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 40-50

미궁의 무한회귀자 40

카리나의 집은 미궁 도시 칼리움의 상업 지구와 미궁 사무소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혼자 살기에는 넓고, 가족이 살기에는 좁은 흔한 집이다.

'천 골드는 넘겠군.'

나이가 60은 확실히 넘어 보이는 쭈글쭈글한 가정부가 우리의 방문을 반겼다.

"아가씨. 그때 말씀하셨던 손님이시군요."

"응. 홍차 세 잔 부탁해."

"알겠습니다. 모쪼록 우리 아가씨, 잘 부탁드립니다."

얼굴과 말투에서 느껴지는 세월의 무게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인다.

하수구 인생인 나는 60 넘은 노인을 어려워하는 이상한 습관이 생겼다.

하수구에서는 60살은커녕 50살 넘기는 사람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60살 넘어 하수구에서 살아남을 능력이 있으면 보통 하수구를 벗어나기 마련이니까.

"손님은 우선 씻으셔야 할 것 같네요. 목욕물부터 데워놓을까요?"

"됐어. 곧 땀도 좀 빼야 하니까. 조금 뒤에 부탁할게 뒤뜰은 비어있지?"

"아무렴요."

"그냥 응접실로 안내해."

라분은 처음 와보는 세련된 집에 눈을 어디로 둬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누가 촌놈 아니랄까 봐."

"주인도 똑같다."

"시끄러."

푹신한 소파에 앉아 홍차를 홀짝이고 있으니 도복으로 갈아입은 카리나가 와서 앉았다.

머리를 꽉 올려 묶은 모습이 꽤나 새롭다.

"더 잴 것도 없이 본론으로 들어가지. 루카스."

"네."

"내가 익힌 호흡법은, 작열염법(灼熱炎法)이야. 헤리슨 가문에서 내려오는 비전 호흡법이지."

"네, 네?"

갑자기 본인의 호흡법을 밝혀오는 카리나.

"너도 곧 알려줄 텐데. 내 호흡법도 공유해야 하는 게 맞지."

"아뇨, 그 대가는 대련으로⋯⋯."

"대련은 이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대가로 생각할게."

이제 이 여자를 대충 알겠다. 일단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다.

그나저나 헤리슨 가문? 가문에서 내려오는 호흡법이 있다면, 혹시 귀족인가?

일단 의문을 접어두고 얼른 말을 이었다.

"그러면 이제 제가 익힌 호흡법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드릴 차례군요."

"그래."

"호흡법의 이름은 학즉사법입니다."

"학즉사법⋯. 학즉사법? 이름이?"

"네. 익히면 죽는 호흡법. 학즉사법입니다."

"이름이 그게 뭐야?"

사실 라분에게도 호흡법의 이름을 알려주기는 처음이었다.

라분의 반응도 카리나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라분. 아직 안 죽었다."

"왜 죽냐."

나는 학즉사법의 서문을 봤던 기억을 살려 답했다.

[⋯⋯그러한 관점을 적용하면 내가 지금 서술하는 호흡법 또한 능히 마공이라고 칭할 수 있다. 이 호흡법을 수련할 시, 반드시 죽기 때문이다.]

"익히다 보면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고 하면서 가르쳐 주더군요. 스승이 누구인지는 밝힐 수 없습니다."

"오호. 그래. 이름을 알았으니 됐어."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나는 그 호흡법을 익힌 남자를, 내 스승을 찾고 있어. 호흡법의 이름을 알려준 것으로 충분해. 너에게 해가 되는 일을 없게 할테니까 안심하고."

"⋯아직 그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만."

"엘론. 검은 머리의 검사. 외팔이야.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40대가 됐을 거다. 그 이상은 나도 아는 게 없어."

"알겠습니다."

엘론. 학즉사법의 또다른 수련자.

더군다나 외팔이란다.

나는 학즉사법 2성을 익힐 때 들었던 머릿속 지식의 경고를 기억해 냈다.

[자신감이 넘치는 외팔이를 조심하라. 학즉사법의 2성을 습득한 자일 가능성이 높다.]

아무래도 엘론이라는 놈은 학즉사법 2성을 달성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가능하다면 한 번 만나 학즉사법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해보고 싶다.

물론 이 미친 호흡법을 수련한 서로의 정신이 멀쩡한지부터 확인해야겠지만.

이제 카리나와는 마지막 거래 내용이 남았다.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빨리 나와 검을 나누고 싶나 보지?"

"그렇습니다. 반드시 꺾고 싶은 강적을 만났기에."

"누구지?"

"아직은 정체를 말할 수 없습니다."

내 강적이 미노타우로스라는 사실을 밝힐 수는 없다.

트롤이면 몰라도 미노타우로스가 미궁 4층에 출현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미궁 4층 탐험가로 알려져 있다.

괜히 호승심에 말을 꺼냈다가는 이야기만 복잡해질 뿐이다.

"그러면 대련은 라분부터 부탁드리죠."

라분이 발을 살짝 굴렀다.

"라분. 최선을 다한다."

"좋아. 많이 얻어 가자고."

사용인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뒤뜰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적당한 거리를 벌리고 카리나와 라분이 마주보며 섰다.

가느다랗지만 기다란 검을 뽑아올리는 4위계의 검사.

감지 능력을 발동한 내게는 그녀가 마치 불덩어리처럼 느껴졌다.

카리나에 비하면 라분의 마나는 그저 횃불 수준이다.

"원할 때 와라."

"우어어어!"

라분이 우렁찬 포효와는 다르게 신중히 카리나에게 접근했다.

방패와 검으로 무장한 라분과는 다르게 카리나의 무기는 꽤 가느다란 칼.

4위계의 상징인 심상 구현은 사용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결국 본인의 신체능력으로 싸운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라분에게는 나름 이점이 있는 셈이다.

라분이 천천히, 하지만 묵직하게 카리나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격돌. 잠깐의 부딪힘 끝에 두 사람이 붙었다 떨어졌다.

하지만 대련의 결과는 이미 나와있었다.

라분의 목 정중앙에서 피가 한 방울 샘솟기 시작한 것이다.

"!"

라분이 피를 닦아내자 이내 뚝 하고 멎는다.

반면 라분의 돌격을 온몸으로 받아냈어야 할 카리나는 애초에 공격에 당하지 않았다.

검을 늘어뜨린 카리나가 라분을 평가했다.

"몬스터의 상대로는 나쁘지 않아. 방패 다루는 법은 배웠나?"

"스승에게 배웠다."

"아직 정진해야겠군. 한 번 더."

콧김을 흥하고 뱉은 라분이 저돌적으로 카리나에게 덤볐다.

다섯 번 연속으로 덤볐고, 다섯 번 연속으로 패배했다.

더 이상 덤벼도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라분이 대련을 깔끔하게 포기했다.

"여자. 역시 강하다."

"제대로 된 무기술을 배우는 것도 방법이야. 너에게 꼭 맞는 무기술을 찾기는 힘들겠지만, 미궁에서 얻은 재화를 사용한다면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어."

"좋은 경험이었다."

꼭 맞는 무기술? 마치 어딘가에서 들어본 듯한 느낌이다.

내가 생각에 잠기는 사이 라분과 카리나가 서로 고개를 까딱이며 대련을 마무리했다.

"많이 얻고 왔어?"

"그렇다. 당장 켄드릭에게 가고 싶다."

"그래. 하지만 오늘은 쉬어. 막 미궁에서 돌아왔잖아."

"알았다."

라분은 많은 경험을 얻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고작 경험을 얻으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다.

무한 회귀는 그렇게 사용하면 안 된다.

목숨을 건 도전을 계속해서 이어간 후에 쟁취해야만 한다.

나는 검을 빼들고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카리나. 대련에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봐."

"첫째, 제가 당신의 공격을 10번 이상 막으면 대련을 종료하시죠."

"좋아."

"두 번째, 어떤 방식이든 대련이 끝나면 그때 보였던 제 허점을 꼭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어렵지 않아."

이다음이 본론이었다.

"마지막으로, 반드시 제게 살초를 사용해 주셔야 합니다."

"응?"

"제압이 아닌, 제가 공격을 피하거나 막지 못하면 죽는 수를 써달라는 말씀입니다. 실전처럼."

"⋯⋯."

카리나는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진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다.

라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직접적으로 나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내가 뭔가 수가 있다고 믿고 있겠지.

물론 수가 있지만, 라분이 알아낼 수 있는 형태는 아니다.

"십중팔구, 아니 십중십 크게 다치거나 죽게 될 거야."

"상관없습니다."

"나는 이런 걸로 장난하지 않아."

"저도 장난이 아닙니다."

카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검을 똑바로 쥐었다.

"지인을 죽이게 되겠군."

"죽일 수 있다면 죽여보시죠. 대신, 죽기 직전이라도 두 번째 조건은 꼭 지켜주시길."

"허점 말이지? 노잣돈이라 이건가? 좋아."

나는 처음부터 전력으로 가기 위해 검염을 끌어올렸다.

카리나는 아예 미약한 살기마저 뿜어내며 나를 바라본다.

바라던 바다.

나는 내게 스스로 건 이 시련을 넘어, 더욱 성장하고 말 것이다.

카리나가 별다른 신호 없이 내게 달려들어 첫 공격을 시도했다.

검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이 뒤로 쭉 밀려났다.

역시 4위계에 다다른 자의 신체 능력은 일반인과 궤를 달리한다.

"윽!"

재빨리 신형을 수습하고 검을 내미는 순간, 카리나의 검이 내 목에 닿았다.

살짝 찌르고 빠져나가는 것과 달리, 그대로 내 목을 부드럽게 뚫은 검이 목뒤로 삐죽 튀어나왔다.

"!"

"주인!"

카리나가 내 만용을 비웃듯 무감정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나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손을 들어 올려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였다.

"허!"

두 번째 요구, 내게 부족했던 점을 지적하라는 요구에 카리나가 헛웃음을 흘린다.

하지만 답변 내용 자체는 진지했다.

"첫 번째 공격에서 내 힘을 느꼈겠지. 네 생각보다 더 강했을 거야. 그 차이를 모르고 있었던 순간 너는 죽을 수밖에 없었어."

"주인!"

라분이 내 목을 잡고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미 바닥을 적신 피의 양은 가늠하기 힘들 정도였다.

나는 개의치 않고 들어 올렸던 손을 엄지로 바꿨다.

내 손가락을 본 카리나가 포커페이스를 무너뜨리고 헛웃음을 흘린다.

"무슨. 정상이 아니었군."

그게 내 한계였다.

시야가 흐려지고.

-키릭.

⋯⋯

나는 바로 회복된 시야에 적응하기 위해 눈을 굴렸다.

잠깐의 탐색 이후, 나는 이번의 회귀 지점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역시 이 타이밍은 너무나 수상하다.

내가 원하는 타이밍으로, 그야말로 완벽하게 돌아와있으니.

나는 카리나가 마침내 결심하고 나에게 달려들기 10초 전으로 회귀했다.

일단 손을 들어 시간을 끌고 지난 전투를 복기했다.

'카리나의 힘을 가늠하지 못해서 패배했다고 했지.'

생각해 보면 카리나의 말이 맞다.

예상치 못한 괴력에 내 몸이 과하게 튕겼고, 이는 카리나에게 날 죽일 수백 가지의 경우의 수를 준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카리나의 힘을 어느 정도 안다.

내가 자세를 풀고 생각에 잠겨있자 카리나가 물었다.

"왜. 막상 말해놓고 실제로 맞서려니 무섭나?"

"그럴 리가."

나는 씨익 웃으며 검을 내밀었다.

일단 딱 아홉 번만 해보자.

열 번을 할지는 그 이후에 생각해 보고.

⋯⋯

"찌르기에 대응하는 마나의 배분이 좋지 않아. 보다 적게, 보다 날카롭게."

"사용하는 특정한 검술이 없군. 그렇다면 임기응변 능력을 더 길렀어야지."

"방금 마지막 자세는 뭐지? 몬스터를 상대로는 몰라도, 나에게는 목을 내민 것으로 보이는군."

"공격에서 수세로 전환할 때 마나의 사용은⋯⋯."

⋯⋯

5번을 죽었을 때, 카리나는 검을 3번 사용했다.

⋯⋯

그리고 내가 9번 죽었을 때, 카리나는 나를 죽이기 위해 검을 6번 사용해야만 했다.

-키릭.

⋯⋯

이제 나는 같은 상황에서의 10번째의 삶에 돌입했다.

일전에, 학즉사법을 익히다 허무하게 죽은 동굴 속에서 세운 회귀의 원칙이 있었다.

[상황 당 10번, 총횟수는 300번을 마지노선으로 둔다.]

그 원칙이라면 10번째 도전인 지금은 이 도전을 회피해야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회피해야 한다고? 이 기회를?'

실시간으로 내가 강해지고 있다는 실감이 드는데?

대신 검을 꽉 쥐었다.

원칙은, 원래 깨라고 있는 법이다.

나는 굳게 결심하며 그대로 검을 들었다.

"왜. 막상 말해놓고 실제로 맞서려니 무섭나?"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면 나오는 카리나의 일관적인 대사.

벌써 저 대사만 5번째 듣는다.

나는 검을 마주 내밀었다. 내가 내뱉는 대사도 이전과 같다.

"그럴 리가."

켈리어에 이은 내 또 다른 스승이 된 카리나 헤리슨이 내게 달려드는 것을 느끼며 마주 검을 휘둘렀다.

이것이 강해지기 위해 선택한 나만의 방식이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41

총 16번의 죽음 끝에 카리나의 10번의 공격을 완벽하게 방어하는데에 성공했다.

"대단하군."

카리나의 짧고 굵은 감상을 끝으로 대련이 끝났다.

"고맙습니다."

"자신감의 이유가 있었어. 다시 봤다."

나에게는 얻은 것이 많은 대련이었다.

그 이후로 보름 동안 칼리움에 있었다.

콜린은 집에 온 우리를 보자마자 우리가 죽은 줄만 알았다고 엉엉 울었다.

얼른 마구 때려준 뒤에 딱 3일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었다.

미궁 탐험은 고된 일이다.

한번 끝났을 때 이렇게 쉬어주지 않으면 나중에 골병 나기 딱 좋다.

그렇게 복귀 4일차.

이제 미궁 8층 공략을 위한 플랜 B를 시행할 때다.

"가자!"

"어디로?"

"그냥 따라와."

라분을 데리고 도착한 미궁 사무소.

나는 게랄프를 잡은 업적의 보상으로 미궁 8층의 상세한 지도를 요구했다.

임시 결산에서도 만난 적 있던 깐깐한 마법사가 안경을 추켜올렸다.

"루카스 님과 라분 님의 파티는 미궁 4층을 주로 활동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개인 의뢰가 들어와서요. 미궁 8층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보상으로 얻고 싶습니다."

"개인 의뢰라. 이렇게까지 돌려 말씀하시는 걸 보니 자세한 정보는 비밀이겠군요."

"네."

그렇다.

내 플랜 B는 미궁 사무소가 보관 중이던 미궁 8층의 지도를 얻어 길을 찾는 것이다.

'개인 의뢰'라는 방패를 들고, 구트란 토벌의 '성과 보상'이라는 검을 들었다.

이걸 사용해서 미궁 사무소를 찌르고 방어한 결과는?

"어렵지 않죠. 제 직권으로 허가하겠습니다. 대신 지도의 가치만큼 추후의 보상이 조절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성공이다!

마법사는 내 들뜬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유롭게 일어나 우리를 안내했다.

안내를 하는 와중에도 말이 많았다.

그 많은 말들 중에서 내가 귀담아들었던 말은 딱 하나였다.

"칼리움에 제국이 요구하는 기본적인 마정석 수요는 미궁 6층까지만 관리해도 충분하죠."

"그러면 7층 이하의 탐험가들은 필요가 없는 거 아닙니까? 6층까지만 안전하게 유지하면 될 텐데."

"허허. 질문이 꽤 날카로우시네. 제가 말씀드린 건 '기본적인' 수요입니다. 각종 라비팩트를 위시한 아티팩트, 상급, 최상급 마정석, 옛 종족의 유산 및 고대 유적 등. 미궁 저층에는 돈과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수많은 수단들이 있죠."

"⋯⋯."

돈과 명예.

내가 얻고자 하는 것들이다. 이 특성을 이용하면, 도달하지 못할 리가 없다.

"어쨌든 그러한 이유로, 미궁 7층부터는 사무소의 영역은 아닙니다. 길드와 탐험가들이 우리에게 정보를 팔죠. 그래도 기본적인 정보는 확보하고 있습니다."

처음 알았다. 사무소가 미궁 6층까지만 관리한다는 사실을.

[7~10]이라고 적힌 문을 통과하는 마법사.

우리를 앉혀놓더니 곧 두꺼운 책을 들고 온다.

"8층 지도입니다. 사서에게 말해 놓았습니다. 앞으로 열흘 동안은 원하시는 만큼 보고 필사해가셔도 좋습니다. 단, 반출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유념해 주시기를."

더불어 책장의 한 구역을 가리킨다.

"아직 정식 지도로 편입되지 않은 길은 이곳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모든 책은 한 권씩 꺼내시고, 다른 권을 보실 때는 반드시 집어넣어 주시면 됩니다."

원래는 따분하게 하루를 보냈을 사서가 눈을 부라리며 이쪽을 보고 있다.

내 감지 능력으로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마나의 양을 보아하니. 사서라는 놈도 마법사다.

'깝치면 안 되겠군.'

마법사의 영역에서 나대다가는 그대로 죽기 십상이다.

클라이머 구트란을 봐라, 자신이 원하는 영역에 들어왔다고 4위계의 전사 둘 중 하나를 죽이고 나머지 하나를 궁지로 몰지 않았었나.

"알겠습니다."

"그러면 용건은 다 마친 것으로 알겠습니다."

