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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 130-140

130화 전직의 단서

나흘째 되는 날.

철두가 돌아왔다.

멀쩡한 철두의 모습과 반대로 구정욱 소령은 거지 같은 몰골을 하고 있었다.

"구 소령님."

"대장, 괜찮아요?"

"어, 어디 부상당하셨습니까?"

"아니다."

걱정하는 부하들을 뒤로 물리곤 강철두에게 인사했다.

"저는 잠시 정비하고 쉬도록 하겠습니다."

"후후, 그래라."

"넵."

구정욱 소령은 정말 직속 상관을 대하듯 그 행동이 깍듯했다.

그냥 형식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온 눈빛이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존경이 가득했다.

"아니, 소령님."

"다들 막사로 들어와라."

"네."

구정욱 소령이 앞장서 7 공격대 배정 막사로 들어갔다. 9명의 대원들이 모두 들어오자 막사 안이 복작복작해졌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많은 일이 있었다.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다 지금 해야 할 말부터 하는 게 맞았다.

"나는 청주로 전근할 생각이다."

"네?"

"이대로는 신서울도, 한국도 미래가 없다."

"네?"

의아해하는 대원들을 보면서 구정욱은 진지하게 대꾸했다.

"내 최근까지 고민만 했으나, 이제 결심이 섰다."

최근 큰일을 겪으며 심경의 변화가 컸다.

특히나 아르테아를 만나고 나서의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참된 군인 그 자체였던 그가 요정의 매혹에 흔들렸다는 것에 대한 실망감은 무엇으로도 치유되지 않았다.

무력감,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환멸.

"네? 대장님까지 청주로 빠지면 신서울은 누가 지킵니까?"

이제 정말 신서울에 랭커가 10명도 남지 않았다.

"내가 있어도 못 지켰던 신서울이다. 없어도 된다."

"하긴. 헙! 아닙니다!"

저도 모르게 대꾸하던 대원 하나가 갑자기 집중되는 무시무시한 눈빛들에 입을 틀어막았다.

'시벌, 틀린 소린 아니구만.'

속으로 구시렁대고는 7 공격대장의 말을 기다렸다.

"아무튼 나는 청주로 간다. 신서울에 남아서는 발전보다는 답보할 뿐이다. 그동안 귀관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구정욱 소령이 꾸벅 고개를 숙이자 대원들은 얼떨떨했다.

"아니, 이리 갑자기...."

"대장."

7 공격대의 대장, 부대장 다음으로 가장 짬이 많은 박찬수 대위가 나서서 물었다.

굳이 노바군 본부에서 1사령부로 옮겨 가려는 이유로는 빈약했다.

거기나 여기나 조건이 비슷했다.

외려 지원은 신서울이 더 빵빵하다.

훈련하기엔 신서울이 더 나은 환경이란 소리다.

"이유 정도는 알아야겠습니다."

"...."

"나흘 동안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지금 꼴은 뭐고요?"

구정욱 소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우거를 잡았다. 오백 마리가 넘었지. 내가 감당한 건 겨우 서른 정도였다."

"헉."

"오백?"

오우거는 랭커라도 잡기 쉽지 않은 몬스터다.

1:1의 사냥이라면 잡기야 하겠지만, 꽤 장기전이 된다. 도망가는 것도 날래다. 도망치지 못하게 붙들어야 하니 오우거 사냥은 레이드가 되기 마련이다.

본디 그렇게 사냥하는 몬스터다.

철두가 오백을 잡은 건 그러려니 하겠지만, 놀라운 건 구정욱이 서른이나 잡아냈다는 거다.

"나는 한 번 죽을 뻔하였다. 영주님은 이용 횟수가 몇 번 남지도 않은 성물을 이용해 나를 살려주었다."

"구명지은을 갚겠다는 거군요. 용병대와 가까운 1사령부에 주둔하며...."

"그것도 아니다."

구정욱 소령의 말에 박찬수 대위가 물었다.

"그럼 무엇 때문입니까?"

"그는 내게 오우거 스킨과 오우거 파워를 내어주었다."

특성구슬.

전력 물자 취급하는 그것들을 그는 너무 쉽게 내어주었다. 그때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후후, 또 나왔군. 구 씨. 이거 먹어라.'

'제가 말입니까?'

'얼른 먹어라. 밥값은 해야 할 것 아니냐?'

'감사합니다.'

'이제 사냥해봐라.'

눈을 감으면 아직도 그때의 대화가 생생하다.

"허, 떡고물 때문입니까?"

적잖이 실망한 듯한 박찬수 대위의 얼굴을 보며 구 소령이 물었다.

"박 대위."

"네. 구정욱 소령님."

단단히 삐진 듯한 그의 음성을 들으며 잔잔하게 웃었다.

"너는 소속도 다른 이에게 특성구슬 두 개를 줄 수 있나?"

"...."

"본인이 사냥하는 게 더 빠른데도 굳이 남에게 전투기술을 가르쳐 줄 수 있나?"

"...."

"고작 몇 회 남은 여벌의 목숨을 남을 위해 쓸 수 있나?"

"...."

구정욱 소령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진정 큰 사람을 보았다. 그를 존경하게 되었지만, 그는 군인이 아니다."

군에 그와 같은 인재가 있었다면, 이번 사태에 절대 흔들리지 않았을 터다.

강철두와 같은 군인을 둘 수 없다면, 내가 그런 군인이 되어 조국을 지키겠다.

"가까이서 그를 보고 배우고 익힐 것이다. 기꺼이 내 몸 불살라 조국을 지켜 낼 것이다."

조용한 가운데 구정욱 소령은 본인의 결심을 그의 부하들에게 확실히 전했다.

"그동안 귀관들을 이끌 수 있어 영광이었다."

"...."

9명의 7 공격대원들은 저마다 굳은 얼굴로 침묵했다.

그 불편한 침묵이 5분쯤 지났을까?

"시발, 영광은 무슨! 난 대장 따라갑니다."

공격대 막내 김지섭 중사를 시작으로, 저마다 소리쳤다.

"아니, 까라면 까는 군대지만, 우리도 좀 데려갈 수도 있는 거 아니오?"

"맞아. 시발. 나도 간다."

"대장이 치사하게 부하들 버리고 갑니까?"

"맞아. 신서울 방위는 개뿔, 어차피 있어도 못 지키는데. 나도 간다."

"나도!"

"까짓 나 혼자 남아서 뭐해? 나도 간다."

"맞아. 신서울이 나 없다고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모두의 시선이 이제는 박찬수 대위에게로 향했다. 그가 대책 없는 대원들을 보며 소리쳤다.

"병신들아! 전근 신청한다고 다 받아들여지냐?"

맞는 말이다.

대원들의 시선이 이제는 대장에게로 향했다.

"데려가 주십시오."

"아, 해주십시오."

해줘라 공격에 구정욱 소령이 피식 웃으며 눈을 감았다. 과연 허락해줄까?

"좋다, 전근 명령은 내가 책임지고 받아온다!"

"우오오오!"

구정욱 소령은 더 미룰 것도 없이 당장 강철두를 찾아갔다.

"영주님."

"오, 구 씨."

"잠시 신서울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래라."

"대원들을 모두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후후, 네 부하들인데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호위 따위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그럼 곧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아마 돌아오는 길엔 새로운 상관인 박준필 중장과 함께이지 싶었다.

그들이 떠나고 엘리스는 본격적으로 영주님에게 쫑알거렸다.

"!@#!@!"

"아까부터 무슨 말이냐?"

엘리스는 도무지 통하지 않는 의사소통에 감히 무례를 무릅쓰고 철두의 손을 잡았다.

"음?"

손을 잡고 끄는 엘리스의 힘에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섰다.

반쯤 허물어진 연금술사의 연구소에 들어온 엘리스는 작업대 옆에 놓인 연금술사의 솥단지의 뚜껑을 옆으로 치웠다.

그러곤 잡초를 꺼내 내밀었다. 이윽고 그것을 단지에 넣는 시늉을 했다.

"그것을 넣으란 거냐?"

끄덕.

"줘봐라."

철두는 잡초를 받아 연금술사의 솥단지에 넣었다.

이윽고 엘리스는 벌레 세 마리를 건네줬다.

"이것도 넣으라고?"

끄덕.

그것마저 넣고 보니 이젠 빈 병을 건네주었는데, 소통의 비약이 담겼던 빈 병이다.

"음?"

이쯤 되자 철두도 조금 기대를 하였다.

퐁당.

빈 병마저 넣고 보니 엘리스가 낑낑거리며 무거운 솥단지 뚜껑을 덮었다. 이윽고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오른손등을 툭툭 두드렸다.

"후후, 알겠다."

<주화 118개로 아이템을 합성하시겠습니까?>

파팟.

빛이 솥단지에 스며들고, 뚜껑을 열어보니 익숙한 아이템이 합성되어 있었다.

<소통의 비약>

하는 말이 달라도 소통에 문제가 없어진다.

1시간 동안 지속된다.

"후후후."

철두는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좋군."

"아아!"

이제야 말이 통하자 긴장이 풀리듯 허물어지는 엘리스를 보며 웃었다.

"하하하, 어떻게 만드는 법을 알고 있었냐?"

"남은 이들 중 연금술사의 조수가 있어, 몇 가지 레시피를 알고 있었습니다."

"좋구나. 몇 개 더 만들자. 재료는 있냐?"

"있습니다."

하인들이 우르르 몰려와 저마다 채집한 재료들을 꺼내 놓았다.

파팟! 팟!

몇 번의 합성 끝에 소통의 비약 9개를 만들어 냈다.

이걸로 9시간 정도는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된 것인가?

"이것도 합성하시지요."

"음? 이건 뭐냐?"

"하급 포션의 재료입니다."

"포션?"

"예에, 상처를 치료하는 포션입니다."

"호오!"

철두가 몇 가지 약재와 재료를 넣고 합성하자 포션이 만들어졌다.

파팟!

<최하급 생명 포션>

생명력 10%를 차츰 회복합니다.

"엄청나군."

"전사들에게 있어 필수적인 소모품입니다."

"후후, 몰랐다."

여신의 목걸이가 있다지만 완충해도 횟수 제한이 있다.

포션은 많이 만들어두면 둘수록 좋으니, 진정한 여벌 목숨이라 할 만했다.

"지칠 때 회복하는 것도 있느냐?"

"있긴 하오나 재료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후후후."

희소식이다.

철두가 아는 레시피는 펫 주머니뿐이었는데, 소통의 비약은 물론 포션의 레시피까지 얻게 되었으니 연금술사의 항아리의 활용도가 대폭 상승했다.

생긴 건 솥단지지만.

"이걸 가져갈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아쉬운 게 있다면 아이언헤드 성에서 이곳까지 오려면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때 하인 중 하나가 나서더니 넙죽 엎드리며 청했다.

"소, 소인에게 맡겨주십시오."

"음? 너는 누구냐?"

"견습 연금술사 돌랑입니다."

돌랑은 솥단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항아리만 분리해 가져가시면, 성내에 연금술사의 연구소를 만들어 낼 수 있사옵니다."

"오! 정말이냐?"

"그렇습니다!"

"후후, 좋다!"

철두는 솥단지를 떼어내기 전에 만들어야 할 것부터 만들었다.

"가방이나 주머니 같은 걸 죄다 내어봐라."

철두는 하인들이 내미는 가방과 포츠네를 넣어 펫 주머니를 만들어 냈다.

<펫 주머니>

인벤토리에 펫 주머니를 생성한다.

주화 10개로 활성화.

하인들의 몫 30개와 할아버지 선물용으로 1개를 더 만들어 31개의 펫 주머니를 합성해냈다.

이제 말만 길들이러 가면 기동력을 얻는다.

"항아리를 떼어내는 건 마지막 날 하자."

"네, 알겠습니다."

"후후, 너는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몇 개냐?"

"겨, 견습이라 어깨너머로 배운 레시피 중에 확실히 만들어 낼 수 있는 건 6가지 정도가 전부입니다."

그것만 해도 좋다.

"말부터 얻으러 간다. 그다음 너는 재료를 찾아라!"

"영주님의 명령을 받듭니다."

돌랑이 넙죽 엎드려 공손히 답했다.

철두는 그런 돌랑을 탐색해보았다.

<돌랑>

견습 연금술사

조금만 더 수련하면 연금술사로 전직할 수 있다.

"...?"

철두는 고개를 갸웃했다.

"전직?"

"네?"

"전직하는 방법을 알고 있냐?"

"소인이 아직 자격이 모자라...."

"아니, 자격 말고 방법 말이다."

돌랑이 어리둥절해하며 넙죽 엎드렸다.

"예에, 방법은 알고 있사옵니다."

"...!?"

철두는 마력을 아낄 생각도 하지 않고 하인들을 일일이 모두 탐색해보았다.

131화 용의 발자취

철두의 손가락이 엎드린 젊은 사내에게 향했다.

"너는 견습 농부군."

"예에, 영주님."

<->

견습 농부

이제 막 농사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너는 이름이 뭐냐?"

"하소스입니다."

"화끈해질 뻔한 이름이군."

<하소스>

견습 농부

이제 막 농사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떻게 전직한 거냐?"

"노바의 주민들은 성년식 때 도시에 있는 전직의 돌을 만집니다."

"전직의 돌?"

"예에, 그것이 제가 가진 재능에 꼭 알맞은 직업을 내려 줍지요."

"흐음."

철두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곤 주변의 인물들을 하나하나 탐색 기술로 훑었다.

상대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을수록 소모되는 마력이 컸지만, 직업을 알아내기엔 충분했다.

견습 마구간지기

견습 요리사

견습 약초꾼

견습 건축가

견습 목수

견습 대장장이

견습 연금술사

견습 ....

30명의 사람을 모두 보았을 땐 마력의 30퍼센트나 날아가 버렸다.

"왜 죄다 견습이냐?"

"숙련된 이들은 모두 시종장과 봉신으로 묶이기 마련입니다."

"그 시종장은 영주랑 봉신이고?"

"그러하옵니다."

영주 하나 죽였다고 줄줄이 다 날아가 버렸다.

"흠, 쭉정이들만 남았다는 소리군."

"이제 막 일을 배우기 시작해 가능성이 큰 이들이지요."

말이 어 다르고 아 다르다고, 엘리스의 대답을 듣고 나니 썩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언헤드 영지에 직업을 가진 이라고 해 봐야 할배 강용철뿐이다. 나머지는 죄다 정착민이니....

"오, 너는 집사군."

"이제 막 일을 배웠을 뿐이옵니다."

<엘리스>

견습 집사

사람을 다루는 능력은 타고난다.

하인들 중 드물게 집사의 재능을 타고난 이들이 있다. 잘 성장하면 집사장, 이를 넘어 영지를 관리하는 시종장까지의 재능도 기대해볼 만하다.

영주에 대한 충성심이 높습니다.

눈빛에서 야망이 넘실거립니다.

"왜 내게 충성하느냐?"

"영주님이 강하시기 때문이옵니다."

보르텡이 영지전에서도 밀려, 겨우 시작의 땅에서 재기를 노리는 패배한 영주라 하더라도 그의 기사들은 진짜배기였다.

황제의 결투장 참전 기록도 있는 그들을 단번에 베어 죽이고, 마법사인 영주님까지 해치웠다.

더욱이 이미 인장도 소유한 영주.

영주의 운명에 따라 그 목숨이 귀히 여겨지기도, 하찮게 휩쓸려 나가기도 하는 사용인들 입장에서는 강한 주인을 모시는 게 최고다.

"저는 앞으로 영주님을 보필하는 집사장이 되는 것이 소망이옵니다."

엘리스는 콩닥거리는 심장 소리를 감추며 포부를 밝혔다.

"후후, 하려면 끝까지 해야지."

"...!"

철두의 말에 엘리스의 심장이 더는 감추지 못할 만큼 쿵덕거렸다.

'집사장보다 더 위....'

과연 나를 그리 중히 쓰실까?

응원차 하시는 이야기일까?

아니다. 이분은 겉과 속이 다른 이로 보이지는 않는다.

더욱더.

더 충성을 다하여 나의 쓸모를 보이겠다.

"영혼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가자. 일단 말부터 얻은 다음 전부 연금술 재료를 찾으러 가자!"

어차피 연금술사의 항아리를 떼갈 생각이라, 아이템 합성이야 느긋하게 해도 되지만, 당장에 도움이 되는 포션 같은 것은 많을수록 좋았다.

