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협상의 달인
우걱, 우걱!
철두는 상다리 휘어지게 차려진 잔칫상을 두고 쉴 새 없이 젓가락을 놀렸다.
"와하하하! 천천히 들게나!"
박준필은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이 친구야, 어쩌자고 성으로 안 가고 예로 온 건가?"
"후후, 여기가 더 가까워서 들렀다."
"내가 걱정이 되던가?"
"사또가 그리 어수룩한 사람은 아니지."
"와하하하!"
빈말로라도 걱정된다가 아니라, 저리 인정해주는 말을 들으니 더 기껍다.
몇 마디 나누는 와중에 이미 상의 대부분의 음식이 사라진 지라 외쳤다.
"여봐라. 여기 한 상 더 내오너라."
"밤중에 과식하면 좋지 않다."
"허허허, 그럼 들이지 말겠네."
"아니, 딱 한 상만 더 먹자."
"허허, 그러세나."
철두와 박준필은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셨다.
잔치는 그들의 상에만 벌어지지 않았다.
"이야! 자네 잘 싸우던데?"
"아, 이번에 죽은 사람이 없어!"
"거봐. 내 뭐랬나? 사또 따라 댕기면 무사태평이라 이거야!"
"아, 이를 말인가? 용병대장은 어떻고?"
"예끼, 영주님이라 불러야지."
"껄껄, 그래. 영주님이 우리 사또하고 막역한 사이인데 무슨 걱정인가? 괴물 새끼들 죄다 몰려오라고 해봐. 도끼 한 방이면 아작이지!"
"크, 나는 그보다 내금위장이 날아다니는 게 정말 대단해 보였네."
"그 양반 원래 수성 하나는 기가 막혔는데, 말 얻더니 아주 대단혀."
"맞어. 앞으로 한양 방비는 걱정 없겠어."
수성전에 참여했던 병사들과 신서울에서부터 따라온 노바 고인물 민간인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어댔다.
승리를 축하하는 듯 달빛은 밝고, 승리의 여운은 성내를 가득 채웠다.
목책 밖의 여러 농경지가 훼손되고 원도심 계획으로 한양 중심이 되어줄 중심 탑은 무너져 내렸지만, 누구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땅이야 다시 갈면 되고, 무너진 건물도 다시 세우면 된다.
중요한 것은 이번 이틀 동안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미 성벽이든 뭐든 단단히 자리 잡은 신서울의 경우도 아니고, 이제 막 개척 중인 이 한양마을에서 펼친 수성전이라고 하기에는 자랑할 만한 성과다.
사람들 틈에는 박봉팔 관장도 있었는데, 얼떨결에 아직 돌아가지 못하고, 월식까지 경험하게 된 그다.
"어이, 박 씨. 한잔 혀."
"아, 예"
"자네, 좀 치던디. 지구에서 뭐 하고 왔단가?"
"복싱체육관 하다 왔습니다."
"왐마, 완투 좀 치는가?"
"하하, 네."
"키야! 자네는 어짜면 랭커 될지도 모르겠구만. 아, 어제 파수꾼도 잡혔으니, 이제 우리 지역에도 랭커들이 쏟아지듯 많이 나올 겨."
"아, 예에."
"크크크, 자네는 운이 좋은 겨. 우리 공방에서 일하며 어데 일 좀 배워볼 탄가? 사냥도 같이 다니고 말이여."
"어유, 말씀 감사합니다. 헌데, 지금 관청에 신세 지고 있는지라...."
"하하하, 그짝 양반들하고 어울려봐야 임관하란 소리밖에 더 듣는가? 짬밥이나 식당 밥이나 매한가지 국밥뿐이지만 그래도 민간인이 낫제."
"아, 예에, 말씀 감사합니다."
박봉팔 관장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저 장단을 맞췄다.
'다들 괴물들이여.'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기와 공방 장인도 칼을 잘 쓰고, 저기서 헤실 웃는 포목상도 백발백중의 명사수다.
"아따 자네는 힘도 좋은 게 활을 당겨야 혀. 나가 부산 진구 출신인데 쐈다 하면 다 맞추는...."
"하하하, 네."
수성전에서 박봉팔의 활약이 준수했는지라, 관심을 보이는 고인물들이 많았다.
본디 싹수 있고 똘똘하고 예의 바른 이들이야 제일가는 인재 아닌가.
왕년에 복싱도 했다고 하니, 성장 포텐도 높고 말이다.
"그래서 자네 제자 중에 어데 챔피언도 있는가?"
"아, 챔피언은 아직 키워보지 못했습니다."
본인이 챔피언 출신이긴 하지만 제자 중에 아직 챔피언 먹은 이는 없다.
"와하하하, 그냥 동네 작은 체육관이었나 보구마잉."
"예에, 근데 유명한 제자는 하나 있습니다."
"누구랑가? 나가 지구 떠난 지 한참 돼서 요즘 선수는 잘 모르는디."
"저기 저 철두가 제 애제자입니다."
"누규?"
"강철두요."
박봉팔 관장의 말에 왁자지껄하던 주변 소음이 일시에 멈췄다.
"누구시라고요? 용병대장님?"
"아, 예에."
박봉팔 관장이 겸연쩍어하며 말했다.
지구에서야 격의 없는 사이지만, 여기 와서 보니 철두가 대단해도 너무 대단했다. 저 신분 높은 쓰리스타 장군, 1군사령관과 겸상하고 있지 않은가.
쉽게 말 붙이기도 눈치 보이는 상황이다.
"아이구, 귀인을 몰라뵙고."
"저, 부산 진구서 온 정성수입니다. 저도 복싱 좀 가르쳐 주십시오."
"...백발백중명사수시라고...."
"아유, 비 오면 쓰지도 못하는 활쟁이 해서 뭐한데요. 주먹 좀 가르쳐 주십시오."
"저희 공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갑작스런 고인물들의 태세전환에 박봉팔이 식은땀을 흘렸다.
곤혹스런 상황이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마침 강철두와 눈이 마주쳤다.
"후후후, 관장님이 인기가 많군."
철두는 싱긋 웃으며 따봉을 날려주었다.
"후후, 자네 복싱 스승이었다지?"
"맞다. 많이 배웠지."
"한양에서 잘 모시고 있네."
"고맙다."
철두는 말하다 말고 불현듯 생각나 홀로그램 맵을 펼쳤다.
파팟.
상 위에 홀로그램 맵이 뜨자 박준필이 휘둥그레 떴다.
"자네 맵은 조금 크군?"
"후후, 업글했다. 월드맵 투다."
월드맵(1)이 해당 지역의 공간만 표시된다면, 월드맵(2)는 경계 없이 인접 지역까지 표시된다.
지역지도와 세계지도의 차이라고 할까.
철두가 맵을 축소해 C614 지역이 주먹만 하게 만들자, 검은 음영지역 너머 새로운 주먹만 한 지역이 떴다.
"음? 저긴."
"알아보겠나?"
"가만, 신서울인가?"
"후후, 맞다."
"허, 연결되어 있었던가! 과연."
"크게 놀라지 않는군?"
"지금 몹시 놀랐네. 허나, 추측하고 있던 일이기도 하지."
박준필은 맵을 보며 가만히 생각했다.
C614를 한 블럭의 맵으로 생각하면 신서울이 위치한 C442 맵까지는 중간에 세 개의 맵을 거쳐야 한다.
가깝다고 할 만한 거리는 아니나, 영 멀다고 느껴지는 거리 또한 아니다.
문제가 된다면 검은 음영지역이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미개발, 미탐사 지역이라는 것.
"지형이 평탄하고 출몰하는 몬스터들이 험하지만 않으면 길을 못 낼 것도 없겠구만."
"그보다는 날씨가 문제가 될 거다."
"아, 그렇지!"
과거 철두는 신서울의 파수꾼을 잡고 맵의 보호 안개를 해제한 후에, 인접한 맵을 하나씩 다 밟아 보았다.
맵마다 날씨가 전부 달랐는데, 어떤 곳은 눈발이 날리는 겨울맵인지라 부실한 보급품으로는 감히 탐사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허어, 이거 자네를 만나고부터 뭔가 휙휙 변하는 느낌이구만. 아니지."
박준필은 말을 정정했다.
"자네가 있기에 그나마 뒤처지지 않고 따라가고 있다고 봐야지."
국제사회에서, 적어도 노바와 관련된 연구성과에 있어서 한국의 위상은 결코 낮지 않다.
"자네 NITO라고 알고 있나? 얼마 전에 신설된 국제기구인데, 여기서 한국의 위상이 높다네. 그게 다 자네 덕이야."
"그게 뭐지?"
"세계적으로 노바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는 기관일세. 모두 한국이 가진 정보를 얻기 위해 안달이 나 있지."
"으음."
철두가 턱을 쓸었다.
"준필이 너와 맺은 약속과 같은 거군."
"하하, 맞네."
박준필과 강철두는 상호정보교류협약을 맺었다.
철두를 관찰하며 얻은 노바의 여러 새로운 정보들은 기밀로 붙여져, 육군본부로 보내지고 정부는 이것을 국제사회에서 판매 혹은 교류하고 있다.
처음 미국과 한국이 서로 파수꾼에 대한 정보 교류로 시작된 협상 테이블이 정기화되고 회원국이 하나둘 늘더니 이제는 국제기구가 되었다.
노바 국제 조약기구(NOVA International Treaty Organization)는 그렇게 탄생했다.
멸망의 형태가 좀비에서 비롯되었단 것도, 벌써 파수꾼이 잡힌 게 40번이 넘었다는 것도 여기서 공유된 정보다.
정보 교류는 노바의 시스템, 노비스에 대한 정보, 식생 가능한 작물, 농법, 지구와 다른 광물의 연구자료 등등.
아주 다양한 분야에서 이뤄졌다.
한국과 미국에서부터 시작해 인도, 영국, 중국이 합류하고, 철두의 등장 전까지 선구자적 위치에 있던 일본까지 결국 대세에 합류, 이제는 회원국이 30개가 넘었다.
"아무튼 NITO에서 심심찮게 자네 이야기가 화두에 오르는 실정이네."
"후후, 유명해진다는 거군."
"그렇다네. 하지만 여기서만 지낼 거면 유명세를 치를 필요는 없지. 하하하."
지구처럼 초네트워크 사회도 아니고, 정보든 물자든 교류가 힘든 노바다. 그러니 철두가 입만 다물고, 그 무식하게 큰 양날 도끼만 무장하지 않으면 대번에 알아보는 이는 드물 터다.
"자네는 여기 두 도시 간의 길을 개척할 셈인가?"
"후후, 가보지 않을 이유도 없지."
박준필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렇구만. 그럼 정식 의뢰로 처리되도록 해보겠네. 자네의 여정에 무임승차하기에는, 정부에서 얻는 게 너무 많군."
신서울과 한양이 육로로 연결된다.
이는 도시 간 이동이 선택된 몇 개의 맵 사이의 이동마법진만으로 이뤄지던 기존의 방식을 탈피하는 걸 의미했다.
앞으로 점점 더 많은 마을들이 연결될 터다.
협조하기도 좋을 테고, 무역을 하기도 좋다.
성장이 가속화될 터고, 문명의 발전만큼이나 부작용도 뒤따르겠지만....
그때, 이방이 누군가와 함께 다급히 달려와 박준필의 옆에 섰다.
이방과 함께 온 전령 차림의 사내가 경례했다.
"충성! 사령관님. 긴급 명령입니다!"
"어허, 손님도 계신데!"
"...사또, 급보이옵니다."
"무언가?"
"당장 육본으로... 아니, 이걸 보면 아실 겁니다."
"줘보게."
박준필은 건네받은 문서를 읽어보곤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강철두가 궁금해 물었다.
"뭔가?"
"...신서울 인근에 외계인 무리가 출현했다는군."
"음? 몬스터?"
"아니, 우리처럼 마을과 문명을 이룬 이들이야."
"호오."
철두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설마 동족들일까?
외계인이라면 그들은 발할라에서 왔을까?
"철두, 일이 급하니 편히 쉬다가 복귀하게나."
"음? 준필이 너는?"
"나는 급히 신서울로 가야겠네."
"왜?"
"허허허, 다 이 몸이 유능하기 때문이 아니겠나? 외계의 무리와 협상을 맡으라는구만."
철두가 대번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후, 날 빼놓고 어딜 가는가."
"음?"
박준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고, 강철두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협상하면 나지."
"...자네가?"
121화 후회
박준필이 즉각 인수인계를 했다.
"이거 뒷수습도 못하고 가서 미안하네."
"맡겨주십시오!"
부사령관 김준용이 깍듯이 경례했다.
강철두도 대충 작별을 고했다.
"후후, 다녀오지."
"네, 잘 다녀오십시오."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최준섭은 바로 수긍했고, 이은영은 질척거렸다.
"후후, 협상가의 일이다. 너는 빠져라."
"제가 가야 대장을 지키죠."
친위대의 역할이 그거다.
하지만 철두는 허락하지 않았다.
"돌아가서 성을 지켜라."
"...알겠어요."
이치상으로 생각해도 그렇다.
아이언헤드 성에서 무력으로 순위를 매기면 강철두 다음이 이은영이다. 철두가 호위가 필요한 상황이 아니니 둘이 나뉘는 게 맞다.
"쳇, 대장은 성 걱정 안 돼요?"
"후후, 진태를 믿는다."
아오, 또 할 말 없네.
"잘 다녀오세요."
"그러지."
철두를 지켜보던 박준필이 시의적절하게 끼어들었다.
"가세나."
"후후, 그러지."
철두와 박준필은 포탈을 넘었다.
파팟.
포탈을 넘고 보니 장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충성!"
"그래, 충성."
"모시겠습니다."
철두는 그쯤 작별인사를 했다.
"내일 보자고."
"그러세나. 이 시간에 맞춰서 파주에서 봅세."
다시 포탈을 타려면 지구 시간으로 1일이 지나야 한다.
박준필은 곧장 장교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서울로 향했고, 강철두는 근처에 보이는 아이언헤드 건물로 향했다.
"후후, 좋아 보이는군."
정부에서 4층짜리 건물 하나를 불허해 주었는데 IH 그룹이 단독으로 쓰고 있었다.
철두가 막 몇 발자국 걸을 때였다.
츠츠츳.
손등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푸른 슬라임이 문신에 스며들어버렸다. 은은한 빛마저 점점 줄어들더니.
<활동 에너지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전령이 비활성화됩니다.>
"음?"
철두가 손등을 툭툭 쳐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지구에서는 자는군."
아마 전령을 움직이게 하는 무언가의 에너지가 노바에는 있고, 지구에는 없는 모양이다.
아무렴 어떤가.
지구에서는 사냥할 일도 없다.
꼬물거리며 주화나 아이템을 줍는 게 녀석의 일이니, 지구에서는 딱히 쓸모가 없다.
"헙!"
"회장님 오십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자신을 알아보는 부하 직원들의 안내에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니 꽤 많은 인원이 상주하고 있었다.
개중에 안면이 있는 이가 부리나케 달려와 넙죽 고개를 숙였는데, 사호인 변우진이였다.
"헉, 대장님!"
"그래, 사람이 많아졌군."
"네, 전부 노비스 전직을 마친 이들로, 지구와 노바 간을 오갈 전령들입니다."
철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건장한 녀석들은 영지군 삼아도 되겠다.
"가족들은?"
"이주 준비를 거의 마쳤습니다."
"좋아."
시켜놓은 것은 다 했다.
"잘하고 있어."
"헉, 감사합니다!"
"가자."
"어디로 모실까요?"
"집으로 가야지."
"헙...."
"왜?"
"골든빌 말씀이십니까?"
"그럼 집이 또 어딨어?"
"...처분했지 말입니다."
"음? 내 집을 팔아?"
철두의 말에 변우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호, 호텔에서 주무시면 안 되겠습니까?"
"음?"
