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화 통증
"전사를 모욕하지 마라!"
철두가 고함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 박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병사들이 모두 몸을 떨 정도였다.
"친구의 명예를 걸고 나선 전사가 분전했으나, 패했다. 언제까지 그를 모욕할 셈인가?"
니키타의 눈망울이 흔들렸고, 이봉근의 몸이 떨렸다.
'시발, 머여.'
그냥 술김에 빡쳐서 나선 건데, 일이 이렇게 되나?
두 사람이 여전히 부동이자 철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친구의 복수를 위해 목숨을 건 것은 칭찬할 만하다."
"그, 그것이...."
철두의 칭찬에 이봉근의 눈망울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파팟.
인벤토리에서 꺼낸 커다란 도끼가 철두의 손에 생겨났다.
"나약한 전사는 필요 없다. 택하라, 니키타."
"무, 무엇을 말입니까?"
"죽일 것인가, 죽을 것인가."
"...."
니키타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음을 절감했다.
남을 위해 죽어줄 수도 없는 법.
푹!
"끄으윽."
목이 꿰뚫린 이봉근이 버둥거렸으나 이내 몸이 축 늘어지며 빛으로 화해 사라졌다. 그의 인벤토리에 있던 한 칸의 물건이 떨어졌는데, 여유분의 갑옷 한 벌이었다.
"후후후."
조용한 가운데 강철두의 웃음만이 메아리쳤다.
"또 나설 자 없는가?"
"...."
"원한이 있거든 풀어내라! 또 결투에 나설 자 없는가?"
철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미켄, 오준환."
"넵, 대왕!"
"예!"
철두가 히죽 웃었다.
"이게 화합이다."
"...."
"...."
더는 원한을 가지고 싸우려고 나서는 자가 없었다.
여러 말이 떠올랐으나 반박하지 못했다.
이것이 고구려의 방식일 따름이다.
"후후, 먹고 즐겨라! 남은 원한이 있거든 적에게 쏟아내라!"
"우오오!"
철두의 고함에 눈치 빠른 병사들이 재빨리 환호했다.
숨 막힐 정도로 압박이 가득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풀어졌다.
여기저기서 다시 술잔을 기울였으나 서먹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그 누구도 지난 전쟁을 입에 담지 않았다는 것이다.
"형씨는 지구에 있을 때 무슨 일 했나?"
"나는 게임회사에 있었습니다."
"오, 어떤 게임?"
"닌텐도에 다녔습니다."
"헐, 정말? 어떤 게임 만들었는데?"
노바 이전의 지구 생활을 주제로 담던가.
"몇 번 전장에서 본 적이 있군."
"잊읍시다."
"누가 뭐라든? 주 무기가 창이오?"
"그렇소."
"숙련도가 몇이오?"
"3이오."
"오, 고수였군. 마상무예 특성은 개화했소?"
"그건 아직이요."
"쯧, 출세하려면 그것부터 개화하시오. 고구려 군대의 운용은 거의 기동전이라 기병 전술이 기본이오."
"으음, 새겨듣겠소."
아니면 노바에서 얻은 기술이나, 고구려의 생활이나 문화, 팁 같은 이야기를 했다.
각 부대의 대장 4명은 강철두와 함께 둘러앉았는데, 오준환이 술병을 들어 시미켄에게 들이밀었다.
"사죄의 의미로 한잔 드리죠."
"아닙니다. 우리 대원이 귀 대원을 상하게 했습니다."
"어차피 곧 부활할 터, 신경 쓰지 마십시오. 먼저 시비를 건 놈이 잘못이죠."
"예에, 그럼 앞으로 잘해보자는 의미로 건배하시지요."
두 사람은 어색하게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대왕이 던진 메시지는 분명했다.
'분쟁에는 목숨을 걸어라.'
목숨을 걸고 죽이고 싶은 정도의 아군이 있다면 그냥 싸우게 두는 게 낫다. 괜히 원한을 품게 뒀다가는, 적과의 전투 중에 수작을 부린 부대원에 의해 부대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시미켄과 오준환이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이는 사이, 김춘배와 제임스는 강철두의 이야기를 조용히 경청했다.
정확히는 김춘배가 묻고, 철두가 답해주는 형식의 대화였다.
"의미심장합니다. 퀘스트 타이틀부터 '노바를 위하여'가 아닙니까?"
"그렇지."
둘은 강철두가 외유하며 새롭게 수주한 퀘스트에 대한 정보를 나눴다.
"결국엔 용들이 돌아올 모양입니다."
"그래. 언젠지가 중하겠지."
"허어, '노바를 위하여' 퀘스트는 그럼 현재 제국 황제와 대왕님께만 뜬 것이겠군요."
"아마도."
"황제가 흑마법사들을 사냥하러 다닌 이유도 이해는 가는군요. 나머지 목표가 뭐라고 하셨지요?"
"흑마법 말살 말고는... 세계의 파편화 저지와 미궁 탐사다."
철두는 퀘스트 창을 다시 열어 읽어주었다.
"파편화.... 파편화라."
미궁 탐사는 알겠다.
하지만 세계의 파편화를 저지하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고민하지 말고 술이나 먹어라."
"하하, 제가 좋아서 하는 일 아닙니까?"
강철두가 주는 술을 쭉 들이켜고 있으니, 뒤늦게 합류한 결사대 사토와 지르골도 잔치에 끼어들었다.
그들을 보며 김춘배가 넌지시 이야기했다.
"정복 전쟁이 끝나면 저도 결사대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마적대는?"
"흐흐, 저 하나 빠져도 통솔에 문제없습니다."
"좋을 대로 해라."
"헙! 감사합니다. 대왕."
'노바를 위하여' 퀘스트는 키를 쥔 자만 수주할 수 있다. 예상하기로 그 키는 성물이니, 현재 알려진 성물의 주인은 황제와 강철두가 유일하다.
퀘스트의 비밀.
그리고 그 퀘스트를 내어주는 존재에 대한 추정이나 탐색을 하자면, 그것에 가장 근접해있는 강철두를 따르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아, 대왕. 아까 하나 더 받았다는 새 길 퀘스트는 뭡니까?"
"아, 그거?"
철두는 퀘스트를 다시 떠올려보았다.
"'신화의 길'이란 거다."
"확실히 영웅의 길 다음 스텝 느낌이 나는군요. 그래서요?"
"뭐가?"
"그, 자세히 좀 알려주십시오. 퀘스트 창에 뭐가 떴는지, 그 뒤에 어떤 메시지가 지나갔는지도요."
"쫑알쫑알 귀찮게 구는군."
철두는 마뜩잖아하면서도 순순히 기억을 떠올려 알려주었다.
"창조주의 편린을 얻고 발동했다. 진정한 신으로 나아가는 길 뭐시기 하더군."
"오오, 그다음은요."
"반신으로 뭐시기 한 다음 신화 시작한다던가? 아, 특성을 하나 얻고 등급이 변했지."
특성 '반신의 육체'는 성장 한계 같은 걸 아예 없애버렸다.
"오! 그럼 무한으로 스탯석의 흡수가 가능한 겁니까?"
"그랬으면 황제가 가장 강했겠지. 난 이제 포인트로 스탯을 올린다."
"...소울 포인트 말입니까?"
"업적 포인트다."
"예? 그건 어떻게 얻습니까?"
"흑마법 말살에 기여하니 주던데."
그러고 보니 그때 받은 421포인트를 아직 분배하지 않고 있었다.
"허, 그럼 정황상 황제도 그 신의 길을 걷고 반신으로 거듭났다고 봐야겠군요."
"업적 포인트가 탐나서 그리 나돌아다니는 게 맞다면 그렇겠지."
"흐음, 정황상 분명합니다."
철두는 물끄러미 김춘배를 보았다.
"왜, 왜 그리 보십니까?"
"너는 뭐가 그리 궁금한 게 많으냐?"
"하하, 퀘스트에 대해 궁금할 뿐이지요."
"그러니까 왜?"
"신과 소통할 수 있다면 오직 그것만이 유일하지 않습니까?"
"...?"
"신이 내어준 유일한 목소리이자 단서니까요."
"흐음."
철두는 김춘배의 말에 괜히 머리가 복잡해졌다.
고민은 중첩시키는 게 아닌데, 당장 풀 수 없는 답을 쫓기에는 바바리안의 인내심이 용인하지 않는다.
"난 자야겠다."
"엇, 벌써 들어가십니까?"
"그래. 내일 점심쯤 출진할 테니. 더 놀아라."
"헙, 넵. 대왕!"
철두가 테무 요새의 지휘관실로 들어가자 사토와 지르골이 서로를 보았다.
"흐흐, 난 더 먹어야겠다."
"...이번엔 양보해주시게. 지르골."
"음?"
결사대는 고구려 대왕의 직속 호위대다.
강철두가 과연 호위나 보호 같은 행위가 필요한지 의문이 들지만, 안전 외에도 귀찮음 방지와 고요한 휴식을 위해 호위는 필요한 법이다.
늘 이렇듯 먹고 마시며 즐기는 자리가 있으면 지르골이 놀고 사토가 경호를 맡았는데, 이번에 사토가 처음으로 욕심을 낸 것이다.
"동향의 동료가 있다."
"쳇, 한번 봐주지."
매번 귀찮은 일은 사토가 도맡아 해주다시피 했기에, 지르골은 한번 양보했다.
"시미켄."
"사토."
과거 일본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노비스 사토와 그가 이끌던 특전대 대원이 마주 앉았다.
"고생이 많다."
"너도."
많은 이야기가 필요치 않았다.
특전대 동료였던 둘은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며 그간의 마음고생을 달랬다.
*
바트롬 후작가의 제일 무력 단체.
바트롬 기사단 60인이 상하이 성에 파견 온 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기사단장 잔슨이 느긋한 휴양을 보내는 이때에도 기사단원들은 상하이 이곳저곳을 오가며 여러 소식들을 수집했다.
상하이 남작의 약점이 될 거리라든가, 전장이 진짜 어떻게 돌아가는지 따위 등이다.
나무 욕조에 느긋하게 늘어져 있던 잔슨은 미녀들로부터 목욕시중을 받고 있었다.
"기사단장님."
"아, 요릭."
잔슨이 시중드는 미녀들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어맛!"
"나가들 봐."
"네, 대인."
그녀들이 나가자 기사단 부단장 요릭이 목소리를 낮춰 보고했다.
"고구려 놈들은 아직인가?"
"네. 아직 테무 요새에 잔뜩 웅크리고 있습니다."
"크큭, 쭉 그랬으면 좋겠군."
이 파견 업무가 앞으로 더 이어지게 말이야.
"근데 무슨 보고야?"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어제저녁 고구려군이 술을 마셨다고 합니다."
"그게 왜?"
원정 중인 군대라고 하더라도 죽음이 오가는 전장의 스트레스를 달래기 위해 종종 술을 마시기도 하는 건 흔한 일이다.
"모든 병사들이 밤이 늦도록 술을 마셨답니다. 보급도 평소보다 더 많았으며, 떠들썩한 게 승전파티라도 벌이는 듯했습니다."
촤르륵.
잔슨이 목까지 담가져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진군 전의 사기진작이군."
"그렇게 보입니다."
"쯧, 휴가도 끝이군. 고구려 왕은?"
"아직 합류 여부를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게 가장 중요하니 놓치지 마."
"네, 단장."
고구려 왕은 대적이 불가능한 적이다.
그가 합류하면 즉각 철수하라는 바트롬 후작의 지령이 있었다.
성물의 주인인 그가 이곳 상하이를 파괴하고 소화하는 사이, 바트롬 후작은 재빨리 황제에게 구원을 청하는 시나리오다.
공연히 바트롬 후작령의 최강 무력 집단을 쓸모없이 소모할 필요가 없다. 굳이 그들이 파견 나와 있는 거 상하이 남작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다.
