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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2 - 330-340

330화 수도 구경

파팟.

빛이 번쩍이며 바뀐 풍경에 적응할 새도 없이 뒤에서 또 번쩍이는 빛이 연달아 터졌다.

"비키쇼."

"엇."

이동마법진 위에선 연신 빛이 번쩍이며 사람이 오가고 있었는데, 자신과 함께 왔던 장교들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많았다.

복색도 가지각색에 생김새도 제각각이다.

서양인들로 보이는 이도 많고, 아예 요정이나 드워프처럼 다른 종족들도 많았다.

"어이, 이리 나오쇼."

리종성이 어어? 하며 혼란스러워하는데, 익숙한 얼굴의 동양 사내가 리종성을 불렀다. 그쪽을 보니 먼저 이동마법진을 통과한 동료 장군들과 장교들이 서 있었다.

"그쪽도 차림새 보니 이북 사람이구먼. 개경에서 왔소?"

"그렇소."

리종성은 딱딱하게 대답하며 사내를 살폈다.

가벼운 무장 차림에, 갑옷은 입지 않고 있었다.

"아, 그리 훑어볼 거 없소. 처음 고구려를 방문하는 이들을 위한 안내인이니."

"...동무는 고구려의 군인이오?"

"하하, 고구려의 말단행정관이오. 방문 목적이 뭡니까?"

"고...구려 대왕의 말을 전하기 위한 전령이오. 재상 김진태를 찾으라 하였소."

"어이쿠."

리종성의 말에 사내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이리 오시오. 총 몇 명이오?"

"나 리종성을 포함해 100인이오."

사내는 책상에 올려진 서류에 무언가를 슥슥 쓰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으로 가시면 아이언헤드 성이오. 대로가 쭉 뻗어있으니 길 찾기 어렵지 않을 겁니다."

"...내 말을 그냥 그리 믿으시오?"

"음? 구라였습니까?"

"...."

리종성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사내는 이내 껄껄 웃었는데, 리종성의 생각을 모르지 않아서다.

"우리 대왕님이 보냈다고 하는데 안 믿을 이유가 뭡니까? 사칭하여 불순한 의도로 우리 재상님을 만난다 한들 또 뭔 상관입니까?"

"...?"

"우리 고구려가 그리 호락호락한 데가 아닙니다."

복잡한 검증이나 절차에 시간 낭비하지 않는 것은 자신감 때문이다. 설령 이들 100인이 재상 각하를 암살하기 위한 이들이라 해도 문제 될 게 없다.

어차피 죽는 건 이들이 될 테니까.

"가보시오. 내 역할이야 어차피 안내일 뿐이니."

"알겠소."

개경에서 온 리종성 일행 100인이 말을 소환해 타고 동쪽의 커다란 대로를 향해 나아가자, 사내는 통신용 마법 아티팩트를 꺼내 들었다.

"보고! 방금 개경 성에서 100명 정도의 랭커급 전력이 도착해 아이언헤드 성으로 이동 중입니다. 대왕님의 말을 전하기 위한 전령이라 합니다."

[전달받았습니다.]

"네, 수고하세요."

사내는 마법 아티팩트를 인벤토리에 넣고는, 이동마법진에 파견 나온 안내인의 역할에 충실했다.

특이사항을 아이언헤드 성의 정보청에 전달 안내하는 역할 말이다.

*

이동마법진과 아이언헤드 성 사이를 잇는 대로는 너비가 어마어마했다. 도로는 흙이 아니라 돌로 되어있고, 오가는 사람들과 마차도 엄청났다.

"허, 장군. 지구 사람들은 여기 다 모인 것 같습네다."

"왜놈 말을 하는 사람들도 다수 봤습니다."

"어허, 왜놈들은 고구려에 풍비박산이 났다 했는데 어째서 이리 활보하고 다닌단 말입네까?"

"...."

리종성은 장교들의 호들갑을 적당히 무시하며 나아갔다. 이동마법진과 아이언헤드 성은 고작 5킬로미터 정도 거리라 코앞이나 다름없었다.

사람 구경하며 오다 보니 금방 커다란 성채를 맞이할 수 있었다.

"허어! 저 성이 전부 돌입니다."

"석재로 저리 크고 높은 성을 짓다니...."

성문도 그 크기가 남달랐는데, 거인이 지나가도 될 정도로 넓은 성문이 문을 활짝 열고 있었다.

성벽 위에 배치된 병사들과 성문 앞에서 대기 중인 문지기들의 군기도 딱 잡혀 있었다.

신기한 건 가만히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만 할 뿐, 누구 하나 제지하여 검사하지도, 방문 목적을 묻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 사이에 있던 갑옷 차림의 사내가 리종성에게 다가왔다.

"고구려 친위대 소속 김상철입니다. 리종성 장군 되시지요?"

"...그렇소."

리종성은 상대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자 깜짝 놀랐으나,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재상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안내하겠습니다."

"알겠소."

<아이언헤드 외성 통행세 10주화가 자동 징수됩니다. 이후, 일몰을 기점으로 보호세 2주화가 자동 징수됩니다.>

<주화 10개를 소모하였습니다.>

"...!"

"헛!"

"귀, 귀신이 곡할 노릇입네다."

"다들 조용해라!"

호들갑 떠는 장교들이 못마땅해 리종성이 소리치자 장교들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김상철이 웃으며 물었다.

"개경에서는 아직 세력창을 다루지 않습니까?"

"허, 무슨 소리! 우리 이석개 장군님이 다루고 있소!"

"아, 예에."

김상철은 말을 하려다 말았다.

휘장으로 만든 세력의 세력창과 온전히 노바의 시스템적으로 마을과 영토로 인정받은 상태의 세력창은 다르다.

영지 상태창이 활성화되어야 자동 징수 같은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으니, 아직 개경 성은 온전히 도시로 인정받지 못한, 그저 노비스들의 단체에 불과했다.

괜히 설명해 줘봐야 으스대는 꼴이라 말을 아꼈다.

"가는 길에 궁금한 것이 있거든 뭐든 물어보십시오."

"...일 없습네다."

리종성은 자존심이 상하는지 그리 대꾸하고는 은근슬쩍 옆에서 따르는 부관을 툭 쳤다.

'동무가 물어보라우.'

눈알을 부라리며 뜻을 전하니 눈치 빠른 부관이 나서서 물었다.

"저, 남조선 동무."

"예, 말씀하세요."

김상철이 온화하게 미소 지으며 질문을 받아주었다.

"고조 듣기로 왜놈 정부랑 대판 싸운 후에 죄다 흩어놓았다고 들었산데...."

"사쿠라시티 말씀이군요."

"길티요. 내 오는 길에 보니까네 왜놈 말하는 무리들이 심심찮게 보이더란 말입네다."

"사쿠라시티의 전쟁이 어찌 끝났나 하면...."

김상철은 간략하게 전후처리에 대해 알려주었다.

사쿠라시티를 지배하던 료 막부의 핵심 몇몇은 처형당했고, 나머지 군인들은 죄다 포로로 사로잡았다.

그리고 몸값을 지불받으면 풀어주니, 사쿠라시티에 머무르는 가족들이 대부분 몸값을 지불하고 자유가 되었다.

"사쿠라시티의 물자를 싹쓸이해왔으니 시민들의 고통이야 있겠으나, 학살은 없었지요."

"허어, 그럼 대로에 돌아다니던 일본인들이 그 도시 출신입니까?"

"그 전에 아이언헤드에 자리 잡은 일본인들도 있고, 사쿠라시티에서 복속을 청해온 자들도 많습니다."

사쿠라시티는 무정부 상태를 맞이해, 몇몇 무리가 득세하고 규합되다가 다시 분열되길 반복하니, 수많은 일본인들이 도시를 버리고 아이언헤드 성으로 넘어왔다.

"...그, 그것이."

"말씀하세요."

"허, 참. 이게 고것이 어찌 가능한 겁네까?"

김상철이 어깨를 으쓱했다.

"전쟁하던 정부는 궤멸시켰고, 사쿠라시티의 주민이라 해 봐야 더는 적도 아닌데 고구려의 국민으로 받지 못할 이유가 뭡니까?"

"...."

"하하, 우리 왕국에 가장 많은 사람이 어디 지역 출신인 줄 압니까?"

"어, 어디요?"

"제국인 출신들이 가장 많습니다. 그 뒤가 아미르 왕국 출신이고요."

"...."

"지구인들을 하나로 퉁치면 그 무리도 많긴 하지만, 남한 북한 나누듯 여러 나라로 나누고 나면 또 각양 각국의 사람들이 많지요."

"거, 미제 같구만기래."

"하하, 비슷하죠. 다민족 다인종 국가죠. 우리 왕국의 대외전략이 그렇습니다. 복속을 청하면 받아들이고, 거부하면 정복하여 무리를 흩어버리죠."

"...."

소름 끼치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김상철을 보며 일동은 할 말을 잃었다.

"저기 보십시오. 자리 잡은 여러 국가 출신들이 거리를 이뤄 저마다 다양한 문화를 계승하고 있죠. 중국인 거리, 일본인 거리, 독일인 거리.... 하하, 말로 다 하기엔 너무 많네요. 가보시면 재밌을 겁니다. 그들 나라 음식을 계승한 가게들이 많거든요."

김상철이 외국인 거리를 가리키며 말했으나, 리종성과 장교들은 참으로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리종성이 가만히 듣다가 한마디 물었다.

"이리 방종하게 저들끼리 무리를 이루도록 둬서야 어떻게 모두를 통제한단 말이오?"

"왜 통제해야 하죠?"

"...!"

김상철의 말에 리종성의 걸음이 멈췄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답이다.

'왜라니....'

필사적으로 반박할 말을 찾았으나 떠오르는 소리가 없어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너무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이 나라는 그렇구나 하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김상철의 말에 일행이 다시 움직였다.

느긋하게 마을을 둘러보고 가는 와중에 사람들에게 뺏겼던 시선이 이제는 그 시설물들로 향했다.

외성에서 내성으로 향하는 대로는 굉장히 넓었고, 오가는 사람들이 많음에도 복잡하지 않았다.

도시 자체가 블록으로 설계되어 골목길이 없으니 말끔했다.

가만히 걷던 부관이 궁금하여 물었다.

"동무, 헌데 도시가 이리 큰데 어찌 하수도관이 없습네까? 개경 성에는 고조 길마다 도랑을 파고 더러운 물을 도시 밖으로 흘려보내고 있지 않겠음둥?"

"아유, 왜 없겠어요. 지하에 있죠."

"...?"

"지, 지하에 말입네까?"

"네, 냄새나잖아요."

"...?"

냄새야 나겠지.

헌데 어찌 이 야만적인 시대의 기술력으로 지하에 수로를 파고 물길을 이을 수 있단 말인가?

"아, 저도 잘 몰라요. 그런 건 그냥 연구소에 시키면 방법이 나오더라구요."

"여, 연구소 말입네까?"

"마법사들하고 여러 연구원들이 계세요."

지금의 고구려 문명을 이끄는 핵심 기관이다.

식물의 종자 개량과 개발부터, 건축, 토목, 사회연구까지. 모든 분야를 총망라해 미친 듯이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여기에 지구에는 없는 마법이 더해지니, 어떠한 것은 지구의 과학 수준보다 더욱 편리해진 것들도 있을 정도였다.

"아, 다 왔네요. 들어가시죠."

"예에...."

김상철의 안내는 내성까지였다.

내성 성문을 출입하며 다시 한번 통행세를 자동 인출당한 개경에서 온 혁명 전사 100인은 곧 고구려 재상 김진태를 마주할 수 있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아니면, 고구려의 2인자라는 높은 자리가 그 사람의 격을 강제로 끌어 올렸음인가.

"아유, 철두가 보내서 왔다고요?"

"그, 그렇습네다!"

별 대수롭지 않은 말에도 여유가 묻어나는 듯했다.

리종성은 절로 긴장하며 답하는 와중에 김진태의 안색을 살폈다.

여유와 위엄이 흘러넘치는 고구려 재상의 얼굴은 매우 앳되다. 저리 젊은 자가, 이 큰 나라의 내정을 총괄하고 있구나....

"뭐라던가요?"

"성을 정비하고 안정시킬 기술자들을 이끌고 일주일 안에 오라고 했습네다."

"흐음, 일주일이라."

김진태가 턱을 쓰다듬었다.

'바로 쿠하루 정복하러 가려는 모양이네.'

철두의 생각이라면 누구보다 더 이해가 빠른 김진태다.

강철두의 계획은 알겠으나, 굳이 전령으로 100명이나 되는 이를 보낸 뜻은 아직 모르겠다.

'전령으로 백 명?'

김진태는 고개를 조아린 100명의 군인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저기 탐색하듯 둘러보는 모양새 하며, 꽤 많이 놀란 듯하나 애써 태연한 척하는 얼굴들을 보면 대충은 넘겨짚을 만했다.

"이야기는 잘 들었어요. 나흘 뒤 출발할 테니, 그때까지 편히 쉬도록 하세요. 엘리스."

"네, 각하."

"저들이 쉬는 동안 성내의 어디든 안내해주고 소개해주세요."

"네, 각하."

개경 성에서 온 북한 출신 혁명 전사 100인.

자유와 자본의 맛을 보여줄 맛이 나는 이들이다.

331화 도시계획

포로 관리 나흘째.

개경 성 밖을 포위하던 쿠하루 왕국 군의 정예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갑옷, 무기, 인벤토리와 주화 주머니의 주화마저 모조리 털려버린 팬티 바람의 4만 명이 조금 안 되는 포로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로의 체온을 나눌 따름이었다.

"빨리빨리 움직여라!"

"간나새끼! 머리 안 숙이니!"

"굶고 싶니? 얼른 안 움직이고 뭐 하니!"

그 수가 적지 않다 보니 배식 시간마다 난리법석이었다.

포로들과 조금 동떨어진 곳에는 1만의 병력이 집결해 사열하고 있었다. 그들의 갑옷과 무기는 모조리 쿠하루 왕국군에게서 뺏은 것들이었다.

쿠하루 왕국의 문명발달 수준이 개경 성을 한참 초월했기에, 무기나 갑옷의 짜임새나 내구성이 큰 차이가 났다.

약탈한 전리품으로 무장하니 순식간에 4천여 명의 정예병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추리고 또 추린 숫자다.

"상급 전사 4,120명! 모조리 집결 완료했습니다."

이석개가 우렁차게 보고했다.

개경 성의 병력은 짜내면 10만까지도 문제없이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약탈한 전리품도 3만 이상의 병력을 무장시킬 장비가 되었다.

허나 그 병력은 후방지원부대로 빠지고, 가려 뽑은 4천여 명만이 새롭게 혁명군으로 편제되었다.

도열한 4천여 명의 병력은 모조리 상급 전사.

근력, 체력, 민첩, 감각 4대 스탯 중 어느 하나라도 30개 이상을 흡수한 자들이다.

성장 한계가 30개가 넘느냐 넘지 않느냐는 중요한 분기점이었는데, 한계 돌파 스크롤을 이용해 추가로 20개의 스탯을 더 획득하면 '랭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랭커, 혹은 기사라 불리는 이 등급부터는 죽음이 없다. 죽음과 함께 시체는 사라지며 무한결투장에서 미니언으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거기서 꾸준히 포인트를 획득하면 다시 노바 세계에 부활하는 식이다.

그 선별을 마치고 도열한 병사들은 예비 랭커이자, 혁명대의 정예가 될 이들이었다.

"잘했다. 탈것은?"

"전원 탐험 퀘스트 수주 후, 탈것으로 말 등록 완료했습니다."

원래였다면 맵 중앙 수호의 나무에 가면 여전히 탐험 퀘스트를 수주받을 수 있다. 문제는 이제 더 이상 맵 외곽지역에 말들이 리젠되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무려 3만이나 되는 쿠하루 왕국군이 있기에 그들의 탈것을 모조리 뺏어 해결했다.

아직도 여분의 말들이 수두룩했으나 그것들은 예비로 남겨두었다. 연금술사의 항아리를 통해 '펫주머니'를 만들어 활성화하면 말을 추가로 등록할 수 있어서다.

병력마다 2필의 말을 보유하고 있으면 말들의 체력 회복 시간을 번갈아 쓸 수 있기에 기동력에서 월등한 이득을 보게 된다.

아니면 구정욱의 공격대처럼 하나는 돌격용 중갑기병으로 쓰고, 하나는 이동용 말로 쓸 수도 있고 말이다.

"좋다. 새롭게 편제에 맞춰 훈련하라."

"네! 대왕!"

혁명대 대장이 된 이석개가 우렁차게 소리치고 훈련을 시작했다.

훈련이라고 해봐야 거창한 것은 없고, 기존의 부대편성을 무시하고 스탯별로 나눠 새롭게 편성된 동료들끼리 손발을 맞춘 기동훈련이었다.