마법사가 떠나고 나와 라분은 책에 빠져들었다.

"라분. 여기서 호수를 찾아야 해."

"호수! 오아시스!"

"오아시스? 어쨌든 찾아!"

이튿날에는 나 대신 콜린이 끼어들었다.

그다음 날에는 라분이 빠지고 콜린 혼자 남았다.

일당으로 은화 1개를 주기로 했고, 성공 보수로 은화 10개를 약속했으니 부려먹는 건 아니다.

"소대가리! 꼭 찾고 만다!"

당장 본인도 불타고 있으니 말 다 했다.

"주인. 나는 켄드릭에게 가겠다."

라분은 가버렸고.

나는 칼리움에서 운영하는 경매장을 찾았다. 비밀통로에서 얻은 아티팩트를 처분하기 위해서였다.

꽤 이쁘장한 여성이 사무적인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어째 나를 대하는 여성들의 얼굴은 빼다 박은 듯이 똑같다.

"일반 아티팩트 감정료는 1실버입니다."

감정의 특성이나 기술을 가진, 돈 벌어먹기 쉬운 놈들의 말이다.

아티팩트 하나 감정하는 데에 은화 1개.

고작 하나라고 해서 비싸지 않은 게 아니다.

무려 콜린을 하루 동안 부려먹을 수 있는 돈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사설 감정소에 맡겼다가 물건을 빼돌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나는 주섬주섬 품에서 은화 두 개를 꺼냈다.

오늘 감정 받을 물건은 비밀통로에서 얻은 목걸이와 책갈피형 아티팩트.

"부탁드립니다."

"접수 받았습니다."

이것 말고도 내게 아티팩트는 두 개 더 있다.

바로 게랄프의 본거지에서 얻은 반지 형태의 보상형 라비팩트와, 비밀 통로에서 발견한 지팡이.

하지만 이것들은 감정을 맡기지 않을 생각이다.

반지는 벗는 순간 다시 사용할 수 없고, 지팡이는 값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팡이 끝에 달린 조그마한 보석이 상급 마정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숨기자.'

나는 미궁에서 운영하는 개인 금고에 얼른 꽁꽁 싸맨 지팡이를 넣어버렸다.

정말 돈이 급할 때나 꺼낼 생각이다.

"목걸이와 책갈피. 둘 다 아티팩트가 맞군요. 보다 정확한 감정을 위해 습득 경위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저도 잘 모릅니다. 아는 사람에게 부탁받은 거라."

"그렇군요."

여성 직원이 목걸이를 조심스레 쓰다듬기 시작했다.

"착용하고 있으면 마나의 흐름을 원활하게 해주고, 마나 축적을 더 빠르게 해주는 목걸이군요. 자세한 수치는 추가 요금이 필요합니다."

나는 얼른 목걸이를 받아 목에 걸었다.

내 모습을 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본 직원이 이번에는 네모난 책갈피를 쓰다듬었다.

"음."

목걸이와는 다르게 땀을 아주 뻘뻘 흘리며 감정을 한다.

너무 감정에 열중한 나머지 본인의 마나 장벽을 돌보지 못한다.

덕분에 나는 감지 능력을 사용해 여성을 보다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마나 대신 정신력과 마나를 같이 사용하는군. 특성이고, 생각보다 강하지 않아.'

그러니까 개인 감정소를 차리지 못하고 경매장 소속으로 본인의 재주를 팔겠지만은.

여성의 땀이 턱을 타고 바닥에 떨어지기를 두어 번.

"후."

잠시 숨을 가다듬은 뒤 책갈피를 내게 쭉 내밀었다.

"책에 사용하는 책갈피입니다. 특정 페이지에 책갈피를 꽂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책갈피의 소유자가 그 페이지를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게 됩니다. 저장 가능 페이지 수 등 자세한 정보는 추가 요금이⋯⋯"

나는 얼른 책갈피를 뺏어들었다.

"감사합니다."

누가 볼세라 얼른 경매장을 나왔다.

경매장에 팔 물건이 없었다.

목걸이는 당장 누가 착용해도 손해 보는 물건이 아니고, 책갈피는 나에게 당장 필요한 물건이다.

'페이지에 끼우면 그 페이지를 떠올리게 될 수 있다고?'

미궁 탐사에 이보다 더 필요한 아티팩트가 있을까 싶다.

당장 내가 만든 미궁 8층의 지도를 페이지로 엮으면 갈림길마다 때가 잔뜩 탄 지도를 열어볼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닌가!

"책갈피. 넌 나랑 평생 가자."

경매장에 다녀온 뒤로는 집에 처박혀 카리나와의 대련을 복기하고, 마나 통제력을 수련하며 모든 시간을 썼다.

라분이 가끔 돌아와서 나의 대련 상대를 해줬지만 명상을 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리고 탐험 하루 전, 콜린이 집에 돌아왔다.

아주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콜린! 해냈구나!"

"믿고 있었다!"

"아니, 실패했어."

"⋯⋯."

"⋯⋯."

콜린이 종이 몇 장을 엮은 것을 내게 휙 던졌다.

"고작 열흘 만에 루카스 네 병신 같은 악필이랑 어? 지도를 비교해서 길을 어떻게 찾냐!"

이 새끼가?

나는 얼른 달려들어 콜린의 뒤를 잡아 목에 팔을 둘렀다.

"켁켁!"

녀석의 10연속 탭을 받은 뒤에야 살짝 놓아준다.

"컥컥!"

"됐고. 그러면 이건 뭔데."

"임마!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콜록이며 헛기침을 연발한 콜린이 말을 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시간 낭비를 하지 않았다는 안심을 할 수 있었다.

* * *

그렇게 나와 라분은 미궁 8층의 호수에 엎드려서 프라냐를 피해 물을 퍼먹고 있었다.

속으로는 콜린이 내게 해 준 말을 떠올린다.

[미노타우로스의 목격담이 있는 미궁 8층의 37곳 주변의 세세한 약도야. 왜 필요한 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다 필사해왔어. 원본과 차이가 없을 정도로 자세하게 해왔지.]

최대한 한 페이지에 모든 약도를 쑤셔 넣어 책을 만들고 책갈피를 끼워 넣었다.

손톱만 한 마정석을 꽂은 책갈피는 약 이틀에 걸쳐 빛나다가 빛이 멎었다.

그리고 책갈피를 품에 넣자.

"오! 떠오른다!"

정말로 머릿속에 미궁의 지도가 떠올랐다.

다음 페이지도 이틀이 지나자 책갈피에 각인되었고, 나는 이제 생각만으로 37개의 길을 모두 떠올릴 수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며 환희에 몸을 떨었다.

"좋아! 좋아! 미궁 좋아!"

"⋯⋯주인이 또 발작한다."

"닥쳐."

호숫가에서 소리치자 프라냐들이 다시 내 주변에 일렬로 정렬한다.

라분이 얼른 낚싯대를 들이민다.

이번에는 바늘 3개가 달린 제대로 된 낚싯대다.

미리 공수해온 홉고블린 손가락을 각 바늘에 매달자 프라냐 여섯 마리가 낚여 올라온다.

"월척이구나!"

장기 원정이기에 미노타우로스를 최대한 자극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때문에 불은 홉고블린의 영역으로 넘어와서 피운다.

노릇노릇 익어가는 프라냐. 역시 다시 먹어도 맛이 좋다.

그렇게 포식을 하고 미리 봐둔 안전한 장소에서 휴식까지 취하니 여기가 미궁인지 하수구인지 헷갈릴 정도다.

미궁 8층에서 안전한 장소?

미노타우로스의 영역 내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놈의 영역 중에는 거대한 소대가리가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 많다.

덩치가 큰 몬스터이기에 생길 수밖에 없는 약점이다.

그곳에서 밖에서는 안 보이는 장소를 찾는다?

거기가 바로 불침번을 설 필요도 없는 휴식 공간이다.

그렇게 일단 한숨 거하게 잔 뒤에 라분과의 작전 회의를 시작했다.

"미노타우로스의 영역 바깥으로 크게 돌출하며 지형을 살필 거야. 하루 정도 탐험하고, 37개에 맞지 않으면 돌아가자."

"⋯⋯주인이 하자는 대로 하겠다."

"그래. 이해 못 했구나."

아직 미노타우로스와 싸우기에는 시기상조다.

일단 미궁 8층의 안전지대에서부터의 길을 찾고 움직여보자.

그리고 안전지대를 찾으면.

'미노타우로스 죽일 때까지 9층 안 간다.'

괴물에게 빼앗긴 나의 자존심을 되찾기 위한 결심이다.

나와 라분은 천천히 미궁 8층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반드시 길을 찾겠다는 확신이 있는, 자신감 넘치는 탐험이었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42

홉고블린의 영역은 불규칙했다.

사방에 이리저리 뻗어있는 가시와도 같았다.

갈림길마다 묻어있는 홉고블린의 타액을 통해 유추한 바로는 그렇다.

"아직 완충지대로군."

그렇기에 오로지 관찰과 직감으로 영역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감지 능력이 든든히 앞길을 밝혀줘서 다행이다.

만약 감지 능력마저 없었다면 장님이 벽을 더듬어 나아가는 것처럼 길을 개척해 나갔으리라.

다만 본격적으로 미노타우로스의 영역을 벗어남이 확인되자 그 감지 능력도 절반 이하로 줄여야 했다.

홉고블린의 함정을 경계해야 했기 때문이다.

평소의 절반밖에 감지를 못했기에, 뒷목이 조금 따뜻해진다.

긴장의 증거다.

그래도 위험을 감수한 대가는 컸다.

제때 홉고블린들이 설치한 함정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봐봐. 이런 곳에 설치했어."

"봐도. 잘 안 보일 정도다."

미궁의 바닥은 고르지 못하다.

특히 두 종족이 차지하는 영역의 완충지대는 더하다.

그렇기에 바닥에 튀어나온 돌 사이에 실을 매달아놓으면 발견하기가 무척 까다롭다.

그리고 이 함정의 발견으로 우리가 홉고블린의 영역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홉고블린들의 기척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바로 앞에 네 마리. 여기서 기습할 수 있을 것 같아."

"알았다."

최대한 전투를 피하려고는 하지만, 이 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전투가 불가피했다.

나와 라분은 각각 반대편 벽에 붙어 몸을 숙였다.

통상적인 속도로 접근하는 적.

그런데, 한 마리의 마나가 심상치 않다.

'챔피언.'

내 수신호를 확인한 라분이 방패를 들었다.

싸워보겠다는 뜻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뽑아낸 검을 매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홉고블린들이 우리가 잠복한 직선길로 들어섰다. 자기들끼리 말을 주고받으며 접근한다.

"케르르릭."

"켈켈."

"크르륵."

여기서부터는 모든 신경을 적에게 집중한다.

나는 감지한 적의 위치를 라분에게 전달했다.

'선두에 챔피언. 중간에 두 마리. 후미에 한 마리.'

"케륵?"

"지금!"

라분이 마치 물속에 던져진 물고기처럼 몸을 튕겼다.

카리나에게 자극받고, 켄드릭에게 교육받아 점점 발전하는 마나 운용이 돋보인다.

나도 보조를 맞춰 몸을 던져 라분의 옆에 붙었다.

"크르르륵!"

홉고블린 챔피언이 검염을 검에 담았다.

나는 맨 뒤의 홉고블린이 호각을 꺼내는 것에 주목했다.

"라분! 버텨!"

"우어어어!"

챔피언의 내려치기.

강력하지만 직선적이다.

라분이 방패를 틀어 녀석의 공격을 땅으로 처박았다.

동시에 나는 왼쪽에서 라분을 노리는 창을 걷어내고 창 주인의 다리를 얕게 베었다.

그리고 급한 대로 검을 집어던졌다.

막 호각에 입을 가져다 대는 홉고블린의 입속으로 그대로 검이 빨려 들어갔다.

"라분!"

목을 붙잡고 넘어가는 놈을 무시하고 오른팔을 크게 떨쳤다.

라분이 던져준 검이 손에 잡힌다.

발차기로 베인 발에 균형을 잃은 놈을 날려버리고, 챔피언의 올려치기를 라분 대신에 막았다.

이 모든 행동이 고작 두 호흡만에 이루어졌다.

"빠져!"

내게 챔피언을 맡기고 뒤로 빠진 라분이 몸을 놀려 오른쪽의 홉고블린의 공격을 막기 시작했다.

한 손에 품에서 꺼낸 단검을 들고 적과 대치한다.

"후."

전투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일반적인 몬스터들의 공격은 오로지 힘이다.

인간보다 많은 마나로 이루어지는 공격은 직접적으로 받아내기 힘들 정도다.

특히 이 홉고블린 챔피언은 챔피언이 된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이 경향이 더욱 강했다.

나는 기술적으로 놈의 검을 걷어낸 뒤에, 그대로 목을 베어냈다.

고작 다섯 번의 공방으로 이뤄낸 성과였다.

'됐다.'

카리나와의 대련 이후로, 16번의 죽음과 맞바꾼 성장이 놈과 내 격차를 한층 더 벌렸다.

무너지는 챔피언을 확인한 뒤에 나머지 홉고블린들을 빠르게 마무리했다.

라분도 한 마리를 맡아 단검으로 마무리했다.

"우어어어!"

"잘했어."

챔피언이 껴 있었음에도 별다른 문제 없이 전투가 마무리됐다.

매우 만족스러운 결과다.

뒷정리를 하며 손에 끼고 있는 라비팩트, 반지를 툭 쳤다.

[인과를 축적하십시오. 다음 보상까지 34/100.]

이 반지는 보름이 지난 뒤 다시 활성화가 되었고, 미궁 4층에서 사냥한 몬스터로 이 정도까지 수치를 채웠다.

'한 번 시간 내서 제대로 해봐?'

나는 이 수치를 일거에 올릴 방법을 생각해냈다.

아주 매력적인 방법이 있다.

하지만 우선 전투의 마무리에 집중할 때.

시체를 털고, 마정석을 확인한 뒤에 바로 공양한다.

[시체를 공양합니다.]

[홉고블린 챔피언 한 마리, 홉고블린 세 마리. 확인.]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진척도. 45.3%]

온몸에 피로가 몰려오지만 쉴 시간은 없다.

"계속 가자."

"알았다."

두 시간을 주기로 가장 큰 갈림길에 멈춰 서서 그동안 그렸던 지도를 꺼내들었다.

눈으로는 지도를 훑고, 머릿속으로는 책갈피 아티팩트의 도움을 받아 콜린이 그려준 지도를 띄웠다.

하지만 이번에도 꽝.

아무리 내가 그린 지도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봐도 37종류의 길 중 맞는 곳이 없다.

"후. 여기도 아니야."

"더. 진행?"

나는 털썩 주저앉아 고민했다.

갈림길의 벽에는 홉고블린들의 타액이 덕지덕지 묻어있다.

분명 콜린은 미노타우로스의 목격 정보가 있는 지점을 중심으로 지도를 그렸다고 했다.

하지만 이곳은 도저히 미노타우로스가 지나갈 것 같지 않다.

"아니, 다시 호수로 돌아가자."

라분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지만 허탈해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다.

벌써 일주일째 허탕을 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여기서 분위기를 전환할 필요가 있다.

"호수로 돌아가면 나랑 일 좀 하나 하자. 내가 생각해놓은 게 있어."

"?"

"해보면 알아."

우리는 하루에 걸쳐 왔던 길을 돌아왔다.

강행군을 통해 호수 근처로 돌아와 충분히 휴식을 취한 후, 라분에게 낚시를 시켰다.

곧 프라냐들이 떼 지어 달려들었다.

라분이 낚싯대를 건져올리자 사방으로 떨어지는 프라냐들.

나는 검염을 두른 단검으로 프라냐를 한 마리씩 죽였다.

[인과를 축적하십시오. 다음 보상까지 31/100.]

[인과를 축적하십시오. 다음 보상까지 32/100.]

[인과를 축적하십시오. 다음 보상까지 33/100.]

⋯⋯

[인과를 축적하십시오. 다음 보상까지 36/100.]

공양을 하면 안 된다.

라분과 나는 프라냐의 몸통을 호수에 휙휙 던졌다.

동족의 고기를 먹기 위해 수백 마리의 프라냐들이 펄떡인다.

"흐흐."

이 호수가 바로 나의 금맥이다.

잘라낸 머리를 바늘에 걸고, 다시 프라냐들을 잡았다.

라분에게는 지루한 반복 작업이었지만 점점 올라가는 인과 수치를 보는 나는 너무나 재미있었다.

[인과를 축적하십시오. 다음 보상까지 99/100.]

[인과를 축적하십시오. 다음 보상까지 100/100.]

[보상을 수령하시겠습니까? 보상 : 혼돈의 상자.]

"보상은 달라지지 않는군."

그렇다면 계속이다!

"아니. 계속 한다."

[인과를 축적하십시오. 다음 보상까지 100/300.]

"200마리 더?"

어렵지 않지.

라분이 뻐근한 손목을 주물렀다.

"주인. 반지는?"

"딱 200마리만 더 잡아보자."

"알겠다."

낚시질, 칼질, 시체 처리, 미끼 꿰기가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인과를 축적하십시오. 다음 보상까지 108/300.]

"낚아라!"

⋯⋯

[인과를 축적하십시오. 다음 보상까지 167/300.]

⋯⋯

[인과를 축적하십시오. 다음 보상까지 237/300.]

"더!"

⋯⋯

[인과를 축적하십시오. 다음 보상까지 299/300.]

팔에 쥐가 날 정도의 노가다 끝에 결국 200마리를 추가로 잡는 데에 성공했다.

"헉헉!"

"헉헉!"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반지를 매만졌다.

[인과가 축적되었습니다. 300/300.]

[보상을 수령하시겠습니까? 보상 : 혼돈의 상자.]

"염병할!"

뭔 보상이 혼돈의 상자밖에 없나?

