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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 170-180

170화 인류채널

인류 최강은 누구인가?

생존과 경쟁은 사람의 본능이고, 경쟁심리에서 비롯된 비교는 비단 본인에게만 적용하지 않았다.

타인을 두고 누가 더 센가? 누가 더 훌륭한가? 여러 주제, 기준을 두고 비교하며 토론하는 것은 하나의 놀이이자 문화다.

비교할 거리만 있으면 줄 세우는 게 당연한 현대문명에서, 노바의 존재와 초인의 영역에 든 노비스의 강함은 당연히 그 대상이 되었다.

각 정부에서 쉬쉬하던 노바의 정보가 민간에 공개된 지 이제 불과 몇 달이 지났을 뿐이다.

놀랍게도 노바가 실존하지 않으며, 종말을 들먹이는 정부의 음모론이라고 치부하는 자들도 여전히 존재했다.

허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혹시 하는 위기감 정도는 느끼고 있었고, 고블린을 직접 잡거나 건너건너 지인이 노비스가 되어 노바의 정보를 접한 이들은 좀 더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노바에 대한 인류의 관심이 얼마나 큰가 하면, 이를 주제로 올라오는 유튜브 영상은 기본 수십만을 기본으로 시작했고, 노바와 지구를 오가는 인플루언서의 팔로워도 기본 수만을 넘는다.

종종 뉴스 채널에서나 속보로 나오던 노바 관련 소식은 차츰, 토크쇼에서도 등장하더니, 이제는 예능에서도 나오는 수준.

노바의 기본 정보와 몬스터들을 마주쳤을 때의 대응 요령이나 생존법 등을 다룬 시사 프로그램이 동 시간대의 드라마 시청률을 넘는 시대.

그 와중에 가장 높은 트래픽이 발생하는 곳은 인터넷 커뮤니티다.

화성으로의 이주를 부르짖던 어떤 미국 부호는 인공위성을 이용한 통신망을 가지고 있었고, 본인 소유의 SNS 회사도 보유하고 있었다.

- 친구들! 화성보다 먼저 가야 할 행성이 있어.

- 우주선도 필요 없지. 난쟁이 녹색 괴물만 잡으면 준비 끝이라구.

그는 정부의 엠바고가 풀리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미친듯이 SNS에 글을 쏟아냈다. 어그로성 내용만 있는 것도 아니다.

- 종말을 대비해보자고. 내가 판을 깔아주지.

그는 초기 인터넷과 비슷한 수준의 텍스트로만 이뤄진 커뮤니티를 구축했고, 각국의 언어를 번역하는 기능을 제공했다.

- 오직 텍스트만 가능한 커뮤니티야.

- 친구들 이해해줘. 물리적인 한계가 있었어.

- 그치만 종말에도 이 커뮤니티는 안전하다구.

- 내가 서버를 우주로 보내버렸거든.

통신망도 인공위성으로 하고, 데이터 서버도 우주로 둔 이 커뮤니티는 완전히 지구 종말을 대비하기 위한 용도였다.

- 정부와 딜을 끝냈어. 이제 이 채널은 공식적인 인류의 채널이야.

- NITO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게 될 거야.

미국의 부호는 자신의 회사를 인류를 위해 제공해버렸고, NITO는 이 채널에 기대를 걸었다.

종말이 다가와 지구의 기반 시설이 모조리 파괴되었을 때, 우리는 소통할 수 있는가?

놀랍게도 그것이 가능해졌다.

전기를 구할 수 있고, 인터넷망에 접속할 수 있는 디바이스를 가지고 있다면 말이다.

통신사 상관없이, 전 세계 어디서나 접속 가능한 '인류 채널'에 새로운 소식이 떴다.

<속보, 아이언헤드 vs 사무라이>

- 아이언헤드와 사무라이가 오늘 밤 맞붙는대.

-어디서?

- 노바. 무한결투장에서 대결 성사 중.

- 개구라 ㄴㄴ

- 진짜야. NITO 공문 유출

- 유출이라고 하면 안 돼. NITO는 우리 할머니도 열어볼 수 있을 정도로 보안 수준이 허술한걸.

- 할머니가 해커인가 봐?

- 아니, 개소리하지 말고. 난 이 결과가 궁금해. 승자가 인류 넘버 1이라는 소리니까.

- 개소리 하지 마. 제임스가 빠졌잖아? 그는 위대한 전사야.

인류 채널에서 가장 많은 뷰를 기록하는 게시판은 노바 정보와 몬스터 공략 같은 정보를 제공해주는 공식 게시판이다.

가장 많은 수의 글이 리젠되는 건 전 세계 자유게시판이고, 그곳에 투하된 글 하나가 단숨에 엄청난 추천 수를 받아 '베스트' 글이 되어버렸다.

이 글은 다시 자유게시판의 하위 카테고리인 '국가별 자유게시판'으로 퍼져나갔다.

- 아이언헤드가 누구야?

- 병신이, 너 한국인 맞냐? 강철두잖아.

- 얘 유명함?

- 와, 어이없는 새끼네. 너 노비스 된 지 얼마 됨? 아니, 노비스이긴 하냐?

- 위에 놈 분탕임. 먹이 주지 마셈.

- 이거 누가 이기지?

- 강철두가 이기지. 이 새끼 존나 쌤.

- 사토도 개쩔잖아? 서로 짬이 다르잖아.

- 강철두 이제 고작 1년도 안 됨. 사토 8년 구른 베테랑. 사토 승

- 위에 새끼 매국노네.

- 야 근데 이게 중요하냐?

- 병신아. 무조건 이겨야지. 중요하냐? ㅇㅈㄹ

- 아니, 그러니까 왜 이겨야 하냐고

- 몰라 병신아. 우리가 무조건 이겨.

- ㅋㅋㅋ 걱정 ㄴㄴ 강철두 존나 깡패임. 무조건 이김

개인, 가족, 이웃, 친구, 국가.

같은 국적이라는 건 때론 기이한 결속력과 소속감을 제공한다. 그저 같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강철두를 응원하는 이들이 많았고, 일본 또한 다르지 않았다.

- 드디어 건방진 한국인을 징치할 때가 되었다.

- 무례, 같은 지구인으로서 이런 대결은 분열만 초래. 좋지 못한 태도입니다.

- 위에 놈 무슨 약한 소리야? 지금 NITO를 이끄는 건 일본이야.

- 맞아. 한국인들은 다혈질이라 분쟁만 일으킬 줄 알지. 그들은 여전히 전쟁 중이야.

- 일본은 대화의 물꼬를 텄어. 노바에 미리 자리 잡은 외계인 친구들도 우리의 이웃이야.

- 일본인은 평화를 사랑하지.

- 병신들. 조센징놈은 사토의 적수가 아니야.

- 노바에서의 경력만 해도 차이가 어마어마해.

- 무식한 조센징은 야만인이나 다름없어.

- 결과는 언제야?

- 노바의 시간은 지구와 달라.

- 시차 페이지에 실시간 노바의 시간이 있어. 그걸 참고하라고 친구.

- 그러니까 결과가 언제 나오냐고?

- 바보냐. 직접 보라구. 답답해서 알려준다. 지구 시간으로 4시간 48분이 하루고, 노바의 다음 해가 뜨려면 이제 고작 1시간 10분 남았어.

- 그렇군. 그때 다시 돌아오면, 이 병신같은 떡밥이 식어 있겠군.

한국을 대표하는 노비스 강철두.

일본의 영웅이나 다름없는 사토 키요시.

노바에 거의 살다시피 하는 두 사람은 얼마나 많은 지구의 인간들이 대결의 결과에 주목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

사토 키요시.

일본 최강의 무력집단인 '특전대'를 이끄는 대장이자, 사쿠라시티 맵의 쌍두사를 최초 사냥해 인류 최초로 파수꾼 사냥이라는 업적을 받은 자.

특전대의 단체 랭킹, 그리고 근력과 체력의 두 개 부문 개인 랭킹에 오른 자.

최고의 대우와 명성을 가진 인류 최강의 사내.

그는 한계 돌파 스크롤을 이용, 감각과 민첩의 랭킹 측정 이후 두 눈을 의심했다.

"나, 나니?"

<지구 채널 '민첩' 활성화 순위>

1. 강철두(2509)

2. 응우엔(777)

3. 사토(775)

4. 료(774)

5. 로빈(772)

....

근소한 차이로 같은 특전대의 민첩 랭커인 료보다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탑 3 안에 드는 수치.

헌데 1등의 숫자가 이상하다.

"미, 미친. 오류인가?"

분명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터무니없는 수치다.

인간이 맞긴 한 거냐?

"강철두라...."

자신의 위대한 업적인 파수꾼 사냥을 따라 한 자.

지구에서는 두 번째로 파수꾼 사냥에 성공한 한국인 노비스의 이름은 진즉 알고 있었으나, 부러 신경 쓰지 않았다.

'신입' 따위를 신경 쓰는 '베테랑' 같은 건 품위가 떨어지는 일이 아닌가?

헌데, 이런 괴물 같은 수치라니.

묘하게 신경을 거스르는 강철두의 이름이 사쿠라시티 내의 저잣거리에서 심심찮게 들려왔다.

'강철두가 지구에서 가장 센 전사다.'

'그는 진짜 사내 중의 사내다.'

'하늘도 날아다닌다.'

'엄청난 전사다.'

'신화 속의 영웅과 같다.'

듣지 않으려 해도 들려오는 소리에, 충성심 강한 특전대의 대원 하나가 소문의 출처를 조사해 보고했다.

"출처를 알았다고?"

"하잇, 미코와 나나라는 여자입니다."

"일본인 아닌가?"

"맞습니다. 개척마을 나뭇잎 마을이 제국민들에게 약탈당했을 때 끌려갔는데, 노예시장까지 흘러갔다가 강철두에게 구함을 받고 돌아온 자들입니다."

"흐음."

"사토 사마. 이는 필시 한국의 날조가 틀림없습니다."

"일리 있군."

"명하신다면 당장 가서 조선의 앞잡이가 된 두 년을 잡아 오겠습니다."

"...."

사토는 고개를 저었다.

"되었다. 입 싼 부녀자들을 건드려봐야 내가 뭐가 되겠나?"

"하잇."

"...보여주면 될 일이다."

사토는 이제 때가 되었다고 여겼다.

'밟아줘야지.'

누가 넘버원인지 각인시켜줘야겠다.

스탯 점수?

강함의 척도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특성.

'격차를 보여주마.'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사토의 도발적인 결투 신청을 며칠 되지 않아 저쪽에서 받아들였고, 무한결투장으로 입성했다.

*

파팟.

철두는 잠깐의 어지럼 이후 보이는 마을의 모습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 바로 여기군."

4대 스탯을 측정하던 백색의 공간은 이제 가지 않는 모양이다.

"이봐, 길을 막고 있지 말라고."

철두가 뒤를 돌아보니 다른 이가 서 있었다.

"오!"

무한결투장은 이번에 두 번째 입장.

다른 이를 마주치는 건 처음이다.

녀석은 괴상한 투구를 눌러쓰고 있었다.

사극에서 본 것 같은데.

안면 가리개가 있어, 보이는 건 눈과 입술뿐이었다.

"네가 사토냐?"

"쳇, 예의가 없는 놈이군. 여기서는 닉네임을 불러라."

"...?"

철두가 고개를 갸웃하자 녀석이 말했다.

"나는 사쿠라사무라이다. 네놈의 닉네임은 뭐지?"

"그래, 사토. 덤벼라."

"예의만 모르는 게 아니라. 절차도 없는 녀석이군. 매도 먼저 맞겠다면 나쁘지 않지. 대련장으로 가자!"

"후후후, 좋아."

"네놈 닉네임이 한산이동 강철주먹이냐?"

"그렇다."

"성의 없는 닉네임이군."

"너도."

"...?"

이 새끼가?

사쿠라사무라이가 어때서?

그때 뒤에서 또 다른 말소리가 끼어들었다.

"이여! 친구들 반가워."

철두와 사토가 돌아보니 근육질의 덩치에, 기사들이 입는 강철 갑옷을 입은 녀석이다.

은빛으로 빛나는 철판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싸고 있어, 능글거리는 목소리 외에 알 수 있는 정보가 없었다.

"섹시가이."

"여어, 사쿠라사무라이."

"...."

철두는 그저 구면인 듯 악수하는 둘을 보았다.

강철 기사가 철두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반갑다. 한산이동 강철주먹. 좋은 구경거리가 있대서 헐레벌떡 들어왔다."

"네놈은 누구냐?"

"섹시가이다."

"...."

철두가 인상을 찌푸렸다.

"섹씨도 있나?"

처음 들어보는 성씨다.

"...난 미국인이다."

"그렇군."

철두가 건틀릿을 마주 잡아 악수했다.

"강철두다."

"흐흐, 알고 있다. 투구 정도는 쓰고 다니라구, 친구. 아직 초창기라 다행이지만 나중을 위해서라도 얼굴 정도는 가리는 걸 충고하지."

철두가 씩 웃었다.

"필요 없다."

충고는 강한 놈이 하는 거다.

"너도 덤빌 테냐?"

171화 지구 최강

"하하하! 이거 당연한 소릴 하는군. 내가 구경만 하자고 이리 헐레벌떡 왔겠나?"

섹시가이는 유쾌하게 웃으며 철두의 도발을 받았다.

"좋군. 좋아!"

철두는 이 호전적인 친구들이 마음에 들었다.

역시 이 정도 투지는 있어야 지금 무한결투장에 들어설 정도의 강자가 되는 거다.

용기 있는 실패자들은 모두 미니언으로 전락했지만, 살아남은 이들은 영웅이 되었다.

파팟.

"어이쿠, 이거 늦었나 싶었는데 다행이네."

"넌 또 누구냐?"

"옥산동백돼지요."

"오호!"

철두는 익숙한 형식의 닉네임에 눈을 빛냈다.

"후후, 만나길 기대했소. 강철... 한산이동 강철주먹! 아니, 뭐라도 좀 쓰고 다니시오. 그렇게 대놓고 다니면 닉네임으로 부르기도 애매하네."

"후후후, 아무렇게나 불러라."

"그럴 수가 있소? 대회에 출전하면 철저하게 닉네임으로 활동하시오. 여기 있는 이들이야 다 같이 지구 출신이라 한 다리 건너면 안다지만, 타 행성 사람들과는 싸울 때 조심하시오."

여기오니 충고쟁이들이 많다.

"알겠다. 잔소리 그만하고 너도 가자."

"음? 난 정말 구경하러 왔소."

"안 싸울 거냐?"

"아, 뭐 얻을 게 있어야 싸우지."

"무슨 소리냐?"

"하하, 그쪽 양반이 규격 외인 건 한국 사람으로서 잘 알지. 뭐 비등비등해야 대련으로 뭐 얻을 거라도 있지. 개죽음당하는 취향이 있지 않고서야 덤비는 게 미친놈 아닌가?"

옥산동백돼지는 철두를 규격 외로 취급했다.

"흥! 돼지 새끼가 겁을 처먹었군."

"자살은 취미가 없소."

"같은 한국인이라고 편을 드는군."

"하하,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섹시가이와 사쿠라사무라이의 시비를 옥산동백돼지가 능글맞게 받아넘겼다.

철두는 그 모습을 보며 어처구니가 없었다.

"뭐야? 나 빼고 다 아는 사이야?"

"뭐, 한두 번씩 다 마주쳤지요."

그럼 싸워봤겠군.

철두는 씩 웃으며 물었다.

"그래? 이 중에 누가 젤 세나?"

"흐흐, 뭐 비등비등하다오."

"나다."

"흠, 난 아니오."

제각기 대답이 다른 세 사람을 보며 철두가 기껍게 웃었다.

"고만고만하단 소리군."

"허, 건방진!"

"와하하하!"

"끄음."

철두는 호탕하게 웃었다.

"세 놈 다 함께 덤벼라."

철두의 말에 섹시가이의 철그덕거리던 걸음이 멈췄고, 사무라이 투구와 탈을 쓴 녀석이 무시무시한 눈빛을 하곤 노려봤다.

"한국인. 무례도 적당히 해라."

"무례? 한 수 가르쳐 준다고 하지 않았나?"

"가르치는 건 나다."

"허접한테 배울 순 없지."

"이익!"

사쿠라사무라이가 허리춤의 검을 빼 들려다가 섹시가이의 제지에 가로막혔다.

"뭐, 신고식 정도로 생각하면 나쁘지 않지."

섹시가이는 철두를 노려보며 말했다.

"대신, 대련이 끝난 뒤 그대는 정식으로 사과해야 할거요."

"후후, 내가 지면 사과하지."

"좋소. 받아들이지."

"미국인! 멋대로 결정하지 마라!"

"사쿠라사무라이. 일단 저치를 밟아놓고 다시 대결해서 우위를 가리면 되지 않은가?"

"으음."

사쿠라사무라이는 화를 내려다가 말았다.

'그래, 한번 죽여보는 것도 괜찮지.'

3:1 대련이라니.

오만함도 정도가 있지, 감히!

"좋다! 받아들이겠다."