고구려의 병력편제를 보면 부대마다 조금씩의 특색이 있지만, 대부분의 부대가 기병 전술을 선호한다.

기마 궁술을 기본전술로 경기병대를 운용하는 유격대와 기창돌격을 주로 하는 중기병대를 운용하는 공격대가 대표적이다.

그에 맞춰 혁명대도 기병 훈련을 하는 것이다.

정예로 새롭게 태어날 혁명대 외의 스탯 30 이하 하급 전사들은 모조리 개경 성의 후방부대가 되었다.

그 수가 무려 2만을 넘었는데, 희망 전역할 자들을 모집했으나 응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당장 군대를 전역하면 먹고살 방도가 궁한 이들이 천지였다.

철두는 굳이 그들을 강제로 흩어 민간인으로 돌아가도록 하지 않았다. 어차피 김진태가 도착하면 여러 가지 토목사업으로 노동력이 부족하면 했지, 일이 부족할 일은 없을 터다.

"대와아앙!"

바람결에 묻힐 수도 있는 작은 소리지만 철두의 예민한 귀에는 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보니 그리핀 세 마리가 빠른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진태!"

후우우웅.

개경 성 상공에 그리핀이 나타나자 밥 먹던 포로들도, 훈련하던 혁명대도, 개경 성의 상비군들도 구경하기 바빴다.

검은 비룡을 타고 나타나 전장을 뒤집어버린 강철두의 위용이 아직까지 머릿속에 선명한지라, 종이 달랐으나 그리핀의 등장에 가슴이 철렁하는 것이다.

그리핀 셋은 강철두의 뒤에 내려앉았다.

김진태와 그를 호위하기 위해 따라온 결사대다.

"주군을 뵙습니다!"

"대왕을 따릅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토 키요시와 지르골이 깍듯이 인사했다.

"잘 왔다."

"예! 대왕."

두 사람은 강철두에게 다가와 시립했는데, 결사대의 본래 임무가 강철두를 따라다니며 적진을 휘젓는 것이라 평시에는 근접 경호나 다름없었다.

철두는 씩 웃으며 진태를 보았다.

"너 혼자냐?"

"먼저 왔어. 일행은 뒤에 와."

이동마법진을 타고 도착하자 먼저 날아온 김진태다. 나머지 기술자들과 원조물자를 든 일행은 지금 말을 타고 빠르게 달려오는 중이다.

"N2790 동쪽 끝에 도시를 하나 만들까 싶어...."

"진태."

"응?"

"그런 건 알아서 해라."

"허, 참."

김진태는 강이 많고 그 지류도 많아 수자원이 풍부한 N2790 맵을 개발할 계획을 자세히 세워 왔으나, 그의 상관이자 친구인 이 나라의 지배자는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보다 어떠냐?"

"음? 병력이 생각보다 적네."

"뜨내기들은 전부 추렸다. 그건 후방에 남겨둘 테니 네가 써라."

"정예만 추린 거야?"

"그래, 전부 상급 노비스다."

"허."

김진태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만큼이 다 기사야?"

"절반은 아직이다. 스탯석이 없으니까."

쿠하루 왕국과 전쟁을 해온 개경 성에 여분의 스탯석이 남았을 리 만무하다. 급한 대로 다 끌어다 썼기에 여분이 없다.

고구려도 철두가 없는 동안 료 막부와 전쟁을 치르느라 남은 스탯석이 없다. 하지만 지구의 다른 개척마을들 중에 여분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고구려가 제후국을 받으며 그들의 자치권을 인정해주고 상납받은 것이 스탯석이나 상급 노비스 같은 인적자원이다.

C 넘버링으로 시작하는 시작의 맵이 N 넘버링의 기본 맵으로 바뀌며 더는 몬스터들이 우후죽순 리젠되지 않았기에 스탯석의 가치는 천정부지로 솟구쳤다.

몬스터는 전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뜨문뜨문 리젠되니, 그 전리품도 덩달아 귀해지는 것이다.

"그냥 줄 수는 없지. 전공을 세우는 대로 풀어야지."

"그야 당연하지. 말 나온 김에 가져가라."

김진태는 인벤토리에서 궤짝을 네 상자 꺼냈고, 철두는 그것을 그대로 인벤토리에 넣었다.

"너도 왔으니 이제 포로 팔러 가야겠다."

"바로? 뭐가 그리 급하냐."

"굳이 끌 일도 아니다. 훈련이야 가는 길에 해도 된다."

"하긴.... 그럼 이건 듣고 가."

"뭘 말이냐?"

"N2790 동쪽 끝에 새롭게 도시를 만들 거야. 맵의 가장자리라 이동마법진까지의 거리도 가까워서, 아이언헤드 성과는 한양만큼이나 가까워."

"음. 그럼 여기는?"

"여기도 버리긴 아깝지. 여긴 보수할 거야. 헌데 앞으로 이 맵의 주도는 동쪽에 새롭게 들어설 도시가 될 거야."

철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개경 성을 새롭게 정비하는 게 아니라 아예 허허벌판에 새로운 도시를 만드는 게 김진태의 계획이었다.

앞으로 이 맵의 중심지는 이곳 개경이 아니라 동쪽 끝에 자리하는 새로운 도시가 될 터다.

"좋아. 알아서 해라."

"출정은 내일 아침에 해. 그전에 나랑 얼굴도장들 좀 찍자."

"굳이?"

"아유, 네 위세라도 빌려야 내 말에 힘이 실리지."

개경 성이 이미 고구려의 소속 도시가 되었다곤 하나, 노바의 시스템상 정식 도시로 인정된 것도 아니다.

세력창이 생기기 전까지는 직접 주민들을 이끌고 여러 가지 지시를 해야 할 텐데, 강철두의 위엄을 빌리면 일이 쉽다.

아무리 고구려의 재상이라 한들 이들에게는 아직까지는 낯선 이일 뿐이다.

"말 안 듣는 놈들은 골통을 부숴버려라. 그러면 말을 들을 거다."

"에헤이. 그냥 친구랑 여기저기 산책 좀 하면 되는데 굳이 사람 머리를 깨니 마니 하냐. 다 고구려 국민인데 말이야."

김진태의 너스레에 철두가 피식 웃었다.

어쨌든 외유가 긴 대왕 강철두를 대신해 고구려의 사람들을 어르고 달래며 이끌어 온 김진태다.

능글능글한 게 이제는 정말 재상이라는 자리가 잘 어울려 보였다.

"좋다. 내일 간다."

"하하하, 그래."

곧 여러 기술자들이 포함된 후발대가 도착하자 강철두는 훈련을 종료했다.

지휘체계가 휙휙 뒤바뀌는 개경 성의 상황에 조금 어수선한 감이 있었으나, 강철두는 김진태를 데리고 개경의 여러 지휘부를 만나며 안면을 터 두었다.

목수, 대장장이, 농부 등등 여러 기술자들을 휘장 하나에 묶어 마을 회관을 몇 번 두드리니 개경 성이 비로소 영지 상태창으로 편입되었다.

"혁명대 대장 이석개는 나를 따라 내일 출진한다."

"명을 받듭니다."

"개경 성의 성주 겸 수비대장으로는 임시로 구대철을 임명한다."

"예, 예엣?"

구대철은 깜짝 놀랐다.

개경 성에 잔뜩 밀집된 인원만 해도 20만이다.

추리고 추린 상비군만 해도 2만인데, 이를 책임지는 자리에 오르게 되었으니 절로 이석개의 눈치가 보이면서 얼떨떨하기만 했다.

"이, 이는 소, 소인이 감당하기 힘...."

"못하겠다면 대가리를 부숴주마."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구대철이 넙죽 고개를 숙이며 우렁차게 대답했다.

"재상의 말을 따라 새로운 도시 건설에 적극 협조하면 된다."

"제 목숨보다 더 귀히 따르겠습니다."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실질 병력 수만 많지, 거의 모든 전력은 혁명대에 몰아넣은 것이나 다름없다. 2만 병력을 통제하여 그가 할 일은 후방에 남아 포로를 관리하거나, 병참, 혹은 가도를 공사하는 공병으로서의 역할이다.

이제 막 나뉘기 시작한 단계이니 차차 자리를 잡아가면 각자 역할에 따라 더욱 발전할 것이다.

"좋다. 가져온 식량과 술을 풀어라. 오늘 하루는 잔치다!"

"우와아아아!"

고구려 사람 중에 축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었는데, 며칠씩 이뤄지는 축제 기간 동안 성에서 모든 음식이 무료로 주어지는 까닭이다.

쿠하루 왕국군에게서 뺏은 식량이 넉넉했기에 개경 성에 피난한 20만 주민을 하루 배불리 먹이기엔 충분한 양이었다.

김진태를 따라온 기술자와 보급부대는 고작 3천 명 남짓이었지만, 그들이 인벤토리에 고기와 술을 가득 넣어왔으니, 이 또한 넉넉하게 나눠주었다.

"우와! 고기다!"

"수, 술이다. 탁주가 아니라 소주야!"

개경 성의 주민들은 강철두가 등장해 전투를 끝낸 뒤에도 여전히 긴장을 놓지 못했는데, 지금에 이르러서야 진정으로 전쟁이 끝났음을 실감했다.

"대왕님 만세!"

"고구려 만세!"

여기저기 바람잡이들이 나서니 만세 소리가 금세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밤이 찾아왔으나 개경 성은 오랜만에 거리와 집들이 환히 불을 밝히며 떠들썩했다.

양껏 배를 채운 병사들이 대거 나와 성 밖에서 포로를 관리하던 병사들과 교대했다.

"동무, 교대야."

"샹, 왜 인자 오니."

"허허허, 아직 고기가 산처럼 남았시야. 얼른 가보라우."

"술은?"

"술도 끝없이 나온다야. 끌끌."

"오오!"

포로 감시 병력들이 교대로 개경 성으로 나섰고, 배불리 먹어 기분이 좋은지 병사들이 포로들을 향해 일러주었다.

"다들 내일이면 집으로 갈 테니까. 그리 죽상 하지 말라우."

"저, 정말이오?"

"썅! 우리 대왕님이 손수 동무들을 집까지 바래다주신다 이 말이야."

병사들의 말에 기대감과 안도감에 가득 찬 이들이 대다수였으나, 총사령관 비토 후작은 참담한 심정이었다.

'휴전하지 않으면 왕국의 미래는 없다.'

신과 같은 힘을 가진 고구려 대왕이 직접 쿠하루 왕국으로 진군한다. 어서 빨리 국왕 폐하를 알현하고 애먼 생각하지 못하도록 타일러야 하건만.

현실은 팬티 바람으로 밤바람 맞으며 떨고 있으니 한스러울 뿐이다.

332화 출진

철두는 김진태와 논의한 끝에 개경 성을 빙 두른 이 거대한 토벽을 그대로 두기로 하였다. 다시 평지로 만들자면 막대한 마력이 드는 것도 이유였으나, 어차피 만들어 둔 것을 자연적인 외성벽으로 사용하려는 것이었다.

쿠구구구구궁.

다만 사람들이 오가는 출입구 정도는 있어야 하기에 사방팔방으로 8군데의 흙벽 높이를 낮춰 평지화했다.

"출진이다."

"출진하라!"

강철두의 명에 이석개가 복명하며 4천의 혁명대가 말을 탄 채 출발했다.

기존의 개경 성의 장교들과 지휘부들은 모조리 혁명대에 포함되어있었는데, 이미 랭커급인 자들이 1500명에 육박했다.

랭커가 되었다는 것은 특전으로 인벤토리나 월드맵을 가졌다는 말과 일맥상통하기에, 그들을 중심으로 조를 나눴다.

4120명의 혁명대가 50명을 기본 단위로, 80개 조로 나뉘어 명령체계를 잡고, 조장이 각기 조를 이끌었다.

리종성과 함께 고구려를 다녀온 100명의 장교들이 대부분 조장으로 선별되었다.

구대철을 비롯한 온순한 성향의 장교들과 장군들은 대부분 개경 성에 남아 후방부대를 이끌며 김진태의 명을 듣도록 했다.

두두두두.

80개 조는 다시 반으로 나눠 40개 조는 앞서가며 기동훈련을 했고, 나머지 40개 조는 2만여 명의 포로들을 포위 감시하는 형태로 나아갔다.

"집으로 귀환하는 길인데도 굳이 도망치는 놈들이 있거든 망설이지 말고 죽여라."

"네, 대왕!"

포로 호송을 맡은 2천여 명은 양 떼를 모는 목양견처럼 기동하며 포로들을 따랐다. 전방에 달려가는 2천의 기병은 여러 기병 진법을 연습하며 나아갔다.

철두는 모든 훈련은 이석개에게 맡겨두고 사토 키요시와 지르골의 호위를 받으며 나아갔다.

가는 와중에 밥때가 되면 밥을 먹고, 잠시 쉬다 다시 이동하고를 반복했다.

먹고 자고 이동하는 모든 게 훈련이 된다.

"대왕, 전방에 수위가 높은 강입니다. 상류 쪽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지역에 빠삭한 개경 성의 병사들이 간언했다.

철두가 개경 성에서 쿠하루 왕국과의 국경까지의 일직선상을 경로로 잡아 이동을 명했기에, 강을 만날 때에는 동선을 수정해야 했다.

"우회는 없다. 직진한다."

"...예, 대왕."

하지만 강철두는 굳이 둘러 가지 않고 직진을 명했고, 이석개는 순순히 명을 따르면서도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 행군 속도라면 고작 30분 정도만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도 수위가 허벅지 정도로 얕아져, 배를 띄우지 않고도 도강이 가능했다.

허나 이대로 나아가면 제법 넓은 강폭에 수위가 높은 강을 마주한다. 건너자면 부교를 놓아야 하는데 그 시간이면 차라리 우회하여 돌아가는 게 나았다.

'곤란하군.'

이리 생각하는 게 이석개만은 아닌지라 여러 조장들이 볼멘소리를 했다.

"장군, 배다리를 띄우자면 이거 보통 시일이 걸리는 게 아닌데, 다시 우회할 것을 청해보시지요."

"맞습니다. 잡공들 수도 적은데 어찌 부교 놓는 것까지 정예 혁명군이 나선단 말입니까?"

랭커거나 예비 랭커들로만 혁명대를 구성하다 보니 이들의 본래 직책은 중간 간부 이상 되는 이가 많았다.

그들의 불만 소리에 이석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간나새끼들. 나사 빠진 소리 하지 말라우. 이 또한 다 훈련이다 이 말이야!"

하라면 해야 한다.

군령이 바로 서지 않은 군대는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다. 대왕의 명을 말 그대로 따르지 않는 부대는 존재 필요가 없다.

이 또한 진정한 훈련이자 길들이기라고 판단한 이석개가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소리쳤다.

"까라면 까라 이 말이야. 알간? 다시 한번 되묻거나 불만을 토해내는 반동분자는 내 손에 먼저 치도곤당할 줄 알라우."

"예, 장군!"

이석개가 군기를 잡으며 앞서 나아갔다.

선발대가 강에 마주하니, 그 길이가 20미터 남짓한 강이 나타났다.

"얼른 나무부터 베라우."

"예, 장군."

선두에 도착한 혁명대원들이 주변의 나무를 벌목하며 부교를 놓을 준비를 했다.

일이 번거롭고 귀찮아서 그렇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랭커의 도끼질 몇 번이면 금세 통나무들이 만들어졌다.

그사이 철두가 지르골, 사토를 대동한채 도착했다.

"음? 뭐 하는 거냐?"

"부교의 설치를 위해 자원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이석개의 대답에 철두는 고개를 저었다.

"길은 내가 열 테니 다들 물러나라."

"예?"

이 귀찮은 일을 대왕께서 직접 하신다는 말인가?

순간 사고회로가 멈춰 얼빠진 소리를 내던 이석개가 퍼뜩 정신 차렸다.

"다들 물러나라!"

대왕의 명령에 토 달지 않고 따르기로 다짐한 지 몇 분이나 지났다고 반문한단 말인가? 이석개는 자책하며 얼른 부하들을 강변에서 물렸다.

푸스스스.

철두가 손을 뻗자 흙 무더기가 날아와 길쭉한 창이 되었다. 궁니르를 그저 무심히 앞에 툭 던지니, 흙더미로 무너져 작은 노인의 모습으로 조형되었다.

"넓은 다리를 지어라."

[뜻대로 하지.]

땅의 정령왕 그라스가 힘을 쓰자 곧 여기저기 흙더미들이 몰려들어 강 사이를 잇기 시작했다. 아치형으로 불쑥 솟아난 흙더미는 저들끼리 뭉치고 압축되었다.

투두두둑.

모래도 뒤엎어 농사짓기 좋은 토양으로 만들어내는 땅의 정령왕이다.

푸시시시!

