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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 160-170

160화 준비 완료

"으으."

김진태는 이를 달달 떨었다.

손이 부르르 떨린다.

"사람이 없어...."

현재 문명 수준은 철기시대.

지을 수 있는 건물도, 만들 수 있는 물건도 많아졌다.

재료는 충분하다.

보르텡 남작성에서 한 번, 뉴아 마을에서 또 한 번 엄청난 전리품을 뜯어냈기에 자원은 풍족하다.

물자는 있는데 인력이 없다.

"이탈자가 20% 정도인가."

성 아랫마을 주민 중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도망쳤다.

전쟁이니 그럴 만도 했다.

이해는 하면서도 화가 나고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다시 돌아오면 받아주나 봐라."

이를 갈면서도 딱히 방법이 없다.

주민들과 성내의 병사들이 모조리 군수품 제작과 방어 타워 건설에 투입되었다.

남은 시간은 고작 2일.

촉박한 시간에 일을 마치기 위해 과다한 인력을 투입한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대부분 화살 따위의 군수품 제작과 수성전 전비를 위해 투입되었다.

김진태라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기에, 잠들기 전 숏폼에 중독된 환자처럼 세력창과 영지 지도를 펼쳐보길 반복했다.

"철기시대로는 한계야...."

이번 위기만 잘 넘기고 나면.

반드시.

다음 문명으로 넘어가야 한다.

문명 연구를 위한 필수 건물 아카데미를 지어 여러 문명 중의 하나를 연구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까지 발견한 문명 루트가 두 개나 존재한다.

성의 원 주인인 라이언 백작이 이뤄놓은 업적.

연구소를 활성화해 기계 문명으로 진입, 옥상의 발리스타를 고치는 것이 첫 번째다.

마탑을 지어 마법 문명으로 테크를 타고, 마법 방어 타워를 건설해도 된다.

어느 것이 되었든 수성전에서 크게 기여할 터인데, 지금으로서는 요원한 일이니 아쉬울 따름이다.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와 답답함이 몰려든다.

기계 문명이든 마법 문명이든 어쨌든, 지금 현재 철기시대의 수준에서도 할 수 있는 게 많은데, 자원이 문제다.

가장 큰 건 노동력.

"후, 사람이 없다. 사람이."

진즉 해자라도 파둘 것을....

전쟁 대비라는 것이 그렇다.

평소에는 그리 급할 것 없는 일이라 차일피일 미루다가, 막상 전쟁이 코앞으로 다가오면 땅을 치고 후회해도 늦다.

평화의 시기에 꾸준히 해야 하는 것이 전쟁 준비거늘.

김진태의 한숨이 깊어질 때였다.

"시종장님!"

"어? 최 소위님."

최승아 소위는 밝은 얼굴로 영주성에 올라왔다.

"왔어요!"

"뭐가요?"

"지원군이요!"

"네?"

"제가 한양에 긴급으로 보고 올렸거든요. 지금 지원군이 오는 중이래요!"

애당초 최승아 소위의 정보소대가 하는 일이 그거다.

아이언헤드 성에 상주하며 진보된 노바의 정보를 한양에 전달하는 것.

매번 빨대만 꽂고 있다가, 이번에 전쟁 소식을 전하니 한양의 박준필이 빠르게 지원군을 구성 파견했다는 소식이다.

"어느 정도 규모랍니까?"

"제2특임대 20인. 7공격대 20인 전원. 병력 2000에, 민간 지원군 1200명입니다."

"헙."

김진태가 깜짝 놀랐다.

최승아는 본인 일인 양 더 신이나 말했다.

"지원군 대장으로 정윤승 중령, 부대장으로 구정욱 중령이 함께입니다."

2천여 병력. 1200명의 민간 지원군.

거기에 더해 확실한 랭커. 기사급의 전력이 둘이나 포함되어있다.

특히 제2특임대는 내금위로 불리는 한양 최정예부대로, 20인이면 부대의 절반에 해당한다.

한양의 수비와 질서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만을 남기고 이번에 모조리 지원군으로 파견한 것이나 다름없다.

"하하, 이거 참."

김진태는 벅차오르는 감정에 말문이 막혔다.

진정한 친구는 위기의 순간에 안다더니, 지금이 딱 그 꼴이다.

"마중 가야겠습니다!"

김진태는 서둘러 성 밖으로 마중 갔고, 말을 탄 병력들이 먼저 당도했다.

"신 내금위장 정윤승! 아이언헤드 성을 구원하러 왔소!"

말을 탄 채 당당히 말하는 정윤승 중령을 보자 저도 모르게 함박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제 박준필이 있든 없든 자칭 내금위장으로 칭하는 것을 보면, 저 사람도 이미 사극 물이 들 대로 다 들었다.

"고맙습니다. 어서 성으로 들어가시지요."

"그전에 병력들에게 전직의 돌을 만지게 해도 되겠습니까?"

"오히려 바라던 겁니다."

김진태가 흔쾌히 응했다.

함께 온 병력들이 일일이 전직의 돌을 만지고 직업을 보고 선택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목수나, 대장장이 등의 제작자 계열의 직업을 가진 이들은 죄다 군수품 제작에 투입되었고, 나머지 인력들은 성밖에 장애물을 놓고, 돌이나 바위 등을 옮겨 수성전 물자 비축에 투입되었다.

"이 인력이면 이제 정말 수성도 문제없습니다."

"하온데, 영주님은 어디 계시는지요."

"철두는 지금 폐관 중입니다. 내일이면 나올 겁니다."

"으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닙니다."

"편하게 말씀해주십시오."

"그, 구 중령의 대접에 조금 신경 써 주십시오."

"구정욱 중령님이요?"

김진태도 아는 인물이다.

신서울에서부터 한양으로 철두와 함께 온 인물.

"예에, 최근 성격이 조금 급진적인 면이 있어...."

"아, 네. 그럴게요."

"예, 하하하. 면목 없습니다."

김진태는 의아해하면서도 엘리스에게 특별지시를 내려놓았다. 그의 대우에 소홀하지 않으면서 사람이 어떤지 한번 살펴보라고 말이다.

3200명이 전직의 돌을 통해 전직했다.

정말 다양한 직업군들이 나왔는데, 개중에는 몇 명만이 전직한 아주 희귀한 직업도 몇 있었다.

"연구원이 7명, 촌장이 12명, 집사가 5명...."

아직 표본이 모자라긴 하지만 드문드문 나온 직업군 중에 탐나는 인재들이 꽤 많다.

촌장을 몇 명만 영입하면 아이언헤드 성을 중심으로 주변에 마을을 몇 개나 건설 가능한 건 아닐까.

"사제는 하나도 없네...."

아울러 장인도 하나도 없다.

사제와 장인은 스스로 소망하고 개척하는 자들.

내면의 재능을 개화한 직업이라기보다는, 간절한 소망이 신에게 닿아 응답을 받은 자들이다.

어쨌든 확 늘어난 인적 자원으로 인해 아이언헤드 성의 전쟁준비는 빠르게 완성되어갔다.

오전에 당도한 지원군의 모든 직업분류가 끝나고, 생산 현장에 투입되고 보니 오후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그 자체로도 해야 할 일이 많이 생기는지라, 한 끼 식사를 만드는 것만 해도 큰일이었다.

기존의 내부 인력까지 합쳐 거의 5천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상주하다 보니 아이언헤드성이 북적북적했다.

여길 보나 저길 보나 사람이 가득해 인산인해였다.

늦은 오후가 되자 뉴아 마을까지 진군했던 병력이 철수했다.

저녁밥을 짓기 위한 솥이 여기저기 내걸리고 아이언헤드성의 영지군과 한양에서 온 지원군의 상견례 비슷한 식사 자리가 만들어졌다.

아이언헤드성의 지휘부가 전부 군에서 전역한 이들이었기에, 모인 이들 모두, 박준필 중장의 휘하 신서울에 주둔하며 안면이 익은 자들이었다.

"이야, 이거 이렇게 한달음에 와주시니 든든합니다."

"마땅히 와야지요. 지난 월식 때 영주님의 도움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영지군 총대장 오준환의 말에 정윤승 중령이 웃으며 받았다.

최준섭과 이은영, 기용수는 지원군으로 온 장교들 중에 꽤 반가운 이들이 많아 오랜만에 수다에 빠졌다.

최준섭은 그때 가만히 술만 들이켜는 구정욱 중령의 옆자리에 가서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구 중령님. 진급 축하드립니다."

"...그래."

"하하, 오늘따라 과묵하십니다."

7공격대 구정욱은 본래 말이 많은 타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리 과묵한 정도는 아니었다.

식사 자리가 무르익어 갈 때쯤, 자연스레 병력의 배치 이야기가 나왔다.

주요 작전은 오준환의 주도 아래 이뤄졌다.

각 성벽마다 구역을 할당하고 병력들이 수성을 한다는 아주 기초적인 작전.

딱히 누군가 반론을 내는 것 자체가 웃긴 정석적인 작전에 깊은 태클이 들어왔다.

"세상 좋아졌군."

구정욱 중령의 말에 옆에 있던 최준섭이 깜짝 놀랐다.

그의 기억 속 구정욱은 전형적인 군인 상이었다.

상부의 말에 딱히 불만도 없고,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고 부하들을 잘 이끌고.

풀어줄 때 풀어주고, 조일 땐 엄하게 하고.

최준섭이 존경하던 장교 선배 중의 하나가 구정욱이었다. 그의 입에서 나왔다기엔 지나치게 빈정거리는 말이었다.

순식간에 굳은 분위기를 최준섭이 나서서 풀어보려 했다.

"구, 구 선배 무슨 말씀을, 하하하. 뭐 잘못된 부분이라도 있습니까?"

"전직 준위 나부랭이가 작전 지도하는 게 잘못이지."

오준환의 얼굴이 팍 썩어들어갔고, 분위기가 더 얼어붙었다.

"구 선배. 말이 지나치시군요."

"허, 내가 왜 그쪽 선배인가? 부사관 특채."

"...."

무례함에도 정도가 있는데, 너무 지나친 말에 오준환은 할 말을 잃고 벙찐 얼굴이 되었다.

그때 나선 것은 정윤승 중령이었다.

"어허허, 자자, 다들 진정 좀 하게. 구 중령.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게나."

"내가 왜 그래야 합니까?"

구정욱이 비릿하게 웃었다.

여기 모인 이들 중에 구정욱을 모르는 이는 없었고, 신서울 7공격대 대장 구정욱을 기억하는 모든 이가 깜짝 놀랐다.

이런 자였나?

"내가 대신 사과하겠네. 요즘 구 중령의 언행이 조금 거친 것이 있네."

정윤승의 말에 구정욱이 나섰다.

"내 말투가 고까운 건 차지하고서, 지휘체계에 문제가 있으니 제기하는 문제 아닙니까?"

구정욱의 말에 빈정이 상한 오준환이 어디 해보란 듯 말했다.

"말해보시죠. 무슨 문젭니까?"

"우리가 이끌고 온 병력이 한양의 절반이오."

"그래서요?"

"그런데 고작 300명도 안 되는 병력에 부사관 출신의 영지군 총대장이 이래라저래라하는 지금 상황 자체가 문제요."

오준환이 기가 차서 되물었다.

"지휘권을 넘겨달라는 말입니까?"

그제야 구정욱이 웃었다.

"그거 마음에 쏙 드는 말이군."

"...."

모두가 깜짝 놀랐다.

정윤승이 나서서 최대한 수습해보려 했다.

"구 중령! 지나친 소리일세! 사령관님께서 그리 명하시든가!"

"흥, 나보다 약한 사령관 따위...."

아주 작게 구시렁거리는 소리였으나 여기 있는 모두가 다 들었다.

그들은 설마 구정욱이 박준필의 명까지 업신여길 줄은 몰랐기에 화가 나면서도 의아한 마음이었다.

"다들 그만! 내가 해명하겠네. 실은 구정욱 중령이 특성석의 부작용으로 성격 변화를 겪고 있네. 과거 신서울 출신의 장호철이 독립해 간 것과 유사한 상황이지. 다들 조금만 이해해주게나."

장호철이란 말에 다들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그, 그러시군요."

최준섭이 억지로 나서서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다.

"장호철도 오우거 특성석 먹고 나서 몇 달 안 되어 안하무인이 다 되었지요."

최준섭의 말에 구정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내가 지금 정신병에라도 걸렸다는 소리냐?"

"...."

조금 유해지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굳었다.

어색하다 못해 살기마저 감도는 팽팽한 분위기를 깨는 것은 익숙한 웃음소리였다.

"후후후."

모두의 고개가 홱 돌아가 웃음의 진원지를 찾았을 때, 그는 이미 거기 없었다.

콰앙!

구정욱을 들어 바닥에 내다 꽂아버린 강철두는 그의 멱살을 틀어쥐고 일으켜 세워 따귀를 올려붙였다.

쫘악!

"구 씨. 머리에 문제가 있군."

안하무인이 되어가는 인간의 따귀를 안하무인의 최고봉에 이른 바바리안이 올려붙였다.

161화 따뜻한 인사

뻐어억!

따귀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굉음에 고개가 홱 돌아간 구정욱 중령의 몸이 축 처졌다.

"주, 죽은 거 아냐?"

"기절했다."

털썩.

철두는 구 중령을 바닥에 내려주었다.

그때 재빠르게 정윤승 중령이 나서서 철두를 달랬다.

"영주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제가 다 해명하겠습니다."

"왜 이렇게 건방져진 거냐?"

"오우거 능력석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직 연구 중입니다만, 능력석이 성격에 영향을 미친 게 아닌가 싶습니다."

"...."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다."

"예?"

"뭐?"

"...?"

정윤승 중령이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어찌 아셨습니까?"

"탐색이 2레벨이 되면 부작용이 보인다."

"헙!"

한양에서는 아직 추정만 하는 중이었다.

그간 오우거의 능력석을 활성화한 이들 중, 이와 같은 부작용은 구정욱이 두 번째여서다.

첫 번째 케이스가 장호철.

본디 신서울의 핵심적인 노비스 셋 중 하나였으나, 어느 순간 사람이 점점 안하무인으로 변하더니 결국 독립해 산적이 되었다.

단 두 사람으로 단정 짓기에는 지나치게 데이터가 적다. 그간 신서울이 10년간 얻은 오우거의 능력석은 10여 개 수준.

"다른 이들은 다 문제가 없사온데.... 혹, 어떤 부작용인지 알 수 있습니까?"

"오만해지고, 무모해진다."

"...오우거의 성격을 닮는 거군요."

"후후, 그렇다."

정윤승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 보니 큰 문제 없다 여긴 다른 이들 중에도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구 중령은 사령관 명에도 욱하고 항명하니 특히 문제가 되었지요."

"준필이한테?"

"예에...."

"문제가 많은 놈이군."

철두가 기절한 구정욱을 깨웠다.

쫘악!

"허윽!"

볼이 퉁퉁 부은 그가 눈을 뜨곤 버럭 소리질렀다.

"기습이다!"

"나다."

"헙! 영주님."

강철두를 알아본 구정욱의 눈빛이 사정없이 떨렸다.

"준필이한테 개겼나?"

"...."

"말해라."

"...사령관이 이치에 맞지 않는 명령을 하기에 그랬소."

"개겼군."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 때문에 이렇게 되었으니 내가 책임지마."

"어떻게 말이오?"

"내가 당분간 데리고 있겠다."

"허, 내가 남 밑에 있을 것 같소?"

구정욱이 반사적으로 질렀으나 그 기세는 많이 죽어 있었다. 마치 범 앞의 강아지 같았다.

"거절하면 죽는다."

"...."

"따를 테냐?"

"...따르겠습니다."

"후후후."

안하무인 부하?

그보다 더한 상사 앞에서는 얌전한 강아지가 될 뿐이다.

"내금위."

"예, 영주님."

"구 씨는 내가 잠시 맡아두지."

"...그리하겠습니다."

당분간이라 했지만, 아마 영구적이리라.

정윤승은 귀한 노바군 장교가 또 이리 전역하게 되리라 직감했다.

"오우거 능력석을 먹은 나머지 녀석들도 문제 되면 보내라."

"...그것도 보고해 두겠습니다."

"좋군. 밥 먹자!"

철두의 등장에, 일촉즉발의 기세로 날카로워지던 분위기는 단번에 깨졌다.

압도적인 무력이나 카리스마를 가진 대장은 그 존재만으로도 개성 강한 부하들을 한데 엮는 힘이 있다.

우적 우적.

철두는 게걸스럽게 음식을 해치웠고, 그때까지 얌전히 지켜만 보던 김진태가 나서서 물었다.

"밥 챙겨가지 않았냐?"

"모자랐다."

