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 50-60

미궁의 무한회귀자 50

흑야혈투회(黑夜血鬪會).

비정기적으로 개최되는 암흑계의 무투회다.

칼리움에서 공식적으로 개최하는 콜로세움의 검투와 같이 공인받지는 못했지만, 이미 암묵적으로 개최를 용인할 만큼은 유명하다.

서민들도 관람할 수 있는 콜로세움과는 달리 흑야혈투회는 초대장을 받은 회원들만 관람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다.

무투회 참가 자체도 회원에 의해 신원이 보증된 사람만 참가가 가능하다니 그 수준의 높음이 짐작된다.

그래서 모인 인원도 16명을 겨우 채웠다고 한다.

"이번 결투는! '미노타우로스 슬레이어' 루카스 대 칼리움 남부 '피의 칼잡이' 발릭!"

'미노타우로스 슬레이어라니.'

이 낯뜨거운 별명은 에릭이 지어주었다.

에릭 이놈이 이름 짓기에는 센스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피의 칼잡이'보다는 낫겠다 싶었다.

발릭이라는 놈의 얼굴을 보아하니 이미 홍당무다.

내 피식거리는 웃음을 도발이라고 생각했을까?

경기장 위로 발릭이 검과 방패를 서로 부딪혀 날카로운 소음을 만들어냈다.

"우아아아!"

목청껏 지르는 함성에 경기장 주변을 둘러싼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환호로 화답한다.

관객들은 가면을 쓰고, 한 손에는 와인잔을 들고 있다.

저게 뭐 하는 짓들인지.

마나를 감추지 않는 걸 보니 정체를 가리기 위해 가면을 쓰지는 않았고, 특유의 패션인가 보다. 배운 집 자식들이라 이건가.

"뭐, 좋지."

3위계에 이른 전사와 생사를 걸고 진행하는 맞대결.

성사되기 어려운 경험이다.

특히 이렇게 완벽한 1대1로 만나기는 더더욱 어렵다.

죽음을 찾아다녀야 하는 나와 다르게 저들은 목숨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이면 오히려 돈을 주고 참가하고 싶을 정도였는데.'

4위계인 카리나에게 10번 넘게 죽어 실력을 상승시킬 계기를 마련한 나다.

학즉사법 2성에 적응하기 위한 방법이 마땅치 않았는데, 이번 참가를 통해 고민을 해결할 수 있게 됐다.

"몬스터보다야 인간이 나으니까."

이런 면에서 보면 에릭과 내 이해관계가 맞았다.

물론 보상에 대한 셈은 제대로 치러야겠지만.

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몸을 숙여 대응력을 강화한 뒤 발릭을 바라보았다.

발릭이 검과 방패에 검염을 피워올리며 나를 주시하고 있다.

두 손에 든 무기 모두에 일정한 양의 검염을 불어넣을 수 있다니.

역시 실력자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되지.'

나는 얼른 달려들어 발릭의 정수리를 찍었다.

기다렸다는 듯 방패가 내 검을 막고, 검이 내 허리를 노리려고 했다.

하지만.

우지끈!

방패에서 들리는 기묘한 소리가 발릭의 계획을 강제로 수정하게 만들었다.

"으윽!"

검을 거두고, 방패에 온 힘을 집중해 겨우 검을 막아낸다.

통철로 만든 방패가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불길한 소리를 계속해서 키워간다.

"크흐으읍!"

발릭이 내 검을 정면으로 막으려던 기존 계획을 수정하고 모든 힘을 방패에 집중했다.

그러고 나서야 겨우 균형이 맞는다.

하지만 그 균형도 내가 허락해서 겨우 맞출 수 있었던 균형일 뿐이다.

'이 녀석은 안 되겠군. 배울 게 없어.'

흑야혈투회의 규칙.

죽여도 상관 없으니 승자는 패자의 피를 봐야 한다.

단, 반드시 진심을 다한 결과가 나와야 한다.

봐주기 식으로 부상을 입혔을 경우? 승자의 자비로 인해 관람객들의 야유를 듣게 되면 승자는 무조건 패자를 죽여야 한다.

'큰 부상을 입히는 게 자비라니.'

준결승전에서 어떻게 질지는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기에 걱정은 없다.

나는 뒤로 훌쩍 물러나 발릭의 검을 피한 뒤, 스텝을 밟고 다시 달려들었다.

검술이고 뭐고 없는 단순한 내려치기 세 번이 발릭의 방패를 부숴버렸다.

마지막 내려치기가 발릭의 어깨를 반쯤 파고들어가 박혔다.

"으아아악!"

마주 내 어깨를 노리던 검은 몸통 박치기로 튕겨내버렸다.

검을 뽑아내며 이어진 발차기가 발릭의 몸을 경기장 밖으로 던져버렸다.

"순식간에 끝나버린 경기! 미노타우로스 슬레이어가 피의 칼잡이를 쓰러뜨립니다!"

관중들의 환호성에 악의가 묻어있었다.

떨어진 바닥을 피로 적시며 꿈틀거리던 발릭이 들것에 실려나갔다.

뭐, 대기하고 있는 사제도 있으니 죽을 상처는 아니다.

나는 억지로 환호성을 지르고 경기장에서 내려와 참가자에게 제공된 자리에 앉았다.

꽤 많은 교류가 이루어지는 다른 테이블과는 다르게 참가자들이 모여있는 곳은 냉기만 철철 흐른다.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참가한 나 같은 놈도 있고, 귀족 가문에서 직접 사병을 내놓은 경우도 있다고 했다.

나는 그동안 몰래 감지 능력을 사용해 참가자들의 눈치를 보며 염탐을 했고, 싹수가 좋아 보이는 몇몇을 눈여겨봤다.

'나보다 마나가 많은 놈이 세 명이나 있어.'

학즉사법 2성 달성으로 증가한 마나로도 따라잡지 못했다면, 녀석들의 마나가 3위계 최상급이라는 걸 의미한다.

보통 마나의 양은 실력과 비례하는 편이다.

제대로 한 수 배울 수 있겠다.

테이블의 인원이 순식간에 절반이 되어버렸고, 잠깐의 휴식시간 뒤 바로 8강전이 실시된다.

토너먼트의 일시는 고작 하루.

일주일간 개최된 사교회의 마지막 날을 장식하는 이벤트라고 한다.

'지하 세계라더니.'

결국 귀족들에게 지하 세계는 결국 이런 종류다.

암중으로 귀족들의 돈을 빨아먹는 암흑계가 귀족들을 대접하는 자리.

결국 귀족, 돈 있는 자제의 사교회의 이벤트 중 하나일 뿐이었다.

뭐, 나야 아까운 시간을 더 뺏기지 않으니 좋은 일이지만.

8강전 첫 경기부터 개싸움이 벌어졌다.

두 명 다 16강전에서 체력과 마나를 꽤 소비했는데, 휴식시간이 고작 1시간 밖에 주어지지 않아 체력을 제때 회복하지 못한 탓이다.

밖에서는 고급 인력으로 대접받는 3위계 전사가 벌이는 더러운 싸움에 이미 술과 흥이 오른 회원들이 체면도 신경 쓰지 않고 소리를 지른다.

"죽여! 죽여!"

"찔러버려!"

남자들만 모인 일부 테이블에서는 원색적인 욕설도 서슴지 않는다.

"저 씨발새끼 죽여!"

"병신아! 너한테 걸었다!"

물론 여자들이 모인 테이블은 얌전하다.

감지 능력으로 잠깐 살피니 교양 수준의 마나를 익힌 여자들인데, 마나의 흐름이 꽤나 정갈해 관리를 받아온 듯하다.

8강전 2경기는 내 차례다.

상대는 내가 눈여겨본 나보다 마나가 많은 세 명 중 한 명. 그것도 유일한 여성이다.

"자! 순식간에 경기를 마무리한 두 전사들의 대결입니다! '미노타우로스 슬레이어' 루카스! 그리고 '여명의 암살자' 셀레나! 공교롭게도 두 명 다 같은 회원님께서 추천하신 분입니다!"

가면을 쓴 에릭이 시선을 한몸에 받고 일어나 청중들에게 인사한다.

미리 말이 됐는지 손에 확성 아티팩트가 들려있다.

"안녕하십니까. 에릭 파르밀입니다."

정체는 딱히 비밀도 아니었는지 시원하게 이름을 밝히고 시작한다.

흥이 오른 관중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공신 가문의 자제를 반겼다.

"이번에 1등 상품이 아주 마음에 들어서요. 본의 아니게 세 분께 부탁하게 되었습니다. 대진운이 좋지 않았네요."

장난스러운 웃음들이 에릭을 향한다.

고위 귀족들이 돌아가며 후원한다는 흑야혈투회의 보상 상품은 면면이 꽤나 화려했다.

1등 상품은 라비팩트인 항아리.

항아리 안에 물을 담아두면 30분 안에 정화시켜 맑은 물로 만들어준다고 한다.

크기가 라분 몸통만 아니었으면 미궁 탐사에 가지고 가고 싶을 만큼 훌륭한 라비팩트다.

2등 상품은 명장 폴른의 단검.

특별한 아티팩트는 아니었지만 수집품으로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한다.

그리고 에릭 파르밀이 노리는 상품.

3등 상품. 미궁 19층에서 발견된 고대 기록.

책 한 권 분량이지만 전문가들도 해석에 실패하여 정확한 가치가 측정되지 않았다고 한다.

"⋯⋯."

나는 켈리어의 시련이 끝났을 때, 켈리어가 내게 남긴 전언을 떠올렸다.

머릿속에 박혀 있어 언제라도 글자 하나 안 틀리고 생각해낼 수 있다.

[미궁 19층, 혹은 20층의 남서쪽, 코렐의 신전. 세 번째 통로, 아홉 번째 등불. 다섯 번째 조각상. 또 다른 내게 그동안의 성과를 보여라. 오지 않아도 상관없다. 인과의 끈이 그대를 내게로 인도하리라.]

'또 다른 켈리어'가 있는 미궁 19층과, 에릭이 노리는 기록이 발견된 미궁 19층.

우연히 겹친 것 같지는 않다.

에릭이 이 기록을 원하는 이유는 대충 알 것 같다.

'시련에 미친놈 답군.'

에릭은 인터뷰를 마치고 자리에 앉고 있었다.

"자, 그러면 에릭 님의 식객들의 실력을 보시죠!"

나와 마주 선 여성은 일전에 에릭의 저택에서 본 적 있는 여성이었다.

상대적으로 짧은 검 두 자루를 쥔 작은 손이 나를 향한다.

이름을 한 번 들었었지만 방금 전 소개에서 듣고 겨우 기억해낼 수 있었다.

나는 셀레나에게 천천히 검을 겨눴다.

"봐주는 건 없어."

"누가 할 말을."

여성이 피식 웃고는 몸을 숙여 그대로 돌진해왔다.

역시, 대비했지만 엄청난 속도다.

검을 크게 휘둘러 두 번의 공격을 차례로 막아내었다.

셀레나가 교차한 검으로 이어진 내 내려치기를 막아내는데, 발릭과는 달리 어떠한 힘의 부침도 없었다.

일부러 힘을 더 줘 셀레나를 튕겨냈다.

"너도 에릭에게 1등을 부탁받은 건가?"

"당연하지. 미안하지만 보상은 내가 가져가겠어."

역시나.

나한테는 3등을 부탁하고 셀레나에게는 1등을 부탁했다.

식객들 중 첩자가 있을 것 같다더니, 아무래도 다른 놈들에게 3등 상품을 노린다고 말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에릭에게 내밀 패가 많아지는 걸.'

셀레나의 공격은 매섭고, 날카로웠다.

학즉사법의 감지 능력으로 공격 자체는 감지되지만, 피하는 내 몸이 느렸다.

아니, 증가된 마나와 동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반응이 느린 것이다.

원래라면 일일이 다 반응하고 쳐낼 수 있어야 했다.

내 삐걱대는 빈틈을 노린 셀레나의 검이 내 몸 여기저기를 찌르고 베었다.

비틀거리며 다시 검을 쥐었다.

어느새 찔린 두 팔에서 피가 손을 타고 방울방울 흘러내리고 있었다.

"제기랄."

"포기하는 게 어때?"

"닥쳐 쌍년아."

"⋯⋯죽고 싶어?"

"죽여보던지."

그 뒤 일부러 욕을 하며 셀레나의 살심을 자극했다.

괜히 부상만 입고 경기가 끝나 자살하는 선택지는 가져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폭력적인 공격.

나는 학즉사법의 마나를 계속해서 운용하며 내 몸을 마나에 적응시켜갔다.

원래라면 3개월 지나도 끝내지 못했을 일이, 직접 검을 맞아가는 실전을 통해 크게 진전을 보인다.

오로지 피를 보지 않으면 이루어낼 수 없는 성과다.

"이거지."

"⋯⋯."

내가 팔이 거의 떨어져 나갈 지경이 되어서도 실실 웃고 있자 셀레나의 표정이 일변했다.

"미친놈. 진짜 죽어줘야겠어. 너 안 죽이면 발 뻗고 못 잘 것 같으니까."

"고맙다."

"하. 미치겠네 진짜."

잠깐 관객석으로 시선을 주니, 에릭 파르밀이 당황해하는 것이 보인다.

거래를 받아들일 때 내가 처음에 자신감 있게 식객 중에 상대가 없다고 했었던 거짓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븅신.'

그래도 걱정 마라. 이 정도 실력차이면 결국 승리하는 사람은 내가 될 테니까.

셀레나가 빛살 같은 속도로 몸을 움직인 뒤 내 목에 검을 박아 넣었다.

'마지막은, 기술인가.'

분명 지금까지 감지한 셀레나가 낼 수 없는 속도였다.

더군다나 기술의 사용으로 인해 자극받아 요동치는 그녀의 마나.

마지막 마무리를 빠르게 하기 위해 기술을 꺼내든 모양이다.

나는 검을 놓치고 털썩 무릎을 꿇었다.

검을 꽂고 내 마지막 일격을 피하기 위해 거리를 벌렸던 셀레나가 터벅터벅 다가왔다.

"어휴. 질기네 질겨. 그러고 보니, 죽였다고 에릭 님한테 혼나지는 않겠지?"

나는 목에 박혀있던 검을 부여잡고 뽑아냈다.

"⋯⋯."

"자."

얼떨결에 내가 내민 검을 받아낸 셀리나가 이제는 공포까지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한창 이어지던 관객의 환호성도 그때를 기점으로 점차 멎었다.

"저 미친놈은 뭐야."

"목에 검이 꽂혔는데."

"뽑았어?"

"씨발."

관객들의 웅성임을 들으며 내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죽음이었다.

-키릭.

⋯⋯

"자, 그러면 에릭 님의 식객들의 실력을 보시죠!"

"허허."

본능적으로 셀레나의 검에 찔렸던 목을 쓰다듬었다.

당연하게도, 어떠한 상처도 없었다.

'그럼. 다시 가볼까?'

목표는 학즉사법 2성을 내 몸에 온전히 녹여내는 것이다.

아직 갈 길이 멀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51

다시 시작되는 흑야혈투회 8강. 나는 가만히 내 반대편에 서 있는 셀레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죽었던 지난 삶을 복기했다.

결론은 바로 나왔다.

'강하다.'

나이는 이십대 중후반으로 보이지만 이미 3위계의 극에 달해있다.

신체와 정신, 마나도 그에 맞게 균형 있게 발전되어 있다.

그야말로 천재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나는?

학즉사법 2성을 달성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 덕분에 감지 능력이 그야말로 극적으로 발전되어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이전에는 멀리 떨어진 적을 감지하는 것에 그쳤다면, 지금은 셀레나의 공격 경로를 예지에 가깝게 예측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다.

하지만.

'신체가 그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적어도 3개월은 적응이 필요하다고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을 정도의 괴리다.

마나를 본격적으로 운용할 때 밀려들어오는 정보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다.

그렇다고 균형을 위해 감지 능력을 이전 수준으로 제한한다?

고점을 낮추면 나머지 능력들과의 균형은 맞을 것이다.

셀레나를 상대로도 더 오래 버티고, 운이 좋으면 이길 수도 있겠지.

하지만 당장의 승리를 위해 내 최고점을 포기하는 건, 무한 회귀자의 자세가 아니다.

"끝까지 가 보자고."

"뭐? 덤비기나 해."

감지 능력을 최대한으로 운용하며 신체를 끌어올린다.

학즉사법이 안겨준 마나와 감지 능력에 몸을 적응시켜야 한다.

이 적응에 목숨을 건 전투만큼 가장 어울리는 것은 없다.

"읏!"

내 매서운 반격에 셀레나의 팔이 얕게 베였다.

이미 검에 두 번 찔린 상태였지만 상관없다.

단 한 번도 공격을 성공하지 못한 지난 삶과는 천지차이의 결과다.

"3개월. 이 결투로 건너뛰어주지."

당연하게도 이번 생에서 내가 셀레나를 이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셀레나에게 5번의 크고 작은 상처를 입히는 것에 성공하였다.

약이 잔뜩 오른 셀레나가 악귀같이 덤벼드는 내게 기술을 사용해 목을 찔러온다.

지난 삶에서 이미 본 기술이다.

나는 기술의 발동 시점을 확인한 뒤 몸을 크게 틀어 검을 피했다.

"뭐야. 점점 어려워지잖아. 윽."

"으아아아!"

내가 그대로 검을 내리치려는 순간, 셀레나가 기술을 역으로 사용하며 몸을 뺐다.

이어지는 일격, 느낄 수는 있었지만 막을 수는 없었다.

'여기까지인가.'

나는 목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윽!"

그렇게 내 몸이 허물어졌다.

"헉! 헉!"

셀레나에게서 처음의 여유로운 태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두 팔에서 피를 뚝뚝 떨어뜨리는 셀레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에도, 내 머리는 셀레나에게서 비롯된 모든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좋군.'

-키릭.

