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퀘스트의 의미
<마적대가 휘하에 들기를 청합니다.>
"받아들인다."
파팟.
아이언헤드에 새로운 부대가 합류했다.
신서울 2군단의 정식 명칭이 있었으나 철두는 그냥 마적대로 불렀고, 김춘배는 마적대로 휘장 이름을 바꾸곤 부대를 재편해 휘하에 들었다.
"좋아. 신병들 지휘관은 누구냐?"
"충성! 대령 심봉수!"
"좋아. 심봉수 여기 앉아봐라."
"넵!"
심봉수 대령이 자리에 앉았다.
그는 임운진 사령관의 파벌 사람으로, 3군단의 신병들을 이끄는 자다. 마적단 출신의 정예병들을 견제키 위해 파견된 자였으나, 이제는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었다.
"애들 말은 다 있지?"
"그렇습니다. 군 병력은 최우선적으로 말을 길들이게 되어 있습니다."
보호의 나무에 가서 탐험 퀘스트만 받으면 된다.
그럼 신맵의 외곽지에 출현하는 말을 길들여 모험을 떠나게 되는 수순이다.
"좋아. 대충 여기 주둔하다가 연락병 돌려."
"예? 어디로요?"
"어디긴, 아미르 왕국 쪽이지."
"그, 그쪽하고 연락하라고요?"
철두는 손을 슥 들었다. 심봉수 대령은 홱 고개를 숙이며 목에 힘을 줬다.
"쓰읍."
이거 초면에 때릴 수도 없고.
철두는 손을 내리곤 친절하게 작전을 설명했다.
"자, 잘 들어. 지금부터 나는 마적대를 이끌고 아미르 왕국으로 갈 거야."
"헙."
놀란 건 심봉수 대령만이 아니었다. 3군단 사령관에서 마적대장으로 강등된 김춘배도 깜짝 놀랐다.
"공격입니까?"
"뭐 대충 비슷하지. 좀 쑤셔놔야 안 쳐들어올 거 아냐?"
"...."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지만, 그건 공격력이 있을 때의 이야기다.
'하긴.'
안 될 건 또 뭔가?
여태는 없었으나, 이제는 99강 보검을 든 것과 같이 공격력이 대폭 증가했는데 말이다.
"지도 없냐?"
"헉, 없습니다."
"쯧."
철두가 포박이 풀린 채 말끔한 옷으로 갈아입은 마법사들을 향해 손짓했다.
"거기, 대장 하고 싶은 놈 한 명 이리 와 봐."
"헙."
마법사 넷이 냉큼 달려왔으나, 무자비한 선착순의 세계에 1등은 늘 한 명인 법이다.
"너, 이름이 뭐냐?"
"탕아후루입니다."
"존나 달게 생겼네."
"예?"
탕후루가 뭔지도 모르는 왕국놈 데리곤 농담칠 기분도 나지 않았다. 철두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니다. 네가 대장이다."
"예쓰!"
"지도 가져와 봐."
"드리겠습니다."
"오! 월드맵 가지고 있어?"
"넵. 마검사입니다."
"오호!"
탕아후루는 감각 쪽 랭커이면서 마법사였다.
특전으로는 특이하게 인벤토리가 아니라, 월드맵을 받았다.
파팟.
"이야, 왕국 전역이 다 있네?"
"헤헤, 여행을 좋아합니다."
마법사들은 어딘가에 처박혀서 연구하길 즐긴다더니, 마검사쯤 되면 좀 다른 모양이었다.
"좋아. 아주 도움이 됐어."
"헤헤헤."
"여기 앉아."
"헙, 감사합니다."
모닥불가에 마검사 탕아후루가 앉았다.
여기 모인 면면이 전부 부대 지휘관인지라, 이 자리가 곧 작전회의이자 간부회의였다.
"루트 짜기 좋겠네. 여기 마을부터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 친다."
"헙, 거긴 더스트 후작성입니다."
"어쩐지 성이 존나 크더라."
"더스트 후작은 왕국에 넷뿐인 제후입니다."
"그래서?"
"예?"
"어차피 왕국도 칠 거야. 제후면 초전으로 딱 좋지 뭘 그래?"
"...."
탕아후루는 입을 쩍 벌렸다.
"이, 이 인원으로 말입니까?"
"아니. 여기서부터 쭉 남으로 가서 여기 전선으로 합류한다."
"거기가 어딥니까?"
탕아후루가 여행을 좋아한다지만 아직 N6140에는 가보지 않아 잘 몰랐다.
"내 영지다."
"오오, 이곳이 아이언헤드 성이군요."
"후후."
철두가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서 아이언헤드 성에 가본 자는 에르미스뿐이었기에 다들 홀로그램 맵을 보며 아이언헤드 성을 구경하기 바빴다.
"가서 봐봐. 신서울보다 살기 좋을 거다."
신서울보다 면적은 적지만, 훨씬 더 알차다.
이동 마법진으로 인해 물자는 풍부하고, 여기저기서 몰린 각국의 노비스들로 인해 먹거리도 풍부하다.
식자재가 하나씩 발견되고 재배될 때마다 먹거리 종류가 조금씩 늘고 있으니, 국밥 원툴의 신서울 생활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심봉수."
"대령 심봉수!"
"자, 다 들었지?"
"넵!"
"넌 뭐 해야겠어?"
"후방 보급입니다."
"아니지."
"예?"
"보급은 전방에서 하는 거지."
"예에?"
"넌 애들하고 전방에서 챙겨주는 거 신서울로 날라."
"헙!"
모두가 철두의 작전을 이해하고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이것은 전쟁도 뭐도 아니었다.
그저 대규모 약탈을 상정한 작전.
고작 300명 남짓한 부대를 이끌고 선언한 대담한 작전이다.
전력 차가 크지 않으면 어려운 작전이건만,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이 작전이 허무맹랑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능성 있어.'
마적대가 같이 돌격했다지만, 사실상 적 기사와 마법사 그리핀 라이더를 포함한 2천여 적병을 혼자서 해치운 철두가 세운 작전이다.
"자, 다 들었으면 부하들한테 설명해줘라."
"네!"
김춘배가 씩씩하게 대답했고, 심봉수가 머뭇거리다 꼭 물어야 했기에 질문했다.
"저, 한 가지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말해라."
"신서울의 상황은 지금 어떻습니까?"
"음? 모르냐?"
"예에. 모르지요."
"...? 근데 왜 내 말 듣고 있었냐?"
"예? 그야...."
'무서우니까요.'라고 하면 너무 없어 보이니까.
"지금 전장을 이끄시니 제 상관이나 다름없지요."
"후후, 맞다. 네 상관이다."
"예?"
철두는 간단하게 신서울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해주기 시작했다.
"김도진이 신서울로 돌아와 임운진의 목을 쳤다. 그리고 내게 충성을 맹세했지. 신서울은 이제 아이언헤드령의 보호를 받는 영지다. 영주로는 기사 김도진을 임명했다."
"...!"
"...!"
심봉수과 김춘배가 입을 떡 벌렸다.
아미르 왕국과 싸움을 핑계로 신서울로 부대를 보내지 않았는데, 그런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반란이라니....
"그, 그, 그러면 다른 장교들은 어찌 되었습니까? 기존에 참모총장을 따르던 자들 말입니다."
"뭐, 저항하는 놈들은 죄다 목이 잘렸다. 자세한 건 김도진에게 물어봐라."
"...!"
임운진 참모총장 파벌의 인물인 심봉수는 본능적으로 제 목을 쓰다듬었다.
'이거 까딱하다간 좆되겠구나.'
심봉수가 부리나케 철두의 앞에 엎드렸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부디 살려주십시오."
"후후, 내가 부하를 왜 죽이나?"
"저는 임운진 참모총장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놈 죽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부탁하잖아.
"너는 이제 내 부하다."
"허업! 가, 감사합니다."
심봉수가 감격해 절하듯이 꾸벅거리더니 일어섰다. 십년감수한 사람처럼 얼굴이 핼쑥했다.
"세부 작전계획 수립해 보고 올리겠습니다."
"그래라."
심봉수가 신병들로 이뤄진 후방부대를 단속하러 갔고, 김춘배만 남았다.
"넌 안 가냐?"
"그냥 돌격을 명하시면 바로 돌격할 것입니다."
"후후, 옛날에도 그러더니 부하들 교육은 잘 시키는군."
"...."
펫 주머니 때문에 강철두와 만났던 그때 바로 부하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영주님."
"왜?"
"탐험 퀘스트 다음을 진행하셨습니까?"
"응? 무슨 말이냐?"
김춘배는 본디 앞으로 나아가려는 인물이었다.
애당초 그가 박준필과 의견이 갈려 심복들을 데리고 탈영한 것도, 모두 이유가 있어서다.
분쟁의 시작은 사이클롭스 처치를 두고, 적극적으로 퀘스트를 진행하자는 김춘배와 아직은 때가 이르다는 소극적인 박준필의 의견이 갈린 것이었다.
"저는 이 퀘스트란 것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후후, 계속 이야기해봐라."
철두는 흥미가 동했다.
"탐험의 시작은 정착 퀘스트로 이어졌습니다."
"정착."
"알고 계십니까?"
"직업인들 몇 명 모아서 대충 부락 만들면 뜨는 거 아니냐?"
"역시 알고 계시는군요."
김춘배는 한숨을 쉬었다.
누구보다 앞서나간다 여겼지만, 역시나 뛰는 자 위에 나는 자가 있었다.
"소인은 그 정착 퀘스트의 정보를 쥐고, 이곳 신서울을 시스템상의 도시로 편입시키려고 했습니다."
"신서울을 삼키려고 했군."
"예에."
숨기지 않는다.
이제는 다 물 건너간 일이기도 했고.
강철두라면.
이자의 밑이라면 제약 없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기도 했다.
"그 뒤로 영웅의 길이란 퀘스트도 찾았습니다. 영주님은 이미 겪으셨지요?"
"그래."
"혹, 다른 퀘스트에 대해서 아시는 바가 있으십니까?"
"우리 할배가 사제가 됐지. 신의 부름이라고 있다. 장 씨는 장인의 길이란 퀘스트를 받았지."
"후, 역시. 영주님을 따르는 게 맞는 길인 것 같습니다."
김춘배의 목표는 하나다.
"퀘스트를 끝까지 공략이 가능한 자가 있다면 그건 영주님이실 겁니다."
"공략?"
"저는 퀘스트가 가리키는 방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끝에 해답이 있을 거란 믿음도 있습니다."
"흐음."
철두는 턱을 쓰다듬었다.
생각해보지 않은 주제다.
김춘배가 철두를 가만히 보며 가장 중요한 용건을 꺼냈다.
"혹여, 전쟁이 끝나면 퀘스트를 찾는 일에 앞장서도 되겠습니까?"
그는 적극적인 공략을 원한다.
그러기 위한 자율성을 추구한다.
그렇기에 어딘가에 소속되기가 어려웠다.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군인의 신분은 맞지 않았다.
하지만 또 돌고 돌아 군인이나 다름없는 신분이 되었으니.
"좋다."
"...감사합니다."
얼추 예상은 했지만, 정말 흔쾌히 허락하자 김춘배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에 안도했다.
"후후, 적극 지원해주지."
바라마지않던 상황이다.
"충심을 다하겠습니다."
"그 퀘스트란 놈이 바라는 게 뭔지는 알아야지."
"넵!"
지구에서 일어난 최초 퀘스트.
종말의 시험을 시작으로 노바에 정착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퀘스트의 목적이 정말 그것이 전부인지.
또 퀘스트가 발생하는 원리는 무엇인지?
퀘스트를 발생시키는 주체가 누구인지....
김춘배는 궁금한 것이 많았고, 이제는 강철두도 흥미가 동했다.
"자, 다들 일찍 자둬라. 내일부터는 보급훈련이다."
"예, 영주님!"
*
더스트 후작성.
끼아아아.
그리핀 하나가 후작성의 그리핀 둥지에 내려앉았다. 양성된 그리핀 기사단은 최우선적으로 변경의 국경지대에 배치되었다.
더스트 후작성에도 20기의 그리핀 기사단 하나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들은 전장 지역을 정찰, 첩보, 후방 교란작전 등, 여러 가지 임무를 수행하며 그리핀 기사의 효용성과 전술에 대해 이것저것 실험하고 있었다.
이른바 현지 전력화 중인 셈이다.
둥지에 내려앉은 그리핀 위에서 기사가 훌쩍 뛰어내리더니 다급하게 소리쳤다.
"급보입니다!"
"무슨 소식이오?"
대기 중이던 연락병의 대꾸에 기사가 빠르게 말했다.
"발트란 마을과 욘트 마을이 약탈당했소!"
"...거긴 나세르 남작령이 아니오?"
들어본 마을이다.
그 말은 마을의 역사나 규모가 일정 이상이라는 소리다.
"맞소! 나세르 남작성에서 고작 이틀 거리요!"
"허, 나세르 남작은?"
"생사 불문이오! 지금 정체불명의 기마대가 나세르 남작성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급히 오는 중이오!"
연락병의 얼굴에도 다급함이 떠올랐다.
적으로 추정되는 기마대가 아군 영지에 출몰했다.
이거 뭔가 국경 전선 사정이 좆됐구나.
241화 침략의 시작
전향한 마법사 넷 중에 셋을 신서울로 보내버렸다.
마법 전력은 전장에서 귀하디귀한 자원이지만, 일상의 연구에서는 더욱 활용도가 높아 신서울의 발전을 위해 파견했다.
지금 철두의 옆에서 길잡이 역할을 자처하는 것은 설탕 덩어리 같은 남자.
마검사 탕아후루.
"여기가 근방에서 가장 큰 마을입니다. 발트란 교역 마을이지요."
"상업 마을이군."
"예에. 국경지대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는 보급창이지요."
철두가 흡족하게 웃었다.
상업 마을은 털 게 많다.
"후후, 가자"
"예!"
두두두두.
철두가 선두에 달리고 마적대 300이 따라붙었다.
멀찍이서 오는 병력이 있었는데 경기병대로 보이는 그 병력은 어림잡아 500 정도였다.
마적대의 출현에 목책의 망루 위에 올라와 있던 발트란 마을의 수비대장은 적의 돌격에 어안이 벙벙했다.
'저 미친놈들, 이대로 돌격할 셈인가?'
발트란 마을은 성까지는 아니지만, 국경지의 최요지 마을답게 튼튼한 목책을 두르고 있었다.
기마대의 무차별 돌격 따위로 뚫릴만한 목책 성이 아니다.
"머, 멈추시오!"
"소나따는 빨간불에도 멈추지 않는다!"
"무, 무슨!"
뿔이 두 개나 난 말을 타고 선두에서 말을 달리는 사내가 쩌렁쩌렁 소리 질렀다.
바지에 허리를 두툼한 벨트까지 둘렀는데, 상의는 입지 않은 야만인 같은 모습의 사내는 정말 목책 성에 부닥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후후후후!"
목책이 코앞이다.
30미터쯤.
이대로 소나따를 충돌시켜 폐차시킬 수는 없는 법.
철두는 튕기듯 쏘아져 나가 새벽 어스름을 두 손으로 쥐곤 마력을 단전에 휘돌리며, 검기로 변환시켰다.
파파팟.
베었다.
거대한 성문이 칼질 다섯 번에 여기저기 비스듬히 무너지더니 허물어져 내렸다.
검으로 목책 문을 벤 사내는 뒤이어 도착한 소나따의 등에 올라타더니, 그대로 돌격을 이어갔다.
"잔당을 정리해라!"
"우와아아아아!"
김춘배의 마적단에게는 익숙한 일이다.
"항복하라! 항복하면 살려준다!"
"항복하라!"
마적대의 구성원들 90% 이상이 제국이나 기타 여러 노바의 종족들 출신이다. 평소에도 의사소통을 위해 종종 소통의 비약을 먹는 그들이라, 항복 권유가 발트란 수비대에게도 닿았다.
"이놈들!"
하지만 항복할 생각이 없는 발트란 수비대장은 즉시 망루를 뛰어 내려와 창병들과 함께 이미 지나간 기마대를 쫓았다.
시가전은 기마대의 단체 돌격에 불리한 면이 있어, 지리를 잘 알고, 훈련이 잘된 수비대라면 적을 상대하는 데 어려움이 없으리라.
발트란 마을 수비대는 무려 600명이나 되니까.
두두두두.
막 목책 문을 부수고 난입한 기병들이 여기저기 골목으로 흩어졌다. 그 와중에 기마대 선두 일부는 선회해 기수를 돌려 오고 있었다.
"거창!"
"거창!"
"창대 땅에 박아!"
"땅에 박아!"
수비대장의 복명에 수비대가 훈련에서 배운 대로 대기병용 장창을 세우고 뒤에 선 자들이 그 창대의 끝을 발로 밟았다.
두두두두두.
