마법사!'
기회가 있다면 폴킨의 마법을 더 관찰해 보고 싶었다.
감지 능력으로 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하는 장면을 제대로 확인해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폴킨은 날카로운 눈으로 쇠숭이들을 훑어보더니 이내 특유의 사람 좋은 얼굴로 돌아갔다.
"흐아암. 루카스 님. 어떻게, 야영지를 옮길까요?"
"아뇨. 깔끔하게 처리했으니 공양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죠."
폴킨의 노예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쇠숭이들에게서 마정석을 빼내왔다.
내가 감지한 쇠숭이들의 수는 총 34마리. 녀석들에게서 총 5개의 마정석이 나왔다.
폴킨은 마정석을 받아들자마자 공양을 했다.
말없이 생각만으로 공양을 했는지 그대로 쇠숭이들이 미궁에 먹혀 사라졌다.
그 뒤로 나는 일부러 주간에 폴킨 파티와의 거리를 10분 내외로 좁혔다.
폴킨에게 양해를 구했음은 물론이다.
"저야 좋죠! 길 안내를 더 가까이서 해주시겠다는데. 과제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해보겠습니다."
나는 의도적으로 폴킨의 파티를 몬스터들에게 발각되기 쉽도록 유도했다.
몬스터들을 감지하면 놈들의 움직임과 동선을 파악해 폴킨 파티로 밀어 넣었다.
폴킨은 내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마법을 계속해서 사용했다.
그때마다 의도적으로 거리를 좁혀 폴킨의 마법을 감상했다.
"리더. 뭐가 느껴져요? 저는 마나의 파동밖에 안 느껴지는데."
"전사도 익힌 호흡법과 검법에 따라 특유의 리듬이 있잖아? 일단 마법도 마찬가지야. 폴킨 특유의 마나가 있어."
이는 어떠한 혼전 상황에서도 폴킨의 마나를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특별했다.
"확실히⋯. 복수의 샘플이 필요하겠어요."
"접촉하기 전에 내 마나와 폴킨의 마법에서 비롯된 마나가 닿으면 수많은 정보가 밀려오지?"
"네. 그나저나 그렇게 되면 마법의 주인이 우리가 여기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지 않을까요?"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가는 마나가 아니라 그럴 걱정은 없어. 자. 다시 온다."
마법사의 마법은 그야말로 마나의 폭발이다.
폭발한 마나는 전방위적으로 퍼져 마나의 사용 방향의 반대편에 있는 우리도 느낄 수 있게 된다.
나는 눈은 감으며 폴킨의 마법에서 잔물결처럼 퍼져 나온 마나를 느꼈다.
"쇼크웨이브를 사용했어."
"정말요? 전혀 다른 느낌인데."
"라분. 모르겠다."
나는 그저 느낌으로만 오는 감각을 말로 설명하려고 끙끙거리다 포기했다.
압도적으로 적을 섬멸한 폴킨이 다시 움직였기 때문이다.
"다시 온다."
폴킨이 우리를 의심하면 안 된다.
야영 시간이 되자 폴킨이 천천히 합류했다.
"오늘은 유난히 몬스터들의 습격이 많았군요. 루카스 님 쪽은 어떠셨습니까?"
"저희는 딱히 없었습니다."
"이거 참. 운이 좋으셨군요!"
"그런 셈이죠. 하하."
폴킨은 오늘 하루만 마법 세 종류를 다섯 번이나 사용했다.
꽤 지쳐있을 것이다.
하지만 폴킨은 쉴 시간이 없었다.
나는 불침번을 서며 같은 순번에 걸린 노예에게 말했다.
"잠깐 걷고 오겠습니다."
"⋯⋯."
폴킨의 말로는 노예들이 흉악범 출신이라 입을 모두 막아놨다고 했다.
그냥 실력 좋은 잡부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기에.'
입을 막는 법은 간단하다. 보다 강력한 노예 마법을 사용하면 된다.
기본적으로 노예 마법의 강화는 허용되지 않지만, 이미 마법사나 귀족들 사이에서는 암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모양이다.
산책을 핑계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근처 몬스터들을 유인했다.
원래라면 그냥 우리 근처를 지나갔을 몬스터들이 내가 던진 짱돌에 머리를 맞고 달려왔다.
종이 미친 듯이 울리고, 폴킨이 산발이 된 머리로 지팡이를 들었다.
"⋯⋯."
무언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폴킨.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폴킨의 마나가 나를 스쳐나가자마자 바로 마법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쇼크웨이브로군.'
달려오던 고블린들이 괴성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그 뒤로는 엘리사의 학살이었다.
검염을 줄기줄기 뽑아낸 엘리사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고블린들을 너무나도 쉽게 처리했다.
그야말로 누워서 빵 먹기다.
"하암. 대충 시간은 된 것 같은데. 그냥 아침 먹고 다시 출발할까요?"
"그러시죠."
마법사는 근접전이 약하다고 한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지금 기습해서 폴킨을 제압할 수 있을까?
전사의 호기심이 본능적으로 폴킨과의 거리를 계산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엘리사가 나를 살짝 돌아보자마자 자연스럽게 자세를 풀 수밖에 없었다.
엘리사도 실력으로만 보면 나와 비슷한 수준의 전사다.
무한 회귀를 믿고 혹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되도록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겠다.
우리의 이런 신경전 아닌 신경전을 아는지 모르는지, 폴킨은 마법사용 지팡이를 지팡이 삼아 걷기 시작했다.
"가시죠!"
나는 하루를 더 빙빙 돌며 폴킨의 마법을 하루치 더 보고 나서야 녀석을 바위산 아래로 데려다주었다.
"여기가 바위산입니다."
"그렇군요."
"주의해야 할 몬스터는 산양, 동굴 오크입니다만⋯ 폴킨 님 실력으로는 기습만 당하지 않는다면 문제없겠군요."
"제가 좀 치죠?"
여전히 넉살 좋게 웃는 폴킨.
나는 마지막으로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그동한 궁금했던 부분을 넌저시 질문했다.
"그런데, 폴킨 님은 마법사들 중에서 얼마만큼 강하신 겁니까?"
"응? 강하다뇨?"
"아뇨. 제가 제대로 된 마법사는 처음 보는데. 모든 마법사가 폴킨 님만큼 강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요."
내가 지금까지 만난 마법사라고 해봤자 구트란, 데른 정도다.
클라이머인 구트란은 파괴적인 마법보다는 향수와 같은 실용적인 마법을 쓰는 학구파였다.
반면 이번 아스모데우스의 공을 모두 받고 미궁의 영웅이 된 데른은 무투파라고 했다.
하지만 녀석의 마법을 제대로 견식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제가 좀 강하긴 하죠?"
"네. 폴킨 님 정도면 마법사들 중 얼마나 강한 것인지 궁금해서요."
"강함의 척도라."
포크를 데굴데굴 굴리던 폴킨이 이내 육포를 찍으며 답했다.
"제국 남부의 무투파 마법사가 실력별로 백 명이 있다고 가정하면⋯ 그중 열 손가락 안에는 들 수 있겠네요."
"와."
"객관적인 판단입니다."
"대단하네요."
확실히 폴킨의 강함은 내가 생각하는 마법사의 기준을 아득하게 넘어서있었다.
그래도 그 정도라니.
그렇다면 나는 지금 상당한 거물과 함께 활동하고 있는 셈이었다.
"자. 그러면 위치도 제대로 설명 받았겠다, 이제 이별할 시간이군요."
"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악수를 청한 폴킨이 나와 맞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
"루카스 님. 제가 여기 왔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알려지면 안 됩니다."
"그거야 당연히 비밀로⋯."
"유감은 없습니다."
"네?"
순간 싸해지는 분위기.
라분과 레이나가 놀라 고개를 들어 올리는 순간, 내 몸이 그대로 뻣뻣하게 굳었다.
폴킨의 마나가 내 몸을 통과하자마자 시야가 암전 됐기 때문이다.
다시 시야가 되돌아왔을 때, 나는 내 목이 하늘을 날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씨발."
성대가 붙어있어 잠시나마 목소리도 나왔다.
머리의 마나를 폭발시켜 시야를 뒤집으니, 싸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엘리사가 보였다.
저년의 검에는 내 몸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한 피가 묻어있었다.
"미치겠네."
이후부터는 피 가래가 목에 섞여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겠다.
"주인!"
"리더!"
녀석들의 뒤늦은 비명 사이로 나는 최대한 빨리 죽기 위해 학즉사법 3성에 도전했다.
"⋯⋯."
아무도 믿지 말았어야 했는데.
미궁의 격언을 되새기며 나는 그대로 마치 깊은 잠과 같은 죽음에 빠져들었다.
-키릭.
⋯⋯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레이나와 조용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라파 언니가⋯⋯ 리더?"
"레이나. 잠시만."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위산이 지척이다.
아무래도 바위산에 도달하기 전날 밤이 확실했다.
분명 어제 불침번을 레이나와 함께 섰다.
"레이나."
내 분위기가 달라지자 레이나의 눈도 깊게 가라앉았다.
"내일 저녁 뭐 먹을래?"
그러면서도 내 손은 우리만 알아볼 수 있는 수화를 그리고 있었다.
[적. 사람. 죽인다. 기습. 여자. 먼저.]
레이나는 놀란 듯 크게 눈을 떴지만 타이밍 좋게 대답하는 것에는 성공했다.
"음. 아무래도 점심쯤에 폴킨 씨를 바래다줄 테니까⋯⋯ 저녁은 바위산 근처에서 먹지 않겠어요?"
[이유? 내일. 끝나는데.]
"그래서?"
[인간. 적. 내일. 우리. 죽인다. 예정이다. 계획. 들었다.]
"으음. 불을 적당히 피워도 될 것 같으니까 스튜나 끓여먹고 갈까요?"
[알겠다.]
"좋지."
[다음. 교대. 기습.]
[확인.]
나는 기지개를 쭉 폈다.
레이나가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퍼뜩 놀랐지만 그 이상의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제 교대지? 엘리사와, 갈색 머리?"
폴킨의 노예들과는 통성명도 하지 못했다.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아 머리 색깔로 구분하고 있었다.
폴킨의 방식이었다.
"그래도 여성분이니까, 네가 엘리사 님을 깨우고[죽이고.] 라분도 잘 자고[바로. 깨우고.] 있나 봐봐."
"네."
그렇게 급조된 기습 작전이 세워졌다.
이미 폴킨이 내 목숨을 노린다는 것은 확정된 미래다.
그럴바에는 무조건 선수를 치면 된다.
'자고 있을 때가 기회다.'
우리는 품에 단검을 숨기고 자연스레 바위의 틈으로 들어갔다.
폴킨과 엘리사는 물론, 노예들과 라분까지 세상모르고 자고 있다.
나와 레이나는 품 속에 단검을 숨기고 자연스럽게 둘을 향해 나아갔다.
"조용히 가자."
"네."
[셋.]
땀이 내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둘.]
레이나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와도 같았다.
[하나.]
무의식적으로 흐르는 마나조차 선명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온 감각이 예민해졌다.
[지금.]
우리는 3위계 전사의 힘을 폭발적으로 발휘해 지근거리에서 몸을 박찼고, 이내 목표한 곳으로 단검을 찔러 넣었다.
"끄륵!"
레이나의 단검에 목이 찔린 엘리사의 눈이 부릅떠지며 부들부들 떨었다.
레이나의 기습은 완벽히 성공했다.
하지만 내가 문제였다.
무형의 방어막에 막힌 내 단검은 검염이 줄기줄기 뿜어져있음에도 폴킨의 몸을 감싸고 있던 마나를 뚫지 못했다.
폴킨이 눈을 떠 나를 마주 보았다.
