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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6 - 270-280

270화 어머니가 재능을 숨김

"조심히 돌아가라."

"넵. 가서 재상께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그래."

이동마법진 앞에서 일행을 나누었다.

펜리르 추격 사냥은 사실상 끝맺음 됐다.

다음에 다시 펜리르를 목격했다는 소문이라도 들려오지 않는 이상, 추격을 재개할 일은 없다.

영물이라고 하긴 하나, 기약 없이 고작 늑대 하나 쫓기엔 여기 모인 이들이 전부 바쁜 이들이다.

사냥꾼 잭과 수석마법사 르망은 고구려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이리스 후작령으로 향하는 건 강철두와 아르엘라, 그리고 에르미스 셋이다.

"그럼 먼저 가십시오. 배웅하겠습니다."

"그러지."

바바리안과 요정, 드워프로 이뤄진 파티가 마법진을 통해 사라지자, 잭과 르망도 곧 이동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우리도 가죠."

"그럽시다."

<주화 890개를 소모하여 좌표 C6140로 이동합니다.>

파팟.

두 사람은 순식간에 변해버린 주변 풍경과 공기에 순간 아찔한 멀미를 느꼈다.

"으음. 돌아왔군요."

"하하, 이제야 좀 제대로 쉬겠습니다."

"잭 경은 계속해서 출장이었으니 고단할 만하십니다."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본디 용병이었으니 정착하는 게 더 낯설지요. 여기가 첫 집인 셈입니다."

잭은 웃었다.

용병 사냥꾼이라는 직업 특성상 여기저기 쏘다니는 게 일상이었다. 아미르 왕국에서 주로 활동하곤 하나 본인이 왕국 휘하라는 소속감은 없었다.

하지만 묘한 인연으로 얽혀 이제는 대왕을 따르는 고구려의 신하가 되고 보니, 그전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강한 소속감을 느끼는 중이다.

고구려의 수도 아이언헤드 성의 그의 집은 머무는 날보다 비워진 날이 더 많았으나, 이제는 진짜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 전보다 유민들이 더 늘어난 것 같군요?"

"허, 그래 보입니다."

아이언헤드 성의 외성 구역은 넓은 공터에 큰 도로부터 깔고 구획을 나눠 필지를 분할해 개발되었다.

불허된 땅에는 번듯한 건물들이 들어서 장사를 하며 거주지를 이루고 있었지만, 아직 불허되지 않은 땅은 공터 그대로였다.

그런 공터마다 여기저기 임시 천막이 처져 있고, 누가 보더라도 피난민처럼 보이는 유민들이 드글드글하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아이언헤드 성이 이동마법진과 가까우니 유동 인구야 본디 많은 성이었지만, 그건 상인들이나 관광객들이지, 이토록 유민들이 많이 몰린 경우는 잘 없었다.

"가보세나."

"그러지요."

르망의 말에 잭도 내성으로 향하는 걸음을 바삐 놀렸다. 움직이며 유민들을 관찰하니 처음 들어보는 어색한 언어가 많았다.

"지구 사람들인 모양입니다. 억양이나 말이 특이하군요."

"그런 모양일세. 무슨 영문인지 영...."

곧 내성에 도착한 그들은 고구려의 2인자 재상 김진태를 만날 수 있었다.

"보고드립니다. 펜리르를 추격, 잊혀진 도시에서.... 던전을 발견.... 하루를 정비하고 영주님께서는 에르미스 경과 아르엘라 왕비님과 함께 아이리스 후작령으로 향하셨습니다."

"음, 고생했어요. 3일 휴가를 줄 테니 푹 쉬도록 하세요."

"예에, 하온데 유민들이 많이 보이던데 무슨 영문인지요?"

"아, 그거요."

재상 김진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지구 출신의 개척마을들 중에 가장 번성한 게 고구려다 보니, 몰려든 사람들이 많아요."

"...?"

르망이 듣다 보니 이상하여 재차 물었다.

"그들이 이룩한 개척마을을 버려두고 이주한다는 말입니까?"

"아뇨. 보호 안개가 걷히고 주변 노바의 세력들과 적절히 교류하는 세력도 있는가 하면, 충돌한 자들도 많죠."

"아!"

알만한 일이다.

여기 고구려의 전신인 아이언헤드 영지가 그랬으니까. 나트롱 백작과 대립하다가 끝내 패배했다면, 여기 있는 주민들은 대거 이탈하여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한다.

붙잡혀 노예로 부림당할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럼 이만 물러가 쉬세요."

"예에."

"...."

잭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청했다.

"재상 각하. 휴가는 뒤로 미루고 청이 있사옵니다."

"뭐죠?"

"듣기로 지구의 번성한 개척도시 중에 사쿠라시티가 있다 들었습니다."

"오, 있죠."

"그곳 정보를 조금 모았으면 합니다."

"사쿠라시티요? 거긴 별 트러블 없이 잘 정착한 곳인데요?"

"아까 보고드린 아룬드 툴룬이 사쿠라시티를 언급했습니다."

김진태의 미간이 좁혀졌다.

"철두랑 시비 붙었다는 데가 사쿠라시티를요? 왜요?"

"밀접한 관계라고 했습니다."

"사쿠라시티가 교역 중인 곳이 그 시비 붙었다는 투룬 공작가인가요?"

"그렇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하, 이거 물어볼 데가 없으니 답답하네."

"그래서 제가 가고자 합니다. 첩보 활동을 승인해 주십시오."

"첩보라...."

김진태는 가만히 고민했다.

정보는 늘 중요하다.

더욱이 이제 고구려로 개국까지 했는데, 주먹구구식으로 어디어디서 들었다 식의 소문으로 계획을 세우거나 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늦다.

'정보 기구가 필요해.'

이제 국가의 기틀을 다지며 소속된 도시들도 많아졌다. 믿고 맡기긴 하지만 임명된 성주들이 제대로 도시를 다스리지 않는 경우도 생길 터.

행정관들이 비리나 범법을 저지르거나 부패하지는 않았는지 감찰하는 기관도 필요하다.

김진태의 시선이 잭에게 닿았다.

그는 혹시나 적이 될 위험이 있는 툴룬 공작가와 사쿠라시티에 대해 조사하려 하고 있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나서서 말이다.

이만한 사람도 없어 보인다.

"이렇게 하죠. 정보청이라는 기관을 새롭게 설립할 겁니다. 거기 청장으로 잭을 임명할게요."

"헙! 저, 저를 말입니까?"

"네, 필요한 모든 자금을 지원해줄 겁니다. 혼자서 돌아다니며 첩보 활동을 하는 게 아니라, 적당한 인재들을 모집해 조직을 만드세요."

"제게 너무 큰 소임이 아니겠습니까?"

"고구려를 위한 길입니다. 자신 없어요?"

"...."

입술을 앙다물고 고민하던 잭이 이내 결심이 선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좋아요. 앞으로 고구려의 눈과 귀가 되어주세요. 어려움이 있거든 박준필 국무총리에게 도움을 받으세요. 며칠이면 아이언헤드 성으로 복귀할 겁니다."

지금은 봉지로 내린 신서울과 일산 성에 대한 반환을 설득하기 위해 나가 있는 그다.

교통편의를 위해 그리핀까지 내어줬으니, 조만간 수도로 복귀할 터다.

오래도록 사령관으로 지내온 그니, 조직의 구성이나 관리에 대해서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넵, 알겠습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네, 좋아요."

잭이 막 물러나려는 그때였다.

와아아아아-

창밖에서 들려오는 병사들의 환호 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저절로 창으로 향했다.

슬쩍 나가서 내다보니 병영 쪽에 가득 몰린 병사들이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김진태가 궁금해할 때 헐레벌떡 병사 하나가 뛰어와 보고했다.

"보고! 드디어 레벨 4의 경지에 이른 기사가 탄생했습니다."

"오오오!"

무척 고무적인 일이다.

이은영, 김춘배, 김도진 이후 새로운 소드마스터가 탄생하는 기념비적인 일이 아닌가!

"얼른 가보죠! 누군가요? 유격대장? 특작대장?"

"아, 아닙니다. 수비대장의...."

"오! 기용수 대장이?"

"아니, 그게 아니라 기 대장님 어머니십니다."

"...누구요?"

"기용수 대장의 어머니 박순자 여사입니다."

"아!"

그분을 잊고 있었네.

산적 장호철에게 죽었으나, 이제 와 부활할 정도면 저력이 있으신 분인데, 영지병 소속이 아니다 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다.

"갑시다. 영약 지급해야죠."

영지병이 아니지만 상관없다.

그런 실력자를 내버려 두는 건 전력 낭비다.

영약을 지급해 소드마스터로 승격한 후에 군에 임관할 것을 제의하든가 하면 될 일이다.

*

차창! 창!

검과 검이 부딪힌다.

"크읏!"

"차압!"

카앙! 퍼억!

"커헉!"

날아오는 참격을 잘 막아냈으나, 변칙적인 뒤돌려차기에 가슴을 얻어맞은 수비대장 기용수가 바닥을 벌러덩 굴렀다.

"큿, 어, 엄마."

그의 상대는 다름 아닌 어머니 박순자 여사.

"왜 아들? 많이 아프니?"

"아, 아니. 부하들도 다 보는데...."

"대련은 실전처럼 아니니?"

"엄마랑 나랑... 스탯 차이가 얼만데."

"어머, 스탯 높은 적 만나면 안 싸울 거니?"

"아, 엄마 좀 조용히...."

기용수는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필이면 지금 싸우는 곳이 병영 연무장이다.

점심 도시락 배달하러 온 박순자 여사가 여흥 삼아 기용수와 대련을 붙었는데, 병사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구경하러 몰려와 기용수의 얼굴은 지금 시뻘게진 상태다.

하필이면 부하들이 보는 데서 이리 창피를 줄 줄이야.

"진짜 이제 나 엄마라고 안 봐준다?"

"호호호, 얘는 별 소릴 다한다. 얼른 들어와라."

박순자는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나이 벌써 육십이 넘었건만, 요즘은 정말 회춘한 것처럼 몸이 가뿐하고 마음도 가볍다.

근심걱정이 없고, 짬짬이 이은영에게 배운 검술은 배우면 배울수록 그 오묘한 재미가 있으니....

차차창!

"크윽!"

기용수는 검을 맞대면서 마치 넘지 못할 벽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우리 엄마가 천재였어! 시발!'

아주 기쁘기 그지없어야 할 상황이건만, 곤란하기도 하고, 곤혹스럽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다.

부활을 덮기 위해 일단 랭커로 만들자는 심정으로 흡수시킨 스탯석은 어머니의 모든 스탯을 50 이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순수 스탯으로는 강철두 다음 가는 타고난 재능!

검술 실력도 예사롭지 않아 벌써 레벨 3. 장인의 영역이다.

"호호호!"

뒤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그녀는 요즘 검술의 매력에 흠뻑 빠져있었다. 지나가는 검객들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싸워보고 싶고....

점심시간 잠깐 들른 아들 직장에서 몸이 근질거려 대련을 청할 정도로 검술에 푹 빠져버렸다.

채챙!

"크읏!"

결국 검을 놓친 기용수는 목에 드리운 검 끝에 울먹이는 얼굴로 어머니를 올려다봤다.

"엄마, 나 여기 대장이야...."

"어머, 아들. 패배가 부끄럽니?"

"후우.... 졌습니다."

요즘 맨날 눈만 마주치면 대련하자고 성화셔서, 야근에 야근에 야근을 하며 집에 들어가지 않았건만, 병영까지 찾아와서 이런 수치를 주시다니.

"근데 아들, 나 방금 레벨 4로 변했다. 검 숙련이."

"어? 뭐라고?"

기용수가 깜짝 놀랐다.

반응은 구경나온 병사들에게서 더 먼저 나왔다.

"와! 대모께서 명인의 경지에 드셨다!"

"우와! 새로운 명인의 탄생이다!"

"우와아아아아!"

병사들이 제 일처럼 좋아하며 여기저기서 축하의 함성을 내질렀다.

고구려의 대왕 강철두가 이르길 용수의 어머니는 나의 어머니가 같다 하여, 그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한 부활절까지 가졌다.

그 부활절 이후 박순자는 대모로 불렸는데, 그 경지까지 이번에 새롭게 높이 오르니, 누구나 축하해주었다.

"오! 축하드립니다. 어머니!"

"아이구, 재상님."

김진태까지 등장하자 박순자는 멋쩍은 듯 웃었다.

"자자, 다들 들으시오! 대왕님이 자리를 비웠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오늘 저녁 하루 성에 잔치를 벌일 생각이오!"

"와아아아아아!"

함성이 배가 되어 커졌다.

고구려의 재상이 주최하는 잔치다.

이것은 축제와 다름없는바, 오늘은 또 고기와 술을 배불리 먹을 수 있으리라.

"새로운 소드마스터의 탄생을 기리는 축하연을 열어라!"

"우와아아!"

김진태는 환호하는 병사들의 응원을 뒤로 인벤토리에서 영약을 꺼내 박순자에게 내밀었다.

천년 영약이 없음이 안타깝지만, 아쉬운 대로 백년 영약도 소드마스터로 신체 재구성을 하기엔 충분한바.

"아이구, 재상님. 감사합니다."

"제가 더 감사하죠. 어머니."

고구려에 소드마스터 전력이 하나 더 생겼다.

271화 처갓집

신서울.

본디 이곳에서 10년이나 근속했던 사령관 박준필은 이제 고구려 국무총리가 되어 이곳에 다시 방문했다.

객이 되어 다시 이곳 관청 누대에 올라 신서울을 내려다보니 감회가 새롭다.

"저걸 어이할꼬...."

신서울의 발전에는 박준필의 입김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잘 정돈된 거리가 그러했고, 잘 구워진 기와로 이어진 담과 지붕이 그러했다.

사극의 세트장을 옮겨놓은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조선시대를 떠올리게 하던 신서울은 꽤 많은 게 바뀌어 있었다.

한옥의 형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지어진 집들이 여기저기 그 존재감을 보이고 있었고, 저쪽 멀리에는 마치 아파트를 연상시키는 10층 정도 높이의 석조건물이 지어져 있기까지 했다.

에잉, 저리 볼품없는 건축물을 짓게 내버려 두다니!

박준필은 영 마음에 차지 않았으나, 신서울의 관리는 이제 제 소관이 아니니 마음을 다스리려 애썼다.

애지중지 키운 마을이다 보니, 고향 같기도 하고 내 집이란 느낌도 들어 영 싱숭생숭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신서울이 내다보이는 누대 위로 신서울을 장원으로 할당받은 기사 김도진이 올랐다.

"어서 오시오. 헌데 저건 경이 건축 허가를 내준 것이오?"

"말씀 편히 하시지요."

"허허, 어디 그럴 수야 있나. 신서울의 통치자께 말이야."

박준필이 소장으로 신서울의 계엄 사령관이던 시절, 김도진은 대령으로 제1 특임대를 이끌고 있었다.

오래전 무단 탈영해버린 김춘배 상사와 조선제일검이란 별명으로 불린 이은영 소령이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김도진의 실력도 녹록잖았다.

꾸준히 정진한 그는, 끝내 소드마스터가 되어 노바 사령관 임운진 사단을 몰아내고 신서울을 장악, 반란에 성공했다.

박준필은 속을 알 수 없는 눈매로 김도진을 물끄러미 내다봤다.

'누구보다 성실한 군인이었던 자인데, 복심으로 야심을 키우고 있었더냐....'

박준필은 김도진을 육사 후배이자 오래도록 지휘했던 휘하 장교로 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사람을 새롭게 보고, 평가하려 애썼으나....

"그리 어려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선배님. 신서울의 거취를 논하기 위해 오셨겠지요."

"허허허."

박준필이 김도진을 잘 알듯이, 김도진 또한 박준필을 오래도록 모셔 왔기에 잘 알고 있었다.

문화 통치와 결속을 유난히 강조하셨던 사령관.

"내 편히 말하지. 그 일을 논하러 왔네. 고구려는 봉건제를 따르지 않을 셈이야."

"거둬가십시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박준필은 할 말을 가렸다.

"아깝지 않은가?"

"본디 제 것이 아닌데 아까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이미 자네에게 하사된 봉토가 아닌가?"

김도진이 고개를 저었다.

슬쩍 올라간 입꼬리는 사심 없는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제가 야심으로 신서울을 장악했다 여기십니까?"

"...부인하지 않겠네. 그 방법이 과격하지 않았나?"

군사 쿠데타나 다름없다.

단번에 사령부를 장악하고 임운진과 그 휘하 사단의 장교들을 숙청해버렸으니.

"조금 섭섭합니다, 선배님."