강변의 무른 흙을 뭉쳐 돌처럼 단단하게 굳히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라스가 일을 마치고 사라지자 너비 10미터 정도의 긴 다리가 만들어졌다. 마차 세 대는 동시에 다닐 정도의 넓은 다리가 눈 깜짝할 사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 정도 마력이군."

능력을 발휘한 건 땅의 정령왕 그라스지만 힘을 소모한 건 강철두인지라, 줄어든 마력 양을 가늠해보았다.

일행의 행군 속도가 도보로 걷는 포로 2만 명의 무리에 맞춰져 있었기에, 그리 빠르지 않았다.

느긋한 속도를 생각하면 마주치는 강마다 다리를 놓아도 마력이 고갈되는 것보다 회복되는 양이 더 많을 것 같았다.

"이, 이럴 수가!"

"어어억!"

혁명대원들이 입을 딱 벌리고 놀라워했다.

그들은 검은 먹구름과 함께 등장했던 강철두의 신위를 다시 떠올렸다.

생각해보면 그 넓은 토성을 솟구치게 했는데, 눈앞의 다리 따위를 못 만들어 낼 턱이 없었다.

신이 창조한 것과 같은 경이로움에 놀라는 한편, 그런 이가 이제는 본인들이 모시는 대왕이 되었음에 새삼 어색할 뿐이다.

"가자. 길을 건너라."

"예, 대왕! 출진하라!"

"예, 장군."

이석개가 강철두의 옆에 나란히 말을 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왕! 가는 길마다 이런 다리가 놓인다면 쿠하루 왕국까지는 고작 4일 정도의 시간이면 족합니다."

"빨리 가면 좋은 게 아니냐?"

"해서 청하옵니다. 훈련을 겸해 가는 길목의 쿠하루 왕국을 약탈할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쿠하루 왕국과의 전쟁이 길어지며 야금야금 영토를 잃고 전선을 물린 개경이다. N2790 맵의 3분의 1은 이미 쿠하루 왕국의 영역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 뺏긴 여러 마을들이 지금부터 펼쳐져 있다.

"좋다. 허락하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단!"

"...?"

이석개가 귀 기울여 철두의 다음 말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군기를 어지럽히지 마라."

철두가 뒤에서 묵묵히 따르던 사토 키요시를 불렀다.

"따라가서 고구려의 보급훈련이 어떠한지 알려줘라."

"존명!"

사토 키요시가 이석개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종성!"

"예, 장군."

"대왕님을 모셔라."

"예!"

혁명대 부대장 리종성을 남겨두고, 훈련 중이던 40개 조를 소집해 그대로 앞으로 내달렸다.

철두의 주변엔 리종성이 이끄는 부대장부대 50인이 전부다. 그들은 긴장된 기색으로 힐끔힐끔 철두를 곁눈질했다.

"후발대 오기 전에 밥이나 먹자."

"넵! 알겠습니다."

리종성이 인벤토리에서 식재료를 꺼내놓자 부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마른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지피고 순식간에 솥이 걸렸다.

하지만 손길이 멈추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 대왕! 어떤 먹거리를 대령하면 좋을는지요?"

"아무거나 해라. 난 다 잘 먹는다."

"헙, 넵!"

부대원들이 허둥지둥하자 리종성이 나서서 정리했다.

"저 솥에 밥부터 짓고, 고깃국을 끓여라."

"네, 장군."

병사들을 지시하는 리종성의 표정은 착잡했다.

강철두가 슬쩍 웃으며 말을 붙였다.

"왜? 전장에 나서서 사치한다 생각하나?"

"헙, 아닙니다. 대왕!"

"후후후."

"...."

철두의 장난에 리종성이 쩔쩔맸다.

지금 인벤토리에서 나온 것도 모두 쿠하루 왕국군을 패퇴시키고 얻은 전리품이다.

인민들의 고혈을 빠니 마니 할 필요가 없었다.

적의 것을 취해 내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는데 탓할 구석이 어딨겠는가.

"이종성."

"넵!"

"우리 고구려는 굶지 않는다."

"알갔습네다!"

"배고프면 이웃에게서 빌리면 된다."

"...."

"왜 말이 없나?"

리종성은 아부하는 성격도 아니며, 대가 약한 이도 아니다. 마음속의 생각과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 다른 인물도 아니다.

밥을 안 줘 삐진 강아지 같은 얼굴의 그를 보며 철두가 웃었다.

"내 앞에서 말을 가려 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공화국 시절, 인민들의 고통 어린 시절이 생각났을 뿐입네다."

"북한 말이냐?"

"네, 궁한 때에 원조를 바란다면, 이웃나라들은 이를 오히려 약점으로 잡을 것입니다."

"하하하하!"

철두가 참지 못하고 크게 웃었다.

"누가 원조를 바란다더냐?"

"...이웃에게서 빌린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아, 그래. 정당한 거래로 빌려오는 거지."

철두가 씩 웃으며 말했다.

"자비를 베풀고 곡식을 빌려오면 수지가 맞는 거래가 아니냐?"

"...?"

바로 이해하지 못해 멍한 얼굴이 되었던 리종성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약탈이 아니옵니까?"

"후후, 보급이지."

철두가 씩 웃으며 다시 말했다.

"우리 고구려는 굶지 않는다."

"...!"

리종성의 머릿속에서 종이 치는 것 같았다.

강철두의 말이 전과 다르게 들린 탓이다.

'절대 굶기지 않는다.'

고구려 대왕의 의지가 리종성의 귀를 거쳐 가슴을 울렸다. 어쩌면 리종성은 마음 깊은 곳에서 바라왔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듣고 싶었던 확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다 같이 고난의 행군이나 하자는 소리 따위는 지긋지긋하다.

울컥하는 리종성의 귀에 강철두의 음성이 꽂혔다.

"아직도 내가 사치하는 것 같나?"

"크윽, 아니옵네다!"

"후후, 밥을 지어라. 내 군병들과 함께 먹을 거다."

"명, 명을 따르옵니다."

리종성은 눈알이 벌게졌다.

저도 모르게 흐르려는 눈물은 참아냈으나 복받치는 감정마저 통제하지는 못했다.

*

두두두두두.

2천의 기마가 질주하고 있었다.

"이쪽이다. 따르라!"

"예, 장군!"

혁명대를 맨 앞에서 이끄는 이석개의 얼굴은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그들의 앞에 작은 강이 나타났으나 기동 속도를 죽이지 않았다.

투두두두.

그리 깊지 않은 강을 2천의 기마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건넜다.

"허억, 적이다!"

경계 서던 쿠하루 왕국 병사들이 있었으나 하얗게 빛나는 기운이 서린 이석개의 창이 병사의 목을 꿰뚫었다.

기마는 멈춤이 없었고, 거창한 이석개는 눈앞에 보이는 마을을 보며 소리쳤다.

"목표는 안진 마을!"

본디 개경 성의 마을이었으나, 적에게 뺏긴 뒤 쿠하루 왕국의 전진기지 역할을 해오고 있는 곳이다.

"복수의 시작이다! 전원 거창!"

"거창!"

"돌격!"

"돌겨억!"

2천의 기마가 창을 세우고 달려들자 안진 마을에 주둔 중이던 쿠하루 왕국 병사들이 허겁지겁 창칼을 들고 나섰으나 판세를 뒤집기는 무리였다.

"간나새끼, 죽으라우!"

"끄어어억!"

혁명대의 창이 안진 마을을 헤집기 시작했다.

333화 목표

안진 마을을 뺏어 전진 보급기지로 삼은 쿠하루 왕국은 전임 사령관 메이슨 자작을 이곳의 지휘관으로 남겨두었다.

"각하! 적입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적이라니!"

메이슨이 헐레벌떡 뛰쳐나왔다.

휘하 기사가 심각한 얼굴로 보고를 이었다.

"가, 간나군이 나타났습니다."

"뭐야? 간나군이 왜 나타나?"

간나군.

그들은 지난 2년간 싸워온 적들이다.

이곳 N2470 맵을 장악한 야인 무리는 항상 간나를 입에 달고 살기에 어느 순간부터 그리 불렸다.

"말이 되는 소릴 해! 비토 후작 각하께서 그 많은 병력을 끌고 가셨는데...."

메이슨은 소리 지르다 말고 퍼뜩 떠올렸다.

'간나군의 본거지 성을 포위한 뒤로 곧 총공세에 나설 것이라 하였다....'

전진부대와 후방부대 사이 전령이 오고 가며 서로 소식을 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교범이고, 이것이 마지막으로 보고받은 부대의 소식이었다.

메이슨은 순간 오싹해져 머리가 쭈뼛 섰다.

"마지막 전령이 언제였나?"

"오 일쨉니다."

"젠장."

동쪽 하늘이 번쩍번쩍하길래 왕궁 마법사들이 신나서 적 본거지에 마법을 난사 중인 줄 알았다. 서로 전령을 주고받지 않은 지 오 일째니, 무심하긴 했다.

"제가 분명 낌새가 이상하니 정찰병을 보내자 하지 않았습니까!"

"뭣! 이 새끼, 지금 내 탓이란 거야?"

부관이 빽 소리 지르자 메이슨도 즉각 목소리를 높였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실책이 맞지만, 그런 걸 인정할 지휘관은 없다.

"그런 건 알아서 조치했어야지!"

"죄, 죄송합니다."

메이슨은 본인이 깔아뭉갰으나 태연했다.

위에서 깠다 해도 낌새가 이상하면 알아서 정찰을 보냈어야지.

"멍청한 놈."

"...."

메이슨이 인상을 쓰자 부관이 목을 움츠렸다.

전장에서 술을 끼고 살고 군사작전을 소꿉놀이 정도로 치부하는 교만한 지휘관이지만, 그 실력은 진짜배기였다.

물론 성질머리도 더럽기로 유명했다.

"시발, 적 규모는?"

"2천 정도 기병입니다."

"많이도 빼돌렸군."

메이슨 자작은 비토 후작이 졌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저 포위망을 벗어난 간나군 2천이 후방부대의 보급기지 중 하나인 이곳을 습격했다 여겼다.

"병력 수습해라."

"네, 각하!"

메이슨이 갑옷을 여미고 투구를 쓰며 말 소환해 올라탔다. 이곳 기지에 남은 병력은 5천 남짓. 기습이 아니었다면 호락호락한 숫자는 아니다.

"흥, 간나군 따위가 감히."

맨날 '간나'를 입에 달고 사는 이 야인들은 후방 침투 교란 따위의 전술을 자주 사용했으나 그 효과가 미미한 건 마법 전력이 없고, 초인이 없어서다.

수만 수십만이 모여 세를 불리면 뭣 할 것인가?

소드마스터 하나 없는 그들은 그저 야인 무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지이이잉!

말에 올라탄 메이슨 자작의 검에 눈부신 검기가 맺혔다.

"따라붙어라."

"네, 각하!"

메이슨이 자신만만하게 나섰다.

야인 무리와의 전쟁이 길어졌다곤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쿠하루 왕국군이 전력을 다하지 않아서다.

메이슨 자작은 지난 2년 동안 야금야금 야인들의 땅을 점령하고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노예들을 잡아 왕국에 풀었다.

간나 무리는 야금야금 사냥하고 포획하는 사냥감이지, 국가적 역량을 집중해 이겨내야 할 적 따위가 아니었다.

고구려의 참전 가능성에 부랴부랴 왕국에서 중앙군을 파견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적 본거지가 점령당한 것만 보아도 전력의 우위는 명백하다.

'설마 놈들이 벌써 참전한 건 아니겠지?'

메이슨 자작은 혹시 하는 불안감이 들었으나 어쨌든 지금은 습격한 놈들을 궤멸하고 난 뒤의 일이다.

기지를 수습한 뒤로 비토 후작군의 소식을 들어야겠다.

"이놈들!"

쇄애애액!

"크악!"

메이슨의 대검이 휘둘러지자 간나군 야인이 몸통째 뎅겅 잘려 나갔다. 기가 질리는 그 모습에 주변에 있던 야인들이 기겁하는 얼굴이 즐겁다.

"간나새끼!"

"뒈지라우!"

용기가 가상하나 학습력이 뒤떨어지는 놈들이로고.

"클클."

멍청하면 뒈져야지.

쇄애애액.

검기를 두른 대검이 상대가 치켜세운 검을 너무 쉽게 두 동강 내고 그 주인마저 두 동강 내버렸다.

"끄어어억!"

순식간에 야인 셋을 해치운 메이슨이 포효했다.

"집결!"

"집결하라!"

"집결하랍신다!"

기습을 수습하는 가장 첫 번째 수순이 아군끼리 뭉쳐 피아를 식별하고 대항하는 것이다.

메이슨의 뒤로 기사들과 병사들이 몰려오기 시작하자 금세 작은 진이 만들어졌다.

여전히 기지 곳곳에 산발적인 전투 소리와 여기저기 불길이 치솟고 있다.

"따르라!"

"자작님을 따르라!"

메이슨이 매캐한 연기를 뚫고 움직이자 그 행로마다 병력들이 새로이 합류해 따라붙었다.

'이제 슬슬....'

야인 놈들이 슬슬 빠져나갈 때가 되었다.

항상 이렇듯 후방을 침투해 불을 지르고 튀는 것이 그들의 주요 전략 중 하나였으니까 말이다. 귀찮고 성가신 놈들이다.

"음?"

메이슨 자작의 눈이 치켜 떠졌다.

적들이 도망치기는커녕, 여기저기 들쑤시다가 이내 뭉치기 시작했다.

"결착을 보자는 건가?"

간나군의 움직임이 평소와 조금 다르다.

메이슨 자작이 앞서가니 간나군 사이에서도 분쟁이 일었는지, 저들끼리 싸우고 있었다.

"이것은 고구려군의 보급 교범과 큰 차이가 있소."

"기습의 묘를 살렸고, 적을 이제 처치하기만 하면 약탈은 거저요. 어째서 틀렸다 말하시오."

이석개의 항변에 사토 키요시가 차분히 말하기 시작했다.

"아군의 손실이 크오."

"허, 전투 중에 그것은 당연한 것 아니오? 죽은 이보다 죽인 놈이 더 많소!"

사토 키요시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방화를 저질렀소."

"아닛! 그럼 기습의 묘를 극대화하자면 적의 시야를 어지럽혀 혼란을 가중해야 하는 것 아니오?"

"틀렸소."

사토 키요시는 차분히 말했다.

"뺏으면 내 것인데 왜 불을 지른단 말이오? 하물며 배가 고프다고 제 살을 깎아 먹는 멍청한 짓도 없소."

"허, 전투 전에 죽기를 겁내고 적의 물자가 상할까 조심한다면 기습은 어찌하고, 저리 적들이 새파랗게 몰려들면 이제는 어찌하자는 거요?"

이석개는 변수가 많은 전장에서 전술을 부정하는 말을 뱉는 이 일본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구려의 적진 보급 교범은 하나요."

사토 키요시가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는 뾰족하고 날카로운 숏소드 두 개가 들려 있었다.

"대항하는 적은 모조리 죽이거나 포로로 삼고, 대항하지 않는 적은 죽이지 않는다. 물자는 남은 자들이 자생할 정도만 남기고 모조리 취한다."

"그, 그거야 적보다 압도적으로 강할 때나 그러는 것 아니오!"

사토 키요시가 씩 웃었다.

"그게 혁명대가 나아갈 길이오."

파팟.

사토 키요시의 신형이 말 위에서 사라졌다.

메이슨 자작은 간나군 야인 둘이 주고받고 언성을 높이다가 갑자기 한 놈이 살기를 피워 올리며 다가오길래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헌데, 말을 몰고 돌격해오리라 생각했던 그 녀석의 몸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으니.

"으음?"

카아앙!

당황한 와중에 기색을 읽고 검을 들어 막았다.

용케 녀석의 검을 막아낼 수 있었으나.

콰직.

"크윽."

막아낸 건 한 자루뿐이었다.

애당초 연환공격을 생각하고 달려든 사토는 메이슨 자작의 옆구리에 검을 박아넣자마자 그대로 세 번째, 네 번째 공격으로 그의 몸 관절 곳곳을 찔러버렸다.

두꺼운 갑옷이 무색하게 관절만 노린 그 공격에 메이슨 자작이 고꾸라졌다.

파스스스.

그의 죽음을 알리듯 빛과 함께 신체가 사라지고, 그의 소환물인 말 또한 사라졌다. 그 대신 남겨진 것은 그의 인벤토리 중 랜덤하게 한 칸을 차지하던 아이템이었다.

"헛! 각하!"

"저, 저놈을 잡아라!"

궤짝을 냉큼 주워 수납한 사토 키요시가 본격적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기사들 사이를 요리조리 누비며 두 자루 검을 촉촉 찔러 넣으니 적들이 속절없이 쓰러졌다.

놀라운 것은 검기를 사용하는 기사들도 너무 수월하게 죽여버린다는 점이었다.

"...."

이석개는 꼭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메이슨 자작이 누군가?

