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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 150-160

150화 저승

"나 진짜 억울하다!"

"뭐가?"

"난 살면서 한 번도 여자를 죽여본 적이 없다!"

"그래서?"

"용수 어머닌지 뭔지, 진짜 나 범인 아니다!"

"용수 어머니가 왜 꼭 여자라고 생각하지?"

"어? 시발."

너무 참신한 의견이라 장호철은 순간 대꾸할 말을 잊어버렸다.

"그게 시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후후, 원수를 갚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살아있다니."

철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늘 용수 어머니의 한을 다시 달래겠다."

"아니, 시발. 나 죽은 거 맞아!"

"살아있잖아?"

"여기 있는 게 죽은 거지!"

"나는 살아있는데?"

"너는 시발 입장이 다르고!"

"말이 길군. 어쨌든 다시 죽여주마."

"아니, 시발! 이미 죽었다잖아!"

"덤벼라."

철두가 손을 까딱했고, 장호철은 속사포 욕을 뱉으면서도 감히 덤벼들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때 함께 소환되었던 미니언 전사가 말했다.

"둘이 아는 사이인가?"

"알지."

"좋아. 그쪽. 한산이동 강철주먹. 내가 제안 하나 하지."

"넌 뭐냐?"

"난 구로다 요시히로다. 5년 전 죽었지."

철두의 표정이 팍 일그러졌다.

이놈들 뭐지?

"보니까 이놈과 원수진 것 같은데, 내게 5포인트만 주면 대신 괴롭혀 주겠다."

"아니, 시발. 구로다! 이 개새끼가!"

이제는 둘이 싸우려는 모양새라, 철두는 칼을 들고 저벅저벅 걸어갔다.

"둘 다 뒈질 놈들이 무슨 개소리냐?"

촤아악!

"끄윽!"

"커억!"

<소울포인트 2를 획득합니다.>

단칼에 두 사람이 베어지고 빛으로 화해 사라졌다. 그 모습에 철두가 인상을 찌푸렸다.

"죽은 거야, 산 거야?"

랭커 녀석들 전부 죽으면 빛으로 사라지더니 이런 데로 온 건가?

"보르텡 그 녀석도 살았겠군."

어쩐지 다음에 만나면 운운하더니, 흔한 악당의 퇴장 대사가 아니라 정말로 복수를 다짐하는 소리였나 보다.

<훈련을 계속하시겠습니까?>

"묻지 마라. 계속한다."

파팟.

<미니언을 소환합니다.>

이번에 소환된 건 셋이었다.

"침착하게 갑시다."

"포위합시다."

"가즈아!"

셋은 철두를 상대로 합격술을 단행했으나 별 소용은 없었다.

촥, 촤르륵!

<소울포인트 3을 획득합니다.>

"후후후."

파팟.

이어서 미니언 넷이 소환되었다.

셋은 동양인에 하나는 서양인이다.

"너희도 지구 사람인가?"

철두의 물음에 사내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동향 사람인가 보구려. 요즘 한국은 어떻소?"

"언제 죽었나?"

"7년 전이오."

"별로 바뀐 건 없다."

"그렇구려."

사내의 조금 씁쓸한 얼굴을 보니 문득 궁금해졌다.

"어떻게 죽은 거냐?"

"나라 지키다 죽었지."

"신서울 출신인가?"

"오! 한산이동 강철주먹도 신서울 출신이오? 하긴, 내 다른 놈들에게 듣기론 개척 마을이 많이 생겼다던데."

사내는 한껏 들떴다가 이내 풀죽은 얼굴이 되었다.

"동향 사람 만나 고향 이야기 나누기엔 상황이 고약하구려."

사내가 검을 들어 올렸다.

신서울의 주둔 군인들이 흔하게 차고 다니던 환두대도다. 철두가 괜히 턱을 긁었다.

"흐음."

"괘념치 마시오. 훈련은 모두에게 득이 되니."

"무슨 소리지?"

사내가 처음으로 씨익 웃었다.

"죽어보면 알 게요."

"...."

그 말을 끝으로 네 명의 미니언이 달려들었다.

쇄애애액. 차앙!

미니언으로 소환된 전사들은 모두 죽은 랭커들이다.

4대 스탯 중 어느 하나는 50이 넘어 랭킹에 이름을 올린 자들.

한가락 하는 자들이 제법 합을 맞춰 공격해 들어오니 제법 위협적이었다.

"후후, 좋군."

철두는 히죽 웃었다.

이름이 무한 훈련장이라고 했나?

마음에 드는 곳이다.

카아앙, 콰직!

철두는 검술 훈련도 할 겸 적당히 받아넘겼다. 싸움이 길어지자, 적들의 손발도 더욱더 잘 맞아갔다.

"흐아아압!"

개중 한 놈은 오우거 파워를 가진 듯 스킬까지 써가며 한순간 철두에게 위협적인 공격을 가하기까지 했다.

콰직!

"어우, 깜놀이야."

반사적으로 휘두른 검에 녀석의 심장이 꿰뚫렸다.

"흐흐."

녀석은 죽음의 순간에도 칼을 잡고 버텼고, 곧 다른 이들이 달려들어 철두를 공격했으나.

터엉!

허벅지를 스친 검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갔다.

피부가 베여 피가 나긴 했으나 생채기 수준의 상처다. 나름 일격을 먹였다고 생각했던 상대는 실소를 흘렸다.

"괴물 같은 몸이구려."

"후후."

철두는 검을 힘껏 빼내 심장이 찔린 녀석을 처치하곤 다시 달려드는 다른 녀석들도 처치했다.

마지막으로 홀로 남은 신서울 출신의 미니언을 보며 다가갔다.

"괴물 같은 몸이구려."

한산이동 강철주먹.

생전 한 번도 본 기억이 없는 자다.

자신보다는 후배 노비스일 터.

"한국의 전력이 크게 두터워졌구려."

"너."

철두는 혼자 남은 미니언 앞에 섰다.

"전할 말 같은 건 없나?"

"자주 들러 주시오."

"...? 그게 다냐?"

"그렇소. 할 말은 내 직접 가서 하리라."

"알겠다."

촤악!

철두의 검이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자신의 목을 베는데도 남자는 웃었다.

투둑.

목과 몸이 분리된 남자의 시체는 빛으로 화해 사라졌다.

<소울포인트 4를 획득합니다.>

"다음!"

아직 여력이 충분하다.

철두는 계속해서 훈련을 이어나갔다.

*

작고 초라한 묘지에 빛이 생겨났다.

빛은 곧 실체화하더니 사람이 되었다.

파파팟.

"후우."

죽은 자는 긴 한숨을 뱉었다.

"영 적응이 안 되는군."

몸이 잘게 떨린다.

본능적으로 목덜미를 만져봤다.

죽음이란 건 익숙해질 수 없는 끔찍한 경험이다.

하늘을 본다.

붉은 하늘은 여전히 답답하게 마음을 짓누른다.

들판을 돌아본다.

배회하는 유령들 너머로 그의 것과 같은 묘비가 쭉 이어져 있었다.

"반드시 돌아간다."

이제 방법이 생겼다.

*

아이언헤드 영주의 집무실.

커다란 회의 테이블을 가장 자주 이용하는 건 영주 강철두가 아니라 시종장 김진태다.

그는 세력의 홀로그램 맵을 띄워놓고는 외성벽을 디자인하고 있었다.

"하수도 라인을...."

도시를 계획할 때 두 번 세 번 보수할 필요 없게 모든 걸 기초부터 완벽히 하면 좋겠지만, 자원의 한계가 그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완벽한 도시 건설을 위해 자원이 모두 모이기만을 기다린다면 몇십 년이 지나도 도시는 첫 삽도 못 뜰 터다.

"일단 성벽이 급하지."

자원의 부족에 더해, 공기 압박도 있다.

월식이나 일식은 예기치 않게 찾아오기에, 방어를 위한 외성벽은 빠르게 완성할 필요가 있었다.

공사 기간이 넉넉지 않다.

"너무 큰가?"

임시 퀘스트 창에 필요 자원, 인력, 공사 기간 등이 떠올랐다. 이대로 퀘스트를 확정하기에는 모든게 부족하다.

지금 성의 창고에 있는 석재로도 감당이 안 되는 숫자다.

"높이는 일단 3미터 정도로 하고...."

신서울이 딱 그 정도였다.

높이는 고정하고 하는 수 없이 길이를 줄였다.

예상한 사이즈보다 대거 줄어들었지만, 내부 공간을 오밀조밀하게 잘 쓰면, 수용인구를 제법 늘릴 수 있을 터다.

'아파트를 지어버릴 수도 없고.'

건설 가능한 카테고리에 아파트 같은 건축물은 없다. 가장 큰 수용시설이 병영 정도. 집은 3층 집이 최대다.

'건축 쪽에도 누구 히든 직업 안 뚫리나.'

이미 존재하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도 만들어내 노바의 시스템으로부터 인정받고 등록이 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건축가가 필요한 게 아니라 건축 장인이 필요하다.

현재 아이언헤드 성의 장인은 장소철이 유일.

문제는 그가 대장 외길을 걸어와 건축 쪽으로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차차 나아지겠지."

"뀨, 뀨!"

"응? 왜 그래? 배고파?"

"뀨뀨!"

"어.... 슬라임은 뭘 먹지?"

김진태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허리춤에 달린 주머니에서 말린 고기를 꺼냈다.

"이거 먹니?"

"뀨뀨!"

"거참. 말을 알아듣는 거야, 마는 거야."

김진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꾸이에게 다가갔다.

철두는 맨날 데리고 다니던 얘를 혼자 내버려 두고 어딜 간 거야?

"자, 먹어!"

"꾸에우어아어어!"

"어?"

진태가 말린 고개를 내밀자 꾸이가 입을 쩍 벌렸다. 헌데 그 크기가 좀 크다.

사람 하나를 집어삼켜도 될 정도의 크기.

"아, 아닛! 날 먹으라는 게 아니라!"

김진태가 소리치며 뒷걸음질 치는데, 신비하게 일렁이는 꾸이의 입에서 불쑥 사람이 튀어나왔다.

"어 시발 깜짝이야!"

"후후후."

"미친놈아. 네가 거기서 왜 나와?"

"결투장에 갔다 왔다."

"어? 결투장?

김진태의 눈이 반짝였다.

"그래."

"어땠어?"

"시시했다."

"응?"

철두는 무한결투장에 대해 대강 알려주었다.

"한 놈, 두 놈, 세 놈씩 나오는데, 그것도 열 놈이 마지막이었다. 훈련장이란 놈이 10번이 마지막이라니."

"허, 그래서 그 소울포인트라는 걸 55개 모았다는 거야?"

"맞아. 100개는 있어야 결투 출전이 된다."

철두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가 하고 싶었던 건 장호철 따위의 하수인을 상대로 훈련하는 게 아니라, 같은 영웅의 칭호를 단 자들과의 결투였다.

"내일 또 가면 되는 거 아냐?"

"쳇. 이것 봐라."

철두가 꾸이를 가리켰다.

<결투장 재입장까지 7일 남았습니다.>

<소울포인트 70을 차감해 바로 입장할 수 있습니다.>

"와, 쿨타임 있었네."

"후우, 쉬운 게 없다. 진태."

김진태는 철두의 옆구리를 두드렸다.

"뭘 그렇게 싸우고 싶어서 안달이냐."

"싸워야 강해지지. 난 지금 너무 약하다."

"네가?"

"이 세상엔 강자가 너무 많다."

철두는 자연스럽게 굴단을 떠올렸다.

황금투구와 갑옷을 입고 다니는 공작 굴단.

굴단 시티의 지배자.

만약 그와 적으로 만나면 승부는 어찌 될 것인가?

이제 제 앞가림만 신경 쓸 나이도 진즉 지났다.

철두 하나 잘못되면 밑에 딸린 목숨이 수백이다.

"후우."

"야아, 너무 조급해하지 마라."

"안 되겠군. 사냥이나 좀 다녀와야겠다."

"어어, 그래. 난 이거 정보 정리해서 최 소위한테 넘겨야겠다."

"그렇게 해라."

철두는 영주성을 나서 목수 아저씨를 찾아갔다.

"응?"

목공방 쪽으로 걷다 보니 자연스레 영주성과 가장 가까운 병영의 훈련 소리가 들렸다.

철두는 이끌리듯 병영으로 향했다.

"찔러!"

"하아!"

"뒤로!"

"핫!"

"세 걸음 전진 베기!"

"하압!"

단상에 오른 오준환의 기합에 맞춰 익숙한 얼굴의 고참병들을 조교삼아 훈련하고 있었다.

"부대 차렷!"

오준환이 강철두를 발견하곤 훈련을 중지시켰다.

"충성! 영주님 오셨습니까?"

"그래. 신병들?"

"네, 훈련 참관하시겠습니까?"

부하들 앞이라 그런지 더 깍듯하게 대하는 오준환을 보며 피식 웃었다.

최고 지휘관과 장교들이 모두 군인 출신이라 그런지, 부하들도 전부 군인으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영지병이라 딱히 틀린 말도 아니지만....

아이언헤드령에는 당연하게도 수직적인 조직문화가 자리잡고 있었다.

"됐어. 수고해라."

"넵, 충성."

"충, 써엉!"

신병들의 군기 가득한 경례에 대충 손은 흔들어 주곤 병영을 나섰다.

"다 만들었겠지?"

그리핀 안장은 어차피 처음 만들어 보는 물건이라 몇 번 탑승비행을 해보고, 개선하고를 반복해야 될터다.

"어?"

헌데 목공방으로 향하는 와중에 또 철두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151화 배신자

"히이이이잉!"

"푸드드득."

우렁찬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오! 마구간이 완성되었군!"

보르텡 남작성을 철거하며 그 안의 모든 물자들이 아이언헤드 성의 인벤토리에 귀속되었는데, 그중에는 남작성에 있던 마필도 여럿이었다.

"!@#@!"

"어, 그래. 그래."

견습 마구간지기가 달려와 넙죽 인사하는 걸 대충 받아주고, 철두는 찬찬히 말을 살폈다.

<전투마>

<숙련된 승용마>

<사냥마>

<노쇠한 군마>

<튼튼한 짐말>

저마다 이름이 달랐는데, 유독 철두의 눈길을 끄는 말이 하나 있었다.

윤기 나는 검은 털은 가진 말인데, 발 부분만 하얀 털이 나 있어 묘한 기품을 가진 녀석이었다.

<성질 나쁜 준마>

철두가 다가서자 녀석은 이름답게 뜨거운 콧김을 뿜으며 투레질했다. 잽싸게 몸을 돌려 발길질부터 날리려고 드는데, 철두는 기껍게 웃었다.

"후후후, 마음에 드는군."

[그, 그 말은 아직 훈련되질 않았습니다.]

"뭐라는 거냐?"

[사람은커녕 마구도 얹기 힘든 말입니다.]

"아, 그래그래. 알았다."

대화가 통하지 없으니 마구간지기는 답답해했고, 철두는 대수롭지 않게 그를 물리며 말 위에 훌쩍 뛰어올라 탔다.

"히이이이이킹!"

녀석이 발을 훌쩍 치켜들며 성질부렸으나, 철두는 허벅지에 힘을 줘 녀석의 갈비뼈를 꼭 옥죄었다.

동시에 두꺼운 팔뚝으로 말 목을 감싸고 반대쪽 손바닥으로 머리를 내리눌렀다.

"끼히이이잉!"

"후후, 나의 백 초크가 어떠냐?"

철두의 목 조르기에 말은 눈알이 벌게졌다.

입을 벌려봐야 이빨만 드러난 채 푸르렁거릴 뿐이고, 꼭 조이는 몸통은 점점 숨마저 쉬어지지 않았다.

부러질 것 같은 목 때문에 점점 다리에 힘도 풀려 휘청휘청거렸다.

"그만 항복해라!"

철두의 진심 어린 제의에 말은 얼마 가지 않아 승낙했다.

<주화 5230개로 탈것을 등록하시겠습니까?>

"후후, 좋다! 넌 이제 제네식스다!"

<제네식스>

종 : 천리마

등급 : A-

생명 : 94%

마나 : 100%

체력 : 298%

특성 : 무한 체력, 전투본능

기술 : 질주, 회피기동

"역시."

무쇠 얼룩말보다 두 배 이상 주화가 든다 싶었더니 A-등급이다.

"후후, 역시 세단은 검은색이지."

철두는 제네식스가 마음에 들었다.

얼른 이 녀석을 진태에게 보여주고 싶을 지경.

하지만 녀석이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대, 대단하십니다.]

"후후. 한국말이나 빨리 배워라, 녀석아."

철두는 아직 소년 태를 벗지 못한 마구간지기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마구나 가져와라."