"흐흐, 좋아. 겁쟁이 돼지는 또 내뺄 셈인가?"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무를 순 없지."

옥산동백돼지도 동의하자 철두가 웃었다.

"후후후, 좋아. 아주 좋아!"

무한결투장에 와서 미니언들을 상대하는 것도 물론 좋은 경험이 된다. 하지만, 4대 스탯을 모두 50 이상 끌어올린 다른 영웅들.

그것도 영웅 셋을 상대로 대련할 기회가 얼마나 많을까?

"가자!"

세 사람은 곧 하나뿐인 대로를 걸어 입구 맞은편의 차원문에 다다랐다.

<훈련><출전><대련>

철두가 먼저 대련을 골랐고,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대련을 선택했다.

파파팟!

철두는 대기실에서 눈을 떴다.

<옥산동백돼지, 섹시가이, 사쿠라사무라이가 팀 '신고식'을 결성했습니다.>

<팀 '신고식'이 3:3 대결을 요청했습니다.>

"수락한다!"

철두가 수락하자, 곧 다시 화면이 바뀌며 ? 표시된 검은 인영이 둘 나타났다.

<무작위 미니언으로 팀원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혼자 한다."

<대련장으로 이동합니다.>

파파팟.

대기실의 모습이 사라지자, 곧 익숙한 형태의 콜로세움에서 눈을 떴다. 미니언들과 싸운 훈련장과 똑같은 모습이다.

다른 게 있다면 맞은편에서 흉흉한 기색을 내뿜는 세 명의 상대가 미니언이 아니라 영웅이라는 것이다.

"흐흐, 버릇을 고쳐 줘보자고."

"섹시가이. 방심하지 마라. 저놈의 스탯은 터무니없는 수치다."

"방심? 난 지금부터 파수꾼을 잡는다 생각하고 최선을 다할 거다."

작전 회의인 듯 각오를 다지는 두 사람을 보며 옥산동 백돼지가 씁쓸하게 웃었다.

"파수꾼 따위로 생각하면 큰코다칠 거요."

"뭐?"

그때 끔찍한 소리가 콜로세움을 쩌렁쩌렁 울렸다.

"우어어어어!"

철두는 인벤토리에서 뾰족 망치와 투핸디드 소드를 꺼냈다. 그리고 히죽 웃으며 달려갔다.

쇄애애액, 차앙!

사쿠라사무라이의 장기는 쾌검! 아니, 외날의 칼을 사용하니 도라고 불러야 한다.

극한의 쾌도술을 부렸으나, 안타깝게도 단 일 합 만에 도가 부러지고 말았다.

"좋아!"

철두는 공격을 막아낸 사무라이의 한 수에 기꺼운 기분이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수련이 되지.

전력으로 가볼까.

쐐애애애액. 콰앙!

철두의 검이 강철 기사가 내지른 창을 쳐냄과 동시에 몸을 한 바퀴 돌리며 앞으로 나아가 거리를 좁혔다.

"헛."

"어딜."

쇄애애액. 콰직!

뒤로 훌쩍 물러서려는 그의 어깨에 뾰족 망치가 파고들었다.

"크악!"

쇄애애액, 콰앙!

뒤이어 휘둘러진 투핸디드 소드가 깔끔하게 목을 파고들며 철 투구를 하늘 높이 날려버렸다.

쇄애애액!

여태 기회를 노리고 있던 옥산동백돼지가 검을 내질렀다. 철두의 두 손에 들린 무기가 모두 강철 기사를 상대하고 있어 쳐내기 어려운 방위를 점하고 내지른 완벽한 찌르기다.

퍽!

등을 노리고 내지른 공격이 슬쩍 몸을 비튼 강철두의 옆구리에 끼어버렸다.

두툼한 삼두와 광배 사이에 낀 검은 나아가지도, 뒤로 물러나지도 않았다.

"헙!"

용을 써봐도 움직이지 않는 검은 철두가 옆구리에 낀 채 몸을 틀어버리자 너무 쉽게 두 동강 나버렸다.

태앵!

철두는 부러진 무기를 든 사쿠라사무라이와 옥산동백돼지를 보며 웃었다.

"두 놈 남았군."

"자, 잠깐!"

"좋아. 정비해라."

"...."

"...."

두 사람은 홀린 듯 여분의 무기를 꺼냈으나 전의는 이미 반쯤 날아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좋아. 간다!"

쇄애애액. 콰앙!

3:1도 안 됐는데, 반쯤 혼이 나간 둘이 될까?

쇄애액! 태앵!

사무라이 투구가 땅에 떨어졌다.

콰직!

옥산동백돼지의 머리도 바닥에 굴렀다.

<승리!>

미니언을 처치했을 때와 다르게 보상은 아무것도 없다.

파파팟.

다시 대기실로 돌아와 보니 세 사람이 침묵한 채 널브러져 있었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닥에 앉아있던 강철 기사가 몸을 일으켰다.

철그럭.

그러곤 투구를 벗자, 금발의 미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건틀릿을 벗어 두툼한 손을 내밀었다.

"정식으로 인사하리다. 제임스 밀러요. 블랙드래곤 용병대를 이끌고 있지."

"강철두다. 아이언헤드 용병대장이지."

"알고 있소. 당신은 꽤 유명하다오."

제임스 밀러는 너털웃음을 지어 보이곤 말했다.

"그 괴물 같은 스탯 수치가 거짓이 아니구려. 설마 3:1의 대결에서 패할 줄은 몰랐소."

"후후, 잘 싸웠다. 너도 제국 기사 수준은 되어 보였다."

"...."

제임스는 뒤를 돌아보더니 다시 철두를 보았다.

"혹시 괜찮다면 대련을 계속할 수 있겠소? 부탁드리겠소."

"오호."

철두는 제임스가 마음에 들었다.

죽음은 신경도 쓰지 않는 그의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한 번의 패배로 깔끔하게 인정하고 숙이고 들어와 가르침을 청하고 있지만, 눈빛은 이글거린다.

이 정도는 되어야 지구에서도 손가락에 꼽는 강자가 될 수 있는 거다.

"좋다!"

"고맙소."

"염치없지만 나도 끼어도 되겠습니까?"

옥산동백돼지가 나섰다.

제임스가 백돼지를 보며 이죽거렸다.

항상 대련을 피하기만 하던 그가 아닌가?

"허, 겁쟁이가 웬일이야?"

"기연을 만났는데 마다하면 병신 아니오?"

"흐흐흐."

하긴, 저치도 운으로 영웅이 되진 않았을 터다. 향상심이 있으니 남들보다 먼저 4대 스탯을 50까지 끌어 올릴 수 있었겠지.

철두가 사쿠라사무라이를 보았다.

그는 사무라이 투구를 벗고는 철두를 보곤 넙죽 엎드렸다.

"사토 키요시! 오늘에야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건방을 용서하시고, 한 수 가르침을 내려주시길 청합니다."

"후후후, 좋다!"

철두가 호탕하게 웃었다.

"전사는 끝없이 강함을 추구하는 것. 전사의 싸움을 마다할 내가 아니다!"

철두의 은근한 칭찬에 제임스와 사토 옥산동백돼지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어렸다.

"바로 가자!"

파파팟.

콜로세움에서 다시 마주한 철두는 뾰족 망치를 집어넣었다.

손에 쥔 건 오직 투핸디 소드 한 자루.

'다음 단계로 넘어선다.'

저들은 가르침을 청한다 하지만, 경험치는 저들만 쌓는 게 아니다.

'특성도 봉인한다.'

오직 순수한 검술.

그것의 극한을 넘을 것이다.

레벨 4.

명인의 경지에 오를 것이다.

영웅 셋.

저들을 감당하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하겠지.

"와라!"

철두의 호기로운 외침에, 세 사람은 쑥덕임을 멈추고 달려들었다.

"좋습니다!"

"침착하게 갑시다."

"차근차근이다."

콜로세움에서 네 사람이 어울리기 시작했다.

차차차차창!

이것은 대련이기보다는 사냥과 같이 보였다.

보스 몬스터 레이드를 하듯 차륜전을 펼쳤다.

쇄애애액, 카앙, 캉!

쉴 새 없이 무기가 부딪치며 청명한 음을 냈다.

철두는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았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여기서 검을 뒤로 빼면?'

'창을 쳐내고, 뒤로 물러나며 검을 피해내고....'

시행착오도 있다.

촤르륵!

철두의 옆구리에 피가 튀었다.

상처는 금세 아물어 피가 멎었다.

차차차창!

네 자루 무기가 어우러지며 싸우길 한참 만에, 체력이 다한 섹시가이가 뒤로 물러나 쉬었고, 다시 전장에 합류했다.

옥산동 백돼지가 널브러졌다가 다시 체력을 회복해 달려들었다.

사쿠라사무라이는 독하게 버텼으나 결국 체력이 다해 뒤로 빠졌다. 이내 다시 합류해 싸워냈다.

그 차륜전을 온전히 감당해온 철두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그렇지만 결정적인 한 방이 없다.

"후우, 후우, 후우."

철두의 거친 호흡이 묘한 성취감을 준다.

그래도 저 괴물을 저만큼 몰아붙였다.

철두도 사람이다! 지쳤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

"...."

세 사람은 침묵한 지 오래되었다.

한 시간, 두 시간.... 어쩌면 하루.... 아니, 이틀일지도....

강철두라는 괴물을 쓰러트리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덤비고, 모든 스킬을 다 쏟아붓고, 체력이 다하면 쉬었다가 다시 달려들기를 반복했다.

여전히 검을 들고 서 있는 상처투성이 괴물은 거친 호흡을 뱉어내고 있었다.

"후우, 후우, 후우."

괴물.

체력은 무한한 게 아닐진대, 저 괴물은 그러해 보였다.

그래도 꽤 지쳐 보인다.

상처도 늘었다.

지혈되지 않아 선혈이 아직 멎지 않은 것도 보인다.

며칠이 지났는지 모른다.

이젠 눈빛만으로 서로의 마음을 알 정도로 호흡이 잘 들어맞는 세 사람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지금이다.

저 괴물의 숨통을 끊을 시간이.

카아앙!

"후우, 후우."

몹시 지쳐 몸이 천근만근이지만 눈빛만은 초롱초롱한 강철두의 시선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새로운 검술의 경지에 눈을 뜹니다.>

<검 숙련의 단계가 상승합니다.>

그래, 이제 이 대련을 끝낼 때다.

차차차창!

그의 손에 들린 투핸디드 소드가 경쾌하게 움직였다. 동시라고 해도 좋을 시간에 세 명의 머리통이 하늘로 솟구쳤다.

172화 신병 받아라

대기실로 돌아오니 축 처진 영웅 3인방이 보였다.

그야말로 미친 듯이 싸워댔다.

"사흘은 넘은 것 같은데...."

"미친, 무슨 소리야. 적어도 일주일은 싸운 거 같은데."

"아니, 그건 너무 갔다. 3일에서 4일 사이야."

제각기 체감시간이 달랐다.

얼추 3일이 넘는 시간 동안 싸웠다.

그나마 삼인방은 중간중간 쉬었지만, 강철두는 오롯이 그 긴 시간 동안 검을 휘둘렀다.

"터무니없는 사람이야."

"엄청나지."

"내가 뭐랬수."

세 사람은 강철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부르르 몸이 떨렸다. 마지막 순간은 어떻게 했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거의 승기를 잡아 강철두에게 치명상을 남겼다 생각했는데, 눈떠보니 대기실이다.

"후후후, 좋은 승부였다."

조금 뒤늦게 대기실에 나타난 강철두를 보는 삼인방의 시선엔 어이없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숫제 괴물을 보는듯했다.

그 눈빛에 두려움과 막막함 등의 여러 감정이 떠올랐으나 가장 큰 것은 경외였다.

한계를 벗어난 강함에 대한 동경마저 들 정도였다.

사토는 그 정도가 심했다.

"많은 깨우침을 받았습니다. 당신을 스승님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후후, 스승은 무슨. 나도 많이 도움 됐다."

아닌 말로 지금 넷 중에 가장 발전한 것은 다름 아닌 강철두다. 그토록 염원하던 검 숙련 4레벨에 닿았으니까.

"그, 그치만."

"후후, 지금처럼 대련이라면 언제든 받아주마."

"하, 하잇! 감사합니다."

사토는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랭킹 1위?

분명 명예로운 자리다.

한 끗 차이로 패배했다면 말도 섞지 않고, 돌아가 절치부심 노력했을 터다.

'어찌 비벼볼 수준이 아니다.'

이건 차원이 다른 격차다.

스탯의 차이는 진짜였고, 기술의 차이도 엄청났다. 압도적으로 강한 자에게 졌기에 패배감 따위도 들지 않았다.

자존심 따위를 내세울 계제도 아니다.

고개를 숙여 가르침을 받고 더 강해질 수 있다면 마땅히 그리해야 한다.

그것이 스스로를 위하는 길이고, 이 몸에 기대하고 있는 일본의 국민들을 위한 길이다.

배울 수 있다면 배워야 하고, 닮을 수 있다면 그리해야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해져야 지켜낼 수 있는 것이다.

"후, 그럼 다음 만남을 기약합시다."

"그러시죠. 이거 진이 다 빠지네요."

아닌 게 아니라 정신적 피로가 상당했다.

삼인방은 곧 나갈 듯했으나 철두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라, 사토가 넌지시 물었다.

"스승님께서도 바로 나가시는 겁니까?"

"나는 더 훈련하고 갈 거다."

"아! 역시. 그럼 저도 절치부심하겠습니다."

"마음대로 해라."

멋대로 스승 취급하는 그를 내버려 두고 철두는 훈련장으로 향했다.

진정한 무한결투장의 명성에 걸맞은 출전을 위해서는 소울포인트를 모아야 한다.

지금으로서는 훈련만이 유일하게 소울포인트를 모으는 수단.

<무한훈련장>

콜로세움에 입장하여 익숙한 모습의 소환된 미니언을 보곤 인상을 썼다.

"바로 10마리 안 되나?"

훈련 횟수는 10회가 전부니, 최대 55포인트. 저번것과 합치면 110포인트가 모인다.

"나 진짜 아니다! 시발!"

그때 익숙한 얼굴의 미니언이 발작하듯 소리쳤다.

"흥, 덤벼라 그냥."

"나, 진짜 용순지 나발인지 모른다! 어머니고 누나고 자시고 여자를 죽인 적이 없다!"

쇄애애액, 댕겅.

장호철을 처리한 철두는 뒤이어 소환되는 두 마리의 미니언을 무참히 베었다.

영웅 셋과 수련하다 보니 미니언 몇이 소환되든 그리 큰 훈련이 되질 않았다.

"이것이 명인의 경지인가?"

검술 3의 달인의 경지.

검을 다루는 것이 곡예 수준의 경지에 올라 능수능란하던 것이 또 새로운 경지에 다다랐다.

검을 쥐었으나, 검이 없는 것 같다.

그저 손을 휘두르듯, 손톱으로 적을 할퀴듯.

검인 듯 아닌 듯.

쇄애애액. 댕겅!

어느새 다섯 마리째 소환된 미니언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의식하지 않아도 검의 수발이 자유로운 경지.

검술 4의 명인의 경지에 다다랐다.

"후우, 다른 무기나 연습해야지."

파파팟.

철두는 소환된 여섯 마리의 미니언을 보며, 투핸디드 소드를 인벤토리에 집어놓고 뾰족 망치를 꺼냈다.

검과는 생김새도 다르고, 쥐는 법도 다르고 운용법도 다르다.

둔기류의 경지를 다시 올릴 때다.

파파팟, 콰직!

강철두는 오늘도 차츰차츰 강해지고 있었다.

*

동이 터오기 전, 특전대 부대장 료는 대장의 방을 찾았다.

"특전대 부대장 료. 대장님의 방에 들겠습니다."

료는 주인 없는 방문 앞에서 깍듯이 보고 한 뒤, 안으로 들어섰다.

대장의 자리에는 보라색의 도깨비불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 불은 두 눈이 달렸는데, 정말 도깨비라도 되는 듯 장난스럽게 이리저리 일렁였다.

이윽고 동이 터오르자 도깨비가 확 커지더니, 차원문이 나타나 사토 키요시가 걸어 나왔다.

"료."

"하잇."

"어쩐 일이냐?"

"결과가 궁금하여 방문하였습니다."

"사내답지 않게 방정맞구나."

"...."

료는 넙죽 고개를 조아렸다.

결과를 말해주기 전까지는 나가지 않을 기세였다. 사토는 담담하게 말했다.

"졌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나의 완패다."

"...믿을 수 없는 말입니다."

"...."

"조센징 따위에게 대장이...."

새애애액, 콰직!

료는 급히 말을 삼켰다.

고개 숙인 그의 시야에 검신이 보인다.

대장의 태도.

그 긴 검이 한 치 옆 다다미 바닥에 푹 들어가 있다.

또독.

검신에 피가 맺혀있어 누구의 것인가 의아한 가운데, 귀에서 따끔한 감각이 느껴졌다.

'내 피였군.'