생명 10% 회복 같은 수치상의 이점보다도 당장 눈에 보이는 상처의 치유 효과가 굉장해, 포션만 있으면 낙오자를 줄일 수 있겠다 싶었다.

철두는 무리를 이끌고 말을 길들이기 위해 맵의 외곽으로 나아갔다.

*

한양과 신서울을 잇는 개척로의 개발은 정부에서 보면 이점이 많은 사업이다.

단순히 두 마을간 통행로를 잇는 것만이 아니라 이동마법진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애초에 신서울을 제쳐두고 한양이라는 새로운 수도계획을 세운 것이 무엇 때문인가?

이동마법진의 발견 때문이다.

도로가 놓이면 신서울도 이동마법진을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게 되는데, 굳이 허허벌판에 새로운 수도를 만들 필요가 있을까?

아직까지 노바의 도시건설계획은 즉흥적인 면이 있었다. 나쁘게 말하면 주먹구구식이고, 좋게 말하면 계획의 변경이 유연했다.

한양을 새로운 수도도시로 만드는 기존의 안은 파기되었다.

애당초 C614에 거대 도시를 기획한 것도 이동마법진의 유무 때문이다. 헌데, C614와 C422 맵이 이어지게 되면 한양의 필요성이 줄어든다.

새롭게 도시를 만드느니, 기존에 자리 잡은 신서울을 확장하는 것이 더욱 낫다.

포탈의 위치도 서울과 가까운 파주로 딱 적당해, 신서울을 노바 행성의 대한민국 임시 수도로 삼을 만했다.

대대적인 도시계획이 변경되며, 이번 개척로 건설에는 박준필의 기대를 훨씬 상회하는 지원이 떨어졌다.

"자네만 믿겠네."

노바군 참모총장 임운진의 격려에 박준필은 얼떨떨했다. 그러나 본분이 군인인 마당에 명령엔 복종뿐이다.

"맡겨주십시오. 빠른 시일 내에 두 도시는 하나의 생활권이 될 것입니다."

"하하, 이거 든든하구만."

박준필의 뒤로 2000여 명의 군 병력이 사열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1차 선발대이자, 도로공사를 위한 전초기지 건설을 위한 병력이었다.

임운진 총장은 박준필의 옆에선 구정욱 소령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잘 해낼 거라 보네."

"충성! 중령 구정욱."

구정욱 소령은 어제 중령으로 진급했다.

'거인의 힘'과 '거인의 피부'를 얻어 단번에 파워업 해버린 구정욱이다.

"부대 전출을 흔쾌히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1사령부는 어디 노바군 아니던가? 막을 이유도 없지."

임운진 참모총장은 구정욱 중령 같은 이들을 좋아했다. 참된 군인의 표상 아닌가?

더욱이 전출의 목적이 아이언헤드 영주를 곁에서 보며 벤치마킹하겠다는 것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이를테면 휘하 군병력 정예화를 위한 교육 파견과 비슷하리라.

"가서도 잘 보고 배우게."

"네, 알겠습니다!"

임운진은 뒤이어 도로건설 전초기지에 건설될 마을을 책임질 장교들도 격려한 후에, 부대 진군을 허락해주었다.

"출발한다."

부대를 이끌게 된 노바군 1군 사령관 박준필의 명령에 2천여 병력이 출발했다.

목적지는 강철두와 함께 합류하기로 한 지점.

기적의 우물이다.

*

말을 길들이고 약초를 찾아 헤맨 지 일주일이 지났다.

"이만하면 되었다."

"#@$%@#"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뜻은 충분히 전해졌다.

모두 작업을 마치고 철두의 곁으로 다가왔다.

인벤토리에 생명 포션과 기력 포션이 한가득이다.

생명 포션은 상처 치료나 회복에 필요했고, 기력 포션은 전투의 지속시간을 늘려 줄 터.

이번 미탐사 지역 개척에 사용하기에 충분한 양이다.

철두는 소통의 비약을 한 병 꺼내 쭉 들이켰다.

"돌랑."

"네에, 영주님."

"항아리 챙겨라."

"예에."

연금술사의 솥단지는 힘으로 뗄 수가 없다.

성소나 연구소, 던전 따위의 맵에 귀속된 설치물들은 멋대로 파괴하거나 변형시킬 수가 없다.

특별한 이벤트나, 자격이 있는 자만이 건드려 변형할 수 있으니.

<연금술사 돌랑이 고대 연금술사의 항아리를 얻었습니다.>

"여기 있습니다요."

"후후, 잘했다."

철두는 그것을 고이 챙겨 인벤토리에 넣었다.

성으로 돌아가면 연금술사의 연구소를 차려 설치할 것이다. 그 연구소의 주인은 아마도 돌랑이 될 터.

"가, 감사합니다."

돌랑의 눈빛이 유난히 반짝이는 이유다.

"후후, 이제 가자."

"오오!"

그 소극적인 환호에, 철두는 뱃심을 이용해 크게 소리 질렀다.

"우어어어오!"

"우오오오!"

냅다 지른 함성을 따라 지르는 강철두와 30인의 하인 무리가 합류 지점을 향해 달렸다.

기적의 우물이 있는 곳이다.

"후후, 기적의 우물이라."

이름은 거창하지만 성소와 비슷한 장소였다. 철두도 지도로 접해 듣기만 했지 직접 가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맵의 외곽에 위치해 있어, 그간 동선상 들를 일이 없었다.

이곳을 합류 지점으로 삼은 이유는 신서울을 떠나기 전, 확인할 게 있어서다.

파팟.

커다랗게 키운 월드맵엔 기적의 우물 위에 거대한 발자국이 찍혀 있다.

<월드맵에 용의 다음 자취가 표시됩니다.>

지난번 용의 신비에서 용의 저주에 대항하며 받은 네비게이터다.

신서울에 다시 온 김에 겸사겸사 용의 흔적을 찾기 위해 이곳을 합류 지점으로 선택했다.

두두두두두.

하루 말을 달려 목표지점에 도착했다.

"오."

철두는 우물이라길래 두레박 같은 것으로 물을 푸는 걸 기대했으나, 기적의 우물은 호수였다.

"후후, 놀랍군."

역시 와보길 잘했다.

저수지 정도의 크기의 아담한 호수인데, 주변에 물을 마시러 온 야생말이나 짐승들도 몇 보였다.

"용은 어딨지?"

월드맵을 열어보니 발자국은 지워졌다.

이곳에서 다음 용의 자취가 이어져야 할 터인데.

철두는 호수를 한 바퀴 돌아보다가 이내, 물가에 넙죽 엎드렸다. 그러곤 목을 길게 빼고 고개를 박고 입술을 쭉 내밀었다.

후루루루룹!

엄청난 흡입력으로 물을 쪽 빨아당겼다.

<회복력이 일시적으로 상승합니다.>

포션과 같은 물이다.

이것을 통에 담아가서 똑같은 효과를 본다면, 다분히 인기 있을 지형이겠으나, 조금만 호숫가에서 벗어나도 효과는 사라진다.

그런 의미에서 하루나 지속되는 회복 버프를 주는 회복의 성소보다도 못한 설치물이 기적의 샘물이다.

근처에서 사냥하다가 급히 치료가 필요할 때 찾는 정도지만, 이 근처엔 적당한 사냥감도 없다.

외곽지였기에 출몰하는 말과 짐승들뿐이다.

"맛은 좋군."

달짝지근한 맛에 철두가 입맛을 다실 때였다.

<용의 목욕물을 마셨습니다.>

<용의 각질이 우러난 물입니다.>

"...."

갑자기 속이 더부룩해지는군.

철두가 인상을 팍 쓰는데, 갑자기 호수의 중심에서 빛나는 것이 보였다.

지난번 용의 둥지에서 보았던 빛과 같았다.

"또 저주인가?"

저주든 뭐든 저리 수상하게 빛나는데 가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철두는 갑옷과 무기를 벗고는 그대로 호수로 뛰어들었다.

첨벙, 첨벙.

시원하게 물살을 가르고 나아간 철두는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신비한 빛무리가 가득한 중심부에 도달했다.

<저주 저항! 용의 저주가 통하지 않습니다.>

역시, 또 저주다.

철두는 가만히 기다렸으나 빛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아무런 시스템 메시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60초 후 인도자의 빛이 사라집니다.>

"으음."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철두는 고개를 푹 숙여 잠수해보았다.

수면 아래는 어두컴컴해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빛줄기 덕에 바닥까지 모습을 보이는 지점이 하나 있었다.

'저기군.'

빛이 비추던 목표는 수면이 아니라 호수의 바닥인 모양이다.

촤아아아악!

철두는 쾌속으로 잠영해 빛이 비치는 바닥까지 내려갔다.

물살에 흙탕물이 일어나 시야를 흐렸으나 손을 더듬어보니 잡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용의 신비를 발견하였습니다.>

<용의 각질을 획득하였습니다.>

<월드맵에 용의 다음 자취가 표시됩니다.>

"...."

용 녀석이 남긴 때를 주웠다.

철두는 두툼한 덩어리인 그것을 옆구리에 끼고 수면으로 빠르게 올라가 참았던 숨을 뱉었다.

푸아!

"후우, 후우."

하늘에서 내려오던 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수영해 물가로 건너온 철두는 손안에 쥔 거무튀튀한 용의 각질을 보았다.

"기분 나쁘게 생겼네."

용의 때 뭉치는 영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주화 3000개로 활성화하시겠습니까?>

"음?"

이거 특성구슬이나 기술구슬 같은 거였나?

철두는 당연하게도 주화를 사용해 활성화했다.

파팟.

132화 탐사 시작

용의 각질 덩어리가 주화를 머금을수록 더 빛이 난다.

허공에 떠오른 용의 각질이 축축해졌다.

굳었던 돌이 찰흙 같아졌다고 할까.

<용의 각질>

용의 비늘이 녹아 뭉쳐진 각질 덩어리.

몸에 발라 방어력의 상승을 꾀하거나, 직접 먹어 소화시켜 신비한 힘을 얻을 수 있다.

(몸에 바르기/먹기)

"우웁."

철두는 괜히 올라오는 헛구역질에 찰흙 같은 용의 각질 덩어리를 혐오하는 눈빛으로 보았다.

세상에 방어력 좀 얻자고 용의 때를 몸에 바르라니.

신비한 힘이 뭔지 알고 싶지도 않다.

때 덩어리를 먹으라니.

"더러운 놈이군."

줄줄이 축복인 척하는 저주만 남기고 다니는 용 녀석은 과연 고약한 녀석임이 틀림없다.

점점 흐물흐물 녹아내린 각질 덩어리는 이제 역겨운 냄새마저 풍기고 있었다.

저건 도무지 취할 물건이 아니다.

"활성화를 취소한다."

주르륵.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줄줄 흐르는 땟국물은 멈추지 않고 녹아내리고 있었다.

빛무리에 휩싸여 점점 녹고 있는 각질 덩어리를 바라보는 철두의 얼굴이 조금 심란해졌다.

"시발...."

"뀨이?"

"...!"

철두가 눈을 부릅뜨며 손등을 보았다.

고개를 치켜든 푸른 덩어리가 이리도 사랑스러울 수가?

"후후후, 꾸이. 신비해지는 거다!"

즉석에서 이름까지 붙여가며 전령을 내밀었다.

"꾸이 꾸이!"

푸른 덩어리의 전령은 뭐가 좋은지 꾸물거리며 각질 덩어리에 찰싹 달라붙어 버렸다.

녹아내리는 각질과 그것을 포개듯 달라붙은 달팽이 같은 슬라임.

그리고 그들을 감싼 아주 홀리한 빛.

"해치워버려라, 꾸이!"

"뀨!"

전령의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더니 각질 덩어리를 뒤덮었다. 푸른 슬라임 안에 갇힌 각질은 빠르게 녹아내려 소화되기 시작했다.

<전령이 용의 각질을 소화했습니다.>

<전령의 몸에 용의 각질이 스며듭니다.>

파파팟.

뗏국물과 슬라임의 리믹스.

액체인 듯 고체 같은 녀석들의 합체.

<전령이 회복을 깨우쳤습니다.>

<전령이 용의 보호막을 깨우쳤습니다.>

"오!"

철두가 감탄했다.

소화기관과 몸체의 분리가 모호한 슬라임의 체형 덕인지 두 가지 모두를 획득했다.

<영웅의 전령>

이름 : 미정

타입 : 체력

등급 : 슬라임

보유 특성 - 용의 보호막

보유 기술 - 전리품 수거, 회복

철두는 흠칫 놀랐다.

"이름이 있었나?"

미정이?

미정이라면 여자인가?

암컷이었나?

<이름을 설정하시겠습니까?>

"아, 그 미정. 후후후."

철두는 괜히 머쓱해 웃었다.

"꾸이로 한다."

"뀨."

"뀨는 약해 보인다. 꾸이로 한다."

작명에 의견은 받지 않는다.

<전령의 이름이 설정되었습니다.>

<전령의 이름을 불러 여러 부가기능을 실행할 수 있습니다.>

<스탯석의 흡수로 전령의 등급을 상승시킬 수 있습니다.>

"음?"

전령도 성장이 가능한 거였군.

아니, 당연한 건가?

애당초 전령을 선택할 때도 4가지 스탯석을 기반으로 했으니....

철두는 꾸물거리는 녀석을 보았다.

은은하게 흡수된 드래곤의 때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다시 파란색 모양의 슬라임이 되었다.

용의 보호막.

드래곤 실드는 패시브처럼 피부를 두르는 보호막이다. 오우거 스킨처럼 피부 자체를 강화하는 게 아니라 막을 하나 씌우는 형태다.

'용의 때.'

두꺼운 각질층이 보호를....

어쨌든 회복 기술은 유용할 것 같았다.

기적의 우물이 주던 회복 효과를 이제 전령을 통해서 획득할 수 있었다.

이동식 기적의 우물인 셈이다.

"후후, 볼일은 끝인가?"

"@!#@!#"

"!@#!@"

그때 하인들의 소란에 그곳을 보니, 모두 호수를 바라보며 넙죽 엎드리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휘리리리.

철두도 고개를 돌려 호수를 보니, 물에서 안개 같은 것들이 뻗어 나와 호수 위에서 뭉게뭉게 뭉쳐지고 있었다.

푸시시시시.

안개는 곧 커다란 날개를 지닌 괴수가 되었는데, 누구나 상상하는 드래곤의 모습 그대로였다.

"...."

안개의 용은 주변을 휘이 둘러보다가 철두를 직시하고는, 한참을 그렇게 보다가 이내 형체를 잃고 흩어져 버렸다.

<용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공기중으로 흩어지며 뿌옇게 안개를 만들어낸 탓에 들이마시는 공기가 텁텁하다.

"...기분 나쁜 놈이군."

철두와 하인들은 캠프를 만들어내고 머물 준비를 했다.

"영주님, 식사 준비, 끝."

엘리스는 영주님의 언어 배우기에 꽤 열성적이었고, 일상에서 필요한 단어의 습득이 빨랐다.

"후후, 알겠다."

견습이라고는 하지만 주방에서 일하던 녀석의 솜씨는 썩 괜찮았기에, 국밥만 먹던 철두의 단조로운 식단은 꽤 풍성해졌다.

배부르게 식사를 마치곤 막사로 들어가 명상에 잠겼다.

"결투장은...."

철두는 잠깐 고심했다.

지금 다녀올까?

"소울 티켓이 없군."

고블린 상인에게 사려던 건 꾸이가 말려서 안 샀다.

"꾸이."

"뀨우!"

"대기실 입장 활성화해봐라."

"뀨!"

<전령 꾸이가 주화 1만 개를 요구합니다.>

<추가로 체력 스탯석 100개를 요구합니다.>

"...."

철두는 흠칫 놀랐다.

주화 1만 개는 지금도 있지만, 체력의 스탯석 100개는 없다.

소울티켓보다 훨씬 비싸지만, 이건 활성화만 시켜 놓으면 영구적으로 사용 가능하니 손해는 아니지만.

"72개론 안 되냐?"

"뀨, 뀨!"

"...."

단호하게 몸통을 흔드는 슬라임을 보니 조금 열 받는군.

"됐다. 다음에 간다."

철두는 이제 어리지 않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의 우선순위를 구분해내고 참아낼 수 있는 나이.

예전의 철두가 아니다.

그는 성장했고, 이제 그 정도는 충분히 인내할 수 있다.

"후우."

참자. 잘하고 있어, 철두야.

"쳇."

메마른 언덕에나 가봐야겠다.

철두가 눈을 감고 바바리안 심상 수련에 빠져들었다.

