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서울역
<미궁의 눈이 온전히 떠지기 전에 미션을 완료하세요.>
뒤이어 들리는 메시지에 오준환의 동공이 흔들렸다. 노바 짬밥 10년이 넘는 그는 산전수전 다 겪어봤으나, 미궁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었다.
혼비백산하는 노론 마을 사람들, 그리고 꺼림칙한 생김새의 검은 구체를 보니 오싹한 기분에 휩싸였다.
"전령! 아니, 너네 조 다 같이 가! 빨리!"
"네, 알겠습니다!"
무려 10명이나 보내버렸다.
이건 누락되면 안 되는 긴급 보고다.
두두두두두.
랭커급만 되어도, 아니 상위 노비스 정도만 되어도 인간의 신체 능력을 상회해 거의 초인이라 봐도 무방했다.
늘어난 근력과 체력, 그리고 그와 비례해 단련되는 정신력은 사나흘 정도는 잠 못 자고 버틸 만했다.
"이랴!"
왔던 길을 빠르게 되짚어 말을 달렸다.
아이언헤드 성에는 연금술 연구소가 있기에 다양한 제작 물품들이 유통되는데, 그중에서도 펫 주머니는 아주 유용한 아이템이다.
펫 1마리와 탈것 1마리.
아이언헤드에 속한 거의 대부분의 대원들이 말 2마리 정도는 보유하고 있었다.
기수가 몇 날 며칠을 말을 달릴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지치면 번갈아 갈아탈 말이 있으니, 아이언헤드령에 속한 병력 누구든 당장 전령으로 부리면 그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낼 만했다.
특작대 소속의 10기의 기마는 반나절 달려, 비슷한 시기에 합류한 10기의 기마와 합류했다.
함께 보급훈련을 나섰던 유격대 소속의 1개 분대였다.
"너희도 보고하러 가냐?"
"그래."
"반만 갈까?"
"아서라! 급하니 다 함께 가자."
"그러자! 이랴!"
총 20기의 기마가 미친 듯이 질주했다.
밤낮없이 달려, 3일 걸렸던 거리를 17시간 만에 주파해 자정이 훨씬 넘어 새벽녘이 되어서야 아이언헤드 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보고해야 할 영지의 최고 우두머리는 자리에 없었다.
"뀨우."
"하아암, 저한테 말하세요."
하는 수 없이 이제 막 잠에서 깬 2인자 김진태에게 서둘러 보고했다.
"미궁이란 게 생겼습니다."
"예?"
"검은 구체가 떠올랐는데, 마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미궁에 대해 보고를 하곤, 잊고 있었던 또 다른 보고 건에 대해 이야기했다.
"노론 마을이 복속을 청해왔습니다. 더 이상 약탈당하느니 차라리 정해진 세금을 꼬박 내겠답니다."
"어? 저희가 갔던 소론 마을도 복속을 청해왔습니다. 아마도 사전에 마을들끼리 협의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헐, 그럼 다른 마을도 연달아 청해올 수도 있겠네요."
N344 지역은 중앙에 하늘산을 기점으로 북쪽에 나트롱 백작성과 그 인근 수십 개의 마을로 이뤄진 대농지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하늘산 남쪽으로는 고작 20여개 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간 아이언헤드 성과 가깝다는 이유로 이 마을들이 주요 약탈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러면 하늘산 기점으로 남쪽은 우리가 전부 먹는다는 건데.'
나쁘지 않아 보인다.
어차피 신서울과 한양 사이에 길을 낸다면 그쪽으로 내야 한다.
앞으로 교류할 유동인구를 생각하면 통행세만 걷어도 엄청난 재정을 확보할 수 있을 터다.
도로공사야 어차피 전문가가 따로 있으니까.
"어쨌든 그 미궁이란 게 중요하네요. 알았어요."
미궁의 눈이 다 떠지기 전에 미궁을 닫아야 한다.
데드라인이 정해진 공략 게임 같다.
"엘리스! 르망 좀 불러다 줄래?"
"예에, 시종장님."
부리나케 달려간 엘리스가 르망을 불러왔다.
"신! 수석 마법사 르망 대령했나이다!"
"르망, 미궁에 대해 알아요?"
"미궁에 대해 어찌 모르겠나이까?"
"오! 말해봐요."
"연유를 여쭤봐도 되겠사옵니까?"
"N344 맵에 미궁이 나타났대요."
"허어! 재앙이군요. 하지만, 이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르망이 자신 있게 이야기했다.
"미궁은 말 그대로 미로와 같은 던전이옵니다. 이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의 힘을 모아야 하옵니다."
진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궁이 뭔지 모르지만, 공략 성공은 딱히 걱정하지 않는다. 어차피 철두가 있으니까.
"정해진 시간이 있다던데요?"
"맞사옵니다. 지금 미궁 발생지역에 미궁의 눈이 수십에서 수백 개가 생겨났을 것이옵니다. 주로 생명체가 많이 몰린 곳 주변에 많이 생겨나옵니다."
"그거 눈 다 뜨면 실패죠?"
"여윽시 영민하시옵니다. 시종장님의 이해력이 하늘에 닿았으니 이참에 마법에 입문해보심이...."
"됐고, 빨리 말해봐요."
"예에, 미궁의 눈은 차츰 백색의 실눈을 뜨는데, 이것이 모두 허예지면 다수의 몬스터들이 출현하옵니다."
"그게 더 좋은 거 아녜요?"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수 없으니, 재앙이지요. C맵 한정 재앙인 월식을 겪어보지 않았습니까?"
"어? 그게 C맵 한정이에요?"
"그러하옵니다. 초보자의 축복이자 재앙이지요."
"으음."
딱 들어맞는 표현이다.
살아남으면 많은 것을 얻을 것이고, 죽는다면 재앙과 다를 바 없다.
"미궁의 공략을 실패할수록 미궁의 눈은 더욱 빠르게 뜨이니, 공략대의 선정에 신중을 기해야 함인 줄 아옵니다."
"으음, 좋아요."
아이언헤드 성의 전력은 튼튼하다.
여러 나라에서 이동 포탈망을 이용해 인재가 몰렸고, 지난 3개월간 부대를 정비하며 뜻이 있고 실력이 있는 인재들이 대거 영지군으로 뽑혀 편입되었다.
"보통 자연적으로 미궁의 눈이 다 뜨이는 데 걸리는 시간이 얼마죠?"
"보름 정도이옵니다."
최초 발견이 아직 하루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충분하다.
"좋습니다. 미궁 공략대를 선별해 꾸려 먼저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에."
김진태는 서둘러 미궁을 공략하기 위한 인원들을 보냈다.
지금 무한결투장에 가 있는 철두는 어차피 해가 떠오르는 시간에 뿅 하고 나타날 터다.
그리핀을 타고 가면 늦게 출발해도 먼저 앞서갈 터이니, 공략대를 미리 출발시키는 게 맞았다.
*
파파팟.
무한결투장은 7일마다 입장이 가능하다.
그간 꼬박꼬박 결투장에 입장해 결투를 즐겼다.
조금 불만인 것은 랜덤 매치라 전에 만났던 적과 다시 조우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간 철두의 전적은 꽤 훌륭했다.
<소울 포인트 : 4850>
<결투점수 : 1253>
소울포인트를 꽤 많이 모았다.
베팅하는 포인트에 따라 적의 강함과 약함이 정해지면 좋겠지만, 좀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처음엔 적게 베팅할수록 언더독이 되어 강한 적과 매칭되는지 알았으나, 몇 번 해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아 적당히 300포인트씩 베팅 중이다.
강자와 만나는 행운도, 약자와 만나는 맥빠짐도 모두 랜덤의 영역이었다.
결투 점수가 오를수록 매칭되는 상대의 수준이 저절로 올라가니, 결국 중요한 것은 배팅 포인트가 아니라 결투점수다.
연달아 4연승을 하고 결투점수가 1400점에 근접했을 때, 매치가 잡힌 검사에게 패배했다.
"후, 1400점이 지금의 한계인가?"
이 구간에서 거의 막상막하로 싸우다가 아슬하게 패배하는 경우가 많았다.
"꾸이이이!"
철두가 무한결투장을 빠져 나와 보니 김진태가 기다리고 있었다.
"철두! 당장 가자!"
"음? 아침부터 어딜?"
"미궁!"
"음?"
철두는 일단 그리핀을 소환해 진태와 함께 북쪽으로 날아가며 설명을 들었다.
*
아이언헤드 성에서 출발시킨 미궁공략대보다 강철두의 그리핀이 먼저 도착했다.
"여기에 미궁이 있다는 말이냐?"
"그렇대."
그리핀이 날아가는 곳은 하늘산.
드넓은 농지가 펼쳐진 N344 맵에서 특이하게 홀로 삐죽이 솟은 탑과 같은 산이다.
그 산에 도착해 주위를 빙글 돌다 보니, 산 중턱쯤에 밥 짓는 연기가 나고 있는 게 보였다.
슈아아아.
그리핀이 강하해 착륙하니, 최준섭의 유격대와 오준환의 특작대가 모두 그곳에 진을 꾸리고 있었다.
"영주님 오셨습니까?"
"후후, 그래. 미궁은?"
"저깁니다."
군이 진영을 꾸린 산 중턱 작은 분지 앞에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혈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의 입구에 붉은색 포탈이 이글거리는 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먼저 살펴보았는데, 미궁에 출입의 제한이 있습니다."
"음? 제한?"
"네, 일단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철두는 미궁의 앞으로 나아갔다.
헌데 붉은 포탈의 옆에 익숙한 차림의 안경 쓴 고블린이 있었다.
"고블린 상인?"
"호호홍. 또 보게 되는군, 재밌는 바바리안."
"너는 수호의 나무에 있던 녀석 아니냐?"
"홍홍, 정확히는 미궁 상인이지."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 영지 지역에 미궁이 생기면 입구는 수호의 나무겠군."
"홍홍, 제법 똑똑하군. 바바리안답지는 않지만."
"후후. 뭘 팔고 있지?"
"이번엔 구매하는 쪽이라네."
철두가 고개를 갸웃했으나 이내 수긍했다.
상인이라 하여 언제나 팔기만 하겠는가, 매입도 하는 거지.
"좋아. 뭘 사지?"
"유구한 역사를 지닌 유물,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은 상징, 특별한 징표. 뭐든 좋다네. 홍홍."
"...."
그런 걸 사서 뭐 하자는 거지?
"뭐 있으면 챙겨오지."
"내가 대가로 내어줄 아이템을 생각하면 반드시 찾아오는 게 좋을 걸세. 홍홍."
"기억해두지."
철두가 고블린 상인을 일별하고는 붉은 포탈 앞에 섰다.
<노비스 미션>
<미니언 미션>
<히어로 미션>
"으음."
철두가 노비스 미션을 건드려 보았으나.
<등급이 맞지 않습니다.>
애당초 접근도 불가능했다.
"혼자서 공략은 어려운 거군."
"그렇습니다. 대원들 10명이 입장했는데, 아직 감감무소식입니다. 입 퇴장이 자유로운 성질의 포탈은 아닌 모양입니다."
철두가 자세히 살펴보니 미션에 인원이 따로 표시되어 있었다.
<노비스 미션> (9/130)
<미니언 미션> (1/10)
<히어로 미션> (0/2)
미니언이 뜻하는 바는 기사급.
적어도 스탯 중 하나를 50까지 찍어 랭커에 이른 수준이 되어야 한다.
랭커 10명을 추리는 건 어렵지 않다.
여기 모인 유격대와 특작대에서 추려도 오십 명은 넘는 게 랭커다.
"히어로면... 지금 오는 녀석 중 제임스뿐이군."
"전력을 다해 올 테니 내일쯤이면 당도할 겁니다."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먼저 가 있지. 준비되는 대로 오라고 해라."
"예?"
철두는 미리 공략을 해낼 생각으로 포탈로 바로 직진해 입장했다.
파팟.
익숙한 어지러움이다.
세상이 짜부라들었다가 폭발하는 듯한 어지러움을 견디고 나면,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새로운 세상에 눈뜨게 된다.
"후우우우."
매캐한 공기.
회색빛의 도시.
여기저기 파괴되고 무너진 빌딩들이 보인다.
멀쩡한 것보다 깨진 유리창이 더 많은 곳.
깔끔하게 깔린 보도블록은 여기저기 뒤집혀 있고, 저 앞에 있는 도로는 주차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부서지고 녹슨 차들이 방치되어 있었다.
"광장인가?"
철두는 제법 넓은 광장에 서서 주변을 휘이 둘러보았다.
"와, 여긴 어디지?"
"음? 언제 왔나?"
철두가 돌아보니 옆에 어느새 제임스가 나타나 있었다.
"대장님 들어가시고 하루 뒤에 도착했죠. 숨만 돌리고 바로 들어왔습니다."
"으음, 무한결투장 같은 곳인가 보군."
"그런가 보네요. 입장 시간이 달라도 전부 한시에 시작하는 미궁인 모양입니다."
철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파팟.
도끼를 꺼내 들었다.
다행히 인벤토리는 정상 작동한다.
흉악한 도끼를 들고 오롯이 선 바바리안이, 익숙한 광장 가운데 서서 여기저기 깨지고 휘어진 유리 구조물을 훑어보았다.
서 우 역
ㄹ
설우? 저거 'ㄹ'이 저기 붙는 게 맞나?
서울 아닌가?
삐뚜름하게 떨어져 위태롭게 매달린 'ㄹ'을 보는 와중에 메시지가 떴다.
<미궁 '서울역'에 입장하였습니다.>
201화 미션
<미궁 '서울역'에 입장하였습니다.>
<히어로 미션 '경쟁전'이 선택되었습니다.>
<마더 좀비를 해치워라.>
서울역은 좀비로 인해 점령당했습니다.
소수의 생존자들이 여전히 플랫폼 안에 갇혀있습니다. 가장 먼저 마더 좀비를 발견, 해치우는 히어로가 승리합니다.
목표 : 마더 좀비 처치
부가 목표 : 좀비 킬 +1점, 생존자 구조 +5점
"헙."
제임스는 퀘스트를 빠르게 읽고는 소리쳤다.
"이거 팀 랭킹전하고 비슷해!"
"팀 랭킹?"
"휘장으로 참가하는 랭킹 등록 있잖아!"
"몰라. 안 해봤다."
"...대체 왜 아직 휘장 업그레이드를 하지 않은 거야?"
개인의 스탯이 일정 이상이 되면 랭커가 되듯, 휘장도 일정 이상이 되면 랭킹 등록이 된다.
그때부터 참가할 수 있는 것이 단체 랭킹전.
제임스가 속했던 블랙드래곤 용병대도 그렇고, 사토가 이끌고 있는 독전대도 단체 랭킹전에서 명성을 날렸다.
"단체 랭킹전은 여러 가지 형태야! 순위 결정전이 지금과 같은 형식이지."
제임스는 단체전 경험이 많은 이답게 빠르게 퀘스트를 해석했다.
"점수를 많이 획득해야 이길 거야."
가장 많은 좀비를 해치우고, 가장 많은 수의 생존자를 구조하면 된다. 하지만 여기에도 함정이 있으니.
"타임리밋은 아마도 메인 목표인 마더 좀비의 사냥이겠지."
"그래서?"
"마더 좀비를 목표로 움직이면서도 최대한 많은 좀비를 처치하고 생존자도 구하면 돼."
서브 목표가 점수를 주긴 하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메인이다.
"명시되어있진 않지만, 아마도 마더 좀비를 처치했을 때 가장 많은 점수를 주겠지. 어쩌면 점수 자체가 눈속임이고 마더 좀비를 해치우는 게 유일한 목표일 수도 있어."
"대장만 잡으면 이긴다는 거군."
경우의 수를 따지자면 마더 좀비를 해치우고도 더 점수가 높은 팀에 질 수도 있겠지만, 제임스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대충 그런 셈이야. 가보자고."
어차피 미궁은 제임스도 처음이고, 강철두도 처음이다.
"그래도 다행이야. 여긴 한국 같군. 자네의 홈그라운드잖아."
"후후, 나만 믿어라."
철두의 자신만만함에 제임스가 기꺼워하며 뒤따랐다.
"그나저나 미니언이나 노비스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군."
"알아서 하겠지."
제임스는 쫑알쫑알 말이 많았다. 그는 본래부터 분석가적인 타입의 사람이었다.
블랙 드래곤 용병대가 최초의 던전 공략으로 명성을 떨친 것도, 단체전에서 제법 높은 명성을 얻은 것도 모두 제임스의 정확한 분석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종말이든 노바든 뭐든 게임으로 받아들이고, 공략법을 찾아내고 수행하는데 재능이 있는 자였다.