괜히 수령했다가 미궁 8층 진척도 10% 같은 거라도 나오면 반지를 부숴버릴지도 몰랐다.

"주인. 표정이 안 좋다."

라분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내 예상과는 다르게 라분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바로 열어보자."

"응? 왜?"

"아끼면. 똥 된다."

나는 어이가 없는 눈으로 라분을 바라보다 이내 피식 웃었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휴식하는 날에 하는 소일거리다.

망하면 망하는 대로 좋다!

"보상 수령!"

과연?

[보상을 수령합니다. 보상 : 혼돈의 상자.]

반지에서 검은빛이 반짝이더니 이내 푸른색 기운을 뿜어낸다.

"오오!"

"제발 대박! 신이시여!"

평소에 믿지도 않는 신을 찾은 결과는?

[보상 : 혼돈을 담은 방패를 수령합니다.]

진척도가 아니다!

어? 방패?

나는 허공에 생겨난 검은색 방패를 낚아챘다.

어떤 금속으로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꽤나 무겁다.

아니. 크기를 감안하면 가벼운 편인 건가?

'아티팩트?'

아직 체감되는 효과가 없다.

그렇게 천천히 외관을 관찰하고 있으려니.

"와아."

라분이 내게 공손히 두 손을 내밀었다.

"⋯⋯."

뭔가에 홀린 듯 방패를 건네자 얼른 받아들고 자세를 잡는다.

무게중심을 확인하고, 몇 번 휘두르고, 벽에 쿵쿵 찧어보고.

한참을 호숫가에서 방패춤을 춘 라분이 눈을 초롱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열자고 했고, 너도 그동안 고생 많이 했으니까. 너 가져."

"고맙다! 잘 쓰겠다!"

라분이 원래 쓰던 방패를 가방에 조심스럽게 집어넣는다.

"그건 왜? 중고로 팔 거 아니면 호수에 버려."

"주인이 사준. 추억의. 방패다. 집에 전시할 거다."

"⋯⋯무거우니까 네가 들어라."

방패를 정리하는 라분을 보며 라비팩트를 매만졌다.

[활성화 대기중. 남은 시간. 30일.]

"어?"

분명 처음에는 활성화에 남은 시간이 15일이었는데, 30일로 늘었다?

"⋯무한으로 퍼주지는 않는다는 건가."

새로운 정보를 얻었으면 됐다.

라분도 좋은 방패를 얻었으니 더 좋은 일이고.

검은색 방패는 확실히 칼리움의 대장장이가 만든 방패보다 훨씬 좋아 보인다.

하지만 나는 방패를 볼 줄 모르니 어디가 어떻게 해서 더 좋은지 통 모르겠다.

라분은 잘 알겠지.

"어떤 점이 좋아?"

"음. 방패? 음. 다 좋다."

"미안. 괜히 물어봤네."

라분에게 기대한 내가 바보다.

나중에 켄드릭에게 물어보자.

그날 라분은 하루 종일 자세를 잡으며 시간을 보냈다.

"처음 잡아보는 건데, 실전에 쓸 수 있겠어? 괜히 썼다가 큰일 나는 수가 있어."

"괜찮다. 문제없다."

"그러면 상관없지만."

3위계에 도달한 후 증가한 신체 능력을 제어하지 못해 크게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다.

라분의 새로운 방패와는 결이 달랐지만 그래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들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방패로도 평소 실력을 낼 수 있는지 한 번 시험해 보자. 방패 들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검을 들고 미노타우로스가 돌아오기 전까지 라분과 대련을 계속했다.

곧 눈치를 보고 은신처로 도망갔다.

돌아온 미노타우로스가 물고기 시체와 파인 흔적으로 엉망이 된 호숫가를 확인하고 분노의 포효를 내질렀음은 물론이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43

미궁 8층에 진입한 지 보름, 그러니까 미궁에 들어선 지 18일차.

나와 라분은 아직도 미궁 8층을 뒤지고 있었다.

"주인. 길이 있기는. 있는 건가?"

"길은 있어."

반드시.

라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지만 스스로에게 건네는 다짐이기도 했다.

길은 반드시 있다.

그래도 가끔 생각해 보면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냐는 생각이 든다.

마침 라분도 같은 마음이었나 보다.

"주인."

"왜. 바빠."

"주인은. 왜. 미궁 내려가나."

"왜 정착 안 하고 계속 내려가냐고?"

"그렇다."

"탐험. 멋있잖아."

나는 아직도 생생한 과거를 떠올렸다.

미궁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지 않았을 때, 칼리움의 축제에 참석한 '탐험가 파티'의 딜러 리디엠 올버스를 본 적이 있다.

그를 우러러보던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잊지 못한다.

마치 신이 이 앞에 있다는 듯 리디엠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던 사람들.

칼리움의 시장이 사람들을 가리키며 뭐라뭐라 쓸데없는 말을 하자 리디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하얀 빛의 검을 뽑아 들어 올렸다.

[사섬광(死閃光). 진(眞). 파천(破天).]

검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구름을 가르는 것을 보며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꽉 쥔 주먹을 바라보았다.

나에게는 무한 회귀가 있었다.

죽어도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그렇다면 도전하고, 또 도전해서 최강이 되고 싶었다.

"꿈이라고만, 철없는 놈의 고집으로만 생각했는데 그게 이루어질 수 있는 방법이 생겼잖아. 그러면 더 볼 것도 없어."

"또. 혼잣말한다."

"시끄러워."

자기가 물어봐놓고 이런 반응이다.

라분에게는 이 한 마디면 충분하다.

"됐고. 넌 내 뒤만 잘 따라오면 돼. 방패 값은 뽑아낼 테니까."

"알았다."

앞으로 최고가 될 건데, 미궁 8층에서 이렇게 애먹을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여기는 홉고블린이 왜 이리 많아?"

함정을 주의하기 위해 감지 범위를 대폭 축소했음에도 감지에 걸리는 무리만 다섯이다.

아무래도 가시처럼 돌출된 홉고블린의 영역의 개척 지점에 닿은 모양이다.

괜히 들쑤셨다가는 낭패를 볼 수도 있겠다.

"조심해서 가자."

위험하다고 해서 쉽게 돌아가버리면 찾을 수 있는 길도 못 찾는다.

무조건 하루 거리다.

미노타우로스의 영역에서 하루 거리까지는 가서 탐색한다는 내 기준을 준수해야 다음 기회도 있을 수 있는 법이다.

"싸우자. 다섯 마리."

앞에서 알짱거리는 저 녀석들만 어떻게 처리하면 길을 뚫을 수 있다.

잠시나마 감지 능력을 확장하여 분석한 상황이다.

라분이 검은색 방패를 텅텅 두드렸다.

"좋아."

빠르게 움직여 녀석들이 지나갈 길목을 선점했다.

거리가 꽤 가까워지자 구성을 알 수 있었는데 녀석들 중 챔피언은 없다.

최대한 신속하게 처치하고, 길을 뚫고 나가면 된다.

'그런데 저놈들, 왜 이리 움직임이 느리지?'

그동안 숱한 홉고블린을 사냥했기에 녀석들의 기본적인 이동속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노리는 놈들은 내가 생각한 평균 속도에 절반이 조금 넘는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조금 의아했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챔피언도 없고, 주변에 함정도 없으니까.

그렇게 녀석들이 사정권에 들어오고 완벽한 기습 타이밍이 나왔다.

'지금!'

라분이 몸을 튕기고, 나도 얼른 튀어나왔다.

"케륵!"

우리를 발견한 홉고블린이 창을 꼬나쥐었다.

하지만 다섯 마리 중 창을 쥔 녀석은 고작 두 마리였다.

나머지 세 마리는 창을 버리고 호각을 입에 물려고 하고 있었다.

호각!

"⋯!"

"⋯!"

마치 기다렸다는 듯 행동하는 모습을 보고 내 몸이 정수리에 직각으로 떨어진 번개를 맞은 듯 떨렸다.

"함정이야! 라분! 다 죽여!"

"우어어어!"

라분의 함성을 뒤엎듯 호각 3개가 울리기 시작했다.

-삐이이이익!

-삐이이이익!

-삐이이이익!

세 마리나 호각을 불었기에 전투력은 형편이 없었다.

급하게 창을 들어보지만 분노에 가득 찬 나와 라분의 공격이 더 빨랐다.

10초도 지나지 않아 홉고블린을 마무리하고 바로 공양했다.

[시체를 공양합니다.]

[홉고블린 다섯 마리. 확인.]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진척도. 51.7%]

함정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감지 능력을 최대한으로 활성화한다.

"!"

홉고블린 여섯 무리, 30마리의 전력이 모두 이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제기랄."

너무 들쑤시고 다녔나.

미궁에는 낡은 격언이 있다.

[같은 장소에 3일 이상 머물지 말고, 같은 지역에 7일 이상 머물지 마라.]

흔적을 곳곳에 남길수록 이를 확인한 몬스터 무리에게 발각될 확률이 높기에 자연스레 생긴 말이다.

이미 이 지역에서의 탐사가 보름을 넘겼기에 당연히 주의를 했어야 했다.

'내 불찰이야.'

아예 퇴로부터 막는 걸 보니 이 녀석들 작정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죽음밖에 답이 없다.

절체절명의 위기!

"라분! 가자!"

"알았다!"

뒤에서 몰려오는 15마리의 홉고블린 보다는 분산되어 앞에서 포위망을 조이는 나머지를 상대하는 것이 낫다는 게 내 판단이다.

감지 능력을 최소화하지 못했기에 이동하며 함정들을 죄다 건드리고 말았다.

준비를 제대로 했는지 근처가 모두 함정투성이다.

-빠아아아아앙!

-빠아아아아앙!

-빠아아아아앙!

함정에 신경 쓸 틈은 없었다.

갈림길에서 고개를 내미는 홉고블린 네 마리와의 전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라분! 무리하지 마! 천천히 돌려깎는다!"

"우어어어!"

라분의 방패 박치기를 맞은 홉고블린이 그대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와우."

평소의 방패였다면 밀어내는 것에 그쳤을 텐데.

몬스터 300마리짜리 방패를 줬더니, 역시 제값을 한다.

아무리 홉고블린이 미궁 8층의 몬스터라고 해도 3위계의 증거, 검염 앞에서 3연격 이상 버틸 수는 없었다.

2위계의 극에 다다른 홉고블린이 창을 내밀지만, 마나를 아끼지 않는 내 연격으로 방어를 분쇄해버렸다.

"공양."

전투를 마무리한 뒤에는 공양도 잊지 않았고.

[시체를 공양합니다.]

[홉고블린 네 마리. 확인.]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진척도. 51.9%]

"달려!"

5개의 갈림길. 다른 3개의 갈림길에서 적이 접근했기에 선택지는 두 군데, 나는 본능적으로 우리가 처치한 홉고블린이 나왔던 갈림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괜히 거기서 튀어나올 이유가 없다.

아마 뒤에 쫙 깔려있을게 뻔했다.

역시 내 예상대로, 멀리서 홉고블린들의 기척이 속속 느껴지기 시작했다.

-빠아아아앙!

"썩을!"

감지 능력의 범위를 줄여 함정을 탐지하자니 길을 못 찾겠고, 그렇다고 늘리자니 함정을 계속 밟는다.

그렇다고 능력을 왔다갔다 조절하면 정신력에 무리가 오고, 사실 이미 한계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감지 범위를 줄여 함정을 탐지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몬스터를 잘 피해도 뭐 하나, 함정 한 방으로 바로 위치가 들켜버리는데.

달리면서 얼른 라분에게 외쳤다.

"내가 함정 수신호 하면 내 발만 따라서 걸어!"

"으어!"

그때부터는 쭉 달리기만 했다.

그런데 다음 갈림길에서 몬스터가 없는 가장 오른쪽을 선택했는데, 점점 길이 좁아지는 것이 아닌가.

"!"

"!"

갈림길에서는 홉고블린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총 15마리.

아직 폭이 넓어 둘이서 정면을 막을 수는 없는 숫자다.

하지만 폭이 이대로 줄어든다면?

어느 시점에서 멈춰 반전해야 한다.

두 사람이 검을 휘두를 수도 없는 폭이 되면 죽는 건 우리이기 때문이다.

"일단 가자!"

그러나 내 기도에도 불구하고 폭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어느새 두 사람이 검을 휘두를 수 있는 한계 폭까지 좁아졌다.

내가 걸음을 멈추자 나를 뒤따라오던 라분도 걸음을 멈춘다.

"헉헉."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결사항전을 준비한다.

솔직히 살아남을 확률은 없다고 봐도 좋다.

'가만. 만약 너무 늦게 죽어서 여기서 환생하면?'

지금이 이 위기에서의 첫 죽음이다.

어느 시점에서 환생할지는 실제로 죽어보기 전까지 알 수 없다.

환생 시점을 조절할 수 없다는 사실은 무한 회귀가 가진 유일한 단점이다.

죽을 장소를 잘못 선택할 경우, 수백 번 넘게 죽어야 하는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다.

빠르게, 정확한 판단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런데 자꾸 눈을 감고 미궁에 대해서 생각하니, 책갈피 아티팩트에 저장된 지도가 떠올라서 미치겠다.

"에라이!"

일단 아티팩트를 라분에게 넘기려는데, 문득 콜린과 통로에 대해 토론하던 기억이 살아났다.

[뭐야. 여기로 통하는 이 길은 뭐 이리 좁아?]

[그러게. 그래도 통과해서 지도를 만든 거 보니까 사람이 지나갈 수는 있나 보지.]

[그 뒤로는 없네?]

[넘어가고 얼마 안가서 미노타우로스 목격 정보가 있었으니까. 해골 표시 하나 보이지? 1명 죽은 거야.]

"!!"

나는 책갈피 아티팩트를 꽉 쥐고 콜린과 말한 그 길을 찾았다.

그곳을 기록한 탐험가들처럼 움직인다고 가정하면, 이곳에서 내가 지나왔던 길로 직진할 시에 길이 넓어지고, 다섯 개의 갈림길로 이어진다.

'딱 들어맞는다!'

물론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선 여기에 걸어보는 게 맞을 것 같다.

다가오는 홉고블린들의 함성이 어렴풋이 들려오자 라분이 내 앞을 막고 방패를 들어 올렸다.

나는 얼른 라분의 등을 팍팍 쳤다.

"아프다!"

"됐고! 계속 가자!"

"하지만 이대로 가면. 싸울 공간. 없다."

"나 믿어!"

라분이 순순히 방패를 내리고 나를 따랐다.

점점 좁아지는 길.

이내 한 사람이 운신할 수 있는 폭보다 좁아지기 시작한다.

"윽!"

"주인! 낀다!"

홉고블린들도 이내 한 줄로 다가오더니 꽉 끼기 시작했다.

인간보다 조금이라도 덩치가 작았기에 끼는 시점이 더 늦어 거리가 확 좁혀졌다.

"뒤에! 홉고블린!"

"돌아보지 말고 계속 가!"

꾸불꾸불하고 좁은 길이 약 10분간 계속되었다.

끊어질 듯, 끊어질듯하지만 끝내 끊어지지는 않는다.

"제발!"

머릿속 지도를 떠올리며 이쯤이면 됐겠다 하는 시점에.

나의 몸이 먼저, 다음으로 라분의 몸이 뿅 하고 넓은 공간으로 빠져나왔다.

높이가 꽤 높아 착지 후 넘어질 뻔했다.

"흡!"

방심하지 않고 검을 뽑아 주변의 적을 다시 한번 감지했다.

틈 안에서 수십 번이고 체크한 대로 적의 기척은 아직 감지되지 않는다.

"해냈나."

털썩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니 라분이 내 옆에 같이 앉았다.

"주인. 여기는⋯."

"그래."

뒤를 돌아보니 홉고블린들은 추격을 중단하고 돌아가고 있었다.

이곳이 홉고블린의 영역이 아님이 분명했다.

나는 벌떡 일어난 뒤 머릿속 지도를 뒤져 앞으로 걸어나갔다.

조금 걷자마자 4개의 방위로 갈라진 갈림길이 보인다.

이것 또한 지도와 같다.

"우리. 길 찾은 것 같다."

처음 비밀통로를 발견했을 때로 치면 무려 두 달에 가까운 시간 만에 이뤄낸, 그야말로 대단한 성과였다.

그로부터 3일 뒤.

우리는 미궁 8층의 안전지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44

나와 라분이 홉고블린을 피한 틈을 경계로 미궁 8층의 영역이 급변했다.

갈림길에 묻어있는 타액과 냄새.

오크의 것이 분명했다.

"틈 사이로 홉고블린이나 인간은 오고 갈 수 있지만, 덩치가 큰 오크는 가지 못해."

"그렇다."

우리는 최대한 오크와의 충돌을 피하며 미궁 8층의 안전지대로 복귀했다.

오크들은 홉고블린처럼 함정을 설치하지 않아 이동이 훨씬 수월했다.

안전지대에 도착하기 직전, 다른 탐험가들의 모습도 보이니 긴장이 저절로 풀렸다.

이쯤 되니 나와 라분은 서로를 칭찬하기 바빴다.

"고생 많았어. 너밖에 없다."

"다 주인 덕이다."

"너 아까 오크도 잘 잡더라."

"다 주인 덕이다."

"방패 안 뺏으니까 걱정 말고."

"⋯⋯."

마지막은 괜히 쑥스러워 한 말이다.

그렇게 미궁 8층의 안전지대에 처음으로 들어가는 순간.

[미궁 8층 안전지대에 진입합니다.]

[탐험 성공! 미궁 8층으로의 입장이 가능해집니다.]

[하위 층인 미궁 5층, 6층, 7층으로의 입장이 가능해집니다.]

[미궁 4층, 5층, 6층, 7층으로의 진척도 100%를 달성하였습니다!]

[달성 등급. B(고정).]

[주요 파티원 : 2명]

[탐험 성공으로 인한 특별 보상이 가산됩니다.]

