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eads / BARBARODELAESTACIONDESEUL / Chapter 8 - 190-200

Chapter 8 - 190-200

190화 털어 챙겨

파사삭.

멋지게 조각된 분수대의 머리통이 떨어졌다. 어깨에 메여 있던 항아리도 뚝 하고 떨어졌다.

"오! 나이스."

철두가 항아리를 받아들자 곧장 메시지가 떴다.

<적대세력의 시설물을 파괴하였습니다.>

<주화 4219개로 전리품을 회수할 수 있습니다.>

"후후, 해야지."

파괴만 하고 돌아가면, 놈들이 주화만 소비해 다시 복구하는 건 쉽다.

이건 당연히 뺏어 가야지.

"어어억!"

페리슨은 입을 쩍 벌렸다.

'저걸 떼어가?'

형님의 기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휙 하고 사라지더니, 굉음이 들렸다.

와르르릉.

전직소가 무너졌다.

그러곤 그리핀이 날아올랐다.

"으아아악!"

"그리핀이다!"

"변태 야인이다!"

백작령의 주민들이 혼비백산하는 사이, 페리슨은 빠지려는 턱을 붙잡았다.

'미, 미친! 형님이 아이언헤드 영주였어?'

그냥 떠돌이 용병 정도로 생각했지, 결단코 지금 가장 화젯거리인 아이언헤드의 영주인 줄은 몰랐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지금 영주가 홀로 적진 한복판에 등장한 건가?

미친놈인가, 정말?

슈슈슈슛.

하늘로 날아오른 그리핀을 향해 성의 방어 타워가 작동하며 온갖 마법이 난무했으나....

파파팡!

알려진 대로 아이언헤드 영주는 정령으로 방어마법을 펼치며 어렵지 않게 탈출에 성공했다.

파지지직!

전격의 타워가 활성화되어 허공에 번쩍이는 번개 줄기를 내뿜었으나, 뒤늦은 처사였다.

"저놈이다! 잡아라!"

"헙!"

병사들이 몰려와 페리슨을 향해 창을 겨눴다.

페리슨은 순간 좆됨을 감지했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울상이 되었다.

"흐으으윽,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일부러 흐느끼다 보니 진짜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났다.

"개수작 부리지 마라!"

"흐으윽, 아닙니다. 여태 저는 그놈에게 인질로 잡혀있었습니다. 병사님들 덕에 구원받았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흥! 저놈을 포박해라."

"아이구, 제 동료들이 그놈에게 모두 끔찍하게 살해당하고, 저만 포로로 잡혀 무서워 죽는 줄 알았습니다요."

"잡아가라!"

어차피 조사해보면 다 나온다.

페리슨은 끌려가면서도 연신 감사 인사를 연발했다.

"흐흑, 감사합니다. 이제 살았어! 살았다!"

*

N344 맵의 중심부엔 뾰족하게 솟은 산이 있다.

정상 부근엔 만년설이 덮여있을 정도로 높은 이 산의 이름은 하늘산.

하늘산을 중심으로 북부는 포도 농사와 밀 농사가 반이고, 남부는 밀 농사와 보리 농사가 반이다.

백작령이 있는 북부가 번화했고, 남부는 그에 반해 낙후되었으나, 그렇다고 아예 시골 마을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남부 21개 마을 중에 중심 역할을 하는 벨로타는 제법 도시 풍광이 느껴지는 큰 마을로, 상점과 용병 길드도 있었고 상시로 주둔하는 영지군이 있었다.

"정렬! 정렬해!"

벨로타 마을 주둔군의 지휘권을 가진 선임기사 오헬은 병사들을 다그쳤다.

벌써 11개의 마을이 털렸다.

위치상 다음 차례는 벨로타 마을.

아직 약탈당하지 않은 인근 마을에 총동원령을 내려 700명의 군사가 모였다.

이중 벨로타에 주둔 중인 정식 상비군은 100명.

나머지 700명은 마을 자체의 수비군인 자경단원들이다. 말이 자경단이지 별다른 위기도 없는 농경 마을이기에 그냥 마을 청년들이다.

"시발! 저기 삐뚤잖아!"

"줄 서! 줄!"

오헬의 신경질에 병사들이 자경단원들을 몰아쳤다. 자경단원들의 표정에 두려움이 가득했는데, 오헬은 그것이 마뜩잖았다.

억지로 참고 있지만, 그가 느끼는 압박감과 스트레스도 저들 못지않다.

'시발, 나더러 어쩌라고.'

지르골이 당했다.

그리고 우로사 남작도 패배했다.

제대로 된 전투를 겪어보지도 않은 이 병력을 이끌고 적을 막으라고?

두두두두두.

"적이다!"

망루에 올라있던 병사의 말에 자경단원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저 멀리 흙먼지를 일으키며 접근하는 기마대의 모습이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들을 보는 듯했다.

"시위 당기지 마! 손 풀어!"

병사들이 성급히 시위를 당기는 궁수들을 정렬시켰다.

오헬은 벨로타 마을의 망루에 올라 가만히 병력을 보았다.

기병대의 수는 고작해야 200명 수준.

그에 반해 자신들의 병력은 700명.

압도적으로 많은 수지만, 목책을 나서서 싸운다는 선택지는 없다.

망루마다 올라서 있는 궁수들과 목책 문 뒤에 도열해 있는 창잡이들은 잔뜩 겁에 질려있었으나, 오헬은 억지로 호기를 부려 적의 수를 줄여 말했다.

"적의 수가 적다! 고작 100명이다! 쫄지 마라!"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허세였으나, 스스로에게 오히려 더 위안이 되어 용기가 차오른다.

오헬은 침을 꿀꺽 삼키곤 저들을 보았다.

다행히 소문의 그리핀은 없다.

'잘하면 막아 낼 수도.'

두두두두.

유격대를 이끌고 온 최준섭은 제법 단단한 목책으로 두른 벨로타 마을을 보며 혀를 찼다.

"뭐야? 이놈들은 싸우려고 하나?"

그간 11개 마을을 털면서 한 번도 저항다운 저항을 맞이한 적이 없다.

이번에 처음으로 전의를 불태우는 수비군을 맞이해 최준섭와 구정욱은 머리를 맞댔다.

"흐흐, 돌격하자!"

"안되죠. 목책 봐요. 피해 클 겁니다."

유격대 공격대 합쳐봐야 고작 200의 기병이다.

기병으로 넘을 정도로 허술해 보이는 목책성이 아니다.

"그럼 목책 밖의 마을만 약탈할 셈이냐?"

"그건 좀...."

최준섭이 미적거리자 구정욱이 콧김을 뿜으며 대검을 치켜들고 달려갈 채비를 했다.

"어어? 작전 짜야죠."

"흥, 작전은 무슨! 내가 길을 뚫겠다."

구정욱의 자신만만한 말에 최준섭이 고개를 저었다.

"병력 손실이 생기면 영주님이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

자신만만한 구정욱도 강철두가 언급되자 움찔했다. 확실히 휘하 공격대는 너무 약하다.

눈먼 화살에 맞으면 죽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반면 구정욱은 자신이 있었다.

'오우거 스킨을 죄다 먹이든지 해야지 원.... 어?'

그러고 보니, 그러면 되는 거 아닌가?

공격대 휘하 병력을 모두 오우거 스킨, 오우거 파워를 먹여버리면 최강의 부대가 탄생하지 않을까?

갑옷을 입지 않아도 최강의 방어력을 자랑하는 부대! 덜어낸 무장만큼 기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부대!

이거, 이번 보급훈련이 끝나면 오우거 사냥터나 전전해봐야겠다.

"그럼 최 대위가 공격대까지 지휘하시오. 내가 홀로 뚫어보지!"

"예?"

"하얏!"

구정욱은 곧장 대검을 쥐곤 말을 박찼다.

두두두두.

최준섭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노빠꾸시네."

특성석이 사람 성격에 미치는 영향이 대단한지, 오우거 특유의 강약약강을 그대로 닮아간다.

강한 상대가 있다면 누구보다 빠르게 내빼지만, 약한 적에게는 재앙이나 다름없는 숲의 제왕 오우거.

슈슈슈슉.

빗발치는 화살의 정확도가 낮아, 대검으로 위협적인 것만 쳐내며 진격한 구정욱이 목책에 힘껏 부딪쳤다.

콰앙!

강철두와 다르게 구정욱의 몸통박치기는 목책을 부서뜨리지 못했으나, 적 병력을 당황시키기엔 충분했다.

꾸역꾸역 날리는 화살을 맞아가며 목책을 올랐다.

이윽고 목책 문이 들썩이더니 열릴 조짐을 보였다.

"와, 존나 무식하다."

예비역이긴 하지만 최준섭에게는 선배 장교 출신인 구정욱이다. 새삼 저렇게 무식하게 싸우던 사람인가를 떠올려보면 격세지감이다.

오우거 특성석이 뭐라고 사람이 저렇게 무모해지나.

"돌격!"

어쨌든 기회를 마련했는데 싸우지 않을 수도 없다.

두두두두두.

200의 기마대가 일제히 달려들었다.

슈슈슉.

망루에 오른 궁수들이 사격을 가했으나, 기마대 전원의 무장이 활인바.

슈슈슈슈슉!

대응해서 날아가는 화살의 수가 월등히 더 많았다.

"으아악!"

망루를 표적으로 수십 발의 화살이 날아가니 궁수들이 화들짝 놀라 피할 새도 없이 맞았다.

"갈고리 걸어!"

휘익, 턱!

"당겨!"

목책 문에 접근한 기마병들이 갈고리를 걸어 당기니 목책 문이 서서히 기울다 이윽고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쿠우우웅.

목책 문이 사라지고, 안에서 힘껏 밀고 있던 구정욱이 바닥을 굴렀다.

"으자자자!"

한 바퀴 구르고 일어선 그의 등에 화살이 네 발 꽂혀있었다.

"헐, 괜찮으세요?"

"흐흐, 별거 아니다."

"...뽑아 드려요?"

"전장부터!"

"네."

구정욱은 등에 화살을 달고도 용감하게 나섰다. 적들은 창을 쥐고 있을 뿐,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전혀 싸울 의지가 없어 보였다.

"멈추시오!"

그때 소통의 비약을 들이킨 오헬이 나섰다.

"그, 그대가 아이언헤드 영주시오?"

과감한 구정욱의 모습에 강철두를 떠올린 것은 당연했다. 오헬의 말에 구정욱은 큰 칭찬을 들었다는 듯 호쾌하게 웃었다.

"우하하하! 나는 그분을 모시는 오른팔이다."

구정욱의 말에 최준섭의 눈썹이 꿈틀했다. 하지만 끼어들기엔 이미 한참 늦었다.

"이럴 수가. 그의 부하가 이 정도면 그는 대체...."

"흐흐, 우리 영주님은 더 굉장하시지. 덤벼라, 이놈!"

구정욱이 대검을 치켜들었다.

오헬은 비장한 얼굴로 칼을 빼 들었다.

"이들은 마을에서 끌어모은 징집병이오."

"그게 뭐 어쨌다는 말이냐?"

"내가 지거든 이들을 매몰차게 학살하지만 말아 주시오."

"흐흐, 오냐. 알았다."

구정욱의 대검이 오헬의 검과 부딪혔고, 승부는 곧 머지않아 결과가 났다.

"크헉!"

오헬이 쓰러지며 빛으로 사라지고, 전리품으로 그의 인벤토리에 있던 검이 한 자루 떨어졌다.

"쯧, 기사 놈들 검은 꼭 챙겨 다니는군."

전리품을 줍자, 곧 병사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창을 버리고 무릎 꿇었다.

"구 선배. 이리 오시오."

"으음. 살살 뽑게."

"거 되게 질기네, 거의 피륙에만 박혔소."

오우거 스킨이 대단하긴 한지, 사람의 살가죽에 박힌 화살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상처가 얕다.

푸시시시.

화살을 뽑고 포션을 붓는 것으로 응급처치를 마쳤다. 그 사이 부하들이 항복한 병력들을 모조리 포박했다.

최준섭은 소통의 비약을 먹고 병사 몇에게 묻더니 곧 구정욱과 향후 진격로를 논의했다.

"남은 마을이 9개랍니다. 어쩝니까?"

"어쩌긴 뭘 어째. 싹 털어야지."

"포로가 너무 많아요. 다 달고 다닐 순 없잖아요."

"으음."

애꿎은 목숨 죽일 이유도 없다.

그렇다고 돌려보내자니 아군을 향해 한번 창을 들이밀었던 자들이다.

"네가 남아서 지켜라. 내가 나머지 털어오마."

"으음, 그냥 이 마을이 지리상 거점인 것 같으니, 그냥 물자들을 이리로 모으죠."

"어디서 모으든 일단 털러 가마."

남은 9개 마을에서 자경단을 싹 끌어모았다 하니, 별다른 저항도 없을 것이다.

"종자는 남겨두고 챙겨요."

"내가 바보냐?"

구정욱이 공격대를 이끌고, 포로 중에 길잡이 몇을 추려서 바로 길을 떠났다.

최준섭은 추적석을 만지작거렸다.

곧 수레를 대동한 후방부대가 이 추적석을 따라 집결해, 여기 있는 물자와 사로잡은 포로들을 데리고 아이언헤드 성으로 복귀할 터다.

"영주님은 뭐 하시려나?"

최준섭은 강철두를 생각하다가, 문득 그의 그늘에 가려져서 그렇지 자신들도 꽤 강한 것은 아닐까 싶어 우쭐해졌다.

"아닌가? 얘들이 약한 건가?"

가만 생각해보면 제국의 역사가 있을 터인데, 이들은 왜 이리 약한 걸까?

몬스터를 사냥하면 스탯석이 나오고, 그것만 하여도 어지간한 사람의 한계는 뛰어넘을 텐데 말이다.

'근데 이 맵에 몬스터가 있었던가?'

문득 N344 맵을 돌아다니며 몬스터를 마주친 적이 몇 번인지 가물가물했다.

다섯 번은 넘었는데....

열 번은 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이 드넓은 맵에서 말이다.

191화 철두 브라더후드 (1)

박준필은 아이언헤드 성을 방문하고는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게 대체...."

여기만 저세상 발전 속도를 자랑하는지, 불과 몇 주 전과 또 판이하게 달랐다.

터만 잡혀있던 외성은 거의 축조가 마무리되고 있었고, 일하는 인부들도 바글바글했다.

"한국 사람들이 아닙니다."

놀란 건 이방 안승우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가리키는 방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언어가 낯설다.

"일본인들이 여긴 왜...."

"저, 저긴 서양 사람들 같은데요?"

들려오는 언어도 다양하고, 인종도 다양하다.

다인종 다국적의 도시가 되어버린 아이언헤드 성으로 발걸음했다.

외성벽의 문은 동서남북으로 4개가 되었고, 어디나 병사 두어 명이 지키고 서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박준필의 얼굴을 보곤 알은체를 했다.

"한양의 사또 아니십니까?"

"아, 낯이 익군그래."

"하하, 전역 전까지 1군 사령부 복무했습니다. 들어오십시오."

"그래, 반갑구먼."

<아이언헤드 외성, 10주화를 사용해 입장할 수 있습니다.>

셋은 성문에 가까이 다가서자 뜨는 알림창을 보곤 깜짝 놀랐다.

"헙!"

"하하, 처음 와보는 사람들은 다들 놀라더군요. 우리 영지는 출입세가 자동 징수입니다."

"...그렇구먼."

안승우의 눈이 반짝였다.

시스템 메시지로 성을 다스릴 수 있다면, 행정력의 낭비를 얼마나 많이 줄일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을 지경이다.

'거의 전산화된 도시 관리 시스템이 아닌가?'

그냥 전산화도 아니고, AI가 알아서 행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무인 징수 시스템이라니.

"아, 성에 들어가시면 자정에 보호세 2주화도 빠져나갑니다. 쇼핑할 때는 주화 주머니가 비지 않게 유의하십시오."

"허허, 알겠네."

박준필과 안승우 정윤승이 외성 남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서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쇼핑?"

"저쪽 중앙 광장 쪽에 상설 시장이 있습죠. 가보십쇼."

"그러세."

