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황제
"너로군."
"날 아나?"
"강철두겠지?"
"흥, 간악한 흑마법사 놈이 제법 똑똑하군."
금발의 황제는 입을 씰룩이더니 목젖이 보이도록 웃었다.
"하하하하, 재밌는 놈이로고."
"...?"
"나는 흑마법사가 아니다."
"구라치지 마라."
황제가 어깨를 으쓱했다.
스컹!
그가 아무런 전조 동작도 없이 빼어든 검이 주변을 훑는가 싶더니 다시 검집으로 빨려 들어갔다.
'뭐야?'
철두는 당황했다.
반응하지 못했다.
그저 움찔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쿠르르릉.
주변 대기가 요동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던 스켈레톤들이 허물어져 내렸다.
하나같이 두개골이 잘렸고, 더는 회생이 불가능해 보였다.
데스나이트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마스터 급의 데스나이트 또한 다르지 않아, 해골 무더기뿐인 곳에 두 발을 딛고 선 것은 강철두와 황제 둘뿐이었다.
철두의 얼굴은 잔뜩 굳어있었다.
'강하다.'
짐작조차 가지 않을 정도로 강한 자다.
"...황제라면 날 잡으러 왔나?"
"널 왜?"
"고구려는 제국과 전쟁 중이지 않나?"
"음? 아하하!"
웃음이 많은 놈이군.
철두는 긴장한 것과는 별개로 모든 신경을 집중해 황제를 관찰하고 있었다.
일거수일투족, 행동, 말투, 성격. 무엇이 되었든 좋다.
바바리안의 모든 촉감은 지금 항거 불가능한 적을 마주하며 약점을 찾아내고 있었다.
승리로 나아가기 위한 관찰이다.
"영지전 따위야 내 관심 밖이야. 아니, 권장해야 할 문화지."
"...?"
부하를 아끼지 않는 녀석이군.
"그럼 내 볼일은 마쳤으니 다음에 보자구. 난 용무가 바빠서 말이야."
흑마법사 제롬이 살아있다.
역시 음침한 녀석들답다.
질서를 거부하는 힘을 다루는 자들.
방금 죽인 제롬은 그저 분신일 뿐이다.
지금 아슬아슬하게 느껴지는 이 불쾌한 기운을 빨리 쫓아가야 추격이 쉽다.
"쭉쭉 치고 올라오라구, 친구. 내가 외롭지 않게 말이야."
"후후, 자신감이 과한 놈이군."
철두는 쫄지 않았다.
그 담대한 기상에 황제가 다시 웃었다.
"뭐? 하하하. 정말 재밌는 녀석이군. 승부는 중요한 게 아니야, 친구."
"...?"
"중요한 건 도전이지. 얼른 커서 덤벼보라구. 아하하하."
황제가 백마를 올라탔다.
철두는 쫓지 않았다.
웃고 있어서 그렇지, 그가 마음만 있었다면 철두는 이곳에서 목이 떨어졌을 테니까.
다그닥, 다그닥.
천천히 달려 나가는 백마마저 강자 특유의 여유가 넘쳐난다.
철두는 멀어지는 그들을 한참 바라보았다.
찰랑이는 말꼬리와 말 똥구멍이 안 보일 때쯤이 되어서야 그는 참았던 숨을 뱉어냈다.
"후우우우우."
저도 모르게 힘껏 움켜쥐었던 손을 펼쳐보았다.
땀으로 축축하다.
"대단한 놈이군."
짐작조차 가지 않는 강함이다.
황궁 비고를 털어 세계수 가지를 찾자고?
불가능하다.
적어도 지금은.
축축한 손바닥을 다시 움켜쥐어본다.
꾸드드득.
꽉 찬 주먹이 느껴진다.
무엇이든 부수고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차올랐다. 동시에 그것이 나의 한계를 규정짓는 것 같아 허무함과 짜증이 밀려왔다.
"벽이군."
오늘 벽을 봤다.
넘어서야 한다.
휘이이이잉.
공기를 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그리핀 한 마리가 선회하며 내려서고 있었다.
"철두!"
"아르엘라."
아르엘라는 주변에 널브러진 해골 무더기를 보며 방긋 웃었다.
"역시 네가 해낼 줄 알았어. 에그니스가 정신을 차렸어! 몇 달 요양은 해야겠지만, 저주가 풀렸다구!"
아르엘라가 덥석 와서 안기니, 더욱 입맛이 쓰다. 이건 그가 한 게 아니니까.
"내가 해치운 게 아니다."
"음? 그럼?"
"황제를 만났다."
"뭐? 누굴 만나?"
"황제."
아르엘라가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그는 이미 떠난 지 오래되었다.
"갔다."
"허, 그냥 갔다고? 하긴, 황제는 바바리안에겐 우호적이니까."
"음? 무슨 말이냐?"
"아, 그냥 제국 정책이 그렇단 소리야."
"정책?"
"제국에서 금지하는 게 두 가지 있어. 뭔지 알아?"
"흑마법과 정령술."
"...?"
철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정확히는 그 두 술사를 고용하는 걸 막지."
"허, 아이리스 후작령은?"
"우리 영지는 예외야. 그래서 제국에 정령사를 가진 제후는 오직 아이리스 후작뿐이야."
철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전에 내가 없앤 남작 가문에 엘프가 있었다."
"정령이 없는 엘프였겠지."
"흐음."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그러려니 할 뿐이다.
"그래서 그 흑마법사를 잡기 위해 황제가 직접 와?"
"정확히는 흑마법사를 몰래 후원하고 키운 툴룬 공작 가문이겠지."
"허."
철두는 제국에서 왜 그것들을 금지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아예 박멸하려는 생각이라면 정령술사로 알려진 강철두도 공격해와야 하는 것 아닌가?
"황제는 제국 밖의 제후들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아."
"거 속 편한 놈이군."
"하하, 그럴지도. 아무튼 황제를 봤다는 사람은 극소수야. 실제 제국은 궁정백에 의해 돌아가니까."
"황제가 아니라 떠돌이 해결사 같은 놈이군."
"그럴지도 모르지."
"놈이 바바리안을 좋아한다는 건 무슨 말이냐?"
"황제의 별명이 뭔지 알아?"
"모르지."
이름도 모르는 놈인데 별명 따위를 알 리가 있나.
"이간질의 제왕."
"...?"
"분쟁 일으키고 영지전 일으키길 좋아해."
"허, 아까 들었다. 그런데 그게 바바리안을 좋아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냐?"
아르엘라는 철두를 보며 맑은 두 눈을 깜빡였다.
"몰라서 물어?"
"...?"
"바바리안처럼 싸움 좋아하는 종족이 어딨어? 굳이 싸움 붙이지 않아도 알아서 싸우는데, 당연히 좋아하지."
"허."
묘하게 기분이 나쁜데 반박할 말이 없었다.
"확실히 미친놈이긴 하군."
짧은 만남이었지만 녀석은 제국의 안위 따위보다 도전자를 더욱 반기는 것 같았다.
"나보고 얼른 커서 도전하라더군."
"오! 잘됐네. 이번에 그것도 얻었으니까."
"으으음."
철두가 턱을 쓰다듬었다.
두두두두.
"철두우우우!"
거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우렁찬 외침이 들려와 돌아보니 노론마을 앞에 차린 군진에서 한 무리의 군마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가장 선두에서 말을 달리는 이는 다름 아닌 박준필. 그는 한달음에 달려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얼마나 마음이 급한지 착지를 잘못해 두어 바퀴 굴러 흙더미가 되었으나, 개의치 않고 달려가 철두를 안았다.
"크으으윽, 잘 돌아왔네. 잘 돌아왔어."
"후후, 준필."
김진태도 그렇고, 박준필도 마음고생이 여간 심한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두두두두.
뒤늦게 달려온 인마가 도착하고 각 부대의 대장들이 다가왔다.
"아니, 사령관님! 그렇게 뛰쳐나가면 어쩝니까?"
"허어, 참."
"크으으윽! 대왕이시여!"
저마다 달려와 강철두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차렸다.
서로 등을 두드리던 강철두와 박준필이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고작 2년 새 많이 늙었군."
"대왕은 여전하시옵니다."
부하들이 보는 자리기에 말을 높였다.
사사로이 친구 사이이나, 왕가를 천명한 고구려였기에 국무총리로서 모범을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야 열흘 정도 다녀온 게 다인데 뭘."
"크윽...."
박준필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눈물 콧물 범벅이었으나 누구도 그것을 나무라지 않았다.
"대왕의 빈자리가 몹시도 무거웠나이다."
"고생이 많았다."
철두는 진심으로 박준필을 달랬다.
마음고생이 여간 아니었던 모양이다.
"최준섭."
"네, 대왕님!"
"오준환."
"네!"
"구정욱."
"예에! 대왕이시여!"
철두는 고작 열흘 만에 보는 부하들이 반가운 정도였는데, 저들의 눈에 가득한 열망과 기대, 안도감은 지난 2년의 부재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반가우면서도 이질적이며, 익숙하면서도 낯선 기분이다.
추억과 유대감, 동질감은 어쩌면 같은 시간대를 공유해야만 나오는 감정일지도 몰랐다.
"출진을 준비하라."
""명을 받드옵니다!""
세 명의 대장이 동시에 소리쳤다.
"준필이."
"예, 대왕."
"나트롱 백작 치고 오마."
"예에, 대왕."
박준필은 가능성 여부를 따져 묻지도 않았다.
그가 그리한다면 무엇이 막을 수 있을까?
"백작성을 징치하고 올 터이니, 서둘러 병력을 이끌고 따라와라."
"예에, 대왕."
철두가 아르엘라를 보며 눈짓했다.
"가자."
"알았어."
파팟!
두 사람은 동시에 그리핀을 소환해 올라타고 훌쩍 하늘로 솟구쳤다.
"하아, 이제 되었어."
박준필은 떠나는 강철두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모든 근심걱정 스트레스가 사라진 기분이다.
새삼 본인이, 아니 고구려의 모든 국민들이 얼마나 대왕을 의지하고 있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이제 길고 지긋지긋한 이 전쟁도 끝이다.
*
나트롱 백작성.
"전령은 아직인가?"
"예에, 각하."
나트롱 백작은 의자 팔걸이를 신경질적으로 두드렸다.
"허어, 벌써 보고가 올라왔어야 하는데 왜 아직이란 말이냐?"
"다시 한번 알아보겠나이다."
머리가 하얗게 센 시종장은 백작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벌써 세 번째 전령을 남쪽 전장으로 내려보냈다.
"허어! 이겼다면 벌써 승전 소식이 전해져야 하거늘!"
나트롱 백작이 이리 오매불망 기다리는 것은 남하한 우로사 남작군의 승전소식이다.
고구려 놈들이 갑자기 밀고 들어오길래, 때마침 적절하게 부활한 우로사 남작이 병력을 이끌고 내려갔다.
마지막 보고로 툴룬 공작가의 흑마법사가 합류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그 뒤로 정기 보고도 없고 감감무소식이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쿠당탕!
밖이 소란스럽자 백작과 시종장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오, 전령인가?"
"나다, 씹새끼야."
"...!"
나트롱 백작이 벌떡 일어나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너! 너! 너는!"
"왜? 반갑냐?"
철두는 씩 웃으며 다가왔고, 눈치 빠른 시종장이 버럭 소리 질렀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
"어, 우리 와이프가 다 처리 중이야."
"...?"
철두가 저벅저벅 걸어왔다.
"이노오옴, 멈추어라!"
"할배는 비키시고."
늙은 시종장이 앞길을 막았으나 철두는 무심하게 발로 차주었다.
퍼억!
"끄억!"
시종장이 벌러덩 누워 숨을 몰아쉬었다.
방해꾼이 사라지자 나트롱 백작의 앞에 선 철두가 물었다.
"정전협정, 네가 깬 거다?"
"...!"
나트롱 백작은 지금 이 순간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주, 죽는다.'
올가미에 목이 걸린 기분이다.
히죽 웃는 얼굴의 강철두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죽음이 목전에 다가온 기분이다. 이 포악한 포식자 앞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유언 없나?"
"나, 나는."
"없으면 말고."
촤륵!
철두는 미련 없이 그의 목을 베어버렸다.
깨끗하게 잘린 수급이 바닥에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몸이 빛으로 화해 사라지고, 남은 것은 궤짝 하나와 반지 하나였다.
<제국 귀족의 인장을 획득하였습니다.>
제국 귀족의 인장을 얻은 것은 보르텡 남작을 처치했을 때에 이어 두 번째다.
철두가 인장을 주워 들자 선택지가 나타났다.
<제국 귀족/자유 영주>
이 인장을 계승하여 제국 귀족으로 살 것인지, 자유 영주로 살기 위해 이 인장을 파괴할 것인지.
철두에게 있어 이 인장은 쓸모가 없다.
막 파괴하려는 그때 아르엘라가 들어왔다.
"철두. 이놈 알아?"
"음?"
아르엘라가 쇠사슬에 묶여 초췌한 몰골의 사내 하나를 데려왔는데, 철두에겐 구면이었다.
"요하임?"
"어? 진짜네. 이놈이 너 안다더라구."
"흠, 나트롱 백작 아들이다."
"어? 이놈 이거 감옥에서 주워 왔는데?"
철두는 손바닥 위의 제국 귀족 인장을 한번 바라보다가, 다시 눈앞의 사내를 보았다.
고문받은 흔적은 없지만 홀쭉해진 볼살과 짙은 다크서클, 가늘어진 팔다리를 보아하니 꽤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던 모양이었다.
291화 정복자의 길
아르엘라가 쇠스랑을 놓자, 요하임은 털썩 주저앉았다.
가까이 다가간 철두가 그의 손발을 옥죄고 있는 쇠고랑을 잡아 뜯었다.
까앙!
견디지 못한 고리가 터져나가며 손발이 자유로워진 요하임은 바닥에 엎드렸다.
"고, 구려의 태, 대왕이시여."
요하임의 목소리는 한껏 갈라진 쇳소리가 났다.
철두는 포션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벌컥, 벌컥.
물 자체를 마신 지 오래되었는지, 요하임은 포션을 감로수 마시듯 꿀떡꿀떡 잘도 넘겼다.
"크으으."
요하임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포션을 마셨으니 당연한 건가?
"밥은 먹었나?"
"...."
"괜한 걸 물었군."
철두의 시선이 끙끙거리며 일어선 시종장에게로 향했다.
"밥 차려와라."
"...."
나트롱 백작 가문의 시종장은 강철두와 요하임을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조아렸다.
"알겠나이다."
자신은 나트롱 백작 가문에 봉신으로 귀속된 몸.
만약, 강철두가 백작 가문의 상징인 저 반지를 파괴하면....
나트롱 백작 가문과 봉신 관계로 얽힌 모든 사람이 죽는다.
그리고 나트롱 백작 가문의 이름으로 된 재산증명도 사라진다.
계약 관계 또한 마찬가지.
나트롱 백작 가문의 인장을 파괴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전리품은 겨우 지금 발 딛고 선 나트롱 백작성뿐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N344 맵에 포진한 수십 개의 마을들, 농장, 목장, 와이너리 등 모든 백작 가문 소유의 것들이 주인을 잃게 되겠지.
먼저 줍는 놈이 임자가 되는 셈.
고구려의 군병들을 동원해 하나하나 점령하고 다시 충성서약을 받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나, 매우 지난한 일이다.
"식사를 올리겠사옵니다."
늙은 시종장은 약점을 잡힌 사람처럼(실제 목숨줄이 잡혀있다.) 얌전하게 명령을 이행했다.
하인들이 테이블을 가져와 보를 깔고 금방 식탁을 만들어 내더니, 줄줄이 들고 온 접시를 내어놓았다.
"먹어라."
"예에, 대왕."
요하임은 사양하지 않고 수프 그릇을 끌어와 조심스레 한 수저씩 떠먹었다.
무언가를 먹어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
허기짐과 저혈당은 포션으로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후루루룹.
철두는 천천히, 그러나 쉬지 않고 수저를 들어 수프를 삼키는 요하임을 보며 불쑥 물었다.
"왜 갇힌 거냐?"
"전쟁 참전에 반대하다 갇혔사옵니다."
요하임의 말투나 행동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실상 고구려의 전신인 아이언헤드령과 나트롱 백작령과의 전쟁을 휴전협정으로 이끈 것도 모두 요하임의 공이었다.
그는 이전부터 강철두와 척지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한 인물이다.
"왜 그랬냐?"
"죽을 것이 확실한 길을 걸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걷는 길인데도?"
"그렇기에 더더욱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철두가 씨익 웃었다.