"허허허. 무엇이 그리 섭섭한가?"

"선배님이 저와 같은 처지에 처한다 해도 그리 선택하셨을 테니까요."

"...."

박준필은 대꾸할 말이 궁색했다.

이미 한양을 들어다 강철두에게 바친 것이나 다름없는 박준필이다. 그것이 시민들을 위하는 길이니까.

"후우, 한잔하겠나?"

"밑에 주안상을 봐 두었습니다."

"내려가세나."

"예에."

두 사람은 몇 순배의 술이 돌고 나서야 대화를 시작했다.

"미안하네, 도진이."

"아닙니다. 애초에 제 것이 아닙니다."

"자네는 참 군인이야."

"하하, 아까는 숫제 반란군으로 보시더니 말입니다."

"허허허, 시대가 그렇지 않은가? 개인적으로 참 미안하네."

"본디 제 것도 아닙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구만."

박준필은 이제 진심으로 김도진이 고마웠다.

김도진은 술을 따라주며 물었다.

"김 상사는 설득이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춘배?"

"예에."

김도진은 표정을 굳히곤 진지하게 말했다.

"그는 야망이 있는 자입니다."

"하하하!"

"...? 어찌 웃으십니까?"

"신서울에 오기 전에 이미 일산 성에 다녀왔다네."

"벌써 그를 만났습니까?"

"이를 말인가? 그는 벌써 자리를 내팽개치고 아이언헤드 성으로 향했네."

"...?"

"마적대 대장이면 족하다더군."

"허어."

김도진이 군단파의 대표 소드마스터였다면, 김춘배는 시민파의 대표 소드마스터였다.

금의환향한 김춘배의 야욕을 알고 있던 김도진은 지금의 말이 허황되게 느껴졌다.

"일산의 자치권을 내놓았단 말입니까?"

"그래. 흔쾌히 내려놓았네. 오히려 좋아하더군."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의 목표는 성 하나 봉토로 하사받아 대대손손 잘 먹고 잘사는 게 아닐세."

"...."

"그는 이 세상의 끝을 보려 하지."

박준필은 웃었다.

신서울 통치 시절 누구보다 박준필과 대립각을 세웠던 김춘배이지만, 그렇기에 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가 박준필이다.

"순수하게 미쳐있는 이들이 다 그렇다네."

그런 자들은 속세에서 흔히 통용되는 부, 권력, 명예 등에 초탈하기 마련이다.

속에 품은 진짜 큰 뜻을 위해 그런 것들은 단번에 내던질 정도로 목표가 분명하니까.

"이거 오히려 제가 좀생이가 된 기분이군요."

"하하하, 아닐세. 자네도 군단을 꾸려야 할걸세."

"군단이요?"

"고구려의 모든 성은 행정관을 파견해 직접 관리될 걸세. 하지만 국토방위는 군대의 소관이지."

이미 고구려의 운용 기반은 얼개가 나왔다.

행정과 군대, 사법은 분리할 작정이다.

그것을 한데 어우르는 봉건제는 파기한다.

"도시 관리는 행정관이, 그리고 곧 만들어질 법무청에서 판사들도 파견할 걸세. 지구의 법과는 많은 것이 다르겠지만 말일세."

"군은 어찌 구성됩니까?"

"고구려 북부를 아우르는 1군단을 만들 예정이네. 신서울과 일산 성 등 북쪽 방위를 책임질 걸세. 그 초대 군단장은 자네로 내정할 셈이네. 사실상 신서울에 대한 행정사법 권한만 박탈당하는 셈이지."

"오히려 좋군요."

"허허, 군단의 이름은 어림군으로 지었네."

"...선배의 생각이십니까?"

"허허, 당연한 소릴 하고 그러는가?"

"...."

존경하는 육사 선배이자 지휘관이었던 박준필 중장은 과연 어림군의 명칭이 왕의 친위병을 이르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는 걸까?

"어림군이 무슨 뜻인지는 아시지요?"

"으허허! 뜻이야 무슨 상관인가? 멋있기만 하면 되지."

"...."

김도진은 할 말이 궁색해 조용히 술만 들이켰다.

그러고 보니 궁금해 물었다.

"국호를 고구려로 짓는 것에 왜 반대하지 않으셨습니까?"

"끄음. 고구려 정도면 인정할 만하지. 사실 조선으로 밀고 싶었는데.... 유나이티드 코리아 같은 게 될 바에야 고구려라도 낫지 않은가?"

"...."

"아무튼 내 시름을 놓았네. 이로써 고구려는 중앙집권의 통치체제가 정비될걸세. 어림군을 잘 부탁하네."

"염려 놓으십시오."

"으하하, 한잔하세나!"

고구려 국무총리와 어림군 대장의 대작이 밤이 깊도록 이어졌다.

*

파파팟.

이동마법진을 통해 주변 풍광이 뒤바뀌었다.

"흐음, 습하군."

"축축해."

강철두와 에르미스의 평가에 아르엘라가 웃었다.

"마법진 북쪽에 바다 같은 호수가 있어서 그래. 맑은 날보다 안개 낀 날이 더 많지."

"어느 쪽이냐?"

"말 타고 사흘 정도 가야 한다."

"3일이나? 왜 그렇게 먼 데다 영지를 만든 거냐?"

"...이동마법진이 흔한 줄 아냐?"

모두가 이동마법진 곁에 영지를 두고 있는 게 아니다. 더욱이 이동마법진 근처가 이동이 편하긴 하지만, 침략도 쉬워 일장일단이 있다.

"후후, 날아가자."

"으음, 별로 좋은 선택지는 아닌 것 같구만."

"그럼 혼자 벌레 타고 기어서 오던가."

"허! 내 탈것은 벌레가 아닐세! 땅지네라는 좋은 이름이 있어!"

"아무튼 잔말 말고 따라와라."

파팟.

철두는 그리핀 오식이를 소환해 올라타곤 훌쩍 날아올라 버렸다.

땅에 남겨진 아르엘라는 어깨를 으쓱하곤 선물 받은 그리핀을 소환했다.

"우리도 가자고. 난쟁이."

"끄응."

아르엘라마저 날아가 버리자 에르미스는 하는 수 없이 그리핀을 소환했다.

"크으, 살살 부탁하네."

"끼아아아!"

그리핀 위에 마련된 안장에 올라타자 그리핀이 훌쩍 날아올랐다. 서둘러 일행에게 따라붙으니 아르엘라가 선두에 나서서 비행을 이끌었다.

"저쪽이야."

쇄애애액.

세 마리의 그리핀이 허공을 가르길 한참 만에 아르엘라가 소리쳤다.

"저 숲이야!"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그 시야가 멀리까지 뻗기 마련이다. 먼 곳도 한눈에 내다보이는데, 모든 곳이 숲이니 정말 방대한 숲이라 할만했다.

"저기서 내리자."

"응? 저긴 변두리가 아니냐?"

"숲의 입구야. 그리고 저기가 본성이야."

"음?"

요정족들은 숲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살기 마련이다. 헌데 아르엘라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숲의 변두리에 형성된 거대한 성채였다.

철두가 의아해하며 함께 고도를 낮춰 성 주변에 내려앉았다.

아이언헤드 성보다는 면적이 작은 그 성은 절반은 숲에 걸쳐져 있고, 또 절반은 숲 밖으로 내다놓은 듯 경계에 걸친 모습이었다.

"이쪽이야."

일행이 그리핀을 착지시킨 곳은 당연하게도 농경지가 펼쳐진 평지 쪽.

거대한 성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며 주변을 살폈다.

농부들을 살피는데 신기하게도 귀가 큰 요정족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제국인의 생김새를 한 이들이 더 많았다.

"요정족들의 도시가 아니었나?"

"여긴 제국인들이 더 많지."

"...?"

철두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아르엘라가 대꾸해주었다.

"아이리스 후작령은 제국 소속이니까."

"상상하던 모습과 다르군."

"어떤 모습을 상상했는데?"

"요정족들만 모여 사는 줄 알았다."

"...그건 안쪽이지."

"음?"

"가서 봐. 일단 공식적으론 아이리스는 제국 후작령이니까."

그럼 비공식적으론 뭐란 말인가?

철두는 의아해하면서도 낯선 풍광을 구경하며 나아갔다. 거대한 성문을 지키고 선 이는 열 명이었는데, 개중 기사 차림의 사람 둘은 엘프였다.

"헙! 단장님!"

"두리에르. 별일 없었나?"

"그, 그렇습니다!"

두리에르라 불린 기사는 연신 에르미스와 강철두를 곁눈질로 훑었는데, 그 시선에 묘한 동경이 담겨 있었다.

"저 뒤에 두 명은 일행이다."

"헙! 역시! 소문의 단장님 부군이군요!"

"...."

아르엘라가 흠칫 놀랐다.

"소문?"

"네, 그렇습니다. 약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하아, 누가?"

"부, 부단장님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하, 에그니스...."

먼저 후작령으로 복귀한 에그니스가 이미 기사단에 소식을 전한 모양이었다. 기사단에 소문이 쫙 퍼진 걸 보면 말이다.

"충! 방명록 작성 끝났습니다. 입장하셔도 좋습니다."

"그래."

아르엘라를 따라 성안으로 발을 들였다.

도시의 첫 감상은 나무가 참 많다는 것이다.

가로수로 쓰이는지 여기저기 심어진 나무들과 아예 살아있는 나무를 건물의 뼈대로 쓴 집들도 많았다.

드문드문 나 있는 큰 나무들 덕에 그늘이 많아 해를 피하긴 좋아 보였다. 나무 둥치 아래에는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아르엘라는 영지에서 유명 인사인지 모두가 그녀를 알아보았다.

"어머, 저분이 부군이신가?"

"저기 우락부락한 자 말인가?"

"바보야. 난쟁이 말고 그 옆에."

"흠, 덩치 큰 인간이군."

"정말 단장님 부군인가?"

"썩 사이가 좋아 보이진 않는데."

"누가 먼저 고백한 걸까?"

"모르지."

길을 걷는 아르엘라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하아."

"왜 한숨이냐?"

"몰라서 묻냐?"

문제의 소문이 기사단에만 퍼진 게 아닌 모양이다. 주민들의 쑥덕거림을 듣다 보니 후작령 안에 아르엘라가 약혼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를 찾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후후후. 좋군."

"뭐가 그렇게 신나냐?"

"바바리안에게 처갓집은 생소한 곳이라 설레는군."

"...."

납치혼이 전체 결혼의 절반에 달하는 종족답게, 처갓집 방문은 흔치 않은 일일 수밖에 없었다.

272화 어머니의 힘

잘 걷던 아르엘라가 얼음이라도 된 듯 제자리에 굳었다. 천천히 목을 돌려 철두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엔 뜨악한 표정이 가득했다.

"처갓집?"

"그래. 여기가 네 집이 아니냐?"

"...."

그래, 맞긴 하지.

맞긴 맞는데, 이거 참....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기분이다.

결혼을 약속했다.

종족의 번영을 위한 희생정신으로 내린 결정.

그것을 두고 저 무심한 바바리안 녀석이 아무렇지도 않게 저리 이야기하니,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처갓집이 부끄러운가?"

"아닛! 벌써부터 그리 사위 노릇 하지 말라구!"

저 철면피 바바리안은 부끄러움도 없는 것인가? 지금 주민들이 모두 이곳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후후후."

"허, 헛! 거, 걷기나 해."

아르엘라는 갑자기 걸음을 빨리해 앞으로 나아갔다. 얼굴이 새빨개져서 걷는 그녀를 보며 에르미스가 피식 웃었다.

"거참. 자네 색시 성격은 참 종잡을 수 없구만."

언제는 괄괄한 성격의 전사 그 자체인데, 또 저렇게 부끄러워하는 걸 보니 어느 쪽이 진짜인지 영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후후, 순수한 거다."

"허허허, 그런 걸로 합세."

철두와 에르미스가 앞서가는 아르엘라를 뒤따르니, 남은 건 코앞에서 그것을 직관한 주민들의 수다뿐이다.

"대박!"

"기사단장님이 저리 부끄럼 타는 건 처음 보는구만!"

"이야, 이거 좋은 구경했네. 냉미녀 기사단장님이 저리 얼굴이 새빨개져서. 크크크."

"영지에 경사가 났군!"

"아무렴!"

아이리스 후작령의 사람들은 저마다 좋은 구경했다고 떠들었으나, 그 사이사이 섞여 있는 엘프들은 자못 더 심각했다.

'소문이 사실이다!'

'공주님의 부군이 요정이 아니다.'

'타 종족을 부군으로 맞다니....'

공주님의 소식이 궁금한 엘프들이 하나둘 그 뒤를 따르니, 아르엘라를 선두로 점점 엘프들이 모여들어 행진을 이뤘다.

아르엘라를 뒤따르던 철두는 문득 방향이 이상해 물었다.

"성은 저쪽인데 어딜 가는 거냐?"

"어디긴, 숲이지."

아이리스 후작령은 숲의 경계에 세워진 성.

동문은 들판 쪽으로 바라보고 있고, 서문은 숲을 바라보고 있다.

지금 아르엘라는 서문에 거의 인접해 있었다.

"후작을 만나러 가는 거 아니냐?"

"숲에 계실 거야."

"오."

철두가 어깨를 으쓱하곤 그냥 그러려니 했다.

후작이 숲에 있다는데 그리로 가는 게 맞겠지 뭐.

점점 가까워지는 성문을 바라보던 철두는 의아해 물었다.

"신기하군. 경계 방향이 성의 안쪽이라니."

"...숲을 보호해야 하니까."

"후후후, 재밌어."

성문의 앞에는 무려 스무 명의 문지기가 있었는데 전부 엘프들이었다. 그리고 성벽 위에 자리 잡은 서른 남짓의 궁수들도 모조리 엘프들이었다.

이들은 숲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성 안쪽을 바라보며 경계를 서고 있으니....

"서문은 숲의 입구야."

"그래서 숲을 지키고 있는 건가?"

"맞아. 저 숲은 오직 요정만이 들어갈 수 있지."

아르엘라의 말에 철두와 에르미스가 서로를 돌아봤다.

"이 난쟁이는 두고 가는 건가?"

"허어! 자네야말로 바바리안이 아닌가?"

"흥! 난 사위다."

"아닛! 그럼 난, 난!"

에르미스가 말문이 막혀 대꾸할 말을 찾는데, 아르엘라가 한숨을 쉬곤 둘을 이끌었다.

"너흰 내가 초대하는 거라 상관없어. 잔말 말고 따라와."

세 사람이 굳게 닫힌 성문 앞에 섰다.

문지기 중엔 아는 사람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기사단의 부단장 에그니스였다.

"복귀를 환영합니다. 단장님."

"시끄러! 문이나 열어."

일부러 소문이나 내다니.

아르엘라가 에그니스를 흘겨보며 명했다.

"하하, 이리로 오시지요."

성문의 한쪽 귀퉁이에 사람이 두엇 출입할 만한 작은 문이 있어, 곧 그것을 열어젖히니 컴컴한 숲이 일행을 반겼다.

"가자고."

"뭔가 음습한데?"

"맞아. 불길한 숲이군."

"시끄럽고 빨리 따라와."

아르엘라가 바바리안과 드워프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뒤따라온 엘프들도 줄줄이 따라 들어와 졸졸 따르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저 요정들은 왜 자꾸 따라오는 거냐?"

"숲을 오가는 건 요정들의 자유 권리야."

에르미스는 그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투덜거렸다.

"이거 영,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이군."

"오! 드워프도 동물원이 있나?"

"허! 지금 우리 종족을 무시하는 겐가? 당연히 있지."

"후후, 제타 행성도 나중에 기회 되면 구경해보고 싶군."

"흥, 이를 말인가, 걱정 말게. 반드시 우리의 신들이 종족을 행성으로 이끌 것이니!"

에르미스의 목소리엔 확신이 가득했다.

철두는 피식 웃고는 걸음을 내디디며 주변 숲을 관찰했다.

길쭉길쭉 키 큰 나무들이 쭉 뻗어있고 무성한 가지를 자랑하고 있어 볕이 잘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숲이다.

위에서 볼 때는 정글 정도를 생각했는데, 막상 숲 안에 들어오니 나무들 외에 넝쿨이나 잡풀 따위는 그다지 없었다.

그늘진 숲이 작은 풀 따위의 번식을 억제하는 탓에 숲길은 제법 쾌적했다.

숲엔 여기저기 요정들이 만들어놓은 거주지가 많았는데, 그 수가 상상 이상으로 많았다.

"요정들은 여기 다 몰려 사는 거냐?"

"맞아."

아르엘라가 순순히 인정했다.

