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의 무한회귀자 10
트롤의 모습은 내 첫 죽음 때와 다르지 않았다.
아니. 똑같은 놈이다!
들고 있는 저 몽둥이가 완전히 똑같았다. 나를 열 번 넘게 죽인 저 몽둥이. 잊으래야 잊을 수 없다.
'미궁 사무소 놈들, 시체 확인했다더니. 잡은 게 아니라 애들 시체만 확인하고 만 거였어?'
생각해 보면 나도 안일했다.
아는 길로만 다니다 보니 처음 트롤과 조우했던 그 길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또 기회다.
내 친구들의 원수를 갚을 기회.
천천히 들어올려지는 몽둥이는 이런저런 얼룩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중에는 마크, 밥, 페트의 것도 있겠지.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처음에는 어떻게 하나 고민했지만 몽둥이를 본 순간 결심이 섰다.
'죽인다.'
반드시!
나를 한참이나 쳐다보던 트롤이 이미 뱃속이 텅 비어버린 오크를 내던졌다.
마치 장난감같이 날아간 오크가 끔찍한 소리와 함께 미궁의 벽에 부딪혔다.
나도 맞춰 배낭을 집어던지고, 자세를 잡았다.
몽둥이를 고쳐잡은 트롤이 한달음에 나와의 간격을 좁혀왔다.
부웅!
뒤로 당겨진 몽둥이가 만들어내는 엄청난 풍압. 주변의 공기를 빨아들여 그 앞에 있는 내게도 영향을 끼칠 정도다.
그대로 내 머리 위로 내리친다.
선이 아닌 면을 점하면서 오는 거대 몬스터 특유의 공격.
나는 이전 오크를 상대할 때와 같이 아슬아슬하게 뒤로 물러나 트롤의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쾅!
땅을 내려친 트롤의 몽둥이가 부순 미궁 바닥의 잔해들이 날카롭게 나를 덮쳤다.
"큭!"
얼굴에 새겨지는 수많은 자상에 본능적으로 눈을 감아버렸다.
다시 느껴지는 풍압!
"제기랄!"
억지로 눈을 뜨니 몽둥이를 그대로 밀어붙이는 모습이 보였다.
몸을 던졌지만 발끝이 몽둥이에 걸리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트롤의 마나로 강화된 몽둥이는 보통 몽둥이가 아니다.
미궁의 벽에 부딪혀도 아무런 이상이 없는 강철 몽둥이가 된다.
단지 스친 것만으로 발가락뼈 두 개가 아작났다.
"크윽!"
켈리어에게 수백 번을 찔려왔던 내게 이 정도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덜컥이는 몸을 바로잡고 트롤에게 달려들었다.
오히려 달려들어야 둔기의 공격을 피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나를 최대한 끌어올린 검을 들어 올렸다.
아직 3위계의 전유물인 검염(劍炎)까지는 아니어도 이 정도도 충분히 먹힌다.
목표는 트롤의 발뒤꿈치.
언젠가 트롤 사냥을 전문으로 하는 탐험가의 자기 자랑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가장 연약한 부분은 발 뒤쪽. 베어내면 넘어진다. 넘어지면 눈을 노리라고 했었지.'
날카롭게 파고들어 트롤의 오른발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절반쯤 휘두르고 나서 칼이 박혀 더는 나아가지 않았다.
"뭐? 안 베여져?"
몸이 덜컥였고, 아차하는 사이에 트롤의 왼발이 내 몸을 강타했다.
"커억!"
학즉사법을 익힐 때와는 다른 의미로 오장육부가 찢겨졌다.
내 몸이 훨훨 날아 미궁의 벽과 부딪혔다.
어마어마한 질량이 주는 충격.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뒤, 고개를 들어 트롤을 바라보았다.
트롤은 다리를 질질 끌며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괴물이 짓는 승리의 미소가 역겹다.
"봐봐."
나는 꺽꺽 웃으며 피를 토했다.
"이 멍청한 자식. 고작 2위계의 검으로 한 번에 잘릴 거라 생각한 거냐."
나는 부들거리며 검을 들어 올렸다.
나는 내게 다가오는 트롤의 오른발목을 주목했다.
처음에는 휘청거리던 몸이 내게 거의 다 다가왔을 때는 절뚝이는 수준으로 변해있었다.
"20초 남짓인가."
이쯤 되면 알 수 있는 정보는 다 얻었다.
"어이 트롤."
그르르⋯
"다시는 네가 나를 죽이게 하지 않는다."
나는 내 검으로 목을 찔렀다.
그렇게 꺼져가는 시야 사이로, 나는 빌고 빌었다.
'제발. 학즉사법을 익힌 뒤로 회귀하기를.'
학즉사법을 익힐 때의 고통은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트롤이 몽둥이를 들어 올리는 것을 보고, 내 시야가 끊겼다.
감각이 사라진다. 깊고, 깊고 긴 어둠 속으로.
역시 죽음은 개 같다.
-키릭.
⋯⋯
"여기군."
내 기도가 먹힌 걸까.
나는 트롤이 있는 공동에 들어서기 직전의 순간으로 돌아와있었다.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무한 회귀의 신이 나를 인도하는 기분이다.
저 트롤 놈을 무찌르라고.
나만의 착각이어도 좋다.
'앞으로 8번. 8번 더 죽으면 포기하자.'
이런 도전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임을 잊지 않으면 된다.
나는 나를 더욱 다그치며 공동으로 진입했다.
아직 오크의 내장을 빨아먹고 있는 트롤.
"야! 이 트롤 새끼야!"
내 엄청난 소리에 트롤의 어깨가 들썩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모습에서 일말의 공포심도 느껴지지 않는 것을 느끼고 안도했다.
하기야, 날 죽인 존재에게 공포감을 느꼈다면 켈리어의 시련에는 도전할 생각도 못 했겠지.
트롤이 오크의 시체를 집어던지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몽둥이를 집어 들고 나를 바라본다.
먹잇감을 보는 눈빛.
이번에는 내가 먼저 돌격했다.
트롤이 몽둥이를 쓸며 내 접근을 차단했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몸을 멈춰 그 공격이 내 앞을 지나가게 한 후 다시 트롤에게 접근했다.
순식간에 이뤄진 가속과 감속, 학즉사법으로 인해 강화된 속도라 해도 기세가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전 죽음보다는 빠르게, 더 멀쩡하게 트롤의 몸뚱이로 접근하는 것에 성공했다.
방심해서는 안 된다.
트롤의 무서움은 그 몽둥이질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몸의 튼튼함과 그 튼튼함을 보조하는 경이로운 회복력이다.
나는 공격이 성공하자 긴장을 풀었던 지난 시도를 반성하며 트롤의 발목을 베었다.
내가 생각하는 완벽한 타이밍에 검을 휘둘렀지만 역시 다 베지 못했다.
이번에는 여유를 남겼기에 검과 함께 몸을 움직일 틈을 만들 수 있었다.
"크어어어!"
본능에 몸을 맡긴 트롤의 미친 움직임.
규칙도 없고, 그저 상황에 맞춰 손과 발을 휘두를 뿐이다.
따라서 켈리어의 시련 때처럼 패턴을 외울 수도 없고, 오로지 내 능력으로만 공격을 피해야 한다.
받아치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 질량의 폭격.
나는 때로는 바닥을 구르고, 몸을 집어던지며 트롤의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놈의 발목을 베었다.
"크어어!"
엄청난 소음과 함께 트롤이 뒤로 넘어갔다.
1차적인 성공이었다.
'이제 두 눈을.'
트롤이 몽둥이를 집어던졌다.
나는 강화된 동체 시력으로 겨우 피해냈다.
다시 접근하며 벨 수 있는 순간마다 트롤의 모든 부위를 베어냈다.
그렇게 트롤의 신경을 분산시키고, 마침내 기회가 왔을 때.
푹!
내 검이 트롤의 두 눈을 빠르게 찌르고 빠져나왔다.
"크아아아아!"
자신의 양 두 눈을 붙잡고 고통의 비명을 지르는 트롤.
나는 쉬지 않고 훤히 드러난 놈의 목을 사정없이 찔렀다.
이리저리 휘두르는, 평범한 2위계라면 절대 피할 수 없었을 트롤의 팔 공격을 능숙하게 피하면서.
"죽어! 죽어! 죽어! 죽어!"
목으로 팔을 내리면 다시 눈을 찌르고, 눈으로 팔을 올리면 다시 목을 찌르고.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을까.
"끄르르륵."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트롤의 움직임이 멈췄다.
나는 헉헉거리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해, 해냈다!"
그 순간.
-퍽!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던 트롤의 발이 내 허리를 후려쳤다.
"으악!"
내 몸이 날아 트롤의 얼굴 옆으로 놔뒹굴었다.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가장 먼저 든 감정은 호기심이었다.
'도저히 공격이 이루어질 수 없는 각도였단 말이지.'
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내 허리를 박살 낸 건 트롤의 발이 아니었다.
"아까 버린 오크의 시체를, 발로 집어던졌구나."
그야말로 집념이다.
트롤이 팔만 내 몸을 향해 움직인다.
그대로 높이 올라간다.
'척추가 부러졌군. 하반신에 감각이 없어.'
제기랄!
그렇게 주의했건만, 마지막에 결국 방심하고 말았다.
하지만 내 몸을 짓이길 것이라 생각한 트롤의 팔은 배 위에 얹어질 뿐이었다.
"?"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리니 이미 피투성이가 된 트롤의 모습이 보였다.
아주 얕은 숨. 계속해서 피가 뿜어져 나오는 목.
나를 바라보는 트롤의 눈.
반쯤 재생된, 초점이 잡히지 않고 있는 눈이다.
나는 박살 나버린 허리에서 오는 통증을 마나로 돌보는 것보다, 트롤의 눈을 마주 보는 것을 선택했다.
트롤의 눈에서 점차 빛이 사라지더니 이내 완전히 숨이 멎었다.
"흐흐흐."
나는 고통에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하면서도 미친 듯이 웃었다.
처음은 패배, 두 번째는 무승부다.
만약 내게 세 번째의 기회가 있다면?
무조건 승리다.
그렇게 나는 트롤과의 싸움을 복기하며 죽음을 기다렸다.
그런데, 바로 죽을 부상이 아니었다.
"망할. 곱게 죽을 수도 없네."
검을 들 힘도 없다.
그냥 학즉사법의 다음 단계에 도전해서 죽으려고 할 때였다.
"어? 저거 트롤 아니야?"
"⋯씨발 좆됐다! 튀어!"
"잠시만. 저거. 뭔가 이상한데?"
다른 탐험가 파티인가?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한 번 죽지 말고 기다려보자.
"죽었어."
"으. 완전 난자됐는데?"
"저번에 한 번 출현했다더니. 사무소 쪽 해결사가 죽인 건가?"
시체 반대편으로 넘어온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는 나를 발견했다.
"여기 사람!"
"진짜?"
"⋯⋯."
내 배 위에 덮여있는 트롤의 팔을 걷어낸 남자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어. 살아있네?"
"안녕하슈."
"아."
세 명의 사람이 모여들었다.
남자 둘과 여자 하나.
복장을 보아하니 로그 하나와 전위의 탱커, 후위의 딜러로 구성된 최소단위 파티다.
내 하체를 본 녀석들의 표정이 구겨졌다.
"이거 못 살겠는데?"
"아이고. 아저씨 혼자 잡으신 겁니까?"
"그렇다만."
여자가 딜러의 팔을 툭툭 쳤다.
"어떻게든 살려봐봐."
"아니, 우리가 포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건 돌아가는 도중에 죽어."
정확한 분석이었다.
나도 딜러의 추측을 긍정했다.
"그럴 것 같군."
"어떻게. 고통을 덜어드릴까?"
"좋지."
"트롤 시체는? 제가 당신을 죽이면 소유권은 제 것이 됩니다만?"
"수고비로 치지. 가져."
내게는 아무 상관 없는 문제였다.
문답무용으로 내 목을 치지 않는 걸 보니 꽤 인성이 바른 놈들이었다.
나쁘지 않다.
학즉사법을 익혀 온몸이 터져나가는 것보다야 정신적으로는 편하겠지.
그 대가가 트롤의 시체니 저들도 한참 남는 장사다.
이름하여 윈윈.
여자 로그가 딜러의 팔을 잡았다.
"이건 살인⋯."
"살인이 아니야. 죽을 사람 고통을 덜어주는 거니까."
나도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는 더 말하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저들은 나를 죽이고, 트롤의 시체를 처리하겠지.
그러고 보니 궁금하다.
내가 죽은 뒤 이 세계는 어떻게 될까?
아예 리셋? 아니면 내가 없는 상태로 그대로 진행?
아니, 후자는 말이 안 된다.
이미 백 번 넘게 죽었는데, 어떻게 세상이 백 개가 넘게 생긴다는 말인가?
"크크."
"왜 웃어요?"
"아무것도."
웅얼웅얼 기도를 드리던 딜러가 내 목 아래로 단검을 가져다 대었다.
"가족이나 지인에게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딱히 없어. 그나저나, 당신 이름은 뭐지? 날 죽이는 놈 이름은 알아야지."
"⋯⋯베른."
"좋아. 베른. 빠르게 부탁하지."
남자의 단검이 따끔한 느낌과 함께 부드럽게 내 목을 갈라왔다.
살을 뚫고 들어오는 금속이 주는 차가운 감촉이란.
도저히 말로 형용할 수 없다.
그렇게 곰곰이 생각하는 나를 바라보는 세 쌍의 눈을 뒤로하며 나는 죽었다.
그래. 죽었다.
-키릭.
⋯⋯
"후."
세 번째 도전.
이제 익숙한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회귀가 습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나는 빠르게 공동을 향해 달려나가 트롤을 향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
이번에는 화들짝 놀란 트롤이 먹던 오크를 놓쳤다.
틈을 주지 않고 그대로 놈을 향해 달려갔다.
그렇게 잠시 뒤.
나는 이미 숨이 멎어버린 트롤의 목에 내 검을 꽂아넣을 수 있었다.
별다른 상처도 없는 깔끔한 사냥이었다.
또한.
"해냈어."
과거의 무력했던 나와의 작별이기도 했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11
내 검으로 트롤을 잡다니. 그것도 홀로.
평생 가능할 것이라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이 업적에 대한 내 감흥은?
"⋯⋯."
딱히 별거 없다.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는 느낌?
더군다나 두 번이나 죽고 세 번째 도전에 사냥에 성공했으니 어디 가서 자랑하기도 쪽팔린다.
대충 계산해도 성공 확률 33%.
세상은 이런 적은 가능성에 목숨을 거는 놈을 미친놈이라고 부르기로 합의했다.
일반적인 사냥의 확률은 99% 이상이어야 한다.
3위계 한두 명으로 분명 트롤을 사냥할 수 있음에도 여러 명이 뭉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목숨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나에게는 확률이 있다는 것 자체로도 충분하지만 말이야.'
오크를 사냥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시체에 손을 대고 마나를 불어넣었다.
곧 트롤의 몸에서 내 마나에 반발하는 힘이 흘러나온다.
체내에 마정석이 있다는 증거였다.
"오."
오크 10마리를 잡아도 안 나오던 첫 마정석이 트롤에게서 나오다니?
물론 개체가 지닌 마나의 양이 많을수록 마정석이 존재할 확률이 높지만, 이 정도면 운이 좋다고 할 수 있겠다.
잠깐 정신을 집중해 마정석의 위치를 가늠하고, 오른쪽 쇄골 부분을 단검으로 푹 찔렀다.
피는 얼마 솟아오르지도 못하고 멈춘다.
단검을 기울여 최대한 상처를 벌린 뒤, 팔을 걷은 손을 쑤셔 넣었다.
"으쌰."
건져낸 것은 한 손에 딱 쥐기 좋은 크기의 마정석.
색깔은 연보라색.
"중급인가?"
대박을 쳤다.
혼자서 3개월은 놀고먹어도 될 돈.
그것도 정말 펑펑 써야 겨우 소진할 수 있을 돈을 벌었다.
시체는 깔끔하게 공양했다.
포션의 재료로도 쓰이는 트롤의 피가 주요 부산물이었는데, 이 과다출혈 트롤의 피를 빼봤자 돈이 될 부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양."
[시체를 공양합니다.]
[트롤 한 마리. 확인.]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진척도. 89.3%]
"헉!"
마지막 진척도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거의 30% 가까이 진척도가 올랐다.
하기야, 미궁 7~8층에서 주로 출몰하는 대형 몬스터를 잡았으니, 그것도 혼자.
이 정도의 진척도는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그렇게 내가 채취한 마정석을 제외한 모든 트롤의 부산물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트롤의 몽둥이를 가져와 시체의 팔 위에 얹어놓는 것으로 나의 할 일을 마무리했다.
이제 잠깐 쉬어도 되겠다.
⋯라고 생각했을 때였다.
"어? 저거 트롤 아니야?"
"⋯씨발 좆됐다! 튀어!"
"잠시만. 저거. 뭔가 이상한데?"
아. 저 친구들이 있었지.
피투성이가 된 채 대자로 쓰러진 트롤.
그 트롤 옆에 있는 나는 아직 그들의 시야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트롤의 몸을 빙 돌아 나왔다.
나를 본 세 명의 파티가 화들짝 놀랐다.
"죽여놨어. 안심해도 된다."
"와⋯."
"혼자서 잡으신 거요?"
"뭐, 운이 좋았지."
나를 죽여준, 파티의 딜러인 베른이 멍한 시선으로 내 몸을 훑었다.
"사무소의 해결사?"
"그냥 보통 탐험가다. 더 이상 접근하지는 말고."
내 말을 들은 파티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미궁 탐험가의 불문율.
[함부로 접근하지 말라.]
살인멸구가 가장 쉬운 공간이 미궁이다.
미궁의 두더지, 클라이머와 더불어 같은 탐험가도 언제든지 살인강도가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처음 구성한 파티 외 다른 파티가 있으면 멀리 돌아가는 것이 상식.
이렇게 접근할 경우 문제의 소지가 될 여지가 있다.
나는 저 파티가 비교적 선량한 축에 속하는 파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비교적 경계가 덜했다.
하지만 저들은 나의 위험성을 모른다.
그렇기에 거리를 두는 것이 당연하다.
나는 서서히 미궁의 밥이 되어가는 트롤의 몸뚱이를 툭툭 쳤다.
"서로 갈길 가자고."
"⋯⋯그러죠."
"지나가도 좋아. 열심히 해."
우리는 서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천천히 멀어져 갔다.
이미 죽음으로 지워진 과거가 생각나 손을 살짝 들어 올리자 오히려 화들짝 놀라는 베른.
"흐. 못할 짓이군."
