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챙겨
아이언헤드가 왕성을 떠났다.
다울 3세는 왕성의 가장 높은 탑에서 그들을 보며 이를 갈았다.
"재상."
"네, 전하."
"제국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다면, 그들의 힘을 빌려서라도 내 꼭 저들을 짓밟아야겠소."
"그리될 것이옵니다. 그때까지 모든 것을 감내하시고 견디셔야 하옵니다."
"후우."
마음을 다스리기 어렵다.
훗날의 복수를 다짐하지 않고서야 지금 당장의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내 반드시!"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이 저 멀어지는 아이언헤드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문득, 공격대의 선두에서 말을 달리는 아이언헤드가 뒤로 고개를 돌리자.
움찔!
다울 3세는 화들짝 놀라 허리를 낮추었다.
"시발, 저놈 저거 돌아오는 게냐?"
"아, 아닙니다. 전하. 다시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냥 뒤돌아본 것 같습니다."
"으음."
다울 3세는 다시 허리를 펴고 멀어지는 아이언헤드를 보았으나, 분노로 이글거리던 눈빛은 많이 수그러들었다.
"후, 가세나."
"예에."
"앞으로가 문제군."
"그러하옵니다. 왕국의 위엄을 지키는 일에 총력을 기해야 할 것이옵니다."
봉건사회는 절대왕정이 아니다.
영주들은 저마다 자신의 영지에서 왕이나 다름없는 자치권을 가지고 있고, 왕국은 큰 테두리의 연합체일 뿐이다.
왕가의 위신이 떨어졌으니, 제후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터다.
북방의 사자 더스트 후작은 아예 죽어버렸고, 그 휘하 영주들이야 이제 아이언헤드령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으니 왕가에 기댈 수밖에 없겠지만.
나머지 제후들이 문제다.
그들은 휘하의 소드마스터 몇을 잃은 것을 제외하면 그다지 큰 손실이 없으니....
"그림자들에게 빛을 줘야겠군."
왕의 호위무사 7명.
모두 소드마스터로 이뤄진 그 최강의 무력집단 중의 넷이 비명횡사했다.
이제 남은 건 셋.
그들을 양지로 드러내 왕가의 검이 아직 여럿 있음을 제후들에게 알리고,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억제해야 한다.
"으음."
다울 3세의 얼굴에 다시 근심이 가득해졌다.
제국으로의 독립을 꿈꾸던 아미르 왕국은, 이제 영주들의 반란을 걱정해야 할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이것이 전부 자연재해처럼 발생한 야인 영주 때문이니....
*
아이언헤드 공격대는 문경 성으로 돌아가는 길도 느긋했다.
전원이 기병대지만, 끼니때가 되면 꼬박꼬박 행군을 멈추고 솥을 내걸어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그 사이 꼭 강철두는 부하들과 대련을 했다.
공격대 대장 구정욱은 당연했고, 그 휘하 간부들인 박도현, 박찬수, 양지섭, 권도안 할 것 없이 모조리 철두에게 맞아 곤죽이 되는 시간을 가졌다.
왕성 점령전에서 전투다운 전투가 없었으나, 가져온 포션이 하루가 다르게 줄어드는 것은 실전을 방불케 하는 대련 탓이었다.
"끄어어!"
"후후, 아직 멀었다."
철두는 간부들은 물론, 공격대 구성원 중에 누구든지 도전하는 자가 있으면 한 수 받아 줬다.
"저도 한 수 가르침을 청합니다!"
"이 이구신도 나섭니다!"
"후후, 모두 한 번에 덤벼라."
절대 강자인 강철두와 겨뤄보는 것만으로도 이들은 많은 것을 배웠다.
전원이 오우거 스킨을 가진 공격대라, 여기저기 어지간히 찔러도 생채기 수준의 상처뿐, 절명할 정도까지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더욱이 무모하리만치 용감해진 성격 탓에 공격대 누구 하나 내빼지 않고 덤벼드니, 식사 시간보다 훈련 시간이 더 길어졌다.
왕성으로 진격할 때는 닷새가 걸렸는데, 다시 돌아가는 길은 닷새가 지났음에도 아직 반의반도 가지 못했다.
재미있게도 돌아가는 길에는 군영을 찾는 손님들이 줄을 이었다.
"붉은늑대 용병대장, 은형로요! 아이언헤드의 명성을 듣고 왔소!"
"후후, 싸울 테냐?"
"아, 아니오! 나와 내 용병대 30인은 그대의 세력에 합류하고 싶소!"
"좋다."
"허어! 과연 듣던 대로 시원시원한 성격이시오!"
"어느 부대에 예속될지는 돌아가서 정해주겠다."
"음? 우리 붉은늑대 용병대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소?"
"못 들어봤다."
"...."
못 들어봤다는데 할 말이 없다.
나름 유명한 용병대이건만....
"후후, 자신만만한 걸 보니 실력이 있는 놈들인가 보군. 정욱이."
"네, 영주님."
"대충 가늠해보고 돌아갈 때까지 관리해라."
"흐흐, 예, 영주님."
구정욱은 붉은늑대 용병대장 은형로를 보곤 대뜸 대검을 뽑았다.
"실력 좀 봅시다."
"허, 알겠소!"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구정욱이란 자가 아이언헤드의 심복으로 보이니, 그를 꺾어 눈도장을 찍을 요량이었으나....
챙, 퍽, 쿠당.
"...으윽, 이럴 수가."
열 합을 넘기지 못하고 나가떨어진 그를 보며 구정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이군. 간부급은 되겠군. 따라와라."
"...알겠소."
붉은늑대 용병대 30인이 군영 한쪽을 차지하고, 합류한 뒤로도 여기저기서 알음알음 합류하는 병력들이 꽤 있었다.
아미르 왕국과 아이언헤드 간의 전쟁은 왕국 전역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핫이슈였다. 이번에 그 결과가 명백히 드러났으니 그간 눈치 보고 있던 용병대나 상인, 심지어 왕국 소속의 귀족들까지도 아이언헤드를 만나기를 청했다.
"명망이 높으신 아이언헤드 대왕님을 우리 성에 초대하는 기회를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후후, 좋다."
"흔쾌히 응해주셔서 가문의 영광이옵니다!"
진군할 때는 굳게 닫혀있던 성들이 회군하는 때는 문을 활짝 열고 너도나도 아이언헤드와 안면을 익히려 했다.
철두는 하나도 사양하지 않고 주는 선물은 모조리 받으며, 호의를 절대 거절하지 않았다.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에르미스가 걱정되어 물어볼 정도였다.
"자네, 그렇게 막 받아도 되나?"
"주는데 왜 안 받나?"
"그게 다 뇌물 아닌가? 저들이 후일 어떤 부탁을 할 줄 알고 덥석덥석 받는단 말인가?"
"후후, 안 들어주면 된다."
"...?"
"주는 놈들마다 사심 없는 선물이라고 하지 않았나?"
"아닛, 그건 그냥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닌가?"
에르미스는 답답한 듯 속을 치고는 물었다.
"저리 호의를 베푼 자들이 나중에 부탁이라고 청해오면 자네는 그걸 일언지하에 거절할 수 있나?"
"있다."
"무, 무슨."
조금의 고민도 없이 대꾸하는 강철두를 보며 에르미스가 입을 쩍 벌렸다.
성물을 가진 이 바바리안은 양심이란 것이 없단 말인가?
"허어, 이거 저치들이 괜히 헛돈을 쓰는지도 모르고 저리 좋아하고 있으니.... 쯧."
"후후후. 좋게 보고 있다."
"그래 놓고 필요하면 저들 성도 약탈할 게 아닌가?"
"당연한 소리 아니냐?"
"에잉, 쯧쯧."
뇌물도 통할 사람에게 줘야지.
강철두의 환심을 얻었다고 생각한 귀족들이 불쌍해 보일 지경이다.
"이것은 우리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이옵니다. 부디 대왕께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후후, 잘 쓰지."
철두는 귀족이 내미는 뿔피리를 넙죽 받았다.
<진격의 뿔피리>
부대 통솔 시 사기를 진작시킬 수 있다.
이건 직접 쓰는 것보다 구정욱에게 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 슬슬 해가 지니 이만 나는 쉬러 가지."
"헉, 자리가 불편하시옵니까?"
"아니, 해야 할 일이 있다."
"허면, 밤시중 들 여인을 준비해 드리오리까?"
"필요 없다."
전전긍긍하는 귀족을 뒤로하고 호화롭게 꾸며진 별실에 돌아온 철두는 창밖으로 보이는 해를 보았다.
노을이 지기 직전이다.
"에르미스."
"말해라."
"다녀오지."
"어딜?"
"오늘이 펫 대회다."
"아! 벌써 때가 되었나?"
펫 대회에 관심 없는 에르미스는 그러려니 했다.
"아니, 근데 백년급 영약은 이미 많이 얻지 않았나?"
"후후, 그렇다고 거저 준다는데 포기할 수는 없지."
"으음, 아울베어로 1등 하긴 어려울 것 같네만.... 뭐, 좋은 성과를 바라지."
"다녀오마."
철두는 해가 지기 전에 얼른 무한결투장으로 진입했다.
해가 뜬 낮 시간에 진입했으니, 퇴장은 일몰 때다.
"금방 오겠군."
중얼거린 에르미스가 조용히 창밖을 보았다.
이벤트 형식으로 열리는 결투장의 펫 대회는 항상 1등이 정해진 경기나 다름없었다.
'보나 마나 또 그 테이머 놈이 먹을 텐데.'
이름이 뭐였더라?
파팟.
고민하는 사이 해가 졌고, 철두의 전령인 꾸이가 꾸물거리더니 입을 쩍 벌리고 차원문을 열었다.
강철두가 씩씩거리며 걸어 나오자 에르미스가 빙긋 웃었다.
"클클, 놓쳤나 보군."
"후우, 차오루가 누구냐?"
"아! 그 테이머 이름이 차오루였지! 클클, 이번에도 그자가 우승했나 보군."
"알고 있는 놈이냐?"
"유명하지. 펫 대회마다 1등을 하는 유명한 테이머지."
철두가 인상을 와락 구겼다.
"흐음, 잭 녀석은 왜 이리 소식이 없는 거냐."
"자네 부하 일을 내가 어찌 아나?"
철두가 길들이려고 계획했던 몬스터는 둘이었다.
첫째가 아울베어고, 둘째가 펜리르.
전자는 소재 파악이 끝나 직접 움직였고, 후자는 소문 정도의 정보라 사냥꾼 잭에게 주어 펜리르의 소재를 파악하는 임무를 주었다.
헌데 펫 대회가 끝날 때까지 아직 연락이 없으니 그저 화풀이를 해볼 따름이다.
"승부야 질서도 있는 게지."
"후우, 나는 속상하지 않다."
"클클, 얼굴은 분통해 죽겠다는 표정이구만."
"후우우. 술이나 마셔야겠다."
철두는 잔뜩 인상을 쓰곤 아까 나온 연회장에 다시 발걸음했다.
"허억!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술이나 먹자."
"바로 준비하겠나이다!"
영문을 모르는 귀족만 철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안간힘 썼으나, 무용한 일이었다.
*
사냥꾼 잭.
본디 그는 몬스터 사냥이나 추적에 도가 튼 인물로, 그 실력을 높이 사 아미르 왕국에 고용되어 '탈주한 그리핀 추적'이라는 임무를 맡은 바 있다.
그 임무가 원인이 되어 강철두와 엮여 어찌어찌 그의 휘하에 들고 말았다.
지금 맡은 임무는 그저 소문뿐인 펜리르를 추적하는 일.
임무를 나설 때 아이언헤드 성에서 지원은 빵빵하게 받은지라, 처음 정보를 수집하는 건 수월했다.
정보란 것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만, 또 허위로 끼어있는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는 것에서 애를 먹기도 한다.
잭은 여러 가지 정보 중에 진짜를 고르는 눈이 있었고, 그렇게 분류된 정보를 토대로 하나하나 직접 움직여 진실 여부를 판별했다.
소문은 점점 더 구체화 되었고, 펜리르의 자취를 쫓아 움직이는 잭의 발걸음에도 점점 힘이 들어갔다.
'진짜 있다.'
펜리르는 일반 몬스터와 궤를 달리하는 영물이다.
신수나 다름없는 존재라, 이를 길들일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지만, 일단 자신의 임무는 자취를 쫓는 것뿐.
중간에 이동마법진을 다섯 번이나 이용할 정도로 먼 거리를 이동한 잭의 추적은 거대한 유적지 앞에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이 이상은 무리군."
모든 정황증거들이 펜리르가 저 숲으로 들어갔다고 가리키고 있었다.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거대한 유적지.
잊혀진 도시와 얽히고설킨 던전들.
"하필 지하 묘지라니...."
들어간 자는 있어도, 나온 자는 없다는 저주받은 곳.
잭의 발걸음은 그 앞에서 멈췄다.
더 이상의 추적은 불가능하다.
"돌아가야겠군."
자신의 소임은 다했다.
하루빨리 돌아가 보고해야 할 때가 되었다.
녀석이 지하 묘지를 벗어나기 전에 말이다.
261화 개국
강철두가 공격대를 이끌고 문경 성을 떠나 왕성으로 향한 지 스무 날 만에 돌아왔다.
가는 데 5일이 걸린 길을, 돌아오는 데는 15일이나 소비한 셈이다.
워낙에 느린 행군이라, 결과에 대한 보고는 이미 그리핀 전령으로 통했다.
"철두야!"
"오, 진태!"
진태가 문경 성에 와있을 줄은 몰랐기에 반가움이 더욱 배가 되었다.
"아, 이렇게 쉽게 전후 협상 될 것 같았으면 협상가를 보냈을 텐데."
"후후, 상관없다. 전쟁은 또 하면 된다."
"왕성 안 치기로 약속했다며?"
"왕성만 안 치면 되는 것 아닌가."
"어? 그런가?"
진태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때까지 옆에서 후드를 눌러쓰고 있던 자가 버럭했다.
"그렇기는 뭐가 그래!"
"음?"
이 목소리는 분명.
"준필이!"
"쯧, 날세. 이따가 서프라이즈 해주려고 했더니만."
후드를 벗으니 한양 사또 박준필이 모습을 드러냈다.
"후후후, 친구들이 다 모였군."
"허허, 들어가세나. 가서 이야기합세."
"알겠다."
문경 성의 영주 저택으로 들어가니, 신서울의 기사 김도진과 일산 성 성주 김춘배까지 와 있었다.
유격대 친위대 등의 부대 대장들도 모두 자리해있고, 거기에 더해 벨로타 마을을 비롯한 작은 마을들의 촌장들과 행정관 포멜까지 와 있으니....
봉건사회에서 마을이나 성을 이루는 모든 집단의 대표가 이 자리에 모인 셈이었다.
"뭐야? 다 왜 여기 있어?"
"내가 불렀어."
"진태 네가?"
"그래."
김진태는 씩 웃었다.
철두도 마주 웃었다.
그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아미르 왕국의 일을 마무리 짓고 개국하기로 했으니까.
"개국해야지."
"후후, 그래야지."
철두의 말에 일제히 함성이 터졌다.
"와아아아아!"
"강철두 만세!"
"철두 임금님 만세!"
"철두 대왕님 만세!"
"철두 황제 만세!"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소리에 강철두가 피식 웃었다.
"조용히 해라."
강철두의 한마디에 커다란 회의실이 금세 조용해졌다.
새삼 느껴졌다.
강철두를 나이로 정의하는 자는 여기 없다.
그를 그저 청년으로 대하는 이도 없다.
적어도 여기 있는 이들은 강철두의 힘을 보고 겪은 이들.
그의 위대함을 알고, 강함을 알며, 그를 중심으로 모여든 이들.
"개국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철두는 조용하게 집중된 이목을 즐기며 인벤토리에서 왕가의 상징을 꺼내 들었다.
<풍요를 노래한 석판>
왕가의 상징이 될 만한 유물입니다.
세력의 상징으로 삼으면 '개국'할 수 있으며, 서약을 받아 타 세력을 왕국의 일원으로 받을 수도 있습니다.
- 주화 1,000,000개로 활성화
- 활성화 시 세력에 귀속.
- 세력권에 '풍요의 축복' 적용
- 기술 '봉신 제의' 획득.
왕가의 상징은 그 형태가 여럿이었는데, 옥쇄, 검, 활, 왕관 등이 가장 흔했고, 지금처럼 석판이나 유물, 장식물처럼 존재하는 것도 있었다.
