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새로운 퀘스트
<정착>
야영지 건설을 완료하였습니다. 당신의 부락은 이곳을 마을로 발전시켜 정착할 수 있습니다. 중심 건물을 지어 영역을 선포하십시오.
인근 지역에서 몬스터들이 더 이상 리젠되지 않습니다.
목표 : 마을회관 건설
보상 : 영역선포
"오!"
놀란 건 철두만이 아니었다.
"철두! '부족장의 결정을 대기 중'이라고 뜨네."
"저도 그렇습니다."
"흐음, 이리 와서 봐라."
철두는 퀘스트창을 보여주었다.
"허, 이런 게 뜨다니."
박준필은 고심을 거듭했다.
"이거, 이렇게 되면 던전을 차지하는 것 외에도 영지를 가질 수 있다는 것 아닌가?"
"그래 보인다."
철두는 퀘스트를 수행할 마음이 없었다.
"벌써 멀티는 이르지."
두 개의 영지를 원했다면 보르텡 남작성을 해체하지 않고 그대로 뒀을 터다.
박준필은 생각이 많아 보였다.
"정착 퀘스트가 생기는 조건을 모르겠군."
철두는 어깨를 으쓱했다.
친구끼리 힘이 되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모든 고민을 나누어야 하는가 하면 아니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난 잔다."
"어, 들어가 보게나."
철두는 막사로 들어가 하인들이 깔아둔 침대에 몸을 던졌다.
전투병력도 아닌 영주 개인의 일을 돕는 자들이 30명이나 되니, 어딜 가나 호사다.
30명의 하인을 둔 철두가 이러할진대, 천 명, 만 명, 수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진군하던 장군들은 정말 집을 떼다 옮기는 수준의 막사에서 매일 생활하지 않았을까?
물론 이게 철두의 스타일은 아니다.
"번거롭군."
지금 함께하는 영민들이야 아이언헤드 성에 도착하는 순간 성에서 계속 지내게 될 터다.
애초에 이들은 관리인단이니까.
말 그대로 성을 관리하고 돌보는 자들이다.
견습이긴 하지만, 전적의 돌을 만지고 노바라는 세계에서 직업으로 인정받은 이들.
"이들 때문인가?"
노바에서 인증받은 직업을 가진 자들.
그리고 그들이 하나의 휘장 아래 세력을 이루고, 이동하여 꾸린 야영지.
뭔지 모를 조건을 달성했대도 이상할 게 없다.
"상관없지."
알 바냐.
어차피 여기에 집 지을 일도 없는데.
이런 건 진태 녀석이 잘 분석한다.
각자 잘하는 걸 하면 된다.
그러니 지금 철두가 해야 하는 건.
'굴단.'
공작 굴단이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다.
영주라면 역시, 영민을 보호하는 게 최우선이다.
농사니, 기도원이니 대장간이니 하는 건 시종장 진태가 알아서 처리할 일이다.
영지를 돌아가게 하는 건 부하들이 할 일이고.
철두는 그런 영지를 지켜내기만 하면 그만이다.
"후후, 잘하고 있겠지."
영지 생각을 하니 두고 온 친구 녀석이 떠올랐다.
파수꾼을 잡으러 나온 것이 이렇게 되어버렸다. 그간 세력 창에 인구가 늘어난 것 외에 별 이상이 없는 걸 보니 잘 굴러가는 모양이다.
시답잖은 생각을 접고 잠이 든 철두는 꽤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다.
"신기한 돌이군."
보온석을 두고 자서 그런지, 지난밤보다 더 몸이 상쾌하다. 사막 맵에서 자고 일어났을 때는 아침부터 목이 갈라질 듯 아팠는데 말이다.
"철두, 잘 잤는가?"
"잘 잤다."
"허허, 그럼 행군로는 정했나?"
철두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또 그 소리군."
이번에 함께 오래 여행하다 보니 박준필의 잔소리가 보통이 아니다. 꼭 할아버지 강용철과 함께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양에 가면 자주 보지 말자고."
"허허허. 이 친구, 섭섭하게 갑자기 무슨 소린가?"
박준필은 그저 웃어넘겼다.
철두의 성격이야 진즉 파악이 끝난 그다.
'말이 직설적이라 그렇지, 거짓은 없지.'
외려 파악하기 쉬운 유형의 사람이다.
감정적으로 받아치지 말고, 말 그대로의 뜻을 해석하면 편하다.
"잔소리에 귀가 얼얼할 지경이다."
"하하하하하, 그게 어찌 잔소리인가? 다 뼈가 되고 살이 되는 귀한 경험이지."
"소나따."
"히이이잉."
철두는 말을 소환해 훌쩍 올라탔다.
"이동할 준비를 해라. 난 저기 저 산 위에 한번 갔다 오지."
"하하하, 해답이 그것인가? 그것도 좋지."
지휘관의 스타일에 따라 작전도 달라진다.
강철두는 높은 산을 올랐다.
행군로를 어디로 정할지는 아마 산에 올라서 직접 보고 결정할 요량인가 보다.
"후후, 자넨 좋은 지휘관이 될걸세."
박준필은 멀어지는 강철두를 묵묵히 응원하고는 야영장 정리를 도왔다.
두두두두두.
철두를 태운 무쇠 얼룩말 소나따가 미친 듯이 질주했다.
"키이이."
"캬우!"
