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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4 - 250-260

250화 결착

댕! 댕! 댕!

아이언헤드 성의 꼭대기에 걸린 종이 요란하게 울렸다.

오늘은 강철두가 요청한 지원 병력이 출진하는 날이다.

"출진하라!"

"출격이다!"

"가즈아!"

제임스의 별동대 500명.

최준섭의 유격대 300명

오준환의 특작대 450명

구정욱의 공격대 210명

총 1500명에 육박하는 기병 전력이 대거 북상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그들은 북쪽에 위치한 N344 맵의 대로를 따라 중간중간 위치한 마을들에서 보급하며 올라갔다.

그러다 맵의 북동 끝에 위치한 호수까지 다다르니, 이대로 북상하면 D722의 사막 맵이고, 동쪽으로 나아가면 N352의 더스트 후작령이다.

호숫가에서 진을 꾸리고 정비한 병력은 동진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적진이다.

"목표 더스트 후작성. 북동 방향이다. 따르라!"

"흥! 양키! 내가 앞장서겠다."

"마음대로 해라."

구정욱은 제임스가 은연중에 부대를 이끄는 듯하자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공격대를 이끌고 선두에 나섰다.

제임스는 그러려니 하곤 선봉을 양보했다.

두두두두두.

1500기의 기마대가 더스트 후작성을 향해 맹렬히 나아갔다.

"대장! 전방에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흥! 밀어버린다."

"우오오오!"

구정욱의 공격대가 경로상에 위치한 마을을 향해 진격했다. 어차피 도로를 놓게 되면 그들이 진군하는 최단 루트가 곧 도로망이 될 테니, 경로상의 마을은 죄다 점령하는 게 맞았다.

*

더스트 후작성.

그리핀 둥지에 그리핀들이 바쁘게 오가며 소식을 전했다.

"각하! 왕국의 결사대가 출진했다 합니다!"

"누가 이끈다더냐?"

"바우켄 공작입니다."

더스트 후작이 입을 꾹 다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규모는?"

"공작 전하를 포함한 20인의 소드마스터입니다."

"다른 제후들은?"

"결사대 구성에 그들의 이름은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가문의 소드마스터를 보냈사옵니다."

아미르 왕국의 제후 넷.

그중 둘이 나서지 않았으나 상관없다.

나머지 제후 둘인 더스트 후작과 바우켄 공작이 함께한다.

이 인원이면 왕국도 멸할 수 있는 전력.

고작 한 명을 잡기 위해 모인 것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이번 작전은 실패할 수 없다.

"후우, 나가보게."

"넵!"

전령이 나서고 더스트 후작은 호위 기사 장투에게 물었다.

"놈은 어쩌고 있나?"

"양구스 자작성을 약탈, 이후 나세르 남작성으로 돌아갔습니다."

"특이하다고 할 만한 건 없었나?"

"양구스 자작의 일가족이 카잔 자작성으로 도주 중이었는데, 중간 지점에서 모두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놈의 소행이군."

"그리 보입니다."

"후우, 왕국의 비밀병기가 그리 쉽게 유출되어서는 안 되었어."

더스트 후작은 모든 걸 그리핀의 유출을 탓했으나, 사실 틀린 말이다.

본디 야생에서 잡아 길들인 그리핀이나 와이번이 존재했기에, 드물긴 하지만 그 라이더를 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아미르 왕국은 그리핀의 가축화에 성공해, 앞으로 수십, 수백의 그리핀 기사단 편대를 이룰 계획을 갖고 있었다.

제대로 된 공군 부대의 창설이었는데, 이를 계획한 이유는 한두 기의 그리핀으로는 사실상 전령이나 척후 외에 별다른 쓸모가 없어서였다.

"교활한 놈이로다."

진짜 문제는 하필이면 강철두라는 괴물이 그 그리핀을 기가 막히게 잘 사용한다는 것이다.

혼자서 수십 명의 마법사의 화력을 감당하는 정령사이기도 하면서, 혼자서 일당백의 전사나 다름없으니....

무지막지한 전략 병기에 지형지물을 무시하는 날개를 달아준 꼴이 되어버렸다.

그리핀을 탄 강철두에게 지금 아미르 왕국은 철저하게 농락당하는 중이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강철두의 그리핀 전략을 따라 할 수도 없다.

저런 위용을 보이려면 그리핀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위에 탄 기수가 전략 병기여야 한다.

혼자서 군단쯤은 대적할 만한....

"후작성 앞이 네놈의 무덤이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다.

놈을 사냥하기 위해 왕국의 날카로운 검들이 모두 모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흑검은 어찌하겠습니까?"

본디 전방에서 활약하던 흑검 넷이 더스트 후작의 소집령에 의해 이곳에 와 있다.

"흑검은... 작전을 함께하지."

아낄 때가 아니다.

이미 충분한 전력이지만, 괜히 힘을 아꼈다가 당하는 멍청한 선택을 하고 싶지 않다.

그때 다시 영주의 집무실로 전령이 튀어왔다.

"급보입니다!"

"고하라."

"현재 1500기 가량의 기마대가 남쪽에 출현. 북상 중입니다."

"소속은?"

"아이언헤드령으로 보입니다."

"...."

병력을 불러들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요한 건 잡병의 수가 아니다.

"병력이 나뉘는지만 확인해 두어라."

"하, 하지만 다른 마을들이 추가로 약탈당할 수도 있습니다."

"...네가 후작 해라."

"헙, 죄송합니다."

"병력의 이동 경로만 확인해 두어라."

"넵! 명을 받듭니다."

두 번 명령하고 나서야 전령으로 온 기사가 부복했다.

이는 적들의 기만책일 수도 있는바, 1500명이나 되는 적의 출현에 괜히 병력을 나눌 수는 없다.

지금은 모든 역량을 모아 강철두 그놈을 사냥해야 할 때다.

영지의 마을들이 약탈당하겠지만, 그것은 전투에서 승리 후 복구하면 그만이다.

영민의 숫자도 재산도, 승리 후 아이언헤드령에서 약탈해 보충하면 된다.

*

일산 성.

성주 김춘배는 별실에 머물고 있는 강철두를 찾아 보고했다.

"아이언헤드 성에서 병력이 출발했답니다."

"우리도 출발해야겠군."

"출진 준비하겠습니다."

철두는 고개를 저었다.

"춘배 너는 일산 성 주변 정리부터 해라. 여기 도로 기점으로 서쪽은 우리가 먹는다."

"헙, 알겠습니다."

신서울에서 일산 성, 더스트 후작성, N344의 호수까지 이어지는 라인으로 가도가 놓일 예정이다.

그 경로상의 모든 마을은 점령할 생각이다.

"후후, 더스트 후작성 공략은 탕아대만으로 한다."

양구스 자작의 병력들이 그대로 탕아대가 되었다. 그들의 가족들은 지금 대규모로 이주해와 일산 성에 자리 잡았다.

피난으로 떠난 이들도 많아 빈집은 넘쳤기에 정착에 무리는 없었다.

탕아대의 거점이 일산 성이 될 테니, 향후 이 근방을 방어하거나 약탈하는 게 이들의 주요 임무가 될 터다.

"탕후루."

"신! 탕아후루! 대령했나이다."

한 번도 제대로 불린 적이 없으나 언제나 빠르게 반응하는 충직한 마검사가 부복했다.

"가자."

"출진 명령을 받드옵니다!"

멋지게 나간 탕아후루는 병력을 수습했다.

출진 준비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일산 성에서 더스트 후작성까지는 남쪽으로 3일 거리. 말을 타면 하루만에도 가는 거리다.

그리핀이면 몇 시간 걸리지도 않고 말이다.

"준비를 마쳤습니다."

"가자."

"넵!"

밖으로 나가보니 탕아대가 도열해 있었다.

이번에 배속된 다섯의 하급 기사가 제대로 중간 지휘관 역할을 해줘, 탕아대를 제법 군단다운 형태로 지휘할 수 있었다.

대장 탕아후루를 필두로 2천의 병력이 남하하기 시작했다.

남쪽에서 올라오는 아이언헤드의 다른 부대와의 소통을 위해 그리핀이 바쁘게 오갔고, 더스트 후작성 서쪽의 너른 평원에서 집결하기로 하였다.

1500명의 부대가 먼저 도착해 군진을 꾸릴 곳을 찾기 시작했다.

"저기가 어떠냐?"

"밭이잖아. 망가져."

"아니, 바보야 여기 밭 말고 공터가 어딨냐?"

더스트 후작성은 동쪽에서부터 발원한 강이 성의 북쪽을 지나 서쪽 평원으로 흘러갔다.

서쪽엔 대규모 농경지가 조성되어 있었는데, 그 넓이가 압도적이었다. 한양의 너른 벌판이 모두 개간되면 이런 모습일까?

"별수 없다. 여기에 군진을 꾸리자. 그리고 한 부대는 저기 다리를 지키자."

북쪽에서 탕아대가 내려오면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저 다리가 파괴되면 도강에 또 시간이 제법 걸리니 곤란해진다.

의아한 점은 더스트 후작성에서도 그것을 알고 있을 텐데, 아무런 조치도 없이 내버려두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가겠다!"

구정욱은 가장 먼저 영주님을 영접하기 위해 다리를 향해 나아갔고, 나머지 부대는 군진을 꾸리기 시작했다.

더스트 후작성과는 불과 3킬로미터 떨어진 거리로, 중간에 시야를 가리는 것도 없는 넓은 들판이었다.

이미 날씨는 가을을 지나 겨울을 맞이하는 단계로, 보리며 밀 같은 작물들은 모조리 추수되어 볏짚만이 어지러이 널려있었다.

적진과 멀지 않은 곳이기에 그들은 언제든 전투를 벌일 수 있도록 긴장하며 강철두를 기다렸다.

"오, 저기 온다."

"이야, 병력 많네."

"기병은 오백 정도인가?"

탕아대가 다리를 건너와 그들의 옆에 군영을 세우니, 알게 모르게 기존의 병력들과 새롭게 합류한 탕아대 사이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슬슬 해가 넘어가려는 늦은 오후라, 오늘은 쉬고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진격하기로 결정이 났다.

철두는 대장 막사에 모든 대장들을 불러들였는데, 제임스, 오준환, 최준섭, 구정욱, 탕아후루, 그리고 탕아대 소속의 5명의 기사였다.

구정욱은 탕아후루는 물론, 기사들도 탐탁잖아했다. 오우거 특성석으로 인해, 사람을 급으로 나누고 대우가 달라지는 기질이 발동됐다.

"영주님! 외람되오나 저들이 작전회의에 참석할 급이 되겠사옵니까?"

"무슨 소리냐?"

"탕아대의 대장이야 그러려니 하더라도, 저들은 백부장 정도의 수준으로 보이는데 작전회의라니요."

"...."

철두는 씩 웃었다.

이거 재밌군.

"그래서?"

"내보내시지요."

구정욱은 비릿하게 웃었다. 다섯 명의 기사들은 얼굴이 시뻘게졌으나, 아직 아이언헤드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쉬이 나서질 못했다.

그들은 모두 탕아후루를 바라보았다. 부관을 모욕하는 것은 그 상관을 욕보이는 것과 같아 탕아후루의 얼굴도 시뻘게져 있었다.

"지금 해보자는 거요?"

"흐흐, 그렇다면?"

두 사람의 눈에서 불꽃이 일자, 철두가 손뼉을 치며 상황을 정리했다.

"후후, 친해지는 데는 역시 주먹다짐이지."

"...!"

"...!"

"결투다! 나가자."

철두는 말리기는커녕 싸움을 부추겼다.

막사 밖으로 지휘관들이 우르르 나왔다. 지휘관들이 대뜸 싸울 기미를 보이자 병사들이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이야, 뭐야? 누가 붙는 거지?"

"공격대장이랑 탕아대장이 붙는다는데."

"오! 지구인과 왕국인의 싸움인가."

"야야, 돈 걸어!"

병사들이 떠들썩하게 이 싸움을 즐길 준비를 했으나 안타깝게도 하늘이 도와주질 않았다.

"적이 성문을 열고 출진합니다!"

"뭐? 이 시간에?"

노을이 지고 있다.

적아의 구분이 힘들어 야습 같은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전투가 잘 벌어지지 않는 시간이건만 열린 성문으로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나오고 있었다.

"후후, 아쉽군."

철두는 적병들을 보며 대장들을 다시 돌아보았다.

"별수 없지. 전공 내기다."

"...!"

내기에는 응당 보상이 있어야 하는 법.

"내기 보상은...."

철두가 검을 들어 더스트 후작성을 가리켰다.

"성이다."

"...!"

스위치를 켠 듯 대장들의 눈에 불빛이 번뜩였다.

251화 한 방

더스트 후작성.

N352 맵에서 가장 번성하고 큰 성이다.

거주 인구도 많고, 농경지도 광활하다.

북으로는 일산 성을 지나 신서울로 향할 수 있고, 남으로는 아이언헤드령인 N344 맵으로 바로 이어진다.

교통의 요충지가 될 것이 분명하며, 앞으로 아미르 왕국을 향해 약탈하기 위한 전초기지가 될 것도 분명한 성.

그곳의 성주가 될 수 있는 기회다.

탐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

"부대 집결!"

"집결하라!"

부대의 휘장이 먼저 자리를 잡고, 그 뒤에 병사들이 도열하기 시작했다. 군영을 짓기 위해 바삐 움직이던 탕아대들도 부대의 좌측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3500여 명의 병력이다.

매번 몇백 수준의 기병만 운용하다가 처음으로 보병이 섞인 대규모 군이 집결해보는지라, 마땅히 진영이랄게 없었다.

좌익에 탕아대 2천이 도열하고, 중앙과 우측에 기병들이 소속별로 쭉 늘어서서 적들의 진격을 바라봤다.

더스트 성을 빠져나온 병력은 그 수가 아군보다 두 배는 더 많아 보였다.

"영주님! 대략 6천은 되어 보입니다."

"으음."

철두가 소나따 위에 올라타서 적들을 휘이 둘러봤다. 대부분이 보병이고, 추격을 위함인지 기병도 1천은 되어 보였다.

여기저기 우후죽순 들어찬 휘장도 수십 개고, 번쩍이는 전신 갑옷을 차려입은 기사들도 다수였다.

그들은 성문 바로 앞에 진영을 펼치고 차츰 전진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척척척!

전열의 보병들이 흐트러짐 없이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 모습에 외려 초조해지는 것은 기병이 다수인 아군들.

"영주님! 돌격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저를 선봉에 세워주십시오!"

탕아후루가 용감하게 말했고, 구정욱도 안달이 나 보챘다.

"기다려라."

"대기하라!"

철두의 명령이 동심원처럼 퍼져나갔다.

적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데, 말을 탄 채 가만히 있는 것도 참 고역이었다.

심장이 쿵쿵 뛰고, 아드레날린이 폭주한다.

돌격의 돌 자만 나와도 당장에 뛰쳐나갈 듯 엉덩이를 들썩인다.

흔들림 없이 척척 걸음을 맞춰 다가오는 방패벽이 성벽과 같았다. 적이 다가올수록 흥분은 점점 조바심으로 바뀌었다.

대기가 길어지니 생각이 많아지고, 복잡해진 머리에 용기로 가득 찼던 심장이 차갑게 식는다.

스멀스멀 두려움이 피어오르려 한다.

병사들의 마음이나, 지휘관들의 마음이나 매한가지라 최준섭이 나서서 청했다.

"영주님! 돌격해야 합니다."

"대기."

최준섭이 말을 몰아 강철두의 옆에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사기가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후후, 괜찮다."

철두는 태연했다.

그저 적을 가만히 살펴보고 있을 따름이다.

그 사이에도 적의 진격은 차츰차츰 이뤄졌다. 그들은 어디까지 다가오려고 하는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철두의 옆에 있던 에르미스도 궁금해 물었다.

"무슨 생각이냐?"

"독니를 꺼내야지."

"...?"

자신이 발견하지 못한 무언가를 강철두는 봤단 말인가?

에르미스가 의아해 적진을 살폈다.

잘 훈련된 병력이다.

진영은 흐트러짐 없이 각이 맞았고, 가진 무기와 통일된 복색의 갑옷이 그들을 더욱 위압감 있게 만들었다.

척척척!

