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일상
살아남은 마법사들이 배정된 하나의 막사에 옹기종기 모였다.
다들 표정이 좋지 못했는데, 패잔병의 몰골 그대로였다.
"아휴."
"거, 한숨 좀 그만 쉬어!"
"뭐? 한숨이 안 나오고 배기게 생겼나, 지금?"
아까부터 계속 한숨을 쉬던 마법사가 분통이 터지는지 가슴을 두드렸다.
"분위기에 휩쓸려 마나의 맹세를 해버렸는데 어찌 답답하지 않겠나?"
봉신 계약은 상호 간의 의무를 지는 계약이다.
군주는 군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신하는 신하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
상황에 따라 상호 협의하에, 아니면 서로 간의 계약 위반에 의해 깨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마나의 맹세는 마법사 스스로가 마나에 대고 맹세하는 것이다.
이것을 어겼을 적엔 마나가 소멸되어 버린다.
조용히 있던 젊은 마법사 하나가 은밀히 말했다.
"이대로 붙잡혀 가 착취당하느니, 차라리 도망치면 어떻겠습니까?"
"마나의 맹세까지 했는데 그게 무슨 소용인가?"
"마나의 맹세를 했지, 목숨이 저당 잡힌 건 아니지 않습니까?"
"맹세를 어기자는 말인가? 허, 평생을 마법사로 살았는데 일반인으로 살아가라고? 뭘 하고? 이 나이에 농사를 지으랴?"
조금 나이 있는 마법사들에게 마나는 목숨이나 다름없기에, 젊은 마법사의 제안은 가당찮은 것이었다.
"그렇다고 야인의 아래서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마법사들의 대화가 점점 더 점입가경으로 치닫자 르망이 나섰다.
"다들 조용! 조용!"
"흥! 딸랑딸랑 개처럼 굴더니, 꼴에 벌써 완장질이라도 하려고 하시오?"
"그래. 못할 것도 없지."
르망이 씩 웃었다.
"다들 병신처럼 굴지 마."
"그럼 당신처럼 납작 엎드려 꼬리라도 흔들라는 거요?"
"못할 것도 없지 않나?"
"뭐요? 당신은 자존심도 없소?"
"그래. 자존심. 그게 뭐지?"
"허, 됐소! 야인의 개가 되느니 차라리...."
"차라리?"
"...."
"크크, 죽을 용기는 없나 보지?"
르망이 마법사들을 쭉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잘 들어라. 야인? 그래. 그딴 개소리는 여기까지다. 현실을 봐. 우리는 나트롱 가문에 의해 버려졌다. 그리고 아이언헤드 영주를 향해 충성해야 하지."
마나의 맹세를 했다.
마력을 잃기 싫으면 맹세를 지켜야 한다.
"다들 이게 기회로 여겨지지 않는 거야? 나만 이게 엄청난 기회로 보이나?"
"흥, 무슨 기회란 말이오? 백작가의 마법사에서 성 하나 달랑 가진 야인 영주의 마법사가 되었는데."
"그래. 그 잘난 백작 가문이 야인 영주 일인에 의해 처발렸지."
"...."
"언제까지 야인 야인거릴 거냐? 언제까지 성이 하나일까?"
르망의 말에 마법사들의 표정이 조금씩 변했다.
"야인? 크큭. 내게는 장차 왕이 되실 분으로 보인다."
물론 전부가 진심은 아니다.
르망은 그가 작은 소왕국의 왕으로 그치지 않고 더 크게 될 인물이라 생각했다.
"자, 병신들. 아직도 전쟁에서 졌다고 전리품으로 마법사들을 내어주는 백작가의 똥꼬를 못 핥아 후회되는 놈 있나?"
"...."
봉신 계약은 상호 의무를 지는 계약이다.
백작이 먼저 군주로서의 보호 의무를 저버렸으니, 그 계약이 해지될 수 있었다.
"그럼 백작가마저 혼자 쳐부술 정도의 전력을 지닌 영주가 다스리는 땅이, 여전히 미개하게 남을 것이라 생각하는 놈 있나?"
"...."
"흐흐, 이건 기회라고. 다들 잘 생각해보라고."
르망이 그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섰다.
진영의 중심, 모닥불 앞에 거대한 덩치의 사내가 앉아서 불을 보고 있다.
쪼로로 달려가 고개를 조아렸다.
"영주님. 잠시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옆에 앉아라."
"예에, 영광이옵니다."
르망이 공손히 앉아 보고했다.
"아직 처세에 밝지 못한 이들이 있긴 하오나, 모두 영지를 위해 일할 준비가 되어있사옵니다."
"다 들었다."
"...!"
르망이 흠칫 놀랐다.
기사들의 청력이 범인의 수준을 넘는 건 알았지만, 여기서 마법사들의 막사까지 거리가 얼마인데 그걸 다 들었을까 싶었다.
"소, 송구하옵니다."
"되었다. 나는 네가 마음에 든다."
"여, 영광이옵니다."
철두는 르망 같은 기회주의자가 마음에 들었다.
"실은 제게도 사정이 있사옵니다."
"들어주마."
"저의 혈족은 대대로 나트롱 가문과 봉신의 계약을 해 노예나 다름없었사옵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부터 시작된 봉신은 아버지에 이어 자신에게까지 이어졌다. 이제 아들의 아들까지 이어질 이 봉신이 깨어졌다.
야인 영주 강철두가 인질을 원했고, 나트롱 가문의 요하임은 르망을 버림으로써 군주의 의무를 져버렸다.
"혈족의 저주가 풀린 것이나 다름없사오니, 영주님을 향한 저의 충심은 진실이옵니다."
"후후, 대가로 바라는 것은 마법사들의 가장 위겠지."
"그러한 욕심도 있사옵니다."
"잘 이끌어봐라."
"예에."
불길을 무심히 보던 철두가 넌지시 물었다.
"리에나를 아나?"
"알다마다겠습니까? 나트롱 백작이 가진 가장 날카로운 칼이지요."
철두의 굳었던 안색이 조금 펴졌다.
"그럼 백작가에는 그만한 강자가 더 없다는 말이냐?"
"백작의 호위기사 둘이 있사옵니다."
철두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상대하기 만만찮은 녀석이었다.
"둘이라...."
백작을 상대하기 만만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두 놈도 봉신이겠지?"
"그러하옵니다."
르망은 철두가 굳이 묻지 않았으나, 눈치로 표정만 보고도 궁금해할 것을 답해주었다.
"백작이 죽는다 하여도 그 두 명의 호위기사가 함께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골치 아프군."
"하지만 영주님은 능히 상대해내지 않았습니까?"
"아니, 남작을 죽여 승부를 미뤘을 뿐이다. 그대로 싸웠다면 나의 패배다."
정령의 검으로 상대했다.
한 번씩 부딪힐 때마다 마력이 숭덩숭덩 빠져나갔으니, 승부가 장기전으로 갔다면 필패였다.
"그것은 검혼을 깨우친 기사들 또한 마찬가지옵니다. 그들도 그 힘을 오랫동안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검혼?"
"예에."
"그거 어떻게 하는 거냐?"
"...저도 마법사인지라 잘은 모르오나, 검에 대한 극한의 깨달음을 얻어 그 혼을 일깨운다 들었습니다."
"검의 혼이라...."
철두는 투핸디드 소드를 꺼내 보았다.
스릉.
험하게 다뤘더니 여기저기 거칠어진 검을 천천히 쓸어보았다.
'혼이라....'
그저 도구로 생각했지, 무기에 혼이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그렇군."
방법을 찾은 기분이다.
철두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후후, 고맙군."
"처, 천부당만부당하십니다."
소통의 팔찌는 마법적으로 작용하는 통신기다.
서로 뱉어내는 말이 다름에도 뜻이 이해되고 전해질 뿐이라, 가끔 어색하게 들릴 때도 있었다.
"팔찌 몇 개 더 만들 수 있나?"
"소인이 가진 것은 두 개가 더 있사옵니다. 영지로 가 더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철두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줘라."
"여, 여기 있사옵니다."
하나는 진태 줘야겠고, 나머지 하나는 그냥 들고 있어야겠다.
"이동마법진도 설치할 수 있나?"
"그, 그것은 제국의 대마법사라 하여도 불가능하옵니다."
"마법사가 그것도 못 해?"
"모, 못합니다."
"어째서?"
"'공간'에 대한 마법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법석?"
"혹시 기술석을 얻어보셨습니까?"
"당연하지."
"아주 드물게 마법석이란 것을 얻을 수 있는데, 이것은 마법사로 입문하는 가장 기본적인 시작점입니다."
바람의 마법석을 얻으면 바람 마법사로, 불의 마법석을 얻으면 불의 마법사로 발전해나갈 수 있다.
"소인이 활성화한 마법석은 3가지입니다. 바람, 나무, 조련입니다."
"왜 3개뿐이냐."
"셋도 많은 편이옵니다. 이것은 가지이지, 그 안에 든 마법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조련계열의 마법 중 소통이 있어, 소통의 팔찌도 제작할 수 있습지요."
"호오."
"마법사들의 효용 가치는 마법 부여에 있사옵니다. 이를 적극 활용하여 주시옵소서."
마법사들은 본인이 익히고 깨우친 마법을 아이템에 부여할 수 있었다.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 같은 르망의 설명을 들으며 철두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진태가 좋아하겠군."
"누구를 이르심인지."
"영지의 시종장이다. 내 친구지."
"일인지하 만인지상!"
또, 또 소통의 팔찌가 제멋대로 가장 그럴듯한 말로 대체한다.
"후후, 난 자야겠다. 그만 가라."
"예에."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밤이 깊었다.
그사이 징발해온 수레에 전리품이 가득 담겼고, 내일 해가 뜨면 출발하기만 하면 되었다.
*
아침 해가 떴다.
"준섭이. 수레 잘 끌고 와라. 난 먼저 간다."
"네, 영주님."
철두가 굳이 행렬에 함께할 필요는 없었기에 오식이를 타고 먼저 성으로 복귀하려 했으나,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발목을 잡았다.
"제임스! 따라와라. 먼저 가자."
"예스."
"마법사들도 따라와라."
"예, 영주님."
고급 인력인 마법사를 굳이 놀려둘 필요가 없다.
하루라도 빨리 진태한테 인계해서 굴려야지.
두두두두.
철두는 르망에게서 루팅한 소통의 팔찌 하나를 제임스에게 주었다. 르망이 죽지 않는 한 어차피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만들어낼 수 있으니 크게 아깝지 않았다.
"뭡니까? 아이언헤드."
"팔찌다. 번역기."
"헛!"
팔찌를 건네받은 제임스는 흠칫 놀랐다.
"이, 이 보물의 대가로 뭘 지불해야 하지?"
"그냥 선물이다."
"홀리...."
이런 보물을 그냥 선물로 주다니.
대단한 배포다.
제임스로서는 감히 상상해볼 수도 없는 일.
"감사하다. 너는 진정한 친구다."
"후후, 친구라...."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임스는 약한 놈이다.
헌데도 철두가 위험한 것을 알고 구하기 위해 용감히 돌진해준 놈이다.
"좋지. 제임스 너는 오늘부터 내 친구다."
"하하! 고맙다. 아이언헤드. 기쁜 날이군."
"후후, 친구 집으로 가자고."
새로 사귄 친구에게 얼른 아이언헤드 성을 구경시켜줘야겠다.
말을 달려 이틀 만에 뉴아 마을로 돌아왔다.
인력을 과다 투입한 요새의 공사는 며칠 만에 제법 진척되어있었다.
"이거 받아라."
"오! 뭐냐?"
"번역기."
"이야, 개꿀이네. 이제 시간마다 소통의 비약 안 마셔도 되겠네."
이미 다국적 다인종 영지가 되어버린 아이언헤드의 시종장에게는 딱 필요한 물건이다.
"전투는?"
"이겼다."
"뭐 얻은 거 있냐?"
"갑옷 옷, 무기."
"쳇, 그냥 그러네."
"후후, 5천 개."
"오, 제법 많네. 고생했다 야."
"별거 아니다."
철두가 르망을 손짓해 불렀다.
"르망."
"예에, 영주님."
"시종장이다."
르망이 말에서 뛰어내려 넙죽 엎드렸다.
"아이언헤드의 선임마법사 르망이 시종장님께 인사 올리옵니다."
"...이 아저씨 뭐냐?"
"후후, 마법사다."
"...많이 때렸냐?"
"아니, 안 때렸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빠릿빠릿해?
보나 마나 적진에서 뺏어온 포로일 텐데.
"후후, 난 먼저 성에 간다. 가자, 제임스."
"아, 알았네."
제임스는 철두를 뒤따르며 힐끗 뒤로 고개를 돌려 김진태를 보았다.
'5천 대 200이었는데....'
아니, 정확히는 5천 대 1의 대결이었다.
친구 사이라더니 시종장과 주고받는 대화가 어질어질했다.
전쟁과 전투, 약탈이 일상화된 영지의 넘버 2다운 여유였다.
'만만한 자들이 없군.'
아이언헤드 성에는 인물 하나하나가 심상찮아 보였다.
181화 지구 최고의 마을
"승전 기념 잔치다!"
성으로 복귀한 영주님의 한마디에 아이언헤드 성은 떠들썩해졌다.
"와! 또 잔치다!"
"이번에 쳐들어온 백작군이 또 묵사발 났다는구만."
"이야, 이번에도 수육 나오려나?"
"아, 잔치인데 당연히 나오겠지!"
성 아랫마을 주민들이 한껏 기대감에 부풀었고, 아이언헤드 성의 사람들은 잔치 준비로 분주히 움직였다.
총총걸음으로 다가온 엘리스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관리인들을 휘장 하나로 묶은 관리인단의 단장인 그녀는 시종장 김진태가 성을 종종 비워도 문제없이 성의 집사 역할을 도맡고 있었다.
"승전을 감축드리옵니다. 규모는 어찌할까요?"
"축하하는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해라."
"예에, 기간은 어찌하오리까?"
"전리품 마차가 돌아온 다음 날까지다."
전리품을 수레에 끌고 오자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터.
'성의 창고가 비겠구나.'
상당한 재물이 소요되겠으나, 창고에 그득한 물자를 생각하면 거덜 날 정도는 아니리라.
"솥을 옮겨라!"
"이쪽으로!"
새롭게 모집된 신병들은 땀내 나는 훈련만 하다가 처음으로 투입되는 임무였다.
"첫 실전이 승전 기념 잔치 투입이네."
"아, 취사 파견한다 생각하라고."
"후방부대가 이런 거 하는 거지, 원래."
대한민국은 여전히 징병제가 시행되는 나라.
건장한 청년들로 뽑은 신병들은 대부분 군대를 다녀온 예비역들이었다.
간혹 징병 전에 한양으로 건너온 20살의 풋내기들도 있었지만, 어차피 그들은 지금 군인으로 변모하기 위한 훈련을 수행하고 있다.
논산 훈련소가 아닌, 아이언헤드 병영에서 말이다.
화르르륵.
성 아랫마을과 아이언헤드 성 사이에 자리한 공터에 늘 그렇듯 여러 개의 막사가 꾸려졌고, 여기저기 솥이 걸리고 불이 지펴졌다.
마을 사람들도 뭐 도울 게 없나 싶어 주변에 땔감을 하러 가거나, 집마다 쓰지 않는 물건 따위를 내다 나눔하거나 헐값에 팔다 보니 여기저기 장이 들어섰다.
제임스 용병대 대원인 로사는 익숙한 듯 착착 돌아가는 영지의 분위기에 묘하게 겉도는 느낌을 받았다.
"어, 대장. 우리도 뭔가 도와야 하는 것 아냐?"
"손님은 가만히 있으래...."
이미 철두를 찾아봤으나 어디 갔는지 종적을 감춰 만나볼 수가 없었고, 잔치를 진두지휘하는 엘리스에게 가서 일거리를 달라 청해봤으나 거절당했다.
"누, 눈치껏 움직이자고."
"그래. 그런데 저거 봤어?"
로사가 가리키는 방향엔 비석이 있었다.
"저게 왜?"
"저거 혹시 전직의 돌 아닐까?"
"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건 제국의 도시들에만 있다고."
"그러니까 가서 물어보라는 소리잖아."
"왜 나보고 그래?"
로사가 한숨을 쉬었다.
"그 망할 팔찌를 낀 게 대장뿐이잖아. 아니면 그걸 내놔. 내가 직접 알아보러 갈 테니까."
"아, 내가 가볼게."
"좋아. 같이 가."