문지기의 마지막 안내에 따라 중앙 쪽으로 이동했다. 어차피 철두를 만나려면 아이언헤드 성이 자리한 그곳으로 가야 했다.

안에 들어와서 보니 여기저기 아직 휑한 들판이 가득하지만, 오가는 사람들의 다양함에 다시 한번 놀랐다.

"제, 제국민도 있습니다."

"아예 현지 이계인도 많아 보입니다."

"...."

박준필이 천천히 도시 구경을 하며 걷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마중 인력이 나왔다.

아이언헤드 성에 파견 근무를 나와 있는 최승아의 정보소대였다.

"충성!"

"그래, 별일 없...진 않아 보이는군."

"지구에 다녀오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혹, 최근 5일 치 보고서 못 보셨습니까?"

"...그전 것도 못 봤네."

한양의 인구 유입으로 골치가 아파 아이언헤드 성에서 주기적으로 오는 보고서를 받아보질 못했다.

실책이라면 실책.

"아! 직접 안내하겠습니다."

"그보다 여긴 왜 이리 사람이 많아졌는가?"

"나트롱 백작의 2차 침략의 승전은 들으셨습니까?"

"들었지. 그것 때문에 축제를 한다는 것까지 본 것 같군."

"그러시군요. 그때의 축제로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많이 몰렸습니다."

"어떻게?"

"한양에서 NITO를 통해 이곳 좌표석을 넘기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아!"

이해가 되었다.

그때 넘긴 게 1000개가량.

그것은 세계 각국의 좌표석과 맞교환되었다.

그렇게 박준필의 손에도 여러 나라의 좌표석이 들어오지 않았는가?

"그렇군."

좌표석은 한 사람만 가지고 있어도 동료들과 함께 이동이 가능하다.

이동하고, 좌표석 추출하고, 다시 돌아가서 전해주고, 동료와 함께 다시 이동하고....

이 과정에서 고블린 주화가 쓸데없이 낭비되는 것이 유일한 단점이지만, 주화가 많고 사람이 여럿 있으면 좌표석의 무한 복사가 가능한 셈이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이렇게 몰린다고?"

겨우 축제하나 즐기자고 그 많은 주화를 태우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열흘의 축제 기간 동안 축구 대회가 열렸습니다. 휴먼 채널에서 이 소식이 핫해졌고, 각국에서 너도나도 참전하다 보니...."

최승아 소위의 보고에 안승우가 감탄했다.

"기획자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대단합니다! 사람들을 모으는 능력이 대단한 자입니다."

하지만 아직 감탄하기엔 일렀다.

"그 이후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긴 했는데, 정착을 시도하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이에, 아이언헤드 성에서 세금을 대폭 측정해...."

"허어!"

"으음."

최승아 소위의 설명이 더해지면 질수록 세 사람이 감탄만 하였다.

"이후 부동산이 경매에 부쳐지며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몰렸습니다. 지금이 가장 싼 타이밍이라고 너도 나도...."

"허어!"

축제를 벌여 사람을 모집했다.

무료로 식량을 나눠주고, 축구 대회 등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대회도 개최했다.

그렇게 사람들을 끌어모은 뒤 세금 정책을 시행, 수익화를 시작했고 부동산 투자를 유도해냈다.

인구는 더욱 늘어났고, 그렇게 늘어난 다양한 나라 출신의 사람들로 인해 자체적인 국제 시장이 열렸다.

그렇게 시작된 상설 시장이 이제는 그 자체로 커다란 교류의 장이 되어, 아이언헤드 성이 이동 포탈망을 가진 마을들 사이에는 중심 교역의 장과 비슷하게 되었다.

"처, 천재적입니다."

안승우는 감탄했다.

"IT 기업들이, 특히 플랫폼 사업자들이 많이 쓰는 방법입니다! 이 정책입안자는 IT 출신이 분명합니다!"

안승우는 흥분해 침을 튀기며 정책입안자를 칭찬했다.

플랫폼을 키우는 방식이 이와 유사하다.

마케팅이든 서비스든, 트래픽을 유발해 사용자를 모으고, 그 모여든 사용자들을 통해 플랫폼을 활성화한다.

이후는 플랫폼 자체가 강력한 수익모델이 되어 안정적으로 여러 사업들을 진행하는 것이다.

상설 시장이 그러했고, 오가는 사람들이 자동으로 내는 입장료, 보호세,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자는 모든 게 돈이 된다.

"허어, 철두의 곁에 그런 인재가 있었던가."

"새로 영입한 게 아니겠습니까? 꼭 만나보고 싶군요!"

안승우가 도시의 시스템에 감탄하는 사이, 정윤승은 다른 데에 눈이 가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무장 상태가 좋습니다. 랭커도 여럿입니다."

이동 포탈망을 통해 여기 올 정도의 주화를 벌어들인 자들이다. 애당초 국가에서 밀어주는 인력이거나, 랭커 급은 되어야 가능한 부유함이다.

"다들 한가락 하는 이들이니 사실 여기 오가는 모두가 고급 전투원이나 다름없습니다. 일식이나 월식 따위는 문제 될 것도 없겠군요...."

세계 각지의 랭커급이 모인 곳이 되어버렸다.

"꼭 좋은 것만은 아닐세."

박준필은 조금 염려스러운 눈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살폈다.

도시가 한순간에 팽창했지만, 다문화 국가들이 늘 겪는 문제점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같은 지역 출신들끼리 뭉쳐 있는 것이 보인다.

아이언헤드령 안에 작은 차이나타운, 제팬 타운, 아메리카 타운 등의 여러 세력들이 난립한 것이나 다름없다.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강력한 때야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약화되면 분열의 전조가 될 것이다.

"문제 있겠습니까? 여기 영주가 강철두 아닙니까?"

"으음, 그렇긴 하지만."

애당초 불안을 안고 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저들을 각각 문화권으로 분리해 저리 내버려둘 게 아니라 한데 뭉칠 수만 있다면....

아주 강력한 도시가 탄생할 수도 있을 텐데.

박준필은 못내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아이언헤드 성으로 들어갔다.

내성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관리인단 단장이자 성의 집사로서 역할하기 시작한 엘리스가 박준필 일행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제가 모시겠습니다."

"얼굴이 좋아 보이는구려."

엘리스와는 구면일 뿐만 아니라, 보르탱 남작성에서부터 아이언헤드 성까지 오기까지 동행했기에 반가운 마음이 일었다.

"영주님의 은혜 때문이옵니다. 그간 무탈하셨는지요?"

엘리스는 박준필에게 깍듯했다.

영주의 친구임을 아는데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철두는 어딨는가?"

"영주님은 마구간에 계시옵니다."

"그럼 그리로 안내해 주게나."

"따라오시지요."

엘리스의 안내에 마구간으로 향했다.

마구간은 전보다 더 커져, 150필가량의 말이 있었다. 그중 유난히 독보적인 존재가 있었으니, 철두의 소나따였다.

강철두는 그런 소나따와 눈싸움하듯이 서 있었다.

"철두!"

"어, 준필이 왔는가?"

"뭐 하고 있는 겐가?"

"소나따 친구 만들어주고 있다."

"응?"

"후후. 이 녀석, 왕따다."

"...?"

무쇠얼룩말 소나따의 키는 다른 말들에 비해 1.5배는 크다. 키가 그 정도 크니, 길이는 말할 것도 없고 덩치가 내뿜는 위압감도 다르다.

애당초 '말'이긴 하지만 '몬스터'로 분류된 놈이 아닌가? 다른 말들이 겁먹어서 근처로 다가오질 못하고 있었다.

"이보게, 철두. 그건 다른 말들이 소나따가 무서워서 그리 행동하는 것 같네."

"말 사이에서 부대끼며 평범한 말처럼 굴면 말과 친구가 될 수 있다."

"하하하."

박준필이 웃었다.

"재밌는 소리군. 침팬지가 인간 사회에 살아간다고 인간이 되진 않네."

"비슷해질 수는 있지."

박준필이 고개를 저었다.

"소나따는 몬스터가 아닌가? DNA에 새겨진 야생성이 다르네. 지구의 얼룩말도 가축화가 되지 않는 종일세. 저 뿔이 두 개나 달린 소나따도 똑같네."

"...."

불퉁한 표정의 철두를 보며 준필이 웃으며 말했다.

"철두 자네니까 길들여 타고 다니는 거지, 마구간에서 다른 말들하고 사이좋게 지내는 건 어려운 일일 걸세."

"...그럼 야생으로 돌려보내 줘야 하나?"

"으음, 그게 저놈에겐 더 나을지도 모르지."

"...."

철두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 모습에 박준필이 물었다.

"뭘 또 그리 심각한가?"

"몹쓸 짓이군."

철두는 소나따를 잠시 마구간에 맡겨두려 하였다.

지금 철두는 탈것 2마리, 펫 2마리와 함께할 수 있다.

그중 한자리가 그리핀 '오식이', 다른 하나가 갈색 준마 '구아방'과 무쇠얼룩말 '소나따'다.

말의 쓰임이 겹치는 것 같아 당분간 소나따는 마구간에 두려 했다.

헌데, 소나따를 마구간에 풀어놓자마자 다른 말들의 상태가 이상해지는 것이 아닌가.

"마치 예전의 나와 같아."

"응?"

"나도 바바리안이 아닌가?"

"...."

박준필은 저도 모르게 안승우와 정윤승의 눈치를 살폈다. 친우인 자신은 이미 들어 알고 있지만, 이들은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역시 마구간에 두진 못하겠어."

못 할 짓이다.

침팬지와 사람이 다르듯,

인간과 바바리안이 다르고,

말과 무쇠얼룩말이 다른 것이다.

자신이 겪었던 외로움과 공허감 따위를 소나따가 똑같이 느끼게 할 필요는 없었다.

자리가 모자라지도 않으니, 자신과 함께 전장을 달리는 게 소나따는 더욱 행복할 터다.

지구에서 자란 강철두가 노바에 발을 디디고부터 무한한 자유와 해방감을 느꼈듯이.

"몬스터를 잡아두기엔 마구간은 무리지."

"...."

192화 철두 브라더후드 (2)

"흐흐흐, 상수도를 깔아봐요!"

김진태는 잔뜩 흥이 오른 상태다.

"여기 완성되었습니다. 시종장님."

"오! 역시 르망 님. 대단합니다."

"과분한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르망이 공손히 읍하며 아이언헤드령의 2인자에게 아부했다.

"그럼 라인은 이대로 하고, 일단 깝시다."

"참으로 획기적인 방식이옵니다. 제국의 여러 도시들이 그저 물을 흘려만 보내고 있지, 이렇게 수조를 만들고 그 압력 차를 이용해 파이프로 물을 공급하는 시스템은 본 적이 없사옵니다."

"흐흐흐, 지구에선 보편적인 거죠."

김진태가 허공에 생성 중인 시뮬레이션 건물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망루를 닮기도 한 이 건물은 거대한 수조다.

여타의 제국 도시들이 무한의 샘물로 분수대를 만들고, 그렇게 넘치는 물을 도시 여러 수맥으로 흘려보내 우물을 채우는 데 쓴다.

도시의 사람들은 그런 물을 길어 사용한다.

깨끗한 냇가에서 물을 길어 쓰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고, 그것이 개념으로 자리 잡은 곳이다.

'이 비싼 파이프를 겨우 수로에 쓰다니....'

르망은 내심 상수도 계획이 비효율적이며 자원 낭비라고 생각했지만, 2인자 김진태가 추진하는 계획이니 무조건 찬성하며 따르는 중이다.

"으흐흐, 수도세."

"...."

철의 재상이 이제 더 이상 야심을 숨기지 않으시는구나.

르망은 더욱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진태."

그때 집무실로 들어오는 소리에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철두 왔냐."

"영주님을 배알하옵니다."

털썩 쓰러져 공손히 절하는 르망을 보며 철두가 혀를 찼다.

"쯧, 도가니 나간다니까."

"영주님을 향한 존경이 하늘에 닿았는데 어찌 바로 서겠습니까?"

"...."

르망의 인사를 본 박준필 일행은 적잖이 충격을 먹었다.

"저분은 누구신지...."

"아, 준필이는 처음 보겠군. 우리 영지 수석마법사다."

"수, 수석!"

엎드려있던 르망이 감격한 얼굴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제 영주님이 나를 주저 없이 수석마법사라고 불러주시는구나.

"여긴 내 친구 준필이다."

"허윽, 영주님의 친우분을 배알하옵니다."

"허허, 나는 다른 마을 사람이니 그러지 마십시오."

박준필이 절하려는 르망을 일으켜 세워주었다.

얼핏 보기에 자신보다 어려 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젊어 보이진 않는다. 잘 쳐주면 30대 중후반?

그런 자가 철두에게 극존칭의 예를 다 하고 있다.

행성이 다르고, 세상이 다르며,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다. 연배 이전에 존귀함의 차등이 있는 곳이다.

그때 보급 장교 안승우가 나서서 르망을 존경심 가득한 눈빛으로 보았다.

"이분이 도시개발의 기획자시군요!"

"음? 나는 그저 마법사일 뿐이오. 도시의 개발은 오롯이 시종장님의 역할이지요."

"음?"

르망이 몸을 틀어 비켜서니, 안승우와 김진태의 시선이 마주쳤다.

"기, 김 시종장님이 도시개발을 주도하셨습니까?"

김 군이라는 말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주워 담고 존칭을 담았다.

"예? 예에. 제가 했죠."

지금 아이언헤드에서 세력창의 영지발전 항목을 건드릴 수 있는 것은 영주와 시종장뿐이다.

"허! 어찌 그리 기발한 생각을."

"기발이요?"

"부러 떠들썩하게 연회를 열고 대회까지 주최해 각국의 인재와 인력을 집중시킨 전략은 정말이지 탄복했습니다."

"...?"

그거 그냥 철두가 통 크게 쏜 건데요?

누가 축구공 가져와서 하나둘 축구하다 보니 토너먼트 열린 거고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세수 정책까지 펼쳐, 도시의 유료화 모델까지 굳히시니 정말이지...."

"...."

안승우의 눈빛엔 누가 봐도 존경이 가득했다.

그거 사람들이 너무 안 돌아가고 눌러붙어서 쫓아내려고 세금 매긴 건데요?

"풍부한 노동력의 대규모 고용을 위해 외성 축조까지 진행하시니, 이야말로 노바 판 뉴딜정책이 아닙니까?"

"...."

그냥 부동산 경매로 한몫 챙겨서 원래 하던 공사 빨리 끝낸 건데요.

"감탄! 또 감탄했습니다! 이제 아이언헤드 성은 몰려든 각지의 인구와 그 상징성만으로도 부유한 도시가 될 기반을 마련했으니, 실로 굉장한 업적입니다."

"...."

존경심을 넘어 광기마저 내비치는 안승우의 눈빛에 김진태는 심히 부담을 느꼈다.

이 아저씨도 정상이 아니구나.

"벼, 별거 아닙니다."

"허어! 이토록 과한 업적에 이리 겸손하시니! 아이언헤드 성의 미래가 밝습니다!"

박준필은 이방 놀이로 다져진 안승우의 혓바닥 드리블에 정신 차리지 못하는 김진태를 구원하고 나섰다.

"어허, 안 대위 그만하시게."

"헙, 넵!"

이방이 아니라, 계급으로 부르시는 것을 보니 우리 사또... 아니, 사령관님의 기분이 언짢으신 모양이다.

"곤란해하시지 않는가? 우린 부탁하러 온 입장일세."

"실언을 용서하십시오!"

"아, 아니에요."

김진태가 넙죽 허리를 숙이는 안승우를 일으켜 세우며 화제를 돌렸다.

"부탁이 뭐에요?"

"면목 없는 부탁이네만, 식량을 좀 더 얻을 수 있겠는가?"

박준필은 굉장히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언헤드 성도 인구가 폭증한 것을 눈으로 본 마당에, 부족할 것이 뻔한 식량을 나눠달라 할 염치가 없어서다.

"그런 걸 뭘 그리 어렵게 말하나?"

"응? 비, 비축이 많은가?"

"후후, 지금 추수해서 옮기는 길이다."

"...?"

박준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추, 추수라니. 농사를 짓는단 말인가?"