코앞까지 들이닥칠 것 같았던 적의 진군은 아이언헤드군과의 거리가 1킬로미터쯤 되었을 때 멈추었다.

철두는 마침내 씩 웃었고, 계속 적진을 살피던 에르미스가 탄식했다.

"아! 군데군데 기사 전력이 많군!"

대장장이의 안목은 금속제 장비에 특히나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하급 기사가 아니야. 상급 기사. 아니.... 그보다 더 잘 만들어진 갑옷이야. 돈 많은 기사 놈들이군. 아니! 음? 문양이 모두 달라. 둘, 셋, 넷... 열둘.... 허허! 각 가문의 정예기사들을 모두 불러 모은 게야!"

에르미스는 추리할수록 들어맞는 아귀에 손뼉을 쳤다. 대장장이는 갑옷의 생김새와 재질, 그 수준을 보고 기사들의 전력을 판단했고.

"후후, 소드마스터 급이다."

"허어, 그런 겐가?"

전사는 저들의 숨길 수 없는 투기와 아우라를 보고 판단했다.

"적어도 스물 이상이야."

철두는 대강 헤아렸으나, 군진의 군데군데 숨어있는 전력을 정확히 판가름해냈다.

돌격?

돌격하는 순간, 저들에 의해 병력의 절반은 오늘 이곳에서 죽었을 것이다.

바바리안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심상 공간.

강철두의 메마른 언덕에 빼곡히 찾아와 억울함을 호소할 동료들의 혼을 생각하니 아찔했다.

굳은살이 두려워 훈련하지 않는 전사는 없다.

부하들의 죽음이 두려워 그들을 전장에 투입하지 않을 지휘관은 없지만....

이건 경우가 다르다.

함정임을 아는데 부하들의 용기를 핑계로 사지에 밀어 넣는 건 지휘관으로서 실격이다.

새삼, 부하들 중에 소드마스터의 수가 적은 게 아쉽다. 그나마 이번 신서울행에서 김춘배와 김도진을 거둬들여 다행이다.

"전원 기다려라."

다그닥, 다그닥.

철두는 여전히 대기 명령을 내려놓고 홀로 앞으로 나아갔다. 적진과는 고작 1킬로미터 거리.

병력의 숫자가 두 배는 차이가 나다 보니 위압감이 상당하다.

3500여 명의 병사들과 6천여 적군.

도합 1만의 눈이 모두 전장에서 이탈해 홀로 나서는 강철두에게 내리꽂혔다.

이목의 집중만으로 질식할 듯한 그 분위기 속에서 철두는 웃었다.

강철두는 정확히 두 진영의 한가운데까지 나아가 쩌렁쩌렁 소리 질렀다.

"적장은 나서라!"

강철두의 고함에 적 군진의 가운데에 도열한 병사들이 좌우로 갈라지더니 백마를 탄 전신 갑옷의 기사 하나가 나섰다.

갑옷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은빛으로 번쩍이는 갑옷의 군데군데 황금으로 새겨진 듯한 문양이 그 존재감을 과시한다.

헌데 앞으로 나선 이는 하나가 아니었다.

하나는 은빛 갑옷을 입었고, 하나는 황금색으로 번들거리는 갑옷에 붉은 망토를 둘렀다.

다그닥, 다그닥.

철두는 화려한 갑옷을 입은 두 명의 기사를 보며 물었다.

"누가 대장이냐!"

철두의 외침에 두 기사가 모두 투구의 안면 가리개를 들어 올렸다.

"아이언헤드!"

은빛 갑옷의 사내가 크게 소리쳤다.

"나는 이곳 N352의 영주이자! 아미르 왕국의 네 번째 검! 북방의 사자! 더스트 후작이다!"

긴 설명에 철두는 그저 옆으로 턱짓했다.

"저놈은 누구냐?"

"...."

더스트 후작은 예의를 모르는 야만인의 언행에 혀를 찼고, 지목당한 황금갑옷의 사내는 재밌다는 듯 껄껄 웃었다.

"하하, 본인은 바우켄 공작이오!"

우렁차지만 짧은 인사에 철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공작이 후작보다 더 위에 아니냐?"

"쯧, 미개한...."

더스트 후작의 표정엔 경멸이 가득했다.

철두는 공작이든 후작이든 상관이 없었으나, 아군 진영은 바우켄 공작의 자기소개에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개중에서도 탕아대의 소요가 컸다.

"왕국 제일검이다!"

"헉! 바우켄 공작이라니!"

"큰일이야! 저기 저 사람도 알 것 같아."

탕아대의 대원들은 대부분 양구스 자작군에서 포로가 되었던 항병들.

아미르 왕국의 사정에 밝은 만큼, 바우켄 공작에 대한 존경과 두려움도 큰듯했다.

반면, 아이언헤드의 부대원들은 전혀 동요하질 않았다.

"바우켄이 누구야?"

"모르지."

"그것도 모르냐? 조금 있다 영주님에게 처발릴 놈이지."

"클클, 알 필요 없는 놈이네."

그들이 보아온 가장 강한 전사는 강철두였고, 아무리 대단한 적들이라곤 하나 항상 강철두가 승리해온바.

이번에도 딱히 다르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어쩌면 이변이 생길까 두려워 괜히 허세를 부리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어어? 근데 좀 많은데?"

"뭐야? 비겁하게."

계속해서 적진에서 제법 차려입은 갑옷의 기마가 앞으로 나서고 있었는데 그 수가 한둘이 아니다.

더스트 후작과 바우켄 공작의 옆으로 속속 모여드는 기사의 수가 열이 넘어가자, 결국 참지 못한 구정욱이 강철두의 옆으로 합류했다.

"영주님! 함께하겠습니다."

"후후, 뒤로 가 있어라."

아직 구정욱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강한 적들이다.

"죽어도 좋습니다!"

"널 죽일 순 없다."

"허억!"

"물러나라."

"크윽, 명을 받듭니다."

구정욱이 감동한 얼굴로 뒤로 말을 돌렸으나, 아예 진영으로 돌아가진 않고, 언제든 전장에 끼어들 수 있도록 강철두와 아군 진영의 사이쯤에 서 있었다.

제임스와 최준섭, 오준환과 탕아후루도 그에 합류해 앞으로 나섰다.

적들의 기사가 하나씩 더 합류할수록 아군의 랭커들도 속속 구정욱의 옆으로 가, 언제든 달려들 준비를 했다.

더스트 후작을 포함해 기사 26인이 적 병력 앞에 도열했다.

철두의 뒤로도 30명이나 되는 랭커들이 섰으나, 그 구색이 조금 차이가 났다.

바우켄 공작은 조용히 속삭였다.

"저놈이 낌새를 눈치채고 도망치면 곤란할 뻔했는데, 맞붙을 요량이오."

"보다 일이 쉽게 되었습니다."

더스트 후작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본디 작전은 적들이 돌격하면 뒤섞여 백병전을 유도한 후, 강철두라는 괴물을 사냥하기 위해 스물여섯의 소드마스터들이 집결 포위해 공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강철두가 자신 있게 앞으로 나서서 일기토를 걸어주니, 오히려 고마운 상황이다.

소드마스터 26인.

강철두의 뒤에 도열한 기사의 수는 서른이 넘어 보였으나, 강철두를 제외하면 모두 하급 기사 수준의 쭉정이들이다.

바우켄 공작 혼자서도 쓸어버릴 수 있는 수준이니, 있으나 마나 한 전력이다.

"일대일 승부를 걸어오면 어쩔까 걱정했는데, 기사단끼리의 돌격을 원하니 그대로 해줍시다."

"그러지요."

바우켄 공작이 작위가 높지만, 어쨌든 지금 전장을 주도하는 사령관은 더스트 후작.

바우켄 공작은 지원군이다.

더스트 후작이 앞으로 나서서 소리 질렀다.

"우리 기사단과 그대의 기사단의 승부로 이번 전쟁의 결과를 내는 게 어떻겠나?"

"후후후, 그럴 필요 없다."

철두는 오만하게 웃으며 나섰다.

어디 애먼 부하 놈 죽이려고 수작이더냐.

"너희는 나 혼자로 충분하다!"

"...."

강철두의 호기로운 외침에 더스트 후작의 표정이 어두워지는데, 바우켄 공작은 오히려 좋다는 듯 웃었다.

"흐흐, 저 야만인의 자신감이 대단하구려."

"후우, 건방진 녀석의 웃음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봅시다."

더스트 후작이 명했다.

"전원 하마!"

파팟.

스물여섯의 기사가 말에서 내려 역소환 했다.

강철두도 소나따를 돌려보내고 대지를 딛고 섰다.

그 뒤에 있던 구정욱을 위시한 아이언헤드 진영의 랭커들도 얼떨결에 하마했는데, 그들은 서로 작게 속삭였다.

"이거 우리 안 끼어들어도 되나?"

"시발, 너무 적 페이스에 휘말리는 거 아냐?"

"바보야, 영주님이 팽이 돌리면 우리가 끼는 게 더 방해야."

"후우, 이거 괜히 손 떨리는군."

"믿어, 병신아."

부하들의 걱정을 뒤로하고 철두는 앞으로 나섰다.

"후후후. 덤벼라, 하룻강아지들."

철두는 두렵지 않았다.

"그대, 자신감이 대단하구려."

바우켄 공작이 웃으며 검을 빼 들었다.

파파팟!

그의 검에 하얀 검기가 맺혀 넘실거렸다.

파팟!

그리고 나머지 기사들도 모두 검에서 광채가 발현되니, 더스트 후작군은 이미 승리라도 한 듯 환호성을 질렀다.

아이언헤드 진영은 설마 저들 모두가 소드마스터일 줄은 몰라 깜짝 놀랐다.

무려 26명의 소드마스터!

아미르 왕국의 최정예 병력이 모두 집결한 것과 다르지 않다.

경악과 좌절이 번뜩이는 번개처럼 번져나가는 그때, 강철두는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망치를 꺼내 들었다.

"후후후. 덤벼라."

더스트 후작은 강철두가 꺼내든 한손 망치를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어울리는 무기가 아니다.

하지만, 어떠하리.

놈은 끝이다.

"전원! 공격하라!"

타탓!

스물여섯의 소드마스터가 오직 강철두만을 죽이기 위해 돌진했고.

파지지지직!

마력의 절반을 넘게 담아 휘두른 망치가 뇌전을 뻗었다.

252화 문경 성

마치 신의 징벌과 같았다.

콰아아아아앙!

산을 쪼갠다는 성물 묠니르가 휘둘러지니, 빛이 번쩍였다.

그 파괴적이며 흉악한 뇌전은 소드마스터의 검기를 달빛 아래 반딧불 정도로 만들어버렸고.

콰지지직!

그들을 모조리 집어삼켜 증발시켜버렸다.

뇌전은 그러고도 힘을 잃지 않아, 적진을 향해 진격하니....

콰지지지직!

두텁게 도열해 있던 적 진영의 한가운데가 뻥 뚫려버렸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장비들과 분리되듯 사방으로 찢어져 버린 육편이 난무했다.

그 파괴적인 힘은 마침내 더스트 후작성까지 닿아, 그 성문이 쪼개지다 못해 성루까지 모조리 무너져 버렸다.

꾸어어어엉!

뒤늦게 뇌전에 으레 뒤따르는 천둥이 울리니, 성벽과 성문이 허물어지는 것과 거의 동시나 다름없었다.

"후후후."

철두는 한 번에 빠져나간 마력의 상실감과 탈력감을 휘이 털어버리곤 앞을 보았다.

파파파팟.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증발해버린 스물여섯의 소드마스터는 그 죽음의 증표인 듯 전리품 스물여섯을 남겨두고 사라졌다.

"...!"

신의 징벌이 내린 전장에 경악스런 침묵만이 가득한 가운데, 에르미스가 허탈하게 읊조렸다.

"...미친."

성물의 대단함이야 진즉 알고 있었지만, 지르골을 상대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그때야 일대일의 비무였으니 강한 자가 이긴다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전장이다.

성물을 한 번 휘두름으로써 전장의 판세가 뒤바뀌어버렸으니, 새삼 왜 그토록 성물의 위대함을 노래했는지, 그 전설이 아직도 이어지는지 되새길 따름이다.

이 정도는 되니까, 드워프의 국왕께서 그토록 보물을 내어주며 계약했겠지.

'국왕은 대체 이걸 어디에 쓰려는가.'

새삼, 이 파괴적인 성물 묠니르를 한 번 휘두를 기회를 가진 드워프 국왕이 생각한 쓰임새가 어디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충격적이며 파괴적인 결과에 먼저 반응한 것은 적군이다. 그들의 중군이 증발하였다.

좌익에 있던 기병대나, 우익을 차지하고 있던 궁병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애초에 명령을 내려야 하는 지휘부 자체가 중군에 있었던바.

"도, 도망쳐!"

"히에에에엑!"

"괴물이다아!"

너무나 충격적인 결과에 너 나 할 것 없이 도망쳤다.

본능적으로 성으로 후퇴하는 병력이 대부분이나, 또 몇은 아예 전장을 이탈해버렸다.

성에 틀어박혀도 적군의 목표가 더스트 후작성이라면 다시 한번 싸워야 하기에, 아예 후속 전투를 피하기 위해 도망친 것이다.

방패를 집어 던지고, 창칼을 버리고 도망치는 이들이 다수다.

진군할 때의 그들은 더없이 정예병의 모습이었으나, 후퇴할 때의 그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어디에도 정예함 따위는 없었다.

두려움.

압도적인 두려움과 절망에 전의 따위는 한 줌의 재로 승화해버린 지 오래다.

사정은 아군도 만만찮아, 여전히 진영을 이루고 있지만 너 나 할 것 없이 입을 쩍 벌리고 있다.

잘게 몸을 떠는 이들도 있었는데, 너무 파괴적이며 흉포한 광경에 아군임에도 두려움과 경외감이 들었다.

너무 놀랍고,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라 누구 하나 승리의 함성을 내지르는 이가 없었다.

"후후후."

철두는 묠니르를 집어넣었다.

부하들을 살려냈다.

"영주님!"

"어, 어떻게 하신 겁니까?"

"허어! 그게 그 소문의 묠니르입니까?"

"아니, 성물의 힘이 이토록 엄청날 줄이야."

대장들이 몰려나와 흥분된 기세로 물었으나 철두는 그저 명령을 내렸다.

"후후, 놀러 왔나?"

"예?"

"성을 점령해라."

"헛!"

"전공 내기는 지금부터다."

함정을 치워줬으니 이제 부하들의 역량을 볼 때다.

철두의 말에 대장들이 각자의 부대를 향해 빠르게 손짓했다.

"공격대, 따르라!"

"유격대, 돌격이다!"

"탕아대! 성을 점령하라!"

특작대와 별동대까지 모조리 진격 명령이 내려지니, 그제야 함성이 울려 퍼졌다.

"우와아아아아!"

"돌격이다아아!"

소리와 함께 막혔던 둑이 터지듯, 두려움도 긴장도 모조리 용기로 치환되며 힘을 북돋았다.

부대가 돌격을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

어차피 성문도 부서져 먼저 성에 진입하는 자가 전공 1등이나 다름없다.

"달려라! 무조건 따라와!"

"이랴아!"

레이스하듯 부대가 달려들자 더스트 후작성의 성벽 위가 분주해지더니, 곧 휘장들이 전부 내려가고 백기가 내걸렸다.

"어어?"

"시발, 뭐야?"

전공 욕심에 내달리던 병력들이 차츰 속도를 줄였다.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뒤를 힐끔힐끔 바라보다가 이내 성 앞에 멈춰서고 말았다.

조금 더 나아가면 화살의 사정거리.

펄럭!

성벽마다 내건 백기가 휘날리고, 부서진 성문과 잔해들은 여전하다.

이제 시야 거리에 병사들의 움직임이 전부 보였는데, 성벽 위에 도열한 더스트 후작군은 창칼을 버리고 저마다 손을 휘저으며 싸울 의사가 없음을 내비치고 있었다.

"후후후."

어느새 병력을 헤치며 선두에 선 강철두는 웃으며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황당한 얼굴인데, 한 게 아무것도 없어 전공이랄 것도 없으니 조금 분해하는 얼굴들도 있었다.

"내기의 승리자는 나군."

"...."

강철두는 당당하게 더스트 후작성을 향해 말을 몰았다.