나는 천천히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마나도 80% 가까이 썼고, 몸이 피곤에 절여져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학즉사법을 수련했던 은신처에 가야겠다.
미궁 속에서 혼자 야영할 수 있는 장소는 한정되어 있으니.
나는 내리 두 시간을 걷고서야 은신처로 돌아올 수 있었다.
가는 길에 잡은 오크 다섯 마리는 덤이다.
쓰러질 것 같은 몸으로 종을 설치하고 가져온 육포와 부순 빵조각을 입에 굴리며 전투를 복기했다.
'너무 날뛰었어.'
학즉사법으로 강화된 신체능력을 너무 막무가내로 휘둘렀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근육을 혹사한 셈.
당장 내일 내게 찾아올 전신 근육통이 무섭다.
웬만하면 안전지대로 복귀하는 것이 좋지만 더 갈 힘도 없다.
여기서 쪽잠을 자고 난 뒤 복귀해야겠다.
"역시 혼자는 힘들군."
홀로 탐험을 하는 것은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일반적으로 탐험가들이 혼자 다니지 않는 이유가 있다.
일단 잠.
밤낮이 사라지는 미궁의 특성상 몬스터들이 쉬지 않고 출몰한다.
따라서 불침번은 필수나 다름없다.
그런데 혼자서는 불침번을 설 수 없다.
잠은 자야 하는데.
더불어 짐.
탐험에 필수적인 도구가 있다.
검 손질 키트나 주머니, 불을 피운다면 장작, 감시용 종 등.
다섯 명이 가도 하나, 혼자 가도 하나가 필요한 도구들이다.
그런데 혼자 가면 전부 홀로 들어야 한다.
자연스레 식량 등 다른 짐들이 줄어들 수밖에 없고, 이는 탐험 가능 시간이 적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몬스터로부터 약탈한 식량으로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특히 육포.
그게 인육으로 만들었을지 어떻게 알고 먹는다는 말인가?
"음."
역시 혼자서는 힘들다.
적어도 한 명, 아니라면 파티의 최소 기준인 두 명은 더 있어야 한다.
"파티를 구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몸을 맡길 동료를 구하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다.
목숨을 맡길 수 있는 신뢰 구축이 필요하니.
차라리 콜린을 다시 꼬드겨 파티에 참가시키는 게 낫겠다 싶다.
"콜린⋯⋯. 나쁘지 않은데?"
지금 내 기준으로 보면 검술 실력도 낮고, 별 볼일 없긴 하지만 그래도 목숨을 맡길 수 있는 놈이다.
좋아. 내일 돌아가서 콜린한테 가자.
전투는 내가 다 할 테니 짐꾼만 해달라고 하는 거야.
그렇게 결정을 하니 속이 다 시원해진다.
나는 음식을 쑤셔 넣으며 배낭을 뒤져 미궁 3층의 지도를 꺼냈다.
조잡하게 그려진 지도는 오크와 고블린 군락지 등 위험구역은 확실하게 표시하고 있었다.
"진척도 확인."
[현재 진척도. 91.8%]
"⋯⋯그냥 3층 졸업 하고 가자."
결심이 바람 따라 흔들리는 건 여전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으악! 전신 근육통!"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심지어 경계를 하고 자야 한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그냥 꿀잠을 자고 말았다.
밤에 몬스터가 종을 울렸어도 절대로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로 잘 잤다.
추정 수면 시간은 최소 8시간!
"미친 놈."
그야말로 목숨 여러 개가 아니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숙면이었다.
나는 바닥에 엎드린 자세로 통렬한 반성을 했다.
"그래. 다음부터 이러지 않으면 되지."
일단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온몸이 돌이라도 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그날은 몸져누운 채로 밥만 축내며 보내야만 했다.
대신 학즉사법을 운용하며 보다 익숙하게 내 것으로 만들었으니 손해 본 하루는 아니었다.
이번에는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쪽잠을 자고 몸이 어느 정도 정상으로 돌아오자마자 은신처를 나섰다.
역시 이틀을 머물러서일까?
내 냄새를 맡고 모여든 건지 근처에 오크들이 많았다.
감각에 잡히는 놈만 대략 두 무리에 총 여섯 마리.
다행히 두 무리가 조금 떨어져 있었기에 각개격파에는 문제가 없었다.
전투? 역시 선수 필승이다.
"가자."
배낭을 던져두고 한걸음에 달려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오크를 급습했다.
예전이었으면 절대 떠올리지 못했을 선택지였다.
오크들이 당황하여 바로 대응하지 못했다.
나는 한 오크의 가슴을 길게 베어버리고, 다른 오크의 왼팔을 갈라버렸다.
그제야 오크가 반응을 했다.
"크어어!"
전투 포효를 들은 다른 쪽 오크가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나는 빠르게 몸을 움직여 왼팔이 잘린 놈을 마무리하고, 가슴이 반쯤 열린 놈의 고간을 차올렸다.
나가떨어지는 오크를 뒤로하고 벌어진 일대일 대결.
"흡!"
기합과 함께 교차하는 나와 오크.
승자는 당연하게도 나였다.
깔끔하게 목이 베어진 오크가 쓰러졌다.
속전속결을 위해 창대를 몸으로 받아냈기에 허리가 약간 쓰렸지만 별문제 없는 정도다.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마지막 오크는 이미 안색이 좋지 않다.
가슴을 벤 검이 갈비뼈를 가르지는 못했지만 고통이 상당한 모양.
나는 자비 없는 내려치기로 놈의 심장을 베었다.
빠르게.
"시체 공양."
[전투 중에는 시체를 공양할 수 없습니다.]
[전투 종료 후 시체와 인접한 곳에서 다시 시도해 주세요.]
"쯧. 늦었나."
곧바로 모습을 드러내는 추가 오크 세 마리.
동료의 시체를 보고 몸이 경직된다.
나는 거치적거리는 시체를 피하기 위해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오크들은 다가오지 않고 천천히 품을 뒤졌다.
꺼낸 것은 호각이었다.
"이런 씨불!"
아무래도 근처에 오크들이 더 있는 것 같다.
이미 입에 가져간 호각을 부는 것을 막는 건 불가능하다.
안전지대로 돌아가는 가장 빠른 길은 오크들이 막고 있는 상황이다.
'어쩔 수 없군.'
나는 방비가 되어있는 오크들을 향해 돌진했다.
짧게 두 번 호각을 분 오크가 호각을 던지고 창을 들어 올렸다.
창 둘에 도끼 하나.
무장도 나름 출중하다.
나는 창을 든 오크의 찌르기를 피한 뒤 학즉사법의 마나를 한껏 끌어올린 검으로 창대를 내려쳤다.
두 동강 나는 창대.
곧바로 다음 오크의 창격을 피하고 무기가 잘린 오크의 어깨를 찔렀다.
다시 찔러오는 다른 오크의 창.
몸을 꺾어 창을 겨드랑이에 잠시 끼운 뒤 다시 검을 내리쳐 잘라낸다.
바로 나를 죽이기 위해 다가오는 도끼를 피하며 뒤로 물러났다.
"후."
내 근처의 창날을 발로 멀리 차버리자 이제 오크들에게 남은 무기는 짧은 봉 두 개와 도끼 하나다.
인간이었다면 사기가 저하되고도 남는 상황.
하지만 몬스터가 괜히 몬스터로 불리는 게 아니다.
역시나 봉이 된 창을 내게 던지면서 육탄전을 시도하는 오크.
부상당한 놈이 죽음을 각오하고 팔다리를 펼치며 나를 끌어안으려고 했다.
일반 탐험가 파티라면 탱커의 방패 차징이 필요한 상황이다.
'제대로 된 탱커가 있었으면 훨씬 편했겠지.'
물론 없으니 내 몸으로 때워야 했다.
검을 휘둘러 내게 달려든 오크의 목을 베어내고, 뒤에 숨어있던 다른 오크의 가슴에 검을 박아 넣었다.
그러고는 검을 놓아버리고 뒤로 몸을 빼냈다.
단 1초 차이로 내 손이 있던 자리를 스쳐 지나가는 도끼.
그야말로 한 끗 차이다.
무기를 잃었지만 문제 없다.
바닥에 무기가 있었으니.
먼저 베어낸 창을 두 손에 들고 한 손으로는 투척을, 나머지 창은 두 손으로 꽉 잡아 돌진한다.
"죽어!"
"크아아아!"
오크가 날아드는 창을 쳐낸 불안정한 자세로 내 몸을 양단하려 했다.
충격점에 마나를 잔뜩 불어넣어 도끼를 튕겨내자 활짝 열린 오크의 가슴이 보였다.
됐다!
켈리어에게 내가 당했던 수를 그대로 따라 하는 데에 성공했다.
올려찌른 창날이 오크의 턱과 입천장을 뚫으며 뇌에 닿았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헉. 헉. 시체 공양. 전부."
[시체를 공양합니다.]
[오크 여섯 마리. 확인.]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진척도. 93.2%]
곧바로 검과 배낭을 챙겨 안전지대 방향으로 몸을 뺐다.
이 지역은 애초에 오크가 이렇게 많이 출몰하는 지역이 아니다.
"나 때문인가 아니, 트롤 때문일지도."
오크가 내가 죽인 트롤 사냥을 위해 몰려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말려들어서 좋은 일은 없다.
나는 활동 지역을 축소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1시간을 안전지대 쪽으로 이동한 뒤, 다시 오크 사냥을 시작했다.
가끔 고블린도 발견해서 사냥해 주고.
역시 대부분은 오크 정찰대였다.
그렇게 5시간.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진척도. 94.5%]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진척도. 94.9%]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진척도. 95.5%]
⋯
⋯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진척도. 100.0%]
[진척도 100%를 달성하였습니다!]
[달성 등급. D+]
[주요 파티원 : 1명.]
[보상 : 하급 마정석 3개.]
[미궁 4층으로의 입장이 가능해집니다.]
"좋아!"
나는 사라지는 고블린의 시체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환호했다.
다섯 명이서 1년을 예상했던 일을 혼자서 이틀 만에 해냈다!
나는 어느새 마법처럼 옆에 나타난 하급 마정석 3개.
마치 허공에서 마정석이 생성되는 것 같다.
아직 어떤 마법사도 밝혀내지 못한 미궁의 신비함 중 하나다.
나는 주머니를 쏟아 마정석을 확인했다.
"최하급 마정석 8개, 하급 3개, 중급 1개인가."
최대 소득과 최고 성과.
들뜬 마음을 애써 잠재우며 안전지대로 향한다.
이제는 천천히, 안전하게.
그렇게 두 시간 뒤.
나는 무사히 칼리움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이제 내가 얻은 보상의 가치를 확인할 시간이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12
마정석을 처분하니 금화 2개와 은화 30개가 나왔다.
2골드 30실버.
트롤에게서 뽑아낸 중급 마정석의 가격이 2골드가 넘어갔다.
두둑한 주머니!
이 맛에 탐험가 못 그만둔다!
물론 이렇게 많이 번 적은 인생 처음이었지만.
"크."
"3층에서 중급 마정석? 트롤이라도 잡으셨나?"
"하하! 그렇다 칩시다."
2골드는 사무소 은행에 맡기고, 은화만 챙겨 하수구로 복귀했다.
내가 원래 머물고 있던 장소의 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콜린!"
하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콜린의 것이 아니었다.
"여. 루카스. 살아있었냐?"
역시나.
내 파티가 머물렀던 거처는 다른 놈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토카리냐."
"흐흐. 이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토카리 패거리. 미궁 식으로 토카리 파티.
네 명으로 구성되었고, 우리와 똑같이 미궁 탐험을 한다.
듣자 하니 2층 80% 수준이라고 한다.
이제는 사라진 내 파티와의 사이는 서로 소 닭 보듯 하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사이.
"됐고, 콜린은?"
"막노동하러 갔지. 어이. 그보다 할 이야기가 있는데."
"어? 여기? 너 쓰고 싶으면 써. 네 원래 자리 쓰지 뭐."
"아니. 그 이야기가 아니다. 사업 이야기라고."
"엥? 거창하게 무슨 사업 씩이나."
토카리가 코를 쓱 훔쳤다.
"탐험가 계속한다며. 마침 파티도 없겠다. 우리도 다섯 명 채우고 싶으니, 우리랑 같이 하자."
"싫은데."
"⋯대답이 빠르군."
안전을 도모하는 인원이 많은 탐험은 내 무한 회귀와는 상성이 맞지 않다.
내가 들어가면 5명이 되는 토카리 파티는, 아마 4층까지의 길을 뚫는 데에 년 단위의 시간을 소모할 거다.
"당분간 솔로. 아니면 콜린이랑 둘이서."
"새끼가!"
토카리의 옆에있던 따까리. 톰이 벌떡 일어났다.
"권유하는 줄 아냐? 3층 길이나 뚫어달라고! 그리고 막일도 좀 하고!"
내게 터벅터벅 다가오는 톰.
나는 검을 뽑아 다섯 걸음 앞에 선을 긋고 다시 집어넣었다.
순간 움찔한 톰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이 이상 다가오지는 말고. 내 옷은 있냐?"
"좆까고 있네!"
금을 넘어온 톰이 주먹을 휘둘러왔다.
하품이 나는 속도다.
나는 녀석의 주먹을 정면으로 잡아챈 다음 강제로 몸을 움직여 팔을 꺾어올렸다.
모든 행위는 제자리에서, 한 손 만으로 이루어졌다.
"끄아아악!"
"다가오지 말라니까."
다른 손으로 턱을 탁 때리니 기절하는 톰.
자리에 조심히 눕혔다.
"토카리."
"어, 어?"
덩치 큰 토카리가 당황하는 장면도 가관이다.
사실 토카리는 예전의 나와 비슷한 실력이었다.
다만 안전주의 성향 때문에 진척도가 느렸을 뿐.
그런데 비슷한 실력인 줄 알았던 내가 본인이 눈으로도 따라오지 못하는 실력을 보여준다?
당황할 수밖에 없다.
"안 들어간다고. 네 파티."
"그래. 알겠다."
"내 옷이랑 기타 등등은?"
"콜린이 가져갔어. 내 예전 거처로 가면 된다."
"땡큐."
미련 없이 돌아서려는데, 토카리의 다른 따까리가 내 등 뒤로 달려들었다.
아예 몽둥이까지 들고 있으니 작정을 했다.
나는 검을 뽑아 몽둥이를 깔끔하게 베어내는 것으로 응수했다.
"헉!"
내 발차기를 명치에 제대로 얻어맞은 놈이 나가떨어졌다.
"네가 먼저 시작한 거다."
내가 검을 들고 다가가자 토카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휘저었다.
내 실력의 일부분을 확신한 토카리의 눈이 떨리고 있었다.
"야야야. 그럴 필요까지 있겠냐. 내가 잘 교육하지. 사고로 치자고."
그러면서 건네는 돈주머니.
"이걸로 술이라도 사 먹어."
나는 피식 웃으며 주머니를 받아들었다.
이런 푼돈이라도 받아둬야 한다.
이곳의 생리상, 돈을 안 받으면 오히려 더 전전긍긍하기 마련이니까.
토카리는 나의 상황을 듣고 서열을 확실하게 하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결과는 반대로 나왔다.
보복을 따로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그 정도의 용기는 없는 녀석들이다.
숙소에서 나와 칼리움 상인 지구의 건물 공사장을 뒤지니 콜린을 찾을 수 있었다.
콜린은 나를 보고 반가운 티를 냈다.
"여!"
"루카스! 살아있었구나."
"죽었겠냐. 걱정했어?"
"그러면. 켈리어의 시련에 도전한다고 지랄하더니 일주일 넘게 안 보이는데, 걱정을 안 하냐?"
"아, 그랬었지."
"야. 정신 차리고 안 갔나 보네. 그냥 미친놈인 줄 알았다니까."
잠깐 포옹하고, 미리 사온 깨끗한 물을 건넸다.
"한 잔 마시고. 오늘은 내가 쏠 테니까 일 그만하자."
"야. 돈은 무슨 땅 파면 나오냐?"
이런 공사판 일당이라고 해봤자 동화 50개 정도다.
"내가 일당 줄 테니까."
찰랑이는 주머니 안을 본 콜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냐?"
"좀 벌었지."
은화 하나를 꺼내 이리저리 둘러보는 콜린. 가운데 박혀있는 은은 진짜일 수밖에 없다.
"됐고. 빨리 한잔하러 가자!"
"어, 어."
작업반장에게 적당히 동화를 찔러주니 콜린을 빼내기는 쉬웠다.
우리는 하수구에 가까운 주점에 자리 잡았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익숙한 곳은 여기다.
급하게 시원한 맥주부터 찾았다.
잔을 받자마자 그대로 원 샷.
다음 맥주를 시키고서야 입이 좀 트였다.
콜린의 관심사는 역시 돈이었다.
"너 왜 이렇게 돈이 많아?"
"혼자 오크 사냥했다."
"미친놈! 네 실력으로?"
"깨달았거든."
나는 살짝 붉은 마나를 보여주었다.
"와우. 뭔데?"
"깨달음."
학즉사법은 이 정도만 보여주자.
"그래서, 같이 미궁 다시 가자. 혼자 하려니까 뒤지게 힘들어. 믿을만한 사람도 너밖에 없고."
"미궁⋯⋯."
리필된 맥주를 꿀떡 마신 콜린이 잔을 탁 내려놓으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루카스. 미안하다. 도저히 자신이 없어."
"⋯⋯."
"매일 악몽이야. 마크, 밥, 페트. 녀석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지? 개죽음이었어. 그냥 사람이 부서졌다고. 어린애 장난감처럼. 아직도 그 광경이 눈에서 사라지지 않아."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이 공허하다.
"그러냐."
"어. 권유해 준 건 정말 고마운데, 미궁을⋯ 거기를 그것도 고작 두 명이서 다시 가는 건 죽어도 못할 것 같다."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데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이미 마음이 제대로 꺾인 모양이다.
손을 달달 떠는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 트롤을 내가 죽였다고 말을 해야 하나?
아니, 도저히 믿어줄 것 같지 않다.
미친놈 취급 안 받으면 다행이지.
"미안. 못할 말을 했다."
사실 누구라도 상관없다.
정말 최악의 경우 뒤통수를 치더라도 내겐 기회가 한 번 더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일단 나는 콜린과 코가 삐뚤어질 만큼 먹고 또 먹었다.
한 끼에 무려 은화 3개를 쓴, 인생 최고의 사치를 부렸다.
다음 날. 나는 금화 30개를 들고 노예시장을 방문했다.
가진 돈의 거의 전부다.
너무 큰 돈에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다.
"든든한 친구가 필요해."
짐을 들게 하고, 불침번도 세우고, 이것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만약 가능하다면 탱커 역할도 맡기고 싶다.