"뭐죠? 이건?"
"보면 몰라?"
레이나가 되는대로 뭔가를 던져 라분을 맞춰 깨우고, 연달아 폴킨을 찔러왔다.
하지만 무투파 마법사는 우리의 공격을 방어하면서 기지개를 펼 정도로 여유가 넘쳤다.
폴킨이 엘리사의 시체에 눈길을 줬다.
"하? 정녕 미쳤구나?"
"좆까고 있네. 내일 나를 죽이려고 발악을 할 놈이."
"⋯⋯뭔 개소리야?"
"지랄은."
순간 녀석의 눈이 파랗게 빛났다.
"레이나! 우선 후퇴!"
우리는 동시에 몸을 빼내며 단검을 버리고 검을 빼들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검을 휘둘러 노예들을 전부 죽여버렸다.
폴킨은 우리를 안중에도 두지 않고 엘리사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암울한 마나가 주변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리더. 어쩌죠?"
라분이 신발조차 제대로 신지 못한 채로 합류했다.
"어쩌기는. 라분. 준비해."
"음!"
일말의 의심조차 하지 않고 한때 같이 탐험을 진행했던 놈에게 검을 들이민다.
정말 든든하지 않을 수 없다.
"마법사 사냥 시간이다. 폴킨. 이새끼 사람 잘못 건드렸어."
사나운 마나가 전방을 휩쓺과 동시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105
폴킨의 날카롭게 정제된 마나가 공기를 휩쓸었다.
분노에 잠긴 마법사의 눈은 자신의 동료들의 시체를 거쳐 우리에게 닿아있었다.
그저 마주친 것만으로도 오한에 온몸이 떨리고, 머리가 멍해진다.
이 빌어먹을 느낌은 마치 무한 회귀를 알기 전에 트롤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와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니다.
"합!"
기합 한 번으로 뿜어낸 마나가 폴킨의 마나를 거칠게 밀어냈다.
라분과 레이나가 정신을 차리고, 자신들의 마나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폴킨의 시선은 나에게 닿아있었다.
"루카스. 분명 오늘 밤까지만 해도 아무런 기색이 없었는데, 어떻게 알았지?"
마법사의 말에 레이나가 몸을 약간 떨었다.
폴킨이 우리들을 모두 죽인다는 내 말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네놈의 더러운 대가리 속을 들여다보는 것쯤이야 간단하지."
나는 내 단검을 막았던 폴킨의 방어 마법의 위력을 되새겼다.
기습을 위해 급하게 끌어올린 검염은 평소의 50%, 전력의 25%다.
'100%로 덤빈다면?'
검을 다잡으며 생각해 봤지만 여전히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니야. 아니야. 엘리사가 너를 잘못 읽었다고? 그럴 리가 없어. 개소리도 정도껏 해야지."
한참을 고민하던 폴킨이 고개를 푹 숙였다.
다시 들어 올린 녀석의 눈에는 붉은 안광이 맺혀있었다.
"너는 맨 마지막에 죽이고, 머릿속을 뒤져봐야겠어. 대체 무슨 비밀을 숨기고 있을지 궁금한데?"
제기랄.
실력 좋은 마법사라더니. 감이 꽤 날카롭다.
만약 내가 녀석에게 잡혀서 고문을 받게 된다면?
나는 내 무한 회귀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 없었다.
잠깐 고민하던 그때, 폴킨의 지팡이가 밝게 빛났다.
나는 감지 능력을 통해 녀석의 마나를 읽어낼 수 있었다.
"쇼크웨이브야! 돌진해!"
"우어어어!"
폴킨이 사용하는 쇼크웨이브는 폴킨 자신을 중심으로 일정 범위의 안전지대를 먼저 형성한다.
그렇기에 그 전에 접근하게 되면 마법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
"허, 참. 영창도 안 했는데 마법은 또 어떻게 알아낸 거야?"
라분의 돌격이 들이닥침에도 폴킨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쳤다.
지팡이가 빠르게 세 번 빛났다.
"라분! 윈드 커터!"
라분이 기민하게 몸을 움직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나의 칼날을 여유롭게 피해내는 라분.
바로 발을 박차 폴킨에게 검이 닿을 수준까지 접근하는 데에 성공했다.
"우어어어!"
"에휴."
라분의 몸통 박치기가 닿으려는데, 폴킨의 지팡이가 움직였다.
그 속도는 눈으로 따라가기도 힘든 엄청난 속도였다.
마치 느려진 세상 속에서 폴킨의 지팡이만 평상시의 속도로 움직이는 듯한, 전혀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는 듯한 움직임.
라분의 검이 닿기도 전에 폴킨의 지팡이가 반원을 그렸다.
"절멸."
지팡이가 그렸던 원이 빛나는 순간.
원에서 무언가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에 닿은 라분의 전신이 터져버렸다.
온전한 곳은 허벅지 아래의 두 다리와 검을 치켜올렸던 오른팔뿐이었다.
그리고 레이나.
"큿!"
왼팔이 날아가버렸다.
폴킨이 그린 원에서 비롯된 빛이 뻗어나간 궤적에 팔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내 머릿속의 모래시계가 뒤집어졌다.
"병신 새끼들이. 괜히 힘쓰게 하고 있어."
나는 라분의 보조를 맞춰 달려들던 움직임조차 멈춘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미처 알 수 없었던 마법 한 번으로 3위계 전사 둘이 무력화되었다.
이 마법이 내게 겨눠졌다면 과연 피할 수 있었을까?
'이미 알고 있어. 다시 보면 피할 수는 있다.'
하지만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는?
절대 불가능하다.
"루카스. 왜. 쫄았어? 아직 이런 마법들이 스무 개는 넘게 남아있다고. 널 위해서 하나씩 보여줄용의도 있어."
레이나가 왼팔을 감싸며 쓰러지는 와중에도 내 머리는 핑핑 돌아가고 있었다.
"그래. 너는 내가 특별히 노력해 줄게. 머릿속을 뒤져본 다음에, 응? 손가락부터 시작하는 거야. 엘리사의 목숨값을 받아야지. 다음은 발가락. 다음은 얼굴로 가볼까?"
아무런 경계조차 없이 다가오는 폴킨.
나는 조용히 칼을 들어 올려 검염을 줄기줄기 뿜어내었다.
내 검을 바라보는 폴킨의 표정은 너무나도 태연했다.
지금 이 상황만 아니라면 일상을 보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평온함에 가득 차 있는 표정이다.
"죽이고 싶잖아? 한번 해봐. 같잖은 자존심부터 짓밟아주지."
"기꺼이."
나는 전력을 발휘해 폴킨을 향해 그대로 검을 내리쳤다.
'100%.'
내 검은 폴킨의 방어막을 반쯤 뚫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 이상 들어가지 않았다.
아무리 힘을 계속해서 불어넣어도, 어떻게 해도 내 검은 마치 강철로 만들어진 바위를 내리친 듯 멈춰있을 뿐이다.
심지어 폴킨의 방어막이 내 검을 붙잡고 있었다.
폴킨이 내 앞에 우뚝 선 채로 내 가슴을 손가락으로 툭툭 눌렀다.
"어? 4위계의 심상 구현을 가져와도. 못 뚫어. 알겠어? 벌레 새끼가 감히. 내게 덤벼?"
"벌레 새끼라."
"여자는 편히 죽여줄게. 나름 착한 년이었어."
소리 없이 날아든 윈드 커터가 레이나의 목을 잘라냈다.
망할.
아직 자살하기에는 이르다.
나는 검을 놓고 단검을 꺼내 그대로 폴킨의 배를 찔러들어갔다.
폴킨의 방어 마법이 내 단검을 잡아채고, 내 검이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눈을 빛내며 떨어지던 검을 잡아채 다시 휘둘렀다.
검을 다시 잡은 방어 마법이 단검을 놓쳐 떨어뜨렸다.
폴킨이 허허 웃었다.
"한 번에 한 공격밖에 못 잡는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냐?"
"!"
"그냥 귀찮아서야."
놈의 방어 마법에 잡힌 단검이 허공으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덕분에 놈은 내게 중요한 정보를 노출하고 말았다.
내 검을 잡고 있던 마법의 힘이 조금이나마 약해져있었기 때문이다.
"역량의 총량을 분배하는 식인가. 검을 잡고 있던 마법의 위력이 줄었어."
"⋯정답. 감은 쓸데없이 좋아. 됐고, 눈알부터 뽑고 시작하자."
나는 폴킨의 눈을 바라보았다.
내 머릿속의 모래시계가 3분을 지났기 때문이다.
"그래 그 눈. 처음부터 느꼈어. 다른 건 다 병신 같은데, 그 눈이 이상하다고. 대체 뭘 숨기고 있는⋯⋯"
준비하지 않은 학즉사법 3성으로의 도전.
뛰어난 마법사조차도 인지하지 못하는 틈에 내 머리가 박살 났다.
내 바로 앞에 있던 폴킨에게로 핏덩이가 튀었다.
"엑? 우웩! 퉤!"
나는 마음속으로만 웃었다.
-키릭.
⋯⋯
나는 급격하게 흐려진 초점을 억지로 고정하며 상황을 살폈다.
"그러니까 라파 언니가⋯⋯ 리더?"
레이나가 흠칫하며 내 얼굴을 살폈다.
"레이나. 잠깐만."
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폴킨에 대해 생각했다.
마법사. 그것도 완성되어 있는 마법사다.
도대체 몇 써클일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정면 승부는 무리다.
우리들과 폴킨 사이에는 아예 전투라는 단어가 성립하지 않을 정도의 간극이 존재하고 있었다.
악마, 아스모데우스와의 전투와는 다르다.
"⋯⋯."
아스모데우스는 최소한 나와 검을 나눴고, 나는 석로검법을 사용했다.
덕분에 100번이 넘는 죽음을 겪으며 석로검법으로 아스모데우스의 호흡을 가져올 수 있었다.
그렇기에 한 번 한 번의 죽음이 가치 있었고, 그 죽음을 쌓아가며 결국 목표를 이뤄내었다.
하지만 지금은?
놈의 방어 마법에 검을 맞대면서 석로검법을 사용했지만 석로검법은 놈의 마나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도전은 가능하다.
단, 도전만 가능하다.
"그런다고 될까."
지금까지 셀 수도 없는 죽음을 겪어본 내가 보증한다.
백 번의 도전으로는 의미조차 없다. 아니, 불가능하다.
"리더. 괜찮으세요?"
레이나가 내 등에 손을 올렸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레이나의 모습이 보였다.
"어. 괜찮아."
레이나는 내 표정을 보고서는 내 옆에 다시 붙어앉았다.
"리더. 리더는 갑작스럽게 지금처럼 표정이 안 좋아질 때가 있어요."
"그래? 그랬어?"
"네. 미궁 8층에서 처음 미노타우로스를 사냥했을 때도. 악마를 무찔렀을 때도. 최근에는 야만족과 싸울 때도요."
"⋯⋯."
"그때마다 리더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셨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기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발자국을 남기면서요. 언제나. 정답만을 가져오셨어요."
나는 완전한 믿음의 시선을 내게 보내고 있는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믿고 있어요."
"그래. 그러면 일어나."
"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레이나가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목격한 레이나의 죽음은 없어진 과거가 되었고, 내 머릿속에만 남아 나를 괴롭게 했다.
'지워진 과거라.'
인정하자.
지금 폴킨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백 번을 넘어, 천 번, 만 번을 시도한다면 가능성이 보일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고 해도 내게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무한 회귀에 대해서다.
'무한 회귀는 정말 무한인가?'
만약 천 번째에 내 무한 회귀가 끝난다면? 악마의 숫자인 777번에서? 아니면 500번이 한계라면?