[통합 보상 : 중급 마정석 5개.]

[해당 보상은 최초 달성 보상으로, 차후 타 인원이 동일 경로로 진입 시 중첩 보상되지 않습니다.]

"읏!"

나는 귓가를 때리는 미궁의 신비에 당황해하면서도 허공에 떠오른 중급 마정석 5개를 재빠르게 낚아챘다.

다행히 근처에 다른 탐험가가 없어 이 장면을 목격한 사람은 나와 라분밖에 없었다.

라분도 어버버거리는 것은 똑같았다.

우리는 일단 구석에 박혀 숨을 골랐다.

"중급 마정석. 5개."

"둘이서 1년 벌 돈 다 벌었네."

이제는 정말 집을 바꿔도 되겠다.

당연히 붉은 송곳니 길드의 간부, 카리나가 사용하는 집은 안 되고, 켄드릭이 사는 집 보다 조금 더 좋은 집은 어떻게 가능할 것 같다.

"라분. 이사가자. 방 하나 줄게."

"우어어어!"

"시끄러우니까 입 다물어."

"우어⋯⋯."

더불어 미궁 5층부터 7층까지의 입장 권한을 얻었다.

내가 알기로, 미궁 10층의 진입 허가를 위해서는 1층부터 9층까지의 입장 가능을 증명해야 한다고 한다.

사무소의 허가를 받지 않고도 자격만 있다면 입장 자체는 가능하다.

다만 그 이후가 힘들어질 뿐이지.

최초의 탐험 층. 진척도 축적이 아닌 탐험으로만 길을 개척해야 하는 층.

바로 미궁 10층이다.

물론 아직 한참 먼 이야기였지만.

"자, 이제 결산은 끝났고. 돌아가서 쉬자."

[미궁 1층으로 귀환하시겠습니까?]

[현재 진척도 56.8%.]

"귀환."

미궁 1층에 도착한 우리는 녹초가 된 탐험가 무리에 섞여 도시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리디엠의 상흔을 지나 밝은 칼리움의 하늘을 볼 때의 그 쾌감이란!

그동안 나를 알게 모르게 억눌렀던 미궁의 압박감이 사라지고, 대신 홀가분한 감정이 가슴을 채운다.

얼른 사무소에 가서 중급 마정석 5개와 하급 마정석들을 내밀었다.

"정산이요."

"!"

"아 빨리요."

잠깐 내 얼굴을 유심히 살피는 사무소 직원.

나도 안다. 미궁 4층을 다녀왔다는 놈이 갑자기 중급 마정석을 5개나 내미는 것이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쯤은.

그래도 암시장에 내놔서 수수료를 잔뜩 때어먹힐 바에는 이렇게 뻔뻔하게 나가는 것이 편하다.

'뭐, 훔쳐 온 것도 아닌데.'

곧 정산이 완료되었다.

"11골드 73실버입니다."

"11골드는 보관해 주시고, 나머지만 현금으로요."

사무소 직원이 건네는 주머니를 받으니 꽤나 묵직했다.

나는 구석으로 가서 은화 73개가 확실하게 맞는지 확인했다.

돈이 돈이니 만큼, 확인은 필수다.

사무소를 나오니 라분이 초조하게 왔다갔다거리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돈 벌었다! 밥 먹으러 가자!"

"오오!"

일단 모든 걸 잊고 짐을 집에 던져두었다.

집에는 콜린은 없고 곳곳에 낡은 종이들이 더덕더덕 붙어있다.

내가 콜린에게 해석을 맡긴 비밀통로의 책들이다.

'잘 하고 있으려나.'

각 페이지마다 뭔가 끄적여둔 걸 보면 뭔가 하기는 한 모양이다.

하기야. 현상금을 은화 5개나 붙였으니까. 알아서 잘하겠지.

보름 동안 찌든 몸을 벅벅 씻은 뒤 라분과 함께 고급 음식점에 갔다.

스테이크를 뜯기 위해서다.

동네 주점의 스테이크는 많이 먹어봤지만 상업 지구의 스테이크 전문점은 처음이다.

돈 깨나 버는 놈들이 가는 곳이다.

하지만 인생은 도전인 법.

돈이면 해결되는 이런 도전이야 수백, 수천 번도 할 수 있다.

식전빵이라고 내놓은 빵을 기름에 찍어 홀라당 먹으니 직원이 온다.

"T본으로 두 개 부탁합니다. 아, 적당한 레드 와인도 한 병."

"굽기 정도는 어떻게 해드릴까요?"

"?"

슬쩍 라분을 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다.

"바싹. 두 개 다."

"네?"

"바싹이요. 바싹 익혀주세요."

"⋯네!"

뭔가 잘못 말한것 같다. 그러고는 돌아가는 직원의 말에 귀를 쫑긋했다.

"T본. 웰던으로 두 개입니다."

"다음에는 웰던이라고 하면 되겠군."

이렇게 하나하나 배워가는 거다.

그 뒤 나온 고기. 주점과는 다르게 맛이 환상적이다.

대충 구워 질긴 고기와는 차원이 다른 육즙! 풍미! 맛!

"이게 바로 고기였구나."

"맛있다!"

와인을 잔에 따르고 쭉 들이키니 더 맛있을 수가 없었다.

3주간의 피로가 전부 녹아버리는 기분이다.

이렇게 먹으면 은화가 아깝지 않았다.

와인 세 병을 따고 집으로 돌아오다 책을 들고 돌아오는 콜린과 마주쳤다.

"여."

"루카스! 한 달은 걸릴 거라더니."

"목표를 빨리 달성해서 일찍 왔지."

"콜린. 잘 지냈나."

"물론이지. 뭐야. 술 마셨어?"

"많이 안 취했어."

"술 마신 놈들 하는 말이 다 똑같지."

나는 콜린이 보고 있는 책들을 봤다.

"뭔 책을 이렇게 많이 가져왔어?"

"네가 던져주고 간 것들 때문이지."

"뭔 돈이 있어서?"

저번 미궁 8층의 지도를 그릴 때, 마법사인 사서랑 꽤 친해졌다고 한다.

책 몇 권 빌려오는 정도의 부탁은 가능하다고.

콜린에게 마법사 인맥이 생기다니.

"내 덕분인 줄 알아."

"굽신거리며 말 붙이는 사이가 무슨 인맥이라고."

집에 돌아와 짐을 정리하고 오니 콜린이 어질러져 있던 종이들을 다 정리해놨다.

나는 은화 하나를 꺼냈다.

"자. 중간 보고를 들어볼까?"

"넵! 시작하겠습니다!"

열심히 방패를 손질하던 라분도 관심을 보였다.

콜린이 여러 페이지를 뒤적거렸다.

"일단 이 문서들이 작성된 시기는 약 300년 전이야."

"300년씩이나?"

"어. 갖고 온 책 절반이 마법사의 수기더라? 연도가 적혀있어서 판별은 쉬웠어."

미궁 도시 칼리움의 역사가 2천 년을 가볍게 넘어가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칼리움이 제국으로 편입되던 시절에 반란군들이 미궁으로 숨어들었던 모양이야."

"그러면 이 책들이 반란군의 자료다?"

"어. 뭐, 이제는 너무 옛날 일이라 반란 관련 자료라고 해도 처벌받을 일은 없겠지만."

"계속해 봐."

"일단, 근처에 비밀통로 없었어?"

"비밀통로?"

수기에 비밀통로의 존재가 적혀 있었나보다.

위치까지 나와있을리는 없으니 상관없지만.

"어. 비밀통로에 연구한 물건을 따로 놔두었다고 적혀있거든. 아마 이들이 있던 장소와는 다른 공간이 있었을 거야."

"연구한 물건이라."

"그래. 이 책을 발견한 장소를 뒤져봐! 분명 있을 거야!"

나는 잠깐 비밀통로를 오고 갔던 기억을 되새겼다.

우리가 발견한 비밀통로의 내의 또 다른 비밀 공간은 분명 연구를 위한 장소였다.

책상과 선반이 가득했으니.

그렇다면 마법사들의 숙소도, 연구물을 모아놓은 창고도 따로 있을만했다.

나라고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래서 비밀통로를 지나다닐 때마다 전체적으로 감지를 돌려 수색을 계속했다.

수상하게 튀어나온 돌이 있으면 건드려도 보고.

연구실도 다시 한번 싹 뒤졌다.

하지만 내가 찾을 수 있었던 건 바닥 구석에 있는 은화 하나뿐이었다.

아무래도 연구실을 습격한 놈들이 다 부수고 간 듯했다.

"자세히 말해줄 수는 없지만 근처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이게 전부야."

"아쉽네. 그러면 이 책들에서 더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없을 것 같아. 이들이 진행하던 연구에 대한 내용은 있지만 내가 마법사가 아니라서 뭐."

나는 은화 하나를 더 꺼내 콜린에게 은화 총 두 개를 건넸다.

"그래도 한 번은 전부 훑어봐줘. 쓸모 있는 정보가 나오면 바로 알려주고."

"네! 알겠습니다!"

내 돈을 밝히며 눈을 빛내는 콜린.

뭐, 나도 이런 책들의 해석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콜린이 있으니 든든했다.

이른바 윈윈 관계. 당연히 돈을 쥐고 흔드는 내가 갑이다.

"어이. 잘 하라고."

"더 잘하겠습니다!"

"술이나 더 먹자. 라분. 가서 사와."

"알겠다."

그날은 죽자고 마셨다.

다음 탐험부터는 미노타우로스의 사냥에 나선다.

어떻게든 전력을 강화하고, 소대가리를 들고 올라가 모두를 놀라게 해주리라.

* * *

미궁에서의 피로를 달래기 위해 최소 일주일은 휴식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골병이 안 나고, 원하는 때에 제 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주인! 주인!"

마나 통제력을 기르기 위해 명상을 하던 나는 그대로 집중을 잃고 말았다.

"에라이. 왜!"

"라파! 라파를 찾았다!"

"라파? 그건 또 뭐냐? 먹는 거냐?"

"내 여동생. 라파!"

"아!"

라분의 여동생. 라파.

예전에 찾아준다고 했던 것을 잊지 않고 용병에 인맥이 있던 켄드릭에게 부탁을 해놨었다.

수고비를 포함한 의뢰비를 아끼지 않았음은 당연하다.

사실 라파의 행선지야 뻔하다.

제국 내에서 노예의 합법적인 거래는 오로지 미궁 도시에서만 가능하다.

'이 근방에서 칼리움이 아니라면, 세리움 밖에 없지.'

제국 남부에 있는 미궁 도시가 두 군데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병을 통해 세리움에 라파의 탐색 의뢰를 맡겼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잊고 살았는데, 드디어 발견한 모양이다.

"잘됐다!"

"켄드릭이 빨리 모시고 오라고 했다! 주인! 빨리 가자!"

"⋯⋯너. 말 되게 잘한다? 드디어 말문이 트였어?"

어찌할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는 라분을 더 놀릴 수 없어 엉덩이를 일으켰다.

남자의 약속은 금과 같다.

돈이 좀 깨지겠지만 나의 충실한 라분을 위해서라면 상관없다.

나와 라분은 들뜬 마음으로 켄드릭의 집으로 향했다.

집 안에는 칼밥 꽤나 먹은 용모의 용병 두 명이 있었다.

듬직이 용병과 홀쭉이 용병, 듬직이 용병은 커다란 양손검을, 홀쭉이 용병은 단검을 장비하고 있었다.

켄드릭의 자식들인 안 나와 마이크는 구석에서 눈만 내밀고 구경 중이다.

"훅! 훅!"

"야. 넌 좀 나랑 떨어져."

라분을 때어놓고 용병들과 악수를 나눴다.

켄드릭이 우리를 환영하며 자리를 만들었다.

나는 우선 듬직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루카스입니다. 이거,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하! 돈 받고 하는 일인데요. 페트릭입니다. 이쪽은 메트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메트입니다."

"네 루카스입니다. 이쪽은 아시겠지만 라분."

"라분이다."

용병들이 나와는 다르게 라분과는 엉성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제 동료입니다. 착한 놈이죠."

"하하. 노예도 동료로 삼다니. 배포가 크시군요!"

페트릭의 농담에 웃지 않자 주변이 금세 조용해졌다.

"노예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그렇군요. 하기야. 그러니 노예 놈을 위해 이런 의뢰까지 하셨겠지. 하하하!"

페트릭이 맥주를 꿀꺽꿀꺽 마시며 표정을 가렸다.

미궁 4층에서도 라분을 무시하던 놈들에게 발차기부터 해댔던 나다.

이놈들이 라분의 여동생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켄드릭의 지인만 아니었다면 칼부터 뽑고 봤을 것이다.

경직되어버린 분위기, 페트릭도 크게 사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켄드릭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손뼉을 쳐 이목을 끌었다.

"이거. 역시 젊으신 분들이 있으니 혈기가 넘치는군요."

그는 아무래도 즐거워 보이는 것이 이 상황을 기다린 느낌마저 들었다.

"아무래도 제 제자가 화가 많이 난 것 같은데. 어떻게. 페트릭 자네가 한 수 보여줄 텐가?"

"응? 라분. 화 안⋯."

내가 탁자 아래로 정강이를 걷어차자 조용해지는 라분.

이 녀석은 성정이 너무 착해서 문제다.

켄드릭이 내게 살짝 윙크하는 것을 보고 얼른 내가 튀어나왔다.

"그거 참 좋네요. 이렇게 찜찜하게 이야기 하기보다 땀 한 번 빼면 더 괜찮을 것 같네요."

"허허. 이거 참."

"당연히 나무 목검과 나무 방패로 해야지. 마나도 최소한으로만 쓰고."

페트릭이 난감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참고로 라분은 방패를 든지 반년이 지나지 않았네. 교육은 주로 몬스터와의 대전을 기준으로 했고, 라분. 괜찮겠나?"

"스승. 상관없다."

켄드릭은 이 어색한 상황을 제자의 단련 기회로 삼으려는 듯했다.

그나저나 저 페트릭이라는 놈. 딱 봐도 꽉 찬 2위계다. 조금의 기회만 있다면 검염을 뿜어낼 수도 있는 인재.

과연 라분이 이길 수 있을까?

라분과 켄드릭이 먼저 뒤뜰로 가고, 페트릭도 씩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원래 싸움 구경이 가장 재미있는 법.

나는 테이블에 놓인 육포를 한가득 집고 뒤뜰로 향했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45

갑작스레 성사된 라분과 페트릭의 대련.

라분이 켄드릭이 챙겨준 장비를 입기 시작했다.

켄드릭이 라분의 등을 토닥이며 뭐라 말을 해주는데, 그 모습이 마치 콜로세움에 나가는 검투사를 격려하는 트레이너 같았다.

용병, 페트릭은 허리를 이리저리 꺾으며 스트레칭을 하고 있다.

육포를 까먹고 맥주를 홀짝이며 지켜보고 있는데 또 다른 용병 메트가 양해를 구하더니 내 옆에 앉았다.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는군요. 저 무식한 녀석 대신 저라도 사과드리겠습니다."

"뭐, 덕분에 좋은 대련을 보게 됐으니 괜찮습니다."

"페트릭에게는 손속에 사정을 좀 두라고 말해놨습니다."

"이런. 큰일 났네요."

"?"

"저도 라분에게 같은 말을 해 놓은 상황이어서요."

"⋯⋯."

메트는 기싸움이 더 번지지 않기를 원하는지 얼른 화제를 돌렸다.

"저희가 조사한 라파라는 여자 노예에 대해서 말씀드려야겠군요."

"음. 부탁드립니다."

라분이 껑충껑충 제자리에서 몇 번 뛰더니 자세를 잡았다.

"세리움에서는 잘 안 팔린 모양이더군요."

"?"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건, 절대 비하나 시비의 의도가 아닙니다.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

메트가 엄청나게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뭔 개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듣자.

"말해보세요. 화 안 낼 테니까."

"박색입니다."

"박색?"

"흠흠. 좀 못생겼습니다."

"아하!"

"거기다가 피부가 까무잡잡하기까지 하고, 말도 제대로 못하니. 팔리는 게 이상할 정도죠."

"그렇군요."

라분 이 자식. 지 여동생 예쁘다고 노래를 불러서 혹시라도 팔려나가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그나마 다행이다.

"그래서 노예 경매가 허용된 칼리움으로 오는 중이라고 합니다. 세리움은 시장 명령으로 노예 경매가 불가능하니, 일단 칼리움으로 보내 헐값에 팔려는 모양입니다."

"그게 언제죠?"

"오늘 칼리움에 도착했습니다. 악성 재고이니만큼 아마 내일 바로 경매에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나는 이쯤에서 잔금을 치르기로 했다.

은화 55개가 들어간 주머니가 메트의 손에 쥐어졌다.

"5개 더 넣었습니다. 세리움에서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노예 상인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여기⋯."

메트가 내게 쪽지를 건넸다.

나는 자연스레 쪽지를 품에 집어넣었다.

나중에 콜린에게 읽어달라고 해야지.

요즘 동화를 주며 콜린에게 필기체 읽는 법을 배우고 있기는 한데, 이게 한 번에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 시작하려나 봅니다."

메트의 말을 듣고 중앙을 바라보자 페트릭과 라분이 서로 검을 부딪히고 있는 것이 보였다.

대련의 시작이다.

페트릭은 딱 보이는 느낌대로 매섭게 라분을 몰아세웠다.

아니, 몰아세우려고 했다.

태산같이 버티고 선 라분이 페트릭의 연속 공격을 방패 하나로 모두 막아내기 전까지는.

"읏?"

신중하게 변한 페트릭이 뒤로 세 걸음 물러나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하지만 라분은 이미 여유를 주지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대로 태산 같은 몸을 숙여 페트릭에게 돌격한다.

"!"

페트릭이 연신 물러나며 파상 공격을 막아내지만, 힘에 부치는 것이 보였다.