귀가 떨어지진 않았는데, 꽤 많은 피가 흘러 볼을 타고 흐른다.

토독.

떨어진 핏방울이 다다미 바닥을 적실 때 대장의 음성이 이어졌다.

"나를 모욕하지 마라. 료."

"죄송합니다."

"나는 그에게 진심으로 탄복했다. 스승으로 받들어 그의 강함을 계승할 것이다."

"...."

료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언제나 강하고 당당하던 자신의 대장이었다.

한풀 꺾여버린 듯한 그의 기세와 말이 당황스럽다.

"나가보라."

"하잇."

일단은 물러난다.

밖으로 나온 료는 귀를 지혈하며 생각했다.

'일본이 졌구나.'

이거 파장이 클 것 같다.

일본에서 특전대장 사토의 위상은 대단하다.

총리보다 더 큰 인지도를 가지고 있고, 여론조사 인기투표 1위는 늘 사토의 몫일 정도다.

사토는 일본인의 자부심이자 긍지다.

그런 그가 졌다.

패배에 그치지 않고, 그를 스승으로 모시겠다니.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지.

일본인들의 기대와 나라의 대표라는 긍지는 패배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듯했다.

*

여수 포탈.

신성 그룹이 개발권을 가진 포탈 너머 노바.

C299 맵은 조금 특이하다.

쏴아아아아.

맵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은 바다.

해안선을 따라 밝혀진 것이 전부라, 맵의 절반은 여전히 음영지역이다.

배는 진즉에 건조되었지만, 해양의 몬스터들의 방해에 근해만을 오가며 어업에 종사하는 고깃배가 전부다.

가장 번성한 마을이자 유일한 마을, 신성 시티.

그 신성 마을의 가장 큰 건물은 본사 사장실이다.

동쪽으로 난 커다란 창은 수평선 너머로 떠오르는 일출을 감상할 수 있게 커다랗게 뚫려있다.

쏴아아아.

시원한 파도 소리와 일출에 맞춰 사장실 의자에 엎드려있던 붉은 잉어가 퍼덕거렸다.

파다다닥!

붉은 잉어의 몸이 떠오르며 공중을 유영하듯 우아하게 꼬리를 흔들었다. 그러길 잠시 눈알이 번뜩이더니 홀로그램처럼 쏘아진 그것이 차원문을 만들어냈다.

즈아아아앙.

차원문을 열고 나온 사내는 투구를 벗고는 떠오르는 일출을 감상했다.

똑똑.

"들어와."

언제나 이 시간에 사장실에 들어와 하루 보고를 올리는 비서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김 비서."

"네, 사장님."

"상무급 이상... 아니, 이사급 이상 전부 부르세요. 임원 회의나 합시다."

"네, 사장님. 안건은 무엇으로 공지할까요?"

"...."

"파수꾼 공략."

"...!"

깜짝 놀란 비서가 곧 실책을 깨닫고는 공손히 인사 후에 밖으로 나섰다.

딸깍.

문이 닫히고 사장실에 홀로 남은 신성 그룹 노바개척단 사장 최재선은 창가로 다가갔다.

둥실 떠오른 태양 옆으로 보이는 작은 섬.

해양 몬스터로 인해 아직 발도 들이지 못한 파수꾼의 섬.

"슬슬 우리도 가야지."

이제 맵을 두른 보호 안개를 걷을 때가 왔다.

안전하게 발전한다는 이유로 세계로의 진출을 조금 더 늦췄다간, 영영 뒤처지고 말 것 같은 기분이다.

*

"형님!"

"대장!"

강철두는 차원문을 넘자마자 보이는 익숙한 두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졌다."

"헉!"

"이, 이럴 수가!"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두 사람은 머리를 부여잡고 놀라워했다.

그 옆에 있던 박준필은 크게 웃었다.

"껄껄, 이 친구들, 농도 못 하겠군. 그래. 보니까 어떻던가?"

"후후, 괜찮은 놈들이었다."

"들?"

"두 놈이 더 있었다."

"오호! 누군가?"

"제임스. 한 놈은 이름을 안 물어봤군. 옥산동백돼지다."

"옥산동이라.... 흐음, 신성 그룹 쪽 사람인가?"

박준필은 고개를 저었다.

정확하지 않다. 신성 그룹 공장이 그쪽 동네에 있었던 것 같은데.

"헙, 형님! 이긴 겁니까?"

"저, 저는 믿고 있었습니다."

뒤늦게 정신 차린 최준섭과 구정욱이 말했으나 강철두는 그저 웃어 보였다.

"믿음이 부족하군."

"아, 아닙니다!"

"모병은?"

"밤새 분류 다 끝냈습니다."

"좋다! 아침밥 먹고 돌아가자."

"그전에 최종 판별부터 좀 해주십시오."

"무슨 판별?"

"스탯 10개 이상 활성화가 조건인데, 조사 레벨이 낮아 그것을 확인할 수단이 없습니다."

"후후. 그냥 모두 합격이다. 데려가라."

"...그 수가 좀 많습니다."

"몇 명이냐?"

"1200명 정도 됩니다."

"...."

철두도 그답지 않게 조금 당황했고, 박준필은 그저 웃었다.

"아, 먹을 입 줄이고 좋지. 데려가게나."

대부분이 민간인이지만, 개중에는 급히 전역 신청한 군인들도 100여 명 정도 끼어있었다.

박준필은 이미 마음 떠난 병들을 굳이 붙잡지 않았다.

"후후, 잘 쓰지. 사람 너무 많아지면 또 보내라. 우리 성은 아직 여력이 있다."

"하하, 아이언헤드가 날이 갈수록 번성하는구만. 내 조만간 놀러 감세. 조금만 있으면 우리 한양도 노바로부터 정식 마을로 인정받을 듯싶으이."

"오!"

똑같은 재료를 가공해도, 노비스가 만지면 그저 형태가 변환된 재료 그 자체고, 직업인 목수가 가공하면 그것은 아이템이 된다.

마을도 같은지라, 지금 한양은 그저 노비스 무리일 뿐이고, 아이언헤드 성처럼 노바로부터 정식 인정된 영지가 아니다.

한양이 만약 정식 영지가 되면 진태가 한 것처럼 세력창을 통해 영지를 관리할 수 있으니, 행정적 인력을 말도 안 되게 줄일 수 있었다.

"후후, 성과 기대하지."

"조만간 또 보세."

"그래."

철두와 준필이 포옹 후에 헤어지려는데, 다급한 기수 하나가 관청까지 말을 몰아왔다.

두두두두.

나는 듯 말에서 뛰어내린 자는 다름 아닌 서종두였다.

"영주님!"

"종두. 무슨 일이냐?"

"척후의 보고입니다. 옛 뉴아 마을 터에 새로운 백작군이 등장했습니다!"

"흐음, 또 왔군."

고개를 주억거리던 철두가 씩 웃었다.

"뒈지려고."

지르골한테도 절절매던 옛날의 내가 아니다.

173화 2차 침략 발발

철두는 옹기종기 모인 신병들을 보았다.

"아직 검증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무슨 검증?"

"스탯 10개 이상을 확인 못 했습니다."

"흐음."

철두가 턱을 쓰다듬었다.

사실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다들 들어라!"

철두가 쩌렁쩌렁 소리질렀다.

"나는 아이언헤드 영주 강철두다. 지금 우리 성은 전쟁 중이다. 지금도 백작군이 코앞까지 당도해 위협 중이다."

철두의 말에 모집된 사람들이 술렁였다.

"잠깐의 훈련을 받고 모조리 전장에 투입될 거다! 두려운 자! 지금 떠나라!"

전장에 투입된다는 말에, 1200명이나 모였던 사람들 중에 무려 절반 가까이가 떠나버렸다.

떠난 이들은 대부분 난민 수준의 옷을 입은 자들이었는데, 상당수는 스탯석도 활성화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 남은 자들 중에서도 겨우 팬티만 입은 남자들이 많았는데, 그 정도 차림의 사람이 사냥에 나서서 스탯석을 획득했다고 믿긴 어려웠다.

하지만, 그런 기준은 아무래도 좋았다.

"쓸 만한 놈들이군."

전장에 나설 각오가 된 자들.

모두 합격이다.

"준섭이."

"네, 영주님."

"챙겨서 인솔해라."

"넵!"

"구 씨."

"네, 영주님."

"뉴아 마을에서 집결이다."

"넵."

"나 먼저 가지."

철두가 그리핀 오식이를 소환했다.

파팟.

"끼아아아아!"

갑자기 그리핀이 소환되자 한양에 몰려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호들갑을 떨었다.

"우와, 저게 뭐야?"

"미쳤다. 독수리야."

"아냐, 그리핀 같은데?"

"와, 난다. 날아!"

"시발, 개쩐다."

아이언헤드 영주가 그리핀을 길들였다는 소문을 들은 자도 있었고, 금시초문인 자들도 있었다.

저마다 놀라는 가운데, 철두를 태운 그리핀이 훌쩍 뛰어올라 북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말을 타고 두어 시간은 걸릴 거리도, 몇 분 만에 주파한다.

쇄애애애액.

바람의 정령의 도움을 받자 그 속도가 두 배는 더 빨라졌다. 더욱이 날갯짓 소리마저 감춰버려, 하늘을 올려다보는 게 아니라면 그리핀이 접근했는지도 모를 터다.

뉴아 마을에 인접한 상공에 다다르자 적 병력이 보였다.

"적군."

고작해야 100여 명 수준.

"가자."

"끼아아아."

오식이가 급강하를 시전했다.

후우우우우웅!

공기를 가르는 소리는 바람의 정령이 감춰주었다.

하늘을 경계 중이던 적의 척후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종을 쳤으나, 이미 그리핀이 바닥에 닿은 뒤였다.

쾅!

운석이 떨어진 듯 주변이 흔들렸다.

피떡이 되어버린 병사들이 서넛.

쓰러져서 혼란스러워하는 자들이 수십이다.

촤아아아악!

그 당황한 양 떼 사이에 철두라는 호랑이가 날뛰었다.

"와하하하, 덤벼라!"

쇄애애액, 촤아아악!

철두의 검은 매끄럽기 그지없었다.

갑옷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곳만 노려가며 적을 베고 지나쳤다. 단번에 죽이진 못했으나, 관절이 베인 병사들은 확실히 전력에서 이탈당했다.

"끄아아아아!"

"!@#@!#:"

비명과 알 수 없는 외계어가 남발하는 가운데, 철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전신 갑옷을 입은 기사가 나섰다.

"멈춰라!"

"병신이냐?"

멈추라면 멈추게?

카아아앙!

한가락 하는 놈인지 철두의 공격을 흘렸으나, 흔들리는 눈동자에는 당황이 가득하다.

"우로사 장군의 진언을 전하러 왔다!"

"할 말 있으면 직접 오라 해라!"

카앙!

"이 무식한! 지금 오고 계시다."

"흐흐, 그럼 그때 듣지."

"자, 잠깐!"

카앙, 캉!

철두가 검을 내지르다 말고, 녀석을 보았다.

"말이 존나 많은 놈이군."

"다짜고짜 검을 휘두르는 그대가 성급한 것이다."

"전쟁 중에 예의 따지는 놈이 다 있군."

"이 전쟁은 의미가 없다. 계속 싸워봐야 그대의 영지와 주민은 살아남지 못할 터다."

"반사."

"...."

기사는 침착하게 장군의 입장을 전했다.

"지금부터는 우로사 장군의 진언이다."

"말하라."

들어는 보자는 생각으로 철두가 기다려주었다.

"그대는 즉시 떠나라. 쫓지 않을 것이다. 이동마법진 근처에 자리 잡은 모든 마을, 모든 생물이 우로사 군의 제물이 될 것이다. 그대가 영민을 아낀다면 즉시 성을 비우고 떠나라."

"후후후."

"우, 웃을 일이 아니다. 그대는 신중히 생각하라! 이것은 우로사 장군이 내리는 자비로운 제안이다."

분명 그렇다.

나트롱 백작은 야인들의 학살을 명했으니까.

"그대, 신중히 결정하고 답을 달라."

"지금 답을 주지."

철두가 검을 들었고, 다시 달려들었다.

"무, 무슨!"

쇄애애액.

분명 검을 들어 막았으나, 귀신같이 거두어졌다가 다시 내질러진 검은 너무나 깔끔하게 목을 꿰뚫었다.

"끄, 끄륵. 후, 후회...."

"이게 내 대답이다."

쑤우우욱, 콰직!

검을 빼내어 그대로 휘둘러 목을 쳐버렸다.

투둑.

목 잃은 시체가 멀뚱히 서 있다가 철그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옆으로 쓰러졌다.

"!@#@!"

"@!#!@"

"...."

병사들은 넋이 나간 듯 웅성거리며 철두의 눈치를 살폈다.

츠츠츳.

기사의 시체가 사라지고, 전리품이 남는다.

소모품 배낭이다.

찰그락.

열어보니 포션 따위의 물약이 가득했는데, 익숙한 포션인 소통의 비약도 있었다.

철두가 그것을 하나 꺼내 먹었다.

"괴, 괴물이다."

"조졌어."

"어쩌지?"

"십부장. 어떻게 해봐."

그제야 웅성거리는 백작군의 음성이 귀에 또렷이 들린다.

철두는 히죽 웃으며 쩌렁쩌렁 소리쳤다.

"돌아가서 나의 말을 전하라!"

학살은 그도 취미가 없다.

전의 잃은 적의 목을 치는 것만큼 짜증 나고, 무료한 일도 없다.

"내 땅을 넘보는 자. 모조리 죽을 것이다."

철두가 손을 들었다.

"가서 전하라!"

"헉, 가, 가자."

퇴로가 열리자 병사들이 서둘러 떠나려 했으나, 철두의 고함이 다시 울렸다.

"벗고 가라!"

"...!"

병사들이 서둘러 갑옷과 무기 따위를 버리고 떠나려 했으나 철두는 고개를 저었다.

"다 벗어라!"

"...!"

땟국물이 흐르는 옷이긴 했으나, 빨아 입으면 되겠지. 준필이가 특별히 주문했으니까.

"버, 벗자!"

"시발, 살아야지."

속옷까지 모조리 벗은 병사들이 부상자들을 수습해 서둘러 북으로 도망쳤다.

도망치는 살덩이들을 보며 철두가 씩 웃었다.

놈들이 쌓아놓은 무기들 중에 성에 차는 건 없었다. 갑옷은 조금만 개량해도 영지병들이 입기에 무리가 없어 보였다.

어렵지 않게 100명의 무장을 얻었다.

"설마 순순히 물러가진 않겠지?"

철두는 내심 이놈들이 진짜 겁먹고 물러나진 않기를 바랐다.

전쟁에는 많은 돈이 들어가지만, 그것도 모두 이기면 말이 달라진다.

승리의 이익은 전리품에만 있지 않다.

"왜 이렇게 안 와?"

두두두두.

역시 양반은 못 되는지 구정욱의 공격대가 미친 듯한 속도로 말을 달려오고 있었다.

먼지구름과 함께 등장한 그는 숨을 몰아쉬며 보고했다.

"후욱, IH 공격대 집결했습니다."

"뭐야? 이렇게 지쳐서 싸움이야 하겠어?"

"잠깐 휴식하면 괜찮습니다. 적은 어딨습니까?"

"다 도망쳤다."

갑옷과 무기들이 산처럼 쌓인 무더기를 보며 구정욱이 적의 수를 가늠해보았다.

"100명 정돕니까?"

"그래."

"순순히 보내주셨습니까?"

"감옥이 좁다."

"그치만...."

구정욱은 노예로 잡아다 팔자는 소리를 가까스로 삼켰다. 스스로 떠올린 생각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이것도 부작용인가?'

전이었다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일을 태연히 생각하다니.

"적은 또 올 테니, 여기에 전진기지를 세운다."

"넵! 좋으신 생각입니다."

"진을 꾸려라. 난 전리품을 성에 주고 오지."

겸사겸사 무기도 새로 만들어와야 했다.

지금 철두는 무기를 적에게서 얻은 전리품이나, 장소철이 만들어낸 것으로 하나둘씩 바꾸고 있었다.

그래야만 아이템 판정을 받아 무한결투장에서도 마음껏 꺼내 쓸 수 있다.

지금쯤이면 성을 나서기 전에 부탁한 투척도끼와 대거들이 완성되었을 터다.

후우우우웅!

철두가 오식이를 타고 성으로 향했다.

*

"와, 그러니까 마나의 맹세를 하면 무조건 따를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잭의 말에, 반대쪽 의자에 묶여있던 마법사 브롤이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이 배신자 새끼! 네놈이 그러고도 무사할 성싶으냐!"

잭이 포로가 되어버린 마법사 브롤을 보고 히죽 웃으며 넌지시 말했다.

"잘 생각하게. 자네는 대마법사의 경지에 이른 것도 아니지 않은가? 죽으면 모든 게 끝이야."

"이익!"

그의 말대로다.

기사나 대마법사가 되어야 죽음 뒤에도 부활을 위한 도전이라도 할 수 있지.