이런 생각이 내 정신을 점차 깎아놓는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아스모데우스의 상황과 지금 이 상황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아스모데우스와의 전투는 기본적으로 필수불가결했다.
미궁 4층을 본인의 영역으로 선포한 아스모데우스는 내게서 탈출, 전투 회피라는 선택지를 없앴다.
결국 내게 남은 것은 전투라는 선택지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회피."
선택지가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 맞서면 죽는다.
그렇다면 가만히 있지도, 맞서지도 않으면 된다.
"레이나. 조용히 라분 깨워서 데려와."
"네."
나는 폴킨이 세상모르고 잠들어있는 바위 틈을 바라보았다.
'엘리사랑 노예들, 죽이고 갈까?'
아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분명 나에게 책임이 돌아올 터였다.
우선 이 선택지의 결과를 확인해 보자.
레이나가 라분을 질질 끌고 왔다.
직전 불침번을 섰기에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정신차려. 오늘 떠날 거니까."
"네? 폴킨 님의 의뢰는요?"
"여기까지 하는 거지."
레이나도 라분도 영문을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내 선택에 더 이상의 토를 달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조용히 야영지에서 사라졌다.
* * *
폴킨은 엘리사의 손이 자신의 방어 마법에 닿자마자 눈을 떴다.
"흐아아암! 엘리사? 뭐야?"
"그들이 떠났습니다."
"뭐? 뭔 소리야?"
폴킨은 엘리사가 건넨 쪽지를 받아들었다.
"에?"
쪽지를 펼치니.
[안내의 의뢰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바위산에 도착하시면 지도로 제 출발점을 확인하기는 어렵지 않으실 겁니다. 하루 일찍 의뢰를 마무리하기에 의뢰비는 따로 받지 않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한참 쪽지를 내려다보던 폴킨이 그대로 종이를 태워버렸다.
루카스가 갑자기 의뢰를 그만둘 이유가 없었다.
"엘리사."
"네."
"놈들이 알고 있었던 걸까? 내가 죽일 거라는 걸."
"제 특성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어제저녁, 잠들기 전까지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확실합니다."
"그렇다는 말이지."
"어쩌시겠습니까?"
"어쩌기는. 죽여야지."
폴킨이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눈을 감고 집중하자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루카스와 일행들의 기척이 잡혔다.
"벌써 저만큼 이동했어? 오늘 안에 정리하려면 서둘러야겠는데."
"향수입니까?"
"어. 구트란 녀석. 기특한 걸 만들어놨단 말이지. 남아있는 양은 충분하니까. 이럴 때 쓰기 딱 좋아."
폴킨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추적하자."
"네."
폴킨 일행은 루카스 일행을 죽이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폴킨은 한 가지 착각을 하고 있었다.
폴킨은 루카스가 향수라면 지긋지긋하게 겪어봤음을, 이미 향수에 대해서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음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106
내가 폴킨이 우리들에게 묻혀놓은 향수의 존재를 인지하게 된 것은 첫 죽음 이후였다.
구트란의 향수.
나로서는 그 원리를 알 수 없는 복잡한 마나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물질이다.
하지만 내 감지 능력을 사용하면 탐지는 어렵지 않았다.
"죽고 나서야 탐지해 내다니."
내 방심이 불러온 실수라고도 할 수 있겠다.
"폴킨이 어떻게 향수를 얻었을까요? 겉보기에는 상당히 선량한 마법사 같았는데."
"마법사는 알다가도 모를 족속들이니까."
우리는 조용히 폴킨의 곁을 떠난 뒤, 붉은 오크들과 짧은 전투를 치렀다.
전투의 끝에서 정확히 세 마리를 살린 뒤에 묻어있던 향수를 마나를 이용해 떠낸 뒤, 그대로 다시 오크의 이마에 묻혀놓았다.
나머지 향수를 말끔하게 지워낸 뒤에 오크를 놓아주었다.
"자. 이러면 어떻게 될까."
오크들은 내가 놔줬음에도 계속해서 덤벼왔다.
몬스터들 특유의 몹쓸 본능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딱 죽기 직전까지 패자 어느새 사그라들었고, 뒤이어 살기 가득한 주먹을 들어 올리자 꽁지가 빠져라 도망갔다.
우리는 근처 나무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폴킨. 찾아올까."
"아마도. 우리를 죽이려고 할 거야."
"⋯⋯리더의 말이기에 믿기야 하겠지만, 대체 무슨 이유일까요."
사실 나도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누구도 자기가 내려온 사실을 알면 안 된다고 했었지.'
내가 3골드를 제시받은 이 안내의 의뢰는 사무소의 중개를 거치지 않은 개인 의뢰다.
더군다나 폴킨과는 따로 파티를 꾸려 미궁에 들어왔다.
폴킨이 마궁 사무소에 탐험 신고를 진행하지 않았을 가능성 또한 높다.
"녀석의 목적을 먼저 알아야겠어."
미친 듯이 도망가던 붉은 오크 세 마리가 내 감지 능력의 끝자락에서 진이 빠져 누워 헐떡였다.
"우리도 잠시 쉬자."
"네."
눈을 감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폴킨의 기척을 감지하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불편한 휴식을 취하던 라분과 레이나도 마찬가지였다.
"폴킨이에요?"
"그래."
이미 향수가 묻은 오크들은 숲속 깊숙이 사라진 상황이다.
폴킨은 내가 자신을 감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거침없이 숲 안쪽으로 발을 내디디고 있다.
바위산의 반대 방향이자, 오크가 도망간 방향이다.
"향수를 추적하고 있어."
향수의 강렬한 마나는 클라이머 마법사인 구트란만 알고 있던 마법으로 추적이 가능하다.
미궁 4층 탈환전에서 포획한 클라이머들은 그 마법을 전혀 알지 못했다.
최근 한창 미궁의 구원자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데른이 우리 집에 놀러 왔을 때 해줬던 이야기가 있다.
[향수가 샘플은 넉넉한데, 영 재현도 안 되고, 마법도 정돈이 아짇이란 말이야. 몇몇 마법사들이 달라붙는데도 이 정도면 라비팩트로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있어.]
그런데 데른의 말과 다르게 폴킨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향수를 탐지하는 마법을 사용하고 있다.
"구트란, 혹은 클라이머 쪽과 접점이 있었음은 확실하군."
"큰 수확이네요. 이대로 돌아가서 지원을 불러오는 게 어때요?"
"라분도. 이 방법이. 좋다."
레이나의 의견도 하나의 괜찮은 선택지다.
수백 번을 싸워도 폴킨에게서 이렇다 할 우위를 점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
의견대로 콜드릭이나 데른의 도움을 받는 것이 합리적이다.
하지만 이건 무한 회귀자의 방식이 아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모든 가능성을 검증하고, 나에게 가장 이득이 되는 가능성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직. 한 번 따라가보자."
경상을 넘어선 부상을 당한 오크들이 향할 장소가 어디겠는가.
바로 오크의 소굴이다.
주변 지리를 전혀 모르는 것이 분명한 폴킨 일행이 미궁 11층의 숲 깊숙한 곳으로 점차 파고들기 시작했다.
우리도 감지 능력의 끝자락에서 줄을 타며 폴킨 일행을 추적했다.
"주인. 너무 깊다."
"괜찮아. 앞에서 어그로를 다 끌어주고 있으니까."
폴킨이 점차 깊숙하게 들어갈수록 오크들이 계속해서 덤비기 시작했다.
폴킨 파티는 어느 지점까지 걸어가다가 걸음을 뚝 멈췄다.
사방에서 오크들의 기척이 느껴진다.
제대로 포위를 당한 것이다.
"다가가자. 붉은 오크들이 주변에 많으니까 조심하고."
"네."
"위험하다. 오크에게 발각되면. 즉시 도망가자."
"그래."
내 감지 능력은 사방이 오크로 둘러싸인 장소에서도 어찌저찌 우리를 폴킨 파티의 근처로 인도했다.
폴킨은 아무런 감정변화 없이 달려드는 붉은 오크들과 싸우고 있었다.
"절멸."
달려들던 오크 챔피언 두 마리의 몸뚱어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파멸."
오크 세 마리가 지팡이의 움직임에 따라 쇠나무와 함께 사선으로 몸뚱이가 베이고.
"페르쿨."
전혀 알 수 없는 단어와 함께, 전후좌우로 퍼져나간 충격파가 오크들의 귀를 터뜨렸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실력.
엘리사와 노예 세 명은 폴킨의 사방을 호위하듯 자리 잡았지만 딱히 하는 일은 없었다.
주변에 쌓여있는 오크들의 시체가 30구를 넘어설 때쯤 전투가 소강상태가 되었다.
오크들은 함부로 폴킨을 공격하지 못하고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만 있었다.
거리가 가까웠고, 마나를 귀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폴킨과 일행의 대화가 들려왔다.
다행히도 근처에 은신한 나를 발견할 수 있는 마법은 없는 모양이다.
"향수는 여기서부터 100m 떨어진 곳이야. 아무래도 속은 것 같지?"
"네. 지금이라도 돌아가시죠."
"제기랄."
그때였다.
내가 미리 감지하고 있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폴킨이 한숨을 쉬었다.
"오크 히어로까지 나오는군. 이거. 제대로 한 방 먹었어."
"마법은 충분하십니까?"
"아니. 벌써 절반은 썼는데. 이거. 마무리를 빨리해야겠네."
"적은 4위계입니다. 폴킨 님께서 상대해 주시면 저희가 나머지를 맡겠습니다."
"빠르게 정리할게."
주변을 포위한 오크 챔피언 세 마리와 일반 오크 다수.
아무리 엘리사가 3위계 끝자락에 있다고 하더라도 상대가 불가능할 정도의 숫자 차이다.
엘리사가 검을 부여잡고 휘파람을 몇 번 불었다.
그 휘파람 소리를 들은 노예들이 주머니를 뒤지더니 검은색 물약을 꺼내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뭐지? 구정물인가?"
"그럴 리가요."
곧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검은색 물을 마신 노예의 검에서 검은색 검염이 뿜어져 나왔던 것이다.
불안정하고, 너무나도 활활 타오르고 있었지만 어쨌든 검염이다.
"으으."
"으으으."
"으으."
괴상한 소리를 내던 노예들이 일사불란하게 달려들어 붉은 오크와 전투를 치르기 시작했다.
노예들은 오히려 오크 챔피언을 압도하는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누가봐도 정상이 아니에요. 아마 강제로 3위계에 올라선 대가는 참혹하겠죠."
"그래도 대단해. 향수만큼 가치 있어 보이는데."
폴킨의 지팡이는 히어로를 향해 겨눠져있었다.
"절멸."
[인간 부수기.]
오크 히어로의 투박한 검이 구현한 심상 구현이 폴킨의 마법과 닿았다.
절멸은 히어로의 심상 구현을 뚫지 못했다.
하지만 히어로도 검을 거두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물러서는 오크 히어로의 두 손가락이 기괴한 각도로 꺾여있다.
4위계의 전사를 압도하는 폴킨의 마법!
"구트란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전투 능력이 뛰어나."
하지만 최종적인 승리를 위한 단서는 있다.
지금 이곳에 오크들만 있다고 생각한 폴킨은 내게 상당히 유용한 정보를 흘렸다.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숫자가 제한되어 있어.'
아직 여유가 넘친다는 느낌이지만 어쨌든 폴킨의 마법은 무한정으로 쓸 수 없다.
조금 더 소모전을 유도한다면 승리의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때였다.
"죽음의 빛."
검은색 빛이 번뜩이고, 오크 히어로의 왼팔이 그대로 떨어져 나갔다.