제임스의 이런저런 수다를 들으며 철두가 웃었다.
"후후, 진태도 너처럼 게임 타령을 한다."
"오! 나와 동류였군."
"진태는 도시 발전에 재능이 있다."
"시뮬레이션 게임 마니아였군. 난 보다시피 알피지 쪽이지. 미궁 미션이라니.... 사실 아까부터 흥분으로 떨림이 멈추질 않아."
"변태군."
"흐흐, 그럴지도 모르지."
제임스는 현실이 되어버린 게임에 과몰입하는 중이다. 거기에 강철두와 같은 치트키적인 든든한 동료와 함께하는 미궁 탐험?
'1등을 노린다.'
판이 깔렸는데 이걸 놓치면 바보다.
보상이 뭔지 명시되어있진 않으나, 그건 일단 1등을 해놓고 고민해봐도 되는 문제다.
"오는군."
"그렇군."
청력이 일반인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두 사람이, 서울역 쪽으로 향하자마자 소음을 캐치해냈다.
"끼아아아아!"
"쿠어어어"
괴성과 함께 계단 위에 좀비가 모습을 보인다 싶더니, 미친 듯이 계단을 구르듯 뛰어 내려왔다.
"키에에에!"
"으, 수가 많군."
"후후, 쫄?"
"허허, 쫄다니!"
철두의 양손에는 남들이 두 손 잡고 휘둘러야 할 양손 도끼가 각기 하나씩 들려 있었다.
차착.
제임스의 몸이 파팟하고 빛나더니 그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전신 판금 갑옷이 착 입혀졌다.
인벤토리의 기능 중 하나였는데, 수납할 때의 상태 그대로 소환된다는 특징을 이용한 방법이다.
판금 갑옷을 몸에 착용한 채로 인벤토리에 넣어버리면, 다시 꺼낼 때 저리 착용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좀비 바이러스가 어떻게 전파되는지 정보가 없으니 자네도 갑옷 같은 걸 좀 입으시게."
"난 튼튼해서 괜찮다!"
철두는 그리 말하곤 냅다 괴성을 내질렀다.
"우어어어어어!"
서울역 광장을 쩌렁쩌렁 울리는 전투함성에 좀비들이 더욱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겨우 두 명이라서 포위될 판이지만, 제임스도 강철두도 개의치 않았다.
쾅, 콰직!
"끼에에에!"
콰자작!
도끼가 휘둘러질 때마다 좀비의 몸이 지푸라기처럼 절단되어 쓰러진다. 제임스는 검을 휘두르며 좀비들을 해치우며 여러 가지 정보를 습득했다.
'소리에 민감히 반응한다. 목과 머리가 분리되면 일단 죽는다.'
공격 형태는 짐승들이 그러하듯 가장 날카로운 수단인 이빨로 깨물기와 손으로 할퀴기 등이다.
약점은 머리.
눈알을 파고든 검날에도 한동안 바둥거리는 것을 보면, 뇌가 찔린다고 즉사하는 것 같지는 않다.
"멱을 따든가, 아예 머리통을 깨부숴버려!"
"후후, 좋다."
철두는 두 자루의 도끼를 인벤토리에 넣어버렸다.
좀비의 방어력이라는 것이 형편없어, 딱밤으로도 죽일 수 있을 정도였는데 도끼는 운용이 과하며 거추장스럽다.
파팟.
그의 손에는 쇠몽둥이 두 자루가 들려 있었다.
부러지지 않는 몽둥이에 대한 강한 열망의 소유자 장소철 장인이 최근 심혈을 기울여 만든 몽둥이다.
매끈한 손잡이와 머리 부분에 둥근 추가 달린 것을 생각하면 곤봉보다는 메이스에 가까운 형태다.
뾰족한 쇠뿔을 박아넣진 않았지만, 육각형 모양의 머리를 지닌 메이스는 좀비 뚝배기를 깨는 데 있어 아주 요긴한 물건이었다.
퍼퍼퍼퍽!
철두의 양손에 쥔 메이스가 움직일 때마다 좀비 대가리가 터져나간다.
그와 처음으로 합을 맞춰 싸워보는 제임스는 든든한 기분에 집중력을 조금 다른 방향으로 몰아넣었다.
'아직 큰 위험은 없다.'
좀비 바이러스가 존재한다면 분명 감염 방법이 있을 터인데 공기감염은 아닌 모양이다.
아까부터 조심히 호흡하고 있으나 이상이 없다.
'피부 감염도 아니고.'
철두의 몸 여기저기에 좀비들의 피, 살점 따위가 엉겨 붙어있으나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인다.
콰직, 콱, 퍼억!
철두는 정말 효율적인 움직임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는데, 빙글빙글 몸을 돌리며 메이스를 휘두르다 보니, 점점 그의 주변으로 소용돌이가 펼쳐진 기분이다.
퍼퍼퍼퍽!
피겨 선수의 회전처럼 몸이 맹렬히 회전하며 좀비 뇌수가 주변으로 비산한다.
팽이처럼 움직이는 철두의 신형이 점점 종횡무진하더니 광장을 휩쓸어버렸다.
"어어? 안 어지러운가?"
횅횅횅!
처음엔 빙글빙글 도는가 싶더니 이내 과하다 싶을 정도로 회전해 이제 철두의 신형이 흐리게 보일 지경이었다.
좀비들이 소음에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철두를 향해 무지성으로 돌격하는 터라, 서울역 광장은 믹서기에 돌진하는 토마토처럼 되어버리고 말았다.
훙후우웅.
철두의 신형이 다시 빙글빙글대더니 멈춰섰다.
"자, 자네 괜찮나?"
"후후후후, 우웨에에엑!"
철두는 눈알이 빙글빙글 돌아 제임스가 수십 개로 보이며 세상이 도는 것을 멈추지 않자 토함으로써 어지러움을 벗어났다.
"괘, 괜찮나?"
"후후후후후."
등을 두들기는 제임스의 걱정에도 철두는 기분이 좋았다.
"새 기술을 익혀버렸다."
"응?"
<기술 '소용돌이'를 개발하였습니다.>
기술석으로 기술을 배운 게 아니라, 스스로 깨우쳤다. 아니, 개발이라 하였으니 오직 철두만이 이 기술을 사용하는 건지도 몰랐다.
이제 기술 '소용돌이'를 사용할 때 마력을 보태면 보다 더 맹렬하게 회전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한 파괴력 또한 증가한다.
"후후, 얼른 해보고 싶군."
"근처에 더 이상 좀비가 없는 것 같네."
서울역 광장은 여기저기서 튀어나온 좀비들의 시체로 인해 시체의 산이 여기저기 쌓여있었다.
"일단 좀비 바이러스도 대충 파악했네. 접촉감염도 아니고, 비말감염도 아닌 모양이야. 공기감염도 아니고 말이야."
공기를 마셔도 괜찮고, 좀비의 타액이 피부에 닿아도 괜찮다.
"자네 혹시 상처 같은 거 났나?"
"아니."
"흐음, 그럼 매개물 감염이란 소린가...."
좀비물 영화를 보면 그런 경우가 있긴 하다.
좀비에게 물리면 그대로 좀비가 되는 경우가 이러하다.
할짝.
"자, 자네! 미쳤나?"
제임스가 기겁하여 소리 질렀다.
철두가 좀비의 뇌수로 번들거리는 육각 메이스를 혀로 핥은 것이다.
"퉤!"
침을 뱉은 철두가 씩 웃었다.
"먹어도 감염은 안 된다."
"하아, 하하. 미쳤군. 미쳤어."
저건 상남자가 아니라 무모한 게 아닐까?
어떻게 좀비 바이러스 테스트를 본인 몸으로 할 수가 있단 말인가?
"후후, 별거 아니다."
철두는 바바리안.
몸 안의 기관을 개별로 컨트롤 할 정도의 괴랄한 능력이 있는지라, 바이러스 따위 침투해도 그저 해치우거나 밖으로 배출하면 된다.
물론 '인간' 제임스에게 있어서는 무모함 그 자체일 뿐이었지만.
"후, 어쨌든 걱정을 덜었군."
"이거 바이러스가 맞긴 한 거냐?"
"아닐지도.... 허나 우리가 각성했기 때문에 감염이 안 되는 걸 수도 있네."
"일리 있군."
철두가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어딜 가나?"
"들어가야지."
"같이 가세."
철두의 함성이 들리는 거리에 있는 좀비들은 죄다 튀어나와서 그런지 플랫폼 입구는 깨끗했다.
"오!"
철두는 계단을 오르자 보이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이미 한바탕 거하게 약탈을 당했는지 제대로 된 물건이 없었다.
"아쉽군."
철두는 먹을 게 없는 것에 아쉬워했고.
"시간이 꽤 지난 느낌이야. 아무래도 노바의 시간과 지구의 시간이 다른 것 같아."
"바보냐? 다섯 배 아니냐."
"아니, 내 말은 그 개념이 깨졌다는 걸세."
노바의 시간으로 생각하면 종말이 일어난 지 겨우 5일. 지구의 시간으로 치면 1일이 지났을 터이지만.
지금 보는 서울역의 모습은 무언가 큰일이 일어난 지 족히 한 달은 넘어 보이는 모습이다.
"어쩌면 이제 반대로 지구의 시간이 다섯 배나 빠른 걸지도 모르겠어."
제임스가 분석을 하든 말든 철두는 매점을 나와 계속해서 서울역 안으로 들어가, 반쯤 부서진 자판기를 발견하곤 반갑게 뛰어갔다.
탕, 탕!
"오! 안에 뭔가 들었다."
완전히 부서지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
철두는 자판기의 열쇠 구멍을 향해 딱밤을 먹였다.
콰직!
벌어진 틈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자판기를 앞뒤로 벌렸다.
덜컹!
"오오!"
멀쩡한 음료수가 가득하다.
이제 노바에서 지구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비스들에게는 향수병을 불러일으키는 존재.
철두는 슬쩍 제임스에게 줄 음료 캔을 빠르게 흔들고는 던져주었다.
휙, 턱!
"고맙네."
"후후, 마시자."
푹, 치이이익.
철두는 오랜만에 맛보는 콜라 맛에 짜릿한 미소를 지었다.
푹, 푸시시시시시시시!
"으헉!"
콜라로 세수하는 제임스를 보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202화 생존자 집단 (1)
덜컹, 덜컹!
[다음 내리실 역은 서울역, 서울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김철수는 지하철 안내음에 따라 사람들 사이에 뒤섞여 서울역에서 내렸다.
대구에 사는 김철수에게 서울 출장이 늘 고역이다. 뭐 이리 사람이 많은지. 어딜 가나 사람에 치인다.
"아따, 디죽겠네."
무심결에 튀어나온 사투리에 오가는 사람들이 힐끔거린다.
지금 시간은 오후 4시.
대구로 향하는 기차 출발까지 20분 남았다.
6시 10분에 동대구역에 도착.
회사에 복귀하지 않고, 전화 보고 후 바로 집으로 퇴근해도 될 것 같다.
편의점에 들러 기차 안에서 마실 맥주 하나를 집어 계산대에 놓았다.
"에쎄 한 갑 주이소."
담배도 하나 사서, 편의점을 나섰다.
흡연실을 찾기 위해 한참 계단을 오르내렸다.
"어휴, 담배 하나 피우기 힘들다."
겨우 찾은 흡연실에 가 담뱃갑을 뜯었다.
칙, 칙!
"쓰으읍, 하아."
하루의 고단함을 나른함으로 뱉어낸다.
연기가 흩어지니 텁텁한 피로가 남았다.
습관처럼 휴대폰을 들어 유튜브를 켠다.
삐이-
"뭐야, 또 지진이야?"
재난 안내문자에 김철수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 훈련상황입니다. 종말을 대비한 대피 훈련입니다. 주소지와 가까운 대피 장소로 이동 후, 구조 활동에 적극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오씨! 맞다. 훈련."
잊고 있었다.
오늘 바이어와 점심을 먹으면서도 한참 떠들어놓고는.
"아오, 시발."
빨리 KTX 좌석에 앉아 맥주 한 캔 하고 한잠 때리고 싶었는데, 운이 따라주질 않는다.
회사는 뭐 이런 날에 서울 미팅을 잡아서는....
"젠장."
담배를 피던 사람들이 얼른 꽁초를 비벼 끄고는 어기적거리며 여기저기 깔린 경찰들의 안내에 따라 이동했다.
종말을 대비한 훈련이지만, 아직 체감되지 않는 종말은 전혀 긴장감을 불어넣어 주질 못한다.
대피소를 향해 이동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짜증과 귀찮음이 가득하다.
김철수는 서울역에 마련된 대피소로 이동했다.
지하에 마련된 지하철역은 그 지리적 이점으로 벙커의 역할을 대신하는 귀한 대피소다.
여기저기 깔린 경찰들의 지시에 따라, 휩쓸리듯 이동하는 군중들을 따라 걷다 보니 지하철 플랫폼 어딘가의 대피소가 나왔다.
"오!"
이런 공간이 있었나?
삐이-
훈련 와중에도 요란한 안내문자가 계속 울린다.
대피소는 꽤 넓었으나, 무지막지한 인구를 자랑하는 서울답게 계속해서 사람들이 몰려 들어왔다.
[띵, 띵, 띵. 열차가 들어오고 있으니....]
설상가상으로 지하철도 들어오고 있다.
저기서 또 수많은 사람들이 내리면 대피소는 더없이 좁아질 터.
"...."
김철수는 와중에 엉덩이 깔고 앉을만한 턱이 있는 구석 자리로 이동해 자리를 깔고 앉았다.
모두가 어서 이 훈련상황이 끝나, 열차에 몸을 싣고 집으로 가기만 기다리는 와중에.
김철수는 눈치를 보다가 역사로 이동했다.
어차피 훈련이야 삼십 분도 안 되어 끝날 테고, 기차 타러 오자면 가까운 대피소가 나으니까.
파팟.
<여기 생존자 있어요!>
지구에 종말이 도래했습니다.
안식의 행성 노바의 구원이 종료되었습니다.
지구의 주민 여러분의 생존을 기원합니다.
준비된 노비스만이 영웅이 내민 구원의 손길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목표 : 고블린 주화 1개 획득
보상 : 노비스 전직
"뭐야, 시발?"
"어? 이게 뭐야?"
"왁! 시발!"
대피소에 몰린 백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일제히 놀란 외침을 쏟아냈다.
"이것도 훈련 메시지인가?"
"그런가요?"
"경찰 아저씨. 이거 뭐예요?"
혼란스러운 사람들의 외침 속에서 김철수는 와락 인상을 구겼다.
그의 손등엔 서클이 새겨져 있었다.
지난번 포항에 출장 갔을 때, 고블린을 사냥해 노비스가 되었다.
'시발, 훈련일 리가 없잖아.'
퀘스트는 진짜다.
'구원이 종료되다니? 진짜 종말이야? 시발, 진짜야?'
김철수는 패닉에 빠졌다.
커진 동공이 주변을 훑는다.
어질한 기분 속에서 소름 끼치는 감각이 경고를 보낸다. 사람들을 헤치며 대피소 입구로 향했다.
"아악, 뭐야?"
"밀지 마요!"
"어머, 미쳤나 봐?"
사람들은 반쯤 눈깔이 돌아간 김철수를 못마땅해하면서도 다가가지 못했다.
"허억, 허억!"
척 보기에도 정상이 아니다.
김철수는 다가오는 지하철을 보았다.
서서히 멈추기 시작하는 지하철.
"!@#!@#"
이명 너머로 괴성이 들리는 것 같다.
정차를 위해 천천히 움직이는 지하철 안의 사람들이 이상하다. 피가 낭자한 여자가 남자를 문다.
블루스를 추는 듯 뒤엉킨 사람들로 난장판이다.
"다, 닫아."
"예?"
"닫으라고! 시발!"
김철수가 발악하듯 소리치며 경찰을 다그쳤다.
소리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서둘러 문 옆의 커다란 레버를 당겼다.
스르르르릉.
쇠사슬 소리와 함께 비상구 입구로 셔터가 내려왔다.
스르르릉, 쿠우웅!
굵고 촘촘한 쇠창살이 내려왔다.
셔터에 비할 바 없이 튼튼한 창살에 김철수는 조금 마음의 위안이 드는 기분이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 오른쪽입니다. 디스 스탑 이즈 서울 스테이션. 서울....]
"크와아아아!"
문이 열리며 쏟아져나온 좀비들의 괴성으로 안내방송이 묻혔다.
