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 30-40

미궁의 무한회귀자 30

나와 라분은 연신 지도를 보며 미궁 4층의 길을 걸었다.

초행길이었기에 어쩔 수 없다.

내 목표는 단 하나.

'주인 잃은 본거지를 친다.'

듣자 하니 게랄프는 요 몇 년 간 미궁 4층의 유명 클라이머로 군림해왔다고 한다.

도시에서도 쉽게 유통되지 않는 포션을 가지고 있을 정도다.

분명, 다른 가치 있는 물건들도 모아놨을 것이 확실했다.

카리나와 니콜라스는 안전이 중요하기에 이 정도 성과에 만족하여 소탕을 중단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미 구트란과 게랄프의 연합이 확인된 이상, 다른 클라이머도 개입되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그들의 선택은 결국 안전을 위해 도전을 포기한다는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나라는 놈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부딪히고, 깨닫는다."

"주인. 자꾸 혼잣말. 하지 마라. 무섭다."

"⋯⋯."

직선 길은 빠르게 주파하고, 갈림길이 나올 경우 사람의 흔적을 찾았다.

미궁이 돌바닥이라고 해도, 방금 지나간 사람이 남긴 족적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급하게 뛰어다녔다면 더 쉬운 일이고.

중간에 오크들도 사냥하면서 한 시간을 이동했을까?

내 감지 끝에 사람의 기척이 잡혔다.

그것도 혼자.

이런 미궁 깊숙한 곳에 혼자 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찾았다."

한곳에 가만히 멈춰있는 기척.

라분에게 신호를 주자 라분이 방패를 앞세우며 천천히 접근했다.

클라이머가 아닐 가능성이 있었기에 최소한 얼굴은 확인해야 했다.

내가 감지한 인영은 잠시 휴식을 취하는 듯 가만히 멈춰서있었다.

길을 돌아 확인해 보니.

"앉아있다."

"가보자."

나와 라분이 천천히 앉아있는 사람을 향해 다가갔다.

멀리서 보이는 얼굴은 분명 도망간 게랄프 파티의 막내가 맞다.

하지만.

"죽었네."

"아니다. 아직 죽지 않았다."

가슴에 커다란 검상을 입고 헐떡이는 클라이머.

나는 푹 숙이고 있는 녀석의 머리를 잡고 들어 올렸다.

다행히 죽기는 죽겠지만 금방 죽을 상처는 아니었다.

눈에 초점도 잘 잡혀 있고.

"어이. 형씨. 이미 늦은 것 같은데 죽기 전에 좋은 일 하라고."

"큭. 큭."

"누가 찔렀냐? 분명 우리는 아닐 테고."

"누구긴 누구겠냐. 이런 함정을 판 놈들이지."

"다섯 명이서 덤볐구나? 여자가 껴있는."

"⋯그걸 어떻게 알지?"

"아직 근처에 있거든."

멀리서 감지되는 다섯 명의 인간.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구트란 쪽의 수하인 모양이다.

"네놈들 본거지는?"

"말해줄 것 같냐?"

"여기서 더 아프게 죽고 싶지는 않을 텐데. 쉽게 쉽게 가자고."

"⋯⋯."

내가 단검을 꺼내들자 녀석의 표정이 굳었다.

이내 입이 열린다.

"여기서 대략 두 시간 정도 앞으로 쭉 가다가, 오른쪽으로 계속 가면 된다."

"그래. 저 놈들도 그쪽으로 가고 있네. 고맙다. 죽여줄까?"

막내가 힘없는 손을 휘휘 저으며 내 팔을 쳐냈다.

"됐다. 조금이라도 오래 살아야지."

"그래. 죽으면 목덜미 정도는 미궁 밖을 보게 해주마."

나는 녀석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뒤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라분. 다섯 명이다. 클라이머야. 구트란의 수하일 가능성이 높다. 3위계라고 가정하자고."

두 명이서 다섯 명에게 덤비는 일.

위계 수준의 차이가 나지 않으면 함부로 시도할 행동이 아니다.

하지만.

"할 수 있지?"

"하라면, 한다."

"좋아. 타이밍을 노려보자."

그렇게 거리를 천천히 좁히는 미행이 시작되었다.

대략 100m 뒤에서 천천히 거리를 유지하며 뒤를 따른다.

"라분아. 벌써부터 긴장할 필요는 없어. 별일 없으면 잘 때나, 게랄프의 본거지에서 나올 때 습격할 거니까."

"알았다."

두 시간 뒤.

녀석들이 정확히 오른쪽으로 꺾이는 갈림길을 골랐다.

조금 뒤 나와 라분이 이 갈림길로 따라붙었다.

사람의 흔적이 진하게 묻어 나오는 장소다.

"좋아. 우선 미행하고, 여기로 돌아온다 싶으면 이곳에 매복하자."

"알았다."

하지만 이곳을 매복지로 선택하지는 않았다.

게랄프의 본거지에 남아있는 클라이머가 있었기 때문이다.

입구에 매복한 클라이머와 대치하는 내 목표.

나는 녀석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한계 지점까지 접근했다.

귀에 마나를 집중하자 청각에 아슬아슬하게 대화 내용이 잡힌다.

"씨발! 게랄프 그 병신새끼 죽었다고!"

"지랄하지 마!"

"아니, 그놈 목이라도 들고 왔어야 했나?"

"누구?"

"너네 막내. 칼침 먹고 도망가다가 쓰러져 있던데?"

"네가 찔렀겠지. 파우엘 이 씹새끼가!"

"어이쿠. 들켰네? 얘들아. 쓸어버려야겠다?"

파우엘이라 불린 남자가 검염을 줄기줄기 뿜어내며 게랄프의 본거지로 다가갔다.

본거지에 잠복하고 있는 기척은 세 명.

보아하니 3위계 한 명이 본거지의 입구 앞에서 파우엘에 맞서 검을 뽑아들고 있다.

"파우엘. 마법사 똥구멍이나 핥는 놈이 기세가 등등하네? 어?"

"이 좆같은 처지에 똥구멍이라도 고급이어야지."

파우엘이 몸을 박차 적에게 달려들었다.

나와 라분은 두 클라이머의 전투를 흥미진진하게 관찰했다.

아예 배낭에서 육포를 꺼내 뜯어먹었다.

"싸움 구경. 재미있다."

"콜로세움보다 더 재밌지? 저거 끝나면 바로 습격할 거니까 준비해."

습격을 위해 적당히 상대방을 관찰하려는데 파우엘의 무리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이전에 나를 습격했던 마이트의 부하. 로비슨이었다.

내 얼굴을 아는 유일한 놈이었기에 포로로 잡아놨던 스롬에게 물어 이름은 외워놨다.

"찜찜했는데 잘 됐군."

클라이머의 기억에 남기를 원하는 탐험가는 없다.

이참에 마무리하고 두 발 쭉 뻗고 자야겠다.

곧 결투가 마무리 지어졌다.

파우엘이 의도적으로 동작이 큰 공격을 가했고, 상대가 이를 강하게 받아쳤다.

두 사람의 팔이 튕기며 서로의 가슴이 활짝 열렸다.

나는 라분에게 습격의 신호를 보냈다.

파우엘이 웃음이 짙어졌다.

마치 가속한 듯 움직인 파우엘이 상대보다 한 박자 빠르게 자세를 잡고 가슴을 내리그었다.

"커헉!"

"하하!"

상대의 마지막 검격이 파우엘의 어깨에 닿았지만 힘이 없었다.

어깨를 조금 베어내는데 그쳤다.

파우엘은 쉬지 않고 검을 휘둘러 상대의 머리를 토막 냈다.

"지금!"

라분이 곧바로 튀어나가 방패를 앞세우고 돌진했다.

이어지는 라분의 몸통 박치기가 로비슨에게 적중했다.

입을 헤 벌리고 전투를 구경하던 로비슨이 혀를 씹으며 제대로 미궁 벽에 처박혔다.

"하하! 이 새꺄! 어때? 이게 내 기술이다! 어?"

파우엘이 상대의 목을 뻥뻥 차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개의치 않고 아직 정신을 못 차린 클라이머 놈년들을 도륙했다.

"으아악!"

"막아!"

라분의 몸통 박치기가 진영을 망가뜨리고, 내가 검염을 담은 검을 휘두르며 마무리했다.

파우엘을 제외한 나머지가 순식간에 정리된다.

"⋯⋯."

파우엘이 검을 내밀었다.

어이가 없을 터다. 막 이겼다 생각한 참에 부하들을 모두 잃었으니.

"이 씨발 새끼가. 뒤를 쳐?"

나는 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파우엘을 바라보았다.

"뒤통수 처맞은 놈이 잘못이지."

"해결사 놈들이냐?"

"그래."

"그러면 죽어라."

파우엘이 눈을 빛내며 내게 달려든다.

하지만 이미 같은 경지의 적과 생사를 가르는 전투를 한 뒤다.

기세가 크게 줄을 수밖에 없다.

"흡!"

검을 받아치고, 튕겨내며 파우엘을 점점 궁지로 몰아넣는다.

파우엘이 또다시 무리한 공격으로 자신의 기술을 사용할 틈을 만들려고 했다.

'순간적으로 몸을 빠르게 움직여서 상대의 타이밍을 빼앗는 기술.'

나는 파우엘의 기술을 이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놈의 노림수를 알고 있었기에 대처는 어렵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돌진을 피하고, 상대방의 힘을 이용해 팔을 살짝 베어낸다.

잠깐 중심을 잃은 파우엘이 내게 한참 떨어진 뒤 자세를 잡았다.

"이 씨발 새끼. 알고 있구나."

"기술은 잘 봤다."

"참 좆같이 하는 군."

"칭찬 고맙다."

파우엘이 처절한 고함을 지르며 내게 다시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들려고 했다.

구석에서 무심히 전투를 바라보던 라분이 몸을 던지기 전에는.

"우어어어!"

"!"

파우엘이 급히 몸을 틀어 라분에게 검을 휘둘렀으나 힘을 제대로 싣지 못했다.

라분의 질량 폭격에 그대로 나가떨어지는 파우엘.

팔이 기괴한 각도로 꺾여있다.

나는 얼른 달려들어 고통에 신음하는 파우엘의 목을 찔렀다.

"끄륵!"

검 끝을 타고 느껴지는 피의 맥동이 생생하다.

감지 능력이 좋아지면 이런 쓸데없는 부분에서 기분이 나빠진다.

"라분. 잘했어."

"우어어어!"

기쁨의 함성을 지른 라분이 자세를 다시잡고 게랄프의 본거지를 보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게랄프의 잔당 두 명이 침을 꿀꺽 삼키며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검에 묻은 피를 털며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알아서 꿇어."

검을 질질 끌으며 움직이자 철과 돌이 만나는 마찰음이 미궁벽을 울린다.

곧 두 클라이머가 무장을 해제하고 무릎을 꿇었다.

'어린 놈과 늙은 놈이군.'

그대로 늙은 놈의 목을 베어넘긴다.

어린 놈이 두 눈을 찔끔 감았다. 잘린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어린 놈의 몸을 적셨다.

"이름."

"⋯⋯."

"이름."

"롬프. 롬프입니다."

"안내해. 돈 될만한 물건이 있겠지?"

"⋯⋯알겠습니다."

롬프가 게랄프의 거처로 우리를 안내했다.

클라이머의 본거지를 보기는 처음이다.

미궁 벽을 의도적으로 부수고, 메꿔 구축한 본거지는 적절한 구획으로 나뉘어 있었다.

게랄프의 방은 샘이 졸졸 흐르는 바위틈이 있는 방이었다.

미궁에서 물을 확보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아마 게랄프는 물을 권력으로 사용하며 이들 위에 군림했을 테지.

"저, 저도 몇 번 들어온 적이 없어서 어디에 뭐가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라분."

내 말을 들은 라분이 방패를 놀려 롬프의 턱을 때렸다.

한순간에 정신을 잃은 롬프의 몸이 무너져내렸다.

라분이 롬프의 목을 잡고 그대로 꺾었다.

나름 자비로운 죽음이다.

"자, 그러면 한 번 뒤져보자."

일단 어떻게 구했는지 모를 침대를 들었다.

이곳저곳 찢어보니 침대 속에서 좋은 느낌이 나는 주머니가 나온다.

열어보니 금화, 은화가 한가득이다.

"아주 좋아."

탐험가들에게서 뜯어냈을 품질 좋은 검 2개, 그리고 꽤 고급스러운 금 촛대.

"좋고."

잠겨있는 서랍을 부수며 열자 커다란 함이 나왔다.

함을 열자 편지와 함께 붉은빛 보석으로 장식된 반지가 보인다.

나는 편지를 펼치고 띄엄띄엄 글을 읽었다.

"아오. 필기체 도저히 못 읽겠네."

정직하게 쓴 글자는 좀 읽겠는데 이건 뭐 지렁이나 다름없다.

맨 아래 구트란의 서명이 들어간 것으로 봐서는 어떤 내용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동맹 요청하는 거고, 이건 대가겠군."

뭔가 대박의 냄새가 난다.

편지는 콜린에게 읽어달라고 하면 되겠다.

배낭에 전리품들을 쓸어 넣고, 시원한 미궁물로 목을 축인 뒤 게랄프의 본거지 전체를 뒤졌다.

추가 소득은 은화 10여 개 정도.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지."

대대적으로 수색하면 더 소득이 있겠다만 시간이 끌리면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마지막으로 게랄프의 거처를 뒤지고 더는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본거지 밖으로 나왔다.

"응?"

꾸물꾸물 거리며 부러진 발로 미궁의 바닥을 기어가는 로비슨.

라분의 방패 박치기를 당하고 그대로 죽은 줄 알았는데, 전투의 흥분에 젖어 미처 체크를 못하고 넘어간 모양이다.

"어이."

우리를 보고 기겁하는 로비슨.

나는 검을 뽑아들고 천천히 지렁이처럼 꿈틀대는 그에게 다가갔다.

머리가 조금 깨져있는 게 보기만 해도 불쌍하다.

"살려, 살려주세요!"

"내가 왜?"

검을 치켜들자 곧바로 무릎을 꿇는 자세를 잡는다.

부러진 발로 저러는 걸 보니 삶에 대한 열망이 엄청난 놈이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내게 기어 온다.

"노예! 노예라도 될 테니까 제발!"

"노예라고? 흠."

여지를 남기는 내 말에 삶으로의 희망을 보고 달려드는 로비슨.

무릎이 까지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나는 마침 좋은 자세로 온 로비슨의 목을 그대로 베어넘겼다.

"끄르륵!"

피가 내 쪽으로 쏟아지지 않게 자리를 옮긴 뒤 무심히 목덜미를 뜯는다.

일련의 일을 행하는 내게는 어떠한 감정도 없었다.

이런 일, 감정이 죽지 않으면 오래는 못한다.

나와 라분은 녀석들의 목덜미를 챙기고 안전지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31

미궁 4층의 클라이머, 게랄프의 본거지를 턴 뒤.

쪽잠 후 꼬박 하루를 걸어 미궁 4층의 안전지대로 복귀했다.

"라분. 고생했어."

"주인도. 고생 많았다."

광장 정중앙에 게랄프의 시체가 매달려있는 것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목에 매달린 나무판에 피로 글씨를 적어놨다.

[클라이머, 게랄프.]

아주 팔까지 주워와서 덜렁이게 달아놨다.

"야생의 세계로구나."

"사막과. 같다. 나쁜놈. 똑같이 한다."

"아마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달지 않을까 싶다."

사무소에 들어가니 미궁 사무소 직원인 카일이 나를 반겨준다.

"여. 살아 돌아왔네. 본대보다 딱 반나절 늦게 왔어."

"나머지 사람들은 돌아갔습니까."

"어. 게랄프가 자살했거든. 이빨 안에 독을 숨겨놨나 봐. 다른 한 명 데려와서 정보 캐내는 중."

"그렇군요."

"간 일은 잘 됐어?"

"싹 다 털렸더군요. 그래도 성과가 없지는 않습니다."

주섬주섬 목덜미들을 테이블에 올렸다.

"호오."

목덜미를 가지고 건물 뒤편으로 간 카일이 두둑한 주머니와 함께 돌아갔다.

"파우엘과 그 떨거지들이네. 파우엘은 2골드, 나머지는 정가로 쳤어."

내가 주머니를 받아들자 카일이 벽에 붙어있는 파우엘의 현상수배서를 때어버린다.

"벽이 꽤 휑해졌네. 곧 바퀴벌레 자라나듯 채워지겠지만."

"적당한 걸로 한 잔만 주쇼."

카일이 맥주 두 잔을 가져와 나완 라분 앞에 내려놓았다.

"이거나 마셔. 나는 맥주밖에 안 사."

"잘 마시겠습니다."

"결산은 3일 뒤 점심 먹고 하니까 별일 없으면 참석하라고. 우리 쪽 사망자는 한 명, 거기다가 그 한 명이 배신자니까 실질적으로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야. 대승이다."

내가 없었으면, 원래라면 그 대승이 대패가 되었을 거라는 걸 카일은 짐작이나 할까?

맥주를 쭉 들이켜고 잔을 탁 내렸다.

"그러면 3일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결산이라는 거 오래는 안 걸리죠?"

"길어봐야 한 시간? 공식적으로 마무리하려면 한 달은 걸려. 아마 잊어버릴 때쯤 연락이 갈 거다."

"알겠습니다."

언제나 탐험을 마치고 지상으로 돌아갈 때는 피곤이 점점 몰려오는 느낌이고, 이는 미궁 1층을 향해 이동할 때 정점에 이른다.

[미궁 1층으로 귀환하시겠습니까?]

[현재 진척도 41.8%.]

그렇기에 리디엠은 1층에 그 유명한 상흔을 남겨 기나긴 탐험의 피로감을 토해놓은 거겠지.

차마 이렇게 깊은 흔적을 남길 실력도 없는 나는 그저 그 흔적을 더듬으며 빛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클라이머들은 다시는 볼 수 없을 도시의 빛으로.

"주인. 또 이상한 생각한다."

"감성적인 생각이야."

"이상한 생각."

"⋯⋯."

터덜터덜 걸어 집에 도착하니 콜린이 급하게 읽던 책을 덮어 숨긴다.

"루루루루루카스! 왜 3일 만에 오는 건데? 일주일은 걸리는 거 아니었어?"

"? 왜 이렇게 당황해하냐?"

콜린이 책을 숨긴 베개 아래로 시선을 두자 아예 베개를 깔고 앉는다.

"뭔데?"

"뭐가? 갑자기 처들어와서 뭔 소리야?"

"⋯⋯라분아."

"알았다."

라분이 콜린의 저항을 무시하며 녀석을 번쩍 들어 올렸다.