아이언헤드 성의 근처에 개울이 몇 개 있긴 하지만 논농사를 크게 지을 정도의 수량은 아니다.

그저 식수로 쓰고 밭농사에 쓰이는 정도라면 모를까.

성으로 들어오며 본 농경지도 성의 규모나 인구 수에 비해 코딱지만 했다.

"우리 밭은 아직 추수하려면 멀었지. 백작이 농사 지은 걸 얻어오는 길이다."

"...."

전쟁 중인 나트롱 백작이 순순히 식량을 내어줄 리가 없으니, 약탈했다는 소리와 진배없다.

"그, 그렇구만."

"곡식이든 옷이든 상점에서 사서 가라. 수량에 제한 두지 않겠다."

약탈해온 물품들은 모조리 성의 창고에 쌓인다.

그렇게 쌓인 물자는 영주의 곡물상, 포목점, 무기점 등... 영지 직속의 상점을 통해 민간에 팔린다.

돈만 있다면 기본적인 물자는 다 구할 수가 있는 곳이 아이언헤드 성이다.

"어려운 부탁이 아니라 다행이네요. 하하."

"...."

걱정이 무색하게 흔쾌히 허락하는 강철두의 배포와, 정말 비축에 문제가 없는지 아무런 근심 없는 김진태의 웃음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부지런히 벌어와야겠네."

"후후, 돈이 모자라면 꿔줄 테니 마음껏 가져가라."

"한양은 이 은혜를 절대 잊지 않을 것일세."

한양에 대규모 농지 부흥이 한창이다.

종자는 물론, 첫 추수까지 버틸 식량은 이제 해결이 되었다.

철두가 박준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후후, 술이나 한잔하러 가자고. 내가 대접하지."

늘 관청에 가서 얻어먹기만 했지, 제대로 대접해 본 기억이 없다.

"하하, 좋지. 기대하겠네."

박준필 일행을 이끌고 1층 연회홀에서 파티가 벌어졌다. 요리사들이 한 음식들이 내어져 오기 시작하자 안승우는 진지하게 감탄했다.

"처음 보는 음식들인데 어째 맛이 하나같이 좋습니다."

"후후, 우리 요리사가 입이 가벼워서 그렇지 솜씨는 좋다."

용병 잭에게 나불나불 떠든 견습요리사 렌은 이제 견습 딱지를 뗐다. 제국의 요리는 그가, 한식은 문경 이모가 담당했는데 거대한 식탁에는 다양한 요리가 올라와 있었다.

한 순배, 두 순배 술을 돌리며 즐겁게 먹고 마시다 보니 자유롭게 사람들이 오갔다.

"유격대 복귀했습니다."

"어, 준섭이. 앉아라. 고생했다."

"넵, 여기 한잔 주십시오."

"그래."

쫄쫄쫄.

"크으, 좋다."

"정욱이는?"

"조금 늦게 복귀한답니다."

"왜?"

"오우거 잡으러 갔습니다. 특성석인가? 그거 얻는다던데요."

"음? 흑색부 쓰게?"

특성석은 같은 종류를 한 번만 흡수할 수 있다.

중복해서 흡수하려면 흑색부를 써야 한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복귀 명령 내릴까요?"

"됐다. 급한 일도 없는데."

"넵, 흐흐. 사령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최준섭이 박준필에게 알은체를 하며 옆자리에 앉아 한참 떠들었다.

"에이, 약탈이라뇨. 보급품 징발이죠. 하하, 우리가 또 군인 출신들 아닙니까? 민간인은 안 건드립죠."

"말이라고 하십니까? 얼마나 협조적인데요."

"우리 영주님 그리핀을 봤다 하면 다들 벌벌 떤다니까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미 명성이 퍼져서 아이언헤드 군이라 하면 싸가라고 수레에 실어 줍니다. 반항하지 않으면 죽이진 않는다고 소문이 자자하거든요."

최준섭은 말이 많았다.

한참이나 그와 대화하다 보니 박준필은 이제 그가 특임대 시절의 최 대위와는 아주 거리가 멀어져 버렸음을 느꼈다.

'다른 사람이 다 됐군그래.'

최준섭만이 아니다.

뒤늦게 연회에 참여한 이은영 소령이 그랬고, 오준환 준위도 그랬다.

그들은 하나같이 철두를 정말 상관. 그 이상으로 따르고 있었다.

계급이 높은 상급자가 아니라, 정말 차원이 다른 존재.... 존경의 대상으로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그 대상이 되는 강철두는 하대가 자연스럽다.

아이언헤드령의 영주의 모습에 너무 잘 어울리는지라 박준필은 어쩐지 씁쓸하면서도, 그가 자신의 친우임에 어깨가 으쓱했다.

'철두를 그저 지구 출신의 20살 청년으로 보다간 큰코다칠 게야.'

제발 범을 못 알아보는 하룻강아지가 나오질 않길 빌었다.

"어유, 난 이제 무리일세. 허허, 더 마시면 정말 취하겠어."

"준필이 늙었군."

"하하, 당연한 소릴 하는군. 난 이만 쉬어야겠네."

"후후, 알겠다. 내일 다시 마시자!"

"하하, 알겠네."

"제가 모시겠습니다."

얼큰하게 취한 박준필을 안승우 대위가 부축해 손님용 숙소인 별궁으로 향했다.

"여기 누우십시오."

"흐흐, 고맙네. 우리 이방."

침대에 박준필을 누인 안승우는 바로 자리를 떠나지 않고 한참 머뭇거리다가 이내 말문을 열었다.

"사또. 주무십니까?"

"으음? 이방, 아직 거기 있었나?"

박준필은 머리가 빙빙 도는 와중에도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방의 얼굴이 두 개로 보였다가 하나로 보였다가 했다.

"흐흐, 아까 보니 술도 깨작이더구만.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는가?"

"하하, 불편은요.... 그...."

"곤란해하지 말고 말해보게나. 우리 사이에 뭘 그리 조심할 게 있는가?"

안승우 대위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사또는 알고 계셨습니까?"

"무엇을 말인가?"

"철두 군이 바바리안인 것에 대해...."

"하하, 알지, 알지."

"...."

역시 알고 계셨구나.

"그래서 친구가 되신 거군요."

이방은 철두가 지나치게 버릇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탈영병을 무참히 처형했을 때는 사이코패스인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허나, 그가 외계인인 바바리안이라면 이해가 된다.

종이 다른데 나이가 대수랴.

"하하하, 그래서 친구가 된 게 아니라, 친구가 되었기에 알게 된 게지."

"...?"

안승우가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저는 이제야 강철두 군의 행동이나 말투가 이해가 됩니다."

"흐흐, 그렇지."

박준필은 알고 있다.

이제는 안승우도 안다.

"동물원에서 자란 사자가 야생에 풀리고서야, 자신이 왕인 걸 깨달은 게지."

"영주의 자리가 더없이 잘 어울리는 분입니다."

안승우가 박준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193화 퀘스트의 목적

지구인들이 이룬 마을 중에 유일하게 전직소를 갖춘 곳이 아이언헤드령이다.

전직소 자체만으로도 아이언헤드령에 방문할 이유는 충분했다.

박준필 일행도 온 김에 전직소를 찾았다.

<주화 100개를 소모해 당신의 운명을 볼 수 있습니다.>

"떨리는구만."

박준필은 전직의 돌에 손을 얹고는 주화 100개를 소모했다.

<당신의 운명은 촌장입니다.>

<주화 22개를 지불하여 촌장으로 전직할 수 있습니다.>

"허, 촌장이라는군."

"허, 사또께서는 고을 원님이 운명인 모양입니다."

이방 안승우가 즉시 아부했고, 박준필은 전직을 할까 말까 고민했다.

"하지 마라."

"흐음."

철두가 만류하고 나섰다.

무조건 전직한다고 좋은 게 아니다.

"전직하면 영웅의 길을 갈 수 없다."

"하하, 그건 틀린 말일세."

"응?"

박준필이 웃었다.

"영웅의 길은 예외적인 퀘스트라네."

"예외?"

"그래, 이미 증명된 일이기도 하지."

박준필은 철두가 모르는 정보도 많이 알고 있다.

NITO를 통해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은 기밀정보도 다수 받으니까.

"들어보게, 철두. 종말시험, 탈출, 마지막 탈출까지. 이 세 개의 퀘스트는 우리를 지구를 떠나 노바로 향하도록 유도하고 있지. 이때가 처음으로 우리의 등급이 변하는 시점일세."

'노비스'가 된다.

노바로 향하는 포탈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

노바 입국 비자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그 뒤의 퀘스트를 생각해보게. 사실 파수꾼을 잡기 이전까지는 방목이나 다름없었지."

더 이상 특별한 퀘스트가 뜨진 않았다.

"던전 공략이 있지 않나?"

"맞아. 던전 공략, 이후에 더 발견된 정착 퀘스트까지. 둘은 공통점이 있네. 터전을 마련하는 퀘스트라는 것이지."

허허벌판에 정착하여 마을회관을 짓는 퀘스트와, 이미 존재하는 던전을 뺏어 소유권을 차지하는 퀘스트.

"두 가지 모두 등급의 변화를 가져오지. 노비스에서 정착민으로 바뀌는 것 말일세."

"흠, 그래서?"

"퀘스트. 이 퀘스트라는 시스템적인 메시지의 궁극적인 목적이나 목표가 노바의 인구를 늘리는 데 있다는 생각이 드네."

철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랑 영웅의 길이랑 무슨 상관이냐?"

"하하, 자네도 던전 공략하고 정착민이 되었다가, 영웅의 길을 받지 않았나?"

"그랬지."

"지금은 등급이 뭔가?"

"자유 영주다."

보르텡 남작을 해치우고, 그의 인장을 얻으며 선택의 갈림길 퀘스트가 떴다.

제국의 귀족이 될 것인지, 자유 영주가 될 것인지.

"촌장이든 정착민이든 영웅의 길 퀘스트를 받는 건 상관없다는 소리냐?"

"맞네. 이미 증명되었지. 일본의 랭커 중의 하나가 농부로 전직했다가, 이후에 스탯석을 활성화해 4대 스텟 모두를 50 이상 달성하고 영웅의 길을 걷고 있네."

등급이 어떻든 간에 '영웅의 길' 퀘스트는 별개라는 소리다.

"영웅의 길만이 오직 예외적인 퀘스트지."

무한결투장에 입성할 자격이 주어진다.

아울러 부활의 기회를 가질 수도 있다.

"으음."

철두는 머리가 복잡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다 문득 생각해냈다.

"우리 할배랑 장 씨도 예외적이다."

"맞아. 신의 부름과 장인의 길이라 하였지?"

두 사람이 받은 퀘스트.

둘 모두 전직의 돌이 이르는 대로의 운명이 아닌, 다른 길을 택했다.

신의 부름대로 걸어가는 길.

운명을 거부하고 스스로 개척하는 길.

"그건 정말 예외적이라 나도 아직 정보가 없네. 실험해보려고 해도 퀘스트 발동 조건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니...."

"신의 부름은 안다. 7일의 기도, 7일의 농사, 성물 보유, 미혼 4가지다."

"...고급 정보구만."

박준필은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외부인은 없다.

강철두와 김진태, 박준필, 안승우와 정윤승뿐이다.

"신의 부름 퀘스트는 내 실험해보고 결과 공유해주겠네."

"그렇게 해라."

장인의 길 발동 조건은 아직 밝혀진 바가 없지만, 차차 장인이 여럿 등장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직은 예외적인 등급을 가진 이는 '사제' 강용철과 '장인' 장소철뿐이다.

"어쨌든 난 촌장으로 전직하지. 사실 관리인등급이 나오지 않을까 봐 그간 마음졸여 전직소를 찾지 않았네."

박준필은 운명의 결과가 썩 마음에 드는듯했다.

"영웅의 길을 갈 수 있다면 나도 말릴 이유가 없다."

강철두도 그저 친구의 가능성을 쉬이 잃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강용철은 한계 돌파 스크롤을 사용하면 영웅이 될 수 있으니까.

<촌장으로 전직하였습니다.>

박준필이 22개 주화를 활성화해 촌장으로 전직했다.

"후우, 빨리 돌아가서 실험해보고 싶구만."

"무슨 실험 말이냐?"

"정착 퀘스트의 발현 요건 말일세."

취합된 정보로는 그렇다.

휘장 아래 모인 여러 직업군.

부족장, 촌장 등의 관리인 등급과 농부, 건축가, 요리사 등의 여러 직업군이 속해 있어야 하는 것으로 안다.

이미 일본의 사쿠라 시티는 시스템적으로 정식 마을로 등록되어 있다.

노바의 시스템적으로 보면 신서울이나 한양은 아직 정식 마을이 아닌, 노비스들이 뭉쳐져 있는 개활지나 다름없다.

"내 더 머물고 싶지만, 빨리 가서 실험해보고 싶으니 이만 가겠네."

"그렇게 해라. 너희는 전직 안 하냐?"

"저는 하지 않습니다."

"해야지요."

철두가 묻자 정윤승과 안승우가 각기 대답했다.

정윤승은 영웅을 노리기에 애당초 기본 직업군으로의 전직에 관심이 없었다. 2개 스탯만 50으로 올리면 곧 영웅이 되어 무한결투장에 입성이 가능해진다.

파팟.

"오오, 저는 역사학자입니다!"

"처음 보는군."

"이건 궁금해서라도 해봐야겠군요."

본디 직급인 보급 장교나 관련 업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안승우는 고민 없이 전직했다.

노바의 지식이 늘 그렇듯, 머릿속에 본디 있었던 것처럼 파고드는 역사학자의 지식은 안승우의 눈을 동그랗게 뜨게 했다.

"오잉, 연구소만 있으면 이거 어쩌면...."

안승우는 박준필을 보았다.

"연구소? 무슨 연구소?"

"역사연구소 말입니다."

"허허, 그래 노바의 역사도 재정비할 필요가 있지."

그 역사가 아니지만, 일단은 그저 고개를 조아렸다.

"우린 이만 돌아감세. 다음에 또 보자고."

"그래. 한양에 사람 많아서 골치면 언제든 넘겨라."

"하하, 알겠네. 헌데, 이미 여기에 고급 인재들이 널렸는데 굳이 왜 신병을 모집하려 드나?"

"음?"

박준필의 말에 철두가 턱을 쓰다듬었다.

세계 각국의 랭커들, 혹은 그에 준하는 상위 노비스들이 아이언헤드령 여기저기서 지금 노동력으로 쓰이고 있다.

이동 마법진을 이용할 정도로 재력이 있고, 실력이 있는 자들이 다수이니....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제 문제 되지도 않는다. 르망을 쪼아 소통의 팔찌를 여럿 제작하면 될 일이니까.

"좋은 계획인데?"

"허허허, 아무튼 또 보세."

"조심히 가세요."

강철두와 김진태는 박준필 일행을 배웅하고는 영주성의 집무실로 돌아왔다.

"외성도 이제 열흘 정도면 진짜 끝이다."

"요새는?"

"그건 내일 중으로 끝나."

뉴아 요새는 아이언헤드성의 첫 멀티다.

나트롱 백작성으로 향하는 길목이자, 서북쪽으로 뻗어 나가기 위한 군사 요새.

"슬슬 우리도 농사지어야 하는데."

"후후, 또 뺏어오면 된다."

"에이, 그래도 어느 정도 자급자족은 해야지."

"하면 되잖아?"

"하아, 농부가 없잖아."

아이언헤드성의 인구는 대부분 상위 노비스다. 농사를 짓기엔 너무 고급 인력.

"음, 좋아. 원하는 게 농부냐?"

철두의 말에 김진태는 서둘러 막아섰다.

"...아니."

"농사짓는다며?"

"아니, 하지 마."

"농부 구해오면 되는 것 아닌가?"

"하,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영지군이나 더 뽑아."

"후후, 알겠다."

"내정 건들 생각도 하지 마라! 괜히 사람 납치해오지 마!"

김진태가 신신당부했다.

저 무모한 영주에게는 빈말도 하기 조심스럽다.

"후후, 알겠대두."

철두는 곧 영지군 총대장인 오준환을 비롯해 각 부대의 대장들을 불렀다.

"신병 훈련은 잘돼가나?"