"헐, 그 많은 게?"

"후후, 진태. 아침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오, 얼마나 세졌어?"

"그건 보면 안다."

자신감 가득한 철두의 얼굴을 보며 김진태는 이번 전쟁의 추가 한쪽으로 기울었음을 직감했다.

"대장, 뉴아 마을에 화공을 위한 함정을 파뒀습니다."

오준환의 보고에 철두가 이죽거렸다.

"후후, 함정 따위는 필요 없다. 내 힘이면 단번에...."

철두는 말을 하다 말고 흠칫 놀라며 일어섰다.

쫘악!

갑작스럽게 두 손으로 자신의 뺨을 후려쳤는데, 그 소리가 우렁차 밥을 먹던 사람들이 죄다 깜짝 놀랐다.

"왜 그러냐?"

"대장!"

모두가 걱정스럽게 쳐다보는데 강철두가 웃었다.

"후후후."

이거, 영 마음 다스리기가 쉽지 않군.

특성석이라는 것은 요물임이 틀림없다.

하물며 철두는 거인의 특성만 발현된 게 아니다.

바바리안에 요정, 거인에 골렘, 그리고 무기와 관련된 다른 특성과 저주 저항까지....

만약 이 모든 게 성격적으로 영향을 준다면, 지금 철두의 성격은 얼마나 뒤틀렸는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성격 따위는 상관없다.'

지금 철두가 화가 나는 건 본인의 변화가 아니다.

그 변화마저도 제어해내지 못한 것에 대해 화가 났다.

바바리안은 모든 것을 통제할 줄 알아야 한다.

바바리안 수련법이 그렇다.

명상법으로 신체 구석구석까지, 심지어 심장박동마저 제어해내는 게 바바리안이다.

한데, 제어를 벗어난 기질적 특성이 멋대로 발현된다?

거인의 특성석이건 나발이건 기분이 나쁘고, 그것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 스스로에게 화가 나고 수치스럽다.

"걱정할 것 없다. 갑자기 자만했을 뿐이다."

"너도 구 중령처럼 막 그래? 여태 괜찮았잖아?"

김진태는 말을 해놓고 헷갈렸다.

'아니, 괜찮은 건 아니었나?'

지나치게 건방지고 자신감 넘치긴 했지만, 지구에 있을 때도 그랬으니 그냥 그러려니 했을 뿐이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조금 과잉된 면이 있었다.

"오우거의 특성을 강화했다."

"미친! 괜찮은 거야?"

"후후, 괜찮다."

오만함과 무모함?

괜찮다.

충분히 컨트롤 가능한 범위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콧대 높은 성격이야 원래도 그랬으니 조금 더 심해지는 정도고, 아이언헤드령에서는 철두가 가장 높은 자이니 딱히 문제도 아니다.

지금 그 권위에 도전할 만한 자는 내부가 아닌 외부의 사람들뿐인데, 그것도 마침 전쟁 중인 적이라 문제 될 것이 없다.

오히려 이로운 방향의 분노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일.

조심할 건 둘이다.

자만하여 적을 업신여기는 것.

무모하여 아군을 위태롭게 하는 것.

다행히 철두는 혼자가 아니고, 좋은 친구를 두었다.

"진태. 내가 부주의하면 또 나를 말려라."

"어, 어. 그래."

"오준환."

"네, 대장."

"척후를 돌려라. 적이 함정에 빠지면 그리핀을 타고 가 화공을 퍼붓겠다."

"알겠습니다!"

자신감이 넘친다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이 자만이다.

철두는 부족장이기에 솟아오르는 호승심을 내리눌렀다.

무모함도 용기로 바꾸는 정도에서 그쳐야 한다.

부하들의 핏물 위에 개인의 용맹을 떨쳐봐야 무슨 소용인가.

철두는 옥상에서 가만히 앉아있었다.

영주성에서 내려다보니 바글바글 사람들이 참 많았다. 김진태는 그런 철두의 곁에서 방해하지 않으려 조용히 그를 지켜주었다.

"진태."

"어? 명상하는 거 아녔어?"

"후후, 아니다."

"어, 왜?"

"부모님 생각나지 않나?"

철두의 말에 김진태의 얼굴이 와락 찌푸려졌다.

"네가 홍길동의 마음을 어찌 알리오."

"난다는 말이냐, 안 난다는 말이냐?"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병신같은 말이군."

"크큭, 그래. 병신 맞지. 화나다가도 한 번씩 생각나기도 하고.... 나 버리고 그래 잘살아 봐라 하다가도, 이거 내가 도움이라도 좀 줘야 하나 싶기도 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해라."

"...."

"망설임은 후회만 낳는다."

"후, 알겠다. 이번 전쟁만 좀 끝나면 한번 뭐 하는지나 알아봐야지."

지구가 언제 망할지는 모르겠지만, 종말이 찾아오면 그래도 핏줄인데 대피할 대피소 정도는 되어주어야 하지 않겠나.

"좋다. 난 심상 수련에 다녀오지."

철두는 곧 눈을 감았다.

푸시시시.

얼마 지나지 않아 철두의 몸에서 열이 오르며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정도로 열기를 뿜었다.

"...지리네."

김진태는 순순히 감탄했다.

바바리안이라는 인종은 저리 순식간에 집중해서, 마음만으로도 신체 단련을 할 수 있구나 싶었다.

노을이 지고, 완전히 해가 지고도 아이언헤드성은 환히 불이 밝혀져 있었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이 군수품을 만들어내고, 영지병들이 하나둘 제대로 된 갑옷을 입기 시작했다.

"이거, 재고가 순식간에 동나긴 하겠네."

영지 창고에 쌓인 자원이 많다 싶었는데, 작정하고 생산에 몰두하니 순식간에 재고가 줄어드는 게 보였다.

철, 목재 등 모든 자원이 게 눈 감추듯 사라졌고, 그나마 풍부하게 남은 건 성벽 축조에 쓰일 커다란 석재가 전부였다.

이번 전쟁만 마치면, 이제 자원 채집에 본격적으로 나서야 할 듯싶었다.

"적이 뉴아 마을에 당도해 진을 꾸렸습니다!"

바삐 오간 전령이 마침내 소식을 전해왔을 때는 완전히 해가 져 어두컴컴해진 후였다.

"다녀오지."

"그래, 조심해. 혼자서 괜히 무리하지 말고!"

"후후, 알겠다."

철두는 그리핀을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가볍고 뜨거운 인사만 해줄 요량이다.

화공 준비라 하여 거창하게 뭔가를 해놓은 건 아니다. 그저 마을의 중심부를 크게 비워두고 집을 해체한 그 목재들을 목책에 빙 둘러 쌓아 뒀을 뿐이다.

여기저기 무너진 목책도 고쳐서 새롭게 세워뒀다. 화염이 번질 때 적이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어렵게 해야 하니까.

기름이 없는 지금, 할 수 있는 화공 준비는 다 한 거다.

철두는 하늘에서 뉴아 마을을 보며 웃었다.

"오준환이 머리가 좋아."

아니면 적이 부주의하든가.

지르골의 군대는 뉴아 마을 한가운데에 진을 꾸리고 있었다. 여기저기 화톳불을 밝혀 환히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는데, 한번 당한 게 있어서 그런지 하늘 위를 보는 녀석들이 많았다.

하지만 어두운 밤하늘을 매초 집중해 살피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철두는 오식이의 급강하를 시전했다.

쇄애애애액.

"후후후, 질러보자고. 친구들."

철두의 어깨 위로 바람의 정령과 불의 정령이 실체화해 올라타곤 히죽 웃었다.

빵빵하게 늘어난 마력을 모조리 저기에 퍼붓고 튈 요량이다.

쇄애애액.

때앵, 때앵!

그리핀이 상공에 등장하자마자 요란한 종소리가 울렸다. 철두는 그 기민한 반응에 역시 정예병을 육성해야겠다 마음먹으며, 모든 마력을 친구들이 쓰도록 허락해줬다.

화르르르르르륵!

사정거리에 이르자 불의 정령이 홱 사라지더니, 적진을 밝히고 있던 화톳불이 일시에 터져버렸다.

콰아아아아앙!

여기저기 폭음과 함께 시작된 불길이, 합류한 바람의 정령에 의해 순식간에 화마를 키웠다.

화르르르륵.

불의 토네이도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화마가 진영을 홱 감아 돌며 일시에 산소를 증발시켜, 타죽기 전에 숨이 막혀 죽을 판이다.

쇄애애애액.

산발적으로 반격해오는 화살을 어렵지 않게 피해낸 철두는 마력이 0%가 되자 그리핀의 고도를 올렸다.

"후후후, 지르골!"

철두의 도발 가득한 음성에도 적진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렇다고 지르골이 이런 화마에 죽었다곤 생각되지 않았다.

"하하하, 망치가 완성되면 네놈 대가리를 쪼개주마!"

철두의 도발이 거듭되는 그때, 진지에서는 마력을 매개로 타오르던 불길이 목재에 옮겨붙어 매캐한 연기를 내며 본격적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철두의 눈에 이질적인 푸른 방벽이 보였다.

"음?"

시력에 감각을 집중해보니 옹기종기 모인 적들을 감싼 푸른 보호막이 보였다. 보호막은 무리의 중심에 있는 지팡이 든 사내에게서 비롯되었다.

"...."

철두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마력을 모조리 쏟아부어 더 공격을 퍼부을 수도 없는데....

마침, 지팡이 든 사내도 무리를 했는지 실신하며 푸른 보호막이 걷혔다.

거의 동시에, 철두는 활을 꺼내 시위를 매겼다.

피잉.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화살은 아쉽게도 기절한 마법사에 닿기 전에 누군가가 잡아챘다.

"...지르골."

"노오오오옴!"

지르골의 노호성을 들으며 철두는 오식이의 고삐를 돌렸다.

162화 너 납치된 거야

"뭐? 마법사가 있었다고?"

"그래."

"와, 이거 또 일이 복잡해지네."

김진태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공성무기와 적진에서 돌격해 들어올 일당백의 기사전력만 생각했는데, 마법사라는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마법사는 그 자체만으로 공성 병기이자 전략 병기이지 않은가?

"어쩌지? 막 여기 마법사들도 전지전능하고 그런가? 아니면 몬스터 주술사 수준이려나."

여태 마주친 마법 몬스터라고 해봐야 고블린 주술사나 오크 주술사 정도다.

"그 정도만 되어도 위협적이지만.... 너 정도라면 진짜 생각하기도 싫다."

김진태의 시선이 철두에게 향했다.

철두가 부리는 정령의 힘은 상식을 아득히 넘어섰다. 어째서 그런 힘을 내는지는 모르겠지만, 철두는 지금 4대 원소 마법을 전부 쓸 수 있는 전사 캐릭터나 다름없다.

'사기네.'

그때 김진태에게 번뜩이는 생각이 떠올랐다.

"물어보러 가자!"

"누구한테?"

"포로 있잖아."

"후후, 그건 진태 너에게 맡기겠다. 그동안 난 조금 더 단련해야 할 것 같다."

"어, 알겠어."

아직 해가 뜨려면 한참이나 남은 야심한 시각이다. 김진태는 즉시 지하감옥으로 내려갔다.

지하감옥은 창살로 이뤄진 방이 6개에 간수실과 고문실이 하나 딸린 작은 규모였다.

"충성!"

"어, 고생 많아요."

당직인 간수의 경례를 받으며 쇠창살 1번 방에 입주 중인 잭을 보았다.

옷은 속옷 빼고 모조리 벗겨져 있었고, 손발이 꽁꽁 묶여 탈출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자리에 주저앉아있던 그가 고개를 들어보곤 게슴츠레 눈을 떴다.

"!@#$"

"아, 맞다."

진태는 소통의 비약을 하나 쭉 들이켜곤 간수가 가져다준 의자에 앉았다.

"흥, 이제 고문인가?"

"이야, 성격 급하시네요. 고문보다 귀순은 어때요?"

"...? 무슨 소리냐."

"영지에 정착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말 그대로죠."

"...."

사냥꾼 잭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좋다."

"와, 화끈하시네."

김진태는 고소를 머금었다.

넙죽 받아놓고, 풀려만 나면 기회 봐서 도망치겠다는 심산이겠지.

노바로 와서 닳고 닳은 건 강철두만이 아니다.

"좋습니다. 그전에 몇 가지 묻죠."

"말씀하십시오."

"지르골의 부대에 마법사가 몇입니까?"

"마법사는 없습니다."

"이야, 초장부터 구라를 까면 이거 대화가 안 되는데?"

마법사의 보호막을 뻔히 겪고 왔는데 마법사가 없다니.

"지르골의 부대에는 없지만, 함께하는 아미르 왕국의 일행에는 있지요."

"오."

"필요한 게 마법사의 정보입니까?"

잭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래요."

"그렇다면 저만큼 더 잘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제가 그 일행이었으니까요."

김진태가 고개를 갸웃했다.

"일행의 정보를 팔겠다고요?"

그리 쉽게 배신하겠다는 건가?

뭔가 예상을 엇나간 반응이다.

"용병은 임무가 종료되면 더는 일행이 아니지요."

"오."

김진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잭은 뼛속까지 용병.

그에게 의리는 돈이다.

'이거, 회유책이 그리 효과적이진 않겠는데?'

상대도 알고 자신도 안다.

영지에 사냥꾼 하나 늘어봐야 딱히 도움 될 일이 무얼까 싶기도 하고, 마땅히 잡아둘 목줄이 없기도 하다.

당장이야 목숨이 달렸으니 협조하겠지만, 간사한 사람 마음은 그것을 금방 잊어버린다.

차라리 미래에 받을 보수를 책정해 두는 게 낫겠다.

목숨값은 안 갚고 튄다는 선택지가 있지만, 보수는 받기 전까지 스스로에게 목줄을 채울 거다.

"툭 까놓고 이야기하죠. 영지전이 끝날 때까지 아이언헤드령에 고용되시겠습니까?"

잭의 동공에 빛이 반짝였다.

"좋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김진태가 씩 웃었다.

"자, 마법사에 대해 풀어봅시다."

김진태의 두 눈엔 탐욕이 가득했다.

*

화르르르륵.

보호막이 걷히며 뜨거운 열기와 매캐한 연기로 숨이 답답해져 왔다.

"속보 이동!"

그나마 다행히도 보호막이 잠깐의 시간을 벌어 준 덕분에, 병사들 모두 심적으로 대비할 시간이 있어 혼란이 덜했다.

기사들의 지시에 병사들이 빠르게 화염 지대를 벗어났다.

여기저기 그을음이 묻어 볼품없는 자들이 많았으나, 다행히 대부분 무사히 탈출했다.

"결원 37명. 경미한 화상 외 손실 없습니다."

"젠자아아앙!"

부관의 보고에 지르골이 괴성을 터트렸다.

망할 녀석.

"반쪽짜리 바바리안 놈이 나를 농락하다니!"

바바리안으로서의 긍지도 없는지, 배알 없이 요정족의 주술을 부리는 놈이다.

콰직, 콱!

지르골이 방방 날뛰며 분풀이를 해대는 통에 병사들이 긴장된 얼굴을 했다.

"후우, 스테고."

"네, 사령관."

"병력을 수습해라. 곧장 진격할 것이다."

"넵!"

기사 스테고는 즉각 답했다.

훌륭한 판단이다.

병사들의 결원은 많지 않았으나 야영 장비들이 모조리 불타오른 게 컸다.

병사들의 피로야 있겠지만 차라리 지금 진군하는 게 낫다.

두두두두.

"척후에 적의 마을이 있는지 살펴라!"

"네, 사령관!"

지르골이 이를 갈았다.

그리핀과 정령사의 조합은 생각외로 성가신 존재다. 무력도 대단한 놈이라 지르골을 제외하면 상대할 기사도 없다.

그렇다고 사령관인 지르골이 잠도 자지 않고 놈을 잡기 위해 대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싸우려면 최대한 빠르게 승부를 보는 게 나았다.

'성 아랫마을 두어 개만 조져도 나서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적아가 뒤섞인 영지 마을에 불을 지르진 못할 것이다.

"사령관! 마을이 없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면 적의 성입니다!"

"성 아랫마을이 하나 있사온데, 척후의 정찰 결과 비었다고 합니다."

거듭된 척후의 보고에 지르골이 인상을 썼다.

"미친놈들인가?"

설마 영지의 마을이 저 성 아래 작은 마을이 전부라는 건가?

그러고 보니 이놈들이 개간한 밭도 형편없이 작은 면적이다.

대체 뭘 먹고 사는 놈들이지?

"군을 정비해라! 날이 밝는 대로 성을 죄일 것이다!"

"네, 사령관!"