한껏 반항하다가 들어올려지는 순간에는 아예 체념한다.

나는 베개를 들어 아무 표지도 없는 책을 펼쳤다.

더듬더듬 내용을 읽었다. 필기체가 아니라 어렵지 않았다.

"뭐야. 야설이었어?"

"그래! 보는게 죄냐! 땀냄새부터 좀 어떻게 하고 와라. 아주 그냥 죽겠어!"

"짜증이야. 내가 돈 주는 거 다 어디로 가나 했다니만."

종이는 그 자체로 비싸다.

콜린이 왜 맨날 돈이 없어 빌빌거리는지 드디어 알게 되었다.

"여자를 만나라. 네가 뭐가 부족하다고."

"취향 존중해 주시죠?"

"눼이눼이."

나는 라분과 함께 흠뻑 씻고 온 다음 구트란의 편지를 콜린에게 던져주었다.

"야. 이번에 얻은 거야. 읽어보려고 했는데 지렁이가 기어가서 도저히 못 읽겠다. 한 번 읽어줘."

"응? 상당히 글씨체가 유려한데?"

"유려?"

"어휴. 됐다. 읽어줄게. 응?"

편지의 내용을 뚫어지게 읽던 콜린이 경악했다.

"이 새끼. 대체 누구야?"

"구트란이라고, 클라이머 마법사."

"온통 음담패설밖에 없는데? 우웩. 성별도 안 가리고 종족도 안 가려. 개 미친놈이 따로 없네."

"취향이잖아. 존중해줘야지. 나도 네 야설 취향 존중해 주잖아."

"⋯⋯."

불편한 시선으로 나를 보던 콜린이 이번에는 조용히 편지를 읽었다.

"드디어 본론이네. 자. 읽어줄게.

어제 이야기 나눈 대로, 내 자네에게 이 반지를 주겠네. 설명해 준 계획에 공감해 준 것으로 알고 있겠네. 자세한 사항은 다시 만나 논의하지. 최근 잡아온 노예의 비명 소리가⋯⋯

이런 미친. 여기는 넘어가고, 음. 음."

왜 이렇게 편지에 적힌 글의 양이 많나 했더니, 전부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밖에 없나 보다.

"좋아 다시 이어진다.

게랄프. 나는 이 생활에 퍽 만족하네만 자네는 그렇지 않겠지? 이 반지는 담보이자 선물이기도 하네. 인과를 축적하다 보면 이 미궁을 탈출하는 것도 꿈은 아니겠지. 기대하고 있겠네.

편지 끝."

"흠."

솔직히 내 머리로는 들어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반지에 인과를 축적해 미궁을 탈출한다고?

"반지는 있어?"

"여기."

내가 반지를 휙 던져주자 콜린이 반지를 이리저리 굴려본다.

"흠. 마정석을 가공한것 같은데. 붉은 마정석이 있었나?"

콜린의 말대로 반지에 박힌 보석의 느낌은 마정석과 같다.

하지만 문제는 색깔. 피보다 더 진한 붉은색의 마정석은 내가 알기로 없다.

"뭐, 껴보면 알겠지."

"야. 위험할 것 같은데?"

"됐어. 라분. 무슨 일 생기면 나 지켜."

"알겠다."

정말 위험한 것이라면 리셋하면 그만이다.

이게 무서워서 다른 쪽으로 알아보는 품을 들이는 것이 더 손해다.

나는 반지를 그대로 오른손 검지에 끼웠다.

처음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하지만.

"응?"

반지에 있던 붉은색 기운이 내 학즉사법의 마나와 접촉하더니.

[사용자 인식 완료.]

[인과를 축적하십시오. 다음 보상까지 0/10.]

마치 미궁과 같은 안내 음성이 귀에 울려 퍼졌다.

미궁 밖에서 이 소리를 들을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같은 높낮이에도 더 크게 울리는 느낌이다.

내가 화들짝 놀라자 콜린이 눈이 동그래져서 쳐다본다.

"인과, 축적?"

"편지 내용이잖아. 갑자기 왜 반복해?"

"아니, 아니야."

딱 짐작 가는 게 있다.

'살생.'

0/10이라는 건 어떤 행동을 10번 해야 한다는 말이고, 이런 불길한 반지가 바라는 것이야 뻔하다.

'생명체를 죽여봐야겠군.'

나는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려고 했다.

[이 반지는 한 번 장착 해제될 시 사용자는 즉시 소유권을 잃으며, 한 번 소유권을 잃은 사용자는 다시는 반지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

그만두자.

"주인. 어떤가."

"몰라. 한 번 미궁에 내려가 봐야겠어."

"루카스 나도 껴보면 안 돼?"

"안 돼."

콜린한테는 미안하지만 너무 많은 정보를 공유해 줄 수 없다.

내가 콜린을 믿고 있는 것과 별개로, 비싼 물건을 보면 없던 욕심도 생기는 법이다.

물론 콜린이 돈에 눈이 멀어 내게 어떤 짓을 할 놈은 아니지만 애초에 그런 여지를 주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편지는 줘. 태워버려야겠다."

"어? 어."

콜린이 던지는 편지를 낚아채고 벅벅 찢은 다음 주머니에 넣었다.

콜린이 약간 아쉬운 눈으로 내가 하는 행동을 바라보고 있다. 내가 찌릿 쳐다보니 머쓱한 표정으로 얼굴을 돌린다.

"⋯⋯."

이 녀석 취향은 전혀 존중해 줄 필요가 없겠다.

* * *

구트란 소탕 작전의 결산이 예정된 3일간, 나와 라분은 개인 정비에 시간을 쏟았다.

라분은 3일 내내 켄드릭의 집을 들락날락하며 탱커의 능력을 쌓아갔고, 내 은화를 털어갔다.

나는 마나 통제력을 집중적으로 수련하며 탐험의 미래 구상을 세웠다.

"진척도 41%, 한 달 내에 100%를 채우고 싶다는 말이지."

일반 탐험가에게는 도저히 달성 불가능한 수치겠지만 나에게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다.

앞뒤 가리지 않고 돌진하면 되니까.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인원 보충이 필요하기는 하다.

나와 라분 둘이서 불침번을 서면 애로사항이 너무 많다.

괜히 사무소의 권장 최소 파티원 수가 세 명이 아니다.

'되도록 로그나 딜러를 영입하고 싶다.'

나는 돈주머니를 만졌다.

이번에 게랄프의 본거지를 털면서 꽤 많은 금화를 얻을 수 있었다.

대충 전 재산을 투자하면 좋은 전사 노예를 구매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라분을 구매할 때는 몰랐지만 노예라는 게 엄청나게 돈이 든다.

만약 덜컥 샀다가 미궁 탐험에 적합하지 못하다면?

반품도 안 된다.

아니, 시간도 엄청 걸리고 수수료도 왕창 나갈 터다.

"노예는 라분 하나로 족하다!"

나의 결론이다.

하지만 내 무한 회귀의 특성을 살리기 위한 리스크 있는 탐험을 위해서는 모든 파티가 내 의견대로 위험에 몸을 던져줘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또 노예만 한 것이 없다.

"으으. 노예 시장⋯ 노예 시장⋯⋯!"

나는 문제를 회피하는 가장 쉬운 방법을 선택했다.

나중에.

어차피 나와 라분 두 명이서 탐험이 불가능하다면 죽을 테고, 그때 움직여도 늦지 않다.

높은 리스크를 0으로 만들 수 있는 게 바로 내 특성이니까.

나는 마음속 정리를 끝내고 탐험을 준비한 뒤, 라분과 미궁 4층 사무소로 들어갔다.

"여! 루카스!"

"켈른 형님. 푹 쉬셨습니까."

"그래. 너도 고생 많았다. 마지막에 같이 못 가서 미안하다. 나도 돌봐야 하는 놈들이 있다 보니."

"하하. 당연히 이해하죠."

"맥주 한 잔?"

"아뇨. 바로 탐험에 갈 거라서."

"바쁘게 사는구나."

라분이 쩝쩝거리며 맥주를 바라는 눈치였지만 내가 엄한 눈으로 바라보자 쭈그러든다.

"확 그냥."

"여전히 장난 없구만."

"주인. 무섭다."

"자. 안으로 들어가자고. 미안한데 이번 결산은 책임자끼리 진행하기로 해서, 라분은 밖에서 기다려줘. 나머지도 다 기다리고 있으니까."

라분은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답했다.

"켈른. 알았다."

"고맙다."

사무소 건물 뒤편에 있는 감옥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붉은 송곳니 길드의 카리나 헤리슨, 해결사 니콜라스. 미궁 사무소 직원 카일까지.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 둘. 기세를 보니 한 사람은 4위계급 전사고, 한 사람은 마법사로 보인다.

"미궁 사무소 측 사람이야."

이미 긴밀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했다.

"이런, 제가 늦었군요."

니콜라스가 손을 들어 나를 반겼다.

"루카스. 자네가 대화에 빠지면 안 되지. 이번 작전의 수훈 갑이니."

"저야 입만 놀렸을 뿐인데요."

"그 입이 우리 모두를 살렸어. 자. 어서 앉게."

카리나 옆에 비어있는 자리에 앉자 카리나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아는 척을 했다.

사무소 측 사람이 내가 앉는 것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는 전형적인 샌님이다.

품고 있는 마나의 양은 마법사답게 엄청났지만.

"소위 이 '향수'라는 것을 분석하니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탐지가 매우 힘들더군요. 특유의 마나 파장이 은밀하게 감춰져 있어서, 4위계의 경지에 이른 자와 4써클 마법사도 탐지에 애를 먹을 정도입니다. 루카스 님."

"네."

"마이트라는, 구트란 휘하의 3위계 클라이머와 전투를 치렀다고 하셨죠."

"맞습니다."

"대략적이라도 좋습니다. 얼마 정도 거리 밖에서 클라이머에게 향수를 탐지당했는지요?"

나는 잠깐 고민했다.

지금의 정확하게 대답한다면 내 감지 능력의 범위를 이 많은 사람들에게 유출하는 짓이다.

절반, 그 이하로 줄여볼까.

"적어도 50m 밖에서 감지당한 건 확실합니다."

"그렇군요."

사무소의 마법사가 향수가 담긴 시약병을 흔들었다.

"먼 거리에서 적, 또는 아군의 위치를 탐지하고, 끊임없이 마나의 잔향을 남기는 이 '향수'의 기술이 클라이머 사이에서 전파되는 건 매우 좋지 않은 상황입니다."

"적의 전략이 더 늘어나겠군."

"상부에 강력히 논의하겠습니다. 마법사 구트란에 대한 적극적인 토벌이 곧 이루어질 겁니다. 무대는 미궁 5층이 되겠군요."

더 이상 정보를 캐낼 것이 없다고 판단된 클라이머 포로들을 즉각적으로 처형하는 것으로 소탕조의 일이 마무리되었다.

나에게는 두둑한 돈주머니가 쥐어졌다.

살짝 열어 안을 보니 금화 열댓 개와 은화 수십 개가 들어있다.

나는 돈주머니를 꽉 끌어안았다.

'이사할 수 있겠어.'

내가 감동에 젖어있자 니콜라스가 어깨를 툭 쳤다.

"빚은 갚아야지. 내가 필요할 때 북쪽 해결사 사무소에서 날 찾게. 언제라도 달려가지."

"곧 뵙겠습니다."

다음으로는 카리나 헤리슨.

"바로 탐험에 가는 것 같네."

"그렇습니다."

"보름 뒤, 붉은 송곳니 길드 사무소에서 보는 게 어때."

"좋습니다."

4위계들과의 대련이 머지않았다.

다음으로는 사무소의 마법사였다.

"루카스 님. 근시일 내로 대규모 클라이머 소탕전이 벌어질 겁니다. 저번과 같이 사무소에 협력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죄송합니다. 확답은 드리지 못하겠군요."

"흠. 네. 알겠습니다."

소탕전에 참가했다가 회귀를 몇 번이나 할지 짐작조차 안 된다.

그냥 조용히 탐험이나 하도록 하자.

내 목표는 사람을 잘 죽이는 능력을 기르는 게 아니다.

탐험을 잘 하는 능력을 기르는 거지.

라분과 함께 다시 1층으로 올라가 이번에 받은 보상금을 사무소에 맡겼다.

다시 4층으로 내려가 탐험을 시작한다.

"라분. 가자."

"알겠다."

이번에야말로 리자드맨을 상대하고, 경험을 쌓아야 한다.

아직 미궁 4층. 길드와 사무소의 입장에서는 중요한 층일지 몰라도, 탐험가의 입장에서는 초입의 영역이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32

리자드맨 사냥을 목표를 한 미궁 첫날.

나와 라분은 고블린을 우선 사냥했다.

일방적인 학살 후.

나는 시체를 공양하기 전, 장갑을 벗고 반지의 보석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인과를 축적하십시오. 다음 보상까지 3/10.]

좋아. 올랐다. 하지만 셋?

나는 미궁의 바닥에 널브러진 고블린들의 숫자를 세었다.

총 다섯.

셋 보다 둘 많은 숫자다.

"라분. 네가 몇 마리 죽였지?"

"두 마리 죽였다."

"직접 죽였을 때만 쌓이는군."

다음은 공양.

"라분. 내가 잡은 고블린 한 마리만 공양해봐."

"알았다."

라분은 직접 입으로 말하는 대신 생각으로 공양하는 타입이다.

[시체를 공양합니다.]

[고블린 한 마리. 확인.]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진척도. 41.8%]

반지는?

[인과를 축적하십시오. 다음 보상까지 2/10.]

공양 시에는 카운트가 줄어든다.

"대충 파악했어."

예상은 했다. 이 아티팩트는 미궁의 법칙을 따르고 있었으니.

이른바 '미궁 아티팩트(Labyrinth Artefact)', 줄여서 라비팩트.

라비팩트는 이렇게 미궁처럼 이상한 안내 문구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사용 시점을 공양이나 귀환과 같이 정할 수 있다고도 했다.

다 귀동냥으로 들었던 말인데, 내가 진짜 라비팩트를 얻을 줄은 몰랐다.

"라분. 전부 공양해."

"알았다."

이번 고블린 사냥은 난전으로 전투를 진행했기에 피가 잔뜩 튀었다.

반지의 카운트가 깎여나가는 건 아쉽지만 안정적인 탐험을 위해 공양하도록 하자.

"라분. 다음 사냥은 공양 안 할 거야. 피 안 튀게 잡자."

"응? 알겠다."

어차피 하루 정도는 이동을 해야 리자드맨을 만날 수 있다.

나와 라분은 적당한 템포를 유지하며 계속 사냥을 진행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블린 열 마리를 사냥할 수 있었다.

[인과가 축적되었습니다. 10/10.]

[보상을 수령하시겠습니까? 보상 : 혼돈의 상자.]

"혼돈의 상자?"

이게 뭐람?

일단 보상이라고 한다. 마치 미궁 한 층의 진척도 100%를 모두 채웠을 때와 같다.

들뜬 마음에 수령을 선택했다.

[보상을 수령합니다. 보상 : 혼돈의 상자.]

반지에서 검은빛이 반짝이더니 이내 푸른색 기운을 뿜어낸다.

"오오."

"주인. 뭐냐."

"나도 몰라."

푸른색 기운이 잠시 떠다니더니 내 손안으로 흡수되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마나를 운용해 기운이 몸에 들어오는 것을거부했지만, 기운은 마치 마나를 피하듯이 움직어 내 몸으로 파고들었다.

[보상 : 미궁 4층 진척도 0.5%를 수령합니다.]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진척도. 41.9%]

"엥?"

엄청난 연출 효과에 비해서 턱없이 낮은 보상이 나왔다.

"뭐야?"

반지에 마나를 불어넣자 이내 귓속에 음성이 울린다.

[활성화 대기중. 남은 시간. 15일.]

"15일?"

그러면 15일 뒤에 반지가 활성화되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건가?

나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제 이해가 된다.

살생을 통해 인과를 축적하고, 그 보상을 받는.

"역시 미궁의 진척도 같아."

미궁도 한 층의 진척도 100%를 달성할 경우 보상을 준다.

이 라비팩트도 미궁과 같이 살생을 할 경우 보상을 준다.

"그래도 중복되니 좋은 건 아냐."

진척도를 쌓아 미궁을 개척하려는 나에게는 별로 메리트 있는 물건은 아니다.

반지의 보상을 채우기 위해 진척도를 포기해야 하는 구조였으니까.

마치 미궁 한 층에만 거주하는, 생계형 탐험가나 클라이머를 위한 라비팩트라는 느낌이 강하다.

"진척도를 모아야하니까, 당분간은 봉인이다."

"주인. 혼잣말. 그만해라. 이제. 무섭다."

"⋯⋯."

라분에게는 말해도 되겠지.

한결같이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놈이고, 나도 라분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으니.

물론 라분과 내가 생각하는 목숨의 무게는 꽤 많이 다르지만.

"라분. 이 반지가 뭐냐면."

내 설명을 들은 라분이 내 반지를 다시 보았다.

"편지 내용. 볼 때. 게랄프는 미궁 탈출에. 이 반지. 쓰려고 했다."

"그래. 응용력이 좋네."

"라분. 바보 아니다."

구트란이 언급한, 미궁 탈출에 이 라비팩트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이 반지가 가진 무궁한 가능성을 방증하기도 했다.

인과를 계속 축적한다면, 예상치 못한 보상이 나올만도 하다.

"좋아. 가능하다면 틈틈이 카운트는 채우자고."

물론 라비팩트가 다시 작동하는 보름이 지난 후 부터 해야겠지만.

순간 여기서 자살하면 카운트가 원래대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즉시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내 목숨은 소중하니까."

확실하지도 않은 기간 단축에 내 목숨을 소비할 생각은 없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미리 찍어두었던 야영지에 도착했다. 야영 전에 눈에 불을 켜고 전체적인 점검을 했다.

바로 구트란의 향수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다.

탐험 전에도 한 번 했지만 혹시 모르니 정기적으로 점검해줘야 한다.

특히 구트란이 소유하고 있었던 반지는 수시로 해야 하고.

마법사 놈이 뭔 수작을 부릴지 짐작도 안 갔기 때문이다.

모든 수색을 이루고서야 잠을 편하게 잘 수 있었다.

다음 날.

나와 라분은 전진하면 할수록 주변의 공기가 습해지는 것을 느꼈다.

"리자드맨. 영역이다."

"그래. 어떻게 하는는 잊지 않았겠지?"

"숙지 했다."

콜린이 가르쳐 줬기에 어려운 단어도 곧잘 쓰는 라분이다.

머지않아 내 감지에 커다란 생물체 하나가 감지되었다.