작은 바바리안 에이든이 번쩍 눈을 떴다.

아니, 이제 작다는 말은 어폐가 있다.

스컥.

키 재는 나무의 여러 표식들 위에 새로운 표식이 생겼다.

그새 더 자랐다.

훌쩍 자라버린 키가 130센티는 넘는 것 같으니... 이 정도면 9살 정도 수준은 되지 않을까?

이제 그냥 작은 바바리안이 아니다.

어중간하게 작은 바바리안으로 성장했다.

"흐흐."

철두는 나무 옆구리에 삐죽 솟은 생가지를 보며 웃었다.

"다 알아. 나와."

프스스스.

메마른 언덕에서 유일하게 생명을 품은 나뭇가지 뒤에서 바람이 뭉치더니 정령이 튀어나왔다.

뾰롱뾰롱

녀석이 날개를 비비며 곡예 비행하자 요란한 소리를 냈다.

"크큭."

철두는 옛 기억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 모습에 바람의 정령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우리의 친구가 돌아왔어!'

'기분 좋아 보여.'

'나도 기분 좋아.'

'와우, 이제 숨어있지 않아도 돼!'

불의 정령, 땅의 정령, 물의 정령이 뿅뿅 올라와서 서로 손잡고 춤췄다.

그들을 보며 에이든은 슬픈 눈으로 해맑게 웃었다.

'울지마.'

'바보야, 웃고 있잖아.'

'저건 눈물이잖아.'

'슬픈 맛이 나.'

쪼로로 날아와 에이든의 볼을 쓰다듬던 물의 정령이 눈물을 핥아 먹었다.

"하지 마, 간지러워."

에이든은 운디네를 떼어내고는 진지한 얼굴로 그들을 보았다.

해야 할 말이 있었다.

"그동안 미안했다."

에이든의 말에 정령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 소리 하지 마.'

"아니, 사과해야 해. 내 잘못인데 너희를 탓했다."

에이든은 넙죽 엎드렸다.

넙죽 바닥에 고개를 박고 절을 했다.

에이든이 알고 있는 가장 공손한 인사였다.

'괜찮아. 우린 친구잖아.'

에이든이 고개를 들곤 해맑게 웃었다.

"고마워."

'고맙긴.'

"날 버리지 않아 줘서."

'....'

"헤헤, 이제 괜찮아."

'이것 봐.'

물의 정령이 곡예비행을 하다가 마른 흙 위를 걸었다.

쿵, 쿵.

땅의 정령이 과장된 몸짓으로 물기 머금은 땅에 발을 구르니.

쑥, 쑥.

풀잎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우와."

'같이 하자!'

"좋아."

어중간하게 작은 바바리안과 정령들의 재잘거림이 메마른 언덕에 가득 찼다.

멈췄던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의 순리가 그러하듯.

에이든은 스스로를 가두던 감옥의 창살이 거둬지는 것을 느꼈다.

부모님이 최후를 맞이한 메마른 언덕이, 차츰차츰 푸르러지기 시작했다.

*

두두두두두.

선발대가 당도하고, 머지않아 본대가 도착했다.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박준필은 부대 지휘관으로서의 체통 따위는 생각지 않고 강철두를 향해 한달음에 달려갔다.

"철두!"

"준필!"

와락!

두 친구는 힘찬 포옹으로 해후했다.

"후후, 뭘 저리 많이 데려온 거냐?"

"자네 뒤꽁무니 쫓는 김에 길을 닦을 셈이네. 저들은 일단 여기에 마을을 건설할 인력일세."

이천여 대병력이 아직 정찰도 마치지 않은 미지의 지역으로 행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기에?"

"이만한 곳도 없지. 기적의 우물도 있고."

"어?"

철두는 뜨끔했다.

"왜 그러나?"

"잘못된 소문인 것 같다."

"응?"

"물을 마셔봐도 회복 효과 같은 건 없었다."

"으음?"

박준필이 의아했고, 곁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관들이 서둘러 호숫가로 가 물을 떠먹었다.

"헉, 정말입니다!"

"회복 효과가 없습니다."

"허, 이런!"

박준필의 동공이 흔들렸다.

C422의 외곽지.

그러나 여전히 한양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들르는 관문 마을을 세우기에 이만큼 적당한 곳도 없다.

"흠, 아쉽지만 이만한 장소도 없지."

회복 효과가 없다지만, 호수는 식수원으로 훌륭했고 주변에 위협이 될 만한 몬스터가 크게 없었기에 전략적으로도 좋았다.

"운 중령. 그럼 마을 건설을 시작해주게."

"네, 알겠습니다."

박준필은 철두와 대면하곤 탐사 계획에 대해 논했다.

"철두, 자네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뭐가?"

"탐사 말일세. 미개척 맵을 천천히 다 밝히면서 갈지, 최단루트로 길만 찾을지 말일세."

"일직선으로 가면 되는 것 아닌가?"

"껄껄, 알겠네. 나도 그게 마음에 든다네."

군 병력을 이용해 모든 것을 하려 하는 건 임운진의 스타일이지, 박준필의 방식이 아니다.

'양 마을 간의 길을 터놓고, 나머지 탐험보고는 민간에 맡기면 수월하지.'

일의 진척은 느리지만, 미개척 맵을 밝히기 위해 소모될 인력과 위험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다.

"구정욱 중령과 7공격대도 함께 갈 걸세. 이제 내 휘하로 옮겼거든."

"후후, 좋은 부하를 거뒀군."

뒤에서 시립한 채 듣고 있던 구정욱 중령의 콧구멍이 조금 벌름거렸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써도 칭찬에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럼 내일 아침 출발하는 거로 하세나."

"음? 당장 가도 문제없다."

"하하, 우린 방금 도착했다네. 하루만 좀 쉬고 감세."

"후후, 늙은이는 별수 없지. 내가 양보해주지."

"껄껄. 배려해줘서 고맙네."

하루를 푹 쉰 일행은 아침 일찍 출발했다.

강철두 휘하 30인의 하인들.

박준필과 7 공격대 20인.

총 52명의 탐사부대가 한양을 목적지로 미개척 맵에 발을 디뎠다.

133화 D772

두두두.

50여 기의 인마가 흐릿한 아지랑이 같은 맵의 가장자리를 통과하자 주변 기후가 일시에 변했다.

휘이이이잉.

마른 바람이 불어와 훅하고 피부가 건조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으음, 이런 느낌이구만."

"후후, 여기보다는 겨울맵이 재밌긴 한데, 탐사엔 별로지."

"하하, 자네는 신서울에 인접한 맵은 다 둘러보았다고 했던가?"

"한 바퀴를 빙 둘러봤다."

대강의 탐사도 그때 했었다.

그랬기에 이 맵도 초입까지는 철두의 월드맵에 지형이 표기되어 있었다.

"겨울맵은 어떻던가?"

"눈이 많지."

"음? 또 뭐 별다른 특징은 없는가?"

"후후, 눈이 많은 것 자체가 특징이지. 밟는 곳마다 무릎까지 발이 푹 꺼진다."

"탐사에 애를 먹겠구만."

박준필은 겨울맵을 상상해보곤, 제발 다음 맵이 겨울맵이 아니길 빌었다.

"후후, 준필.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라.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도 만들 수 있는 맵이다."

"허허허허."

이것 참.

"내 자네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인데, 참 순수해."

"후후후."

사람 대가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도끼로 쪼개는 사람을 두고 순수하다고 하는 것이 어울리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박준필이 보기엔 그랬다.

철두는 순수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그렇다.

어린아이의 순수함이라고 하기에는 성숙했고, 어른의 치밀함보다는 아이들 특유의 영악함을 가졌다.

복합적인 인간관계보다는 단순하게 적과 아군으로 구분하는 것을 좋아했고, 악의 없는 장난은 수시로 이어진다.

그러다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헌데 자네는 지구에 있을 때도 어른에게 반말했나?"

"후후, 준필. 날 뭘로 보는 거냐? 그런 건 싸가지없는 녀석들만 하는 행동이다."

"...."

요즘 엠쥐 사이의 자기비하인가.

"허허, 뭐 아무렴 어떤가."

"후후후...."

강철두는 박준필의 웃는 얼굴을 보며 마주 웃으며 말을 옆으로 붙였다.

슬쩍 고개를 옆으로 붙여 말했다.

"너는 내 친구니 말해줘도 되겠지."

"음? 뭘 말인가?"

"한때는 나도 인간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음?"

박준필은 철두의 말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아니라고?"

"후후, 나는 바바리안이다."

"...?"

그게 뭐야?

박준필은 철두의 말을 금방 이해하지 못했다.

"후후후."

슬쩍 다시 말을 몰아 앞서가는 철두의 넓은 등을 보며, 박준필의 다물어졌던 입이 열렸다.

"아!"

그렇구나.

강철두는 외계인이었구나.

생각이 이어지자 문득 다시 의문이 꼬리를 물고 찾아왔다.

'호적도 있는데?'

아, 그렇지.

강용철에게 입양됐다고 했지.

보고서를 봐 놓고도 깜빡했다.

어? 그럼....

"휴우."

머리가 복잡해 한숨을 뱉었다.

문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 대수로운 일이라고."

강철두의 과거 행적에 대한 재조사?

아무렴. 지금 와서 무슨 소용인가.

의문을 접어두고 보니, 이제야 강철두라는 사람에 대해 더 잘 이해가 되었다.

'그래. 태생이 맹수였어.'

맹수가 인간사회에서 길들여져 있었지만.

야생에 풀어준 순간, 억눌렀던 야성이 폭발한 것이다.

예의? 반말?

종족부터 다른데 장유유서를 들먹이는 것도 우습다.

"이보게, 철두!"

"후후, 왜?"

"허허, 비밀일 텐데 이야기해줘서 고맙네."

"친구에게는 대수롭지도 않은 비밀이다."

"친구...."

박준필의 얼굴에 감동이 어렸다.

외계인이면 어떻고, 종이 다르면 어떠한가? 친구라는 사실이 중할 뿐.

대한건아 박준필!

그리 소인배가 아니다.

그래도 궁금하긴 했다.

"자네 실제 나이가 몇인가?"

"후후후."

철두가 슬쩍 손을 들고 박준필의 귓가로 입술을 붙였다.

"그건 비밀이다."

"허허허."

철두는 박준필이 섭섭해할까 봐 말을 보탰다.

"진태도 아직 모른다."

"음? 하하하. 내 신경 쓰지 않는다네. 나이가 무슨 대수인가? 우리가 친구라는 사실이 중하지."

"후후후, 역시 준필이군."

철두는 다시 자세를 고쳐 잡아 말 고삐를 챘다.

"달려보자고."

"응? 갑자기?"

"이랴!"

"히이이이이."

머쓱한 기분에 괜히 소나따를 재촉해 달렸다.

아무렴 친구 사이라도, 이제 9살쯤 된 것 같다고 어찌 말해주겠나.

"가, 같이 가세!"

철두의 뒤로 늙은 친구가 사력을 다해 말을 몰아왔다.

일행의 대장 격인 두 사람이 질주해버리니, 자연스레 남은 일행의 선임이 되어버린 구정욱 중령이 명령했다.

"전원 속보!"

평보로 걷던 말들이 힘차게 걷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

7 공격대가 앞서가자 엘리스 휘하 30인의 기마도 그 속도에 맞춰 따라붙었다.

구 중령은 그것을 확인하곤 재차 명령했다.

"구보!"

두구닥, 두구닥

말들의 네 다리가 빠른 걸음을 넘어서 가볍게 달리기 시작했다. 눈치 좋은 엘리스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뭐라 명령하니, 하인들도 무리 없이 일행에게 따라붙었다.

'이 정도면 두 사람을 시야에서 놓칠 일은 없겠군.'

구정욱 중령은 저기 멀리 앞서가는 두 사람을 보았다.

닮고 싶은 사람들.

'....'

따라가겠습니다.

*

꼬박 하루를 달린 일행은, 일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사막이군."

박준필이 아쉬운 눈으로 쭉 펼쳐진 사막을 보았다.

지평선 너머까지 전부 모래로 뒤덮인 것을 보니, 이대로 돌파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모래를 밟아보니 발이 푹푹 빠지는 게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사막을 건너기도 전에 말들이 먼저 지칠 것 같았다.

"이쯤에서 야영지를 꾸리는 게 좋겠네."

"좋아."

일행을 전체적으로 이끄는 건 박준필이지만, 그는 모든 결정에 앞서 강철두의 의견을 꼭 물었다.

"저기에 야영지를 꾸린다!"

구정욱 중령은 빠르게 주변 지형을 파악하고는 인벤토리에서 막사 따위의 야영 용품들을 꺼냈다.

"박 대위, 김 중위. 셋씩 이끌고 양쪽으로 정찰."

"넵!"

"알겠습니다."

구정욱 중령은 여섯 명을 차출해 사막의 좌우로 정찰 보냈다.

내일의 경로를 잡기 위해선 어느 정도 지형 파악이 있어야 한다.

두 장교는 월드맵을 가졌기에, 이번 일정에서 정찰 임무가 고정인 대신 야영지 구축은 항상 열외였다.

[어서, 우리도 영주님이 쉴 곳을 마련해요.]

엘리스도 눈치껏 야영지를 꾸렸는데, 하인들은 인벤토리를 가진 이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꼼수로 말 안장에 필요 물품들을 주렁주렁 매달았는데, 마구는 탈것 인벤토리에 함께 수납되기에 꼼수로 인벤토리 개념으로 쓸 만했다.

그렇다고 막사같이 무거운 걸 달고 다닐 수는 없었는지라, 황송하게도 영주님의 인벤토리에 넣고 다녔다.

하여 야영지를 꾸릴 때가 되면 매번 수고스럽게도 영주님께서 보급품을 꺼내 주셨다.

"여기 있다."

쿵!

철두가 꺼낸 마차 위에 가득 실린 짐들이 내려지며 뚝딱 막사가 만들어졌다.

침대를 만들어 잠자리가 완성되고, 그사이 부지런히 솥을 걸고, 재료를 다듬고 요리에 한창이었다.

자연스럽게 한가한 사람은 강철두와 박준필 둘뿐이었다.

"자네는 어느 쪽 같은가?"

"후후, 모르지."

"원, 재미없게. 그래도 다행히 몬스터라도 별 볼 일 없어 다행일세."

"필드몹들이 그렇지."

여태 행군 중에 만난 몬스터라고 해봐야 거대한 지네를 닮은 녀석과 조류형 몬스터뿐이었다.

토끼와 비슷한 생김새의 생물체도 있었는데 이 녀석은 몬스터가 아니라 짐승이었다.

오다가 잡은 녀석들 십여 마리가 지금 도축되는 중이다. 조금 있으면 저녁상에 올라오리라.

"사막만 쭉 이어진 게 아니라면, 이번 맵은 그럭저럭 통과할 만할 것 같네."

"사막도 못 건널 건 없지."

"둘러갈 길이 없다면 그리해야겠지."

두런두런 이야기하다 보니 저녁이 모두 완성되었다.

엘리스가 철두의 앞에 와서 공손히 고개 숙였다.

"영주님. 식사 준비 마쳤습니다."

제법 한국말이 입에 붙은 그녀다.

"후후후, 기대되는군."

아까부터 맛있는 냄새에 코를 벌름거리던 철두가 냉큼 나섰고, 박준필도 이끌리듯 따라갔다.

하인들은 박준필이 영주님의 친구인 것을 알고 공손하게 대했다.

우적 우적.

"허어! 내 이리 맛있는 걸 야영 중에 맛볼 줄은 몰랐군그래."

"후후, 다음 원정 때는 실력 좋은 취사병을 데리고 다녀라."

"하하하, 군대 음식이 아무리 애써봐야 짬밥이지."

대량조리의 한계다.

그에 반해 지금 식탁에 차려진 음식은 오직 철두와 박준필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

하인들의 음식은 따로 요리되는 중이다.

"허허, 정말 이거 귀족이라도 된 듯하구먼."

전시나 다름없는 행군 중이건만, 대충 식판이나 대접에 받아먹는 짬밥이 아니다.

하얀 보가 깔린 식탁과 그 위에 정갈하게 차려진 음식들.

의자와 식사 시중을 위해 늘어선 이들.

"허허허. 철두 자네, 진짜 귀족이었지."

노바에서 영주님이면 귀족이다.

새삼, 30인이나 되는 하인들의 보살핌을 받으면 전장이나 다름없는 노지에서도 이리 호화롭게 생활이 가능하구나 싶었다.

제국의 귀족들은 대체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잘 얻어먹었네."