철두의 손짓에 마구간지기가 한쪽에 있던 마구와 고삐를 가져와 제네식스에게 채웠다.

"그럼 수고해라."

"!@#@!"

황송해하는 그를 뒤로하고, 안장을 얹고 고삐가 채워진 제네식스를 끌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후후, 할배가 좋아하겠군."

우람한 검은색의 준마.

제네식스 정도라면 할배한테 뽑아주는 첫 말로 안성맞춤이다.

"할배! 내 왔다!"

말 하나를 끌고 기도원으로 들어오는 철두를 보며 강용철이 피식 웃었다.

"아이고, 이게 누구고? 하도 바빠가 얼굴도 가물가물한 우리 손자 아이가?"

"후후, 새침하게 왜 그래."

"허허허, 고놈 참 누구 손자인지 말본새 여전하이 참 좋구나."

"할배 손자지."

"허허, 우리 손주 젊은데 귀가 먹었나, 이래 욕을 해줘도 얼굴색 하나 안 바뀌니까 힘이 빠질라 카네."

"빙빙 돌리지 말고 평소처럼 해라."

"아이고, 내사 여신님 모시는 몸으로 우애 평소처럼 우리 손자한테 막말을 하겠노? 하하하!"

누가 봐도 억지로 웃는 강용철의 눈빛은 철두를 잡아먹을 듯 이글거렸다.

"이거 받아라."

"뭐고 이게?"

"말이다."

"필요 없다 안 카드나. 내사 어디 갈 일이 있다고?"

"있으면 요긴하게 쓰인다."

"아니, 내사 농사짓고 기도 올리는 게 전분데 어디 돌아다닐 일 자체가 없다."

"농사 좀 쉬어도 안 죽는다."

"이놈의 자슥, 할배 신탁 받은 거 모리나? 내사 진짜 농사 쉬면 죽는다."

"헐, 못된 신이군. 그만 믿어라."

"뭐라카노! 이놈의 새끼가."

강용철이 버럭 소리 질렀다가 마음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여신님이요. 우리 손주가 아직 어려가 세상 물정 몰라가 카는 겁니다. 고깝게 듣지 말아 주이소.'

강용철이 괜히 역정을 내며 손을 내밀었다.

"목걸이나 줘봐라."

"여기."

"허이구, 몸 성히 돌아와가 좋다 캐떠만, 이거 다 써먹어뿠네."

강용철의 착잡한 눈으로 철두를 보았다.

기도를 열 번이나 쓸 정도로 위기에 처했었다는 소리가 아닌가?

"내가 다 쓴 거 아니다. 충전이나 해줘라."

"기다려 보소! 우리 바쁘신 영주님."

강용철은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펜던트를 들고 여신의 기도를 올렸다.

파파파팟.

사용 가능한 기도 횟수가 다시 10개로 차올랐다.

"봐라, 할배 매일 농사 안 짓고 기도 안 올리면 신빨 약해진다. 그카먼 이런 것도 채울라면 몇 날 며칠 걸리는 기다."

"후후, 알겠다. 알겠어. 이거나 가져가라."

철두는 펜던트를 받고는 말을 넘겨주었다.

"내사 이런 선물보다도, 우리 손주 얼굴이나 자주 봤으면 싶네."

"후후, 바쁘다."

"하이고, 어련하시겠습니까 영주니임."

철두는 강용철에게 펫 주머니를 활성화하게 하고는, 제네식스를 양도해주었다.

"거, 주는 거를 안 타고 다닐 수도 없고."

강용철의 입이 씰룩였다.

이따 성 아랫마을 수로 점검하러 갈 때 타야겠다.

사람들이 또 어디서 구했노, 물어보면 하는 수 없이 또 또 주책맞구러 손주 자랑해야겠네.

"하이고, 참내. 이름 꼬라지 하고는."

말을 쓰다듬는 강용철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할배, 내 간다!"

"그래 욕봐라."

철두는 기도원을 나서서 걸으며 저도 모르게 웃었다.

"후후, 기분이 좋군."

맛있는 걸 혼자 먹는 것보다 나눌 때 더 기쁘다는 것을 귀환행 때 배웠다.

선물도 그와 마찬가지라, 할배에게 좋은 말을 건네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어차피 자신은 이제 말보다 더 근사한 탈것이 있으니까.

마침 목공방에 다 왔다.

"아이고, 우리 영주님 오셨소."

목수 할배가 철두를 발견하곤 장난스럽게 웃으며 마중했다.

"안장은?"

"안 그래도 한번 얹어보고 싶었는데, 여 소환 좀 해보소."

목수 할배는 전직의 돌에서 마침 목수가 나왔기에 냉큼 전직한 상태다.

"오식이!"

"끼아아아아!"

길게 포효하는 그리핀이 소환되자 주변 이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철두는 괜히 어깨가 으쓱해지는 기분이었다.

"어디 보자. 이거 가죽쟁이 불러야겠구만."

목수 아저씨는 견습 무두장이로 전직한 동료를 부르더니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며 그리핀 위에 안장을 달아 넣었다.

"후후, 멋지군."

"하, 내사 쪼매 아쉽구만."

시제품이라 아직 몇 번 더 개량해야 한다.

그는 등급이 '장인'이 아니라 '목수'다.

그는 창작해서 물건을 만들어 낼 수는 있지만, 그것을 장소철처럼 시스템의 테두리 안으로 끌어들여 '아이템'으로 인정받게 할 수는 없다.

"그리핀 안장 레시피나 설계도 같은 거 있으면 꼭 갖고 오소. 내 만드는 거는 그래도 기깔나게 만들어줄 테니까."

"난 지금도 마음에 든다."

"허허, 거 말이라도 고맙구만. 그럼 날아보고 부족한 거 있으면 말해주이소."

"후후, 알겠다."

철두는 그리핀의 등에 달린 안장에 올라탔다.

엉덩이가 닿는 부분이야 말안장과 다를 바가 없는데, 그리핀의 덩치가 매우 큰지라 발을 딛고 설 발판도 있어, 제트스키처럼 서서 탈 수도 있었다.

"가자!"

후우웅!

그리핀은 뒷다리로 훌쩍 지면을 박차고 올라 힘찬 날갯짓으로 금방 몸을 띄웠다.

후우우우웅!

몸이 요동치며 솟구치다가 활공으로 하늘을 날자 지면이 휙휙 지나가며 속도감을 선사했다.

"흐흐흐."

이 기분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답답하던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내친김에 백작인지 뭔지 모가지라도 따버릴까?"

가만 생각해보면 보르텡 때와 마찬가지로 대가리인 백작만 쳐버리면 끝이 아닌가?

봉신 계약인지 뭔지로 엮여 있을 터, 가장 정점인 백작만 죽이면 보르텡 때처럼 죄다 사라지는 건 아닐까?

"으음...."

철두의 이마가 잔뜩 찌푸려졌다.

이래서 사람들이 생각을 하는 건가?

"...나는 사실 천재일지도."

백작을 죽이면 모든 게 해결된다.

철두를 태운 그리핀이 북쪽으로 향했다.

*

뉴아 마을.

퍼억!

"끄아아아아!"

"바른대로 고하라!"

"억울하오!"

배신자 포멜 행정관에 대한 재판은 마을 중앙광장에서 이뤄졌다.

마을 주민들의 유흥을 위해서는 아니고, 군사 시설이나 다를 바 없는 마을인지라, 배신자에 대한 본보기의 역할이 컸다.

"어허, 이놈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재판관은 무심한 얼굴로 명했다.

"지져라."

"옛!"

병사들이 벌겋게 달아오른 쇠를 집어 다가오자 포멜이 발작했다.

"히익! 안 돼! 안 돼!"

발버둥 쳐봤으나 커다란 나무에 묶인 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치지지지직.

"끄아아아아아아!"

포멜은 허벅지가 지져지는 것을 두 눈으로 보며 비명을 지르다 기절했다.

"물을 퍼부어라."

촤아악!

"크헙! 흐윽, 흐으으으."

침을 줄줄 흘리며 깨어난 포멜은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이제야 자백할 마음이 드냐?"

"아니라니까! 내가 배신할 이유가 무엇이냐!"

포멜의 항변에도 재판관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헌데 어찌하여 적에게 전략물자들을 내어주었는가?"

"안 내어주면 몰살이었다! 내 기지로 그나마 병력을 보존하고 반이나 되는 물자를 남긴 것이다!"

"고작 애송이 독립영주를 보고 지레 겁먹고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한 것은 왜인가?"

"나 포멜은 백작님을 20년이나 보필해온 행정관이다! 상대는 고작으로 표현할 적이 아니었다! 나의 판단에는 어떠한 사심도 없었다!"

재판관은 포멜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 자리는 포멜의 억울함을 푸는 자리가 아니다.

'그대는 이미 백작님의 눈 밖에 났네.'

포멜에 대한 믿음과 능력이 없었다면 전진기지의 총책임자로 임명해 내려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믿고 맡긴 만큼 백작의 실망은 컸고, 새로운 후임이 이미 이곳으로 오고 있다.

"포멜 행정관. 순순히 인정하고 죄를 고하라."

"죄가 없는데 어찌 고한단 말인가!"

"쯧."

재판관이 고개를 절레 저었다.

독종이다.

스탯도 꽤 출중해 온갖 고문에도 저리 잘 견디고 있으니 더욱이 어렵다.

재판관은 슬쩍 포멜에게 다가와 귓속말했다.

"백작님은 그대와의 봉신을 해제하길 원하시네. 순순히 죄를 고하고 맹세하게. 그러면 추방되는 선에서 끝날 걸세."

"...!"

포멜이 눈을 부릅떴다.

"어, 어찍 백...!"

쫘아아악!

재판관은 포멜의 뺨을 후려치곤 서슬 퍼런 경고를 남겼다.

"말을 삼가고, 유일한 구명줄을 잡아라."

"...."

포멜은 이를 악물었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비릿한 쇠맛이 울컥 넘어왔다.

'어찌 나를 내친단 말인가!'

억울하다.

억울해 미칠 것 같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머리가 빠르게 돌아간다.

'추방하는 선에서 끝내?'

말도 안 되는 소리.

봉신 제의를 내 쪽에서 깨면 백작은 좋다구나 하고 바로 나를 죽이려 들 것이다.

'하지만 이미 눈 밖에 났으니.'

이러나 저러나 살길이 없어 보인다.

그 잔혹하고 포악한 독립영주와 삼자대면이라도 하게 되어, 나의 무죄를 증명한다면 달라질까?

끼아아아!

"...어?"

하늘에서 그리핀이 선회하며 내려왔다.

병사들이 잔뜩 긴장한 채 경계하는데, 제집처럼 내려앉은 그리핀 위에서 덩치 큰 사내가 뛰어내렸다.

"신성한 재판에 웬 놈이냐!"

재판관의 서슬 퍼런 음성에, 기사 라비안이 화들짝 놀라 손가락질했다.

"재판관님! 저놈입니다. 저놈이 아이언헤드 영주입니다!"

철두는 주변을 휘이 둘러보곤 뒷머리를 긁적였다.

소통의 비약을 안 먹어서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다만 익숙한 얼굴도 있었다.

"여어!"

철두가 활짝 웃으며 포멜에게 인사했다.

여기 술친구가 앉아있네.

"...."

재판관이 인상을 팍 쓰고 포멜을 노려봤다.

"아니라며?"

"...."

152화 재판 난입

"@2@!#@:"

철두는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포멜을 보며 다 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구해 달라는 거냐?"

철두가 주변을 휘이 살피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후후, 그렇군."

이놈, 뭔가 싸웠구나.

철두가 재판장 쪽으로 성큼 다가서자 기사 라미안이 소리쳤다.

[저놈을 막아라!]

창을 쥔 병사들이 달려들었고, 철두는 냉큼 검을 뽑아 휘둘렀다.

촤아아악!

일곱 번의 칼질에 일곱의 목숨이 사그라졌다.

'이제는 칼이 더 손에 익군.'

미니언과의 결투는 정말 훈련이 되었다.

하나하나가 랭커가 죽어 부활한 이들이기에, 실력으로 치면 저기서 경악한 얼굴로 바라보는 기사 라미안 급이었다.

그런 자들과 마지막엔 10:1로 겨뤘으니, 검술이 발전하는 건 당연했다.

아직 레벨 4는 요원해 보였지만, 전보다 더 군더더기 없고 깔끔해졌다. 극한의 실용적인 검술이 몸에 배고 있다.

[마, 막아! 막으라고!]

기사 라미안이 발작적으로 소리쳤으나 병사들은 우물쭈물할 뿐 더 나서는 자가 없었다.

철두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창을 쥔 병사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텄다.

[이익! 멈춰라!]

라미안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으나, 그의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동료 기사 용크가 녀석의 투척 도끼에 비명횡사한 것이 어제다.

괴물.

도대체 저런 괴물이 어디서 나타났다는 말인가?

"짖지 말고 덤벼라."

[이노옴!]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도 소통은 가능하다.

어차피 서로의 얼굴을 살펴봐야 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싸움뿐이란 걸 서로 알고 있다.

채앵, 차앙!

철두는 분기탱천해 달려드는 라미안의 검격을 두 번 막아내곤 세 번째에 녀석의 목을 베었다.

촤아아악!

피가 뿜어지며 쓰러진 녀석은 허물어지며 빛으로 화해 사라졌다. 덩그러니 남겨진 것은 녀석의 인벤토리에 들어 있던 랜덤한 물건 한 가지.

"음? 또 검이군."

기사 놈들, 좀 개성 있게 보물도 들고 다니고 하지. 인벤토리에 여분의 검을 넣는 게 상식인지 전통인지, 전리품으로 남기는 게 죄다 검이다.

철두는 검을 빼 들어 살펴보곤 대충 인벤토리에 넣었다. 자신이 들고 있는 것보다는 못한 검이다.

"멈추어라!"

"오!"

철두는 해석되어 들리는 말에 재단 위를 보았다.

굴단시티에서 본 적 있는 모자를 쓴 자.

재판을 관장하는 녀석들이던가?

소통의 비약을 먹은 재판관이 소리쳤다.

"그대가 아이언헤드 영주인가?"

"그렇다."

"신성한 재판 중이다! 증인으로 참석한 게 아니라면 물러가라!"

"재밌는 놈이네."

철두는 히죽 웃었다.

어차피 볼 장 다 본 사이인데 물러가라 마라 하는 게 웃겼다. 제국 놈들 머리에는 대체 어떤 게 들었길래 저리 오만할까?

혹시 자신감의 원천이 저 뒤에 시립한 두 명의 기사인가? 확실히 여태 상대했던 자들과는 그 수준이 높아 보인다.

특히 한 놈은 그 풍기는 아우라만 보면 보르텡의 호위기사 수준이다.

저놈도 검술 레벨 4의 괴물일까?

싸워보고 싶다.

"어어! 신성한 재판이다! 외부인이 끼어들 곳이 아니다!"

"후후,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멍청한 소리를 뱉을 수 있는가?"

철두를 아예 관계자 외 취급하고 있다.

철두가 한 발 더 나아가 단으로 오르려 하자 재판관이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한 발짝만 더 다가오면 선전포고로 받아들이겠다!"

철두는 그 말에 더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와하하하하하!"

이건 호랑이가 집에 쳐들어왔는데도 집안 싸움을 하고 있는 꼴이 아닌가? 아니, 애초에 호랑이가 아니라 토끼 정도로 봤으니 저리 안중에도 없는 거다.

그럼 보여 줘야지.

철두가 단 위에 올라서자 호위기사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왔다.

쐐애액, 창!

철두는 검을 비껴 흘리며 그대로 주먹을 내질렀다.

콰직!

"끄흡."

갑옷째 우그러지는 대미지에 울컥 피를 토하면서도 기사는 끝내 반격을 가했다.

챙!

철두는 녀석이 내지른 최후의 일격을 막아내곤, 그대로 검을 내질렀다. 검 끝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정확히 상대 기사의 투구 사이를 노려 들어갔다.

푸숙!

"...."

몸을 부르르 떨며 절명한 기사를 뒤로하고 한 발 더 내디뎌 완전히 재단 위로 올라섰다.

"미, 미친! 제국의 재판관을 살해하다니! 네놈은 정말 제국을 적으로 돌릴 생각이냐!"

철두가 히죽 웃었다.

"내 땅을 넘봐놓고 이제 와 묻다니."

미친놈들.

이미 적이지 않은가?

"미쳤어! 네놈은 미쳤군. 감히 제국을 향해 칼을 들이대다니."

더 들을 것도 없다.

이 정도로 무시당해본 적이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철두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모조리 사라졌다.

쐐애애액. 캐앵!

철두가 내지른 검이 재판관의 목에 닿기 전에, 가만히 시립해 있던 기사가 나섰다.