마주치는 몬스터들을 무시한 채 빠르게 달렸으나, 개중에는 재빠른 녀석들도 있어 한 번씩 창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콰직!
"꾸에에에."
비명과 함께 죽은 몬스터는 전령 슬라임 꾸이가 재빠르게 가서 전리품을 회수해온다.
발걸음을 멈출 필요도 없는, 그야말로 거침없는 진격.
영웅의 부족한 점을 메꿔주는 전령답게 철두를 완벽 보조해주는 꾸이였다.
"비룡이 아른아른거리는군."
소나따가 열심히 달리고 있었지만, 산에 가까워질수록 마켓에서 본 비룡의 모습이 아른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놈이 있었으면 산을 오를 것도 없이 사방팔방 정찰이 가능할진대 말이다.
소나따는 슬슬 산의 초입에 다다랐다.
멀리서도 높다 싶었는데, 가까이서 올려다보니 까마득하게 높았다. 덩그러니 홀로 놓인 산은 경사도 가팔라, 더 이상 말을 타고 오를 만한 길이 아니었다.
"수고했다."
"히이이잉."
질주 스킬을 남발하며 달린 소나따를 인벤토리에 넣어버리곤, 철두는 두 다리에 힘을 줘 달렸다.
타타타타타!
도움닫기 끝에 마력을 모아 한껏 높이 뛰었다.
"우어어어어!"
도약 한 번으로 수십 미터를 솟구친 철두가 절벽이나 다를 바 없는 산비탈에 찰싹 달라붙었다.
"후후후."
철두는 한산이동 골든빌 204호에 살 때도 자주 뒷산에 들러 지금처럼 산을 타곤 했다.
한국이 희한하게 악산이 많아, 등산로 아닌 길로 다니면 제법 수련이 되었었다.
파파파파파!
빠르게 팔다리를 놀려 산비탈을 오르고, 제법 평탄한 길이 나오면 도움닫기 후 도약으로 오르자 순식간에 산 중턱까지 올랐다.
수직으로 오르다가 비탈면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북쪽으로 향했다.
맵의 중심지인 북쪽으로 가면 경로상에....
"음? 성이네?"
멀리서도 확연히 보인다.
성이 크다.
보르텡 남작성보다 크지만, 굴단 공작성보다는 작다.
그렇다고 전력을 낮게 평가하기에는 성 변두리로 늘어선 건물들의 면적이 상당하다.
외성벽은 존재하지 않았으나, 그 면적만으로 따지면 신서울의 네 배는 되는 크기였다.
"도시군."
높진 않지만 규모가 거대하다.
공작일까?
아무튼 대귀족이 살지 않을까?
"제국령이라더니."
제국 소속의 귀족 중 하나가 주인이겠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 안에 살고 있을까?
"으음."
철두가 찬찬히 주변을 더 살펴보았다.
"마을이네?"
너무 멀어 자세히 보지 않았으면 지나쳤을 정도의 규모다.
한양이나 용전마을보다도 더 작은 마을들이 맵의 군데군데 있었다.
하나하나 숫자를 세보던 철두는 스물이 넘어가자 세기를 멈췄다.
"존나 많군."
철두는 산을 빙 둘러 이제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올랐다.
파파파팟.
어찌 된 것이 꼭대기로 가면 갈수록 나무나 풀보다 암석이 훤히 드러난 바위산이 많았다. 자연스레 등산 코스로는 최악의 경사도를 마주했고, 철두는 바위를 암벽 오르듯 올랐다.
"저기서 보면 다 보이겠군."
나무 때문에 시야에 제한이 생기니, 저기 저 아파트 같은 바위산까지만 올라야겠다.
"우어어어!"
훌쩍 도약해 바위산에 오른 철두는 남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정찰했다.
"하나, 둘, 셋...."
무슨 개미 떼가 이주해온 것도 아닐진대 산을 빙 둘러 남쪽 방면으로도 제법 많은 마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철두는 일곱쯤 세고 더 찾으려다가, 오싹한 기분에 얼른 몸을 납작 엎드렸다.
후우우웅!
등 뒤로 날카로운 무언가가 긁고 지나갔다.
"웬 놈이냐!"
뒤로 돌아보니 커다란 발톱을 움켜쥐며 날갯짓 중인 거대한 생명체가 있었다.
후우웅. 후우웅.
"어?"
철두는 너무 놀라 손가락으로 녀석을 가리켰다.
"뭐냐, 넌?"
커다란 몸통이 황소보다 더 큰 녀석이었는데 생긴 게 괴상하기 그지없었다.
적어도 철두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괴생명체다.
"끼아아아아!"
녀석이 뾰족한 부리를 벌리며 괴성을 지른 것에서 모자라 빠르게 앞발을 휘둘렀다.
"웃!"
콰직!
철두가 피하니 녀석의 발톱이 허공을 갈라 바위를 움켜쥐어 파냈다. 앞발 힘이 엄청난 녀석이다.
'독수리냐? 사자냐?'
저런 녀석을 뭐라고 불러야 하지?
대가리는 영락없는 맹금류의 그것이고 어깻죽지에 붙은 날개 또한 그렇다.
앞발은 맹금류의 기다랗고 갈고리 같은 손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뒷발은 도톰하고 굵직한 것이 포유류의 그것이다.
가늘고 긴 꼬리도 영락없이 사자나 개과의 것인지라 생김새가 요상했다.