눈앞에 있는 고깃덩이 하나를 포크로 집어 입에 넣었다.
우적우적.
"받아라."
휘익. 탁!
하급의 수준이기는 하나 요하임도 기사는 기사.
무언가 휙 날아오기에 뛰어난 반사신경으로 덥석 잡고 보니 반지다.
나트롱 백작 가문의 가주를 상징하는 반지.
"...가문의 인장이 아니옵니까?"
"맞다."
"...승자의 전리품을 어찌하여 제게 주시옵니까?"
내용은 패배자의 수용적 자세 그 자체였으나, 말투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가문을 이어라. 그리고 나를 섬겨라."
"...."
요하임의 눈이 잠시 반짝였다.
"바라마지않을 기회이오나 불가합니다."
"오!"
철두가 비죽 웃었다.
"제국에 대한 충성이냐?"
"강제적인 봉신이지요."
"...."
"가문의 봉신은 쌍무적인 계약 관계이오나, 황제를 향한 봉신은 조금 다르옵니다."
"다르다?"
"예에, 강제적인 맹세에 가깝지요."
봉신 계약은 쌍무계약이라 어느 일방이 파기하면 파기가 가능했다.
하늘산 남부의 몇 개 마을들이 아이언헤드의 약탈을 견디지 못하고 아예 밑으로 들어온 것이 그 예이다.
"맹세라서 지킬 수밖에 없다?"
"예에."
"방법이 없나?"
"...떠오르는 건 편법뿐이옵니다."
"말하라."
"왕가의 상징이 있다면 제국에서 독립하는 것이 가능하나이다."
"나트롱 백작령이 개국하여 나를 따른다?"
"예에. 다만 문제도 있지요."
"무슨 문제?"
"왕국이 같은 왕국 밑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표면적으로 따른다 하더라도, 결국 노바가 인정치 않는 방식입니다."
마을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공동체는 어떻게 이뤄지며, 왕국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사람 서넛 모여 이제부터 내가 왕이니 하고 선포한다고 왕국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모두가 인정할 만한 세력이어야 했고, 국가로서 기능할 정도의 체급도 있어야 할 것이다.
노바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시스템의 테두리 안에 형성되느냐, 그 외로 취급되느냐이다.
신서울은 오래도록 마을을 이루고 도시로 발전하며 살았으나, 10년이 넘도록 노바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반면, 던전을 차지하고 아이언헤드 성을 점령한 강철두는 손쉽게 영지를 인정받고 '세력창'을 얻었다.
마을을 이루는 건 촌장과 목수 등의 필수 기술자들 몇, 그리고 50명 이상의 인구면 가능하다.
그 최소한의 요건이 맞아야 노바는 그들 무리를 '정착민'이자 '공동체'로 인정하는 것이다.
적당한 터를 골라 마을 회관을 지으면 정착 퀘스트가 끝나며 비로소 세력창을 얻는다.
왕국이 되려면?
왕가의 상징이 필요하다.
고구려는 '풍요를 노래하는 석판'을 왕가의 상징으로 하여 개국했다.
나트롱 가문이 개국한다 하더라도 같은 왕국 아래 복속할 수는 없다. 동맹 관계에 놓일 수는 있으나, 이는 두 세력이 정전협정을 맺었으나 다시 전쟁한 것처럼 언제든 깨어질 수 있는 얕은 계약이다.
노바의 시스템상 고구려의 상태창 아래 나트롱 왕가를 예속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철두는 여전히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후후후."
"호, 혹시...."
상황 판단이 빠르고, 눈치가 느리지 않은 요하임이다. 그가 떨리는 눈동자로 물었다.
"혹, 제국을 향한 상징물을 얻으셨습니까?"
"후후후."
철두가 인벤토리에서 이번 미궁 동굴에서 얻은 보상 중 하나를 꺼냈다.
<대향로>
존귀한 자가 향을 피워 하늘의 문을 두드리니, 나의 말이 신의 귀에 닿으리라. 허나, 이는 제국의 황제에게만 허락된 권한이니, 그대 제국을 이루어라.
- 주화 10,000,000개로 활성화
- 활성화 시 세력에 귀속
- 퀘스트 '정복자의 길' 발동
"이, 이것이면 가능하옵니다!"
요하임은 너무 놀라 손을 덜덜 떨었다.
대향로가 걱정되어 놓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계속 들고 있기도 겁나고, 덜컥 몸이 굳을 뿐이었다.
"후후, 이리 줘라."
"여, 여깄습니다."
요하임은 대향로를 넘겨주고 난 뒤, 긴장이 탁 풀려버렸다.
새삼 철두를 바라보는 요하임의 눈빛이 강렬하다.
'시대가 원하고 있지 않은가?'
성물의 주인인데, 제국의 상징물까지 얻어버렸다.
이걸 우연이나 운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요하임은 순간 노바의 의지는 아닐까 하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세계가 다음 제국을 바라고 있지 않은가?
요하임의 상념을 강철두가 깼다.
"제국의 상징물은 뭐냐?"
"아, 아버지께 전해 듣기로 황금 월계관이라 하였습니다."
"오!"
"제국의 모든 귀족들은 황금 월계관 앞에서 맹세하지요."
그것으로 제국에 대한 충성의식은 마무리된다.
"근데, 제국 이름은 뭐냐?"
"제국은 이름을 쓰지 않습니다."
"음? 어째서?"
"제국은 오직 하나이니까요. 그저 제국일 뿐이지요."
"...."
철두가 궁금하여 물었다.
오늘 황제와 조우하고 온지라 그에 대한 궁금증이 어느 때보다도 컸다.
"그럼 지금 제국은 얼마나 이어진 거냐?"
"500년이 넘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 그럼 지금 황제는 몇 대 황제냐?"
"예에?"
"어?"
요하임이 당황에 철두가 오히려 당황했다.
"화, 황제가 그저 황제이지요. 몇 대인 게 어딨습니까?"
"...?"
철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황제는 자식도 안 놓냐?"
"낳기야 하지요."
"그럼 황제 자리를 물려 줄 것이 아니냐?"
"...황제는 불로장생하십니다."
"...?"
"지금 제국은 듀렌달의 주인인 현 황제께서 이루셨고, 계속해서 통치하고 계십니다."
"허, 불로장생?"
"예에."
철두는 조금 충격받은 얼굴이었으나 아르엘라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너 알았냐?"
"대충은 알지. 불로장생은 아냐."
"허, 역시 그렇지?"
사람이 불사신이 된다니....
"제국이 유지되는 동안만 불로장생을 얻지."
"...."
"500년 전엔 제국이 없었을 것 같아?"
"아."
"전국옥새라는 상징물을 쓰는 제국이 있었지. 그 황제는 어떻게 되었겠어?"
"죽었나?"
"신이 된 게 아니라면 죽었겠지."
"신?"
"황제의 별명이 이간질의 제왕이라고 했지?"
"그랬지."
"황제의 이명은 뭔 줄 알아?"
철두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걸 알 턱이 있나.
"모르지."
"신에 가장 가까운 인간. 신의 아들이야."
"...."
"황제의 운명은 둘이야. 신이 되거나, 죽음으로 다음 황제의 대관식을 치르거나."
더 이상 딛고 설 자리가 없는 정점에 이른 인간의 말로는 둘뿐이다.
정상을 박차고 날아오르거나,
굴러떨어져 정상을 내어주거나.
"흐으으음."
"할거야?"
아르엘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철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야지."
"왜?"
"그놈을 만났으니까."
"...."
철두가 씩 웃었다.
"평생 도망 다닐 수는 없잖아?"
"...맞는 말이야."
철두는 황제와 조우하고 그의 강함에 전율했다.
속된 말로 쫄아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몰랐으면 모르되, 직접 만나보고도 그를 넘어서려는 향상심이 없다면 그것은 바바리안이 아니다.
철두가 한쪽에 공손히 시립해있는 시종장에게 일렀다.
"주화를 가져와라."
"...어느 정도를 이르심인지요?"
"사백만 개가 모자라다."
"...알겠나이다."
시종장이 잠깐 자리를 비웠고, 요하임이 벌떡 일어나 철두의 앞에 오체투지 하듯 엎드렸다.
"나트롱 가문의 요하임이 청하나니, 가문을 보존할 수 있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어 대왕을 충심으로 따를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리할 생각이었다.
"허락하마."
"충실한 종이 되겠나이다."
요하임이 나트롱 가문의 인장을 꼈다.
파파팟.
눈부신 빛이 흘러나와 요하임을 훑고 지나갔다.
그는 노바의 '시스템'이 인정하는 나트롱 가문의 주인이 되었다.
그리고.
<대향로가 활성화되었습니다.>
<'고구려'가 제국을 향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파파팟.
연달아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정복자의 길>
고구려의 대왕 강철두가 제국을 향한 야망을 드러냈다. 오직 하나뿐인 제국, 황제의 칭호를 쟁취하는 길은 하나뿐이다.
당신은 도전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수락/거절>
철두는 망설이지 않았다.
<특성 '정복자'를 획득합니다.>
<기술 '정복'을 획득합니다.>
<정복자>
당신을 향한 충성과 지지가 더해질수록 모든 지표가 증가합니다.
<정복>
당신은 어디든 전쟁을 선포할 수 있으며, 복속시킬 수 있습니다.
철두는 오체투지한 신임 나트롱 백작을 보았다.
<나트롱 가문이 복속을 청합니다.>
"너를 고구려의 백작으로 삼겠다."
"영광된 길의 곁을 내어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기술 정복으로 나트롱 가문을 복속시키자마자, 정복자 특성이 발동했다.
"으읍."
철두는 일시에 오르는 어마어마한 기운에 눈을 부릅떴다.
그래, 이거라면.
아니, 이래서였구나.
황제여.
292화 정복군주
"후후후."
"왜?"
"기운이 넘쳐난다!"
"...갑자기?"
아르엘라는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많이 급해?"
"...뭐가 급하나?"
철두가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하자, 아르엘라는 그제야 볼이 빨개져 고개를 홱 돌렸다.
"아, 아니야."
"후후, 정복자 특성을 알고 있었나?"
"모르지."
철두는 새 장난감을 가진 어린아이처럼 잔뜩 신이 나 설명했다.
"나를 따르는 가문이 늘어날수록 모든 게 파워업한다. 스탯, 스킬, 특성, 모든 게 비례해서 오른다."
"허, 정말?"
아르엘라가 깜짝 놀랐다.
그런 특성이라면 황제는 도대체 얼마나 강하단 말인가?
"마력을 소모하진 않지만 유지 시간이 있고, 온오프는 가능하군. 흐음."
"왜 그래?"
잔뜩 신이나 설명하던 철두가 갑자기 밥그릇 뺏긴 강아지처럼 풀죽은 얼굴을 했다.
"그렇군."
"뭐가?"
"확실히 이것에 의존했다간 나약해질 수도 있겠어. 평소엔 꺼두는 게 낫겠다."
"아, 난 또 뭐라고."
아르엘라가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총이 있다고 단련을 게을리하면 약해지는 건 당연한 이치다.
철두는 정복자 특성을 해제했다.
이건 선조의 혼처럼 필요한 때에 파워업 하는 용도로 쓰는 게 적절할듯싶었다.
"후후, 요하임."
"예, 대왕."
나트롱 가문의 새 주인이 된 요하임은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시간을 주마. 얼마면 이 가문이 진정 네 것이 되겠나?"
"가장 큰 봉신인 우로사 남작이 부재중이니, 늦어도 넉 달, 대왕의 위세를 빌리면 한 달이면 충분하옵니다."
요하임은 인장을 얻어 나트롱 가문의 가주가 되었다. 가문의 일원들이 인정하든 말든 가주가 된 요하임이 처음 한 일은 제국을 벗어나 고구려를 따른 것.
이에 반발하는 봉신들도 나올 터, 그들과 계약을 갱신해 다시 봉신으로 삼는 것은 오롯이 새롭게 가주가 된 자의 숙제다.
정식으로 전대 가주로부터 권력을 이양받아 봉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충성서약을 받았다면 아주 수월하겠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나의 이름을 빌려주마."
"감사하나이다."
요하임은 대왕 강철두의 위상을 등에 업는다면 나트롱 가문을 다시 수중에 넣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 생각했다.
"예에, 대왕 전하. 고구려가 제국이 되는 그날까지 모든 것을 바치겠사옵니다."
"후후."
철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아까부터 반짝이는 세력창을 열었다.
<고구려>
등급 : 정복 왕국
대왕 : 강철두
왕족 : 아이언헤드 가문 +
제후 : 나트롱 백작 +
상징 : 풍요를 노래하는 석판, 대향로
연혁 : 미궁력 86년 9월 17일 16시 25분 29초 아이언헤드 가문의 가주 강철두가 '풍요를 노래하는 석판'을 상징으로 개국했다.
....
수도로 아이언헤드 성을 삼고, 모든 성과 마을을 직할령으로 두어 중앙집권체제를 시행....
....
미궁력 86년 9월 25일 4시 48분 11초 고구려의 대왕 강철두가 '대향로'를 두고 맹세하니, 제국을 향한 정복의 길을 천명했다.
"으음."
철두는 그리 길지 않은 연혁을 훑어보다가 아이언헤드 가문을 눌렀다.
거기엔 본디 고구려의 세력창이 떴는데, 인구와 보유영토, 보유부대, 관료 임명 등의 세부 항목들이 주욱 떠올랐다.
내용은 기존과 같았기에 내버려 두고, 제후 항목을 열어보니 백작위에 임명한 나트롱 가문뿐이었다.
봉건제를 통한 간접통치뿐이라 나트롱 가문을 눌러 뭔가 조종할 만한 항목은 없었다.
(공지/종속 해제/요구/하사)
노바의 시스템이 늘 그렇듯 새롭게 전이된 지식은 원래 철두가 알던 것처럼 사용법이 뇌리에 박혀있었다.
공지는 모든 제후들에게 일괄적으로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고, 종속 해제는 해당 제후를 자유롭게 놓아주는 일이다.
더 이상 정복 왕국의 일원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요구 항목에는 자잘한 세율이나 세품, 어디로 병력 얼마를 이끌고 집결하라 등, 다양한 간접명령이 가능했다.
하사는 말 그대로, 인적, 물적 자원이나, 봉토, 작위, 권한 등 무엇이든 정복 군주로서 해당 가문에게 하사하는 것이다.
제후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고구려 직할령을 관리하고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
아미르 왕국의 여러 제후들이 반기를 들어 내전을 겪은 것을 생각하면, 제후국들의 무조건적인 충성을 맹신해서는 큰일이다.
"노바는 봉건제도를 참 좋아하는군."
"싸우길 바라니까."
"으음."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트롱 가문이 제국령을 벗어나 고구려로 깃발을 바꿔 달았듯, 아국에서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결국 봉건제를 유지하는 것은 왕족 가문의 실질적인 지배력이 미치는 자치령인지라, 이를 키우고 관리하는 게 중했다.
"제국도 참 허술하군."
제국을 상대하기 위해 그 많은 제후를 상대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각기 다른 생각의 그 수많은 제후들이 일치단결해 병력을 모으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절반, 아니면 대세가 기울었다는 분위기 정도면 충분하다.'
어딜 가나 싸움에 적극적인 부류와 평화를 지지하는 부류, 싸우든 말든 이긴 쪽에 붙는 부류가 있기 마련이니까.
"병사들도 빌려주랴?"
"아니옵니다. 대왕."
요하임은 본인이 소영주이자 기사였기에 군부에서는 신망이 제법 있었다. 나트롱 백작성을 장악하는 건 일주일도 걸리지 않을 터다.
'관건은 누이의 마음이다.'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그 원수에 의해 가문을 잇게 된 요하임이다. 이에 반감을 가진 가신들이 구심점으로 삼을만한 건 시집간 누이다.
그녀가 상속을 주장하면, 반요하임 계열의 가신들이 뭉칠만한 구실로 작용하게 될 터다.
"좋아. 당분간은 가문 수습이나 해라."
"네, 대왕."
철두는 아르엘라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
이번 원정에서 얻은 재화는 400만 주화가 전부인 셈이다. 그마저도 모조리 털어 대향로를 활성화하는 데 썼으니 빈털털이다.
그러나 요하임의 존재 덕에 나트롱 가문 자체를 제후로 얻었으니, 당장은 쓸모없어도 후일 쓰임을 생각하면 꽤 괜찮은 투자다.
직접적인 전리품을 얻을 전장은 여기가 아니더라도 많다.
"가자고."
"알았어."
두 사람은 그리핀을 타고 날아갔다.