당연하다. 공격 일변도인 양손검이 균형 있는 한손검과 방패에 밀리기 시작하면 답도 없다.

페트릭이 다시 강공으로 분위기를 가져오기 위한 시도를 했다.

그렇다고 라분의 방어를 뚫을 수는 없었다.

홉고블린 세 마리도 혼자서 감당하던 라분이다.

고작 양손검 하나를 감당하지 못할 리 없다.

페트릭이 마나를 줄기줄기 뽑아냈다면 대화가 통했겠지만, 지금은 엄연히 대련, 합의 없이 마나를 쓸 수는 없었다.

결국 속절없이 밀려난 페트릭이 걸음이 꼬여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라분이 페트릭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페트릭이 머리로 떨어지는 검을 손으로 막으며 비명을 질렀다.

"으악!"

그 커다란 소리에도 무색하게, 라분의 검은 페트릭의 머리를 톡 하고 때릴 뿐이었다.

"⋯⋯."

"⋯⋯."

원래 대련이란 이렇게 끝이 나는 것이 맞는 것임에도, 페트릭은 괜히 찔리는 게 있어 부상을 당할 줄 알았나 보다.

역시 사람은 죄짓고 살면 안 된다.

라분이 검을 떨어뜨리고 손을 내밀자 얼떨결에 손을 마주 잡는 페트릭.

라분의 힘에 의해 벌떡 일으켜진다.

"수고했다."

"⋯대단한 실력이더군."

"주인에 비하면. 별 거. 아니다."

나와 메트, 켄드릭의 환호와 함께 대련이 끝났다.

켄드릭이 손가락 없는 손으로 라분의 등을 팡팡 쳤다.

"페트릭. 응? 노예라고 무시하더니. 내 제자 맛이 어때?"

"이런."

페트릭이 이마를 감싸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재가 제자 하나는 제대로 길렀구먼 그래. 후!"

용병이 다시 라분에게 다가와 손을 건넸다.

"내 사과하지."

"라분. 화 안 났다."

"내가 좀 편해지고 싶어서 그래. 페트릭이다. 은패 용병이지."

"라분. 주인의 노예다."

훈훈한 결말이었다.

안나와 마이크도 연신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그동안 라분과 꽤 편해진 모양이다.

같이 저녁을 먹으며 대화가 이어졌다.

메트가 맥주를 한 잔 마신 뒤 말했다.

"내일 경매에는, 루카스 님 혼자 가시는 게 좋습니다. 최소한 라분은 안 됩니다."

"?"

"노예 상인이라는 놈들은 노예를 비싸게 팔면 그만이죠. 그렇기에 루카스 님이 라파를 노린다는 사실을 알리면 어떻게든 값을 올리려고 할 겁니다."

"그렇군요."

"라분이 옆에 있으면 눈치 빠른 노예상인이 루카스 님의 목적을 알아차릴 확률이 높지요."

"아하."

"그래서 저희도 세리움에서 대놓고 라파를 찾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린 것도 그 이유지요."

역시 비싼 돈 주고 고용한 용병들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아마 내가 라분과 세리움에서 라파를 찾았으면 동네방네 소문이 다 나서 덤터기를 쓰고 사 오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군요. 이것 참,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맙다!"

"라분 이 친구는 너무 눈에 띕니다. 아쉽겠지만 숙소에 두는 게 도움이 될 겁니다."

다음 날, 나는 콜린과 함께 노예 거리를 방문했다.

대륙에 몇 없는 합법적인 거래처이기에 언제나 적당한 사람으로 붐빈다.

"루카스. 이런데 막 갔다가 인신매매당하는 거 아냐?"

"어휴. 넌 똑똑이가 뭐 이리 겁이 많냐?"

우리는 경매 시간에 딱 맞춰서 경매장으로 갔다.

이것도 한 번 와봤다고 익숙하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경매 진행 순서는 여자, 여전사, 남자, 남전사, 기타 순.

라분의 여동생 라파는 당연히 여전사가 아니니 여자다.

가장 순서가 앞이고, 그렇게 상태 좋은 매물이 아니라고 했으니 더 앞에 있을 가능성은 높았다.

라분을 구매했을 때 봤던 진행자가 쉬지 않고 입을 열고 있었다.

"자자! 앉아앉아! 시작하기 1분 전이야! 달에 한 번 있는 경매날. 이번에는 귀족 분들도 보이시네! 어이쿠! 소인이 실례했습니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90도 인사를 하는 진행자.

따로 마련된 원형 테이블에 앉은 귀족들이 적당히 손을 흔들었다.

신분을 감추고 싶은지 얼굴을 가리는 가면을 쓴 모습이었다.

저번에 라분을 살 때는 신경도 쓰지 않아 몰랐는데, 생각해 보면 항상 저 사람들이 높은 금액을 부르곤 했다.

'귀족들이었구나.'

"자, 그러면 바로 시작하겠습니다아! 떨이부터! 야만인 여자! 말 못 해요! 못생겼어요! 말 못 하니 말도 못 알아들어요! 그렇다고 눈치가 좋냐? 그것도 아니다 이 말이야!"

나는 눈을 부릅뜨고 연단에 선 여자를 바라보았다.

"야. 루카스."

"그래. 누가 봐도 라분 여동생이다."

몸은 여리여리한데 얼굴을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살 좀 찌우고, 근육을 기른 다음 방패를 들리고 싶은 외모다.

"콜린. 최대한 싸게 입찰해 봐."

"내가 그런 건 또 전문이지."

안내판과 나를 통해 수신호를 외운 콜린이 여유롭게 물을 마시며 경매를 구경했다.

"자, 그럼 5골드 부터 시작. 5골드. 바로 나왔어! 아무리 못생겨도 노예는 노예라고. 본전 뽑는 게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아? 5골드 10실버. 좋아."

콜린은 5골드 30실버, 5골드 80실버에 입찰해 자신이 경매에 참여할 의사가 있음을 표현했다.

하지만 노예가 기본 값이 있는 법. 8골드까지는 자연스레 값이 올라간다.

하지만 8골드에서 대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8골드 30실버! 8골드 30실버 없어요?"

콜린이 심각하게 고민하는 표정을 짓는다.

진행자의 눈길이 콜린에게 고정된다.

이대로는 경매가 끝날 판.

하지만 나는 썩어들어가는 속과는 다르게 콜린의 말대로 하품을 하며 여유를 부리고 있을 뿐이다.

'입찰하라고!'

콜린이 한참 고민하더니 검지와 중지 두 손을 들고 한 번 튕겼다.

"자! 8골드 40실버! 한 번에 20실버를 올렸어요! 8골드 60실버 없습니까?"

나는 두근거리는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연신 물을 퍼먹었다.

콜린은 노예시장에 들어올 때와 달리 덤덤한 표정으로 진행자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없어요? 없지! 없다! 없어! 없네? 낙찰! 8골드 60실버에 낙찰되었습니다!"

만세!

내가 벌떡 일어나려고 했지만 콜린이 아직 때가 아니라는 듯 내 무릎을 잡았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콜린의 뒤를 따라 걸었다.

"야. 너 대박이다. 도박사 해도 되겠어."

"시끄러워. 지금 심장 터져 죽을 것 같으니까."

"왜. 너 지금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데."

"내 인생에 8골드 거래를 하는 날이 오다니."

라분을 26골드 사고 데려왔다는 걸 알면 그대로 졸도할 것 같은 얼굴이다.

우리는 천막 뒤편으로 가 라분의 여동생, 라파를 보았다.

"라분 여동생이군."

"라분 여동생이야."

"자! 8골드 40실버에, 수수료 10% 더해서 9골드 24실버 되겠습니다!"

이짓도 두 번째라 그렇게 충격적이지 않다.

나는 얼른 10골드가 든 주머니를 건넸다.

미궁 8층 안전지대를 개척하고 얻은 마정석 전부를 판 돈이다.

잠깐 내 곁을 스쳐 지나가니 있던 것 같지도 않다.

대신 라분의 여동생을 얻었으니 됐다.

"자! 네 새로운 주인이다. 어서 인사드려!"

노예 상인이 라파의 등을 팍 밀치려 했다.

나는 얼른 라파의 팔을 잡고 콜린의 품으로 라파를 밀어 넣었다.

내 품은 라파에게 열릴 만큼 넓지 않았다.

"읏! 얌마!"

"됐고. 네가 챙겨."

"우쒸."

"자! 이름은 라파. 나이는 모르고, 말도 거의 못해. 무엇보다 못생겼어. 요리도 못하고, 힘도 그다지 좋지는 않아. 어디다 쓸지는 고민 좀 하시라고."

곧이어 마법사가 내 손등에 노예 계약에 관련한 마법을 새겼다.

이런저런 절차들을 모두 마무리하고 나서야 노예시장을 나올 수 있었다.

그다음에 등록소에서 또 1골드를 뜯겼다.

콜린이 어이가 없어서 등록소 벽을 팍팍 때렸다.

"무슨, 1골드, 씩이나, 처먹어?"

"쯧쯧."

"뭐야?"

"그것도 몰랐냐. 노예 등록에는 무조건 1골드가 필요하다고."

"⋯⋯."

집으로 돌아오니 안절부절못하고 집 안을 서성이던 라분이 반색했다.

"주인! 왔다!"

"어."

"라파는?"

나는 문에서 몸을 빼고 내 뒤에 가려져있던 라파를 내밀었다.

"짜잔!"

"!"

"!"

두 사람이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이내 가까워졌다.

곧 서로 부둥켜안고 꺼이꺼이 울기 시작한다.

"%&@#!"

"&#:₩^"

뭔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듣기 좋다.

감수성 풍부한 콜린이 이내 울음을 터뜨린다.

나도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걸 억지로 참았다.

둘은 거의 두 시간 동안 붙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남매의 이야기꽃은 단 한 번도 끊기지 않고 계속되었다.

나와 콜린은 처음의 감정은 식고, 자꾸 외계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둘을 무시하고 떠들기 시작했다.

가끔 우리에게로 시선이 오면 손을 들어주는 정도.

한참이 지나고서야 제국어가 나왔다.

"라파! 제국어로. 하자. 고생 많았다."

"오라버니도 고생 많으셨어요. 평생 못 볼 줄 알았어요."

"응?"

"응?"

나와 콜린이 당황했다.

라파의 입에서 너무나 현지인 같은 제국어가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제국어를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한다길래 콜린을 시켜 교육하려고 했는데, 반전도 이런 반전이 따로 없었다.

"아! 내 주인이다. 주인. 라파다."

"알고 있어."

"우리 오라버니께서 신세 많이 지셨다고 들었습니다. 호흡법을 전수해 주셨다고요? 그런 비전을.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아, 예."

"말씀 편하게 하시지요. 평생 주인으로 모시겠습니다."

"어. 응."

라분과 꼭 닮은 얼굴과는 다르게 목소리는 옥구슬 굴러가듯 또렷하고 맑다.

눈 감고 들으면 절세의 미녀가 말하는 줄 알겠다.

"미궁 탐험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비록 그런 쪽에 재능은 없지만 뒤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움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물심양면?"

"이것저것 도와준다는 거야."

"아⋯⋯."

어떻게 제국어를 배웠냐고 물어보니, 노예로 팔려나가던 시절에 귀동냥으로 배웠다고 했다.

"천재⋯!"

"과찬이십니다. 주인님."

"하하! 내 여동생! 역시 내 여동생!"

라분이 아직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방방 뛰었다.

이내 내 앞에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라분. 앞으로. 평생.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인에게 충성 다 한다."

나는 당황해하면서도 할 말은 다 했다.

사실 라분의 충성은 그동안 있었던 나의 죽음들에서 증명이 끝난 부분이다.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저도 주인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어요. 이래 봬도 머리 쓰는 일에는 자신이 있답니다."

"어, 우선 집 청소 좀 해줘."

"물론이죠."

라파가 청소를 시작하고, 콜린이 기념주를 가져왔다.

원래 이번에 이사를 하려고 했는데, 라파를 구매하느라 돈을 너무 많이 썼다.

이제부터 잡을 미노타우로스의 몸속에 마정석이 있기를 기도해야겠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46

라분과 라파의 감격적인 남매 상봉이 끝난 후.

우리는 켄드릭의 집으로 넘어가 축하파티를 했다.

이번 일을 진행하는 데에 켄드릭의 도움이 컸기 때문이다.

술과 음식을 잔뜩 사서 가니 켄드릭의 자식들인 안나와 마이크가 좋다고 난리다.

켄드릭이 한눈에 라파를 알아보았다.

"음. 이 아이가 라분의 여동생이겠군."

"안녕하세요. 라파라고 합니다."

"그래. 라분의 스승 켄드릭이네. 앞으로 잘 부탁하지."

양껏 음식과 술을 먹고 기분 좋게 널브러졌다.

라파는 술을 마셨음에도 라분을 똑 닮은 얼굴만 약간 붉어졌을 뿐 아무렇지도 않아 했다.

"평소에 술을 좀 마셨나봐? 오빠랑 다른데?"

"오늘 처음 먹어보는데, 꽤 맛있네요."

"!"

켄드릭의 환송을 받고 집에 돌아 라파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가 들려준 과거 이야기는 참으로 놀라웠다.

"갑자기 오라버니와 떨어지는 바람에 우선 상황을 알아야 했어요.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말을 배웠죠."

"듣는 것만으로? 말을 배웠다고?"

"네. 여자 노예들은 노예 상인과 가까운 곳에서 관리되어서, 말만 이해하면 됐으니까요. 가끔 상황을 설명한다고 통역까지 해준 덕분에 생각했던 것보다 어렵지 않았어요."

듣는 것만으로 말을 배웠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을 너무나도 간단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라파.

"⋯⋯."

라파는 노예 상인들의 정책으로, 가족들과 같이 잡혀왔을 때는 최대한 분리하여 이송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오라버니가 칼리움으로 가야만 했어요. 그래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높아질 테니까요."

귀동냥을 통해 세리움은 경매를 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듣고, 최대한 팔리지 않게 행동했다고 했다.

"라파. 그래도. 꽃. 너무 많이. 먹었다."

"어쩔 수 없었어요."

"꽃?"

내가 반문하자 라분이 열심히 설명한다.

"선인장 꽃은. 약이지만. 먹으면. 독⋯⋯"

"야. 시끄러."

라분의 손짓 발짓보다 라파의 말을 듣는 게 더 빠르다.

라파가 품 속에서 바싹 마른 붉은색 꽃잎들을 꺼냈다.

"달여먹으면 약이 되지만, 그냥 먹으면 독이 되는 그룸 선인장의 꽃이에요. 잎을 옷에 숨겨놓고 있었습니다."

"아하."

"선인장의 가시에 찔리면 목 위가 전체적으로 부어오르고, 꽃잎을 조금씩 먹으면 그 효과가 지속되죠."

"그러면, 그 라분 닮은 얼굴은⋯."

"꽃의 부작용이에요. 일부러 얼굴을 추하게 만들기 위해 계속 꽃잎을 먹었어요. 아까 전부터 꽃잎을 안 먹었으니까, 이틀 정도 지나면 붓기가 다 가라앉을 거예요."

"그, 그렇구나."

나는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노예로 팔려가는 상황에서도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는 침착함.

정보를 얻기 위해 모르던 언어를 습득해버리는 천재성.

단편적인 정보로, 한정된 상황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두뇌까지.

저 멍청한 라분과는 비교하기가 미안할 정도로 전혀 다른 동생이었다.

"주인. 또 이상한 생각한다."

"⋯⋯미안."

"사과를 한다고? 주인이?"

마음만 같아서는 미궁에 데려가고 싶을 정도다.

저 두뇌와 상황 판단 능력을 미궁에서 사용한다면, 우리가 미궁 8층에서 그렇게 개고생을 하지도 않았을 거다.

하지만 슬쩍 떠보니 본인이 난색을 표한다.

"체력이 너무 부족해서. 이 부분은 도저히 손쓸 수가 없어요."

"주인! 동생은 둬라. 라분이 더 열심히. 하겠다!"

"⋯그래."

어차피 기대하고 말한 것도 아니기에 바로 포기했다.

하지만 저 머리, 콜린과 함께 우리의 미궁 탐험을 서포트해 줄 수 있는 기준은 확실히 넘어선 것 같다.

"좋아!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 후로 라파는 콜린에게 글 쓰는 법을 배우며, 한편으로는 나와 라분의 미궁 탐험 이야기를 들으며 이런저런 첨언을 했다.

"주인님께서는 파티의 리더십니다. 저랑 같이 글 읽는 법을 배워요."

"엥? 그게 왜 이렇게 연결되는데?"

"어떤 상황에도 대응할 줄 아는 능력을 기르셔야 합니다. 듣자 하니 현재 파티 인원은 오라버니와 주인님 둘뿐.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주인님뿐입니다."

"그렇군."

"라파!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난 아주 잘 알겠는데?"

그 뒤 나는 라파와 함께 글을 배웠다.

역시 머리 똑똑한 사람은 다른 게, 내가 하나를 배울 동안 라파는 거짓말 안 치고 서른 개를 배웠다.

"주인님. 여기는 이렇게, 저기는 요렇게."

"오오. 이해가⋯⋯ 된다!"

콜린과 다르게 가르치는 것도 능숙했고.

덕분에 콜린과 지지고 볶으며 쌓았던 읽기 기술이 한 단계 더 높아졌다.

더군다나 시간이 지나면서 라파의 말대로 그녀 얼굴에서 붓기가 빠지기 시작했는데⋯⋯

엄청나게 예쁘다!

얼굴이 퉁퉁 부었을 때는 완벽한 라분이었는데, 원래 얼굴이 점차 드러나더니 어느새 아름다운 미녀가 되어있었다.

다만 얼굴 곳곳에 살짝 패인 자국이 있어 이게 흠이다.