"기사 헤인트다."

"덤벼라. 제국의 졸개."

"교양이 없군."

"넌 실력이 없나?"

"건방진!"

헤인트는 혀를 차며 공격해 들어왔다.

차차차차창!

순식간에 검격이 서로를 노리고, 막아내기를 반복했다. 잠깐 사이 열 합이 넘는 공방이 있었다.

제법 괜찮은 검술을 가진 자다.

레벨 4의 경지겠지.

좀 더 검을 나누며 상대의 기술을 훔쳐 배우고 싶은 마음도 있긴 했으나, 별로 아쉬울 건 없었다.

앞으로 이런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쇄애애액, 카앙!

다시 두 번의 검이 마주쳤고, 철두는 상대의 세 번째 검격을 막아내는 대신 동귀어진의 수를 던졌다.

헤인트의 검이 목을 향해 찔러오고 있다.

철두는 심장만 멀쩡하다면 상처 따위야 즉시 회복이 가능하다. 그리고 치명상을 낼 공격을 경상 정도로 경감시켜줄 깜짝 조커도 있다.

스르륵.

바람의 정령이 온 힘을 다해 헤인트의 검을 밀었고, 목젖을 향하던 검은 경로가 비틀려 철두의 목덜미를 얕게 스치며 나아갔다.

스컥!

철두의 검은 기사 헤인트의 겨드랑이에 틀어박혔다. 플레이트 메일의 관절 이음새 아주 작은 틈이었다.

"끄업!"

고통을 참으며 다시 검격을 내지르려 했으나 그의 눈에 보이는 건 새빨간 불이 전부였다.

화르르륵.

두 눈에 불길이 확 타올랐다.

투구 안이 후끈거린다.

"으아악!"

마법사였나?

갑자기 이게 무슨!

콰직!

하지만 더 생각을 잇기도 전에 목에서 둔탁한 고통이 전해짐과 동시에 의식이 흐려졌다.

투웅.

철판 갑옷을 입은 기사가 쓰러졌다.

철두는 기사를 마무리한 양손 도끼를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파팟.

그러곤 재판관을 보았다.

당황과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

믿기 어려운 걸 보았다는 듯 굳은 표정.

믿었던 진리가 무너진 자의 얼굴.

"그래, 그 얼굴이지."

철두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다가서자 재판관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후회할 거다! 지금 이곳의 후임 사령관으로 기사 지르골이 파견되었다! 지르골이 오면 네놈은 절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후후후, 웃기는 녀석이군."

거 봐라.

이놈들 병력을 출전시켜놓고는 더 다가오면 전쟁이니 뭐니 떠들어댔던 것 아닌가?

제국 놈들의 상식이란 그런 모양이다.

누구든 침략할 수 있지만, 누구도 저를 침략하진 못한다는 건가?

내로남불도 적당히 해야지.

"누군가를 때릴 땐, 맞을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야지."

이건 5살짜리 바바리안도 알고 있는 상식이다.

촤아아악!

철두의 검이 재판관의 목을 쳤다.

"허억!"

병사들이 저마다 화들짝 놀랐지만 누구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이 자리에 있는 기사는 모조리 죽었다.

철두는 의자에 묶인 포멜에게 다가가 재갈을 뜯어 주었다.

"어이."

[!@#!@]

"아, 그렇지."

철두는 주머니에서 소통의 비약 하나를 먹고는 물었다.

"이봐, 술친구."

"내, 내가 어찌 그쪽 친구요?"

"허, 이래서 술 먹고 한 말은 믿으면 안 돼."

"...."

"나트롱 백작은 얼마나 강하지?"

"...? 무슨 소리요."

포멜은 불길함을 느꼈다.

"얼마나 강하냐고. 아까 저 기사보다 강한가?"

"그, 그럴 리가. 그분은 기사가 아니오."

"그럼 마법사?"

"그것도 아니오."

"그럼 뭐냐?"

"뭐냐니.... 그냥 귀족이오."

"음? 그게 다야?"

"그, 그렇소."

"그럼 쉽네. 몰래 들어가서 그놈만 죽이면 되겠다."

"그, 그게 무슨 말이오! 백작 암살이라니!"

"후후, 나도 알 건 다 안다. 그놈만 죽이면 전쟁이 끝이 아닌가?"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요!"

"음? 봉신인지 뭐시기로 엮인 놈들이 죄다 죽을 것 아니냐?"

"...그대는 봉신 계약을 뭐로 아는 거요?"

"대가리 죽이면 줄줄이 부하들 죽는 거 아니냐?"

"...."

포멜은 황당함에 입을 쩍 벌렸다.

"봉신은 주군과 신하의 상호계약이오. 봉신 계약 때 서로 맹세의 내용이 그러하다면, 죽을 수도 있겠지."

목숨을 담보로 한 충성서약은 서로 신뢰 관계가 대단할 때나, 엄청난 약점이라도 잡혔을 때나 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봉신 계약의 형태는 아니다.

"내 장담컨대 그대가 백작을 죽인다 해도 봉신한 자들 중에 함께 죽는 이는 다섯 손가락을 넘지 않을 것이오."

철두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백작성에 몰래 잠입해 들어가 녀석을 해치우고 나올 수야 있을 것 같은데. 리스크 대비 효과가 미미하다.

"또한, 백작은 상위 귀족이나 황제와 봉신 계약을 맺은 바. 백작의 죽음은 다른 귀족이나 제국의 참전 명분만 전해줄 뿐이오!"

"그건 곤란하지."

나트롱 백작이야 이미 근처에서 투닥거리니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미친놈도 아니고 제국 전체를 상대로 당장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흐음. 곤란하군."

"정전! 정전협정을 맺으시오! 아니, 그것도 어렵소."

"음? 왜?"

"지, 지르골. 지르골 장군이 오고 있소. 그가 진군하는 길에 남는 건 피와 시체뿐이오."

"음...."

"어, 어서 도망쳐야 하오."

철두가 피식 웃었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여긴 내 땅이다."

"지, 지르골의 부대는 차원이 다르오! 납작 엎드려 항복을 빌든가, 지금이라도 서둘러 도망쳐야 하오!"

"일없다."

철두가 손을 내젓고는 그리핀을 소환했다.

"후후, 어쨌든 다음에 보자고, 술친구."

"아닛, 이대로 가버리면!"

순식간에 멀어지는 그를 보며 포멜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재판관과 그의 호위기사 둘이 죽어버렸다.

그리고 본디 이 마을에 주둔하던 기사 라비안과 병사들도 추가로 더 죽어버렸다.

남은 것은 병사 300명 정도와 아직 도망치지 않고 남은 주민들 1500여 명 정도.

'생각해라. 생각해라. 포멜.'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주변을 둘러보니, 병사들은 이미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이다. 저들을 이용해야 한다.

"하하하하하하!"

포멜이 대뜸 대소를 터트렸다.

"어찌 웃으시오?"

"너희들도 이제 나와 처지가 같으니 저승길 외롭지는 않겠구나."

"그, 그게 무슨 말이오?"

"재판관이 나를 모질게 고문하여 얻으려 한 자백이 무엇이냐? 내가 무슨 죄를 지었더냐?"

"적과 협조하지 않았소?"

"그래. 저 잔혹한 놈이 대뜸 쳐들어왔을 때 바짝 고개를 숙이고 협조한 게 전부이지. 바로 네놈들처럼 말이다."

명령대로 철두에게 달려들기는커녕, 길을 비켜주기 바빴던 병사들이 바들바들 떨었다.

개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자들도 있었다.

"지, 지르골 장군이 우릴 모두 죽일 거야."

"으어어어, 큰일이야! 큰일!"

수뇌부가 모조리 죽어버려 가장 계급이 높은 자라고 해봐야 십부장들 몇 정도다.

"포, 포멜 행정관! 살길을 일러 주시오!"

"그럼 이 줄부터 풀어라!"

병사들이 다가와 서둘러 포멜을 구원하자 그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각오했다.

'백작. 봉신 계약을 먼저 저버린 것은 그대요.'

포멜은 병사들을 보며 서둘러 명했다.

"병력과 마을 주민들을 모조리 불러 모아라!"

포멜은 살기 위해 큰 결심을 했다.

153화 전쟁 준비

후우우웅!

아이언헤드 영주성 꼭대기에 그리핀이 내려앉았다.

"헛, 충성! 영주님 오셨습니까?"

"후후, 종을 쳐라!"

철두는 옥상 망루에서 경계 서던 병사들의 경례를 대충 받고는 명했다.

"예?"

"전쟁이다. 종을 울려라!"

"허업! 넵!"

병사들이 망루 가운데 달린 종을 쳤다.

때애애앵! 때애애앵!

영지의 비상상황을 알리는 종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영주성 꼭대기로 향했다.

난간에 올라선 철두가 뱃심을 끌어모아 우렁찬 함성을 뱉었다.

"전쟁이다!"

엄청난 함성이 널리 뻗어 나갔다.

병영에서 훈련 중이던 신병들도 들었고, 기도원에서 마당 쓸던 할배도 들었다.

"전쟁? 다들 무기 챙겨!"

"하이고, 여신님. 비나이다."

대장간 장 씨도 들었고, 1층 식당에서 밥 먹던 진태도 들었다.

"음? 이거 다시 달궈라. 영주성에 다녀오마."

"뭐, 뭐야?"

저 멀리 성 아랫마을에 농사짓던 사람들도 들었고, 숲으로 향하던 약초꾼들도 들었다.

"전쟁? 하이고, 뭔 일이래?"

"허, 시발. 빨리 마을로 돌아가자."

아이언헤드령이 쩌렁쩌렁 울렸고, 철두는 부리나케 영주성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을 보며 미소지었다.

"후후후."

나트롱 백작 녀석.

전쟁을 위해 사령관 지르골인지 뭔지를 파견해?

"나도 부하 많다."

철두가 흡족하게 웃으며 아래층 영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뭐, 뭔데? 전쟁이라니!"

"영주님! 어딥니까?"

"충성, 유격대 현재 복귀 명령 내려졌습니다."

철두는 호들갑 떠는 부하들을 보며 말했다.

"나트롱 백작과 전쟁이다."

"갑지기?"

진태가 놀랐고, 오준환은 굳은 얼굴이었으나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다.

"약탈 때부터 이미 예견된 전쟁이었습니다."

"그, 그치만 이렇게 갑자기 전면전으로 번지나요?"

본디 국경을 맞댄 국가 간에 분쟁이 없을 수는 없다. 국지전이야 당연하게 벌어지는 일이고, 그에 따른 피해에 서로 책임을 묻기도 한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게 외교이건만, 어찌하여 약탈품 조금 훔쳤다고 전면전으로 번진다는 말인가?

"후후, 진태. 내가 그놈들 재판관을 죽였다."

"어? 재판관이 뭔데?"

"판사 같은 놈이다. 영주를 대리하는 놈이지."

"...!"

김진태의 입이 쩍 벌어졌다.

"맙소사! 언제?"

"방금 죽이고 오는 길이다. 놈이 죽기 전에 얘기하던데, 지르골이란 놈을 사령관으로 병력이 몰려오고 있다더라."

"맙소사."

김진태는 기함했다.

이 미친놈의 친구는 그 잠깐 사이 어디 드라이브 삼아 비행이나 다녀온 줄 알았더니, 분쟁 마을에 가서 홀랑 적 영주의 대리인을 죽이고 와버렸다.

"진태! 전쟁 명분은 확실하다!"

"미친놈아! 당당하게 이야기하지 마."

그 전쟁 명분을 만든 당사자의 표정을 보니 괜히 울화가 치밀지 않을 수 없었다.

"후후, 어차피 그전부터 원군이 오고 있었다."

철두의 말에 진태는 무어라 더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벌써 오준환을 위시한 기용수, 이은영 등등 영지군의 인물들과 장소철이나 강용철 등의 영지 사람들도 모여든 참이다.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 영주에게 대거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준환! 출진 가능한 병력이 얼마냐?"

"기동력을 갖춘 병력은 80입니다."

수호의 나무에 가서 탐험 퀘스트를 받고, 외곽지에 가서 말을 길들여온 숫자가 그 정도다.

"적군."

"죄송합니다."

"됐다. 다 준비시켜라."

어차피 전군이 출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수비병력도 있어야 하니, 말이 없는 보병들은 전부 수비로 돌린다.

그때 계단이 소란스럽더니 최준섭이 부리나케 올라왔다. 이미 오는 사이에 전령에게 이야기를 들었던지라 표정이 자못 비장했다.

"신 유격대장 최준섭!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후후, 출진이다."

"명을 받듭니다!"

일사천리로 이뤄지는 전쟁 준비에 진태는 아찔한 기분이었지만, 자신의 본분을 잊지는 않았다.

"보급대 꾸릴게. 성 수비는 걱정 마. 마을 사람들 전부 불러들일 거야."

어차피 야생의 노바다.

전시에는 민관의 구분이 무의미하다.

어차피 패전하면 영지군이든 민간인이든 그 운명을 함께하니까.

"좋아! 모두 준비해라. 오준환! 얼마나 걸리나?"

"1시간만 주십시오!"

"절반 주지."

"네, 알겠습니다!"

오준환이 부리나케 뛰어나갔다.

어차피 신병들이 대부분인 영지군이지만, 몬스터 사냥을 위한 원정 준비는 숱하게 해보았다.

이번엔 그 대상이 몬스터가 아니라 제국군일 뿐이다.

영지군이 출진 준비에 분주하게 움직였고, 성 아랫마을 사람들은 혹시 몰라 영주성으로 대거 들어왔다.

"성벽 공사를 서둘렀어야 했는데."

아직 외성벽 공사를 위한 삽도 뜨지 못했다.

하지만, 성벽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 넓은 면적을 방호할 수비군도 없다.

역시 최선은 철두가 나가서 적을 요격하는 것.

"수비대장님. 보급대 맡아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수비대장 겸 궁술교관 기용수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출진하는 영지군과 수비군 사이에 오갈 전령들의 암구호도 빨리 확정하고, 급하게 출진하느라 모자란 물자는 또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장 장인님. 전쟁 물자부터 찍읍시다."

"예에!"

시간이 촉박해 아직 영지군의 공식 무기도 정하지 못했다. 지금 출진하는 영지군들은 평소 개개인이 쓰던 제각각의 무기들을 들고 출진한다.

무기야 어떻든 간에 화살도 수량이 충분치 않았기에 대장간은 서둘러 화살촉의 제작부터 들어갔다.

김진태는 홀로그램 세력 맵을 띄웠다.

성으로 몰려오는 사람들을 보며 영지령 전체에 퀘스트를 발생시켰다.

<전쟁발발>

나트롱 백작과의 전쟁이 발발.

훈련과 부역, 징발에 적극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즉시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들고 성으로 집결하시기 바랍니다.

수락 – 보상 미정

거절 - 아이언헤드령에서 추방

김진태의 퀘스트를 보고 신서울에서부터 따라온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수락을 눌렀다.

"히야, 이런 것도 퀘스트로 뜨네그려."

"사또가 봤으면 눈 뒤집어졌겠구만그려."

김진태는 퀘스트를 활용해 성의 행정력의 효율을 극한까지 쥐어 짜낼 줄 아는 자다.

시스템 창으로 이뤄지는 거래 관계는 일일이 행정관이나 군인이 파견되어 징발한 전쟁 물자를 기입하는 등의 번거로움이 없다.

"이런, 불안한데? 우리 한양으로 도망가자."

"거기는 지금 물자 씨가 말랐어. 여기가 훨씬 풍족한데 가긴 어딜 가?"

"병신아, 뒈지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들어보니까 백작이래. 제국 백작이라는데.... 솔까 이거 느낌이 안 좋아."

마을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노비스들이 불안해하며 이탈하려 하자, 신서울에서부터 따라온 고인물들이 점잖게 조언했다.

"클클, 노바 천지에 지금 영주님 그늘보다 더 안전한 데는 없소."

"그려, 괜히 여기저기 떠돌지 말고 그냥 여기 말뚝 박으소. 아, 지금 내뺐다가 나중에 또 어떻게 돌아오려고 그려?"

"그, 그치만...."

"야, 가자. 얼른."

그들의 충고에도 몇몇은 성을 이탈했다.

김진태의 세력창에는 퀘스트를 거절하고 이탈하는 무리의 이름이 차곡차곡 기재되어 목록화되었다.

성 아랫마을 주민들은 영지 안으로 들어왔고, 출진 준비 중인 군인들은 성문 밖 공터에 도열했다.

총대장 오준환 휘하의 영지군 80명.

유격대장 최준섭 휘하의 50명.

친위대 이은영 1인.

영주 강철두 1인.

132인의 선두에 선 철두는 무쇠 얼룩말 소나따 위에 올라타서 짧게 출진을 명했다.