"!"
"!"
"!"
오크 히어로가 이렇게 쉽게 패배하는 몬스터였던가?
"크어어어!"
[강한 발걸음.]
순식간에 몸을 띄운 오크 히어로의 검이 폴킨의 지팡이에 닿았다.
그러나 히어로의 검보다 폴킨의 지팡이가 반바퀴 돌아가는 것이 먼저였다.
"절멸."
오크 히어로의 몸이 그대로 산산조각 났다.
히어로는 죽음의 순간, 미처 닿지 못한 검을 그대로 폴킨에게로 밀어 넣었다.
녀석이 급하게 몸을 틀었지만 히어로의 검이 폴킨의 턱을 얕지만 길게 베어냈다.
히어로는 그 광경을 보며 눈을 감았다.
"이 씨발 새끼가!"
폴킨이 격노하며 오크 히어로의 시체를 마구 짓밟았다.
그동안 주변을 정리한 엘리사와 노예들이 다가왔다.
노예들은 코에서 검은색 김을 내뿜고 있었는데, 영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폴킨 님. 후퇴하시죠. 오크의 증원이 바로 올 수도 있습니다."
"향수가 지척인데. 도저히 인간이 저기 있을 리가 없어. 엘리사. 어떻게 생각해."
"뛰어난 감각을 가진 탐험가들이 향수를 구별해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하필 제단의 위치를 알고 있는 놈이 그 실력자였다고? 제기랄. 더 조사했어야 했어."
폴킨은 지팡이를 한 번 휘둘러 옷에 묻은 피를 전부 털어내고는 바위산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이동 경로 측면에는 우리들이 매복하고 있었다.
뛰어난 마법사의 감이 우리의 은신을 파악하기 직전, 달려든 내 검이 엘리사를 찔러들어갔다.
"읏!"
뒤늦게 나를 발견한 엘리사가 무너진 자세로 내 검을 받아냈다. 뒤이은 레이나의 공격이 엘리사의 오른팔을 크게 베어냈다.
라분은 비틀비틀 걷는 노예들을 습격해 전투를 치르기 시작했다.
"후. 이 정도인가. 레이나. 엘리사를 상대해."
"네."
"흐흐흐. 제발로 찾아왔구나. 루카스."
"폴킨."
폴킨은 지팡이를 들어 올렸지만 바로 마법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나는 평정을 잃지 않으며 폴킨을 관찰했다.
라분과 레이나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의 기습은 살기 위해 내린 행동이 아니다.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죽일 수 없는 괴물을 죽이기 위한 무기를 하나씩 맞춰가는 과정일 뿐이다.
"마법사. 아직 여유롭나 보군."
"고작 이걸로? 어? 이 씹새끼가 나를 고생시켜?"
"누가 할 말을. 제단이 그렇게 가고 싶었나?"
'제단'이라는 말에 흠칫 놀란 폴킨이 잠깐 고민하더니 이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남의 말은 쥐새끼처럼 잘도 훔쳐들어. 응?"
"제단이 뭐지?"
"너같은 새끼는 꿈에도 볼 수 없는 지혜가 깃든 장소다. 이제 죽어."
폴킨의 지팡이가 절멸을 그리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분명 엄청난 속도다.
하지만 이를 십수 번 본 나는 그 속도에 조금이나마 반응할 수 있었다.
"절멸."
"흡!"
절멸의 마나는 내 오른쪽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수십 번이나 했음에도 완벽하게 피해 내지 못했다.
그만큼 무서운 마법이다.
나는 몸을 크게 돌리며 폴킨의 다리를 베어갔다.
폴킨은 그대로 몸을 움직여 내 검을 부드럽게 피했다.
이녀석. 신체 능력도 보통이 아니다.
곧이어 지팡이가 허공에서 선을 그었다.
"파멸."
미처 자세를 잡지 못한 내 오른 다리가 그대로 잘려나갔다.
"읏!"
나는 개의치 않아하며 왼발을 디딤돌 삼아 몸을 튕겨 폴킨의 허벅지를 찔렀다.
"미친새끼! 절멸!"
폴킨이 다급하게 마법을 발사했지만 내 검이 폴킨의 허벅지에 꽂히는 것이 더 빨랐다.
물론 그 대가는 참혹했지만.
내 어깨를 뚫고 등을 거쳐 허리로 빠져나간 절멸이 내 몸을 대각선으로 갈랐다.
그나마 내 머리가 붙어있는 놈이 볼썽사납게 흙바닥을 갈랐다.
"으아아아! 개새끼!"
허벅지에 검이 박힌 폴킨이 뒤로 넘어가며 악을 써댔다.
나는 발작하는 몸을 느끼며 소리쳤다.
"레이나! 라분! 도망쳐!"
녀석들은 내가 신신당부한 대로 머뭇거림 없이 그대로 도망갔다.
죽는 것처럼 보여도 죽지 않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거짓말을 철석같이 믿은 것이다.
'자주 써먹어야겠군.'
"엘리사! 당장 쫓아가!"
"주인님.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우선 자리를 피하셔야 합니다."
"으아아아아아!"
폴킨이 날뛰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마법이 내 머리에 꽂히는 느낌이 어렴풋이 내 감각을 건드렸다.
허무하게 죽은 전생과 반대로, 이번에는 녀석에게 유의미한 부상을 입히는 데에 성공했다.
과연 다음은?
'절대 놓치지 않는다.'
내 다짐과 별개로 의식은 아득히 멀어져 갔다.
-키릭.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107
폴킨에게서 비롯된 세 번째 죽음.
회귀의 장소는 역시나 마지막 불침번을 서던 그 장소다.
"그러니까 라파 언니가⋯⋯ 리더?"
레이나가 내 분위기가 변하자마자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본다.
나는 이전의 생처럼 방황하지 않았다.
레이나와 라분이 알고 있는, '언제나 정답을 찾는 사람'이 되었다.
"레이나. 상황이 급변했어."
"네?"
"아무도 모르게 라분부터 깨워. 바로 움직이자."
폴킨은 붉은 오크 히어로 1마리와 챔피언 5마리와 전투를 하고도 마법의 여유가 넘쳤다.
나를 상대하면서도 강력한 마법 여럿을 남길 수 있었을 만큼.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녀석의 전력을 줄이고, 녀석의 적은 늘린다.'
폴킨은 상시 자신을 방어하는 마법을 믿고 깊은 잠을 잔다.
내 기습이 마법에 의해 막히고서야 정신을 차릴 정도로 무방비하다.
그래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방어 마법이 뛰어나기도 하다.
우리 셋이 기습하더라도 잠 자는 폴킨을 한 번에 죽이기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증명되었다.
하지만.
'나머지는 아니야.'
불침번을 믿고 자고 있는 나머지 놈들은 폴킨과 같은 방어 마법이 없다.
레이나가 하품을 쩍쩍하는 라분을 데리고 나왔다.
우리는 충분히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폴킨은 확실한 적이다. 우리를 죽이려고 할 거야."
레이나는 당황했지만 라분은 당황하지 않았다.
"주인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
"⋯⋯그렇죠."
"주인. 지금 죽일 거냐?"
"아니. 방어 마법이 강해. 못 죽여."
"그렇다면?"
"조용히 노예만 죽이자."
폴킨과 엘리사는 서로 비교적 가까운 장소에서 잠을 청한다.
폴킨이 아무리 방심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본인의 옆에서 사람이 죽어가는데 깨지 않을 바보는 아니다.
반면 노예들과는 거리가 있다.
"녀석의 전력을 줄인다."
3위계조차도 도달하지 못한 2위계 셋을 죽이는 일은 누워서 빵 먹기다.
우리는 각자 한 명씩 맡아 노예들의 목을 그었다. 은밀성을 유지하기 위해 검염조차도 쓰지 않았다.
거처의 입구에 남겨놓는 쪽지의 내용은 도발이다.
[안내자를 죽이려고 들어? 다시는 미궁 1층을 못 밟을 줄 알아라.]
미궁 1층에 올라가 어떻게든 신고하겠다는 암시. 폴킨에게는 반드시 피하고 싶을 선택지다.
반드시 우리를 추적해올 테지.
거기서부터 함정을 설계하면 된다.
우리는 똑같이 붉은 오크를 사냥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반 붉은 오크를 사냥하지 않았다.
챔피언이 포함된 무리를 사냥했다.
"헉헉."
죽이는 것이 아닌 포획하는 것이었기에 사냥이 배는 더 힘들었다.
결국 챔피언의 오른팔을 부러뜨리고 나서야 제압에 성공했다.
"일단 패."
꽁꽁 묶은 세 마리의 붉은 오크를 정말 오줌을 지릴 때까지 정신없이 두들겼다.
두어 번 기절하고 깨어나다 보니 이제 녀석들의 눈에 두려움이 아로새겨졌다.
"됐다."
이것만 해도 하루치 체력은 다 쓴 것 같다.
오크들에게 구트란의 향수를 이식하고 밧줄을 느슨하게 풀었다.
곧 슬금슬금 거리를 벌리자 오크들이 어기적거리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가자."
"음."
"리더⋯⋯ 너무 일을 크게 벌이는 것 같아요."
"내가 언제 대충 하는 거 봤어?"
"그것도 그렇네요."
내 손에는 오크들을 무장해제하며 노획한 호각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크들을 쫓아 다가오는 폴킨의 기척이 느껴졌다.
감지 능력을 통한 거리 조절로 연재 우리의 위치는 오크와 폴킨 파티 사이의 딱 중간이다.
체감상 붉은 오크의 영역 깊숙이 들어왔다.
지금이다.
"불자!"
-삐이이이익!
-삐이이이이익!
-삐이이이익!
마나까지 담아 힘껏 호각을 불고, 얼른 자리를 벗어났다.
호각 소리에 폴킨이 잠깐 멈칫했지만 추격을 중지하지는 않았다.
1분 떨어진 거리에서 폴킨과 엘리사가 빠르게 달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분노에 가득 찬 마법사의 강대한 마나는 몬스터들이 놓치기 힘든 표식이다.
호각을 듣고 몰려온 근방의 붉은 오크 무리가 폴킨을 노리기 시작했다.
나는 폴킨의 마나를 놓치지 않으며 녀석들을 관찰했다.
너무나 많은 오크들이 접근하고 있었기에 둘의 모습을 눈에 담지는 못했다.
5분 뒤.
"아직도 싸우고 있어요?"
"마나의 파동이 느껴지지? 저게 끊기지 않는 이상 무조건 싸우고 있는 거야."
"하아암. 피곤하다."
10분 뒤.
"아직도?"
"오. 히어로 한 마리 더 들어갔다."
15분 뒤.
"히어로 세 마리째. 미쳤는데?"
심지어 오크 챔피언은 스무 마리가 넘어섰고, 일반 오크는 200마리쯤 되었다.
그렇게 20분 뒤.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마나가 마치 태풍처럼 휘몰아치고, 폴킨을 중심으로 서늘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주변의 오크들의 기척이 전부 사라졌다.
그 많았던 오크가 마법 한 방에 전멸한 것이다.
"⋯⋯."
"이 엄청난 마나⋯. 마법사는 정말로 괴물이네요."
"그래봤자 사람이야. 칼로 찌르면 죽어."
"주인의 말이 맞다."
"이제 나온다."
그렇게 장장 20분이 지나고서야 폴킨과 엘리사가 천천히 숲을 걸어 나왔다.
손에는 내가 향수를 묻혀놓은 오크 챔피언의 머리통이 들려있었다.
기어코 향수를 추적해서 끝을 봤다는 증거다.
나는 조용히 수신호를 보냈다.
\[기습. 준비.]