⋯⋯

세 번째 도전에서, 내 목을 내어주는 대신 셀레나의 가슴을 크게 베어냈다.

-키릭.

다섯 번째 도전에서, 나는 셀레나의 오른팔을 잘라내는 데에 성공했다.

-키릭.

일곱 번째 도전에서, 셀레나의 잘린 목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내 의식도 점차 흐려졌고, 곧 사라지고 말았다.

-키릭.

⋯⋯

열 번째 도전.

"자, 그러면 에릭 님의 식객들의 실력을 보시죠!"

나는 몸을 풀며 셀레나를 향해 터벅터벅 나아갔다.

내 움직임에서 빈틈을 찾지 못한 셀레나가 거리를 벌려 이동한다.

비로소 감지 능력을 완전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된 시점에서 나는 전율에 전율을 거듭했다.

3위계의 끝에 다다랐을 셀레나의 움직임이 손금 들여다보듯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나보다 10살은 많고, 몇 배는 더 고련을 거듭했을 셀레나의 재능에 닿아버렸다.

그리고 바로 넘어서버렸다.

이것이 학즉사법 2성의 힘이고, 무한 회귀의 힘이다.

고양이처럼 몸을 숙인 셀레나가 발톱 같은 두 검을 땅에 늘어뜨렸다.

"과연. 에릭 님이 고용할만해."

"⋯⋯."

"하지만 질 수는 없거든?"

몸을 튕긴 셀레나가 바닥에 몸을 눕히듯 달려들었다.

나는 늘어뜨린 검을 올려치는 것으로 공격을 방어하고, 뒤로 물러나 이어지는 삼연격을 빠르게 피했다.

"핫!"

셀레나가 처음부터 기술을 펼치며 내게 따라붙었다.

나는 일부러 거친 동작으로 셀레나의 두 검을 걷어내었다.

잠깐 물러난 셀레나에게 따라붙어 몰아붙였다.

셀레나는 검을 가져다 대거나, 몸을 움직이며 쉽게 내 공격을 피해 간다.

"반사 신경은 좋네?"

이어지는 찌르기가 내 어깨를 살짝 스쳐 지나갔다.

따끔한 느낌과 함께 어깨에 피가 맺힌다.

셀레나가 반격을 빠르게 피하며 거리를 벌렸다.

이 과정까지가 5초.

당장 보기에는 내가 손해를 본 것처럼 보인다.

다시 대치가 시작되었다.

"와아아아!"

"죽여!"

"깔아 뭉개버려 슬레이어!"

"목을 찔러야지! 암살자!"

주변의 소음이 잠깐 들렸다 사라진다.

나는 최선을 다해 학즉사법의 마나를 운용했다.

여덟 번째 도전과 아홉 번째 도전에서 해내지 못한 일을 이뤄내기 위해서다.

'압도적으로 이기면 안 되니까.'

보통 대련에서 일부러 아슬아슬하게 이기거나 지는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서는 상대보다 훨씬 높은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말들은 학즉사법의 감지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더군다나 나는 9번의 삶 동안 오로지 셀레나 만을 바라봐왔다.

녀석이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는 지금 본인을 제외하고는 내가 잘 안다.

"윽!"

서로의 힘을 이기지 못해 튕겨져나간다.

하지만 내가 미묘하게 이득을 보고 있었다.

부딪히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셀레나의 몸에는 상처가 늘어갔다.

반면 나는 자잘한 상처를 입을지언정 절대 다음 경기에 지장이 있을 법한 상처는 입지 않았다.

셀레나가 입술을 꾹 깨물고 나를 노려보았다.

이대로 가면 자신이 진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제법인데?"

"자랑거리는 못 되지."

"그래? 건방져."

내 진심을 잘못 알아들은 모양이지만 정정해 줄 필요는 없다.

셀레나가 검을 든 손에 힘을 꽉 주며 내게 달려들었다.

연속적인 기술의 발동!

몸이 급격히 빨라지며, 이리저리 꺾여 공격 시점과 위치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나는 과부하 된 셀레나의 몸속의 마나를 느끼며 안타까워할 뿐이다.

'목숨을 건 일격이군. 수명 좀 깎아먹겠어.'

결국 공격이 이루어지는 한 점, 한순간만 잡아채면 된다.

완벽한 타이밍을 맞춰 휘두른 일격이 내 눈을 찌르려던 셀레나의 검을 두동강 냈다.

급히 몸을 틀어 다른 검이 내 오른쪽 겨드랑이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가게 한다.

이어진 내 팔꿈치 일격이 망연자실해하는 셀레나의 턱을 팍 때리고 지나갔다.

이미 정신을 잃은 녀석의 옆구리를 베어낸 뒤, 발로 명치를 차 경기장 바깥으로 날려버렸다.

내게 아홉 번의 죽음을 선사했지만, 아홉 번의 가르침을 내려준 셀레나에 대한 내 배려다.

"대단합니다! 빛살보다 빠른 '여명의 암살자'의 공격을 너무나도 간단하게 물리치는 '미노타우로스 슬레이어'! 8강전에 승리하고 준결승전에 진출합니다!"

나는 사제에게 실려가는 셀레나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기절에서 깨어난 그녀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복수심보다는, 호승심에 가까운 감정이다.

마지막에 내가 힘을 빼서 공격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살짝 손을 올리니 그대로 눈을 감아버린다.

그 모습이 나름 귀엽다.

"10살 연상은 취향이 아니지만 말이야."

자리에 앉아있으니 사제가 나를 찾아왔다.

마침 쓰라린 상처들이 거추장스럽던 참이다.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리죠."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애로운 하얀 빛과 다르게 사제의 눈은 어둡고 혼탁했다.

하기야, 이런 피비린내 나는 무투회에 고용된 사제다.

정상이 아닌 놈이 분명하다.

하지만 사제의 실력은 훌륭했다.

내 몸에 생긴 상처가 빛에 닿자마자 그대로 아물었기 때문이다.

"오⋯ 읏!"

"조심하십시오. 귀하의 체력과 회복력 일부를 사용하기 때문에 피로할 수 있습니다."

피로한 정도가 아니라, 처음에는 살짝 어지럽기까지 하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머리를 탈탈 털었다.

사제의 치료를 받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꽤 쓸만한 것도 같았다.

그렇게 딱 10분이 지나자.

"대망의 4강전을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빌어먹을 대진표에 의해 경기를 치르고 바로 4강전의 첫 경기에 올라섰다.

해설자에 의하면 이렇게 체력을 빼고 진행되는 경기야말로 흑야혈투회의 매력이라나.

더군다나 상대는 나보다 마나가 더 많았던 세 명 중에 한 명.

셀레나와의 전투가 없었다면 이 녀석에게 아홉 번을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내 상대가 아니지."

"자신만만하군."

"미노타우로스 슬레이어! 붉은 검의 검객에게 시비를 거는군요!"

붉은 검의 검객, 크리스의 검은 어처구니없게도 그냥 보통의 검이었다.

대신 검집이 붉은색이다.

얼마나 개성이 없었으면. 나라도 개성을 부여해 주자.

"덤벼라. 붉은 검의 검객!"

"⋯⋯."

크리스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안 오냐? 그럼 내가 가지."

크리스의 무기는 나와 크기도 비슷한 검.

아무래도 탐험가 출신인 듯하다.

그렇다면 오히려 좋다.

이런 특수한 전투에서 지는 법?

셀레나를 이겼던 것과 반대로 하면 된다.

크리스는 정석적인 검을 가지고 있다.

억지로 부딪히며 내가 조금씩 손해를 본다.

하지만 얼핏 보기에는 딱 맞는 균형을 유지하면 된다.

그렇게 무려 500합을 겨루면?

"허억! 허억!"

"허억! 허억!"

개싸움의 시작이다.

서로의 검이 힘을 잃고, 검로조차 유지하지 못하며 흐느적거린다.

팔을 부들부들 떨며 나를 노려보는 크리스의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여기서 내가 일격을 펼치면 크리스에게서 간단히 승리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이미 얻어 갈 건 다 얻어 갔으니까.'

추가적인 에릭 파르밀의 보상만 받으면 된다.

원래 적당히 상대하다 녹초가 된 채로 장외패를 할 예정이었는데, 사제의 성능을 알았으니 문제가 없다.

"끄아아압!"

일부러 동작을 크게 가져간 뒤, 크리스의 공격에 맞았다.

나는 배에 살짝 깊게 검에 찔린 뒤 나자빠졌다.

마나를 이용해 피를 최대한 멀리 분사하며, 경기장 밖으로 자연스럽게 몸을 던졌다.

"아! 안타깝습니다! 미노타우로스 슬레이어의 패배! 붉은 검의 검사의 승리!"

크리스는 거친 숨을 한참이나 몰아쉬며 환호했다.

그 처절한 승자의 비틀거리는 모습에 비교적 약한 나의 부상에도 토를 다는 관객은 아무도 없었다.

작전 성공이다.

* * *

3일 뒤, 라파가 내가 가져온 미궁 19층에서 발견된 고대 기록을 모두 필사하는 데에 성공했다.

라파가 휴 하고 이마에 살짝 흘렀던 땀을 닦았다.

"주인님. 이제 가져가셔도 됩니다."

"고마워."

"별말씀을요."

나는 바로 에릭의 저택을 찾았다.

에릭이 본인의 집무실에서 큰 웃음과 함께 나를 반겼다.

"하하! 이것 참. 역시 루카스 님입니다."

"감사합니다."

에릭이 신나는 얼굴로 내가 건네는 기록을 받았다.

"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굉장한 실력이었습니다. 이제 대가를 지불해야 할 텐데, 혹시 따로 원하시는 검술서가 있습니까?"

"음. 제가 평생 익힐 만한 검술서가 필요합니다."

"네?"

에릭이 깜짝 놀라 내게 반문했다.

"?"

"루카스 님. 설마, 따로 익힌 검술이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만?"

동화를 수업료로 받아먹는 노인에게서 받은 가르침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다.

오로지 본능으로 휘두르는 검이 내 전부다.

에릭의 표정은 빈말로도 좋지 않았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아니, 제가 없다는데 무슨 말이신지."

"셀레나를 상대했을 때, 루카스 님은 분명 검술을 사용했습니다."

"⋯⋯예?"

이새끼. 뭔 개소리를 하는 거야?

셀레나를 상대할 때 내가 검술을 사용했다고?

나는 너무나도 진지하게 나를 바라보는 에릭의 얼굴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자.

"제가 이래 봬도 파르밀 가문에서 검술을 지향하는 프리크 분파의 일원입니다. 일전의 어수룩한 모습으로는 저를 속일 수 있었겠지만, 검술로 저를 속일 생각은 마십시오."

"⋯⋯?"

"하하. 이것 참."

에릭이 귀족치고는 차를 급하게 마셨다.

평소에는 절대 안 나던 잔 내려놓는 소리까지 난다.

"제가 단언하죠. 지금 루카스 님이 익힐 수 있는 검술은 최소한 제 저택의 지하실에는 없습니다."

"예에?"

"이는 제가 짊어진 파르밀 가문의 명예를 걸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루카스 님이 직접 익히기 위한 검술서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다른 보상을 요구하십시오."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다.

"아니, 대체 왜?"

"4강전에서 크리스를 상대할 때, 루카스 님은 일부러 패배를 당하기 위해 검술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맞습니까?"

"맞죠."

"8강전에서 셀레나를 상대할 때는 셀레나에게 딱 맞는 검술은 사용하셨죠."

"그건 아닌데. 딱히 익힌 검술이 없으니."

에릭이 김빠진 소리를 내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 말씀에 따르면 루카스 님은 자각 없이, 셀레나를 맞이한 순간에 가장 걸맞은 검술을 만들어 사용했다는 말씀이십니까?"

누구라도 같은 상대에게 아홉 번 죽으면 그렇게 상대하지 않을까?

"뭐, 그런 셈이죠."

"그렇기에 루카스 님께는 더욱더 검술서를 드릴 수 없는 겁니다."

또 도돌이표다.

이제 화가 나기 시작하려는 나에게, 에릭이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스스로 무의식적으로 검술을 창안하는 천재에게는, 앞길을 막을 다른 검술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

아. 이제 알았다.

이 인간, 내 무한 회귀를 모르는 놈이 아주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52

나는 에릭의 굳건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하수구에서 60년을 살아남은 노인이 한 말이 생각났다.

'아무것도 모르는 놈보다, 하나만 아는 놈이 더 무섭다고 했어.'

지금의 에릭이 딱 그렇다.

이런 놈은 이미 눈이 돌아버려 생각이 굳어있기에 사실과 논리를 통한 제대로 된 설득은 무리다.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루카스 님은 검술이 필요 없습니다. 그저 지금처럼 나아가면 됩니다."

"⋯⋯."

이럴 때는 방향을 틀면 된다.

대신 에릭을 더 자극하는 식으로.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저에게는 오히려 검술이 방해된다는 말씀이시죠?"

"맞습니다."

"제가 스스로 익히면 더더욱?"

"이제 이해하셨군요."

"그러면 스스로 익히지 않으면 되겠군요."

"?"

이제 준비된 말을 꺼낼 타이밍이다.

"에릭. 저는 꼭 검술을 배워야겠습니다. 이 부분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

"그렇다면 당신의 인맥으로 저를 올바르게 가르쳐 줄 스승을 구해주십시오. 당신이 말하는 내 재능을 훼손하지 않을 수 있을만큼 훌륭한 스승으로요."

에릭이 침묵했다.

"저한테 이미 검술서를 약속했습니다. 약속했던 대가를 받지 못하는 억울한 상황에서 이 정도도 못해주시는 건 아니겠지요?"

나를 바라보는 에릭의 시선이 약간 흐려졌다.

순간 머릿속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겠지.

"당신이 납득할 만한, 제 재능을 썩히지 않게 도와주며 기본적으로 사용할 검술을 가르쳐 주는 스승입니다."

"흠."

"어떻습니까?"

"확실히, 특정 검술에 매몰되어 재능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혼잣말을 중얼중얼 거리며 한참을 생각에 잠기던 에릭이 곧 눈에 초점을 잡고 나를 바라보았다.

"좋습니다. 마침 적임자가 생각나는군요. 대신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

"제자를 받는 일입니다. 검술로 일가를 이루신 분을 설득하는 데에는 하루 이틀로 어려운 부분이 있지요."

"그 설득까지 이번 일의 보상으로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이 부분은 당연히 제가 양보해야겠죠. 알겠습니다."

에릭이라는 인간의 광기는 내가 잘 알고 있었다.

최소한 이런 일로 뒤통수를 때릴 놈은 아니다.

"그러면 그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완료되면 편지를 통해 전언을 남기겠습니다."

좋아!

어떻게든 에릭의 의지를 다른 곳으로 유도해 검술을 익힐 수 있는 계기는 만들었다.

아니, 오히려 더 나은 결과다.

내가 직접 끙끙거리며 검술서를 익히는 것보다 검술을 미리 익힌 스승이 당겨주는 것이 훨씬 더 검을 배우기 쉬웠으니.

나는 에릭과 악수하며 이번 일을 마무리하려고 했다.

"아, 루카스 님. 기왕 오신 김에 점심 식사라도 같이 하고 들어가시지요. 제가 이번 식사는 조금 더 신경 쓰라고 미리 주문해 놓았습니다."

"좋습니다!"

에릭과 함께 식당에 들어서니, 이전에 봤던 식객 몇몇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셀레나의 얼굴도 보였다.

처음과는 달리 식객들의 시선에 흥미가 어려있다.

이미 내가 셀레나를 꺾었다는 소문이 퍼진 모양이다.

나를 보며 수군대는 식객들의 대화 내용은 한 마디로 정리되었다.

"꽤 어린데?"

에릭이 앞에 있었기에 이 이상으로 나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는 오가지 않았다.

나는 자연스레 셀레나 옆의 빈자리에 앉았다.

"자, 드시지요."

우선 앞에 놓인 스테이크부터 공략하기로 하자.

셀레나는 적당히 음식을 먹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 흑야혈투회 4강전에서 왜 진 거야?"

"!"

"크리스가 제법 치는 놈은 맞지만 내 상대는 못 돼. 날 꺾은 네가 질 리가 없어."

엄청 작은 목소리였기에 나 말고 들은 사람은 없었다.

나도 최대한 작게 입을 열었다.

"당신을 상대하느라 꽤 지치는 바람에."

"그래?"

"네. 당신, 꽤 강했습니다."

"그렇다는 말이지."

에릭은 나를 포함해 세 명의 식객을 흑야혈투회에 참석시켰다.

나와 셀레나는 살아남는 데에 성공했지만, 다른 한 명의 식객은 결승전에서 크리스에게 죽고 말았다.

2등 상품인 폴른의 단검은 그대로 다음 대회에 이월되어버리고 말았고.

크리스도 3위계에서는 나름 출중한 인물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기회가 되면 다시 겨뤄보고 싶은데."

"⋯기회가 된다면 말이죠."

이미 밑천이 드러난 상대와의 결투는 관심이 없다.

나는 밥을 먹다 말고 조용히 마나를 투사했다.

학즉사법에서 비롯된 감지 능력은 경지를 이룬 상황이다.

식객 한 명 한 명의 마나를 조심스레 관찰하고, 실력을 가늠한다.

모두 꽤 출중한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내 상대는 아니다.

이제 3위계에서 내 적수를 찾는 것은 꽤 어려분 일이 될 것이다.

"다음에 자리를 마련해 보죠."

오늘은 계획에 없다.

이미 리필되는 스테이크를 보며 허리띠를 풀었기 때문이다.

에릭은 식객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흐뭇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음식에 머리를 박으며 각종 산해진미들을 흡입했다.

제발 이제 신경 좀 꺼줬으면 좋겠다. 스승만 제대로 찾아주고.

* * *

며칠 뒤, 라파와 콜린이 고르고, 내가 승인한 새로운 집에 도착했다.