더불어 내 말에 절대복종해야 하고.
이 점을 열띠게 설명했지만 노예상인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예산이 얼마라고?"
"금화 20개 내외로⋯⋯. 사랑으로 돌보겠습니다!"
"흠. 그건 별로 안 궁금하고. 금액 책정부터 엉망이군. 일단 따라오시게."
노예상인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기대하던 노예들은 없고, 에릭의 집에서나 봤던 접대용 가구들이 있는 게 아닌가?
어벙벙한 내 모습을 본 노예상인의 얼굴이 한심으로 가득 찼다.
"어느 가문에서 이런 기본도 안 된 촌뜨기를 보낸 건가?"
"에?"
"어느 가문에서 왔냐고."
어쩐지 초짜 티를 내도 무시를 않더라니.
이대로 내가 사러 왔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그대로 쫓겨날 것 같다.
나는 기지를 발휘했다.
"아. 그건 비밀입니다."
"흥. 그러겠지. 자. 이걸 보면 된다."
노예상인이 얇은 두께의 책을 건넸다.
펼쳐보니 노예 목록이 보인다.
'글씨 잘 못 읽는데!'
읽을 줄은 알지만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봐야 겨우 이해하는 수준이다.
이 빌어먹을 필기체!
"맘에 드는 놈을 추리게. 더 자세히 설명해줄 테니. 영 없으면 딴 데 가고, 아니면 마침 오늘 경매하는 날이니까 경매장에라도 가던지."
툴툴거리면서도 확실하게 설명해 주는 노예상인이었다.
듣자 하니 도시는 땅값이 비싸 도시 바깥에 터를 마련하고 노예를 공동으로 관리한다고 한다.
여기 있는 노예상인들은 영업을 전문으로하고.
각자의 역할을 나눴다고 한다.
이걸 분업이라고 한다나 뭐라나.
"아하!"
"이런 것도 모르고 있었나? 기본 교육이 안 돼도 제대로 안 되어 있구나. 몇 살이야?"
"열일곱 살입니다만."
"한창이네."
간단한 인상착의와 얼굴 그림, 각각이 특징이 책에 적힌 것들의 전부였다.
나는 책의 페이지 하나하나를 한참 뚫어지게 쳐다보다 한숨을 쉬며 책을 닫았다.
"역시 직접 봐야겠네요."
"그래. 우리는 대량 판매에 특화되어있으니까. 노예 경매장은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가장 시끄러운 곳. 상시 판매 중인 노예를 직접 보려면 남문으로 나가면 돼."
"감사합니다."
"쯧쯧. 주인한테 혼 안 나게 잘 하라고."
"눼이눼이."
노예상인은 떠나는 내게 굳이 빵 한 조각을 챙겨줬다.
보기와 다르게 착하다.
다음에 꼭 매상을 올려줘야겠다.
기회가 있다면.
노예상인의 말대로 거리를 걸어가니 어느 공간이 엄청나게 시끄럽다.
"저기인가?"
빠르게 달려가니 한창 경매가 진행 중이다.
확성 아티팩트를 장착한 진행자의 목소리가 우렁차다.
"거기거기! 10골드 50실버! 이 엉덩이 좀 봐라! 청소도 잘하게 생긴 년이야! 17살 11골드! 그렇지! 12골드! 좋아! 13골드. 13골드 없냐!"
무대가 보이는 부분에 적당히 자리 잡자 옆 사람들이 공간을 만들어줬다.
"18골드 60실버! 낙찰! 무대 뒤편으로 오슈! 자! 다음 경매!"
일단 닥치고 앉아있어 보자.
한 30분 앉아있으니 어느 정도 돌아가는 게 보였다.
경매 진행 순서는 여자, 여전사, 남자, 남전사, 기타 순으로.
수신호도 대충 외워놨다.
여전사에서부터 눈을 부릅뜨고 내 미래 동료를 찾았다.
"자자! 미궁 2층 탐험가 출신! 2위계! 빚을 못 갚아서 평생 몸으로 갚는답니다! 아주 발랄해! 30골드 부터!"
엥? 30골드?
지금 내 전 재산인데? 은행에 5골드 더 있지만.
"31골드! 32골드! 35골드!"
가격이 미친 듯이 올라간 여전사는 51골드에 낙찰되었다.
나는 입을 떠억 벌리며 경매 진행 과정을 바라보았다.
"남자 전사는 더 비싸겠지."
귀동냥으로 들으니 최소 가격이 50골드란다.
내 평생 만져볼 일 없는 금액에 절로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시간만 버렸어.'
남자 전사는 보지도 말고, 남자까지만 보고 가자.
짐이랑 불침번만 서줘도 뭐 감지덕지니까.
그렇게 남자 경매가 시작되었다.
평균가는 25골드.
어린 노예는 20골드 아래 가격이 형성되기도 했다.
먹이는데도 엄청 드니까. 이해할만하다.
골격이 튼튼한 남자는 30골드 즈음이다.
"좋아. 한 번 해보자."
나는 계속 경매를 지켜봤지만, 영 마음에 드는 매물이 없었다.
도둑질을 아주 거하게 했는지 노예형을 받아 손가락 몇 개가 없고, 가슴에 커다란 흉터가 있고, 빼빼 말랐고.
그래도 30골드나 쓰는데 외관이 튼튼해야 하지 않겠나.
그렇게 한 명 한 명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자! 다음 매물은 좀 폐급입니다! 단순노동만 가능! 좀 멍청하지만 몸 하나는 끝내주는 놈이라고! 저기 사막에서부터 팔려온 야만인! 말은 대충 통합니다! 10골드부터 시작!"
나는 눈을 번쩍 뜨며 단상을 바라보았다.
덩치는 크다.
말을 듣고 봐서 그런지 몰라도 조금 멍청해 보이기는 한다.
눈을 뒤룩뒤룩 굴리고 있다.
가슴을 텁텁 때려도 반응조차 안 하는 걸 보니 맷집은 괜찮아 보인다.
"자! 11골드! 12골드 나왔구요!"
나도 얼른 손을 들었다.
사회자가 귀신같이 내 손 모양을 잡아낸다.
"14골드 나왔습니다! 16골드? 16골드 없습니까? 15골드! 자, 바로 17골드 나왔쓰! 단순노동 인력으로는 충분하지! 좋아 18! 19! 20골드!"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수신호를 보냈다.
21골드!
"21골드! 더 없습니까!"
제발! 제발! 제발!
"좋아! 22골드!"
씨발!
사회자가 내 눈치를 보는 것이 보였다.
"자. 22골드. 23골드 없습니까?"
나는 체념하며 손을 들었다.
이 이상 넘어가면 관둘란다.
"23골드! 24골드 없어? 없지? 없다! 23골드! 23골드 당첨! 낙찰입니다!"
"좋아! 좋아!"
나는 크게 박수를 치며 단상 뒤로 달려갔다.
말 잘 듣는 짐꾼이 고작 23골드! 싸다! 살게요!
나는 내어진 차를 후르릅 마셨다.
그러고는 싱글벙글 웃으며 주머니를 뒤졌다.
"수수료 10% 땡기면 25골드 30실버입니다."
수수료? 이런 미친?
내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여기서 거래를 무르면 토막살인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다.
나는 체념하며 주섬주섬 돈을 꺼냈다.
"여깄슈."
"확인 됐습니다. 어이!"
곧 문이 열리더니 든든한 짐꾼이 나타났다.
"나. 라분. 노예."
"그래 임마! 네 주인님이다. 여기 앉아!"
의자가 삐걱거리며 덩치를 겨우겨우 받아냈다.
"자. 이름은 라분이고. 나이는 몰라요. 채무, 원한 등등 문제 될 거 없는 깨끗한 놈이고. 주인은 누구? 배달로 해드릴까?"
"아뇨. 제가 주인 하겠습니다."
"오? 그래도 돼요?"
아무래도 저 녀석도 이전의 노예 상인과 같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괜히 착각을 수정해 주지는 말자.
"일단은요."
"아하! 거기 마법사도 있어? 이거 이놈 잘 팔렸네."
곧 마법사가 오더니 내 손목에 선을 그으며 뭔가를 새기기 시작했다.
나는 의식적으로 손에 있던 학즉사법의 마나를 속으로 밀어 넣었다.
마법사의 마나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다.
"자. 지금 새겨주는 건 공격 금지와 도주 금지, 간단한 명령 수용뿐입니다. 나머지 기능은 지금 추가금 내시거나, 아니면 다시 새겨야 해요."
"그걸로 충분합니다."
"나. 노예."
"그래 임마! 이 분이 네 주인님이시다!"
"내. 주인."
"어휴. 답답하실 겁니다."
"하하. 괜찮습니다."
"하기야. 알아서 잘 쓰시겠지."
직원이 서류를 즉석에서 작성하며 넘겼다.
"다음 경매 끝나기 전에 끝냅시다. 이 서류 들고 등록소 가서 제출하시면 되고. 요 서류는 상속자 등록이니까 진짜 주인 주시면 되고. 오케이. 끝!"
나는 두툼한 서류와 함께 경매장을 나왔다.
결과적으로 든든한 노예를 얻었다.
"라분!"
"나. 라분."
"그래 그래. 가자."
"라분. 간다."
등록소에서는 노예 소유 등록에 1골드의 수수료를 요구했다.
"이런 망할."
중얼중얼 거리고 1골드를 지불하고서야 라분이 내 노예가 되었다.
"든든한 짐꾼이 26골드 30실버면⋯ 거저⋯⋯ 겠지?"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라분을 돌아보았다.
시선을 허공에 둔 라분은 천천히 나를 따라오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라분의 몸 안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마나 호흡법은 따로 익히지 않은 것 같고."
호흡법을 익힌 자는 마나의 움직임을 보면 바로 알 수가 있다고 어디서 들었다.
하지만 라분의 마나는 그야말로 무질서.
딱 학즉사법을 익히기 전의 나와 같다.
만약 라분이 호흡법을 익히지 못하고 성장한다면?
옛날의 나처럼 그때그때 필요한 마나를 주먹구구식으로 몸에서 끌어다 쓰게 된다.
못 배운 마나 운용의 전형적인 패턴이다.
그래도 기본적인 마나량이 많아 싹수가 좋다.
"학즉사법. 익혀야겠지?"
"?"
이미 내 노예가 된 이상 전속 짐꾼이 되는 건 확정이다.
걱정 마라. 내가 목숨 걸고 익히게 해줄게.
미궁의 무한회귀자 13
지금 나의 거처는 토리코 파티가 사용하던 아담한 장소다.
나와 콜린과 라분이 자리하니 아주 그냥 꽉 찬다.
"그러니까. 새로 구한 짐꾼이 이 덩치라고?"
"어."
"나. 짐꾼. 아니다. 라분이다."
"그래. 이 녀석 이름은 라분. 나랑 같이 미궁에 들어갈 친구지."
콜린은 라분의 오른손 손등에 새겨진 노예 각인을 보았다.
"뭐야. 노예잖아? 어디서 빌려온 거야? 얼마 줬어?"
"다 수가 있는 법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일 안 가냐?"
"어제 그렇게 마셨는데, 일어난지도 얼마 안 됐어."
"그러면 오늘 일당 공쳤네?"
"그래. 임마."
나는 품에서 은화를 하나 꺼냈다.
이게 2,630개가 있으면 합법적으로 라분을 살 수 있다 이 말씀이야.
"그럼 소일거리나 해라."
"어?"
"한 3시간 동안 밖에서 망좀 봐줘. 누가 들어오려고 하면 크게 소리 지르고."
콜린이 얼떨결에 내가 던진 은화를 받아들었다.
잠시 주춤거리더니 부리나케 바깥으로 뛰쳐나간다.
"준비 완료!"
"좋아."
이 녀석과 십 년 가까이 같이 지냈기에 녀석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뻔히 안다.
"나 안 미쳤다 임마!"
"그래?"
"망이나 잘 봐."
"알겠습니다!"
대답이 빠릿하니 좋군.
나는 바로 라분을 돌아보았다.
"라분."
"주인."
"준비 됐냐?"
"준비? 라분. 준비."
"좋아."
이렇게 멍청해 보여도 힘은 좋다.
말도 못 할 뿐이지 알아듣기는 잘 하는 편이고.
딱 내가 원하는 짐꾼의 상이다.
학즉사법 잘 익혀서 탱커도 해주면 좋고.
"자. 학즉사법을 배운다. 이게 원리는 쉬우니까 그냥 하면 돼. 뒷감당이 문제지."
"학즉, 사법."
"그래."
라분은 체내의 마나를 움직일 줄 아는, 1위계의 경지였으므로 호흡법을 익히는 데에는 아무 문제 없었다.
나는 약 2시간의 진득한 설명으로 라분이 자신의 마나를 변환할 수 있게 했다.
"어? 붉은색이 아니라 노란색이네?"
"마나. 모래 색깔."
"아. 사막 출신이랬지? 그래서 다른 건가?"
학즉사법을 전수하는 게 처음이다 보니 이런 돌발 상황이 생겼다.
"이걸 심장에 넣는다. 그리고. 일어나는 모든 상황에 대해 내게 말해."
내 명령에 따라 마나를 심장에 집어넣는 라분.
저절로 아빠 미소가 지어졌다.
"으흐흐."
지금부터 라분이 겪을 고통은 누구보다 내가 알고 있었기에.
"크아아아악!"
뱃속이 녹아내리는 고통에 라분이 외계어를 내뱉으며 자지러졌다.
나는 얼른 라분의 몸을 바로 세웠다.
"제어해! 마나를 제어해!"
부들부들 거리며 마나를 붙잡는 라분.
한참을 그러더니 곧 진정한다.
"루카스! 뭔 소리야? 라분 비명 소리 맞지!"
"들어오지말고 망이나 잘 봐. 문 열지 말고! 은화 뺏어버린다!"
콜린이 말이 쏙 들어갔다.
나는 다시 라분에게 집중했다.
"마나는 어디 있어! 마나! 어디!"
라분이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명치를 가리켰다.
"좋아. 이제 마나가 어디로 막 움직이려고 하지? 내가 아까 말했던 것처럼, 조금이라도 더 많은 마나가 향하는 방향으로 마나를 인도해."
라분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나는 부작용을 각오하고 라분의 몸속에 마나를 침투시켜 마나가 움직이는 방향을 살폈다.
명치에 있다가 간 쪽으로 옮겨가는 마나.
좋아. 아직 안 터졌다.
'명치, 다음은 간이군.'
그 뒤 다시 명치로 이동하는 마나.
두 번 연속 성공이다!
"잘한다!"
라분이 여기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뭐야. 마나 양이 같아?"
끄덕끄덕.
"어디랑 어디?"
"머리랑. 가슴이랑. 배."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하나의 선택지를 골랐다.
내가 저번에 머리를 선택하자마자 죽었지.
그렇다면?
"우선 배로 가!"
"알았⋯다."
그 순간.
펑!
라분의 배가 폭발해버렸다.
배로 쏠린 마나가 자기 혼자 소용돌이치더니 그대로 사방으로 튀어나가버린 것이다.
"이런 썩을."
"야! 이건 또 뭔 소리야! 문에 뭐가 부딪혔는데?"
라분은 찍 소리도 못하고 절명했다.
"하."
역시 한 번에는 안되는 건가.
나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처음에는 쉽게 생각했지만 결국 라분을 살리기 위해서는 스스로 죽어야 한다.
이건 지금까지의 죽음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죽음이 확정된 순간에서 자살한 적은 있지만, 충분히 살 수 있는데도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26골드 30실버⋯⋯. 26골드 30실버⋯⋯. 라분. 그래. 라분.'
내 말을 잘 듣는 순둥순둥한 라분.
그리고 26골드 30실버.
나를 믿고 나에게 맡긴 목숨.
내가 책임져야 한다.
"그래. 하자."
결심이 선 나는 그대로 학즉사법의 다음 단계에 도전했다.
죽는지도 모르고 죽을 정도로 학즉사법은 좋은 자살용 호흡법이다.
가공된 마나를 가슴에 집어넣고, 밑도 끝도 없이 머리로 쳐올렸다.
시야가 순간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키릭.
⋯⋯
나는 라분의 노란색 마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타이밍 좋군."
"타이밍?"
"됐고. 내가 마지막에 무슨 말 했지?"
라분의 대답으로 현재 시점을 알아냈다.
심장에 마나를 넣기 10초 전 시점이다.
내가 회귀하기를 원했던 시점이기도 하다.
'너무 딱 들어맞는단 말이야.'
회귀의 신이 농간이라도 부리나?
내가 대답이 없자 라분이 스스로 마나를 지 가슴에 집어넣는다.
집어넣은 직후의 고통을 모르니 할 수 있는 용감한 행동이다.
또다시 까무러치는 라분.
간과 명치로 마나가 옮겨가고.
"머리랑. 가슴이랑. 배."
"좋아⋯ 이번에는 가슴을 뚫어!"
"알았다."
심장으로 마나가 모여든다.
"머리. 배. 목."
아무래도 마지막 같다. 나의 경우에는 본능적으로 배를 선택해서 성공했다.
하지만 라분은?
"목!"
펑!
라분의 목이 그대로 터졌다.
"씨바아아아아알!"
"뭐, 뭐야?"
콜린이 문을 열자마자 내 머리도 터졌다.
키릭.
⋯⋯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라분이 들고 있는 노란색 마나가 보였다.
"후."
"?"
"아냐, 다시 가보자."
라분은 다시 마나를 집어넣고, 내 인도대로 죽기 직전까지의 학즉사법 습득을 진행했다.
"머리, 배, 목."
"목은 절대 안 돼!"
나는 후, 한숨을 쉰 뒤 라분을 보았다.
"목만 말고 네가 원하는 쪽으로 선택해. 단 먼저 말하고!"
"머리. 간다."
"⋯⋯."
머리? 아무래도 불안한데.
누가 봐도 머리는 폭발하기 좋은 부위란 말이지.
펑 하고 터지면 그게 또 장관이겠지 싶었다.
내 생각과는 다르게 거침없이 머리로 진격하는 라분의 노란색 마나.
마나가 머리로 옮겨가기 무섭게 몸이 덜컥거리고, 코에서 쌍코피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폭발하지는 않았다.
"해치웠나?"
"어깨 아래, 배."
아직 하나 더 남아있단 말이야?
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마지막이라면 역시.
"배로!"
"배. 간다."
마나가 그대로 라분의 몸을 관통하듯 쑥 내려간다.
그러고는 이내 잠잠해진다.
나는 마나를 집어넣어 라분의 마나를 관찰했다.
라분의 몸속에서 일정한 궤도로 순환을 하는 마나가 느껴졌다.
"좋아. 끝난것 같다. 라분. 기분이 어때?"
"모르겠다."