폴킨과 엘리사의 모습은 몰골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할 정도로 구겨져있었다.
폴킨의 로브는 군데군데 찢어져있었고, 엘리사는 왼팔에 흐르는 피를 보아하니 제대로 된 전투가 불가능해 보였다.
\[여자. 레이나. 라분. 기습. 나. 남자. 기습.]
레이나와 라분이 내 등을 두드리며 알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내 손가락이 하나씩 접히고.
"흡!"
내 기습은 폴킨의 방어 마법에 간단하게 가로막혔다.
하지만 라분과 레이나의 기습은 유효했다.
레이나의 빠른 검을 가까스로 받아낸 엘리사였지만 라분의 몸통 박치기를 흘려내지는 못했다.
허리가 정확히 반으로 접혀 날아가 쇠나무에 박혀 쓰러지는 엘리사.
더 볼 것도 없이 전투 불가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마지막으로 남은 폴킨을 둘러쌌다.
"하."
폴킨은 눈을 부릅뜨며 모든 광경을 바라볼 뿐이다.
"하하."
그러더니 이내 실성한 사람처럼 웃기 시작한다.
"하하핫! 하하하하!"
볼에 난 깊은 상처가 히어로 3마리와의 전투가 결코 쉽지 않았음을 방증했다.
하지만 아직도 마법사의 눈은 형형했다.
"이봐, 루카스."
"⋯⋯."
"너. 대체 뭐야?"
"개수작 부리지 마."
검염을 일으킨 우리들이 쉴 새 없이 폴킨의 방어 마법을 두드렸다.
우리 세 명의 공격으로도 방어 마법을 단기간에 뚫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검이 점점 깊숙이 박히고 있다.
손에 든 붉은 오크 챔피언의 머리를 던진 폴킨이 지팡이를 들어 마나를 내뿜었다.
"향수는 어떻게 알았지? 그것보다도, 어제저녁까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네가 어떻게 이런 계획을 세울 수 있지? 어? 가장 완벽한 수만 골랐다고?"
"말이 많아. 빨리 죽어줬으면 좋겠는데."
"닥치고 대답해!"
폴킨이 지팡이를 들고 내게 겨눴다.
하지만 기백이 가득한 위협에도 불구하고 폴킨의 지팡이에서는 충분히 검으로 받아칠 수 있는 자잘한 마법만 나올 뿐, 반드시 피해야 할 강력한 마법이 뿜어져 나오지는 않았다.
나는 덤덤하게 칼질을 계속하며 말했다.
"이 방어 마법. 다른 복잡한 마법과 동시에 사용하지 못하지?"
"⋯⋯."
"제대로 공격하려면 방어 마법을 해제해야 되는데, 나머지 둘에게 한 칼씩은 맞을 각오를 해야 할 거야."
"죽여버린다. 반드시 죽여버린다. 루카스."
"부디 성공하기를. 전위 없는 마법사가 더 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레이나가 타이밍 좋게 던진 단검이 부들부들 떨고 있던 엘리사의 목을 찔렀다.
이미 죽어가고 있던 엘리사의 움직임이 이윽고 완전히 멈췄다.
그 모습을 악귀 같은 얼굴로 바라보던 폴킨이 천천히 움직여 앞으로 나아갔다.
우리는 방어 마법에 밀려 자리를 비켜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이동속도는 현저하게 느렸다.
걷는 속도의 절반 정도.
근방의 붉은 오크는 폴킨에 의해 전부 전멸했다.
앞으로 10분은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를 수 있겠다.
폴킨은 방어 마법을 전개하며 이런저런 출력 낮은 마법을 시도했지만 우리들에게 생채기만 낼 뿐, 제대로 된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라분. 레이나. 너무 힘쓰지 마."
"네."
"음."
한참을 불안해하던 폴킨이 우리가 페이스를 조절하는 것을 보더니 곧 안정을 되찾았다.
"그런 식으로 내 마나를 다 소모시킬 수 있을 것 같나? 네 체력이 먼저 바닥나게 될걸?"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
일단 폴킨은 방어 마법을 계속해서 유지해 줘야 한다.
마나를 회복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흡!"
10분이 지나자 내 몸에서 굵은 땀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방어 마법이 점차 약해지는 만큼 내 몸도 부들부들 떨려오고 있었다.
"하하하! 나는 아직 너끈하니까 계속해 봐 이새끼야!"
방어 마법을 절반 정도 벗겨내자 내 체력이 완전히 바닥났다.
내가 미끄러지며 뒤로 나자빠지자 레이나와 라분이 뒤를 이어 폴킨을 전력으로 공격했다.
그동안의 결과로 추정해보건대, 이대로 가면 대략 80%의 방어 마법을 벗겨낼 수 있을 것 같다.
이대로 가면 말이다.
우리의 전력을 빠르게 계산한 폴킨이 기세등등해졌다.
"탱커 새끼는 사지를 먼저 잘라야겠어. 불로 지져서 금방 죽지도 못하게 만들어줄게. 루카스. 너는 두 눈알부터 뽑자. 혓바닥은 죽을 때까지 뽑지 않을 테니까 안심하고, 여자. 너는 우선 기절부터 시킬 거야. 나랑 재미 좀 보자고. 기대해."
"시끄러워."
나는 옷을 걷어 이번에 콜드릭 포인트에서 얻은 팔찌를 매만졌다.
'회복.'
팔찌에서 하얀 빛이 뿜어져 나와 내 몸을 감쌌고, 이내 소진되었던 내 체력이 완전히 회복되었다.
"미친!"
그 잠깐의 틈을 노려 폴킨의 방어 마법이 해제되었다.
레이나와 라분의 공격의 틈을 정확하게 잡아낸 회심의 한 수였다.
폴킨의 지팡이가 반원을 그리며 돌았다.
눈으로 좇을 수조차 없을 만큼 빠르지만, 이미 이 마법에 대해 알고 있다면 피해 내지 못할 것도 없다.
"절멸."
지팡이가 그려낸 원에서 비롯된 빛이 전방을 그대로 꿰뚫었다.
그 광선에 걸린 건 내 갑옷의 일부뿐이었다.
"!"
레이나와 라분의 검이 각각 폴킨의 어깨와 팔에 틀어박혔다.
"윽!"
폴킨이 다시 급하게 방어 마법을 전개했다.
하지만 이미 입은 부상이 치유되는 것은 아니었다.
검의 폭과 같선으로 이루어진 구멍에서 피가 샘솟아 오른다.
"으아아아!"
"시끄럽네."
폴킨이 피를 쏟아내며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나는 완전히 회복된 몸으로 검염을 줄기줄기 뿜어내며 폴킨의 방어 마법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쾅!
-쾅!
압도적인 공격에 방어 마법이 점차 찌그러졌다.
이윽고.
-콰직!
무언가 움푹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자 폴킨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들어 올리는 두 손이 피범벅이다.
"잠깐! 잠깐! 이야기를 하자. 어? 씨발! 생각해봐. 내가 너한테 한 짓이 뭐가 있는데! 어? 우리 탐험 잘 하고 있었잖아. 왜 갑자기 뒤통수를 쳐서 내 노예 새끼들 죽이고! 어?"
나는 어떠한 말에 대꾸도 하지 않으며 방어 마법에 검을 내리쳤다.
폴킨의 몸이 덜덜 떨리고, 지팡이에서 마나를 쥐어짜내기 시작했다.
지팡이가 빛나고 다시 견고해진 마법은 나의 내려치기 2번에 다시 찌그러졌다.
마법사가 다시 다급해졌다.
"야! 뭐라고 말 좀 해봐! 어?"
내가 대화의 의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폴킨의 말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나는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직전 검을 멈췄다.
폴킨이 내게 집중하며 지팡이를 들어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어 마법이 깨지자마자 나를 공격한다면 꽤 위험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
레이나와 라분이 동시에 내지른 찌르기가 폴킨의 방어 마법을 그대로 뚫어냈다.
둘의 공격이 폴킨의 등과 가슴을 부드럽게 가르고 박힌다.
"파멸. 커헉."
기어코 완성한 마법이 나를 노렸지만, 나는 마법을 피하는 데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기에 팔이 살짝 베이는 선으로 피해를 최소화했다.
폴킨이 비틀거리다 힘을 잃고 내 앞에 쓰러졌다.
"씨, 씨발. 끄르륵."
레이나의 검이 폴킨의 목을 찌르는 것으로 끝이었다.
무한 회귀가 없었다면 결코 이뤄낼 수 없었을 일이다.
강력한 마법사가 결국 내 앞에 그 무거운 무릎을 꿇었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108
마법사 폴킨. 놈을 살린다는 선택지도 있었다.
죽은 마법사보다는 산 마법사가 더 쓸모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런 생각은 오로지 생각으로만 남기기로 했다.
녀석을 살릴 경우 완벽하게 제어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녀석을 제어하기 위해 무한 회귀를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내 무한 회귀는 결과를 위해 써야 한다. 결코 승리가 확정된 체스판을 뒤집어서는 안 된다.
"빨리 정리하자. 4분 거리에 오크들이 오고 있어."
레이나도 라분도 곳곳에 생채기가 가득했다.
폴킨은 방어 마법 안에서 강력한 마법을 쓰지는 못했지만 자잘한 마법들은 쓸 수 있었다.
덕분에 우리들은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레이나. 엘리사의 시체를 정리해. 충분히 쓸만한 것들이 있을 거야."
"네."
나와 라분은 폴킨의 시체를 조심스럽게 뒤졌다.
그래봤자 근처에 던져져있던 배낭 안에 몸속의 소지품들을 전부 욱여넣는 정도였지만.
서둘렀음에도 도망가기 직전에는 붉은 오크들과의 거리가 고작 1분 차이로 좁혀져있었다.
만약 쇠나무 숲이 아닌 평지였다면 서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금만 더 힘내자."
"네!"
피곤을 숨기며 애써 씩씩하게 다가오는 레이나.
나는 레이나의 머리를 툭 쳐준 뒤 앞서나갔다.
감지 능력의 덕을 톡톡히 봐 쉴만한 장소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우리는 얼른 바위틈에 짐을 풀고 몸의 상처들을 살폈다.
다행히도 모두 경상을 넘어서는 부상은 없었다.
"후. 늘어지게 쉬고 싶지만."
"마무리를 해야겠네요."
"그래. 펼쳐보자."
먼저 엘리사의 배낭 속 물건들을 하나씩 꺼냈다.
"그나저나 폴킨은 왜 우리를 죽이려고 한 걸까요?"
"라분도. 궁금하다."
녀석들은 직접적인 증거가 부족함에도 내 말을 전적으로 신뢰해 주고 있었다.
서로가 당연하다고 여겼기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지만.
"의도는 확실하지만 동기는 확실하지 않아. 여기에 그 답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만약 바위산에서 폴킨과 헤어졌더라도 나는 폴킨을 전혀 의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살아돌아오든, 돌아오지 않든 그냥 지나가는 인연이라고 생각했겠지.
그렇다면 왜 폴킨은 굳이 우리를 죽이려고 한 걸까?
엘리사의 배낭에서는 별다른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물통 크기의 병에 담겨있는 검붉은색 액체.
노예들이 마시고 검염을 뿜어냈던 그 불길한 액체다.
"이건 뭘까요? 와인?은 아닌 것 같고."
"냄새도 맡지마. 우선 미믹 주머니에 넣어둬."
"이건 냄비. 이건 돈주머니다."
주머니가 두둑해 열어보니 은화가 아니라 모두 금화다.
대충 봐도 30골드는 되어 보인다.
나는 주머니의 묵직함과 위화감을 함께 느꼈다.
"미궁에서는 쓸 일도 없는 현금을 이렇게나 많이 가지고 있다고? 무겁기만 할 텐데?"