보아라.
우리 바트롬이 그대 봉신 가문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애를 쓴다!
그 정도의 제스처일 뿐이다.
"아, 두 번째는 뭔가?"
"엊그제. 상하이 남작의 아들이 굴단 마켓으로 향했습니다."
"응?"
너무 생뚱맞은 소식이라 잔슨은 의아함이 들었다.
굴단 마켓은 일정한 영지가 없는 거대 성이다.
시기를 두고 성 자체를 좌표 이동해 노바의 세계를 떠도는 자유시장을 가진 성이다.
"거긴 왜?"
"지원 요청인 것 같습니다."
"상하이 남작이 굴을 하나 더 파고 싶은 모양이군."
잔슨이 피식 웃었다.
"쓸모없는 짓을 했군. 굴단 공작이 들어줄 리가 없지."
굴단.
굴단 마켓의 주인이자, 제국 공작위를 받은 고위 귀족이다.
그가 가진 무력이며, 그의 군대는 위대한 검사 잔슨이라 하더라도 감히 올려다보기조차 힘들 정도의 위상을 가진다.
제국의 공작이란 그런 존재다.
이제 제국에 귀의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남작의 지원 요청?
굴단 공작이 받아들일 리가 없다.
"단장님."
"뭐, 또 있어?"
"두 번째 보고가 아직 안 끝났습니다."
"...?"
"굴단 공작이 병력을 이끌고 상하이 성으로 출발했다는 소식을 전령이 전해왔습니다."
"...!"
통에 기대있던 잔슨의 몸이 벌떡 일어섰다.
덜렁!
"그 이야기를 먼저 했어야지!"
잔슨은 생각지도 못한 우군의 합류에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하아."
제국 공작이 직접 왔는데, 후작의 일개 가신이 전장이 불리하다고 과연 단독으로 이탈할 수 있을까?
"골치아프군."
굴단 공작이 돌아가기 전에 고구려 왕이 참전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341화 관문 돌파!
제국의 공작이자, 이동 성채 굴단 마켓의 지배자.
그는 늘 황금투구를 쓰고 다니기에 제대로 얼굴을 아는 자가 없었다.
일정 시간마다 좌표를 바꿔 무작위 순간이동하는 그의 성채 덕에 방랑자라고 더 알려진 그다.
제국의 귀족이지만 중앙정계에 모습을 보이지도, 그렇다고 대영지를 가진 귀족도 아닌 그가 무려 공작의 작위를 받은 것을 두고 사교계에서 뒷말이 나온 적이 있었다.
황제와 만난 자리에서 바로 공작 작위를 받았네, 거금을 주고 작위를 샀네, 뭐네 말이 많았다.
하지만 이후 보여준 그의 호전적이고 엄청난 실력 덕에 추측은 하나로 모여졌다.
'굴단이 황제와 호각세를 이룰 정도로 강하다.'
어떤 이는 황제가 반수 앞서 이긴 다음에 굴단을 공작으로 삼았다고도 했다.
허나, 무성한 추측일 뿐.
누구 하나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권력의 정점에 선 황제에게 물을 수도 없으며, 말 붙이기도 무서운 굴단에게 물을 수도 없었다.
방랑자 굴단 공작은 그런 이미지였다.
황제도 인정할 정도 강자이지만, 정치력도 기반도 없는 자.
방랑자 굴단은 본디 보따리 장사나 다름없는 그를 낮춰 부르는 말이었으나, 들리는 소문로는 굴단 스스로가 그 별명을 아주 흡족해한다고 했다.
사교계에서 인기가 시들했을 뿐이지, 그 가진 힘과 권위가 어디 가는 게 아니다.
굴단 공작은 그의 기사단 45명과 함께 상하이 남작성에 도착했다. 제국의 귀족으로서 잔슨은 바트롬 기사단을 전부 대동한 채 그를 맞이했다.
"고,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잔슨이 한쪽 무릎을 꿇고는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바트롬 기사단도 한목소리로 답하며 절도있게 예를 취하니, 주변 일대로 퍼져나가는 박력이 대단했다.
황금투구 너머로 보이는 부리부리한 눈동자가 의문을 담고서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를 모시러 갔던 상하이 남작의 장자, 왕린이 재빨리 말했다.
"바트롬 후작령에서 지원 온 기사단이옵니다."
굴단의 시선이 잠깐 잔슨에게 머물렀다가 왕린에게 되물었다.
"상하이 남작은 어딨는가?"
"예에, 저기에... 오고 계십니다."
왕린이 저 멀리서 부산스럽게 뛰어오는 아버지를 가리켰다. 왕웨이는 넘어지는지 절하는지 모를 정도로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어이고오! 공작 전하! 상하이 남작령을 이리 구원해주시어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
"소신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사옵니다."
"...."
소통의 팔찌를 통해 그 의사는 분명 전달되었으나, 굴단의 눈빛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필요한 말만을 꺼낼 뿐이었다.
"내일 그놈들을 향해 진군한다."
"허억! 영지의 사정을 헤아려 이리 나서주시니 감...."
"너."
굴단은 상하이 남작 왕웨이의 말을 더 들을 생각도 없는 듯 그의 말을 끊으며, 아직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취하고 있는 잔슨을 불렀다.
"예에, 전하."
"이름이 뭐냐?"
"잔슨 빌리네오 남작입니다. 전하!"
"잡병들을 통솔해라. 내일 동이 트면 진군한다."
"예에, 전하."
잔슨은 가타부타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굴단 공작은 그 말만을 남기고 떠나버렸고, 그 뒤로 상하이 남작이 부리나케 따라붙었다.
"저은하! 저기 별궁을 거처로 삼으소서!"
"저 후원을 쓰겠다."
굴단을 따라온 전사들은 그저 대충 정원에 천막을 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잔슨이 몸을 돌렸다.
"가자."
"네."
은빛의 플레이트 아머를 차려입은 60명의 기사단은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주변에 위압과 기세가 대단했다.
"단장님."
"말하라."
"어째서 굴단 공작의 작전에 순순히 협조하십니까?"
기사단장 잔슨이 발걸음을 멈췄다.
뒤돌아보는 그의 눈에 핏발이 섰다.
"요릭."
"넵! 단장님!"
"공작의 말이 그저 작전 협조 정도로 들리더냐?"
"...."
부단장 요릭이 입을 다물었다.
"나만 느꼈나?"
"무엇을 말씀이신지...."
잔슨이 손을 떨었다.
위대한 검사이자 존경받는 기사단장의 모습에 단원들은 크게 놀랐다.
"협조를 구한 게 아니다. 공작은 명령한 게다."
"하지만 아무리 작위가 높다 하나 바트롬 후작가의 가신인 우리 기사단에 명령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흐흐."
잔슨이 웃었다.
"전장에서 정의 따질 놈들이군."
다른 제후의 가신에게 명령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불응했다면 거기서 나와 너희 모두는 죽었다."
"...!"
"너, 너무 억측이 아닙니까?"
부단장 요릭으로서는 당연한 의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되지 않은가?
귀족이 아무리 제멋대로인 족속이라고 해도, 타 제후의 가신을 함부로....
"나는 느꼈다. 아니, 나만이 느꼈다."
"...."
부단장 요릭은 의아할 따름이다.
단장은 무엇을 느꼈기에 저리 핏발선 눈으로, 입술을 짓씹으며 떨어대는가?
그의 행동이 얼마나 이해되지 않으면, 성감대라도 자극당했나 하는 수상하고 황당한 생각까지 들었다.
"후우우우. 무서운 자다."
잔슨은 부하의 불손한 생각을 돌볼 겨를도 없이 다시 길을 걸었다. 아직도 생생하다.
그 부리부리한 눈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때의 감각이 아직도 몸에 남아있다.
맹수.
아니, 상상 불가능한 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괴물의 발치에 눌린 기분이다.
어떠한 저항도 무의미해, 싸울 의지조차 들지 않는 위압감이었다.
황제와 호각을 다툴 정도의 강자라고 했던가?
그 말은 허언이 아니리라.
제국의 정점을 엿본 기분이라 묘한 쾌감마저 들었다.
모멸감은 희열로, 두려움은 존경으로 변했다.
"부대를 통솔해라! 내일 동이 트는 대로 진군이다! 상하이 영지군의 지휘권을 가져와라."
"네, 단장님!"
잔슨의 머릿속에 바트롬 후작의 당부는 휘발되어버렸다. 전선이 불리하거든 지체없이 도망쳐, 전력을 보존하라는 명령 말이다.
'고구려 놈들. 씹어 먹어주마.'
대신, 굴단 공작의 투기가, 그의 호전성이 전염이라도 된 듯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의 명령이 있다면 불구덩이라도 들어갈 기세다.
*
N4414 맵의 최남단 테무 요새.
떠들썩하게 저녁을 보낸 고구려군은 느지막이 일어나 점심을 해결한 이후에 진군하기 시작했다.
고구려 대왕 강철두의 합류로 전장이 변했다.
대 전략은 당연히 변경되어 상하이를 위한 침략의 전진기지 역할로 삼았던 테무 요새는, 전리품을 후송하기 위한 후방부대의 지휘소 역할로 바뀌었다.
김춘배의 마적단이 그 역할을 맡아 테무 요새에 머물며 전방과 후방을 잇는 가교 역할을 맡기로 하였다.
마적대 2천을 제외한 나머지 부대 6천여 기가 북상하기 시작했다.
전략만이 아니라 부대 운용도 상이해졌다.
"끼아아아!"
여기저기 그리핀이 날아오르며 하늘에서 척후의 역할을 충실하며 맵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월드맵에 반영해주었다.
두두두두두.
"늦는 놈들은 오늘 저녁을 서서 먹어라!"
"이랴! 하하, 달려라!"
말을 타고 달리는 대장들의 모습은 전장이 아니라 사냥터를 나온 듯 유쾌하기까지 했다.
일본대의 일부 병력을 제외하면 사실 전원이 기병이다 보니 행군 속도는 엄청나게 빨랐다. 저녁 해가 지기도 전에 성 하나를 만날 수 있었다.
"대왕! 전방에 관문성이 하나 있습니다. 한자로 함곡관이라 쓰여있었습니다. 병력은 1천가량, 그 수준은 파악하기 힘듭니다."
그리핀 정찰병의 보고에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애당초 그가 이번 전장에 참여한 것은 전쟁의 빠른 종식을 위해서다.
더불어 제국에 붙어버린 지구인 출신 도시를 정벌함으로써 다른 지구인 개척마을들을 향한 경고의 의미다.
이곳 상하이처럼 박살 나기 싫으면 얼른 복속을 청하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어서 가자!"
"예, 대왕!"
철두는 소나따의 속도를 올려 진영의 선두로 나섰다.
함곡관은 주변의 지세를 이용해 지은 관문성이었다.
높지는 않지만, 도보로나 말을 달리기엔 영 부적합해 보이는 산 사이의 골짜기를 막아둔 성이다.
굳이 우회하는 것도, 공성하는 것도 택하지 않았다.
촤르르륵!
철두가 말을 달리며 손을 내 뻗자 행군 경로 근처에 있던 강에서 물줄기가 솟구쳐 손아귀로 빨려 들어왔다.
형태를 갖춘 묠니르는 즉시 철두의 마력을 아낌없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파지지지직!
묠니르에 번개의 기운이 가득 모여들었을 때, 철두는 함곡관이 훤히 내다보이는 개활지 앞에 도착했다.
"항복하여! 고구려에 귀의하라!"
철두의 쩌렁쩌렁한 소리가 함곡관과 주변 산을 울렸다.
[어림없는 소리!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군을 물려 돌ㅇ....]