제임스가 성문 앞의 공간에 자리한 비석까지 다가갔다. 비석 주위로 울타리가 빙 둘러져 있고, 입구가 하나 있었으나 따로 지키는 자가 있진 않았다.
"마을 토템 같은 건가?"
"그럴지도 모르지. 그만 추리하고 물어보라고!"
로사의 재촉에 제임스는 지나는 사람을 잡고 물었다.
"실례합니다."
"예에."
공손한 제임스의 요구에 상대는 더욱 공손히 고개를 넙죽 숙였다.
"아, 그리 어려워하실 건 없습니다."
"아닙니다요. 영주님의 손님께 감히."
상대는 더욱 고개를 조아렸기에 제임스는 곤란해하면서도 얼른 용건만 전했다.
"저게 혹시 전직의 돌입니까?"
"예에, 맞습니다."
"헉!"
제임스가 깜짝 놀라자 로사가 반문했다.
"왜? 뭐래?"
"맞대."
"저게 왜 저기 있냐고 물어봐."
"저게 왜 저기 있습니까?"
"영주님이 가져오신 것으로 압니다."
"영주님이 가져왔대."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자는 제임스가 같은 말을 두 번씩 하는 걸 보곤 품에서 비약 하나를 내밀었다.
"음? 이건 뭡니까?"
"저분께 드리십시오. 소통의 비약입니다."
"헉! 이게 그 말로만 들어본 소통의 비약?"
제임스가 깜짝 놀랐고, 로사도 덩달아 놀랐다.
"이거 한 병에 3000주화가 넘잖아?"
"마, 맞아! 그마저도 수량이 없어서 프리미엄이 장난이 아니지."
3000주화의 가격은 제국의 상인들에게서 살 때 내는 금액이다. 그것을 사온 지구인들은 또 마진을 남겨서 팔아먹기에 어떤 곳에서는 세 배, 네 배의 이문이 붙기도 한다.
"마, 마시라고?"
"주, 주는데 마셔."
가치를 생각하면 고작 1시간 유지되는 시간이 아쉬울 따름이지만, 준 사람이 권하니 삥땅 쳐서 뒤에서 팔아먹는 짓은 못하겠다.
꿀꺽.
소통의 비약을 마시니 로사의 귀로 그제야 한국말과 제국말이 귀에 쏙쏙 박혀 들어왔다.
"와아! 이런 느낌이구나."
"레이디께서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아, 네에."
로사가 공손해 고개를 숙였다.
"이 귀한 것을 내어주셔서 일단 감사합니다."
"수고로움이 들어가긴 하지만, 그리 귀하진 않습니다."
아이언헤드령의 병사들에게는 두어 병씩 보급될 정도로 널리 쓰이는 게 소통의 비약이다.
"예? 귀하지 않다니요? 아이언헤드 성에는 소통의 비약이 많습니까?"
"많지는 않습니다."
"아!"
그런데 귀하지 않다니.
"창고에 비축량은 적으나, 필요한 때마다 만들어 쓰면 되기에 그리 귀한 물건은 아닙니다."
"헉!"
"갓 뎀!"
역시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보아야 한다.
"이, 이걸 자체생산한다고요?"
남자의 얼굴에 조금 자부심 같은 것이 어렸다.
"예에, 저와 같은 성의 연금술사들이 만들어내고 있지요."
"연금술사라니, 어떻게 벌써.... 아!"
무언가 깨달은 로사가 탄식했다.
노비스가 직업을 갖는 것은 까다로운 일이다.
우호적인 이계인 마을을 찾아야 하고, 거기까지 갈 정도의 무력과 세력이 있어야 한다.
그 마을과 교류를 트고, 왕래하며 신뢰를 쌓은 후에 마을에 출입을 허가받아야 한다.
통행세를 내고 들어간 마을 내에 전직의 돌이 있어야 하니, 좀 규모가 큰 마을이나 도시여야 한다.
그런 도시의 문지기들이 요구하는 통행세는 지구인에게 가혹하게 매겨져, 보통 100주화 정도 한다. 거기에 더해 전직의 돌을 한 번 만져보는 데에는 1000주화가 필요하다.
무력, 세력, 재력 세 가지를 모두 갖춰야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거다. 거기에 전직의 돌로 인해 맺어진 운명의 직업이 연금술사일 확률이 얼마나 될까?
적어도 현재 지구 소속의 직업인들 중에 연금술사는 없을 터다.
아니, 이곳 아이언헤드 성을 제외하고 말이다.
아이언헤드 성에는 전직의 돌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초보 노비스도 직업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 있다. 연금술사가 있다손 치더라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다.
"놀랍군요. 연금술사가 되신 지 얼마나 되었나요?"
"저는 9년이 조금 지났습니다."
"예에? 노바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기에."
"제국 출신입니다."
"아!"
놀랍다.
마법사들을 인질로 데려오는 것을 보긴 했다만, 그 이전에 이미 제국인들이 아이언헤드 성에 정착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구인들에게 있어 제국인은 미지의 외계인이자, 아직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은 종족이다.
많은 지구의 마을들이 그들과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아주 소소의 마을들만이 교류를 이어나가고 있다.
적어도 지구상에 존재하는 세력 중에, 제국인과의 전투에서 압도적인 승기를 점하고 제국인 노예를 부리며 지배하는 자는 아이언헤드 성이 유일하리라.
'스케일이 다르다.'
제국 출신의 연금술사 돌랑은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저, 더 하문하실 것이 없으시면 이만 물러나도 되겠는지요?"
"으음."
제임스가 로사를 돌아봤고, 그녀는 조금 심각한 얼굴로 잠깐 고심하더니 물었다.
"그대는 노예의 신분입니까?"
"아닙니다. 성 소속의 하인이지요."
"그것은 신분입니까?"
"가신이라 해야겠지요."
"아! 이해했습니다."
소통의 비약이 완벽한 것은 아니기에 이제야 뜻이 이해되었다.
"고마웠습니다."
"별말씀을요. 영주님의 친구를 정중히 대하라는 집사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궁금증이 모두 풀렸다.
돌랑이 인사 후 멀어지자 로사는 제임스의 팔을 퍽퍽 쳤다.
"미쳤어! 이건 미쳤다고!"
"아니, 그냥 말을 해."
"흥분돼서 주체할 수가 없어."
"저런 취향이야?"
"아니, 시발. 그거 말고. 저거 말야."
로사가 전직의 돌을 가리켰다.
"이건 혁명이야. 지구인이 지배 중인 마을에 전직의 돌이 있어. 이게 뭘 뜻할 것 같아?"
"전직이 조금 쉬워졌다?"
"쉬워진 정도가 아니라고! 퍽킹! 이건 혁신이야! like 사과폰."
"...진정 좀 해."
"당장 본부에 알려야겠어. 한국은 여태 이런 정보를 NITO에 공개하지 않았어! 그들만 전직의 돌을 사용하고 있었다고."
로사의 흥분을 제임스가 가로막았다.
"멈춰."
"당장 다녀올게. 포탈망을 이용하면 금방이야."
"아니, 당장 멈춰."
제임스의 얼굴은 진지했다.
"제임스! 이건 공익을 위해서야."
"허락이 먼저다."
"뭐? 어디에? 한국 정부?"
"아니."
제임스가 바닥을 찍었다.
"여기 주인."
"강철두?"
"그래."
"...젠장. 그래 맞아."
로사가 겨우 흥분을 가라앉혔다.
"종잡을 수 없는 친구야. 화끈하기도 한 친구지. 난 그런 친구를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아."
"알았어. 제임스. 사과하지."
"그래. 당분간은 조용히 있어. 다른 대원들도 단속하고."
"그래서 그 친구는 지금 어디 있는 거야?"
제임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지.... 음?"
"왜? 짐작 가는 곳 있어?"
"서, 설마!"
"왜?"
"결투장 진입 시간이 다 됐어."
"복귀하자마자 결투장에 갔다고?"
"확실해!"
강철두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제임스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아직 오후라 해는 서산마루에 걸려 노을이 지기 전이다.
"네스트!"
제임스의 부름에 그의 손등에 달라붙어 있던 붉은 뱀이 꿈틀거리더니 빛을 머금고 커졌다.
길쭉하게 길어진 뱀은 팔을 타고 올라가, 제임스를 향해 고개를 내밀고 혀를 날름거렸다.
슈슈슉.
"네스트. 결투장 입장할게."
쇼쇼쇽
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입을 쩍 벌리자 빛이 쏘아지며 앞에 차원문이 나타났다.
"뭐야, 갑자기?"
"아마 저기 있는 것 같아. 일단 간다!"
"어, 알겠어."
파팟.
제임스는 어질해지는 기분과 함께 눈을 떴다.
무한결투장은 노바나 지구와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이 흐른다.
낮에 진입한 이들은 낮에 진입한 이들끼리 모두 함께 입장.
밤에 진입한 자들은 밤에 진입한 이들끼리 모두 함께 입장.
제임스가 무한결투장에서 눈을 뜨자, 강철두가 저만치 앞서 걸어가는 게 보였다.
"역시."
제임스.
아니, 결투장의 섹시가이는 서둘러 뛰어가며 철두를 불렀다.
"이보게! 한산이동 강철주먹!"
182화 뒤틀린 운명
"음?"
뒤로 고개를 돌린 철두는 철 투구에 철갑옷을 뒤집어쓴 기사를 보며 대충 손을 흔들어 주었다.
"왔나? 제임스."
"여기선 섹시가이라고 부르라구."
"병신같은 이름이군."
"쿡쿡, 자네도 만만찮아."
두 사람은 피식 웃었다.
"아니, 성에 돌아오자마자 어찌 결투장에 왔는가?"
"출전해봐야지."
쿨타임이 다 돌았으니 입장했을 뿐이다.
"성격이 급하군."
"미룰 일도 아니지."
"그, 그건 그렇지."
제임스는 철두의 말을 곱씹었다.
우리는 대회나 시험, 시합 등의 이벤트를 과하게 중요하게 생각한다.
많은 시간 준비하고 공을 들이고, 정신적으로도 무장을 단단히 한다.
허나, 철두는 그런 게 없다.
그저 일상생활의 한 부분인 듯 무던하게 받아들인다.
어쩌면 강철두의 강함은 저런 자세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자네를 존경해."
"후후."
제임스의 리스펙에 그저 웃어 주었다.
"난 바로 간다."
"어, 알겠네. 좋은 운이 함께하길 바라네."
어린 친구지만 참으로 존경스럽다.
리스펙하지 않을 수가 없다.
"흐흐. 나도 얼른 포인트나 모아볼까."
하나씩 하나씩 모은 포인트가 벌써 26개다.
제임스는 훈련장으로 가 소환된 미니언을 보았다.
파팟.
하나는 쉽지.
2:1부터는 조금 어렵고, 3:1은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었다.
"어?"
그러고 보니 강철두는 이번이 무한결투장 세 번째 입장이다. 저번 3:1 훈련이 두 번째 입장이라고 했으니.
"...미친. 두 번 만에 100포인트를 모은 건가?"
최소 미니언 100마리를 잡았다는 이야기....
매 도전마다 한 마리씩 더 소환되는 미니언이다.
대체 몇 대 1까지 해봤다는 소리일까?
"흐흐, 가슴이 뜨거워지는군."
제임스는 미니언을 보며 돌진했다.
"흥, 덤벼라! 나 장호철이...."
서컥!
한 마리는 쉽다. 쉬워.
<계속 도전하시겠습니까?>
<도전한다.>
파팟.
두 번째로 소환된 미니언들과의 전투를 속행했다.
*
<훈련>
<출전>
<대련>
"출전한다."
<전사의 대기장으로 이동합니다.>
파팟.
철두의 시야가 빙글 돌며 눈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대기장이라더니 휑한 방에 의자와 침대, 그리고 네모난 상자가 전부였다.
철두가 상자로 다가서니 커다란 화면과 아래쪽엔 막대기가 하나 달려 있었다.
<소울 포인트를 투입하세요.>
<최소 포인트는 100입니다.>
이래서 출전을 위해서 100포인트가 필요했구나.
철두는 망설이지 않고 모든 포인트를 집어넣었다.
<110포인트를 베팅합니다.>
또로로로롱.
?의 화면이 생기고 그 뒤로 검은 인영이 슬롯 돌아가듯이 쭈루루룩 바뀌었다. 그러다 천천히 돌아간 화면이 멈추자, 검은 인영에 색이 입혀지며 몽타주가 나왔다.
닉네임 : 전설을 잇는 자
결투 점수 : 154
베팅 포인트 : 100
<레버를 당겨 상대를 바꿀 수 있습니다.>
<하루 한 번만 무료이며, 이후 10의 포인트가 차감됩니다.>
"오!"
철두는 레버를 당겼다.
이걸 어떻게 안 당기고 참아.
또로로로로.
다시 몽타주가 돌아가며 매칭 상대가 떴다.
닉네임 : 숲의 재앙
결투 점수 : 177
베팅 포인트 : 120
"오."
아까 그놈보다 더 많은 포인트를 베팅한 녀석이다.
"이놈으로 하지. 그런데 어떻게 출전하지?"
철두의 물음에 대꾸라도 하듯 방 한쪽 벽에 마련된 문이 열렸다.
끼이이이.
"오."
양쪽으로 열린 커다란 문을 나서자 익숙한 모습의 콜로세움이 나왔다.
무한훈련장이나 무한대련장과 똑같은 모습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텅 비어 있었던 관객석에 드문드문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는 거다.
"호오, 여기가 진정한 무한결투장이군."
철두는 설렘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쿠웅.
결투장에 온전히 진입하자 문이 자동으로 닫혔다.
이제 여기서 나가는 방법은 승리 또는 죽음뿐이다.
"후후후."
설레는군.
쿠우웅.
반대쪽에서 열린 문으로 천천히 들어서는 상대를 보았다.
여기저기 파츠로 나눠진 갑옷을 입은 녀석이었는데, 입안에서 삐죽 튀어나온 거대한 송곳니가 인상적인 놈이었다.
"오크?"
"와하하하! 이노옴! 나는 나룬겔 행성의 오르그족이다."
오크처럼 긴 송곳니를 가졌고, 험악하게 생긴 모습이 똑 닮았지만, 피부색이 다르다.
오크는 진한 녹색의 괴물이지만, 상대는 주황색이다.
"좋아, 오렌지 오크. 덤벼라."
"크하하하! 건방진 놈! 감히 0점따리가 까부는구나."
자칭 숲의 재앙이라는 오르그족 전사가 인벤토리에서 거대한 도끼를 꺼내 들었다.
"오!"
철두도 인벤토리에서 도끼를 꺼냈다.
"크크크, 내 앞에서 도끼로 맞서다니. 용감한 놈이로세!"
"후후후. 자신 있나 보군. 한 수 배우지."
지금 가장 기술 수준이 높은 무기는 검이었으나, 도끼를 꺼냈다. 도끼를 주력으로 쓰는 상대와 어울리다 보면 도끼 숙련도 또 다른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후우우웅!
숲의 재앙이 빠르게 거리를 좁히곤 일도양단의 기세로 도끼를 내리찍어왔다.
"와하하하!"
콰아아앙!
철두는 도끼를 피하지 않았다. 양날도끼를 힘껏 휘둘러 올려 쳤다. 놀랍게도 달려온 가속도에 체중을 실어 휘두른 오르그족의 도끼가 밀려났다.
높이 치켜든 도끼로 인해 철두의 겨드랑이가 훤히 보일 정도로 빈틈이 노출되었다.
이 정도 빈틈이라면 공격하지 않을 수 없다.
자, 어떻게 막을 것이냐?
쐐애애액. 콰직!
철두가 휘두른 도끼는 그대로 오르그족의 가슴팍을 찍어버렸다.
"커헉!"
"...?"
철두가 의문을 표할 새도 없이, 쩍 벌어진 상처로 피를 왈칵 쏟던 오르그족의 신형이 허무하게 빛으로 화해 사라졌다.
"...?"
철두는 우두커니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깜짝 놀란 관객들은 박수를 치기도 하고, 어딘가 전화를 걸기도 했다. 잠깐, 저거 진짜 전화기인가?
"뭐야?"
결투장이라고 잔뜩 기대했더니, 이래도 되는 건가?
이거 너무 싱거운 거 아닌가?
<승리!>
<120의 소울 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놀라운 전과!>
<결투 점수 517점이 책정되었습니다.>
쿠우우웅.
철두가 뒤로 돌아보니 닫혔던 문이 다시 열려 있었다.
"김샜네."