하수구를 벗어나 얻은 첫 집이었다.

"무려 2층 집!"

무허가의 하수구에서 아주 약간 떨어진 집이었지만 이게 어디인가.

이제 하수구의 똥물 냄새를 더 맡지 않아도 된다!

새로운 집은 켄드릭의 집과 꽤 가까운 곳에 있어 라분이 좋아했다.

"집! 넓다!"

"개인실은 창고로 사용되던 곳을 정리하면 최대 여섯 곳까지 만들 수 있어요. 부엌과 큰 거실도 따로 있습니다."

나와 라분이 방방 뛰며 집안 곳곳을 구경했다.

미궁 탐험가로 내 집을 마련하다니, 이런 성공이 따로 없다.

"좋아. 축하 파티를 하자고."

부를 만한 사람은 켄드릭 가족밖에 없었다.

하수구 사람 중에서도 생각나는 놈들은 있었지만 괜히 분위기만 망칠 것 같아 부르지 않았다.

적당한 와인과 고기가 곁들여진 파티가 끝난 후, 나는 모두를 불러 모았다.

"우선 미궁 10층에 빠르게 도달할 생각이다. 라파."

"네 주인님."

"인원 충원은 여러 방법이 있지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탐험가 아카데미나 길드 쪽이야. 우리가 미궁에 있는 동안 그 방면을 좀 알아봐 줘."

"알겠습니다."

"콜린도 최대한 라파를 도와주고."

"어. 걱정마."

라파가 수완이 꽤 뛰어난 편이지만 아무 힘도 없는 여자의 몸이라 애로사항이 많았다.

이럴 때 건장한 남성인 콜린이 서포트한다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다음으로 라분을 돌아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부담스럽게도 똘망똘망한 눈.

"라분은⋯ 건강하면 돼. 훈련도 잘하고."

"건강! 그건 걱정 마라! 훈련! 내 전문이다!"

"그래."

어느 정도 교통정리가 끝났다.

그렇다면 다시 미궁이다.

다음 날. 나와 라분은 단단히 준비를 마치고 미궁 8층으로 내려갔다.

[미궁 8층으로 진입합니다.]

[현재 진척도 92.2%.]

목표는 나머지 7.8%를 모두 채우고 미궁 9층으로 가는 길을 뚫는 것이다.

더불어 학즉사법 2성으로 강화된 내 실력이 인간이 아닌 몬스터에게 얼마나 먹히는 지도 확인하고.

그렇기에 이번에는 각종 몬스터들을 골고루 사냥하기로 했다.

우리는 안전지대 출구 근처에서 둘러앉아 지도를 펼쳤다.

주요 구역의 지도는 이미 책갈피 아티팩트로 머릿속에 저장해둔 상황이지만 이렇게 종이 지도를 펼치는 것도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나는 혼자서 탐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여러 번 이야기했던 탐험 경로를 최종적으로 점검했다.

"첫날에는 이쪽 방향으로 가서 고블린을, 깊숙하게 이동해서 리자드맨을 사냥할 거야. 이틀 차에는 빙 둘러 가서 오크를 사냥한 다음 삼일차에는 틈을 통해 홉고블린을 사냥한다. 이제 다시 반대로 똑같은 길을 돌아 안전지대로 귀환하는 거야."

"음."

"이해했어?"

"당연하다."

"이해했지?"

"물론이다. 주인. 잘 따라다니면 된다."

"⋯⋯."

라분을 바라보니 당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내가 누구에게 말하는 건가 싶다.

지도를 잘 접어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응?"

나는 뒤를 돌아보고 깜짝 놀랐다.

뒤에 탐험가 파티 몇이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모든 파티의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몰랐기 때문이다.

이럴 때 대처하는 방법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절대로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지도를 말아 집어넣고 삐딱하게 자세를 잡았다.

"뭐야?"

허리춤을 털어 허리선을 따라 세워져있던 검을 비스듬히 늘어뜨렸다.

언제든지 발도가 가능하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하지만 나를 지켜보던 이들의 반응은 내 예상과 180도 달랐다.

한 탐험가 파티의 리더가 내게 손을 내밀며 다가왔다.

"자네가 두 명이서 미노타우로스를 잡았다는 친구인가? 아, 미안하네. 게르포스 길드의 마흐너라고 하네."

"⋯⋯."

"이거, 별 친분도 없이 실례지만 자네에게 아주 관심이 많아서 말이야. 소속 길드가 없다면 우리 길드 마스터와 잠시 이야기하지 않겠나? 마침 8층 사무소에 계시는데."

뭐지?

다른 길드의 사람들도 급하게 끼어들었다.

"나는 푸른 안개 길드의⋯⋯"

"핏빛 칼날 길드의⋯⋯"

다들 미노타우로스를 사냥한 내 실력에 감탄했고, 어떻게 잡았는지 궁금해했다.

나는 모든 질문에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길드 가입에 전혀 관심이 없음을 드러냈다.

슬슬 짜증이 나려는 차에 귀에 들어오는 어떤 여성이 빼액 지르는 소리.

"저희는 길드는 아니고 단순한 파티이기는 하지만, 언젠가 꼭 미궁의 끝을 보고 싶어요! 괜찮으시다면 한 번 이야기라도 나눠보시는 게 어떨까요?"

나와 같은 꿈이다.

고개를 휙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보니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진 여성이 아직도 뭐라 뭐라 소리 지르고 있었다.

나는 다른 길드에게 양해를 구한 후 여성에게 다가갔다.

어느새 라분이 내 뒤에 붙었다.

"어?"

정말 자신에게 올 줄은 몰랐다는 듯 여성의 얼굴이 멍해진다.

탱커 두 명과 딜러 두 명. 딜러 한 명은 로그의 역할도 겸하는 정석적인 파티다.

모두 퉁명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 관심은 오로지 이 여성에게 실려있었다.

"저는 루카스라고 하는데, 그쪽은?"

"아. 소피아라고 해요."

나는 소피아와 자연스럽게 악수했다.

더불어 학즉사법의 마나를 운용해 소피아의 마나를 관찰했다.

그 마나가 어떻게 움직여 몸을 순환하고 있는지도.

이 모든 과정은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에 이루어졌다.

학즉사법 2성을 획득하면서 자연스럽게 획득한 이능이다.

차라리 특성이라고 해도 좋을 능력이 소피아의 경지를 대략적으로나마 알려주었다.

'숙련된 3위계. 나이에 비해 대단한 실력이군.'

나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말씀은 고맙지만, 함께 탐험할 수는 없겠군요."

금세 시무룩해져 고개를 숙이는 소피아.

"저와 꿈이 같으신데, 미궁의 끝을 위해 서로 노력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어! 감사합니다. 그런데 역시 두 명으로는 아무리 실력이 있으셔도 인원이 부족하시지 않나요? 저희와 함께 여섯 명이서 움직인다면 더 괜찮을 것 같은데."

"아뇨. 저도 저만의 생각이 있어서, 앞으로도 길드나 다른 파티에는 가입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렇군요."

"기회가 되면 술이나 마시죠."

다른 길드에게도 들릴 정도로 대화를 나누며 대답을 대신했다.

"라분. 가자."

"라분. 주인 뒤에 있다."

우리는 여러 탐험가 파티들의 눈길에 눈인사로 답하며 안전지대를 벗어났다.

나는 나만의 말을 듣는 내 파티로 미궁을 돌파할 예정이다.

이 방법이야말로 내 무한 회귀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살릴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마음은 고맙지만 내가 소피아 파티에 합류할 수 없는 이유였다.

그렇게 나와 라분은 미궁의 암흑 속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53 (무료 마지막 화)

학즉사법 2성을 익힌 이후 미궁 탐험은 처음이다.

새롭게 얻은 힘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 되도록 미궁 8층에 출현하는 모든 몬스터를 만나고자 했다.

그렇게 첫 번째. 머릿속 지도에 의지해 일직선으로 진행하자 곧 고블린 무리의 기척이 잡혔다.

'감지 능력의 최대 범위는 아주 약간 늘어났군.'

생각한 것보다 범위가 늘지는 않았지만 감지의 디테일이 1성보다 배는 늘어났다.

"라분. 2분 거리에 고블린 8마리. 혼자 상대할 수 있겠어?"

"문제 없다."

"좋아. 전부 다 고만고만해. 챔피언은 없어."

원래라면 접근 직전에야 적의 확실한 전력을 알 수 있었는데, 지금은 이 거리에서도 바로 알 수 있다.

라분이 방패와 검을 빼어들고 빠르게 적에게 접근한다.

내 신호에 맞추어 점차 가속하는 라분의 돌진 속도는 고블린들과 충돌할 때 정점에 다다랐다.

"우어어어!"

마나를 잔뜩 담은 라분의 일격이 이제서야 뒤를 돌아보는 고블린의 머리를 그대로 사선으로 잘라버리고, 다른 고블린의 목까지 반쯤 베어낸다.

이어지는 방패 휘두르기가 나머지 고블린을 위협한다.

그야말로 깔끔한 기습.

라분은 어렵지 않게 8마리의 고블린들을 정리하는 데에 성공했다.

"잘했어. 공양."

[시체를 공양합니다.]

[고블린 8마리. 확인.]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진척도. 92.3%]

두 번째 전투는 나 혼자 나섰다.

대신 라분처럼 기습을 하는 것이 아닌, 고블린들에게 충분히 대응할 시간을 준다.

내 존재를 확실하게 확인시킨 뒤 산책하듯 몬스터에게 다가갔다.

"케에엑!"

돌멩이와 독침 등의 위협적인 원거리 공격이 먼저 날아들었지만, 나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모든 공격을 피하거나 빗겨냈다.

'감지 능력이,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증가하고 있어.'

일정한 영역이 있고, 그 영역에 들어온 모든 것들은 내 감지를 벗어날 수 없다.

학즉사법 1성 시절에는 없던 능력이다.

영역의 크기는 대략 나를 기준으로 원형 3m 정도.

이렇게 원거리 공격을 방어하는 데에 큰 쓸모가 있어 보인다.

내가 원거리 공격에 개의치 않고 다가오자 창을 꼬나쥔 고블린들이 그대로 달려들었다.

"카아아악!"

나는 정확히 한 검에 한 마리씩, 고블린들을 빠르게 베어넘겼다.

모든 공격은 막지 않고 피하기만 했는데도 고블린들은 수적 우위를 살리지 못하고 내게 목을 헌납했다.

내가 숨 한 번 크게 쉬지 않고 전투를 마무리하자 멀리서 지켜보던 라분이 다가왔다.

"주인! 대단하다!"

"뭘. 너도 나만큼 하면 돼."

정확히는 '나만큼 죽으면'이라는 말이었지만.

"고블린으로는 더 볼 것도 없고, 바로 오크로 넘어가자."

"오크!"

고블린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도 괜찮겠지만 우리를 따라오고 있는 놈들을 뿌리칠 필요도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목에 걸린 가시처럼 신경 쓰였던 점을 말했다.

"미행이 붙었어. 두 파티."

더 정확하게는 내게 인사를 건넸던 길드들이다. 인사 과정에서 악수를 했고, 그러면서 마나의 특징들을 외워놨다.

증가된 감지 능력의 끝에 걸리자 누군지 곧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주인. 클라이머인가?"

"아니. 그런 의도가 있어 보이기는 않아."

나를 길드에 영입하고 싶어 하는 놈들이니 내게 밉보이는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일부러 방향을 90도로 꺾은 후 급속 행군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점의 갈림길에 크게 글을 적었다.

[따라오지 마시오.]

삐뚤삐뚤한 글씨였지만 알아볼 수는 있을 테지.

미행은 들킬 경우에는 크게 책을 잡을 수는 있지만 그냥 가는 길이 겹쳤다고 말하면 뭐라 할 말이 없다.

나도 내 감지 능력을 밝히면서까지 일을 벌이고 싶지는 않고.

예상대로 갈림길에서 내 글을 발견한 파티는 잠깐 벽을 살피더니 결국 나를 따라오지 않고 멈춰 섰다.

다른 파티도 한 파티와 잠시 접촉하더니 미행을 관두고 고블린 구역으로 진입하기 시작했고.

더 따라오면 내게 명분을 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경고를 무시했다면, 실력을 보여줬겠지만.'

어떠한 결과도 저들에게는 좋지 않게 끝났을 것이다.

약 2시간의 급속 행군으로 고블린의 영역을 빠르게 벗어나 오크의 영역으로 진입했다.

미궁 8층답게 챔피언들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여기서부터 오크야. 천천히 예열해 보자."

방패를 검으로 툭 때리며 대답을 대신하는 라분.

우리는 먼저 오크 3마리로 구성된 정찰대를 습격했다.

"지금!"

기습으로 한 마리를 죽이고, 내가 보조하며 라분이 나머지 두 마리를 상대했다.

탱커의 안정성을 유지하며 빠르지는 않지만 느리다고는 할 수 없는 속도로 적을 정리하는 라분.

이제 제대로 된 탱커의 느낌이 물씬 난다.

하지만 나는 라분을 제대로 된 탱커로 만들 생각이 없다.

'앞으로 꾸려나갈 내 파티에 어울리는, 최고의 탱커로 만들어야지.'

그렇기 위해서 안정을 추구할 수는 없다.

"다음은 챔피언에게 도전할 거야. 긴장하지 말고."

"알겠다."

챔피언이 포함된 네 마리의 오크.

일반적인 파티라면 3위계 3명 이상의 전력이 없는 이상 전투를 회피해야 하는 수준의 적이다.

탐험은 안정적이어야 하니까. 사망자가 발생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도 허락하면 안 된다.

하지만 나와 라분은 아니다.

"우어어어!"

라분이 챔피언에게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이제 2위계의 극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라분은 검염이 담긴 일격을 그럭저럭 방어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방패의 덕이 컸다.

대장장이의 말에 의하면 흑철로 만들어졌다는 방패는 특별한 효과를 가진 아티팩트는 아니었지만 내구성 하나는 기가 막힌다고 했다.

하기야 그러니까 미노타우로스의 일격을 막고도 멀쩡했던 거겠지.

이 방패와 라분의 기교가 더해지면?

미궁 8층 오크 챔피언의 공격도 받아낼 수 있는 2위계 탱커가 탄생하는 것이다.

라분이 챔피언을 맡는 동안 나는 순식간에 나머지 오크들을 정리했다.

검염을 일으켜 오크들의 장비째로 베어내니 놈들이 버틸 재간이 없다.

"크르르르!"

챔피언이 자신의 부하들을 전부 죽여버리는 나를 저지하려 몇 번 움직이려고 했으나, 틈을 본 라분에게 허벅지를 베이고는 그만두고 만다.

나는 라분 뒤에 빠르게 붙었다.

"라분! 내가 뒤에 있다. 한 번 마음껏 상대해 봐."

"!"

실전, 오로지 실전만이 실력을 강하게 만들 수 있다.

나는 무한 회귀를 통해 실전에 대한 두려움을 완벽하게 희석시켰다.

하지만 라분은?

무한 회귀가 없는 평범한 탐험가인 라분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나에게 있다.

"죽지 않아. 나를 믿어."

"우어어어!"

라분이 공격적으로 챔피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챔피언은 검염이 서린 검으로 라분을 노렸지만, 완벽한 방어에 막혀 유효타를 단 한 번도 성공시키지 못하고 있다.

뭐, 성공해도 내가 막아낼 예정이다.

검염의 가장 큰 강점. 검염이 서려있지 않은 장비를 베어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강점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3위계는 그저 2위계보다 신체 능력이 한 단계 발전한 전사일 뿐이다.

라분은 2위계다. 근데 학즉사법 1성을 곁들인.

학즉사법이 나에게 감지 능력을 줬다면 라분에게는 견고한 유지력을 주었다.

"우어!"

더군다나 켄드릭에게 꾸준히 배운 실전 방패술까지 더해지니 그저 본능적으로 검을 휘두르는 오크 챔피언이 당황할 수밖에 없다.

라분이 마나를 운용하며 기세 좋게 챔피언을 몰아붙였다.

뒤로 연신 물러나던 챔피언이 미궁 벽에 등을 대는 순간.

라분의 마나가 크게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

곧바로 거리를 조금 벌린 뒤 이어지는 몸통 박치기!

라분의 체중을 실은 박치기가 챔피언의 몸에 적중한다!

"크어!"

배에 방패 차징을 당하고 숨을 컥 하고 내쉬는 챔피언.

급하게 검을 휘둘러보지만 이미 몸에 밀착한 라분에게 닿기에는 각도가 모자라다.

어떻게들 손목을 꺾고 닿게 하려는 걸 내가 걷어내었고.

라분이 손에 든 검을 비스듬히 올려 찔렀다.

그 끝에는 챔피언의 턱이 걸려있었다.

그대로 뇌까지 관통한 검을 따라 라분의 머리 위로 피가 줄줄 떨어졌다.

이내 생명을 잃고 몸을 늘어뜨리는 챔피언.

'⋯대단해.'

나도 2위계 시절에 해내지 못한 오크 챔피언 레이드를 거의 홀로 해내는 라분이었다.

"우어어어어어!"

'내가 탱커는 아주 잘 골랐지.'

이렇게 경험을 쌓게 해주면, 3위계에 훨씬 더 빠르게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곧바로 이어진 휴식 시간. 라분이 아직도 흥분을 주체 못하고 손을 떨고 있다.

"왜. 좋아?"

"라분. 강하다. 챔피언. 잡았다."

"그래. 네가 짱이다. 나보다는 약하지만."

"주인. 기다려라. 곧 따라잡겠다."

"기대하지."

라분의 눈이 호승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아직 하루가 끝나려면 시간이 꽤 남아있었다.

나는 오늘의 마지막 전투로 6마리의 오크 무리를 지목했다.

"챔피언 한 명이야. 할 수 있겠지?"

"물론이다."

"꽤 많으니까 기습으로 가자고."