"그러게요. 불필요한 짐을 늘리는 바보는 없죠. 특히 마법사가 꾸리는 파티라면 효율을 생각하지 못했을 리 없잖아요."
"어째서일까?"
폴킨 파티는 탐험을 진행하기 전까지만 해도 콜드릭 포인트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콜드릭 포인트에서 돈을 쓸 일은 전혀 없다.
여러가지 가능성이 떠오르지만 지금은 억측일 뿐이다.
우리는 필요한 물건들만 추려 챙겼다.
다음은 폴킨의 배낭이다.
열자마자 보이는 것은 내가 챙긴 폴킨의 마법 지팡이다.
이건 일단 미믹 주머니에 보관해야겠다.
다음으로는 폴킨의 세 노예의 정보가 담긴 문서다.
내게 배낭을 맡기고 문서를 읽던 레이나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리더?"
"어? 왜?"
"노예들, 구매한지 10일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요?"
"정말?"
보아하니 정말 구매 확정일이 전부 보름 전이었다.
10일. 대충 따지자면⋯⋯
"우리가 폴킨을 콜드릭 포인트로 안내하기로 결정했을 때와 대충 비슷해."
"리더 말씀이 맞다면 폴킨은 탐험이 확정되자마자 노예를 산 셈이네요."
노예들의 이력을 읽어보니 모두 미궁 5~7층의 탐험 경험이 있는 탐험가 출신이기는 하다.
하지만 미궁 11층의 탐험 경험은 전혀 없었다.
그 말은 이들은 미궁 11층의 과제를 완수하지 않는 이상 미궁을 벗어날 수 없었다는 말이다.
"폴킨이 노예들을 돌봐줬을 것 같지도 않도."
"단순히 불침번 용이었겠어."
"필요가 없어지면. 죽였을 것. 같다."
"그래."
다음으로 발견된 것은 검은색 상자였다.
확인해 보니 아주 조그마한 공간의 미믹 주머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미궁 10층의 보상인 미믹 주머니와는 크기부터 다르다.
대충 느껴보기에는 고작 커다란 서랍 하나 정도.
하지만 그 안에 있는 것들은 지금까지의 것들과 질적으로 달랐다.
먼저.
"금괴?"
내가 꺼내든 것을 본 레이나와 라분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꺼낸 금괴는 총 4개. 개당 2kg 정도 되는 금괴가 4개다.
"미쳤군."
다음으로 꺼낸 것은 유리병에 담긴 액체였다.
뚜껑의 틈으로 새어 나오는 마나만 읽어도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구트란의 향수야."
"정말요? 이 정도의 용량이?"
포션병 하나를 가득 채운 구트란의 향수.
이건 미궁 사무소에 적당히 비싼 값에 팔아먹을 수 있었다.
다음으로 꺼낸 것은 두꺼운 가죽을 표지로 정성스럽게 엮은 책 여러 권이다.
겉에 적힌 문구들이 죄다 필기체의 극한이라 읽는 게 쉽지가 않다.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레이나도 애를 먹을 정도다.
그래도 아예 포기한 나와 라분과는 다르게 결국 읽어내기는 한다.
"마법의 기초? 저자. 메이슨 슈왈트."
"마법?"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마법서라고? 이 8권의 책이?
생각해 보니 마법사가 마법서를 들고 있다는 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일단 넣어두자."
이건 라파에게 넘겨서 처분하도록 하자.
장물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으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물건이다.
다음은 미믹 주머니에서 나온 물건으로는 마지막이다.
"구슬?"
"아티팩트 같아요."
"기운이. 차갑다."
라분의 말대로였다.
우리 파티가 큰맘 먹고 마련한 발열석이 열을 낸다면, 이 구슬은 엄청난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다.
나는 조심스럽게 내 마나를 구슬 안으로 집어넣어 봤다.
[사용하겠습니까?]
응? 뭘?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둘을 바라보니 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듯했다.
그렇다면 이 물건은 라비팩트 확정이다.
"라비팩트야. 뭘 사용할 거냐고 물어보는데?"
"사용? 팔찌 같은 것일까요?"
"전혀 모르겠어. 이렇게 차가운 걸 볼 때 회복이나 보조적인 용도는 아닐 것 같아."
"이런 라비팩트가 사용자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한 번 사용해 보시는 것도?"
"그럴까?"
"라분. 사용해 보고 싶다."
슬쩍 보니 라분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그러던지."
라분에게 구슬을 넘기자 곧잘 마나를 불어넣는다.
"사용."
분명 사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음에도 구슬에서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한다.
"뭐해?"
"사용 대상을. 지정하라고 한다."
"사용 대상?"
설마. 공격형 마법인가?
"라분! 나가서 최대한 멀리에다가 사용해."
"알았다."
라분이 바위틈에서 빠져나와 숲 안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되겠다."
이내 내 감지 능력에 구슬이 라분의 마나를 쭉 빨아들이는 것이 잡혔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콰과과과과!
구슬에게서 비롯된 얼음이 순식간에 자라나기 시작해 라분이 대상으로 삼았을 만한 나무까지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이내 얼음이 나무에 닿았다.
의외로 얼음은 부드럽게 나무에 닿기만 할 뿐, 나무를 손상시키지는 않았다.
마치 얼음으로 만들어낸 길을 보는 것 같다.
두께를 보아하니 얼음 위에서 움직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겠다.
"잠깐. 얼음 위에서 움직인다고?"
이미 라분과 레이나는 얼음 위에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이 라비팩트의 원래 용도에 대해 추측하고 있었다.
"목표로 한 곳까지 두꺼운 얼음이 뻗어나간다. 얼음은 위에서 움직여도 문제없을 정도로 두껍다."
콜드릭 포인트에서, 마그마가 흐르는 공간이 있었다.
마치 절벽에 난 틈과 같은 곳 반대편에는 분명 공간이 있었다.
절대적인 거리는 의외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직선거리로 30초 남짓.
지금 이 얼음이 이어준 거리와 비슷하다.
"이거. 콜드릭 포인트에 다시 가봐야겠는데?"
나는 얼음 위에서 놀고 있는 라분과 레이나를 불렀다.
"얌마! 자리 옮겨야 돼! 주변 몬스터들 다 다가오고 있어!"
흠칫한 둘이 얼른 얼음덩어리에서 내려왔다.
아닌 게 아니라 상당히 멀리서도 보이는 두껍고 거대한 얼음 구조물에 주변 모든 몬스터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근처에서 활동하던 다른 파티들의 기척까지 감지되었다.
우리는 그야말로 꽁지가 빠져라 도망갔다.
다시 찾아낸 안전한 장소에서 라분이 내게 구슬을 건네주었다.
"아. 주인. 이 구슬. 사용 횟수가 정해져 있다."
"뭐? 그 중요한 걸 왜 지금 말해. 몇 번 남았어?"
"총 두 번. 남았다고 했다."
"다행이네."
"?"
"?"
두 번이면 마그마 위에 길을 만들고 왕복할 수 있겠다.
내 생각을 말하자 레아나와 라분이 그럴듯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폴킨의 목적이. 그곳의 탐사일 수도."
"가능성이 높아."
"용암 건너편의 통로는 그냥 그림의 빵이라고 생각하고 넘기려고 했는데 이렇게 기회가 오네요."
"최대한 빨리 넘어가 보자고."
이후로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했다.
새벽부터 너무 많은 힘을 썼고, 그 와중에 입은 자잘한 상처도 회복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틀 차의 밤을 보내고 있었을 때였다.
발열석 주변에 모여앉아 육포를 뜯고 있는데, 우리 근처로 접근하는 기척이 잡혔다.
"사람이다. 7명. 접근하고 있어."
내 말을 듣자마자 무기의 위치를 찾는 둘.
"야만족이 아니라 확실히 사람이죠?"
"어. 이제 구분할 수 있어."
"정확히 이쪽으로?"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라분과 레이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궁에서는 몬스터보다 더 조심해야 할 것이 같은 탐험가다.
특히 미궁 11층에서는 탐험가끼리의 충돌이 일어날 경우 목격자조차도 없을 가능성이 높다.
전멸만 시킬 수 있다면 완전범죄가 가능하다.
우리들이 폴킨 파티를 죽여버린 것처럼.
"여성 둘, 남성 다섯. 전형적인 탐험 파티야."
무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라분과 레이나는 바위 뒤에서 기다리고 내가 전면으로 나섰다.
이틀의 휴식을 취했기에 컨디션은 최상이라는 점이 위안 삼을 만하다.
내 존재를 마나로 포착한 도적이 흠칫 놀라며 발걸음을 멈췄다.
대략 2분 떨어진 거리에서 발견했다.
나름 실력이 뛰어난 도적이다.
나는 일부러 마나를 뿜어내며 이미 내가 녀석의 존재를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알렸다.
도적은 누군가와 이야기 후 천천히 우리를 향해 접근했다.
"3위계 여섯, 2위계 하나. 2위계는 짐꾼 같아. 발걸음이 가장 깊어. 후위에 위치하고 있어."
2위계를 제외한다면 상대는 여섯. 여전히 절망적인 격차임은 변함없다.
곧 쇠나무 뒤에서 도적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이제는 말이 통하는 거리다.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어이! 경고를 무시하고 굳이 다가온 이유가 뭐지?"
"죄송합니다! 야만족인 줄 알았어요!"
"?"
도적의 뒤로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중년 남성이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일행의 리더인 듯싶었다.
"거참. 미안하게 됐군. 과제가 아주 지랄맞아서 말이지."
"야만족 사냥이라도 걸린 모양입니다?"
"딱 맞아. 실례했네. 그러면 이만 물러가지."
다른 의도는 전혀 없어 보이고. 이 정도면 나름 잘 풀린 것 같다.
그렇게 서로 갈 길 가려던 때였다.
나를 유심히 보던 도적이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치며 말했다.
"어? 나 저 사람 알아요."
"응?"
"?"
"아카데미에서 영입하려고 왔었어요. 리더는 기억 안 나세요?"
"전혀."
"⋯⋯."
우리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레이나가 고개를 빼꼼 내밀어 도적의 얼굴을 확인했다.
"트레비스?"
"레이나!"
도적이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레이나도 방방 뛰었다.
이 만남을 기점으로 서로 간에 흐르던 긴장감이 탁하고 풀렸다.
내가 먼저 다가가 리더에게 손을 내밀었다.
"루카스입니다."
"펠튼일세."
"잠깐 쉬셨다 가시죠. 애들 화포도 풀 겸."
"고맙네. 마침 쉴 장소를 찾고 있었거든."
폴킨과의 인연은 죽음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펠튼과의 인연은 어떻게 될까?
미궁은 정말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는 순간이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109
펠튼 일행과 우리는 미궁에서의 시간 감각이 전혀 달랐다.
펠튼은 베테랑 탐험가답게 잠깐 우리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상황을 알아냈다.
"숙영할 준비를 하고 있었군. 우리는 이제 막 탐험을 시작한 시간인데."
"우리 쪽이 시간이 꼬였을 가능성이 높겠습니다. 최근 조금 바쁜 일이 있어서."
이렇게 탐험을 진행하다 보면 다른 파티 간의 시간이 어긋나는 경우가 많다.
낮과 밤의 구분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미궁의 특성 때문이다.
아무래도 폴킨과의 전투로 신체 리듬이 크게 망가진 우리가 원인인듯하다.
나와 펠튼은 통성명을 하는 일행들과 조금 떨어져 주변을 산책했다.
"야만족은 제가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그런가? 이번이 두 번째 탐험이라고 들었는데."
"첫 번째 탐험에서 꽤 깊숙한 곳으로 이동했죠."