철두가 다시 대기실로 돌아가 네모난 상자를 짚었다.
"전부 베팅한다."
<230의 소울 포인트를 베팅합니다.>
닉네임 : 떨어지는 별
결투 점수 : 502
베팅 포인트 : 300
"오!"
아마 이 매칭 시스템이란 것은 비슷한 수준의 결투 점수를 가진 자들과 비슷한 포인트를 베팅한 자들끼리 이어주는 모양이다.
"후후, 점수를 빨리 올려야겠군."
결투 점수를 올리면 더 강한 상대와 매칭되지 않겠는가?
생각해보니 상대가 약할 만도 했다.
점수가 낮은 영웅은 기껏해야 제임스나 사토 정도의 수준일 텐데, 철두의 상대가 될 리가 만무했다.
철두는 기대를 안고 두 번째 결투를 진행했다.
서컹!
"크아아!"
<승리!>
<300의 소울 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놀라운 전과!>
<결투 점수 853점이 책정되었습니다.>
세 번째 경기.
슈유유유, 콰직!
<승리!>
<500의 소울 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결투 점수 972점이 책정되었습니다.>
네 번째 경기.
스컥!
<승리!>
<400의 소울 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결투 점수 1098점이 책정되었습니다.>
"후후후."
1000점이 넘는 녀석은 제법 싸울 줄 아는 놈이었다.
"대충 알겠군."
매칭을 해 보니 알겠다.
소울 포인트를 많이 베팅할수록 좋은 게 아니다.
포인트를 많이 베팅하면 나보다 결투 점수가 낮은 상대와 매칭된다.
베팅한 포인트가 낮을수록, 상대적으로 위험한 선수와 매칭되어 고배당을 노려볼 수 있다.
"이번엔 300 베팅한다!"
철두가 300의 소울 포인트를 지불하자 매칭 상대를 찾는 룰렛이 돌아갔다. 방금 전보다 한참을 더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매칭 상대 찾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후후, 기대되는군."
닉네임 : 나만없어정령
결투 점수 : 2104
베팅 포인트 : 700
"후후후."
과연.
무려 1000점이나 더 많은 상대와 매칭되어버렸다.
이기면 700포인트 획득, 지면 300포인트 손실.
하지만 포인트 따위는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결투 점수.
강한 상대와의 매칭!
"도전한다!"
쿠우우웅.
문이 열렸다.
철두는 기대감을 안고 다시 문밖으로 나섰다.
아까보다 관객석에 앉은 구경꾼들이 더 많아 보였다.
여태 상대한 모든 결투자들이 알게 모르게 투구나 가면 같은 것으로 얼굴을 가린 데 반해, 이번에 등장한 놈은 투구가 없다.
은발의 머리를 찰랑이며 나타난 상대는 두 귀가 뾰족하게 솟아 있었다.
"음? 요정?"
"허, 바바리안이네."
철두는 상대를 자세히 봤다.
저건 갑옷을 입은 건지 안 입은 건지,
두 팔은 훤히 드러나 있고, 배도 살갗으로 훤하다.
골반에 걸친 핫팬츠 같은 스커트 갑옷과 가슴만 가린 흉갑이 갑옷의 전부다.
"...."
철두는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며 요정을 노려봤다.
이제 전처럼 요정만 보면 복수심을 불태우고 그러진 않는다. 애새끼도 아니고, 이제 문제의 근원을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찾을 정도로 철이 들었다.
철두가 화가 난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어째서 요정이 타투를 하고 있지?"
"허, 그러는 넌 뭔데 바바리안 새끼가 타투도 없냐?"
매끈한 피부의 바바리안과,
온몸에 바바리안식 타투를 한 요정이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했다.
스릉.
요정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도끼를 꺼내 들었다.
"...도끼를 쓰나?"
"그래. 배운 게 이것뿐이라."
"배워?"
"말해주면 아나? 애송이 바바리안."
"...."
바바리안 전사도 아닌, 요정 따위에게 애송이 취급을 받다니.
"흥, 상대해주마."
철두가 도끼를 꺼내 들었다.
"하여튼, 개성 없는 종족이야."
하나같이 무게가 나가는 무기를 즐겨 쓴다.
쇄애애액.
콰앙, 까가강, 쾅!
두 사람의 일격필살을 담은 도끼가 서로 미친 듯이 공방을 주고받았다.
서로가 놀랐는데, 그 힘이나 밸런스가 묘하게 엇비슷했다.
"잴 것도 없다. 넌 뒈졌다."
요정이 거칠게 말하곤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
츠츠츠츳.
요정의 몸에 새겨진 타투가 진하게 빛나며 스멀스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러곤 요정의 어깨 위에 상반신이 불쑥 솟았는데, 영락없는 바바리안의 생김새를 가진 형태였다.
"...서, 선조의 혼?"
"...."
철두는 그답지 않게 깜짝 놀라버렸고, 요정은 냉막한 얼굴로 철두를 노려볼 뿐이었다.
"뒈져라."
쇄애애액.
어마어마한 스피드다.
선조의 혼이 깃든 전사는 적게는 두 배, 많게는 수 배는 더 세진다.
지금 철두가 저것에 대항할 수단은 하나뿐.
'친구들.'
스아아앙! 파앙!
요정이 휘두른 도끼가 바람의 정령이 만들어낸 공기 방어막과 부딪혔다.
철두는 몸에 깃드는 물의 정령의 기운과 도끼에 깃든 땅의 정령의 기운을 느끼며 요정을 노려봤다.
"후, 나도 지원군 있다."
불의 정령과 바람의 정령은 철두의 어깨에 올라타 언제든 마법을 쏘아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요정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철두를 삿대질했다.
"어, 어떻게 바바리안이 정령을...."
"사돈 남 말 하고 있네."
철두가 이죽이며 도끼를 들고 달려나갔다.
183화 중심을 잡다
"어이가 없군. 바바리안이 정령이라니...."
"네놈이 더 말이 안 된다. 요정 따위에게 우리 선조의 혼이라니...."
더군다나 요정의 머리 위로 기세등등하게 노려보는 선조의 모습이 심상찮다. 그저 노려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찌릿찌릿한 기분이다.
"굉장히 기분 나쁜 바바리안이구나. 한산이동 강철주먹."
"흥, 너야말로. 나만 정령 없어.... 그렇군. 넌 정령이 없었군. 후후후."
철두가 호탕하게 웃었다.
"아하하하하! 정령도 다루지 못하는 요정이라니."
요정이 와락 인상을 구기며 소리쳤다.
"무슨 병신같은 소리냐! 정령은 선택받은 하이엘프들만 다루는 힘이다! 모든 요정이 정령을 다루는 게 아니다!"
"오, 넌 하이엘프가 아니구나."
"아니다. 난 하이엘프가 맞지만...."
요정은 더 말하기를 멈췄다.
"넌 뒈졌다. 바바리안 새끼."
감히 나를 놀리다니.
"이렇게 큰 새끼 봤냐?"
"병신이, 타투도 없는 게 다 크긴!"
"흐음!"
감히 나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다니.
"가자, 친구들!"
하지만 정령이 함께한다.
"정령도 없는 게."
"이이익!"
후우우우웅.
요정이 휘두른 도끼와 철두의 도끼가 부딪쳤다.
꾸엉!
엄청난 힘에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충격이다.
'차원이 다르군.'
대체 저 요정은 어떤 선조의 인정을 받은 거지?
어떻게....
"우어어어어!"
냅다 전투함성을 내지르곤 달려들어 미친 듯이 도끼를 후려쳤다.
쾅, 쾅, 쾅!
엘프 녀석은 그리 어렵지 않게 모든 공격을 막아냈다.
전력을 다한 휘두르기였는데도, 엘프의 표정엔 여유가 남아있다.
"이이익!"
철두는 이를 악물었다.
이것은 분명... 질투의 감정이다.
나 바바리안 강철두는 아직 아무런 선조와도 인연을 맺지 못했는데, 감히 엘프 따위가 선조의 혼을 모시다니!
"감히!"
콰아앙!
"흥!"
엘프는 코웃음 치고는 비릿하게 웃었다.
상대해보니 별것 없었다.
하이엘프도 아니면서 정령을 부리는 웃기지도 않는 바바리안은 분명 특이하긴 하지만, 미숙하다.
무려 4대 원소 정령 모두와 연을 맺고 있는데도, 정령을 다루는 모습이 너무 서툴다. 저걸 저렇게밖에 활용하지 못하다니.
"끝이다. 애송이 바바리안."
짜증이 난다.
정령 바바리안.
이건 분명 질투이기도 하다.
감히 바바리안 따위가 정령과 연을 맺다니.
슈아아아아!
여태와는 다른 속도, 다른 힘.
끄앙!
철두는 반사적으로 도끼를 들어 막아냈으나, 그 거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끼 쥔 손이 위로 떠 버렸다.
그 빈틈으로 엘프의 발차기가 들어왔다.
꾸엉!
배가 움푹 들어갈 정도로 충격적인 킥이다.
철두는 순간 숨이 턱 막힐 정도의 고통에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물었다. 울컥하는 피를 삼키며 힘껏 도끼를 내리그었다.
까앙! 퍼억!
도끼는 너무 쉽게 막혔고, 엘프 녀석은 철두에게 로우킥을 먹였다.
쩌억!
다리가 휘청이며 무너진다.
엘프는 호리호리한 체형답게 재빨랐고, 그 힘도 어마어마했다.
'선조의 혼만 아니면....'
엘프 따위 허리를 반으로 접어버릴 텐데.
콰앙!
철두의 신형이 무너졌다.
엘프가 휘두른 도끼가 철두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온다.
'그대 위대한 선조여, 어찌하여 엘프 따위에게....'
콰직!
세상이 시커메진다.
의지가 이어지지 않는다.
<300의 소울 포인트를 잃었습니다.>
<결투장을 퇴장합니다.>
파팟.
눈을 떠보니 영주실의 지하 수련장이다.
"꾸이!"
찰싹, 찰싹.
전령 꾸이가 꿀렁이는 몸체로 철두의 볼에 붙었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후우."
철두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거칠게 머리를 헝클이며 쓸었다.
"졌군."
죽음을 경험해보는 것은 처음이다.
"후우우우."
허무하고 분하다.
선조여....
선조의 혼을 얻지 못한 반쪽짜리 바바리안은 여태 아쉬워할지언정, 부족함을 느끼진 않았다.
허나 지금 철두의 가슴엔 갈망이 가득하다.
나는 원한다.
"발할라."
이곳 노바에는 선조의 혼을 얻을 수가 없다.
있다면 오직 하나.
"발할라로 가야겠다."
갈 수 있지 않을까?
지구가 노바에 연결되어있듯이, 발할라도 노바의 어딘가와 연결되어있지 않을까?
철두가 몸을 일으켰다.
이동 마법진을 통해 영주실로 이동해보니 서쪽으로 해가 져서 빨간 노을이 지고 있다.
테라스 너머로 성 밖에서 왁자지껄 사람들이 몰려들어 있는 게 보인다.
그래, 승전연을 준비해놓고 결투장에 갔었지.
이 기분으로 부하들을 볼 수는 없지.
심상의 공간에서 조금 마음을 다스리고 가야겠다.
철두는 눈을 감았다.
*
아이리스 후작령.
기사단장 아르엘라는 후작의 집무실에 쳐들어갔다.
"영감!"
"예끼! 이 녀석아! 후작 각하라고 불러라."
하이엘프족 장로였으나 지금은 아이리스 후작이 된 요르센이 길게 자란 흰 수염을 쓰다듬었다.
"무슨 일이길래 또 씩씩거리느냐?"
"아, 됐어. 지금 굴단 어딨어?"
"굴단 공작은 왜 찾느냐?"
"장로. 내가 미친놈을 봤어."
"미친놈 눈에는 다 미친놈만 보이는 법이지."
"아씨! 좀!"
"낄낄."
아르엘라는 장로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영감, 바바리안이 정령과 친구라면 믿어져?"
"예끼.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니까. 내가 지금 얼마나 빡이 치는지 알아?"
아르엘라가 분통을 터트렸다.
"아니, 시발. 엘프 왕족 혈통이 정령이 없는데 감히 야만인 따위가 정령.... 읍, 읍. 아, 왜?"
"입조심하라 늘 이르지 않았습니까?"
"아이씨, 누가 듣는다고 그래."
"이 늙은이 죽는 꼴 보시렵니까?"
"아, 알았어."
아르엘라가 입술을 삐죽였다.
아이리스 장로는 조심성이 너무 많아서 탈이다.
지배계층 전부가 엘프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아이리스 후작령에서까지 이리 조심하니, 거 참.
"아무튼, 별종 바바리안이 나왔어. 그놈을 찾으러 가야겠어."
"어휴."
아이리스 후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터무니없는 자가 있다 해도, 굴단 공작령에 있다고 어찌 확신합니까?"
"모르지. 누가 확신한대?"
그냥 바바리안 중에 가장 높은 계급을 가진 자가 굴단 공작이라 그를 찾아가려는 거다.
그자 밑에 없으면 뭐, 또 다른 녀석을 찾아봐야지.
발할라 행성이 노바에 먹힌 지 15년.
발할라의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던 인간은 노바의 제국과 여러 왕국의 시민이 되었고, 엘프와 바바리안 또한 다르지 않은 처지다.
일부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아직 떠돌고 있다 하나, 대부분은 아이리스 후작이나 굴단 공작처럼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아무튼 굴단 그 영감 어디로 또 갔는지 알면 알려줘."
"어휴, 알겠습니다."
저 고집을 어찌 꺾을까?
어차피 막아봤자 몰래 갈 테니, 차라리 수행원을 줄줄이 딸려 보내는 게 낫다.
아르엘라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으나, 여전히 표정이 심통맞았다.
"그러고 보니 열 받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세상을 보는 눈을 감고, 내부를 보는 눈을 떴다.
요정 아르엘라의 심상공간.
어둠 숲.
파팟.
아르엘라는 언제나 어둡기만 한 숲의 공터에 눈을 떴다.
이 심상 공간은 언제나 어둡다.
하늘은 까맣고, 무수히 많은 별빛만이 주변을 밝힌다.
스산한 느낌을 주는 이 어둠숲의 중심 공터 한쪽에 오두막이 하나 지어져 있다.
"영감!"
오두막 문이 열리며 거대한 덩치의 바바리안이 걸어 나왔다.
"나, 참. 그 터무니없는 새끼.... 어?"
아르엘라는 자신의 선조를 보고 덜컥 굳었다.
지난 15년간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모습이기에.
"우, 울어?"
"...."
위대한 전사가 울고 있다.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우어어어어어!"
함성엔 슬픔이 가득했다.
부족보다 강했던 전사.
종족의 배신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자.
아르엘라를 15년이나 가르친 스승이자....
아버지....
"...."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기에.
너무 놀란 아르엘라는 감히 물어볼 수조차 없었다.
우두커니 서서, 놀란 입을 가로막고 있을 뿐이다.
어둠숲에 울부짖는 바바리안의 함성만이 가득했다.
*
메마른 언덕.
바바리안 에이든이 눈을 떴다.
전보다 훌쩍 키가 컸지만, 이제야 아이 태를 벗은 소년의 모습.
"우어어어어어!"
분노 가득한 함성을 뱉었다.
감히, 나도 없는 선조의 혼이 엘프 따위에게.
선조로 추앙받을 정도면 위대한 전사였을 텐데, 배알도 없이 요정족 따위에게 붙다니.
같은 동족이라는 게 부끄럽군.
"흥!"
괜히 심술이 났다.
어린아이들이 대부분 그렇다.
소년 특유의 치기라고 할 만도 했다.
"흐으응!"
에이든의 불편한 심기를 달래러 정령들이 날아왔다.
요리조리 재주넘는 녀석들을 봤음에도 에이든의 얼굴에 덕지덕지 묻은 심술이 떨어지질 않는다.
역시 잡생각을 없애는 덴 수련이 최고지.
도끼를 생각하자 도끼가 뿅 하고 나타났다.
바바리안 명상법도 이제 경지에 올라, 이 정도 구현력은 충분히 발휘해낸다.
후우웅, 후우웅!
선조의 보살핌을 받는 요정 놈과의 결투를 복기해봤다.
후우웅, 후웅!
요렇게, 요렇게.
아, 그렇지.
전투에 있어서 바바리안의 두뇌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 전투의 시작과 끝까지 전부 외워 다시 시뮬레이션을 돌려가며 도끼를 휘두르던 에이든은 갑자기 우뚝 멈춰섰다.