라분은 뭐라 중얼중얼 거리더니 그대로 혼절해버렸다.
나는 라분의 몸에 있는 마나가 고유의 통로를 통해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두 번의 죽음으로 성공했다.'
그래도 서너 번의 죽음을 각오하고 있던 나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콜린! 이제 들어와도 돼."
집에 들어온 콜린이 라분의 상태를 보고 기함했다.
쌍코피에, 전신에는 땀이, 머리는 산발이 되어있으니 말 다 했다.
"야! 빌려와놓고 이러면 너 큰일 나는 거 아냐? 얼굴에 주먹질했지? 학대?"
"아니거든. 쨌든 얘 기절했으니까 청소 좀 하자."
청소라고 해봤자 코피를 닦아주는 정도뿐이다.
땀범벅인 몸을 닦아줄 의리는 없었다.
잠에서 깨면 하수구에서 목욕이라도 시켜야지.
토카리 패거리는 나름 힘 있는 패거리였기에 하수구에서도 그나마 깨끗한 물을 쓴다.
라분은 꼬박 6시간이 지나고서야 눈을 떴다.
한밤중이었다.
"주인. 주인."
굳이 나를 흔들어깨우는 라분.
"으. 깼냐? 몸은?"
"몸. 단단해졌다. 힘. 강해졌다."
"그래. 좀 쉬어라. 내일도 바쁠 거야."
"알았다."
하지만 도통 잘 생각을 안 한다.
결국 잠이 달아나버린 내가 라분의 옆에 앉았다.
"왜."
"주인. 고맙다."
"뭐가."
"강하게. 만들어줘서."
"짜식. 내 노예 내가 챙기겠다는데."
"충성. 다한다."
"당연하지."
이때 라분의 미소를 처음 보았다.
그러고는 말주변 없이 자신의 과거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사막 부족의 삶에서부터, 부족이 습격당하고, 여동생을 제외한 모든 가족이 죽고 본인만 살아나 노예로 팔려왔단다.
"여동생은?"
"여기. 전에. 헤어졌다. 어디. 모른다."
"그렇겠지."
노예 사업은 미궁 도시의 민낯이다.
제국 내에서 오직 미궁 도시에서만 노예 판매가 허락된다.
내가 모르는 무슨 이유가 있겠지.
'높으신 분들이 하는 일인데 어련하시겠어.'
"습격이 대충 얼마 전인데?"
"1년. 정도."
"그렇구나."
내가 어느 정도 말을 들어주자 라분이 계속 두서없이 본인의 말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우리는 밤을 새우며 실없는 이야기를 나눴다.
콜린은 해가 뜨자마자 일하러 나갔고.
나와 라분은 미궁 사무소로 향했다.
목표는 라분의 신규 탐험가 등록.
은화 2개로 해결.
다음으로 향한 곳은 미궁 2층.
미궁 2층은 안전지대가 넓어 행상이 발달되어 있다.
미궁 탐험용 물품을 사기에는 이곳이 제격이다.
라분의 커다란 배낭과 오크에게서 벗겨온 적당한 가죽 갑옷.
그리고 실용적인 크기의 질긴 가죽을 덧댄 나무 방패.
총 은화 3개로 해결.
식량은 은화 1개 어치다.
그리고 마지막은 라분을 위한, 노예 각인을 가리는 가죽 장갑 한 세트.
동화 50개.
"휴. 끝났다. 라분. 무게는 어때?"
"별로. 안 무겁다. 학즉. 사법. 덕분."
"그래야지. 내가 너한테 투자한 게 얼마인데."
무려 목숨을 투자했다 이 말씀이다.
물론 라분은 이 사실을 꿈에도 모를 테지만.
"그럼 출발하자."
"어디?"
"등록할 때 옆에서 뭐 했어?"
"어⋯ 지켜봤다."
"그러면 알 거 아냐."
나는 안전지대에서 외쳤다.
"이동. 미궁 4층!"
[미궁 4층으로 진입합니다.]
[현재 진척도 0%.]
[주의! 파티에 미궁 4층의 입장 자격이 없는 파티원이 있습니다.]
[해당 파티원은 홀로 다른 층으로 이동할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자격 부여 조건. 진척도 20% 달성.]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군."
간단하다.
라분이 홀로 이 미궁에서 나가기 위해서는 미궁 진척도 20%를 달성해야 한다는 것.
만약 내가 죽으면?
라분은 진척도를 모으기 전까지 귀환하지 못한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라분. 너한테는 일부러 무기를 안 사줬어."
"왜?"
"자급자족."
"자급. 자족?"
"오크의 무기를 쓰면 된다. 이 말이지."
오크들은 의외로 철로 만든 무기를 쓴다.
철 촉을 단 창, 심지어 도끼와 검까지.
미궁의 활성화 이후 철 무기의 값이 수직 낙하하게 된 원인이 바로 이 오크다.
옛날에는 철 자체의 값이 비싸 웬만한 전사도 철 무기를 얻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미궁 3층에서 몇 번 사냥하면 철을 얻을 수 있다.
비록 함량이 균일하지 못해 불순물을 분리해야 하지만, 일단 제련된 철을 얻을 수 있다는 게 어딘가?
그리고 지금 철의 가치는 무거워서 미궁에서 시체와 함께 버려지는 정도의 것이 되었다.
'물론 일부 파티는 미궁에서 철을 정기적으로 공급하면서 먹고살기도 하지만.'
그건 하루살이의 삶. 나는 절대로 그렇게 생을 보낼 생각이 없다.
"라분. 따로 무기를 써본 적은 있어?"
"무기. 없다."
"그렇군."
완벽한 백지. 나쁘지 않다.
처음부터 가르칠 수 있는 셈이니까.
"뭐, 짐꾼 역할만 잘 해주면 돼. 일단 오늘은 미궁 4층 맛보기니까. 잘해보자고."
"라분. 힘낸다."
사실 나도 미궁 4층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
그렇다고 너무나도 얇은 인맥으로 미궁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기에는 시간이 너무나도 아깝다.
차라리 몸으로 때우는 게 더 좋다.
내게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으니.
바로 이 든든한 짐꾼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특성 말이다.
그렇게 나는 미궁 4층으로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14
루카스의 든든한 짐꾼.
학즉사법의 유이한 수련자.
라분은 먼저 앞서가는 주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주인.'
노예인 자신에게 호흡법을 가르쳐 줬다.
무척 아팠지만.
짐을 드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일도 시키지 않는단다.
엄청 무겁지만.
심지어 자는 곳도, 먹는 것도 차별 없이 똑같은 처지다.
집이 너무 좁지만.
라분은 그저 앞서가는 주인의 등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시키는 대로만 하자.
사실 라분은 별생각이 없었다.
부모님이 죽고 노예로 전락한 시점에서 이미 삶의 희망은 사라진 뒤였으니까.
아직 꿈을 갖기에는 이른 시기다.
* * *
나는 먼저 미궁 4층의 사무소에 들렀다.
"모든 일에는 목적이 있어야 하는 법."
보통 새로운 층수에 진입할 경우 적응이 필요하다.
미궁이 내뿜는 모종의 압박감도 더욱 강해지고, 애초에 지리, 식생, 몬스터의 습성 등이 기존에 활동하던 층과는 달라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미궁 탐험가들에게 정보를 얻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그런 방법에는 시간과 돈이 들어가기 마련.
그 둘을 절약하기 위해 몸으로 부딪히는 장소는 바로 여기다.
미궁 사무소, 4층 지부.
사무소를 향해 걸어가는 도중 라분이 나를 불러 세웠다.
"응? 왜?"
"라분. 어지럽다."
미궁의 압박감에 라분이 헤롱거렸다.
이번이 첫 미궁 탐험이니 이 정도 버틴 것만 해도 용하다.
내가 익히게 한 학즉사법의 덕도 있겠지.
나는 사무소 계단 앞에 라분을 앉혔다.
"안 움직이는 게 최고야. 짐 내려놓고. 잠깐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올게."
"알았다."
나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미궁 사무소에 들어왔다.
신입이라고 쫄 거 없다.
어차피 미궁 4층을 탐험하는 같은 처지이니까.
나는 접수대에 다가갔다.
"의뢰 접수요."
사무소 정기 파견 직원이 턱짓으로 구석을 가리켰다.
시선을 옮기니 구석 벽의 한 면을 종이들이 빽빽하게 채워놓고 있었다.
의뢰.
미궁 밖에 사는 사람들이 미궁 탐험가들에게 본인의 의뢰를 접수한다.
실력 있는 탐험가에게는 지정 접수가 들어가지만 나 같은 무명 탐험가는 이렇게 직접 일감을 따야 한다.
나는 천천히 벽면으로 다가갔다.
"어디보자⋯⋯."
한 쪽에는 사람의 몽타주가 가득하다.
탐험 중 실종된 탐험가를 찾는 가족들의 눈물 어린 의뢰부터, 미궁 4층에서 행적이 확인된 두더지, 클라이머에 걸린 수배까지.
어차피 이런 임무는 얻어걸리는 경우가 많기에 그냥 지나가면 된다.
그래도 현상금 높은 클라이머의 얼굴과 특징은 유심히 봤다.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물론 나에게는 다른 쪽에 적힌 종이들이 더 중요하다.
[미궁푸른무지버섯 10송이 채취]
⋯⋯
[브라운 오크의 머리 5수]
⋯⋯
[동굴 늑대의 심장 10개]
⋯⋯
[리자드맨의 돌 목걸이 5개]
'등장하는 몬스터는 동굴 늑대랑 브라운 오크, 리자드맨. 4층은 오크 지대니까 브라운 오크가 주류겠어.'
나는 의뢰 기한이 2주 정도로 넉넉한 오크에 관한 의뢰서 두 장을 뜯었다.
이런 전리품 의뢰의 경우 보통 정기적으로 있는 편이다.
'한 번에 맡을 수 있는 의뢰는 3개니까.'
마지막은 어려운 임무로 고를까.
마침 내 눈에 띄는 의뢰가 있다.
[브라운 오크 챔피언의 옷 수실 1개]
챔피언.
몬스터 중 유난히 능력이 뛰어난 개체를 챔피언이라고 부른다.
미궁 4층의 오크 챔피언이라고 하면 3위계의 실력자가 2명 이상 붙어야 안전한 레이드를 보장할 수 있는 강력한 몬스터다.
이걸로 하자.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의뢰 기한이 넉넉하니 몇 번 도전해 볼 수 있겠네.
[브라운 오크의 송곳니 20개]
[브라운 오크의 온전한 눈알 3쌍]
[브라운 오크 챔피언의 옷 수실 1개]
알뜰하게도 챙겼다.
의뢰 수락비는 각 의뢰 당 동화 10개씩이다.
내가 의뢰비를 지불하자 직원이 내 이름을 받아적었다.
"루카스, 라분. 접수했수다."
"오케이."
이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수락비에 더해 보상금을 받게 되고, 실패하거나 기한을 지키지 못하면 수락비는 사무소에서 가져간다.
이 불합리한 수수료 강탈에 나는 치를 떨었지만 이렇게 하는 이유가 다 있단다.
콜린이 이런저런 설명을 해줬는데 한 귀로 들은 걸 자꾸 나머지 한 귀가 흘려버려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밖으로 나가니 내가 라분을 놓고 갔던 자리에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응?"
한 파티로 보이는 남자 4명이 라분을 둘러싸고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이야. 덩치 보소? 눈만 순하네."
"야. 눈 깔아봐."
"라분. 주인 기다린다."
"노예야? 손등 한 번 보자. 어디 사람이냐?"
"만지지. 마라."
"어쭈? 한 대 맞을래?"
나는 얼른 달려가 라분의 팔을 잡고 있는 놈의 옆구리를 발로 걷어찼다.
"으악!"
갈비뼈가 걸리는 느낌이 좋다.
녀석. 오늘 탐험은 다 했다.
놈의 동료들이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나를 돌아보다 이내 눈이 사나워졌다.
놈들의 자세를 살폈다.
'3위계는 없군.'
4층의 첫날이다.
신입 주제에 가뜩이나 고작 둘이서 다니는 판에, 기어다닐 수는 없지.
나는 탐험가의 생존 방식을 이렇게 배워왔다.
"뭘 꼬라봐 씨발년들아. 내 동료를 건드려?"
"동료? 노예 새끼 동료면 너도 노예 새끼겠네?"
"주인. 미안하다."
"라분. 네가 뭘 미안해. 개새끼들 청소하게 도와주면 칭찬받아야지."
내게 발로 차인 놈이 옆구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씨발. 그냥 구경 좀 한 거라고."
"나도 니 새끼 옆구리 좀 구경했다. 불만있냐?"
"이 새끼가!"
한 놈이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아올렸다.
나는 검을 뽑지 않고 고개를 살짝 꺾었다.
"자신 있냐?"
"싸움이다!"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주변 탐험가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물론 공포의 비명이 아니다.
즐거움이 가득한 비명이다.
곧 사무소를 시작으로 각종 건물에서 탐험가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만들어진 인파의 원진이 무언의 압박이 된다.
"4층 데뷔전으로는 나쁘지 않은데."
"주인. 무섭다."
나는 주먹으로 라분의 가슴을 통통 쳤다.
"덩치도 큰 놈이 간은 작아가지고. 그냥 지켜보기나 해."
내 맞은편에 선 놈의 칼끝이 살짝 떨렸다.
하지만 눈빛은 심상치 않다.
저건 무서움에서 비롯된 긴장이 아니다.
사람 죽여본 적이 있는 놈이다.
"흠."
하수구에 살면서 사람 안 죽여본 사람 없다.
어려서 구석에서 살았을 때는 사람 시체가 동네 개보다 흔했다.
내가 철들 때 시작한 도시 정화 사업으로 그런 시절은 끝났지만.
"싸워라!"
"싸워라!"
"싸워라!"
사무소 파견 직원이 귀찮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기어 나왔다.
딱 봐도 완숙한 3위계다.
"어이 둘."
"예."
"진짜 할 거냐?"
나는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먼저 물러설 뜻이 없음을 표현한 것이다.
"퉤!"
녀석도 마찬가지.
동료들도 딱히 말릴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옆구리를 맞은 놈은 아직도 캑캑거리고 있고.
"좋아. 결투의 시작을 부른 모든 감정은 모두 이 결투로 끝낸다. 승자가 모든 걸 가진다. 결투 후 사적 보복은 허락하지 않는다. 사무소가 보증하며, 내가 보증한다. 승부에 불복할 시 목숨으로 그 값을 지불한다. 동의하나?"
"동의합니다."
"그래."
직원이 동화를 꺼냈다.
"이 동전이 땅에 떨어질 때 결투 시작이다."
주변 사람들의 야유와 비명이 거세다.
모처럼의 오락거리가 나타났으니 오죽할까.
나는 거만한 자세로 검을 앞으로 내밀고 검자루를 쥔 검지를 까딱거렸다.
자신감 가득한 내 모습에 녀석들의 웅성거림이 심해졌다.
내 상대의 눈에도 미세한 흔들림이 잡히고, 그에 따라 마나도 흔들렸다.
하지만 이미 동전은 던져졌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고, 마치 죽을 때마다 보는 주마등과 같은 기분이 든다.
마침내 천천히 하늘을 날던 동전이 땅에 닿았을 때.
멈췄던 시간이 다시 돌아와 세차게 흐르기 시작한다.
"죽어!"
녀석이 내게 달려들어 크게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허초.
공격이 막힐 걸 예상하고 일부러 받아치기를 준비하는 검이다.
나는 이미 저 잡기술을 본 적이 있다.
'저 공격에 가슴을 베였었지.'
켈리어가 구사하던 기술과 결은 같았지만 수준은 천지차이다.
그래도 이런 공격은 받아치면 반드시 손해를 보기 마련.
그렇다면?
흘려주면 된다.
뒤로 세 걸음 물러나 피하고, 미리 대기했던 두 번째 검을 받아낸다.
마나를 비효율적으로 쑤셔 넣은 검이 내 검과 부딪혀 마치 폭발과도 같은 소리를 자아냈다.
구경꾼들의 환호 속에서 검을 맞대며 서로의 눈을 바라본다.
"핏줄이 잔뜩 섰네."
"닥쳐!"
녀석의 발차기를 칼자루로 막아내고 다시 거리를 벌렸다.
그 와중에 기술적으로 검을 꺾어 돌려 놈의 팔을 살짝 베었다.
"칫."
"계속 할거냐?"
"뭐? 뭐라고?"
"계속 할⋯"
내가 말을 하는 타이밍에 맞춰 달려든다.
바로 자세를 잡다가 혀를 씹을 뻔했다.
'얍삽한 놈.'
오로지 힘뿐인 삼연격을 받아치고, 틈을 노려 크게 검을 밀어올렸다.
활짝 열리는 나와 녀석의 가슴.
녀석은 되는대로 발차기를 시도했지만, 더 안쪽에 있던 내 검이 한 박자는 더 빨랐다.
내 검이 녀석의 오른 손목을 반쯤 베고 지나갔다.
검에 묻어 떨어지는 피.
곧 손목에서 빠져나오는 피가 대지를 적셨다.
"크아악!"
자세가 무너진 발차기가 내 배에 닿았지만 이렇다 할 충격을 주지는 못했다.
여기서 목을 벨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내 검은 녀석의 목울대 끝에 닿아있었다.
나는 언제든지 검을 찌를 준비를 마치고 녀석이 놓친 검을 들어 올렸다.
덜렁이는 손목을 부여잡고 뒹굴거리던 놈의 몸이 딱 멈췄다.
목에 닿은 내 검을 느끼며 눈을 데굴데굴 굴린다.
구경꾼들이 난리다.
"좆밥새끼!"
"왜 깝치냐 병신아!"
원색적인 욕설이 오고 갔다.
그 짧은 새에 돈까지 걸었는지 아주 걸쭉한 발음을 뽐내고 있다.
사무소 직원이 내게 다가왔다.
"솜씨 좋은데? 제대로 배웠나 봐. 어디서 배웠어?"
"그냥저냥 배웠습니다."
"싱겁기는. 어떻게 할 거야? 죽일 거야, 살릴 거야. 개인적인 부탁이지만 죽이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일이 귀찮아지거든."
나는 피식 웃으며 검을 휘둘렀다.
목으로 향하던 검이 내리그어지며 녀석의 허리띠를 잘랐다.
고개를 숙여 허리띠에 매달려있던 놈의 돈주머니와 검집을 집어올렸다.
잠시 허리띠를 지키려던 녀석의 손이 내 신발을 잡았지만 나는 간단히 떨쳐내버렸다.
승자의 당연한 권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녀석, 은근히 웃고 있다?
고통에 미쳐버렸나?
그냥 신경 끄자.
