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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 - 220-230

220화 제국이 되어라

철두는 시끄러운 드워프들의 연회를 빠져나왔다.

성물의 주인을 축하하기 위한 연회는 밤새 이어졌지만, 주인공은 별실로 돌아가 따로 상을 받았다.

"후루루룹."

진작에 여기서 음식을 더 시켜 먹을걸.

철두의 앞에 앉은 르망과 에르미스는 질린 듯 그를 보았다.

"...영주님, 체통을 조금 지키심이."

"...바바리안은 과식이라는 개념이 없나?"

"후후후, 난쟁이 녀석들. 배통이 작군."

"허, 난쟁이라니. 이런 차별주의자를 봤나! 난쟁이를 난쟁이라 칭할 수 있는 건 오직 난쟁이뿐이다."

"후후후, 아까 하던 이야기나 해봐라."

"뭐? 펫 대회?"

"그렇다."

"그냥 정기적인 이벤트지. 헌데 천년설삼을 먹어놓고 백년하수오는 왜 탐내는가? 그거 추가해 봐야 마력 성장은 눈곱만큼일 텐데."

"음? 마력 성장?"

"...? 영약을 탐내서 펫 대회 나가는 거 아니냐?"

"맞다."

"이미 1000년급 영물을 먹고 각성했으니, 100년급은 효율이 나빠. 차라리 봉신들에게나 던져주라고."

"부하들에게 주려고 구하려던 거다."

"아, 그래?"

"그보다 그 말이나 계속해 봐라. 천년급 영물을 추가로 활성화할 수도 있다는 말이냐?"

"당연한 소리 아닌가?"

에르미스는 황당함에 철두를 보았다.

"운 좋게, 정말정말 운 좋게 만년급의 영약을 취하는 게 아닌 이상, 천년급을 모으고 모아 '탈피'를 노리는 게 정석 아닌가?"

"...."

철두는 새로운 지식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신체 재구성만 해도 굉장한데, 그보다 더 나은 경지가 존재한다.

"그렇지. 레벨 5가 끝일 리가 없지...."

"상식적으론 그게 거의 끝이지. 그 이상의 경지는 왕급이나 제국의 공작급이니까."

"...? 왕이 그렇게 세나?"

"약한 놈이 왕 해 먹는 곳도 있더냐?"

"...없나?"

"없지, 이 사람아. 봉신 계약을 가문에 떡칠을 해놓은 게 아니면 없지. 근데 이것도 3대를 못 가서 망해."

"망하다니?"

"노바가 그렇지 않은가? 약자를 위한 세상이 아니라네. 편법으로 위에 올라선들, 결국 처박히는 게 이곳 세상의 섭리지."

"으음."

"...정말이지 자네의 상식 수준은 놀랍군."

"후후후."

철두가 드워프의 에르미스의 정수리를 손으로 잡았다.

"후후, 난 이렇게 수박을 깬 적이 있지."

"...초보 노비스라면 모를 수도 있는 일이지. 기본적으로 이곳 노바는 경쟁을 유발한다네. 거저먹는 평화를 싫어하지."

"어느 세상이나 그렇지 않나?"

"허허허,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지."

"그런데 말이야."

철두가 손가락을 들어 하나하나 꼽아보았다.

"그 말대로라면 백년급 10개를 먹으면 어차피 천년급이 되는 것 아닌가?"

"쯧쯧, 그게 그렇지 않네. 영약의 효과를 온전히 취득할 수 있는 건 처음 각성 때뿐일세. 그 뒤로는 효율이 갈수록 줄어들지. 이미 천년급으로 각성해놓고 백년급을 탐한다면 그 효율이 백분지 일도 되지 않을걸세."

"...."

철두가 인상을 팍 썼다.

"그럼 결국 여러 명을 각성시키는 게 좋겠군."

"...그것도 방법이지. 하지만 세력보다는 개인의 성취를 더 중히 여기는 자들도 부지기수네. 쥐똥만큼 상승한다 해도 기꺼이 욕심부릴 자들이 많지."

"...."

"제국의 황제가 왜 두문불출하겠나? 어디 틀어박혀 향락이라도 즐기는 줄 아는가? 아닐세. 모르긴 몰라도 노바에서 가장 바쁘고 치열한 게 황제일 거야."

"왜 바쁘냐?"

"왜긴 왜야? 강해지기 위해서지."

"그러니까 왜? 이미 제국이지 않나?"

"허, 그거야 모르지. 내가 황제가 아닌데."

"아는 척은 다 하더니 별 볼 일 없는 난쟁이군."

"허! 그 난쟁이 소리! 이 차별주의자 새끼가."

"후후후."

철두는 씩 웃으며 에르미스의 정수리를 툭툭 쳤다.

"내 친근함의 표시다."

"이익. 바바리안은 친밀의 표시로 비난을 일삼는가?"

"인간도 그렇다."

"허, 미개한 문명이로다."

"대신 키가 크지."

"이이익! 무례하단 말이다."

에르미스는 놀리는 맛이 있는 녀석이다.

저리 즉각적으로 반응하니 어찌 놀리지 않을 수 있으랴.

"근데 성물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사람들이 이리 굽실거리는 거냐?"

"...어째서 묠니르는 주인을 정해도 너 같은...."

드워프 에르미스는 이제 감탄 어린 시선을 보냈다.

아무리 초보 노비스라 해도 무지함에 정도가 있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성물이 몇 개일 것 같나?"

"그건 들었다. 일곱 개라며?"

"기록으로 존재가 알려진 것이 그 정도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성물이 더 있을지도 모르네. 그런 추상적인 것 말고 실물로 존재하는 성물은 셋이야."

궁니르.

묠니르.

듀렌달.

"황제가 왜 황제가 되었는지 아는가? 듀렌달을 가졌기 때문이지. 헌데 이번에 주인이 정해지지 않은 성물 2개 중 하나가 주인을 정했네. 세상 사람들이 자네를 두고 어떤 기대를 하겠나?"

"황제랑 싸움 붙이려고 하는군."

"...굳이 싸움 붙이지 않더라도 황제의 대적자쯤으로 여길 걸세. 섣부른 이들은 새로운 제국의 태동쯤으로 볼지도 모르지."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국의 백작이라는 모솔의 태도나 말투 변화만 보아도 충분했다.

"하피족 기자도 취재해 갔다지? 자네의 이름과 얼굴이 대륙에 알려지는 것도 순식간일세. 물론 신문을 구독할 정도로 재력 있고 유력한 이들만이 알게 되겠지만 말이야."

노바의 정보는 평등하지 않다.

언제나 그렇듯 힘이 있는 자들이 정보를 쥐고 있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더욱 힘을 공고히 할 뿐이다.

하피족 기자의 무료 신문 구독 서비스는 굉장한 선물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성물의 주인'이 가치 있는 소재여서기도 했다.

"좋아. 슬슬 해가 떠오르니 갈 준비를 하자고."

"음? 밤새 처먹어놓고 바로 떠나자는 말인가? 잠은?"

"난쟁이들은 체력이 형편없나 보군. 하루 못 잔다고 우는 소리를 내는 건가?"

"허! 우리 장인은 사흘 밤낮을 망치 드는 일도 허다한데, 하루쯤 못 잔다고 문제 될 게 없네!"

"후후, 좋다. 조금 있으면 내 부하들이 나온다. 그때 바로 출발하겠다."

"...뭘 그리 급히 떠나려는가?"

"할 일이 많다."

애초에 여기에 온 것도 에르미스에게 받을 무기 제작과 겸사겸사 펫 대회의 정보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궁극적인 목적인 영약의 수급을 해결했지만, 그렇다고 펫 대회를 놓치고 싶은 마음도 없다.

"펫 대회에 나가서 우승할 거다."

"자신만만하군. 자네 펫이 뭔가?"

"이제 구하러 가야 한다."

"...이런 대책 없는 야만인을 봤나."

"그래서 말인데, 지난 대회 우승 펫은 어떤 놈이었지?"

"으음, 보자. 지난 대회는 하이드라를 가진 자가 우승했다네."

"하이드라?"

"머리 여럿인 괴물이지."

"으음."

철두가 턱을 쓰다듬었다.

들어도 본 적 없는 몬스터이니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자연스레 시선이 르망에게 향하니, 르망이 신중한 표정으로 에르미스에게 물었다.

"하이드라를 펫으로 길들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세상에 별 또라이들이 많은데 가능이야 하겠지. 아, 그리고 머리가 두 개인 놈이었네."

"으음."

르망이 고심했다.

하이드라는 머리의 개수가 많을수록 강하다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문제는 길들일 수 있는 마지노선이라는 게 있다는 거다.

"그 정도면 우승할 만하군요."

"의외로 결승은 꽤 박빙이었다는구먼. 상대 펫이 뭐였더라? 불숭이인가?"

"헛."

불숭이는 불타는 털을 가진 원숭이로, 숫제 정령 취급을 받는 몬스터였다.

실체 없는 정령과 다르게 실체를 가진 정령이라 해야 할까?

불 마법을 쓰는 몬스터로, 꽤 강한 축에 드는 놈이다.

"으음, 대강 윤곽이 잡히는군요."

르망은 대회에 나서는 펫의 우승 전력에 대한 대강의 정보를 파악했다.

좋은 소식은 아니다.

테이밍이 가능하다고 알려진 최고 수준의 몬스터들이 출전하는 대회다.

"헌데, 에르미스 공께서는 어찌 참여하지 않으시는지요?"

"공은 무슨. 나 같은 이들이 짐승 키울 시간이 어딨던가? 쇠 두드리기도 바쁜 시간에 말이야. 그리고 백년급이 귀하다 해도 탐이 날 정도의 보물도 아닌데, 시간 낭비지."

에르미스의 말에 르망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영주님."

"그래."

"일단 성으로 복귀하시지요. 그 뒤 고위 몬스터들의 위치를 탐문한 다음, 하나하나 찾아가 길들여 보는 방법이 제일로 보입니다."

아직 한 달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다.

"그럼 모솔의 의뢰부터 처리하면 되겠군."

"음? 무슨 의뢰?"

철두가 모솔과 주고받은 의뢰와 선수금으로 받은 빙정 등의 이야기를 했다.

"허허, 하지 말게. 맹약의 서도 쓰지 않았다면 그 빙정을 돌려주고 무르게."

"왜?"

"아직 일러도 한참 이르네. 자네가 아직 제국에 대항할 수는 없는 노릇이야."

"...?"

철두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난 이미 제국과 싸우고 있다."

"하하하하하, 분쟁했던 자가 나트롱 백작이라고 하였지? 상속받아 백작이 된 자."

"그게 왜?"

"우린 그런 자를 몰락 귀족이라 부르네. 2대에 그리되었으니, 3대에 걸출한 상속자가 나지 않는 이상 나트롱 가문이 몰락하는 것은 예견된 수순이지."

"...."

"다음 대의 나트롱 가문은 없다고 봐도 좋아. 지금처럼 신입 독립영주에게도 영지가 털려 땅을 뺏기는 게 무슨 제국 귀족인가?"

어, 이건 좀 기분 나쁜데?

"봉신에 얽혀 있다 한들, 스스로 지켜내지 못하는 자는 제국의 눈 밖에 난 몰락 귀족이지."

"흐음."

철두의 삐딱한 시선에 에르미스는 씩 웃으며 덧붙였다.

"본래 좆밥들 싸움에는 어른이 끼지 않는다네. 헌데, 모솔이란 자의 말을 들으니 이번 일은 제국에 제대로 밉보일 일인 것 같은데, 하지 않는 게 좋아."

"왜?"

"제국은 강하니까."

"나도 강하다."

"껄껄! 체급이 다르네. 가랑비도 맞으면 약해지는 게 사람이야. 제국이 왜 제국인가?"

에르미스는 철두가 곤혹스러워하는 게 신나는지 들떠서 떠들어댔다.

"노바에 격언이 있다네."

"무슨 격언?"

"제국에게 맞서는 자. 제국이 될 것이다."

"...?"

"흐흐흐, 흡수당하고 싶지 않으면 그냥 이번 의뢰는 포기하시게나."

철두의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아미르 왕국과도 분쟁이 있다지? 그것만 해도 충분히 위험해 보이네만, 그거야 넘어갈 수도 있지."

"...."

"자네를 따르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네. 그들을 모두 사지로 내몰 게 아니라면 제국에 대항하지 말게나."

"그럼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란 소리냐?"

"허허허! 어찌 싸울 생각만 하는가? 그저 자네의 왕국을 이루시게. 아미르처럼, 혹은 우리 일족의 왕국처럼 말일세."

드워프 에르미스가 씩 웃었다.

"괜히 멍청한 요정 놈들처럼 제국에 대항했다가 제국이 되진 마시게나."

"...."

요정의 왕국은 없다.

그들은 제국의 제후가 되었다.

철두는 벌떡 일어섰다.

"자존심이야 상하겠지만, 가서 빙정을 돌려주게나."

"흐음, 흐으으음!"

철두의 얼굴은 시뻘게졌고, 콧김이 내뿜어졌다.

얄밉게 웃고 있는 에르미스의 얼굴을 한 대 치고 싶다.

"싫다!"

"음? 내 말을 뭐로 알아들은 건가?"

철두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말로 한 것도 계약."

위대한 장인을 꿈꾸는 꼬마 드워프도 그러할진대.

"약속은 지킨다."

"허, 결말이 뻔하거늘...."

"따라오기나 해라."

때마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으니.

파파팟.

두 개의 전령이 나타나, 두 명의 새로운 히어로를 뱉어냈다.

"후우, 대장. 복귀했습니다."

"형님. 다녀왔습니다."

최준섭과 오준환이 철두를 보곤 보고했다.

아이언헤드에 새로운 히어로 둘이 추가되었다.

221화 인재 수집의 시작

아이언헤드 성의 유일한 레벨 4 기술 보유자.

이은영은 연속된 대련에 얼굴이 땀범벅이었으나, 여전히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읊조렸다.

"다음."

"차앗!"

부상자가 서둘러 한쪽으로 물러나고, 다음 차례의 친위단원이 달려들었다.

조셉 펠튼.

본래 철두의 친위대 소속이었던 자.

지금도 전장에 나서면 대장기를 들고 다니는 기수.

"차아아아!"

카앙, 카앙!

순식간에 몇 번의 공방을 주고받았다.

스팟.

"크윽."

조셉의 허벅다리에 피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진검을 든 대련 중에 다치는 건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이미 연무장은 이들이 며칠째 흘린 피로 검게 변해버린 지 오래다.

"다음."

"계속할 수 있습니다!"

이은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철두였다면 분명 상처입히지 않고 검면으로 허벅다리를 때렸으리라.

대련 중에 부상이 발생한다는 것은 실력 차가 크지 않다는 이야기다. 압도적인 차이가 있다면 외려 부상자는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은영은 조셉의 의지를 허투루 넘겨 보내지 않았다.

"...오라."

"하압!"

카앙, 카앙!

몇 번의 공방이 오고 간 뒤에, 이은영의 발차기가 조셉의 복부에 들어박혔다.

균형을 잃고 넘어지려는 그를 향해 검이 네 번 향했고, 조셉은 비틀거리며 막아냈으나 마지막 검이 목을 찌르는 것만은 막아내지 못했다.

"크흡."

손가락 한 마디만큼 찔러 들어간 검을 회수하자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조셉은 서둘러 상처를 손으로 막았고, 기다리고 있던 강용철이 달려와 기도했다.

"하이고, 여신이요. 이 문디새끼 좀 치료해주시오!"

강용철의 간절한 기도가 닿아 여신의 기적이 일어났다.

파파팟.

"어휴, 친위 대장님요. 이제 고만 하입시다."

"아!"

"내 인자 농사지으러 갈 시간이구마."

"넵. 수련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은영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기도원을 찾는 이들이 많아진 가운데, 개중에는 '신의 부름' 퀘스트를 받아 사제 전직에 성공한 이들도 꽤 되었다.

하지만 신의 총애는 공평한 것이 아니어서, 강용철만큼 '기적' 수준의 신성력을 발휘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들의 기도나 축복은 그저 상처를 빨리 낫게 하고, 병을 치료하며, 농작물이 잘 자라게 해주는 정도였다.

이것만 해도 현대의학에 비할 바 없는 대단한 일이지만, 강용철의 기도는 그 차원이 달랐다.

떨어진 팔도 붙이고, 목이 달아나도 재빨리 이어 붙이기만 하면 사람을 살린다.

그래서 요즘 강용철은 대사제라고 불렸다.

고수들의 훈련은 삐끗하면 부상자가 아니라 사망자를 낳을 수도 있기에, 강용철은 매번 파견을 나와야 했다.