"뭐야, 이거?"
요정에게 진 것은 선조의 보살핌으로 인한 버프로 인해, 힘의 격차가 너무 크기에 속절없이 밀렸다고 생각했다.
허나, 가만히 복기해보니 상대의 도끼 다루는 솜씨가 심상찮다.
"...바바리안처럼 도끼를 다루는 요정이라."
어디서 배웠지?
에이든은 한참을 더 도끼를 휘두르다가 상념에 빠지길 반복했다.
"뭐, 됐어. 다음엔 이기면 되지 뭐."
선조의 보살핌을 부러워하고 질시하기에는, 아직 에이든은 위로 향하기 위해 채울 부분이 많다.
무구의 혼.
레벨 5 정도가 되면 그 녀석도 이길 수 있지 않을까?
발할라에 가는 방법도 슬슬 알아봐야겠다.
무구의 혼이든, 선조의 혼이든 모두 가지고 말 테다.
세상에서 제일 강해지고 말 테다.
부모님과 한 약속이니까.
*
아이언헤드성의 축제가 이어졌다.
영주의 복귀와 함께 시작된 축제는 하루, 이틀, 사흘째도 이어졌다.
나흘째 되는 날, 수십 대의 수레와 검과 창, 갑옷과 옷가지 등 엄청난 물자가 실려 오고 나서는 축제가 더욱 성대해졌다.
소문을 듣고 한양에서 온 사람들이 가장 많았고, 소식이 NITO에도 퍼지고, 최대 커뮤니티인 휴먼 채널에도 퍼져, 세계 각국의 노비스들이 몰렸다.
축제 닷새째 날에는 몰린 인구가 3천을 넘었고, 엿새, 이레, 여드레 되는 날에는 6천이 넘었다.
아흐레 날이 되자 영지병들이 치안 유지에만 투입될 정도로 혼잡해졌기에, 열흘째 되는 날 축제는 파했다.
축제가 끝나고 이동 포탈망을 통해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본래의 소속 마을과 도시로 돌아가며, 아이언헤드성의 사정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아이언헤드성이 지구 출신인들의 개척마을과 도시들 중.
중심지로 역할하기 시작한 기점이 된 날이다.
184화 조세 남발
축제가 시작했다고 사람들이 단번에 모이지 않았듯, 축제가 끝을 고하고 나서도 사람들은 일시에 뿅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아이언헤드령에 머물렀고, 사회적 동물들의 습성상 비슷한 부류끼리 모여 무리를 이뤘다.
아이언헤드성을 두고 본디 자리 잡은 성 아랫마을 외에도, 여기저기 막사들이 모여 군진 비슷하게 꾸려져 있었다.
중국 사람들끼리 모인 무리가 수백, 미국인들도 수백, 일본에서 온 자들도 천여 명 조금 넘게....
이에 더해 남미, 아프리카, 인도 등등 전 대륙의 사람들이 조금씩 와서 동향을 살피고 있다.
"아오! 왜 안 돌아가는 거야!"
아이언헤드성의 최고 내정 책임자인 시종장 김진태는 골머리를 앓았다. 이러다가 정말 창고가 거덜 나게 생겼다.
"엘리스! 식사에 돈을 받고 있는 거 맞아?"
"마, 맞습니다. 한 끼에 10주화를 받고 있사온데 너 나 할 것 없이 맛있다고 사 먹고 있습니다."
"국밥이 3배나 비싼데 왜들 그래!"
축제 때야 공짜로 식사를 제공했지만, 이제는 밥을 먹기 위해서는 돈을 내야 한다.
신서울의 국밥 가격이 주화 3개고, 조금 사정이 퍽퍽한 한양의 국밥 가격이 5주화다.
나름 고민한 끝에 책정한 금액이 10주화다.
사람들을 굶길 수는 없으니 음식을 팔아주긴 하겠는데, 돈이 아까우면 얼른 너네 마을로 돌아가라는 의미다.
"안 되겠다! 이걸 막아야겠어."
<전직의 돌 활성화 주화를 100개로 설정합니다.>
이제 전직의 돌을 이용하려면 100주화를 넣어야 한다. 이 정도면 지금도 알음알음 찾아오는 신규 유입 정도야 막을 수 있겠지.
"철두는 어딨어?"
"영주님은 지금 북쪽 축구장에 계십니다."
"하아, 이 새끼."
시종장은 이렇게 고생하는데 영주란 놈은 축구를 하러 가셨단다.
"어디랑 붙는데?"
"영국팀이랑 붙고 있습니다."
아이언헤드 승전 축제를 무려 열흘이나 치렀다.
축제 기간 동안 먹고 마시며 노래 부르고 춤을 추던 가운데, 여러 도시의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 누군가 족구를 한 것에서 시작되어 판이 커졌다.
잔디 들판에 라인이 그려지고, 축구 골대가 세워지고 토너먼트가 벌어졌다.
"영주님을 모셔올까요?"
"어유, 냅둬요."
늦바람이 무섭다고, 늘 개인종목만 하던 철두에게 구기 종목은 신세계였다.
'신날 만하지.'
철두는 학창시절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놀지 못했다. 철두만 들어가면 초딩 리그에 차미네이터를 풀어놓은 것 같이 변해버리니, 게임이 재밌을 리가 없었다.
알게 모르게 구기 종목 시합 때마다 왕따를 당해온 철두다.
하지만 지금은 누가 막겠는가?
강철두가 최고 권력자인데.
'이게 군대스리가인가.'
한창 신나 있을 철두를 내버려 두고는 정신없이 올라오는 게시판을 읽었다.
아이언헤드 성문 앞과, 성 아랫마을 광장 두 곳에는 커다란 게시판이 있어 세력창을 통해 퀘스트를 생성하거나, 공지사항 등을 공표할 수 있었다.
반대로 주민들의 의견을 모아 영주에게 올리는 신문고의 역할도 했기에, 여러 요청이 게시판에 가득했다.
김진태는 상소문을 읽는 왕의 심정으로 한가득 올라온 요청을 하나하나 읽다가 분통을 터트렸다.
"아니! 다 놀았으면 가라니까, 건축허가는 뭐여!"
<일본인 거주지역에 건축을 허가해주십시오. 외성 안쪽 구역에 5개의 건물을 지으려 하니....>
주절주절 올라온 영주님을 위한 상소문을 읽고는 빠르게 처결했다.
"모르겠다. 지들이 짓겠다는데."
세금이나 왕창 때려야겠다.
비싸면 아니꼬와서 떠나겠지.
<거주지역 부동산 1필지에 2000주화....>
건물을 지으려면 땅이 있어야 한다.
외성의 안쪽은 아이언헤드령이 보호하는 구역.
"너무 싼가? 싸면 나중에 올리고."
고개를 갸웃한 김진태는 세력창의 세금 항목을 대거 손보기 시작했다.
"보유세 때리지 뭐."
<건축물 보유세 10주화 - 자동징수>
<거주세 하루 3주화 - 자동징수>
<상업활동 허가증 발급 - 5000주화>
<영업 면허료 하루 30주화>
....
"몰라, 시벌."
일에 치인 시종장이 폭주했다.
세금이 적당한지 어떤지 따위 계산하지 않는다.
아니꼬우면 떠나라.
"흐흐흐흐. 세금, 세금!"
돈 내기 싫은 자. 떠나라!
제발 집으로 좀 돌아가라.
"흐흐, 놀고먹는 놈들 죄다 떠나겠지?"
<외성 통행세 입장 시 10주화 자동징수>
<보호세 하루 2주화 자동징수>
....
시종장 김진태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
아이언헤드 성문 앞 커다란 게시판.
새롭게 공고된 게시물을 바라보는 호세의 얼굴엔 희열이 가득했다.
"떠, 떴다!"
개편된 세금안이 주르륵 떠올랐는데, 호세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드디어 살 수 있어!"
필지를 불허하기 시작했다.
<분양 공고>
거주용 필지
1-1번지 - 2000주화
1-2번지 - 2000주화
....
상업용 필지
2-1번지 - 7000주화 (판매완료)
2-2번지 - 7000주화
....
공방용 필지
3-1 번지 - 5000주화
3-2 번지 - 5000주화
....
아이언헤드 성을 중심으로 지어지는 외성은 아직 공사가 끝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부동산은 미래를 먹고 자라는 괴물.
외성이 다 지어지고 나면, 노바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는 어디가 될 것인가?
또 가장 안전한 노바의 땅은 어디가 될 것인가?
적어도 축제에 참여한 여러 사람들은 본인들의 마을보다 아이언헤드성의 가능성을 더 높게 평가했다.
제국 백작을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해버리는 강철두가 영주로 있는 성이다.
노바에 있어 여기보다 안전한 곳이 없다.
그런 외성 안쪽 구역을 드디어 민간에 불허하기 시작했다.
용도마다 겨우 50개씩 제한적이다.
위치를 가늠할 여유도 없다.
<판매 완료되었습니다.>
"이런!"
사람들 생각이 다 비슷한지라 게시판에 몰렸던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부동산을 샀고, 호세도 지금 가진 재산을 모두 쏟아부어 거주용 하나와 상업용 하나를 샀다.
"준! 준! 어서 와! 돈 가져와!"
더 사야 한다.
더!
여기서 장사할 수 있으면 앞으로 돈을 버는 건 문제도 아니다.
갑자기 수십 개나 불어나 버린 세금들?
"호재다!"
세금 공표는 많은 것을 의미한다.
"납세하면 보호받을 수 있다!"
이게 호재가 아니면 무엇인가?
브라질 출신의 호세에게 이는 너무나 당연한 진리다.
안전한 부동산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다!
중앙정부든 마피아든 누구든 상관없다. 절대 권력자가 차지하고, 보호세를 걷으며 지키는 부동산은 안전하다!
돈을 내라!
확실히 지켜주고, 보호해주겠다.
아이언헤드령이 세상을 향해 공표한 것이나 다름없다.
"개국이다!"
호세의 눈이 반짝였다.
*
영토가 있고, 사람이 있으며, 주권이 있다.
국가로서 갖춰야 할 요소는 다 있다.
휴먼 채널은 이로 인한 갑론을박으로 시끄러웠다.
특히나 글의 리젠이 많은 곳은 미국 커뮤니티였다.
- 뭐야? 드디어 독립세력의 탄생인가?
- 테란이야! 다행성 종족의 숙명이지 자연스러운 흐름이야.
- 애초에 한국은 아이언헤드를 컨트롤하지 못함.
- 그럼 왕정인가? 공화정인가?
- 노바에서 민주주의를 들먹이는 새끼는 없겠지?
- 왜 안 돼? 독재는 나쁜 거야.
- 위에 놈은 병신인가?
- 총 없는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없어.
- 위에 놈 새끼, 무슨 극단주의자 출신이냐?
- 일부는 맞는 말이야. 모든 사람이 평등해야 민주주의가 출발할 수 있어.
- 평등이랑 총이 대체 무슨 연관이 있어?
- 시민 1만 명 반란, 아이언헤드 1인 제압 가능.
- 완전히 이해했어. 친구.
- lol 재밌군! 슈퍼히어로가 다스리는 왕국이라구!
- 독재가 나쁜 게 아니라. 독재를 막을 수가 없다.
- 어이, 안 가면 되잖아?
- 현실은 반대임. 너 나 할 것 없이 지금 사람이 몰리고 있어.
- 어이, 친구들. 지금 지구에서 이렇게 글이나 싸지를 때가 아니야. 어서 빨리 가장 가까운 포탈존으로 달려가서 고블린을 잡아!
- 아직 노비스 아닌 놈도 있냐?
최대 노바 관련 커뮤니티인 휴먼 채널이 시끄러운 만큼, 대한민국 국회도 시끄러웠다.
"말도 안 되는 일이요! 이것이 반란이 아니면 무엇이오?"
"세금을 걷는다면 마땅히 그 주체는 대한민국 정부여야 합니다."
"꼴이 그때 그 산적패와 다를 게 뭡니까?"
"어허, 또 뭘 그리 민감하게 받아들이십니까? 경우가 다르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장호철의 산적 패거리나 마적 떼와 같은 경우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때는 직접적인 적대관계고, 지금은 협력관계지 않습니까?"
"어허! 무른 소리 하지 마시오! 지금 문제는 그가 통제를 벗어나려 한다는 겁니다! 진정 모르시겠습니까들?"
이기택 의원은 못에 핏대를 세웠다.
"노바 특별법 공표를 두고 대통령님이 지금 밍기적거릴 때가 아닙니다!"
누구보다 노바 특별법에 진심인 사람.
이기택 의원은 목소리를 키웠다.
진즉 국회에서 통과되었는데 대통령이 공표를 두고 시간을 끌고 있다.
[노바 특별법]
노바 행성의 신서울과 한양을 대한민국령으로 지정하고, 특별시로 승격하자는 법안이다.
그리되면 신서울과 한양에서 각기 시장 선거가 치러진다. 노바의 도시에 대한 행정권을 대한민국 정부가 쥐게 되는 거다.
지금처럼 계엄에 준하는 체제로 군부에 그 행정까지 맡겨둬서는 안 될 일이다.
노바군은 노바의 방위만을 책임지면 될 일.
"시의 행정이란 것은 전문 행정가에게 맡겨야지요! 언제까지 군인들에게 맡겨둔답니까? 지금도 보십시오! 적대관계가 아니니 괜찮다? 허! 이렇게 하나하나 양보하다 아예 국민들이 강철두 그자를 왕으로 모시겠습니다그려!"
민주주의 후퇴를 부르짖으며 이기택 의원이 핏대를 세웠고, 시끄러운 국회 안건은 대통령을 넘어, 국방부를 통해 노바군 1군 사령부 박준필에게까지 전달되었다.
박준필은 국방부 장관과 대통령의 직인이 찍힌 명령서에 한숨을 쉬었다.
"어휴."
박준필의 인상이 어두워지자 보급 장교 소령(진) 안승우가 조심스레 물었다.
"사또, 어찌 그리 안색이 좋지 못하십니까?"
"후우, 안 대위."
아차, 사또 놀이 하실 기분이 아닌 모양이다.
"소령 진 안승우!"
"그래, 안 소령."
"하문하십시오."
"어찌해야 하나?"
"무엇을 말입니까?"
박준필이 명령서를 턱짓했다.
그것을 빠르게 주워 읽어보던 안승우의 얼굴도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으음."
"어떤가?"
"조금 그렇군요."
"그래. 아주 그렇지."
[철두시 신설에 대한 협약서]
아이언헤드 성을 철두시로 승격, 강철두를 임시 시장으로 내정하고, 지방자치를 인정하며 세수에 대해서는....
주절주절 말이 길지만 요약하면 세 가지다.
1. 너네 지방자치 인정해준다.
2. 중앙정부에 세금 내라.
3. 5년 뒤, 지구 시간으로 1년 뒤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통해 철두시의 시장을 선출해야 한다.
"아이언헤드 영주가 받아들일 것 같지는 않군요."
"그래, 그렇지."
노바는 지구가 아니다.
저들은 자립했다.
맨손에서 일궜으며, 앞으로 지구로 가지 않는다면 저들의 자치를 인정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제어할 수단 자체가 없다.
군사력?
한양과 신서울을 모두 합쳐도 아이언헤드령에 못 미친다.
과연 이 명령서는 노바에 대한 이해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었다.
"사령관님. 헌데, 문제는 이게 더 큰 거 아닙니까?"
[한양 시장 보궐선거 안내]
사령관 박준필은 한양의 초대 시장선거를 위한 선거인단을 구성, 투표 방법을 마련하고....
"후우."
박준필의 한숨이 깊어졌다.
"시벌, 더러워서 못 해 먹겠군."
야전에서 고생한 지 11년.
아직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는 윗선에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는데도 참아왔건만, 이제는 슬슬 한계가 찾아왔다.
185화 성의 확장
"와, 영주님 해트트릭 지렸습니다."
"후후후, 준섭이 어시스트 좋았다."
"아유, 마무리가 지렸지 말입니다."
화기애애한 아이언헤드령 진영과는 반대로 영국인들이 모인 구역은 조금 침울했다.
"퍽. 이거 반칙 아닙니까?"
"선출이고 나발이고, 랭커는 출전 못 하게 막아야지."
"저쪽 심판이 더 문제야. 미국놈이 왜 저렇게 편파판정이야?"
"케인즈! 골키퍼가 골을 막아야지, 피하면 어떻게 해?"
"아니, 맞고 뒈져라 슛을 때리는데 어떻게 해?"