"이 정도로 하죠."
"좋아. 언제 한번 들르라고, 한 잔 사지."
"접수했습니다."
내 머리를 툭 친 직원이 하품을 연발하며 말했다.
"어이. 이 녀석 친구들. 친구의 복수를 해야지? 도전자 있냐?"
구경꾼들의 야유를 철면피로 씹어버린 놈들이 부들부들 떠는 놈을 집어 들고 미궁 밖으로 도망쳤다.
떠들썩한 비웃음은 덤으로 가져간다.
"싱겁기는."
나는 빼앗은 검을 이리저리 살펴본 뒤 내 검을 검집과 함께 라분에게 넘겼다.
이번에 새로 얻은 검이 더 좋은 검이었다.
'그래도 주인이 좋은 검을 써야지.'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못하던 라분이 내 검을 받아들었다.
"주인. 이거? 검?"
"내가 무기 안 산 이유가 바로 이거라고."
사실 오크 무기를 주려고 했지만.
라분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심히 부담스럽다.
나와 라분은 이리저리 손을 내미는 탐험가들에게 마주 손을 내밀었다.
"이야. 깔끔하던데?"
"감사."
"어디 소속이야?"
"비밀임다. 잘 부탁드림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약육강식의 사회다.
이번 미궁 4층도 잘 다닐 수 있겠다 싶었다.
우리 라분 건드리는 놈들도 이제 없을 테고.
나와 라분은 환대를 뒤로한 채로 라분과 함께 미궁 4층의 안전지대 밖으로 몸을 던졌다.
조금 지연된 탐험의 시작이었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15
미궁 4층의 기본적인 구조는 3층과 비슷했다.
안전지대를 벗어나자마자 이어지는 몇 개의 진입로, 나는 모든 진입로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각 진입로에는 선배 탐험가들이 손수 새겨놓은 주옥같은 충고들이 있었다.
[가다 보면 오크 만남.]
[다음 갈림길 가운데 가면 안 됨. 오크 마을 직통임.]
"여긴 오크군."
[리자드맨 만나고 싶으면 물 흐르는 곳으로 가라.]
[그냥 비린내 오짐. 이것만 알고 가셈.]
"리자드맨이고."
[아마 여기가 생존율 제일 낮을걸.]
[가장 넓은 통로임.]
[트롤 목격함 씨발.]
더듬더듬 손가락으로 천천히 한 자 한 자씩 따라가며 글을 읽었다.
쉽지 않았지만 돌에 새겨 필기체가 아니라 읽을 수는 있었다.
"여기는 안되겠다."
나는 당연히 목적에 맞게 오크가 출몰한다는 갈림길을 선택했다.
"라분. 어지럼증은 어때?"
"이제 괜찮다."
"적응이 빠르네. 역시 호흡법부터 가르치기를 잘했지."
만약 라분이 학즉사법 없이 미궁 4층에 들어왔다면 적응에만 3일을 썼을 터다.
아예 적응 못하는 놈들도 있다니 말 다 했다.
나는 미리 준비한 종이를 꺼내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라분이 신기한 듯 잠깐 옆을 기웃거렸지만 멀뚱멀뚱 내가 그리는 지도를 바라보더니 이내 다시 내 뒤로 돌아갔다.
"선. 점. 어렵다."
⋯⋯앞으로도 머리 쓰는 일은 내가 도맡아야겠다.
본격적인 전업 탐험가의 층이라고 불리는 미궁 4층답게, 걸은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아 몬스터가 감지되었다.
"직선 전방 40m 내외. 고블린 다섯 마리."
"!"
"감지했어?"
"모, 못했다."
나는 학즉사법을 익히자마자 감지 능력이 상승했는데?
아무래도 활용이 미숙한 모양이다.
"감지해봐. 전투 끝나고 어느 지점부터 감지됐는지 말해주고."
"알겠다."
"미리 이야기된 대로 가자."
대답을 듣지 않고 지체 없이 고블린들을 향해 달려나갔다.
조금 뛰니 나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던 고블린이 화들짝 뒤를 돌아보는 것이 보였다.
"키이이익!"
선수필승!
자고로 소드 마스터는 고블린을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고 했다!
나는 학즉사법을 최대한으로 운용하며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고블린 무리를 습격했다.
고블린은 작고 보잘것없지만 투척 무기를 잘 사용한다.
그렇기에 고블린을 상대로는 거리를 주지 않는 전투를 해야 한다.
특히 우리 파티는 원거리 무기에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이 라분의 방패 말고 없었기에 더 주의해야 하고.
그래도 이렇게 고블린들의 틈에 끼어드는 데에 성공했으면 끝이다.
무인지경으로 검을 휘두르고, 미약한 저항은 무시하면 된다.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나는 고블린들의 시체 위에 서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라분이 박수를 쳤다.
"주인. 대단하다."
"그래."
나는 라분에게 시체 정리법, 마정석 탐지법 등 탐험가들의 기본을 가르쳤다.
곧 적응한 라분이 검을 찔러 고블린의 팔에서 마정석을 뽑아낸다.
마나 감지력은 나쁘지 않다.
"뽑았다."
"잘했어!"
칭찬할 수 있을 때 마구 칭찬해 주자.
듬직한 26골드짜리 내 일꾼.
그 뒤로 이어지는 고블린 무리와의 전투.
마지막 전투에는 라분도 한 손 거들었다.
내가 무기를 빼앗은 고블린을 자연스레 라분 쪽으로 흘려준 것이다.
"키야아아악!"
"⋯⋯."
라분이 잠깐 경직되더니 이내 방패를 받쳐 들었다.
'검이 아니고 방패?'
그 뒤 이어지는 방패 후려치기가 고블린의 턱을 그대로 돌려버렸다.
고블린은 끽 소리도 못하고 그대로 절명했다.
머리가 터져버린 강력한 일격!
'!'
이 힘은 분명 마나의 작용이다!
방패에 피어오르는 학즉사법의 노란색 마나.
상당히 불안정하지만 확실하게 방패에 깃들어있다.
자신의 마나를 사물에 담아 사물의 위력을 강화시키는 경지.
'2위계!'
물론 마나만 다룰 수 있다면 2위계에 도달하기는 전혀 어렵지 않다.
자신의 마나를 자각해 1위계가 되고, 그 마나를 사물에 집어넣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전투 상황에서 이렇게 간단하게 마나를 넣어 활용했다?
'⋯설마.'
알고 보니 천재 노예?
라분은 방패를 살피더니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나를 봤다.
"방패. 안 다쳤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라분의 말을 들으니 본능적으로 그렇게 됐다고 한다.
자신의 안에 있던 마나가 흘러가고 싶어 하는 곳으로 인도했을 뿐이라고.
'역시 학즉사법인가.'
1성만 익혀도 타 호흡법 3성을 익힌 효과를 낸다는 학즉사법의 작용이 분명했다.
"오케이! 좋아!"
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라분이 2위계가 됐으니 나에게는 엄청난 희소식이다.
그 뒤로는 라분을 방패로 앞세워 어설프게나마 포메이션을 구축했다.
내가 먼저 몬스터를 탐지하면 라분이 짐을 집어던지고 방패를 들고 앞서나간다.
고블린들이 달려들자 이뤄지는 라분의 탱킹.
그다음 내가 난입해서 고블린들을 마무리하는 구조다.
물론 고블린들을 상대할 때만 해당되는 전략이다.
오크는 고블린들보다 월등한 힘과 지능을 가지고 있다.
오크들을 상대로 라분의 어설픈 움직임은 통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미궁의 철칙, 반드시 사냥할 수 있을 때 사냥한다.'
성공 확률을 계산하는 것도 재능이다.
나는 원래부터 승산을 따지는 재능이 있었고, 켈리어를 상대로 99번 죽으며 그 재능이 더 강화됐다고 생각한다.
아마 평균적인 오크 정찰대 세 마리를 상대로 라분을 전위로 세웠을 때.
'라분이 다치지 않게 하면서 오크를 제압할 확률은?'
나는 라분이 고블린을 마무리하는 움직임을 스윽 훑어보았다.
나름 자신감 있게 고블린을 상대하는 라분.
오크를 상대로는?
'아직은 아니야. 하루 정도 빡세게 교육을 시켜야겠어.'
쓸만한 움직임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실전 경험은 미천하다.
이건 시간이 답이기에 천천히 가야 한다.
미궁 4층은 갈림길이 상당히 많은 축에 속했다.
갈림길마다 있었던 선배 탐험가들의 메모도 점점 줄어들 때쯤, 커다란 메모가 눈에 보였다.
[여기서부터 오크 영역과 고블린 영역의 완충지대. 좋은 탐험.]
'착한 놈들.'
이게 바로 상부상조라는 건가 싶다.
미궁 사무소의 인증 도장까지 찍혀있으니 확실하다고 봐야 했다.
나는 글을 읽을 수 없는 라분을 위해 이 내용을 읽어주었다.
"오크."
"실제로 본적 있냐?"
"없다. 말은 들었다."
"고블린 때처럼 처음은 구경만 해."
오크부터는 나도 진지하게 전투에 임해야 한다.
더군다나 브라운 오크.
나도 처음 상대하는 몬스터다.
"전력으로 간다."
오크는 머지않아 만날 수 있었다.
갈림길에서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세 마리. 오크. 라분. 방패들어."
이번에는 비교적 감지가 늦었다.
정찰대도 잠깐 머뭇거리는 것이 낌새를 챈 모양이다.
그래. 첫 전투는 기습보다 정면에서 붙어봐야지.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곧 오크들과 내가 조우했다.
라분은 방패를 움켜잡고 있었다.
"쿠어어억!"
브라운 오크. 말 그대로 일반 오크보다 몸이 더 짙은 갈색의 오크다.
미궁 3층의 오크보다 비교적 덩치가 크고, 근육도 잘 발달되어 있다.
무기는 창 하나와 몽둥이 두 개.
고만고만한 편.
나는 속도를 높인 오크와 싸울 생각이 없었기에 먼저 달려들었다.
전방에 위치한 몽둥이를 든 두 오크.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러 오크의 몽둥이를 튕겨냈다.
옆구리를 노리는 몽둥이를 몸을 굴려 피하고, 일어서는 반동으로 창을 든 오크의 배를 찔렀다.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오크가 움찔거리는 사이 그대로 검을 내리그어 척추를 끊었다.
벌떡 일어나니 다시 몽둥이가 휘둘러진다.
나는 전투 흥분에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기합으로 몽둥이를 받아치려고 했다.
그때였다.
"주인!"
라분이 방패를 앞세우고 달려들어 오크 하나를 들이받았다.
"!"
나는 당황하지 않고 내 어깨를 스쳐 지나가는 라분을 보았다.
오로지 적에게 집중하는 눈.
정신교육은 아주 제대로 됐다.
나는 내 머리를 노리는 나머지 오크 하나의 몽둥이를 기술적으로 받은 뒤, 이어지는 일격으로 목을 베었다.
고개를 돌려 라분이 있는 쪽을 바라보니 라분이 얼른 거리를 벌려 오크와 대치하는 모습이 보였다.
'다치지는 않았군.'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좋은 방법이 있다.
오크 한 마리를 상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나는 얼른 달려들어 오크의 몽둥이를 강제로 빼앗았다.
그 와중에 우수수 잘려나가는 오크의 손가락.
나는 그대로 뒤로 물러났다.
"라분. 처리해 봐."
고블린을 처리하는 모습에서 살인에 대한 거부감은 거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도 오크는 인간과 가장 비슷하게 생긴 몬스터다.
문명을 가지고 있다.
철을 제련할 지능도 가지고 있다.
과연 라분은 오크를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죽일 수 있을까?
1분 뒤.
"⋯⋯라분. 그만 찍어도 돼."
"후. 알겠다."
방패에 얼굴이 함몰되어버린 오크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더니 그대로 까무러쳤다.
라분. 상당히 터프한 놈이다.
"으. 피 다튀었어. 이건 공양하자. 공양 안 하면 냄새 때문에 탐험 못해."
"미안하다."
"잘했어."
[시체를 공양합니다.]
[브라운 오크 세 마리. 확인.]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진척도. 1.3%]
라분의 몸에 튀었던 피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함몰된 얼굴이 기괴하게 변형되더니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간다.
역시 익숙해지지 않는 광경이다.
전투를 마무리한 뒤, 나는 라분을 타박했다.
"전투는 서로의 호흡이 잘 맞아야 한다고. 네 돌발행동이 나를 위한 것이기는 했지만 내가 예측하지 못한 돌격을 하면 안 되지."
"미안하다."
"다음부터 잘 하자는 거야."
잔뜩 풀이 죽는 라분.
"그래도 패기는 좋아. 합만 잘 맞춰보자고."
나는 라분에게 두 가지를 주문했다.
하나. 합의된 타이밍에 나설 것.
둘. 나보다는 본인의 몸을 더 신경 쓸 것.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이다.
"알았다. 명심? 한다."
그렇게 계속되는 전투를 통해 라분과 나는 점점 서로의 타이밍을 알게 되었다.
우선 계속 전진하며, 만나는 적은 고블린과 오크 가리지 않고 싸움을 걸었다.
중간중간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지만 어떻게든 기합으로 헤쳐나갈 수 있었다.
"역시 기합이 최고지!"
우리는 하루 동안 12번이라는 엄청난 숫자의 전투를 하고 난 후, 미리 봐두었던 미궁의 오목한 부분에 자리 잡았다.
정면을 비롯한 사방이 막혀 있고, 그다지 깊지 않아 야영용 장소로 적절했다.
실제로 다른 파티들의 야영 흔적도 있고.
종 3개를 설치하고, 밥을 먹은 다음 하루 전투의 피드백을 진행했다.
그 뒤 녹초가 된 라분을 먼저 재웠다.
두 시간짜리 모래시계가 4분의 1쯤 지났을 때 다시 돌렸다.
이러면 한 시간을 잴 수 있고, 다시 돌리면 세 시간을 잴 수 있다.
두 시간 뒤에 깨운다고 했지만, 그래도 고생했으니 세 시간은 자게 해주자.
두 시간 간격으로 세 번씩, 마지막에는 한 시간, 총 10시간.
수면은 중요하기에 오래 자둘 필요가 있었다.
전투 피로도 상당한 편이고.
그렇게 세 시간을 보내고 라분을 깨웠다.
비몽사몽하면서도 불침번 위치에 선다.
라분이 자리를 잡은 걸 확인하고 잠에 들었다.
* * *
미궁 4층 탐험 3일차.
조금 더 깊숙하게 들어간 미궁의 갈림길.
라분은 탐험가의 증표, 오른쪽 쇄골에 새겨진 문양에서 묘한 공명을 느꼈다.
"?"
공명에 맞춰 고개를 숙여 벽을 살폈다.
평소라면 절대 찾아보지 못했을 장소에 조그마한 글자가 새겨져있었다.
[3H-1-2G-B]
그 뒤 보이는 미궁 사무소의 조그마한 문양.
"??"
"라분 뭐해! 가자!"
"라분. 간다."
라분은 이해되지 않는 것을 빠르게 무시하기로 했다.
하지만 미궁 사무소의 암호 규칙상, 해당 문구는 이렇게 해석이 가능하다.
[B급 위험지역. 2등급 몬스터 출현. 3위계 1명 이상이 포함된 파티 공략 요망.]
미궁의 무한회귀자 16
탐험.
미궁이 인간 사회에 제공하는 가치를 최소한의 손실로 획득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다.
각 미궁의 미궁 사무소는 도시, 나아가 국가에서 운영하며, 탐험가들의 생존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알맞은 장소에 알맞은 탐험가가 알맞은 수준으로 탐험을 진행해야 한다.
그렇기에 미궁에는 위험 지역이라는 구분이 있다.
위험지역은 미궁의 각 층의 위험지역을 나타내기에 실질적인 난이도는 아니다.
즉 A급 위험지역의 경우 그 층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며 이는 단계별로 C급 위험지역까지로 분류된다.
일반적인 해당 층에 가장 적합한 탐험가가 사냥을 이어가야 하는 곳은 C급 위험 지역.
B급 위험지역은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탐험을 권장하지 않는다.
A급 위험지역은 기본적으로 탐험이 금지된다.
⋯까막눈인 내가 이걸 읽는 데에만 10분이 넘게 걸렸다.
그나마 나를 배려한 콜린이 또박또박 써줘서 망정이지, 평소의 필기체로 적었다면 30분도 더 걸렸을 것이다.
라분은 그저 눈을 끔뻑거릴 뿐이다.
"라분, 알아들었어?"
"어렵다."
"쓰흡. 그래?"
나는 콜린이 은화 1개를 받고 수작업으로 작성해 준 미궁 가이드를 집어넣었다.
솔직히 나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라분에게 읽어줘봤자 오크 귀에 호흡법 읽기다.
"좋아. 이거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잘 들어. 1급! 가면 죽음. 2급! 가면 위험함. 3급! 여기서 사냥해라. 알겠지?"
"오. 오. 이해했다."
"좋아. 이걸로 오늘 교육은 끝이다."
다음 교육으로는 미궁 사무소가 남겨놓는 표식 해석법이 있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대조해 보면 되니까.'
미궁은 어마 무시하게 넓다.
층 하나하나가 대도시와 그 주변 구역에 버금갈 정도니 말 다 했다.
이런 미궁을 탐험하는 데에 규칙이 많다는 것은 당연했고, 그중 몇 개 모르는 지식이 나온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다.
어차피 가장 중요한 것은 실력!
오로지 본인의 실력이다.
'왔던 길을 안 까먹는 능력도 중요하고.'
길을 외우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지도를 만들어둔다.
그리고 쉬는 시간과 자기 직전 필사본을 두 개 더 만들어 하나는 신발 속에, 하나는 가방 속에 집어넣는다.
이렇게 하면 만약 미궁에서 급박한 상황이 일어나도 안전하게 생존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알겠어?"
"⋯⋯⋯⋯⋯⋯알겠다."
"모르는 것 같은데?"
"아니다. 라분. 바보 아니다."
"그래. 믿어줄게 ."
이것으로 오늘의 교육은 끝.
사실 이 이상으로 아는 건 나도 별로 없어서 여기서부터는 똑똑이인 콜린의 힘을 빌려야 한다.
다음으로는 전투에 대한 피드백이다.
'오늘 합은 좋았어.'
학즉사법의 운용에 익숙해지면서 라분의 실력이 급속도로 좋아지고 있었다.
이제는 브라운 오크 한 마리 정도는 맡겨도 될 정도.
예전의 나를 넘어선 실력을 가지게 되었으니 과연 스승인 내가 엄청난 놈이라 하겠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이런."
저 앞에서 접근하는 오크들의 기척이 잡혔다.
