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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9 - 300-310

300화 마법과학문명 고구려

덜컹, 덜컹.

선로를 따라 바퀴가 구르며 내는 소음이 주변 풍광과 어우러져 음악처럼 느껴졌다.

"와아! 봐, 노을이 지고 있어."

"후후, 보고 있다."

철두와 아르엘라는 기차를 타고 신서울로 향하는 중이다.

기차 여행 겸, 연구소를 시찰하기 위해서다.

지난 전쟁 동안 수도인 아이언헤드 성은 가장 많은 테러를 당한 지역이자 전선과 너무 가까운 도시였기에, 연구시설과 연구원들은 대거 신서울로 이주했다.

아이언헤드 성의 바로 옆 포멜 마을부터 시작하는 기차를 타고 가면 신서울까지 꼬박 12시간이 걸린다.

마석을 동력으로 아주 빠른 속도로 나아가기에, 그리핀을 타고 날아가는 것보다도 오히려 더 빠른 속도였다.

게다가 그리핀은 중간중간 체력 보충을 위해 쉬어줘야 했으나, 마석 열차는 밤낮없이 달렸다.

이제 슬슬 일산 성을 지날 때쯤 노을이 지고 있었다.

고구려의 대왕 부부의 기차 여행을 함께하는 것은 친위대와 르망.

연구소의 소장인 르망은 한달음에 달려와 진태를 대신해 철두에게 그간의 성과를 자랑하기 바빴다.

"이런 기차가 몇 개라고?"

"여섯입니다. 넷은 오로지 화물로만 쓰이고, 둘은 민간여객과 화물 혼합으로 쓰이지요."

기찻길은 애초부터 복선으로 깔았다.

그 길옆으로 넓은 대로도 함께 고구려의 국토를 종으로 이었는데, 휙휙 지나가는 풍광으로 마차들이 바삐 오가는 게 보였다.

"저기에 곧 자동차가 다닐 수도 있겠어."

"하하, 완성된 시제품들이 많긴 하나, 민간에서 활성화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음? 왜?"

"단순 이동만 생각하자면 탈것이 더 유용하지 않겠습니까? 유지비 자체가 없으니까요."

처음 활성화할 때 고블린 주화를 소모하는 것을 제하면 탈것의 유지비는 없다. 간간이 소모된 체력을 채워줘야 한다지만 그건 두 필의 말로 해결이 가능하다.

반면 마석 자동차는 그 연료인 마석이 터무니없이 비싸 민간이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허나, 군사적으로는 쓰임이 많아 벌써 탱크들도 여럿입니다."

"오, 근데 왜 이번 전쟁에 쓰지 않았나?"

"아직은 시제품입니다. 이것저것 만들어지고 있사오나 대부분 공성용으로 적합하다는 판단입니다."

철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보병, 궁수, 기병, 마법사들 정도의 편제에서 탱크를 이용한 기갑부대를 이용하면 전장의 판도가 바뀔 것인데 왜 아직 적용하지 않았는가?

"아시다시피 이 쇠라는 게 기사의 검에도 무참히 썰려 나가는지라, 실상 효용성이 많이 떨어집니다. 기동력도 심각하지요."

무쇠로 만들어진 장갑은 총알을 막아낼 순 있어도 기사의 검기는 막아내지 못한다.

기동력도 말에 비할 바 없이 떨어지고, 그 유지비용을 생각하면 도무지 활용하기가 어렵다.

"재상께서도 이를 인지하시고는 공성병기나 이동용 마탑 형태로 연구발전을 지시하셨습니다."

말이 탱크지, 바퀴 달린 공성탑이나 다를 바 없이 개조되고 있었다.

기존에 사용되던 마력포라든가, 전격의 방어탑 따위를 엮어 이동식으로 만들어내는 형태다.

이동마법진 따위가 보편적이며, 검기와 마법이 실존하는 이 세상에서 이 또한 기동성이 형편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방어탑이나 마력포가 괜히 설치형으로 성에 장착되어 방어용으로만 쓰이는 게 아닌 것이다.

"후후, 기대되는군."

"앗! 해 넘어간다."

아까부터 노을을 구경 중이던 아르엘라는 창밖으로 해가 지려는 풍광을 보며 말했다.

"왜? 무한결투장에라도 다녀오려고?"

보통 무한결투장의 입장은 일몰이나 일출 전에 행한다. 그것이 시간적 손실을 최소한으로 막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럴까? 한동안 안 가본 지 꽤 됐네. 너도 가자."

"가봤자 하수들과 드잡이질할 뿐이다."

철두의 현재 결투장 등급은 브론즈.

최대한 저격해서 매칭할 수 있는 적이라 해 봐야 현재 순위에서 다섯 단계 위뿐이다.

언제 싸워서 실버 등급, 그 뒤의 골드 등급까지 가겠는가.

"바보냐? 지금 미루면 높은 곳은 언제 가? 천천히 가는 거지."

"으음."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는 말이군."

잠시 오만했다.

지금도 철두는 실시간으로 파워업 하는 중이라, 효과가 적은 수련은 등한시하는 멍청한 생각을 하고 말았다.

"자만할 뻔했군."

<스토그 시티가 복속을 청합니다.>

진태의 외교활동으로 인해 하나씩 제후가 늘어나고 있다. 덩달아 정복자 특성 때문에 철두의 파워도 늘어나는바.

이것은 마치 투자해놓은 주식이 떡상하는 것과 같아, 근로소득은 상대적으로 등한시하는 상태와 같았다.

"가자."

"좋아."

두 사람은 해가 지기 전 곧장 무한결투장으로 향했다.

파팟!

각자의 전령이 무한결투장으로 향하는 포탈을 열었다.

철두는 지구 채널로, 아르엘라는 발할라 채널로 떠났다.

"으으음."

이제는 익숙한 어지러움과 함께 그간 조금씩 변한 브론즈 등급의 지구 채널 대기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억, 강철두다!"

"아이언헤드."

"한산이동 불주먹!"

일출과 일몰을 기준으로 같이 입장한 이들이 주변에 빽빽하다. 유난히 큰 덩치에 가면이나 투구로 얼굴도 가리지 않은 강철두를 알아보는 이가 많았다.

"후후후."

"흐억."

철두의 친근한 웃음에 사람들이 기겁하며 물러났다.

"왜 다들 쫄았냐?"

"...."

저마다 눈을 피하기 바빠 철두가 의아해할 때 익숙한 이가 나섰다.

"고, 고구려의 대왕이여."

"여기선 한산이동 불주먹이다."

"...어, 어쨌든 고구려의 선전포고가 참말입니까?"

"음? 선전포고?"

철두는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무슨 소리냐?"

"처, 처음 들어보십니까? 분명 고구려 대왕의 이름으로 각 마을에 돌리지 않았습니까?"

"아아."

철두도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외교다."

"그것이 어찌 외교입니까? 대뜸 복속을 청하지 않으면 전쟁을 각오하라는 게 선전포고가 아니면 무엇인지요."

"진태가 명필이군."

고구려의 입장을 아주 간략하게 잘 추려 보낸 모양이다. 철두가 익숙한 사내를 보며 물었다.

"네 이름이 뭐였지?"

"옥산동백돼지입니다. 사쿠라사무라이, 섹시가이와 함께 대왕과 대련한 적이 있었지요."

"아, 그때 그놈이군."

어쩐지 익숙하더라.

사토 키요시와 제임스, 그리고 옥산동 백돼지 셋을 팀으로 철두와 사흘간 대련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이후로 마주친 적이 없었는데 오늘에야 또 마주친 것이다.

"아니,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옥산동백돼지가 투구를 벗었다.

"뉴성 그룹의 사장직에 있는 최재선입니다."

"뉴성 그룹이라.... I2990 맵인가?"

"...."

최재선의 얼굴이 굳었다.

고구려의 대왕은 곰 같은 여우다.

워낙 눈에 띄는 덩치와 힘을 보고 그가 무식할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전부 눈이 삔 거다.

'위치도 알고 있군.'

최재선 사장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후후, 좋아. 뭐가 문제지?"

"너무 부당합니다."

"뭐가?"

"연락이 닿는 모든 지구 출신 개척마을과 도시에 선전포고를 한 줄로 압니다."

"그렇지."

진태가 일을 잘했다.

꼼꼼한 내 친구.

"어찌 같은 지구 출신끼리 이리 비극적인 전쟁을 일으키려 하십니까? 너무나 두렵고 감당키 어렵습니다."

철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원치 않으면 복속하지 않아도 된다."

"그럼 전쟁 아닙니까?"

"후후, 고구려의 병력이 그대 영지를 침략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

철두는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무한결투장에 입장한 이들은 모두 히어로.

각자 세력을 이끌고 있거나, 세력에 속한 핵심 인물들이다.

"모두 들어라!"

철두의 음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고구려에 복속하는 자, 제후로 대접할 것이다. 거절해도 상관없다. 허나, 훗날 고구려의 도움을 기대하지 말지어다!"

권리와 의무는 본디 함께 따라다니는 것이니, 그들이 충성을 맹세하고 세금을 바치는 한 고구려는 끝까지 그들을 비호 할 것이다.

"뉴성 그룹 사장 최재선."

"...예에."

"부당하면 따르지 않으면 된다. 그대는 후일 고구려의 도움을 기대치 말라."

"...."

"또한, 고구려의 창검이 그대 영지를 향하더라도 마땅히 감수하라."

"...."

최재선의 얼굴이 암울해졌다.

결국엔 무릎 꿇지 않으면 목이 달아나게 생긴 게 아닌가?

"대왕이 사쿠라시티에서 보여준 모습은 너무 과격합니다!"

"그리 계속 짖는다면 뉴성 그룹의 말로가 그리되겠지."

"...."

철두가 소리쳤다.

"각자도생이다! 고구려의 그늘에 들 자 언제든 환영한다! 허나, 이를 거부하는 자 앞으로 우리의 적이 되어도 변명하지 말라!"

철두가 인파를 헤치고 걸어 나갔다.

분분히 길을 비켜서는 히어로들이 저마다 복잡한 얼굴을 했다.

철두는 곧장 무한결투장에 들러 랭킹전을 진행했고, 꽤 순위를 올릴 수 있었다.

모든 교전 기회가 끝났음에도 무언가 섭섭하여 출전 포탈 앞에 섰다.

<훈련> - 훈련으로 소울포인트를 수집할 수 있습니다.

<출전> - 출전 기회를 모두 소모하였습니다.

<대련> - 대련 상대가 없습니다.

"티끌 모아 태산이지."

효율 따위 따지지 않고 노력하기로 한바, 조금의 소울포인트라도 더 벌어야지.

조금이라도 더 강해질 수단이 있으면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파팟!

오랜만에 미니언들을 소환하는 훈련장으로 이동했다.

결투장과 똑같은 모습의 콜로세움 경기장에 미니언 하나가 소환되었다.

"어헉! 너는!"

"후후, 장호철 또 너군."

장호철이 넙죽 무릎을 꿇었다.

"나 정말 아닙니다. 저 진짜 그 여자 누군지도 몰라요."

"아직도 변명이군."

"하, 시발. 저 진짜 아닙니다. 저 반성 많이 했습니다? 아니, 저 곧 부활하는데 정말 억울합니다."

"후후후, 말이 길군."

퍼억!

철두가 던진 투척 도끼에 장호철의 머리통이 깨져 나갔다.

두 명, 세 명, 네 명....

연달아 미니언들이 소환되고, 철두는 이것저것 무기술을 점검할 겸 창이나 도끼 따위를 써서 해치웠다.

파팟.

이윽고 여섯의 미니언이 소환되었는데, 그중 아는 얼굴이 둘 보였다.

"음?"

"헛! 대왕!"

"대왕이시여!"

두 사람이 넙죽 엎드려 울었다.

철두의 눈망울도 흔들렸다.

"종두? 상철이?"

"예, 대왕!"

"흐흑, 이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서종두와 김상철.

철두와 인연이 깊었던 이들로, 충성도와 성장 가능성 하나로만 선별되는 친위대에 속했던 자들이다.

아이반 기사단장의 습격 때 친위대는 겨우 스무 명 남짓만 남겨두고 모조리 몰살되었는데, 그때 휩쓸려 죽은 이들이다.

"어찌 여기서 나온 것이냐?"

"미니언이 부활을 하려면 포인트를 모아야 합니다. 훈련용 미니언으로 출전하는 것은 꽤 많은 포인트를 주는바, 이리 불충하게 검을 겨누게 되었습니다."

"허!"

세 사람의 상봉이거나 말거나 함께 소환된 나머지 미니언 넷은 인상을 찌푸렸다.

"어이, 형씨들. 그만 징징거리고 할 일은 해야지."

"그래. 저놈이 모시던 군주인지 뭔지 몰라도 얼른 해치우자고."

슈우우욱, 퍼퍼퍽!

철두가 던진 투척 도끼가 네 미니언의 머리통을 부숴버리자 그들이 빛으로 화해 사라졌다.

"일어서라."

"예, 대왕."

철두는 서종두와 김상철을 덥썩 안아주었다.

"고생이 많았다."

"크읍, 아닙니다."

"부활이란 것. 자세히 이야기해 봐라."

"예에, 대왕."

서종두가 그리 길지 않은 미니언 생활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301화 마음이 통하면

덜컹, 덜컹!

"꾸이 꾸이!"

전령 꾸이는 흔들리는 기차가 마음에 들었다.

좌석에 앉아 기다리길 잠시.

주인이 무한결투장으로 들어간 지 겨우 1분 남짓 흘렀을까?

"꾸이!"

일몰과 함께 온 신호에 입을 쩍 벌리고 포탈을 생성하니 주인이 걸어 나왔다.

그의 옆으로 아르엘라의 전령도 포탈을 열었다.

"후우."

"잘 다녀왔어?"

"그래."

"랭킹은?"

"아직 브론즈다."

"조만간 오를 거야."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철두의 강함은 이미 알고 있으니 필요한 건 시간뿐이다.

다음 무한결투장 입성까지는 일주일 남짓의 쿨타임이 또 돌아간다.

소울포인트를 소모하면 바로 재입장도 가능하지만, 굳이 그럴 정도로 급하진 않다.

"조급해하지 마."

"조급하지 않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리 안 좋아?"

"부하들을 만나고 왔다."

"부하들?"

"그래, 이번 전쟁에서 죽은 녀석들."

"아!"

아르엘라는 철두의 표정이 좋지 않은 이유를 납득했다. 생각보다 더 여리고 어린 사람이니까.

"심상 공간에 다녀와야겠다."

"어? 어디 다쳤어?"

"아니, 수련이다."

"허, 굳이 지금?"

"어차피 시간도 남았지 않나?"

그렇긴 하다.

일몰과 함께 어두워진 창밖 풍경은 이제 대수로울 것도 없었고, 일산 성을 지나 힘차게 달리고 있는 기차가 목적지인 신서울에 정차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이 정도로 열심히 하란 건 아닌데...."

"후후, 나 먼저 간다."

"그럼 나도 간다."

아르엘라는 저도 할 일이 없었기에 심상 공간에 들어갔다.

두 사람 모두 노바로 돌아오고 나서 딱히 심상 공간을 찾지 않았다.

마음을 치료해야 할 정도로 타격을 입은 적도 없고, 심상 공간에서 여유롭게 수련할 정도로 짬이 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츠츠츳.

아르엘라는 철두를 따라 눈을 감았고, 곧 그녀의 심상 공간에서 깨어났다.

검은 숲.

어두운 숲에서 깬 아르엘라는 언제나처럼 공터의 오두막을 찾았다.

"영가.... 아니, 아버님!"

아르엘라는 습관적으로 부르던 호칭을 급히 주워 담았다.

뭐야, 왜 안 나와?

"스승님!"

탕! 탕!

문을 두드려 봤으나 반응이 없다.

홱 열어보니 오두막 안이 휑하다.

"어? 뭐야?"

언제나 오두막에서 시간을 보내던 카다잔이다.

"어디 간 거야?"

아르엘라는 훌쩍 뛰어 지붕 위로 올라가더니 이내 그 옆의 큰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숲의 종족인 요정답게 그 행동이 매우 민첩하고 익숙해 다람쥐와 다를 바가 없었다.

"어?"

높은 숲에서 주변을 휘이 둘러보던 아르엘라는 깜짝 놀랐다.

"헐!"

숲의 끝부분.