자잘한 부상들이야 어차피 다른 사제들이 돌볼 수 있지만, 그들의 기도 수준은 사실 포션을 사용해도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긴급한 치료나 사망에 준하는 부상은 오직 강용철만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대사제님. 매번 폐를 끼칩니다."

"하이고, 다 고생하는데 뭔 고생인교. 칼부림하는 거야 내 봐도 봐도 심장이 벌렁거려서 그렇지."

"하하.... 지금 피땀을 흘려놔야 전장에서 허망하게 안 죽죠."

"어휴, 다 알구마. 그냥 노인네가 푸념 해봤소. 친위대장도 참 고생이 많소."

"사제님이 더 고생이시지요."

"카면 욕보소. 내는 밭 갈러 가구마."

"네, 살펴 가십시오."

대사제 강용철.

영주님의 할아버지라는 유일무이한 인척 관계를 떼고서라도 아이언헤드 성의 주요 인물이다.

그는 오늘도 여신의 서약을 지키기 위해 매일 농사짓고, 매일 기도하며, 결혼 계획도 없다.

기도원에 이제 사제로 전직한 이가 20명도 넘었기에 적적하지도 않다.

사제들은 다들 강용철을 아버지처럼 삼촌처럼, 큰형님처럼 대우하고 따랐다.

"하이고, 우리 손자는 어데 가가 또 코빼기도 안 비치는지."

정작 진짜 손자는 용무가 너무 바빠 얼굴 볼 틈도 없다. 강용철은 손주 녀석이 준 거대한 흑마를 소환했다.

파팟.

"제네식스야."

"히이이잉."

"밭에 가자."

"히이잉."

거대한 흑색의 천리마는 한달음에 달려 내성을 벗어나 외성 한쪽에 마련된 밭으로 이동했다.

본디 아이언헤드 성은 언덕이 많고 개울 수준의 강 주변만 농경지를 이루고 있었으나, 무한의 샘물 항아리를 얻고 나서부터 도시 곳곳에 상수도를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평지만 있으면 물을 끌어와 농수를 사용하기 좋아, 이렇게 내성 가까운 언덕 분지에도 기도원 직할의 너른 밭을 이룰 수 있었다.

여기서는 각종 맵에서 채집한 식물들과 교역에서 얻은 종자를 키워내고 있었는데, 농사를 짓는 사람들 중엔 기도원의 사제들도 있고 아이언헤드 성 연구소 소속의 마법사도 있었다.

지구 출신의 농부들도, 전직의 돌을 통해 전직한 농부들도 한데 어우러져 종자 개발에 열중이었다.

정확히는 종자 선별이었다.

각지에서 모아둔 종자들 중에 지구의 것과 비슷한 것을 가려내는 것이다.

"대사제님 오셨습니까?"

"그려. 허허."

"이야, 대사제님의 말은 보면 볼수록 명마 같습니다."

"허허허, 손주 놈이 억지로 끌고 댕기라고 줘서 곤란해 죽겄어."

본디 차 자랑은 본인 입으로 하면 멋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종자 연구소장 김춘식은 강용철의 가려운 등을 적재적소에 긁어주는 좋은 동생이었다.

"오늘은 좀 수확이 있는가?"

"예에. 기가 막힌 걸 발견했습니다."

"응?"

김춘식은 허언이 없는 사람이라,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한 걸 발견한 모양이었다.

"이것 보십시오."

"호, 생긴 건 꼭 마늘 같은디."

"하하, 맛도 비슷합니다. 마늘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거 보십시오."

"음? 고추인가?"

"예에. 거대한 나무에서 열려서 그렇지, 조금 통통하게 생긴 것만 빼면 우리가 먹던 풋고추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허어!"

"이와 비슷한 품종을 여럿 심었습니다. 개중에 청양고추 같은 것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경사로세!"

"하하, 암요!"

희소식이다.

본디 외국에 나가면 음식이 입맛에 익숙지 않은 게 가장 큰 문제다.

마늘과 고추는 모든 한식에 들어간다 해도 좋을 정도로 널리 쓰이는 식재료이니, 이제 농사를 크게 지어 민간에 공급하면 여기저기 식당의 음식 퀄리티가 대번에 상승할 터다.

"여기 종자에 축복을 좀 내려주십시오."

"허허, 그럽세."

사제들의 축복은 농작물을 건강하고 바르게 자라게 하는 효능이 있다. 거기에 더해 특별한 성장 촉진의 능력도 갖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대사제 강용철의 축복은.

"여신이여. 이 새싹들 좀 키워주이소."

파파팟.

강용철의 진심 어린 기도가 닿아 푸른 새싹이 금세 자라나 줄기를 뻗기 시작했다. 돋아난 이파리는 기지개를 켜듯 활짝 펼쳐지고 빛을 듬뿍 받아 냈다.

촤아아악.

물을 주는 대로 흡수한 줄기는 쭉쭉 자라나 키가 어른만 해지더니 이내 첫 열매를 수확해냈다.

"으음, 이건 너무 밍밍하군요. 좀 더 매운 종자가 나오면 좋을 텐데."

"허허, 김 소장이요. 너무 실망하지 마이소. 비슷한 기 저만큼 있는데."

"하하, 그렇죠."

식물 개량이라는 게 본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다. 원하는 맛과 모양을 가진 종자를 다시 재배하고 길러내고, 다시 분류하고 길러내기를 반복해야 하는 일.

애당초 사제들의 걸어주는 축복으로 인한 성장 촉진이 없었다면 이렇게 신속한 연구는 꿈도 꾸지 못했을 터다.

"아쉽습니다. 저 같은 겉핥기 연구자 말고, 진짜 연구 엘리트들은 죄다 신서울에 있을 터인데."

신서울은 본디 파주 포탈과 연결되어있었다.

수도권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 덕에 대학교수부터 의사, 각종 분야의 엘리트 연구자들까지 모두 신서울에 똬리를 틀었다.

그에 반해 한양은 청주 포탈이라는 거리적 불리함과 더불어 개발 초창기라 어수선한 한양의 상황 탓에 엘리트 인재들은 크게 없었다.

그나마도 군에 소속되어 있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김춘식도 본디, 노바군 1군사령부의 농사 고문으로 초빙된 지방대학의 교수였다.

1군사령부 자체가 아이언헤드 성에 편입되며 이제는 한식구가 되어 집을 아이언헤드 성으로 옮기고 농사 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그였다.

"후후, 연구원들이 필요한가?"

"하이고, 시발. 깜짝이야."

"어헉!"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강용철과 김춘식이 깜짝 놀랐다. 뒤돌아보니 큰 키의 사내가 싱긋 웃고 있었다.

"하이고, 언제 왔노? 우째 전에보다 더 애빈 것 같노?"

"몸은 금방 큰다, 할배."

신체 재구성 때문에 키는 그대로인데, 근육의 사이즈가 대폭 줄어든 탓에 철두는 말라보였다.

사실 탄탄한 근육이 자리하고 있어 마른 체형은 아니지만 2미터가 넘는 큰 키 덕에 더 그렇게 보였다.

이게 또 할아버지 필터를 거치고 나니, 강용철의 눈에는 비쩍 마른 멸치로 보일 따름이다.

"하이고, 안 되겠다. 여 농사지은 마늘도 나왔는데 내 오늘 니 좋아하는 마늘 통닭이라도 좀 해달라 케야겠다."

"오, 마늘 통닭 좋지. 할배 친구도 같이 먹으러 가자."

"...농사 연구소장입니다. 영주님."

"하하하, 소장도 가지."

"...허허허."

철두는 태연히 말하다가 괜히 머쓱해 아까 들었던 말을 물었다.

"한데 연구원이 필요하다고?"

"아, 그저 아쉬운 소리였습니다. 신서울에 엘리트 인재들이 많으니...."

"후후, 알겠다."

"예?"

"내가 가서 데려오겠다."

"...?"

김춘식이 화들짝 놀랐다.

"그, 저, 그 복잡하지 않습니까?"

"뭐가?"

"외교적으로나... 어, 이주를 희망하는 연구원을 모집하는 것이라거나...."

"후후후, 그건 걱정하지 마라. 다 영주의 일이니."

"아, 예에."

"마음껏 농사나 지어라. 이렇게 마늘도 얻고 얼마나 좋으냐."

"하하, 그렇지요."

강용철은 손자와 연구소장의 대화를 보며 참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을 했다.

'스무 살 애를 교수님이 저리 윗사람 대하고 있으이....'

강용철은 어색하기만 한데 손자는 하대가 편해 보이고, 연구소장 김춘식의 존대도 거리낌이 없다.

불편한 것은 강용철의 마음뿐이었다.

"마, 다 가입시다."

"하하, 그럴까요?"

"근데 철두 니는 뭐 펫 구하러 간다카디 와 이래 일찍 왔노?"

"후후, 그건 부하들이 알아보기로 했다."

테이밍해야 하는 몬스터의 '급'이 정해졌다.

아무 몬스터나 테이밍할 게 아닌 이상, 급에 맞는 몬스터의 소재 파악부터 해야 한다.

그 모든 일은 르망과 사냥꾼 잭에게 일임했다.

펫 대회 등록까지 남은 시간은 27일 정도.

그 전에 급이 맞는 몬스터의 소재를 파악해서 올 터다.

그때까지는 그저 최준섭과 오준환이 훈련만 시키면 되었는데, 차라리 잘 되었다.

둘만 훈련시키는 것보다야, 영지의 싹수 있는 녀석들을 죄다 훈련하는 게 더 나으니까.

누구든 레벨 4. 명인의 경지에 먼저 오르는 놈에게 백년초가 돌아갈 터다.

천년급인 만드라고라 두 뿌리의 용처는 이미 정해져 있다.

'친위대장 것 하나.'

유일한 레벨 4 검술의 경지인 이은영이 하나.

'하나는 내 것.'

또 하나는 철두가 활성화할 생각이다.

아미르 왕국 삼검을 해치웠다고 좋아할 때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두머리가 강하지 않으면, 결국 모든 걸 잃게 될 터다.

노바의 섭리가 그러하다.

222화 통신망

치지지지직.

내성의 주방에서 기름 냄새가 가득 퍼지자 지나는 사람마다 코를 벌름거리며 기대에 찬 얼굴을 했다.

이미 오늘 저녁 메뉴가 마늘 통닭인 것은 소문이 쫙 퍼졌다.

"이야, 마늘 통닭을 노바에서 먹게 되다니."

"그러게. 하, 시발. 냄새 쥑인다."

콩은 이미 옛날부터 재배되었고, 된장과 간장도 있다. 최근 들리는 소문에는 고추 재배에도 성공했다고 하니, 곧 고추장이나 빨간 김치도 맛볼 수 있을성싶었다.

"기대된다."

"난 눈물 날 것 같아."

빈말이 아니라 정말 눈시울이 붉어진 이도 있었다.

지구로 향하는 길이 아예 끊어진바, 익숙한 음식이 불러일으키는 향수는 대단했다.

"난 고추 너무 기대된다. 이제 국밥 말고 짬뽕도 먹을 수 있으려나."

"바보야, 해산물이 없잖아."

"아, 왜. 인벤토리만 있으면 상하지도 않고 운반되던데, 살려면 살 수야 있지."

"그럼 짬뽕값이 얼마나 비싸겠냐?"

"비싸도 좋으니까 먹고 싶다 이거지! 누가 가격 따지냐?"

"허허, 좋은 날 왜들 그러냐? 지금 통닭 튀겨지는 소리 미쳤다. 다들 조용히 교대나 기다려라."

"하, 첫 순번 놈들 겁나게 부럽네."

사실 기름을 많이 사용하고, 닭을 대량으로 잡아야 하기에 통닭 자체가 쉽게 맛볼 수 있는 음식이 아니다.

물자가 풍부한 아이언헤드성 정도 되니까 저녁 배식으로 해볼 만한 것이다. 보통의 영주성 같았으면, 영주님의 식탁에나 한두 접시 오를 사치스러운 요리다.

"아미르 왕국은 언제 털까? 너무 기대된다."

"그러게. 전진 요새만 건설되면 이제 본격적으로 털 거라던데."

아이언헤드 영주군은 아미르 왕국과의 전쟁을 크게 위기로 느끼지 않고 있었다. 강철두가 그들의 전초부대를 궤멸시키다시피 하고, 또 왕국의 3검을 포함해 소드마스터 셋을 죽인 이후부터는 아예 걱정을 놓았다.

더욱이 부랴부랴 사신을 파견해 평화 협정을 맺으려는 그들의 다급한 태도가, 유불리를 명백히 드러냈다.

더욱이 아이언헤드의 수뇌부가 전면전이나 점령전을 노리고 있지 않은바, 이번 전쟁은 그저 국경 너머로 약탈 갈 수 있는 보급지가 늘어난 정도로 인식되었다.

한편 아이언헤드의 풍부한 물자와 경제력은 약탈에 기반했기에, 정규군이 아닌 사설 용병대들도 이번 전쟁에 참여를 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시종장 김진태는 사적 약탈에 대해 엄격하게 선을 그어, 게시판마다 공지사항을 전파했다.

- 방어전이 아닌 공격작전에 용병대의 고용은 없다. 개별 작전은 인정하지 않으며, 아이언헤드는 책임지지 않는다.

개별 행동으로 인해 아이언헤드에 피해를 입힐 시 성에서 추방될 수도 있다.

김진태의 강력한 경고에 몇몇은 체념하고 군에 입대했으나, 몇몇은 과격한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

"쳇, 전리품은 죄다 높으신 분들이 먹고 우리는 군인 월급이나 받으라는 건가?"

기존의 약탈은 죄다 아이언헤드 정규군에 의해 이뤄졌기에 모든 물품은 공적 자원으로 성에 귀속되었다.

정작 당시의 군인들은 불만이 없는데, 민간의 여러 용병대가 불만을 품고 독자적인 움직임을 내보였다.

애초에 아이언헤드 성의 구성원은 범지구적이다.

그중에서도 지구 출신은 한국인이 절반이면 나머지 절반은 외국인들로 이뤄져 있었다.

애당초 정착한 외국인들의 구성은 대다수가 전투원들이다. 힘을 가지고 있으니 욕심이 나고, 행동에 나서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문제는 그들이 아미르 왕국을 너무 만만하게 보고 있다는 것이다.

철두와 진태는 마늘 통닭을 뜯으며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벌써 그렇게 포로로 잡힌 사람들이 80명이 넘어."

"후루룹, 바보들이군."

"하아, 왕국에서 정식 사절이 왔어. 포로를 사가라고."

"쩝, 짭. 이미 공지했다며?"

"했지. 근데 다들 전리품에 눈이 돌아서 듣지도 않아."

"흐음."

"어떻게 할까?"

김진태는 강철두의 의견을 중시했다.

이런 건 영주님이 큰 틀을 잡아줘야 했다.

"포로로 산 다음 노예병으로 부리는 방법도 있어. 몸값을 변제할 때까지."

"내버려 둬라. 욕심을 냈으면 책임을 져야지."

"알겠어. 개인적으로 몸값을 지불하려고 하는 사람은?"

호기롭게 아미르 왕국을 약탈하러 갔다가 역으로 포로로 잡힌 이들도 여기저기 얽히고설킨 인맥이 있다.

내 친구가, 내 아버지가, 내 아들이 포로로 잡혔다는데 돈을 지불해 구제하지 않을 이들은 없다.

"그런 것까진 못 막지."

"영지 차원에서 중재할 거냐는 말이야."

"으음."

"사실 이건 아미르 왕국에서 먼저 제안했어."

"...놈들이 왜?"

"가장 비싸게 팔 수 있으니까."

"...?"

포로로 잡은 적이다.

풀어주면 그대로 적의 전력이 될 터인데, 이들은 이익을 좇았다. 전쟁을 무엇으로 생각하는지 알 만했다.

철두가 턱을 쓰다듬었다.

"우리도 사람을 잡아다 팔까?"

"...그러지 말자."

김진태의 말에 철두가 물었다.

"군인은?"

"음?"

"여태 홀딱 벗겨서 보냈지 않나?"

"그렇지?"

"그놈들은 팔자."

어차피 그냥 보낼 바에야 돈 받고 보내는 게 낫다.

민간인을 납치하는 노예 사냥이야 꺼려지더라도, 싸우다 잡힌 전쟁포로는 몸값을 받아도 될 듯했다.

"그렇게 하자."

"우적, 우적."

뼈까지 씹어 삼킬 기세로 마늘 통닭을 먹어 치우는 철두를 보며 김진태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맛있냐?"

"후후, 맛있다. 그래서 말인데, 신서울에 연구원들 좀 데려와라."

역시 귀찮은 일은 친구에게 짬 시키는 게 맞다.

"음? 갑자기?"