철두가 턱을 쓰다듬었다.
"좋다. 가자. 내일 아침까지 파주에 가야 하니 근처로 가자."
포탈 사용 가능 시간인 24시간이 지나면 곧장 신서울로 가야 한다.
다급한 일이니까.
"알겠습니다. 차 준비시키겠습니다."
곧 차가 준비되고 파주로 향했다.
차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종두에게서 전화가 왔다.
- 회장님!
"누가 회장님이냐."
- 사, 사장님.
"우냐?"
- 면목 없습니다.
철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시킨 일은 죄다 잘 처리한 서종두다.
용병대의 가족들 신원 파악도 끝냈고, 노바로의 이주 의사도 전부 조사했다.
앞으로 이주하고 싶은 이들을 노비스로 만들어 노바로 건너오게 도와줄 것이고, 아닌 이들은 인편으로 포탈을 오가는 전령에 편지라도 주고받을 터다.
"뭐가 문제냐?"
- 당했습니다. 넘겨받은 기업들의 재무 상태가 심각합니다.
철두가 피식 웃었다.
"문제없군."
- 네?
"종두."
- 네, 형님.
"근본을 잊지 마라."
- ...근본 말씀이십니까?
"후후, 그래. 잘하고 있다."
- ...감사합니다.
"너도 대충 정리되면 얼른 노바로 와라. 언제까지 조무래기만 할 거냐?"
- ...알겠습니다.
"그래, 조만간 노바에서 보지."
-네, 사장님.
철두는 전화를 끊었고, 창밖을 보았다.
마침 휴게소를 지나쳤다.
'핫도그 까비.'
철두는 무심히 말했다.
"다음 휴게소에 들르자."
"네, 알겠습니다."
철두는 가는 길에 휴게소에 들러 핫바와 핫도그 호두과자를 먹었다. 감자도 몇 개 먹다가 의문이 들었다.
"무구마 말고 감자는 어째서 없지?"
노바의 구황작물은 무구마가 있다.
아무런 맛도 나지 않는 고구마 같은 녀석인데, 정말 맛이 없었기에 허기진 게 아니면 딱히 먹을 게 못 된다.
감자처럼 이리 맛난 게 있으면 좋을 터인데.
노바가 다 좋지만, 음식만큼은 지구의 다양성을 따라갈 수가 없다.
"후후, 최대한 즐기고 가주지."
하지만 주어진 시간은 고작 하루.
일곱 끼 정도밖에 못 먹겠군.
서둘러야겠다.
"맛집으로 가자."
"예?"
"맛난 데로 나를 데려가라."
"메뉴는 어떤 거로 하시겠습니까?"
"뭘 고르나, 그냥 순서대로 가자."
"헙, 넵!"
철두가 알뜰하게 맛집 투어를 하며 파주에 올라왔을 땐 이미 해가 진 저녁이었다.
룸서비스로 안주를 몇 개 시켜먹고는 욕조에 몸을 담갔다.
"후후후후."
이것이 호캉스란 것인가?
나쁘지 않군.
아니, 오히려 집보다 더 좋다.
골든빌 204호. 행복했다.
"돌아가면 목욕탕도 만들어달라고 해야겠어."
진태라면 만들어주지 않을까?
성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결투장에도 한번 들러보고 싶고. 하고 싶은 건 많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에 든 것은 하나다.
"발할라."
신서울 인근에 나타났다는 외계종족이 과연 누굴까?
같은 고향 행성의 이들은 아닐까?
바바리안이라면....
동족을 만나면 무얼 해야 하지.
드디어 나도 동족이 생기는 건가?
더 이상 지구인들 사이의 유일한 외계인이 되지 않아도 되는 건가?
부족은 아직도 나를 쫓고 있을까?
아니, 이거 바바리안을 만나도 환영받지 못할 수도 있겠는데?
설마 재수 없게 요정족이나 제국인을 만나는 건 아니겠지.
"후우."
철두는 답지 않게 머릿속이 복잡했다.
꽈앙!
두꺼운 손을 들어 제 머리를 쳤다.
눈앞이 핑 돈다.
"후후후, 쓸데없는 짓을 했군."
생각 같은 건 닥치면 해도 된다.
만나보면 알 터인데, 지레짐작으로 걱정하다니.
지구에 오래 있다 보니 멍청해졌군.
"후우!"
촤아아악.
철두는 욕조에서 나와 대충 물기를 닦고 옷을 입었다. 남들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철두는 지구에서나 노바에서나 같은 옷을 입었다.
나와 보니 변우진이 소파에 앉아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주무시겠습니까?"
"술이라도 한잔하자. 안주도."
"안주는 어떤 걸로.... 다 시키겠습니다."
"후후, 사호 제법이군."
눈치가 많이 늘었어.
철두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룸서비스를 기다리는데, 말끔한 인상의 웨이터와 함께 희끗희끗한 머리의 중년인이 함께 모습을 보였다.
그의 뒤로는 딱 봐도 한 덩치 하는 양복쟁이 다섯이 함께였다.
"...."
"...."
철두와 중년인의 시선이 얽혔다.
의아해하는 철두의 얼굴과 여유로운 웃음을 짓는 중년인의 얼굴이 대비되었다.
"후후후."
"기분 나쁘게 웃는군."
철두의 말에 중년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이거, 내적 친밀감을 다지려고 해봤더니만 내로남불이 심한 친구였군.
"나는 이기택일세."
"나는 강철두다."
"같이 한잔하겠나?"
"싫다."
"헛."
단번에 거절당할 줄은 몰랐기에 이기택이 헛바람을 삼켰고, 뒤에 있던 양복쟁이 하나가 발끈했다.
"감히! 이분이 누구신지 알고!"
"이기택 아니냐?"
"허, 어린놈의 새끼가. 예의 없이! 이기택이 네 친구냐?"
"내 친구는 진태, 준필이 뿐이다."
"이이, 뭐 이런 싸가지 없는 놈이."
양복쟁이가 부들부들 떨었으나 이기택은 노회한 정치인답게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김 실장, 그쯤 하면 되었네."
"하지만, 의원님."
"어허, 물러나래도."
"쳇. 너 조심해!"
김 실장이라 불린 녀석의 삿대질이 묘하게 신경을 거슬렸다.
이기택은 근처의 의자에 앉고는 잔을 들었다.
"한잔 따라 주겠나?"
"...? 예의 없는 놈이군."
앉으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하하하하, 참 재밌는 친구야."
이기택은 호탕하게 웃고는 말했다.
"내 알아본 것보다 더 뾰족한 친구로구만 그래. 좋아. 본론만 이야기하지."
"싫다."
"어허, 들어만 보게. 듣는 데 돈이 드나?"
시간이 든다.
이것으로 인해 7끼를 못 먹을 수도 있고, 그사이 7번의 간식 시간 중 한번이 날아갈 수도 있다.
"굳이?"
"아주 파격적인 제안이 될 걸세."
"좋아. 말해봐."
"대가부터 말하지. 우리 당에 입당시켜 주겠네. 다음 선거 비례 1번은 자네 차지가 될 게야. 스무 살에 최연소로 의사당에 입성할 걸세."
후루루루룩.
이야기를 들으며 룸서비스로 온 술을 한잔 마시곤 대꾸했다.
"싫다."
"허, 싫어? 어째서?"
"싫은데 이유가 무엇이 필요하나?"
정확히는 남의 손에 의해 미래가 정해지는 것 자체가 달갑지 않다. 물론 상대가 납득할 만한 언어로 풀어내 줄 배려 따위는 없다.
"싫으니 가라."
"허, 젊은이. 후회할 텐데?"
"후회?"
철두가 웃었다.
"후후후."
그래, 딱 한 번 후회한 적이 있다.
그때를 떠올리니 이거 괜히 기분이 나쁘군.
하지만 할아버지와의 약조가 있으니 한 번은 참아야겠지.
"사호. 쫓아내라."
"네! 나가시죠."
변우진의 완력에도 경호원들은 이기택의 앞을 막아서며 저지했다.
"어허, 감히."
"오지 마."
"어허, 밀지 마!"
변우진이 용을 썼으나 경호원 다섯을 감당하지는 못했다.
"쯧."
지구에 오래 있으면 저 꼴이 난다.
스탯석도 몇 개 먹은 녀석이, 성장이 정체되어 저리 쩔쩔매지 않는가?
종두도 얼른 노바로 돌아와 열심히 수련해서 조무래기는 면해야 할 터인데.
"나와봐라."
철두는 변우진을 지나쳐 막아서는 경호원의 따귀를 쳤다.
퍼억!
굉장히 섬세하고 미세한 컨트롤로 인해, 경호원은 고개가 홱 돌아가고 저만치 멀리 날아갔으나, 목뼈가 돌아가 절명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퍽, 뻑, 뻑!
김 실장이라 불린 놈과 이기택만이 깜짝 놀라 굳어있다.
"문제 있나?"
"이,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넌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알았나?"
"어?"
어는 무슨.
뻐억!
김 실장이 미세 컨트롤 배려왕 약소 싸다구에 날아가 기절했다.
홀로 남은 이기택을 보며 물었다.
"문제 있나?"
"히익! 아, 아닐세."
후다닥.
이기택이 서둘러 도망쳤다.
"문제없군. 후후."
할배, 나 많이 참았다.
저놈들은 한 번 참아줬는데 또 덤비면 이제 끝이다. 사호가 쓰러진 경호원들을 밖으로 끌어내고 문을 닫았다.
뚜루루루.
때마침 변우진의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받은 변우진은 급히 철두에게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형님, 받아보셔야겠습니다."
"종두냐?"
"아닙니다. 박준필 중장님입니다."
"음? 준필이?"
- 철두!
"출발은 내일인데 이 밤중에 무슨 일인가?"
- 잠깐 볼 수 있겠는가?
박준필의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다급했다.
"왜?"
- 김근수 대령이 외계 무리에 납치당했네.
"허."
철두가 탄식했다.
- 사태가 심상찮네. 대책 회의 중이네만, 자네의 의견이 필요하네. 호텔로 사람을 보내겠네.
"알겠다."
조금 귀찮긴 하지만 친구가 이리 찾는데 가야지.
"그전에 하나만 묻지."
- 말해보게.
"김근수가 누구야?"
- ....
122화 결정
- 신서울 부사령관일세.
"하하하, 안다. 알아."
- ...아무튼 곧 사람이 도착할 걸세.
띵동.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군복 입은 장교 둘이 호텔 초인종을 눌렀다.
"너는 돌아가라. 나 혼자 가지."
굳이 번거롭게 변우진까지 데려갈 이유가 없었기에, 철두는 혼자서 군인들을 따라나섰다.
부르르릉.
차창 밖으로 보이는 장벽의 모습에 철두는 감탄했다. 경이로운 공사 속도다.
"여기는 올 때마다 달라지는군."
"정부의 모든 역량을 투입하고 있지요."
장교는 제 일처럼 자부심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하긴, 오다가 본 굴착기만 수십 대에, 레미콘 차 수백 대가 줄지어 여기저기 오가는 모습도 보았다.
자원을 퍼부으면 못할 것도 없다.
"굉장히 빠르군."
"국민들이 불안해하니까요."
고블린의 출현으로 사람들이 대거 피난 가버렸다. 서울은 인근에 괴물이 출몰하니 불안감이 커졌고, 장벽의 건설로 이어졌다.
"후후, 저게 어딜 봐서 고블린을 막기 위한 장벽이냐?"
"...아는 사람들 눈엔 그렇지요."
철두를 데리러 온 군 장교가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장벽은 누가 봐도 내부의 괴물이 아니라,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한 모양새였다.
장벽 위도 내부로는 오픈되어 있어도 외부로는 군데군데 총안구를 제외하고는 벙커처럼 막혀 있다.
더욱이 내부에 여러 시설 공사들이 한참인 것을 보면, 정부에서는 장벽 바깥보다 장벽 안을 더 귀하게 여기는 게 확실했다.
"좀비는 아직인가?"
"헛, 그, 후우, 아닙니다."
장교는 깜짝 놀랐다가 상대가 상대이니 그러려니 했다.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자군.'
대놓고 저리 기밀을 발설하니 말이다.
"아직 공식적으로 발견된 바는 없습니다."
"비공식은 있다는 소린가?"
"...."
쓸데없이 예리하게 물어오네.
장교는 침묵으로 회피했고, 철두는 굳이 더 캐묻지 않았다. 어차피 좀비가 창궐하든 말든 그의 본진은 노바다.
"다 왔습니다."
차가 멈춘 건 기존에 포탈 주변을 아우르던 장벽 안이다. 이렇게 두고 보니 포탈을 중심으로 내성벽과 외성벽이 생긴 모양새다.
내성 안에도 변화가 컸는데, 넓은 주차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높은 건물들이 여기저기 지어지고 있었다.
포탈 근처의 건물로 안내되어 들어가 보니 반가운 얼굴의 박준필과 나이든 중년인들이 여럿 있었다.
"자네 왔는가?"
"후후, 왜 불렀나?"
철두의 격의 없는 말에 좌중이 깜짝 놀랐다.
설마하니 20살 갓 성년이 된 강철두와 오십이 넘은 박준필이 저리 허물없는 사이일 줄은 몰랐으니 말이다.
박준필은 철두에게 어깨동무하곤 한쪽으로 끌어갔다. 목소리를 낮추곤 당부의 말을 전했다.
"자네가 장난이 많은 건 알지만, 오늘은 조금 자중해주게."
"왜?"
"그래도 명색이 대통령님인데, 너무 예의 없는 것도 좋지 않아."
"오, 대통령."
대한민국의 부족장!
철두의 초롱거리는 눈빛을 보며 더 걱정스러워진 박준필이 말을 보탰다.
"이 친구 체면을 좀 생각해주게. 날 위해서라도 조금 예의를 차려주게."
"후후, 알겠다. 장난치지 않겠다."
철두의 약속을 받아내곤 박준필이 중앙의 테이블로 다가가 소개했다.
"아이언헤드 용병대장이자, 아이언헤드성의 영주 강철두입니다."
"소문의 주인공을 만나니 영광일세."
철두는 대통령이 내미는 손을 마주 잡고 흔들었다.
"후후, 반갑습니다."
"하하하, 듣던 것과 다르군요."
김승태 대통령은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내 이번 기회가 될 때 용병대장을 한번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리 무례를 무릅쓰고 초청했습니다."
얼굴 한번 보자고 부른 건가?
쓰잘데기 없는 용건에 비해, 깍듯하군.
대한민국의 부족장으로서 잘 어울렸다.
"나도 영광입니다."
"하하, 그래요."
철두의 말에 박준필의 눈알이 휘둥그레 떠졌다.
'철두가 빈말을?'
저런 말도 할 줄 알았던가?
강철두와 김승태 대통령의 대화는 꽤 화기애애했고, 박준필이 이쯤 끼어들어야 하나 고민할 때 먼저 선수 친 인물이 있었다.
"대통령님. 지금은 외계 무리에 대한 확실한 입장을 정해야 합니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외교부 장관의 말에 김승태 대통령의 얼굴에 가득하던 미소가 씁쓸해졌다.
"그래요. 그래야지요."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해야 한다.
저들은 사절로 출발한 김근수 휘하 10인을 억류해 인질로 잡아두고 있으며, 현재까지 아무런 요구사항도 없는 상태다.
침묵하는 적을 대면한 상황.
많은 이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라 쉽게 결정하질 못했다. 복잡한 심경에 강철두를 초청한 것도 대통령이다.
새삼 이 자리가 쉽지 않았다.
어떤 선택을 하든 후회할 것 같아서.
"...."
대통령은 장고를 거듭했고, 회의실에 모인 십여 명의 사람들은 모두 초조한 얼굴이었다.
"아이언헤드 영주님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저요? 으음."
철두는 턱을 쓰다듬었다.
"김근수가 중합니까?"