나무 두어 그루가 초록빛을 띠고 있었다.

"말도 안 돼."

검게 죽은 숲에 생명이 깃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나무 너머에 높다란 절벽이 보인다.

한번 보았지만 잊을 수 없는 공간이다.

"...메마른 언덕."

철두의 심상 공간이다.

어째서? 왜?

세계수의 잎사귀도 없는데?

어떻게 된 거지?

온갖 의문이 메아리친다.

아르엘라는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리는 게 느껴졌다. 심상 공간의 하늘이 펄쩍펄쩍 뛸 정도다.

타타탓!

발걸음이 절로 빨라진다.

"허엇!"

도착한 아르엘라는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푸른 나무.

너무나 친숙한 생명의 기운에 폐부로 들어오는 공기의 질이 다르다.

적어도 이곳 검은 숲에서는 맡아본 적 없는 냄새며 느낌, 감상이다.

"하아아."

"...."

심호흡하는 그녀의 옆에는 카다잔이 있었다.

"사부, 여기 있었던 거야?"

"...그래."

"어딜 보는 거야? 아."

카다잔은 망부석이라도 된 듯 바닥에 털썩 앉아 저 너머를 보고 있었다.

메마른 언덕.

아르엘라가 그쪽으로 한걸음 옮기니 보이지 않는 결계가 그녀의 접근을 막았다.

지이잉.

"아!"

아직도 단절되었음에 아쉬움과 동시에, 세계수의 잎을 소모하는 주술을 행하지 않고도 여전히 두 심상 공간이 연결되어 있는 모습에 어리둥절했다.

"어떻게 된 거야? 뭐 좀 알아?"

"그때 이후 계속 이 상태다."

"그때?"

"...에이든의 정령들이 폭발한 이후다."

"아!"

기억이 난다.

그때의 폭발로 주술이 깨어졌다.

타타탓.

그때 저 너머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뭐? 소리?'

단절된 두 공간 사이에?

아르엘라가 깜짝 놀라 바라보니 투명한 결계 너머로 비탈면을 타고 내려오는 아이가 보였다.

"아버지!"

또렷이 들린다.

아주 어린 꼬마 신랑의 목소리가.

쿠웅!

다다다 달려온 소년이 보이지 않는 결계에 부딪혀 발랑 넘어졌다.

"아버지!"

"들린다, 에이든!"

"헉! 아버지!"

카다잔도 벌떡 일어서 결계에 손을 짚었다.

에이든도 맞은편에서 손을 짚었으나 두 사람은 서로를 보기만 할 뿐 만질 수 없었다.

"크으으윽. 에이든!"

"아버지! 들려요! 아버지 목소리가 들려요!"

에이든은 결계를 더듬었다.

그 모습이 허공에 대고 하는 마임 연기를 보는 듯했다.

한참 더듬거리던 에이든이 소리쳤다.

"여기예요!"

결계.

만날 수 없는 두 차원이 합치된 그 공간 사이에 작은 구멍이 있었다.

에이든의 검지손가락이 툭 튀어나와 꼼지락거렸다.

"여기 뚫렸어요!"

소리치는 에이든의 소리가 먹먹하다.

손가락을 쏙 빼내고 눈알을 가져다 대는 에이든이다.

"아들!"

"아버지!"

두 부자가 손가락 하나만 한 구멍을 사이에 두고 눈물겨운 상봉을 했다.

아르엘라는 두 사람의 감정이 너무 격앙되어 상대적으로 이성을 찾을 수 있었다.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 그제야 의문이 해소된다.

'그때의 정령 폭발로 메마른 언덕과 검은 숲이 연결되어버렸어. 저 작은 구멍.'

본래는 만날 수 없는 두 차원이 세계수의 잎사귀로 인해 조우했다가, 정령들의 폭발로 인해 구멍이 뚫려버렸다.

그 구멍이 마치 좌표라도 된 듯 두 세계는 고정되어버렸다.

'저기서 생명의 기운이 나오고 있어. 검은 숲이 생명을 찾고 있어.'

뒤를 본다.

갈색의 본디 색을 되찾은 기둥과 초록빛을 찾은 잎사귀.

한 그루, 두 그루, 반?

색을 찾은 나무를 쓰다듬던 아르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구멍과의 거리순이다.

저기서부터 시작되어 차츰 나무가 색을 찾고 있었다.

'철두와 나의 마음은 이어졌다.'

두 심상 공간이 이어져 유기적으로 연결되었으며, 서로 호흡하듯 생명을 주고받고 있었다.

"크흐윽.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아버지 전 이제 강해요."

"헌데 어찌 아직 그리 어리단 말이냐!"

"아직 선조의 혼을 못 받았어요."

"크흑, 발할라여! 어찌 어린 전사를 외면하시나이까."

아르엘라는 두 부자의 격앙된 감정이 해소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시간은 많다.

한참 만에 카다잔이 아르엘라를 불렀다.

"아르엘라."

"네, 사부."

"정녕 에이든과 혼약을 했더냐?"

"...그렇죠."

"...."

카다잔은 요정 며느리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어 조금 당황스러웠다.

"설마 사부. 반대니 뭐니 그런 거야?"

"...그럴 리가."

새삼 죽은 귀신이 반대니 뭐니 들먹이는 것도 우습다. 더군다나 그조차도 선조의 혼으로서 바바리안 전사를 돕는 게 아닌, 요정을 돕고 있지 않은가.

"고생하겠군."

"고생이랄 게 있나요."

아르엘라는 말을 줄였다.

요정 공주의 운명을 읊으면 카다잔은 화내지 않을까?

'아들을 홀아비로 만드는 거니까....'

초록빛 나무를 쓰다듬는 아르엘라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이 숲이 온전히 녹음으로 물들면, 그때가 그녀가 공주로서 의무를 행해야 할 때다.

그리고 이별을 준비해야 할 때이니.

"이리 와서 이야기해 봐라."

"네?"

카다잔의 말에 상념이 깨졌다.

그녀가 다가가니 결계 너머 에이든이 서 있다.

"안녕. 꼬마 신랑."

"흥, 누가 꼬마라는 거냐."

"후훗."

아르엘라가 맑게 웃었다.

사내아이를 낳으면 저리되지 않을까?

고집불통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

"정령들이 우리 심상 공간을 이은 것 같아."

"그때 그 폭발로 정령들이 죽은 거야? 분명 죽지 않았다고 했잖아."

에이든의 목소리엔 원망마저 깃들었다.

아르엘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모든 정령들은 죽지 않아. 그들의 혼은 정령계로 통하니까."

"노바랑 정령계는 이어지지 않았다며?"

"...맞아."

정령 계약이란 것이 그런 거다.

정령계에 혼이 있는 정령들을 계약자의 심상 공간으로 데려오는 것이다.

그리되면 정령의 수명은 계약자의 수명과 함께한다.

계약자가 죽지 않는 한 영원하다는 것이니.

"정령계로 돌아갈 방법이 없으니 여기 어딘가에 있을 거야."

"여기 어디?"

"네 심상 세계에 있겠지."

"메마른 언덕에?"

철두가 뒤로 고개를 돌렸다.

높디높은 언덕.

"거기 숲은 왜 그렇게 된 거야?"

"나도 몰라. 아마 네 심상과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것 같아."

"...내 정령을 비료로 쓴 건 아니겠지?"

"허, 참내."

에이든의 치기 어린 말을 어이없어하면서도 그녀는 섣불리 확답하지 못했다.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몰랐으니까.

"나도 잘 몰라. 차근차근 알아가야 해."

"...그때 말한 세계수의 가지를 찾으면 해결되는 거야?"

아르엘라가 고개를 저었다.

"이젠 모르겠어."

"왜?"

"세계수의 가지로 난 스승님과 네 정령 친구들을 교환하려고 했어."

"지금은 아니란 거야?"

"몰라. 계획이 어그러졌어. 교환할 정령이 없잖아? 세계수의 가지를 찾아본들 무슨 소용이겠어."

"...."

에이든이 아버지를 보았다.

"내게 정령이 없어서 우리 아버지를 못 주겠단 거야?"

"애냐?"

아르엘라는 씩씩거리는 철두를 보며 피식 웃었다.

"왜 웃는 거야?"

"귀여워서."

"뭐어?"

"아버지를 네 심상 공간에 모시게 최대한 도울 거야. 걱정 마."

어차피 그녀는 떠나야 한다.

죽음뿐인 미래에 무엇을 욕심낼까?

"정말?"

금방 해맑은 얼굴이 된 에이든을 보며 아르엘라는 겨우 고소를 참았다.

저돌적인 고구려 대왕의 본모습은 이리도 아이와 같구나.

그렇기에 그의 분노도 그리 순수하구나.

"당연하지. 그리고 지금 현상도 나쁘지 않다고 봐."

겨우 나무 두 그루 반.

이제 시작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게 중요하다.

검은 숲은 정령을 품을 수 없다.

이 숲이 제 색을 찾는다면 어떤 정령이든 품을 수 있으리라.

그것이 정령왕이라 할지라도....

"매일 심상 공간에 와서 살펴보자. 어떻게 변해가는지."

"당연하지! 난 매일 아버지를 보아야겠다."

가만히 듣고 있던 카다잔도 반색했다.

"내가 네게 도끼술을 가르치겠다."

"오! 정말?"

아버지에게 도끼술을 배운다니.

생각만 해도 설렌다.

"자, 그럼 나가자."

"싫다. 나는 아버지와 수련하겠다."

"허."

아르엘라가 어이없어하는데, 바바리안 부자는 기껍게 웃으며 서로 무기를 꺼내 들었다.

아주 투명한 결계.

그리고 서로의 소리가 숨이 통하는 구멍 하나.

두 부자는 거울을 보듯 마주 선 채 도끼를 들고 휘둘렀다.

"이렇게 쥐어라."

"이렇게?"

아르엘라는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미소 지으면서도 괜히 질투가 났다.

늘 냉엄하기만 하던 스승 카다잔이 저리 밝게 웃는 모습도, 맹랑한 바바리안 꼬마가 저리 즐겁게 웃는 것도 모두 부럽다.

아버지란 참 좋은 거구나.

302화 추억 낙오

끼이이이잉!

철로를 마찰하는 바퀴의 쇳소리와 함께 기차가 멈춰 섰다. 승객 칸보다 훨씬 많은 화물칸에 빽빽한 짐들이 내려지기 시작했다.

"하나, 둘, 웃차!"

"저 마차게 실어!"

멈춰 선 기차로 인부들이 새카맣게 몰려들었다.

근력 스탯이 높은 기사들이 나서면 중장비와 같은 힘을 내겠으나, 신서울의 기차 하역장은 굳이 비효율을 택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일자리 덕분에, 저 많은 사람들이 오늘 일당으로 며칠을 보낼 수 있다.

승객 칸에서 내린 강철두는 잠시 머물러 하역 장면을 보다가 말에 올랐다.

"연구실로 모시겠습니다."

"그래."

르망의 안내에 따라 고구려의 국왕 부부는 신서울의 연구소로 향했다.

박준필이 심혈을 기울여 터전을 닦은 신서울은 대한민국 제1의 개척마을답게, 고구려의 제2 도심에 온 것 같았다.

지난 2년간 전쟁통에 비교적 안전하여 후방지역으로 기능한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은 연구실만이 아니었다.

공방 거리, 식당 거리, 잡화거리로 분류되었던 상업지역 중에 특히나 공방 거리가 아예 몰라볼 정도로 달라졌다.

"저기가 신서울에서 가장 큰 방적공장입니다. 그리고 저기가 철공소지요. 옆에 건물은 자전거 공장입니다. 그 옆이 군수공장들입니다. 주로 화살과 통조림을 제조합니다."

"흐으음."

공방 거리를 주로 차지하고 있던 철공소 목공방 가죽공방 따위가 여전히 있긴 했으나, 전체적으로 작은 규모의 공장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후방이긴 하나, 하나같이 주요한 보급품을 만들어 내는 곳이라 방호가 쉬운 성내에 자리를 불하했습니다."

신서울은 슬슬 포화상태다.

어차피 맵은 넓어 성 밖에 땅은 많다.

안전만 보장된다면 개발에 부지가 모자랄 일은 없다.

"전쟁이 끝났으니, 3 개척마을에 대규모 산업단지를 짓는 것을 계획 중입니다."

철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소로 바로 가자."

"예에, 대왕."

연구소는 아이언헤드 성에 있을 때보다 곱절은 더 커 보였는데, 건물도 많고 그 안에서 연구 중인 연구원은 더 많았다.

기존의 연구원들이 대부분 농업이나 건축, 등에 특화되어 있었다면, 지금은 마법, 기계, 화학 심지어 정책과 사회연구까지도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가장 인원이 많은 것은 마법과 기계공학 쪽이었다.

"자동차 시제품은 저쪽입니다."

철두가 안내에 따라가 보니 SUV 차량 한 대와 트럭 한 대가 서 있었다.

"마력 엔진을 이용하며 이 정도 마석으로 100킬로미터 정도 주행이 가능합니다."

르망이 보여준 마석은 주먹보다 조금 작은 크기로, 그 가격을 생각하면 썩 가성비가 뛰어나 보이지는 않았다.

자동차는 지구인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운송 수단이라 향수를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지만, 제국인들의 눈에는 하등 쓸모없는 마석 사치품이었다.

"저쪽이 군사용으로 개량한 버전의 자동차입니다."

철두가 따라가자 여섯 개의 바퀴를 가진 커다란 자동차 위에 마력포가 장착되어 있었다.

어딘가 뚱뚱한 모습의 탱크를 보는 것 같았다.

"대형의 마력포를 장착했으나, 보시다시피 중량이 너무 늘어났습니다. 원정에서는 아예 쓰이질 못하고 임시적인 이동 요새의 형태로 운용 중입니다."

"저건 뭔가?"

철두가 마력 탱크 옆에 있는 높은 첨탑을 가리켰다. 탱크와 마찬가지로 바퀴가 달렸는데 2개가 더 많아 8개의 바퀴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동감시탑입니다. 높이 12미터에 감시탑을 보유하고 있으며, 중간중간 소형 마력포 8대를 장착하였습니다."

마력 탱크와 이동감시탑.

"어디에 쓰이고 있다고?"

"현재 북방에 배치해 운용하고 있습니다. 일정 간격으로 배치 운용하는 것만으로도 국경선을 그은 것과 같이 작용해, 최후 방어선으로 유용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이동용 요새이자, 거점이다.

신서울 북부에 렙틸 유목민들의 약탈이 심한데, 이동 요새를 간격마다 배치하여 천천히 밀고 올라가니, 자연스레 그들의 활동 영역도 밀려 올라가는 중이다.

"원정에는 못 쓰겠군."

"그렇사옵니다. 인벤토리에 수납은 어불성설이기에 이동마법진의 사용이 불가하지요."

노바의 세계는 넓다.

이동마법진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먼 거리를 직접 이동해야 하는데, 그때 소비되는 마석을 생각하면 쓸 수 없는 물건이다.

다만 지금처럼 고구려의 국경 지역에 배치해 전선을 형성하고 조금씩 그 전선을 전진시키는 전략에는 효율적으로 보였다.

대형 마력포라 해도 중급 마법사 정도 되면 충분히 비슷한 파괴력을 내는 마법을 구현할 수 있다.

원정지에 저 큰 마력포를 끌고 가느니, 마법사를 데리고 가는 게 낫다.

"하지만 현재 모듈화하여 이동 후, 재조립하는 공정도 연구 중입니다. 조만간 원정에 나서실 때 쓰일 수도 있게 하겠습니다."

"으음."

철두에게 마력포는 필요 없다.

공성전에 저것을 쓰느니, 묠니르 한 방 휘두르는 게 낫다.

연구소에서 개발 중인 무기들은 모두 철두의 부재를 상정한 전장에서 쓰일 물건들이다.

"그럼 다음 연구동으로 모시겠습니다."

철두는 르망을 따라 연구소를 하나하나 돌며 그 성과를 확인했다.

고작 2년의 시간이 흘렀건만 마법과 과학의 융합은 상당한 진척도를 보여주었다.

"무선 전화기입니다. 이것으로 인해 고구려의 모든 성들이 전령 없이 즉각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지요. 이 덕분에 효율적인 부대 운용이 가능했습니다."

모든 성과 요새에 이 전화가 설치되어 있었다.

"어디든 통화할 수 있는 거야?"