"오오! 이게 뭐야!"
"후후, 서약의 검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철두는 진태에게 석판을 넘겨주었고, 김진태는 그 석판을 모두가 볼 수 있게 들어주었다.
"오오오!"
왕가의 상징에 대해서는 그나마 여기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이인 탕아대의 대장 탕아후루가 빠르게 말했다.
"국호를 정하셔야 합니다!"
"오오, 국호 중하지."
"정할 게 있나? 대한민국 해야지."
"허! 모르는 소리! 한국을 계승하더라도 새 국호로 개국해야지!"
"조선으로 합시다!"
"아니, 시발 헬조선은 왜 가져오시오?"
"어? 시발? 방금 누구야? 너 시발 육사 몇 기야?"
"아니. 박 중장님, 그게 아니고."
"시발, 누가 중장이야? 나 한양 사또야!"
박준필이 씩씩거렸다. 분위기가 과열되자 진태가 나서서 모두를 말렸다.
"여러분! 잠깐만요!"
"허어, 이거 내가 과하게 흥분했군."
패션역덕 박준필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내 반드시 옛 조상들의 멋을 구현해내리라!'
역사 고증 따위는 필요 없다.
멋있으면 그만.
"옛날 이름 할 거면 차라리 신라로 합시다."
"신라는 간지가 안 나잖아?"
"허, 천년 짬빱 무시해?"
"고조선으로 합시다."
"어허! 조선이랑 뭐가 달라?"
"최초지 않소?"
"여기가 한반도냐! 우리 대왕님이 단군이야?"
"저 새끼 환빠 아냐?"
국호를 정하는 영광된 자리라 너도나도 욕심내다 보니 목소리가 커졌다.
"유나이티드 코리아 어떻습니까?"
"뻑킹! 제임스! 끼어들지 마."
"왓? 퍽! 나도 일원이야."
"고구려 갑시다!"
"음, 고구려 괜찮지."
"고구려 하면 철갑기병 아닌가?"
철갑기병 소리에 박준필의 눈이 반짝였다.
"나도 찬성!"
갑자기 분위기 고구려.
너도나도 동조하는 가운데, 본디 나트롱 백작령 소속의 마을 출신 촌장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너희도 의견을 내봐라."
"허억."
철두의 말에 깜짝 놀란 촌장들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어찌하여 소인들의 의견을 물으십니까요."
"영주님의 뜻이 곧 모두의 뜻이옵니다."
"소인들은 그저 따를 뿐이옵니다."
그들의 품계가 낮아 그러는 것도 아니다.
포멜 행정관도 무릎 꿇은 것이, 모두가 수동적으로 따를 태세다.
그들은 자유롭게 의견을 내는 이들을 이상하게 여겼다.
왕가의 이름을 어찌 신하들이 정한다는 말인가?
"맞네. 철두야. 네가 정해라."
"후후후."
철두의 고민은 잠깐이었고, 결정은 빨랐다.
"대한민국 출신이 많으나, 이제는 제국 출신, 또 왕국 출신들도 많다!"
역시 유나이티드를 중얼거리는 제임스를 무시하며 철두가 선언했다.
"국호는 고구려로 한다!"
"오오오오!"
철두는 즉시 왕가의 상징을 활성화했다.
<고블린 주화 1,000,000개가 >
<풍요를 노래하는 석판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아이언헤드 가문의 왕국 '고구려'가 개국했습니다.>
파파팟.
곧 세력창이 변화했다.
기존에 세력에 속해있던 여러 부대와 예속 영지들이 모두 이관되었다.
<목록의 영지 중에 수도를 선택해주십시오.>
"아이언헤드 성."
<왕국의 필수 인재를 임명해주십시오.>
시종장, 감독관, 징세관, 등등....
왕국의 기본 행정을 구성하는 여러 인물들을 임명해야 했으나, 철두는 언제나 그가 하던 방식대로 처리했다.
"재상 김진태에게 일임해야지."
<'김진태'를 고구려의 '재상'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박준필이 안타까워했다.
"허어! 고구려면 막리지지...."
사극으로 역사를 배운 박준필은 간절히 청했다.
"대왕! 저를 예조판서로 임명해주십시오."
"그런 거 없다."
"허어! 제가 왕가의 기틀을 잡겠습니다!"
"으음."
철두가 이글거리는 눈의 박준필을 보았다.
맡겨놓으면 시대를 불문하고 오만 사극에서 나오는 용어로 떡칠된 행정 개편을 볼 것 같아 고개를 저었다.
"싫다."
"허억! 소신을 믿지 못하십니까?"
"재상하고 상의해라."
"크윽."
박준필이 아쉬워하면서 김진태를 보며 이글이글 눈을 빛내니, 진태는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그, 논의해봅시다. 행정체계는...."
"암요! 내 고구려의 주춧돌을 제대로 놓겠습니다!"
"후후, 알아서 해라."
철두가 국호를 고구려로 정한 것은 다른 게 아니다.
역사책에서 배운 그들의 기풍에 끌려서다.
끊임없는 정복 활동과 무를 숭상하는 그들의 기상이 딱 지금 구성원들을 끌어안기 좋아 보였다.
<왕국 '고구려'가 건국되었습니다.>
모두에게 월드 메시지가 떴다.
"오!"
그리고 강철두에게는 또 다른 창이 떴다.
<등급 '자유 영주'가 '국왕'으로 변경됩니다.>
<영웅은 역사에 기록되고>
자유 영주의 길을 걷는 당신은 중간 기착지에 다다랐습니다.
당신의 세력은 이제 노바의 세계에 기록될 것입니다.
노바 세계에 제국의 칭호는 오직 하나, 그 영광된 업적에 도전하십시오.
성장을 멈추지 마십시오.
목표도 보상도 없는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흐음."
"왜?"
"이상한 퀘스트가 떴다."
내용을 들은 김진태는 별 대수롭지 않은 반응이었으나, 김춘배는 달랐다.
"마, 마지막 퀘스트일지도 모릅니다."
"으음. 그럴지도 모르지."
퀘스트에 대한 선구자를 뽑으라면 단연 김춘배다.
"퀘스트를 발생시키는 존재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끊임없는 성장을 요구하는 건 틀림없습니다."
"계속 싸우라는 거군."
"싸움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성장을 위한 싸움 느낌입니다."
파괴와 살육뿐인 전쟁이 아니라, 마치 서로 계속해서 부딪쳐 성장하는 대련 같은 느낌이다.
"천천히 생각해보자."
"예에, 대왕."
호칭은 임금이니 왕이니 하다가 이제 대왕으로 굳혀진 듯했다.
고구려는 태왕인데, 하는 박준필의 속삭임은 다들 못 들은 척했다.
"성으로 돌아가자. 가서 잔치를 벌이자."
"그래. 건국인데 행사는 해야지!"
여기 모인 이들은 모두 각 성과 마을을 이끄는 수장들이라 오래 자리를 비워둘 수가 없었다.
특히나 지배력을 공고히 다지지 못한 성의 성주들은 한시바삐 돌아가야 했다.
한자리에 모인 김에 거나한 술잔치가 벌어졌고, 다음날 각자의 성으로 돌아가 건국 기념행사 겸 고구려의 건국을 정식으로 선포하고 알리기로 하였다.
*
고구려가 건국되었다.
월드 메시지가 떴기에 노바의 모두가 그 메시지를 들었다.
변화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상태창에 소속 표기가 활성화됩니다.>
"헉, 이게 뭐야?"
아이언헤드령에 속하는 모든 이들의 상태창에 새로운 항목이 추가되었다.
<김개동>
종족 : 인간
출신 : 지구
소속 : 고구려
등급 : 왕국민
생명 : 100%
마나 : 0%
"오잉! 고구려래!"
모두가 고구려 소속이 되었으며, 정착민이던 등급이 왕국민으로 바뀌었다.
모두에게 일어난 일이라, 서로 모이기만 하면 이 이야기였고, 한국인들에게는 더없이 친근한 국명에 너 나 할 것 없이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저 상태창에 같은 소속으로 표기된 것만으로도 벌써부터 동질감과 유대감이 형성되는 것 같았다.
어쩌면 무패의 대왕을 모시는 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이 기반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고구려의 개국을 선포한다!"
"우와아아아!"
강철두가 아이언헤드 성에 돌아와 정식으로 개국을 선포하며 건국 축제를 벌이자 연대감은 한층 더 돈독해졌다.
역시 사람들의 유대를 이끌어내는 데는 축제만 한 게 없다. 같이 먹고 마시고 놀이를 즐기며, 같은 추억을 쌓아가는 것이다.
건국 축제는 열흘이나 계속되었으나, 모든 국민에게 배불리 먹을 음식과 술을 내리고도 창고가 마를 걱정이 없었다.
고구려보다 덩치 큰 속국 아미르 왕국에서 징발한 식량과 특산품들이 문경 성에 집결한 뒤, 부지런히 아이언헤드 성으로 옮겨졌다.
축제가 끝나갈 무렵.
"추우우웅! 대왕님께 보고드립니다."
사냥꾼 잭이 펜리르의 자취를 보고하기 위해 돌아왔다.
262화 잊혀진 도시
"어디라고?"
"잊혀진 도시입니다."
잭은 공손히 보고하며 두 손으로 좌표석을 바쳤다. 잊혀진 도시 근처로 향하는 이동마법진의 좌표석이다.
"고생했군."
강철두는 잭의 일처리가 흡족했다. 말뿐인 치하에도 잭은 황송하다는 듯이 더욱 고개를 조아렸는데, 얼굴에 가식이 없다.
작은 성 하나 차지한 영주가 제국 백작과 싸워 이겨 영토 일부를 뺏더니, 이제는 아미르 왕국의 영토 일부까지 뺏고 항복을 받아냈다.
'고구려는 이제 시작이다.'
이 모든 것이 1년 남짓한 시간에 벌어진 일이다.
지금 왕좌에 앉아있는 강철두의 끝은 어디인가?
그 위대한 대업을 곁에서 함께 거들 수 있음에 잭은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러가 쉬어라."
"예에, 대왕이시여."
잭이 물러나자마자 김진태가 나서서 물었다.
"갈 거야?"
"고생해서 알아 왔는데, 가야지."
"펫 대회도 끝났잖아?"
"후후, 다음 대회를 대비해야지."
"흐으음."
지금은 중요한 시기다.
국가의 기틀을 잡기 위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시기.
노바의 세력 상태창은 지구의 기준으로 보면 획기적인 관리 시스템이라, 이것을 이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세력 상태창을 기반으로, 그 아래 여러 정부 기구를 두고 개편 중이다.
"말린다고 네가 안 가겠냐. 갔다 와라."
"오. 체계 잡힐 때까지는 조용히 있으라더니?"
"그거야 박 사또가 적극적이야."
"후후후."
박준필을 생각하자 절로 실소가 나왔다.
국호 조선을 주장하던 그는 끝내 고구려로 낙점되자 실망하긴 했으나 크게 상심하지는 않았다.
"크흠, 고구려라면 타협할 만하지."
그는 조선이 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지만, 어차피 그가 좋아하는 것은 사료에 의한 진짜가 아니라 그저 사극에서 따라 한 겉멋이다.
옛 조상의 얼을 살린다는 취지로 고구려면 충분히 받들 만하다고 여기는듯했다.
"내금위 복장 기억나냐? 벌써 친위대들 그걸로 옷 주문 들어갔다."
"음? 그거 조선시대 거 아니냐?"
"몰라, 말을 안 들어. 고구려라고 이런 옷 안 입었다는 증거 있냐는데...."
"후후후, 내버려 둬라. 중요한 건 기상이다."
"그렇지."
어찌 옛 나라의 이름을 잇는다 하여 과거의 재림이 될까?
강철두가 원하는 건 옛 고구려의 상무 정신과 끝없는 정복 전쟁의 기상이다.
이곳 노바는 평화보다는 전쟁이, 협상보다는 승리가 더 절실한 세상이라 고구려를 택했을 뿐이다.
그 내실이 어떠하든 상관없다.
"직책명도 좀, 뒤죽박죽이 될 것 같긴 한데...."
"그런 건 알아서 해라."
"어휴, 알겠다."
어차피 강철두는 김진태를 '재상'으로 임명하며 할 일을 마쳤다.
왕국의 2인자 자격과 동시에 세력창의 거의 모든 권한을 허락했다.
사실상 강철두가 자리를 비워도 고구려의 내정을 다스리는 데 무리가 없을 정도의 막강한 권한이다.
그가 재상으로 불리든, 막리지, 영의정, 총리, 승상.... 그 무엇이 되었든 명칭 따위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좋아. 기본 골자는 절대왕정이야. 그리고 기본적으로 수도와 문경 성, 그리고 그 주변 마을까지 모조리 직할령이야."
북쪽으로 신서울과 일산은 기사 김도진과 김춘배에게 자치권을 주었다.
"음? 한양은?"
"몰라, 준필이 아저씨가 자치 안 한대."
"왜?"
실상 남쪽의 한양은 박준필이 사또로 잘 다스렸고, 그가 이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라 그의 영지로 내려도 상관이 없었다.
"자기는 앞으로 국가의 행정 정비에 힘쓰겠대. 한양은 직할령으로 그냥 관리 파견하재."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절대왕정과 봉건제가 뒤섞인 형태가 되어버렸지만 상관없다. 시행착오는 겪기 마련이고, 안 되면 뒤엎으면 된다.
왕국은 강철두에 의해, 그리고 강철두로 인해 만들어졌고 유지되고 있다.
고구려의 존립은 강철두의 강함과 무력이 전제되어야 하는 형태다.
"가는 길에 요정 영지도 다녀올 테니, 이건 네가 가지고 있어라."
"어?"
철두는 백년급 영약 십여 개를 모조리 김진태에게 주었다.
빠르게 올 테지만, 늦어질 수도 있다.
그사이 누군가 진전을 보여 무기술 4레벨에 오르면 바로 하사해줘서, 소드마스터로 단계를 올리는 게 낫다.
아미르 왕국과 유사 정전 협력을 맺은바, 지금은 딱히 적이 없지만 만일을 대비해야 한다.
고구려에는 철두를 제하면 아직 소드마스터가 셋뿐이다.
아미르 왕국과 비교해 보아도, 전성기의 아미르 왕국에는 공인된 소드마스터만 서른 가까이 되었고, 비공식으로는 그보다 두 배는 더 많았으니....
고구려의 현재 전력은 지나치게 1인에게 기대는 형국이었다.
"철두야. 너무 조급해하진 말자. 그래도 네 덕에 우리가 이렇게 나라 기틀이라도 세우는 거지, 초기 행성들 주민들은 대부분 어렵대."
지구가 완전 연결된 지 불과 몇 달 지나지도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유민 받는 거 어떻게 생각해?"
"유민?"
"지구인들 말이야. 저마다 자리 잡고 있긴 하지만, 외부 세력에 밀린 마을도 있고, 이래저래 위험한 데도 많은가 봐."
아이언헤드 성이나 신서울, 한양처럼 자립한 곳도 많지만, 점점 세력이 커지며 주변에 자리 잡은 영주들과 마찰을 빚는 곳도 많았다.
"으음, 진태."
"응."
"모든 건 네게 일임했다. 나는 적이 생기면 싸울 뿐이다."
"하하, 알았어."
"후후, 믿고 다녀오마."
"그래."
김진태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적어도 철두가 돌아올 때까지 적만은 만들지 말자.'
유민을 받는 것도 좋지만, 누군가와 척을 지고 행해야 한다면 미뤄두는 게 맞다.
개국 축제가 끝나는 날.
강철두는 단출하게 일행을 꾸렸다.
"신 르망, 대왕님을 따르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법사 르망과 사냥꾼 잭, 그리고 드워프 에르미스와 아르엘라였다.
"같이 안 가도 괜찮은가?"
"나는 방해만 될 뿐이다."
언제나 그림자처럼 아르엘라를 따르던 에그니스는 곧장 요정의 땅, 아이리스 후작령으로 복귀하기로 하였다.
"장로회는 내가 잘 설득할 터이니, 너는 그 펜리르를 잡아 돌아와라."
"후후, 알겠다."
"고대하고 있도록 하지."
철두와 에그니스가 악수하곤 아쉬운 작별을 나눴다.
"에그니스...."
"단장님. 저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
슬쩍 아르엘라의 귓가로 입을 가져간 에그니스가 작게 속삭였다.
"공주님, 부디 마음을 열길 바랍니다."