"따라와라. 성을 정리한다."

항복했다 하더라도 소규모 저항이야 있을 수도 있으니 빠르게 성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따르라! 후작의 저택부터 점거한다!"

탕아후루가 가장 크게 활약했는데, 그의 부대가 가장 많기도 했고, 소통의 비약을 쓸 필요도 없이 아미르 왕국의 말이 통하기도 해서다.

주민을 통제하고 항복한 병력을 분류하는 한편, 후작의 내성으로 들이닥쳐 백작의 가족들을 포로로 잡았다.

소규모 항전을 할 법도 한데, 전의를 상실한 것은 병사나 기사나 매한가지라 누구 하나 창칼을 들고 덤벼들지 못했다.

백작 저택의 안뜰에 줄줄이 포박된 자들이 합류했다. 그 수가 삼백여 명이 넘어가, 안뜰이 비좁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안 되겠다 여겼는지 탕아후루가 다가와 포로의 처분을 물었다.

"충! 충신 탕아후루! 영주님께 포로들의 처분을 여쭙습니다."

"후후, 가보자."

"충신! 탕아후루가 모시겠습니다. 이리로 가시지요."

본래도 배알 없는 녀석이지만, 이제는 정말 입속의 혀처럼 굴었다.

"먼저 백작의 가족들입니다."

"보통 어떻게 처분하나?"

탕아후루는 자신이 올리는 말이 그대로 실현되리란 것을 알았다. 잠시 고민하다 말을 신중히 골라 답했다.

"성인 남성은 참하고, 아녀자들과 어린아이는 노예로 파는 것이 관례입니다."

사형선고와도 같은 탕아후루의 말에 포로로 잡혀있던 더스트 후작가의 사람들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무슨 소리요! 영지전의 경우만 하더라도 그 귀족의 가족은 해하지 않는 것이 관례요! 몸값을 지불할 테니 우리를 자유로이 풀어주시오!"

탕아후루는 눈빛을 번뜩였다.

감히 포로 주제에 우리 영주님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다니!

"닥쳐라, 이놈들! 영지전? 네놈들 눈엔 우리 영주님이 아미르 왕국의 봉신으로 보이느냐!"

제국에도 숙이지 않으시는 분이다. 감히 아미르 왕국의 후작가 귀족이 저리 낮잡아 볼 분이 아니건만.

"그, 그치만."

"닥쳐라!"

탕아후루는 당장에라도 목을 쳐버릴 듯 늙은 남자를 노려보았으나, 강철두는 흥미가 돌았다.

"탕후루."

"충신! 탕아후루! 영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들어보자."

"예?"

"몸값이 얼마냐?"

처음 입을 열었던 늙은 남성은 기회라 여겼는지 눈빛이 반짝였다. 이거 잘하면 가문의 식솔들이 모두 살아서 나갈 수 있겠구나.

"나는 던힐 더스트로, 더스트 후작각하의 두 번째 형이오. 멀지 않은 곳에 내 소유의 철광산이 있소! 그곳의 채굴권 20%를 넘기겠소!"

"...."

철두가 가만히 보더니 던힐을 손짓해 불러냈다.

파팟.

홀로그램 맵을 띄워놓고 재촉했다.

"위치가 어디냐?"

"여, 여기요."

"후후, 거긴 이미 내 땅이다."

"무, 무슨?"

철두가 홀로그램 맵을 쭉 그어, N352 지역의 나세르 남작성과 더스트 후작성이 있던 서쪽 전체를 가리켰다.

"여기 두 덩어리는 이제 내 땅이다."

"하, 하지만 내 광산은 자세히 보시면 구앙 남작령에 더욱 가깝소."

"후후, 그럼 구앙 남작까지 죽여야겠군."

"...."

던힐은 낭패한 얼굴이 되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다.

그는 자포자기했다.

"이미 다 제 것이라 하면, 무엇으로 협상한단 말이오?"

"후후후, 하나 있긴 하지."

철두가 강제로 뺏을 수 없는 재물이 있긴 하다.

"귀족 중에 주화와 인벤토리를 모두 비워 내놓는 자는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겠다."

"...!"

철두의 선언에 포로로 잡힌 귀족들 웅성거렸다.

"사용인들 중에 그대로 성에서 봉사하겠다는 자들은 받아들이겠다."

이번에는 사로잡힌 하인들이 웅성거렸다.

"전향하는 병사들과 기사들 또한 받아들여 주마."

몇몇 기사들은 혹하는 얼굴이 되었다.

이미 아미르 왕국 자체가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성물의 주인이 등장했다!'

세상에 성물의 주인은 오직 제국 황제뿐이었다.

헌데, 이번에 야인들의 영주가 그 두 번째 주인이 되었으니, 이건 어쩌면 새로운 제국의 시작을 함께할 수 있는 기회인지도 몰랐다.

이미 더스트 후작성이 초토화된 이상, 그리고 아미르 왕국에서 끌어모은 소드마스터들이 전멸한 이상 아미르 왕국의 패망은 정해졌다.

"탕후루!"

"충신! 탕아후루!"

"일러준 대로 처분해라."

"명을 받드옵니다!"

탕아후루가 다시 포로들의 분류를 시작했다.

귀족들은 정말 모든 것을 탈탈 털린 이후에나 성을 빠져나갈 수 있었고, 사용인들은 대부분 성에서 봉사를 이어가기를 원했다.

고용된 입장의 그들로서는 주인이 바뀌었을 뿐, 하는 일은 매한가지였다. 오히려 그 주인이 성물의 주인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또 영주가 패배하여 포로 취급당할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더스트 후작성을 완전히 장악하자, 승전연 겸의 논공 자리가 만들어졌다.

"후후. 이 성은 관리자를 두고, 내가 직접 다스리겠다."

철두가 굳이 성을 누군가에게 하사하지 않은 것은 부하들의 전공이 모자라기도 하지만, 좋은 시설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인장을 활성화해 성을 점유할 수 있습니다.>

더스트 후작의 인장은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 찾을 길이 없다. 하지만 지배자가 죽은 성은 새로운 인장으로 주인을 등록할 수 있으니.

<아이언헤드 가문의 인장이 성을 점유합니다.>

<성의 이름을 설정해 주십시오.>

"문경으로 한다."

김춘배처럼 고향이랄 게 없다.

생각나는 게 할아버지 강용철의 고향 문경이라 그냥 그렇게 지어버렸다.

<문경 성의 좌표가 등록되었습니다.>

<문경 성 비밀 창고 좌표가 등록되었습니다.>

그렇지.

이게 바로 강철두가 이 성을 직접 점유하고자 한 이유다.

이제 그는 아이언헤드나 문경이나 어디에 있든, 순식간에 오고 갈 수 있게 되었다.

"급보! 급보입니다!"

그때 아이언헤드 성의 그리핀 전령이 뛰어와 강철두를 찾았다.

"무슨 일이냐?"

"아이언헤드 성이 기습당했습니다!"

"...!"

철두가 벌떡 일어섰다.

253화 오해가 부른

"적이 몇이냐?"

"넷이옵니다!"

철두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수천이 몰려왔다 하면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적이 고작 넷이라면 이는 암살자를 보냈다는 말일 터.

"피해는?"

"친위대장이 중상이오나...."

파팟!

철두가 뛰쳐나갔다.

"아앗! 이미 상황은 종료... 가셨네...."

전령은 입맛을 다셨다.

이거, 결과부터 말씀드릴 걸 그랬나?

철두는 전령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서둘러 달렸다.

타타타탁!

"마법진!"

홀로그램 맵을 열어 보며 저택의 중심부, 영주의 침실 옆방의 문고리를 잡았다.

철컥.

<소유자가 변경되었습니다.>

<주화 1000개로 재등록하시겠습니까?>

파팟.

문고리가 돌아가며 열린 작은 방의 바닥에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개인 전용 이동마법진>

사용자 '강철두' 전용의 마법진.

등록된 좌표로 순간 이동할 수 있다.

문경 성 - 0주화

비밀창고 - 1주화

아이언헤드 성 - 30주화

지하수련장 - 30주화

N6140 - 32주화

N3650 - 629주화

N5290 - 351주화

M44 - 998주화

I21 - 1783주화

문경 성과 아이언헤드 간의 거리는 주화로 30개.

철두는 얼른 30개의 주화를 소모해 마법진을 활성화했다.

파팟!

익숙한 공간이다.

철두는 아이언헤드 성의 영주 전용 이동마법진의 문을 열고 나섰다.

*

N6140 이동마법진.

파팟.

빛이 번쩍이더니 엘프 아르엘라와 에그니스가 마법진 위에 나타났다.

"후, 여기가 아이언헤드인가?"

아르엘라는 이동마법 특유의 멀미를 쫓으며 천천히 걸었다.

"에그니스. 성은 어느 쪽이야?"

"저쪽입니다."

"네가 어떻게 알.... 이정표가 있군."

아르엘라가 나무 팻말을 향해 다가갔다.

거기엔 여러 문자가 적혀 있었는데, 그중에는 읽을 수 있는 제국어도 있었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친절한 놈들이군."

아르엘라가 냉소했다.

에그니스는 언제나처럼 묵묵히 그녀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자기네 말도 아닌데, 이렇게 많은 언어로 이정표를 세우다니. 그놈이 영주인 영지치고 지나치게 친절하다고 생각 안 해?"

"그의 휘하 행정관들이 친절한 것일 수도 있죠."

"호오! 그렇지? 그렇겠지. 그놈의 새끼는...."

아르엘라는 괜히 그 무식하고 힘만 센 바바리안이 생각나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대체 뭘 먹으면 그렇게까지 가파르게 강해질 수 있는 것일까?

다그닥, 디그닥.

두 사람은 말을 타고 천천히 동쪽으로 나아갔다.

멀지 않은 곳에 아이언헤드 성이 있으니, 점심 무렵엔 도착할 성싶었다.

"헐, 생각보다 성이 큰데?"

"그렇군요."

"시골 영주일 줄 알았는데...."

그도 아니면 막사 생활하는 전형적인 바바리안식 영지를 예상했는데, 의외였다.

성문은 마차 다섯 대는 지나다녀도 될 정도로 크고 위압감이 넘쳤는데, 문지기 같은 병사들이 성문 앞에 넷, 성벽 위에 여섯이 있었다.

천천히 말을 몰아간 에그니스는 병사들 중에 가장 선임으로 보이는 사내에게 가서 말했다.

"아이리스 후작령의 기사단장님 행차시다!"

"...? 안 물어봤소."

안 물어봤지.

하지만 절차이지 않은가?

"...성의 출입을 요청하는 바이다."

"그냥 들어가시면 됩니다. 통행료는 자동 징수입니다."

"...?"

신원 확인도 하지 않고 그냥 들여보내 줘?

그럼 성의 치안 관리는 대체 어떻게 하는 건가?

언제나 무표정한 에그니스의 표정에 작은 균열이 일어났다.

"아이언헤드의 영주님께 볼일이 있다.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나?"

"영주님은 지금 성에 계시지 않습니다."

"...소식은 어떻게 전하는가?"

질문 세례가 이어지자 병사는 조금 귀찮은 듯 대꾸했다.

"내성으로 가보십시오."

"알겠네."

에그니스는 문지기 병사에게도 예의를 잃지 않는 모습으로 대하곤, 성문을 통과해 들어갔다.

파팟!

<아이언헤드 외성 통행세 10주화가 자동 징수됩니다. 이후, 일몰을 기점으로 보호세 2주화가 자동 징수됩니다.>

<주화 10개를 소모하였습니다.>

그리 높지 않은 통행세다.

아르엘라와 에그니스가 성문을 통과해 들어가자,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병사들이 그들을 힐끔거리며 소곤거렸다.

"와, 시발 존나 예쁘다. 봤냐?"

"봤지, 병신아. 엘프 맞지?"

"엘프가 우리 영주님한테 무슨 볼일이지?"

"모르지."

"병신아, 너한테 물은 거 아니야."

"뭐래, 병신아."

문지기가 투닥거리는 사이 두 엘프는 거리를 거닐며 관찰하기 바빴다.

"거리가 잘 정비되어있어."

"...."

"인구 밀도도 과하지 않은데? 아니, 널널해. 공터가 많네."

"...."

아르엘라는 도시를 구경하기 바빴고, 에그니스는 혹시 모를 위협을 대비해 감을 날카롭게 하고 주변을 경계했다.

방명록도 쓰지 않고, 누구나 출입 가능한 성이기에 치안이 좋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거리를 걷는 내내 아르엘라의 미모에 힐끔거리는 사람은 있어도, 주머니를 노리는 좀도둑 하나 없었다.

"거리도 깨끗해!"

"...그렇군요."

"오! 웬일로 대꾸를 해."

"저는 벙어리가 아닙니다."

"웃기시네."

아르엘라는 코웃음 쳤다.

에그니스도 거리가 깨끗한 건 동의하는 모양이었다. 인간들의 도시는 여럿 봤지만 이토록 잘 정비되고 깨끗한 도시는 잘 없었다.

지어진 건물들이 예술적으로 뛰어나지는 않지만, 뭔가 도시 자체에서 특유의 깔끔함과 정돈된 분위기가 느껴졌다.

왜 그런가 천천히 살펴보니 깔끔한 도로와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복색이 그 이유였다.

"이 동네엔 거지가 없나?"

"깔끔하긴 하군요."

그렇게 화려한 옷은 없는데, 사람들의 옷차림이 말끔했다. 다른 건 몰라도 빨래는 자주 하는 모양이었다.

거기에 반듯하고 넓으며 곧게 뻗은 도로도 한몫했다. 아이언헤드 성에는 구불구불한 골목길이랄 게 하나도 없었다.

도로부터 지어지고 집을 지은 전형적인 지구의 계획도시 그 자체였으나, 지구에서나 흔하지 노바의 도시들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도로는 전부 조금 높은 지대에 위치한 내성으로 이어져 있었다.

점점 지대가 높아지며 도시 전체를 아우르는 시야로 보니, 동서남북에 성문이 하나씩 있고, 거기서부터 뻗어 나온 4개의 대로가 모두 내성까지 나 있다.

거기에 내성에서부터 동심원처럼 도로가 하나씩 하나씩 띠를 이루며 놓여 있으니, 성 전체가 격자무늬 블록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어떤 길을 가도 막히는 것 없이 모든 길이 이어지는 신비로운 도시였다.

내성에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에그니스는 제법 긴장을 늦추었다.

"치안이 좋은 이유가 별다를 게 없군요."

"그러게."

막히는 길이 없고 골목길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효과를 본 것이다.

두 사람은 마침내 내성에 당도했다.

내성 문 앞에는 문지기로 보이는 차림의 병사가 있었는데, 기사 계급은 아니더라도 제법 정예 병사인지 철제 흉갑과 여기저기 철제로 덧대어진 갑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멈추시오!"

"오, 여긴 검문하네."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단장님."

에그니스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이분은 아이리스 후작령의 기사단장님이시오. 아이언헤드 영주께 볼일이 있어 왔으니 전해주시오."

"영주님은 지금 부재중이시니 후일 다시 오시지요."

"으음."

에그니스의 눈썹이 꿈틀했다.

"듣지 못했는가? 이분은 아이리스 후작령의 기사단장님이시오."

"그렇게 말씀하셔도 없는 영주님이 뿅 나타나진 않습니다. 후일 다시 오시지요."

"허어!"

에그니스는 당장 이분을 내성 가장 좋은 별실로 모시라 호통치고 싶었으나, 예의를 지키기 위해 애써 참았다.

기품을 잃지 않는 정중한 말투와 바른 행동거지에서 나오는 품위는 에그니스의 성격과 상징 그 자체다.

"에그니스. 나와봐."

보다 못한 아르엘라가 나서서 문지기에게 말했다.

"나는 아이언헤드 영주와 서로 중요한 것을 나누기로 약조한 사이예요."

"헙, 넵?"

문지기가 깜짝 놀랐다.

아르엘라의 미모는 아까부터 눈에 띌 정도로 대단했는데, 대뜸 영주님과 그런 사이라는 생각이 드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문지기가 서둘러 성안으로 들어가자, 에그니스가 한숨을 쉬며 작게 귓속말했다.

"공주님.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입니다."

"흐흐, 뭐 어때?"