"가자! 출진이다!"

"우어어어어어!"

영지병들이 기세 좋게 말을 몰아 달려나갔다.

보통 보병의 하루 행군 거리는 20킬로미터.

기병의 하루 거리는 40킬로미터 정도.

하지만 노바는 도로가 없는 곳이 많고, 있더라도 길이 엉망인 경우가 많다. 또한 복병으로 등장하는 몬스터 무리도 많기에 개활지가 아니라면 저 속도가 나지 않는다.

노바에서 보통으로 생각하는 하루 이동 거리는 8킬로미터 전후, 기병은 25킬로미터 정도다.

두두두두두!

"저녁은 뉴아 마을에서 먹는다!"

"우오오오!"

아이언헤드 성에서 뉴아 마을까지는 개활지다.

거기에 출몰하는 몬스터도 그저 그런 종류의 소형종뿐이라, 기병의 질주에 거칠 게 없다.

빠르게 달려 해가 지기 전까지는 도착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해가 저물었고, 달빛에 의존해 기병의 행군속도가 조금 늦춰졌다.

최준섭과 오준환이 선두에서 말을 달리는 철두의 곁으로 다가왔다.

"대장!"

"준섭이."

"작전이 어떻게 됩니까?"

"뉴아 마을에서 저녁을 먹는다."

"그리고요?"

"푹 자고, 기다렸다가 적이 오면 죽인다."

"...."

최준섭이 힐끗 오준환을 보았고, 서로 뜻이 통했는지 시선이 맞았다.

'우리가 짜자.'

'돌격뿐이셔. 우리가 세부 작전안 올리자.'

눈빛만으로 뜻이 통한 두 사람이다.

"좋은 계획입니다. 세부 작전은 제가 조정해도 되겠습니까?"

"영지군의 통솔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닥치고 돌격하라고 할까 봐 조마조마한 오준환의 청에 철두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라."

오준환은 쾌재를 불렀다.

"영주님은 그리핀이 있으니 차라리 정찰에 나서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으음, 일리 있군."

"마을에 도착하면 전투 후, 적의 지원군이 어디까지 왔는지 정도만 정찰해 주시지요."

"좋아. 그렇게 하지."

철두의 순순한 허락에 오준환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 눈앞의 전투.

뉴아 마을의 점령만 무사히 끝내면 일단 한시름 덜어 놓는다.

오준환은 최준섭의 옆으로 붙으며 조용히 작전회의를 가졌다.

"최 대장. 어쩔 껴?"

"뭘 어째?"

"뉴아 마을 말야. 가봤잖아."

"별거 없어. 목책이 조금 성가시긴 한데."

"그래도 공성은 무리야. 사상자가 많이 나올 게 뻔해."

전쟁에 아군의 희생이 없을 수야 있겠냐만, 최대한 그 수를 줄이는 게 지휘관의 역할이다.

이왕이면 완벽한 승리를 위해.

"영주님 돌격하면 따라 들어가."

"유격대는?"

"우린 개별 조로 나눠서 패잔병들 소탕."

전투력과 작전 수행능력만 놓고 보면 아이언헤드에서 유격대가 가장 정예하다. 애초에 산채 출신의 고인물들이 그 구성원이기에 기본 전투력이 월등하다.

거기에 더해 그간 익힌 기병 전술로, 다섯 정도로 조를 나눠 사방을 수색, 탐사, 추격하는 데 이골이 난 그들이다.

그에 반해 영지군은 절반은 신병이나 다름없으니, 뭉쳐서 오준환의 지휘를 받는 게 혼란이 덜할 터.

"그렇게 하자고."

"좋아. 다 왔네. 저기 강 넘으면 바로야."

아이언헤드의 병사들이 말에 탄 채 그대로 얕은 강물을 건넜다.

두두두두.

"후후후, 따라와라."

철두는 뉴아 마을의 목책 문을 향해 냅다 달려들었고, 오준환과 80명의 영지병들이 뒤따랐다.

"돌격!"

"돌겨어어억!"

"영주님을 따라라!"

선봉에서 달린 철두가 숄더 차징으로 목책 문을 넘어뜨렸다.

꽈아아앙!

뒤이어 영지병들이 뉴아 마을에 들이닥쳤으나.

"음? 왜 이리 조용해?"

"뭐야? 다들 어디 간 거야?"

뉴아 마을에는 쥐새끼 하나 보이지 않았다.

154화 사령관 지르골

나트롱 백작궁.

한때 제국 사교계에서도 잘 나가던 나트롱 백작의 잘생긴 얼굴도 세월을 이기지는 못했다.

"으음."

거울을 보며 멋들어진 수염을 쓰다듬다가 흠칫 놀랐다.

"또, 또."

흰 수염이 났다.

망할.

벌써 흰 수염이라니.

아직 머리는 새까만데.

흰 수염 한 가닥을 뽑아낸 그가 빗으로 수염을 빗었다.

"각하."

머리가 새하얀 시종장이 조용히 다가와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래, 파티 준비는?"

"파티는 차질없이 준비하고 있사옵니다."

"흐음, 그래."

나트롱 백작의 입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젊었을 적엔 사교계 죽돌이였고, 중년에 접어든 요즘 그의 취미는 파티 주최다.

호스트로서 파티를 열어, 여러 귀족들과 친분을 나누고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만남을 지켜보는 게 그의 유일한 낙이다.

"영지에서 하는 첫 파티니 각별히 신경 쓰게."

"예에. 살피고 또 살피겠사옵니다."

이번에 백작령 인근에 이동마법진이 발견되었다.

조만간 귀족들에게 보낼 초대장에 이동마법진의 좌표석을 첨부해 발송할 것이다.

'이참에 영지 자랑을 실컷 할 수 있겠군.'

나트롱 백작령의 와인은 황궁에서도 알음알음 소문이 났다.

초대된 친우들에게 자신의 와이너리와 포도밭을 구경시켜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몸이 달아올랐다.

그때 그의 세력창에 알림음이 떠올랐다.

<'나트롱 백작가'와 '행정관 포멜'과의 봉신 계약이 종료됩니다.>

"음?"

백작가문과 행정관 사이의 군신 계약.

포멜은 행정관에서 사직함으로써 봉신의 연을 끝맺어 버렸다.

"이놈이 실성하였나?"

백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원한 것은 봉신 계약의 파기지, 종료가 아니다.

<부대 뉴아 수비대의 대장이 변경되었습니다.>

<뉴아 수비대가 세력에서 이탈하려 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허."

당연하게도 백작은 거절했으나, 저들도 거절을 거절했다.

<뉴아 수비대가 세력에서 이탈합니다.>

무단 탈영을 해버렸다.

"실성했나?"

휘장 아래 뭉친 부대 구성원 모두가 동의해야 가능한 일일진대, 어찌....

조용히 눈을 감았다.

행정관 포멜의 얼굴이 떠오른다.

수비대에 남은 기사가 하나도 없나?

어떻게 부대원 모두를 설득했지?

"건방지군."

정말 배신이야 뭐야?

그럴 놈은 아니었는데.

"상당히 건방져."

어쨌든 명령 불복종이자 백작 가문에 대한 정면 도전.

백작이 시종장을 힐끗 보았다.

그도 세력 알림을 들어 상황은 알고 있다.

"조속히 처리하겠나이다."

"아, 마법진 근처의 야인 무리는 어찌 되었지?"

"기사 지르골이 부대를 이끌고 출진했습니다."

"지르골이?"

하필이면 백작의 사병부대 다섯 중에 지르골의 부대라니. 그 사령관과 휘하 병사들은 잔인하고 인정이 없기로 유명해, 학살과 약탈을 즐기는 것으로 유명했다.

"쯧, 몰살이라도 시킬 셈이더냐?"

"...."

시종장이 더욱 허리를 숙였다.

"지르골에게 적당히 하라 일러라. 야인들이라 하여 모조리 죽이면 농사는 누가 짓는다더냐?"

앞으로 백작령이 배는 더 넓어질 터인데, 땅을 개간하고 농사지을 노예가 없어서야 어찌하겠나.

"예에, 새로운 명을 하달하겠사옵니다."

"적당히 어르고 달래 최대한 많이 품으라 이르라."

"예에, 각하."

시종장이 물러가고 나트롱 백작은 거울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광대 부근에 못 보던 뾰루지가 눈에 띈다.

"후, 건방진 놈 하나 때문에."

이래서 일 좀 잘한다고 하여, 함부로 봉신 계약을 하면 안 된다.

근본 없는 놈들과는 상종을 말았어야 하거늘.

"흉이라도 남으면 어이할꼬?"

파티 당일 이전에는 사라져야 할 터인데.

정 안되면 도려내고 최상급 포션으로 치유하면 될 터다.

지금 백작 머릿속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남쪽 이동마법진 근처에 자리 잡았다는 야인 무리도, 배신하여 탈영해버린 뉴아 수비대도 아닌, 뾰루지였다.

칼을 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될 뿐이다.

*

무혈입성.

뉴아 마을에 들어선 아이언헤드 병력은 마을을 모두 뒤져보곤 허탈하게 보고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창고도 텅텅 비었습니다."

"군수품도 없습니다."

철두는 마을 중심부인 마을회관을 보곤 혀를 찼다.

"싹 들고 튀었군."

마을 인벤토리 격인 상자도 산산조각나 깨져있었다.

"영주님이 한번 기습하셨으니 튀는 것도 일리는 있습니다."

"후퇴할 만도 합니다. 어차피 감당 못 할 바에야 지원군과 빠르게 합류하는 게 맞지요."

"그런데 마을을 그대로 둔 건 조금 미심쩍네요."

"함정이라도 있는 것 아닙니까?"

철두는 가만히 있는데 최준섭과 오준환은 서로 조잘조잘 의견을 나눴다.

"이거 비슷한 경우를 삼국지 어디서 본 거 같은데."

"뭐 어떤 거?"

"그 왜, 빈 성 하나 던져주고 막 포위해서 말려 죽이는 그런 거."

"말려 죽인 거였어? 화공 아닌가."

"어?"

말을 하다말고 서로 시선이 부딪힌 두 사람의 얼굴이 덜컥 굳었다.

그때 들려온 맵 알림에 철두가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아닌 모양이군."

철두가 보기에 포멜과 재판관의 사이가 썩 좋아 보이진 않았었다.

"그래도 찝찝하니 목책은 허물어라."

"넵!"

아예 마을 밖으로 나가 진을 꾸리는 것도 생각해봤으나 굳이 그렇게까지 조심할 건 없었다.

"척후를 돌리겠습니다."

"그래라."

최준섭이 유격대원들을 사방으로 보냈다.

철두는 월드맵을 띄워놓고 그들이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는 걸 보았다.

"저녁 먹자."

"네, 알겠습니다."

깍듯하게 대꾸한 오준환은 영지병들과 함께 늦은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저녁 준비하랍신다!"

"솥 걸어라!"

신병들 중에 인벤토리를 가진 자는 전무하고, 기존의 영지병들 중에도 인벤토리를 가진 자는 소수다.

랭커가 되어 포인트로 사거나, 최초발견이나 다른 특전을 얻어 구해야 하는데, 둘 모두 쉬운 일이 아니다.

그나마 유사하게 쓸 수 있는 것이 있었으니, 탈것이다.

탈것으로 길들인 말은 역소환 시에 몸에 걸친 장비들도 함께 사라지는데, 이를 이용한 꼼수 인벤토리다.

말의 안장에 개인 보급품을 주렁주렁 달아놓는 것이다.

희귀하긴 하지만 인벤토리를 가진 고참병이 오준환을 포함해 넷 있었고, 막사와 솥같이 부피가 큰 짐들은 죄다 그들의 인벤토리에 나눠 담겨있다.

화르르륵.

땔감은 널려있다.

무너뜨린 목책만으로도 충분하고, 여기저기 근처의 집들도 그냥 허물어트려 땔감으로 썼다.

집 몇 채면 130인 정도의 병력이 머물기엔 충분했고, 나머지는 그저 혹시 모를 기습에 대비한 장애물 역할만 해주면 되었다.

"대장, 드십시오."

"그래, 많이 먹어라."

"네."

그릇 두 개를 들고 온 오준환이 철두의 옆에 앉았다.

"전쟁이 길어질까요?"

"모르지."

철두는 재판관이 죽어가며 저주처럼 남긴 말이 거슬렸다.

"지르골인지 뭔지를 쓸어버리면 반응이 오겠지."

"백작의 군대라면 보르텡의 경우보다 훨씬 많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건 기사다."

철두는 오준환을 보았다.

"너는 어떻게 되었나?"

"감각은 달성했고, 근력도 곧 달성합니다."

"좋군."

보통의 기사를 랭커 급과 동급이라 하면 지금 주둔군 중에 기사급 전력은 최준섭과 오준환 둘뿐이다.

철두와 준환은 전투를 앞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보았으나, 결국 명쾌한 전략을 낼 수는 없었다.

일단 적을 알아야 무언가 대비책이라도 나오지 않겠는가?

식사를 마친 철두가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대충 어디까지 왔나 마중 갔다 오지."

"네, 조심하십시오."

철두가 피식 웃고는 그리핀을 소환해 올라타고 날았다.

"히야."

"멋지군."

식사를 마치고 정리 중이던 영지병들이 코앞에서 본 그리핀의 위용에 저마다 감탄사를 터트렸다.

"후우."

오준환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만약 그리핀 부대를 양성할 수 있다면, 공성전이나 적의 후방요격, 하다못해 전령으로도 활용가치는 무궁무진하다.

"어디 그리핀 키우는 농장 같은 데 없나...."

오준환은 그저 아쉬울 뿐이었다.

*

왕국기사 지롤은 사냥꾼들과 북진하던 와중에 백작성에 보낸 기사 호르크 경과 앙트루 경, 그리고 마법사 브롤을 만났다.

마법사 브롤의 추적 화살촉을 지롤이 가지고 있었기에, 북상하는 그의 방향을 알고 이리 마중 나온 것이다.

"지롤 경! 무사하셨습니까?"

"무사하다네. 호르크 경."

지롤은 반갑게 안부를 나누다가 의아하여 물었다.

"백작성까지는 아직 한참인데 어찌 이리 마중 나왔는가?"

"나트롱 백작님께서 흔쾌히 병력을 내어주셨습니다."

기사 호르크의 안색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나트롱 백작에게 도움을 청하는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냈다.

"호! 어느 정도 규모인가?"

"정예병 1000입니다."

"흐음."

기뻐하는 호르크의 얼굴과는 반대로 지롤의 안색은 어두웠다.

"내 정찰해 보았는데 적의 성은 높고, 병력도 그 반절은 된다네. 주민들까지 동원하면 더 많겠지."

아무래도 1000의 병력으로 공성을 하기엔 불안해 보였다.

하지만 호르크의 얼굴에 걸린 미소는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문제없습니다! 병력을 이끄는 사령관이 소문이 자자한 지르골입니다!"

"음? 그자는...."

소문이 자자하긴 하지만.

"포악하기로 악명이 높지 않은가?"

"그렇지만 실력 또한 확실하지요."

"으음."

지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민간인 학살을 지나치게 자행하는 자긴 하지만 그 부대의 강력함은 유명했다. 이웃 왕국에까지 소문이 퍼질 정도로 말이다.

"더욱이 이미 전진기지로 마을이 건설되었는데 거기도 정규군이 300명이 넘고, 주민들 중에 징집하면 못해도 1000명은 충원할 수 있을 거랍니다."

합쳐서 2000이 넘는 병력을 기사 지르골이 이끌고 있다.

"다 이긴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호르크 경."

"네, 지롤 경."

"우리 임무는 그리핀을 되찾아가는 것일세. 전쟁의 승패는 중하지 않아."

"하지만 이겨야 되찾아가지 않겠습니까?"

"...."

호르크 경의 순진무구한 말에 지롤의 얼굴은 어둡기만 했다.

'너무 압도적인 병력이다. 과연 백작이 대가로 무엇을 요구하게 될지....'

만에 하나 백작이 그리핀을 탐내 과한 병력을 파견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다.

지롤을 위시한 왕실기사들의 임무는 실패로 돌아갈 테니까.

"일단 부대에 합류부터 하시지요."

"그러세나."

그들은 달빛에 의지해 어두운 밤길을 달렸다.

곧 1000명의 부대가 주둔하는 백작군의 진지에 당도했다.

일단 외부인으로서 부대에 합류하기 위한 인사와 허락부터 받아야 할 터.

부대 내의 부관으로 보이는 기사의 안내를 받으며 가장 크고 화려한 막사로 향했다.

"사령관님. 왕실기사 지롤이 뵙기를 청합니다."

부관의 보고에 막사 안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와장창!