마법을 사용했는지 증폭된 음성으로 들리는 중국말에, 철두는 더 두고 볼 것도 없다는 듯 묠니르를 휘둘렀다.
꾸아아앙!
산을 없앴다는 묠니르의 전설은 실시간으로 갱신되고 있다.
신화의 길이라더니, 정말 이제는 그 행동 하나하나가 신화 속 이야기와 다를 바 없었다.
드드드드.
관문성이 있었으나 없어졌다.
천 명이 주둔했으나 살아남은 자는 수십이 되지 않았다. 혼비백산해 도망치는 그들을 보며 철두가 명했다.
"진군!"
"진군하랍신다!"
"말을 달려라!"
철두의 짧은 명을 복명복창하며 부대가 미친 듯이 뒤따랐다. 막아서는 모든 걸 부숴버릴 것만 같았다.
그들의 행로는 거침없었으며, 거리낄 것도 없었다.
뿔 세 개 달린 덩치 큰 말을 타고 달리는 대왕의 등을 바라보고 가다 보면, 언제까지고 달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마을이다! 보급이다!!"
"예! 대왕!"
길이란 본디 사람이나 마차가 오가며 생겨나는 것인지라, 그 행로가 마을과 마을로 이어짐은 당연했다.
관문을 지나 처음 도착한 이름도 모르는 마을은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도망친 닭 몇 마리 나다니는 것 빼고는 가축도 모조리 끌고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집은 멀쩡하고, 우물에도 독 같은 걸 풀지는 않은 것으로 보였다.
"대왕! 함정은 아닌 듯합니다."
"적긴 하나 곡식들도 여기저기 있습니다. 검시해봐도 독은 없습니다."
적의 보급을 긍휼히 하기 위한 청야전술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공연히 함정 같지도 않았으나, 확실히 해둘 필요는 있었다.
"주변을 수색하라."
"예에! 명을 따릅니다."
혹시 모를 매복이나, 함정 따위를 수색해 보았지만 나오는 건 없었다. 주변에 인접한 마을들도 모조리 비어 사람이 없었다.
"주변 마을이 모조리 비었습니다."
"고구려의 진군을 피해 민간인들을 대피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경로상의 마을 주민들을 피난시킨 것으로 결론이 났다. 허겁지겁 귀중품만 챙겨 달아난 듯한 모습도 그렇고, 다시 돌아올 것을 염두에 두어 마을이 멀쩡한 모습도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영민을 아낄 줄 아는 놈이군."
철두는 이곳에 자리 잡은 중국인 수장에 대해 짧게 평하고는 명했다.
"오늘 밤은 이곳 마을에서 보낸다."
"예, 대왕!"
6천의 군세가 마을을 점거했다.
고작 하룻밤이지만 마을 건물 몇을 허물어 외부에 세우는 등, 혹시 모를 야습에 대비했다.
그리핀 라이더들은 순번을 정해 수시로 주변을 날아 정찰하며 적의 접근을 파악했다.
다음 날 동이 트며 여기저기 밥 짓는 솥이 걸리고 연기를 피워올리는 가운데, 북쪽으로 정찰 갔던 그리핀 척후병이 적의 동태를 보고했다.
"북쪽에 호로관이라 쓰인 관문성이 하나 더 발견했습니다. 그 후방으로 대략 1만가량의 적 병력이 남하 중입니다."
적들은 호로관을 틀어막아 결사 항전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철두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침을 든든히 먹어라! 점심은 호로관에서 먹겠다."
"예, 대왕!"
적이 저리 적극적으로 나와주니, 이번 전쟁도 그리 길어질 것 같지 않았다.
342화 운명에 이끌려
사람의 기본적인 이동 방법은 도보다.
풀밭도 사람들이 자주 오가면 길이 만들어지기 마련이고, 일단 길이 만들어지면 이동 수단을 이용하기도 용이해진다.
바퀴를 굴려 가는 모든 이동 수단은 길에 예속된다.
길이 얼마나 잘 깔려 있느냐는 교통 발달의 척도다.
지상의 운송 수단은 노바보다 지구가 월등하다.
길을 벗어나는 항공과 해상 이동도 지구가 더욱 발전했으나, 오직 한 가지 노바가 월등한 것이 있다.
이동마법진.
노바의 신비이자, 고대 마법의 유산.
성소와 더불어 현재의 마법 문명으로는 만들어내지 못하는 이것들은 노바 곳곳에 산재해 있다.
마치 현대 지구의 공항처럼 이동마법진은 교통의 요충지로 자리매김했고, 모든 길은 이 이동마법진으로 향하도록 설계되어있다.
노바에 설립된 도시 상하이 또한 다르지 않았기에, 가장 가까운 이동마법진인 남쪽을 향해 큰길인 남방대로가 나 있었다.
가도를 정비하는 일은 많은 공력이 들어가는 일이고, 유지보수를 위해서도 지속적으로 재물이 들어간다.
상하이는 이 남방대로 사이 방어 요충지마다 관문을 쌓아, 통행세를 징수하는 창구이자 유사시에 외부의 침략을 대비하는 방어 요새로 구실 하게 했다.
가장 큰 4개의 관문이 있으니, 남쪽부터 함곡관 호로관 동관 옥문관이다.
노바의 모든 지형과 성들이 그러하듯 지구의 것에서부터 유래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두 번째 관문인 호로관에 상하이의 병력 1만이 모였다.
상하이가 자랑하는 다섯의 고수 중에 겨우 셋이 살아남았다. 그들 셋은 전부가 소드마스터지만 지휘실의 말석을 차지할 따름이었다.
"호로관 앞에 포진을 마쳤습니다. 단장님."
"수고했소."
그들은 우군으로 참전한 바트롬 기사단의 단장 잔슨 남작의 명을 받았다. 하지만 보고하는 상하이 남작군의 장군들도, 통솔권을 쥔 잔슨 남작도 본인이 최고 지휘관이라 생각지 않고 있었다.
모든 명령은 굴단 공작에게서 나온다.
그가 이 전장의 사령관이자, 승패의 핵심이다.
"적들은?"
"함곡관을 넘은 이후 파죽지세로 치고 올라와 텐진 마을에 진을 꾸리고 숙영에 들어갔습니다."
"으으음."
기사단장 잔슨 빌리네오 남작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의 참전이 확실한가?"
"정황상 그렇습니다."
"...."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함곡관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병사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고구려 왕의 참전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야 했다.
천둥소리와 함께 눈 깜짝할 사이 함곡관이 사라졌다.
후방에 있었기에 겨우 목숨을 부지해 살아 돌아온 병사가 서른둘이고, 그들의 진술은 모두가 같았다.
전장에 있어 그런 위력을 내는 마법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가능한 방법은 오직 성물의 파괴력뿐이니, 그들은 고구려 왕을 같은 전장의 적으로 맞이하게 된 것이다.
"적의 동태를 한시도 놓치지 마라."
"하오나 적의 그리핀 척후에게 번번이 발각당하고 있습니다."
"척후를 더 늘려라."
하나라도 살아 돌아와 적의 위치를 알려주면 된다.
"예, 단장님."
상하이의 셋 남은 장군이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상하이 남작령의 군부에서 가장 높은 직급의 관직에 있고, 개인의 무력도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렀으나 그것을 빌미로 어찌해볼 자리가 아니다.
나트롬 기사단 60인 중에 소드마스터가 아닌 이가 없었고, 그 단장인 잔슨은 무려 위대한 마스터다.
제국의 후작이란 이토록 대단한 저력을 지닌 제후였고, 그런 제후가 직접 이 전장에 와 있다.
고구려 왕의 참전에도 병력들의 동요가 적은 것은 모두 그 존재 덕분이었다.
"전하를 뵙고 오겠다."
"예, 단장님."
고구려 왕이라는 변수에 맞대응할 수 있는 존재.
실질적인 이 군대의 사령관에게 현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잔슨 기사단장이 움직였다.
굴단 공작이 이끌고 온 자들은 고작 45명이 전부다.
그들은 호로관 앞에 포진한 상하이군의 좌익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의 군영은 모닥불 몇 개가 타오르고 있었는데, 인벤토리에서 아무렇게나 꺼내 놓은 상자와 간이 텐트들로 어지러웠다.
전혀 정돈되지도, 군율도 없어 보이는 그 진영에 발을 디디며 잔슨 남작은 숨이 막힐 듯한 압박을 느꼈다.
"...."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이 지나치게 호전적이다.
"공작 전하를 뵈러 왔소."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던 사내 하나가 슬쩍 턱짓했다. 가봐도 좋다는 신호에 잔슨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무례한 놈이다.
얼굴도 앳돼 보이는 것이 굴단 기사단 중에서도 그리 높지 않은 직책으로 보였기에 더 그랬다.
"...."
"...."
잔슨이 가만히 서서 노려보자 상대도 이글거리는 눈으로 마주 보았다.
'건방진!'
두 사람의 눈싸움에 주변에 흩어져있던 굴단 기사단의 이목이 쏠렸다. 누구 하나 말릴 기세 없이 오히려 잔뜩 기대하고 부추기는 꼴이다.
잔슨은 이대로 물러나자니 자존심이 상했고, 그렇다고 저 건방진 녀석을 손봐주자니 녀석이 굴단 공작의 군진이었기에 예의가 아니었다.
두 사내가 기세를 끌어모으자 자연스레 분위기가 날카롭게 변했다.
으레 낯선 사람들이 서로 마주치면 누가 더 우위에 있는지 견주는 게 보편적인 심리다.
하물며 검을 든 기사들은 오죽할까?
강자와 약자를 판별하는 것은 숨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습관과 같다.
잔슨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경우의 수가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서로 싸우게 되면 어떤 수를 쓸 것인지, 반격은 어떠할지, 연달아 어디를 노릴지 따위를 생각하느라 분주했다.
'내가 무슨?'
그러다 불현듯 본인의 생각에 화들짝 놀랐다.
저 어린 기사 놈과 진지하게 호각세를 다투는 모습만이 그려져서다. 그만큼 사내가 보이는 기세는 보통이 아니었다.
'나보다 하수가 아니다.'
호각세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사내는 잔슨의 기세가 꺾이자 흥미가 식었는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조각칼로 나무를 깎고 있었는데, 다듬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무엇을 만드는지는 모호했다.
굴단 기사단은 공작이 쓰고 다니는 황금투구와 같은 형태의 투구를 쓰고 다녔다. T자 형태로 뚫려 있는 투구는 눈두덩이와 입술 정도만을 노출했다.
그 정도만 해도 나이 따위는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는데, 새파랗게 어린 녀석의 실력이 상상 이상임에 잔슨은 전율했다.
이 진영에 자리 잡은 45명의 굴단 기사단.
어쩌면 이들 모두가 위대한 마스터 일지도....
그야말로 왕국 십여 개를 모아도 대적하기 힘든 전력이 아닌가?
"가까이 와라."
묵직한 저음에 잔슨이 충격에서 헤어 나왔다.
"헛."
뿌옇던 시야가 돌아오듯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온다.
순간 수치심과 패배감이 들었으나, 여기저기 널브러진 굴단 기사단은 비웃음이나 조롱 따위가 없었다.
각자 제 할 일을 했는데, 모닥불에 고기 따위를 꿰어 구워 먹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잔슨은 그들의 무관심에 오히려 더욱 모멸감이 들었다. 마치 너 따위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한 무시로 다가왔다.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나무상자 위에 걸터앉아있는 굴단 공작을 향해 다가갔다.
"병력 상황 보고드립니다."
"필요 없다."
"...."
굴단 공작은 잔슨의 말을 끊어먹었다.
"그놈은?"
그놈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기에 대답은 즉각 튀어나왔다.
"전장에 합류한 것으로 보입니다."
"...후후."
잔슨의 보고에 굴단이 씩 웃었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고구려 왕의 참전 소식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웃음은 잔슨에게 묘한 기대를 불러일으키게 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충분히 해봄직하다.'