"어허, 이봐요. 말을 가려 하세요. 김근수 대령이 당신 친굽니까?"
국방부 장관이 욱하고 나섰고, 철두는 씩 웃었다.
"대머리에게 물은 거 아니다."
"뭐? 뭐! 이 새끼가!"
반짝반짝 국방부 장관이 욱하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박준필이 서둘러 그를 말렸다.
"아이고, 장관님. 참으십시오."
"박 중장! 저 새끼 저거 말본새 봐. 저 어린노무 새끼가!"
"후후후."
철두의 웃음은 사람을 열 받게 하는 묘한 힘이 있어, 국방부 장관은 반짝반짝한 머리를 붉게 물들였다.
"저, 시발놈이!"
"어허! 자중하세요!"
대통령의 호통에 국방부 장관이 끓는 주전자 같은 얼굴을 하곤 앉았고, 철두가 묘하게 미소지었다.
박준필이 그 모습에 이마를 짚으며 제발 자중해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김근수 대령이 중요하냐고 물었습니까? 중요하지요. 허나 대한민국 국민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건 저들이 사절로 간 우리 국민을 인질로 잡았다는 겁니다."
대강의 사정은 철두도 이제 파악했다.
"나라면 가서 보고 판단합니다."
"보고요?"
"후후, 인질을 잡아뒀으면 할 말이 있겠죠. 중요한 건 그놈들의 머리요."
철두가 자신의 머리를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대통령이 탄식했다!
"저들의 진짜 의중을 알아야 한단 소리구려."
대통령의 말에 국방부 장관이 버럭하고 나섰다.
"진짜 의중이고 뭐고가 없습니다! 이건 명백한 도발입니다. 지금은 힘을 보여야 합니다."
여태 잠자코 있던 외교부 장관이 나서서 핏대를 세웠다.
"어허, 어찌 그리 싸울 생각만 합니까? 평화로 해결할 수 있다면 마땅히 그래야지요."
"어허, 이리 답답해서야."
철두가 오기 전부터 강경파와 온건파가 싸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결정을 앞둔 대통령이 심란한 마음에 내일 떠나기로 예정된 협상단의 박준필과 강철두를 부른 것이다.
"조용하세요!"
김승태 대통령은 곧 결정을 내렸다.
"예정대로 2차 협상단을 파견하겠소. 용병대장이 저들의 생각을 잘 좀 관찰해 주시오."
"...?"
철두는 고개를 갸웃했다.
문제 있는 놈의 머리를 따는 일에 왜 생각이 필요한가?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박준필이 나서자, 김승태 대통령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박 중장과 용병대장은 그만 나가서 쉬세요. 중책을 맡겨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마땅히 제가 해야지요."
"...?"
철두가 고개를 갸웃하며 나서자 김승태 대통령은 한숨을 쉬었다.
"국방부 장관."
"네."
여전히 씩씩거리는 그를 보며 명령했다.
"노바 군에 알려, 혹여 2차 협상단까지 사로잡힌다면... 전쟁 준비를 하라 이르세요."
"알겠습니다! 적들이 누구를 건드렸는지 똑똑히 보이겠습니다."
본디 협상도 대등한 사람들끼리 하는 거다.
한쪽이 기울면 일방적이며 굴욕적인 수용만 있을 뿐이다.
"다들 나가보세요."
지구에서의 1일이 노바에서 5일이다.
겨우 4시간 남짓의 시간마다 올라오는 보고서는 노바에서의 하루가 담겨 있었고, 시간 단위로 저쪽의 상황이 급변하고 있었다.
지구 종말이니, 좀비 바이러스니 하는 와중에 최후의 도피처로 삼은 노바 행성의 정착에도 먹구름이 끼이는 형세다.
어디 하나 쉬운 게 없다.
회의실의 모든 사람들이 나갔으나 딱 한 명이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직접 보니 어떻던가요?"
회의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중년 사내.
경찰청장은 천천히 입을 뗐다.
"멍청하다는 말은 확실히 틀린 소리더군요."
"으음."
"범죄자들 중에도 그런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어떤 계기를 통해 정서적 비틀림이 생기는 경우지요."
경찰청장의 말에 대통령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범죄자에 가깝다는 겁니까?"
"하하, 아닙니다. 그저 무언가 계기가 되어 억눌렸던 싸... 무언가가 터져 나왔다고 봐야지요."
경찰청장은 싸가지를 대체할 말을 찾으려다가 말았다.
강철두의 경우는 특이하다.
애초에 그가 멍청하다는 소문은 믿지도 않은 총장이다.
'운동선수 중에, 그것도 엘리트 중에 멍청한 놈은 없지.'
뇌는 몸을 제어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다.
운동지능이 낮은 이가 저토록 훌륭한 성적의 엘리트 운동선수가 될 수는 없다.
'상식이 부족하다면 모를까. 멍청한 건 말이 안 되지.'
강철두의 기록을 전부 보았다.
그를 이해해보려 애써봤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그를 직접 관찰해보았다.
그는 충분히 절제할 수 있으며, 때에 따라 말을 가려 할 줄도 알았다.
예의가 없다는 평가도 틀렸다.
그는 대통령 앞에서 지나치게 당당하긴 했으나 예의 없지는 않았다.
'예의가 없는 게 아니라, 예의를 안 차리는 거다.'
무인도에서 옷을 벗든 입든 상관없는 것과 같을까?
힘을 얻고 그랬을까?
노바에 들고부터?
흥미로운 케이스지만 흔하기도 하다.
자존심과 자존감이 넘쳐 오만으로 변하며, 주변을 무시하는 경우는 많으니까.
"어쨌든 강철두는 범죄자들과 다릅니다. 그는 스스로 통제할 수 있습니다."
트리거로 인해 성격이 변한 게 아니다.
내재된 폭력성, 이기심, 반사회적인 이로 변해버린 것이 아니다.
"그냥 통제하지 않을 뿐이지요."
"...사람에 따라서요?"
"네에."
확실히 국방부 장관 앞에서 대머리라고 놀린 건 인상 깊었다.
싸가지력이 높은 녀석이다.
"알겠습니다. 이만 가보세요."
"네, 대통령님."
막 문을 나서려던 경찰청장이 뒤돌았다.
"대통령님."
"더 할 말이 있습니까?"
"시대가 변했습니다."
"...."
"범죄자면 어떻고, 폭력성이 있으면 어떻습니까? 그는 통제력이 있으며, 폭력도 이롭게 쓰이면 전쟁영웅이 되는 법입니다."
"...귀담아듣겠습니다."
"네, 그럼."
경찰청장까지 밖으로 나서고, 김승태 대통령은 무거운 숨을 뱉었다.
"후우...."
무겁구나.
이 자리가.
할 수만 있다면 도망치고 싶다.
"이미 도망친 건가?"
당장 결정하기 무서워 2차 협상단의 결과를 보고 결정하자고 하였다.
그때가 되면....
나는 결정할 수 있는가?
"후우."
무겁고 탁한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123화 전력평가
강철두는 대통령을 만나고 나서 숙소로 안내되었다. 군인들이 쓰는 듯 2층 침대가 있는 숙소였는데, 포탈을 타고 가면 바로 또 일정을 소화해야 하니 쪽잠이라도 취하라는 배려였다.
자리에 누운 철두는 이질적인 감각에 오른손등을 보았다.
<전령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뭐야? 언제 깨어난 거야?"
"뀨우?"
이 녀석 지구에 오면 비활성화되는 것 아니었나?
아니면 파주 포탈존 인근은 고블린이 출몰하는 지역이라 나타난 건가?
"이 근처는 노바 같다는 건가?"
무엇이 되었던 녀석이 깨어있을 정도의 에너지는 나오는 모양이다.
"자라."
"뀨?"
철두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 대신 심상의 세계로 들어갔다.
메마른 언덕.
여전히 황량한 공간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다.
"더 자랐군."
죽어있던 나무 기둥에서 돋아난 새싹 하나.
새싹은 점점 더 자라나 이제 한 뼘 정도 되는 가지가 되어 있었다.
괜히 기분이 좋군.
철두는 한참 나무를 구경하며 심상 세계에서 비구름을 만들어내 물을 주었다.
투두둑, 투둑.
철두의 영혼력이 낮아서 그런지, 아주 작은 비구름밖에 구현해내지 못했지만 부슬거리며 내리는 비는 충분히 나무를 적셔 주었다.
"음?"
철두는 어쩐지 자신의 손이 커진 것 같아 나무 둥치에 가 뒤로 돌아섰다.
손날을 세워 정수리에 대고 나무에 붙인 다음 떼 보았다.
"어?"
컸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될까?
그때 할배한테 꾸중 들었을 때는 한 뼘은 컸었는데, 그때보다는 못하지만 분명히 자라났다.
"후후, 이제 나도 성장하는가?"
왜 자랐지?
이유는 몰라도 기분은 좋다.
이미 몸은 전사의 몸이 되었지만, 여전히 자라지 못한 마음은 소년이다.
손가락 한 마디 커봐야 거기서 거기.
에이든은 여전히 작은 바바리안이었고,
메마른 언덕은 여전히 황량했다.
꾸르르릉.
그때 하늘이 찌그러드는 게 보였다.
"뭐야."
역시 바바리안 수련법은 지하 비밀수련장에서 하거나, 누군가 믿을 만한 녀석을 호법으로 세워두고 하는 게 맞다.
에이든은 눈을 감았고,
철두가 눈을 떴다.
덥썩.
"헙."
철두가 손을 잡아채고 보니 박준필이 침대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뭐냐?"
"아니, 깨우려고 했네."
"변태군."
"어찌 그렇게 되는가?"
"후후, 자는 아이를 만지려고 하다니."
"...아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크지 않나?"
"늙은이들의 변명이란."
박준필이 어이없어 철두를 보았다.
눈동자에 가득한 장난기를 보곤 피식 웃었다.
"그만 일어나게. 갈 시간이야."
"벌써?"
"벌써긴, 자네 잠든 지 세 시간이나 지났네."
"잠든 게 아니라, 심상 수련이었다."
"아무튼 나가 보세나."
철두와 준필은 곧 포탈을 타고 신서울로 들어섰다.
파팟.
"충성!"
기다리고 있던 병력들이 즉시 안내했고, 곧 노바군 참모총장 임운진 대장과 마주할 수 있었다.
"어서 오게나. 자네도 다시 보니 반갑구만."
"충성. 상황 설명부터 들을 수 있겠습니까?"
"이게 그 편지네."
- 오늘부로 제국에 충성하고 칼리안 남작령의 가신이 되기로 하였으니, 더는 저를 찾지 마시길 바랍니다. 마지막 남은 애국심으로 충고하건대, 절대 이들과 무력충돌을 일으키지 마십시오. 이들의 힘은 진짜입니다.
임운진 대장은 어두운 표정으로 설명했다.
"암호문의 전문가들이 다방면에서 분석해봤으나 숨겨진 메시지를 찾을 수 없었네."
박준필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암호문이라면 그도 조예가 있었다.
"세로 드립에도 맞는 게 없군요."
"그렇지."
진지한 두 사람의 대화에 철두가 끼어들었다.
"호, 제국이라."
"음? 자네 제국에 대해 알고 있나?"
"음, 조금 알지."
"허, 이 제국이 나타내는 게 무언가?"
"나타내긴 뭘 나타내. 제국이 제국이지."
"암호 대체문이 아니라?"
"제국은 고마운 존재다. 혹독한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제국이 꼭 필요했지."
"...?"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임운진이 와락 인상을 구겼고, 박준필은 귀를 기울였다.
"무슨 말인가?"
"아, 그렇군. 그냥 옛날이야기다. 제국은 농사를 잘 짓는다."
바바리안 부족들이 사냥감마저 줄어드는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번번이 제국을 약탈해와야 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주는 고마운 존재들이다.
이따금씩 대규모 토벌군을 꾸려 몰려드는 게 위협적이긴 하지만, 언제나처럼 그들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진배없는 존재들.
직접 전쟁터에 나간 적 없는 8살 작은 바바리안의 개념 속 제국은 그러했다.
"어쨌든, 김근수 대령 휘하 10인이 억류되어있는 건 사실이네, 더불어 저들의 저의를 알 수가 없으니 내 이리 답답한 심정이야."
저들이 무언가 요구라도 하면 좋으련만, 아무런 요구도 없었다.
철두는 박준필을 보았다.
"가자."
"음? 이대로?"
"그럼? 어차피 가서 보는 게 우리 목적 아닌가?"
"어어, 그렇긴 한데."
임운진이 나섰다.
"자네는 아직도 성정이 급하군. 저들이 어찌 나올지 여러 경우의 수를 생각한 다음, 그 대응책도 미리 생각하고 가야 하네."
생각 좋아하는 녀석들 많군.
"가서 보고 생각하면 된다."
철두는 싱크빅들을 뒤로하고 회의실을 나섰고, 박준필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대책회의야 그간 많이 하지 않았나?
"인원 차출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공격대 하나가 차출되었네. 가면서 파악하게."
"네, 그러지요."
박준필은 나서려다가 임운진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 묘한 섭섭함이 가득했다.
"할 말이 있으면 말하게."
"신서울이 많이 바뀌었더군요."
"...옛것 위에 새것이 들어서는 것 아니겠는가?"
"...보중하십시오."
"자네야말로 무사 귀환하게."
임운진은 진심으로 그리 말했다.
이번 월식을 겪고, 또 예기치 않은 외계인과의 조우를 겪어 보니, 노바는 지구의 상식으로 통하지 않는 일들이 언제 벌어져도 이상치 않을 곳이다.
박준필 같은 경험 많은 야전사령관이 많이 필요하다.
두두두두두두.
한 떼의 인마가 신서울을 빠져나가 서쪽으로 향해갔다.
C442.
통칭 신서울맵은 보호의 나무를 중심으로 12시 방향에 신서울이 위치했고, 7시 방면에 외계인의 마을이 출현했다.
본디 마적단의 본거지가 있던 곳 근처였다.
"7 공격대장 구정욱 소령입니다."
철두와 박준필을 호위하며 함께하는 건 7 공격대 20인이었다.
총인원 22명의 2차 사절단이 힘차게 말을 달려나갔다.
"조금 무리해서 7번 마을까지로 일정을 잡겠습니다."
7번 개척마을은 보호의 나무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마을이다. 농업보다는 지리적인 이유로 중간 기착지 같은 마을.
두두두두두.
해가 지고 조금 더 달려서 마을에 도착했고, 구정욱 소령과 대동한 자리에서 그날의 상황을 조금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이상합니다. 분명 그 외계인이 더없이 아름답긴 했으나, 지구의 연예인들도 그 정도는 되었습니다."
"으음, 흥미롭구만."
"페로몬? 아니, 마법적인? 뭔가 이상했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욕정이 들었다는 말이 맞겠군요."
구정욱 소령의 말에 박준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누구보다 마법의 힘을 높이 평가하는 박준필이다.
오죽하면 스탯과 스킬, 마법의 존재 덕에 총기 제작을 포기하고, 기병과 궁병을 양성했을까.
"매력 계열의 마법이 작동했을 수도 있겠군."
"그렇습니다. 필체는 분명 김근수 대령의 것이었지요. 김 대령은 스스로 썼을 겁니다. 물론 그 내용까지 본인의 생각인지는...."
매혹에 당했다.
이건 거의 자백제 먹은 인질과 다를 바 없는 것 아닌가?
"허, 신서울의 사정이 다 털렸겠군."
"...그렇습니다. 내부사정은 이미 적들에게 다 까발려졌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김근수 대령은 신서울의 부사령관.
임운진 대장이 부임하기 이전부터 부사령관이었던 자다.
실권이 없이 거의 두문불출해서 그렇지, 내부사정에 대해서는 빠삭한 인물.
"후후후, 알겠군."
갑작스러운 철두의 말에 구 소령과 박 중장의 시선이 모였다.