"아닙니다. 미리 연결되어있는 회선끼리만 통화가 가능합니다. 모든 위성도시들은 중심도시와 연결되어있고, 종래에는 모두 아이언헤드 성의 정보부처와 연결되어있습니다."

신서울 부속 여러 개척마을과 북부의 전선의 정보는 모두 이곳에 1차적으로 모이고, 2차적으로는 모든 보고가 아이언헤드 성의 정보부로 이어진다.

"진태 연결해 봐."

"옙."

르망은 거대한 단말기를 조작하더니 주먹만 한 돌멩이 하나를 뚝 떼어 철두의 손에 쥐여주었다.

"여기서 소리가 나와?"

"거기에 대고 이야기하시면 음성을 마법 신호로 변환, 아이언헤드 성까지 전달합니다."

"진태야."

[어, 연구소인가 봐?]

소리는 거대한 단말기의 한쪽에 부착된 스피커에서 나왔다.

"오, 어떻게 알았냐?"

[연구소 채널로 걸었으니까 알지.]

"후후, 신기하군. 통화료 많이 나온다. 끊어라."

[바보야, 통화료가 어딨냐? 마석이 쓰이긴 하지만....]

뚜욱.

철두는 주먹만 한 마법 돌멩이를 통신기의 자리에 두었다.

"그럼 다음 연구동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니, 되었다. 그만 봐도 된다."

"아, 그럼 궁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러지."

본디 신서울 관청이 있던 곳에 다다르니 신서울의 시장이 뛰쳐나와 고개를 조아렸다.

"대왕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하나이다."

"별일 없지?"

"예에, 대왕."

"그래, 일 봐라."

"예에, 알겠나이다."

본디 신서울은 김도진에게 영지로 하사했지만, 박준필이 다시 협상해 직할령으로 바꾸었다.

고구려의 모든 성과 마을은 관리가 파견되어 행정을 보는 중앙집권제를 택하고 있었다.

제후국들에 대해서야 간접적인 봉건제를 택하고 있지만, 직할령은 어쨌든 직접 통치하고 있다.

한순간에 하사받은 영지를 뺏긴 기사 김도진이지만, 어림군의 군단장으로 만족하는 것 같았다.

철두와 아르엘라는 귀빈들을 위해 지은 궁에 머무르며 간단히 목욕하고 저녁을 먹었다.

"내일 어림군 대장만 만나고 돌아가자."

"벌써?"

"그래."

"표정이 왜 그래?"

"내 표정이 어때서?"

"그냥 외로워 보이는데?"

"후후."

철두는 씁쓸히 웃으며 국을 후루룩 마셨다.

"너랑 드워프들과 미궁에 다녀온 게 고작 열흘이다."

"아!"

아르엘라는 철두보다 더 노바에 일찍 정착했고, 미궁 경험이 더 많다. 철두는 미궁에 다녀온 히어로들이 한 번씩 느끼는 괴리를 느끼는 중이었다.

"처음 미궁에서 만났을 때 내가 그랬잖아. 빨리 돌아가라고."

"그랬었지."

"두 번째 미궁에서 너무 오래 있긴 했어."

씁쓸한 얼굴의 철두를 보며 아르엘라가 조심스레 물었다.

"힘들어?"

"난 힘든 게 없다."

허세는.

"낯설어?"

"...."

"이건 어쩔 수 없어. 조금 더 시간이 쌓여야 해. 우린 아직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그렇지."

철두의 얼굴은 쓸쓸했다.

고작 열흘 미궁에 다녀왔는데 세상이 몰라보게 발전했다.

나만 홀로 자고 일어났는데, 주변 친구들이 모두 나를 빼고 친해진 기분이다.

나 홀로 외톨이가 된 기분이다.

"내가 있잖아."

"후후, 그거 위로되는군."

"흐흐,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건 생각 이상으로 크지."

"그런 것 같다."

철두도 수긍했다.

어쩐지 고구려는 낯선 느낌마저 드는데 아르엘라와는 전혀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를 공유한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생각 이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돌아가면 후작령이나 가보자."

"어?"

"왜 놀라나? 너와 나의 심상 공간이 이어졌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보러 가야지."

"그, 그렇지."

아르엘라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근데 급진적이지 않아도 돼. 내 심상 공간인 검은 숲이 점점 색을 찾고 있어. 언젠가는 숲 전체가 다 푸르러질 거야."

"그걸 언제 기다리나?"

"...나랑 빨리 헤어지고 싶은 거야?"

"너랑 왜 헤어지나?"

"...."

아르엘라의 입술이 몇 번이나 달싹였으나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잠이나 자러 가자."

"음? 난 아직 덜 먹었다."

"시끄럽고 따라와."

아르엘라가 먼저 침실로 향했다.

엘프 공주의 숙명을 거부할 수는 없다.

최대한 늦게 그 시기가 오길 바라지만, 미래는 모르는 일이기에 부부의 결실 정도는 보고 가고 싶었다.

*

신서울과 여러 개척마을들이 위치한 M4220 맵의 북부.

어림군의 본부에 고구려 국왕 부부가 방문했다.

"대왕을 뵙습니다."

"그래, 고생이 많다."

어림군 본부는 그리 발전하지 않은 개척마을의 전형을 보는 듯했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마을은 군수물품과 지원을 위해 자리 잡은 상인들로 이뤄져 있다.

신서울에 비해 초라해 보이는 이곳이 지금 기사 김도진의 거처다.

"아깝지 않느냐?"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어째서?"

"아깝지 않은 데 이유가 있겠습니까? 제가 다스리는 것보다 고구려에서 직접 다스리는 게 신서울의 시민들을 위하는 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박준필이 어떻게 설득했는지, 김도진의 얼굴에서는 정말 조금의 욕심도 없어 보였다.

"내가 어림군에 해줄 것은 없나?"

"그리핀을 조금 더 지원해주시옵소서."

"다른 건?"

"없사옵니다."

철두가 슬쩍 북쪽을 보았다.

렙틸인들이 부족을 이루며 사는 맵이다.

그들 부족끼리도 수시로 싸우면서, 또 고구려군이 밀고 올라가면 똘똘 뭉쳐 결사 항전하는 놈들이다.

"내가 밀어주랴?"

"아니 되옵니다. 저들과의 교전이 어림군의 성장 자양분이 되고 있사옵니다."

아무리 실전 같은 훈련을 해봐야 실전이 백번 더 성장에 도움이 된다.

고구려에서 어림군은 후방부대이자, 신병들의 훈련소와도 같은 기능을 하고 있어 렙틸인들의 침략이야 그저 내버려 두는 게 더 나았다.

두 사람은 한참을 대작하며 술잔을 나눴고, 어림군은 그사이도 몇 번이나 종을 울리고 출동과 복귀를 반복했다.

병사들의 얼굴에서 피로함이 있지만 자부심도 공존하는 것이, 이 전장은 활기로 가득 찬 것 같았다.

303화 삶의 이유

어림군에서의 대작이 끝나고 고구려의 대왕 부부는 남하 일정을 잡았다.

언제나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그이지만, 이번에는 그를 따르는 친위대도 대동하고 있고 또, 고구려의 국민들을 위무한다는 공무가 있었다.

대왕이 부재중이던 지난 2년간의 고생이 있었기에, 강철두가 직접 모든 직할 영지에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일변했다.

"되었다. 이제 되었어!"

"대왕님이 돌아오셨다! 만세!"

강철두의 존재는 전쟁 억제력으로나 위력으로나 핵무기와 다를 바 없다.

성물의 주인이 대왕으로 있는 나라에 선전포고해올 국가는 많지 않았다.

2년간 수세적으로 결사 항전해오던 것이 이제는 변해 정복 활동을 이어가니, 제후국이 빠르게 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최북단에서부터 시작된 남하 일정은 말을 타고 모든 도시를 들렀다 왔기에 꽤 시일이 걸렸다.

고구려의 허리라 할 수 있는 문경 성에 들렀을 때는 아미르 국왕이 직접 행차해 고개를 조아리기까지 했다.

기차를 타고 떠난 지 꼬박 한 달 만에 아이언헤드 성에 돌아온 철두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태! 저건 뭐냐?"

"흐흐, 뭐겠어. 수도 확장이지."

내성 외성으로 구분되어 동심원처럼 생긴 아이언헤드 성의 외곽에 엄청난 둘레의 제2 외성이 축성 중이었다.

"땅이 모자라나?"

"아니."

"후후, 돈 쓸 데가 없나 보군."

"어? 어떻게 알았어."

"...?"

"하하, 돈이 많긴 한데 그 때문만은 아냐. 유민이 너무 많이 몰려서 그래."

"유민? 어디서?"

"어디겠냐, N5290이지."

"음? 사쿠라시티?"

"맞아. 박 사령관이 복귀했거든."

강철두가 고구려 국토를 돌며 위무하는 사이, 박준필이 돌아왔다.

사로잡은 포로들의 판매가 모두 끝났으며, 온갖 자원에 대한 약탈도 끝났다는 의미다.

정복자들이 싹 빠져나갔으니 이제 막부를 잃고 생존한 일본인들은 다시 터전을 일구는 일만 남았다.

그렇게 다시 그들이 농사짓고 생활이 풍족해지면, 그 맵에 자리 잡은 고구려의 겐지 성을 전진기지 삼아 군대가 약탈을 나설 예정이었다.

"거기 지금 지옥이나 다름없어. 정부가 사라져서 완전 혼란의 도가니야."

"...? 자립할 식량은 남겨 두지 않았나?"

"그렇지. 근데 그건 우리가 계속 주둔하고 사민했으면 모르겠는데, 철수했으니까 어쩌겠냐?"

사쿠라시티에 남겨진 이들은 한순간에 재산의 대부분을 잃어 겨우 궁핍하게 삶을 이어갈 정도의 자원만 남게 되었다.

개중에 힘 있는 자들은 빠르게 세력을 일구어 다른 이들의 것을 수탈했다. 정부도 사라지고 승전한 고구려군도 빠지게 되니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와중에 많은 재산은 재기의 발판이 아니라 도적의 표적이 되기 일쑤니, 이동마법진의 이용 비용만 있다면 모조리 고구려로 피난 왔다.

"그래서 유민이 늘었다?"

"어, 맞아."

전 재산을 탈탈 털어 몸만 피난 온 이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이들은 아이언헤드 성에 입성할 수 없었다.

아이언헤드 성의 세금은 높은 편으로, 통행세와 더불어 하루하루 거주할 때마다 내는 거주세도 자동 징수되니까.

"이건 그냥 구제 사업이야. 어차피 미래를 생각하면 수도 확장도 필요했어."

그렇게 대규모 유민이 발생해 그들을 성벽 공사에 투입해 급료를 지급하는 중이다.

"그래서 말인데, 이 사람들 고구려 시민으로 받아도 되지?"

"안 될 게 뭐냐?"

"괜찮은 거야?"

"음?"

"아니, 그래도 대왕님 재가는 떨어져야 할 일이니까."

철두가 피식 웃었다.

"사로잡힌 포로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순간 이미 자유민이다. 그들이 가진 원한 관계는 스스로 풀어야 할 일이다. 고구려의 그늘에 들기를 자처해서 온 자들을 내칠 이유는 없다."

"이야, 우리 철두. 마음이 아주 태평양이야."

김진태는 강철두의 시원한 승낙에 쾌재를 불렀다.

"뭘 그렇게 좋아하냐?"

"흐흐, 난 네가 혹시나 반대할까 봐 아직 편입 미뤄두고 있었거든."

김진태는 능글맞게 웃으며 말을 보탰다.

"지금 N5290 맵은 진짜 난리도 아냐. 이동마법진 사용할 돈도 없는 사람들은 전부 겐지 성 주변에 몰려들고 있어."

"그들도 받자?"

"응, 솔직히 불쌍하잖아. 료 막부가 적이었지, 시민이 뭘 했겠어. 거기 시민들 고통이 너무 커."

"후후, 좋을 대로 해라."

"흐흐, 역시 내 친구. 그럴 줄 알았다."

김진태는 홀로 꽤 고민하고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는데, 철두가 흔쾌히 수락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진태. 앞으로 정복할 일이 많다. 하나하나 눈치 보지 마라. 모든 내정은 네게 맡긴 지 오래다."

"그래, 알겠어. 흐흐."

김진태는 내친김에 하나를 더 제안했다.

"시미켄이라고 료 막부에 2인자로 있던 사무라이가 있는데, 써보는 거 어때?"

"사토가 살린 놈이군. 놈을 쓰자?"

"응, 항복한 일본인들에게도 기회를 줘야 해."

지난 2년간의 전쟁은 툴룬 공작 가문과 료 막부의 고구려침략이었다.

전쟁의 기간이 길었기에 서로를 향한 원한과 분노도 깊었다.

종전했다고 하여 그 원한이 증발할 리가 없기에, 현재 아이언헤드 성에 흘러들어온 유민들은 멸시와 천대를 받고 있었다.

지난 2년간 당해온 고구려인들의 분노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지만, 이대로 두는 것은 폭탄을 키우는 것과 같다.

아예 고구려의 국민으로 받지 않는다면 모르되, 받아놓고 멸시와 조롱이 이어지며 차별이 커지면 불만이 쌓이기 마련이다.

굳이 고구려 안에서 불만 세력을 키울 게 아니라면 최소한의 기회는 주어야 했다.

"항왜군을 만들자는 거군."

"그래. 맞아."

"좋다."

예로부터 항복한 포로에게 군공을 세워 출세와 면책의 기회를 열어주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라 망설일 이유가 없다.

"그럼 난 이제 아이리스 후작령에 좀 다녀오겠다."

"아니, 오자마자 가려고 그러냐. 한 달만 머물다 가."

"...한 달씩이나?"

"응. 수도에도 대왕님의 존재가 필요해."

"흐음."

"그동안 수도에 와서 풍요로운 석판에 맹세하고 간 제후들도 싹 불러야지. 인사는 하고 가야 할 것 아냐?"

"...알겠다."

"흐흐, 그럼 편하게 있어. 궁궐도 전보다 더 쾌적할 거야."

아이언헤드 성은 이제 더 이상 영주성이 아닌, 대왕의 거처로써 기능해야 했기에 대부분의 시설들은 외성으로 옮겨갔다.

행정, 군사 업무를 보는 관청들이 모조리 터를 옮겼고, 아이언헤드 성은 왕성의 역할에 조금 더 치중하는 형태로 구성이 변했다.

철두는 왕의 침실에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왜? 어디가?"

"할배 만나고 오겠다."

"같이 갈까?"

"아니. 아!"

철두는 아까 진태와 있었던 이야기를 아르엘라에게 들려주었다.

"후작령에 가는 건 한 달은 더 있어야 하는데 괜찮겠어?"

"응, 괜찮아. 오히려 네가 더 조급해 보여."

"으음."

"그렇게 서두르지 마. 천천히 해도 돼. 모든 게 좋아지고 있으니까."

실제로 지난 한 달간 매일 짧게는 삼십 분, 길게는 몇 시간씩 심상 세계에 머물러온 둘이다.

두 세계를 잇는 구멍은 조금도 커지지 않았지만, 검은 숲은 차츰차츰 빛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럼 다녀오마."

"알겠어."

철두는 홀로 아리아 여신의 신전을 찾았다.

내성의 모든 건물들이 증축되어 달라졌는데, 여신의 신전은 2년 전에 비해 별달리 달라진 게 없었다.

그중에서도 신전의 중심부 기도원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거기에 무릎 꿇은 채 기도하는 할배의 등도 마찬가지다.

"할배."

"오야, 언제 왔노?"

"아까 낮에 왔다."

"해 떨어졌는데 잠이나 자지, 만다고 왔노."

"후후."

철두가 그저 쓸쓸히 웃고는 할배의 옆에 털썩 앉았다.

"와, 또 펜던트 충전해주까?"

"아니, 아직 10회 그대로다."

"그라먼?"

"꼭 용건이 있어야 오나?"

"하이고, 우리 철두가 철들었는갑데이. 볼일도 없이 이 할배를 다 찾아오고."

"후후."

강철두는 웃었으나 그 웃음 끝에 걸린 씁쓸함이 할아버지 강용철의 눈에 걸렸다.

"와? 무슨 일이고?"

"그냥 갑갑한 기분이다."

"갑갑하다고?"

"으음."

"좀 말이 되게 이야기해 봐라. 그냥 니 맴대로."