"...이미 결정했어요."
강철두를 부군으로 맞이하기로 하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략적인 판단이다.
자신은 어차피 요정족의 미래를 위해 몸 바쳐야 하는 공주의 신분.
그 부군 또한 요정족을 위해 쓰일 수 있다면, 좋은 것이 아닌가?
"건투를 빕니다. 단장님."
에그니스는 아르엘라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태어날 때부터 가혹한 운명을 진 아르엘라.
그녀가 조금이라도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일행은 함께 이동마법진으로 향했으나, 다른 좌표석을 이용해 헤어졌다.
에그니스는 아이리스 후작령으로, 나머지 강철두 일행은 잊혀진 도시로....
"으으! 나도 열심히 해야지!"
김진태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지금은 국가의 기본 기틀을 완성하는 게 우선이다. 최대한 노바의 시스템을 이용하는 쪽으로.
"아니 될 일일세! 중앙집권을 이뤄야 하네."
"아니, 사또. 이미 신서울과 일산 성은 장원으로 줘서 안 된다니까요?"
"허, 돌려받으면 되는 거 아닌가?"
"아니, 철두가 줬는데 어떻게 다시 뺏어요? 그리고 관리 측면에서 봉건제도가 꼭 나쁘진 않아요."
"어허! 재상! 아니 될 말이오. 영지가 몇이나 된다고 간접통치인가?"
"하, 노바 시스템 아예 안 쓸 수는 없잖아요?"
"내 말이 그 말일세. 노바의 시스템을 사용하면 충분히 직접 통치가 가능해."
"어째서요?"
"모든 영지를 직할령으로 삼고, 관리인을 파견하면 될 일 아닌가?"
"...하지만 이미 줬잖아요? 대왕의 위엄 문제예요."
"내가 직접 설득하겠네."
"...사또가 직접이요?"
"그렇소."
박준필의 열정은 대단했다.
그는 김도진과 김춘배 둘 모두 알고 있었다.
"김춘배 일산성주하고는 사이가 안 좋잖아요?"
"그건 다 옛말일세. 서로의 방식에 차이가 있어 의견이 갈렸을 뿐이지. 내가 설득하면 그도 대의에 충분히 공감하고 일산 성을 내어줄 것이네."
"...."
김진태가 망설이자, 박준필이 강하게 나섰다.
"지금뿐일세. 시일이 더 지나 굳건해지면 돌이키기 어려워. 봉건제는 관리가 쉽기는 하나, 너무 큰 자치권을 주는 건 길게 보면 좋지 않네."
박준필의 생각은 그렇다.
"적어도 행정권과 군권은 분리를 해야 하네. 건국 초기인 지금 이루지 않으면 더욱 곤란해질 걸세."
"후, 알겠어요. 맡길 테니 설득해보세요."
김진태는 박준필에게 그저 임무만 넘기지 않았다.
<박준필을 고구려 '국무총리'로 임명합니다.>
"허어! 내 반드시 그들을 설득해 내겠소이다. 재상."
"네, 알겠어요."
고구려의 대왕은 강철두다.
재상은 김진태로, 현대로 따지면 거의 부통령의 직위다.
그다음 3인자로 박준필을 임명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의 얼굴은 사뭇 비장하기까지 했다.
"법령의 발표도 서둘러야 하나, 이것은 반포 후에 돌이킬 수 없으니, 정비 후에 대왕이 돌아오신 후에 하도록 합시다."
"연구소에서 좀 고생해야죠."
"흐흐, 그치들은 일에 치이는 지금이 더욱 행복할 게요."
고구려의 연구소는 지금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농업 분야가 가장 크지만, 기술, 마법 등의 연구 기관이 부속으로 자리 잡으며, 이제는 행정, 법률, 도시계획 등 여러 행정 연구원들이 대거 확충되어 서로 머리를 맞대고 국가 기틀을 정비하는 중이다.
본디 대한민국에서 지식층에 해당했던 사람들이 이제야 제자리를 찾아, 자신들의 역량을 한껏 발휘하고 있었다.
"후, 나는 내 일에 집중해야지."
김진태는 종종 자신이 저들보다 잘난 것 하나 없는데 더 높은 자리에 있는 게 맞나 싶었지만, 이내 자신감을 가졌다.
각자의 역할이 다른 것뿐이다. 지식의 고하에 따라 지위를 나눌 수는 없다. 여긴 논리보다 힘이 우선인 노바의 세상이니까.
강철두가 가장 신뢰하는 인간이라는 타이틀과 강철두를 가장 잘 이해하는 능력이야말로 어쩌면 재상으로서 갖춰야 할 가장 큰 덕목일지도 몰랐다.
"보자, 부지를 더 넓히고.... 이제 위성 도시 형태로...."
김진태는 홀로그램 맵을 열어 도시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다른 건 몰라도 노바의 시스템 안에서 도시를 설계하고 배치하는 데 있어 김진태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오늘도 수도 아이언헤드는 보다 더 편리한 도시로 거듭나고 있었다.
이제 첫발을 내디딘 고구려는 차근차근 발전의 기틀을 마련해 나가고 있었다.
*
강철두는 잠깐의 어지러움 뒤에 찾아온 변화에 인상을 찌푸렸다.
"으으음."
"흡."
이동마법진 밖으로 보이는 어스름한 안개도 기분 나쁘지만, 진짜 불쾌한 것은 공기다.
습하고 텁텁하며, 왠지 모르게 기분 나쁜 공기에 숨 쉴 때마다 짜증이 치민다.
"저쪽입니다."
잭이 주변 지형을 읽다가 높은 산을 기준 삼아 한쪽을 가리켰다.
"잭."
"네, 대왕."
"너는 아무렇지도 않나?"
"예? 무엇을 말씀이신지...."
"이 불쾌한 기분 말이다."
"습도 말입니까?"
"으음...."
철두는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둘러보니 드워프 에르미스도, 요정 아르엘라도, 마법사 르망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미약한 저주의 기운을 느낍니다.>
<특성 '저주면역'으로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철두는 마법진의 안개 너머 아스라이 보이는 죽은 도시를 보았다.
잊혀진 도시.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 왜 들어간 자들은 있어도 나온 자들이 없는지도, 대충은 짐작이 갔다.
263화 저주
"저주가 퍼져있다."
"저주요?"
"허, 난 느껴지지 않는데?"
아르엘라가 나섰다.
"난 저주 내성이 있어! 저주가 걸려있다면 즉시 반발했을 거야."
"난 저주 면역이다."
"...?"
저주 내성은 마력을 소모해 저주를 제거할 수 있는 특성이다.
하지만 저주 면역은 그냥 패시브로, 아예 무슨 저주든 통하지 않는 특성이다.
"허, 어떻게 얻은 거야?"
"안 가르쳐준다."
"...."
아르엘라는 욕을 하려다가 말았다.
대신 서둘러 마력을 소모해 저주 내성을 활성화시켜 보았다.
"어엇?"
아르엘라는 깜짝 놀랐다.
"정말 저주가 있어!"
"헛, 정말입니까?"
"이런...."
에르미스와 르망이 깜짝 놀랐고, 잭도 난감한 기색이었다. 미리 알아채지 못한 그의 실책이었다.
"일단 안개 범위를 벗어나지. 잭!"
"네, 대왕."
"근처 마을로 가자."
"예에, 이쪽입니다."
마을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이동마법진이 안개 지역의 끄트머리에 있었는데, 그곳을 벗어난 지 고작 30분 거리에 제법 번성한 마을이 있었다.
"좋아. 펜리르는 나 혼자 잡고 오지."
"아니 될 말일세!"
에르미스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그는 임무의 성격상 강철두와 한시도 떨어질 수 없었다.
"하루 이틀은 문제없지 않나?"
"어찌 하루 이틀 만에 일이 끝난다고 보장하는가?"
"흐음."
철두가 인상을 찌푸렸다.
"난 따라갈 수 있어."
"넌 마력 다하면 쓸모가 없지 않나?"
"그치만... 저 안개가 저주의 매개라면 모든 지역에 저주가 퍼진 건 아닐 거다. 마력이 다하기 전에 안전지대로 이동해 보충하며 나아가면 된다."
"어느 세월에?"
철두는 함께 따라온 일행이 짐덩이처럼 느껴졌다.
저주라니.
가만히 생각하던 잭이 나섰다.
"제가 한번 조사해보고 오겠습니다."
"뭘?"
"잊혀진 도시 근방에 마을이 존재하는 이유는 여기에 얻을 게 있기 때문이죠."
트레저 헌터나, 도굴꾼, 혹은 그 외의 모험가들이 잊혀진 도시 주변에서 활동한다.
"대부분 저주가 약한 외곽에서 활동하는 자들이지만, 필시 중앙까지 탐험한 이가 있을 겁니다."
"으음, 그럴듯하군."
에르미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철두는 턱을 쓰다듬다가 말했다.
"잭, 방법을 알아봐라."
"예, 대왕."
"나는 대충 안을 살펴보겠다."
"헛! 나를 두고는 못 간다."
"하루가 지나기 전에 돌아올 테니 문제없다."
"하, 하지만. 일이 어떻게 될 줄 알고?"
"그럼 여기서 시간만 죽치고 있을 건가?"
"...."
에르미스는 고심했으나 곧 대답을 내놓았다.
"아침에 나가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는 거로 하세."
"후후, 그러지."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르엘라가 끼어들었다.
"팀을 나누자. 나는 철두와 함께 직접 조사팀으로 가지. 나머지는 모험가들을 찾아."
아르엘라가 그나마 저주 내성이라도 가지고 있지, 나머지는 아무것도 없다.
"후, 그러겠습니다. 적어도 저주가 무슨 종류인지는 알아야 하니까요."
르망이 수긍했고, 에르미스도 납득했다.
일행은 일단 여관을 잡고 보름치 숙박비를 선결제하곤, 서로 뿔뿔이 흩어졌다.
철두는 아르엘라와 함께 마을을 나섰는데, 안개 지역으로 들어서자 곧 다시 기분 나쁜 감촉이 전신을 옭아매는 것이 느껴졌다.
"아르엘라. 마력을 아껴라."
"언제 저주에 걸릴지 모르는데?"
"그래. 걸리는 순간 저주 내성으로 쫓아내라."
"아! 알겠어."
제일 좋은 건 아예 저주에 걸리지 않게 예방하는 것이지만, 계속 마력을 소모할 바에야 그냥 저주에 걸렸을 때 그것을 해제하는 데 쓰는 게 낫다.
"말 타고 가자."
"알았어."
파팟.
철두는 소나따를 소환해 올라탔고, 아르엘라는 사슴 같은 녀석을 소환했다. 생긴 건 꽃사슴인데 덩치가 커서 말이랑 별반 차이도 없었다.
두두두두.
달리는 속도도 말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염소 같은 뿔도 귀엽군.
"으으, 조금 울렁거리지 않아?"
"난 괜찮다. 그게 저주인 모양이군."
아르엘라는 안개 지역의 중심부로 갈수록 표정이 점차 나빠졌다.
10분 정도를 달리니, 잊혀진 도시의 외곽지에 다다랐다.
도시는 폐허 그 자체였지만 자연적으로 허물어지고 낡은 모습이라, 의외로 길은 멀쩡히 사람이 다닐 만했다.
"으으."
"기분이 어때?"
"무슨 저주인지는 모르겠지만, 호흡이 굉장히 불편해. 괜히 신경질도 나고."
"으음."
철두라고 해서 저주에 대해 잘 아는 게 아니라 할 말이 없었다. 저주 면역인 그는 아까나 지금이나 그저 불쾌함 정도밖에 느껴지질 않았다.
"더 가보자."
"굉장히 꺼려지는데?"
"무슨 저주인지는 몰라도 의도는 분명하군."
저주의 발원지로의 접근을 막아내고 있다.
"우린 지금 펜리르를 찾으러 온 거잖아?"
"그렇지."
"그럼 굳이 저주의 중심부로 갈 필요가 있어? 그냥 펜리르만 찾자고."
"후후, 모르는 소리."
철두는 손가락으로 도시 중심부를 가리켰다.
"펜리르는 저기에 있다."
"어떻게 알아?"
"그냥 그럴 것 같다."
"이 시벌...."
욕을 뱉다가 말았다.
아르엘라는 표정을 구겼으나, 워낙 아름다운 외모라 그것마저 매력이 있었다.
"하아, 뭐 좋아. 더 참기 힘들면 저주 내성을 활성화할 테니 가보자."
"좋다."
철두와 아르엘라는 탈것을 빠르게 몰아 중심부로 나아갔다. 곧게 뻗은 대로에는 건물의 잔해가 어지러이 놓여있어 돌아가야 할 길이 꽤 많았다.
허나 부러 중심으로의 접근을 막는 듯한 미로 같은 경로로 가느니, 건물 잔해를 넘어가는 게 더 낫다.
"걸어가자."
"후, 그래."
철두는 조금 가쁜 숨을 몰아쉬는 아르엘라를 보며 물었다.
"힘드나?"
"아니, 갈수록 마력 소모가 커지고 있어."
저주의 힘이 클수록 소모되는 마력의 양이 많아지고 있다. 이는 중심부로 갈수록 더 강해질 터.
"얼마나 버틸 수 있나?"
"으으, 아마 저기까지 가진 못할 거야."
아르엘라가 가리킨 곳은 중심에 위치한 거대한 성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거리다.
"넌 돌아가는 게 좋겠다."
"...고집부리고 싶지만 이건 안 될 것 같아."
아르엘라는 순순히 사슴을 타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황급히 떠나는 모습을 보니, 어지간히도 저주의 힘이 센 듯했다.
"흐음, 그 정돈가?"
타탓.
철두는 장애물처럼 놓여진 건물의 잔해를 지나 천천히 나아갔다.
잊혀진 도시가 아무리 크고 넓다 하나, 목적지를 정해놓고 가니, 몇 시간 지나지도 않아 곧장 도착했다.
점점 짙어지는 안개 따위는 전혀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후후, 여기군."
거대한 성이다.
잊혀진 도시 전체가 안개에 휩싸여 있었으나, 내성에 가까이 다가가자 놀랍게도 안개는 모조리 사라졌다.
시야를 가리는 것 없이 모습을 드러낸 성은 놀랍도록 온전한 모습이었다. 세월의 흔적으로 낡은 것 외에는 외력에 의한 파손 흔적은 없다.
철두는 낡은 성문 앞에 서서 아주 잠깐 고민했으나, 거리낌없이 행동에 나섰다.
드드드드드.
두 손으로 짚고 밀어젖히니 성문이 움찔하며 먼지를 뿜어냈다.
뿌지지직.
겨우 버티고 서 있던 성문의 낡은 나뭇조각들은 결국 철두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여기저기 부서지며 허물어졌다.
열어젖혔다기보다는 낡은 나무를 허물어뜨린 기분이었다.
"후후."
어쨌든 성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온 철두는 여태 안개가 내뿜던 텁텁한 불쾌감이 흩어진 것만 해도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던전 공략>
잊혀진 고대 성에 입장하셨습니다.
지하 묘지의 입구를 찾으십시오.
잠들지 못한 원혼을 해치우십시오.
목표 : 잠들지 못한 원혼 제거
보상 : ???
"허, 뭐야?"
철두는 눈앞에 나타난 던전 공략 퀘스트에 슬쩍 미소 지었다. 이거, 보상이 뭔진 몰라도 안 하면 손해 아닌가?
"흐음."
철두는 성을 휘이 둘러보았다.
딱히 지하 묘지라고 불릴 만한 입구는 없어 보였다.
수색을 해야 하나....
슬쩍 고개를 들어보니 이미 고점을 찍고 내려오는 중인 해는 절반이나 더 내려왔다.
"입구만 찾아봐야겠군."
철두가 성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돌아가는 시간까지 계산하면 얼추 1시간 정도는 수색할 여유가 있다.
입구만 찾고, 공략은 내일 해도 될 일이다.
*
다그닥, 다그닥.
"왜, 이래?"
아르엘라는 어지러이 움직이는 사슴의 목을 툭툭 쳤다.
"그르르르."
"헙!"
사슴의 눈알을 보니 벌겋게 충혈된 것이 정상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사슴은 저주 내성이 없었다.
파팟.
즉시 사슴을 소환 해제한 아르엘라는 두 발로 달렸다.
빠르게 닳기 시작한 마력이 이제 거의 끝을 보이고 있다.
빠르게 달리기 시작하는데, 곧 마력이 다했다.
"어엇?"