"연구소장이 인재가 필요하대."

"으음. 데려올 수 있으면 좋기야 하지만.... 어쨌든 알겠어. 어차피 구정욱 대장 공격대가 아직 신서울 근처에 주둔 중이니 맡겨보지 뭐."

"구 씨는 아직도 안 돌아왔나?"

"공격대 전원에게 오우거 특성석 먹일 셈인가 봐. 점점 오우거 개체 수가 줄어서 사냥이 힘들대."

"으음. 알겠다. 그럼 난 이틀 뒤에 의뢰 하나 하고 오겠다."

"의뢰?"

"결투재판의 대전사로 나선다."

"...듣긴 했는데. 누구랑 갈 거야?"

"우르르 갈 필요가 없다. 나 혼자 금방 해결하고 오마."

철두의 말에 여태 마늘 통닭에 집중하고 있던 드워프가 나섰다.

"아니 될 소리! 내가 함께 가겠소!"

"어째서?"

"허, 그야 내 임무가 연락책이니까!"

딴에는 맞는 말이라 철두는 반박하지 못했다.

김진태는 드워프 에르미스를 신기하게 보다가 문득 궁금하여 물었다.

"근데 그 연락 수단이란 게 어떤 거예요?"

"음? 그야 대지의 목소리지."

"대지의 목소리요?"

"허, 우리 드워프는 대지의 목소리를 통해 서로 의사를 주고받을 수 있다!"

김진태의 눈빛이 반짝였다.

'통신수단이 있어?'

노바는 지구에서처럼 전파통신을 이용할 수 없었다. 마력이 실존하는 세상이라 왜곡이나 저항이 너무 커 제대로 무선 통신망을 갖추기가 너무 어려웠다.

유선 통신망이라면 가능할 듯하지만, 아직 연구도 개발도 미진했다. 통신수단보다는 개인의 역량 강화와 생존을 위해 시간과 노동력을 써야 했으니까.

이제 슬슬 통신망 개발의 필요성을 느끼는 와중이었다.

'신서울에서 인재들 좀 빼 오면 관련 연구도 좀 시키고, 드워프 통신 기술도 좀 훔쳐 배우고 하면....'

김진태의 원대한 계획을 아는지 모르는지, 드워프 에르미스는 허리춤에 매달려있던 동그랗고 길쭉한 통을 집어 들었다.

호리병처럼 생긴 통은 한쪽에 길쭉한 주둥이가 있고, 그 끝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음? 술병이 아니었나?"

"흥, 술병이라니. 아니다."

"그게 통신기냐?"

"그렇다. 우리 드워프만의 진보한 문명이지. 이것이 사이언스다. 인간들의 문명은 흉내 낼 수도 없는 물건이지."

"...좋아 보이는군."

드워프에게 인류의 스마트폰을 보여주고 싶으나, 찬란했던 문명은 이미 한참 퇴보했다.

"어떻게 작동하는 거냐?"

"흐흐, 이 안에 와이피석이라는 광물 조각이 들어있다. 쌍으로 이뤄진 광물 조각이 멀리서도 서로 공명하는 원리를 이용했지."

"거리가 멀어져도?"

"어디라도 상관없다. 공명한다."

"허!"

행성 반대편에 있어도 통신이 된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기지국이나 중계기가 필요하지 않다는 점에서 저것은 보다 진일보한 문명일 것이다.

"중계기 같은 건 없나요?"

"중간기계? 무슨 말이냐?"

김진태는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중계기의 원리에 대해 아주 친절하게 풀어 설명해주었다.

소통의 반지는 서로의 언어를 통하게 해주지만, 이런 자잘한 소통 오류는 어쩔 수 없이 길게 설명해야만 한다.

"아, 그건 당연히 있다. 와이피석의 핵으로 모든 공명이 통한다."

"...?"

김진태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개별적인 통신은 안 되나요? 와이피석의 조각을 가진 그 통신기는 서로 모두 연결되는 건가요?"

"당연한 소리 아닌가? 와이피석은 핵을 중심으로 모든 조각과 공명한다."

김진태는 팍 김이 식은 기분이었다.

그럼 저 통신기를 얻어봐야 무쓸모다.

드워프와 통신망을 공유하는 셈인데, 그리되면 보안이 전혀 이뤄지지 않는다.

'얻는다 해도 전체공지 효과뿐이지만.'

물론 지금의 문명 수준에서 그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지만, 개인 휴대용 무선기기를 들고 다니던 현대인의 감성에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와이피석이 여럿이면 별도의 통신망도 구축이 가능하지."

"그 와이피석이라는 게 여러 개예요?"

"당연한 소리 아니냐?"

김진태가 눈을 반짝였다.

"어디서 구할 수 있나요?"

"못 구한다."

"예?"

"와이피석은 노바에서 나지 않아. 우리 고향 행성에서만 나는 광물이지."

"아."

김진태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물었다.

"드워프 말고도 이런 통신망을 가진 자들이 있나요?"

"통신망이야 죄다 갖추고 있지. 멍청한 요정족들도 그들의 방식이 있으니."

"와이피석을 혹시 판매도 하시나요?"

"흐흐, 팔면 살 텐가? 조각 하나라도 떨어진 와이피석은 보안을 장담할 수 없을 텐데."

"...그렇네요."

와이피석을 구매할 수는 있어도, 드워프들이 미리 조각 몇 개를 떼놓고 판매하면 통신의 도청이 가능하다.

왜 이 통신망이 드워프 독점인지 알 것 같았다.

"아쉽네요."

역시 방향은 연구원들을 데려와 통신망을 구축하는 것으로 잡으며, 철두의 결투행에 대한 인선을 끝냈다.

"이틀 뒤, 나와 에르미스 둘이 간다."

"알겠어."

철두의 선언을 끝으로 다들 수다 삼매경에 마늘 통닭을 즐기는데, 즐기지 못하는 자가 하나 있었다.

"후우."

쫄깃하고 향긋한 마늘 향의 간장치킨을 깨작이며 먹는 사람은 이은영.

'속이 더부룩해.'

과도한 긴장과 설렘으로 인해 소화가 되지 않는다. 저녁 식사 전에 철두가 무심히 한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후후, 천년영약을 구했다. 이따 활성화하자.'

이은영은 젓가락을 깨작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이제 곧 소드마스터가 된다.

박준필이 농담처럼 부르던 조선제일검이란 별명이 이제는 칭호가 되리라.

223화 전력 증강

아이언헤드 성의 영주 전용 지하연무장만큼은 못 되지만 병영에도 실내 훈련장이 마련되어있었다. 그 훈련장 한 칸에 강철두와 이은영이 마주했다.

너비 10미터쯤 되는 그리 넓지 않은 훈련장이지만, 주변의 이목을 차단할 수 있으니 신체 재구성을 하기엔 안성맞춤인 장소다.

"내가 가져오라고 한 건?"

"여깄어요."

철두는 새 옷과 목욕물 통을 가져오라 일러두었다.

이은영이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통 세 개를 꺼내자, 철두는 물의 정령을 이용해 그 안에 가득히 물을 채워주었다.

"옷은 이따 입고 이걸 받아라."

"헙."

이은영은 상자를 들곤 손을 덜덜 떨었다.

끼익.

상자의 뚜껑을 열어보니 사람의 형상을 한 산삼이 다소곳이 누워있었는데, 뚜껑이 완전히 열리자 그놈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끼야아오오오오!"

"허업!"

이은영은 깜짝 놀라 상자를 놓쳐버렸다.

"헛!"

바닥에 떨어지려는 만드라고라를 재빨리 움켜쥐니 녀석이 더욱 크게 소리쳤다.

"끼야아아아."

<만드라고라>

교수대의 흙에서 천년에 한 번 피어나는 식물. 끔찍한 괴성을 지른다.

복용 시 효과 - 신체 재구성, 스탯 한계 돌파, 저주 내성

"이, 이거 왜 이래요?"

"원래 그런 놈이다. 얼른 먹어라."

"넵!"

실제 입으로 먹을 필요는 없다.

노바의 모든 아이템이 그러하듯 활성화로 개인에게 흡수되니까.

파파팟.

만드라고라가 빛으로 화해 이은영에게 흡수되고, 곧 그녀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장비는 미리 벗어두었기에 삭을 걱정은 없다.

파스스슥.

다만 그녀가 걸치고 있던 옷은 끔찍한 기운들이 스며 나오자 삭아서 떨어져 내렸다.

나신이 되어 빛에 휘감긴 이은영은 몇 번이나 몸을 뒤틀더니, 이내 신체 재구성을 마치고 바닥에 내려섰다.

"후우우우우."

길게 숨을 뱉은 이은영은 변화된 신체에 고양감이 차올랐으나, 나신의 상태인 것을 자각하자 수치심이 몰려왔다.

"앗!"

풍덩!

잽싸게 욕탕에 몸을 담그곤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봤어요?"

"뭘?"

"제 몸이요."

"당연히 봤지."

"...."

철두의 당당함에 이은영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뭐가 그렇게 당당하세요?"

"...?"

철두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나가요!"

"어이가 없군."

철두가 구시렁거리며 밖으로 나서자 이은영은 몸을 벅벅 문질렀다.

시커먼 각질이 우두두 떨어져 내리는데, 악취가 상당했다.

"아아, 망했다...."

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은 그녀라고 하더라도, 알몸을 훤히 내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 데다 이렇게 악취를 내풍겼으니.

차차차차차.

"아오오!"

창피함에 얼굴이 붉어져 물장구쳤다.

"나가기만 해봐라."

이은영은 씩씩거리면서도 몸을 빠르게 씻고, 새 옷을 입고 미리 벗어뒀던 장비를 찼다.

그러곤 상태창을 열어 변화를 점검했다.

특성 '저주 내성'과 '초인의 몸'을 얻었다.

이은영은 노바의 시스템이 주는 새로운 지식을 곱씹었다.

<초인의 몸>

단전이 활성화되며, 마력을 기력으로 치환할 수 있다.

차앙.

지이이잉.

뽑아 든 그녀의 검에 날카로운 예기를 머금은 빛이 서렸다.

<새로운 검술의 경지에 눈을 뜹니다.>

<검 숙련의 단계가 상승합니다.>

되었다.

그녀의 검술 레벨이 5가 되었다.

*

철두는 지하 수련장에 앉아 옷을 다 벗었다.

아까운 장비를 녹이지 않기 위해서다.

"끼에에에에."

"조용히 해라."

"끼에에엥."

꽈드득.

"후에엥."

철두는 만드라고라를 움켜쥐고 그대로 활성화했다.

파팟.

빛이 흡수되며 신체 재구성처럼 몸이 떠오르진 않았다. 다만 마력이 미친 듯이 오르기 시작했다.

<마력이 97 상승합니다.>

<'저주 내성' 특성을 얻었습니다.>

<'저주 내성' 특성이 중첩됩니다.>

<특성 충돌이 일어납니다.>

"흡"

철두는 서둘러 인벤토리에 남아있던 흑색부 하나를 활성화했다. 이미 배운 특성도 중첩해서 배울 수 있는 아이템.

<특성 '저주 내성'이 잊혀집니다.>

<특성 '저주 면역'을 얻었습니다.>

이미 용의 저주를 이겨내며 얻은 특성이 중첩되어 저주 면역으로 발전했다.

"후우."

변화가 끝났다.

지난번처럼 몸의 노폐물이 뿜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건 신체 재구성 때 한 번뿐인 듯했다.

어쩌면 만년영약이나, 천년영약이 중첩되어 도달할 수 있는 그다음 경지인 '탈피' 때나 한 번 더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

"후후, 마력이 늘었군."

기존의 마력 수치가 93이었다.

이번의 증가로 인해 거의 두 배 가까이 마력이 늘어났다.

검기의 유지 시간도 그만큼 늘어나는 셈이고, 부가적으로 정령을 부리는 힘도 늘어난 셈이다.

일거양득.

마력의 쓰임새는 다양하다.

스킬을 쓸 자원이기도 하고, 정령이 부리는 마법의 자원이기도 했다. 거기에 더해 검기를 유지하는 힘이기도 하니, 자동차로 치면 연료통이 늘어난 셈.

"다른 수치도 늘려야지."

신체 재구성을 이루며 스탯 한계가 대폭 늘어났을 터인데, 아직 스탯을 올리진 않고 있었다.

철두는 인벤토리에 가득 쌓여있던 스탯석을 꺼내 마구잡이로 활성화하기 시작했다.

이제 성장이니 적응이니 따지지 않기로 했다.

일단 한계까지 천장을 높여 놓으면 적응은 그 뒤에 가파르게 따르기 마련이다.

<근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뿌드드드드.

<체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파파팟.

<감각이 소폭 상승합니다.>

스스스.

<민첩이 소폭 상승합니다.>

....

주화가 스르륵 소모되며 가득 쌓였던 스탯석이 끝을 모르고 흡수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한계는 있기 마련이고.

<더 이상 스탯석을 활성화할 수 없습니다.>

"상태창."

<강철두>

종족 : 바바리안

출신 : 발할라

등급 : 자유 영주

순위 : 브론즈 619

소속 : 지구 채널

생명 : 100%

마나 : 99%

<보유특성> -

바바리안의 심장, 요정의 가호, 마상무예, 골렘의 회복력, 쌍수무기술, 초인의 몸, 타이탄의 후인, 가문의 시조, 냉기 내성, 저주 면역

<보유기술> -

창 숙련(2), 검 숙련(5), 도끼 숙련(3), 궁술(2), 둔기숙련(2), 투척(2), 내려찍기, 달리기, 강타(2), 탐색(2), 승마, 도약, 질주, 소용돌이, 기사서임

<활성화 구슬> -

근력 225

민첩 201

체력 251

감각 222

마력 190

"후후후."

이제 200 아래의 스탯은 마력이 전부다.

철두는 백년영약을 한번 흡수해볼까 하다가 아까워서 관두었다.

마력 수치 고작 몇 올리자고 소드마스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영약을 쓰자니 아까웠다.

"이제 훈련도 짬 시키면 되겠군."

이은영의 수준이 이제 검술 5다.

제임스부터 오준환, 최준섭, 등등 아직 레벨 3단계인 녀석들의 수준을 4로 만드는데 그녀만 한 적임자가 없다.

"나도 기술 수련 좀 해야겠군."

어쩌다 보니 검술의 단계가 가장 높아졌지만, 도끼나 다른 무기들의 수준도 높여 놓을 필요가 있었다.

무기는 그 무게나 길이, 생김새에 따라 그 쓰임이나 장단이 모두 다르니 익숙해져 놓아 손해 볼 것은 없다.

가끔 전장에서는 손에 잡히는 대로, 남의 무기도 빼앗아 쓸 데가 있으니까.

"이제 미친 듯이 수련하면 되겠어."

잘 먹고 잘 자고, 미친 듯이 수련하면 이 앙상해져 버린 몸도 다시 튼튼해질 터다.

거기에 더해 이번에 얻게 된 신무기.

파팟.

묠니르를 소환해 들었다.

손망치만 한 크기지만, 이것은 의지에 따라 크기를 늘릴 수도 줄일 수도 있는 무기.

후우웅.

거대화를 생각하자 망치의 크기가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자루는 창대만큼 커졌고, 머리는 어른의 몸통만 하다.

손으로 전해지는 무게와 파괴력이 실로 어마어마하다. 휘둘러보지 않아도 느껴진다.

산을 쪼갤 수 있다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후후후."

망치 능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어디 그 기술이 허접해서야 쓰겠는가?

철두는 이미 둔기 숙련이 있으니 이것도 어디 같은 판정인지 궁금했다.

후우우웅, 후우웅.

크기를 자유자재로 줄여가며 휘둘러보니, 이것은 또 나름의 유용한 한 수가 될 것 같았다.

근접해서는 짧은 망치로 근거리 타격을, 멀리서는 거대 망치로 한 방을.

<새로운 무기의 사용 숙련도가 일정 이상입니다.>

<기술 해머 숙련이 생성되었습니다.>

메이스나 몽둥이 같은 둔기와는 그 쓰임이 조금 다르다 여겼는지 해머 마스터리가 생성되었다.

"후후, 좋다."

철두는 신나서 무기를 꺼내 이리저리 휘둘렀다.

*

푸우우우우, 푸우우웅.

대장간의 풀무가 숨 쉬듯 부풀었다가 줄었다를 반복하며 화로에 온도를 높여다.

화르르륵.

화로에서 벌겋게 달아오른 쇳덩이를 끄집어낸 장소철이 모루에 놓고 그것을 힘차게 내려찍기 시작했다.

까앙, 까앙.

"으음, 기본은 됐군."

드워프 에르미스는 한편에 서서 팔짱을 끼고 그것을 감독하듯 보고 있었다.