아르엘라가 음흉하게 웃자, 에그니스가 연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저 표정은 꼭 뭔가 장난을 칠 때나 사고를 칠 때 짓는 얼굴이다.

"우리는 손님으로서 이곳에 방문했습니다. 장난은 예의에 맞지 않습니다."

"뭐라는 거야? 없는 말 한 것도 아닌데. 흐흐흐."

아르엘라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이 무식한 바바리안 녀석. 좀 골려줄까?'

거짓은 말하지 않는다.

진실을 교묘하게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긴 쉬우니....

어디, 골탕먹어봐라.

*

헐레벌떡 뛰어간 문지기는 상관들을 제쳐두고, 영지군 총사령관 기용수를 찾아가 보고했다.

"충! 사령관님!"

"왜 이러나? 숨부터 돌리게."

"헉. 그게, 밖에 아름다운 엘프 숙녀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게 왜?"

"영주님과 미래를 약속한 사이랍니다!"

"헉, 뭐야?"

기용수는 얼른 달려, 영주성으로 향했다.

"충! 시종장님!"

"네, 기 대장님."

"밖에 영주님 약혼자라는 엘프가 왔습니다."

"뭐어? 약혼자!? 엘프!?"

김진태는 깜짝 놀랐다.

평생 모솔로 지내온 굳건한 유대가 이렇게 깨어지는가?

'이 새끼. 엘프라면 학을 떼더니.'

역시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 말이 맞는 것인가? 지나치게 미워하는 건 사랑하는 것과 같다더니.

"허, 시발. 나가보죠!"

"네!"

김진태와 기용수가 헐레벌떡 영주성을 나와 성문으로 향하자, 마침 기도원에서 나와 산책하던 강용철과 마주쳤다.

"허허, 두 사람 다 어딜 그리 급히 가느냐?"

"할아버지! 지금 밖에 철두 여자친구 왔어요!"

"뭣이?"

강용철은 깜짝 놀랐다.

"허어! 이놈의 새끼. 밖으로 싸돌아다닐 때부터 알아봤더라니!"

영주성에 붙어 있는 날보다, 외유하는 날이 더 긴 무심한 손자였다. 헌데, 이렇게 떡하니 제 짝을 찾아오다니!

"얼른 가봐요, 할아버지."

"오냐! 나도 같이 가자. 우리 손주며느리가 왔는데 마중 가야지!"

기용수와 김진태, 강용철이 헐레벌떡 뛰어갔다.

성문에 나서보니 과연, 눈이 돌아갈 만한 미모의 엘프가 공손히 서 있었다.

"헉! 시발, 존나 이쁘다. 철두 개새끼!"

"어억! 우리 영주님의 사모 되십니까?"

"아이구야!"

다급히 뛰어온 세 사람을 보며 아르엘라는 미소 지었다.

'뭐야? 재밌는데?'

이걸 이렇게 바로 오해해주나?

아르엘라가 짧은 치마 아랫단을 잡고는 살포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소녀 아르엘라, 인사드리옵니다."

"하이구야."

강용철이 헤벌쭉 웃었다.

곱다 고와.

곰 같은 녀석이, 연애에는 영 재주가 없는 줄 알았더니, 떡 하니 이렇게 예쁜 색시를 데려올 줄이야.

"참말로, 처자가 우리 손주며느리 되시는감?"

아르엘라는 미소 지었다.

그 바바리안의 할아버지구나.

"그저 아버지의 혼령으로 이어진 관계랍니다."

"어어? 누구 아버지?"

"아이언헤드의 아버지이옵니다. 그 앞에서 우리 두 사람은 소중한 것을 나누자 약조하였지요."

"하이구야!"

강용철이 손뼉을 쳤다.

철두 그 무심한 놈이, 아빠 걸고 사랑 맹세까지 했구나!

잘했다. 내 새끼.

254화 오예!

파팟!

익숙한 공간이다.

아이언헤드 성의 개인 포탈존!

벌컥!

급하게 문을 열고 나오니 아이언헤드 성 4층의 영주 집무실이다.

이곳에 머무르는 시간이 가장 많은 친구가 김진태다.

"없어!"

강철두는 마음이 급해졌다.

김진태가 당한 건가?

설마 할배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전사의 정신력에 금이 가는 기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엔 그의 소중한 사람들이 모두 모여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암살자라니!

감히!

철두의 눈에 살기가 차올랐다.

만약 내 친구에게, 내 가족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면 암살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씹어 삼켜주마!

철두는 창문을 밟고 뛰어내렸다.

휘이이익 터억!

황급히 달린 철두는 여신의 사원 앞에 섰다.

여신의 사제들이 철두를 알아보고 인사해왔다.

"어엇? 영주님."

"할배 어딨나!?"

"대사제님은 기도원에 계십니다."

"비켜라."

"어엇."

철두가 냉큼 달려가 사원의 중앙에 있는 기도원을 찾았다.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서니, 휑한 기도원의 모습이 보인다.

"할배! 어딨어?"

강철두의 고함에 기도원 옆에 딸린 작은 집의 문이 열렸다.

"이놈아! 뭘 그리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앉았어!"

"후, 무사하군! 암살자는?"

철두는 반가움과 안도가 뒤섞여 작은 집으로 들어갔다. 대사제 강용철의 주거 공간인 이곳엔 선객이 있었다.

"음?"

"어?"

철두는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등장에 잠깐 얼어붙었다.

"안 그래도 잘 왔다. 여기 엘프 처자 아니었으면 큰일 치를 뻔했다."

"...?"

철두는 의문이 들었다.

"이은영은?"

"크게 다쳤는데, 내가 치료했다."

죽지만 않으면 살려낸다.

대사제 강용철의 신성력은 그 정도로 대단했다.

철두의 의문 어린 시선이 실실 웃고 있는 엘프 아르엘라에게 가서 닿았다.

"네가 암살자를?"

"네."

"네에?"

철두는 깜짝 놀랐다.

반말은 기본이고, 말끝마다 욕을 뱉던 그 성질 고약한 엘프 아르엘라가 맞나?"

"너 아르엘라 아니냐?"

"맞사옵니다."

"맞사옵니다?"

철두는 머리가 어질했다.

이 녀석, 뭐가 달라졌는데?

"너 머리에 문제 있나?"

"아니에요."

"...허어, 문제가 심각하군."

"철두 이놈! 손님한테 무슨 무례냐?"

"어? 그치만 할배. 얘가 원래 이런 애가 아니다."

"어허! 아무리 한 가족이 될 사람이라지만, 아직은 남의 집 귀한 딸이다."

"음?"

철두는 귀를 후비적거렸다.

뭘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무슨 말이냐, 할배?"

"다 들었다. 여기가 우리 손주며느리 아니냐?"

"...!?"

철두는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어 어안이 벙벙했다.

"허! 할배, 대마 같은 것 피웠나?"

쫘악!

강용철이 철두의 굵은 팔뚝을 찰지게 때렸다.

"이놈의 새끼. 할배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하이고, 처자. 우리 집안이 이렇습니다. 못난 모습 보여서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할아버님."

"하이고, 어쩜 이리 말하는 것도 예쁠꼬."

"허어, 할배! 속고 있는 거다."

"니는 쓸데없는 소리 말고 여 앉아라!"

"...."

철두가 인상을 쓰면서도 할배 옆에 앉자, 아르엘라는 슬쩍 미소 지었다.

'할아버지한테 꼼짝도 못 하는군.'

속으로 계속 음흉한 웃음만 났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이는 강철두의 약점을 알아낸 기분이라고 할까?

묘한 승리감이 그녀를 미소 짓게 했다.

"처자는 잠깐 나가보겠는교? 내 손주한테 단단히 일러둘 게 있어갔고."

"네, 저는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편히 말씀 나누세요."

"허허허, 그래요. 내 철두도 바로 보내줄 테니께."

"네에. 할아버님."

아르엘라가 공손히 인사하고 나서자, 철두는 콧방귀를 뀌었다.

"허! 연기가 아주 물이 올랐군."

짜악.

"왜 자꾸 때리나, 할배."

"이놈의 새끼야. 여자친구한테 뭐 그리 종알종알 대 쌌노."

"허! 누가 여자친구라고 그랬나?"

"하이고! 마! 할배한테까지 그래 내숭 떨 필요 없다."

"아니! 내숭은 무슨 내숭!"

"흐흐, 새끼 부끄러워하기는."

"아니!"

"내 다 안다 임마! 내는 네가 속도위반한다 캐도 응원한다."

"아니!"

세 번의 아니시에이팅이 먹혀들지 않았다.

"그래서 묻는기다마는. 아 생긴 거는 아니제?"

"아니다!"

"하이고, 그래도 선은 지키는갑네."

"아니, 그게 아니고!"

탕탕!

철두는 답답함에 가슴을 쳤다.

이게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아니, 그보다.

"암살자는?"

"그거는 네 여자친구하고 그 호위가 다 처리했다."

"허!"

"아무리 여자친구라도 감사 인사는 꼭 해래이. 그 처자 아니었으면 내나 진태도 여 없다."

"...."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은영이 감당 불가능한 암살자가 들이닥쳤고, 아르엘라가 구해준 건 맞는 모양이다.

"후우, 아무튼 할배. 아니다."

"흐흐흐, 아니기는 새끼!"

툭!

다시 철두의 팔뚝을 친 강용철이 히죽 웃었다.

"나가봐라! 내는 그라먼 손주만 바라꼬 있는다."

"허! 아니라니까!"

"돼따마. 처자 기다린다. 얼른 가봐라."

"허, 참!"

바바리안 인생 20년.

강철두는 눈뜨게 코 베이는 기분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느끼는 중이었다.

밖에 나와보니, 아르엘라가 요사한 웃음을 짓고 있다.

"요정놈! 무슨 구라를 친 거냐?"

"헤헤, 거짓말은 무슨. 난 거짓 따위는 말한 적이 없다."

"허! 근데 우리 할배가 왜 저러나?"

"메롱이다. 십새끼."

"이익!"

철두가 나서서 잡으려 했으나, 아르엘라도 한가락 하는지라, 훌쩍 몸을 피해 달아나 버렸다.

"게 서라!"

"꺼져, 병신아."

휘이익!

무림인의 경공과 같은 움직임으로 훌쩍 뛰어가던 아르엘라가 길 중앙에 우뚝 멈춰 섰다.

"잡았다, 이 요정 녀석!"

"아이참!"

"...?"

요정 놈의 혼꾸녕을 위해 따귀를 치려던 강철두는 아르엘라의 반응에 움찔했다.

시발도 아니고, 아이참?

아이참?

"하하하, 보기 좋습니다. 두 분."

"...?"

철두가 돌아보니 대장간 문에 선 장소철이 흐뭇하게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한창 깨를 볶을 때지요. 허허허, 영주님과 사모님의 모습이 이리 좋으니, 곧 영지에 좋은 소식이 있겠습니다. 하하하하!"

"...!"

호탕한 장소철의 웃음소리에 강철두는 탁하니 맥이 빠져 버렸다.

우악스런 팔로 아르엘라가 도망치지 못하게 헤드락을 걸었으나 아르엘라가 뱀처럼 파고들어 와 폭 안기니, 멀리서 보면 두 사람의 모습은 퍽 다정해 보였다.

"야, 요정."

"흐흐, 왜? 멍청한 바바리안."

"왜 장난질이냐?"

"날 죽인 복수다, 이놈아."

"너도 나 한번 죽였잖아?"

"흐흐, 그럼 너도 장난치든가."

"오!"

철두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르엘라를 보았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후후후."

이런 수준 낮은 장난은 초등학생이나 하는 짓이다.

괜히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말로,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어 희열을 느끼는 짓이라니.

'곤란하지 않으면 되지.'

당했다는 생각에 화가 났었지만, 이제는 마음이 편해졌다.

'사람 놀리는 건 내가 한 수 위다.'

강철두의 얼굴에 당황이나 기분 나쁨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모조리 사라졌다.

"후후후."

"왜, 왜 웃냐?"

"후후후."

"뭐, 뭐냐?"

뭐겠냐.

너 열받으라고 그냥 아무 의미 없이 웃는 거지.

"후후후."

"뭐냐니까?"

"알 필요 없다."

곤란하지 않으면 더 이상 장난이 아니다.

나 강철두!

이런 저급한 장난 따위 신경 쓰지 않겠다.

강철두가 영주성으로 향하려다가 칼 소리에 이끌려 발걸음을 옮기니 영지병들이 훈련하는 병영이었다.

챙챙!

그곳에 다다르니, 전에 미궁에서 본 적 있던 엘프와 이은영이 서로 대련하고 있었다.

수준 높은 검술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든 병사들이 한가득인데, 그 가운데 진태도 있었다.

"진태!"

"오! 철두 왔냐?"

김진태는 뭔가 대충 철두에게 대답하곤, 뒤따르는 아르엘라를 보고 알은체를 했다.

"제수씨도 어서 오세요."

아르엘라가 반사적으로 강철두를 봤는데, 그는 곤란해하긴커녕 활짝 웃고 있었다.

"후후후."

"뭐냐고요."

한바탕 욕이라도 쏟고 싶었지만, 사람들이 보고 있기에 일단 아르엘라는 충실하게 연기를 이어갔다.

김진태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배를 문질렀다.

"크으! 네가 먼저 솔로 탈출할 줄이야."

"후후, 별게 다 부럽군."

"...!"

아르엘라는 깜짝 놀라 철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뭐야? 인정하면 어떻게 해?"

철두가 다시 입술을 옮겨 그녀의 귀에 속삭이니.

"후후, 내 마음이다."

"...!"

아르엘라가 다시 철두의 귀를 잡아 끌어와 으르렁거렸다.

"뭐야? 너 구라 까면 정령 친화력 떨어지는 거 몰라?"

"난 구라 따위 까지 않는다."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귓속말을 속삭이자, 대련을 구경하던 병사들의 시선이 점차 둘에게 모였다.

'하, 시발. 존나 부럽다.'

'영주님은 그 바쁜 와중에 언제 연애까지 한 거야?'

'크, 전쟁터에도 사랑은 핀다더니.'

모두의 부러움을 받으며 두 사람이 서로 귓속말로 욕을 주고받는 사이, 대련은 끝나 있었다.

워낙에 실력 차이가 컸기에, 숫제 이은영이 가르침을 받는 입장이었다.

에그니스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 감사를 표한 그녀가 철두에게 다가와 대뜸 무릎 꿇었다.

"소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벌해 주십시오."

"후후, 무사하면 되었다."

"...."

"일어나라."

"예에."

천천히 일어선 이은영은 힐끗 아르엘라를 보곤 강철두에게 직진으로 물었다.

빈말을 안 하기로는 조선제일검 이은영도 유명했다.

"이분이 정말 약혼녀이십니까?"

"후후후, 왜?"

"...."

이은영은 대답할 말이 궁색했다.

그저 여자의 촉이라고 하기에도 그렇고, 그냥 대뜸 의심한다고 하더라도 조금 이상하게 보였다.

"저는 영주님의 친위기사. 장차 부인이 되실 분이라면 제 호위 대상이기도 하니, 그저 사실관계를 확실히 하고 싶을 뿐입니다."

철두는 아르엘라를 보았다.

"너는 내 약혼녀냐?"

"...."

아르엘라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욕은 해도 거짓은 말하지 않는 그녀다.

아니, 마력을 다루는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다.

거짓을 행하면 언행이 가벼워지고, 자연스레 그 언령이 약해지는바. 주문이든, 기운이든, 정령술이든 마력을 쓰고, 의지로 행하는 모든 힘이 약해진다.

철두는 대꾸 없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대로다."

"와아!"

철두의 선언에 병사들이 감탄했으나.

채챙.

언제 뽑아 들었는지, 에그니스가 검을 빼 들어 철두의 목젖에 겨누고 있었다.

"감당 못할 거짓은 입에 담지 마라. 바바리안."

"후후후."

철두는 잔뜩 화가 난 얼굴의 에그니스를 보며 히죽 웃었다.

"거짓? 나는 거짓을 행한 적이 없다."

"장난은 여기까지다. 더 이상 선을 넘지 마라."

"후후, 넘으면?"

"...결투다."

"후후후."

철두는 아르엘라의 어깨를 감싸던 손을 풀었다.

그제야 에그니스도 검을 거두어 납검하는데....