"조금 먼 거리에, 리자드맨 한 마리."

"꿀꺽."

콜린에게 적당한 돈을 쥐여주고 미궁 사무소에서 리자드맨에 대한 공부를 바짝 시켰다.

전달 교육을 받은 바에 의하면 리자드맨은 보통 한 마리, 아니면 암수 두 마리가 활동한다고 한다.

덩치는 오크와 비슷하지만 지구력, 순발력이 더 좋아 한 번 포착될 경우 따돌리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천천히 접근하자."

나는 미리 합의된 사항을 위해 라분을 뒤로 세웠다.

처음 상대하는 몬스터의 경우 내가 먼저 적의 강함을 가늠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리자드맨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자 신발에 물기가 밟히기 시작했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은근히 미궁 벽을 타고 멀리 나아간다.

"빠른 접근은 힘들겠어."

더군다나 군데군데 보이는 이끼까지.

자칫 잘못하면 그대로 미끄러질 수도 있겠다.

약 20m 남겨둔 시점에서 리자드맨으로 추정되는 기척이 걸음을 멈추고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때, 나는 크게 도약해서 놈과의 거리를 10m 안쪽으로 줄여놓은 상태였다.

도마뱀의 세로로 찢어진 동공이 당황에 흔들렸다.

검염이 서린 검을 그대로 내려친다.

놈이 창을 들어 내 공격을 막았다.

하지만 내 검은 창대와 함께 리자드맨의 두 팔까지 한 번에 잘라버렸다.

이어진 올려베기에는 검염이 없었다.

약간의 저항감과 함께 놈의 목이 그대로 잘려나갔다.

깔끔한 기습.

라분이 얼른 다가왔다.

"주인. 고생했다."

"그래."

라분이 방패를 들고 리자드맨의 몸 여기저기를 쿵쿵 때렸다.

켄드릭이 전수해 준, 마나를 담은 방패를 이용해 적의 신체 강도를 측정하는 방법이다.

"어때?"

"역시. 비늘이 있으니. 오크보다 단단하다."

"방패로 충격을 줄 수 있겠어?"

"충분하다."

아무리 내가 위험을 도외시한다고 하지만 아예 맨몸으로 부딪히지는 않는다.

리자드맨 같이 처음 상대하는 몬스터는 이렇게 체계적으로 사냥 가능 여부를 검증해야 한다.

"좋아. 공양하고, 다음 기척도 감지됐어."

바로 다음 사냥을 이어간다.

이번에는 검염 없이 검을 부딪힌다.

리자드맨의 창대가 내 검을 막고, 빠르게 움직여 내 허리를 노린다.

"이크."

막무가내로 힘을 믿고 뻗어내는 오크들의 일격보다는 질이 좋은 대응이다.

하지만 형태가 잡히지 않은, 임기응변에 의존하는 리자드맨의 공격을 방어하기는 어렵지 않다.

허리를 막은 뒤 그대로 오른팔 손가락 4개 중 두 개를 베어낸다.

"크륵!"

반격을 막으며 검을 크게 휘둘렀다.

손가락의 균형이 무너진 리자드맨이 창을 놓쳤고, 나는 발로 그 창을 멀리 날려버렸다.

"라분!"

"우어어어!"

라분이 전투의 포효를 내지르며 리자드맨 앞에 섰다.

리자드맨은 몬스터답게 손가락과 무기를 잃었음에도 전의를 잃지 않았다.

그대로 돌격해 라분의 방패와 부딪힌다.

결과는?

리자드맨이 방패에 단단한 부분과 부딪혀 뒤로 밀려난다.

라분의 힘이 리자드맨 한 마리보다 더 강하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라분이 기세를 죽이지 않고 그대로 방패를 앞세워 리자드맨과 재격돌했다.

그런데, 리자드맨이 몸을 비틀며 라분에 맞섰다.

"응?"

무게중심을 흩뜨려뜨리는 공격. 방패 돌격에 대한 대응으로는 합격점을 주기 힘들다.

하지만 나는 몸을 돌린 리자드맨의 등 뒤에 달린 무언가를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바로 리자드맨의 꼬리다.

반동을 받아 세차게 휘둘러지는 모습이 제법 무섭다.

"라분! 꼬리 조심!"

"흡!"

내 말을 듣고 본인의 허리를 향해 날아오는 꼬리를 발견한 라분.

오히려 돌격을 선택한다.

"우어어어!"

몸을 방패에 바짝 붙여 리자드맨과 충돌하니 이미 무리한 자세를 잡은 리자드맨이 허물어지고, 라분은 허리에 일격을 맞았지만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리자드맨과 같이 넘어진 자세 그대로 검을 끌어올려 도마뱀의 턱을 뚫었다.

뇌까지 닿은 검이 그대로 리자드맨의 생명을 앗아갔다.

나는 검자루를 들고 넘어진 라분의 목덜미를 툭 쳤다.

"리자드맨 한 마리가 더 있었으면 방금 죽었어."

"⋯⋯꼬리 공격. 예상 못했다."

"확실히,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들어오네."

미리 콜린의 교육을 통해 리자드맨의 꼬리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도, 라분도 꼬리 공격을 예상하지 못한 건 뼈아픈 실책이다.

만약 이런 사전 점검 없이 그대로 전투에 들어가 일격을 당했다면?

부상을 입고 탐험 복귀를 선택했겠지.

부상 회복에 드는 시간 소비는 덤이고.

"더 조심하자. 꼬리 쪽도 계산에 무조건 넣어야겠어. 허리는 어때?"

"문제없다."

마지막 점검은 온전한 리자드맨의 상대다.

미리 우리의 존재를 알려 적 리자드맨이 대비할 시간을 준 뒤, 전위에 라분을 내세운다.

라분이 적절히 탱킹을 하고, 최소한의 검염을 앞세운 내가 리자드맨을 공격하는 진형.

오크 세 마리를 동시에 상대할 때보다 훨씬 쉽게 전투를 이끌어나갈 수 있었다.

리자드맨 한 마리 한 마리의 능력은 오크보다 강력하다.

하지만 최대 두 마리씩 돌아다니기에, 소수로 활동하는 우리 파티에게는 오히려 오크보다 적합한 부분이 있었다.

나는 지난번에 완수하지 못한 의뢰 목록을 떠올렸다.

왠지 오기가 생겨 그대로 뜯어 다시 가져왔다.

물론 사무소 직원 카일의 배려를 받아 접수비를 내지는 않았지만.

[리자드맨의 온전한 꼬리 5개]

[리자드맨의 발 3개]

[리자드맨 주술사의 지팡이 1개]

'리자드맨 주술사.'

이번 탐험의 추가 목표인 주술사.

지금 이 기세라면 한 번 도전해 볼 수 있겠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33

리자드맨을 상대할 때, 즉 전투에서 우리는 조심에 조심을 거듭했다.

하지만 탐험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다.

무슨 말이냐고?

일반적으로 탐험은 인내가 미덕으로 통한다.

각자 자신의 목숨이 걸려있기에 돌다리를 수십 번 두드려가며 진행하고, 또 그렇게 진행해야 하는 것이 탐험이다.

보통 탐험가들은 미답지의 외곽을 사과 돌려깎듯 돌아들어가며 지형을 숙지하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깊게 나아가는 것을 정석으로 삼는다.

하지만 우리는 아니다.

"물이 조금씩 깊어지네."

한 방향을 정하고, 마치 사과를 송곳으로 찌르듯 탐험을 진행했다.

지형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우리에게는 엄청난 리스크가 있는 진행 방식이다.

이는 무한 회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나만의 방식이었지만, 내 탁월한 감지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먼 거리에서 적을 미리 감지할 수 있지 않았다면 꽤 많은 위기 상황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들을 굳이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라분은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우직하게 나를 따를 뿐이다.

"라분. 리자드맨 두 마리다. 한 번 해보자."

"알았다."

처음으로 상대하는 리자드맨 두 마리.

수적 우위를 점할 수 없기에 기습을 준비했다.

감지 능력을 통해 미리 탐지한 길로 리자드맨들을 앞지르고, 매복한다.

마침내 리자드맨이 모습을 드러내고.

"우어어어!"

라분의 방패 차징이 리자드맨 한 마리의 측면을 강타했다.

"크르르!"

즉각적으로 상황을 이해한 다른 한 마리가 비어있는 라분의 하체에 창을 찔러왔다.

오크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신속한 대응.

하지만 라분의 뒤에는 내가 있었다.

애초에 이 돌격도 나를 믿었기에 이루어진 공격이었고.

내가 창을 걷어내고 그대로 검염을 이용해 리자드맨에게 제대로 일격을 먹었다.

아마 암컷인 놈이 그대로 몸이 양단당해 죽었고, 수컷인 놈은 나자빠진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라분에게 일격을 당해 다시 몸을 눕혔다.

익숙한 라분의 마무리 일격.

턱이 꿰뚫린 리자드맨이 그대로 절명했다.

"후. 간단하네. 라분. 어때."

"괜찮다."

그 뒤에는 두 마리씩 구성된 리자드맨의 파티를 발견해도 무리 없이 전투를 계획하게 되었다.

그렇게 계속 깊숙이 나아가자 물이 신발의 밑창을 거의 다 적시기 시작했다.

비린내도 꽤 나고, 온도도 적당히 올라 찝찝해지기 시작했다.

"장화 신자."

"알았다."

배낭을 뒤져 미리 준비한 장화를 신었다.

이때를 대비해 미리 길을 들여놔서 신고 활동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나는 대략적으로 그려진 미궁 4층의 지도를 살폈다.

내가 제대로 온 것이 맞다면 이제 리자드맨 구역의 외곽 중앙 정도이고, 조금만 더 들어가면 본격적인 리자드맨 서식처가 나온다.

등급으로치자면 C급과 B급 사이.

정상적인 파티라면 이곳을 경계로 외곽을 들락날락거리며 안정적인 탐험을 꾀할 것이다.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지만.

"좀 더 들어가보자."

그런데 놀랍게도 외곽에서는 보이지 않던 다른 파티가, 더 깊숙이 들어가자마자 2개나 감지되었다.

이는 중요사항이기에 라분에게도 공지했다.

"알아둬. 접촉은 절대 안 할 거지만."

"알았다. 클라이머. 일수도?"

"흠."

당연히 가능성은 배제하지 않았다.

최근 클라이머 놈들에게 데인 적이 한두 번인가?

하지만 이 구역은 구트란이나 게랄프의 구역과는 한참 떨어져 있고, 클라이머 목격 제보도 없는 곳이다.

일반적인 탐험 파티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일부러라도 접촉하지는 않을 거니까. 저쪽도 알고 접근하지는 않을 테고."

"그래도 조심. 해야겠다."

"그래."

어차피 상당한 거리가 있다.

감지 능력으로 4위계들에게 인정받은 나조차도 감지만 겨우 할 수 있을 정도니.

다만 우려되는 건 두 파티가 비교적 가까이 위치하고 있다는 것 정도?

"한 번 마주칠 수도 있겠는데."

거기서 신경을 껐다.

우리보다 깊은 곳에서 사냥을 하는 만큼 두 파티가 연합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았기 때문이다.

"조심해야지. 별일이야 있으려고."

내 말은 꼭 이상한 데에서 들어맞는 게 문제다.

다음 날. 우리는 어제보다 더 깊숙한 곳으로 진출해 리자드맨 세 마리가 한 번에 움직이는 것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세 마리야."

"그렇다는 건⋯⋯."

"그래. 챔피언 아니면 주술사일 가능성이 있어."

보통 암수 두 마리씩 짝을 이루는 리자드맨이 세 마리가 있다?

콜린발 정보에 의하면 특수 개체가 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챔피언이든, 주술사든, 아니라면 일반적인 리자드맨일지라도 충분히 주의를 기울어야 한다.

회피한다는 선택지는 당연히 없다.

우리는 근 30분에 가까운 추적 끝에, 겨우 매복 장소를 잡았다.

그런데 어제보다 더 가까워진 거리에서, 어제부터 감지되던 두 파티가 더 가까워져 있는 것이 감지된다.

"뭐지."

"응?"

"아니야. 집중해."

일단 우리의 일부터 신경 쓰기로 하자.

리자드맨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감지에 갱신되는 정보가 점차 늘기 시작한다.

"두 마리의 마나량은 보통, 한 마리의 마나가 비교적 많아."

"특수종."

"확정이야. 적은 마나를 가진 개체들이 앞에 돌출되어 있군. 나머지 하나는 조금 떨어져 있다."

"호위? 주술사?"

"가능성은 있어."

그렇다고 단정 짓지는 않는다.

미궁에서 단정과 고집은 생존확률을 낮추는 가장 위험한 행동이었기에.

직진길에 진입한 리자드맨이 접근하는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나는 최후에 최후까지 라분의 어깨를 잡고 있다가 리자드맨이 잠시 멈칫하는 순간, 손을 놓았다.

"우어어어!"

라분이 곧바로 뛰쳐나가며 돌진했다.

녀석의 뒤에 바짝 붙으며 적의 모습을 확인한다.

특히 맨 뒤에 있는 놈. 다른 녀석들과는 달리 치렁치렁한 옷에, 무엇보다도 도마뱀 손에 들린 지팡이.

"주술사!"

주술사를 목격했을 때의 방침은 수십 번이고 되새겨놨다.

길이 뚫려있을 경우 무조건 돌진.

"계속 가!"

학즉사법의 마나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린 라분이 돌진의 기세를 더욱 올렸다.

하지만 기본적인 거리가 조금 있었기에, 주술사가 지팡이를 휘두르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원거리에서 적을 방해할 수 있는 로그나 마법사, 사제가 없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캭캭!"

마나의 파동이 미궁 전체에 울려 퍼지며 모든 생명체에게 닿는다.

리자드맨에게 파동이 닿자, 즉각적으로 리자드맨의 몸이 부풀어 오른다.

"!"

우리에게 파동이 닿자, 순간 정신이 멍해지고 전신에 힘이 빠진다.

"!!"

"우어어어!"

다시 주술사가 지팡이를 휘젓자 이번에는 사방팔방으로 마나의 파동이 뻗어나간다.

미궁 벽이라는 장애물 없이 울려 퍼지는 파동이 빠른 속도로 내 감지에 걸리던 다른 리자드맨에게 닿는다.

주변 리자드맨들의 시선이 곧장 이곳으로 향한다.

이 모든 주술이 고작 기습을 하는 5초간 이루어졌다.

'주술이 마법보다 훨씬 빠르다더니.'

다행히 적 리자드맨들의 몸이 다 부풀기 전에 라분의 방패가 닿았다.

-쾅!

리자드맨 한 마리가 뒤로 나가떨어지고, 나머지 한 마리가 주술사와 라분 사이를 막아섰다.

내가 튀어나와 검염이 잔뜩 서린 검을 맞댄다.

"크아아!"

놀랍게도 리자드맨의 창이 검염을 버텨냈다.

"흡!"

나는 즉각적으로 공격의 방향을 수정해 힘이 월등히 강해진 리자드맨의 창의 방향을 수정해 땅에 꽂았다.

갑자기 힘이 늘어나면 그 힘을 다루는 디테일이 무뎌지기 마련이다.

3위계에 도달하고 오크 챔피언에게 적응하지 못해 죽음을 헌납한 내가 산증인이다.

나는 리자드맨의 힘을 역이용해 몸을 타고 넘어간 뒤 그대로 주술사에게 검을 휘둘렀다.

"캭캭캭!"

주술사가 지팡이를 휘두르고.

"큭!"

순간 시야가 암전 되었다.

하지만 이건 리자드맨 주술사의 악수다.

나는 감지 능력을 최대한으로 확대하여 교묘히 뒤로 몸을 빼던 주술사의 목을 그대로 베어냈다.

거기에 내게 뒤를 보인 리자드맨의 등에 검을 찔러놓고 몸을 던졌다.

먼저 나가떨어진 리자드맨이 급하게 던진 창이 내 팔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 시야에 눈을 감고 양손에 단검을 거머쥔다.

라분이 검을 휘둘러 내게 검을 찔린 리자드맨을 찌르고, 나도 라분에 맞춰 단검을 휘둘러 발목을 베어낸다.

육중한 소리와 함께 쓰러지는 리자드맨.

나는 얼른 라분의 뒤에 붙었다.

본능적으로 대응하기는 했지만 시각이 사라진 상실감은 말로 표현하기도 힘들다.

실시간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

"주술에 당했어. 눈이 안 보여."

"그런가. 그러면 저놈은 내가 마무리하겠다. 쓰러진 놈을 맡아라."

"괜찮겠어?"

평소의 리자드맨이었다면 라분을 믿었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주술이 바로 사라지지 않아 적은 거대해졌고, 우리는 쇠약해졌다.

라분이 리자드맨과의 전면전을 감당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리자드맨 주술사. 보기보다 훨씬 위험한 몬스터다.

"믿어라. 괜찮다."

나는 라분의 등을 툭 두드렸다.

"무조건 1분안에 끝내. 리자드맨 여섯 마리가 오고있어."

"알았다."

라분이 포효를 내지르며 적에게 달려드는 동안 쓰러진 적 리자드맨을 마무리했다.

곧 시야가 천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역시 지속시간이 길지는 않은 모양.

"대략 20초인가."

어느 정도 시야가 말끔해져 라분을 보자 라분이 쓰러진 리자드맨을 난도질하는 모습이 보였다.

"⋯⋯."

저건 공양하자.

주술사는 지팡이가 없어지면 안 되니까 하지 말고.

현실적으로 주술사의 지팡이가 사라질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혹시라도 사라진다면 손실 너무 뼈아프다.

상당히 사냥의 위험성이 높은 주술사의 전리품은 최대한 간직하도록 하자.

[시체를 공양합니다.]

[리자드맨 두 마리, 확인.]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진척도. 50.3%]

우리는 공양을 마치자마자 그대로 몸을 빼 전속력으로 후퇴했다.

다행히 타이밍이 맞아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리자드맨들과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다.

아직도 뻐근한 몸을 달래며 이루어진 30분의 행군.

말없이 가지는 않고, 이번 전투의 피드백도 겸했다.

"아직도 몸이 뻐근한데."

"나는 괜찮다."

"주술사가 여러 주술을 사용했지. 하루에 한 마리 이상 사냥하는 건 힘들겠어."

"보다 더 나은. 순간에 기습해야 한다."

"그래. 5초 이상 넘어가면 무조건 주술에 당한다고 봐야 해."

"눈 안 보이면. 위험하다."

"만약 너한테 그런 주술이 오면 나는 괜찮으니까 말하고 그대로 빠져."

"그러면. 주인이 위험하다."

"너를 지키면서 싸우는 게 더 위험해."

"그렇군."