지난 2년간 개경 성의 병력들을 야금야금 깎아 먹은 쿠하루 왕국군의 지휘관이다.

씹어먹어 버려도 시원찮을 저놈의 손에 얼마나 많은 동지들이 죽었는가? 저놈을 암살하기 위해 여러 동지들이 나섰으나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메이슨 자작 본인도 소드마스터고, 그가 데리고 있는 다섯의 기사도 소드마스터다.

마법사도 소드마스터도 없는 개경 성의 입장에서 그들은 감당할 수 없는 탱크 같은 놈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지금 대왕님을 따르는 왜놈의 손에 무참히 죽어가고 있다.

너무나 쉽게.

내가 어찌하지 못했던 강대한 적이, 누군가에 의해 너무 쉽게 유린당하는 모습은 참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나 이석개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지난 2년간 저자에게 고전한 나와 동료들은 무엇인가?

"끄아아!"

"하, 항복합니다!"

사토 키요시가 기사 스물 정도와 일반 병졸로 보이는 자들 서른 정도를 두 자루 검으로 무참히 죽였을 땐 전장의 기세가 완전히 넘어가 버렸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히익!"

"항복합니다."

남은 적병들이 너도나도 무기를 부리고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피를 잔뜩 뒤집어쓴 사토 키요시가 이석개에게 돌아와 말했다.

"포로야 많이 잡으면 잡을수록 돈이니, 전투는 적의 대가리만 쳐서 빨리 끝내는 게 고구려의 방식이오."

"...알겠소."

이석개는 알 수 없는 패배감으로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쯧, 신경 쓸 것 없소. 나는 대왕의 은혜를 입어 직접 지도받으며 실력을 키웠으며, 천년영약을 하사받은 운 좋은 칼잡이에 불과하오."

"...?"

"나는 내 나라 국민을 지켜내지 못했으나, 그대는 온전히 지켜내 대왕에게 귀의하지 않았소?"

"...나를 놀리는 거요?"

"전혀."

사토의 얼굴엔 일말의 비웃음도 장난기도 없었다.

"대왕을 따르다 보면 자연히 이리될 것이오. 그대는 실력을 갈고닦고, 공을 드높이면 될 일이오."

"...."

"내가 알려줄 건 다 알려주었으니 이제 그대가 병력을 이끄시오. 아!"

"더 할 말이 있소?"

"병사들 아랫도리를 조심시키시오. 괜히 참수될 수 있으니."

"명심하겠소."

이석개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포로들을 엮고, 마을에 숨은 적병을 모조리 척살하라!"

"예, 장군!"

혁명대가 적의 수중에 떨어져 있던 안진 마을 곳곳을 누비며 숨어있던 적병을 색출하고, 사로잡혀 노예로 부림당하던 여러 북한 주민을 역으로 구해냈다.

"하이고, 이석개 장군 만세!"

"정말 감사합네다."

구출된 자들이 이석개를 칭송하며 고마움을 전했으나, 본인은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자신은 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더, 더 높은 군공을 세워야겠다.'

이석개가 개경 성을 들어 바치며 얻은 영약이 백년급.

그것으로 인해 신체를 재구성하고 소드마스터로 거듭난 이석개다.

창을 쓰니 정확히는 스피어마스터겠지만 어쨌든, 그는 새로운 경지에 눈을 뜨고 자신만만했었다.

누구든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찼으나 이제는 안다.

'소드마스터라고 다 같은 초인이 아니다.'

그 사이에도 급이 있다.

여러 인민을 이끌며 장군으로 행세하던 이석개는 오늘을 끝으로 없다.

'뼈가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수련을 멈추지 않을 것이야!'

스스로를, 그리고 혁명대 대장으로서 부대를 누구보다 강하게 만드는 것이 그의 사명이자 존재 이유가 되리라.

천외천의 힘을 내는 강철두를 볼 때는 그저 숭배하고자 하는 마음뿐이었다.

사토 키요시의 활약을 두 눈으로 보고서야, 이석개는 현실적인 지향점을 찾았다.

신이 될 순 없으나, 그의 제일가는 창이 되어 보이겠다.

334화 이심전심

안진 마을을 털어냈다.

사로잡은 적군 포로가 2200명에 달했고, 구출해낸 북한 출신 주민이 870명이었다.

일단은 보급을 풀어 그들을 배불리 먹이고 있는데 강철두의 본진이 당도했다.

"보고드립니다. 본래 안진 마을로 불리던 적의 기지를 급습...."

이석개가 굳은 얼굴로 보고를 마치자 강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병력 손실이 크다. 동료를 아껴라."

"넵! 대왕!"

사토 키요시에게 들은 대로 강철두는 병력 손실부터 책잡았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본인의 인벤토리에서 커다란 수레를 꺼냈다.

인벤토리 한 칸에 저 커다란 수레가 들어가는 것도 신기한데, 그 안에 든 내용물은 더욱 놀라웠다.

"헉! 포션이 아닙니까?"

"부상자들을 돌봐라. 구출한 주민은 후방으로 이송한다."

"넵! 대왕!"

군기가 바짝 든 모습의 이석개를 보며 철두가 씩 웃었다.

"고생했다. 오늘은 여기서 숙영한다."

"알겠습니다!"

슬슬 해도 지려 하기에 일찍 자리를 잡았다.

안진 마을을 오면서 보이던 작은 강 위에도 다리가 건설되었다. 아무렴 이제 N2790 맵 전역을 마차가 쉽게 오고 갈 수 있어야 물류가 원활히 이동할 테니, 튼튼한 다리는 필수였다.

대충 쿠하루 왕국과의 국경인 서쪽 끝까지 이르는 일직선대로만 강철두가 만들어 놓으면, 맵 전역의 자잘한 다리건설이야 기술자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장관으로 승진한 국토부의 아스발도 경이 이끄는 공병대의 수준은 지구의 방식과 결합해 굉장한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본래 그들이 잘하던 가도건설은 당연하고, 교각의 건설에 더해 최근에는 기찻길도 훌륭히 건설해내며 고구려의 토목을 책임지는 핵심 부서였다.

이석개가 이끄는 혁명대는 이제 좀 고구려의 방식에 적응해, 포로들을 관리하는 건 척척 손발이 맞았다.

2200명의 포로들의 무장을 뺏고, 갑옷과 옷을 벗기고, 인벤토리와 주화를 털어먹는 사이 숫자는 1800명으로 줄어들었다.

반항적인 이들은 굳이 어르고 달래지 않고 단칼에 쳐 죽이며 포로 구분을 끝낼 즈음에 후발대가 도착했다.

"헉! 저건 왕국 중앙군이 아니냐?"

"이런! 비토 후작께서 이끄는 중앙군이 패배했다는 말인가?"

중앙군 2만에 본래 간나군과 대치하던 국경의 부대 1민까지, 거의 3만에 이르는 대병력이 동쪽 간나 야인들의 본거지로 진군했는데 처참한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간나새끼들! 얼른 이동하라우!"

"얼른얼른 가라! 간나새끼!"

혁명대 병사들이 안진 마을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거칠게 몰아붙였다.

포로 중 하나인 기사 트레디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그들의 통제대로 바삐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 야인들의 말뜻이 모두 이해되고 있구나.'

간나 빼고는 못 알아들을 말만 하던 야인들의 언어가 머릿속에서 이해되었다. 새삼 그들의 손이며 목이며 차고 있는 아티팩트가 눈에 들어왔다.

야인 무리에 없던 마법사가 하늘에서 떨어졌을 리는 없으니, 그토록 우려하던 고구려의 참전이 확실시되었다.

'그래서 패배했구나.'

트레디는 들판을 가득 메운 아군 포로들을 보며 착잡한 심정이었다. 왕궁에서 왜 그토록 무리하여 왕국 정예군과 마법 전력을 대거 출병시켰나 했더니, 고구려의 저력이 참으로 대단했다.

끝내 왕국군이 야인을 소탕하기 전에 고구려가 구원에 성공, 그 뒤 이렇게 많은 이들을 포로로 사로잡은 것을 보면 말이다.

"고구려가 참전해 패배한 거요?"

"말해 뭣하겠소?"

트레디가 슬쩍 묻는 말에 병사가 조용히 뇌까렸다. 그의 눈은 공허하게 죽어있었는데, 용기나 분노는커녕 조금의 반항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패잔병.

그것도 더는 대항할 마음을 잃어버린 지독한 포로들이 들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속옷 차림에 몇몇만 가벼운 겉옷 정도를 걸친 차림이다.

밤이면 제법 쌀쌀한 날씨기에 오돌오돌 떨면서도 서로 체온을 나누기 위해 옹기종기 밀집했다.

조금 의아스러운 것은 포로들의 손발을 결박하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없다는 것이다.

도보로 이동해야 하니 발이야 내버려 둔다지만, 혹시나 반항할 것을 대비해 손을 묶어 두지도 않은 모습에 트레디는 여기저기 눈치를 살폈다.

그 기색을 알아차렸음인지 옆에 있던 포로가 넌지시 이야기했다.

"도망치려거든 소용없는 짓이오. 공연히 나서서 피해 끼치지 마시고 가만히 계시오."

"뭐?"

트레디는 병사를 보며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기와 갑옷을 모조리 뺏겼다곤 하나, 아군이 2만이 넘소. 거기에 감시 중인 야인 무리는 저리 허술하니, 단박에 몰아치면 이중 절반은 살길이 열릴 게 아니오?"

2만이 넘는 인원이 들판에 둥글게 모여있고, 혁명대 기병들이 그 주변에 자리 잡고 있다. 그야말로 양 떼를 몰아놓고 감시 중인 목양견이나 다름없었는데, 숫자에서 차이가 나니 해볼 만하지 않나 싶었다.

"지금 이대로 가는 곳이 고향이오. 이대로 귀환해 왕궁에서 배상금만 지불하면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될 텐데, 굳이 그리 모험할 이유가 있소?"

"뭐라?"

트레디는 깜짝 놀랐다.

"전쟁포로를 그대로 풀어준단 말이오?"

"거저는 아니지. 왕궁에서 돈을 줘야겠지만."

"허, 우리 국왕께서 병사들 목숨값을 아낄 분은 아니지 않소?"

"그러니 내 말이 그 말이오. 이대로 있으시오. 이 굴욕도 며칠 감내하면 곧 자유의 몸이 될 테니."

트레디는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싶었다.

'기사는 그렇다 쳐도 병사들을 대관절 왜 풀어준단 말인가?'

이 많은 수의 병력을 풀어줘 봐야 다시 재무장하면 그대로 적이 될 게 아닌가?

야인 무리는... 아니, 고구려는 돈에 환장한 놈들이란 말인가?

적국의 전력을 깎아 먹을 수 있는 기회를 굳이 돈을 벌자고 그대로 되돌려주려 하다니.

"이보시오. 그리 눈알 굴리지 말고 저기 오른쪽 방향을 슬쩍 보시오."

"어디?"

"저기 있잖소. 덩치 큰 사내 말이오. 저기 저 바바리안이 따라다니는 사내 있잖소."

포로가 지르골을 가리키자 트레디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온몸이 문신인 바바리안 지르골이 커다란 덩치의 사내를 따르고 있었다.

"봤소."

"저 사람이 고구려 대왕이오."

"저 사람이?"

"그리고 절대 저자의 눈에 띄지도, 반항하지도, 심기를 거스르지도 마시오."

"...?"

"우리는 간나야인에게 당한 게 아니오. 저 한 사람에게 모조리 제압당했소."

벌써 나흘이나 지났지만, 그때의 충격이 아직 그대로였다.

"성물을 휘두르는 족족 번개가 몰아쳐 동료들이 터져 죽었다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이리 몸이 부르르 떨리오."

"...쉬 싸지 마시오."

"아이쿠, 지릴 수도 있지 거참."

트레디가 인상을 찌푸리며 사내에게서 멀어졌으나 옹기종기 모인 포로들이 콩나물시루처럼 밀집해있는지라 오갈 데가 없었다.

"어이! 간나새끼들! 배식이다!"

"얼른 처먹으라우!"

거대한 솥 수십 개를 들고 온 야인 무리가 밥을 뭉친 주먹밥과 밀을 구운 듯한 빵을 여기저기 마구잡이로 던졌다.

"이익! 내가 먼저 잡았어."

"꺼져, 새끼야!"

그들은 짐승 우리에 먹이를 던지듯 하였고, 포로들은 또 그것을 하나라도 더 먹겠다고 악다구니를 썼다.

사로잡힌 지 얼마 되지 않은 트레디의 눈에는 그 모습이 정말 짐승과 같았으나, 그들은 부끄러움도 없는지 흙 묻은 음식 덩이를 주워 와구와구 씹어먹었다.

"크흐흐, 그리 볼 거 없소. 형씨도 미리미리 배 채우지 않으면 고향 가기 전에 죽을 거요."

"...적들의 목적이 몸값인데 함부로 죽이기야 하겠소?"

"크흐흐, 저놈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놈들이오. 비실거리거나 걸음이 느리면 그대로 죽여버리니, 뭐라도 주워 먹어 체력을 아끼시오."

"...."

돈이 목적인데 그 값을 치러야 할 포로들을 또 살뜰히 살려갈 생각도 없어 보였다.

트레디는 그래도 기사로서 며칠 굶는 것 따위는 끄떡없었기에 사내의 말을 애써 무시하며 눈을 감았다.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사냥감에 불과했던 야인 무리들이 왕국군을 짐승 대하듯 하고, 저들끼리 낄낄거리고 있으니 참담한 심정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

"1개 조를 차출, 구출한 민간인들을 개경 성까지 후송하겠습니다."

"그렇게 해라."

"이곳 안진 마을의 물자는 아직 한데 모으지 않았습네다. 어찌 할는지요?"

"으음."

철두가 마을을 둘러보았다.

작은 강을 끼고 있는 이 마을은 3천 명 정도는 무리 없이 수용할 정도로 큰 마을이었다.

"사토."

"네, 대왕."

"재상에게 여기 소식을 전하고 관리할 병력을 보내라."

"하잇!"

사토는 즉시 자신의 펫인 그리핀을 소환해 하늘 높이 솟구쳐 후방으로 향했다.

포로들을 이끌고 오느라 하루 걸려 여기까지 왔지만 날아서는 순식간에 갈 거리다.

사토를 전령으로 보내놓은 철두는 지휘소로 쓰던 안진 마을 회관에 들어갔다.

넓은 집 안은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는데, 철두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지르골에게 명했다.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해라."

"예, 대왕!"

"으음."

철두는 지르골마저 내보내고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제 곧 심상 공간에 들어갈 참이다.

실상 호위가 있든 없든 상관없는 일이다. 심상 공간에 있다 해도 외부의 위협이 느껴지면 즉각 반응할 수 있는 강철두였으니까.

하지만 오붓한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

강철두는 두 눈을 감았고.

마음속 에이든이 눈을 떴다.

"후우우우."

메마른 언덕에서 눈뜬 에이든이 숨을 길게 뱉었다.

코로 쑥 들어오는 향기가 나쁘지 않다.

쏴아아아아!

저 아래에서 언덕을 거슬러 올라와 아르엘라의 심상 공간인 검은 숲 쪽으로 흐르는 강물로 인해 메마른 언덕은 더는 건조하지 않았다.

더욱이 가운데에 크게 자라난 나무는 싱그러운 냄새를 풍기니 절로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외부야 어떻든 간에 철두의 마음은 희망과 즐거움으로 가득 찼다.

"그새 더 자랐네."

철두는 거대해진 그루터기를 툭툭 두드렸다.

높이 자라난 나무만큼이나 강철두의 내면도 자라나, 이제는 어엿한 소년을 넘어서려 하고 있었다.

그루터기 한쪽에 머리를 뒤로 대고 서서 칼을 하나 만들어내 키를 쟀다.

스컥.

칼날이 나무 기둥을 스치며 새로운 표식을 만들어냈다.

"흐흐, 키도 자랐군."

이제는 성년 엘프인 아르엘라보다도 아주 조금 더 크리라.

"가볼까?"

한달음에 달려간 에이든은 두 심상 세계를 잇는 구멍을 찾았다.

콸콸콸.

그 구멍 너머로 물의 정령왕 엘리아가 만들어낸 강물이 넘어가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그 앞에 덩치 큰 바바리안 카다잔이 서 있었다.

"아버지!"

"에이든!"

"후후, 시작하자."

"네!"

카다잔이 도끼를 꺼내 들자 에이든도 도끼를 만들어냈다.

파팟.

자신의 심상 공간에서는 신과 다름없기에 도끼 한두 개 창조해내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후우우웅!

"이렇게 치켜올려 봐라. 그렇지! 몸을 빙글 돌리면서 이렇게!"

카다잔이 시범을 보이면 에이든이 따라 하는 식이다.