황제와 호각세를 이뤘다는 굴단이 아닌가?
황제가 누구인가?
성물 듀렌달의 주인이다.
두 사람이 정말 결투를 벌였는지, 그 당시 성물을 사용했는지 따위는 알 길이 없으나, 추측은 해볼 수 있다.
'공작 전하는 자신이 있으시다.'
고구려 왕의 기세가 대단하고 묠니르의 위력이 신에 닿았다지만, 굴단 공작의 미소에서 자신감을 읽어냈다.
이 전쟁은 해볼 만하다.
제국을 향한 고구려의 정복 전쟁도 여기서 끝이다.
모든 영웅들이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그저 영웅으로 남듯, 묠니르를 쥔 그의 신화도 여기가 종착이다.
그 모든 것을 가로막을 자가 여기 계시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랜덤으로 좌표 이동하는 굴단 시티가 때마침 이 근처에 온 것도, 지지부진하던 전장에 고구려 왕이 참전한 것도 모두가 신이 안배한 것만 같았다.
잔슨은 본인이 할 수 있는 역할에 충실하기로 했다.
적을 찌르는 칼은 여기 공작과 그의 기사단이 할 것이다.
이 무대에서 자신의 역할은 그저 지휘 정도면 충분하니.
"야습을 생각하신다면 오늘 밤이 좋을 듯합니다."
"주제를 넘지 마라."
"헙!"
굉장한 기세에 잔슨은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굴단 기사단의 애송이와는 차원이 다른 기세다.
"물러가라. 내일 여기서 녀석을 맞이하겠다."
"예에! 전하!"
잔슨이 저도 모르게 크게 복명하고는 서둘러 물러갔다. 굴단은 녀석이 떠나자 다시 손아귀에 쥐고 있던 호두를 씹었다.
"후후후."
웃고 있는 그에게 철투구를 쓴 기사단원 하나가 다가와 옆의 상자에 걸터앉았다.
"즐거워 보이십니다. 족장."
"왜 아니 즐겁겠나? 타막."
"이리 빨리 성장할 줄은 몰랐습니다."
"후후후. 언제나 예상을 비껴간 놈이지."
굴단은 히죽 웃었다.
타막도 웃었다.
"내일이면 결착을 보겠군."
"아, 그래."
굴단이 손아귀에 쥔 호두 껍데기를 모닥불에 던져넣었다.
"질긴 운명의 악연을 끊어낼 때지."
"발할라를 위하여!"
"발할라!"
타막의 선창에 제각각 휴식하던 철 투구의 사내들이 소리 질렀다.
군영의 좌익에 자리 잡은 그들의 기합성에 상하이 군대가 움찔움찔 놀랐다.
*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 강철두는 일찍 일어났다.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있으니, 곧 그의 곁에 제임스가 다가왔다.
"대왕."
"말하라."
"오늘 결착을 보겠지요?"
"후후, 그렇겠지."
호로관까지 말을 달리며 오후쯤엔 당도한다.
한숨 돌리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강철두 개인의 체력만 충분하다면 전투는 바로 시작해도 된다.
이후의 일 처리야 부하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포로로 잡고, 약탈하고.
"바트롬 후작가는 천천히 공략하실 겁니까?"
"군대의 진격이 멈추는 건 바트롬 후작성이 될 거다."
제임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늘 전투가 대승으로 끝나더라도 이 전쟁의 끝은 아직 멀리 있었다.
"널리 널리 소문이 나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 하는 전쟁이 아니냐?"
이번 전장에서 흘리는 피가 많을수록 좋은 경고가 될 것이다.
아직 고구려에 복속하기를 망설이는 많은 개척마을들이 앞다투어 아이언헤드 성으로 사신을 보내올 터다.
"하하, 사람들은 의외로 직접 본 게 아니면 잘 안 믿으니 그렇지요."
"그럼 다음 대가리가 깨지는 건 그놈 차례겠군."
"하하하."
제임스가 씁쓸하게 웃었다.
한때 그의 기반 도시였던 미국인 개척마을 마이클시티는 불행히도 아직 고구려에 귀의하지 않고 있었다.
부디 다음 전장이 마이클시티가 되지 않으려면 이번 전쟁에서 더욱 날뛰어야 할 것 같다.
"아침 드시러 가시죠."
"후후, 그러지."
매번 그래왔듯.
망치질 한 번에 모든 게 끝날 터다.
아침 식사를 한 고구려군이 빠르게 군진을 해체한 후에 진군하기 시작했다.
343화 쟁투
두두두두두.
고구려군이 말을 달렸다.
6천의 군세가 흙먼지를 피워올리며 달려오는 기세는 말로 형용하기 힘들었다.
특히 그것이 적군에게는 상당한 압박으로 다가왔다.
거대한 먼지구름.
흔들리는 지축.
집단적인 광기와 살기.
아군의 군세가 1만이 더 많은 건 알지만, 두 눈에 담기는 건 오직 적군뿐이다.
옆에 선 동료들의 긴장과 떨림이 더욱 두려움을 부추긴다.
목숨이 오가는 전장이다.
특히나 말단 병졸들은 화살받이 또는 가장 먼저 창에 꿰이는 신세가 되기 마련이라, 누구보다 귀동냥에 열중하는 것도 이들이다.
지휘부에서 아무리 정보를 통제하려고 해도 알음알음 소문은 퍼지기 마련이고, 함곡관의 증발 소식은 대부분이 알고 있었다.
저기 저 흉악한 고구려왕이 묠니르 하나 뽑아 휘두르면 본인들은 애써 훈련한 성과도 없이 창 한번 찔러볼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죽게 될 터다.
'죽는다. 죽을 거야!'
아무리 희망을 찾아보려 해도 부정적인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퍼억! 퍽!
"똑바로 서라!"
"이탈하지 마!"
"용기를 가져라! 우리에겐 제국 공작이 함께한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독전관들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빌어먹을 랭커 놈들.
저놈들은 여분의 목숨이 있는 놈들이다.
부활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랭커와 자신들과 같은 하위 노비스들의 처지는 다르지 않나.
도망치고 싶다.
상하이 시장 투표 때 괜히 왕웨이를 뽑았다.
아니, 왕웨이가 아니라 누굴 뽑더라도 같았으려나?
빌어먹을.
기세를 살려 돌격할 것 같던 적 기병들이 서서히 속도를 줄이더니 멈춰서기 시작했다.
바람 방향이 좋지 못해 그들이 피워낸 먼지구름이 상하이 군을 향해 덮쳤다.
"쿨럭, 쿨럭."
여기저기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빌어먹을 고구려 놈들.
이건 황사에 대한 복수인가.
"함성을 질러라!"
"힘껏 응원해라!"
"우와아아아아!"
독전관들의 외침과 옆 동료들의 고함에 저도 모르게 소리 지르던 병사들이 목을 빼고 두리번거렸다.
"일기토다!"
"굴단 공작이 나섰다!"
굴단 공작과 45인의 굴단 기사단이 좌익 대열에서 이탈해 앞으로 나갔다.
저들의 대결에 1만의 목숨이 달려있다.
그리고 수십만 상하이 주민들의 운명도 함께다.
양군의 이목이 모두 그들의 최고 지휘관에게로 몰렸다.
*
강철두는 손짓에 기마 행군이 멈췄다.
적과의 거리는 불과 3킬로미터 남짓.
"숨을 돌려라."
"예, 대왕!"
별동대와 특작대, 마적대가 각자 조별로 도열하며 말을 바꿔탔다.
고구려군은 펫주머니와 탈것, 두 개의 인벤토리로 말 두 필을 운용하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체력이 온전한 돌격용 전투마로 갈아탄 채 정렬했다.
호흡을 돌리며 물을 마시거나, 건량 따위를 꺼내 먹는 이들도 있었다.
돌격 명령이 떨어지면 언제 튀어 나가도 좋을 정도로 기세를 끌어올렸다.
"적 좌익이 출진합니다."
전장을 살피고 있던 오준환의 말에 강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는 놈이군."
멀리서도 보이는 황금투구의 존재감.
"구면입니까?"
"전에 본 적 있는 놈이다. 제국 공작이다."
"헉, 공작이요?"
공작이라는 말에 대장들의 표정에 긴장이 서렸다.
그들로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강자다.
"후후, 다녀오지."
"따르겠습니다."
"됐다."
좌익에서 떨어져 나와 앞으로 오는 굴단 공작의 걸음은 느긋하기 그지없다. 저것을 어찌 돌격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철두도 천천히 말을 몰아 나아가는데, 뒤에서 지르골과 사토가 따라붙었다.
결사대 둘을 데리고 전선의 중앙으로 나아가니, 적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스파르타 전사들 같군요."
사토가 짧게 평했다.
갑옷이라 할 만한 건 가슴을 가리는 흉갑과 투구뿐이다. 하반신에 스커트 갑옷을 입고 있는 이도 있었고, 대충 갑옷을 두른 자도 있었다.
통일된 모습의 흉갑과 투구가 아니라면, 군인이 아니라 도적 떼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중구난방이다.
노바의 기사들은 전부 전신 갑옷을 선호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모습이다.
특이하기로는 황금투구를 눌러 쓴 굴단 공작이 제일이었다.
결사대 2명을 대동한 철두가 45명의 기사단을 대동한 굴단 공작과 마주 섰다.
"또 보는군. 굴단."
"후후, 건방지긴."
굴단은 말과 다르게 히죽 웃었다.
그 웃음에 일견 대견함과 반가움까지 교차하고 있으니 뜻 모를 일이다.
"왜 그렇게 웃나?"
"끌끌, 결국 이리될 운명이었나 싶구나."
"...? 무슨 소리냐."
철두가 의아해하는데, 지르골은 아까부터 말이 없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철두에게 조막만 하게 말했다.
"굴단은 발할라 출신 바바리안 중에서도 가장 강한 자입니다."
"음? 너, 굴단을 알고 있냐?"
"발할라 출신 바바리안 중에 대전사 굴단을 모르는 이는 없습니다."
대전사라.
철두가 히죽 웃었다.
"유명한 놈이었나 보군."
오늘 그놈이 자신의 손에 떨어질 것이다.
"그럼요. 다섯 바위 부족의 굴단 하면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
지르골의 말에 철두의 얼굴이 덜컥 굳었다.
"뭐라고 그랬냐?"
"예? 굴단이 대전사라는 거 말입니까?"
"아니, 무슨 부족이라 했지?"
"다섯 바위 부족 말입니다. 바바리안 중에서도 호전적인 그놈들을 이끄는 대족장이 굴단 아닙니까?"
"...!"
철두의 몸이 덜컥 굳었다.
꽉 말아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굴다아안!"
철두의 고함이 고구려군과 상하이군의 귀에까지 닿을 정도로 쩌렁쩌렁 울렸다.
"네가 말해라."
"클클, 무엇을 말이냐? 어린 전사여."
"네가 다섯 바위 부족의 족장이냐?"
"...."
굴단이 황금투구를 벗었다.
주름이 지기 시작한 늙은 얼굴이 드러났다.
굴단은 대꾸 없이 씩 웃으며 흐트러진 백발을 정돈해 뒤로 질끈 묶었다.
뚜두둑.
그러곤 두꺼운 손으로 흉갑을 뜯어내니, 상처투성이 상반신이 드러났다. 타투가 가득한 몸은 누가 보더라도 강인한 바바리안 전사의 그것이었다.
저것이 대답인가?
철두가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늙은이. 답하라."
"클클, 고얀지고."
철두의 눈에 살심이 넘실거렸다.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그를 보며 씹어내듯 노려보았다.
늙은 바바리안 전사가 답했다.
"카다잔의 아들 에이든."
"...!"
"많이 컸구나."