다시금 답답하고 울렁거리는 느낌에 속이 불편했다.
"하아, 하아."
호흡이 달리니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어지러움이 찾아오니 안 그래도 안개 때문에 흐릿한 시야가 더욱 뿌예진다.
'가야 해. 얼른....'
벗어나야 한다.
이 안개 지역에 계속 머무르면 안 된다.
저주고 뭐고 이 지역만 벗어나면 될 일이다.
타닥, 타닥!
걸음을 바삐 움직였으나 어쩐지 안개는 옅어지긴커녕 더욱 짙어지는 기분이었다.
위아래 좌우가 뒤섞인 기분이다.
방향감각이 제멋대로 된 느낌.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지?
가랑비에 옷이 젖듯 너무나 천천히 일어난 변화는 그 시작점을 알 길이 없으나, 깨달은 순간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르렀다.
"우욱."
토할 것 같다.
거대한 통 속에 넣은 채 누군가 마구 흔들어 놓은 듯한 기분이다.
"키에에에!"
설상가상으로 몬스터까지 나와버렸다.
"으으, 오크?"
오크다.
장검을 든 오크가 눈앞에 나타나 다짜고짜 덤비기 시작했다.
아르엘라는 도끼를 소환해 오크의 검을 향해 마주 내질렀다.
콰직!
오크 녀석은 실력이 별 볼 일 없어, 검이 두 동강 나며 그대로 몸이 쪼개져 죽어버렸다.
"흐으, 흐으."
거대한 압력이 몸을 짓누르는 기분이다.
마치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듯하다.
아르엘라는 빠르게 탈출하려 발을 바삐 놀렸으나, 급한 것은 마음뿐이고, 발걸음은 느리기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처음엔 마주치기도 힘들었던 몬스터들과 계속해서 조우한다.
"키에에."
오크, 리자드맨, 오우거까지.
잊혀진 도시에 이렇게 다양한 종의 몬스터가 살았던가?
알 길이 없다.
정보를 알고 들어온 곳이 아니다.
싸우고 또 싸우며 나아간다.
급한 마음과 별개로 싸움의 텀은 점점 짧아지고, 탈출할 길은 보이지도 않았다.
이제 어디가 안이고 밖인지도 헷갈린다.
거대한 안개가 미로가 되어 갇혀버렸다.
저벅, 저벅.
또 발소리다.
몬스터.
"칫!"
아르엘라는 새롭게 나타난 몬스터를 보곤 입술을 깨물었다.
거인.
우락부락한 거인이 나타났다.
압도적인 존재감.
오우거나 사이클롭스 따위는 아이 취급해도 될 정도의 위압감이다.
전설의 타이탄이 있다면 저런 분위기일까?
이길 수 있을까?
여기서 죽는 건가?
내가 죽으면 우리 요정족의 미래는....
포기할 순 없다.
선빵필승!
타탓.
거대한 도끼가 허공을 가르며 거인을 향해 나아간다.
캉!
젠장.
너무 쉽게 가로막혔다.
거인의 우악스런 손아귀가 도끼를 뺏어 들더니 이윽고 거대한 손길이 뺨을 후려쳤다.
쫘아악!
"정신 차려라. 아르엘라!"
어?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인데....
생각은 이어지질 못했다.
쫘악!
아르엘라는 볼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에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264화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거대 유적 잊혀진 도시는 많은 미스터리를 품고 있는 지역이다.
단순히 탐험심과 용기가 많은 모험가부터, 돈냄새를 맡은 도굴꾼, 과거의 고대 제국을 연구하기 위한 고고학자 등등.
사람이 오래 머물다 보면 거주지가 생기기 마련이고, 여럿이 사회를 이루면 거래가 발생한다.
코스트 마을도 그렇게 생겨난 마을 중의 하나였다.
이곳은 비교적 외지인의 왕래가 잦고, 그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상인들도 많다.
그 때문에 마을의 규모에 비해 여관의 개수도 많고, 서비스도 천차만별이었다.
철두 일행이 보름치 숙박을 결정한 여관은 코스트 마을에서 가장 고급이며, 조용한 여관이었다. 값이 비쌌지만, 이미 철두에게 돈은 중요한 의사결정의 조건이 아니었다.
영지의 세출만 해도 어마어마했고, 남의 주머니도 제 주머니처럼 쓰는지라 돈이야 있든 없든 만들어 쓸 수 있다.
여관은 보통의 여관들이 그러하듯 1층은 식사와 술을 마실 수 있는 식당이었고, 숙소는 2층 위로 마련되어 있었다.
너른 1층의 식당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은 드워프 에르미스는 호쾌하게 잔을 들어 맥주를 단번에 비우고는 테이블 위에 놓았다.
탁!
"끄어어!"
맛 좋다!
에르미스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이제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에르미스가 창밖으로 시선을 주니 슬슬 어두워지는 것이 곧 해가 질 모양이다.
가끔 실없는 소리는 하지만 허언하는 경우는 잘 없는 강철두이니, 머지않아 돌아올 터다.
끼이익.
여관 문이 열리며 덩치 큰 사내가 사람 하나를 어깨에 들쳐메고 들어섰다.
"혼자 먹냐?"
"클클, 양반은 못 되는군."
"양반이 뭔지 아냐?"
"무슨 소리냐? 드워프 속담인데."
"으음."
철두는 소통의 팔찌를 그저 툭툭 쳐보았다.
이건 이상하게 번역을 해주다가도, 이런 때에는 꼭 들어맞게 의역해주니 신기할 따름이다.
"그 귀쟁이는 왜 그리된 거냐?"
"모른다. 다짜고짜 공격하길래 기절시켰다."
"...올려다 놓고 오게나."
"후후, 알겠다."
철두는 2층 숙소에 아르엘라를 눕혀주고는 혹시 몰라 정령들을 불러냈다.
파팟.
"지키고 있어라. 무슨 일 생기면 말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네 정령을 보며 피식 웃고는 발길을 돌렸다.
에그니스와 약속한 게 있으니 지킬 것이다. 더군다나 미래에 그의 부인이 될 자다.
옛날 같았으면 요정과의 결혼 따위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는데.
"나도 많이 성장했군."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철두는 1층으로 내려와 에르미스와 술잔을 부딪쳤다.
"크, 어때. 성과는 있었나?"
"후후, 도시 중심부에서 던전을 찾았다."
"오! 역시, 저주 면역이라 그런가 강력하군. 중심부에 도달하다니 말이야."
"너는 알아본 게 있나?"
"별게 없어. 보통 모험가들이 하는 일이라곤 도시 외곽지에 갔다가 나오길 반복하는 것뿐이야. 도굴꾼도 같지."
"음? 왜지?"
"저주에 많이 노출되다 보면 저주 저항이라는 기술을 얻을 수 있는 모양이야."
"저주 저항? 기술?"
"맞아. 마력을 소모해 저주 저항력을 조금 높여주는 기술이지."
강철두의 저주 면역과 그보다 아랫급인 저주 내성은 모두 특성이다.
아마 저주 저항은 그보다 더 아래 형태의 기술인 모양이었다.
"흠, 그래서?"
"그래서긴. 저주 저항을 얻어 점점 활동 범위를 넓히는 게지. 그러다가 운이 좋은 자들은 몇 개월 만에 저주 내성이라는 특성을 얻는다더군. 길면 2년도 걸린다고 하네."
"흐음."
철두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그건 그냥 오봉산의 오우거 던전에서 누구나 얻을 수 있는 특성이다.
무려 용의 저주가 걸린 샘물에서 얻을 수 있는 특성.
고구려 대부분의 병사들은 저주 내성 정도의 특성은 얻은 상태다.
어쨌든 에르미스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저주 내성을 얻은 뒤부터 본격적으로 잊혀진 도시 안으로 들어가 탐험을 시작한다더군. 들어보니 꽤 쏠쏠하게 아티팩트 같은 게 발견되는 모양이야."
"흐음."
"허, 잘 모르니 심드렁한 모양이군. 고대 제국의 아티팩트는 지금의 마법 수준으로는 카피도 불가능한 엄청난 기술들이 녹아있다네."
"으음."
"이제야 관심이 동하는 모양이군. 흐흐."
말을 하던 에르미스는 인상을 팍 구겼다.
"젠장. 자네, 중심부에서 던전을 찾았다고 했지?"
"그렇다."
"대박이군."
"왜?"
"내가 듣기로 지금까지 던전이 발견되었다는 정보는 없었네."
"감췄을 수도 있지."
"으음, 그럴 수도 있겠지. 보물이 났다고 동네방네 떠드는 건 하수들이나 그러하니."
에르미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슬슬 저녁 먹을 시간이라 하나둘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큼, 이 이야기는 이따 합세."
"후후, 그러지."
철두와 에르미스가 본격적으로 식사를 주문해 먹기 시작하자 금세 이목이 집중되었다.
제법 비싼 값의 음식을 저리 아무렇지도 않게 대량으로 시키는 것도 그렇지만, 지나치게 교양 없이 먹는 모습이 더욱 눈길을 사로잡았다.
"전하. 신 르망, 조사를 마치고 복귀했나이다."
"수고했다. 앉아서 먹어라."
"예에, 전하."
르망이 합류해 식사를 시작하니, 여기저기서 왕이니 뭐니 하는 속삭임이 들렸다.
와중에 고급진 옷을 입은 검사 하나가 일어나 웃으며 다가왔다.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철두와 에르미스는 쳐다보지도 않았고, 르망이 정중히 나서서 사내를 물렸다.
"지금은 식사 중이라, 초면에 교류를 나누기에는 적절하지 못한 때인 듯합니다."
"하하, 교분을 나누기에 식사 시간만큼 좋은 때가 어딨습니까? 내 모두 살 터이니, 서로 통성명할 수 있는 영광을 내어주지 않겠습니까?"
그제야 철두가 돌아보았는데, 사내는 금발에 꽤 잘생긴 남자였다.
"후후, 앉아라."
"이거, 영광이옵니다. 소문의 아이언헤드 영주를 만나 뵙게 되었으니, 가문의 모든 이들이 저를 부러워할 것이옵니다."
사내가 이미 정체를 알고 접근했음에 르망이 흠칫 놀라며 사납게 그를 노려봤다. 사내는 눈치가 느린 편이 아니라 즉시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하하, 이것 보십시오. 영주님께서 하피 월간신문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 모습을요."
그가 보여준 신문엔 묠니르를 손에 쥔 강철두의 모습이 큼지막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후후, 유명해졌겠군."
"하하하, 맞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아이언헤드 영주님의 얼굴을 알아보는 건 아닙니다. 적어도 하피 월간신문을 구독할 정도의 유력가문들 사이에서나 유명한 게지요."
은연중에 자신의 가치를 높이며 사내가 정중히 인사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제국령인 툴룬 가문의 장남 아룬드가 성물의 주인을 뵙습니다."
"후후후."
강철두는 아룬드 툴룬을 보며 그저 웃었다.
"용건이 뭐냐?"
"하하하, 그저 교분을 나누어 보다 친밀해...."
"용건이 없으면 음식이나 주문하고 꺼져라."
"하하하, 과연 소문대로 성격이 참 급하십니다."
그때 르망이 끼어들어 여태 거슬리던 그의 행동을 지적했다.
"신문에서는 대왕이 고구려를 개국한 것은 실리지 않은 모양이오? 그대는 국가의 원수를 대함에 있어 조금 더 예의에 신경 써야 할 것이오."
"아! 이런! 최근 개국한 고구려가 아이언헤드령이었군요! 하하하, 이거 미리 알았다면 축하 사절이라도 보냈을 터인데요."
"우리 대왕님의 너그러움은 예의 없는 자에게는 해당이 없으니, 그대는 신속히 용건을 밝히시오."
"허어, 그러는 그대는 툴룬 가문이 제국의 공작 가문인 것은 알고 예의를 운운하는 것이오?"
아룬드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으나 그 눈빛은 추궁을 담고 있었다.
제국의 공작 가문이면 작은 왕국이나 다를 바 없다. 아니, 최근 개국한 신생 왕국에 비하면 오히려 그 급이 높은 바이나.
"후후후."
철두는 웃었다.
"양반 집 개도 개다."
"...!"
눈썹이 꿈틀한 아룬드가 당황한 것도 잠시, 더욱 미소가 짙어졌다.
"늑대도 잡아 묶이면 개가 되기 마련이지요."
"후후후."
철두는 웃었으나 르망은 참지 못했다.
"이노옴! 말을 삼가라!"
"허, 늑대가 키우는 개는 과연 다른가 보오? 저리 막 짖어대는 걸 보면."
아룬드의 말에 철두는 시원하게 웃었다.
"크크크, 그래. 용건이 뭐라고?"
"우리 툴룬 가문은 최근 사쿠라시티와 교류하며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소."
사쿠라시티라면 일본에서 적극 개발한 개척마을이다. 거기도 지구로 향하는 포탈이 닫히며 무언가 변고가 일어났을 터인데, 딱히 연락이 닿지 않아 무소식이었다.
"후후후, 그래서?"
"후후, 말 그대로요. 우리에게 지구인은 익숙한 이들인바, 여기서 그 지구인 중 가장 강하다는 아이언헤드. 그것도 성물의 주인인 자를 만났으니 그저 교분이나 나누고자 말을 건 것뿐이오."
정말 용건이 그것이 전부다.
"부러 당신을 만나고자 했다면 아이언헤드 성으로 가서 만났지, 왜 여기서 이러고 있겠소? 그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뜻밖의 인물을 만나 반가웠을 뿐이오."
"후후, 알겠다."
철두가 넙죽 손을 내밀었다.
"반갑군."
"허허, 소문대로 호쾌하기 그지없구려. 나도 반갑소."
"후후, 앉아라."
철두의 허락에도 아룬드 툴룬은 미소 지으며 르망을 흘겨봤다.
"소인의 속내는 좁아, 내게 짖어댄 개와는 한 테이블에 앉기 어렵소. 격이 맞지 않으니 개는 물려주시오."
"...!"
아룬드가 대놓고 모욕하자 르망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으나, 감히 대꾸하지 못했다. 그 주인인 대왕께서 저자와 교분을 나누기로 했는데, 그 신하 된 입장에서 무어라 항변할 것인가?
몸을 일으켜 사과 후 물러나는 수밖에 없다.
"신 르망이 눈치 없이...."
"앉아라."
"...!"
철두는 르망의 어깨를 내리누르며 대신 일어섰다.
아룬드의 앞에 선 철두는 그 키가 머리 하나는 더 커, 아룬드는 철두를 올려다봐야 했다.
앉아있을 때도 아우라가 대단했는데, 서서 마주 보니 그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다만 아룬드도 만만찮은 이라 그저 미소 지으며 철두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후후후."
"왜 웃으시오?"
"르망은 개가 아니다."
"하하, 그럼 우리 툴룬 공작가도 개가 아니오."
시종일관 미소 짓는 얼굴로 할 말은 다 한다.
새삼 제국의 공작 가문이라는 무게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 가문의 장자가 되는 이다.
그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이들이 심상찮은 분위기에 슬쩍 일어서서 관망하기 시작했다.
세 명뿐이었으나, 그 실력이 범상찮다.
적어도 이은영급, 아니, 적어도 한 명은 에그니스... 정도는 아니고 발베르 조르 정도는 되어 보인다.
레벨 5는 확실히 넘어 보이고, 레벨 6에도 한발 걸쳐 보이는 수준.
강철두가 이미 레벨 6의 경지라 그 아랫급의 하수들의 실력이 훤히 보였다.
"후후, 웃기는군."
"뭐가 그리 우습소?"
"네가 까부는 게 제국 공작이라는 이름값이냐? 저놈들 실력이냐?"
"하하하, 당연히 둘 모두지 않겠소?"
여전히 웃고 있지만 눈빛에 가득 차오르는 긴장감이 엿보인다.
"후후후."
철두는 인벤토리에서 검을 빼 들었다.
파팟.
그와 동시에 엉거주춤 일어섰던 아룬드의 호위기사들도 재빨리 무기를 소환해 철두의 앞으로 대시했다.
아룬드가 그사이 재빨리 뒤로 멀어지자, 자연스럽게 둘 사이에서 세 명의 호위기사가 대적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제 미소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의 아룬드가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 이게 무슨 뜻인지 여쭤봐도 되겠소?"
"전사가 무기를 들었는데 무슨 뜻이겠나?"
"...이렇게 아무런 명분도 없이 감히 제국의 공작 가문과 척을 지겠다는 거요?"