주술사가 그 짧은 전투에서 시전한 주술은 여러 개였다.

적 쇠약화, 아군 거대화, 주변 아군 소집. 그리고 실명.

주술이 마법보다 위력이 떨어지지만 다재다능하다고 콜린에게 들었는데, 과연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

내 감으로 예상한 승률은 대략 90%.

뒤집어 말하면 패배할 확률이 10%다.

탐험이 불가능한 수치다.

하지만 이 사냥에 적응이 된다면 보다 수월해질 가능성이 있으니 10%의 위험부담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

그렇게 리자드맨 주술사에 대한 방침을 정했다.

"그나저나."

나는 일전에 감지했던 두 파티를 다시 감지했다.

30분간 걸친 행군으로 비스듬하게 가까워져 감지를 더욱 세세하게 할 수 있었다.

'더 가까워졌어.'

이제 두 파티 사이의 거리는 고작 50m. 한 파티는 가만히 멈춰 서있고, 다른 한 파티는 그 파티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

감질나서 안 되겠다.

"라분. 아까 말한 두 파티들, 한 번 접근해 보자."

"?"

의아해하면서도 나를 따라 움직이는 라분.

우리는 빠르게 움직여 100m 안쪽으로 접근했다.

이제 더 자세한 정보가 내 감지에 들어온다.

나는 입으로 라분에게 중계를 시작했다.

라분이 육포를 꺼내 내게 넘겨준다.

"가만히 있는 파티 하나는 7명. 여자 2명이 껴있고, 접근하고 있는 다른 하나는 남자만 5명."

"거리가 어느 정도인가."

"한 2분 뒤면 접촉할 것 같아."

주변을 탐색하듯 천천히 움직이는 7명의 파티.

5명의 파티가 합류를 약속한 동료라면 저렇게 조심스럽게 움직일 필요가 없다.

마침내 두 파티가 접촉하고, 5명의 파티의 움직임이 일순간에 빨라졌다.

확실하다. 습격이다.

"라분. 조심해. 5명 쪽이 습격했어."

"7명 파티를?"

"그래."

나는 휴식을 취하지도 못하고 뚫어져라 학즉사법의 마나를 운용하며 전투의 관찰에 모든 역량을 사용했다.

아직 일주일은 더 사냥할 계획이다.

저런 변수는 빠르게 해결해야 한다.

"전투 준비해. 끼어들 생각은 없지만."

"알았다."

진행되는 꼴을 보아하니, 안정적인 사냥은 불가능할 것 같다.

나는 적의 움직임을 가늠하며 검을 어루만졌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34

나는 라분과 함께 육포를 뜯으며 내 감지 능력을 탓했다.

본래 이런 습격은 미궁 저층에서는 잊을만하면 한 번씩 일어나는 편이다.

이 정도 거리라면 일반적인 능력을 갖고 있는 탐험가는 절대로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내가 생각해도 엄청나게 넓은 감지 능력으로 모든 상황을 관찰하고 있었다.

'3위계가 되어도 이런데, 4위계면, 학즉사법 2성을 이루면 얼마나 강화되는 거야?'

솔직히 지금도 감지에 들어오는 정보가 너무 많아 어지러울 정도인데, 여기서 더 강화되면 어떻게 될지 무섭기만 하다.

"주인. 말이 끊겼다."

"어, 7명 파티 남자 하나 죽었다. 아직 싸우는 중."

7명을 습격한 5명이 클라이머인지, 아직 탐험가의 탈을 쓴 놈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는 전투를 보건대 습격 자체에 목적이 있음은 확실하다.

만약 생존자를 남겨 본인들의 정체를 들키게 되면 이들의 선택지는 단 두 가지 밖에 없다.

안전지대에서 죽거나, 클라이머가 되거나.

그럼에도 이런 종류의 사건이 멈추지 않는 이유가 있다.

'편하니까.'

탐험가 파티를 털면 순식간에 평범한 탐험의 수십 배에 달하는 돈을 얻어낼 수도 있다.

그동안 목표물이 사냥한 마정석, 몬스터의 코 등의 성과, 장비들까지.

심지어 돈 많은 녀석일 경우 가족에게서 돈을 뜯어낼 수도 있다.

물론 거의 하지 않는 방식이기도 하니까.

"7명이 졌다. 흩어지고 있어."

만약 5명이 평범한 탐험가인 척 위장을 한 놈들이라면, 한 명만 놓쳐도 저들의 패배다.

일곱 중 두 명이 죽고, 나머지 다섯 명이 세 명과 두 명으로 나뉘어 도주한다.

"두 명은 우리 쪽으로 온다."

정확히는 건너편 복도라 실제로 마주칠 일은 없지만.

"주인. 어쩔거냐."

"도와줄 의리는 없지."

일곱이 다섯에게 패했다.

다섯에게서는 어떠한 피해도 찾아볼 수 없다.

4위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숙련된 3위계 두엇은 있는 것이 확실하다.

정면 승부를 했다가는 큰 곤경을 치를 것이 확실했다.

"주인. 개인적으로는 도와주고 싶다."

"응? 라분아? 왜?"

"잠자리가 찜찜해질 것 같다."

"안 돼. 죽을 확률이 훨씬 높아."

"알았다."

이길 확률이 1%라도 있는 한, 이 전투는 내 승리가 된다.

하지만 왜?

남을 위해 정말 무한인지도 모를 내 특성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이기적이라 욕해도 별 수 없다.

목숨은 그 무엇보다 소중하니까.

그런데 도망치는 두 명이, 공교롭게도 방향을 이리저리 꺾어 내가 있는 곳으로 오는 게 아닌가.

1분이면 시야에 잡힐 거리.

"이런 염병할! 라분아! 튀자!"

"!"

라분과 내가 부리나케 저들과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곧 걸음을 멈췄다.

"잠깐."

"주인?"

"두 명이잖아?"

다섯 명이면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내가 상대해야할 적은 고작 두 명.

두 명은 해볼 만하다.

어차피 저들의 출현으로 이번 사냥은 여기서 쫑났다.

뒤통수가 찜찜한데 어떻게 사냥을 한단 말인가.

그럴 바에는 좋은 일 하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

"칵! 퉤! 라분아. 여기 바위 뒤에서 매복하자. 죽이지는 마. 아직 누가 클라이머인지는 모르니까."

어쩌면 7명이 클라이머일 수도 있다.

곧 철벅이는 소리가 들려오고, 남녀 각 한 명씩 두 명이 꽁지가 빠져라 달리고 있다.

손에 들고 있던 무기도 던져버렸고, 온몸이 튀어오른 물로 난장판이다.

남녀 탐험가를 쫓아오는 놈들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저 정도면 빼도 박도 못한다.

'강도 탐험가로군.'

"하하하! 거기 앞에 리자드맨 있다?"

"죽이지는 않을게! 빨리 와!"

나는 적당한 타이밍을 계산해 쥐고 있던 라분의 어깨를 놨다.

"지금!"

"음!"

남녀가 지나간 뒤 라분이 그대로 돌진했고, 그 뒤를 바짝 쫓던 놈 중 한 명의 허리를 그대로 들이박았다.

"끄아아악!"

저놈, 이제 서서 오줌은 다 쌌다.

"!"

급하게 걸음을 멈추는 나머지 복면인.

남녀 탐험가는?

뒤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인지조차 못한 채로 뛰어가버린다.

"⋯⋯."

졸지에 똥을 맡았군.

"씨발! 뭐야!"

복면인의 검에는 줄기줄기 검염이 뻗어있다.

보아하니 라분에게 당해 허리가 꺾인 놈도 3위계다.

하지만 방심이란 게 이렇게 무섭다.

"작업은 빨리빨리 끝내야지. 응? 시끄러워서 사냥을 할 수가 없잖아."

"무, 무슨."

자신이 부딪힌 놈이 일어나지 못할 것을 확인한 라분이 내 앞을 막아섰다.

"싸게싸게 가자. 복면 쓴 거 같은데 탐험가 맞지?"

"!"

"어차피 도망가면 내가 저 녀석 데리고 안전지대 갈 텐데. 어떻게, 클라이머로 업종 변경할 텨?"

"!!"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겠지? 덤벼."

라분이 굳게 방패를 잡고 천천히 녀석에게 다가갔다.

나는 라분 뒤에 바짝 붙어 녀석을 바라봤다.

되도록 빠르게 끝내고 튄다.

다른 3명을 쫓은 놈들이 이제 막 마무리를 하고 호각을 불고 있다.

필시 이 두 명을 찾는 것일 터.

하지만 전투에 집중하는 놈은 차마 호각을 꺼내 불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결국 놈의 선택은 하나다.

"흡!"

검염이 불같이 피어오르며 라분의 방패를 찔러왔다.

명백히 자신보다 높은 위계의 일격임에도 라분의 대응은 침착하다 못해 고요했다.

그림과 같은 흘려내기로 방패에 최소한의 피해를 입으며 검을 미끄러뜨리는 라분.

교육에 거의 금화 2개를 투자한 보람이 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튀어나갔다.

"!"

녀석이 급하게 검을 돌리며 내 일격을 막았지만 이미 두 호흡 넘게 내가 이득을 본 상황이다.

강하게 연속으로 검을 내리치며 녀석이 호흡을 되찾을 틈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수십 번의 내려치기 끝에, 놈의 몸이 열렸다.

경악으로 휩싸이는 눈. 크게 떨리는 팔. 복면 너머로 서서히 벌어지는 입.

이 모든 동작이 녀석의 유언이었다.

내 검이 목을 꿰뚫자, 이내 온몸에 힘이 빠지고, 파르르 떨리는 팔이 죽음을 기다리며 쓰러진다.

"후."

라분은 어느새 허리가 부러진 놈의 무기를 전부 빼앗고, 복면을 휙 벗기고 있었다.

반쯤 눈이 풀려있다.

"몇 살일까?"

"대충. 40대 중반 같다."

라분의 말대로 놈은 켄드릭과 비슷한 연배였다.

머리에 물을 뿌리자 이내 정신을 차린다.

"으으. 아."

"이거, 살기 글렀는데?"

"아이가, 둘이나 있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그런 것 같다. 곧 죽겠다."

"흠."

어차피 목덜미만 가지고 가면 된다.

파티의 탐험 신고서를 보면 나머지 놈들은 전부 알 수 있으니.

나머지 세 명이 천천히 접근하고 있었다.

길이 아주 척척 들어맞는 것이 모종의 접근 방법이 있는 듯했다.

"제발. 10살 아들. 8살 딸이⋯⋯."

"아저씨. 시끄러워요. 그러면 평범하게 돈을 벌었어야지. 이게 뭡니까?"

"아, 아."

"라분. 목덜미 뜯어. 죽여줄 가치도 없다."

남자는 산 채로 목덜미가 뜯겼다.

나도 내가 죽인 놈의 목덜미를 뜯고 녀석들의 품을 뒤졌다.

꿰 두툼한 돈주머니와 검 두 개를 비롯한 필요한 것들을 챙기고 얼른 자리를 벗어났다.

이 목덜미의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얼른 증언자를 찾아야 한다.

다행히 도망친 남녀가 곧 내 감지 범위에 들어왔다.

"휴. 찾았다."

미궁 구석에 쭈구려 박혀있다.

나와 라분이 일부러 인기척을 내며 접근했다.

둘이 꼭 껴안으며 숨을 죽이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딱 목소리가 들릴 거리에서 소리쳤다.

"어이! 형씨들!"

"⋯⋯."

"나 클라이머 아니야! 이거 받아! 목소리도 다르잖아!"

"⋯⋯."

나는 돌에 묶은 놈들의 두건 두 장과 목덜미를 남녀의 앞에 던졌다.

피 묻은 두건을 본 이들이 떨리는 손을 들며 바위틈에서 걸어 나왔다.

"뭐 단검도 없이 도망쳤어?"

"⋯⋯살려주세요."

"안 죽어! 빨리 와. 시간 없으니까!"

내가 벽을 검으로 탕탕 치며 재촉하자 남녀가 느린 걸음으로 다가왔다.

"정말 아니죠?"

"세상 속고만 살았나. 라분. 방패 내밀어봐."

"알았다."

"이 방패. 클라이머 놈들이 쓰던 거 아니잖아."

"⋯⋯맞습니다."

"너네 파티 것도 아니지?"

"네."

"내가 놈들 시체도 보여주고 싶지만, 그건 너무 위험해서 안 돼."

나는 녀석들이 지나갈 수 있게 얼른 길을 텄다.

"앞서 가."

"네?"

"내가 너네 뭘 믿고 등을 맡기냐? 길 알려줄 테니까 앞서가라고."

배낭도 갖다 버렸고, 무기도 없다.

그야말로 고기 방패나 다름없다.

내 성난 눈길을 이기지 못하고 어기적어기적 걸어 앞서나가는 둘.

그렇게 기묘한 동행이 시작되었다.

"난 루카스, 이쪽은 라분. 거기서 오른쪽으로 꺾어."

"⋯⋯."

"통성명 안 할 거야?"

"스쿱입니다."

"리아나예요."

"그래. 나머지 친구들은 다 죽었어. 희망 갖지 말라고 미리 말해주는 거야."

잠시 멈칫한 두 사람의 몸이 가볍게 떨린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사실을 미리 말해줘야 내 수고를 덜지.

"아주 뭣 같은 상황인 거 알아. 하지만 응? 일단 살고 봐야지. 얼마 줄 수 있어?"

"네?"

"목숨값."

"아."

"발은 쉬지 말고. 잘못하면 뛰어야 될 수도 있어."

남녀의 걸음이 빨라졌다.

대답은 조금 늦게 흘러나왔다.

"2골드, 정도."

"저도 그쯤."

"됐다 그 정도면. 라분. 검 줘."

"알겠다."

라분이 터벅터벅 걸어 배낭에 찔러 넣었던 클라이머들의 검을 건넸다.

"받아라. 무겁다."

"아, 네?"

"계약. 했다. 같은 편."

"라분. 말 잘했다. 저기 앞에 리자드맨 한 마리 있는데, 뭐 맨몸으로 싸울 거면 받지 말고."

남녀가 부랴부랴 검을 집어 들었다.

"둘 다 딜러지? 2위계?"

"네."

"딜러가 검을 놓으면 쓰나. 너네 쫓던 놈들이 쓰던 거야."

나는 성큼성큼 나아가 녀석들의 어깨를 툭 치고 배낭을 벗어던졌다.

"리자드맨 한 마리 50m 앞이야. 라분 가자."

"알겠다."

"너네는 저거 들고 따라오고!"

리자드맨을 도륙하고, 마정석을 뽑을 때쯤 스쿱과 리아나가 도착했다.

둘이서 리자드맨을 잡는 모습을 보니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다.

'합격.'

일부러 던져놓은 배낭도 가지고 따라온 걸 보니 앞으로도 도망가지는 않겠다.

도망가도 내 손바닥 안이지만.

혹시나 해서 여러 번 둘의 몸을 살폈다.

하지만 구트란의 향수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클라이머들과의 거리를 한참 벌려놓고서야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내가 건네주는 육포를 받아든 스쿱이 먹을 생각은 않고 눈물만 뚝뚝 흘린다.

나는 한참을 기다리다가 툭 내뱉었다.

"참 좆같지?"

스쿱이 잠깐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이내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먹어. 아직 3일은 더 가야하니까."

이런 말 밖에 해줄 수 없다.

탐험가.

한 번 탐험하면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 달 놀고먹을 돈을 벌 수 있다.

하지만 약간 삐끗하거나 운이 안 좋으면? 그대로 저승길 예약이다.

미궁 저층의 탐험가는 그런 직업이고, 마정석이 인간을 잡아먹는 아귀 소굴이다.

이제 '진짜' 탐험가 취급을 받는다는 7층까지는 갈 길이 너무나도 멀다.

어째 가는 일마다 사건을 몰고 다니는 느낌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내 운명인 것을.

스쿱이 푸는 파티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라분을 슬쩍 바라보았다.

라분은 스쿱의 말을 경청하며, 추임새를 넣거나 고개를 끄덕거려주고 있었다.

참 착한 놈이다. 영악한 나와는 다르게.

'이 녀석이랑은 끝까지 가야지.'

비록 라분의 성장이 2위계에서 멈추더라도, 학즉사법이 1성에서 머물더라도 상관없다.

정 탐험이 안되면 짐꾼으로라도 쓰면 된다.

'절대 죽을 리 없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쿡쿡 웃고 있는데, 내 감지에 의문의 기척이 잡혔다.

총 세 명. 내가 따돌린, 아니 따돌렸다고 생각한 놈들의 수와 같았다.

흔적은 최대한 지웠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이번 일에 목숨이 걸렸다 보니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았다.

나와 라분이 죽인 두 명 모두 3위계의 전사였다.

이게 우연일까? 아니다.

적 모두 3위계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이 파티의 전력은 3위계 5명.

미궁 4층에는 과잉을 넘어선 수준이다.

'사람 죽이려고 모인 놈들이었군.'

다른 이유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다.

어떻게 이놈들을 요리하지?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35

미궁 4층. 나와 라분, 그리고 스쿱과 리아나.

우리를 쫓아오는 예비 클라이머 셋.

아주 고약한 상황이다.

나는 이들을 데리고 적들과 응전했을 때를 가정했다.

우선 적들의 실력부터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스쿱. 최소 네 명이 검염을 두르고 있었다는 말. 확신하지?"

"맞습니다."

내가 그 넷 중 둘을 죽였으니 적 세 명 중 두 명은 무조건 3위계다.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쳤을 이들과 싸운다?

우리의 전력은 3위계 한 명과 2위계 세 명. 그중 2위계 두 명은 이미 기세가 꺾일 대로 꺾여있다.

미끼 역할조차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놈년이다.

미궁벽에 머리를 쿵쿵 찧으며 생각을 마쳤다.

"안 되겠군."

정면 승부의 예상 승률은 5% 미만.

무한 회귀가 있으니 지지는 않겠지만, 몇 번을 죽어나갈지 감도 안 잡힌다.

"주인. 적이 오고 있나?"

"그래. 확실하게 이쪽 방향으로 오고 있어. 실력 좋은 로그가 있나 봐."

"맞서는 건 힘들다."

"알아."

나는 지도를 쭉 훑어본 뒤에 방향을 잡았다.

"쉬지 않고 움직이는 수밖에. 떨쳐낼 때까지 움직이자고. 가자!"

어차피 우리가 안전지대로 들어가면 저들은 죽은 목숨이다.

시체에서 뜯어낸 목덜미로 신원을 조회하고, 같이 탐험 허가를 신청한 파티원을 알아내면 끝이다.