이번에 야영지를 새로 옮겼는데, 아무래도 오크들의 순찰로에 걸려버린 모양이다.
"라분. 정리해. 전투다."
하지만 나는 내 감각에 느껴지는 오크의 숫자를 감지하고 잠깐 움직임을 멈췄다.
"5마리?"
오크는 기본적으로 자신을 믿고 싸움을 통한 성장을 갈구한다.
그렇기에 기본적인 순찰을 다니는 오크가 5마리인 것은 이상한 일이다.
수가 많을수록 자신의 용맹을 드러낼 수 없기에.
당황스러웠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주변에 다른 오크들은 없다.
어차피 인생은 도전이다.
"라분. 전방에 오크 다섯 마리. 준비해. 잊지 말고. 언제나 안전이다."
"알겠다."
라분은 이런 돌발 상황에도 익숙해졌는지 별말 없이 배낭을 내려놓고 방패와 검을 들었다.
지난 3일간 라분과 미궁 4층을 탐험하면서 라분의 능력에 대해 알았다.
우선 같은 학즉사법을 익혔음에도 나보다 감지 능력은 떨어진다.
대략 절반 정도?
반면 마나 자체가 가진 안정성이 높고, 소모가 적다.
이 점이 단단한 신체와 결합되어, 놀라운 유지력을 보여준다.
그야말로 탱커를 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하겠다.
굳이 속성을 나누자면 나는 불, 라분은 땅과 같은 느낌.
뭐, 마법 속성 같은 건 아니지만.
라분이 이제는 당당히 내 앞에 나와 방패를 들고 방어자세를 잡았다.
검을 꺼낸 내가 등을 툭툭 치자 빠른 걸음으로 앞서나간다.
통상적인 전투 포메이션이다.
요 3일간 오크 세 마리를 상대로 안정적인 사냥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다섯 마리는?
보통 파티였다면 매우 조심스럽게, 과잉 전력을 투입한 뒤 점차 줄여나가는 식으로 최소치를 결정할 문제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부딪히고, 판단한다.
어차피 무한 회귀를 알게 된 뒤로 내 인생은 도전을 쌓아나가 성공을 이루는 길밖에 보이지 않는다.
뭣모르는 라분은 그저 나를 따라올 뿐이고.
잘 지켜줘야지. 내 든든한 짐꾼.
"라분. 가자!"
"알겠다!"
마주 오는 오크는 우리가 지척에 다가오고 나서야 우리의 접근을 깨달았다.
그런데 다섯 마리의 오크에게서, 평소와는 다른 감각이 느껴졌다.
'당황하고 있는 건가?'
나는 평상시의 전투와는 다른 감각에 멈칫거렸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대로 도망가게 두어 우리의 존재를 알리면 오크의 추격을 피해 하루 종일 움직이기만 해야 할 터다.
'무조건 죽인다!'
ㄱ자로 꺾인 갈림길에서 망설임 없이 몸을 꺾는 라분.
적을 발견하고 몸을 멈추려고 한다.
라분은 적의 당황을 느끼지 못했을 테지만, 나는 지금이 공격의 적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세를 잃지 마! 그대로 돌격해!"
"우어어어!"
라분이 도저히 고치지를 못하는 저 괴성과 함께 돌격했다.
하지만 살심 가득히 갈림길을 돈 내가 오히려 당황해 멈칫거렸다.
"어?"
다섯 마리의 브라운 오크 중 무기를 들고 있는 오크는 세 마리.
무기를 든 세 마리는 상대적으로 피부가 탱탱하고, 나머지는 두 마리는 피부가 쭈글쭈글하다.
나는 두 마리가 들고 있는 막대기에 주목했다.
'주술사?'
특수 개체에 대한 생각이 들자마자 머리끝이 쭈뼛거렸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오크 세계에서 귀한 취급을 받는 주술사가 변변한 호위도 없이 이렇게 돌아다닐 리가 없었다.
더 이상의 생각은 독이다.
나는 그대로 오크에게 달려들었다.
나와 타이밍을 맞춰 라분이 오크 한 마리를 방패로 밀었다.
전투에 돌입하자마자 무기를 든 세 마리의 오크들이 커다란 함성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나머지 두 오크들은?
'도망을 가?'
뭔가 이상하다.
태생이 전투 종족인 오크들은 암컷 수컷 가리지 않고 성년이 되면 죽음을 찾아다닌다.
임신 등 아주 특별할 때만 부족으로 돌아가 할 일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도망가는 오크가 있다?
뭔가 있다.
어차피 도망가게 두면 위험하다.
나는 학즉사법의 마나를 폭사시키며 오크에게 달려들었다.
본래의 방어적인 사냥 계획을 제쳐두고 오크 두 마리를 동시에 상대했다.
마나를 두른 몸으로 오크를 들이받으며 목을 찌른다.
다른 오크가 내리치는 도끼를 몸을 움직여 면으로 받아내고, 오히려 그 반동을 이용해 들이받은 오크를 그대로 넘기며 앞구르기를 했다.
덕분에 뒤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라분! 잠깐만 버텨! 상대하기 힘들면 도망가고!"
"우어어어!"
내 눈은 빠르게 뛰어가는 두 오크를 보고 있었다.
자세를 바로잡고 마나를 아끼지 않으며 달렸다.
라분이 제대로 버텨주기만을 바랄 뿐.
술래잡기는 길지 않았다.
오크의 지구력은 인간보다는 약하기 때문이다.
언제가 짧게 끝나는 전투에서 이 지구력 차이를 체감할 일은 없지만 인간이 도주할 때, 또는 인간이 추격할 때는 그 덕을 본다.
내 추격을 뿌리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 두 오크 중 하나가 자리에 멈춰 섰다.
"크아아아!"
하지만 나는 그 오크의 자기희생을 완벽하게 무시했다.
오크가 들고 있던 막대기가 나를 때리건 말건 그대로 뚫고 지나가 아직도 도망가고 있는 오크를 노린 것이다.
아주 잠깐의 추격 끝에 끝까지 도망가던 오크의 목에 칼을 박아 넣을 수 있었다.
"후!"
쉴 틈이 없다.
나는 즉시 반전해 나를 향해 분노의 표효를 내지르는 오크를 맞이했다.
방금 전에는 녀석의 막대기를 맞아줬지만 지금은 아니다.
마나를 잔뜩 불어넣은 검이 막대기를 반으로 갈라버리고, 그 끝에 걸려있는 오크의 머리까지 잘라버렸다.
"끄르륵!"
그로테스크하게 본인의 뇌를 보여주는 오크.
나는 눈길도 주지 않고 다시 달렸다.
"라분!"
두고 가서 미안하다!
네가 잘못됐으면 죽음으로 갚을게!
사력을 다해 전투가 시작된 장소로 달려갔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라분의 검을 주워들고 다시 달렸다.
잠깐 달리자 전투의 소음이 들린다.
"라분!"
"주인!"
좋아! 살아있다!
부상도 없어 보이고.
나는 한달음에 라분에게 달려갔다.
두 손으로 방패를 들고 오크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라분.
놀랍게도 상황의 어려움과는 별개로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다.
관찰은 사치.
그대로 라분에게 달려가 나에게 맞서기 위해 반전하는 오크와 대치했다.
무기는 도끼.
나는 흥!하고 숨을 내쉰 뒤 그대로 몸을 숙여 접근했다.
정석적인 내려치기를 검으로 흘려내고,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도끼의 자루로 내 검을 받아내는 오크.
하지만 그 동작이야말로 내가 의도한 바였다.
이미 수백 번은 보고 연습한 켈리어의 검술을 흉내 냈다.
자루를 타고 미끄러지는 내 검이 오크의 손가락들을 우수수 잘랐다.
"!"
크게 떠지는 오크의 눈.
도끼의 자루를 쥐는 힘이 풀리며 가슴이 열린다.
내 검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가슴을 치고 지나갔다.
튀는 피를 피하지 않고 라분의 방패를 때리던 오크의 뒤를 노렸다.
동료를 믿고 라분을 공격하던 오크는 내 검을 막지도 못하고 등이 쩍 벌어졌다.
평소의 전투와 다르게 너무나도 격렬했던 전투의 끝이었다.
"헉. 헉!"
라분이 가죽이 반쯤 베인 방패를 내렸다.
전신이 땀에 젖어있다.
체력의 감소가 아닌 긴장과 스트레스로 인한 땀이었다.
내게 다가온 라분의 어깨를 탁 때렸다.
"고생했어."
"어렵지 않았다."
"잠깐 쉬고 마무리하자."
나는 단기간에 엄청나게 달렸기에 숨을 고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반면 라분은 쉬는 나를 잠깐 바라보더니 묵묵히 시체들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체력 하나는 좋다더니, 학즉사법으로 두 단계는 더 강화된 느낌이다.
그렇게 힘을 썼음에도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 처음으로 죽인 오크를 질질 끌고 온다.
"피 많이 튀었어. 이 세 마리는 공양하자."
라분은 오크의 시체를 뒤지더니 주머니에서 물만 챙긴 뒤 그대로 시체를 공양했다.
[시체를 공양합니다.]
[오크 세 마리. 확인.]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진척도. 7.1%]
세 오크의 시체가 미궁에 먹히며, 내 몸에 튀었던 피도 묻었던 그 모양대로 날아가 오크의 몸에 흡수된다.
그 광경을 잠시 바라보니 체력이 회복되었다.
삐걱거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아까 도망치던 두 마리도 죽여놨어. 그건 시체를 확인해 봐야지."
"알았다."
내 감지로 볼 때 주변에는 어떠한 생명체도 없어 보였다.
물론 전투가 벌어졌기에 최대한 빠르게 정리하고 이곳을 벗어나야겠지만.
그렇게 모아놓은 두 오크의 시체.
확실히 이상했다.
"옷이 화려하다."
"그러네."
옷에는 하늘하늘한 금색 실로 만든 줄이 달려있었다.
나는 순간 생각이 들어 내가 받았던 의뢰서를 꺼내들었다.
[브라운 오크 챔피언의 옷 수실 1개]
의뢰서 뒷장에는 의뢰자가 적어놓은 주의사항들이 적혀 있었다.
[수실은 옷을 장식할 때 쓰는 실이다. 이 수실은 브라운 오크의 옷에서 채취한 것에 한한다.]
[최근 이 수실에 마법적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으나 확실한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
⋯⋯
처음에는 오크가 갑옷이 아니라 옷을 입는다고 하길래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진짜 옷을 입고 있는 오크가 있었다.
나는 옷을 장식한 금색 실에 주목했다.
"설마."
이 금색 실이 수실일까?
일단 챙겨놓자.
들고 있던 막대기를 보니 끝에 하급 마정석이 달려 있다.
안에 마나가 없으니 마법에 사용하는 스태프 같지는 않고 그냥 장식용이다.
이것도 잘 때어놓자.
다음은 품을 뒤졌다.
총 3개의 주머니가 나왔다.
하나씩 열어보니.
"이상한 가루다."
"냄새 맡아봐."
"킁킁. 모르겠다."
"일단 가벼우니 가져가고."
육포는 버리고. 마지막 주머니는?
"이거지!"
"금!"
꽤 크기가 실한 금조각 세 개가 들어있었다!
"이게 몇 골드야?"
"금! 금!"
"시끄러워. 좀 다물어봐."
또 말은 잘듣는 라분은 입을 꽉 다문다.
괜히 미안해지게.
금화 가운데에 박혀 있는 금의 무게와 비교해보건대.
"6골드 정도 같은데?"
"6골드? 어느 정도지?"
"대박이라는 거다!"
나와 라분은 얼싸안으려다 말았다.
미궁 4일차에 숙성된 땀내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대신 다른 오크의 주머니를 뒤져 금조각 하나를 더 찾아낼 수 있었다.
혹시 몰라 이 오크가 입던 옷도 배낭에 쑤셔 넣었다.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 여기서 탐험은 마무리하고 돌아가자."
"알았다."
시체는 공양하지 않도록 하자.
어차피 늙은 오크고, 공양의 원리가 규명되지 않은 이상 이 금덩이가 공양할 때 빨려 들어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뜻하지 않은 대박을 터뜨렸으니 조심해야 한다.
항상 쪽박은 대박의 뒤에 있었으니.
남은 식량은 일주일 치.
아직 탐험을 더 해도 되는 상황이지만 이미 할 만큼 했다.
'어차피 첫 탐험이잖아. 이 정도면 됐어.'
나는 이 지점을 탐험의 끝으로 정하고, 돌아갈 결심을 마쳤다.
다음에도 이곳으로 돌아와 대박을 노려야겠다.
조금 멀리 이동해 다시 야영지를 차리고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다음 날, 안전지대로 방향을 틀어 복귀를 시작했다.
그렇게 행복한 탐험을 마무리할 줄 알았다.
나를 기습하는 오크 챔피언을 만나기 전까지는.
미궁의 무한회귀자 17
오크는 개인적인 종족이다.
누가 어디서 죽든 어떻게 죽든 상관하지 않는다.
하지만 몬스터의 사회에서도 예외는 있는 법.
죽어서는 안 되는 오크들이 있다.
첫 번째로 오크 로드.
오크 로드의 죽음은 행사이자 양위다.
로드는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도전자에게 죽어야 하며, 그에게 로드의 자리를 물려줘야 한다.
로드가 외부인에게 죽을 경우 오크 사회는 엄청난 혼란의 시기를 맞게 된다.
다음으로 오크 장로.
젊었을 때 강함을 과시한 오크 들은 나이가 들면 일정 시점을 기점으로 모든 힘을 잃고 만다.
대신 지혜로워지고, 현명해진다.
장로에게는 지팡이가 쥐어지고, 부족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일원이 된다.
그런데 오크 장로 둘이 갑자기 죽었다.
소식을 들은 오크 챔피언은 조용히 살육의 현장에 도착했다.
"크르르."
뒤에서 목이 찔린 장로, 머리가 가로로 베여진 장로.
오크 세 마리의 첫 순찰행을 송별하다가 변을 당했다.
오크 챔피언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맡아지는 냄새 중, 오크 장로들의 냄새를 지우자 특정한 냄새가 느껴졌다.
인간의 냄새.
인간.
챔피언의 눈에 살기가 맴돌았다.
챔피언의 허락이 떨어지자 주변 오크들이 장로들의 시체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지혜로운 동족의 생살을 뜯어먹어 그 능력을 물려받고자 하는 행동이다.
오크의 선봉장은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고는 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짙은 인간의 체취를 따라.
피의 복수는 자신의 것이다.
* * *
미궁 4층 깊숙한 곳, 나와 라분은 지금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다.
아까부터 뒤에서 한 파티가 나와 라분을 졸졸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범하게 길이 겹친 것 같아 일부러 방향을 틀어 갈 길을 가게 하려고 했다.
그런데 길이 겹쳤는지, 계속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우연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우연이 세 번 연속으로 일어날 경우에는 생각을 달리해야 한다.
"주인."
"알고 있어. 클라이머인가?"
"클라, 이머?"
"미궁의 두더지. 괴물이 되어버린 인간."
살인 등 범죄를 저지른 탐험가나 용병들이 최후의 도피처로 선택하는 곳이 미궁이다.
왜 최후의 도피처냐고?
미쳐버리거든.
미궁의 압박감은 사람의 신경을 자극한다.
그 자극이 사라질 희망도 없이 24시간 계속된다?
웬만한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정신이 나가버린다.
"알겠어?"
"알아들었다."
"제대로 알아들었지?"
"라분. 바보 아니다."
"알아."
어쨌든 내 뒤의 사람들이 우리를 졸졸 따라오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클라이머인지, 일반 탐험가인지 확인이 필요하다.
일반적인 파티라면 아주 조심히 접촉을 시도했을 것이다.
나는 아니다.
그런 시간 낭비는 내 특성에 맞지 않다.
라분에게 잠깐 멈추라는 신호를 줬다.
"기다려."
"알겠다."
그대로 몸을 반전해 미궁 바닥을 뛰었다.
너비는 2.5m 정도. 1대 다수도 충분히 가능하다.
높이도 걱정 없고. 퇴로도 뚫려있다. 근처에 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저들은 내 접근을 내가 시야에 들어오고서야 알아차렸다.
나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
"어이."
뽑아든 검을 어깨에 걸친 뒤 전투를 위해 숨을 골랐다.
남자 둘, 여자 둘. 전부 2위계.
나를 바라보는 네 쌍의 눈이 아주 똘망똘망하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클라이머는 아니구나.
하지만 긴장을 풀지는 않았다.
"형씨들. 뭐야? 왜 자꾸 따라와?"
"⋯⋯."
"거짓말 칠 생각은 말고. 계속 따라오고 있었잖아."
파티의 리더로 보이는 딜러가 앞으로 나왔다.
"흠흠. 다른 의도가 있던 게 아닙니다."
"뒤를 밟으면서 의도가 없기는 무슨. 본론이나 빨리 말하슈. 시간 끌지 말고."
"살려주십쇼. 길을 잃었습니다."
"⋯⋯?"
본론이 너무 심플한 거 아냐?
딜러가 손가락을 까딱하자 꽤 예쁘장한 여자가 나왔다.
하지만 딜러는 자비 없이 로그로 보이는 여자의 대가리를 후렸다.
"이 미친년이! 지도를 품에 넣고! 땀을 존나게 흘리는 바람에! 아니 지도가 글쎄! 이렇게 되어버렸습니다! 하필! 초행길에!"
"미안해!"
이리저리 얼룩이 져있는 지도를 꺼내 보이는 딜러.
느낌표마다 머리를 처맞은 로그가 훌쩍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든 돌아다녀 봤는데, 점점 더 깊이 가다가. 이제는 B급 지역까지 왔다갔다거리니 정말 죽겠더라고요."
"⋯⋯."
"식량도 바닥났고, 진짜 미치기 일보 직전에 형님들의 기척을 발견해서⋯ 좀 어떻게 안되겠습니까?"
어느새 형님으로 격상된 내 위치.
아무리 봐도 그쪽이 형님으로 보이는데 말이지.
나는 네 명을 쭉 스캔했다.
"사례는? 목숨 값인데?"
"돈이라고는 이것밖에."
딜러가 허리춤에 있던 주머니를 꺼내 내게 던졌다.
땅에 떨어진 주머니를 칼끝으로 툭툭 쳐 내용물을 가늠했다.
'마정석이군.'
주워 열어보니 피 때묻은 마정석들이 있었다.
"에휴."
그중 씨알 굵은 놈 세 알을 꺼낸 뒤 다시 딜러에게 던져줬다.
그래. 어차피 세상 다 돕고 사는 거다.
어차피 탐험 마치고 돌아가는 길, 사람 넷 살리면 죽어서 천국 가겠지.