"그렇죠. 문제가 없는 건 아닌데...."

"무슨 문제가 있나?"

"스탯석이 모자랍니다."

"음? 사냥을 안 가나?"

"가죠. 가긴 가는데... 이게, 몬스터 개체 수가 뜸해졌습니다."

철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몬스터가 줄어?"

"네, 전에 비해 수가 줄었어요. 드랍률도 영 형편없어졌습니다."

"...."

스탯석의 공급에 차질이 빚어지면 신병을 키워내기 힘들다.

병사들의 숫자나 훈련도도 중요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스탯 흡수한계가 높은 인재의 발굴이다.

적어도 30개의 스탯석은 활성화해야, 한계돌파 스크롤로 20개를 추가해 랭커에 들 수 있다.

초급 기사 정도의 전력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아, 저도 이거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C넘버링 맵 말고 다른 맵은 영 몬스터 수가 적습니다."

"다 토벌되기라도 한 건가?"

철두가 말을 하다가 삼켰다.

그러고 보니.

"어째서 리젠되지 않는 거지?"

C614는 물론, 신서울이 있는 C422도 모두 몬스터들이 때가 되면 알아서 리젠되는데 말이다.

문득 불안감이 엄습했다.

"영 좋지 못한 예감이 드는데."

"...점점 몬스터가 줄어드는데, 이러다간 스탯석이 턱없이 모자라겠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이은영이 한마디 보탰다.

"제국에 기사가 생각보다 적은 이유가 이걸까요?"

"무슨 소리냐?"

"아니, 제국에 사람이 그리 많은데 인구에 비해 기사는 적으니까요...."

"...."

철두가 고민에 잠기는 사이, 최준섭이 조금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이거, 스탯석이든 뭐든 낭비할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고블린 상인도 스탯석은 알팔지 않습니까?"

"제국에서도 유통이 안 될까요?"

"보나 마나 값이 어마어마하겠지. 아니면 귀족들만 독점하거나."

"...."

철두는 가만히 듣다 보니 일이 생각보다 시급하다는 것을 알았다.

몬스터들의 리젠이 갈수록 뜸해지고 있으니.

"사냥이다! 지금부터 전 맵을 휩쓴다!"

"네!"

부랴부랴 영지군을 비롯해 병력들이 준비되는 대로 아이언헤드 성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스탯석, 스킬석, 특성석 무한 매입>

영지 게시판에도 스탯석을 꽤 높은 가격에 매입하기 시작했다.

김진태가 경매로 몇 개의 부동산을 더 내어놓으니,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여러 나라의 노비스들이 수중에 가진 스탯석을 팔기 시작했다.

끼아아아.

철두는 구정욱이 사냥 나간 오우거 출몰지 인근을 향해 날아갔다.

오크 나무꾼들이 리젠되는 숲 너머, 한강의 상류 지역의 숲이 오우거 출몰지다.

"음?"

뭉게뭉게 밥 짓는 연기를 보고 고도를 낮추다 보니 어렵지 않게 구정욱의 공격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몬스터가 아닌, 사람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슈아아아악.

급강하해 내려서니, 구정욱이 얼른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영주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저놈들은 뭐냐?"

"화전민 같습니다."

"음?"

철두가 살펴보니 숲속에 드문드문 오두막이 보였다. 숲 안에 마을이 만들어져 있으니, 하늘에서는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별거 없어 보이는데 왜 이러고 있냐?"

"그것이, 일단 대화를 해보려던 참입니다."

"훌륭하군."

바로 깨부수지 않고 대화부터 하다니.

철두가 나서자, 숲 입구에서 창을 들고 쭉 늘어선 사람들 뒤가 분주해지더니 구면의 인물이 튀어나왔다.

"음?"

기억이 날듯 말 듯한데.

저 얼굴은 분명....

"포멜?"

나트롱 백작의 행정관이자 가신.

뉴아 마을의 촌장이었던 그가 나는 듯이 뛰쳐 나와 철두의 앞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194화 합류와 역류

구정욱은 공격대를 이끌고 오우거가 등장하는 산을 올랐다.

"오, 나왔습니다!"

오우거가 쓰러지며 남긴 검은색 구슬을 들고 외쳤다.

"좋아! 용기를 얻고 싶은 도전자 누가 있나?"

"제가 하겠습니다."

"접니다! 제가 바로 적임자입니다!"

"좋다. 가져라!"

구정욱이 검은색 구슬을 하늘로 던져버렸고, 악다구니 쓰던 공격대 중 하나가 운 좋게 캐치해 활성화했다.

"오오오! 오우거 파워다!"

오우거가 드랍하는 특성석은 두 가지.

거인의 힘과 거인의 표피다.

그중 힘은 마력을 소모해 힘을 일시적으로 힘을 대폭 늘리는 액티브 스킬이고, 표피는 말 그대로 몸의 내구도와 방어력을 상시로 올려주는 패시브 스킬이다.

어느 것이 더 유용하냐 하면, 기마 돌격이 잦은 공격대의 특성상 표피가 좀 더 효용이 좋다.

마력이 없어도 되고, 일단 내구도가 뒷받침되면 생존력이 올라가니까.

"후후후, 보채지 마라! 어차피 우리 모두 얻을 것이다!"

"오오!"

"대장 만세!"

"방금 좀 영주님 같았습니다!"

"오오오오! 구정욱 만세!"

"후후후."

구정욱은 흐뭇하게 웃고는 오우거 산을 이 잡듯이 뒤졌고, 다 잡았다 싶자 산을 내려와 그 주변 숲까지 뒤졌다.

하루 정도 지나면 또 리젠이 되어있기에 산을 타다가 숲을 뒤지는 걸 반복했다.

점점 몬스터 수가 줄어드니 자연스럽게 사냥 시간은 단축되었고, 오우거 산보다 숲을 뒤지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점점 더 오우거 산에서 먼 숲까지 수색하다 보니 오크 숲과 닿은 한강 변까지 내려왔는데....

나오라는 오우거는 없고, 웬 생뚱맞은 화전민 마을이 튀어나왔다.

그때쯤 그리핀을 타고 영주님이 당도했으니, 이 또한 운명이리라.

"포멜?"

강철두는 잽싸게 다가와 고개를 조아리는 구면의 사내를 불렀다.

"아이언헤드 영주시여. 기억해주시니 영광이옵니다."

"후후, 반갑군."

포멜이 슬쩍 고개를 들어 눈치를 살폈다.

강철두의 기색을 보니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

"나트롱 백작과의 전쟁에서 대승했음을 감축드리옵니다."

"음? 그걸 네놈이 어찌 아느냐?"

"눈과 귀는 항상 영주님을 향해 열어두었습니다."

"세작을 보냈다는 말이군."

"소, 송구하옵니다! 버림받은 자들의 생존을 위한 미천한 발버둥으로 봐주시옵소서."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영주가 버렸나?"

"예에. 무단으로 이탈했으니, 쌍방으로 헤어짐이지요."

"탈영을 고급지게 말하는군."

"...."

철두는 무리를 쭉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익숙한 얼굴들이 면면이 보였다.

뉴아 마을에 터를 잡고 있던 병사들과 병사에 준하는 징집병들.

애당초 마을을 개척하기 위해 보내진 인재들인지라, 숲에 자리 잡은 통나무집들도 꽤 그럴듯했다.

"좋아.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아이언헤드의 깃발 아래 복속되고 싶나이다."

철두가 히죽 웃었다.

그간 이 숲에서 숨어 나트롱 백작과 철두 사이의 전쟁을 지켜만 보며 어디에 붙을까 저울질했을 모습이 괘씸하지만, 그의 말마따나 생존을 위한 눈치싸움이다.

서로 간에 지킬 의리도 없으니, 필요하면 품고, 필요치 않으면 내치면 된다.

"뭘 줄 수 있지?"

"이 옆에 큰 강이 있어 수량이 풍부하오나, 드넓은 숲이 차지하고 있사옵니다. 숲을 개간해 밭을 만들어 영주님의 농경지를 늘리겠습니다."

"흐음."

철두가 턱을 긁었다.

마침 필요한 걸 필요한 때에 척하니 내놓는 것이 영 거슬렸다.

"어디까지 염탐했지?"

"그, 그저 아이언헤드 성을 오간 것뿐이옵니다."

아이언헤드 성을 드나드는 건 주화만 내고, 안에서 사고만 치지 않으면 충분히 가능하다.

외국 사람들이 하도 많아, 제국민이라 하여 딱히 가려내고 말고 할 것도 없으니까.

"헌데 내게 농부들이 필요한 건 어찌 알았지?"

"유추했나이다."

"감으로?"

"감이 아니옵고... 영주님께 필요한 것이 무엇이온지 생각하고 궁리했나이다."

추측만으로 철두가 필요로 하는 게 뭔지 알아맞혔다는 말이다.

"대가는?"

"그저 영민으로 대우하여 주시길 바라옵니다."

영주의 영민이 된다.

영지 안에서는 어디든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으며, 외부 세력으로부터 영주의 보호를 받는다.

포멜이 원하는 건 그것 하나다.

그에 반해 강철두가 얻는 것은 많다.

인구를 얻고, 농경지를 얻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한 꾸준한 세금을 얻을 것이다.

"좋다! 포멜 너와 네 마을을 내 깃발 아래 두겠다."

"가, 감사하옵니다!"

포멜이 넙죽 엎드렸다.

<뉴아 수비대가 휘하에 들기를 청합니다.>

"받아들인다."

"마을의 이름을 하사하여 주시옵소서."

"포멜 마을이라 하지."

"여, 영광이옵니다."

<세력 '포멜 마을'이 활성화되었습니다.>

포멜이 일부러 무슨 수를 썼는지 시스템적인 메시지만 막고 있었던 듯, 연달아 월드 메시지가 떴다.

<보유 영토 목록이 갱신됩니다.>

아이언헤드 성, 뉴아 요새, 포멜 마을

보유 영토가 셋으로 늘었다.

"후후."

당연하게도 세력창에서 포멜 마을의 세수 항목이나 정책 등의 설정을 할 수 있게 되었으나, 철두는 내버려 두었다.

포멜 마을의 촌장인 행정관 포멜이 이쪽엔 더 유능할 터.

"행정관. 너는 날 따라와라."

"예에."

나트롱 백작의 가신이었던 행정관 포멜이다.

진태에게 데려다주면 요긴하게 도움이 될 터다.

"응?"

철두는 새롭게 뜨는 월드 메시지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저희 마을이 아니옵니다."

포멜이 항변했고, 월드 메시지는 그치지 않았다.

C614 지역에 도시 정도로 불릴 만큼 세를 이룬 곳은 하나뿐이다.

"후후, 짐작이 가는군."

철두는 포멜을 직접 성으로 데려가려던 계획을 철회했다.

"너는 성으로 가서 시종장을 찾아라."

"예에, 무엇을 하면 되겠는지요?"

"너의 가치를 증명해라."

"...!"

포멜은 머릿속에서 번뜩이고 번개가 치는 것 같았다.

'기회다.'

"반드시 가치를 입증해 보이겠사옵니다."

포멜이 공손히 읍했다.

"구 씨."

"예! 영주님."

"갈수록 몬스터 리젠이 줄어들 거다. 스탯석 같은 거 최대한 많이 보유해라."

"헙, 어쩐지!"

구정욱이 자신의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맡겨주십시오. 오우거뿐만 아니라 다른 몬스터들도 모조리 잡아들이겠습니다."

"후후, 좋아."

볼일을 마친 철두는 그리핀 오식이를 타고 다시 날아올랐다.

한양으로 가볼 참이다.

후우우웅.

철두가 떠나자, 구정욱은 포멜을 보며 히죽 웃었다.

"한솥밥을 먹게 생겼군."

"인근에서 사냥을 하신다면 포멜 마을을 거점으로 삼으시면 되실 것이옵니다."

"흐흐, 거 반가운 소리군."

아이언헤드 성 동쪽 한강 유역에 새로운 영지가 생겼다.

*

<한양수비대의 영토 목록이 갱신됩니다.>

보유 영토 : 한양

박준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거다!

이것이 발동 조건이었다!

"이, 이방! 모두 기록했는가?"

"기록했사옵니다!"

"허허허! 되었네. 되었어."

촌장으로 전직 후에 돌아와 한양수비대 휘장에 직업인들을 하나둘씩 넣으며 발동 조건을 체크했다.

관리인 계열의 직업 하나와 건설 직종의 직업 한 명, 장인 직종의 직업 하나, 농부, 사냥꾼 직종 하나씩.

그리고 인구 30명 이상.

그 발동 조건을 만족하자 '정착' 퀘스트가 떴다.

<정착>

야영지 건설을 완료하였습니다. 당신의 부락은 이곳을 마을로 발전시켜 정착할 수 있습니다. 중심 건물을 지어 영역을 선포하십시오.

인근 지역에서 몬스터들이 더 이상 리젠되지 않습니다.

목표 : 마을회관 건설

보상 : 영역선포

마을회관을 짓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중앙관청을 마을회관으로 지정하자, 한양은 마을이 되었다.

<마을의 문명도가 높습니다.>

<마을의 인구가 많습니다.>

<마을이 도시로 인정받습니다.>

"하하하! 얼른 기록하여 신서울로 전령을 보내게."

"네!"

한양이 성공했으니, 이제 신서울도 정식적인 마을로 등록해야 한다.

그래야 자동징수 같은 시스템적 요소를 사용할 수 있고, 이는 엄청난 행정력 절감과 도시의 효율적인 관리를 가능케 할 것이다.

"이러면 휘장이 더 중해지는군."

이제 한양을 기반으로 영지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오늘 체크한 이 정보는 그들이 NITO에서 정보를 제공받았듯, 아무런 대가 없이 공유될 것이다.

종말이 임박한 지구의 사정을 생각하면, 한시라도 빨리 노바에 마련된 터전들이 발전되어야 한다.

이제 농사에 전념하기만 하면 된다.

후우우웅.

그때 관청 마당에 그리핀이 내려앉고 철두가 훌쩍 뛰어내렸다.

"준필이 축하한다!"

"하하하, 이게 다 자네 덕이 아닌가?"

"후후후, 영웅의 길은 어떻게 되었나?"

"이 친구야. 뭐가 그리 급한가? 그건 아직 멀었네."

"얼른 스탯석을 흡수해라. 조만간 구하기도 힘들어질 거다."

"응? 그게 무슨 말인가?"

"몬스터의 리젠이 줄고 있다."

"그야.... 으음?"

박준필도 알고는 있었다.

몬스터는 토벌하면 할수록 그 수가 줄어든다.

처음에 100마리 나오던 것이 98마리가 되고, 50마리가 되고, 차츰 줄어드는 격이다.

이는 한강 유역에 사는 악어를 미친 듯이 토벌해가며 나온 정보다.

몬스터 리젠이 적어지면 그만큼 인간들의 안전한 영역이 확장되는 것이니, 좋게만 생각했다.

"좋지 않은 소식이군."

"그렇다. 스탯석 구하기가 힘들어질 거다."

몬스터는 그 자체로 위협이 되지만, 반대로 자원을 비롯해 스탯석과 주화를 공급해주는 주요 매개체였다.

너무 많아도 문제지만, 아예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노바에 아예 몬스터가 없지는 않을 텐데, 제국이나 다른 왕국은 스탯석을 어찌 수급하는지 아는 게 있는가?"

철두가 어깨를 으쓱였다.

"모른다."

"으음, 내 NITO에 알려 자세한 정보를 알아봄세. 혹시 자네 영지의 제국인들은 뭐라고 하던가?"

"안 물어봤다."

"...."

"...."

"좀 물어보지 그랬나?"

"후후, 알겠다. 왜 몬스터가 줄어드는지 알게 되면 알려주지."

"그럼세."

쾅쾅쾅!

그때 관청 문을 요란스럽게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고함이 울렸다.

"박 사령관 나와보게!"

익숙한 목소리다.

"에휴."

박준필이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냐?"

"한양 시장 선거에 나온 후보라네."

"음? 한양 시장? 여기 부족장은 너잖아?"

강철두의 물음은 너무나 당연했다.

지금의 한양을 도시로 이룬 것은 박준필의 공로가 크다.