내가 살펴둔 지형으로 접근하는 오크 무리.

사실 라분에게는 말 안 했지만. 저기에는 오크 챔피언이 두 마리나 있다.

'하루에 챔피언 세 마리. 수지 남는 장사군.'

물론 성공한다는 전제가 깔려있지만.

라분에게 수신호를 보내 타이밍을 잡는다.

의외로 챔피언 두 마리가 포함된 파티는 우리에게 꽤 가까이 접근하면서도 기습을 알아채지 못했다.

나는 계속 손가락을 까딱이다 최적의 타이밍을 계산하고 주먹을 쥐었다.

"지금!"

"우어어어!"

그대로 달려들어 일반 오크 두 마리를 베어낸다.

우리를 발견하고 순식간에 휘몰아치는 검염어린 검 두 자루.

두 마리의 챔피언을 발견한 라분의 마나가 요동쳤지만 돌진을 멈추지는 않았다.

"라분! 오른쪽 챔피언을 맡아!"

"!"

나는 왼쪽 챔피언에게 검염 서린 검을 휘두르며 맞섰다.

놈의 예상보다 배는 빠르게 움직인 내가 후속타로 발차기를 곁들이자 기습의 불리함을 견디지 못한 챔피언이 일격을 허용하고 멀리 날아갔다.

나는 그 틈에 나와 라분을 창으로 찌르려는 오크 두 마리에게 덤벼들었다.

"그어어어!"

"흡!"

우선 라분을 노리는 한 마리에게 검을 꽂아 넣고, 나를 노리는 나머지 한 마리의 창대를 잡아챘다.

팔에 창이 스쳐 살짝 베였지만 전투에는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을 상처다.

검을 뽑아내 나의 한 손의 힘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오크의 머리를 찍어냈다.

그렇게 내 의도대로 만들어진 챔피언들과의 2대2 상황. 분노의 비명을 지르며 나를 맞이하는 오크 챔피언에게 맞서기 시작한다.

물론 라분의 상태를 면밀히 체크하는 것을 잊지 않고서.

내가 상대하는 오크 챔피언은 비교적 경험이 적어 보였다.

창을 사용할 때의 본능적인 움직임을 아직 떨쳐내지 못하는 것이 보인다.

'쉽겠어.'

나는 여유롭게 놈의 검을 받아쳤지만 마무리하지는 않았다.

그러면 모처럼 만들어놓은 라분의 위기 상황이 흐려지게 된다.

반면 라분이 상대하는 챔피언은 검염을 다루는 것이 능숙했다.

깔끔하게 검을 휘두르며 라분의 공격을 방어하고, 방패를 두드린다.

"윽!"

아무리 방패가 검염을 받아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검에 실린 3위계 전사의 힘은 사라지지 않는다.

"제대로 흘려! 정면으로 받지 마!"

나는 내 상대인 챔피언을 점점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감지 능력으로 내게 향하는 투박한 공격의 경로를 읽어낼 수 있으니 상대는 전혀 어렵지 않았다.

나는 약 50합을 겨룬 뒤, 챔피언의 왼팔을 크게 베어냈다.

"크아아아악!"

오크가 피를 흩뿌리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나는 라분 쪽을 주시하며 챔피언이 허우적 휘두르는 검을 튕겨내고 그대로 목에 검을 박아 넣었다.

라분은 녀석의 내려치기를 방패로 받아내고 있었다.

"흐으으으으읍!"

챔피언도 챔피언대로 악다구니를 쓰며 힘을 보대고 있었고, 라분도 목에 핏대를 세우며 챔피언의 공격을 방어한다.

두 손 모두 방패를 받치고 있어 검으로의 공격은 불가능해 보인다.

'끼어들어야 하나?'

아니, 아직 라분은 지지 않았다.

대신 걸음을 옮겨 챔피언을 내 유효사거리 내에 두었다.

얼마나 힘대힘의 싸움이 계속되었을까? 라분이 마지막 순간에 방패를 틀어 챔피언의 검을 바닥에 내리 꽂았다.

챔피언도 빠르게 검을 회수했지만, 라분의 공격이 더 빨랐다.

매끄럽게 이어진 챔피언의 올려치기를 방패로 다시 받아내고, 검을 휘둘러 무방비가 된 챔피언의 몸을 크게 베어낸다.

"우어어어!"

"!"

온전한 오크 챔피언과의 전투에서, 확실하게 승리를 쟁취하는 라분의 모습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54

하루에 오크 챔피언 세 마리 사냥.

미궁 8층을 위주로 탐험하는 베테랑 탐험가 파티라면 어쩌다 한 번은 올릴 수 있는 성과이고, 그들 사이에서는 자랑거리도 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챔피언 세 마리를 상대한 탐험가가 고작 두 명이라면?

더군다나 한 명은 3위계, 나머지 한 명은 2위계라면?

인생에 다시없을 업적을 이뤘다고 할 만하다.

평생 술자리에서 자랑할 안주거리였다.

"라분. 배고프다."

"기다려. 야영지에 도착하려면 아직이야."

하지만 나와 라분은 그런 일들을 전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할 수 있기에 했을 뿐이다.

나는 짬을 내서 진척도를 확인했다.

'하루만에 진척도가 97%까지 올랐어. 내일이면 끝나겠는데.'

원래 6일을 계획한 탐험이 2일 혹은 3일 만에 끝나게 생겼다.

적어도 4일을 번 셈이니 크나큰 이득이다.

오크와 고블린들의 완충지대에 있는 은신처에 자리를 잡고, 즉각적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리자드맨의 영역으로 이동해서 진척도 100%를 달성할 거야. 홉고블린 쪽은 생략. 이 정도의 전투 데이터면 충분해."

라비팩트인 반지가 인과를 축적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

그때 다시 들러 호수의 프라냐를 싹쓸이할 생각이다.

적어도 500마리의 인과는 채울 수 있을 터다.

"미궁 8층 진척도. 100%. 그 후에는?"

"미궁 9층에 잠깐이라도 들어가 보자. 분위기 파악도 해볼 겸."

"알았다."

이미 라파는 나를 위해 10층의 정보를 알아보고 있는 상황이다.

9층의 정보는 반복된 교육으로 확실하게 머릿속에 넣어놨다.

그래도 몸으로 직접 겪어보는 것보다는 못하다.

나는 검에 기름을 바르는 라분을 바라보았다.

이미 멋들어지게 손질된 방패가 옆에 놓여있다.

"내일은 리자드맨 챔피언이야. 오크보다 훨씬 강하니까 호락호락하지 않을 걸?"

"각오. 되어있다."

"그래. 내일도 한 번 잘해보자."

나의 감으로 라분은 어떤 계기만 있다면 3위계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그 계기를 만들어줘야 할지 모르겠다.

'이미 2위계 시절의 나보다 강해.'

4위계와의 대련? 이미 카리나와의 대련을 거쳤다.

강력한 적? 오크 챔피언도 1대1로 이길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

'돌아가면 니콜라스와의 대련이라도 추진해야겠군.'

4위계 해결사 니콜라스. 마법사 클라이머 구트란의 토벌전에서 그에게 빚을 지워놨고, 대련을 전제로 한 번 찾아가기로 했었다.

그라면 라분의 좋은 상대가 되어줄 수 있을 터였다.

"좋아. 이제 자자."

두 시간마다 교대하는 지옥의 불침번이 시작되었다.

나는 불침번을 설 때 잠이 올 때마다 감지 능력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최대한 먼 거리에서 얼쩡거리는 고블린 무리를 관찰하면 시간이 금방 간다.

지켜보면 꽤나 재미있는 게, 갈림길마다 변을 찍 뿌리고 문지른다.

그러면서 괴성을 지르는 자세를 취하고 춤을 춘다.

멀리서 보니 미친놈이 저지르는 쇼 같기도 했다.

오크와의 완충 영역에 발만 살짝 담그더니, 이내 본인의 영역으로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는 고블린들.

"하암."

이러고 두 시간을 버티다가 또 두 시간 뒤에 일어나야 한다니.

인원 충원이 절실해지는 순간이다.

두 명이서 활동하면 한나절을 수면에 투자해야 6시간을 잘 수 있지만, 세 명이서 활동하면 9시간만 투자해도 6시간을 잘 수 있다.

탐험에 있어서 이 3시간의 차이는 너무나도 크다.

"동료. 꼭 모집한다."

탐험가 아카데미 졸업식을 우선적으로 노리고, 실패하면 건장한 노예를 짐꾼으로 사자.

이번에 흑야혈투회에서 에릭에게 받은 10골드에 보너스 5골드로 15골드까지 추가로 벌었으니 구매 자체에는 크게 문제가 없다.

물론 싹수가 좋은 놈을 골라야겠지만 라분의 성공사례도 있고 하니 도전해 볼 만하다.

미래 계획을 세우다 보니 모래시계가 전부 다 돌았다.

"⋯⋯."

나는 라분의 격렬한 코골이 소리를 들으며 모래시계를 다시 뒤집었다.

오늘 내게 맞춰주고 챔피언과 사냥하느라 고생했는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다음 날.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며 리자드맨의 영역으로 이동했다.

"라분. 근육통 안 났어?"

"마나로 신경 썼다. 괜찮다."

"그러면 바로 간다."

리자드맨의 영역은 고블린의 영역과의 완충지역은 작고, 오크의 영역과는 꽤나 긴 완충지역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리자드맨의 영역은 기본적으로 습지가 형성되어야 하기에 완충지역에서의 전투는 비교적 덜한 편이다.

그렇기에 야영하기도 훨씬 안전하다.

나는 감지 능력을 통해 가장 적절한 위치에서의 전투를 설계했다.

"리자드맨 두 마리. 암수의 기본적인 구성이야. 한 마리씩 맡아보자."

"알겠다."

물이 발에 밟히자마자 장화를 신고, 그대로 리자드맨을 습격했다.

나는 몇 합 지나지 않아 리자드맨을 사냥하는데 성공했고, 라분도 그렇게 어렵지 않게 리자드맨의 머리에 칼을 꽂아 넣었다.

"점점 컨디션이 좋아지는데?"

"문제없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우리는 리자드맨의 영역을 직선으로 가로지르며 탐험을 계속했다.

일반 리자드맨을 무시하며 전진하니 근처에서 사냥하는 여러 탐험가 파티들의 기척도 같이 감지된다.

"이쯤이 탐험가 파티의 일반적인 사냥 장소로군."

이곳에서 다시 한 시간을 더 이동하자 탐험가들이 잘 탐험하지 않는 깊숙한 영역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곧 내가 원했던 목표물이 감지에 들어온다.

"챔피언 한 마리, 일반 한 마리. 어때 라분. 챔피언을 상대할 수 있겠어?"

"문제 없다. 주인이 뒤에 있다면."

"그래. 바로 가 보자."

격렬한 전투가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라분은 챔피언을 사냥하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지금의 실력으로는 무리였다.

아주 약간의 실수만 있어도 부상을 면하기 힘들었을 정도다.

라분은 겨우겨우 쓰러뜨린 리자드맨 챔피언의 시체를 바라보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후욱! 후욱!"

"그 정도면 잘했어. 챔피언은 내가 맡는 게 낫겠다."

"젠장!"

라분이 챔피언의 몸을 거칠게 내리쳤다.

고전한 자신에게 불만이 가득한 모양이다.

이내 나를 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흥분했다."

"크크."

나는 라분의 등을 팡팡 때렸다.

"강해지고 싶어? 빨리 3위계가 되고 싶지?"

"그렇다. 강해져서. 든든한 라분이 된다."

"짜식. 기특한 놈. 하지만 명심해. 네 목숨이 가장 중요하다고."

"⋯⋯."

"알았어? 무리는 기본적으로 하되, 선을 넘으면서 무리하지는 말란 말이야.'

나를 위해 목숨까지 바쳤던 라분이다.

오크 챔피언에게 죽을 뻔한 나를 구하고 죽은 라분의 모습이 뇌리에 생생하다.

미노타우로스 레이드 때도, 라분은 거의 모든 죽음에서 나보다 항상 먼저 죽었다.

목숨값을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면, 이미 나는 라분에게 크나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공양."

[시체를 공양합니다.]

[리자드맨 챔피언 한 마리. 리자드맨 한 마리 확인.]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진척도. 98.6%]

"이제 복귀하며서 나머지 진척도를 채우자."

"⋯알겠다."

라분의 대답이 조금 늦다.

"왜. 내 말에 감동이라도 했냐?"

"라분. 더 강해지고 싶다. 3위계. 되고 싶다."

"그래. 좌절하지 말고."

"알겠다."

그 뒤, 내가 맡아 리자드맨 챔피언을 사냥하고 천천히 복귀를 시작했다.

고블린의 영역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리자드맨의 사냥으로 미궁 8층의 진척도를 모두 채우는 데에 성공하였다.

[시체를 공양합니다.]

[리자드맨 두 마리. 확인.]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진척도. 100.0%]

[진척도 100%를 달성하였습니다!]

[달성 등급. B+]

[보상 : 중급 마정석 1개.]

[미궁 9층으로의 입장이 가능해집니다.]

나는 허공에 마나가 모이듯 생성되는 마정석을 잡아챘다.

"해냈다."

미궁 8층 공략.

보통의 미궁 탐험가들은 년 단위의 노력을 해도 불가능할 업적을 단 1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뤄냈다.

생계형 탐험가들은 6층 공략 기록을 가지고 자신의 검을 팔기도 한다.

'생계형은 넘어섰고.'

전문적인 탐험을 노리거나, 길드의 탐험 전문 파티를 백업하는 탐험가들은 보통 9~10층의 탐험 경력을 가진다.

그래야 갑자기 저층의 미궁에 파견되어도 당황하지 않기 마련이다.

"라분. 수고 많았어."

"미궁 9층도.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당연히 그래야지."

미궁 10층. 10층은 돌파해야 어디 가서 명함이라도 내밀 수 있겠지 싶다.

물론 8층 돌파도 업적이라면 업적이고, 내가 살았던 하수구에서는 모두가 우러러볼 경지다.

하지만 이미 내 기준은 하수구 인생과는 너무나도 먼 곳에 있다.

"가보자."

그날 저녁에 잠을 자지 않는 강행군을 거쳐 미궁 8층으로 복귀하고, 사무소의 숙소에서 그대로 하룻밤을 잤다.

그리고 미궁 8층의 안전지대에서.

"이동."

[미궁 9층으로 진입합니다.]

[현재 진척도 0%.]

우리는 미궁 9층으로의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미궁 9층의 첫인상은 한 마디로 정리되었다.

"넓네."

"넓다."

고개를 한참 빼고서야 미궁의 벽이 보이고, 반대편 미궁의 벽은 꽤 먼 거리에 있는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드문드문 놓인 바위의 언덕도 시야를 방해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이게 미궁인지, 평야인지."

라파에게 말을 미리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주변 풍경이 극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니.

미궁의 각 층은 마치 다른 차원일 것이라는 연구가 정설이었는데 정말 그 연구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막상 그런 놈들도 층과 층을 잇는 통로를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미궁.

그야말로 신비가 가득한 공간이 아닐 수 없다.

더불어 미궁의 빛. 곳곳에 쌓인 바위들이 빛을 내고 있어 상당히 먼 거리임에도 지형지물을 식별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덕분에 이렇게 벽과 벽 사이가 넓은 장소에서도, 미궁의 시야는 나름대로 밝았다.

물론 거리에 따라 멀리 떨어질수록 시야가 조금씩 흐려지기는 하지만.

'도시에서의 거리감과 크게 다른 점이 없어.'

이건 탐험에 유리할 수도 있고, 불리할 수도 있다.

내가 상대를 빨리 발견하는 만큼 상대도 나를 빠르게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

오히려 감지 능력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나에게 이런 환경은 이익보다 손해가 더 많을 가능성이 높았다.

시야에 대한 분석을 마친 나는 안전지대 내에 탐험가들이 세워놓은 건물이 있는 장소를 보았다.

미궁의 벽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약 10여 개의 건물들.

건물의 상태는 미궁 4층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조악하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미궁 사무소의 명패는 뚜렷하다.

"사무소로 가자."

"음."

새로운 층을 탐색할 때, 미궁 사무소에서 정보를 얻는 것은 필수적인 과정이다.

운이 좋으면 실시간으로 해당 층을 탐험하고 있는 탐험가들의 지식도 같이 얻을 수 있으니까.

비밀 통로를 통해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전부 개척한 미궁 8층이 특이한 사례였다.

나와 라분은 천천히 사무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사무소의 문을 열었다.

단 두 사람만 입장하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주변 탐험가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오히려 나는 반가움에 살짝 미소 지었다.

"좋아."

새로운 도전. 미궁 9층 공략의 시작이었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55화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55

카운터를 보고 있는 미궁 9층 사무소의 직원은 안경을 눌러쓴 샌님 스타일의 남성이었다.

겉보기에는 검보다 책이 어울리는 인상이다.

하지만 내 감지 능력으로 확인한 남성은 상당한 마나량을 보여주고 있었다.

제대로 신체까지 접촉해 봐야 알겠지만⋯

'3위계 정점, 또는 4위계!'

내가 제대로 경지를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히 나보다 윗줄의 실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했다.

"이봐. 너무 재지 말라고. 긴장하게 되잖아."

"⋯⋯흠. 실례."

"처음 보는 얼굴이 둘. 거기다 한 명은 이국인. 너희들인가? 미궁 8층에서 미노타우로스를 단 두 명이서 잡았다는 파티가."

"그렇습니다만."

주변에서 오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살짝 들어주었다.

오오거리는 소리가 더 커진다.

"벌써 미궁 9층이라. 첫 방문이겠고."

"그렇습니다. 잠깐 들러봤습니다."

"9층의 기본적인 정보는?"

"숙지하고 있습니다."

사무소 직원이 잠깐 오른손을 털고 내게 내밀었다.

"네이슨."

"루카스입니다."

4위계로군.