지르골의 군대가 혹시 모를 기습에 대비하면서 넓게 포진해 휴식을 취했다.

얼떨결에 여기까지 따라온 아미르 왕국의 기사들은 슬슬 눈치를 봤다.

"지롤 경. 이거 상황이 묘하게 돌아갑니다."

"이긴다 해도 문제가 큽니다. 그리핀 한 마리가 전황을 이리 바꾸는 걸 보았는데, 저들이 쉽게 포기하겠는지요?"

"다들 입 조심하게. 아직은 상황을 지켜볼 때야."

지롤의 안색도 어둡긴 마찬가지였다.

아미르 왕국에서 수년에 걸친 연구 끝에 드디어 그리핀을 대량으로 가축화하는 데 성공했다. 앞으로 몇 년만 더 지나면 그리핀으로 이뤄진 기사단을 출범시킬 예정이었다.

'제국을 끌어들인 게 실책이다.'

너무 그리핀을 회수하는 것만 생각했다.

회수보다 차라리 사살했어야 했다.

'제국도 이제 알겠지.'

아미르 왕국에서 그리핀을 가축화해 길러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공물로 그리핀을 요구하게 될지도 몰랐다.

오래도록 계획한 아미르 왕국의 비상계획이 시작도 되기 전에 좌초될 위기다.

"브롤은 어떠냐?"

"겨우 정신은 차렸습니다."

기절했던 마법사 브롤이 깨어났으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이 영 컨디션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마법사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지르골의 군영에서도 기사 스테고가 점검차 방문했다.

"마법사는 어떠시오?"

"겨우 정신을 차렸습니다."

"사령관께서 공성에 쓰일 마법을 찾으시오."

지롤이 고개를 저었고, 스테고는 물끄러미 브롤을 보았다.

척 보기에도 좋아 보인다고 할 수 없는 피로한 얼굴이었으나, 자신은 사령관의 요구를 실현해야 하는 처지다.

"마력이 고갈되어 마법은 무리입니다."

"어느 정도면 가능하오?"

"...하루가 다 지난다 해도 무립니다. 마력이란 것은 그리 쉽게 회복되는 게 아닙니다."

"흐음, 뭔가 방법이 없겠소?"

브롤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라도 던져주지 않으면 스테고는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단단히 꼬였군.'

분명 그리핀 회수를 위해 제국의 힘을 이용한다는 계획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제국의 전쟁에 이용당하는 모양새였다.

"마력을 가진 자가 있거든 이걸 쓰시오."

브롤이 아공간에서 물건 몇 개를 꺼내 주었다.

"이게 무엇이오?"

스테고가 물건을 들곤 고개를 갸웃했다.

팔뚝만 한 크기의 길쭉한 물건이었는데, 한쪽이 뻥 뚫려 있어 마치 길쭉한 꽃병 같았다.

이것이 쇠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면 영락없이 길쭉한 그릇 정도로 생각했으리라.

"파이어 캐논이오. 마력을 주입하면 불덩이를 발사할 것이오."

"오호, 알겠소. 귀하의 협조에 사령관을 대신해 감사의 말을 전하오."

"예에."

브롤이 이제 좀 가란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스테고가 파이어 캐논 3개를 챙겨 나가자, 브롤이 한숨을 쉬었다.

지롤의 얼굴은 굳을 대로 굳어 있었다.

"마법사 브롤."

"나도 별수 없었소. 지롤 경도 보지 않았소? 뭐라도 내주지 않으면 포기할 기세가 아니었소."

"...그래도 왕국의 기밀 무기를 이리 쉽게!"

"그만! 말은 바로 하시오. 저게 어째서 왕국의 기밀 무기요? 엄연히 우리 툴스 학파의 자산이오."

브롤이 속한 툴스 마탑은 4대 원소의 연구보다는 마법진의 연구와 아티팩트 제조에 더욱 매진하는 학파다.

브롤이 시전한 대규모 방어마법도 그가 익히고 배운 기술이 아니라, 그의 손에 들린 지팡이에 내장된 마법이었다.

그것을 시전하는 데 필요한 마력의 양이 상당해, 탈진한 것이다.

"후우, 아무튼 그대나 나나 돌아가면 교수대에 목이 달리긴 매한가지겠구려."

지롤의 자조적인 말에 브롤도 대꾸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내심으론 생각했다.

'넌 뒈져도 난 살지.'

마법사는 기사에 비할 바 없는 고급 인력인데, 아무렴 죽으려고. 어디 골방에 박혀 마법 제작하는 기계 취급을 받긴 하겠지만 목이야 부지할 것이다.

그때 미세한 진동을 느낀 기사들이 흠칫 떨었다.

기사 호르크가 급히 땅에 귀를 가져다 대더니 표정이 굳었다.

"기마대요."

아군의 기마대가 쉬고 있는데, 이리 말발굽 진동을 낼 상대는 적군뿐이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놈들이구만."

지롤이 비장하게 말했다.

"호르크 경, 앙트루 경."

"네."

"말하십시오."

"그리핀을 회수해가긴 그른 것 같소. 지금부터 우리의 최우선 목표는 그리핀의 회수가 아니오."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임무 포기 선언이나 다름없다.

아미르 왕국의 대계가 달린 일.

"가축화의 흔적이라도 지워야 하오."

그리핀이 지르골의 손에 들어가는 걸 막아야 한다.

"지르골이 이긴다면 아이언헤드 영주를 죽이기 전에 그리핀을 '양도'받으려 할 것이오. 그때를 노려 영주의 목을 노립시다."

"좋습니다! 어차피 죽을 목숨, 아미르를 위하여!"

"왕국의 부흥을 위하여!"

세 기사가 칼을 빼 들고 비장하게 소리쳤다.

동시에 무언가 소름이 쭈뼛 돋았다.

후우우우웅!

어느새 머리 위까지 급강하한 그리핀의 안장 위에 히죽 웃는 아이언헤드 영주가 보였다.

"후후후, 여깄군. 마법사."

그가 손에 쥔 밧줄을 홱 하고 던지자, 브롤의 몸이 착 하고 감겨 끌어 올려졌다.

"어억!"

브롤을 끌어올린 철두가 그를 꽁꽁 묶어 안장 앞에 실었다.

"무, 무슨 짓이오!"

"후후후."

무슨 짓이긴.

아이언헤드 영지에 마법사가 생겼다는 거지.

철두가 히죽 웃었다.

163화 격돌

후우우웅.

영주성 꼭대기에 그리핀이 내려앉았다.

"철두야! 마법사는?"

"후후, 친구보다 이놈을 더 먼저 찾냐?"

철두가 꽁꽁 묶인 마법사를 던져주었다.

"어이쿠!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김진태는 마법사 브롤을 보물 고블린 보듯이 했다.

적진에 마법사가 둘만 되었어도 이리 걱정하지는 않았다.

'흐흐, 드디어 우리도 마법 문명 테크다.'

김진태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마주한 마법사 브롤이 오한으로 몸을 떨었다.

'미쳤다. 미친놈이야.'

광기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 옆에는 익숙한 얼굴의 사내가 서 있다.

"잭! 너 잭 아니냐?"

"흐흐, 브롤. 다시 보니 반갑구려."

"이 개자식! 네놈이 배신자였어!"

브롤은 주변을 둘러보곤 발작하듯 소리쳤다.

"모두 거짓 정보였어! 이 개자식!"

기사 지롤이 용병 사냥꾼 잭에게 놀아난 것이 틀림없다. 그 정보를 전해 받은 지르골의 군대도 지금 위험한 상태고 말이다.

대충 성벽 위에 도열한 병사만 해도 2천이 넘었다. 저 정도 숫자면 이 아담한 성은 몇 날 며칠이고 수성이 가능할 것이다.

"낸들 알았겠어? 그땐 분명 맞는 정보였다구."

"이 개자식이!"

쫘악!

"얌전히 굴어라."

"야! 우리 마법사님 때리면 어떻게 해?"

"후후. 이따 보자, 진태. 지르골 잡고 온다."

"그래! 이기고 와."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철두가 다시 그리핀을 타고 날아가 버렸고, 브롤은 음침하게 웃는 시종장 진태의 명에 의해 일단 지하감옥에 수감되었다.

"지하감옥 특실로 모시세요!"

"예! 시종장님."

병사들이 우렁차게 대답하곤 브롤을 끌고 계단을 내려갔다.

물론 지하감옥에 특실 같은 건 없다.

*

두두두두두두.

유격대를 비롯해 정윤승의 제2특임대, 구정욱의 7공격대 등 본래 기병으로 활동하던 이들은 당연하고, 영지군이나 한양군 중에서도 말을 타고 활을 쏠 수 있는 자들은 모조리 출진했다.

500기가 넘는 기병이 두 무리로 나뉘어 좌우에서 덮쳤다.

"속사!"

쇄애애애애액.

달리는 말 위에서 쏘아진 화살 세례가 적진을 향했다.

투두두두두.

빗나가는 게 반이고, 맞추는 게 반이었는데 또 그도 적의 중갑 때문에 그다지 유효한 타격은 없었다.

하지만 개중에도 운 없는 몇은 갑옷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곳에 화살을 맞고 전투 불능에 빠졌다.

"크아아!"

한 번, 두 번, 세 번.

화살비가 내릴 때마다 피해가 중첩되었다.

방패엔 이미 화살이 빼곡히 박혀 거추장스럽다.

"이 날파리 같은 놈들이!"

궁기병 전술로 인한 효과는 적 병력보다 적 지휘관의 멘탈에 더 깊은 상처를 냈다.

"스테고! 놈들을 쓸어라!"

"넵! 하얏!"

기사 스테고가 말을 타고 진영을 빠져나갔을 때, 따로 명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뒤로 기병 50기가 따라붙었다.

확실히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며, 혼란 중에도 군기를 유지할 정도의 정예병이다.

두두두두두.

적 기병의 출진에 아이언헤드 측 기병대가 다급히 물러났다.

"젠장, 우리 쪽이군."

기사 스테고는 정윤승과 구정욱이 이끄는 기병대 쪽으로 따라붙었다.

"구 중령! 선두 맡게."

"어디서 명령질이야!"

"자네가 이끌어 달란 걸세! 난 후위로 가지."

"흥."

정윤승의 제2특임대가 기마대 후열로 빠졌다.

기마 궁술 중에서도 상체를 돌려 후방으로 활을 쏘아 보내는 배사는 어려운 기술이다.

그것도 그냥 활을 날리는 게 아니라 적을 저격할 정도가 되려면 정예 궁기병만 가능한 수준.

애당초 명궁들만 모아놓은 제2특임대가 아니면 흉내 낼 수 없다.

두두두두.

달리는 와중에 후열에 모인 붉은 갑옷의 내금위들이 활을 꺼내 시위를 매겨 일사불란하게 상체를 뒤틀었다.

후열까지 바짝 쫓은 적 기병들의 얼굴이 보일 정도.

"사격!"

쐐애애애액!

스무 발의 화살이 적의 급소를 노리고 날아갔다.

온몸을 철판으로 가린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기사 전력이야 활 하나로 해치우기 힘들지만, 다른 기병들은 아니었다.

"히이이이잉!"

"크아아악!"

투다다다닥!

두꺼운 흉갑 외에는 몸 전체가 표적지나 다름없고, 여의치 않으면 말을 노리고 쏘아도 좋다.

선두가 뒤엉키며 적의 추격이 조금 멀어지나 싶었는데 금세 수습해 다시 추격을 시작했다.

적의 기마술은 과연 예사롭지 않았다.

내금위장 정윤승은 뒤를 힐끗힐끗 보며 다시 사격 타이밍을 잡으려다가 깜짝 놀랐다.

"산개! 산개하라!"

어느 정도 따라잡았다고 생각한 적 병력이 일제히 창을 던진 것이다.

긴급한 명령에 따라 좌우로 벌린 이들은 투창 공격에서 멀찍이 비켜났고, 운 없는 몇이 창에 맞아 바닥을 굴렀다.

"크억!"

좌로 기수를 튼 정윤승을 따르는 무리가 이백, 우로 기수를 틀어 구정욱을 따른 이가 일백이다.

두두두두두.

그 사이를 뚫고 지나간 적 기병이 행동이 굼뜬 아군을 향해 기마창을 찔렀다.

"크아아아악!"

"으허어억!"

특히나 선두에서 기병을 이끄는 풀 플레이트의 기사가 문제다. 그 혼자만이 다른 시간선에 사는 듯, 창의 움직임이 배는 빠르다.

여기저기 비명성이 들리고, 구정욱이 폭발했다.

"나를 따르라!"

구정욱이 마상 대검을 들곤 소리쳤다.

희생이 있더라도 적 기사 놈은 죽여야 한다.

머리를 쳐야, 나머지가 산다!

"대장을 따르라!"

그의 휘하 7공격대원들이 주축이 되어 밀집된 기병들이 돌격했다.

허나, 방어구의 차이가 너무 극명해, 마치 단단한 바위를 향해 돌격하는 계란과 같았다.

두두두두두.

"기수를 돌려라! 우리도 돌격한다!"

내금위장 정윤승이 하는 수 없이 말을 되돌렸다.

구정욱의 무모함을 구경만 하다가는 걷잡을 수 없는 피해가 생길 것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승부를 봐야 한다.

[흥, 가소로운 놈들.]

스테고는 적이 돌격해오자 미소지었다.

이미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다.

별 유효타격도 없는 적의 기마 궁술이 성가실 뿐.

마상 돌격과 난전은 그의 부대 장기 중 하나다.

적의 수가 6배 가까이 차이 나지만 진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후우우웅.

카앙!

[네놈이 기사구나.]

"뭐라는 거야, 시발놈이."

구정욱과 스테고가 격돌했다.

뒤이어 난입한 정윤승의 부대로 인해 전장은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뛰던 말은 걷거나 서 있기 일쑤고, 무기 휘두르는 소리와 비명과 함성만이 전장을 채웠다.

"크아아아!"

"어억!"

여기저기서 영지군이 부상을 입고 쓰러지는 가운데, 적 기병이라 하여 아예 피해가 없는 건 아니었다.

쇠도 두드리면 구부러지기 마련이다.

몸통을 아무리 에워싸고 있더라도, 여기저기서 창을 찔러대는데 그들이라고 무사할 리 만무하다.

정윤승의 언월도와 구정욱의 대검이 연신 스테고를 몰아붙였으나, 그는 어렵지 않게 두 사람을 상대해냈다.

[흥, 기사도도 없는 놈들이군.]

"구 중령, 셋 하면 가세!"

"시키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다!"

정윤승은 마상에서 애용하던 언월도를 집어넣고 마상편곤을 꺼내 들었다.

적의 갑옷이 두꺼워 화살도 흘려내고, 베기도 힘드니 차라리 둔기가 나을 것 같았다.

다행히 그의 수중에는 조선 후기 기병 중 하나인 편곤기수에 눈이 돌아간 사또가 소매넣기 한 마상편곤이 있었다.

쇄애애액.

두 사람의 동시 공격에 스테고는 가소로운 눈빛을 보내며 구정욱의 대검을 비껴 흘리고, 정윤승의 곤봉을 검으로 막았다.

딱.

헌데 막았다고 생각한 곤봉의 중간이 구부러지더니 그대로 휘어 머리를 쳤다.

태애앵!

"으."

짧은 신음과 함께 찾아온 황망함을 수습하려는데 옆구리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콰앙!

빈틈을 노리고 온 힘을 다해 대검을 휘두른 구정욱이 마침내 유효타에 성공한 것이다.

콰직!

그때 다시 거두어들인 편곤이 스테고를 때렸고, 정신을 차린 그가 막았으나, 휘어진 편곤은 다시 뒤통수를 때렸다.

태애앵!

'으.'

그제야 스테고는 적의 무기를 제대로 살필 수 있었다. 그냥 막대기를 닮은 곤봉이 아니다.

중간이 쇠고랑으로 이어져 휘어지는 곤봉이다.

거기에 끝에는 뾰족하고 작은 돌기까지 있었다.

투구가 깨어지진 않았으나, 그 돌기 모양대로 휘어져 구부러져, 머리를 누르는 감각이 영 거슬렸다.

하지만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콰악, 콰직!

"뒈져라. 시발, 뒈져!"

"후우, 후우!"

구정욱과 정윤승은 낙마한 스테고를 무차별적으로 두드렸다. 이내 숨이 끊긴 그가 빛으로 화해 사라지자 희열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적 기사를 처치했다.

"시발, 해냈다!"

"구 중령! 서둘러 수습하세!"

"흥! 안 시켜도 그럴 생각이다."

두 중령은 빠르게 교전 중인 나머지 기병들도 처리하곤 병력을 수습했다.

