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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0 - 210-220

210화 소드마스터

"처, 철두야!"

강 건너에서 친구의 걱정스러운 외침이 들려온다.

"아, 걱정 마라. 내가 알아서 하마."

"아니, 미친놈아, 옷 입으라고!"

"후후, 부끄러워하긴."

철두는 친구의 걱정을 뒤로하고, 당당하게 나그낙을 보았다.

성큼 앞으로 나섰다.

덜렁.

"무, 무슨?"

나그낙이 주춤 한 발 물러섰다.

"써, 썩 꺼져라! 전장 한복판에 웬 미친놈이!"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후후, 내가 아이언헤드다."

"...?"

"말하라."

"무, 무엇을 말이오!"

나그낙은 철두의 박력에 밀려 그리 말했다.

황급히 강 너머를 바라보니 낭패한 표정으로 제 얼굴을 가리는 병사들이 많았는데, 그 누구도 이 미친 광인의 말을 부정하지 않고 있었다.

'진짜 아이언헤드 영주?'

아이언헤드 성.

쉽게 볼 수 없는 곳이다.

본디 미친놈과 술 취한 놈은 피하라고 했는데, 이런 미친 자가 영주라니.

"아, 아이언헤드 영주는 체통이 없으시오!"

"후후, 전쟁터에서 별걸 다 따지는군."

"누, 누가 전쟁터에 알몸으로 나온단 말이오."

"뛰어오다 보니 다 벗겨졌다."

철두라고 어디 미쳐서 나신으로 왔겠나.

신체를 재구성하며 가늘어진 그의 몸이 문제였다.

5인치 넘게 줄어버린 허리는 바지를 붙잡아두지 못했고, 팬티도 마찬가지였다.

애당초 윗옷은 안 입고 다니던 철두다.

멜빵처럼 걸치고 다니던 대거벨트는 모조리 삭아버려 쓸 수도 없게 되었다.

"후후, 그래도 나는 예의를 아는 자지."

"...지?"

나그낙의 시선을 느끼며 철두는 인벤토리에서 여벌의 옷을 꺼내 스커트처럼 허리에 둘둘 매 중요 부위를 가려줬다.

"자, 시작하자!"

"뭐, 뭘 말이오?"

"전쟁하러 온 거 아니냐?"

"...그 그렇소만."

"그럼 싸워야지."

차창.

철두가 인벤토리에서 검을 빼어 들었다.

얼른 검기를 써보고 싶구만.

"덤벼라."

"...."

나그낙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미, 미친 자다.'

은은한 광채의 눈동자는 돌아버린 자의 전형이다.

전장에 나서며 저리 즐거운 기색이라니.

"저, 전쟁에 앞서."

"거절한다!"

강철두가 소리질렀다.

"전쟁이다!"

우렁찬 선전포고와 함께 철두의 검이 휘둘러졌다.

추아악.

쫑알쫑알 말이 많던 나그낙의 목이 단숨에 날아갔다.

"후후후, 누가 덤빌 테냐!"

"...."

철두의 서슬 퍼런 기세에도 아미르 왕국군의 군진은 고요했다.

왕국 최정예를 모아왔다더니 허언이 아닌 모양이었다.

착, 착, 착!

그때 창진을 이룬 적 진형의 가운데에 길이 생기며 누가 봐도 기사 차림인 사내들이 튀어나왔다.

척, 척, 척.

절도있게 걸어 나온 기사들이 또다시 예의로 누군가를 에스코트하니, 이번 출진 부대의 사령관인 나룬 백작이었다.

"아미르 왕국의 세 번째 검. 요제프 나룬이다."

"전쟁이 아니라 인사하러 온 놈들이냐? 나는 강철두다."

"야인 무리가 왕국의 보물을 훔쳐 갔다더니, 과연 야인다운 놈이구나."

"말이 길다. 그냥 덤벼라."

"하하하. 성급한 자로군."

요제프 나룬은 철두를 보며 눈을 빛냈다.

싸워 이길 자신은 있다.

'하지만 피해가 크다.'

아미르 왕국이 바라는 것은 아이언헤드의 복속이다.

저 강 건너의 병력이 아미르 왕국의 깃발 아래 모이길 바라고, 강철두 또한 아미르 왕국의 귀족이 되길 바란다.

아미르 왕국의 야심은 장차 제국으로의 발돋움에 있다.

포섭할 수 있는 자들은 최대한 왕국의 깃발 아래 끌어안아야 한다.

'되도록 온전하게.'

싸우지 않고 해내면 가장 좋은 결말이다.

싸움을 피하기 위해서는 종종 압도적인 힘을 내보여야 하는바, 왕국의 세 번째 검인 자신이 손수 나섰다.

스르릉.

"그대와 나트롱 백작 간의 분쟁을 모두 보았다."

아미르 왕국은 그간 첩보망을 발휘해 두 영지 간의 전쟁을 빠짐없이 관찰하고 빼곡히 기록했으며, 정리하고 분석했다.

그들이 비밀리에 키운 '그리핀 기사단'은 전략 무기다.

무기에 맞는 전술도 필요한바, 그리핀이 활약한 아이언헤드와 나트롱 간의 전쟁은 그들에게 좋은 교보재가 되어주었다.

아군의 전략 무기를 대리 시험해준 전장이었으니, 아미르 왕국이 주의 깊게 본 것은 당연했다.

그 와중에 강철두란 자에 대해서도 정보를 입수했다. 수완이 좋은 자다.

행성 접속 초기에 그렇듯 새로운 노비스가 된 자들은 개미 떼처럼 불어났고, 어느새 아이언헤드 성과 인접한 한양의 인구는 수만을 넘어버렸다.

탐이 나는 과실이다.

그보다 더 탐이 나는 건 강철두 그 자체.

잠깐이나마 소드마스터 리에나와 접전을 벌인 그다. 그가 노비스가 된 기간을 생각하면 유례없는 발전 속도.

'왕국의 검으로 쓰일 만하다.'

아이언헤드를 어르고 달래 포섭할 수 있으면 하고, 아니면 그리핀을 회수, 징치하는 것이 국왕으로부터 받은 명령.

그에 왕국에 백여 명이 넘는 소드마스터 중에서도, 세 번째 검. 요제프 나룬이 나선 것은 압도적인 힘의 격차로 그를 굴복시키기 위해서다.

거친 짐승일수록 매로 다스려야 하는 법.

스릉.

"내 한 수 가르쳐 주겠네."

"후후후, 늙은이가 입으로 싸우려 하는군."

"흐흐흐, 고놈 참. 재밌는 놈일세."

요제프가 앞으로 나섰다.

차앙! 창!

철두가 마주나서며 검을 주고받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세 번의 공방이 이루어졌고, 요제프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네, 네놈."

"뭐? 왜?"

"어, 어찌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렀는가?"

소드마스터.

초인의 경지에 오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평생을 갈고 닦으면 달인의 경지야 누구나 노려볼 만하다.

하지만 재능이 있지 않고서는 명인이 될 수 없다.

재능과 노력, 그 두 가지가 어우러져야 닿을 수 있는 것이 명인의 경지라면, 초인은 다르다.

기술의 극한으로 초인의 경지에 다다르는 것은 구전으로나 전해지는 상상의 영역이고, 대부분의 초인은 영약의 도움을 받는다.

"후후후, 너만 광선검 쓸 줄 알았냐?"

지이이잉.

은은한 광채가 흐르는 요제프의 검과 같은 광채가 철두의 검에도 깃들어 있었다.

저놈은 운이란 운은 모조리 타고 난 놈인가?

미궁을 아무리 헤매도 영약을 얻기란 하늘의 별 따기와 다를 바가 없는데....

어째 철두의 검에 깃든 빛이 더 커 보인다.

'조졌군.'

이거 힘의 격차고 나발이고, 자칫 잘못하다간 전투 자체를 지게 생겼다.

이번 전투에 참전한 소드마스터는 모두 셋.

만약, 정말 만약 요제프 본인이 지게 되면 그들이 저자를 감당할 수 있을까?

아니, 강 건너의 저 많은 병력은 또 어이하고?

"랑트, 글랜!"

스르릉.

낭패한 얼굴의 백작이 호위기사를 불렀다.

뒤에서 대기하던 기사 둘이 나섰는데 그들의 검에도 은은한 빛이 깃들어 있었다.

요제프 나룬 백작만큼은 아니지만 분명한 소드마스터의 경지.

검기가 깃든 초인의 검이다.

속전속결.

비겁하긴 하지만 재빨리 저 우두머리 녀석을 잡아야겠다. 적의 우두머리가 강 건너에 홀로 와 있다.

빠르게 저놈만 잡으면 전쟁은 끝이다.

"후후, 셋도 좋다. 덤벼라."

굴욕적이다.

저토록 여유를 부리다니.

"젠장. 죽여도 좋다. 전력으로 임하라."

"네, 각하."

"넵."

랑트와 글랜이 합류해 3:1로 어우러졌다.

차차창!

"후후후."

철두는 신이 났다.

검이 깨지지 않는다.

정령을 깃들게 할 필요도 없이 검기는 검기끼리 충분히 감당이 가능하다.

문제가 있다면 충돌 때마다 빠르게 깎여 나가는 마력의 양.

적은 셋이니, 검이 부딪힐 때마다 철두의 마력이 3배나 더 빠르게 깎여 나가는 셈이다.

적들도 철두의 마력을 바닥낼 생각인지 적극적인 공격보다는 수적 우위를 앞세운 차륜전을 치르고 있었다.

쇄애애액. 파앙!

철두가 한 놈을 노리고 들어가면 녀석이 물러나고, 다른 방위에서 공격이 들어온다.

또 다른 놈을 노리면 녀석은 맞서기보다 즉시 내빼버리고, 나머지의 협공이 이어진다.

모두 명인의 경지에 오른 자들.

철두는 이토록 검술의 경지가 높은 이들이 함께하는 수준 높은 합격술은 처음이었다.

"후후, 사냥감이 된 것 같군."

"되도록 자네를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함일세."

"네놈들이 다치지 않으려는 거겠지."

"그것도 맞는 말이지. 난 누구도 다치는 걸 원치 않네."

"검을 쥔 놈이 할 소리는 아니야."

"그 또한 맞는 말이지."

요제프 나룬 백작이 고소를 머금었다.

여전히 기가 꺾이지 않은 야인 녀석의 용기가 가상하면서도, 상황이 불리하자 대화를 청해오는 모양새가 퍽 나쁘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곰 같은 여우군.'

백작 역시 끝까지 이 3:1의 싸움을 이어가 얻을 것이 없다.

강철두를 제압한다 한들 정당한 대결도 아니니 그가 굴복할 리가 없고, 강 건너 병력들 역시 무시할 수 없다.

그들이 합류하면 대규모 회전을 피할 수 없는데, 적잖은 희생이 따라야 할 터다.

'적당히 체면을 챙겨 달라는 건가?'

요제프 나룬 백작은 철두의 뜻을 이해했다.

"내 국왕께 아뢰어 그대의 작위를 백작으로 봉하자 청해보겠네."

"후후후."

"나 아미르 왕국의 세 번째 검. 요제프가 공언하는 바니 믿어도 될 것이네."

"그래서 네가 삼짱이라는 거다."

"쌈장?"

"후후, 3인자."

"...."

"세 놈이 세트로 싸워서 삼 등인가?"

요제프 나룬 백작의 안색이 굳었다.

'교활한 놈이군.'

녀석은 비겁하게 세 명이 덤비지 말고, 정당하게 홀로 덤비라 도발하고 있었다.

하마터면 긁힐 뻔했군.

"...전장에서의 명예는 승리가 만들어주는 법이네."

"병신."

"놈을 죽여라."

어차피 굴복시키지 못할 놈이라면 일단 죽이는 것도 방법. 그 긴 부활의 과정을 겪어보면 목숨 귀한 줄 알게 될 터다.

"후후후."

철두는 인벤토리에서 검을 하나 더 빼 들었다.

거대한 투핸디드 소드 하나에 롱소드 하나.

밸런스가 맞지 않는 두 개의 무기지만.

<특성 쌍수무기술이 영향을 미칩니다.>

두 개의 검에 모두 검기가 서렸다.

"흥, 그래 봐야 기력만 더 빠르게 닳을 뿐이다."

"후후후."

철두는 그대로 대시해 나룬 백작을 몰아붙였다.

쾅, 쾅!

두 개의 검과 세 개의 검이 서로를 노리며 공방을 주고받다 보니, 철두는 점점 신형을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횅, 횅, 홰앵!

그 속도가 눈으로 좇기에도 정상이 아닌바, 나룬 백작이 서둘러 명령했다.

"무, 물러나라."

홰애애애앵!

허나 기사들은 물러날 수 없었다.

사람이 검 두 개를 들고 회전한다고 저런 회오리바람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소용돌이 스킬로 팽이처럼 돌아가는 철두의 머리 위로 나타난 바람의 정령이 정말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강력한 흡입력을 발휘했다.

카카카카캉!

돌고 돈다.

칼을 막았는데, 또 칼이 날아온다.

하나는 길며 하나는 짧다.

위로 스치는가 하면, 어느새 아래를 노리고 돌아온다. 미친 듯한 돌개바람이 빨아들이는 흡입력에 제대로 땅을 딛고 서기도 힘들다.

쇄애애액.

촤아아악!

"크읏!"

미처 검으로 막아내지 못한 정강이를 검기 서린 검이 할퀴었다.

판금 갑옷은 소드마스터의 검기 앞에서는 종이보다 힘이 없었다.

촤아아악!

"끄아아아!"

바람의 정령과 함께하는 소용돌이!

마력이 미친 듯이 빨려 나가며 순식간에 동이 나 바람이 잦아들었지만, 그땐 이미 모든 게 끝나 있었다.

육편이 되어버린 소드마스터 셋 사이에 홀로 선 바바리안이 두 개의 검을 들고 천 명의 군인을 향해 외쳤다.

"후후후, 다음 도전자. 나서라!"

아미르 왕국의 정예병들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하지만, 두려움에 저마다 몸을 떨고 있었다.

211화 아미르 왕국

아미르 왕국군 부사령관 라온 남작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거 조졌네. 어찌해야 하지?'

지금 라온 남작의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였다.

웬 벌거벗은 놈이 나오더니, 나그낙 행정관을 단칼에 베어버렸다. 거기에 더해 놈은 요제프 나룬 백작까지 단숨에 해치웠다.

나룬 백작이 명예를 버리고 실리를 찾기 위해 호위기사들과 합공을 가했는데도 역으로 당한 것이다.

괴물 같은 자다.

요제프 나룬 백작이 누구던가?

왕국의 세 번째 검이다.

국가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강자가 그다.

그런데 당해버렸다.

그것도 3:1의 정당하지도 않은 전투에서!

그의 호위기사 랑트와 글랜이 그저 그런 병사도 아니고, 무려 소드마스터다.

왕국의 소드마스터가 서른 명에 이른다.

그 말은 그들도 왕국 내 순수 검술 실력만 놓고 보면 서른 안에 드는 강자라는 소리다.

그런 자들이 셋이 끔살당했다.

왕국 제일검인 바우켄 공작이라 하더라도 저 괴물을 막아설 수 있을까?

맹수 같은 야인 영주 하나를 길들여 제국을 잡는 사냥개로 쓰려 했으나, 애당초 잘못된 계획이었다.

이건 맹수가 아니다.

괴물이다.

"어찌해야 하는가?"

라온 남작의 옆에는 아카데미 출신의 똑똑한 참모진이 서 있었으나 그들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후퇴하셔야 합니다."

"...."

당연한 소리에 라온 남작은 방금 말을 한 참모의 머리통을 후려치고 싶었다.

"어떻게?"

"...돌격을 명하소서."

"뭐?"

"도망치기에 앞서, 우선 들이쳐야 합니다. 난전을 유도해 다리를 끊어내면 퇴로가 열릴 것입니다."

"오!"

그럴듯하다.

어쨌든 아직 강을 넘어온 자는 적의 우두머리 한 명뿐이고, 엄청난 수의 병사들은 강 건너에 있었다.

"후후, 네놈이 다음 대장이냐?"

"히익!"

충격적인 결과에 전장이 조용해진 탓에 라온 남작의 목소리가 철두의 예민한 청력에 걸려 버렸다.

후우우우웅. 팅!

"오!"

철두가 인벤토리에서 빼낸 투척 도끼를 냅다 던졌으나, 라온 남작의 옆에 있던 기사는 제법 한가락 하는지 그것을 어렵지 않게 막아냈다.

'아쉬워.'

투척 도끼의 숙련도가 명인의 경지만 되었어도, 검기를 담아 내던질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지금 철두가 검기를 쓸 수 있는 무기는 오직 검뿐.

"후후, 비켜라."

"마, 막아라!"

라온 남작의 명령에 일선 장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진! 창진!"

"전진! 전진하라!"