철두가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내 부족인데 내 부족이 아닌 것 같다."

"고구려 말이가?"

"어, 맞다."

"와 그래 생각하노?"

"그냥, 낯설다. 내 집이 내 집이 아닌 것 같고, 내 부하가 내 부하가 아닌 것 같다."

"흐으으음."

강용철은 깊게 숨을 뱉으며 함께 고심했다.

"할배가 니 만나기 전에 이야기해준 적 있더나?"

"건달 했던 때?"

"아니, 그 뒤에."

"노숙자?"

"그래."

철두가 강용철을 물끄러미 보았다.

"없지."

"흐흐, 믿었던 형님한테는 버림받고, 한순간 인생이 추락한 기라...."

허공에 시선을 둔 강용철의 눈이 깊어졌다.

마치 과거의 순간을 보는 듯 머릿속에 생생하다.

"버려진 꽁초나 주워 피고, 돈이라도 조금 생기면 맨날 소주만 뭇는 기라. 그거라도 안 무먼 견딜 수가 없었거든."

"...."

"그때 할배가 와 그래 살았는지 아나?"

"모르지."

"사는데 이유가 없는 기라. 그냥 숨만 붙어있는 기지. 그냥 산송장이나 다름없다 이 말이다."

"그 이야기가 무슨 상관이야?"

"에헤이, 들어봐라."

숨을 가다듬은 강용철의 시선이 철두에게 향했다. 그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죽지 못해가 살매 세상이나 원망하던 술주정뱅이 노숙자가 뒷골목에서 요만한 꼬맹이를 만난 기라."

"...."

"겨우 꼬추만 가리는 거적때기 하나 입고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데, 쥐를 생으로 뜯어먹고 있는 기다...."

강용철은 그때를 떠올리며 팔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할배는 그때 그 눈빛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데이."

충격이었다.

티 없이 맑은 눈은 어떤 폭발적인 에너지를 닮고 있었다.

"후후후, 기억난다. 그때 할배가 편의점에 도로 들어가가 술을 빵으로 바꿔왔지."

"그래. 맞다. 맞다."

강용철은 해맑게 웃고는 한동안 허공을 보았다.

"철두야."

"듣고 있다."

"그때 니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

"저래 쪼매난 것도 살라고 저리 발버둥인데, 인생 다 망한 거처럼 지랄하던 기 마 부질없어지던 기라."

"...."

"술이 팍 깻붓는 것처럼 정신이 돌아오는 기야. 할배가 그때부터 니를 키우기로 마음먹었다."

"후후, 재밌었다."

철두의 얼굴에 맑은 웃음이 떠올랐다.

할배 손잡고 길거리를 떠돌던 때가 생각났다.

폐지나 공병을 주워다 팔고, 사정이 딱했는지 고물상에서 빌려준 리어카로 더 많은 고물을 줍고....

"철두야."

강용철의 시선이 철두를 보고 있었다.

바바리안 꼬마를 처음 만났던 노숙자는 여신의 대사제가 되어있었지만....

"니는 누가 뭐라 해도 내 손주다."

"...."

"잡아먹힐 필요가 없는 기라."

배신에 대한 허무함과 원한으로 인생을 내던진 자신과 같은 경험을 손주가 할 필요는 없다.

"왕 자리가 무거우먼 언제든 내리 놔도 된다."

"...."

"니가 불편하먼 안 쓰먼 되는 기라. 고구려 왕이 어쩌고저쩌고 기대를 받니 마니 지랄삥 하지 마라 캐라."

"...."

"니 싫으면 때리 치아뿌라. 할배가 니 하나 못 먹여 살리겠나? 다시 리어카 끌어서라도 니는 밥 안 굶긴다."

강용철의 말에 강철두가 크게 웃었다.

무언가 막혔던 것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하하하하하!"

한밤중의 고구려 국왕성.

시원한 웃음이 아리아 여신의 대신전에 울려 퍼졌다.

304화 초심

"할배, 고맙다."

"흐흐, 할배는 항상 니 편이데이."

"알지!"

강철두는 벌떡 일어섰다.

"더 있다 가지?"

"진태를 보러 가야겠다."

"허허, 그래라."

강철두의 어깨가 한결 가벼워 보였다.

"후후후."

철두는 실실 웃으며 신전을 나섰다.

마주치는 이들마다 길옆으로 비켜서 가만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래, 수고가 많다."

"감읍하나이다. 전하."

철두는 더 이상 그들의 행동이 불편하지 않았다.

내성에서 가장 가장 큰 구역 넷을 나누자면, 대왕이 기거하는 궁전인 대왕전이 첫째요, 두 번째가 정무를 돌보는 국무관이다.

셋째가 신전이고, 넷째가 친위대의 연무장이다.

국무관은 10층의 높고 큰 건물로, 고구려의 내각을 이루는 거의 모든 행정기관들이 몰려 있었다.

국무관 정문을 지키고 있던 경계병이 철두를 보곤 절도있게 고개를 숙였다.

"대왕! 어인 일이십니까?"

"진태 안에 있느냐?"

"예에, 대왕."

"가자."

"예에."

병사가 곧장 철두를 안내해 10층으로 향했다.

10층엔 딱 두 가지 기관만 자리 잡고 있었는데, 가장 큰 단체인 정보청과 재상의 집무실이다.

"이곳입니다."

"그래. 준필이는 어딨나?"

"국무총리께서는 9층에 계십니다."

"좀 불러와라."

"예에, 대왕."

철두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단출하게 꾸며진 집무실의 중앙테이블에 홀로그램 맵을 펼쳐놓고 고심하는 진태가 보였다.

"누구? 어? 철두야."

"후후, 바쁘냐?"

"아니, 들어와."

김진태는 철두의 얼굴을 보며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뭔 좋은 일 있냐?"

"후후후."

"나 참, 커피 줄까?"

"커피도 있어?"

"있지, 왜 없어. 이건 무역으로 들여온 거라 아직 비싸다. 흐흐."

철두는 여전한 김진태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났다. 어쩌면 변한 건 2년간 고군분투한 이들이 아니라 철두의 마음이었는지도 몰랐다.

"커피 말고 술이나 먹자. 준필이도 불렀다."

"총리님도?"

"그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허허, 대왕께서 어인 일로 이 노구를 부르셨습니까?"

철두가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친구끼리 술이나 먹자."

"하하하, 그거 좋지."

김진태는 테이블 위에 펼쳐두었던 홀로그램 맵을 해제하고 곧 사용인을 부려 술상을 봐오게 했다.

"이 밤중에 웬일이야?"

"꼭 일이 있어야 오냐?"

"허허허, 이리 벗끼리 모이니 꼭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군."

사석이기에 격의 없이 대하는 그들을 보자 철두는 고민이 무색했음을 느꼈다.

"미궁에 다녀와서 조금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표정 안 좋아 보이긴 하더라."

눈치 빠른 김진태의 말에 철두가 말갛게 웃으며 술을 따랐다.

"내 것이 내 것이 아닌 기분이었다. 고구려가 내 나라가 아닌 것 같았지. 나 없이도 이리 잘 굴러가는구나. 그런 소외감이 들었다."

"헐, 너 안 왔으면 우리 다 멸망했어. 겨우겨우 버텼다, 진짜."

몇 순배의 술이 돌고, 가만히 듣기만 하던 박준필이 입을 뗐다.

"자네들은 아직 어려 경험이 없겠지만, 자식 농사가 꼭 그렇지."

"자식 농사?"

"자식이 태어나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라네. 이 작은 아이를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겠다는 마음이 들지."

"...."

철두와 진태는 친구를 떠나 어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갓난아기는 부모의 양육 없이는 먹고 마시고 싸는 것 어느 것도 할 수 없지. 손이 많이 간다네. 힘들지. 아주 힘든데 이게 역설적이게도 힘든 만큼 보람차고, 또 행복하다네."

박준필은 이미 장성한 아들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반추하며 이야기를 이었다.

"부모밖에 모르는 아이가 점점 커서 사춘기가 오면 부모로부터 멀어지려 한다네."

"배은망덕하군."

"아닛, 철두야 좀 듣자."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박준필은 손주까지 본 할아버지니.

"준필이가 우리 중 가장 번식의 베테랑이지."

"...아니, 철두야. 육아라고 하자."

"후후후."

"큼, 아무튼 그때의 부모는 참 많이 상처받는다네. 섭섭한 게지. 나밖에 모르던 아이가 벌써 저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양 굴면 밉기도 하지."

"...!"

철두는 불현듯 벼락을 맞은 듯 몸이 굳었다.

박준필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동시에 대견하기도 하다네. 철두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

"자네가 이룩한 이 나라가, 자네의 손길 없이도 이리 버텨낸 게 섭섭한가? 대견한가?"

"후후."

철두는 쓰게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오늘 낮까지만 해도 섭섭했지."

꿀꺽!

단숨에 잔을 비우곤 씩 웃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견하다."

"흐흐, 우리 참 피똥 싸게 노력했다네."

"맞아. 총리님 없었으면 진짜...."

"아닐세, 재상 각하가 중심을 잘 잡아줬지."

공치사하는 둘을 보며 철두는 더는 소외감이 들지 않았다.

"둘 다 고생 많았다."

"허허허, 듣고 싶었던 말이로고."

"당연한 걸 뭘 칭찬하냐."

두 사람의 얼굴에 가득한 미소를 보며 철두는 잔을 뻗었다.

"건배하자."

"그래! 철두야, 건배사 해라."

"자네가 하게. 대왕으로서! 우리들의 리더로서!"

강철두는 씩 웃었다.

더 이상 마음속 혼란은 없다.

"제국을 향하여!"

""제국을 향하여어!""

셋이 잔을 부딪치곤 쭉 들이켰다.

끝모르고 들이부어진 술자리는 늦게까지 계속되었고, 어느새 주제는 앞으로 고구려의 향방에 관해서로 바뀌었다.

"난 더는 흔들리지 않는다. 강해진다."

초심을 찾았다.

강해진다.

그 누구보다 강해져 내 것을 뺏기지 않을 것이다. 고구려의 대왕으로서 해야 하는 가장 큰 임무가 그것이다.

"진짜 마법진이든 육로든 닿는 모든 지구 출신 마을을 제후로 둘 거야. 정복자의 길? 그거 나한테 맡겨둬라."

전쟁은 지구 출신 범생이를 내정 전문 재상으로 키워냈다. 강철두는 이제 진심으로 고구려를 걱정하지 않고 어디든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제후도 좋지. 허나 결국은 고구려연합이 아닌 고구려의 힘이 커져야 하네. 제후국을 받으며 국민들의 이동을 자유로이 해야 할 게야."

인구는 노동력과 군사력 경제력 모든 것의 기초다. 이동의 자유만 보장해준다면 결국 사람들은 고구려로 몰리게 되어있다.

이전에도 그렇지만, 강철두가 건재한 고구려는 앞으로 미친 듯이 발전하게 될 테니까.

"아, 철두."

"말해라."

"이제 더는 수호수에 주화를 기부해도 탐험 퀘스트가 뜨지 않는다네."

"음?"

시작의 맵인 C 문자로 시작하는 맵은 모두 수호의 나무를 가지고 있었다. 본디 주화를 50개만 기부하면 탐험 퀘스트를 받아 탈것을 얻을 수 있었다.

"펫 주머니가 있지 않나?"

"그렇지. 펫 인벤토리든 탈것 인벤토리든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지만, 진짜 문제는 더 이상 맵 외곽지에 말이 출몰하지 않는다는 것이네."

"그건 문제군."

고구려의 전 병력은 기마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모두가 적게는 한 필, 많게는 세 필씩 탈것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게 맵 외곽지에 리젠되는 야생마로 인해 가능한 것이었는데, 이제 그 말을 공급받기 어렵게 되었다.

"시기를 얼추 유추해보니 정복자의 길을 천명하고부터라네.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큰 이벤트라곤 그게 전부야."

"으음."

철두가 턱을 쓰다듬었다.

"퀘스트 연구야 마적대장 김춘배가 열정적이니 그에게 물어보면 될걸세."

"내일 찾아가 보도록 하지."

"허허, 그리고 제후들이 늘어난 김에 그들의 엘리트 병력들을 일부 지원받아 부대를 창설하는 건 어떤가?"

"주려 하겠나?"

"안 줘도 뺏어와야 할 판이네."

박준필이 조금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몬스터가 증발한 이후로 스탯석이 몹시 귀해졌어. 지난 전쟁 동안 비축해왔던 스탯석을 거의 소모하다시피 했다네."

"으음."

스탯석이 없으면 자체적인 랭커(기사)의 성장은 막힌 것이나 다름없다.

"제국이 바보라서 기사단을 양성하지 않은 게 아니었군."

"그렇네. 이제 우리는 일종의 초보자 버프가 끝난 셈이지. 추측키로 정복자의 길을 천명한 이상, 지구 출신의 인간들의 노바 적응은 끝났다고 여기는 모양일세."

초보자 버프가 끝났다.

이제는 노바에 정착한 모든 이가 상황이 똑같아졌으니....

새삼 왜 돈 많은 귀족 가문에서만 기사들이 배출되는지, 왜 굳이 스탯이 낮은 병사들로 부대를 이루는지 등이 이해되었다.

동시에 죽은 기사들의 부활이 기다려지기도 했다.

"아직 지구 출신의 개척 마을들은 저마다 보유한 스탯석이 꽤 될걸세."

박준필은 눈매를 좁히며 조금 비장하게 말했다.

"모든 도시와 마을들이 순순히 그것들을 주진 않을 걸세. 필요하면 힘을 보여서라도 확보하는 게 중하네."

스탯석을 상납받고, 이미 그 스탯석으로 성장한 기사들도 포섭해 와야 했다.

철두는 씩 웃었다.

전처럼 그는 모든 것을 혼자 하려 하지 않았다.

"내 힘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라."

"허허허, 알겠네."

"내일부터 제후들 올 거야. 이미 충성을 맹세한 제후들이라 해도 속마음은 다 다를 거야."

대세를 따르는 자, 겁화를 피하고자 하는 자,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자, 등등.

누구보다 빠르게 고개 숙인 이들이기에 계산적인 이들이 많을 터.

"이해득실을 따져 계산기 두드리려 할 거야."

"다 알아들었다. 진태."

씩 웃는 철두의 송곳니가 반짝였다.

"계산기를 부숴주면 되는 거 아니냐?"

"하하, 그렇지."

세 친구는 한참을 대작하다가 동이 새벽녘 동이 터올 때가 되어서야 자리를 파했다.

철두는 왕의 거처인 대왕전에 돌아와 아르엘라와 마주했다.

"으으, 술 냄새."

"후후후."

"해장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보다 심상 수련이 우선이다."

"어휴, 알겠어."

철두는 아르엘라와 손을 잡곤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곧 마음의 눈을 떴다.

파파팟.

메마른 언덕.

회색 바위 무덤 같던 언덕의 끝에서 비탈면을 타고 내려와 익숙한 숲으로 향했다.

녹음으로 물들어 바람결에 휘날리는 나무는 얼추 12그루. 제법 넓은 공간이 푸른 숲으로 변해 있었다.

투루루룩. 툭!

미끄럼틀 타듯 비탈을 내려온 철두가 이제는 익숙한 투명장벽에 부딪혀 더는 나아가지 못했다.

반달 모양으로 퍼진 초록 나무들 앞에 섰다.

곧 숲 너머가 부스럭거리더니 아버지 카다잔과 아르엘라가 모습을 보였다.

"어?"

"음?"

두 사람은 벽 앞에 와서는 자신을 보며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에이든! 키가 자랐구나."

"이제 꼬마라고 못 부르겠는데?"

에이든은 그들의 반응에 제 손과 발을 눈앞에 들어 보았다.

"어?"

진짜 손이 커졌다.

맞은편에 선 아르엘라와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키가 한 뼘 이상 불쑥 자란 셈이다.

"성장했구나. 나의 아들."

카다잔은 누구보다 뿌듯해했고, 아르엘라도 퍽 기꺼운 얼굴이었다.

"하하."

뒤통수를 긁적이던 에이든은 습관처럼 두 심상 공간을 잇는 장벽의 구멍을 더듬다가 깜짝 놀랐다.

"어어?"

겨우 손가락 하나 들어갈 정도로 작은 구멍이었는데, 에이든의 손이 불쑥 들어가 버린 것이다.

"엇!"

"허어!"