"다 왔어. 저기야."

"...."

빽빽한 숲길을 한참 걸어 멈춘 곳엔 거대한 바위 두 개가 비스듬히 서 있었다.

A 텐트처럼 바위가 그늘을 만들어내고 그 아래 제법 큰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의 나무그루터기에는 늙은 엘프가 앉아있었다. 늙은 엘프는 일어서서 강철두를 향해 다가왔다.

"어서 오시게나. 요르센 아이리스 후작일세."

"오! 고구려 왕 강철두다."

"허허허, 개국은 들었다네."

"당신이 여기의 왕인가?"

요르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늙은이는 그저 왕국의 장로일 뿐일세."

"왕국이라...."

철두가 휘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무 주변에, 또 튼튼한 나뭇가지 위에, 여기저기 중구난방으로 몰려든 요정들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짐승보다 더 예민한 기감으로 느껴보건대 몰려든 엘프들만 해도 수천, 아니 저 인식범위 밖의 엘프들까지 하면 수만은 되리라.

"여긴 왕국인가? 후작령인가?"

"밖은 후작령이네만, 여긴 엄연히 왕국이지. 하지만 개국을 선포하진 못했네."

"왕가의 상징이 없나?"

개국을 하려면 꼭 필요한 아이템이다.

요르센 장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노바의 시스템이 인정하는 것과 아닌 것은 무슨 차이가 있는가?"

"으음."

"우리 발할라 출신의 요정들은 여전히 하나의 이상과 하나의 믿음 아래 뭉쳐 있네."

노바의 시스템을 받든 말든 상관없다는 태도다.

"후작령은 뭔가?"

"허허, 현실과의 타협이라 생각해주게."

철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제국에 속해있으나 그것은 허울일 뿐.

요정들은 흩어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결속을 단단히 하며 그들만의 왕국을 이루고 있었다.

이 어두운 숲에서.

"왕이 누구냐?"

아이리스 후작은 바지사장이다.

진짜 종족의 왕은 따로 있을 터.

철두의 부름에 요르센 아이리스 후작은 말없이 웃으며 아르엘라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그 옆의 에그니스 또한 그러했고, 주변의 기사단 엘프들도 그러했다.

모두가 하나둘 천천히 아르엘라를 향해 존경과 신뢰가 담긴 눈빛을 하곤 무릎을 꿇어 바라보니, 마치 그녀를 중심으로 물결치는 동심원 같았다.

구경 나온 요정들과 함께 구경 나왔던 어린 요정들도 어른들을 따라 공손히 무릎 꿇었다.

이 어두운 숲에서 두 발로 서 있는 건 아르엘라와 강철두, 에르미스뿐이었다.

*

밤이 깊었다.

등을 맞댄 두 개의 거대한 바위는 숲에서 상징적인 장소라, 요정들에게 광장과 같은 개념의 공간이었다.

약속이 있거나 집회할 일이 있으면 이곳에 모인다.

지금 그 바위틈에 모닥불 하나를 피워놓고 철두와 아르엘라가 물끄러미 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치 빠른 에르미스는 이미 요르센 장로를 따라 손님용 주택으로 가 자는 중이다.

타닥, 타닥.

나무 하나를 더 집어넣어 불을 쑤시던 철두가 불쑥 물었다.

"공주라고 하지 않았나?"

"맞아."

"...아버지는?"

"돌아가셨지. 어머니도."

철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버지가 안 계신데 왜 아직 공주인가?

여왕이지....

"왜 아직 공주라 불리지?"

"대관식을 못 했으니까."

"왜? 아!"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령이 없으면 안 되는 건가?"

"맞아."

철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왕위에 오르기 위해 정령을 가지려는 거군."

"...."

아르엘라는 눈동자가 저 모닥불처럼 흔들렸다.

"요정들은 내면에 숲을 가꾼다고 한 거 기억나?"

"기억한다."

"내가 가진 숲은 정령왕을 품기에도 충분할 정도야."

"호오!"

이를테면 정령사로서 자질이 아주 뛰어나다는 말이다.

"헌데?"

"저주받았지. 정령들이 아무도 탐내지 않아."

정령들에게 아르엘라의 어둠숲은 그저 부지만 넓은 쓰레기장이나 다름없었다. 정령들에게 매력적인 건 크기가 작더라도 자연력이 넘치는 화원이다.

"후후, 신세 한탄은 많이 들었다."

"...."

"그래서 이제 어쩌자는 거냐?"

"요르센 장로가 의식을 준비하고 있어."

"무슨 의식?"

"서로의 심상 공간을 보게 될 거야."

"...!"

철두가 흠칫 놀랐다.

바바리안의 심상 공간은 내면의 수련터이자 선조의 혼을 모시는 공간이다.

요정족의 심상 공간은 정령들이 정령계를 떠나 새롭게 이주해오는 집이다.

비슷한 형태의 이 심상 공간은 당연하게도 남에게 보일 수도, 살아있는 이를 들일 수도 없는 공간이건만....

"그게 가능하냐?"

"가능해...."

아르엘라는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다만, 모든 걸 품어주는 전지전능한 어머니의 힘이 필요해."

"엄마 돌아가셨다며?"

"...세계수 잎이 필요하단 소리였어."

철두는 괜히 머쓱해 말을 재촉했다.

"그것만 있으면 되냐?"

"맞아. 우린 내일 의식이 준비되면 서로의 심상 공간을 볼 거야."

"바꾸는 거냐?"

"잎으론 불가능해. 서로 엿볼 뿐이지."

세계수의 잎으로 두 사람이 서로의 심상 공간을 볼 수 있지만, 어떠한 물리력을 행할 수는 없다.

"그럼 헛수고 아니냐?"

"아니, 가능성을 보는 거지. 너의 정령들과 내 안의 스승님이 서로의 터전을 맞바꾸는 게 가능한지."

"흐음. 아버지를 만날 수 있겠군."

"그래."

아르엘라는 한참 모닥불을 보더니 물었다.

"가능성이 있다면 어떻게 할 거야?"

"...."

"바꿀 거야?"

"으음."

철두는 그답지 않게 신중했다.

아르엘라는 이해한다는 듯 말을 이었다.

"기다릴 수 있어. 우리 종족에게 시간은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것이니까. 수십 년 뒤라도 상관없어. 우리 종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네 정령 친구들이 필요해."

의식은 강제적일 수 없기에 철두의 자발적 승낙이 중요했다.

"결정하면 바로 바꿀 수 있는 거냐?"

"아니."

철두가 와락 인상을 구겼다.

"뭐야? 보는 건 되고, 바꾸는 건 왜 안 돼?"

"더 큰 어머니의 힘이 필요해."

"세계수?"

"맞아. 세계수의 가지가 필요해."

"없냐?"

"없지."

철두는 맥이 풀려 피식 웃었다.

"뭐야? 불가능한 걸 떠본 거냐?"

"가능성만 확인해 보는 거야. 가능하다면 난 당장 세계수의 가지를 찾으러 갈 거야."

"오, 어디 있는 줄은 아는 거냐?"

"짐작 가는 곳이 있어."

"그게 어디냐?"

잠시 모닥불을 바라보던 아르엘라가 이내 말문을 열었다.

273화 합일

"황실 비고."

"음?"

아르엘라의 말에 철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황실 비고?"

"맞아."

"황궁?"

"그래."

"허, 결국 싸워야 하는군."

철두의 말에 아르엘라가 황당해하며 대꾸했다.

"훔칠 거야."

"허, 어떻게?"

"그건 이제부터 생각해봐야지."

"...."

철두는 이 대책 없는 엘프 공주를 보며 피식 웃었다.

"어차피 내일 의식에서 맞바꾸는 게 불가능하면 아직은 소용없는 일이군."

"맞아. 내일이 중요해."

아르엘라가 그토록 강철두를 요정 장로에게 보이고 싶었던 이유다.

일단 정령과 선조의 혼이 바뀔 수 있는지 체크해봐야 한다.

가능하다면 그 뒤의 수순이 세계수의 가지를 얻으러 가는 일이다.

"세계수의 가지까지 얻으면 바로 바꿀 거냐?"

철두의 물음에 아르엘라는 질문을 역으로 돌렸다.

"넌 어떤데?"

"...."

"생각이 바뀐 거야?"

아르엘라는 초조해 물었다.

철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 하나 바바리안 전사로 거듭난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싶어 고민했을 뿐이다."

"...."

철두는 최근 고민이 들었다.

요정족들은 그들끼리 뭉쳐 모두가 종족의 미래를 위해 힘쓰고 있다.

정령계와 노바가 연결되면 요정족은 다시금 정령사를 배출하며 명맥을 이어 나갈 터다.

드워프들도 그러했다.

그들은 신의 무기를 만들어 낸다는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모두가 한 가지 목표를 향해 경쟁하고 땀을 흘린다.

'바바리안은....'

그에 반해 바바리안은 어떠한가?

바바리안은 종족의 미래니 뭐니 하는 걸 고민하는 자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바바리안 태생이긴 하나, 고구려는 지구 출신의 나라가 되어버렸다."

철두가 아무리 용을 써본들 고구려에 바바리안이 뿌리내리는 건 어렵다.

"내 아들을 얻는다 한들, 아들이 바바리안 전사가 될 길도 없다."

"왜?"

"선조의 혼이 없다."

"...."

"전장에서 용감히 싸우다 죽은 선조만이 혼령이 되어 후손들을 보살핀다. 헌데 여긴 죽음이 없지 않나?"

"하긴, 기사급만 되어도 전부 미니언이 되어버리니까."

아르엘라가 맞장구치다 문득 궁금해 물었다.

"자연사할 수도 있잖아?"

"응?"

"수명이 다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런 바바리안이 있었던가?

그전에 다 죽은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바바리안 부족에서의 삶은 너무 어렸을 때다."

"어렵네."

"후후, 그러니 노바에서 바바리안의 명맥은 끊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른 바바리안을 찾으면 되잖아?"

"음?"

"너 혼자 고민할 게 아니라, 다른 바바리안과 힘을 모으면 되잖아?"

아르엘라의 말에 철두가 씩 웃었다.

"바바리안은 협력이 없다. 정복과 복종이 있을 뿐이다."

"정복해, 바보야."

"...!"

"세력을 모으면 되잖아."

"모아서?"

"그, 그때가 되어 생각해봐야지."

"...."

바바리안을 모아본들 딱히 뾰족한 수는 안 생길 것 같다.

모든 것은 노바의 법칙에서 비롯된 문제다.

무한결투장과 부활 시스템이 존재하는 한, 선조의 혼령은 이제 만들어지지 않는다.

영면도 없고, 선조와 후손이 이어지지도 않는 세계.

어쩌면 노바는 바바리안에게 있어 참 고독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답은? 바꿀 거야?"

"내 정령 친구들이 가겠다면 말리지 않는다."

"...고마워."

"후후, 내게도 좋은 일이 아니냐? 이제야 제대로 바바리안 전사로 거듭날 기회인데."

아르엘라의 심상에 있는 아버지가 철두의 심상으로 오면 이제 진정한 선조의 혼을 갖게 된다.

철두는 내심 정령 친구들과의 이별이 아쉬우면서도 기대가 되었다.

다만 걱정은 역시나 하나뿐.

"내 아들은 바바리안 전사가 되지 못하겠지."

"...."

"아이는 언제 낳아줄 거냐?"

"...."

모닥불이 비춰서 그런지 아르엘라의 벌건 얼굴이 더욱 벌게지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멍청한 바바리안이라도 그렇지, 그런 말은 조금 조심해줄래?"

"후후후."

"징그럽게 웃지 마."

아르엘라는 모닥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내일 의식이 끝나고 결혼하자."

"후후, 좋다."

철두의 즉답에 아르엘라의 눈망울이 조금 흔들렸다.

'나의 희생은 괜찮아.'

이 순진무구하지만, 누구보다 강한 이 바바리안의 희생은 최소화되길 바랐다.

"10년. 아니 어쩌면 20년."

"뭐가?"

"그때쯤 바꾸자."

"굳이?"

"바보야, 애는 키워야 할 것 아냐."

당장 요정족이 큰 위협에 처하는 게 아닌 이상 그 정도 시간은 기다릴 수 있다.

"너야말로 바보군. 정령과 선조를 바꾸고 애를 낳으면 되지 않은가?"

"그...."

엘프 공주 아르엘라가 정령을 되찾으면, 그녀는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모든 걸 저버리고 숭고한 희생으로 걸어가야 하는바.

"아, 몰라! 애부터 낳자고!"

"후후, 적극적이군."

퍽.

"잠이나 자!"

아르엘라가 더는 낯간지러워 참지 못하고 엉덩이를 털고 모닥불을 떠나버렸다.

"후후."

철두는 홀로 남아 불길을 보았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불을 보고 있으니 불의 정령이 불쑥 솟아나 철두의 앞에서 히죽 웃었다.

땅도 들썩이더니 땅의 정령이, 바람의 정령과 물의 정령도 나타나 철두의 주변을 맴돌았다.

"슬퍼하지 마라."

정령들이 철두의 주변에 더욱 엉겨 붙었다.

마치 떠나기 집을 떠나기 싫은 아이들처럼.

"요정족을 위해 필요하다잖아. 애들 좀 도와줘라."

철두의 말에 정령들이 시무룩해졌다.

물의 정령은 꺼이꺼이 울기까지 했다.

"후후."

철두는 그저 정령들의 투정 정도로 생각했다.

타닥, 타닥.

불똥이 튀는 모닥불을 보니 설레서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내일이면 아버지를 만난다.

*

아이언헤드 성.

기쁜 일은 연달아 온다고 했던가?

대모 박순자가 소드마스터가 되었다.

축제로 떠들썩한데, 연구소에서 연구원들이 잔뜩 흥분해 재상 김진태를 찾았다.

"각하! 완성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석 엔진입니다!"

"오오."

마석 엔진은 그 크기가 책상 정도로 컸다.

"이렇게 크나요?"

"아직 정교한 부품의 생산이 힘들어 그렇습니다. 하지만 곧 해결 가능합니다!"

연구원들은 다들 눈빛이 반짝반짝거렸다.

마석 엔진은 마석을 에너지원으로 삼아 동력을 발생시킨다.

위이이잉!

"오! 엄청 빠르게 돌아가네요."

"이 마석 엔진을 장착한 산업용 기계들도 만들어 내기 시작하면 소형화도 가능합니다!"

"호오, 좋네요!"

하루아침에 산산조각 나버린 지구 문명이다.

맨몸으로 이곳 노바로 넘어온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은, 이 마석 엔진의 구동을 다들 저마다의 전문분야에 대입해보기 바빴다.

'선반부터 만들어야지. 금속 가공을....'

'이제 수차는 필요 없군. 대형 제분소를....'

'드디어 나의 진가가 발휘되는 건가! 자동차! 자동차를 만들어 내고야 말겠다.'

'펌프 정도야 간단히 만들어 낼 수 있어. 이제 농수로 문제는 해결된 거나 다름없어.'

열기로 반짝이는 연구원들의 눈빛을 받으며 김진태는 해맑게 웃었다.

"자, 일단 우린 기차를 만들 겁니다. 신서울부터 한양까지. 우린 이 라인에 기차 교통망을 건설할 겁니다."

물류와 교통을 해결할 것이다.

바나나처럼 길쭉한 형태로 국토를 이루고 있는 고구려의 모든 도시들을 기찻길로 이을 것이다.

"문제없습니다!"

"이미 남북으로 도로가 거의 놓였으니 그에 선로를 놓는 건 금방입니다!"

"당장 열차 개발에 착수하겠습니다!"

모두가 희망에 차서 장밋빛 전망을 쏟아내는데, 수석마법사 르망이 우려를 표했다.

"기쁜 날에 송구하오나, 이것이 효용이 있을는지요?"

"예에? 엔진이에요. 엔진."

"예에. 들어서 알고는 있사오나, 이곳 노바에서 마석은 귀한 광물입니다."

"...?"

마석을 다루는 마법사이기에 잘 알고 있다.

르망은 누군가는 해야 하는 말이기에 본인이 나섰다.

"그 비싼 마석을 고작 동력을 얻는 데 쓰는 건 낭비이옵니다. 우마는 뒀다가 어디에 쓰겠습니까? 그것이 훨씬 더 경제적입니다."

"아니, 기차라니까요?"

"예에, 마차가 여럿 이어진 것 아닙니까?"

"아우, 답답해."

지구의 문명을 경험한 지구인과 그것을 설명으로만 들은 제국인의 견해는 좀처럼 좁혀들지 못했다.

"잠깐! 중요한 건 가성비가 안 나온단 말이죠?"