한 시간도 나아가지 않았는데 먼지구름을 피워올리며 들이닥치는 부대가 보였다.
"후후, 빨리 왔군."
저 정도면 철두가 나서자마자 병력을 수습해 바로 진군해온 모양새였다.
그들은 하늘에 그리핀 두 마리가 나타나 선회하자 천천히 속도를 멈추었다.
철두와 아르엘라가 내려서자 대장들이 나서서 인사했다.
"대왕!"
"기수를 돌려라."
"헛, 나트롱 백작이 제후국이 된 게 참입니까?"
"어떻게 알았냐?"
"국가 메시지가 떴습니다."
최준섭의 말에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른 건?"
"고구려가 정복 활동에 들어갔다고 떴습니다."
"후후."
철두는 미궁에서 얻은 대향로와 정복자 등에 간략하게 이야기해주었다.
"그렇게 되었다."
"하하, 저희도 미궁에서 보물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대왕께서 얻은 것에 비할 바는 아니군요."
"오, 뭘 얻었나?"
철두가 궁금해 묻자 최준섭이 씩 웃으며 인벤토리에서 궤짝을 하나 꺼냈다.
<천년어의 내단>
빙궁의 깊은 동굴 호수에 사는 천년어의 내단.
복용 시 효과 - 신체 재구성, 스탯 한계 돌파, 빙결 내성
"오, 천년 영물이군."
"흐흐, 저희 겁니다."
이번 미궁에서 얻은 최고 보물이다.
김춘배, 오준환, 최준섭, 구정욱 4명이서 히어로 미션을 완수하고, 처음으로 간 보상동굴에서 운 좋게 높은 포인트를 요구하는 상자를 발견했다.
혼자서는 포인트가 모자라 네 명이서 다 함께 포인트를 모아 열었는데, 천년어의 내단이 튀어나왔다.
일단은 최준섭이 보관하고 있지만, 아직 넷 중에 주인을 정하지 못한 상태다.
"후후, 나도 천년짜리는 셋이다."
"헉! 세, 셋이요?"
철두는 드워프 왕국과 거래하며 만드라고라 2뿌리를 얻었는데, 하나는 이은영에게 주고 하나가 남아 있었다.
거기에 더해 이번 미궁에서 추가로 천년급 영약 둘을 얻었다.
<야광 고사리>
천 년간 숲의 정기를 머금고 자란 고사리.
벼락을 맞아 뇌전의 기운이 깃들었다.
복용 시 효과 - 신체 재구성, 스탯 한계 돌파, 번개 내성
<이무기의 송곳니>
천 년이나 산 이무기가 승천하며 떨군 송곳니.
복용 시 효과 - 신체 재구성, 스탯 한계 돌파, 독 내성
만드라고라까지 해서 3개의 영약을 보여주자 대장들의 눈빛이 홱 변했다.
그들 모두 지난 2년의 전쟁 기간 동안 실력이 향상되어 기술 레벨 4를 달성하고 김진태에게 100년급 영약을 하사받아 초인이 되었다.
하지만, 천년급 영약을 더 활성화시키면 단전의 크기도 더 커지고, 마력 대비 검기의 효율도 더 좋아지기에 탐이 났다.
"와, 그럼 우리나라에 천년급만 4개군요."
대장들은 물론, 그 뒤에 집결해있는 대원들도 눈을 반짝인다.
"후후, 공과에 따라 나눠주마."
"우오오!"
"후후, 먼저 가지!"
파파팟!
철두와 아르엘라가 그리핀을 소환해 먼저 날아가 버리자 대장들이 당황했다.
"어엇! 큰일이야! 이리되면 뉴아 요새의 주둔병들이 공을 독점하게 생겼어."
부대는 이미 나트롱 백작성까지 진격하다 멈춘 상태. 한참을 남으로 내려가 뉴아 요새를 지나야 에도성에 이른다.
"헛! 유격대 부대장! 병력 수습해서 달려와라!"
파팟.
최준섭이 그리핀을 소환해 철두의 뒤꽁무니를 쫓아가 버리자, 다른 대장들도 너도나도 그리핀을 소환했다.
파파팟!
"우리도 따라가자!"
"가자아! 대장들을 따르라!"
그리핀은 전령이나 정찰 척후나 쓰임이 많기에 부대마다 서너 마리씩은 할당해 운용 중이다.
순식간에 그리핀 열일곱이 날아 철두의 뒤를 쫓으니 합이 19기에 이르는 그리핀 편대가 이뤄졌다.
*
특전대 부대장 료는 혐한 분위기를 타고 사쿠라시티를 장악했다.
한 수 아래로 깔보던 한국 출신의 노비스들이 앞서나간다는 소식은 일본인들에게 큰 위기감과 경각심을 일깨웠고, 료는 이를 잘 이용했다.
툴룬 공작 가문과의 긴밀한 교류로 눈부시게 발전한 사쿠라시티의 권력을 거머쥔 특전대 부대장 료는 전시행정 체제를 선포하고 막부를 구성했다.
막부의 핵심 인재들은 특전대 출신들.
그들 중 절반은 애초에 료를 따르는 혐한파였고, 나머지는 대세에 따라 그를 따르는 중이다.
어찌 되었건 특전대의 전대 대장인 사토 키요시가 은퇴나 다름없는 칩거 생활을 하니, 딱히 다른 구심점도 없어서였다.
N6140 맵의 전진기지 에도성을 책임지는 사령관 시미켄은 특전대 3인자였던 인물로, 사토나 료의 알력다툼에 크게 관심도 주지 않던 이다.
'일본을 일본답게.'
그는 딱히 한국을 깔보지도, 좋아하지도 않으며 그저 일본의 번영만을 생각하는 군인 출신의 노비스였다.
정치 성향을 잘 내보이지 않는 군인 중의 군인이라 존경하며 따르는 이가 많았다. 쇼군에 오른 료도 그런 그를 중임해 고구려 침략의 선봉으로 내세웠다.
도시화되어버린 에도성의 중앙엔 8층 목조탑이 세워져 있었다.
시미켄은 홀로 이곳 탑에 올라 에도성을 굽어살피길 즐겼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어, 시미켄."
"...?"
묵묵히 도시 전경을 내다보던 시미켄은 온몸의 털이 바짝 서는 기분이었다. 절로 똥꼬가 조여지는 긴장감!
"...대장?"
"후후, 아직 나를 그리 생각하는 건가?"
뻣뻣한 목을 돌려보니 웃는 얼굴의 사토 키요시가 서 있었다.
293화 정벌 (1)
시미켄은 2년 만에 나타난 사토 키요시를 물끄러미 보았다.
여유로운 미소가 가득하다.
은거해버리더니 득도라도 한 것인가?
"죽은 줄 알았습니다."
"아쉬워?"
"쇼군께서는 그렇겠군요."
"쇼군이라...."
시미켄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쇼군이란 소리가 나오는 것을 보니, 시간의 간극이 확 와닿았다.
료 막부에는... 아니, 사쿠라시티에는 더 이상 사토가 돌아갈 자리가 없다.
완전히 남이 된 기분이다.
'그래도 별수 없지.'
내 사랑하는 조국.
내 이웃, 동료들을 하나라도 더 구할 수 있다면 그리하는 게 맞는 일이다.
"복귀하시려는 겁니까?"
"복귀라...."
사토는 시미켄의 불편한 기색을 읽었다.
대놓고 경계심을 표현하고 있는데 모르는 게 멍청한 거다.
"말리고 싶군요."
시미켄은 정치적 알력 싸움을 극혐하는 인물이지만, 시세에 어둡지는 않았다.
막부의 쇼군 료에게 사토는 부담스러운 사람이다. 그가 돌아오면 어떻게 해서든 막부의 균열이 생긴다.
"조국을 위해 대장은 은거 생활을 이어가는 게 좋아 보입니다."
"아니, 틀렸어."
사토의 대답에 시미켄의 눈썹이 꿈틀했다.
"진정 복귀하려는 겁니까? 2년이나 모습을 감췄다가 굳이 지금 다시 훼방하려는 이유가 뭡니까?"
"훼방이 아니야. 더는 두고 볼 수 없기에 나서는 거다."
"또 그 이야깁니까?"
시미켄은 2년 전 사토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특전대를 나가서 민초의 생활을 이어가다가 갑작스레 전쟁을 반대하고 나섰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운 뒤였다. 사토의 의견은 묵살되었으며, 료에게는 막부를 강력하게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2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는 사토의 영향력은 미미한 수준이다.
과거의 영웅.
일본인의 수치.
조센징의 개.
그를 추억하는 사람이나, 멸시하는 사람이나 공통된 의견은 옛 시대의 사람이라는 거다.
새 시대에 구시대의 사람은 분란만 일으킬 뿐이다.
"이미 고구려와 우리 막부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요."
"알지, 알아. 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허. 말이 안 통하는군요."
"아니, 시미켄. 너라면 분명 선택할 수 있을 거야."
"...?"
"전쟁은 이미 끝났어. 스승님이 돌아오셨다."
"허!"
시미켄은 코웃음 쳤다.
조국에 대한 사랑이 큰 만큼 자부심 또한 남다른 그다.
"내가 존경하던 대장은 그때 이후 죽었군요."
사토 키요시가 변해버린 것이 언제부터인가?
일본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강철두와의 대련에 나섰다가 무참히 패배, 변명을 해도 모자랄 판에 그를 스승으로 추켜세운 그다.
이는 기대한 국민들을 배반하고 조롱한 행위나 다름없었다.
시미켄도 그때 적잖이 실망했었다.
"더는 추해지지 마십시오. 대장."
"아니, 난 국민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더한 짓도 할 수 있다."
"허!"
"이 전쟁은 이미 끝났다. 곧 스승님의 분노가 사쿠라시티를 덮칠 거다.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조센징의 개가 되더니 아주 헥헥대는 꼴이 보기 역겹군."
시미켄의 눈에 경멸이 어렸다.
"한때나마 일본을 대표하던 랭커로서의 자부심도 없다는 말인가? 더는 일본을 모욕하지 마라."
"시미켄. 부질없는 죽음일 뿐이야. 희생을 늘릴 필요가 없다."
"허, 대일본의 군인 중엔 전장에서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겁쟁이는 없다."
스르릉.
시미켄이 일본도를 뽑아 겨눴다.
"대장으로서의 예우는 여기까지다. 조용히 묻혀서 살아라. 사토 키요시."
"...부질없단 말인가?"
사토는 씁쓸히 중얼거렸다.
스릉.
사토도 허리춤의 한손검을 빼 들었다.
"허, 너야말로 부질없다. 사토, 특전대의 누구도 당신보다 약한 이는 없다."
"그럴까?"
츠츠츳.
사토의 검에 검기가 맺혔다.
시미켄이 흠칫 놀랐다.
"...기연이라도 얻었는가?"
"기연? 그래.... 기연이지."
"물러가라, 사토. 지금까지처럼 쥐 죽은 듯 살아라. 마지막 경고다."
"아니, 그럴 수 없어."
사토가 앞으로 나섰다.
쇄애애액, 카앙, 캉!
순식간에 세 번의 검격이 맞부딪혔다.
원래 고수들의 싸움은 찰나에 끝나는 경우가 많았고, 두 사람의 싸움도 마찬가지였다.
시미켄의 일본도는 부러졌고, 사토는 그의 멱살을 쥐고 검을 목에 겨누고 있었다.
꾸욱.
검 끝에 닿은 목에서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대로 찌르면 시미켄의 죽음은 확정이다.
"...뭐 하자는 거지?"
시미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2년 만에 나타난 사토가 이리 진심으로 공격해 올 줄이야.
"최대한 많은 사람을 살리자는 거다."
"...."
"잘 들어라, 시미켄. 곧 스승님이 오신다. 툴룬 공작가에서 파견 나온 기사단장 아이반과 흑마법사는 이미 죽었다. 그리고 나트롱 백작 가문도 굴복했다."
"...거짓말 마라."
"닥치고 들어라. 이게 모두 스승님이 돌아오시고 하루도 되지 않아 일어난 일이다. 지금쯤 이곳 에도성으로 오고 계실 터. 맞는지 아닌지는 곧 알게 될 게다."
"...."
"난 스승님의 분노가 료 막부에 향하길 바란다."
"...료에 대한 복수인가?"
"아니. 누군가는 이 전쟁에 책임을 져야 하고 그것이 막부다. 그 아래 일본인들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
"난 그들을 살릴 거다."
시미켄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장 말이 맞다고 치자. 헌데 그걸 내게 주절주절 떠드는 이유가 뭔가?"
"누군가는 패전을 책임져야 하고, 또 누군가는 항복한 이들과 함께 선처를 바라야 한다."
책임을 지는 것은 료가 될 것이고, 항복한 일본인들을 이끄는 것은 시미켄이 될 것이다.
"대장이 하지 그러나?"
"흐흐, 네가 이미 말하지 않았나? 나는 이미 밀려난 옛사람일 뿐이다."
지난 2년간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토와, 2년간 료 막부의 2인자로 군림해온 시미켄이다.
사람들을 결집하고 의견을 모으기에 누가 더 적합하냐고 묻는다면 답할 가치도 없다.
"부디 일본인을 구원해다오."
"...."
사토가 겨눴던 검을 거뒀다.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해다오. 시미켄."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시미켄의 볼살이 푸들푸들 떨렸다.
"대장 말이 전부 맞다 해도, 달리는 열차를 나 혼자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이야?"
전쟁이란 것이 그렇다.
집단의 광기는 개인의 역량으로 멈추고 말고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광기는 개인을 집어삼킨다.
지금 시미켄이 고구려에 항복하자는 소리를 하면, 설득은커녕 되려 목이 잘려 효수되는 건 그가 될 것이다.
배신자 낙인이 찍혀버린 사토의 전철을 밟게 될 뿐이다.
"열차는 고구려에 부딪혀 제 스스로 멈출 거다. 네가 할 일은 생존자를 구조하는 일이다."
"왜 네가 하지 않는가?"
"난 이미 고구려 사람이다. 부탁하지, 시미켄."
파팟.
사토가 사라지듯 모습을 감춰버렸다.
"헛!"
등장 때와 마찬가지로 기척을 찾을 수가 없다. 등허리에 식은땀이 주루룩 흐른다.
막부의 어떤 닌자보다 더욱 놀라운 은신술이다.
그가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 아닌가?
"...정말인가?"
방금 사토가 한 말이 모두 사실일까?
터무니없는 소리다.
무려 2년을 끌어온 전쟁이다.
강철두가 아무리 성물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에 대한 대비는 툴룬 공작 가문에서 다 도맡기로 하였다.
'아이반 경이 정말 당했는가?'
닌자들의 첩보에 아이언헤드 성을 직접 요격하러 나선 그다. 안 그래도 복귀해야 할 그가 돌아오지 않아 첩보조를 내보낸 참인데.
타탓.
8층 목탑으로 특전대 부하 하나가 올라와 고개를 숙였다.
"첩보조가 복귀했습니다."
"어찌 되었나?"
"아이언헤드 성이 불타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내부 첩보 활동 중이던 닌자를 만나 정보를 가져왔습니다."
"간략히."
"실패했습니다. 아이반 경과 기사단이 내성을 공략, 방화에는 성공했으나 탈출에는 실패, 끝내 목숨을 잃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
정말로 그가 죽었다.
사토의 말은 정녕 진실인가?
"북쪽의 전선은?"
"그쪽으로 정찰조를 보내 볼까요?"
"...아니. 되었다. 그보다 누군가 탑에 접근하는 것을 못 느꼈나?"
"예? 아무도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알겠다."
지금 보고하는 특전대의 부하도 소드마스터다.
백년급 영약이긴 하지만, 엄연히 한계를 돌파해 신체 재구성을 마친 몸. 오감을 비롯해 감각기관이 범인에 비할 바가 아닌데 사토의 잠입을 전혀 눈치조차 못 채고 있었다.
"쇼군에게 보고는?"
"긴급으로 전령이 출발했습니다."
"...알겠다. 전 특전대와 병사들은 내성에 집결해라."
"...모두 말입니까?"
"그래. 전선의 모든 병사들을 불러 모아라."
"하잇!"
에도성에서 출발한 전령들이 각기 부대로 연락을 전하러 가는 사이, 하늘에서 그리핀 편대가 나타났다.
"그리핀이다!"
"고구려의 새다!"
"조센징 놈들! 썩 물렀거라!"
그리핀 정찰부대는 고구려에서 수시로 운용하는 병과다. 하루에도 서너 번씩 에도성 상공에 나타나 정찰하다 돌아가는 걸 반복하는 녀석들인데....
시미켄은 그런 놈들이 무려 19마리나 한 번에 나타난 것에 참을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피, 피해라!"