상체는 독수리, 하체는 사자였으나 합치고 보니 괴상하기 그지없다.
"무엇이면 어떠랴?"
녀석의 몸통은 황소보다도 더 크고, 활짝 펼친 날개는 10미터가 넘었다.
후웅, 후웅.
과연 장식용이 아닌지, 녀석은 두툼하고 굵은 뒷다리 힘으로 뛰어올라 날개를 퍼덕여 하늘로 높이 날아오르더니 산꼭대기 주위를 맴돌았다.
"후후후후후."
철두는 저 거대한 덩치가 활공하는 것을 보며, 비죽비죽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기 고역스러웠다.
"끼아아아!"
녀석의 날카로운 괴성에 신경질이 가득하다.
철두는 훌쩍 도망가지 않은 녀석의 호전성이 기꺼웠다.
"흐흐흐, 그래 와라!"
쐐애애애애.
철두는 아예 대놓고 무방비한 모습을 보이며 녀석을 유인했다. 괴생명체는 철두를 향해 매섭게 낙하해왔다.
콰직!
맹금류와 같은 녀석의 앞발이 철두의 몸통을 집어 들었고, 묵직한 무게에 잠깐 비틀린 균형을 날개로 잡고는 굵은 허벅지를 가진 뒷다리로 힘껏 점프했다.
"키아아아!"
승리했다.
인간 녀석을 잡아챘다.
이제 이놈을 저 위 하늘에서 떨어트리면 죽는다.
기쁘다.
"흐흐흐, 너도 좋냐? 나도 좋다."
"...끼아?"
승리의 포효가 비명으로 바뀌는 데는 찰나면 충분했다.
꽈드득.
"끼아아아!"
앞발가락이 부러졌다.
"후후후."
뿌드득.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인간을 잡아채고 있던 앞발 정강이가 부러졌다.
"끼아아아!"
푸드덕 푸드덕.
그리핀이 고통에 겨워 몸부림치자 높이 날아올랐던 몸체가 바닥으로 추락하다가 다시 균형을 잡고 활공했다.
용케 팔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은 철두는 괴물의 털을 잡아채고 재빠르게 등에 올라탔다.
찌익.
와중에 옷이 걸리는 느낌이 있어 살펴보니 부러진 활대다. 털이 피에 젖은 것이 적어도 화살 서너 방은 맞은 듯했다.
"아프구나!"
철두는 히죽 웃으며 녀석의 등에 완전히 올라타 목을 조였다.
"후후후, 나의 탈것이 되어라. 치료해주마."
"끼아아아!"
미친 인간! 떨쳐 내리라.
푸드덕, 푸드덕!
발버둥 쳐봤으나 인간의 용력은 대단했고, 좀처럼 떨어지질 않았다.
"끼아아아아!"
그렇다고 마음이 꺾이진 않았다.
어디 마음대로 매달려 있어봐라. 네 녀석이 굶어 기력이 다할 때까지 하늘에서 내려주지 않을 테다!
"후후후. 마음에 들어."
철두는 날개 달린 괴물의 호전성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 정도 대쪽은 있어야지.
꽈드득.
"...?"
날갯죽지 양쪽을 꺾어버렸다.
뼈가 부러지며 날개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끼아아아아!"
쇄애애애액.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하는 괴물의 목에 매달린 철두가 속삭였다.
"흐흐흐."
"끼아아!"
"죽을래? 나랑 살래?"
"...."
미친 인간이다.
동반 자살을 택하다니.
쐐애애애액.
멀찍이 보이던 땅이 훅하고 가까워져 온다.
선택의 시간이 다가왔다.
141화 그리핀 라이더
<주화 10290개로 탈것을 등록하시겠습니까?>
<주화 10290개로 펫을 등록하시겠습니까?>
"탈것!"
철두는 펫 2마리, 탈것 2마리를 길들일 수 있다.
그의 팔뚝에 새겨진 4개의 동그라미 중에 자리를 차지한 것은 하나뿐.
펫 칸의 무쇠 얼룩말 소나따뿐이다.
이왕이면 빈칸이 두 개인 탈것이 낫겠지.
파파팟.
고블린 주화 만여 개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빛이 괴물을 길들였다. 의식의 한쪽이 실타래가 되어 얽힌다.
"그리핀이었군!"
<탈것의 이름이 설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리핀으로 설정하시겠습니까?>
이름.
신중해야 한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날개 꺾인 그리핀의 동체가 빠르게 떨어져 내리고 있어 이제 지면이 멀지 않았다는 것.
"어, 그랜드! 는 겹치고...."
쐐애애애액.
자동차는 안 된다.
나는 것 중에 이름 뭐 있지?
철두는 그답지 않게 당황했다.
왜 날개 달린 놈은 치킨밖에 안 떠오르지?
"오식이!"
<오식이로 설정되었습니다.>
후욱, 하고 얽힌 실타래가 단단히 꼬여 철두와 연결된 것이 느껴진다.
탈것을 길들였다!
철두는 펜던트를 쥐고 서둘러 소리쳤다.
"여신! 오식이를 치료해달라!"
<대상이 잘못 지정되었습니다.>
<탈것은 역소환시 자동으로 체력, 생명을 회복합니다.>
"어?"
이건 계획에 없던 건데?
철두는 훅 가까워지는 지면을 보며 서둘러 오식이를 역소환했다. 죽어도 어차피 시간이 다시 지나면 소환이야 가능하지만, 쿨타임이 너무 길다.