카다잔과 아르엘라는 검은 숲 영역으로 넘어온 에이든의 팔을 보곤 기겁했다.

카다잔이 얼른 다가가 손을 맞잡으니,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와아!"

"...에이든."

목소리만 이어져도 감격이고 좋았는데, 이제는 서로 손을 맞잡고 있으니 두 부자는 다시금 감정이 격앙되었다.

작은 바바리안의 마음은 오늘 크게 성장했다.

그 성장만큼 두 마음을 잇는 통로가 더 커졌다.

305화 대왕 알현

세상에 같은 마음을 가진 자는 없기에, 각각의 심상공간은 별개의 차원이다.

심상공간 '메마른 언덕'과 '검은 숲'은 정령들의 폭발 이후 계속해서 연결되었다.

두 차원의 연결점은 처음엔 손가락 하나 정도의 작은 구멍이었으나 지금은 팔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넓어졌다.

한 뼘 정도의 공간을 두고 바바리안 부자는 뜨겁게 악수하며 서로의 체온을 나눌 수 있었다.

"흐으음."

아르엘라는 이제 녹음이 짙어져 싱그러운 내음이 가득한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아 바바리안 부자를 보았다.

오늘은 여느 때와 달랐다.

투명한 차원 벽을 사이에 두고 늘상 도끼술을 가르치던 큰 바바리안과 작은 바바리안이 아니다.

우람한 카다잔의 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제 제법 자라 바바리안 소년 정도는 되어 보이는 에이든이었다.

키도 훌쩍 커 카다잔의 어깨 정도까지는 왔고, 아르엘라와는 아예 키가 비슷했다.

"흐음, 많이 컸네, 우리 신랑."

아르엘라는 피식 웃으며 두 부자를 계속 구경했다.

바바리안 부자는 구멍 뚫린 차원 벽 앞에 서서 담론하고 있었다.

"당연한 이치다. 부족장의 선택에 따라 부족 전체가 위태로워지기도 하는 법이다."

"그럼 어떻게 해요?"

"대전사의 결투로 부족장을 차지하면 된다."

우두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결투로 그 자리를 쟁취하면 된다.

답답하면 내가 이끈다가 성립되는 바바리안다운 호쾌한 전통이다.

"그럼 하루가 멀다 하고 부족장이 바뀌는 거 아니에요?"

"아니다. 부족장이 훌륭히 부족을 이끌면 굳이 대전사의 결투도 일어날 필요가 없지. 그리고 대부분 가장 강한 전사가 부족장이 되기 마련이니, 이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아버지는 가장 강했지만 부족장이 아니었잖아요?"

"...."

카다잔는 부족 내에서 가장 강력한 전사였다.

하지만 그는 일개 전사일 뿐, 부족장이 되지는 않았다.

"부족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가장 강하면 할 수 있잖아요?"

에이든의 단순하고 치기어린 말에 카다잔이 히죽 웃었다.

"바바리안은 자유로운 전사다. 부족장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도전해 부족장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다른 부족을 향하거나, 독립할 수도 있지."

"으음."

"흘흘, 바바리안은 멍청이가 아니다.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지만 또 지혜로운 지도자를 원하기도 한다."

"아버지가 지혜롭지 못했다는 의미인가요?"

"난 뾰족한 사람이다. 내가 부족장이 되었다면, 많은 전사들이 불만을 품고 부족을 떠났을 것이다."

아버지의 대답이 불만족스러운지 철두는 여전히 쀼루퉁한 얼굴이었다.

"너는 이미 너의 부족을 이뤘다. 그 운용방식까지 구시대적으로 따를 필요는 없다."

"흐흐, 제 부족을 직접 보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호오, 기대가 되는구나."

"진태라고 제 친구가 있는데, 녀석이 귀찮은 건 다 합니다. 준필이라고 늙은 친구가 있는데 얘도...."

에이든은 한참이나 자신의 부족에 대해 떠들었는데, 그 모습이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낸 아이와 같아 흐뭇하면서도 설렜다.

그걸 지켜보고 있던 아르엘리가 흠칫했다.

"어? 설레?"

자신의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부정도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야 그럴 수 있다지만, 믿음, 든든함, 신남, 뿌듯함 등등....

그녀는 생각지도 못한 묘한 마음을 느끼는 중이다.

"...동기화되고 있어...."

자신의 마음이 아니다.

저기 해맑은 얼굴로 신나게 떠드는 에이든의 마음이다.

아르엘라의 시선이 숲으로 향했다.

작은 구멍일 때에 비해 배는 더 빨라진 속도로 숲이 제 색깔을 찾고 있다.

가만히 바라보면 그 경계가 조금씩 조금씩 늘어나는 게 눈에 보일 정도다.

두 부자의 대담은 꽤 길어졌는데, 먼저 자리를 파한 건 카다잔이었다.

"오늘도 제법 시간이 흘렀으니 이만 나가 보도록 해라."

"벌써요? 전 아직 멀쩡해요."

카다잔이 고개를 저었다.

"심상수련이 과하면 아니한만 못하다. 삶의 균형은 중요하다. 마음과 신체가 엇나가는 실수를 하지 마라."

"...알겠어요."

아버지와 헤어지는 게 아쉬워 못내 수긍하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에이든."

"왜요?"

"넌 훌륭한 부족장이 될 게다."

에이든이 씩 웃으며 아버지를 배웅했다.

"이미 그래요."

"허허."

꾸벅 인사한 에이든과 아르엘라가 동시에 자취를 감췄다.

"...."

주인이 떠나버린 심상공간.

두 공간은 여전히 이어져 있으며, 카다잔만이 홀로 서 있었다.

"흐으음."

저 너머 메마른 언덕 위로 언뜻 보이는 푸른 나무의 가지 끝이 보인다.

벌써 저렇게 자랐구나.

메마른 언덕에 피어난 유일한 나무 한 그루는 에이든의 성장에 발맞춰 빠르게 자라나고 있었다.

메마른 언덕의 저 한 그루 나무가 높이 자라는 게 빠를지.

검은 숲의 나무들이 제 빛깔을 찾는 게 빠를지.

자박, 자박.

선조의 혼으로서 강림한 카다잔은 오늘도 제 할 일을 마친 듯 검은 숲 한편에 위치한 오두막으로 향했다.

*

고구려 대왕전.

쭉 늘어선 제후들이 바리바리 선물을 사들고 찾아와 대왕 강철두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마이클 시티의 스미스 대왕님께 인사드립니다."

"반갑군."

지구와 노바간의 포탈이 닫히고 난 뒤, 노바에 자리 잡은 개척마을들은 저마다 홍역을 겪었다.

본디 각국에서 엄청난 지원을 받아 성장하고 자리 잡은 개척마을들이지만, 그 본국과의 연결이 끊어지며 독자적인 세력으로 거듭났다.

고구려처럼 정부와 관계없는 인물이 정부에서 키운 마을들을 집어삼켜 국가로 발전시킨 경우는 소수다.

대부분의 시티나 마을들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성장한 무력단체가 정권을 잡아챘다.

독전대를 휘어잡은 료가 사쿠라시티를.

블랙드래곤 용병단장 스미스가 마이클시티를 손에 넣은 것처럼 말이다.

"제임스에게 이미 이야기를 들었다. 무엇을 내어 줄 테냐?"

"마이클 시티는 고구려라는 큰 우산을 쓰게 되었으니, 블랙드래곤 기사단의 7개 조를 파견하겠습니다."

본디 제임스가 이끌었던 블랙 드래곤 용병단은 14개 용병대의 연합체였다.

제임스가 불현듯 단장 자리를 집어던지고 강철두에게 합류한 이후로 스미스가 단장역을 맡고 있었다.

이후 마이클시티가 독립하며 용병대는 기사단이 되었고, 그중 7개 조라면 기사단 무력의 절반에 해당하는 큰 전력이다.

"후후, 좋다. 너를 백작에 봉한다."

"영광이옵니다. 대왕."

마이클 백작이 된 스미스가 고개를 조아렸다.

"제임스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연회를 즐기게나."

"예에, 대왕."

마이클시티에서 고구려로 소속을 바꾼 옛 동료들이 많기에 마이클은 웃으며 물러났다.

"다음은 개경의 이석개입니다."

북한 최고의 노비스였던 이석개다.

그는 정부의 입김이 여전하던 때에 아예 쿠데타를 일으켜, 북한 정권을 잡은 사내다.

이후 노바의 개척 마을을 개경으로 명명하고 모든 국가역량을 모아 발전시켰기에, 개경의 세력은 상당했다.

반삭한 머리의 이석개는 깐깐한 얼굴이었는데 강철두의 앞에서 절도있게 엎드려 절했다.

"대왕을 뵙습니다."

"의외군."

"...."

"개경의 세력이 크다 들었는데 이리 제후를 청한 이유가 있나?"

"개경성이 크다 한들 노바에서는 한 줌이옵니다."

"호오, 그래도 이리 선뜻 고개를 숙일 줄은 몰랐는데."

"쇄국의 폐단과 고통을 알고 있는데 어찌 같은 잘못을 반복하겠습니까?"

"그대 결정이 그렇다 해도, 북한 주민들의 반발이 없었는가?"

이석개가 진지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지었다.

"의도하신지 모르겠사오나, 국호가 고구려임에 많은 혁명전사들이 환호하고 있습니다."

"오호!"

"제국에 흡수되느니 고구려의 일익이 되는 게 더 낫지 않겠사옵니까?"

"후후후, 좋다. 너는 병력과 물자를 얼마나 낼 테냐?"

"개경성이 크다 하나, 온전히 지역을 장악한 것도 아니옵니다."

개경이 자리 잡은 맵 N2790은 절반은 쿠하라 왕국이 차지하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번에 흔쾌히 고구려의 막하로 들려고 한 이유에 쿠하라 왕국과의 지난한 전쟁이 한몫할 터다.

"개경성을 아예 들어바치오니, 고구려로 삼아주십시오."

제후로 인정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아예 고구려의 직할령으로 삼아 달라 하니 이는 너무 파격적인 행보였다.

개경에 대한 지배권을 아예 내놓겠다는 것이다.

철두가 슬쩍 김진태를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할 만하다 여긴 것이다.

여태 엎드려 절한 채 고개를 조아린 이석개의 행동이 퍽 이해가 되었다.

"원하는 바가 있느냐?"

"제가 가진 능력이 일천해 인민들을 배불리 먹이고, 살리는 재주가 없습니다. 허나, 혁명전사들과 목숨을 바쳐 싸우는 것에는 조금의 재주가 있으니, 전장에 설 기회를 많이 주시옵소서. 제가 가진 창의 날카로움을 증명하겠습니다."

철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내 너를 나의 창으로 쓸 것이다. 그리고 그 창을 첫 번째로 내지르려 하니, 쿠하루 왕국은 더는 개경성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고구려의 제일가는 창이 되겠사옵니다!"

철두가 가만히 이석개를 보다가 물었다.

"너의 창술이 몇 레벨이냐?"

"4레벨이옵니다."

명인의 경지다.

또한 영약으로 신체 재구성이 가능한 레벨.

"개경에 영약이 없더냐?"

"아직 구하지 못했사옵니다."

철두가 인벤토리에서 백년급 영약 하나를 꺼내 주었다.

"이것으로 나의 창이 더욱 날카로워지기를 바라니, 네가 취해라."

"감사하옵니다. 대왕."

외양만큼이나 단단해 보이던 이석개가 답지 않게 손을 떨었다.

"연회를 즐기다 돌아가라. 보름 내 출정할 것이니 부대를 정비하라."

"예, 대왕!"

철두는 이후로 제후가 된 이들을 계속 만났고, 병력과 스탯석 같은 물자를 받고 그 양에 따라 작위를 나눠주었다.

실상 작위에 따른 어떠한 차별도 없어, 남작이나 백작이나 이름만 다르지 같은 제후였다.

제후들이 모인 자리에서 떠들썩하게 연회를 즐기며, 각 제후들이 당면한 문제를 취합하니 예측한 대로 위태로운 곳이 많았다.

대왕전의 대왕 집무실에서 고구려를 이끌어가는 세 친구가 모였다.

"다들 자잘하게 반목하는 세력들이 있어."

"흘흘, 그렇겠지. 그러니 다들 냉큼 고구려의 문을 두드린 게지."

박준필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다. 정해라. 진태."

"으음."

"어디부터 정리할 거냐?"

"동시에 해야지."

"오!"

김진태는 홀로그램 맵을 뛰었다.

고구려의 세력창은 전에 비할 바 없이 복잡해져 있어, 강철두는 아예 잘 건드려보지도 않았다.

강철두가 한 일이라곤 세력창의 권한을 김진태에게 모조리 허용한 것이 전부다.

"개경엔 철두 네가 가야 해."

"좋다."

"대신 추가 병력은 없어. 거기 혁명전사? 그 사람들하고 가. 그게 전부야."

"후후, 식은 죽 먹기군."

"나머지 급한 전장은 5곳 정도야. 이번에 집결한 제후들 병력들을 죄다 섞어서 새로 부대를 만들 거야."

제후들이 내어놓은 병력들은 모조리 찢어 새로 부대를 배치해, 고구려에 녹아들게 만든다.

출신 세력별로 부대를 운용하면 처음이야 합이 잘 맞고 전투력이 좋겠지만, 그들은 영원히 아군이 아닌 우군으로 남을 터다.

"좋아. 알아서 해라. 난 출진 전에 아이리스 후작령에 다녀오겠다."

"그래, 맡겨놔. 이젠 진짜 이건 익숙하다."

"힘 딸리면 말해라."

"흐흐, 너 하나 있고 없고 차이가 얼마나 큰데."

전에는 실패하면 안 되는 싸움이었지만, 이제는 실패해도 수습해줄 철두가 있기에 작전 수립에 있어 스트레스가 아예 없다시피 했다.

제국을 향한 고구려의 제후 화합 연회는 계속되는 한편, 속속 제후들이 내어놓은 상위 노비스급 병사들이 아이언헤드성으로 집결했다.

306화 이심전심

"그렇게 해. 난 그전에 개경 성 한번 다녀와야겠다."

"으음, 호위는 꼭 데려가게나."

박준필이 우려를 드러냈다.

"에이, 설마 함정이려고요."

"이석개가 진심이라 한들 개경의 모든 의견이 그러할지는 모르는 게야. 호위에 만전을 기하는 게 좋을 것 같네."

이석개가 넙죽 고구려로의 편입을 희망해왔다고 해서, 아직 개경의 모든 인민들이 그러할지는 모를 일이다.

"이건 준필이 말이 맞다."

"어유, 걱정 마. 그럴 테니까."

박준필의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이 호선을 그리며 웃었다.

"재상. 고구려에서 자네가 차지하는 위상이 결코 가볍지 않네."

"어유, 알죠. 호위 데려갈 테니 걱정 마세요."

"결사대도 내어주지. 데려가라."

"그 사람들은 너 따라다니기로 했잖아?"

"후후, 처갓집 가는 데까지 데려갈 필요는 없다."

"어우, 알겠어."

지르골과 사토라면 호위에 문제가 없다.

고구려 왕국에 여러 제후들이 합류하며 고구려 연맹이 출범함을 알렸다.

제법 세력이 대단해졌지만, 아직 많은 지구 출신 개척 도시들이 남아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눈치 보고 있는 자들이 다수였고, 어떤 마을은 이미 노바의 구세력들에 편입된 이들도 다수였다.

이미 제국의 제후가 된 자도 있었고, 왕국이나 제국에 멸망해 편입된 이들도 다수다.

고구려의 본격적인 정복 전쟁은 강철두가 아이리스 후작령에 다녀온 뒤부터 시작될 예정이었다.

*

강철두와 아이리스는 단출하게 아이리스 후작령으로 향했다.

숲의 외곽에 위치한 아이리스 성을 지나쳐 요정족에게만 출입이 허가된 숲에 다시 한번 바바리안이 발을 디뎠다.

요르센 아이리스 후작은 오랜만에 보는 공주와 그 부마를 보며 미소 지었다.

"외유가 점점 길어지십니다. 공주님."

"허, 뭐야? 나보고 숲에 틀어박혀 있으란 소리야?"

"허허허! 그럴 리가요. 죽을 날이 다 되어가는 노인의 투정으로 여겨주십시오."

"흐음."

아르엘라는 흘깃 그를 째려보았다.

"영감은 오래 살 거야. 그런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허허허, 그야 모를 일이지요."