"그렇지요. 마석은 귀한 자원입니다. 고작 마차를 끄는 데 쓸 물건이 아닙니다."

르망의 완고한 태도에 김진태는 인상을 찌푸렸다. 지구 문명에서 엔진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모든 기계의 심장이라 해도 무방했다.

"일단 만드세요. 연구비는 내가 지원합니다."

"예, 각하!"

연구원들이 우르르 물러났다.

김진태는 대충 계산기를 두드렸다.

아미르 왕국에서 매년 받을 공물까지 생각하면, 얼추 마석 구입은 가능하지 않을까?

비싼 기차를 굴린다 생각하면....

그때 집무실에 남은 르망이 충언했다.

"하오나, 각하! 마석은 돈이 있다고 하여 무조건 살 수도 없는 물건이옵니다."

"어째서요?"

"시장에 풀리는 수량은 매우 한정적입니다. 마석 광산을 보유 중인 상단과 끈이 닿지 않으면 잘 구하기도 힘드옵니다."

"으음."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다.

고구려에서 시장에 풀린 마석을 매입하기 시작하면 그 값이 또 천정부지로 솟구칠 것이다.

'골치 아프네.'

마석 엔진을 개발해놓고도 가성비가 떨어져 쓰지 못하게 되는 걸까?

"일단 열차 개발은 진행하세요."

성 밖은 축제로 떠들썩하건만, 좋은 날 김진태의 얼굴은 고심으로 가득 찼다.

"각하! 모솔 상단의 닉이라는 자가 고구려의 대왕을 찾고 있습니다. 부재중이라 하니, 그다음 책임자를 만나고자 청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바쁘니 나중에.... 아니다. 들라 해라."

"네, 각하."

곧 비슷한 복색의 사내 열 명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그중 가장 선두에 선 자가 공손히 인사했다.

"모솔 상단의 행장 닉이 고구려의 재상을 뵙습니다."

"그래, 모솔 상단에서 무슨 일로 방문하였는가?"

"마석 광산의 개발을 무사히 마치고 이제 채굴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금일부터 보름 간격으로 채굴된 마석을 전달드리기 위해 방문했사옵니다."

김진태가 깜짝 놀랐다.

"뭐? 뭘 채굴해요?"

"마석이옵니다."

"허, 그걸 왜?"

상인답게 눈치 빠른 닉이 김진태를 보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대왕께서 모솔 상단과의 거래에 의해 공동 소유하게 된 마석 광산에서 지분 비율대로 생산된 마석을 배송하기로 약조하였습니다."

"비, 비율이 어떻게 되죠?"

"5:5입니다."

"허억!"

매장량을 알 수는 없지만 생각지도 못한 마석 광산이 생겼다.

'철두야!'

너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이 귀여운 자식!

얼른 돌아와라.

우리 대왕님 돌아오면 아주 성대하게 환영회를 해주리라!

*

숲의 중심.

다른 나무보다 두 배는 더 큰 나무가 있었다.

요정들이 공들이고 공들여 키우고 있는 중심 나무다.

세계수라 불리기엔 턱없이 모자란 나무지만, 지금은 이 나무가 요정족 숲의 중심지가 되어주고 있었다.

그 나무 앞에 강철두와 아르엘라가 누워 있다.

"두 분께서는 마음을 편히 하시고, 서로 손을 잡으십시오."

철두와 아르엘라가 누운 채 서로 손을 뻗어 맞잡았다.

"후후, 손잡으면 애기 생기는데."

"농담이 나오냐? 조용히 해."

귀하디귀한 세계수의 잎을 쓰는 의식이다.

허투루 할 수 없다.

아르엘라의 핀잔에도 철두는 그저 히죽 웃었다.

요르센 장로가 세계수의 잎을 꺼내 두 사람이 맞잡은 손에 쥐여 주었다.

"육신은 제가 지켜드릴 것이옵니다. 두 분께서는 심상 세계로 떠나주시기를 바랍니다."

철두와 아르엘라가 눈을 감았다.

철두가 외부의 눈을 감자,

에이든이 내부의 눈을 떴다.

메마른 언덕.

작은 바바리안 에이든의 심상 공간.

그 언덕 아래 끝없이 펼쳐진 검은 숲이 생겨나 있었다.

274화 구멍

메마른 언덕.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곳.

강렬한 후회가 남아 작은 바바리안의 마음속에 깊이 박혀버린 이곳에 변화가 생겼다.

본디 언덕의 아래는 황무지 절벽이었는데 그 아래 검은 숲이 생겨나 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숲.

"여기구나."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저기가 아르엘라의 심상 공간이구나.

에이든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버지...."

저곳에 아버지가 있다.

절벽 위에 올라선 에이든의 눈이 바삐 움직였다. 방대한 숲이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니 여기저기 공터가 있었는데, 개중에 작은 오두막집이 하나 보였다.

저기다.

저기구나.

메마른 언덕의 절벽 비탈면에 몸을 던졌다.

마음이 급하니 행동이 투박하고 몸이 굳었다.

투두두둑!

흙먼지와 함께 잘 내려오다가 중간부터는 거의 구르다시피 하여 바닥에 닿았다.

"후우!"

숨을 짧게 쉬며 흙먼지를 쫓으며 달렸다.

타탓!

벌써 마음은 저 검은 숲에 가 있다.

아버지!

저예요. 에이든!

콰앙!

맹렬한 속도로 달리던 에이든의 몸이 숲으로 들어가기 전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혔다.

터엉!

"커헉!"

예상치 못한 충돌에 뒤로 벌렁 나자빠진 에이든이 다시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가려 했으나, 보이지 않는 벽이 진로를 막아섰다.

메마른 언덕과 검은 숲은 투명한 벽이 두 공간을 단절시키고 있었다.

퉁 퉁!

벽을 두드려봤으나 소용없다.

"어어?"

그때 검은 숲에서 두 명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재빨리 다가왔는데, 한 명은 익숙한 얼굴의 아르엘라였다.

그리고 덩치 큰 사내는 너무나 그립고 그리운.

닮고 싶었던 사내.

"아버지!"

에이든이 소리 질렀다.

허나, 보이지 않는 벽은 몸만 막아선 게 아니라 목소리도 막아섰다.

주먹으로 벽을 치며 더욱 크게 소리 질렀다.

"아버지이! 저예요! 에이든이에요!"

쾅, 쾅!

"아버지!"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사정은 단절된 반대편도 마찬가지였다.

바바리안 카다잔은 투명한 벽을 쳐보다가 이내 도끼까지 꺼내 휘둘렀다.

허나, 반대편인 이곳까지 아무런 충격도 소음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아!"

에이든이 탄식했다.

다른 차원이다.

애당초 심상 공간이다.

철두의 마음과 아르엘라의 마음이 서로 별개이니, 두 세계는 분절되어있음이 당연했다.

에이든과 카다잔은 소용없음을 깨닫고 벽에 마주 붙어 서로를 보았다.

"아버지!"

[....]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상대의 입 모양만이 보인다.

그저 먹먹하다.

소용없음을 알지만 에이든은 소리쳤다.

"저 보세요! 강해졌어요!"

"아! 여기선 아직 어리지만, 이것도 곧 자랄 거예요!"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전 잘하고 있어요!"

"울지 마! 우리 아버지는 울지 않아!"

에이든이 울부짖었다.

처음 본다.

전사 중의 전사.

어린 에이든의 눈에 누구보다 강하고 누구보다 컸던 사내!

"흐흑, 여기로 부를게요! 걱정 마요!"

"난 이제 누구보다 강해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잃지 않아도 돼요!"

"난 강하니까!"

에이든이 목놓아 울부짖었다.

*

검은 숲.

넓디넓은 숲의 주인 아르엘라는 심상 세계에 들어오자마자 카다잔의 오두막을 찾았다.

"영감!"

끼이익.

늘 변함없는 모습의 단단한 사내.

카다잔이 걸어 나와 아르엘라를 보며 오두막 옆에 세워뒀던 도끼를 들었다.

심상 세계에서의 수련은 숨 쉬는 것과 같은 행위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아니, 그건 나중에 하고 일단 가자."

"...어딜?"

"아들 보러."

"...?"

"아, 물론 좀 징그럽게 크긴 했지만 말야."

곧 있을 부자 상봉을 생각하며 아르엘라가 씩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 무식하고 남 놀리기 좋아하는 유치한 바바리안의 얼굴이 스승과 많이 닮아 있었다.

카다잔이 선 굵은 마초남 그대로의 얼굴이라면, 강철두는 거기서 조금 더 장난기 많아 보이는 얼굴이다.

"흐흐, 저거 보여?"

아르엘라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따라갔다. 숲의 공터에 자리 잡은 오두막에서 위를 살펴본들 본디 우중충한 검은 하늘뿐이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저 숲 너머, 거대한 언덕이 보인다.

저게 뭐지?

불쑥 솟아있는 언덕 모습이 묘하게 익숙하다.

거대한 무언가가 엎드려 고개를 치켜든 모습.

"용바위!"

용바위다!

저긴, 저긴.

타타타탓!

마음이 급하다.

"어어? 같이 가!"

순식간에 숲을 향해 뛰어가는 카다잔을 보곤 아르엘라가 급히 따라붙었다.

퍼퍼퍽!

아르엘라는 저렇게 서두르는 카다잔을 본 적이 없다. 늘 느긋하고 여유로우며 두려움 따위는 모르는 전사가 잔뜩 겁에 질려 도망치는 것 같았다.

상상해본 적 없는 모습이라 당혹스러우면서도 슬펐다.

그냥 슬펐다.

누군가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저렇구나.

난 기억나지 않지만....

타타탓!

쾅!

미친 듯이 달리던 카다잔은 벽에 부딪혀 나뒹굴고 말았다.

쾅, 쾅!

몇 번이나 벽을 두드려 보다가 정신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허공에서 미친 듯이 벽을 두드리는 꼬마를 발견했다.

타탓!

급히 달려간 카다잔은 투명한 벽 너머에 선 꼬마를 향해 울부짖었다.

"아아아어아!"

짐승이 내는 소리 같았다.

뒤따라온 아르엘라는 감히 끼어들지 못했다.

쾅, 쾅!

얼굴이 닮은 두 부자는 서로를 향해 미친 듯이 주먹을 휘두르고, 도끼를 꺼내 내리찧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것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은 투명한 막이 있었다.

보호막 같은 게 아니다.

아예 다른 공간에 있는 세상.

두 공간이 단절된 게 아니라, 본디 다른 세계를 세계수의 잎을 통한 의식으로 보이게 한 것뿐이다.

서로를 볼 수 있지만 무엇도 할 수 없다.

"에이든! 에이든! 그래, 아빠다!"

전사는 울먹이며 허공을 짚고 허물어졌다.

엎드려 아들과 눈높이를 맞추며 울부짖었다.

"에이든!"

[....]

허공 너머에서 작은 소년이 무어라 소리 질렀으나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어항 속의 물고기가 뻐금거리는 것 같았다.

"아아아아! 내가, 내가아!"

바바리안 전사는 절규했다.

후회, 후회, 후회.

후회해본들 바꿀 수 있었을까?

다시 돌아간다 한들, 아들을 지켜 낼 수 있을까?

약하구나, 카다잔.

결국 내가 저 아이를 아직도 어린아이로 머물게 해버렸구나.

인도자 없는 아이가 어찌 바바리안으로 성장할까?

"날 보내다오! 아르엘라! 날 내 아들에게 보내다오!"

카다잔이 엎드린 그대로 아르엘라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부탁하니, 꼭 아르엘라의 앞에 절을 하는 것 같았다.

"...카, 카다잔."

스승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본다.

이것이 아버지일까.

나의 아버지도 어린 나를 두고 죽음에 이르며, 이토록 비통하셨을까?

"무엇이든 하마! 날 보내다오!"

"무엇도 할 필요 없어."

"...!"

"이미 그러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아르엘라가 벽 너머를 보았다.

작은 소년이 바로 1미터 앞에 있지만, 두 세계는 온전히 분절되어 아무것도 전달되지 않는다.

세계수의 가지가 있다면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만질 수 있을까?

카다잔이 저 세계로 가고, 정령들이 이 세계로 올 수 있을까?

그렇게 서로 맞바꿀 수 있을까?

아르엘라가 여전히 길길이 날뛰는 소년을 향해 다가갔다.

"네가 강철두구나."

[....]

"아니, 에이든...."

몸만 컸지, 마음속의 너는 이토록 어리고 약하구나.

아르엘라는 강철두의 성격을 이루는 근간을 엿본 기분이다.

그래서 너는 그토록 유치했구나.

그래서 너는 악의 없이 그리 폭력적이었구나.

그래서 너의 잔인함은 선이 없었구나.

그리고 그리도 순수했구나.

아르엘라가 손을 뻗어 공간을 만졌다.

손은 에이든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멈췄다.

손가락을 쫙 펼쳐 대고 있으니, 뭐라도 해보려는지 반대편에서 에이든이 제 손을 펼쳤다.

두 손은 포개져 있었으나, 마음이 다르니 만나지 못했다.

파직.

"어?"

방금 무언가 느껴진 것 같은데?

파지지직!

손에서 느껴지는 짜릿함에 깜짝 놀라 손을 떼었다.

파지지지직!

방금까지 손을 맞대고 있던 허공에 스파크가 튀었다. 작은 소년의 손은 여전히 그 허공에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이 벽을 잡아 뜯어버리기라도 할 기세로.

*

메마른 언덕 아래.

검은 숲을 앞에 두고도 가로막힌 작은 바바리안이 울부짖었다.

"비켜! 비키라고!"

요정 녀석!

아버지를 무릎 꿇리다니!

"비켜! 이건 뭐야? 손 뭐? 어쩌라고!"

흥분과 분노로 머리가 굴러가지 않는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오직 두 세계를 잇지 못하게 막아선 이 벽에 대한 분노뿐이다.

뚫어버리겠다!

파지지직.

"어?"

그래.

여긴 심상 공간.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는 공간이다.

신으로 군림하는 나만의 세계.

나의 의지가 그것을 원하니.

파지직.

뚫려라!

나는 에이든.

이 죽음뿐인 메마른 언덕에서.

죽음에서 비롯된 이 공간에서.

나무에 새싹도 틔우지 않았던가?

간절한 의지에 벽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휘이이잉.

바람이 불어와 에이든의 머리를 헝클어뜨린다.

땅이 솟아나 에이든의 다리를 두드리고 오른다.

이글거리는 불이 나타나 에이든의 팔을 타고 오른다.

눈물이 찰랑이며 볼을 타고 흐르니.

"도와줘!"

"너희들이 했던 거 알아! 날 도와줘!"

이 죽은 공간에 생명을 틔운 힘을 내게 줘.

빌려줘.

제발.

난 저리로 가야겠어.

에이든의 간절함에도 네 정령은 한참을 말리려 했으나, 작은 바바리안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이내 못 말리겠다는 듯 네 정령이 서로를 보며 조잘거렸다.

[....]

[....]

[....]

[....]

뻐끔거리나, 들을 수 없다.

마치, 단절된 차원에 있다는 듯.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들끼리 이야기를 마친 듯 이내 네 정령이 에이든의 손바닥으로 향했다.

그러곤 폭발한다.

파지지지직! 꾸웅!

"헉!"

폭발에 휩쓸려 에이든도, 맞은편에 있는 아르엘라도 뒤로 튕겨 날아갔다.

폭발이 남은 허공엔 손가락 하나 들어갈 만한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으으...."

폭발의 충격이 커, 에이든은 의식을 유지하려 애썼으나 감기는 눈을 멈춰 세우지 못했다.

"...에이든!"

꿈에서 듣던 아버지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으나, 내면은 두 눈을 꼭 감아 버렸다.

마음을 보던 눈이 감기고, 다시 세상을 보는 눈이 떠지니.

"허어어억!"

크게 숨을 들이켜며 벌떡 몸을 일으키려고 보니 맞잡은 손이 느껴진다.

"으윽."

비슷한 시기에 깨어난 아르엘라가 신음하며 일어섰다.

두 사람은 깍지 낀 두 손을 풀었는데, 그 안에 쥐고 있던 세계수의 잎은 푸름을 잃고 바싹 말라 있었다.

"...."

철두의 눈망울이 흔들렸다.

"...아버지."

막연히 생각하던 것과 대면하는 것은 다르다.

철두는 반드시 아버지를 모셔 오고 싶었다.

"가자!"

"어딜?"

아직 충격이 심해 머리를 붙잡고 있던 아르엘라의 물음에, 강철두는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세계수의 가지! 그게 필요하다!"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야."

"느긋할 이유도 없다!"