시미켄은 그 말과 함께 목탑에서 다이빙하듯 몸을 내던졌다. 심장을 찌르는듯한 불쾌하고 불길한 예감과 과감한 결단력이 그의 목숨을 구했다.
꽈르르릉!
선두의 그리핀에서부터 시작된 낙뢰가 목탑을 부숴 버리며 내리꽂혔다.
쿠르르르릉!
에도성의 중심에 자리한 목탑과 주변 건물들이 모조리 무너지며 지진을 일으켰다.
쾅, 콰앙!
벼락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으니, 강철두가 그리핀 위에서 망치를 휘두를 때마다 에도성 여기저기 건물이 무너지고 폭발했다.
화르르륵.
"불이야! 얼른 꺼!"
"으아아아!"
"살려주세요!"
콰아앙, 콰앙!
도시에 미사일 세례가 떨어지면 이러할까?
벼락과 지진, 화염에 혼비백산이 된 에도성은 천천히 선회하여 내려서는 19기의 그리핀을 막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유독 목조건물이 많은 에도성은 불길이 치솟자 순식간에 타올라 불이 번졌다.
타탓.
그리핀 편대는 에도성의 동쪽에 살짝 치우친 넓은 정원에 내렸다. 누가 보더라도 일본풍으로 꾸며진 정원의 가운데 무한의 샘물 항아리가 걸린 호수가 있었다.
"떼어라."
"네! 대왕!"
철두의 명에 눈치 빠른 유격대원 하나가 빠르게 다가가 무한의 샘물을 강탈했다.
"기습이다!"
"적을 주살하라!"
정원의 한편에서 일단의 일본 무사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그 수가 200명가량이었는데 순식간에 19명의 고구려군을 포위했다.
허나, 강철두는 말할 것도 없고, 구정욱을 비롯한 대장들이나 부대장들도 거진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이들이라, 누구 하나 겁먹는 이가 없었다.
"무기를 들고 대항하는 적은 모조리 참하라."
"예! 대왕!"
"명을 따르라!"
고구려 대왕 강철두의 명령에 공적이 절실한 그들이 사납게 일본군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끄아악!"
"크악!"
일반 병졸들 사이의 소드마스터는 그야말로 양 떼에 떨어진 늑대와 다를 바 없어, 종횡무진 누구 하나 막아 낼 수가 없었다.
부하들의 활약을 훑던 철두의 시선은 주위를 휘이 둘러보다 어느 한쪽에 고정되었다.
"이쪽이군."
느껴진다.
이곳 에도성에서 가장 강한 놈들이 몇 모여있다.
지휘관이 있다면 저 무리리라.
파지지지직.
철두의 손에 들린 묠니르가 다시 한번 휘둘러졌다.
꾸아아앙!
묠니르를 한 번 휘둘러 산을 옮겼다는 전설은 허황한 것이 아니었다.
집이고 담이고, 사람이고 할 것 없이 뇌전에 잡아먹혀 증발하듯 사라져버렸다. 뻥 뚫려버린 길을 걷는 철두의 눈에 적 지휘관이 보인다.
전형적인 사무라이 복장을 한 인물.
"네놈이 료냐?"
"...."
시미켄은 떨리는 턱을 숨기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저벅, 저벅.
상대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걸어오고 있었다.
나약한 토끼가 되어 산중 호랑이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294화 정벌 (2)
"나, 나는 에도성의 성주 시미켄이다."
"후후."
철두가 대뜸 투척도끼를 빼 던졌다.
후우웅!
"...!"
시미켄은 순식간에 날아오는 도끼를 보았지만 피할 수 없었다. 독사 앞의 쥐가 되어버린 것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죽는다.'
주마등이 펼쳐진다.
이렇게 가는구나 싶었던 순간.
까앙!
"크윽!"
사토가 나타나 투척도끼를 막아냈으나 뒤로 주르륵 밀려나 버렸다.
시미켄은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온 사토의 등을 보았다.
"...사토 대장?"
"입 닥치고 있어라."
사토는 여유가 없었다.
그가 모시는 대왕 강철두가 어찌 행동할지는 그도 확신을 가질 수 없었으니.
그저 최대한 살려보고자 시도해볼 뿐이다.
"호오!"
철두는 자신의 도끼를 막아선 사토를 보며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어디 갔나 했더니 여깄었네."
"대왕이시여!"
철두는 여유롭게 웃으며 다가섰다.
그의 뒤에는 언제나처럼 아르엘라가 뒤따랐다.
"후후후."
철두의 걸음이 엎드린 사토의 앞에 다다랐다.
검을 빼들어 내리치면 목이 닿을 거리.
"이유가 그럴듯해야 할 게야."
"이자는 제가 특전대를 이끌 당시 부하였습니다. 료와는 달리 명에 충실한 군인일 뿐이옵니다. 자비를 베풀어 목숨을 구원해주신다면 훗날 크게 쓰일 것이옵니다."
"그게 전부인가?"
쿠웅!
사토가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이마가 깨져 피가 줄줄 흘러 바닥을 적셨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견마지로를 다 하겠다더니, 주인을 향해 짖는구나."
쿠웅.
사토가 다시 머리를 바닥에 찧고 처분을 기다렸다. 자신은 할 만큼 다 했다. 이러고도 철두가 시미켄을 참한다면 더는 막을 방법이 없다.
철두의 시선이 사토의 뒤에 서 있는 시미켄에게로 향했다.
"이름이 뭐냐?"
"고, 곤노 시미켄이오."
"항복할 테냐?"
"...."
시미켄의 떨리는 눈동자가 주변을 훑어봤다.
성난 고구려의 무사들은 막부의 군인들을 양 떼 몰듯이 하고 있고, 여기저기 눈에 보이는 건물들은 죄다 불타고 있다.
더 저항해봐야 무엇할까?
전투? 전쟁?
이것은 재앙일 따름이다.
사토 키요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전쟁은 끝났다.'
결코 허언이 없었음이 분명하다.
털썩.
시미켄이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료 막부의 에도 성주 곤노 시미켄이 항복을 청합니다."
"후후, 포로들을 포박해라."
"...하잇."
시미켄은 벌떡 일어서 뒤에 대기 중인 특전대를 향해 소리쳤다.
"무기를 버리고 전원 투항하라!"
"...하잇!"
상부에서 무조건적인 항복을 결정했다 하더라도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따르는 건 아니었다.
"뭐? 침입자가 고작 스물도 안 된다는데 안 싸워?"
"칙쇼! 겁쟁이가 따로 없군."
"다들 성이 불타는 걸 보고도 모르는 거야?"
"어이, 어이. 그놈도 마력이 무한대는 아닐 거 아냐? 꺾이지 않으면 기회는 온다."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도 있었고, 서둘러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는 이들도 있었다.
에도성은 큰 도시고, 고작 19명으로 성을 장악하기엔 터무니없이 모자랐다.
더군다나 툴룬 공작 가문의 병력들과 기사들도 여전히 많아, 여기저기 항복하는 자들과 끝까지 저항하는 이들로 인해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종래에는 시미켄이 이끄는 부대가 강제로 아군을 공격해 항복을 종용하니, 적의 침입인지 내란이 일어난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민간인들은 화재를 진압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철두는 그 지옥의 한가운데 서서 묵묵히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토."
"네, 스승님."
"잘 수습해야 할 거야."
"시미켄이 적임자입니다."
"난 그놈 몰라."
"...."
"너는 알지."
"헛, 미,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토가 감격해 고개를 숙였다.
전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밀어준 꼴이 아닌가.
두두두두.
곧 매캐한 연기를 뚫고 열기의 기마대가 도착했다. 뉴아 요새에서 출발한 고구려군의 선발 전령들이었다.
"대왕님께 보고드립니다! 김춘배 대장이 이끄는 마적대가 곧 도착합니다."
문경 성에 파견되었던 마적대는 아이언헤드 성이 공격당했다는 소식에 서둘러 수도로 복귀하다가, 중간에 또 강철두의 복귀에 이쪽으로 오고 있는 중이다.
"보고! 문경 성 주둔 4천 병력이 1시간 뒤 도착합니다."
"보고드립니다! 공격대와 유격대, 특작대가 박준필 사령관의 부대와 합류, 현재 뉴아 마을을 목표로 행군 중입니다."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절대적인 힘을 가진 개인이 일으킨 전과는 놀랍긴 하지만, 혼자서 모든 것을 통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김춘배가 병력을 이끌고 에도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스스로 포박한 료 막부의 군병들과 툴룬 공작가의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화재는 진압되었으나 에도성 여기저기는 검게 그을려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멀쩡한 건물이 절반도 되지 않아 보였다.
사람들은 철두를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사자처럼 두려워했다.
그리핀을 타고 나타나 번개 줄기를 내뿜으며 도시를 파괴한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정리해라."
"예, 대왕!"
김춘배가 포로들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료 막부 출신의 포로 2458명, 툴룬 공작가의 병력 1749명, 합이 4천이 넘는 포로가 생겨버렸다.
에도성에는 고구려의 깃발이 내걸렸고, 영토가 고구려에 복속되며 다시 월드 메시지가 갱신되었다.
에도성의 존재 때문에 분쟁지역이 되었던 N6140 지역이 다시금 고구려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이제 맵 어디든 세력창으로 조종하고 세금을 매길 수 있게 되었다.
곧 박준필마저 병력을 이끌고 도착하자, 철두는 전후처리를 모조리 그에게 일임해버렸다.
실상 2년 동안 부재중이었던지라, 강철두가 나서서 무언가를 판결하기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소신에게 맡겨주시옵소서!"
박준필은 본디 이런 일에 능해, 곧 포로들의 신상 명세를 하나하나 조사하기 시작했다. 모든 조사가 끝나면 군사재판을 할 예정이다.
에도성에 거주하는 민간인들이라 하여 조사 대상에서 비껴가는 것은 아니다.
"죄의 경중에 따라 벌금을 따로 매겨 스스로 갚게 하겠나이다."
"알아서 하라니까."
"예에, 대왕!"
2년의 전쟁은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이고, 서로 간에 쌓이고 쌓인 원한도 크다.
도저히 용서하지 못할 놈들은 사형으로 다스려야겠지만, 나머지는 죄의 경중에 따라 몸값을 매길 것이다.
아미르 왕국과의 전쟁 중에 사로잡은 포로들을 몸값을 받고 그들 가족에게 팔았듯이, 이들은 그 몸값을 앞으로 벌어 스스로 갚아야 할 터다.
"재판은 시일이 걸릴 일이오나, 에도성의 장악은 사나흘 후면 될 듯싶습니다. 사쿠라시티의 원정은 부디 그 뒤로 미뤄주십시오."
"음, 그렇게 하지."
지금 당장 철두가 쳐들어가 료를 죽이고 도시를 파괴한들 수습할 병력이 여기 묶여 있어서야 어쩔 도리가 없다.
N6140 맵이 평정되었고, 북부의 나트롱 백작도 복속시켰다.
하루 만에 북부와 서부의 전선이 정리되었다.
"기다리는 동안 아미르 왕국이나 단도리 해야겠군."
아직은 충돌이 없지만, 첩보에 의하면 아미르 왕국의 참전 가능성이 존재했다.
그곳만 잘 마무리 지으면 적어도 고구려와 물리적인 국경을 맞댄 모든 지역은 이제 전쟁이 종료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적과 마주하는 국경은 모두가 이용하는 이동마법진뿐이다.
*
에도성에서 아이언헤드까지는 한달음이다.
그리핀을 타고 날아서 30분이면 도착할 만한 거리.
"철두야!"
언제나 철두의 그리핀이 착륙하는 영주성의 옥상에서 김진태가 마중 나와 있었다.
"전쟁 바로 다 끝낼 줄은 몰랐어!"
"후후후."
철두는 괜히 팔을 들어 이두박근을 자랑해주었다.
"이제야 진짜 집에 돌아온 것 같군."
"하하, 내려가자. 저녁 먹자."
"아직 안 먹었냐?"
"같이 먹으려고 기다렸지!"
아이언헤드 성에는 고구려의 모든 정보가 모인다. 벌써 철두의 활약상과 나트롱, 에도성이 넘어온 것은 고구려 전역에 전해졌다.
미궁에서 돌아온 뒤 곧장 전장으로 향했으니 이제야 좀 제대로 집에 복귀한 기분이었다.
테이블에 상이 차려지고 익숙한 얼굴들이 저녁 만찬에 초대되었다.
"여어, 여기서 또 보니 색다르군."
"후후, 쿠찌. 은혜를 입었다."
"껄껄, 그리 생각해준다니 고맙구만. 우리 국왕이 들으면 아주 좋아하겠어!"
쿠찌의 옆에는 에르미스도 함께였다.
철두는 고작 열흘 만에 그와 재회하는 것이지만, 그는 무려 2년 만에 강철두를 보는 것이라 얼굴엔 오묘한 감정이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반가움과 안도감이 가장 컸으니.
"에르미스.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다."
"허허, 그게 다 자네가 우리 왕국을 돕느라 그런 것 아닌가? 난 공백을 메우려 최선을 다했을 뿐이야."
"후후, 그래도 드워프들에게는 큰 빚을 졌다."
드워프 왕국이 아니었다면 고구려는 진즉 위태로웠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할배는?"
"기도원에서 쉬고 계셔."
"으음."
당연히 저녁 만찬에 올 줄 알고 따로 찾아가지 않았는데, 이거 저도 모르게 불효하고 말았다.
"모셔 올까?"
"아니다. 배만 채우고 가봐야겠군."
"그렇게 해. 할아버지가 엄청 고생하셨어."
김진태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강용철이 살린 이들만 해도 지난 2년간 수천 명은 되리라.
"대왕이시여."
"오, 용수 어머니."
철두는 박순자를 반갑게 맞이했으나, 그녀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료 막부를 징치하러 출병하실 적에 부디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음? 굳이 그 험한 델 뭐 하러?"
"아, 철두야."
김진태가 얼른 다가와 귓속말했다.
"기용수 수비대장, 이번에 전사했어."
"허! 용수가?"
"...그래."
철두가 다시 박순자를 바라보니, 눈물이 말라버린 눈망울엔 정제된 분노가 가득하다.
"나흘 후 출병할 테니 같이 가죠."
"예에, 대왕님. 그리고 말씀을 편히 해주십시오."
"에이, 용수 어머니면 우리 어머니나.... 아니다. 그렇게 하마."
"예에, 대왕."
만찬에 모인 이들만 서른이 넘는다.
공적인 자리라 해도 무방하니, 그냥 그러려니 했다. 평등이나 장유유서를 들먹이는 것도 우습다.
"다들 고생했다! 아직 사쿠라시티와 툴룬 공작 가문이 멀쩡하다만, 곧 끝날 일이다."
"우오오!"
고구려의 대왕 철두가 돌아왔다.
이제 전장은 고구려의 영토가 아니라 적의 영토가 될 것이다.
한창 먹고 마시는 연회가 이어지는 가운데, 병사 하나가 달려와 재상 김진태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보고드립니다. 아앗!"
병사는 아차 싶었는지 다시 강철두를 향해 고개를 숙이곤 말했다.
"대왕! 보고드립니다. 현재 아미르 왕국에서 온 사절단이 급히 대왕 폐하를 알현하길 청하고 있사옵니다."
"음? 아미르?"
아이언헤드 성과 문경 성의 인장은 철두가 가지고 있기에 영주 전용의 이동마법진을 사용해 언제든 적은 주화로 오고 갈 수 있었다.
"후후, 잘됐군. 데려와라."
"예에, 대왕!"
곧 저녁 만찬이 벌어지는 연회홀에 세 사람이 들어섰는데, 그 선두에 선 자는 철두에게도 낯이 익은 자였다.
"고구려의 대왕을 뵙사옵니다!"
"아미르 재상이던가?"
"예에, 폐하! 소인은 아미르의 재상 투헬입니다."
"그래, 무슨 일인가?"
"폐에하아아! 세간에 흉흉한 소문이 돌아 오해를 바로잡기 위하여 왔사옵니다."
"오해?"
철두가 피식 웃었다.
이놈들, 도둑이 제 발 저려 찾아왔구만.
295화 전쟁의 끝
투헬 공작은 세상 억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미르 왕국은 그동안 내전으로 너무나 힘겨운 날을 보냈사옵니다. 대왕과의 약조는 한시도 잊은 적이 없사오나, 상황이 부득이하여 미룰 수밖에 없었나이다."
"호오. 그래서?"
"이번에 내전이 종식되며 상황이 나아진바, 그간 약속을 지켜내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남아 급한 대로 그간 내지 못한 공물을 들고 왔나이다."