"하하, 나가 보세."

박준필은 지구에서 한 번도 투표를 겪어 보지 못한 바바리안에게 한국의 민주주의 선거 방식에 대해 알려주기로 하였다.

끼이익.

관청 문이 열리자 서른쯤 되는 사람들이 몰려왔는데, 그 선두에 반백의 사내가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박 사령관! 이게 지금 뭣 하는 짓이오! 독재도 이런 독재가 없소!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시민들을 이리 막 대하다니! 제정신이오?"

바락바락 소리치며 삿대질하는 남자를 보며 철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195화 개념과 상식

양문수.

진보당에서 이번에 한양 시장 보궐선거에 공천된 3선 국회의원이다.

그는 한양에서 각 정당별로 사람들을 내쫓았다는 것에 분개하여 포탈을 타고 들어왔다.

"박 사령관! 국민과 국가를 보호해야 할 군인이 어떻게 국민을 내쫓을 수가 있소!"

"내쫓은 게 아니고 정당별로 마을을 이룬 거지요."

"하! 저딴 거지 촌막 같은 데다 사람을 몰아넣어 놓고, 마으을? 마을?"

양문수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고, 그의 지지자들은 속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철두는 이해되지 않았다.

"준필이."

"어, 그래."

"저놈은 왜 시비냐?"

"저게 다 요식행위라네. 지지자 단속하는 거지."

"...?"

"철두 자네는 투표를 한 번도 안 해봤으니, 정치에 대해 모를 수도 있지. 반장 선거는 알지 않나?"

"알지."

"비슷하다네. 여기 사람들이 투표로 한양 시장을 뽑을 예정이지. 후보가 셋이네. 보수당의 이기택 의원, 여기 계신 진보당의 양문수 의원, 소수당의 김양순 의원이지."

"아, 이기택은 안다. 나보고 입당하라 한 놈 아니냐."

"쿡쿡, 그 이야기는 들었다네."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두 사람을 보며 양문수의 얼굴이 벌게졌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도 아니고, 지금 면전에 사람을 두고 무시하고 있는 것 아닌가?

"박 사령관! 자네 지금 뭣 하는 짓인가?"

"아, 이 친구가 정치에 대해 잘 몰라 알려주는 게지요."

박준필은 철두에게 가능한 많은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 이해를 바탕으로, 뜻이 갈려 다투고 싸우는 것이 당연하다 여겨 줬으면 좋겠다.

이 믿음직한 바바리안 영주가 인간혐오에 걸리지 않도록 말이다.

'내가 두고 보지 않을 게야.'

지금도 강철두는 양문수를 못마땅한 얼굴로 보고 있다. 철두의 손에 쥐인 도끼가 지구인을 향하도록 두고 싶지 않았다.

"지, 지금 나를 무시하는 겐가!"

"하하, 무시라뇨. 나는 공평하게 이번 선거를 집행할 뿐입니다."

"허! 군부가 그걸 왜 집행하나! 선거관리인단이 있는데!"

"아직 한양시의 행정 권한은 임시지만 제게 있습니다. 시민의 범위를 산정하는 것도 제 몫이지요."

투표권자를 박준필의 마음대로 가리겠다는 거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여긴 노바고, 한양과 신서울을 대한민국 도시로 편입하는 노바 특별법은 아직 보수할 곳이 많은 구멍이 숭숭 뚫린 법안이다.

"노바에 발을 디딘 이상, 공동체에 기여해야 합니다. 그저 밥만 축내고 물자만 축내는 이를 시민으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헌법 위반이야!"

양문수가 바락 소리 질렀으나 박준필은 요지부동이었다.

"개정하시든가요."

"뭐?"

"법안 발의해서 고치십쇼."

"허, 어느 세월에!"

박준필이 어깨를 으쓱했다.

"군바리는 모르죠."

"이익! 너! 옷 벗고 싶어? 어엉!"

철두가 잔뜩 굳은 얼굴로 앞으로 나섰다.

"내 친구를 모욕하려 하는군."

"어어? 철두. 괜찮으니 이리 오게."

"아니다. 내가 해결하겠다."

"응? 아니, 참게. 참아주게."

박준필이 식겁한 얼굴로 철두의 팔을 붙잡았으나, 철두는 굵은 팔을 휘둘러 박준필을 날려버렸다.

후우웅.

"어억!"

어깨 한번 털었는데 박준필이 뒤로 5미터나 날아갔다.

"너."

"어어어?"

철두가 성큼 다가서자 양문수가 그만큼 뒤로 물러났다. 허나 그도 지지자들이 뒤에 있어 더는 물러날 데가 없었다.

"감히 내 친구를 모욕하다니."

후우우웅.

허공에 휘둘리는 도끼가 내는 풍압에 양문수의 머리칼이 휘날린다.

"히이이익!"

비례 한 번, 지역구로 두 번. 산전수전 다 겪은 3선 의원이지만 이렇게 흉악한 무기가 눈앞에서 휘둘러지는 꼴은 처음이다.

"덤벼라."

"무, 무, 무슨 소린가!"

"결투다."

"...."

양문수가 입을 쩍 벌렸다.

사정은 다른 사람들도 다르지 않았다.

양문수의 지지자들도, 박준필과 군인들도, 그리고 구름처럼 몰려든 한양의 주민들도 모두가 깜짝 놀랐다.

누군가는 황당해했고, 누군가는 아연실색했으며, 누군가는 걱정했고, 누군가는 통쾌해했다.

"내가 이기면 준필이에게 사과해라!"

"...."

양문수는 아찔한 기분이었다.

그런 건 싸우지 않아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사, 사과하겠네."

"결투가 먼저다!"

"...!"

뭐 이런 미친놈이?

"내가 졌네."

"후후, 나의 승리군."

"...!"

진짜 미친 새낀가?

"전리품을 내놓아라."

"무, 무슨 그런 황당한 소린가!"

"결투 재판을 모르나?"

"음?"

그런 게 어딨나?

"노바 기본 상식인데 그것도 모르다니. 쯧쯧."

"...."

양문수가 입을 쩍 벌렸다.

절대 무시당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무시당하는 기분이 이런 건가?

"승리자가 아량을 베풀어 목숨을 거두지 않으면 전리품을 내놓아야 한다. 인벤토리의 두 칸을 내게 바쳐라."

"...이, 인벤토리가 뭔가?"

"뭐? 황당한 놈이군."

"나도 황당하네."

"랭커도 아니면서 부족장 후보라니.... 한양의 미래가 어둡군."

철두는 그리 꽉 막히지 않은 사내.

인벤토리가 없음에 당황하지 않았다.

"가진 것 중에 가장 값진 것 두 개를 내놓아라."

"가, 가지긴 뭘 가졌는가? 수중에 아무것도 없네."

"황당한 놈이군."

철두가 자세히 살펴보니 양문수는 정말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지구에서 막 건너와 몸에 걸친 옷이 전부다.

"벗어라."

"무, 무슨 소린가?"

"결투 재판에서 내가 이겼다. 전리품 없이 보낼 수는 없다."

"...한번 봐주게."

"골라라. 목숨과 전리품. 어떤 걸 내어줄 테냐?"

"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지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다시 삼켜졌다.

장난인가? 몰래카메라야?

양문수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으나, 철두의 단단한 눈은 말하고 있었다.

전리품을 내놓지 않으면 정말 죽일 셈이다.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노비스?

퍽이나!

저놈은 이미 통제를 벗어난 폭탄이나 다름없는 놈이다.

양문수가 박준필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냈으나, 그는 어두운 얼굴로 가만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철두가 사사로이 나의 벗이긴 하나, 그의 결투 재판에 끼어들 수는 없습니다."

"...."

이런 낭패가 있나.

박준필마저 저리 말하는 걸 보니, 정말 이곳 노바에서는 이러한 결투 재판이 상식인 모양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패배 선언도 안 했지!

아니, 싸웠어도 졌겠지만.

"인내심을 시험하는군."

철두가 도끼를 슬쩍 들어 올리며 다가오자 양문수가 서둘러 옷을 벗었다.

"버, 벗음세."

윗옷 하나, 바지 하나.

전리품 두 개를 챙겼다.

팬티만 입은 양문수는 서둘러 지지자들 사이로 모습을 감추려 하였으나.

"내가 이겼으니 내 친구에게 사과해라."

"미, 미안하네. 박 사령관."

"허허허."

박준필은 돌아가는 꼴이 황당해 웃었다.

이게 뭐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그, 그만 가보겠네."

양문수는 지지자들과 함께 꼬리를 말고 도망쳤고, 철두는 양문수가 입고 있던 옷을 박준필에게 주었다.

"이걸 왜 날 주나?"

"누가 옷 벗기려거든 말해라."

"...허허."

이 친구 참.

"들어가세. 내 전해줄 이야기가 있네."

"후후, 그러지."

몰려든 주민들을 해산시키고, 관청으로 들어온 두 친구는 조촐한 상을 두고 앉았다.

"음? 반찬이 왜 이게 단가?"

"허허, 긴축이라 그렇네."

"왜? 한양 사정이 많이 안 좋으면 내가 좀 더 털어오겠다."

"철두, 지금부터 하는 말은 대외비일세."

박준필은 대한민국에서 네 사람만 알고 있는 기밀에 대해 철두에게 터놓기로 마음먹었다.

"지구 종말이 정말 머지않았네. 이미 바이러스가 국내에도 상륙했네."

"좀비 말인가?"

"그렇다네. 한계 시간으로 한 달 조금 넘게. 그러니까 노바 시간으로 6개월 정도를 보고 있네."

지구에서 한 달 하고 며칠, 노바에서는 6개월.

"급하게 개간한 땅에 파종을 서두르면 수확할 시기이기도 하지. 그를 위해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네."

"으음."

"보궐선거도 사실은 그저 쇼네. 미끼지. 나는 세 정당을 경쟁시킬 걸세. 마을 셋이 들어섰고, 이제 앞다투어 농지개척에 열을 올릴 걸세."

박준필은 대통령의 계획을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철두는 불쑥 물었다.

"그냥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전부 노바로 오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으음, 통제력을 벗어난 군중은 적보다 더 무서운 재앙이 될 걸세."

"...?"

"발표를 한다 해도, 일시에 전 국민이 노비스가 될 수는 없네."

"그렇겠지. 고블린이 리젠되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고블린 한 마리를 사냥해야 주화 주머니가 생기고, 노비스가 된다. 노비스가 되어야만 노바로 향하는 포탈을 이용할 수 있다.

"적은 기회를 많은 사람들이 노리게 되면 경쟁이 불가피하네. 통제해야만 해."

그것을 위해 파주와 청주, 그리 다른 곳에도 장벽을 두르고 성과 같은 대피소를 짓고 있다.

"우리가 할 일은 차근차근 넘어오는 사람들이 굶어 죽지 않도록 하는 걸세."

농사엔 사람이 필요하고, 그 노동력은 다름 아닌 노비스다.

지구에서 고블린을 잡아 노비스가 되었지만, 여전히 노바에 발을 디디지 않고 있는 사람.

그들을 노바로 이동시키기 위해 선거를 끼워 넣었다. 각 정당, 기업 할 것 없이 발 벗고 나서서 사람들을 밀어 넣고 있다.

불법 선거라고 해도 반박하지 못할 정도의 편법과 돈이 쓰였으나, 정부는 눈감았다.

최대한 많은 유권자의 이동이, 정부가 바라는 노동자의 이동이다.

"결국에 사람은 이익에 맞아야 움직이네. 그들의 이익과 나의 이익이 같도록 조율하는 게 정치이지."

철두가 인상을 찌푸렸다.

"복잡하군."

"하하, 그렇지. 차차 자네도 배워야 할 걸세."

철두는 고개를 저었다.

"힘 있는 부족장이 부족을 융성하게 만들 뿐이다."

"그것도 맞는 말일세."

적어도 아직 아이언헤드 성에는 통용되는 말이다.

하지만, 성이 두 개가 되고, 세 개, 네 개....

아울러 수백의 영지가 생겨나면 어찌 될 것인가?

규모가 커질수록 정치는 필요하다.

박준필이 염려하는 것은 딱 하나다.

"여러 부족이 있다 치면, 그 모든 부족을 아우르는 대족장은 어떠해야 하는가?"

"가장 싸움을 잘해야겠지."

"흐흐. 맞네, 맞아."

박준필이 무릎까지 치며 맞장구쳤다.

"난 자네가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왜 사람들을 미워한단 말인가?"

"허허허."

사람들의 이기심은 가끔 혐오스러울 정도로 질릴 때가 있다.

박준필의 염원은 딱 하나다.

인간도 아닌, 이 바바리안만이 구심점이 될 수 있다.

강철두가 있어야, 부족이 대부족, 그 너머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게다.

지구에는 여러 나라가 있지만, 종말을 고할 것이다.

노바에 들어서는 여러 마을과 도시는, 적어도 하나의 카테고리에 모이게 만들고 싶었다.

"허허허, 안주가 거칠지만, 한잔하세."

"후후, 난 원래 반찬 투정이 없다."

나물 몇 가지만 있는 조촐한 상이지만, 철두는 기분 좋게 노쓰우드 41년산 위스키를 땄다.

196화 갈망하는 것

박준필은 강철두가 심했느니, 참았어야 했느니 따위는 입에 담지 않았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많은 사람들이 보았다.

이것이 큰 사고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도 아니고, 딱히 수습이 필요한지도 의문인 일이다.

지구 기준으로 보면 3선 국회의원을 20살 애송이가 모욕한 사건이다.

하지만, 노바의 기준으로 보면 건방진 초보 노비스를 아이언헤드 영주가 골탕 먹인 정도다.

양문수 의원이 본인을 한낱 초보 노비스로 생각할 리는 없으니 그는 아마 이를 갈고 있을 터다.

반면 강철두는 아예 다 잊어버린 듯 신경도 쓰지 않고 있다.

"허허허, 철두."

"말해라."

"자네 성에도 농사를 지어보는 건 어떤가?"

"이미 시작했다."

"응?"

아이언헤드의 자원 수급은 약탈로 충당된다.

주화의 수입이야 이동 포탈망을 타고 오가는 사람들의 세수로 충당하고 말이다.

"허, 자네도 나와 뜻이 같은가?"

"무슨 뜻?"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구하려 함이 아닌가?"

"준필."

"말하시게."

"내게 영민은 제국인이든 지구인이든 상관이 없다."

"...."

박준필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노쓰우드 41년산이 더없이 독하게 느껴졌다.

어우, 시발 독해.

"쓰읍, 그래. 농사는 어디서 시작하는가? 성 근처는 수량이 부족해 대규모 농업을 일으키기엔 적합하지 않을진대 말이야."

"아, 제국인 마을 하나가 복속을 청해왔다."

철두는 한강 상류에 자리 잡은 화전민 마을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거기에 숲을 개간하고, 수로도 건설해 물을 끌어와 논농사를 지을 작정이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박준필은 두 눈을 반짝였다.

"철두."

"말해라."

"자네는 부족의 영민들이 굶주리면 어찌하겠나?"

"음? 사냥을 가야지."

"턱없이 모자라면 말일세."

"뺏어와야지."

"만일 말일세. 그대의 영민이 굶주리고 있고, 이웃은 우리 한양뿐이라면 어찌할 셈인가?"

"뺏어야지."

"...."

잠깐의 고민도 없는 그 대답에 박준필은 쉬이 대꾸할 수 없었다.

자신이라면 어떠했을까?

친구? 아니면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시민들?

"왜 그런 병신같은 걸 묻나?"

철두는 조금 기분이 나쁜 듯 대꾸했다.

부족민들을 위해 친구의 부족을 약탈해야 하는 상황이 영 마뜩잖다. 왜 이따위 가정을 하지?

"결정했네."

"뭘?"

"한양을 받아주게."

"음?"

"나는 아직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노바군 1군 사령관으로서 조국의 수호와 국민의 보호가 우선이네. 대통령의 명이 최우선이지...."

하지만 언젠가 대통령이 강철두와의 대립을 명한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친구라고 그가 협상에 응할까?

대립하는 순간 패배는 기정사실이다.

그 많은 희생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나는 명령이라는 핑계로 국민들의 희생을 강요할 수 없네."