막사 안에서 난잡한 소리가 들리더니 뾰족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아아악! 제발!"

"사, 살려주세요. 제발!"

두 명 이상의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윽고 요란한 소리와 비명은 5분여 동안이나 계속되다가 잠잠해졌다.

"흐흐흐흐."

사락.

막사의 입구를 가리던 휘장이 거둬지며 거구의 남자가 웃통을 벗은 채, 바지춤만 겨우 추스르며 걸어 나왔다.

"그래, 누가 왔다고?"

"...."

히죽 웃으며 묻는 사령관 지르골의 얼굴과 상체에는 그의 것이 아닌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155화 무난한 협상

"아미르 왕국의 지롤 경입니다. 적의 정찰 정보를 입수해 왔습니다."

"아아, 그래. 지르골이다."

기사 지르골이 불쑥 손을 내밀자, 지롤이 멈칫했다.

피에 절어 시뻘겋게 물든 두 손은 이미 변색되기 시작해 검붉은색으로 번들거렸다.

"...."

"아, 이거. 내가 자기 전에 염소 창자를 만지는 버릇이 있어서 말이야."

염소는 개뿔. 말하는 염소가 어디 있나?

지르골이 씩 웃으며 손을 거두지 않자, 지롤의 표정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야만인.'

자세히 뜯어보니 벌거벗은 상체 곳곳에 얼룩진 피 말고 문신이 몇 개 있었다.

야만인 사냥에 이골이 난 지롤이기에 누구보다 그들의 문신을 잘 알아볼 수 있었다.

바바리안 타투.

야만인들의 힘의 원천이자, 비기.

"이거 기분이 나빠지려 하는군."

지르골의 안색이 싹 굳자, 지롤은 마지못해 손을 마주 잡았다.

"후후후, 기사가 피를 꺼려서야 쓰나? 왕국은 계집에게도 기사 서임을 해주는 줄 알았지 뭔가?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

지르골이 크게 웃자 주변에 있던 그의 휘하 기사들과 병사들이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지롤은 속으로 욕을 참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정찰 결과에 대한 작전 회의를 청합니다."

"아아."

지르골이 악수를 풀어주고는 대충 손을 내저었다.

"쥐새끼들 잡으러 가는데 작전은 무슨. 밤이 늦었으니 물러가라."

제국의 위상이 높다 하나, 그는 백작 가문의 봉신 기사. 그에 반해 지롤은 왕국의 국왕에게 서임 받은 왕실 기사다.

급으로 따진다면 서로 존대해야 맞으나, 지르골은 타국의 기사를 두고도 숫제 아랫사람 대하듯 했다.

"...예."

지롤은 애써 화를 누르며 짧게 인사 후 돌아섰다.

"이 막사입니다."

"들어가지."

앙트루 경의 안내에 막사 안에 다시 아미르 왕국의 그리핀 추적조가 모두 모여들었다.

기사 지롤과 앙트루, 호르크.

마법사 브롤과 사냥꾼 셋.

지롤은 손에 묻은 피를 불쾌한 듯 벅벅 문질러 닦아냈다.

"잘 참으셨습니다."

"후우."

참지 않을 도리가 없다.

단순히 도망친 그리핀 하나를 쫓아 데려오는 일이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되었는가?

"후우,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어."

지롤의 말에 호르크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전쟁에서 이겨 그 아이언헤드 영주가 차지한 그리핀을 돌려받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지르골이 가만있지 않겠지."

"어음."

지르골이 욕심내면 막을 힘이 없다.

문제는 명분도 약하다는 거다.

"너무 많은 지원병력이다. 과해."

그리핀을 양보하는 대신 다른 대가를 바라면 어찌해야 하는가?

고작 왕실 기사인 지롤은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사냥꾼 잭이 슬쩍 눈치 보다 나섰다.

"기사님."

기사 셋이 동시에 잭을 돌아봤다.

"저희는 여기서 의뢰를 종료하길 원합니다."

"으음."

"이미 전쟁으로 돌입하는 마당에 저희 역할도 딱히 없을 것 같습니다."

잠깐 고민하던 지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괜히 기간을 연장해 고용비를 더 지출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핀의 행방은 정해졌고, 놈을 쫓는 사냥꾼의 추격 기술보다는 그것을 돌려받을 무력과 협상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여기 정산금이네."

"예에."

촤르르륵.

두 사람이 악수하자 지롤의 주화 주머니에서 숫자가 사냥꾼 잭의 주화 주머니로 옮겨갔다.

"이만, 무운을 빌겠습니다."

"그러세나."

사냥꾼 셋이 떠나가고, 기사 셋과 마법사 하나 파티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두두두두.

사냥꾼 잭과 동료 둘은 정신없이 말을 달려 지르골의 둔영에서 멀어지자 한숨을 내쉬었다.

"이보게, 잭. 이제 좀 천천히 가자고."

"후우, 그러지."

잭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동료가 의아해 물었다.

"자네 감이 좋은 건 알지만, 이번엔 조금 경솔한 것 아닌가?"

"뭐가?"

"그대로 의뢰를 이어갔으면 앉아서 더 많은 돈을 벌었을 텐데, 어째서 미리 정산했는가?"

"쯧쯧."

잭이 혀를 찼다.

이 무식한 새끼.

"우리 의뢰가 전쟁이냐? 그리핀 추적이지."

"그게 왜?"

"이 멍청아. 전쟁이 이기든 지든 무슨 상관이냐? 그리핀 확보를 성공 못 했다고 강짜 놓으면 의뢰금은 어찌 받을 테냐? 그리고 전쟁 중에 지롤이 죽기라도 하면?"

"으음. 일리 있군."

일리 있기는, 시발놈.

리스크에 대한 개념이 없는 녀석이다.

잭은 혀를 찼다.

"이게 안전빵이야. 계속 들러 붙어있어 봐야 기대수익도 적어."

"그래도 이길 게 확실한 전쟁인데 아깝잖아?"

"뭐가 아까워?"

"흐흐, 왜 이래? 알 만한 사람끼리. 전쟁 부수입이 꽤 될 텐데."

"쯧쯧, 아까 그 새끼 못 봤냐? 잘도 공평히 나눠주겠다."

공을 세워도 외부인에다가 용병 사냥꾼인 그들에게까지 전리품이 돌아올지는 알 수 없다.

헛바람 켜는 동료를 보며 잭은 비장하게 말했다.

"돈은 그렇게 버는 게 아냐."

전쟁 약탈품?

기대수익도 형편없고, 받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기왕 확률이 낮다면, 수익이 높은 데 걸어야지."

"응? 그게 무슨 말이야?"

"흐흐, 본디 대박은 역배에 나온다."

잭의 말에 두 명의 사냥꾼이 깜짝 놀랐다.

"미쳤어? 지르골의 군대를 상대로 싸우자고?"

"돌았군. 난 빠지겠어. 돈보다 소중한 게 내 목숨이라고."

"뭐, 좋을 대로 해."

사냥꾼들이 질색하며 한마디씩 하고 떠나갔다.

"길드에는 잭 자네가 죽었다고 해야겠군."

"무운을 비네. 젠장, 그냥 네 녀석도 이대로 돌아가자고."

"됐어. 난 돈 좀 더 벌어야겠어."

"하여튼 무모하긴."

사냥꾼이 떠나고 홀로 남은 잭은 씨익 웃었다.

"병신들."

저리 시야가 좁아서야 어찌 사냥꾼을 자처하는가?

전쟁에 용병 수요가 어찌 직접 참전뿐이겠는가.

"정보만 팔아도 얼마야?"

사냥꾼이면 사냥꾼답게 돈을 벌어야지.

지형을 살피고, 덫을 놓고, 짐승을 손쉽게 잡는 게 사냥꾼의 스타일이지, 활 들고 칼 들고 미련하게 사냥감을 쫓는 건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다.

사냥꾼 잭이 말을 몰아 미친 듯이 남쪽으로 질주했다.

운 좋게 지르골의 부대도 모두 염탐했고, 구성도 보았다. 더욱이 그들의 대략적인 작전까지도 들었다.

이 상황에 어느 누가 있어 이 정보를 마다하겠는가?

분명 비싼 값에 사 주리라.

"흐흐흐."

이런 목돈 벌이를 두고 떠나준 동료 사냥꾼들이 고마울 지경이다.

정신없이 말을 달리던 잭은 갑작스러운 오싹함에 본능적으로 하늘을 보았다.

쇄애애액!

"허업!"

거대한 동체가 급강하하고 있다.

홱 하고 뻗어오는 날카로운 발톱을 보며 피하려다가 마상인 것을 자각하고서 급히 말을 역소환했다.

파앙!

말이 사라지며 잭의 신형이 쑥 꺼졌고, 그 자리를 아슬하게 날카로운 발톱이 스쳤다.

파다다다닥!

운 좋게 마침 초원지대를 달리고 있었던지라 바닥에 낙법하듯 구른 잭을 수풀들이 받아줘 크게 다치지도 않았다.

"시발!"

서둘러 고개를 들어보니 정체불명의 괴생명체는 그리핀이다. 그리고 그 위에 타고 있는 사내.

"어?"

처음 보는 자지만 누군지 알 것 같다.

이 근방에 그리핀을 타고 다니는 자라면 그들이 쫓고 있는 그자밖에 없을 테니까.

잭이 서둘러 품에서 소통의 비약을 먹고는 급히 물었다.

"아이언헤드 영주님이십니까?"

"음? 그렇다."

"마침 잘되었습니다. 영주님을 찾아가던 중이었습니다."

"난 그리핀 먹이를 주던 참이다."

아니, 보통 이러면 왜 찾아오던 길이냐 물어야 정상 아닌가?

"그, 그러셨습니까?"

"그래. 먹이가 말을 하는군."

"...그게 접니까?"

철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

잭은 고심했다.

땀을 삐질 흘리는 그를 보며 철두가 히죽 웃었다.

"농담이다."

"하하하하."

잭은 어색하게 웃었다.

성격을 종잡을 수가 없다.

'튈까?'

잠깐 고민이 되었으나, 방법이 마땅찮다.

상대는 그리핀 라이더.

말을 타고 도망쳐봐야 손바닥 안이고, 상대를 이기기도 요원한 일이다.

"사실 네놈 말을 노렸다."

"그, 제 말은 드릴 수 없습니다. 대신 고기가 있으니 나눠드리겠습니다."

"호오."

철두가 관심을 보이자 잭은 인벤토리에서 사냥에 성공해 가지고 다니던 짐승 사체들을 모조리 꺼내었다.

"끼아아아!"

그리핀 오식이가 짐승을 쪼아 포식을 시작했다.

'아오, 저 가죽이 얼만데.'

가죽이 아무리 비싼들 자기 목숨값만 할까.

잭은 마음을 다잡으며 철두를 보았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철두의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다.

'아까 그놈하고 비슷한데?'

지르골이라는 이름의 섬뜩한 느낌을 주던 기사.

어째서인지 피 칠갑을 한 그자와 지금 처음 보는 아이언헤드 영주가 겹쳐 보였다.

"여, 영주님을 뵙습니다."

저도 모르게 한쪽 무릎을 꿇은 잭이 고개를 조아렸다.

지르골이 흉포하고 잔인한 분위기였다면, 아이언헤드 영주는 뭐랄까....

'종잡을 수 없다.'

뭘 할지 알 수 없는 자다.

저렇게 눈깔이 은은하게 돌아 있는 자는 무조건 조심해야 한다. 귀족들은 하나같이 괴팍하고 다혈질이니까.

"후후, 예의를 아는 놈이군. 일어나라."

"예에."

철두는 익숙하게 땔감을 모으고, 인벤토리에서 철팬을 꺼내 곡식 가루와 물을 붓고는 불 위에 올렸다.

그리핀이 포식을 통해 체력을 회복하는 사이, 자신도 주린 배를 채워야 했다.

자연스러운 그 행동에 잭이 의아해 물었다.

"무엇을 하시는 건지요?"

"밥 먹는다. 너도 먹을 테냐?"

"예?"

"앉아라."

"예, 예에."

이거 저도 모르게 계속 상대의 페이스에 말리는 기분이다.

"후후, 그래 넌 뭐 하는 놈이냐. 백작의 전령이냐?"

"예에? 아닙니다!"

잭이 화들짝 놀라 손사래 쳤다.

맹해 보이다가도 또 이리 날카롭게 물어오니,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견적을 내기 어려운 인물이다.

심지어.

<현재 수준으로 조사가 불가능한 대상입니다.>

<현재 수준으로 분석할 수 없습니다.>

마력이 많이 소모된다는 경고도 아니고 아예 불가능하다는 메시지가 떴다.

'시벌....'

덜컥 불안하다.

이거 잘못 걸린 거 아닌가?

"수상한데?"

"소, 소인은 아미르 왕국의 사냥꾼 길드에서 활동하는 잭이라고 합니다."

잭은 서둘러 머리를 쥐어 짜냈다.

'정면 돌파다.'

어설픈 거짓이 통할 상대가 아니다.

차라리 진실을 절반만 드러내고, 절반은 감추는 게 낫다.

"실은 제가 그리핀 추적 임무를 받고.... 이러이러해서.... 임무의 지속이 불가능해 완수금을 받고 왕국으로 돌아가던 중입니다."

"호, 우리 오식이한테 화살을 쏜 놈이 네 녀석이군."

"...그렇습니다."

"후후, 그래서 내게서 오식이를 뺏어 가려고 접근한 거냐?"

"아, 아닙니다. 이제 관계없는 일입니다. 임무는 종료되었고, 용병인 저에게는 이제 관계없는 일입니다."

"으음."

철두는 턱을 쓰다듬었다.

"그래, 넘어가 주지."

잭의 눈이 빛났다.

다행이다.

어울려 보이진 않지만 자비가 있는 영주다.

"실은 소인이 지르골 사령관의 부대 사정을 대강 들었습니다."

"호오."

"영주님께서는 이 정보를 사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잭은 조심스레 말해놓고는 초조하게 기다렸다.

사라, 제발 사라.

"얼마냐?"

허, 아마추어같이.

선제시 모르나?

"값은 영주님께서 먼저 말해 보시지요."

"후후, 고맙다."

"예?"

"4개에 사마."

쨍그랑.

철두가 주화 4개를 건네주었다.

"말해봐라."

"아, 아니. 흥정을 하자는 말이지, 영주님 마음대로 값을 치르라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잭의 말에 철두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지금 돈을 받아놓고 정보를 팔지 않겠다는 거냐?"

"아, 아닛, 그게 아니라."

156화 새벽의 야습

"신용이 없는 놈이군."

"아닛! 그게 왜 그렇게 됩니까?"

"돈만 받고 입을 닫다니."

"아니! 제 말도 좀 들어보십시오!"

거듭된 잭의 아니시에이팅에 철두가 웃었다.

"후후후."

재밌는 녀석이다.

놀리는 맛이 있는 놈이군.

이 정도 타격감은 진태 이후 오랜만이다.

"그래, 변명해봐라."

"변명이 아니라, 흥정 중이었지 않습니까? 자고로 흥정이라 하면 영주님께서 가격을 제시하시고, 제가 또 원하는 값을 내고 서로 의견 차를 좁혀가는 거지요."

"네가 원하는 값은 얼마냐?"

"예에?"

잭의 표정에 당황이 물들었다.

구체적인 숫자 따위 당연히 생각해두지 않았다.

"오, 오천?"

"후후."

"사, 삼천?"

"후후후."

"천! 천만 주십시오."

"...."

철두가 잭을 그저 물끄러미 보았다.

무표정한 그 얼굴에 잭은 덜컥 표정이 굳었다.

이거 좆됐군.

"시발! 날 죽일 셈이군!"

잭은 거의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젠장, 젠장!'

두 세력이 전쟁 중이다.

가볍게 정보만 팔고 고향인 아미르 왕국으로 넘어가려고 했다.

그래, 이건 소소한 용돈 벌이로 생각했다.

'경솔했어.'

거래 이전에 정보의 종류를 알려준 것부터가 문제다.

'주변의 소문'이라든가 '도움이 될 정보'를 살 의향이 있나 떠봤어야 했다.

전쟁 중인 영주에게 대뜸 상대 정보를 팔겠다고 했는데 탐내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나?

주화 4개?

말장난이다.

정보만 빼가고 죽일 게 틀림없다.

"외통수야! 시발, 그래 죽여라. 아무리 고문해봐도 절대 내 입을 열지 않겠다!"

"왜 급발진이냐?"

"...?"

"그거나 먹어라."

철두는 마침 끓기 시작하는 팬을 휘젓더니 그릇에 죽과 비슷한 곡물 스프와 고기를 담아 건네주었다.

잭은 그릇을 내려다보며 머뭇거렸다.

"대, 대체 내게 이러시는 이유가 뭐요?"