"철두 자네, 짐작 가는 게 있는가?"
철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은 견적이 다 나온 거다."
"무슨?"
"전쟁 말이다."
"...."
"설마."
"그렇게까지야...."
두 사람의 반응에 철두가 히죽 웃었다.
"후후, 여우가 주인인 산에 호랑이가 들어온 게지."
박준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한참 생각하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저들은 판단을 마친 거다.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신서울의 전력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이 얼마나 압도적인 자신감인가?
"후후후, 아주 기대가 돼."
철두의 눈빛이 타올랐다.
노바로 들어오고부터 생명이 깨어나는 기분이다.
강한 적. 강한 상대.
노바는 끊임없이 전사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준필."
"말해보게."
"지켜주지 못할 수도 있다. 슬쩍 보고 튈 수 있으면 무조건 튀어라."
"허, 자네는?"
"후후, 나도 간 보고 튀어야지."
강한 상대다.
마주해보고 안되면 튀면 된다.
후일, 힘을 길러서 다시 도전해보면 될 일.
"용병대장, 전쟁은 장난이 아닙니다."
구정욱 소령의 말에 철두가 히죽 웃었다.
"난 장난으로 싸우지 않는다."
"...아니, 그 말이 아니잖습니까?"
"되었네. 자네는 그만 나가보게나."
"끄음, 알겠습니다."
구정욱 소령이 나서고 박준필은 어쩐지 걱정되어 물었다.
"저들의 목적이 무엇이겠나?"
"알 필요가 있나?"
"음?"
"후후, 안다고 대응은 할 수 있냐는 말이다."
"하하하, 그야 그렇지."
철두의 단순한 말은 핵심적인 본질을 담고 있었다.
박준필은 가만히 마음을 정리했다.
'적이 아군에 대한 허실과 전력 파악을 마쳤다.'
박준필의 목표는 아직 명확하지 않은 적의 실체와 전력 파악.
적을 알아야 대응을 하고, 보다 효율적으로 싸워낼 것이 아닌가?
"이틀은 더 가야 하는 강행군일세. 주무시게나."
"알겠다."
일행은 7 마을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 해가 뜨기 전의 새벽에 출발했다.
보호의 나무를 지나쳐 계속해서 남서진했다.
하루의 야영을 마치고, 셋째 날 점심 무렵이 될 때쯤.
"저깁니다."
긴장한 얼굴의 구정욱 소령이 손짓했다.
"허허."
박준필은 저도 모르게 웃었고, 강철두도 웃었다.
"후후, 낯설지 않군."
마적단이 자주 활동하던 너른 벌판에 석조 고성이 서 있었다.
아이언헤드 성과 아주 비슷한 모습이었다.
124화 협상 테이블
칼리안 남작성.
별실에는 호화로운 정원을 가진 궁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며칠째 잔치가 이어져 오고 있었는데, 파티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노바군 신서울 주둔 부사령관 김근수 대령이었다.
"호호호, 이것 좀 드셔보세요."
"이리 내어 오너라."
"아잉, 이리 오세요."
"하하하하."
김근수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걸렸다.
이거지.
이게 호사지.
권력이고 나발이고 무슨 소용인가?
어차피 곧 쓸려나갈 텐데.
이건 배신도, 배반도 아니다.
내가 나라를 팔았어?
조국을 배신했어?
이건 그냥. 그래. 그거다.
망명이지.
벌컥, 벌컥.
"어머, 호탕하신 거 봐."
"영웅은 주량이 대단하다는데, 꼭 김 장군님을 두고 하는 말 같아요."
"흐흐흐."
김근수는 며칠째 취해있다.
반쯤 눈알이 풀린 그는 남은 죄책감마저 씻어내려는 듯 연거푸 술병을 비워냈다.
'그 힘 앞에서는....'
그래, 내가 졸렬한 게 아니야.
누구나 그랬을 터다.
제국의 진짜 힘을 목도하게 되면
꼭 내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이리 와 봐라. 흐흐흐."
"아잉."
술에 취해, 인사불성인 그가 계집을 잡고 드잡이질했다.
아름다운 정원의 나무엔 수급 셋이 매달려 있었다.
퍽, 퍽!
"흐흐흐흐."
제정신으론 누리기 힘든 호사다.
*
2차 사절단 대표.
박준필 중장은 성으로 나아갔다.
그 옆의 철두도 천천히 말을 몰았고, 7 공격대원들도 보조를 맞춰 갔다.
"자네 성하고 비슷해."
"내 성보다 커 보이는데?"
"건축 양식을 말하는 게지."
"라이언 백작이 저들하고 한패였나 보군."
"후후, 모를 일이지. 백작이라면 귀족이었을 터, 그 제국에서 받은 봉작이 아니겠나?"
철두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성을 보았다.
'남작이라고 했다.'
칼리안이라고 했나?
김근수는 분명 남작령에 봉사한다고 하였는데, 큰 성의 주인이 남작인가?
성이 크다고 그 주인마저 강할 것인가?
기대된다.
더욱이 외계인들의 존재는 무엇일까?
발할라 출신의 바바리안도 있을까?
두근, 세근, 네근.
전사의 심장이 아까부터 요동친다.
"자네는 일단 내 호위일세. 그러니 모든 협상은 일단 내게 맡겨두게."
"알았다. 몇 번을 말하나."
"허허, 알겠네. 알겠어."
일행이 성벽 아래까지 왔을 때도 적에게서는 아무런 낌새도 없었다.
성벽 위의 병사들은 그저 멀뚱히 이곳을 보고 있고, 성문 앞의 기사 차림의 사내 하나가 느그적거리며 다가왔다.
"!@#!@#!@$%"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일행의 대표 박준필 중장이 나섰다.
"우리는 저기 신서울 출신의 사절단이오."
"@$%#"
뭐라 중얼거린 기사가 투구를 벗었다.
드러난 얼굴은 귀찮음이 가득했다.
뿅.
인벤토리에서 꺼내는지 허공에서 꺼낸 물병의 약을 먹더니 기사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지구의 인간과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우리 동족이 연락이 두절되었소. 그를 만나야겠소."
"허, 그는 지구를 버렸다. 이제 칼리안 남작령의 사람이니 더 이상 귀찮게 굴지 마라."
"직접 보고 가야겠습니다."
"이 건방진 놈들이."
기사가 칼을 빼 들었고, 철두도 허리춤의 검을 빼 들었다.
라이언 백작의 검술 레벨이 3이었는데.
이 기사들은 어떠할까?
"저 야만인처럼 생긴 녀석은 뭐냐?"
"내 호위요."
"쳇, 지구에도 야만인처럼 생긴 놈이 있군."
"일단 소식을 전해주시오. 김근수 대령을 무조건 만나보고 가야겠소."
"하, 귀찮게 하지...."
채챙!
철두가 나서서 기사의 검을 쳐냈다.
"흥! 감히 준필이를 공격하려 하다니."
"무슨 개소리냐?"
가만히 서 있었던 기사는 어이가 없었다.
"덤벼라! 내 친구의 원수!"
"시발, 무슨 개소리야!"
채채챙.
철두가 가볍게 내지른 참격과 찌르기를 무리 없이 받아내는 기사를 보며 철두의 눈빛이 더욱 반짝였다.
'최소 레벨 3.'
달인의 경지다.
칼리안 남작령에는 검술 레벨 4의 강자도 있을까?
두근, 세근.
철두의 심장이 거칠게 뛴다.
"후, 시발. 넌 뒈졌다."
도발에 걸려든 상대 기사는 검에 진심을 담기 시작했다.
차차차차창!
두 개의 검이 어지러이 부딪히며 요란한 소음을 냈다. 권태로운 얼굴로 밖을 주시하던 병사들도 눈을 반짝이며 그 대결을 지켜봤다.
"@!#!@"
"$%#ㄲ@"
알아들을 수는 없으나 저들끼리 떠드는 게 뭐라 뭐라 응원하는 것 같았다.
"이런, 야만인 같은 녀석이!"
차창!
"후후후, 너는 발할라 출신인가?"
흠칫.
기사는 흠칫 놀랐고, 철두는 후후 웃었다.
"칼리안 성에 바바리안이 있나?"
"허, 노예로 길들이지도 못하는 야만인 따위가 성에 있을 리가 있나?"
"후후후후후후."
철두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들은 발할라를 알고 있다.
아, 제국 놈이구나.
아낌없이 주는 나무여.
"너는 야만인이냐?"
"후후후후."
철두의 검이 다시 현란하게 춤췄고, 대강의 수준을 파악했다.
레벨 1은 재주가 있는 수준의 입문자.
레벨 2는 완숙의 경지에 다다른 숙련자.
레벨 3은 달인의 경지다.
'검술 레벨 3 정도, 스탯은 랭커보다 위다. 전투 센스는 오준환 정도?'
종합적인 평가는 오우거보다도 위고, 기술도 데스나이트보다 위다.
하프 리치였던 라이언 백작보다는 조금 약한 정도?
'압박해볼까?'
숨겨진 수가 있다면 더 끄집어내겠지.
철두가 슬쩍 인벤토리에서 투척 도끼를 꺼내 들었다. 한 손에 검, 한 손에 짧은 투척도끼가 들렸으나 그의 쌍수무기술은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차차차창.
"으으으!"
투핸드 소드로 바쁘게 움직여봤으나, 유기적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두 개의 무기를 전부 막아내지는 못했다.
옆구리를 노린 도끼의 공격을 급히 갑옷의 옆면으로 흘려내려 했으나, 담긴 힘이 상상 이상이다.
쿠퉁!
"크윽."
그 틈에 하체를 쓸어오는 발차기를 피할 겨를이 없었다.
꽈앙!
로우킥이라곤 믿을 수 없는 파워가 오금을 쳤고, 기사는 휘청이며 바닥에 엎어졌다.
응원하던 성벽 위의 병사들이 조용해졌고, 철두는 바닥에 뻗은 기사를 향해 다가갔다.
'죽일까?'
할배가 약한 놈은 한 번은 봐주라고 했는데.
여긴 전장이니까 상관없나?
철두가 잠깐 고민하는 사이, 성문 위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
올려다보니 소년 하나가 서서 히죽 웃고 있었다.
"뭐야, 저건?"
"크윽, 지구인! 예의를 갖춰라. 칼리안 남작님이시다."
"저 꼬마가?"
"크윽! 이놈!"
기사는 발을 절뚝이며 일어서서 검을 다시 들었다.
"내 죽는 한이 있어도 네놈의 그 예의 없는 주둥이를 베겠다."
투지를 불태우는 녀석과 다르게 그 주인은 너그러웠다.
"@!#!@"
"크윽."
녀석은 소년 주인에게 한소리 들었는지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는 말했다.
"남작님께서 그대 무리를 초대하고자 하니, 들어오라신다."
"후후, 꼬마가 예의가 있군."
그때까지 가만히 뒤에 있던 박준필이 나섰다.
"어쨌든 잘 풀렸구만. 가세나."
철두가 박준필의 어깨를 잡곤 뒤로 고갯짓했다.
"우리 둘만 가자."
"음? 어째서?"
철두가 박준필의 목을 끌어와 속삭였다.
"부하들이 많으면 튀기 힘들다."
적의 소굴로 들어가는 입장이다.
저리 자신만만하게 초대하는데, 퇴로 정도는 확보해야 한다.
모두 함께라면 몰라도 박준필 하나 정도라면 충분히 데리고 도망칠 만했다.
"구 소령. 밖에서 대기하게. 아니지, 저기까지 후퇴해 진을 꾸리게."
"하지만...."
"명령일세."
"알겠습니다."
구정욱 소령은 군말 없이 7 공격대를 이끌고 후퇴했고, 박준필과 강철두만 성문을 통과했다.
"후후후, 좋군."
철두와 준필은 천천히 걸으며 성내를 구경하기 바빴다.
"이쪽으로 와라."
"아까 마신 건 뭐냐?"
"흥, 미개한 놈에게 알려줄, 아악!"
철두가 기사의 어깨를 짚었다.
"크흡, 놓아라!"
"알려줘라."
"소, 소통의 비약이다."
"나도 하나 줘봐라."
"크흡, 안 된다."
"왜?"
아니, 시발.
주기 싫은데 왜가 어디 있나?
"안 주면 부순다."
"아악, 여, 여깄다."
철두의 두툼한 손바닥에 잡은 어깨가 압박감에 삐그덕댈 때, 할 수 없이 약을 꺼내 건네주었다.
<소통의 비약>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도 소통에 문제가 없어진다.
1시간 동안 지속된다.
철두는 그것을 원샷했다.
"크윽, 영주님의 초대만 아니었어도."
중얼거리는 기사에게 씩 웃으며 물었다.
"어차피 나보다 약하잖아."
"...."
"한 병 더 줘봐라."
"맡겨뒀나!"
"허, 아까 내가 봐준 덕에 목숨을 건진 것 아니냐?"
"시발, 애초에 기습적으로 공격한 건 네놈이지 않나?"
"후후, 사소한 걸 문제 삼는군."
기사는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철두를 훑었다.
뭐, 이런 참신한 시발 새끼가 다 있지?
"쪼잔하게 굴지 말고 한 병 더 줘라."
"여, 여기 있다."
녀석은 다시 어깨동무하며 잡힌 어깨가 박살 나긴 싫었는지 순순히 한 병을 더 꺼내 주었다.
역시 아낌없이 주는 제국인 녀석.
"준필이 마셔봐라. 맛은 별로다."
"고맙네."
박준필이 소통의 비약을 쭉 들이켰다.
이거 어명 809보다 맛이 별로구만?
어쨌든 맛과는 별개로 수군거리는 성내 사람들의 소리가 다 들린다.
"또 지구인이야."
"영주님의 노예들인가?"
"모르지, 영주민이 될 수도 있고."
박준필은 그들의 말과 행동을 보며 여려가지 정보를 습득했다.
곧 중앙의 영주 저택으로 들어가니 메이드복을 입은 하녀들이 여기저기 바쁘게 오가다가 일제히 모습을 감췄다.
연회홀의 긴 테이블 상석엔 아까 그 꼬마가 앉아 있었다.
"어서 와라. 지구인들. 아, 참."
보르텡은 허공에서 삥 하고 꺼낸 소통의 비약을 뽕하고 따서 마셨다.
"환영하지. 앉게나."
"후후, 네가 보르텡이냐?"
"이보게, 철두. 협상은 내게...."
"아, 준필이. 내게 맡겨라. 제국 애들은 내가 잘 안다."
"...알겠네."
철두가 보르텡에게 다가서려 하자 뒤에 시립해 있던 기사들이 나섰다.
차창.
움직일 때마다 갑옷 부딪히는 소리가 거슬린다기보다는 꽤 듣기 좋았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라, 지구인."
영주의 호위기사는 둘이었는데, 풍기는 기세가 심상찮았다.
'아까 그놈보다는 더 위. 라이언보다도 더 세 보이는데?'
이 남작 녀석 뭐 하는 놈이길래 호위기사가 저리 심상찮지?
아니면 라이언 백작이 하프 리치가 되어 몬스터화 되면서 더 약해진 건가?
"하하, 경들 물러서게."
"네, 주군."
철두는 히죽 웃으며 테이블 위의 사과 하나를 집어 먹었다.
와작!
달고 맛있다.
역시, 농사 하나는 제국인들이 잘 짓는다.
"지구인 중에 너 같은 전사가 있는 줄은 몰랐군."
보르텡은 시종일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너를 높이 평가한다. 내게 충성할 기회를 주겠다."
"후후후."
철두의 미소에 보르텡의 눈썹이 꿈틀했다.
묘하게 킹받게 하는 녀석이군.
"가서 아르테아를 데려와라."
125화 부모님의 원수
오라는 아르테아보다 시종들이 더 먼저 들어왔다.
착, 착.
그들은 커다란 쟁반을 들고 와 차례로 테이블에 깔았는데, 처음 보는 종류의 음식부터 익숙한 것들까지 산해진미가 차려지기 시작했다.