아미르 왕국의 부대는 정예병이긴 한 듯, 두려워하면서도 명령대로 몸을 움직였고, 고슴도치 같은 창진이 철두를 향해 다가왔다.

콰자자작!

"크아아악!"

"으어억!"

물론 철두를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기민한 분대 하나가 다리로 다가가 줄을 끊어내기 시작했다.

"어어? 저 새끼 뭐야?"

"막아! 시발, 멈춰! 활, 활!"

쇄애애애액.

서둘러 대기하고 있던 아이언헤드의 병력들은 화살을 쏘아 보내며 저지하는 한편, 빠르게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차창!

"이익, 비켜라!"

"크어억!"

격렬한 저항에도 아미르 왕국군 또한 필사적인지라 결국 다리 줄이 끊어지고 말았다.

투두둑, 끼이이이!

나무가 비틀리며 위태롭게 휘청하더니 다리를 건너고 있던 병사들이 우르르 강에 빠져버렸다.

상류라 강폭이 좁고 유속 또한 빠르다.

더군다나 병사들은 갑옷을 입고 있으니, 수영을 할 줄 안다고 하여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으어어어."

"어푸우우우, 어무이!"

"살려줘로로로로꼴."

"줄, 줄 던져!"

"여기 창 잡아!"

뭍에 다가선 병사들이 서둘러 구출작업을 벌이는 사이, 아미르 왕국군도 필사적이었다.

"후퇴! 후퇴하라!"

"결사 항전한다! 나를 따르라!"

전방의 몇 분대가 철두를 향해 부나방처럼 달려든 틈을 타 나머지는 재빠르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목숨이 달린 일이라 미친 듯이 달리면서도 어느 정도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정예부대의 모습이긴 했다.

"이놈들!"

콰자자작.

철두의 손에 들린 거대도끼가 창대를 우수수 부러트리며 진형을 뭉갰다.

검기를 쓰기엔 아직 회복된 마력이 미약하기에 지금은 도끼가 더 나았다.

모래처럼 흩어져 도망치는 적들이 가득한데, 철두는 쉽사리 쫓을 수 없었다.

"정리해라."

"네, 영주님."

악다구니를 쓰며 겨우 다리를 건너온 병사들이 철두의 명령에 따라 전장에 남은 적병을 빠르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도망칠 수도 없어 억지로 남겨진 부상병이나, 결사 항전을 각오한 자들 십수 명뿐이었다.

"내 부하들을 구해줘."

철두의 부탁에 물의 정령이 뿅 하고 나타나 다이빙 선수처럼 강에 퐁당 빠졌다.

겨우 회복되던 마력이 다시 숭덩 빠져나간다.

하지만 그 효과는 확실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병사들이 모조리 뭍으로 건져졌다.

"으헉, 켁켁."

"이거 잡아!"

마력이 다했다.

"후우우."

탈력감과 함께 나른함이 끈덕지게 몸을 휘감는다. 똥꼬에 힘을 빡 주고 몸을 꼿꼿이 세웠다.

쫘악!

본인의 뺨따귀를 후려갈겨 정신을 차린 철두는 끊어진 다리를 찾았다.

"쯧."

텄다.

한쪽이 끊어져 흘러내린 다리는 나무 발판이 모조리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 버렸고, 줄만 반대편 뭍에 묶여 있었다.

"다리를 복구해라."

"예!"

"거기 건너올 수 있는 놈들은 건너와라."

"네, 영주님."

도약 종류의 기술을 가진 자들은 강을 훌쩍 뛰어 건너왔으나, 소수였다.

"어이, 여기 줄."

"당겨!"

병사들은 나풀거리는 줄을 다시 이어 외줄을 잇고는 너 나 할 것 없이 갑옷을 벗고 한 명씩 줄을 타고 건너왔다.

수영을 하기엔 유속이 빨랐으나, 줄에 의지해 조금씩 유격 훈련하듯 나아가니 제법 많은 병력이 넘어올 수 있었다.

"이것부터 입으십시오."

"그래."

최준섭이 본인의 여벌 옷을 철두에게 주었다. 옷을 대충 입은 철두가 명령했다.

"우리는 지금부터 추격에 나선다. 나머지는 모두 성으로 돌아가라."

"네, 영주님."

천 명이 넘는 병력이 집결했는데, 도강한 병력은 고작 100여 명.

허나 추격을 나서기엔 충분한 숫자다.

"철두야."

"진태. 너도 돌아가라. 성이 비었다."

"알았어. 이거 놈들 양동작전일 수도 있겠다. 너무 쫓아가진 마."

"적당히 전과만 올리고 돌아올 거다."

"알겠어. 조심해."

"후후. 이따 보자."

"그래, 고맙다!"

강철두의 파워업은 성공적이다.

김진태는 이제 아미르 왕국과의 전쟁이 두렵지 않았다.

"준섭이. 기병대를 이끌고 따라와라."

"넵!"

가장 먼저 강을 건넌 최준섭이 추격대의 지휘를 맡았다.

유격대, 특작대, 친위대 할 것 없이 뒤섞인 부대지만 유격대장 최준섭의 지휘 아래 모두 일사불란하게 말에 올랐다.

"전군 기마!"

파파파팟.

여기저기서 말이 소환되고, 철두도 그리핀 오식이를 소환해 올라탔다.

"간다."

후우우웅!

그리핀이 날아오르고, 최준섭도 기병대를 출진시켰다.

"영주님을 따른다!"

하늘에 떠올라 추격하는 그리핀을 이정표 삼아 100여 기의 기병대가 박차를 가했다.

*

아미르 왕국 궁성 외곽.

그리핀 기사단 숙영지.

"끼아아아악!"

그리핀 하나가 다급히 활강해 내려와 착지했다.

"음? 라따 경 아닌가? 전장 소식인가?"

"그렇습니다!"

"음, 표정이 좋지 못하군."

"패퇴 중입니다. 보고가 급하여 가보겠습니다."

"어어, 어서 가게."

라따라 불린 기사는 서둘러 궁성으로 가 국왕을 알현했다.

"저어어안하아아아 급보이옵니다."

"고하라."

왕좌에 앉은 왕의 앞에 엎드린 라따 경이 빠르게 전장 소식을 전했다.

"사령관 나룬 백작을 비롯해 랑트 경, 글랜 경 전사. 이후 퇴각에 성공했으나 적의 집요한 추격에 부사령관 라온 남작 및 참모장 키세르 경 전사, 작전참모 개스리 행정관 전사, 나그낙 행정관 전사...."

"...."

아찔한 보고의 향연에 아미르 왕국 국왕 다울 3세 왕은 역정을 냈다.

"졌다는 말이더냐?"

"그러하옵니다."

"...."

패배 따위는 염두에 두지도 않은 출진이었다.

도망친 그리핀을 중간에 빼돌린 야인 영주를 복속시키거나, 징치하거나 둘 중 하나의 결과가 나오리라 예상했다.

선택은 야전사령관인 나룬 백작에게 맡겼다.

"병력 피해는?"

"생존자 619명이옵고, 나머지는 모두 사망 혹은 실종이옵니다."

말이 실종이지 거의 죽었을 것이다.

지휘관들이 줄줄이 죽은 것에 비해 병력의 피해가 적어 물었다.

"병력의 피해는 생각보다 적구나."

"국경을 넘어선 순간 더는 추격하지 않았나이다."

"...패배의 원인은?"

"아이언헤드 영주의 조사결과가 틀렸습니다. 터무니없는 실력자로, 나룬 백작과 랑트, 글랜 3인의 소드마스터를 상대로 셋을 한 번에 참살하였나이다."

"...."

다울 3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정도라고?'

왕국 제일검인 바우켄 공작과 비견해서는 어떠할까? 아니, 바우켄 공작이라면 과연 소드마스터 3명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까?

"터무니없는 자구나."

"그, 그러하옵니다."

"...."

"...."

"알겠다. 가보아라. 부대는 복귀하도록 하라."

"예에, 저어언하."

다울 3세는 머리를 짚었다.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겼다.

"이거야 원...."

시종장을 향해 물었다.

"전력분석을 누가 했었지?"

"앙구안 경과 파빌 행정관입니다."

"책임을 져야지."

"...하명하시옵소서."

"처형하게."

"...명을 받드옵니다."

다울 3세는 의자 팔걸이를 툭툭 두드렸다.

"그리핀 기사단을 소집하게."

"예, 전하."

시종장이 읍하는데 알현실 문이 열리며 백발의 투헬 공작이 들어섰다.

"아니 되옵니다. 저언하아!"

"하아."

재상 투헬 공작의 등장에 다울 3세는 머리를 짚었다.

"한낱 야인 무리의 도발에 응하지 마시옵소서."

"이대로 묻자는 말인가?"

"저언하! 멀리 보시옵소서! 그들을 벌해 얻을 것이 무엇이옵니까?"

"나룬 백작의 넋은 기릴 수 있겠지."

"왕국의 전력을 고작 야인 정벌에 낭비할 수는 없사옵니다. 저어언하아아."

투헬 공작은 늙은이답지 않게 에너지 넘치게 말했다.

"아량을 베푸시어 용서해 주시옵소서. 국경에 접한 다른 야인 무리를 복속하시옵소서."

패배한 것이건만, 높은 자의 아량을 베풀라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울 3세의 주름이 하나 없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얼굴은 불만족스러움이 가득하다.

"나의 그리핀 기사단이면 그놈들은 단숨에...."

"즈으응은하아아앙아! 고정하시옵소서! 화살은 쏘아 보내고 나서는 뒤가 없는 법이옵니다. 손에 쥐고 있을 때가 가장 위엄을 발휘하는 법이옵니다."

그리핀 기사단은 왕국의 비밀병기다.

비밀병기가 왜 비밀병기인가?

감춰둘수록 힘을 발휘하는 것인데, 어쩔 수 없이 출격해야 한다면 압도적인 차이로 승리해야 한다.

하지만....

'상대는 소드마스터 셋을 상대하는 괴물이다.'

피해가 없을 수 없는 적.

설상가상으로 상대도 그리핀을 보유하고 있다.

재상 투헬 공작은 그들과 반목하는 걸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저으으은하아아! 복속은 창칼로만 이뤄지지 않나이다."

"...어느 세월에 그들을 하나하나 교화시킨단 말이오?"

"즈으은하아. 인내심을 가지시옵소서. 사람 하나하나가 아쉬울 때에 창칼로 굴복시키는 것은 빠른 길이 아니라 느린 길이옵니다."

"...."

"제게 맡기시옵소서. 저들과 소통하고 교화해 왕국민으로 삼고, 그들을 왕국의 창이자 방패로 쓰임 할 수 있게 하겠나이다."

"...내 재상을 믿고 한번 맡겨보겠소."

"성심을 다하겠나이다!"

투헬 공작은 깊이 읍하곤, 곧장 사과 사절을 꾸렸다.

"리투앙 남작. 경의 세 치 혀에 왕국의 미래가 달렸소."

"맡겨주십시오. 재상 각하."

왕국 최고의 외교관 리투앙 남작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는 마차 세 대를 가득 채운 선물과 함께 아이언헤드령으로 향했고.

"하이고, 리투앙 남자아악! 어찌하여 목만 오셨소오오!"

돌아온 것은 소금에 절여진 수급뿐이었다.

아이언헤드 영주는 정전협정에 응할 생각이 없었다.

전쟁의 시작이었다.

212화 전쟁 준비

"싫다."

"무, 무슨! 전쟁을 계속 이어나가겠다는 말이오?"

"그렇다."

"허! 왕국이 아량을 베풀어 용서하는데 주제도 모르고...."

서컥.

진태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철두가 칼집에서 뽑아 휘두른 검격에 외교관의 머리가 매끈하게 잘려 떨어져 내렸다.

"처, 철두야."

"진태."

"어어?"

"내가 과했나?"

"...아니."

상대가 주제를 입에 담기에 주제를 알려주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누구인지.

"이놈, 랭커가 아니군."

시체가 남았다.

"그래도 외교사절로 온 사람인데, 돌려보내자."

"그러자."

철두는 나머지 일은 시종장 김진태에게 맡겨버렸다.

"웃기는 놈들이군. 먼저 전쟁하자 덤벼놓고, 멋대로 화해하자고 하고 말이야."

때리는 것도 화해하는 것도 제 멋대로인 놈들이다.

이제 시작인데 관두긴 왜 관둔단 말인가.

"당장 가서 놈들 왕성을 털어오마."

"에헤이, 또, 또. 왜 그리 급하게 구냐, 철두야."

"이놈들이 먼저 시작한 전쟁 아니냐?"

철두가 인상을 썼다.

"너라고 해도 막지 못한다. 난 이 전쟁을 해야겠다."

"누가 하지 말라냐."

"응?"

"아니, 그래도 맛있는 건 아껴 먹자는 말이지."

"으음?"

김진태는 능글맞게 웃었다.

강철두가 파워업에 성공했다.

지금의 강철두면 이웃한 나트롱 백작의 호위기사들도 이제 더는 두렵지 않은 전력.

아미르 왕국과의 전쟁이라 해도 그리 두렵지 않다.

다만 조심할 필요는 있다.

아이언헤드는 분명 엄청난 힘이 있지만, 전력의 분배가 고르지 못하다.

이미 아미르 왕국의 대외적인 전력은 왕국 출신 마법사 브랄과 왕국 출신 사냥꾼 잭을 통해 파악했다.

"잭. 왕국에 소드마스터가 몇이라 했죠?"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은 27명입니다. 셋이 죽었으니 이제 24명이겠군요. 하지만 비밀리에 양성 중인 자들도 있을 테니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김진태가 철두를 봤다.

"철두야."

"내가 다 감당할 수 있다."

"양동작전이면?"

"음?"

"공격조 수비조는 있어야 할 것 아냐?"

"그렇지."

"너 말고 감당할 사람이 없는데, 어쩌냐?"

"...."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말에 철두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준섭이를 키우지. 아니, 제임스부터 키우자."

"내 말이 그거야. 우린 조금 시간이 필요해."

"...."

짝!

김진태가 손뼉을 쳤다.

"난 한강에 다리를 놓을 거야. 수레가 오고 가도 무너지지 않을 아주 튼튼한 다리로."

"훌륭한 진격로가 되겠군."

"그리고 국경에 요새도 세울 거야. 적을 방어하는 1차적 방어선이 될 수도 있고, 공격을 위한 전초기지가 될 수도 있는 거지."

"좋군!"

"그걸 전부 겨울 동안 진행할 거야."

"겨울이라 더 약탈에 나서야 하는 것 아니냐?"

"아냐, 우리 성 창고에는 식량이 가득해. 솔직히 농사 안 지어도 먹고살 걱정 없을 정도야. 문제는 주민이지."

아이언헤드의 주요 약탈은 모두 영지군에 의해 일어났다. 자연스럽게 그 전리품이 모두 영지의 재산이 되는 셈.

식량, 옷, 여러 자원들까지도 모두 성에 가득한데, 주민들 역시 모두 풍족하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영주성은 부유하다.

모든 자원을 생산 판매하는 주체가 영주성이기에 그 판매대금도 상당하고, 하루하루 거주비 등의 세수 수입도 굉장하다.

하지만 돈을 쌓아두어서는 아이언헤드령이 발전할 수 없다.

"돈 있는 사람들은 다 먹고사는 데 문제없는데, 최근 유입된 사람들이 많아서 문제야. 이 사람들 일거리가 있어야 해."

겨울에 밭을 갈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제 겨우 초보 노비스가 된 자들 보고 몬스터 사냥을 나서라고 하는 것도 무리다.

더군다나 이제는 몬스터의 개체 수가 급감해 숲을 돌아다니더라도 오크 하나 만나기가 쉽지 않은 환경이 되어버렸다.

창고가 가득한데 굳이 전쟁이나 약탈에 조급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지금은 내실을 다질 때야, 철두야."

"알았다."

적어도 영주인 강철두가 공격에 나섰을 때 성을 안전하게 방어할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 난 다리랑 도로공사, 요새 공사로 일거리 좀 만들게."

지금 당장 돈이 없고 사냥에 나설 수도 없는 자들에게 자구책을 마련해주어야 했다.

국가적인 토목사업으로 임금을 지불할 생각이다.

아이언헤드 버전의 뉴딜 정책인 셈.

'이번 겨울만 잘 넘기면 돼.'

겨울을 날 식량은 이미 충분하다.

좀 부족하면 뭐 그때그때 약탈에 나서도 되고, 친구가 된 나트롱 백작령에 좀 뜯어내도 된다.

내실을 다질 때다.

"숨겨진 전력까지 생각하면 소드마스터만 30명, 어쩌면 40명 정도로 생각하고 대비해야 해."

"40명이라...."

철두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당장 떠오르는 부하놈들 중에 소드마스터가 될 이들이 몇이나 될까?

'갈 길이 멀군.'

차라리 잘됐다.

철두 자신도 단련할 게 많다.