지금 브롤의 수준은 그저 수련 마법사 수준이라, 죽으면 그대로 끝이다. 한 구의 시체가 되어 땅에 묻힐 뿐이다.

"어차피 자네의 선택은 정해진 게야. 감금되어 아티팩트를 만들어내는 도구가 되느니, 차라리 마나의 맹세를 하고 가신으로서 자유로이 사는 게 좋은 것 아닌가?"

"...."

잭의 설득에 브롤의 눈빛이 흔들렸고, 김진태는 그저 비켜서서 흥미롭게 지켜보며 응원만 했다.

'짜란다, 짜란다. 우리 짹!'

브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면 1000 주화를 준다고 보상으로 걸었더니, 저런 혼신의 연기를 펼치는 중이다.

"난 한 점의 후회도 없네. 아이언헤드 영주님은 필시 크게 되실 분이야! 브롤 그대 꿈이 궁정마법사였던가?"

"...."

"여기에 그 꿈이 있네!"

"무슨 개소리냐! 고작 성 하나 가진 영주의 시골 마법사가 되는 게 무슨 궁정...."

"어허! 우리 영주님이 이대로 천년만년 지낼 분이 아니시네! 아미르 왕국은 처음부터 왕국이었고, 제국은 어디 날 때부터 제국이었나?"

"무, 무슨...."

"아이언헤드령이 더욱 커지고, 번창해 왕국을 이룬다면. 이 영지에 첫 마법사가 된 그대는 무엇이 되는가?"

"그, 그런."

"개국공신일세! 왕실 마법사? 허, 궁정 최고의 대마법사 자리는 자네를 위한 것일세!"

"허!"

브롤이 다급히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시발, 당장 충성맹세할 뻔했네.

"시, 시간을 주게."

"암, 그래야지. 비참하게 죽을 목숨과 찬란한 미래가 걸린 결정인데, 고민할 시간은 있어야지."

"...."

어째 선택지가 편향되어있는 것 같지만, 잠깐 시간을 벌었다.

"고민이 길지 않았으면 싶네. 우리 영주님이 참을성이 그리 길지 않으시네."

가만히 지켜보던 김진태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앞으로 포로 심문이나 전향 작업은 무조건 잭에게 맡겨야겠다고 다짐하는 그때였다.

"진태! 여깄냐?"

지하감옥 문을 열고 들어서는 거한의 익숙한 목소리에 김진태가 반갑게 맞이했다.

"어! 왔어?"

"후후, 여기서 뭐 하냐?"

"아, 마법사 우리 편 만들기. 거의 다 넘어왔어. 마나에 대고 맹세하면 어길 수가 없대."

"호오."

그거 확실한 개목줄이군.

철두가 성큼성큼 다가와 의자에 묶인 마법사 브롤을 보았다.

고개를 치켜들고 철두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엔 두려움이 가득하다.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를 들으며 철두가 히죽 웃었다.

콰직!

"히익!"

철두가 냅다 지른 투척도끼질에 그를 묶고 있던 줄이 풀렸다.

"맹세해라."

"시, 시간을 주기로 했소."

"5초 주지."

"헙!"

"5."

"...."

"4."

철두가 도끼를 들었다.

"맹, 맹세하겠소!"

"3."

마법사 브롤이 식겁한 얼굴로 서둘러 주먹 쥔 손을 들어 엄지와 약지를 펼쳤다.

할짝.

엄지에 침을 묻혀 이마에 찍어 약지를 하늘로 향하게 했다.

"2."

"나 브롤은 마나에 맹세하노니, 아이언헤드령을 위해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파파파팟.

약지에서부터 시작된 빛이 마법사 브롤의 신형에 깃들었다가 사라졌다.

"후후, 됐군."

마법사 브롤이 질린 얼굴로 이제 마스터가 된 영주를 보았다.

"정말 날 죽이려 하였소?"

"당연하다."

"...."

"마법사야 또 구해오면 되지."

"...."

"후후후."

브롤이 침을 꿀꺽 삼켰다.

174화 두려움

영지에 드디어 마법사를 얻었다.

"우오! 이제 방어 타워 간다!"

"...진태. 그전에 해줄 게 있다."

"어, 뭔데?"

"뉴아 마을에 전진기지를 세울 거다."

"너무 멀지 않아?"

"계속 아이언헤드 성에서 싸울 수는 없다."

"하긴, 본진에서 계속 싸우는 것도 웃기지."

김진태가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은 생각이다.

위치도 나쁘지 않다.

이동마법진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5킬로미터 가면 아이언헤드 성이다.

불타버린 뉴아 마을은 이동마법진에서 북쪽으로 15킬로미터 부근.

나트롱 백작성에서 병력이 몰려오자면 뉴아 마을을 지나칠 수밖에 없는 위치다.

N344에 자리 잡은 나트롱 백작과 계속 반목하게 된다면 1차 방어거점으로 활용할 것이고, 관계가 개선되면 교역의 거점으로 쓰면 된다.

"잘됐다. 안 그래도 해보고 싶었는데."

김진태는 즉시 세력창을 열어 아직 시기상조라 생각해 구경만 했던 항목을 열었다.

<영토확장>

'벌써 멀티를 깔 줄이야.'

멀티 건물들을 쭉 살폈다.

<개척마을>

'이건 너무 본격적이고.'

마을부터 시작해 도시로까지 발전시킬 수 있는 항목이다.

진태는 마을 대신 군사시설 쪽으로 눈을 돌렸다.

감시탑, 훈련병영.... 요새.

감시탑은 주둔 병력이 너무 적다.

그보다 더 큰 병영을 지어도 되지만, 어지간하면 성으로서 기능하는 게 좋지.

"요새 짓자."

군사시설용 성이다.

아직 외성 축성 초기로 석재는 남아있다.

외성 건설이 좀 늦어지더라도 요새부터 짓는 게 나을 성싶었다.

아이언헤드의 '문화'가 다양하지 않아 건축 가능한 형태는 1개뿐.

<요새 건설>

필요 자원 - 석재 344, 목재 123....

필요 인력 - 건축가 3, 목수 2, 인부 80....

예상 소요시간 - 30일

"한 달 걸리네."

미친 듯이 빠른 속도지만 전쟁 중임을 생각하면 아쉬울 수밖에 없는 시간이다.

"괜찮다. 진행해라."

"알았어. 요새 건설은 나한테 맡기고, 너는 적이나 쓸어버려."

"후후, 그럴 생각이다."

진태와의 볼일은 끝났기에 철두는 곧장 대장간의 장소철을 찾았다.

"어이쿠, 영주님."

넙죽 엎드려 인사한 장소철이 다른 직업인들을 불렀다.

목수 할아버지부터 무두장이까지 여러 분야의 기술인들이 그간의 성과를 가져와 늘어놓았다.

"무기부터 보지."

"예에, 여기. 투척도끼와 대거입니다."

철두는 투척도끼 하나를 쥐었다.

손도끼로 쓰여도 훌륭할 투척 도끼는 무게 밸런스가 딱 맞았다. 도끼날의 옆에는 아이언헤드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좋군."

"일단 30자루를 만들었습니다. 제작도가 등록되어 이제 성의 어느 대장장이도 만들어낼 수 있으니, 소모품이라 생각하고 마음껏 쓰셔도 됩니다."

"후후, 좋아. 아주 좋아."

철두는 기껍게 웃으며 무두장이가 내미는 새로운 가죽 벨트를 찼다.

이것도 이제 아이템 판정을 받을 테니, 무한결투장에 입장하면 몸에 그대로 찰 수 있으리라.

꾸우, 꾹.

아직 질이 들지 않아 딱딱한 가죽벨트의 주머니에 도끼를 하나씩 넣었다. 허리춤에만 총 6개의 투척도끼가 매달렸다.

적에게 전리품으로 뺏은 롱소드를 차고, 젖꼭지를 가로지르는 두 줄의 대거벨트에는 8자루의 대거를 꽂았다.

"그리핀의 안장 개량형입니다."

"여기, 말 안장 또한 개량형이 나왔습니다."

"오! 오식이, 소나따."

파파파팟.

철두가 두 소환수를 소환했다.

바꿔 단 안장에는 투척 도끼를 보관하는 공간부터, 기다란 기창을 꽂아 고정해두는 곳도 있었다.

간단한 수납 가방들이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안장뿐만이 아니라, 마갑도 만들어져 있어 소나따의 가슴 부위와 투구까지 입혀놓고 보니 제법 전투마 태가 났다.

오식이도 가슴과 배를 가리는 보호구가 생겨 전처럼 화살에 애먹을 일은 없어 보였다.

보호구마다 아이언헤드의 문장인 X자로 교차된 도끼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후후후."

장비 업그레이드만큼 가슴 설레는 일이 또 어딨을까. 역시 장비빨은 중요하다.

"영주님. 그리고 새로운 도끼가 완성되었습니다."

장소철의 조수들이 낑낑거리며 들고 온 도끼를 보며 철두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완벽하군."

역시 장인 장소철이 만들어낸 도끼답다.

날개를 활짝 펼친 나비처럼 균형 잡힌 날을 지닌 양날도끼가 두 자루.

보통의 사람이라면 두 손으로 들어야 할 양날도끼를 철두는 한 손에 하나씩 들었다.

붕붕붕.

"후후후후."

마음에 든다.

특히 도끼날 옆면에 새겨진 문양들이 모두 철두 맞춤형처럼 느껴져 더욱 기분이 좋았다.

철두는 양날도끼를 인벤토리에 집어넣고는, 나머지 도끼 한 자루를 집었다.

창대처럼 긴 도낏자루, 그리고 커다란 도끼날이 달린 그것은 이제 거대도끼라고 부르기 어려웠다.

"앞으로 전신 갑옷을 입은 기사들을 상대할 일이 많으실 것 같아 핼버드로 만들어보았습니다."

"후후후."

한쪽에 외날의 도끼날이 있고, 그 반대쪽에 뾰족한 망치가 달려있다. 무게 밸런스가 잡혀있어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고, 뾰족한 저 망치는 갑옷을 깨부수기 제격이었다.

도끼날 위로 삐죽 솟은 창대는 적을 찌르기 좋아 보였고, 무게중심을 잡기 위해 창 꼬리에 달린 뭉툭한 철퇴도 마음에 들었다.

유사시에 핼버드를 반대로 잡고 휘두르면 훌륭한 둔기가 되리라.

"자네의 대장장이 기술은 이미 제국에 버금가는군."

"과, 과찬이십니다."

"아무렴. 제국보다는 더 나아야지."

철두의 말에 장소철이 넙죽 엎드렸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후후후, 고생했다. 내 이걸로 적을 깨부수고 오지."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그래, 후후, 아, 그렇지."

철두는 깜빡하고 있던 적의 전리품을 우수수 쏟아냈다.

"헙! 이게 무엇입니까?"

"적 선발대의 무장이다. 병사들 것으로 개조해라."

"아, 알겠습니다."

철두는 소나따를 역소환하고는 오식이의 등 위에 올라타 훌쩍 날아가 버렸다.

후우우웅!

다시 전쟁이건만 아이언헤드 성은 전보다 더 평온했다.

철두가 뉴아 마을 터로 돌아왔다.

온통 불타 재뿐인 그곳의 바로 옆에 IH 공격대의 둔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다녀오셨습니까?"

건방지지만 철두에게는 누구보다 깍듯한 구정욱이 대장의 귀환을 반겼다.

"별일 없나?"

"척후를 보내 정찰했는데, C614에 더 이상 적은 없습니다."

"흐음."

"직접 정찰에 나서시겠습니까?"

"오늘 밤에 나서겠다."

정찰만 하고 돌아오는 것보다는 역시 야습이지.

"알겠습니다."

철두는 새로 얻은 무기들을 휘두르며 개인 정비 시간을 가졌다.

후우우웅!

새 무기는 알게 모르게 무게나 길이가 달라 이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

"후후, 좋지. 덤벼라."

몸이 근질근질한 구정욱이 달려들었고, 철두는 적당히 상대해주며 구정욱을 요리조리 몰아붙였다.

철두가 한창 수련하는 사이 최준섭이 당도했다.

"유격대 100인 무사 복귀 신고드립니다."

"신병 608명 아이언헤드 성에 인계 완료하였습니다."

"좋아. 너도 덤벼라."

"헙, 넵!"

2:1의 대련이었으나, 여전히 철두의 공세 속에 최준섭과 구정욱이 힘겹게 막아내고 있었다.

그래도 손이 하나 더 늘었다고 간간이 반격이라도 가할 수 있었으나, 별 유효타격은 주지 못했다.

유격대와 공격대는 하나도 빠짐없이 구경하며 수다 떨었다.

"우리 대장이 그래도 대단하긴 하네. 영주님 상대로 간간이 공격도 넣잖아."

"허, 우리 공격대장이 더 낫지."

"야, 유격대장이 뺀질거려서 그렇지 실력은 진짜야."

"유격대장은 총대장한테도 발리잖아?"

"허, 이 시벌놈들이?"

유격대와 공격대가 아웅거리는 사이, 김진태도 당도했다.

"이야, 열심이네."

김진태는 철두가 싸우든 말든 함께 온 건축가들과 함께 터를 살폈다.

역시 괜한 곳에 뉴아 마을을 세운 것은 아닌 듯, 불타버린 뉴아 마을 터가 인근에서 가장 좋은 위치였다.

적당히 솟은 지형과 근처에 흐르는 작은 강물까지.

"여기로 합시다."

김진태가 홀로그램 맵을 띄우고 요새의 위치를 확정했다.

성문은 북쪽과 남쪽에 하나씩.

감시 타워는 북쪽에 두 개가 우뚝 솟은 형태다.

N344맵과 C614의 경계지역까지 관찰이 가능한 정도로 높이 설계되었다.

촤르르르륵.

자재를 쏟아내고, 공사가 시작되었다.

*

"후욱, 후욱."

"허억, 허억!"

가볍게 생각했던 대련은 어쩌다 보니 해가 질 때까지 이어져 버렸다.

노을이 깔린 저녁.

철두는 독하게 버틴 부하 둘을 흐뭇하게 보며 칼을 거둬들였다.

"배고프다. 밥 먹자."

"허억. 헉!"

"시발, 죽을 뻔했네."

대련의 종료를 고하는 철두의 말에 구정욱과 최준섭이 동시에 쓰러졌다.

"후후, 나약하군."

철두는 주머니에서 포션을 꺼내 던졌다.

꿀꺽, 꿀꺽.

"으으, 살겠네요."

포션을 마신 두 사람은 링거 맞은 숙취자처럼 되살아났다.

"언제 영웅 진입이냐?"

"전 조만간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른 와라. 거기서 수련하면 더 효과가 좋다."

"헙. 정말입니까?"

최준섭의 말에 철두가 씩 웃었다.

"그럼."

당연하지.

거긴 진짜 죽일 수 있거든.

죽기 싫으면 더 실력이 늘겠지.

"슬슬 야습 갔다 오마."

"어? 가십니까?"

"조심하십시오."

저녁에 산책 삼아 밤마실 나가듯 그리핀에 올라탄 철두가 북쪽으로 날아갔다.

*

5천의 병력이 사열한 채 단상 위의 비워진 사령관의 의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찰그락, 찰그락.

화려한 갑옷을 입은 사령관 우로사 남작이 단상에 올라 의자에 앉았다.

단상 앞에는 알몸의 사내 70여 명이 무릎 꿇은 채 엎드려 있었다.

"흐음."

턱을 괸 채 그들을 바라보던 우로사 남작의 입이 열렸다.

"왜 저 꼴들이냐?"

"모조리 뺏겼다 합니다."

"아니, 어째서 저리 살려 보냈단 말이더냐?"

"놈이 남작님께 전언을 남겼습니다."

우로사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보겠다는 신호다.

무장한 기사가 엎드린 알몸의 사내 하나를 툭 쳤다.

"히, 히익!"

십부장이던 사내는 자신이 지목되었음에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어찌 이 불경한 말을 우로사 남작의 면전에 전하랴?

"한 치의 보탬이나 뺌도 없이 고하라."

"...."

차아앙!

기사가 검을 빼 들었다.

"야, 야인의 진언을 고, 고하겠습니다."

십부장이 될 대로 되란 식으로 고래 소리를 질렀다.

"돌아가서 나의 말을 전하라!"

침을 꿀꺽 삼킨 알몸의 십부장이 다시 소리쳤다.

"내 땅을 넘보는 자! 모조리 죽을 것이다!"

"...."

보고가 끝나자 침묵뿐.

5천이 넘는 사람이 모인 자리엔 적막뿐이라 십부장은 자신의 심장소리가 군영 전체에 울려퍼지는 것만 같았다.

"쯧."

사령관의 의자에 앉아있던 우로사 남작은 못마땅한 얼굴로 지휘봉을 까닥거렸다.

단상 아래에 있던 기사는 빼 들고 있던 검을 그대로 휘둘렀다.

촤아아악!

투욱.

비명도 지르지 못한 알몸의 십부장의 목이 떨어졌다.

"히이이익."

목숨을 건졌으나, 무기고 갑옷이고 옷까지 모조리 뺏겨 돌아온 병사들이 벌벌 떨었다.