후우우웅!
철두는 여전히 날개 없이 추락하고 있었지만, 이 상황이 즐거웠다.
"후후후."
이 정도 높이에서 낙법하는 건 나도 해본 적이 없긴 한데.
철두는 몸을 버둥거리며 바람을 맞아 떨어지는 방향을 살짝 사선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이제 지면과 부딪히는 순간 재빠르게 몸을 굴려서!
콰아아앙!
철두의 육중한 몸이 바닥에 처박히고도 한참 더 굴러갔다.
퍼퍼퍼퍼퍽!
수십 미터를 굴러간 철두의 몸이 대자로 뻗어버렸다.
"흐흐흐흐."
존나 아프군.
하지만 살았다.
처음 착지한 두 다리가 부러져 뒤틀려 버렸지만 상관없다.
"후우."
벌떡 몸을 일으키고 싶었으나, 격통을 참으며 상체를 슬쩍 일으켜 세우는 게 고작이었다.
"끄읍."
고통을 참으며 기이하게 뒤틀린 다리를 힘줘 돌렸다.
뿌드득.
"흐음."
이를 악물고 다리를 쭉 뻗게 한 다음에 소리쳤다.
"후후, 여신 나를 치료해달라!"
철두의 진심 어린 기도가 닿아 또 한 번 기적이 일어났다.
파파팟.
여신에게 올리는 기도 덕에 펜던트에서 난 빛이 철두의 몸 전체를 감쌌다.
철두는 다리를 꼼지락거리더니 이내 일어나 씨익 웃었다.
"후우, 후후후."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와라. 오식이."
파팟.
처음 길들인 탈것.
철두는 오식이를 꺼내자 부러져 축 처진 날개가 눈에 들어왔다.
"불쌍한 것."
철두가 다가서자 오식이가 움찔했다.
"포션은 되겠지?"
철두는 포션을 꺼내 날개에 뿌리자 살이 타는 냄새를 내며 뼈가 빠르게 붙었다.
"오!"
생명력은 차오르는데, 체력은 그와 비례해 줄어든다. 외부적인 힘에 의한 기도와는 달리 포션은 자가회복의 속도를 올려주는 약이어서다.
치료하는 김에 화살 맞은 곳도 살폈다.
"이건 어디서 맞은 거냐?"
푸슉.
그리핀의 몸체 군데군데 박혀있는 부러진 화살을 뽑고 보니 무려 여섯 개나 되었다.
푸시시시.
상처에 포션을 뿌려 치료하고 보니 녀석의 체력은 상당 부분 낮아져 있었다.
<오식이>
종 : 그리핀
등급 : A+
생명 : 77%
마나 : 44%
체력 : 12%
특성 : 포식, 강화
기술 : 급강하, 도약
A등급이라 그런지 B등급인 소나따보다 특성이 하나가 더 붙어 있었다.
포식 - 사냥감을 먹어 체력을 회복한다.
강화 - 강화된 신체는 바위와 같이 단단하다.
강화 특성이 발톱에 적용되면 바위를 움켜 챌 정도고, 몸에 적용되면 어지간한 화살은 튕겨낼 정도다.
이런 녀석에게 상처입힌 화살을 누가 쏘아 보냈는지 모르지만, 누구든 상관없다.
"후후, 이제 내가 지켜주마."
아직 체력이 12%면 잠시 동안은 날 수 있겠지?
그리핀의 위에 올라타 털을 움켜쥐었다.
"가자!"
굵은 사자의 뒷발이 크게 지면을 박차고 여기에 마나를 더하자, 날개 없이도 충분히 하늘로 몸을 띄워 올렸다.
후우우웅, 후우우웅!
이내 열심히 퍼덕이는 날갯짓에 몸이 위아래로 요동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하늘 위에서 저항 없이 맞이한 바람에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흐르고,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에서는 침이 샜으나 기분은 한껏 고무되었다.
"흐흐흐흐."
하늘을 나는 게 이런 기분이군.
지금 이 순간은 굴단 마켓에서 보았던 비룡이 부럽지 않았다.
왔던 방향으로 되돌아가니 한 떼의 기마대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후후후."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건 이런 기분이군.
박준필과 일행들이 그리핀을 발견하고는 동요하는 게 하늘 위에서 다 보였다.
"후후!"
조금 놀래켜 줄까?
장난치기 전의 아이 같은 미소가 얼굴에 짙게 뱄다.
후우우웅!
마나가 조금 스며들며 급강하를 시전했다.
쐐애애애액!
하늘에서 바위가 떨어져 내리면 이렇게 보일까? 갑자기 훅하고 떨어져 내리는 그리핀의 모습에, 여기저기 말을 역소환하며 일행들이 납작 엎드렸다.
후우우우웅!
지면에 닿기 전 날개를 활짝 펴고, 바람을 일으키며 속도를 줄였다. 종내에는 차분히 착지하여 일행들을 보았다.
먼지 바람 사이로 여기저기 삐죽 솟아난 창들이 보인다.
"후후후. 나다!"
긴장하며 창진을 이루던 부대원들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닛! 영주님!"
"헉! 어떻게 된 겁니까?"
그래, 더 물어라.
더 격렬하게 놀라워해라.
"철두!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후후, 준필."
강철두는 훌쩍 뛰어내려 바닥에 착지하곤 그리핀의 배를 두들겼다.