두 사람의 언쟁에 구경하던 에르미스가 끼어들었다.

"안타깝게도 그건 뒤로 미뤄야 할 것 같네."

돌아본 에르미스의 표정은 자못 심각했다.

"연락이 왔네."

"무슨 연락?"

에르미스가 와이피석이 든 호리병을 들어 보였다.

"왕국과의 약속을 지킬 시간이네. 바바리안."

성물 묠니르를 써야 할 시간이다.

275화 불길의 강

중심 나무.

다른 나무들보다 배는 더 큰 이 나무는 요정들이 심혈을 기울여서 돌본 나무다.

장차 세계수가 될 나무.

모든 중요한 의식은 중심 나무 앞에서 이뤄졌다.

장로 요르센은 단 3개 남은 세계수의 잎을 이번 의식에서 사용했다.

어머니의 숨결이 닿은 이 잎은 서로의 마음을 보여준다. 거짓 없이 서로를 보게 되며, 가식 없이 서로를 알게 된다.

매끈한 피부의 덩치 큰 바바리안과,

전신에 타투가 가득한 요정이 누웠다.

서로 맞잡은 두 손에 세계수의 잎사귀를 쥐여주고, 의식을 진행했다.

지팡이를 들고 소망했다.

나의 소중한 친구들이여, 내게 잠시간 어머니의 따스한 자애로움이 함께하기를.

파파팟.

요르센은 2원소 정령을 길들인 정령사.

그의 친구들이 지팡이에 모여 요르센의 의지를 받아 어머니의 숨결과 함께했다.

파스스!

지팡이에 뻗어나간 빛이 잎사귀에 스며들고 곧 두 사람의 손안에 하얀빛이 머물렀다.

"후우우."

요르센이 한 일은 어머니의 힘을 빌려 서로 간에 있는 마음의 문이 서로를 마주 보도록 한 것뿐.

그것만으로도 기력이 다해 요르센은 털썩 주저앉았다.

우우우웅.

고요한 가운데 세계수의 잎사귀에 머무르는 빛의 공명음만이 가득했다.

그것은 마치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박동하는 심장 같았다.

중심 나무를 두고 수많은 요정들이 몰려나와 있었다. 본디 숲에 넓게 퍼져 사는 엘프들이건만.

지금은 서로의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밀집해 있었다.

어제보다 더 많은 수의 요정들이 몰려나와 있다.

공주님의 부군이 누구인지 구경하는 것보다, 오늘이 더 중한 날이니 당연했다.

겨우 3장 남은 세계수의 잎.

그 귀한 어머니의 숨결이 함께하는 자리니.

요정들은 저마다 밀집해 조금이라도 그 힘을 더 받으려 애썼다.

나의 어머니여.

나를 보아주소서.

어머니의 자애로움이 내게 깃들기를....

모든 요정들이 소망하며 간절히 기도했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세계수의 잎은 천천히 박동했고, 그 빛은 조금씩 퍼져나갔다.

이윽고 한참 만에 그 빛이 눈이 부실 정도로 커지니.

"어어어!"

"헉!"

모든 요정들이 깜짝 놀라 눈을 감고 고개를 조아렸다.

후우우우우웅!

거대한 빛이 숲을 모두 밝히는 것 같았다.

아아아아.

이것이 어머니의 손길이구나.

모든 요정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환한 빛이 한참을 머물다 사라지자, 여기저기서 탄식이 울려 퍼졌다.

아쉽다.

허무할 정도로 아쉽다.

어머니여, 우리를 버리지 마소서.

원망이 들 정도로 진한 탈력감이 든다.

그만큼 잠깐 사이 퍼진 기운은 엄청난 힘을 담고 있었다. 몇몇 요정들은 일시에 정령 친화력이 높아질 정도로....

가장 놀란 건 장로 요르센이다.

의식을 진행했으며, 가장 가까이서 의식을 지켜본 자.

'이 무슨 터무니 없는....'

요르센은 일시에 증가한 자신의 마력에 감당이 안 될 정도였다.

그야말로 어머니의 은총이다.

의식을 행할 때마다 이런 결과가 빚어지는 게 아니다. 그렇기에 요르센은 지금 누구보다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말도 안 돼.'

지금 노바의 요정족들의 상징적인 수장은 공주 아르엘라다.

하지만 이들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이는 가장 오래 살았으며, 경험이 많은 장로 요르센이다.

나라의 재상과 같은 역할.

그가 노바로 건너온 뒤 세계수의 잎을 쓰는 건 이번이 세 번째.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기에 당혹스러움이 컸다.

잎사귀 하나로는 이만한 광휘를 발휘할 수 없다.

분명 다른 힘이 추가되었다.

"으읏."

신음과 함께 아르엘라와 강철두가 깨어났다.

*

대뜸 이어진 강철두의 재촉은 에르미스의 개입으로 저지되었다.

"으으, 하필!"

강철두는 이를 악물었다.

아버지를 만나고 온 길이다.

지금 당장 세계수의 가지를 구해 아버지를 데려오고 싶다.

머릿속에 온통 그 생각뿐인데 하필 이런 때에 드워프 왕국의 호출이라니.

"맹세를 저버릴 셈인가? 바바리안."

"흥! 맹세 따위 하지 않았어도 약속은 지킨다."

에르미스의 날 선 말에 철두가 이죽거렸다.

"가자!"

"잠깐!"

이번에 철두를 제지한 것은 아르엘라다.

"...결혼식."

"뭐?"

아르엘라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강철두가 채근하자 그녀가 조금 더 목소리를 높였다.

"결혼식을 하고 가...."

"허!"

결혼식이란 문화는 바바리안에게 없기에 생소하기 그지없다.

"결혼식 몰라?"

"안다."

하지만 지구에는 존재하는 바.

강철두는 중심 나무를 가운데 두고 오밀조밀 밀집한 엘프들을 보았다.

결혼식이란 무엇인가?

양가 친척들과 지인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하는 행사다.

"요즘 누가 결혼식을 하나?"

"어?"

"그냥 혼인신고만 하고 사는 사람도 많다."

"어어?"

철두가 아르엘라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곤 우렁차게 소리 질렀다.

"나 강용철의 손자 강철두. 카다잔의 아들 에이든은 요정족 아르엘라를 신부로 맞이함을 선포한다!"

쩌렁쩌렁 목소리가 대호의 포효처럼 숲을 가득 메웠다.

"너도 선언해라!"

"...나 요정족의 적통한 후계자 아르엘라는 바바리안 전사 강철두를 부군으로 맞이한다."

박력에 밀려 얼떨결에 철두를 따라 선언한 아르엘라가 어안이 벙벙해 있는데, 눈치껏 요르센 아이리스 장로가 나섰다.

"축제다! 두 사람을 축복하는 축제를 열겠다!"

"와아아아."

종족을 초월해서 축제는 어딜 가나 환영받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당사자는 축제를 즐길 여유가 없었다.

"다녀오마."

"같이 가."

"음?"

성물 묠니르의 사용을 두고 한 맹약은 강철두의 의무.

아르엘라가 함께할 이유는 없다.

"어딜 가는 줄 알고 따라오려는 거냐?"

"어디든 상관없어."

아르엘라는 확신했다.

세계수의 잎사귀를 두고 서로의 심상 세계를 보며 확신했다.

강철두가 답이다.

바바리안이 어떻게 4대 정령 모두와 계약했는지 모르겠지만, 강철두의 정령을 받아야 한다.

"네가 없으면 우리 요정족의 미래도 없어."

"...좋다. 따라와라."

아르엘라의 결연한 얼굴을 보자 설득하고 말고 해서 될 일이 아닌지라, 그냥 허락했다.

얼른 드워프 왕국에 가서 성물 묠니르 한 방 써주고, 세계수의 가지를 찾으러 바로 갈 생각이다.

'아버지, 기다리고 계세요.'

아버지를 금방 모셔 올 것이다.

그리하여 진정한 바바리안 전사로 거듭날 것이다.

철두는 떠나기 전 장로 요르센에게 부탁했다.

"내 나라에 소식을 전해주시오."

"이를 말입니까? 무엇이라 전하면 되겠습니까?"

"그냥 그대로 전해주시오. 맹약을 지키고, 세계수의 가지를 찾으러 갈 것이오."

"그리 전하겠습니다."

당분간 철두가 없어도 별일이야 없을 터다.

직접적으로 전쟁 중인 세력은 없으니까.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대공께서는 염려 말고 다녀오십시오."

요정족 최강의 검사 에그니스가 심부름꾼을 자처하자 철두는 마음이 놓였다.

"부탁하지. 처남."

"...예. 대공."

처남은 아니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대답했다. 배웅하는 에그니스와 요르센 장로를 뒤로하고 세 명은 다시 그리핀에 올라 마법진으로 향했다.

멀미가 심한 드워프 에르미스도 사안이 심각한지라 투덜거림 없이 비행에 집중했다.

"난쟁이."

"왜?"

"뭘 그리 긴장하는 거냐?"

"종족의 명운이 걸린 일인데 긴장하지 않게 생겼나?"

"후후후."

"...우리 드워프의 소망이 자네 손에 달렸네."

"걱정 마라. 두 번 세 번도 휘둘러 줄 테니."

"흐흐, 끔찍하게도 든든하구만."

드워프, 바바리안, 엘프.

세 종족은 나란히 그리핀을 몰고 마법진을 통해 드워프 왕국으로 향했다.

*

보이는 모든 곳이 바위산으로 이뤄진 M44 지역.

용오름 계곡에 자리한 거대 도시 자이언트 포지는 드워프 왕국의 수도다.

제타 행성 출신의 드워프를 이끄는 국왕 삼디다스는 M44 맵 전역에 생겨난 검은 구체를 보며 전율했다.

"때가 되었다."

M44 지역에 미궁이 열려버렸다.

서둘러 미궁의 입구에 가 태연하게 자리 잡은 고블린 상인에게 다가갔다.

"정보를 사고 싶소."

"홍홍홍, 무슨 정보를 사고 싶으십니까? 드워프를 이끄는 자여."

"...이 미궁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있소?"

"홍홍, 물론입죠. 500만 주화입니다."

삼디다스는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제타 행성을 떠나 노바에 자리 잡은 지 벌써 한세월.

고블린 상인에 대해서라면 잘 알고 있다.

노바의 충실한 종.

차원을 초월하는 상인.

차원을 넘나드는 약탈꾼.

상인은 절대 값어치가 없는 상품을 비싸게 팔지 않는다. 500만 주화라는 거금을 부른 것을 보면 분명 삼디다스가 바라마지 않던 정보임이 틀림없다.

"사겠소."

"홍홍홍, 여억시 이끄는 자답습니다."

고블린이 내민 손을 맞잡자 500만 주화라는 거금이 불쑥 빠져나갔다.

"이번 미궁은 제타입니다."

"그게 전부라면 500만을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오."

"홍홍홍. 불길의 강입니다."

"...!"

삼디다스의 표정이 덜컥 굳었다.

드워프 왕을 호종하는 기사들과 주술사들도 표정이 좋지 못했다.

"...알겠소."

"홍홍홍. 도움이 되었습니까?"

"...내게는 시련이구려."

"시련이 아닌 선택이 세상에 어디 있답니까? 홍홍."

"...."

삼디다스는 일단 물러났다.

미궁의 공략 시간은 여유 있다.

아니, 공략 시간이 문제가 아니다.

그들의 목적은 미궁의 공략이 아니니....

"왕이시여! 여태 기다렸는데 더 기다리지 못할 이유도 없사옵니다."

"맞사옵니다. 불길의 강은 아니 되옵니다."

"...."

삼디다스는 고심했다.

여러 행성의 미궁이 있기에 수년을 기다려야 겨우 제타 행성의 미궁이 열릴까 말까다.

그중에서 원하는 맵이 걸릴 확률은 얼마나 될까?

아니, '신이 존재하는 맵'이 열릴 확률 말이다.

"...지금의 기회를 흘려보내면 또 얼마나 기다리게 될지 알고 하는 말이오?"

"하오나! 불길의 강에 봉인된 신은 아니 되옵니다."

드워프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신이라고 어찌 하나같이 자애롭고 너그러울까?

성격이 폭급하며 잔혹한 신이 있기 마련이니.

불길의 강에 기거하는... 아니, 봉인되어 있는 신은 악신이자 흉신이다.

제타의 거의 모든 신들에게 미움받을 정도로 모났으며, 모든 신들이 힘을 합쳐도 겨우 봉인에 성공할 정도로 포악하며 강하기도 했다.

고민을 거듭하던 삼디다스가 말했다.

"쿠찌 경."

"예, 전하."

"불과 몇 달 전 성물 묠니르가 주인을 찾았네."

"예에, 그러하옵니다."

"그리고 한 달 전 그대가 신의 무기를 빚었지."

"...맞사옵니다."

드워프 명장 쿠찌가 마침내 신에게 바칠 만한 신화급 무기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오늘에야 미궁이 열리니, 불길의 강으로 향하고 있네."

"...."

"이것은 우연인가? 운명인가?"

우연이라 하더라도 이는 필연이니, 결국 운명일 터.

"왕국의 모든 정예전사와 주술사를 소집하게."

"왕의 명을 받드옵니다."

"그리고 에르미스에게 연락하여...."

삼디다스는 굳은 얼굴로 모든 결정을 확정 지었다.

"묠니르의 주인은 맹약을 수행하라 이르게."

"예, 전하."

자이언트 포지가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제타 출신 드워프들이 그들의 수도에 신을 받들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276화 반지

파파팟.

M44 맵의 이동마법진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드워프가 인사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루이비숑!"

에르미스는 반가운 얼굴에 다가가 와락 끌어안았다.

"흐흐, 난쟁이 녀석 얼굴을 보니 고생이 많았군그래. 고생했어. 에르미스."

"하하, 알아봐 주니 고맙군."

제멋대로인 바바리안을 따라다니는 것은 꽤 스트레스받는 일이었다.

"후후, 술만 먹은 주제에 고생은."

"허! 술만 먹다니. 자네가 들고 다니는 검 하나는 내 작품일세."

철두가 요즘 싸울 때 주로 꺼내는 두 개의 검.

'할아버지'는 발베르 조르를 죽이고 얻었고,

'새벽어스름'은 에르미스가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어 준 검이다.

"흥, 생색은."

"쳇, 가세나. 국왕께서 기다리겠어."

에르미스의 재촉에 루이비숑이 만류했다.

"그리 서두를 필요 없네."

"응? 일이 급하지 않은가?"

"아니야. 지금 왕국 전역에 소집령이 떨어졌어. 선발대가 꾸려지면 그때 나설 테니, 아직 여유가 있어."

"으음, 군대라니. 국왕께서는 묠니르를 어디에 쓰려 하심인가?"

에르미스의 물음에 루이비숑은 한숨 쉬고는 오랜 친우를 나무랐다.

"난쟁이, 눈은 뜨고 다니냐? 저걸 보고도 모르냐?"

에르미스가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고는 침음했다.

"으음, 미궁이군."

"맞아. 성물의 쓰임은 미궁에서 요구될 거야."

"후후, 두 번째 미궁이군."

철두는 두 번째 방문하는 미궁이 퍽 기꺼웠다.

첫 번째 미궁 '서울역'에서 얻은 보상이 다름 아닌 천년설삼이었지 않은가.

철두는 묘한 기대를 갖고 일단 루이비숑의 안내에 따라 집결지로 향했다.

사방팔방 삐죽 솟은 바위산들이 즐비한 가운데, 한참 남쪽으로 날아가자 푹 꺼진 둥근 분지가 있었다.

주변 지형과 어우러지지 않게 그곳만 둥글게 푹 꺼진 게, 꼭 운석을 얻어맞아 생긴 크레이터 같았다.

그 거대한 분지의 가운데 미궁 포탈이 덩그러니 있었고, 그 주변으로 여러 개의 막사가 지어지며 드워프 군대가 줄지어 합류하고 있었다.

"끼아아아!"

상공을 몇 번 선회해 적이 아님을 알린 그리핀 편대가 가장자리에 내려앉았다.

한달음에 달려온 드워프 국왕 삼디다스가 오랜만에 만난 친우를 대하듯 강철두를 환대했다.

"어서 오시게! 소식을 전하자마자 이리 달려와 주어 고맙네!"

"약속을 지킬 뿐이다."

"하하하, 약속을 한다고 모두 지킨다면 어찌 신뢰와 정직이 귀하겠나."

그걸 강제하기 위해서 맹약의 서까지 써놓고는....

"자자, 이리 오게. 저기에 성물의 주인을 위한 막사가 세워졌으니."

"후후, 고맙다."