"좋다!"

철두가 선언했다.

"결투다!"

"...?"

에그니스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아르엘라는 깜짝 놀랐다.

255화 선언!

병영의 대연무장.

강철두와 에그니스가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두 사람의 거리는 고작해야 5미터.

누구 하나 한 발짝만 박차고 나서도 닿을 거리다.

"...이해할 수 없다. 바바리안."

"후후, 알이 없는 놈이라 이해력이 딸리는구나."

"...?"

에그니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소통의 팔찌에 문제가 있나?

바바리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의 고차원 조크를 이해하지 못하다니. 너는 이미 패배했다."

"무례함이 도를 넘는군."

"후후후. 덤벼라."

"그전에 묻겠다."

"물어라."

"너는...."

"왈왈."

"...."

에그니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도무지 진중하지 못한 놈이군.

이런 녀석이 감히 공주님을 넘봐?

에그니스는 아르엘라를 흘겨봤는데, 조금의 원망이 담겨 있었다.

그러게 왜 그런 장난을 쳐서는.

이런 녀석에게 틈을 보이신 겁니까?

"감히 넘볼 수 없는 벽을 보여주마."

"후후후."

철두는 히죽 웃었다.

이 진지한 호위 기사의 허세가 무서워서는 아니다.

'기대된다.'

강자와의 대결은 언제나 소중한 경험이다.

불과 몇 시간 전, 무식하게 소드마스터가 떼거리로 덤비는 바람에 묠니르를 사용하고 말았다.

적당히 한 열 명 정도가 덤볐으면 철두도 최대한 그들과 어울려 한바탕했을 것이다.

강자들을 두고도, 제대로 싸워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었는데, 에그니스가 알아서 판을 깔아주니 기꺼울 뿐이다.

"덤벼라. 애송이."

"치잇!"

평정심이야말로 에그니스의 가장 큰 무기 중 하나건만, 강철두를 앞에 두니 그것을 유지하기가 참 어렵다.

어쩌면 지금 이 대결을 지켜보고 있는 공주님 때문일지도.

"차앗!"

에그니스가 더는 참지 못하고 앞으로 뛰쳐나오며 철두의 목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카앙!

"후후, 좋구나."

고수들은 검을 맞대보면 안다.

철두는 결코 가볍지 않은 에그니스의 공격에 기꺼운 마음이 들었다. 반면, 에그니스는 적잖이 당황했다.

'공주님이 질만 하다.'

무한결투장에서 패배했다더니, 과연 공주님보다 몇 수는 더 위의 실력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브론즈에서의 대결.

'나는 골드 티어의 검사다!'

쇄애애액. 카앙, 캉!

쉴 새 없이 검격을 쏟아내 봤으나 강철두는 무리 없이 막아내고 있었다.

"...?"

뭐지?

왜 안정적으로 막아내지?

생긴 건 힘만 믿는 도끼 전사처럼 생겨서는, 검술이 왜 이렇게 세련됐지?

뭐야, 이 완숙함은?

감히 나 골드 티어의 검사의 검을 막아?

브론즈 따리가?

쇄애액, 카아앙, 후우우웅, 까앙!

점점 눈으로 좇기도 어려운 검격에 구경꾼들만 신이 났다.

"이야, 저 양반도 실력이 대단하네."

"영주님 상대로 잘 버티네."

"이야, 저 귀 큰 양반, 그 암살자 놈들 샥샥 썰어 재낄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예사 솜씨가 아냐."

"허어, 이거 너무 수준 높아서 배울 게 없네."

"배우기는. 난 눈에 뵈는 것도 없다. 너무 휙휙인데."

병사들은 그 누구 하나 강철두가 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강철두는 이미 승리의 공식이자, 무패의 상징이었다.

오직 단 한 명.

두 사람의 진짜 실력을 알고 있는 아르엘라만이 초조하게 결투를 지켜봤다.

'에그니스가 밀려?'

아르엘라는 표정 관리를 하기가 어려웠다.

에그니스의 실력은 진짜다.

아이리스 후작령 최강의 검사.

아니, 요정족 최강의 무신이 그다.

아르엘라와 에그니스는 아이리스 기사단장과 기사단원의 신분이지만, 그 실력은 정반대.

애시당초 기사단장은 그녀의 진짜 신분을 감추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50명으로 이뤄진 아이리스 기사단의 존재 이유는 공주님의 호위.

기사단은 기사단장 아르엘라를 보호하기 위해 탄생했고, 그것만을 위해 기능한다.

그렇기에 직책 따위는 무의미.

평단원인 에그니스가 최강의 검사인 이유였다.

그런 그를 이겨내면, 사실상 요정족을 꺾는 것이나 다름없다.

까앙, 까앙!

"이, 이노옴!"

언제나 냉철하며, 무표정하고, 평온한 얼굴의 에그니스의 얼굴에 당황이 번졌다.

"후후, 후달리냐?"

"후우, 나 골드 티어의 검사를 상대로 제법이구나."

"골드?"

"브론즈인 너에게는 까마득히 높은 수준의 리그가 존재한다."

"...?"

"브론즈에서 1순위에 올랐다고 전부가 아니다. 그것은 다시 시작일 뿐이니, 그 윗 등급의 실버 리그가 있다."

"오!"

"후, 그 지옥의 구간을 넘은 자들이 도달하는 최강의 리그가 골드!"

"...후후."

철두는 히죽 웃었다.

"골드 별거 아니네."

"...후회하게 해주마."

"후후, 골부심은."

철두가 김진태를 흘깃 봤다.

그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이마를 짚고 있었는데, 에그니스 대신 부끄러워하는 중이었다.

"진짜를 보여주마."

"보여줘 봐라."

에그니스는 검에 검기를 덧씌웠다.

츠즈즈즛.

"후후, 마력 싸움이냐?"

츠츠측!

철두도 검기를 피워올렸다.

신체 재구성을 통해 단전이라는 기관이 생기면, 마력이 이 기관을 통해 기로 치환된다.

이 기운을 검에 흘리는 것이 검기.

"브론즈다운 발상이군."

"...?"

골드 부심이 도를 넘는군.

철두가 먼저 선공하려는데, 상대의 검이 더욱 커졌다.

츠아아앙!

"...!"

검이 길어졌다.

아니, 기운이 더욱 길어졌다.

"허!"

본적이 있다.

발베르 조르.

제국의 후작위를 제안받았다는 그 방랑 기사의 검이 저 수준이었다.

탈피의 전 단계!

위대한 검.

레벨 5. 초인을 넘어,

레벨 6. 위대한 경지.

"이것이 검강이다."

"...."

철두는 그저 그것을 가만히 보았다.

발베르 조르와 싸울 때는 불확실성에 기대기 싫어 바로 묠니르를 썼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그때의 철두에 비해 지금의 철두는 또 성장한바.

"그거 어떻게 하는 거냐?"

"흐으, 안 가르쳐 준다."

"치사한 놈이군."

강철두는 속으로 웃었다.

안 가르쳐 준다지만, 충분히 대답이 되었다.

'영약을 많이 섭취하는 것 말고도 방법이 있군.'

발베르 조르는 탈피 직전에 가서야 저 검을 얻었다.

위대한 검.

다 같은 검이 아니다.

발베르 조르와 에그니스의 검이 그 생김새가 조금 다르니, 구현방식도 다르지 않을까 싶어 물어봤는데 그 해답을 들었다.

'다른 방법이 있다.'

영약을 통한 약빨이 아닌, '기술'의 영역이리라.

기술에 있어 철두보다 배움이 빠른 이는 없다.

슈아아악, 카앙!

그냥 검과 검기가 부딪히면, 마치 무를 썰어내듯 검을 동강 내버리는 것이 검기다.

검강과 검기가 그 정도의 차이일까 싶어, 첫 일격을 맞대며 조금 긴장했는데 다행히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철두의 손에 들린 명검 '새벽어스름'은 멀쩡했고, 다만 뭉텅 빠져나간 마력을 유추해보건대.

'교환비가 나쁘군.'

저것은 더욱 정제된 기운이다.

검기가 검에 불을 바른 것처럼 기운이 흘러넘친다면, 저것은 단단히 뭉친 돌과 같다.

쇄애액, 꾸웅! 꽈아앙!

두 검이 서로 맞부딪힐 때마다 천지가 진동하는 소음을 냈다. 얼마나 시끄러웠는지, 사달이 나는 줄 알고 강용철이 깜짝 놀라 병영을 찾을 정도였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실전 대련에 대사제 강용철이 있고 없고는 큰 의미가 있는바.

'이번엔 절대 묠니르를 꺼내지 않는다.'

성장할 기회가 있는데, 굳이 마다할 멍청이가 어딨을꼬?

"훗, 슬슬 힘이 달리는가 보지?"

"후후, 거뜬하다."

"훗, 허세는."

에르미스는 더욱 몰아쳤고, 강철두는 신중히 그 검을 받아냈다.

'기의 흐름이 다르다.'

철두는 돌을 생각하며 불같은 검기를 뭉치려 해봤다.

콰앙!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시도했다.

주고받는 검에도 일정한 패턴과 흐름이 있어, 철두의 몸은 뇌의 명령 없이도 그 흐름에 몸을 맡겨 자유로이 움직였다.

아슬아슬하게 에그니스의 공격을 피해내며, 온전히 기운의 움직임에만 관찰하니....

'다르다!'

방금 단전에서 발출된 기운이 조금 성질이 변한 것 같기도 한데.

꾸앙!

맞네. 방금 검기가 앞으로 삐죽 1센치는 커진 것 같았는데.

'좀 더.'

검에 집중한다.

쾅, 콰아앙!

두 검이 서로 몸을 맞대며 폭발하는 반발력에서 흐름을 읽으려 애썼다. 기운의 움직임에 모든 신경을 집중한다.

'오!'

이거 될 것 같은데?

철두는 놀랍도록 집중했고, 무아지경에 빠졌다.

당황한 것은 에그니스였다.

"무, 무슨."

길어지고 있다.

상대의 검이.

검기가.

"마, 말도 안 돼!"

자신이 어떻게 이 경지에 올랐는데?

엘프보다 더 수명이 길다는 하이엘프.

무려 500년을 수련한 요정족 최강의 검사.

골드 티어의 불세출의 기사.

'나, 에그니스의 검술이....'

고작 20년 산 바바리안이 어깨너머로 보고 훔쳐 배울 수준이란 말인가?

츠아아아앙!

철두의 검이 커졌다.

<당신의 검술이 위대한 경지에 이릅니다.>

<검 숙련이 레벨 6이 되었습니다.>

무아지경의 철두가 눈떴다.

아니, 아까부터 눈은 뜨고 있었으니....

그래, 이것은 새로운 경지에 눈을 뜬 것이다.

"후후후."

꾸앙! 쾅!

"크윽!"

단 세 합.

"...."

에그니스의 신형이 멈췄다.

서서 죽었나 싶을 정도로 미동도 하지 않는 그의 시선은 두 동강 나버린 검에 가 있었다.

"...."

부러진 검을 쥐고 어찌 검사를 자청할까....

분하다.

브론즈따리에게.

"후후후."

녀석의 웃음소리에 깨어난다.

"아!"

진짜 졌구나.

에그니스는 허망한 얼굴로 부러진 검을 내렸다.

"...."

공주님을 바라보니, 경악한 얼굴로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서 있다.

다시 강철두를 바라보니 그는 그저 웃고 있다.

"...나의 패배다."

"후후후, 멋진 가르침이었다."

가르친 것이 없으나, 그는 훌륭히 배워버렸다.

에그니스는 피식 웃음이 나고 말았다.

정말이지 재능 하나는 타고난 놈이 아닐 수 없다.

좋아, 인정하지.

요정족 최강의 검사인 내가.

대 골드 티어 검사인 내가.

'장난으로 시작하였으나, 이미 인연이 얽혔으니 차라리 잘되었다.'

어쩌면 강철두라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요정족의 오랜 숙원이....

그리되면 공주님의 배필로 손색이 없으니.

"음? 왜 날 그렇게 보나?"

"...."

에그니스는 그저 처연한 미소를 짓곤, 아르엘라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에, 에그니스."

"...공주님. 드디어 제 소명이 다했습니다."

"...!"

"좋은 배필을 만났으니, 다행입니다."

"어?"

에그니스는 황망해하는 아르엘라를 두곤 강철두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공주님을 부탁한다."

"후후후, 알겠다."

뭐, 어차피 이제 같이 다닐 건데.

움직이는 전화기 에르미스에 이어, 정령 교환 대기의 요정 하나 더 붙는 게 뭐가 대수겠는가.

"좋다.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하마."

그의 눈은 더없이 슬펐으나, 또한 애틋하기도 했다.

"...?"

"...?"

아르엘라와 강철두의 시선이 마주쳤다.

"두 사람의 약혼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오! 이는 나의 목숨과 검을 걸고 보증하오!"

"...!"

"...!"

여태 구라를 친 사람은 없었다.

선을 넘은 사람은 있었으니.

그는 알이 없는 자.

256화 시작점

영주성 옥상.

본래 초소에서 경계를 서던 영지병들도 자리를 비워, 지금 옥상엔 강철두와 아르엘라 둘뿐이었다.

"조졌다."

"후후, 뭐가?"

"아니, 그렇게 선언해버리면 어떻게 해!"

"뭐가 문제냐?"

"하, 괜히 시작했어...."

실없는 장난이 크게 번졌다.

그리고 에그니스는 그것을 사실인 양 선언해버렸다.

이제, 이것이 거짓이 되면 에그니스는 거짓말쟁이가 된다.

아예 검에 대고 맹세까지 해버렸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단순한 거짓말 정도라면 언령이 약해지는 정도로 끝나겠지만, 이제는 정말 모든 걸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장난인 걸 뻔히 알면서도 대체 왜...?'

에그니스의 의도를 알 길이 없다.

"후후, 뭐 어떠냐?"

"웃음이 나오냐? 시발넘아."

가장 아끼는 기사가 힘을 잃게 생겼는데.

"괜찮다."

"뭐가?"

"이왕 이렇게 된 거, 내 아기를 낳아라."

"...."

아르엘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철두가 그녀를 보니, 얼굴이 시뻘게진 그녀가 빽 소리 질렀다.

"이 시벌넘이! 돌았나? 미친 거 아니야?"

"후후, 당돌하긴."

"허, 미친 새끼야. 장난도 적당히 쳐야지."

"난 괜찮다."

어차피 결혼은 해야 하고 후손도 봐야 한다.

이왕이면 튼튼한 아기를 낳기 위해 튼튼한 여자가 좋다. 아르엘라 정도의 전사면 충분히 자격이 있다.

무엇보다 아버지에게서 직접 사사한 제자가 아닌가?

"내가 안 괜찮아!"

"후후후, 그런 건 상관없다."

"아니, 뭐 이런 미친 새끼가 다 있어?"

"내가 결정했으니 그만이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어떤 미친놈이 그렇게 결혼하냐!"

"많은 부족에서 그리 결혼한다."

"하, 시발. 이 새끼 바바리안이었지."

아르엘라는 새삼 강철두의 종족을 떠올렸다.

바바리안은 약탈의 부족.

부족의 전사들이 재물과 여자를 약탈해와 자신의 부인으로 삼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다.

로맨스 없는 종족 번식이 너무 당연한 종족이니....

"하아, 더 듣다간 한 대 칠 것 같으니까 그냥 입 다물어라."

"후후, 맞지 않는다."

"...."

"그렇지만 나는 지구의 교육을 받은 고졸 바바리안."

"그게 뭐?"

"기다려 주지."

"뭐, 뭐를?"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

"허!"

"때가 되면 내 아이를 낳아라."

쫘악!

아르엘라는 참지 못하고 강철두의 뺨을 후려쳤으나, 어찌된 것이 아르엘라의 손바닥이 더 아팠다. 이 정도면 뺨으로 손바닥을 친 수준이다.

"이익! 미친놈아! 그 아기 소리 좀 하지 마!"

"후후후. 성은 부끄러운 게 아니다."

파악, 팍!

철두의 팔뚝을 때려봤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웃을 따름이었는데, 아르엘라는 그 웃음이 소름 돋을 뿐이었다.

"시발, 따라오지 마."

"나 고졸 바바리안은 강제로 아기를 만들지 않는다."