힘주고 있던 눈알의 실핏줄이 터져나갔다.
저도 모르게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흐른다.
"이 개자식이!"
자신을 알고 있다.
대답은 충분하다.
슈아아아!
달려가는 철두의 손에 도끼가 쥐어졌다.
콰앙!
굴단이 인벤토리에서 꺼낸 도끼로 막아냈다.
콰앙, 쾅!
순식간에 열두 번의 공방이 지났다.
정확히는 강철두의 공격 일변도를 굴단이 무리 없이 받아냈다.
"아직 여물지 못했구나."
"닥쳐라! 늙은이!"
"클클, 네놈은 부족장이 누군지 기억하지도 못하느냐?"
"이 개자식!"
사진 따위도 없는 세계.
아버지 얼굴이야 심상 세계에서 자주 보지만, 어머니 얼굴은 이제 가물가물하다.
그런 마당에 어릴 적 부족의 친구들이나 어른들 얼굴을 기억할 리 만무하다.
"넌 오늘 내 손에 죽는다. 늙은이!"
"후후, 해볼 수 있으면 해보아라."
굴단의 얼굴에 걸린 웃음이 미치도록 역겹다.
저 자식의 여유로운 표정을 두려움으로, 후회로 바꿔놓고 싶다.
저주받은 바바리안 아이.
그 아이를 죽이라 명한 부족장의 입을 찢어놓고 싶다!
츠츠츳.
철두가 내뻗는 손아귀에 바닥의 흙들이 솟아올라 창이 되었다.
던지면 목표를 빗나가는 경우가 없는 궁극의 창.
"그런 것 따위에 기대다니. 전사의 수치다."
"지랄하지 마라."
굴단의 음성에 철두는 비죽 웃었다.
전사고 나발이고 지금은 복수가 우선이다.
"정정당당하게 붙어 나를 넘어서라. 에이든!"
"함부로 그 이름을 담지 말라!"
철두가 버럭 고함지르며 궁니르를 던졌다.
필살의 창.
저놈은 이제 죽는다.
쇄애애애액. 파삭!
허나, 어떻게 된 일인지 맹렬한 기세로 쏘아져 나간 궁니르가 굴단의 손에 붙잡혔다.
"...!"
철두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츠츠츳.
굴단의 몸에 아지랑이 같은 귀기가 서렸다. 누르스름한 빛은 그가 늘 쓰고 다니던 황금빛 광채와 같았다.
"대지의 기운이 서렸구나."
굴단이 흡족하게 웃었다.
"너는 성물로 나를 해하지 못한다."
"난 두 개의 성물을 가지고 있다."
철두는 즉시 수통 마개를 열어 손을 뻗으니 물줄기가 치솟아 망치가 되었다.
후우우우웅!
철두가 묠니르를 잡고 냅다 다가가 후려쳤으나.
콰앙!
굴단은 성물 묠니르를 도끼로 막아냈다.
철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 성물을 가졌군."
"후후, 평범한 도끼다."
"구라치지 마라!"
철두가 버럭 외쳤으나 굴단은 비릿하게 웃으며 처음으로 반격을 시도했다.
쇄애애액, 쾅, 파직!
굴단이 휘두른 도끼가.
정확히는 그를 아우르는 황금빛 광채가 묠니르를 물방울로 돌아가 흩어지게 만들었다.
"이럴수가!"
철두가 급히 비산하는 물방울을 다시 모아 묠니르를 만들어내 방어해냈으나 결과는 반복될 뿐이었다.
콰앙! 촤르르!
황금빛 광채를 머금은 도끼에 부딪힐 때마다 묠니르가 부서졌다. 궁니르도 다르지 않아 단단한 창이 굴단을 뚫어내지 못하고 족족 모래로 돌아가 흩어질 뿐이었다.
철두가 뒤로 훌쩍 물러났다.
성물이 통하지 않는다.
적잖이 당황했으나 그것을 티 낼 정도로 어리숙하지 않다.
"어떻게 한 거냐?"
굴단이 크게 웃었다.
"아직 어리숙하구나."
"...."
철두의 얼굴이 다시 험악해졌다.
자신을 애 취급하는 건 할아버지나 아버지, 아엘 정도면 충분했다.
부모님의 원수가 저따위 말을 지껄이니, 모욕감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다.
"후후, 선조의 혼이 없는 바바리안 전사는 전사로 인정받지 못한다!"
"어쩌라는 거냐!"
철두의 콤플렉스를 건드린 굴단이 히죽 웃었다.
"나는 발할라를 모시는 대전사로서, 여러 부족의 뛰어난 전사들을 거두었다."
굴단의 말에 굴단 기사단 전원이 투구를 내팽개치고, 상체를 가린 흉갑을 뜯어내 버렸다.
상체가 훤히 드러나는 근육질의 사내들 몸에는 바바리안 타투가 가득하다. 저마다의 빛깔로 반짝이며 아지랑이를 피워올리는 선조의 혼들.
진정 바바리안 전사로 불리는 이들이 저기에 있다.
"클클클, 이들을 아우를 수 있는 건 대전사뿐!"
"늙은이!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굴단이 도끼를 들어 철두를 향해 겨눴다.
"성물 따위 버리고 정당하게 덤벼라."
"...."
"대전사의 쟁투다!"
철두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무슨 소리냐?"
"나 발할라의 대전사 굴단이 너의 도전을 받아들이마!"
굴단의 몸에 깃들었던 황금빛 광채가 빠져나와 허공에 실체를 이뤘다.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선조의 혼.
흐릿해 그 얼굴도 형태도 잘 보이지 않으나, 강하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겠다.
"...."
철두는 굴단을 노려보았다.
애 취급을 받았는데 계속 애처럼 굴 수는 없다.
'나쁘지 않다.'
쟁투니 뭐니는 모르겠고, 지금 성물 쓰지 말고, 선조의 혼도 쓰지 말고 붙어보자는 말이 아닌가?
"좋다! 나 강용철의 손자 강철두. 너에게 도전하겠다!"
철두의 소개에 굴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좁아진 눈매에 조금 분노가 어렸다.
"와라!"
"훗!"
철두가 도끼를 빼어 들고 달려 나갔다.
344화 대전사
쾅, 쾅!
철두는 여태 살면서 자신보다 강한 힘을 가진 인간을 본 적이 없다.
카그그극! 차앙!
"크읏!"
예전 오우거를 만날 때 힘의 격차를 느꼈다.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없다면, 기술로 이기면 된다.
촤앙!
"어설프구나!"
지금 강철두는 자신보다 더 힘이 강하며, 그 기술도 한 수 위인 강자를 만났다.
"늙은이, 뭘 먹은 거냐."
"후후후하하하!"
카앙, 쾅!
두 손으로 잡아 휘두르는 도끼 머리에 담긴 일격은 쉬이 피해내기 힘든 속도로, 막아내기 버거운 힘을 담고 날아온다.
"먹어서 단련하는 놈도 있더냐!"
"큿."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일방적인 수세다.
늙은 바바리안 굴단은 쉴 새 없이 도끼를 휘둘러오고, 강철두의 모든 신경을 그것을 막아내고 피하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아주 조금의 여유.
찰나의 틈이라도 보이면 반격의 기회로 삼겠건만, 굴단의 공격은 물 흐르듯 이어졌다.
콰앙, 쾅! 콰직!
휘몰아치는 공격에 막고 막고 굴렀다.
"후우, 후우, 후우!"
"고작 이 정도더냐!"
쾅!
"크읏."
도끼는 겨우 막아냈으나, 굴단의 발에 차인 가슴이 욱신거린다.
'부러졌군.'
숨쉬기가 거북하다.
"여신, 나를 치료해라!"
철두의 진심어린 기도가 닿아 여신의 팬던트가 빛났으나, 덩그러니 서 있던 황금빛 광채의 선조의 혼이 날름 그 빛을 흡수해버렸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
철두의 시선이 황금빛 선조의 혼에게 머물렀다.
저놈은 대체 뭐길래 신의 힘을 아무렇지도 않게 억제하는가?
"그따위 외부의 힘에 기대다니."
"늙은이. 무기를 가지고 쓰지 않는 인간은 멍청이뿐이다."
어쨌든 대화에 응해준 덕에 여유를 찾았다.
바바리안의 몸이 재빠르게 부러진 뼈를 붙이고 재생하기 시작했다.
"후우우."
호흡이 한결 편해졌다.
퍼렇게 멍든 것은 별수 없다.
이 정도만 해도 다시 싸울 준비가 되었다.
"덤벼라!"
"클클."
바바리안 명상법 1단계가 몸을 컨트롤 하는 것.
2단계가 심상세계를 열어 마음을 컨트롤하는 것.
1단계만 마쳐도 자연재생력을 몇 배로 당겨 특정 부위를 빠르게 치료하는 게 가능했다.
쇄애애액, 콰앙! 쾅!
철두의 도끼와 굴단의 도끼가 다시 부딪쳤다.
도끼란 본디 그 압도적인 중량감으로 일격필살을 노리는 무기다.
철두의 지금 도끼술의 레벨은 6. 위대한 경지.
사실상 기술의 영역인 명인의 경지(레벨4)까지가 사실 어렵지, 초인 경지(레벨5)와 위대함의 영역(레벨6)은 쉽다.
무기술이 레벨 4까지만 닿으면 그 뒤의 5, 6은 자동 레벨업이나 다름없다.
'검을 꺼낼까?'
같은 레벨 6의 경지라도 미묘한 숙련도의 차이는 발생하기 마련이고, 여태 철두가 더 많이 쓴 무기는 도끼보다는 검이다.
"잡생각이 보이는구나."
쾅, 쾅!
굴단의 공격이 쉴 새 없이 몰아친다.
고민도 하지 말라는 듯.
'검은 안된다.'
무기의 무게 차이가 너무 심하다.
안 그래도 힘의 우위는 굴단에게 있다.
검으로 바꿔 쥐면 절대 막아내지 못한다.
도끼는 모조리 피한다는 생각으로 검으로 반격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힘도 기술도 모두 굴단이 우위를 점하고 있어 금방 승부가 나 버릴 것이다.
'진다.'
강철두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패배라니.
"이노오옴!"
"큿."
쾅! 쾅!
"집중해라! 네가 전사라면 모든 걸 보여라."
"난 이미 전사다."
"애송이!"
쾅, 쾅!
빌어먹을.
힘에서도 밀리고 기술에서도 밀린다.
분하지만 굴단의 도끼 다루는 실력은 아득히 높은 수준의 경지에 닿아 있었다.
체중을 모두 실어 무방비하게 휘두르는가 싶으면, 또 그 체중으로 인하여 내려친 도끼를 원심으로 회수해 다시 공격을 이어가는 게 기가 막히다.
도끼를 휘두르는 느낌이 아니라, 신체의 일부인 도끼와 함께 휘몰아치는 모습이다.
경이롭다.
요즘 아버지와 함께 매일 심상공간에서 수련하는 도끼술의 극의가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늙은이, 실수하는 거다!'
무슨 영문인지 저 빌어먹을 원수는 지금 이 결투를 조롱하고 있다.
아까부터 마음만 먹으면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음에도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있었다.
이미 잡아 놓은 사냥감을 가지고 노는 꼴이지 않은가?
그 방심으로 인해 이 어린 호랑이에게 늙은이의 목이 물어뜯길 거다.
'배워 주마.'
철두는 굴단의 작은 행동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하고 집중했다.
성물도 없다.
여신의 치료도 없다.
믿을 것은 여태 강해지려 애쓴 자신의 노력과 의지뿐.
강해진다.
그것에 어떠한 전제도 없다.
부모님을 죽인 원수의 것이라 해도 기꺼이 배우고 익히리라.
강철두의 얼굴이 신중해졌다.