줄어버린 몸부터 다시 채워야 한다.

"좋아. 난 부하들 단련에만 신경 쓰겠다."

"굿! 나머지는 내게 다 맡겨!"

"든든하다. 진태!"

"흐흐흐."

김진태는 이제 영지의 2인자 자리가 익숙했다.

자원이 가득하고, 노동력을 부릴 돈도 충분하다.

그간 비축한 힘으로 이제 발전에 박차를 가할 때다.

아이언헤드 본성과 북서쪽에 세운 뉴아 요새.

그곳에서부터 시작되는 N344 맵의 21개 마을도 이제는 아이언헤드령의 영지로 편입되었다.

'노론 마을도 성벽을 좀 쌓아서 요새 도시로 만들고.'

나트롱 백작과 정전협약을 했다지만 관계란 것이 언제 틀어질지 알 수 없는 일.

이제는 국경 마을이 되어버린 노론 마을을 요새화하면 북쪽의 방비는 얼추 모양을 갖춘다.

아이언헤드 본성에서 동쪽으로 가면 나오는 포멜 마을. 그리고 한강 동쪽의 미개척지인 방대한 숲과 그 너머 아미르 왕국의 국경까지.

숲을 벌목하고, 국경 초 인근에 요새 성을 하나 더 지으면 동쪽의 방비도 어느 정도 모습을 갖춘다.

남쪽으로는 한양이 자리하고, 서쪽으로는 이동 포탈망이 자리하고 있으니....

"후, 공사할 게 산더미네."

김진태는 익숙하게 세력창을 건드려 홀로그램 맵에 위치를 잡고 필지의 용도를 지정, 건물을 요리조리 대보며 계획을 세웠다.

"아, 길은 미리 깔자."

위치는 이미 나와 있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길과 다리공사는 설계도 없이도 당장 시작할 수 있다.

"아스발도 행정관 소집하세요."

"네, 시종장님."

하인이 빠르게 나가 도로공사의 귀재 아스발도를 찾으러 갔다.

전쟁 중에 포로 비슷하게 억류한 자였는데, 김진태가 나트롱백작령의 소영주 요르단과 협상하며 아예 받아온 인재다.

당장 시급한 건 한강 동쪽으로 진출하기 위한 다리공사.

그에게 맡겨야겠다.

*

콰앙!

제국 수도.

나트롱 백작의 저택에 불려온 요르단은 아버지 나트롱 백작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허! 남부의 21개 마을을 갖다 바쳐?"

"...그들의 독립 요구가 있었습니다."

"감히!"

체면과 과시를 중시하는 나트롱 백작에게 있어 이는 큰 충격이었는지라, 얼굴이 시뻘게졌다.

"아버지. 제게 맡겨주십시오."

"이익! 그딴 망발을 지껄이고 해 놓은 짓이 마을이나 뺏기는 것이냐? 이제는 대농이라 불리지도 못하겠구나."

"복구할 수 있습니다."

나트롱 백작이 씩씩거리더니 다른 해결책을 내놓았다.

"조만간 발베르 경을 보내주마."

"안 됩니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아이언헤드와의 이미 정전협정까지 맺었습니다!"

"흥! 마을을 갖다 바치며 맺은 굴욕적인 협정이다. 야인과의 약속 따위야 하등 쓰잘데기없다."

"...맹약의 서를 사용하였습니다."

"뭐? 어억."

이 미친놈을 보았나.

맹약의 서는 무조건 지켜져야 한다.

어기면 무조건 대가로 내건 것을 집행하기에.

"무, 무엇을 걸었느냐?"

"...제 목숨을 걸었나이다."

"...고얀 놈."

말은 거칠지만, 조금 차분해진 음성에서 백작의 속내가 읽혔다.

요르단은 그것이 슬펐다.

'다행이라 여기시는구나.'

아들의 목숨을 포기하면, 그 맹약은 무효가 될 터. 어쩌면 가벼운 대가라고 여기실지도 모르겠다.

나트롱 백작의 슬하에 아직 1남 1녀뿐이라지만, 그는 아직 정정하고 얼마든지 후계를 양산할 기회가 있으니.

어쩌면 백작의 슬하에 다시 아들이 태어나는 때가... 아이언헤드와의 전쟁이 다시 개시되는 때인지도 몰랐다.

"돌아가라."

"...네에. 달리 하명하실 것이 있사옵니까?"

"흥, 제멋대로 영지를 반 토막 내는 놈에게 명해본들 제대로 따를 수야 있겠느냐? 더는 땅을 잃지 말고 잘 보존이나 해두어라."

"...알겠사옵니다."

확신했다.

요르단은 지금 소영주의 자리에 앉아있지만, 이것이 그가 가질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다.

그는 절대 백작위를 상속받을 수 없으리라.

'...마음이 아프구나.'

물론,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으니.

본인이 쟁취해내는 방법도 있었다.

수도 저택을 떠나 영지로 돌아가는 요르단의 얼굴이 어두웠다. 그 와중에 눈에는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

철두는 이은영을 앞에 두고 매섭게 검을 휘둘렀다.

카앙, 카아아앙!

"으윽."

친위대장 이은영은 연신 뒤로 밀리면서도 기회가 보일 때마다 반격을 가했다.

까앙!

"후후후, 좋구나."

역시 재능있는 녀석답다.

조선제일검.

이은영의 지금 검술 레벨은 4.

기예에 있어서는 철두 다음으로 뛰어난 성취다.

영약만 하나 있다면 다음 소드마스터로 낙점된 것이나 다름없기에 철두는 이은영의 경지가 흡족했다.

푸싯. 퍼억!

"크흡!"

얽히고설키던 검격에 이은영의 팔이 베이고, 훤히 드러난 상체에 철두의 무지막지한 발차기가 날아와 박혔다.

쿠당창.

한참 날아간 이은영이 겨우 일어나더니 한숨을 쉬었다.

"후, 안 되네요."

"후후후, 잘 버텼다."

"나름 싹수 있는 애들만 모은 건데. 아쉽네요."

"아니다 훌륭했다."

지금 이은영의 주변에는 친위대원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피가 낭자한 와중에 죽은 이들은 없다.

친위대와 강철두의 대련.

50 vs 1의 싸움이었는데 결과는 너무 압도적이었다.

"이눔시끼야. 좀 살살 혀. 애들 다 죽일 일 있어?"

대련이 끝나서야 대련장으로 들어선 강용철이 부상이 심각한 이들부터 치료하며 핀잔했다.

"후후, 할배. 대련이 실전 같아야 실전에서 덜 죽는 법이다."

"어휴, 저거 틀린 말이 아니니 혼낼 수도 없고."

그저 혹여 진짜 죽는 이들이 나올까 걱정하며 대련을 지켜보느라 늙은이 진땀뺀 투정이다.

"은영. 오늘인가?"

"네."

"후후, 무한결투장은 이것보다 더 좋다. 진짜 목숨을 걸고 하니까."

"하하하. 기대되네요."

이은영이 힘없이 웃었다.

역시 영주님은 싸움에 있어서는 진심이었다.

실전만 한 훈련은 없다.

강철두와의 대련도 충분히 실전과 같이 험하게 치러지지만, 딱 한 가지 심리적인 방어선이 있었다.

'진짜 죽지는 않지.'

부상을 입을지언정 강철두가 정말 죽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안다.

허나 무한결투장은 그런 방어선마저 없는 곳.

"건투를 빌지."

"네."

이은영은 감각, 민첩, 근력의 트리플 랭커다.

체력 스탯도 49.

오늘이 바로 그녀가 히어로로 등급업 하는 날이다.

철두, 제임스에 이어 아이언헤드 령의 세 번째 히어로가 탄생하는 날.

"바로 다녀와라."

무한결투장은 낮에 가면 일몰에 돌아오고, 밤에 가면 일출에 돌아온다.

슬슬 서산마루에 해가 넘어가려는 지금이면 딱 좋은 타이밍이다.

"네, 다녀올게요."

강용철의 기도로 치료받은 이은영이 붉은 스탯석을 활성화했다.

파파팟.

213화 브론즈

"허억, 허억. 허억."

이은영은 절벽을 오르고 또 올랐다.

스탯석 50개가 되면 오게 되는 이 측정실에서 시험하는 종목은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무엇이 되었든 우습게도 공정하게 점수가 나온다.

"으엇!"

슈우우우웅.

오르고 오르다가, 힘이 다하여 떨어져 내린 그녀는 잠깐의 부유감과 함께 곧 흰색의 공간에 우뚝 섰다.

"허어억!"

가쁘던 숨소리도 평온을 찾았고, 방향감각도 돌아왔다.

파팟.

<수치를 계산합니다.>

<점수 751점 획득>

<지구 채널 '체력' 활성화 순위>

1. 강철두(2512)

2. 사토(782)

3. 제임스(756)

4. 우로이(755)

5. 이은영(751)

6. 장진(749)

....

"우왓!"

이은영이 활짝 웃으며 주먹을 쥐었다.

됐다!

5등 안에 들었다.

너무 신나 제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부하들이 봤으면 깜짝 놀랄 만한 소녀 같은 모습.

"흠, 흠."

괜히 민망해 헛기침을 했다.

여전히 스물셋 나이로 보이는 그녀지만, 노바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군인 출신의 친위대장.

특히 부하들이 보는 데서는 도도하고 위엄있는 상관의 모습 그 자체를 보여온 그녀다.

흐트러질 수는 없지.

"흐흐, 5등이다."

하지만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

무려 5등이다.

지구 전체의 체력 랭커 중에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이야기니, 엄청난 대기록이다.

새삼 윗줄의 랭커들이 대단해 보이면서, 넘사벽의 점수를 기록한 강철두가 아예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지만....

"흐, 한국인 두 번째당. 호호."

지금은 어차피 혼자만의 공간.

근엄 진지 가면을 벗어던지고 지금은 마음껏 기뻐해도 되지 않을까?

한참 방방 뛴 그녀는 자판기를 닮은 상점으로 가 점수를 모조리 사용했다.

"인벤토리 늘리고, 월드맵도 강화하고...."

벌어들인 점수가 적어서 금세 동이 났다.

남은 점수는 모조리 휘장으로 바꿔 인벤토리에 넣었다.

모든 점수를 소모하자 눈앞에 기다리던 선택지가 나타났다.

<측정이 완료되었습니다.>

<종합 점수를 집계 중입니다.>

<결투장 입장을 준비합니다.>

<영웅의 길>

영웅의 길은 고난과 투쟁이 함께합니다.

각오한 자만이 마땅히 도전할 것이며, 꺾이지 않는 자만이 영웅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도전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수락/거절>

수락 시 신을 섬길 수 없습니다.

거절 시 결투 마을에 입장할 수 없습니다.

드디어!

이은영은 선택을 망설이지 않았다.

"수락한다."

<영웅의 전령을 선택하세요.>

<영웅과 고난을 함께하는 동료입니다.>

철두와 제임스도 가지고 있는 영웅의 전령.

결투장으로 향하는 차원문을 열어주는 존재.

붉은색, 초록색, 파란색, 보라색.

이은영은 민첩의 전령을 선택했다.

거창한 이유는 아니다.

가장 먼저 랭킹을 달성한 게 민첩이어서, 그냥 끌리는 대로 선택했다.

화르륵.

초록색의 도깨비불이 이은영의 오른쪽 손등의 주화 주머니에 스며들었다.

아직 전령은 깨어나지 않았다.

노바로 돌아가야 전령을 깨우고 이름을 붙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가볼까?"

이은영은 백색의 공간이 사라지고 덩그러니 생겨난 문을 힘차게 열어젖혔다.

파파팟.

잠깐의 울렁임과 함께 곧 지구 채널의 대기마을이 모습을 보였다.

"오, 뉴비군."

지금 노바는 낮 시간.

낮 시간 안에 입장한 히어로들이 마을 입구에 우후죽순으로 소환되듯 나타났다.

지구 경로에 이리도 히어로가 많았나 하는 생각에 이은영이 깜짝 놀랐다.

"어이, 비키라구."

"아."

노바에서 예비역 소령의 베테랑이지만 무한결투장에서는 신입 그 자체.

"오, 첫 입장이시군요. 레이디."

"...네."

"제가 마을 안내를 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가면을 쓴 금발의 남자가 정중히 인사하며 물어왔다. 이은영이 그 사람을 무심히 보는데 구면의 사람이 다가왔다.

"내 부하한테서 떨어져라."

"허억! 아이언헤드.... 죄송합니다."

남들과 다르게 가면이나 투구 따위는 쓰지 않는 당당한 차림의 강철두가 나타났다.

지구에서도 노바에서도, 그리고 이곳 무한결투장에서도 강철두의 위상은 대단했다.

힐끔힐끔 히어로들이 전부 강철두를 의식하고 있었다.

"여기서 보니 더 반갑네요."

"후후, 고생했다."

이은영이 웃었고, 철두도 웃었다.

이은영은 반가움에, 철두는 이제 막 히어로가 된 부하를 더욱 강하게 단련시킬 수 있다는 기쁨에.

"가죠."

"후후, 따라와라."

이은영은 철두를 따라 등록소에서 닉네임을 등록했다.

조선제일검.

이제는 과거의 별명이 되어버린 그것으로 등록을 마치고 첫 결투를 위해 결투장으로 이동하려는데....

<지구 채널의 종합 점수 평가가 완료되었습니다.>

<등급 '브론즈' 판정을 받았습니다.>

파팟.

하늘에서부터 구릿빛의 빛무리가 내려와 마을 중심부 공터에 조각상을 만들어냈다.

콰콰쾅!

공터에 생겨난 별 모양의 조각상은 위치를 잡자마자 랜드마크처럼 자리했다.

거대한 트로피.

파파팟.

동상에서 갑작스레 빛이 폭사하더니 장엄하고 비현실적인 광경이 벌어졌다.

동심원처럼 퍼져나가는 빛이 마을에 닿을 때마다 모든 게 변했다.

공터는 광장이 되었고, 허름한 빈집들이 2층 가옥이 되었고, 비어있던 상점에 불이 들어왔다.

파파파팟.

마을이 변했다.

"이, 이게 뭐야?"

"미쳤다!"

"어어? 여기 자판기야!"

여기저기 몰려있던 사람들은 혼란스러운 와중에 새롭게 생겨난 마을 시설들을 둘러보며 흥분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네요."

"후후, 좋은 징조겠지."

철두도 결투장으로 가려던 걸 멈추고 변화된 마을을 구경했다.

등록소는 더 커졌고, 도우미도 셋으로 늘어났다. 장비 수리점에는 없던 주인이 나타나 사람들을 접객했다.

대장간도 생기고, 선술집도 생겨났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중앙광장에 자판기가 생겨났다는 거다.

익숙한 모습의 자판기.

"비켜봐라."

철두의 말에 자판기까지 가는 길이 훤히 갈라졌다.

무한결투장은 영웅들만 출입이 가능한 곳이지만, 이곳에서도 철두의 위상은 대단해, 그에게 함부로 까부는 사람이 없었다.

자판기는 랭킹 등록 때 보았던 것과 흡사하게 생겼다.

<결투장 전용 판매 상품>

<보유 포인트 4850>

200p - 고급 인벤토리 + 1칸

1000p - 고급 탈것 인벤토리 + 1칸

1000p - 고급 펫 인벤토리 + 1칸

100p - 휘장

"음?"

랭킹 등록 상점보다 터무니없이 높아진 가격이지만, 이제는 15칸에서 더 늘릴 수 없는 인벤토리를 추가 확장할 방법이 생겼다.

화폐는 소울 포인트.

'포인트를 더 벌어들일 이유가 늘었군.'

보다 열심히 결투를 해야 할 성싶었다.

철두는 적당히 포인트를 사용했다.

<인벤토리가 1칸 늘어납니다.>

<인벤토리가 1칸 늘어납니다.>

....

1000포인트를 소모해 5칸을 추가해 철두의 인벤토리가 20칸이 되었을 때였다.

2000p - 고급 인벤토리(2) + 1칸

"비싸군."

남은 포인트는 3850.

1칸을 더 확장하려면 이제 10배의 소울포인트를 소모해야 한다.

차라리 펫이나 탈것 인벤토리가 가성비가 좋아 보인다.

말 두 마리에 그리핀 한 마리.

아직 빈자리가 남아있긴 하지만, 철두는 그것을 구매했다.

파팟.

<탈것 인벤토리가 1칸 늘어납니다.>

<펫 인벤토리가 1칸 늘어납니다.>

철두의 팔뚝에 동그라미가 2개 더 생겨났다.

총 6개의 동그라미.

그 속에 채워진 건, 말 모양 그림 두 개랑 그리핀 그림 하나가 전부였다.

"후후."

빈자리가 많으니 조금 더 다양한 탈것을 구해볼까 싶어졌다.

강철두가 쇼핑하는 사이 이은영이 자판기를 보고는 골똘히 생각하다 강철두를 불렀다.