"음? 더 먹지 않고?"

"하하, 맛만 보았으면 되었지. 내 그래도 부대 지휘관인데 나만 어찌 맛난 걸 먹겠는가?"

박준필은 감사를 전하곤 하인들의 몫으로 주화 30개를 두고는 7 공격대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식사 중인 곳으로 가버렸다.

"흐음."

홀로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철두는 묘한 기분이었다.

음식은 맛있는데 썩 기분이 좋지 못했다.

맛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불편하다.

심적으로 편하지 않으니, 온전히 즐겨야 할 식사자리 또한 불편하다.

"엘리스."

"네, 영주님."

"같이 먹자."

"무슨 말?"

"너희들도 다 같이 먹자는 말이다."

"쩐쩌니, 쩐쩌니, 말 몰라."

"...흠."

철두가 소통의 비약을 먹어야 하나 고민한 순간, 다급한 기마 소리가 들려왔다.

귀가 예민한 철두가 가장 먼저 반응했고, 이윽고 7 공격대원들도 식사를 멈추곤 북쪽을 보았다.

박 대위가 정찰 나갔던 방향이다.

"사, 사령관님!"

두두두두두.

정신없이 달려온 이는 박 대위와 함께 따라나섰던 권도안 중사.

마음이 급해 말에서 떨어져 내리듯 바닥에 내려선 그는 철퍼덕 넘어지면서도 사령관을 찾았다.

"사령관님!"

"내 여기 있다. 말하거라."

상황이 심상찮아 보였기에 박준필은 물론 공격대 모두 표정이 좋지 못했다.

"박 대위님이 사로잡혔습니다!"

"사로잡혀?"

"3시 방향 10km 부근, 정체불명의 막사를 발견, 정탐 중에 외계 무리와 교전, 박도현 대위, 이동혁 중위가 상대하는 사이, 나머지는 도주 중 적의 추격대가 쫓아와 양지섭 중사가 저지, 저 혼자 겨우 적의 범위에서 벗어났습니다."

매뉴얼에 있는 일이다.

정탐의 최우선 목표는 본대에 정보를 전달하는 것.

"사망자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말하라."

"적들은 둔기나 밧줄을 사용해 생포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박준필이 두 눈을 감았다.

아직 부하들의 생존 여부는 모른다.

허나 작은 희망을 걸어봄직한 상황이다.

일단 눈앞의 일부터.

"고생했다. 바로 길을 안내할 수 있겠느냐?"

"맡겨주십시오!"

박준필이 명령을 위해 뒤를 돌아보자, 이미 7 공격대는 전원 마상에 올라타 출격 준비 중이었다.

134화 진짜 친구

박준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곤 철두를 보았다.

함께 가자고 할까?

박준필은 강렬한 유혹을 느꼈으나, 끝내 참았다. 철두가 함께한다면 위험부담이 크게 줄겠지만, 그건 도움받는 쪽의 욕심일 뿐이다.

바바리안의 거래는 등가교환.

박준필은 저울에 친구의 우정을 놓아 사용하고 버리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기대기만 해서는 바로 자라지 못하지.'

희생이 두려워 그늘에만 있다 보면, 크게 자랄 기회조차 놓칠 거다.

"출발하지."

"네!"

임무가 위험하다 하여 작전을 마다하는 군인은 없었고, 그 임무가 동료의 구출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철두, 다녀오겠네."

"알겠다."

박준필과 7 공격대원들이 모두 출발하자 강철두는 홀로 남아 입안에 든 고기를 씹었다.

질겅, 질겅.

어쩐지 조금 전까지의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입에 든 것이 고기인지 고무인지 분간이 안 된다.

"퉤!"

철두가 씹고 있던 고기를 뱉자 하인들이 일제히 바닥에 엎드려 벌벌 떨었다.

철두는 뱉은 고깃덩어리를 보았다.

"...."

처음이다.

먹던 음식을 뱉은 건.

"...."

강해지는 것과 생존은 철두에게 있어 유일한 목표였고, 잘 먹고 잘 자라는 건 그것을 위한 더없이 중요한 과제였다.

"기분이 별로군."

기분에 따라 맛이 변하다니.

알 수 없다.

아직은 모르겠다.

어렴풋이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생긴 기분.

뿅.

철두는 인벤토리에서 소통의 비약을 꺼내 마셨다.

"엘리스."

"예에, 영주님."

엘리스는 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무릎걸음으로 걸어와 다시 바닥에 엎드렸다.

"너희들과 같은 걸 먹겠다. 다시 가져와라."

"그리하겠습니다."

반론은 없다.

평생을 하녀로 살았고, 이제 막 견습 집사로서 일을 배우다가 새로운 주인을 맞이한 하녀는 반문하지 않았다.

달그락 달그락.

긴장한 하인들이 재빨리 음식을 마무리했고, 그들이 하던 것처럼 그릇에 담아 가져왔다.

"너희도 함께 먹자."

철두는 그릇을 들고 대충 퍼질러 앉았다.

그 모습에 하인들은 긴장하면서도 하나씩 배식을 받아 저마다 쪼그려 앉았다.

"먹자!"

"...."

달그락.

철두는 수저로 음식을 떠서 먹었다.

수프라고 끓이긴 했는데, 제대로 제분이 되지 않아 곡식의 알갱이가 그대로 씹히는 것이 반쯤 갈아낸 죽 같았다.

"으음."

맛이 나쁘지 않으나 좋지도 않다.

달그락.

한 숟갈, 두 숟갈 부지런히 움직이는 수저를 따라 음식은 빠르게 비워졌으나, 차오르는 위장과 반대로 속은 허한 기분이 들었다.

"...."

공허하다.

철두의 시선이 군인들이 머물다 떠난 자리로 향했다.

급히 끄고 간 모닥불은 이제 잔불만 남아 하얀 연기만 무성했고, 그 위에 걸린 솥에 담긴 국밥은 천천히 식고 있었다.

식탁도 없이 먹다 여기저기 바닥에 내려놓은 그릇들엔 벌써 몇 마리 곤충들이 달려들어 음식을 훔쳐먹고 있었다.

"...."

물끄러미 자신의 손에 들린 그릇을 보았다.

그리고 옆에서 함께 식사 중인 하인들을 보았다.

"허윽."

철두와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움츠러드는 사람들.

"...."

답답하다.

아까부터 정체 모를 감각이 묵직하게 가슴을 짓누르는 느낌이다.

벌떡 일어선 철두가 숨을 뱉으며 고함을 질렀다.

"우어어어어!"

바바리안의 우렁찬 외침에도 가슴을 누른 정체불명의 불편함은 가시지 않았다.

사람들과 함께 있는데도 외롭다.

아이언헤드령의 영지민이 된 이들이다.

내가 강해지려는 이유는 더 이상 잃지 않기 위함이고, 내 부족민을 스스로 지켜내기 위해서다.

모든 게 흠잡을 게 없이 흘러가고 있는데....

지금도 내 부족민들과 함께하는데도 이 공허한 외로움은 무엇인가?

그래. 친구.

친구는 어찌하여 내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는가?

나는 강한데.

이리도 강한데.

늙고 약한 친구는 어째서 내 손을 빌리지 않는가?

"왜 날 두고 갔나!"

철두의 고함에 하인들이 벌벌 떨었다.

그 모습에 철두는 더 답답해졌다.

훙, 훙.

철두의 성난 콧김이 내뿜어질 때마다 하인들이 함께 들썩였다.

"갔다 온다."

"네, 네, 영주님."

누가 있어 말릴 수 있을까?

"히이이이잉."

철두는 소나따를 소환해 타고 달렸다.

파팍, 파팍!

다급한 주인의 마음을 아는지 질주 스킬과 함께 소나따의 발굽은 마른 흙을 힘껏 차며 앞으로 치고 나갔다.

두구, 두구, 두구, 누구.

곧 최고 속도에 이르며 밤길을 질주했다.

"실프! 길을 찾아라."

불운과 죽음을 몰고 온 게 이 작은 정령들이 아님을 아는데, 더는 감출 이유도 없다.

샤라랄라 랄라라!

샤방한 날개 소리와 함께 바람의 정령이 나타나 빠르게 앞으로 날아가며 주변을 살폈다.

곧 결과를 가지고 돌아올 거다.

두구, 누구, 덕구, 성구.

말발굽이 내는 기분 좋은 박자에 몸을 싣고 말을 달리기를 얼마.

곧 바람의 정령이 다시 나타나 소나따의 뿔을 잡고는 정수리 위에 올라탔다.

"저쪽이군."

조막만 한 손이 가리키는 대로 방향을 수정하곤 달렸다.

와아아, 채채챙.

그렇게 달리길 한참 만에, 병장기 소리와 함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달도 하필 그믐이라 아직 눈에 보이지는 않았다.

조금 더 달려가니 여기저기 횃불 든 놈들이 있고, 그들과 어울려 싸우는 7 공격대와 박준필을 볼 수 있었다.

"히이이이잉!"

철두는 전장에 거의 다다라서야 말을 멈춰 세웠다.

"후우웅, 후우웅."

소나따가 더운 콧김을 내뿜으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적은 사람과 꼭 같은 체형이었는데, 인간이라 부르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뱀 눈깔?"

이목구비도 사람처럼 다 붙어있고, 귀도 요정처럼 크진 않다.

귓바퀴가 손바닥을 쫙 펼친 것처럼 뾰족하게 생겨, 괴상하면서도 녀석의 얼굴에는 퍽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코가 좀 크고 길고, 눈동자가 세로로 쭉 찢어진 파충류를 닮은 녀석이다.

녀석들은 새롭게 등장한 강철두를 경계했다.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 대치하니,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엄청난 덩치를 가진 무쇠 얼룩말을 길들여 타고 다니는 존재.

바지만 입은 괴상한 차림에 변태처럼 소드벨트와 젖꼭지를 가로지르는 두 줄의 대거벨트를 찼다.

주렁주렁 달린 투척 단검과 투척 도끼가 주는 흉흉함도 보통이 아니다.

외견만 보자면 바바리안 전사가 아닌가 싶을 정도의 위협적인 모습이지만, 타투 하나 없는 매끈한 상반신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다.

외계인 무리는 24명이었는데, 그중에 채찍 같은 것을 쥔 놈이 나서서 외쳤다.

"넌 누구냐? 인간이냐?"

녀석들 중 대장처럼 보이는 놈의 말에 철두의 인상이 굳어졌다.

곤란한 질문을 던지다니.

"못생겼어."

"이익!"

소통의 비약의 유지시간이 아직 남아서 그런지, 의사소통에 문제는 없다.

아니, 그것이 문제였다.

"감히 나를 모욕하다니!"

"팩트라는 거다."

"이익!"

얼굴이 시뻘게져서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녀석을 무시했다.

철두는 박준필을 찾았다.

반가운 듯 미안한 듯 겸연쩍어하는 얼굴의 박준필을 보고는, 천천히 말을 몰아 그 곁으로 다가갔다.

"준필!"

"철두, 왔는가?"

"왜 내게 함께 가자 하지 않았나?"

"음?"

강철두의 음성엔 화가 가득했다.

"왜 친구인 나를 버리고 갔나!"

"...버리고 가다니."

박준필은 황당해하면서도 곧 인자하게 미소지었다.

"친구라서 말 못했네."

"...뭐?"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일방적인 도움만 바란다면 어찌 친구라 하겠나?"

"하지만."

"자네가 말하지 않았던가?"

"...?"

"저울에 올릴 게 없다네."

"...!"

철두는 지난 대화가 떠올랐다.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대화.

'전혀 이해하지 못했나 보군.'

'....'

'난 인류를 위해 싸우지 않는다. 내가 싸우는 건 나의 부족을 위해서다.'

'....'

'난 네 부하도 한국의 부하도 아니다.'

'....'

'방금 말한 것은 의뢰인가? 친구의 부탁인가?'

'...의뢰일세.'

꾸드드득.

철두는 이를 깨물었다.

후웅, 후웅.

뜨거운 콧김이 내뿜어져 나온다.

그래, 분명 그리 말했었다.

분명 바바리안의 거래는 등가교환으로 이뤄진다.

박준필이 허허롭게 웃으며 말했다.

"화내지 말게. 자네에게 친구로서 부탁하기엔 내가 지나치게 모자라지 않은가?"

친구로서 부탁?

입에 발린 말일 뿐이다.

친구라는 명분으로 싼값에 철두의 무력을 빌리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급이 맞아야 친구가 된다.

주거니 받거니 해야 친구가 되지, 일방적인 관계는 언젠가 깨어지기 마련이다.

"나는 친구를 잃고 싶지 않네."

저울에 친구의 우정을 올리고 부탁하면 흔쾌히 들어줄 철두다. 하지만 그 이후는....

그래서 나섰다.

어차피 그들의 일이기도 했고.

잡혀간 군인들이 그들에겐 동료지만, 강철두에게는 냉정히 말해 남이지 않은가?

강철두의 바바리안 고백을 듣는 순간, 박준필은 깨달았을 뿐이다.

같은 부족도 아니고, 나라도 다르며, 심지어 종족도 다르다.

둘 사이를 이어주는 공동체 의식과 교분은 오직 '친구'뿐이다.

박준필은 친구에게 기대,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철두의 거친 숨이 음성을 실어 밖으로 토해졌다. 머리가 핑핑 도는 기분이다.

상반되는 여러 감정들이 뒤섞여 화가 난다.

이것을 표현할 여러 가지 말들이 떠오를 듯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무엇을 말해야 할까.

"나는!"

복잡한 머리는 조리 있는 말 대신, 진심 하나를 토해냈다.

"나도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철두의 진심이 쩌렁쩌렁 울렸다.

인간 세상에서 자란 바바리안은 저울을 스스로 끊어냈다.

높게 쌓은 벽이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근원적인 외로움이 조금 해소되는 기분이다.

"우어어어어어!"

철두가 냅다 전투함성을 내질렀다.

그 투기 가득한 외침에 외계 무리는 화들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공격했다.

더 놔뒀다간 저 덩치 큰 인간의 기세에 사기가 꺾일 노릇이다.

쐐애애애액.

소리가 들렸을 땐 이미 철두의 굵은 목에 채찍이 감겨있었다.

꾸드득.

철두는 당기는 그 힘에 저항하지 않았다.

후우웅.

마구를 박차고 딸려간 철두의 두 손엔 어느새 투척 도끼가 한 자루씩 들려있었다.

홰애애액.

퍼퍼퍼퍽!

채찍에 딸려가는 와중에 여기저기 날아간 투척도끼와 비도는 정확히 외계인들의 머리통에 틀어박혔다.

타탓.

철두가 바닥에 내려서 여전히 목에 감겨있는 채찍의 주인을 향해 다가갔다.

"어?"

얼빠진 소리를 내는 녀석의 머리통을 깨부수기 위한 도끼가 이미 철두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후웅.

"철두, 안 되네!"

준필의 다급한 목소리에, 목에 접근하던 도끼가 급히 방향을 틀어 어깻죽지에 틀어박혔다.

콰직!

"크아아아!"

고통에 몸부림치는 녀석을 뒤로하고 철두가 의아해 뒤를 돌아봤다. 박준필이 헐레벌떡 뛰어오며 말했다.

"녀석들 무리가 대원 몇을 사로잡아 갔네."

"으음, 여기도 인질이군."

"그렇네. 추궁할 게 많아."

인질을 구출하자면 어디로 끌려갔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아."

뭐, 일단 그건 제쳐두고서라도.

철두는 박준필과 마주 섰다.

"나는."

"미안하네."

박준필이 사과했다.

"친구라고 하면서 친구 마음도 헤아리지 못했으니, 면목이 없네."

꾸득.

철두는 이를 악물었다.

"아니, 내가...."

말하려니 온몸이 비틀리는 기분이지만 참아냈다.

"전엔 미안했다."

철두를 옭아맨 사슬이 끊어지는 기분이다.

내내 가슴을 내리누르던 불편함이 사라졌다.

135화 굴단 마켓

"전엔 미안했다."

철두의 말에 박준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거대하고 순박한 친구의 입에서 나오리라곤 상상하기 힘든 말이다.

"허, 자네가 사과를 다 하는군."

"...."

철두는 입술을 꾹 다물렸다.

콧구멍이 저절로 벌름거리고, 온몸에 으스스 소름이 돋는 느낌을 억지로 참아냈다.

"부하들부터 찾자고."

"그러세나. 자네가 취조해 주게."

철두가 어깨를 박살 낸 외계인은 구정욱이 잡아두고 있었다.