"그리핀이다."
"허어, 설마 길들인 건가?"
"그렇다."
"이럴 수가! 비룡을 보고 온 게 엊그제인데, 그리핀이 어찌 이리...."
때맞춰 나타날 수 있는 거지?
과연 자신의 친우는 천운을 타고난 자가 아닐까?
"허허허, 대단허이."
"후후후, 별거 아니다."
철두의 어깨가 한껏 올라갔고, 뒤로 젖혀진 고개에 콧구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허허허, 광대나 집어넣게. 일단 가면서 이야기하세나."
"후후, 그러지."
철두는 그리핀을 역소환했다.
잠깐 비행했는데 체력 수치가 벌써 간당간당하게 1%이다. 조금만 더 비행했으면 체력이 고갈되어 생명력이 줄어들었을 터다.
'장기비행은 무리야.'
연비 나쁜 비행기를 얻었다.
아니, 헬리콥터에 가까우려나?
어쨌든 포식 특성 덕에 빠르게 체력을 회복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한 번 비행의 시간은 제법 짧은 편이리라.
"히이이잉!"
철두는 펫 소나따를 소환해 타고는 일행의 선두에 복귀했다. 한참 그리핀을 길들인 무용담을 늘어트리며 말을 몰았다.
"허허, 대단허네. 그래서 이름은 뭐로 지었나?"
"으음."
"아직 짓지 않았나?"
"아니다."
"허면?"
"오식이다."
"음? 치킨?"
"...."
철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렇다. 생각나는 게 그것뿐이었다."
철두 식성에 맞추느라 매번 할아버지가 사준 게 오식이 두 마리 치킨이다. 퍼뜩 다른 날개 달린 것이 떠오르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BBBQ로 지었어야 했는데....
"정감 있고 좋군그래."
"...그치만 오식이는 두 마리인데."
"하하하하."
박준필이 웃으며 꿈보다 해몽을 시전했다.
"상체는 독수리고 하체는 사자니, 두 마리 아닌가? 제법 어울리는 이름일세!"
"음? 준필이 너는 천재인가?"
철두는 생각할수록 딱 들어맞는 이름에 흠칫 놀랐다.
'이것이 운명?'
나는 사실 천재가 아니었을까?
"후후후."
철두는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하하하, 그래서 진군로는 정했나?"
"남쪽으로 가자. 마을이 몇 개 없어, 외계인 마을과 마주치지 않고 행군이 가능하다."
"북쪽은 어떻던가?"
"큰 도시가 있다."
"으음, 좋지 못한 소식이군."
철두의 본거지인 아이언헤드성과 한양이 위치한 C614 맵과 바로 인접해 있는 N344 맵이다.
하필 여기에 도시를 가진 세력이 있다는 건 아무리 좋게 생각해 봐도 호재는 아니었다.
"어서 돌아가야겠구만."
"동감이다."
어서 빨리 돌아가 진태에게도 오식이를 자랑하고 싶다.
"허허, 자네도 영주 다 됐구만."
"음?"
"수장이란 건 그런 걸세. 자리에 있고 없고 차이가 크지."
"...?"
"어서 빨리 돌아가서 자리를 지키세."
"그러지."
어쨌든 빨리 돌아가고 싶은 것은 사실.
일행은 말을 빨리 달렸다.
그리고 하루 뒤, 그곳에 한 떼의 인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곱 명의 일행이었는데, 철갑을 입은 기사 차림의 사내가 셋이고, 사냥꾼 차림의 궁수들이 셋, 로브를 뒤집어쓰고 지팡이를 든 자가 하나였다.
전형적인 추적자 무리.
"브롤, 이쪽이 맞나?"
"그래. 추적마법이 이쪽을 가리키고 있어."
"흐음, 산에서 계속 멀어지는데?"
"내 마법을 믿지 못하는 건가?"
"아니, 자네 마법이야 믿지."
마법사 브롤은 인상을 쓰며 말했다.
"멀지 않았어. 어제부터 움직임이 없어."
"쳇, 재수 없게 죽었으면 어쩌지?"
"그럼 우리 다 목이 잘리겠지."
"이봐.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고 길이나 잡아라."
"예에. 그러죠."
기사 중 하나가 사냥꾼과 마법사의 잡담을 핀잔주며 속도를 높였다.
한참 달린 그들은 공터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뽑혀나간 화살들뿐이었다.
브롤은 그중 하나를 쥐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화살촉은 공명하듯 푸른빛을 내뿜어댔다.
"누가 낚아챘군."
"설마 길들인 건가?"
사냥꾼들이 슬금슬금 기사의 눈치를 봤다.
탈주한 그리핀 추적대를 이끄는 기사 지롤 또한 낭패한 얼굴이 되었다.
"왕국의 재산이다! 흔적을 찾아라!"
"예에."
사냥꾼들이 주변에 흩어져 흔적을 찾는 시늉을 하며 구시렁댔다.
"시발, 날개 달린 놈이 도망치는데 흔적이 어딨냐?"
"조졌네, 이거."
"의뢰를 맡는 게 아녔어."
"다른 나라로 망명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하필 왕국 정식 의뢰를 맡았다가 괜히 불똥이 튀게 생겼다.
사냥꾼들은 눈치 보며 주변을 수색하는 시늉을 하다가 기마대의 흔적을 발견했다.
"음? 오십 기 이상이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파티가 아닌데?"
"적어도 용병단급이다."