"대장."

"왜?"

"여기서 포인트를 벌 수 있고, 특전을 구매할 수 있게 됐으니 이제 순위에 목맬 이유가 있을까요?"

"높은 점수를 받아서 나쁠 것 없지."

"하지만 높은 점수 받자고 시간 끄는 것도 손해 같은데요."

"으음."

철두가 턱을 쓰다듬었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4대 스탯석 50개를 흡수할 수 있으면 빠르게 히어로가 되는 것도 방법이다.

소울포인트야 미니언들과의 훈련만 해도 벌어들일 수 있는 것이니까.

"물랭커군."

"맞아요. 그게 더 성장이 빠르지 않을까요?"

이은영의 말에 철두가 고개를 저었다.

"결투에서 이기지 못하면 포인트를 벌어들이지 못한다."

"무한훈련장이 있잖아요."

"훈련 상대는 미니언이다. 랭커란 소리지. 그런 놈을 잡을 정도가 되려면 마찬가지로 랭커가 되어야겠지."

"아!"

"하지만 좋은 생각이었다."

철두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이미 랭커급인 자들은 이제 다른 스탯의 랭킹까지 높은 점수를 유지하기 위해 시간을 허비하느니 빠르게 무한결투장에 입성하는 게 나을성싶었다.

패배는 또 그 자체로 얻을 수 있는 전투 경험치가 있으니까.

"후후, 준환이랑 준섭이, 정욱이 정도는 바로 올려야겠다."

그 네 사람 정도는 당장 미니언 한둘을 상대로 승리하기 어렵지 않은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굳이 랭킹 점수를 올려 특전을 얻자고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일단 히어로로 만들어 놓아야 무한결투장에서의 성장도 가능하고, 또 미궁 미션에서 히어로 미션을 진행할 수 있으니까.

'미궁이 중요하겠어.'

철두가 알기론 영약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미궁뿐이었다.

방금 전까지는.

"우와, 이게 뭐야?"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곳을 가보니, 커다란 게시판이 존재했다.

<브론즈 채널 공식 게시판>

[채널 '브랜드포지'가 채널 교류전 모집 중.]

채널 발전 점수 100점을 걸고 대결.

용기 있는 채널의 도전을 기다리는 중.

[제 872회 펫 결투 대회 등록 마감 - 29일]

우승 상품 – 영약 백년하수오

철두의 시선은 펫 대결에 가 있었다.

"후후, 저거다."

천년설삼보다는 못하지만 상관없다.

영약은 영약.

초인의 영역으로 만들어 줄 수만 있다면, 이은영을 당장 소드마스터로 만들어 줄 수 있는 보물이다.

지금 당장이야 제임스의 전투력이 더 높지만, 그건 다재다능의 영역이다.

기술 레벨 4를 달성한 것은 아직 아이언헤드령에서 강철두와 이은영이 유일하다.

"출전하자."

"펫 있으세요?"

"그야...."

철두가 인상을 팍 썼다.

갈색 준마는 당연히 탈것이라 안 되고, 그나마 펫 전투로 나갈만한 것은 소나따와 오식이뿐인데, 우승을 할 수 있느냐 하면 조금 불안해 보였다.

"으음, 일단 소울포인트나 벌고 나가자."

괜히 엉덩이가 들썩인다.

이거 노바로 돌아가면 맵을 샅샅이 뒤져 펫부터 한 마리 구해봐야겠다.

"네, 저도 얼른 결투해보고 싶네요."

이은영이 당차게 말했다.

목숨을 건 결투.

죽음은 없지만, 실전 그 자체인 훈련.

경기장 입구 포탈로 다가가, 강철두는 결투를 선택해 사라졌고, 이은영은 훈련을 선택했다.

처음 와보는 콜로세움에 자리한 이은영의 눈앞에 미니언이 소환되었다.

파팟.

"아닛! 시발, 네년은?"

"장호철?"

이은영은 케케묵은 인연의 산적 장호철을 보고 씩 웃었다.

생전에도 자신에게 상대가 안 되던 놈인데, 지금이라고 다를까.

첫 훈련은 꽁승이다.

214화 펫을 찾아서 (1)

파팟.

꾸이와 초록색 도깨비불이 꾸물거리더니 동시에 강철두와 이은영이 나왔다.

"후후, 몇 승 했냐?"

"엇, 잠시만요. 전령 이름 정하고요."

이은영이 잠깐 허공에 나타난 메시지에 따라 전령 이름과 형태를 정했다.

파파팟.

"째짹."

초록색의 빛 덩어리는 꾸물거리더니 작은 참새의 모습을 했다.

"와, 제 짹짹이예요."

"째짹."

"후후, 내 꾸이보다 못하군."

"허, 누가 봐도 슬라임보다는 제 짹짹이가 더 귀엽지 않나요?"

"꾸이는 더 쓸모가 많다."

전리품 수거도 되고, 용의 각질 덕에 어디서든 힐링 포션처럼 상처 치유 효과도 부여할 수 있었다.

"전 '가속' 스킬을 얻었네요."

철두는 꾸이의 스킬을 지정하지 않아서 저절로 가장 필요한 기능인 전리품 수거가 얻어졌는데, 이은영의 짹짹이는 가속이 가능했다.

히어로를 일시적으로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스킬.

"후후, 잘했다. 그래서 몇 승이냐?"

"다섯이요. 여섯을 상대로 싸우다가 죽었어요."

"잘했군."

역시 검술 레벨 4. 명인의 경지 정도 되니 압도적이다.

애당초 레벨 3만 되어도 기사 중에서는 베테랑 기사라 할 만한데, 그 윗 단계쯤 되니 미니언들을 다수 상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얼른 포인트 모아서 결투에 나서라. 거긴 더 좋다."

"그래야죠."

이건 나보다 상대적으로 약한 대상 다수를 상대로 하는 연습이 될 뿐이다.

진정한 강자와 목숨을 내걸고 싸우고 싶으면 소울포인트를 내걸고 결투에 나서야 하는 것이다.

"대장은 몇 승이에요?"

"7승이다."

"8번째에 패하셨어요?"

"아니. 방식이 바뀌었다."

철두가 결투장에 입성하고 나니, 이제는 결투 매칭의 방식이 바뀌어 있었다.

지구 채널 자체가 브론즈로 배정되어서인지, 브론즈 전장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랭킹으로 매긴다. 위로 5위까지 저격해서 매칭할 수 있더군."

그 이전의 랜덤 매치는 배치고사였는지, 철두의 랭킹은 브론즈 626등.

윗 순번의 대상에게 도전해 랭킹을 오를 수 있는 구조.

철두는 마침 접속 중인 621등에게 도전해 이겼고, 그의 랭킹을 뺏었다.

이후로도 쭉쭉 랭킹을 올렸으나, 도전은 세 번이 전부였다.

"어? 7승이라면서요?"

"밑의 놈들이 날 저격하더군."

"아!"

도전할 수 있는 기회는 단 세 번.

하지만 도전을 받아들이는 것은 무제한이다.

철두는 7번 이겼고, 한 번도 죽지 않았다.

"그런 방식이군요. 그럼 전 처음엔 무작위 매칭이겠네요."

"그렇겠지."

일몰 전에 무한결투장에 입장했는데, 나오고 보니 딱 일몰 후의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무한결투장에서 적어도 네다섯 시간은 보내고 온 것 같은데, 노바의 시간은 고작 20여 분이 흘러있을 뿐이었다.

"그럼 애들 훈련시켜라."

"네, 대장은요?"

"몬스터 찾으러 가야지."

물론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진태!"

영주의 집무실로 들어서며 친구를 찾았다.

영주인 자신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는 시종장이다.

"시종장님께서는 전진 요새로 향하셨사옵니다."

"음? 그럼 르망은?"

"수석마법사님도 함께 가셨습니다."

"언제 돌아온대?"

"늦게 가셨으니 오늘 밤은 아마 그곳에서 숙영할 듯하옵니다."

"쳇."

가는 날이 장날이다.

"내가 가야겠네."

"어? 어디 가십니까?"

때마침 들어오는 최준섭과 오준환을 보며 물었다.

"뭐야 둘이 왜 같이 있냐?"

"예? 저녁엔 저희 수련 봐준다고 하셨잖아요."

"아, 그렇지."

철두는 약속이 뒤늦게 떠올랐다.

친위대와 이은영을 먼저 봐주고, 저녁 먹고는 유격대와 특작대를 봐주기로 하였었다.

"음, 마침 잘됐다. 둘 다 스탯이 어떻게 되냐?"

"전 47, 41, 39, 54입니다."

"52, 44, 48, 49요."

먼저 대답한 최준섭은 여전히 감각의 랭커일 뿐이고, 한계 돌파 스크롤로 49에 멈췄던 근력을 추가 흡수한 오준환은 근력의 랭커가 되었다.

"둘 모두 나머지도 최대한 흡수해라."

"예? 그럼 물스탯이 되는데요? 더 강해지는 것도 아닌데."

천장만 높여놔서 뭣할 것인가?

차근차근 성장해야 그 스탯에 걸맞는 활약을 할 것이 아닌가?

초등학생 1학년을 당장 고등학교에 입학시켜봐야 학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과 같다.

"아니, 시간이 너무 걸린다."

하지만, 두 사람이 네 스탯 모두 50이 되어 랭커가 되기까지 기다렸다간 앞으로 1~2년으로도 부족하다.

"너희 둘은 속성으로 랭커가 된 후에, 강해진다."

"...그럼 순위가 낮아지잖아요?"

"그건 신경 쓸 필요 없다. 특전은 이제 무한결투장에서도 얻을 수 있다."

"오, 그래요?"

"얼른, 스탯석 챙겨서 따라와라."

"부대도 준비시킬까요?"

"아니, 둘만 와라."

부대의 훈련도 중요하지만, 철두가 보기에 지금 가장 시급한 건 소드마스터의 양산이다.

영약을 먹으면 신체 재구성을 통해 초인의 몸을 가질 수 있지만, 무기 레벨 4를 달성하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가장 높은 무기술이 얼마냐?"

"전 검술이요. 3이죠."

"전 단검술이랑 검술이요. 둘 다 3입니다."

오준환은 두 개나 레벨 3 장인의 경지에 올라있어 우쭐했으나, 철두가 보기엔 거기서 거기였다.

"일단 가자."

"네."

세 사람이 말을 달렸다.

두두두두.

아이언헤드 성을 나서 동쪽으로.

포멜 마을을 지나, 아직 활발히 건설 중인 다리를 건넜다.

임시로 쓰일 목재 다리는 진즉에 완성되었고, 지금은 튼튼한 석조 다리가 건설 중이었다.

완성되면 마차 두 대가 동시에 지나가도 좋을 정도의 넓은 다리가 될 터다.

동쪽으로, 더 동쪽으로 향하는 보급부대의 주요 경로가 될 터.

"신 아스발도가 영주님을 뵙습니다."

"어, 고생이 많구나."

"여, 영광입니다!"

토목공사 총 책임자 아스발도 행정관은 철두를 상대로 극공의 예를 취했다.

"후후, 그럼 계속 고생해라."

"서,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철두가 목조 다리를 건너 동쪽으로 향했다.

한창 벌목과 함께 도로 공사 중인 길을 쭉 따라가면 국경 인근에 건설 중인 전진 요새가 나온다.

아미르 왕국을 칠 주요 루트가 될 최전방의 요새.

그들의 모습이 숲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아스발도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그의 옆에 있던 부관이 말을 걸었다.

"행정관님."

"가셨냐?"

"예, 가셨습니다."

"어휴, 살 떨린다."

아스발도가 그제야 허리를 폈다.

"너무 조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허, 뭐라?"

아스발도는 깜짝 놀라 부관을 나무랐다.

"혹여라도 그런 불충한 생각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해라."

"예? 하지만...."

"너는 영주님이 우습더냐?"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영주님을 대함에 있어 황제나 왕과 같이 대해야 한다."

"예에?"

부관은 여전히 수긍하지 못하는 얼굴이었기에 아스발도는 쓰게 웃었다.

"미래를 보아라, 미래를. 너는 영주님이 장차 왕이 될 모습이 그려지지 않더냐?"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쯧."

어찌 이리 둔할까.

지금 현재의 상세만 보면 제국의 작은 귀족 가문 정도의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일 뿐이다.

하지만 미래를 보면 어떠한가?

역사 공부에도 관심이 있는 아스발도의 상식 안에서 이토록 단시일에 소드마스터가 된 자는 없다.

지르골을 처치했을 때만 해도 대단하다 여겼는데, 아미르 왕국의 세 번째 검을 포함해 소드마스터 셋을 상대로 승리했을 때는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알음알음 명성이 퍼져나가고 있다.

지금 상태로도 대단하지만, 영주님의 숨겨진 힘은 다른 데 있다.

'행성 지구의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있을 테니.'

같은 행성 출신의 같은 종족이 갖는 유대감은 특별하다.

노바의 기득권들이 보기엔 이제 막 초보 노비스가 되어버린 야인들 무리들이다.

노예로 잡거나, 복속시키거나, 누구든 먼저 줍기만 하면 이득인 인적 자원.

하지만 그들에게도 구심점이 있으면 어찌 될 것인가?

아이언헤드는 지구의 구심점이 될 만한 기반과 힘을 함께 갖고 있었다.

이는 필연적으로 다음 수순으로 이어진다.

'건국이다.'

아스발도는 정전협정의 희생양으로 나트롱 백작에게서 아이언헤드로 흘러왔지만, 이것이 전화위복이 되리라 생각했다.

*

N6140 동북쪽 끝단.

전진기지 공사가 한창이었다.

"방어탑이 적어도 넷은 되어야 합니다."

"그 이상은요?"

"마법사가 부족해 그 이상은 유지가 어렵습니다."

"음, 성은 이것보다 더 크게 지어야 해요."

"예에, 설계에 반영하겠습니다."

"방어의 용이성도 좋지만, 여긴 진군을 위한 전진기지가 되어야 할 겁니다. 그 목적에 충실해야 해요."

"여부가 있겠사옵니다."

"아미르 왕국에서 약탈해올 여러 보급품을 생각하면 동북쪽에도 성문을 내야 합니다."

진태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방어를 위해 과잉 투자하긴 하지만, 오로지 방어만을 위한 성은 아니다.

사실, 적에게 공격당할 일도 많지 않으리라 여겼다.

'공격하는 쪽이겠지.'

이 전진기지는 지금은 최전방이지만, 이번 겨울만 지나고 나면 오히려 아미르 왕국 진군부대의 후방기지로서 역할 할 것이다.

보급기지도 아니다.

보급이야 현지에서 조달할 테고, 전진기지는 그들이 약탈한 물품을 아이언헤드 성으로 나르는데 주력할 터다.

'흐흐, 영지 발전이 이리도 쉽구나.'

수많은 영지 발전 게임을 해봤지만, 어째 현실이 더 쉽다.

게임은 밸런스 등이 중요해 초반부터 강력한 패를 주지 않지만, 현실은 다르다.

강철두라는 치트키적인 존재를 데리고 있는데, 영지 정착과 발전이 쉽지 않으면 그것대로 문제다.

"진태야!"

"오! 철두야!"

나의 여포 같은 친구가 전진기지에 방문했다.

"부대 훈련시킨다더니 웬일이야? 어? 최 대장님, 오 대장님도 왔네요."

"얘들 데리고 사냥 다녀오마."

"사냥?"

"가도 되냐?"

"어, 되지. 정찰병 돌리고 있는데 당장 위협은 없어."

지금 전진기지를 지키는 병력은 제임스의 별동대다. 아미르 왕국의 동태를 예의주시하며 요새 건설이 방해받지 않도록 호위하고 있는 셈이다.

"오래 걸려?"

"그건 모르겠다."

"어디 갈 생각인데?"

"펫 구하러."

"어? 펫?"

갑자기?

진태가 의문이 가득한 얼굴을 하자 철두가 무한결투장에서의 일을 설명해주었다.

"헙! 영약? 그럼 소드마스터잖아! 누구 줄 거야?"

"은영이다."

"친위대장? 낙점이야?"

"무기술 4레벨인 사람이 이은영뿐이다."

"아!"

진태가 납득했고, 함께 따라온 최준섭과 오준환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그래서 아까 스탯이 어쩌고, 랭커가 어쩌고, 무기술이 어쩌고 물어보셨구나.

"신 오준환! 마구 굴려주십시오. 영주님의 가르침을 뼈에 새기겠습니다."

최준섭도 얼른 비장한 얼굴로 무릎 꿇었다.

"형님! 죽으라면 죽겠습니다. 알아서 하십시오! 제가 먼저 레벨 4가 되겠습니다."

적극적인 두 사람의 랭커를 보며 철두가 희게 웃었다.

"후후후후."

아주 좋군.

215화 펫을 찾아서 (2)

두두두.