"아니, 시발! 좀 닥치라고!"

얼굴이 시뻘게진 아르엘라는 씩씩거리며 옥상을 내려가려다가, 아이언헤드에 온 목적을 떠올리곤 다시 돌아와 퉁명스레 물었다.

"하아, 개소리하지 말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나 말해봐."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나?"

파악!

정강이를 걷어찼으나 철두는 얄밉게 다리를 들어 정강이끼리 부딪쳤다.

"아오! 썅! 계획 말야! 계획! 난 무조건 정령사가 되어야 한단 말이야! 우리 주술사 안 볼 거야?"

"후후, 아직 계획은 없다."

"이씨!"

화를 내 봐야 무엇할까?

이 능글맞은 바바리안은 화를 내며 낼수록 오히려 더 흥을 낸다.

"정령이나 불러봐."

"후후."

"아, 얼른!"

재밌다.

욕쟁이 요정 녀석.

놀리는 맛이 있다.

"나와라."

철두의 곁에 네 정령이 나타났다.

불, 물, 바람, 땅 속성의 정령 친구들.

"와!"

아르엘라는 네 정령을 보며 감탄사를 터트렸는데, 정령들은 소환되자마자 철두의 몸 뒤로 쏙 하고 숨어버렸다.

"왜들 이러냐?"

"...다들 그래."

"음?"

"정령들은 날 싫어해."

아르엘라의 얼굴에 깊은 그늘이 생겼다.

"후, 어릴 때부터 그랬어.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어."

아이리스 후작령은 엘프들의 자치령과 비슷한 영지이다. 엘프 정령사들 또한 넘쳐나는데, 하이엘프쯤 되면 적어도 하나 이상의 정령과 계약을 맺는 게 일반적이었다.

정령을 바라보는 아르엘라의 시선엔 부러움이 가득했다.

"너처럼 정령 넷을 한꺼번에 계약한 건 처음 봐."

"계약이 아니다."

"뭐?"

"내가 세상을 인지한 순간부터 함께해오던 녀석들이다."

"...."

아르엘라의 얼굴에 더욱더 부러움이 차올랐다.

"너는 정말 축복받았구나."

"후후, 맞다. '요정의 가호'다. 특성으로도 등록되어있지."

"난 '선조의 비호'야. 특성이지."

"그것도 처음부터 있었나?"

"맞아. 이것 때문인지 정령들은 모두 날 두려워하며 기피했어."

"흐음. 그래도 난 네가 부럽군."

철두에게 선조의 비호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지금쯤 그는 진정한 바바리안 전사로 거듭났겠지.

"우리 부족은 15살쯤이 되면 성인식을 치른다. 선조께 제사를 지내고, 강한 전사의 혼을 받으면 한 명의 전사로 대우받지. 그때부터가 어른인 셈이다."

"그럼 난 15년 전부터 어른이었겠네."

"...."

"그때 스승님이 내게 오셨으니까."

"너 몇 살이냐?"

"115살."

"...."

철두의 얼굴이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노산이군."

빠악!

"아니거든! 요정 나이로는 이제 갓 어른이 되었을 뿐이야!"

"그럼 피가 섞이면 오래 사는 전사를 낳을 수 있겠군."

"하아, 말을 말자."

아르엘라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이 특성이 문제야."

'선조의 비호'도 '요정의 가호'도 모두 노바에 입성하고부터 특성으로 인식되었다. 사실, 그전까지는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철두도, 아르엘라도 발할라에 있었을 당시에는 그저 저주인 줄 알았다.

강철두는 저주에 씌었다 하여, 부족에게 가족이 버림당했고.

아르엘라는 알 수 없는 저주 때문에 정령들이 자신을 기피하는 삶을 살았다.

"정말 운명이 뒤바뀐 것만 같군."

"내 말이 그 말이야. 서로 이 특성만 바뀌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어?"

"그럼 부모님이 돌아가실 일도 없었을 텐데."

"어? 야아."

아르엘라가 순간 말문을 잃었다.

"나, 난 100년이나 정령이 없었어."

"부모님은?"

"어?"

"부모님은 계신가?"

"없어."

"죽었나?"

아르엘라가 슬쩍 강철두를 보았다.

그 표정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긴가민가할 정도였다.

아르엘라도 이제는 이 솔직하고 무심한 바바리안을 조금은 이해하고 있어, 사심 없이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임을 알고 있다.

"돌아가셨어."

"언제?"

"날 낳으실 때."

"오!"

철두는 이것이 무언가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혹시 그때 뭔가 하신 게 아닐까?"

"뭐?"

"너와 나의 운명이 바뀐 것에 대해서 말이다."

분명 두 사람이 가진 특성을 생각하면 주인을 잘못 찾아간 게 맞았다.

하지만 아르엘라는 부모님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무언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부모님과는 별개일 수도 있어. 어쩌면 애초에 우리 둘의 운명이 바뀐 게 아닐 수도 있고."

"그럼 같이 다닐 이유도 없다."

"...."

먼저 제안한 것은 아르엘라다.

그녀는 두 사람의 운명이 바뀌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후, 그래. 맞아. 내가 경솔했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생각해보자."

"나도 최선을 다해보지."

"오늘은 이만하자. 난 조금 쉬어야겠어."

"그렇게 해라."

아르엘라는 먼저 일어섰다.

옥상을 내려와 영주의 공간인 4층을 지나, 3층으로 향했다.

3층은 본디 영주의 직계가족들이 머무르는 공간인데, 이미 영주의 약혼녀 대접을 받으며 방 하나를 차지한 그녀다.

털썩.

침대에 몸을 던지듯 누운 아르엘라는 눈을 감았다.

"하아."

깊은 한숨이 절로 뱉어졌다.

정말 부모님이 연관되어 있었을까?

난 부모님마저 잡아먹어 버린 괴물인 걸까?

아르엘라는 괴로운 마음에 머리가 어질어질해질 지경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부정적인 상념에서 그녀를 깨워냈다.

"후우, 들어와."

"벌써 주무시는 겁니까?"

"아니, 그냥 쉬는 거야."

방 안으로 들어오는 에그니스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병신같이 왜 그런 거야?"

"무슨 말씀입니까?"

"선언 말야!"

"공주님께서 먼저 시작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나는 장난이었고!"

"저는 진심입니다."

"멍청아! 이 약혼이 파투 나면 넌 힘을 잃게 될 거야!"

"약혼이 성사되면 되지 않습니까?"

"이익! 돌았어?"

아르엘라를 보며 에그니스가 그답지 않게 슬쩍 미소를 지었다.

"공주님도 슬슬 배필을 알아보셔야지요."

"흥! 그렇다고 요정도 아닌 바바리안과 결혼이라니!"

"4대 정령을 다루는 바바리안이지요."

"...."

에그니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지금의 요정족에겐 나쁘지 않은 기회입니다."

"시발, 지금 공주인 나를 희생시키겠다는 거야?"

"공주님에게도, 종족에게도 좋은 힘이 될 것입니다."

"하!"

기가 찬 아르엘라가 손을 휘이 저었다.

"나가봐."

"후후, 그러죠."

"그렇게 웃지 마, 새끼야!"

"부군이 될 분의 영지입니다. 이제는 정말 말을 조심히 하실 때가 되었습니다."

퍼억!

"나가!"

"쉬십시오. 공주님."

베개에 얻어맞은 에그니스가 나가자 아르엘라는 한동안 부들부들 떨었다.

온 세상이 자신을 놀리는 것만 같았다.

*

날이 밝았다.

'돌아가야겠는데.'

말도 없이 훌쩍 왔으니, 지금쯤 에르미스가 길길이 날뛰고 있을 것이다.

"진태야."

"어, 왜?"

"문경 성, 어떻게 할까?"

"뭘?"

"성주는 나지만, 성을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다."

"흐음."

김진태가 턱을 쓰다듬었다.

"잠깐만, 지도 좀 보고."

김진태는 홀로그램 맵을 띄워놓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이언헤드의 영토가 훅하고 확장되어 있었다.

보유영토 목록에도 성과 마을이 한가득이다.

"많이도 뺏었다."

"후후후."

"어디까지 뺏을 거냐?"

"그냥 신서울하고 길만 이으려고 했을 뿐이다. 이제 안 뺏는다."

"흐음."

북쪽의 신서울(N4220)부터 일산 성(N352), 문경 성(N352), 벨로타마을(N344), 아이언헤드 성(N6140), 한양(N6140)으로 이어지는 방대한 영토가 만들어졌다.

"여기 하늘산 아래 벨로타 마을을 조금 더 키우고, 도로 건설부터 하자."

"후후, 그런 건 알아서 해라. 지금 급한 건 문경 성의 관리자다."

"흐음, 포멜 행정관이 적당할 것 같은데."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은 선택이군."

"근데 군사령관의 직책까지 생각하면 준필이 아저씨 불러올리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철두는 고개를 저었다.

"군은 걱정 마라. 1초면 내가 두 성을 오갈 수 있다."

"그럼 통신망만 연결되면 방어는 문제없겠네."

김진태의 머리가 바삐 돌아갔다.

이미 얻어낸 영지니, 이것을 관리하는 것은 김진태의 역할.

하지만 아이언헤드 가문의 시종장으로서는 그 한계가 명확했다.

"철두야."

"왜?"

"때가 됐다."

"...?"

"개국하자."

"후후, 알겠다."

철두도 흔쾌히 받아들이자 김진태가 의외의 얼굴을 했다.

"오! 반대 안 하냐?"

"왜 반대하냐?"

"어? 사극 보면 다 반대하잖아?"

꼭 왕이 되는 사람들은 저 스스로 권력욕을 부리지 않는다. 부하들이 나서서 왕으로 추대하는 그림을 만들어내지.

"후후후. 난 그런 하남자가 아니다."

"하하, 알았어. 개국은 어떻게 하지?"

"그건 내가 알아보마. 일단 포멜부터 문경 성으로 보내라."

"알았어."

"그럼 난 문경 성으로 돌아간다. 전쟁은 마치고 와야지."

"알겠어. 아미르 왕국 너무 털어먹지 마."

"후후, 함부로 까불지만 못하게 만들고 오겠다."

철두가 히죽 웃었고, 김진태도 마주 웃었다.

257화 끝을 향해

"핵심은 문경 성이네."

김진태는 남북으로 쭉 이어진 영토의 허리 부분을 차지한 문경 성을 짚어냈다.

"여기가 중심이야."

"중심은 아이언헤드다."

"당연히 수도는 거기지. 하지만 문경 성을 중심으로 방비가 튼튼해야 뭐라도 되겠어."

"내가 왔다 갔다 하면 되니 괜찮다."

김진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지의 전력은 대부분 강철두에게서 나온다.

성물을 얻고 나서부터는 거의 대부분의 힘이 강철두 개인의 힘이라 해도 좋았다.

그런 강철두가 단 몇 초 만에 아이언헤드와 문경 두 성을 오갈 기동력을 갖췄다.

"통신망만 완성되면 사실 큰 문제는 없겠다."

"오! 그때 말한 통신선 말인가?"

"흐흐, 아니. 무선으로 될 거 같아."

"주파수가 없다며?"

"대신 마나가 있잖아."

노바의 물리법칙은 지구와 다른 것이 많아 과학자들과 연구자들이 꽤 애를 먹었는데, 마나도 그중 하나다.

마나라는 이름의 이 매개 물질은 마법이라는 근사한 결과를 가져오는데, 지구의 과학자들과 마법사들을 연구소라는 시설 안에 모아두니 그럴듯한 결과물이 나왔다.

"그 추적 마법인가 하고, 확산 마법인가? 그걸 쓰면 뭐, 아무튼 소리까진 힘들지만 신호 몇 가지는 가능한가 봐."

마법사들은 그것으로 무슨 통신이 되냐며 회의적인 시선을 보였지만, 지구의 과학자들은 쾌재를 불렀다.

있다, 없다.

혹은 0과 1. 단 두 가지 신호로 눈부신 발전을 이뤄낸 지구 인류다.

"들어보니까 대충 위기 신호나, 긴급 지원 같은 것만 띄워도 충분할 것 같아. 봉화 같은 거지."

"그럼 내가 바로 순간이동해 가면 되겠군."

"그렇지!"

봉화보다 더 정확하고, 빠르다.

"일정 거리마다 마력 중계기만 설치하면 될 것 같아."

"후후, 역시 진태야."

영지 발전 게임은 역시 김진태.

마법 과학을 버무려 연구소를 돌리더니, 이제 마공학 시대를 열려 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철기시대도 끝을 내는 기분이었다.

"흐흐, 뭐 얼떨결에 영토가 늘긴 했는데, 차라리 잘됐어. 생산인구도 받쳐 주겠다. 아예 중장기 사업을 해보려고."

"중장기 사업? 어떤 거?"

"뭐긴 뭐야. 토목이랑 인프라지."

"결국 도로군."

"에헤이. 그건 이미 하고 있잖아. 기찻길 깔아야지."

철두가 깜짝 놀랐다.

"오! 드디어 기차까지 만든 건가?"

"아니, 이제 만들어야지."

"...?"

철두가 의아해하는데 김진태는 당당하게 말했다.

"연구소에 말해놨어."

"...그럼 만들어지는 거냐?"

"당연하지! 들어보니까 마력 엔진만 구현하면 될 것 같아."

"오! 나머지는 이미 만들어진 건가?"

"아니, 만들고 있겠지."

"...."

지나치게 당당한 김진태의 태도에는 모두 근거가 있었다.

"이번에 연구원 모집하니까 구름떼처럼 몰려들더라."

"...어디서?"

"어디긴, 한양이지."

신서울과 한양은 모두 대한민국에서 전략적으로 개척하던 노바의 식민지다.

신서울에 연구자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긴 하지만, 한양이라고 해서 그 수가 적은 것은 아니었다.

도시를 처음 건설하고, 땅을 개간하며 식량 자립을 이루는 것이 먼저였기에 농사와 가축, 건축, 토목 등의 연구자들의 비중이 클 뿐.

미리 연구를 위해 노바에 발을 디딘 공학자들도 그 수가 많았다.

"아무튼 지금 만들고 있어. 조만간 나올 거야."

"...그래. 그건 알아서 해라."

철두는 미심쩍었으나 이런 분야는 김진태가 전문이기에 믿고 맡겼다.

"나는 아미르 녀석들이 다시는 까불지 못하게 마무리 짓고 오겠다."

"그래, 그것만 마무리 짓고 제대로 개국하자! 도시 하나였을 때는 상관없지만, 이제 진짜 체계가 있어야 해."

"후후, 알겠다."

강철두는 문경 성으로 한달음에 순간이동해버렸고.

그날 점심 무렵 아르엘라는 강철두가 사라진 것을 알아채곤 에그니스를 재촉했다.

"에그니스! 따라가자!"

"공주님."

"어, 왜?"

"공주님의 목적은 아이언헤드의 곁에 있는 것입니까? 정령을 얻을 방법을 찾는 것입니까?"

"당연히 정령이지!"

아르엘라는 하루빨리 바바리안이 어떻게 정령과 계약하게 되었는지 연유를 알고 싶었다.

"조급함을 달래시지요."

"안 조급하게 생겼어? 바바리안 아니랄까 봐 전쟁에 미쳐있잖아? 전쟁이 몇 년이나 이어질 줄 알고?"

"그렇게 길어지진 않을 겁니다."

강철두와 검을 부딪쳐본 에그니스다.

그의 재능을 눈으로 몸으로 확인한 그다.

전투와 몸놀림에 있어서 강철두의 집중력과 관찰력은 범인의 기준을 아득히 초월한다.

적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고, 빠르게 훔쳐 배울 수 있다.

그는 싸우면 싸울수록 더 강해지는 자다.

"왕국은 얼마 버티지 못할 겁니다."

정복 전쟁이 아닌, 그저 힘의 우위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전쟁은 종결 수순으로 흐르리라.

"하아, 빨리 주술사한테 보여야 하는데."

"...."

"뭐, 왜 그렇게 봐?"

"마음의 결정은 내리셨습니까?"

"...."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했다.

아르엘라는 눈에 쌍심지를 켜곤 에그니스를 노려봤다.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저보다 더 훌륭하게 공주님을 지켜줄 자니까요."

"너 정도면 충분해."