300명의 병력 중에 멀쩡히 말을 타고 도열한 이는 190명에 불과했다.

110명의 낙오자 중에 사망자가 몇인지, 부상자가 몇인지는 아직 파악이 불가능했다.

"후우, 후우. 양구산."

"네!"

"부상자들을 수습해라."

"네, 대장."

190명 중에 또 40명이 열외되었다.

150명의 기병을 이끌고 다시 적진을 향해 달렸다.

그곳엔 이미 산발적인 교전은 멈춘 상태였다.

대신 이 전투의 승패나 다름없는 대장전이 열리고 있었다.

지르골과 강철두가 서로 격돌 중이었다.

꽈앙, 쾅!

철두의 양손에는 무기가 하나씩 들려있었는데, 하나는 적에게서 얻은 투핸디드 소드에, 나머지 하나는 그와 같은 무게의 망치였다.

한쪽은 뭉툭해 둔기로 쓰기 좋고, 반대쪽은 뾰족해 갑옷을 깨기 좋았다.

쾅, 쾅!

지르골의 도끼와 철두의 두 가지 무기가 쉴 새 없이 부닥쳤다.

본디 한 손으로 쥔 무기에 실린 힘은 두 손으로 든 무기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는 게 정설이다.

헌데 철두는 어렵지 않게 그것을 해내니, 지르골은 적잖이 당황했다.

이틀 전에 이미 한번 얽히며 탐색전을 펼친 두 사람은, 서로의 전력을 대강 가늠한 상태였다.

그러나 지금 철두가 보이는 무위는 그때와 레벨이 달랐다.

[쥐새끼 같은 놈. 무슨 짓을 한 거지?]

익숙하지만 낯설게 느껴지는 고향 행성 발할라의 언어에 철두가 그저 웃었다.

[후후후, 궁금하면 오백 원.]

[...네놈 같은 병신을 배출한 부족이 대체 어디냐?]

[궁금하면 오....]

꽈아앙!

지르골은 철두의 도발을 끊고 도끼를 휘둘렀다.

쾅, 쾅!

두 바바리안은 한동안 무기를 주고받았다. 이윽고 지르골이 광소를 터트렸다.

[알 만하군. 알 만해.]

드디어 깨달았다는 듯 그가 이죽거렸다.

[그래, 이건 거인의 힘이군. 크큭.]

[왜 웃어?]

[어찌 웃기지 않을쏘냐?]

[강해지는 게 왜 웃기지?]

[개의 후각이 탐난다고 개가 될 놈이구나.]

콰앙, 쾅!

철두가 인상을 찌푸렸다.

거슬리는 말이군.

[하하하! 너 같은 혼종은 처음 본다. 네놈은 확실히 바바리안의 수치다!]

지르골은 애송이 바바리안을 종족의 전사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긴, 마땅히 성인식을 마친 전사라면 있어야 할 선조의 혼도 없는 녀석이니.... 네놈은 평생이 지나도 절대 선조의 후인이 되지 못할 것이다.]

[개소리.]

쾅!

철두의 대검이 지르골의 투구를 날려버렸다.

[흐흐흐, 이 저주받은 행성에 선조는 없다. 네놈은 평생을 애송이로 지내겠지. 요정족에게 가서 꼬리나 흔들어라! 하하하!]

모멸적인 말에 철두의 눈에 핏발이 섰다.

[잡종에게 죽을 녀석이 말이 많구나.]

[흐흐흐, 꼬맹아. 진정한 바바리안의 힘을 보여주마.]

지르골의 갑옷을 붙잡고 있던 가죽이 모조리 불타 녹아 흐르며, 그의 상반신이 드러났다.

붉은 문신이 타오르듯 이글거리며 핏빛을 내뿜고 있었다.

164화 승자독식

푸시시시시.

사납게 일렁이는 빛 때문에 문신이 아니라, 상반신에 뱀이 달라붙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파팟.

문신에서 일렁이던 빛은 마침내 튀어나왔다.

지르골의 몸에서 시작된 빛은 정수리 위로 올라가 사람 형상의 홀로그램을 만들어냈다.

지르골의 몸에 올라탄 귀신의 형상처럼 보이는 그것은 도깨비 같기도 했고, 귀신 같기도 했다.

"우어어어어!"

지르골이 괴성을 터트렸다.

오우거의 힘을 개의 후각 따위에 비교했던가?

진정한 바바리안의 함성은 그 정도 무시는 당연하다는 듯한 힘이 있었다.

움찔!

철두가 움찔거릴 정도니, 다른 이들은 오죽할까?

철두의 뒤에서 시립한 기병들이 드래곤 피어라도 마주한 듯 몸이 덜컥 굳어버렸다.

사기를 수치화할 수 있다면 방금 함성 한 번으로 절반은 깎여 나갔을 터다.

홰애애애액.

콰앙!

냅다 달려온 지르골의 도끼를 막아냈다.

단 한 번의 부딪침이지만 전보다 힘이 서너 배는 더 강해진 게 느껴진다. 검을 잡는 악력이 전과 같지 않아 슬쩍 보니 손아귀가 찢어졌다.

"괴력이군."

"흐으으으으. 힘의 우위를 느끼게 해주마."

바바리안 지르골의 눈깔이 은은하게 돌아있다.

붉은 귀기가 서린 그 눈엔 살기뿐이다.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가 뱀과 같이 철두를 조여온다.

"우어어어어!"

철두가 함성을 질렀다.

바바리안의 전투 함성이지만 녀석이 지른 그 소름 끼치는 효과까지는 없다.

하지만 전신을 옥죄던 불편한 기분을 해소할 정도는 되었다.

"후후, 덤벼라."

"흐흐흐흐."

제정신으로 보이진 않는 녀석의 얼굴을 마주 보며 철두가 냅다 달려들었다.

힘이 밀린다고 기세에서까지 밀릴 수는 없다.

쾅, 카앙!

힘이 워낙에 차이가 나다 보니 최대한 비껴 흘릴 때마다 찢어진 손아귀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지금 당장 망치를 두고 양손으로 투핸드 소드를 잡고 싶지만 그러지 않았다.

쌍수무기를 포기하는 순간 반격할 기회마저 놓치게 되는 거다.

카앙! 퍼억!

검면으로 도끼를 흘리며 망치로 지르골의 옆구리를 찍었다.

'글렀다.'

맞는 순간 감으로 알 수 있다.

둔탁한 샌드백을 때린 듯 손맛이 영 별로다.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한 망치를 회수하기도 전에 지르골의 도끼가 다시 공격해 들어온다.

카아앙!

힘이 서너 배가 되었다는 것은 그 속도도 그만큼 늘었다는 이야기다.

지르골이 한 걸음 움직일 때, 적어도 세 걸음을 움직여야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었다.

철두의 검술과 둔기술이 레벨3 달인의 수준은 되었기에 방어에 급급하지만 겨우 상대가 될 정도였다.

카앙, 캉!

정타로 맞으면 위험하다.

힘이 다르고, 무기의 무게가 다르다.

그렇다고 기술이 딸릴까?

무엇을 비교하더라도 지르골이 우세하다.

'이것이 선조의 혼.'

바바리안이 다 자라 성인식을 치를 때, 위대한 선조로부터 선택받는 것.

그때부터 바바리안 전사로서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선조의 혼은 철두에게 열등감이자 결핍이고, 집착이자 콤플렉스였다.

그래서 그랬을까?

왜 상대의 페이스대로 싸워주고 있을까?

이렇게 싸워서는 선조의 혼이 함께하는 저 바바리안을 이길 수 없다.

'그래, 난 전사가 아니다.'

주술사에 더 가까우려나?

그도 아니면, 바바리안도 요정도 인간도 아닌 잡종이겠지.

뭐든 어떤가?

나의 강함은 근력에만 있지 않다.

'나와라, 친구들.'

철두의 부름에 정령들이 깃들었다.

네 정령은 서로 뭉쳐 아웅다웅하더니, 바람의 정령이 쏙하고 철두의 몸에 깃들었다.

휘이이이이.

철두는 몸이 가벼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땅을 밟는 감촉이 얕다.

이대로 뛰면 산보다 더 높이 뛰어오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가벼워진 건 몸무게만이 아니다.

쇄애애액.

카카카캉, 캉, 카앙!

철두의 손에 들린 양손검과 뾰족 망치가 미친 듯이 움직였다.

지르골이 압도적인 힘으로 스피드를 늘렸다면, 철두는 가볍게 해 그 속도를 높였다.

카앙, 카아앙!

쉴 새 없이 부딪친다.

움직임이 빨라진 건 무기뿐만이 아닌지라, 철두는 점점 전장을 넓게 쓰기 시작했다.

적의 좌로, 우로, 크게 허탕 친 도끼질을 피해내며 뒤를 점하기도 했다.

까가강!

선조의 혼으로 강화된 바바리안의 가죽은 과연 거인의 표피 따위를 업신여길 정도로 두꺼웠다.

하지만, 그토록 두꺼운 가죽도 바람살이 씌워진 철두의 검이 계속해서 두드리자 상처가 나기 시작했다.

촤아악!

절호의 기회를 노리고 후방에서 휘두른 일격이 지르골의 등에 긴 자상을 남겼다.

'얕다.'

거죽만 베여 피가 스며 나오는 정도.

전장에서는 피해 축에도 못 끼는 상처.

까아앙!

엄청난 힘으로 도끼를 횡으로 휘둘러 오는 걸 아웃복서처럼 뒤로 물러나 피해냈다. 그리고 다시 달려들어 검을 찌르고, 기회를 봐 망치를 내려친다.

쇄애애액, 까앙!

철두는 쉴 새 없이 스텝을 밟으며 거리조절을 자유자재로 했다.

손에 무기만 들려있지, 복싱 경기랑 다를 바 없었다. 상대는 엄청난 힘을 가진 헤비급 챔피언이다.

걸리면 크게 아작이 나겠지만, 피해내면 그만이다.

얄밉게 치고빠지기를 하던 철두는 마력 양을 보곤 승부를 봐야 할 때가 다가옴을 느꼈다.

정령과의 합체로 인해 마력이 쭉쭉 소모되고 있었다. 애초에 새벽에 있었던 화공에 모든 마력을 소모했기에, 회복된 양은 30% 정도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지금은 12% 정도가 남았다.

"흐으으, 쥐새끼 같은 놈이군."

광전사와 같던 지르골의 눈에 맺힌 붉은 귀기가 사라졌다. 그의 어깨 위로 보이던 선조의 혼도 사라졌으나.

파파파팟!

그 귀신이 이제 아예 헌신해 버렸다.

붉은 핏빛으로 번들거리는 형체.

좋게 봐줘도 사람은 아니건만, 그것은 분명 바바리안 전사의 형상이었다. 점점 더 실체화되어가는 모습은, 온몸이 붉을 뿐이지 도끼를 두 자루나 쥔 바바리안 전사의 현신 그 자체였다.

"시발...."

졸지에 2:1로 싸우게 생겼다.

선조의 혼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어디 계속 피해 봐라!"

지르골이 철두를 향해 도끼를 크게 회쳤다.

까앙!

철두가 어렵지 않게 그것을 막아냈다.

쇄애액.

하지만 뒤로 돌아온 선조의 혼이 쌍수 도끼를 휘둘러왔다.

따당, 탕!

2:1의 싸움에 쉴 새 없이 양손검과 망치를 휘둘러 막아내기 급급했다.

이제는 반대다.

힘은 철두가 우위, 그러나 상대의 수가 많으니 정신없이 수세에 밀렸다.

'합쳐도 짜증 나고, 나뉘어도 화나는군.'

탐난다.

하지만 철두에게 있어, 성인식은 요원한 일이다.

주술사들이 진행하는 성인식의 방법도 모르고, 안다고 한들 노바에서는 그의 혼이 되어줄 위대한 바바리안 전사가 없다.

노바에서는 랭커 정도만 되어도 죽지 않고 미니언이 될 테고, 랭커가 되지 못해 혼이 남을 정도면 위대한 전사가 아닐 테니까.

까강, 깡!

승부가 길어지자 지르골이 폭발했다.

"죽어라, 좀!"

"너 같으면 죽겠냐?"

"이 바바리안도 못 된 새끼가!"

"너는 시발, 바바리안이라서 좋겠다!"

철두는 기회가 왔음을 느꼈다.

'조바심이 드는군.'

좋은 징조다.

이는 상대에게 더 이상 패가 없다는 의미기도 했고, 선조의 혼의 유지 시간이 끝나간다는 암시이기도 했다.

철두는 몰아붙이려던 기세를 수그러뜨렸다.

반격은 할 생각이 없다는 듯, 더욱 수세로.

방어만을 해내며 마력을 아꼈다.

간당간당한 배터리다.

둘 중 누가 먼저 방전되냐의 싸움.

"이이이익!"

콰앙! 콰앙!

최후의 발악이라도 되는 듯 지르골이 미친 듯이 도끼를 휘둘러왔으나, 그의 도끼도, 그의 선조가 내지르는 핏빛 도끼도 어느 것 하나 철두를 상하게 하지 못했다.

푸스스스스.

철두의 좌를 점하고 있던 선조의 혼이 핏빛 안개로 화해 사라졌다.

"으으으."

전신을 달달거리는 지르골을 향해 마주 섰다.

철두가 히죽 웃었다.

"이제 누가 우위지?"

"흐으으."

선조의 혼도 없고, 정령의 힘도 없다면 철두의 힘이 우위다. 마력은 없지만 거인의 위상 같은 패시브 능력이 남아있으니까.

게다가 철두의 배터리는 아직 남아있다.

'마력 2%'

여전히 바람의 정령을 업고 있는 그의 스피드는 지르골이 따라잡을 수 없는 수준.

"크크크, 와라! 반푼이!"

"좋다."

불리함을 아는데도 지르골은 버럭 소리 지르며 기세를 피워 올렸다.

그래, 죽음이 코앞까지 와도 무기를 드는 게 바바리안 전사지.

그는 그렇게 무수히 많은 전장을 지나 이곳에 섰을 것이다.

후우우웅.

그의 거대한 도끼가 철두를 향해 휘둘러졌고, 철두는 잔영만 남기고 한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다.

쐐애애액!

뒤이어 들려온 바람 소리와 함께, 끔찍한 통증이 목을 감싼 순간.

"크르르, 다시 보면 널 씹...."

지르골은 피가 끓는 소리와 함께 이어지던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툭.

지르골의 목이 떨어지고, 뒤이어 그의 신형이 허물어졌다.

마력 0%.

푸시시시.

철두의 몸에 아지랑이처럼 덧씌워져 있던 바람의 정령이 흩어지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마력을 회복하기 전까지 정령을 부르는 건 이제 요원한 일이다.

스스슥.

지르골의 시신이 빛으로 사라지며, 전리품을 남겼다. 그의 인벤토리의 여러 칸 중 하나일 터.

"음?"

또 무기겠거니 했는데 배낭이 떨어졌다.

철두가 그것을 집어들려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든 오싹한 예기에 서둘러 목을 숙였다.

차아앙!

목을 찔리는 건 면했으나 스치고 지나간 자리로 피가 주룩 흘렀다.

철두가 뒤돌아보니 플레이트 아머를 차려입은 기사였는데, 그 기세가 심상찮았다.

보르텡의 호위기사보다 더 강해 보인다.

지난번 기습 때 상대했던 지르골이라 착각했던 기사 정도의 기세를 뽐내고 있었다.

여기까지 다가오며 기척을 숨긴 기술 또한 훌륭하다.

그런 자 옆으로 기사가 둘이 더 있다.

"헛, 영주님!"

"대장!"

빠르게 최준섭과 이은영이 튀어나와 대치하니 3:3의 묘한 대치가 시작됐다.

적의 중갑보병들은 진군하려던 순간 아미르 왕국 기사 셋이 튀어나갔기에 엉거주춤 진군을 멈췄다.

철두의 뒤에 자리 잡은 기병들 또한 마찬가지.

꾸물 꾸물.

전령 꾸이가 슬금슬금 움직여 전리품으로 남긴 가방을 꿀꺽하고는 돌아와 철두의 손등이 아닌 목에 찰싹 달라붙었다.

꾸물 꾸물.

녀석이 드래곤의 각질을 먹고 얻은 치유능력이 발휘되어 상처가 금방 지혈되는 게 느껴진다. 목에 파란 밴드를 붙인듯해 꼴은 별로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쳇."

기습에 실패한 아미르 왕실기사 지롤은 낭패한 얼굴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한 기습이었는데 상대는 짐승 같은 감각으로 피해내 버렸다.

그리고, 적진에도 기사들이 기민하게 튀어나오는 통에 3:1의 수적 우위도 기대할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아니, 기회다.'