큰 두 눈은 별빛을 담은 듯 초롱초롱했다.
"좋구나! 애송이!"
"큿."
"전사의 눈이란 그런 거다!"
쾅, 콰앙! 쇄애애액, 콰직, 퍽!
바닥을 구른 철두의 몸에 상처가 하나둘 늘어난다.
자잘한 상처에 집중해 치료할 여유는 없다.
모든 정신력과 관심은 굴단에게 가 있다.
지금은 어떠한 생각도 들지 않는다.
강해진다.
저 맹수보다 더 강해진다.
비수처럼 박혀 철두의 근간이 된 아버지의 유언만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쾅! 콰직!
뇌가 아닌 몸으로 익힌다.
이렇게 했던가?
콰직!
아니군.
덜렁거리는 어깨를 틀어 빠르게 회복시키며 연신 뒤로 물러난다.
흰수염과 흰머리를 풀풀 날리는 도끼귀신은 도망치는 사슴을 쫓는 범처럼 따라붙어 앞발 휘두르듯 도끼를 내지른다.
팔이 조금 회복되자 한 손으로 쥔 도끼를 두 손으로 쥔다. 단단한 도끼자루를 쥐고 행동반사처럼 굴단의 행위를 따른다.
이렇게 인가?
쾅, 스컷!
맞군.
"호오!"
굴단의 허벅지를 스치는 도끼에 피부가 갈라져 피를 뿜었다.
애송이 녀석, 성장이 빠르군.
쾅, 콰앙!
디딤발이 약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강철두가 쉴 새 없이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굴단은 수세에 몰려 그 공격을 받아내면서도 오히려 얼굴에 내걸린 웃음은 짙어졌다.
'과연 안배를 받을 만한 아이로구나.'
힘을 줄 때마다 울컥울컥 솟구치던 피가 점점 옅어진다. 상처가 스스로 아물며 피가 멎더니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퍼억!
땅에 힘껏 발을 구르니 거머리처럼 붙어있던 피딱지가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
강철두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굴단을 노려봤다.
모든 신경세포 하나하나가 굴단을 주시하고 있다.
두 마리 범이 이빨을 세우고 대치하듯 그렇게 잠깐의 소강이 찾아왔다.
"이제 조금 전사라 부를 만하구나."
"...."
무념무상의 강철두는 대꾸할 여유가 없다.
아니, 애초에 듣지도 않았다.
발끝 손끝, 뇌에 공급되는 에너지마저도 오로지 굴단의 동작을 카피해 내는 데 집중되어 있다.
"승부를 보자. 애송이!"
굴단이 날아오르니 철두도 마주 튀어나갔다.
쾅, 카그그극!
두 마리 호랑이가 치열하게 발톱과 이빨을 휘두르는 것만 같다. 서로를 상처 입히고 우위를 점하기 위해 모든 것을 집중한다.
"후후후, 제법이구나."
"...."
굴단의 칭찬에도 철두는 대꾸하지 않았다.
아직 그럴 여유는 없으니까.
대화할 정도의 여유가 있다는 것만 보아도 굴단이 아직은 여유 있다는 표식이다.
쾅 쾅!
공방이 지날수록, 점점 더 굴단의 말이 줄기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극한의 집중력을 발휘해 서로의 목을 노리고 있다.
열 번 막고 한 번 반격하던 철두가 이제는 일곱 번에 한 번 반격할 정도가 되었다.
기울었던 승부의 판세가 점차 다시 모호하게 되어버렸다.
전장의 변화는 민감한 자들에게 그대로 드러났다.
전장을 주시하던 고구려군은 처음으로 고전하는 대왕의 모습에 잔뜩 긴장했으나, 다시 서서히 기우는 승기에 여유를 찾기 시작했다.
반면, 상하이군은 고구려 대왕이 휘두른 성물이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하자 함성을 내지를 정도로 고무되었다.
그 고구려다.
대단한 기세의 저 나라를 잡는다는 것은 앞으로 지구 출신 개척마을들을 휘어잡을 힘을 얻는다는 것과 같았다.
상하이 남작 왕웨이가 달뜬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바트롬 후작 가문에서 파견 나온 기사단장 잔슨도 애써 불안함을 지울 수 있었다.
'되었다. 굴단 공작전하의 우세다.'
잔슨은 공작의 싸움을 보며 피가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위대한 검사가 되고나서 놓아버린 수련을 다시 하고 싶을 정도의 고양감이다.
소문은 사실이었나 보다.
아니, 사실이었다.
그 대단한 성물의 주인과의 싸움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지 않은가?
저 정도면 정말 황제와 싸웠어도 호각세였지 않을까?
'고구려 왕도 별것 없군.'
마음속으로 안심이 들자 승자로서 여유가 생겼다.
성물의 힘만 믿고 까불던 고구려 왕의 최후를 이제 목격할 테니 기껍기 그지없다.
헌데, 압도적으로 기세가 좋은데 굴단 공작이 너무 봐주고 있다.
'이제는 끝내야 할 텐데.'
갑옷과 투구 따위 벗어던지고 웃통을 훤히 드러내놓고 싸우는 야만전사 둘의 싸움이 길어지고 있다.
슬슬 불안하더니, 이제 굴단이 점점 밀리는 모양새가 되었다.
'빌어먹을!'
잔슨이 부관을 향해 소리쳤다.
"활을 가져와라!"
"예, 단장님!"
위대한 검사 잔슨은 활쏘기에도 그 재능이 있어 활 숙련이 6에 달했다.
뿌드드드.
살을 걸고 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츠츠츳.
강기가 덧씌워진 활살을 조준하자마자 놓았다.
쐐애애액.
강기를 머금은 화살은 일반적인 화살의 속도를 아득히 초월해 눈 깜짝할 새에 날아갔다.
꽈아아앙!
하지만 강철두의 등에 닿기 전, 굴단 기사단원 하나가 철퇴를 휘둘러 강기시를 막아버렸다.
"무, 무슨!"
저놈들이 미쳤나?
아군이 아닌가?
미친 바바리안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전쟁에서 명예로운 결투가 어디있나?
"기사단 전원 기승!"
부랴부랴 돌격 준비를 하는 사이 고구려군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잔슨이 눈살을 찌푸리며 굴단을 찾으니 그의 어깨죽지에 도끼가 박혀 쓰러져 있었다.
"이런 젠장!"
늙은이, 노망이라도 난 겐가?
진즉 해치우지 않고 이 무슨!
*
콰직.
옆구리를 노려 후려치려던 도끼 머리를 붙잡고 그대 반 바퀴 돌아 상대의 어깨에 박아버렸다.
<도끼술이 한 차원 높은 경지에 이릅니다.>
<도끼 숙련의 단계가 상승합니다.>
철두는 오랜만에 보는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정신을 차렸다. 하얗던 머리가 밝아져 온다.
내가 뭘 하고 있었지?
상대는 어떻게 되었지?
상대가 누구였지?
"아!"
철두가 굴단을 내려다보았다.
이 늙은 호랑이가 아예 옴짝달싹 못하게 팔을 잘라 놓아야 한다. 서둘러 도끼를 빼려 했으나 철두는 쉬이 행동에 옮길 수 없었다.
"쿠후후후."
피를 왈칵 토해내며 손에 쥔 도끼마저 놓아버린 굴단의 표정이 어딘가 통달한 스님과 같았다.
저 눈빛.
익숙한 저 눈빛이 철두를 망설이게 했다.
인자하고, 대견스러워하는 저 눈빛은 대체.
"왜 날 그렇게 보지?"
"쿠후후, 그렇게 홀로 서는 게다."
"...?"
"전사가 기댈 곳은 어디에도 없다. 쿨럭, 커억!"
굴단이 피를 한참이나 토해냈다.
발할라의 안배여.
네게 너무 많은 짐을 맡기는구나.
"...짐이 무겁다 하여 주저앉지 말고 나아가라!"
굳이 상처를 낫게 하지도, 재생하지도 않았다.
대전사의 쟁투에 무승부는 없으니.
"대전사 에이든!"
"난 강철두다!"
굴단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나는 이룩하지 못했으나 너는 가능할 것이다.
광기어린 그 눈빛이 뿌옇게 번졌다.
"굴단의 손자 에이든!"
"...?"
철두의 눈동자가 커졌다.
굴단이 마지막 숨에 염원을 담았다.
"발할라를 위하여!"
굴단은 스스로 심장을 죄었다.
그와 동시에 황금빛 광채를 한 선조의 혼이 철두의 몸에 휙 하고 들어왔다.
345화 선조의 혼
"발할라를 위하여!"
늙은 바바리안 전사가 죽음의 순간 토해낸 음성이 천둥처럼 울렸다.
몸이 부르르 떨린다.
아니, 떨리는 건 마음이다.
파파팟.
심판처럼 서 있던 황금빛 광채의 선조의 혼이 쑥 하고 그 흔들리는 마음을 비집고 똬리를 틀었다.
"끄아아아!"
형용할 수 없는 고통에 비명이 터져나왔다.
트드드드.
명치 부근에서 황금빛 광채가 새어나오더니 꾸물거리며 철두의 몸으로 퍼져나갔다. 이윽고 거미줄 같은 선들이 문양을 만들어냈다.
"후우우우우."
철두가 긴 한숨을 내쉬며 털썩 무릎 꿇었다.
"하아아."
엄청난 탈력감이다.
심신이 지쳐 기력이 없었다.
덜덜 떨리는 두 손을 들어올려 뒤집어 보았다.
두 팔에 굵은 선들이 저마다 자리잡고 있다.
오른손으로 왼 팔뚝을 쓸었다.
문신은 팔을 타고 어깨로 올라가 가슴까지 이어졌다.
명치 부근에 물감을 던진 듯 문양이 두껍다.
사선으로 가슴을 쩍 갈라놓은 상처처럼 자리 잡은 문신이다.
"대, 대왕! 선조의 선택을 받아 진정한 전사로 거듭나셨으니 감축드립니다!"
지르골이 한달음에 달려와 철두의 앞에 엎드려 절했다. 그의 몸에 난 타투는 피처럼 붉은 색이다.
"...."
철두는 황금빛 문신을 더듬거리다가 일어섰다.
지르골을 지나쳐 굴단의 시체 앞에 섰다.
그때 굴단 기사단의 남자들도 다가왔다.
그들이 어슬렁 다가와 굴단의 시체를 두고 서 있으니, 지르골은 물론 사토도 깜짝 놀라 철두의 뒤에 섰다.
여차하면 무기를 빼어들 태세였으나, 굴단 기사단은 그저 강철두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철두는 굴단의 시체 앞에 무릎 꿇어 앉았다.
복수가 이렇게 허무해?
아니, 이게 복수 맞나?
"...."
할아버지라 하였나?
그럴 리가 없다.
그건 너무하지 않은가?
할아버지가 날 죽이려 해?
"거짓말."
아버지의 아들로서 당당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누구보다 강해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헌데, 그 손주를 죽이게 명령하고.
아버지를 죽인 게 할아버지?
내 조상이 이러하단 말인가?
거북한 환멸에 울컥 토가 쏠리는 기분이다.
존재를 부정당하는 기분이다.
"굴단은 다섯 바위 출신이나, 단 한 번도 족장의 지위에 오른 적은 없소."
"...?"
철두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보니 굴단 기사단원 중 하나이다. 중년의 얼굴에 걸맞은 탄탄한 근육과 바바리안 타투를 가진 녀석이다.
"넌 뭐냐?"
"타막. 검은 바위 부족 출신이오."
"...?"
철두의 시선이 다른 바바리안들에게로 향했다.
이놈들 전부 다섯 바위 부족 출신이 아닌가?
원수 녀석들이 아냐?
"세상 어떤 조상이 후손을 죽이려 들겠소?"
"...허면 이 녀석은 어째서 나를 알고 있는 거지?"