스쿱과 리아나에게는 내 감지 능력을 설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미 녹초가 된 몸을 움직이라는 내 말에 약한 반항을 시도했다.

"제대로 쉬지도 못해서 너무 힘듭니다.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데, 조금만 더 쉬시죠."

"판단은 내가 한다. 이제 길 알잖아? 그러면 여기서 쫑치던지."

"⋯⋯."

"아. 목숨값은 제대로 줘야 하고. 네가 무사히 살아돌아갔을 때의 이야기지만."

스쿱과 리아나는 찍 소리도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지옥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저들은 내 감지 능력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나는 놈들이 빠르게 접근하면 빠르게, 느리게 접근하면 느리게 움직이며 체력 소모를 최소화했다.

하지만 의아한 점이 있었다.

"라분. 흔적을 최대한 지우고 가는데, 어떻게 위치를 아는 걸까? 나처럼 확신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모르겠다."

"댁들은 짐작 가는 게 있쇼?"

스쿱과 리아나도 통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그래서 나는 지도를 보며 몇 가지 시도를 했다.

잠깐 분기가 나눠졌다가 합류하는 미궁의 길에서, 일부러 인원을 둘로 쪼갰다.

그 후로 녀석들이 어느 팀이 지나간 길ㅈ을 따라오는지 검사했다.

그렇게 인원을 바꿔가며 다섯 번.

"모두 스쿱이 있는 조를 선택했어."

"다섯 번. 우연 아니다."

"그래."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앞장선 스쿱을 관찰했다.

아무리 봐도 이상한 건 없다. 구트란의 향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 원인을 제거해 봐야지.

"5분 쉬자."

내 말에 두 사람의 몸이 그대로 무너진다.

장장 8시간의 강행군.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둘에게 너무나 힘든 시간이었겠지.

나는 얼른 스쿱에게 다가갔다.

내 손에는 비누와 여분의 옷이 들어있었다.

"스쿱. 옷 다 벗고, 저기 웅덩이에서 씻어."

"예?"

"씻으라고."

리자드맨의 습지 구역이라 가끔 웅덩이가 깊은 장소가 있었다.

그래봤자 발목 높이의 물이 무릎 언저리까지 차오르는 정도였지만.

"갑자기 왜⋯⋯."

"말이 많아. 옷 전부 벗고, 확실하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복창."

"머리부터 발끝까지?"

"좋아."

리아나가 대자로 엎어진 채로 조용히 고개만 돌렸다.

스쿱이 옷을 벗고 온몸을 박박 씻는 동안, 나는 스쿱의 옷가지들을 멀리 집어던졌다.

스쿱은 더 이상 의문도 못 내뱉고 내가 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바로 출발하자."

적이 5분 거리를 따라붙었다.

15분 정도 거리다. 조금만 주저해도 따라잡힌다.

나는 감지를 활성화하며 적들이 내가 버린 옷가지에 접근하는 것을 확인했다.

"과연."

적들은 옷가지 근처에서 잠깐 모이더니 1분 뒤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향은 정확히 우리가 이동하는 장소였다.

"옷 냄새가 아니었다고?"

여러 번 따돌리기 위해 길을 틀었지만, 적들은 여전히 우리를 따라온다.

그것도 빙글빙글 도는 길까지 확실하게.

"돌아버리겠군."

다들 많이 지쳤다.

나도 라분도 슬슬 땅에 발을 질질 끌 정도다.

물이 첨벙거리는 길을 걷는 건 평지를 걷는 것보다 더 힘이 드는 법이다.

나는 문득 궁금한 사항이 생겨 입을 열었다.

"헥헥. 스쿱."

"읍!"

스쿱이 벽에 대고 헛구역질을 한 뒤 답했다.

"네. 헉. 헉."

"리자드맨 구역에서 꽤 깊이 들어왔던데, 아무리 7명이라도 너무 무모한 탐험 아니야?"

"그건⋯."

스쿱은 잠깐 답을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다가 이내 한숨을 쉬고 답했다.

"어차피 한 번 탐험하는 거, 리자드맨 주술사를 잡아보자고 해서 의견을 모았습니다. 나름 신중하게 움직인다고 움직였는데 이런 사달이."

"그래?"

나는 이 대답 사이에 꽤나 긴 간극이 있었음을 놓치지 않았다.

확실하다. 이 녀석, 뭔가 숨기고 있다.

"⋯⋯."

하지만 굳이 캘 생각까지는 들지 않는다.

어차피 뭘 숨기든 지금 도망치는 우리와는 아무 상관 없으니까.

이후 두 번의 분기에서도 여전히 스쿱만을 따라오는 적들.

나는 다음 수를 골랐다.

"내가 준 칼, 그냥 다 버려. 아니, 저 구석에 숨겨놓자."

어쩌면 내가 노획한 칼이 이정표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무기를 빼앗겠다는 말에 스쿱이 꽤 격하게 저항했지만 내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안 버려? 내가 너네를 버릴까?"

"버리겠습니다."

과연?

적들이 이번에는 숨겨놓은 검을 발견하지도 못하고 우리를 쫓아온다.

"망할."

이제는 방법이 없다. 그냥 지구력 싸움이다.

나는 쓰러진 리아나를 질질 끌고 물이 고여있는 곳으로 갔다. 그 뒤 얼굴을 물속에 박아 넣었다.

지쳐 쓰러진 년이 어찌 이리 힘이 좋은지, 하수구에서 건져올린 메기처럼 팔딱거린다.

내가 적당한 타이밍에 머리를 쥔 손을 놓자 벌떡 일어나 물을 한가득 뿜어낸다.

"멈추면, 나한테 죽는다. 농담 아니야."

"라분. 죽는다."

"넌 닥치고 일어나."

여기서 어쩔 수 없이 5분을 쉬었다.

하지만 우리를 쫓아오는 놈들은 쉬지 않았다.

15분의 거리가 10분으로 좁혀졌다.

나는 안전지대까지 남은 거리를 대략적으로 계산했다.

"지금 속도로 6시간인가."

"루카스 님. 설마 6시간 동안 쉬지 않고 걸으려고 하시는 겁니까?"

"왜 아니겠어? 걱정 마. 9시간만 걸으면 주변에 파티가 많아서 습격 못할 테니까."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신을 찾던 스쿱과 리아나는 하늘이 노래진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 자기들 살리자고 하는 짓임을 알고 있음에도 저런다.

어쩔 수 없다. 내 감지 능력을 조금 공개하는 수밖에.

"빨리 움직여. 10분 거리다."

"정말입니까?"

"그럼 내가 미쳤다고 지금 이렇게 쉬지 않고 움직였겠어."

"하지만⋯"

"9분."

스쿱과 리아나가 입을 다물고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습지대를 벗어나 평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몇 시간을 행군했을까.

슬슬 미궁에서는 보일 리 없는 하늘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하늘이 마치 하수구 물처럼 각양각색이다.

"으어어어."

"켁!"

"으어어."

"켁켁켁!"

"뭐야. 고블린이잖아."

고블린들이 반쯤 좀비가 되어버린 우리들을 발견하고 달려들었다.

나는 있는 힘 없는 힘을 끌어내어 무기가 없는 이들 대신 고블린들을 무찔렀다.

마나를 쥐어짠 검염으로 상대했기에 시간이 끌리지는 않았다.

"헥. 헥. 공양."

[시체를 공양합니다.]

[고블린 아홉 마리. 확인.]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진척도. 50.4%]

"쉬지 않고 뛰어!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

내 말에 모두 억지로라도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라분도 도저히 안 되겠는지 배낭을 집어던졌다.

"나중에. 찾으러 온다!"

"남아있겠냐 등신아!"

그러면서도 방패는 버리지 않는다.

상당히 마음에 들어 했으니 어쩌겠냐마는.

공양되는 고블린과 라분의 배낭을 발견한 적들이 최후의 힘을 다해 달려오기 시작한다.

일단 속도가 우리보다 빠르다.

다 따라잡히기 전에 미리 질러놓자.

"씨발! 따라잡히겠어!"

"으아아아!"

스쿱이 꺾이려던 다리를 펴면서 침을 질질 흘리며 달린다.

리아나도 흐느적거리머 어떻게든 달린다.

나와 라분은 각각 리아나와 스쿱의 뒤를 받치고 밀며 달렸다.

놀랍게도 먼저 나가떨어진 놈들은 우리를 쫓아오던 놈들이었다.

"멈췄다. 멈춰!"

더 거리를 벌리면 좋겠지만 스쿱도 리아나도 딱 여기가 한계다.

약 3분 거리.

3위계라면 어렴풋이 인기척을 감지할 수도 있는 거리다.

"제대로 쉬어. 저 녀석들이 움직이면 우리도 움직여야 하니까."

그게 될까 싶기는 하다.

휴식이 길어졌다. 5분이 10분이 되고, 15분, 20분⋯⋯

놈들이 발작적으로 몸을 튕겼다.

"다시 달려!"

미리 준비하고 있던 우리들이 꽁지가 빠져라 달리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1년 치 달리기는 다 했다.

그렇게 두 시간, 우리는 안전지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동안 마주친 파티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 우리의 불행을 증명했다.

우리가 안전지대에 들어서자마자 누워버리자 주변의 탐험가들이 의아해하며 접근했다.

"헉헉."

"헉헉."

제대로 답변을 못하는 사이, 내가 그토록 얼굴을 보고 싶어 했던 세 명도 비틀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가 탐험가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보고 얼굴이 똥을 먹은 듯 일그러졌다.

아직 여력이 남았는지, 리더로 보이는 남자가 목청 크게 소리친다.

"저 녀석들! 클라이머야! 모두 조심해!"

"에?"

내가 꿀꺽꿀꺽 받아먹고 있던 물통이 급하게 치워진다.

나는 어이가 없어 내게 물통을 준 탐험가를 바라보았다.

인상 좋던 탐험가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하다.

역시 선빵 필승인가.

"우리에게 덤비다가, 도저히 안 되니까! 저희가 모두 3위계입니다. 뭣 모르고 덤비더군요! 그대로 도망가서 미친 듯이 쫓았습니다! 기습으로 제 동료 두 명을 죽였어요!"

구체적인 진술까지 더해지자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점차 적대적으로 변한다.

나는 턱을 문질러 흐르던 물을 닦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달리던 도중 행색을 고치고 왔는지 검은 옷이며 복면이며 다 없었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증거가 있었다.

"야 이 개새꺄!"

"뭐 이 씹새꺄!"

"같이 미궁 사무소로 가자. 여기서는 도망칠 수도 있잖아. 어? 거기서 누가 클라이머인지 가려보자고."

눈치 빠른 탐험가들이 미궁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스윽 막아섰다.

이제는 저 클라이머 놈들도 물러날 곳이 없다.

억지로 호기롭게 외치는 모습이 애처롭다.

"가자!"

그렇게 우리는 탐험가들의 호위를 빙자한 감시를 받으며 사무소로 이동했다.

사무소의 밖이 점점 시끄러워지자 사무소의 직원들 몇이 밖으로 나왔다.

탐험가들의 대표를 자처한 이들이 사정을 설명하자 사무소의 문이 열린다.

곧 내 파티 4명과 적 파티 3명이 나란히 사무소의 안에 들어갔다.

직원의 보고를 들은 사무소의 직원, 카일이 어이가 없어 나를 바라본다.

"너는 무슨, 일감을 몰고 오냐?"

"고의로 그런 건 아닙니다."

"응? 이번에는 뭐, 클라이머로 전직했어?"

"그럴 리가요."

사무소의 직원과 친한 척을 하자 녀석들의 얼굴이 흑빛이 된다.

내게 승부를 걸었던 놈이 기세를 살리기 위해 아까 했던 말을 앵무새처럼 떠들어댄다.

"음. 일견 일리가 있군."

"하. 그러깁니까?"

"이건 일이야. 루카스. 반박해 봐."

나는 한숨을 푹 쉬며 품을 뒤져 살뭉치를 꺼냈다.

깔끔하게 잘린, 내가 죽인 놈들의 목덜미다.

"저 녀석 말로는 저희들이 저들의 무위에 꽁지가 빠져라 도망쳤다고 했는데, 그러면 어떻게 이 목덜미를 뜯어왔겠습니까?"

"이 목덜미는?"

"조회해 보십쇼. 저놈들 동료입니다."

카일이 직원들에게 받은 아티팩트로 목덜미를 검사했다.

내친김에 모인 사람 전부 검사한다.

"루카스와 라분. 한 팀이고. 스쿱과 리아나. 한 팀. 그리고 루카스 말대로, 목덜미의 주인들과 너희가 한 팀이군."

이제 모든 시선이 저들에게로 집중되었다.

잠깐 할 말을 잃은 녀석이 이내 처절하게 외친다.

"저 녀석이 발이 빨라! 잠깐 우리를 따로 따돌리고, 어, 다시 돌아와서 목덜미를 뜯어갔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이 병신아?"

"말이 안 될 건 또 뭐야?"

내가 가슴을 텅텅 쳤다.

"너네들 다섯 다 3위계인데, 우리는 연합했어도 고작 3위계 둘에 2위계 일곱이다 임마! 그런데 기습해서 둘 죽이고 다섯 죽었는데, 다시 돌아와서 목덜미를 챙긴다고?"

"그, 그래."

"우리가 클라이머라고 생각했으면 너네가 죽인 우리들 목덜미도 챙겼겠지?"

"⋯⋯."

"우리는 도망갔으니까 시간도 많았을 거 아냐. 응?"

"⋯⋯."

남자가 말을 않자, 옆에 쭈그려 앉아있던 남자가 한숨을 푹 쉰다.

"씨발. 괜히 말을 들어가지고는. 그냥 클라이머나 됐어야 했는데."

그러고는 이내 풀썩 쓰러진다.

감추고 있던 단검으로 자신의 심장을 찔러버린 것이다.

"어, 어?"

남자는 이내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너무나 강력한 자백에 발뺌하는 것도 잊어버린 얼굴이다.

즉석으로 이루어진 재판이 이렇게 끝났다.

카일이 한숨을 쉬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수고했다. 뭐, 의심도 안 했지만."

"그러려니 하렵니다. 맥주나 주십쇼."

"아주 술집 다 됐어?"

나는 맥주를 다 먹지도 못하고 그대로 뻗어버렸다.

* * *

푹 자고 일어난 다음 날.

"구해져서 감사합니다만, 돈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 스쿱과 리아나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안심했다.

저들의 눈이 노상강도치고는 너무 당당했기 때문이다.

뭔가 비장의 한 수를 숨기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나는 생각과는 다르게 시치미를 떼고 따지고 들었다.

"아니, 똥 싸러 들어갈 때랑 나올 때가 다르다더니. 딱 좋은 예시가 여기 있네. 엉?"

"라분. 화났다."

스쿱이 진정시키려는 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

"대신 돈 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드리지요."

"?"

"지금까지 그린 미궁 4층의 지도,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뭐, 어려울 것 없지."

스쿱이 내가 건네준 지도를 살폈다.

개발로 그렸지만 용케 원하는 곳을 찾아낸다.

그리고 본인의 품 속에서 지도를 꺼내더니 내 지도에 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뭐 해?"

"잠시만요."

쭉쭉 이어나가던 선이 어느 지점에 뚝 하고 그쳤다.

"이 지점입니다."

"응?"

"이 지점에서 벽에 걸려있는 어느 돌을 위로 잡아당기면, 비밀 통로가 열립니다. 아직 저희도 제대로 탐사해 본 적이 없는 미답지입니다."

"!"

"사실 저희는 이번 습격으로 죽은 3위계의 지인이었습니다. 오로지 이번 탐험을 위해 꾸려진 팀이었지요. 지인이 다른 파티와 탐험하는 중에 우연히 발견했다고 합니다."

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인다.

"형님도 죽었으니, 이 정보는 저희 목숨을 구해준 두 분께 드리려고 합니다. 이 정도면 4골드의 값어치는 할 겁니다."

"⋯⋯."

"그곳에 뭐가 있는지는 저도 리아나도 모릅니다. 무운을 빕니다."

내게 꾸벅 인사한 두 사람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미궁 1층으로 돌아갔다.

나와 라분이 타이밍 맞게 서로를 쳐다보았다.

"비밀의 방?"

"신기하다."

"언제 갈까?"

지도를 한 번 보고, 다시 서로를 보고.

아무래도 라분은 나와 같은 생각인 것 같다.

"지금?"

"지금."

마침 카일이 직원을 시켜 주워온 라분의 배낭을 턱 던졌다.

"잡소리 그만하고. 빨리 방 빼. 공짜로 재워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알겠습니다."

"응? 바로? 웬일이야?"

그로부터 하루 더 휴식을 취하고, 음식만 보충한 채 다시 미궁을 달렸다.

그렇게 체감 시간 3일 뒤.

우리는 스쿱과 리아나가 알려준 장소에 서 있었다.

나는 이곳에 오기 조금 전부터, 내 감지에 위화감을 주던 바위를 계속 쳐다보았다.

"이건가?"

스쿱의 말대로 바위를 위로 살짝 들어 올리자.

-크릉!

반대편 벽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장관이 따로 없었다.

나와 라분은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준 뒤, 비밀통로 안쪽을 향해 걸어나갔다.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아직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36

비밀통로 안쪽의 벽은 보통의 벽과는 달랐다.

"빛이 거의 안 나네."

"앞이 잘 안 보인다."

"그래도 아예 안 나지는 않고."

미궁이 아닌 지상의 일반적인 동굴에서는 벽에 빛이 나지 않아 마치 불 없는 방처럼 사방이 깜깜하다고 한다.

콜린에게서 그 말을 듣고 정말 신기해했는데, 이 비밀통로가 딱 그렇다.

"사막에 있는 동굴은 아예 아무것도 안 보인다."

"우와. 진짜?"

빛이 적다 뿐이지 아예 없는 건 아니라 앞이 어느 정도 보이기는 한다.

사실 내게는 감지 능력이 있었기에 정체 모를 생명체의 습격에는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계속 탐험을 이어가려는데, 라분이 킁킁 냄새를 맡더니 나를 멈춰세웠다.

"주인. 잠깐 기다려라."

"왜?"

"냄새. 오래되었다."

"?"

"오래되면, 안 좋다."

나는 라분의 설명을 진득이 들었다.

"환기를 시키자는 거군!"

"환기, 그렇다."

목숨은 소중하기 때문에 백 번 조심해도 문제가 없다.

다행히도 이곳은 리자드맨들이 수시로 지나는 길이 아닌지 어떠한 기척도 없다.

나는 이참에 비밀 통로 앞에서 밥을 먹으며 모래시계 하나가 전부 다 내려갈 때까지 기다렸다.

시간을 아깝게 쓰지 않고 라분과 탐험의 방법을 논의하였음은 물론이다.