"아아아악!"
사람들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철컹!
"크와아아!"
좀비들이 철조망에 엉겨 붙어 흔들었으나, 셔터에 비교되지도 않을 정도로 튼튼하게 만들어진 쇠창살이 제법 잘 방어해냈다.
"허억, 멀어져요."
김철수의 말에 대피소의 사람들이 새싹반 아이들처럼 순순히 따랐다.
"으으으윽, 그윽."
그때 대피소 안에 섞여 있던 사람들 중의 하나가 괴상한 신음을 흘리며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김철수는 재빠르게 주변에 있던 쇠몽둥이를 하나 집어 들어 그 사람의 머리를 후려쳤다.
퍼억!
"꺄아아아악!"
난데없이 일어난 살인에 주변에 있던 이들이 놀라 멀어졌다.
사람들은 김철수를 숫제 미친 사람처럼 보았으나.
파팟.
시체는 사라지며 고블린이 그려진 누런 황금빛 동전만이 남았다.
"허억, 허억."
김철수는 흥분으로 거칠어진 호흡을 정리할 새도 없이 반사적으로 동전을 주웠다.
그의 손등에 1이라는 숫자가 깜빡이다 사라졌다.
"...종말이 온 것 같네요."
"...."
김철수의 말에 백여 명이 넘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향했다. 위기상황에서 구원을 바라는 눈빛이 가득하다.
눈깔이 돌아간 이상한 사람은 선구자가 되었고, 리더가 되었다.
"일단 퀘스트대로 버텨봅시다!"
"크와아아아"
쇠창살 밖에서는 여전히 많은 좀비들과 그들에게 쫓기다 물어 뜯겨 똑같이 좀비로 변하는 사람들의 절규가 울려퍼졌다.
"열어주세요! 아아아악!"
"사, 살려줘!"
대피소의 사람들은 귀를 막았다.
우린 운이 좋구나.
*
"꾸이이이!"
철두가 콜라로 장난치는 사이 전령 꾸이가 전리품 수거를 마치고 돌아왔다.
"전령을 아이템 파밍에 사용할 생각은 어찌 한 겁니까?"
"지가 저절로 한 거다."
"...굉장하군요."
제임스는 전령은 붉은 뱀.
근력의 정령이다.
아직 모두 해금하지는 못했지만, 전령의 기능은 단순한 버프 그 이상의 파워업에 도움이 된다.
전령의 전투능력부터 활성화하지 않고, 아이템 파밍 같은 부가적인 능력부터 활성화한 철두의 자신감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전투에 있어 전령의 도움까지는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 아닌가?
"후후, 우리 꾸이는 반창고도 된다."
용의 각질을 먹어 치료 효과를 가지고 있다.
슬라임 꾸이를 대충 주물러 상처에 바르면 포션하고 비슷한 수준의 상처 회복 능력을 보인다.
"...굉장하군요."
"후후후."
진짜 부러워서 그런 건 아니지만, 괜히 맞장구쳐준 제임스는 탐색을 이어가며 다시 재잘재잘 떠들었다.
"좀비가 스탯석을 드랍합니다! 호오! 마력 빼고 전부 주는군요. 주화도 꽤 많이 줍니다."
좀비 하나당 주화 1개는 꼭 드랍했다.
더군다나 근력, 체력, 민첩, 감각 4개의 스탯석이 모두 드랍되었다.
좀비의 허술한 전투능력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효율의 사냥터다.
"노바에 몬스터가 차츰 사라지는 상황에서 앞으로의 주화 수급은 미궁에서 이뤄질 것 같네요."
"그럴지도."
"흥미롭습니다. 결국 노바의 다른 세력들도 이를 알고 있을 텐데, 미궁에서 그들과 마주칠 수도 있을까요?"
"모를 일이지."
제임스는 여러 경우의 수를 떠올리며 가정했고, 혼자 중얼중얼거렸다.
철두는 이래도 상관없고 저래도 상관없다는 주의였다.
철두의 함성에 좀비들이 대거 휩쓸려 나왔기에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서서도 고요한 침묵뿐이었다.
화르르륵.
전력이 차단되어 어둑한 실내를 밝히기 위해 살리만다를 소환했다.
불도마뱀은 앞서가며 사위를 밝혔고, 처음으로 발견한 시체를 보곤 제임스가 다가가 조사했다.
"부패가 심각하군요. 즉사예요. 즉사한 뒤 좀비도 되지 못할 정도로 물어뜯겼어요."
"가자."
"네."
제임스는 조금 더 조사해보고 싶었으나 그들은 지금 미션 중이다.
퀘스트도 중했기에, 다시금 발길을 옮겼다.
이따금 백골이 되거나 거의 썩은 시체들이 발견되었으나, 지하철역 안은 휑한 느낌뿐이었다.
"오, 저기에 뭐가 있다."
"저보다 청각이 예민하시군요."
"당연한 소릴 하냐?"
"...."
철두를 따라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자 진짜 무언가 소음이 들려왔다.
흐으으으, 흐으응.
좀비가 내는 괴성이기보다는 여자의 교성에 가까웠다.
"오, 저기 생존자 같은데."
"그래 보이는군요."
두 사람의 대화 소리 때문인지, 교성이 멈췄다.
철두는 쇠창살 너머로 느껴지는 숨죽인 인기척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좀비는 처치 시 1점인데, 생존자는 5점이 아닌가?
못해도 수십 명은 될 것 같은데.
콰직!
철두가 손으로 대충 쇠창살을 뜯어버렸다.
"허읏."
"...헉."
안엔 좀비 대신 생존자가 있었다.
서른 명 정도였는데, 여자들은 속옷만 입은 채 다들 바닥에 엎드려 있었고, 남자들은 창 같은 뾰족한 무기를 들고 있었다.
그 와중에 여자들에 둘러싸인 자가 있었다. 그는 강철두와 제임스를 보곤 못마땅한 얼굴로 소리쳤다.
"몬스터다! 우리 생존을 위협하는 몬스터입니다! 죽이십시오!"
그의 명령에 남자들이 나섰다.
그들이 창을 내밀며 다가오는데, 번들거리는 눈빛이 어딘가 고장 난 사람처럼 보였다.
"...뭐야?"
철두는 황당했고.
"어떻게 하죠?"
제임스는 그답지 않게 당황했다.
"어떻게 하긴."
철두는 성큼 앞으로 나서며 창을 내지르는 녀석들을 후려쳤다.
퍼퍼퍽!
급소를 피해 휘둘렀다곤 하지만, 쇠몽둥이가 워낙 위력이 강해 갈비뼈 서너 대가 나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끄아아아악!"
순식간에 창을 쥔 남자들을 무력화하고 더 앞으로 나가니, 나신의 여자들 셋을 소파 삼아 기대고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감히! 내 왕국에 발을 들이다니!"
남자는 망치를 들고 달려들었다. 철두는 인상을 찌푸리며 녀석의 머리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퍼억!
주먹 한 방에 머리통이 그대로 터지며, 육편과 뇌수가 주변에 흩뿌려졌다.
김철수의 작은 왕국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강철두다! 생존자 거수!"
"...흐윽."
철두의 외침에 여기저기 엎드려 있던 여자들이 흐느끼며 울었다.
좀비로부터인지, 괴물로부터인지.
...그들은 구원받았다.
203화 생존자 집단 (2)
"제임스. 수습해라."
"음? 철두. 자네 나라 사람이잖아?"
철두는 자신의 팔목을 톡톡 두드렸다.
제임스의 팔에도 같은 팔찌가 끼워져있다.
"아니, 소통의 팔찌가 문제가 아니고."
"더 강한 자가 사냥을 하는 거다. 너는 생존자를 지켜라."
"하아."
반박을 못 하겠네.
제임스는 하는 수 없이 생존자들을 수습했고, 밖으로 나간 철두는 냅다 전투함성을 내질렀다.
"우어어어어!"
지하 공간이라 쩌렁쩌렁한 메아리가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그에 화답하듯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좀비 괴성에 철두는 씩 웃었다.
"후후후."
새로 익힌 기술이 썩 마음에 든다.
인간 소용돌이라니.
아니, 바바리안 소용돌이인가?
철두는 메이스 대신 이번엔 전투 도끼를 꺼냈다.
"키에에에에."
허약한 주제에 뭐 저리 용감하게 달려드는지.
미궁이 다 이런지는 모르겠지만, 좀비는 여타의 몬스터와 달리 본능이 거세된 것처럼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덤벼드니 사냥이 수월했다.
강약약강의 전형인 오우거 같은 몬스터라면, 낌새가 불리하다 싶으면 금세 도망칠 것이고, 그러면 사냥시간보다 추적시간이 더 길어지니 말이다.
"소용돌이!"
퍼버버버버.
철두의 몸이 마력의 도움을 받아 팽이처럼 고속회전하기 시작했다. 양손에 쥔 양날 도끼를 좀비의 약점에 조준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홰애애애액!
믹서기에 갈리는 토마토처럼 아주 곤죽이 되어 죽어 나갈 뿐이다.
"꾸이, 꾸익!"
전령 꾸이가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주화와 스탯석을 수급했다.
"후후후."
이 정도면 한동안 스탯석 걱정은 없지 않을까?
하지만 철두는 이미 흡수 한계까지 스탯석을 모두 활성화했다.
거기에 더해 한계 돌파 스크롤로 20개까지 추가로 활성화한 상태.
무언가 새로운 시스템적인 향상이 있기 전까지는 스탯 상승은 어려울 것 같았다.
"부하들을 키워야지."
하지만 철두는 아이언헤드의 부족장!
개인의 전력 증가에 한계가 있다면, 단체의 전력 증강을 꾀하면 되는 일이다.
스탯석은 노비스를 미니언으로 만들 수 있고, 그중 특출한 몇은 히어로가 될 터다.
"후후, 제임스."
철두가 다시 대피소로 돌아오니 제임스는 곤혹스런 얼굴로 생존자들을 보고 있었다.
"철두. 문제가 있어."
"무슨 문제? 음?"
철두는 안으로 들어와서 깜짝 놀랐다.
"왜 둘뿐인가? 설마 다 죽였나?"
"아니! 죽이긴 누굴 죽여."
제임스는 간략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생존자 구조용 포탈이 열렸는데 노비스만 통과가 되었네."
"포탈은?"
"노비스들이 다 들어가니 사라졌어."
"흐음."
철두는 남은 두 사람을 보았다.
속옷만 입은 차림의 두 여자는 과하게 눈치를 보며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입어라."
철두는 인벤토리에서 옷을 꺼내 던져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가자."
"...어딜요?"
"고블린 잡으러 가야지."
노비스가 되기 위한 방법은 그것뿐이니까.
하지만 그때 생존자 하나가 서둘러 말했다.
"좀비만 잡아도 노비스가 될 수 있어요!"
여태 생존자 집단에서 노비스가 된 자들은 모두 좀비를 사냥하고 주화 주머니를 활성화한 이들이었다.
"너희는 뭐했냐?"
"사, 사냥을 못 하게 했어요."
생존자 집단의 사냥은 철창을 방어막 삼아 날카로운 쇠몽둥이를 창처럼 찔러서 이뤄졌다.
"스탯석이고 주화고 모두 김철수 그 사람이 독점했어요. 우린 노예나 다름없었어요...."
김예지와 이승희란 이름의 두 사람은 흐느끼며 울었다.
"강철두 님을 알아요. 인터넷에 워낙에 유명하신 분이라. 흐흐흑."
사토와 강철두의 대결은 한일전 비슷하게 되어서 국뽕 코인을 타고 한동안 알고리즘을 점령했다.
한국인 대표 노비스인 강철두의 사진과 이름은 그때부터 대중에게까지 널리 퍼지게 되었다.
"흠, 좋다. 따라와라."
"네, 흐윽."
"뚝해라."
"흐읍, 네."
철두가 준 옷은 그의 사이즈에 맞는 것이라 거의 상의를 원피스처럼 입은 두 명의 여성이 일행에 합류했다.
"가자, 좀비 잡으러."
"후, 별수 없군."
제임스가 두 레이디를 에스코트하듯 보살폈다.
철두의 전투함성이 닿는 곳까지의 좀비는 모두 몰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지라, 좀비를 찾기 위해 한참을 지하철역 안을 돌아다녀야 했다.
"키에엥, 케에아아!"
무지성으로 공격성만 남은 좀비지만 공격력 자체는 인체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하찮은 수준이라, 강화유리도 뚫지 못해 편의점 안에 갇힌 좀비 셋을 발견했다.
"문 열 테니 차분하게 때리시오."
제임스는 그녀들에게 망치 하나씩을 주곤, 신호를 보냈다.
철두가 고개를 끄덕이곤 편의점 문을 열어 좀비 하나의 모가지를 덥석 잡아 밖으로 끄집어냈다.
"끼에에! 끼에!"
목줄기가 잡혀 버둥거리며 철두의 팔을 할퀴고 긁고 난리가 났지만, 철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장미꽃 한 송이 내밀듯 좀비 대가리를 들이밀었다.
"쳐라."
"네."
그녀들이 대피소에 갇힌 시간이 23일.
그간 미친 듯한 좀비들의 아우성과 좀비보다 더 무섭게 변해버린 사람들.
짧은 시간 겪은 고초가 많다 보니 그녀들도 나름 독기를 가지고 있었다.
퍼억!
"자, 다음."
철두는 냉장고에서 음료를 꺼내듯 편의점 문을 열어 좀비 하나를 더 끄집어냈다.
퍼억!
"됐어요!"
두 사람 모두 좀비가 떨어트린 주화를 줍자 노비스로 전직했다.
파팟.
손등에 새겨진 주화 주머니를 보며 제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포탈을 열겠네."
"네가 여는 거였나?"
"그냥 구출한다고 생각하면 열린다네."
"그래?"
철두가 그런 마음을 먹자 눈앞에 정말 파란색 포탈이 생겨났다.
파팟.
"오!"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들어가라."
"가, 감사합니다."
두 여인이 막 들어가려는데 제임스가 서둘러 말했다.
"어디로 통하는지 알 수가 없소. 미궁 입구로 간다면 우리 병사가 있을 테니 걱정이 없고, 혹여 모르는 장소로 이동한다면 아이언헤드 성을 찾으시오."
"네, 감사합니다."
예지는 곧장 포탈을 타고 넘어갔고, 승희는 잠깐 우물쭈물하더니 말했다.
"대피훈련 중에 종말이 일어난 터라, 다른 대피소에도 생존자들이 있을지도 몰라요."
"여기 역에 대피소가 몇 개냐?"
"지하철역 입구 가까운 곳에 하나씩은 있어요."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 안에 대피소가 마련되어있다. 이건 몇 날 며칠 종말 훈련 내용을 방송으로 전파했기에 일반인도 모두 아는 정보다.
"후후, 알겠다."
"네, 다시 한번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이승희는 포탈 너머로 사라졌다.
"가자고."
"어딜 말인가? 정말 생존자들을 찾으려는 건가?"
"당연한 것 아니냐?"
"하지만 미궁의 미션은 어찌하고?"
제임스의 말에 철두가 후후 웃었다.
"부족민을 늘리는 건 부족장의 의무다."
"...."
"미궁 미션 따위 상관없다."
주워가면 다 주민이 될 생존자들이 있는데, 굳이 점수 따위에 연연해 빠르게 마더 좀비를 찾을 필요는 없다.
"...자네의 대의에 또 한번 배우는군."
제임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스펙 할 수밖에 없는 사내다.
이 단순해 보이는 사내는 타고난 리더일지도 모른다.
"자네 의견을 기꺼이 따르지."
"후후, 가자고."
두 사람은 마더 좀비를 찾는 건 제쳐두고 대피소부터 뒤졌다.
대피소의 역할 자체가 사람들의 빠른 대피와 보호를 염두에 뒀기에, 지하철 입구에서 가까운 곳 어딘가에 마련되어있었다.
좀비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공간만 있으면 대피소로 훌륭히 기능하기에, 정부는 얼마간의 생존물자를 비축해놓는 것으로 여러 개의 대피소를 마련해두고 있었다.
"여기도 꽝이군."
"으음, 처참해."
두 사람은 서울역 인근의 네 번째 대피소를 들렀으나 죽은 이들뿐이었다. 한쪽 창고에 쌓여있는 생존물자는 뜯어낸 흔적도 없는 박스 상태 그대로였다.
"위로 가보는 게 어떤가?"
"좋다."
철두는 제임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계단을 밟고 올라가니, 어슬렁거리는 좀비들이 많다.
철두는 배에 힘을 주고 고함을 질렀다.