긴 테이블에 접시가 빈틈없이 올려졌다.
처음 군데군데 있던 과일 바구니가 초라해 보일 지경.
"하하하, 앉아라. 나 칼리안 보르텡은 손님에게 인색하지 않다."
쪼끄만 영주가 어른인 척하는 게 우습지만, 접시의 음식이 풍기는 냄새는 진짜였다.
철두는 권하기 무섭게 의자를 빼서 앉았다.
"처, 철두."
"후후, 준필이. 초대를 해줬는데 밥도 안 먹고 가는 건 실례다."
"...."
엄밀히 말하면 초대가 아니라 무단침입이지만, 박준필은 철두의 옆에 앉았다.
강철두가 슬쩍 고개를 붙이곤 조용히 말했다.
"상갓집에 가도 밥은 먹고 오는 게 예의다."
"...자네 침 고였네."
"쓰읍, 후후후."
철두는 음식을 보며 포크를 집어 들었다.
"맛있게 먹지."
푸욱.
철두는 잘 익은 고기를 찍어 입에 한 움큼 넣었다.
우적, 우적.
바비큐 같은 맛이 나는군.
"하하하, 이거 지구에도 괴상한 녀석이 있었군."
칼리안 남작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는데, 그 모습이 계속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놈이다.
"후후, 준필이. 먹어봐라. 독은 없다."
"으음."
박준필이 고개를 끄덕이곤 앉았다.
그러나 음식을 입에 대지는 않았다.
"좋아. 인간 전사. 매일 이런 음식을 차려주지."
"마음에 드는군."
"좋아. 내게 충성을 맹세해라. 봉신의 계약을 맺는 거다."
"싫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가?"
"후후, 맛있다."
우적.
철두의 포크는 쉬지 않았다.
그 모습에 보르텡은 슬쩍 미소지었다.
"그럼 봉신 계약을 맺자."
"싫다."
"...."
저 새끼가?
보르텡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으나, 이내 다시 미소지었다.
"하하, 재밌군. 지구의 인간들이 그리 미개하지는 않구나."
본디 짐승을 길들이자면 먹을 것과 매로 충분하겠으나, 조금 문명화된 인류를 길들이는 데 한두 가지쯤의 욕구는 더 충족해줘야겠지.
"때마침 오는군."
끼이이익.
사치스럽게 꾸며진 연회 홀의 연장선과 같은 계단 위의 문이 열렸다.
2층에서부터 내려오는 드레스 입은 여인의 모습에 박준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허흡."
선녀다.
하늘에서 선녀님이 내려온 겨.
"흐흐흐."
보르텡 칼리안 남작은 웃었다.
인간 놈들이야 뻔하지.
요정족, 그중에서도 특히나 미모가 빼어난 아르테아를 보면 다들 정신을 못 차린다.
보르텡은 기꺼운 마음에 철두를 살폈다.
인간치고 대단한 용력과 검술을 가진 녀석.
'어디, 인간 전사는....'
보르텡은 깜짝 놀랐다.
콰직!
철두의 커다란 덩치가 어느새 식탁 위를 밟고 있다. 그대로 힘줘 뛰어오르자 그 반발력에 식탁이 무너졌다.
콰장!
"우어어어어!"
인간 전사가 날았다.
연회홀을 가로질러 2층 계단을 향해 솟구쳤다.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
눈은 타오르는 불길만큼 거센 감정이 들끓었다.
카아앙!
철두가 휘두른 포크가 아르테아가 빼낸 검에 가로막혔다.
"...무례하군요."
포크가 가로막힐 줄은 몰랐다.
깜짝 놀란 철두가 한 발 뒤로 물러나 자세를 잡으며 도끼를 빼 들었다.
"덤벼라."
"...."
분노가 가득한 철두의 눈을 보며 아르테아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우리가 만난 적이 있던가요?"
"흥, 요정은 내 원수다."
"...."
더 아리송한 말이다.
아르테아는 철두의 이글거리는 눈을 보았다.
'바바리안?'
요정에게 이렇게 무식하게 덤벼드는 건 바바리안 정도뿐이다.
하지만.
'문신이 없는데?'
바바리안 전사 중에 문신 없는 녀석은 없다.
선조의 혼도 내려받지 못한 새끼 바바리안이 아닌 이상, 문신은 그들의 힘의 원천이자 자부심.
"인간과 원수진 적은 없는데?"
"가증스럽군."
저 큰 귀. 가녀린 몸.
보기만 해도 피가 끓어 오른다.
"후우, 후우."
철두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세포 하나하나를 통제 가능한 바바리안이지만, 그 통제력은 강인한 정신력과 영혼에서 나온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인해 통제력을 상실한 몸은 피로를 호소하며 숨을 가쁘게 쉬었다.
"우어어어어!"
연회홀을 쩌렁쩌렁 울리는 함성과 함께 도끼를 짓쳐들었다.
차앙!
아르테아의 검은 철두의 도끼를 비껴내며 순식간에 네 합을 더 겨뤘다.
차차창!
하늘거리는 드레스가 불편했으나, 펄럭이는 옷자락이 검무와 어우러져 아름답게 보였다.
까앙!
검이 도끼의 날과 자루 사이로 끼이며 두 사람의 얼굴이 확 가까워졌다.
"후우, 후우."
"...."
철두의 눈은 실핏줄이 다 터져 벌겋게 변해 있었고, 아르테아의 얼굴엔 혼란이 가중되었다.
아까는 긴가민가했는데, 지금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분명 익숙한 향기다.
"...어째서 정령의...."
아르테아의 흔들리는 눈빛이 슬쩍 보르텡에게 향했다가 말을 삼켰다.
그사이 철두가 더욱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죽여주마! 후우!"
콱!
철두의 발차기가 아르테아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윽."
힘이 대단하다.
아르테아가 휘청거리자 철두가 당장 도끼를 놓고 인벤토리에서 검을 빼 들었다.
차앙!
철두의 검술 레벨은 3.
차차창! 까강!
철두의 검과 아르테아의 검이 순식간에 수십 번의 합을 겨눴다.
철두는 전심전력으로 검을 휘둘렀으나 넘을 수 없는 벽을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보다 위다.'
최소 검술 레벨 4.
아르테아의 수준이 높다.
'나를 봐주고 있어?'
철두는 수치스러움과 모멸감에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는데도 아르테아는 그저 철두를 그저 '상대'해주고 있다.
적당히 검을 받아주고 있다.
'죽인다.'
하지만 이건 검술대회 같은 게 아니고, 무슨 수를 쓰든 상관없는 전투다.
철두는 검을 버리고 거대 도끼를 두 자루 꺼내 양손에 쥐었다.
힘은 확실히 철두가 우위다.
잘하는 걸 두고 상대의 장기에 놀아줄 이유가 없다.
투투둑.
긴 치맛자락이 결국 철두의 발에 밟혀 쭉 찢어지며 아찔한 다리가 드러났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철두가 달려들어 도끼를 휘둘렀다.
쾅, 콰직!
철두의 도끼와 양발이 쉴 새 없이 공격을 퍼붓자 아르테아는 연신 뒤로 밀려났다.
"하하하, 아르테아. 그만해라."
그때 들려온 보르텡의 음성에 아르테아의 신형이 우뚝 멈췄다.
쐐애애액!
철두의 위협적인 발차기가 아르테아의 팔뚝에 틀어박혔다.
콰직!
무방비하게 맞은 아르테아의 신형이 벽으로 날아가 처박혔고, 철두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도끼를 내리쳤다.
후우우웅!
이제 저 가증스런 요정족의 목을 치면 된다. 와중에 시선이 얽혔다.
"...."
"...큭."
철두는 급히 도끼를 멈춰 세웠다.
즈윽.
도끼날이 아르테아의 목을 지그시 누르고 있다. 한 마디는 베고 들어간 도끼날을 타고 피가 흘렀다.
"...."
철두의 이글거리는 눈알이 죽음 앞에서도 여전히 고요하고 깊은 아르테아의 눈을 응시했다.
"왜지?"
"...."
"왜 날 그렇게 보지?"
"...내가 널 어떻게 보고 있지?"
"...."
철두의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불쌍해?'
아르테아의 눈빛엔 동정이 가득했다.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을 죽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전사에게 내보낼 눈빛이 아니다.
김이 샜다.
이 요정을 죽인다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내 동족이 네 가족을 해쳤다면 미안하다."
"...."
아니다.
내 가족을 해친 것은 요정이 아니라 같은 동족인 바바리안이다.
"...."
철두가 도끼를 들었다.
주르르륵.
날이 빠지자 깊게 벌어진 상처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으나 죽을 정도의 상처는 아니다.
아르테아가 급히 한 손을 들어 지혈했으나, 아까 다리에 맞은 팔은 덜렁거리며 축 처졌다.
"...."
아르테아의 볼썽사나운 모습에 철두의 눈빛에 당혹이 피어올랐다.
요정족과 바바리안이 앙숙인 건 맞았다.
요정은 정말 나의 원수인가?
"나...."
부모님을 죽인 건 부족이다.
죽어야 할 건 자신이다.
요정의 축복을 받은 작은 바바리안을 살리기 위해, 부모님은 대신 죽었다.
"나는...."
죽었어야 할 나는 살아있는데.
죽지 않았어도 될 부모님은 죽었다.
나의 원수는 누구인가?
지독한 자기혐오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그저 요정을 죽여 나의 죄책감을 씻어내려 했구나.
"하하하하! 인간, 좋다. 좋아. 내 얕잡아봤군. 아르테아와 호각세일 줄은 몰랐어."
보르텡은 뭐가 좋은지 엉망이 되어버린 연회장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 봉신이 되어라. 부귀영화를 주마. 요정 노예라면 수십 수백도 사주마. 마음껏 분풀이해라!"
"...."
슬쩍 돌아보는 철두의 눈빛이 공허하다.
보르텡을 보는 철두의 얼굴엔 아무런 감정도 깃들지 않았다.
식욕도 사그라들었다.
흥이 식었다.
"준필."
"자네, 괜찮은가?"
"근수나 데리고 가자."
박준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철두는 엉망이 되어버린 아르테아를 남겨두고 계단을 내려와 보르텡에게 다가갔다.
차착.
그의 옆에 있던 기사 둘이 나섰다.
이들도 아르테아 정도의 실력이겠지?
검술 레벨 4.
그런 괴물 둘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을까?
'안 될 것 없지.'
기술 레벨 따위로 전투력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김근수를 데려와라. 돌아가겠다."
"크큭, 무슨 소리냐? 너는 내게 봉신 계약하기 전엔 떠날 수 없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녀석이군."
"너야말로 멀리 볼 줄 모르는군. 지구에 대한 파악은 이미 끝났다. 아직 종말도 시작하지 않은 햇병아리 행성이라지?"
"...."
"이제 겨우 초보 노비스들 무리만 드글한 인간들이 어째서 이리 빨리 맵을 개방했는지 모르겠지만, 너희 인간족은 아직 준비가 되지 못했다."
이 녀석은 다른 건 몰라도 노바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녀석이군.
"내 기꺼이 칼리안 남작령의 품에 너희 인간을 품을 것이다. 나의 통치 아래 사민이 될 것이며, 영광을 함께 할 것이다."
보르텡이 양손을 활짝 펼쳤다.
마치 자신의 자비로움을 자화자찬하듯.
"너는 돌아가 본들 소용없을 것이다. 신서울의 전력은 형편없다. 당장 고리온 경 혼자서도 함락시킬 만한 성."
칼리안 남작이 가진 3개의 검이자, 자신감의 원천.
"돌아갈 곳은 없다. 나의 봉신이 되어 칼리안 남작령의 영광을 함께하자. 인간 전사."
역시, 문제가 많은 녀석이군.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오, 승낙인가?"
"네놈 귀는 필요가 없겠군."
"뭐?"
남의 말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제 말만을 지껄이는 녀석이니 귀는 없어도 되겠다.
"잘라주마."
쐐애액.
철두가 도끼를 휘둘렀고, 호위기사 고리온이 앞을 가로막았다.
차앙!
126화 친구와 친구
차앙!
덤벼든 기사의 검술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분명히 수준이 높다.
차차차차창!
이놈도 필시 레벨 4 이상의 경지일 터.
쌍수 도끼를 어지러이 놀리며 다 방어해냈다고 생각했는데 옆구리가 따끔거린다.
"우어어어어!"
전투 함성과 함께 고리온을 몰아붙였다.
하지만 녀석은 분하게도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후후, 꼭 야만인처럼 싸우는군."
그 뒤에 있는 꼬맹이 녀석의 표정도 다르지 않았다.
절대 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모양새였다.
그때 칼리안의 뒤에 서 있던 다른 기사 녀석이 움직이려 했다. 철두는 도끼를 늘어뜨렸다.
'준필이 쪽.'
싸워 이기는 것은 자신 있지만, 지금은 이긴다고 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철두가 한 놈을 감당하는 사이, 준필이가 나머지 하나를 해치울 수 있을까?
'준필이가 위험하다.'
검 한번 맞대보면 당장 목이 달아나거나, 못해도 인질로 잡힌다.
패배다.
'생각해라, 강철두.'
철두는 생각했다.
지금은 몸보다 머리를 써야 할 때.
귓가가 웅웅거리고 입술이 씰룩인다.
미간이 간지럽고, 이마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기분이다.
"우어어어어!"
참을 수 없어 냅다 함성을 질렀다.
시발, 생각은 무슨.
문제 낸 놈을 죽인다.
그리 마음먹는 순간, 다행인지 녀석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쯧, 진짜 야만인인 게냐?"
"내가 야만인처럼 보이나?"
"그럴 리가."
기사 고리온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문신도 없는 야만인이 있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다."
"후후, 바바리안 타투...."
철두에게 있어 그것은 아킬레스건이다.
선조의 혼을 내려받기는커녕, 제대로 전사의 교육도 받지 못했으니까.
그가 익힌 것은 바바리안 명상법 하나다.
철두는 고리온 너머 보르텡을 보았다.
"대화를 원한다. 협상하자."
보르텡의 눈매가 좁아졌다.
얼굴에 걸린 희미한 웃음이 짙어졌다.
누가 보더라도 머리보다 몸을 쓰게 생긴 녀석이 대화를 청하는 건 불리하다는 방증이니까.
하긴, 제깟 녀석이 고리온 경을 넘어설 수는 없지.
"말해라."
"나는 너 따위에게 충성할 마음이 없다."
"당당하게 무례한 놈이군."
"김근수와 부하들을 내놔라."
"요구 조건은 그것인가?"
"그렇다."
"내가 얻을 건?"
보르텡의 말에 철두는 생각과 동시에 대꾸했다.
"줄 건 없다."
"허."
보르텡이 피식 웃었다.
"어이없는 놈이군. 그런 건 협상이 아니라 협박이라 하는 거다."
"...."
철두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젠장, 나의 협상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
"나참, 정말 어이없는 놈이군."
보르텡은 철두를 보며 이죽거렸다.
"좋아. 내가 좋은 협상안을 제안해주지. 네가 나와 봉신 계약을 맺는다면, 저 늙은 녀석을 살려주지."
"시벌놈."
철두는 참지 못하고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역시 되지도 않는 머리를 굴리는 게 아니었다.
"눈치가 빠른 놈이군."
"하하하, 남작은 아무나 하는 줄 아나?"
철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잘하는 걸 해야 한다."
패배 따위를 겁내니까 괜히 될 싸움도 안 되는 거다.
철두는 도끼를 쥔 양손에 힘을 줬다.
축 늘어졌던 두 개의 도끼가 발딱 서며 서슬 퍼런 예기를 발했다.
"크큭, 네놈이 고리온 경에게 될 성싶으냐?"
철두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놈은 문제가 많다."
없애주마.
"뭐?"
파팟!