그들을 바라보던 우로사 남작이 눈을 감았다.

'야인이라 무시할 게 아니구나.'

전략을 아는 놈이다.

'교활한 놈.'

놈이 노린 건 고작 100명 분량의 약탈품 따위가 아닐 터다.

그래, 공포.

녀석은 지금 나의 군영에 공포를 심어 놓기 위해 포로로 잡지 않고 적들을 자비롭게 돌려보냈다.

'클클, 재밌구나.'

저들을 군영에 섞어 둘 수 없다.

독이 퍼지기 전에 솎아내야지.

휘릭.

지휘봉을 대충 휘둘렀다.

촤아아악!

"끄아아아!"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이 70여 명의 알몸 병사들의 목을 쳤다. 그 끔찍한 학살에 5천의 병사들은 두려움을 느꼈다.

다만 그 대상은 야인이 아니라, 우로사 남작이었다.

독도 잘 쓰면 약이 되는 법이다.

175화 전술의 꽃

"저기군."

철두는 전보다 더 큰 진채를 꾸리고 있는 적을 가만히 살폈다.

지르골의 부대보다 그 수가 몇 배는 많아 보였는데, 막사에 들어가 있다 보니 추정이 어려웠다.

다만, 늦은 밤임에도 경계병의 수가 많고, 또 하늘을 향한 경계도 게으르지 않았다.

"쳇, 금방 들켰군."

바람의 정령이 소리를 감추어 주고, 그리핀은 높이 날고 있는데도 들켜버렸다.

분주해지는 적의 진채를 보며 철두는 급강하를 시전했다.

쇄애애애액!

들킨 이상 괜히 바람의 정령을 써서 소리를 감출 필요도 없다. 모든 마력을 모아 준비했다.

후우우웅!

엄청난 속도로 내리꽂히던 그리핀이 날개를 활짝 펼쳐 브레이크를 걸었다.

훅하고 압박하는 중력을 참아내며 모아둔 마력을 일시에 터트렸다.

화르르르륵!

진채의 곳곳을 밝히는 화톳불이 일시에 화악하고 커졌다.

훼에에엥.

사나운 돌개바람에 의해 커진 불길이 진채 전체를 감쌌다.

화르르르륵.

뜨거운 열기로 인해 주변이 한순간 확 건조해졌다.

마지막 한 줌의 마력까지 빼어낸 철두를 태운 그리핀이 다시 고도를 높였다.

"후우우."

0%로 비워진 마력으로 인해 잠깐 찾아온 탈력감과 나른함을 추스르곤 적을 살폈다.

"제법이군."

적의 둔영에 치솟았던 불길이 금세 사그라들었다.

여기저기 봉긋 올라온 보호막의 숫자만 봐도 열두 개.

적어도 12명 이상의 마법사가 적의 부대에 있다.

"쳇, 재미없군."

아까운 마력을 모조리 쏟아냈으나 큰 유효타격은 주질 못했다.

끽해야 막사 몇 개가 탔고, 적의 보급품 일부가 불탄 정도. 인명피해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끼기기기긱.

철두는 활을 꺼내 시위를 매겼다.

목수 할배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준 각궁.

피이잉!

다시 조금 차오른 마력으로 부린 정령의 힘을 더해 날아간 화살이 적 기사를 노렸으나....

즈으으응.

적 진영에 가까이 다가가자 화살의 속도가 훅 줄어들었고, 기사는 그런 화살을 너무 쉽게 칼로 쳐냈다.

하늘을 주시하고 철두가 쏘아내는 화살에 집중하고 있으면 누구도 맞지 않을 공격이다.

철두는 활대에 걸린 줄을 풀었다.

더 해봐야 괜한 힘 낭비다.

"제법이군."

야습이 전혀 먹힐 것 같지 않다.

그나마 적의 수준이나 병력을 확인해 '정찰' 정도의 성과는 있기에 다행.

"좆됐군."

만만찮은 놈들이 걸린 것 같다.

하긴, 지르골이 졌는데 그놈보단 더 센 놈을 보냈겠지.

철두는 빠르게 뉴아 마을 터로 돌아왔다.

"어땠어?"

사안이 중하기에 야밤에도 공사를 진두지휘 중인 김진태와 부대장들이 모였다.

"만만찮은 놈들이다."

철두는 자세한 정찰 경과를 공유했다.

"와, 사오천 정도 병력에 마법사 다수네요. 기사는요?"

"좋아 보이는 갑옷 입은 녀석들만 추려도 30이 넘어 보였다."

"...."

철두의 말에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기사라면 최소 못해도 랭커급이란 소리다.

그런 자가 무려 서른이 넘는다.

여긴 강철두를 제외하면 구정욱과 최준섭 둘뿐이다.

새삼 자신들이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 실감이 났다.

철두는 조용히 경청만 하는 잭을 보았다. 회의 전에 소통의 비약을 먹었기에 죄다 알아들었을 것인데 아무런 말이 없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

"예?"

"작전 같은 건 없냔 말이다."

잭이 어깨를 으쓱했다.

"우로사 남작이라고 했지요. 그럼 그 정도 병력도 이해 못 할 수준이 아닙니다."

철두가 혼내버린 뒤 알몸으로 쫓아버린 선발대가 분명 우로사 남작의 진언이라며 최후통첩을 전했었다.

"우로사 남작은 나트롱 백작군의 총사령관. 5천이라면 병력의 거의 대부분입니다. 성에 남은 병력은 3천도 되지 않을 겁니다."

그럼, 지르골의 부대까지 있었던 옛날을 생각하면 1만의 군대를 보유한 영주라는 소리다.

"백작이 1만 군대라...."

"나트롱 백작령은 부유한 영지입니다. 백작은 대지주이자 대농이지요. 어지간한 경제력으론 어림도 없기에, 다른 제국 백작들 중에도 1만 군대를 보유한 자는 몇 없습니다."

"흐음."

철두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작전 없냐니까."

"...병력 차이가 너무 큰데 어떤 작전이 있겠습니까? 다만 좋은 소식도 있습니다."

"오, 말해봐."

"우로사 사령관의 군대가 나트롱 백작의 주력부대이니, 그의 부대만 격파하면 이 전쟁은 사실상 승리나 다름없습니다."

철두가 피식 웃었다.

"당연한 소리를 거창하게 하는군."

철두는 긴장한 기색의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모두가 걱정 가득한데, 구정욱만이 조금 다른 표정이었다.

마치 덤빌 테면 덤벼보란 듯이 콧구멍을 벌름거리고 있다.

겁도 나지만, 쫄 것도 없다는 듯 스스로에게 잔뜩 용기를 불어넣는 모습.

"후후, 오우거의 구슬이 허투루 쓰이진 않았군."

"말만 하십시오! 따를 준비가 되었습니다."

"좋다!"

철두가 냅다 회의 테이블을 탕 두드렸다.

"작전은 간단하다."

"오! 무엇입니까?"

모두가 기대 어린 표정으로 보고 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진격한다."

"이 병력으로 말입니까?"

"그래."

지금 여기에 모인 병력이라고 해봤자, 공격대 유격대 합쳐 200이 전부다.

"증원이 더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럼 피해만 더 늘어난다. 우린 적을 괴롭히러 간다."

"아!"

최준섭이 철두가 그리는 큰 그림을 어렴풋이 알아챘다.

"게릴라 작전입니까?"

"...? 그냥 싸우러 가는 거다."

철두가 비죽 웃었다.

"힘이 다할 때까지 싸우고, 지치면 도망치고 회복하면 다시 싸운다."

"...."

그게 게릴라 전술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으나, 최준섭은 분위기상 입을 다물었다.

"좋은 작전입니다."

"좋아. 오늘 충분히 쉬어둬라."

"예!"

아이언헤드의 병력은 대부분 신병이다.

제대로 게릴라 전술을 써먹자면 지금 200의 병력이 최선이다.

"내가 최대한 요새 공사 서둘러볼게."

"여기까지 밀리면 어차피 진 거다."

요새를 서둘러 건설해서 적을 맞이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차라리 아이언헤드 성에서 적을 맞이해 수성전을 하는 게 더 낫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지."

200의 병력은 하루를 푹 쉬고, 아침 해가 뜨자마자 북쪽으로 진격했다.

두두두두두.

점심을 먹을 때쯤 N344맵의 경계를 넘었다.

거기서 2일을 더 진격하자 적과 조우할 수 있었다.

"준섭이, 구 씨."

"네, 대장."

"준비됐습니다!"

"절대 중심으로 들어가지 마라!"

철두는 부하들을 많이 잃고 싶지 않았다.

"옛!"

"돌려 깎기 하겠습니다."

보급받은 화살은 충분하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날씨지만, 습하지 않아 활을 걸기도 좋은 날이다.

"그럼 가자."

소나따의 등에 올라탄 철두의 구령에 맞춰 200의 병력이 돌격했다.

이제 막 행군해온 적의 군세는 5000.

두두두두두.

"사령관! 적의 부대가 돌격을 시작했습니다."

"터무니없는 놈이로군."

우로사 남작은 적을 높이 평가했다.

심리전을 아는 자이며, 전략에도 밝은 자라 생각했다.

사흘 전 기습은 제법 참신했다.

하지만, 지르골의 부대가 어찌 당했는지 파악이 끝난 그가 그런 야습에 또 당해줄 리가 만무하다.

동원된 마법사만 15명.

백작령에 의탁하는 마법사들의 절반이 넘는 수다.

터무니없는 수준의 정령 마법을 쓰는 놈이지만, 이 정도 마법사의 숫자면 어렵지 않게 대응할 수 있다.

두두두두.

"사령관. 적이 곧 당도하옵니다."

"호들갑 떨 것 없다. 방어진을 펼쳐라."

"예에, 사령관!"

방어진의 중심.

공성차처럼 움직이는 지휘단 위로 올라섰다.

전장이 한눈에 보인다.

쏴아아아아아.

접근한 적 기병들이 단단한 방패진을 보곤 감히 돌격하지 못하고 좌우로 갈라지며 화살을 쏘아댄다.

"후후, 소용없는 짓이니라."

우로사 남작군.

나트롱 백작의 주력군이자, 수비군.

그들의 별명은 궁병 잡는 부대.

움직이는 요새.

튼튼한 방어진을 세우고, 웅크린다.

돌격해 오는 적을 분쇄한다.

적의 화살 공격?

그것이야말로 소용없는 짓이다.

휘장 효과 : 화살 방어 (3)

휘장 중에서도 레어급 휘장 효과.

그것도 강화를 거듭해 무려 3단계의 화살 방어 효과가 있다.

적의 화살 공격은 떨어지는 가랑비만 못한 존재다.

틱, 티디디딕.

여기저기 병사들의 갑옷이나 투구에 부딪혀 떨어지는 화살 소리에 기분 좋게 웃었다.

"하하하, 오늘도 적들이 알아서 보급해주는구나."

"대응 사격 시작하겠습니다."

"일선 장교 재량에 따르라."

"네, 사령관!"

우로사 남작의 명에 방패병 뒤에 대기하고 있던 궁병들이 잰 화살이 장교의 지휘봉의 방향을 향해 힘차게 쏘아졌다.

쏴아아아아아!

궁기병들이 날린 화살은 아군진영에 당도하자마자 힘을 잃고 떨어져 버리고, 진영에서 쏘아낸 화살은 적을 향해 힘차게 내리꽂힌다.

"후후후."

수성의 달인.

방어의 명장.

우로사 남작.

하지만 그의 부대는 성이 없어도, 성과 같이 견고하다. 바위와 같이 단단하게 버티고 있으면, 달려온 적은 알아서 깨지고 터지는 계란과 같은 운명이 될 터다.

쏴아아아아.

적 기병이 접근할 때마다 서로 화살을 주고받았으나, 피해는 아이언헤드 쪽의 기병들뿐이었다.

세 번 정도 돌격과 후퇴를 반복하던 적 기병대가 한데 모였다.

"끌끌끌, 돌격이라도 하려는가?"

우로사 남작은 시야가 훤히 내보이는 지휘단 위에서 적들을 보며 즐겁게 웃었다.

어찌할 테냐?

나를 이대로 실망시킬 테냐?

너의 다음 전략은 무엇이냐?

야인이여.

그때 적 진영에서 거대한 뭔가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허, 투석이라 봤자 마법사들이 막...."

적 기병대에서 갑자기 투석 공격?

투석기도 없이?

마력대포도 없이?

날아오는 돌덩이를 보는 우로사 남작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무, 무슨!"

돌이 아니다.

사람이다.

그것도 심지어 적 대장.

몽타주가 일치한다.

"우어어어어어!"

쩌렁쩌렁한 함성과 함께 떨어져 내리는 그를 보며 마법사들이 서둘러 방어막을 전개했다.

쯔아아앙.

"후아아아."

긴 함성과 함께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 야인대장이 거대한 핼버드를 꺼내 들어 방어막을 찧었다.

꾸아아앙!

"쿨럭!"

마법사 하나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가 유지하던 방어막이 산산조각 나며 야인 대장이 진영의 가운데 떨어져 내렸다.

쿠우우웅!

그가 디딘 주변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거렸다.

어느새 그의 두 손에는 양날 도끼가 한 자루씩 들려있었다.

"후후후."

철두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지휘단에 시선을 고정했다.

저기구나. 적 대장.

마침 우로사 남작도 철두를 보고 있었다.

"무, 무슨 속셈이냐? 이건 무슨 전술이냐!"

"후후, 오천 대 일이다."

전술은 개뿔.

"다 덤벼라!"

철두의 양날 도끼가 미친 듯이 춤추기 시작했다.

176화 전쟁 보고

휴먼 채널

- 그래서 강철두랑 사토랑 싸움은 어떻게 된 거야?

- 강철두가 이겼다던데?

- 누가 그래?

- 미국.

- ???? 한국과 일본이 싸웠는데 미국이 심판 봤나?

- 비슷하지 않을까? 블랙드래곤 피셜임.

- 거기 제임스가 대장으로 있는 용병대잖아.

- 뭐가 어떻게 된 거야?

- 한국이랑 일본은 왜 침묵하고 있는 거야?

사토 키요시는 분명 결과를 밝혔다.

발 빠른 기자는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고, 노바 행성에서 일본 최대 도시인 사쿠라시티에도 기자는 있었다.

기자의 접근과 질문에 사토는 담담하게 밝혔다.

"나의 완패다. 그와 같은 인류라는 것이 영광스러울 지경이다. 경지에 이르기까지 그가 얼마나 뼈를 깎는 노력을 했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사토 개인의 감정이 어떻든 간에 일본은 이것을 용인할 수 없었다.

국가가 그랬고, 언론이 그랬으며, 국민이 그랬다.

다들 쉬쉬하다 보니 인터넷에도 극단적인 몇몇의 반응 외에는 없었다.

- 일본놈들 이렇게 잠잠한 거야 그러려니 해도, 우리는 뭐함? 강철두 인터뷰도 없나?

- 지금 철두성 바쁨.

- 거기 청주 포탈에서 말 타면 두 시간도 안 걸린다던데 후딱 갔다 오지. 기자 쉑들 머하냐?

- 발로 뛰는 기자는 한국에 없습니다.

- ㅋㅋㅋ 철두성 지금 전쟁 중임. 진짜 바쁨.

- 니가 가라 병신들아. 거기 가면 뒈질 수도 있음.

- 아니, 우리나라는 종군기자 없냐? 전쟁 실황중계 이런 거 없음? 존나 궁금하네.

어느 인터넷 커뮤니티나 그렇듯 대화 주제는 순식간에 넘어갔다.

휴먼 채널의 한국 게시판도 다르지 않았다.

금세 강철두와 사토의 대결 결과에서 전쟁 결과로 관심이 옮겨갔고, 번역기능을 제공하는 휴먼 채널답게, 한국 게시판의 내용에 관심을 기울이는 외국인들도 꽤 되었다.

- 미친놈들이군. 중과부적이야.

- 맞아. 저 지역도 이제 끝이군.

- 아직 지구의 마을은 이계인들을 대항할 수 없다.

- 우리 중국도 뼈아픈 실책으로 도시 둘을 잃었지.

- 친하게 지내면 안 되는 거야?

- 조센징들은 고개를 숙일 줄 몰라.

- 언제나 부딪히지.

- 싸움닭이야.

- 노바 정세에 저런 포지션으론 롱런할 수 없는 것.

- 잠깐의 굴욕을 감내하고 숙일 건 숙여야 한다.

- 일본과 사쿠라시티와 레온 자작성과의 교류는 와신상담의 좋은 예.

- wow 친구들 한국의 터프가이들이 제국의 백작과 전쟁 중이래.

- 소식이 늦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구

- 뭐야? 나만 몰랐던 거야?

- 교전이 일어난 지는 꽤 되었음. 1차 침공은 아이언헤드의 성공적인 방어로 승.

- lol 좀 치는데.

- 최신 소식 아이언헤드 200 병력이 나트롱 백작령으로 진격.

- 와, 남자군. 적병은 몇 명이래?

- 3천 이상.