"뭐가?"

"내게 얻고자 하는 게 뭐냔 말이오?"

"후후."

철두는 나무 수저를 이용해 죽을 떠먹었다.

후루룹.

태연히 식사하는 그를 보며, 잭은 될 대로 되란 심정으로 따라 먹었다.

후루룹.

"시발. 말년에 재수가 없군."

잭은 이제 아예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사람처럼 굴었다. 죽은 목숨이라 생각하니 측정 불가의 영주도 더는 두렵지 않다.

"불만이 많은 녀석이군."

"당신 같으면 그렇지 않겠소? 한탕 쳐보려다가 뒈지게 생겼는데."

"자살이 취미인 놈이냐?"

"뭐요?"

"내가 널 왜 죽이나?"

"음?"

철두의 말에 잭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게 지르골의 군대 정보가 있다는 소리 못 들었소? 이건 당신에게 꼭 필요한 정보지 않소?"

"꼭 필요하진 않지만, 내가 4개에 샀지."

"...!"

잭이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코너에 몰린 쥐새끼가 쥐구멍을 찾은 듯 희망찼다.

"정말 4개에 사실 생각이십니까?"

죽음이 코앞에 다가온 쥐는 두려울 게 없지만,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 쥐는 한없이 비굴하기 마련.

"아까부터 샀다잖아?"

"저, 정말 날 살려 보내주시는 겁니까?"

"한 번 더 물어보면 죽일 수도 있지."

바바리안의 인내심은 길지 않으니까.

밟으면 꿈틀대는 지렁이 같은 반응이 재밌어 살려두는 것도 흥미가 사라지기 전까지다.

"...."

잭은 물끄러미 철두를 보았다.

은은하게 돌아있는 것 같은 눈알은 다시 보니 현기가 깃들어 보였고, 우락부락 산적 같은 덩치는 믿음직스런 기사님을 보는 듯했다.

세상사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 보인다더니, 그 말이 꼭 맞았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아이언헤드 영주가 이리도 자비로운 분인 줄 모르고 망언을 지껄였습니다."

"맞아, 난 자비롭지."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놈의 건방에도 한 번 참아줄 정도로 말이야."

할아버지와 맹세했으니 말이다.

아니었다면 어쭙잖은 흥정을 시도할 때 대가리가 깨졌을 것이다.

"다 말하겠습니다."

잭의 말투가 고분고분해졌다.

아이언헤드 영주가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다 넘기고 뜨자.'

괜히 돈 욕심 내다가 목숨마저 잃지 말고 그냥 뜨자. 오늘 영 운수가 좋지 못한 느낌이다.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지르골이란 놈. 어때 보였나?"

"예?"

"굴단이란 놈보다 세나?"

"구, 구, 굴단이요? 방랑자 굴단?"

"그래."

"그는 제국 공작 아닙니까! 어떻게 제국 공작과 백작가의 여러 기사들 중 하나인 지르골을 비교하겠습니까?"

"그 정도인가?"

"명성은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실제 전투력도 그에 비례합지요."

"후후, 그럼 됐군."

잭이 조금 신중한 얼굴로 말했다.

"으음, 지르골 또한 명성이 있는 자입니다. 고작 백작 가문의 기사로 취급하면 안 되는 자긴 합니다."

"그래서 세다는 거냐, 안 세다는 거냐?"

"모, 모르겠습니다. 붙어봐야 알지요."

사실 지르골은커녕, 기사 정도만 되어도 사냥꾼 잭에게는 별세계의 사람들인지라 세세하게 구분하기도 힘들었다.

그냥 윗분들이다.

철두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후후, 옳은 소리도 하는구나."

철두는 잭이 한 소리 중에 방금 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역시 싸움은 직접 싸워봐야 알 수 있다.

그리핀을 타고 적의 동태나 숫자 등만 파악하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슬쩍 간 보고 가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예? 그게 답니까?"

"그럼 뭐가 또 있나?"

"정예병 1000명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기사는 열둘이며, 아미르 왕국의 기사 셋도 함께입니다."

잭이 크게 중요치 않은 정보들을 읊었다.

"기사가 많군."

"예, 상당한 전력입니다. 그에 반해 아이언헤드의 기사는 그 수가 적지 않습니까?"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

"그야 제가...."

잭은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떨어트렸다.

움찔 굳은 그의 몸은 뱀 앞의 개구리가 된 것 같았다.

"후후, 영지에 정착하고 싶다는 사냥꾼이 너였군."

"...."

잭은 손을 덜덜 떨었다.

머리가 하얘져 어떤 변명의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에 번뜩이고, 그것이 몸으로 전달되려는 그 찰나.

꽈득.

"끄읍."

철두의 두툼한 손아귀에 잭의 모가지가 잡혔다.

"정착을 가장한 쥐새끼였군."

"끄읍, 끕."

철두는 밧줄을 꺼내 잭을 꽁꽁 묶어버렸다.

"사, 살려주시오!"

"네놈의 처분은 영지로 돌아가서 정하겠다."

잭의 눈이 번뜩였다.

이거 아무래도 아직 뜯어먹을 정보가 있다고 여긴 모양이다.

잘하면 살 수 있는 건가?

고문당하고 죽는 건 아니겠지?

"끼아아아!"

그때 식사를 마친 오식이가 피 묻은 부리를 닦지도 않고 다가왔다.

"그래, 이제 가자."

철두가 오식이 위에 올라탔고, 오식이는 애벌레처럼 묶여 꿈틀거리는 잭을 날카로운 앞발로 꽉 쥐었다.

후우우웅!

사자와 같은 뒷다리로 힘껏 점프한 그리핀이 하늘을 날았다.

'아, 조졌다.'

잭은 이거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휙휙 변하는 속도감에 잭이 신음했다.

"으으으."

옴짝달싹할 수가 없다.

그리핀이 앞발을 높으면 그대로 낙하해 죽는다.

"시발, 어쩌다가...."

아찔한 와중에도 잭은 살 궁리를 했다.

'이놈의 주둥아리가 문제다.'

오늘따라 이성적이지 못한 본인을 자책하는데, 어째 날아가는 방향이 조금 이상하다.

"이쪽으로 가면 머지않아 지르골의 둔영입니다."

"후후후. 안다."

"...?"

"확인은 해봐야 하지 않겠나?"

"뭐, 뭐를요?"

"붙어봐야지."

"...!"

잭이 깜짝 놀랐다.

"호, 홀로 말입니까?"

"왜 혼자냐. 너와 함께다."

"아니, 이렇게 꽁꽁 묶였는데 뭐가 함께입니까?"

"너는 방패다."

"...?"

"후후후."

호랑이에 물려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산다는데, 불행히도 그리핀 앞발에 잡혀가고 있다.

잭은 급박한 상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철두가 말한 방패의 의미는 머지않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어?"

그리핀은 지르골의 둔영을 향해 직진했고, 머지않아 둔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그리핀의 접근에 둔영이 부산스러워졌다.

지르골의 부대는 정예병답게 새벽에도 경계를 철저히 했고, 그리핀을 발견하자마자 요란한 종소리가 둔영을 가득 메웠다.

쇄쇄쇅!

몇 발의 화살이 근처로 다가왔다가 고꾸라졌는데, 조금만 더 거리가 가까웠으면 잭에게 닿을 정도의 거리였다.

"더, 더 가면 위험합니다."

"후후, 안다."

미쳤다.

이 영주는 미친 게 틀림없다.

저 은은하게 돌아있는 눈까리와 광기 어린 미소를 보라.

"후후후."

"왜 웃으십니까?"

"재밌지 않느냐? 놀라서 허둥대는 꼴이 꼭 개미 같군."

"...!"

잭은 잘게 몸을 떨었다.

개미 하니까 이젠 기억도 가물가물한 어릴 적 생각이 난다.

어릴 때 밭일에 따라가면 개미굴을 휘젓고 파기도 하고, 오줌을 갈기며 놀았었는데.

어릴 땐 어떻게 그렇게 잔인했던지.

아이언헤드 영주의 웃음이 순수한 아이와 같다는 생각이 들자 소름이 돋았다.

'미쳤어. 미친 자다.'

그리핀은 어느새 둔영의 상공에 다다랐고, 사정권 안에 들어오자 화살 세례가 빗발쳤다.

후두두두.

"엇, 엇!"

잭은 몸을 요리조리 피하려 했으나 그저 꿈틀거릴 뿐이었고, 우수수 하늘로 솟구쳐 힘을 잃은 화살이 가죽 갑옷에 부닥쳐 떨어졌다.

화살이 박히진 않았으나 돌멩이 맞은 정도의 통증은 선사했기에 잭은 죽을 맛이었다.

"저놈은 좀 쏘는군."

후우우웅.

쏘아지는 화살 세례를 이리저리 피하며 아래를 자세히 살피니, 개중에 제법 활에 기운을 싣는 녀석이 있었다.

가벼운 수준이긴 하지만 여기저기 철판으로 가린 갑옷 차림을 보니 기사거나, 그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놈이다.

녀석이 다시 활을 들어 하늘을 조준하였을 땐, 이미 철두의 손에도 팽팽히 당겨진 활대와 화살이 쥐어져 있었다.

"후후."

궁술 하면 한국이지.

한국에서 자란 기간이 13년이다.

이 정도면 유사 양궁의 민족 정도는 쳐 줘야지.

쐐애애애액!

같은 순간 서로를 노리고 쏜 화살이 교차했고, 비명성은 지상에서 들려왔다.

"크억!"

명중이다.

투구도 쓰고 있지 않은 녀석의 머리통에 박힌 화살에, 포션을 써볼 시간도 없이 절명했다.

"대, 대단하십니다."

"후후, 아부는."

철두는 신기에 가까운 궁술로 적을 하나하나씩 해치웠다.

잭이 혼란스런 와중에 자세히 보니, 쓰러지는 것은 전부 적의 간부급들이었다.

'갑옷이 좋은 녀석들만 골라 저격하고 있다!'

심지어 기사로 보이는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녀석도 넷이나 죽었다.

어떻게 화살 따위로 기사를 죽일 수 있는 거지?

저 작은 투구 가리개의 틈으로 어떻게 화살을 욱여넣을 수 있단 말인가?

정확도도 미쳤고, 파괴력도 미쳤다.

이건 숫제 바람이 친구가 되어 조준을 보조해주면서, 바람의 저항까지 줄여주는 것이 아니고서야 말이 안 된다.

"차, 차원이 다른 궁술입니다."

"후후."

누구보다 궁술에 자신 있는 잭이었으니, 아이언헤드 영주의 수준이 얼마나 까마득한지 절절히 느껴졌다.

이정도 궁술과 그리핀이 합쳐졌으니, 야습에 그야말로 최적화된 병과가 아닌가?

"성공적인 기습입니다. 이만 돌아가시지요."

더 있다간 정말 재수 없게 화살에 맞을 것 같았다.

차라리 지하감옥에 갇혀 정보나 술술 뱉는 게 낫지, 이런 종류의 고문은 처음이었다.

"후후, 이제 슬슬 내려가지."

"...?"

시발, 진짜 미친놈인가?

잭은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157화 전략 전술의 꽃

후우우웅.

둔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오식이가 내려앉았다.

"미, 미쳤습니까?"

"후후후."

진짜 미친 건가?

이젠 병신같은 저 웃음에 광기마저 느껴져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게릴라가 뭔지 보여주지."

"...?"

철두는 소나따를 소환해 타고는 거대도끼를 꺼내었다.

이미 지르골의 둔영에서는 수십의 기마대가 착륙지점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선두에 선 번쩍번쩍한 갑옷의 기사가 셋.

그 뒤를 따르는 오십여 기병의 갑옷과 무장도 충실하다.

"후후후."

철두는 소나따에 탄 채 말을 마주 달려가며 흥분되는 기분을 애써 내리눌렀다.

바바리안의 심장은 끝없이 에너지를 공급해줄 테니 마음껏 날뛰어보란 듯이 힘차게 두근거렸다.

치밀하진 않지만 철두에겐 나름 계산이 있었다.

'안 되면 튀지 뭐.'

일단 붙어봐야 안다.

역부족이면 튀면 된다.

너덜너덜해지더라도 회복은 할 수 있을 테니까.

"하얏!"

"히이이잉!"

철두의 외침에 소나따가 포효하며 달려나갔고, 여전히 꽁꽁 묶인 채 오식이의 발에 잡혀있는 잭이 소리쳤다.

"시발, 그냥 돌격이잖아!"

게릴라는 개뿔이.

철두는 직선적으로 나아가 마주 달려오는 적 기마대와의 충돌을 대비했다.

"!@#!@!"

"!@#!"

괴상한 기합성을 내며 접근하던 녀석들이 철두와 격돌하기 이전에 대나무 쪼개지듯 쫙 갈라졌다.

"오!"

정예병이라더니, 이런 일사불란한 움직임의 적은 처음이다.

도끼를 휘두를 새도 없이 양쪽으로 스쳐 지나간 녀석들은 선회하지 않고 그대로 오식이를 향해 짓쳐들어갔다.

애당초 목적은 철두가 아닌 오식이였던 모양.

적진에서는 두 번째 병력이 출진해 달려오고 있었는데, 그 수가 삼백이 넘어 보였다.

"후후후."

그리핀을 잡으러 오십이, 그리고 철두를 묶어두러 삼백이 출진했다. 적 지휘관은 철두의 기동력부터 봉쇄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럴 순 없지!

"오식아, 날아라!"

"끼아아아!"

날아오르라, 그리핀이여.

쇄애애액!

적 기마대가 냅다 던진 투창이 위협적으로 그리핀을 노렸으나, 다행히 모조리 빗나갔다.

"어어어억!"

그리핀이 이리저리 날갯짓하며 몸을 틀어대며 날아오르는 통에, 앞발에 붙잡혀있는 잭은 뇌가 흔들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우에에에에에!"

이건 도저히 참을 수 있는 종류의 멀미가 아니다.

아이언헤드 영주와 마주친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여태 그가 겪은 죽음의 위기보다 더 많은 위기와 마주했다.

"시펄, 헛것도 보이...."

위협적인 투창이 오가는 와중에 허연 귀신같은 요정이 창에 매달려 장난치는 모습이 언뜻 보였다.

그리핀은 순식간에 투창의 사정권을 벗어나 버렸고, 목표 잃은 50의 기마대는 선회하여 철두의 뒤를 노렸다.

"후후후."

철두는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적의 군대를 보며 생각했다.

나도 가지고 싶다.

이런 군대를.

최준섭을 좀 더 쪼아야겠다.

오준환도 더 갈구고.

철두는 한 몸처럼 움직이는 기마대를 보고 전율하면서도, 해야 할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우어어어어!"

냅다 고함을 지르며 한쪽 다리를 들어 바닥을 디뎠다. 단단한 바닥을 디딘 발과 무릎이 굽혀지기 무섭게 펴졌다.

후우우웅!

훌쩍 날아올라 적진의 가장 밀도 높은 곳으로 도약했다.

마력은 20%쯤.

도약에 마력을 실으면 착지할 때 충격파를 줄 수 있다.

꾸아아아앙!

착지와 함께 엄청난 충격파가 퍼지며 돌격 중이던 기마대가 여기저기 흩어지듯 넘어졌다.

어느새 거대도끼는 집어넣고 양날 도끼를 두 자루 든 철두의 신형이 그곳을 휘저었다.

촤악, 콱!

"끄아!"

"크읍!"

"!@#@!"

"커억!"

비명이 난무하는 전장의 가운데 철두는 웃었다.

애당초 전문 기병은 아까 말을 달린 녀석들이 전부였는지, 지금 철두의 주변을 에워싼 이들은 기병이라기보다는 중보병에 가까운 무장차림이었다.

녀석들은 잠깐 혼란스러워하더니 말을 모두 역소환하고 진형을 갖춰 철두를 에워싸고 압박하기 시작했다.

통일된 무장이 주는 위압감은 대단했다.

죽인 것 같았는데 똑같은 놈이 또 악다구니를 쓰며 덤벼온다.

당황스런 와중에도 창을 한 번이라도 더 찌르려는 적 병력에 대한 존경마저 느꼈다.

부대를 이리 조련한 자가 궁금하다.

지르골.

어떤 놈이냐?

콰지지직.

"1@#"

그때 괴성과 함께 남다른 갑옷을 입은 녀석이 나타나 철두에게 검을 날렸다.

채쟁, 타앙!

도끼를 들어 반사적으로 막아서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운 없게 그곳에 있던 병사 셋이 철두의 도끼에 목숨을 잃었다.

쓰러지는 시체를 발로 걷어차곤 철두가 물었다.

"네놈이 지르골이냐?"

"@$#!"

"후후, 그렇지."

싸울 줄 아는 놈이군.