"정규군일 수는?"
"그럴 수도 있지."
"여기 맵 영주가 나트롱 백작이던가?"
사냥꾼들은 찾아온 정보를 기사들에게 넘겼고, 그리핀 추적대의 책임을 맡고 있는 지롤은 빠르게 답을 내렸다.
"이 흔적을 따라간다!"
감히 왕국 재산을 빼돌리다니.
"이 기마대가 그리핀을 훔쳐간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상관없다!"
지롤의 음성은 단호했다.
그리핀을 훔쳐갔든 아니든 책임을 질 자는 필요했다. 지롤은 그것이 자신이 아닌, 타인이길 바랐다.
도둑놈이 없다면, 도둑놈을 만들어서라도.
"호르크 경. 자네는 나트롱 백작에게 가라. 그에게 협조를 구해라."
"만약 그가 범인이면 어떻게 합니까?"
"그럼 이 흔적이 나트롱 백작성으로 이어지겠지."
"헛, 알겠습니다."
기사 호르크가 나트롱 백작성이 있는 북쪽으로 떠나고, 나머지 6인의 추적대는 기마대의 흔적이 남은 서남쪽으로 나아갔다.
143화 대립
아이언헤드 성의 북쪽에 생긴 마을로 당장 떠나려는 강철두를 김진태가 말렸다.
"유격대랑 같이 가!"
"당장 준비시켜라."
"성 밖에 훈련 나갔어. 불러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아이언헤드성의 전력 절반 이상이 강철두 개인에게서 나온다.
철두 혼자 가도 해결이야 보겠지만, 조금의 과시만으로도 협상이 가능하다면 후자가 낫다.
그리고 철두가 자리를 비울 때를 대비하자면, 철두 혼자 가는 것보다는 부대를 이끌고 나가는 게 좋다.
영지의 수비병을 제외하면 지금 가장 정예화된 병력은 최준섭이 이끄는 유격대다.
"후우, 알겠다. 기다리지."
철두는 마침 궁금한 게 있어 물었다.
"용병대 사람 수가 늘었던데, 영지민들을 받은 거냐?"
"아, 몇 명 정착민으로 받긴 했는데, 대부분은 신병이야. IH 그룹에서 보냈어."
서종두가 선별해서 보낸 이들이다.
나름 운동을 했거나 피지컬이 좋은 이들로 가려 뽑아 보냈으니, 지금은 초보 노비스들이지만 머지않아 제 몫은 해내는 병사들이 될 터다.
"대장님!"
"오, 종두."
"크흡, 명하신 대로 다 처리하고 넘어왔습니다."
"오, 잘했다."
뭘 했는지를 묻지도 않으신다.
'아아, 큰형님의 그릇은 대체....'
서종두는 그래도 보고는 해야 할 것 같아서 말문을 열었다.
"근본을 잊지 말라는 말씀대로, 넘겨받은 계열사 대부분을 정리했습니다. 일단 유통과 건설 두 가지만 남겨두었습니다."
부실덩어리 계열사들을 모조리 정리해버렸다.
"후후, 잘했다."
서종두가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역시 이것이 맞았구나.
"두공 그룹에서 많은 도움을 주어 신속하게 처리했습니다. 정부에서도 발 벗고 나서줬습니다."
"두공 그룹?"
"예, 일전에 최두식 회장과 엮인 일이 있으셨는데...."
"아아, 그 할배."
일식집에서 김동춘을 잡아올 때 보았다.
"네, 남은 건설도 대부분의 자산을 처분했으며, 청주 인근에 부동산을 사들여, 아포칼립스를 대비한 공사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맡겨뒀으니 지구의 회사 일은 알아서 해라. 그리고 지금처럼 진태한테 신병들을 자주 보내라."
"넵! 김진태 시종장님을 빈틈없이 보필하겠습니다."
서종두의 깍듯함에 김진태는 어색하게 웃었다.
나이 많은 아저씨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꾸벅꾸벅 하는 게 이제 익숙해질 만도 했지만, 영 적응이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진태가 성 밖에 사람을 보내는 사이, 반가운 얼굴이 면박과 함께 등장했다.
"철두 이놈아!"
"할배!"
"어디를 그래 싸돌아댕기노! 여까지 할배 데리고 와놓고 싸돌아댕기는 거는 똑같구만!"
"후후, 잔소리하지 마라."
지구를 통했다가, 파주로 이동, 신서울로 갔다가 보르텡 남작을 처치하고 다시 여기까지 오느라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
노바의 시간으로 한 달이 훌쩍 넘는 일정이었는지라, 철두를 끌어안고 등을 두들기며 투정하는 강용철의 눈가는 축축해져 있었다.
"건강한 거 봤으면 됐다. 일 봐라."
"알았다! 이따가 밥이나 먹자!"
할배랑 따뜻한 저녁밥을 먹으려면 유격부대가 빨리 와야 할 터인데, 아직도 소식이 없다.
유격부대보다 먼저 아이언헤드 성에 당도한 것은 박준필의 한양수비대와 엘리스의 관리인단이었다.
"여기는.... 아니다. 네가 먹어라."
철두는 자신이 통역해 주려다 엘리스에게 직접 소통의 비약을 건네주었다.
"이, 이곳이 영주님의 성입니까?"