우리는 주변 바위 위에 앉아 파티원들을 바라보았다.
라분은 평소의 무뚝뚝함으로 필요한 말만 하고 있었고, 레이나는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트레비스를 옆에 두고 이것저것 떠들어대고 있었다.
"보아하니, 이번 탐험에서 사람을 죽였나 보군. 피냄새가 나."
"⋯⋯."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정곡을 그대로 찔러오는 펠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공격이었다.
덕분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리고 말았고, 노련한 미궁의 전사에게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답이 되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허리에 찬 검의 위치를 찾았다.
"걱정 말게. 들춰낼 생각은 아니니."
"어떻게 아셨습니까?"
"특성일세. 내게 4위계 동료 없이도 3주 동안 미궁 11층을 탐험할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지. 이번 탐험은 3일 차이기는 하지만."
이미 거짓말은 소용없겠다. 나는 이미 본능에 심어진 대로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무한 회귀를 믿고 있었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죽지 않기 위해서는 죽여야죠. 이번에는 상대가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공감하네."
"누구를 죽였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굳이 알 필요까지 있겠나. 네 특성이 자네는 안전하다고 말해주고 있어. 괜히 파고들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펠튼이 대체 어떠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듣자 하니 상당히 범용성이 높은 특성인 것 같았다.
"불가피한 살인이었습니다. 미궁 사무소에 들러 소명할 계획이었죠."
"그렇게 하게."
나와 펠튼 사이로 잠깐 정적이 일었다.
그 와중에 레이나가 나를 가리키며 뭐라 뭐라 떠벌리는 몸짓을 취했다.
라분을 제외한 모든 파티원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나는 살짝 손을 들어 올려 화답했다.
"미궁 11층을 고작 세 명으로 탐험하다니. 그것도 한 명은 이제 갓 아카데미를 졸업한 풋내기야. 정상이 아니군."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당신도 마찬가지이신 것 같습니다만?"
"이런, 술이 없으니 더 따지고들 수는 없겠어."
"어떻게, 쉬다가 떠나실 겁니까?"
"분위기가 좋은 것 같으니, 한 번 길게 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파티원들을 향해 걸어가면서, 내가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제가 만난 야만족은 바위산에 숨어살고 있었습니다. 바위산 반대편을 중심으로 수색하시면 흔적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고맙네. 이미 알려진 서식처는 너무 깊은 곳에 있어 엄두를 못 냈거든."
"별말씀을."
레이나가 동창인 트레비스를 내게 소개해줬다.
졸업생 중 가장 뛰어난 로그라고 한다. 감지 능력으로 관찰했을 때도 상당히 강력한 마나를 가지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트레비스라고 합니다."
"그래. 루카스다."
여기서 나와 레이나가 동갑이라는 사실은 잠시 넘어가기로 하자.
상당히 훈훈한 분위기에서 펠튼의 파티는 여기서 야영을 하고, 우리의 수면 시간을 지켜주기로 이야기가 되었다.
나야 야만족에 대한 정보로 보호비를 치렀다고 생각했기에 이 호의를 선선히 받아들였다.
안절부절못해 하던 레이나도 내가 귀띔을 해주자 안정되었다.
"괜찮아. 믿고 자자."
그렇게 우리는 미궁 11층에서의 가장 편안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
펠튼 일행과는 바위산 입구까지의 길이 같아 몇 시간 동안 동행할 수 있었다.
우리를 만나 하루 종일 쉬었기에 펠튼 일행의 컨디션은 대체로 좋았다.
도중에 두 번의 전투가 있었지만 챔피언이 포함되지 않은 붉은 오크의 습격이었기에 무난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파티의 로그인 트레비스가 주변을 주의 깊게 관찰한 뒤에 결론을 내렸다.
"최근 붉은 오크의 영역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어요. 실력자가 오크들을 대거 학살한 게 분명합니다."
나는 속으로 뜨끔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트레비스가 말하는 것은 내가 폴킨을 죽이기 위해 동원한 오크들의 죽음이 확실했다.
아카데미 로그 1등이라더니, 상당히 예리한 관찰력과 분석력을 가지고 있었다.
"영역 변동은 진행 중인 건가?"
"네. 아무래도 길어야 3일, 짧으면 이틀 전에 사건이 발생한 것 같군요. 그러고 보니 3일 전에 느껴졌던 광대한 마나의 분출이 원인일 수 있겠습니다."
"마법사겠어. 당분간 이 근방에서는 몸을 사려야겠어. 어차피 바위산을 돌아 이동할 거니까, 바위산 너머를 탐사한 뒤에 돌아오면 안정되어 있겠지."
"그렇겠네요."
펠튼과 트레비스의 대화 외에도 다른 파티원들이 한 마디씩 거들어 의견을 말했다.
우리는 입을 반쯤 벌리며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나. 다른 파티. 다 이런가?"
"아마도요? 저도 본격적인 탐험은 리더랑 다니는 게 처음이라서."
"⋯⋯."
펠튼을 중심으로 모든 파티원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탐험 방향을 결정하는 과정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체계적이었다.
반면 우리는?
"우리야 리더가 이쪽으로 가자! 하면 가고. 저쪽으로 가자! 하면 가죠."
"음. 주인의 말이. 다 옳으니까."
"그렇긴 하죠. 이번에도 엄청났고."
"⋯⋯."
트레비스와 펠튼이 내 파티에 있었으면 적어도 50번은 덜 죽었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저런 방식에도 분명 단점은 있었다.
"결정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그렇기는 하네요. 최종적인 결정까지 대충 2분 걸렸나? 우리는 1초면 끝이잖아요. 리더가 정하니까."
"급박한 상황에서는 쓸 수 없는 방법이야."
바위산 입구에 도착하자 우리와 펠튼의 파티는 깔끔하게 헤어져 서로 갈 길을 갔다.
펠튼은 바위산에 오르기보다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빙 돌아서 간다는 입장이다.
이미 콜드릭 포인트로의 길을 개척한 우리와는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무운을 비네."
개척을 완료한 길을 다시 이동했기에 이틀 만에 콜드릭 포인트에 다다를 수 있었다.
우리는 이틀 동안 최대한 싸움을 피하며 콜드릭 포인트에서의 행동에 대해 논의를 끝내놓은 상태였다.
"외부 침입 흔적은 없는 것 같아."
"음. 저도 그렇게 보이네요."
"라분은?"
"음. 주인이 없다면. 없는 거다."
"그래."
내 감지 능력을 말 그대로 감지를 잘하는 능력이다.
마나나 마정석에 의한 것이 아닌 흔적이나, 몬스터의 분변, 털 등의 무정물을 감지하지는 못한다.
한때 콜린 등과 함께 다닐 때에는 로그랍시고 행동하기도 했지만 정말 흉내일 뿐이었다.
지금 어떻게든 해보려고 해봤자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애초에 안 하던 짓 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됐고, 내가 보증할게. 안전해. 바로 가자."
"네!"
"음!"
라분과 레이나도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고.
역시 이게 우리 파티에게는 가장 알맞은 방식이다.
그렇게 야만족을 상대했던 네갈레 길로 진입했다. 이때까지 야만족들은 감지되지 않았다.
"오른쪽은 버섯이 있는 공간이고, 직진하면 야만족들의 거처, 왼쪽은 마그마가 흐르는 강이 있는 통로야."
"오른쪽부터. 가자."
"그래."
가운뎃길에는 라분보다는 마나 운용 능력이 좋은 레이나가 남았다.
만약 다른 길에서 누군가가 접근한다는 사실을 알아채면 바로 나와 라분에게 달려오기로 이야기가 되어있었다.
"빠르게 이동하자."
"음."
레이나가 자진해서 남았지만 그래도 떨어져 있는 시간은 최소화하는 것이 좋았다.
우리는 짐을 모두 네갈레 길에 놓아두고 빠른 구보 형식으로 버섯의 길을 돌파했다.
그런데, 길을 걷다 보니 발에 자꾸 버섯들이 채였다.
"뭐야? 왜 이렇게 많아?"
"먹지 않아서. 증식했다."
"그런 거야?"
버섯을 피해서 계속 걸어가는데, 중간 지점부터는 아예 버섯이 통로 전체를 틀어막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 버섯들은 미세한 마나를 뿜어내고 있어 건너편이 제대로 감지되지도 않았다.
"주인. 어떻게 할까?"
"음. 저 너머에 뭐가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그렇다고 위험 요소를 남겨둘 필요는 없었다.
"라분! 돌격!"
"⋯⋯."
"돌격!"
영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은 라분이 자세를 잡고 방패를 내밀며 버섯 군단에게 돌격했다.
"우어어어⋯."
힘 빠진 돌격과 달리 온몸에 마나를 두른 라분의 돌격의 효과는 엄청났다.
두서없이 자라난 버섯들이 라분의 방패 박치기를 이기지 못하고 이리저리 부서지며 휘날렸다.
라분은 어떠한 저항도 없이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음. 좋군."
푹신하게 밟히는 버섯들을 넘어 들어가니 전신에 버섯가루가 붙어있는 라분이 건너편에 서 있었다.
"잘했다."
"⋯."
"보너스 줄게."
"알겠다."
애초에 예상했던 대로 버섯의 길 끝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눈으로 길의 끝을 직접 확인한 뒤에 걸음을 돌렸다.
"오셨어요?"
"바로 갈게."
다음은 야만족들의 서식처가 있는 가운뎃길. 이번에는 상당히 정밀하게 감지 능력을 돌리며 꼼꼼히 탐색을 진행했다.
역시나 반대쪽 출구에 막혀있는 바위도 그대로이고, 거주지 내부에도 생명의 기척은 찾아볼 수 없었다.
"좋아."
가운뎃길로 돌아온 우리는 셋이 뭉쳐 왼쪽길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폴킨에게서 노획한 얼음의 길을 만드는 라비팩트는 레이나가 장착했다.
상상력과 관찰력이 중요하기에 레이나가 적격이었기 때문이다.
라분에게서도 기대를 해볼 여지는 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레이나가 정답이다 싶었다.
'한 번 사용해본 라분과 비교해⋯. 당연히 더 낫겠지.'
이는 라분도 넉넉히 인정한 바다.
그저 굳건히 고개를 끄덕이는 라분. 여기서는 쓸데없이 믿음직하다.
"기회는 왕복 한 번 씩밖에 없으니까 신중하게 해야 해. 안 되면 그대로 끝이야."
"네! 리더! 저만 믿어주세요!"
결의에 찬 표정의 레이나.
만약 레이나가 실패한다면⋯.
'이번에는 마그마에 뛰어들어서 죽어볼까? 가장 다양한 방법으로 죽여보기 신기록을 재갱신해봐?'
나 자신이 생각해 봐도 나는 이제 슬슬 미쳐가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110
다행히 내가 마그마 속으로 뛰어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용."
라비펙트의 발동과 함께 휘몰아치는 미궁의 기운.
평소 다른 라비펙트에서는 느껴본 적이 없는 농도에 레이나의 머리가 휘날릴 정도다.
곧 구슬에서가 뿜어져 나온 냉기가 얼음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그마에서 비롯된 열기로 가득했던 통로가 점차 시원해지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으니 새삼 마법이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엄청난 온도차에서 비롯된 수증기가 통로를 뒤덮기 시작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다.
나는 그동안 무수히 많은 사선을 건너온 자의 직감을 발휘했다.
"얼음 위로 올라타! 지금 바로!"
원래 통로의 안전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올라가려고 했지만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었다.
레이나가 상상력을 발휘해 줬는지 얼음은 계단 모양을 하고 있었다.
라분의 말에 아이디어를 얻어 미리 신발에 자투리 가죽을 얼기설기 엮어 얼음 길을 걷기 쉽게 만들었다.