두 심상 공간을 잇는 구멍이 조금 더 커지면 아예 넘어가 아버지와 도끼를 맞대볼 만도 하겠건만,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구멍도 차츰 넓어지고 있어, 아버지와 온전히 해후하는 것도 그리 먼 일은 아니었다.

한창 도끼를 휘두르는데 검은 숲 상공의 하늘이 번쩍번쩍했다.

에이든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고, 카다잔의 얼굴에도 피식 실소가 지어졌다.

"며느리가 왔군."

"헤헤."

카다잔은 자리를 피해주었고, 그 자리를 곧 숲을 질주해 달려온 아르엘라가 차지했다.

"에이든!"

"왔어?"

서로를 바라보는 요정과 소년 바바리안의 눈은 애정이 가득했다.

"거긴 어때? 나 없이 안 심심해?"

"심심하긴 한데, 임산부를 데려갈 수는 없지."

"뭐야아."

아르엘라가 슬쩍 배를 만지며 웃었다.

"거긴 어때?"

"아이언헤드 성? 그대로지 뭐. 별일 없어."

"다행이네."

마음이 닿은 두 사람은 시공간의 제약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며 서로의 안부를 전했다.

335화 종전 협상

N2790 맵을 동과 서로 양분하면 서쪽은 그간 쿠하루 왕국이 점령했던 지역이고, 동쪽은 개경 성을 중심으로 북한 출신의 개척마을이 자리한 곳이다.

개경 성은 맵의 중앙에서 오른쪽으로 치우쳐져 있었는데, 김진태는 여기서 더욱 동쪽으로 이동해 맵의 끄트머리에 핵심 도시를 만들고자 했다.

바로 맵의 경계만 넘어가면 이동마법진이 있어, 수도 아이언헤드 성과 전령이 오가기 쉽기에 최적의 장소다.

"이 성의 이름은 양평입니다."

"네, 재상 각하!"

김진태의 선언에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가 상기된 얼굴로 답했다.

"초대 양평 시장으로서 잘할 수 있죠?"

"물론입니다! 이 안승우! 뼈가 부서지도록 일하겠습니다."

"그래요."

안승우가 감격스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사령관 박준필을 모신 보급 장교 안승우!

이방 안승우!

그간의 노고가 헛되지 않았다.

이리 능력을 인정받아 이리 큰 맵을 아우르는 핵심 도시의 시장으로 부임하다니.

이 도시의 이름이 양평이라 지어진 것도 다름 아닌 자신의 고향이 양평이어서다.

'양평을 최고의 도시로 만들겠다!'

안승우는 벅차오르는 감동에 울컥한 기분이었다.

"나도 이제 세력창으로 간섭할 수 있으니 별문제는 없을 겁니다."

"네, 재상 각하."

지금은 그저 마을회관 하나 지어진 황량한 벌판이지만, 앞으로 이곳은 N2790 맵의 주도가 된다.

안승우에게 휘장을 하사하고, 마을을 활성화해 고구려의 영지 목록에 양평 마을이 등록되었다.

이제 세력창을 통해 간접 지배할 수 있으니, 안승우가 인력 관리와 청사진대로의 도시 건축만 잘 신경 쓰면 될 일이다.

가장 동쪽의 주도 양평과 서쪽으로 조금 더 나아가면 나오는 개경 성, 그리고 바로 어제 점령되어 새롭게 영지 목록에 들어온 안진 마을.

"아스발도 경. 모든 길은 이곳 양평으로 통하게 될 겁니다."

"아무렴요. 그리 염두에 두고 가도를 건설하겠습니다."

"일단 큰 도로인 이 동서대로만 건설하면 전 맵을 장악하는 데 무리가 없을 거예요."

쿠하루 국경지 - 안진 마을 - 개경 - 양평

맵의 중심 허리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거대한 도로다.

"어휴, 대왕님께서 이미 다리를 놓고 가셔서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습니다요."

"네, 하하. 그럼 믿고 맡기고 갑니다."

"걱정 마십시오. 각하."

고구려에서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강철두다.

헌데, 고구려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 누구냐 하면 김진태를 꼽는다. 그가 없으면 고구려의 행정은 마비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막 장악과 개척, 발전을 시작해야 하는 N2790 맵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강 친구이자 대왕인 강철두의 의중도 알았고, 이 맵의 발전 방향과 구상까지도 마쳤다. 이제 이 설계대로 일선 행정관과 군인들이 따르기만 하면 된다.

"르망 경도 빠르게 통신 구축하면 복귀토록 하세요."

"네, 각하!"

고구마처럼 생긴 고구려의 전 맵에는 마법 통신망이 깔려있다. 전 국토의 소식을 마법 통신을 통해 아이언헤드 성의 정보청에 모이게 된다.

이곳 N2790 맵은 이동마법진을 통과해야 할 정도로 너무 먼 곳이라, 곧장 정보청으로 통신하는 것은 무리다.

이곳 양평에 작은 정보청을 짓고 전 맵의 소식들을 모은 후, 이곳의 정보를 전령을 이용해 이동마법진을 이동, 아이언헤드 성까지 전하는 게 가장 빠른 길이다.

즉시 정보 교환을 하지는 못하지만, 정기적으로 오가는 전령을 통해 이 먼 곳의 맵까지 직접 지배할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다.

르망을 비롯한 연구소의 마법사 열 명이 이번 후발대에 섞여온 이유였다.

"그럼 모두 수고들 하세요."

전쟁이 한창이지만 이미 강철두가 나선 이상 승패 예측은 무의미하다. 할 일은 다 했으니 김진태는 이제 수도로 복귀한다.

가는 길에 함께하는 건 이번에 사로잡은 쿠하루 왕국 마탑의 마법사들이다. 실력이 대단한 자들이 많아 고구려의 마법 전력에 큰 도움이 될 터다.

포박되진 않았지만 끌려가는 노예나 다름없는 그들을 보며 르망이 으르렁거렸다.

"허튼 생각 말고 고구려에 충성을 다해야 할 것이다. 대왕님의 큰 배려로 조만간 가족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니 최선을 다해라."

"예, 연구소장님."

고구려의 마법사 서열 1위 르망을 보며 고개 조아리는 마법사들이었다.

"그럼 진짜 갑니다."

김진태는 자신을 호위하는 친위대 열 명과 새롭게 연구소의 인력이 될 마법사들을 이끌고 맵 너머로 사라졌다.

"자자! 우리도 이만 일해 봅시다. 이토록 비옥한 땅을 언제까지 놀리겠습니까?"

"자 이동합시다!"

N2790 맵은 강이 없는 곳이 없어 맵 전역이 농사짓기 좋은 땅이니, 이 맵 하나에서 얻는 식량이 고구려 전체의 소출보다 더 많아질 것이다.

"흐흐, 시작해볼까?"

보급 장교로서, 신서울의 사또를 모시는 이방으로서 그의 행적은 화려하다.

허허벌판에 도시를 이룩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전문 분야.

<성벽 축성 인력 모집>

<퀘스트가 등록되었습니다.>

<양평 마을 확장 건설 인부 모집>

<퀘스트가 등록되었습니다.>

전문가의 손에 막대한 금액과 개경 성의 수많은 노동력이 있다. 시스템 창의 도움 없이도 신서울 건설의 일익을 담당했는데, 이제 퀘스트까지 공고할 수 있으니 동시다발적으로 일의 진행이 가능했다.

<인부 모집이 마감되었습니다.>

개경 성에서 건너온 수천의 주민들은 양평 마을의 기초적인 게시판 앞에서 퀘스트가 뜨자마자 앞다투어 수주했다.

"어엇, 놓쳤어."

"간나! 비키라우. 뭘 그리 욕심내네?"

금방 어지러워지는 질서에 안승우가 소리쳤다.

"다들 질서 지키세요! 일자리는 많습니다!"

"예, 시장님."

양평이 도시 구색을 갖추기 위한 퀘스트가 남발되었고, 주민들이 그것을 수주하며 노동력을 제공했다.

저녁이 되면 작업이 멈추고 일당이 자동으로 지급되었으니, 그야말로 혁신적인 행정인력의 감축이다.

수천의 인부를 안승우는 시스템창 하나로 부리며 양평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주변 수만 평의 땅에 동시다발적으로 도로가 깔리고 건물이 들어서고 있었다.

*

강철두는 느긋하게 이동했다.

강을 만날 때마다 땅의 정령 그라스의 도움을 받아 튼튼한 다리를 놓으며 쭉 직선으로 이동했다.

이석개는 혁명대를 이끌고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며 경로상의 적 진영을 공격했다.

그렇게 탈환한 마을엔 후방부대와 함께 도착한 여러 장인이 포함된 인력들이 마을을 보수한 뒤, 진정한 의미의 마을을 건설했다.

마을을 하나 만들 때마다 휘장 하나가 소모되었으나, 그만큼 고구려의 세력창 안에 복속된 영지가 늘어나 관리에 이로움이 많았다.

안진 마을을 시작으로 양구, 진천, 상전, 태하, 용락 마을이 차례로 개척마을로서 시스템적으로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구대철이 추가로 보낸 병력들이 마을의 방비와 재건을 위해 주둔했다.

철두의 뒤를 따라오는 포로들의 숫자는 최초 2만에서 차츰차츰 늘어나더니, 국경에 거의 다다른 지금에 이르러서는 2만 9천까지 되었다.

"대왕! 북쪽에 마을 두 곳이 있어 급습하였는데, 적들이 모두 퇴각한 뒤였습니다."

"대왕! 남쪽의 사정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마 전체퇴각 명령이 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보고하는 혁명대의 얼굴은 분통이 가득해 보였다.

그들로서는 침략해온 쿠하루 왕국군이 아무런 피해도 없이 퇴각하는 것이 영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도망쳐봐야 쿠하루 왕국이다. 내버려둬라."

"네, 대왕!"

적들이 전원 퇴각했다면 이제 N2790 맵은 온전히 고구려가 장악한 것이나 다름없다.

하나의 맵에 하나의 세력만이 존재할 때, 그 맵 전체를 세력하에 둘 수 있다. 세력창을 통해 맵 전체를 통제하에 놓게 되는 것이다.

"오늘 중으로 맵을 넘는다. 척후를 보내라."

"네, 대왕!"

혁명대는 그간 진군하는 방향에서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나가 수색하던 것을 멈추고 전방으로 내달렸다.

이미 맵 끄트머리에 거의 도달했기에 척후는 몇 시간 되지 않아 금방 돌아왔다.

"보고! N888 지역에 진입하자마자 너른 벌판이 존재하며, 적군이 진을 이루고 있습니다. 수는 1만 남짓으로 보입니다."

함께 보고를 듣던 이석개가 척후를 채근했다.

"구성은?"

"기사 차림의 병력이 다수, 중앙엔 귀족 차림의 사람들도 여럿 보였습니다. 여러 문양의 깃발이 존재했습니다."

쿠하루 왕국의 문장까지는 속속 알고 있지 못하고 그들의 글자도 모르는지라 척후가 알아 온 정보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적의 숫자가 1만이 넘고 그 구성이 귀족들이라면 호위로 이끌고 다니는 기사들만 해도 만만찮은지라, 이석개는 긴장하며 더 물었다.

"저들의 기세는 어떻더냐?"

"1킬로미터 지점까지 정찰하였으나 저들의 대응은 없었습니다."

전장에서 1킬로미터.

특히 신체 능력이 일반인의 범주를 뛰어넘는 기사들에게는 바로 앞에서 마주 보는 것이나 다름없는 거리다.

그 거리까지 적의 척후가 접근하는데 아무런 저항이나 경계도 없었다 하니, 이석개는 일단 안심이었다.

"적들이 협상을 위해 자리한 듯 보입니다."

"그렇겠지."

철두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고, 이석개는 전쟁이 이렇게 마무리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석개."

"넵! 대왕."

"쫄 것 없다."

"...죄송합니다. 못난 모습 보였습니다."

"후후, 돈이나 받으러 가보자고."

"네, 대왕!"

이석개는 새삼 고구려가 틀리지 않은 선택지였음에 안도했다. 개경 성을 전부 바쳐 고구려에 신속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직할령이 아니라 여러 도시들처럼 자치권을 인정받고 제후로서 귀부했다면....

'후순위로 밀려 쿠하루 왕국에 집어삼켜졌을 거다.'

그 뒤로 고구려가 다시 개경을 탈환한다 하더라도, 여러 인민들이 노예로 잡혀간 뒤였을 것이니, 만약을 가정해 생각해보면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다.

뿌연 막을 통과하자 시야가 휙 바뀌며 주변 일대가 드러났다. 조금 더 나아가자 풀이 듬성듬성 난 황량한 들판에 도열한 혁명대원들의 등이 보였다.

그들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고구려의 국기와 결사대 깃발을 든 지르골과 사토가 그 뒤를 따랐다.

철두는 혁명대 2천여 병력의 선두에 서서 적들을 보았다.

"...."

적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는 철두의 눈이 호선을 그린다. 바바리안의 예민한 감각이 적 부대를 하나의 덩어리로 따져 분위기를 가늠했다.

고요하고 비장하다.

철두의 등장에 적진에서 흰 깃발을 내건 전령 셋이 뛰어왔다.

다그닥, 다그닥.

갑옷 차림의 기사는 말에서 뛰어내려 공손히 무릎 꿇었다.

"쿠하루 왕국기사단 소속 도널이 고구려의 대왕을 뵙습니다."

철두가 비죽 웃으며 물었다.

"수장이 누구냐?"

"왕국의 재상 미첼 공작께서 국왕 전하로부터 모든 전권을 위임받고 와계시옵니다."

"재상이라...."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전권이 있다면 재상이 오거나 국왕이 오거나 매한가지다.

"오라 해라."

"저 뒤의 성에서 기다리고 계시니, 저를 따라오시지요."

서로 말이 통하게 해주는 아티팩트, 소통의 팔찌를 보급받은 혁명대는 이제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

기사 도날의 말에 그의 옆에서 노려보고 있던 혁명대 하나가 참지 못하고 검을 빼 들었다.

"간나새끼!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군을 대표해 전령으로 나설 정도면 유약한 인물은 아닌지라, 기사 도널은 혁명대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강철두를 올려다봤다.

"더 이상 무의미한 피를 흘릴 필요가 있겠사옵니까? 왕국은 고구려의 모든 제안을 수용할 의사가 있사옵니다."

"후후후, 재밌는 놈이군."

철두가 씩 웃으며 허리춤에 달린 수통 마개를 열었다.

336화 장사는 힘

촤르르륵.

수통에서 빠져나온 물이 철두의 손아귀에 잡히며 묠니르로 변했다.

"진정 전쟁으로 서로 피를 더 보아야겠습니까?"

"틀렸다, 이놈아."

철두는 이 용감하고 젊은 기사를 보며 웃었다.

"누가 전쟁을 한다더냐?"

"...?"

전쟁은 서로 피를 보게 되지만, 사냥으로 죽는 건 짐승뿐이다. 혹여 사나운 짐승과 대거리할 수도 있으나, 이 경우는 사냥도 아닌 일방적인 도축에 가까우니....

철두의 손에 피가 묻는다 하여도 그것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이다.

후우웅.

철두는 충분한 마력을 담아 망치를 휘둘렀다.

산을 보고 휘둘렀더니 산이 사라졌다는 전설이 있는 묠니르다.

꾸우우웅!

현실에 나서는 안 될 종류의 소리가 나며, 철두의 앞에 선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그 위에 밀집해있던 쿠하루 왕국의 군대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중앙에 밀집해있던 귀족들은 모조리 사라졌고, 그들을 호종하던 기사들도 마찬가지다.

주변 병력 2~3천은 그냥 사라졌고, 도열해 있던 자들도 충격파에 여기저기 밀려나고 나뒹굴었다.

후우우웅!

뒤이은 역풍이 고구려군 쪽으로 불어왔다.

"...!"

이석개를 위시한 모든 혁명대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군인데도 이리 두렵고 경이로운데 적들의 심정은 어떨까?

후두두두두.

흙과 나무 돌과 갑옷, 칼과 무기, 그리고 시체들.

그것들 가운데 살아남은 이들은 본능에 몸을 맡겼다.

"으아아아! 으아아!"

"크으으!"

본진이 증발하자 우익과 좌익의 병력들이 미친 듯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자연재해를 만난 듯, 그야말로 미친 듯이 도망쳤다.

그들이 버린 창칼에 도망치며 걸려 넘어지고 악다구니 쓰는 모습은 가관이었다.

철두는 묠니르를 쥔 채로 다시 물었다.

"너는 아직도 내가 전쟁을 위해 온 것으로 보이더냐?"

"...."

전령으로 온 기사는 의연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몸을 덜덜 떨었다.

"안내해라."

"예에?"

얼빠진 대꾸에 철두가 턱짓으로 전방을 가리켰다.

사라진 쿠하루 병력들 뒤로 작은 성이 보인다.