"후후, 뭘 가져왔나?"
"그리핀과 마석, 금과 철괴이옵니다. 내전으로 인해 식량 수급이 좋지 않아, 그에 상응하는 보석과 주화로 셈을 하여 그것도 들고 왔나이다."
철두가 흡족히 웃었다.
"내가 오해할 뻔했군."
"아이구, 소신의 불찰이옵니다. 거듭 사신을 보내 양해를 구했어야 하온데, 사정이 너무 급하여 이제사 찾아온 것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난 또 내가 없는 사이 간만 보다가, 이번에 제국을 등에 업고 뒤통수치려는 건 아닌가 했지 뭐야?"
"아이구!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럴 리가요! 본국의 국왕께서는 더는 제국에 공물 또한 바치지 않으리라 고민하고 계실 정도입니다."
아미르 왕국은 현재 제국의 속국이다.
매해 세금을 바치는 제후국인데, 그 관계를 끊어내면 필시 보복이 따를 터.
"...해서 국왕께서는 고구려의 대업에 동참할 뜻을 내비치고 있사옵니다."
"아예 고구려에 붙겠다?"
"예에! 대왕."
철두가 히죽 웃었다.
"굳이?"
"하나만 약조해 주시옵소서!"
"무엇을?"
"아미르 왕국의 오랜 소망은 독립이옵니다. 훗날 고구려의 이웃으로 남을 수 있겠사옵니까?"
철두의 얼굴에 흥미로움이 가득했다.
드센 사자가 군림하는 정글에 이제 겨우 아기호랑이가 도전장을 내미는 형국이다.
'그 사이에 끼어서 기회를 보겠다?'
철두가 히죽 웃었다.
"아미르 왕국다운 처신이군."
"...."
투헬 공작은 긴장으로 침 넘기는 것조차 삼가며 철두를 주시했다.
"그냥 이참에 아미르 왕국을 복속시키는 건 어찌 생각하나?"
"...소신이 실언했나이다!"
투헬 공작이 넙죽 엎드렸다.
고개를 조아리고 청하니 연회홀이 쩌렁쩌렁 울렸다.
"이미 결과에 승복하고 고개를 숙이기로 하였사온데, 내전으로 인해 이제야 청하니, 왕국을 존속게만 해주시옵소서."
"흐음."
"아미르 왕가는 고구려의 든든한 제후국이 될 것이옵나이다! 부디 제국의 노여움을 막아주시옵소서."
투헬 공작의 말이 끝나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아미르 가문이 복속을 청합니다.>
아무렴 이대로 왕국이 찢어져 고구려에 흡수되느니, 왕가를 유지하며 왕국의 틀을 유지한 채 제후국이 되는 것이 백번 낫다.
아미르 왕국의 가장 큰 불행은 하필이면 고구려가 그들의 영토 바로 옆에 자리 잡았음이다.
적대하기에는 너무나 강력하고 위험하니, 결국 선택지는 이웃이 되는 것뿐이다.
적으로 두고 수시로 수탈당하느니, 제후국으로 약속된 공물을 바치는 것이 백번 낫다.
"이건 아미르 국왕의 뜻인가?"
"그렇사옵나이다! 내전의 종식에 크게 상처 입어 현재 거동이 불편하여 부득이 소신이 사신단을 이끌고 왔을 뿐이옵니다. 모든 권한은 이양받았으니, 이것은 한치의 다름도 없는 아미르 국왕의 뜻이옵니다."
"후후, 좋다. 받아들이지."
"감읍하나이다."
투헬 공작이 고개를 조아리며 진심으로 안도했다.
이미 지난 전쟁에서 강철두의 무서움은 잘 겪은 그들이다. 혹시나 이번에 복수할 수 있을까 기대해봤지만 무용지물이었다.
'툴룬 공작가도 별수 없다.'
괜히 그들을 믿고 나섰다가 낭패를 볼 뻔했다.
고구려와 척을 져서는 안 된다.
아미르 왕국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제국을 손절하고 고구려에 아예 붙기로 결정했다.
아직도 국왕은 강철두를 불편해했으나, 지난 내전으로 인해 그 분노는 제후들로 옮겨간 상태다.
2년 전에 날 때렸던 동네 형보다, 오늘까지 치고받고 싸운 형제가 더 미운 격이다.
"왕국령을 그대로 공국에 임하지."
"고구려 대왕님의 아량에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아미르 가문이 고구려에 귀부했습니다.>
<아미르 가문을 공왕에 봉합니다.>
<아미르 공국을 제후국으로 복속합니다.>
철두는 다시금 차오르는 고양감에 몸을 잘게 떨었다. 나트롱 가문을 복속할 때보다도 월등한 크기의 증가치다.
두 제후를 두었는데, 벌써 강철두는 하루 전과 비교해 터무니없을 정도의 강력함을 얻었다.
그와 동시에 깨닫는 게 있었다.
'황제 녀석도 정복자 특성을 꺼놨군.'
확실했다.
두 가문을 정복한 철두가 이러할진대, 수십 수백 가문의 충성을 받고 있는 황제가 겨우 그 정도의 신위일 리가 없다.
터무니없는 황제의 강함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호승심이 피어올랐다.
'기다려라.'
도전을 환영한다고?
그 말을 반드시 후회하게 해주겠다.
"후후후."
철두의 스산한 웃음에 투헬 공작이 몸을 떨었다.
"재상."
공적인 자리기에 철두는 직책으로 불렀다.
"예, 대왕."
김진태도 포권하듯 깍듯이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서로가 바라보는 눈빛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입술이 씰룩거리는 것이 겨우 참고 있으나 두 사람 모두 실없이 웃음이 났다.
"사신을 잘 대접해 보내시게."
"대왕의 명을 받잡습니다."
"후후."
철두가 손짓하자 투헬 공작이 인사 후 물러났다.
십년감수한 표정의 그는 조금만 더 늦었다면 아미르 왕국이 사라질 수도 있었음에 가슴이 철렁했다.
한참 만에 돌아온 김진태는 철두의 옆에 앉아 히죽 웃었다.
"쟤들 급하긴 엄청 급했나 봐. 그리핀이 52마리에 마석이 한가득이다. 다른 보물은 말할 것도 없고 주화도 920만 주화나 가져왔어."
"후후, 2년 동안 안 보냈으면 그 정도 성의는 보내야지."
"그렇기야 하지. 아 맞다. 너 기차 못 봤지?"
"기차?"
"흐흐, 신서울에서 여기까지 이틀이면 간다."
"오! 어딨냐? 기찻길 같은 건 못 봤는데."
"신서울에서 포멜 마을까지 이어져 있어."
"지금 가보자!"
"에이, 늦었어. 내일 가."
"흐으으음."
철두의 콧구멍이 벌름거렸다.
지금 당장 보고 싶었지만 진태의 다음 말이 그를 붙잡아뒀다.
"할아버지나 보러 가. 너야 열흘 정도지만 우린 2년이나 기다렸어."
"아!"
"아는 무슨 아야. 얼른 가봐."
"후우, 알겠다. 기차 구경은 차라리 전쟁을 다 끝내고 와서 하겠다."
"으음, 그래. 너한테 보여주고 싶은 것도 많은데, 차라리 그게 낫겠다."
"기차 말고 뭐가 더 있나?"
"군사용이긴 하지만 모든 성이랑 마을에 전화기 깔렸어."
"오!"
"흐흐, 이제 정말 직할령 다스리는 건 문제도 아냐."
"후후, 고생 많았군."
"연구원들이 고생하셨지."
2년간 전쟁만 한 게 아니다.
군사용 목적이긴 하지만 물류, 통신을 중심으로 마법과 과학이 합쳐진 문명의 발전이 눈부신 수준이었다.
"후후, 기대하마."
철두는 진태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모임을 파했다.
아리아 여신의 사원은 전쟁 전에 비해 두 배는 더 커졌는데, 사제도 많아지고 기도하러 오는 신도들도 많다고 했다.
"대왕을 뵙습니다."
"할배는 어딨나?"
"대사제님께서는 기도원에 계십니다."
"그래."
잘 꾸며진 정원을 가로질러 확장하기 전부터 기도원으로 기능하던 건물로 들어갔다.
중앙엔 기둥과 천장뿐인 뻥 뚫린 제단이 있었고, 강용철은 그곳에 앉아 고개 숙이고 있었다.
"할배."
"그래, 왔나?"
"어, 왔다."
철두가 할아버지의 옆에 다가가 털썩 앉았다.
고개를 들어 제단을 보아봤자 여신이든 뭐든 알 수 없다.
다만, 철두는 '여신의 눈물'이란 펜던트로 여러 번 신성치유를 발휘해 도움을 받았기에 아리아 여신에 대한 호감이 컸다.
"고맙다. 아리아."
따악!
"하이고, 먼 등짝이 쇳띠 같노. 여신님이라 캐라."
"후후, 당사자도 뭐라 안 하는데 왜 그러나?"
"허이구, 그래 버릇없이 굴면 이 할배가 욕 묵는 기다."
강용철이 가정교육이니 뭐니 한참을 잔소리해대자 철두도 항복하고 말았다.
"알겠다. 알겠어. 여신님, 그동안 고구려 돌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캐야지!"
"감사합니다."
"...."
"...."
갑자기 찾아온 주제의 공백에 침묵이 감돌았다.
열흘 만에 보는 할배와 2년 만에 보는 손자다.
침묵은 그 간극만큼이나 무겁게 내려앉았다가 대수로울 것도 없이 사라졌다.
"밥은 뭇디나?"
"먹었지."
"인자 어지간하면 어데 가지 마라."
"후후후, 그럴 수야 없지."
전사는 빈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사람들이 니한테 의지 많이 하고 있는 거 알제."
"안다."
"...우리 손주 어깨가 무거버가 우야노."
강용철이 철두를 안아주었다.
"할배, 힘들었나?"
"내사 힘들게 뭐 있노. 네가 걱정돼가 글치."
"후후, 할배. 나보다 강한 사람은 없다."
"그래가 카는 기다. 그래가."
강용철이 철두를 안아줬으나, 덩치가 워낙에 차이가 나다 보니 철두의 목에 매달린 모습이었다.
"하이고, 우리 손자...."
강용철은 감정이 북받치는지 눈물 콧물을 흘렸다. 강철두는 그저 할아버지를 다독여 주었다.
"울지 마라, 할배."
"얼매나 짐이 무거울꼬, 얼매나...."
남자는 책임감이라지만 이 많은 사람들이 강철두만 바라보고 있다.
고구려의 철두 의존도는 사실상 자립이 불가능할 정도였으니, 할아버지 강용철로서는 고구려의 일원이 아니라, 손자 강철두의 할아버지로서 걱정과 안쓰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작던 아이가 언제 이만큼 컸는지 대견하기만 했다.
"걱정 마라. 전사에게 명예와 책임감은 숙명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전장에서 도망치기만 할 뿐이니까.
철두는 흐느끼며 우는 할배를 한참 다독여 주었다. 그가 부재중인 사이 할아버지가 참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세상사, 일방적으로 기대고 사는 건 없으니까.
*
사쿠라시티.
일본 정부에서 주도해 키운 가장 큰 개척마을이었던 이곳은 인구 10만이 넘는 일본인들이 터를 잡고 사는 대형 도시가 되어 있었다.
사쿠라시티를 중심으로 뻗어나간 거점 마을과 개척마을들이 30개나 되는 거대한 영토.
사쿠라시티를 이끄는 세력은 '료 막부.'
지구와 통하는 포탈이 사라지고, 사토 키요시가 일본인들의 덕망을 잃어버릴 때쯤 특전대 부대장 료는 이를 파고들어 권력 쟁취에 성공했다.
더는 일본 정부의 개입이 없어진 이상, 가장 강력한 무력 집단 특전대와 군대만 장악하면 사실상 권력을 쥐는 것이나 다름없다.
무력이 권력이 되는 시대.
전쟁은 그 자체로 훌륭한 정치적 수단이 되어 막부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해줬다.
툴룬 공작 가문의 부추김으로 시작된 전쟁이지만, 표면상으로는 료 막부에 의한 전쟁.
"칙쇼!"
이제사 발을 뺄 수도 없다.
"보고! 에도성이 떨어졌습니다."
"보고! 나트롱 백작 가문이 등을 돌렸습니다."
"보고! 아미르 왕국이 고구려의 산하로 들어갔습니다."
암울한 소식뿐이다.
료는 전령들이 보고하러 올 때마다 신경쇠약이 걸릴 것만 같았다.
"젠장! 젠장!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이냐!"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강철두를 사냥할 수 있다고 자신했던 툴룬 공작 가문에 따질 수도 없다.
그들보다 사쿠라시티의 세력이 약해서도 아니다.
"보고! 툴룬 공작 가문의 생존자들이 망명을 청했습니다."
어젯밤 툴룬 공작성이 불타며 무너졌다.
공작을 비롯한 기사들과 병사들이 증발하듯 사라져버렸다.
오직 한 명에 의해.
"젠장, 젠장!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게야!"
노바.
이 세상은 미쳤다.
대체 황제가 어째서!
어째서 적국인 고구려를 치지 않고 제국 귀족인 툴룬 가문을 멸문시킬 수가 있단 말인가?
"보고! 이동마법진에 고구려 대왕 등장!"
"칙쇼오오오!"
저승사자가 다가오고 있다.
296화 복수의 시작
이동마법진을 타고 고구려의 병력들이 속속 집결했다.
"대왕! 공격대 490명 전원 집결 완료했습니다."
구정욱의 공격대가 선발대로서 먼저 와 자리를 잡았다. 2년의 전쟁 동안 모병이 꽤 이뤄져 모든 부대의 정원이 늘었다.
한 집 건너 한 집에 군인이 있을 정도이니, 고구려에서 가장 흔한 직업이 군인이었다.
"대왕, 친위대 17명 전원 집결했습니다."
그동안 고구려의 대왕 강철두가 부재중이라 친위대는 늘 수도를 지키는 방위 임무에 치중했다.
지난번 아이번의 습격에 상당수의 친위대원들이 사망해, 생존자는 겨우 17명.
이은영이 이끄는 친위대는 모두 눈빛이 형형했다. 선배가, 후배가, 동료가 죽었다.
그들이 언젠가는 부활한다고 하더라도, 언제가 될지 기약할 수 없는 일.
17명의 친위대원들은 하나하나가 비장했다.
여기에 아들 기용수를 잃은 박순자까지 더하니, 이은영이 통솔하는 부대는 18명.
"좋아. 일단 저기 점령한다."
"예, 대왕."
철두가 이동마법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거점을 가리켰다. 역참처럼 마구간이 크고, 망루 두어 개가 달린 모습의 작은 요새였다.
"얘들아, 가자!"
"우오!"
오우거 부대라는 별칭답게 공격대는 여타의 다른 전략 전술보다 기마 돌격을 극한으로 수련한 이들.
오우거스킨을 통해 강화된 방어력 덕에 갑옷은 부대 중 가장 얇고 가벼운 차림이지만, 말들에게 씌운 마갑은 어느 부대보다 더욱 두텁고 무거운 부대.
그들이 일제히 달려 나가 거점을 점령했다.
"진을 꾸려라."
"진을 꾸려라!"
명령이 퍼져나가며 여기저기 막사가 펼쳐지고, 뒤이어 부대들이 속속들이 합류했다.
"대왕! 유격대 1270기. 전원 집결 완료했습니다."
"수고했다."
"예, 대왕!"
"별동대 2100인. 집결 완료했습니다."
"오랜만이군, 제임스."
"예, 대왕."
제임스가 씩 웃었다.
아미르 왕국과의 무력 충돌을 대비해 문경 성에 주둔 중이던 그가, 병력을 이끌고 합류했다.
"신 탕아후루! 대왕님을 다시 뵈오니 감개가 무량하옵니다! 탕아대 5200명. 전원 집결했습니다."
"후후, 그래. 저기 진을 꾸려라."
"명을 따르옵니다!"
아미르 왕국 출신의 항복한 병사들이 주축으로 만들어진 탕아대는 독립부대 중에 가장 그 수가 많았다.
"한양 수비대 800기. 지금 막 당도했나이다!"
"정 대령, 오랜만이군."
"예에, 대왕!"
정윤승 대령이 전신 내금위부대인 한양 수비대를 이끌고 합류했다.
그 뒤로도 병력들이 속속 합류했는데, 오준환의 특작대 740명, 박준필이 이끄는 중앙군 3000명도 함께였다.
거기에 김춘배의 마적대 1920기까지.