한국팀과 영국팀의 대결은 한국팀의 5:2 승리로 끝났다.
"어이! 친구들 다 같이 한잔하자고."
두 팀은 축구장 옆에 모여 불을 지피고 솥을 걸었다.
아이언헤드령 사람들이야 기본이 전부 유격대, 공격대에 속한 군인들이라 숙영에 능숙했고, 영국 출신의 이들도 뛰어난 사냥꾼들인지라 야영에는 익숙했다.
철두가 고기와 식량을 아낌없이 내어주니 분위기는 금세 캠핑장에서 만난 아저씨들처럼 화기애애해졌다.
"내일 한판 더 하자고."
"영주님. 이제 공이 없습니다."
"진짜 공 있잖아."
"그건 보물입니다."
그들이 축구에 사용한 공은 오우거 가죽을 기워 만든 튼튼하고 딱딱한 공이다.
그에 반해 케인즈라 불린 선수 출신 골키퍼의 인벤토리에는 진짜 지구의 축구공이 있었다.
그는 고블린을 잡고 축구공을 얻었다.
"이건 우리 가문의 가보로 물려줄 것이니 절대 탐내지 마십시오."
"흐흐, 아쉽군."
케인즈는 그보다 넌지시 다른 걸 물었다.
"이거 지구의 룰대로 해서는 승부가 안됩니다. 영주님은 탱크나 다름없으니 몸싸움이 안 됩니다. 그쪽 심판도 편파판정이 너무 심하고요."
심판을 맡은 제임스가 괜히 휘파람을 불었다.
"후후, 그럼 싸움이라도 하자는 건가?"
"그것도 좋지요. 차라리 좀 거칠게 나가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케인즈의 말에 철두가 그를 다시 봤다.
"놀 줄 아는 놈이군. 우리 할배가 여기 사제다. 숨만 붙어있으면 살리는 건 문제없다."
"오! 그거 좋은 소식이군요. 차라리 이러면 어떻습니까? 제가 축구를 기반으로 새로운 룰을 도입한 게임을 만들어보겠습니다."
"후후, 기대되는군."
"그럼 영주님께서 그럴듯한 경기장을 하나 지어주시겠습니까? 한 번씩 대회를 열고 하면 이 게임은 축구만큼이나 유명해질지도 모릅니다."
"좋은 생각이야."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상시 경기장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경기장을 떠올리니 자연스레 무한결투장의 콜로세움이 떠올랐다.
"이참에 크게 짓지."
관중들도 여럿 구경할 수 있게 하고, 경기장에서 꼭 축구만 하란 법도 없다.
고대에서부터 현대까지 이어진 유서 깊은 스포츠.
아예 격투를 해도 상관없으리라.
"재밌겠어."
이거 점점 흥분되는데?
노바에서 개최되는 UFC라?
체급이야 스탯석의 개수 같은 걸로 나누면 되지 않을까?
상위 노비스는 그들끼리, 랭커도 그들끼리 붙고.
"후후후, 좋아."
얼른 지어달라 해야겠다.
흥분으로 몸이 달아올랐다.
한창 더 기분을 내다가 성으로 돌아오니 김진태가 달달 떨고 있었다.
"음? 감기냐?"
"아, 아니!"
"근데 왜 그렇게 떠냐? 오줌싸냐?"
"으으, 철두야."
김진태는 세력창을 띄워 보여주었다.
"이거 어떻게 하냐?"
"뭐? 민원?"
지금도 계속해 업데이트되며 새로운 요청이 올라오고 있다.
"아니 그거 말고 위에 봐. 자산."
"으음. 영이 몇 개야. 하나, 둘, 셋...."
숫자를 세던 강철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고블린 주화 : 15,322,231
"뭐, 뭐냐?"
"모, 몰라. 무서워...."
김진태는 입술을 달달 떨었다.
"히익, 더 늘었어."
그 사이에도 숫자는 계속 늘고 있다.
철두는 피식 웃으며 김진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진태. 난 네가 해낼 줄 알았다."
"뭐, 뭐가?"
"역시 성 꾸리는 건 네가 전문가 아니냐?"
"그, 근데 이건 게임이 아니잖아?"
김진태는 덜컥 겁이 났다.
잠깐 정신줄을 놓고 세금을 덕지덕지 신설했을 뿐인데, 어느 순간부터 영지 잔고가 미친 듯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떠나긴커녕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을 아이언헤드령으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아침에 세금을 때렸는데, 저녁이 되니 영지 인구가 2000명은 더 늘었다.
그것도 빈몸으로 오는 게 아니라 바리바리 주화를 싸 들고 와서 미친 듯이 투자하고 있다.
용도별로 50개씩 분양했던 땅들은 몇 초 만에 다 팔려버렸고, 추가로 팔아달라고 애원하는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10개씩 경매로 팔아버렸다.
진짜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엄청난 낙찰가에 다들 땅을 사갈거라고는.
이후에도 분양 요구는 계속되었고, 10개씩, 10개씩 경매로 팔다 보니 잔고가 미친 듯이 쌓였다.
1000만이 넘는 주화는 철두도 처음 봤고, 김진태도 처음 보는 수치다.
"처, 철두야. 이거 맞냐?"
"후후. 장하다, 진태. 이제 돈이 많이 생겼으니 하고 싶은 것 다 해라."
"하, 돈만 많다고 다가 아냐. 아직 외성 축조도 덜 끝났어. 뭐든 인력이 있어야...."
어, 사람이 있네?
이동 포탈망을 타고 사람들이 미친 듯이 몰려들고 있네?
"잠깐만, 철두야."
<외성 축조 추가인력 모집>
하루 일당 30주화에 외성 축조.
모집인원 300명.
파파팟.
<인부 모집이 마감되었습니다.>
"어?"
이게 이렇게 인기 많은 일자리였나?
"자, 잠깐만."
모집인원을 대거 늘렸다.
2000명으로 늘렸는데도 단번에 300자리가 차더니, 이후에도 꾸준히 사람이 붙기 시작했다. 이 속도면 삼십 분도 되지 않아 2000명이 다 모집되게 생겼다.
"어어?"
돈이 있고, 노동력이 있다.
외성 축조에 필요한 돌?
창고에 아직 조금 비축이 있고, 나머지는 캐오면 된다.
<석재 채집>
성벽 축조에 필요한 석재 무제한 매입함
석재 1당 20주화
....
미친 듯이 퀘스트를 남발하기 시작하는 김진태의 얼굴에 다시 희열이 떠올랐다.
"흐흐흐, 발전이다. 발전."
그래. 시발.
이건 게임이 아니다.
그래서 겁나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렇기에 카타르시스가 남다르기도 하다.
"후후, 흐뭇하다. 진태."
"철두야! 나 막 질러도 되냐!"
"된다!"
"그래, 시발!"
게임이고 현실이고 무슨 상관이랴.
내 친구가 여기 영주다.
나는 그런 영주가 신임하는 영지의 시종장이고.
"철두야! 근데 우리 이제 식량 다 떨어져 간다."
"농사도 지어라!"
"그래. 석 달만 굶자!"
김진태의 농담에 철두가 웃었다.
그래, 놀 만큼 놀았다.
선조의 혼 때문에 울적했던 마음은 축구 하면서 조금 달랬다. 축제는 승전을 기념하는 의미도 있지만, 전장에서 나가 싸우고 돌아온 병사들을 위무하는 측면이 더 컸다.
그런 의미에서 철두는 제대로 충전했다.
"후후, 보급 훈련을 하고 오마."
"어디로?"
철두가 북쪽을 가리켰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좋아! 요새 건설도 얼추 뼈대는 갖췄으니까 그쪽으로 보급부대 돌릴게! 네가 털어주고, 옮기는 건 보급부대 꾸려서 따로 하자."
징발한 수레가 많다.
"후후, 알겠다."
철두는 즉시 병력을 모집했다.
"준섭이! 정욱이!"
최준섭의 유격대와 구정욱의 공격대가 즉시 소집되었다. 아이언헤드령에서 가장 정예한 부대이자, 돌격대.
"보급 훈련이다!"
"오오! 좋습니다."
"너희가 털고, 뒤에 후방부대가 옮길 거다."
"이야, 좋죠."
"제가 징발 전문입니다."
부대마다 월드맵을 활성화한 이들이 한 명 이상씩은 있다. 월드맵을 가진 이들끼리 아군의 위치를 찾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월드맵이 없으면....
"마법사!"
"신! 영지 수석 마법사 르망 대령했나이다."
현재 영지의 마법사를 대표하는 충성의 아이콘이 즉시 달려왔다.
"추적 뭐였지?"
"추적 마법 말씀이십니까? 여기 추적석이 있사옵니다."
화살촉처럼 생긴 돌을 수북이 꺼냈다.
"마법사들이 추적마법을 이용해, 돌의 위치를 알 수 있습니다."
"후후, 좋아. 이거 가져가서 털어버린 마을에 하나씩 둬라."
"예에."
구정욱과 최준섭이 추적의 돌을 스무 개씩 가져갔다.
눈치 보고 있던 르망이 즉각 대꾸했다.
"후방 보급부대에 마법사들을 배치하겠사옵니다."
"좋아!"
역시 마법사들 두뇌 회전이 빠르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다.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던 최준섭이 넌지시 물었다.
"영주님은 함께 안 가십니까?"
"마을 터는데 나까지 무슨 필요가 있냐."
철두가 그리핀을 소환했다.
"나는 백작성 털고 온다."
"허억! 과연!"
르망이 넙죽 고개를 숙이며 찬양했다.
"웅크리고 있던 영웅의 날개가 활짝 펼쳐지니, 백작이 벌벌 떨 것이옵니다."
"후후."
르망이 주변의 눈치를 보다가 철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영주님. 장차 아이언헤드성이 수도로 기능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시설물이 있사옵니다. 백작성의 중앙 분수대에 있는 항아리를 가져다주십시오."
"항아리?"
"그렇사옵니다. 그리고 풍년의 성소도 있으면 좋으련만, 이것은 옮길 수 있는 물건이 아닌지라...."
"말꼬리 늘리지 말고 시원하게 말해라."
"차라리 백작성을 점령하고 그곳을 본거지로 삼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풍년의 성소는 N344 맵에 있는 시설물로 주화를 투입하면 주변에 무조건 풍년이 깃들게 해주는 귀물이다.
나트롱 백작이 대농으로서 부유한 이유였다.
"흐음. 농사 토템이라."
철두가 고개를 저었다.
"난 여기가 좋다."
"신이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후후, 일어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대체 제국말로 뭐라 이야기했기에 소통의 팔찌로 저리 통역되는지 모를 일이지만, 뜻은 분명히 전달되었다.
"내가 강도도 아니고, 이웃끼리 다퉜다고 하나 집까지 뺏을 정도는 아니다."
"과연! 영주님의 자비로움이 하늘에 닿았습니다."
"애초에, 굳이 땅을 차지하고 농사지을 필요가 무엇이냐?"
"과연...."
"후후, 농사까지 다 지어서 주는데."
"과...."
"이웃끼리 친하게 지내야지."
"...."
농사는 나트롱 백작이 짓게 두고, 식량만 받으면 될 일이다.
굳이 뺏어서 힘들게 농사지을 이유가 무엇이랴?
'악마세요?'
르망은 흠칫 몸을 떨었다.
하마터면 실언할 뻔했다.
역시 영주님은 발상이 다르시다.
"과연 대왕의 풍모이십니다!"
"후후, 일단 다녀오마."
철두가 오식이를 소환해 날아올랐다.
김진태가 그런 철두를 향해 무운을 빌었다.
"조심해. 저번에도 위험했잖아."
"걱정 마라, 진태. 백작하고 싸우진 않을 거다."
무구의 혼을 깨우친 리에나와 싸우다가 곤욕을 치렀다.
백작의 호위기사 중에 리에나와 비슷한 급의 호위기사가 2명 있다 했으니, 아무리 철두라고 해도 위험했다.
"간만 보고 올 거다."
"어, 그래."
철두가 오식이를 소환해 훌쩍 날아올랐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김진태가, 옆에 있던 르망에게 물었다.
"르망."
"예에, 시종장님."
"분수대 항아리가 뭔 소리예요?"
"본디, 번성한 도시를 이루는 데에는 여러 귀물이 필요하나, 장차 대도시로 번성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무한한 샘물의 항아리이옵니다."
"오!"
이름만 들어도 뭐 하는 물건인지 알 것 같다.
"그것이 있어야지만 장차 수만, 수십만, 수백만을 책임질 식수원을 마련할 수 있나이다."
김진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언헤드성의 식수원이 마련되었다.
"이야, 좋은 걸 선물 받게 생겼네."
"...."
백작이 줄지 안 줄지는 모르지만, 철두라면 가져올 것이란 믿음이 있다.
김진태의 뿌듯해하는 얼굴을 보며 르망은 더욱더 고개를 숙였다.
'과연....'
그 친구에 그 친구다.
적의 곤혹스러움은 조금도 생각지 않는, 오직 본인의 영토와 왕국만을 돌보는 냉혈한.
철혈의 재상으로서의 풍모를 보이는 김진태였다.
186화 한양시장 보궐선거 (1)
후우웅.
철두는 그리핀 오식이를 타고 나트롱 백작가를 향해 나아갔다.
지나는 길에 반쯤 완성된 뉴아 마을 요새를 하늘에서 구경했다.
C614 맵을 벗어나 N344 맵으로 진입했다.
말을 타고 가면 꼬박 5일은 가야 할 거리지만, 날아가면 중간중간 포식으로 그리핀 체력만 회복시켜 주면 하루 만에 간다.
"응?"
철두는 제법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곤, 3차 침입군인가 싶어 방향을 틀어 정찰했다.
"아무리 봐도 군인은 아닌데?"
그들은 하늘에 그리핀이 배회하자 하던 일을 멈추고 여기저기 숨었는데, 하던 일이란 것이 길을 정비하는 것이었다.
후우우우.
철두는 개중에 그나마 지휘관으로 보이는 이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급강하를 전개했다.
"마, 막아라!"
"튀어! 시발, 잡히면 죽어."
우왕좌왕하는 적들의 명령체계가 정신 사납다.
철두가 그리핀에서 뛰어내려 제법 좋은 옷을 입은 놈 앞으로 다가갔다.
"히익! 오, 오지 마시오!"
"안 죽여. 이리 와봐."
"저, 정말이오?"
"어허, 내가 애먼 사람 왜 죽이나?"
"그, 그렇습니까?"
"누구나 한 번은 기회를 줘."
"히익!"
사내가 화들짝 놀랐으나, 철두의 웃는 낯을 보곤 도망칠 수 없었다. 저렇게 활짝 웃으며 도끼를 휘두를 것 같은 사내다.
"여기 애들, 아이언헤드로 쳐들어가는 군대냐?"
"아, 아니오! 우리는 군대가 아니오."
"근데 왜 그렇게 쫄아 있냐? 그럼 적도 아닌데."
"예?"
사내는 일순 사고회로가 꼬이는 기분이었다.
아이언헤드와 나트롱령은 지금 전쟁 중인 것 아닌가?
우린 나트롱 백작가 소속인데?
"그럼 뭐하던 거냐?"
"도, 도로공사 중입니다."
"왜?"
"이동 마법진이 발견되었으니 성까지의 길을 정비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너 도로공사 잘하냐?"
"백작령의 선임 토목행정가입니다."
"오! 이름이 뭐냐?"
"아스발도입니다."
"좋아. 아스발도. 똑똑히 기억했다."
이런 고급인력이 있을 줄이야.
마침 잘됐다. 공사해야 할 도로도 많은데.
"후후, 그럼 공사 끝나면 마법진 근처에 대기해라."
"저, 저는 백작가의 가신입니다."
"알지, 알아."
철두가 친근하게 아스발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백작하고 지금 잘 화해하러 가는 길이다. 이제 이웃끼리 돕고 살아야지?"
"저, 정말이십니까? 전쟁이 끝나는 겁니까?"
"후후, 그렇다."
"가,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영지의 여러 마을들에서 원성이 자자했습니다."
"...큼. 다음에 또 보자고."
"감사합니다. 자비를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식이를 타고 떠나는 철두를 향해 아스발도는 한참이나 머리를 숙였다.
"후, 죽는 줄 알았습니다."
"맞습니다. 행정관님은 괜찮으십니까?"
"하하, 안 괜찮을 게 있나? 참으로 다행이다. 아이언헤드 영주가 그리 꽉 막힌 자는 아닌 모양이야. 곧 종전할 것 같구만."