국경을 방비하는 거점 정도의 작은 요새였다.

앞을 가로막는 건방진 군대 따위는 이제 없다.

남은 건 시체와 기사들이 죽고 남긴 전리품, 신음하는 부상자들뿐이었다.

"석개."

"예, 대왕!"

"길을 터라."

"예에!"

대답하는 이석개의 음성에 힘이 넘쳤다.

친구와 싸운 뒤에 아빠를 불러온 아이의 심정이 이러할까?

개경 성의, 아니, 이제 고구려의 국민이 된 이들에게 강철두는 아버지이자 든든한 뒷배다.

"대왕님 행차시다! 길을 열어라!"

"예, 장군!"

혁명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아직도 얼쩡거리는 적군을 흩었다.

"...."

기사 도널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런 그의 곁을 강철두가 지나쳐 걸었다.

그의 시선은 더 이상 자신에게 있지 않았다.

"흐흐, 비켜라. 멍청이."

강철두의 뒤를 따르는 두 명의 호위 중 하나.

지르골이 도널을 밀치며 지나갔다.

바닥에 철푸덕 엎어진 도널은 이게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어안이 벙벙했다. 너무나 충격적이라 정상적인 판단이 잘 안될 정도였다.

"이 새끼 갑옷 벗기고 묶으라우!"

퍼억, 퍽!

"으윽."

전쟁 중의 전령으로서 비무장에 하얀 깃대 하나 들고 온 도널을 혁명대 대여섯이 달려들어 구타하고 갑옷을 뜯어내다시피 벗겼다.

정신을 차려보니 도널은 밀집한 포로 행렬 사이에 던져진 채였다.

*

쿠하루 국경의 작은 성.

왕국의 재상이자 제후이며, 왕의 장인어른인 공작 미첼은 종전 협상을 위해 모든 권한을 가지고 이 자리에 나왔다.

미첼 공작은 연회 준비가 한창인 홀을 보았다.

커다란 테이블에 놓인 의자는 단 두 개.

조금 있으면 저 자리에서 고구려의 왕과 대면해야 한다.

'얼마를 내어줘야 할지....'

고구려의 왕을 생각하면 절로 한숨이 나온다. 지금의 고구려가 어떠한지 누구보다 잘 아는 게 미첼 공작이다.

제국의 백작령 나트롱 가문이 고구려에 귀의했고, 아미르 왕가가 제후국이 되었다.

엄청난 기세로 성장 중인 이 정복국가의 중심에 고구려왕 강철두가 있다.

그 당사자가 이 전쟁에 나섰다.

'고구려가 참전하는 순간 포기했어야 했다.'

뒤늦은 후회다.

나름 계산은 있었다.

고구려가 참전하기 전 제대로 한탕 해 최대한 많은 야인들을 노예로 끌고 온다.

그 뒤 N2790 맵은 그저 줘버리는 거다.

쿠하루 왕국의 목적은 노예.

이 간나 야인들은 정말이지 지독한 생존력이 있어, 어디로 끌고 가 노역을 시켜도 군말 없이 잘 따랐다.

특히나 농장과 광산에서의 노동력이 탁월했기에 욕심을 내고 말았다.

"전하! 고구려의 왕이 국경을 넘었습니다."

"으음. 알겠다."

곧 고구려의 왕과 대면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실수가 없도록 하여라."

"네, 전하!"

"황제를 배알하는 것처럼 해야 할 것이다. 아니!"

미첼 공작이 굳은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그냥 그가 황제라고 생각하고 행동하여라."

"예에, 전하."

함께 따라온 왕궁의 사용인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특히 요리에 신경 써야 한다."

"예에, 전하."

듣기로 고구려왕은 대단한 대식가이자 미식가로 소문났다. 그의 혀를 즐겁게 하기 위해 왕궁 최고의 요리사들을 오십이나 데려왔다.

쿠우우우웅.

"허억!"

"꺄아아악!"

거대한 굉음과 함께 성이 흔들렸다.

중심을 잡지 못한 사람들이 넘어지고, 테이블들이 춤을 췄다. 벽에 걸린 그림이 떨어지고 벽난로의 불꽃이 튀었다.

"이, 이게 무슨."

지진은 오래가지 않아 멈췄고, 미첼 공작은 서둘러 성 밖으로 향했다.

서둘러 나가는 와중에 경계 서던 기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뛰어 들어오고 있었다.

"저은하!"

"대체 무슨 일인가?"

"제후군이 궤멸했사옵니다."

"뭣이?"

미첼 공작이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

작은 성은 성들이 자리 잡은 위치가 대부분 그러하듯 주변보다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밖으로 나가자 처참한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 이럴 수가!"

급하게 끌어모은 동부의 영지군들이 주둔해있던 땅이 헤집어지고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생존한 병력이 적지 않았으나, 불을 보고 기겁해 도망치는 벌레들처럼 사방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개중에 미첼이 위치한 성으로 오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병사들은 좌우로 미친 듯이 퍼져 도망치고 있다.

와중에 야인들의 군대가 양을 치듯 벌거벗은 포로들을 몰아 성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럴 수야 없다. 이럴 수는...."

미첼 공작의 동공이 쉴 새 없이 흔들렸다.

받아들일 수 없는 사태에 현실을 부정하고만 싶었다.

두두두두두.

야인 군대가 올라오고 있다.

아니, 이제 고구려군이라 불러야 할까?

"전하! 자리를 피하십시오."

"성으로 가셔야 합니다."

호위 기사들의 말에 미첼 공작이 긴 숨을 뱉었다.

"성으로 피한들 무슨 소용이더냐?"

새카맣게 몰려오는 야인들이 문제가 아니다.

멀리서 보기에도 느껴지는 존재감의 사내.

고구려의 왕이 그 유명한 성물 묠니르를 들고 오고 있는데 말이다.

"다들 무기를 버려라."

"하, 하오나. 전하!"

"칼이 있다 한들 휘둘러볼 상대가 아니다."

휘둘러 본들 닿을 수도 없다.

"어서!"

"명을 따릅니다."

기사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검을 바닥에 던졌다.

곧 언덕길을 따라 혁명대가 치고 올라왔다.

전원 말을 탄 그들은 급할 것 없이 느긋하게 진군했는데 그 모습이 꼭 승리한 군대의 개선식 같았다.

"젠장, 야인들 입은 갑옷을 봐."

"왕국 정규군 갑옷이군."

"시발 놈들."

미첼의 주변으로 늘어선 기사 20명이 참담한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말을 타고 올라온 야인들은 양옆으로 벌어지며 길 중간을 텄는데, 그 길을 따라 뿔이 돋아난 말을 탄 이가 호위 둘을 대동하고 천천히 올라왔다.

어느새 혁명대의 선두로 나선 강철두가 소나따를 멈춰 세운 것은 미첼 공작과 불과 3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그대가 미첼인가?"

미첼 공작은 흠칫 놀랐고, 그의 호위들도 모욕감이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고구려의 기세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야인들을 규합한 왕이 역사 깊은 쿠하루 왕국의 재상에게 대하는 태도로는 지나치게 무례했다.

"그렇습니다. 고구려의 왕이시여."

철두는 여전히 말 위에 올라탄 채였기에 미첼 공작은 고개를 꺾어 위를 올려다봐야 했다.

"머리통이 깨지고 싶은가 보군."

"...예?"

미첼 공작은 이런 무례한 외교를 해본 적이 없기에 그답지 않게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꿇어라."

"...."

미첼 공작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당사자인 그가 초인적인 인내로 참아내는데, 그의 호위들은 그렇지 못했다.

"타국의 왕이라 하나, 이분도 왕국의 재상이시오! 아무리 전쟁 후를 논하기 위한 자리이긴 하나, 외교적 예의는...."

콰직!

철두가 그 말을 다 들어주지 않고 투척 도끼를 날려버렸다.

"학습 능력이 없는 놈들이군."

"...."

"외교라니."

철두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 모습에 지르골과 사토도 말에서 내려 철두의 뒤에 섰다.

강철두가 미첼의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

"장사를 하러 왔다. 네놈에게 지불 능력이 있느냐?"

"...있습니다."

미첼 공작의 말에 철두가 히죽 웃었다.

"다행히 왕궁까지 갈 필요는 없겠군."

"...!"

철두의 그 말에 미첼 공작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강철두가 이대로 쿠하루 왕궁으로 쳐들어간다?

'막아내지 못한다.'

왕궁의 중앙군이 모두 저기 뒤에 포로로 잡혀 있는데 누가 있어 왕궁을 지킨단 말인가?

왕국의 제일가는 소드마스터들?

'아니 된다.'

아미르 왕국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상기해야 한다.

그리고 승리한 고구려가 무엇을 요구했는지도.

미첼 공작이 무릎 꿇었다.

"헉, 전하."

"이익!"

그 모습에 기사들이 분노한 얼굴이 되었다.

"지르골."

"흐흐, 예! 대왕!"

지르골이 날뛰니 기사들이 금방 제압되었다.

여덟이 순식간에 죽었고, 나머지는 폭력에 저만치 날아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한번은 내가 누군지 몰라 덤볐으니, 봐 줄 수 있다.

허나, 두 번이나 저리 으르렁 짖으려 하니, 더 참을 이유가 없다.

할아버지 강용철과의 약속도 한 번의 관대함일 뿐이다.

"살아남은 포로들을 주겠다. 몸값이 얼마냐?"

"...."

거래의 국룰은 선제시다.

미첼이 넙죽 다시 한번 고개를 조아렸다.

"부디 원하는 바를 말씀해주신다면 모든 것을 준비하겠습니다."

"흐음."

철두가 고개를 돌려 이석개를 찾았다.

"석개."

"네, 대왕!"

"가지고 싶은 것 있나?"

"쿠하루 왕국에 수많은 인민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들의 자유이옵니다."

"다른 건?"

"소장이 원하는 건 그것이 전부입니다."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북한 출신이라 그런가 소박하기 그지없다.

"미첼."

"예에, 고구려의 왕이시여."

"모든 포로를 데려와라."

"고구려의 너그러운 처사에 감사하옵니다."

미첼은 속으로 안도했다.

포로들의 맞교환으로 잘 마무리될 듯싶었다.

"그리고 왕국에 존재하는 모든 영약과 스탯석을 바쳐라."

"...그러겠나이다."

크다.

큰 지출이다.

허나, 왕가가 보존될 수 있다면 이 또한 용인 가능하다.

"그리고 왕국이든 영지든 모든 마법사들을 데려와라."

"...!"

마법사는 고급 인력이다.

이는 절대....

"안 주면 직접 약탈하러 가겠다."

"그, 그것만은!"

미첼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국민을. 그것도 엘리트 인재인 마법사들을 포로로 넘길 것을 결국 약속했다.

"또, 매년 왕국 소출의 절반을 바쳐라."

"...!"

"그리고...."

"...?"

철두의 요구는 그칠 줄 몰랐고, 미첼 공작의 얼굴은 점점 더 하얗게 질려갔다.

337화 왕자와 공주

2만이 훌쩍 넘는 포로를 남겨두고 고구려군이 회군했다. 맵의 경계를 지나 N2790 맵으로 복귀하자, 강철두는 대로의 중간 언덕배기를 가리켰다.

"저기에 성을 쌓아라."

철두의 손가락을 따라 이석개의 시선이 구릉지대로 향했다.

맵의 경계와 불과 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다.

"저 구릉에서부터 시작해 저쪽 강을 방어선으로 하는 성을 구축하면 되겠사옵니까?"

"아니."

철두는 아직도 소극적인 이 북한 출신 장교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쿠하루 왕국을 약탈하기 위한 전초기지다."

"...."

"저들이 얌전히 매년 공물을 보내오면 굳이 필요가 없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이 성에 주둔하며 수시로 약탈하라."

"네, 대왕!"

철두는 지시를 내리곤 검은 비룡 꾸이를 소환했다.

"놈들이 거래를 잘 지키는지 지켜본 뒤 보고해라."

"알겠사옵니다. 대왕!"

강철두가 할 일은 끝났다.

그가 훌쩍 떠나버리자 이석개는 일순 풀리는 긴장감에 휘청거렸다.

"장군!"

혁명대 부대장이 된 리종성이 다급히 그를 부축했다.

"후우, 종성이."

"예, 장군."

"쿠하루 놈들이 재침하지는 않겠지?"

"설마 그러기야 하겠습니까?"

강철두가 보여준 모습이 있는데 그들이 또 그리할까 싶기는 했지만, 전쟁이란 모를 일이다.

"일단 진을 꾸리시지요."

"그렇게 해라."

맵의 서쪽 끝.

혁명대가 부지런히 나무를 베어 군진을 꾸렸다.

쿠하루 왕국에서 패전에 대한 보상과 노예로 잡아간 인민을 보내오는 동안은 주둔해야 할 테니, 꽤 긴 기간 머무르게 될 터다.

"내일부터 구역에 혹시 남아있을지 모를 쿠하루 왕국의 탈영병과 몬스터들을 소탕한다."

"네, 장군. 그런데 말입니다."

리종성이 조금 불안한 듯 쿠하루 왕국 방향을 향해 힐끗거렸다.

"아직 아무것도 받은 게 없는데 이렇게 포로들을 다 줘버려도 되는 겁네까?"

"으음."

이석개도 그 부분이 의아했으나.

"주라는데 주는 게 맞겠지."

"헙, 그럽습네다."

강철두가 명령하는데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생각해 보면 옳은 결정이지. 그 많은 놈들을 볼모로 잡아둔들 무슨 소용인가? 밥만 축내겠지."

"그것도 맞는 말입네다."

혁명대의 대장과 부대장이 된 그들은 쿠하루 왕국이 다시 멍청한 선택만 하지 않기를 바랐다.

*

쿠하루 국왕의 알현실.

쾅!

"재상, 다시 한번 말해보게나."

"...송구하옵게도, 받아들이는 게 맞습니다."

"아깝긴 하지만 노예들이야 돌려줄 수 있지. 패전에 대한 책임으로 그 많은 재화를 내어놓을 수도 있네."

쿠하루 국왕의 볼살이 푸드드 떨렸다.

"매년 공물을 바쳐? 그것도 절반을? 허! 그래, 굴욕적이지만 그것도 참아 넘겨보지."

"...."

"마탑의 마법사들을 바치라?"

"저언하."

"그딴 짓을 했다간 왕가가 고구려가 아니라 반역으로 무너질 것이오!"

그때 재상의 옆에 같이 엎드려 있던 비토 후작이 성토했다.

"저언하! 반란이 낫사옵니다."

"뭐라? 제정신이오?"

"고구려는 제국에 도전하는 정복 왕국입니다. 또한 그자는 눈 한 번 깜빡할 새에 우리 왕국을 멸할 수도, 살릴 수도 있으니 일단은 무조건 따르는 게 맞사옵니다."

"허, 경들은 진정 미친 것인가?"

미첼 공작과 비토 후작은 무조건 국왕을 설득해내야 했다.

"미친 것은 고구려의 왕입니다. 절대 그자를 상대하려 하지 마시옵소서!"

"맞사옵니다! 그저 재난이 지나간 것이라 여기며 눈을 감으소서."

"허어."

쿠하루 국왕은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괜히 노예에 눈독을 들이다가 있는 노예까지 다 내어주게 생겼다.

"고구려 왕의 요구는 아까 말한 것이 전부요?"

"그렇사옵니다."

"다른 세부적인 사항은 없소?"

"한 달의 약속을 받아냈사옵니다."

"허, 고작 한 달?"

"그것도 소신이 간곡히 간청해 늘린 것이옵니다. 처음엔 열흘을 이야기하였사옵니다."

"...."

국왕은 참담함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경들은 고구려의 요구에 응하면서도 최대한 손실을 줄이는 방법을 생각해 보...."

"아니 되옵니다, 전하!"

"...내 말도 다 마치지 않았소."

"절대 아니 되옵니다."

"무엇이 말인가?"

"더 해주었으면 주었지, 절대 빼지 마시옵소서."

"...."

국왕이 언짢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경들은 쿠하루의 귀족인가, 고구려의 귀족인가?"

"고구려의 왕이 보낸 공물에 만족하지 못하고 아국의 영토에 발을 들이게 되면 재앙이나 다름없사옵니다."

"맞사옵니다. 쿠하루를 위해서는 그가 요구한 대로 모든 노예들을 빠짐없이 돌려주어야 합니다."

감추거나 뺄 수도 없다.

이미 쿠하루 왕국에 잡혀 온 노예들만 수만인데, 그들의 입을 어찌 하나하나 막을 수 있겠는가?

'함께 일하던 동무 누구누구는 되돌아오지 못했다.'라고 나불거리는 순간 그 미친 왕이 쿠하루 왕국에 강림할 것이다.

"또한 재물의 양도 과하게 주소서."

"맞사옵니다. 절대 그자가 국경을 넘게 두지 마시옵소서."

"허어."