"미궁 9층은 빨리 졸업하고 10층으로 가야지. 그래도 미궁 9층이 이 모양이라 나는 파티 활동을 추천한다만."

"참고하겠습니다."

"그래. 두 명이서 미노타우로스를 잡았다는데. 자신감이 넘칠만하지."

주변 사람들의 작은 야유가 네이슨을 향했다.

"저기 술이나 축내고 있는 빈대들이랑 친하게 지내라고. 나쁜 놈들은 없으니까."

"어이! 한 잔 할 텨?"

이미 얼큰하게 취한 탐험가 무리 둘.

탐험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인가 보다.

'8명. 3위계 5명, 2위계 3명. 10명. 3위계 7명, 2위계 3명.'

겉으로 보이는 포지션도 적절하게 나뉘어져 있고, 술을 마시고 있음에도 나름 기세가 날카롭다.

저런 놈들을 딱 두 명만 스카우트하고 싶을 정도다.

"돌아와서 하시죠."

"어차피 멀리 못가. 얼른 돌아오라고."

네이슨은 맥주 대신 냉수를 건넸다.

나와 라분은 감사를 표하며 천천히 물을 마셨다.

그 뒤, 네이슨이 미궁 9층에 대한 이런저런 정보를 알려주었다.

대부분의 정보는 라파가 전달해 준 정보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베테랑 탐험가 출신이 줄 수 있는 정보들도 있었다.

"되도록 벽을 따라가던지, 벽이 보이는 범위 내에서 움직여라. 특히 인원이 적은 너희들은 벽이라도 있어줘야지. 지형상 어렵겠지만, 항상 벽을 시야에 넣어 둬."

"벽의 틈에 몬스터들이 매복해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적당한 틈은 하룻밤을 안전하게 보낼 수 있는 은신처가 되어주기도 해."

"불을 피우고 싶으면 피워도 된다. 여기 몬스터들은 불을 무서워하거든."

나는 마지막 말에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몬스터들이 불을 무서워한다? 왜죠?"

"20년 전에 '인페르노'가 한 번 쓸고 갔거든. 미궁 9층 몬스터들은 아직도 그 공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과연⋯⋯."

'인페르노'. 이사벨라 에리톨리아.

칼리움에서 가장 유명한 마법사 중 한 명이다.

'탐험가 파티'의 일원으로, '섬광' 리디엠 올버스와 함께 대외활동에 가끔 얼굴을 비추기도 한다.

"하지만 조심해. 불을 피우면 잡스러운 몬스터들이야 물리칠 수 있지만, 강한 몬스터들의 호승심을 자극할 수도 있으니까."

오히려 챔피언들에게는 자극을 준다는 말인가.

"덕분에 귀중한 정보, 잘 얻었습니다."

나는 통 크게 은화 1개를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이슨은 사양하는 법 없이 빠르게 은화를 챙겼다.

4위계의 순발력을 발휘해 주변 사람들이 눈치챌 틈도 없이 쓸어간다.

"멀리 가지 마라. 죽는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오른손을 드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막상 사무소를 나오고 나니 막막하기는 하다.

"벽 쪽으로 가라는 말이지."

안전지대 밖을 바라보니 두 갈래의 길이 있다.

바로 앞에 커다란 이정표가 놓여있다.

[왼쪽 길 : 주로 고블린, 오크, 홉고블린, 미노타우로스, 샌드웜 출현.]

[오른쪽 길 : 주로 고블린, 오크, 리자드맨, 트롤, 미노타우로스 출현.]

"왼쪽으로 가자."

"알겠다."

샌드웜이 조금 걸리기는 하지만, 새로운 몬스터를 경험한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좋다.

물론 이번 탐험은 간만 보고 돌아올 거라 샌드웜을 만나기는 쉽지 않겠지만.

하루 거리만 이동하고, 자고 돌아오는 것이 목표다.

총 소요시간 2일의 간단한 탐험 계획.

나와 라분은 담담하게 안전지대를 나섰다.

안전지대를 벗어난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아 눈앞에 야트막한 바위산이 나타났다.

"⋯벽을 따라 이동하라면서."

벌써부터 벽에 붙어있는 바위산이 나타나면 어쩌자는 건지.

직진 길을 고수해 바위산을 올라가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았다.

대략 30분을 등산해야 할 높이라 한 번 등산하면 한 시간은 쉬어야 할 판이다.

그리고.

"위에 고블린들이 좀 있는데?"

"!"

"10마리 정도야. 우리를 발견하지는 못한 것 같아."

감지를 돌려보니 아예 바위산의 초입부터 박혀있다.

큰 바위 뒤에 있어 시야에 보이지는 않았다.

바위산에는 탐험가들이 만들어놓은 듯한 길이 있었는데, 그 길의 바깥쪽에 매복해 지나가는 탐험가 파티를 노리는 것 같았다.

'바위산에 올라가면 기습을 당할 수도 있겠어.'

위협은 되지 않았지만 이번 목적은 탐사다.

엄한 곳에서 힘을 뺄 필요는 없다.

더군다나 내 감지 범위는 바위산 전체에 미칠 만큼 넓지 않아 얼마나 많은 적이 바위산에 매복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돌아가자. 괜히 싸웠다가 고블린들이 몰려오면 귀찮아지니까."

"좋은 생각이다."

그렇게 행로를 결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감지 능력의 효용성에 감탄했다.

"고지대에서의 기습을 탐지할 수 있다니."

감지 능력만 있으면 미궁 9층을 공략하는 것도 어렵지 않아 보였다.

바위산의 주위를 따라 도니, 바위산 옆에 또 다른 바위산이 있었다.

마치 물만 흐르면 강이 될 듯한 지형이다.

그래도 길이 잘 다져져 있어 이동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산과 산 사이를 천천히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내 감지 능력이 우리가 다다를 지점의 벽 틈에 있는 고블린 다섯 마리를 감지해냈다.

거리도 가깝고, 기습하지 않으면 먼저 발견될 확률이 높았다.

"라분. 오른쪽 바위산 벽 틈에 고블린 다섯 마리. 바로 처리하자."

"알겠다."

조심스레 접근해서 기습을 하는 순간이었다.

첫 번째 고블린을 찌르려는데, 기습에 놀라 나를 바라보는 고블린의 몸이 상처투성이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듯 빼빼 말라있었고.

심지어 무기조차도 들고 있지 않다.

'뭐지?'

머리는 생각을 이어가면서, 손은 그대로 고블린의 목을 썰고 있었다.

라분도 한 마리를 처리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려던 순간.

남아있던 세 마리가 동시에 호각을 꺼내들었다.

"!"

"!"

미궁 8층에서, 홉고블린의 함정에 걸려 죽었던 악몽이 떠올라 자동으로 검염을 피워올렸지만 이미 늦었다.

-삐이이이이익!

미처 막지 못한 마지막 한 마리가 호각을 부는 데에 성공했고.

-들썩!

양옆에 위치한 바위산이 들썩였다.

나는 마지막 고블린의 목을 찌르고 공포에 젖은 시선으로 바위산을 올려다보았다.

"케륵!"

"케르르륵!"

"키야아악!"

수십 마리의 고블린들이 바위산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각각의 고블린들의 손에는 사람 주먹만 한 돌덩이가 들려있었다.

"엿 됐다! 라분! 튀자! 길을 열어!"

"우어어어!"

"역돌격이다!"

고블린들이 바위산을 제 몸처럼 타고 건너며 우리들을 압박해왔다.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진 돌덩어리가 하늘 위에서 떨어진다!

"미친!"

그동안의 미궁에서는 모든 원거리 무기가 수평으로 투척되었기에 힘이 없어 피하기 쉬웠다.

하지만 바위산 위에서 던지는 돌멩이는 수평이 아닌 수직에서의 공격이다.

돌멩이가 땅을 향해 떨어지며 빠른 속도로 우리를 덮쳤다.

"라분! 방패 머리 위로!"

"으아아!"

나는 감지를 통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멩이를 피했지만, 라분은 그런 능력이 없었다.

방패에 텅텅 떨어지던 돌이 우연찮게 라분의 옆에 떨어지며 튕겼다.

"윽!"

라분의 팔에 적중한 돌멩이. 고통을 이기지 못한 라분의 팔이 흔들리며 방패도 따라 같이 흔들렸다.

그 틈을 노리고 라분에게로 투석이 집중된다.

"씨발!"

내가 라분에게 달려들어 라분에게 날아드는 돌멩이를 쳐내기 시작했다.

검날이 돌멩이에 닿으며 잔뜩 상해버렸다.

기어코 계곡을 벗어나자 고블린들이 바위산 끝에서 케륵케륵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위산을 내려와 우리를 쫓아오지는 않았다.

"헉헉."

"헉헉. 이게 무슨 일이야."

고블린들의 사정거리 한참 밖에 도달하고서야 숨을 고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한참을 꽥꽥거리던 고블린들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돌아간다.

손가락을 휙휙 휘두르는 모습이.

"라분. 저거 욕하는 거지?"

"딱 봐도. 그렇다."

"저놈 다 죽었다."

오늘은 특별히 봐주도록 하자⋯⋯

다음에는 꼭 죽여줘야 겠다.

일단 라분의 팔을 살폈다.

다행히 부러지지는 않았고, 움직이면 통증을 호소하는 것이 타박상을 입은 듯했다.

"마나 잘 운용하면 이틀이면 낫겠네."

"문제없다."

"일단 돌아가자. 신고식 잘 치렀어."

역시 미궁이다. 만만히 볼 것이 못 됐다.

우리는 그렇게 안전지대로 돌아갔다.

"⋯일찍 돌아가자."

"라분. 분하다."

"나도. 다음에는 저 녀석들. 씨를 말려버리자고."

"물론이다."

사무소로 돌아가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벌써 오냐며 신참들을 놀릴 탐험가들 얼굴을 보기 싫었다.

"귀환."

[미궁 1층으로 귀환하시겠습니까?]

[현재 진척도 0%.]

예정보다 일찍 돌아오니 집에서 펜을 들고 뭔가를 적던 라파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인님? 오라버니?"

"오빠. 왔다."

"어. 일찍 왔어."

"고생 많으셨습니다. 식사를 준비해 드릴까요?"

"부탁할게."

집 뒤편에 있는 공용 우물에서 대충 몸을 씻으니 라파가 스프와 빵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콜린은?"

"잠깐 외출 했어요. 심부름 시킨 게 있어서."

"⋯⋯."

요즘 라파를 보면 얼굴이 빨개지더니 아예 노예를 자처하는 콜린이다.

맨날 야설만 보더니 임자를 제대로 만난 모양이다.

"오라버니가 다치셨네요. 미노타우로스를 사냥했을 때도 부상이 없었는데."

"어떻게 된 거냐면⋯."

나는 라파에게 미궁 9층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곧 각종 야채들을 사온 콜린까지 합류한 토론의 결과는 이러했다.

"먼저, 이동 경로가 좋지 않았어요."

투석 공격의 위험을 전혀 알지 못한 우리는 함정이었던 계곡의 편한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덕분에 그대로 된통 당하고 말았고.

"결국 고블린 한 놈이 살아남아서 호각을 불었다고 했지? 인원 부족이 원인이야."

콜린의 말도 옳다.

호각을 불려던 고블린을 모두 말끔히 죽였다면, 애초에 함정에 걸려들 일도 없었다.

인원이 많았다면 기습을 통해 호각을 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좋아. 결론이 났어."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벌써 곯아떨어진 라분은 빼고.

학즉사법 2성의 달성으로 미궁 9층을 공략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실패는 빠르게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전투 능력이 있는 동료 한 명을 구한다. 그전까지 미궁 9층 탐험은 중지야."

새로운 동료를 맞이할 시간이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56

탐험가 아카데미.

미궁 사무소에서 설립하고, 미궁도시 칼리움이 직접적으로 지원하는 탐험가 전문 육성 아카데미다.

매년 졸업생을 배출하며, 아카데미의 이름에 걸맞게 졸업생들은 대부분 탐험가가 된다.

이미 교육을 통해 탐험가의 자질을 입증받은 사람들이다.

하수구에서부터 시작하는 우리 같은 놈들보다야 훨씬 좋은 스타트라인을 가진다.

라파에게서 들은 정보를 종합한 나의 감상은 단 한 마디로 요약되었다.

"샌님들이겠네."

"미궁 실습도 겸한다고는 들었습니다만."

"그래봤자 겉핥기겠지. 영입한다고 해도 실전에 쓰려면 다듬어야 할 가능성이 커."

보통 졸업생들은 대부분 길드로 진로를 잡는다고 한다.

칼리움에는 수많은 길드들이 있었기에, 졸업자들의 취업률은 거의 100%에 달한다.

"한 명 데려오기도 힘들겠어. 유명 길드들도 다 달라붙을 거 아냐."

"보통 스카우터들이 활동한다고 합니다."

"스카우터? 그건 또 뭐야?"

라파에게서 스카우터에 대한 설명을 들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길드에서 자체 파견한, 인재를 알아보는 사람들이라.

일반 파티보다야 고도의 전문성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좋아. 참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네. 일단 신청은 마쳐놨습니다."

"엥? 벌써? 내 허락도 없이?"

"미궁 8층 탐험을 떠나시기전 며칠 동안 자리를 비우셨을때가 마감일이어서요. 어쩔 수 없이 사후 승인을 받는 형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때라면, 흑야혈투회였나.

보안이 중요하다는 에릭의 말에 며칠 동안 자리를 비우기는 했었다.

"이후에라도 말해줬어야지."

"바로 탐험을 계획하시고, 나가시는 바람에 미처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라파를 보았다.

미노타우로스의 계책을 알려줄 때도 그렇고, 지금 이 상황도 그렇고.

당연히 악의가 있는 건 아니지만 본인의 판단을 믿고 단독으로 앞서나가는 면이 있었다.

그런데 결과가 좋다는 점이 문제다.

정말 결과로는.

나를 4번 죽게 하는 무모한 계책이었지만 미노타우로스의 레이드를 성공했고, 지금 탐험가 아카데미의 건도 내게 말도 안 하고 신청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잘한 선택이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나가면 안 된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다.

"라파. 네가 나를 위해 애써주고 있는 건 알아. 하지만 이 파티 내부에서 내가 모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돼."

"⋯죄송합니다."

"내 승인을 받기 전에 일을 진행했으면 바로 보고하고, 더해서 어떻게 진행할건지 미리 설명해줘. 알겠어?"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개를 한참이나 숙이는 라파.

갑자기 변한 분위기에 전전긍긍하던 콜린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언제 아카데미로 가야 하지?"

"내일입니다."

"음 그렇군. 내일⋯ 내일?"

내 눈치를 보던 라파가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답했다.

"정말 만약을 대비해 신청만 한 것이기에⋯ 참석하지 않아도 별도의 불이익은 없다고 합니다."

"준비하자!"

그 뒤 나는 라파의 손길에 몸을 맡겨 머리를 다듬고, 삐죽 자란 수염을 깔끔하게 정돈했다.

"탐험가 아카데미는 그 규모만큼이나 참여하는 길드도 많습니다. 일반적인 길드의 스카우터 구성은 사무원 1명, 호위 1명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최대 두 명 밖에 참가하지 못하는 거야?"

"맞습니다."

그러면 가야할 사람은 정해져 있다.

호위 겸 스카우터인 나와, 나를 보조해줄 똑똑한 라파다.

"라분은 몸조리 잘하고, 콜린은 할 거 없으면 공사판이라도 가."

"알겠다."

"알아서 잘 할 테니 걱정 마슈."

다음 날, 우리는 칼리움 외곽에 있는 탐험가 아카데미에 도착했다.

아직 정문은 닫혀있어서 그 앞에 사람들이 몰려있다.

"⋯이게 아카데미야. 시장통이야."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면서도 내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움직여 한곳을 찾았다.

내 감지 능력이 가까운 곳에 있는 익숙한 마나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내가 찾아온 마나의 주인은 내 모습을 보고 반색했다.

"켈른 형님!"

"오. 루카스! 오랜만이다."

붉은 송곳니 길드의 길드원. 3위계의 실력자 켈른이었다.

함께 구트란 토벌전에 참가하였으며, 지워진 과거에서 4위계 클라이머 게랄프의 심상 구현에 피떡이 되기도 했었다.

"여기서 다 보네."

"쓸만한 인력 좀 건지러 왔죠."

"우리도야. 아. 인사해. 길드의 스카우터인 헨리."

"안녕하십니까. 헨리입니다."

"안녕하세요. 개인으로 활동하는 루카스입니다. 이쪽은 라파. 라분 동생이기도 하죠."

"호오. 라분의 동생이라고?"

라파가 두 손을 모아 공손히 고개를 숙이자 남자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확실히 라파가 예쁘기는 하다.

이국적인 외모에 얼굴에 난 얕은 흉터는 라파의 매력을 깎아먹기는커녕 오히려 그녀에게 미지의 매력을 선사하기까지 한다.

이것도 다 본판이 좋아야 가능한 일.

"라분 그 놈이 상당한 동생을 숨기고 있었군."

"호호. 감사드려요."

라파는 꼬리치는 것도 제법이다.

"그나저나. 뭐 이렇게 사람들이 많아요?"

"탐험가 아카데미니까. 이 시즌에는 항상 만원이야."

이런 쪽으로는 신경 쓸 생각을 한 적이 없다 보니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일단 호기롭게 오기는 했는데 어떻게 할지 몰라 막막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딱 아는 사람, 그것도 같이 목숨을 맡기고 싸웠던 전우를 만나니 안심이 된다.

"루카스. 지금 미궁 몇 층이야?"

"미궁 9층에 발만 담근 정도예요."

"엥? 9층?"

"넵."

"너. 마지막으로 만날 때까지만 해도 4층 아니었어?"

"맞습니다. 어쩌다보니 최근 8층 진척도를 다 채웠네요."

"⋯⋯."