- 뭐야? 위에 놈 구라야. 한국에도 그런 소식은 없어.

- 당연하지. 이건 우리 쪽 정보니까.

- 우리 쪽? 지금 미국인이 거기 가 있단 말이야?

- 자세한 건 노 코멘트.

*

콰콰쾅!

철두의 쌍도끼가 춤춘다.

"막아! 막으라고!"

적 기사들이 서른이 넘는다 하나, 그들이 모두 한데 모여있는 것은 아니다.

기사단이 아닌 이상 대부분 중간 간부의 역할을 하는 것이 기사. 그들은 각자의 부대를 이끌고 진영의 곳곳에 있었다.

"크억!"

그 말은 지금 저 앞의 기사 넷만 베면 우로사 남작이 지척이라는 거다.

"흥, 지나갈 수 없다."

캉, 카아앙!

우로사 남작의 호위기사는 실력이 대단했다.

최소 레벨 4 수준의 검술을 지닌 자이지만 철두의 거력이 담긴 도끼를 막아내는 데 급급해 보였다.

콰직!

"끄윽."

도끼는 두 자루나 되고, 검은 하나니 어지러이 방어에 전념하다가 그만 어깨에 날이 파고들었다.

콰직!

나머지 도끼가 다시 목을 치니, 기사 하나가 허망하게 죽고 말았다.

"이노오옴!"

다른 기사 둘이 덤벼들었다.

2:1이지만 상대 못 할 바는 아니다.

조금 더 어울려주며 도끼 숙련도의 상승이나 노릴까 싶은 유혹이 들었지만, 지금 적장을 놓치면 부하들의 희생이 클 터.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한다.

화르르르륵!

상대가 둘이듯 철두 또한 혼자가 아니다.

내딛는 걸음마다 땅의 정령이 움푹 함정을 파며 장난질을 하고, 시야를 가리는 불길에 기사들이 곤혹스런 모습이었다.

마법사들이 급히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지만, 작은 틈을 놓치지 않은 도끼가 이미 적의 목을 떨어트리고 난 뒤다.

철컥!

투구째 우그러져 머리통이 깨진 녀석이 빛으로 사라졌다. 목이 반쯤 잘려 덜렁거렸으나 즉사하기엔 충분한 공격. 그 또한 빛으로 사라졌다.

"파이어볼!"

뒤늦게 도착한 마법사들이 부랴부랴 불덩이를 날렸으나.

퍼엉!

바람의 정령이 펼쳐낸 방어막에 막혀 철두의 터럭 하나 태우지 못했다.

후우우우웅, 콰직!

마법 한번 날려주고 그들이 대가로 받은 건 투척 도끼.

정수리에 박힌 투척 도끼로 인해 유언 하나 남기지 못하고 털썩 쓰러졌다.

콰직, 콱!

지팡이 든 놈이 보이는 족족 도끼를 던졌다.

급히 달려온 두 녀석은 빛으로 사라졌는데, 멍청하게 그냥 방어막만 펼치고 있던 세 녀석은 정수리에 도끼를 매단 채 시체로 남았다.

랭커도 안 되는 마법사라도 일단 모조리 전쟁에 동원한 모양이다.

더 다가오는 마법사나, 실력 좋아 보이는 이는 없다.

철두는 그사이 진영 반대쪽으로 허겁지겁 물러난 우로사 남작을 찾았다.

"게 서라!"

퍼억!

철두가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치솟은 철두의 신형은 10만 전자의 열망을 담은 그래프처럼 솟구쳤다가, 불황이 찾아온 코스피처럼 처박혔다.

콰아아앙!

엄청난 고공 점프와 낙하로 인한 대미지로 주변이 흔들흔들거렸다.

"이, 이노오오옴!"

철두는 소리치는 적장의 얼굴을 그제야 볼 수 있었는데, 드문드문 흰 수염이 섞인 장년의 장수였다.

"후후, 전쟁을 끝내자."

"흥! 가소롭도다!"

자신 있게 소리치는 것 치고는 뒤로 물러난 우로사 남작 대신, 반질반질한 은빛의 갑옷을 입은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나 리에나가 그대를 상대하겠다."

"덤벼라. 계집."

"...."

리에나는 철두의 모욕을 침묵과 찌르기로 답했다.

차아아앙!

'쾌검이군.'

눈 한번 깜짝할 사이에 무려 다섯 번의 찌르기가 들어왔다. 명인의 경지 그 안에서 나누고자 하면 상대는 명인 중의 명인이리라.

레벨 5의 경지가 있다면, 녀석은 그 코앞까지 다다르지 않았을까?

"...."

놀란 건 철두만이 아니었다.

우로사 남작의 대전사 리에나 역시 자신의 공격을 태연하게 막아내는 철두를 보며 눈을 빛냈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붙잡고 상대해주고 싶지만, 남작을 무사히 지키는 것이 그녀의 의무.

개인적인 무예에 대한 욕심으로, 의무를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츠츠츠츠츳.

리에나의 검에 푸르스름한 광채가 맺혔다.

심상찮음에 철두가 먼저 공격에 나섰다.

"하아아압!"

촤아앙!

철두의 도끼가 리에나의 허리를 양단할 듯 휘둘렀고, 리에나의 검이 도끼를 막아서기 위해 진격했다.

'도끼로 쳐내고, 다른 도끼로 놈의 머리를 노린다.'

도끼가 맞부딪히는 순간, 뇌가 내린 명령을 거부한 몸이 위기를 감지하고 먼저 움직였다.

스컥!

오싹한 기분에 도끼를 놓아버렸는데, 놀랍게도 두꺼운 쇠도끼가 리에나의 검이 휘두른 궤적에 따라 깨끗하게 잘려버렸다.

'놓지 않았으면 손목이 잘렸으리라!'

철두는 서둘러 인벤토리의 검을 빼어 들어 도끼와 검 쌍수무기를 들고 뒤로 훌쩍 물러났다.

촤아아악!

"끄으으으."

운 없이 그곳에 있던 병사들이 철두의 검과 도끼에 잘려 쓰러지며 분분히 뒤로 물러났다.

저벅, 저벅.

리에나는 승기를 잡은 맹수처럼 천천히 걸어왔다. 그녀의 검에는 아직도 은은한 광채가 서려 있었다.

"후후, 재밌군."

철두는 오싹한 긴장감에 저도 모르게 웃었다.

이거 좆될 수도 있겠군.

성공적으로 도망칠 자신이 없다.

리에나의 검에 목이 잘려 죽는 오식이의 모습이 눈에 훤하다.

'승부를 본다.'

철두는 남은 마력의 양을 가늠해보았다.

57%

충분하다.

저것이 마법검인지 나발인지 모르겠지만, 정령의 힘이라면 대응 가능하지 않을까?

"와하하하하, 야인 놈아! 리에나 경은 무패의 기사다!"

리에나는 의연한데 경박스런 웃음은 그녀의 뒤에 멀찍이 서 있는 우로사 남작의 입에서 나왔다.

잠시나마 식겁했던 그는 그 반동이라도 되는지, 철두를 한껏 조롱했다.

"지금이라도 내 앞에 무릎 꿇고 용서를 빌면, 네놈을 내 봉신으로 삼아주마!"

이놈이나 저놈이나 봉신 타령이 아주.

제국 놈들은 다단계를 너무 좋아한다.

"후후."

철두는 내심 선조의 혼이 있다면 리에나의 기운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별수가 없다.

이미 멸망해버렸을 발할라에 다시 가는 게 아니라면 선조의 혼을 찾을 길은 요원하다.

'도와라.'

철두의 명령인 듯 부탁인 듯한 의지에 정령들이 앞다투어 무기에 달라붙었다.

화르르륵.

선착순 두 정령.

검에는 불의 정령이 깃들었고, 도끼에는 땅의 정령이 깃들었다.

어디 바위처럼 단단한 이 도끼도 잘라낼 수 있는지 보마.

리에나는 정령이 깃든 무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와라."

"후후후, 간다."

리에나의 도발에 철두가 몸을 날렸다.

꽈앙!

'버틴다.'

은은한 광채가 서린 리에나의 검과 철두의 도끼가 맞부딪쳤으나 도끼는 이번엔 버텨냈다.

다만.

37%

한 번의 부딪힘에 마나 20%가 증발해버렸다.

'앞으로 세 번.'

세 번의 공격만 막아내도 정령은 역소환된다.

그들이 활동하는 에너지 근간은 철두의 마력이었으니까.

철두는 리에나를 노려보다가 그 너머의 우로사 남작을 보았다.

"우어어어어어!"

냅다 지른 전투함성과 함께 다시 리에나에게 달려들었다.

화르륵, 쾅!

21%

이번엔 16%가 날아갔다.

전력으로 부딪히지 않았다.

공격하는 척하며 날아가 공방을 교환하곤 두 사람의 위치가 바뀌었다.

그리고.

"흡! 무슨!"

철두는 리에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우로사 남작을 향해 냅다 달렸다.

'바람!'

파파파팟!

철두의 걸음에 더해 등 뒤에서 밀어주는 바람의 정령의 힘이 합쳐지자 엄청난 질주가 펼쳐졌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우로사 남작이 훅 가까워진다. 겹겹이 가로막힌 병사들의 장벽은.

콰콰쾅!

들소처럼 들이받으며 분쇄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게 서라!"

리에나가 급히 돌아왔으나 이미 거리가 벌어진 뒤다.

급한 그녀가 손에 쥔 장검을 투창처럼 집어 던졌다.

쇄애애액.

그 다급한 행동에 오히려 철두는 미소지었다.

'맞는 모양이군.'

대전사라 했으니 봉신이겠지.

봉신의 대가로 어떤 리스크를 짊어졌을까?

철두는 그 검이 닿기 전에 냅다 우로사 남작을 향해 도끼를 내리찍었다.

콰직!

"끄으!"

땅의 정령이 깃든 도끼.

바위의 힘이 담긴 도끼가 우로사 남작의 투구를 반으로 가르고, 머리통을 쪼갰다. 그러고도 여력이 남아 몸통을 수직으로 절단해버렸다.

콰직!

"흡."

그와 함께 등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에 철두가 고개를 내려보니, 배를 비집고 삐죽 튀어나온 검날이 보였다.

슬쩍 뒤로 돌아보니, 어느새 코앞까지 당도한 리에나 경의 신형이 연기처럼 흩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후후후."

목숨 담보 봉신 아니었으면 좆될 뻔했네.

177화 5000 vs 1

블랙드래곤 용병단.

미국을 대표하는 노비스 단체인 이들은 마이클시티에 거점을 마련하고 있었다.

5일에 한 번씩 열리는 용병단의 정기회의 시간.

단장 제임스는 선언하듯 소리쳤다.

"난 한국에 가야겠어."

"뭐? 한국에는 왜?"

"후후, 멘토를 만나버렸지."

"대장, 또 무슨 개 같은 소리야?"

"스미스. 생각해보라구. 셋이서 덤볐는데도 깨졌다구."

"원팀이 아니면 오히려 서로 방해될 뿐이야."

"무슨 소리야? 우린 원팀이었어."

"그 일본인과 사우스코리안과?"

"그래. 밤낮없이 일주일간 싸웠다고. 호흡이 안 맞을 수가 없어. 우린 서로 눈빛만 보고도 뜻이 통할 정도가 되었지."

스미스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제임스. 사람은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집중력을 유지할 수 없어. 거짓말하지 마."

"후, 좋아. 맞아. 사실 쓰리 데이 정도였지."

"데엠. 그것도 과장이 심해."

"아니, 이건 맞아. 그 대신 우린 번갈아 가며 쉬었지. 둘이 상대하는 시간도 길었다고."

"말이 안 돼. 상대는 혼자서 3일을 버텼다는 거잖아?"

"버텨? 아니야. 버티는 게 아니라 우릴 가지고 놀았다고."

"하! 아무튼. 허풍도 정도껏 해."

"허풍 같겠지. 근데 진짜니 내가 뻑이 가지."

제임스는 회의에 모인 블랙드래곤 용병단의 간부들 14인을 보았다.

블랙드래곤의 휘장은 15개.

이들 모두 휘하에 적게는 10명에서 많게는 100명까지의 병력을 두고 있다.

15개의 용병대가 모여 블랙드래곤이라는 거대한 용병단을 이루고 있다.

블랙드래곤 용병단의 단장이 제임스이긴 하지만, 그 권한이 절대적이진 않다.

용병단의 큰 운용 방향에 관한 결정은 다수결로 정한다. 15개의 표로 블랙드래곤이 움직인다.

"어쨌든 난 갈 거야. 아, 이건 개인적인 일이니까 회의 안건으로 올리자는 게 아니야."

"그럼?"

"다음 단장을 선출했으면 해."

"뭐? 무슨 개소리야?"

"난 깨달아버렸어. 내 부대원들 추스르기도 벅차. 용병단장은 더 이상 내가 감당할 수 없어."

"제임스. 의무를 저버리려고 하지 마."

"맞아. 네가 아니면 누가 한다고 그래?"

"우리 모두 본래는 한 팀이었어. 겨우 20명이던 용병대가 용병단이 된 데엔 제임스 네 역할이 절대적이야."

"난 할 만큼 했어. 사퇴할 거야."

"허, 무슨 개 같은."

"피하지 마!"

많은 간부들이 제임스의 무책임함을 성토했으나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어이, 그만들 하라고. 하기 싫다는데 왜 그래?"

"허, 볼튼. 단장 자리가 욕심나나 봐?"

"무슨 개 같은 소리야? 다들 제임스에게 짐을 미루지 말라는 소리야."

"위하는 척. 자리가 욕심이 난 거겠지."

금세 소란스러워진 실내에 제임스가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내리쳤다.

파앙!

"...!"

모두의 시선이 제임스에게로 모였다.

장난기 많던 표정은 사라졌다.

진지한 얼굴의 제임스가 말했다.

"내 자유를 침해하려 하지 마."

"책임감의 문제야."

"내가 용병단을 떠나겠다는 게 아니잖아? 내게도 성장의 시간을 달라고. 단장의 업무와 병행할 수 없어."

지지부진 막혀 정체기에 왔다고 생각한 제임스다. 헌데 하늘 위의 하늘을 보았다.

무한결투장에 다녀온 뒤, 내리 2일을 잠만 잤다. 다음 무한결투장이 5일 남았지만, 그때까지 도저히 기다릴 수 없었다.

"다음 단장으로 나오고 싶은 사람은 거수해."

슬쩍 서로를 쳐다보는 그들의 눈알엔 머뭇거림이 가득했다.

"좋아. 난 스미스와 볼튼을 추천하지. 더 있어?"

"단장!"

"제임스!"

추천받은 둘이 소리질렀으나, 제임스는 피식 웃었다.

"둘 중 누가 해도 잘 할 거야. 거수하자. 당사자들은 빠지지. 13표로 정하자. 스미스가 단장에 어울린다 손들어."

제임스는 손을 든 사람들을 보곤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곱이군. 좋아. 스미스가 다음 단장이야."

"이게 무슨!"

"잘 부탁해, 친구. 난 그럼 한국에 다녀오지."

"제임스! 제임스!"

제임스는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맥커리 가자!"

"예, 대장."

제임스의 직속 용병대 30명이 따라붙었다.

두두두두.

마이클시티와 멀지 않은 이동마법진에 도착한 그들은 준비된 좌표석을 꺼내 들었다.

아이언헤드성 근처의 마법진으로 향하는 좌표석이다.

모두 해서 10개.

"10명이 먼저 가고, 좌표석을 추출해 돌아와서 10개를 전할 거야. 오케이? 지금이라도 내키지 않는 사람은 말해."

"제임스. 우리가 굳이 마이클시티를 벗어날 이유가 없어. 미국에서도 강해질 기회는 많아."

"멍청한 소리 하지 마."

제임스의 생각은 확고했다.

"조를 짜서 몬스터 사냥 따위를 해서는 더는 강해질 수 없어. 진짜 강함이란 그런 게 아냐."

그건 사냥이지 싸움이 아니다.

제임스는 느껴버리고 말았다.

"거긴 가장 거친 전쟁이 벌어지는 곳이야. 최전선이란 말이지. 그리고 거기에 가장 강한 사내가 있어! 가지 않을 이유가 없지."

진정한 전사는 사냥터가 아니라 전쟁터에서 태어난다.

제임스는 깨달아버린 거다.

"우리의 수준을 한 단계 더 올려 줄 거야."

"좋아. 가자."

"그래, 제임스 말 들어서 손해 본 건 없잖아?"

의견이 모였고, 제임스 용병대의 선발대 10명이 좌표석을 나눠 가졌다.

<주화 670개를 소모하여 좌표 C614로 이동합니다.>

파파팟.

10명의 사람들이 눈 깜빡할 사이에 확 변한 풍경의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후우, 벌써 전장의 냄새가 나는 것 같군."

제임스는 웃으며 이동마법진 기둥에 주화를 기부하고 좌표석을 추출했다.

모두 초행인 10명이 각 1개씩의 좌표석을 추출해, 맥커리가 쥐고 다시 마이클시티 좌표석으로 건너가 동료에게 건네주었다.