국왕은 이제 어이없어 실소가 나올 지경이었다.

"좋다. 경들의 말을 모두 들어주겠다. 허나, 마법사들을 내 손으로 갖다 바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쿠하루 왕국의 모든 마법사들을 해방하겠다. 지금부터 쿠하루 왕국에는 마법사가 없다."

"저어언하아! 아니 되옵니다."

"그마안! 왕가가 멸문해도 이 결정은 바뀌지 않는다."

"흐윽, 저언하아."

"결정을 번복해 주시옵소서."

미첼 공작과 비토 후작의 청에도 국왕의 결정은 바뀌지 않았고, 두 제후는 이 결정이 고구려왕의 심기를 거스를까 전전긍긍했다.

*

N2790 맵의 동쪽 끝에 위치한 주도 양평.

처음 이곳에 진입했을 때는 허허벌판에 정비되지 않은 가도뿐이었는데, 어느새 뚝딱 마을이 지어져 있었다.

더욱이 넓은 지역에 성벽 공사가 진행 중이고, 여기저기 동시다발적으로 집들이 지어지고 있어 주변 어딜 둘러봐도 공사장이었다.

그만큼 투입된 사람들도 많아 위에서 내려다보니 먹이에 달라붙은 새카만 개미 떼를 보는듯했다.

철두는 그 공사장의 중심부.

멀끔하게 지어진 마을회관 앞에 착륙했다.

"대왕님의 승전을 축하합니다!"

우렁차게 소리치는 남자를 보며 철두의 눈썹이 휘어졌다.

"오, 안 대위."

"양평시장! 안승우!"

이제 군인이 아닌, 행정관이지만 반사적으로 관등성명을 뱉었다.

"후후, 어떠냐?"

"하하, 다 좋습니다."

"성은 언제 완공될 것 같으냐?"

"못해도 두 달은 걸릴 것입니다."

"길다. 한 달 만에 해라."

"헛, 하지만 공정이라는 게 순서와 절차가 있사온데."

"돈이 부족하면 돈을 더 쓰고, 자원이 부족하면 자원을 더 주마."

"헛, 하겠습니다."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데 못할 이유도 없다.

노동력이야 남아도는 게 개경 성이다.

"후후, 좋다. 진태한테 일러두마."

"아이고!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한 달 뒤에 다시 오마."

"알겠습니다."

강철두가 이곳에 계속 머무를 이유가 없다.

아직 지지부진한 전장은 수없이 많고, 단숨에 판세를 뒤집기에 강철두만 한 패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수고해라."

"넵, 대왕!"

철두는 그대로 동쪽 경계를 넘어 이동마법진을 통해 아이언헤드 성으로 돌아왔다.

양평성과 아이언헤드 성 모두 이동마법진 바로 옆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마법진 이용 주화 문제만 아니라면 바로 이웃한 성이나 다름없다.

후우웅.

"헉, 대왕이시다! 얼른 정보청에 알려!"

마법진에 나타난 철두가 검은 비룡을 타고 날아올라, 아이언헤드 성의 꼭대기에 착륙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5분.

그사이 마중 나와 있던 진태가 철두를 반갑게 맞이했다.

"대왕!"

"진태!"

"다 끝났어?"

"끝냈다."

"막 왕궁 부수고 하진 않았지?"

"후후, 내가 애냐? 겁만 줬다."

"하하, 잘했어."

지금 고구려로서는 쿠하루 왕국을 직접 통치하기가 어렵다. 개경성과 그 맵만 해도 고구려가 소화하기 벅차다.

이미 피폐해져 있기에 N2790 지역을 부흥시키는 게 우선이다. 그들부터 고구려에 동화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웃에 쿠하루 같은 적을 두고 있으면 오히려 결속에 좋다.

쿠하루 왕국을 직접 통치하여 세금을 걷는 것보다, 당분간은 간접적인 위압으로 그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게 낫다.

"안 대위 지원이나 좀 해줘라."

"무슨 지원? 이미 충분한데."

"한 달 뒤에 가기로 했다. 그때까지 정비 좀 마치게 해줘라."

"흐으음. 그럼 네가 전장 몇 개는 정리 해줘야 해. 그래야 인력을 좀 빼지."

"걱정 마라, 진태. 내 부족인데 내가 안 챙길까?"

"흐흐, 알겠다."

"난 그럼 아엘 보러 간다."

"왕비님은 지금 기도원에 있다."

"일석이조군."

철두가 웃으며 꼭대기에서 뛰어내렸다.

쿠웅.

"...계단으로 좀 다니지."

김진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의 덩치 큰 친구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았다.

대왕으로서의 체통은 모르겠으나 위엄 자체는 넘쳐났으니....

"읏샤, 그럼 한 달 철두 사용권 돌아왔네. 흐흐."

김진태는 한 달 동안 철두를 어디로 파견 보낼까 궁리하며 전장 판세를 되짚기 시작했다.

*

아리아 여신의 신전.

대사제 강용철은 기도원에 앉아 묵묵히 기도했다.

"우리 증손자 무탈하게 자라가, 쑥쑥 크게 해 주이소."

기도원이 훤히 보이는 나무 정자 위에선 아르엘라가 조금 부풀어 오른 배를 만지며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건강하게 자라렴...."

배를 쓰다듬는 손에 걱정과 기대, 설렘이 가득하다.

그녀의 얼굴은 미소와 처연함이 함께 묻어났는데, 이제는 정말 자신의 운명을 알 길이 없어서다.

'세계수는....'

요정이 요정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정령과 소통할 수 있어서다. 정령 없는 요정은 진정한 요정이라 할 수 없다.

이대로 수 대만 지나도, 노바의 요정은 더는 요정이 아닌 귀 큰 인간이 되고 말 터다.

노바와 정령계는 다시 이어져야 한다.

요정족의 미래를 위해서도, 배 속의 아이를 위해서다.

그 세계수를 싹 틔울 의무를 지닌 공주는 선택의 순간이 오면 망설이지 않으리라.

"뭘 그리 비장하나?"

"음? 언제 왔어?"

"후후, 방금 왔다."

철두는 오자마자 아르엘라를 안아주었다.

굵은 그의 손이 아르엘라의 배로 향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더 큰 것 같군."

"며칠 지났다고 더 컸어."

"후후후."

철두의 입매가 귀에 걸렸다.

철없던 바바리안은 어느새 예비 아버지가 되어버렸다.

"할배는 왜 저깄나?"

"기도 중이시잖아. 방해하지 마."

"후후후."

철두는 무슨 말을 해도 웃었다.

"아들이겠지?"

"아들이면 어떻고 딸이면 어때."

"나 같은 전사가 되겠지."

"요정일 수도 있잖아."

"...!"

강철두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다.

"요, 요정?"

"아빠가 바바리안이고 엄마가 요정인데...."

"...."

아르엘라도 말수를 줄였다.

바바리안과 요정이 결혼한 경우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으니, 그들이 첫 번째 경우나 다름없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때 기도를 마친 강용철이 인자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허허! 거기에 할배는 인간인데, 요정이면 어떻고 바바리안이면 어떻노? 섞이가 인간이 난다 캐도 건강하게만 나면 된다."

"...."

"...."

강철두는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계속 낳다 보면 바바리안 하나쯤은...."

퍼억!

338화 대국

N4414 지역.

여느 시작의 맵이 그러하듯 농사짓기 좋은 땅을 가진 이곳은 중국인 개척마을 상하이가 위치한 곳이다.

'고구려에 귀의하든가, 정복당하든가 택하라.'

상하이는 고구려의 정복 야욕에 콧방귀를 뀌었다.

"대국이 어찌 소국을 섬기랴!"

상하이 시장으로 취임한 왕웨이는 사신으로 온 전령을 베진 않았으나, 일갈하고 내쫓았다.

상하이만 해도 인구 5만의 대도시였으며, 수십 개의 크고 작은 개척마을을 모두 합치면 인구가 40만이 넘었다.

이들은 독자적인 국가로 발전하는 대신 제국의 신하 되기를 자처했는데, 왕웨이는 처세술과 운이 나쁘지 않아 제국의 귀족이 될 수 있었다.

제국의 상징물에 직접 충성을 맹세한 것은 아니나, 이웃한 제국령인 바트롬 후작령의 가신이 된 것이다.

왕웨이는 충성을 맹세하고 바트롬 가문의 봉신이 되었으며, 후작령 산하의 상하이 남작으로 봉해졌다.

바트롬 후작의 전폭적인 지원 덕에 상하이는 보다 더 빠르게 발전했으며, 군사력도 나날이 증가했다.

고구려의 왕이 성물의 주인이라고 하나, 그들의 정점에 이른 황제 또한 성물의 주인이시다.

구태여 이제 와 한국 출신의 애송이가 세운 나라에 숙이고 들어갈 이유가 없다.

"각하! 고구려군이 진군해오고 있습니다!"

"허, 결국 욕심을 내는군. 규모는 어떠하냐?"

"2천의 군세이옵니다!"

"당장 리자오 장군을 불러라!"

생각보다 많은 수에 깜짝 놀랐으나, 왕웨이는 상하이 최고의 무사 리자오라면 막아낼 수 있다 여겼다.

정복과 지배를 위해서는 많은 수의 병력이 필요하지만, 전쟁의 승패에 영향을 미치는 건 고수의 유무다.

저 소국에서도 영웅이 나는데, 대국에서 어찌 영웅호걸 하나 없으리.

소드마스터 리자오 장군과 그 정예부대라면 충분히 방어해낼 만하다.

"바트룸 후작령에도 전령을 보내라!"

"예, 각하!"

상하이 남작 왕웨이는 혹시 모를 대비책까지 세우고, 경과를 지켜보았다.

N4414 지역에는 이동마법진이 없다.

가까운 마법진이 남쪽에 붙은 W274 지역에 있었기에 적들의 침입은 남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막아라! 영토 밖으로 적들을 쫓아라!"

맵의 경계를 두고, 한쪽은 한파가 부는 겨울 맵이고, 한쪽은 아직 따듯한 가을인 노말 맵이다.

노말 맵의 남쪽 요새를 지키는 상하이 군과 그것을 뺏으려는 고구려군의 싸움이었다.

겨울 맵은 주둔하기 녹록잖은 환경이었기에, 상하이 지역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저 요새를 점령해야지만 안전한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게 된다.

가장 어려운 이 전장에 나선 부대는 항왜로 이뤄진 일본부대.

료 막부가 무너지며 함께 주저앉아버린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이뤄진 이 부대의 대장 시미켄은 부러 이 전장을 골랐다.

가장 어렵기에 성공했을 때의 그 공 또한 크다.

하지만 지형이 너무 나쁘고, 적들의 기세 또한 만만찮다.

"대장! 이대로는 안 됩니다."

"알고 있다. 쿄진."

"지금은 공을 탐할 때가 아닙니다. 이러다간 일본 부대가 전멸하고 맙니다."

처음 시미켄을 따라 참전한 일본 부대의 숫자는 2천.

그동안 전투로 꾸준히 사망자가 나오며 손실이 있었으나, 충원되는 전사들도 있어 그 수는 2천 5백까지로 늘었다.

그만큼 점령당하고 버려진 사쿠라시티의 일본인들이 고구려에 복속되길 희망하며 아이언헤드 성으로 건너오고 있는 것이다.

다국적 다민족 국가인 고구려에서 신분 상승의 수단으로 널리 열려있는 것은 전장에서의 공훈.

상위 노비스인 일본인들이 꾸준히 입대했고, 전부 시미켄의 일본부대로 보내졌다.

"공은 언제든 세울 기회가 있지만, 부대가 없으면 기회마저도 잡지 못합니다. 대장!"

"쿄진, 네 말이 맞다."

시미켄은 단번에 일본인들의 위상을 되찾기 위한 공훈 집착을 버렸다. 혼자 먹다 탈이 날 바에야 나누는 게 낫다.

"증원 요청을 해라."

"네, 대장!"

상하이 구역의 진군이 지지부진하는 사이, 다른 전장을 빨리 정리한 부대가 당도했는데 오준환의 특작대였다.

그들의 수는 고작 800명 정도지만, 거의 대부분이 랭커로 이뤄진 정예부대였다.

료 막부와 고구려가 전쟁으로 서로 창칼을 맞댄 게 2년이다. 료 막부의 3인자 시미켄과 고구려의 대장 중 하나인 오준환도 몇 번이나 서로 싸운 적이 있기에 썩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음, 어쨌든 이제는 한식구가 됐으니 힘을 합쳐봅시다."

"그렇게 말해주니 감사합니다. 오준환 상."

특작대와 일본대의 병력을 합치니 3천이 훌쩍 넘었으나, 부대를 합쳐 공동작전을 펼치는 건 오준환이 반대했다.

"아직 부대원들 간에 감정이 좋지 못한 이들도 많으니, 공동전선보다는 독자적인 작전 수행이 낫겠소. 우리 부대는 적의 후방을 교란토록 하겠소."

"그럼 이 작전은 어떻습니까?"

그간 상하이군과 대치한 지 열흘이 넘는 시미켄이 큰 작전을 짰다.

"저들은 경계를 넘어 군진을 꾸리기 무섭게 이를 습격하여 내쫓으려 드니, 이를 이용해 적의 부대를 유인해 섬멸하는 건 어떤지요?"

"좋은 생각이오."

시미켄의 일본대가 맵의 경계를 넘어, 군진을 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넓게 퍼진 적의 척후에 금방 발각당했고, 곧 적의 기사단이 기습에 나섰다.

그것을 오준환의 특작대가 요격, 승리하며 일본대는 전투에 나선 이후 처음으로 N4414 지역의 따뜻한 진영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

"후방의 척후들을 제거해 적들의 소식을 교란하겠소. 일본대는 교두보를 마련하시오."

"걱정 마십시오."

"아직 공성전은 무리이나, 곧 제임스 대장의 별동대가 합류할 겁니다. 그들이 오는 대로 적 요새를 공격하면 함락은 금방이오."

"알겠습니다."

특작대가 상하이 지역의 남쪽을 종횡무진하며 척후와 전령의 사냥에 나섰다. 고구려의 부대마다 그리핀 라이더가 적게는 셋에서 많게는 열까지도 포함되어있어 척후에 있어서는 유리한 입장이었다.

일본대가 요새 인근까지 행군해 군영을 세웠다.

따뜻한 지역에 드디어 군영을 세우고 나니, 마법진이 있는 겨울 맵에서 시작된 보급과 충원이 어렵지 않게 되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제임스가 이끄는 별동대

곧 제임스가 이끄는 별동대 2500명과 김춘배의 마적대 2000명까지 합류했다.

"미리 듣기로 별동대가 합류할 것은 알았는데, 어떻게 마적대까지 왔습니까?"

"하하, 대왕님께서 복귀하셨기에 여유가 생겼소."

김춘배가 호탕하게 웃으며 풀이 죽은 얼굴의 시미켄을 위로했다.

"재상 각하께서 이 전장을 본보기로 삼으려 하시니, 여기 4부대가 나섰다곤 하나, 그 공을 나눈다 해도 적지 않을 거요."

"...알겠소."

본보기를 보인다 함은 아직도 고구려에 복속을 청하지 않은 지구 출신의 개척도시들과 마을에 보내는 메시지다.

그 첫 번째 본보기가 되었던 사쿠라시티 출신인 시미켄은 과거의 끔찍했던 기억이 떠올라 표정이 좋지 못했으나, 김춘배와 제임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들이 같은 지구 출신에 이웃한 중국인들이긴 하나, 이미 제국의 귀족이 되었소."

"제국이라는 든든한 뒷배를 둔 이들을 제대로 굴복시키지 못하면, 아직 눈치 보는 지구의 다른 도시들도 용기를 얻고 대항하려 할 겁니다."

"상하이는 물론, 그 상위 가문인 바트롬 후작령까지 진군하여 본보기를 보이라는 재상 각하의 명이셨소."

고구려 중앙정부에서 내려온 명령이다.

상하이는 물론 그들의 뒷배인 바트롬 후작령까지가 목적.

"일이 그리 커지면 이 병력으로 가능하겠소?"

"흐흐흐."

"...?"

시미켄의 말에 김춘배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제임스가 보다못해 한마디 거들었다.

"곧 대왕님께서 오신다. 그전에 우리가 할 일은 보급로의 완성이다."

"보급로?"

시미켄은 점점 전장이 알 수 없게 흐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왕 강철두의 위력이야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시미켄이다.

대왕이 직접 친정하는 이상 이 전쟁은 이긴 것이나 다름없다. 추가로 투입된 별동대와 마적대가 설명하는 전략도 승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승리는 기정사실로 정해버렸고, 전후처리에 대한 병력 운용으로 바뀌었다.

"대왕님 오시기 전에 저 요새는 먹어야지."

"하하, 내일 바로 진군합시다."

자신감 넘치는 그들의 말에 시미켄이 만류했다.