상대는 무려 학살자 지르골을 이긴 자.

노바 행성에 새로운 신성이 출현한 셈이지만, 막 전투가 끝난 지금이라면 승산이 있다 여겼다.

지롤은 소통의 비약을 먹고 소리쳤다.

"나는 아미르 왕국 기사 지롤이다."

"...."

"그대가 강탈해간 그리폰은 본디 아미르 왕국의 재산. 나 지롤이 결투를 신청하는 바이니, 승패에 따라 왕국의 재산을 돌려받길 원한다."

지롤의 의기양양한 외침에 철두가 히죽 웃었다.

"지랄하고 있네."

기습한 놈이 낯짝도 두껍다.

쇄애애액.

철두의 양손검이 지롤의 목을 노리고 찔러 갔다.

165화 공수교대

캉! 카앙!

"무, 무슨!"

지롤은 거력이 담긴 투핸디드 소드를 정신없이 막아내며 뒤로 물러났다. 힘의 격차가 어마어마하게 나면 기술의 우위는 무의미하다.

체급이 깡패란 말은 검을 든 검사에게도 통용되는 말.

카앙! 캉!

하물며 상대의 검술 수준이 초심자인 것도 아니다.

레벨 3과 레벨 4의 차이.

검술의 달인과 명인의 싸움.

기술만으로 우위를 점하기엔 달인의 힘이 너무 터무니없었다.

콰직!

아미르 왕실기사 지롤의 어깨에 마침내 투핸디드 소드가 틀어박혔다.

철두는 이 싸움을 조금 더 오래 끌어 상대의 검술을 훔쳐 배우고 싶었으나, 적 중장보병의 형태가 심상찮기에 이만 싸움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

"끄으으으."

"지랄. 네놈 말이 정말이냐?"

"무, 무슨 소리냐?"

"아미르 왕국에 그리폰이 있다는 소리 말이다."

"내가 언제 그딴 소리를 지껄였느냐?"

"그리폰이 왕국 재산이라며?"

"...!"

"더 있을 것 같은데?"

지롤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그 떨리는 동공에서 낭패감을 읽어낸 철두는 웃었다.

"후후후, 대답은 충분하다."

촤악!

지롤의 목이 떨어졌다.

빛으로 변해 사라지는 그의 모습을 뒤로하고 돌아보니, 이은영이 막 기사 하나를 제압한 참이었다.

파악!

갑옷 틈새로 찔러낸 검에 상대가 빛으로 화해 사라졌는데, 이은영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피가 낭자했다.

"꼴이 뭐냐?"

"하아, 죄송합니다."

"쟤보다는 낫네."

철두가 가리킨 곳엔 최준섭이 기사 호르크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혀, 형님! 보지만 말고 좀...."

후우우웅, 콰직!

철두가 던진 투척 도끼가 기사 호르크의 뒤통수에 박혔다. 그의 신형이 고꾸라지며 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꾸이가 꾸물거리며 열심히 전리품을 챙기는 사이, 철두는 두 명의 대장을 보았다.

"꼴이 말이 아니군."

"아니, 형님. 갑옷이 이래 차이가 나니까 그렇죠."

상대는 전신을 가리는 플레이트 아머.

이은영과 최준섭은 몸통은 철로 가리고 있지만, 나머지 부분은 기본이 가죽 갑옷이고, 군데군데 철판이 덧대어져 있을 뿐이다.

"후후, 장비 탓은."

철두는 가슴을 탕 두드렸다.

철두의 상체는 갑옷은 고사하고, 옷도 없다.

상체를 두르는 건 젖꼭지 사이를 가로지르는 두 줄의 대거벨트뿐이다.

"여신! 부하들 치료해달라!"

파파팟!

철두의 진심 어린 기도에 응해 여신의 기적이 일어났다. 펜던트가 빛나며 피칠갑을 한 이은영과 최준섭이 치료되었다.

"후후, 기병을 이끌어라."

"대장은요?"

철두가 막 진열의 정비를 마친 중갑보병대를 보았다.

아미르 기사 삼인방의 기습으로 인해 녀석들의 진격이 미뤄졌다.

정비된 진영을 보니, 사령관의 죽음에 대한 분노를 사기로 바꾼 듯 기세가 날카롭다. 정돈된 녀석들의 진영을 어그러트려 놓을 필요가 있었다.

"우어어어!"

철두는 냅다 함성을 지르곤 도약했다.

그사이 차오른 2%가량의 마력.

후우우우웅.

착지와 동시에 모든 마력을 쏟았다.

콰앙!

한정된 공간이지만 지진이 난 듯 땅이 흔들리며 잠깐 운신할 공간이 만들어졌다.

후우우웅, 콰직!

"후후후, 다 덤벼라!"

차차차창, 콰작, 서컥!

철두의 망치와 투핸디드 소드가 쉴 새 없이 휘둘러졌다.

중갑보병이지만, 기사처럼 전신 판금 갑옷을 입은 것은 아니다. 병사들 개개인의 체형에 따라 그런 갑옷을 보급할 수는 없는 노릇.

갑옷 수준은 최준섭이나 이은영이 입은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철판이 기본이지만 관절 부위는 가죽이고, 그 정도 틈이면 철두에게 있어 대충 휘둘러도 맞을 정도의 과녁이다.

서컥, 퍼억!

투핸디드 소드가 휘둘러질 때마다 팔다리 잃은 병사들의 비명이 전장을 울렸고, 뾰족 망치가 휘둘러질 때마다 투구에 구멍이 뚫려 피를 뿜는 자들이 쓰러졌다.

두두두두.

"돌격하라!"

"우로 돌아라!"

최준섭과 이은영, 정윤승과 구정욱이 각기 기병들을 이끌고 단단한 진영의 중갑보병들의 외곽만 돌며 치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갑옷이 두껍고 튼튼한들, 말을 달려온 가속을 더한 기창에 맞으면 나가떨어지기 일쑤다.

본 적도 없는 전술이다.

사람 하나가 투석기처럼 날아와 방진 중심을 헤집고 외곽은 기병들이 깎아먹기를 하고 있다.

"원형 방진을 이뤄라! 원형... 커억!"

고군분투하던 부대의 지휘관급 기사들은 양 떼를 사이를 누비는 호랑이 같은 철두의 기습에 하나둘 쓰러졌다.

용감한 선임병사들이 소리쳤으나, 마찬가지로 철두의 뾰족 망치가 내리쳐질 때마다 하나씩 쓰러졌다.

아무리 훈련이 잘되어있다 한들.

명령 없는 부대는 와해되기 마련이다.

두두두두두두.

사방에서 들려오는 건 말밥굽과 비명뿐이고, 옆에 있어야 할 동료는 없다.

"1@#!@!"

의미를 알 수 없는 악다구니지만, 무기를 버리고 두 손을 번쩍 드는 모양새만 봐도 항복임을 알 수 있다.

하나둘 항복하는 자들이 늘어나더니, 종래에는 무기 들고 서 있는 자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

"포로를 묶어라!"

"저쪽으로 가!"

여기저기서 포로들을 한데 모으고 묶기 시작했다.

"후욱, 후욱."

철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미친 듯이 날뛴 덕에 중갑보병들의 시신이 대다수지만, 안타깝게도 아이언헤드군과 한양군의 시신도 심심찮게 보인다.

그 와중에 랭커인 이들은 모두 살아 기병들 틈에서 철두를 바라보고 있다.

"후우, 후우."

철두가 숨을 돌리며 그들을 마주 보았다.

죽은 동료들의 위로도 좋다.

하지만 지금은 살아남은 자들을 치하해야 할 때다.

"승리다."

철두의 한마디가 기폭제처럼 터졌다.

"우아아아아아아!"

"승리다아아아아!"

병사들이 우렁찬 함성을 터트렸다.

수백이나 되는 사람들이 다 함께 지르는 함성은 대단한 박력이 있었다.

병사들은 더욱 사기가 충전했고, 반대로 포로들은 더욱 움츠러들었다.

"전장을 정리해라!"

"예, 영주님."

철두의 명에 병사들이 사망자의 시신을 수습하고, 부상자들을 돌봤다.

전장이 된 적의 진채는 아이언헤드성에서도 훤히 내다보이는 위치.

성벽 방위를 책임지는 병사들도 승리를 목도했다.

보병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전후 처리를 도왔다.

"철두야!"

김진태는 철두부터 찾았다.

"괜찮냐?"

"괜찮지 않으면?"

"...잘했다. 우리가 이겼어."

"희생이 크다."

"...."

역시 괜찮지 않구나.

김진태는 애써 웃었다.

"승리한 전쟁에 영주가 웃어야지!"

"진태,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응?"

"후후,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어?"

"핏값을 받아내러 가겠다."

김진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영주님이 그러자면 그래야지.

"일단 승전 잔치를 열자! 그리고 연설해!"

"연설?"

"그래도 침략 아니냐. 명분은 확실해야 사람들이 따르지."

한국인에게 있어 침략에 대한 방어는 너무 익숙한 것이다.

한반도 역사가 외세 침략에 저항한 역사 그 자체니까.

반대로 침략은 익숙지 않다.

'얻어맞았으면, 돌려줘야지.'

김진태는 철두의 생각에 동의했다.

침략만 받다가는 동네북으로 전락하고 만다.

주변의 외계세력들은 알아야 한다.

'아, 저거 괜히 건드렸다가 좆되겠구나!'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전쟁 뒤처리는 빠르게 이어졌고, 전후보고가 따랐다.

"사망자 보고입니다. 영지군 27명, 한양군 34명입니다. 부상자 없습니다."

동분서주하며 기도를 남발한 강용철의 활약에 부상자는 없다. 숨만 붙어있으면 모조리 살릴 수 있기에, 운 없이 죽은 이들 외엔 중상자도 모두 살았다.

"사로잡은 포로는 73명입니다."

거의 1000에 육박하던 자들 중에 무기를 버리고 투항한 자들이 겨우 73명이다.

엄청난 독종들이다.

그만큼 훈련의 성과이기도 했고.

"알겠다. 수고했다."

"네, 영주님."

보고를 마친 오준환은 덧붙였다.

"실망시켜드려 죄송합니다."

"되었다."

철두가 고개를 저었다.

죽고 사는 게 어찌 그의 탓일까.

"누구 탓도 아니다. 나도 이제 그쯤은 안다."

"...예에. 반드시 정예강병으로 키워내겠습니다."

오준환이 신병들의 지옥훈련을 다짐했다.

"이왕이면 기병들로 키워라."

"기병 말입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반문은 없다.

기병이 까다로운 게 많다지만, 이곳 노바는 게임적 시스템이 적용되는 세상이다. 말을 길들이고 관리하는 일이 획기적으로 쉬운 곳이다.

기병들로 육성하는 게 오히려 맞을지도 모른다.

아이언헤드 성의 아랫마을에 사람들이 북적였다.

영주성에서 5천이나 되는 사람들이 잔치를 벌이기엔 너무 좁아 마을로 나온 것이다.

5천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가득 차자 널찍한 마을 공터가 좁게 느껴졌다.

너른 들판에 백여 개가 넘는 솥이 걸리고, 여기저기 밝혀진 모닥불만 수백 개가 넘었다.

적에게 뺏은 보급품이 모조리 잔치를 위한 식재료로 쓰였고, 승전을 기념해 병사들 주민들 할 것 없이 들뜬 분위기가 가득했다.

철두는 그들을 보다 말고, 나무 무더기가 제단처럼 쌓인 곳에 시선을 주었다. 그 위에 시체들이 여럿이었는데, 모두 화장 준비 중인 아군의 시신이었다.

"영주님."

"내금위장."

"...."

"...."

두 사람은 화장을 준비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미안하다."

철두의 사과에 정윤승 중령이 깜짝 놀랐다.

"아닙니다."

"마음이 편하지 않다."

철두의 말이 꾸밈없는 진심임을 알기에 정윤승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안타까운 일이나, 군인으로서는 숙명과도 같습니다. 그리 미안해하시면 오히려 제가 송구합니다."

"숙명이라...."

철두의 뻐근하던 심장이 조금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한양과 아이언헤드는 형제와 같습니다. 다음에도 또 이런 일이 나면 기꺼이 도우러 올 것입니다."

"나 또한 그렇다."

철두는 지금의 목숨 빚을 반드시 갚으리라 다짐했다. 어려운 시기에 기꺼이 절반이 넘는 병력을 내어준 친우에 대한 감사를 전했다.

"준필이한테 고맙다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쉴 만큼 쉬다 돌아가라."

"내일 당장 떠나려 합니다."

"좋을 대로."

한양에서 온 병력만 3200명이다.

그들이 하루 머무르며 축내는 식량도 어마어마하기에, 정윤승은 서둘러 돌아가려 했다.

사실 몰려온 숫자에 비해 활약은 미비했다.

"한양에 먹을 게 귀하다던데, 진태한테 일러둘 테니 챙겨가라."

"거절하기엔 한양의 사정이 급한지라 감사히 받겠습니다."

정윤승이 공손히 읍하고, 철두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래."

철두가 횃불을 들고 나무제단을 향해 나아갔다.

"다들 집중!"

"전사자 화장을 진행한다! 집중!"

언제 음식이 나오나 들떴던 사람들도 통솔에 따라 모조리 나무제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숙연해진 분위기에 침묵이 내려앉은 좌중에 철두의 우렁찬 소리가 울렸다.

"나는 오늘의 희생을 잊지 않을 것이다!"

"...."

단순히 죽은 병사들의 넋을 기리고 살아남은 자들의 충성심을 고양시키기 위한 말이 아니다.

"내 동료들의 핏값을 받아내겠다!"

화르르르륵.

철두가 던진 횃불이 나무제단에 불을 붙였고, 그간 쌓인 마력을 모조리 쏟아 불의 정령으로 하여금 불을 키우게 만들었다.

화르르륵.

순식간에 커진 불길에 주변이 대번에 환해졌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

맞는 말이다.

한번 침략을 맞아, 그것을 분쇄했다 한들 아직 매듭지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준비되는 대로 원정에 나설 것이다!"

"와아아아!"

철두의 원정 선언에 여기저기 동료의 희생에 슬퍼하던 병사들이 소리 질렀다.

"때렸으면 맞을 수도 있단 걸 알아야지!"

"그래, 시발! 개새끼들 뒤졌다."

"가자! 가자고! 시발 새끼들!"

방어는 끝났다. 이제 우리의 차례다.

"오늘의 승리를 즐겨라! 앞으로의 전쟁은 모조리 우리의 승리다!"

"와아아!"

이제 공격의 순간이다.

166화 보급 훈련

승전 잔치가 이어지고, 한양에서 온 지원군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어이, 김 씨. 자네는 안 가남?"

"난 여기 있으려고. 지금 아니면 터 잡기도 힘들지. 자네도 그냥 여기 정착하지 그래?"

"에헤이, 식구들 죄다 한양에 이제 터전 잡았는데 또 이사하기 싫어."

"허허, 아무렴. 알아서 하게나."

2천여 한양군은 모조리 돌아갔으나, 1200명의 민간인은 절반 정도가 아이언헤드 성에 남았다.

그 수가 기존의 마을 주민들의 수에 육박한지라, 잔치가 끝난 다음 날부터 여기저기 새로 집 짓는 곳이 많았다.

"이봐요. 한양 소식이나 좀 전해주쇼."

"아, 별게 있답니까? 사람 사는 게 똑같지요."

"아니, 그래도 거긴 지구 소식도 빠르지 않소?"

"지구야 뭐 별게 있겠소. 요즘 종말이다 뭐다, 어수선해서 사이비도 생기고, 불안한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노비스로 전직부터 해놓으려고 하니, 한양에 사람이 미어터질 지경이오."

한양은 대규모 난민촌의 모습이라 했다.

상시 퀘스트인 고블린 한 마리 잡는다고 노비스로 전직하는 게 아니라, 포탈을 통해 노바에 진입해야 퀘스트가 완수되고 노비스로 전직한다.

상태창도 그때 얻고 말이다.

문제는 그렇게 노바로 진입했다가 다시 지구로 돌아가려면 꼼짝없이 5일을 견뎌야 하는데, 그 숫자가 어마어마하다는 거다.

5일을 먹이고 재워주어 돌려보내면, 그들보다 더 많은 숫자의 신입 노비스가 노바로 건너온다.

그 와중에 지구로 돌아가지 않고 정착을 시도하는 이들도 부지기수라, 한양은 지금 난민촌의 모습이긴 하지만 빠르게 성장하는 중이라 했다.

"헌데, 먹을 것 입을 것 어느 것 하나 모자라지 않은 게 없소. 남정네들은 바지만 겨우 입은 자들도 많고, 여인네들도 두루마기 하나 두르고 다니는 자들이 많다오."