대장장이의 기술은 어차피 타고난 손기술과 숙련의 영역이라 드워프가 도움을 줄 것은 없다.

모든 제작계 직업의 핵심 보물인 여러 레시피도 공개해줄 수는 있으나, 공개해준다 한들 아직 부족한 수준으로 인해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없다.

미스릴 단조만 해도 장소철은 아직 그 숙련도가 형편없었다.

"더 부드럽게! 강철 다루듯 힘만으로 되는 게 아니야!"

"옙!"

장인의 길을 걷는 장소철은 드워프 에르미스의 말을 신의 대리인이 내뱉는 음성처럼 여겼다.

기회다.

영주님이 이 쇠 무지렁이를 위해 귀인을 데려왔으니 하나라도 더 보고 배워야 한다.

한참 덩어리를 두드리던 장소철의 눈앞에 드디어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미스릴 단조 기술을 깨우쳤습니다.>

"아아!"

"흥, 입문에 그리 좋아해서야. 우리 드워프는 걸음마 떼고부터 익히는 기술인데 말이야."

"가르침을 나눠주시어 감사합니다."

"뭐, 당분간 얹혀사는 처지니 밥값은 해야지."

한참 구경만 하던 에르미스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대장간 좀 빌리자고."

"영광이옵니다. 이것을 쓰십시오."

장소철이 본인이 쓰던 망치를 내밀었으나, 드워프 에르미스는 코웃음 쳤다.

"흥, 그런 망치로는 명품을 만들어낼 수 없다."

파팟.

그는 인벤토리에서 대장장이 망치를 꺼내 들었는데, 드워프 명인의 증표이자, 드워프 왕국에도 고작 9자루뿐인 강화의 망치였다.

"허어."

한눈에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망치라 장소철이 탄식을 터트렸다. 물욕이 드문 그도 갖고 싶다는 욕심이 스멀스멀 피어오를 정도의 아우라를 내뿜는 망치다.

"보는 눈은 있구나."

"죄송합니다."

"대장장이라면 응당 욕심을 부리는 게 당연하지. 그럼 잘 봐두라고."

드워프 에르미스는 이참에 강철두와의 약속을 이행할 생각이다.

그를 위한 무기를 만들어 주기로 하였다.

"뭐가 좋을까.... 옳지. 검을 만들어 주지."

강철두의 검술이 상당하다는 것은 이미 들어 알고 있다.

'재료는... 쩝, 아깝지만 미스릴을 써야겠군.'

약속은 무거운 것.

최고의 무기를 만들어 주기로 하였으니, 지금 그가 가진 최고의 재료로 무기를 만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에르미스는 인벤토리에 가지고 다니던 귀한 광물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미스릴을 베이스로 오리하르콘을 섞어서....'

장소철은 하나라도 놓칠세라 드워프 에르미스의 손짓 하나, 눈짓 하나까지 따라가려 애썼다.

까앙, 까앙.

후끈한 대장간의 열기는 이틀이나 계속되었다.

무기가 완성된 것은 강철두가 지하 수련장에서 나온 시간과 얼추 비슷했다.

그가 검을 보곤 고개를 저었다.

"도끼로 하나 더 만들어 줘라."

"...검이나 다시 살펴보게."

이틀이나 밤새워서 한시도 쉬지 않고 검을 만들어낸 에르미스가 쉬어버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음?"

철두는 무기의 상세정보를 보곤 깜짝 놀랐다.

224화 낙원의 섬

<새벽 어스름>

명장 에르미스가 만들어낸 미스릴 명검

어지간해서는 부러지지 않으며, 예리함이 배가 되었다.

내구성 +

절삭력 +

"후후, 너를 생각하며 이름을 새벽의 어스름이라 지어 보았다. 찬란하게 떠오르는 태양 빛도 길고 긴 새벽을 지나야 하니, 딱 너와 어울리지 아니한가?"

"흐음. 이건 뭐냐? 처음 본다. 내구성 절삭력."

"훗, 뛰어난 명장들은 부가효과를 부여할 수 있다."

"명장이 되면 이게 되는 거냐?"

"강화의 망치도 있어야 하지."

"오."

철두가 눈을 빛냈다.

"전에 주기로 한 거?"

"헹, 그때 1500점에 줬으면 큰일 날 뻔했지."

황금상자에서 나온 보물은 겨우 천년설삼이었다.

강화의 망치를 만들어내는 고행을 생각하면, 차라리 그때 거래가 성사되지 않은 게 다행이다.

"그거 어떻게 얻는 거냐?"

"흥, 미궁이지."

"오, 미궁? 좋군."

철두의 자신만만한 얼굴에 에르미스가 고소를 머금었다.

"넌 못 얻는다."

"음? 왜?"

"장인의 길을 걷는 자만이 얻을 수 있으니까."

철두의 시선이 장소철에게 향했다. 그에 에르미스도 장소철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치고는 기술이나 자세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더니. 과연, 그랬나?"

에르미스가 첨언해 주었다.

"미궁 중에 장인의 길을 걷는 자들이 도전할 수 있는 미션이 있지. 가지고 싶다면 도전하게."

"아, 알겠습니다."

장소철이 다부지게 말했으나 강철두가 인상을 찌푸렸다.

"위험하지 않나? 내 장인을 잃을 수는 없다."

"쯧, 그런 미션은 대부분 팀으로 이뤄진다. 네가 지키면 될 게 아니냐?"

"음? 그도 그렇군."

철두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장소철에게 일러두었다.

"그래도 스탯 성장을 게을리하지 마라."

"알겠사옵니다."

목숨의 은인이자 영주성의 지존인 강철두의 애정 어린 걱정에, 장소철은 감격한 얼굴이 되었다.

"흠, 일단 의뢰를 하러 가자. 갔다 와서 도끼도 하나 만들어 줘라."

"뭣? 이 검만 해도 왕가에 선물하면 당장 가보로 쓰겠다고 할 보검이건만, 여기서 더 욕심을 내?"

"후후, 철로 만들어도 상관없다. 어차피 계속 여기서 지내게 될 거, 밥값은 해야지?"

"끄응, 알겠네. 강철도끼를 만들어 주지."

"후후, 좋다."

굳이 자신이 가진 귀한 재료를 쓰지 않는다면 명장의 노동력 정도야 빌려줄 만하다. 하고, 드워프 왕으로부터 적극 협조하라는 명령을 듣기도 했으니까.

"가자."

"알겠네."

철두와 에르미스가 길을 나섰다.

"언제 돌아오냐?"

"진태. 늦어도 이삼 일이면 돌아온다."

결투재판까지 이틀 정도 남았을 테니, 재판 후에 바로 온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 시간은 걸릴 터다.

"끼아아아!"

철두가 오식이를 소환했다.

"타라."

"으음. 말을 타고 갑세."

"날아가면 금방이다."

"끄응."

드워프 에르미스는 인상을 잔뜩 쓰고는, 이내 별수 없다는 듯 오식이 위에 올라탔다.

후우웅.

"끄으으음."

하늘을 나는 게 울렁거리는 건지, 지면에서 멀어지는 게 싫은 건지 드워프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후후후, 촌놈처럼 멀미냐?"

"으으, 말 시키지 마라."

"후후후."

철두가 괜히 더 격하게 오식이를 채근했다.

오식이도 재밌는지 위아래로 들썩이며 비행했다. 주인과 탈것의 장난에 에르미스는 죽을 맛이었다.

슈유유유.

하지만 성과 이동마법진의 거리는 매우 가까웠다.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에르미스는 참지 못하고 속을 게워냈다.

"우웨웨웨."

"후후후."

"젠장!"

"마셔라."

"으, 고맙네."

철두가 준 물을 마시던 에르미스가 울컥하며 입에 머금은 액체를 그대로 뱉어냈다.

"푸우우! 이건 술이잖나?"

"후후후. 드워프는 술 좋아하지 않나?"

"이런 미친 야만인 놈이."

"후하하하."

철두의 장난에 에르미스는 인상을 쓰면서도 손에 쥔 술병을 다시 입에 가져다 대 벌컥벌컥 마셨다.

물이라 생각하고 마셨기에 화끈한 알콜 향에 저항 없이 뱉어냈지, 술을 마다할 에르미스가 아니다.

"크으으, 이제 살겠군."

에르미스가 술병을 돌려주며 말했다.

"다시는 안 탈 거야! 다시는! 이동할 땐 무조건 말을 타세!"

"후후, 알겠다."

철두는 모솔 상단의 주인 드라운 백작이 준 좌표석을 꺼내 등록시켰다.

맵 명칭 'I'는 처음이다.

드워프들이 자리 잡은 M44가 산악 지역형의 맵이었듯, 이번에도 평범한 맵은 아닐 것 같았다.

"I21이다. 내가 먼저 가서 좌표석을 가져다주지."

"아, 거긴 나도 등록된 곳이야. 굳이 그럴 필요 없네."

"음? 가본 적이 있나?"

"당연하지. 나를 촌놈 취급하지 말게."

그대로 촌놈을 갚아주곤, 드워프 에르미스가 먼저 이동마법진에 올라타 사라져버렸다.

"흐음."

철두도 이동마법진 앞에 올라타 이동할 좌표를 설정했다.

<주화 1742개를 소모합니다.>

파팟.

이동마법진을 사용한 이래 가장 많은 주화 소모량.

철두의 영지에서 가장 먼 거리의 이동이다.

"흡."

들이마신 숨에서 습기를 머금은 짠 내가 확 치고 들어와 흠칫 놀랐다.

"후후, 바다군."

눈앞에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이동마법진은 모래로 이뤄진 해변의 가운데, 제단처럼 만들어진 돌무더기 위에 마련되어 있었다.

"흐흐, 결투의 섬은 처음인가? 촌 무지렁이."

"후후, 처음이지."

철두는 이동마법진에 손을 대고 좌표석을 하나 얻어내고는 밖으로 나섰다.

이동마법진 앞에는 여러 사람들이 서 있었는데, 여기저기 손에 뭔가 글자를 들고 있는 꼴이 꼭 공항에서 대기 중인 가이드 같았다.

"어서 오십시오. 아이언헤드 님."

"음?"

불쑥 다가온 사내가 철두를 향해 고개를 넙죽 숙였다. 모솔 백작이 이르길 언제 찾아오든 사람을 보내놓겠다 하더니, 이자가 그 사람인 모양이다.

"자이언트 포지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 모솔 상단의 닉이라고 합니다."

"강철두다."

"에르미스다."

"예에, 알고 있습죠. 신삼개 가문의 장자이자, 위대한 장인, 기사단의 샛별 에르미스 공을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흠흠."

에르미스의 어깨가 으쓱해졌다.

본디 칭찬은 남의 입에서 들었을 때 더욱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것.

상단의 사람이라 그런지 남을 띄우는 재주가 있었다.

"가자."

"예에, 모시겠습니다. 마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닉이 이끄는 대로 가보니, 이동마법진 근처에 주차장처럼 줄지어 늘어선 마차가 보였다.

수레처럼 지붕이 없는 오픈된 모양이었는데, 푹신하고 안락한 의자와 마차를 꾸미는 조각 등으로 인해 몹시 고급스러워 보였다.

지붕이 없는 건 별다른 이유가 아니라, 아름다운 주변 경관을 구경하라는 배려처럼 보였다.

기다리고 있던 마부의 채찍질로 마차가 출발했다. 닉은 두리번거리는 강철두를 보며 안내를 시작했다.

"낙원의 섬은 처음이시니 간단히 관광이라도 해 보시겠습니까?"

"결투의 섬이라더니?"

에르미스는 결투의 섬이라 하였다.

"하하, 그것도 맞는 말입니다. 결투와 휴양, 오락과 낙원이 함께하는 섬이지요."

"으음, 여긴 누구 영지인가?"

"중립지입니다."

"중립?"

"예에."

낙원의 섬은 싸움이 금지되어 있었다.

적대국의 사람들이 마주쳐도 마찬가지다.

정확히는, 모든 분쟁은 결투장의 결투로 증명해내야 한다.

낙원의 섬엔 수천 개가 넘는 귀족의 별장과 리조트가 있고, 크고 작은 세 개의 결투장이 존재했다.

무료 결투장에서는 길거리에서 선술집에서 시비가 붙은 자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결투를 벌이고, 그에 또 판돈을 거는 도박이 성행한다.

결투재판 자체가 오락거리가 되어, 관광객이 즐기고 먹고 마신다.

재판이 없는 날엔 또 명성을 얻기 위한 검투사들의 경기가 열리니, 낙원의 섬은 하루가 멀다 하고 경기가 벌어지고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그야말로 결투의 섬이었다.

"결투재판을 꼭 여기서 할 필요가 있나?"

"이곳에 가장 권위 있는 재판장이 있습니다."

"굴단은 그냥 길에서 하던데?"

"하하하, 결투재판은 반드시 심판관이 있어야 합니다. 한데 그 재판의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는 자들도 있는바, 재결투가 이뤄지기도 하지요. 그리되면 1심을 맡은 심판관보다 더 권위 있는 자를 심판관으로 초청해야 합니다."

"...."

결투재판이라는 것이 그냥 이기면 다 끝나는 건 줄 알았더니, 불복하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그 와중에 가장 권위 있는 경기장이 이곳 결투의 섬이니, 여기서의 판결에 더는 이견을 달 수 없습니다."

"호오, 여기 심판관이 누군데?"

"신이지요."

"신?"

"재판의 신 티르. 그가 관장하는 재판이기에 여기서 승리하면 누구도 의심하지 않지요."

이를테면 3심 재판의 대법원인 셈이다.

"모솔이 졌나 보군."

"...그렇습니다. 세 번의 재판에서 패배했지요. 그래서 이번이 중요합니다."

"한데 왜 제국과 적대하는 건가?"

"...세 번째 재판관이 황궁의 궁중백이었습니다."

첫 번째 재판을 패배하고, 두 번째 재판에서 모솔 백작은 승리했다.

한데, 상대가 세 번째 재판관으로 황궁의 궁중백을 심판관으로 초청했다.

황제가 두문불출하는 사이 사실상 제국의 실세나 다름없는 궁중백이 관장하는 재판이었다.

그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신의 눈을 빌려 다시 한번 재판을 한다?

제국의 권위에 반하는 일이다.

제국은 신을 모시지 않는다.

정확히는 황제를 신격과 동등하게 취급한다.

한데, 황제의 궁중백의 재판을 무시하고, 새로운 신을 찾았으니 이는 제국의 권위를 무시하는 처사.

"그럼 모솔 상단도 제국의 눈 밖에 나는 게 아니냐?"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국의 눈 밖에 나는 것보다도 이번 재판이 더 중요합지요."

"재판 내용이 뭐냐?"

철두의 물음에 닉은 심각한 와중에도 고소를 머금었다.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진즉에 물어봤을 안건이건만, 결투재판이 하루 앞둔 오늘에서야 물어보는 무신경이 감탄스러울 지경이다.

"영지 소유권 다툼입니다."

"으음. 누구와?"

"수르 상단과의 분쟁입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에르미스가 불쑥 물었다.

"어떤 영지기에 상단끼리 그리 심각하게 다투는가?"

"하하, 작은 영지입니다."

"작은 영지에 백작가의 운명을 걸 정도인가?"

"...."

닉은 침을 꿀꺽 살피곤 마부를 보았다.

이내 두 사람을 손짓해 머리를 가까이 들이밀고는 귓속말로 조용히 말해주었다.

"그 영지에서 마석 광산이 발견되었습니다."

"오!"

에르미스는 단박에 이해했고, 강철두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뭐냐? 마력석 같은 거냐?"

"...마력를 품은 광물이지요."

"그게 왜?"

"...귀한 겁니다."

"그렇군."

철두가 납득했다.

"큰돈이 걸린 일이군."

제국의 눈 밖에 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도 그렇지만, 세 번의 재판으로 인해 잃은 게 많습니다. 재물보다는 모솔 상단의 명성과 신뢰를 되찾기 위해서 더욱 중요합습죠."

모솔 상단주가 백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는 작위에 대해서는 별 미련이 없다.

그 스스로를 상단주로 자각하기에 제국에 대한 충성심 따위보다는 상단의 신용과 명성을 더욱 중요시하는 그다.

그렇기에 궁중백의 재판 결과까지 부정하고 이곳 티르신이 관장하는 결투장까지 오게 된 터다.

"오늘 하루 즐겨주십시오. 결투재판은 내일입니다."

"후후, 좋다."

철두와 에르미스는 낙원의 섬을 관광하기 시작했다.

225화 결투 시작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우오오오!"

해변에 깔린 의자와 테이블에 앉아 주문한 음식들이 줄줄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먹어본 지 꽤 된 해산물 요리가 가득한 것이, 아직 포크도 들지 않았는데 군침이 흐를 정도였다.