순식간에 고슴도치 같은 진영이 만들어졌는데 적 기병대는 두려움도 없는지 오히려 속도를 높이며 치켜 들어왔다.
"살 걸어."
선두에 선 마적대장 김춘배의 명에 마적대 정예들이 순식간에 화살을 걸어 시위를 당겼다.
"어엇!"
수비대장이 추가로 무언가 대응 명령을 내릴 새도 없었다.
"쏴!"
후두두두!
"크아아아아!"
전력으로 달리는 기병대가 이토록 정교하게 활을 쏴?
진영은 순식간에 와해되었다.
두두두두 콰아앙!
곧 창을 든 기병들이 들이닥치자 여기저기 병사들이 그 창에 꿰여 붕붕 날아다녔다.
콰직!
그도 아니면 말에 치여 바닥을 굴렀고.
그도 아니면....
스컥!
수비대장처럼 적의 도검에 목이 베였다.
"적장을 베었다!"
"적장을 해치웠다!"
김춘배의 호기로운 외침에 마적대가 호응하며 소리쳤다.
"투항하라! 목숨만은 살려줄 것이다!"
"투항하라!"
"무기를 버려라!"
마을 전체가 마적대의 고함으로 가득했다.
말밥굽, 비명, 창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진동했다. 이가 곧 잦아들 때쯤 소집 명령이 내려졌다.
"마을 중앙으로 집결!"
"집결하라!"
마적대 휘장 기수가 마을 중앙 공터에서 목이 터져라 소리 질렀다. 명령은 곧 파도타기 응원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곧 병력이 모두 소집되었다.
"보고! 사망 다섯, 부상 서른, 행방불명 열둘입니다."
"행방불명?"
"넵. 수색을 지시할까요?"
"아니다."
어차피 이제부터 보급훈련을 진행해야 하니, 그때 찾으면 된다. 아직 소집에 응하지 않았으면 죽었겠지.
"중상은?"
"포션으로 치료 중입니다."
다만 철두에게 아쉬운 게 있다면, 포션으로 치료해도 차도가 없는 중상자가 하나 있다는 것이다.
"후우...."
철두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울베어를 길들이기 위해 여신의 눈물을 모두 소진해버렸다. 이용 횟수 1개라도 남았다면 살릴 수 있었을 터인데, 이렇게 눈앞에서 죽는 것을 보아야 하니 안타까움이 컸다.
그때 철두의 기감에 슬그머니 합류하는 인원이 보였다.
"거기."
"헙, 넵!"
"나와."
"넵."
숫자를 세어보니 여섯이다.
아군의 복색이지만, 옷을 바꿔치기한 대범한 첩자일 수도 있다.
"첩자냐?"
"헙, 아닙니다."
"증명해라. 소집에 왜 늦었지?"
"헤헤, 그게 오는 길에 창관이 있어...."
전진기지의 역할을 하는 교역 마을이다.
몸 파는 여성들의 창관이 몇 있었는데, 이들은 그쪽으로 진격했다가 회가 동한 모양이다.
"어차피 약탈할 거, 먼저 한 발 빼고 왔습니다."
"...."
철두가 가만히 그를 보다가 김춘배를 보니 그도 별반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마적대에서는 흔한 일인 모양이었다.
"...."
철두의 앞에 끌려 나온 6명의 마적대원은 조금 긴장하는 기색이었다. 구경하는 마적대원들은 그들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무슨 영웅 취급하듯 휘파람까지 불어대니 철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소집 불응."
"네?"
"허가되지 않은 약탈."
"...?"
철두가 김춘배를 보았다.
"목을 쳐라."
"...!"
김춘배가 깜짝 놀라는데, 그 표정을 본 강철두의 눈빛에 실망이 가득 담겼다.
촤악!
"크헉!"
철두의 허리춤에는 롱소드가 하나 매달려 있었는데, 실제 전투에서는 항상 인벤토리에서 꺼낸 투 핸디드 소드 두 자루를 쓰기에 거의 장식용으로 취급되는 부무장이다.
그 검이 언제 빼 들었는지도 모를 속도로 검집을 빠져나왔다가 다시 들어가자, 철두의 근처에 있던 여섯의 목이 깔끔하게 잘려 떨어졌다.
"허억!"
여기저기서 비명과 같은 헛바람이 나왔으나 누구 하나 꿈쩍하질 못했다.
단기필마나 다름없는 전력으로 적진을 일점 돌파하던 강철두의 뒷모습도 떠올렸다.
수백 발의 화살을 되돌려보내던 믿기지 않는 마법도 떠올랐으나, 역시 가장 뇌리에 남는 것은 그리핀 기사를 고문하고 마법사의 머리통을 아무렇지도 않게 터트려버린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전투로 인해 흥분된 마음이 가라앉았다.
들끓던 사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두려움과 적막만이 공터에 가득했다.
마적대 전원은 부동자세로 몸이 얼었다.
"거기."
"헙, 넵!"
"목을 장대에 내걸어라."
"네!"
지목받은 이가 조건반사와 다름없는 대꾸를 하며 허겁지겁 달려와 동료였던 자들의 목을 긴 장창에 걸어 바닥에 세웠다.
저벅, 저벅.
워낙 조용해, 철두의 발걸음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
김춘배의 앞에 선 강철두의 입술이 열렸다.
"자율성?"
"...!"
"앞으로 두고 보지."
"...!"
김춘배의 눈이 부릅떠졌다.
시발....
그의 핏발 선 눈동자가 슬그머니 공터로 합류하려다 골목에 숨은 병사 여섯을 보았다.
방금 참수당한 놈들과 합치면 딱 열둘의 행방불명 숫자와 맞았다.
타다다닥!
김춘배는 그들을 잡으라는 명령도 없이 직접 달려 나갔다. 마적대에서 가장 빠른 이를 찾으라면 김춘배 그 자신이니까.
여섯의 면면을 확인한 김춘배의 눈에 핏발이 섰다.
한 명은 그도 아는 자다.
'시발, 종수야.'
신서울부터 자신을 따랐던 중사 출신의 부하를 보며 김춘배가 씹어뱉듯 말했다.
"대답 잘 해라. 왜 늦었냐?"
"다, 단장님. 그게...."
"시발."
김춘배가 새하얀 검기가 맺힌 검을 휘둘렀다.
파파팟!
여섯의 수급이 떨어졌다.
벌겋게 상기된 눈알의 김춘배가 명령했다.
"이놈들의 수급도 걸어라!"
"예에."
마적대가 허겁지겁 달려와 목을 다니, 공터에 열둘의 목이 둥둥 매달렸다.
"춘배."
"네, 영주님!"
"허가되지 않은 약탈은 없다."
"네!"
철두는 조용히 행동강령을 알려주었다.
"민간인을 해치지 마라."
그들을 해치고 파괴하고 살육하면 황금 거위의 알을 가르는 것과 같다.
두고두고 빼먹을 게 있는 마을이 낫지, 한 번 털고 말면 너무 아깝지 않은가.
"포로는 군인들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생존할 정도의 물자만 남기고 모두 털어라."
"넵!"
"가라."
김춘배가 마적대의 조장들을 소집해 마을에 흩뿌렸다.
신병 500명을 이끌고 뒤따라온 심봉수 대령은 몸을 덜덜 떨었다.
"봉수."
"네? 네, 네! 넵!"
"마을이 크다. 도와라."
"헙, 넵!"
신병들이 나서서 자원을 징발하기 시작하니, 곧 공터에 물자가 가득 쌓였다.
식량은 물론이고, 쇠붙이란 쇠붙이는 모조리 끌어모아져 왔다. 개중에는 발트란 마을에서 부를 축적한 상인의 재산도 있었다.
발트란 마을은 꽤 큰 마을인지라 약탈은 밤이 새도록 계속되었고, 주민들은 누구 하나 적극적으로 나서서 저항하지 못했다.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지만 아군도 저리 단호하게 베어버리는 자들인데, 점령지의 주민들 목숨 취급은 어떻겠는가?
*
마검사 탕아후루는 전율했다.
'시발, 쌌다.'
최근 그리핀 부대의 마법 폭격원으로 낙점되어 여러 야전 지휘관을 만나온 탕아후루다.
헌데 강철두 같이 단호하며, 순식간에 부대를 장악하는 자를 본 적이 없다.
마적대는 발트란 마을을 제압하더니, 아주 신사적으로 물자만 약탈해냈다.
수레란 수레는 모조리 동원되어 신병들이 신서울로 가져가 버렸고, 인력이 모자라 포로로 잡힌 수비병 300여 명도 동원되었다.
그리곤 주력부대인 마적대는 마을 밖으로 나서서 군진을 꾸려 숙영했다.
딱 물자 약탈만 하고 마을을 벗어났다.
흔히 마을을 약탈하는 군대나 강도가 벌이는 파티가 없다.
마을에 불을 지르지도 않았고.
아녀자들을 강간하지도 않았으며.
무차별적으로 민간인을 학살하지도 않았다.
학살이 뭔가, 한 명도 죽이지 않았다.
'내가 본 가장 신사적인 군대다.'
탕아후루는 감탄했다.
이 엄정한 군기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안다.
단 한 명의 압도적인 카리스마.
"후후후, 마셔라."
"아, 예에."
그가 승전 기념 술을 풀었다.
군영의 취사를 맡은 병사들이 마을에서 약탈한 염소 대여섯 마리를 잡아 구웠다.
너무나 압도적으로 마을을 점령하고 털어버린 자들이 벌이는 승전연은 술과 고기가 전부였다.
"탕아!"
"신! 탕아후루! 부름 받잡고 왔사옵니다."
고작 3미터 떨어져 있었으나, 바람처럼 날아올라 털썩 무릎 꿇는 마검사 탕아후루였다.
"다음 마을은 어디냐?"
"...끅."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딸꾹질이 나올 것 같다.
'내 선택에 의해서.'
다음 마을이 철저히 털리겠구나.
그나마 마음의 부담이 조금 덜한 것은, 유린당하거나 파괴되지는 않는다는 것....
"욘트 마을이 다음으로 큽니다."
"후후, 좋다. 내일은 거기다."
다음 보급훈련지가 정해졌다.
242화 공성전
욘트 마을이 털렸다.
발트란 마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병력의 충원이 있었다는 것.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마을 선술집에 머무르던 용병대 사내 8명이 합류했다.
애당초 마적대가 규모를 불린 방식은 이런 자들을 받아 수를 늘리고, 솎아내기로 정예화하는 것이었다.
"영주님. 이번에 받은 신병들입니다."
"추웅!"
"영주님의 명성은 널리 들었습니다!"
마적대의 신병을 충원해, 인사차 들렀기에 철두는 덕담을 해줬다.
"후후후, 환영하지."
어차피 마적대의 관리는 김춘배의 몫.
300은 적으니 숫자를 불려야 하긴 했다.
"후방 부대에 전령을 급파하겠습니다."
"알아서 해라."
"넵."
김춘배가 깍듯이 인사하고 물러갔다.
그는 곧 전령을 보냈는데, 그는 그리핀을 소환해 타고 훌쩍 후방으로 향했다.
철두가 뺏은 그리핀 4마리는 마적대에 둘, 후방부대에 둘을 배치했다.
랭커 중에 기수를 뽑아, 일단 그리핀 전령으로 쓰기로 했다.
"난쟁이, 이거 먹어봐라."
"으음."
"입맛이 없나?"
철두는 어제부터 입맛이 영 없는지 말수가 줄어든 드워프 에르미스를 보며 물었다.
"철두."
"왜?"
"자네의 야망은 어디까지인가?"
"...?"
철두는 어리둥절했다.
"무슨 야망?"
"제국을 이루려는가?"
"음?"
철두는 생각해본 적 없는 주제다.
"생각해본 적 없다."
"자네의 행보를 보게."
"내 행보가 왜?"
"인재를 주도로 모으고, 위성 영지를 계속해서 만들고 있지."
"원래 같은 나라였다."
에르미스는 철두의 말은 대충 듣고 제 할 말만 했다.
"이제는 아미르 왕국을 침략하고 있지."
"이건 보급훈련이다."
"허, 같잖은 소리 하지 말게. 온화한 약탈인 것은 인정하지. 하지만 그건 고도의 계산된 전략이 아닌가?"
에르미스의 얼굴은 진지했다.
"자네는 아미르 왕국까지 다 품을 생각이 아닌가? 내 눈에는 보여."
"뭐가 보여?"
"아미르 왕국을 먹을 셈이 아닌가? 지배층은 철저히 죽이고 없앤 다음 그 영민들을 모조리 품을 생각이 아닌가?"
"후후, 내가 왜 품나?"
"내 말이 틀리단 건가? 아닐세. 자네는 이미 전적이 있지 않은가?"
"무슨 전적?"
"나트롱 백작의 마을을 뺏지 않았나?"
"우리 진태가 일을 잘하긴 하지."
"...?"
"후후, 계산이니 뭐니 그런 건 없다."
에르미스의 얼굴이 굳었다.
정말 잘못 짚었다는 말인가?
"허면?"
"털고 털어야지."
"굳이?"
"애써 주민을 뺏어와 입을 늘릴 필요가 뭐가 있나? 대신 농사도 지어주고, 물자도 생산해주는데. 그냥 뺏으면 되지."
"...?"
"주민을 늘려봐야 책임져야 할 식구만 늘 뿐이야."
남일 때가 낫다.
고생을 하든 말든, 그 과실만 빼 오면 되지.
"허! 하지만 그들이 자네에게 복속을 청해오면 어떻게 할 건가?"
"굳이 마다할 이유도 없지."
"시발, 맞잖아!"
에르미스가 벌떡 일어섰다.
내 말이 맞잖아!
"결국 야망이 제국에 닿지 않았는가?"
"후후, 그런 건 상관없다."
"...?"
"제국이 되든 왕국이 되든, 내 부족은 하나만 하면 된다."
"뭐, 뭐를 말인가?"
"남의 부족을 털어 내 부족을 살찌우는 것이다."
"...."
시발놈의 바바리안.
그 말이 그 말이지 않은가?
"우린 그런 걸 정복 전쟁이라 부르네만...."
"살기 위한 몸부림일 뿐이다."
"...."
대체 어떻게 몸부림을 쳐야 제국 백작이 영지를 반이나 떼주고, 도시 하나가 충성을 맹세하며, 왕국이 벌벌 떤단 말인가?
"하아, 말을 마세."
뜻이 있고, 행하는가.
행하다 보니 뜻으로 이어지는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
나세르 남작성.
성의 수비를 책임지고 있는 랑오루 기사는 초조한 얼굴로 정찰병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보고! 적 기병 두 무리로 나눠서 접근 중입니다."
"수는?"
"전방부대 300인 남짓, 후방부대 1200명 남짓입니다."
전부 기병이다.
기병 전력 1500명의 습격이다.
자잘한 농사 마을들은 모두 제쳐두고 직선 경로상에 있는 두 개의 마을이 털렸다.
국경 교역 마을 발트란이 당했고, 그 뒤에 있는 가장 큰 농지를 가진 욘트 마을이 당했다.
거기에 더해 지금 나세르 남작성 코앞까지 적이 당도했으니....
"큰일이구나. 후작 각하의 지원 병력은 아직인가?"
"그렇습니다, 거리상 이틀의 차이가 납니다."
더스트 후작의 주력병은 북쪽의 오크 국경지대에 주둔하는 병사들이다.
오크 족과의 전투가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일어나는 치열한 전장이라, 거기 복무하는 병사들은 대부분이 정예병이었다.
기사들의 실력도 월등한데, 그 부대의 일부 병력이 지금 나세르 남작성을 구원하기 위해 출발했다.
"이틀을 버텨야 하는구나."
"성이 높은데 걱정할 게 있겠습니까?"
"병력이 적음이 문제다!"
나세르 남작이 성의 병력을 대거 끌고 국경지까지 진군한 바람에, 현재 남작성에 남은 병력은 300명 남짓이다.
성의 민병대를 징집한다 해도 겨우 1천을 만들어내는 게 전부일 터.
숙련되지 못한 민병대가 얼마나 수성을 잘해줄지 그것이 문제다.
"허면 이건 어떻습니까?"
"방법이 있느냐?"
"외성은 민병대에게 맡기고, 정규군은 내성 방어에 치중하시지요."
"지금 외성을 버리겠다는 건가?"
"적들이 민간인은 해치지 않는다는 첩보가 있습니다."
"...그것이 참인가?"
"그렇습니다."
발트란 마을과 욘트 마을이 당했다.
그 경과를 살펴보러 간 척후병이 도착하면 더 정확한 정보가 들어올 터.
"이틀만 버티면 됩니다. 랑오루 경."
"후, 좋습니다. 모든 귀족들에게 내성 대피를 지시하시오."
"네, 알겠습니다!"
"자네는 즉시 민병대를 소집하게."
"알겠습니다!"
선임 기사 랑오루의 명령에, 성에 남은 기사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수성을 준비했다.