붉은 송곳니의 스카우터 헨리가 내 말을 듣고 뭐가 생각난 듯 말했다.

"인적사항이 일치해서 여쭤보는 겁니다만. 혹시 단 두 명이서 미궁 8층의 미노타우로스를 레이드한 파티가?"

"하하. 저희입니다."

"뭐어?"

켈른이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아니. 미궁 8층에서 찾고 있던 놈이 왜 여기서 나타나?"

"저를 찾았어요?"

"그래. 기회가 되면 영입해보려고 했는데. 어휴. 이런 우연이 다 있군."

"이거. 파견 나간 친구들 빨리 철수하라고 해야겠네요. 저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켈른이 쩝쩝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길드 들 생각은 없지?"

"하하. 있었으면 여기 오지도 않았죠."

"오케이. 알았다."

주변의 동료들에게 상황을 전달한 헨리가 자리로 돌아왔다.

아카데미의 정문이 열리며 확성 아티팩트를 들고 있는 교직원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자! 개방 5일차의 길드, 파티 분들은 오와 열을 맞춰서 들어오세요! 먼저 들어오든 늦게 들어오든 시간만 맞추시면 되니까 들어오기만 하세요!"

"5일차?"

"워낙 수요가 많다 보니 신청 단체를 다섯으로 나눠 실시합니다. 저희는 마지막 날짜로 신청했습니다."

"그렇군."

"원래라면 루카스 님이 탐험을 하고 계실 때라 참가하지 않을 예정이었는데, 이번에는 꽤 운이 좋았네요."

나는 라파의 머리를 톡톡 쓰다듬어주었다.

"잘했어."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이렇게만 해. 말만 미리미리 해주고."

커다란 강당에 들어선 스카우터들이 내는 소음이 소란스럽다.

여러 쓸데없는 행사가 지나가고, 이내 커다란 운동장으로 보이는 외부 시설의 가운데로 안내되었다.

"참가 단체들이 각각 자신을 소개할 기회가 있을 거예요."

"그 다음에는?"

"이후 졸업생이 먼저 마음에 드는 단체를 선택하고, 선택받지 못한 단체는 이번에는 학생들을 선택할 수 있어요."

그렇게 주고받기를 하며 기회를 준다고 하지만, 나중에는 이리 섞이고 저리 섞여 북새통이 된다고 한다.

"대략 10분 동안 이야기를 하게 되고, 이후에는 학생들이 돌아다니며 다른 길드에 대한 문의를 해요."

켈른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자세히 보니 천인데, 펼치니 붉은 송곳니가 그려져있다.

"형님. 그게 뭐예요?"

"뭐기는. 깃발이잖아."

"깃발?"

"참가하는 단체는 각자 자신을 상징하는 깃발을 가지고 오게 되어있어."

내가 슬쩍 라파를 돌아보니 라파도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고 있었다.

다 알아서 준비 하겠다더니 과연.

라파가 펼친 깃발은⋯

"응? 이 밤송이는 뭐야?"

"선인장입니다. 행운을 상징하는 설피 선인장으로 그려봤어요."

"아. 사막의 식물? 그 아래의 지렁이는?"

"루카스 님의 이름을 사막의 언어로 적었습니다. 밑에는 오라버니, 저, 콜린의 이름도 조그맣게 적혀 있습니다."

뭐, 급조한 것치고는 봐줄 만하다.

"내게 말했으면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깃발을 만들어줬을 텐데."

"⋯대충 어떤?"

"우선 블랙 드래곤이 날개를 펼치고 있고, 나와 라분이 창을 찌르는 자세로."

"저 깃발처럼요?"

라파가 손으로 가리킨 지점을 보니 레드 드래곤이 그려진 깃발이 대에 꽂혀 올려져 있다.

졸업생들이고 단체들이고 킥킥거리며 비웃기 바빴다.

깃발을 올린 여자 스카우터가 얼굴이 벌개져 남자를 퍽퍽 때리기 시작한다.

"⋯⋯."

"⋯⋯."

라파는 아무말없이 깃대에 깃발을 묶고, 미리 준비된 구멍에 쏙 집어넣었다.

라파의 개인 취향이 잔뜩 들어간 선인장이 그려진 깃발이 휘날렸다.

"자! 지금부터 약 1분 동안, 참가 단체 분들의 소개가 있겠습니다!"

원래 자신감 있는 순서대로 발표한다고 했다.

처음은 꽤 유명한 길드들이 발표했다.

"서리 길드입니다. 3위계 탱커 모집하겠습니다."

끝이었다.

"서리 길드라."

"미궁 20층 후반을 탐험하는 길드예요. 칼리움의 10대 탐험가 길드를 나열하면 무조건 언급되는 길드이기도 하고."

"그렇군."

"베른 길드입니다. 현재 1군 탐험 파티의 경우 24층 탐험 중입니다. 언젠가 1군에 합류할 수 있는 인재들을 모집하려고 합니다."

저런 대형 길드는 간단하게 소개를 마친다.

중대형 길드에 속하는 붉은 송곳니의 경우 말이 조금 더 길었다.

스카우터 헨리가 빠르게 준비된 말을 읊었다.

"붉은 송곳니 길드입니다. 미궁 19층에서 전력을 모아 20층에 도전하고자 합니다. 모집 인원은 따로 없습니다. 같이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동료들을 모집하는 것이 이번 목표입니다."

조그마한 박수소리에 답한 헨리가 말을 이었다.

"오늘은 저녁 늦게까지 자리할 예정이니, 언제라도 궁금한 점이 있다면 찾아와주세요. 감사합니다."

나는 켈른에게 조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몇 명 모집하시려고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전력이 안 되면 4~6층에서 생계형으로 돌려도 좋고. 만약 다이아 원석이면 정말로 1군 파티에 들어갈 수도 있으니까."

"아하."

중대형 길드 다음은 중소형 길드, 마지막으로 개인 파티 차례였다.

순서는 원하는 단체가 아티팩트를 건네받으면 됐지만, 모두가 암묵적으로 룰을 따르고 있었다.

마침내 개인 파티 차례가 왔다.

"어?"

꽤나 익숙한 사람이 처음으로 확성 아티팩트를 잡았다.

미궁 8층에서 내게 영입 제안을 해 온 여성 탐험가. 소피아였다.

"미궁 8층에서 탐험하고 있는 소피아라고 합니다⋯⋯! 총 인원은 8명이고, 같이 안정적으로 8층을 공략할 수 있는 인재를 모집하고 있어요! 물론 미궁 4층부터 천천히 저희 파티원들이 번갈아서 케어해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누구라도 좋으니 말씀 부탁드릴게요!"

하이톤의 목소리가 빽빽 울렸다.

보통 탐험가 아카데미 졸업생들은 정식으로 미궁에 들어가보지도 못한 상황이다.

단계적으로, 천천히 미궁의 층을 밟고 올라와야 한다.

아니라면 일전에 라분이 그랬던 것처럼 미궁의 제재를 받기 때문이다.

라분은 미궁 4층부터 시작했기에 진척도 제재를 받았었다.

[자격 부여 조건. 진척도 20% 달성.]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다.

허둥지둥하며 내게 확성 아티팩트를 넘겨주는 소피아.

내 얼굴을 확인한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는 소피아에게 눈인사를 하며 자리로 돌아왔다.

"탐험 파티입니다. 총 인원은 두 명입니다."

고작 두 명이라는 말에 졸업생들의 마나가 흔들렸다.

약간의 웃음기까지.

초짜 파티가 미궁 저층부터 함께할 사람을 구한다고 생각했겠지.

졸업 성적이 낮은 졸업생들에게는 나쁜 선택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이들이 생각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제 동료와는 미궁 3층부터 함께했고, 현재 미궁 9층 탐험 중입니다. 그때까지의 소요시간은 대략 반년이군요."

"⋯⋯."

"몇년 간의 적응, 그런 지루한 과정은 없습니다. 제 마음에 드는 실력 있는 한 명만 모집하고, 합만 맞춘 뒤 바로 미궁 9층에 도전합니다. 페널티는 걱정하지 마세요. 페널티를 극복하기 전까지 복귀하지 않을 겁니다."

"⋯⋯."

"이거 하나는 확답 드릴 수 있습니다. 제 파티에 들어오면 저와 운명을 함께하시는 겁니다. 탐험은 도전입니다. 저와 같이 인생을 걸고, 도전을 주저하시지 않을 분들만 지원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나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정적에 휩싸였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57

"인생을 걸고, 도전을 주저하시지 않을 분들만 지원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탐험가 아카데미에서 졸업생들에게 처음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시간.

각 단체마다 자기소개가 끝나면 짧은 질문 시간이 있다.

이름이 많이 알려진 대형, 중대형 길드들은 미리 질문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고, 그 외 소형 길드나 파티의 경우는 적극적으로 질문을 받는 편이다.

내 파티는 딱히 질문을 받지 않는다는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질문이 들어오지 않았다.

임팩트 있는 발언의 실패라고 볼 수도 있다.

주변 파티들의 인식도 그러했고.

하지만 나는 분명 몇몇 학생들의 마나가 요동치는 것을 감지했다.

'나쁘지 않아.'

확성 아티팩트를 다음 파티에게 건네니 켈른이 다가왔다.

"화끈한데? 정말 신입 데리고 바로 미궁 9층으로 가려고?"

"네. 기본적으로 8층에서 손발은 맞춰봐야겠지만요."

길드에서 아카데미의 햇병아리를 교육하는 기간은 연단위로 잡는다고 한다.

나는 그 시간을 기다려줄 생각이 단 1도 없다.

차라리 있는 돈 없는 돈 모아 검 쓰는 노예를 사는 게 낫지.

"너와 라분이면 안심이지만, 과연 그렇게까지 할 졸업생들이 있을까?"

"없으면 어쩔 수 없죠. 미련 없이 돌아갈 겁니다."

"역시. 보법이 달라. 물론 나는 절대 네 파티 안 들어간다."

내가 피식 웃자 켈른이 내 옆구리를 툭 치고 돌아갔다.

뭔가를 열심히 적던 라파가 내게 다가왔다.

"주인님. 저희를 주목하는 눈길이 늘었어요."

"결과를 봐야지."

미노타우로스 잡은 것도 말할 걸 그랬나 싶기도 하지만, 이 이상 관심을 끌 필요는 없어 보였다.

곧 모든 단체의 발표가 끝나고, 10분의 쉬는 시간이 지났다.

"자. 졸업 예정자들은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은 분들께 이동하세요. 5분 드립니다. 5분 뒤에 단 한 명이라도 학생이 있는 단체는 학생과 함께 밖으로 이동해 주시면 됩니다. 최대 3명까지만 학생들을 받아주세요! 3명이 꽉 안 채워졌을 경우 한 분은 남으셔도 됩니다!"

5일 동안 똑같은 일을 했으니 학생들의 움직임도 일사불란했다.

우선 대형 길드 위주로 학생들이 몰리고, 중소형 길드에도 학생들이 드물지 않게 모여들었다.

붉은 송곳니 길드에도 금방 3명이 자리 잡았다.

"자자! 학생들 더 편한 곳에서 이야기하자고."

켈른이 깃발을 뽑아올리며 내게 윙크했다.

나는 살짝 손을 들어 올려 화답한 뒤 내 앞에 있는 두 학생을 바라보았다.

어떤 생각인지는 모른다. 어차피 잠깐의 대화를 나누는 것뿐이니까.

정말 관심이 있다면 성공이고, 그저 간만 보러 왔다면 실패다.

남녀 각 한 명이다.

"안녕?"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남학생은 다소 소심하고, 여학생은 활기차다.

"그러면 우리도 적당한 장소로 이동할까."

"네!"

라파가 내게 말했다.

"주인님. 3명이 차지 않았으니까 저는 여기 남아 마음에 드는 학생을 지목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해."

햇병아리들이라고 해봤자 사실 나와 그렇게 나이 차이도 안 난다.

아니, 실력에 따라 졸업 시점이 정해진다는 아카데미의 특성을 감안하면 오히려 나보다 나이가 많을 수도 있다.

"⋯⋯."

나이 이야기는 하지 말자. 영원히.

"내 이름은 루카스야."

"저, 저는 빌리입니다. 포지션은 탱커입니다."

"레이나라고 해요. 포지션은 딜러."

악수를 하며 각자의 마나와 경지를 확인했다.

빌리는 2위계. 레이나는 3위계다.

'미쳤군.'

빌리가 2위계라고 해도 수준이 낮은 것이 아니다.

절도 있는 마나의 배열을 보아하니 꽤 수준 높은 검술을 배운 듯했다.

더군다나 레이나. 3위계에, 마나의 흐름도 정순하다.

주변 스카우터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는 이유가 있었다.

레이나는 스카우터들이 주목하던 대형 졸업생이 분명했다.

어떻게든 잡고 싶지만, 쉽지는 않아 보인다.

흥미를 끈 것만 해도 일단 목표 달성이다.

"자. 먼저 우리 파티에 대해 설명해 줄게. 미궁 9층을 이제 막 탐험하고 있고, 미궁 4층부터 8층까지의 진척도는 100%야."

"저, 정말 두 분이서 이뤄내신 건가요?"

"당연하지."

물론 5~7층까지는 비밀 통로를 이용한 공략이었지만 진척도 100%를 달성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레이나가 손을 들어 질문했다.

"정말로 루카스 님의 파티에 가입하면, 미궁 9층에 바로 도전할 수 있는 건가요?"

"9층을 같이 탐험할 동료를 구하고 있으니까. 실력만 검증된다면 못할 것도 없지."

"평균적으로 미궁 9층을 탐험하는 파티는 8명 이상으로 구성된다고 했는데."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내 파티는 단 두 명이서 미궁 8층의 미노타우로스를 사냥했어."

"!"

"!"

"불가능은 없어. 서로 믿고 목숨을 맡길 수 있는 사람들을 모집하고, 미궁 9층도 반드시 공략해낼 거야."

"혹시 경지가 4위계⋯ 이신가요?"

"아니. 3위계. 다른 한 명은 2위계."

두 사람이 약간은 김빠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요."

"상당히 위험한 도전이라는 자각은 있지. 하지만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실패한 적 없고, 실패할 일도 없게 만들 거다. 우리는 다른 파티처럼 한 층에 1년씩 시간을 투자하며 내려갈 생각은 없어."

"⋯⋯."

"자, 이제 할 말은 대충 끝났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겠지?"

"네."

빌리와 레이나를 보내고, 라파가 또 한 명을 데려왔다.

다른 파티와 대화한 뒤 내게 관심을 보이는 학생들도 있었고.

그렇게 학생들이 점차 늘어나더니 어느새 운동장은 단체와 학생들 사이로 북새통이 되어있었다.

나는 했던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고, 입이 지칠 때에는 라파가 대신 말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훌쩍 지났다.

"자! 식사 시간입니다!"

학생들이 삼삼오오 떠나고, 우리에게는 외부에서 전달된 간단한 빵과 우유가 제공되었다.

"형님. 잘 되셨어요?"

"길드에 들어오겠다는 친구들이야 널렸지. 여기서부터 헨리 자네의 실력이 드러나겠지만."

"옥석을 잘 가려보도록 하겠습니다."

"딱딱하게 굴기는."

켈른이 헨리의 등을 팡팡 때렸지만 헨리는 여전히 켈른을 어색해했다.

그러던 도중, 나는 내 뒤로 접근하는 기척을 감지했다.

아는 마나였기에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저기, 합석해도 될까요?"

뒤를 돌아보니 밝은 웃음을 짓고 있는 소피아가 보였다.

"저는 문제없습니다만."

켈른이 어깨를 으쓱하는 것을 확인하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소피아와 갈색 머리의 남성이 조심스럽게 앉았다.

남성의 이름은 조셉이라고 했다.

"깜짝 놀랐어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보게 될 줄은."

"세상에 인연이란 게 있나 보죠. 소피아 씨도 신청을 했었나 봐요?"

"네. 인원 충원이 필요한 시점이기는 한데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요. 조금 길게 보려고요."

소피아는 특유의 붙임성으로 자연스럽게 대화에 녹아들었다.

옆에 있는 무뚝뚝한 인상의 조셉은 아니었지만.

켈른이 갑자기 생각난 듯 나를 바라보았다.

"아, 루카스. 그거 알고 있어?"

"? 형님. 그렇게 말하면 당연히 모르죠."

"구트란 토벌전, 제대로 시작되었어. 이른바 2차 토벌전."

"오. 그러면 우리가 참가한 토벌전은 1차 토벌전이겠네요?"

"그런 셈이지."

미궁 4층부터 6층까지 고루 활동하는 클라이머 마법사 구트란.

일전에 토벌을 실패하고 다시 손을 본다고 하더니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한 모양이다.

소피아는 처음 듣는 소식에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을 뿐이다.

나는 소피아의 눈치를 보았다.

"그래도 나름 기밀 사항인데 이렇게 대놓고 말씀하셔도 돼요? 외부인도 있는데."

"상관없어. 이미 시작한 지 5일이나 지났거든."

"아하."

"카리나 님은 빠졌지만 니콜라스 님이 참가했고, 다른 여러 길드의 실력자들도 힘을 보탰어. 실패할 수가 없는 토벌이야."

"과연."

아무리 미궁을 제 집으로 삼는 마법사라고 하더라도 날을 잡고 압박해오는 토벌대를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조만간 미궁 5층에 목이 걸리겠네요. 소식 들으면 말씀 남겨주세요."

"그래. 너도 외부인은 아니니까."

얼마전, 라파와 콜린을 대리인으로 보낸 1차 토벌전의 논공 행사에서 5골드의 포상금을 받았었다.

아마 그 뒤 바로 토벌을 실시한 모양이다.

"니콜라스가 무사하셔야 할 텐데."

"야. 4위계 걱정을 하냐. 더군다나 로그. 위기 대처능력은 우리보다 훨씬 뛰어나니까 걱정하지 마."