"모솔 상단에서 모두 지불하는 것이니, 마음껏 드시기 바랍니다."

"후후, 이것들 전부 다섯 개씩 더 내어와라."

잘 되었다.

철두의 스탯은 거의 대부분이 200을 넘겼기에 남아있는 성장 한계가 어마어마했다. 저 높이 천장을 올려버렸으니, 이제 그 속을 채울 차례다.

몸을 움직이고 적응시키는 훈련만큼이나 회복과 영양 섭취도 중요한 일.

"후루루룹."

"촵촵촵!

본격적으로 음식을 흡입하기 시작한다.

몸 쓰는 일이 기본인 대장장이 드워프도 요란하게 혀를 놀리기 시작하자, 음식을 내어오기 무섭게 접시가 비기 시작했다.

"식사 후엔 관광을 해보시겠습니다."

"그 시간에 하나라도 더 먹어야지."

"...."

"후후, 낙원의 섬에 있는 모든 음식을 맛보고 가겠다."

"...예에, 다른 식당을 섭외해 두겠습니다."

모솔 상단의 닉은 손님 대접에 소홀함이 없었다. 철두는 맛집 투어를 다니며 하루를 온전히 보냈다.

"후, 자네 대단하군. 이런 대식가는 내 인생에 처음 봄세."

"먹는 즉시 소화하면 된다."

"소화할 시간이 어딨었나?"

"즉시 소화하면 소화할 시간은 필요 없다."

"...."

내내 먹기만 했는데 배도 안 부른지, 철두는 그야말로 끊임없이 먹었다.

"자네, 그새 살찐 것 같군."

"근육이 찐 거다."

"허허허, 원 농담도."

초인의 경지에 들어버린 바바리안의 몸은 소화된 에너지를 저장할지, 신체의 성장에 사용할지 스스로 결정 내릴 수 있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후후, 위대한 전사는 근육에 힘을 비축하는 법이지."

어디 에너지를 꼭 지방에만 비축하던가.

철두는 그저 먹는 것으로 내일을 위한 모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식당 투어를 마치고 모솔 상단의 리조트로 왔을 땐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쏴아아아아, 촤아아아아.

객실의 테라스에서 보는 밤바다의 전경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별빛을 그대로 담아낸 바다와 두 개의 서로 다른 색깔의 달빛이 그 고고한 아름다움을 파도에 실어 보내고 있었다.

"에르미스."

"왜 부르나?"

"일식이나 월식은 이제 일어나지 않는 건가?"

"그거야 초보자맵 전용 이벤트가 아닌가?"

"...."

"우리 제타가 노바로 연결될 때도 그러했다네."

"그 이야기 좀 해줘라."

"뭔 이야기 말인가?"

"제타."

"이야기하고 말고 할 게 뭐 있나? 이미 오래전에 흡수되고 만 고향인데."

"미궁이 열리면 갈 수 있지 않나?"

"그것도 운이 좋은 경우라네. 미궁이 언제 열릴지도 알 수 없는 데다, 고향 행성에 미궁이 열릴 확률이 얼마나 되겠나?"

"음, 노바에 연결된 행성이 몇 개인지 알고 있나?"

"나도 모르지. 다만 우리 행성은 발할라 전이었네."

노바는 그간 여러 행성과 연결되었다.

구원인지 타락인지 모르겠지만, 다시 고향을 보기 위해서는 미궁을 통해야 한다.

...제타, 발할라, 지구.

"가장 최근에 연결되었을수록 미궁으로 출현할 확률이 높으니, 당분간 미궁이 생기면 무조건 가게나."

"당연하다."

"최대한 많이 챙기시게. 다시 이룩하기 힘든 문명의 유산들 아닌가."

제타 행성 출신의 드워프 에르미스도 고향에 두고 온 것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지금도 번화한 것 같은 드워프 문명이지만, 그들도 전성기에 비해 한없이 퇴보한 상태일 뿐이다.

"끙, 이만 주무시게나. 난 피곤하군."

"허약한 난쟁이군."

"하아, 정말 자네의 숨 쉬듯이 뱉어내는 비하는 견디기 힘들군."

"후후후. 너도 야만인이라 불러라."

"난 교양을 지키도록 하지. 잘 주무시게."

"후후후."

에르미스가 자신의 방으로 가버렸다.

호화롭게 꾸민 리조트의 침실과 테라스, 그리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철두는 어쩐지 몸과 마음이 느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낙원의 섬이라...."

오늘만 같다면 분명 낙원으로 불릴 만한 곳이다.

*

결전의 날이 밝았다.

"잘 주무셨습니까?"

드라운 모솔 백작이 환히 웃으며 철두를 반겼다.

"후후, 잘 잤다."

"긴장도 안 하시는군요. 제가 대전사를 제대로 섭외했군요."

"후후, 받은 만큼은 해내야지."

"예에, 약속한 '성수'는 결투재판이 끝나고 바로 양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다."

철두는 간단하지만 비대한 아침 식사를 하곤 결투장으로 향했다.

여기저기 결투하기 좋은 광장 같은 것들이 군데군데 있는 섬에 경기장은 셋.

그중에서 검투사들의 대화가 매일 열리며 하루라도 결투가 없는 날이 없는 유료경기장, 티르의 심판장은 가장 커다란 콜로세움이었다.

관중 2만은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

인간이 지었다고는 믿기지 않는 웅장한 건물에 들어서며 드워프 에르미스는 감탄을 거듭했다.

"정말이지 여기는 올 때마다 놀랍군."

"뭐가 말이냐?"

"우리 드워프의 건축 기술도 하늘에 닿았다 자부하는데, 이토록 견고하고 거대한 구조물은 흔치 않네."

철두가 피식 웃었다.

"지구엔 흔한 경기장이다."

"음? 훗, 허세는."

"스포츠 경기장은 대부분 이 정도 크기다. 이보다 더 큰 경기장도 수두룩하지."

"하하하, 그렇다고 침세."

에르미스는 아예 허풍으로 여기는지 웃으며 넘겼다. 지구의 경기장을 더 자랑하자니 유치한 것 같아 철두도 관두었다.

곧 모솔 백작과 에르미스는 관중석으로, 강철두는 출전 대기석으로 향했다.

구구구궁.

실내에 만들어진 대기석 위는 관중들이 빼곡히 들어찬 관람석인지라, 그들의 발소리로 웅웅거리는 진동이 그대로 전해졌다.

철두의 등장에 대기실에 있던 수십 쌍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낯선 이에 대한 경계와 호기심, 이유 모를 적대감이 가득한 와중에 풀 플레이트 아머를 챙겨입은 사내 하나가 일어서며 웃었다.

"훗, 너로군. 나의 상대가."

"누구냐?"

"...?"

상대는 눈을 치켜떴다.

"날 모르나?"

"처음 보는데 어떻게 아냐?"

"하하하하하! 허세는, 좋아."

상대는 철두가 부러 모르는 척한다고 여겼지만 친절하게 자기소개를 해주었다.

"나는 이 검 하나로 세상을 떠도는 자유 기사 발베르 조르다."

"발바리?"

"...."

"조루?"

"...!"

발베르 조르는 비죽 튀어나오려던 욕지기를 눌러 삼켰다.

"어이없는 놈이군."

이런 질 낮은 도발을 하다니.

"하하하, 마음껏 까불어 두어라. 네 목이 내게 달아나는 건 정해진 운명이었으니."

"말이 많은 놈이군."

"풉, 이제 그런 도발은 통하지 않네. 이따 봅세."

발베르 조르가 대기실을 나서버리자 사람들이 웅성웅성거렸다.

"불쌍하군. 하필 상대가 질풍의 기사라니."

"어이, 괜히 희롱당하지 말고 경기를 포기하게."

철두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놈의 이명이 질풍의 기사인가?"

"...자네 정말 질풍의 기사를 모르나?"

"모른다."

"허! 상대도 알려주지 않다니.... 자네 의뢰인이 자네를 버림패로 쓰는 거로군."

"후후, 상관없다."

"대책 없는 자군. 아무리 돈이 급해도 상대가 누군지는 들어보고 결투를 받았어야지."

철두가 그저 피식 웃자 모여든 검투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질풍의 기사는 대단한 자야. 제국에서 열리는 토너먼트의 단골 우승자기도 하고, 이곳 티르의 심판대에서의 전적도 화려한 자지."

"그래서?"

"쯧, 자신감이 과할 나이긴 하니 더는 참견 않겠네. 무운을 빌지."

친절히 알려주던 검투사가 멀어지자 더 이상 철두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접근하지 않았다.

목숨이 오고 가는 이런 경기에 나서는 자들 중에 징크스 하나 없는 자가 없고, 미신을 신봉하는 자도 다수다.

굳이 패배가 점지되어 곧 죽을 목숨인 강철두에게 말을 걸었다가 패배의 불운이 옮겨붙을세라 멀리하는 것이다.

철두는 조용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피식 웃었다.

모솔이 정말 자신의 패배를 염두에 두고 골랐을까?

패배를 염두에 뒀다면 정말 어중이떠중이 중에 아무나 골라도 되었다. 굳이 귀한 영약까지 써서 대전사로 섭외한 건 승리의 믿음이 있어서다.

'적어도 성물의 힘은 믿겠지.'

정보의 전달이 늦은 시대라 아직 철두가 묠니르의 주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널리 퍼지지 못했다.

기껏해야 드워프 수도인 자이언트 포지와 그곳에 있었던 상인들이나 알고 있는 정보.

정보가 돈이 되는 시대이기에 상인들의 입에서 이 정보가 대중에게 퍼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테다.

어쩌면 오늘은 성물의 주인이 세상에 모습을 내보이는 첫 무대가 될지도 모르는 날이다.

'묠니르가 없어도 충분하다.'

물론 철두는 묠니르를 굳이 처음부터 꺼내지 않을 작정이다. 상대가 강자라면 더없이 좋은 훈련 상대일진대, 아이템의 힘을 빌려 레벨업할 기회를 놓치는 건 멍청한 선택이다.

고행은 사서도 하는 것이고, 강자와의 생사결 기회는 쉽게 오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은은하고 따분한 시간이 지나, 진행 요원이 왔다.

"아이언헤드 맞습니까?"

"맞다."

"출전입니다."

"후후."

철두가 걸어 나갔다.

본디 철두의 복장은 바지와 멜빵을 닮은 대거 벨트가 끝이었지만, 신체 재구성 이후에는 상의를 입고 다닌다.

'빈약한 육체를 자랑할 수는 없지.'

마른 근육은 그에게 있어 멸치나 다를 바 없다.

지금 철두의 모습은 검투에 나가는 전사의 복장이라기보다는 관광 온 여행객의 차림이었다.

갑옷은 하나도 없고, 상하의 평상복에 허리벨트와 거기에 매달린 검 한 자루가 전부다.

무한결투장에서 특전을 구매할 수 있게 되면서 인벤토리가 더욱 늘어나, 어지간한 무기들은 모조리 아공간에 보관하는 철두다.

철두와 발베르 조르가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재판의 신 티르께서 굽어살피시는바!"

어디선가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진원지를 찾아보니 장내 아나운서 같은 녀석이 쩌렁쩌렁 고함지르고 있었다.

"수르 상단의 대전사 발베르 조르경과 모솔 상단의 대전사 아이언헤드의 결투재판을 시작하노라!"

신의 대리자라도 된 듯 떠들어대는 그의 눈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재판을 속행하라!"

여전히 빛을 내뿜는 그 눈을 보며 철두는 적잖이 놀랐다.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아우라가 할아버지 강용철의 그것과 흡사해서다.

'정말 신의 대리자인 모양이군.'

대지의 여신 아리아도 대사제가 있는데, 재판의 신 티르라고 대사제가 없겠는가.

"후후. 덤벼라, 애송이."

발베르 조르가 검을 뽑아 들었다.

"혹, 시집간 누이가 있다면 내 네놈을 살려주도록 하마."

"...?"

철두는 그답지 않게 벙찐 얼굴이 되었다.

정확히는 할 말을 잃었다는 표현이 딱 맞으리라.

"이상한 녀석이군."

"흐흐, 없는 모양이군. 그럼 죽어야지."

철두가 성큼 다가섰다.

그의 검에 검기가 서려 빛났다.

츠츠츳.

발베르의 검에도 검기가 서렸다.

슈아아악, 까앙. 카앙!

몇 번의 검이 부딪힌 뒤, 철두의 인상이 굳어졌고 발베르 조르의 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갓 초인에 든 녀석이구나."

"...."

확실히 건방을 떨 만한 실력이다.

아미르 왕국의 3검이라는 녀석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차이가 컸다.

발베르 조르의 검술 실력만큼은 진짜배기다.

"그 위의 경지가 있다는 것을 내 오늘보여주마."

츠츠츠츳.

발베르 조르의 검에 맺힌 검기가 쑥하고 길어졌다.

두 배는 더 두꺼워졌고, 길이도 반 배는 더 늘어났다. 숫제 검에 빛으로 된 검집을 덮어씌우기라도 한 듯 커졌는데 그 기세가 심상찮았다.

"잘 보아라. 레벨 6의 경지를."

역시, 녀석은 한 단계 높은 수준의 검수다.

안타깝게도 지금으로서는 절대 이길 만한 상대가 아니다.

철두는 별수 없이 검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포기냐?"

발베르의 말에 철두가 고개를 저으며 망치를 꺼내 들었다.

"템빨이다."

"...?"

발베르 조르가 의아해하는데, 철두의 망치에 어마어마한 전격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파지지지직!

2만 관중석에 있던 모든 이가 움찔 놀랄 정도였다.

226화 신의 망치

강철두가 대기실로 향하고, 모솔 백작과 에르미스는 관중석으로 향했다.

"상단주님, 큰일입니다."

"무슨 일이냐?"

"수르 상단의 대전사가 바뀌었습니다."

드라운 모솔 백작이 흠칫 놀랐다.

"뭐? 카인츠 경이 아니었나?"

"예, 출전 명단을 확인하니 다른 자였습니다."

카인츠는 수르 상단주의 사위로, 소드마스터다.

수르 상단이 대상이 된 데는 상단주의 수완이 컸지만, 그 사위인 카인츠의 공도 무시 못 할 정도였다.

중요한 결투재판마다 언제나 승리하며 수르 상단을 지켜온 그였기에, 이번 결투도 그가 나서리라 생각했다.

수르 상단에서 내보일 수 있는 최선의 패가 카인츠였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상단의 사위이자, 천년급의 영약을 벌써 몇 개나 먹여 애지중지 키운 소드마스터.

이만한 전력을 두고, 외부에서 대전사를 찾으리라곤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카인츠보다 더 강한 자를 대전사로 내세우기 위해서는 재물만으로는 안 될 테니까.

'내가 얼마나 고심해서 골랐는데.'

드라운 모솔 백작이 강철두를 포섭하기 위해 얼마나 큰 값을 치렀나?

"수르 상단 대전사가 누구인가?"

"발베르 조르 경입니다."

"발베르...."

강한 자다.

제국에 그 명성이 자자한 자.

토너먼트의 왕이라고까지 불리는 자다.

명성만큼이나 악명도 자자한 자다.

여자에 미친 새끼.

유부녀에 환장한 놈 등등.

그의 여성 편력만큼이나 포섭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설마!"

드라운 모솔 백작은 아차 싶었다.

"나트롱 백작이 개입했단 말인가?"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정보가 샜군."

"...."

드라운 모솔 백작이 눈을 감았다.

모솔 상단의 대전사가 강철두로 정해졌다.

나름 극비로 취급한 정보였건만, 수르 상단은 용케도 이것을 알아냈다.

'나트롱 백작과 아이언헤드는 원수지간.'

강철두를 제거하려는 나트롱 백작의 원한과 모솔 상단을 이기려는 수르 상단의 요구가 맞아떨어졌다.

두 가문이 손잡고 발베르 조르를 설득해 이끌어낸 것이라면, 그리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다.

"쳇. 알겠다. 가봐라."

"예, 상단주."

보고하는 닉도, 보고받은 모솔 백작도 잠시 당황이야 했지만 그리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낭패를 볼 뻔했군.'

묠니르를 얻기 전의 강철두였다면 절대 발베르 조르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가 성물의 주인인 것은 아직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으니.

'수르 상단 놈들도 아직 모르나 보군.'

아니면.

'알면서도 방법이 없어 발베르 조르에게 알려주지 않았거나.'

기밀인 대전사까지 알아낸 것을 생각하면, 수르 상단에서 묠니르의 주인이 탄생한 사실을 몰랐을 리는 만무했다.

허나 적어도 상대 대전사는 아직 모르는 것 같으니.