"나는 강철두다! 생존자를 구출하러 왔다! 아직 살아있다면 신호를 보내라!"
쩌렁쩌렁 울리는 소음에 거리마다 좀비들이 먼저 반응했으나, 그 사이에 사람의 목소리도 있었다.
"여기요! 여기 사람 있어요!"
생존자는 대피소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철두, 저기!"
"보인다."
출입구 근처의 상가 건물이다.
4층 창문으로 상반신을 내민 채 필사의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여기 사람 있어요!"
서울역은 커다란 역이다.
기차역은 물론, 지하철도 1호선과 4호선, 경의중앙선과 공항선까지 아주 복잡하고 큰 역.
엄청난 유동인구를 자랑하는 곳이기에 골목마다 좀비들이 득실거렸다.
"키에에에."
골목 사이사이 있던 좀비들이 독서실 빌런처럼 모습을 드러내 득달같이 달려오고 있다.
생존자 구출 전에 일단 좀비들 떼거리부터 정리해야겠다.
"우어어어어!"
더 큰 소리로 어그로를 끌었다.
함성에 반응해 몰려오는 좀비의 수가 못해도 천이 넘는다.
"후후후. 소용돌이."
양손 도끼를 쥐고 고속 회전하며 좀비를 말 그대로 갈아버렸다.
상가 4층에 고개를 내밀고 구조 신호를 보냈던 남자 정승호는 전율했다.
"미, 미쳤다!"
처음 보는 광경이다.
사람이 저런 기술을 쓸 수 있나?
"히, 히어로다."
상대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분명 퀘스트에서 이르는 히어로가 틀림없다.
정승호는 빠르게 휴대폰의 전원을 눌러 켰다.
종말 1일 차에 전기가 끊겼고, 수도도 2일 차에 끊겨버렸다.
하지만 인공위성 통신을 기반으로 하고, 그 서버도 우주로 보내버린 어떤 미국 사업가 덕에 인류의 커뮤니티는 살아있다.
휴대폰 전원만 켤 수 있으면, 그리고 인공위성 통신 유심만 가지고 있으면 누구나 '휴먼 채널'에 접속해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다.
토토톡.
커뮤니티에 접속, 한국 게시판을 찾아 빠르게 게시물을 작성하기 시작한다.
- 서울역에 히어로 출현. 강철두라 밝힘. 근처 생존자들 위치 업뎃해주세요!
댓글은 폭발적으로 달렸다.
하지만 모두가 긍정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 이 새끼 낚시 아님?
- 서울역까지 어떻게 가?
- 시발, 오려면 강남부터 오지. 왜 서울역?
- 님들 속지 마세요. 저 새끼 악질일 수도 있음.
- 집 밖으로 안 나가는 게 살아남는 길이다.
- 좀비보다 사람이 더 무섭습니다. 조심하세요.
인류에 종말의 그림자가 드리운 지 23일.
수많은 사람들이 좀비로 변해버렸고, 죽음을 맞이했다.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 중 슬슬 집단을 이루는 이들도 있었다.
- 딱 보니까 사람들 유인해서 세 불리려는 것 같은데. 차라리 인천으로 오십쇼. 인천연합은 열려있습니다.
- 뭉쳐야 삽니다. 도봉구 패밀리로 오세요.
하나보다는 둘.
둘보다는 셋이 낫다.
하지만 극한의 상황에서 사람이 많다 하여 무조건 생존에 유리한 것은 아닌지라, 여전히 가족들과 혹은 개인으로 버티는 생존에 임하는 자들도 많았다.
- 아니, 진짜 강철두야! 지금 좀비들 갈아버리고 있어! 못 믿겠으면 근처 놈들이라도 밖을 내다봐.
최초 글 작성자 정승호의 새 게시글에 몇몇이 호응을 얹기 시작했다.
- 진짜다! 뭔가 우렁찬 소리 들리더니 좀비들 싹 몰려갔어.
- 무슨 일이 일어나긴 하는 듯.
- 나 ○○스퀘어 생존잔데, 진짜 누가 좀비 사냥하고 있어.
서울역에 강림한 바바리안의 활약상이 휴먼 채널의 한국 게시판을 통해 빠르게 업뎃되고 있었다.
204화 보상 동굴 (1)
인공위성 통신사의 유심칩, 그리고 스마트폰.
이 둘만 있다면 세계 어디든 연결될 수 있다.
디바이스의 충전을 위한 전기 조달이 문제지만....
아직 종말이 시작된 지 23일.
충전된 보조배터리든, 태양광이나 발전기 따위로 스마트 디바이스를 충전할 전기 수급은 가능했다.
인류 채널엔 아직도 많은 이들이. 아니, 종말 이전보다 더 많은 인원들이 글을 쓰고, 읽고, 댓글을 교환하며 생존 소식을 나누고 있었다.
그중 한국 게시판은 세계적으로도 주목도가 높은 편이다.
미국인 하나가 게시판의 글을 퍼왔다.
- 퍽, 한국에서 아이언헤드가 나타났대.
- 그게 누구야?
- 걔 있잖아. 한국의 슈퍼 노비스.
- 이젠 히어로라고 불러야 해. 그럼 히어로 퀘스트가 뜬 건가?
- 어떤 방식인지 몰라. 젠장. 그는 왜 한국에 간 거야?
- 자국민부터 구하는 건 당연한 거야. 그를 비난할 수 없어.
- 그럼 한국에 노바로 향하는 포탈이 열린 건가?
- 방식은 아직 알 수 없어.
- 한국 게시판에 가서 물어보자. 그래야 구조를 기다리든지, 생존 활동을 이어나가든지 할 것 아냐.
- 위에 놈, 생존 활동이라니. 약탈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 퍽킹! 난 이제 식량이 거의 다 소진되었어.
- 와우, 여기 히어로가 나타났어.
- 위에 놈 어디야?
- 뉴욕이야! 뉴욕에 지금 아마조네스가 나타났어! 엄청나! 좀비들이 죄다 쓸려나가고 있어.
게시판의 여기저기서 히어로의 출현 정보가 난무하기 시작했다.
일본, 프랑스, 영국 할 것 없이 수많은 나라에서 히어로가 출현해 좀비들을 휩쓸며, 구조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철두는 거리에서 뛰쳐나오는 좀비들을 갈아버리고는 정승호가 있는 상가건물로 들어갔다.
쿠드득.
4층의 철문을 열어젖히자 정승호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철두를 맞이했다.
"흐윽,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노비스냐?"
"아닙니다."
"그럼 빨리 전직부터 해라."
"주, 주화 좀 주십시오."
"음? 네가 잡아야지."
"그, 남이 준 것도 된답니다."
"...?"
철두는 의아해 물었다.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그걸 여기서 23일간 버티기만 한 녀석이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누가 그래?"
"휴먼 채널 정봅니다."
"휴먼 채널?"
철두의 되물음에 답한 것은 제임스였다.
"알아! 미국의 갑부가 만든 무료 인터넷망이지."
"무슨 소리냐?"
"그러니까 스페이스...."
제임스는 처음부터 설명하려다가 핵심만 말하기로 하였다.
"세상이 퍽킹 이 꼴이 났지만, 셀폰과 통신칩만 있으면 인터넷이 가능하다는 소리야 친구."
"오!"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승호가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게시물을 보여주었다.
"생존자를 찾는 글에 댓글이 3천 개가 넘었습니다. 여기 서울역 인근의 생존자들도 많은 것 같아요."
철두는 기계를 보곤 결정했다.
"좋아. 이름이 뭐지?"
"정승호입니다."
"이놈들을 구하자."
"예?"
"너 혼자 도망치려 했나?"
"아, 아니. 그건 아니지만."
"후후, 나만 믿어라. 넌 그냥 길 안내만 하면 된다."
"그, 그러겠습니다."
파티에 합류한 정승호는 제임스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지구의 종말과 그 이후의 상황을 궁금해하는 제임스의 질문세례에 정승호는 대부분을 대답해 줄 수 있었다.
"호, 그러니까 한국 정부는 결국 멸망했군요."
"예, 대국민 연설 중에 대통령이 좀비가 되는 게 생중계되었죠."
종말을 위한 대피훈련 중에 퀘스트가 발생했다.
마지막 구원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내용을 담은 퀘스트에 모든 시민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가운데 대통령 긴급연설이 있었다.
- 국민 여러분. 대통령 김승태입니다. 지금은 실제상황임을 알립니다. 모두 종말에 대비해... 아아악!
미사여구를 뺀 다급한 대통령의 연설 도중 몇몇 보좌관들의 눈이 뒤집히더니 대통령의 목을 물어뜯었다.
대통령은 각기춤을 추듯 몸을 기괴하게 움직이더니 곧 좀비로 화해 사람들을 해치기 시작했다.
이를 직접 찍은 방송국은 물론, 시청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종말을 대비한 대피 훈련은 그대로 실제상황이 되었고, 반강제나 다름없던 그 훈련은 많은 사람들이 생존하도록 도왔다.
물론 정승호와 같은 부류도 있었다.
"장사도 바빠 죽겠는데, 대피소에 갈 시간이 어딨겠습니까? 냉장창고에 숨어 지냈습니다."
그는 쇼핑몰 상가의 푸드코트 사장으로, 부식물을 보관하는 커다란 창고에 숨어 생존할 수 있었다.
그가 생존하는데 큰 보탬이 된 것은 창고에 가득한 식재료와 휴대폰으로 주고받는 휴먼 채널의 소식들이었다.
"헌데, 제가 어그로 끌어봐야 믿지 않고 나오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상관없다."
"예?"
"모두를 구조할 수는 없다."
철두의 단호한 말에 정승호는 입을 앙다물었다.
이거 괜히 의심병 많은 이들은 이번 기회를 놓치면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다음 구조는 언젠지 알 수 있습니까?"
"나도 모른다."
철두의 단답에 제임스가 부연했다.
"노바에 지금 미궁이라는 게 열렸는데, 그것을 통해 온 곳이 여길세. 그리고 미궁이란 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열리는지 우리도 정보가 없어."
"그, 그렇군요. 그 사실 그대로 휴먼 채널에 알려도 되겠습니까?"
"알리게. 아, 이것도 전하게. 포탈이 닫히고, 그러니까 종말이 시작되고 노바는 지금 겨우 5일 정도가 흘렀을 뿐이야."
"예? 지구는 그날부터 오늘이 23일째인데요?"
"그러니까 말이야. 시간이 역전된 것 같아. 정확한 비율은 알 수 없지만, 지구의 시간이 훨씬 빠르게 흐르는 듯하네."
"...그 말은."
"다음 구조 시기는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이지."
"...어, 어떻게 합니까?"
"어쩌긴? 어서 전하게. 기회가 왔을 때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들을 구해야지."
"아, 알겠습니다."
정승호는 위기감과 동시에 자신은 이미 구해졌다는 묘한 안도감에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 노바에서 5일 지난 시간이 지구에서 23일이래. 너네 괜히 조심하다가 다음 차례는 몇 달, 아니, 몇 년 뒤일 수도 있어. 서울역 근처에 있는 녀석들은 얼른 나와! 소리치고 다닐 테니까!"
"생존자 여러분 응답하십시오! 구조대입니다!"
정승호는 사명감에 불타 목청을 높였고, 철두는 그 소음에 이끌리는 좀비들을 해치웠다.
"여기요! 여기 사람 있어요!"
어느 다세대 주택에서 일가족 4명을 구한 뒤, 이들도 소리치게 했다.
"구조대입니다! 어서 나오세요!"
"노바로 갈 수 있는 기회입니다. 다들 나오세요!"
운 좋게 생존한 지하철역의 대피소에서 또 서른 명 정도를 구하자 철두를 뒤따르는 생존자 무리는 점점 더 많아졌다.
서울역을 중심으로 순회하듯 이동하며 좀비를 소탕하고 또 생존자들을 구하다 보니 어느새 뒤따르는 인원이 삼백을 넘겼다.
텅.
"으음?"
그렇게 구조를 이어가던 와중에 철두는 반투명한 막에 가로막혔다.
텅, 텅!
철두가 두드려보니 깨질 만한 종류가 아니었다.
정령을 소환해 마법을 시도해봤으나, 방어막 같은 종류의 것도 아니었다.
비슷한 것이 있다면....
"종말시험 때 본 시공간 장막 같군그래."
"그래 보인다."
"흐음, 이번 미션의 맵이 제한된 것 같아. 지구 전역을 돌아다닐 순 없나 보군."
철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미궁 서울역에 입장하였다 했다.
지구 전체가 무대였다면 미궁 지구에 입장했음을 알렸겠지.
"끝이군."
"수색 계속할 거야?"
"아니, 이쯤 해도 안 나오면 됐다."
"그러자고."
철두와 제임스가 생존자를 노바로 보낸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두 개의 파란색 포탈이 생겨났다.
"아! 그렇지. 생존자당 점수도 따로 카운트되겠군."
제임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의 포탈을 닫았다.
"지분을 요구하기엔 염치가 없지. 자네가 다 돌려보내게."
"알겠다."
철두는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노비스는 곧장 포탈로 가고, 아닌 자는 여기 와서 주화를 받아 가라."
이제 퀘스트존 전용의 주화 같은 건 사라진 모양이다. 철두가 건네주는 주화로도 사람들은 노비스로 전직해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꼭 은혜 갚겠습니다."
파팟.
포탈로 들어가는 사람들마다 감사 인사를 전하는데, 그 진심이 느껴져 철두는 괜히 심장이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이거 골렘의 핵에 문제가 있나?
간질간질.
괜히 겸연쩍군.
"자, 이제 마더 좀비 녀석 찾으러 가보자고."
"그럽세."
생존자들을 모조리 포탈 너머로 보내놓고 철두와 제임스는 마더 좀비를 찾기 위해 다시 서울역으로 향했다.
*
미궁 동굴.
히어로 미션은 이 동굴을 오기 위한 것이다.
미궁 동굴의 시작점.
커다란 공동의 공간의 중앙에 밝혀진 모닥불가엔 엘프 둘만이 남아 있었다.
"단장님, 이제 가야 합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자."
"미션에 실패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실패는 아니야."
아르엘라의 목소리엔 확신이 가득했다.
철두와 결투장에서 대결해본 그녀다.
그 정도 실력이면 미션에 실패할 가능성은 없다.
"그럼 왜 여태 안 왔겠습니까? 아무리 길치라도 이 정도 시간이면 미션을 완료했을 시간입니다."
"...."
무언가 사고가 생긴 게 틀림없다.
그게 아니라면 상대적으로 쉬운 난도인 이번 미션을 이리 늦게 클리어할 리가 없다.
"단장님, 이러다 보물상자가 남아나질 않겠습니다."
"...."
일반적인 스탯석이나 스킬의 향상이 극에 이른 히어로들이 더 강해지는 방법은 오직 이곳 미궁 동굴에서의 보상뿐이다.
에그니스의 재촉에 아르엘라가 한숨을 쉬었다.
"알겠어. 가자."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 바바리안은 노바에서도 만날 수 있지만, 미궁은 자주 열리는 게 아니니까요."
미궁이 그리 자주 열리는 것이 아닌바, 히어로에게 있어 미궁 보상은 절대 흘려보낼 만한 기회가 아니다.
'이 쉬운 미션을 왜 아직....'
보스 사냥형 미션은 어렵지 않다.
보통 몬스터의 밀집도가 높은 곳에 보스가 있기 마련이기에, 양학이 가능한 범위공격 계열의 마법사와 보스몹의 딜링을 위한 근접딜러 조합이면 무난하게 클리어하는 게 이번 미션이다.
'분명 그 정도 허접은 아닌데.... 설마 점수 욕심 때문에?'
보스 사냥형 미션의 원리는 간단하다.
몬스터를 사냥해 점수를 모으고, 보스를 사냥해 미션을 끝내면 보상 동굴로 올 수 있다.
보상 동굴에는 한정된 수량의 보물상자가 있고, 이것을 여는 열쇠는 점수다. 상자마다 각기 다른 자물쇠 점수를 차감해 상자를 열고 보물을 획득한다.
많은 점수를 확보한다면 보다 많은 상자를 열 수 있겠지만... 상자는 한정된 수량만 존재하기에 너무 늦게 오면 미리 다 열려있는 빈 상자뿐일 수도 있다.
"제길. 설마."
초짜나 하는 그런 멍청한 삽질을?
아니, 잠깐. 이 새끼 초짜 맞잖아?
파팟.
그때 공동에 환한 빛이 나며 포탈이 하나 생성되었다.
205화 보상 동굴 (2)
마더 좀비.