"저는 요정족의 가디언.... 종족과 공주님을 두고 고르지 못합니다."

"...."

하지만 강철두라면 그리할 수 있다.

"하아...."

깊은 한숨을 뱉어낸 아르엘라의 얼굴에 굳은 결심이 섰다.

"어차피 희생은 내 숙명이야. 차라리 잘 됐어. 요정족의 미래를 위해 부군의 자리마저 이용해야 한다면 그리하겠어."

엘프의 수명은 길고, 바바리안의 수명은 짧은바.

결혼생활이 길진 않겠지.

아이를 낳아 주는 건....

"...."

괜히 볼이 발그레해진 아르엘라를 보며 에그니스가 흐뭇하게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신 겁니까?"

"새, 생각은 무슨 생각!"

"후훗."

"그, 그럼 우리가 전쟁이나 돕자!"

"여기 있는 게 돕는 겁니다."

"뭐?"

"누군가는 여기를 지켜내야 하고, 그것이 공주님과 저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

실제로 전례가 있다.

무려 소드마스터 넷이 암살자로 넘어왔고, 에그니스가 없었다면 아이언헤드 성에서는 대학살이 일어났을 터다.

"아니면 벌써 약혼자가 보고 싶어서 그러시는 겁니까?"

"뭐? 시발. 참내!"

"어디 가십니까?"

"남이사!"

아르엘라가 훌쩍 떠나버렸고, 에그니스는 흐뭇하게 웃다가 차츰 미소가 사라졌다. 웃지 않는 그의 눈빛에 남은 것은 측은함뿐이었다.

'그가 가혹한 운명을 지려는 당신을 구원해주길....'

그 적임자가 자신은 아닌 모양이다.

더없이 가볍고 유쾌하지만 비범한 그 바바리안이 해내 주길 바랐다.

진심으로.

*

문경 성은 본디 변경백 더스트 후작의 본거지 성이라 그 규모나 시설이 압도적이었다.

탕아후루는 문경 성을 장악하라는 명령을 받고, 일산에서처럼 주민들을 분류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떠날 자와 남을 자.

"막지 않겠다! 떠날 자들은 가산을 정리해 떠나라!"

"아이언헤드령에 속할 주민들만 남고 모두 떠나라!"

기회를 주었다.

국가를 선택할 기회.

"대장, 이거 의미가 있습니까?"

"무슨 의미?"

"점령하면 따르는 거지, 굳이 보내줘야 합니까?"

"나 탕아후루. 영주님의 명을 따를 뿐이다."

탕아후루도 아미르 왕국 출신.

지금 하는 일이 정확히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모른다.

봉건제를 살아온 이들에게 왕국은 너무 먼 깃발이다.

제국보다 왕국이, 그보다 제후가, 그 아래 영주, 도시, 마을이....

위로 갈수록 소속감은 옅어지고, 아래로 갈수록 그 결속은 더 단단해진다.

"부자들은 죄다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은?"

"도시에 기반이 있는 이들이야 어디 갈 데가 있겠습니까?"

"맞습니다. 다른 영지로 가봐야 부랑민 취급만 받을 텐데요."

다른 도시나 마을에 정착하는 것도 돈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경 성의 평민들은 애초에 큰 선택지가 없었다.

"영주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계속 선전해라!"

"네!"

탕아대는 문경 성의 주민들을 모두 내쫓을 기세로 선전을 이어갔고, 점점 이탈이 가속된다 싶더니 어느 순간이 되자 더는 떠나는 자가 없었다.

그들은 떠나지 못한 것이지만,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 되기도 했다.

앞으로 아이언헤드령의 주민이 되기로 한 자들 앞에 그 주인이 될 자가 다시 나타났다.

"충신! 탕아후루! 영주님의 명령을 완수했나이다."

"몇이나 떠났나?"

"1할 정도의 주민이 떠났습니다."

"잘했다."

철두가 문경 성에 다시 돌아왔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온 것은 탕아후루고, 2등이 에르미스다.

"허! 아이언헤드! 말도 없이 그리 가버리는 게 어딨는가?"

"후후, 잠깐이었다."

"하루지 않은가! 무려 하루 만에 돌아왔어! 그 사이 국왕의 요청이 있었다면 어찌할 뻔하였나?"

"후, 집착하긴."

"아닛! 이건 집착이 아니라 내 임무일세!"

"아, 쫑알거리지 마라."

"아니!"

철두는 에르미스의 잔소리를 무시하고 명했다.

"부대장들을 모두 소집해라."

"네, 영주님!"

즉시 전령이 내달렸고, 곧 영주의 저택에 부대장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제임스, 최준섭, 오준환, 구정욱, 탕아후루.

"탕후루는 남아서 문경 성을 지킨다."

"신! 탕아후루 명을 받듭니다!"

"제임스, 준섭이, 준환이는 주변 마을들 점령한다."

"어디까지로 하면 되옵니까?"

철두가 홀로그램 맵을 열었다.

신서울 일산, 문경, 벨로타, 아이언헤드 성으로 이어지는 라인.

"여길 따라 도로와 기찻길이 놓인다."

"오오!"

기차란 소리에 지구 출신 대장들의 눈에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오직 탕아후루만이 의미를 몰라 멀뚱히 있을 뿐이었다.

"이제 영지 전체가 그리 멀지 않은 생활권이 되겠군요!"

"물자 이동이 이제 쉽겠습니다."

"이야! 기차여행도 가능하겠네요."

들뜬 대장들을 진정시킨 철두가 명을 이었다.

"여기 N352의 서쪽 절반은 우리 영역이다. 특히 여기 철광석 광산은 반드시 접수해라."

"네 영주님!"

철두는 아직 호명되지 않은 공격대 구정욱을 보았다.

"너는 나랑 간다."

"네! 어디든 따르겠습니다."

동경해마지않는 영주 강철두와 함께하는 출진이다. 구정욱이 들뜬 얼굴로 물었다.

"어디로 진격하면 되겠습니까?"

"우린 왕성으로 간다."

"흐흐흐! 언제까지 출진 준비를 하면 되겠습니까?"

구정욱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누가 봐도 여기가 주공이고, 나머지는 그저 점령지 안정화에 기여하는 정도다.

기쁠 수밖에.

"지금 당장."

"흐흐,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구정욱이 나서고,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놈은 특성석을 잘못 먹더니 성격이 급진적이고 인내심이 적어져, 꼭 사고를 칠 놈이다.

점령지를 안정화하는 임무보다는 파괴하고 약탈하는 공격으로 쓰는 게 낫다.

"당분간 더 이상의 영토 확장은 없다. 국경 밖은 알아서 약탈하도록."

"하하, 네 알겠습니다!"

철두는 모든 명령을 내린 뒤, 그도 나섰다.

목적지는 아미르 왕궁.

이 전쟁을 끝맺음할 때다.

258화 흥정의 기본

아미르 왕국 역사 150년.

건국 이래 가장 큰 국난을 맞아, 투헬 재상을 비롯해 왕국을 이끌어가는 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해서, 적의 진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수는 기병대 200여 기 이상, 선두에서는 문제의 그 아이언헤드가 병력을 이끌고 있습니다."

"...."

전력 분석관의 보고에도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무거운 침묵만을 유지했다.

실상 이것은 작전 회의라고 부를 수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대책 회의일 것이나, 대책이 없으니 다들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다들 벙어리요?"

"...."

무거운 분위기 속에 다울 3세의 음성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질책이 담긴 소리에도 누구 하나 말문을 열지 못했다.

모두가 곁눈질로 눈치를 주니, 신하들의 대표 격인 투헬 공작이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전하."

"말하시오. 재상."

"제국에서 도착한 비답에서... 제국이 이 전쟁에 끼어들기를 꺼려하니 싸움은 피해야 하옵니다."

아미르 왕국은 제국의 동맹국인바.

소드마스터들이 몰살당한 끔찍한 결과 앞에 당연하게도 부리나케 제국에 사신을 보냈다.

하지만, 그 답신으로 내려온 말인즉슨 잔뜩 치장한 예의를 걷어내면 '참전 불가'였으니.

"계속 말해보시오."

"제국이 발을 빼는 것은 결국 성물의 존재 때문이옵니다."

"...."

황제는 성물 듀렌달을 얻고 제국을 이루었다.

헌데, 동시대에 또 다른 성물 묠니르가 등장했으니, 이를 상대하기 위해 누가 출전할 것인가?

"뒤늦게 알아본바. 발베르 조르 경도 성물 묠니르를 휘두른 아이언헤드에게 당했다 하옵니다."

"허, 조르 경이...."

"제국 후작급의 기사가 아니오?"

"어허, 저런."

재상의 이어진 말에 술렁이는 귀족들을 보며 다울 3세는 심기 불편한 음성을 토해냈다.

"조용!"

"...."

"재상은 계속하라."

"예에, 아이언헤드는 이미 제국과 척을 지고 있으니, 제국이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아이언헤드를 제거하고자 할 것입니다."

제국이 적대한 자들의 운명은 둘 중 하나다.

제국의 일원이 되거나.

제국에 의해 사라지거나.

"제국이 아이언헤드를 처리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옵니다."

"...."

다울 3세가 두 눈을 감았다.

시뻘게진 얼굴은 앞으로 다가올 치욕을 예견한 듯했다.

"참으셔야 하옵니다. 또한 감내하셔야 하옵니다. 백기를 걸고 나아가 바짝 엎드리소서."

"...재상의 입에서 나올 소리요? 군주더러 치욕을 감내하라니."

"전하의 옆에 제가 함께할 것이옵니다. 이것만이 왕국을 보존하는 길이오니 이 투헬, 마땅히 그 치욕을 함께할 것이옵니다."

버텨야 한다.

어차피 제국의 눈 밖에 난 아이언헤드다.

차도살인지계.

제국이 아이언헤드를 제거할 때까지 버텨야 한다.

제국이 만일 아이언헤드를 품는다면?

그 또한 상관없다.

제국의 질서 아래 들어온 순간, 중재가 가능할 테니까.

더는 저 빌어먹을 아이언헤드와 교전하지 않아도 되는 길.

어떤 결과든, 지금 당장 싸워서 무너지느니, 굴욕적이고 치욕적이라도 항복하여 아미르 왕국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다.

"경들은 할 말이 없는가?"

"송구하옵니다!"

"신들 또한 전하의 곁에 나아갈 것이옵니다."

"...."

신하들은 전장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항복하러 가는 데에 우르르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다울 3세는 팔걸이를 내리쳤다.

쾅!

움찔하는 신하들을 훑어보는 다울 3세의 눈알이 벌겋다.

"항복하겠소.... 경들은 아이언헤드를 맞이할 준비를 하시오."

"결단에 감읍하나이다."

"이 치욕은 반드시 훗날 갚을 때가 올 것이옵니다."

여러 위로의 말들이 난무했으나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독립은 무슨....'

그리핀 기사단을 양성해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고 싶었던 아미르 왕국은 제국은커녕, 옆에 생겨난 조그만 야인 영주도 넘지 못했다.

'모든 것을 수용하고 감내하리라.'

아미르 왕국 국왕 다울 3세는 모든 것을 놓아버린 해탈한 얼굴이 되었다. 전보다 10년은 더 늙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

두두두두두.

"영주님! 저기 왕성입니다!"

"후후, 이제 끝이군."

문경 성에서 말을 달린 지 닷새째.

첫날 두 번의 교전 외에는 어떤 군대도 그들의 앞을 막아서지 않았다.

지나는 성의 영주는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그저 태풍이 지나가길 바라는 심정으로 부대를 구경하기만 할 뿐이었다.

중간중간 들리는 마을은 아예 대항할 생각도 하지 않고 목책 문을 여는 곳이 많았다.

이미 소문이 퍼진바, 아미르 왕국의 여러 마을들은 깨달았다. 그들을 적으로 맞이하면 창칼을 받을 테고, 손님으로 맞이하면 돈을 받으리라.

강철두와 공격대는 실제로 들르는 마을마다 그저 식량과 잠자리를 제공받으며 그 값을 치렀다.

용병대의 이동처럼 중간중간 마을에 들러 쉬기도 하고, 달리는 행군 중에 훈련도 하다 보니 왕성까지 닷새나 걸려버렸다.

기동력을 살렸다면 이틀이면 닿을 거리를, 두 배의 시간을 들여 왔다.

"흐흐, 이미 놈들이 싸우기를 포기한 모양입니다."

"후후후, 누구 마음대로."

공격대 구정욱은 강철두와 매일매일 훈련하는 호사를 누렸다. 대검으로 무기를 바꾼 그의 검술 레벨은 이제 3.

아직 영약을 하사하기로 한 4의 레벨은 멀어 보였지만, 다른 부대의 대장 정도의 기술은 탑재한 그다.

더욱이 구정욱이 이끄는 공격대는 모두가 오우거의 특성석을 먹어 '거인의 표피'와 '거인의 힘' 두 가지 특성을 개화한 이들.

마력만 있으면 순간적으로 힘을 배 이상 낼 수 있고, 살가죽만으로도 갑옷과 같은 방어력을 뽐내니 일당백의 용사들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오우거 특성석의 부작용으로 하는 성질이 급해지고, 사고가 단순해지는 문제는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본분은 군인.

명령하면 돌격하고,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장점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두두두두.

왕성이 슬슬 눈에 보이자, 철두의 옆에서 땅지네를 타고 이동 중인 에르미스가 혀를 찼다.

"쯧, 백기가 걸렸군."

"음, 노바에서는 저게 무슨 뜻이지?'

"뭐겠나? 항복이지."

"허, 감히 항복!"

철두의 반응에 에르미스가 깜짝 놀랐다.

"하, 항복한 적을 상대로 싸울 셈인가?"

"항복을 받아줄 마음은 없다."

"학살이라도 벌일 셈인가?"

"그건 아니다."

"허어, 이거 참."

남의 전쟁에 에르미스는 본인이 왜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최선을 다해 그를 설득했다.

"자네, 여기 온 목적이 뭔가?"

"전쟁을 끝내러 왔지."

"저들은 항복했네. 전쟁이 끝난 셈이지. 헌데 어째서 그리 화를 내는가?"

"흥, 나는 아직 용서해줄 마음이 없다."

"허어! 하면 어찌할 셈인가?"

"다시는 아이언헤드를 침략하지 못하도록 본보기를 보여야지."

"...."

그 본보기로 얼마나 죽어 나갈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성물의 주인이 학살자로 거듭나는 것은 재앙이다.

"먼저 시비를 걸어왔는데, 냅다 백기를 내건다고 싸움을 멈추는 건 바보가 아니냐?"

철두의 생각은 그러했다.

저놈이 먼저 때렸는데, 대뜸 사과한다고 용서해주는 건 멍청한 짓이다.

"대가를 받아야지."

"그 대가를 꼭 목숨값으로 받아야 하겠는가?"

"후후, 누가 목숨값으로 받는다고 했나?"

철두가 슬쩍 왕성을 향해 턱짓했다.

"알아서 챙겨가야지."

왕성을 약탈할 것이다.

철두의 말에 에르미스는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면 문제 될 게 없군. 종전 항복을 그저 맨입으로 하겠는가?"

"음?"

"무엇이든 요구해보게. 저들이 알아서 들어줄 테니."

"으음."

철두가 슬쩍 구정욱을 보았다.

"저들은 선택지가 없습니다. 싸우면 죽을 것이 뻔한데 싸우려 들겠습니까? 무엇을 요구하든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구정욱이 알기 쉽게 알려주었다.

"역사에서 보면 강대국이 주변 약소국에게 요구하는 공물 같은 것 있지 않습니까?"

"흐음."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단 들어보지."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건 나니까.

두두두두.

활짝 열린 성문을 보며 공격대는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진격했다.

혹여나 함정일까 하는 의심 따위는 추호도 하지 않았다. 함정을 파봐야 두 동강 나는 건 함정 쪽이니까.

활짝 열린 아미르 왕국의 성문 앞에 일단의 무리가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모두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철두는 소나따의 속도를 늦추며 천천히 나아갔다.

"결사대인가?"

"아니! 자네는 보고도 모르나? 딱 봐도 항복하는 이들인데."

"후후, 농담이다."

철두가 무리의 가장 앞에 있는 자를 가리켰다.

"저놈이 왕이군."

"으음, 그래 보이는군."