안내된 자리에 가보니 제법 성대한 상이 차려져 있었다.

군대가 집결 중인데 전쟁을 나선다는 분위기라기보다는 이미 승리한 이후의 연회를 보는 듯 화기애애했다.

"병사들이 별로 긴장한 기색이 없군."

"이를 말인가? 우리 드워프들에게는 오래도록 기다려 온 순간일세. 긴장보다는 설렘이 더욱 크네."

"흐으음."

철두는 의자에 앉아 테이블 위에 있는 고깃덩이를 하나 집어 입에 넣고는 씹으며 주변을 휘이 둘러봤다.

그들은 전투를 앞둔 긴장보다 정말 기대감이 더 커 보였다.

싸움에 미친 전사가 아닌 다음에야 전투에 대한 기대라기보다는, 그 이후의 보상을 생각하고 있을 터.

"작전은?"

"후후, 성급하긴. 자네는 쿠찌 경을 따라가 묠니르를 한번 휘둘러 주면 되네."

"쿠찌?"

"이번에 신의 무기를 빚어낸 위대한 장인일세."

삼디다스 국왕의 소개에 다부진 체격의 중년 드워프가 와서 인사했다.

"반갑소. 쿠찌요."

"구면이군. 기사 아니었나?"

철두가 처음 묠니르를 손에 넣었을 때 국왕을 호위하던 기사가 쿠찌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예사롭지 않은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하하하, 우리 종족에게 위대한 장인은 곧 위대한 전사나 다름없지. 쿠찌 경은 왕국 최고의 기사라네."

"으음."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맹약의 서에 두고 한 맹세기에 무조건 지켜야 하는바, 어차피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따로 당부할 말은?"

"아! 자네도 이번 미궁 맵에 대해서는 숙지해둬야겠지."

드워프들이 모두 기대감에 들떠 있지만, 그중 가장 심한 이가 국왕 삼디다스였다.

"불길의 강은 용암이 들끓는 화산지대일세. 그곳 심처에 신이 봉인되어있네. 묠니르를 휘둘러 그 감옥을 깨부수는 게 자네 역할일세. 아까 말한 대로 길잡이는 쿠찌 경이 맡을 걸세."

"미궁 미션은?"

"아, 일을 마친 이후에는 미궁 미션은 알아서 하게. 포기하든, 속행해 보상을 노리든 상관하지 않겠네."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다. 이해했다."

"그럼 오늘 하루는 먹고 마시며 즐기게나."

국왕이 자리를 뜨려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철두의 옆에 얌전히 있던 아르엘라가 끼어들었다.

"이번 미궁의 입장 제한이 몇 명인가요?"

"네 명이오. 요정 아가씨."

"그럼 한 자리는 제가 맡을게요."

"음? 허어, 이는 우리 종족에게 있어 중요한 행사요. 요정족 아가씨가 끼어들 일이 아니오."

삼디다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보다 아가씨는 누구요? 초면인데."

"내 부인이다."

"으음? 자네 바바리안 아닌가?"

"맞다."

"허, 근데 요정족 아가씨를 부인으로 맞이하나?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군."

"왜? 문제 있나?"

"자네 두 종족은 본디 원수지간 아닌가?"

지극히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삼디다스의 말에 철두가 씩 웃었다.

"내 알 바 아니다. 어쨌든 부인과 함께 가겠다."

"허어, 이미 인선이 끝났네. 여기 에르미스 경과 루이비숑 경까지 4명이서 함께 할 걸세."

철두는 오히려 잘되었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얘보다 얘가 더 세다."

"으음?"

철두의 말에 삼디다스가 의아해했고, 아르엘라는 대뜸 일어나서 도끼를 들었다.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허, 이런 막무가내 부부를 보았나?"

삼디다스가 어이없어하는데, 지목된 에르미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제가 빠지겠습니다."

"어허!"

삼디다스가 불퉁하게 인상을 쓰고 나섰다.

"경은 항명하겠다는 건가?"

"폐하, 어차피 철두가 고집부리면 끝입니다. 그 말마따나 저 요정이 저보다 더 강력한 것도 사실이니, 전력의 누수도 없을 것입니다."

"허어! 허나, 이는 우리 제타 출신의 드워프의 행사다."

"난 바바리안이지 않나?"

"자네는 경우가 다르지! 성물의 주인이지 않나?"

"전 부인이에요."

"아닛! 엘프 아가씨는 또 경우가 다르지!"

이 대책 없는 부부에 삼디다스의 얼굴이 시뻘게지자 기사 쿠찌가 나섰다.

"전하. 인선의 소소한 변화는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크흠."

가장 중요한 건 성물 묠니르의 주인 강철두와 장인 쿠찌다. 나머지 두 자리는 그저 이들을 호종하기 위한 인원으로 선별하면 그뿐.

"좋네. 내 크게 양보하지!"

"후후. 알겠다."

"후우, 이만 쉬시게나. 최상의 컨디션으로 내일 미궁에 입장해야 할 터야."

"걱정 마라."

"그럼 편한 밤 보내시게."

삼디다스가 손님들을 위해 자리를 피하자 남은 건 강철두와 아르엘라, 그리고 드워프 에르미스와 루이비숑 둘이었다.

그때 루이비숑이 에르미스를 보며 말했다.

"차라리 내가 빠지겠어. 에르미스 네가 함께해."

"응? 주술사가 있는 게 낫지. 불길의 강이지 않은가?"

불길의 강은 뜨거운 용암지대였기에 온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벌겋게 익어 통구이가 될 게 아니라면 주술사가 있는 게 낫네."

"허, 내 마력통이 무한인 줄 알아? 그건 이걸로 대체가 가능해."

루이비숑이 반지 3개를 꺼냈는데, 생김새에 조금 차이가 있을 뿐, 기능은 모두 같은 아티팩트였다.

<화염 내성의 반지>

화염 내성을 얻는다.

심플한 설명이지만, 그 기능을 생각하면 상당히 귀한 아티팩트다.

"호, 내성이라니."

보통 내성은 특성으로 취급받는 효과다.

마력의 소모가 없으면서 지속적인 저항 효과를 본다.

저항 - 내성 - 면역

의 순서로 발전하니, 이 반지 하나만 있으면 불길의 강 맵이 주는 디버프 효과는 상쇄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함께하려면 손발을 맞춰본 사람이 낫지 않겠나? 자네가 함께하는 게 맞아."

"허, 좋은 생각이지만, 내게는 다른 일이 있네."

"음?"

루이비숑이 의아해하는데 에르미스가 철두를 보았다.

"자네가 우리 드워프를 돕는 동안 고구려는 내가 돕겠네."

"음? 무슨 소리냐?"

"쯧, 이 무심한 사람 보게. 왕이면 보살피는 나라 생각도 좀 하게나."

미궁과 보상동굴, 그리고 노바의 시간은 다르다.

미궁에서 1시간을 허비하면, 보상동굴에서는 10시간, 노바에서는 100시간이 흘러있다.

"이번 임무는 불길의 강에서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걸세. 그러니 고구려는 국왕 없이 꽤 많은 시간을 보내야겠지."

"으음."

철두가 인상을 팍 썼다.

그나마 보상동굴과 노바 시간 차는 10배지만, 미궁은 100배.

미궁에서의 시간을 최대한 단축하는 게 시간 단축에 가장 유리하다.

하지만 이번 임무는 미궁의 '미션'이 아니라 불길의 강 어딘가에 봉인되어있는 '신'을 찾아내어 그 '봉인'을 풀어내는 것.

일을 마치고 다녀왔을 때 노바의 시간이 얼마나 흘러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단 1일만 허비하고 돌아오더라도 노바는 100일이 지나있다.

"왕이 오래 자리를 비우게 될 테지만, 걱정 말게. 나만 믿어."

"후후, 고맙군."

철두는 이 세심한 드워프의 마음 씀씀이가 기꺼웠다.

"허허, 별수 없군. 미궁은 내가 함께 가야겠네."

루이비숑이 웃으며 반지 두 개를 내밀었다.

"그래도 이 아티팩트는 가지게나."

"후후, 고맙군."

철두가 반지를 끼곤 근처의 횃불에 손을 집어넣자, 아르엘라가 미간을 찌푸리며 나무랐다.

"무슨 짓이야. 바보야."

"후후, 안 뜨겁다. 그냥 따뜻한 정도야."

"바보야. 손 빼."

아르엘라가 투덜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음? 뭐냐?"

"끼워줘."

"음?"

철두가 의아해하자 에르미스가 혀를 찼다.

"바바리안은 전부 머저리만 있는 겐가? 반지를 끼워 달라는 거 아니냐?"

"후후, 너야말로 바보군."

반지도 혼자 못 끼는 건가?

철두가 반지를 들어 아르엘라의 손에 끼워주었다.

아르엘라는 흡족한 듯 미소 짓다가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홱 돌렸다.

"흥, 어서들 자."

"후후, 그러지."

"흐흐흐,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이 부부가 되고 첫날밤이군그래. 편히들 일 보시게."

"무슨 일?"

"흐흐흐흐."

철두의 반문에 에르미스는 그저 음흉하게 웃을 뿐이었다.

"끌끌, 우린 이만 자리를 비켜줌세."

"흐흐흐, 그러지."

루이비숑과 에르미스가 저들끼리 웃으며 사라지자 막사엔 강철두와 에르미스만이 남았다.

괜히 어색해진 분위기에 아르엘라가 꼼지락거렸다.

그녀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다.

엘프 공주의 운명은 가혹하기 그지없기에, 어머니로 거듭나는 날.

그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된다.

'아이 정도는 낳아 줘야지.'

이 무심한 바바리안의 결혼관은 매매혼과 후손을 보는 것뿐이지만, 그 정도야 맞춰 줘야지.

"자러 가자."

"뭐?"

"이만, 자자고."

"후후, 난 조금 있다가 잔다. 먼저 자라."

"...."

아르엘라의 고운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이 순수한 바바리안은 아직 남녀관계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다.

아르엘라가 의자에서 일어나 철두의 두꺼운 목에 팔을 휘둘러 감았다. 그리곤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누나가 오라면 그냥 따라와라."

100살 처녀 요정이 21살 바바리안을 이끌고 막사로 들어갔다.

277화 화염졸개

미궁의 입구에 선별된 선발대가 모였다.

전날 요란하게 집결지에 모여든 드워프의 숫자에 비해 한참이나 적은 수였는데, 추리고 추린 정예들이었다.

"하하하, 편히 쉬었는가?"

"...그렇다."

"하하하, 눈이 퀭하군. 바바리안이 지친 건 오랜만에 보는군그래."

드워프 국왕 삼디다스는 흐뭇하게 웃었다.

"이게 전부인가?"

"그렇다네. 미궁의 미션은 아직 알 수 없으나, 자네들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봉인을 해제하는 일일세."

"알고 있다."

"여의찮다면 신의 봉인을 해제하는 대로 미션은 포기하고 돌아오도록 하게."

"후후, 그럴 수야 없지."

"뭐, 미션도 성공하면야 좋지."

미궁은 주기적으로 열리는 것도 아니고, 한번 열리면 언제 또 열리는지도 알 수 없다.

독점적으로 미션을 진행할 수도 없는 것이, 지금 M44 맵에 열린 이 미궁은 다른 지역에서도 랜덤으로 열렸을 터다.

100개의 맵에서 같은 미궁이 열렸다면, 100개의 팀이 참석하는 미션 대결이 될 것이다.

지금 이 미궁의 입구에 선 사람들은 일종의 '팀 M44'인 셈이다.

<노비스 미션> (0/70)

<미니언 미션> (0/30)

<히어로 미션> (0/4)

팀 구성과 인원의 제한이 있는 미궁이다.

철두가 향하는 구성은 히어로.

신의 무기를 빚어낸 쿠찌.

강철두, 아르엘라, 루이비숑이 함께 하는 미션이다.

"자, 다들 가세."

쿠찌를 시작으로 줄줄이 미궁 입구로 향했다.

번쩍이는 빛과 함께 사라지는 그를 뒤 따르다가 철두는 입구 옆에 있는 고블린을 보았다.

언제나처럼 좌판을 깔고 곰방대를 태우고 있는 안경 고블린을 불렀다.

"이봐. 고블린."

"홍홍홍, 무슨 용건인가?"

"내가 살 게 있나?"

"필요한 거야 있겠지. 하지만 자네에겐 지불할 값이 없구만그래."

"...?"

그냥 물어본 말인데 의외의 대답에 철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듣기로 고블린 상인은 상대의 주화주머니 용량을 훔쳐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인벤토리마저 볼 수 있는 그들이다.

"내가 돈이 없어?"

"홍홍홍, 그렇다네."

황당하다.

고구려의 국왕인 강철두다.

그의 주화 주머니에 든 고블린 주화만 해도 1200만 개가 넘고, 인벤토리에는 보물이 즐비하다.

그런데 값을 치를 수 없다니....

그때 눈을 반짝이던 아르엘라가 나섰다.

"내가 가진 것까지 합치면?"

"여전히 모자랍니다. 홍홍."

"이번 미궁에서 값이 될 만한 걸 가져오면?"

"홍홍, 그리되면 저울추가 얼추 맞을 수도 있겠군요. 아니지, 뭘 가져오느냐에 따라 제가 더 값을 치를 수도 있습죠."

"알겠어."

아르엘라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가자."

"어어?"

아르엘라가 철두의 팔을 끌어 미궁으로 향했다.

"너 심장이 빨리 뛴다."

"후우, 당연하지!"

아르엘라는 괜스레 철두의 팔뚝을 한 대 툭 치고는 귓속말했다.

"고블린 상인은 재수 없긴 하지만 사기는 치지 않아. 대단한 걸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어. 그리고."

"그리고?"

"이번 미궁에서 그에 버금가는 보물을 얻을 확률이 있어."

고구려의 대왕과 요정족의 공주가 지금 가진 것을 모두 털어도 살 수 없는 보물이 있다.

헌데, 미궁에는 그런 보물에 필적하거나 그보다 더 값진 전리품이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니.

"후후, 기대되는군."

파팟.

철두는 설레는 마음으로 미궁에 발을 디뎠다.

차원 이동 특유의 울렁이는 느낌과 함께 주변 풍광이 바뀌며 훅하고 마른 공기가 들이닥쳤다.

"후우."

눈이 따갑다.

반개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니 매캐한 연기가 자욱했다.

바닥은 마그마가 강처럼 흐르고 있었는데, 군데군데 불쑥 튀어나온 바위들이 있어 그나마 딛고 설 만한 발판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푸시시시.

그마저도 달궈진 돌판처럼 열기가 대단해 신발 밑창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뜨거운 열기로 인해 숨쉬기가 답답하니, 철두로서도 퍽 당황스러웠다.

화염 내성 반지를 끼고 있는 상태가 이 지경인데, 없었다면 얼마나 버틸 수 있었을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찬 기운을 주소서!"

미궁에 입장하고부터 지팡이를 들고 계속 중얼거리던 루이비숑의 주문이 끝났다.

츠츠츳.

"으음."

루이비숑을 중심으로 후끈한 열기가 한순간에 밀려나니, 텁텁한 사막에 있다가 청량한 숲에 들어온 듯 숨쉬기가 편해졌다.

"하아, 살 것 같네."

"하하하, 유지 시간이 길지 않으니 얼른 휴식 포인트로 이동해야 합니다."

"휴식 포인트?"

"불길의 강이라고 전부 이렇게 용암이 들끓는 건 아니지요. 제법 식어 안정화된 지대가 있으니 얼른 찾아보죠."

"어떻게 찾나?"

철두의 질문이 떨어짐과 동시에 미션 창이 떠올랐다.

<미궁 '불길의 강'에 입장하였습니다.>

과연 그 이름 그대로다.

<히어로 미션 '협동전'이 선택되었습니다.>

<베이스캠프 탈환>

불길의 강은 모험하기 험난하기 이를 데 없는 곳입니다. 불길의 강 하류의 부서진 베이스캠프를 재건하고 활성화하십시오.

목표 : 부서진 베이스캠프 정상화

부가 목표 : 화염졸개 마을 파괴

"흐음, 베이스캠프를 찾아야겠군."

"그건 후방입니다. 우리가 찾아야 하는 건 화염졸개 마을입니다."

쿠찌가 나서서 한곳을 가리켰다.

"일단 저기부터 접수하지요."

제법 지대가 높아 보이는 바위였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용암도 고지대에서 저지대로 흘러가기에, 저기 툭 튀어나온 바위 지대 위에는 제법 넓은 땅이 있을 것이다.

"그리핀을 타고 가자."

"펫이 이 열기를 버티지 못할 겁니다."

"주술이 있지 않나?"