"쓰읍."

"하하, 알겠습니다. 노인이 말 조심합지요."

요르센이 인자하게 웃었으나, 아르엘라의 얼굴은 불만이 가득했다.

옆에서 지켜보면 꼭 토라진 손녀 놀아주는 할아버지 같은 모습이었다.

실제로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아르엘라는 부모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자랐다. 그녀가 태어난 뒤로 아버지이자 어머니처럼 키워준 것은 요르센 장로였다.

그런 장로가 죽니 마니 앓는 소리를 하니 아르엘라가 심통이 나는 것도 당연했다.

"어인 일로 아이리스 후작령에 행차하셨습니까?"

"뭐야? 내 집에 내가 오겠다는데."

"허허허."

철두는 요르센이 몇 번 더 아르엘라를 놀려주는 것을 구경하다가 본론을 꺼냈다.

"그때 의식을 한 이후로 아르엘라와 나의 심상 공간이 이어졌다."

"흐으으음. 바바리안의 심상과 요정의 심상이 이어졌다라...."

"아는 게 있나?"

"...."

요르센이 고민에 잠긴 모습을 보며 철두는 더 재촉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과연, 공주님의 혜안이 정확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뭐?"

"공주님과 부마님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정령을 가진 바바리안과 선조의 혼을 받은 요정의 뒤바뀐 운명에 관해서였다.

"그랬었지?"

"두 사람의 운명이 뒤얽힌 과거를 짚어내자면... 역시 그분밖에 없습니다."

"누구?"

"우리 고향의 유일신이신 발할라지요."

"...."

"...."

철두와 아르엘라가 동시에 침묵했다.

발할라는 최초의 바바리안이라 불리지만, 요정족에게도 신이었다.

"발할라께서 계신 이후에 요정과 바바리안이 났으니.... 그분의 강건한 육체의 축복을 받은 것이 바바리안이요, 그분의 자애로움과 태초에 심은 첫 번째 나무, 세계수를 따르는 게 우리 요정이지요."

바바리안은 그 힘과 단련된 육체를 숭상했고, 요정은 조화로움과 자연과 소통하는 그의 친화력을 숭상했다.

훗날 두 종족은 서로 원수지간과 같은 사이가 되었으나, 태고에서 나길 같은 것에서 난지라 어찌 보면 한배에서 난 쌍둥이와 같았다.

"그건 그냥 신화잖아?"

"허허허, 세상에 거짓으로 이뤄진 신화는 없습니다. 공주님."

강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턱을 쓸었다.

"그럼 나와 아르엘라의 마음이 이어진 게 발할라의 안배라는 소리냐?"

"제가 그분의 종이 아님에야 어찌 알겠습니까? 다만 신의 안배와도 같이 맞아떨어지니, 공교로운 운명이 아니겠습니까?"

철두가 대뜸 물었다.

"발할라에게 물어보자."

"...?"

"...?"

깜짝 놀라는 아르엘라와 요르센을 보며 철두가 턱을 긁적였다.

"안 되나?"

"허허, 바바리안족의 주술 중에 신과 대면하는 종류의 것이 있습니까?"

"어머니가 주술사였지만, 난 주술에 대해 잘 모른다."

"흐음, 적어도 요정족에겐 없습니다."

"흐음."

요르센이 한참 고심하더니 말했다.

"요정족은 정령의 역사와 같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지요. 발할라와 가장 가까이 든 이까지는 말이 닿을 수 있습니다."

"오, 그게 누구냐?"

"발할라의 친우였던 자들. 태초의 정령이었던 존재들."

"...?"

"정령왕입니다."

"허, 그럼 그 정령왕을 불러내 봐라."

"허허허허, 그것이 어찌 그리 뚝딱 이뤄지겠습니까?"

요르센의 시선이 아르엘라에게 머물렀다.

그 눈빛에 어쩐지 안쓰러움과 걱정 연민이 가득했다.

"어떻게 하냐?"

철두의 재촉에 요르센이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정령왕은 정령계에서도 오직 넷뿐인 존재. 역사에 그들이 강림한 것은 오직 다섯 번뿐입니다."

"빙빙 돌리지 말고 결과만 말해라."

"요정족. 그중에서도 하이엘프, 그 와중에도 혈통을 타고난 자들 중에 자질이 뛰어난 자들의 몸에 깃들어 계약하는 게 정령왕이지요."

계약은 정령계에 기반을 둔 그들이 터전을 계약자의 심상 공간으로 옮기는 것.

정령계에 가장 높은 존재인 정령왕이 터전을 옮기려면 어지간한 자질로는 턱도 없는 일이다.

"그게 아르엘라라는 말이냐?"

"허엇."

"난 바보가 아니다."

요르센은 생각보다 눈치 빠른 강철두를 보며 바바리안에 대한 편견을 하나 고쳤다.

"그렇소. 공주님이야말로 정령왕과의 계약을 해낼 자질을 가진 유일한 분이십니다."

"으음."

철두가 턱을 쓰다듬었다.

"결국 제자리군."

지금 강철두와 아르엘라의 심상 공간이 서로 연결된 것에 대한 의문으로 발할라를 대면하고자 한다.

허나, 발할라와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 친우인 정령왕과 계약하려면 아르엘라의 심상 공간 검은 숲이 온전히 제 색깔을 찾아야 한다.

"정령왕과 계약하면 이미 지금 의문도 필요치도 않겠군."

검은 숲이 녹음을 찾으면, 두 사람의 심상 공간이 어떤 식으로든 변화할 테니까.

겪어보지 못한 미래가 궁금한 것이지, 이미 벌어진 일이라면 점치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됐다. 이미 필요 없군."

아이리스 후작령에 오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여겼건만, 여기도 해답은 없다.

"...."

"넌 표정이 왜 그러냐?"

"어?"

어두운 안색의 아르엘라를 보며 철두가 채근했다.

"어디 안 좋냐?"

"아, 아니."

"...?"

"이만 자러 가자."

"난 아직 밥 덜 먹었다."

아르엘라가 식탁을 보더니 철두를 한번 보고 고개를 저었다.

"나 먼저 갈게."

"후후, 그래라."

철두가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음식을 먹었다.

식기들이 철그덕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와중에 요르센이 말했다.

"눈치가 빠른 건지, 나쁜 건지 이젠 모르겠군요."

"음? 눈치 같은 걸 왜 보나?"

"흐음."

요르센이 이마를 짚었으나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요정족의 위기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날 바보 취급하는 거냐? 당연히 기억한다. 노바에서 정령계와의 연결이 끊어져서 그런 것 아니냐?"

"맞습니다. 기억하는군요. 그를 위해 세계수를 노바에 심는다는 게 우리의 계획입니다."

"알고 있다."

요르센은 여전히 식사에 열중인 철두를 보며 조금 마음을 가다듬고는 말문을 열었다.

이미 부마 된 입장에서 그도 알긴 알아야 할 터다.

"지금 노바의 요정족 중에 정령왕과 계약할 자질을 가진 건 공주님이 유일합니다. 그것을 위해 일단 당신이 가진 정령이 필요했지요."

본래의 계획은 그러했다.

두 사람의 심상 공간에 존재하는 '정령'과 '선조의 혼'을 서로 바꾸는 것이 가능한지 '세계수의 잎'을 사용한 의식으로 알아봤다.

가능하다면 '세계수의 가지'를 획득해 더 강력한 의식으로 정령과 선조의 혼을 바꾸려 했다.

"그리하여 심상 공간에 정령을 들여 검은 숲을 먼저 치유하는 게 계획이었죠. 허나, 이미 검은 숲이 치유되고 있으니 굳이 무리하여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바꾸려고 해도 정령이 없다."

"후후후,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정령은 당신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

"한번 터전을 자리 잡은 정령은 계약자가 죽기 전까지는 정령계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노바에서는 정령계와 단절되어 있으니, 당신이 죽을 때 그대로 소멸하겠죠."

"허, 내 친구들이 아직 살아있다는 말이냐? 그때 터진 이후로 감쪽같이 사라졌는데?"

"살아 있습니다. 분명히."

확신에 찬 요르센의 말에 철두는 묘한 기쁨과 안도를 느꼈다.

오래된 친우들을 잃었다 생각해 상심이 컸는데, 다행이다.

"그럼 언제 돌아오나?"

"그건 모릅니다. 당신 마음에 달린 일인데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유능한 듯하면서도 쓸모없는 장로군."

"뭐라? 허허허허!"

크게 웃은 요르센은 표정을 진지하게 하고 말했다.

"계획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자면, 검은 숲이 치유되면 공주님은 희생하기로 하셨습니다."

닭다리를 쥐고 살을 발골해 낸 철두의 턱이 멈췄다.

"무슨 희생?"

"정령왕을 품을 정도의 터전을 내어 정령계와의 연결을 진행하려 했죠."

"그러니까 무슨 희생."

철두가 입에 든 닭고기를 퉤 뱉고는 닭다리 뼈를 놓았다.

"공주님의 희생으로 세계수를 활성화하려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묻지. 무슨 희생?"

철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르센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죽음입니다."

쉐애애액! 터어엉!

철두의 신형이 공간을 접듯이 순식간에 이동했다. 그의 두꺼운 손아귀가 요르센의 목을 노리고 나아갔으나 허공에 부딪혔다.

지이이잉.

반투명한 보호막을 보며 철두의 주먹이 휘둘러졌다.

터엉! 꾸응! 퍼억!

세 번의 주먹질 만에 보호막이 깨졌다.

후속 방어막을 펼치기도 전에 철두의 손아귀가 요르센의 목줄을 쥐었다.

"크윽."

목을 움켜쥔 철두가 휙 잡아당기니 요르센의 얼굴이 불과 한 뼘 거리에 놓여 있었다.

숨이 막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요르센이 철두를 보았다.

포악한 맹수가 눈앞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구 마음대로 죽나?"

"끄윽...."

철두의 눈에 살기가 가득했다.

철두는 어쩐지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죽여버릴까?

철두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려는 찰나.

"그만해!"

후우웅, 쾅!

철두는 빈손으로 날아온 도끼를 잡았다.

그곳엔 어두운 얼굴의 아르엘라가 서 있었다.

그녀가 울고 있었다.

"...."

철두는 분노가 가득한데도 눈물이 났다.

슬프고 슬프며, 고통스럽다.

그녀의 마음을 마치 이해라도 하듯 말이다.

307화 요정의 미래

"그만해."

감정이 전해진다.

이 슬픔이 내 것인지, 아르엘라의 것인지 모르겠다.

"제발, 그만해."

철두의 손아귀에서 힘이 스르르 풀렸다.

"쿨럭, 커억!"

요르센이 바닥에 주저앉아 기침하자 아르엘라가 얼른 뛰어와 그의 상태를 살폈다.

"영감, 괜찮아?"

"끄으, 괜찮습니다. 공주님."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는 철두의 얼굴은 복잡미묘했다. 아직도 푸들거리는 볼살은 분노로 가득한데, 그 눈빛은 우수에 젖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아르엘라."

"...."

철두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이 슬픔과 책임감을 이해하기 싫다."

"...."

"너를 잃을 바에야 요정족의 미래를 뺏는 게 낫다."

"내 운명이야."

"허튼소리!"

철두의 분노가 터져 나왔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모든 것을 파괴해버릴 것만 같은 포악함이 새어 나왔다.

"...에이든, 이건 공주로 태어난 내 운명이야."

"날 그렇게 부르지 마라!"

철두의 고함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나 강용철의 손자 강철두! 고구려의 국왕으로서, 왕비의 희생을 허락하지 않는다!"

"...."

아르엘라의 얼굴에 눈물이 가득하다.

어찌 그녀라고 죽고 싶을까?

"난 각오가 되어있어."

"내가 느끼는 이 슬픔이 각오인가?"

"...."

심상 공간이 연결되며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된 이때에 이미 거짓말 같은 건 소용없는 짓이었다.

"...방법이 없잖아."

"내가 찾겠다!"

"...."

철두의 이글거리는 눈이 아르엘라를, 그리고 요르센을 쏘아보았다.

"희생은 없다."

선언하듯 외쳤다.

"내 왕비의 목숨에 기생하는 종족의 운명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내게 기대든가, 내게 멸하든가의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철두!"

"택일해라. 내일 답을 들으러 오겠다."

철두가 몸을 돌아서려는데, 요르센은 그럴 필요 없다는 듯 그를 붙잡았다.

"내일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사옵니다."

"...?"

철두의 살기 어린 눈이 요르센을 향했다.

"답하라."

"본디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오로지, 공주님의 희생 대신 다른 방법을 찾고자 함이었으니...."

두 사람의 심상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장로 요르센은 깨달았다.

'공주님은 세계수를 피우지 못한다.'

이제는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종족의 미래에 희망을 품고자 한다면, 오로지 이 사람뿐이다.

"...아이리스 후작령은 대왕을 섬기고자 하오니, 부디 복속을 허락해 주십시오."

"...."

철두의 눈매가 한층 온화해졌다.

"...진즉 그렇게 이야기하지 그랬나?"

"다짜고짜 공격하시기에...."

"크흠, 다음부터는 본론부터 이야기하라."

고개를 조아린 아이리스 후작의 손에 끼워진 제국 귀족의 인장이 빛났다.

<아이리스 가문이 복속을 청합니다.>

"허락한다."

본디 제국과 귀족 사이의 봉신은 이리 쉽게 깨어질 것이 아니지만, 정복자의 길을 걸으며 수월해졌다.

고구려가 제국을 향한 퀘스트를 진행 중이기에 제국 소속 영주를 휘하로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대를 공작에 봉한다."

"감사합니다. 대왕."

요르센이 다시 한번 고개를 조아려 고구려의 제국을 향한 성물인 대향로에 충성을 맹세하며 제후로 거듭났다.

노바의 시스템이 정식으로 아이리스 가문을 고구려 소속으로 인정했다.

"일어서시오."

"예, 대왕."

일어선 요르센의 목에 벌건 손자국이 나 있어 철두가 괜히 헛기침했다.

"성급했네. 사과하지."

"괘념치 마십시오. 오히려 기쁩니다."

"변태인가?"

"...허허."

요르센이 허허롭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공주님을, 아니 왕비님을 향한 대왕의 사랑과 책임감을 알았으니 기쁘지 않을 것이 있겠습니까?"

철두는 괜히 민망해 돌아섰다.

"난 자러 간다."

아무리 철면피의 철두지만 이 분위기에 식탁에 도로 앉아 식사를 이어나가는 건 못 할 짓이었다.

이제는 공작성이 되어버린 아이리스 가문의 사용인들이 긴장한 얼굴로 철두를 침실로 안내했다.

그가 나가자 아르엘라가 요르센을 힐난했다.

"무슨 짓이야? 죽을 뻔했잖아?"

"허허허, 이렇게 살아 있지 않습니까?"

"허, 그보다 갑자기 이게 무슨...."

아르엘라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많은 요정들이 반발할 거야."

고구려가 정복자의 길을 천명하며 제국을 향한 발돋움 중이지만, 아이리스 후작령은 본디 제국이었다.

큰 배에 올라 안전한 항해를 하다가, 다시 쪽배에 오르는 멍청한 선택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더욱이 철두의 종족은 바바리안.

요정과 사이가 좋지 않은 바바리안 종족이 공주의 부군이 된 것만 해도 아직 반발하는 무리가 있는 와중이다.

그런데 이제는 요정족이 통째로 바바리안의 지배하에 들어간다니, 필시 반발이 심할 터다.

"설득해야지요."

아르엘라는 태평한 요르센의 말에 욱하는 기분이었다.

"너무 성급한 결정이잖아!"

"저는 보았습니다."

"뭘?"

"...대왕은 신화를 쓸 것입니다."

신화.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결국은 신격을 갖춰 신이 되어버린 자들의 이야기와 발자취다.

"묠니르 덕에?"

"성물도 중하지요.... 허나 저는 다른 것을 느꼈습니다."

"뭘?"

"마치 그의 행보가 발할라와 같지 않습니까?"

"...!"

아르엘라의 몸이 덜컥 굳었다.

발할라 행성의 유일신.

태초의 정령왕들과 친우이며, 누구보다 뛰어난 전사였던 신.

"...그게 정말이야?"

"하하하, 노구가 어찌 신의 걸음을 좇겠습니까? 마땅히 따를 만하니 따를 뿐이지요."