남작성에 살고 있는 여러 귀족들과 돈 많은 상인, 병사의 가족들이 모조리 내성으로 이동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정규병들도 모조리 내성으로 들어가니, 외성의 민심이 한순간에 흉흉해졌다.
"이, 이거 우리 버려지는 거 아냐?"
"젠장, 예감이 좋지 않아."
"도, 도망가야 하는 거 아냐?"
"야만인들이 모두 기병이야.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지금 성 밖으로 나가면 죄다 사냥감으로 전락한다고."
수성을 위한 병력 배치가 이뤄지는 가운데, 랑오루는 민심을 다독일 겸, 민병대의 사기 저하를 막기 위해 스스로 외성으로 향했다.
"자네들은 내성 수비에 집중하게."
"경은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민병대를 지휘할 지휘관이 필요하네. 내가 가야 민심을 다독일 수 있어."
"보중하십시오!"
"여의치 않으면 당장 내성으로 대피하십시오."
"...."
개색히들.
빈말로라도 대신 간다는 소리를 안 하네.
"...응원 고맙네."
기사 랑오루는 징집한 민병대 600명으로 조를 나누고 명령체계를 잡고 부대를 배치했다.
그 열성적인 모습에, 민병대는 자신들이 버림패가 아니라는 생각에 의욕적으로 나섰다.
"화살을 옮겨라! 창을 들어라!"
"가족을 지켜야 한다! 야만인들이 성을 넘으면 내 부인이, 내 누이가, 내 딸이 욕보일 것이다. 내 어머니가 내 가족이 죽임당할 것이다!"
"용기를 내라! 우리가 지켜내야 한다! 내 가족과 내 재산을 지키자!"
"이 성을 지켜야 한다! 이틀! 이틀만 버티면 된다!"
"더스트 후작 각하의 지원 병력이 오고 있다! 우리는 이틀간 결사 항전하여 이 성을 지킬 것이다!"
기사 랑오루의 독려는 민병대의 사기를 끌어 올렸다.
곧 크지 않은 외성 위에 민병대가 빼곡히 올라 성을 지켰다.
고작 600명밖에 되지 않아 교대로 병력을 운용할 여유가 없다. 가장 중요한 성문 주위에 궁수들이 집중 배치되었고, 성문 안에 시가전을 대비하기 위한 장애물들이 여럿 쌓였다.
기마대의 돌격을 봉쇄하여 그 기동성만 막아내면, 파이크병으로 상대해봄 직하다.
야만인 부대 아니랄까 봐, 철제갑옷을 입은 이는 소수고, 잘해봐야 갬비슨에 아예 갑옷도 없이 옷에 활을 매고 칼을 무장한 놈들이 다수다.
설상가상으로 선두에 큰 말을 탄 자는 옷도 입지 않고 있다. X자로 상체를 가로지르는 대거 벨트로 인해 가려진 유두가 핑크빛인지 흑빛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헙, 집중해라. 집중!"
랑오루는 민병대를 독려하며 적을 다시 찬찬히 살폈다.
선두에 서서 유독 시선을 잡아끄는 반라의 사내가 대장인 듯싶었다.
민병대가 용기, 두려움과 절박함이 버무려진 긴장감을 느끼는 그때, 강철두는 후방의 기병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춘배."
"네, 영주님."
"저놈 어때 보이나?"
철두는 성문 위에서 전신 갑옷을 차려입은 기사를 노려보았다. 척 보니 소드마스터 정도는 아니고, 숙련된 기사 같았다.
보르탱의 호위기사 정도 될까?
새삼, 그때는 정령의 도움까지 받아 사력을 다해야 무찌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칼질 한 번에 해치울 자신이 있으니 격세지감이 따로 없었다.
그간 참 많이도 강해졌구나 싶었다.
철두와 마찬가지로 한참 동안 적의 기사를 살펴보던 김춘배가 답했다.
"제법 한가락 하는 것 같습니다."
"후후, 너보다 약하다."
"헙, 알겠습니다!"
대체 기감이 얼마나 예민해야 이 먼 거리에서 적의 강함 정도까지 파악할 수 있는 걸까?
"기존의 작전대로 성문부터 엽니까?"
"으음, 동시에 들이쳐야지."
발트란 마을과 욘트 마을이 크다 해도, 나세르 남작성은 그에 비해 규모가 달랐다.
작은 소도시라고 봐도 될 정도의 크기에 많은 인구가 밀집해 있으니, 고작 300의 마적대로 들이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파괴하고 불 지르고 되는대로 약탈해 가자면 충분하겠지만, 전체를 모두 먹어 치우자면 터무니없이 적은 병력이다.
"일단 척후 돌리면서 기다려보자."
"넵."
후방부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척후병이 성을 빙 둘러 관찰하고 와서는 보고했다.
"보고! 대부분의 병력은 이곳 북문과 서문에 몰려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남문의 경계가 가장 허술합니다. 서문에 경계 중인 병사들이 가장 정예해 보였습니다."
탕아후루가 다가와 부연설명했다.
"서문은 내성으로 바로 통하는 문입니다."
나세르 남작성은 내성이 있고 동쪽으로 확장하듯 외성을 가진 구조였다. 서문의 앞으로는 절벽에 가까운 언덕이라 대규모 병력을 운용하기엔 무리였다.
비탈길을 지그재그로 난 좁은 길을 올라야 하고, 서문은 그저 비상구의 개념인지라 문의 크기도 가장 적었다.
"밥이나 먹자."
"네, 영주님."
마적대가 모두 말에서 내려 대충 군진을 이루곤 여기저기 불을 붙이고 솥을 걸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충 껄렁거리는 느낌과 불량함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군기가 바짝 든 군인과 같았다.
그 중심에는 강철두가 있었다.
두두두두두.
곧 후방부대의 선발대가 도착했다.
신서울을 장원으로 하사받은 기사 김도진은 강철두의 앞에 와 무릎을 꿇었다.
"주군의 부름에 부리나케 달려왔나이다."
"후후, 고생했다."
그리핀 전령까지 띄워 후방부대를 요청했다.
기존의 3군단 인력은 겨우 마을 두 개를 털어먹은 물자를 옮기기 위해 전부 투입되다시피 했다.
눈앞의 남작성을 포위할 병력도 필요하고, 전리품도 옮겨야 했기에 신서울에 주둔 중인 2군단 소속의 병사들이 대거 진군해왔다.
"애들 도착하면 밥 먹여둬라."
"명을 받듭니다!"
김도진의 깍듯한 모습에 김춘배가 복잡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한때 신서울을 두고 내심 서로 눈치를 보던 자들이 사이좋게 강철두라는 주인을 모시게 되었으니....
세상사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243화 점령
소드마스터 셋이 모였다.
"후루루룹."
제법 쌀쌀한 날씨라, 셋은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둘러앉아 병사들과 같은 음식을 배식받아 먹고 있었다.
"후후후."
"왜 웃으십니까?"
"즐거운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서 그렇다."
"...?"
"허허."
김춘배와 김도진이 어리둥절해했으나, 철두는 씩 웃고 말았다.
어쩌면 이번 신서울행의 가장 큰 성과는 이 둘인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합류로 본성에 남은 이은영까지 합치면 아이언헤드령의 소드마스터가 넷이 되었다.
"춘배. 마적대를 이끌고 동문을 친다."
"네, 알겠습니다."
"도진이. 이대로 병력 이끌고 북문을 친다."
"명 받잡습니다!"
김도진의 우렁찬 대꾸에 김춘배가 힐끔거렸다.
저 양반이 저렇게 아부에 능했나?
이거 나도 분발해야겠는데?
김춘배는 힐끗거리더니 말했다.
"서문은 어떻게 합니까?"
"내가 간다."
소드마스터 셋이 각기 문 하나씩을 맡는 것이다.
"에르미스 너는...."
"흥! 날 자네의 정복 전쟁에 부릴 생각은 추호도 말게!"
"으음."
"아무리 왕이 직접 명하여 자네를 도우라고 했어도, 이는 내가 나설 문제가 아닐세. 내가 도움을 주는 건 어디까지나 내 대장 기술일세. 내 무력을 빌릴 생각은 말게."
"후후, 넌 그냥 응원해라."
"그러지."
어차피 혼자 가도 된다.
서문은 수레가 나고 다니는 큰 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걸어서 다니는 작은 문이다.
마침 좁은 오르막길 하나뿐이니, 철두 혼자 쉬엄쉬엄 산책하듯 오르면 될 일이다.
"후후, 기대되는군."
강철두가 남작성의 약탈에서 가장 기대하는 것은 무한의 샘물과 전직의 돌이다.
마검사 탕아후루의 자세한 보고에 의하면 도시에 그 둘이 있다 하니, 약탈해서 신서울로 옮기면 도시의 발전에 날개를 달 터다.
"밥 다 챙겨 먹고, 소화 삼아 이동하지. 신호는...."
철두는 좋은 생각이 나서 씩 웃으며 말했다.
"포효소리로 하지."
"명을 받듭니다!"
"...."
김도진의 큰 소리에 대꾸할 타이밍을 놓친 김춘배는 경쟁심에 더욱 목소리를 낮고 크게 깔았다.
"신! 마적대장 김춘배! 영주님의 명을 따릅니다!"
"으음, 좋다."
"...칫."
철두가 어깨를 두드려주자, 김도진의 잇새가 묘하게 벌어졌다.
*
"랑오루 경! 적들이 점심 보급을 합니다."
"그래, 나도 보고 있다."
기사 랑오루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그렇게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라!'
후방부대가 합류한 적의 숫자는 1500명 정도.
아군보다 월등히 많지는 않지만, 숫자가 전력과 비례하지 않는 세상이다 보니 방심할 수가 없다.
공성 장비 따위는 아직 보이지 않지만, 이 또한 안심할 수 없다. 무거운 공성 장비를 인벤토리에 담아 이동시킨 후 순식간에 조립해내는 건 너무 흔한 전략인 세상인 것이다.
랑오루는 적들을 살피며, 그들이 느긋하게, 또는 신중하게 성을 관찰하고 공격하기를 바랐다.
'이틀만 버티면 된다.'
어쩌면 그 전에 원군이 올 수도 있고.
넉넉잡아 이틀만 버티면 원군이 도착하니, 그때까지만 필사적으로 막으면 된다.
"우리도 식사 보급을 시작하라!"
"넵!"
적이 새카맣게 몰려올 때는 두려움이 일고 긴장되었으나, 막상 그렇게 당도한 적들이 밥을 지으며 당장 공격할 태세가 아니자, 긴장감도 많이 완화되었다.
더욱이 시장기가 돌던 차에 식사 배급이 이뤄지니, 제법 적응한 민병대원들이 서로 잡담하거나 농담을 나누기도 했다.
랑오루의 얼굴이 조금 찌푸려졌다.
자신감을 가지는 것은 좋으나, 지나치면 없느니만 못하다.
급하게 징집하여 훈련량이 부족한 민병대원들.
성을 믿고 화살을 날리거나 창을 찌르는 정도는 가능하겠으나, 성문이 뚫리거나 적들이 성벽에 오르면 큰일이다.
"다들 긴장을 유지하라!"
"예에!"
랑오루는 주먹밥을 씹으며 적 진영을 찬찬히 살폈다. 무엇보다 공성 병기의 유무가 중요하다.
'성벽만 지키면....'
그때 적들이 식사를 마쳤는지 진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서 랑오루는 위화감을 느꼈다.
'진을 해체해?'
대단한 자신감이다.
저것은 한 번의 공격으로 성을 함락할 테니 돌아갈 진영 따위는 필요 없다는 소리가 아닌가?
대규모의 적들이 이동했다.
1200여 기병이 바로 코앞 북문 앞에 도열했고, 무리에서 떨어져 나간 300여 기병이 우회해 동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기마 셋이 서문으로 향한다.
'서문은 감시 정도만 붙이는구나.'
어차피 대규모 병력을 운용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거기에 좁은 서문으로 통하는 내성은 정예병력이 지키고 있으니 문제없다.
"다들 마음 단단히 먹어라!"
적이 움직이자 민병대원들은 다시 긴장했다.
"성벽이 그대들을 보호해줄 것이다! 적은 얼마 되지 않는다!"
1200명의 기병으로 공성전?
버틸 자신 있다.
오히려 동문이 조금 걱정이긴 한데, 거기로 몰려간 병력은 300명 정도니 그 정도야 막아내겠지.
도열한 1200명의 적군은 화살의 사정거리 밖에 대기 중이었다. 여전히 어느 누구도 공성 병기를 꺼내거나 조립하는 낌새가 없다.
'다행이다.'
랑오루는 전장이 자신이 바라는 대로 돌아간다고 여겼다.
'항복 권유가 다겠지.'
애당초 기병 1500기로 공성할만한 성이 아니다.
제대로 준비되지 못한 야인 무리들.
할 수 있는 건 항복 권유가 전부겠지.
그래, 차일피일 미뤄주마.
이틀만 견디면 된다.
지원군이 당도할 테니....
부우우우우!
난데없이 울려 퍼진 끔찍한 괴성에 병사들이 동요했다.
"허억."
"뭐, 뭐야?"
"으억!"
쿠어어엉!
어딘가 부러지고 폭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성 쪽이다.
"이런!"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다.
랑오루는 내성으로 달려가려 했으나, 북문 앞에 주둔 중인 적 기병대가 출진하기 시작해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두두두두두.
"저, 저 미친놈들. 화살을 쏘아라!"
랑오루의 명령에 화살이 날아갔으나, 궁병의 수는 고작해야 300명이고, 일제사격 같은 기술이 없었기에 화살은 전장 여기저기 중구난방으로 날아갔다.
틱, 티틱!
제멋대로 날아간 화살 한두 방에 피해 입을 적은 없었다. 운 나쁜 몇 명의 기수만이 낙마했을 뿐.
"침착하라! 기병으로 돌진해봐야 성벽만 믿...."
후우우웅!
무언가 날아오르는 소리에 랑오루의 눈이 찢어지듯 커졌다.
가장 선두에서 말을 달리던 사내는 대뜸 성벽을 밟고 날아올라 랑오루의 앞에 착지했다.
타탓.
"신서울 기사 김도진이다."
"...!"
카아앙!
난데없이 휘둘러진 검에 랑오루가 맞서 싸웠으나, 그 한 번의 부딪힘으로 상대가 보통이 아님을 알아챘다.
'강하다.'
강한 자다.
나보다 더.
쉽지 않은 승부가....
즈아아앙.
상대의 검에서 피어오른 검기를 본 순간 랑오루는 생각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시발."
오늘 여기서 죽겠구나.
공성 병기?
적의 무리에 소드마스터가 있는데 무슨.
그들이 곧 공성 병기니....
캉! 촤륵!
단 두 합 만에 랑오루의 목이 잘렸다.
"덤벼라!"
"히이익!"
김도진이 밀어붙이자 성벽 위의 민병대는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갔다.
휘이이이, 틱!
그때 성벽 아래 도달한 병사들이 갈고리를 걸어 오르니, 순식간에 북문이 점령되었다.
끼이이이익.
북문이 수월하게 열리고 병사들이 진입해, 흩어져 도망치는 민병대를 잡기 시작했다.
*
에르미스가 넌지시 물었다.
"혼자서 할 셈인가?"
"후후, 안 도와줄 거잖아?"
"흥! 도움이 필요는 한가?"
"응원이나 해라."
강철두와 에르미스의 대화는 너무나 여상해서 코앞에 전투를 앞둔 사람들처럼 보이지 않았다.
"충신 탕아후루! 전력을 다해 돕겠습니다."
철두는 이제 막 전향한 마검사를 보며 히죽 웃었다. 어째 마법사 놈들은 전향하는 놈들마다 이렇듯 간신 같은 놈들뿐일까.
"너도 구경해라."
"헙! 알겠사옵니다."
탕아후루의 가치는 그 검술도, 마법도 아니다.
아미르 왕국 출신이라는 것과 그들의 왕국, 문화, 세력 판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내부자 출신이라는 것이다.
그는 작전회의에서 적들의 정보를 뱉어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제 몫을 다 하고 있었다.
서문에 당도한 철두는 언덕 위를 보았다.
지금 딛고 선 땅보다 적어도 80미터는 더 위에 자리 잡은 성이다.
지그재그로 난 길은 말 한 마리가 겨우 다닐 정도.
연락병이 드나들거나, 피치 못할 사정에서 도주로 정도로나 이용될까, 평소에 사용되는 성문이 아니다.
그에 반해 성벽 위에 도열해 있는 병사들의 무장은 좋아 보인다.
맞춰 입은 갑옷 하며, 통일된 무기들로 미뤄보아 성의 정예병들은 모두 내성 방어에 투입된 모양이다.
"이쪽이 주력이었군."
철두가 씩 웃었다.
여기에 적 지휘관이 있을 터.
본디 전투란 대가리만 치면 모든 게 끝나는 것이다.
공연히 부하들을 죄다 몰살시킬 필요가 무엇인가?