방심만 하지 않으면 이긴다.

드라운 모솔 백작의 얼굴에 다시 여유가 깃들었다.

"대전사가 바뀐 모양이구려."

"흠, 그렇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없지요. 이쪽은 성물의 주인이니."

"흐흐, 왜 문제가 없소?"

"...?"

에르미스가 히죽 웃었다.

"값이 다르지 않소?"

"...!"

"카인츠인가 하는 놈의 상대로 저놈을 포섭한 것 같은데, 상대가 바뀌었으니 흥정을 다시 해야지."

"허."

모솔 백작은 짧게 탄식하고는 신중히 말을 골랐다.

'빌어먹을 난쟁이 새끼.'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손해 보기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놈들답다.

"하오나, 에르미스 공께서는 아이언헤드와는 관련이 없지 않소? 공께서 흥정을 대신 이어갈 이유는 없소."

"흐흐, 왜 관련이 없나? 그럼 내가 상대가 바뀐 것을 귀띔하고 경기를 포기하라 일러도 되나?"

"...제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내가 원하는 게 뭐겠나? 없어. 그냥 거래가 공정치 못하다는 소리지."

"...."

모솔 백작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에 에르미스의 얼굴은 더욱 활짝 펴졌다.

남의 손해가 그의 이득이 아닐진대, 표정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빌어먹을 난쟁이.'

모솔 백작이 차분히 이야기했다.

"결투가 끝나고 아이언헤드 영주와 적절한 보상에 대해 다시 논하겠습니다."

"워어, 그때가 되면 이미 결과가 난 마당인데 무슨 흥정? 흐흐."

"...어찌하시길 바랍니까?"

"적절한 보상에 대해 이야기해 보세. 내가 대신 흥정해주지."

난쟁이를 상대로 흥정이라니.

치가 떨리는 일이다.

이 날강도 같은 녀석이, 제 일도 아닌데 왜 훼방인지 모르겠다.

"아이언헤드 영주는 영약을 특히 귀하게 여기니, 상단에 보유 중인 영약 하나를 더 내놓겠습니다."

"고작 하나?"

"...."

에르미스가 익살스럽게 웃었다.

"성물 묠니르를 한 번 휘둘러주는 조건으로 우리 드워프 왕국이 내건 보상을 생각하면 뒤집어지겠군. 크크크."

"...."

"우린 그 한 번을 대가로 천년급 영약 2개와 백년급 수십 개를 내어주었네."

"...!"

모솔 백작이 입을 쩍 벌렸다.

"...에르미스 공은 우리 상단이 파산하길 바라십니까?"

"흐흐."

"대가란 것은 지불할 능력이 있을 때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일개 상단과 왕국의 저력이 어찌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상대는 같은 것을 제공하지."

"...."

묠니르의 주인이 한 번 휘둘러 주는 대가.

"흐흐흐. 거래할 마음이 없으면, 이따 철두가 출전하면 내 소리쳐주지."

"...이러기요?"

"흐흐, 뭐가?"

"상단이 무엇을 내어주면 만족하시겠소?"

"마석 광산."

"...!"

모솔 백작은 하마터면 저 밉살스럽게 웃는 드워프의 얼굴을 한 대 칠 뻔하였다.

"마석 생산량의 50% 정도면 되겠구려."

"허,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흐흐, 아니면 우리 왕국처럼 천년급 영약 둘을 구해보시구려."

"...."

"영 말이 안 되지도 않지. 어차피 결투를 포기하면 전부 날리게 되는 셈인데, 무려 50%나 건질 수 있는 것 아니오?"

"으음."

"그것도 당장 수중에 있는 것을 내어주는 게 아니라 미래에 얻을 것에서 나누는 것이니.... 이리 재고 저리 재도 손해는 아닐 게요."

드라운 모솔 백작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 깐깐한 드워프란 족속들은 손해 보는 걸 특히나 싫어하는 종으로, 호구처럼 보이면 바가지 씌우는 일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에르미스 공은 이득이 없지 않소? 내 그대에게 마석 생산량의 10%를 드리리다."

"어허, 나를 모욕할 셈이오? 내가 대가로 줄 것이 없는데 어찌 나랑 흥정하자는 거요?"

"왜 없습니까? 침묵을 대가로 줄 수 있지요."

에르미스만 입 닥치고 강철두에게 말하지 않으면 된다.

"더는 나를 모욕하지 마시오. 내 정직함을 시험하려거든 결투를 걸어야 할 것이오. 난 흥정의 대상이 되지 않소."

"끄응."

까다로운 놈들이다.

돈을 지나치게 밝혀서 그렇지, 또 도둑질이나 사기는 안 치는 종족이 드워프다.

'정직한 씹새끼.'

드라운 모솔 백작은 겨우 심신을 달랬다.

그래, 좋게 생각하자.

어차피 모두 잃을 것이라면 반이라도 건지는 게 낫지.

'영 손해도 아니다.'

강철두에게 50%나 갖다 바치게 되었지만, 그것도 손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무려 성물의 주인과 함께하는 마석 광산 채굴이다.

앞으로 누가 있어 감히 시비를 털까?

'제국과는 사이가 멀어졌다.'

이미 궁중백이 관장한 결투재판을 부정한바, 제국과는 소원해질 수밖에 없다. 이제 더 나은 뒷배를 골라야 할 때인데, 성물의 주인이라면 차고 넘치는 자격이 있었다.

'관계 유지의 비용.'

이익이 줄긴 하겠지만 손해는 아니다.

"좋습니다. 광산의 마석 생산량의 50%를 아이언헤드 영주에게 넘기겠습니다."

"후후, 좋은 딜이군. 그럼 난 잠자코 보고 있도록 하지."

열세 번의 결투가 있고, 열셋이 목숨을 달리했다.

사람들은 열광했고, 이제 오늘의 메인 이벤트이자 마지막 결투가 진행되려 하고 있었다.

"오오, 토너먼트 왕이다!"

"자네 어디에 걸었나?"

"당연히 발베르지!"

"마상 창 시합이 아닌데도?"

"바보야. 발베르 조르라고! 난 그가 패배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상대도 대단한 모양이던데."

"아이언헤드? 헹, 지구 출신이야! 이제 겨우 행성 연결이 완료된 그곳 출신이 강해져 봐야 얼마나 강하겠어?"

"맞는 말이야. 발베르 조르는 10년 전에도 절대강자였다고."

"하긴, 물리적인 시간을 무시하지 못하지."

"어어? 나온다."

티르 신의 대사제가 요란한 목소리로 메인 이벤트의 시작을 알렸다.

츠츠츳.

"오오! 둘 다 소드마스터야!"

쾅, 콰앙!

역시 메인 이벤트.

두 소드마스터가 격돌하며 검기의 격돌음과 충격파가 결투장을 쩌렁쩌렁 울리게 했다.

잠시 떨어진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무어라 이야기하더니 잠시 뒤, 발베르 조르의 검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어어어?"

"미, 미쳤다! 위대한 검사의 탄생이다!"

사람들이 경악했다.

2만여 관중이 술렁거렸다.

*

나트롱 백작의 부탁을 끝내 거절하지 못했다.

"수르 상단의 결투재판에 그놈이 나온다네. 자네가 해결해주게."

"내가? 왜?"

"...내 딸과 티타임 정도는 허락해주지."

"오호!"

딸과의 하룻밤을 허락해준 건 아니지만 상관없다.

본디 공략하기 어려울수록 그 성취감은 크니까.

더욱이 유부녀는 남편만 이기면 된다.

이 결투와 다를 바가 없다.

상대만 이기면 승리는 내 차지다.

그런 의미에서 수르 상단이 대전사의 대가로 내어준 천년삼은 대단했다.

황제에게 후작으로 예우하겠다는 봉신 대신, 영약을 지급받은 그다.

'귀찮게 영지는 무슨, 그거 키울 돈으로 나에게 투자하겠다.'

그렇게 산 지 수십 년의 세월.

드디어 찰랑이던 물이 넘쳤음인가?

쯔아아아아앙!

"후후후, 이것이 바로 위대한 검이다."

발베르 조르의 도발에 당황한 상대의 얼굴이 보인다. 제깟 놈이 아무렴.

위대한 검은 이제 곧 탈피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증거.

여태 그가 취한 영약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백년급은 백이 넘고부터 세는 것도 포기했고, 천년급만 무려 열두 개는 먹었다.

조금만 더 하면 정말 '탈피'가 머지않았다.

"흐흐흐, 포기냐?"

상대가 검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이내 망치를 꺼내든 녀석의 얼굴이 심상찮다.

"그, 그 망치는 뭐냐?"

"묠니르다."

"...?"

발베르 조르의 사고는 퍼뜩 이어지지 않았다.

성물? 설마.

"가당찮은 헛소...."

파지지지직.

헛소리로 치부하기에는 망치에 모여든 전격이 심상찮다.

밀프 헌터 발베르 인생 최악의 위기감이 그를 잠식했다.

"그, 그만! 네놈! 정정당당하게 붙어라!"

"후후후, 나는 당당하다."

"비겁하게 템빨이라니!"

"너는 약빨이잖아."

"...!"

발베르 조르의 말문이 턱 막혔다.

이런 몰상식한 놈이 있나?

"약빨은 실력이다!"

"후후, 비내추럴 같은 소리를 하는군."

"무슨 헛소리냐!"

"템빨도 실력이다."

"비, 비겁한 소리 말고 검을 들어라!"

"후후후."

철두가 히죽 웃었다.

비겁하긴.

새끼, 그러니까 적당히 강할 것이지.

검술 훈련도 좀 하게 말이다.

"이, 이 비겁한 노옴!"

발베르 조르가 더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지금도 망치에 모여든 기운이 어마어마한데, 더 기다렸다간 서 있기도 힘들 것 같아서였다.

"후후후."

후우우웅.

철두가 망치를 휘둘렀다.

빠져나간 마력은 20% 수준.

꾸우우우우웅!

망치에서 뻗어 나간 백뢰가 발베르 조르의 몸에 작렬했다.

파스스스스.

그대로 빛이 되어 흩어진 그가 존재했던 자리에 덩그러니 그 전리품만 떨어져 내렸다.

철컥.

"또 검이네."

지겹게 말이야.

철두는 위대한 검사가 착용하던 검을 쥐어 들었다.

227화 마더

<할아버지>

위대한 검사였던 할아버지의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닮고자 한다. 각오를 다지기 위해 새 검을 빚어냈다.

내구력 +

내구력 +

내구력 +

발베르 조르가 위대한 검사였던 자신의 할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만든 검.

"흐음, 위대한 검사라."

검기를 넘어 검강의 경지에 오른 자를 이르는 말인 듯했다.

레벨 5 초인의 영역을 넘어,

레벨 6 위대함에 닿은 영역.

좋은 검이다.

얼마나 부러지기 싫었는지 무려 내구력 3강의 검이다.

팅!

검면을 쳐보니 익숙한 질감이다.

새벽 어스름과 같은 미스릴 검.

그것보다 더 좋아 보이는 건 착각인가?

"후후, 좋군."

철두는 검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둘 다 롱소드보다 더 큰 양손검이지만, 철두의 근육과 힘을 생각하면 쌍검으로도 쓸 만했다.

투핸디드 소드도 한 손으로 휘두를 만큼 괴력은 충분하니까.

"재판의 신 티르께서 경기를 보셨다!"

파파파팟.

괴상한 음성으로 소리치는 티르 신의 대사제는 눈알이 돌아 있었다.

정말 돌아 있어 흰자위뿐인 눈알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이언헤드의 승리다! 모든 진실은 승리자의 전리품이니! 모솔 상단이 옳고, 수르 상단이 그르다!"

파파팟.

대사제는 장황하게 외치고는 쓰러졌다.

정말 신이 잠깐 강림했다 갔는지, 퍼포먼스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중들은 열광했다.

"와아아아아!"

"아이언헤드!"

"묠니르가 들렸다!"

"묠니르가 세상에 났어!"

이곳 경기장에 모인 이들만 2만여 명.

그들 모두가 낙원의 섬에서 결투를 즐길 정도의 부유층이거나 힘과 권력을 가진 사회지도층들.

그들이 자신의 본거지로 돌아가 전할 소식을 생각하면 이제 세계가 알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묠니르의 주인이 나타났다.

지금 시대의 성물은 오직 하나.

황제의 듀렌달뿐이었다.

그 유일무이한 상징성이 그를 더욱 위대하게 만들었는데, 그 대항마가 나타나 버렸다.

소재는 진즉 파악이 되었지만 오래도록 주인이 정해지지 않았던 성물, 묠니르와 궁니르.

그중 하나의 주인이 정해져 버렸다.

아이언헤드의 이름이 노바에 널리 알려질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와아아아아아!"

군중의 환호성을 뒤로하고 대기실로 들어서니,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던 검투사들이 주춤하고 물러섰다.

"성물의 주인!"

"...승리를 축하합니다."

"...."

몇몇은 뻔뻔하게 말을 걸어왔지만, 대부분은 그저 멀뚱히 철두를 바라볼 뿐이었다. 개중에는 질시가 가득한 눈빛도 있었다.

'운 좋은 놈.'

'어떻게 성물의 선택을 받았지.'

성물은 주인을 가려 섬기는 귀물.

검투사들은 강철두가 강해서 이긴 게 아니라, 묠니르가 있어서 이겼다고 생각했다.

우습게도 이곳에서 소드마스터는 강철두 한 명뿐인데 말이다.

"후후후. 다음에 보자고, 약골들."

"...!"

대기실을 나선 철두를 한달음에 달려온 드라운 모솔 백작과 에르미스가 반겼다.

"아이언헤드 영주님은 우리 상단의 은인이시오!"

"흐흐, 잘 봤다. 역시 대단하군."

"후후, 별거 아니었다."

"자자,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상단의 지부로 가시지요. 모시겠습니다."

드라운 모솔 백작은 강철두를 서둘러 모솔 상단 소유의 리조트로 안내했다.

"승전 연회를 준비하겠습니다. 초대에 응하려는 자들이 줄을 설 겁니다."

"됐다. 우리끼리 밥이나 먹자."

"...여, 연회를 열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무력이 명성을 낳고, 그 명성이 힘이 되는 건 인맥을 불러와서다.

유명하다는 것은 나를 널리 알리는 것 이상의 힘이 있었다. 힘을 가진 기득권들도, 저자의 무명인들도 호감을 가지고 대하게 만드는 힘이 명성이다.

승리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지금이야말로 그 명성의 가치가 가장 높을 때다.

인맥을 늘릴 이런 좋은 기회를 걷어차다니?

"보상이나 내어와라."

"으음.... 알겠습니다."

"왜? 이제 와서 아까우냐?"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한쪽에서 이 상황이 재밌는지 웃고 있던 에르미스가 끼어들었다.

"흐흐, 원래 네 상대가 다른 놈이었다지 뭐냐. 중간에 더 센 놈으로 바뀐 거지."

"으음. 확실히...."

성물이 아니었다면 철두도 위험했으리라.

처음 본 검강이 내뿜는 기세가 심상찮았으니까.

'그래도 정령으로 검강을 막아낼 수 있었을까? 아니, 애초에 부딪히지 않고 투척 무기로....'

여러 가지 전략이 머릿속에 떠올랐으나 철두는 지나간 일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그래서 내가 보상을 좀 더 뜯어냈지."

"뭐로?"

"모솔 상단 소유의 광산에서 채굴한 마석을 5:5로 나누기로 했네."

"오! 누가 5인가?"

"...."

"...."

에르미스의 얼굴이 팍 구겨졌고, 모솔 백작의 입이 쩍 벌어졌다.

두 사람의 리액션에 철두는 흡족하게 웃었다.

"후후후, 농담이다."

"진짜겠지?"

"날 바보로 아나?"

"...넘어가지."

"후후."

철두가 물끄러미 모솔 백작을 보자, 그가 인벤토리에서 준비한 보상을 끄집어냈다.

"지난번에 지급하기로 한 백년급 영약 '성수'입니다. 그리고 채굴한 마석의 50%를 양도한다는 맹약의 서입니다."

파파팟.

모솔 백작은 바로 맹약의 서 앞에서 맹세하고는 그것을 철두에게 주었다.

하지만 철두는 받지 않았다.

모솔 백작의 얼굴에 언뜻 희망이 서렸다.

최초 계약대로 성수만 받고 끝내려고 함인가?

이것이 위대한 전사를 목표로 정진하는 전사의 정직함인가?

"바, 받지 않으십니까?"

"이게 단가?"

"예?"

"실망스럽군."

"...."

시발, 수전노 드워프보다 더한 종족이 있다면 그건 바바리안일 것이다. 이 철면피 같은 놈을 뒷배로 두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혹, 더 원하시는 게 있으십니까?"