이것이 나 박준필의 한계이고, 그릇이겠지.

"나와 한양을 거둬주시게."

"으음."

철두는 그답지 않게 고민했다.

지금도 사냥에 이것저것 할 일이 많은데, 그 많은 사람들을 영민으로 받으면 할 일이 더 많아진다.

하지만 계산하지 않았다.

"좋다!"

"고맙네!"

철두의 시원한 대답에 박준필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이리 흔쾌히 받아들여 줄 줄은 몰랐다.

적어도 제 사람 챙기기는 제일인 철두니, 제국인 지구인 차별도, 굶어 죽는 꼴을 두고 보지도 않을 터다.

"염치없지만, 아까 말한 폭발적인 인구 유입에 대한 대책은 있겠는가?"

"뺏어야지."

"그 정도로 감당이 불가능하면?"

"많이 뺏어야지."

"...!"

"후후, 병사들을 내어라."

"어? 자, 잠깐만 기다리시게."

"음? 휘하에 들기로 청한 건 거짓이었나?"

"지금 당장은 아닐세. 지금은 한양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농업을 일으키는 게 우선이네."

지금은 이르다.

강철두를 위해서도 좋지 않다.

지금 노바군 1군 사령부인 한양이 홀라당 아이언헤드령에 붙는다? 이는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보면 군사쿠데타나 다름없다.

이미 나트롱 백작과 싸우고 있는 마당에, 한국과도 적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6개월. 딱 반년만 기다리면 한양은 이제 독자적인 노선을 걸을 걸세."

그때도 포탈을 통해 지구의 인구를 계속해서 받겠지만, 박준필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대한민국 정부는 사라진다.'

적어도 이곳 노바에서 시작되는 인류의 문명은 강철두를 중심으로 피어날 것이다.

"그때까지만 기다려주면 안 되겠나?"

"후후, 준필이."

강철두는 늙은 친구를 보며 웃었다.

"아까 정치가 뭐라 그랬지?"

"남의 이익과 나의 이익을 일치시키는 거라 했지."

"이것은 정치인가?"

"...정치일세."

한양의 이익이 아이언헤드의 이익과 다르지 않을 터다. 허나....

"위기도 함께고 말이야."

"...."

철두의 말에 박준필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후후, 받아들인다."

"...."

철두는 술을 들이켰고, 박준필은 손에 쥔 술잔을 그저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웃었다.

20살 애송이?

아니다, 인간으로 생각하면 항상 그 이상을 보게 될 터다.

뭘 가르칠까?

그저 옆에서 보필하면 될 터다.

"역시 자네뿐이야."

"뭐가 말인가?"

"지구인들의 왕이 될 사람 말일세."

박준필은 손에 쥔 술을 쭉 비웠다.

독주가 주는 화끈한 열감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왕이 될 것이다.

그렇게 만들 것이다.

친구라서?

아니다.

그 길이 가장 많은 지구인들이 생존하는 길이니까.

*

발베르 조르.

몰락 귀족 출신의 그는 방랑기사로 어느 가문에 속하지도, 그렇다고 본인의 가문이 대단하지도 않은 자이나 대단한 친구들이 많았다.

제국에서 열리는 토너먼트에 나갔다 하면 우승, 못해도 준우승은 하는 그의 실력으로 명성이 높았다.

명성 높은 이들을 초대해 파티의 격을 높이고 싶은 귀족들에게 발베르는 좋은 상대였고, 자유롭고 귀부인과의 만남을 즐기는 벨베르의 성격에도 척 맞았다.

인생의 90%는 파티장에, 5%는 토너먼트 경기장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그의 나머지 5%는 외유였다.

"백작이 애를 먹나 보군."

지금처럼 친우들이 부탁을 해올 때, 이따금씩 수도 밖을 나서는 거다.

"...."

백작의 편지를 가져온 심부름꾼은 젊은 기사였는데, 알게 모르게 나트롱 백작을 닮은 것 같았다.

"너는 벙어리인가?"

"아닙니다."

"이름이 어떻게 되지?"

"요하임 나트롱입니다."

"오! 백작이 자기 대신 영지를 훌륭히 관리한다던 그 큰아들이 자네군."

"...감사합니다."

"훗, 친구가 아들까지 보내 이리 부탁을 하는데 안 들어줄 수가 없지."

요하임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무슨 요구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다.

토너먼트에 나서서 인기를 얻는 것은 좋아하지만, 그다지 명예욕이 높은 자는 아니다.

돈을 밝히는 자도 아니다.

한없이 자유로운 그의 성향이 아니었다면, 진즉 황제께 봉신하였을 실력 있는 기사.

사교계에 떠도는 소문엔 황제가 봉신 제의한 '후작위'를 거절했다는 소리도 있다.

워낙 종잡을 수 없는 자이니, 그가 무엇을 대가로 요구할지 알 수가 없었다.

"좋아. 자네 누이가 이름이 뭐였더라?"

"...."

요하임이 이를 깨물었다.

꿀꺽 침을 삼킨 그가 화를 가라앉히며 차분히 대꾸했다.

"제르니 나트롱입니다."

"아! 그래. 제르니. 하하하. 제국에까지 그 미모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더군."

"...누님은 이미 시집을 가셨습니다."

"하하하하하!"

벨베르가 크게 웃었다.

이 꼬마는 여자를 모르는군.

"그저 소문이 자자한 귀부인을 뵙고 싶을 뿐이었다."

"...그리 이르겠습니다."

"하하, 그래. 내 준비되는 대로 나트롱 영지를 찾도록 하지."

요하임이 고개를 갸웃했다.

준비랄 게 있던가?

집도 없이 이 집 저 집 떠도는 삶을 사는 게 발베르 아닌가? 애당초 모든 짐은 인벤토리에 있지 않은가?

"준비되면 기별하시게나."

"...알겠습니다."

본인이 아니라 나트롱 가문의 준비를 이름이었다.

시집간 누님을 그저 만나보기만 할까?

"...."

발베르 조르의 능글맞은 웃음이 불쾌하지만, 요하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기별하겠습니다."

"그래, 살펴 가시게."

요하임이 나서고, 발베르는 기분 좋게 웃었다.

"와하하하, 드디어!"

명예욕도 금전욕도 없는 발베르가 원하는 게 있다면 오직 하나, 여자다.

그것도 처녀는 그의 관심 분야가 아니다.

이미 시집간 유부녀가 최고다.

책임 없는 쾌락.

부정이 주는 배덕감.

들킬까 말까 하는 그 긴장감.

토너먼트도 주지 못하는 최고의 도파민이다.

소문이 자자한 나트롱 백작가의 계집이 시집가기만을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던가?

밀프헌터 발베르 조르.

그의 머릿속에 타겟인 야인에 대한 걱정은 조금도 없었다.

*

아이리스 후작령.

기사단 연무장.

아르엘라는 후작령의 기사단장으로서 휘하 기사단의 실력 향상에 누구보다 진심이었다.

후우우웅, 까앙!

"으윽, 단장님 칼 쓰십쇼. 칼!"

"너희는 도끼로 충분하다."

"아니, 도끼가 주 무기잖습니까! 좀 봐달란 말이에요!"

"전사는 최선을 다한다!"

콰앙, 카앙!

아르엘라는 몸통만큼이나 커다란 도끼를 들고 요리조리 잘도 움직였다.

그를 상대하는 건 기사 다섯.

5:1의 수련이지만 다섯 쪽이 연신 밀리고 있다.

아르엘라는 여유롭게 그들을 상대로 몰아붙이다가, 연무장에 새롭게 등장한 사람을 보곤 도끼를 멈췄다.

"어? 에그니스!"

기사단에서 그가 가장 신임하는 부하.

따로 임무 하나를 맡겨뒀는데 그가 돌아왔다.

"신 에그니스, 복귀 신고합니다."

"됐어. 됐어. 어디래?"

"시티가 D772 맵에 시장을 열었을 때 그자를 목격했다는 말이 많습니다."

시티라 말함은 굴단 시티다.

도시 자체를 여기저기 랜덤한 신맵으로 자주 옮겨 다니는 방랑자 굴단의 무역도시.

"투구도 안 쓰고 다닌다 했더니. 허술한 놈이군."

"그건 단장님도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실력에 자신 있는 거고."

"그자도 그럴지...."

"아, 됐고."

아르엘라는 에그니스의 말을 자르고 궁금한 걸 물었다.

"그래서 한산이동 불주먹 이름이 뭐래?"

"아이언헤드라고 합니다."

"쇠대가리?"

"예에."

"무식한 새끼네."

아르엘라가 인상을 팍 썼다.

그런 무식한 놈도 정령이 있는데, 나만 없다.

무려 정통 하이엘프를 넘어서, 엘프 왕가의 혈통이 흐르는 자신인데 말이다.

"아이언헤드라...."

단서를 찾았다.

"좋아. 가자."

"방금 복귀했습니다만."

에그니스가 특유의 무표정으로 응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래. 알았으니까 가자."

"어어? 단장님. 후작님께 뭐라 보고합니까?"

후작령 기사단에서는 기사단장의 무단이탈이 흔한 일인지라, 수련 중이던 부하들이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잠깐 친구 만나고 온다고 해."

"예에.... 예에?"

우리 기사단장이 친구가 있었던가?

아르엘라는 부하들을 남겨두고 에그니스만 대동한 채 보호의 나무로 향했다.

아이언헤드라는 단서 하나만으로 한산이동 불주먹을 찾으려면 역시 정보 상인만 한 게 없다.

"홍홍홍, 어서 오시게."

고블린 상인이 특유의 웃음으로 요정족 공주를 맞이했다.

197화 급변

"홍홍홍. 사고 싶은 게 무엇입니까?"

고블린 상인의 말에 아르엘라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이언헤드 알아?"

"홍홍홍."

"알아, 몰라?"

"구입하고 싶으신 게 정보입니까? 홍홍."

"음, 비싸?"

아르엘라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고블린 상인의 악독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다. 행성이든 사람이든 벗겨 먹는 데는 도가 튼 종족이 고블린이라는 족속들이다.

"홍홍. 값이 꽤 나가지만, 비싼 정보는 아닙니다."

"웬일로?"

"사시겠습니까?"

"얼만데?"

"1만 주화만 내십시오."

"...."

시벌놈.

안 비싸다더니.

허나 고블린 상인의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진짜 비싼 정보였다면 아르엘라가 가진 전 재산을 노렸을 터다.

고블린 상인은 상대가 가진 주화 주머니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고유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홍홍, 양심적인 가격 책정입니다."

"좋아. 사지."

"홍홍,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빨리 말해."

"강철두. 지구 출신의 바바리안입니다."

"아니, 바바리안인 줄은 알아."

"지구 출신이죠."

"그게 왜? 아! 혹시 녀석이 지구 채널에 있단 소리야?"

"그렇습죠. 홍홍."

"시발, 어쩐지."

아르엘라가 있는 채널은 '발할라'.

요정족, 바바리안, 제국인이 뒤섞인 발할라 채널의 결투장 대기마을을 아무리 뒤집고 다녀도 한산이동 불주먹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 건 상관없어. 지금 어디에 있는지가 중요하지."

"C614 맵에 있습니다."

"오! C맵? 아직도 연결(Connect) 중이야?"

"홍홍, 곧 접속(Connect)이 완료됩니다."

"흐음. C614가 어디지?"

"추가정보 구매를 원하십니까?"

고블린 상인이 씩 웃었다.

"얼마야?"

"굳이 추천 드리고 싶지는 않군요."

"왜?"

"그와 만나는 게 목적입니까? 그의 본거지가 목적입니까?"

"집 털어서 뭐하게. 그놈이 목적이지."

"그럼 굳이 먼 길을 가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무슨 소리지?"

"다음번 미궁에서 만나게 되실 텐데요."

"으음."

아르엘라가 인상을 썼다.

돈도 받지 않고 이리 친절할 녀석이 아닌데?

"얼마야?"

"호호홍, 엘프 공주님을 위한 서비스라 여겨주십시오."

"허, 별일이 다 있네?"

아르엘라는 고개를 절레 저었다.

어쨌든 정말 접속의 완료가 얼마 남지 않았다면, 곧 미궁이 열릴 거다.

거기서 만나게 되겠지.

"가자."

"네, 단장님."

아르엘라가 에그니스를 이끌고 사라지자, 고블린 상인이 안경을 추켜 올리며 웃었다.

"홍홍홍. 이번 미궁도 참 재밌겠어."

*

콰앙!

"이, 이 개 같은 자식이!"

나트롱 백작이 노발대발했다.

발베르 조르.

그는 제국 수도 사교계에서 유명한 자다.

그와 친분이 두터운 나트롱 백작 또한 발베르의 성품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유부녀에 환장한 놈.'

자신의 검은 귀부인들을 위해서만 쓰인다고 했던가?

정상이 아닌 놈이다.

그 실력과 명성이 아니었다면 감옥에 갔거나, 진작 교수대에 목이 매달렸을 놈이다.

이놈이 감히 내 딸을 노리다니!

"아버지. 야인들에게 일러 화친을 맺는 것이 어떠한지요?"

"...."

"어차피 영지에서의 연회는 불가하옵니다."

"네놈이!"

감히 영주인 자신의 앞에서 가부를 따지다니.

백작령에서의 백작은 왕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전부 이뤄지고, 모든 결정은 백작의 의지에 달렸다.

야인 무리 때문에 이렇듯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아들 녀석까지 감히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다니.

"용서하여주십시오, 아버지. 하지만 누님을 부를 수는 없사옵니다. 이는 우리 가문의 명예를 땅에 떨어트리는 일이옵니다."

"이익."

그도 안다.

나트롱 백작 가문이 야인 무리 때문에 시집간 딸을 이용했다는 불명예를 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발베르 조르는 아랫도리만큼이나 입도 가벼운 놈이라, 소문이 나는 것은 순식간이다.

차라리 영지에서의 연회를 안 하면 안 했지!

"음?"

백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차라리 그리할까?

"흐음."

시선이 아들 요하임에게로 간다.

제국에 나아가 중앙정부에 봉신하는 동안 자신을 대신해 나트롱 영지를 훌륭하게 관리해온 아들.

"요하임."

"예, 아버지."

"...."

백작은 잠깐 갈등했다.

자신의 두 호위기사.

고라운과 부초.

이 둘이라면 그 야인을 확실하게 죽일 수 있을까?

'확신이 있다면.'

그리했을 터다.

자신의 곁에서 늘 함께하며 호위하기로 봉신한 두 명의 기사다. 확신이 있다면 그 둘을 이끌고 직접 전장에 나아가 야인과 맞섰을 것이다.

하지만 나트롱 백작은 만약, 정말 만약의 상황을 감당하기 싫었고, 최후의 수로 떠올린 묘안이 발베르 조르인데.

그 배은망덕한 녀석이 그간 친분을 다진 게 무색하게 딸을 들먹이고 있으니....

"너는 그 야인을 만나보았지. 어떻더냐?"

"대화가 통하는 자였습니다."

"아니, 그것 말고 말이다."

"허면 무엇을...."

"고라운과 부초 경이라면 그 야인을 제압할 수 있겠느냐?"

"...두 기사님이라면 능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되었다."

요하임이 즉답했다면 모르겠지만, 잠깐의 고민만으로 대답이 되었다.

'그 야인 놈이 대단하긴 한가 보군.'

승률 100%가 아니면 덤벼들 수 없는 판이다.

단 1%의 위험도 용납할 수 없다.

본인의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

굳이 목숨까지 걸고서 영지에서의 연회를 주최해야 할까?

고민이 거기까지 미치자 백작은 모든 게 피로해졌다.

괜히 아까운 영지의 재정만 낭비한 꼴이다.

"수도로 가겠다."

"지, 직접 발베르 경을 설득하실 생각이십니까?"

"내 수도에서 방법을 찾아보겠다. 그간 영지의 모든 업무는 너에게 맡기마."

"...."

아버지를 잘 아는 아들이다.

저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사실상 패전 선언.

몇 달 뒤 화가 가라앉으셨을 때, 화친을 맺었다 하면 수도의 저택에서 보고받고 그냥 그러려니 하실 분이다.

'다행이다.'

더 이상 영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아도 되겠구나.