"좋아. 처음부터 방패 들고 앞장서. 탐색 모드다."

"알았다."

"작전 회의 끝!"

"⋯더 없나?"

"나머지는 기합으로 어떻게든 하면 된다!"

"⋯⋯."

모래시계가 다 털어지자 라분이 비밀통로 입구에서 코를 킁킁거렸다.

점차 몸을 들이밀며 확인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이 정도면. 괜찮겠다."

"가자!"

나의 우렁찬 기합과 함께 비밀 통로 탐험이 시작되었다.

비밀 통로는 딱 한 치 앞만 보이는 수준의 빛만 뿜어내고 있었다.

그래도 벽이 골고루 빛나 길을 알 수 있다는 점이 다행이다.

우리는 신중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디뎠다.

아직 내 감지 능력에 잡히는 생명체는 없다.

지나면서 보니 벽이랑 바닥이 매끈했다.

이는 이곳에 무엇이든 생명체의 손길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10분을 걸었을까?

내 감지에 약간 찜찜한 무언가가 걸렸다.

나는 내 앞에 바짝 붙어 나아가고 있는 라분의 등을 툭툭 쳤다.

번개 맞은 듯 움찔거린 라분의 몸이 멈춰 섰다.

신경을 곤두세우려고 하길래 얼른 입을 열었다.

"적은 아니야."

"그러면?"

나는 내 바로 옆에 있는 벽을 가리켰다.

"이 벽. 상당히 찜찜해."

마치 처음 비밀통로를 발견했을 때의 그 느낌이다.

"!"

나와 라분은 이리저리 근처의 모든 벽을 살폈다.

마침내 라분이 어떤 바위를 꽉 누르는 순간.

다시 새로운 문이 열렸다.

우리는 일단 열리는 문에서 한참을 물러난 뒤, 천천히 안을 살폈다.

새로운 통로가 나왔으니 우선 이곳을 먼저 탐사하기로 했다.

라분이 또 머리를 들이밀고 냄새를 맡는다.

"괜찮다."

진입해 걸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꽤 넓은 공간이 나왔다.

"너무 어두운데."

벽이 빛나고 있었지만 너무 얕게 빛났기에 벽에서 떨어진 중심은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암흑의 바다가 눈앞에 있는 것 같다.

미궁에서는 전혀 느껴보지 못한 공포심이다.

"감지. 못하는 건가?"

"내 감지는 생명체만 감지해. 가끔 미궁 벽도 감지하기는 하지만, 저 안쪽은 모르겠어."

어둠 속에 조금 가까이 다가가니 뭔가 앞을 막고 있기는 하다.

손을 더듬어 뭔가를 잡고, 시야가 보이는 쪽으로 쭉 잡아당겼다.

놀랍게도 상당히 간단히 잡아당겨지는 의문에 물체.

'에라 모르겠다!'

뭔지는 당겨보면 알겠지!

곧 내가 당긴 물건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책상?"

"책상이다."

먼지가 거의 한 뼘은 쌓여있는 책상이다.

먼지의 양을 보아하니 역시나 꽤 오랫동안 아무도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다.

"아!"

"라분? 왜."

"책상으로. @#%&. 만들자."

"뭐?"

라분이 사막의 언어를 써 뭔 말인지 모르겠다.

이내 진득한 설명과 몸짓으로 단어를 이해했다.

"횃불?"

"횃불? 어쨌든. 만들겠다."

책상다리를 부숴 검으로 적당한 모양을 잡고, 검닦는 천과 기름을 아낌없이 사용한 뒤에 부싯돌로 불을 붙였다.

순간 불이 확 타오르더니 횃불의 끝에 안정적으로 옮겨붙었다.

시야가 확 밝아진다.

"읏!"

라분이 검을 집어넣고 한 손에는 횃불, 한 손에는 방패를 들었다.

횃불을 앞으로 기울이니 생각보다 시야가 많이 확보되었다.

"오래 못 간다. 빠르게 둘러보자."

"알겠어."

주변을 빠르게 살피니 내가 끌어온 책상 말고 다른 책상들이 몇 개 더 있다.

나와 라분은 책상 위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책상을 칼로 적당히 베어냈다.

일부를 넓게 펼쳐 불을 붙이니 시야가 더 확실하게 확보된다.

이제 광장 크기의 공간이 전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는⋯⋯."

"무슨 사무실 같은데?"

곳곳에 놓인 책상과 벽에 붙어있는 칠판이 미궁 사무소를 생각나게 하는 구조다.

나는 다른 책상 위에 있는 종이를 집어올렸다.

바스라지기 직전인 종이가 겨우겨우 형태를 잡혀 내 손에 들려올려진다.

엄청난 필기체가 내 눈을 뚫어버린다.

똑바로 쓴 글조차도 버벅대며 읽는 내게 이건 해석 불가능이다.

"검은 건 글씨요. 하얀 건 종이로구나."

그래도 이 공간에서 얻은 첫 성과이기에 미리 준비해 온 추가 배낭에 조심스럽게 접어 담았다.

다음으로는 벽에 붙어있는 선반.

나와 라분이 선반을 하나씩 열고, 안에 아무것도 없으면 그대로 서랍을 모닥불에 던져 불을 키웠다.

"종이다!"

"배낭에 집어넣어."

"필기구 같다!"

"전부 집어넣어."

영 돈 되는 건 안 보인다.

일단 천천히 절반 정도 뒤져봤는데, 때 탄 책만 한 무더기 찾았다.

"뭐 금이라도 없나."

우선 다시 광장 입구로 돌아와 모닥불을 쬐며 책을 살폈다.

총 10권이 있었는데, 전부 선반 안에서 찾았으며, 일단 제목은 각자 달랐다.

"하. 글을 못 읽으니 뭐 할 수 있는 게 없네."

"⋯⋯."

이게 엄청난 호흡법인지, 아니면 마도서인지 판별할 수 없으니 답답해 죽을 노릇이다.

다음번에는 정말 글을 읽을 줄 아는 놈을 구해서 같이 다녀야겠다.

그런데, 라분이 어느 한곳을 빤히 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라분의 시선을 따라가다 이내 벽밖에 없는 것을 보았다.

"어딜 보는 거야?"

"저기. 입구 근처 벽. 뭔가 이상하다."

"응?"

라분이 벌떡 일어나 미궁 벽의 한 부분을 짚었다.

"여기다."

"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정말로 뭔가 이상했다.

벽에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동그란 홈이 있었다.

"진짜 뭐지?"

"꼭 마정석. 모양이다."

"!"

나는 허리에 찬 주머니에서 하급 마정석 하나를 꺼내들었다.

정말 크기가 딱 맞는다.

나와 라분은 서로를 한 번 쳐다본 뒤 마정석을 그대로 벽의 틈에 밀어 넣었다.

그러자.

-팟!

천장이 순식간에 밝아지며 주변을 한 번에 비쳤다.

"읏!"

"읏!"

갑작스러운 빛에 나와 라분이 눈을 가리며 뒷걸음질 쳤다.

이내 눈물을 닦고 천천히 앞을 바라본다.

천장의 커다란 반구가 마정석의 에너지를 빨아들이면서 빛나고 있었다.

그 빛에 의해 밝아진 내부가 한눈에 들어온다.

우리가 탐색한 책상들 외에도 많은 책상이 늘어져 있고, 그 위에는 드문드문 물건들이 올려져 있다.

건너편에는 개인용 책상 몇 개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꽤 다양한 물건들이 놓여 있는 게 보였다.

라분이 들고 있던 횃불을 모닥불에 휙 던져 넣었다.

"싹 뒤져!"

우리는 곧바로 달려들어 집기를 때려 부수며 물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닥에 드문드문 해골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두개골이 부서진 해골부터, 상 하체가 나뉘어 따로 떨어져 있는 해골까지.

총 수십 구가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다.

"습격당했나? 확실히 급하게 도망친 티가 나네."

자세히 보니 책상들에는 대부분 피가 흩뿌려진 흔적이 있었다.

그 모양을 보니 대부분 검으로 당한 상처다.

나는 이쯤에서 분석을 마쳤다.

과거에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든, 나와는 크게 연관이 없는 일이다.

개인용 책상에서 내가 원하던 성과들이 쏟아져 나왔다.

명백히 마나를 품고 있는 아티팩트가 둘, 어느 시대의 것인지 모를 금화가 여덟 개에, 은화 다수.

각종 문서와 필기구들.

아티팩트는 목걸이와 책갈피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품고 있는 마나의 양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일상용이군.'

그래도 이게 다 돈이 될 수 있다.

배낭에 전부 쑤셔 넣으니 마음이 든든해진다.

선반이 텅텅 빈 것으로 보아 꽤 많은 물건이 유실된 것 같은데, 남아있는 게 이 정도면 대체 원래 이곳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주인! 뒤에 공간이 있다!"

"갈게!"

정말 왼쪽 끝부분에 사람이 충분히 지나갈만한 공간이 있었다.

들어가니 라분이 멍하니 한곳을 바라보고 있다.

"문이다."

꽤나 고풍스러운 문.

내 감지에 어떤 생명체도 느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다행히 안은 환히 밝아져 앞을 보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방은 엉망진창으로 부서져 있었다.

원래의 집기였을 물건들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있었지만, 단 한곳은 어떠한 잔해도 보이지 않았다.

방의 정중앙.

그곳을 본 내가 멈칫했다.

어질러진 집기들 대신 백골이 된 시체가 있었다.

그런데 시체의 모양이 희한했다.

목과 팔다리가 몸통과 한참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배 위에 가지런히 올라가 있는 지팡이 하나.

"원한관계였던 자들의 습격을 받은 건가."

그렇다면 지팡이는 원래 배 위에 꽂혀져 있었을 거라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아마 이곳의 책임자로 보이는 인물의 시체가 이렇게 끔찍한 모양으로 전시될 리가 없었다.

"시체는 갖다 버리고, 지팡이만 챙기자."

"알겠다."

부서진 집기에서는 어떠한 물건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안에서 화염 마법이라도 사용했는지 전부 불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밖으로 나와 전체적으로 다시 뒤져봤지만 추가적으로 별다른 성과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얻은 물건들을 모두 배낭에 쑤셔 넣었다.

배낭이 꽤 묵직해졌지만 들고 다니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꽂아놨던 마정석을 뽑으니 다시 어두워지는 통로.

우리는 통로를 나와 다시 앞으로 걸어나갔다.

"통로. 꽤 길다."

"그러게."

내 감지에 걸리지 않았기에 추가적인 통로도 없는 것 같고, 갈림길도 없었다.

배낭 밖 주머니에 꽂혀있던 모래시계를 꺼내니 이미 한시간도 넘게 걸었다.

"뭐지?"

나는 그때서야 이상함을 느끼고 멈췄다.

곡선도 아니고 갈림길도 없는 통로를, 장장 한 시간 동안 걷는다고?

미궁 4층의 구조를 생각해 볼 때,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렇게 올곧게 뻗은 직선 길을 지나가면서 다른 길과 교차하지 않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집중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려가고 있어!"

"응?"

"내려가고 있다고!"

"그게 무슨 소리인가. 쭉 뻗어 있는데."

"아주 조금씩 내리막길이라고 이 멍청아!"

내가 매끈한 바닥에 물통의 물을 조금 부었다.

물은 잠깐 고이는듯하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천천히 앞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이 거리 동안 천천히 내려가기만 했다면, 지금 여기는 어디란 말인가?

"꿀꺽."

고요한 미궁에 내 침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계속 가자."

그렇게 미궁을 걷기를 추가로 1시간.

우리는 통로의 끝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동안 계속 내리막길이었다면.'

얼마나 낮은 곳으로 움직였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우리의 앞을 막아서는 벽 근처에 너무나 노골적으로 튀어나와있는 바위.

먼지가 꽤나 쌓여있는 것이 역시나 이용객이 아무도 없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

"⋯⋯."

이제 와서 돌아갈 생각은 없다.

내가 굳게 고개를 끄덕이자 앞장선 라분이 바위를 들어 올렸다.

덜커덩 소리를 낸 벽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미궁 8층에 진입합니다.]

[주의! 탐험을 통한 신규 층 진입이 이루어질 경우 반드시 해당 층의 안전지대로 복귀해야 층 진입이 인정됩니다.]

[기존 층으로 복귀할 시 해당 층으로 재진입할 수 없습니다.]

나와 라분은 미궁 8층에 진입했다.

만약 안전지대를 통한 복귀에 성공한다면, 미궁 탐험 일정을 1년 넘게 단축할 수 있는 성과를 얻은 것이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37

미궁 8층으로의 진입!

감격이었다. 여기가 미궁 8층의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안전지대로 복귀할 수만 있다면 순식간에 미궁 5, 6, 7, 8층의 입장 권한이 생긴다.

그것만으로도 년 단위의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내가 기쁨에 겨워 방방 뛰고 있자 라분이 나직이 말했다.

"주인. 8층 탐험. 위험하다."

"당연히 위험하지."

새로운 지형, 새로운 몬스터, 새로운 장소.

모든 게 새롭다.

위험하지 않을 리가 없다.

하지만 나아가지 않으면,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나는 비밀통로를 돌아보았다.

이 통로는 세상에 알려진 기존의 통로와는 다르다.

원래 미궁의 층에서 다른 층으로 가는 통로는 소리 소문도 없이 생성되고,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진다.

그렇기에 탐험을 통해 새로운 층을 개척하는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도전이다.

탐험이 불가능해 원래 들어왔던 통로로 돌아왔는데, 그 통로가 없어졌다?

이미 탐험할 힘도 없는데?

그대로 미궁의 먹이가 된다.

만용의 대가를 치른 것이다.

하지만 이 통로는 사라지지 않는다.

최소한 몇십 년 동안은 사라지지 않은 통로다.

만약 도저히 공략이 불가능하면 4층으로 돌아가 단단히 준비를 한 뒤 다시 도전하면 된다.

거기다가 나는 궁극의 특성, 무한 회귀까지 가지고 있다.

도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못 먹어도, 아니. 못 먹을 수가 없다! 가자!"

"⋯⋯."

라분이 방패를 들어 올려 힘 없이 텅 두드렸다.

영 못 미더운 모양이다.

배낭에서 얼른 새로운 종이를 꺼냈다.

지금 있는 곳을 중심으로, 천천히 원을 그리며 길을 찾을 셈이다.

그러다가 갈림길에서 미궁 사무소가 적어놓은 글귀를 발견하면 끝이다.

"글⋯귀?"

"내가 저번에 가르쳐 줬잖아 이 멍청아!"

미궁에는 복원력이 있다.

일반적인 글씨를 쓰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진다. 기본적으로 대략 한 달 정도.

하지만 그 기간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글씨에 마정석 가루를 섞어놓는 것이다.

마정석 가루를 섞은 글씨는 그 농도에 따라 몇 년이고 보존될 수 있다.

하지만 영리한 몬스터들이 이를 모를 리가 없다.

사무소의 표식 남기기는 일종의 영역 표시다.

주기적으로 영역을 순찰하는 몬스터는 그런 표식을 발견하자마자 지운 뒤 오줌을 싸 닦아낸다.

사무소는 정기적으로 점검을 한 뒤 다시 표식을 새겨 넣고.

그야말로 야생동물의 영역 싸움이다.

만약 내가 미궁 8층에서 그 표식을 발견한다면? 또는 감지 능력을 이용해 탐험을 하는 다른 파티를 발견한다면?

"내 승리다."

그렇게 비밀 통로를 기점으로 지도를 그려나가는 우리의 탐험이 시작되었다.

"라분. 조심해서 가자고."

"알겠다."

식량은 보름치. 만약 실패하고 돌아간다고 가정하자. 비밀 통로에서 4층 안전지대까지의 거리는 3일 정도.

'그러면 12일치가 남는다.'

탐험이 실패할 경우, 12일 뒤에는 이 비밀 통로의 입구에 서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주변에 몬스터는, 꽤 많다.

"라분. 주변에 내 능력으로 감지할 수 있는 몬스터 무리만 여섯 무리야."

"많다."

"정확히 어떤 몬스터인지는 모르겠어. 세 마리에서 여섯 마리까지 다양해. 일단 어떤 몬스터가 등장하는지 파악하자고."

미궁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몬스터들이 가지는 마나가 증가한다.

같은 오크라도 미궁 4층과 8층의 오크는 질이 다르다.

더 강하고, 덩치도 크다.

일반 오크 무리에 챔피언들도 종종 섞여있을 정도니 그 난이도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내가 몬스터들과의 거리를 입으로 계속 브리핑하며 속도를 조절했다.

지도에 나만 알아볼 수 있는 메모를 하며 천천히 길을 개척해나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궁의 길이 세 갈래로 나뉜다.

한 군데는 고블린이나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고, 나머지 두 군데는 몬스터의 흔적이 역력하다.

갈림길을 뒤져봐도 미궁 사무소의 표식은 없다.

"상당히 깊은 지역인가."

일단 오른쪽에 가장 가까운 갈림길을 선택해 걸어나갔다.

그렇게 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틱.

"응?"

천천히 걷고 있던 내 종아리가 무언가를 건드렸다.

순간 마나가 튀었기에 겨우 알 수 있을 정도로 조용한 소리였다.

하지만 그 후.

-빠아아아아앙!

귀청을 찢는 듯한 엄청난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주변에 있던 몬스터 무리 중 가장 가까운 세 무리가 역동했다.

"헛!"

잠깐 멈칫하더니 곧장 이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함정!"

급히 몸을 틀기 전에 정보를 얻기 위해 종아리 쪽의 벽을 살폈다.

벽에서 머리카락 정도 굵기의 하얀 실이 나풀거리고, 그 끝에는 마정석 조각이 매달려있다.

"!"

이렇게 정교한 함정을?

이제 더는 생각할 시간이 없다.

"라분. 갈림길로 후퇴!"

부리나케 달렸지만 갈림길에 진입하는 건 적들이 먼저였다.

적들의 정체는 바로.

"고블린?"

아니, 덩치를 보아하니 홉고블린이다.

오크와 고블린 사이의 덩치를 가지고, 손재주가 좋은 미궁의 종족.

나는 멈칫했지만 이내 기세를 끌어올렸다.

홉고블린의 수는 4마리. 지금 달려오고 있는 놈들을 생각하면 빠르게 마무리해야 한다.

죽인다. 아니면 우리가 죽는다.

"내가 먼저 간다!"

검염을 있는 대로 끌어올리고 가장 선두에 창을 꼬나쥔 놈을 향해 달려나갔다.

이어지는 격돌.

-깡!

"읏!"

놀랍게도 내 공격은 홉고블린의 창대를 갈라내지 못했다.