이웃한 영지끼리의 갈등은 늘상 있는 일이지만, 영지전의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이 받는다.
병사가 되어 죽어 나가고, 전쟁물자를 만들어내느라 고달프고, 또 여러 마을이 약탈당해 고통받는다.
이런 와중에 아이언헤드 영주가 먼저 고개를 숙이고 종전을 맺으러 가는 것을 보니 마음이 한결 편했다.
"이웃이라 했으니 아마 백작에게 봉신할 모양인가 봐."
"남작으로 봉신 되겠군."
"어허, 그가 아무리 야인 출신이라 해도 이 정도면 자작으로 대우해줄 걸세. 두고 보라고."
아스발도 행정관은 물론 동료들과 인부들도 모두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아무리 야인 무리가 전투 두 번을 이겼다 한들, 제국의 백작이 고개를 숙이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제국이니까.
그들이 백작령 주변의 정세에 대해 떠들며 도로를 닦는 그때, 철두는 고도를 계속해서 높이며 날았다.
저 멀리 커다란 백작성이 보인다.
굴단의 성처럼 웅장하고 크진 않지만, 그 성을 두르고 있는 도시가 압도적이다.
철두가 보아온 도시 중 가장 큰 곳은 신서울.
그런 신서울보다 4배는 더 큰 도시다.
후우우우웅.
해를 보니, 도착할 때쯤이면 어중간한 오후가 될 것 같았다.
"으음, 좋아."
철두는 좋은 생각이 나 고도를 슬슬 낮추며 날아갔다.
적당한 곳에 이르자 오식이를 소환 해제하고는 소나따를 소환해 올라탔다.
산등성이 하나만 넘으면 백작성이다.
"후후, 잠입이라. 기대되는군."
정령을 이용한 테러를 하자면 오식이를 타고 그대로 갔을 것이나, 이번의 목적은 그게 아니다.
백작성의 보물을 훔쳐오라고 대놓고 일러주는 선임마법사 르망의 청을 들어주기 위해서다.
"소나따는 안 되겠는데."
정체를 숨기고 잠입하자면 조금 평범한 말을 타야 할진대, 철두가 소환 가능한 탈것은 오식이와 소나따뿐이다.
외곽지에서 말을 길들여 왔어야 하는 건데, 한 번도 정체를 숨기고 다닌 적이 없어서 실수했다.
다그닥, 다그닥.
"와하하하, 이노오오옴!"
그때 노호성과 함께 우거진 수풀이 들썩이더니 길 앞으로 각양각색의 무기를 든 일단의 무리가 쏟아져 나왔다.
"뭐냐?"
"흐흐흐. 보면 모르느냐? 그 말에서 내려 가진 걸 모두 내놓아라!"
"...?"
철두는 고개를 갸웃했다.
"산적이냐?"
"흐흐, 알 것 없다."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잘됐다."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철두가 소리친 놈을 향해 다가갔다.
츠츳.
철두의 인벤토리에서 양날 도끼가 나오자, 흠칫 놀란 산적 놈이 명령했다.
"쳇, 기사급이군. 얘들아 쳐라!"
상대도 제법 한가락 하는지, 아니면 여덟이나 되는 수적 우위를 믿는 것인지 물러설 기색 없이 덤벼들었다.
"이야아아."
"차압!"
"가압류!"
"죽어라!"
각양각색의 기합성과 함께 달려든 산적들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막아냈다.
차차창! 스컥!
"크억!"
철두는 가장 앞에 선 놈의 대가리를 쪼개며 고민했다.
'이거 이래도 되나?'
백작성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말을 달리면 서너 시간이면 닿을 거리인데, 아무리 산이 있다 해도 산적이 이렇게 활동하고 다니는 게 맞는 건가?
그게 문제가 아니라, 여기서 소란이면 괜히 잠입이고 뭐고 들키는 것 아닌가?
철두는 고민과 동시에 다섯을 해치웠다.
"흐억!"
"크아!"
촤르륵.
적을 무참히 도륙한 양날도끼를 허공에 휘둘러 엉겨 붙은 피를 털어냈다.
"허억!"
"도, 도망쳐!"
휘이이잉, 콰직!
도망치자는 말을 뱉으며 한 걸음 물러난 녀석의 이마에 투척 도끼가 틀어박혔다.
살아남은 두 명의 산적은 덜컥 몸이 굳어 눈알만 데굴데굴 굴릴 뿐이었다.
너무 순식간에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계속 싸울 테냐?"
"아, 아닙니다."
"너 이리 와라."
"넵."
"말 있냐?"
"있습니다."
제법 눈치가 빨랐는지 지목당한 산적 녀석은 재빨리 말을 소환해냈다. 갈색의 준마였는데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말이었다.
안장에 주렁주렁 달린 가방이나 활 따위를 미뤄보아 이들의 직업을 알만했다.
"넘겨라."
"귀, 귀인이 타시기에 누추하지 않으신지."
스윽.
철두가 도끼를 들자 그가 움찔하며 악수를 청해왔다.
"드, 드리겠습니다."
철두가 손을 맞잡자 곧 메시지가 떴다.
<갈색 준마를 양도받았습니다.>
"이름이 뭐냐?"
"페리슨입니다."
"말 이름을 쓰레기같이 지었군."
"제 이름입니다만...."
철두는 못 들은 척하곤 말갈기를 쓰다듬었다.
<갈색 준마의 이름이 '구아방'이 되었습니다.>
"후후, 역시 클래식이지."
철두는 이제 잠입하기 아무런 문제 없는 말을 얻어 기분이 좋았다.
슬쩍 돌아보니 두 산적 놈이 서로 눈짓해가며 분위기를 살피고 있었다.
"좋아. 한 놈은 나와 백작성으로 간다."
"...."
"제가 가겠습니다."
한 놈은 슬쩍 눈치를 살폈고, 페리슨은 번쩍 손을 들었다.
"후후, 좋아. 네 말, 얘 줘라."
"네?"
얼빠진 놈이군.
"줘라."
"헙, 넵."
페리슨이 본인 말을 뺏기고, 동료의 말을 양도받은 그때 철두의 투척 도끼가 동료의 머리통에 박혀 들었다.
"히익!"
조금만 눈치가 느렸으면 뒈지는 건 동료가 아니라 페리슨 본인이었을 것이다.
"우린 가자고."
"그, 그러겠습니다."
다그닥, 다그닥.
말을 몰아 길을 따라가는 와중에 페리슨은 모든 신경을 강철두에 집중하고 있었다.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시발,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페리슨."
"헙, 넵."
"원래 산적이냐?"
"아닙니다. 용병대입니다."
"근데 왜 산적질이냐?"
"예?"
페리슨은 너무 당연한 물음에 어찌 대답할 바를 몰랐다. 그저 당연한 상식을 읊는 수밖에.
"의뢰인 만나면 호위가 되고, 몬스터 만나면 사냥꾼이 되고, 만만한 놈 마주치면 강도가 되는 게 용병 아닙니까요?"
"후후후."
철두는 그 말이 퍽 마음에 들었다.
상황에 따라 직업이 바뀌기도 하는 놈들이니, 사고가 유연한 놈들이다. 눈치도 제법 있는 것 같고.
"좋아. 날 호위해서 백작성 안까지 모셔라."
"예?"
철두가 헛주먹을 쥐자 주화 주머니에서 1000 주화가 튀어나왔다.
팅, 텁.
주화를 던졌다.
반사적으로 그것을 잡은 페리슨이 양각된 1000이라는 숫자에 헛바람을 들이켰다.
"헙!"
"착수금이다."
"고객님.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역시 눈치가 영 없는 놈은 아니다.
태세 변환도 빠르고.
"후후, 가자고."
"넵!"
동료 7명을 잃은 페리슨이지만 그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본디 용병들이 그러한 것 아니겠나.
3개월 전 만난 용병 동료들과의 의리보다는 1000주화가 훨씬 값지지 않은가?
*
노바 특별법이 가결되었다.
한반도 남쪽을 국가 영토로 보위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영토가 늘어났다.
C422이라 명명된 신서울 맵,
C614의 한양 맵.
두 맵을 대한민국 영토로 선포하며, 신서울과 한양을 특별시로 승격, 대한민국은 다차원 다행성 국가로 변모했다.
한양 특별시 보궐선거
보수당 이기택
진보당 양문수
소수당 김양순
세 명의 후보가 나섰다.
정부의 명에 의해 투표소를 마련하고, 이것저것 하다 보니 선거관리인단이 들어와 인계해주었다.
"사또! 새로운 노비스들이 너무 많습니다!"
"...."
박준필은 머리를 지끈 부여잡았다.
벌써 며칠째 계속되는 보고다.
아이언헤드 성에서 물자를 사와 겨우겨우 한양에 자력 기반을 마련하나 싶었는데, 새로운 인구가 물밀 듯이 몰려들고 있다.
"하아. 승우야."
"소령 진! 안승우!"
"포탈을 틀어 막아버릴까?"
"불가능하지 말입니다."
"하아, 시벌놈들이 진짜."
박준필은 테이블을 탕 쳤다.
분통이 터진다.
노바에서의 생존이 장난도 아니고.
포탈 너머 청주 포탈존에서 사람들을 마구마구 밀어 넣고 있다.
그 이유가 너무 터무니없어, 현장 책임을 지고 있는 박준필은 요즘 모두 뒤엎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보수당에서는 자기네 기반 시민들을, 진보당에서도 진보세력을, 소수당에서도 당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노비스가 되어 한양에 입성 중이다.
"아, 여기 밥 좀 더 줘요!"
"아니, 여기 오면 돈도 주고 밥도 준다더니 왜 이것밖에 안 돼요?"
"허, 이거 옷 사이즈가 작은데요?"
대체 지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똥인지 된장인지도 구분하지 못하는 신입 노비스들이 지금도 꾸준히 포탈을 통해 한양으로 유입되고 있었다.
"아이구, 두야."
박준필은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지구 좀 다녀와야겠다."
"넵, 모시겠습니다."
소령(진) 안승우가 박준필을 호종했다.
187화 한양시장 보궐선거 (2)
시작은 소수당이었다.
"신서울은 몰라도 한양특별시장은 우리 당에서 먹어야 합니다!"
"좋습니다! 당원들을 보냅시다!"
그들의 계획은 그럴듯했다.
한양특별시와 신서울특별시의 시장선거는 해당 지역 주민들의 투표로 이뤄진다.
선거소가 마련되어있지만, 아직 유권자가 특정되지 않았다.
노바 특별법이 졸속으로 통과되다 보니 여기저기 허점이 많았는데,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의 유권자를 해당 지역 주민으로 해석하는 것에서 문제가 있었다.
전입신고를 받아주는 것도 일이고, 심지어 개중에는 집이 없는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여러 논의가 오갔고, 유권자를 실제 해당 지역에 출입이 가능한 '노비스'로 특정했다.
주소지가 대한민국 어디든, 종말을 대비한 두 개의 다차원 시의 주민이 될 여지가 있으니, 노비스라면 누구나 해당 도시 중 한 곳에서 투표를 할 수가 있었다.
소수당은 이를 위해 당원들을 적극 지원해 고블린을 사냥토록 했고, 그들은 하나둘 포탈로 들어가며 신입 노비스가 되었다.
이들만 그랬다면 한양이 이토록 복잡하지는 않았겠지만, 사람 생각이라는 것이 다들 비슷비슷하다. 꼼수에 있어서는 어딜 가나 빠지지 않는 양대 정당도 대놓고 사람을 밀어 넣었다.
출마를 선언한 3당에서 투표를 위해 유권자들을 청주 포탈존으로 밀어 넣으니, 한양을 다스리는 박준필만 열이 받고 있었다.
"이 시벌놈들이! 이걸 막아야지, 그대로 냅둬!"
노바로의 이주는 차근차근 이뤄져야 한다.
최소한 생존을 위한 준비가 된 자들, 그들 중에서도 자유의지로 고블린을 사냥해 노비스로 전직한 자들.
그런 이들도 노바로 오고 나서 열악한 환경에 고생만 하는데, 지금 물밀 듯이 쏟아지는 사람들은 모두 해당 사항이 없었다.
"어어? 그냥 창 찌르라니까 찔렀죠. 위험이요? 사람들이 고블린 다 묶어놨던데요."
"예? 정착이요? 아뇨. 전 투표 끝나면 돌아갈 건데요."
"에이, 진짜 멸망한다면 몰라. 그것도 아닌데 이런 데서 어떻게 살아요?"
"아, 이거 너무 열악한 거 아닙니까? 옷 좀 주세요. 이건 사이즈가 안 맞다니까요?"
"여긴 뭐 인권도 없어? 어어? 안 놔? 군바리 쉐끼들이! 내가 누군 줄 알아?"
새롭게 등장한 사람들은 생산성 없고 불평불만만 많았다. 더 최악인 것은, 이들은 같은 당원이라는 결속력이 있어 집단행동에 나선다는 것이다.
"군부독재 물러가라! 식량 배급 정상화하라!"
시발, 내어줄 식량이 없다.
노바에서의 식량 배급은 철저하게 미래를 대비해, 다음 추수기 전까지 남은 비축 식량을 나눠 배식한다.
최근 가파른 인구 유입으로 두 달도 간당간당하다. 아니, 두 달이 뭔가? 이대로 쭉 인구가 늘어나면 한 달도 위험하다.
"가자. 승우야."
"네, 사령관님."
식량 배급을 책임지는 보급 장교 소령(진) 안승우는 박준필 중장과 함께 포탈을 넘었다.
파팟.
청주 포탈존.
포탈은 이제 공사가 완료되어 돔 천장이 감싸고 있었다. 내부엔 줄지은 사람들이 가득했는데, 그들은 박준필과 안승우가 멍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자 역정을 냈다.
"아, 여기 대기 중인 거 안보여요?"
"길막하지 말고 비킵시다. 얼른."
"음?"
박준필이 밖으로 나와 보니 줄이 끝없이 길게 늘어서 있다. 대충 헤아려봐도 천 명이 넘는다.
'이 인원이 전부 오늘 한양으로 간다고?'
이거 현장과 조율이 안 돼도 너무한 거 아닌가?
"헉! 박 중장님!"
청주 포탈 책임자인 임용찬 중령이 부리나케 뛰어왔다.
"임 중령! 내 누차 요청했는데 대체 왜 안 막는 건가?"
"아유, 중장님 안 막는 게 아니라. 못 막는 겁니다."
임종찬 중령이 한쪽을 가리켰다.
거기엔 각양각색의 피켓을 든 시위자들이 가득했다.
- 이기택을 한양시장으로!
- 맹꽁이 보호! 군부의 무분별한 개발 멈춰!
- 살기 좋은 도시! 한양특별시!
- 한양을 계획도시로! 군부독재 OUT
- 시민의 권리 침해! 청주 포탈 자유 이용 허용하라!
- 체육관 선거의 재림! 청주 포탈 개방하라!
- 포탈 독점! 군부독재 멈춰!
- 시민에 개방하라! 포탈 자유 이용!
- 선거 조작 금지! 자유투표 허용하라!
- 민주주의를 향한 길을 막지 마라!
"지랄들을 한다."
"그, 그러게 말입니다."
박준필은 한숨을 쉬었다.
노바 특별법이고 나발이고, 지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야생에서 민주주의 부르짖어봐야 뭐 하는가?
배곯아 죽는 자들이 속출할 것이다.
계획된 도시, 점진적인 이주계획으로 진행되던 일이, 국회의 개입으로 엉망이 되어버렸다.
'대통령은 이것도 막지 않고 뭘 하는지.'
지금 신서울이고 한양이고, 지방자치 행정체계로 돌아갈 상황이 아니다.
박준필은 곧장 육군 본부로 향했고, 노바군 1군 사령관으로서 대통령 면담을 신청했다.
그날 저녁 곧장 청와대로 오라는 허락이 떨어져 박준필은 당장 서울로 올라갔다.
"대통령님! 이대로 가다간 선거는커녕, 그전에 식량이 동나 아사까지 걱정해야 할 처지입니다."
"상황이 그 정도입니까?"
"그 정도니 제가 여기 왔지요!"
"어허! 자네, 흥분을 조금 가라앉히게."
회의에 동석한 국방부 장관이 나서서 말렸다.
"자네 심정도 모르는 게 아니야."
"아시면서 어찌 그리 사람을 밀어 넣습니까?"
"전에처럼 좀 잘 해결해주게."
"지금 한양은 사실상 아이언헤드의 원조가 없으면 자생이 불가능한 수준입니다."
"그, 자네하고 그래도 끈끈하지 않은가?"