소통의 비약 덕에 유일하게 의사소통이 가능한 철두가 녀석에게 다가섰다.

"이봐. 대충 들었지? 어디부터 고문해줄까?"

두둑.

철두가 녀석의 성한 팔을 붙잡아 어떻게 비틀어줄까 하는 그때, 녀석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협조하겠소."

"음? 대가 그렇게 약한 녀석 같지는 않았는데?"

"사로잡은 인간들의 행방이 궁금한 거 아니오?"

"어, 맞아."

이거 생각보다 너무 순순히 협조하는데?

"그렇게 나와도 안 살려줄 거야."

"기대도 하지 않소."

"그럼?"

이유를 알 길이 없으니 찝찝하다.

"일이 더럽게 꼬여 이리 적으로 만났지만, 다음에 인연이 닿으면 서로 빚은 없는 거요."

"빚?"

"원한은 오늘로 끝내자 이거요."

"웃긴 놈이군."

"손해 볼 거 없지 않소? 이대로 내가 죽으면 곤란할 텐데?"

"...."

철두의 이맛살이 꿈틀거렸다.

"좋아. 저승에서 만나게 되면 서로 원한은 없다."

"저승이라.... 딱 들어맞는 말이구려."

고문의 필요성 자체가 사라졌기에, 철두는 팔을 놓고 녀석의 앞에 털썩 주저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말해봐. 왜 잡아갔지?"

"노예로 팔려고 잡아간 거요. 지구인 노예는 처음이라 비싼 값에 거래될 거요."

"흐음, 노예라...."

외계인의 말은 모르지만, 철두의 말은 알아들을 수 있는 일행들이 동요했다.

"저 시발놈이."

"설마 노예로 판다고? 저 십새끼가."

"다들 조용."

박준필이 소란을 정리했으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그도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

"좋아. 내가 뭘 더 물을지도 알지?"

"용병대 융카스. 대장 융카스는 만만찮은 인물이오. 뭐, 그대에겐 안 되겠지만. 어쨌든 남은 이들은 30명 전후요."

"어디에 있지?"

"이 맵에 들어선 자유시장이오. 본래 목적은 그곳이고, 지구인을 노예로 잡은 건 우연이었소."

"흐음."

"우리는 추격하는 지구인 노예를 더 잡아가려다가, 만만찮은 것을 알곤 저지하려고 나선 거요."

"좋아. 그다음."

녀석의 손에 뿅 하고 물건이 나타났다.

부적 같기도 했고, 종이를 찢어놓은 것 같기도 했다.

"자유시장의 좌표요. 사용하면 지도에 표시될 거요."

철두가 종잇조각을 잡았다.

<도시 좌표>

굴단 마켓의 지도 좌표.

유효기간이 있는 좌표이며, 유효기간이 끝나면 좌표의 신뢰성을 보증할 수 없다.

- 유효기간이 12일 4시간 남았다.

- 고블린 주화 50개로 월드맵에 표시할 수 있다.

"이거 구라 아냐?"

"유효기간이 남은 거요. 적어도 그때까진 도시가 옮겨가지 않을 거요."

"옮겨가?"

"허, 시발.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지금 이딴 소리 할 시간에 동료들이나 찾으러 가는 게 어떠시오?"

녀석이 인상을 팍 구기며 말하자 철두가 냅다 따귀를 때렸다.

촤악!

"시발, 왜 때리시오?"

"네놈들이 잡아가지 않았으면 시간에 쫓길 일도 없지."

"젠장, 위에서 시키면 까는 거지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철두는 도시 좌표를 활성화했다.

파팟.

월드맵을 열어보니 생각보다 가깝다.

"좋군."

필요한 건 다 알았다.

"유언은?"

상대가 얼굴을 슥 내밀었다.

"뭐야? 게이냐?"

"내 얼굴 똑똑히 봐 두시오. 코타콩, 내 이름이오. 이번엔 일이 꼬여 형씨 손에 죽지만, 우리 후일 원수지진 맙시다."

"...."

평화주의자 노예 사냥꾼 새끼인가?

현실은 좆같이 살았지만, 저승 가서는 개과천선하고 싶은 녀석인가?

"미친놈이군."

철두가 도끼를 꺼냈다.

"이것으로 너와 나의 원한은 끝이다."

코타콩이 씩 웃었다.

"다음에 만나면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거요."

친구라....

철두가 씩 웃었다.

"그랬으면 좋겠군."

스컹!

철두가 휘두른 도끼가 녀석의 목을 잘랐고, 코타콩은 웃는 얼굴 그대로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츠츠츳.

그 시체는 조금 시간이 지나자 빛으로 휩싸여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에 철두는 불현듯 든 생각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열었다.

"정말 죽었을까?"

"예?"

"아니다."

"영주님. 전리품이 나왔습니다."

"그래."

전리품은 챙겨야지.

코타콩이 죽고 남긴 아이템은 궤짝이었다.

"음? 꽤 무거운데?"

철두는 그것을 들어 그대로 인벤토리에 수납했다. 내용물이 무엇인지 확인하기에는 시간이 아깝다.

"어떻게 되었나? 대원들은 모두 무사한가?"

박준필이 급히 물었고, 주변에 몰려든 대원들의 시선 또한 간절한 무언가가 가득했다.

그들의 기대와 열망이 가득한 시선을 받고 있자니, 어딘가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무사하다. 노예로 팔기 위해 잡아갔다는군."

파팟.

철두가 월드맵을 활성화해 시뮬레이션 맵의 파란 점을 가리켰다.

"여기에 도시가 생겼다. 거기 시장에 내다 팔 거라고 했다."

"도시라.... 그보다 가깝군."

"그래. 좋은 소식이지. 어서 가자. 이 정도면 한달음에 데려올 수 있다."

철두와 다르게 박준필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후, 차라리 멀었다면 당장 쫓았을 것이나, 이리 가깝다면 쫓아봐야 놈들이 도시로 진입했을 것이네."

"...?"

철두는 그게 무슨 문제냐는 듯 반문했다.

"그게 어쨌다는 거냐?"

"도시의 전력을 모르지 않나?"

"준필, 너는 너무 조심스럽다."

"지휘관의 덕목이지."

박준필이 손바닥을 들어 올려 말을 막았다.

"잠깐 시간을 주게."

"흐음, 그러지."

강철두는 조용히 기다려주었고, 박준필의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으나 꽤 고통스러워 보였다.

철두는 그사이 무기를 하나씩 꺼내 점검하며, 곧 있을 싸움을 대비했다. 도시전력이니 뭐니 했지만 어쨌든 잡혀간 녀석들만 데려오면 되는 것 아닌가?

전투 준비를 하는 건 강철두만이 아니었다.

동료가 납치당해갔기에 조용히 무장을 점검하는 7 공격대의 분위기는 어딘가 모르게 비장했다.

슬쩍 그들을 본 철두가 물었다.

"다친 사람이 많나?"

"이 정도는 다들 별거 아닙니다."

"사지 떨어져 나간 정도 아니면 부상도 아니죠."

체력 수치가 적어도 30은 넘을 7 공격대원들인지라 그 말은 어느 정도 맞긴 했다.

괴물 같은 자연치유력이 어지간한 상처는 스스로 회복시킬 테니까.

하지만 그 회복력이란 것이 높다고 해도 기적처럼 당장에 피가 멎고, 끊어진 근육이 붙고 하는 게 아닌지라, 여기저기 붕대를 감은 녀석들의 얼굴은 애써 고통을 참는 듯 잔뜩 찡그려져 있었다.

몇몇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허세는."

철두는 쭉 늘어놓은 무기들을 죄다 인벤토리에 수납하는 것으로 전투 준비를 마치곤, 포션을 꺼내 던져주었다.

"치료해라."

"이게 뭡니까?"

"포션이다."

"헉!"

구정욱 중령은 놀라워하면서도 감격에 겨운 얼굴로 그것들을 부하들에게 나눠 주었다.

치지지지직.

"크흡."

부상자들은 붕대를 풀고 포션을 붓거나 마시며 치료에 나섰고, 멀쩡한 이들은 외계인들의 시체를 한데 모으며 그제야 전장 정리에 나섰다.

"시체는 13구입니다."

"10명이나 랭커였다는 소리군."

그 정도 전력의 적을 만났으니 지금 공격대의 몰골이 이리도 처참했으리라.

구정욱이 강철두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영주님이 아니었다면 전멸했을 겁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철두는 입을 꾹 다물었으나, 벌름거리는 콧구멍을 막지 못했다. 몸이 배배 꼬이는 기분이다.

"신경 쓰지 마라."

뿌듯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딱히 이유가 없기도 했다.

박준필이 아니었으면 내가 이들을 구하러 왔을까?

불현듯 지금 그들이 먹다 남기고 간 국밥 그릇들과 그것을 훔쳐먹던 곤충들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고마워할 필요 없다."

이성과 감성이 충돌하며 억지로 이유를 만들어냈다.

"준필이 부하니까 구해준 거다."

"하하하, 예에, 장군님 덕에 소인들도 목숨을 구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힐끗 박준필에게로 향했다. 때마침 그도 고민을 마쳤는지 감았던 눈을 떴다.

"철두. 너무 애써서 그러지 말게나."

벌름거리는 콧구멍이 상장 받은 아이가 별거 아니라고 허세 떠는 것 같아 웃기면서도 대견하다.

"사람을 구하는데, 이유가 무어 중요한가? 하하."

"...."

이유가 중요하지 않다라.

강철두가 피식 웃었다.

"우리 할배 같은 소리를 하는군."

"음? 하하하. 어르신을 다시 만나면 내 좋은 술 한 동 내어드려야겠군."

박준필은 이쯤하곤 모두를 불러모았다.

"다들 알겠지만, 상황이 좋지 않네."

적은 30명 전후, 인질은 셋.

지금부터 쫓아봐야 이미 도시에 진입했을 시간이다.

"도시 잠입부터 문제네.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잠입해 인질의 위치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야."

철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몰래 담을 넘어가서 찾아오면 되는 것 아닌가?"

"마켓이 여기 들어서며 노예상들이 그쪽으로 가다가 운 나쁘게 우리와 조우했지 않은가. 이런 무리가 얼마나 더 있을지 알 수 없네."

"그게 무슨 상관이냐?"

"자네 영민들을 두고 왔지 않은가?"

"...!"

철두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그 말이 맞다. 남겨진 이들이 중요하지 않아서 이들을 구하러 온 게 아니다.

모두 지키고 싶었을 뿐이다.

"이리 함세. 구 중령."

"네, 장군."

"자네와 7 공격대는 야영지로 돌아가 영민들을 수습, 대기해 주게."

"알겠습니다."

구정욱은 가타부타 반론이 없었다.

내심으론 인질 구출 작전에 투입되고 싶어 하는 눈치지만, 명령이 떨어지니 군말 없이 따랐다.

"철두, 소통의 비약에 여유가 있는가?"

"충분하다."

"자네는 날 좀 도와줄 수 있는가?"

"...."

철두가 박준필을 보았다.

전이었으면 거절했을 것이다. 허나.

"친구를 돕는데 이유는 없다."

바바리안의 저울 따위 이제 철두의 마음속에 있지도 않다.

"고맙네. 자네는 나와 함께 도시로 가세. 서둘러 따라가 도시에 잠입, 사람들을 구해오세나."

철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좋아. 그럼 서두르세. 어느 것 하나 촉박하지 않은 일이 없으니."

"영주님의 주민들은 걱정 마십시오!"

구정욱의 말에 강철두가 해야 할 말을 골랐다.

어색하다.

아니, 최초이지 않을까?

내 것을 스스로가 아닌 누군가 대신 지켜주는 건 말이다. 그것도 내 부족민, 가족이 아닌 타인이 말이다.

"...부탁하지."

"염려 마십시오!"

"제 목숨처럼 지키겠습니다!"

여기저기서 소리치는 대원들을 뒤로하고 박준필과 강철두는 빠르게 말을 몰아 도시 좌표 굴단 마켓을 향해 나아갔다.

거리가 가까워 말을 달린 지 두 시간 만에 거대한 도시를 마주했다.

신서울보다 면적은 적었으나, 성벽의 높이가 어마어마했다. 저 정도면 거의 20미터는 육박하지 않을까?

거기에 더해 내성은 아파트처럼 우뚝 솟아 있다. 지금 인류의 수준으로는 건축조차 불가능한 도시의 성세에 박준필은 입을 쩍 벌렸다.

"...."

"크군."

"철두."

"말해라."

"이번엔 정말 조심해야 해. 돌발행동은 금물이네."

"걱정마라."

철두가 자신만 믿으란 듯이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나만 믿어라. 날 믿어서 잘못된 적이 있나?"

"...미, 믿어보지."

못내 불안한 박준필이었지만, 그 말대로 잘못된 적 또한 없다.

136화 이계인들

선택은 꽤 어려운 문제다.

무엇을 택하든 후회와 미련은 남기 마련이기에 선택은 늘 어렵다.

점심으로 짬뽕과 짜장 사이의 갈등도 그러할진대, 실전에 투입되는 군인들의 작전계획은 얼마나 어려울까.

여럿의 목숨이 걸린 일이라면 오죽 어려울까?

허나 지휘관은 그것을 해내야 하는 직책이고, 최선의 선택이 이것이다.

"절대 먼저 나서지 말게나."

"알았다니까 그러네."

철두는 두 번 세 번 말하는 박준필의 잔소리를 흘려들으며 새 도시에 대한 묘한 설렘으로 들떴다.

이미 잡혀간 인질이야 다시 돌려받으면 그만이고, 싸움이 일어나면 이기면 그만이다.

언덕을 내려간 두 필의 말은 성이 가까워지자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다 왔군."

"후후후."

멀리서 내다봤을 때도 웅장한 도시였지만, 가까이서 보니 높은 성벽이 주는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줄 서자고."

"그러세나."

두 사람은 말을 역소환하고는 성문 앞에 쭉 늘어선 줄 뒤에 섰다.

철두는 고개를 꺾어 성벽 위를 훑었다.

여기저기 경계를 서는 병사들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병사 하나하나가 기사 정도.'

보르텡 남작성의 기사 정도 되어 보였다.

성문 앞에서 통행세를 걷는 녀석의 뒤에 선 기사는 호위기사 정도.

단순히 검술 레벨 정도로 계산하자면 문지기 기사가 검술 레벨 4, 경계병이 레벨 3 정도라 봐야 할까?

어디까지나 느낌이 그렇다는 이야기고, 진짜 실력은 붙어봐야 알 수 있겠지만 어찌 되었든 보르텡 남작성을 까마득히 웃도는 전력이었다.

"수준이 높아. 침입은 힘들겠어."

"애초에 그런 작전이 아닐세."

침입보다는 잠입에 가깝다.

하지만, 일은 더 수월하게 풀릴 것 같았다.

"딱히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군."

"후후, 여기저기 외계인 천지니까."

줄 서 있는 자들의 얼굴은 각양각색이다.

코타콩처럼 생긴 녀석도 있고, 인간처럼 생긴 사람도 있다. 여러 종족이 뒤섞여 줄을 서 있는데 분쟁이 없는 걸 보니, 철두와 준필이라고 해봐야 그리 눈에 띌 것 같지도 않았다.

"한 번 보고는 우린 신경도 안 쓰는군."

"그것도 철두 자네 말 보고 그런 것 같은데."

"후후, 소나따가 좋긴 하지."

박준필은 주변인들을 샅샅이 보았다.

저들끼리 속닥속닥 이야기하긴 하는데, 외계어라 뭐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철두, 나도 그 약 좀 주게."

"여기."

두 사람은 소통의 비약을 쭉 들이켰다.

그제야 여기저기서 떠드는 말소리가 귀에 속속 박히기 시작했다.

"아, 이번 마켓은 왜 이리 사막 가운데 자리 잡은 거야?"

"행성 흡수 초기엔 다 그렇지 뭘 그러나?"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박준필은 하나하나 정보를 기억하려 애썼다.

마음 같아서는 슬쩍 말을 붙여 물어보고 싶었으나, 도시에 들어서면 기회는 많다.

지금은 별 대수롭지 않은 척, 최대한 긴장하지 않으며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어가는 거다.

다행히 이번 작전의 파트너는 그런 쪽으로 타고났다.

"후후, 성문도 쇠군. 부수기 쉽지 않겠어."

"자네는 긴장이라곤 없구만."

"그건 통제 가능한 영역이다."

적어도 바바리안에게는 말이다.

줄은 줄어들어 곧 두 사람의 차례가 왔고, 늙은 징세관이 손을 내밀었다.