"허, 그렇군요."

"그에 비해 여긴 모든 게 풍부하오. 내 이런 말 하면 그렇지만 지난밤 잔치에서 먹은 게 보름 만의 포식이라오."

"하하, 우리 영주님이 곧 원정을 나설 거라 하니, 물자는 더 늘어날 겁니다."

"허허, 그러니 내 이리 남아서 집도 짓는 게 아닌가? 여긴 그래도 일거리가 끊이지 않으니, 헐벗고 굶을 걱정은 없어."

"그렇지요. 앞으로 소문이 나면 새로 인구가 더 늘 텐데, 빨리 자리 잡는 게 이득이지요."

"암, 지금이야 포탈에 가까워 한양에 인구가 많다지만, 결국 중심 도시는 여기가 될 게야."

본래의 주민들과 새로운 주민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현재의 상황과 미래의 분석까지 해가며 앞으로의 세력 판도를 떠들었다.

인구가 늘었기에 영주성에서 퀘스트 형식으로 발행한 임무에 충분한 노동력이 제공되었다.

외성의 축조가 시작되고, 여러 장인들이 영주성의 대장간이나 목장, 농장, 공방에 취업했다.

병사모집에 응해, 아이언헤드 영지병이 된 자들도 꽤 많았다.

"찔러라!"

"하아!"

"다시!"

"하앗!"

"오늘 땀을 흘려야 그만큼 피를 덜 흘릴 것이다!"

오준환은 새로이 모집한 신병들을 훈련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제 전투가 있었는데 오늘 바로 훈련이다.

사실, 지금 구르고 구르는 이들은 새로 모집된 신병들이 대부분이다.

한양에서 온 민간인 중에 병력으로 자원한 이들이 꽤 되었다.

그렇게 병력이 늘고도, 오준환이 훈련 중인 병력은 상당수 줄어 있었다. 기존의 병력들이 대거 전출해서다.

"충! 유격대 증원 마쳤습니다. 총인원 100명입니다."

기존에 50명이던 IH 유격대가 충원을 마쳤다.

"친위대 총원 10인. 증원 마쳤습니다."

"다 채우라니까 왜 그래?"

"4대 스탯 중 하나라도 30이 넘는 이들만 가려 뽑았습니다."

이은영은 근력, 민첩, 체력, 감각 중에 어느 것 하나라도 30이 넘는 이들로만 가려 뽑았다.

한계 돌파 스크롤의 사용 제한은 4장. 총 20의 스탯을 추가로 올릴 수 있다.

결국 기존에 스탯이 30은 넘어야, 스크롤의 도움으로 랭커로 진입이 가능하다는 소리다.

"음, 빨리 채우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철두는 보고하러 온 다른 이를 보았다.

소속은 여전히 노바군 1사령부지만, 철두의 휘하에 적을 두게 된 사내.

"킁, 기존에 따르던 놈들 10명이 남았고, 새롭게 부하들 90명 맞췄습니다."

"좋아."

휘장 하나를 활성화해 구정욱에게 부대를 꾸리게 했다.

IH 유격대 (100/100)

IH 친위대 (10/50)

IH 공격대 (100/100)

3개의 부대 아래 모인 병력이 210인.

기존의 영지군은 대폭 줄었지만, 차차 신병을 늘려갈 생각이다. 조만간 인력이 남아도는 한양에도 공고를 낼 작정이다.

영지군 (75/200)

고참병들이 대거 휘하부대로 전출 가며 병력이 팍 줄었다. 신병이 절반쯤인 이들은 모조리 훈련에 임하며 영지의 수비와 치안을 담당할 것이다.

"친위대는 남아라."

"네."

이은영은 이번 원정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

새로 뽑은 이들이 많아, 훈련의 시간을 가지는 게 나았다.

"주력은 유격대와 공격대다."

총 200의 병력.

"기병으로 키워라."

"네. 안 그래도 말 가진 이들로 다 뽑았습니다."

"출진은 언제입니까?"

자신감 넘치는 구정욱의 질문에 철두가 히죽 웃었다.

마음만 앞서 피해를 누적시키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다.

분노를 삭이는 건 어려운 일이나, 잠시 묵혀두었다가 더 크게 터트릴 정도의 인내심 정도는 길렀다.

"무구 정비에 나서면 곧장 출진이다. 그간 훈련해라."

"네!"

까앙, 까앙!

대장간에서는 밤낮없이 갑옷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통일된 무기도 없는 와중에 갑옷이라고 별게 있었겠는가?

이번 희생은 서로 가진 보급품의 차이가 만들어낸 것이나 다름없다.

사로잡은 포로 73명도 모두 랭커가 아님에도, 전투력에서 차이가 났던 것은 장비빨이다.

장인 장소철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일단 아이언헤드 기병 기본 무장 세트를 만들어냈다.

투구와 흉갑을 비롯한 각반과 어깨 보호구 등, 가죽과 철판이 어우러진 기병 갑옷이 개발되어 등록되었다.

그렇게 제작 레시피를 등록하면 '장인'이 아닌 '직업' 대장장이들도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기병창, 단궁, 마상편곤, 투척도끼, 검이 기본 무장으로 등록되어 만들어지고 있다.

기병이기에 기본적인 마갑도 만들어내야 한다.

무려 200인의 무장이다.

하루 이틀 만에 될 일이 아니다.

"장인들이 밤낮없이 몰두하고 있으니 한 달이면 충분할 듯합니다."

"N맵이 그래도 기후가 그리 다르지 않아 다행입니다."

"철의 수급이 문제입니다. 전리품으로 얻어낸 철을 모두 녹여 만들고 있사온데, 수량이 충분치 않습니다."

"오크 숲에서 조달이 안 되나?"

"한양의 사냥꾼들도 오크 숲에서 사냥하고 있으니, 경쟁이 치열합니다."

철두는 문제 해결을 위해, 병력을 모았다.

전투가 끝난 지 5일째 되던 날이다.

아이언헤드 성을 중심으로 빙 둘러쳐, 북서쪽부터 외성벽의 토대공사가 진행 중이고, 이제 외성벽 안에 위치하게 된 성 아랫마을에 새로운 집들이 우후죽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주민들이 공터에 모인 200인의 기병을 보기 위해 구경나왔다.

유격대와 공격대 200인이 도열했다.

아직 제대로 된 무장이 없어, 부랴부랴 만들어낸 기창 정도가 전부다. 나머지 보조 무장은 기존에 그들이 쓰던 칼이나 도끼 망치 등 다양했다.

갑옷도 태반이 가죽 갑옷이고, 몇몇이 철 흉갑을 걸쳤을 뿐이다.

통일되지 못한 모습에 패거리가 200이나 모이니 꼭 마적 떼를 연상시키게 했다.

"기동 훈련입니까?"

"또 훈련입니까?"

5일 치 정도 보급을 준비하라 일렀다.

"후후, 그렇다."

철두는 히죽 웃었다.

"어디로 갑니까?"

"철을 구하러 간다!"

철두의 선언에 기병들이 지레짐작하며 서로 떠들었다.

"오크 숲이라니 기병 훈련은 아닌가 봐."

"그렇지, 말 달리긴 좀 그래."

"하긴, 신병들 보고 오크 사냥은 좀 그렇지. 우리가 나서야지."

기병들은 당연히 목적지가 오크 숲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자, 따르라!"

철두는 200기 기병을 이끌고 출진했고, 그 방향은 북쪽이었다.

"음? 형님. 이쪽은 나트롱 백작령입니다."

"맞다."

구정욱이 눈을 빛냈다.

"실전입니까?"

"실전은 무슨."

철두가 고개를 저었다.

구정욱의 눈에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그럼 뭡니까?"

"후후, 철 수급하러 간다."

"...?"

"나트롱 백작령에 철 수급지가 있습니까?"

철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령에 마을이 수십 개가 넘는다. 마을마다 병력이라 해봐야 수십 수준이니 그것만 치우면 된다."

"...."

"...."

최준섭이 뜨악했고, 구정욱이 히죽 웃었다.

"후, 훈련이라면서요?"

"후후후, 약탈이군요."

두 사람의 말에 철두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물자 이동 훈련이다."

"...."

우린 그걸 약탈이자, 실전이라 부른답니다. 최준섭은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훈련 중에 죽는 놈은 없겠지?"

그래도 혹시 몰라 할배한테서 여신의 펜던트 기도 10회를 충전해서 왔다.

선착순 10명은 숨이 붙어 있는 한 살릴 수 있다.

"하하, 그, 그렇죠."

"흐흐흐, 드디어 실전."

최준섭은 말을 삼키며 그저 말을 몰아 부하들에게 명했다.

"다들 마음 단단히 먹어라!"

본 전쟁 전에 부족한 물자를 이동하는 훈련이 시작되었다.

*

나트롱 백작성.

참방.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욕조에 꽃잎이 둥둥 떠다닌다. 목욕 시중드는 하녀들의 손길에 따라 마사지를 받으며 부력을 느끼던 나트롱 백작은 인상을 찌푸렸다.

<봉신 지르골이 사망하였습니다.>

"...."

절로 이마가 찌푸려졌다.

"멍청한 놈."

"네?"

안마하던 시녀가 화들짝 놀랐으나, 일일이 해명해 그녀의 걱정을 덜어줄 정도로 백작은 섬세하지 않았다.

촤르륵.

욕조에서 몸을 일으킨 백작이 나서자, 분주하게 따라붙은 시녀들이 물기를 닦고 옷을 걸쳐 주었다.

"시종장!"

"예에, 각하."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백발의 시종장이 구부정한 허리를 더욱 납작 숙였다. 음색만으로도 백작의 기분을 파악 가능한 그다.

'화가 많이 나셨다.'

뭔가 일이 그르친 게 틀림없다.

"지르골이 죽었다. 알아봐라."

"예에."

역시, 심상찮은 소식이다.

시종장은 즉시 사람을 보내 알아봤고, 좋지 못한 조사 결과를 들고 보고했다.

"뉴아 마을 잔존병력의 행방은 아직입니다. 사령관 지르골이 이끌던 부대는 대패, 소수의 인원이 포로로 잡혀 야인들의 성에 구류 중입니다."

"허,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더니."

백작이 피식 웃었다.

지르골은 행실이 바르지 못하다곤 하나 그 실력이나 사나움 하나만큼은 일품인 놈이다.

어찌 순종적인 개만 키울 수 있겠나?

말 안 듣지만 흉포한 맹견 하나도 키울 만하지.

키우던 개에 정은 없다 하나, 주인으로서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이 버러지들을 어찌 징치할까?"

토벌이야 당연한 거고, 어찌 처분해야 할까 고심하는 그때 기사 하나가 부리나케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무엇이냐?"

"소론 마을과 노론 마을이 적습에 당했습니다."

"...."

감히 야인 놈들이 선전포고도 없이 전쟁을 걸어왔다.

167화 모병

나트롱 백작이 대노해서 소리쳤다.

"당장 추격대를 보내라! 끌려간 내 영지민을 되찾아야겠다!"

마을마다 차이가 있지만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 해도 500명 정도의 주민이 있기 마련이다.

두 개 마을이 초토화되었으니, 못해도 수백의 주민들이 노예로 끌려갔을 터.

"저, 그것이... 노예로 끌려간 자가 없습니다."

"뭐, 뭣이라!"

나트롱 백작의 눈에 분노가 넘실거렸다.

"다 죽였단 말이냐?"

야인 녀석이, 지르골보다 더 흉포한 놈이구나.

"그, 그것이 아니옵고. 모두 무사하옵니다."

"...?"

백작이 의아해 물었다.

"약탈이 없었느냐?"

"있긴 했사온데...."

"경은 뜸 들이지 말고 가감 없이 말하라!"

"형태가 하도 기이하여.... 마을의 쇠붙이란 쇠붙이는 문고리까지 모조리 뽑아갔습니다. 거기에 더해 식량도 모두 털어갔습니다."

"또."

"저항한 자경대 47명이 죽었습니다."

"또."

"더는 없습니다. 불을 지르지도 않고, 주민을 노예로 끌고 가지도 않았습니다. 다른 것들은 두고 쇠와 식량, 가축만 싹 털어갔습니다."

"...."

이거, 선택적 약탈인가?

잃은 게 적긴 한데 기분이 심히 나쁘다.

본디,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

백작이 지르골을 보낸 건 정당한 야인 토벌일 뿐이었으나, 야인이 감히 백작령의 마을을 약탈한 것은 백작에 대한 도전이자 선전포고나 다름없다.

"놈들을 징치할 것이다! 우로사 경 들라 하라!"

"가, 각하. 우로사 남작을 겨우 야인 토벌에 보내려 하시옵니까?"

시종장이 깜짝 놀라 물었다.

우로사 남작은 백작성을 방위하는 핵심 전력이다. 그의 부대는 그 수가 가장 많을뿐더러, 백작성의 근간이 되는 부대.

더욱이 영지전이 벌어질 때 주력으로 쓰이는 부대라, 외부로 돌리기 어려운 부대다.

"시종장."

"네, 각하."

"내가 처음으로 나의 영지에서 주최하는 파티가 이제 겨우 세 달도 남지 않았소."

"...."

"그 야인 놈의 성을 전초기지로 신맵으로 백작령이 뻗어 나갈 것이오."

아예 신맵 C614 전체를 먹어버려야겠다.

"알겠사옵니다."

"가도 건설을 위한 인부들과 자재도 함께 이동하라 하시오."

이제는 정말 파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이동 포탈망부터 나트롱 백작성까지 멋들어진 도로를 만들어 내려면 동시다발적으로 공사를 시작해야 될 판이다.

"예, 각하."

시종장은 굳은 얼굴로 명을 받았다.

백작이 지르골을 내보낼 때, 적당히 야인들을 굴복시켜 사민하라 이르셨다.

허나, 이번엔 그런 명이 없으시니....

'야인들의 학살이 벌어지겠구나.'

모조리 죽게 되리라.

*

두두두두두.

유격대와 공격대를 이끌고 보급 훈련에 나섰던 강철두가 성으로 복귀하고 있었다.

갈 때는 200기의 기병이었는데, 올 때는 수레 30대가 함께였다.

철두는 열심히 따라오긴 하지만 만족스런 속도가 아닌 수레 행렬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

"이게 문제군."

"그래도 무거운 쇠붙이는 인벤토리로 옮기니, 일이 수월합니다."

최준섭이 즉시 아부했다.

강철두의 인벤토리는 무려 15칸이다.

훈련에 나서기 전에, 무기고로 쓰이는 2칸을 제하곤 모두 비워서 나갔다.

'결투장에서 꺼내지도 못하는 무기는 필요 없다.'

노바의 공식 딱지가 붙은 무기만이 결투장에서 쓰임이 있다. 지구인들이 임의로 만들어 낸 무기라고 해봐야 정식 제작품이 아니다.

지금 철두의 주력 무기는 투핸디드 소드, 그리고 뾰족망치다.

무게가 나가는 두 개는 인벤토리에 담겨있고, 나머지 무기들은 모조리 철두의 몸에 달려있다.

어쨌든 남은 인벤토리는 13칸.

여기엔 쇠가 가득 담긴 수레 13대가 수납되어있었다.

인벤토리에 넣을 수 있는 물건은 사용자가 들어 올릴 수 있는 무게가 한계였기에, 철두의 인벤토리에 가장 많은 쇠붙이가 들어있다.

"후후, 진태가 좋아하겠군."

"그렇습니다. 철의 수급도 해결했고, 한양에 내어준 식량보다 더 많은 식량과 가축을 뜯어냈습니다."

"뜯어내다니."

"하하하, 본디 우리 것이 될 운명이었으니, 그냥 옮기는 거지요."

"그렇지."

철두와 최준섭의 억지를 들으며 구정욱은 생각했다.

'존나 마음에 드는데?'

오우거의 능력석 두 개를 연달아 취하고는 자존감과 오만이 하늘을 모르고 치솟던 구정욱이다.

계급이 높다는 이유로 나보다 약한 이를 상사로 모신다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화가 가득했는데, 아이언헤드로 오고 나니 사라졌다.

강철두야 워낙 괴물 같은 사람이라 그의 밑에 있는 것이 딱히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았다.

더욱이 이렇게 새로 부대까지 꾸려주어 100명이나 되는 부하들을 이끌고, 적 마을을 휩쓸며 약탈을 벌이고 나니, 오히려 부족했던 그의 심장 한쪽을 채워주는 듯 충만한 기분이 든다.

'이것을 위해 내가 존재했구나.'

그런 운명적인 직감마저 든 찰나다.

"영주님!"

"오, 구 씨. 왜?"

"전역하고 영주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후후, 그렇게 해라."

"예에!"