전진 요새로 갈 때까지만 해도 세 명이었지만, 돌아올 때는 네 명이었다.

"르망."

"헙, 넵."

"이 근처에는 없나?"

"시작의 맵 근처에 가장 많은 몬스터가 있겠지만, 아시다시피 맵이 바뀌었습니다."

"그렇지."

'C614' 맵은 'N6140'이 되었다.

"시작의 맵이란 게 밸런스 상 그리 강한 몬스터는 또 없습니다. 해봐야 오우거나 미노타우로스 정도입죠."

"더 강한 몬스터가 많나?"

"그리핀도 오우거보다는 강합니다."

"오, 우리 오식이가?"

"예. 공중 몬스터 중에서는 최상위 포식자 중에 하나입죠."

"그럼 오식이로 그냥 출전할까?"

"제가 무한결투장에 가본 적이 없어 펫 대회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리핀으로는 힘들 듯싶습니다."

그리핀보다 전투력에서 앞서는 몬스터는 많다.

르망의 머릿속에 지금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열 종류가 넘었다.

"길들인다는 전제가 깔려야겠지만, 샌드웜이나 드레이크만 해도 그리핀보다는 압도적으로 강합니다."

"쳇, 역시 오식이로는 무리군."

철두의 안색을 슬쩍 살핀 르망이 조심스레 권유했다.

"저, 펫 대회에 대해 아는 사람에게 조언을 구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조언?"

"못해도 저번 대회의 우승 펫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알아야 기준점이 되지 않겠습니까?"

"오!"

일리 있는 말이다.

마법사는 그 자체로 몬스터 탐지기와 같은 역할을 하기에 데려온 건데, 르망은 참모 역할도 톡톡히 했다.

"좋은 의견이군."

"아는 히어로가 있습니까?"

"있지."

철두는 당장 두 사람이 떠올랐다.

둘 다 볼일이 있다.

좌표석도 두 개가 있고 말이다.

철두는 고민하다가 부하들을 보고 물었다.

"좋아. 요정하고 난쟁이 중에 골라봐."

"오! 전 요정이요."

"음, 난쟁이라면 드워프인가요? 그쪽이 더 끌리는데요."

"오, 그럼 나도! 드워프 하면 대장기술 아닙니까? 무기 맞추러 갑시다!"

두 사람의 열렬한 의견에 행선지가 정해졌다.

"좋다!"

곧장 이동마법진으로 향한 철두는 드워프 에르미스가 준 좌표석을 꺼냈다.

파팟.

철두는 곧장 이동마법진 위로 올라갔다.

아이언헤드성 - 5주화

지하수련장 - 6주화

N6140 - 0주화

N3650 - 670주화

N5290 - 369주화

M44 - 1020주화

거리가 상당한지 금액이 꽤 나간다.

"다녀오지."

"넵."

파팟.

철두의 주화 주머니에서 1020의 숫자가 차감되자마자 순식간에 주변 시야가 바뀌었다.

포탈을 통한 차원 이동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포탈을 통한 이동이 우주에 처박혔다가 쑥 하고 다시 중력에 끌어당겨지는 느낌이라면, 이동마법진은 멀미와 비슷했다.

"후우."

철두가 주변을 둘러봤다.

뻥 뚫린 시야로 굽이치는 산맥의 능선들이 끝없이 보였다.

"정상이군."

주변이 훤히 보이는 산 정상 분지에 마련된 이동마법진이었다.

석조 제단처럼 보이는 곳에 손을 대 좌표석을 추출했다.

파팟.

최초 이동마법진의 활성화에 기여하지 않으면 개인이 추출할 수 있는 좌표석은 1개뿐.

파팟.

철두는 좌표석을 추출하자마자 다시 N6140으로 돌아갔고, 르망에게 넘겨주고는 다시 돌아왔다.

파팟.

"허, 이런 지형의 맵은 처음이군요."

함께 M44에 도착한 르망은 주변에 온통 높다란 산뿐인 지형에 감탄했다.

"다녀와라."

"넵."

르망이 좌표석을 추출해 다시 돌아가 최준섭에게 건넸고, 최준섭도 반복해, 오준환까지 이동을 마쳤다.

"여기 좌표석입니다."

오준환이 추출한 좌표석을 강철두에게 내밀었다.

좌표석을 사용했으나 한 바퀴 돌아 다시 하나가 주머니에 들어왔다. 오가는 게 번거로워서 그렇지, 좌표석 하나로 여러 일행을 옮기는 건 쉬웠다.

"우와, 여기 경치 죽이네요."

여긴 순수 경관만으로도 한 번은 방문할 가치가 있는 풍광이었다.

한국처럼 나무가 빽빽해 푸른 산과 계곡이 아니라, 그랜드 캐니언처럼 바위로 된 산과 골들이 굽이굽이 어우러져 있었다.

주변을 한 바퀴 휘 둘러본 최준섭이 물었다.

"와, 다 산이네요. 마을 같은 건 안 보이는데요?"

"그래 보이는군."

"예? 형님 길 아시는 거 아니세요?"

"나도 처음 온다."

"...."

철두의 당당함에 최준섭이 당황해 물었다.

"여, 여길 다 뒤져봐야 하는 건 아니죠?"

"용오름 계곡이라고 했다."

"용오름이요?"

그때까지도 주변을 살피던 오준환이 산 하나를 가리켰다.

"대장, 저기 보십쇼."

"오!"

"이야, 저거네."

"저곳인 것 같사옵니다."

오준환이 가리킨 산을 보곤 모두가 납득했다.

굽이치는 바위가 꼭 하늘을 오르는 용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으음, 근데 어떻게 가죠?"

높은 산들이 워낙 많은 지형이라 중간쯤으로 보여서 그렇지, 이동마법진이 자리한 산도 결코 낮은 편은 아니었다.

한참을 내려가 다시 몇 개의 산을 타야 용오름 골짜기에 도달할 듯싶었다.

"후후후."

파팟.

"끼아아아!"

소환된 오식이가 날개를 활짝 펼쳤다.

"오오! 역시 대장님."

"형님, 근데 여기에 다 탈 수 있습니까?"

최준섭의 물음은 합당한 것이다.

오식이의 안장은 잘해봐야 두 명이 타도록 설계되어 있으니까.

"선착순 한...."

"오르시지요. 영주님."

눈치 빠른 르망이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먼저 올라타 정중히 안장을 가리켰다.

"후후, 너흰 매달려 가자."

"예?"

"다리에 붙어라."

"넵."

철두가 오식이 등에 올라타고 고삐를 채자 오식이가 훌쩍 날아올랐다.

후우우웅.

양쪽 다리에 모래주머니처럼 인간을 매단 오식이가 평소보다 더 빠른 날갯짓으로 비행했다.

저 멀리서 보니 솟구치는 용처럼 보이던 지형도 가까이 다가가며 위치에 따라 모습이 조금씩 변했다.

능선처럼 뻗어있던 용의 다리 부분.

두 개의 거대한 산 중간의 골짜기에 드디어 인공적인 구조물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군."

협곡의 사이에 자리한 웅장한 성채도시가 보였다.

협곡의 사이를 앞뒤로 메워 쌓아 올린 성채는 산 중간에 끼인 탑처럼도 보였는데, 여러 개의 창문 외에 입구라고는 저 아래 있는 커다란 문뿐이었다.

후우우웅.

그리핀이 천천히 활공해 성문 앞으로 가 내려섰다.

"우와. 엄청 크네요."

최준섭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위에서 볼 때와는 또 다른 위압감이 전해졌다.

"꼭 아파트 같네요."

양쪽에 산이 자리하고 있어 성채 벽면이 사각이 아니라 역삼각형인 게 다를 뿐, 그 웅장한 구조나 여기저기 질서정연하게 나 있는 창문이 꼭 아파트를 보는 듯했다.

아파트보다도 더 높은 성채만큼이나 높다란 성문도 굳게 닫혀있었다.

"난쟁이들 사는 성에 왜 저리 문이 크냐?"

"하하하, 형님. 유우머가 아주 그냥 하하하."

"...?"

박수를 치고 좋아하던 최준섭이 철두의 진지한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르망이 옆에서 공손히 읍하며 대꾸했다.

"옛 이야기책에 의하면 드워프와 거인족이 서로 원수지고 싸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 그거랑 무슨 상관이냐?"

"그 책에 의하면 거인족을 무찔러 이긴 드워프 족이 그들의 성을 뺏어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고 하지요."

"무슨 책이냐?"

"동화책이옵니다."

"으음."

철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어 보이는 이야기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저런 거대한 성문을 만들 이유가 없으니까.

"어? 저기 구멍이 있는데요?"

"저게 진짜 문이군."

"가보죠."

일행이 거대 성문의 아래에 뚫린 구멍으로 향했다.

네모난 구멍은 사람 하나 지나가기 충분한 높이였는데, 그 앞에 무장한 드워프 기사가 창을 쥐고 서 있었다.

"멈추어라!"

"제가 나서겠사옵니다."

제국 출신의 르망이 나섰다.

타 왕국을 방문하는 일이니, 제국인 출신의 그가 나서는 게 낫다 싶어 앞으로 보냈다.

"나는 여기 계신 아이언헤드 영주님을 모시는 종으로서, 영지의 수석마법사를 맡고 있는 르망이라 하오."

"...."

드워프 기사는 눈알만 데굴 굴려 르망을 빤히 쳐다보았다. 말을 안 했다뿐이지 '어쩌라고?'가 귓가에 맴도는 눈빛이었다.

"하하하, 아직 아이언헤드의 명성이 이곳에는 닿지 않은 모양이구려. 앞으로 이 노바에 이름을 떨칠 이름이지. 똑똑히 기억해두시는 게 좋을 거요."

"...."

"그러니까. 지금은 한미하지만...."

"100주화."

"...? 입장료요?"

"두당."

"...."

르망은 드워프 기사를 보며 적잖이 당황했다.

이리 과묵한 녀석을 문지기로 세우다니.

드워프 왕국도 어지간히 융통성이 없군.

"너무 많소."

차앙.

창대를 힘줘 쥐는 것만으로도 위협이 되어 르망이 한 발짝 물러섰다.

"허업."

뒷걸음질 치던 그의 등이 철두에게 닿았다.

묵짐함에 볼이 발그레해졌다.

"그냥 줘라."

"하, 하지만 너무 많습니다."

그때 무뚝뚝하던 드워프 기사가 피식 웃었다.

"시골 촌뜨기인 모양이군. 자이언트 포지는 그 자체로 문화 유적이자 역사 그 자체. 100주화마저 아깝다는 방문자는 받지 않는다."

"여기 있다."

철두가 주화를 꺼내 건네주었다.

400주화를 받은 드워프 기사가 창을 비껴 들었다.

"자이언트 포지에 온 것을 환영한다. 방문자들이여!"

"후후, 가자."

철두가 앞서 걸었다.

뒤따르는 르망이 비장한 목소리로 용서를 구했다.

"소인의 경솔함으로 영주님의 명예에 누를 끼쳤으니 죽어도 할 말이 없사옵니다."

철두가 르망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아끼면 좋은 거지."

"허어억! 이리 자비로우시니. 이 르망, 영주님의 은혜에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흐윽."

르망과 철두를 보며 한 발짝 떨어져서 뒤따르던 최준섭이 오준환에게 귓속말했다.

"저러다 형님 헐겠는데?"

"그러게요. 아부가 심하긴 하네."

"어휴, 왜 저러는지."

"...최 대장도 만만찮은데요?"

"뭐? 내가 뭐?"

"아니, 영주님이나 대장님으로 불러도 되는데 굳이 형님형님 하면서 꼬리 살랑살랑 흔들잖아요."

"허! 준환이 그렇게 안 봤는데."

최준섭이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피식 웃었다.

"내가 영주님하고 호형호제하는 게 부럽냐?"

"...12살이나 많은 양반이 체통도 없소?"

"하하하, 의형제 맺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 나보다 세면 형이지."

"...형 잘 둬서 좋겠수."

"하하하, 부러워하긴."

"어휴."

오준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괜히 더 말을 섞기 싫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동화책 이야기가 사실인지, 성안의 건물들도 모두 큼직큼직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하늘 대신 높다란 천장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 정말 아파트 같이 지었네...."

"허, 그럼 여기가 1층인 건가?"

"그렇겠죠."

"근데 우리 어디로 가지?"

"영주님이 알지."

강철두가 뒤로 돌아보며 말했다.

"에르미스를 찾으러 가면 된다."

"오! 그분이 미궁에서 만났다는 히어로군요. 어디로 가면 되죠?"

"그건 나도 모르지."

"...."

철두의 당당함에 잠깐 멈칫했으나, 찾는 게 그리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히어로라면 일단 이 왕국에서도 꽤 높은 위치에 있는 자일 테니까.

"모르면 물어보면 된다."

철두가 지나가는 행인을 불렀다.

"이봐."

"...무슨 일이슈?"

"에르미스를 알고 있나?"

"그게 누구요?"

"드워프다. 히어로지."

"...댁은 내가 드워프로 보이시오?"

"...인간으로 보이는군."

"나도 방문객이오. 드워프를 찾는 거면 드워프에게 물으시오."

"...."

철두에게 붙잡혔던 상인 차림의 사내가 옷을 한번 털고는 다시 제 갈 길을 갔다.

그제야 성을 오가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드워프는 3분의 1도 되지 않고, 죄다 이종족이었다.

216화 모솔

철두가 민망해하지 않도록 르망이 눈치껏 나섰다.

"군주의 실수는 신하의 무능이오니, 저를 벌하여 주시옵소서."

"후후, 됐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적당한 식당을 찾아 메뉴를 주문했다.

철두는 몸이 작아진 만큼 적게 먹는 게 아니라, 전보다 배는 더 먹었다.

몸을 다시 키우려면 많이 먹어야 했다.

"어우, 형님 이거 좀 더 시켜도 됩니까?"

"내 것도 시켜라."

덩달아 허겁지겁 음식을 취하던 최준섭이 어느 정도 허기가 가시자 르망을 보며 물었다.

"근데, 수석마법사님."

"어휴, 유격대장님. 그저 마법사 르망이라 불러주십시오."

"하하, 어찌 그럽니까? 마법사 수장이신데."

"허허허! 말씀하십시오."

"드워프 왕국이 그리 폐쇄적이지 않네요?"

"왜 그리 생각하셨습니까?"

"어.... 드워프를 처음 보니까요?"

"하하하."

르망이 웃으며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드워프 왕국은 폐쇄적이지 않습니다. 외려 개방적이에요. 다만 외부활동이 적을 뿐이지요."

"외부활동이 적어요?"

"예에. 다들 이리 찾아오는데, 드워프들이 굳이 외부로 나다닐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

드워프 수도의 성은 그야말로 여러 외계종들이 뒤섞인 교류의 장이다.

"드워프제 무기는 그 자체로 명품이니, 그것을 얻기 위한 여러 왕국, 종족들이 모여들어 작은 노바와 같지요."

무기를 얻기 위해 어디 귀족들이나 전사들만 오갈까.

외려 무기중개상이 더 많은데, 그들이 빈손으로 올 리 만무하다. 여러 지역의 특산물들이 이곳 자이언트 포지로 몰려드니 시장은 그야말로 지역 산물의 장이었다.

"자이언트 포지야말로 있을 건 다 있는 시장이지요."

"수석마법사님은 모르시는 게 없군요. 꼭 먼저 와보신 것 같습니다."

"하하, 다 책에서 읽은 겁니다. 실제로 방문하는 건 저도 처음인지라 신기하고 설레는군요."

그때 다시 추가로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말없이 식사에 집중했다.

"우적우적, 왜 다들 안 먹냐?"

"하하, 저는 배부릅니다."

"저도요."

"많이 먹어야 몸이 커진다."

몸이 커야 힘도 더 세지고 말이다.

철두의 지론에 오준환이 고개를 끄덕이곤 물었다.

"그런데 단서가 에르미스라는 이름이랑 히어로라는 게 전부입니까?"

"음, 신분증이라고 하나 주긴 했다."

철두가 광석을 꺼냈다.

단단해 보이는 광석의 중앙에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오, 이게 신분증이면 의외로 찾기 쉬울지도 모르겠군요."

"후후, 일단 이 녀석을 만나서 무기제작을 의뢰해놓고 성을 구경하도록 하지."

르망은 신분증을 유심히 보더니 마법사다운 호기심을 내비쳤다.

"이건 무슨 광물일까요? 일반적인 철은 아닌 듯한데요."

"만나면 물어봐라."

"그래야겠습니다. 이 드워프와는 꽤 친한 사이신가 봅니다."

이렇게 신분증을 내맡기고 찾아오라 할 정도면 친한 사이가 아니겠는가?

"후후, 맞다."

철두의 긍정에 르망은 이것을 기회 삼아 드워프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채우고자 욕망했다.

그런데 갑자기 옆 테이블에 있던 인간 남자가 광석을 보곤 기함했다.