"입장료 500개네."

"허, 비싸군."

"클클, 신맵에 자리 잡은 마켓 중에는 굴단이 제일 싸다네. 불만이면 다른 마켓으로 가."

"쳇, 여깄다."

짜랑.

"클클, 통과."

강철두가 주화 500개를 내고 들어섰고, 한양의 수령인 박준필도 여유자금을 꽤 가지고 있기에 주화를 내고 뒤따라 들어섰다.

"자네, 어찌 이리 태연한가?"

"준필. 너는 너무 위축되어있다."

"누구나 그런 것 아닌가? 낯선 외계인 천지에, 우리는 여기가 처음이니 말이야."

"후후, 내겐 익숙한 상황이지."

"자네...."

박준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지구인들 사이에서 성장한 바바리안 아이의 삶이란 지금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으리라.

팡, 팡.

철두가 박준필의 등을 두들겼다.

"자, 부하들을 찾으러 가보자."

말과 다르게 두 사람은 거대한 도시를 걸어 구경하기 바빴다.

"크군."

"시가전도 쉽지 않겠어."

"자네 눈에는 그런 것부터 보이는가 보군."

"후후, 당연한 것 아닌가? 적지에 왔는데."

철두의 말에 박준필은 새삼 풀어지려던 마음을 추슬렀다.

"허허, 맞지. 자넨 참...."

신기하다.

바바리안들은 모두 저런가?

낯선 곳에서도 당당함은 평소와 같다.

오히려 즐거움마저 보인다.

맹수들이 으레 그러하듯 마주치는 모든 사람마다 내가 이길지, 상대가 이길지 견적을 재고 있다.

마치 본능 같았다.

건물을 구경하며 대로를 걷던 철두가 문득 발을 멈췄다.

"왜 그러는가?"

"후후, 준필. 네 짐작이 옳았다."

"응?"

철두가 고개를 들어 아파트처럼 우뚝 솟은 내성을 보았다.

"사고 치면 쉽게 나가긴 글렀어."

철두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이거야 원.

이런 괴물이 있을 줄이야.

기세만으로 싸움을 포기하고 후일을 도모할 정도의 위압감이다.

'저 녀석의 영역이군.'

호랑이의 영역에 발을 디딘 여우는 잔뜩 뽐내던 기세를 감췄다.

그제야 철두를 옥죄던 압박감도 사라졌다.

"...자네 괜찮은가?"

"후후후."

"까불지 말고 얌전히 놀다 가라는 것 같군."

"음? 누가?"

철두가 턱짓으로 내성을 가리켰다.

"누군지는 모르지. 아무튼 대단하군. 얌전히 부하들만 찾아서 가자고."

"헉, 알겠네."

그 자신감 넘치던 강철두가 이런 반응이라니. 새삼 내성을 힐끔거린 박준필이 서둘러 철두의 뒤에 따라붙었다.

"후후후."

강철두는 긴장을 아예 놓아버렸다.

이 거대한 성에 자리 잡은 시스템을 거스를 힘이 없는 건 자신이나, 여기저기 오가는 행인들이나 다를 게 없다.

전투를 머릿속에서 지우자, 작전은 심부름이 되었다.

"일단 저기부터 가세."

박준필이 가리킨 곳은 식당이었다.

벽이 있긴 했으나 오픈되어있어, 내부가 훤히 보이고, 외부에도 노상 카페처럼 테이블이 쭉 늘어선 모습은 눈치 없는 곰탱이가 봐도 식당인 걸 알아챌 만했다.

"배고프나?"

"정보부터 모으세나."

"흠, 그러지."

애초에 이번 일은 박준필의 뜻을 따르기로 하였다.

자리에 앉은 두 사람에게 여급이 다가와 생긋 미소지었는데, 그 순간 철두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하필이면 주문받으러 온 종업원이 요정족이다.

박준필이 서둘러 말문을 열었다.

"가장 많이들 먹는 것 두 개 내어주게나."

"마실 건 필요하지 않으세요?"

"뭐가 있나?"

"사과 주스와 사과 소주가 있어요."

"호, 소주도 있나?"

"소주가 없는 곳이 있나요?"

"허허. 주스 하나, 소주 하나 주세나."

"21주화예요."

"여깄네."

음식을 기다리며 박준필은 철두와 소곤소곤 이야기했다.

"이거 비약이 완전치는 않은 모양이야."

"그렇겠지."

"생각해보면 당연한 건데 말일세."

종이 다르고 문화가 다른데 대치할 말이 어찌 정확히 존재할 수 있겠는가?

"빨리 나오는군."

여급은 음식을 턱 내려놓았다. 상 위에 올려진 것은 면 요리 하나와 건더기가 가득한 스튜 하나였다.

"이건 이름이 뭔가?"

"여행자의 스튜예요."

"그럼 이건 뭐고?"

"국수요."

"허허, 알겠네."

박준필이 알았다고 해도 여급은 그저 멀뚱히 서 있었다. 준필의 얼굴에 물음표가 두어 개 피어날 때쯤 철두가 주화 하나를 튕겼다.

"꺼져, 요정."

"헤헤, 감사해요."

철두의 무례에도 요정은 좋다고 주화를 낚아채 돌아갔다.

"아아, 팁. 여기도 팁 있구만."

"먹자."

"먹고 있게나."

"늙은이가 먼저 수저를 떠야지."

"으응?"

박준필은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기껍게 웃었다.

"하하하. 자, 드세."

후루룹.

스튜를 한입 떠먹고는 천천히 음미했다.

끼니를 때울 요량이긴 했지만 미식을 즐기러 여기에 온 건 아니다. 사람이 모인 곳에서 식사 중에 그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방랑자 굴단도 다 됐나 보군. 이런 볼품없는 맵에 자리 잡다니 말이야."

"굴단이 네 친구냐? 여기선 조심하라구."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부터 조용조용한 밀담까지. 박준필의 귀는 수많은 목소리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번 노예시장에 신맵의 인간들이 꽤 나왔다는군?"

"인간 노예야 사봐야 똥값이잖은가?"

"전사인 모양이야."

"호, 그럼 값이 조금 나가겠군. 마법사놈들은 일단 샘플로라도 취급해주니까 말이야."

원하는 정보다.

신맵의 인간 전사라....

7 공격대 대원인 것이 틀림없다.

톡톡.

그때 제 손을 두드리는 감각에 돌아보니 철두가 술병을 내밀고 있었다.

"안 마실 거냐?"

"아, 한잔 주게나."

사과 소주를 따라 꿀꺽 넘기니 그 맛이 꽤 시큼했다.

소주에 사과식초를 탄 느낌이라고 할까?

"후후, 존나 맛없군."

"...동감이네."

철두는 말과 달리 한 잔 더 따라 마시곤 면을 후루룩 다 먹었다. 그의 시선에 자신 앞에 놓인 스튜에 고정된 게 느껴져 슬쩍 내밀었다.

"이것도 먹게나."

"후후, 고맙다."

철두는 스튜를 떠서 먹으며, 사과 소주를 들이켰다. 술맛에 비해 음식은 꽤 먹을 만했다.

"철두. 더 시켜도 먹을 수 있는가?"

"당연한 소릴 하는군."

"허허, 여기!"

여급을 부를 구실이 필요했던 박준필이 손을 들었고, 요정이 다시 다가왔다.

"이것 두 그릇하고, 제대로 푸짐한 요리도 하나 내어주게."

"42주화예요."

"이건 팁이네."

박준필이 주화 다섯 개를 내밀자 여급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번 신맵의 인간 노예를 구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노예 거래는 서쪽 광장에서 주로 장이 서요."

"고맙네. 보통 얼마쯤 하는지 시세는 아는가?"

"그건 저도 모르죠?"

박준필이 아쉬운 듯 다섯 개의 주화를 다시 쥐었다. 그러자 요정이 다급히 말했다.

"직전 행성인 발할라의 인간 노예는 100주화 정도 했어요."

후루루룹!

요정의 말에 철두는 깜짝 놀라, 면치기 도중에 끊어 억지로 꿀떡 삼키곤 물었다.

"발할라?"

"네, 제가 거기 출신이라 그쪽 인간 노예 시세는 알죠. 신맵 인간은 잘 몰라요."

철두는 다급히 물었다.

"발할라에서 온 바바리안들도 있나?"

"네? 농담도. 바바리안 노예라니. 그놈들이 어디 노예로 잡힐 놈들인가요? 길들이기 힘든 족속들이에요."

"아니, 노예 말고 바바리안 말이다!"

"어딘가에 있겠죠."

"어디에?"

"결투장에나 기웃거리는 놈들이니, 결투장 있는 도시에 가면 냄새나는 놈들이야 널렸죠."

"이익."

"자자, 철두 참게. 그쪽도, 여기 팁이네."

"네."

철두의 기색이 워낙에 흉흉했기에 여급은 팁을 챙겨 들고는 찬바람 나게 뒤돌아 가 버렸다.

"조금 진정하게."

"후욱, 후우. 쉽지 않군."

동족의 이야기다.

마음 같아서는 묶어놓고 이것저것 묻고 싶었지만, 멋대로 굴기엔 이 도시의 치안이 너무 좋다.

"흥분을 가라앉히세나. 이곳에 온 목적을 떠올려 주게."

바바리안의 존재 여부를 알았을 뿐이다.

"...맞는 말이다."

어머니 아버지는 이미 죽어버렸고, 나고 자란 부족이야 이제 원수나 다름없다.

헌데, 지금 와서 동족을 만난다고 해 달라지는 게 있을까.

철두가 박준필을 보았다.

그래, 나는 어쩌면 이들과 어울리느라 동족에 대한 그리움이 옅어지는지도 모르겠다.

"한 잔 줘라."

"자, 받게나."

꼴꼴꼴.

두 사람은 시큼한 소주를 털어 넘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족이 아니라 동료를 구하러 갈 시간이다.

137화 재판

서쪽 광장을 찾는 건 쉬웠다.

중심에 놓인 내성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전부 커다란 광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광장마다 적당한 테마가 있어 어떤 데는 무기를 팔고, 또 어떤 데는 노예를 팔고 하는 식이다.

그들이 가는 서쪽 광장엔 노예와 말, 가축과 길들인 몬스터 같은 것들을 취급했다.

"뀌이이이!"

서쪽 광장에 진입하자 여기저기 중구난방으로 마차가 즐비했는데, 그 안엔 여러 생물들이 가득했다.

창살에 갇혀 소리치는 녀석들은 대부분 가축이었고, 의외로 흉악하게 생긴 몬스터들을 아무런 방비 없이 밖에다 내어놓고 있었다.

"길들인 놈들이군."

"그래 보여. 자네 소나따 같은 녀석들인가 보군."

펫 주머니가 있어야 펫을 길들일 수 있다.

지금 철두의 펫주머니 한 칸은 소나따가 차지하고 있고, 포인트로 구매한 두 번째 펫 칸은 비어있다. 하지만 딱히 시장에서 사고 싶은 펫은 없었다.

"헉!"

"왜, 왜 그러나?"

갑자기 철두가 자리에서 멈춰 서자 박준필이 덩달아 긴장하며 주변을 살폈다.

부들부들.

철두의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왜 그러는가?"

"...추가 음식. 못 먹고 왔다."

"아!"

거, 의기투합하다 보니 잊었다.

"별수 없지."

"...처음이다."

돈 주고 산 음식을 먹지 않고 나오다니.

인생에 이런 중대한 실수를!

"일이 끝나면 같이 요기나 하고 가세나."

"후우, 후우."

철두가 마음을 다스리는 그때 광장 한구석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오오오오!"

"대단하군."

갑작스런 소란에 두 사람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강철두의 눈이 부릅떠졌다.

"요, 용인가?"

"저게?"

철두는 홀린 듯 인파 사이로 파고들어 갔고, 박준필도 그 뒤를 따랐다.

마차 위에 자리 잡고 날개를 펼쳤다 접었다 하는 녀석의 위용은 대단했다.

"15만 2천에 낙찰!"

"와하하하! 드디어 내가 비룡을 손에 넣는군."

이미 거래가 끝났는지, 비룡을 산 키 큰 전사가 크게 기뻐했다.

철두가 슬쩍 옆에 구경꾼에게 물었다.

"저게 15만 주화요?"

"이번엔 그래도 시세보다 꽤 비싸게 팔렸구만."

"아무렴, 요즘 비룡들 매물이 뜸하다 싶더니 결국 15만을 돌파하는구만."

상인들이 한마디씩 덧붙이니 한순간에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대화에서 슬쩍 뒤로 빠진 철두가 턱을 쓰다듬었다.

"흐음."

백작성을 활성화할 때보다도 더한 거금이다.

저게 영주성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

"후후후후."

철두의 손이 잘게 떨렸다.

격하게 가지고 싶다.

탈것.

그것도 하늘을 날아다니는 탈것이라니.

저건 성만큼이나 가치가 있다.

"쿠오오오오!"

비룡이 길게 울부짖으니 구경꾼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이야, 대단하군."

"허허, 그리폰보다는 승차감이 별로라던데."

"아, 이 사람아. 비룡이 속도가 월등해."

저마다 떠드는 사람들 사이에 다시 슬쩍 끼어 물었다.

"저게 용이오?"

"용이라 부르기엔 급이 조금 딸리지."

"그냥 날개 달린 드레이크라 해야 맞지."

철두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저런 건 어디서 잡을 수 있소?"

"쯧쯧, 저게 일확천금으로 보이나 본데, 비룡 사냥꾼들은 고생에 비해 돈벌이가 별로라오."

"괜찮소."

"허허, 저건 운도 좋아야 만날 수 있지. 비룡은 거처를 잘 옮겨 다녀서, 마주치는 것 자체가 운이 좋아야 해."

"흐음."

좋다 말았다.

말과 다르게 날개 달린 녀석들은 일정한 영역이 없는 모양이다.

"그냥 눈요기나 하고 말게."

철두는 입맛을 다시며 비룡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가세나, 철두."

"후우, 그러지."

두 사람은 이 광장의 최대 히트 상품인 비룡을 뒤로하고 사람을 찾았다.

서쪽 광장의 매대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아서 뒤죽박죽으로 뒤섞인 상인들 틈에서 인간, 그것도 동료들을 찾기 위해선 발품을 꽤 팔아야 했다.

"...."

목에 쇠사슬 목걸이를 매고 죽은 눈으로 쪼그려 앉은 인간들은 셀 수 없이 많았고, 철두와 준필은 그들 하나하나의 얼굴을 확인하는 절차를 가졌다.

"에잇, 살 거 아니면 뒤적이지 마쇼."

"살 수도 있지."

"찾으시는 게 뭐요?"

"신맵의 인간 노예가 나왔다던데?"

"음? 시장에 그런 게 있소? 여긴 없소."

"어디 가면 볼 수 있소?"

"난들 알겠수? 신맵이 열리면 노예 사냥꾼들이 활개 치니, 며칠만 지나면 신맵 노예들이 한둘씩 들어오기 시작할 거요."

"...."

박준필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이건 숫제 걸어 다니는 상품 취급인지라 기분이 상하는 건 별수 없었다.

"이거 큰일이군. 벌써 오픈된 맵이 오십 가까이 될 터인데."

벌써 그 정도 파수꾼이 잡혔다.

이 모습을 보아하니 앞으로 이계인들 무리가 자주 출몰하고, 노예 사냥꾼, 산적, 마적 할 것 없이 출몰할 게 뻔하기에 걱정이 되었다.

"후후, 반대로 때려잡으면 된다. 걱정 마라."

세상에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기 마련이다. 역으로 잡아들이면 될 일이다.

"외계인 노예 필요하면 말해라."

"허허허, 일단 가세나."

두 사람은 한참을 돌아다닌 끝에 결론을 냈다.

"이렇게 봐서는 끝이 없겠어. 길을 나누세."

"그러지. 난 저기로 가겠다."

"난 이쪽을 살피지. 찾지 못하면 저기 해 지는 분수대로 모이세."

"그러지."

철두가 훌쩍 떠나려는데 박준필이 손을 잡았다.

"억울하긴 하지만 최대한 사고 치지 않는 게 안전해 보이네. 만약 노예로 팔리고 있는 걸 발견하거든 그냥 사게."

"후후, 알겠다."

촤르르륵.

철두의 손등 위 주화 숫자가 5,000개 더 올라갔다.

"잊지 말게. 성과가 없거든 해 지고 저기 분수대네."

"걱정 마라."