신서울 북부를 방위하고 있는 김도진의 어림군을 제외하고는 전 병력을 집결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동맹으로 파견 나와 있는 드워프 부대는 혹시 몰라 아이언헤드 성에 주둔하는 중이고, 요정 에그니스 또한 요양 중이다.
아르엘라도 이번엔 참전하지 않고 성에 머무르며, 에그니스를 돌보는 중이다.
고구려의 병력 외에 참전한 병력도 있었으니.
"대왕! 이렇게 다시 뵈오니 영광이옵니다."
"이, 뭐였지?"
철두는 덩치 큰 사내의 얼굴이 낯익었다.
"이덕근입니다. 대왕."
"그래, 덕근이."
"용전마을 출신들이 은혜를 갚고자 하오니, 부디 참전을 허락해주시옵소서."
흑마법사의 공격으로 가장 먼저 타격 입은 용전마을이다. 오래도록 고구려에 귀속하지 않고 독자적인 생존을 꾀하던 그들이었으나, 구울 사태로 인해 더 이상 자립이 어려웠다.
고구려에서 쉬이 망명을 받아줬다지만, 군식구처럼 굴 수는 없는지라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고 당당한 고구려의 국민으로 자리 잡고자 했다.
"병력은 몇이냐?"
"331명이옵니다."
"용전대로 부르지. 휘장은 있나?"
"있사옵니다."
이덕근은 이 기회를 놓칠세라 서둘러 본래 휘장의 이름을 바꿔버렸다.
<용전대가 휘하에 들기를 청합니다.>
"받아주지. 공을 세우면 정식으로 편제해주겠다."
"충심으로 따르겠습니다!"
이덕근의 뒤로 참전한 군사들이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나트롱 백작에게 고용되어있던 바바리안 기사 지르골이었다.
"나를 받아주시오."
"...."
철두는 부대원 없이 홀로 온 지르골을 보았다.
넙죽 무릎 꿇고 고개를 숙이는 그를 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너는 나트롱의 봉신이 아니냐?"
"봉신은 깨어졌소."
"가벼운 놈이구나."
"간곡히 청해 해지했을 뿐이오."
"왜 내게 온 것이냐?"
"나는 성정이 포악하고 잔인해 부족을 꾸릴 그릇이 못 되오."
철두가 흠칫 놀랐다.
메타인지가 이리 뛰어난 바바리안이었던가?
"이왕지사 개처럼 쓰인다면 당신의 개가 되겠소."
"호오."
철두는 흥미가 동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목숨을 걸고 싸웠던 동족이다.
"왜 나더냐?"
"흐흐, 제국의 개보다는 제국을 잡아먹는 개가 더 먹을 것이 많지 않겠소?"
"미친놈이로군."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씩 웃었다.
"네 목줄을 내가 쥐지."
"나를 가장 위험한 전장에 내보내 주기만 하면 되오."
철두는 다리를 들어 지르골의 머리를 밟았다.
콰직!
"크윽."
두꺼운 신발에 뒷머리가 눌려 흙바닥에 얼굴이 닿은 지르골은 바둥거렸으나 벗어날 수 없었다.
"지르골."
"...예에."
"건방지구나."
철두가 지르골의 목을 더욱 세게 내리눌렀다.
"끄으."
"내가 명하면 너는 따르면 그뿐이다."
"예에, 대왕."
철두가 그제야 발을 풀어주었다.
"널 나의 결사대로 삼겠다."
철두가 인벤토리에서 휘장 하나를 꺼내 활성화해 하사해주었다.
<결사대를 신설하였습니다.>
"너는 내가 가는 전장에 늘 함께할 것이며, 끝까지 싸우게 될 것이다."
"...바라던 바입니다."
피와 살육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노바로 이주해오며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서이니.
"바바리안의 긍지를 찾는 부대가 될 것이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발할라 행성이 멸망하며 노바에 안착.
어찌저찌 살다가 나트롱 백작 가문의 식객이 되어 기사 작위를 받고 호의호식하던 잔인한 개가 다시금 전사를 꿈꾸기 시작했다.
"후후, 기대하지."
"예, 대왕!"
부족에 처음으로 바바리안 부하를 두었다.
무언가 감회가 새로운 기분이다.
"사토."
"하잇!"
"너 또한 결사대다."
"하! 명을 따릅니다."
호위처럼 따라다니던 사토 키요시가 깍듯이 대꾸했다. 결사대는 이제 강철두가 가면 어디든 따라다니는 두 자루 보검이 될 것이다.
동료가 된 지르골과 사토는 서로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보이지 않는 경쟁심과 살기를 느끼며 철두는 비죽 웃었다.
진짜 전사들로만 이뤄진 부대라면 응당 저 정도 호승심은 있어야지.
병력들이 오고 가는 빛으로 이동마법진이 쉴 새 없이 번쩍이고 있었다.
총 16000명에 이르는 대규모 군대다.
드넓게 자리 잡은 막사가 가득하다.
벌써 여기저기 척후를 돌리기 시작하며, 군진의 중앙엔 커다란 막사가 채워지고 모든 지휘관들이 소집되었다.
즈아앙.
철두가 홀로그램 맵을 띄웠다.
월드맵 특전을 가진 고구려의 병력들이 정찰하면 할수록 홀로그램 맵에 표기된 지역이 실시간으로 넓어지고 있었다.
"준필이."
"예, 대왕."
"시작해라."
"예에."
박준필이 나서서 지휘봉으로 맵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아군을 나타내는 초록색 점이 빼곡하게 자리한 부분이다.
"우리의 진영이 지금 여기, 마법진에서 서쪽으로 5킬로미터 지점입니다."
지휘봉이 쭉 더 나아가 빨간 점을 가리켰다.
"서쪽으로 40킬로미터쯤 더 나아가면 사쿠라시티의 거점 마을인 겐지 성이 나옵니다. 보다시피 협곡 사이에 있어 마치 관문과 같은 성이지요."
사쿠라시티가 자리 잡은 N5290 맵은 고구려처럼 평지로 이뤄진 맵이 아니었다.
한도의 지형과 매우 흡사해 여기저기 산지가 많고 분지와 개활지는 아주 적은 면적만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이 N6140 맵에 굳이 진출하려 했던 것도 대규모 농경지를 얻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서쪽으로 더 나아가면 넓은 평원이 있사온데 여기가 사쿠라시티입니다."
맵 중에 가장 좋은 땅을 차지한 사쿠라시티다.
"그리고 사쿠라시티에서 북쪽으로 쭉 나아가면 N90 지역인데, 여기서부터 툴룬 공작 가문의 영역입니다."
박준필의 브리핑이 끝나자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늘은 이곳에서 숙영한다."
"겐지 성의 공략은 내일부터입니까?"
"굳이 그럴 필요 없다. 공격대와 유격대가 나서라. 겐지 성을 함락해 길목을 확보한 후 그곳에서 숙영해라."
"예, 대왕!"
"지금 바로 출발합니까?"
"후후, 밥은 먹고 가라."
"와하하하."
철두의 말에 지휘관들이 왁자하게 웃었다.
승기가 확실한 전장이다.
분위기가 여유롭고 가벼울 수밖에 없다.
그걸 우려했는지 박준필이 나섰다.
"제장들이 자신감을 가지는 것은 좋으나, 방심은 금물이오."
철두도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적 계산에 아군의 사상자 비중을 가장 크게 치지."
"헙!"
적을 죽이는 것보다 제 병력을 지키는 게 더 중해졌다.
이번 전쟁의 공적에 따라 철두가 가진 영약을 하사한다 했기에 부대장들의 사기는 드높았다.
"보고드립니다! 료 막부의 사신이 왔사옵니다!"
"데려와라."
"예에!"
흰 깃대를 멘 사신이 왔는데, 차려입은 갑옷이 사무라이의 그것이라 신분이 낮아 보이지 않았다.
호위로 데려온 자들도 모두 갑옷을 챙겨입은 사내 다섯이라, 혹시 모를 암습인가 싶어 부대장들이 저마다 살벌하게 그들을 노려봤다.
"꿇어라!"
구정욱의 서슬 퍼런 음성에 사내들은 깜짝 놀라 넙죽 엎드렸다.
선두에 엎드린 자가 말문을 열었다.
"료 막부 산하, 겐지의 다이묘 나카무라와 제 막하의 사무라이들입니다. 고구려의 대왕님께 인사드립니다."
료는 본인이 쇼군이 되며 개척마을을 봉읍으로 삼아 다이묘(영주)를 임명했는데 나카무라는 그중 하나였다.
"겐지 성의 성주라면 곧 있을 전쟁에 대비해 방어나 할 것이지, 여기까지 무슨 일이냐?"
"소, 속하 고구려에 귀부하려 하오니, 받아주시옵소서."
"후후후."
철두가 히죽 웃었다.
"어이없는 놈들이군."
철두가 슥 일어서 항복을 청해온 다이묘 나카무라의 앞까지 걸어갔다. 그의 뒤로 지르골과 사토가 서로 충성 경쟁이라도 하듯 재깍 뒤따랐다.
"주인 없는 집에 쳐들어와 난장을 부려놓고, 그 값을 물으러 오니 대뜸 용서를 구하는구나."
"쇼, 쇼군의 명을 어찌 거부하겠나이까? 부디 살길을 열어 주시옵소서!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너도나도 개를 청하니 개 짖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구나."
철두는 크게 웃었다.
괜히 사토가 멋쩍어하는데 철두가 명을 내렸다.
"베어라."
콰직!
철두의 명이 떨어지기만 기다렸는지, 지르골이 도끼를 빼 들고 나서 단번에 머리를 찧어버렸다.
"으흐흐."
지르골은 오랜만의 살육에 기뻐하며 나머지 사무라이들도 순식간에 처형했다.
"정욱이, 준필이."
""예, 대왕!""
"가서 겐지 성을 확보해라."
"예, 대왕!"
"출진을 명 받잡습니다."
공격대와 유격대가 즉시 출진하며 전쟁이 시작되었다.
친위대의 무리에 끼어 가만히 상황을 예의 주시하던 박순자는 조마조마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로구나.'
대왕님께서 저들의 항복을 받아줄까 봐 마음 졸였다. 다행히, 복수의 칼날을 빼어 들 수 있게 되었으니....
내일 이 검으로 아들의 원혼을 달랠 것이다.
297화 발악
사쿠라시티 료 막부.
"뭣이라!?"
쇼군 료는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마, 만?"
"만 오천 정도로 보인다 하옵니다."
"이런 미친놈들을 보았나!"
엄청난 대군이다.
그들이 닌자의 첩보로 끌어모은 정보에 의하면, 거의 고구려의 정규군을 모두 끌어모으다시피 한 숫자가 아닌가?
숫자만 중요한 게 아니다.
강철두.
고구려의 대왕이 직접 행차한 것이 더욱 중요했다.
그에 모인 특전대 사무라이들이 설왕설래했다.
"스, 승산이 없습니다."
"어이, 그게 사무라이로서 입에 담을 소리냐!"
"툴룬 공작가마저 풍비박산이 나버린 지금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쇼군 료가 침묵했다.
사무라이들의 논쟁을 내버려 두며 거듭 고민했다.
'나라고 별수 있는 게 아니잖아?'
어쩔 도리가 없다.
질 것이 뻔한 싸움에 무모하게 나서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막부의 희생을 막기 위해.
'그래. 조국의 국민들을 위해서다.'
언제 어느 때나 늘 그렇듯 통하는 대의를 품으니 옹졸함이 옅어졌다.
사무라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다고 다 죽일 셈인가!"
"어허! 방금 뭘 들었나? 겐지의 다이묘가 항복을 청했다가 단칼에 목이 달아났어!"
"허, 항복을 하자는 게 아니야!"
"싸우지 말자는 게 항복하자는 것과 뭐가 다른가?"
"실상 전쟁을 부추긴 건 전부 툴룬 공작 가문이 아닌가?"
료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만!"
"...."
료의 호통에 제각각 떠들던 사무라이들이 자세를 바로 하고 앉으며 고개를 숙였다.
"요이치. 다시 말해보라."
"전쟁을 부추긴 건 툴룬 공작 가문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툴룬 가의 생존한 직계들이 망명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을 바쳐 고구려 왕의 노여움을 달래시지요."
료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턱을 쓰다듬었다.
긍정의 표시다.
그에 눈치 보던 사무라이들이 너도나도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쇼군! 우리가 모두 지구라는 한배에서 나왔는데, 저들도 매몰차게 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한국과 일본은 미국과 동맹국이지 않았습니까?"
"이웃끼리 항상 다툼은 있었지만, 한국과는 본래 그렇지 않았습니까."
"제장들의 생각은 그러한가...."
여지를 주는 듯한 료의 말에 눈치 빠른 사무라이들이 나섰다.
"대의를 위해 굴욕을 감내해야 하옵니다."
"치욕은 한때이나 시민들은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불충한 청이오나 결단을 내려주시옵소서."
"쇼군!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사무라이들이 무릎 꿇은 상태에서 주먹으로 바닥을 짚으며 엎드렸다. 저마다 쇼군을 향해 비통한 얼굴을 하고 결단을 촉구하니 마침내 료가 입을 열었다.
"내 잠깐의 굴욕으로 시민들을 살릴 수 있다면 무엇을 주저하리? 제장들의 의견을 받아들이겠다."
"크윽, 고통스러운 결정에 감읍합니다."
"소장, 막부의 운명과 함께할 것이옵니다."
"쇼군을 죽어서까지 따르겠습니다."
료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요시!"
벌떡 일어서 비장하게 명령하니.
"항복 사절을 보내라!"
"하잇!"
곧 백기를 든 사신이 달려 나갔다.
사쿠라시티에서 적들이 함락한 겐지 성까지는 말을 타고 꼬박 하루.
"신 사세키! 사신으로 보내주시옵소서."
"좋다! 사세키. 나의 대승적 결단을 전하고 와라!"
"하잇!"
사세키가 호위 무사 둘만을 대동한 채 바삐 말을 달렸다.
*
겐지 성의 함락은 공성전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아미르 왕국이 부랴부랴 공물을 바치며 가져온 그리핀이 무려 52마리다.
부대마다 충분히 나눠 보급되었고, 이번 전장에 그대로 쓰인바.
협곡 사이에 자리 잡은 적의 관문성은 그리핀을 타고 하늘에서 공격하는 전술에 터무니없을 정도로 쉽게 함락당하고 말았다.
애초에 겐지 성의 다이묘를 죽이고 시작된 전투는 너무 쉽게 끝났다.
유격대와 공격대는 조금의 피해도 받지 않고 겐지 성을 함락, 오히려 너무 많은 포로가 문제가 되었다.
고구려의 약탈 수칙이 그러한지라, 조금의 투쟁심도 없이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는 적을 도륙하지 못하고 모조리 사로잡은 탓이다.
곧 승전 보고가 본진에 닿았고, 이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으나.
"준필이."
"예, 대왕!"
"후방을 맡기지. 앞으로 사로잡는 모든 포로들에 대한 전권도 맡긴다."
"소임을 다하겠나이다."
박준필은 마다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철두가 공적인 자리에서 저들을 참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무렴 정복자의 길을 걷는다지만, 피의 강에 헤매고 싶지는 않았다.
"막부의 백성들은 어찌하오리까?"
철두는 턱을 쓰다듬었다.
"그것도 맡기지. 그대로 두든, 모조리 고구려로 데려가 농사에 쓰든 알아서 하라."
"예에, 대왕!"
박준필은 재상 김진태에게 추가 지원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포로들의 쓰임과 점령지의 백성들을 사민하는 것은 영 다른 성질의 것이다.
다음 날, 날이 밝고 후방을 책임질 박준필의 중앙군만 남기고 모조리 행군을 시작했다.
모두가 말을 탄 기병이면 행군 거리가 월등할 것이나, 안타깝게도 보병들이 많았다.
지구 출신의 병력들은 대부분 기병이었으나, 아미르 왕국군 출신들이 많이 섞인 탕아대에 보병이 많았다.
적들이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니기에 행군은 느긋했다.
사쿠라시티를 향해 나아가길 이틀째.
백기를 든 사신이 다시 찾아왔다.
철두가 부대의 선두로 나아가 그들을 맞이하니.
"신 사세키! 고구려의 대왕을 뵙습니다!"
"무슨 용건이더냐?"
"료 막부는 고구려와의 오해를 풀고자 합니다."
철두가 비죽 웃었다.
"무슨 오해?"
"전쟁의 모든 발단은 실상 툴룬 공작 가문의 계략이옵니다."
"그래서?"
"료 막부는 그들의 외압을 이기지 못하고 감투를 쓰고 전쟁에 나선 것입니다."