패잔병들은 죽이는 것보다 살려서 노예로 삼는 것에 더 가치가 있는 법이다.
"다녀오지."
"몸조심하세."
"후후, 별말을 다 하는군."
"그러게 말일세."
철두는 에르미스의 걱정 아닌 걱정을 뒤로하고 오식이를 소환해 훌쩍 날아올랐다.
후우우웅!
사자 뒷다리로 훌쩍 뛰어올라 날개를 펼치고 몇 번 내저으니 금세 성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상공이다.
"허어어억!"
갑작스러운 도약에 놀라는 병사들을 보며, 철두는 또 하나의 펫을 소환했다.
"새곰아! 밥값 할 때다."
파파팟.
철두의 앞에 소환된 새곰이 자유낙하하기 시작했다.
화아아악!
앞발을 활짝 펼치니, 진화가 되다 만 듯한 날개인지 팔인지 모를 기관으로 속도를 늦추며 성안에 착지한 새곰이 포효했다.
"부우우우우우우!"
전장의 시작을 알리는 함성이었다.
콰직!
내성의 가장 높은 탑에 착지한 오식이에게 명했다.
"도망치는 그리핀이 보이면 잡아 와라."
"끼아아아아!"
"후후."
철두는 오식이의 목덜미를 툭툭 두드려주고는 훌쩍 뛰어내렸다.
쿠우우웅!
성벽을 무너뜨릴 듯 착지한 강철두를 보며 병사들이 기겁했다.
"히익!"
"후후후."
철두는 새벽검과 할배검을 꺼내 히죽 웃었다.
성벽이 튼튼하고 넓은 것이, 돌기 딱 좋은 무대다.
홰애애애액.
<회전에 대한 이해도가 깊습니다.>
<기술 '소용돌이'의 단계가 상승합니다.>
파파파팟.
더욱 맹렬한 빠르기로 돌아가는 검의 소용돌이 앞에, 성벽 위의 병사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내렸다.
흉포한 소용돌이가 지나간 성벽 위엔, 더 이상 경계 병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 전장을 저 아래에서 지켜보던 에르미스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으으음."
"여윽시! 영주님이십니다."
"간신. 네놈은 저게 좋아 보이더냐?"
"예?"
"쯧, 작게 보면 호쾌하나 크게 보면 너무 잔인한 모습이니라."
"하지만 적에게 두려움을 심어주는 건 오히려 전장에서 중요한 일이 아닙니까?"
탕아후루의 반론에 에르미스가 혀를 찼다.
"간신배 같은 놈이 바로 코앞만 생각하는구나. 그 두려움이 후일 아군에게도 옮겨갈 게다."
"...?"
그럼 부하 단속에 더 좋은 게 아닌가?
탕아후루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겨우 삼켰다.
어두운 안색의 에르미스의 얼굴에서 걱정이 담겨서다.
"쯧, 패왕의 길을 걷겠다는 겐가...."
외로운 길에 스스로를 집어삼켜 괴물이 되면 어이할꼬?
그리되면 그 누가 있어 저자를 막을 수 있을까?
244화 배달이요
"보고! 북문과 동문 모두 통제 중입니다. 성벽에도 경계 병력을 배치했습니다. 빠져나간 적은 없습니다."
"수고했다."
"충!"
김도진은 성의 장악을 완료하곤, 도시의 중앙 광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군기가 바짝 든 마적대가 포로들을 관리 중이다.
김춘배가 깍듯이 보고했다.
"영주님. 대부분이 징집된 민병대입니다."
"그래서?"
"예?"
"칼을 들었으면 적이다."
"아, 넵!"
김춘배는 이제 강철두의 말을 이해했다.
그는 이제 슬슬 자신이 모시게 된 상관의 사상이나 생각의 매커니즘이 파악되는 중이었다.
"모두 포로로 처우하겠습니다."
"그래."
옆에서 타이밍을 보고 있던 김도진이 보고했다.
"모든 성문과 성벽에 대한 통제를 확보했습니다."
"고생했다."
철두는 두 대장을 치하하고는 할 일을 시작했다.
"김도진."
"넵!"
"성의 주요시설들을 모조리 해체해라! 신서울로 옮길 것이다."
"충!"
김도진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것은 자신에 대한 하사품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철두는 잠깐 고심했다.
나세르 남작성이 생각보다 규모 있고 부유한 성이라, 이곳의 물자만 턴다 해도 지금 인력으로는 이동이 쉽지 않았다.
이를 김도진에게 모두 맡기고 다시 남하를 시작해 보급지를 늘리는 게 맞는지 고민이 됐다.
이제 곧 겨울인데....
"춘배."
"네, 대장!"
"네가 정해라."
"헙, 무엇을 말입니까?"
"더 털까? 돌아갈까?"
"...."
김춘배는 고심했다.
더 턴다면 어디까지 턴다는 거지?
진짜 조금 더 내려가면 적의 핵심들과 부딪혀야 할지도 모른다. 더욱이 병력이 너무 모자라니....
"이쯤에서 숨을 고르는 게 어떤지요?"
"으음. 좋다."
철두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용병 몇 명을 더 추가로 받긴 했으나 여전히 300명 규모의 마적대다.
이들만으로 계속 적진에 파고들면 손실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번 겨울을 날 정도의 물자는 충분히 확보한 것 같으니, 이 성의 것만 털고 돌아가자."
"넵!"
그렇게 결정되었다.
부대는 민간인들의 약탈에 신중했는데, 영주님의 지침으로 그들이 삶을 포기할 정도는 뺏지 않았다.
터전을 떠나지 않고 겨울을 나고, 다시 열심히 일해 농사를 짓고, 재물을 축적할 정도의 여력을 남기기 위해 애썼다.
"하이고! 나리! 이것마저 뺏어가면 저희 애들은 굶어 죽습니다요!"
"으음, 좋다. 돌려주마."
"예에?"
"애들 굶는다며? 그럼 안 되지."
"예에에?"
순순히 식량을 돌려준 점령군이 대신 솥을 가리켰다.
"솥이 두 개니. 하나는 가져가겠다."
"그, 그러십쇼."
"나머지 하나는 자네들도 밥해 먹어야지."
"그, 그렇지요?"
"그래. 힘내서 살아보게."
"...예에, 나리."
방금 재물이 털린 집안의 가장은 어안이 벙벙했다.
방금 전쟁에서 이긴 점령군이 맞았나?
이거, 세금 징수원보다 더 부드러운데?
이거 맞아?
상황은 성 내의 곳곳에서 벌어졌다.
"딸이 귀엽군."
"하이고! 나리! 안 됩니다요. 이제 10살 난 아이입니다요!"
"아니, 그냥 귀엽다고."
"예에?"
"이쁘게 키우슈. 어우, 너무 많이 털었군. 이건 돌려줄 테니 애 까까나 사주시오."
"예에에에?"
약탈하던 점령군이 개평을 줬다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성의 민간인들이 착취인지 징수인지 모를 약탈을 당하는 동안, 나세르 남작성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모조리 실어 담아라!"
"예에!"
점령군은 여기저기서 아예 기둥뿌리까지 뽑아 갈 기세로 약탈을 하고 있었고, 하인들은 손발이 묶여 한쪽에 몰려 있었다.
투항한 정규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는데, 그 수가 100명이 조금 넘었다.
철두와 에르미스는 남작성을 두루 돌아보았다.
모두가 철두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있었다.
눈치가 보일 수밖에.
자신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자니까.
"남작의 가족들을 잡았습니다."
"놓아라. 이노옴!"
철두는 끌려온 남녀노소를 바라보다가 탕아후루를 불렀다.
"탕후루."
"예! 충신 탕아후루!"
탕아후루가 달려와 부복하자 물었다.
"아미르 왕국에서는 어떻게 처리하나?"
"몰락한 귀족의 가족들은 모조리 노예로 처분하옵니다."
철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라."
"네!"
남작의 가족을 잡아 왔던 병사들이 그대로 그들을 끌고 갔다. 여자도 아이도 있었으나 철두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영주님. 저들은 어떻게 할까요?"
철두는 이제 주인 잃은 하인들과 병사들을 보았다.
봉신 계약으로 묶인 심복들은 나세르 남작이 죽으며 함께 사라졌을 터.
"투항하여 따를 자들은 고용하겠다. 병사들도 항복하면 받아주지."
"아이언헤드령에 봉사할 자들은 이쪽으로 와라!"
"어이, 얼른얼른 움직여!"
병사들이 그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주인이 누가 되든 상관없다 생각하는 하인들은 대부분 선을 넘어왔고, 병사들도 대거 넘어왔다.
남은 이들은 하인 7명과 병사 21명.
"영주님, 이들은 어찌합니까?"
"노예로 팔아라."
"넵!"
"탕후루."
"넵, 영주님. 탕아후루 귀를 열고 듣고 있사옵니다."
"네가 맡아라."
통제하자면 아미르 출신의 기사이자 마법사인 마검사 탕아후루가 맡는 게 제일이다.
"헙, 감사합니다."
철두는 간단히 처분하고는 영주성 안으로 들어갔다. 에르미스가 뒤따랐다.
"난쟁이. 할 말 있나?"
"...확실히 자네는 군왕의 자질은 타고났네."
"후후, 남이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다."
"어째서 상관없나?"
"내 부족 하나 지킬 뿐이다."
"...남의 부족을 망하게 하는 일 같네만."
"뺏어야 지키지."
"...."
바바리안의 사고방식에 할 말이 없군.
"자네는 제국이 쳐들어온다면 항복할 텐가?"
"어림없는 소리."
"...흐흐."
에르미스는 웃었다.
이 바바리안의 야망이 어마어마하구나.
"자네가 어디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그 끝은 찬란하겠군."
제국을 넘어, 제국을 이루거나.
제국에게 먹히거나.
"후후후, 쓰잘데기없는 소리 말고 밥이나 먹자. 배고프다."
"흐흐, 난 구경만 했더니 아직 소화도 덜 되었네."
사실이 그랬다.
점심을 먹고 시작된 공성전이 끝나고, 전후처리마저 일사천리로 이뤄졌으나 아직 해도 지지 않은 오후 무렵이다.
남작성을 점령하는 데는 불과 두어 시간이면 충분했다.
부리나케 성으로 뛰어온 탕아후루가 고개 숙였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곧 저녁 식사를 대령하겠나이다."
잠깐 사이 하인들을 구워삶은 모양이다.
본디 그들이 일하던 곳이니, 이미 손에 익을 터.
저녁은 금방 차려져 왔다.
철두는 본디부터 남작성의 주인인 양, 그곳에 본진을 꾸렸다.
징발한 물자가 북문에 가득 모이기 시작했고, 수레가 턱없이 모자라 급하게 새 수레를 만들기도 했다.
인력도 모자라 보급품을 모두 옮겼을 3군단을 소집하기 위해 그리핀 전령이 급하게 날아가기도 했다.
"몇 마리 더 뺏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쉽군."
"가능할 것이옵니다. 소인이 기거했던 더스트 백작령에만 해도 20기의 그리핀 기사단이 있었으니 말입니다."
하나가 죽고 넷을 뺏었으니 15기나 남은 셈.
"으음, 터는 김에 그놈까지만 털까...."
철두가 잠깐 고심하는 사이, 동쪽을 경계하던 병력으로부터 급보가 전해져왔다.
"동쪽에 대규모 적의 출현입니다!"
"누구더냐?"
"그, 그것이 누군지는 모르겠사옵니다. 수는 3천가량 되옵니다."
탕아후루가 급히 전령에게 물었다.
"휘장의 문양이 어떻던가요?"
"방패 두 개였습니다."
아는 문장이다.
"더스트 후작의 병력입니다. 영주님."
"오!"
지원 병력 3천이라니.
"그리핀도 있더냐?"
"예에. 적의 그리핀 다섯이 지금 상공에서 남작성을 빙 돌며 척후 중입니다. 요격할 방법이 마땅히 없습니다."
병사의 비통한 보고에도, 철두의 웃음은 짙어졌다.
"후후후, 치킨이 배달 왔군."
이거, 굳이 찾아갈 수고를 덜게 해줘서 고맙군.
철두가 즉시 나섰다.
*
"늦으면 안 된다! 서둘러라!"
"예에!"
더스트 후작의 주력 부대는 넷이다.
그중 예비대 성격의 병력이 철두에게 궤멸해버린 나세르 남작군이다.
나머지 3개의 정예 병력은 모두 오크들과의 국경지에 주둔했는데, 두 개의 부대가 국경지에 주둔하고, 한 개의 부대가 후방에 머무르며 휴식하는 식으로 교대했다.
나세르 남작성의 위급함을 듣고, 후방에서 휴식 중이던 정예부대를 구원군으로 보내니, 곧 나세르 남작성이 코앞이다.
"자작님께 보고! 이미 성이 떨어진 듯합니다. 처음 보는 휘장이 내걸려 있습니다."
척후병이 돌아와 보고하자, 양구스 자작은 허탈한 듯 소리쳤다.
"허! 나흘 거리를 이틀 만에 왔건만! 이미 성이 떨어졌다니!"
"명을 내려주십시오!"
"평보! 천천히 나아간다."
"예에, 자작님!"
양구스 자작의 3천 병력이 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턱까지 차올랐던 숨을 돌리며 나아갔다.
병력 구성 중 1천이나 되는 기병을 미리 보내, 적당한 곳에 주둔케 했다.
성과 불과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언덕.
2천의 보병이 당도하자 군진을 꾸리고, 사방으로 척후를 보냈다.
"보고! 주변 적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패잔병들의 모습도 없습니다."
"도망친 영민들도 없는바, 모두 성안에 고립된 모양입니다."
전투의 양상이 어찌 되었는지, 남작성이 어떻게 공략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멀리서 보아하니 성문도 멀쩡해 보이는 까닭이다.
성벽이니 뭐니 죄다 멀쩡한 게, 공성전을 치러 적에게 넘어간 성처럼 보이질 않았다.
위화감이 드는 게 있다면 오직 성에 걸린 저 깃발이다. 도끼 두 개가 X자로 교차된 휘장.
"그리핀 기사단은 성을 정찰하고 오라."
"네!"
더스트 후작은 4개의 주력 부대에 5기씩 그리핀 기사단을 배정했으니, 공평한 처사였다.
자신의 휘하에도 다섯의 그리핀 기사들이 있으니, 척후로도, 전령으로도, 유격병으로 쓰기에도 안성맞춤이라 썩 흡족한 병과다.
곧 그리핀 다섯이 날아올랐고, 성 위를 휘이 돌며 정찰하던 그들이 땅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어?"
"보, 보고! 그리핀들이 격추당했습니다."
"나도 보고 있느니라!"
양구스 자작이 역정 내며 안력을 돋웠다.
소드마스터인 양구스 자작이다.
모든 신체 능력이 범인에 비할 수준이 아닌바, 이미 그리핀이 어떻게 격추되었는지는 눈 좋은 정찰병보다 더 상세히 보였다.
'도끼?'
작게 반짝이는 게 꼭 투척 도끼처럼 보였는데.
거의 동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다섯이 격추당한 걸 보면, 적의 주력 부대 중에 투척 병과가 많은 모양이었다.
"보, 보고! 그리핀 하나가 복귀 중입니다!"
"이런 멍청한 놈! 아군이 아니다!"
양구스 자작의 호통성에 정찰병이 급히 말을 고쳤다.
"가, 가슴에 성에 내걸린 것과 같은 문양이 박혀 있습니다."
"다 보고 있으니 닥쳐라, 이놈!"
"헙, 넵."
양구스 자작이 정찰병을 노려봤다.
눈이 좋다고 눈치가 다 좋은 것은 아닌지라, 저 새끼는 입을 막든지 다른 병과로 보직 변경해야 할 성싶었다.
정찰보다는 화를 돋우는 재주가 있는 놈이다.
후우우웅.
그리핀은 순식간에 가까워졌는데, 하늘에서 웬 벌거벗은 야인 하나가 뚝 떨어져 내렸다.
후우우웅, 콰앙!
3천 병력의 한가운데 고립된 처지이건만, 바닥에 착지한 야인은 씩 웃었다.
"후후후후후!"
병신같은 웃음을 흘리는 야인을 보며 양구스 자작은 침을 꿀꺽 삼켰다.
결코 얕볼 수 없는 기세를 가진 자다.
245화 거점도시
아미르 왕국에는 다섯 개의 검이 있다.
물건을 이르는 말이 아니라,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다섯의 소드마스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중 넷은 변경을 지키는 제후고, 하나는 왕실을 지키는 검이다.
첫 번째 검이니, 이검이니, 삼검이니 하지만 그 실력 차이는 근소한바.
왕국 4검으로 칭해지는 북쪽 변방의 제후 더스트 후작은 이 명칭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오크들과의 국경선을 수년째 유지해오고 있는 북방의 사자는 지금 굉장히 화가 나 있었다.
"...각하!"
"다시 고하라."