"⋯그렇겠죠."

구트란의 함정에 보기 좋게 걸려 죽어버린 니콜라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설마 이번에도 죽겠냐마는.

점심시간이 끝나고, 이번에는 학생들이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저는 3위계⋯⋯."

"저는 2위계지만 호흡법의 강점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라파가 열심히 학생들의 인적 사항을 받아 적었다.

"3위계가 꽤 있네요."

"괜히 탐험가 아카데미가 아니지. 무조건 실력 위주에다가, 자격이 안되면 졸업도 안 시켜주니까."

총 졸업생의 10% 정도가 3위계다.

비공식적이지만 4층 이상의 탐험가들 중 3위계의 비율이 5% 미만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확연하게 높은 수치다.

"역시 오기를 잘했어."

이번에는 단체가 원하는 학생들을 골라 이야기하는 시간.

단체의 내부 등급에 따라 지목 순서가 정해져있었다.

당연하게도 우리에게는 거의 마지막 순서가 배정되었다.

또다시 시작되는 지옥의 홍보.

오후 시간을 다 날리고서야 끝났다.

학생도 스카우터도 잔뜩 지쳐있다.

학생들은 이 지랄을 5일 동안 해왔을 터이니 이미 후반에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졸업생들에게도 이는 중요한 일이다.

지금의 이 선택에 자신의 미래가 걸려있기도 했으니까.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남아서 학생들과 개인적으로 상담을 하고 싶으신 분들은 남아도 좋습니다. 3일 후 아카데미 정문의 공고를 보고, 미궁 실습을 진행해 주시면 됩니다."

미궁 실습. 학생들이 마음에 드는 길드나 파티에 실습을 신청하면 해당 길드, 파티는 인원을 선별해 길게는 일주일 동안 미궁 3층을 같이 탐험해야 한다.

"으! 지친다."

"루카스. 먼저 가려고?"

붉은 송곳니는 아예 자리를 만들어놓고 있다.

헨리는 가져온 종이에 바쁘게 무언가를 적으며 정리하고 있었고.

라파도 꽤 관심이 있어 보였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목맬 필요도 없다.

실습에서 누구든 단 한 명만 건져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니까.

아예 없을 수도 있고.

"돌아가고. 나중에 다시 오자."

아직도 학생들과 교수들, 스카우터들로 북새통인 아카데미를 얼른 빠져나왔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래. 맛있는 거 사가자."

그 후, 남아있는 2일 중 하루에 노예 경매가 열린다고 해서 콜린과 노예시장으로 향했다.

"싸다 싸!"

나는 학즉사법의 마나를 최대한으로 운용해가며 노예들을 하나하나 관찰했다.

결과는 꽝.

"통 마음에 드는 노예가 없어."

"왜. 다 고만고만한데."

"형은 네가 볼 수 없는 3의 눈이 있다고. 그 눈에 안 차."

"지랄은. 아예 오른팔에 드래곤이라도 있다고 하지 그래?"

"닥쳐."

전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어봤자 결국에는 최대 2위계.

탐험가 아카데미의 질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

이미 눈이 조금 높아져 버리고 말았다.

"아카데미 쪽 진행 상황을 보고 다시 결정하자."

"쳇. 하루 날렸잖아. 야. 시장 들르자. 야채 사 가야 해."

"⋯혼자 다녀와. 귀찮게."

아주 라파에게 붙잡혀 사는 일이 일상이 된 콜린이다.

뭐, 콜린이 라파를 잡는 것보다야 훨씬 바람직한 일이겠다만.

그렇게 휴식을 취한 뒤 맞이한 탐험가 아카데미의 미궁 실습 공고일.

나는 커다란 종이 속에서 내 파티의 이름을 찾았다.

"루카스 파티, 루카스 파티. 여기 있다."

옆에 학생의 이름이 적혀있다!

"레이나!"

처음에 내게 관심을 보였던 3위계의 딜러!

나는 얼른 아카데미 안으로 들어가 레이나를 찾았다.

이미 준비는 만전이다.

내가 얼른 레이나를 데려가려고 했지만 교수가 막아섰다.

"먼저 서류를⋯⋯."

"라파. 모든 권한을 위임할게. 나중에 설명해 줘."

"알겠습니다."

머리는 라파가 쓰라고 하고, 나는 얼른 레이나에게 다가갔다.

레이나는 약간 긴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실습 지원한 거 맞지?"

"네.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조건?"

"네. 들어주시지 않으신다면 죄송하지만 이번 건은 없는 이야기로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

흥이 팍 식었다. 괜히 쓸데없는 조건을 덕지덕지 붙여 내 행동을 제한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차라리 라분과 둘이서만 9층 공략을 나서는 게 더 나을 정도.

하지만 조건은 들어보기로 하자.

"말해봐."

레이나가 조심스레 말했다.

"실습 장소를 미궁 3층이 아닌 8층으로 하면 안 될까요?"

"⋯⋯."

뭐지?

"이게 제 조건입니다."

"진심이야?"

"진심입니다."

나는 크게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제대로 미친놈, 아니. 미친년이 걸려들었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58

미궁 8층으로 가는 일이라면 나도 환영이다.

마침 들러야 할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손에 끼고 있는 라비팩트, 반지가 곧 활성화된다.

이전에는 호수에 사는 프라냐를 먹여 인과를 채웠고, 라분의 방패를 얻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어차피 미궁 8층의 마지막 방문이 될 터였다.

프라냐를 잡을 수 있는 만큼 잡아 인과를 꽉꽉 채울 생각이다.

그렇게 방침을 정하면서 나는 레이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상적인 생각으로 미궁 8층에 도전하려 할 리가 없었다.

필시 무슨 사정이 있을 텐데, 천천히 물어보기로 할까.

"그래. 미궁 8층. 가보자."

"감사합니다!"

"단."

"⋯⋯?"

"위험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 거야. 미궁에서는 무조건 내 명령에 복종해."

"알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라파가 빠르게 서류들에 서명했다.

서류를 확인한 아카데미의 여교수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이거 참. 레이나를 잘 부탁드립니다."

"네. 감사합니다."

악수를 나눠보니, 이 여자. 4위계다.

하기야, 그러니 아카데미에서 교수 노릇을 하는 거겠지.

'세상은 넓군.'

우리는 우선 집으로 향했다.

"여기야. 누추하지만 들어와."

"네."

콜린과 라분은 카드게임 중에 벌써 돌아온 나를 보고 놀랐다.

"빠르게 돌아왔네? 그쪽은?"

"소개할게. 아카데미에서 미궁 실습을 신청한 레이나."

"안녕하세요. 딜러 포지션을 맡고 있는 레이나입니다."

"무려 3위계."

"오오."

모두가 경탄했다.

각자 자기소개를 마치자 문 옆에 놓인 내 배낭을 집어 들었다.

"라분. 준비는 다 됐겠지?"

"물론이다."

라분이 방패와 검, 배낭을 들고 일어섰다.

"그럼 바로 다녀올게."

"주인님.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래. 집은 부탁한다."

우리는 바로 미궁으로 향하지는 않았다.

먼저 레이나의 실력을 정확히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3위계의 강자라고는 해도 파티의 리더인 내가 레이나를 적재적소에 활용하려면 실력 파악이 필수다.

이 목적에 가장 적합한 장소는 바로 켄드릭의 집이었다.

"켄드릭.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아. 루카스 님. 아닙니다. 어서 들어오시죠."

"오래 있지는 않을 거고, 잠시 뒤뜰 좀 사용할게요. 잠깐 체크가 필요한 인력이 있어서."

"물론입니다."

내 의도를 깨달은 레이나와 라분의 마나가 요동쳤다.

켄드릭이 뒤뜰을 정리하는 동안 나는 검을 뽑아 정성스레 손질했다.

"레이나."

"네."

"먼저 나와 대련해 보자. 다음에는 라분과 대련하고."

"네. 해볼게요."

이는 라분에 대한 배려이기도 했다.

레이나는 3위계. 명백한 실력자다.

아무리 여자라고 해도 성별에 따른 힘의 차이는 2위계에서만 통용되는 말이다.

3위계부터는 남녀의 힘 차이는 없다고 봐도 된다.

다만 스타일의 차이가 비교적 극명할 뿐.

위계의 차이에 따른 라분의 고전이 예상되는 상황.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게 할 수는 없지.'

하지만 모든 것이 실력 위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탐험가의 세계다.

라분이 명함이라도 내밀려면 자신의 힘을 증명해야 한다.

이 부분은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믿을 건 라분의 실력과 실전 경험뿐이다.

"루카스 님. 준비됐습니다."

"고마워요."

나는 켄드릭에게 은화 하나를 건네주었다.

레이나가 내 맞은편에 섰다.

"목검으로, 검염은 쓰지 말 것."

"네."

목검을 들고 기수식을 잡는다. 역시나 제대로 된 자세가 나온다.

아무래도 스승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

"선수는 양보하지."

"그러면 사양 않고!"

레이나가 빠르게 거리를 좁혀오며 검을 휘둘렀다.

나는 부드럽게 레이나의 검을 받아넘겼다.

'마나의 활용도는 3위계 중반.'

흑야혈투회의 셀레나에 비하면 조금 모자란 솜씨다.

그래도 이 정도면 더할 나위 없는 실력자다.

조금만 가다듬고 성장하면 켈른 정도는 찜쪄먹을 수 있겠다.

"흡!"

나는 레이나의 모든 공격을 반박자 빠르게 막아섰다.

당황한 레이나가 허초를 실어 변칙적인 공격을 시도했지만 이 정도 공격에 걸려들 내가 아니다.

'실전 경험은 부족하군.'

반박자의 거리를 한 박자로 늘려 거세게 레이나를 압박했다.

점점 손발이 꼬이기 시작한다.

마무리를 하기 전, 검을 거두었다.

곧 미궁으로 가야 하는데, 혹시라도 부상을 입는 건 자제해야 한다.

"후. 제법인데?"

"루카스 님이 훨씬 더 대단해요. 저랑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는 것 같은데."

나는 뜨끔하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

라파가 살짝 귀띔해 줬었는데, 레이나. 나랑 동갑이다.

"루카스 님이라 하지 말고, 지금부터 리더라 불러."

"네. 리더."

"다음은 라분과 대련할 거야. 잠깐 숨 좀 돌리고, 준비되면 말해."

"휴식은 필요 없어요. 준비됐습니다."

"좋아. 라분!"

라분이 목검과 나무 방패를 들고 척척 나왔다.

역시 듬직한 모습이다.

"2위계라고 방심하지마. 라분은 오크 챔피언 정도는 가볍게 잡을 수 있는 실력자니까."

"⋯⋯!"

"괜히 둘이서 미궁 8층을 돌파한게 아니라고."

라분이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레이나의 앞에 섰다.

레이나도 침을 꼴깍 삼키며 라분을 바라보았다.

"시작!"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들어 병장기를 부딪힌다.

나는 켄드릭의 옆에 섰다.

"루카스 님. 역시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그 나이에 이 정도의 경지를 이뤄내셨는지."

"딱히 의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동년배에서는 적수가 없습니다. 명문 귀족가의 자제도 포함해서요."

"라분도 훌륭하지 않습니까? 어때요?"

"확실히 라분도 괜찮은 재능을 가지고 있지요."

라분은 레이나의 연속 공격을 방패와 검을 사용해 유연하게 막아내고 있었다.

특유의 센스 없이는 발휘하기 힘든 기교다.

"하지만 루카스 님에 비하면 부족한 편입니다."

아닌데요?

라분은 2위계의 실력으로 오크 챔피언을 잡아버리는 괴물인데요?

저는 못했는데요.

물론 전투 쪽으로 특화된 학즉사법 1성의 보정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성공했다는 것 자체로도 엄청난 실력임은 분명했다.

레이나는 라분이 틈을 내주지 않자 잠시 공격을 멈추고 물러났다.

아니, 물러나려 했다.

"우어어어!"

틈을 본 라분이 득달같이 달려들기 전까지는.

"읏!"

순식간에 방어에서 공격으로 전환하는 라분.

방패를 앞세운 돌격을 정면으로 받을 수 없었던 레이나가 몸을 급하게 틀었다.

라분이 검을 연신 휘두르며 레이나의 호흡을 뺏었다.

마침내 레이나가 눈을 빛내고, 라분의 공격이 레이나의 허점을 찌르기 위해 움직일 때.

"그만!"

내 고함소리와 함께 대련이 뚝 멈췄다.

"헉! 헉!"

"후우."

각자의 검이 서로의 급소를 노리는 자세로 멈춰있었다.

두 호흡만 늦게 중지시켰어도 오늘 탐험을 가지 못할 뻔했다.

"라분 씨. 대단하시네요."

"그쪽도. 날카로웠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훈훈한 결말이었다.

잠깐 땀을 식힌 후, 둘을 불러 모았다.

"레이나. 왼손잡이네?"

"네. 좌수검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좌수검?

뭐, 왼손잡이란 뜻이겠지.

나는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공격적인 스타일은 아닌 것 같고, 방어에 조금 치우쳐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

"네."

"감안해서 포지션을 잡자."

내가 지금까지 겪었던 전투에 레이나를 대입해 가상의 위치를 잡았다.

여기서 나는 내 감지 능력의 일부를 공개했다.

"5분 거리의 적을 미리 탐지할 수 있다는 말씀이세요?"

"어. 그렇지 않으면 단 두 명이서 미궁 8층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지."

"확실히⋯⋯."

"우리 탐험은 모든 감지를 내가 한다는 전제하에 움직이는 거야. 비전투 시에는 로그 역할이라고 봐도 좋아."

레이나가 감탄했다.

"둘이서 탐험을 하셨다길래 안전한 루트로만 탐험을 진행하시는 줄 알았어요."

"안전을 챙겼다면 이렇게 빠르게 진척도를 쌓지 못했을 거야."

나는 미궁 8층의 지도를 꺼내들고 탐험 루트를 설계했다.

"홉고블린의 지역으로 가고, 호수로 가서 하루 머물고, 다시 돌아오면 얼추 6일이야. 이 정도면 레이나 너의 진척도를 채울 수 있겠지."

"네."

"라분. 불만 없지?"

"없다. 빨리 가자."

우리는 바로 켄드릭의 집을 나와 미궁 사무소에 도착했다.

"아카데미 미궁 실습입니다. 3명 3층이요."

"접수 완료되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향하는 곳은 미궁 3층이 아니다.

이른바 허위신고. 걸리면 처벌을 받지만, 걸리지만 않으면 그만이다.

당연히 사고가 발생했을 때 미궁 사무소의 보호를 받을 수 없지만 내게는 크게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미궁 8층 이동."

[미궁 8층으로 진입합니다.]

[현재 진척도 0%.]

[주의! 파티에 미궁 8층의 입장 자격이 없는 파티원이 있습니다.]

[해당 파티원은 다른 층으로 이동할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자격 부여 조건 : 진척도 20% 달성.]

100%의 진척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레이나가 파티에 참가하니 순식간에 0%가 된다.

물론 나와 라분은 진척도가 100%에서 변하지는 않고, 정식으로 파티에 소속된 레이나의 진척도가 반영된 듯하다.

역시 레이나에게 부과된 페널티는 진척도 20%다.

"이제 탐험을 시작해 보자고."

우리는 더 볼 것도 없이 미궁의 안전지대를 빠져나왔다.

"레이나. 실전 미궁 경험은?"

"2층은 100%, 3층은 30%의 진척도를 달성했어요."

딱 트롤에 맞아죽을 때의 나 수준의 진척도다.

물론 실력은 천지차이이지만.

아직 레이나는 우리의 정식 파티원이 아니다.

미궁 실습에 참가한 아카데미 학생일 뿐이다.

그렇다고 끌려다닐 필요도 없다.

"오크는 잡아봤어?"

"네."

"리자드맨은?"

"아직이에요."

"그렇군. 우선 익숙한 오크부터 사냥해 보기로 하자."

나는 눈을 감고 책갈피 아티팩트의 도움을 받아 탐험 경로를 수립했다.

"가자."

우리는 미궁 속으로 몸을 던졌다.

30분 정도 나아갔을까? 내 뒤를 바짝 따라오던 레이나가 입을 열었다.

"저⋯ 리더. 잠시만요."

"응? 왜? 화장실?"

"아뇨. 그게 아니라. ⋯탐험 속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닌가요?"

"?"

"?"

나도 라분도 서로를 바라보며 의아해했다.

오히려 초행길인 레이나를 배려해서 속도를 조금 늦춘 건데?

라분이 내 생각을 대신 말해줬다.

"레이나. 반대가 아닌가?"

"네?"

"오히려. 조금 느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말의 호흡이 맞지 않았다.

"이 속도. 빠르지 않다."

"아뇨? 보통 탐험 속도의 거의 3배는 되는 것 같은데? 손금 보듯이 아는 길이라도 최대한 천천히 이동해야 한다고 배웠어요."

"아니야. 이게 정상이야."

"그런가?"

"그래. 이 속도에서 더 느리게 탐험해야 한다고? 속 답답해서 죽어."

"맞다."

아무래도 레이나가 잘못된 상식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의아해하는 레이나. 설득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나는 내 페이스대로 말을 이어갔다.

"3분 거리 전방에 고블린 7마리. 이건 사냥하고 가자. 제대로 길을 막고 있어서 안 되겠네."

"!"

"알았다."

"다가오고 있어. 매복."

그래도 즉각적으로 내 명령에 반응하는 자세는 칭찬해 줄 만하다.

우리는 미궁의 벽에 굴곡진 부분에 매복했다.

"정말 올까."

레이나가 중얼거리는 소리다.

어차피 직접 보여주면 되기 때문에 따로 토를 달지는 않았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내는 고블린 7마리.

"!"

나는 수신호를 통해 내 의사를 반대편의 라분에게 전달했다.

마침내 신호가 공격으로 바뀌었을 때.

"우어어어!"