녀석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날개뼈 부근에 팔 같은 촉수가 4개나 튀어나와 있어, 한눈에 보기에도 다른 좀비들과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처치하는 건 쉬웠다.
"키에에에!"
스걱!
재생을 막는 게 어렵지.
콰직!
바닥을 구르는 머리를 밟아 으깨버렸다.
"이래도 재생하나 보자."
마력을 쏟아 살리만다를 불러 마더 좀비의 몸을 활활 태웠다.
화르르륵!
<미션 완료!>
<점수를 정산합니다.>
<5872점을 획득하였습니다.>
"후후, 끝이군."
"수고했네. 철두."
"너는 몇 점이냐?"
"231점일세."
제임스는 처치한 좀비의 수가 적다.
생존자 구출도 처음에 몇 명만 했을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철두에게 몰아줬다.
즈아앙!
마더 좀비가 빛으로 화해 사라진 자리에 포탈이 생겨났다. 생존자들이 돌아간 푸른 포탈과는 대비되는 색깔의 붉은 포탈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기존에 지구와 노바를 이어주던 포탈과 똑같이 생겼다.
<보상 동굴로 이동해 보상을 수령하세요.>
<높은 점수의 자물쇠가 걸린 상자에 좋은 보상이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낮은 점수의 자물쇠 상자에서도 희박한 확률로 좋은 보상이 등장합니다.>
"음?"
"어?"
철두와 제임스의 눈이 동시에 마주쳤다.
"가챠?"
"중국게임?"
둘 모두에게 너무나 익숙한 시스템이다.
투입되는 금액에 따라 다른 확률의 보상.
"흠, 가자고."
"아쉽군. 나도 다음 미궁에서는 분발해야겠어."
철두는 조금 설레는 얼굴이었고, 제임스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파팟.
포탈을 타자 차원 이동 특유의 울렁거림이 찾아왔다.
반전되는 시야로 대뜸 보이는 얼굴을 보곤 철두가 와락 인상을 구겼다.
"재수 없게 요정 놈들이군."
"뭐? 시발놈아?"
"후, 아니다. 네 탓도 아닐 텐데."
"와, 어이가 없네?"
아르엘라는 피식 웃고는 철두를 도발했다.
"한 판 더 떠?"
"음? 날 아나?"
"와, 진짜 어이가 없네. 나 기억 안 나냐? 처발려놓고 정신 승리하냐?"
"허, 내가 져?"
내가 요정 따위에게 진 적이....
있구나.
"헛! 너는 선조의 혼이 깃든 요정?"
"그래. 나다. 이 좁밥아. 이제 기억나냐?"
"흥!"
철두는 훌쩍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만만찮은 전력을 가진 요정이다.
그때의 승부가 아슬아슬했다고 하기엔... 지금도 감히 승리를 장담치 못할 정도의 강적이다.
차앙.
철두가 검을 꺼내 들었다.
"흥! 복수를 하려는 거냐?"
"아니, 내가 이겼는데 무슨 복수야?"
"알 바 아니다."
"이런 미친놈을 다 봤나. 그러고 날 왜 못 알아봐?"
"요정 놈들 생김새야 거기서 거기인데 못 알아보는 게 당연하지."
"허."
아르엘라는 기가 찬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손을 휘이 내저었다.
"야, 칼 치워. 안 잡아먹는다. 여기 와서 앉아."
"흥, 교활한 요정의 간계에 속지 않는다."
"하, 이런 씹."
아르엘라는 한숨을 쉬었다.
"애도 아니고 유치하게 그러지 마라. 결투장에서의 대결인데 원한 같은 게 어딨어? 할 이야기 있어서 기다린 거니까 이리 와봐."
"흥."
"아니, 여긴 안전지대라 아예 못 싸워."
철두가 여전히 칼을 들고 서 있자 제임스가 옆에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철두. 저 말이 맞는 것 같네."
"요정은 교활하다. 속지 마라."
"아니, 저기 모닥불을 보게."
<평화의 모닥불>
따뜻한 온기만큼은 마음 편하게 나누어야 한다.
온기가 사라질 때까지 평화가 유지된다.
"으음."
철두가 모닥불을 바라보자 메시지가 떴다.
<모닥불의 온기가 전해지는 동안은 상대를 공격할 수 없습니다.>
<모닥불을 벗어나도 향후 10분간 서로 공격할 수 없습니다.>
정말이네.
철두가 검을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고는 히죽 웃었다. 서로 공격하지 못하면 본디 강한 자가 손해다.
"후후, 아쉽겠군."
"허, 내가 왜?"
"날 제거할 절호의 기회를 놓쳤으니 말이야."
"아니, 그러니까 내가 너를 왜 죽여?"
"왜냐면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테니까."
다음에 만나면 저 요정 놈보다 더 강해지겠다.
철두의 눈에서는 호승심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아르엘라는 너무 어이없어 화도 나지 않았다.
"그만 깐죽대고 앉아라."
"흥."
철두가 아르엘라의 맞은편에 앉았다.
"용무가 뭐냐?"
"우리 영감님이 보자셔."
"영감?"
"내 스승님."
"...?"
철두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볼일이 있으면 직접 오라 해라. 심부름꾼을 보내지 말고."
"아니, 그래서 왔잖아."
아르엘라는 짜증이 났다.
딱히 말주변이 좋은 것도 아니고, 남에게 맞춰 주고 배려해주며 살아온 인생도 아니다.
상대에 맞춰 주기에는 여태 자신에게 맞춰 주는 삶만을 살아온 그녀다.
엘프족.
그중에서도 특별하다는 하이엘프.
개중에도 또 더욱 고귀한 왕가의 혈통이라면....
"에그니스."
"네, 단장님."
"답답해 뒈지겠으니까 좀 설명해줘 봐."
"...그러죠."
여태 가만히 서 있던 냉막한 인상의 엘프 남자가 나서서 차분히 말문을 열었다.
"강철두 님은 정령술을 쓰실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아르엘라 단장님은 선조의 혼이 깃드셨죠."
"안다."
그것 때문에 저번 무한결투장에서 패배했다.
엘프 따위가 바바리안 선조의 혼이라니.
"단장님의 생각은 그렇습니다. 동시대에 엘프족의 특별함이 바바리안에게, 바바리안의 특수함이 엘프에게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래서?"
"바꿀 수 있다고 여기십니다."
"...."
철두는 아르엘라를 보았다.
그녀도 철두를 보았다.
조금 으쓱한 표정의 그녀가 말했다.
"바꾸자."
"어떻게?"
"그건 이제 알아봐야지."
"...."
이 요정은 멍청하기가 바바리안보다 더하구나.
"방법도 모르면서 어떻게 바꾸자는 거냐?"
"이제부터 찾아봐야지."
아르엘라는 당당했다.
"아, 그전에 우리 영감님이 좀 보자셔."
파파팟.
아르엘라의 어깨 위로 귀기와 같은 기운이 뭉치더니 선조의 혼이 깃들자, 철두는 흠칫 놀라며 인벤토리에서 검을 빼 들었다.
갑자기 전투 준비라니!
츠츠츠츳!
허나 뭉글뭉글한 형상의 선조의 혼은 철두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철두도 아르엘라의 어깨 위 선조의 혼에 시선을 맞췄다.
"인사해."
"흥! 엘프족 따위에게 깃든 비겁한 바바리안은 선조도 아니다."
"네 아버지셔."
"...!?"
철두는 너무 놀라 눈을 부릅떴다.
이윽고 그의 손에 들린 검이 매섭게 공기를 가르며 아르엘라의 목을 향해 나아갔다.
쩌엉!
검은 아르엘라의 목에 닿기 전 무형의 기운에 가로막혀 우뚝 멈춰서 버렸는데, 그녀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소용없다니까 그러네."
"내 아버지를 모욕하지 마라!"
"뭔 모욕이야, 병신아. 진짜 너네 아빤데."
"이익, 이노오오옴!"
쩌엉, 쩌엉!
유리가 깨지는 듯한 특이한 마찰음과 함께 검격은 허공에 계속해서 멈췄다.
"허, 놈이 아니라 년이거든."
"이익!"
아르엘라를 노려보는 강철두의 얼굴이 흉악스럽게 변했다.
20살.
앉은 자리는 벌써 수만을 책임지는 우두머리가 되었지만, 여전히 애송이라면 애송이일 나이.
특히나 부모님 욕을 못 참을 시기.
"카다잔. 내 스승님 이름이야."
평소에는 영감이라고 부르지만, 자식 앞에서 부모를 막 대하는 것 같아서 말을 골랐다.
"어머니 성함이 이블린이지?"
"어, 어떻게!"
"어떻게 알긴, 스승님이 이야기해주셨으니까 알지."
"...."
철두는 너무 놀라 검을 쥔 채 그저 멍청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아버지가 왜 엘프 녀석을 전사로 인정하고 혼으로 깃드셨나?
아니, 그렇단 건 역시 아버지는 그때 돌아가신 건가?
"아버지.... 정말 아버지십니까!"
츠츠츳.
아르엘라의 어깨 위에 깃들었던 선조의 혼이 분리되었다.
선조의 강림.
붉은 기운의 선조의 기운은 철두를 향해 다가오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이럴 수가.
"대화를 나눌 순 없는가?"
"나도 내 심상 세계에 데려가면 좋겠지만, 너도 알잖아? 심상 공간은 죽은 자들밖에 들어오지 못해."
"...."
철두는 붉은 선조의 혼을 보았다.
솔직히 아직도 반신반의하다.
너무나 믿기지 않는 일이라 그렇다.
"잘 컸다 하더라."
"아버지가 그리 말하셨나?"
"응. 말한 대로 컸대."
"말한 대로?"
"강해지라고 했다던데?"
"...아."
철두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아르엘라는 거 보란 듯이 잘난 체를 했다.
"거 봐. 내 말이 맞지?"
"...."
"카다잔의 아들 에이든."
"아아...."
더는 참지 못하고 철두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전사의 눈물이 볼을 타고 주루룩 흘러내렸으나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아버지."
아버지가 맞구나.
어찌하여 모욕적이게도 요정의 혼이 되셨는가.
아버지여....
"흐으으윽."
철두는 허물어져 내렸다.
"흐어어어어!"
바닥을 짚고 엎드려 울부짖던 철두가 한참 만에 일어나서 제 뺨을 후려쳤다.
퍼억!
"우어어어어!"
엎어져서 한 5분쯤 울던 사람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고함을 질러대니, 오열하는 모습을 못 본 체하며 모닥불을 쬐고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아이, 시발. 놀래라."
입이 걸걸한 엘프 공주를 보며 철두가 단호하게 말했다.
"방법을 찾겠다!"
"그, 그래?"
아르엘라는 철두가 이리 협조적으로 나올 줄 몰랐기에 반색한 얼굴이 되었다.
"아버지를 요정 놈의 심상에 가둬둘 수는 없다."
"아니! 자발적으로 오신 거거든!"
"그럴 리가 없다."
"하, 그냥 넘어가자. 어쨌든 이걸로 너도 동의한 거다."
아르엘라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눈은 확신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너와 나는 운명이 뒤바뀌었어. 이건 확실해. 내 감이 말해주고 있어. 함께 방법을 찾아보자. 너와 내가 본래의 운명을 찾아갈 수 있게."
"좋다."
철두가 아르엘라의 손을 맞잡았다.
전혀 상상해본 적도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상황에 제임스는 정신이 없었다.
"자자, 그럼 우리 서로 싸울 일이 없어 보이는데, 미궁은 어찌하실지?"
대충 상황을 정리하고 싶은 제임스의 눈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철두와 자신은 보상의 동굴이 처음이고, 상대는 경험이 있어 보이니 도움을 받으면 최상의 상황이다.
"보상은 알아서 수령하는 거지 뭐. 이거나 가져가."
철두는 상대가 내미는 좌표석을 받았다.
"우리 영지로 통하는 좌표석이야."
"내 것도 주지."
"오! 좋아."
철두가 흔쾌히 좌표석까지 내줄 줄은 몰랐는지라 아르엘라가 해맑게 웃었다.
바바리안 녀석이 좀생이처럼 굴더니, 함께 하기로 한 뒤로는 의심 없이 믿어주는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자, 그럼 노바에서 보자고."
"내가 찾아가겠다."
"알겠어. 바로 튀어와라. 너를 우리 주술사에게 보여야겠어."
아르엘라는 강철두가 어찌하여 요정족의 축복을 받았는지 낱낱이 알아볼 생각에 들떴다.
'드디어.'
진정한 엘프 공주의 자격을 갖출 때다.
206화 황금 상자
아르엘라와 에그니스는 그래도 헤어지기 전 중요하다면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보상 동굴은 미로야. 너무 늦어서 찾기 쉬운 곳에 있는 상자는 다 열렸겠지만, 꼭꼭 숨겨진 상자도 있으니 운 좋으면 한두 개는 찾을 수 있을 거야."
"좋은 정보군."
"그렇다고 너무 오래 있진 마. 여기서 시간은 금이야."
"무슨 뜻이야?"
"늘 뒤죽박죽인 이 세계답다는 거지. 미션 클리어까지 얼마나 걸렸지?"
"10시간 정도?"
"우리는 여기서 100시간 정도를 기다렸어."
"...?"
철두와 제임스가 흠칫 놀랐다.
"보상 동굴의 시간이 10배 빠르다는 소리냐?"
"맞아. 그리고 노바는 더 빠르지."
"어? 노바가 더 빠르다니?"
"여기서 1시간을 허비하면 노바에서는 10시간이 지나간다."
"...."
노바와 보상 동굴의 시간 차가 10배.
그럼, 노바와 미궁의 시간 차는 무려 100배다.
"너나 나처럼 노바의 일이 중요한 사람에겐, 미션을 이렇게 늦게 완수하는 건 병신같은 짓이야. 알겠어?"
"대충."
"그럼 행운을 빌게."
두 엘프는 상자를 찾는 노하우 같은 건 가르쳐주지 않고 훌쩍 출발해버렸다.
"우리도 가자."
"그러세. 시간이 없군."
철두와 제임스가 동굴을 나섰다.
동굴의 길은 하나였는데, 조금 걸어가니 곧 두 갈래의 길로 갈라졌다.
"음?"
"어디로 갈 텐가?"
"잠깐 기다려봐라. 코카콜라 맛있...."
철두는 손가락을 들어 한참 두 갈래 길을 가리키더니 오른쪽을 골랐다.
"저쪽이다."
"...방금 그건 뭔가?"
"코리안 점괘 같은 거다."
"오! 다음에 나도 가르쳐 주게."
"후후, 별거 아니다. 딩동댕과 딩동댕동이 중요한 거다."
철두는 마법사의 비기처럼 기술을 전수해주었다. 다 들은 제임스는 황당한 얼굴이었다.
"딩동댕에서 고른 게 마음에 안 들면 동을 한 번 더 해서 옮기는 건가?"
"그게 핵심이지."
"그럼 결국 본인 마음대로 고르는 게 아닌가?"
"맞아."
"아니, 그럼 점괘가 아니잖아?"
"후후, 대신 내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지."
"아니 뭔...."
제임스는 황당해 항변하려다 말았다.
조금 병신같긴 하지만 일리 없는 말로 느껴지지도 않아서였다.
어차피 선택은 둘 중 하나인데, 코카콜라 점을 보면서 본인의 확실한 마음을 가려낼 수 있는 것이다.
<모닥불의 온기가 사라집니다.>
"이제 공격 가능한 모양이군."
"음, 조금 경계하면서 가세나."
"그러지."
두 사람은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그리 좁진 않아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정도는 되었으나, 천장이 높은 것도 아니라 퍽 답답한 기분이었다.
길이야 복잡하지 않으니 어두운 와중에도 두 사람은 잘도 길을 찾았다.
"점점 더 밝아지는군."
"저기 뭔가 있다."
긴장감을 끌어올린 채 점점 더 밝아지는 시야에 적응하며 나아가다 보니 지름 10미터는 되는 뻥 뚫린 공동이 나타났다.
빛은 그 공동의 중앙 천장에 박혀있는 돌에서 나오고 있었다. 저 빛이 새어나가는 덕에 복도에서도 그럭저럭 횃불 없이 길을 더듬어 갈 정도의 시야 확보가 가능했다.
"이미 털렸군."
"그렇군."
공동의 중앙 바닥에 궤짝 같은 상자가 뚜껑을 벌린 채 빈 속을 내보이고 있었다.
미로라고 하더니, 이 정도면 그냥 재빨리 달려오면 거저 발견하는 수준이다.
"이래서 미션 속도도 중요하군."