파팟.

동료 10명이 다시 오고, 나머지 10명이 다시 왔다. 그들마저 좌표석을 추출하자 수중에는 10개의 C614 좌표석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제 31명의 제임스 용병대는 주화만 있다면 마이클시티와 아이언헤드성 사이를 오갈 수 있게 되었다.

"후, 좋아! 가보자고."

상당히 개방적으로 정보를 공유하는 NITO였기에, 청주 포탈존인 C614 지역에 대한 대강의 위치 정보는 찾아보면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동쪽으로 가면 아이언헤드 성이야."

한참 이동한 그들은 곧 철두의 출동 소식을 들었고, 뉴아 마을까지 당도했다.

"어? 누구? 제임스? 블랙드래곤?"

"예스, 나이스투미츄."

시종장 김진태는 뜬금없는 사람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깜짝 놀랐고, 이내 점잖게 주인으로서 손님을 맞이했다.

"성으로 가서 기다리세요. 지금은 전쟁 중이라 철두는 만날 수 없습니다."

"참전하고 싶어서 온 겁니다!"

"아니, 그 무슨."

"보내주십시오! 아이언헤드를 돕겠습니다."

"고맙긴 하지만 너무 위험합니다. 적 병력이 못해도 3천이 넘습니다."

"아이언헤드는 얼마나 진군했습니까?"

"200이요."

"허!"

제임스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거다.'

상남자의 전투가 아닌가!

무한결투장에서도 대뜸 3:1을 시전하더니.

이제는 200의 병력으로 3천 이상의 병력을 향해 돌격했다.

거의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에 버금가는 상남자의 행보다.

전사 중의 전사.

제임스는 피가 끓었다.

"우리를 누구로 보는 겁니까? 제임스 용병대는 블랙드래곤 중에서도 정예입니다!"

"...좋습니다. 종두 씨."

"네! 시종장님."

"길 안내 해줘요."

원병으로 온 것이면 괜히 길이 엇갈리는 것보다 확실히 합류하는 게 낫다. 괜히 서로를 적으로 알고 꼬이기라도 하면 큰일이 아닌가.

"알겠습니다!"

요새의 건설 겸 방위를 위해 병력 30명 정도를 이끌고 함께 뉴아 마을에 왔던 서종두는 부하 셋만 이끌고 길 안내를 자처했다.

그들은 말을 재촉해, 밤에도 달려 꼬박 하루 만에 전장에 당도할 수 있었다.

"이런, 늦었군."

하지만 이미 개전 중이라 전투가 한창이다.

제임스는 말을 달리는 와중에도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적 병력은 어림잡아 4~5천.

단단한 방패진이 초원에 들어선 성 같이 느껴졌다.

아이언헤드의 궁기병들이 몇 번 돌격해 화살을 주고받았으나 피해는 일방적으로 궁기병에게서 나왔다.

"저런! 속도를 높입시다."

슬슬 가까워지는 거리.

그때 대뜸 기병 무리에서 사람 하나가 날아가 적 진영 한복판에 떨어졌다.

"...! 왓 더 퍽!"

제임스는 익숙한 남자의 복장에 저도 모르게 환호했다.

시발, 남자다.

저게 사나이다!

마초 그 자체!

5천 군세를 보고도 두려움은커녕 홀로 뛰어드는 저돌적인 사내!

"우리도 돌격한다!"

제임스는 피가 끓어 외쳤다.

*

푸스스스.

우로사 남작이 죽었다.

"후후후."

도박수가 통했다.

사실 다른 수가 없기도 했다.

오식이를 타고 도망치는 것도 여의치 않아 보였고, 마침 적장이 근처에 있으니 한번 쪼개봤다.

그 대가로 봉신으로 엮여있던 대전사 리에나도 함께 사라졌다.

푸스스스.

리에나와 함께 사라진 인물들은 다섯을 넘지 않았다. 기사로 보이는 자 한 명과, 리에나, 그리고 늙은 시종으로 보이는 자 하나와 지팡이 쥔 마법사 하나가 연기로 화해 사라졌다.

철두는 여전히 많은 수가 남았으나, 사기는 팍 꺾여버린 적군을 보았다.

배때기에 꽂힌 검은 리에나가 사라지며 함께 사라졌기에, 커다란 구멍에서 핏물이 콸콸 나오고 있었다.

"녀석은 부상 입었다!"

"다들 공격해라!"

진영의 군데군데 퍼져있던 기사들이 몰려온다.

그들은 할 만하다 여기는 듯했다.

"후후후, 졸렬한 놈들이군."

"이노오옴! 사령관님의 복수를 하겠다!"

"봉신도 아닌 놈이 충신 흉내 내냐?"

철두의 도발에 기사가 버럭 소리질렀다.

"누가 야인 놈 아니랄까 봐 무식하긴! 기사들은 모두 봉신이다!"

"근데 왜 안 죽냐?"

"우리의 봉신은 우로사 남작 가문을 향한 것이다!"

"오!"

개인이 아니라 가문을 상대로 한 봉신 계약도 되는구나.

하여튼 다단계 녀석들.

철두를 궁지에 몰았다고 생각했는지, 빙 둘러싼 기사들이 12명이다.

병력들을 헤치며 다가오는 녀석들이 5명.

많기도 많군.

미니언 정도 되는 녀석들이다.

검술 3일 때도 10:1도 무난하게 이겼다.

17명의 기사들을 상대로는 어떠할까?

적어도 리에나 하나보다는 이들 17명이 더 수월하리라.

"놈의 상처가 깊다! 일시에 돌격합시다!"

"그럽시다! 셋 하면 돌격합시다!"

철두를 포위한 기사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먼저 나서주길 바라며 내빼는 모습에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흐흐흐흐."

울컥울컥 쏟아지던 피가 질질 흐르는 수준으로 바뀌었다. 이 정도 상처는 골렘의 회복력이나 바바리안의 자연 치유력 정도로도 회복될 터지만, 지금은 전투 와중.

"여신! 나를 치료해달라!"

철두의 진심 어린 기도가 닿아 목에 걸린 펜던트가 빛이 났다.

파파팟.

철두의 배에 난 구멍이 말끔히 메꿔졌다.

"헉! 아닛!"

"진작 돌격하자니까."

"후후후."

철두는 도끼를 집어놓고 투핸디드 소드를 꺼내 들었다. 센 척하고 있지만 사실 지치긴 했다.

마력도 1% 수준이고.

지금은 빠르게 전장을 이탈해 재정비할 시간이다.

파파팟.

철두의 검이 열일곱 번 흔들렸고, 열일곱의 수급이 떨어졌다.

"꾸이!"

꾸이가 빠르게 전리품을 회수하는 사이, 철두는 오식이를 소환해 올라탔다.

"후후후, 다음에 보자고들."

단번에 기사들을 잃은 병사들이 어찌할 줄 모르고 사격도 하지 못하는 가운데 철두는 전장을 빠르게 이탈했다.

쇄애애액.

오식이가 낮게 날아오르며 진영을 벗어나는데, 도리어 진영을 향해 돌격해오는 30인의 기마대가 보였다.

"음?"

"어?"

철두와 제임스는 서로의 얼굴을 보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철두의 놀람은 의아함.

반면, 제임스의 놀람은.

"갓, 데엠...."

최고속도에 이른 용병대의 돌격이 적의 방패진의 코앞에 이르렀다.

178화 무장해제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요?

당신은 왜 거길 날고 있죠?

우린 이렇게 엇갈리나요.

제임스는 이것이 운명의 장난처럼 느껴졌다.

신의 시련이든가.

마주치는 눈빛에서 서로를 향한 당혹감이 가득했다.

'네가 여기 왜 있냐?'

'어? 도와주러 가는 길인데.'

'나는 한탕 하고 나가는 길인데.'

'어어? 나는 이제 왔는데.'

인질 없는 구출 작전을 위해 달려온 제임스는 맥커리의 비명 같은 외침을 들었다.

"제임스!"

그래, 선택해야 한다.

팀원들이 동요하고 있다.

바로 코앞이 방패진이다.

지금 말머리를 돌리는 건 불가능하다.

"로시! 갈겨!"

"오케이."

슈우우우욱, 콰앙!

언제나 용병대의 선빵 담당인 로시가 쏘아 올린 파이어볼이 적 방패진에 쏘아졌다.

화염이 터지며 만들어진 균열.

"돌격!"

기사 덕후답게 기병진의 선두에 선 제임스가 창을 들고 용감하게 돌진했다.

가장 선두에 선 쐐기의 역할은 균열에 구멍을 내는 것.

콰앙!

랜스에 부딪힌 불타는 방패병이 허무하리만치 쉽게 날아가 버리고, 그 사이로 철갑을 두른 제임스의 말이 박차고 들어갔다.

콰쾅쾅!

작은 구멍은 그 뒤를 따르는 다른 기병들로 인해 더 커졌다.

콰직! 스컥!

창을 찌르고, 칼로 베며 적진을 쭉쭉 나아간다.

외곽열의 방패병의 진영은 두꺼웠으나, 그 안의 궁수진이나 예비대는 어딘가 얼이 빠져있어 허수아비를 베는 기분마저 들었다.

"뭐, 뭐야?"

제임스는 당황하면서도 깨달았다.

'난 전생에 돌격기병이었는지도?'

여태 몬스터를 상대로만 랜스 차징을 해봤는데, 단단히 진영을 잡은 병력을 상대로도 그것을 해낸 것이다.

촥, 까앙! 캉!

하지만 기세 좋은 돌파도 차츰 속도가 줄었다. 뛰기를 멈춘 기병은 갑옷을 차려입은 중장보병이나 창병의 좋은 먹이가 될 뿐이다.

"크아악!"

"젠장! 막심이 당했어!"

"제임스! 어떻게 해!"

"나를 중심으로 모여!"

제임스는 정신없이 적을 찌르면서 동료들을 불러모았다.

따당, 땅!

여기저기서 찔러오는 창을 피하며 되레 반격한다. 그 와중에 동료들에게 명령도 전해야 한다.

제임스는 처음 겪어보는 전투에 어안이 벙벙했다.

'사냥하곤 달라!'

몬스터라고 전략전술이 없는 건 아니다.

오우거는 사나움에 비해 불리하다 싶으면 도망치기 일쑤였고, 오크들은 병과가 있을 정도로 진영이나 전술을 구사할 줄 알았다.

하지만, 제국군과 비할 바가 아니다.

제대로 훈련받은 제국군은 겨우 30기의 돌격기병의 돌격에 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애당초 철두가 적 지휘부를 초토화해 지휘 공백이 생긴 그 틈이 아니었다면, 돌격 자체가 성공하지 못했으리라.

애매하게 적진 한가운데 갇히게 된 제임스는 서둘러 명했다.

"말에서 내려! 원형진! 모여!"

돌파력을 잃은 이상, 말 위에 타고 있는 것은 장창병에게 찌르라고 표적이 되어주는 것밖에 안 된다.

높이의 차이로 보병을 헤집는 것도 어느 정도 장비의 차이가 나야 가능하지, 외려 장비는 제국군이 더 좋아 보인다.

"제임스! 시발, 멍청한 새끼!"

"어떻게 할까? 이거 맞아?"

"막심의 부상이 심해."

"아아악!"

"로시도 당했어."

"시발, 조졌어."

"제임스, 이거 맞아? 우리 수련하러 온 거 맞지?"

"다들 닥쳐봐. 방진 좁히지 마! 창 꺼내!"

정신이 없다.

사냥과 전쟁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아니, 애초에 숫자가 말이 안 되잖아!'

제임스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쳤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마약이라도 한 기분이다.

말이 안 되지 않은가?

이것이 사냥이었다 하더라도 5000마리가 군집한 오크 떼를 향해 돌격했겠는가?

절대 하지 않았을 터다.

"내가 미쳤었나 보군."

제임스의 말에 여기저기서 욕설이 들렸다.

"퍽, 정신 차려! 넌 길을 알려줘야지!"

"맞아! 우릴 여기로 몰아넣고 몰살시킬 셈이 아니라면 방법을 제시해!"

"우릴 이끌라고!"

그들도 지금 상황에서 뾰족한 수가 없다.

늘 그랬듯 리더를 따를 뿐.

척척척!

"@!#!"

부상자들을 중앙에 두고 둥글게 방진을 마련한 그들을 둘러싼 창진이 마치 고슴도치 같다.

완벽히 포위당했다.

다만 저들도 포위해놓고는 저마다 눈알을 굴리며 명령만 기다리는 게 조금 이상했다.

지휘관이라고 할 만한 고급갑옷을 입은 자들도 없고, 잘해봐야 백인장, 십인장 수준의 병사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다.

"쟤들 싸우는 건가?"

"뭔가 의견이 맞지 않는 모양인데?"

"제임스! 어떻게 해?"

"조용히 해봐."

제임스는 섣불리 결정할 수 없었다.

그는 앞장서는 타입의 리더다.

항상 몬스터를 두고 제일 먼저 랜스 차징을 하고, 뒤따르는 동료를 이끄는 맹장 스타일의 용병대장.

그런데 한 번의 실책으로 이렇게 위기에 몰리고 나니 뒤이어 결단을 내리기 쉽지 않았다.

'정말 그게 최선이야?'

무슨 선택을 하든 그런 물음이 꼬리를 물고 늘어져 괴롭게 한다.

결단력이 필요한 때인데....

부상당한 막심과 로사를 포기하고 한쪽을 뚫어봐?

뚫을 수는 있나?

정말 그게 최선인가?

그때 하늘에서 구원의 사자가 도착했다.

후우우웅.

거대한 날개를 활짝 펼친 그리핀이 상공에 나타났다.

"아이언헤드."

제임스의 눈에 희망이 떠올랐다.

반면 적진은 동요가 가득했다.

술렁이는 그들은 분명 당황했고,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후우웅, 꿍!

그리핀 위에서 뛰어내린 철두의 신형은 정확히 창진으로 포위망을 이룬 제국군과 제임스 사이였다.

"제임스."

"아이언헤드."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위험에 빠진 줄 알고 구하러 왔다."

철두가 웃었다.

"후후후, 토끼가 호랑이를 구하러 왔군."

"퍽, 부정하지 못하겠군."

정말 그 말 그대로다.

적진을 유린하듯 휘젓고 몸을 빼낸 호랑이를 용감한 토끼가 구하러 뛰어든 셈이다.

판단 미스로 인한 객기와 무모한 돌진으로, 용감한 토끼의 목숨만 아깝게 버릴 뻔했다.

호랑이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후후, 용기가 가상하군. 여긴 왜 온 거야?"

"전투를 경험하고 싶었다."

"경험하니 어떠냐?"

"...일단 대화는 여길 빠져나가서 하면 되지 않나?"

"나도 그럴 생각이었지."

적어도 마력이라도 채워와서 일시에 적들을 쓸어버릴 작정이었다. 용감한 토끼가 거기 끼기 전까진 말이다.

"이놈들을 죄다 불태워버릴 생각이었는데 방해됐어. 인질은 곤란해."

"...미안하게 됐다."

제임스는 아임쏘리를 연발했다.

"좋아. 나가자고."

철두가 인벤토리에서 투핸디드 소드를 꺼내 들어 적진을 향해 섰다. 자연스럽게 제임스 용병대가 그 뒤를 따를 준비를 했다.

그때 적진에서 기사가 나타났다.

"오, 기사가 아직 남았군."

철두는 검을 겨누며 히죽 웃었다.

머리는 모조리 쳐놔야 몸통을 치기 좋다.

기사는 천천히 다가오며 투구를 벗어 바닥에 버렸다. 그러곤 대뜸 철두의 앞에 와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이언헤드의 영주시여,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

철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전사답게 나서라."

"제 목을 내어 드리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하오나, 병사들은 가엽게 여겨 주십시오!"

"무슨 소리냐?"

"...노예로 삼아도 좋으니, 부디 학살만은 피해주시옵소서."

철두가 무릎 꿇은 기사를 노려보았다.

기사의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가득했으나, 철두를 바라보는 눈에 거짓은 없었다.

불에 태워죽이니 마니 한 말이 젊은 기사를 움직이게 한 모양이다.

"네놈 이름이 뭐냐?"

"기사 요하임 나트롱입니다."

"나트롱?"

"나트롱 백작 각하께서 저의 아버지 되십니다."

"오, 백작 아들."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를 인질로 잡는다면 5천 군병의 값어치는 있사오니, 승리한 전장에 더는 피를 뿌리지 마시옵소서."

그의 간청에 철두는 웃었다.

승리한 전장이라.

"하하하, 저놈들이 패배한 군병처럼 보이나?"

"창을 거둬라!"

차차차착!

요하임의 말에 병사들이 서둘러 겨누었던 창을 바로 세웠다.

제임스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너무 궁금하여 소통의 비약을 들이켜곤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철두는 턱을 쓰다듬었다.

이놈을 인질로 잡아 백작에게 딜을 걸어봐?

'그럼 전쟁 끝인데.'

전쟁이 끝나면 더는 싸울 수가 없다.

그러면 안 되지.