아룬드는 도무지 지금 상황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제 막 개국해서 어깨뽕이 심하게 차올랐나?
아무리 자신감이 과해도 그렇지, 굳이 이런 사소한 일에, 검까지 빼 들 일인가?
"명분? 후후 충분하다."
철두가 잔뜩 움츠러들어있는 르망의 어깨를 짚었다.
"내 부하를 모욕한 것은 나를 모욕한 것과 같다!"
"허, 전쟁이라도 하자는 거요?"
"후후, 마다할 필요 없지."
"고작... 그대 신하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철두가 씨익 웃었다.
"충분한 이유지."
울먹이는 얼굴의 르망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고, 아룬드는 기가 찬 얼굴이었다.
"허, 그 무슨."
막무가내도 정도가 있지, 이런 미친 자가 왕이라니? 전쟁을 얼마나 우습게 본단 말인가?
이쯤에서 용서를 구해야 하나?
아니면 그저 찔러보기용 허세인가?
아룬드 툴룬이 고민하는 그 잠깐 사이, 철두의 검이 움직였다.
슈확!
"...!"
투툭.
세 개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초인의 경지를 아득히 넘어선 수준의 검술이었다.
265화 왕의 무덤
투툭.
수급이 떨어졌다.
'미, 미친!'
보지도 못했다.
아니, 반응하지도 못했다.
"레, 레온 경!"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츠츠츳.
세 명의 호위 기사가 빛으로 화해 사라졌다.
태연히 그 전리품을 줍는 아이언헤드가 도무지 인간 같지 않았다.
무엇보다 레온이 당하다니?
그것도 단 일검에!
레온은 툴룬 공작가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기사다. 이렇게 죽을 이도 아니었고, 죽더라도 이리 간단하게 죽어서는 안 되는 이였다.
도대체 얼마나 괴물이란 말인가?
"후후후."
철두는 기사 셋을 해치우고 얻은 전리품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도끼 하나와 커다란 배낭 둘이다.
인벤토리 한 칸을 랜덤으로 드랍하는 것을 생각하면 도끼는 아마도 꽤 좋은 장비일 것이고, 배낭 둘은 소모품 꾸러미나 야영 등에 필요한 물품 또는 보급물자가 들었을 터다.
"이제 한 가지 이유만 남았군."
"...그, 그대는 이 일을 감당할 자신이 있으시오?"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보아하니, 단단하던 자신감도 한층 무너진 모양이다.
"후후, 감당하는 건 내가 아니다."
"...?"
"너지."
"...."
철두가 더욱 짙게 웃었다.
"나의 할아버지 강용철의 당부가 아니었다면, 너는 이 자리에서 죽었다."
할아버지 강용철은 멋모르고 덤비는 녀석들을 한 번은 봐주라 하였다. 누군지 몰라서 하는 실수를 모두 탓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강철두가 누구인지 똑똑히 알게 되었으니....
"선택해라."
"...."
"전쟁할 각오가 되었나?"
"...."
철두는 마지막 물음을 던지곤, 입을 다물었다.
조금 기다려줄 요량이다.
아룬드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턱을 덜덜 떨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아니, 그보다 이게 맞아?
겨우 이런 일로?
덜덜덜.
주체할 수 없이 몸을 떨어대는 아룬드를 보며 철두는 흥이 식었다.
"싸울 배짱도 없으면 시비를 걸지 말았어야지."
철두가 검을 겨눴다.
"히익."
"내 부하에게 사과해라."
"미, 미안하오."
"꺼져라."
"...."
아룬드가 부리나케 사라지자, 그때까지 비명이라도 새어나갈까 봐 제 입을 틀어막고 있던 르망이 허물어지듯 바닥에 엎드렸다.
"대왕이시여! 어찌 이 미천한 것 때문에 적을 두려 하시나이까?"
"내 부하 중에 미천한 놈은 없다."
"흐읍! 대왕이시여...."
눈물 콧물이 범벅된 르망은 그저 고개를 처박고 감동에 몸을 떨어댈 뿐이었다.
"후후, 앉아서 밥이나 먹어라."
"끄읍, 끕. 예에, 대왕이시여."
르망이 볼을 타고 줄줄 흐른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밥을 먹었다.
꾸역꾸역 음식을 밀어 넣으며 울었다.
아! 이분이라면.
대왕을 위해서라면 이 한목숨 아깝지 않으리!
본디 제국의 나트롱 백작령 소속 마법사였다가 협박에 못 이겨 아이언헤드에 잡혀 온 마법사는, 이제 진실로 고구려의 신하가 되었다.
에르미스는 한 상에서 밥을 먹는 고구려의 대왕과 그 수석 마법사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자네, 사이코패스는 아니지?"
"오, 드워프가 별말을 다 아는군."
"전쟁이 끝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일을 저지르고 그러나?"
"후후, 난 전쟁을 하자고 안 했다."
"...호위 기사 목을 쳐놓고 할 소리인가?"
"전사가 서로 무기를 꺼내면 죽을 수도 있지."
"...."
에르미스는 강철두의 당당함에 순간 대꾸할 말을 잊었다.
"난쟁이. 너는 누가 시비를 걸면 참는 편인가?"
"으음, 하지만 딱히 시비랄 것도 없지 않았나?"
"내가 기분 나쁘면 시비다."
밥 먹는 덴 개도 안 건드리는데, 거들먹거리며 다가와 당연하다는 듯이 말을 거는 것부터 별로였다.
특히, 자신의 제안을 상대가 거절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하는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아, 자네는 조금 세상을 너그러이 볼 필요가 있네."
"난 충분히 너그럽다. 난쟁이."
에르미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성물의 주인이라는 자리의 무게는 자네의 생각보다 더욱 크네. 지금 세상엔 단 두 개의 성물만이 있다네."
"세 개라며?"
"궁니르는 예전 묠니르처럼 주인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세상에 나온 것은 묠니르와 듀렌달뿐이지."
그 듀렌달의 주인은 무려 황제다.
그리고 묠니르의 주인이 강철두이니.
"세상이 자네를 주시하고 있네. 성물의 파괴력이 남다른바, 모두가 그 주인은 어떤 자인지 궁금해하지. 그가 포악하고 난폭하며 싸움광이라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겠나?"
"음, 건드리지 말자?"
"처음은 그렇겠지.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두려움은 위기감으로 바뀌고, 하나둘 그런 자들이 늘어나면 점점 여론이 모일 걸세."
"...."
"저자는 성물을 지닐 자격이 없다."
"후후, 다 덤비라고 해라."
"쯧, 괴물과 영웅은 한 끗 차이라네. 자네는 희대의 마왕이 될 수도 있고, 제국의 황제가 될 수도 있네. 자네가 걷고자 하는 길은 마왕의 길인가?"
"...!"
철두는 에르미스의 말에 가슴이 울리는 것 같았다.
마왕의 길.
이는 영웅의 길 퀘스트를 받은 철두에게 있어 단 한 번도 떠올려보지 못한 선택지다.
"마왕...."
"신은 대왕이 가는 길이 어디든 마땅히 따를 것이옵니다."
르망이 힘차게 대꾸하자 에르미스가 혀를 찼다.
"저 보게. 자네의 행동에 따라 고구려의 군세는 악마의 군대가 될 수도 있네."
"...."
"자네는 세상 모두를 적으로 돌리려는가?"
가만히 생각하던 철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나는 나의 부족을 지키기 위해 내 힘을 쓸 뿐이다."
"끄응."
방어적인 대답에, 그렇지 못한 행동이다.
에르미스가 보기에 누구보다 공격적인 게 강철두니까.
"자네는 일단 혼자 다니는 일부터 줄이고 호위를 항상 데려 다니게."
"후후, 내가 가장 강한데 누가 누굴 호위한다는 말이냐?"
"대왕의 칼은 신중히 뽑혀야 하네. 자잘한 시비에 모두 반응할 셈인가?"
"흐음."
그 말도 일리가 있어 철두가 턱을 쓰다듬었다.
친위기사 이은영이 떠올랐으나, 그녀는 철두에 이은 고구려 2인자라 데리고 다니는 건 낭비다.
성을 지키게 두는 게 더 나은 선택지.
"알았다. 너의 이야기가 할아버지의 염려와 같다. 내 새겨듣지."
"호오! 이거 보람찬 반응이군."
에르미스는 철두가 이렇게 순순히 수긍할 줄은 몰랐던지라 깜짝 놀랐다.
"그나저나 어쩔 셈인가? 방금 간 그놈이 참지 않을 텐데."
"사소한 시빗거리로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미 그 명분은 의미가 없다."
"끙, 그것도 맞는 말이지."
"툴룬 공작이 아들의 모욕을 복수하겠다고 나서면, 받아쳐야지."
"그래, 이미 일이 일어났는데 어쩌겠는가. 얼른 일을 마치고 돌아가세나."
때마침 잭이 돌아와 깍듯이 인사했다.
"대왕! 조사를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그래, 앉아라."
"어째 여관이 조용합니다."
잭이 둘러보니 1층은 철두 일행뿐, 다른 이가 한 명도 없었다. 지금이 저녁 식사 시간임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이다.
"사소한 시비가 있었습니다."
"아! 알 만하군요."
르망이 작게 속삭이자, 잭이 고개를 끄덕이곤 보고했다.
"잊혀진 도시가 발견된 지도 꽤 오래되어 사실상 크게 돈벌이할 만한 건 없다고 합니다. 대부분은 '저주 저항'과 '저주 내성'을 개화하기 위한 필드로 이용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고급 여관이 존재한다.
귀족들도 특성 개화를 위해 잊혀진 도시를 찾으니 말이다.
아룬드가 이곳에 머무르던 이유도 저주 내성을 얻기 위해서였으리라.
"그럼 잊혀진 도시를 진심으로 탐험하는 이는 없는가?"
"있습니다. 잊혀진 도시가 발견된 지 오래되었다지만, 워낙에 방대하고 저주가 강한 중심부는 아무래도 아직 남겨진 유적이 있을 테니까요."
고대의 아티팩트를 얻으려는 모험가도 여전히 활동하는 맵이다.
"문제는 하필 펜리르가 잊혀진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는 거지요. 이렇게 된 이상 저주 면역을 가지신 대왕님께서 펜리르를 직접 추적하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잭은 괜히 송구스러웠다.
자신이 더 이상 알아낼 수 있는 것도, 펜리르를 추적할 역량도 없다.
"아까 정찰을 나갔을 때 중심부 성에서 던전을 찾았다."
"헛, 던전 말입니까?"
잭이 깜짝 놀랐다.
"잊혀진 도시에서 던전이 발견되었다는 정보는 여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흥, 네놈이 모르면 전부 아닌 거냐? 이미 발견되었지만 감추었을 수도 있지."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저히 낮지요."
잭은 펜리르를 추적하다가 복귀하기 전, 잊혀진 도시에 대해 자세히 조사했다. 정보란 정보는 모두 긁어모았으나 던전 같은 건 발견 보고된 것이 없었다.
"제가 입수하지 못한 정보가 있을 수도 있지만... 최초 발견이라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던전은 발견하더라도 아무나 바로 공략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막강한 전력이 투입되어야 합니다. 말이 새어나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흥, 하지만 잊혀진 도시가 발견된 지 벌써 수십 년이다. 그간 한 명도 중심부에 도달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에르미스의 말에 잭이 확고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이야기가 퍼져나가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공략이 되었다면 던전이라는 특성상 주인이 생겼을 텐데, 아직 그런 변화가 없으니 미공략 던전이 확실합니다."
"으음, 일리가 있군."
에르미스가 수긍하자 철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던전은 공략하면 점령할 수가 있었다.
철두가 오크 마을 던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공략하고도 굳이 점령하지 않는 경우도 있겠지만, 철두가 아니고서야 굳이 그럴 이유가 없다.
"후후, 기대되는군."
지금 당장이라도 던전 공략에 나서고 싶다.
"아!"
잭이 갑자기 손뼉을 쳤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자 그가 가설을 하나 내놓았다.
"혹, 특별한 시기에만 등장하는 던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펜리르와 연관이 있는지도 모르지요."
"오!"
"하필 펜리르가 잊혀진 도시에 들어갔다는 것도, 던전이 발견되었다는 것도 영 상관이 없지 않을 겁니다."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상황을 정리했다.
"내일 나 혼자 던전 공략에 들어간다."
"...."
말리고 싶지만 말릴 명분이 없다.
현재 잊혀진 도시의 중심부까지 갈 수 있는 사람이 강철두 하나뿐이니까.
"나도 갈 거야."
"음?"
그때 2층 계단을 타고 아르엘라가 내려왔다.
한껏 수척해진 모습의 그녀는 퀭한 눈을 하고 있었으나, 그 눈빛만은 초롱초롱했다.
"나도 갈 수 있어."
"무리다."
"저주 면역."
"...?"
"나도 얻었어."
"허."
고작 하루.
하지만, 잊혀진 도시에서 가장 저주의 강도가 강력한 내성의 주변에서 버틴 시간.
아르엘라가 저주 면역 특성을 얻었다.
"던전, 이름이 뭐지?"
아르엘라의 물음에 철두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지하 묘지다."
"...지하 묘지."
아르엘라가 수척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말문을 열었다.
"고대 왕의 무덤이겠네."
"...?"
이 거대한 면적의 잊혀진 도시의 지배자가 묻혔으리라.
266화 계약의 의미
악몽이다.
'으으.'
늘 꾸던 악몽임을 인지하자마자 꿈에서 깨고 싶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싫어.'
보기 싫은 과거를 마주한다.
망각이란 이름의 축복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 기억은 잊을 만하면 꿈으로 찾아온다.
도망치는 어린 요정을 본다.
과거의 나.
작은 엘프는 미친 듯이 도망치고 있다.
'헉, 허억!'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함께 숨이 차오른다.
어느새 시야는 점점 가까워지며 어린 엘프와 하나가 되었다.
"헉, 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오로지 하나.
붙잡히면 안 된다.
감히 두려워 뒤를 돌아볼 수 없지만, 느껴진다.
검은 손길이 바로 등 뒤까지 다가왔다.
죽는다.
죽기 싫어.
도망친다.
도망칠 수 없어.
살려줘.
누가 좀 도와줘!
두려워 감히 외치치도 못한 말들만 차례로 머릿속을 스쳐 간다.
등 뒤에 닿은 검은 손이 마침내 작은 엘프를 사로잡았다.
"꺄아아아아!"
있는 힘을 다해 소리 질렀으나 이 세상엔 아무도 없다.
검은 괴물.
온통 검은색 그림자 같은 괴물이 작은 엘프를 잡고 입으로 가져가 삼켰다.
파팟.
이내 모든 세상이 사라진다.
눈을 떴을 땐 늘 그렇듯 익숙한 공간이다.
검은 숲.
엘프 아르엘라의 심상 공간.
괴물에게 잡아먹힌 순간부터 검게 변해버린 죽은 숲에서 눈을 뜬 아르엘라가, 곁에 무심히 서 있는 도끼 전사를 보았다.
"카다잔."
"...말하라."
"날 구해준 거, 정말 영감 아니었어?"
"나는 죽음 이후 너를 만났을 뿐이다."
"그럼 누구였지...."
"모든 건 발할라의 뜻이겠지."
"발할라...."
그 전사가 발할라였을까?
아르엘라는 끝나지 않는 고뇌를 접어두곤 마침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영감 아들과 결혼할 거야."
"...."
무심한 바바리안은 아무런 대꾸도 없다.
"그 녀석과 이 숲을 되돌릴 방법을 찾고 있어."
엘프는 누구나 마음속에 푸른 숲을 가진 채 살아간다. 그 숲이 크면 클수록 보다 많은 정령을, 보다 대단한 정령과 계약할 수 있다.
아르엘라의 숲은 누구보다 컸다.
하이엘프.
그중에서도 왕가의 혈통을 타고난 순혈 엘프의 타고난 재능은 이 끝없이 펼쳐진 숲의 크기가 증명한다.
하지만....
검게 죽어버린 숲을 보금자리 삼아 계약할 정령 따위는 하나도 없다.
"꼭 되돌릴 거야."
정령왕과 계약할 재능을 가진 이는 오직 공주뿐이니까.
정령왕의 계약자가 되어 부족을 위해....
아르엘라는 그 뒤까지는 굳이 생각을 이어가지 않았다.
굳게 마음먹은 희생이지만, 지금은 자격을 갖추는 게 먼저다.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는 진즉에 끝났다.