철두가 대시했다.
고리온의 신형이 그를 막아서며 검을 휘둘렀다.
카앙!
제대로 갑옷도 갖춰 입지 못한 채 두 개의 도끼를 쥔 전사와 전신 갑옷을 입은 기사의 대결이다.
검술 또한 상대가 우위.
장비에서 밀리고, 기교에서 밀리니 그것을 승부 보긴 어렵다.
'오우거 파워!'
마력은 아까 2층 난간으로 점프할 때 쓴 도약 한 번이 끝이다.
충만하게 남은 마력량을 생각하면 거인의 힘의 지속시간은 꽤 여유롭다.
상대보다 우위에 놓인 것은 힘과 저돌성.
촤륵!
철두는 허벅지를 파고드는 검날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고 도끼를 휘둘렀다.
"무슨!"
고리온이 대경실색해 뒤로 물러났다.
이 녀석은 죽음이 두렵지 않나?
녀석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마치 그 대답을 대신하는 것 같다.
"우어어어!"
콰아앙!
도끼 하나가 옆구리에 박히며 우그러졌다. 갑옷이 갈비뼈를 누르며 호흡을 흐트러졌다.
그 잠깐의 틈이면 충분하다.
'미친!'
훅하고 짓쳐들어오는 도끼를 보며 고개를 숙인 고리온이 후속 공격에 대비했다.
녀석은 두 손으로 쥐고 싸워야 할 양날 도끼를 마치 한손도끼처럼 두 개나 들고 싸우는 놈이다.
실로 무식한 힘이자, 주군이 탐낼만한 용력의 전사다.
'떨어져라.'
최선의 방어는 공격!
고리온은 목을 숙여 도끼를 피해내며 상대의 목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목이 꿰뚫려 죽지 않으려면 피할 것이다.
콰직!
'어?'
고리온이 움찔했다.
상대의 굵은 목에 검이 박혔다.
콰직!
그와 동시에 세상이 빙글 돈다.
시야에 들어오는 건 머리가 없는 전신 갑옷과, 도끼를 치켜올린 인간 전사다.
문득 저 인간 전사가 자신이 그토록 많이 사냥했던 야만인들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철두는 숨이 막혔다.
빌어먹을 녀석.
검술 4레벨의 기교는 아직 철두가 이해하기엔 수준이 높다. 틈을 주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기어코 비집고 들어와 목에 틀어박혔다.
촤륵!
맨손으로 검을 잡고 뽑았다.
피가 울컥하고 튀어나왔으나 대충 천으로 감쌌다.
관통상이라 지혈에 오래 걸리겠지만 죽진 않는다. 골렘의 핵인 심장만 무사하다면 모든 것이 재생된다.
그 속도가 빠르진 않지만.
'목소리를 잃었군.'
당장 불편한 건 말이 나오지 않는 것 정도.
철두가 재빨리 천 조각으로 목을 동여매는 사이, 수급이 잘린 고리온의 몸이 철푸덕 쓰러졌다.
콰앙.
갑옷이 무거워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진 고리온의 시체가 빛으로 화해 사라졌다.
츠츠츳.
이 녀석도 시체를 남기지 않는다.
랭커급이란 거군.
녀석이 죽으며 인벤토리에 있었을 아이템이 랜덤하게 하나 떨어졌다. 녀석이 쓰던 검이다.
철두는 그것을 냉큼 집어 들었다.
후우우웅.
좋은 검이다.
영호공방 주인도, 성에 있을 장소철도 흉내 내지 못할 명품 검이다.
역시 제국 놈들이군.
철두가 보르텡을 향해 검을 겨눴다.
"하하하, 고리온 경을 이기다니. 이거 내 예상을 뛰어넘는 놈이군."
철두는 슬쩍 뒤를 보았다.
박준필이 강철 기사에게 잡혀 있었다.
"철두!"
사로잡힌 박준필의 음성엔 조금의 두려움도 없다.
"난 걱정 말게!"
"우어어어!"
박준필을 불렀으나,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피로 인해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죽음을 각오하다니.
세상에 친구는 둘뿐인데 이렇게 하나가 가는가?
강철두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럴 순 없지.'
강철두의 시선이 보르텡에게로 향했다.
둘뿐이던 호위기사 중 하나는 죽고, 하나는 박준필을 잡느라 뒤에 가 있다.
묘하게 웃는 저 얼굴이 얄밉다.
'눈에는 눈.'
저 녀석을 인질로 잡아내 협박하자!
철두가 훌쩍 대시해 보르텡에게 고리온의 검을 휘둘렀다.
카앙!
하지만 검은 상대에게 닿기도 전에 투명한 장벽에 가로막혔다.
즈아아아앙!
"후후후, 내가 수단도 없이 호위기사들을 내보냈을까? 용력에 비해 멍청한 놈이군."
"으어어어!"
말 못 하는 바바리안이 움찔거렸다.
이 녀석을 죽여야 한다.
즈으으으응!
칼에 더 힘을 줘봤으나 방어막은 슬라임처럼 꿈틀거릴 뿐, 깨지지 않았다.
"소용없다 인간 전사. 자, 선택해라. 둘 모두 죽을 것인지, 살 것인지."
"우어어어!"
"아, 말을 못 하지. 좋다."
보르텡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에 따라 방어막이 꿈틀 철두를 밀어냈다.
꼬마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심상찮은 마력을 지닌 놈이다.
남작은 고스톱 쳐서 딴 게 아닌 모양이다.
마법사였다니.
그그긋.
바닥을 디딘 철두의 발이 뒤로 밀려났다.
녀석의 힘이 강한 것인지, 마력 때문에 밀려나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꿇어라. 그러면 둘 모두 살 것이다."
보르텡의 말에 철두는 검을 거두었다.
검술 따위로 깰 방어막의 마력이 아니다.
모든 공격을 퍼부어도, 상대의 마력 고갈보다 자신의 마력이 더 빨리 끊길 것이다.
푸시시시시.
거인의 힘을 해제했다.
차츰 줄어들던 마력이 절반 정도에서 멈춰있었다. 소모에서 증가로 돌아선 마력이 차츰 채워진다.
"오, 결심이 섰나? 어차피 네게 있어 선택지는 나와 봉신 계약을 맺는 것뿐이다."
"...."
철두의 눈알이 이글거렸다.
저 봉신무새를 잡고 싶다.
저놈을 죽이고, 동시에 박준필을 살릴 방법은 정말 없는 것인가?
'생각해라, 강철두!'
힘으로 해낼 수 없는 상대를 만났다.
생각해내야 한다.
지고 싶지 않다.
모든 세포 하나하나까지 동원해라.
모든 힘을 모아 생각하고 짜내라!
정말 방법이 없는가?
'방법이....'
최선을 다해도 친구를 구할 길이 없는가?
어찌하여 나는 아무것도 지켜낼 수 없는가?
그간 죽을 힘을 다해 몸을 단련해왔다.
다시는 잃지 않기 위해, 위대한 전사가 되기 위해 노력해왔다.
강해지는 것만을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어찌하여 세상엔 이리도 괴물이 많은가?
'결국 또....'
이렇게 나 때문에 소중한 이를 잃어야 하는가?
죽이고 싶지 않다.
차라리.
일단은 준필이를 살리자.
'봉신인지 뭔지 해놓고 죽인다.'
철두의 한쪽 무릎이 구부러졌다.
그때, 반쯤 구부러진 무릎이 무언가에 가로막혔다.
척!
'...!'
노움이다.
바닥에 튀어나온 노움이 두 손을 들어 올려 철두의 무릎을 받쳐냈다.
녀석의 눈빛이 애처롭다.
흙흙 우는 땅의 정령의 표정에서 진심 어린 걱정이 느껴진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조심스레 접근하는 바람의 정령이 보인다. 박준필을 사로잡은 강철 기사 바로 뒤다.
그 옆에 나뒹구는 물잔에서 윙크하는 물의 정령도 보인다.
"흐어어."
굳은 피가 막아버린 성대에서 목소리가 형태도 없이 새어 나온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모든 힘을 쓰지 않았다.
손등 위에 일렁이는 불꽃이 느껴진다.
'그래.'
너희의 탓이 아닌 것을.
부모님을 죽인 건.
요정의 축복도,
정령의 존재도,
무엇도 아니다.
나는 약하지 않다.
하지만, 강하지도 않으니.
"...도와…줘."
피딱지를 게워내며 말했다.
"...친구…들."
파파파팟.
사대 정령이 강렬한 빛을 내뿜으며 현신했다. 그들의 의식이 철두의 영혼과 얽히고설키는 것이 느껴졌다.
화르르르륵.
철두의 손등에서 시작된 불길이 번져 검에 깃들었다.
"무, 무슨!"
당황하는 보르텡을 향해 화염검이 쇄도했다.
127화 전리품
화르르륵.
보르텡이 당황했다.
"어, 시발!"
물리댐 한정으로 효율이 좋은 방어막인데, 갑자기 마법댐은 사기 아니냐?
파팟!
화염검은 보호막을 갈라냈다.
"큭!"
재빨리 다시 보호막을 펼쳤으나 녀석의 검은 쉴 새 없이 그것을 잘라냈다.
마력이 숭덩 빠져나가는 게 느껴진다.
'거리를 벌려야....'
지켜줘야 할 호위가 없으면 마법사는 한없이 불리하다. 다음 마법을 전개할 시간을 벌어야 한다.
호위 중 하나는 죽고, 하나는 저기 인질을 제압하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임무상 나가 있고.
"라울 경!"
라울을 급히 불러보며 그쪽을 보았으나, 사정이 나쁘기는 그쪽도 마찬가지다.
"우우욱!"
박준필의 목에 겨눴던 칼은 바람이 잡아채 떼어냈고, 식탁이 무너지며 여기저기 흩어진 물줄기들이 빨려 들어와 갑옷 안으로 들어갔다.
라울은 갑옷 안에서 홀로 힘겨운 싸움 중이었다.
고개를 아무리 털어봐야 가득 찬 물이 호흡을 방해한다.
선 채로 익사할 상황.
그런 와중에 인질이고 나발이고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젠장!"
보르텡이 서둘러 보호막이 아닌 다른 마법을 전개했다. 메모라이즈되어 주문 없이 즉각 발현할 수 있는 마법은 이것뿐이다.
"죽어라!"
파지지지지지직!
보르텡이 쥐고 있던 작은 완드에서 시작된 전격이 철두를 휘감았다.
"으겨겨겨겨겨겨!"
감전으로 인해 몸이 덜덜덜덜 떨린다.
주둥이도 혓바닥도 의지와 다르게 멋대로 움직이며 괴상한 신음을 흘렸다.
"가갸거겨고교!"
치치치치직.
전격마법이 끝났다.
인간 전사. 아니, 정체를 감추고 있던 인간 정령 전사는 잔류전류로 여전히 통통 튀었다.
"아자차카타파으으드드드드!"
"후우, 뒈져라 좀!"
보르텡은 빠르게 주문을 외웠다.
메모라이즈된 마법은 다 썼다.
남은 마력을 총동원해, 녀석을 죽여야 한다.
'무식한 새끼.'
정령사일 줄이야.
용력이 뛰어난 인간 전사인 줄 알고 품으려 했지만, 정령사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무조건 죽여야 한다.
제국의 척살 대상을 품었다간 아무리 귀족이라도 공적이 될 터니.
"으으으으."
머리를 털어내는 철두를 보자 보르텡의 눈동자가 뒤집어졌다.
"미, 미친!"
그 전격을 참아내?
마력의 삼분지 일은 쓴 것 같은데.
투두둑.
철두는 굳어버린 몸을 천천히 움직였다.
가닥가닥 끊어졌던 신경회로가 이어지며 차츰 움직이는 동작이 마치 고장 난 로봇 같았다.
"너, 뒈졌다."
철두는 빠르게 돌아오는 신경세포들과 감각들, 그에 맞게 움직이는 근육들을 느끼며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성대도 돌아왔다.
목에 뚫린 구멍은 막혔고, 피도 멎었다.
챙그랑.
철두는 검을 버리고 거대 도끼를 들었다.
천천히 다가서는 철두의 걸음에 맞춰 보르텡이 한 발 한 발 조심히 물러났다.
"주, 죽어라, 괴물아!"
정령도 막아내지 못할 공격을 퍼부어주지.
츠츠츳.
보르텡의 머리 위로 거대한 얼음 화살이 떠올랐다. 아니, 화살이라 하기엔 크다.
작살 정도의 크기.
아이스볼트가 담기엔 과도한 마력을 집어넣었다.
"끝이다!"
쐐애애액.
얼음 작살이 괴물 정령사를 향해 날아갔다.
쩌저정!
머리를 꿰뚫어야 할 작살은 철두의 눈앞에서 얼음 파편이 되어 흩날렸다.
즈으으응.
"후후."
"어, 어떻게!"
마법은 제 놈만 쓰는 줄 아는가 보군.
고장 난 로봇의 움직임은 부드러워졌고, 보호막을 해제한 철두가 거대 도끼를 들어 올렸다.
"자, 잠깐! 살려줘!"
"억지가 심한 녀석이군."
촤아아악!
거대 도끼가 보르텡의 목을 쳤다.
"후우."
시벌놈.
뒈질 뻔했네.
철두가 뒤돌아서니 요리조리 움직이는 강철 기사가 보였다.
"댄스 타임인가?"
라울이라고 했나?
춤 좀 추는군.
감히 친구를 인질로 잡았던 철기사를 해치우기 위해 다가섰다.
"운디네. 그만해."
스스스스.
운디네가 제어하던 물줄기가 힘을 잃고, 바닥에 축 떨어졌다.
"오줌을 지렸군."
그 모습이 마치 오줌을 지린 것 같아 철두가 이죽거렸다. 하지만 상대는 농담에도 웃지 않았다.
"콜록, 콜록. 칼리안 남작님!"
내팽개친 투구로 인해 녀석의 얼굴이 훤히 드러났는데, 그 표정이 실로 가관이었다.
"네놈, 다음엔 반드시 죽일 것이다."
"어디서?"
곧 죽을 녀석이 마음대로 지껄이는군.
철두가 막 달려들려 할 때였다.
츠츠츠츳.
녀석의 신형이 빛으로 화해 사라졌다.
"뭐야?"
왜 죽었지?
철두가 뒤를 보니 보르텡의 시신도 사라지고 있었다.
츠츳.
다른 것이 있다면 보르텡의 시체는 사라지며 전리품을 남겼고, 라울은 그저 사라지기만 했다는 것이다.
"뭐야."
어떻게 된 건지 알 길이 없다.
죽은 건가, 죽지 않은 건가.
철두는 사라진 보르텡의 시신에서 전리품을 주웠다. 익숙한 반지다.
"인장?"
철두가 그것을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준필이부터 살폈다.
"괜찮나, 준필?"
"나는 괜찮다네! 자네 목은...."
"다 나았다."
철두가 목을 두르고 있던 천 조각을 풀어냈다. 엉겨 붙은 피딱지를 쓱쓱 닦아내니 정말 새살이 올라있었다.
흉터야 남았지만, 상처는 아물었다.
"다행이구만. 다행이야."
"후후, 다행이다."
철두가 준필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거, 협상장에 혼자 올 걸 그랬다.
사륵.
문득 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2층 난간에 널브러져 있던 아르테아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철두를 보고 있다.
"아직 조무래기가 남았군. 준필, 잠깐 숨어 있어라."
철두가 도끼를 들고 그녀에게 접근하려는데, 아르테아는 싸울 생각이 없는지 부러지지 않은 팔을 들어 손바닥을 펴 보였다.
"항복이에요."
"음?"
"당신은... 요정족인가요?"
"날 모욕하다니."
철두의 도끼 대가리가 치켜 올라왔다.
"...당신이 살아남길 바라요."
저 요정은 머리에 문제가 있나?
"승리자는 나다."