상자를 열 수 있는 점수만 획득한 후에 보스를 잡아 먼저 오면, 이렇게 쉽게 상자를 열 수 있는 거다.
"우린 정말 허탕만 칠 수도 있겠군."
"일단 가보세. 길이 복잡하지 않아서 다행일세."
두 사람은 공동에 난 나머지 세 갈래 길 중 하나를 골라 나아갔다.
그리 크지 않은 복도는 곧게 나 있었고, 미로라고 하더니 길이 여러 갈래일 뿐, 그리 복잡하지는 않았다.
일자로 난 길을 쭉 따라가다 보면 또 공동이 나오고 하는 식이다.
하지만 말이 씨가 되었을까.
단순했던 미로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공동도 점점 더 커졌다.
복도 끝에 다다르자 이제는 절벽까지 나왔다.
절벽의 끝에서 광원을 향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보니,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거대한 공동의 천장에 그에 비례하는 거대한 빛이 매달려 있었다.
대낮처럼 밝지는 않았지만, 동굴 안이라기엔 지나치게 밝은 빛이 주변 사물을 선명하게 비췄다.
"저 아래로 길이 있다."
절벽으로 길이 끊긴 게 아니라 절벽의 벽을 따라 여기저기 울퉁불퉁한 돌이 있어, 매달려 내려갈 만해 보였다.
처음 마주한 복잡한 지형이지만, 그 복잡도만큼이나 숨겨진 상자가 있을 수도 있겠단 생각에 두 사람은 절벽을 타고 내려가 주변을 샅샅이 수색했다.
"꽝이군."
"여기도 꽝이야."
두 개의 상자를 찾았으나 모두 텅 비어 있다.
"철두. 더 시간을 지체하는 게 맞을까?"
"무슨 소리냐?"
"우린 미션에서 이미 10시간을 허비했지. 여기 시간으로 환산하면 100시간일세. 그리고 지금 2시간째 헤매고 있으니 102시간, 4일 8시간이지."
철두가 인상을 찌푸렸다.
제임스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계산했다.
"지금 노바로 돌아가도 거긴 40일 80시간. 그러니까, 43일 8시간이 흘렀단 걸세."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솔직히 아이언헤드령의 전력은 자네가 차지하는 비중이 월등하지. 아니, 자네 없이는 영지가 존속할 수 없는 수준이야."
"...."
"우리 영지 괜찮겠나?"
"괜찮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나온 대답에 제임스가 조금 놀랐다.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진태는 그리 호락호락한 놈이 아니다."
"시종장 말인가?"
제임스의 표정은 조금 뜨뜻미지근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친구라서 감싸는 건가?
"친구라서 믿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냉정히 생각할 필요가 있네."
"후후, 괜찮다. 준필이도 있고."
지금 위협적인 적이라고 해봐야 어차피 나트롱 백작뿐이다.
고작 40~50일 사이에 진태가 무너지진 않으리라.
철두 없이도 일식을 무사히 넘긴 김진태가 아닌가.
잘 이겨낼 것이다.
"돌아가서 얻어맞은 만큼 패주면 된다."
"좋네. 하지만 제한을 걸어둘 필요는 있을 것 같아. 기한을 정하세."
맞는 말이다.
뭐가 나올지도 모르는 보물찾기를 위해 여기서 평생 시간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높은 점수가 참 계륵 같다는 생각이 든다.
버리자니 점수가 아깝고, 헤매자니 시간이 아깝고.
"120시간으로 하자."
"으음, 좋네. 5일이면 50일이 지났겠군. 그렇게 하세. 이제 18시간 남았군."
제임스가 거대한 공동에 난 나머지 19개의 갈림길을 보며 물었다.
"이제 어느 길로 갈 텐가? 또 그 코카콜라로 정할 텐가?"
"으음, 다른 수가 있다."
철두는 고개를 저었다.
마력을 아끼고 자시고 할 시간이 없다.
곧장 4대 정령을 모조리 소환했다.
"길을 찾아라."
파팟.
네 갈래로 찢어진 정령들은 도깨비불처럼 나아가더니 한참 만에 돌아왔다.
"저쪽이다."
철두가 자신 있게 길 하나를 가리키자 제임스의 얼굴에 기대감이 부풀었다.
"드디어 안 열린 상자인가?"
"아니, 저쪽에서 싸움 소리가 난다."
"...?"
철두와 제임스는 빠르고 은밀하게 나아갔다.
*
"우하하하! 신의 은총이 내게 함께하신다!"
드워프족 전사 에르미스는 번쩍번쩍한 상자를 눈앞에 두고 신께 감사 인사를 올렸다.
드워프족 주술사 루이비숑은 그런 에르미스를 보며 혀를 찼다.
"난쟁이 놈아. 너는 저 숫자가 안 보이냐?"
"흐흐, 왜 안 보이나?"
<해제 점수 5000.>
무려 5000점.
지금 에르미스와 루이비숑이 가진 점수를 모두 합쳐봐야 3502점.
아직 1500점가량이 모자란다.
"모자란 점수야 채우면 되지."
"어떻게?"
"너는 여길 지키고 있어."
"넌?"
"점수 가진 놈을 찾아와야지."
"뺏게?"
"만만하면 뺏고, 아니면 거래하는 거지."
"알겠어."
루이비숑도 에르미스의 의견에 동의했다.
황금 상자를 발견하고도 못 열어보는 건 너무 손해다.
이건 확정적으로 전설템 이상을 드랍하니까.
루이비숑은 지팡이를 들고 언제든 주술을 펼칠 수 있게 경계하며 황금 상자 앞을 지켰다.
에르미스는 망치를 들고 공동을 나서서 거래 상대를 찾기 시작했다.
*
채채챙. 쾅!
철두와 제임스가 복도를 뛰었다.
가까워질수록 소리가 점점 더 커진다.
한창 싸우던 이들은 두 불청객의 등장에 일시적으로 싸움을 멈췄다.
"쿨럭! 도와주게."
드워프 에르미스는 철두와 제임스를 보자마자 도움을 청했다.
"흥, 남의 싸움이다."
"맞아. 끼어들지 마라."
에르미스와 싸우고 있던 자들은 두 명의 팀이었는데, 전에 본 적 있던 생김새의 종족이었다.
뱀을 닮은 눈깔을 가지고 있으며, 귓바퀴가 큰 녀석이다.
철두가 그들을 보며 말을 걸었다.
"전에 본 적 있던 놈들이군. 내 부하들을 납치해간 놈들 말이야."
"흥, 랩틸인은 노바에서 흔한 종족이다. 그리고 우린 노예사냥 따위 하지 않는다."
랩틸인 듀오의 항변에 철두가 어깨를 으쓱했다.
맞는 말이다.
개인의 잘못을 종족에 묻는 건 멍청한 짓이다.
"그럼 계속 싸워라."
철두의 말에 에르미스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도와주면 사례하겠네!"
"뭘로?"
"보, 보물을 나눠 주겠네."
철두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난쟁이 녀석.
누굴 호구로 아나.
"그러니까 무슨 보물?"
"원하는 건 말만 하게. 드워프의 무기는 천금을 사고도 구할 수 없는 것. 그대에게 꼭 어울리는 무구를 만들어 주겠네."
"오오."
철두의 얼굴이 솔깃하게 변했다.
그때 랩틸인들의 얼굴이 흉흉해졌다.
둘이서 난쟁이 하나를 상대하는데도 애를 먹고 있었는데, 인간 둘이 끼어 버리면 영 낭패다.
"흥, 난쟁이 말은 듣지 마라!"
"맞아. 우릴 방해하지 않으면 더 좋은 걸 주겠다."
"뭘 줄 거냐?"
"그리핀의 알을 주마!"
철두가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그리핀의 알이라니.
"비룡의 알은 없나?"
"그건 없다."
"그럼 아쉽군."
"무, 무슨 소리냐? 그리핀은 속도만 빠른 비룡에 비할 바가 아니다. 더욱 다재다능하다."
"알지, 알아."
"그럼 우리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거냐?"
"저쪽이 조금 더 끌려."
과연 혹할 만한 제안이었다.
철두에게 다 자란 그리핀이 없었다면 말이다.
스컹.
철두가 도끼를 꺼내 들었다.
다급한 랩틸인 듀오가 다시 흥정에 나섰다.
"그, 그럼 다른 걸 주겠다. 우리 인벤토리에는 귀한 게 많다."
철두가 그 말에 히죽 웃었다.
"그거 아주 반가운 소리군."
랭커 이상은 죽으면 인벤토리 중 랜덤하게 한 칸을 드랍한다.
이거 아주 전리품이 기대되는군.
슈우우욱!
콰직!
철두가 달려들자 랩틸인 둘은 일방적인 공격에 금세 수세에 몰렸다.
"크윽, 네, 네놈! 복수할 테다."
"네놈 얼굴을 똑똑히 기억해뒀다."
"후후후, 다음에 또 보면 나야 좋지."
스컥.
죽은 랩틸인 둘이 사이좋게 전리품을 하나씩 드랍했다.
"음?"
철두는 전리품을 쥐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207화 미궁의 보물들
<서약의 검>
가문의 상징으로 삼을 수 있는 검이며, 가문에 충성할 기사를 서임할 수 있다. 상징의 상속을 통해 봉신의 의무 또한 상속할 수 있다.
- 10000주화로 활성화.
- 활성화 시 가문에 귀속
- 특성 '가문의 시조' 획득.
- 기술 '기사 서임' 획득.
"오!"
철두는 보석으로 치장된, 실전에서 쓰이기엔 지나치게 화려한 검을 보곤 눈을 빛냈다.
이건 다단계의 시작 아이템이 아닌가?
"이걸로 이제 봉신을 임명할 수 있는 건가?"
"끄응, 그건 봉신의 가장 하위 아이템이요."
"응?"
철두가 난쟁이를 보았다.
여기저기 상처 입은 그는 조금 불퉁한 얼굴이었다.
"봉신으로 기사만 둘 수 있을 뿐인 아이템이오."
"이거보다 상위 아이템도 있나?"
"왕가의 상징이 그러하고, 제국의 상징이 또 그러하지."
"오! 그건 어디서 얻나?"
"모두 미궁 보상이오. 그것도 저 랩틸 놈들이 이번에 얻은걸 드랍한 것 같구려."
철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 다른 랩틸인이 드랍한 것은 배낭이었는데, 잡템 숙영 장비가 이것저것 들어 있었다.
철두는 일단 그것도 챙긴 뒤 드워프에게 다가갔다.
"약속을 지켜라. 난쟁이."
"하아, 그러겠소."
"음?"
"충분히 제압할 실력이 있는데 손을 과하게 쓰셨소."
철두는 드워프를 물끄러미 보았다.
불퉁한 표정을 보아하니 어딘가 불만이 있는 모양새다.
"저놈들에게 얻을 게 있었나?"
"...."
에르미스는 말하지 않았다.
'나보다 강자다. 루이비숑과 힘을 합쳐도 이 듀오에게는 안된다.'
아까부터 가만히 구경 중인 제임스가 더 신경 쓰인다.
본디 이런 몸 쓰는 일은 2인자가 먼저 나서기 마련인데, 철두가 일을 다 처리하는 사이 제임스는 가만히 팔짱을 끼고 구경만 했다.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자다.
눈앞의 거한도 상대하기 껄끄러운데, 저자는 또 얼마나 강력할 것인가?
'황금 상자에 대해 절대 이야기할 수 없다.'
말하는 순간 뺏기고 말리라.
'허나 어디서 1500점을 충당한단 말인가?'
이렇게 강할 줄 알았다면 랩틸인들을 생포해 넘겨달라고 할 걸 그랬다.
하지만 후회는 빨라도 늦는 법이고, 이미 일은 벌어졌다.
점수를 다 쓰지도 못하고 랩틸인들은 죽어버렸고, 눈앞의 인간들과 흥정하자니 주도권을 뺏길 게 뻔했다.
황금 상자의 가치를 생각하면 저들이 강도가 되는 것도 순식간이다.
"약속은 지키겠소."
"어떻게?"
드워프가 품에서 돌멩이 두 개를 내밀었다.
하나는 좌표석이고, 하나는 광석 같았는데 중간에 그들의 언어가 적혀있었다.
"우리 왕국이 자리한 용오름 계곡으로 통하는 좌표석과 나의 신분패요. 찾아오면 당신을 위한 무구를 제작해주겠소."
"후후, 알겠다."
철두는 두 개의 돌을 갈무리해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안 만들어주면 가서 죽여주지.
철두의 시원시원함에 에르미스는 벙찐 얼굴이 되었다.
'이렇게 쉽게 믿어?'
조금은 더 확실한 증표를 요구할 줄 알았다.
아니면, 드워프가 만들어낼 무깃값에 어울리는 주화나 담보를 요구해도 들어줬을 터다.
이렇게 덜컥 말만으로 은원이 끝맺어질 줄은 몰랐다.
'신용이 있는 자다.'
적어도 초면인 상대를 믿고 거래를 할 정도로 대범함이 있는 자다.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났다. 또 다른 무리를 만난다는 보장도 없고....'
에르미스는 계산했다.
지금까지 보상의 동굴에 남아있다는 것은 아직 점수가 있다는 것이고, 상자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냐, 신중해야 해.'
황금 상자는 성자도 강도로 변모시킬 정도의 보물을 품고 있을 테니까.
일단 점수가 얼마나 있는지 떠봐야겠다.
"내가 발견한 상자가 있소."
"음?"
"날 구해준 호의로 위치를 알려드리겠소이다."
"오, 고맙군."
"안내해드리리다."
에르미스는 두 사람을 이끌고 복도를 걸었다.
몇 개의 공동을 지나치자 상자가 나왔다.
<활성화 점수 200점.>
"오, 이건 꼭 나를 위한 것 같군."
제임스가 기꺼운 마음으로 앞으로 나섰다.
"아, 혹여 남은 포인트가 200입니까?"
"하하, 그렇습니다."
에르미스의 말을 받으며, 제임스가 상자를 열었다.
딸깍, 끼이이.
열린 상자 너머에서 빛과 함께 검이 튀어나왔다.
"오오."
제임스는 자신의 검보다 더 좋아 보이는 검을 얻자 기분이 들떴다.
"오, 미스릴 검이군요. 좋은 무기지요."
"허, 이게 미스릴입니까?"
"자세히 살펴봐 드릴까요?"
"그래 주겠소?"
드워프라면 장인 종족이다.
안목이라면 그들이 더 뛰어나지 않겠는가?
제임스가 흔쾌히 검을 넘겨주었고, 에르미스는 대강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이 끝났습니다. 보시지요. 제법 좋은 검입니다."
<장검>
미스릴이 소량 함유되어 내구성과 절삭력이 상승하였다.
"오오."
제임스는 검을 보곤 아주 만족한 듯 웃었고, 에르미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딱 200 점수 수준의 아이템인데 어찌 그리 좋아하십니까?"
"하하, 지금 제 검보다 좋으니 당연히 좋지요."
"아."
"헌데 200 점수가 이 정도 아이템이라면, 보다 높은 점수의 아이템들은 더욱 대단하겠군요."
제임스가 강철두를 힐끗 보고는 미소 지었다.
그가 가진 점수가 5천이 넘었으니까.
물론 높은 점수의 상자를 발견할 수 있을지가 문제지만 말이다.
"점수가 높다고 하여 꼭 좋은 아이템이 나오는 건 아닙니다."
"후후, 그래도 확률이 대폭 올라가지."
맞는 말이다.
거기에 기본이 5천부터 시작하는 황금 상자는 보물 확정을 깔고 간다. 쓰레기템이 나올 확률은 0.
슬슬, 이쯤에서 물어볼까?
"이제 두 분은 점수가 얼마나 남았습니까?"
"저는 없습니다."
제임스의 순순한 대답에 드워프 에르미스는 조금 긴장된 얼굴로 철두를 보았다.
"그쪽은요?"
"후후후."
"...왜 웃습니까?"
"또 상자가 있는 곳을 알고 있나?"
"...아닙니다."
"근데 왜 묻지?"
"...."
대답할 말이 궁색해졌다.
에르미스가 알고 있는 상자는 방금 열어젖힌 이것과 루이비숑이 지키고 있는 황금 상자뿐이다.
'방금 이것도 헤매다가 찾은 거라고.'
잠깐 고민했을 뿐이다.
하지만 강철두의 눈치는 지나치게 빨랐다.
바바리안의 직감.
"역시 알고 있군."
"...."
"후후, 어디냐?"
"혹여 제가 다른 상자의 위치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알려줄 의무는 없습니다."
드워프의 말에 제임스의 고개가 갸웃했다.