구정욱이 우렁차게 답하곤 뒤를 돌아봤다.

함께 말을 달리는 부하들 중 10명은 자신을 따라서 온 이들이다.

지구에서 신서울로, 또 한양으로, 이번에는 아이언헤드 성까지 따라온 부하들.

전우 그 이상의 우애를 나눈 이들.

이제 이들을 두고 가는 건 대장으로서 부하들을 배신하는 꼴이다.

"들었나? 다들 전역해라!"

"오! 웬일로 의견 안 묻고 명령하십니까?"

"흐흐, 물을 게 뭐가 있나?"

"물었으면 섭섭했을 겁니다."

"하하, 맞습니다! 중령님이 조금 병신같이 변했지만,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뭐야?"

"하하하하!"

구정욱의 역정에 부하들이 낄낄거렸다.

"흐흐흐. 앞으로 신나게 휘저어보자."

애초에 자신은 이 길이 옳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도성 수비?

아니다.

나는 약탈을 위해 태어난 사내다.

장호철이 오우거 능력석의 부작용으로 끝내 산적이 되었던 것처럼, 구정욱은 약탈 기질이 발현되기 시작했다.

*

아이언헤드 성의 공터에 수레의 짐이 내려지기 시작했다.

촤르르르륵.

쇠다.

칼, 창촉, 화살촉, 솥도 있고, 농기구도 있고....

"저건 못 아니냐?"

"후후, 알뜰하게 주워왔다."

"주워와?"

김진태는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

"약탈한 거야?"

"보급하고 왔을 뿐이다."

"그게 약탈이잖아."

철두는 고개를 저었다.

"진태. 너는 내가 나트롱 백작에게 진다고 생각하나?"

"아니지. 우리가 이기지."

"그럼 지금 나트롱 백작의 것은 내 것이 아니냐?"

"어? 그치만 아직 싸움 덜 끝났잖아."

"후후, 어차피 내 거다."

"...."

김진태는 머리를 저었다.

모르겠다.

"잘했다."

"후후후."

"근데 이것만 긁어온 거야?"

"가장 필요한 게 아니냐? 식량과 철이다."

"...."

김진태는 막대한 물량의 식량 포대를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람들은? 설마 다 죽였어?"

"반항하는 놈만 죽였다."

"휴우."

김진태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잘했어. 우리, 약탈도 신사적으로 하자."

"응?"

약탈이 신사적일 수가 있나?

"앞으로 이렇게 모조리 긁어오지 마. 농사도 원래 종자는 남겨두는 법이야."

"오!"

"그 사람들 굶어 죽거나 마을 버리고 떠나면 어떻게 하냐?"

"다른 마을들이 많다."

"어휴, 그럼 안 되지. 두고두고 뽑아낼 수 있는데. 적당히 뜯자, 우리."

"오! 역시!"

철두가 손뼉을 쳤다.

역시, 수업시간에 잠들지 않은 나의 친구.

배운 놈은 다르구나.

"그리고 좀 특이해 보이는 직업 가진 사람들도 좀 데려와."

"사람?"

"마법사나, 연금술사라든가... 뭐, 장인 같은 거나...."

"후후, 알겠다."

척하면 척이다.

농부 같은 이들이야 지구인들도 적성이 뜨기에 전직하는데 문제없다.

하지만 그 누구도 마법사가 되지는 못했다.

재야에 인재가 있다면 마땅히 등용해 와야지.

"인재 등용은 내게 맡겨라."

"영지 부흥은 내게 맡겨라!"

서로 파이팅하는 영주와 시종장을 보며, 짐을 내리는 병사들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시종장이 더 악만데?'

'우리 영주님이 그래도 사람은 안 건드렸는데, 시종장은 대놓고 납치까지 시키시네.'

'와, 적당히 뺏어와서 두고두고 털어먹을 생각을 하다니. 남다르다.'

'내 우리 영주님하고 친구일 때 알아봤어. 시종장 보통 아니라고 했잖아.'

'악마야, 악마.'

병사들이 짐을 내리고, 김진태는 창고관리인의 권한으로 그 물건들을 모조리 창고 인벤토리로 수납해버렸다.

파파파팟!

잔뜩 약탈해온 물품들이 진공청소기에 빨려가듯 후루룩 사라져버렸다.

"철두야. 보급 훈련 좀 자주 나가."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흐흐흐."

"후후후."

"잔치하자!"

김진태는 원정에 나선 지 3일 만에 복귀한 유격대와 공격대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 잔치를 선포했다.

"우오오오오!"

병사들이 환호했고, 철두도 히죽 웃었다.

부상자 하나 없는 성공적인 훈련이었다.

잔치는 병사들만을 대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야, 이게 뭔 일이래?"

"아, 왜 그 사흘 전에 나섰던 영주님이 식량을 잔뜩 뜯어내 왔더라고."

"이야, 이거 고기 아녀? 한양은 멀건 죽으로 버틴다던데, 어째 여기는 잔칫날마다 고기가 이리 나오냐."

"아, 가축들도 줄줄이 달고 왔다더라고."

"들어보니까 병사들은 매일 상에 고기가 올라온다던데?"

"참말이여?"

사냥이 활발하고, 가축 자원이 풍부한 아이언헤드 성이지만 성 아랫마을 주민들의 주머니 사정까지 모두 풍족한 건 아니다.

이주해온 개척민인 그들의 주요 일거리는 영지에서 내려지는 전체 퀘스트.

외성 축조부터 농경지 개간 등, 노동력이 부족했으면 부족했지, 일거리가 없는 날은 없다.

대부분 노바의 경제가 몬스터 사냥으로 이뤄지는 것과 다르고, 아이언헤드 성은 시종장의 주도 아래 일거리를 주고 보수를 지급했다.

보수로 지급한 돈은 다시, 영지의 상설 매장에서 판매하는 곡식이나 농기구, 무기 등을 사는 데 이용되었다.

"하, 나도 이참에 영지군이나 지원해볼까? 엄청 번다던데."

"그치들 죄다 보상으로 곡식 다섯 포대씩은 받았다던데?"

"이거 농사지을 게 아니라 병사가 되어야 하나."

"아, 뭘 그리 꿍얼대고 있어? 다들 근력 10도 안 되면서."

"잉? 그게 뭔 말이여?"

"아, 오늘부로 병력모집 기준이 생겼더라고!"

"그래?"

"영지군 지원하려면 근력 10은 돼야 한대."

"허어, 벌써 이라면 나중엔 기준이 더 높아지는 거 아녀?"

"아, 이거 이러다 영영 기차 떠나는 거 아녀?"

"하, 난 내일 날 밝는 대로 영지군 지원할란다!"

"나도! 군사 훈련이라도 받으면 사냥이라도 다니겠지."

주민들 일부는 신서울부터 지내온 고인물이지만, 이번에 한양에서 지원 왔다가 남은 이들부터 해서 대부분의 주민들은 노비스가 된 지 반년도 되지 않는 이들이다.

경험과 장비, 힘은 부족하지만 이제 슬슬 노바의 사회환경과 구조를 이해한 이들.

'강해져야 한다.'

그들의 눈에 아이언헤드 영지군은 점점 매력적인 선택지로 다가왔다.

168화 변화하는 한양

"흐흐, 영주님. 한잔 받으시지요.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그래. 구 씨도 수고했다."

철두가 구정욱이 올리는 술을 받아 쭉 들이켰다.

잠시 기다린 그가 곧 본론을 꺼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내일 한양에 가 전역 신청을 하고 오려 합니다."

"후후, 나도 함께 가지. 오랜만에 준필이 얼굴이나 봐야겠다."

잔소리 많은 친구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예에, 알겠습니다."

구정욱이 물러가자 이번에는 사냥꾼 잭이 얼굴에 비굴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다가와 술 주둥이를 내밀었다.

"존경하는 영주님께 미천한 사냥꾼 잭이 술 한잔 따를 수 있는 영광을 주십시오!"

"따라봐라."

"오오, 영광된 기회를 주시어 감사하옵니다."

쪼로로로록.

"너도 한잔 받아라."

"오오오! 소인에게 귀한 술을 내려 주시어, 만세에 영광된...."

"혓바닥이 길군."

"헙."

"후후."

철두가 웃으며 잔을 내밀자 잭이 공손히 잔을 부딪치곤 몸을 돌려 술을 쭉 들이켰다.

그 모습이 꼭 할아버지에게 배운 술 예절과 맞아 궁금해 물었다.

"제국도 그런 문화가 있나?"

"아닙니다. 지구의 것이라 배웠습니다."

자세가 된 놈이군.

하지만 잘못 배웠다.

"나이가 어린 이가 그리 돌려먹는 거다."

"어헉! 어찌 제가 감히. 지위의 고하가 분명한데 어찌 나이를 앞세우겠습니까? 계급은 나이에 앞섭니다."

"흐음."

철두가 턱을 쓰다듬었다.

"맞는 말이군. 그래, 무슨 볼일이냐?"

"저도 영주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응? 이미 그러고 있잖아?"

"고용된 형태가 아니라, 영주님의 가신이 되고 싶사옵니다."

잭의 표정은 사뭇 비장했다.

'지르골을 쳐부순 자다.'

나트롱 백작령에 지르골보다 더 대단한 자들이 많다곤 하지만, 어쩐지 철두가 진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용병 생활 청산할 때도 되었지.'

정착하고자 하면 아이언헤드령만 한 데가 없다.

여긴 아직 개국 선포도 하지 않은 독립영주 세력.

지금 그가 어딜 가서 가신 노릇 하겠나?

"난 약한 녀석은 부하로 두지 않는다."

"헙, 아닙니다. 제가 쓸모가 많습니다."

"뭘 잘하나?"

"약탈.... 보급 훈련에 나서실 때, 갈취.... 선별할 품목을 보는 눈부터, 제국의 문화와 정세까지, 제가 해드릴 조언이 많습니다요."

잭의 매력 어필에 옆에서 듣고 있던 김진태가 나섰다.

"받아줘. 솔까 우린 적에 대해 너무 모르잖아."

잭 같은 인재가 필요하긴 했다.

철두가 턱을 쓰다듬었다.

"너, 아미르 왕국 출신이라 했나?"

"그렇습니다."

철두가 히죽 웃었다.

이 녀석은 사냥꾼 용병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닌 터라 주변 길에도 익숙하고, 무엇보다 아미르 출신이니 그곳에 대해 잘 알 터다.

"좋아. 받아들이지."

"헙, 넵!"

잭이 넙죽 엎드렸다.

"헙! 봉신의 영광을 제게 주셔서 감사합니다."

"봉신이라니?"

"예?"

"그런 게 굳이 왜 필요하냐?"

"그, 제가 배신이라도 하면 어떻게 합니까?"

"배신할 속셈이냐?"

"헙, 아닙니다."

"그럼 뭐가 문제냐?"

"...."

잭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날 이렇게 믿어준다는 건가?'

대범한 것인가? 순수한 것인가?

'이게 아닌데?'

봉신 계약은 오로지 군주를 위한 계약이 아니다.

상호 협의에 의한 가신 계약.

군주는 부하의 충성과 봉사를 대가로.

신하는 원하는 보상과 보호를 대가로.

상호계약은 서로를 보호한다.

신하가 배신할 염려도 있지만, 군주에게 팽 당할 염려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이거, 쓰다가 버려지는 거 아냐?'

어쨌든 잭은 넙죽 고개를 숙였다.

"성심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아직은 신뢰가 부족한 모양이다.

'나의 능력을 입증해 봉신 계약까지 따내겠다.'

'그거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

군주와 신하의 동상이몽 속에 잔치가 이어졌다.

다음 날 철두의 한양행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함께였다. 수레 20대에는 식량이 가득했고, 철두의 인벤토리에도 그만큼의 식량이 들어차 있었다.

"준필이가 좋아하겠군."

"값은 다 받아내라."

"당연한 소리하지 마라."

"병력 모집도 대대적으로 해."

"걱정 마라."

김진태의 염려를 뒤로하고, 철두는 유격대와 공격대를 이끌고 한양으로 향했다.

"모시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일행에는 잭도 함께였다.

그는 자신의 역할대로 충실한 앞잡이가 되어주기로 하였다.

두두두두.

한양까지 가는 길은 대각선 방향으로 서남쪽을 향해 나아가면 된다.

하지만 한가운데 있는 오크 숲이 문제.

"숲길이 정비 중이긴 하나, 아직 수레가 나아갈 정도는 아닙니다. 서쪽 들판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상관없다."

철두 일행은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이동 포탈망이 나왔다.

갈비뼈 같은 구조물이 솟은 그것은 이제 활성화되어 중앙바닥의 마법진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파팟.

마법진이 빛나고 곧 세 사람이 나타났다. 그들은 200여 명의 기병을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 북쪽으로 내달렸다.

"제국민이군."

"그렇습니다. 이동 포탈망은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협약에 의해 이동 포탈망 주변 5킬로미터 안엔 누구도 상주하거나 점거할 수 없습지요."

"그런 법이 있나?"

"예에. 제국이 발의하고 모든 왕국들이 동의한 내용입니다. 이른바 노바 협약이지요."

"흐음."

철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성이 그쯤 거리인 것 같은데."

"예전 백작성이었다 하니, 협약에 맞춰 지은 게 아닐는지요."

"그럴지도 모르지. 바로 옆이면 좋을 텐데."

묘한 웃음을 짓는 철두를 보고 잭이 서둘러 말했다.

"노바 협약은 지키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을 어기면 공공의 적이 됩니다."

"누가 뭐라더냐."

철두가 그저 웃어주곤 궁금하여 물었다.

"가자."

"온 김에 좌표 등록을 하고 가시지요."

"난 이미 있다."

"아, 그러시군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얼른 등록만 하고 오겠습니다."

잭이 서둘러 마법진으로 가더니 기둥에 손을 얹었다.

파팟.

작은 빛이 그의 손등에 스며들었고, 좌표 등록을 마친 그는 조금 더 주화를 투입해 작은 돌멩이를 하나 쥐곤 왔다.

"그건 뭐냐?"

"좌표석입니다."

"음?"

"이 이동마법진의 좌표가 새겨진 마법돌이지요. 이것을 가지고 등록할 수도 있습니다."

철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그게 있으면 가본 적 없는 마법진도 등록할 수 있다는 말이냐?"

"예, 그렇지요. 이 마법진은 활성화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좌표석도 비쌀 것입니다."

희희낙락한 잭의 말에 철두가 손을 내밀었다.

"줘봐라."

"아, 안됩니다. 이건 한 사람당 하나만 얻을 수 있는 겁니다."

좌표석을 얻는데 100주화를 투입했다. 못해도 10배는 더 남겨 먹을 수 있는 아이템인데, 아무리 모시기로 한 군주임에도 공짜로 뺏기는 건 가당찮다.

"군신 간의 계약은 엄합니다. 군주는 가신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줄 의무가 있습니다."

"계약 안 했는데?"

"...."

잭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이래서 봉신 계약을 해야 한다.

시벌.

"여, 여깄습니다."

"후후, 얼마냐?"

"2000주화만 주십시오."

"옛다."

이걸 그냥 주네?

웬일로 흥정이 없으시지?

잭은 최대한 표정 관리를 했다.

아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아, 감사합니다."

스무 배 남겨 먹었네.

개꿀.

"아쉽습니다. 제가 이 맵에 오는 게 조금만 더 빨랐으면 최초 기여자가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럼 뭐가 다르냐?"

"그때 투입한 주화 1개당 좌표석 1개를 득할 수 있습니다."

"음?"

"하, 제가 만약 이 마법진을 최초 발견했으면 빚을 져서라도 모든 주화를 넣었을 겁니다."

철두가 좌표석을 다시 잭에게 돌려주었다.

"내놔라."

"예?"

"안 산다."

"...."

결제 취소당한 잭이 인상을 찌푸렸고, 철두는 홀린 듯 마법진으로 다가가 손을 짚었다.

<이미 좌표 등록된 마법진입니다.>

<좌표석 추출 잔여 개수 - 423개>

"후후."

이렇게 보니 아쉽다.

그때 가진 주화가 더 많았으면 그만큼의 개수의 좌표석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23개의 좌표석을 얻었습니다.>

무더기로 쏟아지는 좌표석을 보곤 잭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최, 최초 활성화 기여자십니까?"

"그렇다."

"와아. 하나, 둘... 스물셋이라니. 대단하십니다."

"아직 400개 남았다."

"허억!"

철두는 좌표석을 주머니에 넣고는 일행에게 다시 출발을 명했다.

"이제 가자."

"네, 영주님."

200기의 기병과 20대의 마차가 남쪽을 향해 나아갔다. 이동마법진부터 남쪽의 한양까지는 오크 숲을 비껴간 들판인지라, 제법 길이 정비되어 있었다.