"요새를 지키고 있는 장수가 리자오요. 하물며 공성 장비도 턱없이 부족하니, 공성전은 무리요."

"리자오든 리자몽이든 괜찮아. 걱정 마. 무리데스 노노."

제임스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설명했다.

"별동대와 특작대, 마적대요. 소드마스터만 스물은 넘으니 걱정 마시오."

"...하지만 저 성은 어찌 넘을 요량입니까?"

"고구려는 소드마스터가 되면 그리핀을 하사받소."

스물이 넘는 소드마스터가 그리핀을 타고 진격한다.

성벽이 아무렴 높아 보았자 하늘에 닿을까?

작전회의는 끝이 났고,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오준환의 특작대가 합류하며 정말 23기의 그리핀이 날아올랐다.

"진격을 준비하라!"

시미켄은 병력을 통솔하면서도 멀어지는 그리핀을 부럽게 보았다.

그는 소드마스터였으나, 아직 그리핀을 하사받진 못했다.

*

상하이 본성.

"각하! 리자오 장군이 전사했습니다! 또한 테무 요새가 함락당했습니다."

"뭣이!"

왕웨이 남작이 분노해 소리쳤다.

"허, 고구려 놈들이 작정을 했군."

리자오 장군은 상하이에서 다섯 손에 꼽히는 고수다.

"지금 당장 사방장군을 모두 모아라!"

"예, 각하!"

리자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장수가 넷이나 더 있다. 상하이의 자랑스런 고수들이지만, 왕웨이의 얼굴에 근심이 사라진 건 이들 때문이 아니었다.

"상하이 남작께서는 너무 심려치 마시오."

"아유, 잔슨 선생께서 계신데 어찌 마음에 불안이 있겠습니까?"

비트롬 후작성 최강의 무력 집단 비트 기사단의 단장 잔슨 빌리네오 남작.

무려 위대한 검사인 그가 여기 있는 한 소드마스터들이 아무렴 많아 봐야 어른 앞의 아이들일 뿐이다.

'빌어먹을 놈. 나가서 놈들을 처치 좀 하지, 꿈쩍도 않으려는군.'

왕웨이는 상하이 본성을 벗어날 기미가 없는 잔슨을 보며 애가 탔지만, 얼굴은 방실방실 웃음이 가득했다.

"선생만 믿고 있습니다. 놈들이 예까지 진군하느라 상하이 영민들이 다칠 수도 있으니 잠시 피난토록 해야겠습니다."

"허허, 그러시구려."

빌어먹을 새끼.

제 놈이 나서서 고구려 놈들을 조져주고 오면 좀 좋으련만, 꿈적도 하지 않는다.

'귀족 새끼들이란.'

제 한 몸의 평안과 귀찮음을 두고 평민 수만 명의 수고로움을 저울에 매달아도 제 안위만 돌보는 자들이 귀족이다.

"하하하, 내 잔슨 선생만 믿고 두 발 쭉 뻗고 잠들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렴요."

"하하하."

"하하하."

*

N4414 맵의 최남단.

테무 요새를 점령한 고구려군은 더 이상의 진군도, 산발적인 게릴라도 없었다. 심지어 척후조차 내돌리지 않고 요새에 틀어박혔다.

특작대, 별동대, 마적대, 일본대.

4개 부대가 집결해 8천의 대군을 이뤘다.

테무 요새가 이 인원을 모두 수용할 정도는 되지 않아, 요새에 절반, 나머지는 요새 밖에 군진을 꾸리고 대기하고 있었다.

요새가 점령당한 지 나흘째 되는 날.

검은 비룡이 테무 요새에 합류했다.

339화 갈등

고구려군이 테무 요새 하나를 점령한 뒤로 웅크리고 있자, 왕웨이는 수시로 척후를 돌렸다.

"작은 병력의 움직임도 놓치지 마라!"

파견 온 바트롬 후작령의 기사단장 잔슨은 여전히 상하이 성의 별궁을 나설 생각이 없었다.

최고의 미녀를 붙여 시중들게 하고, 끼니때마다 산해진미를 내어놓으니 그놈은 제 실력을 발휘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휴양이라도 온 듯 유유자적했다.

"대인! 어쩜 피부가 이리 고우십니까? 제게 비법 좀 알려주시와요."

"하하, 아서라. 네깟 년들이 넘볼 게 아니다."

"호호호, 대인 어쩜 이리 근육도 튼실하신지."

위대한 검사 잔슨은 알몸으로 누워 미녀 셋이 해주는 중국식 마사지에 푹 빠져 있었다.

이제 막 후작 산하에 들어온 상하이 남작은 딱히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이지만, 기존 노바의 영지들과는 다른 상하이 남작령만의 문화가 있는 이곳은 퍽 즐길만했다.

처음 맛보는 음식도 즐겁고, 이들의 문화도 퍽 기껍다. 며칠 휴양하다가 돌아갈 요량이다.

"하하하. 더 힘껏 주물러라, 이년아."

"아이잉."

상하이 남작 왕웨이는 그 꼴을 보고 있자니 더 열이 솟구쳤다.

"빌어먹을."

고구려 놈들은 테무 요새에 틀어박혀 꿈쩍 않고 있으니 도무지 그 의중을 알 길이 없지, 파견 나온 검사는 영 적극적이지 못하니 쟁기를 쥐고도 손으로 밭을 가는 형국이었다.

"영민들의 피난은 다 했느냐?"

"예에, 각하."

그의 정치적 기반은 인민들의 지지에서 시작되었다. 그런 그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은 왕웨이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사방장군들은 포진을 마쳤느냐?"

"예, 4진까지 이르는 저지선을 구축했습니다."

리자오 장군이 죽으며 상하이에 남은 소드마스터는 고작 넷.

"최우선은 적의 저지가 아니라 장군들의 퇴각이다. 괜히 공명심에 옥쇄할 것을 바라지 않으니, 너는 가서 내 뜻을 확고히 전하라."

"예, 각하!"

영지의 생산력은 인구에 비례하지만, 군사력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병력의 숫자보다 고수의 숫자가 더욱 중요하니, 영지군 10만 군세를 잃는 것보다, 소드마스터 넷을 살리는 게 더욱 중요하다.

첫 정치적 기반은 인민들의 지지로 인한 상하이 시장 취임이었지만, 지금의 그를 있게 하는 건 바트롬 후작과의 봉신 계약이다.

후작의 위세가 건재하는 한, 그의 지위가 박탈당할 리는 없다. 영민들의 민심이 돌아서더라도 잘 구슬려 달래면 된다.

어차피 모든 지배력은 무력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무력은 많은 수의 군사보다는 압도적인 정예 기사들에 우선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구태여 영민들을 잃어 민심을 해칠 필요는 없는지라, 왕웨이는 테무 요새에서 상하이 성까지 이르는 경로의 모든 마을과 성을 비워냈다.

그리고 주요 길목이 되어주는 4개의 관문성에 1천의 병력씩 주둔케 했다.

이들의 역할은 아주 잠깐의 저지 정도면 충분했다.

후방의 또 그 후방의 부대가 대비하고 준비할 잠깐의 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테무 성에서 예까지 말을 달려도 나흘이다.'

4개의 관문성이 있으니 못해도 이틀 정도는 더 잡아 줄 것이다.

적들도 병력이 8천이 넘는바, 병력의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행군이 굼뜬 법이다.

"너는 바트롬 후작에게 가거라. 적들의 마법 전력이 충원되어 공성에 어려움이 있으니, 마법사들을 더욱 파견해달라 하면 된다."

"예? 적 마법사가 합류했습니까요?"

빠악!

"그냥 그리 전하면 될 일이다."

"헙, 네엡!"

왕웨이 남작은 눈치 없는 전령을 보내곤 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렸다.

'바트롬 후작만 믿을 게 아니다. 동맹을 더 끌어들여야겠다.'

상하이 맵의 남쪽은 겨울 맵이고, 서북쪽은 전부 바트롬 후작령이다. 동쪽에는 쓸모없는 사막 맵이 있으나....

"왕린!"

"네, 각하!"

왕웨이는 장성한 자신의 첫째아들을 불렀다.

"너는 이 초대장을 가지고 여기 적힌 좌표로 가라."

"헙, 아버지. 이 초대장은!"

"그래. 마켓의 초대장이다."

"소인이 가서 무얼 하면 되겠습니까?"

"이곳 성주를 설득해 병력을 얻어와라."

"소, 소자가 감당할 수 있겠는지요?"

"이걸 가져가라."

"헙! 이것은!"

"상하이 남작령 소영주의 인장이다."

"아, 아버지!"

"이번 일을 잘 해내고 나면 내 정식으로 너를 소영주로 삼을 것이다."

왕린의 얼굴에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소자 반드시 성공하겠습니다!"

"내 너를 믿으마. 병력의 수는 필요 없다. 마켓의 주인이 직접 행차하면 더욱 좋은 일이다."

"예!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왕린은 즉시 채비를 갖춰 무사 열둘과 함께 서쪽 사막 맵으로 향했다.

초대장을 활성화하니 홀로그램 월드맵에 해당 위치가 표시되었다.

<굴단 마켓 D113. 311:274>

가슴이 웅장해진다.

이 좌표가 정식 후계자로 향하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이랴!"

왕린이 고삐를 챘다.

"하얏! 도련님을 따르라!"

"이랴! 핫!"

열둘의 무사들이 들떠서 앞서가는 왕린을 보좌하기 위해 속도를 높였다.

"하하하, 다들 빨리 와라."

"도련님을 모셔라!"

왕린은 저들의 입에서 나오는 도련님 소리가 곧 소영주로 바뀔 생각을 하니 척추가 짜르르 울리는 기분이었다.

아버지를 잘 둔 덕에 이제 곧 상하이 2대 남작이 되게 생겼다. 무뚝뚝하던 공안 출신 아버지를 생각하니 없던 효심도 솟구치려 한다.

아버지를 위해.

우리 상하이를 위해.

내 한 몸 불사르리!

*

고구려의 깃발이 내걸린 테무 요새.

"대왕!"

대장들은 강철두의 등장에 유난히 반가워하며 그를 맞이했다.

"후후, 잘들 있었나?"

"하하, 잘 지냈습니다."

"결사대는 어찌하여 아직 안 왔습니까?"

"뒤에 오겠지."

철두가 타고 오는 비룡이 워낙 빠르다 보니 그리핀으로 뒤쫓기엔 무리가 있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철두의 꽁무니를 결사대 둘이 졸졸 쫓아다니는 형국이었다.

"시미켄."

"헛, 네, 대왕."

쭈뼛거리는 시미켄을 보며 철두가 호탕하게 웃었다.

"다들 친하게 지내라. 왜 왕따시키나?"

"헛! 아닙니다. 왕따라니요."

"잘 지내는 중입니다."

"아직 어색해서 그렇지요."

"...."

제임스, 오준환, 김춘배가 쩔쩔매는 와중에 시미켄이 침묵하자 철두는 피식 웃었다.

"진군을 시작하면 뿔뿔이 흩어질 테니 지금 잔치를 열어라! 오늘 밤 배를 든든히 채우고 내일부터 출진이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테무 요새의 안팎으로 든든한 보급이 내려졌고, 병사들은 고기와 술을 풍족하게 먹을 수 있었다.

철두의 의중을 이해한 대장들은 각 부대를 그냥 아예 뒤섞어버렸다.

일본대는 일본인들끼리만 모인 부대지만 다른 부대는 아니다.

제임스의 별동대야 처음부터 다국적 노비스들이 모인 외인부대였고, 오준환의 특작대도 신규 대원을 모집하며 여러 외국인이 끼어들었다.

김춘배의 마적대는 애당초 노바 출신의 용병들이 주축이 되었고, 아미르 왕국과의 교전 이후 흡수한 항병들이 주축이 되었다.

부대마다 언어통일이 안 되었기에 소통의 팔찌 같은 아티팩트들이 많이 보급되어있었기에 말이 통하지 않는 문제는 없었다.

일본대 병사들은 소통의 팔찌가 없었으나, 아티팩트는 둘 중 한 명만 가지고 있어도 소통에 문제가 없기에 충분히 대화할 수 있었다.

어색한 이들끼리 한데 모아놓고 배불리 먹이고 술을 먹이니 자연스레 분위기가 풀어졌다.

하지만 좋은 의도로 시작한 일이라도 늘 문제는 있기 마련이고, 여기저기서 주먹 다툼이 일어나기도 했다.

"나니? 다시 한번 말해봐!"

"쪽바리 새끼! 네놈 얼굴 내가 모를 줄 알고? 너 때문에 영수가! 시발!"

퍼억, 퍽!

지난 전장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던지 좋지 못한 감정싸움이 주먹다짐이 되었고, 두 사람을 말리려는 대원들이 달라붙자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짓이냐!"

이런 문제가 생기면 박힌 돌보다 굴러온 돌이 더 화들짝 놀라기 마련이다. 아직 고구려 왕국에 제대로 이륙했다 보기 어려운 일본대 대장 시미켄이 민감하게 반응하며 나섰다.

시미켄이 나서자 싸움 당사자가 속해있는 특작대의 오준환도 나섰다.

"무슨 일입니까?"

"우리 대원이 무례를 범했습니다. 송구합니다."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번지지 않으려면 언제나 공손함이 우선되어야 한다. 시미켄이 넙죽 고개를 숙이자 일본대 대원의 얼굴이 불그락푸르락해졌다.

"대장, 저놈이 다짜고짜 먼저 주먹을 날렸습니다!"

"입 닥치고 있어라!"

시미켄의 호통에 일본대 대원이 입을 다물었으나 얼굴에 스며든 분기는 여전히 가득했다.

"봉근이. 뭐야?"

"넵, 대장!"

"왜 때렸어?"

"저 자식이 지난 전쟁 때 영수를 죽인 놈입니다!"

"...."

오준환은 대번에 특작대 대원 이봉근을 혼내지 못했는데, 그 심정이 본인도 이해가 가서다.

"사과해라."

"...."

요지부동인 이봉근을 보며 오준환은 고민했다.

규율을 내세울 것이냐, 좋게 좋게 분위기를 풀어볼 것이냐? 문제는 어떤 선택을 하든 이미 대장의 면도 상했고, 분위기도 되돌릴 수 없을 지경이라는 것이다.

"후후후! 싸움이냐!"

"대, 대왕."

대원들의 분쟁에 강철두까지 나서자 오준환과 시미켄의 동공이 흔들렸다.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 결투다! 다들 자리를 마련해라. 하하하!"

강철두가 그리 외치자 병사들이 엉거주춤 물러나면서도 얼굴에 묘한 기대감이 생겼다.

대번에 패가 갈라지더니 일본대가 뭉쳤고, 반대쪽으로 고구려의 기존 병사들이 뭉쳤다.

"후후, 선수 나서라!"

철두가 싸운 당사자들을 불러냈다.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더 부추기는 대왕의 행동에, 보다못한 제임스가 나서서 조용히 귓속말했다.

"대왕, 자칫 화합이 깨질 수도 있습니다."

"화합?"

철두가 목젖이 보일 정도로 웃었다.

"누가 화합하라더냐?"

"예?"

철두의 소리가 워낙 쩌렁쩌렁했기에 모여있던 병사들 모두가 들었다.

"전장이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결속을 다지는 것도 좋지만, 언제나 진리는 하나다.

"강한 놈은 살고, 못한 놈은 죽는다."

"...."

"자, 증명해라! 승자가 모든 걸 갖는다!"

철두가 흥미로운 얼굴로 두 사람의 결투 결과를 보았다. 아예 멍석이 깔리니 두 사람은 잘 됐다 싶어 무기를 빼 들었다.

"니키타다. 네 동료를 죽인 건 유감이다."

"닥쳐라. 쪽바리 새끼. 사과는 저승 가서 영수한테 해라."

채앵, 차앙!

"우오오오!"

"이겨! 이겨라!"

"지지마, 니키타!"

니키타와 이봉근의 싸움이 시작되자 병사들이 환호했다. 싸움의 이유야 아무렴, 무기를 들고 서로의 목숨을 앗기 위한 치열한 결투가 재미없을 리가 있는가.

싸움은 오래지 않아 끝이 났다.

채앵!

"크읏."

검을 놓친 이봉근이 니키타의 발차기에 맞고 벌러덩 자빠졌다. 그 사이 니키타의 검이 그의 목젖에 닿았다.

'후, 이겼다.'

니키타의 눈에 깃들었던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지며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고요해진 결투장.

모두의 시선이 강철두에게로 향했다.

오준환과 시미켄도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입을 주목했다.

이제 그만 승자를 위로하고 두 사람이 화합할 수 있게....

"후후, 뭐하나? 죽여라."

"...!"

니키타도 당황했고, 목에 칼이 겨눠진 이봉근도 당황했다. 이곳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건 오로지 강철두뿐이었다.

340화 통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