"그건 조금 이상하군요. 본인이 열어도 될 상자를 굳이 호의로나마 알려준 것은 남은 점수가 없어서가 아닙니까?"
"...."
"어차피 열지도 못할 상자 위치를 감출 이유가 무엇입니까?"
"...."
제임스의 정확한 분석에 드워프 에르미스의 눈동자가 어지러워졌다.
"후후후."
철두가 성큼 다가왔다.
"무, 무슨."
"후후후."
덥석.
철두는 에르미스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가르쳐 달라."
"불가합니다."
"안 열린 상자를 알고 있다는 건 인정하는군."
"...."
"공짜로 가르쳐 달라는 게 아니다."
철두의 말에 에르미스의 눈에 희망이 어렸다.
'거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상대는 신용을 아는 자.
에르미스는 이왕 이렇게 된 것 이판사판으로 나섰다. 사실, 보다 전력이 열세인 에르미스에게 뭔가 별다른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좋습니다. 그 전에 하나만 묻지요. 남은 점수가 1500점이 넘습니까?"
"넘는다."
"후, 그럼 제게 1500점을 양도하면 그 점수로 얻는 보통의 아이템보다 더 좋은 것을 드리지요."
"꺼내 봐라."
"그런 보물을 들고 다니진 않습니다."
"그럼?"
"왕국에 있습니다. 내 대장간에 있는 강화의 망치를 드리겠소. 1500점으로도 구하기 쉽지 않은 보물이오."
"또 공수표군."
에르미스가 땀을 삐질 흘렸다.
"맹세할 수 있습니다. 맹약의 서가 있으니 그것에 대고 말하면 그대로 이뤄질 것입니다."
에르미스는 인벤토리에서 가방을 하나 꺼내 뒤적이더니 양피지 하나를 손에 들었다.
<맹약의 서>
서 앞에 한 맹세는 지켜져야 할 것이다.
하나의 약속과 하나의 대가를 서로 말할지어다.
약속을 지키지 아니한 자, 대가로 건 것을 잃으리라.
"나 드워프 족 에르미스는 1500점의 대가로 강화의 망치를 줄 것을 맹세한다! 이를 어길 시 내 목숨을 대가로 지불할 것이다."
파파팟.
<맹약의 서>
에르미스는 1500점을 대가로 강철두에게 강화의 망치를 양도한다. 이를 어길 시 에르미스는 죽는다.
순식간에 이뤄진 맹세에 철두는 피식 웃었다.
"강화의 망치가 보물이 아니면?"
"아, 아닛! 강화의 망치요! 미궁이 아니면 얻을 수도 없는 보물이자, 우리 왕국에도 단 아홉 자루뿐인 귀물이오!"
"그거야 드워프족 이야기고."
"허어!"
에르미스는 뒤통수를 맞은 듯 허망한 표정이었다.
맹약의 서 또한 미궁에서만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자 값비싼 것이다.
"역시 찜찜하다. 거래하지 않겠다."
"이, 이 무슨 억지요! 거래하겠다고 하지 않았소?"
"웃기는 놈이군."
철두는 당당하게 외쳤다.
"내가 거래하고 싶은 건 상자 위치다."
"흥! 그것으로 뭘 내어주든 저울의 추는 맞지 않을 것이오!"
"네 목숨을 건다."
"...."
"후후, 위치를 알려주면 죽이지 않으마."
"이, 이 무슨 강도짓이요!"
"거래다."
철두의 당당함에 에르미스는 기가 질렸다.
"...."
이런 무식한 인간을 보았나?
'아니, 아니지.'
에르미스의 머리가 민활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황금 상자는 5000점이 있어야 한다. 녀석도 우리가 가진 3500점이 필요할 터.'
어차피 열지도 못하는 상자를 눈앞에 두고 녀석이 거래하지 않을 수 있을까?
'또 협박하면....'
상자 앞에서도 점수를 강탈하려 할 수도 있으니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좋소."
"오! 역시 거래를 아는군."
빌어먹을 놈.
협박이 아주 몸에 밴 놈이군.
"대신 맹약의 서 앞에 맹세해 주시오!"
"좋다."
"상자의 위치를 가르쳐 주면, 나와 내 동료를 절대 죽이지 않는다고 맹세하시오!"
"알겠다."
에르미스가 맹약의 서를 내밀자 철두는 시원시원하게 바로 맹세했다.
"상자 앞까지 안내하면 너와 네 동료를 해치지 않겠다. 약속을 어기면 내 목숨으로 갚겠다."
파팟.
맹약의 서가 번쩍이자 에르미스가 고소를 머금었다.
'됐다.'
이걸로 안전장치를 확보했다.
이제 목숨을 잃을 위기는 없을 테니 황금 상자 앞에 가서 다시 거래하면 된다.
"따라오시오."
에르미스는 득의만만한 웃음을 머금고 앞장섰다.
힘은 세고 싸움을 잘하지만 성급한 성격의 인간을 요리하는 건 약삭빠른 대장장이에겐 너무 쉬운 일이었다.
'흐흐흐.'
208화 대비책
루이비숑은 지팡이를 들고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접근 중이다.
저벅, 저벅.
발소리가 많다.
둘, 혹은 그 이상.
셋인가? 셋이군.
이번 미션은 듀오로 진행됐기에 기대감이 들었다.
에르미스가 돌아오는 건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속박 주문을 캐스팅했다.
츠츠츳.
지팡이에 푸르스름한 빛이 맺혔다.
[루이비숑. 나야.]
웅웅거리는 소리가 복도를 타고 울려 퍼졌다.
"오, 에르미스!"
상자를 지키며 한참을 기다린 루이비숑은 그래도 혹시 몰라 주문을 유지했다.
하지만 미리 대비한 게 무색하게, 에르미스는 인간 둘과 함께 밝은 얼굴로 공동에 들어섰다.
"하하하, 걱정 마. 이들은 우릴 해치지 않아. 맹약의 서에 맹세까지 했거든."
"오, 알겠어."
루이비숑이 그제야 지팡이를 거둬들였다.
파팟.
에르미스의 손에 쥔 맹약의 서가 번쩍였다.
"나는 약속을 지켰어. 너 역시 약속을 지켜야 할 거야."
"후후, 좋다. 너와 네 동료는 해치지 않는다."
철두는 고개를 끄덕이곤 이끌리듯 황금 상자를 향해 다가갔다.
"오! 특이한 상자군."
"금으로 번쩍이는 게 심상찮아 보이네."
제임스도 동의하는 바다.
지구 게임을 해본 자라면 누구나 아는 시스템이 아닌가? 이 번쩍번쩍한 상자는 보나 마나 확정 보물을 쏟아내는 상자가 틀림없다.
<활성화 점수 5000>
점수도 문제 되지 않는다.
여태 상자를 찾지 못한 철두는 점수를 쓰지도 못하고 그대로 보유하고 있으니까.
5천 점이 넘는 점수를 말이다.
인간 둘이 상자에 매료되어 있는 사이, 루이비숑은 에르미스에게 다가와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점수 거래를 못 한 거야?"
"이제 해야지."
"이제?"
"이게 최선이었어."
에르미스는 간단하게 처한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루이비숑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인간이 1500점을 가졌다는 거네."
"그래. 지금부터 강화의 망치로 거래할 생각이야."
"미쳤어? 그걸?"
"손해는 아냐. 강화의 망치는 다음에 또 얻으면 돼. 그동안은 다른 가문의 망치를 빌리면 되지."
"흐음, 좋아. 알겠어."
"그래. 이제 딜을 해볼 테니까, 잠깐 물러서."
찰칵.
"저것 봐. 상자를 열려면 5천 점을.... 응?"
저게 왜 열려?
"후후후후, 엄청난 놈이군."
"어억! 그, 그, 그걸 왜 열어!"
"...? 이 상자가 네 거냐?"
"우, 우리가 최초 발견한 거요!"
"난 정당한 거래로 여기로 왔다."
에르미스가 입을 쩍 벌렸다.
무슨 이런 개 같은 상황이 다 있지?
도대체 무슨 짓을 하면 혼자서 5000점을 가질 수 있지? 아니, 인간 하나가 점수를 몰아줬나?
"후후, 드워프 친구들. 그럼 다음에 보자고. 무기는 도끼였으면 좋겠군."
"어어어억!"
"마, 막아야 하지 않아?"
에르미스와 루이비숑이 당황하는 사이, 철두와 제임스는 즉시 노바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했다.
파팟.
푸른 포탈에 뛰어든 둘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어어어."
"...이거 맞아?"
거래고 나발이고 말도 못 붙여봤다.
어어 하는 사이, 공동에 남은 것은 텅 빈 황금 상자와 아직 못다 쓴 3500점을 가진 드워프 둘이 전부였다.
*
파팟.
철두와 제임스는 미궁의 입구를 걸어 나왔다.
"충성! 영주님, 무사 귀환을 환영합니다."
"으음."
철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미궁 입구로 들어갈 때와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남은 부대는 10명 정도.
그들 모두 영주의 귀환에 막사를 나서서 도열했다.
"이게 전부냐?"
"네, 생존자들과 함께 영주성으로 귀환했습니다."
철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어둑하게 지고 있는데, 쌀쌀한 공기가 훅 들어왔다.
"며칠이 지났나?"
"43일 만의 귀환이십니다."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 확인하니 철두와 제임스의 얼굴이 굳었다.
"전쟁은 어찌 되었나?"
"예?"
"전쟁 말이다. 나트롱 백작이 쳐들어오지는 않았나?"
"아, 전투는 없었습니다."
"응?"
"전쟁은 끝났습니다."
"어떻게? 아니, 누가?"
"시종장님이 끝맺었습니다."
"진태가?"
철두는 의아했으나, 일단 성으로 돌아가서 물어보면 될 일이다.
"우리가 마지막이냐?"
"그렇습니다. 모두 그전에 귀환하여 성으로 복귀했습니다."
철두와 제임스의 귀환을 기다릴 유격대 1개 조를 빼곤 전부 부대로 복귀했다.
"알겠다. 성으로 복귀해라. 난 날아가지."
"충!"
유격대가 부랴부랴 막사를 해체하는 사이, 철두는 미궁의 입구에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고블린 상인을 보았다.
"이봐. 저건 언제 사라지는 거야?"
철두가 하늘산 아래 여기저기 퍼져있는 미궁의 눈을 가리켰다.
"홍홍, 미궁이 공략되었으니 이제 곧 사라지겠지."
고블린 상인은 특유의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그래서, 내게 팔 만한 건 가져왔나?"
"음?"
그러고 보니 고블린 상인이 미궁으로 향하는 철두에게 요구한 것이 있었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유물.
많은 관심을 받는 상징.
특별한 징표.
어떤 것이 되었든 값비싸게 사준다고 하였다.
"미궁 물건을 여기로 옮겨 올 수 있을, 으음?"
철두는 허리춤 주머니를 더듬다가 깜짝 놀랐다.
거기에 넣어놓은 콜라 캔이 그대로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홍홍홍, 지구에서 널리 마시는 음료로구나. 그건 값이 싸다."
"이것도 사겠다는 말이냐?"
"물론이지. 홍홍."
"...."
철두는 손에 쥔 콜라 캔을 보다가 물었다.
"고블린들은 이런 걸 가져가서 뭐 하는 거냐?"
"홍홍홍."
"...."
"홍홍."
"귀를 먹었나?"
"정보를 구매하고 싶나? 홍홍."
"그렇다면?"
"지금의 너는 값을 치를 여력이 없어 보이네만. 홍홍."
"...."
별것도 아닌 정보를 또 바가지 씌우려고 하는군.
"됐다. 이거나 가져가라."
철두가 콜라 캔을 던지자 고블린 상인이 주머니를 쏙 내밀어 받았다. 아공간 주머니라도 되는지 콜라 캔은 부드럽게 안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1.2만 주화를 치르지."
"음? 고작 캔 하나에 말이냐?"
"홍홍, 이 또한 상징물이니까."
"...!"
철두가 깜짝 놀랐다.
"그럼 서울역에 있는 간판을 떼어 왔으면 얼마를 줄 거냐?"
"홍홍홍. 음료 캔보다야 수만 배 비싼 값을 치렀을지도 모르겠구나."
"...헉."
바바리안도 깜짝 놀랄 정도의 금액이다.
"지구의 유물이나 상징이라...."
"아, 아쉽네. 이럴 줄 알았으면 이것저것 고물이라도 주워올 걸 그랬어."
제임스는 진심으로 아쉬웠다.
미궁의 물건을 노바로 온전히 가지고 올 수 있는 줄 알았다면, 지금은 구현하기 힘든 지구의 과학 문명을 그대로 가져올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닌가?
"홍홍, 더 거래할 건 없나?"
"없다."
"아쉽군그래."
고블린 상인이 그리 말하곤 무거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 다음 미궁에서 보세."
고블린 상인이 손을 휘이 저으니, 차원문이 나타났다.
츠츳.
검은 차원문 안으로 고블린 상인이 쏙 들어가 버리자, 미궁의 문도 차츰 빛을 잃으며 닫혔다.
츠츠츳.
하늘산 아래 N344 맵 전역에 퍼져있던 미궁의 눈이 사라졌다.
"...."
"후. 한시름 덜었네, 철두."
"...그래."
철두는 사라지는 미궁의 눈을 보며 조금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 저거 만든 것도 고블린 놈들 아냐?'
철두의 언짢은 기분과 별개로 유격대는 철수 준비를 마쳤다.
"영주님! 회군 준비 모두 마쳤습니다."
"그래, 성에서 보자."
"충!"
파파팟.
철두는 오식이를 소환해 올라타곤 제임스에게 고갯짓했다.
"타라."
"알겠네."
산 중턱에서 박차오른 오식이는 커다란 날개를 펴고 순식간에 아이언헤드성으로 날아갔다.
"어? 그리핀이다. 영주님 귀환이다!"
"자세히 봐! 적 그리핀일 수도 있다."
"아냐. 아이언헤드 문장이다. 영주님 귀환이다."
영주성의 가장 높은 첨탑 꼭대기에서 경계 서던 병력들이 서둘러 소식을 전했고, 그리핀이 영주성 꼭대기에 착지하자 주요 인물들이 대거 몰려나와 맞이했다.
"철두야!"
"진태!"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미궁의 시간이 여기와 다르다."
"후, 어쨌든 다행이다. 들어가자."
"후후, 전쟁을 끝냈다는 게 정말이냐?"
"그래."
"어떻게 이겼나?"
"이기기는.... 정전 협정했어. 하늘산 기준으로 남쪽 영토는 우리가 가지는 거로 협의 봤어."
철두가 충격을 받은 듯 우뚝 멈춰섰다.
"왜? 왜 그래?"
"그, 그럼 우린 이제 우리는 어디서 보급하나?"
"...그런 문제였냐."
김진태는 고개를 절레 저었다.
"뭐, 됐다. 아무튼 다른 문제로 골치 아픈 참이었는데, 마침 네가 돌아와서 다행이네."
"음? 보급지가 없어진 것보다 더 큰 문제냐?"
"...아미르 왕국에서 최후통첩을 보내왔어."
"음?
"그리핀 안 돌려주면 전쟁이라도 할 기세야."
"호오!"
철두의 얼굴이 활짝 밝아졌다.
"역시 진태다!"
"응?"
"나트롱은 이제 털어먹을 대로 털어먹었으니, 새로운 보급지를 마련했구나. 후후후."
"...뭘 들은 거냐? 걔들이 알아서 찾아왔다니까?"
"후후후, 잘했다. 진태."
"...일단 내려가자."
"그래, 배고프다."
"할아버지가 매일 네 무사 귀환만 기도하셨어."
"후후, 할배가 걱정이 많긴 하지."
장유유서 바바리안은 영주성에서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아리아 여신의 신전이 되어버린 기도원으로 가 할아버지에게 문안 인사를 드렸다.
"할배, 내 왔다!"
"몸은?"
"멀쩡하다."
"욕봤다."
"후후, 밥 먹으러 가자."
"오야. 그라자."
눈물이 그렁그렁하지만 애써 무뚝뚝함을 유지하는 할아버지와 함께 영주성으로 돌아오자 영지의 간부들이 모두 모였다.
영주의 귀환을 축하하는 자리이자, 미궁을 클리어한 업적을 기리는 식사 자리는 점점 더 규모가 커지더니, 성내의 사람들이, 이윽고 성 밖의 주민들도 함께했다.
"축제다!"
철두의 고함에 진태가 기겁했다.
"아니, 미친놈아. 즉흥적으로 갑자기 결정하지 마."
"후후, 뭐가 문제냐, 진태?"