"아니, 국가사업을 일개 개인의 친분에 기대면 어찌하십니까?"
박준필은 황당해서 더 할 말이 없었다.
지금 수천 명, 앞으로 몇만이나 더 될지 모르는 사람들을 꾸역꾸역 밀어 넣으면서 그 똥은 나보고 다 치우라는 소리인가?
철두에게 계속 식량 원조를 받아서?
'아이언헤드라고 달라면 다 주는 줄 아나.'
한양에서 식량을 구입하는 거다.
주화가 있어도 구매할 식량이 없었던 예전 상황과는 다르지만, 결국 새로 유입된 잉여인력들이 노바에 대한 적극적인 적응이나 사냥에는 무관심한 게 문제의 핵심이다.
"일치단결해서 힘을 모아도 모자란데, 짐덩이들만 던지면 어쩌자는 겁니까!"
생산성 없는. 아니, 적극적인 생계 활동 의지가 없는 자들이 오직 투표만을 위해 한양에 유입되어 밥을 축내고 있다.
그때까지 가만히 이야기만 듣고 있던 김승태 대통령이 나직이 박준필을 불렀다.
"박 중장."
"네, 대통령님."
"후우, 솔직히 말하리다."
"대통령님. 아직 이릅니다."
국방부 장관이 말리는 소리에 박준필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위화감이 들었다.
뭘 말하려는 거지?
"국내에도 좀비 바이러스가 상륙했습니다."
"예?"
"이제 대한민국에서 이를 아는 사람은 일선 감시부대 외에는 여기 국방장관과 나 그리고 총리와 박 중장이 다군요."
"예?"
좀비 바이러스라니.
애당초 종말의 형태가 좀비 바이러스임을 그도 전달받아 알고 있었지만, 국내에 상륙했다는 소식은 갑작스러웠다.
"...."
대한민국에서 고작 넷만 아는 정보다.
"헌데 그것이 노바 특별법과는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슬슬 낌새를 눈치챈 국회의 관심을 돌릴 만한 거리가 필요했습니다."
노바 특별법이 통과된 이후 대한민국의 뉴스는 온통 그것을 다루고 있었다.
다차원 시대의 시작이니, 대한민국이 제국으로 거듭나니 마니 하는 국뽕 방송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온 국민의 관심은 한양과 신서울의 초대 시장선거로 향했다.
"하필이면 그게 왜 노바 특별법입니까?"
"어차피 가야 하니까요."
"...."
종말이 머지않았다.
대통령은 아직 좀비 창궐에 대한 정보를 감추고 싶어 했고, 국민들을 빠르게 노바로 이주시키길 원했다.
"하지만 이대로는 무리입니다. 전부 굶어 죽는다는 말입니다."
"박 중장은 선택하실 수 있겠습니까?"
"예?"
"전 국민을 좀비로 만들지, 다 함께 굶어 죽을지 말입니다."
대통령은 눈을 감았다.
그의 속눈썹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하아아."
깊은 숨이 그의 고민을 축약해 놓은 것 같았다.
"...나는 후자를 선택했을 뿐입니다."
김승태 대통령의 얼굴이 전에 비해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
"차라리 정보를 공유하지 그러셨습니까?"
"방임이지요."
김승태 대통령은 어려운 결정을 내린 만큼 자신의 선택에 후회가 없어 보였다.
"그거야말로 방임입니다. 행여나 그들이 알게 되면, 국민들께 한자리라도 내어주려 하겠습니까? 지금도 신서울에 국회의원들 별장이 그득하고, 노비스가 아닌 이들이 없습니다."
그들은 피난 준비를 모두 마쳤다.
한양과 신서울.
국가가 관리하는 두 도시 외에도, 강릉과 포항.
기업이 관리하는 두 개의 도시는 일반 국민은 아예 받아주지도 않는다.
이미 그곳 포탈들은 대기업의 공화국이나 다름없었다. 선택받은 자들만이 그 안전한 땅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파주와 청주. 두 곳에서 받아내야 합니다."
"...."
따지러 와서 설득당할 판이다.
박준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알고 선택하게 해야 합니다."
김승태 대통령이 웃었다.
"어차피 통제 가능한 시간도 며칠 안 남았습니다. 길어야 한 달이지요."
"한 달...."
노바 시간으로 다섯 달이다.
파종한 씨앗이 자라 곡물이 열리는 한 사이클은 된다. 수호수가 존재하는 C넘버링 맵이 3모작이 가능한 기후라 천만다행이다.
"한 달 뒤면 대한민국 정부는 끝을 고합니다."
"...."
김승태 대통령의 확정적인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한 달 뒤면 좀비 바이러스의 정보 통제도 끝이다.
아니, 바이러스의 확산 방지의 끝이다.
"방벽의 공사가 거의 마무리 중입니다. 박 중장의 어깨가 무겁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한 달 새 새 주민들을 잘 적응시켜 주십시오."
"...."
얄궂다.
눈앞에 새로운 퀘스트가 뜨는 기분이다.
<신규 주민들을 노바에 적응시키십시오.>
그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하고 생산력을 끌어모아야 한다.
그리고....
"좀비 사태 발발 이후, 정부는 모든 역량을 동원해 주민들을 파주 방벽과 청주 방벽으로 대피시킬 것입니다."
방벽의 공사도 완료했고, 막대한 생존물자도 비축 중이다.
"...."
"박 중장이 해내야 합니다. 그때부터는 차츰차츰 노바로 이주를 시작하는 게지요."
지금 행해지고 있는 노바 특별법.
신서울과 한양의 시장 보궐선거는 연막이다.
공표된 시장 선거는 40일 뒤.
노바 시간으로 6달 뒤다.
김승태 대통령은 애초에 선거를 치를 생각도 없었다.
"박 중장."
"...."
박준필이 긴 숨을 뱉었다.
국방부 장관은 이미 계획을 알고 있어서인지 별반 표정의 변화가 없다.
"왜 제게 미리 알리지 않으셨습니까?"
"잘 해내고 계시니까요."
박 중장이 몰라서 그렇지, 알게 모르게 자꾸 사람을 밀어 넣었는데, 한양은 그 많은 인력을 넙죽넙죽 잘 받아냈다.
물자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적응시켰고, 아이언헤드와의 거래로 그것도 해소한 상태가 아닌가?
"정말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김승태 대통령이 간절한 얼굴로 물어온다.
이거야 원.
"해보겠습니다."
그래, 시발.
진짜 굶어 죽기밖에 더하겠냐?
좀비가 될 바에야 차라리 노바에서 굶어 뒈지는 게 낫지.
"보내십시오."
지금부터 박준필의 머릿속에도 계획은 없다.
어떻게든 되겠지.
아니, 어떻게든 해내야 한다.
188화 분열 속의 결속
부우우웅.
청주로 내려오는 차 안.
박준필과 안승우는 한마디 말도 없었다.
청주로 다가올수록 거성이 보인다.
거대한 장벽, 그리고 그 아래 줄지어 들어가는 물류 트럭들. 장벽 안에 또다시 줄줄이 나눠진 섹터들.
'좀비 발생 시 차단벽.'
모를 땐 몰랐는데, 알고 보니 새롭게 왜 저리 짓는지, 건물들 배치가 왜 저런지 굳이 옥상과 옥상 사이를 연결하는 스카이워크는 왜 설치되었는지 납득이 되었다.
장벽으로 둘러싼 외성벽 안에 또다시 내성벽만 네 곳.
그 최중심부에 포탈이 있다.
"어어, 줄 섭시다. 줄!"
"이야, 노바가 공기는 좋다던데 기대되네요."
"선거 끝나도 그냥 눌러앉아서 살까."
"에이, 아무렴 대자연 좋다고 아프리카 같은 데 가서 살겠다고? 난 선거만 마치면 돌아와야지."
지루한 줄이 줄어들길 기다리며 떠드는 사람들의 수다가 새삼 새롭게 다가온다.
본래라면 계엄령이 선포된 포탈존 인근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다. 굳이 막지 않는다지만 포탈의 출입 기록은 철저하게 관리되던 것이 옛날이다.
'투표라.'
투표라는 대의명분을 등에 업고 민간인 통제구역이었을 곳에 민간인들이 가득이다.
정치권은 물론, 그에 줄 선 기업들의 투자로 너나 할 것 없이 유권자 모집에 열성이다.
나름 각오를 다지고 고블린을 찾아 나서고, 운이 좋아 사냥에 성공해야 노비스가 될 수 있었던 시절이 지났다.
지금은 그저 투표를 약속하기만 하면 알아서 고블린을 잡아다 준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냥 창 한 번 찌르면 노비스로 전직해 '차원이민비자' 자격을 얻는다.
생각을 달리하니 새롭게 보인다.
노바의 개발에 짐덩이라 치부했던 자들이, 침몰하는 지구라는 배에서 먼저 내려지는 노약자로 보였다.
노바 특별법으로 떠들썩한 대한민국이기에, 이제 어디 산골에서 티비나 라디오도 없는 자를 제하고는 노바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적극적인 자는 지금 노바로 입성할 것이고, 낙관적인 자들도 종말의 순간 '노바'라는 안전한 땅을 떠올릴 것이다.
생존자들은 파주나 청주로 몰릴 것이니, 거대한 장벽은 그 생존자들을 건져 올릴 구조선으로 보였다.
"들어가지."
"네, 사령관님."
박준필과 안승우는 포탈을 타고 노바로 입성했다.
파팟.
꼬박 하루 만에 돌아오는 한양이지만 이곳의 시간은 벌써 5일이 흘렀다.
"어째 사람들이 더 많아진 것 같습니다."
"흐음."
여기저기 무리지어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박준필은 가만히 서서 눈을 감았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일식, 월식.
그래, 그런 불가항력적인 재난이 아닌 이상, 이들을 굶겨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단 관청으로 가세."
"예에, 사또."
박준필의 목소리 톤이 달라졌다.
사또 소리에도 반박하지 않는 것을 보니 기분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배급 늘려달라! 늘려달라!"
"식량 배급 정상화하라!"
관청 앞에는 집단으로 몰려와 떼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를 막아서는 군인들은 난처한 와중에 박준필의 복귀가 퍽 반가웠다.
"육방들 다 들라 하게."
"예에, 사또!"
우리 고을 원님이 돌아오셨군.
보급장교 안승우가 힘차게 대답하고는 각부의 실무자들을 불러모았다.
테이블에 C614의 전체 지도가 깔리고, 한양 인근을 나타낸 더 큰 지도를 깔았다.
지휘봉을 들고 찬찬히 지도를 살피던 박준필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여기, 그리고 여기, 여기."
한양의 옆을 지나는 남북으로 꾸불꾸불 이어지는 한강.
서쪽 들판을 농경지로 삼기 위해 수로 공사가 한창인 곳이다.
"여긴 아직 수로 공사를 덜 마친 곳이 아닙니까?"
"여기 세 곳에 마을을 개척하세."
"마을이요?"
"각 정당 지지자들을 한데 모아 마을 하나씩 배정할 것이네."
박준필이 하루 동안 고민하고 고민해낸 결과물이었다.
투표만을 위해 노비스가 되어 노바로 먼저 들어온 자들이다. 저들은 모르겠지만, 그들의 어깨 위에 한국의 많은 이들의 목숨이 달려있다.
잉여인력을 노동자로 만들어야 한다.
그들이 흘리는 땀 한 방울이 하나의 생명을 더 구할 터다.
"통합은 불가. 차라리 그들끼리의 결속력과 유대감을 이용할 것일세."
세 정당 지지자들을 한데 엮어봐야 서로 불만만 나온다. 차라리 마을 하나씩 몰아넣어, 경쟁을 유도할 생각이다.
"임시 숙소로 이용되는 천막들을 해체해, 세 곳으로 옮기고 거주지 이동을 명하게."
"바, 반발이 심할 텐데요?"
"힘으로라도 밀어붙여야지."
"헙."
장교들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자네들은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다하면 되네. 책임은 내가 질 터이니."
상당한 악명이 박준필에게 따라붙을 터다.
허나, 별 3개의 지휘관은 모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무상배급도 이제 없네. 최소한의 배급에 주화 1개씩 받게."
"도, 돈이 있어야 사 먹지 않겠습니까?"
"각 할당된 마을 주변 밭을 개간시킬 걸세. 구획마다 주화를 할당하게."
박준필의 말에 이방 안승우의 눈빛이 반짝였다.
"개별로 일을 맡기는 게 아니라, 구획 별로 맡기자는 말씀이군요!"
"그래. 개개인에게 맡기기엔 인력 낭비가 심하지."
"옳습니다! 참으로 기발하신 생각입니다."
보수당, 진보당, 소수당.
3개의 거주지로 그들을 가르고, 농경지 1필지마다 개간 성공 보수를 걸어둔다.
일일이 일을 시킬 필요는 없다.
마을 자체에 할당된 일이니,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하청의 하청과 같고, 봉건제와도 맥락이 비슷하다.
각부의 실무 장교들이 서로 시민들의 예상 행동을 분석했다.
"배급이 불만이면 주화를 더 주고 시장에서 사 먹겠지요."
"농사가 불만이면 사냥을 나서는 자들도 있겠습니다."
"아예 지구로 돌아가는 자들도 있을 테고요."
"시위세력도 만만찮을 겁니다."
박준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구로 돌려보내는 건 안 될 일이다.
"지구로 돌아가는 자들은 명부를 작성하고, 투표권을 상실한다 이르게."
"부, 불만이 더 커질 터인데요?"
"시위는 없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알겠습니다."
한양의 수비대를 이끄는 장교들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박준필이 일하지 않는 자들을 위해 매를 들었다.
임시 숙소로 쓰이던 천막이 해체되어 한양 서쪽 밖 드넓은 들판으로 옮겨졌다.
한양에서 끌어온 수로가 끝나는 지점.
마침 그런 수로가 여섯이었는데, 그중 셋이 마을로 할당되었다.
"각 정당별로 숙소 배정이 이뤄질 것이오."
"아니, 하루아침에 이러는 법이 어딨소?"
"숙소를 여기에 잡으면 배식받으러 가는 데만 한세월이 아니오?"
"이제부터 무상배식은 없소! 가장 기본 끼니가 1주화이니, 돈을 벌어 사 먹으시오."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시민을 굶겨 죽일 셈이오?"
"돈이 있어야 사 먹지!"
"덜렁 노바로 가서 투표하라고 꼬드길 때는 언제고, 이제 와 나 몰라라 하깁니까?"
불만의 목소리에도 일선 지휘관들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불만이 있는 자들은 지구로 돌아가시오! 그 대신 한양시장 선거의 투표권은 상실될 테니, 알아서들 하시오!"
청천벽력같은 소리에 분위기가 삽시간에 흉흉해졌다.
"아니! 이러는 법이 어딨어? 지구로 돌아가지도 못하게 하고, 밥도 안 주고!"
"이러고도 무사할지 알아? 군바리 새끼가 옷 벗고 싶어? 어엉?"
"이거 독재야! 독재!"
"어어? 안 놔? 어디 가서 살라고?"
"아이고! 군인이 사람 패네!"
"말도 안 되는 소리!"
"이거 시민을 이리 홀대해도 돼?"
금방이라도 단체 활동을 이어갈 태세였으나, 군인들은 유사시를 대비한 몽둥이를 하나씩 지참하고 있었다.
"단체 시위는 없소! 무력해산할 터이니, 궁금하거든 해보시오. 마을 인근 말뚝 친 필지마다 성공보수가 있소. 같은 당원들끼리 힘을 모아 밭을 개간하고 끼니를 해결하시오들."
한순간에 바뀌어버린 한양의 분위기에 불만이 폭주했으나, 한양 관청은 입장을 고수했다.
퍼퍼퍽.
"아이고 나 죽네!"
"당장 꺼져라!"
"해산! 해산하시오!"
"여기서 시위해봐야 소용없소!"
군인들은 단체로 항의하러 온 시민들을 쫓아 보냈다.
한양 서쪽과 서북, 서남쪽에 자리 잡은 3개의 마을은 보수 마을, 진보 마을, 소수 마을이 되었다.
아직 천막으로 지어진 임시 숙소지만 마을마다 인구가 4~5천은 되기에 무시 못 할 인구였다.
배고픔엔 장사 없는지 하루 만에 이탈자가 무더기로 나왔다. 투표고 나발이고, 배곯고 고된 노동을 하게 생겼으니 지구로 돌아가는 자들이 속출했다.
국가기밀을 알고 있는 안승우만이 안절부절못했다.