그렇다고 모두 살려두기에는 이만한 포로를 수용할 시설도 없고, 이들을 감시할 인력도 없다.

지금 병력이라 해봐야 공격대, 유격대 합쳐 200명인데 5천의 포로를 제어 가능할 것이라 보지 않았다.

"좋아. 내 요구를 들어주면 너희를 놓아주지."

"...!"

요하임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상대는 엄청난 정령 마법을 보유한 자다.

개인의 무력은 어떠한가?

기사 17명이 순식간에 목이 날아갈 정도의 전사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건 레벨 5, 초인의 경지에 오른 리에나 경을 이겼다는 것이다.

며칠 전 홀로 그리핀을 타고 등장해 둔영 전체를 화염의 토네이도로 감싸버리는 그의 마법에는 전율했다.

마법사들이 아니었다면 필시, 상당수의 병력들이 불에 타 죽었을 것이다.

그런 마법사들도 지금 절반이 죽었으니, 상대의 불에 태워 죽인다는 협박이 허언으로 들리지 않았다.

'나를 희생해 영민들을 구하겠다.'

요하임은 숭고한 정신으로 나섰다.

수천의 무고한 목숨을 잃게 하고 싶지 않았다.

불에 타 죽느니, 포로가 되더라도 사는 게 낫다.

헌데, 적장의 입에서 나온 말은....

"노, 놓아주겠다는 말입니까?"

"그렇다."

"어, 어찌하여.... 아니, 이대로 복귀하면...."

요하임은 너무 황당한 말이라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정돈되지 않은 질문이 새어 나왔다.

"...다시 적으로 마주하게 될 터인데. 어찌 이 기회를 놓치려 하십니까?"

지금 여기에 백작군 절반이 넘는 병사가 있다.

내가 만약 적장이라면 이들을 그대로 돌려보낸다는 선택지를 고를 수 있겠는가?

'없다.'

요하임 본인을 인질로 잡는다 쳐도, 이 병력을 포로로 억류하면 했지, 돌려보낸다는 선택지는 고를 수가 없다.

"후후, 겁이 많은 놈이군. 무슨 상관이냐? 또 쳐들어오면 그땐 정말 죽이면 될 일이다."

"...."

요하임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오만한 자다.

하지만, 그 실력을 경험했으니 결코 허언으로 들리지 않았다.

"...요구를 말씀하시옵소서."

"마법사들을 모두 데려와라! 내가 쓰겠다."

"...알겠사옵니다."

"갑옷과 무기를 모두 두고 가라!"

"...그 또한 알겠사옵니다."

"옷도 다 벗고 가라!"

"...예에."

"네 인벤토리도 싹 다 비우고 가라."

"...예."

"후후, 그리고...."

"더, 더 있사옵니까?"

"음? 으음. 더 벗겨먹을 게 없는데. 뭐, 좋다. 이쯤에서 끝내겠다."

"알겠사옵니다."

굴욕적인 처사다.

하지만 포로로 잡혀 노예로 팔리느니 알몸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백번 낫다.

"모두 무장해제하고 옷을 벗어라!"

요하임의 명에 장관이 펼쳐졌다.

살아남은 수천의 군병들이 무기를 버리고, 갑옷을 벗었다.

철두는 명령만 내리고 멀뚱히 있는 요하임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너는 안 벗고 뭐 하냐?"

"예?"

나도였어?

나 기사이자, 백작 아들인데?

정말?

"가, 갑옷까지만 벗겠사옵니다."

"옷도 벗어라."

"...."

"우리 준필이 줘야 한다."

"...소, 속옷만이라도."

"좋아. 허락한다. 그래도 귀족으로서 품위는 지켜야지."

"...감사하옵니다."

요하임은 진지하게 지금이라도 그냥 싸울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생각만 했다.

179화 간신과 충신 사이

누드 비치를 가도 이 정도의 덜렁이 향연은 즐길 수 없다.

그 와중에 포로 중에서도 옷이 안 털린 자들이 있었으니, 하나같이 비슷한 차림의 로브를 걸친 자들이다.

열 명의 마법사들은 온몸이 꽁꽁 묶여 있었다.

"좋아. 요하임. 얘들 봉신 풀어줘라."

"...제겐 권한이 없습니다. 봉신 계약은 당사자들만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이지요."

철두가 마법사들을 보았다.

"죄다 백작의 봉신이냐?"

"...."

마법사들은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한 와중에도 눈치를 살폈다. 인질의 가치가 있으니 이리 붙잡아 둔 것.

마법사는 어딜 가나 고급 인력이기에 포로로서의 가치가 높다. 다만, 그 마법을 생각하면 다루기가 극히 어렵다.

"말이 안 통하는군."

철두가 가장 불만이 많아 보이는 마법사 앞에 섰다. 머리가 희끗하고 눈빛에 원망이 가득한 것이 퍽 반항적이었다.

"너 봉신이냐?"

"...흥."

"후후."

철두는 허리춤에 달린 투척용 도끼를 빼 들어 그대로 정수리를 찍어버렸다.

콰직!

"히이이익!"

콧방귀 한번 뀌었다고 대가리가 깨질 줄은 몰랐기에, 옆에 있던 마법사들이 기겁하며 물러나려다가 밧줄에 묶인 몸들이 바닥을 굴렀다.

그 야만적인 대우에 뒤에서 지켜보는 요하임의 표정이 핼쑥해졌다.

철두는 아까 두 번째로 불만 어린 표정을 지었던 마법사 앞에 섰다.

"너도 봉신이냐?"

"...그렇소."

"깨라."

"그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하시오? 봉신 계약은 쌍방의 동의하에 이뤄지고, 파기 또한 마찬가지요! 한쪽이 일방적으로 요구한다 하여 깨질 수 있...."

콰직!

마법사는 말을 다 잊지 못했다.

봉신 계약 대신 대가리가 깨졌으니까.

"흐에에엑!"

"히익!"

나머지 마법사들이 기겁했다.

"여덟 남았군. 봉신 깨고 올 사람 선착순."

"내가 가겠소!"

마법사 하나가 재빠르게 나섰다.

"어차피 백작가는 우리를 저버린 것과 같소. 이것으로 군주의 의무를 저버렸으니, 신하의 의무 또한 져버려도 상관없소. 나는 오늘 봉신을 해제하고자 하오."

마법사가 간절히 말하자, 그의 몸에 빛이 깃들더니 영혼이 빠져나가듯 위로 쑥 뽑혀 나와 흩어졌다.

"아!"

탄식은 요하임 나트롱의 입에서 나왔다.

저 마법사의 말이 맞다.

군 병력 5천을 살리자고 마법사들을 넘긴 건 분명 나트롱 가문의 아들 요하임이니까.

"후후, 좋아. 엄지 찍어라."

"헉! 마, 마나의 맹세라니...."

"왜? 하기 싫으냐?"

"그, 그것은 너무 큰 족쇄가 아니오?"

철두는 그저 말없이 투척 도끼를 들었다.

손도끼 사이즈라 뚝배기 쪼개기에는 이만한 게 없다.

마법사가 기겁하고는 얼른 엄지손가락을 찍었다.

"히익! 나 르망은 마나에 맹세하노니, 아이언헤드 영주에게 거짓 없이 충성을 다할 것이다!"

파파팟.

"후후, 좋군."

철두가 나머지 마법사들을 보았다.

스윽.

"나 카롤은 마나에 맹세...."

"나도...."

나머지 마법사들은 봉신계약은 안 했는지 죄다 마나의 맹세를 했다.

포박된 마법사들이 엄지를 찍어대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파파파팟.

철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풀어라."

"예! 영주님."

유격대원들이 마법사들의 포박을 풀어주었다.

철두는 혼이 나간 듯한 요하임을 보며 물었다.

"인벤토리 싹 비운 거 맞냐?"

"...맞습니다."

"좋아. 가봐도 된다."

볼일은 다 끝났다.

"...아이언헤드 영주의 자비에 감사드리옵니다."

"아차차, 주화."

"...."

"주화도 다 모아서 가져와라."

"...그리하겠습니다."

"그건 제가 걷겠습니다. 영주님."

그때 최준섭이 나섰다.

유격대와 공격대는 말을 탄 채 알몸의 투항병들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누구라도 도망치면 등에 화살을 꽂아줄 준비를 마쳤다.

"그렇게 해라."

최준섭은 소통의 비약 하나를 들이켜곤 포로들을 줄 세웠다.

"자자, 주화 주머니 비운 사람들은 순서대로 저쪽으로 그대로 간다!"

"주머니 확인하고 나면 이제 자유다!"

"줄 서라, 줄!"

유격대가 한 명 한 명의 주화를 털어냈다.

"여기 있습니다."

요하임은 팬티만 입은 채 철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철두가 마주 잡자 두 사람의 손등이 번쩍였다.

<주화 52132개를 양도받았습니다.>

"오, 너 부자구나?"

"...과하게 들고 다녔다는 생각이 듭니다."

허나 주화를 오른쪽 손등 위에 새겨진 주화 주머니에 무제한으로 수납할 수 있는데 본인의 재산을 다른 곳에 보관하는 멍청이는 없다.

지금 요하임이 내민 주화는 본인이 가진 주화의 전부다.

"후후후. 잘 쓰지."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다음에 올 때는 무장 더 튼튼하게 해서 와라."

"...아버님께 고해 종전 협정을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섭섭하게 무슨 종전이야. 다 이웃끼리 싸우고 그러는 거지."

"...."

저건 진심이 아니겠지.

'정치를 아는 자다.'

누가 우위에 있는지, 어떻게 상대를 압박하는지도 아는 자다.

'종전 협상으로 엄청난 거금이 뜯기겠군.'

계속 싸우자는 철두의 말이, 나를 설득하려면 보통의 정성으로는 안 된다는 말로 해석되었다.

"다시 한번 자비에 감사드리옵니다."

"그래. 다음에 또 보자고."

기분이 좋은 철두가 손까지 흔들어주었다.

알몸의 군단이 북쪽으로 떠나갔다.

멀찍이 떨어져서 절반이 넘게 말을 소환하는 모습을 보곤 철두가 무릎을 쳤다.

"아차! 말을 안 뺏었네."

아쉽다. 아쉬워.

다시 가서 잡아 와 말까지 뺏는 건 조금 너무하나 싶은 생각을 하는데, 가장 먼저 마나의 맹세를 한 르망이 철두의 옆으로 다가왔다.

"한번 길들인 말은 여유분의 탈것이나 펫 인벤토리가 없으면 양도받는 게 불가능하니, 그리 노여워 마십시오."

"응?"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읍하는 르망을 보며 철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야, 너 제법 싹싹하구나."

"적응력이 뛰어나단 소리는 종종 들었사옵니다."

좋아.

아주 충신이 될 자질이 넘치는군.

"네가 앞으로 여기 마법사들의 대장이다."

르망이 넙죽 고개를 숙였다.

"최선을 다해 이끌어보겠사옵니다."

르망의 손이 번쩍하더니 팔찌 하나가 나왔다.

"뭐냐?"

"이것은 소통의 팔찌이옵니다. 상시로 소통의 비약을 먹은 것과 같으니, 앞으로 일대의 통치자가 되실 영주님에게 어울리는 물건이 아니올는지요."

"어, 어. 고마워."

"영광이옵니다."

봉신 끝났다고 태세전환이 이렇게 빠른 놈을 보았나?

철두는 왜 통치자들이 간신배를 곁에 두는지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이 새끼, 아주 쓸모 있어 보이는군.

"준섭이."

"네, 영주님."

"근처 마을 가서 수레 좀 빌려와라."

"예, 알겠습니다."

유격대가 급히 동쪽으로 향했다.

"종두."

"예, 대장님."

"진태한테 가서 소식을 알려라."

"네, 영주님!"

서종두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있었다.

'대단한 전과다. 역시 큰형님이시다.'

어마어마한 수의 제국군이 강철두의 위엄 앞에 스스로 항복하고 무구와 갑옷을 벗고 쫓겨났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이 전과가 전해지면 또 아이언헤드 성이 난리 날 듯싶었다.

두두두두.

구정욱의 공격대는 철두에게 다가왔다.

"오늘 여기서 밤을 보내시겠습니까?"

"음."

그러고 보니 해가 중천을 넘었다.

수레를 징발하고 전리품을 싣고 하다 보면 해가 질 판이다.

"좋다! 진을 세워라. 내일 아침 출발한다."

"네, 영주님!"

구정욱의 공격대가 진을 꾸리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막사가 지어지는 가운데, 여태 멀찍이 구경하던 제임스가 허겁지겁 다가와 물었다.

"강철두."

"왜?"

"부상자들을 돌봐줘서 고맙다."

제임스 용병대의 막심과 로사는 나눠준 포션으로 치료되었다.

"별거 아니다."

"포션이 비싼 건 알고 있다. 제국 놈들도 잘 팔려고 하지 않잖아. 나중에 반드시 갚겠다."

"음? 그건 우리 성에서 만든 거다."

"...포션을?"

"연금술 모르나?"

"...."

제임스는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그런 내용은 NITO를 통해서도 공유되지 않았는데?

'한국 놈들. 모든 정보를 오픈하는 건 아니군.'

미국도 마찬가지라 욕할 거리는 없지만서도....

새삼 아이언헤드 성의 저력이 지구에 알려진 것보다 대단하다는 생각에 전율이 일었다.

가장 번성한 도시는 그가 활동한 마이클 시티거나 가장 먼저 제국의 영주와 교류를 시작한 사쿠라 시티라고 생각했다.

오판이다.

아이언헤드 성은 노바의 기준에서 가장 기술적으로 가장 번영한 성이리라.

'강철두가 있으니....'

5천의 병력을 말빨로 제압하는 광경을 봤다.

저런 강력한 영주가 통치하는 성인데 어련할까 싶었다. 한국놈들이 아주 작정하고 강철두의 정보를 제한적으로 풀었다.

지구 최강?

퍽, 그냥 노바에서도 최강이잖아.

"성으로 돌아가면 손님맞이 해주지. 적당히 막사를 치고 오늘은 여기서 자자."

"어어. 아니, 그보다 할 말이 있다."

"말해라."

"아이언헤드 성에 당분간 머물러도 되겠나?"

철두가 어깨를 으쓱했다.

"좋을 대로 해라. 거주세만 내면 영지에 머무르는 건 자유지."

"...."

제임스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강철두의 여유로운 말과 몸짓에서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이건 숫제 왕과도 같은 자세가 아닌가?

이미 아이언헤드 성은 한국의 개척 마을이 아닌, 독자적인 왕국이라 해도 좋지 않을까?

구정욱이 이끄는 공격대는 막사를 치는 걸 마치고, 주변에 목재를 가공해 거마창을 만들어 진영 둘레를 드문드문 둘렀다.

배정받은 공간에 자신들의 텐트를 치고 구경하던 제임스 용병대는 입을 헤 벌렸다.

"미쳤어. 여긴 진짜 군대야."

"미군하고도 차이가 있어."

"이 사람들은 여기서 수십 년 지낸 자들 같아."

신세계를 접한 기분이다.

블랙드래곤 용병단. 그중에서도 단장이었던 제임스의 직속 용병대원들이었다.

지구 최초로 던전을 클리어한 용병대.

단체전에서 늘 지구 랭킹 수위를 다투는 자들.

헌데, 아이언헤드 영주의 무력은 상식을 파괴하는 수준이었고, 그 휘하 기병대도 뭔가 살기가 몸에 밴 듯한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자들이었다.

괜히 위축이 되는 게 사실이다.

두두두두두.

그때 수레 징발에 나섰던 유격대원들이 속속 복귀했다.

"왜 이렇게 늦었나?"

"아, 죄송합니다. 노론, 소론 마을은 더 이상 수레가 없어서 좀 더 가서 빌려왔습니다. 발베른 마을이었나? 거기서 빌렸습니다."

"노론 소론 놈들, 게으르군."

"안 그래도 수레를 만들어 두라고 따끔히 일러두고 왔습니다."

"잘했다."

대화를 듣던 제임스가 넌지시 끼어들었다.

"여기 근방에 마을이 그리 많습니까?"

"어, 예스. 어, 으음."

영어로 답하려던 최준섭은 답답한지 가방에서 소통의 비약을 하나 쭉 들이켜고는 한국말로 설명해주었다.

"나트롱 백작령의 소속 마을이 많아요."

"...? 나트롱 백작령 소속이면 적진 아닙니까?"

"그렇죠?"

"...적의 마을에서 수레를 빌려와요?"

"네."

"빌려주던가요?"

"달라 하면 주죠."

"...대가로 뭘 주셨나요?"

"어, 안 주죠?"

최준섭은 대꾸해 놓고도 어이없어 피식 웃었다.

"...."

제임스는 최준섭의 흉악하고 살기 어린 미소를 보곤 입을 다물었다.

'우린 그걸 약탈이라고 부르기로 했잖아!'

생글생글 웃으며 적 마을을 약탈했을 최준섭의 모습을 상상하자 제임스는 소름이 끼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강철두만 괴물이 아니라, 그 부하들도 만만찮아 보였다.

180화 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