"패, 패전하였사옵니다."
"또."
"양구스 자작이 적과 부딪혔으나 목이 잘렸고, 이후 야인이 괴이한 춤사위로 칼을 휘두르며 뱅글뱅글 도는데 아무도 막아서질 못했습니다."
"또."
"...자, 자작가의 기사 서른둘이 전사했고, 병사는 수백이 사상했습니다."
"또."
"소, 소인이 목숨을 부지한 것은 그가 살려서 보냈기 때문이옵니다."
"왜?"
세 번이나 같은 반문을 하고는, 새로운 말을 이끌어냈다. 마음에 드는 대답이 있기 전까지 같은 말로 되묻는 건 더스트 후작이 굉장히 화나있다는 증표.
말을 잘해야 한다.
북방의 사자는 결코 인자하지 않으니.
"마, 말을 전하라 했사옵니다."
"뭐라더냐?"
"그, 그만 털고 돌아갈 터이니 다시는 국경을 넘보지 말라고 하였사옵니다."
"...."
더스트 후작은 봉두난발의 전령을 내려다보았다.
양구스 자작가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기사.
"적은 몇이더냐?"
"적의 수는 파악하지 못하였고, 교전은...."
"교전은?"
"하, 한 명이옵니다."
콰직!
더스트 후작의 군화가 양구스 자작가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기사의 머리통을 터트려버렸다.
"...."
대전에 모여있던 가신들의 표정이 굳었다.
다들 부동자세에서 움직이지 않으려 애썼다.
후작께서 화가 많이 나셨다.
"장투."
"예에, 각하."
"멀리서 놈을 관찰하고 와라."
"예에. 명을 따르옵니다."
"절대 가까이 다가가지 마라. 그놈이다."
"그놈이라 하심은...."
"왕국 삼검을 부러뜨린 놈이다."
더스트 후작은 확신하고 있었다.
"알겠사옵니다."
더스트 후작가의 가장 충실한 기사 장투가 떠났고, 후작의 명령은 계속 이어졌다.
"왕실에 고하라. 왕실 기사단의 지원을 받아야겠다. 리탄이 떠나라."
"신 리탄! 명을 따릅니다."
더스트 후작의 표정은 전혀 풀어지질 않았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남쪽에 있어야 할 사냥감이 북방에 나타났다.
아미르 왕국에 있어 골칫거리나 다름없는 녀석.
"전방에서 그들을 불러들이라."
"그들이라 하심은...."
"흑검을 쓸 것이다."
"넵! 명을 따릅니다."
아미르 왕국에서 대외적으로 알려진 소드마스터 전력은 27명. 하지만 명성을 널리 떨친 자들의 수가 그러하지, 대중에 알려지지 않은 자들은 더 많다.
더욱이 왕국에서 비밀리에 키우는 전력이나, 각 가문에서 몰래 양성하는 이들까지 합하면 수는 더 늘어난다.
더스트 후작령에도 공식적으로는 소드마스터가 여섯이지만, 비공식적으로는 흑검 넷이 더 있다.
'놈을 사냥하는 데 병력의 수는 의미 없다.'
소드마스터의 싸움이다.
녀석은 제국 3검 나룬 백작을 포함해, 랑트와 글랜이라는 만만찮은 실력의 소드마스터 셋을 동시에 상대해 이겼다고 했다.
괴물 같은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는 팀을 꾸려야 한다.
'구앙 남작과 카잔 자작을 뺄 순 없다.'
나세르 남작과 양구스 자작군이 궤멸했다.
이제 후작가에 남은 정예부대는 둘뿐.
소드마스터가 지휘하는 구앙 남작군과 카잔 자작군은 지금 오크들과의 전선에 나아가 있다.
그들을 빼낼 수는 없으니....
더스트 후작 본인과, 호위기사 장투, 흑검 넷을 포함하면 6명의 소드마스터가 모인다.
'부족하다.'
확실하게 놈을 잡고 가야 한다.
왕실에서 최대한 많은 전력을 지원해주길 바랄 뿐이다.
'전력이 충분하면 흑검은 숨긴다.'
아미르 왕국은 봉건제에 기반하는 왕정.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해서는 연합하는 것이 당연하나, 내부의 경쟁에서 밀릴 수도 없는지라 비밀전력은 항상 필요하다.
부지불식간에 깊숙이 들어와 더스트 후작령의 전력 반을 갉아먹어 버린 괴물을 잡기 위한 사냥팀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
"후후후, 다섯이다."
철두는 고문과 협박 끝에, 다섯의 그리핀을 뺏어냈다.
"탕후루."
"신! 탕아후루! 대령했습니다."
"너 하나 해라."
"허어어억! 소인이 한 게 없사온데 어찌 이 귀한 걸 받겠나이까!"
"그럼 할 수 없지. 다른 녀석에게...."
"신 탕아후루! 영주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그리핀 라이더로 거듭나겠나이다!"
"...."
공손히 내밀어진 두 손을 보며 철두가 피식 웃었다.
"후후. 마법사 놈들이란."
철두는 새롭게 마법사 일곱을 더 얻었는데, 셋은 마나의 맹세를 이미 한 상태라 그냥 죽여버렸다.
망설임 없이 목을 쳐버리는 모습에 마법사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마법사는 여러모로 유용한 존재다.
잘 길들여서 써야 하는데, 따르거나 죽거나의 가혹한 양자택일을 강요하니 그들은 초장부터 기가 팍 죽어버렸다.
"다 데려가라."
"네, 주군!"
김도진은 정말 몇 년이나 철두를 따른 충직한 기사처럼 굴었는데, 김춘배가 묘하게 경쟁의식을 느끼는지 요즘 따라 좀 더 명에 충실한 모습이었다.
"영주님! 병력 충원을 마쳤습니다!"
"몇이냐?"
"마적대 517인. 언제든 출진이 가능합니다."
"후후, 훈련시켜라."
아미르 왕국 출신의 신병이 200이 넘으니, 손발을 맞추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충!"
김춘배가 우렁차게 보고하고 나섰다.
나세르 남작성의 병영에서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강철두가 남작성에 기거하고 있으니 남작성은 주인만 바뀌었을 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저기 성 밖에 포로로 줄줄이 묶여있는 2천여 명의 패잔병들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탕후루."
"신, 탕아후루! 무엇이든 명만 내려주시옵소서!"
"포로 안 사가면 얘들 어떻게 하냐?"
"그, 그치만 사 갈 겁니다."
"으음. 양구스 자작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살려둘 걸 그랬나?"
"...."
양구스 자작군을 패퇴시키고 그의 병사들을 사로잡았다. 2천 명이나 되는 포로를 죄다 신서울로 끌어간들 소용이 없다.
노예를 얻기 위한 침략이 아니었다.
노동력은 이미 신서울에도 충분하다.
자원이 없지.
아미르 왕국이 그랬던 것처럼 이들을 몸값을 몸값을 받고 팔고 싶은데, 그 결정권자인 양구스 자작을 죽여버렸으니 일이 조금 복잡해졌다.
양구스 자작의 주인이랄 수 있는 더스트 후작에게 항복한 기사 하나를 보냈는데....
"이놈 이거, 가다가 죽은 거 아니냐?"
"기사인데 그럴 리가 없습니다."
"으음. 근데 왜 답신이 없냐?"
"그, 그러게 말입니다."
철두는 고심하다가 탕아후루에게 명했다.
"네가 수습해봐라."
"네?"
"항병 부대로 받을 만큼 받아서 부하로 삼아라. 나머지만 팔지 뭐."
"헙, 알겠습니다!"
마법사이자 기사인, 마검사 탕아후루가 신이 나서 밖으로 향했다.
이미 자신의 휘하에 배속된 부하들이 많다.
나세르 남작령의 하인들이 그러했고, 항복한 병사들이 그러했다. 헌데, 이번에 양구스 자작군 중에서 쓸만한 병사들을 더 뽑으면....
'영주님은 나를 장군으로 쓰실 모양이야.'
탕아후루는 이참에 제대로 지휘력과 통솔력을 인정받겠다고 생각했다.
부리나케 동문으로 향했다.
동문 밖, 포로 2천여 명이 무장해제당해, 얇은 옷만 입은 채 포박되어 무릎 꿇려져 있었다.
곧 겨울이 다가오는 쌀쌀한 가을 날씨에 슬슬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이라 추위에 몸을 떠는 자들도 있었다.
포로들 앞에 단상이 하나 있어 탕아후루는 그곳으로 올라가 소리쳤다.
"모두 고개를 들어 나를 보라!"
"...."
포로들이 엉거주춤 올려다보자 탕아후루가 진중한 얼굴로 소리쳤다.
"나는 아미르 왕국의 마검사 탕아후루였다!"
"...."
이미 전장에서 패배해 포로가 된 패잔병들이 무어라 대꾸할까.
그저 그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탕아후루의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나를 아는 자 일어서라!"
"...."
"아미르 왕국의 시대는 저물었다."
"...."
"아이언헤드의 기세는 폭풍과 같으니, 그대들은 위태로운 배에서 내릴 기회를 받았다."
탕아후루는 한참을 강철두의 강함과 압도적인 힘, 아미르 왕국도 결국 강철두에게 패배할 것임을 집중적으로 연설했다.
"그대들도 신위를 보았기에 잘 알 것이다."
"...."
패잔병들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잘 안다.
바로 오늘 무참히 많은 병사들과 기사, 그리고 그들의 주인인 양구스 자작까지 죽어버렸으니까.
단 1인에게 말이다.
"나를 따르지 않아도 상관없다. 이는 기회이지 강요가 아니다!"
"...."
"그대들의 몸값을 지불하고 데려가라 더스트 후작에게 통보했다. 따르지 않는다 하여도 죽지는 않을 것이나, 다시는 기회 또한 없을 것이다."
"...."
"앞으로 떠오르는 태양과 같은 기세의 아이언헤드령에 몸담을 자들은 나를 따르라. 일어나 내게 오라!"
탕아후루의 연설에 병사들이 동요했다.
"시발, 난 간다."
"뭐? 미쳤어?"
"어차피 후작이 우리 살려줘 봐야 다시 오크들과의 전장에 보내질 거야. 난 평생 그렇게 살 수 없어."
"시발, 나도 따라간다."
"젠장!"
양구스 자작군은 정예병력일 수밖에 없었다.
입대하고 평생을 흉악한 오크들과의 끊임없는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에서 살아남은 자들이니까.
"시발, 가족들은? 변절자 새끼들의 가족들은 무사할 거 같아?"
"나 고아야, 병신아!"
"나도 간다! 엄마야 시발, 모시고 오면 되지."
병사들이 우후죽순 일어서자, 용기 있는 누군가가 나서서 물었다.
"양구스 자작성으로 진격하는 거요?"
"그건 왜 묻지?"
"내 가족을 데려올 수 있다면 나도 가담하겠소!"
"나도 마찬가지요!"
병사들의 요구에 탕아후루는 잠깐 당황했다.
'철수한다 했는데?'
털어먹는 건 나세르 남작성까지다.
이제 철수한다고 정해졌는데, 자신의 말을 듣고 계획을 바꿔 주실까? 아니, 어차피 지금 혼란한 틈이니 저들의 가족들만 데려오면 되지 않을까?
"좋다! 그대들의 가족 정도야 충분히 데려올 수 있노라!"
"좋소! 나도 가담하겠소!"
"나도!"
군중심리란 것은 분위기나 다름없어, 너도나도 가담하자 병력이 모조리 가담했다.
혹여 지금 합류하지 않으면, 양구스 자작령으로 진군한 뒤에 보복을 당할까 두려웠다.
탕아는 곧 부리나케 달려가 강철두 앞에 보고했다.
"보고드립니다. 포로 2천여 명. 전원 항병으로 투항 의사를 밝혔습니다."
"음?"
철두가 의외라는 눈빛으로 탕아후루를 보았다.
"전부?"
"그렇습니다."
"호오."
"하오나... 저들이 한 가지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뭐냐?"
"가족들을 데려오길 원하고 있사옵니다."
"으음, 데려오면 어디서 산다더냐?"
"예?"
철두가 턱을 쓰다듬더니 홀로그램 지도를 띄웠다.
신서울에서부터 남서로 내려가면 사막맵이고, 남동으로 내려가면 아미르 왕국이다.
거기서 각기 남하하면, 사막맵은 이제 아이언헤드령에 닿는다.
신서울
사막. 아미르왕국
아이언헤드령(N344)
철두는 아미르 왕국의 서부에 가장 큰 성을 가리켰다.
"여긴 이름이 뭐냐?"
"더, 더스트 후작령입니다."
철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길 먹자."
"허억."
점점 스케일이 커지는 전쟁에 탕아후루가 깜짝 놀랐고, 에르미스는 가자미눈을 하곤 철두를 보았다.
"쯧, 정복 안 한다지 않았나?"
"후후, 같이 어울려 사는 거지."
"허허, 참."
그저 웃고 말았다.
에르미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미르 왕국의 미래는 썩 밝지 않은 듯했다.
246화 교통망
"내 결국 이리할 줄 알았지."
"난쟁이, 왜 계속 쫑알거리나?"
"흐흐, 본색을 숨겨봐야 나한테는 다 보이네."
"무엇이?"
"결국 더스트 후작령인 이곳 N352 맵을 전부 먹을 생각 아닌가?"
"후후, 아니다."
"허, 대놓고 더스트 후작령을 친다고 하지 않았나?"
"후후, 잘 봐라."
철두는 홀로그램 맵을 띄워놓고 찬찬히 가리켰다.
"여기 D772는 사막이다."
"그게 어쨌다는 건가?"
"도로를 놓을 수 없다는 거지."
"...."
"자, 봐라."
철두가 기존의 신서울에서부터 아이언헤드까지 이어지는 길을 쭉 가리켰다.
"여기 가운데 사막이 있으니, 돌아가면 어찌 되겠나?"
"...."
철두의 손가락이 이번에는 신서울에서부터 아이언헤드까지 오른쪽으로 휙 휘어서 내려갔다.
' ) '모양으로 길을 놓게 되면 중간에 거쳐 가는 도시가 있으니....
"후후, 여기 더스트 후작성이 교통의 요지로 좋다."
"...그런 이유로?"
사막인 D772 맵의 옆에 붙은 N352 맵이다.
그중에 더스트 후작성은 사막 쪽에 붙은 서쪽에 위치해 있으니, 여길 거점으로 삼으면 딱이다.
북쪽으로 길을 내면 신서울에 닿고, 남서로 길을 내면 N344 맵으로 이어진다.
"여긴 먹어야지."
"허면, 그 경로에 있는 이 마을들은 어찌할 테냐?"
"내 알 바 아니다."
"고얀 성미군."
에르미스는 혀를 찼으나, 저 마을의 운명이야 뻔했다. 잦은 약탈에 못 이겨 떠나든지, 아예 세력을 바꿔 복속을 청하겠지.
나트롱 백작령의 남부 마을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김도진이. 김춘배 불러라."
"넵!"
철두는 곧 그들이 도착하자 바뀐 계획을 설명했다.
"김도진이, 물자 이동 천천히 해라."
"알겠습니다."
가타부타 의문 없이 곧장 명령에 복종하는 김도진이었다.
"우린 여길 친다."
"헙, 적의 본진 아닙니까?"
"맞다."
더스트 후작령인 N352 맵은 정 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이었다.
이것을 다섯 조각으로 나뉘어 가신들과 함께 다스리고 있으니....
나세르. 양구스. 카잔.
더스트직할령. 구앙.
다섯 개의 영지가 쭉 배치되어 있었다.
현재 나세르 남작령은 거의 점령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곧 이대로 남하하여 더스트 후작성을 치고 남서로 내려가면 N344 맵과 닿는다.
"알아들었나?"
"그럼 이곳의 물자를 굳이 이동할 필요는 없겠군요."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신서울, 나세르, 더스트로 이어지는 도로를 건설하고 신서울과 아이언헤드 간의 육로를 구축할 생각이다.
"전선이 길어지는데 신서울의 병력을 불러들인다 한들, 턱없이 부족합니다."
"후후, 춘배."
"네, 영주님."
"여기 남작성을 맡아줘야겠다."
"...!"
"하, 하오나."
"영지로 하사하지. 안정시켜라."
"...명을 받듭니다."
"꿇어라."
철두는 서약의 검을 꺼내 일사천리로 봉신을 진행했다.
<봉신 기사 '김춘배'를 얻었습니다.>
<봉신 기사에게 장원을 할당해 주십시오.>
"춘배."
"네, 영주님."
"이름이 뭐가 좋을까?"
"이, 이름 말입니까?"
"나세르가 아닌데 나세르 성이라 부를 수는 없지 않나? 춘배 성으로 해줄까?"
"허, 허면... 일산으로 해주십시오."
"일산?"
"제 고향입니다."
"좋다!"
왜 고양시가 아니라 일산이냐고는 굳이 묻지 않았다.