"이제 겨울이라고! 식량 비축도 생각해야지."
"후후후! 새로운 보급지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
"...전쟁은 안 하는 게 이득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진태!"
"하아. 왕국이라고. 그냥 일개 귀족령이 아니라."
"후후후."
철두가 웃었고, 잔뜩 인상 쓴 채 골머리를 앓던 진태는 오랜 친구답게 설마 하는 얼굴이 되었다.
"너, 뭐 방법 있구나?"
"후후후. 당연하다."
"어?"
"후후후."
"아니, 고만 쪼개고 얼른 말해봐."
"진태. 미궁에서 내가 황금 상자를 열었는데...."
강철두는 미궁에서 있었던 일을 뒤죽박죽으로 알려주었다.
"그러니까 미션 끝내고 점수로 상자를 열었는데, 황금 상자 열어서 나온 아이템이 방법이다."
"그렇다."
"그게 뭔데?"
"후후후."
철두가 인벤토리에 귀하게 모셔두었던 황금 상자에서 나온 보물을 끄집어냈다.
파팟.
209화 초인의 영역
<천년 설삼>
천년이나 한기를 품은 설삼은 영약의 수준을 넘어섰다.
복용 시 효과 - 신체 재구성, 스탯 한계 돌파, 냉기 내성
"이, 이거 환골탈태 말하는 거 아니냐?"
"후후후, 뭐가 됐든 상관없다. 이걸 먹으면 스탯을 더 올릴 수 있는 게 확실하다."
무엇보다 황금 상자에서 나온 아이템이다.
좋지 않을 리가 없다.
"만약 아니면?"
"초치지 마라, 진태."
"아니, 대비는 해야지. 대비책도 없이 전쟁할 수는 없잖아?"
"흥, 오식이를 잃을 수는 없다."
철두는 콧김을 내뿜었다.
감히 내 그리핀을 뺏으려 하다니.
하지만, 그리핀이 아깝다고 전쟁에서 부족민을 잃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걸로 파워업하지 못하면 오식이를 포기하겠다."
전사로서는 굴욕적이지만, 부족장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하지만 진태."
"응?"
"놈들이 정말 그리핀 하나 뺏자고 전쟁을 원할까?"
"어?"
"후후후."
전쟁을 위해서 그리핀이라는 명분이 필요한 건지도 몰랐다.
"잔치할 기분이 아니군. 진태, 나는 먼저 가겠다."
"그래. 그럼 축제는 접자."
"바보냐? 파워업하고 올 테니 계속 축제를 해라!"
"어어, 그래."
철두는 곧장 일어나 개인 연무장으로 향했다.
"후우, 설레는군."
철두는 천년설삼을 마주했다.
이건 분명 보물이다.
효과만 봐서는 얼마만큼의 파워업을 할지는 모르겠다만, 스탯 한계를 돌파시켜주는 것만 하여도 대단한 물건이다.
철두는 지금 100 전후로 모든 스탯이 한계까지 성장했다. 여기서 더 육체적으로 성장할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니.
'선조의 혼까지 얻는다면....'
그야말로 바바리안 전사 그 자체!
검기를 줄줄 뽑아대는 초인의 경지에 오른 인간도 상대해낼 수 있으리라.
으적.
<천년설삼을 복용합니다.>
<신체를 재구성합니다.>
파파팟.
철두는 천년설삼을 씹어 꿀떡 삼키자마자 드는 척추가 찌릿한 기분에 몸을 펄쩍 떨었다.
'으억!'
비명을 질렀으나 굳은 혀는 아무런 소리도 토해내지 못했다.
우우우웅.
철두의 몸이 빛으로 쌓여 공중으로 솟구쳤다.
츠츠츳.
냉장고를 삼킨 듯 뱃속에서 시작된 엄청난 한기에 몸이 덜덜 떨렸다.
<특성 '냉기 내성'을 획득하였습니다.>
덜덜덜.
떨림이 차츰 잦아든다.
더 이상 추위가 느껴지지 않자 이번엔 몸이 뒤틀리는 듯한 통증이 찾아왔다.
뿌드드드득.
'시벌.'
진짜 뒤틀리고 있다.
트레이에 갇힌 얼음을 꺼내듯 철두의 몸이 비틀릴 때마다 그의 몸에서 검은 증기 같은 것들이 뿜어져 나왔다.
푸시시시시.
<신체를 재구성 중입니다.>
뿌드드득, 푸시푸시, 뿌드드득, 푸시시시.
철두를 두르고 있던 옷이 염산에 닿은 듯 바스러지며 떨어져 내렸다.
허리춤의 버클도 풀어지고, 가죽끈이 끊어지며 모든 무기들이 쏟아져 내렸다.
푸시시시.
옷이며 신발이며 하나도 걸치지 않은 몸이 되었다. 은은한 광채에 쌓여 공중 부유 중인 그의 몸은 신성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논이 갈라지듯 여기저기 갈라진 각질이 말라붙어있고, 그을린 듯 검은 땟국물이 굳어 엉겨 붙어 있었다.
철두의 키는 이삼 센티쯤 더 커졌는데, 몸의 두께는 외려 줄어들었다.
터질 듯이 두꺼운 상체 근육도, 나무그루터기 같던 허벅지도 사라졌다.
대신 단단히 압축된 듯 여기저기 오밀조밀한 근육이 가득했다.
인간의 기준에서 본다면 여전히 근육맨이지만, 바바리안의 기준에서 본다면 너무나 가냘픈 몸이었다.
<스탯 한계가 대폭 늘어났습니다.>
텅!
철두의 몸을 감싸고 있던 은은한 광채가 사라지자 그의 신형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반사적으로 낙법을 펼쳐 발바닥으로 착지했으나 아래에 깔린 무기들이 밟혔다.
철두는 대충 발치에 걸리는 걸 걷어차고는 바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두 손을 들어 몸 여기저기를 살펴보려 했으나....
"지독하군."
시체 골렘과 비견될 만한 악취다.
지하수련장에는 급수시설이 없으니, 철두는 하는 수 없이 물의 정령을 불러냈다.
츠츳.
"나를 씻겨라."
츠츳, 웩, 웩.
물의 정령의 두 손에 빗자루 같은 물의 형상이 쥐어졌다.
날개를 팔락이며 날아와 철두의 몸 여기저기를 문지르던 정령은 허리를 구부리고 토하는 시늉을 하더니 멀찍이 떨어져 물대포를 쏘았다.
쏴아아아아!
철두의 몸에 붙은 피딱지와 같은 노폐물들이 모조리 떨어져 나갔다.
"후후후."
철두는 냄새가 가시자 몸을 구석구석 더듬어 보았다.
"멸치군."
이거, 등에 손이 닿을 정도다.
팔과 다리가 이토록 가늘어지다니.
하지만, 앞으로 이 몸을 더욱 강하게 단련할 공간이 생긴 것 같아 흡족하기도 했다.
변화는 이제 막 갈무리된 참이다.
요동치던 마력이 철두의 아랫배에 단단히 뭉치는 기분이 들었다.
<단전을 활성화합니다.>
<특성 '초인의 몸'을 얻었습니다.>
<신체 재구성을 마칩니다.>
"아!"
노바의 신비가 늘 그러하듯, 특성 초인의 몸을 얻자마자 철두의 뇌에 관련된 지식이 삽입되었다.
모든 기술에는 단계가 있다.
레벨 1의 입문
레벨 2의 숙련
레벨 3의 달인
레벨 4의 명인
레벨 5의 초인
철두의 무기 숙련도는 검술이 명인의 경지, 그 외의 무기술들은 대부분 달인의 경지다.
헌데, 기술만이 아닌 신체 그 자체에도 단계가 있음을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철두는 여전히 히어로 등급이지만, 초인의 몸을 가지게 되었다.
츠츠츳.
철두는 손을 감싸는 날카롭고 이질적인 기운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선조의 혼도 아니요, 자연의 결정체인 정령도 아니다.
이것은 오로지 수련한 자의 극에 이른 기운의 표출인바.
바닥에 널브러진 검을, 철두가 은은한 검기가 서린 손날로 내리쳤다.
서컥!
손으로 내려친 검은 너무나 깔끔하게 잘려 두 동강이 나버렸다.
철두가 이번에는 그 부러진 검에 검기를 일으켰다.
부러진 검에 온전한 검기가 서렸을 때.
<새로운 검술의 경지에 눈을 뜹니다.>
<검 숙련의 단계가 상승합니다.>
"후후후후."
절로 웃음이 난다.
인벤토리에서 창을 꺼냈다.
검기를 담으려 했으나.
쩌저정!
창두가 터져버렸다.
<기운을 감당하기엔 창 숙련도가 낮습니다.>
창 숙련은 이제 고작 레벨 2.
"후후후."
도끼를 집어 들어 검기를 담았다.
츠츠츳.
온전히 기운이 담기는 듯했으나, 이내 도끼가 금이 가며 쩍 소리와 함께 갈라져 버렸다.
<기운을 감당하기엔 도끼 숙련도가 낮습니다.>
"그렇군."
철두의 무기술 중에 레벨 4에 오른 건 검술이 유일무이하다. 그 뒤로 익숙한 무기인 도끼 숙련은 이제 3레벨.
적어도 4레벨. 명인의 경지는 되어야 검기를 무기에 능숙하게 녹여낼 수 있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되었다.
"다 덤비라 그래. 후후후."
나트롱 백작?
아, 이제 화해했지.
아미르 왕국?
덤벼라. 다 부숴주마.
*
아이언헤드 영주님의 무사 귀환과 더불어 시작된 축제는 3일째 이어지고 있었다.
시종장 김진태의 지시였다.
"하, 왜 이렇게 안 나오냐."
김진태에게 있어 이 축제는 철두의 성공적인 파워업을 바라는 의식과도 같았다.
먹고 마시고 떠드는 저 소리가, 영주님이 더욱 강해지길 바라는 성공의 주문 소리처럼 들렸다.
축제와는 별개로 아이언헤드 성의 병력은 빈번하게 외부정찰을 하고 있었는데, 아미르 왕국의 반응이 심상찮아서였다.
"시종장님!"
전령의 깃발을 단 병사가 급히 영주성 집무실로 치고 들어왔다.
"어디서 오는 소식입니까?"
"포멜 마을에서 급보입니다."
좋지 않다.
포멜 마을은 아이언헤드 성의 동쪽에 있다.
그 너머는 한강이고, 오크들의 숲이며, 그 경계 너머의 맵 N132 지역은 아미르 왕국의 영역이니.
국경 지역의 소식이다.
"말하세요."
"아미르 왕국군의 진군이 시작되었사옵니다!"
"...병력은요?"
"1천이라 하옵니다."
그 수가 적다.
다행이라 해야 할까?
"좆됐네요."
아이언헤드와 나트롱 백작의 분쟁을 그들이 모를 리가 없다.
헌데도 1천의 병력만으로 쳐들어왔다는 것은 자신이 있다는 소리니, 그 병력 안에 어떤 괴물이 있을지 짐작이 되었다.
"유격대, 친위대, 별동대, 특작대 전부 포멜 마을로 집결시키세요!"
"네, 시종장님."
적을 맞이하자면 동쪽에서부터 맞이해야 한다.
전력을 깎아 저지하든, 진을 치고 막든, 시간을 벌어야 한다.
'시발, 어떻게든 되겠지.'
철두의 말대로다.
그리핀을 준다고 저들이 순순히 물러갈까?
애당초 그것은 전쟁을 위한 구실뿐일지도 모른다.
"믿는다. 철두야."
김진태는 영주 전용의 마법진 방을 한번 보곤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
"출동 준비 마쳤습니다!"
지금 신서울맵에 가 있는 공격대를 제외하고는 모든 독립부대가 모였다.
특작대의 오준환.
유격대의 최준섭.
친위대의 이은영.
별동대의 제임스.
최정예 부대들이다.
이들만으로 감당해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먼저 출발하세요. 저는 마법사들을 소집해 이동하겠습니다."
"네, 시종장님."
땡, 땡, 땡!
영주성에 내걸린 커다란 종이 전쟁을 알리고, 축제 중이던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이윽고 영지의 게시판에 공지사항이 내려왔다.
<아미르 왕국 선발대 1천 접근 중.>
<포멜 마을에 전선을 형성할 것이니, 참전 의사가 있는 랭커들은 포멜 마을로 집결 요망.>
"오오오, 전쟁인가?"
"시발, 왕국? 좆된 거 아냐?"
"하하하하. 좆되긴? 제국 백작도 꼬리 내리고 땅덩이 뚝 떼줬는데."
"가자고!"
"한몫 챙겨야지!"
"에라이 속물아. 한몫이고 나발이고 집 지켜야지!"
"아 그러췌. 여기 무너지면 어차피 우린 다 뒈진 겨."
지구로 통하는 포탈이 사라졌다.
미궁에서 구출되어 아이언헤드 성으로 들어온 사백이 조금 안 되는 주민들로부터 지구의 소식이 전해졌다.
아이언헤드 성에는 여러 인종, 여러 국가의 사람들이 모여있지만 지구 출신이라는 유대가 있었고, 느슨한 결속을 단단히 다지는 데는 공통의 적을 두고 싸우는 것만 한 게 없었다.
"의병참전이다!"
"가자아!"
수많은 랭커들이 참전했으며, 노비스 이하는 별 도움이 안 되어 모집령도 내리지 않았으나, 많은 수의 노비스들이 한 손이라도 거들 요량으로 포멜 마을로 향했다.
김진태가 마법사들을 이끌고 포멜 마을로 다가서니, 한강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이미 두 군이 대치 중이었다.
한강의 상류인지라 제법 유속이 빨랐지만, 상대적으로 강폭은 하류보다 적어, 흔들다리가 하나 놓여 있었다.
아이언헤드의 병사들과 아미르 왕국의 병사들은 그 다리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여차하면 다리를 끊어 진군을 저지할 속셈이었다.
아미르 왕국 진영에서 익숙한 차림의 사내가 나섰는데, 그간 몇 번 사절단으로 온 왕국 소속 행정관 나그낙이란 자였다.
그가 나서서 흔들다리 앞으로 가자, 김진태도 흔들다리 앞으로 갔다.
둘 사이에 놓인 다리의 길이는 20미터.
대화는 물론 얼굴 표정까지 볼 수 있는 정도의 거리.
이야기가 잘 마무리된다면 두 사람이 다리 중간에 만나 악수를 할 수도 있을 것이며, 이야기가 틀어진다면 다리가 끊어질 터였다.
김진태가 먼저 소리쳤다.
"나 아이언헤드의 시종장 김진태가 전한다! 아이언헤드 영주가 무사 귀환한바, 귀 왕국의 요구에 대해 깊이 고민 중이니 군을 물려라."
"하하하하!"
행정관 나그낙은 여유 있게 웃었다.
"그리핀의 반환 요구는 저번 사절단 방문이 마지막 기회였소!"
나그낙이 두 팔을 벌려 소개하듯 왕국의 병사들을 가리켰다.
"왕국 최정예 1천이 함께하니, 아이언헤드는 무의미한 피를 흘리지 마시기 바라오."
"싸우기도 전에 항복하라는 거냐?"
"복속이오."
"...."
"독립영주여, 왕국의 일부가 되시오. 그대들은 귀족으로 대우받을 것이오."
"...."
당장의 전투 선언은 아니지만, 자신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영주님께 이야기해 보고...."
"하하하, 그 영주란 자는 대체 어디 있단 말이오? 겁쟁이가 아니라면 나서시오!"
나그낙이 아이언헤드령 군진을 휘이 살피며 조롱했으나, 철두는 그 틈에 없었다.
'시발.'
김진태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거 어쩌지?
싸워야 하나?
저렇게 자신만만한 걸 보니까 저쪽 전력이 심상찮은 것 같은데.
진태는 많은 수의 목숨이 자신의 결정에 달렸다는 생각에 쉬이 행동할 수 없었다.
쿵, 쿵, 쿵.
그때 땅이 흔들리며 진동했다.
마치 오우거라도 접근하는 듯 웅장한 발걸음이다.
쿠우웅!
큰 진동과 함께 아이언헤드 군영의 뒤에서 불쑥 사람 하나가 솟구쳐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도약했다.
얼마나 멀리 뛰는지 강을 넘어 나그낙의 바로 코앞에 착지했다.
쿠아아앙!
"무, 무슨!"
나그낙이 넘어지지 않기 위해 균형을 잡는 사이, 1천 군세는 창을 들어 올리고 경계했다.
"후후후후."
전라의 바바리안이 히죽 웃었다.
210화 소드마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