"허락해줄 거지?"
가혹한 운명을 타고난 엘프 공주와 결혼할 부군 또한 그 운명이 순탄하진 않을 터.
"감당할 수 있다면 해봐라."
"오, 허락이야?"
"전사는 허락을 구하지 않는다."
카다잔이 등을 돌렸다.
아르엘라는 괜히 웃었다.
"손주 하나는 낳아줄 테니까 걱정 마!"
"...흥."
아르엘라의 놀림에 카다잔이 코웃음 치곤 멀어졌다.
"크큭."
괜히 실없이 웃은 아르엘라가 심상 공간을 나섰다.
검은 숲.
그곳을 떠난 의식이 천천히 수면 위로 떠오르자, 시체처럼 누워있던 아르엘라가 번쩍 눈을 떴다.
사르르르.
"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정령들.
물, 불, 바람, 땅의 네 원소 정령들이 아르엘라의 머리맡에 모여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안녕?"
부시럭.
네 정령은 아르엘라의 말에 피식 웃고는 허공을 노닐다가 이내 공기 중에 흡수되듯 사라져버렸다.
"아!"
아르엘라는 잠깐 보았던 정령의 미소에 진한 아쉬움을 느꼈다.
그녀를 만나는 정령들은 대부분 인상을 찡그리거나, 두려운 얼굴로 피하기 바빴으니까.
엘프 공주에게 웃어준 첫 정령들이 아닐까?
"으윽."
아쉬움을 뒤로하고 몸을 일으키려 하니 천근만근이다.
그러고 보니, 어째서 난 여관에 누워있는 거지?
<특성 '저주 내성'이 잊혀집니다.>
<특성 '저주 면역'을 얻었습니다.>
"아!"
기억났다.
저주받은 도시를 헤매며 여러 적을 만나 싸우고 또 싸우다가, 마지막에 거인을 만나서 따귀를....
그게 철두였구나.
*
다음 날 아침, 철두는 부리나케 아르엘라와 함께 잊혀진 도시로 향했다.
"후후후."
"뭐가 그렇게 신났어?"
"당연히 신나지. 던전이잖아?"
"...긴장 안 돼?"
아르엘라의 물음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무려 던전 공략이니까.
던전을 탐사한 뒤 그에 맞는 던전 공략대를 꾸리는 것이 일반적인 던전 공략 수순인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상황은 무모하기 그지없었다.
던전을 발견한 게 어제인데, 달랑 두 명이서 오늘 공략하러 가는 길이니까.
통상적인 던전 공략 파티에는 던전 전문가인 베테랑 모험가, 함정 전문가, 고대어를 읽을 수 있는 마법사, 그리고 모두를 보호할 수 있는 기사 전력이 기본으로 구성된다.
"하긴...."
아르엘라가 피식 웃었다.
지금의 강철두는 왕국마저 혼자서 대적이 가능한, 그야말로 일인 군단이나 다름없는 자다.
그 숫자나 구성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함정이든 몬스터든 나오면 부숴버리면 될 일이다.
츠츠츳.
두 사람은 안개 지역에 들어섰다. 아르엘라는 이전과 다르게 옅은 불쾌감 정도만 느꼈지, 저주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이 정도면 방해되진 않겠어."
"후후, 좋은 소식이군."
철두와 아르엘라는 빠르게 중심부로 나아갔고, 곧 잊혀진 도시의 중심, 내성에 발을 디뎠다.
<던전 공략>
잊혀진 고대 성에 입장하셨습니다.
지하 묘지의 입구를 찾으십시오.
잠들지 못한 원혼을 해치우십시오.
목표 : 잠들지 못한 원혼 제거
보상 : ???
"이쪽이다."
강철두는 어제 미리 찾아둔 던전 입구로 아르엘라를 이끌었다.
"묘잖아?"
"이 뒤에 입구가 있다."
철두는 성의 뒷마당에 마련된 커다란 비석을 밀었다.
구르릉.
바닥에 누워있던 넓은 석판을 옆으로 밀어내자 아래로 향하는 지하 계단이 나타났다.
"오!"
"후후, 따라와라."
철두는 먼저 지하 계단으로 내려갔다.
아르엘라가 인벤토리에서 횃불을 꺼내 들려는데, 철두가 만류하고는 불의 정령을 불러냈다.
화르륵.
도마뱀처럼 생긴 녀석은 길잡이라도 되는 듯 앞서서 걸어가며 주변을 환히 밝혔다.
파팟.
그리고 곧이어 공기가 뭉치더니 네 쌍의 날개를 가진 작은 요정이 나타났다. 투명한 바람의 정령은 한껏 미소 지으며 철두의 주변을 어지러이 날아다녔다.
"그만 까불고 길을 찾아라. 늑대 녀석을 보면 바로 알려라."
까르르르.
뭐가 그리 신나는지 배를 잡고 웃던 바람의 정령이 횅하니 사라지고 기분 좋은 미풍만이 남았다.
"...."
아르엘라는 착잡한 얼굴로 정령들과 능수능란하게 소통하는 강철두를 보았다.
좋은 혈통을 타고난 하이엘프는 정령들이 꺼리고 두려워해 가까워지길 거부하는데, 전사 중의 전사 바바리안은 정령들이 저리 기꺼워하며 친해지려 하니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일단 외길이니 가자."
"알았어."
어쩐지 전보다 더욱 말투가 유순해진 아르엘라였다. 욕도 습관이고, 예쁜 말도 습관인지라 의식적으로 말하다 보니 습관으로 굳어진 듯했다.
두 사람은 기묘한 정적을 벗 삼아 지하 묘지를 나아갔다.
카타콤은 지루한 긴 복도로 이뤄져 있었는데, 양쪽 벽면엔 벽화와 조각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처음엔 두 사람도 그것들을 조사하며 나아갔으나, 별다른 소득이 없자 끝나지 않는 이 길을 그저 하염없이 걸어 나갔다.
"이상한데? 이 정도면 이미 도시를 벗어나지 않았나?"
"아닐 수도 있어. 쭉 직진으로 이어진 건 아니니까."
"후후, 아니다. 몇 번 꼬긴 했으나 쭉 북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래?"
적어도 오감에 있어서는 바바리안을 따라갈 종족은 없어, 철두의 방향감각은 정확했다.
"외길인데 별수 없잖아? 일단 가자."
"지루하군. 몬스터라도 나오면 좋을 텐데."
"말이 싹을 틔운다고 했어."
"후후, 요정 속담도 지구와 비슷하군."
"아무튼 말조심해."
"크크크."
철두는 욕쟁이 엘프의 잔소리에 참지 못하고 웃었다.
길은 끝이 없고, 지루하니 자연스레 대화가 길어졌다.
"내 심상 세계는 검은 숲이야."
"난 메마른 언덕이다."
"영가... 카다잔과 처음 만나고 심상 세계에 들어올 수 있었어."
"운이 좋았군. 원래 심상 세계는 바바리안 명상법을 통해서만 닿을 수 있는 공간이다."
"명상법?"
"배우지 않았나?"
"배우긴 했는데, 난 요정이야. 안 되더라."
바바리안 명상법은 정신을 집중해 모든 신체 부위를 통제하에 놓는 것을 1단계로 한다.
내부 장기까지 하나하나, 나아가 심장박동마저 조절할 수 있게 되면 그것을 대성으로 본다.
신체를 다스린 다음의 2단계가 마음을 다스리는 단계니, 이때부터 심상 세계가 열린다.
"심상 세계에서는 끝없이 단련할 수 있지."
"그래. 나도 뒤지게 처맞았지."
"부럽군. 아버지께 배우다니."
"...어, 미안."
"후후, 괜찮다. 나도 좋은 스승을 여럿 두었다."
철두는 운동이란 운동은 모두 섭렵했다.
안 다닌 학원이 없을 지경이니, 스승이라면 철두가 더 많다.
실전 압축으로 배웠을 바바리안 도끼술이 조금 부럽긴 하지만, 이미 지난 일.
"바바리안은 성인식 때 전사로서 인정받으며 제를 올린다. 그때 별이 된 선조들께서 그 전사가 마음에 들면, 심상 세계에 강림하시지."
"그 제는 어떻게 하는지 알아?"
"모른다. 그건 바바리안 주술사들의 영역이니까."
"으음."
아르엘라가 턱을 쓰다듬었다.
대뜸 철두가 화제를 전환했다.
"정령은 어떤가?"
"응? 아아!"
선조의 혼을 얻는 법을 공유했으니, 이제 통상적인 엘프 정령사들이 정령과 계약하는 방법을 들을 차례다.
"정령은 아무에게나 모습을 보이지 않아. 보통의 요정은 태어남과 동시에 정령의 선택을 받아."
"으음."
철두 또한 그랬다.
그는 4대 원소 정령 모두의 선택을 받았다.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지. 서로 그렇게 자라가는 거야. 천천히, 천천히 친해지는 거지. 그러다 유대가 쌓이고, 어느 순간 느낌이 와."
"어떤 느낌?"
"이제 더는 이 친구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느낌."
"흐으음."
"그때가 되면 비로소 계약을 맺어."
"굳이 계약을 맺을 필요가 있나?"
"있지."
아르엘라의 눈빛이 조금 우울해졌다.
"본래 정령은 이 세계에 있지 않아. 정령계와 여러 차원의 세계를 오가지. 본신은 오직 정령계에만 있어."
"계약하면?"
"그때가 되면 계약자에게로 오지. 정령계를 완전히 벗어나는 거야."
"오호."
심상의 세계에 선조의 혼이 강림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프는 정령이 머물 심상의 숲을 내어주는 것이다.
"이사하는 거군."
정령계에서 엘프의 심상으로.
"맞아, 그래서 신기하단 거야."
"뭐가?"
"넌 정령과 계약하지 않았잖아."
"후후, 그렇다."
"그런데 어째서 이 세계에 정령들이 그대로 헌신할 수 있는 걸까?"
"음?"
철두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왜? 너는 정령들이 여러 차원을 오갈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노바는 예외니까."
"...?"
"노바와 정령계는 이어져 있지 않아."
"허."
아르엘라의 눈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요정의 음울한 미래도, 그걸 희망으로 바꾸는 것도 모두가 엘프 공주의 어깨 위에 달려있다.
"후우!"
짧은 숨을 뱉으며 아르엘라가 눈을 반짝였다.
"그래서 궁금해. 네 정령 친구들은 분명 정령계를 벗어나 둥지를 텄다는 말일 텐데. 넌 계약한 기억이 없다며?"
"그렇다. 그 계약은 어떻게...."
철두는 말을 하다 말고 시선을 전방으로 향했다.
"허!"
아르엘라도 오싹한 기운에 짧은 숨을 뱉고는 온몸에 긴장을 끌어올렸다.
"이야기는 이따 다시 하지."
철두는 인벤토리에서 투핸디드 소드 '할아버지'와 '새벽어스름' 두 자루를 꺼내 쥐었다.
강철두는 전방에 나타난 괴물을 보며 천천히 걸어갔다.
267화 어디로 향하는가
아까부터 거닐던 복도는 차츰 넓어져 어느새 마차 두 대는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의 넓이가 되어 있었다.
복도는 옆으로만 넓어진 게 아니라 천장도 그만큼 높아져 있었다.
넓은 복도 너머에서부터 괴물들이 다가온다.
철그럭, 끼릭.
2미터쯤 되는 키에 저마다 녹슨 갑옷을 입고 있다. 어떤 놈은 투구를 쓰고 또 어떤 놈은 투구가 없었는데, 얼굴이 기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얼굴이라 할 것도 없다.
해골 그 자체의 두개골과 퀭한 눈두덩이에 붉은빛이 감도는 괴물.
[구으으으으.]
지옥에서 끓이는 주전자 같은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괴물은 열둘.
"데스나이트군."
"도와줄까?"
아르엘라가 도끼를 소환해 들고 나섰다.
"후후, 누굴? 쟤들?"
철두가 씩 웃고는 앞으로 나섰다.
"소용돌이!"
홰애애애애액!
쌍검을 쥔 바바리안이 팽이처럼 돌았다.
꽈지지직!
은은한 검기가 맺힌 검의 소용돌이가 지나는 곳에 멀쩡히 남은 데스나이트는 없었다.
남은 것은 잔해들뿐.
"후후, 가자."
"화끈하네."
아르엘라는 어느새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해져 버린 철두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령 없는 엘프는 전사로서 스스로의 가치를 높여왔으나, 그마저도 진짜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 보일 뿐이었다.
두 사람은 몇 미터 가기도 전에 다시 등장한 데스나이트 여섯을 보며 무기를 다시 끄집어냈다.
"한가롭게 대화하긴 글렀군."
"이제부터 본격적이네."
슬슬 몬스터가 출몰하고 있다.
처음 맞닥뜨린 몬스터가 데스나이트다.
여긴 아마도 기본 졸개가 죽음의 기사인 모양이다.
왕이 묻혔다는 게 억측이 아니다.
이 많은 수의 기사들이 함께 순장 당했다는 소리가 아니겠는가?
파파파팍.
데스나이트를 꾸역꾸역 죽이며 나아가다 보니 갈림길이 나왔다.
전면은 막혀있고 좌우로 통로가 다시 뚫려 있다.
"어느 쪽으로 갈래?"
"왼쪽?"
"으음."
"오른쪽?"
"으음."
철두가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아르엘라가 버럭했다.
"아니, 바람의 정령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 쪽으로 갔냐고."
"왼쪽으로 갔다."
"그럼 우린 오른쪽으로 가는 게 맞겠네."
왼쪽은 바람의 정령이 수색 중이니, 구태여 그 뒤를 밟을 필요는 없다.
"좋다. 가자."
"그래."
두 사람이 걸어간 오른쪽 길에서는 온갖 함정들이 등장했다.
천장과 벽에서 창이 나오는가 하면, 갑자기 잘 걷던 바닥이 푹 꺼지기도 했다.
함정이 위협적일수록 이쪽 길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나아간 두 사람은 한참 만에 거대한 석실에 닿았다.
"후후, 보물이군."
"와아...."
석실 한가득 보물이 가득하다.
여기저기 쌓여 있는 궤짝은 열어보는 것마다 금이 가득했고, 영롱하게 반짝이는 보석들도 돌멩이처럼 나뒹굴었다.
철두는 보물을 탐하기 전에, 먼저 보물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석관을 향해 나아갔다.
"이자가 왕인가?"
"저기 고대어가 쓰여있긴 한데."
"으음, 모르겠군."
철두도 아르엘라도 고대어를 아는 바가 없다.
아르엘라는 혹시 몰라 인벤토리에서 종이와 연필을 꺼내 그 고대 문자를 그대로 옮겨 적었다.
그사이 철두는 관을 살피고 있었는데, 이집트의 파라오 무덤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석관은 관 그 자체가 석상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정말 이게 왕의 관일까?
그럼 안에 왕이 들어있나?
미라가 되었을까?
데스나이트나 리치 같은 게 튀어나올까?
철두는 궁금증에 관을 열까 말까 잠깐 망설이다 관 뚜껑을 잡았다.
궁금하면 열어봐야지!
<잠들지 못한 원혼이 깨어납니다.>
하지만, 철두가 관 뚜껑을 열기도 전에 관에서 검은 연기가 뭉실뭉실 피어났다.
"헙!"
아르엘라는 깜짝 놀라 바닥에 주저앉았다.
"음? 왜 그러냐?"
철두의 물음에도 아르엘라는 그저 턱을 덜덜 떨면서 뭉게뭉게 뭉쳐나는 검은 그림자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
부릅뜬 눈, 감히 시선을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떨리기만 하는 눈썹. 덜덜 떨리는 턱과 볼살.
누가 보더라도 두려움에 사로잡힌 모습이다.
깡다구 있는 엘프 전사가 보이기엔 괴리가 있는 모습이다.
"또 저주냐? 정신 차려라."
쫘아악!
"허윽, 허억!"
아르엘라의 따귀를 때려주자, 막혔던 숨이 터지듯 몰아쉰 그녀가 철두를 보았다.
"처, 철두."
"어울리지 않게 그 눈빛은 뭐냐?"
"...."
"넌 아무것도 할 게 없다. 내가 막아줄 테니."
"...그."
철두는 더 들을 말도 없다는 듯이 아르엘라를 들어 구석으로 던져버렸다.
탓, 타닥.
내던져질 줄은 몰랐기에 아르엘라는 황당했지만, 참 철두 같다는 생각에 묘하게 긴장이 풀렸다.