"아쉽게도 빙벽 주술은 시전 시 움직이지 못합니다."

루이비숑의 말에 철두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그럼 어떻게 이동하나?"

"일단 방향을 정하고 열기를 버티며 이동해야지요."

그러기 위해서 화염 내성 반지를 나눠준 것이다.

지금 루이비숑이 펼친 빙벽 주술은 일시적인 휴식을 위한 용도밖에 안 되었다. 이동 중에는 주술을 유지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자, 다들 목적지가 정해졌으니 일단 이동하지."

"좋다. 가자."

쿠찌의 말에 모두가 저 멀리 보이는 바위 언덕을 향해 이동했다.

빙벽 주술이 걷히자 다시 후끈한 열기가 들이닥쳤으나, 마음먹고 참아내자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타탓, 탁!

거대한 용암의 강 중간중간에 섬처럼 돋아난 바위 지대를 이용해 점프하여 나아간 끝에 거대한 언덕 바위에 위에 올라왔다.

"키이이이!"

제법 평탄하고 넓은 바위 언덕 위에는 집으로 보이는 석조 건축물들과 가재도구들이 너저분하게 널려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주인이 있었으니.

"저게 화염졸개인가?"

"맞네."

"불이 붙은 놈은 없군."

철두의 감상평대로, 화염졸개라 불리는 몬스터는 그저 가죽이 두꺼워 보이고 붉은 것을 제외하면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팔 두 개, 다리 두 개. 구부정한 허리 정도를 가진 보행 몬스터와 다를 바가 없다.

아, 머리 위에 제각각 하나에서 서너 개 정도의 뿔이 돋아난 것이 이야기 속 악마 같기도 했다.

"키이이이이!"

"후후후."

거주지를 침범당해 분개한 화염졸개들을 향해 강철두가 나섰다.

인벤토리에서 투헨디드 소드 두 자루를 꺼내 들자마자 소용돌이로 적들을 분쇄해 버렸다.

파파파팍!

불나방처럼 달려든 화염졸개들이 회전하는 칼날에 속수무책으로 갈려 나갔다.

그 충격적인 전투방식에 망치를 들고 튀어 나가려던 쿠찌가 입을 딱 벌렸다.

"...항상 저런 식으로 싸우나?"

"우리 남편이 과격하긴 하지."

아르엘라의 담담한 말에 쿠찌가 입을 딱 다물었다.

저게 그냥 단순히 과격?

잔혹하기 그지없는 전투 방법이지만 그 효과는 굉장했다.

달려든 화염졸개들이 줄줄이 갈려 나가 죽어버리니 나머지 화염졸개들이 뿔뿔히 흩어져 도망쳐 버렸다.

"으음, 성물의 주인은 확실히 다르군."

성물 묠니르는 과연 비범한 자를 주인으로 받아들였다.

"자, 따라들 오세."

쿠찌가 일행을 이끌고 마을 중심부로 다가갔다.

여기저기 다듬은 바위들이 서 있어 건축물 형태를 띠었으나, 그것이 투박하기 그지없어 고인돌을 보는 듯했다.

기둥이 될 만한 바위에 지붕 바위를 얹고, 벽을 세워 주변의 열기를 최소화한 형태의 집이다.

화염졸개들이 만들어낸 건축물은 투박한 모습이지만 그 안은 제법 쾌적해, 바깥에서 뜨거운 열기를 그대로 마주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하지만 도망친 화염졸개들이 곧 주변 마을에서 응원군을 이끌고 들이닥칠 테니, 여기서 머무르는 건 좋은 선택지가 아니다.

"정비가 필요하나?"

"후후, 문제없다."

"그럼 바로 이동하지. 우리 목표는 화염졸개 사냥이 아니니 말이야."

"미션은 어떻게 하나?"

철두의 말에 쿠찌가 그리 달갑지 않은 얼굴로 답했다. 그로서는 철두가 신의 봉인 해제에 전념했으면 싶지, 괜히 미션에 욕심내어 집중력이 흐려지는 걸 원치 않았다.

"베이스캠프는 후방에 있네. 그걸 재건하는 건 맞지 않아. 대신 화염졸개 마을은 앞으로도 줄줄이 처치할 수 있을걸세."

"호오, 사냥하러 가는 건가?"

"아니, 이동 경로가 사실상 마을과 마을 사이를 오가는 길일세. 전투야 자연히 따라오는 게지."

불길의 강에서 그나마 숨 쉴 만한 지대 위에는 화염졸개들이 머무르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그 마을을 하나씩 점령하는 형태로 나아가게 된다.

"좋아. 어디로 가면 되나?"

"불길의 강은 거대한 용암 분지일세. 저기 저 산이 보이는가?"

"으음, 보인다."

매캐한 연기에 둘러싸인 거대한 산이 보였다.

"저런 산봉우리가 다섯일세. 신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 일단 가장 가까운 저 봉우리부터 확인한 다음 차차 이동할 걸세."

"으으음."

철두는 아득히 멀고 높아 보이는 봉우리를 보며 침음했다.

다른 봉우리들은 시야에 잡히지도 않는다.

오봉산과 비슷한 형식의 분지였는데 다른 점은 오라지게 넓다는 것이다.

"넓군."

"암, 넓지...."

"하루 이틀 만에 될 일이 아니군...."

"허허, 그렇네. 운이 나쁘면 다섯 개의 봉우리를 전부 올라야 할 수도 있어."

철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5일만 허비해도 노바의 시간은 500일이 지나가 버린다.

'별일 없겠지?'

작은 불안감에 인상을 쓰고 있으니, 쿠찌는 미션에 대해 그런 줄 알고 부연했다.

"허허, 베이스캠프는 산봉우리 바깥일세. 아예 경로가 달라.... 미션 생각은 그냥 접어두시게."

"걱정 마라."

미션 걱정이 아니다.

친구들과 부하들이 걱정되는 거지.

"걱정 마. 에그니스가 신경써줄 거야."

그나마 부부가 되었다고 철두의 작은 표정 변화만으로도 그의 생각을 훤히 읽은 아르엘라가 위로했다.

"후후, 그놈이면 믿을 만하지."

불편했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에그니스는 엘프 최강의 검사니까.

적어도 제국의 후작 공작급 이상과 시비가 붙지 않는 한 안전할 터다.

"자! 빨리 가자!"

어쨌든 최대한 빠르게 일을 마치고 돌아가면 될 일이다.

278화 전쟁 발발

일곱 번째 화염졸개의 마을을 초토화한 철두는 생각보다 일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션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화염졸개들의 마을은 빽빽하게 이뤄져 있어 굳이 찾지 않아도 경로상에 무조건 마주쳤다.

전투에 소모되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돌아가기도 여의치 않다. 어떤 경로를 선택하든 졸개 마을이 존재했다.

"위로 가자."

"허어, 아니 될 말입니다."

"왜 안 되나? 내겐 그리핀이 있다. 아르엘라에게도 있으니 둘씩 타고 가면 된다."

"흐으음. 한번 소환해보시지요."

"훗, 지켜봐라."

루이비숑은 굳이 말리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철두에겐 계획이 있었다.

지면의 열기가 문제면 공중으로 빠르게 솟구치면 될 일이 아닌가?

파파팟.

"헛!"

기합성과 함께 소환된 오식이 위에 올라탄 철두가 빠르게 의지를 전달했다.

'뛰어!'

후우우웅!

"끼아아아!"

세찬 날갯짓과 함께 뛰어오른 오식이의 신형이 순식간에 훅 높아졌다.

"끼아아아!"

하지만 하늘이라고 온도가 그리 떨어지진 않았고, 더욱 큰 문제가 있었으니.

"쿨럭. 크흠."

철두는 폐로 흡입되는 불쾌한 공기에 즉시 숨을 참았으나, 오식이는 그러지 못했다.

"끼아아악! 케룩!"

하늘을 가득 메운 매캐한 연기는 유독가스 그 자체였으니, 오식이의 체력이 순식간에 닳기 시작했다.

결국 상공에서 불과 10초도 견디지 못하고 오식이의 체력이 바닥나 역소환되어버리고 말았다.

후우우웅.

갑자기 사라진 그리핀 때문에 허공에서 휘적이며 자유낙하한 철두는 저 아래 보이는 일행을 보곤 공중에서 헤엄치다 적당한 곳에 착지했다.

꾸우웅!

바위가 흔들리고 주변 용암이 출렁일 정도의 충격파와 함께 착지한 철두가 참았던 숨을 뱉었다.

"안되는군."

루이비숑이 거 보란 듯 어깨를 으쓱했다.

"젠장!"

철두는 아직도 저 멀리 보이는 봉우리를 보며 이를 갈았다.

이거 하루 만에 저길 오를 순 있는 건가?

직선으로 가더라도 중간에 마주치는 화염졸개 무리가 기백이 넘어 보인다.

별 볼 일 없는 잡졸이라 큰 위협은 되지 않지만, 지속적인 전투로 발생하는 피로가 문제다.

'하루에 100일이라.'

철두의 머릿속에 점점 시간적 압박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이 정도로 불안감이 드는 것은 결코 예삿일이 아니다.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육감이 무언가를 느낀 것이 틀림없다.

고구려가 별 탈 없어야 할 것인데....

*

N6140.

고구려의 수도 아이언헤드 성이 있는 이곳의 맵 전역에 미궁 감시자의 눈이 떠올랐다.

미궁은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곳에 열린다.

무대가 하나이나 입구는 여럿.

"공략합시다."

고구려 재상 김진태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결정했다.

공략하지 않아 미궁 감시자의 눈이 다 떠지면, 월식 때와 같이 몬스터들이 소환되어 창궐한다.

두꺼운 성벽의 아이언헤드 성은 방어해낼지 모르겠으나, 그 주변의 드넓은 농경지, 그리고 한양을 비롯해 다른 여타의 개척 마을들은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히어로 4명, 미니언 30명, 노비스 70명.

마침 공략 인원도 그리 많지 않은지라, 빠르게 인선이 완료되었다.

미궁에 진입하면 그 시간축이 다른바,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자들은 인선에서 배제되었다.

고구려 최강의 전력인 대왕 강철두가 부재중인바, 그다음 전력인 이은영은 미궁에 투입할 수 없다.

북부 방위를 맡은 어림군 사령관 김도진도 마찬가지 이유로 배제되었고, 김춘배가 자원해서 나섰다.

소드마스터 김춘배를 필두로 오준환, 최준섭, 구정욱이 나섰다.

미니언 30명 자리는 랭커들 중에 지원자를 뽑아 추렸고, 노비스 70명의 자리도 지원하는 병력 중에 가려 뽑았다.

미궁의 입구는 수호의 나무가 있는 맵의 중심.

그렇게 선별된 인원이 미궁에 진입했고....

547일이 흘렀다.

파팟.

네 명의 히어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으음?"

"이야, 여름이네."

미궁에 진입했을 때가 겨울이었는데, 나오고 보니 무더운 해가 내리쬐고 있었다.

"이야, 여름은 무슨. 선선하구만."

"후, 이제 살 것 같다."

그때 미궁의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막사에서 병사들이 부리나케 달려와 군례를 올렸다.

"추웅!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너 유격대지?"

"네, 맞습니다!"

반가운 얼굴에 유격대장 최준섭이 다가와 악수하며 물었다.

"늦었지? 며칠 지났냐?"

"오늘로 547일째입니다."

"으음, 미궁에서 5일쯤, 보상동굴에서 5일쯤이니까 얼추 맞네...."

미궁이 100배, 보상동굴이 10배의 시간 차가 발생하니, 얼추 계산상으로는 맞았다.

"신기하네."

다만, 고작 열흘 보내고 왔더니 세상이 1년 반이나 지나가 있음이 언뜻 체감되지 않을 따름이다.

"별일 없지?"

여상한 물음이었다.

"그것이, 현재 전쟁 중입니다."

"...?"

네 명의 히어로 모두 깜짝 놀랐다.

"어디랑?"

"사쿠라시티입니다."

"허, 뭐야?"

"거기가 왜?"

"말이 돼?"

깜짝 놀라는 그들을 보며 여태 히어로들의 귀환만을 기다리고 있던 유격대원들은 서둘러 임무를 전달했다.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귀환 즉시 성으로 복귀하라는 재상 각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전선이 어디야?"

"이동마법진을 사이에 두고 동남 측에 우리 군이, 북서 측에 사쿠라시티 연합군이 주둔, 대치 중입니다."

"연합군?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이동하면서 보고드리겠습니다."

네 명의 히어로, 특히 소드마스터 김춘배는 귀한 전력이었기에 전력 증강이 두드러질 터다.

"서둘러 가지."

"네."

네 명의 히어로들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5일은 미궁에서 버려진 마을을 정비하고, 화염졸개라는 몬스터들을 처치하며 보냈고, 나머지 5일은 보상동굴을 뒤져 여러 개의 상자를 오픈한 끝에 꽤 괜찮은 전리품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번 미궁 탐사는 꽤 성공적이라 평할 만했는데 평화롭던 노바의 본진이 전쟁 중이다.

성으로 복귀한 네 사람은 곧장 재상 김진태를 만났다.

"어서 오세요!"

"예에, 미궁을 클리어하고 돌아왔습니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김진태는 네 사람의 합류를 정말 반가워했는데, 특히나 김춘배의 합류를 반겼다.

"상황이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아니, 전쟁은 갑자기 왜 일어난 겁니까?"

"하아, 그게...."

미궁 탐사대가 떠나고 난 뒤 겨울 내내 괜찮다가 봄이 되자, 사쿠라시티 출신의 지구인들이 이동 포탈망 서쪽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N6140 맵은 고구려가 온전한 영역으로 선포한 터라, 그들은 개척마을을 짓고 농사를 짓는 대신 세금을 바치기로 약조하였다.

그렇게 이동 포탈망 서쪽에 일본인 개척마을이 생겨나고 자연스럽게 아이언헤드 성과 왕래가 깊어졌다.

그러다 마을이 커지고 점점 성벽을 높이 짓더니, 그것이 요새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할 때쯤 그들이 본색을 드러냈다.

"세금 납부를 미루더니, 그 뒤로는 독립 요구를 하며 독자 세력을 구축했어요."

N6140 맵에 고구려가 아닌, 다른 세력이 자리 잡으며 세력창이 변했다.

맵은 분쟁지역이 되었고, 맵 전역에 미치던 김진태의 세력창 조작은 축소되어 아이언헤드 성과 한양을 비롯한 개척마을과 그 근방으로 영향력이 축소되었다.

"노바의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는 자들입니다."

김진태는 열이 뻗쳤지만, 쉽사리 전쟁을 선택하지 못했다.

같은 지구 출신의 마을이기도 했고, 세금 때문에 지구인을 죽여야 한다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아서였다.

대왕이 부재중인 상황에서 아이언헤드 성의 지도부도 의견이 갈렸다.

일벌백계해야 한다는 주전파와 그래도 아직 외교적으로 해결하자는 주화파로 나뉘었다.

재상 김진태는 주화파로 전쟁에 소극적이었고, 박준필은 왜놈 운운하며 주전파로 전쟁을 하자는 쪽이었다.

고구려가 결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저들이 먼저 전쟁을 시작하고 말았다.

이동마법진 서쪽에 자리 잡은 일본인 요새의 병력은 마법진의 북쪽 길목에 자리 잡은 고구려의 요새를 공격, 점령해버렸다.

"허어! 임진왜란이다!"

임진년은 아니지만 박준필은 크게 개탄했고, 김진태는 뒤늦게 후회했다.

모든 역량을 쏟아 전쟁에 임해 잃어버린 요새를 되찾으려 했으나, 저들은 만만찮았다.

"툴룬 공작가에서 막대한 지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슬슬 나트롱 백작마저 합류하여 연합전선을 구축하니, 제국을 등에 업은 사쿠라시티와 우리 고구려의 전쟁이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김춘배는 심각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미르 왕국 쪽의 동태는 어떻습니까?"

"천만다행으로 그쪽은 내전 중입니다."

강철두에 의해 왕국 핵심 인재들이 쓸려나갔고, 4대 제후 중에 하나의 세력도 궤멸되다시피 하였다.

전력을 보존하며 건재한 3개의 가문은 굴욕적인 항복을 한 아미르 왕가에 반기를 들었고, 그들의 내전은 1년이 넘게 계속되는 중이다.

"천만다행이군요."

"그렇죠. 다만, 그들이 본디 보내기로 한 공물도 끊겼습니다."

"칼을 들고 쳐들어오지 않는 것만 해도 어딥니까?"

고구려는 남북으로 길쭉한 바나나 지형의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 서쪽에서 전선이 형성되어있었는데, 동쪽에서까지 전쟁이 벌어지면 골치 아픈 상황이다.