"전에 보니까 알 같은 게 있던데."

"...."

파팟.

인벤토리에서 상자에 담긴 비룡의 알을 꺼냈다.

"드리겠습니다."

"후후, 고맙게 받지."

철두는 그제야 맹약의 서로 만들어진 마석 광산의 지분까지 받아 갔다.

"그런데 마석이 뭐지?"

"...마법의 에너지원으로 쓰이는 광물입니다."

"오, 마법 배터리군."

철두가 고개를 끄덕이곤 에르미스를 칭찬했다.

"잘했다. 에르미스."

"흐흐흐."

"얼마를 원하나?"

"크크크큭!"

에르미스가 박장대소했다.

"역시, 말이 통하는 바바리안이군. 나는 이익을 본 흥정의 대가로 2할을 원한다."

"많다!"

"크흠, 그럼 1할."

"좋다."

"흐흐, 좋은 거래다."

"후후, 굿 딜."

철두와 에르미스가 서로 악수했다.

둘 사이에 맹약의 서니 뭐니 하는 신뢰의 절차는 없었다.

"...두 분께서는 미리 이에 대해 의논하신 겁니까?"

"아니."

"마석의 가치가 결코 낮지 않음인데, 어찌 1할이나 되는 양을 그리 덥석 주십니까?"

"공에 상이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하다."

"...."

철두의 말에 에르미스가 다시 크게 웃었다.

"이봐, 모솔 백작. 자네는 상인이고 철두는 영주야."

"...아."

모솔 백작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익을 우선시하는 상인과 지배자의 관점은 이토록 다르다.

은연중에 모솔 백작도 알고 있기에, 그는 스스로를 제국의 백작이 아니라, 모솔 상단주로 정의하지 않는가?

'한 방 먹었군.'

드워프 에르미스는 철두가 흔쾌히 논공을 해줄 것을 알고 대신 흥정에 나선 것이다.

당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뒷배로 둘 만한 자다.'

적어도 이익을 배신할 성격은 아니다.

논공이 철저하다는 것은 공사 구분이 명확하다는 것이니, 앞으로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면 이익이 되면 되었지 손해 볼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긴밀한 관계는 이미 형성되었다.

마석 광산의 공동 채굴로 말이다.

"앞으로 생산된 만 석은 아이언헤드령으로 안전히 운송해드리겠습니다."

"후후, 알겠다. 그럼 밥이나 먹자."

철두는 문득 수저를 들다가 물었다.

"근데 알은 하나뿐인가?"

"...!"

막 기분 좋게 밥을 먹으려던 모솔 백작이 흠칫 놀랐다.

"...어찌 물으시는지요?"

"한 마리 더 주면 고맙다."

"...."

이 날강도 같은 새끼.

"주기 아깝다면 팔아도 괜찮다. 섭섭하지만 돈을 주마."

"...드리겠습니다."

모솔 백작은 괜히 더 털릴까 봐 얼른 비룡의 알을 내어놓았다. 정말 두 개뿐인 알인데 다 내어주고 말았다.

"후후, 얼마냐?"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는 제 성의로 봐주십시오."

"후후후, 섭섭할뻔했군."

"하하하."

철두는 냉큼 비룡의 알을 챙기고는 술잔을 내밀었다.

"한잔해라. 너랑 나는 이제 친구나 다름없다."

"오, 기껍고도 달콤한 말입니다."

"후후, 말 편하게 해라."

철두의 말에 모솔 백작이 헤벌쭉 웃었다.

무려 성물의 주인과 이런 급진적인 친분을 쌓다니.

바라마지않던 상황이다.

"제가 영주님을 허물없이 대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편하게 대하래두. 모솔."

"으허허허! 알겠네. 아이언헤드."

"자, 짠."

"허허, 좋지!"

철두가 내미는 잔을 부딪치곤 쭉 들이켰다.

술이 달다, 달아.

묠니르의 주인과 친구를 먹다니.

"후후후, 앞으로 자주 선물도 하고 그래라."

"하하하, 무, 물론이네."

"후후후."

"하하하."

"후후."

"...취하는군. 나는 이만 쉬어야겠네."

"벌써?"

"주량이 약하다네."

"아쉽군. 쉬어라."

"허허허, 조촐한 연회지만 즐기게나. 음식은 무한대로 나올 걸세."

"기꺼운 소리군."

모솔 백작이 서둘러 떠나자 에르미스가 음흉하게 웃었다.

"이거 호구 잡았구만."

"후후, 호구라니. 친구다."

"으허허허! 선물을 뜯어낼 친구 말인가?"

"친구끼리 무엇이 아까운가?"

"크하하하하! 걸작이야. 걸작!"

에르미스는 신 행성 지구 출신의 이 바바리안 영주가 마음에 들었다.

"자네, 나랑도 친구 할 텐가?"

"후후, 넌 이미 내 친구다."

"으허허허, 자 한잔하세."

"좋다!"

철두와 에르미스는 무한대로 내어져 오는 안주와 술을 마시며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두 사람은 일어나자마자 아쉬워하는 모솔 백작을 뒤로하고 본거지가 있는 N6140 맵으로 돌아왔다.

"오, 일찍 왔네."

"진태. 큰일은 없었나?"

"큰일 없지."

"작은 일은?"

"용병들이 말썽부린 거?"

"무슨 말썽?"

"무단으로 아미르 왕국 국경 넘는 거지 뭐."

"흐음."

"냅둬. 어차피 전리품 욕심에 넘어간 놈들인데, 역으로 다 털리고 있어."

"죄다 노예로 잡혔겠군."

"그렇지."

"애들은?"

"매일 대련하고 있지."

역시 친구 사이라 그런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지금 철두의 최고 관심사는 최준섭과 오준환을 위시한 레벨 3 수준의 무기술을 가진 자들의 레벨 4 달성 여부.

그것만 달성하면 당장 영약을 지급해 줄 것이다.

"아! 맞다. 용수 대장 히어로로 진급했어."

"오! 기용수!"

수비대장 기용수가 4대 스탯 랭킹에 모두 든 모양이었다.

"용수 궁술이 3레벨이었지?"

"어, 아마도?"

"후후. 일단 가봐야겠다. 어디 있냐?"

"아마 집에 있을걸?"

"알겠다."

철두는 밖으로 나와 아무 병사나 하나 붙잡고 기용수의 집으로 안내를 받았다.

수비대장 기용수는 아이언헤드에서 나름 귀족 대우를 받는 입장답게 2층짜리 큰 집에 살고 있었다.

탕탕탕!

"용수 있냐?"

"헉!"

안에서 다급한 헛바람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소란스런 소음이 울렸다.

'어머니, 숨으세요!'

속삭이듯 작은 소리였으나, 감각 스탯 200을 뚫어버린 철두의 귀에는 천둥처럼 들렸다.

228화 부활

콰앙!

철두가 문을 열어젖혔다.

"허억!"

"...."

집 안엔 깜짝 놀란 얼굴의 기용수와 엉거주춤 일어서있는 중년 여인이 있었다.

"여, 영주님. 이분은...."

기용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시바, 조졌다.

이모라고 할까?

새엄마라고 할까?

아니, 아버지가 없구나.

아, 아버지! 왜 요절하셨나요.

"어머니냐?"

"그, 그...."

기용수가 말을 더듬는데 철두가 성큼 다가와 기용수의 얼굴을 덥석 잡았다.

"어머니더냐?"

"...맞습니다. 죄송합니다."

"...."

철두의 눈망울이 흔들렸다.

"그랬군."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머니가 랭커셨군."

"...예?"

"언제 성에 오신 거냐?"

"이, 이틀 되셨습니다."

"이틀 전에 부활하셨군."

"...예?"

철두가 기용수의 어머니를 보았다.

"기용수는 나의 동생이니, 용수 어머니는 제 어머니와 같습니다."

"네에?"

중년 여인이 깜짝 놀라는데, 철두는 진지했다.

"어머니 성함이 어찌 되십니까?"

"박순자예요."

"어머니의 부활을 기념해야겠습니다."

마침 잘됐다.

발베르 조르를 이기고 조촐하게 한 끼만 먹고 돌아온 참이다. 이제 본거지로 돌아왔으니 그간 떠들썩했던 일도 정리할 겸, 분위기 전환이 필요할 때긴 했다.

"병사!"

"예, 영주님."

"시종장에게 가서 일러라! 오늘부터 3일간 축제다!"

"네, 영주님!"

길 안내를 왔던 병사는 부리나케 성으로 달려갔다.

"후후후, 살아서 잘 돌아오셨습니다."

"어어, 네에."

철두가 덥석 껴안자 박순자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후우, 용수."

"헙, 넵."

"어머니 모시고 성으로 와라."

"넵, 알겠습니다."

철두가 먼저 밖으로 나갔다.

끼이이익.

조심스레 문을 닫은 기용수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어머니를 보았다.

"엄마."

"아이구, 저분이 영주님 아니니?"

"맞아."

"이게 다 무슨 일이라니."

"...어떻게 된 거냐면."

기용수는 빠르게 사정을 설명했다.

임무를 받고 강철두와 호형호제하고 어머니의 복수를 위해 장호철을 무찌른 것까지.

"자알한다. 멀쩡히 살아있는 애미나 죽이고."

"아니, 엄마...."

박순자는 아들을 째려보았다.

"지금이라도 가서 사실대로 이야기해라."

"그럴까?"

"그래, 정직하게 사죄하면 진심으로 받아주게 되어있다."

"후, 알겠어."

기용수는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떠들썩하게 성으로 몰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이야, 축제다!"

"이번엔 3일이야! 우하하하, 또 고기에 술을 내어주겠지?"

"무슨 축제래? 또 전쟁에서 이겼남?"

"아니 수비대장 어머니가 부활하셨다는구만!"

"어어? 수비대장 어머니가?"

"아암. 엊그제가 바로 그날이여! 부활 기념일로 삼을 모양이더만."

"아니, 예수도 아니고 그건 좀...."

"클클, 뭔 상관인가? 축제일이야 많을수록 좋은 거지!"

"암! 먹고 마시자고!"

"용수 어머니 부활 만세!"

"용수 어머니 만세!"

기용수는 눈물을 또로로 흘렸다.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온 그가 어머니 앞에 무릎 꿇었다.

"어머니, 불초소자 마지막 청이 있습니다."

"갑자기 뭐니?"

박순자는 또 이놈의 자식이 왜 이러나 하는 한심한 눈으로 보았다.

"부활하신 걸로 합시다."

"...."

이 아들놈의 새끼를 호적을 파버릴까.

"난 거짓말 못 한다."

"아아! 엄마! 제발류!"

기용수는 박순자에게 매달리다시피 해서 겨우 합의점을 찾았다.

"일단 랭커만 돼주세요! 제가 좀 분위기 가라앉고 나면 나중에 기회 봐서 영주님께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용서 빌게요."

"에휴."

"이, 일단 당장만 좀 넘기는 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박순자는 결국 기용수의 청을 받아들였다.

"난 그냥 입 다물고 있을 거다! 반드시 나중에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용서 구해야 한다."

"아, 암요! 박 여사 아들 기용수가 맹세를 합니다요."

"에휴, 랭커니 뭐니는 어떻게 하는 거니?"

"아, 스탯석을 50개는 활성화해야 하는 건데...."

근력 체력 민첩 감각.

4가지 스탯 중에 하나라도 50을 넘기면 된다.

"이게 사람 재능 따라 흡수 한계가 달라. 제발 1개라도 30만 넘으면 돼. 그럼 한계 돌파 스크롤로 20개 더 추가할 수 있으니까."

그럼 딱 50개를 넘어 랭커가 될 수 있다.

"에휴, 이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박순자는 아들로부터 주화를 넘겨받고는, 테이블 위에 가득 꺼내놓은 스탯석을 하나씩 하나씩 활성화하기 시작했다.

"제발 30개만 제발류...."

어머니는 하나씩 스탯석을 활성화하고, 아들은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구라쟁이의 간절한 기도가 닿았을까?

"어?"

"이거 한계니 뭐니는 언제 되니?"

"...그러게요."

파팟.

활성화된 스탯석은 어느새 50개를 넘어버렸다.

*

축제가 열렸다.

대외적인 명목은 용수 어머니의 부활 기념.

이른바 순자 커밍 데이.

축제를 선포한 지 고작 4시간.

이미 축제에 이골이 난 영주성의 베테랑 사용인들은 대량의 조리를 아무렇지 않게 해내고 있었고, 마찬가지로 민간의 사람들은 아낌없이 먹고 마실 준비가 되어있었다.

"우오오오! 순자 님 오신 날!"

"예아~ 용수 어머님이 부활하셨네!"

"어머니 제사상에 장호철 모가지를 올렸다네!"

"예아~ 모가지."

떠들썩하게 술내기를 벌이는가 하면, 고작 몇 시간 만에 술이 거나하게 취해 음유시인 흉내 내는 누군가의 선창에 이 축제의 의미를 되새기기도 한다.

"후후, 근데 용수는 왜 안 오나?"

"어? 그러게. 기 대장은 왜 안 와? 오늘 주인공인데."

"제가 다녀올까요?"

"됐어. 오겠지."

축제 명목이 중요한가?

축제라는 것 자체가 중하지.

"후후후, 음식을 더 내어와라."

"네, 영주님."

성의 관리인단을 이끄는 엘리스는 이렇게 통이 크고 손이 큰 영주는 처음 봤다.

보통 성대하게 파티를 꾸민다 하더라도 영주성에 한하고, 초대에 응한 귀족들만이 즐길 따름이다.

허나, 아이언헤드 성에서의 축제는 말 그대로 성 전체가 함께하니, 그 스케일이 남달랐다. 신분의 고하마저 없이 어울려 즐기는 모습이 엘리스에게는 퍽 새로웠다.

엘리스는 부지런히 단원들에게 지시를 내려 축제가 즐겁고 배부를 수 있도록 지휘하면서도 얼굴에 내걸린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아니, 좋은 영주님이다.

"용수 어머니 납시오!"

드디어 오늘 주인공인 박순자 여사와 그 아들 기용수가 영주성으로 입장했다.

"용수! 왜 이렇게 늦게 오나?"

"그, 그게...."

용수는 멋쩍어하면서도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어머니가 히어로가 되셨습니다."

"으음? 어쩌다가?"

"스탯석 몇 개 추가로 활성화하시다가 그만...."

"오오오!"

철두는 기꺼운 마음으로 박수 쳤다.

아이언헤드령에 새로운 히어로가 출현했다.

그것도 용수 어머니 박순자 여사다.

"역시! 호랑이가 호랑이를 낳는 법이지! 어머니도 재능이 남다르시구나!"

"그, 그런 모양입니다."

정작 기용수는 상위 노비스였다가 수호의 나무가 생기고 난 뒤, 한계 돌파 스크롤이 해금되고 나서야 랭커에 오르고, 이제서야 히어로가 되었다.

헌데, 어머니는 한계 돌파 스크를을 쓰지도 않고 모든 스탯이 50이 넘어버렸으니, 그 순수 재능으로만 따지면 강철두 다음 가는 재능이었다.

'어머니가 히어로인 것에 대해.'

기용수는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어머니는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재능을 품고 계셨다.

재능을 썩힐 수도 없고, 환갑이 넘은 어머니에게 칼을 쥐어 전쟁터로 내보낼 수도 없고....

"새로운 여전사의 탄생이다! 건배하자!"

"...."

강철두의 호랑이 같은 고함에 기용수가 기겁했다.

박순자 여사는 그저 해탈한 듯 웃고만 있었다.

*

펫 대회 출전을 위해서는 강력한 펫이 필요하다.

우승 전력의 몬스터는 흔한 게 아니라, 그들의 출몰지역 정보가 필요했고, 이 임무에 사냥꾼 잭이 자청해서 나섰다.

그는 용병 생활을 한 인맥이 있기에 아미르 왕국으로 넘어가 정보 길드를 찾았고, 마침내 몬스터 위치 정보를 얻은 뒤 복귀했다.

잭이 영주성에 돌아온 것은 축제 마지막 날인 3일째 날 점심 무렵이었다.

곧장 아이언헤드 성의 마탑을 찾은 그는 르망을 만났다. 떠들썩한 영지 분위기에 대해 물었다.

"승전 축제입니까?"

"아니, 용수 어머니 부활을 기념하는 걸세."

"예?"

"흐흐, 예전에 산적에게 당하셨는데, 그놈을 처치하여 복수한 게 영주님이라는구만."

"인연이군요."

"그래, 그때 돌아가신 분이 이번에 부활해서 돌아오셨으니 축제라 할 만하지. 사적으로도 영주님의 어머니와도 같으신 분이라고 하시네."