검염이 조금씩 창대를 갉아내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단기전에서는 효과가 없어 보인다.

"꽉 찬 2위계!"

홉고블린이 창대를 휘저어 내 검을 튕겨냈다.

이어진 홉고블린들의 호응을 막기 위해 라분이 기세를 내었다.

"우어어어!"

라분이 방패 박치기로 내 왼쪽을 막아섰다.

나는 검염을 아끼지 않고 휘두르며 홉고블린을 빠르게 압박해들어갔다.

하지만 전투가 빨리 끝날 것 같지가 않다.

"제기랄!"

다소 무리하게 전투를 진행하다가 내 왼쪽 어깨 끝이 창에 걸렸다.

살짝 찢어져나가는 어깨살.

하지만 잃은 만큼 소득은 있다.

내가 상대하던 홉고블린의 목이 검 끝에 걸렸다.

"켁!"

힘을 잃은 홉고블린의 몸을 밀어재끼며 나머지 놈들에게 집어던졌다.

이어진 검염으로 몰아붙여 두 마리를 추가로 죽이는 데에 성공했다.

한 마리의 목에 검을 박아 넣은 라분이 거센 숨을 쉬며 나를 돌아보았다.

"주인."

"그래. 좆됐다."

어느새 우리는 열 마리의 홉고블린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그중 한 마리는 검을 들고 있다.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는 검염.

홉고블린 챔피언이다.

"지랄났군. 라분! 일단 갈림길까지 길을 뚫어!"

"우어어어!"

라분이 몸을 아끼지 않고 방패에 몸을 실어 돌격했다.

나는 우선 챔피언과 부딪히며 큰 동작으로 놈을 튕겨낸 후, 라분의 뒤를 보호하며 갈림길에 다다랐다.

바로 보호하지 못했기에 라분의 몸 곳곳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괜찮아?"

"괜찮다."

굳이 비밀통로와 연결 된 갈림길은 고른 이유는 모든 통로 중 그나마 폭이 좁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적이 너무 강력하다.

몬스터는 1대1 싸움에 흥미가 없는 종족이다.

챔피언이 나와의 격돌은 피하고 라분을 노리기 시작했다.

내게는 2위계의 홉고블린 다섯 마리가 달라붙었다.

"제기랄!"

도와주고 싶지만 도저히 틈이 나지 않는다.

곧 라분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리저리 챔피언의 공격을 잘 흘려내다가 다른 홉고블린에게 창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라분아!"

"주인! 도망⋯⋯."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라분의 가슴에 검이 틀어박힌다.

가슴이 뜨거워진다.

"이 씨발 새꺄!"

목숨을 도외시하고 적 챔피언에게 달려들었다.

내가 등을 보이자 홉고블린의 창이 자비 없이 내 온몸을 찌른다.

무심한 표정의 적이 혼신의 일격을 내지른 내 검을 받아냈다.

쇠 갈리는 소리와 함께 챔피언의 검이 반쯤 잘린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곧 몇 개인지 셀 수도 없는 창이 내 몸을 꿰뚫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의 연속이다.

"큭!"

손아귀에 힘이 사라지며 검을 떨어뜨린다.

홉고블린 챔피언이 무심하게 내 목을 베어버렸다.

내 의지와 다르게 붕 떠버린 시야가 이내 빙글빙글 돌더니 툭 떨어진다.

아득히 멀어져 가는 소리 속에 홉고블린의 승리의 울음이 떠돌아다닌다.

그러다가.

-키릭!

⋯⋯

"흠."

라분은 출발하려다 말고 주저앉아 생각에 잠긴 나를 지켜보았다.

곧 별말 없이 옆에 털썩 앉았다.

하도 이런 일이 많다 보니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홉고블린. 다섯 마리 이상과의 정면 승부는 힘들다.

"4층의 오크보다 훨씬 강해. 층 차이인가."

더군다나 함정의 존재가 너무 껄끄럽다. 마정석을 이용해 그런 함정을 만들어낼 수 있다?

기술력도 엄청나고, 육체적인 능력도 오크나 리자드맨에 뒤지지 않는다.

특히 함정. 이 함정은 전혀 가정조차 하지 못했기에 허무하게 죽음을 헌납하고 말았다.

하지만.

"탐험 자체가 불가능한 건 아니야."

우선 내 감지 능력이 있다.

마정석을 사용한 함정은 미궁벽에 내 감지 능력 집중한다면 충분히 탐지가 가능하다.

마정석은 특수한 마나로 이루어져 있고, 내 감지 능력은 마나를 감지하기 때문이다.

무모한 도박의 끝은 죽음이었지만, 내게는 아직 무한한 판돈이 남아있다.

"라분아. 미안하다. 가자."

"?"

"가자고."

"라분. 간다."

첫 마디는 내 실수로 죽게 만든 라분에게 한 사과였지만, 라분은 알지 못하는 일이다.

이게 바로 무한 회귀의 개 같은 면이다.

"후."

더 신중하게, 전투는 최대한 회피한다.

그렇게 방침을 정하기 전에 미리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빠르게 아는 길을 이동해 내가 걸렸던 함정의 앞으로 갔다.

감지 능력을 축소시키고 벽에 정신력 일부를 할애하니 함정이 설치된 마정석이 보인다.

"좋아. 30걸음 내까지는 감지해야 하니까."

천천히 뒤로 물러나며 감지 능력을 이리저리 조절한다.

24시간 사용하다 보니 이런 것도 된다.

꼭 30걸음을 물러났을 때.

"됐다."

홉고블린이 설치한 마정석이 아슬아슬하지만 확실하게 느껴졌다.

적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은?

"절반 이하. 40% 정도인가."

이 장소에서 다섯 무리까지 느껴졌던 홉고블린이 이제는 세 무리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감지할 수 없는 미궁의 암흑 너머에서 활동하는 홉고블린들.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공포가 확 몰려왔다.

"⋯⋯."

홉고블린의 창이 내 몸을 찌르고, 목을 베어낸다.

데굴데굴 구른 목이 흙바닥에 쓸려 더러운 피를 뱉어내고, 시야가 흐릿해진다.

마침내.

-짝!

나는 두 손으로 내 양쪽 뺨을 때렸다.

이런 부정적인 생각할 시간에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죽음에 대해 생각할 시간에 더 한 걸음 나아간다.

몇 번의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그렇게 다짐하지 않았었나.

"라분. 가자."

"알겠다."

"내가 항상 먼저 갈 거야. 저 앞에. 이거 보여?"

"마정석이다."

"적 홉⋯, 적이 설치한 함정이야. 이렇게 실이 늘어져있지? 반대편에도 마정석이 있고. 이 함정을 모르고 있다가 실을 끊으면 적들이 몰려올 거다."

"그렇군."

"내가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정신 바짝 차리고 가자. 알겠지?"

"알았다."

나는 라분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다시 발걸음을 이었다.

목표는 안전지대.

미궁 8층의 안전지대에 도착할 때까지 절대 뒤돌아보지 않을 생각이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38

아무리 홉고블린에게 죽임 당했다고 해도, 계속 쫄아있을 필요는 없다.

순식간에 주변의 모든 홉고블린을 자극하는 함정이 위험하다.

그것만 주의한다면 어떻게든 해볼 만하다.

감지를 통해 최대한 홉고블린과 마주치지 않는 범위에서 탐험을 재개했다.

감지 능력이 이럴 때 아주 큰 도움이 된다.

전투는 피해야 하지만 손해를 보면서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꽤 넓은 통로를 막고 있는 홉고블린. 뚫기 위해서는 피를 봐야 한다.

마침 적의 수는 세 마리. 다른 무리와는 꽤 거리가 있다.

"라분. 전투다. 준비해."

나에게는 세 번째 전투, 라분에게는 첫 전투다.

우선 낮은 자세로 천천히 다가가 적을 확인한다.

"홉고블린이야."

"홉. 고블린?"

"그래. 고블린이라고 무시하지 마. 미궁 8층의 고블린은 미궁 4층의 리자드맨보다 더 무서우니까."

"꿀꺽."

"쫄지말고. 온 힘을 다해 부딪히자고. 뒤는 내게 맡겨."

"알았다."

"셋 세면 간다. 셋. 둘. 하나!"

"우어어어!"

"으아아아!"

나와 라분. 라분과 나. 여간 기합이 아니다!

어차피 거리가 있어 기습은 불가능하다.

홉고블린이 우리의 포효를 듣고 창을 꼬나쥐었다.

적들의 눈에 붉은빛이 서린다.

창을 곧추세우자 돌격이 매우 위험해졌다.

라분이 달리다가 창 끝 앞에서 멈춘다.

적절한 타이밍에 방패를 휘둘러 창을 쳐냈다.

완벽한 방패 기술!

충격에 대비해 무게중심을 앞으로 밀어 넣고 있던 홉고블린들이 옆으로 가해지는 힘에 순간 중심을 잃었다.

나는 미리 준비한 단검 두 개를 빠르게 던진 뒤 검을 휘둘렀다.

운 좋게 단검 하나가 홉고블린의 눈에 맞았다.

나머지는 다른 놈의 팔을 스쳤고.

"케엑!"

"흡!"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검염 서린 검을 휘둘러 한 마리의 가슴을 크게 베어냈다.

시작하자마자 한 마리를 처치했다.

라분이 돌출한 내 옆구리를 커버하며 창을 걷어낸다.

이어지는 라분의 공격은 홉고블린에게 닿지 못했지만 견제 역할로는 충분하다.

"바로 간다!"

내가 검을 휘두르며 다시 적진에 뛰어든다.

직전 라분의 검을 피한 홉고블린의 다친 눈의 시야를 파고들었다.

손쉽게 목을 베어내자, 이제 남은 적은 한 마리.

몬스터답게 승산이 없는 상황에서도 투지가 넘친다.

내 단검에 맞은 팔에서 피가 흘러내리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창을 든다.

어림잡아 2위계 중반 정도의 실력.

나는 순간적으로 감지 능력을 넓게 펼쳤다.

전투의 소음을 듣고 접근하는 기척은 없다.

완벽한 전투를 완성하기까지 한 걸음 남았다.

"라분. 상대할 수 있겠어?"

"물론이다."

라분이 척척 걸어가 홉고블린과의 1대1 대결을 시작한다.

결과는 싱거웠다.

잠깐의 탐색전. 이내 인내심이 바닥난 홉고블린의 찌르기를 그림같이 걷어내고, 훤히 열린 상체에 그대로 검을 박아 넣었다.

"끄르륵."

라분은 검을 계속 밀어붙여 가슴을 뚫은 후, 발을 대고 거칠게 뽑아내었다.

뿜어져 나온 적의 피가 라분의 상체를 적셨다.

"우어어어!"

나는 라분의 지랄발광을 뒤로하고 홉고블린의 시체를 자세히 살폈다.

죽었던 전투에서는 살펴볼 기회가 없었던 탓에 관찰은 나도 처음이다.

"암수 섞여있고, 신체적 차이는 크게 없군."

라분이 자신이 죽인 홉고블린의 오른팔에서 마정석을 뽑아내었다.

그러고는 처음 잡은 놈의 시체를 방패로 툭툭 때려 내구도를 시험해 본다.

나는 수통의 물에 입을 대었다.

가지고 있는 물도 충분히 먹을만하다.

"좋아. 라분. 분석 끝났어?"

"끝났다."

라분이 내게 마정석을 건넸다.

살펴보니 하급이지만 꽤 질이 좋은 마정석이다.

마나의 양으로 판단하건대 하2급 정도?

10단계가 있는 하급 마정석 중에서도 최상위권이라고 볼 수 있다.

"좋네. 모두 공양."

[시체를 공양합니다.]

[홉고블린 세 마리. 확인.]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진척도. 0.8%]

이 정도면 진척도도 꽤 준수하다.

그만큼 홉고블린이 강력한 적이라는 증거겠지.

첫날에는 세 마리가 있는 무리를 골라서, 둘째 날에는 네 마리가 있는 무리를, 셋째 날은 안전한 장소에서 대부분 휴식을 취했다.

최대한 흔적을 없애기 위해 모든 시체를 공양하자, 어느새 진척도가 7% 가까이 쌓였다.

"⋯그냥 여기서 사냥하면서 졸업해버려?"

직진 길로 3일을 움직였는데도 사람의 흔적은 깜깜무소식이다.

슬슬 이 방향으로의 탐험은 그만 둬야 될 상황이다.

그때였다.

"응?"

내 감지 능력은 미궁의 벽을 통과하지만, 벽의 모양을 확실하게 알지는 못한다.

때문에 감지 능력으로 지도를 그릴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장소의 지도는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공허.

"라분. 조심해. 바로 앞에 엄청 큰 공간이 있어. 지금 속도로 2분."

"! 알았다."

앞장선 내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 장소에 가까워질수록, 어떠한 소음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뭐지?"

자세히 들어보니 물소리였다.

멀리서 아득히 울려오는, 물 떨어지는 소리.

"⋯⋯"

당장 주변에 몬스터는 없다.

나는 그때부터 성큼성큼 걸어 길 끝에 다다랐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커다란 호수를.

"허허."

미궁이란.

내 맞은편에서는 엄청난 기세로 폭포가 떨어지고 있었지만, 내 눈앞에 있는 물은 잔물결만 이따금 일 뿐이다.

함정은 없겠지 싶어 감지 범위를 최대로 확장하자 물속에서 어떤 기척이 잡힌다.

"응?"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저 어두운 물속에서, 수십, 수백 마리의 무언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목한 머리는 모두 나를 향해 고정되어 있고, 그 몸 뒤에서 꼬리, 아니 지느러미로 보이는 물체를 살랑인다.

마치 그 모습이.

"물고기?"

물고기라고?

저 많은 생명체가 전부?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았다.

"오. 마침 목말랐는데 잘 됐다."

나는 방패를 내려놓고 얼른 물을 뜨려는 라분의 어깨를 붙잡았다.

"응? 왜 그러나?"

"라분. 안 느껴져? 물 아래의 기척이. 이곳에서 5m도 안 떨어져 있어."

"?"

"감지해 봐."

라분이 눈을 감고 열심히 노력해 보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냥 물 밖에 안 느껴진다."

"⋯⋯."

나는 바닥에서 커다란 돌멩이를 들어 마나를 실어 강가에 던졌다.

풍덩 소리를 내며 돌이 떨어지지만, 어떤 물고기도 반응하지 않는다.

다만 돌에 닿는 범위에 있는 물고기들만 소리 없이 비킬 뿐이다.

여전히 시선은 내게 고정되어 있다.

엉덩이에 힘이 빡 들어간다.

"절대 여기서 물 떠먹지 마."

마나를 가지고 있으니, 저것도 몬스터인가?

일단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는데, 내가 나온 구멍과는 다른 구멍에서 접근하는 홉고블린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이런 큰 구멍이 호숫가를 따라 여러 개 자리하고 있다.

"!"

홉고블린은 총 네 마리고, 아직 거리가 있다.

나는 라분에게 최대한 빠르게 상황을 알려주고 홉고블린이 다가오는 통로의 옆에 튀어나와있는 벽에 붙었다.

곧 몬스터들이 접근하기 시작한다.

"케르르르륵."

"케륵?"

"쿠르쿠릭!"

"카륵!"

뭔 개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만, 자기들끼리의 대화에 열중해있어 매복이 들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

그리고 마침내, 홉고블린들이 호숫가에 발을 디뎠다.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올린 손을 접지는 않았다.

홉고블린들이 천천히 몸을 숙인 채로 소리 없이 물가로 접근했다.

이전의 나처럼 쿵쾅거리지 않았기에 물속의 기척도 조용하다.

마침내 홉고블린들이 물을 마시고, 본인의 수통을 꺼내 조심스레 물을 담기 시작했다.

나는 주먹을 힘차게 접었다.

돌격 신호였다.

"지금!"

"우어어어!"

"물에 닿지 마!"

쿵쾅거리며 달려오는 라분을 보는 홉고블린들의 시선이 명백하게 공포에 질리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물통을 떨어뜨리고 창을 들었지만, 사정없이 떨리는 동공이 보였다.

"밀어붙여!"

라분의 방패 박치기가 홉고블린을 밀어내었다.

두 마리가 물에 빠지고, 나머지 두 마리는 발까지만 들어간다.

그리고.

"끼에에엑!"

물에 빠진 두 홉고블린들에게 호수 아래에 숨어있던 수백 마리의 물고기들이 달려들었다.

"끄르륵!"

"끼에에에에에엑!"

창을 놓고 버둥거리는 동료를 보던 한 홉고블린이 팔짝 뛰어올랐다.

물에 들어갔던 두 발목에 사이좋게 물고기 두 마리가 매달려있다.

녀석이 착지할 때는 목이 없었다.

내 검염이 착지 순간에 그대로 사선으로 그어졌기 때문이다.

반면 라분은 발만 들어갔던 홉고블린을 방패로 툭툭 미는 것만으로 목적을 달성했다.

엉덩이에 수십 마리의 물고기가 달려들자, 고통을 참지 못하고 펄쩍 뛰어오른다.

착지 지점에는 역시나 내 검이 기다리고 있었다.

"⋯⋯."

"⋯⋯."

이렇게 될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실제로 시행해 보니 끔찍함이 엄청났다.

제대로 떨어진 두 놈은 이제 성한 살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해체되어 있었고, 뭍에서 죽은 두 녀석을 물은 물고기는 아예 살 속으로 파고들어가고 있다.

"공양."

[전투 중에는 시체를 공양할 수 없습니다.]

[전투 종료 후 시체와 인접한 곳에서 다시 시도해 주세요.]

"흐흐. 이것도 전투라는 건가."

나는 단검을 꺼내 바닥에서 팔딱이는 물고기의 머리를 찍었다.

물고기는 내게 이빨을 들이밀었지만 물속도 아니고 여기서 내가 당할 리가 없다.

나는 머리가 세로로 갈라져 죽은 물고기를 바라보았다.

"공양."

[시체를 공양합니다.]

[프라냐 1마리. 확인.]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진척도. 7.3%]

"이 물고기 이름이 프라냐? 라분이는, 들어봤을 리 없고."

"라분. 바보 아니다."

"그러면 알아?"

"모른다."

"거봐."

한 마리 더 잡아와 시체를 살폈다.

생긴 거는 꼭 하수구에서 잡히는 물고기랑 같다.

하지만 몸과 비교하면 머리가 비정상적으로 크고, 무엇보다 이빨이 날카롭다.

그때였다. 내가 죽인 목 없는 홉고블린의 시체가 부르르 떨었다.

"?"

사지를 덜덜 떨더니 얌전해진다.

이내 목 쪽에서 프라냐 한 마리가 툭 튀어나온다.

아무래도 살을 파먹으며 신경을 잘못 건드린 모양이다.