흉터가 없었다면 얌전한 인상이었겠지만, 흉터로 인해 차가운 느낌이 보인다.

"원래는 없었는데, 그룸 선인장을 너무 오래 먹었나 봐요. 어쩔 수 없지요. 다른 선택지가 없었으니."

라분이 동생의 얼굴에 난 흉터를 보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본인은 이 정도면 싸게 값을 치렀다며 아무렇지 않아 했지만, 오빠의 마음은 또 다른 법이다.

"미안하다! 못난 오빠가! 지켜주지 못해서!"

자신의 무릎에 얼굴을 묻은 라분의 머리를 토닥거리며 책을 읽는 라파.

벌써 우리가 미궁의 비밀 통로에서 가져온 연구 일지를 통달하고 있다.

나는 기왕 콜린과 라파, 둘의 지혜를 빌릴 겸 내가 가진 정보들을 조금 더 오픈하기로 했다.

콜린이 미궁의 정보를 듣고 아주 기겁을 한다.

"엥? 벌써 미궁 8층 탐험을 하고 있다고? 거기다가 미노타우로스를 잡겠다고? 고작 둘이서?"

"그래."

"말도 안 돼!"

"미노타우로스가 뭐죠?"

고유 명사에 약한 라파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는 콜린.

나의 목격 정보를 통한 외견 묘사는 덤이다.

"소의 머리에 근육이 있는 인간의 몸, 2층 건물 크기의 대형 몬스터. ⋯⋯정보가 더 필요해요."

라파가 라분을 잡아끌고 한참을 이야기했다. 사막의 언어로 대화했기에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못 알아듣겠다.

잡혀있던 라분이 녹초가 되고서야 라파가 라분을 놓아주었다.

그 뒤 라파는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와 같이 글을 배우는 한편 콜린과 같이 외출해 책을 빌려오기도 하고, 은화 1개를 받아 미노타우로스와 대면한 적 있는 탐험가를 만나러 가기도 했다.

그 결과.

"너무나도 무모하지만 지금까지 말씀 주신 정보를 분석해볼 때, 단 한 가지. 방법이 있을 것 같아요."

"정말?"

정면 승부 외의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했던 내게는 엄청난 소식이었다.

라파가 내준 글쓰기 숙제를 풀고 있던 내가 반색하며 종이를 얼른 날려버렸다.

라파는 자연스레 내가 던진 종이를 주워 순서를 맞춘 다음 다시 자리에 올려놓았다.

"⋯⋯."

"문제를 푸시면서 들어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넵."

나는 다시 종이에 머리를 박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탁상공론뿐이라, 실제로 이 방법이 적용될 수 있을지 확신이 되지 않아요."

"괜찮아. 말해줘."

탁상공론이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방법이 생겼다는 것이 중요하다.

안 되면 죽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라파가 아무리 똑똑해도 절대 생각하지 못할 방법이기도 했다.

"그리고 만약 가능하다고 해도 여전히 위험도가 높고요. 사실 많이 힘들어요."

내게 위험하다는 건 반드시 성공한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내가 목숨을 걸 결심만 한다면, 무조건 원하는 것을 이뤄낼 수 있다.

"괜찮아. 듣고 판단해도 되니까. 말해봐."

"그 방법이 뭐냐면⋯"

라파가 품 속에서 커다란 뭔가를 꺼냈다.

* * *

그로부터 일주일 뒤, 우리는 미궁 8층의 호숫가 위에 서 있었다.

"주인. 정말 라파의 말이. 맞을까?"

"모르지. 일단 우리를 위해 머리를 썼다는 점에 고마워하자고."

"알았다."

"여동생 믿지?"

"믿는다."

"나 믿지?"

"믿는다."

"가자."

곧 미노타우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난장판이 된 호수를 둘러보며 분노의 포효를 지으려던 괴물이 우리가 있는 쪽을 보더니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미노타우로스의 눈이 번뜩였다.

나도 정상은 아니었다.

"흐흐."

고작 두 명이서 미노타우로스 레이드라니.

라파가 알아봤을 때, 손발이 맞는 3위계 10명, 2위계 5명의 파티에서조차 사망자가 나왔다고 했다.

항상 99% 이상 토벌이 가능할 때만 토벌을 진행하는 미궁 탐험의 특성상, 이는 토벌의 완전한 실패를 의미했다.

애초에 라파도 인원 충원을 먼저 이야기했을 정도.

[⋯때문에 가장 추천드리고 싶은 방법은, 손발이 맞는 동료들과 함께 레이드를 진행하는 거예요.]

하지만 그렇게 해서 미노타우로스를 잡는다면 내 마음속에 들끓고 있는 이 트라우마를 잠재울 수 없을 것 같다.

오로지 내 손으로, 내 검으로 공포에 물든 미노타우로스의 시체를 봐야 직성이 풀리겠다.

[안 돼. 둘이서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봐 줘.]

[알겠습니다.]

라분은 의연하게 내 앞을 막았다.

라분은 나를 믿기에 이 자리에 서 있었고, 라파는 나를 믿는 라분을 믿기에 가족을 사지로 보낼 수 있었다.

나는 그 믿음에 보답해야 하며, 언제든지 보답할 방법을 마련해두고 있었다.

'무한 회귀.'

내 자신감의 원천이자, 인생의 원천이기도 했다.

미노타우로스가 낮고 음울한, 하지만 우렁찬 포효를 내뱉었다.

땅을 퍽퍽 발로 차며 돌진 자세를 잡는 소대가리.

"그래. 한 번 해보자. 라분. 조심하고."

"주인도 조심해라."

내가 미리 설치한 밧줄을 잡아당기자 미노타우로스의 몸뚱이만 한 붉은 천이 휘리릭 펼쳐졌다.

[특이하게도 미노타우로스는 붉은색에 민감해요. 미노타우로스와 전투를 했던 탐험가들과 관련 책에 서술된 일관된 정보죠.]

[붉은색 천으로 미노타우로스의 돌진 경로를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을 거예요.]

우리는 얼른 붉은 천 뒤로 숨었다.

천지를 울리는 쿵쾅 소리와 함께 미노타우로스가 우리에게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천을 천천히 움직이며 미노타우로스의 돌진을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한다.

"무오오오오!"

바람이 불지 않는 미궁에 미노타우로스의 돌진이 조그마한 바람을 일구어낸다.

조금 펄럭이는 붉은 천 뒤로 보이는 괴물의 얼굴.

눈이 붉은색으로 물들어있다.

[미노타우로스의 돌진력과 힘은 그 단단한 미궁벽을 부술 만큼 위력적이라고 들었어요.]

[우리는 그 힘을 이용해야 해요.]

미노타우로스의 발이 붉은 천 앞의 땅을 딛는 순간,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그대로 무너졌다.

호수를 향해 비스듬히 기울어진 함정은 미노타우로스의 몸을 호수 쪽으로 기울게 만들었다.

본인이 만든 돌진력을 상쇄하지 못한 몸이 홱 돌아버리고, 미노타우로스의 몸이 그대로 호수에 빠졌다.

[호수에 있는 프라냐. 그리고 주인님과 오라버니. 셋의 합동 공격이 필요해요.]

[모자란 인원을 살인 물고기로 채우는 거죠.]

[되도록 기동성을 상실하도록 다리를, 가능하시다면 얼굴을 노리세요.]

"라분!"

"우어어어!"

프라냐들이 미쳐 날뛰고 있었고, 무릎이 돌아가버린 미노타우로스가 허우적거리는 틈을 타 나와 라분이 괴물의 몸 위로 올라갔다.

검염을 싣고, 깊숙이 검을 내리찍었다.

"꼬로로록!"

깊게 박힌 검 위로, 아직 물에 잠겨있는 미노타우로스의 머리 쪽에서 기포가 올라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씨익 웃었다.

토벌의 시작이다.

"⋯⋯."

[주인님. 실패하시면 지체 없이 도망치셔야합니다. 목숨이 가장 중요한 법이니까요.]

⋯⋯다섯 번째 시도만에 성공했다는 사실은 나만 아는 비밀이었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47

무려 1분 만에 미노타우로스가 소대가리를 물 밖으로 내밀었다.

"푸허!"

내가 일부러 몸통에 검염으로 상처를 냈기에 피 냄새를 맡은 프라냐들이 광분하기 시작했다.

미노타우로스가 열심히 본인의 무릎을 쑤시고 있는 우리들을 발견했다.

우리도 수상한 시선을 눈치채고 고개를 들어 미노타우로스와 눈이 마주친다.

"⋯⋯."

"⋯⋯."

"⋯⋯."

잠깐의 정적 속에서도 무릎 관절을 끊어내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무오오오! 컥!"

벌린 입으로 프라냐 대여섯 마리가 쏙 들어갔다.

격한 기침이 우리에게 시간을 끌어주는 사이에.

-뚜둑

미노타우로스의 무릎 관절 절반을 끊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프라냐의 어시스트가 주효했다.

"라분! 됐다!"

"무어어어!"

미노타우로스가 엄청난 코어 힘을 이용해 호수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리 하나만을 사용한 괴물의 윗몸일으키기다.

내 검이 열심히 미노타우로스의 배를 쑤셔봤지만 녀석의 윗몸일으키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후두둑 물과 프라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미노타우로스가 몸을 완전히 일으키는 데에 성공했다.

"이제 제대로 된 시작이군."

얼른 뜀박질해 괴물의 몸에서 벗어났다.

그렇게 나자빠지는 와중에도 몽둥이는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몽둥이를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켜본다.

하지만 이미 돌아간 것도 모자라 관절을 반쯤 끊어놓은 무릎이 미노타우로스의 육중한 무게를 버틸 리 만무하다.

중심을 잡자마자 기우뚱 쓰러지려는 몸.

결국 몽둥이로 받치고 나서야 겨우 균형을 잡았다.

상처는 심각한 수준이다.

만약 녀석이 우리를 죽이고 살아남는다 할지라도 제대로 된 삶은 불가능할 정도.

'트롤이라면 모를까.'

그래도 미노타우로스의 사기는 죽지 않았다.

눈은 계속 나와 라분을 바라보고 있었고.

"무리하지 말고, 돌려깎자. 이제 기동성은 우리가 훨씬 위야."

"알았다."

"정면으로 공격을 받으면 안 돼."

이미 지워져버린 네 번의 죽음 속에서, 함정이 실패했기에 미노타우로스와 근접전을 치러야 했다.

그 네 번의 전투에서 미노타우로스는 극강의 능력을 자랑했다.

멀쩡한 두 다리를 디딤발로 나오는 완력은 그야말로 재앙.

맞받아쳤다가는 그대로 으깨진다.

더군다나 속도까지.

체감 상으로 트롤 두 마리가 동시에 공격을 해도 미노타우로스의 공격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다.

"항상 조심해!"

"우어어어!"

그런 미노타우로스의 공포를 알고 있는 나에게.

"?"

"?"

저 엉성한 몽둥이 공격은 너무나도 의심스러웠다.

힘 없는 견제 몇 번. 나와 라분은 흩어져 접근해 미노타우로스에게 계속해서 일격을 날렸다.

단단한 가죽이 갈라지고, 피를 뿜어낸다.

하지만 미노타우로스는 허둥대며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라분이 미노타우로스에게 공격을 가했다.

하지만 약간 모자라는 거리.

라분이 욕심을 부려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

당장 전투의 흥분에 젖은 라분이 선을 넘은 순간, 기회를 잡은 미노타우로스의 몽둥이가 벼락같이 라분에게 내리쳐졌다.

도저히 직전의 엉성한 공격과 연결되지 않는 최속의 일격.

'내려찍기는, 두 발이 아니라 한 발로도 가능해!'

내가 무한 환생자가 아니었다면, 네 번을 내리 죽으며 미노타우로스의 능력을 파악하지 않았더라면 라분은 그대로 납작해져버렸을 것이다.

아무리 방패 다루는 것에 재능이 있다고 해도 2위계가 미노타우로스의 일격을 정면으로 받아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검이고 뭐고 집어던지며 겨우 몸을 던져 라분을 감싸고 굴렀다.

"큭!"

하지만 미노타우로스의 내려치기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라분이 놓친 방패를 잡아내고 마나를 있는 대로 불어넣었다.

"빨리 뒤로 빠져!"

"헙!"

자신이 내려친 몽둥이를 빠르게 회수하고 이루어지는 두 번째 공격이 내가 집어든 방패에 닿았다.

"크윽!"

정면으로 받아내는 것은 미친 짓이다.

요령이 없지만 마나를 잔뜩 싣고 어떻게든 옆으로 흘렸다.

방패가 부서질 듯 휘어졌지만 부서지지는 않았다.

몽둥이가 땅을 찍고, 미노타우로스가 삼연격을 위해 몽둥이를 들어 올렸을 때, 나와 라분은 괴물의 공격 반경 밖으로 벗어나있었다.

"주, 주인."

"퉤! 조심해. 저녀석. 장난 아니야."

"괜찮나? 팔이. 휘듯이⋯⋯"

"정신차려!"

"!"

당황해하는 라분에게 소리를 지르며 방패를 던져주었다.

"항상 침착해. 조금만 실수해도 우리 다 죽는 거야. 네가 죽어도 내가 죽는 거라고. 알겠어?"

"알았다."

다행히도 미노타우로스의 내려치기가 전력이 아니어서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일격을 두 번, 세 번 받아낸다면?

나는 저릿저릿한 몸을 풀었다.

'여섯 번째 도전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나는 미리 뒤로 던져놓은 검을 들어 올렸다.

미노타우로스는 장기전을 대비하고자 지친 몸을 호수의 벽에 기댔다.

"그르르르."

회복되지 않은 무릎에서 피가 뚝뚝 떨어진다.

어차피 시간은 우리의 편이다.

그 후.

미노타우로스는 그 부상으로 무려 5시간이나 버티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트롤의 회복력을 가지지 못한 미노타우로스의 한계는 명확했다.

모기처럼 앵앵거리는 나와 라분을 잡기 위해 마지막으로 도약하는 미노타우로스.

우리는 이전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몸을 날려 일찌감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났다.

몸이 바닥으로 쿵 하고 떨어진다.

"무어어어! 무어어어!"

이미 반대쪽 다리도 너덜너덜해진 미노타우로스가 사지를 버둥거리며 나를 노린다.

마지막으로 던져버린 몽둥이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마지막으로 괴물의 공격이 뚝 그쳤다.

"후욱. 후욱."

미노타우로스의 숨소리와 함께 굵은 핏물이 솟아 나와 피웅덩이를 만들었다.

나와 라분은 안전을 확인한 후 천천히 다가가 괴물의 얼굴 앞에 섰다.

초점이 흐려진 미노타우로스의 눈과 내 눈이 맞았다.

"이것도 자랑거리는 못 되겠군."

무려 네 번이나 죽었다.

멀쩡한 상태에서는 상대조차 안 되는 능력 차이도 여전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살아남은 건 나고, 죽어 나자빠지는 건 미노타우로스다.

삭제된 미래에서 누가 이겼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결과적으로 누가 살아남았는가.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애초에 트라우마를 가질 거리도 없었어."

"트라우마?"

"그런게 있어."

입에서 끓는 피가래 섞인 울음을 마지막으로, 미노타우로스의 동공이 풀렸다.

지저분한 승리다.

장렬한 패배보다 백 배는 나은 결과이기도 했다.

"고생했다. 좀 쉬자."

곳곳에 프라냐의 시체가 널려있었다.

적당한 것들을 골라 손질하고 구워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흘러나오는 미노타우로스의 피에 프라냐들이 펄쩍 뛰어오른다.

보통 피를 마시고 만족하는 편이었지만 욕심을 버리지 못한 놈들은 땅을 펄쩍거리며 튀어 올라 몸에 닿는다.

나는 흘러나오는 피 옆에 있다가 단검으로 한 놈씩 찍어 죽였다.

미노타우로스의 일격을 받아낸 팔이 점점 더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3위계의 전사인 내가, 전력을 싣지 못한 일격을 흘린 것만으로도 부상을 입게 하는 존재가 바로 미노타우로스다.

나는 괴물의 시체를 바라보며 단검을 꺼내들었다.

옆에는 팔을 걷어붙이는 라분이 있다.

"시작하자."

미궁의 특별한 몬스터 몇몇에게는 마정석과 같이 공양을 해도 사라지지 않는 부위가 있다.

이른바 '시그니처(signature)'.

라파가 조사하기로, 미노타우로스는 시그니처 몬스터이기도 하고, 그 시그니처는 크고 아름다운 뿔이다.

라분이 단검으로 주변 살을 마구마구 파헤치고, 내가 힘껏 힘을 준다.

"더!"

퍽퍽!

"더!"

퍽퍽퍽퍽!

"더!"

"주인. 같이 살을 파는 게 좋을 것 같다. 라분 너무 힘들다."

"그렇지? 그런데 너. 이럴 때는 말을 되게 잘 한다?"

"⋯⋯."

뿔의 뿌리가 생각보다 깊은 곳에 있어 파내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시그니처는 반드시 몸과 분리해야 채취가 가능하기에 열심히 단검을 놀렸다.

사냥 기록이 많지 않은 몬스터들은 시그니처 확인을 위해 부위별로 조각조각 분해한다고 하니, 탐험가들의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하겠다.

뿔을 들어낸 뒤, 라분이 마정석 탐사에 나서려고 했다.

"둬라. 내가 할게."

이런 거대 몬스터는 내가 한 번에 하는 게 좋다.

라분은 감지에는 소질이 없어 여기저기 다 찔러볼게 뻔하다.

괴물의 몸에 손을 대고 그저 마나를 운용한 것으로.

"헙! 있다!"

단검으로 목을 찌르고 손을 넣어 이리저리 휘저었다.

촉감은 끔찍하지만 닿는 게 소고기 목살이라 생각하면 못할 것도 없다.

곧 손에 잡히는 큼지막한 마정석.

얼른 꺼내 색깔을 확인한다.