"어엇? 그것은 드워프 귀족의 신분패가 아니오?"

"음? 이게 뭔지 아나?"

"알다마다요! 드워프 왕국의 여섯뿐인 귀족 가문의 신분패가 아니오?"

"오, 귀족."

"허어! 따로는 드워프의 보은패로도 불리오. 분명 그 패를 주고 뭔가를 보상으로 준다고 하지 않더이까?"

"내게 꼭 맞는 무기를 만들어준다더군."

"이야! 드워프 귀족가에서 만들어주는 무기라.... 천하의 명품이겠구려."

남자는 부러움이 가득한 얼굴로 철두를 보았다.

"후후, 그럼 이게 어느 가문의 것인지도 아나?"

"잠깐 줘보슈."

광석을 건네받은 남자가 문자를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대꾸했다.

"신삼개 가문의 보은패군요."

"고맙군. 드워프 문자를 읽을 줄 아나?"

"허허, 상인이라 그저 안목이 뛰어날 뿐입지요."

안목이나 감정 탐색 종류의 스킬 레벨이 높으면 대상에서 좀 더 많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 생각을 못 했군."

탐색 스킬이라면 철두도 가지고 있다.

정보의 단서가 적을수록 마력이 많이 소모되지만, 철두의 마력량을 생각하면 어느 가문의 것인지 정도야 알아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하하, 이참에 통성명이나 하는 게 어떻습니까?"

"후후, 좋다. 이리 와서 앉아라. 나는 강철두다."

"으음? 스트롱아이언헤드? 그럼 요즘 시끄러운 아이언헤드령의 영주 되시오?"

"오, 날 알고 있나?"

"허어, 어찌 모를까? 노바 정세에 관심 있는 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 아니오?"

"후후후."

"하하하, 아이언헤드의 명성은 이미 높은바, 정보에 빠른 이들은 모두가 알고 있는 이름이오."

철두가 으쓱해하자 덩달아 오준환과 최준섭도 콧대가 높아졌다. 반면 르망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르망은 상인을 조금 경계하며 물었다.

"그쪽은 성함이 어찌 되시는지요?"

"이런, 하하. 내 결례했소. 나는 모솔이라는 작은 상회를 운영하는 이오."

"오오! 모솔의 상단주님 되십니까? 이렇게 우연한 자리에서 제국의 백작을 뵙는군요."

"허허허."

르망의 말에 사내가 그저 웃었다.

그쯤 되자 이 자리가 꼭 우연한 것이 아님을 모두 눈치챌 수 있었다. 최준섭과 오준환이 조금 긴장하여 주변을 둘러보는데, 철두가 웃었다.

"오호! 제국 백작인가?"

"그렇네, 모솔 가문의 드라운이오."

"반갑다. 후후."

"...하하, 결례를 했소이다."

"뭐가?"

"...?"

철두의 당당한 순진무구함에 드라운이 멈칫했고, 르망이 조용히 귓속말을 전했다.

"모솔 상단은 이름난 거상입니다. 모솔 백작령도 결코 나트롱 백작령에 뒤지지 않는 거대 가문이니, 엄청난 거물입지요. 그런 자와 우연히 이런 식당에서 마주칠 리가 없습니다. 이건 분명 목적이 있어서 성사된 만남이옵니다."

"오."

철두가 다시 드라운 모솔 백작을 보자 그가 겸연쩍게 웃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네. 내 근래에 고민하던 일이 있던 와중 자이언트 포지에 볼일이 있어 들른 것은 사실이지."

그가 주변을 둘러보며 으쓱했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아이언헤드 영주가 자이언트 포지에 방문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지. 이런 게 인연이 아니겠나?"

"후후, 좋아. 용건이 뭔가?"

"직설적이구만. 좋네. 말했다시피 내 근래에 고심하던 일이 있네."

"그래서 그 일이 뭔가?"

"맡아 줄 텐가?"

"아니."

"...."

철두의 즉답에 모솔 백작이 계속 유지하던 포커페이스가 깨졌다.

"들어는 볼 텐가?"

"들어줄 수야 있지."

"하지만 들어주면 맡아야 하네."

"그럼 싫다."

"...이유라도 있는가?"

"난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은 질색이다."

"허허, 그럼 이건 어떤가?"

모솔 백작이 아공간 인벤토리를 열어 궤짝을 하나 꺼냈는데, 새의 둥지처럼 지푸라기가 감싼 그 궤짝 안에 알이 하나 들어 있었다.

"비룡의 알일세."

"오!"

역시 상인이라 그런지 귀한 걸 가지고 있다.

"아이언헤드령은 본디 용병대에서 출발했다고 알고 있네."

"자세히 알아봤군."

"내 일을 맡길 후보 중 하나인데 자세히 알아볼 수밖에."

드라운 모솔 백작은 이제 의도를 갖고 철두를 만나러 왔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용병대에 정식으로 의뢰하겠네. 이것은 착수금일세."

"...."

착수금으로 비룡의 알이다.

최준섭과 오준환은 갑작스럽게 진전되는 상황에 침을 꿀꺽 삼켰다.

르망은 굳었던 얼굴이 더욱 긴장해 허옇게 변해 있었다.

착수금이 큰 만큼 위험한 의뢰일 터.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싫다."

"...."

철두의 즉답에 브라운 모솔 백작이 진심으로 놀랐다.

"자네는 비룡의 알이 욕심나지 않는가?"

"욕심나지."

그리핀보다 더 빠른 탈것이다.

적어도 먼 거리를 빠르게 이동하는 데 있어 비룡보다 나은 것은 없다.

"헌데 어째서 바로 거절하는 겐가?"

"바쁘다."

"...."

단순하지만 가장 명쾌한 대답이다.

시간이 없어 못 맡는다는데 어찌 다른 말이 필요할까?

한참이나 철두의 눈을 빤히 보던 모솔 백작이 허허롭게 웃었다.

"허허, 알겠네. 결례했군."

"후후, 아니다."

"그럼 무운을 빌겠네."

"그대도 하려는 일이 잘되길 바란다."

"허허허."

중년의 사내. 모솔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식당의 이곳저곳에 앉아 식사를 즐기던 손님 중 절반이 함께 일어나 떠났다.

"와, 여기 있던 사람 거의가 모솔 백작의 사람이었네요."

"쉿, 아직 더 남아있을지도 모릅니다."

"아! 그러네요."

르망의 경고에 최준섭이 아차했고, 철두가 웃었다.

"후후, 더 있으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이미 의뢰를 거절한 마당에 더 마주칠 일도 없다.

조심할 이유도 없고, 상대가 적대하고자 마음먹으면 그대로 돌려주면 된다.

"헌데 어찌 거절하셨습니까?"

"같이 들었잖아. 나 바쁘다."

"예? 정말 그 이유입니까?"

"당연한 것 아니냐? 펫 대회 나갈 몬스터 사냥하러 갈 시간도 없는데, 의뢰는 무슨."

비룡이 탐난다 하여도 고작 탈것 하나 때문에 영약을 포기할 수는 없다.

영약은 그 자체로 소드마스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

지금 아이언헤드성에서 가장 시급하며 귀한 물건이다.

애당초 자이언트 포지에 온 것도 에르미스에게 조언을 구하기 위함이 아닌가?

겸사겸사 온 김에 그가 약속한 무기도 받을 셈이고 말이다.

"다 먹었으면 가자."

"네."

일행이 식당을 나서자, 근처 테이블에서 식사하던 자들이 일어서 빠르게 거리로 나섰다.

번화한 거리를 부지런히 걸어 3층 건물 앞에 멈춰섰다.

[모솔 종합 상회 지부]

문지기로 있던 날카로운 기도의 사내가 저지했다가 구면인 것을 보곤 비켜섰다.

"닉이군. 올라가라. 기다리고 계신다."

"수고해."

닉은 건물의 3층에 도착하자 곧장 무릎을 꿇고는 상단주에게 인사했다.

"각하를 뵙습니다."

"그래, 무슨 연유더냐?"

"펫 대회라 하였습니다."

"으음, 펫 대회라...."

드라운 백작이 의자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이번 펫 대회 상품이 무엇이냐?"

"백년하수오입니다."

"영약이군."

신생 영지 아이언헤드령에서 탐낼 만한 물건이다.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았다.

톡, 톡.

드라운 모솔 백작이 피식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제격인데 말이야."

의뢰를 맡아줄 여러 후보가 있지만, 아이언헤드만큼 적임자가 없다.

말은 명성이 널리 퍼졌다고 했지만, 강철두의 실력은 아직까지는 관계된 몇몇 이들만 아는 정보.

특히나 아이언헤드가 아미르 왕국의 소드마스터 셋을 참살한 것은 정말 소수만 아는 최신정보다.

다른 후보들을 찬찬히 떠올려 봤으나, 강철두의 얼굴만 외려 또렷해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밖에 없다.

"흐음."

일을 맡기려면 상대가 원하는 걸 줘야겠지.

"상회에 영약이 몇이더냐?"

"셋이옵니다."

톡, 톡.

하나를 포기하게 하여야 하니....

"둘을 가져와라."

"예에, 각하."

닉이 즉시 지부를 떠나, 상회의 본단 귀물 창고가 위치한 모솔 백작령으로 떠났다.

217화 성물

자이언트 포지는 드워프 왕국의 수도이자, 층계로 나뉘어진 거대한 성이었다.

1층은 상업지구, 2층은 대장간지구, 3층은 드워프 거주지, 4층은 귀족 거주지, 5층이 왕성이다.

자이언트 포지 1층은 높은 천장을 가지고 있는 거대한 동굴에 마을이 지어진 모습이었다.

3층 건물도 천장에 닿지 않을 정도로 층계가 높았는데, 유일하게 천장과 바닥이 이어진 건물이 있었으니 바로 중앙 탑이다.

"저기가 2층으로 올라가는 관문입니다."

"관문? 또 돈을 내나?"

"당연합지요."

작은 체구의 드워프가 히죽 웃었다.

어딜 가나 큰 도시엔 밝은 아름다움과 음습한 어둠이 함께하기 마련이다.

자이언트 포지의 최하층은 주로 드워프 상인들이나 하층민들이 거주하는 구역으로, 이들의 주 수입은 방문객들을 상대로 장사하거나 호객하는 일이다.

상인들은 장사를 하고,

눈앞의 드워프 꼬마처럼 고아들은 호객을 한다.

"저만 믿고 따라오십쇼."

"2층 입장료는 얼만가?"

"두당 200주화입죠."

"으음, 800인가."

"아니죠. 1000입니다요."

"어째서?"

"제 것도 내어주시면 성심껏 안내하겠습니다."

"...."

"2층은 장인들의 작업공간입죠. 제가 실력 좋은 장인을 잘 알고 있으니 만족하실 겁니다요."

르망이 드워프 꼬마를 노려봤으나, 철두는 기껍게 웃었다.

"재밌는 놈이군."

"헤헤, 감사합니다요."

"재밌는 곳이기도 하고."

"자이언트 포지가 재밌긴 하죠."

"맞아. 내 친구가 함께 왔다면 아주 좋아했겠어."

김진태와 함께 왔으면 층별로 나눠 입장료를 받는 세금 정책에 감탄을 금치 못했으리라. 아이언헤드에 당장 2층을 만들자 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실없는 상상에 실실 웃는데, 르망이 조언했다.

"영주님. 이 꼬마는 여기 두고 가시지요."

"헛! 왜요? 2층엔 저 같은 안내꾼이 없어요. 단골가게가 없는 외지인들은 호구 맞기 딱 좋다구요."

"네놈부터 호구치려는구나. 보나 마나 소개비를 챙겨주는 가게로 안내하려는 거겠지."

"헛, 하지만 가장 실력이 좋으니 소개비를 내어도 이득이에요."

"그렇게 실력이 좋으면 소개비를 줄 정도로 호객도 하지 않는단다."

"헙."

"그리고 애당초 우리의 목적지는 2층이 아니란다."

꼬마 드워프 길잡이의 역할은 사실 자이언트 포지의 구조와 역사 등의 자잘한 상식을 읊은 것에서 효용 가치를 다했다.

다른 여타의 방문객처럼 드워프 장인의 무기를 사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더 이상의 안내는 사실상 필요 없다.

"앗, 3층부터는 외지인들이 못 가요."

"후후, 꼬마. 수고했다."

짤랑.

철두는 200주화를 꺼내주었다.

본래 길 안내의 대가로 줄 금액의 20배였다.

"헙,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요."

"그래, 고생했다."

일행은 둥근 탑처럼 생긴 관문 앞까지 걸어갔는데, 꼬마가 떠나지 않고 따라왔다.

"음? 안 가냐?"

"이건 너무 많아요. 돌려드릴게요."

"음?"

철두는 깜짝 놀랐고, 여태 가자미눈으로 꼬마를 보던 르망도 놀랐다.

"어째서?"

"전 계약을 위반할 수 없어요."

"...."

"길 안내 약속도 계약이니 지켜야죠."

"허, 그게 이 돈보다 중요하나?"

"당연하죠. 정직하고 고귀한 드워프만이 위대해질 자격이 있거든요."

"...."

꼬마는 굳이 첨언했다.

"진정한 장인이 되고 싶은 드워프는 절대 거짓말하지 않아요."

"음, 알겠다. 너는 이름이 뭐냐?"

"로퍼라고 해요."

"좋아. 로퍼. 기억하지."

"네?"

"나중에 네가 위대한 드워프가 되면 네게 내 무기 제작을 맡기마."

"...아저씨가 누군데요?"

네가 뭔데 나한테 맡기냐 마냐 하는 듯한 도발적인 질문에 철두가 씩 웃었다.

"위대한 전사, 강철두다."

"위대한...."

로퍼를 뒤로하고 일행이 중앙 탑으로 향했다.

입구는 딱 하나. 그 앞을 지키고 선 드워프 문지기가 손을 내밀었다.

"내려가시오? 올라가시오?"

"...밑에도 층이 있나?"

"아래는 위대한 망치 묠니르가 있소."

"...망치?"

"한번 구경해보시오. 전설의 성물을 대놓고 구경할 수 있는 것은 노바에서도 흔치 않은 경험이니."

고작 망치 따위를 전시해둔 걸 뭐 그리 자랑스레 이야기하나 싶으면서도, 철두는 왠지 모를 두근거림을 느꼈다.

"좋아. 아래에 갔다 가보지."

"1층으로 돌아오는 건 공짜요. 하지만 다시 2층으로 가려면 200주화를 내시오."

관람료로 800주화다.

돈을 지불하고 문지기를 지나쳐 입구를 통과했다.

안은 탑의 계단처럼 나선형의 계단이 나 있었는데, 위로 가는 길과 아래로 가는 길의 앞에 또다시 문지기가 있었다.

"들어가시오."

문지기를 지나 지하로 가는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원형 탑의 규모가 상당하다 보니 계단도 그만큼 넓어, 어깨를 나란히 마주한 사람 다섯이 지나가도 될 듯했다.

헌데 계단이 세 칸마다 낡은 돌로 놓여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던 르망이 감탄했다.

"이건 큰 계단에 작은 돌을 쌓아 증축한 것 같군요. 이 계단의 너비와 높이를 생각하면 정말 거인들의 성이었던 모양입니다."

비교적 최근에 놓인 듯한 잘 깎아 만든 돌을 치워보면, 계단은 본디 네 칸이 한 칸으로 기능했을 터다. 그 정도 보폭이면 정말 거인은 되어야 할 터.

"키가 10미터는 넘겠군."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거인의 키는 7~12미터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거인이 없나?"

"거인족의 잔재는 있습니다. 허나 전부 싸이클롭스나 오우거 같은 몬스터종이지요."

"흐음."

"사람으로 취급받는 거인종은 없습니다."

요정 인간, 드워프, 렙틸족 등 여러 종족이 뒤섞여있는 이곳 노바이건만 거인족은 없다.

여기저기 기록이나 유적지 같은 것만 남아있을 뿐.

계단은 일정 간격으로 횃불 대신 빛을 내는 돌이 박혀있어 시야에 어려움은 없었다. 그렇다고 그리 밝은 것도 아니라, 지하 특유의 음침한 기운이 감돌았다.

나선형의 계단을 한참 내려가자 둥근 모양의 공당이 나왔는데, 지하층은 1층만큼 넓지는 않았다.

고작해야 축구장 1개 정도.

내려온 깊이만큼이나 천장이 높았는데, 그 천장에도 빛을 내는 광석이 드문드문 박혀있어, 어지간한 시야는 확보가 되었다.

크기에서 차이가 나서 그렇지 꼭 아이언헤드 성의 지하수련장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은 모두 지하 공동의 중앙에 몰려 있었다.

"우와, 저게 성물이군."

"히야, 대단한데?"

"이이이이익! 안되는군."

성물이라 하기에 박물관처럼 전시되어있을 것이라 생각했건만, 묠니르는 그저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다.