"⋯⋯내가 물 먹지 말라고 그랬지. 내 말 잘 들어."

"라분. 주인 말 잘 듣는다."

프라냐는 툭툭 움직이며 방향을 잡더니 껑충껑충 뛰어 물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뭐, 저런 미친⋯⋯."

"무섭다."

나는 감지 능력을 활성화하며 칼로 홉고블린의 몸을 푹푹 찔렀다.

이내 들썩이던 몸이 잠잠해졌다.

다른 놈도 똑같이 해준 뒤, 마정석을 탐색했다.

놀랍게도 프라냐에게는 마정석도 있었다.

3층의 고블린과 비슷한 등급이었지만 어쨌든 있는 건 있는 거다.

이것은 이놈들이 몬스터라는 보다 확실한 증거다.

"주인. 마음에 안 드는 놈. 여기로 데려오면 되겠다."

"미친 놈."

"증거도 안 남는다."

"시끄러워."

나는 프라냐 한 마리를 남긴 뒤 나머지 모든 시체들을 공양했다.

[시체를 공양합니다.]

[홉고블린 두 마리, 프라냐 일곱 마리. 확인.]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진척도. 7.5%]

시체가 훼손되어서일까? 아니면 프라냐가 한 손 거들었기 때문일까.

원래라면 0.4%는 되었을 진척도가 그 절반밖에 늘지 않았다.

공양물로 인정된 홉고블린의 숫자도 고작 두 마리뿐이고.

미궁의 신비가 내 사냥을 정상적인 사냥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만은 분명했다.

"프라냐. 한 마리. 왜 남겼나?"

"구워 먹어보자."

"!"

"왜? 물고기같이 생겼잖아. 맛있어 보이는데? 물론 안에 있는 홉고블린은 씻어내야겠지만."

더러운 하수구의 물고기도 생으로 뜯어먹었던 나다.

고작 홉고블린 먹은 물고기 몬스터는 내 상대가 되지 못한다.

우리는 프라냐를 들고 원래 통로로 돌아갔다.

단검으로 비늘을 벅벅 밀어내고, 홉고블린 놈들과 같은 방법으로 호수에서 물을 떠 내장을 벗겨낸다.

잘 씻은 다음, 불 위에 올려놓았다.

곧 고소한 향이 미궁에 퍼지기 시작한다.

"꿀꺽."

"꿀꺽."

크기도 적당히 커, 한 사람당 한 마리씩이면 떡을 치겠다.

바싹 구워 반씩 나눈 다음 한 입 크게 물어본다.

"읍!"

입속 가득히 퍼지는 고소한 기름기와 촉촉한 생선살의 맛이 환상적이다.

하수구에서 먹던 비린내 덩어리들과는 비교가 미안할 정도!

라분은 한입 먹더니 그대로 반 마리를 먹어치워버리고는 벌떡 일어난다.

"왜?"

"더. 잡으러 간다."

"어떻게 잡으려고?"

"방법이 있다."

"사막 놈이?"

"사막에도 물고기 있다."

실과 바늘을 이용해 줄 낚싯대를 뚝딱 만들어낸 라분이 척척 걸어나갔다.

궁금 반, 안전 반으로 따라나가니 라분이 바닥에 일단 엎드려 접근한 뒤 돌을 여기저기 던져 물고기를 끌어모은다.

곧 프라냐 눈알이 달린 낚싯줄이 날아가고.

"오!"

곧바로 프라냐 한 마리가 바늘을 꽉 무는 것이 내 감지에 느껴졌다.

최소한의 입질조차도 없는 즉각적인 반응이다.

옷 꿰맬 때 쓰는 바늘은 굵고 길었다.

제대로 바늘에 꿰인 프라냐가 피를 흘리자 주변이 소란스러워진다.

라분이 얼른 줄을 끌어올렸다.

막 바늘에 걸린 프라냐와 그 프라냐를 문 두 프라냐.

한 번에 세 마리를 낚아올린다.

"와."

라분이 펄쩍 뛰며 본인 머리 위로 떨어지는 프라냐를 피한 뒤, 척척 머리를 찔러 내게 가져온다.

"잡았다."

"⋯⋯."

식량에, 물에, 몬스터도 별로 없어 보인다.

아무래도 엄청난 전진기지를 얻은 것 같다.

"좋아."

그렇게 이곳에서의 장기전에 대한 생각을 굳혔을 때.

내 감지에 이상한 생명체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방향은 내가 죽인 홉고블린이 나왔던 통로다.

"라분. 조용히."

홉고블린은 확실히 아니고, 트롤도 아니다.

감지되는 마나가 너무나 이질적이다.

곧 미궁이 쿵쿵 울리며 정체불명의 생명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미노타우로스⋯!'

집채만한 소머리를 가진 괴물.

트롤과의 영역 경쟁을 압도적인 우위로 승리한다는 거대 몬스터.

미노타우로스의 등장이었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39

나와 라분은 고개만 빼꼼 내민 다음 미노타우로스를 관찰했다.

전신이 근육질에, 실전으로 단련된 것이 분명한 잔근육들이 몸의 움직임에 맞춰 꿀렁거린다.

소대가리에 달린 뿔은 기괴하게 휘어있어 마치 얼굴을 보호하는 듯하다.

그야말로 괴물.

내가 첫 회귀에 트롤이 아닌 저 괴물을 마주쳤다면 백 번을 죽어도 도망칠 생각조차 못 했을 테지.

미노타우로스는 호숫가에 오자마자 머리를 박아 넣고 물을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프라냐들이 발작하며 미노타우로스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미노타우로스의 대응은 간단했다.

눈을 감는 것. 그게 다였다.

프라냐의 이빨은 미노타우로스의 질긴 가죽을 뜯지 못하고 겉만 핥다 떨어져 나갔다.

물을 쭈욱 마신 미노타우로스가 얼굴에 붙은 프라냐 몇 마리를 손으로 집어 씹어 먹는다.

-으적으적.

거대 몬스터가 내는 소음이 물 떨어지는 소리 가득한 호수를 뚫고 나의 귀에까지 들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검자루를 매만졌다.

'잡을 수 있을까?'

지금 내 검이, 저 몬스터에게 닿을 수 있을까.

검염을 최대로 일으켜 발목의 힘줄을 베어버린다면?

아니, 베어질까?

미노타우로스가 불현듯 내가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여 몬스터의 시선을 피했다.

"⋯⋯."

피하고 말았다.

감지 능력이 뛰어나기에 느낄 수 있었다.

저 괴물은 트롤 세 마리가 붙어도 못 이길 정도로 강하다.

나는 그런 미노타우로스에게 쫄아서, 싸워볼 생각도 못 하고 피하고 말았다.

'제기랄.'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분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 아무래도 이 호수. 저 괴물의 영역."

"그래. 확실해."

미노타우로스가 천천히 호수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걸음에 맞춰 천천히 뒤로 물러난 뒤, 이내 크게 거리를 벌렸다.

다행히 미노타우로스는 호숫가를 한 바퀴 돈 뒤 자신이 왔던 미궁의 구멍으로 빠져나갔다.

나는 감지를 통해 그 광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라분."

"?"

"저녀석. 내가 잡고 만다."

나도 모르게 숨었다. 도망쳤다.

고작 몬스터 놈에게 쫄아버린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부끄러운 것으로 끝낸다면, 나는 영원히 패배자가 될 뿐이다.

"갚아주겠어."

저놈의 눈에서 나에 대한 공포를 볼 때까지,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

* * *

그렇게 호숫가에서 머물며, 호수를 새로운 중심지로 하여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다.

"라분. 내가 드디어 알아냈다."

"뭐를?"

"이 홉고블린 말이야."

물을 떠먹다가 우리의 기습에 죽은 홉고블린들.

"피부가 탱탱하고, 얼굴이 앳되어 보여."

"앳되어?"

"어려 보인다고."

"아하."

"그리고 중요한 건데, 분명 물을 뜨기도 전에 죽었잖아?"

물통을 열고 물통 안에 채워져있던 물을 쪼르르 따라낸다.

"물이 있네? 그것도 꽤 많아. 물이 부족하지 않다는 증거야."

"그렇다면?"

"담력 시험이다. 분명해."

옛날 늦은 밤. 하수구의 공동묘지에서 비석 찍고 돌아오기는 내가 어렸을 적에 했던 대표적인 담력 시험 중 하나였다.

나는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오금이 저린다.

겁 없는 피터 새끼가 하얀 천을 뒤집어쓰고 나와 콜린을 덮쳤을 때, 콜린은 그만 오줌을 지리고 말았다.

피터가 트롤에게 죽고 나서는 농담도 못했는데, 슬슬 다시 놀려줘야지.

"어린 홉고블린이 미노타우로스와 프라냐의 공포를 이기고 호수의 물을 마시는 거야. 담력 시험이지."

"성인식. 일수도."

"그럴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러면 녀석들의 가벼운 태도가 설명이 안 돼."

항상 놈들은 낄낄 웃으며 호수로 왔다.

인간의 언어로 치자면.

[쫄았냐?]

[안 쫄았어 등신아.]

[가서 빨리 먹고 오자.]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러면 진척도가 생각보다 적게 오르는 이유도 설명이 가능해. 젊고 경험 없는 놈이라서 공양해도 진척도가 짠 거야."

"오. 주인. 천재다."

"알고 있어. 임마."

이어진 호수를 중심으로 한 탐험은 꽤나 안정적으로 진행되었다.

약 3일에 걸쳐 호수 주변을 탐사하고, 지도를 그려나갔다.

그다음 호수 근처로 돌아와 하루를 휴식해 골병이 나지 않게 했다.

그렇게 12일이 지나자 미노타우로스와 홉고블린의 영역 범위가 대충 보였다.

우리는 홉고블린과 미노타우로스의 영역을 넘나들었다.

마치 미노타우로스의 영역을 인간의 안전지대로 여기는 행동이다.

이 방침은 홉고블린에게는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미노타우로스 쪽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졌다.

하기야, 인간이 머무르며 자기의 영역에 똥오줌을 뿌려대는데 어떤 몬스터가 좋아하겠나.

이곳에 머무른 지 10일이 넘어가자 미노타우로스는 우리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라분아. 망한 것 같다."

"⋯⋯."

역시 미궁 탐험에 편한 건 없다.

미노타우로스의 감각이 꽤 가까운 거리에 있던 우리를 느낀 것이 확실했다.

정확히 우리가 있는 곳으로 걸어오는 거대 몬스터.

나는 그동안의 탐험을 통해 미리 봐둔 곳으로 이동했다.

거대 몬스터는 들어올 수 없지만, 인간은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구멍.

반대편도 널찍하게 뚫려있어 길이 막힐 걱정은 없다.

"무어어어어!"

소머리를 앞세우고 달려오던 미노타우로스가 내가 있는 통로 앞에 멈춰 섰다.

나에게는 통로지만 놈에게는 개구멍이다.

고개를 거의 허리까지 숙인 소머리와 나의 눈이 마주친다.

첫 조우였다.

"⋯⋯."

"⋯⋯."

"븅신."

"!"

내 욕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일까?

미노타우로스가 갑자기 머리를 휙 들었다.

"무어어어어어!"

트롤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포효가 미궁 벽을 타고 울렸다.

사람이라면 오금이 저리고, 자동으로 머리가 멍해질 수밖에 없는 수준이다.

나와 라분이 각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을 떨었다.

곧 미노타우로스의 몽둥이가 미궁 벽을 쾅쾅 때리기 시작했다.

"무어어어!"

천지가 울리는 소리와 함께 놀랍게도 미궁 벽이 조금씩 떨어져나갔다.

하지만 그 수준은 지극히 미미해서, 도저히 내가 있는 곳까지 닿을 수 없을 정도다.

"힘 빼고 있네."

수십 번 미궁 벽을 때리던 미노타우로스가 씩씩 거리며 멈춰섰다.

집어던진 몽둥이가 떨어지는 소리, 마치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 같다.

고개를 숙인 미노타우로스와 나의 눈이 다시 맞았다.

나와 라분은 미궁 벽이 부서질 때부터 점차 거리를 벌려 이제는 꽤 떨어진 상태였다.

"⋯⋯."

"⋯⋯."

"엿 먹어. 이 소대가리야."

"!"

가운뎃손가락을 척 들어 올리자 이것도 알아차렸는지 발을 구른다.

미노타우로스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고, 내가 인지하지도 못한 순간에 무언가가 내 눈앞으로 훅 날아온다.

미노타우로스가 부순 미궁의 벽 조각이다.

"헉!"

"주인!"

라분이 기가 막힌 방패 컨트롤로 돌을 튕겨냈다.

정확히 내 머리를 향한 일격이다.

지형의 이점을 믿고 방심하고 있었다. 만약 맞았으면 즉사였다.

"주인! 괜찮나!"

"라분아. 너밖에 없다."

괴물은 공격이 실패하자 지금까지의 분노는 거짓이었다는 듯이 잠시 나를 노려본 뒤 걸음을 돌렸다.

"방심하면 안 되겠어."

"그렇다."

미노타우로스가 우리를 포기하고 완전히 멀어진 것을 감지하고서야 다시 움직였다.

저 거대 몬스터의 영역은 넓다.

주의를 잘 기울인다면 호수를 몇 번 더 이용하는 것도 문제가 없다.

우리는 탐험을 이어가며 지금까지의 성과를 결산했다.

지금까지 모은 미궁 8층의 진척도는 약 35%. 사냥 기간을 감안하면 경이로울 정도의 진척도다.

이곳에서 진척도 100%를 노리는 것도 좋겠다.

충분히 따돌릴 자신도 있고.

하지만 미궁 8층의 안전지대에서 이곳으로 이어지는 길을 뚫고 싶기도 하다.

길을 모르면 계속해서 비밀통로를 이용해야 하고, 미궁 4층에서 출발해서 미궁 8층의 부산물을 가져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8층으로 위장하는 것도 귀찮고.

"⋯⋯."

더불어서 저 미노타우로스도 꼭 내 손으로 사냥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보급을 위한 안전지대 탐색은 필수다.

하지만 지금 이 방법으로는 꽤 먼 거리에 있을 안전지대를 찾는 길은 요원하다.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곧 내가 결론을 내렸다.

"안되겠다. 라분."

"라분. 여기 있다."

"플랜 B다."

"B?"

"지금 탐험은 이 싸이클이 끝날 때까지. 2일만 더 하고 돌아가자. 몸 많이 상했지?"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더 수준 높은 미궁 8층에 2주 넘게 박혀있었으니 몸이 성할 리 없다.

나도 라분도 만신창이다.

우리 둘 다 각자의 터프함으로 버텨내고는 있지만, 모든 일은 길게 봐야 하는 법.

지금은 몸을 추스를 때다.

그렇게 이틀 동안 호수 외곽 구역 탐험을 진행하고, 다시 홉고블린의 영역으로 발길을 돌렸다.

무리에서 거리가 멀어진 홉고블린들을 사냥하며 비밀통로에 도착한 뒤 안에 쏙 들어갔다.

그 순간 모든 긴장이 풀렸다.

"휴."

비밀통로는 몬스터가 없기에 불침번을 설 필요도 없고, 저번에 한 번 열어놨더니 환기도 잘 된다.

그야말로 최적의 휴식 장소다.

우리는 통로의 중앙에서 내리 반나절을 잔 뒤 미궁 4층으로 복귀했다.

다시 3일 뒤, 미궁 4층의 안전지대로 복귀하자 제대로된 피로가 몰려온다.

사무소에 들어서자 카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어? 죽은 거 아니었어?"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계속 탐험했던 거야? 나한테 클라이머 처리까지 던져놓고?"

스쿱 파티를 습격한 탐험가들은 클라이머 판정을 받지는 않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면밀한 조사가 필요했는데, 그 주요 증인인 내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비밀통로에 눈이 먼 것이 죄다.

"죄송."

"됐어. 어차피 신용의 문제였고. 잘 처리했으니까."

내 앞에 문서 몇 장이 툭 떨어졌다.

"문제없는 보고서랑 서류들이니까 읽고 서명해서 나 주면 돼."

"넵."

"그런데, 너 괜찮겠어?"

"뭐가요?"

내 똘망똘망한 눈을 본 카일이 푹 한숨을 쉬었다.

"카리나 헤리슨이랑 한 약속도 까먹었지? 나한테 너네 어디있는지 묻더라."

"헉!"

"헉!"

나와 라분이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그랬다.

미궁 4층을 탐험하고 카리나와 만나 학즉사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그 대가인 대련을 치를 예정이었다.

그런데 미궁 8층에 다다른 대사건을 겪고 카리나와의 약속을 새까맣게 까먹어버렸다.

"어제도 여기 왔었어. 너네 아직도 복귀 안 했냐고. 1층 사무소에 복귀 기록이 없다면서."

"⋯⋯."

"빨리 수습해라. 난 모른다."

이미 벌어진 일. 어쩌랴. 할 일부터 하자.

나는 주섬주섬 이번 탐험에서 얻었던 의뢰품들을 내밀었다.

리자드맨 주술사의 지팡이를 비롯한 부산물이다.

"정산이요."

"리자드맨 주술사를 잡았어?"

"꽤 어렵더라고요."

"3위계 1명이랑 2위계 1명, 고작 두 명 뿐인 파티가 리자드맨 주술사를 대체 어떻게 잡은 거야?"

"응? 그냥 적당히 하니까 잡히던데요?"

"미친놈들이 따로 없네. 클라이머 잡고, 주술사 잡고."

반응을 보니 아마 내 배낭에 있는 비밀통로의 성과들을 보면 그대로 기절할 거다.

목이 타 얼른 맥주 한 잔을 시키고 잡담을 이어가고 있을 때였다.

나와 떠들던 카일의 말이 뚝 멈췄다.

시선은 어느새 내 뒤의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응? 아저씨. 왜 그래?"

내가 카일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카리나 헤리슨이 서 있었다.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 위로 희미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다.

카리나가 터벅터벅 걸어와 내 앞에 섰다.

나는 재빨리 입에 침을 발랐다.

"어, 죄송. 탐험이 너무 재미있어서 그만 약속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래?"

"넵."

"상관없어. 이전의 약속은 아직 유효한 거겠지?"

"물론입니다."

"그러면 가자. 내일부터 탐험이라, 오늘 밖에 시간이 없으니까."

잘못이 있으니 끌려가는데도 뭐라 할 말이 없다.

내 뒷모습을 보며 카일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저 인간, 은근히 얄미운 점이 있다.

한편으로 나는 마나로 주정을 몰아내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이미 미노타우로스에게 자극된 나다.

나를 한 층 더 성장시켜줄 4위계 전사와의 대련. 기대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