요르센의 얼굴엔 사심 없는 미소가 가득했는데, 그간 공주의 희생을 강요하는 방식인 세계수 개화가 영 껄끄럽던 건 그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요정들의 설득은 제가 맡겠습니다. 공주님은 다른 일에 집중해주셔야 합니다."

"...무슨 일?"

"이왕지사 신화시대를 여는 영웅에게 성물이 하나인 것보다 두 개가 낫지요."

"...!"

"지금 당장 궁니르를 취하러 가십시오."

너무 엄청난 소리라 아르엘라가 헛숨을 들이키는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요정들의 숲에 사는 엘프들이 항의하기 위해 아이리스 성을 찾아온 까닭이다.

공주가 나가보니 요정들의 항의 소리가 가득했다.

"이게 대관절 무슨 소리요! 제국의 개가 된 것도 겨우 참고 넘겼는데, 바바리안의 졸개라니!"

"공주님이 사악한 바바리안의 꾀에 넘어가 종족을 들어다 바친 게 아니오?"

"장로를 만나야겠소!"

"자자, 진정들 합시다. 우리 요정이 독자적으로 나라를 이루고 있으나 일신의 이유로 거짓 후작령이 된 것처럼, 이번에도 장로의 큰 뜻이 있을 겁니다."

"허어, 아무리 위장이라 해도 바바리안을 따른다니. 너무하지 않소?"

아르엘라는 원성 어린 그 소리를 들으며 바삐 움직이던 걸음을 멈췄다. 복도 밖 창문 너머로 한밤중임에도 집결한 엘프들이 한가득하다.

"단장님."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깜짝 놀란 아르엘라가 뒤돌아보니 에그니스가 서 있었다.

"에그니스!"

"바쁘신 분이 뭐 하십니까? 얼른 가시지 않고요."

"...다 들은 거야?"

"듣다마다요. 장로와 상의한 게 접니다."

"허."

고구려로의 귀부는 요르센 장로와 요정 최강의 전사 에그니스의 합작품이다.

"공주님을 지키는 것이 종족을 지키는 겁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네. 확신합니다."

에그니스의 단단한 음성에 아르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할게."

"후후, 걱정 마십시오. 요정에겐 어차피 다른 미래가 없습니다."

이제 와 공주를 납치할 수도 없다.

강철두가 허락하지 않으니까.

"가십시오!"

"다치지 마."

"저를 뭐로 보시고."

요정족 최강의 검사 에르미스가 싱긋 웃었다.

"저 골드 티어입니다."

아르엘라가 떠나가자 에그니스의 입에 걸린 미소가 차츰 옅어지며 씁쓸함이 감돌았다.

"스스로를 희생하지만 마시옵소서."

오직 그것을 막기 위한 그림이었으니까.

*

쇄애애액.

그리핀 두 마리가 사이좋게 날고 있었다.

그 위에 올라탄 강철두와 아르엘라는 서로를 마주 보며 이야기했다.

"정말 여기가 맞냐?"

"맞다니까."

"흐음."

철두가 사막뿐인 길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궁니르도 묠니르처럼 알아서 주인을 가리나?"

"그렇진 않을 거야."

"그 애매한 대답은 뭐냐?"

철두의 말에 아르엘라도 어깨를 으쓱했다.

"궁니르의 위치는 모두가 알지만, 아직 궁니르 앞에 접근한 자들은 없으니까."

"뭐, 이 모래사막에 숨어 있기라도 했나?"

"아니, 궁니르는 이 사막 어딘가에 있다."

"...."

철두는 뾰로통한 얼굴로 삐딱하게 물었다.

"벌써 나흘째 날고 있다. 방향 제대로 잡은 것 맞냐?"

"맞아."

아르엘라는 일일이 대답하기 귀찮아, 그냥 한 번에 설명해주었다.

"이 광활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아야 해."

"오아시스?"

"그래, 사막 중심부 어딘가에 있을 거야."

"허, 이 사막은 대체 얼마나 큰 거냐?"

"그냥 바다라고 생각하는 게 편할 거야."

그 정도로 지금 가고 있는 사막은 컸다.

날 것이 있으니 이리 가고 있지, 말이나 걸어가려 했으면 족히 몇 해를 보내도 오아시스를 찾기 어려울 터다.

닿을 수 없다는 뜻의 오아시스.

"머나먼 오아시스. 그곳만 찾으면 다 된 거야. 거기서 북쪽으로 쭉 가면 증오의 사원이 있어."

"증오의 사원?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사막에 사원을 지은 거냐?"

철두다운 해석에 아르엘라가 피식 웃었다.

"뭘 웃냐? 누구 사원이냐? 증오의 신?"

"비슷하지. 세상의 모든 증오가 몰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철두가 인상을 썼다.

"사원에 궁니르를 보관했군."

"아니, 정확히는 궁니르가 사원을 만들었지."

"...?"

"궁니르에 의해 죽은 모든 것들이 사원에 몰려 있어. 그래서 달리 부르는 이름이 있지."

"뭐냐?"

"증오의 억류지."

"허, 거창하군. 어떤 미친놈이 사막에다 창을 버린 거냐?"

"궁니르를 쓰던 신이겠지. 그리고 사막에 버린 게 아냐."

묘한 말의 반복에 철두가 코웃음 쳤다.

"이 사막도 궁니르가 만든 거냐?"

"전설로는 그래."

"후후후."

나흘 동안 뒤꽁무니만 쫓아가는 내내 썩은 동태눈깔 같던 철두의 눈이 반짝였다.

"마음에 드는 무기군."

"엇, 저기 오아시스다."

아르엘라는 시력 좋은 엘프답게 지평선 너머의 한 부분에 잠깐 반짝이는 빛을 보곤 그리로 날아올랐다.

"오!"

그리핀이 사력을 다해 날아간 덕에 금방 오아시스에 다다랐는데, 선회하는 그리핀의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아르엘라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도 아냐."

"또 꽝이냐?"

그간 지나쳐온 오아시스만 다섯 군데다.

"전설에 머나먼 오아시스는 굉장히 큰 호수라고 했어."

"그사이 다 말랐을 수도 있잖아."

"그럴 리 없어."

"일단 내려가자. 배고프다."

"선객이 있어."

"무슨 상관이냐."

철두의 그리핀이 먼저 급강하했고 아르엘라도 별수 없이 뒤따랐다.

그리핀 두 마리의 등장 때부터 하늘을 주시하던 서른 명 정도로 이루어진 무리는, 그리핀이 착지하자 아예 무기를 꺼내 들었다.

308화 머나먼 오아시스

그리 크지 않은 오아시스에서 휴식 중이던 무리는 아홉 명이었다.

그들은 그리핀이 나타났을 때부터 경계심을 올리더니 철두와 아르엘라가 착지하자 무기를 빼어 들고 경계했다.

"한번 해보자는 거냐?"

철두도 씩 웃으며 도끼를 빼 들었다.

위대한 경지에 이른 건 검이지만, 요즘은 아버지로부터 사사하며 도끼를 즐겨 쓰는 그다.

이미 도끼 숙련이 레벨 4에 다다른 순간, 초인이 된 몸이 그다음 단계인 레벨 5까지 끌어올려 줬다.

4레벨 명인의 경지와 5레벨 초인의 경지는 단전에서 끌어올린 기운을 무기에 덫 씌울 수 있냐 없냐로 갈릴 뿐이다.

철두는 도끼 숙련도 레벨 6, 위대한 경지에 닿기를 원하고 있었다.

위대한 전사였던 아버지 카다잔의 힘을 물려받고 싶은 것이다.

"후후후, 안 덤비면 내가 먼저 가지."

철두가 도끼를 들고 성큼 다가서자 무리 중에 후방에 머무르던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고슴도치가 맹수 앞에 가시를 세우는 건 자연스런 이치입니다. 전사께서는 부디 아량을 베풀어 주시지요."

철두는 아홉이나 되는 무리를 살폈다.

핑계는 아닌지 몸에 두른 옷 여기저기가 잘리고 해지며 피로 얼룩져 있었다.

포션이 있으니 상처야 치료가 되었겠지만, 누더기가 되어버린 옷이나 갑옷은 감추기가 어렵다.

"좋다. 공연히 피를 보기 싫으면 나를 자극하지 마라."

"예에."

사내가 손짓하자 그들이 무기를 거두며 다시 그들끼리 둘러앉았다. 식사 중이었는지 불이 한창인 모닥불 위에 솥이 얹어져 있고 무언가가 끓고 있었다.

철두도 아르엘라의 곁에 다가와 털썩 주저앉았다.

"겁쟁이 놈들이군."

"상황 판단이 빠른 놈들이겠지."

아르엘라는 슬쩍 그들을 살폈다.

이 드넓은 사막에 활동하는 것만으로도 저들의 실력은 입증된 것이나 다름없다.

자신의 강함을 조금도 숨길 생각이 없는 철두의 기세가 만만찮아 빠르게 태세를 변환했을 뿐, 만약 만만했다면 그대로 죽이려 들었을지도 모른다.

"밥이나 먹자."

"그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기는 어려운 일이고, 이렇게 오아시스에 들를 때마다 개인 정비 시간을 가지는 게 이득이다.

그리핀이 무한 체력으로 날 수 있는 것도 아니라, 대기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심상 수련은 글렀군."

"그건 별수 없지."

철두의 불만은 대수로울 게 없다.

방해꾼이 있으니 심상 수련이 어려워 괜스레 부아가 치밀 뿐이다.

호위로 아울베어인 새곰을 세우기엔 저들 9명의 전력이 그보다 상회하는 것 같았다.

오아시스는 오가는 이들의 쉼터가 되기에 돌무더기를 쌓아 모래바람을 피하거나, 화덕으로 쓰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었다.

철두도 그런 화덕 가운데 하나를 골라 인벤토리에서 장작을 꺼내 쌓고, 손바닥만 한 마도구를 꺼내 들었다.

틱, 틱, 화르르륵!

마도구에서 일정한 불길이 일며 장작을 태우기 시작했다.

"그게 라이터야?"

"맞아."

"이야, 신기하네."

"흥, 정령이 있었다면 이런 것도 필요 없는 일이다."

"...그러게."

애초부터 정령이 없던 아르엘라도, 정령이 사라져버린 철두도 잠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신기한 거 많네."

"군용 표준 보급이다."

진태가 챙겨준 보급 배낭에는 야영에 필요한 갖가지 용품들이 들어 있었다.

잠시 불이 커지길 기다렸다가 무쇠 프라이팬을 꺼내 그 위에 두툼한 고기를 얹었다.

치지지직!

불 조절을 위해 장작 몇 개를 꺼내 불을 줄이곤 고기를 계속 구웠다.

"한잔할 거냐?"

"됐어.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어."

"음? 뭐가 말이냐?"

"세계수."

"...."

철두는 침묵한 채 고기만 뒤적거렸다.

치지지직.

"세계수는 꼭 필요해."

"걱정 마라. 내가 심어주지."

"...만약에."

"만약은 없다."

"...."

"난 어떤 것도 잃지 않을 것이다."

부인도, 아직은 없는 자식도, 그리고 내 부족도.

아버지를 존경하지만, 아버지는 실패했다.

어머니도 잃었으며 가정은 풍비박산 났고, 부족에게 버림받았다.

강해진다는 것은 그저 무기술 따위를 이르는 말이 아니다.

모든 것에서 강해질 것이다.

내가 가진 그 무엇도 잃지 않기 위해.

"다른 말은 하지 마라."

"...알겠어."

아르엘라는 목구멍에 맴도는 말을 뱉을 수가 없었다.

종족의 운명이 이 사내에게 달렸다.

하지만, 때가 되어 선택의 순간이 오면,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공주로서의 운명과 의무를 외면할 수 있을까.

"먹어라. 다 익었다."

"덜 익었잖아?"

"이거 소고기다."

"...."

철두는 두툼한 소고기를 썰어 씹으며 다른 통을 열었다. 뚜껑을 열자 매콤한 김치 냄새가 풍겨왔다.

김치를 꺼내 씹으니 2년 전의 단순한 맛에 비해 엄청나게 발전되어 있음을 실감했다.

식재료가 계속해서 연구 개발되며 아이언헤드 성의 식당 거리에 없는 식당이 없다고 들었는데, 거기도 한번 가봐야겠다 마음먹었다.

대왕전에도 실력 있는 요리사들이 많지만, 한 가지 음식의 대가를 이룬 이들의 맛은 또 특별하니까.

두툼한 고기에 김치를 올려 먹고 있으니, 이제 슬슬 저쪽 무리도 정리하고 있었다.

"쟤들한테 물어볼까?"

"뭘?"

"머나먼 오아시스가 어딨는지."

"으음."

아르엘라는 흘깃 무리를 보았다.

"저들도 현지인처럼 보이진 않는데."

"좋아. 물어본다."

"아니, 그럴 거면 내 의견은 왜 물은 거야?"

"후후."

철두가 일어서 다가오자 아홉의 무리는 또다시 바싹 긴장하며 경계했다.

"...고구려의 대왕께서는 무슨 용무인지요?"

"오! 날 알아?"

"하피 신문을 구독하는 이들 중에 대왕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

철두는 묠니르를 얻을 당시 호들갑 떨던 하피족 기자가 떠올랐다.

한 달에 한 번 신문을 가져다준다고 했지만 한 번도 읽어 본 적은 없다.

진태는 봤으려나.

"뭐, 좋다. 머나먼 오아시스의 위치를 알고 있나?"

"...."

사내가 흠칫 놀랐다.

"그건 어찌하여 여쭙는지요?"

"볼일이 있으니까 묻는 게지."

"어떤 일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굳이?"

철두의 의문에 사내의 눈망울이 잠깐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거기가 네 영지라도 되나?"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머나먼 오아시스는 저쪽입니다. 아까 그 그리핀을 타고 가면 족히 하루면 닿을 수 있을 겁니다."

"후후, 좋군."

철두의 오른쪽 손등 주화 주머니가 슬쩍 빛나더니 손아귀에 주화 하나가 튀어나왔다.

"길 안내 값이다."

철두가 튕긴 주화를 얼떨결에 받은 사내는 깜짝 놀랐다.

"...."

고블린 1주화라니.

지금 노바에서 가장 핫한 왕국 고구려 국왕의 배포라고는 믿기지 않는 금액이다.

머나먼 오아시스 위치만 묻고 정말 쿨하게 돌아가 다시 식사하는 그를 일별하고는 사내는 무리를 이끌고 떠났다.

파파팟.

저마다 탈것을 소환했는데 모두 등이 솟은 쌍봉낙타였다. 덩치가 어지간한 황소보다 더 커 사람을 태우는 데 무리가 없어 보였다.

낙타 무리가 향하는 방향은 동쪽으로, 머나먼 오아시스가 있는 북쪽과는 차이가 있었다.

푸스스스.

낙타의 발치에 밟히는 모래가 푹푹 패이며 나아가길 한참 만에 금발의 여검객이 리더를 찾았다.

"랑통!"

"우샤."

우샤가 무리의 대장 랑통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한창 정복 전쟁이나 할 녀석이 여기 왜 나타난 걸까?"

"모르지."

"설마 저 녀석도 끼어드는 건 아니겠지?"

랑통이 고개를 저었다.

"머나먼 오아시스로 향한다잖아."

"바보야. 둘러댄 말일 수도 있잖아. 진짜 찾는 게 그...."

"쉿."

랑통이 검지를 입에 대고는 씩 웃었다.

"놈의 목적이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야?"

"너무 강력한 경쟁자잖아! 무려 성물의 주인이라구!"

우샤의 우려도 일리 있는 말이었으나, 랑통은 오히려 웃었다.

"아니, 차라리 잘된 걸지도 몰라."

"뭐? 우린 지금 '지옥불 사신단'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고."

"그러니까 내 말이."

랑통의 눈이 맑게 빛났다.

"어차피 불리한 판세야. 차라리 고구려 왕이 끼어들어 판이 흔들린다면... 우리에게도 다시 기회가 올 거야."

"아!"

"정확한 위치를 아는 건 우리뿐이니까."

"...."

랑통의 말에 우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전까지 걱정했던 게 연기라도 되는 것처럼 맑게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들었지? 대장이 돌대가리도 아니고 다 계획이 있다구. 다들 불만 가지지 마, 이제."

"와하하, 부대장이 가장 불만이었잖아."

"난 처음부터 믿고 있었다구."