철두는 다시 도끼를 들고 녀석을 향해 대시했고, 강철 기사도 마주 검을 주고받았다.

차앙, 창!

상대의 검은 철두의 허리춤에 달린 보르텡의 호위기사 검보다 더 강력해 보였다.

길쭉하고 검면이 조금 더 넓은 투핸디드 소드.

도끼보다는 가볍지만 중병이라 부를만한 무게감의 무기다.

스피드는 조금 떨어지지만, 철두의 도끼를 마주 쳐낼 정도의 힘을 실을 수 있는 무기.

낭창거리는 장검만 보다가 길쭉하고 굵은 검을 보니 철두의 눈빛이 바뀌었다.

"탐나는군."

"@#!#"

철두는 양날도끼를 내려다보았다.

신서울 최고 대장장이 영호공방에서 만들었으나, 노바의 아이템으로는 인정받지 못한 무기.

돌아가면 장인 장 씨에게 도끼도 새로 만들어 달라 해야겠다.

쇄애애액.

녀석은 다시 검을 마주 뻗어왔고, 양손검과 한손검은 그 운용에서 제법 차이가 있었다.

매번 쾌검을 구사하는 녀석들만 보다가 중병끼리 마주치니 제법 흥이 났다.

카앙! 캉!

이 녀석도 레벨 4에 이른 괴물인가 보군.

하지만 이 흥을 계속 이어나갈 수가 없다.

오밀조밀 짜임새 있게 차려진 포위진이 철두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추격을 위함인지 말 탄 기병 100여 기도 부대 후미에서 어슬렁거리며 주시하고 있다.

철두는 이 승부를 빠르게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어이, 친구들.'

철두의 부름에 땅의 정령이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하체가 안정이 되어야 상체가 힘을 쓴다.

모든 힘의 시작점은 단단하게 바닥을 딛고 선 발가락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그 지면이 갑자기 불쑥 솟거나, 푹 꺼지면 중심이 흐트러질 수밖에 없다.

"@@@!"

경악이 뒤섞인 고함을 들으며 철두는 도끼를 녀석의 목줄기에 찍어냈다.

콰직!

"후우, 후우."

힘이 비슷한 상대끼리 싸우면 기술이 더 뛰어난 자가 이긴다.

기술의 격차를 앞서는 힘으로 상대하느라 철두와 기사는 서로 비등비등하게 싸웠으나, 정령이 개입하자 승부는 싱겁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별거 아니군. 지르골."

숙제를 하나 해결한 것 같은데 맥이 빠지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양날 도끼 두 개가 모두 실금이 가 있다.

이건 얼마 가지 않아 부러지겠다.

다행히도, 적 기사가 죽고 남긴 전리품은 투핸디드 소드였다.

철두가 냉큼 그것을 집어 들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문득 의아한 기분에 주변을 둘러보곤 흠칫 놀랐다.

"음?"

병사들의 동요가 없다.

지휘관이 죽었는데 혼란이나 두려움은커녕 분노조차도 없다.

고요하고 독기어린 그들의 눈빛을 마주하다 보니 뭔가 껄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새삼 주변을 보니 온통 중갑보병들로 인의 장벽을 치고 있다.

착, 착, 착!

그때 진형 한쪽이 열리더니 철두보다 더 큰 거한의 사내가 나섰다.

철두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후후, 네가 지르골이군."

[크크크, 이거 물건이군. 바헨드를 이길 정도의 실력이라니.]

철두는 흠칫 놀랐다.

누구 하나 소통의 비약을 먹은 게 아닌데도 지르골의 말이 이해가 되어서다.

[요정의 잔재주를 익힌 인간이라니. 이거 경을 칠 놈이군.]

철두는 의아했다.

그래서 물었다.

[너 바바리안인가?]

[...?]

지르골이 깜짝 놀랐다.

[뭐, 뭐냐? 네놈, 뭐지?]

[후후후, 어느 부족이었지?]

[어째서 네가 바바리안의 말을 하는 것이냐? 그것도 발할라의 말을....]

[그야 나도 바바리안이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투구를 벗어 내팽개친 지르골의 얼굴은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봐도 단단히 화가 난 게 보였다.

[왜 말이 안 되나?]

[요정의 힘을 쓰는 바바리안이 어디 있나?]

[여기 있군.]

철두가 가슴을 펴고 투핸디드 소드를 들어 올렸다.

그의 어깨에 바람의 정령이 올라타서 양손을 허리춤에 얹고는 지르골을 노려봤다.

[허, 말도 안 되는 소리. 바바리안과 요정의 힘은 양립할 수 없다.]

[...?]

철두가 의아해할 때 지르골이 철두를 노려보더니 히죽 웃었다.

[그렇군. 크하하하, 네놈.]

지르골이 파안대소를 터트리더니 말했다.

[선조의 혼이 없군! 병신같은 놈. 요정의 힘을 탐해 바바리안의 힘을 버리다니.]

지르골은 오랜만에 만난 같은 발할라 출신의 바바리안을 보고 들었던 반가움이 싹 달아나는 걸 느꼈다.

투두두둑.

지르골은 자신의 상체 갑옷을 잡더니 그대로 뜯어냈다.

뿌직.

훤히 드러난 상체에 기이하게 새겨진 문신이 빛나고 있었다.

바바리안 타투.

성인식을 마친 바바리안에게 내려지는 선조의 축복.

[네놈은 바바리안이 아니다!]

지르골이 대뜸 거대한 도끼를 들고 달려들었고, 투핸디드 소드를 들고 막아낸 철두는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죽어라! 발할라의 재앙!]

콰아앙, 쾅!

철두는 파괴적인 도끼 공격에 투핸디드 소드를 들어 요리조리 막아내며 연신 뒤로 밀려났다.

여태 나를 상대하던 적의 기분이 이랬을까?

이거 무지막지한 놈이다.

'힘이 월등하군.'

오우거도 만나본 강철두다.

힘이 강한 자는 기술의 우위로 승부를 보는 게 맞지만, 상대는 그 기술마저 출중했다.

거기에 더해 동요 없이 포위망을 형성한 적군을 보면 승부를 어렵게 가져가서는 답도 없다.

"후후, 안 되겠군."

무엇보다 상대는 아직 선조의 힘을 제대로 쓰지도 않았다.

기회는 지금뿐.

철두는 계산을 마쳤다.

힘 지르골 승

기술 무승부

상황판단 철두 승!

'튄다!'

철두는 마음속으로 오식이를 불렀다.

하늘에서 선회하던 오식이가 급강하를 펼치며 내다 꽂히고 있다.

철두는 모든 마력을 모아, 불의 정령에게 주었다.

화르르륵!

철두를 중심으로 거대한 화염이 번졌다.

꽈앙!

그와 동시에 착지한 오식이를 중심으로 충격파가 퍼졌고, 오식이는 즉시 뒷발을 강하게 차며 하늘로 솟구쳤다.

[형편없는 공격이군.]

지르골이 냉소했고, 철두는 씩 웃으며 깨알같이 남은 마력을 쥐어짜 도약했다.

[나중에 보자.]

[...?]

지르골은 이해하지 못했다.

언어란 것이 말이 통한다 하여 그 뜻이 항상 일맥상통하는 건 아닌지라.

아니, 고정관념이리라.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

[네, 네놈! 도망치는 거냐!]

어이없는 놈이다.

바바리안이 도망?

지르골이 냉큼 부하의 창을 뺏어 집어 던졌으나 뒤늦은 판단이었다.

쇄애애애액.

철두는 그 창을 손으로 잡아채곤 지르골을 향해 소리쳤다.

[기념품 잘 받아간다!]

[....]

지르골의 이맛살에 돋아난 혈관이 불끈불끈댔다.

"동족의 수치군."

아니, 동족도 아니지.

선조의 혼도 없는 바바리안이라니.

지르골은 마음을 가라앉혔고, 그의 상체를 덮고 있던 문신이 다시 은은한 붉은 빛을 띠었다.

피가 필요한 밤이다.

눈치 빠른 기병대 몇이 주변 민가로 향했다.

158화 업그레이드!

후우우웅.

그리핀이 나타나자 뉴아 마을에 진지를 꾸리고 철거 중이던 병사들이 환호했다.

"영주님이 돌아오셨다!"

그리핀이 착지하자 최준섭과 오준환이 부리나케 뛰어왔다.

그들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꽁꽁 묶여 앞발에 매달린 사냥꾼 잭이었다.

"음? 누굽니까?"

"첩자다."

"첩자요?"

"그런 놈이 있다. 아무튼 철수한다."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

"예에? 철수요?"

"영희는요?"

오준환이 반문했고, 최준섭이 드립을 쳤다.

"...."

"...."

"죄송합니다."

"아무튼 적 병력이 많다. 천 명 정도."

"으음, 거리는 어찌 됩니까?"

"말을 달려 삼 일 정도. 급히 달리면 이틀이면 닿는다."

오준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숫자 차이가 나긴 하지만, 목책에 기대 싸우면 되지 않겠습니까?"

철두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놈들은 모두 정예다. 무장도 튼실하지. 상대가 되지 않는다."

철두의 냉정한 평가에 얼굴이 시뻘게진 오준환이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이게 다 제대로 정예병을 길러내지 못한 영지군 총대장에 대한 질책으로 들렸다.

"됐다. 어쨌든 모두 후퇴다. 성벽을 이용해 싸우는 게 낫겠다."

그래야만 수적 우위를 무색하게 만들 수 있고, 무장의 차이도 극복이 가능했다.

"기사 전력은 어떻습니까?"

"지르골 부하가 12명, 아미르 왕국 기사가 3명이다. 내가 일곱 놈 잡았으니 여덟 놈 남았다."

"...그래도 많군요. 아미르 왕국 기사는 뭡니까?"

"시간이 급하니 성으로 돌아가서 이야기하자."

"헙, 넵."

"그럼 이따 보자고. 여긴 모조리 불 질러라."

"네, 알겠습니다!"

아직 어둑어둑하건만 철두는 바로 그리핀을 타고 날아가 버렸다.

"어째 대장님이 초조해 보이는데."

"왜?"

"아니, 그렇게 장난 좋아하시는 분이 내 드립도 안 받아주시고."

오준환이 최준섭을 찌릿 흘겨봤다.

"분위기 파악 좀 합시다. 유격대장."

"허, 형한테 싸가지는."

"됐고. 영 찜찜해."

오준환이 불퉁한 얼굴이 되자, 최준섭이 제 딴에는 위로를 건넸다.

"야, 훈련시간이 촉박하니까 그랬지. 영지 생산이 좀 받쳐주면 이제 무장도 제대로 하고, 갑옷도 입히고 하면 돼."

"그 말이 아냐."

오준환에게 있어 강철두의 존재는 적이 백이든 천이든 신경 쓰지 않을 자다. 양떼에 뛰어들어 휩쓰는 호랑이가 그다.

"형 말대로 대장님 좀 초조해 보였어."

"부대 차이가 속상해서 그런 거 아니겠냐."

"대장이 뒤에서 지휘만 하는 타입이야?"

"응?"

최준섭이 무언가 깨달은 듯 덜컥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형님은 선봉장 타입이지."

"그래. 그런데 저리 초조하신 걸 보면...."

오준환의 고민이 깊어졌다.

"대장이 생각보다 여려."

"엥?"

"그때 생각 안 나? 백작성 먹었을 때."

"캬, 역사적인 승리지."

그래. 보통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다.

아군 사상자가 겨우 셋뿐인 압도적인 승리였으니까.

"그때 아군 사상자 셋 기억나?"

"기억나지. 장례도 했는데."

"대장님 많이 괴로워하셨어."

남몰래 철두를 찾아갔다가 울고 있는 그를 보곤 충격을 받았었다.

누구보다도 부하들의 희생에 가슴 아파하는 대장이다.

그때부터였으리라.

오준환이 강철두를 직상 상사 그 이상의 존경을 담아 따른 것이.

"아마도 적 대장이 만만찮은가 봐."

"그래?"

"그러니 걱정되는 거야. 부하들 죽을까 봐."

"아니, 희생 없는 전투가 어딨냐?"

"그렇지. 그게 맞지...."

그 당연한 걸 대장님은 본인 힘으로 막을 수 있다면 막고자 하신다.

"일단 우리 철수부터 하자. 명령인데 따라야지. 불 지르자."

"아니, 잠깐!"

오준환은 최준섭을 말리곤, 잠시 고민하더니 작전을 꺼냈다.

"트랩이라도 만들어놓고 가자."

"뭐?"

"이대로 여기 버리긴 아까워. 일단 놈들 1차 진격은 이리로 할 거야."

"어떻게 그리 확신하냐?"

"여기가 놈들이 세운 마을인데 여기로 오겠지. 안 오더라도 시도는 해봐야지."

말 그대로 함정이다.

걸리면 좋고 아니면 말고다.

조금의 수고로 가능성을 얻는다면 하는 게 맞다.

오준환과 최준섭은 후퇴를 늦추면서까지 뉴아 마을을 조금 손봤다.

*

후우우우웅.

철두가 영주성에 내려앉자 김진태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철두야!"

"진태."

철두는 그리핀에서 훌쩍 뛰어내려 역소환했다.

털썩.

"으으으."

앞발에 잡혀있던 잭이 바닥에 떨어져 신음했다.

"어? 누구야?"

"첩자다."

"첩자? 어어?"

김진태는 자세히 잭을 살펴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사람, 그 사람인데. 그, 얼마 전에 내가 영지에 정착하고 싶다는 사냥꾼 있다고 했잖아?"

"안다. 이놈이 그놈이다."

"허, 시발. 간첩 새끼였어?"

김진태는 사냥꾼 잭을 발로 찼다.

퍽, 퍽!

[시벌 새끼들! 차라리 고문을 해라.]

소통의 비약 시간이 다 되어 잭이 하는 말이 무슨 소린지 모르는 김진태는 녀석을 차 주기만 했다.

[끄, 끄읍. 차라리 감옥에나 넣어라!]

계속 그리핀에 잡혀 아찔한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바지는 벌써 몇 번이나 지려 축축해져, 수치심과 모멸감에 비참한 기분이다.

감옥에 갇히는 게 낫지, 계속 그리핀에 달려 다니다가는 죽을 수도 있는 위태로운 경험을 또 해야 한다.

고문이 나으리라.

그건 고통은 있지만 죽을 확률은 현저히 낮으니까.

"헉헉, 이놈 지하 감옥에 넣어요."

"네, 알겠습니다."

옥상 망루에서 번을 서고 있던 병사들이 잭을 데리고 나갔다.

"어쩐 일이야? 이 새벽부터."

아직 동이 터오려면 한 시간은 더 남았다.

철두는 무거운 얼굴로 진태에게 고백했다.

"지르골이라는 놈이 좀 친다."

"그래? 너보다 더?"

"어."

"허, 시발. 조졌네."

아이언헤드령의 전력 대부분을 담당하는 것이 강철두다. 그의 개인 무력이 아니라면 아이언헤드 성의 전력은, 신서울은커녕 한양에도 비비지 못할 수준이다.

김진태는 강철두의 얼굴이 굳은 것을 보곤 괜히 어깨를 쳐주었다.

"아니, 얼굴 펴 인마. 네가 대장인데."

"맞다. 나는 지금 대장의 자리에 맞지 않다."

"아니, 미친놈아. 적이 셀 수도 있지. 존나 쎄 봐야 얼마나 더 쎄겠어? 그냥 힘 합쳐서 막으면 되지."

언제나 나보다 약한 적만을 골라 만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죽을 거다."

"어? 그 정도로 전력 차이가 나?"

철두는 고개를 저었다.

"지르골 녀석이 제법 치긴 하지만, 온 힘을 다하면 상대 못 할 수준은 아니다."

"그럼 뭐가 문제냐?"

"그놈 부하들도 세다."

"얼마나?"

"한 놈이 우리 영지군 서넛은 감당할 수준."

"시발, 좀 치네."

김진태는 즉각 수긍하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수성하지 뭐. 저놈들 중에 그리핀 같은 거 가진 놈은 없지?"

"없다."

"아니, 그럼 쫄지 마 인마!"

팡팡.

허리를 두들겼으나 쇠를 두들기는 것 같다.

진태는 괜히 자신의 손이 더 아픈 것 같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시발, 전쟁인데 하나도 안 죽는 게 말이 되냐? 그리고 너만 싸우냐? 우리도 싸울 줄 알아."

"그치만."

"아 됐고. 너는 지랄인지 지르골인지 그 새끼만 맡아."

"내게 작전이 있다."

"아, 어쭙잖게 나가서 게릴라 이딴 걸로 수 줄일 생각하지 마! 어차피 대장 못 잡으면 우린 죄다 뒈지는 겨."

"...."

역시 친구라서 그런가?