라분의 방패 돌격이 시작되었다.

"가자!"

"네!"

레이나가 검을 치켜들고 라분의 왼쪽 뒤로, 내가 라분의 오른쪽 뒤로 붙었다.

대칭을 이룬 서로의 위치.

단번에 공방의 안정성이 끌어올려지는 느낌이다.

라분의 방패가 이제서야 반응하는 두 마리의 고블린을 날려버리고, 뒤이어 나와 레이나의 검이 고블린들을 도륙했다.

전투는 1분을 넘기지 않았다.

"후. 레이나. 마정석만 찾고 전부 공양해."

"네⋯⋯네!"

뒷처리는 막내에게. 모든 탐험가 파티의 도시적인 룰이다.

"라분. 처음이니까 너도 거들고."

"알겠다."

운이 없었는지 고블린에게서 나온 마정석은 없었다.

[시체를 공양합니다.]

[고블린 일곱 마리. 확인.]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진척도. 0.1%]

앞으로 6일 안에 진척도 20%.

우리 셋의 진척도가 아니라 레이나 한 명의 진척도만 채우면 된다.

"어느 정도 적응됐지? 조금 더 빠르게 가보자."

내가 레이나에게 맞출 생각은 없다. 레이나가 우리에게 맞춰야 한다.

적응하지 못하면 떨어져 나가는 것이고.

레이나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우리의 속도에 맞춰 이동했다.

"역시 빠른 것 같은데?"

남은 시간 동안 저 의심병을 나에 대한 믿음으로 바꾸는 것이 이번 탐험의 목표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59

고블린으로 레이나의 실력을 검증하는 것은 애초에 무리가 있었다.

그저 전투 감각을 일깨워 주는 역할이면 족하다.

우리는 빠르게 고블린의 영역을 벗어나 오크의 영역으로 진입했다.

내가 이 사실을 알리자 레이나의 긴장감이 부쩍이나 올라갔다.

뭐, 차차 익숙해져야 할 부분이겠지.

"몸이나 풀자. 전방에 오크 세 마리."

"!"

"레이나. 이번에는 견학해. 미궁 8층의 오크는 3층의 오크와는 수준이 다르니까. 견적을 보면 어떻게 상대할지 감이 올 거야."

"⋯알겠습니다!"

"라분. 검염 없이 간다."

"음!"

나와 라분은 T자 모양 갈림길의 양 끝에 매복해 올라오는 오크들을 기다렸다.

고개를 내밀 수 없기에 내 손가락에 온 정신을 집중하는 라분.

나는 가장 완벽한 타이밍을 잡았다.

"지금!"

"우어어어!"

라분의 돌진과 동시에 오크들의 신형이 갈림길에 나타났다.

그대로 두개골이 함몰되어 날아가는 오크.

우연히 조금 떨어져 지켜보던 레이나의 옆으로 날아갔고, 깜짝 놀란 레이나가 검으로 오크의 목을 그대로 베었다.

"⋯⋯."

보통 비명을 지르지 않나?

나와 라분이 한 마리씩 맡았다.

라분은 빠르게 마무리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나는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

레이나를 위해서다.

최대한 오크에게서 공격을 쥐어짜낸다.

평소에 몇 배나 되는 수고를 들였지만 레이나가 초롱초롱한 눈길로 바라보는 모습을 보니 공을 잘 들였다 싶다.

마침내 한계에 다다른 오크의 근육이 경련하기 시작했을 때, 그대로 목을 그어 마무리했다.

오크가 피를 뿜어내며 쓰러졌다.

라분과 레이나가 뒷정리를 했다.

"어때?"

"확실히 3층의 오크보다 더 강하고, 빨라요. 그래도 그 이상의 특이점은 없는 것 같네요."

"정확해."

레이나가 경험이 비교적 부족할 뿐이지 무려 3위계의 전사다.

방심만 하지 않는다면 미궁 8층의 오크 정도야 3마리를 동시에 상대해도 밀리지 않을 실력이다.

"계속 가자."

그렇게 5마리의 무리, 3마리 무리와의 연속 전투 등 내 감지 능력으로 설계한 점차적으로 난이도가 높아지는 전투가 이어졌다.

레이나는 처음에는 고전하는듯했지만 필요할 때는 검염을 뿜어내기도 하면서 체력 관리를 하는 모습이다.

괜히 아카데미 졸업생이 아니다 싶다.

"오늘의 마지막 전투야. 챔피언 한 마리, 일반 오크 네 마리."

"음!"

"바로 간다. 레이나. 챔피언을 맡아."

"!"

레이나가 퍼뜩 놀라 나를 바라봤다.

오크 챔피언. 무려 3위계의 전사와 같은 능력을 가진 몬스터다.

이제 막 실전 경험을 쌓는 레이나가 본인과 같은 경지를 가진 몬스터를 상대한다?

우물쭈물하는 레이나.

"내가 말했지? 인생을 걸고, 도전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고, 내 목숨을 걸고 뒤를 받쳐줄게. 제대로 싸워 봐."

"⋯네!"

"좋아. 전투 배치."

5마리의 오크. 그중 한 마리는 챔피언이다.

꽤나 면밀하게 준비를 해서 맞이해야 할 상대다.

나는 일부러 시간을 들여 싸움에 가장 유리한 전장을 잡았다.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오크들의 마나가 요동치는 순간.

"지금!"

라분이 달려가 검염을 일으키기 전의 오크 챔피언에게 돌격했다.

미리 이야기가 된 움직임.

양옆에는 검염을 피어올리기 시작한 나와 레이나가 있었다.

챔피언을 중앙으로 날개를 펼친 각 두 마리의 오크를 맡았다.

"하압!"

레이나의 내려베기가 오크 한 마리를 양단했다.

다른 오크가 예상보다 기민하게 움직여 레이나의 옆구리를 노렸다.

라분이 적절히 몸을 움직여 오크의 공격 경로를 막아선다.

챔피언을 포함한 오크 두 마리의 공격을 적절하게 방어하는 라분!

그야말로 대단한 숙련도가 아닐 수 없다.

나는 그동안 오크 두 마리를 전부 베어넘기고, 레이나의 옆으로 돌아 나머지 오크도 그대로 베어버렸다.

결국 남은 적은 오크 챔피언 한 마리.

몬스터 특유의 흉성은 여전해서, 혼자가 되었음에도 투지는 변함이 없다.

"레이나!"

"네."

라분이 타이밍 좋게 뒤로 빠지고, 레이나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챔피언이 눈을 굴려 유도된 판에 이끌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검염을 잔뜩 피워올린 레이나와 검을 나눌 수밖에.

"크르르!"

챔피언의 검이 투박하게 레이나의 몸을 베어갔다.

레이나는 유연하게 검을 받아치며, 챔피언보다 빠른 속도를 이용해 반격한다.

검염이 맞닿는 폭발 소리와 함께, 수십 합의 공방이 지나가는 동안 챔피언의 몸 곳곳에 상처가 늘어났다.

이윽고 챔피언이 큰 틈을 보이고, 레이나가 승기를 확신하고 몸을 들이밀었다.

"!"

하지만 챔피언의 틈은 기만이었다.

틈 자체는 거짓이 없었다. 레이나가 속아넘어갈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나는 챔피언의 의도를 깨닫고, 레이나의 허리를 향해 나아가던 챔피언의 종아리를 잘라냈다.

그와 동시에 레이나가 챔피언의 힘없는 검을 피하고 목에 칼을 쑤셔 넣었다.

"끄륵."

전투에 끼어든 내게 챔피언이 눈을 부릅떴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마치 비겁자를 저주하는 듯했던 눈길은 이제는 공허해져 허공만을 응시할 뿐이다.

레이나가 어리둥절해하며 검을 뽑았다.

"이건?"

"목을 내주고, 네 허리를 걷어차려고 했어.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거지."

"그런⋯⋯."

"걷어차봤자 부상 밖에 입히지 못했을 테지만 말이야."

의도와 다르게 오크 챔피언의 목숨을 버린 일격은 내 저지에 막혀 우스꽝스럽게 빗나간 발차기가 되었을 뿐이다.

"⋯⋯."

나는 챔피언의 잘라낸 발을 세로로 길게 잘라 마정석을 뽑아내었다.

"방심하지 마. 아차 하는 순간에 모든 걸 잃을 수도 있으니까."

"네."

'그리고 그걸 기회로 만들 수 있는 사람도 있지.'

나는 뒷말을 내 마음속으로 삼켰다.

레이나는 한참이나 공양되어 사라지는 챔피언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미궁 8층의 야영지는 어느 정도 꿰고 있다.

우리는 챔피언을 쓰러뜨린 전투를 마지막으로 가장 가까운 야영지로 돌아가 짐을 풀었다.

"어땠어?"

"하루 만에 진척도가 벌써 6%나 오르다니 굉장해요."

"세 명이서 나눠가졌으면 2%밖에 안 되는 야이야."

"⋯2%도 굉장한 수치 아닌가요?"

"아니지. 너무 적어."

"아니다."

"그런가!"

라분은 라분의 상식으로, 나는 나의 상식으로 밀어붙였기에 레이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른바 상식 주입 과정이다.

육포와 말린 과일로 저녁을 해결하고 불침번을 정했다.

"자. 레이나. 처음 1시간은 나랑 같이 서자. 기본적인 것들을 가르쳐 줄게. 알고는 있겠지만 복습 차원으로."

"네."

"1시간 뒤에 자고, 내가 3시간 더 선 뒤에 라분, 마지막이 레이나."

레이나를 배려한 불침번 순서다.

이렇게 하면 결과적으로 3시간의 불침번으로 6시간의 수면을 보장할 수 있다.

내가 동료를 더 모으려는 이유 중 가장 주요한 부분이다.

라분은 역시 라분답게 눕자마자 코를 골아대기 시작했다.

레이나와 나는 각자 미궁의 반대편을 바라보고 등을 돌려 앉았다.

"알려준 건 다 이해했지?"

"네. 리더."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내가 이 자리를 마련한 본론을 꺼냈다.

"미궁 8층. 생각보다 힘들지?"

"3층보다야 힘들죠."

"탐험가는 한 번에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하잖아."

"네. 들어봤어요."

"사실 나도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동의해. 안전하게, 천천히 성장하는 게 좋지."

"⋯⋯."

"그런데 어떻게 미궁 8층부터 탐험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야? 보통 탐험가들이 할 수 있는 결정은 아닌데."

너 혹시 미쳤니?의 부드러운 표현이다.

레이나가 고개를 숙이는 것이 느껴졌다.

한참을 말이 없다가 입을 연다.

"재미없잖아요."

"응?"

한숨을 푹 쉬더니 이내 벌러덩 누워버린다.

"아세요? 아카데미는 진짜 재미없는 곳이에요. 다들 들어온 처음에는 말하죠. 자기가 미궁을 정복할 거라고. 끝까지 내려갈 거라고. 하지만 딱 1년만 지나잖아요? 현실을 깨닫고 말죠."

"⋯⋯."

"지금 졸업반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 줄 아세요? 어느 길드가 복지가 좋더라. 5층만 돌아도 평생 먹고 살 돈은 문제가 없더라. 블라블라. 재미없는 말들. 쓸데없는 말들. 바로 저버릴 꿈이었으면 말을 하지 말던가."

레이나는 미궁의 천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직 난, 꿈을 꾸고 있는데."

잠깐의 정적은 길지 않았다.

"리더."

"말해."

"이 파티에 지원한 이유는, 가장 빠르게 미궁을 내려가신다는 그 말 때문이에요."

"리더는 제 꿈을 이뤄주실 수 있어요?"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나와 레이나가 슬쩍 서로를 돌아보았다.

나는 레이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당연히 장담 못 해."

"⋯그렇군요."

"하지만 똑같은 일상에 지루해할 일은 없을 거야. 나는 멈추지 않을 거니까."

내 말을 고민하던 레이나가 이내 피식 웃었다.

"그러면 믿어 볼까요?"

"선택은 네 자유야. 네가 있든 없든 나는 나아갈 뿐이니까."

"좋아요. 저보다 먼저 죽으면 안 돼요?"

"그럴 수가 있을지 모르겠다."

나와 레이나가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미궁의 끝을 바라보는 사람들끼리의 묘한 공감대가 생긴 순간이다.

* * *

이틀 뒤, 우리는 홉고블린의 영역으로 통하는 틈을 통과했다.

"이렇게 좁은 길을 어떻게 찾아내신 거예요?"

"말하자면 길어. 한 달로도 빠듯할 거다."

"으! 좁아!"

"옷 안 걸리게 조심해. 뭐, 레이나 너는 몸이 작으니까 문제없겠지만."

"네."

중간중간 홉고블린들이 설치한 함정을 알려주고 피하느라 시간을 많이 썼다.

하나라도 밟으면 며칠은 진입을 못하기에 신신당부를 해놨다.

마침내 길이 점차 넓어지며 홉고블린의 구역에 진입했다.

"여기서부터 홉고블린의 영역."

"와."

"말했다시피 일단 탁 트인 길로 가기 전까지는 무조건 전투 회피야."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난 뒤로는 첫 방문이다.

과연 미노타우로스의 죽음이 영역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을 지도 알아봐야 한다.

보통 탐험가였으면 며칠을 두고 일대를 관찰하며 몬스터들의 움직임을 관찰했을 것이다.

당연히 내 입장에서는 시간 낭비.

무조건 몸으로 부딪힐 생각이다.

"더 볼것도 없어. 바로 호수로 가자."

"알았다."

우리는 최대한 홉고블린과의 접촉을 피하며 호수로 향했다.

반나절을 더 행군하고 도달한 호수.

미궁의 폭포 소리에 레이나가 감탄의 목소리를 낸다.

확실히 미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다.

"대박."

"여기서 프라냐를 사냥할 거야."

나는 라분과 레이나에게 미리 준비한 낚싯대를 건넸다.

"낚시 시작!"

그 뒤로는 노가다의 시작이었다.

낚고, 죽이고, 자르고, 꿰고, 던지고.

프라냐는 음식이 날아오기 무섭게 인과의 희생양이 되었다.

레이나는 처음에는 의아해하다가 이제는 즐기기 시작했다.

[인과를 축적하십시오. 다음 보상까지 40/100.]

[인과를 축적하십시오. 다음 보상까지 41/100.]

[인과를 축적하십시오. 다음 보상까지 42/100.]

⋯⋯

[인과를 축적하십시오. 다음 보상까지 100/100.]

[보상을 수령하시겠습니까? 보상 : 혼돈의 상자.]

"계속 가자!"

인원이 늘어나니 낚시 속도도 배가 되었다.

"씨를 말려!"

물론 나는 프라냐를 죽이면서도 내 감지 범위를 호수의 출구들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빠르게 발견할 수 있었다.

'온다!'

하지만 접근해오는 속도가 엄청났다.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대응이 불가능할 정도.

이게 다 넓은 호수 때문이다.

아무리 집중한다고 해도 좁은 틈의 감지는 호수에 비해 깊게 나아갈 수 없다.

"모두 동작 그만!"

라분이 낚싯대를 집어던졌고, 레이나가 잠깐 버벅거리더니 라분과 같이 행동했다.

"이런."

미궁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호수에 나타난 몬스터.

"미노타우로스."

나는 천천히 검을 빼어들었다.

"에? 어?"

"무어어어어어어!"

검염을 피워올리며 내 눈앞에 나타난 새로운 미노타우로스를 관찰했다.

내가 이곳 호수에서 잡았던 놈보다는 덩치가 작았다.

하지만 몬스터의 흉성은 내가 알던 그대로다.

"제기랄."

출구가 멀다.

이미 셋 다 도망치기는 글렀다.

하지만 둘이 희생한다면, 한 명은 도망칠 수 있다.

"레이나."

나는 레이나에게 책갈피 아티팩트를 던졌다.

"이건?"

"지금 바로 오른쪽 길로 도망가. 이 아티팩트 안에 길이 있어."

"⋯⋯."

"설명할 시간 없다. 너는 싸우지 마."

"하지만."

"말했지. 미궁에서는 내 명령이 절대적이라고."

주춤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레이나.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아 크게 소리 질렀다.

"빨리 달려! 틈에서 우리를 기다려!"

"네!"

그제야 레이나가 꽁지가 빠지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미노타우로스가 우리를 향해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들고 있는 마나를 잔뜩 품은 몽둥이가 놈의 몸을 따라 흔들리고 있다.

"라분! 돌격을 멈추게 해야 해!"

아직 레이나가 달리고 있다. 그 틈을 만들어줘야 한다!

"으아아아!"

"우어어어!"

몽둥이에 일부러 돌격해 시선을 끌고, 두 명의 교차 공격으로 타이밍을 교란시켜 틈을 노린다.

내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몽둥이. 바닥의 모래가 거세게 휘날려 시야를 방해한다.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미노타우로스의 발목을 향해 검염을 잔뜩 실은 검을 휘둘렀다.

-츠짓!

질퍽한 소리와 함께 살갗을 베고, 근육을 나름 깊게 잘라내는 데에 성공했다.

"무어어어!"

몸을 빼보았지만 놈의 움직임은 내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애초에 레이나가 탈출할 시간을 벌기 위해 너무 깊게 들어갔다.

이미 감수한 피해다.

대가는 내가 예상한 대로였다.

"어?"

시야 한 쪽이 사라졌다.

순간 생각할 수가 없게 되었다.

아. 머리를 당했구나.

깨달음과 동시에 내 몸이 허물어졌다.

죽음이었다.

-키릭.

⋯⋯

"낚시 시작! ⋯하지 마!"

"네?"

"주인. 무슨 일?"

나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회귀의 감각에 몸서리쳤다.

고개를 숙이고, 몬스터에게 당해 사라졌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내 모든 것이 확실해지자 다시 고개를 들었다.

"소고기부터 먹고 시작하자고."

돈 좀 만지게 생겼다.

다시 사는 EX급 미궁 탐험가 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