"어쩔 수 없지. 이쪽도 마침 돌아가는 길이었으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꼬질꼬질해진 네 명이 넙죽넙죽 인사를 했다.
나는 혀를 차며 잠깐 바라본 뒤 검을 집어넣고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3일은 볼텐데. 통성명이나 합시다. 루카스요."
"루덴입니다."
주르륵 들은 4인의 이름은 가장 이쁜 로그 소피아와 딜러 루덴을 빼고 다 까먹었다.
어차피 부대끼면 다 외워지니 상관없다.
탱커 둘, 딜러 하나, 딜러 역할도 겸하는 로그 하나.
기본적인 4인 파티의 구성이다.
일부러 틈을 보였는데 기습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정말 말하는 대로 불쌍해진 파티 같았다.
"따라오슈."
나는 라분이 있는 곳까지 천천히 걸었다.
곧 라분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보였다.
"여, 나왔다."
"주인. 늦었다. 찾아가려고 했다."
"그래, 그래."
라분은 내 뒤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따라오던, 사람?"
"그래. 인사하슈. 제 동료 라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구세주께 인사드립니다!"
루덴 이랬나? 라분의 조금 이국적인 얼굴을 봐도 안색에 변화도 없다.
자기 처지를 아주 잘 파악하고 있군.
"아는 길까지 바래다주면 됩니까?"
"아, 이미 기존 길과는 한참 동떨어져서요. 아예 끝까지 같이 가고 싶습니다."
"흠."
"사냥, 취사, 뒷정리 등등. 모두 저희가 전담하겠습니다! 길만 잡아주시면 됩니다!"
"그렇게 합시다."
"감사합니다!"
호화 코스로 귀환하게 생겼네.
어찌저찌 모였으니 자리를 잡고 식사하기로 했다.
어차피 먹자마자 바로 이동할 거라서 조그맣게 불을 피웠다.
로그인 소피아가 아주 준비가 빨랐다.
차마 오크 고기를 먹을 수 없어 이틀을 굶었단다.
내일이면 먹었을 거라고.
라분이 가방에서 음식을 꺼내주자 뚝딱뚝딱 조리하더니 그럴싸한 스프를 만들어냈다.
"음!"
첫 입을 넣으니 꽤 맛있다.
그동안 먹던 딱딱한 빵, 육포와는 질적으로 다른 음식이다.
네 명은 아주 그릇에 머리를 처박고 있다.
"조금씩 오래 먹어요. 못 먹다가 급하게 먹으면 몸 상하니까."
"네⋯⋯."
저 감동받은 얼굴 좀 봐라.
그래도 내 눈치를 보는지 먹는 속도가 조금 줄기는 했다.
일단 뱃속이 따뜻해지니 긴장이 풀어졌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워 삼기며 이야기를 풀었다.
"저희는 같은 길드 출신입니다. 햇병아리기는 하지만."
"호오. 어디? 아, 저랑 라분은 개인 파티입니다."
다시 말을 높였다.
누가 봐도 저쪽이 나보다 연배가 높으니.
기왕 같이 가기로 했으니까 얼굴 붉힐 일은 최대한 만들지 않는 게 좋다.
"붉은 송곳니 길드입니다."
그러면서 보여주는 왼손 새끼손가락의 붉은색 반지.
붉은 송곳니 길드 소속이라는 증표다.
"음, 그렇군요."
사실 길드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이런저런 지원을 해주고, 돈 좀 뜯어먹는다는 것 밖에.
우리는 취사의 냄새가 퍼지기 전 얼른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뒤에서 길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러시죠."
그 뒤로는 호화로운 탐험이 시작되었다.
사냥을 하고, 나오는 마정석은 다 내 거다.
내 소유로 공양까지 해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시체를 공양합니다.]
[오크 세 마리. 확인.]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진척도. 9.3%]
이러다가 복귀할 때쯤에는 진척도 10%도 가능하겠다.
공양까지는 필요 없다고 해도 요지부동이다.
하기야, 목숨을 살려주는 것과 다를 바 없는데 이 정도는 받아야 하겠지.
물론 나중에 복귀하고 목숨 값을 더 요구하는 걸 미연에 방지하려는 의도도 있겠지만.
밥때 되면 밥해주고, 불침번도 서준다고 하니 이게 탐험인지, 미궁 체험학습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너무 긴장이 풀리면 안 되는데.
"불침번은 같이 서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면이 있지."
"아! 그러면 염치 불고하고 부탁드리겠습니다."
인원이 여섯 명이나 되니 불침번도 여유가 넘친다.
한 조가 세 시간만 불침번을 서면 모두 골고루 여섯 시간을 잘 수 있었으니.
쪽잠을 자던 나와 라분의 탐험과는 피로 풀리는 속도가 질적으로 다르다.
이런 생각을 하니 우리도 인원 추가를 고려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확실히 다섯 명이서 할 때는 편했지.
생각해 보니 고작 얼마 전 일인데도 몇 주는 지난 것 같다.
그동안 백 번이 넘는 회귀를 해버렸으니 당연한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며칠 전에 묵었던 장소에서 육포로 간단히 저녁 끼니를 때웠다.
여기서 하루를 보낼 예정이었기에 점심때와 같은 냄새가 풀풀 나는 호화 스프를 맛볼 수는 없었다.
먹고 개인 정비를 위해 쉬고 있는데 루덴이 말을 걸어왔다.
"루카스 님. 저희 길드에 오실 생각은 없습니까?"
"응?"
"미궁 4층에서 둘이서 다니는 걸 보니 꽤 실력이 있어 보이는데, 기왕 탐험하는 거 소속이 있으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루덴은 소속감, 지원 등에 대해서 설파했지만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혜택을 누리면 의무도 생긴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원하지도 않은 일에 칼을 휘두르기 싫다.
"네에? 미궁 4층이 처음이시라구요?"
네 명이 모두 눈이 동그래졌다.
반응이 아주 일품이란 말이지.
"그렇긴 하네요."
"그런데 이렇게 깊은 곳까지. 실례가 아니라면 진척도가 얼마인지 알 수 있을까요?"
"진척도 확인."
[현재 진척도 9.7%.]
"5퍼센트 정도네요."
소피아가 감탄했다.
"헉! 첫 탐험에 5퍼센트? 장난 아니네요. 곧 5층으로 가시겠어요."
"운이 좋았죠."
"주인. 우리, 진척도 5퍼센트, 아⋯⋯."
나는 살기를 담은 눈빛으로 라분을 보았고, 내 눈빛을 본 라분이 쪼그라들었다.
라분은 다 좋은데 눈치가 부족한 것이 흠이다.
그게 라분의 매력 포인트이기는 했지만.
자리를 정리하고 나와 루덴이 먼저 불침번을 섰다.
루덴은 한 번 말이 트이니 아주 끝도 없이 입을 열어댔다.
조곤조곤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야기.
하도 말이 많아 대답해 주다 보니 어느새 친해졌다.
칼밥 먹는 놈 삶이 뭐 이런 거 아니겠나.
마지막에는 의기투합해서 복귀 후 일주일 뒤에 날 잡고 술 한잔하기로 했다.
"라분 님도 같이 오시는 겁니다. 하하."
"그렇게 하죠. 그때는 말 편하게 하십쇼. 한참 형님이신데."
"하하. 그럽시다."
그렇게 탐험에서 더없이 편한 잠을 자고, 다시 복귀를 위해 출발했다.
하루 동안 루덴의 파티를 지켜보니, 이 파티의 장단을 알 수 있었다.
'안정적이지만, 기본적인 실력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군.'
특히 몬스터 감지 능력.
내가 감지 능력이 엄청나게 뛰어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거의 10m쯤 남겨놓고서야 적을 발견하니 항상 준비되지 못한 전투를 시작했다.
물론 대부분의 탐험가 파티들은 거의 이런 식이겠지만.
길게는 60m 넘는 거리에서 기습을 준비하던 나와 라분과는 천지차이였다.
3시간 동안 2번의 전투 후 지도를 보니 꽤 나아갔다.
나는 지도의 한 지점을 기점으로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고블린도 출몰하니까. 맘을 좀 놓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조용한 환호.
파티의 분위기가 조금 들뜬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탱커가 앞서서 길을 개척하는데.
갈림길의 옆에서, 고작 3m 떨어진 거리에서.
무언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은밀하게 감춰져있던 기적이다.
내 온몸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모두 전투 준비!"
"엣?"
내 말에 반응한 사람은 라분 뿐이었다.
뒤에서 천천히 따라오던 라분이 나와 함께 배낭을 벗어 집어던졌다.
내 다급함을 느꼈는지 라분이 포효를 내질렀다.
"우어어어!"
어안이 벙벙한 나머지 파티.
나는 탱커에게 소리 질렀다.
"방패 들어! 온다!"
여전히 나를 돌아보고 있는 탱커는 내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인간의 본능일까? 순간 소름이 돋아 몸을 틀은 시선이 앞을 향한다.
탱커의 앞에는 오크 챔피언이 바짝 다가와 있었다.
"어? 뭐?"
유언이었다.
검염(劍炎)을 내뿜는 오크의 검이 사람을 세로로 잘라내었다.
-쩌억.
불길한 소리를 내며. 지금을 기점으로 한낱 돌멩이와 같은 무정물의 지위를 가져버린 육체가 허물어진다.
그 동일성을 선사한 존재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크 챔피언."
가슴이 두근거린다.
힘껏 검을 쥐었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18
오크 챔피언은 일반 오크의 1.5배에 달하는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 거대한 몸에서 비롯된 힘과, 힘을 다루는 섬세한 능력. 그리고 3위계의 증거인 검염.
이 셋이 결합된 결과 사람이 간단하게 양분되었다.
"파커!"
루덴과 소피아의 비명은 나와 라분의 돌격에 묻혔다.
처음부터 전력이다.
학즉사법의 마나를 최대한으로 운용해 오크 챔피언에게 맞섰다.
챔피언이 곧장 파티의 딜러, 샤샤를 노린다.
얼음이 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사샤. 라분이 챔피언과 샤샤 사이에 끼어들었다.
"정면으로 맞서지 마! 흘려!"
라분이 내 말을 듣고 필사적으로 방패를 놀렸다.
검염이 뿜어져 나오는 챔피언의 일격이 라분의 방패를 타고 미끄러진다.
방패를 든지 일주일 만에 저런 기교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재능이다.
하지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미끄러지는 검은 그 자체의 반동으로도 뻗어나가 샤샤의 오른팔을 잘랐다.
"꺄아악!"
자신의 팔의 잘린 단면을 본 샤샤가 비명을 지른다.
이어진 공격에 머리가 날아갔다.
"큭!"
비교적 뒤에 있어 이제서야 도달할 수 있었다.
챔피언이 라분을 향해 검을 내리치려다 내 일격을 막기 위해 검을 틀었다.
-쾅!
검과 검이 내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충격음이 미궁의 공기를 울렸다.
결과는? 내가 한참 모자랐다.
뒤로 쭉 밀려나가는 몸.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다리가 후들거린다.
"크윽."
검을 보니 날이 눈에 띄게 닳아있었다.
내 마나가 담긴 검으로 검염을 받아내지 못한 것이다.
라분은 아직 녀석의 근처에 있었다. 이대로 두면 죽을 것이 뻔했기에 내가 다시 달려들었다.
그 와중에 챔피언의 내려치기를 방어한 라분의 방패가 두 동강 났다.
정면으로 방어할 수밖에 없었기에 이번에는 흘려낼 수 없는 공격이었다.
대신 내가 틈을 보며 끼어들어 오크 챔피언의 왼팔에 긴 자상을 남기는 데에 성공했다.
"크아아아!"
"그래. 너도 검은 들어가지."
라분이 뒤로 몸을 빼는 것을 확인한 내가 모든 정신을 전투에 집중했다.
루덴이 검을 뽑아 내 옆에 섰다.
"이 개새끼!"
파티원의 죽음에 복수심에 불타는 리더.
나는 빠르게 전략을 세웠다.
"합을 맞추는 건 무리야. 내가 어떻게든 막아볼 테니 틈을 노려봐."
"알겠다."
소피아는 다리가 풀려 주저앉아버렸으니 전력 외.
어차피 미궁의 폭이 좁아 두 명 이상의 협공도 무리다.
둘이서 어떻게든 해야 한다.
"크르르."
베인 팔을 툭툭 턴 오크 챔피언이 천천히 접근했다.
기세에 눌리지 않기 위해 나도 마주 검을 내밀었다.
켈리어에게 수십 번 죽어나가며 배운 것 중 하나다.
'기세에서 밀리면, 이길 싸움도 질 수밖에 없다.'
힘, 경지, 마나.
내가 불리한 요소다.
반면 스피드, 기교, 인원 수.
내가 유리한 요소다.
상대의 유리한 면을 누르고, 내 유리한 면을 전투에서 부각시켜야 한다.
나는 빠르게 접근해 챔피언과 검을 나눴다.
받아치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한 수 한 수 검을 나눌 때마다, 마나가 한 움큼씩 소모되어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질 정도다.
이러면 장기전은 불가능하다.
라분이 죽은 탱커의 방패를 들고 합류할 각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루덴이 먼저 움직였다.
"흡!"
틈을 본 루덴이 혼신의 힘을 다한 찌르기를 시도했다.
미리 이야기되지 않았기에 내가 반응이 늦었다.
그렇다고 루덴을 그대로 두면 보나 마나 죽는다.
나도 힘을 억지로 끌어올리며 같이 돌격했다.
그 돌격을, 오크 챔피언은 검염을 불태우는 것으로 화답했다.
"!"
루덴의 검이 오크 챔피언의 검에 닿자마자 그대로 갈라진다.
루덴의 검을 완전히 가르지는 못했지만, 돌진하던 기세를 완전히 죽이는 데에는 성공했다.
루덴이 멈칫한 사이 이어진 챔피언의 발차기가 명치에 명중했다.
뒤로 날아가는 루덴의 뒤에는 무리하게 접근한 내가 있었다.
'이런!'
반쯤 무너진 자세인 내게 챔피언이 검을 내려쳤다.
자세가 좋지 않다.
나는 내 검이 잘릴 것을 알면서도 마주 검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죽는건가.
직감한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
어디로 회귀하는 거지? 어제, 이틀 전?
아니. 회귀할 수 있을까? 이 죽음이 끝이라면⋯
빌어먹을 주마등이 지나가며 단 한 가지의 생각만 남았다.
'살고 싶다.'
죽고 싶지 않다.
그와 동시에 시간이 다시 원래대로 흐르기 시작하고.
내 몸이 붕 떠서 날아가 미궁의 벽에 처박혔다.
"읏!"
알싸한 등의 통증이 전투의 고양감에 희석되었다.
그리고 보였다.
나를 밀쳐낸 자세 그대로.
어깨부터 가슴까지 갈라진 채 무릎을 꿇는 라분의 몸이.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쏟아지는 피가 미궁의 바닥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어?"
땅을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라분을 보았다.
라분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인."
"라분아?"
"주인은⋯⋯ 내게⋯ 새로운 세상을⋯"
챔피언의 검이 라분의 목을 그대로 갈라버렸다.
라분은 피가래 섞인 마지막 말조차 끝내지 못한 채 내 눈앞에서 죽었다.
죽어버렸다.
챔피언은 아직도 꼿꼿이 세워져있는 라분의 몸뚱이를 발로 차 넘어뜨렸다.
그러고는 곧장 나를 바라본다.
"⋯⋯하, 하하."
나도 웃었고, 오크 챔피언도 웃었다.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집어 들고, 챔피언을 노려보았다.
소피아는 도망가 버렸고, 명치가 박살 난 루덴은 공허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지연된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나는 내 내면을 보았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차가운 이성이 덮고 있었다.
결국 밖으로 표출된 것은 희미한 미소였다.
그리고 결심.
"그래. 같이 춤춰보자."
"크아아아!"
"네가 죽을 때까지."
분명 라분은 나를 구하며 내가 도망가기를 바랐겠지.
하지만 라분의 희생을 나는 덧없게 만들 생각이다.
지금의 미래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회귀가 없어도 상관없어."
나는 모든 힘을 다해 챔피언에게 부딪혔다.
이후 목숨을 돌보지 않은 내 처절한 저항이 오크 챔피언의 손가락 세 개를 잘라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오크 챔피언이 올려친 검이 내 오른쪽 겨드랑이 위를 사선으로 베어냈다.
양분하는 시야가 잠깐 머리를 헤집어놓고, 그대로 암흑이 날 맞이했다.
초점 잃은 시야가 잠시 명멸하다 꺼졌다.
죽음이었다.
키릭.
⋯⋯
"다! 흡!"
모두들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나는 우리를 향해 접근하는 챔피언의 흉포한 마나를 느끼고 상황을 깨달았다.
'직전의 대사가. 방패 들라고 했을 때, 그 순간이군.'
어찌할 틈도 없이 오크 챔피언의 검이 또다시 루덴 파티의 탱커, 파커의 몸을 양단했다.
루덴과 소피아의 비명. 라분의 접근.
나도 바로 정신을 차리고 앞을 향해 달렸다.
상태는 만전.
루덴 파티와의 합류로 잘 먹고 잘 잤다.
"라분! 맞서지 마! 샤샤만 구하고 빠져!"
내 말을 들은 라분이 이전과는 다르게 움직였다.
방패를 챔피언을 향해 내던져 녀석의 타이밍을 한 번 빼앗고, 샤샤의 목덜미를 잡고 뒤로 쭉 빠졌다.
챔피언이 포효하며 방패를 검으로 내리찍었다.
나는 내 뒤로 물러서는 라분에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라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일부러 화답하지 않았다.
아직 내가 챔피언을 이기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챔피언과 대치했다.
강력한 개인과의 전투.
"켈리어 이후로 처음이군."
오크 챔피언의 실력은 명확히 나보다 윗줄이다.
우선 3위계. 검염의 메리트를 무시할 수 없다.
속도는 나보다 떨어지지만 몸의 유연함으로 부족함을 메꾸는 타입이다.
나와 상성이 그리 좋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도.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있을까?"
열 번이 안 되면, 백 번은?
챔피언과 내가 검을 맞댔다.
여기서 정보의 격차가 드러난다.
나는 챔피언 고유의 호흡과 움직임에 익숙하다.
하지만 녀석은? 나를 모른다.
이게 작은 차이를 낳는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초반에는 내가 우위를 잡을 수 있었다.
루덴이 쌍욕을 하며 끼어들려고 했지만 내가 일부러 몸을 틀어 접근을 막았다.
챔피언을 분석하는 와중에 루덴이라는 변수가 끼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심지어 루덴의 참전은 나에게 도움은 고사하고 방해가 될 확률이 더 높다.
애초의 첫 번째 싸움에서 라분이 허무하게 죽은 이유가 무리해서 루덴을 커버하던 나를 구하기 위함이었으니.