<일산 성을 봉신 기사 김춘배의 장원으로 하사합니다.>
김춘배는 신서울을 먹으며 마무리하려 했던 정착 퀘스트를 얼떨결에 마무리하고 말았다.
파팟!
"허어!"
김춘배는 눈앞에 나타난 세력창과 일산 성의 영지 정보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런 식으로 시스템의 권한 한 귀퉁이를 얻어낼 수 있다니.
"도진이."
"네, 영주님!"
"신서울에서부터 일산까지 도로랑 연락망 구축해라."
"넵!"
"나는 여기 탕후루랑 더스트 칠 테니까."
"예? 병력이 없지 않습니까?"
"후루가 2천 복속시켰다."
"하지만...."
항병이다.
그것도 같은 왕국 출신의 항병만을 데리고 전장에 나서서 제대로 통제가 될 리가 없건만....
김도진은 걱정을 입 밖으로 뱉지 않았다.
"따르겠습니다."
이제는 믿음이 있다.
전투의 승패는 강철두의 유무로 나뉘지, 병력의 질적 여하로 가려지지 않는다.
자신들의 역할은 전후 처리와 통제, 점령지의 안정화 등에 있을 터.
"후후, 전령이나 보내라. 본성에 있는 놈들이 얼마나 실력이 늘었는지 봐야겠다."
"넵! 누굴 불러들이면 되겠습니까?"
누가 가장 먼저 레벨4의 경지에 올랐을까?
가장 유력한 자라고 하면 제임스고, 그 뒤를 이어 최준섭과 오준환도 가능성이 있다.
기용수의 궁술도 어쩌면 경지에 이르렀을지도 모르고.
"제임스, 준섭이, 준환이, 정욱이 불러라."
"넵!"
별동대, 유격대, 특작대, 공격대를 불러들일 생각이다.
본성의 수비야, 영지 중앙군을 이끄는 수비대장 기용수가 있고, 전진기지에 파견 중인 친위대의 전력도 있다.
그나마 친위대장 이은영이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이리 편하게 병력을 소집할 수 있는 거다.
구정욱의 공격대도 지금쯤이면 아이언헤드 성에 도착했을 테니, 다시 출병하는 데 무리가 없을 터다.
"탕후루, 가자."
"신, 탕아후루! 어디로 따르면 되겠습니까?"
"부하들 단속하러 가야지."
철두는 본디 탕아후루에게 소규모 병력의 호위부대 정도를 꾸리게 하려 했으나, 녀석의 수완이 생각보다 좋아 너무 많은 병력을 포섭해버렸다.
제대로 지휘체계를 잡고, 쓸 만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훈련이 필요했다.
나세르 남작성의 게시판마다 새로운 포고가 붙었다.
[나세르 남작성의 이름이 오늘부터 일산으로 바뀐다. 일산 성의 영주는 김춘배이다. 이곳은 오늘부로 아이언헤드령임을 공표한다.]
[일산의 시민이 되기 싫은 자, 지금 떠나면 쫓지 않겠다. 3일의 시간을 주겠다.]
가산을 모조리 털어갈 기세로 약탈을 자행하더니, 이제는 아예 점령군으로 눌러앉아 버렸다.
주민들은 혼란스러워했고, 몇몇 행동이 빠른 자들은 남은 가산을 추려 가족들과 함께 성을 떠났다.
아이언헤드령이 되든 나세르 남작령이 되든 모시는 영주가 누군지는 상관이 없으나, 아미르 왕국군이 다시 오게 되면 전쟁터가 될 테니 전화를 피하려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농업이 근본인 이곳 세상에서 대부분의 주민들은 터전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는 걸 주저했다.
혼란한 3일이 지나고 이탈한 주민은 30% 정도.
나머지는 모두 일산의 영지민이 되었는데, 그 수가 4219명이었다.
탕아후루는 자신의 밑으로 배속되었던 나세르 남작군 출신의 병사들과 하인들을 모조리 김춘배에게 소속을 옮겨주었다.
김춘배는 일단 일산을 안정시킨 이후에, 마적대를 그대로 유지 정예화해 강철두의 부름에 응하기로 하였다.
"욕심쟁이 바바리안 놈아. 언제 내려갈 거냐?"
"후후, 난쟁이. 이틀 뒤에 갈 거다."
"왜? 훈련은 하나마나더만."
에르미스는 강철두가 병력의 훈련 때문에 뒤늦게 출발한다 생각했으나 잘못 짚었다.
"쓸 만한 놈들이지."
철두는 탕아후루를 지휘관으로 휘장을 내려주었다.
<탕부대가 창설되었습니다.>
고블린 주화야 철두에게 넘쳐나는 것이었기에 아낌없이 투자해, 지휘 병력을 늘려주었다.
탕아후루는 탕부대 2천의 지휘관이 되었다.
대부분 양구스 자작령 출신의 병력들이라, 이들의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도 양구스 자작령에 한번은 들러야 한다.
양구스 자작령은 동진해야 하고, 더스트 후작령은 남진해야 한다.
일단 양구스 자작령으로 쳐들어가 병사들의 가족들을 대거 데려와 일산에 정착시킬 생각이다.
그때부터는 이미 소속이 완전히 바뀔 뿐만 아니라, 사실상 가족들도 볼모로 잡힌 셈이니 탕부대의 지휘통제는 문제가 없다.
출정을 굳이 이틀이나 미룬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펫 시합 등록하러 가야 한다."
무한결투장에 입장 가능한 제한 시간이 모두 흘렀다.
"아! 그렇군. 그랬지."
에르미스는 강철두가 드워프 도시인 자이언트 포지에 온 이유에 대해서 새삼 떠올렸다.
그놈의 펫 대회 때문에 거기까지 왔다가 냉큼 성물을 주워가버린 녀석이다.
"어휴."
성물을 가진 녀석이니, 아미르 왕국은 문제 될 것이 없다. 그야말로 강철두의 행보는 떠오르는 태양과 같으니,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땅이 그의 아래 복속될 것인가.
"나도 오랜만에 결투장에나 가봐야겠군."
"음? 넌 시간마다 가는 게 아니냐?"
"헹, 무한결투장은 영혼의 전장이다. 얻을 수 있는 건 훈련 성과 정도인데 뭐 하러 자주 가나?"
"...?"
강철두가 깜짝 놀라 에르미스를 보았다.
"강자들과 마음껏 싸워볼 수 있는데 마다할 이유가 무엇이냐? 바보냐?"
"허, 그거야 자네 같은 바바리안의 생각이고. 우리 드워프에게 무한의 결투장은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인 곳이지."
그깟 싸움 실력으로 등수를 매긴들 무엇한단 말인가? 어차피 싸움도 장비빨이다.
실력의 상승은 그 한계가 있고, 한계에 가까워질수록 차이가 미미하다.
그에 반해 장비는 재료에 따라, 장인의 실력에 따라 한없이 좋아질 수 있으니.
결국 궁극의 강함은 장비빨이니라.
"그게 바로 우리 드워프 정신이지!"
"병신같은 정신이군."
"이익! 너 이 새끼. 드워프족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발언을 하는 거냐."
"후후후."
"...!"
그저 웃는 강철두의 얼굴을 보며 에르미스가 뜨끔했다. 이 순진무구한 얼굴의 바바리안은 농담과 장난을 숨 쉬듯이 하지만, 그만큼 용감무쌍한 놈이라 드워프 왕국이 적이라 해도 딱히 꺼릴 것 같지가 않았다.
"적까진 아니지만, 우리 드워프들이 학을 뗄 말이다!"
"후후, 열 내지 마라, 난쟁이."
"이익! 그 난쟁이 소리도 딱 주먹 맞기 좋은 소리다."
난쟁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같은 난쟁이인 드워프끼리뿐이다.
"후후후."
"큼, 아무튼 일정은 알겠네."
철두와 에르미스는 일산 성의 별실로 거처를 옮겼다. 이제 영주성은 이제 일산 성주가 된 김춘배의 것이니 마땅히 그의 것이다.
하루가 지났고, 쿨타임이 끝나자마자 철두는 무한결투장으로 향했다.
"이따 보자고."
"다녀와라. 야만인."
"알겠다. 난쟁이."
파팟.
강철두는 오랜만에 무한결투장에서 눈을 떴다.
"엇? 영주님."
"음? 은영."
같은 타임에 진입했는지 이은영과 마주했다.
"영지는 별일 없나?"
"별일 없죠. 아! 공격대랑 연구원들 도착했어요."
"후후, 잘됐군."
"영주님은 왜 이렇게 안 내려오세요? 구 대장 말로는 아미르 왕국 국경지 정리 좀 하고 내려온다던데."
"아! 도시 몇 개를 먹기로 했다."
"예?"
"후후, 마침 잘됐군. 아직 전령이 도착하지 않은 모양인데."
철두는 이은영에게 전령에게 전했던 것과 똑같은 이야기를 전달했다.
"...알겠어요."
작전계획은 군에서는 기밀로 다루는 내용인지라, 이은영은 누가 들을세라 조심했다.
"잘됐군. 그리핀 가져가라. 남는 자리 있나?"
"네? 펫 자리야 하나 있긴 하죠."
펫 주머니 레시피야 이제 공공재나 다름없어, 탈것 1개와 펫 1개 인벤토리는 아이언헤드령의 병력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다.
"머신에서 펫 주머니 하나 더 사라."
"네."
이은영은 소울 상점 자판기에서 펫 주머니(2)를 구입했다. 철두는 그녀에게 그리핀 2마리를 넘겨주었다.
"전령으로 써라."
"아, 네.... 어디 가세요?"
"결투장에 왔으면 싸우러 가야지."
철두는 곧장 펫 시합 등록을 마치고 무한결투장으로 향했다.
무한결투장에 접속 중인 근처 랭커들을 지목해 결투를 벌이며 순위를 올리는데,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아르엘라]
"오!"
랜덤매치 때 지고 나서 처음이다.
그때에 비해 얼마나 강해졌는지 확인이나 해볼까?
"후후후."
곧 매치가 성사되었고, 결투장에서 두 사람이 마주했다.
요정 아르엘라는 강철두를 보자마자 소리쳤다.
"야이 미친놈아! 온다고 해놓고 왜 안와!"
"후후, 기다렸나?"
"기, 기다리긴 누가 기다려?"
"그럼 문제없다."
"이런 미친놈이!"
아르엘라는 언제나 그렇듯 당황한 심정을 욕으로 풀어냈다.
"개새끼야! 약속을 했으니 지키란 소리잖아!"
약속을 하긴 했다.
그녀의 영지에 찾아오라고 좌표석도 받았고.
하지만 철두도 할 말은 있었다.
"후후, 바빴다."
"...하아. 시발, 일단 좀 맞자."
아르엘라는 즉시 대시해왔고, 전에 비해 훤히 보이는 그 움직임에 철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무래도 오늘 맞을 사람은 이쪽이 아닌 것 같았다.
247화 아버지
슈아아악! 뻐억!
달려와 휘두른 주먹이 철두의 손아귀에 잡혔다.
곧장 반대 손을 내질렀지만.
퍼억!
"후후후."
아르엘라의 양 주먹을 움켜쥔 철두가 씩 웃었다.
적잖이 당황한 아르엘라가 눈알을 부라렸으나.
"...놔라."
"후후후."
"으읍!"
철두가 대뜸 힘을 주자 아르엘라는 두 주먹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장난이 아니다.
이대로 두면 정말 주먹이 부서진다.
"이이익!"
아르엘라는 주먹이 잡힌 그대로 두 발을 차올려 구부렸다가 철두의 가슴팍을 향해 내질렀다.
콰직!
"간지럽군!"
"뭐? 시발!"
아르엘라는 적잖이 당황했다.
이 새끼, 갑자기 왜 이렇게 단단해졌지?
"선조의 혼이여!"
파팟!
아르엘라의 부름에 그녀의 상반신 문신이 번쩍하더니 선조의 혼령이 튀어나와....
<선조의 강림>
철두의 뒤에 사람의 형상으로 헌신했다.
붉은 귀기가 어린 모습이 사람이 아니라 유령 몬스터 같은 모습이었다. 손에는 도끼를 들고 있었는데, 혼령은 그것을 대뜸 철두의 등을 향해 휘둘렀다.
후우우웅!
유령처럼 생겼다곤 하나 강림하며 물리력을 얻었으니, 철두는 무시하지 못하고 바닥을 굴러 피해냈다.
쿠당탕!
철두의 손에 잡혀있던 아르엘라도 함께 굴렀는데, 마지막 순간 철두가 온 힘을 다해 손아귀에 힘을 주자.
꾸드득!
"끄아아아!"
"후후."
철두는 너덜거리는 손아귀를 놓고는, 선조의 두 번째 공격을 피해냈다.
퍼어억!
철두가 굴러 빠져나온 자리에 붉은 도끼가 깊숙이 박혔다.
"후후, 역시 아버지군."
[....]
선조의 혼령이 철두를 노려보았다.
귀기 서린 그 눈빛은 충분히 위협적이었으나, 철두의 눈에는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찬찬히 살펴본다.
수백, 수천 번 꾸었던 꿈속의 아버지 모습 그대로다.
탄탄한 몸에, 저 익숙한 도끼 하며, 봉두난발의 머리까지.
너무 많이 꾸어 하나하나가 심장에 박혀버릴 듯 생생한 그날.
부족의 전사들을 향해 달려가던 아버지를 말리고 싶었던 작은 바바리안 에이든은 이렇게 훌쩍 자라서 아버지보다 더 큰 전사가 되었습니다.
'지금이라면 함께할 수 있을 텐데.'
너무나 미련이 남아 심상 공간으로 남아버린 메마른 언덕.
그 전장에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부족의 전사들에게 달려갔던 아버지의 옆에 설 텐데.
지금이라면....
"뭐해? 죽여버려!"
손가락뼈가 모조리 부러져버려 너덜너덜해진 아르엘라가 소리쳤고, 선조의 혼이 움직였다.
철두도 인벤토리에서 도끼를 꺼냈다.
아버지와 어울리고 싶었다.
쇄애애액, 쾅! 쾅!
"후후후."
[....]
도끼와 도끼가 서로를 노리며 치열하게 싸웠으나,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철두도 웃고 붉은 선조의 혼도 웃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의지가 전해지고 뜻이 명확하니.
후우우웅, 쾅!
많이 컸구나, 아들.
쇄애액 퍼억!
강해지고 또 강해졌습니다. 아버지.
슈우우우 카캉! 깡!
이렇게 휘둘러라.
후우우웅 퍽!
이렇게요?
후웅 쾅 꾸직!
잘하는구나.
새애애애액!
어느새 두 사람의 도끼는 그 움직임이 비슷해지고 있었다.
낑낑거리며 포션 마개를 입으로 떼어내 손에 붓던 아르엘라는 그 모습을 보며 인상을 썼다.
"시발, 뭐 하자는 거야."
저게 어딜 봐서 생사결인가?
지도 대련이지.
"지랄들을 한다."
푸시시시시!
겨우 뼈가 붙어 움직일 만한 손으로 포션 한 병을 더 꺼내 마셨고, 회복이 되자 도끼를 빼내 들었다.
"아이고, 아주 부자 사이에 꼴값을 떨어요."
아르엘라는 도끼를 들고 철두에게 쇄도했다.
후우웅, 쾅! 퍼억!
"부자의 전투에 끼어들지 마라!"
"윽!"
회심의 공격은 철두에게 너무 쉽게 막혔다. 이어진 발차기에 저만치 날아간 아르엘라는 충격을 받았다.
"시발새끼, 존나 쎄졌네...."
대체 무슨 짓을 하면 단기간에 저리 달라질 수 있을까?
그 사이 선조의 혼과 강철두의 대결은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었다.
"지랄도 지랄도...."
훈훈한 지도 대련을 보며 아르엘라는 더 끼어들지 않고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아주 시발, 부자 상봉에 눈물이 난다."
괜히 이죽거리고는 포션 한 병을 더 꺼내 마셨다.
이 무한결투장이란 것은 신기하기 짝이 없다.
죽음도 무효로 돌리는 주제에, 여기서 사용한 아이템은 실제로 없어진다. 부러진 장비도 복구되지 않으니....
원상복구되는 건 전투 중 죽은 육신뿐이다.
"...시벌."
부자간의 훈훈한 대련을 보니 절로 욕이 나온다.
나는 저런 감정 모르니까.
태어날 때부터 공주였으되, 한 번도 부모님을 뵌 적이 없으니까.
"어쭈? 허어, 저걸 저렇게."
처음엔 질투였고, 다음엔 그저 스승님도 아들을 오랜만에 봤으니 실컷 보란 심정이었고, 마지막엔 대련에 철저히 몰입했다.
"와, 저렇게도 쓰는구나. 오 저걸!"
숙련된 도끼 장인 둘이서 주고받는 공방은 치열하며 박진감이 있었다.