그 덕분인지 얼음 위를 오르기는 어렵지 않았다.
마침내 얼음 위를 올랐을 때, 우리는 아래에서부터 차오르는 한기와 머리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열기를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더불어 수증기를 벗어나 순식간에 넓어진 시야까지.
"와!"
"감탄하지 말고! 발동은 끝났어?"
"네!"
레이나의 얼음은 정확히 건너편 통로까지 이어져있었다. 약간 위쪽에 있는 아래쪽에 있는 통로라 약간의 경사가 져있다.
얼음길의 형성을 확인함과 동시에.
\-쩌저적.
얼음이 갈라지는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더 볼 것도 없이 소리 질렀다.
"달려!"
"으아아아!"
"우어어어!"
우리는 엎치락뒤치락 얼음을 밟아대며 건너편을 향해 달려갔다.
그래도 얼음의 두께가 충분히 두꺼워 걷는 도중 얼음이 산산조각 나는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마치 굴러떨어지듯 반대편 통로로 달려간 우리는 자연스럽게 몸을 던져 미궁 바닥을 굴렀다.
사실 얼음이 무너지기까지는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지만, 사람 일이 그렇게 쉽게 되지는 않는 법이다.
누가 누구를 밀었다고 할 것도 없이 서로가 서로를 밀어버렸다.
우리는 건너편 미궁 벽에 기대 안전한 땅의 감촉을 느꼈다.
"헉헉."
"헉헉."
"헉헉."
밖에서 계속해서 들려오던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마침내 임계점을 넘었을 때, 엄청난 굉음과 함께 얼음 다리가 무너져내렸다.
시야에서 얼음이 사라지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산산이 부서진 얼음은 마그마의 강에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갔다.
우리는 잠깐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서로를 바라보았다.
뜨거운 열기가 몰아치는 것을 느끼고 그대로 몸을 미궁의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우리는 다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한바탕 웃어젖혔다.
"하, 하하."
"하하하!"
"흐흐."
"리더. 리더 표정을 봤었어야 해요. 얼마나 다급하던지."
"너는 뭐 아닌 줄 알아? 그렇게 치면 라분이 훨씬 더했지!"
"라분. 언제나. 침착하다."
"뻥치고 있네."
아예 눈물까지 닦아낸 레이나다.
"정말. 이 파티에 오기를 잘했어. 대체 누가 미궁에서 이런 경험을 해봤겠어요."
"그건 그래. 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여기까지 오기 위해 대체 몇 개의 목숨이 사용되었는지 안다면 레이나도 저렇게 순수하게 웃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라분과 레이나가 웃게 내버려두었다. 녀석들의 티 없는 웃음은 그동안 쌓여왔던 내 정신적인 피로를 몇 꺼풀은 벗겨내주고 있었으니까.
한참 쉬고 나서야 다시 탐험의 페이스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우선 감지 능력에 잡히는 다른 생명체는 없어."
"최대로 확장해도요?"
"응. 통로가 긴 모양이지."
"라비팩트. 한 번 남았다."
"그래. 다음에는 신중하게 써."
"네. 어떻게 쓸지는 미리 생각해놨어요."
레이나는 다음에 만들 얼음 통로의 구상을 대충 보여주었다.
상당히 상상력이 넘치는 아이디어라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럼 여기서 휴식은 마무리하고, 다시 탐험 시작이다."
탐험을 시작하기 전 우선 벽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왔던 건너편의 벽과 같이,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벽과 천장이다.
하지만 바닥은 매끈한 부분이 군데군데 있었다.
"라파 언니가 말했어요. 미궁은 풍화 작용이 거의 없어서 몇백 년 전의 흔적과 몇 년 전의 흔적도 쉽게 구별할 수 없다고."
"풍화작용?"
"바람이나 비, 눈 등 기상 현상이 자연을 변화시키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사막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나는 매끈한 바닥을 매만졌다.
"이게 얼마나 오래된 흔적인지 모른다는 거지?"
그래도 내 직감으로 최소 몇 년간은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시간은 많다.
우리는 아주 천천히 미지의 장소를 탐험하기 시작했다.
울퉁불퉁하던 길은 점차 나아갈수록 직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벽과 천장도 지능이 있는 존재의 손을 탄 듯 반듯하게 이어지기 시작했고.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딱 맞는 십자 모양의 네 갈래 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응?"
"건너편에 있는 길이랑 모양이 똑같네요?"
"모양뿐만 아니라 폭, 높이까지 쌍둥이처럼 똑같아."
"정말요?"
"어."
야만족 우두머리와 목숨을 건 싸움을 하며 나는 최대한 모든 전장을 이용하고자 했다.
당연히 가장 변수가 많을 중앙의 길에서의 싸움도 염두에 두었다.
그렇게 얻을 수 있었던 정보와 지금 이곳의 정보가 그야말로 동일했다.
"우리가 온 통로가 여기라면."
"건너편은 버섯의 길, 오른쪽은 야만족이 살았던 길, 왼쪽은 계단이 있는 길이겠어."
물론 단순한 추정일 뿐이었다.
결국 탐험을 해봐야 알 수 있는 정보들이다.
"왼쪽 길부터 시계방향으로 탐험해 보자. 내 감지 능력만 너무 믿지 말고, 너희들도 확실하게 경계하면서 이동하도록 해."
"음."
"네."
왼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나아갈수록 점차 길이 정비되기 시작하더니, 이내 벽에 선명한 무늬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손으로 무늬를 쓸어보니 날카로운 무언가로 파낸 것 같다.
"벽을 장식해놓은 것 같네."
"가장 낮은 무늬의 높이는. 딱 제 허리 정도고, 가장 높은 건 리더의 머리 정도네요."
"우리랑 비슷한 키를 가진 종족, 어쩌면 인간일 수도 있고."
"고블린은 아니겠어요."
그렇게 나아가니 통로의 끝에서 꽤 넓은 공간이 나왔다.
옛날, 미궁 저층에서 발견했었던 비밀 통로와는 다르게 사방이 어두컴컴하지 않고 밝아 모든 공간을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이건."
"숙소? 같은데요?"
딱 봐도 침대같이 생긴 가구가 이리저리 뒤집어져 있고, 헤진 천 조각들이 널브러져 있다.
조심스레 다가가 천 조각을 들어 올리니, 내가 집는 힘조차 버티지 못하고 바스러진다.
이런 천들이 그야말로 한 무더기.
쇠나무들은 이곳저곳 산을 이루고 쌓여있다.
"일단 생명체는 아무것도 없어. 흩어져서 수색해보자. 10분 뒤에 모여서 성과를 공유하고, 먼지가 많을 것 같으니까 코랑 입에 뭐라도 좀 둘러."
우리는 폴킨의 배낭에서 노획한 하얀색 천을 머리 뒤로 넘겨 꽉 묶고 탐색을 시작했다.
나는 우선 방의 끝으로 이동한 뒤에 통로 쪽으로 돌아오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쇠나무를 발로 뻥뻥 차며 무슨 다른 물건이 있나 찾아봤지만 이렇다 할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내 감지 능력으로 감지되는 아티팩트도 전혀 없었고.
겨우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정체불명의 그림과 글자가 그려진 종이 한 조각이었다.
그나마도 조심히 다루지 않으면 그대로 부서질 정도로 약했다.
종이를 고이 접어 돌아가니 라분과 레이나가 서로 가져온 물건을 보여주고 있었다.
레이나는 넝마나 다름없는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보세요. 옷이에요. 셔츠랑 속옷."
"오. 진짜네?"
레이나의 발견은 나쁘지 않았다. 옷을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는 정보가 많았기 때문이다.
"크기는 딱 성인 라분 씨한테 맞는 정도에요. 소재는 가죽인 것 같고."
"야만족은 옷을 거의 입고 있지 않으니까, 인간일 확률이 더 높아."
여기서 폴킨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내게서 야만족이 출현하는 장소를 들었을 때 보인 폴킨의 표정과 감정, 더불어 내가 설명하지 않은 마그마의 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얼음 길을 만드는 라비펙트를 준비했다.
이쯤 되면 야만족의 틈에서 마법 수련을 하기 위해 이곳에 간다는 폴킨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건 확실히 알겠다.
'사실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기는 했어.'
미궁 밖에도 뛰어난 마법사가 얼마나 많은데 굳이 미궁 11층까지 내려와서 목숨을 걸겠나.
그것도 히어로 세 마리와 챔피언 다수를 단신으로 학살할 수 있는 괴물 같은 실력을 가진 놈이.
폴킨의 목적지가 이곳인 것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곳에는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숨겨진 무언가가 있었다.
진득하게 탐험해 보자.
라분은 돌조각을 하나 들고 왔다.
"화살촉이다."
"음. 진짜네."
"여기에서 화살을 쏠 일이 있었을까요?"
"뭐, 바깥으로 향하는 통로가 있었을지도. 아니면 마그마의 길을 통과하는 놈들만의 방법이 있었을 수도 있고."
돌조각과 옷은 들고 갈 가치는 없었다.
내가 가져온 종이도 당장 해석할 수도 없었고.
일단 종이만 미믹 주머니에 넣고 이곳에서의 탐험을 마무리 짓기로 했다.
"뒤지면 뭐라도 더 나오겠지만 이 쓰레기장을 제대로 탐험하려면 한세월이야. 차라리 다른 장소를 먼저 탐험하고, 정 성과가 없으면 다시 탐험하자."
그래도 한 바퀴 돌아보는데, 한구석에는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머리 높이에서 미궁벽을 따라 아래로 흐르는 물은 마그마의 영향인지 따뜻했다.
손으로 물을 한주먹 떠 봤다.
"따뜻하고, 깨끗하네."
"먹어도 될것 같아요."
"마실 물은 넉넉히 챙겨왔으니까 먹지는 말자."
"이 정도 온도라면 간단하게 씻을 수도 있을 것 같고. 저거는."
"음? 화장실이다."
딱 생긴 것이 화장실 모양이었다.
레이나가 반색했다.
"와. 씻을 수도 있는데, 화장실까지? 리더. 우리 하루만 자고 갈까요?"
"좋지. 하지만 탐험 먼저야."
본격적인 탐험을 개시한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휴식을 취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다.
우리는 바로 '숙소'로 지정한 장소를 벗어나 '숙소의 길'을 걸었다.
다시 갈림길에 도달한 뒤, 이번에는 건너편 쪽에서는 '버섯의 길'로 이름 지은 길로 걸어나갔다.
이 길은 상당히 습하기는 했지만 역시 생명체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길이 무너져있네."
"오래전에 무너져 있었던 것 같아요."
나는 발치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방금 막 부서진 것 같이 날카로운 돌멩이다.
잠깐 돌을 바라보고는 이내 돌무더기에 집어던졌다.
"돌아가자."
뭐, 세 개의 길 중에 하나는 꽝일 수도 있는 법이다.
언제나 정답만을 고를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마지막 길로 향했다.
역시나 어떠한 생명체의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길의 끝에 들어서기 전부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감지 능력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생명체는 아니야. 하지만 '무언가'가 있어."
"무언가?"
"어. 엄청난 기운이야. 마치 집채만 한 마정석이 있는 것 같아."
"⋯⋯."
"조심해."
그렇게 천천히 도달한 길의 끝에는 반대편의 '숙소'와 크기가 비슷한 공간이 있었다.
그 중앙에는 내 감지 능력을 완전히 덮어버렸던 물체가 있었다.
"뭐지?"
커다랗고 반듯한 모양의 바위다.
스스로 빛을 발하는, 알 수 없는 문자가 새겨진 비석이 우리들의 앞에 세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