검염에 마나가 계속 깎여나가고, 이에 더 많은 마나를 검에 녹아내는 것으로 응수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나가 떨어지며 온몸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잠깐 챔피언과의 거리를 벌렸다.
틈을 봐 품속의 지도를 꺼내 루덴에게 던졌다.
"루덴. 제가 패배하면 라분과 함께 도망가요."
"루카스. 그건."
"빨리. 그러겠다고 약속해."
"⋯알았다."
챔피언도 더 숨을 고를 시간을 주지는 않았다.
다시 격돌.
내가 아무리 스피드를 살려 공격해도 오크 챔피언의 방어를 뚫을 수 없었다.
'더, 더 큰 힘이 필요해.'
마나를 죽을 듯이 쥐어짜서 한 수 한 수 공격에 대응한다.
머리가 멍해지고, 한계를 맞이한 학즉사법의 회로가 터져나가려고 한다.
쌍코피가 주륵, 내 코를 타고 흘러내린다.
그럼에도 검을 부딪힌다!
'더!'
일격, 일격이 살과 뼈를 깎는 고통이 되지만 검을 멈추지 않는다.
이러다가는 챔피언에게 죽는 게 아닌 내 몸이 터져 죽을 판이다.
그래도 좋다!
내 모든 것을 부딪힐 수 있다면.
그리고 마침내 몸속에 있던 무언가가 터져 나온다고 생각했을 때.
내 검에서 붉은 마나가 형태를 가지고 휘몰아쳤다.
'검염!'
3위계의 등극과 함께 챔피언의 검이 내 왼팔을 가르고 지나갔다.
깔끔하게 떨어져 나가는 팔.
피가 주르륵 쏟아지는 순간, 챔피언은 승리의 포효를 내질렀다.
나는 씨익 웃으며 남은 한 손으로 검염이 어린 검을 들어 올렸다.
"이긴 것 같아?"
"주인!"
나는 달려오려는 라분을 무시하고 검을 휘둘렀다.
한 손으로 휘둘렀으니 제대로 힘이 실릴 리 없다. 챔피언의 검과 부딪힌 내 검은 주인의 손아귀를 찢고 미궁의 천장으로 높이 날아올랐다.
그래도 느낄 수 있었다.
원래는 손아귀는커녕 팔이 부러졌어야 했을 교환이었다.
하지만 검염을 사용하니 고작 이 정도 부상에 그친다.
"라분! 오지 마!"
라분이 내 말을 무시하고 챔피언에게 돌격했다.
나는 챔피언의 검이 내게 먼저 닿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눈을 감고 검염을 처음 일으켰을 때의 감각을 끊임없이 되새겼다.
챔피언이 내 목을 치는 그 순간에도.
라분의 처절한 비명과 함께 의식의 끈이 끊어지는 그 순간에도.
키릭.
⋯⋯
"다! 아아아! 방패 들어 올리라고 제발!"
회귀하자마자 루덴 파티의 탱커를 살려보려고 했지만 역시 불가능했다.
몇 초도 되지 않는 시간. 더군다나 탱커의 시선은 정면이 아닌 나를 향하고 있었다.
결국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탱커의 몸이 세로로 갈라져버리고 만다.
"제기랄."
내 손이 닿을 수 없는 영역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거냐?
깔끔하게 포기다.
안면은 익혔으나 딱 그 정도뿐.
살릴 수 있었으면 무조건 살렸겠지만 그럴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챔피언과의 싸움에 집중하도록 하자.
먼저 살릴 수 있는 샤샤는 살리도록 하고.
"라분! 맞서지 마! 샤샤만 구하고 빠져!"
라분이 내 예상대로 방패를 버리고 샤샤를 구했다.
나는 죽기 직전에 내가 느꼈던 감각을 되새기며 검을 들었다.
몸속의 마나가 휘몰아치며 일정한 형태를 취하기 시작한다.
그 마나를 검에 몰아넣어, 구현시킨다.
'검염.'
3위계의 증거이자 완숙한 전사의 증명.
평범한 재능을 가진 90%의 검사가 좌절하는 구간.
나는 검염과 함께 챔피언을 맞이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챔피언이 눈을 빛내며 내게 달려들었다.
진정한 전투의 시작이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19
검염(劍炎).
마나가 검이라는 형태에 안주하지 못하고 검의 한계를 벗어나 실체화되어 나타나는 현상.
3위계에 도달했다는 증거.
나는 오크 챔피언과의 대치 상황은 별개로, 난생 처음 발현한 검염을 감상했다.
"아름답다."
내 붉은 마나가 피어난 검은 마치 아름다운 꽃을 보는 것 같다.
반면 오크 챔피언의 검염은 푸른빛이다.
내 검염을 본 챔피언이 이전보다 더 신중하게 접근해왔다.
지난 삶에서는 문답무용으로 공격해오던 것과 다르게 제대로 거리를 재는 모양새다.
"크르르."
"후."
그런더 이 검염. 생각보다 마나를 훨씬 더 많이 사용한다.
이렇게 검염을 발현하고 가만히 서있을 뿐인데도 마나의 소모가 느껴질 정도다.
상시로 사용한다면, 대략 5분 정도일까.
그동안 겪은 챔피언의 마나량은 나보다 윗줄.
어떻게든 단기전으로 끌고 가야 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자세를 낮게 가져가며 챔피언에게 접근해 검을 올려쳤다.
곧바로 반응한 챔피언이 내 검을 막았다.
반발력이 느껴진다.
빠르게 이어지는 공방 속에서, 나는 확실히 내 몸이 이전보다 더 빨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독이었다.
일변한 신체능력에 제대로 적응할 시간도 없이 챔피언과 실전 전투를 벌인다.
싸우다가 각성하면, 힘을 주체 못 할 수밖에 없다.
"씨발!"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몸이 가볍고, 빠르다. 그러면서도 위력은 더 강하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내 힘에 못 이겨 챔피언에게 일격을 허용했다.
오히려 2위계였던 시절보다 더 빠르게 결판이 났다.
"제기랄."
키릭. 키릭. 키릭.
그렇게 네 번을 더 죽고 나서야 몸에 완전히 적응할 수 있었다.
키릭.
⋯⋯⋯
루덴 파티의 탱커. 파커의 죽음이 익숙해진다.
깎여나가는 정신력과는 별개로, 나는 내 몸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
샤샤를 구하기 위해 라분이 나서지 않아도 될 정도다.
"흡!"
라분을 앞지르고, 샤샤를 향해 휘둘러지는 챔피언의 검을 막는다.
예상을 벗어난 속도의 접근에 챔피언이 당황한 것이 느껴졌다.
'지금!'
틈이 보이자마자 검을 내질렀다.
챔피언의 오른팔이 깊게 베어진다.
가장 좋은 시작이었다.
"!"
챔피언이 검을 빼며 기술적으로 내 어깨를 노렸다.
몸을 최대한 뒤로 빼봤지만 어깨가 살짝 베이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명백한 우위를 점했다.
뒤로 물러서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오크 챔피언.
얼굴에 명백한 낭패의 빛이 스쳤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씨익 웃었다.
"이제 끝났다."
그 뒤 약 3분간 이어진 전투.
오로지 상처 입은 오른팔만을 노리는 내 전략이 주효했다.
챔피언의 손이 점차 어지러워지더니 내게 일격을 허용했다.
멀리 날아가는 챔피언의 팔.
동시에 내 검이 당황한 챔피언의 목을 치고 지나갔다.
"하."
일곱 번의 도전 끝에 이뤄낸,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성과였다.
막상 챔피언을 죽이고 나니 왜 진작 이렇게 하지 못했냐는 생각이 든다.
'개구리 올챙이적 모른다더니.'
나는 널브러진 오크 챔피언의 시체를 바라보다 주저앉았다.
"으윽."
한 번에 너무 많은 마나를 써서 머리가 어지럽다.
라분이 얼른 달려와 내 몸을 받쳐줬다.
"주인. 대단하다."
"그래. 나 대단해."
순둥순둥한 라분의 얼굴.
나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그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물론 지워진 미래였지만, 라분의 흔들리지 않는 충성심을 알게 되었다.
맛있는 거 많이 먹여줘야지.
돌아보니 루덴이 파커의 시체를 수습하고 있었다.
나는 잠깐 쉰 뒤, 루덴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아, 루카스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목숨을 몇 번이나 빚지는 건지."
"동료분의 일은 유감입니다."
라분이 슬픔으로 떨리는 숨을 뱉었다.
반으로 갈려버린 시체는 전투의 여파까지 더해져 제대로 수습하지 못할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다.
"각인이랑 장비만 회수하겠습니다. 조금만 시간을."
"물론입니다."
나도 처리해야 할 게 잔뜩 있었으니.
우선 오크 챔피언의 경우다.
나는 내가 가져갔던 의뢰를 기억해 냈다.
[브라운 오크 챔피언의 옷 수실 1개]
일단 옷을 살피니 정말로 투박한 가죽 갑옷 밑에 천으로 된 옷을 입고 있었다.
벗겨내니 늙은 오크를 잡고 얻었던 옷과 똑같았다.
"와우."
그러면 옷이 3개라는 말인데, 이렇게 많이 가져가도 되려나?
의뢰서에 딱 한 개라고 되어있어서 애매한 부분이 있다.
일단 벗겨 놓고 생각해 보자.
라분은 챔피언의 시체 조각들에 일일이 마나를 투사해 보고 있었다.
곧 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마정석이 없다는 신호를 보냈다.
"있었으면 대박이었을 텐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음은 챔피언이 쓰던 검이다.
길이도 딱 적당하고, 무게도 괜찮다. 절삭력도 나름 뛰어난 편이다.
여러번 이 절삭력을 몸으로 겪은 내가 보증한다.
나는 원래 쓰던 검을 배낭에 쑤셔 넣고 새로운 검을 들었다.
검집이 약간 헐렁해 새로 맞춰야겠다.
마지막으로 오크 챔피언의 시체의 처리.
"공양이냐, 포상금이냐."
오크 챔피언을 공양하면 상당한 진척도를 얻을 수 있다.
코를 베어 가면 포상금을 상당히 많이 받을 수 있다.
돈과 미래를 위한 투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흠. 라분. 어떻게 할까?"
"잘 모르겠다."
"그럴 줄 알았어."
이미 내 맘은 한 쪽으로 기울어있었다.
고블린과 오크의 완충지대에 오크 챔피언이 갑자기 출현했다?
그것도 명백히 나를 노리는 듯한 모습으로?
그 원인을 생각해내는 것은 간단했다.
그저께 내가 죽였던 늙은 오크가 원인이겠지.
늙은 오크가 입도 있던 옷과 챔피언의 옷이 똑같았다.
현장을 보고 나를 추적해왔다면 말이 된다.
그렇다면 괜히 챔피언을 사냥한 흔적을 남기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다.
만약 오크 챔피언을 넘어선 오크 히어로가 온다면, 절대로 감당할 수 없을 테니.
포상금이 아깝지만 내 안전이 훨씬 더 중요하다.
"시체를 공양한다."
[시체를 공양합니다.]
[브라운 오크 챔피언 한 마리. 확인.]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진척도. 26.8%]
"그래. 이거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한 번에 진척도가 15% 넘게 올랐다.
아마 최상위권 탐험가도 이렇게는 올리지 못할 것이다.
하기야. 6번 죽고 이뤘으니 자랑할 것도 못되기는 하다.
오크 챔피언의 머리와 팔이 두둥실 날아올라 머리에 붙고, 그동안 흘러내렸던 피가 저절로 몸 속으로 들어간다.
다행히도 옷과 검은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가끔 신체 부위가 아닌 소지품들도 빨려들어간다고 하기는 하는데, 왜 빨려들어가는지에 대한 기준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미궁이 오크 챔피언을 집어삼키는 것을 보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루덴. 준비 끝났어요?"
수습한 파커의 시체를 향해 묵념하던 루덴이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이별이 익숙한 직업이다.
한 명 한 명의 죽음에 너무 많은 감정을 소비하게 되면 이 직업도 오래는 못한다.
"⋯⋯."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나를 비웃었다.
어찌알 수 없었던, 라분의 죽음에 끓어오르던 분노를 알고 있었기에.
루덴이 짐을 들어올렸다.
기진맥진한 소피아와 샤샤도 지친 몸을 일으켰다.
"네. 가시죠."
다시 시작된 안전지대로의 길.
이전과는 달리 서로 말이 없었다.
이들의 말문이 트인 건 다음 날이 되어서였다.
루덴과 소피아가 파커에 대한 추억을 나눴다.
"좋은 놈이었지."
"응."
"그놈 몫까지 살자고."
"응⋯⋯."
복귀는 순조로웠다. 안전지대에서 도보로 5시간 정도 남은 거리.
탐험가들도, 몬스터들도 뜸한 시점이다.
그런데 저 멀리서, 대략 4명의 탐험가의 기척이 잡혔다.
"응?"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오는 기척.
이미 안전지대 근방이기에 길을 잃었을리는 없다.
하지만 우리처럼 복귀하는 탐험가일 가능성이 높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일정한 거리에서 의도적으로 깔짝거리는 것이, 우리들의 위치를 알고 있는 듯했다.
'이 거리에서?'
나와 비슷한 감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말이 된다.
하기야. 본격적으로 미궁에 뼈를 묻는 탐험가들이 돌아다니는 구역인데, 나 정도 감지 능력이 있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나는 일부러 일행의 이동 속도를 늘렸고, 곧 4명을 따돌릴 수 있었다.
루덴네 파티처럼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다른 파티와의 접촉은 금기다.
알아서 멀리 떨어져주는 게 서로에게 좋았다.
그렇게 5시간.
마침내 우리들은 안전지대에 복귀할 수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훌쩍훌쩍 눈물을 보이는 샤샤와 소피아.
루덴이 이 둘을 감싸 안았다.
기어코 아무 말 없이 울기 시작하는 셋.
나는 검지로 볼을 벅벅 긁으며 라분과 함께 자리를 비켜주었다.
"주인. 힘들다. 쉬고 싶다."
"그래. 첫 탐험인데 개고생 했어."
"빨리 돌아가자."
"할 거는 해야지. 아 라분."
"?"
"맛있는거 먹자. 소고기 먹자."
"좋다."
잡담을 하며 시간을 보내자 루덴이 다가왔다.
어느 정도 진정된 모양.
"루카스 님."
"이제 말 편히 하시죠."
"그러시죠. 아니, 그러자. 흠흠. 루카스."
"네."
"정말 고맙다. 상황이 이렇지만, 탐험을 그만두지는 않을 거니까. 꼭 보답할게."
"됐습니다."
나는 미리 준비한 주머니를 건넸다.
루덴에게서 받은 선금에, 마정석 몇 개를 더했다.
"푼돈입니다."
"이런 걸."
"됐고, 형님 주는 거 아니니까. 집어 넣으쇼."
내 예상으로 볼 때 챔피언의 출현에는 내 지분이 높았다.
파커의 죽음에는 내 책임도 있는 셈이다.
헤어짐은 빠를수록 좋다.
나는 손을 흔들며 루덴 파티와 작별했다.
바로 돌아간 곳은 미궁 사무소.
"여. 오랜만이네."
담배를 뻑뻑 피우던 직원이 아는 체를 했다.
사람 대하는 직업이다 보니 잠깐 봐도 얼굴을 잘 외우나 보다.
사실 나는 직원 얼굴 까먹었다.
"예. 고생 많으십니다. 의뢰 정산이요."
나는 꼬깃꼬깃해진 의뢰서와 세 개의 주머니를 꺼냈다.
내가 받은 의뢰는 세 가지.
[브라운 오크의 송곳니 20개]
[브라운 오크의 온전한 눈알 3쌍]
[브라운 오크 챔피언의 옷 수실 1개]
이다.
나는 복귀하는 사냥에서 이것들을 모두 모아왔다.
일단 챔피언의 옷은 한 벌만 꺼냈다.
"휘유! 챔피언? 잡았어?"
"어쩌다 보니."
"둘이서? 보통 놈이 아니었네."
어차피 루덴의 파티가 현장에 같이 있었다.
길드에 소속된 이상 파커의 죽음을 보고할 테고, 그렇게 되면 내 챔피언 사냥이 보고 사항에 빠질 리가 없다.
'내가 이 정도는 머리가 굴러가지.'
송곳니와 눈알은 바로 정산을 받았고, 수실은 의뢰서를 돌려받았다.
"이건 내가 검증할 수 없으니까. 위로 가라고. 의뢰주가 바로 달려올 거야."
그렇다면 이곳에서의 볼 일은 끝났다.
미궁의 압박감에서 벗어날 때다.
건물 안에서 이동하는 것은 불법이기에 밖으로 나와 미궁 1층으로 이동했다.
"귀환."
[미궁 1층으로 귀환하시겠습니까?]
[현재 진척도 27.1%.]
"귀환한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뜨니 미궁 1층에 도착했다.
나와 라분은 리디엠의 상흔을 넘어 칼리움의 공기를 맛볼 수 있었다.
"으으!"
"후아!"
일주일 동안의 압박감에서 해방될 때의 이 감각이란!
익숙해져서 몰랐지만 막상 풀리고 나니 무거웠다는 것을 알았다.
라분은 해방감에 취해 정신을 못차릴 정도다.
나는 사무소에 들어가 의뢰서와 챔피언의 옷을 내밀었다.
"의뢰입니다."
"네. 접수되었습니다."
옷을 가지고 들어가는 사무원, 곧 사무소의 마법사가 나왔다.
"진품이군."
"혹시 더 필요합니까?"
"응?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연구에 필요하다고 했으니까."
운이 좋다.
얼른 배낭에서 남은 두 벌의 옷도 꺼냈다.
"호오? 3개나?"
"세 겹을 껴입고 있지 뭡니까."
마법사가 의아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얼굴에 철판을 제대로 깔았다.
옷의 금빛 수실을 만지작거린 마법사가 말했다.
"의뢰자가 일주일 내로 올걸세. 한 벌의 값은 미리 치르고, 나머지 두 벌은 그때 결과가 나오겠지."
"의뢰비 미만으로는 받지 마십쇼."
마법사가 어깨를 으쓱였고, 사무원이 종이를 내밀었다.
"그건 여기다가. 물품 등록 서류입니다."
나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의뢰비만큼 돈을 달라고 적었고, 두 벌의 보관증도 받았다.
그리고 마정석까지 정산하고 나자 볼 일을 다 마칠 수 있었다.
"하암."
빨리 집에 돌아가서 눕고 싶다.
라분도 꾸벅꾸벅 졸고 있고.
우리 라분 맛있는 거 먹여줘야지.
생각보다 힘들었던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미궁의 무한회귀자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