"...칼리안 남작은 영지전에서 밀려, 새 땅에서 기회를 잡으려던 최약체 귀족일 뿐이에요."
"음?"
이제 죽었다고, 모시던 영주 욕을 잘도 하는군.
"제국은...."
그때 그녀의 몸이 흐릿해졌다.
"음? 무슨 짓이냐?"
"아아, 시간이 없어요. 저는 보르텡 남작의 영혼에 귀속된 노예.... 주인의 부름에 응해야 해요."
"뭐? 놈은 죽었다."
"...부디 꺾이지 말아 주세요."
"무슨 소리냐?"
"...."
파팟.
아르테아의 신형이 공기중에 녹아들듯 사라져 버렸다.
후우우웅.
철두가 도끼를 여기저기 휘둘러봐도 아무것도 걸리는 게 없다.
"쳇, 이상한 요정이군."
속을 알 수 없는 말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준필. 협상은 끝났다. 어서 근수를 찾아 돌아가자."
"...알겠네."
협상다운 게 없긴 했지만, 어쨌든 일이 마무리되었다.
박준필과 철두는 연회홀을 나섰다.
"거기, 너."
"히익!"
숨어 있던 하녀 하나를 짚어 물었다.
"김근수 어딨냐?"
"벼, 별궁에 있습니다."
"안내해라."
"네에."
철두가 도끼를 쥔 손에 힘을 줬다 뺐다 하며 그 뒤를 따랐다.
한참 가는 와중에 의아해 물었다.
"왜 병사들이 아무도 없지?"
"히익, 그, 그건. 영주님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소리냐?"
"봉신의 의무에 의해 주인이 죽으면 가신도 죽습니다."
"뭐?"
철두가 주변을 둘러봤다.
가장 처음 철두에게 졌던 기사 놈은 물론이고, 성벽 위에 있던 병사들도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모두 영주의 가신이란 소리냐?"
"아, 아닙니다. 기사분들과 시종장 몇 분만 그러합니다."
"그럼 병사들은 왜 안 보이나?"
"그들은 기사들의 가신입니다."
철두가 눈살을 찌푸리다가 박준필을 보았다.
"준필. 하마터면 우리 다단계에 휩쓸릴 뻔했군."
"...비슷하긴 하네. 아까와 같은 상황이 또 온다면 그땐 고민하지 말게. 나는 살 만큼 산 나이야."
"늙음은 친구를 버릴 이유가 되지 못한다."
"철두, 자네 참...."
박준필의 눈가에 눈물이 촉촉해졌다.
오늘 그는 내내 짐이었다.
'최악의 날이군.'
하마터면 친구가 보르텡인지 시벌탱인지 하는 놈에게 종신 계약 당할 뻔했다.
봉신 계약이 이토록 위험한 줄 알았다면 혀를 빼물고 죽어버릴걸.
"후, 일단 얼른 수습부터 하세나."
하녀의 안내에 따라 별궁으로 향했고, 그들은 흠칫 몸이 굳었다.
"이, 이런."
정원에서 그들이 마주한 건 별궁의 정원에 효수된 병사들이다. 군복으로 미뤄보아 모두 신서울의 사람들.
"내려라."
"헛, 네. 네!"
하녀가 부리나케 뛰어가 밧줄을 풀고, 박준필도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시신을 내렸다.
철두는 별궁 안에서 기척을 느끼곤 휘적휘적 걸어가 문을 걷어찼다.
꽈앙
"히익!"
테이블 바닥에서 헛바람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나와라."
"...."
"죽이기 전에 나와라."
"...네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의 병사들이 나왔다. 그 수는 모두 여섯.
"따라와라."
철두가 밖으로 나오니 시신을 내린 박준필이 그 앞에 철푸덕 앉아있었다.
술에 취해 얼굴이 붉은 병사들이 앞다퉈 뛰어가 그 앞에 무릎 꿇었다.
"죽여주십시오!"
"면목이 없습니다. 크윽."
"...."
박준필은 그들을 힐끗 보더니 일어섰다.
"하나가 비는군."
총 책임자인 김근수 대령이 없다.
"가, 갑자기 빛으로 화해 사라지셨습니다."
"...."
"쳇."
박준필이 침묵했고, 철두가 혀를 찼다.
봉신 계약했군.
"준필."
"후, 말하게."
"난 성을 돌아보지."
"알겠네. 여긴 내가 수습하지."
철두는 별궁을 나서 걸었다.
그 뒤로 하녀가 졸졸 따라왔다.
"너는 왜 따라오냐?"
"네에? 하오면... 달리 명하실 게 있습니까?"
"뭐?"
"...이제 영주님이시지 않습니까?"
"내가?"
철두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제국인 하녀는 머리에 문제가 있나?
"나는 네 영주를 죽였다."
"하오니, 새로운 영주님이시지요."
"...?"
복수심은 터럭만큼도 없다.
순수한 복종심에 철두는 의문이 들었다.
"복수하려고 그리 낮추는 거냐?"
자신이 봉신 계약을 하고 칼리안 남작 뒤통수를 까려고 했던 것처럼, 이 하인도 복수를 위해 무릎을 굽히는 건가?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녀는 퍼뜩 무릎을 꿇었다.
"제게 영주님은 여섯 번째 주인이실 뿐이옵니다."
"뭐? 그럼 보르텡은?"
"칼리안 남작은 다섯 번째 주인이셨지요."
"네 번째는?"
"오리앙 자작님으로, 칼리안 남작님에게 패배했습니다."
"으음."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국민 하녀들은 머리에 문제가 있군.
스스로를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너는 전리품이로군."
"맞습니다. 주인님."
조금의 모멸감도 느껴지지 않는 그 대답에 철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람이 전리품 취급을 당하는데도 당연하다는 태도라니.
"사람들을 모아라."
전리품이라면 마땅히 승리자가 취해야지.
"네에, 주인님."
당연한 명령과 하대에, 하녀는 오히려 불안감이 가신 얼굴이었다.
평온해진 것으로 모자라 기쁨마저 내비치니, 사람 마음을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128화 성이 두 개지요
"모두 모였습니다. 영주님."
하녀의 말에 성의 연무장으로 나가보니 모두 30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 큰 성을 관리하는 인원으로는 적어 보여 물으려는데, 하녀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칼리안 남작은 영지전의 패배로 영지를 잃고 이곳 시작의 땅에서 새롭게 재기하기를 바랐습니다."
"시작의 땅?"
"예에. 수호수가 있어 농사도 짓고 새로운 식민백성도 받을 수 있으니, 재기를 노리는 영주들이 많이 선호하는 맵입니다."
"으음."
철두는 턱을 쓰다듬었다.
"너, 이름이 뭐냐?"
"엘리스입니다. 영주님."
깊이 고개를 숙이는 엘리스를 보며 히죽 웃었다.
"네가 하녀들 대표냐?"
"봉신 계약을 맺은 하녀장과 시종장 등이 모조리 죽었으니, 제일 선임은 저입니다."
아까부터 자신 있게 나선다 싶더라니, 짬밥이 제일 높은 녀석 같았다.
"좋아. 엘리스. 이 사람들 중에 대장장이, 농부, 요리사 등 쓸모 있는 녀석을 추려라."
"...!"
철두의 말에 엘리스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왜 가만히 있어?"
"모, 모두를 거두어 주시길 청하나이다. 다들 열심히 영주님을 모실 것입니다."
"너무 많다."
철두의 말은 청천벽력이 되어 하인과 하녀들의 귓가를 때렸다. 그들 모두 무릎을 꿇은 채였는데, 깊이 고개를 숙이며 울부짖었다.
"목숨을 바쳐 모시겠습니다."
"제발 거둬 주십시오."
"제발, 살려주십시오!"
철두는 그들의 간절한 외침에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죽이기라도 한다더냐!"
"거둬 주지 않으시면 모두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도 많은데...."
성에 일하는 사람이 30명을 넘을 이유가 무엇인가? 아이언헤드성의 병력이 채 150명이 되지 않는다.
그 5분의 1 정도 되는 인원을 허드렛일 하라고 거둬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술이 좋고, 일 잘하는 십여 명만 추리려고 하였는데.
"모, 모두 장인은 아니지만 다들 각 분야에서 조수로 있거나, 일을 열심히 배운 자들입니다. 곧 장인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엘리스의 간청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일거리가 없으면 일은 만들면 된다.
"모두 받아주겠다."
"와아! 영주님 만세!"
"감사합니다."
"목숨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후후후."
철두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까 다 먹지도 못한 진수성찬이 아른거렸다. 요리사 녀석이 봉신무새에게 낚여서 같이 죽지만 않았다면 또 맛볼 수 있겠지.
아니, 조수들도 있을 테니 뭐 비슷하게는 만들어내겠지.
"이제 저희를 받아주십시오."
"받아줬잖아?"
"서, 선포를 안 하셨지 않습니까?"
"선포?"
"이, 인장을...."
엘리스의 동공이 흔들렸다.
신임 영주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아 보였다.
"난 이미 인장이 있다."
"...!"
엘리스는 깜짝 놀랐다.
시작의 땅에서 벗어나지 않은 인간이 어째서 벌써 인장이 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 칼리안 남작이 졌겠지만.'
철두는 엘리스의 시선을 대충 받아주며 인벤토리에서 인장 두 개를 꺼냈다.
아이언헤드의 인장을 끼고, 뒤이어 칼리안 남작에게서 받은 인장을 꼈다.
<제국 귀족의 인장을 획득하였습니다.>
<제국 귀족의 인장>
제국의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인장.
제국 귀족의 상징이다. 영토를 획득 시 활성화할 수 있다.
<제국 귀족의 인장과 영주의 인장은 동시에 활성화할 수 없습니다.>
<선택의 갈림길>
당신은 영웅의 길을 걷겠습니까?
제국 귀족의 삶을 살겠습니까?
<제국 귀족/자유 영주>
선택창이 반짝였다.
- 제국 귀족
30일 이내, 황제를 알현해 봉신 계약을 마쳐야 합니다.
영웅의 길 퀘스트가 실패합니다.
다시는 영웅의 길에 도전할 수 없습니다.
전령이 더 이상 영웅이 아닌 당신을 떠납니다.
- 자유 영주
당신은 그 누구에게도 충성하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영토를 다스리며, 살아갈 것입니다.
영웅의 길을 걸으며, 역사에 발자취를 남길 것입니다.
귀족의 삶과 영주의 삶이라.
철두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았다.
"자유 영주로 살겠다."
<제국 귀족의 인장이 파괴됩니다.>
<영주의 인장에 흡수됩니다.>
<명성 점수가 오릅니다.>
<등급이 오릅니다.>
"오."
철두는 개인 상태창을 열어보곤 흡족하게 웃었다. 등급이 변경되었다.
<강철두>
종족 : 바바리안
출신 : 발할라
등급 : 자유 영주
생명 : 78%
마나 : 19%
<보유특성> +
<보유기술> +
<활성화 구슬> +
정착민이던 등급이 자유 영주가 되었다.
"아깝군."
귀족의 인장은 부서져 쓰임이 다했다.
철두는 대충 인벤토리에 쑤셔 넣고는 영주성의 지붕을 보았다.
바람에 나부끼는 칼리안 남작령의 깃발이 아직도 건재하다.
주인을 해치웠으니 이 성도 내 것이다.
퍼억!
철두는 땅을 박차고 훌쩍 뛰어올라 깃대가 꽂힌 꼭대기에 도착했다.
나부끼는 깃발을 뽑아냈다.
<칼리안 남작의 휘장>
제국 귀족의 휘장.
귀족 가문의 일원이 아니면 휘장의 효과를 얻지 못한다.
"이것도 짭이군."
철두는 휘장을 그냥 꺾어 버렸다.
<칼리안 남작성을 점거했습니다.>
<제국 귀족의 본성을 획득했습니다.>
철두는 그와 동시에 머릿속을 파고드는 이질적인 기억들을 받아들였다.
노바의 지식들은 한결같이 이러하다.
원래부터 알았던 것처럼 아무런 어색함 없이 모든 상황이 명쾌해진다.
<철거/본성 선포/성주파견>
철거 - 제국 귀족의 성입니다.
철거 후, 모든 자재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자재는 성의 인벤토리에 귀속됩니다.
영지 점수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필요 주화 - 5,000개.
본성 선포 - 아이언헤드령의 직할령으로 선포합니다. 관리인을 파견할 수 있습니다.
필요 주화 - 100,000개.
성주 파견 - 성주를 임명해, 간접적으로 다스릴 수 있습니다.
필요 주화 - 50,000개.
철두는 잠깐 고민했다.
두 개의 성을 관리할 수 있을까?
'어렵지.'
시작의 땅이라고 했다.
보호수가 수호수로 바뀌고 난 뒤 맵을 보호하는 안개가 사라졌다.
칼리안 남작처럼 외부 세력이 언제 뿅하고 나타날지 모르는데, 두 성을 모두 관리할 여력은 없다.
이동 포탈이 있다 하더라도 인장을 가진 영주만 사용 가능할진대, 바쁘게 오가며 성을 지키느라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다.
"철거한다!"
"허억!"
철두는 성을 철거했다.
주화 5,000개가 사라지며 성이 빛으로 화했다.
파파파파팟!
성을 이루는 돌들이 빠르게 사라지며, 건축 영상을 역재생하는 것처럼 철거가 이뤄졌다.
철두가 훌쩍 뛰어내려 연무장으로 쓰였을 공터에 내려서니, 하인들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라봤다.
"어, 어째서 철거하십니까?"
"여긴 내 집이 아니다."
"허면...."
"너희는 나를 따라 아이언헤드 성으로 간다."
집이 없는 게 아니다.
철두의 확언에 가까운 명에 엘리스가 공손히 읍했다.
"아이언헤드 영주님의 명을 따릅니다."
주인도 집도 없는 게 불안하지, 거주지도 있고 주인도 있는데 불안할 게 없다.
파파팟!
성벽도 영주성도 모조리 사라지고 이내 언덕엔 사람들밖에 남지 않았다.
"...어, 어떻게 된 건가?"
박준필이 다가와 물으니 철두는 어깨를 으쓱했다.
"성을 없앴다."
"허어. 이런 일이...."
박준필이 탄식하곤 손바닥을 쳤다.
"잘했네. 이제 위협은 사라진 게야."
"아니다. 준필. 또 새로운 적이 쳐들어올지도 모를 일이다. 방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으음?"
"칼리안은 귀족 중에서도 패배자에 속한다. 그런 녀석들도 신서울은 아직 감당하기 힘들지. 앞으로 그런 녀석들이 이 비옥한 시작의 땅을 노리고 많이 몰려들 거다."
"...좋지 못한 소식이군."
"저기 구 씨가 오는군."
갑작스럽게 성이 사라지는 변화에 멀리서 주둔하고 있던 구자욱 소령이 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병력을 이끌고 오고 있었다.
박준필은 하인들을 보며 물었다.
"이들은 그 남작의 사람들인가?"
"하인들이다. 이제는 내 사람들이다."
"으음."
박준필은 복잡한 얼굴이었다.
잠깐 생각을 거듭한 그는 조심스레 제안했다.
"이들의 존재는 숨기는 게 좋겠네."
"어째서?"
"사로잡은 외계인의 존재를 알게 되면, 정부가 무슨 요구를 할지는 뻔하네."
"어떤 요구?"
"양도해달라 하겠지."
철두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외계인인 것은 이들이나 철두나 매한가지다.
애당초 철두가 본성을 숨기고 조용히 지내지 않았다면, 그도 어딘가에 납치되어 연구대상이 되었을까?
"난 뺏기지 않을 자신이 있다."
박준필이 이마를 짚었다.
그래서 문제라는 거다.
정부와 철두가 척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준필, 어차피 숨길 수 없다. 아이언헤드 성에 가려면 신서울에서 보급을 해야 한다."
"보급?"