울퉁불퉁하던 길이 평평해진 것만 해도 수레의 속도에 날개를 단듯했다.

좌측으론 오크 숲이 보이고, 우측으론 너른 들판이다. 드문드문 무리 지어 사냥하는 사람들이 제법 되었다.

겨우 걸친 천 옷이나, 손에 들린 나무 몽둥이를 보니 초보 노비스로 보였다.

"잡아!"

"이쪽으로 몰아!"

초보 노비스로 보이는 이들이 한창 타조 공룡을 두고 사냥 중이다.

"후후, 옛날 생각나는군."

"형님이 최초 발견한 성소가 이 근처였죠?"

"맞아."

최준섭의 물음에 새록새록 추억이 떠올랐다.

진태와 함께 탐험 중에 최초 발견한 성소가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거기도 마을이 들어섰나?"

"마을까지는 아니고 모험가 캠프 비슷하게 차려져 있습니다. 유격대 훈련 때 자주 들렀습니다."

마을까지는 아니지만, 적당히 사람들이 밤이슬 피할 건물들 몇 개와 모닥불 지필 화로가 몇 개 있다 했다.

사람이 모이는 데는 늘 그렇듯,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인들이 몇 있고 말이다.

"전쟁이 끝나면 이 맵도 완벽히 탐사해야겠어. 숨겨진 던전이 더 있을지도 모르니까."

"넵, 좋죠."

아직 C614 지역을 완벽히 탐험한 게 아니다.

철두는 해지기 전에 한양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소문대로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지나치게 간소한 것이 여기가 노바의 한양인지, 양양의 서퍼 비치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다행히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그리 어둡지 않고, 힘이 있어 물자가 부족할 뿐이지 사람들의 분위기 자체는 에너지가 있었다.

"아니! 이게 누군가?"

북문 경비대의 보고를 받은 박준필은 관청 앞에서 기다리다가 환하게 웃으며 철두를 덥석 안아줬다.

"이 친구야! 몸은 괜찮은가?"

"후후, 문제없다."

철두는 밝은 얼굴의 박준필을 보며 의아해 물었다.

"한양 사정이 궁핍하다더니, 얼굴이 좋군."

"하하하하, 이게 다 자네 덕 아닌가?"

"후후, 저기 식량을 더 가져왔다."

"아이쿠, 이 사람! 뭘 또 이리 바리바리 싸 들고 오나?"

"주지 말까?"

"어허! 내 농도 못 하겠네. 어서 들어가세나."

"후후."

철두는 친구의 환대를 받으며 관청으로 들어갔다.

"여봐라! 귀빈이 오셨으니 얼른 잔칫상 내오거라!"

"예에, 사또."

여전히 이방에서 벗어나지 못한 안승우 대위가 넙죽 인사 후 물러났다.

"내 안 그래도 자네에게 전할 말이 있어, 성에 한번 들를까 하던 차였네."

169화 덤벼라

토독.

박준필은 테이블 위에 돌멩이 하나를 올려두었다.

"이게 뭔지 아는가?"

철두가 피식 웃으며 주머니에서 좌표석을 꺼냈다.

"오! 자네도 가지고 있구만. 허허."

"준필이 네 건 색깔이 조금 다르군."

"맞네. 오사카 포탈의 좌표석이지."

정확히는 오사카 포탈로 이어지는 노바 마을인 사쿠라시티. 그 인근 이동마법진의 좌표석이다.

"자, 선물일세."

철두가 그것을 받고는 피식 웃었다.

"몇 개 더 줘봐라."

"잉? 내게 할당된 게 많진 않네. 자, 여기 두 개 더 가져가게."

박준필이 허허 웃으며 말을 전했다.

"요즘 NITO의 활동이 활발해."

정보 교류는 물론이고, 노바의 개척도시 간의 교류를 위해 즉각적인 커뮤니케이션 창구로 이용되고 있었다.

이동마법진을 근처에 둔 도시들은 서로 좌표석을 맞교환해두는 추세다. 언제 무슨 일이 있어, 지원군을 필요로 할지 모르니까 말이다.

일본과 한국이 이번에 마법진 좌표석을 1000개씩 맞교환했고, 그중 몇 개가 박준필에게 할당된 것이다.

"좋은 일 아닌가?"

지구의 인류끼리 서로 도우면 좋은 일이다.

"좋은 일이지. 허나, 갑자기 이리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도 다 위기감을 느껴서 그런 게 아니겠나."

지구 종말이 정말 머지않은 느낌이다.

민간에서도 이미 상당한 정보가 풀려, 너도나도 차원 이민 티켓인 노비스 전직을 위해 고블린을 사냥하는 추세고, 주가나 자산 가치가 하루가 멀다 하고 폭락 중이다.

여기저기 폭동이나, 지구 종말을 대비한 구원을 부르짖는 사이비 종교가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는 추세다.

사회가 불안하면 늘 있어 왔던 약탈은 이제 비일비재한 일이다.

치안이 좋다고 알려진 한국도 다르지 않아, 여기저기 도둑들이 기승을 부렸고, 성범죄도 심심찮게 일어나 전국의 구치소가 포화 상태라 했다.

"아, 이건 꼭 전해야 하는 정보일세. 최근 중국의 마을 넷이 초토화되었네."

"음?"

"우리처럼 인근에 이계인 영지가 있었던 모양일세. 시비가 붙고 전쟁이 나고 나서 무참히 박살 났다는구만."

많은 사람들이 죽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끌려갔다.

박준필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처럼 주변 영지와 트러블이 생긴 자들은 다 결과가 좋지 못해. 일본은 다행인지 교류를 텄다는군."

모두가 이웃과 전쟁을 하는 건 아니다.

일본의 사쿠라시티는 인접 제국 영지와 교류에 성공해 물적, 기술적 교환이 활발하다고 했다.

"많은 정보가 풀렸네."

전직 방법, 도시를 이루는 방법, 봉신 계약, 심지어 무한결투장에 관한 정보까지.

요즘 NITO에서 가장 존재감을 보이는 국가가 일본이다.

"후후, 좋은 일이군."

"하하, 여전히 한국도 꿀리지 않는다네. 모두 자네 덕이지."

철두가 얻어오는 정보의 가치도 낮지 않다.

박준필은 흐뭇하게 웃으며 철두를 바라봤다.

강철두가 인상을 찌푸렸다.

"꼭 잔소리하기 전 얼굴이군."

"허허, 잔소리라니."

"표정이 그렇다."

"지원해준 식량이 전쟁 중에 얻은 전리품인 것으로 알고 있네."

"젠장. 그 소린 하지 마라."

"어허, 내 자네에게 도덕을 논하려는 것이 아닐세."

박준필이 성인군자도 아니오, 본분은 군인이다.

그는 철두를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법이 다르고, 관습이 다를진대 어찌 그것을 탓하겠는가?"

"그럼?"

"허허, 이거 민망하네만. 다음엔 옷가지들도 좀 구해다 줄 수 없겠나?"

"...."

"이왕 약탈할 거, 필요한 것 좀 구해다 주게나."

철두가 피식 웃었다.

"맨입으로?"

"아, 지금처럼 보태거나 빼는 것 없이 모조리 정산해 주겠네."

박준필이 오른손을 쥐었다 펴더니 주화를 쏟아냈다.

촤르르륵.

1000의 숫자가 쓰인 기존의 고블린 주화보다 크고, 더 정교한 고블린 주화다.

주머니에 보유한 금액이 많을수록 이렇게 고액의 고블린 주화도 꺼낼 수 있다.

"자, 세어보게."

"24만 주화군."

"지난번 식량 판매대금일세."

철두가 지원해준 식량은 공짜가 아니다.

한양은 지원받은 식량을 무료 배급이 아니라, 일에 대한 대가로 지급했다.

밭을 개간하거나, 수로를 파고, 집을 짓는 등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모든 곳에 사람을 모집했고, 식량을 나눠줬다.

그럼에도 일자리에는 한계가 있어, 주화에도 식량을 팔았다.

일거리가 없는 사람들은 삼삼오오 주변 몬스터를 사냥하러 나갔고, 그렇게 벌어온 주화가 식량과 맞바꾸어 관청에 차곡차곡 모였다.

"이제는 부역에 대한 대가도 식량을 직접 배급하는 게 아니라, 주화로 지급하려고 하네. 이번에 들고 온 식량도 제대로 팔아줌세."

"후후, 알겠다. 옷도 구해다 주지."

"하하하하, 자네 덕에 한양 사람들이 배곯지 않으니 참으로 고맙네."

꾸물꾸물.

철두의 주화 주머니에 붙어있던 푸른 슬라임이 꾸물거리며 테이블 위의 주화를 먹어치우자 박준필이 유심히 보고는 신기해했다.

"그게 영웅의 전령이군."

"음? 알고 있나?"

"원, 아까 뭘 들었나? 자네 말고도 무한결투장에 진입한 이들이 많아."

파수꾼이 잡히며 한계 돌파 스크롤이 풀리다 보니, 기존의 랭커 중에 4대 스탯을 모두 50까지 올려 영웅의 길 퀘스트를 받은 이들이 많다고 했다.

"그렇더군. 결투장에 등록된 놈들이 많았다."

죄다 별명으로 등록되어 누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허허, 자네와 이리 술 한잔하니 좋구만그래."

쪼로로록.

박준필은 술을 비우곤 물었다.

"크으, 그래. 늙은 친구가 말이 많았군. 자네는 무슨 볼일이 있어 직접 행차하셨는가?"

"모병 좀 하러 왔다. 구 씨도 볼일이 있고."

철두의 언급에 상 끄트머리에서 조용히 식사하고 있던 구정욱이 화들짝 놀랐다.

"전역이겠지."

"음? 어찌 알았나?"

"하하, 구 중령을 자네에게 보낸 게 날세."

박준필은 어차피 일이 이리 흘러갈지 알고 있었다. 그의 성격 변화가 특성석에 의한 부작용임을 알고 있는 바에야,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장호철과 같은 전례를 따르느니, 철두 아래에 있는 게 낫지.'

강철두라면 구정욱이라도 잘 통제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후후, 그렇군. 잘 쓰지."

"허허, 잘 이끌어주게나."

구정욱과 그를 따르기로 한 기존 7 공격대 10인의 전역 처리는 술자리에서 순식간에 결정되고 이뤄졌다.

"모병은 허하지. 말했듯이 종말이든 뭐든 노바에 그대로 눌러앉으려는 이들이 많네. 아이언헤드의 명성은 이미 파다하게 퍼졌으니, 모병하면 응하는 자들이 많을 걸세."

"좋다. 준섭이, 구 씨."

"네, 형님."

"네, 대장."

"모병하고 와라."

"헙, 넵!"

두 사람이 유격대와 공격대를 이끌고 다시나 나가 저잣거리에서 모병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술 한잔하니 좋군그래."

"후후, 잔소리만 안 하면 자주 오마."

"껄껄껄. 다 애정 어린 말이지."

박준필은 정말 기분이 좋은지 얼굴이 불콰하게 취해 있었다. 그도 제법 많은 스탯을 올린 상위 노비스라 인사불성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아참, 전쟁은 어찌 될 것 같은가? 들어보니 자네 다시 한번 파워업 한 것 같던데."

"내가 이긴다."

"자신감이 있어 좋구만! 자네가 이긴다면 이긴 거나 다름없지. 다만, 나트롱 백작의 처분에 있어서는 신중하게."

"음?"

"그도 상위 귀족, 재수 없으면 황제와 직접 봉신 계약을 맺었을 걸세. 누구든 간에 그를 죽이면 전쟁은 확전될 수밖에 없어."

"...."

철두도 바라는 바가 아니다.

"걱정 마라. 전쟁이 안 끝나도 상관없다."

"응?"

"계속 패면 된다."

"응?"

"오히려 그게 더 좋을 수도 있다."

나트롱 백작을 죽이면, 그의 형이나 아빠가 와서 복수해준다는 소리가 아닌가?

안 죽이면 된다.

패고 패고 또 패고, 빨아먹을 수 있는 자원만 쏙 뺏어가면 된다.

"못 견디겠으면 항복하겠지, 뭐. 후후."

"하하하, 그거 참. 아무튼 신서울과 한양의 가도 건설은 나트롱 백작과의 전쟁이 매듭지어져야 가능할 듯하이. 내 도울 일이 있거든 전심전력으로 돕겠네."

"후후, 말만 들어도 고맙군."

한 순배 두 순배.

나이 차이가 두 배는 나는 두 친구는 술을 기울이며 별별 이야기를 다 했다.

"이야! 선조의 혼이 그런 겐가?"

"애를 좀 먹었지."

일 이야기부터 철두의 무용담으로 이어지던 이야기는 점점 영양가 없는 가십거리로 흘렀다.

"클클, 사토 키요시라고 아는가?"

"일본 노비스 아니냐?"

"맞네! 하하. 듣기로 그가 자네와 붙어보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다니는 모양이더군."

"오라 그래라."

좌표석도 가졌을 테니 마음먹으면 마주치지 못할 일도 아니다.

"다들 각국의 주요 전력인데 그게 쉬운가? 하하, 듣기로 무한결투장에서 마주치면 이번에야말로 우열을 가리겠다고 호언장담하고 다닌다더군."

"가소로운 놈이군."

철두의 얼굴을 보며 박준필은 기껍게 웃었다.

이 혈기 넘치는 젊은 친구의 강함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준필이다.

"내 말이! 하하, 내 자네가 무한결투장에 입장하면 그치에게 알려줘도 되겠는가?"

"음?"

철두는 의아했다.

박준필의 얼굴에 드리운 장난기를 보면 강철두가 사토와 싸워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그놈이 뭔가 시비를 걸었나?"

"하하하, 시비는 무슨. 본디 일본하고는 가위바위보도 져서는 안 되는 게 한국 사람이야. 헌데, 일본 방송이고 뭐고, 요즘 사토가 인류 최강이니 뭐니 떠들어대니 고까워서 하는 소리지."

"후후, 애 같은 소리군."

"그래서 피하려는가?"

"당연히 아니지."

철두와 박준필이 마주 보며 씩 웃었다.

남자는 나이가 적으나 많으나 애다.

인간이나 바바리안이나 다르지 않다.

"무한결투장 시간이 노바와는 다른 건 아는가?"

"그렇겠지."

"노바에서 각기 다른 시간에 진입해도 무한결투장에는 동시에 입장되는 것도 알고 있나? 낮에 진입한 이들은 낮에 진입한 이들끼리, 밤에 진입한 이들은 밤에 진입한 이들끼리 동시에 입장되지."

"음? 저번엔 한 명도 마주치지 못했는데?"

"아직 영웅이 몇 없으니 시기가 맞지 않았겠지."

이제 막 해가 저물어 초저녁이다.

지금부터 내일 동이 터오기 전까지, 무한결투장에 입장하는 이들은 서로 같은 시간에 마주치게 된다.

"아, 물론 시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쓰자면, 해뜨기 전에 입장하든가, 일몰 전이 가장 낫지."

무한결투장에서 시간을 얼마나 쓰고 오든지 간에, 노바로 돌아오면 일출이나 일몰 시간일 터니 시간적 손해가 적다.

"후후, 보내봐라. 안 그래도 쿨타임이 다 됐으니 오늘 밤 들어가겠다."

"하하하, 좋네! 내 당장 소식을 전하지."

박준필은 본인이 더 신나서 NITO에 보낼 공문을 작성했다.

예의와 격식을 갖춘 장황한 글이지만, 줄여서 요약하면 딱 한 줄이다.

- 오늘 밤 결투장 간다. 자신 있으면 덤벼라.

"흐흐흐. 여봐라!"

"예에, 사또."

"긴급이다. NITO 청주 지부로 보내라."

"예이!"

전령이 부리나케 서신을 가지고 지구로 향하는 포탈로 내달렸다.

"클클, 우린 술이나 더 마시세. 답신은 금방 올 걸세."

"후후, 그러지."

모병 활동에 나섰던 병력들이 다시 관청으로 돌아와 여기저기 삼삼오오 모여 술을 마시거나, 연무장 한쪽에 족구판이 벌어졌다.

병사들이 노는 걸 구경하며 준필이와 술을 기울인 지 서너 시간 만에 NITO를 통한 일본의 답신이 왔다.

국제 공문이어서 그럴까?

자신감 넘치는 그들의 답신을 요약하면 하나다.

- 한수 가르쳐 주지. 들어와라.

"흐흐, 똑똑히 보여주고 오게. 누가 남바완인지."

"후후, 다녀오지."

전령 꾸이가 훅 하고 커지더니, 거대한 입에 결투장으로 통하는 차원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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