사냥꾼 잭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님이 어머니처럼 모시는 분이라면 확실히 영주성의 중요 인물이다.

"아무튼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오, 어떤 종인가?"

"둘입니다. 하나는 확실한 출몰이 확인되었고, 다른 하나는 애매합니다."

"흠, 좋아. 영주님께 가서 보고합세."

"예."

잭은 수석마법사 르망과 함께 강철두를 찾아갔다.

그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차앙, 차아앙!

축제라고 하여 어찌 먹고 마시기만 할까?

즐길 거리가 있는 것은 당연했고, 즉흥적인 검술 대회도 벌어졌다.

누구든 실력을 보이면 영지군에 임관할 기회가 주어지고, 상금도 만만찮았기에 너도나도 출전했다.

개중에 대회와는 상관없이 눈요깃거리의 대련도 벌어졌다. 강철두와 영지군의 각 부대 대장들의 대련이 그것이었다.

카앙, 카앙!

"크윽."

퍼억, 까앙!

강철두를 상대로 네 명이 대치 중이었는데, 상대는 다름 아닌 오준환과 최준섭, 기용수와 제임스였다.

제임스는 아미르 전진요새에 주둔 중이었으나, 축제를 맞이해 별동대가 성으로 복귀하고, 그 빈자리에 이은영이 친위대와 유격대를 이끌고 갔다.

지금 상대하는 넷 모두 히어로.

"더! 더 악착같이 노려봐라!"

"칫."

"차아아압!"

"흐읍!"

"큭."

'할아버지'와 '새벽 어스름' 두 자루의 검을 쥔 철두가 도발하자, 네 명의 히어로가 다시 달려들었다.

캉, 까앙!

여섯 자루의 검이 어지러이 난무하며 눈과 귀를 즐겁게 했다.

철두의 검술은 이미 레벨 5의 경지.

나머지 대장들도 레벨 3의 장인의 경지에 이른 검사들이다. 결코 수준이 낮지 않은 대결에 구경꾼들이 환호했다.

"오오오오."

"이야, 진짜 싸우긴 기깔나게 잘 싸우시네."

"역시 정규군이 답이야. 들어보니까 독자적으로 국경을 넘은 용병대들 태반이 제대로 약탈을 하지도 못하고 죄다 잡혔다는구만."

"병신들이지. 아미르 왕국도 눈알이 벌게져서 국경 근처에 전력 배치 중인데, 거길 약탈하러 기어들어 가남?"

한참 이어지던 대련은 네 사람의 패배로 끝이 났다.

철두는 혀를 찼다.

"더 정진해라! 언제 명인의 경지에 이를 거냐?"

레벨 4가 되면, 영약이 충분하니 레벨 5까지는 금방일 텐데.

아쉽고도 아쉽다.

"영주님. 소인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오, 잭."

철두가 간단히 치하하고는 보고를 들었다.

"두 가지 중 첫 번째는 먼저 아울베어의 출몰지 위치 정보입니다."

"두 번째는?"

"두 번째는 소문이긴 합니다만... 환수 펜리르의 흔적이 발견되었답니다."

"펜리르?"

229화 신서울로

"펜리르가 뭐냐?"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늑대입니다."

"자유로이 모습을 바꾸는데 왜 늑대냐?"

"아, 크기가 자유자재로 바뀐다는 말입니다."

"오!"

철두는 흥미가 동했다.

"아울베어는 얼마나 세냐?"

"오우거를 찢어 죽일 정도입니다."

"하이드라보다도?"

"그건 모르겠습니다. 같은 종이라도 성장도에 따라 전투력에 차이가 있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머리 두 개인 하이드라보다는 세야 한다."

그 정도는 되어야 펫 대회에서 이길 가능성이 생긴다.

"펜리르라면 머리 두 개인 하이드라보다 강할 것입니다."

"그럼 펜리르란 놈을 잡아야겠군."

"하오나, 아직 소문 단계의 정보라 보다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려면 시일이 걸립니다."

"흐음."

철두가 턱을 쓰다듬었다.

이제 겨우 단서를 모아야 하는 일에 철두가 나설 수는 없다. 사냥에 시간을 허비하기에는 그의 어깨가 무겁다.

무리를 이끄는 자리는 스스로 해내는 자리가 아니라, 사람들을 적절히 부리는 자리다.

"잭."

"예, 영주님."

"펜리르를 찾아라."

"네, 알겠습니다!"

"난 일단 아울베어란 놈을 잡아 오지."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위치만 알려줘."

"넵."

잭은 함께하지 못해 아쉬웠으나 군말 없이 위치정보를 넘겨주었다.

"W305 지역?"

"네, 그렇습니다. 그 맵의 중앙에 있는 설산에서 모험가 무리가 아울베어에게 습격당하는 일이 최근 발생했습니다."

"으음."

철두가 지도를 펼쳤다.

지도를 쭉 축소해 넓은 지역을 띄웠다.

W305.

아는 맵이다.

신서울 맵을 개방하고 나서 그 주변 지형을 탐사할 때 본 겨울 맵.

"후후, 가깝군."

날아가면 며칠 안 걸린다.

"진태!"

"아, 왜?"

"나 나갔다 온다."

"아닛! 바빠 죽겠는데 왜 자꾸 돌아댕기냐?"

"펫 구하러 가는 거다."

"영약 많이 구했잖아?"

천년급인 만드라고라 두 뿌리는 이미 써버렸지만, 백년급은 아직 많다.

정령초 둘에, 빙정, 성수.

4개나 있다.

이것들은 특성을 추가해주지는 못하지만, 신체 재구성을 도와주는 영약.

소드마스터로서 초인의 신체를 가지게 해주는 최소한의 영약이다.

"대장급만 줘도 모자라다."

"어.... 그렇긴 하네."

친위 대장 이은영은 이미 소드마스터가 되었으니 필요 없다.

허나.

유격대장 최준섭,

별동대장 제임스,

특작대장 오준환,

공격대장 구정욱.

여기에 독립 휘장은 없지만 아이언헤드령의 본대의 수비대장인 기용수까지.

다섯 외에도 레벨 3에 이른 이들이 있는지라, 최대한 많이 확보하는 것이 좋다.

"구할 수 있을 때 최대한 구해야 한다."

"후, 알겠다. 며칠 걸리냐?"

전략자산이나 다를 바 없는 게 영약이라, 김진태도 더는 말리지 않았다. 다만, 빨리 돌아오기만 바랄 뿐이다.

"사냥이야 하루 이틀이면 끝난다."

사냥에서 가장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게 사냥감 포착이다. 철두에게는 하늘에서 그것을 수행할 수단인 그리핀이 있으니 상관없다.

"얼른 와. 아미르 왕국 쪽 분위기가 심상찮아."

"왜?"

"왜긴, 용병대가 하도 들쑤시니까 국경 쪽으로 병력을 대거 배치하기 시작했어."

"흠, 잔챙이들이 물을 흐리는군. 단속을 해야겠어."

"요즘엔 우리 성 사람들은 자제하는데, 마법진 타고 여러 마을에서 한탕 하러 오고 있어."

"마법진을 타고?"

아이언헤드 성은 마법진과 가까이 위치해 있다.

마법진 옆에 자리 잡은 도시들끼리는 사실상 이웃 영지나 다를 바 없기에, 전쟁 중인 아미르 왕국을 약탈하려는 소규모 용병대가 끊임없이 유입되고 있었다.

"어차피 죄다 잡힌다면서 왜 그러는 거냐?"

"잡혀도 안 죽으니까."

"흠."

철두가 인상을 썼다.

아미르 왕국의 마을을 털어 약탈에 성공하면 대박이고, 못해도 그저 노예로 잡힐 뿐이다.

동료들이 있으면 미리 말을 맞춰놓아, 돈으로 풀려날 수 있으니 비교적 안전한 도박인 셈이다.

아미르 왕국에서도 이렇게 사로잡은 노예들의 가격이 제법 되는지라, 죽이지 않고 계속 팔고 있다.

지구 출신의 용병대는 잠입 약탈 게임을.

아미르 왕국은 디펜스 게임을 하는 중이다.

서로의 이익이 되기에.

"어이없는 놈들이군. 우리 성에는 들이지 마라."

"안 그래도 전부 밴 먹였어. 못 들어와."

시스템적인 제약이기에 출입 금지 명단에 올라가면 성을 통과할 수 없다.

'잠입'이나 '위장' 같은 스킬이 있지 않은 이상 아이언헤드 성에 들러 보급을 하거나 휴식을 취할 수는 없다.

"아, 신서울 근처면 가는 길에 연구원들 좀 초빙해봐. 저번에 말해둔 게 있어서 연구소장님이 은근히 바라는 눈치야."

"후후, 알겠다. 맡겨둬라."

"강압적으로 데려오지 마. 자발적으로 따르는 사람들만 데려와."

"날 뭘로 보는 거냐? 정중히 모셔 오겠다."

"흐, 알겠어. 얼른 갔다 와. 요즘 아미르 쪽에서 아예 진격이라도 할까 봐 조마조마하다."

"알겠다."

지금 강철두가 빠지면 아미르 왕국군을 막아낼 수 있을까? 소드마스터만 해도 이은영 한 명뿐인데 말이다.

절대 불가다.

소드마스터가 일반병사의 손에 죽지 않는 것은 아니나, 아미르 왕국의 소드마스터 그 한 명을 잡기 위해 희생될 병력의 숫자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단신으로 돌격해오는 경우도 없는지라, 사실상 소드마스터를 상대할 수 있는 카드는 같은 소드마스터뿐이다.

사실상 영지를 총괄하는 김진태에게 있어 강철두의 부재는 불안 요소다.

"후후, 이거 줄 테니 요긴하게 써라."

"응? 뭐?"

철두는 비룡의 알 두 개를 꺼냈다.

"뭐야? 타조알이야? 후라이 해 먹어?"

"어휴."

철두는 답지 않게 진태를 한심한 눈으로 보았다.

"하나는 내가 키울 테니 하나는 네가 키워라."

"이게 뭔데?"

"비룡이다."

"어어?"

김진태가 깜짝 놀랐다.

통신설비를 갖추지 못한 지금 상황에서 파발마가 유일한 통신수단인데, 하늘을 날아다니는 전령이 있다면 혁신이나 다를 바 없다.

더욱이 정찰과 우회 타격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으니 비룡을 더 구할 수만 있다면....

잔뜩 흥분해 떠들어대는 진태의 이야기를 들으며 강철두는 웃었다.

"흐흐, 그건 걱정 마라. 계획이 있다."

"무슨 계획?"

"아미르 왕국에 그리핀이 많다. 그거 뺏어서 애들 나눠주면 된다. 전투용으론 그리핀이 낫다."

"아!"

역시, 네 것 내 것 없이 모두 내 것인 마인드가 탑재되어야 이 정도 배포를 부리지.

"그러니까 그건 네가 잘 키워서 타라."

"어어, 그래."

철두는 말이 나온 김에 비룡의 알을 부화시켰다.

<3200개의 주화를 활성화해 부화시킬 수 있습니다.>

파팟.

주화가 소비되며 즉시 알이 깨졌다.

파사사삭.

"끼아아아!"

알을 깨고 나온 녀석이 버둥거리다가 이내 철두와 눈이 마주쳤다.

<대상이 어미로 착각합니다.>

<주화 1개를 활성화해 길들일 수 있습니다.>

이미 어미로 따르고 있어서 그런지 테이밍 값은 헐값이다.

파팟.

길들이자마자 펫으로 등록되었다.

"좋다. 네 이름은 삐약이다."

<삐약이>

종 : 와이번

등급 : D-

생명 : 33%

마나 : 11%

체력 : 5%

특성 : -

기술 : 성장

갓 태어난 녀석이라 등급도 D급이고, 기술도 하나밖에 붙어있지 않았다.

<성장>

펫이 성장 중입니다.

해당 기술은 성체로 성장 시, 변화합니다.

대상은 다음 행위에 성장합니다.

섭식, 사냥, 스탯석 활성화

"오!"

철두는 팔뚝만 한 비룡을 손에 올렸다.

날개를 활짝 펼쳐봐야 날지도 못하는 작은 녀석이지만, 어쩐지 타고 다니기까지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진 않았다.

"아악! 이름 뺏겼어!"

"후후후."

철두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김진태는 하는 수 없이 부화한 와이번에게 다른 이름을 지어주었다.

"용용이다."

"흥, 용이 아니다."

"비룡도 용이야."

"쯧, 새지."

"어휴, 몰라."

"후후. 삐약아, 들어가 있어라."

파팟.

철두는 삐약이를 펫 인벤토리로 넣고는 그리핀 오식이를 소환했다.

"누구 하나 데려가."

"누구?"

"최 대장 데려가."

"에르미스 데려가야 해서 자리 없다."

"아, 좀 불안한데."

철두만 혼자 보내기 못내 불안하다.

사냥이야 걱정하지 않지만, 신서울에서 괜히 불화가 생길까 걱정이다.

'최 대장이 특임대 대위 출신이니 신서울에 아직 아는 사람 많을 텐데.'

최준섭이라면 알아서 잘 보필할 것이다.

"어차피 거기 구 씨도 있지 않나?"

"어, 그렇지?"

"구 씨 데리고 사냥 갔다가 신서울 들렀다 올 테니 걱정 마라."

엘리트 인재들을 설득해 호송해와야 한다.

그리핀에 줄줄이 매달아 올 게 아니라면 호위 병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미 신서울 맵에 가 있는 구정욱과 공격대라면 충분한 병력이다.

"그래, 그럼."

"후후, 나중에 보자."

"그래! 조심하고! 최대한 빨리 돌아와."

"알겠다."

철두는 그리핀을 타고 날아올랐다.

"별일 없겠지?"

떠나는 철두를 보고 무심결에 말을 뱉은 김진태는 깜짝 놀라 본인의 뺨을 후려쳤다.

"취소, 취소. 퉤퉤!"

불길하게 플래그를 세우다니.

김진태는 머리를 흔들고는 옥상을 내려갔다.

"출입 금지 놈들, 그냥 세금이나 올릴까?"

아이언헤드의 통제를 따르지 않은 괘씸한 놈들이지만, 굳이 배척할 필요까지 있었을까?

"출입세를 10배 정도 걷고... 하루 거주비도 10배.... 아니다. 거주비는 3배 정도로 하자."

너무 가혹하면 아이언헤드 성에서 거주하기를 포기할 수도 있다. 명령을 따르지 않는 제3의 세력이 이 근처에 자리 잡는 걸 두고 보고 싶지는 않다.

어쨌든 영지 내에서의 통제력은 놓치지 않을 테다.

"기간 지나면 삭감하고...."

욕심에 눈이 멀어 국경을 넘어 약탈에 나선 병력이지만, 어쨌든 지구 출신들. 악질적인 놈들만 아니라면 배척할 필요는 없다.

"군에 임관하면 공짜로 돌리고...."

김진태는 지금도 포로로 잡혀있는 병력들을 흡수할 방법을 이리저리 강구했다.

"저도 물러나겠습니다."

"아이, 깜짝이야.

조용히 시립해있던 르망의 목소리에 진태가 깜짝 놀랐다.

"어, 왜 아직 거기 있어요?"

"시종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 네."

"최근 마법사들이 피로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아!"

아이언헤드 본성은 물론이고, 뉴아 요새와 아미르 전진요새에도 방어탑이 설치되어있었다.

전격을 흘리는 이 방어탑은 항상 마법사를 필요로 했다. 헌데 영지의 마법사는 적은데 관리해야 할 방어탑은 많으니, 교대로 순번을 정해도 스케줄이 너무 빡빡했다.

"이번에 전쟁이 나면 최대한 마법사들을 납치해볼게요."

"...."

역시, 시종장님도 사고방식이 다르시구나.

르망이 헛기침하고는 대안을 이야기했다.

"마석을 좀 구해주십시오."

"마석이요?"

"네. 일반인도 마석만 있으면 마법 아티팩트를 작동시킬 수 있지요."

"배터리 같은 거네요."

김진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비싸겠죠?"

"비싸지만 그 값어치는 하는 물건입니다."

"좋아요. 구해보죠."

마석의 수급이 충분하면 방어탑을 더 늘려도 될 것 같다.

'철두 없다고 털릴 수는 없지.'

영지를 방어해내야 한다고 영주인 강철두를 계속 성에 잡아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친구의 성격을 생각하면 앞으로 지금처럼 외유할 일이 잦을 테니, 성의 방어는 과하게 마련해둬도 낭비가 아니다.

'어디서 마석 광산 같은 거 안 떨어지나.'

김진태는 돈을 벌기 위해 다시 영지 관리창의 세금 항목을 만지작거렸다.

230화 유사 야만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