보르텡 성에 비해 뒤지지 않는 크기의 우람한 성을 보자 엘리스를 비롯한 영민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보르텡 남작을 단번에 처치할 정도의 실력자인 것은 진즉 보고 알았지만, 가지고 있는 성도 훌륭할 줄은 몰랐다.
"여긴 시종장 김진태다. 말 잘 들어라."
"아아, 시종장님."
엘리스는 영주성의 내정 총 책임자 앞에 공손히 무릎 꿇었다.
"예, 예?"
갑자기 미모의 여성이 등장하자 김진태는 적잖이 당황했다.
"이, 일어나세요."
"명을 따릅니다."
엘리스는 자신의 역할을 잘 알고 있었다.
"영지를 둘러보고 적재적소에 인원을 배정하겠습니다."
"어, 그렇게 해요."
"예에."
엘리스가 관리인단을 데리고 떠나자 김진태가 호들갑을 떨었다.
"야야, 이거 뭐냐? 왜 저렇게 저자세이시냐?"
"지구인이 아니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야?"
"바보냐? 제국은 계급제다."
"어어...."
김진태의 눈알이 데굴데굴 굴렀다.
"얼굴이 왜 빨개지냐?"
"아, 아닛! 그게 아니라. 어?"
김진태는 횡설수설하더니 철두를 보며 급히 말을 돌렸다.
"우리도 계급제 할 거야?"
"넌 제국 놈이냐?"
"어?"
"굳이 따라 할 필요는 없다."
"그렇긴 하지."
김진태는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근데 이미 뭐....'
말만 이리 편하게 하지, 이미 아이언헤드 영지에서 철두의 위상은 절대적이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라."
"음?"
여전히 복잡한 표정의 진태와 다르게 강철두는 확고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국가에 대한 소속감?
출신에 대한 유대?
종족에 대한 친밀?
철두는 지난 삶 어디에도 끼지 못한 이방인이자 낯선 존재로 살아왔으나, 이제는 스스로를 정의하며 마음의 번뇌를 벗었다.
"나 강용철의 손자 강철두는 아이언헤드의 부족장이다!"
"허."
김진태가 눈을 번쩍 떴다.
뭔가를 깨달아서는 아니고, 머리통이 깨질 듯 아파서다.
"미친놈아, 대가리 터져!"
"후후, 실수다."
철두가 진태의 머리를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다행히 친구는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네 말이 맞다. 우린 우리지."
"문제가 해결된 얼굴이군."
"제도 정비도 해야 하는데...."
김진태는 다시 머리가 아파 오는 것 같았지만, 차차 생각하기로 했다.
그때 갑자기 김진태의 세력창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어? 농장 활성화됐어!"
김진태는 세력창에 나타난 변화에 진심으로 놀랐다.
철두는 그런 진태의 반응을 보고 가슴을 쫙 폈다.
"새로 데려온 이들이 모두 직업이 있어서다."
견습이긴 하지만 엄연히 노바의 세상에서 인정받는 직업을 가진 이들.
영지 시설을 활성화할 인재들이 이제 영주성에 합류했다.
"연금술사의 연구실하고 마구간은 꼭 만들어야 한다."
"와아, 쩐다. 방금 대장간도 활성화됐어."
김진태는 기쁘면서도 어딘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장 씨 아저씨 어쩌지?'
그간 장소철이 대장간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애쓴 노력을 알기에 절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여전히 직업을 얻지 못한 '정착민'이다.
"직업을 얻으려면 전직의 돌이 있어야 한다."
"전직의 돌? 어디서 얻는데?"
"모르지."
"으음, 아직 갈 길이 머네."
아이언헤드 부족은 이제 막 시작하는 세력.
갖춘 것보다 갖춰야 할 시설들이 더 많다.
가진 시설들도 비활성화 상태인 게 대부분이었는데, 엘리스와 관리인단의 합류로 그간 비활성화 상태던 시설들이 단번에 활성화되어 다행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어느 날 창고에 물품들이 진짜 미친 듯이 들어왔길래 깜짝 놀랐는데, 그게 보르텡 남작 성 해체한 거구나."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
"자재는 내가 좀 썼어."
"봤다. 건물 많이 지었더라."
철두는 더 이어지려는 친구의 말을 잘랐다.
"어차피 네게 맡긴 일이니 알아서 해라. 준섭이는 아직인가?"
"곧 올 거야."
철두와 진태는 성문의 위에서 밖을 내다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사람이 좀 많아진 거 같은데?"
"여긴 새 발의 피다. 한양은 지금 난리다."
"한양이?"
"청주 포탈 열렸으니까, 신규 노비스들 미친 듯이 들어온다."
"으음."
때마침 박준필이 다가왔다.
파견 정보소대장 최승아에게 보고를 받고 오는 길이라 썩 표정이 좋지 못했다.
"철두, 내 마음 같아서는 하루 푹 쉬다 가고 싶은데 말일세."
"아니다. 급하면 가야지."
"음? 어찌 그리 반기는가?"
"후후, 너는 잔소리가 너무 많다."
"하하하, 내 한양의 일만 급히 처리하고 다시 들름세."
"천천히 와라. 천천히."
철두는 냉큼 한양 수비대를 세력에서 추출해주었다.
<한양 수비대가 휘하를 떠납니다.>
이제 한양 수비대는 독립된 부대다.
"휘장은 내 꼭 갚음세."
"당연하다."
철두는 쿨하게 박준필을 보내주었고, 박준필도 한양의 사정이 좋지 않았기에 얼른 부대를 이끌고 길을 나섰다.