"와, 저거 누가 훔쳐가면 어쩌려고 저렇게 둔대요?"

"저 사람은 아예 만져보네."

최준섭과 오준환이 신기하게 묠니르를 보았다.

'만지지 마시오.' '눈으로만 구경하세요.'에 익숙한 지구의 박물관 예절을 생각하면 상식적이지 않은 모습이었다.

"허허허! 묠니르를 보는 게 처음이신 모양이구려."

"그렇다."

"그럼 묠니르의 전설에 대해서도 모르시겠군?"

"전설?"

"그렇소."

"이야기해달라."

"허허허, 그럽시다."

묠니르는 산을 향해 내려치면 평지가 되어버릴 정도로 파괴력을 가진 무시무시한 무기다.

성물이라 불리는 것들은 하나같이 어마한 능력을 담고 있어, 함부로 휘둘렀다가는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힐 위험이 있었다.

해서 성물은 주인을 가려 섬기니, 위대한 자만이 묠니르를 들어 올릴 수가 있다.

"...해서 저리 사람들이 도전하는 거라오. 뽑기만 하면 성물의 주인이 될 수 있으니 남는 장사가 아니오? 하하하."

"호오."

철두가 턱을 쓰다듬었다.

아까 꼬마 드워프 로퍼가 말한 '위대한'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누가 저기 둔 건가?"

"하하, 누구긴 누구요. 옛 거인족의 왕이지."

거인족의 왕이라.

"본디 여기 자이언트 포지는 높디높은 산이었는데, 거인족의 왕이 묠니르로 내려쳐 두 조각을 냈다는 전설이 있소."

"허, 그때 내려치고 버렸나?"

"그야 모르지. 그냥 전설이라오. 하하하."

철두는 망치를 보며 묘한 이끌림을 느꼈다.

"드워프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이유도 아마 저 성물 때문일 것이오."

"드워프들도 묠니르를 탐내나?"

"아니오. 천성이 만들기 좋아하는 그치들은 묠니르의 주인이 되기보다, 묠니르를 섬기며 그와 같은 무기를 만들고 싶어하지."

"괴상한 놈들이군."

"하하하하, 그 종족이 그렇다오. 위대한 장인이 되는 방법도 결국에는 성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느냐이니...."

드워프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물을 만들어 내는 것.

"아, 이야기 잘 들었다."

"허허, 아니오. 그쪽도 도전해보려 하시오?"

철두는 이미 쭉 늘어선 줄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후후후, 남자라면 당연한 것 아니냐?"

펀칭머신이 눈앞에 있으면 지나치지 못하기 마련인데, 누구도 들 수 없는 망치가 눈앞에 있는데 어찌 들어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보기엔 힘이 모자라서 못 드는 것이다."

철두의 말에 남자가 웃었다.

"힘으로 들 수 있는 물건이 아니오."

그랬다면 우락부락한 이들만 도전했겠으나, 줄지어 늘어선 사람들 중에는 늙은이도 있고, 아이도 있다.

모두가 본인은 '위대하다'고 생각하기에 혹시나 하는 기대로 도전해보는 이들.

"후후, 내가 못 들어 올린다면 힘이 모자라는 것뿐이다."

"허허허! 용쓰다 머리에 피가 쏠려 쓰러진 이들이 부지기수요. 조심하시오."

전설을 읊어준 남자의 걱정이 무색하게 철두의 자신감은 대단했다.

'나는 이미 위대한 전사다.'

한시도 부끄러워 본 적이 없다.

철두는 당당하게 차례를 기다려 묠니르 앞에 섰다.

"체험비 300주화요."

"...."

척척 입장료를 내던 철두도 묠니르 앞에서 손을 내미는 드워프를 보며 인상을 팍 찌푸렸다.

"고블린보다 더한 놈들이군."

"칭찬 고맙소."

"...여깄다."

돈에 미친놈들이 있다면 첫째가 고블린이고 둘째가 드워프이리라.

관광 체험비로 300주화를 건넨 철두가 묠니르 앞에 섰다.

"으음."

망치는 거인이 썼다고 알려진 만큼 커다랗다.

망치 머리가 어른 머리통 세 개를 이어붙인 듯 커다랗고, 그 손잡이도 롱소드보다 길다.

커다란 거인이 들었으면 한손망치 정도의 사이즈였을까?

고작 2미터가 넘는 키의 철두에게는 거대 망치다.

철두는 두 손으로 망치를 쥐었다.

"흡."

가볍게 힘을 줘 봤으나 꿈쩍도 하지 않는다.

묵직한 무게감에 철두가 속으로 깜짝 놀랐다.

지금의 철두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에이톤 트럭도 들어 올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있다.

헌데 고작 망치 따위에....

"흐어어어업!"

철두는 모든 힘을 다해 망치를 들었다.

이러다 똥을 지리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용을 쓰면서 모든 마력을 쏟아부었다.

<거인의 가호가 깃듭니다.>

그러자 상시 패시브 스킬인 거인의 가호가 발동해 철두를 보호했다.

<거인의 위상이 깃듭니다.>

마찬가지로 패시브 스킬인 파워업의 특성이 추가로 발현되었다.

그그그그.

망치가 움직인다.

"으어어어어!"

<성물이 대상을 확인합니다.>

<특성 '거인의 가호', '거인의 위상'이 특성 '타이탄의 후인'으로 변경되었습니다.>

후우웅.

거대망치가 철두의 손에 이끌려 번쩍 들어 올려졌다.

<묠니르가 사용자에게 귀속됩니다.>

218화 묠니르

<타이탄의 후인>

거인족의 수호자만이 가질 수 있는 영광스러운 칭호. 타이탄이 될 자질을 갖춘 자.

"오오오!"

언제나 그렇듯 노바의 정보는 본래 알았던 것처럼 뇌 속으로 자리잡힌다.

타이탄의 후인.

거인족의 가호와 위상, 두 개의 특성이 사라지고 얻은 특성답게 모든 것이 아우러져 있었다.

기본 패시브로 위기상황에서 발동되는 보호막을 가지며, 이제는 근력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신체 능력이 대폭 상승한다.

거기에 더해 마력을 소모하면 이를 더 극대화할 수 있으니, 상시로 파워업을 하면서, 유사시에 마력을 끌어 써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묠니르가 사용자에게 귀속됩니다.>

가볍다.

그렇게나 무거웠던 망치는 한손망치처럼 가볍게만 느껴졌다.

츠츠츳.

스파크를 튀기며 스스로 크기를 조절한 망치는 정말 한손망치처럼 작아졌다.

"후후후."

한 손으로 그것을 쥐고 붕붕 휘둘렀다.

무게감은 가볍지만, 무엇이든 깨트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든든한 무기를 얻었다.

"허억! 묘, 묠니르가 들리다니."

"위, 위대한 전사가 나타났다!"

주변에 몰린 관광객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떠들었다. 개중에는 사진기처럼 생긴 것을 든 이도 있었는데, 참새 부리를 가진 새 종류의 수인이었다.

"특종이야!"

파파팟.

사진기는 번쩍이는 빛을 여러 번 토해냈다. 그는 흥분된 얼굴로 철두에게 다가와 소리쳤다.

"이봐요! 나랑 인터뷰해줘요."

"신기하게 생긴 사람이군."

"하피족 처음 봐요?"

"처음 본다."

"호로로로, 우린 노바에서 가장 많은 발행 부수를 가진 신문사를 운영해요! 내게 묠니르의 주인을 인터뷰할 수 있는 영광을 줘요!"

반인반조의 하피족은 조잘조잘 빠르게 말을 쏟아냈는데, 그 모습이 삐약대는 종달새를 보는 듯했다.

"후후, 공짜로?"

"당신에게 우리 신문사의 신문을 공짜로 구독하게 해드릴게요!"

하피족의 말에 르망이 빠르게 달려와 속삭였다.

"받아들이시지요. 인터뷰 한 번에 하피 신문 구독이면 좋은 보상입니다."

"신문이?"

"귀족들만 받아볼 수 있는 고급 소식지입니다."

"오, 좋아. 가자고, 새 친구."

"효로로로, 감사합니다."

하피는 폴짝 뛰어 철두의 옆에 달라붙었다.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얼이 빠져 철두를 구경하기 바빴다.

"당신을 소개해줄 수 있나요?"

"강용철의 손자 강철두다."

"호로롤, 인사가 바바리안 같네요."

"바바리안이다."

"발할라 출신인가요?"

"발할라에서 태어났지만, 지구에서 자랐다. 나는 지구의 유일한 바바리안이다!"

"헙."

철두의 대답에 곁에 있던 최준섭과 오준환이 움찔했다.

"호로롱, 바바리안 종에서 성물의 주인이 나다니. 그야말로 특종이군요! 그것도 신행성 지구 출신이라니!"

하피는 뭐가 그리 좋은지 까르르 웃기 바빴다.

"호롤롤, 노바에서는 뭘 하고 있죠?"

"영주다."

"영주? 영지는 어디에 있나요?"

"N6140에 있다."

"어? 거긴 최근 핫한 아이언헤드가 자리 잡은 곳인데요."

"내가 거기 영주다."

"호롱!"

반인반조의 하피는 깜짝 놀라 날개를 퍼득였다.

"특종, 특종! 뻬에에에!"

제자리에서 번쩍번쩍 점프하며 날개를 퍼덕이는 게 굉장히 경박했다. 반대로 남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저리 기뻐하는 게 순수해 보이기도 했다.

"아이언헤드! 최근 아미르 왕국 삼검 나룬 백작을 참살한 게 사실인가요?"

"사실이다."

"베에에에! 특종!"

뭔 특종을 저리 좋아하는지, 방방 뛰는 하피족이었지만 인터뷰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비켜라!"

"물러서라!"

계단을 타고 다급하게 내려온 드워프 기사들이 주루룩 밀려 들어왔다.

그들의 뒤로 여러 명의 드워프들이 몰려왔는데, 대장장이로 보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몇몇 화려한 옷으로 치장한 이들도 있었다.

"저자인가?"

"묠니르의 선택을 받은 자가?"

기사들이 몰려오자 하피는 서둘러 말했다.

"베에에! 아이언헤드로 찾아갈게요! 단독 인터뷰! 단독 인터뷰해줘요!"

"알겠다. 신문 가져와라."

"호로로롱! 우리 신문은 한 달에 한 번! 꼭 가져다드릴게요! 베에에엥!"

"물러서라!"

하피족 기자는 드워프 기사들에게 떠밀려 멀어졌고, 철두와 일행은 어느새 오십은 넘어 보이는 기사들에게 둘러쌓였다.

파파파팟!

그 모습을 본 하피족 기자는 또다시 사진을 찍어대기 바빴다.

척척척!

창을 든 기사들은 철두를 포위했다기보다는, 누군가를 호위해서 온 것이었다. 중심에 자리한 드워프가 앞으로 나섰다.

그의 옆에서 날카로운 기세로 주변을 훑어보는 드워프 기사의 수준은 꽤 높아 보였다.

'왕국 삼검보다 위군.'

적어도 레벨 5 수준의 기사는 아니었다.

그보다 더 위의 경지가 있을까?

'있겠지.'

어렴풋이 느끼기에 제국의 공작인 굴단은 결코 레벨 5 따위로 생각되지 않았다. 그보다 더 높은 경지는 분명 있다.

지금 눈앞의 드워프를 모시는 두 명의 기사의 기세가 그러했다.

'강하다.'

기세만으로 철두는 긴장을 느꼈다.

저들이 적대하고자 하면 빠져나갈 수 있겠는가?

입구가 하나뿐인 이 지하 공간에서 말이다.

"국왕 전하시다! 예를 갖춰라!"

기사가 쩌렁쩌렁 소리 질렀으나 철두는 마주 보며 대꾸했다. 기세에서 밀린다고 지고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

"네 왕이지, 내 왕이 아니다."

"...."

두 사람의 눈싸움으로 주변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하하하하, 내 묠니르의 주인이 나타났다는 이야기에 결례했소! 제타 행성 출신의 드워프를 이끌고 있는 삼디다스요."

"강철두다!"

"내 성물의 주인이 된 그대를 연회에 초대하고 싶소."

"...."

철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드워프 기사들의 단단한 얼굴들이 보인다.

'거절하면 싸운다.'

싸움이 벌어지면 적어도 오준환, 최준섭, 그리고 르망은 죽는다. 철두야 여차저차 빠져나갈 수 있다손 치더라도, 부하들의 죽음은 확정적이다.

아니, 전력평가를 차지하고서라도 응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이번에는 성물을 훔쳐 가는 것도 아니고 정당하게 얻은 것이다.

"좋다."

"허허허! 호쾌하구만. 쿠찌 경이 안내해드리게나."

"예, 전하."

철두 일행이 기사들과 함께 우르르 몰려나가 입구로 가자, 통제가 풀린 관광객들이 조잘조잘 떠들어댔다.

"묠니르가 주인을 찾았어!"

"들었어? 바바리안이래."

"성물이 주인을 찾았어."

"미쳤어! 성물이 주인을 가리는 자리에 내가 있었다니!"

평생의 술안주 감이다.

그도 그럴 게 학자들이 연구를 통해 고대 기록에서 밝혀낸 성물의 존재는 일곱.

그중에서도 실체가 드러난 것은 단 셋.

파괴의 망치 묠니르.

필살의 창 궁니르.

부러지지 않는 성검 듀렌달.

세상에 존재를 드러낸 성물 중 주인을 섬기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듀렌달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두 번째 성물의 주인이 탄생한 것이니, 어찌 역사적인 순간이 아닐 수 있겠는가?

"맙소사! 그럼 제, 제국이 또...."

"어허, 입조심."

"정말 특종이군. 어서 알려야...."

"이미 촉새가 기사를 쓰러 갔어. 곧 다 알려지겠지."

"제국이 움직일까?"

"모르지 그건...."

노바의 전력을 평가할 때.

그 절반에 해당한다고 평해지는 제국.

그 제국의 최고 정점인 황제.

벌써 50년째 두문불출하는 그가 다시 대중 앞에 나설 것인지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황제.

아니, 듀렌달의 주인으로서.

동시대에 성물의 주인이 된 신출내기 바바리안을 어찌할 것인가?

*

"쩝쩝."

"후루루루룹."

"거, 소리 좀 내지 말고 잡수십쇼."

"후후후, 소리 따위를 신경 쓸 시간이 어디 있나? 몸을 키우려면 부지런히 먹어라!"

"후, 이 상황에 밥이 넘어가는 신경이 부럽습니다."

오준환이 푸념하며 고개를 돌리니 역시 잔뜩 굳은 얼굴의 르망이 접시를 깨작대고 있다.

"저희 좆된 거 맞죠?"

"으음, 상황의 주도권이 우리에게 있지 않은 건 확실하지요."

"어유, 호랑이 굴에 들어온 기분이네."

오준환은 한숨을 쉬며 무신경하게 식사에 열중하고 있는 강철두와 최준섭을 보았다.

아무리 산해진미가 차려졌다고 해도 지금 저게 넘어가나? 강철두야 그렇다 쳐도 최준섭은 어째 성격이 변한 것 같다.

본래도 낙천적인 양반이었지만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말이 좋아 별실이지, 우리 감금된 것 같은데요."

"후후, 상관없다. 지하보다야 훨씬 좋으니까."

지금 별실을 '경호' 중인 기사도 고작해야 열두 명뿐이다. 거기에 더해 철두도 경계해야 할 정도로 실력 좋던 기사 둘은 왕의 호위인지 항상 왕과 함께 다닌다.

그런고로 철두에게 있어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탈출할 수 있는 상황이다.

"걱정 마라. 드워프는 우릴 적대하지 않는다."

"대장이 어떻게 아시오?"

"감이다."

"...."

대꾸할 말이 궁색하긴 한데, 강철두는 나름 확신하고 있었다.

사람을 평가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철두는 그보다는 감을 따르는 편이었고, 여태 틀렸던 적도 별로 없었다.

틀려봐야 싸움밖에 더 나겠는가?

이기면 문제없는 일이다.

상대가 조금 껄끄럽게 강하니 작정하고 덤벼들면 문제가 되겠지만, 철두의 감은 저들에게서 호의를 읽어냈다.

"후후, 오는군."

저 멀리서도 존재감이 느껴지는 기사들과 오는 걸 보니 아마 왕이 행차하는 모양이다.

"하하하하, 어찌 음식은 입에 맞으신가?"

"후후, 잘 먹었다."

"하하하, 그래. 본 연회가 시작하기에 앞서 내 긴히 할 말이 있네."

철두의 감이 말하고 있다.

이 대화의 결과 여부에 따라 저들과 '껄끄러워'질지, 더욱더 '돈독해질'지가 결정될 터다.

"묠니르를 보여줄 수 있는가?"

"어려울 것 없지."

파팟.

철두는 인벤토리에서 즉시 묠니르를 소환해주었다.

"호오! 한번 살펴봐도 되겠는가?"