황금으로 된 왕관을 쓰고, 화려한 복색과 망토를 두른 자가 무릎 꿇고 있다.

그 뒤로 마찬가지로 질 좋은 옷을 입은 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무릎을 꿇고 있었으며, 도열한 병사들은 모두 창칼 없는 비무장이었다.

철갑옷을 입은 기사들도 빈손이었고, 투구도 쓰지 않아 얼굴이 모두 보였는데 그 표정이 모두 비통하기 그지없었다.

몇몇은 분기를 못 참는 듯 시뻘건 것이, 명령만 내려준다면 싸우기라도 하겠다는 얼굴이었다.

성벽 위에는 병사 하나 없고, 활짝 열린 성문 너머의 집과 거리에 몰려나온 시민들이 모두 구경하고 있었다.

"후후, 그대가 아미르 왕인가?"

"그렇소! 아이언헤드여."

"침략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 항복을 청하는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사오니, 그저 아미르를 가엾이 여겨 항복을 청하는 바입니다."

"대가는?"

"...."

철두의 직설적이며 후진 없는 물음에 국왕이 당황했고, 그의 옆에 무릎 꿇고 있던 신하 하나가 나섰다.

"정전협정은 왕성에 가서 논하는 것이...."

"후후."

철두가 구정욱을 보며 고갯짓하자 그가 말에서 나는 듯이 뛰어내렸다.

"차아아!"

그대로 대검을 빼 들어 말문을 연 아미르 왕국 귀족의 목을 쳐 버리니, 그 피가 국왕에게까지 튀었다.

"허억."

"어, 어찌 이리...."

무릎 꿇은 귀족들이 황망해 하는데 철두는 소나따 위에 탄 채로 물었다.

"감히 정전을 요구하는가?"

누구 마음대로 협정을 맺는단 말인가?

고개를 처박은 다울 3세의 몸이 푸들푸들 떨리는데, 옆에 있던 투헬 공작이 나섰다.

"아이언헤드 대왕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해주시옵소서."

"조무래기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철두가 구정욱에게 또 턱짓하려는데, 투헬 공작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신은 아미르 왕국의 재상 투헬 공작이옵니다."

"으음."

김진태 같이 왕국의 2인자쯤 되는 녀석이구나.

그럼 자격 있지.

"말하라."

"아미르 왕국은 무조건적으로 항복하는바, 대왕의 어떠한 요구라도 마땅히 들어 드리겠나이다. 다만, 왕국이 존속할 수 있도록 용서, 또 용서해주시기를 감읍하나이다."

왕국 재상의 비굴하고도 치욕스러운 요청에 누군가는 화를 참았고, 누군가는 비통해했다.

그리고 철두는 웃었다.

"무얼 줄 수 있느냐?"

"...."

선제시는 흥정의 기본이지.

259화 알뜰하게

투헬 공작은 곤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들어줄 준비가 되었는데, 상대가 먼저 내보이라 말하니 막연하기 그지없다.

이것이 흥정이라면 서로의 패를 내보여야 하는데.

저들이 내민 패는 '용서'다.

그리고 지금 여기 모인 국왕과 이하 대신들, 그리고 국민들의 목숨이 걸려 있으니.

'무엇을 주어야 하는가?'

그 대가로 무엇을 지불해야 맞을 것인가?

불행히도 상대의 면면을 살펴보니, 왕국에 대해 무지한 자들뿐이다.

강철두야 당연하고, 그 옆의 드워프도 인간 왕국의 법에 무지하니, 기댈 곳이 없다.

방금 칼을 휘두른 망나니 같은 놈은 말해 무엇하며, 제대로 갑옷도 갖춰 입지 않은 저 뒤의 야인부대들은 또 오죽할까?

투헬 공작은 흥정에 앞서 확실히 해야 할 것이 있었다.

"무엇이든 드릴 수 있사오나, 그것이 왕국의 모든 것이라면 실상 흥정하고 말고 할 것도 없사옵니다. 대왕의 자비로움에 기대야 하는바, 왕국의 존속을 위한 아량을 기대해봐도 되겠나이까?"

빙빙 둘러 말하고 있지만, 말하는 바는 하나다.

'안전을 보장해 달라.'

막상 뜯어가 놓고, 조금 시일이 흐른 뒤 다시 쳐들어오면 말짱 도루묵이 아닌가?

"좋다. 먼저 덤비지 않는 한 내가 이 왕성을 공격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대왕의 자비로움에 감읍하나이다."

애매한 대답이지만 여기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 강철두가 망치를 꺼내 휘두르면 이 왕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될 터, 이제 무엇이든 내어주어야 할 때.

"아미르 왕국은 아이언헤드령을 대하기를 제국과 같이할 것이오니, 앞으로 왕국 세입의 3할을 바치겠나이다."

"...!"

파격적인 조건에 오히려 철두의 옆에 있던 에르미스와 구정욱이 깜짝 놀랐다.

'제국으로 대우해?'

'세금을 30%나 바친다고?'

놀란 포인트는 달랐으나, 남다른 심장의 소유자 강철두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또."

"...!"

이번에는 무릎 꿇은 다울 3세가 깜짝 놀랐다.

긴 회의 끝에 나온 가장 강력한 패가 세입의 3할이다.

투헬 재상이 처음부터 최상의 패를 꺼냈는데, 저 막돼먹은 야인 영주는 만족하질 못하고 있으니....

"대왕께서는 무엇이든 가져가실 수 있나이다. 원하는 바를 말씀하시면 기꺼이 준비시키겠습니다."

"후후후."

먼저 제시하라 이거군.

철두는 상대의 패가 마음에 들었으니, 이제 자신의 요구를 내보일 때임을 알았다.

"그리핀을 보내라."

"...한 해에 몇 마리를 원하시는지요?"

"가진 것의 절반."

"...그리하겠나이다."

철두는 인심 써서 절반만 뺏었다.

지금 당장 모든 그리핀을 징발하는 건 수고로운 일이다. 그리핀 라이더를 죽이지 않고 생포해 다시 그리핀을 양도받는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번거롭다.

더욱이 그리핀 가축화에 성공한 아미르 왕국이기에, 매년 진상 받는다면 후일 더 많은 이익이 있는바.

이는 철두가 늘 강조했던 적당히 뺏고 적당히 유지하는, 황금알의 낳는 거위의 배를 굳이 가를 필요가 없는 전략과 일맥상통한다.

"또 다른 요구는 없나이까?"

"있지."

"...."

투헬 공작은 괜히 물어본 것은 아닌가 후회했으나, 이미 뱉은 말이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왕국의 특산품을 보내라."

"...그리하겠나이다."

"철도 보내라."

"...예에."

"그리고 또 뭐가 있느냐?"

"...무엇을 이르심인지?"

"돈 되는 거 뭐 있나?"

"...."

투헬 공작은 이 도둑놈 같은 야인 영주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공개된 자리에서 어디까지 모욕을 주려고 이리 세세하게 요구한단 말인가?

아량을 베풀 요량이면 왕가의 위신을 생각해 궁으로 가서 따로 협상 자리를 만들면 되지 않은가?

"돈이라 하심은, 이미 왕국 세입의 3할을 바치기로 한 바.... 부족하신지요?"

"으음."

철두가 턱을 쓰다듬었다.

"마석 있나?"

"...왕국 소유의 광산이 둘 있나이다."

"좋아. 딱이군. 절반을 보내라."

"...알겠나이다."

"후후, 뭐 더 자잘한 건 알아서 보내라."

"예에."

일단 알겠다고 대답했다.

어차피 다 수용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첫해만 보내면 된다.'

제국에서 아이언헤드를 제거하는 데에는 1년도 걸리지 않으리라. 그때까지만 견디면 된다.

지금 가장 걱정되는 것은 굴욕과 치욕을 감당하고 있는 다울 3세의 멘탈이다.

"모자라면 직접 가지러 오겠다."

"...성심껏 준비하겠나이다."

"그리고 지금 왕궁의 보물 절반을 챙겨가겠다."

"...그리하겠나이다."

철두는 그제야 만족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다! 약속이 지켜지는 한, 내가 먼저 이 왕성을 공격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대왕의 자비로움에 감읍하나이다."

철두가 제집에 온 양 왕성을 향해 들어갔다.

혼비백산한 시민들이 우왕좌왕 길을 비키는데, 철두와 그 뒤를 따르는 공격대는 전혀 위축됨이 없이 당당히 말을 몰아가니, 승리한 군대의 개선식과 같았다.

그 뒤를 국왕과 귀족들이 헐레벌떡 따르니, 시민들은 누가 승리했고 누가 패배했는지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왕은 굴욕과 치욕을 감내하며 왕국을 지켜냈으나, 국민들은 그런 왕에게서 조금씩 마음이 떠났다.

왕궁의 거대한 접견실.

왕의 자리에 앉은 건 아미르 왕국의 국왕이 아닌 강철두.

"후후, 이웃끼리 다투지 말고 지내야지."

"...그렇습니다."

"함부로 국경을 넘고 하지 말게. 내 부하들이 참지 않을 것이니."

다울 3세가 이를 악물었다.

성물의 주인 강철두가 두렵지, 그 휘하의 부대는 별 볼 일 없는 자들이다. 하지만, 속내를 그대로 내보일 수는 없다.

해야 할 대답은 하나뿐이니.

"그러겠습니다."

"먹어. 맛있는데 왜 안 먹고 그러나?"

"예에."

철두는 주인처럼 행세했고, 다울 3세는 거의 해탈한 얼굴로 그의 옆에서 고역스러운 식사를 함께했다.

"...해서 물러가 쉬도록 하겠습니다. 자원의 징발은 재상과 상의하시면 될 것이옵니다."

"후후, 알겠다."

"편히 지내다 가시옵소서."

"내가 눈치가 그리 없지 않다. 내일 떠날 것이니, 그리 알라."

"예에...."

다울 3세가 물러나고 투헬 공작이 근심어린 얼굴로 강철두의 옆에 붙었다.

"자, 계산을 하자."

"예에."

"왕궁의 보물 절반을 내놓아라."

"그 양이 방대하니, 후일 수송 함이 어떻습니까?"

"후후, 값어치 나가는 몇만 챙기면 된다."

금은보화 따위 그리 쓸모가 없다.

그것은 원하면 언제든 뺏을 수 있는 것들.

철두가 원하는 것은 '영약'과 같은 특수한 보물들이다.

"보물창고로 안내해라. 내 직접 고르겠다."

"...그리하겠나이다."

공격대원들이 떠들썩한 저녁 식사를 하는 걸 두고 강철두는 에르미스와 단둘이 보물창고로 향했다.

철두의 탐색 기능이 쓸 만하다지만, 물건을 감정하는 데 있어서는 에르미스의 안목이 더욱 높아 쓸모가 많았다.

곧 지하의 보물창고로 들어가니, 휑하니 넓은 공간에 궤짝만 여섯이 있었다.

"왕성의 인벤토리이옵니다. 권한을 드리겠사오니 편히 살피시옵소서."

"후후, 좋다."

<아미르 왕성의 인벤토리 열람 권한을 획득하였습니다.>

철두가 여섯 개의 궤짝 중에 크기는 가장 작지만 호화로워 보이는 문양의 궤짝을 향해 다가갔다.

파팟.

궤짝에 손을 올리니 개인 인벤토리와는 비교할 수 없이 커다란 창이 나타났는데, 그 칸칸마다 아이템들이 수두룩했다.

개중에는 역시 영약이 몇 있어 철두는 흡족한 기분이었다.

"이건 가져가야지."

<별의단약 9개를 획득하였습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9개 모두 백년급 영약이라는 것.

"천년급은 없나?"

"왕국에 그만한 보물은 없사옵니다."

"난쟁이 왕국보다 가난하군."

"...."

철두는 목록을 더 살폈으나 영약 외에는 눈에 차는 것이 없었다.

사치품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전직의 돌과 무한의 샘물 항아리 몇 개를 더 챙기고 나니, 마땅히 더 챙길 것도 없었다.

질 좋은 무기들과 갑옷들이 많았으나, 에르미스를 짜내면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 것들이라 내키지도 않았다.

다른 상자들을 열어봤으나 그 또한 마찬가지라, 철두는 턱을 쓰다듬었다.

그 모습에 불안함을 느낀 투헬이 바짝 긴장했다.

이 날강도 같은 놈이 또 무엇을 뜯어내려고 저리 궁리하는가?

"조만간 내가 개국할 생각이다."

"감축드립니다. 왕국에서 마땅히 축하 사절을 보낼 것이옵니다."

철두는 인벤토리에서 서약의 검을 꺼내 들었다.

"이건 가문을 세울 때 쓰지. 그럼 개국할 때는 뭐가 쓰이나?"

"...왕가의 상징이 필요하옵니다."

"후후, 그걸 가져와라."

"...."

투헬은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이곳 보물창고에 있는 것은 실상 최고로 값어치 있는 물건들은 아니다.

진짜 보물은 왕의 개인 인벤토리에 들어 있었다.

투헬 공작은 잠깐 머뭇거렸으나, 곧 청산유수같이 말을 쏟았다.

"어, 어찌 그것을 요구하시옵니까? 아미르 왕국을 개국한 왕가의 상징을 가져가 버리시면 왕국은 그 틀이 무너지는 셈이니, 이는 곧 대왕이 베푸신 자비로움과 맞지 않사옵니다."

네가 왕가는 존속시켜준다 해놓고, 그걸 뺏어갈 수 없다는 말이다.

"하나 더 있는 거 다 안다."

"...!"

철두의 태연한 말에 투헬 공작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 모습에 철두의 웃음이 더 짙어졌다.

"후후, 항복한 놈들이 속내는 시커멓구나. 일부러 맹약의 서도 쓰지 않고 항복을 받아주었는데, 이리 나온다면 나도 별수 없지."

파팟.

철두가 묠니르를 꺼내자 투헬이 깜짝 놀라 바짝 엎드렸다.

"요, 용서해 주시옵소서! 아직 활성화하지 않은 왕가의 상징은 억만금을 주고도 사기 힘든 보물 중의 보물이옵니다."

"아, 그러니까 그것만 받으면 이제 돌아간다잖아."

"...알겠사옵니다."

투헬 공작은 고민이 깊어 보였으나, 결국 그것을 가지러 자리를 떴다.

그가 떠나자 에르미스가 슬쩍 물었다.

"철두. 자네, 어떻게 입수한 정보인가?"

"음? 뭐가?"

"아미르 왕국에 왕가의 상징이 하나 더 있다는 것 말일세."

"후후, 그냥 찔러봤다."

"...."

에르미스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걸 감이 좋다고 해야 할지,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헷갈렸다.

"흠, 아미르 왕국이 큰 뜻을 품었던 모양이구만."

"그게 무슨 소리냐?"

"지금 아미르 왕국은 제국에 예속된 속국이 아닌가?"

"그렇겠지."

"진정 독립을 꿈꾼 모양일세. 새로운 왕가의 상징까지 준비할 정도면 말일세."

"으음."

철두는 그 복잡한 시스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조만간 왕가의 상징을 손에 넣은 뒤 직접 확인해보면 될 일이다.

*

왕의 침소.

기운이 쭉 빠진 다울 3세는 허탈하게 웃으며 재상에게 되물었다.

"무엇을 달라고?"

"...활성화하지 않은 왕가의 상징을 달라 하였나이다."

"허허허허."

다울 3세의 웃음이 공허하기 그지없다.

미궁을 수백 번이나 헤쳐 나가며 운이 좋게 손에 넣은 보물이다.

제국의 속국 신분에서 벗어나 새롭게 개국할 목적으로 사용할 예정이었던 아이템인데.

"이것을 내어줌이 무슨 뜻인지는 아는가?"

아미르 왕국이 지난 이십 년간 준비한 독립 계획을 모조리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전하! 당장의 재난을 피하시옵소서.... 어차피 아이언헤드가 존재하는 한, 제국의 그늘을 벗어나는 것보다 그들을 이용함이 옳습니다."

"허허허...."

다울 3세는 힘없이 웃다가 별수 없이 인벤토리에서 그것을 꺼내 건네줄 수밖에 없었다.

"내 훗날 반드시 아이언헤드령의 살아있는 모든 것을 참할 것이다!"

"참고 견디시면 반드시 그때가 올 것이옵니다."

260화 챙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