본디 도끼는 그 무게에 따른 파괴가 장점이나, 그 무게가 단점이 되어 일격필살의 공격이 실패하면 뒤가 없는 무기다.
두 전사는 그 도끼를 아주 능숙하게 다루면서, 압도적인 힘으로 도끼에 휘둘리지 않고, 저 스스로 도끼를 휘두르니....
"...좋겠다."
저들에 비해 연약한 요정의 몸으로는 감히 흉내 낼 수도, 온전히 체화할 수도 없는 기술이었다.
파파팟.
고혼이 된 바바리안의 숙련된 도끼술은 그 아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아르엘라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강철두는 지금 무아지경으로 도끼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에게 스승이 있었던가?
있었다.
복싱 관장인 박봉팔이 그러했고, 수영 선생님도 그러했다. 검도 관장님도 있었고, 태권도 사범님도 있었다....
성장기 때 만난 수없이 많은 선생님들을 거쳐, 노바의 세상에 던져졌을 땐 더 이상 스승이 없....
있었다.
처음 만난 고블린이 그러했고, 오우거가 그러했다. 오크들도 있었고, 죽은 하프 리치 라이언 백작이 그러했다.
가르쳐 줄 사람이 없으니 언제나 적에게서 배웠다.
싸우며 깨쳤으며, 훔쳐서 배웠다.
적도 스승으로 둘 정도로 배움에 목말라 있던 바바리안에게, 처음으로 진정한 스승이 지도해주고 있었다.
"아아!"
이렇게 하는 거구나.
<도끼의 이해도가 명인의 반열에 오릅니다.>
<도끼 숙련의 단계가 상승합니다.>
되었다.
그토록 바라던 4레벨의 무기 숙련.
검에 이어 도끼가 그 경지를 밟았다.
"감사.... 아버지!"
철두는 점차 흐려지며 사라지는 선조의 혼에 깜짝 놀라 소리 질렀다.
홱 하고 돌아간 고개가 아르엘라에게로 향하니.
"마, 마력 다됐어."
"...."
철두의 화난 얼굴에 주춤거리며 답한 아르엘라는 새삼 왜 자신이 이리 쫄아 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시발, 뭐? 왜?"
"...."
"방해 안 하고 기다려줬잖아!"
"고맙다."
"응?"
감사 인사를 받을 줄은 몰랐던지라 아르엘라는 다시 당황했다.
"그러니 깔끔하게 보내주마."
"어?"
철두가 도끼를 들었다.
파팟.
신체가 재구성하며 새롭게 생긴 마력 기관 단전은 마력을 기로 바꾸어 도끼로 흘려보냈다.
<도끼에 기가 흐릅니다.>
<도끼 숙련의 경지가 레벨 5에 이릅니다.>
레벨 4까지가 어렵지, 그 뒤는 일사천리다.
"엇!"
아르엘라가 깜짝 놀라는 사이 철두는 허연 기운이 서린 도끼를 내리찍었다.
그야말로 일격필살의 공격.
"이익!"
아르엘라가 반사적으로 도끼를 마주 내질렀으나.
홰애액, 스컥!
철두의 도끼는 아르엘라의 도끼를 반으로 갈라버리곤 힘이 남았는지 그대로 진격해 아르엘라마저 쪼개버렸다.
파팟.
<승리!>
<900의 소울 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랭킹 갱신! 브론즈 587등>
"후우."
승리의 고양감보다 아버지와 헤어진 아쉬움이 더욱 크다.
철두는 길게 심호흡했다.
당장 아버지를 찾으러 가고 싶다.
정령들에겐 미안하지만, 정령들과 선조의 혼을 바꿀 수 있다면 당장에라도 그렇게 하고 싶다.
하지만....
"후, 부족의 일만 마무리하면 가겠습니다."
아들이 아닌, 바바리안 전사가 아닌, 아이언헤드의 부족장으로서 책무가 막중하기에.
개인의 일은 또다시 뒤로 미뤄두었다.
진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무한결투장을 빠져나왔다. 오늘은 더 싸우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파팟.
차원문을 연 전령의 입을 통해 튀어나온 강철두는, 언젠가부터 친구 김진태를 대신해 항상 자신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난쟁이를 보았다.
"난쟁이."
"이익! 네놈은 어떻게 입만 열면 상습 혐오냐."
"난쟁이를 난쟁이라 부르는 게 어떻게 혐오냐?"
"내가 듣기 싫으니 그게 혐오다!"
"한잔할 테냐?"
"허, 언제는 안 한 적이 있었나?"
아, 매일 마셨구나.
"역시 난쟁이는 공감력이 없군."
"...."
에르미스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으나, 마음을 다스리려 애썼다.
'이 미친놈을 정상적으로 대하는 게 우스운 일이다.'
입만 열면 장난질만 쳐대는 이 바바리안에게는 맞장구쳐주는 게 지는 거다.
"아버지를 만나고 왔다."
"음? 자네 아버지도 히어로신가?"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
그런데 어떻게 만나?
"아, 미니언이 되셨나? 고생이긴 하지만 부활하실 수는 있는 것 아닌가?"
철두가 고개를 저었다.
"내 고향 발할라에서 돌아가셨다."
"...!"
노바에서 죽어야 무한결투장으로 끌려가 미니언이라도 되지.
지구나 발할라나, 옛 고향 행성에서 죽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근데 어떻게 만나?'
에르미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조상소환술이라도 썼나?"
"그게 뭐냐?"
"...!"
흠칫 놀란 에르미스가 헛기침했다.
"흠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비네."
"고맙군."
이놈 바바리안. 이거 진지하군.
"술상을 봐오지."
"후후,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에르미스는 밖에 대기하고 있는 하인에게 일렀고, 곧 상이 차려졌다.
철두는 노쓰우드 41년산을 꺼내 잔을 나누었다.
"바바리안 타투는 선조의 혼을 받는 의식이다."
"음? 그런가? 난 그냥 포악해 보이려고 하는 줄 알았네."
"...내 아버지의 혼을 가진 녀석과 싸우고 왔다."
"...."
에르미스는 이 복잡한 고인 관계에 뭐라 해줄 위로나 조언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게는 선조의 혼이 없지. 전장에서 죽은 동료의 혼이 잠깐씩 머물다 갈 뿐이다."
"어?"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에르미스는 주먹을 탁 쳤다.
"그래서 그랬군! 자네가 부하들 훈련에 너무 열심이다 싶어 의아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던가?"
"후후, 죽은 놈들을 보면 기분이 좋지 못하다."
"...이거 스트레스가 심하겠군."
죽은 부하들이 영혼이 되어 찾아온다?
끔찍한 일이다.
"자네 괜찮은가?"
에르미스가 머리를 툭툭 쳤다.
정신에 타격이 없는가 하는 물음이다.
"후후후. 문제없다."
철두가 웃으며 대꾸했다.
무덤덤해질 수는 없으나....
그저 익숙해지려 할 뿐이다.
그럼에도 동료가 죽는 것은 슬픈 일이라, 최대한 그들을 굴려 정예로 만들어 낼 뿐이다.
"전쟁이 끝나면 아버지를 찾으러 갈 테다."
에르미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끝난다면 말일세...."
어디든 못 가겠는가.
248화 정답을
아이리스 후작령.
기사단장실.
파팟!
아르엘라는 무한결투장에서 나오자마자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단장님."
"히익!"
충실한 기사단원 에그니스가 다가왔으나, 아르엘라는 화들짝 놀라 손을 치워냈다.
"접니다."
"후우, 후우! 에그니스!"
"졌습니까?"
"졌지."
"...심하게 졌습니까?"
"후우."
길게 숨을 뱉은 아르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한결투장의 랭킹 시스템이 그렇다.
자신보다 상위 순위에 있는 랭커를 지목해 싸울 수 있기에, 끊임없이 랭킹을 올리다 보면 결국 자신보다 강력한 상대를 마주하게 된다.
무한결투장에서의 패배는 거의 죽음으로 끝나니,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도 아르엘라는 매번 이렇게 힘겨워한다.
헌데 오늘은 유독 힘들어하니....
"시발, 한 방에 죽었어."
"...브론즈 아닙니까?"
"맞아."
"같은 브론즈끼리 그 정도로 차이가 났습니까?"
"존나 세졌더라고."
"...."
본디 그 실력의 상승은 낮을수록 더 큰 법이다.
에그니스가 그러려니 하는데, 아르엘라는 충격을 털어버리고 싶은지 말을 이었다.
"강철두야."
"...그렇게 강해졌습니까?"
"후, 시발. 약이라도 처먹었는지.... 아니, 먹었더라."
분명 검기였다.
아니, 도기라고 해야 하나? 부기?
뭐가 됐든 그것은 신체 재구성을 이루고 단전을 얻어야 이룰 수 있는 기술.
"너보다 셀지도 몰라."
"...그렇습니까."
에그니스의 얼굴이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아르엘라는 늘 포커페이스인 그의 표정 변화를 보자 꽤 기분이 나아졌다.
"맞네. 더 세겠네."
"그럴 리가요."
"아니야. 내가 볼 때 그 새끼가 더 쎄."
"잊으신 모양인데 저는 골드 티어입니다."
"그놈의 골드부심."
"...."
"후훗."
"저는 이만 퇴근하죠."
당했다고 생각한 에그니스가 밖으로 나서려는데 아르엘라가 급히 명했다.
"가자."
"어딜 말입니까?"
"그 새끼 찾으러."
"...오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시발, 답답한 년이 가야지."
"험한 말은 존귀함에 상처를 남깁니다."
"뭐, 시발. 어쩌라고. 따라와. 가자."
"...."
아르엘라가 쪽지를 남겨두곤 기사단장실을 나섰다. 언제나 그렇듯 기사단원이자 공주님의 호위 기사인 에그니스가 그 뒤를 따랐다.
*
"진군! 진군하라!"
2천 병력을 지휘하게 된 탕아후루는 신이 났다.
위엄있어 보이려는 굳은 얼굴과 근엄함을 흉내 내기 위한 저음의 목소리로 시종일관 소리쳤다.
"탕아."
"예! 영주님!"
"조용히 가자."
"헙, 알겠습니다!"
그래도 2천 병력의 탕아대 대장의 위신이 있기에 탕아후루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으나, 소통에 문제가 조금 생겼다.
"전원! 전술 행군한다! 은밀함을 유지하라!"
"전원 전술 행군!"
명령은 보병들에게만 이뤄진 것이 아니다.
"기병 전원 하마! 말굽에 천을 감고 평보로 행군한다!"
철두는 의욕 과다의 초짜 지휘관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탕아후루는 이리저리 명령해놓고 철두에게 와 보고했다.
"신 탕아후루! 질문이 있습니다. 기도비닉도 진행하옵니까?"
"...그냥 가자."
"예! 전술 행군에만 초점을 두겠사옵니다."
지금 향하고 있는 양구스 자작령까지는 아직 한나절은 더 남았다.
지금 전술 행군해 봐야... 아니, 애초에 은밀함을 요구하는 전술 행군 자체가 필요가 없다.
'이것도 훈련은 훈련이니.'
철두는 소통의 오류를 바로잡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양구스 자작성은 빈 성이나 다름없다.
거길 함락하는 것 자체가 실전보다는 훈련의 성격이 더 짙다.
본디 그곳 출신인 탕아대원들의 진정한 충성을 받기 위해 그들의 가족들을 데리러 가는 길.
조용한 행군 끝에 저녁 무렵 양구스 자작성에 닿았고, 철두는 괜히 저녁 보급에 시간을 끌지 않았다.
"저녁은 성에서 먹는다."
"충! 전원 진격하라!"
탕아후루의 명령에 탕아대 2천이 성을 향해 질주했다. 성벽 위에 모습을 보인 병력은 어림잡아 300명 수준.
치열한 공성으로 이어지면 제법 희생을 감수해야 하나, 본디 동료였던 그들이다. 탕아대로 전향한 병사들이 설득을 하든, 성의 취약점을 찾든 알아서 공략에 성공해낼 테다.
그럼에도 희생은 불가피하니.
에르미스가 걱정되어 물었다.
"자네가 나서지 않아도 괜찮은가?"
"음? 내가 왜?"
"부하들이 여기서 죽으면 망령이 되어 자네를 또 찾아와 괴롭힐 게 아닌가?"
"후후."
철두는 히죽 웃었다.
"굳은살이 두려워 훈련하지 않은 전사는 없다."
"허어...."
에르미스는 순순히 감탄했다.
맞는 말이다.
손발이 까지는 게 두려워 검을 들지 않는 자가 어찌 전사가 될까?
부하들의 전사가 두려워 훈련만 시키고 실전을 내보내지 않으면 군대가 아니다.
그 부하들의 죽은 혼령과 마주해야 하는 강철두의 멘탈이 걱정되었지만, 묵묵히 감내하는 그의 모습에서 작은 존경마저 들었다.
'왕의 자질은 타고 나는가.'
에르미스가 속으로 철두를 인정하는 그때, 철두가 나섰다.
"후후, 성문은 뚫어줘야겠군."
"흐음. 항전이 거세군."
에르미스가 그제야 전장을 살펴보니 수성중인 병사들이 결사 항전하고 있었다.
철두는 직접 나서는 대신, 펫을 소환했다.
"가라! 새곰!"
"부오오오오!"
아울베어 새곰은 쿵쿵 달리다가 어느 순간 훌쩍 뛰었는데, 반쯤 날개와 다름없는 앞발을 활짝 펼쳐 꽤 먼 거리를 활공해 성벽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크아아아!"
"부오오오!"
포효와 비명이 난무하는 것도 잠시, 성문이 비스듬히 부서지며 열렸다.
"와아아아!"
"진격하라!"
병사들이 물밀 듯이 성문으로 들이닥쳐 성벽 위를 쓸어버리니 금세 전장이 정리되었다.
양구스 자작이 기거하는 작은 내성도 작은 저항을 쓸어버리곤 점거했는데, 이미 자작의 가족들은 이미 도망치고 난 후였다.
"별 볼 일이 없군."
"신 탕아후루! 도시의 약탈을 허해주십시오! 적어도 전직의 돌은 가져가야 하나이다!"
"좋다. 도시 시설물은 모조리 챙기고, 민간 보급은 적당히 하라."
"추우웅! 명을 받듭니다."
탕아후루가 나서서 병력들을 통솔하니, 곧 도시의 시설물들을 모조리 해체했다.
지금은 일산 성이 되어버린 나세르 남작성의 도시 시설물이 벌써 신서울로 옮겨진 터라, 여기 것을 가져가야 했다.
무한의 샘물이 없는 것이 아쉽지만, 아미르 왕국에 도시는 아직 여럿이고, 아무 데서나 뺏으면 될 일이다.
탕아후루도 이제는 아이언헤드식 사고방식에 젖어 든 상태다.
"휑하군."
"쯧쯧, 죄다 내뺐는데 병사들이 그리 싸운 게 의아하군."
양구스 자작성에는 귀족이 남아있질 않았다.
남은 기사와 병사들이 결사 항전한 것이 의아할 따름이다.
텅 빈 성에는 도망치지 못한 허드렛일 하던 하인들만 남았는데, 그들에게 일러 저녁 식사를 준비하게 했다.
식사를 하는 와중에 탕아후루가 중간 보고를 위해 다가왔다.
"인원 점검 후, 민간 보급 진행 중입니다. 사망 서른하나, 부상자 전원 포션 치료했습니다."
"포로는?"
"219명의 포로를 잡아들였습니다."
"그놈들, 왜 열심이었다더냐?"
"그들의 가족이 모조리 기사들과 병사들에게 끌려갔습니다."
"으음."
알 만했다.
가족들이 인질로 잡혀갔으니, 어쩔 수 없이 그리 용을 쓰며 싸웠겠지.
"개중에 선임병을 몇 데려와라."
"넵!"
탕아후루가 밖으로 나가 명령하니 곧 상체가 꽁꽁 묶인 포로 다섯이 끌려왔다.
모두 하급 기사.
지구의 노비스 구분으로 치면 랭커급이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무릎 꿇고 바닥을 볼 뿐이었다.
"양구스 자작의 식솔은 어디로 향했느냐?"
"...동으로 갔으니 카잔 자작령으로 향했을 거요."
"...."
철두는 가만히 그 기사를 보다가 물었다.
"모든 병사들의 가족이 포로로 끌려갔나?"
"...아니오. 여기 경들의 가족들과 간부급의 고참 병사들의 가족들만 끌려갔소."
본디 하급 병사들이야 상급 지휘자가 독하게 마음먹고 몰아붙이면 따르게 되어 있다.
사백 명이나 되는 병사들의 가족 모두를 끌고 가는 게 오히려 더 일이다.
"내가 그놈들을 해치우고, 가족들을 구해오면 너희는 무엇을 하겠느냐?"
"...!"
철두의 물음에 다섯 명의 포로가 동시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초점 없이 죽어있던 그들의 눈에 희망이 차올랐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눈에 습기가 차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만 해주신다면! 무엇이든 따르겠습니다!"