최대한 인구를 늘리고 농경지를 늘리는 게 그들의 임무였으니.
"어, 어찌합니까?"
"의지 없는 자들을 강제할 수는 없다. 그냥 보내주어라."
지구로 떠날 자들은 모두 떠나고, 남은 인구는 마을마다 3천 명 수준.
그들의 숫자가 곧 투표권의 숫자였기에, 결국 핵심 당원들이 나서서 단속한 끝에 그들은 일을 하기 시작했다.
"다들 조금만 고생합시다! 우리 보수당에서 시장이 나면, 우리 모두 한자리하는 겁니다!"
각 당마다 농기구를 들고, 밭을 개간하기 시작하니 시민들의 생각도 바뀌었다.
'매번 풀죽만 먹을 바에야, 일을 더 해서 돈을 더 벌자!'
한양 내에도 아직 인력을 구하는 여러 공방들이 즐비했기에, 시민들은 차츰 마을 내에서 일거리를 찾거나, 직접 사냥을 나서기 시작했다.
잉여인력들이 비로소 생존을 위한 노동력으로 치환되기 시작했다.
나흘을 더 지켜본 박준필은 성을 나설 채비를 했다.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기에....
"비축 식량이 이제 40일이 간당합니다."
"유입인구는 여전하니, 40일도 넉넉히 계산한 것입니다. 보수적으로 한 달 이내로 봐야 합니다."
지금 파종한 밭의 작물이 자라 추수하는데 적어도 4~5개월.
그때까지 기다리다간 한양에 아사자만 수천 명이 발생할 위기다.
"얻어와야지. 별수 있는가?"
"...."
"모시겠습니다."
박준필과 그를 보좌하는 안승우, 그리고 호위를 위해 정윤승 대령이 함께했다.
세필의 말이 한양을 떠나, 막 정비를 마친 가도를 질주해 아이언헤드 성으로 나아갔다.
*
두두두.
철두와 페리슨은 해가 지기 전에 성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입장료 10주화!"
"예에, 여깄습니다."
페리슨이 20주화를 문지기에게 넘기고 성으로 들어왔다. 말에서 내린 그들은 도시를 걸으며 꽤 많은 대화를 나눴다.
"헤헤, 일단 여관을 잡겠습니다. 이쪽입니다."
"후후."
현지인 길잡이를 고용하니 이리 편하다.
페리슨은 눈치가 썩 나쁘지 않아, 철두의 정체에 대해 조금도 궁금해하거나 묻지 않았다.
그저 모르는 게 약일 때가 있는 법이고, 모를수록 목에 옭아매어진 칼이 멀어지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자다.
"성에 유명한 게 있다던데?"
"유명한 거요? 백작님의 조각상 말씀이신가요?"
"조각상?"
"옙, 이번에 영지에서 커다란 연회가 있는데 특별히 이름난 조각가가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딴 거 말고. 무슨 무한의 샘물인가."
"아! 중앙 분수대 말씀이시군요."
"그래 그거. 중앙이 어디냐?"
"그야 백작성이지요. 거기서 시작된 물이 상수도 라인을 따라 전체 도시에 공급이 되지요."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것이 필요해서 이리 온 참이다.
"커다란 도시들은 모두 하나씩 가지고 있습죠."
"그건 누가 만드는 거냐?"
"고대의 머시기라 마법사들도 못 만든다고 하던데.... 소인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한번 알아볼깝쇼?"
"되었다."
굳이 알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여기 물건이 있는데 가져가면 끝이지.
원리나 만드는 법 같은 건 몰라도 된다.
189화 여기 다 있네
쪼로로로.
"크으, 제가 형님 덕에 이 좋은 와인을 다 마셔봅니다."
"내가 왜 네놈 형님이냐?"
"아, 용병한테는 돈이 형님이죠. 헤헤."
웃기는 놈이군.
철두는 녀석과 와인을 마셨다.
배알 없는 것치고는 아는 것이 많아 주절주절 떠드는데, 제법 도움이 되는 게 많았다.
"여기 백작이 파티 광이라서 거의 수도에 살다시피 합니다요."
"이번에 영지에서 성대하게 파티를 주최하려는데 야인들 때문에 틀어져서 백작성의 분위기가 말이 아니더랍니다."
"제일 가까운 이동 포탈망이 서쪽으로 다섯 번째 맵에 있죠. 뭐, 이제 저기 바로 밑에 생겼다던데, 아직 거기에 자리 잡은 야인들을 처리하지 못했답니다."
백작이 파티광, 이동 포탈망을 원하고, 스트레스 받고 있다. 오케이.
"이야, 들으셨습니까? 그 도살자 지르골이 당하고, 백작령의 세 번째 검인 리에나 경이 당했다더라고요."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어떠냐고요? 아 그 괴물들 대단하죠. 백작의 호위인데, 수도로 갈 때도 따라간다더라고요."
현재 가장 위협적인 적은 백작 옆에서 밀착 경호. 오케이.
"백작령은 밀이랑 보리 농사가 많습니다. 아, 저 서북쪽엔 포도밭이 많구요."
"진짜 특산물은 이 와인이죠. 맥주 양조장도 많지만, 제국 내에서 유명한 건 나트롱 와이너리입니다."
다음 약탈 품목에 와인 체크. 오케이.
수다쟁이 페리슨의 이야기를 듣다가 잠들었는데, 다음 날 녀석은 용케 도망치지 않고 남아있었다.
"헤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형님."
짤그랑.
"오늘은 어디로 모실까요?"
철두가 아낌없이 돈을 쓰자 녀석은 시종처럼 굴었다. 철두가 나트롱 영지가 처음인 듯하자 아예 관광 가이드에 빙의했다.
"분수대로 가자!"
"예에, 모시겠습니다."
여관에서 간단히 요기를 마치고 길을 나섰다.
"본디 저기 내성이 백작성이었지요. 이 주위의 집들은 그 뒤에 확장된 겁니다요."
"저기는 누가 살지?"
"귀족들이나 장인, 돈 많은 상인들이 살지요. 저희 같은 뜨내기들은 내성에 들어가려면 또 입장료를 내야습죠."
페리슨과 강철두는 외성보다 세 배나 더 비싼 입장료를 내고 내성으로 들어섰다.
내성이라고 하더니, 아이언헤드 성보다 수 배는 넓어 하나의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저기 북쪽 언덕에 있는 게 백작성입니다요. 진짜 귀족이 기거하는 성입죠."
백작성의 성채가 비로소 아이언헤드 성과 비슷했다. 크기만 그러할 뿐이지 여기저기 성벽마저 조각상으로 치장된 것 하며, 화려함은 궤를 달리했다.
나트롱 백작성에 비하면, 아이언헤드 성은 그냥 군사 요새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저깁니다. 본디 여기 내성 안이 본래 도시였던바, 주요 시설들은 모두 여기에 있습죠."
페리슨을 따라가니 중앙에 아담한 분수가 있었다.
"저게 무한의 샘물 항아리입니다. 번화한 도시들만 가지고 있습죠."
작은 분수대의 중앙 조각상은 항아리 하나를 기울여 들고 있었는데, 그 안에서는 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수량이 분수대를 넘쳐, 관로를 따라 다시 도시 곳곳으로 퍼지는 모양이었다.
수량이 그리 많지는 않아, 중간중간 저수조가 마련되어 있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요? 저 작은 항아리에서 나오는 물이 여기 도시 전체의 갈증을 해소해주니 말입니다."
페리슨은 제 것도 아닌데 자랑스레 이야기하더니 철두를 이끌었다.
"얼른 줄 섭시다."
"줄은 왜?"
"예? 샘물 마시러 온 것 아닙니까?"
분수대 주위엔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차례가 된 사람은 수금원으로 보이는 행정원에게 주화를 주고 분수대 물을 마셨다.
지구에 살 적에 뒷산의 약수터에서 자주 보던 풍광이었다.
"좋아. 마셔보지."
헌데 물을 마신 사람들이 성수라도 마신 듯 감격한 얼굴이었다.
"저거 마시면 무슨 버프라도 걸리나?"
"그냥 맛있습니다."
"...."
"하루 종일 운이 함께한다고 하죠."
"그래?"
철두는 페리슨과 함께 줄을 섰다.
천천히 줄어드는 줄을 따라 구경하며 주변을 둘러보다 한곳을 가리켰다.
"저긴 뭔가?'
기사 둘이 지키고 있어 궁금하여 물었다.
"아! 전직소입니다."
"오!"
저기에 전직의 돌이 있겠군.
철두가 페리슨의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근데 저 샘물 항아리는 훔쳐가는 사람이 없는가? 조금 허술해 보이는데."
"예에? 시설물을 어찌 훔쳐갑니까?"
"흐음, 그래?"
"예에, 시설물의 주인인 백작이 양도하지 않는 이상 가져갈 수 없지요."
'백작을 죽이는 것밖에 방법이 없나?'
아직 확전하고 싶지는 않은데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다.
백작의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초인 급의 기사들도 아직 부담스럽고 말이다.
"그래도 훔쳐가려는 간 큰 놈이 있었을 것 같은데."
"에이, 백작성의 한가운데입니다. 누가 와서 저걸 훔쳐가겠습니까?"
"으음."
그때 철두의 앞에 있던 자가 물을 마시고 비켜섰다.
"1주화요. 오늘 하루 그대의 운이 상승할 것이오."
"후후, 운이라."
어느새 차례가 되어 철두는 주화를 행정원에게 주고는 바가지로 샘물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아 마셨다.
벌컥, 벌컥!
"히야아아."
단번에 들이켠 물은 감탄사가 나올 만큼 맛있었다.
"정말 맛있군."
청량하고 시원한 게, 마치 은은한 탄산수를 마시는 것과 같았다.
철두는 물을 마시곤 조각상을 올려다보았다.
"구경하려면 옆에 물러서서 하시오."
"그러지."
철두는 분수대의 옆으로 가서 분수대의 벽을 만져보았다. 탐색 스킬에 마력을 듬뿍 담아 분수대를 낱낱이 살펴보았다.
<무한의 분수대>
무한의 샘물이 솟아오르는 분수대다.
적대세력의 시설물입니다.
파괴할 수 있습니다.
전리품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오!"
철두가 감탄사를 뱉자 페리슨이 옆에서 거들었다.
"멋지지요? 어쩜 조각이 저리도 정교할 수 있는지, 소인도 처음 보고는 퍽 감탄했습지요."
"후후후. 그래."
정교하게 부서지겠군.
*
나트롱 백작은 연이은 보고에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시종장! 당장 전군을 소집하게!"
"진정하시옵소서. 각하."
"내 진정하게 생겼나? 우로사 남작이 당했어! 내 봉신 계약자로서 그의 복수를 행할 의무가 있어!"
"우로사 남작이 당했다곤 하나, 곧 부활하여 돌아올 것이옵니다. 그의 기사들도 그러하옵고, 함께 진군했던 병력들은 비록 군장을 강탈당했다 하나, 몸 성히 돌아왔사오니, 잃은 것은 크지 않사옵니다."
"마법사들이 모조리 봉신을 끊어냈어!"
"...불가피한 손실이옵니다."
늙은 시종장은 씩씩거리는 백작을 거듭 달랬다.
진정 잃은 것은 기백의 병력과 스물가량의 마법사뿐이다.
마법사가 고급 인력이라곤 하나, 기록적인 패전에 의한 손실이 그것뿐인 것은 기적이다.
"병력을 보존하여 돌아온 것은 온전히 요하임 공자의 공이옵니다."
"그 자식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시오!"
"...."
요하임은 기세 좋게 우로사 남작군과 함께 남하했다가 기록적인 패배 이후, 잔뜩 겁을 집어먹고 돌아왔다.
'아버지. 이쯤에서 화친하시는 게 어떻겠사옵니까? 그는 야인이라 만만히 볼 자가 아니옵니다. 대화가 영 통하지 않는 것도 아닌바, 일단 화친하시어 후일을 도모하시옵소서.'
장남이라는 녀석이 겁먹은 자라 같은 말만 하기에 별궁에 근신토록 했다.
"이익, 곧 파티 날이 다가오는데. 내 체면이 무엇이란 말이냐!"
나트롱 백작이 화가 나는 건 오로지 그것뿐이다.
벌써 초대장을 보냈다.
초대받은 손님들이 왔을 때, 백작의 가신들은커녕 웬 야인 무리가 이동 마법진에 기웃거리는 것을 보여줄 생각만 하면 창피하여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염려 마시옵소서, 각하."
"뭐라?"
분노하려는 백작을 보며 늙은 시종장은 고개 숙이며 보고했다.
"초대장은 아직 발송되지 않았사옵니다."
"뭐라? 내 명령을 내린 지 한참이 지났는데...."
"이동 마법진의 좌표 수급이 원활하지 않아, 지연되고 있었사옵니다."
"...!"
초대장에는 좌표석을 함께 동봉해 보내야 한다.
그래야 영지 근처의 이동 마법진으로 찾아올 수 있을 터이니.
야인들 처리가 원활하지 않아 시종장이 부러 누락한 것이 틀림없지만, 결과가 좋으니 탓할 수 없었다.
나트롱 백작은 웃는 듯 우는 듯 기묘한 표정이 되었다.
'일단 체면 상할 일은 면했군.'
파티를 주최해놓고 준비가 미흡하여 엉망인 모습을 보이면 그보다 낭패가 없다.
아직 초대장을 발송하지 않았으니, 아직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셈이다.
시간적 압박이 사라진바.
'수도에서 큰소리친 것만 수습하면 되겠군.'
제국 수도에 여러 친우들이 있어, 그들에게 하여금 나트롱 백작령의 아름다움과 와이너리에 대해 그리 자랑을 해댔었다.
'이 친구야. 그리 자랑만 해서 어찌 믿겠는가? 말만 그럴싸하면 단가? 그럼 우리 집에도 금송아지가 수천 마리 있다네. 하하하.'
'허! 그럼 내 조만간 준비해서 내 영지에서 파티를 주최하지!'
얄미운 친우 녀석의 도발에 그리 호언장담하고 말았다.
귀족의 말은 무겁다.
뱉었으니 모른 척할 수가 없고, 언젠가는 지켜야 한다.
다행히 초대장을 발송하지 않았으니 여유 시간이 있는바.
'별수 없군.'
백작의 호위 중 하나를 내보내서....
"각하."
"말하라."
"수도의 친우 중에 결투를 즐기는 이가 있다 들었사옵니다."
"음? 발베르 경을 이름인가? 어억!"
나트롱 백작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무릎을 탁 쳤다.
하지만, 곧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했다.
'도움을 청하자면,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해야 하니....'
무언가를 부탁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 해결할 힘이 없다는 시인하는 꼴이라 체면이 상하는 일이다.
선뜻 내키지 않았다.
"영 내키지 않는군."
"고라운 경과 부초 경은 봉신에 의해 각하를 떠날 수 없사오니, 외부의 칼을 빌리는 수밖에 없사옵니다."
"으음."
확실히 그렇다.
자신의 두 호위기사, 고라운과 부초를 사용하자면 자신이 직접 그 야인 영주와 만나야 한다.
그것은 위험 부담이 큰바, 조금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외부의 칼을 끌어들이기로 하였다.
그래도 곧장 말을 바꾸기 겸연쩍어 한마디 하였다.
"며칠 고민해보고 답해주겠네."
"신중을 기해 나쁠 것이 없나이다."
늙은 시종장은 백작의 심중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리 수긍했다.
철그럭.
그때 기사 하나가 뛰어오더니 급히 한쪽 무릎을 꿇고는 보고했다.
"각하를 뵙습니다."
"무슨 일이냐?"
"영지 남부에 야인 무리가 출몰해 다시 마을들을 약탈 중입니다!"
"이익! 이 괘씸한 놈들이!"
우당탕.
그때 다시 기사 하나가 부리나케 달려와 이번엔 거의 엎드리다시피 했다.
"가, 각하!"
"넌 또 뭐냐?"
"서, 성의 부, 분수대가 파괴되었습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냐!"
놀란 건 백작만이 아니었다.
평정심이 만렙인 시종장도 깜짝 놀라 재촉해 물었다.
"상세히 고하라."
"분수대가 파괴되고, 연이어 전직소가 무너졌습니다."
"...누구 소행이더냐?"
"자, 자세히 보지 못했으나 직후 그리핀이 날아올랐다 하...."
콰앙!
백작이 의자의 팔걸이를 내쳤다.
분노로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익! 당장 발베르 경에게 서신을 전하라!"
"예에, 각하."
190화 털어 챙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