"중급! 최소 중2급 마정석!"

내가 탐험 성공으로 받은 마정석들은 중6급으로 판정받았다.

그것보다 순도가 훨씬 좋은 마정석을 얻었으니, 대박이 따로 없다.

이제는 공양을 할 때다.

"공양!"

[시체를 공양합니다.]

[미노타우로스 한 마리. 확인.]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진척도. 91.8%]

"91.8!"

역시 미궁 8층의 터줏대감 몬스터 다웠다.

진척도를 30% 가까이 주다니.

사실 이렇게 높은 진척도 수치가 주어진 데에는 이유가 있다.

바로 두 명이서 미노타우로스를 사냥했기 때문이다.

거대 몬스터만큼 거대한 진척도 총량이 고작 두 명에게 분배됐으니 그렇게 될 만도 하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혼자 사냥했으면 60%, 10명이서 사냥했으면 고작 6% 올랐을 거야. 알아들어?"

"알겠다."

이제 전리품인 뿔을 각자 하나씩 들어올렸다.

어깨에 들쳐매야 하는 크기고, 또 꽤 무게가 나간다.

"8층의 틈에. 들어갈 수 있나?"

"들어가기는 할 것 같은데, 들키지 않고 지나가는 게 문제지."

올 때도 같은 틈을 이용했는데, 홉고블린들이 설치한 함정이 아주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놓친 사냥감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였으니 오죽하겠냐마는.

"그래도 전리품을 놓고 갈 수는 없지. 이틀만 쉬고 가자."

"주인. 몸 괜찮나?"

"끄떡 없어."

자신의 실수로 부상당한 나를 신경 써주는 라분.

사실 네 번의 죽음 중 라분이 나를 위해 미노타우로스의 공격을 대신 막아주다 죽은 게 세 번임을 감안하면 미안해할 것도 없다.

"흡! 무겁네. 가자."

우리는 은신처를 찾아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틀간 휴식을 취했다.

어느 정도 몸을 다스리고, 다시 강행군을 시작해 4일 만에 안전구역에 다다랐다.

"고생했어."

"고생했다."

내 개인의 업적을 이루고 오는데, 마주치는 탐험가들마다 안타까운 시선을 주었다.

"쯧쯧."

"고작 두 명이서 살아남았나."

"고생했네. 그래도 한몫 단단히 잡았군."

우리를 위로하기 위함인지 탐험가의 불문율도 어기고 우리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려 준다.

"⋯⋯."

"⋯⋯."

좋은 뜻에서 해주는 거니 뭐라 할 수도 없고.

조용히 사실을 정정해 줬다.

"두 명이서 잡았는데요."

"?"

"둘이서 잡았다고요. 미노타우로스."

"!"

미궁 8층의 베테랑 탐험가들을 침묵 속으로 빠뜨린 뒤 안전지대로 귀환했다.

처음 방문하는 미궁 8층의 사무소는 4층보다 건물 자체의 크기가 훨씬 작았다.

방문하는 사람의 규모가 다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라분과 내가 미노타우로스의 뿔을 갖고 오니 주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나는 별 신경 쓰지 않고 카운터에 다가가 뿔을 올려놓았다.

"으쌰. 뿔 의뢰는 상시 있죠? 한 쪽만 내놓겠습니다."

"그렇긴 하다만, 지원 없이 사냥한 거냐?"

"그죠. 잡았으니 문제없죠?"

"몇 명이 가서, 몇 명 죽었지? 생존자는 두 명이 다인가?"

"에휴."

나는 말하기도 귀찮아 목덜미를 내밀었다.

휴대용 아티팩트로 내 목덜미를 스캔한 직원이 깜짝 놀랐다.

"파티 총원 두 명? 다른 파티는 없었나?"

"없었습니다. 궁금증은 해결되셨겠죠?"

"흠흠. 실례했다. 어디 보자."

의뢰서 뒤쪽을 살핀 직원이 말했다.

"의뢰인을 호출할 테니 진행 상황을 알고 싶으면 3일 뒤, 여기서 미리 약속을 잡을 거면 7일 뒤에 오면 된다."

"7일 뒤에 오겠습니다."

미노타우로스의 뿔은 찾는 사람들이 많아 부르는 게 값이다.

한 쪽은 안정적으로 미궁 사무소에 맡기고, 한 쪽은 라파와 콜린에게 맡겨볼 셈이다.

결과가 좋으면 앞으로도 맡겨볼 생각이고.

"아. 천 몇 장 있으면 사겠습니다."

"당연히 있지. 여기있다."

"감사합니다.

괜히 미궁 1층에 가지고 갔다가 관심을 받으면 귀찮다.

라분과 함께 뿔을 둘러매고 건물 밖으로 나와 미궁 1층으로 귀환했다.

사무소 직원에게 미노타우로스의 마정석과 홉고블린, 오크애게서 얻은 마정석을 건넸다.

"⋯⋯."

순도높은 중2급 마정석. 2인 파티가 도저히 얻을 수 얻는 성과다.

또 너냐? 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직원.

나도 똑같이 응수했다.

"아. 빨리요."

잔뜩 골드를 챙기고 귀환했다.

그리고 끙끙 앓아누웠다.

라파가 자연스레 내 병수발을 들었다.

"무모하셨습니다."

"그래도 이겼어."

"대단하십니다."

"그래야지."

라파의 극적인 태세 전환.

나는 라파를 조금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다섯 번 시도해서 한 번 성공했어.'

위험하다고 누누이 말해줬기는 하지만, 성공률이 높지 않았다. 고작 20%.

나라서 성공했지, 사실 라파의 작전은 실패나 다름없었다.

"⋯⋯."

탁상공론이라고 했었지?

뜻을 들어보니 딱 들어맞는다.

미궁에서의 경험이 부족하고 이론적인 지식으로 판단하다 보니 벌어진 일인 것 같다.

"라파야."

"?"

"공부 많이 하자."

"알겠습니다."

우리의 미궁 탐험 파티. 아직 갈 길이 멀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48

미노타우로스 전 이후 망가진 몸을 회복하자마자 내 양해를 구한 라파가 말을 꺼냈다.

"주인님. 미궁 9층을 앞두고 계시지요."

"그런데?"

라파는 최근 콜린을 데리고 이런저런 장소를 돌면서 탐험가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그 외에 미노타우로스의 뿔을 판매하고, 새로운 집을 구하는 일도 일임해놨으니 동시에 세 가지 일을 진행하는 셈이다.

다 라파와 콜린을 믿기에 맡길 수 있는 일들이다.

나? 몸을 회복하며 온종일 마나 통제력을 수련하고 있었다.

"미궁 9층은 넓은 지형이 특징입니다. 1층부터 8층까지의 좁은 지형을 기대하시고 입장하시면 안 됩니다."

"그래? 흠."

몸으로 부딪히는 무식한 타입인 나는 이러한 브리핑이 어색했다.

하지만 이제 익숙해져야 한다.

더 아래를 노리고 있는 만큼 새로운 미궁 층에 대한 정보는 필수다.

라파는 그런 나를 위해서 바쁜 와중에도 발품을 팔아주고 있었고.

"미궁 9층에 출현하는 몬스터는 고블린, 리자드맨, 오크, 홉고블린, 샌드웜, 미노타우로스, 트롤입니다."

"다양하네?"

생소한 몬스터는 샌드웜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상대해 보고, 한 번씩은 레이드에 성공한 몬스터들이었다.

라파에게 샌드웜에 대해 물어보니 바로 답이 나왔다.

"샌드웜은 발밑의 진동으로 목표를 탐지하고, 땅속에서 튀어나와 공격하는 지렁이 형태의 몬스터입니다."

"오오? 더 자세히."

"샌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모래 지형에 살고 있습니다. 미궁 9층에는 모래가 있는 지형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모래라."

사막이 모래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지?

라분이 좋아하겠다.

"넓은 지형에서 파상적으로 공격해오는 몬스터들을 상대하며 진척도를 쌓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탱커가 적어도 한 명 더 필요합니다."

"으음."

"미궁 9층의 탐험입니다. 최소한의 실력이 보증된 멤버가 필요하겠죠."

"노예를 구매하는 쪽은 어떻게 생각해?"

노예. 다루기 편리하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라분을 구매한 대성공의 사례도 있고.

"새로운 집을 구하는 데에 돈을 쓸 경우 예상 예산은 이 정도입니다."

"⋯⋯."

라분을 반으로 뚝 나눠서 상체만 살 수 있는 예산이다.

이 돈으로 실력 좋은 탱커를 사려면, 아예 벙어리를 사야 할 판이다.

"미노타우로스의 뿔을 팔아도?"

"팔아서 이 금액입니다. 시세가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는 품목이다 보니."

"그렇구나."

그렇다면 인원의 충원을 외부에서 할 수밖에 없다는 건데.

"미궁 9층을 세 명이서 다니고자 하는 미친 탱커가 라분 말고 있을까?"

라파는 대답 없이 내 판단을 기다렸다.

의외로, 새로운 모험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당연하다. 목숨을 건 미궁 개척을 위한 탐험을 즐기는 미친놈이 많겠는가?

내가 좀 별난 놈일 뿐이지.

탐험가의 대부분은 생존과 안정적인 수입을 추구하며, 이를 위해서는 미궁 4~6층을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게 더 낫다.

때문에 미궁 4~6층에서 활동하는 탐험가가 가장 많고, 그에 따라 활동하는 클라이머들도 다 이쪽 층에 집중되어있다.

"하지만 쓸만한 3위계 탱커를 구하지 못하면 더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도 명확합니다."

"그렇군."

다른 파티에 소속되어야 하나?

아니다. 무한 회귀를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도전이다.

사망. 전멸의 위험이 있다고 해도 도전하고, 죽어야 한다.

수많은 가능성들을 검증하며 결국에는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

무모함. 미궁에서 가장 위험한 성향이지만 나에게는 필수적인 덕목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결정권은 내가 가져야 한다.

내 말에 절대복종하며 사지에 뛰어드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 라분 같은 존재.

그러한 존재가 아니면 필요 없다.

괜히 무모한 계책에 반대하여 팀에 불만만 일으킬 테니까.

나는 내 무한 회귀를 설명하지 않으며 이러한 상황을 이야기했다.

라파는 내 고집으로 보일 수 있는, 아니 고집 어린 말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해 주었다.

그래. 이런 라파같은 사람을 원한다는 말이지.

모든 상황에서 나를 우선으로 판단하고, 따라와 줄 수 있는 사람.

몸만 좀 좋았으면 짐꾼으로라도 미궁에 데려가는 건데, 애초에 젓가락 같은 몸으로 뭘 해보는 것 자체가 무리다.

"⋯⋯그래서 충원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 보자."

우선 앞으로 1개월 정도 남은 탐험가 아카데미의 졸업식을 염두에 두고 있기는 하다.

햇병아리 중 싹수가 있고 말도 잘 듣는 파티원을 구해볼 생각이다.

⋯아니면 말고.

결국 인원 충원에 대한 대화는 실속 없이 끝나고 말았다.

그렇다면 개인적인 성장이 중요하다.

인원 충원 없이 두 명이서 8층을 넘어 9층에 도달하려면 어떻게든 전력을 강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 미궁 8층의 진척도를 채우기 전 마지막 휴식에서 두 가지 사업을 동시에 진행해 볼 셈이다.

그 중 첫 번째 사업. 라분 3위계 만들기.

"라분. 나랑 대련 한 번 해보자."

"알겠다."

라분과 내가 검을 맞댔다.

수비 모드에 들어간 라분을 검염 없이 뚫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라분의 공격이 내 방어를 뚫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계속 공격하고, 공격해 한계를 맛보게 한다.

나는 내가 오크 챔피언을 상대했을 때를 기억해 냈다.

3위계를 달성했을 때, 나는 최후의 최후까지 마나를 끌어내었다.

마지막 한 줌의 마나가 검에 깃드는 순간, 검염이 검에 서렸다.

물론 반드시 오크 챔피언을 죽이겠다는 열망과 증오, 다짐 또한 있었다.

"윽! 윽!"

내 검을 힘겹게 받아내는 라분.

"마나를 더 실어! 끝까지!"

하지만 아무리 라분을 벼랑 끝까지 몰아붙여도, 결국 라분은 검염을 끌어내지 못했다.

"헉! 헉!"

하기야, 3위계가 이렇게 달성되는 경지였다면 개나소나 다 3위계를 달성했겠지.

가만히 수련하다 검염이 어리는 경우도 있고, 나처럼 위기 상황에서 검염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이를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라분. 열심히 하면 돼."

하루 이틀로 끝날 일이 아니다.

결국 두 번째 사업에 달렸다.

바로 학즉사법 2성으로의 도전이다.

"가즈아!"

그동안 최선을 다해 마나 통제력을 수련했고, 붉은 송곳니 길드의 4위계, 카리나 헤리슨과의 대련을 통해 한층 더 성장했다.

지금 내 실력은 막 3위계의 도달한 나 정도는 세 명이 동시에 덤벼도 어찌어찌 이길 수 있을 정도다.

세 명을 상대하는 지형이 좋아야겠지만.

"라분. 문밖에서 호법 좀 서줘. 절대로 들어오지마. 학즉사법 수련할 거니까."

"알겠다."

라분을 세워 놓고 가부좌를 틀었다.

마음을 비우고, 조용히 내 안에 잠들어 있는 학즉사법의 마나를 느꼈다.

학즉사법을 익히겠다고 결심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풀리는 머릿속의 지식.

[학즉사법의 1성은 마나가 통할 큰 통로를 몸속에 개척했다. 그렇다면 마나가 신체 곳곳에 뻗어나갈 수 있는 아주 작은 통로를 개척하는 것이 2성의 목표라 하겠다.]

그래.

나는 이미 수십 번의 시도 덕분에 익숙해진 마나 가공법에 따라 마나를 움직였다.

곧 송곳 모양의 마나가 내 손에 잡힌다.

아무 생각도, 아무 형상도 떠오르지 않았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할 수 없다는 불안감도 없다.

[가공된 마나를 오른쪽 팔다리, 왼쪽 팔다리, 그리고 몸통, 다음으로 그 마나를 모아 머리 위로 올려라. 마나의 결을 깨달아 몸을 자유롭게 하라.]

그저 조용히 송곳 모양의 마나를 오른손에 찔러 넣을 뿐.

역시 처음에는 아무 반응이 없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처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고통에 움직이면 너무 늦다. 팔을 경계로 퍼지기 시작하는 마나의 결을 하나씩 잡아내고, 통제한다.

물감이 투명한 물에 퍼져나가듯 질서 없이 움직이던 마나가 마치 정해진 패턴이 없는 거미줄을 이루듯 변해간다.

분명 패턴은 있다.

"윽!"

예상했던 고통이 찾아왔다. 그래도 처음 학즉사법을 익힐 때에 비해 고통은 크지 않다.

오른팔이 점차 안정되기 시작한다.

"좋아⋯."

나는 오른팔의 통제를 유지하며 오른발에 마나의 송곳을 찔러 넣었다.

팔의 고통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

내 정신은 오로지 오른발에 집중되어 있었다.

계속된 마나 통제력 수련이 효과가 있었다!

오른발을 마무리하고, 왼발. 다시 왼팔.

모두 한 번의 시도만에 성공했다.

계속 죽었던 과거의 도전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그래, 결국 이것도 사람이 익히는 호흡법이다.

길은 있다.

'너무 쫄아 있었나?'

사지가 펑펑 터지는 광경은 아무리 무한 회귀가 있는 나라고 해도 정신적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최대한 수련을 미뤄왔는데, 막상 도전을 하니 결과가 좋았다.

역시 일은 미루면 안 된다.

[마나의 결을 깨달아 몸을 자유롭게 하라.]

나는 사지에 갇혀있던 마나의 통제를 일시에 풀어 몸통으로 마나를 모았다.

마나가 명치에서 뭉치며 전신으로 퍼져나간다.

매우 부드러운 움직임이었지만 그 움직임이 빚어낸 결과는 내 상상을 초월했다.

마치 머리 아래의 모든 부위를 결대로 찢어내고, 다시 붙이는 듯한 끔찍한 고통!

"으으윽!"

다행히 내 마나 컨트롤이 필요한 부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잠시 정신을 놔도 되었다.

몸은 가부좌를 틀고 있지만 정신은 하수구 위를 떠다니는 쓰레기처럼 둥둥 떠있었다.

마침내 고통이 멎고 내 몸 곳곳에 퍼졌던 학즉사법의 마나가 다시 명치 위로 뭉쳤다.

그 마나를 머리 위로 올려야 한다.

"⋯⋯."

본능적인 거부감이 인다. 하지만 여기서 그만두면 죽음 밖에 답이 없다.

"후."

나는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마나를 전진시켜 머리로 마나를 올렸다.

목을 지날 때 일렁이는 느낌이 인다 싶더니 마침내 뇌에 마나가 도달하자 일렁임은 불길이 되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주인! 괜찮나!"

"괘애애앤찬트아아!"

나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데굴데굴 굴렀다.

몇 번 죽었을 때 뇌가 곤죽이 된 적이 있는데, 분명 뇌에는 직접적인 통증이 없었다.

그러면 이 통증은 어디서 비롯된 통증이란 말인지.

뇌를 한 번 데치고, 무치고, 찌고, 구워낸 뒤 튀기고 있다.

어느새 가부좌를 틀던 자세도 무너지고, 데굴데굴 구르며 침을 질질 흘리고 있다.

이 고통 또한 내 마나 통제력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덕분에 어딘가에 집중할 필요도 없이 고통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훅! 훅!"

체감 상으로는 6시간의 고통이 끝나고,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몸을 부들부들 떤 내가 곧 추욱 늘어졌다.

"이 미친 마공."

하지만 성공했다.

그것도 한 번도 죽지 않고 성공했다.

"라분. 흐흐흐."