공중에서 몸을 돌려 착지한 그녀가 벽에 등을 기대곤 뭉게뭉게 피어나는 검은 그림자를 보았다.
이전과 같이 두려움이 사로잡힌 눈빛이 아니다.
'달라.'
다시 보니 트라우마를 심어줄 정도로 매번 반복되는 꿈에서 본 그림자 괴물이 아니다.
생김새가 비슷하지만 묘하게 조금 달랐다.
<잠들지 못한 원혼이 온전히 깨어났습니다.>
마침내 형태를 갖춘 그것은 검은 구름이 뭉쳐진 그림자 같았다.
빛도 빨아당길 듯 검고 검은 색.
철두는 꺼림칙한 상대를 보며 묠니르를 꺼내 들었다.
파지지직.
검은 그림자는 히죽 웃었다.
[애송이가 신의 무기를 손에 넣었구나.]
"어?"
철두는 깜짝 놀랐다.
던전 보스인 듯한 몬스터가 대뜸 말을 걸어 올 줄은 몰라서다.
하지만, 말을 걸어왔다고 해서 대화를 받아주진 않는다. 바바리안은 히죽 웃으며 망치에 힘을 모았다.
"후후, 이빨 까지 말고 덤벼라."
[영글지 못한 존재가 신에 도전하는구나.]
"...너 신이냐?"
그림자뿐인 녀석이 허세가 심하군.
[컬컬컬, 신의 영역을 보았으나 나 또한 도달하지 못하고 인간으로서 죽은 자.]
"꼬시다."
[...모든 인간의 욕망은 결국 신이 되고자 욕망하는.... 네 녀석은 죽은 자도 열받게 만드는 재주가 있구나.]
"후후."
검은 원혼은 철두를 노려보았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지?
묠니르를 손에 쥔 것을 보면 현세에서 한가락 하는 놈일 텐데.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모양이구나. 너 같은 녀석이 묠니르의 선택을 받다니.]
검은 원혼은 강철두와 아르엘라를 한 차례씩 보았다.
"너는 싸우기 전에 말이 왜 그렇게 많냐?"
[클클, 미련이 남아 원혼이 되었는데, 어찌 세상사가 궁금하지 않을 수 있으랴?]
"희한한 몬스터군."
[신의 길을 걸은 과거의 영웅을 대하는 네놈의 자세가 건방지기 그지없구나.]
파지지지직.
철두는 더는 대화의 의미를 찾을 수 없어 마력을 끌어모았다.
"그래서 네 이름이 뭔데?"
츠츠츳.
검은 원혼 또한 스산한 힘을 끌어모으니, 풍기는 아우라가 달라졌다.
[짐의 이름은....]
꽈지지직!
그때 철두의 묠니르가 휘둘러지며 거대한 전격이 검은 원혼을 덮쳤다.
"후우우우."
철두는 깊은숨을 뱉어냈다.
몸을 쥐어짠 듯한 탈력감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다.
"흐읍."
똥꼬에 힘을 주고 비틀거리려는 몸을 곧추세우며 적이 있던 곳을 보았다.
"뒈졌나?"
모든 마력을 담았다.
여상하게 중얼거렸지만 꺼림칙한 적이었다.
넘실거리는 연기 같은 몸은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도 불분명하고, 무엇보다 적의 경지를 가늠하지 못한다는 게 영 거슬렸다.
철두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카드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공격.
이게 안 통하면 큰일인데.
<잠들지 못한 원혼이 영면에 듭니다.>
<던전 공략에 성공하였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최초 공략된 던전입니다.>
<특전을 고를 수 있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오!"
특전은 이제 무한결투장에서 소울 포인트로 구매할 수 있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지만, 주는데 마다할 필요는 없다.
철두는 인벤토리 1칸을 늘리는 것으로 특전 선택을 마쳤다.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용의 비늘>
제국의 황제는 용과 맞서 사투를 벌였으나, 끝내 용을 사냥하지 못하였다.
그때의 전투 중 얻은 비늘은, 신화 격의 전투를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물이다.
"...."
철두는 32인치 티비만 한 넓은 철판을 들곤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비늘이라고?"
"용 비늘이야?"
어느새 다가온 아르엘라가 관심을 보였다.
"용에 대해 아는 게 있나?"
"...전설 정도만."
아르엘라는 기억을 더듬었다.
요정과 바바리안의 고향인 발할라 행성에서는 용이 없었다.
용의 전설은 노바에 있는 것.
"인간의 정점에 오른 이여. 용의 날개를 꺾고 심장을 마셔, 신이 되리라."
"그런 걸 믿는단 거야?"
"...나도 그냥 노바에 떠도는 전설이나 시구로 생각했지."
아르엘라가 턱짓으로 관을 가리켰다.
"여기 결과물이 있잖아."
"이놈이 인간의 정점이란 소리냐?"
"여기 쓰여 있잖아. 황제라잖아."
"호오."
철두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이놈이 지금 황제의 조상인가?"
"아니."
"어떻게 그리 확신하냐?"
"제국어랑 저기 고대어가 다르잖아."
"그게 왜?"
"다른 제국이야. 지금 있는 제국의 역사는 50년도 안 돼."
"흐음."
"애초에 가장 강성한 '연합'에 제국이라는 칭호가 내려올 뿐이야. 지금 황제도 제국의 초대 황제야."
제국의 역사는 짧다.
마치 중국 역사처럼 새로운 제국이 들어서고, 다시 분열해 다시 또 새로운 제국이 탄생하고, 그러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너의 행보를 예의주시하고 있어."
"나?"
"그래, 묠니르의 주인이니까."
사람들은 기대하고 있다.
현시대에 단둘뿐인 성물의 주인.
하나는 지금 제국의 황제이고, 다른 하나는 고구려의 대왕이니.
다음 제국을 이룰 자가 누구이겠는가?
"충돌은 어차피 피할 수 없어."
"마다하지 않는다."
철두의 자신감에 아르엘라가 피식 웃었다.
"장로가 그랬어. 노바의 모든 것이 그렇대, 평화를 원치 않는 것 같다고. 끊임없이 경쟁시키고 싸우게 만든다고."
"원래 역사가 그렇지 않나?"
"노바에서는 부활할 수 있잖아. 죽은 기사들은 언젠가 다시 돌아와. 그렇게 부활한 자들이 돌아오는 게 누적되면 노바의 전력은 계속해서 높아진대."
"그게 어쨌다는 거냐?"
"모르지. 장로 말이니까."
아르엘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장로는 항상 불안해하더라고. 종착이 어딘가에 대해."
"종착?"
"노바가 이러는 이유가 있을 것 아냐."
"허, 그걸 어찌.... 퀘스트 말이냐?"
철두도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퀘스트 추적자 김춘배도 같은 견해를 내놓았었다.
퀘스트의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해하면서도, 그것이 곧 노바의 의지라고.
"장로는 어디 있나?"
철두의 물음에 아르엘라의 눈이 반짝였다.
'됐다.'
철두를 언제 장로에게 데려가나 오매불망 기다렸는데, 이제야 관심을 가지는듯해 속으로 고소를 머금었다.
"아이리스 후작령에."
"펜리르 잡고 가기로 한 곳이군."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아. 늑대 녀석을 잡으러 가자."
"잠깐만."
"왜?"
"챙길 건 챙겨야지."
아르엘라가 턱짓하는 곳을 돌아보니, 관이 자리한 묘실에는 여전히 무수히 많은 보물이 쌓여 있었다.
268화 신의 흔적
"흠, 영약 같은 건 없군."
"넌 영약에 왜 그렇게 집착하냐? 이미 위대한 검사의 경지에 이르렀잖아?"
레벨 6.
강철두는 초인의 영역을 넘어 위대한 경지에 이르렀다.
"내 부하들이 약하다."
"영약 있어 봐야 먹지도 못하잖아."
"...."
"네 부하들 실력 너무 허접이야."
철두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가 없다.
레벨 4만 되어도 영약을 먹여 신체 재구성을 통해 단전을 생성, 바로 레벨 5. 초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헌데, 이은영과 김춘배, 김도진을 제하고는 전부 레벨 3. 달인의 경지에 이른 게 고작이니....
"흥, 그러는 너도 고작 3레벨 아니냐?"
"야, 요정이 도끼 다루기가 쉬운 줄 아냐?"
"그럼 검을 익히지 그랬나?"
종족을 탓하기에는 요정족 최강의 검사 에그니스도 무려 레벨 6에 이르러 있다.
"...배운 게 도끼뿐인데 어떻게 해."
"후후, 아버지가 도끼를 잘 쓰시긴 하지."
"배운 게 이것뿐이야."
"에그니스에게 배우지 그랬나?"
"그럴 순 없지."
아르엘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아버지 카다잔에 대한 의리인지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철두는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아르엘라가 선조의 혼으로 들어앉은 카다잔을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닌 건 아닌 거다.
"요정의 몸으로는 어차피 도끼술의 극에 이를 수 없다."
"...아직일 뿐이야."
강철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닌 건 아닌 거다. 원한다면 내가 검술을 가르쳐주지."
"필요 없어."
조금의 고민도 없이 아르엘라는 거절했다.
"왜냐?"
"경지의 높고 낮음보다, 내겐 이게 더 중요하니까."
"...!"
강철두의 동공이 흔들렸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관점이다.
무기는 다양하게 많이 다루는 게 무조건 좋다고 여겼다.
배우고 나서도 어느 하나를 고집하지 않았고, 경지에 이르는 대로 더 손에 익은 무기를 쓸 뿐이었다.
보다 나은 무기가 있으면 갈아타는 게 맞지 않은가?
지금도 철두가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른 것은 검이지만, 가장 큰 파괴력을 내는 것은 묠니르 망치다.
그렇다고 도끼와 창, 활의 숙련도가 그리 낮은 것도 아니다.
대부분의 무기술은 달인의 경지인 레벨 3이다.
"해내겠다고 맹세했으면 해낼 뿐이야."
"...."
"경지의 끝을 보니 마니는 상관없어. 내게 가장 자신 있는 무기는 도끼야."
"좋다. 전사로서 너의 맹세를 존중하겠다."
철두는 아르엘라를 전사로 인정했다.
두 사람이 묘실에 있는 보물들을 모조리 챙겼을 때, 바람의 정령이 날아왔다.
"으음, 그쪽이냐?"
바람의 정령이 마침내 펜리르를 찾아냈다.
철두와 아르엘라는 서둘러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갈림길이 나오고 왼쪽 길을 따라 한참 따라갔다. 여기저기 한 번씩 갈림길이 나왔으나 바람의 정령은 망설임 없이 길을 인도했다.
"음? 빛이야."
"밖이군."
점점 옅게 새어 들어오기 시작한 빛은 구부정한 통로를 돌아가니 곧 환한 빛을 내뿜었다.
그 끝에 다다르니 아래로 10미터쯤 되는 높이의 절벽이었다.
고개를 빼꼼 내밀어 위를 바라본 철두는 혀를 내둘렀다.
"위가 더 높다. 여긴 거의 협곡의 바닥이라 생각해야겠군."
아르엘라도 고개를 내밀어 위를 보았다.
양쪽으로 까마득히 높은 절벽이 감싸듯 하늘로 솟아 있어 하늘이 꼭 반개한 사람의 눈자위 같았다.
"내려가 보자."
"그래."
10미터쯤은 아무것도 아닌지라 철두는 훌쩍 뛰어내렸다.
참방.
바닥엔 물이 고인 곳이 많았는데, 해가 닿지 않아 음습한 지형에 맺힌 이슬이 흐르다 고인 물웅덩이들이었다.
"저기다."
바람의 정령이 이끄는 대로 갔다.
협곡의 지형은 사람의 눈자위처럼 구멍 난 천장과 그 모습이 흡사해, 양쪽으로 길쭉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가운데는 그 폭이 넓고, 양쪽으로 갈수록 그 폭이 좁아져 빛도 잘 들어오지 않고 어두웠다.
점점 길이 넓어지는 것을 보니 협곡의 중심지로 향하는 길이다. 바닥은 평탄하지 않아, 바위를 오르기도 하고, 내리막을 내려가기도 하며 구불구불한 길을 건넌 끝에 펜리르와 조우할 수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햇볕이 마치 조명처럼 한 곳만 비추었는데, 그곳에 펜리르가 배를 깔고 누워있었다.
종종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전설의 영물은 푸르스름한 빛깔의 털을 지니고 있었다. 외형은 여느 늑대와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드디어 만났군."
철두는 생각보다 작은 크기에 놀랐으나 녀석이 풍기는 기세에 마음이 들었다. 적어도 아울베어보다는 강력한 녀석이다.
"후후후. 나랑 살자."
철두가 성큼 앞으로 나섰다.
영물이라 해도 그저 좀 패다 보면 알아서 고분고분 따르겠지.
파팟.
인벤토리에서 강철몽둥이를 꺼내 다가서는데, 가만히 햇볕을 쬐던 펜리르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녀석은 짖지도 않고, 으르렁거림도 없이 그저 철두를 쳐다보더니 어딘가로 어슬렁 걸어갔다.
"뭐냐? 도망치는 거냐?"
쇠몽둥이를 쥔 철두가 성큼 따라갔다.
햇볕이 들어오는 곳이다 보니, 눈이 벌써 적응했는지 그늘진 비탈면 근처는 퍼뜩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슬렁거리는 늑대를 따라가며 눈을 깜빡이던 철두는 깜짝 놀랐다.
온전해진 시야로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드러났다.
"...."
거대한 생명체의 뼈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거대한 몸뚱이를 짐작게 하는 갈비뼈부터, 넓게 펼쳐진 날개뼈, 길쭉하게 뻗은 척추를 따라 이어지는 꼬리뼈까지.
철두는 찌릿한 느낌을 받았다.
시선을 뗄 수 없다.
뼈밖에 남지 않은 괴물은 이미 죽은 지 수십, 수백 년은 지났을 터지만, 시선을 잡아끄는 마력이 있었다.
너무 자세히 봤기 때문일까?
정보량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며 탐색 기술에 의해 대상의 정보창이 떴다.
<드래곤 사체>
자연사한 드래곤의 사체.
수천 년이 지났으나 그 뼈는 전혀 마모되지 않았다.
시스템 메시지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용의 신비를 발견하였습니다.>
<용은 영원한 안식에 들었습니다.>
<월드맵에 용의 안식처가 표시됩니다.>
푸스스스.
그때 용의 사체 앞에 서 있던 펜리르의 신형이 흐릿해지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헛!"
깜짝 놀란 철두가 다가가 쇠몽둥이를 휘둘렀으나 펜리르는 유령처럼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이런!"
늑대를 쫓아와 놓고 다른 것에 눈이 팔려 놓쳐버리고 말았다. 정신을 집중해 주변을 살폈으나 펜리르의 기운은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파팟.
철두의 의지에 모습을 드러낸 바람의 정령을 보곤 빠르게 부탁했다.
"펜리르를 찾아봐!"
스르륵.
잠자리처럼 얇은 날개를 파닥이며 바삐 날아갔으나, 철두는 어쩐지 정령이 펜리르를 찾아내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쳇!"
"놓친 거야? 엇?"
철두를 향해 다가오던 아르엘라는 드래곤의 뼈를 보고 깜짝 놀랐다.
"와아...."
뼈밖에 없는데도 존재감이 굉장한 녀석이다.
"우, 움직이는 건 아니겠지?"
"죽은 지 오래된 놈이다."
"용이 실존하는 거였네...."
"용의 신비에 대해 모르나?"
"용의 신비?"
아르엘라는 금시초문인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철두는 문득 생각이 나 월드맵을 열었다.
지금 그들이 딛고 선 곳에 용의 안식처가 표시되었다.
"바보같이 이걸 잊고 있었군."
철두가 처음 용의 신비를 발견한 것은 오봉산의 용의 둥지 던전에서다.
버려진 용의 둥지에 오크 들이 마을을 이루고 던전을 이룬 그곳에, 용이 떠나기 전 자취를 남겨두었다.
그리고 다음 자취가 맵에 표시되니....
<월드맵에 용의 다음 자취가 표시됩니다.>
그곳이 용 호수다.
거기서 치료 효과를 지닌 용의 각질을 얻었다.
"이걸 잊고 있었군."
그때 다시 용의 다음 자취가 월드맵에 표시되어 있었는데, 이래저래 바쁘다 보니 잊어먹고 있었다.
연달아 전쟁을 치르며 영지를 지켜내는 데 신경 쓰다 보니 용의 발자취니 뭐니 하는 건 후순위였다.