"...."
철두가 묵묵히 듣고 있자 사세키는 점점 굳었던 입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해서 모든 전쟁의 시발점이 되는 자, 아룬드 툴룬 공자를 비롯한 툴룬 가문의 생존자들을 생포하여 구금 중이니, 이들을 고구려에 바치겠사옵니다."
"왜?"
"예?"
사세키가 어리둥절해하자 철두의 입꼬리가 더욱 올라갔다.
이거 참 웃긴 놈들 아닌가.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하, 항복하나이다. 료 막부는 고구려 앞에 무조건적인 항복의 뜻을 전하는 바입니다."
"후후후후."
철두의 웃음이 커졌다.
"와하하하하!"
철두가 웃으니, 제장들도 따라 웃었다.
"지르골."
"흐흐!"
지르골이 대번에 나서자 철두가 서둘러 제지했다.
"말은 전해야 하니 주둥이는 남겨두어라."
"예, 대왕!"
촤악!
"끄아아아!"
지르골이 나설 때부터 엉거주춤 뒤로 피하던 사무라이 사세키의 팔이 바닥에 떨어졌다.
"무, 무슨!"
콰직, 콱!
호위로 따라온 무사 둘은 아예 머리통이 쪼개져 그대로 절명했다.
"크으읍."
사세키는 팔꿈치 아래 손이 바닥을 구르고 있음에도 목이 달아날까 무서워 감히 소리 지르지도 못하고, 피가 솟구치는 팔을 부여잡고 있었다.
"가서 전해라."
철두의 목소리가 짐승의 으르렁거림처럼 사세키의 귀에 때려 박혔다.
"살려줄 생각이 없으니, 죽기 살기로 덤비라고."
"...."
사세키가 덜덜 떨고 있자, 도끼날에 흐르는 핏물을 핥던 지르골이 고함질렀다.
"대왕께서 명하지 않느냐!"
"히익, 아, 알겠사옵니다."
"그럼 썩 꺼져라!"
"히이이익!"
"으하하하하!"
지르골의 비웃음에도 사세키는 서둘러 말을 소환해 달아나듯 사쿠라시티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마을이 몇 개냐?"
"최단 거리로 삼아 행군하면 마을 셋을 거치고, 범위를 10킬로미터로 늘리면 마을 여섯을 지납니다."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준섭이, 제임스, 춘배."
""예, 대왕!""
"약탈하라."
""명을 받듭니다!""
"탕후루."
"신, 탕아후루!"
"보급품을 나눈다. 병력의 허리를 맡는다."
"알겠사옵니다!"
유격대, 별동대, 마적대가 가는 길의 모든 마을들을 약탈하고, 탕아대가 그 보급품을 후방으로 인계한다.
겐지 성에 후방주둔지를 차린 박준필의 중앙군이 이를 아이언헤드 성으로 후송한다.
적들이 싸울 생각도 하지 않고 항복이나 구걸하는 상황에서 이미 전쟁은 이겨있다.
고구려 군이 천천히 진군해가기 시작했다.
사쿠리시티의 꽃이 지려 한다.
*
사쿠라시티, 료 막부.
쇼군의 처소에 칩거한 료는 몸을 덜덜 떨었다.
'도망칠까? 도망쳐? 어디로?'
쇼군 료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했다.
항복 사신으로 갔던 사세키가 팔 병신이 되어 돌아온 순간부터 한숨도 자지 못했다.
산중에서 내려온 호랑이가 수많은 사람들을 모조리 제쳐두고 나만을 목적으로 어슬렁 다가오는 기분이다.
심지어 그 호랑이는 느긋하기 그지없다.
사쿠라시티 인근의 마을들을 차례차례 약탈하며 다가오고 있다.
집과 터전을 잃어버린 피난민들이 모조리 사쿠라시티로 몰려왔다.
그들은 목숨을 구하러 사쿠라시티로 피신했으나, 홀몸으로 온 것이 아닌 두려움과 패배감을 함께 몰고 왔으니 도시의 분위기는 날이 갈수록 흉흉했다.
피난한 주민들도, 도시의 주민들도 모두 료 막부가 지켜줄 것이라 믿었다.
허나, 칩거한 료는 특전대 부하들에게 도시 수비를 그저 일임해버렸다.
말이 일임이지, 손을 놓아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장 위에 자리한 수장이 저러하니, 그 아래 특전대라고 어디 사기가 높을까?
너도나도 목숨을 바쳐 따르고자 했던 그들은 슬슬 다른 마음을 먹기 시작했다.
'툴룬 공작 가문이 아니라 쇼군의 목을 바쳐 항복하면 받아주지 않을까?'
몇몇 불충한 사무라이의 기습을 받은 료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칙쇼! 이판사판이다! 죽기가 두려울 게 무엇이냐? 차라리 부활을 노리겠다!"
료는 히어로.
히어로나 랭커는 죽으면 시체를 남기지 않는다.
죽음이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니, 무한결투장에서 미니언으로 다시 태어나 부활을 노릴 수 있다.
차라리 거기에 기대해야겠다.
'죽을 때 죽더라도, 재기의 발판은 마련해야 한다.'
패배는 기정사실.
겁쟁이 옹졸한 쇼군으로 죽을 수 없다.
최후의 순간까지 적군을 막아내다 장렬히 전사한 쇼군이어야 한다.
그래야 부활하고 돌아와 세력을 다시 일굴 기반이 되지 않겠는가?
"제장들은 들으라!"
료는 사무라이들을 모두 모아놓고 선언했다.
"간악한 적들이 몰려오고 있다! 이 전쟁이 나의 목숨은 앗아가겠지만, 나의 숭고한 사무라이 정신을 헤치지는 못할 것이다!"
"...."
"항복한다 하여도 죽는다. 비참히 죽을 바에야 전장에서 적을 하나라도 더 참하고 죽겠다! 제장들은 살기를 포기하라! 이 전장에서 죽어, 훗날 오늘의 치욕을 갚기로 결의하자!"
"쇼군을 따르겠습니다!"
특전대를 설득하고 설득해 료는 사쿠라시티의 장정들을 있는 대로 징집해 무기를 쥐게 했다.
적들이 느긋하게 다가오는 이때가 기회다.
아직 방비할 시간은 있다.
사쿠라시티의 여기저기서 징집이 이뤄지다 보니, 그것을 피해 다시 피난 가는 자들이 늘었지만 막부는 그것까지 단속할 겨를이 없었다.
"조센징들을 죽이자!"
"조상의 복수를 하자!"
온갖 선전과 독려로 병사들을 정신 무장하고, 짧게나마 훈련하며 결전을 대비했다.
고구려군은 그럼에도 느긋하기만 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진군한 그들은 정상 행군으로 나흘이면 올 거리를 보름이나 걸려 도착했다.
아이언헤드 성에 비해 규모 면에서 밀릴 것 없는 대도시를 보며 철두가 비죽 웃었다.
"궁지에 몰린 쥐가 독이 바짝 올랐군."
이제 독 안에 든 쥐를 잡을 때가 왔다.
298화 종전
결사항전!
지난 열흘 동안 사쿠라시티에서 가장 많이 쓰인 단어다.
애당초 전쟁을 시작한 건 료 막부였으나, 2년 만에 적이 본진까지 쳐들어오자 그들은 피해자가 되었다.
고구려를 악의 군대처럼 묘사하며, 사쿠라시티 전체가 일치단결하여 항전할 태세를 마쳤다.
그에 큰 역할을 한 것은 닌자들의 유언비어로, 고구려군이 사쿠라시티의 전 주민을 학살할 것이라는 소문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지난 2년간 전쟁으로 많은 고구려 백성들이 죽었는데, 이제 그 복수를 위해 여기까지 쳐들어왔으니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란 이야기였다.
강철두에 대한 소문은 부풀려지고 부풀려져 거의 마왕 정도로 변질되니, 사쿠라시티의 주민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두려워하며 별 도리없이 싸움을 각오했다.
눈치 빠른 주민들이 시티를 버리고 피난길에 올랐으나, 이내 정신을 차린 료가 도시의 모든 성문을 통제하자 더는 도리가 없었다.
패배하거나 항복하여 학살당하거나 처형당할 바에야, 죽기 살기로 싸워 살 방도라도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덤벼라, 고구려의 악마!"
고구려의 대군이 사쿠라시티 앞에 결집했다.
소문에 만 명이 넘고 이만이 넘는다는 소리까지 있었으나, 실제로 도시 앞에 집결한 고구려군은 고작해야 7천 남짓이었다.
사쿠라시티의 정규군을 모두 더해보면 1만이 넘고, 무차별 징집된 신병들이 2만을 넘는다.
총 해서 3만에다 사쿠라시티 측이 유리한 수성전인지라, 의외로 료 막부의 사기는 나쁘지 않았다.
해낼 수 있다.
마왕을 무찌를 수 있다.
징집된 병사들 사이에서도 긍정적인 말이 오갔다. 그 정도 숫자 차이였다.
강철두는 사쿠라시티의 성벽을 보았다.
활로 무장한 궁수들이 서로 어깨가 닿을 정도로 빽빽하게 서 있다.
무차별 돌격을 했다간 불필요한 아군의 희생이 따를 수 있었다.
"성문은 내가 열어주겠다."
철두가 앞으로 나섰다.
"유격대! 돌격 준비!"
"공격대! 전원 준비!"
말을 탄 기병만 7천.
대장들이 저마다 부대를 단속하며 튀어 나갈 준비를 마쳤다.
철두가 인벤토리에서 묠니르를 꺼내 들었다.
마력은 절반 정도.
파지지지직!
쑥 빠져나간 마력이 그대로 뇌전으로 바뀌어 묠니르에 가득 찼다.
후우우웅!
철두가 뇌전의 기운이 가득한 묠니르를 앞으로 휘둘렀고, 땅에서 시작된 낙뢰가 창처럼 나아갔다.
꾸아아앙!
엄청난 충격음과 대지가 진동했다.
드드드드드.
흔들리는 대지에 말들이 우왕좌왕하며 대열이 흐트러질 정도였다.
"워어, 워어!"
쿠우우우우웅!
직격당한 사쿠라시티는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성문이 있었으나, 없어졌다.
성벽들은 도미노처럼 주르륵 무너졌고, 성문은 증발하듯 사라지고 쭉 뻗은 대로를 만들어 냈다.
마치 불도저 수십 대가 곧게 길을 뻗어낸 것 같았다.
"뭣들 하나? 전공을 세워봐라!"
철두의 고함에 정신을 차린 부대들이 얼른 뛰쳐나갔다.
"돌격! 특작대 돌격이다!"
"나를 따르라!"
두두두두두.
7천 기마대가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이걸 공성전이라 부를 수 있을까?
뇌전 한 방에 사쿠라시티의 전의는 증발되어 버렸다. 거대한 자연재해와 싸우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이것은 신과 인간의 싸움처럼 결과가 뻔했다.
무너진 건물과 깔린 사람들의 아우성이 메아리친다.
"살려줘!"
"으아아아!"
"오, 온다!"
재앙이 내려친 사쿠라시티의 뻥 뚫린 진격로로 악마의 군대가 몰려오고 있다.
7천의 기마대가 그들의 숨통을 끊어내기 위해 다가온다.
"저, 전열을 정비하라!"
"궁수부대! 활을 메겨라!"
"사격! 쏴라!"
여기저기서 정신을 차린 사무라이들이 병사들을 독려하며 무너진 사기에 불을 지피려 애썼다.
"겁먹지 마라! 충분히 싸...."
스컥!
고래고래 소리치며 독려하던 사무라이의 목이 달아났다.
"히익!"
옆에 있던 병사들이 깜짝 놀라 창을 버리고 흩어졌다.
"이놈들! 물러서지 마라! 겨우 늙은 년 하나 아니냐!"
다른 사무라이가 도망치는 병사의 목을 베며 독려하자 병사들이 엉거주춤 창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아직 기마대의 돌격은 성에 닿지도 않았는데 어디서 뚝 떨어졌는지, 중년 여인이 검을 빼 들고 있었다.
"...."
"찔러라!"
슈슈슉.
사무라이의 명령에 다섯 개의 창이 여인을 향해 내질러졌다.
스컥!
허나 검격 한 번에 창대가 모조리 잘려 나가 버리고, 뒤이어진 참격에 다섯 창수의 목이 단번에 잘려 나갔다.
"이, 이익!"
사무라이가 일본도를 빼 들고 달려왔으나, 여인은 너무 쉽게 그것을 한번 막고는 목에 검을 찔러 넣었다.
캉, 푸직!
"끄륵."
"...내 아들을 보거든 안부 전하거라."
촤악!
검을 빼어드니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으나, 중년 여인처럼 보이는 할머니 검객 박순자는 이미 피한 후다.
그녀는 누구보다 빠르게 사쿠라시티의 중심부로 향해 나아갔다.
두두두두.
그제야 당도한 기마들이 사쿠라시티에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항하는 놈들은 모조리 죽여라!"
"돌격하라!"
공적을 위해 돌격하니, 도시가 순식간에 창칼 소리와 비명으로 가득 찼다.
"칙쇼! 남문이 뚫렸다! 어서 움직여라."
"병력 신속히 이동! 장애물을 쌓아라!"
성의 남문이 허물어져 뻥 뚫려버렸기에 다른 성문과 후방에 주둔하던 병력들이 부랴부랴 대응에 나섰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약탈은 나중이다! 죽여라!"
"밀어버려! 돌파한다!"
콰앙!
시가전을 대비해 골목마다 기마 돌격을 방해하기 위한 장애물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콰직!
이제 부대마다 소드마스터는 당연히 있는 수준이었고, 지난 전쟁 동안 병사들의 정예화도 마쳤다.
적어도 전장에서 창을 내지르고 돌격하며 활을 쏘는 것을 망설이는 자는 없었다.
이제는 더 이상 수급이 극히 어려운 스탯석만 여유가 충분했다면, 어쩌면 지금보다 랭커의 수도 수십 배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철두는 천천히 나아갔다.
그의 뒤로 결사대 사토와 지르골이 뒤따랐다.
"흐흐흐."
"...."
지르골은 파괴와 살육에 신음하는 도시 전경이 마음에 든 모습이었고, 사토는 참담함에 입을 열지 못했다.
결국 이리되고 말았구나.
"...대왕."
한참 입술을 달싹이던 사토가 용기 내 물었다.
"말하라."
"이만 항복을 종용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후후."
철두는 아직도 대항해 싸우는 막부의 병사들과 집에 숨어든 사람들, 그리고 혼란을 틈타 탈영하거나 피난하는 주민들을 보았다.
"사토."
"네, 대왕."
"노바에 자리 잡은 지구의 마을이 몇이더냐?"
"수백이 넘는 것으로 압니다."
나라마다 포탈 서너 개는 기본이고, 국토가 넓은 나라는 더욱더 많은 개척마을을 두었을 것이다.
한국만 해도 포탈이 5개였지 않았던가.
"그들에게 보내는 경고이며, 선전포고다."
"...."
사쿠라시티는 본보기다.
고구려가 정복 활동을 이어가자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지구 출신인들의 통합이다.
적어도 거리상, 혹은 이동마법진으로 이어진 모든 이들을 영향력 아래에 둘 것이다.
허나, 사토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동향 사람이 속절없이 죽어가는데 어찌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으랴?
"하나라도 더 살리고 싶으면 어서 전쟁을 끝내라."
"하!"
"흐흐흐, 드디어 출격이군요."
사토가 짧게 대답하고 튀어 나갔고, 지르골도 목줄이 풀린 개처럼 뛰쳐나갔다.
허나 두 사람이 막부의 본단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황이 끝나가고 있었다.
채앵, 챙!
"크소오!"
료가 발악하며 덤볐으나, 박순자는 여유롭게 그 검을 쳐내며 얕은 공격을 이어갔다.
스팟!
또 옆구리가 베이며 피가 튄다.
이미 료의 옷은 너덜너덜해졌고, 머리는 봉두난발이며 눈자위는 핏발이 서 벌겋다.
누가 보더라도 실력 차가 명백하다.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듯 두 사람의 기색은 천양지차였다.
"장난은 그만둬라! 나는 쇼군이다!"
"...."
"그대가 명예를 아는 검사라면 제대로 덤벼라!"
"아니."
박순자는 고개를 저었다.
"너는 더 고통받아야 한다."
"쿠소!"
료가 손에 쥐고 있던 검을 역수로 쥐곤 할복하려 했으나.
스컥!
"끄어!"
번개같이 움직인 박순자의 검이 료의 손목을 잘라버렸다.
"칙쇼오!"