이 고통을 겪을 라분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철저한 예행연습이 필수겠지만.

'그런데 이걸 어떻게 연습시키지?'

내 이름을 30번 넘게 부른 라분이 결국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를 들으며 까무러쳤다.

학즉사법 2성에 도달하는 순간이었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49

푹신한 감촉에 눈을 뜨니 나를 내려다보는 라파의 두 눈이 가장 먼저 보였다.

이마에 느껴지는 감촉을 보아하니 물 묻힌 수건을 내 머리에 대어주고 있었나 보다.

"괜찮으세요?"

"어."

대답은 괜찮다고했지만 머리가 어지러워 죽겠다.

다른게 아니라 몸 속에 새로운 마나가 몰아쳤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마나가 다니는 길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면 지금은 파상적으로밖에 파악하지 못하겠다.

그렇다고 마나의 운용에 문제가 생긴 건 또 아닌게, 오히려 훨씬 더 빨라지고, 효율이 늘었다.

'대략 2배 정도 빠르군.'

역시 수련자의 목숨을 위협하는 호흡법 다웠다.

엄청난 리스크를 동반하는 대신, 성공 시 그에 걸맞는 보상 또한 돌아온다.

"저는 잘 몰라서 그러는데, 보통 호흡법을 수련하면 이틀을 앓아눕나요? 오라버니께서는 당연한 일이라고는 하시는데."

"⋯⋯."

"제가 듣고 상상한 수련과는 좀 달라서."

"어떤 점이?"

"보통 이제 자세를 잡고, 내면 수련을 하지 않나요?"

"그렇기는 하지. 하지만 특별한 수련법이라 약간 고통이 있어. 아주 약간."

라파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납득하고 물러났다.

뭐, 라분이 학즉사법 2성에 도전하려면 일단 3위계가 되어야 하니까.

이제 2위계가 된지 반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조금 천천히 기다려보도록 하자.

대신 나는 2성에 도달하자 해금된 머릿속 지식들을 탐독했다.

[학즉사법 2성에 도달한 수련자는, 타 호흡법의 5성에 도달한 자와 같은 효율을 낼 수 있다. 마나의 길이 정형화된 것이 아닌, 수련자만의 길을 개척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마나의 움직임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내가 직접 제어하고, 뚫어놓은 길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학즉사법 3성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4위계에 도달해야만 하며, 자신 내부에 개척된 마나의 길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4위계."

본인의 경지를 개척하고, 심상 구현을 이뤄낼 수 있는 존재.

모든 전사가 도달하기를 염원하는 경지이며. 거의 모든 전사가 포기하는 단계이기도 하다.

나는 4위계에 다다른 전사를 총 두 명 만났다.

붉은 송곳니의 카리나와 칼리움의 해결사 니콜라스.

둘 다 격이 다른 경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닿지 못할 것도 없다.

"그때 보자고."

학즉사법 2성을 달성한 후 3일간은 명상을 통해 내 몸에 있는 마나를 내 것으로 완전히 소화시키는 데에 중점을 뒀다.

중간에 미노타우로스의 뿔을 판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먼저 길드 사무소.

"엇! 자네는?"

"우연이네요."

미노타우로스의 뿔 구매자는 우연찮게도 예전에 나에게서 오크 챔피언의 옷을 구매했던 그 마법사였다.

아주 이상한 몬스터 부산물만 모으는 것을 보아하니, 꽤나 괴팍한 연구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으하하! 역시 재능 있는 친구로구먼.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못 들었는데?"

"루카스 입니다. 성은 없습니다."

느닷없이 내 손을 덥석 잡고 위아래로 흔든다.

왜 갑자기 이러는지는 몰랐지만 뭐, 악의적인 의도는 없는 것 같으니 그대로 내버려뒀다.

덕분에 학즉사법의 마나를 마법사의 내면에 투과해 마법사의 마나를 잠깐이나마 관찰할 수도 있었고.

'⋯괴물이군.'

마법사의 마나는 일반적인 전사와 그 결이 다르다.

호흡법 대신 축적법을 익히는 마법사는 신체 능력이 같은 경지의 전사에 비해 약하지만 순간 화력은 그들을 압도한다.

괜히 마법사가 유도한 전장에서 싸우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그 화력을 계속해서 견뎌야 하는 상황에 놓이면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니까.

"자! 이번 재료도 값을 후하게 쳐주도록 할까? 8골드 정도면 되겠지?"

"거래 성립입니다."

"화끈해서 좋구먼!"

내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손을 척 내밀자 마법사가 좋아라했다.

"루카스, 루카스. 아! 내 이름은 멀트릴 반스테인일세. 내 자네 이름을 기억했어. 지명 의뢰가 오면 매몰차게 거절하시지는 마시게."

"저는 특정 층에 상주하는 탐험가가 아니어서요. 타이밍을 잘 맞춰야 할 겁니다."

"오호? 혹시 계획을 들을 수 있나?"

뭐, 말해준다고 닳는 건 아니니까.

"1개월 뒤에는 9층, 늦어도 반 년 뒤에는 10층을 탐사할 것 같군요."

"하하! 그러면 6개월 뒤에 지명 의뢰를 하면 되겠군!"

"10층에 필요한 게 있으신가 봅니다?"

"그렇게 급한 건 아니지만, 뭐 있으면 좋은 거지. 자네가 없으면 길드를 고용하면 되니까. 훨씬 더 값을 치러야겠지만."

"그렇군요."

8골드에 미궁 사무소의 중개료 10%를 납부하면 7골드 20실버다.

라파와 콜린이 직접 판매한 가격이 뗄 거 다 떼고 내 수중에 들어온 돈 7골드 50실버.

무려 은화 30개나 이득을 봤으니 앞으로는 라파에게 물건을 맡겨도 좋겠다 싶다.

그렇게 기분 좋게 돌아가려는데.

"루카스 탐험가님."

"네?"

사무소 직원이 나를 불렀다.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평생 미궁 사무소를 다니면서 이런 적은 처음이라 당황스럽다.

"루카스 님께 편지가."

"?"

뭐지? 나한테 편지?

내게 편지를 보낼 만한 사람이 있었던가?

일단 사무소 직원이 건넨 편지를 받아들었다.

꽤나 익숙한 가문의 문장이 실링 왁스 위에 새겨져 있었다.

"발신자는 파르밀 가문의 에릭 파르밀 님입니다."

"!!"

칼리움에 거주하는 파르밀 가문의 일원.

켈리어의 시련을 주관하는 자.

별로 달갑지 않은 사람의 편지가 내 손에 들려있었다.

* * *

배낭을 아무 데나 던져둔 뒤 방의 문을 걸어 잠그고 에릭의 편지를 꺼냈다.

멋들어지게 새겨진 파르밀 가문의 인장.

왜 익숙했냐 했더니 2박 3일간 죽어라 봤던 그 문양이 맞다.

"⋯⋯."

괜히 편지랑 눈싸움해서 뭐 하겠냐!

"에라이. 열어보자!"

조심스레 건드리니 툭 하고 열린다.

그 안에 있는 고풍스러운 편지.

미궁 사무소의 의뢰가 적힌 종이와는 질부터 다르다.

그야말로 귀족적인 느낌이다.

[황제폐하 만세. 루카스 님. 안녕하십니까. 미궁 탐험가가 본업이라는 말씀을 듣고 몇 자 남깁니다.]

더듬더듬 읽어나가니 귀족적인 수식어로 정원에 대한 이야기, 미궁 도시 칼리움의 정세, 최근의 날씨 같은 쓸데없는 이야기가 아예 한 장을 차지한다.

"뭐야. 눈이 빠져라 봤구만."

정말 귀족 나리들의 허례허식은 감당할 수 없다.

새삼 내가 대견했다.

그동안 읽기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은 탓에, 이런 어려운 내용의 편지도 어느 정도 해석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본론은 거의 마지막 줄이 되어서야 나왔다.

[⋯는 루카스 님께 한 가지 일을 의뢰하고 싶습니다. 그룸린의 달이 끝나기 전이라면 언제든지 자택에 방문해 주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룸린의 달?"

그게 언제지?

나도 얼른 편지를 품에 집어넣고 밖으로 나왔다.

마침 찐 감자를 까먹는 콜린의 뒷모습이 보였다.

"야! 그룸란의 달이 언제냐?"

"그룸란? 그룸린이겠지 이 빡대가리야."

"쨌든."

"이번달이잖아. 에휴. 역시 미궁 탐험가들은 시간 감각이 지랄 났다니까."

뭐 어쩔 수 없다. 미궁을 탐험하다 보면 모래시계를 제때 돌려놓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니까.

한 2, 3일 지나면 이제는 생체 리듬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럼 이번 달이 언제까지지?"

"이틀 뒤까지."

"엥?"

"2일 남았다고. 이제 곧 끝나. 왜?"

"⋯⋯아냐."

그래도 귀족 나리께서 불렀는데 안 간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냥 얼굴만 비추고, 무슨 부탁인지는 모르겠지만 들어보고 결정하면 되겠지.

다음 날.

라분과 콜린을 먼저 보내고 파르밀 가의 저택으로 향했다.

경비병은 내가 처음 이 저택을 방문했을 때와 같은 경비병이었는데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들어갈 때는 정문, 나갈 때는 뒷문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보나 마나 시련에 잡아먹혔다고 생각했겠지.

"뭐냐. 무슨 일이지?"

앳된 얼굴에, 후줄근하게 입고 왔으니 다짜고짜 하대를 하는 것도 당연했다.

"시련의 도전자인가?"

"그건 아니고."

동냥하러 온 거지인 줄 알고 경비병이 창을 들어 올리려고 했다.

나는 빠르게 손사래치며 품 속의 편지를 꺼냈다.

"초대받고 왔습니다만."

"응?"

내게서 편지를 전달받고 인장을 살피던 경비병이 고개를 숙였다.

"이런, 손님이신 줄 몰랐군요. 미리 사람을 보내고 오셨으면 이런 무례를 저지르지 않았을 텐데."

"됐습니다. 무례는 무슨."

부사수가 편지를 들고 안으로 들어가고 얼마 뒤, 문이 열렸다.

"들어오시죠."

낯이 익은 집사의 안내를 따라 본관에 들어서니 에릭 파르밀이 웃는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하하. 루카스 님.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반년도 안 지났습니다만."

"이런. 반년 씩이나 지났군요. 마침 식사 시간이니. 같이 식사라도 드시지요."

접대가 아주 자연스럽다.

3위계가 되고 보니 에릭의 실력이 어느 정도 감이 잡힌다.

나보다는 분명히 윗줄.

하지만 격차가 그렇게 크지는 않아 보인다.

물론 익히고 있는 기술이나 검술, 호흡법 등은 감히 나와 견줄 수 없을 정도겠지만.

'처음 싸우면 무조건 지겠군. 두 번째부터는 해볼 만하겠다.'

세 번 싸우면 무조건 우위를 점할 수 있겠고.

기술을 하나씩 파다 보면 열 번 내에는 이길 수 있겠다.

집사에게 검을 맡긴 뒤 에릭을 따라 아직 기억에 생생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여러 사람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밥을 먹고 있었다.

남자 넷에 여자 둘.

각자 기도가 심상치 않았는데, 3위계에 도달하지 못한 자는 없는 것 같았다.

"자. 어러분. 루카스 님입니다. 루카스 님. 제 부탁으로 저택에 잠시 머물고 있으신 분들입니다."

"안녕하심까. 루카스라고 합니다."

식객이었군.

지난번에는 일부러 보여주지 않더라니.

다들 나를 흘깃 쳐다보더니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을 대신하고 자기들만의 이야기에 열중한다.

에릭은 개의치 않고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부르며 나를 소개시켜주었다.

솔직히 처음 패리슨이라는 남자 외에는 다 까먹었다.

여자들도 이쁜 편이 아니라 빠르게 기억에서 삭제됐고.

대신 내 시선은 귀족 가문의 식사 메뉴에 쏠리기 시작했다.

여기 온 이유의 8할을 차지하는 푸짐한 식사.

"흐흐."

소스를 발라 구워낸 양고기를 한입 가득 물고, 와인으로 넘긴다.

스프를 세 숟갈 연속 떠 마신 뒤, 과일 샐러드를 포크로 한 움큼 찍어 먹었다.

다음으로 노린 건 소고기. 두 점을 동시에 입에 넣으니 극락이 따로 없다.

내 폭풍 식사에 대한 에릭의 반응은 간단했다.

"역시 복스럽게 드시는 건 변함이 없으시군요."

나는 에릭의 본성을 알고 있었기에 저 말이 '돼지처럼 게걸스럽게 처먹네'라는 뜻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뭔 상관인가? 음식이란 맛있게 먹으면 그만인 것을.

주변의 시선 따위 신경 쓰고 사는 건 귀족들이면 족하다.

스프 두 그릇으로 해장을 완벽히 마무리하자 다과가 나왔다.

"자. 맛있게들 즐겨주시고, 잠시 뒤에 뵙도록 하죠. 루카스 님은 저와 잠시."

"네."

우연히 타이밍이 잘 맞아서 밥도 얻어먹었으니 운이 좋았다.

에릭이 안내한 저택 집무실에 따로 다과가 차려져 있었다.

나는 얼른 앉아 신선한 사과를 집어넣었다.

"후. 힘들군요."

에릭이 의자에 편히 기대앉았다.

내게 훔쳐보기가 들킨 뒤로 은근히 나에게는 편한 모습을 보여준다.

솔직히 부담스럽다. 이 또라이한테는 전혀 관심받고 싶지 않다.

"그런데 제게 부탁하실 일이 뭡니까? 식객들 면면을 보아하니 저들에게 부탁하면 웬만한 일은 다 가능할 것 같은데."

식객의 의무다. 자신이 거하는 집주인의 부탁은 웬만해서는 들어줘야 한다.

그 가문이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이면 뭐, 말 다 했고.

"식객이 문제입니다."

"에?"

"저들 중에 정보를 흘리고 있는 놈이 있습니다. 정체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나름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나랑은 별 상관없는 일이기도 하다.

"첩자가 있는 건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그래서 식객이 아닌 사람들 중 딱히 이해충돌이 없고, 믿을 수 있는 분을 추렸습니다."

"그게 저다?"

"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중 한 분이시죠."

"그래서 용건이?"

"하하. 여전히 직설적이시군요."

에릭이 과장된 손짓으로 몸을 뒤로 뺐다.

"내용을 들으시면 제 제안을 수락하셔야 합니다. 수락하시는 겁니까?"

"오우. 아직 그 정도까지는."

에릭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씨익 웃었다.

분위기도 살짝 환기된 김에, 줄곧 신경 쓰였던 말을 해야겠다.

"그나저나 에릭 님은 어떻게 저 같은 무지렁이를 믿을 수 있는 놈이라고 확신하시는 겁니까?"

에릭의 표정은 뭘 그리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하다.

"시련을 통과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응? 그렇죠."

"가문을 세우신 선조 님께서 인정하신 분을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습니까?"

"⋯⋯."

고작 그것만으로?

에릭은 본인답지 않게 웃어 보였다.

"선조 님께서는 아무나 시련을 통과시키지 않습니다. 가문의 역사에 기록된 시련을 통과한 사람들을 보면, 모두 일가를 이뤄 내셨지요. 그거 아십니까?"

"?"

"제가 본격적으로 시련을 돌본 지 3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시련을 통과한 사람은 루카스 님을 포함해 단 네 명뿐입니다."

"!"

그렇게 확률이 낮았다니!

내가 99번을 괜히 죽은 게 아닌 모양이다.

"제가 루카스 님께 거는 이유로 납득이 되셨습니까? 저 정도는 먼저 신뢰를 주어야겠지요."

"⋯⋯."

일부러 다과를 질겅질겅 씹어 먹으며 내 표정을 숨겼다.

에릭은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다.

나는 안다. 저 얼굴 속에 싸이코패스의 본성이 잠들어있다는 것을.

나를 죽일 때의 표정은. 좋게 말해도 정상은 아니었다.

"나름 저도 절실한 상황이라. 먼저 보상을 알려드려야겠군요. 우선 선금으로 10골드를 드리겠습니다."

내 눈이 부릅 떠졌다.

하겠습니다! 라는 말이 절로 나올 뻔했다.

하지만 나는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성공 보수로는. 저택 서고에 있는 검술서 중 하나를 일부 대여해 드리려고 합니다."

"하겠습니다!"

헙!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나는 반쯤 일으켰던 몸을 천천히 가라앉혔다.

검술서라니! 돈 주고도 제대로 된 걸 구하기 힘든 검술서를!

그것도 파르밀 가문이 보관하는, 검증된 검술서다.

이건 목숨을 걸어서라도 얻어내야 한다.

내 반응에 살짝 미소 지은 에릭이 홍차를 한 모금하고 말을 이었다.

"실패할 경우 불구가 되거나, 목숨을 잃으실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도 도전하시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안 그래도 나만의 검법으로 한계를 느끼고 있던 참이다.

학즉사법 2성도 달성했겠다. 웬만한 상대는 내 적수가 안 된다고 자신할 수 있다.

"자. 그러면 동의하신 것으로 간주하고, 제 의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에릭은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귀족의 옷 안에서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는 허름한 종이다.

"읽어보시죠."

나는 거침없이 손을 가져가 종이를 읽었다.

꽤 지저분한 문장이었지만 해석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흑야혈투회?"

"지하 세계에서 실시하는, 나름 유명한 회원제 무투회입니다."

"허?"

"제 제안은, 이 무투회의 3위계 부문에 참가해서 3등 상품을 얻어오시는 겁니다. 1등도, 2등도 아닌 3등 상품이어야 합니다."

무투대회 3등이라?

"3위계만 참가한다고 했죠?"

"그렇습니다."

"그러면 어렵지 않겠군요."

3등? 빠르게 일을 끝내고, 끝내주는 검법서를 하나 가져와야겠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