철두가 묠니르를 내밀어 건네주었다.

철두의 손을 떠나, 드워프 왕 삼디다스가 온전히 쥐자마자.

쿠우웅!

묠니르가 바닥에 떨어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

"허허허허!"

"후후."

철두가 묠니르를 다시 쥐곤 저글링 하듯 위아래로 던졌다 받았다.

척.

부러움이 가득한 삼디다스의 시선에 강철두는 묘한 승리감이 차올랐다.

"후훗, 용건을 말하라."

"좋네. 성물의 주인에게 내 부탁할 것이 있네."

"부탁?"

한층 더 정중해진 태도다.

삼디다스는 맹세의 서를 꺼내 들었다.

"이것이 뭔지 아는가?"

"알지. 맹세의 서가 아닌가?"

"맞네. 우리 드워프는 거짓말을 잘 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것은 확실해야 하는바."

나는 구라를 안 까지만 너는 못 믿겠다를 고급스럽게 포장한 삼디다스가 말했다.

"서에 맹세해줄 수 있겠나?"

"무엇을?"

"후일 내가 원하는 때에 딱 한 번. 묠니르를 내리쳐 주게."

"...?"

철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공짜가 아닐세."

"호오."

강철두의 눈이 반짝였다.

"무엇을 줄 수 있지?"

"무엇이 필요한가?"

철두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영약이 있나?"

"물론일세."

있단다.

철두는 내심 쾌재를 불렀으나, 더 부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개가 있지?"

"자네가 원하는 게 그저 초인 흉내나 내는 영약은 아닐 터."

100년 이상 된 영약이어야 진정한 초인의 신체를 얻을 수 있다.

"만드라고라 뿌리가 있네."

"겨우?"

"십년삼 셋도 주지."

철두는 곰곰이 생각했다.

설명을 들어보니, 만드라고라는 설삼에 버금가는 영약이고, 십년삼은 신체 재구성까지는 일으켜주지 않지만, 약한 검기를 얻을 수 있는 경지로 만들어준다 하였다.

옛날 상대했던 리에나 경 정도는 되는 모양.

'또 귀한 게 뭐가 있지?'

곰곰이 생각하던 철두는 미궁에서 만난 에르미스가 생색내듯 내건 보상을 떠올렸다.

"강화의 망치도 얹어 달라."

"...!"

국왕이 흠칫 놀랐다.

"...전사가 어찌 강화의 망치가 필요한가?"

"흠, 우리 영지에도 장인은 많다."

"...."

드워프 국왕은 고심하는 듯했으나 결국 응하고 말았다. 묠니르를 사용할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아직 그 가치를 잘 모르는 성물의 주인이다.

지금이 가장 쌀 때다.

"거래에 응하지."

철두도 히죽 웃으며 주먹을 내밀었다.

"굿 딜."

219화 파견 장인

"그럼 맹세를 하세."

"좋다!"

철두는 맹약의 서 앞에서 맹세했다.

"나는 삼디다스의 부탁이 있을 때 딱 한 번 묠니르를 써주겠다. 다만 대가로 받은 것 이상의 부탁을 할 수는 없다."

"...."

"너도 맹세해라."

드워프 국왕 삼디다스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채근하는 철두에게 대꾸하지 않고 함께 온 신하에게 명했다.

"만드라고라 두 뿌리 준비하게."

"헙, 왕국이 보유한 게 두 뿌리입니다."

"다 가져오라는 말일세."

영약은 귀하다.

그중에서도 소드마스터를 탄생시킬 수 있는 100년 이상급부터는 특별하다.

그런데 개중에서도 특별한 1000년 이상급의 영약은? 그야말로 나라의 보물이다.

소드마스터에도 급이 있고, 무엇으로 각성했느냐에 따라 경지의 차이가 나뉜다.

왕국의 입장에서 전략무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충성의 대가이기도 했다.

"기사단의 반발이 심할 것입니다."

"영약은 구하면 되네. 헌데 묠니르는...."

국왕도 속이 쓰리긴 매한가지다.

"후, 가져오게. 왕국의 미래를 걸어야 그에 걸맞은 부탁을 할 게 아닌가."

만드라고라 두 뿌리라면 정말 왕국의 미래를 걸었다 할 만했다.

"나 삼디다스는 맹세한다. 왕국의 국운이 걸린 일에 묠니르를 사용해주는 대가로 강철두에게 만드라고라 두 뿌리와 강화의 망치, 그리고 십년삼 셋을 준다."

"백년급은 없나?"

"...추가로 정령초 둘을 내어준다."

"...."

국왕 삼디다스는 싱글벙글 웃는 강철두를 보며 따귀를 한 대 치고 싶은 강한 욕망이 들었으나 애써 내리눌렀다.

"왕국 재산으로 있는 모든 영약일세. 정말 왕국의 미래를 걸었다는 이야기지."

"후후후, 알겠다. 받아들이지."

"후, 대가를 걸게. 무엇을 걸 텐가?"

"내 목숨을 내건다."

"좋네. 맹약은 체결되었네."

파파파팟.

맹세의 서가 빛나며 맹약이 맺어졌다.

잠시 뒤 왕국의 재무대신이 가져온 상자를 건넸다.

천년설삼에 버금가는 커다란 뿌리가 둘, 그리고 그보다 못하지만 신묘한 기운을 품은 잎이 둘, 인삼과 같은 실뿌리가 셋이었다.

거기에 더해 국왕이 자신의 인벤토리에서 대장간 망치를 하나 꺼내주었다.

<강화의 망치>

아이템의 능력치를 추가하거나 강화할 수 있다.

간략한 설명이지만, 철두는 망치를 쥐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내가 사용할 물건이 아니군.'

본디 아이템이라는 것이 사용법이 훅하고 떠올라야 하는데, 이것은 잡자마자 사용 불가능하다는 감각만이 가득 들었다.

파파팟.

철두가 물건을 모두 넘겨받으니 맹약의 서가 발동했다.

"나는 맹약을 지켰네."

"후후, 나도 지켜주지. 언제든 불러라."

"소식꾼을 하나 붙이겠네."

철두가 고개를 저었다.

"감시꾼이군. 거절하지."

"...이러긴가?"

"감시는 질색이다."

"감시보다는 상호 교류라고 해둡세."

"보내는 놈이 장인인가?"

"당연함세."

"그럼 내가 그놈을 좀 부려먹어도 되나?"

"아, 이를 말인가! 내 일러두겠네."

"그럼 내 구면인 드워프가 있으니 그자를 붙여줬으면 해."

"오! 잘되었군. 내 보내주지."

드워프 국왕 삼디다스가 냉큼 받았다.

"누군가? 구면인 자가?"

"에르미스다."

"어?"

삼디다스 국왕이 퍽 당황했다.

"다, 다른 이는 모르는가?"

"루이비숑이란 녀석도 안다."

"허윽."

하나는 왕국의 기사단원이요, 하나는 주술사였다.

에르미스는 기사일 뿐만 아니라, 그 지닌바 대장 기술도 뛰어난 명장이다.

루이비숑은 주술사이긴 하지만, 아이템에 '마법 부여'가 가능한 단계의 고위 주술사.

귀하기로만 따지면 후자가 더하다.

드워프 중엔 명장은 많으니까....

"에르미스를 데려가게...."

"후후, 좋다."

소식꾼이라고 하지만 언제든 부려먹을 수 있는 히어로급의 전력을 얻었다.

"에르미스를 통해 연락하지."

"언제쯤 부르게 될 것 같나?"

"...그건 알 수 없네. 당장 내일이 될 수도, 몇 년 뒤가 될 수도 있지."

"후후, 좋군."

빠르면 일을 빨리 매듭지으니 좋은 일이고, 느리면 그만큼 드워프를 '대여'하는 기간이 늘어나는 것이니 나쁠 게 없다.

지금 아이언헤드 성의 빈한한 전력을 생각하면 오히려 후자가 낫다.

"볼일은 끝났군. 이만 연회를 즐겨주게."

"후후, 알겠다."

국왕이 나서고 그의 호위기사 둘이 따라 나가자 굳었던 분위기가 풀어졌다.

그리고 철두 일행을 모셔둔 별궁을 지키던 기사들도 모조리 사라졌다.

대신 심부름할 드워프 시종 하나가 붙었을 따름이다.

"연회장으로 모시겠습니다."

"좋다. 가자."

"후우, 이제 좀 제대로 먹겠네요."

"일이 잘 마무리되어 다행입니다."

"형님, 형님. 저 그거 하나 주시는 거죠?"

"후후, 어림없다."

"아아닛! 형님과 호형호제하는 이 의제를 주시지 않으면 누굴 줍니까?"

최준섭이 애교 부렸으나 어쩔 수 없다.

"무기술 레벨이 4가 되는 놈부터 줄 거다."

"헙!"

"으음."

최준섭과 오준환의 눈빛이 변했다.

잠시 망각하고 있었지만, 이번 여정에 철두를 따라온 것은 수련을 위해서다.

"시간이 아깝습니다. 어디 공터라도 찾아가시지요."

"후후, 저녁 먹고 떠나자. 배는 채워야지."

"아까 드셨잖아요?"

"부족하다."

"...."

철두의 사이즈는 작아졌지만, 위장은 전보다 배는 더 커졌는지 음식이 끊이지 않고 들어갔다.

"아니다. 이참에 히어로 진급이나 해둬라."

아쉽게도 해가 저물어 있었다.

지금 무한결투장에 들어가면 일출과 함께 나오게 된다.

"여기서 말입니까?"

철두가 시종을 보며 물었다.

"저기 별실, 내일 아침까지 써도 되나?"

"물론입니다."

철두가 고갯짓하자 오준환과 최준섭이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갔다.

"내일 아침 뵙겠습니다."

"그래."

두 사람이 되돌아갔고, 철두와 르망 둘이서 드워프 시종을 따라 연회장으로 향했다.

"후후, 우리끼리 많이 먹자고."

"...예에. 하하."

이미 배가 찢어질 것 같지만, 르망의 사회생활 수치는 이미 소드마스터급.

입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말은 '예스'뿐이다.

연회장에 들어서자 생각보다 사람이 적었다. 무려 '성물의 주인'이 정해진 것을 축하하는 자리다.

어중이떠중이가 참여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대부분은 드워프였지만 개중에 인간이나 렙틸인 같은 이종족도 섞여 있었다.

낯익은 인간이 웃으며 다가왔다.

"하하하, 이거 하루도 지나지 않아 자이언트 포지에서 가장 유명하신 분이 되었군요."

"음? 너는 모쏠?"

"...모솔 백작입니다."

"아 그래, 모솔. 반갑군."

철두도 이제 빈말이라는 것을 자연스레 한다.

'나도 영주가 다됐군. 후후.'

이것이 어른의 화법인가?

철이 든 바바리안이 흡족해하는데 모솔 상단의 주인인 모솔 백작이 덩달아 웃었다.

"묠니르의 주인께 제가 드리고 싶은 작은 청이 있사옵니다."

"안 한다."

"제게 빙정이 한 개, 그리고 성수가 한 병 있습니다."

"그게 뭐냐?"

"둘 다 100년급의 영약이지요. 하나는 지독한 한기를 품고 있고, 하나는 성스러운 신성력을 품고 있습니다."

"...오."

철두의 눈에 맺힌 욕심을 읽어낸 모솔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다른 이들이라면 모를까, 아이언헤드 영주께는 아주 쉬운 일이옵니다."

"...."

"아직 묠니르의 주인이 정해졌다는 소식이 알려지지 않은 지금으로서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알려지면 상대가 내뺄 수도 있으니까요."

"뭐냐?"

"경쟁 상단과 작은 분쟁이 있었사온데, 결투 재판에서 대전사로 나서줄 것을 바랍니다."

"으음. 너는 전사가 없나?"

"상대 대전사를 이길 자는 없습니다. 거기에 더해 알려지지 않은 실력자면 더 금상첨화가 아니겠습니까?"

"으음."

무언가 더 있는 것 같은데.

철두가 턱을 쓰다듬을 때 르망이 나서서 날카롭게 물었다.

"우리 영주님이 얽히고설킨 봉신이 없는 것도 이유요?"

"하하, 아이언헤드 영주님은 참으로 훌륭한 참모를 데리고 다니시는군요."

적의 칭찬에, 눈을 부라리던 르망의 얼굴이 발그레 물들었다.

"맞습니다. 상대 대전사가 제국의 귀족인바. 제국과 척을 질 용기를 가진 자를 찾았습니다. 혹은...."

"이미 적이거나."

"그렇지요. 하하."

철두는 가만히 가늠했다.

신체 재구성을 위해 필요한 것은 100년급 이상의 영약.

지금 철두의 수중에 있는 것은 1000년급인 만드라고라 2개.

100년급인 정령초가 2개다.

'소드마스터 넷. 거기에 더해 둘을 더 추가하면.'

철두가 고민하는데 모솔이 끈덕지게 설득하고 나섰다.

"잘 아시겠지만 영약은 오롯이 미궁에서만 구할 수 있지요. 돈이 있다 하여도 쉽게 구할 수 없는 귀물이니, 기회가 오면 천금을 주고서라도 사야 합죠."

말인즉, 지금 기회를 잡으라는 거다.

일이 풀리려니 이렇게 술술 풀려 눈앞에 영물들이 굴러들어오고 있지만, 상대의 말이 맞다.

직접 구하려면 미궁에 도전할 수밖에 없는데, 보상 상자에서 꼭 귀물이 나오리란 법도 없다.

"좋다. 일시는?"

"나흘 뒤입니다."

"받아들이지."

"감사합니다."

모솔은 즉시 인벤토리에서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안에 든 것이 빙정입니다. 선수금이옵니다."

"...맹약의 서 안 하나?"

"묠니르의 주인을 믿지 않는다면 누굴 믿겠습니까?"

"좋다. 내 꼭 약속을 지키지."

"여기, 결투가 열리는 영지로 올 수 있는 좌표석입니다."

"알겠다. 나흘 뒤 그곳으로 가지."

"언제 오셔도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마법진에 늘 시종을 둘 터이니 편할 때 오십시오."

"알겠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모솔은 후련한 얼굴로 떠났다.

드디어 차려진 음식을 먹으려는 철두의 앞에, 이번에는 기회만 노리고 있던 드워프들이 차례로 들이닥쳤다.

"성물 묠니르에게 선택받은 자여. 축하드립니다."

"고맙소."

"나는 드워프 왕국의 여섯 가문 중 하나인 헌델 가문의 가주. 까르티앙이오."

"강철두다."

철두의 얼굴을 보려는 것인지, 아니면 묠니르의 주인이 된 자와 말을 섞는 것이 목적인지, 난쟁이들은 입에 음식을 집어넣을 틈도 주지 않고 차례로 등장했다.

'계략인가?'

수다로 굶겨 죽이려는 적의 계략인가?

바바리안의 인내심을 시험하기 위함인가?

"이봐! 아이언헤드!"

"음?"

줄줄이 들이닥치던 드워프 중에 아는 이가 불쑥 따져 물었다.

"에르미스?"

"쳇, 잘도 기억하는군. 상자에서 나온 게 뭔가?"

"음?"

"뒤통수 깐 거야 그러려니 해도, 내 궁금해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내가 언제 뒤통수를 깠나?"

"1500점 준다고 해놓고 안 줬잖아!"

"거래다. 안 줬으니 망치도 안 받으면 되는 것 아닌가?"

"끄응."

맞는 말이다.

드워프 에르미스는 두 가지를 제안했었다.

목숨을 구해준 대가로는 무기 제작을.

1500점의 양도 대가로는 강화의 망치를.

그냥 두 번째 거래가 성립되지 않았을 뿐이다.

"어, 어쨌든. 그래서 나온 물건이 대체 뭔가?"

"천년설삼이다."

"...으음. 귀한 물건이긴 하지만...."

천년급 영약이다.

귀하디 귀한 물건이긴 하지만 황금 상자에서 나온 물건치고는 그저 그렇다.

상중하 중에 중 정도?

천년영약이야 왕국에도 둘이나 있으니까.

그보다 진정한 보물은 성물 묠니르.

"묠니르 좀 보여주게."

"후후, 성으로 가면 많이 보여주마."

"...? 무슨 성?"

"연락책을 하나 데려가라길래 널 달라 했다."

"으어음?"

에르미스의 고개가 옆으로 홱 돌아갔다.

"아버지!"

신삼개 가문의 가주이자, 에르미스의 아버지인 늙은 드워프가 허허롭게 웃었다.

"허허허, 그리되었다."

"...아니, 그걸 제게 물어보지도 않으시고."

"국왕의 명령이시다."

"...."

까라면 까긴 해야 하는데.

에르미스는 불퉁한 얼굴로 히죽 웃는 강철두를 보았다.

어째 이 인간이랑... 아니, 이 바바리안이랑 계속 엮이지?

220화 제국이 되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