수도에 계신 아버지는 전쟁을 영지의 물적 인적 손실 정도로 생각하시겠지만, 자신은 다르다.

아버지를 대신해 영지를 관리해온 요하임에게는 이웃이자 정을 나눈 부하들의 죽음이다.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좋다. 내 수도에서 방법을 찾는 대로 다시 찾아오마."

아마 아버지가 영지로 내려오는 날은 아주 먼 훗날이 될 터다.

백작은 그 말을 끝으로, 지긋지긋한지 곧장 영주성의 마법진으로 향했다.

발동하는 데 인장이 필요해, 백작과 소영주 둘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진이다.

파팟.

나트롱 백작이 빛과 함께 사라지자 엎드리고 있던 요하임이 몸을 일으켰다.

"하아."

전쟁의 수습을 맡아야 한다.

언제나 그렇듯 뒤처리는 그의 몫.

아버지가 꾸중하지 않도록 수도 저택으로 제때제때 영지의 물산과 세금을 보내야 한다.

귀족에게 영지는 그런 의미였고, 대리관리인의 역할이 그것이니까.

"시종장!"

"예, 소영주님."

"사절단을 꾸리세요. 그리고 약탈당한 마을들에 구휼 식량을 보내도록 하세요."

"그리하겠사옵니다."

긴 전쟁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

*

철두는 아이언헤드 성으로 돌아왔다.

영지의 수비만 맡았던 총대장 오준환은 지겨운지 자신도 부대를 할당받기를 원했다.

"이제 휘장 몇 개 없다."

"와! 그래도 정이 있지! 제가 영주님 따른 짬밥이 있는데 쩨쩨하게 그러십니까?"

"그래서 총대장 아니냐?"

"아니, 이제 자경단 소집만 해도 짱짱한데 무슨 영주성 방업니까? 용수 시켜도 충분합니다. 그리고 마법 타워도 건설 중인데, 더 집 지킬 것도 없습니다."

"흐음."

"아, 하나 내려주십쇼! 방어할 상황이면 부대 다 모여서 지키면 되지. 평시엔 저도 좀 돌아다닙시다."

궁병 교관이자 수비대장직을 맡고 있는 기용수 정도만 두어도 신병의 훈련과 영지의 치안관리는 충분하다.

"흠, 좋아."

"특작대로 해주십쇼!"

아이언헤드라는 깃발 아래, 벌써 많은 휘하 부대가 생겨났다.

관리인단, 친위대, 공격대, 유격대, 특작대.

엘리스가 대장으로 있는 관리인단은 군대가 아니니 차지하고서라도, 독립적인 부대가 넷이나 되었다.

"흐흐, 이제 나도 기병이다!"

신이 나서 나가는 오준환을 보니 기병대가 하나 더 만들어질 모양이다.

이름만 다르지, 부대가 하는 일이 다 거기서 거기다. 기동력을 확보한 기병 전력으로 보급훈련.

굳이 왜 이름을 달리하는지 모르는 기병대만 늘어나는 꼴이다.

스탯 30 이상인 자.

탈것 보유한 자.

오준환이 쏘아 올린 경력직 신병 모집공고가 아이언헤드 성을 며칠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외국에서 모인 자들이 많다 보니, 그들 중에 의외로 지원자가 많아 면접을 빙자한 시험까지 치러야 했다.

철두는 무한결투장 입장 쿨타임이 지나면 일주일마다 패배 전까지 결투를 했다.

노바로 돌아오면 심상의 공간에서 수련하거나, 몬스터 사냥을 다녔다. 그러다 심심하면 친위대장 이은영과 대련을 했다.

"빨리빨리 경지에 올라라, 은영."

"쳇, 그게 마음대로 되면 얼마나 좋아요?"

이은영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대련에 임해주다 보니, 애초에 재능이 남달랐던 그녀도 검술 레벨 4의 경지가 되었다.

갈굼이나 대련은 내리사랑이라, 이은영의 대련지도 아래 친위대원들도 속속 실력이 늘고 있었다.

친위대는 아직 40명도 채 되지 않았는데, 재능만 있다면 현재의 능력보다 충성심을 더 우선해서 보기 때문이었다.

싹수 있는 재능만 있으면 실력이야 후천적으로 키울 수 있다는 게 그녀의 생각.

친위대는 외유가 잦은 부대가 아니건만, 병영에서 거의 매일 일어나는 피 튀기는 대련 덕에 아리아 여신의 기도원의 단골 고객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나트롱 백작성에서 보낸 화친 제안을 세 번 거절하고, 마트에 물품 채우듯이 털린 마을에 구호물자가 내려오면 또 그걸 약탈하길 네 번 정도.

창고가 모자라 창고 증축을 몇 번 더 하고, 마침내 아이언헤드 성에 방어 타워가 완성되었다.

"흐흐. 철두야, 보이냐?"

"보인다!"

"어떠냐?"

"장하다, 진태!"

김진태는 마법사들을 쪼아 마침내 완성시키고 말았다.

<마력의 방어 타워>

활성화시 접근하는 적에게 전격을 방출합니다.

주화를 소모합니다.

"흐흐, 이제 돈으로 지킨다!"

"후후, 우린 부자지."

"흐흐, 우린 무적이란 소리지."

아이언헤드의 외성 성문마다 커다란 송전탑을 닮은 마력 방어 타워가 세워졌다. 장전에 필요한 마력을 주화로 충당하는 자본주의적인 방어 타워.

"이제 개척마을 세울 때마다 이거 하나씩 세울 거야. 그럼 주둔군도 줄일 수 있어."

"좋은 생각이다."

"아, 빨리 써보고 싶네. 위력 테스트해보고 싶다."

점점 불어나는 잔고에, 돈 걱정이 없는 김진태는 방어 타워의 시운전을 위해 어디 일식이나 월식이 한번 찾아오길 은근히 바랐다.

하지만 영영 일어날 리 없는 바람이 되고 말았다.

<지역 C614의 연결이 완료되었습니다.>

<지역이 N6140으로 명명됩니다.>

<이제 해당 지역에 계절이 찾아옵니다.>

한양시장 보궐선거로 떠들썩해진 지 고작 3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198화 종말

"후우."

김승태 대통령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요즘은 하루하루가 1년 같다.

"대통령님. 긴급대피훈련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그래요."

종말 사태 발발과 더불어 대중에 모든 것을 공개할 수는 없다.

질병에 걸리기 전에 미리 백신을 접종하듯, 종말을 대비한 대피훈련의 실시가 계획되었다.

그것의 실행일이 오늘이다.

이따금 이뤄지는 민방위 훈련에 익숙한 국민들은 그 정도 수준의 훈련이라 여겼다.

이제 10분 후면 긴급재난문자가 순차적으로 전 국민을 상대로 발송될 것이다.

- 훈련상황입니다. 종말을 대비한 대피훈련입니다. 주소지와 가까운 대피 장소로 이동 후, 구조 활동에 적극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 훈련상황입니다. 대피로의 이동이 원활하지 않을 경우, 집 밖으로의 출입을 삼가시고, 권장 30일의 식수와 식량을 확보해두시기 바랍니다.

- 훈련상황입니다. 좀비 바이러스 발생. 체액, 타액에 유의, 길고 두꺼운 옷을 입으시고, 상처에 유의하십시오.

- 훈련상황입니다. 노바로의 대피로 장소는 파주, 청주, 강릉, 포항, 여수입니다. 고블린을 발견하시면 주저하지 마시고....

- 훈련상황입니다. 군의 통제에 따라....

이미 일주일 전부터 종말 대피훈련에 대한 방송이 끊이지 않고 전파되고 있다.

지금도 방송사마다 생방송으로 종말 대피훈련을 중계하고 있다. 준비 중인 군인들과 공무원들, 그리고 재밌다는 듯이 기웃거리는 시민들이 가득한 거리 화면이 티비로 송출되고 있었다.

"후, 신서울과 한양 인구는 어떻습니까?"

"신서울이 6만 7천, 한양이 2만 2천 명을 넘었습니다."

신서울이 가장 중요하다.

파주 포탈은 인구 절반이 몰린 수도권의 생존자들을 받아줘야 하니까.

그렇다고 한양의 중요성이 떨어지냐면 그것도 아니다. 청주 포탈은 중부지방과 그 이남의 생존자들에게 희망이 될 터다.

민간에 아예 개발권이 넘어가 버린 강릉, 포항, 여수의 포탈도 생존자를 받아들일 터다.

"5분 전입니다. 대통령님."

"으음."

생존을 위한 최종 리허설.

보다 많은 국민들을 대피시키기 위한 훈련이 이제 5분 남았다.

떠들썩한 상황에 눈치 빠른 이들은 진즉 노비스가 되어 노바로 건너가길 주저하지 않았고, 불안한 이들의 사재기로 마트의 라면과 생수 등의 비축 식량 등이 동나기도 했다.

예상 가능한 범주의 혼란이고, 충분히 제어 가능한 수준이다.

"시작합니다."

비상상황실의 모니터에 각종 방송사의 생중계 화면과 주요 대피소의 상황실이 비춰지고 있었다.

웨에에에엥!

[훈련상황입니다. 훈련상황입니다. 현재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

대한민국 전체에 사이렌이 울렸고, 대피훈련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김승태 대통령은 진중한 얼굴로 모니터링 화면을 응시했다. 언론에서 몇 날 며칠이나 훈련에 대해 설명하고 떠들어댔기에 시민들의 혼란은 적었다.

차근차근 대피하고, 군인들도 작전지역에 결집 가상의 좀비 소탕 작전을 실시하고 있었다.

"대통령님!"

국방부 장관이 심각한 얼굴로 상황실로 들어와 대통령을 찾았다.

그는 집중된 이목에 헛기침하고는 조용히 대통령의 귓가에 보고했다.

"홍천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홍천?"

홍천은 대한민국에 상륙한 좀비 바이러스 감염자들이 격리된 곳이다.

최초 격리 후, 이제 겨우 15일이 지났을 뿐이다.

"무슨 문제?"

"자리를 옮기시는 것이...."

그때 김승태 대통령은 물론, 모든 사람들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여기 생존자 있어요!>

지구에 종말이 도래했습니다.

안식의 행성 노바의 구원이 종료되었습니다.

지구의 주민 여러분의 생존을 기원합니다.

준비된 노비스만이 구원의 손길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목표 : 고블린 주화 1개 획득

보상 : 노비스 전직

"뭐, 뭐야!"

"퀘스트 같습니다!"

지구의 모든 사람들에게 퀘스트가 떴다.

갑작스런 상황은 차지하고서라도 그 내용이 심상찮았다.

"대, 대통령님! 파주에서의 긴급 연락입니다."

"바꾸세요."

전화기를 든 대통령이 빠르게 말했다.

"대통령입니다."

[충성! 파주 주둔군 사령관 김....]

"본론만 말하세요!"

[포탈이 사라졌습니다!]

"...."

손에 힘이 풀려 전화기를 흘렸다.

"대통령님! 7군단 사령관님 연락입니다."

"대통령님! 대구 시장 연락입니다."

"대통령님! 부산 진구 명사수...."

여기저기 보고체계도 없는 비상연락이 남발했다.

"허어."

김승태 대통령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끝이다.

이런 상황은 상정해보지 않았다.

노바와 지구의 연결고리가 끊어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대통령님! 2, 2번 모니터 좀 봐주십시오."

2번 모니터.

NBC 방송사의 생중계 화면에 좀비로 각성한 시민이 주변에 몰린 인파를 해치는 장면이 그대로 방영되고 있었다.

사정은 다른 모니터도 다르지 않았다.

여기저기 중구난방으로 좀비가 생성되었다.

애당초 바이러스 따위가 아니었다.

"대통령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

무슨 명령을 내린단 말인가?

통제할 수 없는 혼란이 지구에 들이닥쳤다.

종말의 시작이었다.

*

다그닥, 다그닥.

"하얏!"

말을 달리는 정윤승의 얼굴엔 핏기가 없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아이언헤드 성에 도착했고, 번화한 성내 길을 지나 본성에서 영주 강철두를 만났다.

"영주님!"

"음? 내금위장인가?"

정윤승은 누가 보더라도 아픈 사람처럼 보였다.

핏기 없는 얼굴, 우는 듯 웃는 듯 조절되지 않는 눈매 하며, 떨리는 눈썹까지.

"...사라졌습니다."

"아, 맵 이름 바뀐 거 말인가?"

"아닙니다. 포탈 말입니다."

"음?"

"포탈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

정윤승이 거의 울먹이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지구와의 길이 끊어져 버렸다는 소립니다."

"허."

지구로 돌아갈 수 없다.

달에 터전을 마련 중이던 우주인들이 지구의 멸망을 지켜보면 이런 기분일까?

고향 행성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충격은 정윤승을 패닉에 빠트렸다.

그에 반해 발할라 출신의 강철두는 초연할 수 있었다.

"준필이는?"

"한양을 수습 중입니다."

"...."

포탈이 사라졌다는 소식에 모든 사람들이 혼란에 빠질 것이다. 한양은 지금 난리가 났음이 당연한데 그 수장이 자리를 비우는 것은 옳지 못하다.

"내게 따로 전할 말이 있었나?"

정윤승은 한쪽 무릎을 꿇고 강철두의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명을 기다린다 하였습니다."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친우의 막막함과 걱정이 전해지는 듯했다.

"한양의 주민들을 잘 수습하고, 농사에 전념하라 전해라."

"예, 그리하겠습니다!"

정윤승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혼란이 가신 데는 철두의 태연한 신색이 많은 도움이 되었으리라.

이제 한양이 아이언헤드 아래에 배속되게 되니, 철두가 정윤승의 상사가 되는 셈이다.

깍듯하게 군례를 올리고 다시 한양으로 향했다.

김진태는 뒤늦게 철두를 찾곤 물었다.

"정 대령 왔다 갔다며? 맵 넘버링 바뀐 거 때문에 그래?"

"아니, 포탈이 사라졌다더군."

"아 포탈.... 어? 무슨 포탈?"

김진태는 퍼뜩 이해하지 못했다.

"지구로 가는 포탈 말이다."

"...!"

김진태가 깜짝 놀라 물었다.

"미친! 그럼 지구로 못 간다는 말이야?"

"그렇다더군."

철두의 태연한 표정과 말이 퍽 낯설게 느껴졌다.

김진태의 얼굴이 하얘졌다.

"진태!"

"어, 어."

"정신 차려라. 호흡해라, 호흡."

"후우, 후우."

심호흡을 하자 순간 모자랐던 산소가 공급되며 생각이 굴러가기 시작했다.

"시발. 좆됐네, 이거."

"...."

철두는 격한 김진태의 반응에 당황했다.

"어차피 여기가 우리 터전이 아니냐?"

"그치. 그치만."

"지구는 종말했을지도 모른다."

"...."

김진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억지로 참고 있지만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아!"

철두는 어찌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몰랐다.

지구엔 여전히 김진태의 가족이 살고 있으니까.

사생아 취급을 당했다곤 하나 아버지인 것은 변함이 없고, 천륜이 어디 끊어낸다고 끊어질 인연이던가.

영영 못 본다 생각하니... 아니, 이제는 생사조차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진태."

"후우, 나 잠깐만 혼자 있을게."

"알겠다."

철두는 김진태를 내버려 두었다.

영주성의 집무실을 나와 옥상으로 올라갔다.

"충성!"

"그래."

아이언헤드 성의 영주성 옥상은 일대에서 가장 높은 지역이다. 부서진 발리스타는 말끔히 수리되어 발사될 준비를 마쳤고, 경계 서는 감시병들은 군기가 바짝 서려 있었다.

철두는 가장 높은 곳에서 영지를 한눈에 내려다보았다. 둥글게 울타리 쳐진 외성은 저 멀리까지 시선을 두어야 할 정도로 넓었으며, 방위마다 뚫린 문 옆에 선 방어 타워는 든든하기만 했다.

지난 석 달간 외성의 여러 구획들도 정비되어 아직 공터가 더 많긴 하지만, 거리 주변을 중심으로 건물들이 제법 오밀조밀하게 지어져 있었다.

어느새 상주인구만 해도 1만 명을 넘어버렸다.