철두와 박준필이 서로 길을 반대로 훑기 시작했다. 강철두는 천천히 걸으며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하다 중대한 문제점을 깨달았다.

"박도현 얼굴밖에 모르는데."

나머지는 이름도 모르겠다.

보면야 어렴풋이 기억이야 나겠지만.

철두는 이왕 이렇게 된 것 대놓고 탐색에 들어갔다.

"박도현! 들리면 답해라!"

소통의 비약을 먹은 외계인들도 철두가 소리치는 소리를 듣겠지만, 시장에서 일행을 찾는 건 대수롭지도 않은 일인지 돌아보는 사람도 없었다.

허나 적어도 박도현 대위에게는 외계어 와중에 한국말만 들리리라.

"박도현! 사러 왔다!"

철두가 그렇게 떠들고 다닌 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예민하게 가다듬고 있던 청각이 외계인들 소음 중 한마디 한국말을 잡아챘다.

"여기요!"

철두가 얼른 그쪽으로 향해보니 쇠창살 안에 사람 다섯이 갇혀있었다.

"박도현!"

"영주님!"

박도현 대위는 벌떡 일어나 창살을 잡고 있었다.

"크흐흡, 영주님."

강철두의 얼굴을 보자마자 터져버린 울음과 설움, 환희, 안도가 어우러진 표정은 말로 표현이 다 안 됐다.

그 옆에 선 이동혁 중위와 양지섭 중사의 얼굴도 다르지 않았다.

"크흡, 구하러 오신 겁니까?"

"그래. 기다려 봐라."

철두는 철장의 주인인 듯한 배불뚝이 사내를 보았다. 그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철두의 위아래를 훑었는데, 얇은 입술이 묘하게 비틀려 있었다.

"그쪽도 지구인?"

"아니다."

"흐흐, 뭐 속아주지. 노예 사시게?"

척 봐도 동족으로 보이는 녀석이 나타났다.

상인은 오늘 제대로 후려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조건 사겠지.'

구매할 것이 확실한 손님에게 후려치지 못하면 상인 자격 상실이다.

"두당 1,000개요."

"비싸다!"

"싫으면 마쇼!"

"싫다!"

"음?"

"두당 100개에 사겠다."

"허."

상인은 어이가 없었다.

"볼일 없으니 가쇼!"

이놈들을 노예 사냥꾼에게서 300씩에 샀다.

적어도 500에는 팔아야 한다.

"흥정을 모르는 녀석이군."

철두가 상인에게 다가서자 상인이 뒷걸음쳤다.

"어어? 저리 가."

"깎아달라!"

"허, 더 다가오면 경비병 부르겠어!"

경비병이란 소리에 철두가 걸음을 멈췄다.

그 모습에 상인의 입매가 비틀려 올라갔다.

아무렴, 굴단에서 소란을 일으킬 멍청이는 없지.

"이봐. 지구인. 여기서 소란을 일으켜 봐야 좋을 게 없어. 그냥 1,000개씩 해서 사가. 옆에 년들은 300씩에 주지."

철두가 슬쩍 철창을 보니, 군인들과 함께 갇혀있던 여인들이 애원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타, 타스케테 쿠다사이."

"헤루푸 미...."

철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살려줘?"

"어? 네. 살려주세요."

소통의 비약을 마신 철두에게 있어 일본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디서 잡힌 거냐?"

"벚꽃 도시 소속의 나뭇잎 개척마을이 약탈당했어요. 그때 인질이 되었어요."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람이 사람을 구하는데 이유가 없다."

철두가 그리 말하곤 상인에게 다가갔다.

"다섯 명 모두 사겠다. 500 주화에 달라!"

"미, 미친놈아. 그러면 손해야."

"나도 500개 손해다."

"어째서?"

"애초에 노예가 아닌 자들이다. 나도 손해를 보겠으니 너도 손해 보고 팔아라!"

"미, 미친 새낀가?"

상인이 즉시 소리쳤다.

"썩 꺼져! 이 이상 억지 부리면 나도 참지 않아!"

"안 참으면?"

"뭐?"

"안 참으면 어떻게 할 거지?"

"미친놈인가? 결투로 네놈을 묵사발 낸 다음 네놈도 노예로 팔아버리겠다."

철두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게 이 도시의 규율이군.

차창!

철두가 도끼를 꺼내 들고 소리쳤다.

"결투다!"

"...미, 미친 새낀가?"

상인이 손쓸 겨를도 없이 벌어진 소란 상황에, 예의주시하고 있던 경비병이 나섰다.

"둘 다 그만해라!"

"경비병 나리. 저놈이 제 상품을 강탈하려 하고 있습니다!"

철두는 고개를 저었다.

"저들이 내 동료를 잡아가 노예로 삼았다."

"아닙니다요! 정당하게 노예 사냥꾼에게 구입한 상품입니다."

두 사람의 의견이 엇갈렸다.

"그만! 그만!"

그새 경비병은 여섯으로 불어났다. 불어난 경비병들은 구경꾼들을 뒤로 물렸다.

"의견이 갈린다! 집행관님이 오실 때까지 물러서라!"

"저기 오신다!"

기다란 투구를 쓴 기사가 등장했는데, 그 기세가 보르텡의 호위기사 정도 되었다.

검술로 우위를 가리자면 필패하겠지만, 모든 걸 쏟아붓자면 못 이길 상대도 아니다.

"물러서라! 나 툴라이 집행관이 중재할 것이다. 승리의 재판을 진행한다. 의견이 갈리는 당사자는 나서라!"

경비병들이 만들어 놓은 공터로 철두가 나섰고, 상인도 낭패한 얼굴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섰다.

"저놈이 무도하게 제 상품을...."

"그만!"

툴라이 집행관은 속히 재판을 진행했다.

"굴단 공작령의 법령에 따라 승리자의 말이 진실이다!"

툴라이는 철두와 상인을 한 번씩 보고는 재판의 시작을 알렸다.

"싸워라!"

그 말에 철두가 씩 미소지었다.

"후후후."

존나 마음에 드는 법령이군.

도끼를 든 철두는 상인에게 달려들려다 흠칫 놀라 멈춰 섰다.

슈우우우우 쿵!

굉음과 함께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자는 번쩍번쩍한 황금 투구를 쓰고 있었다.

"...!"

모두가 깜짝 놀라는 가운데 경비병들과 집행관이 공손히 무릎 꿇었다.

"공작 전하."

"헉."

"저분이?"

모두가 깜짝 놀랐다.

방랑자 굴단.

굴단 마켓 시티의 주인이자.

자유를 인정받은 몇 안 되는 공작 중 하나.

대귀족.

강철두는 황금 투구 사이의 번득이는 굴단의 눈과 시선이 맞았다.

덜덜덜.

철두는 묘한 흥분으로 몸이 떨렸다.

녀석이구나.

이 영역의 주인.

재보기도 민망할 정도로 수준 차이가 나는 강한 상대는 처음이다.

굴단 공작과 눈이 마주친 것 같은데....

착각인가?

황금 투구 속의 덥수룩한 수염이 움직였다.

"참관이다. 속행하라."

굴단은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호위기사들이 마련한 의자로 가서 앉았다.

"...후후후."

철두의 시선이 힐끔힐끔 굴단에게로 향했다.

투기로 온몸이 끓어오른다.

마주 선 상인 녀석은 더 이상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재판을 소, 속행하라!"

집행관의 말에 상인이 먼저 달려들었다.

138화 유대

상인의 허리춤에 달린 검은 장식용이 아닌 듯 날카로웠다.

카앙, 캉!

실린 힘도 제법이다.

철두는 온 신경이 굴단 공작에게 가 있어, 건성으로 쳐내며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상대는 대강 자신이 우세하다고 판단 내렸다.

"흐흐, 꼭 신맵에 들어서면 멋모르고 나대는 놈들이 있지. 아그야. 노바에서는 상인도 용병이나 매한가지인데 이리 얕봐서야 쓰나?"

"...."

철두는 대꾸하지 않았다.

못 들었으니까.

지금 그의 모든 감각 하나하나는 굴단 공작에게로 가 있다.

호랑이가 저기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데, 찔끔하지 않을 여우가 어딨겠나?

멋모르고 까불락 날뛰는 토끼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세다.'

처음 보는 강자.

공작이 저 정도면 그 위의 놈은 얼마나 더 강한 거지?

부들부들.

카앙, 캉!

반사적으로 날아오는 칼을 쳐내면서도 떨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더 강해질 수 있다.

무한한 가능성을 본 것에 대한 희열과, 당장은 넘어설 수 없는 공작 굴단에 대한 호승심에 몸이 떨렸다.

캉!

"후후, 제법 날래군. 네 녀석은 더 가치가 있겠어."

슈아아! 카앙!

철두는 칼을 쳐내곤 곧장 발을 쭉 내밀어 앞발차기를 시전했다.

뻐억!

갑작스럽게 발차기가 나올지는 몰랐기에, 상인 녀석은 무방비하게 배를 얻어맞고는 바닥을 몇 바퀴나 굴렀다.

"쿨럭, 숨겨진 수가 있었군. 네 놈에, 크악!"

슈아아, 콰직!

상인은 어깻죽지에 박히는 도끼날에 비명을 토해냈다.

철두는 무심히 상인을 보았다.

보기보다 튼튼한 놈이군.

어깨에 틀어박힌 도끼날을 꺼내며 발로 차 바닥에 엎어지게 만들었다.

꾸드득.

등을 밟자 녀석이 버둥거렸다.

높이 치켜든 철두의 도끼가 녀석의 목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항복! 항복한다!"

이제 와서?

철두의 도끼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도끼가 상인의 목을 자르기 직전, 무언가가 날아와 경로를 틀었다.

태앵, 콰직!

"히엑."

상인이 질색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코앞을 지나쳐 바닥에 박힌 도끼날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철두는 도낏자루에 깊이 박힌 비도를 노려봤다.

'시벌.'

기분이 나쁘군.

남의 집에서 놀아나는 꼴이 썩 좋지 않다.

"뭐야?"

철두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황금 투구의 굴단 공작을 보았다.

왜 비도를 던졌느냐 하는 무언의 시위.

황금 투구에 턱은 덥수룩한 수염으로 뒤덮인 사내다. 그가 일어서자 철두보다도 한 뼘은 더 큰 키, 이제 와 보니 망토로 가려진 몸도 두껍고 튼튼하다.

그가 철두를 보며 웃고 있다.

투구 안의 눈동자는 분명 반달처럼 휘어져 있었다.

"이름이 뭐냐?"

"강용철의 손자 강철두다!"

"재밌는 녀석이군."

굴단은 그 짧은 감상평을 뒤로하고 자리를 떠나버렸다.

"집행관. 재판을 마쳐라."

"네, 넵!"

집행관 툴라이가 슬쩍 멀어지는 굴단 공작을 바라보곤 선언하듯 소리쳤다.

"도끼 사내가 승리했다! 그의 주장이 진실이다!"

재판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패배자는 법령에 따라 인벤토리를 비워라."

"호!"

그런 법령이었나?

"크으."

상인 사내는 아쉬워하면서도 재판에 순응했다.

패배자는 어쩔 수 없다.

푸시시시시.

경비병 하나가 부은 포션이 상인 사내의 쩍 벌어진 어깨를 치료했다.

"크흡."

포션으로 인해 회복되는 고통을 참으며 상인은 생각했다.

'시펄.'

죽을 목숨 살린 건 다행이지만, 물건을 털릴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속이 쓰렸다.

'안목이라도 없길 빌어야지.'

상인이 기도하며 인벤토리를 하나하나 비웠다.

"이야, 상인이라 인벤토리도 많네."

"오, 저 궤짝이 뭔가 있어 보이는데?"

"난 저기."

구경꾼들이 더 신나서 재잘거리는데, 철두가 집행관을 보자 그가 소리쳤다.

"재판의 패배자는 죽음뿐이나, 목숨을 부지할 시 인벤토리 두 칸을 내어주어야 한다."

"오호!"

인벤토리를 가진 걸 보면 보나 마나 랭커급은 될 터이니, 죽으면 어차피 인벤토리 중 1칸이 전리품으로 떨어진다.

살려 주는 대가로 받는 게 2칸인 모양이다.

"으으으."

상인은 심히 아까운지 이빨이 부딪힐 정도로 달달 떨면서 물건을 9번 꺼냈다.

철두처럼 무기고로 쓰는지, 두 칸은 무기고 나머지는 수납을 최대치로 발휘하기 위한 커다란 궤짝이다.

철두는 순수한 호기심이 물었다.

"저놈 인벤토리가 9칸인 줄은 어떻게 아는 거요?"

"그건 내게 보인다."

집행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보인다면 보이는 거겠지 뭐.

철두는 9개의 궤짝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싶었으나, 개봉해보는 건 금지였다.

그저 운에 기대 고를 수밖에 없었는데, 상대가 상인인 것을 생각하면 무엇을 골라도 제법 값어치가 나가는 것일 터다.

철두는 무기 두 개는 제쳐두고 7개의 궤짝 중의 하나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흐음."

콧구멍을 벌름거리는 상인 녀석의 표정이 재밌군.

"코."

"흐음."

"카."

"어윽."

"콜."

"으음."

천천히 움직인 손가락에 따라 녀석의 표정이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듯 쪼그라들었다 풀어졌다를 반복했다.

철두가 히죽 웃었다.

재밌는 녀석이군.

"딩, 동, 댕!"

"허윽!"

숨이 넘어갈 것 같이 좋아하는 녀석에게 코카콜라 드리블의 정점을 보여줘야겠군.

"동!"

"흡."

철두가 손가락이 마침내 멈추자 상인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저거 둘로 하지."

철두가 씩 웃고는 첫 번째 궤짝과 6번째 궤짝을 골랐다.

철두가 고른 궤짝을 보며 상인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어억! 네, 네놈이 나를 농락하다니!"

"후후, 내 마음이다."

"골라놓고 바꾸는 게 어딨단 말이냐!"

"훼이크다."

"어억!"

뒷목을 잡고 엎어진 녀석을 무시하고 궤짝에 손을 얹었다.

"가져가도 되나?"

"가져가라."

철두는 궤짝 두 개를 겹쳐 들어 인벤토리 한 칸에 넣어버렸다.

"후후. 동료들도 데려가겠다."

"그것은 재판의 목적이었으니 타당하다."

집행관의 판결까지 받았으니 철두는 철창의 자물쇠를 깨버렸다.

꾸드득.

"나와라."

"크흡, 영주님."

"고맙습니다."

세 군인이 쇠창살을 벗어나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고, 일본인 둘도 예의 바르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목숨을 빚졌습니다."

"후후, 가자고."

철두는 다섯 사람을 이끌고 분수대를 찾아 걸었다.

으레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노바의 세계에서 결투 재판은 꽤 빈번하긴 하지만, 열릴 때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본디 불구경 다음으로 재밌는 게 싸움 구경 아닌가.

"이야, 지구인 같은데 잘 싸우는구만."

"지구인 중에 잘 싸우는 놈도 있겄지. 맵이 개방됐다는 건 파수꾼이 잡혔단 이야긴디."

"하기사. 저치는 그중에서도 좀 치는 놈인가벼."

결투 재판을 구경한 사람들은 철두가 지나가는 길을 따라 수군거렸다.

단순히 가십을 즐기는 자들이 대부분이었으나 몇몇은 보다 더 큰 목적이 있기도 했다.

"수전노 먹스가 당했군."

"먹스의 보물 궤짝 두 개라.... 해볼 만하지 않아?"

"탐이야 나지. 그런데 난 쎄해. 빠지지."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소리를 다 들었으나 철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외려 바라고 있었다.

"후후후."

누가 또 시비 안 거나?

결투 재판.

존나 좋군.

잡혀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풀려난 군인들이야 어느 정도 멘탈을 회복한 듯 묵묵히 뒤따랐지만, 일본인 여성 둘은 꽤 불안한 얼굴로 뒤따랐다.

말이 통하는 상대는 소통의 비약을 먹은 강철두가 유일.

하나가 용기 내 물었다.

"어, 어디로 가는 겁니까?"

"여길 나가야지."

철두가 슬쩍 아파트 같은 내성을 보았다.

호랑이 발톱 위에서 노는 건 찜찜하다.

분수대로 나가보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여어, 준필!"

"헉! 충성!"

"후후후, 가자고."

철두는 분수대로 다가가 와락 박준필을 놀래켜 주었고, 그는 구출된 부하들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금 붉어진 눈시울로 여기저기 팔다리 부러진 데가 없는지 확인하기까지 했다.

"애썼네. 애썼어."