"손자를 몰라보는 할아버지도 있소?"
"...."
할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아버지도 말씀하지 않으신....
'물어보면 되겠군.'
아버지의 혼이 계신다.
심상공간에 가서 물어보면 될 일이다.
철두는 서서히 바닥을 쳤던 체력과 소모된 정신력이 차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원수인지 아닌지는 접어두지.
복수인지 비극인지는 아버지께 물어보면 될 일이다.
그보다 눈앞에 보이는 의문점에 절로 중얼거렸다.
"어째서 시체가 남은 건가...."
타막이 따박따박 말해주었다.
"대전사의 쟁투가 그렇소."
"...."
"발할라의 행사에 노바의 신이 끼어들 여지는 없소!"
"...."
신의 행사라....
휘황찬란한 시스템 메시지가 뜨진 않았으나, 철두는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토록 바라던 선조의 혼이 아닌가?
"선조의 혼은 본디 조상을 죽이고 얻는가?"
"그럴 리가!"
타막의 말에 철두의 얼굴이 조금 핼쑥해졌다.
"굴단이 나의 원수가 아니라면, 나는 할아버지를 죽인 놈인가?"
"그렇지 않소!"
타막이 쩌렁쩌렁 소리쳤다.
"대전사의 쟁투요! 당신은 대전사를 계승했소!"
"...."
철두는 타막을 보았다.
"대전사가 무어냐?"
타막이 슥 무릎을 꿇었다.
그 옆에 있던 전사들도 차례로 무릎 꿇고 철두를 올려보았다. 45명의 전사들은 제각기 생김도 다르고, 출신 부족도 다르다.
하지만 단단한 기세와 흉포함은 목줄을 채우기 힘든 짐승과 같다.
그들을 옭아매는 것은 스스로의 의지.
그도 아니면 오래도록 믿어온 신의 뜻.
"발할라의 전사들이 대전사를 따르겠소!"
"...."
그들의 박력에 철두는 조금 기가 질렸다.
"내가 무얼 할 줄 알고?"
"무엇을 하든 대전사의 걸음은 발할라로 향하니, 따르겠소."
"허."
굴단을 따랐던.
아니, 대전사 굴단을 따랐던 이들이 대전사 강철두에게 무릎 꿇었다.
와아아아-
그때 상하이군이 함성과 함께 돌진해왔다.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찮아 보였는지 이판사판으로 결판을 보려는 모양이었다.
"부대가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토의 말에 뒤돌아보니 고구려군이 철두만을 바라보고 있다. 명령하면 그대로 뛰쳐나가 상하이군을 향해 돌격할 태세다.
철두의 고개는 다시금 앞으로 향했다.
45명의 바바리안 전사.
"저들을 멸하라."
타막이 일어섰다.
"발할라를 위하여!"
다른 바바리안 전사들도 고함질렀다.
""발할라를 위하여!""
그들의 타투가 빛났다.
빨강, 노랑, 파랑, 분홍....
저마다 색색이 선조의 혼이 그들의 등에 업어탄 기세로 강림했다. 그 귀기가 그들의 무기에도 어울리니, 마치 강기를 두른 듯 위압적인 기세를 뿜어냈다.
마흔 다섯의 바바리안 전사가 상하이 군 1만의 앞에 떨어졌다. 양 떼를 거니는 늑대가 다름 아니다.
칼질 한 번, 도끼 한 번에 수십의 병력들이 갈려 나가니....
전세는 기울 것도 없이 아예 뒤집어져 버렸다.
상하이군이 겁에 질려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기까지는 채 20분도 걸리지 않았다.
피에 절어버린 45명의 바바리안 전사가 철두를 향해 걸어왔다.
부리부리한 눈의 바바리안들은 씩 웃기까지 했는데, 같은 동족인 지르골마저 질려버릴 정도의 광기였다.
한바탕 살육을 마치고 돌아온 그들이 철두의 주위에 모여 외쳤다.
"발할라를 위하여!"
""발할라를 위하여!""
철두는 그들이 내지르는 승리의 함성에 가슴이 쿡쿡 쑤시는 기분이었다.
나는 바바리안 대전사인가.
고구려의 왕인가.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는 없지만, 저들이 지른 승리의 함성이 숙제처럼 여겨졌다.
발할라를 위하여.
노바를 위하여.
퀘스트는 무엇인가?
김춘배의 말처럼 행성의 의지인가.
노바를 아우르는 창조주의 의지인가.
마땅히 행해오던 이 이 시스템에 대한 강한 의문이 들었다.
복잡한 사고에 철두는 더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사토."
"예, 대왕."
"고구려군에게 일러 상하이로 진격하라 해라."
"예, 대왕!"
사토가 명령을 전하기 위해 뒤로 빠지자 이제 남은 건 정말 바바리안들뿐이다.
발할라 출신의.
철두는 노바의 시스템에 편승해 부활하지도 못한 채 시체로 남은 굴단의 시체 앞에 앉았다.
이자는 진정 자신의 할아버지인가?
아니면, 스스로의 짐을 넘겨준 원수일 뿐인가.
철두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지르골이 잔뜩 긴장해 바바리안들을 경계했다.
대왕은 담도 크시지, 이들을 어찌 믿고?
그러거나 말거나 바바리안들은 익숙한지 저마다 인벤토리에서 수통을 꺼내 씻는가 하면, 아예 노숙이라도 하려는지 본디 그들이 있던 곳으로 가 야영품을 챙겨 오기까지 했다.
느긋하게 제 할 일 하는 마흔다섯의 전사들과 철두의 옆에 서서 바짝 긴장한 전사 하나를 두고, 철두는 심상공간에서 눈을 떴다.
*
파팟.
메마른 언덕.
철두는 그 언덕에 섰다.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곳.
너무나 큰 충격에 심상에 그대로 남아버린 이 언덕에서 아래를 보았다.
블랙우드.
부인으로 맞이한 아르엘라의 심상세계.
저 너머에 아버지가 계신다.
메마른 언덕에 선 철두는 아래를 보았다.
그대로 뛰어내려 아버지에게 가서 물어보고 싶다.
정말 족장이 할아버지였나?
사실관계를 확인해보고 싶다.
하지만 철두의 발걸음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보다 더 그 자신을 잡아끄는 강렬한 존재.
철두의 시선이 언덕 반대편 아래로 향한다.
거꾸로 솟는 강의 수원지이자 그의 기억상 다섯 바위 부족이 머무르던 마을.
어린 바바리안 에이든의 고향.
그곳에 자리 잡은 선조의 존재감에 몸이 떨릴 정도다.
복수고 뭐고, 일단 저기로 가야겠다.
바바리안 전사.
그토록 염원하던 선조의 혼이 저곳에 있다.
엘프의 심상에 자리 잡은 아버지의 경우처럼 선조의 혼은 핏줄을 가리지 않는다.
과연 누구인가?
'굴단?'
그가 죽으며 내게 왔나?
가능성은 조금.
아니, 미약하다.
두근두근.
세차게 심장이 떨린다.
타타탁.
철두는 걸음을 급히 해 강을 따라 거슬렀다.
마을을 옆에 두고 강물이 쏟아지는 다섯 개의 봉우리 중에 하나.
가운데 우뚝 솟은 봉우리에 사내 하나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다.
"너는 누구냐!"
철두가 소리치자 사내가 히죽 웃었다.
그리곤 훌쩍 뛰어내리는데, 부족 내의 결투 때 쓰던 신성한 바위 위에 착지했다.
"허, 아직 여물지도 못한 햇병아리군."
"...?"
선조의 혼이란 게 본디 이런가?
본적 없지만 익숙한 녀석이다.
굴단과의 쟁투 때 심판 보던 녀석이다.
분명 굴단의 선조의 혼일진대, 어째서 내게 옮겨올 수 있단 말인가?
그 방법을 안다면 아버지 카다잔을 내게로 모셔 오는 것도 가능한 것인가?
아니, 이미 한 명의 선조가 자리 잡았으니 영영 아버지를 모시는 건 불가능하겠구나.
문득 불쾌함이 치솟는다.
앞으로 좋든 싫든 저 녀석과 함께 해야 하지 않는가?
"누구냐고 물었다."
"클클, 올라와라. 이기면 알려주마."
미친놈인가?
에이든이 허공에 손을 움켜쥐자 도끼 자루가 만들어져 착 감겼다.
무엇이든 마음대로 되는 심상공간.
허공에서 도끼 한 자루 꺼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철두의 심상공간이지만 상대도 아무렇지 않게 도끼를 빼 들었다.
"...."
에이든이 훌쩍 뛰어 올라가 마주 섰다.
젊은 모습이다.
많이 잡아도 사십도 되지 않아 보이는, 전사로서의 경험이든 신체능력이든 절정을 맞이한 모습이다.
'굴단이 아니다.'
아무리 보더라도 생김새가 다르다.
굴단이 모시던 선조가 옮겨온 게 확실하다.
"내 이름을 알고 싶거든 전력으로 부딪혀 보거라."
바보가 아니라면 선조의 정체를 유추하는 건 쉬운 일이다.
"발할라!"
마주 선 에이든이 소리쳤다.
"...똑똑한 바바리안이군."
올려치기 당한 바바리안 에이든은 씩 웃으며 도끼를 치켜들었다.
"한 수 가르침을 청하겠다!"
두근거림으로 심상공간에 지진이 일어날 정도다.
"바바리안의 조상!"
아니, 그 기원이자 신이 되어버린 자.
발할라의 혼이 씩 웃었다.
"한 수로 되겠느냐?"
이리저리 치이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대전사의 자격을 갖춘 이 중에는 가장 어렸던 녀석이 아닐까?
이제 겨우 소년티를 벗어나 청년쯤 되어 보이는 바바리안과 절정기의 바바리안이 맞부딪혔다.
쾅 쾅!
복수니, 핏줄이니, 부족이니.
모든 생각을 지웠다.
보이는 건 오직 도끼날뿐이다.
넘어서고 이겨내라.
강해질 것이다.
346화 신의 뜻대로?
챙, 퍽!
거력을 감당하지 못해 도끼를 놓쳤다.
그 대가로 발길질에 차여 결투의 바위 위에 내팽개쳐졌다.
"크윽."
"끌끌, 무기를 놓는 전사도 있다더냐?"
"쳇, 이건...."
에이든은 말을 하려다가 급히 삼켰다.
손아귀가 찢어져 불가항력적인 상황이지만, 이미 벌어진 결과에 대해 가타부타 말하는 게 비겁하다고 여겼다.
핑계고 변명이다.
바바리안 에이든의 생각은 그러했다.
"왜? 다 자라지 못한 몸이 문제더냐?"
"흥."
에이든이 콧방귀 끼며 다시 섰다.
이곳은 그가 마음먹은 대로 이뤄지는 심상세계.
찢어진 두 손아귀가 순식간에 아물며, 다시금 허공에서 거대한 도끼를 꺼내 들었다.
"호오! 바람직한 자세로고."
쇄애애액, 쾅!
"크읏."
발할라가 다시금 달려들어 도끼를 휘두르자 에이든이 속절없이 밀려났다.
"어리다는 것은 아직 성장한다는 것이니."
발할라가 흡족하게 웃으며 몰아쳤다.
"너는 훌륭한 대전사가 될 것이다."
차창!
"대전사가 뭐냐!"
"후후, 당연히 나 발할라를 모시는 전사가 아니냐?"
"흥."
"시건방진 놈이로고!"
발할라의 음성엔 즐거움이 가득했다.
"개소리하지 마라!"
"호오!"
창, 크그그극!
"내 몸도 마음도 나의 것이다. 너는 그저 나를 도우면 된다!"
"오호라!"
에이든이 멀찍이 떨어진 발할라를 보며 선언하듯 말했다.