"네 분께는 죄송하지만, 최대한 빠르게 전장에 합류해주셨으면 합니다."

김진태는 빠르게 지금 고구려군의 주둔 현황을 브리핑했다.

이동마법진을 중심으로 가장 치열한 전장이 형성되어있었고, N344 맵 또한 하늘산을 기준으로 전선이 형성되어있었다.

"전선이 너무 긴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의 병력은 너무 적고, 적은 많으니.... 점차 피로가 누적되고 있습니다."

"으음.... 외람되오나 전세가 지극히 불리한데 어떻게 형세가 유지되고 있는 겁니까?"

"우리도 동맹군이 있으니까요."

"예?"

"에그니스 경과 드워프 왕국에서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드워프 왕국은 대놓고 물자 조달에 병력을 지원하기까지 했다.

요정들은 요정들끼리 자치령을 꾸렸다곤 하나, 대외적으로는 제후인 아이리스 후작령은 제국의 일원.

나서서 지원해줄 수는 없는바, 에그니스가 상시 주둔하며 전력의 추를 맞추고 있었다.

위대한 검사 한 명의 존재로 인해 적들의 정예도 함부로 나서지 못하고 있으니, 여기저기서 국지전은 벌어지고 있지만 전선은 고착화된 상태다.

"쉽지 않겠군요."

"버티기만 하면 됩니다. 버티기만."

김춘배의 비관적인 전망에도 김진태는 한껏 희망적이었다.

"대왕이 오실 때까지만 버티면 됩니다. 머지않았습니다!"

"아!"

김춘배는 퍼뜩 깨달았다.

4인방이 미궁에 참가했듯이, 그들의 대왕 강철두도 미궁에 참가했다.

4인방이 미궁에서의 일을 마치고 돌아왔으니, 강철두도 곧 돌아올 때가 되었다는 의미.

"대왕님만 오시면 끝입니다. 끝."

김진태는 누구보다 간절히 친구이자 고구려 대왕의 귀환을 바라고 있었다.

지난날 같은 지구인에 대한 연민과 망설임으로 전쟁을 키워버린 자신의 실책을 저주하고 후회하며 말이다.

*

불길의 강.

잔뜩 굳은 얼굴의 강철두는 화염졸개 마을을 초토화하곤 인상을 썼다.

"시발, 여기도 아니군."

벌써 네 번째 봉우리.

그 정상에 존재하는 건 몇 개의 화염졸개 마을일 뿐, 어디에도 신이 갇힌 흔적은 없었다.

"이봐. 난쟁이. 정말 산봉우리에 신이 갇힌 게 맞나?"

"틀림없네."

"...젠장."

"후우, 이리도 운이 없을 줄은 몰랐네. 그래도 이제 저기가 마지막일세."

다섯 개의 봉우리.

그중 4개를 점령하고 확인했다.

남은 것은 이제 하나.

"젠장."

미궁에서 벌써 6일이 흘렀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젠장, 젠장!"

철두는 점점 피어오르는 불안감의 정체를 알아 버렸다.

279화 불의 왕

"흥분하지 마, 철두."

"흥분하지 않게 생겼나?"

불안함의 싹.

어제와 같은 오늘인데 무언가 결여된 것 같은 기시감.

정령이 없다.

항상 주변에서 느껴지던 정령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불러봐도 대답이 없으며, 실체화해 앞에 나타나지도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하고 돌이켜보니, 세계수의 잎을 통한 의식이 있고 난 뒤부터다.

그날 심상 공간에서 네 정령이 뭉쳐 폭발한 장면이 이따금 떠올라 철두의 불안함을 더 크게 피웠다.

"네 마음 누구보다 잘 알아."

"...."

아르엘라가 철두를 토닥이며 달랬다.

흡사 잔뜩 흥분한 맹수를 다독이는 조련사를 보는 듯했다.

"후우우우."

철두가 길게 숨을 뱉으며 자기 손으로 따귀를 쳤다.

"미궁이어서 소환이 안 된 걸 수도 있잖아?"

"쓸데없는 소리."

"...미안."

아르엘라는 어쭙잖은 위로를 사과했다.

그 전 미궁인 서울역에서도 정령이 소환되었고, 다른 요정들도 미궁에서 잘만 정령을 소환했다.

미궁의 문제가 아니고 분명 그때의 그 폭발이 문제일 것이다.

"부부싸움 끝났으면 얼른 와서 이거나 먹게."

쿠찌와 루이비숑은 두 사람이 티격대는 사이 대충 넓은 집 하나를 골라잡아 대충 음식을 꺼내 끓였다.

철두와 아르엘라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한결 후끈한 열기가 줄어드는데, 루이비숑이 빙벽 주술까지 펼쳐 간만에 상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후루루룹. 가자."

건네받은 죽을 원샷한 철두를 보며 아르엘라가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

"안 뜨거워?"

"단련되어서 괜찮다."

"별걸 다 단련하네. 조금 기다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여기서 1시간이 노바에서는 100시간.

"슬슬 나라 걱정도 돼?"

"부하들이 아직 많이 약하니까."

당연한 걱정이다. 고구려의 전력 대부분은 강철두 1인에게서 기인하니까.

"에그니스가 돌봐줄 거야."

"으음."

"그래 봬도 제국 공작급이야. 걱정할 것 없어."

"알겠다. 하지만 여유 부릴 이유는 안 된다."

"그렇지."

아르엘라는 빠르게 그릇을 비웠고, 허기가 가시며 에너지가 도는 것을 느꼈다.

"가자."

쿠찌와 루이비숑은 이미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네 사람은 마지막 남은 봉우리를 향해 출발했다.

저곳에 봉인된 신이 있다.

첫 번째 봉우리를 탐사하고 왼쪽이 아닌 오른쪽으로 향했으면 두 번째 만에 발견하는 것인데....

운이 좋지 못해 가장 마지막에 가는 길이 되어버렸다.

시간의 낭비는 있었으나 그나마 소득이라고 한다면 수천이 넘는 화염졸개 마을을 격파한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미션 포인트가 어마어마하게 쌓였을 것이다.

신의 봉인을 풀어낸 뒤, 아까워서라도 보상동굴에는 들렀다 갈 생각이다.

가는 길에 또 이백여 개의 마을을 건너 정상에 다다랐다.

쿠르르르릉.

용암이 들끓는 소리는 기괴하기 그지없어 지옥의 울음소리 같기도 했고, 천둥소리 같기도 했다.

"여기네."

"맞네."

지난번에 올랐던 4개의 봉우리와는 느낌부터가 다르다. 산 중턱부터 등장하는 몬스터들의 종류도 다르다.

화염 거인.

들끓는 용암지대에서 불쑥 몸을 일으킨 그것들은 불타는 골렘과도 같았는데, 약점도 그와 같았기에 상대하기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다.

뜨거운 용암 속에 감춰진 핵을 파괴해야 기동을 멈췄다.

루이비숑이 가장 바빴는데, 그는 쉴 새 없이 얼음 주술을 펼쳐 화염 거인의 핵이 위치한 가슴 부분의 용암을 굳게 만들었다.

콰쾅.

그 굳은 가슴을 쿠찌는 망치로, 아르엘라는 도끼로 깨부수며 화염 거인을 처치했다.

물론 모두가 그렇게 싸우는 건 아니었다.

"후아아아!"

푸시시시시.

용암이 굳건 말건 냅다 달려들어 주먹을 불쑥 넣어 화염 거인의 핵을 깨부숴버리는 이가 있었다.

"으, 안 뜨거워?"

"후후, 괜찮다."

빈말이 아니다.

가혹한 환경은 그 자체로 훌륭한 스승이고, 세포 단위로 수련에 환장한 바바리안의 신체는 그에 맞게 진화했다.

<특성 화염 면역을 얻었습니다.>

지난 6일이 넘는 기간 동안 얻은 성과다.

저주 안개에 오래 노출되면 저주 저항을 얻듯이, 불길의 강에서 바바리안 강철두는 화염 저항 스킬을 얻어냈다.

이후 화염 저항은 화염 내성으로 변했고, 이내 화염 면역까지 진화했다.

이제는 화염 내성 반지는 빼도 상관없으나.

"빼면 죽는다."

"...알았다."

부인의 서슬 퍼런 강짜에 무옵션이나 다름없는 반지를 끼고 있는 중이다.

어쨌든 철두는 화염 거인 따위, 그저 흙 골렘이나 다름없다는 듯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며 일행의 전진 속도를 올렸다.

"후우, 정말 대단하구려."

"후후, 별거 아니다."

"철두 대왕이 아니었다면, 접근도 쉽지 않았겠습니다."

쿠찌의 공치사는 괜한 것이 아니다.

어지간한 히어로 4인팟으로는 산 중턱부터 오르는 게 쉽잖았을 것이다.

애당초 봉인된 신은 불길의 강 미션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바, 노바의 시스템. 미궁이라는 특수한 미션에서 지금 이 지역 자체가 이스터에그나 다름없는 셈이다.

접근이 불가능하도록 난이도를 올려놓은 게임 스테이지를 꾸역꾸역 진행하는 격이다.

"여의치 않으면 성물을 쓰시오."

"바보냐? 마력은 아껴야 한다."

"허허허."

성물 묠니르의 사용은 마력에 기반한다.

소모되는 마력의 양에 따라 위력이 증가하는바, 최대한 많은 여분의 마력을 남겨두어야 신의 봉인인지 뭔지의 결판을 낼 수 있으리라.

목적지에 도달하고도 마력이 모자라 실패하면 그 또한 낭패다.

강철두가 저리도 성심성의껏 맹세의 의무를 이행하니, 쿠찌는 새삼 국왕 삼디다스의 사람 보는 눈이 제대로구나 생각했다.

일이 술술 풀리는 기분이다.

"가자고! 고지가 멀지 않았네."

"후후, 따라와라."

불과 화염을 정복해버린 바바리안이 앞장서서 길을 뚫으니, 일행은 파죽지세로 봉우리를 올랐다.

푸시시시.

쿠르르르.

유독가스가 가득한 정상 분지는 용암으로 들끓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큰 섬에 붉은 괴인이 앉아있었다.

거대한 두 개의 뿔과 오크와 같은 송곳니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생김새가 괴이하기 그지없었다.

"못생겼네."

"시, 신을 모독하지 마시오."

철두의 감상평에 쿠찌가 화들짝 놀랐다.

"저걸 깨면 되나?"

정좌한 채로 앉아있는 괴인의 팔다리와 몸은 황금색으로 번쩍이는 쇠사슬로 칭칭 묶여 있었다.

저렇게 옴짝달싹 못 하게 묶어두면 똥은 어떻게 싸고 밥은 어떻게 먹는지 궁금했다.

"기다려보시오. 내가 신을 배알하고 오겠소."

들끓는 용암의 분지의 이곳저곳 툭 튀어나온 바위가 있어 징검다리 건너듯 뛰어가 가장 가까이 다가서니, 괴인처럼 생긴 신과 불과 15미터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절하듯 고개를 처박은 쿠찌가 쩌렁쩌렁 소리쳤다.

"산산이 쪼개져 미궁이란 쓰임으로 전락한 행성 제타의 신이여.... 여기 제타 출신의 장인이 그대를 위한 무기를 빚어 왔으니 부디 받아주십시오!"

쿠찌의 간청에 신이 고개를 돌렸고, 엉겨 붙듯 칭칭 감긴 황금 쇠사슬이 철렁였다.

스르르렁.

[종말이 다가오는가?]

고개를 돌린 괴인의 얼굴을 보니, 눈이 있어야 할 자리가 퀭해 눈두덩이밖에 없었다.

"이미 제타는 종말을 고했나이다! 살아남은 종들이 노바에 표류하고 있으니, 신께서 부디 제타를 재건해 주시옵소서."

[나의 쓰임은 파괴와 살육에 있으니, 종말의 날이 유일한 나의 날이니라.]

"...."

[나의 걸음 뒤에 남는 것은 재앙과 절망뿐이니, 그대 제타의 종은 그만 돌아가라.]

"...."

쿠찌는 땅에 고개를 처박고 부들부들 떨었다.

거절당하는 것도 생각해 보았다.

상대는 제타에서도 악명높은 신.

오죽했으면 모든 신들의 미움을 받아 그들의 합동 공격으로 저리 비참한 몰골로 봉인되었을까?

하지만, 제타의 모든 신들이 합심해서도 결국 죽이지 못하고 봉인하는 것에 그칠 정도의 파괴적이며 막강한 신이기도 했으니.

"난쟁이 나와봐."

철두는 앞으로 나섰다.

"무, 무엇을 하려 하시오?"

"맹약을 지켜야지."

"자, 잠깐!"

"왜?"

"무턱대고 봉인을 풀어서 될 일이 아니오."

"그럼 내 맹약은?"

"허어."

쿠찌는 골치가 아팠다.

신은 도구가 아니고 거래의 대상도 아닌바, 그의 의지가 없는 한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파괴와 살육의 의지만 있는 신에게 구원을 청했으니, 애당초 이건 글러 먹은 일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다음 기회를 노렸어야 했나?'

모든 판단은 이번 미궁의 책임자인 쿠찌가 나서야 하는바. 그가 강철두를 돌아보니 그가 돈 떼인 사장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 킵하고 다음 기회에 쓰자고 하면 묠니르로 네 대가리를 찧을 거야."

"...."

시발, 조졌구나.

어차피 묠니르의 이용은 한 번이다.

'아니, 다시 거래하면 되는 것 아닌가?'

이번에 맹약의 서를 무효화하고, 다시 계약을 체결한다면?

"그냥 저거 풀자고."

"어, 어쩌자고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하는가?"

"아니, 당신네들 목표가 그거잖아? 제타의 신에게 무기 주고 노바 신하고 싸우는 거라며?"

"투쟁과 쟁취다! 우리는 고향을 되찾아야 하니까."

"쟤가 존나 잘 싸운다며? 그냥 풀자."

"그, 그러다 결과가 잘못...."

"아, 거참."

강철두는 인상을 팍 쓰곤 쪼그려 앉아 쿠찌와 눈높이를 맞췄다.

"잘 들어 봐. 난쟁이 양반."

"말해보게."

"어차피 미래를 알고 사는 사람은 없어."

"그야 그렇지."

"그러니까 일단 풀어보자고."

"아니, 그게 무슨!"

"오케이, 그럼 알아들은 걸로 알고."

철두가 일어섰다.

파지지지직.

그의 손에는 성물 묠니르가 들려있었다.

"이봐! 못생긴 신."

[...그대는 누구인가? 누구기에 묠니르를 가졌는가?]

봉인된 신은 보이지 않았으나, 묠니르의 기운을 알아차렸다.

"강철두다."

[....]

이름을 물은 게 아니다.

"풀어줄 테니, 난쟁이한테 무기 받아라!"

[나의 걸음은 종말의 이름으로 족적을 남길 터.]

"아, 몰라. 노바라고 여러 행성을 잡아먹는 괴물 행성이 있다!"

[...흥미로운 소리군.]

"가서 싸우라고. 난쟁이들이 바라고 있으니."

[노바는 종말을 바라고 있는가?]

철두가 씩 웃었다.

모든 마력은 이미 묠니르로 옮겨졌다.

"무조건 이길 자신은 있으시고?"

[...나의 봉인을 풀어내라.]

와, 이거 긁혔네.

"오케이. 성립."

철두는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쿠찌에게 말했다.

"말 잘됐어. 이따 저놈한테 무기나 줘."

"어, 어디가 잘됐다는 말인가?"

파지지직.

쿠아아아앙!

묠니르에서 뻗어나간 뇌전이 황금 쇠사슬을 강타했고, 그것이 산산이 깨져 나갔다.

쿠르르르르.

산 전체가 진동한다.

용암이 들끓으며 솟구쳐 괴인을 향해 뭉쳐진다.

거뭇하던 눈두덩이는 새빨간 용암으로 채워져 붉게 빛났다.

점점 더 덩치가 커진 괴인은 용암 거인이 되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모습은 마치 산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나 수르트가 선언하노니.]

쿠르르르릉.

불길의 강이 요동쳤다.

불타는 화염 거인이 쩌렁쩌렁 소리쳤다.

[노바는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쿠찌는 입을 딱 벌리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시발, 저질러 버렸구나.

이거 잘하는 짓인가?

"뭐하냐? 빨리 무기 주고 튀자."

일을 저지른 장본인 강철두의 말에 쿠찌는 이유 모를 살심이 솟구쳤으나,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말았다.

종말이든 구원이든.

이미 시작되어 버렸다.

280화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