한바탕 왁자지껄 웃은 아홉의 사내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랑통이 오른손으로 가슴을 툭툭 쳤다.

"먼저 간 형제들의 죽음이 무의미하지 않게!"

"먼저 간 형제들을 기리며!"

'치의 형제단'의 생존자 9명이 다시금 전의를 불태웠다.

*

머나먼 오아시스는 저쪽으로 하루 거리다.

"그래?"

아르엘라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초행길이긴 하지만, 방향은 여태 잘 맞춰 온 것이다. 물어보지 않았다면 남은 거리야 알 수 없었겠지만, 어쨌든 내일 당도하는 건 매한가지였다.

"차라리 오늘 하루 여기서 잠깐 쉬자."

"굳이? 머나먼 오아시스엔 마을도 있어."

"방해꾼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난 심상 수련에 들어가야겠다."

어제 심상 수련을 빼먹었으니 이틀만이다.

마침 아홉 명의 방해꾼들도 사라졌으니, 머나먼 오아시스로 떠나기 전에 제대로 정비할 생각이다.

"좋아. 그러자."

철두는 아울베어 새곰을 소환해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주변을 경계하게 하곤, 곧장 심상 공간으로 빠져들었다.

*

머나먼 오아시스.

과장을 조금 보태 바다처럼 넓은 호수였다.

거대한 호수는 그만의 생태계를 이루고 있고, 호수 주변엔 그 수량으로 인해 사막답지 않게 녹지화되어 있었다.

하늘에서 그것을 내려다보니 거대한 푸른 눈과 그 주변에 자리한 녹색의 화장을 보는 것 같았다.

머나먼 오아시스 주변으로 자리한 밀림에는 더러 작은 마을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언뜻 살펴본 바에 의하면 여덟 곳쯤 되는 것 같았다.

철두와 아르엘라는 가장 가까운 남측의 마을 앞에 그리핀을 착륙시켰다.

"워어! 멈추시오!"

노바의 여느 마을들이 그러하듯 자경단으로 보이는 사내들이 창을 세우고 접근을 막았다.

"우리 마을은 지금 이방인을 받지 않소!"

"왜 안 받으시오?"

"그것은 마을의 일이라 외부인에게 말해 줄 수 없소."

"우리가 원하는 건 하루의 잠자리와 맛있는 식사, 따뜻한 목욕물뿐이다."

"보통과 같았으면 마을의 자랑인 예나의 여관에서 모든 게 가능했을 것이나, 지금은 안타깝게 불가하오."

철두가 아르엘라를 돌아보니 그녀는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다른 마을 가자."

"흐음, 그러자."

두 사람의 결정에 오지랖 넓은 자경단원이 조언했다.

"다른 마을들도 모두 마찬가지요. 굳이 시간 낭비하지 마시길 바라오."

"으음."

철두가 턱을 쓸었다.

그냥 오아시스의 공터 하나를 잡아 노숙해도 되겠으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는데 굳이 그럴까 싶었다.

"얼마냐?"

"음? 무슨 소리요."

"그 예나의 여관에 하루 묵어 가겠다."

"허, 아까 무슨 이야기를 들었소? 지금은 외부인을 받지 않소."

촤르르륵.

철두가 고블린 주화 500개를 자경단원 앞에 쏟아냈다.

"선불이다."

"이, 이런다고 될 일이 아니오."

촤르르륵.

다시 500개의 동전이 쏟아지자 자경단원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모자란가?"

촤르르륵.

다시 500개의 동전이 더해지자 황금으로 된 작은 무더기가 생겨났다.

"자, 잠깐! 촌장님을 모셔 오겠소!"

자경단원이 부리나케 마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309화 엘리아

헐레벌떡 뛰어간 자경단과 함께 나온 이는 등 굽은 노인이었다. 그는 돈 무더기를 한번 보고 강철두와 아르엘라를 한번 보더니 고개를 까닥했다.

"돈은 됐으니 들어오시구려."

"오!"

철두는 공짜란 소리에 얼른 무더기로 쏟아낸 고블린 주화를 주화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허억, 초, 촌장님. 굳이 주는 돈을 마다할 이유가 있습니까?"

"단켈, 자네가 저들을 여관으로 모시게."

"하, 하지만 지금 마을은...."

"...."

촌장은 자경단원 단켈을 그저 지그시 올려다보았다. 단켈은 이내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촌장님."

촌장은 강철두와 아르엘라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쉬다 가시구려."

"후후, 고맙다."

"별말씀을."

등이 굽은 촌장은 지팡이를 짚고 마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저, 저를 따라오십시오."

단켈이 앞장서니 철두와 아르엘라는 그를 뒤따르며 마을을 둘러봤다.

사막 마을답게 가는 나무와 억센 풀줄기를 엮어 만든 집들이 많았다. 이방인의 등장에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그 눈빛엔 낯선 이에 대한 당연한 경계심과 호기심이 공존했다. 어딜 보아도 딱히 위기감은 느끼지 않는 모습이라 철두는 궁금해져 물었다.

"단켈이라 했던가?"

"그렇소."

"마을에 무슨 일이 있길래 외부인을 받지 않는가?"

"...하아."

단켈은 한숨을 내쉬고는 허탈한 어조로 말했다.

"이미 촌장님의 허락이 떨어져 마을에 들어섰는데 무엇을 숨기겠습니까. 여기 오아시스의 안식절이 곧 다가오기에 외부인들의 출입을 금하고 있습니다."

"안식절?"

"오아시스 근처 여덟 마을의 평화와 안녕을 비는 의식이지요."

"오, 축제에 왜 외부인을 받지 않는가?"

"...부정을 탄다는 이유로 외부인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근데 왜 받았나?"

"아닛, 막무가내로 군 건 당신들 아니오?"

"허락한 건 촌장이지."

"하아, 그도 그렇소."

단켈은 한숨을 내쉬다 픽 웃었다.

"따지고 보면 숨어서 구경한 이방인들이 어디 한둘이겠소? 하여튼 저기가 예나의 여관이오."

"후후, 길 안내 고맙다."

티잉!

철두가 주화 하나를 튕겨주기에 넙죽 받은 단켈이 히죽거렸다가 이내 실망했다.

1주화.

입장을 위해 주화를 무더기로 쏟아내기에 통이 큰 인물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쪼잔했다.

"아르엘라. 가자."

"그래. 여관이 특이하게 생겼네."

주화 하나를 쥐고 많은 생각에 잠긴 단켈을 뒤로하고 부부는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허리춤까지 오는 가는 싸리나무들로 벽을 두른 모습이 꼭 초창기 신서울의 주막을 보는 듯했다.

큰 건물 하나와 정자 정도 크기의 단층 건물들이 넓은 마당에 저마다 간격을 두고 위치하고 있었다.

"방갈로 식당 같군."

"그게 뭐야?"

"지구의 식당에 이렇게 생긴 게 있다."

"흐음."

아르엘라는 철두가 이따금씩 해주는 지구 문명 이야기에 귀를 쫑긋했다.

"어이쿠, 누구세요?"

주방으로 보이는 큰 건물에서 마침 나오던 중년 여인이 깜짝 놀라 소쿠리를 떨어트렸다.

"손님이다."

"엥? 안식절에 무슨...."

"촌장이 허락했다."

"허, 그럼 뭐 이리 오세요. 식사부터 하시겠어요?"

"좋지."

철두와 아르엘라는 마당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주문했다.

"여기서 파는 모든 음식을 내어와라."

"둘이서 드실 거 아니에요?"

"내가 많이 먹는다."

"하나씩 시키세요."

"돈은 선불로 주겠다."

철두의 말에도 여관 주인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 사막마을은 자원이 귀해요. 괜한 미식을 위해 음식을 낭비할 수는 없어요."

"흐음."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까운 이동마법진도 날아서 5~6일은 걸리는 거리다. 지상 탈것으로 이동하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는 곳이 이곳이다.

거대한 사막의 중간에 고립된 섬 같은 곳이 이곳 머나먼 오아시스다.

"좋다. 먹고 더 시키겠다. 일단 적당하게 내어달라. 이건 선불이다."

철두가 주화 하나를 꺼내 주었다.

번쩍번쩍한 고블린 주화에는 1000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헉, 냉큼 모든 음식을 내어 오겠습니다요."

"음? 말이 다른데?"

"아유, 자원도 귀하지만 돈은 더 귀한 게 우리 마을이라."

얼른 주화를 챙겨 주방으로 들어가는 주인을 보고, 철두와 아르엘라가 말없이 서로를 보며 웃었다.

"재밌는 마을이군."

"신기한 마을이긴 해."

"후후, 음식이 기대되는군."

"내일 떠날 거지?"

"그래야지. 증오의 억류지는 여기서 한나절 거리 아니냐?"

"맞아."

"그럼 내일 해지고 떠나면 되겠군."

밤새 날아 새벽쯤 증오의 억류지에 도착하는 게 이번 계획이었다.

"자신 있어?"

"무슨 자신?"

"궁니르는 쉽게 얻을 수 있는 성물이 아니야."

"후후, 상관없다. 악령이든 뭐든 다 해치우면 된다."

궁니르는 묠니르, 듀렌달과 함께 위치가 특정된 성물이다.

듀렌달은 오래전부터 황제가 주인이었고, 최근 묠니르도 주인을 찾았다.

하지만 여태 궁니르가 주인을 찾지 못한 건 별다른 이유가 아니다.

아주 오래전 노바의 신과 궁니르를 가진 세계의 신 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두 신은 치열하게 싸웠으나, 결국 노바의 신이 승리했고, 패배한 신은 궁니르를 노바의 세계에 집어 던져 자신의 무덤으로 삼았다.

주인 잃은 궁니르는 억제된 힘을 풀어냈는데, 그간 궁니르에 목숨을 잃은 모든 적들이 악령이 되어 부활한 것이다.

증오의 억류지는 그렇게 만들어졌고, 그 죽음의 기운이 퍼져나가 들판과 평원은 생명을 잃고 사막이 되어버렸다.

지금도 이 사막은 점점 넓어지는 중이다.

"결국 궁니르를 직접 본 사람은 얼마 없을 거야. 아예 없을지도 모르지. 모든 악령들을 해치고 그 중심부에 가는 거니까."

"후후, 걱정 마라. 그 신화도 구라가 끼어 있을 거다."

"허, 거짓말이란 거야?"

"말이 안 되지 않나? 죄다 사막이 될 정도로 죽었다는데 증오의 억류지와 가까운 이 오아시스는 어째서 유지되는 거냐?"

"그야, 우리의 신들이 지켜주시니 그렇지요."

대답은 막 음식을 서빙해온 주인에게서 나왔다.

"신?"

"예에, 오아시스의 신이요."

"...?"

철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신은 이름이 뭐냐?"

"우리 오아시스의 신이요? 엘리아 님이시죠."

"엘리아라...."

"...!"

철두는 대수롭지 않게 내어져 온 음식부터 집어 들었으나 아르엘라는 덜컥 굳어버렸다.

"음? 왜 그러냐? 머리카락이라도 나왔나?"

철두는 아르엘라가 쥔 빵을 슬쩍 보았으나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인다. 그제야 얼음땡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듯 아르엘라가 고성을 뱉었다.

"엘리아라고?"

"그렇죠."

"물의 정령왕이잖아!"

"음?"

철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름이 같을 수도 있지 않나?"

"그, 그렇지만."

너무 공교로운 일이다.

더군다나.

"정말 물의 정령왕이 이들의 신이라면 요정들이 먼저 와서 조사했을 것 아니냐?"

"...그럴지도.... 헌데 장로는 내게 아무런 말이 없었어."

철두도 고개를 갸웃했다.

"요르센 장로도 모르고 있었나?"

철두가 주인을 보며 말했다.

"너희 신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주겠나?"

"아유, 여관 일이 한가해 보여도 그렇지...."

팅.

주인은 철두가 꺼낸 1000주화를 냉큼 집어들고는, 빈자리에 앉았다.

"...한가하긴 하죠. 어디서부터 이야기해드릴까요?"

"처음부터 전부."

"옙! 본디 우리 조상들은 신의 전쟁 이전부터 여기 살던 자들로...."

신의 전쟁이 끝나고 궁니르가 악령을 개방해 거대한 사막이 만들어졌다.

사막이 되기 이전에 이 평원엔 본디 도시도 있고 마을도 있고 나라도 있었다.

그들은 점점 넓어지는 사막에 차츰 터전을 잃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늘 그렇듯 새로운 터전을 떠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고향을 등지지 못하고 지키는 자들이 있기 마련.

"이곳 오아시스는 마르지 않고, 사막화를 피해 가서 그대로 정착하게 되었습죠."

고향을 떠날 수 없었던 자들이 하나하나 모여 정착하다 보니 큰 마을 여덟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사막화마저 피해 가게 하는 오아시스에 감사해하며 매년 제사를 지냈으니, 그것이 안식절의 시작이다.

일 년에 한 번, 일주일간 모든 생업을 놓고 오로지 신께 감사함만을 전하며 무사 안녕을 비는 7일이다.

"내일부터 안식절의 시작이지요. 그러니 조식은 이따 저녁에 미리 차려드리겠습니다."

"...아직 엘리아의 엘 자도 나오지 않았다."

"호호, 그렇게 이어져 오던 제사가...."

사막은 점점 넓어졌고, 사막 밖 마을들과 거리가 멀어져 교류가 점점 줄어들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오아시스는 생명줄이며 삶의 터전 그 자체였다.

언제부터인가 오아시스에 신성한 신이 살고 있어, 죽음의 악령들과 저주도 피해 간다는 말이 돌았다.

이후로 제사는 더욱 정성을 다했으며, 마을 사람들은 진신으로 신을 모셨다.

"...그래서 어디가 엘리아란 거냐?"

"아유, 손님. 참을성도 참 없으시지. 이제 나오니까 들어보셔요."

바바리안에게 인내심을 기대하다니.

여관 주인의 배포가 호수만큼 넓구나.

"신의 힘을 더욱 크게 하는 데 돈이 필요합지요. 제사에 주화를 바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신의 힘이 커져?"

"네, 매년 제사 때마다 커지지요. 듣기로 수백 년 전에는 이 호수가 이리 크지도 않았습니다."

철두는 깊은 호기심을 느꼈다.

아르엘라의 눈도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서 엘리아는 어디서 나온 말이냐?"

"호호호, 들어보셔요. 오직 안식절에만 주화를 바칠 수 있는데, 그때 모두가 듣는답니다."

"...."

"엘리아의 축복을 받습니다. 하고 말이지요."

철두와 아르엘라의 눈빛이 마주쳤다.

"성소군."

"하아...."

이 호수는 거대한 성소다.

주화를 기부하면 그 축복을 내려주는 것이 꼭 성소와 같다.

일 년에 단 7일만 활성화되는 기간제 성소 말이다.

아르엘라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안식절이 내일이라 그랬죠?"

"예에."

"그 제사에 우리도 주화를 바칠 수 있나요?"

"예? 엘리아 님의 축복을 외부인이 받아서 뭐 한답니까?"

엘리아의 축복은 이곳 오아시스에 사는 사람들에게만 달가운 것이다.

개인에게 버프를 거는 게 아니라, 오아시스를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니까.

나트롱 백작령에 있는 풍요의 성소와 비슷한 기능이다.

"후후, 기부지. 기부. 어차피 나쁠 것 없는 제안 아니오?"

"어.... 그야 그렇지요?"

지역 발전을 위해 외부인이 돈을 써준다면 누가 싫어할까?

"그치만 촌장님께 여쭤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후후, 내일 물어보고 참가하겠소."

"예에, 그럼."

여관 주인은 하루 새 2천 주화나 벌어들여 기쁜 눈치다. 내일 안식절에 그 돈을 모조리 기부할 수 있으니까.

"이 생선 엄청 맛있군."

본격적으로 식사하는 철두를 보며 아르엘라가 걱정되어 물었다.

"내일 촌장이 허락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

분위기를 보아 안식절이 오기 전부터 외부인을 받지 않는 이유가 있을 터인데,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아르엘라였다.

"음? 그럼 그냥 하는 거지."

"허."

아르엘라는 잠시 기가 막혔다가 피식 웃었다.

새삼 자신의 반려자가 바바리안임을 상기했다.

"문제없네."

"후후, 아무 문제 없다."

괜한 걱정은 접어두고 아르엘라도 포크를 들었다.

310화 심청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