"저들을 데리고 지구 포탈을 넘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
철두가 월드맵을 열었다.
그들이 위치한 C442 지역에서 C614 지역의 아이언헤드 성까지는 꽤 먼 거리가 떨어져 있다.
중간의 검은 공간을 생각하면 적어도 미탐사 지역 3개는 넘어야 한다.
"도중에 겨울 맵이 나온다면 이 차림으론 행군이 불가능하다."
"으음. 그도 그렇군."
박준필도 이리저리 구상해봤으나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하는 수 없구만."
강철두를 대신해 박준필이 보급품을 구매한다 하더라도, 윗선에서 추궁할 게 뻔하다.
"보급품을 대가로 저들에게서 얻은 정보를 공유해줄 수 있겠는가?"
"후후, 준필. 그건 이미 너와 나의 약속이 되어있지 않나?"
"...자네는 정말이지."
별것 아니라는 철두의 뉘앙스에 박준필의 눈시울이 금방 촉촉해졌다.
"늙으면 눈물이 많아진다는 게 정말이군."
"허허, 늙은 친구 그만 놀리시게."
박준필은 오늘 하루 종일 철두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얻었다.
"엘리스."
"네, 주인님."
"말은 탈 줄 아나?"
"하, 하인들이 어찌 말을 타겠습니까."
"없단 소리군. 말부터 길들이러 가야겠어."
아이언헤드성까지 걸어가면 한세월이다.
말을 타고 가더라도 꽤 시일이 걸릴 텐데, 보행자를 데리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 이렇게 하세나."
박준필은 일행을 나눌 것을 제안했다.
"구 소령의 7 공격대의 반을 자네가 데려가게. 말을 길들인 다음, 길을 찾으며 정찰에 먼저 나서주게."
"준필이 너는?"
"책임지고 보급품과 이번 일의 대가를 얻어 오겠네."
"후후, 알겠다. 그럼 합류 지점은...."
철두는 월드맵에서 신서울의 끄트머리를 가리켰다. 한양으로 가기 위한 일직선상의 경계다.
철두의 손가락이 그곳을 향하다가 멀지 않은 곳에 적당한 지역이 있어 그곳에 멈췄다.
"좋아. 여기서 만나지."
"음? 여긴."
"후후, 자네도 아는군."
철두가 씩 웃었다.
129화 개척로
7 공격대의 절반을 나눴다.
구정욱 소령과 대원 포함 10명이 철두와 함께하기로 했고, 나머지 10명은 박준필과 함께, 생존한 사절단의 사람들과 순직한 군인들의 시신을 수습해 신서울로 가기로 했다.
"빠르면 일주일, 늦으면 열흘도 걸릴걸세."
"천천히 갔다 와라. 나도 할 일이 많다."
두 친구는 각자 헤어졌고, 구정욱 소령은 조금 걱정스런 얼굴로 30명의 하인들을 보았다.
"도보로 행군하면 저희도 빠듯할듯합니다."
"그러니 말부터 구해야지. 엘리스."
"네, 영주님."
"탈것 인벤토리 있나?"
"네? 감히 하인들이 어찌...."
"그럼 받으러 가자."
말을 길들이려면 탈것 인벤토리부터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탐험' 퀘스트를 받아야 하고 말이다.
"저는 노바 태생이라 퀘스트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음? 왜?"
"왜라고 물으시면... 본디 그렇습니다."
"허?"
철두는 갸웃했으나,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종말 퀘스트도 그렇고, 모든 퀘스트들이 지구인의 노바 적응과 노바로의 이주를 강제하는 듯한 임무로 주어졌다.
노바에서 태어나 자라온 이에게 퀘스트는 불필요할지도 모른다.
"뭐, 좋아. 펫주머니는 어차피 만들려고 했으니."
할아버지 선물을 위해 펫주머니를 만들어 가려고 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넉넉하게 만들어야겠다.
미개척 맵을 지나야 하는데 도보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펫주머니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연금술사가 없는데 어찌...."
"응? 연금술사?"
연금술사가 있었나?
"네. 그는 봉신 계약을 맺은 가신으로, 칼리안 남작이 죽으며 함께 사라졌습니다."
"허! 연금술사의 항아리에 가지 않아도 가능한 거였군."
다음에 연금술사가 보이면 무조건 주워와야겠다.
"예? 연금술사의 항아리가 있습니까?"
"그래. 준필이랑 만나기로 한 장소도 거기다."
"허! 하면 많은 것을 만들 1@#@!!@#"
"응?"
"!@#!@#!@!@"
"허, 시간이 다 됐군."
소통의 비약의 유지 시간이 끝나버렸다.
철두는 30명의 하인들이 뱉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한참 무어라 떠듬거리던 엘리스도 이내 포기하곤 시무룩해져 입을 닫았다.
하지만 초롱초롱한 눈빛은 포기한 기색이 없었다.
"영주님. 어디를 목적지로 합니까?"
"일단 오우거 잡으러 가자."
"예?"
펫 주머니를 만들려면 재료가 두 개 있어야 한다. 마력이 깃든 포츠네와 가방.
지구의 것이 아닌, 노바의 물건으로 인정받는....
"저것도 되는가?"
철두는 문득 하인들이 가진 주머니나 가방 따위를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노바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다.
저것도 노바의 것이 아닌가?
해보고 안 되면 미믹 동굴로 가서 미믹을 잡으면 될 일이다.
"행군 대열을 잡겠습니다."
"아니다."
철두는 구정욱 소령의 말을 끊고는 인벤토리를 열었다.
철두의 인벤토리는 15칸이다.
절반은 다급한 전투 중에 무기를 바꿔 들기 좋도록 무기고로 쓰고 있고, 나머지 절반은 수납함이다.
비상식량이나 야영 도구, 전리품 상자 등의 여러 수납 상자들이 들었다.
인벤토리 한 칸에 수납 가능한 물건은 오로지 본인이 들어 올릴 수 있는 물건 하나.
집채만 한 바위라도 들 수 있으면 수납이 된다.
쿠쿵!
"헉!"
철두가 꺼낸 마차에 구정욱이 깜짝 놀랐다.
상당히 큰 짐마차다.
더군다나 그 안에는 여러 보급품 상자들이 실려 있다.
"후후, 진태랑 쓰던 보급 마차다."
"허, 이런 걸 넣어 다니십니까?"
"보급품을 내려라."
"넵."
구정욱 소령은 소속도 다르지만, 용병대장이자 영주인 강철두를 상관 모시듯 하는 것에 아무런 거부감도 없었다.
"30명이 다 타기엔 좁군."
"두엇은 대원들 뒤에 태우면 됩니다."
"좋아."
철두는 소나따를 소환해 마차에 묶었다.
덩치 큰 무쇠 얼룩말은 승객이 20명이 넘는데도 마차를 무리 없이 움직이게 했다.
짐칸에 콩나물시루처럼 사람을 태우고도 자리가 없어, 7 공격대 대원들의 뒤에 한 명씩 사람을 태웠다.
"영주님. 경로상 연금술사의 버려진 연구소에 먼저 들러, 야영지를 꾸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오우거 산에 모두가 함께 가는 건 비효율적입니다."
"좋은 생각이다. 일단 그리로 가자."
"넵!"
마차와 열 필의 말은 버려진 연금술사의 연구소로 향했고, 이틀이 걸려 그곳에 도착했다.
"야영지를 꾸린다!"
말이 통하지 않는 30명의 하인들이지만,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 그들은 알아서 제 할 일을 찾아 움직였다.
"#@$@#"
와중에 엘리스가 와서 버려진 연금술사의 연구소를 보며 무어라 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손짓 발짓을 했다.
"무슨 소리냐?"
"!@#"
"뭐야? 욕한 거냐?"
"###"
"아니면 아니지 왜 성질이냐?"
가슴을 두드린 엘리스가 마시는 시늉을 했다.
이윽고 손바닥을 입 앞에 가져다 대고 재잘거리더니 박수를 쳤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알아서 해라."
"!@#!@!"
강철두가 손을 휘젓자 엘리스는 하는 수 없이 꾸벅 인사 후에 물러났다.
"구 소령. 우리 둘이 가자."
"네, 알겠습니다."
포츠네를 채집하는 산에 오우거가 주로 출몰하니, 공격대 대원들을 데리고 가봐야 짐이다.
랭커인 구정욱이야 밥값은 할 테니, 그와 함께 철두는 오우거 산으로 향했다.
야영지에 남은 9명의 대원들은 주변을 정찰하며 몬스터를 사냥하거나, 짐승을 사냥해 식량을 마련했다.
주된 임무는 야영지의 30명의 하인들을 지키는 것이고.
"저 사람들, 뭐 하는 거야?"
"나물이라도 캐나?"
하인들은 알아서 일을 잘했는데, 대다수의 하인들이 주변에 땅을 뒤적이며 뭔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뭘 하는지 물어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딱히 위험지역까지 가지는 않으니 내버려 두었다.
"대장님은 언제 오시려나."
"사나흘은 걸리시겠지."
"단둘이서 오우거 산이라니."
"난 대장님 걱정은 안 되는데, 사또가 더 걱정이군."
"박 중장님?"
"그래. 좀 콩라인 아니냐. 괜히 커버 쳐주다가 또 어디 좌천되시는 거 아니냐?"
"쳇, 고생이란 고생은 다 시키고, 너무하네."
"음, 나도 이참에 전출 신청서 써볼까 한다."
"어디로?"
"어디긴 어디야. 청주지."
"박 중장님 따라가게? 어유, 너 그러다 또 사또놀이 한다."
"뭐 어떠냐? 그것도 나름 재밌지."
"크큭, 그건 그래. 요즘 영 그렇다. 너무 군대 같아."
"병신아. 우리 군인 맞아."
"크크, 그것도 그렇네."
한참 떠들며 대원 둘이 하인들을 경호했다.
*
노바군 1사령부 사령관 중장 박준필은 직속 상관인 노바군 참모총장 임운진에게 모든 보고를 마쳤다.
"이상입니다."
"결국, 그 친구가 배신했군."
"배신이라기보다는 위압에 의한 굴복이겠지요."
"그거나, 그거나."
"...."
결과는 같다.
사절단 대표로 갔던 김근수 대령이 조국을 버렸다. 편지의 내용은 사실이었고, 상대의 전력 또한 만만찮았다.
목적도 밝혀졌다.
"지구인을 주민으로 받으려고 했군."
"맞습니다."
"우리 둘이 떠들 이야기가 아니야. 가서 보고토록 하자고."
"회의는 노바에서 하면 안 되겠습니까?"
"뭐?"
임운진의 얼굴이 굳었다.
높으신 분들보고 오고 가라고 하면 좋아할까?
"지구에 가면 다시 돌아오기까지 5일이 걸립니다. 손해가 큽니다."
더군다나 노바에서 회의하면 이점도 있다.
지구에서 하루 회의할 시간에 노바라면 5일을 회의할 수 있다.
"지금은 효율을 중시해야 합니다. 저는 곧 결과를 가지고 돌아가야 하니까요."
묘하게 바뀐 박준필을 보고 임운진의 눈매가 좁아졌다.
"...자네, 전역 생각이 있나?"
"조국이 더는 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옷을 벗겠지요."
"...."
부정에 가까운 말이지만, 협박처럼 들렸다.
여차하면 옷 벗을 테니, 더 이상 건드리지 말라는 뜻으로 들렸다.
"일단 긴급으로 의견을 전하지."
긴급 전령이 지구로 향했고, 어쩐 일인지 순순히 관련 부처의 사람들이 노바로 들어왔다.
외교부 장관
국방부 장관
NITO 한국 대사
셋이 건너왔고, 곧 모든 정보 공유가 이뤄졌다.
"저들의 목적은 정착이군요."
"사민이라.... 그 방식이 꼭 평화적이진 않았겠군요."
"대등하면 교류하면서 인구 빼가는 거고, 차이가 나면 그냥 노예사냥이었겠지요."
"문제는 앞으로도 저런 세력들이 계속해서 시작의 땅을 노린다는 것 아닙니까?"
"대사, 외국은 어떻습니까? 외계문명과 접촉한 마을이 있습니까?"
"몇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3군데이니, 지금 신서울처럼 아직 비공개 케이스까지 하면 아마 3배수는 될 것 같습니다."
"흐음, 이러면 맵의 공개가 꼭 이점으로 다가오지는 않는구려."
"파주, 청주는 이미 공개되었으니 어쩔 수 없더라도 강릉, 여수, 포항은 그대로 폐쇄해두는 게 낫겠습니다."
"으음, 강릉은 이미 오픈됐습니다."
"허, 언제요?"
"2시간 전에 들어온 소식입니다."
인편으로 보고되는 속도를 감안하면 빠르면 어제, 늦어도 오늘 중 파수꾼 사냥에 성공한 모양이다.
"허허, 이런."
국방부 장관이 낭패한 얼굴이 되었다.
"이거 이래서야 종말이 와도 노바가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주긴 어려운 게 아닙니까?"
노바의 개발과 개척 이유가 그것이다.
지구 종말을 대비한 피난처.
회의장에 잠깐 침묵이 감돌았고, 가장 계급이 낮은 박준필이 끼어들었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말하시오."
"용병대장과 합작으로 신서울과 한양 간의 개척로 개발을 하기로 했습니다. 이에 대한 지원을 청합니다."
"음?"
여태 회의 주제는 과거에 대한 것이었다.
외계문명의 출현 목적과, 그들의 재출현 시 대책과 전력분석 등이 주 내용이었고.
"외계인이든 뭐든 국방이 튼튼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대한민국은 가장 강력한 동맹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라면 노바에 안전한 근거지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박준필은 확신에 가득 차 말했고, 국방부 장관은 불편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국가에서 지원하지 않아도 개척로는 만들어질 텐데, 이렇게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지원을 꼭 해야겠소? 조국의 사정을 생각해줄 수 있는 거 아니오."
"조국? 여기서 조국이 왜 나옵니까?"
"이봐, 강철두도 대한민국 국민이야! 뭘 그리 외국 사람 대하듯 말하나?"
"...그리 낙관적으로 생각하다 뺏길 겁니다."
"뭐? 허. 요즘 것들은 영 애국심이...."
"장관님!"
박준필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국방부 장관의 말이 뚝 끊겼다.
초보 노비스가 감당하기엔 박준필이 내뿜는 박력이 대단했다.
"애국심? 노바에 대한민국이 어디 있습니까?"
"자네!"
"들으십시오!"
"...."
이곳은 힘의 논리가 가장 우선되는 행성.
"20살 갓 성인이 된 대한민국 청년으로 그를 보지 마십시오. 그는 노바 행성에서 200여 명의 사병을 지닌 용병대장이자, 성을 보유한 영주입니다."
"...."
"신서울이 존립을 걱정해야 할 정도의 적이었음에도, 그는 혼자서 해치웠습니다."
누구도 입을 벙긋하지 못했다.
박준필의 기세는 매서웠다.
"주제를 알아야 합니다! 생각을 달리하십시오! 분명 실수하실 겁니다. 강철두가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함부로 할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박준필의 눈빛이 활활 타올랐다.
"그의 마음에 아직 대한민국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강요해선 안 됩니다. 강대국 대하듯, 그가 요구하면 따라야 하고, 베풀면 감사해야 합니다."
"그 무슨!"
"장관님. 그가 미국으로 가면? 일본으로 가면? 그 이전에 외계문명이 다시 출현해 김근수 대령처럼 훌쩍 가버리면, 장관님은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내, 내가 왜 책임져야 하오?"
"그러니 그런 실수 하지 말자는 겁니다."
"...."
"용병대장이 두 마을을 잇는 개척로의 개발에 나섰습니다. 모든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
"그가 나서서 할 때, 우린 좀 업혀 갑시다."
"...."
"아, 물론 대가는 확실히 주고요."
조용한 회의실에서는 누구도 반대의견을 내지 못했다.
130화 전직의 단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