대번에 다른 손목도 잘려 나가며 졸지에 두 손을 잃어버린 료가 절규했다.
"끄어어어! 이 요망한 년! 네년은 전사의 긍지도 없더냐! 전장에도 예의와 법도가 있는 법이거늘!"
"내게 그런 건 없다."
박순자는 무심히 다가서며 검을 휘둘렀다.
무정한 칼날은 허벅다리를 베며 그의 사지를 하나 더 잘라냈다.
"끄어어어!"
서컥!
다리 하나가 더 잘려 나갔다.
사지가 모조리 떨어져 피가 줄줄 흐르는 그에게 다가간 박순자는 인벤토리에서 포션 하나를 주워 그의 상처에 부었다.
치지지지직.
"끄어어어어!"
피가 멎으며 상처가 빠르게 아물었다.
"이 악마 같은 년! 육시랄 //할 //년!"
"그래, 짖어라."
박순자를 올려다보는 료의 얼굴에는 절망과 두려움이 가득하다. 이 여인의 눈은 지독히도 슬프며, 무심했고, 또한 독기가 있었다.
무엇을 해도 벗어날 수 없으며, 애원해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내 아들이... 이번 전쟁에서 죽은 그들이 들을 수 있게 더 크게 짖어라."
"끄으으."
두려움에 이젠 소리치길 포기한 료가 버둥거렸다. 박순자는 쪼그려 앉아 그에게 조용히 읊조렸다.
"발버둥 치다 죽어라. 그리고 또 살아나라. 내 검이 다시 너를 찾을 테니."
뒤늦게 도착해 그 참상을 바라보는 사토는 침을 꿀꺽 삼켰고, 지르골은 박수쳤다.
"와우, 진짜 전사가 여기 있군."
저 여자는 바바리안인가?
마음에 들어.
철두는 성에 들어와 료를 보더니 박순자를 보았다.
박순자도 그런 철두를 보았다.
"기분이 풀리십니까?"
"...조금도 풀리지 않아요."
박순자의 눈망울이 떨렸다.
"후후, 마무리는 어머니가 하시죠."
"...그래요."
료는 다가서는 박순자를 보며 안도했다.
그래, 죽여라!
날 이 고통에서 해방시켜라!
"이 악마 같은 년!"
"염라대왕이 누가 보냈냐고 묻거든 용수 어머니가 보냈다고 해라."
"내 반드시, 돌아와 네년을 씹어 삼킬 것이다!"
"제발 그리해다오."
스컥!
순자의 검이 료의 머리를 베었고, 곧 그의 몸 전체가 빛으로 화해 사라졌다.
"은영."
"네, 대왕."
철두가 당도했을 때부터 이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친위대다. 이은영이 나서며 깍듯이 대답했다.
"용수 어머니를 모셔라."
"아직이에요."
휴식을 논하기엔 아직 그녀의 검은 빛을 잃지 않았다.
"툴룬 가문 사람들을 처단하게 해주세요."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료 막부가 일으킨 전쟁이라지만 툴룬 공작가의 공작이나 다름없다. 더욱이 기용수는 툴룬공작 가문의 기사단장 아이반에게 당했다.
"은영, 함께 가라."
"네!"
친위대가 사라지고, 막부는 곧 병장기 소리와 비명소리로 가득 찼다.
한참 만에 소음이 그치니, 곧 병사들의 환호성이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철두가 밖으로 나가보니 막부의 깃발이 내려오고 고구려의 깃발이 올라 나부끼고 있었다.
299화 나도 없어 정령
<료 막부의 휘장이 파괴됩니다.>
사쿠라시티의 정권을 2년여간 장악하고 있던 료 막부가 끝을 고했다.
사쿠라시티의 주민들은 겁에 질려 벌벌 떨었으나, 의외로 고구려군은 신사적이었다.
학살, 고문, 강간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닥치는 대로 물자를 약탈해갈 뿐이었다.
"이게 다야?"
"히익! 그, 그렇습니다."
"그럼 별수 없지."
"예?"
"이것만 가져간다고."
"에에?"
모든 것을 징발했다.
고구려의 모든 군사들이 동원되어 사쿠라시티에서 뜯어낸 물자를 이동마법진으로, 그리고 다시 고구려의 아이언헤드 성으로 나르고 있었다.
전쟁 와중에 사로잡힌 포로들?
그들은 거대한 구획에 감금되고, 아예 노예 시장이 열려 버렸다.
그들의 가족이 사가든, 노예 상인이 사가든 상관치 않았다.
상대가 누구든 돈만 내면 노예를 팔았다.
아미르 왕국과의 전쟁 때 사로잡은 포로들을 대했던 것처럼.
철두는 전쟁에서 이긴 이곳 사쿠라시티를 점령할 생각도, 파괴할 생각도 없었다.
"여기는 새로운 우리의 보급지가 될 것이다."
그대로 둘 생각이다.
자생하면 다시 약탈하고, 다시 또 자생하면 약탈하고....
이웃에 약탈 보급고를 두는 것과 같다.
관리를 할 필요도 없다.
사쿠라시티는 큰 도시고, 그에 부속된 맵 전역의 30개에 달하는 개척 마을도 모두 합치면 만만찮은 인구를 자랑했다.
고구려의 주둔군은 벌써 열흘째 머무르며 끝없이 약탈보급품을 본국으로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사이 북쪽의 툴룬 공작 가문에 정찰 나섰던 그리핀 척후병들이 돌아왔다.
"보고드립니다. 툴룬 공작 가문의 본성은 초토화, 영주성으로써의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보고! 툴룬 공작가의 여타 다른 성들과 영지들은 무사합니다."
"보고! 공작 가문의 봉신 가문들은 현재 아무런 군사 행동 징후도 포착되지 않았습니다."
"그래, 물러가 쉬어라."
"예, 대왕!"
툴룬 공작 가문이 초토화되었다.
아니, 초토화된 것은 오로지 영주가 기거하던 공작성과 중심도시뿐이다.
오직 한 명의 존재.
황제에 의해 일어난 테러, 혹은 징벌.
공작 가문 세력의 다른 자작, 남작 등의 봉신들이 벌벌 떨며 나서지 못하는 것을 보면 징벌이 맞겠지.
"지르골을 불러와라."
"예, 대왕!"
곧 지르골이 씩 웃으며 다가와 강철두의 앞에 무릎 꿇고 고개 숙였다.
"경과는?"
"아주 술술 협조하고 있습니다."
"대가 약한 놈이군."
"흐흐, 저의 기술이 좋은 덕도 있습죠."
철두가 피식 웃었다.
이놈은 그새 다시 기어오르려고 하는구나.
미친개도 목줄이 묶이면 쓰기 나름이니, 철두는 작은 으르렁거림 정도야 넘어가 주었다.
어쨌든 고문 기술자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탈곡을 하고 온 지르골이다.
"이유가 뭐라더냐?"
"짐작하신 대로 흑마법사와의 결탁 때문이라 합니다."
철두는 너무 궁금하여 물었다.
"제국법에 흑마법, 정령술이 금지란 걸 몰랐다더냐?"
"알았답니다."
"...?"
철두는 의아했다.
"알면서 왜?"
"이렇게 노발대발할 줄 몰랐답니다."
"...?"
철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법이 있는데 집행할 줄은 몰랐다?"
"그렇습니다."
"태평한 놈들이네."
살인을 해놓고도 처벌받을지 몰랐다고 할 놈들이구나.
"흐흐, 대왕. 세상에 법을 지키고 사는 귀족이 어딨습니까?"
"음?"
"저조차도 법을 지키고 산 적이 없습니다."
"자랑이다."
"...."
지르골이 겸연쩍은지 소리 없이 웃었다.
"하긴."
철두라고 어디 그렇지 않을까?
지구의 법이 과한 족쇄처럼 느껴지던 때도 있지 않았던가? 그가 노바의 세계에 처음 발을 딛고 느꼈던 해방감과 자유는 지나친 억압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철창에 갇힌 사자가 다시금 자연에 돌아갔을 때의 해방감이었다.
"황제는 두 가지에 대해서는 얄짤없군."
철두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준필이."
"예, 대왕."
"어떻게 생각해?"
"타국의 법인데 신경 쓸 필요 있겠습니까?"
"있지."
철두가 히죽 웃었다.
"난 정령술을 잃었어."
"...."
"황제와 대면했을 때는 정령을 잃고 난 뒤였지. 그때 정령이 있었다면 놈이 나를 죽이려 했을까?"
"아이리스 후작령의 경우가 있사온데 그러겠습니까?"
"흐음, 황제의 의중을 모르겠군."
철두가 턱을 쓰다듬었다.
황제는 제국의 입장에서 적이라 봐도 무방할 고구려의 팽창이나 성장을 오히려 기꺼워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제국령에 속한 툴룬 공작 가문은 아예 멸문시킬 정도이니....
"황제가 경계하는 게 정령술보다는 흑마법이 더 큰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모르지."
철두가 어깨를 으쓱했다.
"허면 경고일지도 모르옵니다."
"무슨 경고?"
"제국령의 그 누구도 흑마법을 손대지 말라는...."
철두가 다시 이번에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탕후루."
"신, 탕아후루! 언제든 준비되었나이다. 하문하시옵소서."
"제국에서 이번처럼 흑마법사를 탄압한 적이 있었나?"
"역사를 물으신다면 종종 있어왔던 일이옵니다. 지난 제국에서도 그러한 역사가 있습니다."
"지난 제국? 이번 제국은?"
"이번 제국은 처음입니다."
"흐음, 다른 제국인데 똑같이 흑마법을 탄압한다라...."
철두가 무릎을 탁 쳤다.
"더 생각 말자."
"예?"
"우리 쪽에 흑마법사가 있는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냐?"
"그, 그렇사옵니다."
"황제 그놈이 금지하든 말든 알아서 하라 그러고. 어쨌든 고구려의 정복 활동에 황제는 관심이 없다. 아니, 오히려 반기고 있지."
"그렇습니까?"
"놈의 꿍꿍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상관없다. 나는 고구려를 제국으로 만들겠다."
그것이 정복의 길이며 정복자의 숙명이다.
퀘스트가 아니더라도 강해질 방도가 있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준필이."
"예, 대왕."
"맡아서 정리해라. 난 먼저 돌아가지."
"예에, 대왕."
사쿠라시티를 점령할 것도 아닌 바, 뒤처리 일이라 해 봐야 약탈과 약탈품의 운송이다.
사로잡은 전쟁 노예들은 마구잡이로 팔아치우고 있다. 헐값에 팔아치우다 보니 노예 상인들이 대거 몰려오고 있다.
"툴룬 공작령에 대해서는 어찌하시겠습니까?"
"보급훈련 상대로 적당하겠군."
"그리 진행하겠사옵니다."
툴룬 공작 가문의 모든 직계가 죽었다.
지금 감옥에 갇혀 고문받은 아룬드 툴룬만이 유일한 생존자라 할 만한데, 그가 이대로 풀려난다 한들 툴룬 가문의 구심점으로 역할 하긴 어려웠다.
황제로부터 직접 징치당한 툴룬 가문은 사라졌다. 징벌을 피해간 툴룬 공작령 산하 여러 소영주들은 알아서 독립할 것이다.
다시 제국 수도로 달려가 제국 상징에 충성을 맹세하여 제국령이 되든, 독립영주로 살아가든 알 바 아니다.
다만, 사분오열된 그 세력은 털어먹기에 적당하다. 고구려의 병력은 지난 2년간 전쟁 때문에 정예화 하나는 확실히 진행되었으니까.
"무리하진 마."
"예, 대왕."
"그럼 수고해."
"친위대는 데려가십시오."
"그러지."
곧 친위대가 소집되었고, 거기에 박순자는 없었다. 철두는 떠나기 전 그녀를 만났다.
"용수 어머니."
"예, 대왕."
"복수는 아직인가?"
박순자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핏값은 충분합니다."
"허면 이만 돌아가도 좋아."
이번에도 박순자는 고개를 저었다.
"복수가 허무뿐이란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전장에 남는 건 고구려의 자식들을 하나라도 더 살리려 함입니다."
"아!"
"이 늙은이도 쓰임이 있을 터이니, 마지막 병력의 퇴각 때 함께하겠습니다."
소드마스터라고 다 같은 게 아니다.
박순자는 새로운 경지에 이른 검사다.
신체 재구성을 마치고 초인이 되는 레벨 5를 넘어선 수준의 검사.
'위대한' 영인 레벨 6의 검사.
고구려에는 아직 강철두와 박순자만이 도달한 영역이다.
에그니스가 있다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엘프 왕국의 인물.
그런 이가 전장에 남는다니 든든하기 그지없다.
그 이유도 복수가 아닌 아군의 희생을 줄이기 위함이라 하니, 강철두는 이곳 전장에서 한 줌의 걱정도 남기지 않게 되었다.
"그럼 어머니만 믿고 돌아가죠."
"예에, 대왕. 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후후."
철두와 친위대가 그리핀을 소환해 이동마법진으로 향했다.
쇄애애액.
사쿠라시티는 털어먹기만 하고 점령 사민할 생각이 없지만, 이동마법진 근처의 관문 요새인 겐지 성은 고구려의 영토로 삼을 생각이다.
이는 앞으로 이 드넓은 맵을 오가며 약탈할 고구려군의 전진기지이자 물류기지로 기능할 것이다.
*
돌아온 철두는 진심으로 쉬었다.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아르엘라와 뜨거운 밤을 보내기도 했다.
정복자의 길을 걷는다지만, 모조리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정복하자면 혼자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적어도 사쿠라시티에 원정 가 있는 병력이 돌아와야 가능한 일.
철두로서는 꽤 긴 휴가를 부여받은 셈이다.
"아르엘라."
"왜?"
"기차 구경 가자."
"...."
"뭐? 왜?"
"넌 정말 괜찮은 거냐?"
"뭐가?"
"정령 말이다."
철두가 어깨를 으쓱였다.
"별수 없지."
"허, 정령 계약이 깨졌는데 상실감도 없단 말이야?"
"애당초 계약이 아니었다."
애시당초 철두는 정령사가 아니었다.
4대 원소 정령들이 철두의 주위를 맴돌았을 뿐이지.
"허! 말도 안 되는 소리. 계약 없이 어찌 심상 공간에 정령들이 터전을 마련할 수 있단 말이야?"
"그건 나도 모르지. 계약 같은 건 기억에 없다."
"후, 이건 더 말하지 말자."
아르엘라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제 딴에는 상실감이 클 강철두를 위로하자고 꺼낸 말인데 너무 아무렇지 않은 그의 모습을 보니 아리송했다.
"정말 괜찮아?"
"정령은 그냥 친구였다. 떠나든 말든 존중해줘야지."
공기처럼 늘 곁에 존재하던 그들이 사라졌을 때 처음엔 상실감이 들었으나, 차츰 적응한 철두다.
막말로 소유물이 아닌 친구로 생각한다면 그들이 떠난 의지도 존중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분명 정령계로 돌아갔을 거야. 노바와 정령계가 다시 연결되면 재회할 수 있을 거야."
"후후, 재회는 기대되는군."
"거봐! 영 슬프지 않은 건 아니구만!"
"허전할 뿐이다. 늘 있던 친구들이 사라졌으니. 하지만 정령이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저 안도할 뿐이다."
"아!"
아르엘라가 픽 웃었다.
어쩌면 이 바바리안은 요정보다도 더 정령을 사심 없이 보는지도 모르겠다.
"기차나 보러 가자!"
"그래, 그러자."
에그니스도 의식을 되찾았고, 기력을 회복 중이다.
잘 먹고 잘 쉬고 있으니 조만간 건강해질 것이다.
"진태한테 가자."
철두는 진태를 찾기 위해 영주성을 나섰고, 1층에 내려오자마자 그를 만났다.
"어? 철두야. 어디 가냐?"
"너 만나러 가던 길이다."
"아! 나도 너 찾아가던 길인데."
"무슨 일이냐?"
"정복자의 길. 그거 해야지."
"...? 벌써 회군 중인가?"
철두가 전장에서 돌아온 지 겨우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다.
"에이, 정복이 어디 군대 몰고 가서 하는 것만 있냐."
"그럼?"
"흐흐. 외교지, 외교."
"외교?"
"사쿠라시티 소식이 쫙 퍼졌잖아. 이번에 외교 서신 쫙 돌렸거든."
"어디에?"
"소식 닿는 지구 출신 개척 마을 전부."
"...."
"흐흐, 걍 바로 복속 청해 온 곳만 12곳이다."
고구려의 제후가 빠르게 늘어날 것 같았다.
300화 마법과학문명 고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