"여길 봐라."
"이게 무슨 표식이야?"
"여길 따라가면 용의 흔적이 남아있다."
"살아있는 용을 만날 수 있다는 거야?"
"그럴지도."
아니면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이미 죽어버린 용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고 말이다.
철두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용의 사체에 다가갔다.
"으음."
기둥처럼 굵은 용의 갈비뼈를 붙잡아 보았다. 얼핏 힘을 줘봤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작은 발톱 뼈를 잡아 뜯어내 봤으나, 어쩐 일인지 조금도 미동도 없었다.
"끄응, 뭐야 이게?"
철두의 힘으로 뽑아내지 못하는 뼈가 있나?
"뭔가 이상해."
아르엘라는 철두가 용을 쓰는 것을 보며 용의 사체가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이건 아예 고정되어버린 것 같아."
"무슨 고정?"
"아무리 무거운 바위라도 네 힘이면 흔들리기라도 해야 하는데, 이건 조금도 그런 기색이 없어."
"...그래서?"
"세상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것 같아."
"물리법칙을 이야기하는 거냐?"
아르엘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지. 어쨌든 이건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것 같아. 이렇게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지만 영향력은 행사할 수 없는 것처럼.... 아니, 맞아. 다른 차원의 존재야."
"허."
2차원이 3차원을 이해할 수 없듯, 3차원적인 존재인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4차원의 존재란 말인가?
"흐음."
철두는 잠깐 용의 뼈를 노려보다가 대뜸 검을 꺼내 내리쳐보았다.
까아앙!
아예 검강까지 일으켜 내리쳐봤으나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까아앙.
조금의 흔적도 남기지 못했다.
뼈의 강도가 지나치게 단단한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서로 상호작용 자체를 하지 않는... 정말 다른 차원의 존재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마모되지 않는다 했군."
"어떻게 할래?"
"뭘 어떻게 하나? 돌아가야지."
철두는 애당초 목표로 했던 펜리르를 길들이지 못했지만, 소득이 없는 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 돌아가자."
두 사람은 왔던 동굴의 입구로 다시 들어가 긴 복도를 지나 지하 묘지 입구로 돌아왔다.
"뭐야? 안개가 그대로야."
아르엘라는 여전히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는 저주의 안개를 보며 의아해했으나, 철두는 별 대수롭지 않았다.
"이제 여기엔 볼일이 없다."
내 알 바 아니다.
던전의 공략과 잊혀진 도시의 저주는 영 상관관계가 없는 것이었겠지 뭐.
그도 아니면 이 안개도 다른 차원의 존재가 내린 조화라든가.
두 사람이 여관으로 돌아온 시간은 해가 지고, 자정도 넘어 새벽이 된 시간이었다.
환히 불을 밝힌 1층 식당에서 일행이 카드 게임을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오! 늦었지만 돌아왔군."
"대왕! 펜리르는 찾으셨습니까?"
"아니, 놓쳤다."
철두는 지하 묘지 던전에 갔던 일과, 원혼을 해치운 일, 그리고 협곡에서 만난 드래곤의 뼈까지 모든 것을 이야기해주었다.
그 이야기를 눈을 빛내며 듣고 있던 잭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쿠어스의 협곡!"
"음? 무슨 소리냐?"
"마, 말씀하신 지형이 쿠어스 신의 성지 묘사와 비슷합니다."
"쿠어스 신?"
"사냥꾼과 나무꾼의 신이지요."
"...?"
철두가 아는 신은 할아버지 강용철이 모시는 대지의 신인 아리아뿐이다.
"쿠어스 신은 승천하기 전, 대지를 향해 거대한 도끼를 휘둘러 협곡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호오."
철두가 턱을 쓰다듬었다.
쿠어스 신이라....
269화 행성과 노바
방향을 가늠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길을 안내해줘."
사르르륵.
바람의 정령이 재주를 부리듯 하늘을 날며 앞서갔다. 일행은 그저 그 뒤를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저주의 안개가 낀 잊혀진 도시를 크게 돌아 이동하는 동안 잭은 상당히 들뜬 모습이었다.
"왜 그리 호들갑이냐?"
"대왕이시여. 노바의 사냥꾼들이나 숲지기들은 대부분 쿠어스를 믿습니다."
"쿠어스 사제냐?"
"사제는 신의 선택을 받아야만 할 수 있습죠. 저는 이를테면 신자라고 하는 게 맞겠군요. 이번에 정보를 취합하다가 쿠어스의 성지가 잊혀진 도시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지형에 대한 묘사를 듣자마자 떠올릴 수 있었다.
"이야기로만 전해 듣던 쿠어스의 성지로 가는 길인데 어찌 설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으음, 쿠어스는 어떤 신이냐?"
"사냥의 영웅이었지요."
잭은 한참이나 천진난만하게 떠들어댔다.
대부분이 쿠어스의 활약상이었는데, 거대 도끼로 괴물을 때려잡았다, 활을 쏘아 날아다니는 새 다섯을 잡았다 등....
들어보면 대단하긴 한데, 신의 업적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걸 했다고 신이냐?"
"하하, 아닙니다. 그저 원래부터 비범했다는 거지요. 영웅으로 칭송받는 건 성물 레비아탄을 얻은 이후입니다."
"성물 레비아탄?"
"내가 아는 건 셋인데?"
"하하, 현시대에 소재가 밝혀진 성물이 셋이지요."
파괴의 망치 묠니르.
필살의 창 궁니르.
부러지지 않는 성검 듀렌달.
"고대 기록까지 합치면 일곱입니다. 레비아탄은 그중 하나지요."
"흐음, 그건 지금 어디 있어?"
"그저 기록에만 남아 있습니다. 바로 쿠어스 신의 기록에 말입니다."
사냥꾼의 신 쿠어스는 거대 해수 레비아탄을 물리치고 도끼를 얻었는데, 그것이 괴물의 이름을 딴 성물 레비아탄이다.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그는 용을 물리치고 마침내 승천해 신이 되었으니, 레비아탄은 아마 신계에 있겠지요."
"으음."
철두는 턱을 쓰다듬었다.
"쿠어스가 본래 인간이었단 말이냐?"
"아유, 당연한 소릴 하십니까. 본디 모든 신은 인간이었지 않습니까?"
"...."
지구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강철두의 사고에서는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는 관념이나,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증명하기만 하면 신조차도 될 수 있다는 거군."
"암요."
잭이 당연하다는 듯 맞장구쳤다.
철두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증명은 다름 아닌 용을 사냥하는 것일 터.
"용의 백골이 있었으니, 신화가 맞는 모양이야."
"후우, 긴장되는군요."
잭은 오래도록 믿어온 신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에 굉장히 크게 흥분했다.
"전설로, 쿠어스가 용을 잡을 때 크게 도끼를 내치니 땅이 쩍 갈라져 무저갱의 협곡이 생겼다 전해집니다. 신께서 그길로 승천했으니, 신도들은 전설 속의 무저갱 협곡을 성지로 부르고 있지요."
그 성지로 향하는 길이다.
"저기군."
"저, 저길 넘어야 한다구요?"
높은 절벽이다.
높이가 30미터는 넘는다.
지진이라도 나서 단층이 생긴 모습 그대로 저 구역만 높이 솟구쳐 있다.
"아니면 저리 돌아가든가."
철두가 가리키는 곳은 자욱한 안개가 가득한, 잊혀진 도시의 권역이었다.
"엇? 저기 줄이 있습니다."
잭이 말과 동시에 달려 나가 절벽 한쪽에 매달린 줄을 당겨 보았다. 제법 튼튼한 줄은 누군가 인위적으로 매어 놓았는데, 절벽에는 군데군데 사람이 밟고 올라서기 좋게 움푹 파인 지형도 몇 있었다.
"제가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30미터 정도 되는 암벽이다.
신체 능력이 남다른 이들에게 밧줄까지 매인 이 암벽은 장애물도 아닌지라 빠르게 올라섰다.
"히야...."
가장 먼저 올라선 잭은 감탄했다.
일대가 전부 불쑥 솟구쳐 있었는데, 그 가운데가 쩍 갈라져 있었다.
"이게 레비아탄의 도끼 자국이군요."
고원 위에서 내려다보니 협곡이 쩍 벌어진 게 정말 도끼 자국이라 할 만했다.
가까이 다가서니 그 아래로 깊은 어둠만이 보일 뿐,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었다.
"무저갱입니다. 저 아래에 뭐가 있는지는 자세히 알려진 게 없었습죠."
"용의 백골이 있다."
"하아.... 그 소식이 알려지면 모험가들이 몰려들겠군요."
"소용없다. 그건 가져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해보지 않고 못 배기는 게 또 인간의 욕심이지요."
철두는 피식 웃었다.
사람이 몰려들든 말든 알 바가 아니다.
애당초 여기 있는 이들 빼곤 아무도 저 아래 용의 백골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도 없으니, 소문이 나지도 않을 것이다.
무저갱의 협곡이 내려다보이는 곳곳엔 사람들이 머물다간 흔적이 있었다.
"순례자들이나 신도들일 겁니다."
절벽에 쳐놓은 줄도 그들이 설치해 놓은 것 같았다.
"노바에는 신이 얼마나 많은 거냐?"
"워낙에 많으니 잘 모르지요."
"...."
철두가 아는 신은 이곳 성지의 쿠어스 신과 강용철이 대사제가 된 아리아뿐이다.
"철두. 신은 본디 잊혀지기 쉬운 존재네."
에르미스가 나서서 말문을 열었다.
"바바리안은 어떤 신을 믿는가?"
"우린 조상신을 믿는다."
"개중에 특별한 신은 없는가?"
"있지. 혈통을 타고 올라가면 최초의 바바리안 발할라가 있다."
에르미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 제타 행성 출신의 드워프들은 믿는 신이 제각각이지. 뜨거운 화염의 신을 믿기도 하고, 망치의 신, 진실과 거짓의 신을 믿기도 했지."
"지금은 잊혀졌나?"
"여긴 제타가 아니라 노바니까."
에르미스의 낯빛이 진지해졌다.
"제타가 노바에 흡수된 때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지만, 똑똑히 기억하고 있네. 우리 제타 행성에서 신은 실존하는 이들이었네. 자네 조상신이 일으키는 기적처럼 힘을 냈지."
"흐음, 지금은 안 된다는 소리냐?"
에르미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는 제타를 버리고 노바로 이주해왔으나, 신은 아닌 모양이야. 신의 실체는 행성에 속박되는 게 아닌가 싶으이."
에르미스의 음성에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사제는 신성력을 잃어버렸고, 성기사는 더 이상 고결하지 않네. 신의 힘이 사라져버렸지."
"신이 사라진 건가?"
"단절이겠지. 한 번씩 미궁으로 제타와 연결되지 않는가?"
에르미스는 담담히 이야기했다.
"제타를 떠나 노바로 이주해온 드워프들의 목표는 들어봤겠지. 신들의 무기를 빚는 것.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신들에게 들려주는 것 말일세."
자이언트 포지의 드워프 장인들은 위대한 장인이 되기 위해 성물을 만들어내는 것에 모든 것을 바치고 있다 하였다.
"그래서 얻는 게 뭐냐?"
"뭘 얻어야 하나? 신들이 싸우도록 돕는 거지."
"왜?"
"당연한 소릴 하는군. 고향을 되찾기 위해서지."
"...?"
철두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이라 깜짝 놀랐다.
"되찾아?"
"그렇다네. 제타를 되찾는 것. 그것이 우리 자이언트 포지에 모인 드워프들의 유일한 소망이지."
"...."
철두는 생각이 깊어졌다.
'되찾는다라....'
이미 이렇게 흘러가 버린 것을 어떻게 되돌린다는 말인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슬쩍 옆을 보니 아르엘라도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너도 같은 생각이냐?"
"...고향을 잃은 모든 종들이 그러하지 않을까?"
"...."
"너는 어때?"
철두에게는 조금 충격이었다.
지구에서 포탈을 타고 노바로 넘어와 철두는 무한한 자유로움을 느꼈으니까.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찾은 듯 마음이 편하고, 모든 억압에서 벗어난 홀가분함을 느꼈다.
노바에서의 적응과 생존, 그리고 그만의 부족을 만들어 번영하는 것만 생각했지, 이미 떠나온 고향 행성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나는...."
발할라에 대해 생각해 보아도, 너무 어렸을 때라 그런지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부모님을 되살릴 수 있는 게 아니고서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자연히 지구를 생각하니, 지구에 남겨진 여러 사람들이 떠올랐다. 좀비 월드가 되어버린 그곳엔 여전히 생존자들이 있다.
발할라 출신의 반쪽 지구인이 아니라면 무엇을 그리워할까?
'문명....'
지구가 잃어버린 신과 신성력이 있다면 인류가 수천 년에 걸쳐 이룩한 과학 문명과 그 이기다.
그것이 그들이 잃어버린 신의 은총일 것이다.
"...모르겠군."
"클클, 자네는 자네만의 길이 있지 않은가?"
길이란 소리에 철두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영웅의 길...."
이것이 인도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전에 퀘스트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지구 종말이 도래했다 하여 구원을 찾아 노바로 왔고, 정착하길 원했다.
퀘스트는 끊임없이 노바에 적응하고 노바의 주민이 되도록 이끌고 있는데.
"너희는 퀘스트를 따르지 않는 거냐?"
"드워프는 드워프만의 길이 있다네."
"...요정은 뒤늦게 후회할 뿐이야."
"후회?"
"이대로 가다간 백 년이 지나기도 전에 노바에서 요정은 사라질 거야."
"왜? 아이를 못 낳나?"
"그런 문제가 아냐."
아르엘라는 철두를 빤히 보았다.
"너는 전사인가?"
"전사다."
"그럼, 바바리안이라고 할 수 있어?"
"그...!"
철두는 자신 있게 말하지 못했다.
선조의 혼이 없는 바바리안이 무슨 바바리안인가?
바바리안 타투도 없는 그를 보고 초면에 바바리안이라고 짐작하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그렇군."
노바에서는 더 이상 바바리안이 나올 수 없다.
죽음이 없는 이곳 노바에서는 더 이상 위대한 선조의 혼령 따위는 없을 테니까.
"요정도 마찬가지야. 정령 없는 요정족은 결국 귀 큰 인간이 될 뿐이지."
"...바바리안은 그냥 덩치 큰 인간처럼 되겠군."
"그렇지."
철두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아르엘라가 왜 그토록 정령에 집착하는지.
선조의 혼이 없는 자는 바바리안 전사가 아니듯, 정령 없는 요정은 요정이 아니다.
"으으음."
철두는 새삼 발할라에 가보고 싶었다.
미궁으로 변해버린 행성에서나마 선조의 넋이 남아있을까?
나를 선택해줄 선조의 혼령이 있을까?
다음 미궁은 왜 안 열리는 거지?
철두가 상념을 이어가는데 드워프 에르미스가 아르엘라를 향해 물었다.
"요정들은 무슨 비책이 있소?"
"뭐?"
아르엘라의 불손한 대꾸에도 에르미스는 껄껄 웃으며 재차 물었다.
"요정들이 정령을 되찾는 방법 말이오."
"...있어."
아르엘라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세계수."
"응?"
"우리 요정들은 신 대신 어머니 세계수를 모시지."
"호오!"
제타의 드워프들이 신을 다시 모셔 고향 행성을 찾길 원하고, 지구의 인간들이 문명을 다시 발전시키길 원하듯, 발할라의 요정들도 바라는 바가 있었다.
"세계수만 뿌리 내릴 수 있으면... 모든 게 잘될 거야."
세계수만 이 노바에 뿌리내리면 '단절'된 정령계와 다시 이어질 터다.
"후후, 좋다."
상념을 끝낸 철두가 소리쳤다.
아니, 고민을 접어두었다가 맞다.
고민해봐야 무슨 소용인가?
아직 제 스스로의 마음도 모른다.
고향을 되찾니 마니, 생각해본 적 없던 주제라 여러 생각들이 불쑥 튀어나와 머리가 잠시 어지러웠을 뿐이다.
내 부족을 지킨다.
그것 하나면 충분하다.
"가자. 다음 목적지로. 영지 이름이 뭐라고 했지?"
"아이리스 후작령."
제국의 후작이 되었으나, 여전히 요정족만의 문화와 계급을 이어 나가는 곳.
일행은 아이리스 후작령으로 향하기 위해 이동마법진으로 돌아갔다.
270화 어머니가 재능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