"지금은 일이 바쁘니 다음에 오겠다. 올 때마다 내 수련을 돕기만 하면 된다."
"호오!"
에이든이 할 말을 마쳤다는 듯이 홱 가버리자, 홀로 남은 발할라는 박장대소했다.
"으하하하하!"
물건이로고.
"대전사가 뭐냐니."
다들 발할라를 선조의 혼으로 모시면 알아서 기기 바빴는데.
아직 어려서 그런가?
아무것도 몰라서 그런가?
대뜸 대거리해대는 모습이 기껍다.
암, 전사라면 그리해야지.
"다섯 바위 부족이라."
발할라가 주변을 휘이 둘러보았다.
신성한 결투의 바위에서 훌쩍 뛰어내려 마을도 보았다.
아주 흡족한 얼굴의 발할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음이 고향에 가 있으니, 더할 나위 없구나."
무언가를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잘할 놈이다.
발할라를 위하여!
다만 문제 되는 게 있다면 저기 언덕을 오르는 중턱에 생겨난 거대한 나무인데....
"좀 더 두고 보지. 후후후."
바바리안 전사들이 모두 신으로 모시는 자.
행성의 유래 그 자체.
발할라가 소년의 마음속에서 웃었다.
*
에이든은 발할라와 드잡이질을 대충 끝내곤 블랙우드를 찾았다. 이제 팔 하나쯤은 넣어 서로 악수를 나눌 수도 있는 차원의 벽 구멍 앞에서 물었다.
"아버지! 굴단을 압니까?"
"굴단? 네가 어찌 아느냐?"
"굴단이 할아버지가 맞아?"
"...."
카다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나 카다잔은 굴단의 아들이지."
"쳇. 맞네."
에이든의 얼굴에 씁쓸함이 가득했다.
"왜 그런 얼굴이냐?"
"내가 죽였어."
"...."
바바리안 전사 카다잔은 잠시 고민하더니 물었다.
"어디서 만났느냐?"
"전장에서."
"그럼 되었다."
카다잔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전장에서 만나 전사끼리 승부를 보았는데 무엇이 더 문제인가? 네가 강했기에 살아남았으니 다행이다."
카다잔의 심경도 복잡했다.
아버지와 아들의 싸움이다.
하지만, 이미 죽어 혼이 되어 엘프 전사 아르엘라의 선조의 혼으로서 심상공간에 머무르는 그에게 무엇이 중할까?
"바바리안 전사는 전장에서 전사로서 자격을 입증하면 될 뿐이다. 자책하지 마라."
"...."
그럼에도 에이든의 얼굴이 풀어지지 않아, 카다잔은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꺼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네 녀석 정도 되는 나이였다. 태어난 지 일곱인가 여덟쯤 되는 나이였지."
그때 아버지 굴단은 부족을 떠났다.
대전사가 되기 위해서였다.
"말이 좋아 대전사지, 내게 있어 아버지 굴단은 부족을 버리고 발할라를 쫓아간 자다."
카다잔이 본인을 소개할 때 굴단의 아들 카다잔이라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아울러 철두가 카다잔의 아들 에이든이라 말하지 않는 것에 섭섭하지 않은 이유와 같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에이든이 평했다.
"결국 굴단은 꿈은 이뤘네."
"무슨 말이냐?"
"대전사더라."
"...굴단이 말이냐?"
"나와 쟁투했다. 그리고 패배했지."
"...."
카다잔은 그답지 않게 머리가 핑 도는 기분이었다.
대전사라니.
어릴 때 모든 걸 내팽개치고 황야를 떠돌며 발할라를 쫓는 그 허상을 쫓아간 아버지가 대전사가 되었다니.
"에, 에이든 네가 말이냐?"
"응. 난 이제 대전사다."
"...."
이게 대체.
아니, 그보다 아들은 대전사에 대해 어찌 저리 쉽게 이야기할까?
"너, 대전사가 무언지는 알고 있느냐?"
"발할라가 선조의 혼이 되었어."
"...."
그야 그렇겠지.
발할라 행성을 살아가는 바바리안 전사 중에, 가장 신임받으며 신의 뜻을 이행할 이가 갖는 명예가 대전사다.
그야말로 신을 모시는 전사.
아리아 여신의 대사제인 강용철이 그와 비슷할까.
"발할라를 따르는 전사들을 이끄는 자리다."
"알아. 부하들이 많이 생겼어."
"...."
전혀 모르는 것 같은데.
"그들 바바리안들은 발할라의 전사들이라 불리지."
발할라의 대전사와 전사.
수많은 바바리안 전사 중에 자격을 갖춘 이들만이 그 영광스런 칭호를 받을 수 있다.
"대전사는 특히 발할라의 계시를 직접 받지."
대사제가 신의 신탁을 받듯, 발할라의 대전사 또한 발할라의 계시를 받는다.
"아까 이야기하고 왔어."
"뭐라던?"
카다잔의 음성엔 걱정이 가득했다.
제 눈에는 아직 어리고 여린 전사이건만, 덜컥 발할라를 모시는 전사가 되다니.
그 얼마나 무거운 짐인가?
"나 알아서 살 테니, 뭘 시킬 생각하지 말라 했지."
"...."
에이든의 말에 카다잔은 쉬이 대꾸할 말은 찾지 못했다.
"대전사의 무게에 대해 알고는 있는 거냐?"
"안다니까."
"...."
전혀 모르는 것 같은데....
뭐, 이미 죽은 자신이 더 말을 보태본들 의미가 있을까. 아들은 이미 발할라의 대전사가 되었다.
카다잔이 이래라저래라 끼어들 계재가 아니다.
"...앞으로 많은 바바리안들이 너를 의지하려 할 것이다."
"하라지."
"...아니다."
"흐흐, 난 내 부족이 우선이다."
"...."
"나의 울타리에 들겠다면 모두 받아 줄 수 있다."
"그렇구나."
카다잔은 말을 아꼈다.
본디 저 나이 때의 바바리안 전사는 자신감과 우월감에 빠져 있을 때긴 하다.
발할라께서도 사춘기 바바리안은 처음으로 대전사로 삼으셨을 테니, 알아서 잘 인도해 주시겠지.
"아엘은 안 오는군. 그럼 다음에 올게."
"알겠다. 에이든."
철두는 미련 없이 떠났다.
쿠르르릉.
심상공간이 요동치며 주인 없는 곳에 선조의 혼만이 남았다.
카다잔도 일어서서 오두막으로 가려는데, 너머에 낯선 사내가 나타났다.
"...."
"...."
카다잔은 사내를 보고 한참 바라보았다.
누군지는 명백하다.
"재밌구나."
"무엇이 재밌소?"
"요정의 심상에 자리 잡은 바바리안이라니."
"...."
카다잔은 사내를 한참 보다가 말했다.
"이 요정이 특별함은 그대가 더 잘 알지 않소?"
"후후, 알지."
발할라는 의뭉 떨지 않았다.
강철두가 요정의 축복을 받았듯, 아르엘라 또한 바바리안의 축복을 받았을 따름이다.
그것이 가능한 연유를 찾자면 발할라행성의 유일신 발할라에게 묻는 게 가장 빠르지 않겠는가?
"이 모든 게 당신의 안배요?"
"태초의 안배겠지."
"...?"
카다잔은 이해하지 못했다.
발할라는 그런 그를 이해시키려 하지도 않았다.
"너는 인도자로서 역할을 다하였다."
"...내 아들은 어찌 되는 거요?"
"하하하, 왜 내게 묻느냐? 그 녀석의 뜻이 있겠지."
"...."
카다잔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바바리안들이 발할라를 숭배하지만, 자식을 위해 부족을 버린 카다잔에게는 조금 달랐다.
이미 죽어 혼밖에 없는 처지인데 뭐.
"내 아들을 잘 부탁드리오."
"후후, 제 녀석 하기 나름이지."
서로 혼밖에 남지 않아 전사의 마음에 기생하는 처지인데, 이리 마주 보니 그냥 같은 처지나 다름없지 않은가?
"빈말이 아니다."
발할라는 히죽 웃었다.
"이 발할라의 운명도 녀석의 손에 달렸으니, 태초의 의지가 어디로 향하는가는 나도 모를 일이다. 그저 바라옵건대 이 녀석이 해내길 바라는 수밖에."
"...."
카다잔의 얼굴이 한층 더 무거워졌다.
아들 녀석의 앞날엔 대체 얼마나 큰 고난이 놓인 것일까.
전사의 행보를 응원하고 지지함이 마땅하나, 가시밭길을 걸어갈 자식을 생각하면 마음이 고되기만 하다.
아무것도 조력해줄 수 없음이 한스럽고,
그렇기에 할 수 있는 건 믿는 것뿐이니.
'강해져라. 에이든.'
그 무엇도 너의 앞길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
철두가 눈을 뜨니 아예 얼굴이 허옇게 질린 지르골이 그를 반겼다. 굴단 기사단의 전력은 그 하나하나가 위대한 검사에 필적하는지라, 지르골로서는 감히 대항할 엄두가 나지 않는 이들이다.
개중 가장 젊어 보이는 자도 지르골을 아득히 넘어서는 강자이니, 그들이 나쁜 마음을 먹으면 그로서는 막아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왕. 신속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이들을 어찌 믿으시옵니까?"
"명상한다고 무방비하지 않다."
"대왕...."
그 말도 맞긴 맞다.
기감이 예민한 바바리안이기에 명상 중에도 외부의 위협이 있으면 강제로 깨어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저들 또한 호락호락한 자가 아니기에, 기습하면 상처 입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명상이 무방비와 동의어는 아니지만, 아예 허점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철두가 주변을 둘러보니 해가 지며 내린 어둠이 살육의 현장을 가리고 있었다.
하늘의 밝은 별빛과 여기저기 피워놓은 모닥불만이 남았다.
"군은?"
"동관을 함락한 후 숙영에 들었습니다."
상하이 도시로 향하는 세 번째 관문이다.
내일 점심쯤이면 네 번째 관문인 옥문관을 뚫고, 저녁이면 상하이 도시가 고구려에 떨어질 것이다.
"다들 모여라."
철두의 한마디에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바바리안 전사들이 모였다.
사토와 지르골을 제하니, 45명의 전사들.
철두는 그들을 대함에 있어, 조금의 어색함도 없었다.
"타막."
"예, 대전사."
"대왕이라 부르라."
"예, 대왕."
중년의 바바리안 전사는 군말 없이 철두의 말을 따랐다.
"결사대로 삼겠다. 대장은 너 타막이다."
"...."
"...."
철두의 말에 타막이 슬쩍 사토와 지르골을 보았다.
"왜?"
"저들이 결사대가 아닙니까?"
"맞다."
"저들은 발할라의 전사가 아닙니다."
"상관없다."
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전사를 따르는 발할라의 전사들이 다른 동료들과 어울린 전적은 없으나, 이제 대전사가 된 강철두의 말을 따르지 않을 도리 또한 없었다.
"좀 모자란 녀석들이다. 재주껏 가르쳐봐라."
타막이 씩 웃었다.
"예, 대왕."
가르치라 하였으니, 발할라의 전사로 만들면 될 일이다. 사토와 지르골의 얼굴에 긴장과 당황이 어렸으나, 철두는 무시했다.
이들 바바리안들을 데려가 고구려의 요직에 앉힐 것도 아니고, 그를 수행할 수도 없는 이들이다.
한 부대로 모아 자신이 데리고 다니는 게 낫다.
"내일 날이 밝으면 상하이로 간다. 다들 자라."
철두가 손을 휘이 내젓자 다들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중에 타막만은 남아있으니, 되물었다.
"할 말이 남았나?"
"예, 대왕."
"뭐냐?"
"굴단 시티를 수습하시지요."
"아."
맞네.
그게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