"개가 되어 짖으라면 짖고, 죽으라면 죽겠으니 제발 가족들만 구해주십시오!"
생기와 절박함이 가득한 그들의 청에 철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길잡이 한 놈 나서라."
"제가 나서겠습니다!"
벌떡 일어선 포로를 보며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허리춤의 롱소드를 뽑아냈다.
파팟.
검을 휘두르는 것이 보이지도 않았는데 줄이 잘려 떨어지자 그들은 깜짝 놀랐다. 곧 뒤늦게 일어선 네 명의 기사들도 모두 포박에서 풀려났다.
"다녀오지. 너희는 병력을 수습해라."
"넵!"
"에르미스."
"다녀오게."
"오! 웬일로 빠지는가?"
"금방 올 게 아닌가?"
"후후, 금방 다녀오지."
*
다그닥 다그닥!
"이랴! 이랴!"
아홉 대의 마차가 미친 듯이 질주했다.
호위하는 기병은 전부 열셋.
그중 기사는 다시 셋이요, 일행을 이끄는 자는 선임 기사 도르헴이었다.
열 명의 기병도 가려 뽑은 정예들이라 거의 기사 전력이라 봐도 무방했다.
"꺄아아아!"
"조금만 천천히 가줄 수는 없나요?"
마차의 창문이 열리며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렸으나 도르헴은 따를 수가 없었다.
"자작부인! 적에게는 그리핀 기사가 있어 아직 안심할 때가 아닙니다."
"그, 후우. 알겠어요."
선두의 마차 두 대는 자작부인과 그 가족들이, 그 뒤의 짐마차 셋에는 재물들 실려있다.
나머지 마차 다섯 대엔 도망치는 기사의 가족들과 성에 남아 결사 항전할 기사와 분대장들의 가족이 실려있다.
"이랴! 이랴! 서둘러라!"
"하앗!"
선임 기사 토르헴과 두 기사의 얼굴은 잔뜩 굳어 무거웠는데, 연신 힐끔거리며 후방을 살피는 것이 많이 초조한듯했다.
그들의 뒤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뒤따른 또 다른 무리가 있었는데, 양구스 자작성의 눈치 빠른 귀족과 상인들의 피난 마차였다.
추격자가 있다면 저들에게 발목이 붙잡히길 기도하며 토르헴은 카잔 자작령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엇! 토르헴 경! 전방에 사람입니다!"
"뭣?"
토르헴이 전방을 살피니 숲으로 향하는 길 중간에 사람 둘이 떡하니 서 있었다.
안력을 돋워보니 그중 덩치 큰 한 놈은 헤실헤실 웃고 있었는데, 웃옷을 벗고 젖꼭지만 겨우 가린 띠를 교차해 매고 있었다.
"미친놈이군. 그래도 밀어...."
토르헴은 덩치 큰 광인 옆의 사내를 보곤 깜짝 놀랐다.
"체르히?"
성에 남아 결사 항전해야 할, 양구스 자작 가문의 기사가 왜 이곳에?
토르헴은 '어떻게'라는 의문을 떠올리는 것 따위의 멍청한 선택 대신, 빠르게 대응했다.
"활을 쏴라!"
휘이이익. 터억!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뭔가 희끗한 게 옆을 지나친다고 느낀 순간, 뒤에서 좋지 못한 소음이 들렸다.
"끄억!"
비명과 함께 옆으로 기우는 휘하 기사의 머리통에 투척도끼 자루가 박혀있다.
"...!"
오싹한 기분에 얼른 다시 고개를 전방으로 돌리니, 이미 도끼가 눈앞까지 와 있었다.
퍼억!
기사 셋이 모로 쓰러지며 빛으로 변해 사라져 버렸으나, 투척 도끼는 연이어 날아와.
퍼퍼퍽!
앞서 달리던 말 한 마리의 두개골에 도끼가 박혀 허물어지며 마차가 전복되었다.
쿠아아앙!
"꺄아아아!"
앞선 마차가 넘어지자 연쇄 추돌이 일어났다.
뒤따르던 마차 몇이 겨우 방향을 틀어 전복을 피했으나, 미친 듯이 달리던 행렬은 이미 멈춘 뒤였다.
"허억!"
새로 얻은 부하 녀석이 입을 쩍 벌리고 있자 철두는 웃었다.
"후후, 문제 있나?"
"...없습니다."
"가족들 챙기러 가야지."
"...넵."
철두는 가족들 생각에 다시 잔뜩 화가 난 새 부하와 함께 교통사고의 현장으로 향했다.
구조자를 선별할 차례다.
249화 알려줘
아이언헤드 성의 신전은 본래 작은 공간이었다.
작은 기도원과 사제가 거주하는 사택 하나.
그리고 텃밭으로 쓰이는 공간이 조금.
하지만, 아리아 교단이 날로 번성하니 주변 땅들이 신전으로 불허되어 이제는 사원이라고 불릴 정도로 커졌다.
몰라볼 정도로 커진 교단의 사원에서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기도원은 대사제 강용철의 공간이다.
강용철은 하루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다.
외부 활동이라고 해봐야 농업연구소에 가거나, 거동이 불편한 환자를 구호하러 가는 것 정도다.
'우리 철두 무탈하게 돌아올 수 있게 해주이소.'
언제나처럼 손자의 안녕과 건강, 무사 귀환만을 기도하는 할아버지였다.
그리고 기도하는 시간만큼이나 공들이는 것은 텃밭을 직접 일구며 농사를 짓는 일이었다.
여신의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그 두 가지를 매일 해야 한다.
기도하고, 농사짓고.
무료하지만 성실한 그 단조로운 생활에 오늘은 조금 특별함이 추가되었다.
강용철은 마치 고해성사를 들어주는 신부처럼, 또 다른 손자의 넋두리를 들어주고 있었다.
"아니, 할아버지. 이게 맞는 거예요? 예?"
"허허."
"연구원 데리러 가놓고는, 그 사람들 죄다 도착한 게 언젠데, 자기는 쏙 빠져서 혼자 저기 쳐들어갔대요."
"그러게 말이다. 무사히 돌아와야 할 긴데."
"철두야 무사하겠죠. 그쪽 왕국이 안 무사하지."
한숨을 내쉰 김진태는 걱정을 내비쳤다.
"아니, 대뜸 점령이라뇨. 그냥 약탈만 하고 돌아오는 줄 알았는데.... 어휴, 성이 갑자기 이렇게 늘어나 버리면 이거 어떻게 감당합니까?"
김진태의 걱정은 별다른 게 아니었다.
내실을 다지지 못했는데 외형만 커지고 있다.
가진 영토도 이미 충분히 넓다.
보유한 영토의 개발도 다 되지 않아 넓은데, 굳이 땅을 늘려 영지 방위에 대한 부담감만 늘어나는 꼴이다.
"신서울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갑자기 왕국 점령전이라뇨. 하아...."
인력이 없다.
인력이....
무턱대고 아무에게나 성을 맡길 수 있느냐?
없다.
배신과 반란, 독립을 배제할 수 없는 세상이다.
'능력'이 있고, '믿을 만'한 '내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강철두 김진태에게는 턱없이 모자란 게 인적 자원이다.
"막말로 철두 없어 봐요? 지금 있는 애들도 통제 못 해요."
중국인들은 벌써 차이나타운을 만들어냈을 것이고, 다른 국적의 이들도 그들끼리 똘똘 뭉쳤을 것이다.
지금의 아이언헤드성은 모든 통제가 강철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형국이라, 철두가 무너지면 모든 게 무너진다.
"이대로 철두 사라지면 아이언헤드는 한 달도 못 버틸걸요? 바로 사분오열 내분이에요."
"그렇구나."
"더군다나 이제 영토도 더 넓어지고, 지배력은 더 약해질 텐데. 아오, 이거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가늠도 안 돼요."
"그렇구나. 우리 진태가 걱정이 많구나."
"아니, 할아버지. 좀 진지하게 들어줘요."
"허허허."
강용철.
한때 조폭이었던 전직 노숙자!
인생 단맛 쓴맛 다 본 아리아의 대사제는 김진태의 상태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쫄았느냐?"
"예?"
"뭐가 그리 걱정이더냐?"
"아니, 그야. 지방 도시들 생겨나다 보면 그들이 말을 제대로 안 들을...."
"진태야."
"네?"
"넌 할 수 있다."
"...."
김진태는 말문이 막혔다.
"...못하면요."
"해내야지."
"...."
김진태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김진태가 한숨을 쉬었다.
"하아, 역시... 제가 해야겠죠?"
"철두가 너 하나 믿고 있지 않더냐?"
"...."
그게 부담이다.
철두는 창이며, 방패다.
그러나 관리는 오로지 친구 김진태에게 일임하니, 진태는 지금 그것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지금의 제도로는 넓은 지역을 다스리지 못해요. 할아버지 말이 맞아요. 제가 이 제도를 정비해야죠."
"역시 내 손자다."
강용철은 김진태를 흐뭇하게 보았다.
김진태는 강용철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후, 답을 찾은 기분이네요."
"벌써?"
"네. 아니, 머뭇거리던 결정을 내렸어요."
피라미드를 쌓아야 한다.
강철두 하나를 두고 문어발처럼 이어진 이 지배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개국밖에 없어요."
"음?"
강용철이 깜짝 놀랐다.
"후, 이제 후련하네요. 민주주의 후퇴니, 계급제의 부활이니. 욕먹을 걱정부터 한 제가 한심하네요. 까짓것 욕은 제가 다 먹죠, 뭐. 암요!"
"어어?"
그냥 행정제도를 개편하는 것이 아니었나?
김진태는 강용철의 지레짐작보다 더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후, 시발. 까짓것 하죠, 뭐. 제가 철두를 왕으로 올릴 겁니다. 시발꺼, 욕하라 그래. 뭐 어쩔 거야?"
"...."
"할아버지, 답을 알려줘서 고마워요."
"어어?"
"그럼 전 가볼게요."
"어?"
후련한 얼굴의 김진태가 떠나자, 강용철은 잠깐 멍하게 있다가 신전으로 가 무릎 꿇고 빌었다.
"여신이시여, 이거 우짤라고 이러는지...."
여신은 언제나처럼 답이 없었으나, 온화한 기운이 강용철의 전신을 훑었다.
마치, 그리 말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순리대로 흐르리라.
손주 하나는 옆 왕국을 치며 영토점령에 나섰고, 다른 손주 하나는 개국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영주성으로 돌아온 김진태는 세력창을 띄웠다. 그 옆에 홀로그램 맵을 켜고 고심에 들어갔다.
"수도 아이언헤드."
이동 마법진 근처의 아이언헤드는 어차피 번성한다. 가장 멀리 떨어진 영토인 신서울이 문제.
"봉신 김도진."
철두가 이미 그의 영토로 할당해버렸다.
아마 귀족이 되겠지.
아니, 귀족이 된다.
지금 문제는 지배계층의 부재.
권력을 나누어 주어야 할 때다.
확실한 충성을 받아내고 말이다.
"봉건제...."
노바의 시스템은 봉건제 형태다.
지금의 아이언헤드는 노바의 시스템과 지구의 계급원리 사이에 괴리가 있었다.
아직도 자신의 국적을 대한민국으로 여기는 자들이 태반이며, 강철두를 동네 20살 청년쯤으로 여기는 자들 또한 있는 지경이니.
"이젠 안 되지."
왕과 귀족으로 이루어진 지배층으로, 수많은 백성을 다스리리라.
이것은 지구인에게 있어 시대의 역행이나 다름없어 큰 반발에 부딪히겠지만....
"악명은 내가 짊어진다."
결정을 내린 시종장 김진태는 아이언헤드령의 핵심 인재들을 모조리 불러들였다.
"시종장님. 부르셨습니까?"
"어서 와요. 이 대장님."
"어? 이 소령님도 계셨네요."
"흐흐, 다 모였군."
"구 중령도 왔네요."
"우와, 이렇게 한데 모이기는 오랜만이네요."
친위대장 이은영을 필두로 여러 부대의 대장들이 모였다. 아니, 전부 모였다.
서로를 제각기 중구난방으로 부르는 그들이다.
전역하기 전의 계급으로 부르기도 하고, 그들끼리의 호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대로 계속 갈 수는 없다.
쾅!
김진태가 테이블을 내리쳤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그가 눈을 질끈 감으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계급제를 부활시키고, 봉건제를 채택, 강철두를 왕으로 추대할 겁니다."
"...."
조용하다.
놀랐겠지.
질러놓고 슬쩍 눈뜬 김진태는 도리어 깜짝 놀랐다.
"이야, 드디어 개국입니까?"
"시종장님은 재상이 되는 겁니까?"
"진즉 했어야 할 일이죠."
"노바의 시스템이 그러하니 따라야죠. 당연히."
누구 하나 놀라는 기색 없이, 당연하다는 듯이 뱉어내는 대장들의 말에 김진태는 살짝 허망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아니, 내가 얼마나 고민했는데.'
고민이 무색하게 다들 이미 그리될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아니, 바라고 있었다.
김진태도 이것이 영지발전 시뮬레이션 게임이었다면 당연히 바로 봉건제를 채택하고 다스렸을 것이다.
그러나 장고를 거듭한 건 김진태 본인 스스로가 평등과 자유의 시대를 살아온 대한민국의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다들 언제부터 이런 생각 했어요?"
김진태의 물음에 대장들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이미 영주님은 제게 있어 왕이지요."
"맞습니다. 제대로 왕위에 올라 개국하고 논공행상을 할 때가 되었습니다."
"아마 다들 인정할 겁니다."
지금 세상은 강력한 지배자를 원한다.
*
아미르 왕국의 국왕인 다울 3세는 더스트 후작의 요청에 제국의 모든 소드마스터에게 소집령을 내렸다.
<아이언헤드 척결 작전>
이미 아이언헤드령에 대한 허실은 모두 파악했다.
가장 중요한 전력인 강철두를 제외하면 별 볼 일 없는 이들이다.
지금 왕의 앞에는 스무 명의 소드마스터가 있었다.
그들의 선두에 왕국제일검이라 칭해지는 바우켄 공작이 늠름하게 서 있었다.
"바우켄 공작!"
"예, 전하."
"그대의 검에 왕국의 미래가 달렸소."
"염려 마시옵소서. 전하."
바우켄 공작이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무려 소드마스터 20명이다.
그것도 왕국제일검 자신을 포함한.
지원을 요청한 더스트 후작에게도 소드마스터 둘. 혹여 숨겨둔 비수가 있다면 더 많은 이들이 있을 터.
"왕국의 정예들이 모두 모였사옵니다. 이 전력으로 행하지 못한다면, 다른 방도가 없사오니 그저 염려를 놓으소서."
해보고 안 되면 어차피 답이 없으니 마음을 편히 가지라는 소리다.
제 딴에는 긴장을 풀기 위해 한 소리였으나, 다울 3세는 웃지 못했다.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일을 앞둔 사람의 심정이야 오죽할까. 그것이 왕국의 미래가 걸린 일이라면 더욱더.
지금 다울 3세의 심정은 도박판에서 마지막 패를 쥐고 올인한 도박꾼과 다를 바가 없었다.
"부디, 부디 왕국의 검으로 저 짐승 같은 놈을 사냥해주게."
"삼가 명을 받드옵니다!"
바우켄 공작이 젊은 날의 그때처럼 한쪽 무릎을 꿇으며 우렁차게 답했고, 그 뒤에 시립해있던 기사들이 따라 복창했다.
"출진하라!"
"출진하라!"
바우켄 공작이 출진하자, 왕국의 재상 투헬 공작이 다울 3세에게 간했다.
"전하!"
"말하라."
"어찌하여 그림자들을 쓰시지 아니하옵니까?"
그림자라 하면 국왕과 그의 직계가족을 지키는 호위 7인을 이르는 말이다.
그중에서도 그림자의 수장은 소문으로 왕국제일검 바우켄 공작과도 비견된다는 소리가 있다.
"그들은 이미 임무에 나섰네."
"임무라 하심은?"
"왕국의 국토가 유린당하고 있는데, 어찌 당하고만 있겠소?"
"...?"
"그림자 넷이 아이언헤드령으로 향했소."
"허어!"
투헬 공작이 탄식했다.
다울 3세는 가늘게 뜬 눈매로 왕국 저 너머의 아이언헤드령을 상상했다.
"짐승을 못 잡더라도 돌아갈 우리를 없애버려야 하지 않겠소?"
아이언헤드령에 강철두가 없으면, 전력이 비는 것이나 다름없다.
소드마스터에 이른 여검사가 하나 있다곤 하나, 무려 그림자 넷을 보냈다.
그중엔 '헤드'도 포함되어 있으니.
아이언헤드 성에는 역사에 기록될 정도의 학살극이 벌어질 터였다.
"단단히 알려줘야지! 우리 아미르 왕국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오!"
다울 3세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250화 결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