아이언헤드 성에 뿌리내린 주민의 수가 그 정도였고, 이동 포탈망을 타고 오가는 유동인구가 하루 평균 5천이 넘었다.

그들을 위한 여관들도 무수히 많이 생겨나 이제 2만 명 정도의 인원은 무리 없이 수용 가능한 수준의 도시가 되어버렸다.

"후, 철두야."

"진태! 괜찮나?"

"괜찮아! 할 일 하자!"

"무슨 일?"

"공표해야지! 소문 돌아봐야 혼란만 생겨. 영지에 공표하자."

"좋다!"

"뭐라 적을까?"

"변하는 건 없다! 난 내 부족을 지킬 뿐이다."

"너답다."

김진태는 피식 웃고는 세력창을 열어 포탈이 사라진 사실과, 이를 조사 중이며 아이언헤드 성은 앞으로 어떤 위기에도 주민들을 보호할 것이라는 내용의 공문을 작성했다.

내성 앞의 메인 게시판을 비롯해, 외성 곳곳에 나 있는 28개의 게시판에 동시에 공지될 것이다.

"...더 열심히 해야겠군."

책임감이 막중하다.

아이언헤드 성에 1만.

뉴아 요새에 50명.

포멜 마을에 1500명.

여기에 한양의 인구 2.3만까지 아우르는 대부족장이 되어버렸다.

이제 N6140으로 바뀐 이 맵은 4계절이 모두 찾아온다. 그 말은 전처럼 3모작이 불가능하다는 소리.

여름에 부지런히 농사지어 겨울을 대비해야 하며, 방한용품도 마련해야 한다는 소리다.

지난 3개월간 주구장창 창고에 곡식을 채워 넣어 식량 걱정은 없지만, 이제는 겨울의 추위가 문제다.

"철두야, 신서울에도 한번 다녀와야 해."

"신서울은 왜?"

"거기도 포탈이 없어졌을 것 같긴 한데, 확인은 해봐야지."

"으음, 일리 있다."

철두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먼 길을 다녀오자면 그리핀을 가진 철두 혼자 갔다 오는 게 더 빠르겠지만....

"넌 갈 생각하지 마라."

"쳇. 알겠다."

이런 혼란스런 와중에 우두머리가 자리를 비우는 것은 옳지 못하다.

"공격대를 보내주십시오!"

구정욱이 적극 지원하고 나섰다.

"좋다. 구 씨, 다녀와라."

"추우우웅!"

"준섭이, 준환이."

"넵!"

"네!"

"방한용품 보급해와라."

"알겠습니다."

"명을 받듭니다!"

약탈의 시간이다.

199화 미궁

아이언헤드의 독립부대는 지난 3개월 동안 경쟁적으로 부대원을 증원했다.

유격대가 300명.

특작대가 300명.

친위대가 50명.

공격대가 210명이다.

공격대는 전원이 오우거의 특성석을 활성화한 특이한 부대다. 그래서 아직 300명을 채우지 못했다.

신서울에는 아직도 오우거 사냥터가 많다.

특히 수호의 나무 근처 숲은 오우거가 드글드글 끓는 스팟이니, 이번에 가서 아예 작정하고 사냥을 해 특성석을 수급할 생각이다.

"흐흐, 나도 300명 채워야지."

구정욱은 신병을 충당해 300명의 돌격대를 이끌 생각에 신이 났다.

오우거 스킨으로 방어력이 더 높아지고, 오우거의 힘으로 창질 한 번에 사람 서넛 꿰어내는 건 일도 아니니, 공격대는 점점 돌격 전술이 기본으로 자리 잡았다.

공격대는 철갑옷을 입은 이가 드물었다.

아예 철두처럼 웃통을 벗은 이들도 상당수다.

방어력은 오우거 스킨으로 충당하고, 차라리 마갑을 더욱 두텁고 튼튼하게 만들었다.

말도 각자 두 필씩 길들여 마갑을 씌운 돌격용 전투마와 이동 시에 사용하는 승용마를 따로 운용했다.

특성석으로 인한 성격 변화도 돌격 전술에 딱 들어맞았다. 오우거의 난폭함과 저돌성을 깨우친 이들이라, 조금만 겁을 집어먹으면 하남자 취급을 받았다.

자칭 상남자의 부대.

강철두를 우상으로 숭배하는 부대.

그것이 공격대의 정체성!

"우오오오오!"

"우어어어!"

강철두를 따라 하는 전투함성과 함께 성을 빠져나가는 그들을 보며 김진태는 고개를 절레 저었다.

리틀 강철두가 따로 없는 모습이다.

정작 그렇게 이야기하면 공격대원 누구든 칭송을 받은 듯 우쭐해 하지만 말이다.

"어휴, 구 대장 요즘 너무 살벌해."

"후후, 너한테도 까부나?"

"까분다기보다는... 좀 으스대시지."

구정욱의 건방진 성격이 요즘 부쩍 심해졌다.

최근 흑색부를 이용해 오우거 특성석을 추가로 활성화한 그다.

'거인의 표피'가 '거인의 가호'로, '거인의 힘'이 '거인의 위상'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그 탓인지, 거인족 특유의 성격이랄까?

오만함과 선민의식이 가득 찬 구정욱의 무례에 점점 동료들이나 성내의 사람들에게서 말이 나오고 있었다.

"돌아오면 교육 좀 해야겠군."

"살살해라. 살살."

그래도 보다 강한 상대에 대한 존중은 확실한지라, 구정욱은 여전히 강철두 앞에서만큼은 순한 양이나 다름없었다.

"신서울 가서 별일 없겠지?"

"그냥 포탈이 사라졌는지만 보고 오는데 별일 있겠냐?"

"그, 그렇지?"

구정욱의 임무는 신서울의 포탈 유무를 확인하고 오우거 사냥 후에 돌아오는 것.

그 간단한 임무인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후후, 걱정 마라."

아무렴 일이 좀 있으면 어떠리.

구정욱이 신서울을 목적지로 출발하고, 유격대와 특작대도 겨울을 나기 위한 보급을 위해 나트롱 백작령으로 출발했다.

철두는 영주성에 머무르며 혼란스러워하는 영지민들을 돌봤다.

이동 포탈망을 타고 마이클 시티에 다녀온 제임스는 어두운 얼굴로 면담을 청했다.

"철두!"

"제임스. 고향은 어땠나?"

"분위기가 좋지 않아. 도시가 쪼개질 판이야."

"지진인가?"

"...농담할 기분이 아니야. 포탈이 사라지고 나서 사람들의 불안이 심해."

"호오. 그래서?"

"마이클 시티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세력들이 충돌할 것 같아."

"거긴 블랙 드래곤이 꽉 잡고 있지 않나?"

바로 눈앞의 제임스가 블랙 드래곤 단장 출신이다. 지금이야 그저 단원이지만 여전히 핵심적인 의결권을 가진 자다.

"블랙 드래곤도 둘로 쪼개졌어."

"허, 그럼 화해시키지 그랬나?"

"하하, 난 자네처럼 절대적인 힘 같은 건 없어."

제임스가 블랙 드래곤을 이끌어온 힘은 명분과 명성이다.

블랙 드래곤 자체가 제임스가 창단한 용병대.

그가 이룩해 놓은 용병대의 입지와 커리어가 쌓이며 얻은 명성이 그의 힘이었다.

허나 스스로 단장직에서 물러나며 그 힘을 내려놓았으니, 이제 와 권력을 되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4개월가량 아이언헤드 성에서 철두 뒤꽁무니를 쫓아다닌 제임스와 그의 직속용병대는 블랙 드래곤으로부터 축출당하다시피 하였다.

"후후, 정치 당했군."

"음? 자네가 그런 말도 쓰다니."

"너의 이익과 블랙 드래곤의 이익이 갈렸다는 말이다."

"허!"

제임스가 깜짝 놀랐다.

철두가 겉으로 보이는 모습보다 훨씬 똑똑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리 날카롭게 핵심을 짚어낼 줄은 몰랐다.

"후, 맞아. 용병단은 권력을 좇아 움직이기 시작했어."

그것을 탓할 수는 없다.

마이클 시티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는 권력 쟁투다.

"나는 개인의 향상을 위해 용병대를 놓았지."

이미 돌아갈 자리는 없다.

"철두."

"말해라."

"내 용병대를 받아주게."

한때 블랙 드래곤의 일부였던 제임스 직속의 제임스 용병대.

"부하가 되겠다는 말이냐?"

"그래. 지금 팀원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고 있지. 지구로 돌아갈 수도, 마이클시티로 돌아갈 수도 없다. 우주 미아가 된 심정이지. 부디 우리를 받아줄 수 있겠나?"

고향 행성 지구는 그런 의미다.

누구나 혼란스럽고 두렵다.

"좋아. 받아주지."

"고맙네!"

이미 팀원들과는 이야기를 끝냈다.

포탈의 상실과 행성 지구와의 작별이 주는 공허함과 두려움은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는 견뎌낼 수 없는 미지의 공포였다.

<제임스 용병대가 휘하에 들기를 청합니다.>

철두는 흔쾌히 받아들이며 이름을 바꾸었다.

"네 이름을 쓸 수는 없다."

"별동대로 해줬으면 해. 아니, 해 주십시오. 써!"

<'제임스 용병대'의 명칭을 'IH 별동대'로 변경합니다.>

"좋다. 또 복속하길 원하는 무리가 있으면 네 밑으로 거둬라."

"알겠습니다. 영주."

한동안 아이언헤드 성은 어수선한 분위기가 흘렀다. 철두는 답지 않게 영주성에서 머무르며, 면담을 신청하는 모든 이들을 만나 그들의 불안을 해소해주었다.

*

두두두두두.

"크으, 공기 좋다."

선두에서 말을 달리는 오준환의 말에 뒤따르던 특작대 대원 하나가 물었다.

"대장은 걱정도 안 되십니까?"

"뭐가?"

"지구로 돌아갈 방법이 없어졌잖습니까?"

"크큭, 나는 노바로 다시 들어오고 난 뒤에 지구로 돌아가 본 적이 없다."

"예?"

"난 아쉬울 게 없다."

"허, 가족 걱정도 안 되십니까?"

"난 가족이 없다."

"...."

"내게 가족은 네놈들 아니냐?"

"헙, 대장."

"근데 가족들 걱정 아니면 사실 여기가 더 좋지 않냐?"

"그래도 지구가 더 발전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먹을 것도 많고요."

"즐길 거리도 더 많지 않습니까?"

부하들의 투정에 오준환이 웃었다.

오준환은 고아 출신이다.

부모 없는 설움을 겪으며 살아온 유년기는 세상에 대한 불만과 원한이 가득했고, 모난 삶을 살았다.

26살까지 취업도 못 한 아르바이트생은 파주 종말시험에 휩쓸려 노바 이민 1세대가 되었다.

그때부터 박준필과 인연이 이어졌고, 군에 임관해 승승장구하다가 준위로까지 승진했다.

오준환에게 있어 지구의 삶은 그저 태어났기에 죽지 못해 살아온 독기 가득한 삶이었다면, 노바에서의 삶은 존재의 가치를 찾은 삶이었다.

그는 노바에서의 삶이 좋았다.

그랬기에 랭커의 문턱에서 성장이 멈췄을 때 그리도 좌절하고 방황했더랬다.

철두와 인연이 이어지고, 그의 부하가 되어 다시 노바로 들어오고 난 뒤, 그의 삶은 다시 활력을 찾았다.

죽어지내던 그를 박준필이 일으켜 세워주었다면, 강철두는 날개를 달아 주었다.

"하하하. 난 여기가 좋아."

"듣고 보니 맞습니다그려."

"지구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성은 식당도 다양하지 않습니까?"

"아 컴퓨터 없는 게 심심하지만, 과학 문명이야 금방 다시 발전하겠지요."

"그렇지! 금방이다. 여긴 마법도 있잖냐?"

"맞습니다!"

갑자기 대원들이 긍정적인 말을 쏟으며 파이팅을 외쳤다.

지구와의 단절이 이미 일어났는데, 어떻게 한단 말인가? 결국엔 적응하고 살아야 한다.

'마법이라.'

특작대에 속한 이들은 출신이 다양하다.

일본인도 있고, 미국인 중국인, 인도인도 있다.

다국적 용병들 무리답게, 특작대의 대장인 오준환을 비롯해 조장급 정도 되는 이들은 전부 소통의 팔찌를 끼고 있었다.

적어도 마법의 존재로 인해 몇몇 분야에서는 지구보다 훨씬 뛰어난 문명을 가진 이곳이다.

소통의 팔찌도 그러하고, 이동 포탈망도 그렇다.

"자, 가자!"

말을 달리며 떠들다 보니 첫 번째 목적지인 나트롱 백작의 마을이 나왔다.

뉴아 요새와 가깝다는 이유로 늘 가장 먼저 털리는 노론 마을이었다.

땡, 땡, 땡!

침입자를 알리는 마을의 종소리가 정겹다.

이젠 저들도 익숙한지 마을 대문도 안 닫는다.

활짝 열린 목책 문 너머로 그저 종소리에 맞춰 주민들만 하던 일을 멈추고 각자 집으로....

"응? 워워!"

"히이이이이."

말을 멈춰 세운 오준환이 잔뜩 몰려있는 마을 주민들을 보았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나와 있다.

노론 마을이 작은 규모가 아닌지라 그 수가 900명이 넘었다.

오준환이 잔뜩 굳은 얼굴로 그들을 보았다.

"싸우자는 거냐?"

인파 속에서 제법 체구가 건장한 중년인이 나섰다.

"에잇 시팔!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니요?"

"뭐가 너무해?"

앞으로 나서서 소리치는 중년인은 이 마을의 촌장으로, 수시로 보급훈련을 하는 와중에 안면이 익은 자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그렇지! 약탈도 좀 정도껏 해야지. 털어간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이렇게 몰려옵니까? 예?"

"아, 걱정 마라. 이번엔 식량이 아니라 방한용품이다. 그리고 약탈이 아니라 보급훈련이다."

"아니, 시팔! 사람만 안 해치면 단가! 죄다 뺏어가면 우린 대체 뭐 해 먹고 살라고! 백작성에 가서 살려달라 청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시팔! 겨우겨우 사정해서 식량 꿔오면 또 털어가고! 겨우겨우 구걸 받아오면 또 털어가고! 에이 시팔!"

중년의 마을 촌장은 아예 작정한 듯 나섰다.

"더는 못 참겠으니 때려죽이든, 거둬 살리든 마음대로 하시오!"

"무, 무슨 말이냐?"

"차라리 세금을 내고 말지! 우리도 아이언헤드 영주를 따르겠소!"

"...."

오준환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우리는 어디서 보급받나?"

"아니, 시팔! 우리가 봉이야? 다른 데 털면 되지! 지금까지 털어간 게 있으니 우리를 책임지쇼! 아, 싫으면 때려죽이든가!"

"맞소! 맞소!"

"우리도 데려가라! 데려가!"

"난 백작 징세관보다 저 양반 얼굴을 더 많이 봤어."

"맞아! 차라리 세금을 걷고 우릴 지켜줘라!"

주민들의 요구에 오준환이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했다.

이거, 특작대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일단 요구는 알았으니 기다려라. 영주님께 물어보겠다."

"알겠수."

오준환이 아이언헤드성으로 전령을 보냈고, 노론 마을의 촌장은 마을 사람들을 다독였다.

그때 마을과 멀지 않은 들판에 심상찮은 기류가 생기더니 검은 구체가 떠올랐다.

"히이익! 미궁이다!"

"미궁이 열렸어!"

"어서 알려야 된다!"

주민들이 혼비백산하자, 오준환이 검은 구체를 한번 보곤, 다시 촌장을 찾았다.

"촌장! 저게 뭐지?"

"미, 미궁 감시자의 눈입니다!"

"미궁 감시자?"

"히익, 저 눈이 다 뜨이기 전에 미궁을 닫아야 합니다요."

"안 닫으면?"

"모, 모, 몬스터가 나옵니다요! 재앙이나 다름없습니다요!"

촌장은 오준환을 보며 사정하듯 말했다.

"용사님이 미궁을 좀 닫아 주십쇼!"

"...."

내가?

오준환이 눈을 끔벅였다.

200화 서울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