철두의 마음을 거울 속 보듯이 들여다보는 진태였다.

철두의 멍청한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태는 온 힘을 다해 철두의 따귀를 때렸다.

쫘악!

"쫄았냐?"

"...."

쫘악!

"쫄았냐고! 시발!"

"쫄았...."

쫘악!

"강철두는 절대 안 쫄아!"

"...."

쫘악!

"쫄았냐!"

"아니."

"네가 그 새끼 잡는 거야. 조무래기들 싸움은 우리한테 맡겨!"

김진태가 철두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문제 있냐!"

"없다!"

철두의 음성에 조금 힘이 깃들었다.

"시발, 그럼 그 새끼 잡을 준비해! 나도 수성 준비할 테니까."

철두가 벌게진 볼을 문지르며 웃었다.

"후후, 고맙다. 진태."

"얼른 가!"

"알겠다!"

철두는 즉시 영주성의 계단을 뛰어내렸다.

김진태는 퉁퉁 부어 두 배는 더 커진 손을 보며 참았던 고통의 비명을 터트렸다.

"으억, 시발. 대갈통이 무슨."

때린 건 난데 부상도 내가 당했다.

김진태는 서둘러 포션 하나를 꺼내 부었다.

치지지지직.

"크읍."

기도는 신의 기적을 빌리는 것이고, 포션은 치유의 속도를 가속화하는 것.

기적에 고통은 없지만, 치유의 가속은 간지러움과 고통을 동반했다.

"하, 시발, 조지긴 했네. 진짜."

노바에 입성하고 그간 승승장구한 그들이다.

애초에 강철두의 엄청난 무력으로 인한 버스나 다름없었다. 이제야 호적수나 다름없는 적을 만나게 된 것이다.

"아, 몰라. 시발, 각자 일만 하자."

조무래기는 조무래기끼리.

대장은 대장끼리.

대장이 지면 필패고, 조무래기야 패배해도 전장은 승리할 것이다. 다만 많은 피해를 남길 뿐.

'줄여봐야지.'

김진태는 세력창을 건드려 방어 타워 종류를 빠르게 서치했다.

*

따앙! 따앙!

해도 뜨지 않았지만 대장간은 불이 환히 밝혀져 있었다.

대장간 안에는 책임자인 장소철뿐만 아니라 여러 조수들이 한가득이었다.

견습 대장장이로 전직한 마을 주민들만 해도 20명이 넘었다. 그들은 장소철이 등록해놓은 제작 아이템을 시스템의 힘을 빌려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를테면 장소철이 발명가라면, 그들은 제작자다.

"장 씨 있는가!"

"아니, 영주님 어서 오십시오."

장소철은 하던 작업을 멈추고 즉시 튀어왔다.

"무기가 필요해."

"허업, 어쩌다가 이 도끼들이...."

철두는 날이 상하여 곧 부러질 것 같은 양날도끼 두 자루를 꺼내주었다.

"똑같이 도끼를 만들면 되겠습니까요?"

철두는 잠깐 고민했다.

"아니, 뾰족한 망치로. 갑옷도 깰 수 있을 만큼."

"두 자루를 만들깝쇼?"

철두가 고개를 저었다.

투핸디드 소드를 꺼내어 장소철에게 넘겨주었다.

"한 손으론 이걸 쓸 거다. 무게를 같게 해서 만들어줄 수 있나?"

"언제까지 만들면 되겠습니까요?"

"하루 반."

더 여유 시간을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다.

망치가 속하는 둔기 숙련은 아직 2레벨.

상대의 철갑옷에 대처할 무기를 만들어낸다 해도 그 사용자의 숙련도가 낮아서야 소용이 없다.

"제 영혼을 갈아 넣겠습니다요."

영혼이라....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야 할 게야. 우리 성의 미래가 달렸으니까."

"예에."

철두는 다시 영주성으로 찾았다.

"진태!"

"어, 엉?"

"지하 수련장으로 간다. 하루 반 뒤에 나오마."

"그래, 알겠어!"

철두는 영주전용의 마법진을 타고 지하 수련장으로 향했다.

습습한 지하의 공기가 지금 철두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후우우우."

길게 한숨을 뱉었다.

좋아. 할 수 있는 모든 스펙업을 해보자고!

159화 담금질

철두는 챙겨온 물건들을 인벤토리에서 하나하나 꺼내놓았다.

근력의 구슬.

민첩의 구슬.

체력의 구슬.

감각의 구슬.

오늘 이 4가지 스탯의 흡수 한계를 볼 생각이다.

"여유롭게 적응할 시간이 없군."

일단 천장을 높여 놓는다.

성장은 고작 이틀 남은 훈련에서 최대한 노력해볼 터이고, 나머지는 실전이 알아서 채워줄 터다.

장기전으로 가면 승산이 있다.

마력의 구슬.

구하기 쉽지 않은 물건이지만, 뉴아 마을의 인벤토리에서 꽤 많은 양을 구할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민간에서 징발한 양까지 모조리 가져왔다.

정령은 거저 힘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부리는 조화로운 마법의 근간은 모두 마력에 기원하고, 그것은 철두에게서 나온다.

철두의 마력이 높을수록, 정령의 힘 또한 커진다.

정령의 도움 없이는 지르골을 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철두는 구슬을 하나씩 활성화하기 시작했다.

푸시시시시.

<근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뿌드드드드.

<민첩이 소폭 상승합니다.>

파파팟.

<체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파파팟.

<감각이 소폭 상승합니다.>

데샤아아

<마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하나씩 하나씩 흡수하던 감각의 구슬이 처음으로 그 한계를 맞이했다.

<민첩의 구슬의 활성화가 불가능합니다.>

"74가 끝인가?"

철두는 개의치 않았다.

<감각의 구슬의 활성화가 불가능합니다.>

<근력의 구슬의 활성화가 불가능합니다.>

<체력의 구슬의 활성화가 불가능합니다.>

차례로 한계를 맞이한 스탯석.

"이 정도인가?"

내 몸의 한계를 마주한 심상은 꽤 복잡했다.

인간에 비하면 월등히 높은 수치겠지만. 올바르게 자란 바바리안 전사와 마주치고 온 철두다.

거기에 더해 아직 얼마나 강한지 감도 잡을 수 없는 굴단이란 놈은 어떠한가?

더욱이 제국에는 그런 공작들이 여럿일 테고, 황제 녀석도 더 강할 터인데.

"흐음. 어째서 마력이 아직 한계가 아니지?"

철두는 계속해서 마력의 구슬을 흡수했다.

보통 인간은 마력의 구슬을 10개도 활성화하기 힘들다고 하던데, 바바리안은 다른가?

아니면, 바바리안 중에서도 철두만 특별할지도.

<마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어이없군."

마력의 구슬이 동나버렸다.

한계에는 부닥치지도 않았다.

<활성화 구슬>

근력 88

민첩 74

체력 91

감각 82

마력 93

"...."

철두는 상태창을 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마력의 구슬이 더 있었으면 어쩌면 100도 돌파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전사보다 주술사의 운명을 타고난 몸뚱어리가 아닐까?

"나쁠 것 없다."

전사니, 주술사니 따지지 않기로 하지 않았나.

강해지기만 하면 남들이 전사로 보든, 주술사로 보든 상관없다.

마력의 구슬은 다 떨어졌지만, 나머지 4대 스탯석은 아직 남아있다.

적색부.

녹색부.

청색부.

자색부.

황색부.

철두는 마력의 흡수 한계를 늘려주는 황색부는 인벤토리에 다시 집어넣었다.

<적색부를 활성화했습니다.>

<근력의 구슬을 5개 더 활성화할 수 있습니다.>

철두는 나머지 스크롤도 하나씩 쓰곤 구슬을 추가로 흡수했다.

하지만 이것도 다섯 번째가 되자 제동이 걸렸다.

<적색부의 활성화가 불가능합니다.>

<녹색부의 활성화가 불가능합니다.>

....

"이런 시벌."

철두가 욕지거리를 뱉었다.

스탯 당 한계 돌파 스크롤이 4개씩밖에 활성화되지 않았다.

철두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럼 왜 10장 살 때 아무 말 안 해준 거야!"

한계 돌파 스크롤은 남에게 양도해줄 수도 없는 물건이다.

철두가 씩씩거려봤으나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약삭빠른 고블린 상인에게 그저 속았을 뿐이다.

두고 보자, 상인 놈.

<활성화 구슬>

근력 108

민첩 94

체력 111

감각 102

마력 93

4대 스탯이 20씩 증가했다.

"이래서 랭커가 적군."

이제 이해가 갔다.

한계 돌파 스크롤이 존재하는데 어째서 이 세상에는 기사가 소수였는지.

적어도 스탯 30은 넘어야 한계 돌파 스크롤의 힘을 빌려 랭커에 진입할 수 있다는 소리다.

"다음은."

철두가 백색부와 흑색부를 집어 들었다.

<흑색부>

같은 종류의 특성의 구슬을 한 번 더 활성화해 강화할 수 있다.

- 양도 불가, 주화 100개로 활성화.

<백색부>

같은 종류의 기술의 구슬을 한 번 더 활성화해 강화할 수 있다.

- 양도 불가, 주화 100개로 활성화.

백색부부터 썼다.

철두가 가진 흰색 구슬인 기술석은 안타깝게도 3가지. 투척, 강타, 관찰뿐이다.

<백색부를 활성화합니다.>

<이미 습득한 기술도 다시 활성화가 가능합니다.>

<기술 '투척'을 활성화합니다.>

<투척의 경험이 축적됩니다. 보다 멀리 던질 수 있습니다.>

<기술 '투척'을 활성화합니다.>

<투척의 경험이 축적됩니다. 보다 많은 힘을 담아 던질 수 있습니다.>

<'투척'의 새로운 경지에 눈을 뜹니다.>

<투척의 단계가 상승합니다.>

투척이 레벨 2가 되었다.

철두는 남은 투척의 기술석 3개를 더 활성화해봤으나 경험치만 먹었고, 레벨3까지는 되지 못했다.

"아쉽네."

가지고 있는 기술석을 모조리 활성화했다.

<강타의 단계가 상승합니다.>

<탐색의 단계가 상승합니다.>

관찰의 기술석은 상위호환 기술인 탐색의 레벨을 하나 올려주었다.

기술석들은 아이언헤드 영주의 창고에 있던 것을 모조리 긁어온 것이라, 민간에서 강제징발한 물품도 포함된 것들이다.

영지의 모든 역량을 모아, 강철두 개인을 강화하는 중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후우, 이제 특성이군."

철두는 흑색부를 활성화했다.

지금 가진 검은 구슬은 거인의 힘과 거인의 표피 두 가지다.

오거 파워와 오거 스킨.

모두 오우거를 잡아내고 얻은 것들이다.

하도 많이 나와 구정욱에게도 하나씩 나눠준 검은색 구슬이 지금 철두의 수중에 6개가 쥐어져 있다.

<오우거의 능력 구슬>

오우거의 특수 능력 중 하나를 얻을 수 있다.

-고블린 주화 100개로 활성화할 수 있다.

힘인지 표피인지 알 길이 없다.

파워든 스킨이든 어차피 하나씩만 활성화되기에, 그동안 구분해놓지 않았다.

"탐색으로...."

철두가 향상된 스킬인 탐색(2)를 활성화하며 마력을 주입해 검은 구슬을 노려봤다.

<오우거의 능력 구슬>

오우거의 힘이 담겨 있다.

오우거의 오만함을 닮을 수 있다.

-고블린 주화 100개로 활성화할 수 있다.

"어?"

전에 없던 설명이 추가되었다.

"오만함?"

이건 부작용으로 봐야 할까?

힘이 세지면 오만해질 수도 있지.

<오우거의 능력 구슬>

오우거의 질긴 가죽을 얻을 수 있다.

오우거만큼 무모해질 수도 있다.

-고블린 주화 100개로 활성화할 수 있다.

"으음."

철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 방어력이면 무모해질 만도 하지.

탐색(2) 스킬은 꽤 값어치를 했다.

수리부엉이를 더 찾아 기술석을 얻고 싶을 정도다.

"힘이 셋, 표피가 셋이군."

딱 수가 맞아떨어졌다.

<거인의 힘이 스며듭니다.>

<거인의 힘이 스며듭니다.>

<거인의 힘이 스며듭니다.>

<거인의 힘이 새로운 경지에 도달합니다.>

<거인의 힘>

마력의 도움을 받아 종을 초월한 거인의 힘을 낼 수 있다.

기존에 마력을 태워 일시적으로 2배나 파워업할 수 있던 특성이 사라져버렸다.

<특성 '거인의 위상'을 얻었습니다.>

<거인의 위상>

선택받은 거인족들이 받던 축복.

힘의 위상은 늘 부족하지 않은 힘을 제공한다.

"으읍."

철두의 심장이 두근댔다.

뚜렷한 힘의 증가와 고양감이 차오른다.

이젠 마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두 배 정도의 힘은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흐흐흐."

하찮다.

지르골?

얼른 골통을 깨부수고 싶다.

이것이 거인의 오만함인가?

철두는 세게 자신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꽈아앙!

거대한 힘을 감당하지 못해 머리통이 찢어졌다.

그 틈으로 피가 흘렀으나 정신을 차리게 하는 효과는 확실했다.

"으으, 자만하지 말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래야 최대한 부족민을 살릴 수 있다.

<거인의 표피를 얻었습니다.>

<거인의 표피를 얻었습니다.>

<거인의 표피를 얻었습니다.>

<거인의 표피가 새로운 경지에 도달합니다.>

<특성 '거인의 가호'를 얻었습니다.>

"으읍."

철두는 척추가 찌릿한 기분이었다.

이것은 마치 뒷골목에서 얻어맞고 집에 와보니 문신한 백수 삼촌이 누워있는 걸 본 기분.

이것이 든든한 백을 가진 기분인가?

든든함이 국밥 특대보다 더하다.

<거인의 가호>

거인족의 수호자, 타이탄이 받던 축복.

신성의 보호막은 늘 그대를 지켜줍니다.

"후우우우."

느껴진다.

찢어져 피가 흘러던 머리통은 이미 아물어있다.

이제 어지간한 날붙이는 철두를 벨 수조차 없다.

그것은 커터칼로 쇠를 긁는 정도의 무모함.

이 정도 방어력이면 조금 무모해도 어찌할 것인가?

부작용 따위도 아니다.

철두는 늘 자신감이 넘쳤고, 무모했으니까.

<강철두>

종족 : 바바리안

출신 : 발할라

등급 : 자유 영주

생명 : 98%

마나 : 62%

<보유특성> -

바바리안의 심장, 요정의 가호, 저주 내성, 마상무예, 골렘의 회복력, 쌍수무기술, 거인의 위상, 거인의 가호

<보유기술> -

창 숙련(2), 검 숙련(3), 도끼 숙련(3), 궁술(2), 둔기숙련(2), 투척(2), 내려찍기, 달리기, 강타(2), 탐색(2), 승마, 도약, 질주

<활성화 구슬> -

근력 108

민첩 94

체력 111

감각 102

마력 93

"후후후."

차오르는 자신감에 당장이라도 지르골에게 달려가고 싶은 걸 꾹 내리눌러 참았다.

스탯은 거의 뻥스탯이다.

철두의 현재 적응 스탯은 60 정도.

한계만 저렇게 늘어났지, 아직 그 간극을 메우지 못했다.

하루 반.

아직 스스로를 담금질할 시간이 남아있다.

헛되이 쓸 수 없다.

철두는 오랜만에 정좌로 앉아 조용히 호흡하며 눈을 감았다.

세상을 바라보던 눈이, 내면을 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집중하자 마음의 세계를 본다.

메마른 언덕.

바바리안 에이든이 심상 공간에서 눈을 떴다.

"후우, 후우."

숨이 가쁘다.

에이든은 초조한 얼굴로 얼른 주변에 있는 나무몽둥이를 집어 들었다.

홰액, 홰액!

1분 1초가 아깝다.

한 번이라도 더 휘둘러야 한다.

둔기숙련 3은 당연히 달성해야 하고, 검, 도끼, 둔기 어떤 것이든 간에 제발 레벨 4의 경지에 도달했으면 싶은 심정이다.

그리하면 그 괴물을 잡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허억, 허억."

홰애액!

몽둥이는 에이든의 조급한 마음처럼 바쁘게 움직였다. 한번 휘두를 때마다 한 명의 부하를 더 살릴 수 있다면 수천 번이라도 휘둘러주마.

더는 동료들이 이곳에 찾아오는 게 싫다.

나의 치부를 보여주기도 싫고, 그들이 혼이 되어 찾아오는 것도 싫다.

쇄애애액.

에이든의 나무몽둥이가 바삐 움직였다.

160화 준비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