"아닙니다."

"음? 저들은...."

박준필이 의아해 일본인 둘을 가리키니 철두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사람이 사람을 구하는 덴 이유가 없지."

"하하하, 알 만하네. 어서 나가세나."

"그러지. 나도 여긴 영 마음에 안 들어."

한껏 여유로운 모습의 굴단 공작이 계속 떠올랐다.

*

내성의 가장 높은 층.

테라스에서 밖을 내다보는 사내.

방랑자 굴단의 덥수룩한 수염이 씰룩이며 하얀 치아가 드러났다.

"...많이 컸군."

그의 시야 끝엔 막 성문을 빠져나가는 일곱 명의 지구인 파티가 있었다.

*

미코와 나나라고 소개한 두 일본인은 탐험 퀘스트를 받지 못했는지 탈것이 없기에 군인들이 뒤에 태웠다.

두두두두.

다섯 필의 말이 빠르게 달려 야영지로 향했다.

철두는 힐끗힐끗 뒤를 보았으나 쫓아오는 추격대는 하나도 없었다.

"아쉽군."

"뭐가 말인가?"

"불나방들이 있으면 약탈하려 했지."

"...."

저리 말하니 누가 피해자고, 누가 가해자인지 모르겠지만 이곳 노바가 그렇다.

아니,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것은 지구도 마찬가지.

노바의 규율이 보다 원초적이고, 직접적일 뿐이다.

아쉽게도 한 번의 불청객 없이 야영지로 돌아온 일행을 전우들이 맞이했다.

"왔다!"

"다, 무사해!"

"오, 이럴 수가!"

저마다 생환을 축하하며 두들기고 박수 치는 와중에 구정욱 중령이 상기된 얼굴로 강철두에게 다가와 경례했다.

"부하들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후후, 너도 내 영민들을 지켜주지 않았나?"

"...."

아, 이 얼마나 대인배인가.

마음의 짐을 덜어주려 빈말도 해줄 줄 아는 이였구나.

"후후, 샘샘이다."

"크흡, 감사합니다."

철두는 영민들에게로 향했다.

하인들은 영주의 귀환에 기뻤다.

'표정이 좋아지셨어.'

무사 귀환보다도 그것이 더 좋다.

어쩌면 사용인들에게는 주인이 누구인지보다, 주인의 기분이 어떤지가 더 중요할 수도 있는 문제.

"밥은?"

"준비가 되었나이다."

엘리스의 자신 있는 모습 너머로 두 개의 솥이 모락모락 김을 뿜는 것이 보였다.

"준필!"

"왜 그러는가?"

"밥이나 먹자."

"허허, 좋지."

눈치 빠른 엘리스의 지시에 그릇에 국밥이 담겼다. 혼신의 힘을 다해 이계인이 끓인 국밥이 모두의 손에 들어갔다.

하인 하녀, 군인, 지휘관, 그리고 막 구출된 이웃 나라 주민들에게도.

"먹자고."

후루루룹.

맛있다.

"후후후."

후루루룹.

기분이 좋군.

지금 기분으로는 내 이웃에게 손대는 적이라면 누구든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동족인 바바리안이라도.

더 이상 종은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유대.

내 가족만을 챙기던 작은 바바리안은 친구가 생겼고, 부족을 이뤘으며, 이제는 동료가 생겼고, 이웃이 함께했다.

여전히 어중간하게 작은 바바리안은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139화 전리품 개봉

철두는 여분의 휘장 하나를 박준필에게 빌려주었다.

<한양 수비대>

등급 : -

유형 : 수비대

휘장 효과 : 주둔 강화(1), 결속 증가(1)

인원 : 23/50

조직 구성 : 수비대장, 부대장

"진즉 이렇게 할 걸 그랬군."

박준필은 세력을 만들자마자 철두의 밑으로 편입 요청을 넣었다.

<한양 수비대가 휘하에 들기를 청합니다.>

"좋다!"

<아이언헤드>

등급 : -

유형 : 용병대

휘장 효과 : 회복력 상승(1), 사기 증가(1)

인원 : 189/200

조직 구성 : 영주, 시종장, 총대장, 궁병교관

휘하 부대 : IH 유격대(30/50), 한양 수비대(23/50)

보유 영토 : 아이언헤드 성

"음?"

철두가 깜짝 놀랐다.

"인원이 왜 이렇게 불어났지?"

하인들을 소속시키려 했는데 빈자리가 없게 되었다. 아마 아이언헤드 성에 있는 김진태가 부하들을 더 받아들인 모양이다.

"수비대에 분산해서 넣으면 되지 않나?"

"으음, 아니다."

여분의 휘장도 많기에, 철두는 이참에 휘장 하나를 더 꺼내 활성화했다.

<관리인단>

단장으로 엘리스를 앉혔다.

"제, 제게 이 귀한...."

"귀해? 1포인트짜리던데."

"이, 이것은 봉신에 준하는 단계가 아니옵니까?"

"음?"

철두가 턱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다단계를 닮았군.

"어쨌든 내게 복속해라."

"목숨 바쳐 모시겠사옵니다."

<관리인단이 휘하에 들기를 청합니다.>

"후후, 다 됐군."

이제 철두의 월드맵에 수십 개의 주황색 점이 보였다. 이제 전처럼 노예 사냥꾼이 잡아가더라도 즉각 대응이 가능했다.

"진즉 이렇게 할 걸 그랬군."

"허허, 자네에게 여분의 휘장이 있는 줄은 몰랐네."

"후후후."

철두는 그저 웃고 말았다.

휘장의 유무보다는 철두의 의식 변화 덕이다.

이제 적아를 가르는 이분법적인 카테고리에 전우나 동료, 이웃 같은 개념이 생겨서일 뿐이다.

"한양 가면 풀어주지."

"허허, 알겠네. 그때가 되면 휘장은 갚아주지."

"후후, 알겠다."

"그나저나 이제 이 건조한 곳도 끝이군."

박준필은 철두의 홀로그램 맵이 유난히 탐났다.

저것은 군 지휘관에게 있어 거의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이능이 아닐까?

인벤토리보다 더 중해 보이는 녀석이다.

박준필이 월드맵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박준필의 특성상, 탐험보다는 주둔이 많았던지라 최초발견과는 연이 없어 아무런 특전도 얻지 못했다.

랭커도 아니니, 인벤토리도 월드맵도 없다.

"탐나면 준필이 너도 단련 좀 해라."

"그래야겠군. 나도 한계돌파 스크롤 두 개만 쓰면 감각 랭커라네."

"지금 40개가 넘는단 소리군."

"그렇지."

"후후, 감각 쪽 랭커들이 많군."

"아무래도 그렇지."

현대인들의 대다수가 유독 다른 스텟보다 감각 쪽의 흡수한계가 높긴 했다.

강철두와 박준필을 중심으로 한 본대가 나아가는 와중에 사방팔방으로 7 공격대원들이 정찰을 나갔다 들어오길 반복했다.

"맵이 두 배로 넓어지는군."

"이점이 많아 참으로 탐나는군."

월드맵이 있으면 앉은자리에서 실시간으로 부대 위치를 볼 수도 있고, 지형지물도 한눈에 파악이 가능하니 천리안이 따로 없었다.

"잘만 구축하면 인공위성처럼 세상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것도 되겠어."

맵과 세력구축, 외계인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나아가다 보니 어느새 경계를 넘어버렸다.

맵의 섹터가 바뀌며, 검게 칠해져 있던 N344 지역의 경계 테두리가 뚜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 여기만 지나면 한양이야."

"고향에 가는 기분이군."

꽤 먼 원정길이었다.

신서울(C422)과 한양(C614)을 잇기 위해서는 두 개의 맵을 거쳐야 했다.

사막과 황무지뿐이던 D772 맵을 지나왔으니, 지금 밟은 N344 맵만 지나면 된다.

"처음 보는 유형의 맵이군."

"특별할 건 없는데?"

워낙 덥고 건조한 지역에 있다 와서 그런지, 적당히 습기 찬 공기가 약간 쌀쌀한 느낌마저 주었다.

거의 승마 여행이나 다름없는 두 대장덕에 구정욱 중령은 앞서가며 자신의 부대원들과 함께 탐험을 진두지휘했다.

"다들, 산개! 적당한 야영지를 찾는다."

20필의 말이 사방으로 달려나가며 맵을 밝힌다. 탐색 속도는 전보다 더 빨랐고, 발견지역도 전보다 세 배는 더 많아졌다.

앉은자리에서 맵이 밝혀지니 강철두는 그저 행군로를 잡으면 되었다.

"저쪽에 호수가 있군."

"저리로 가자."

N344 맵은 동서로 누운 고구마 모양처럼 생겼다. 일행이 진입한 지점은 오른쪽 끄트머리.

여기서 서남쪽으로 쭉 내려가면 아이언헤드 성과 한양이 있는 C614맵이다.

일행은 제법 넓은 호수에 도착해 야영지를 꾸리기 시작했다. 사막맵에서 넘어온 지 몇 시간 되지 않다 보니 아직 몸이 적응되지 않은 것이 느껴졌다.

날이 저물수록 제법 매서워지는 추위에 여기저기 모닥불을 두 배는 더 밝히고, 일찍이 천막을 치며 하룻밤을 날 준비를 했다.

타닥, 타닥.

모닥불 하나에 의자를 두 개 가져다 놓은 박준필이 철두를 찾았다.

"이보게, 철두. 여기 앉게."

"왜?"

"아, 왜긴? 맵 좀 띄워주게."

"거 귀찮게."

철두는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박준필의 옆에 앉아 맵을 활성화해주었다.

"저기 보이는 저 산이 문제군."

얼핏 봐도 까마득히 높은 산이다.

맵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저 멀리 시야에 보이는 산의 위치를 얼추 가늠해보았다.

"이쯤일 것 같은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박준필이 가리킨 맵의 지점은 하필 그들의 이동 경로 상이었다.

"둘러가야지."

"그러니까, 어디로?"

선택지는 둘이다.

북쪽으로 돌아가든지, 남쪽으로 돌아가든지.

철두는 이런 선택지에 있어 늘 같은 해결방식을 보였다.

"그건 산밑까지 가서 생각해도 된다."

"허허, 자네답구만. 난 여기 남쪽 길이 조금 더 끌리네만."

"좋아. 그렇게 하자."

"그리 빨리?"

철두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자꾸 귀찮게 왜 그러냐?"

"허허, 이 늙은 친구랑 말동무해주기가 그리 어려운가?"

"계속 뭘 물으니 귀찮다."

"하하하."

박준필이 고소를 삼켰다.

부러 철두를 귀찮게 하고 있는 게 맞았다.

'지금 배우고 익혀두게. 귀히 쓰일 걸세.'

박준필 중장.

쓰리스타의 노바군 1군 사령관의 관록은 우습게 볼 게 아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부대통솔 방법 등을 철두에게 전수해주려 했다.

"아, 내가 왜 위로 가는 것을 꺼리는 거 같은가?"

"모르지."

"우린 이 맵에 대한 정보가 없네. 이보다 더 위쪽은 맵의 중심지니.... 혹여 위험한 게 있을지도 모르지 않나?"

"후후,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군. 위험한 게 있다는 소리는 보상이 크다는 말과 같다."

"호오! 그럴 수도 있지."

박준필은 질문과 칭찬, 그리고 자신의 견해를 곁들인 여러 재질문 등으로 철두에게 부대통솔법을 주입식 교육했다.

"우리 부대 구성을 보게. 비전투원이 너무 많지. 애초 목적이 성으로 귀환하는 게 아닌가? 위험은 피하는 게 맞지. 중심부 탐사야 나중에 해도 될 일일세."

"시간 낭비 아닌가?"

"하하하하, 자네 한국 사람 다 되었군."

박준필이 기껍게 웃었다.

극한의 효율적 움직임은 한국 사람 종특이다.

"후후,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다면 하는 게 맞다."

"하지만, 리스크가 커지지."

"그건 나도 안다."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도 이미 경험해봐서 안다.

결투장의 진입과 부하들의 구원 사이에서 한번 선택한 적이 있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의 구분 정도는 한다."

"오호!"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

이제 그 정도 인내심과 선택은 철두에게 어려운 게 아니다.

다만.

"아래쪽으로 가는 게 더 안전하다고는 어떻게 장담하는가?"

"허허허, 내 자네를 얕봤군. 맞네. 이건 확률의 문제지. 우린 두 갈래 길 모두 가본 적이 없으니, 어느 것을 택하든 위험하긴 매한가지일세."

"확률이라...."

"이럴 때는 경험적으로 선택하는 거지."

바로 그 지휘관의 경험과 선택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하지만 철두의 생각은 이미 다른 곳으로 새버렸다.

"그러고 보니 그걸 안 봤군."

"뭐가 말인가?"

"후후, 보물을 찾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철두는 인벤토리에서 궤짝을 꺼냈다.

"오, 이게 결투에서 얻은 전리품인가?"

"맞다."

철두는 거침없이 궤짝을 열었고, 나온 물품에 고개를 갸웃했다.

"음?"

궤짝 안에 길쭉한 상자 수십 개가 나왔는데, 모두 같은 글자가 그려져 있다.

하지만 노바 까막눈 강철두는 읽을 줄을 몰랐다.

"흐으으으음."

"그렇게 노려보면 보이는가?"

"보이지."

철두는 탐색 스킬을 계속 시전했다. 탐색 스킬은 정보량이 너무 적어 엄청난 마력을 빨아들이고서야 상자의 정체를 까발렸다.

<노쓰우드 41년>

바리오 증류장의 최고 걸작.

54도의 독한 술로, 그 향과 풍미가 깊다.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

"술이다."

"음?"

박준필의 얼굴에 묘한 흥분이 어렸다.

"그러고 보니 양주 케이스 같군. 하나 열어봐도 되나?"

"좋다."

철두의 허락에 상자를 열었다.

딸깍.

"허어!"

상자 안에 곱게 놓인 술병을 보며 박준필이 탄식했다.

"이건 척 봐도 물건이야. 비싼 술일세."

"먹어보자!"

"그, 그래도 되는가?"

"전리품인데 뭐 어떤가? 구 씨."

"중령 구정욱."

안 듣는 척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구정욱 중령이 즉각 관등성명을 댔다.

"몇 병 가져가서 나눠 먹어라."

"헙! 감사합니다."

박준필이 감탄했다.

"허허, 내 자네 통 큰 줄은 알았다만, 이리도 호쾌하니 친우로서 덩달아 기분이 좋구만."

"술은 마셔야지."

"이거 못해도 값이 꽤 나가 보이는 술이네만."

상인의 인벤토리에 있었다는 것 자체가 판매 가치가 있다는 소리다. 어디서 팔 생각인지는 몰라도 어디에 내다 팔아도 값은 꽤 받을 것 같은 명주다.

"저것도 열어보세나."

"그러지."

끼에엑.

철두가 나머지 궤짝도 오픈해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돌인데?"

"옥같이 생겼군. 음? 따뜻한데?"

철두는 또 눈을 부라리며 돌을 한참 노려본 끝에 정보를 도출해냈다.

<보온석>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추위와 더위를 가시게 해준다.

여행자들의 필수품이나 다름없기에, 종종 현물거래에도 쓰인다.

"어? 이거."

"후후, 때마침 유용하겠군."

N맵의 특징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노을 지는 저녁이 지나고 보니 조금 더 쌀쌀해졌다.

일교차가 큰 날씨에 당장 요긴하게 쓰일 물건이었다.

"엘리스!"

"영주, 부름. 왔다."

일취월장하는 한국어 실력의 엘리스가 즉각 튀어왔다. 소통의 비약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연금술사의 항아리를 설치하기 전까지는 조금 아낄 필요가 있었다.

일상적인 심부름이나 지시 정도야 엘리스의 눈치가 빠른 덕에 문제가 없었다.

"하나씩 나눠줘라."

"헉, 감사. 영주 존나 좋다. 귀하다."

"후후."

엘리스는 보온석을 하나씩 나눠 주었다.

제법 쌀쌀한 날씨에 전혀 대비되지 않은 짧은 옷차림의 사람들이 돌 하나씩을 쥐고는 추위를 쫓으며 야영장 구축을 서둘렀다.

노을마저 사라졌을 때 야영지 구축이 완성되었다.

"영주님. 다했다. 안으로, 잘 자."

"후후, 고생했다."

철두와 박준필이 각자 막사로 가려 할 때였다.

"...?"

이거 우리보고 하는 소리인가?

그때 철두의 앞에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140화 새로운 퀘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