"너, 박 중장님하고 싸웠냐?"
"아니, 말이 너무 많다. 같이 있으면 기가 빨린다."
"으음."
"후후, 역시 진태 네가 편하다."
"허, 그거야 당연하지."
괜히 부랄친구가 아니다.
두 친구는 떨어져있었던 시간만큼, 각자 일어난 여러 일들을 공유했다.
"저기 오는군."
철두는 멀리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다가오는 기마대를 보고 훌쩍 성벽 위에서 뛰어내려 소나따를 소환해 탔다.
"히이이잉!"
"후후, 저녁은 잔치다, 진태."
"어어, 다녀와. 차려놓을게."
영주님이 한 달이 넘도록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왔다. 잔치를 열 명목으로는 충분했다.
두두두두두!
철두를 태운 소나따가 기마대를 향해 나아가 합류해 그대로 방향을 꺾어 북쪽으로 향하는 게 보였다.
"잘하겠지."
어차피 부족장은 철두.
그가 하자는 대로 부족의 내정을 잘 이끄는 게 자신의 역할일 뿐이다.
김진태는 관리인단 수장을 찾아 나섰다.
"엘리스라고 했던가?"
이름도 예쁘네.
많은 대화가 필요할 것 같았다.
아, 영지의 발전을 위해서.
*
기마대를 추격해 신맵에 발을 디딘 지롤은 저 멀리 떠오르는 그리핀을 보았다. 사냥꾼들도 발견했는지, 호들갑을 떨었다.
"그, 그리핀이다!"
"오, 맙소사!"
까마득히 멀리 점처럼 보이는 것을 사냥꾼들이 먼저 발견했고, 잠시 후 지롤도 육안으로 그리핀의 존재를 확인했다.
"속도를 높인다."
"예이."
좀 더 속도에 박차를 가해 달리자 저 멀리 기마대의 후열도 가시거리에 들어왔다.
'짐작이 맞았군.'
기마대는 제국군이 아니다.
용병 무리일까?
그리핀이 나아가는 방향과 정체불명의 기마대가 가는 방향이 같았기에, 지롤은 거리를 두며 따라갔다.
이보다 더 접근했다가는 추격이 들킬 판이다.
적의 소속도, 전력도 모르니 섣불리 나설 수가 없다.
"저기 성이 있습니다."
"으음."
사냥꾼의 말에 지롤의 표정이 굳어졌다.
'적어도 자작성 이상.'
제법 낡아 보이는 고성이지만, 성의 규모가 상당하다.
그리핀은 저기로 날아간 것이 틀림없다.
기마대마저 성으로 향하니 확실하다.
"어떻게 할까요?"
지롤은 잠깐 고민했다.
"너."
"예에."
"정찰을 다녀와라."
"예에? 제가요?"
사냥꾼은 퍽 맡기 싫은 듯 얼굴에 불만을 그대로 드러냈다.
지롤은 이런 놈들을 다루는 법을 잘 알았다.
지롤의 오른쪽 손등이 빛나더니 손아귀에 1000이 양각된 커다란 고블린 주화 3개가 쥐어졌다.
"놈들이 어디 소속인지, 대강의 전력은 어떤지 정도만 파악하면 된다."
"어이구, 당연히 제가 나서야지유."
사냥꾼이 안색을 바꾸곤 3천 주화를 챙기곤 말을 달려 성으로 향했다.
사냥꾼답게 '추적', '조사', '분석' 기술을 가진 자였다.
144화 충돌
두두두두.
기마대가 달렸다.
소나따에 탄 철두가 뒤를 힐끗 보더니, 옆에서 달리고 있는 최준섭에게 물었다.
"수가 더 늘었군."
"네, 50명 꽉 채웠습니다. 벌써 대기까지 섰습니다. 들어오고 싶어 난리입니다."
"후후, 정원을 늘려라."
"어유, 주화가 있어야 하죠."
"이따 저녁에 주지."
"하하, 역시 형님이십니다."
최준섭은 나이 적은 형님을 따라 말을 달리며 브리핑했다.
"요놈들이 요즘 들어 자꾸 신경 거슬리게 출몰하는 게 영 아니꼽더라고요."
"왜 내버려 둔 거냐?"
"아, 싸울 때 싸우더라도 대장님 허락은 맡아야죠."
아무리 성격이 자유분방하다고 하더라도 군인 출신인 최준섭으로서는, 상부의 명령 없이 교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뭐, 아예 선을 넘으면 저희도 되받아치기라도 할 텐데 이놈들이 은근히 간만 본단 말이죠."
"후후, 선을 넘으러 가보자."
"흐흐, 좋죠."
박준필이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언제든 전투가 일어날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어라!"
"예에!"
두두두두.
기마대와 함께 달리길 두 시간쯤.
언덕 위에 멈춰선 강철두가 저 멀리 보이는 마을을 보았다.
"우리 마을보다 크군."
아이언헤드 성의 아래에 자리 잡은 마을보다도 규모가 크다.
"네. 병력도 삼백은 넘어 보이고, 주민들도 이천은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간 유격대원들도 알음알음 정찰하고 있었기에 상대의 규모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저기 저 강을 넘으면 놈들이 꼭 튀어나와 뭐라 합니다."
마을 앞에 강이 하나 보였는데, 깊이가 그리 깊어 보이지 않는 개울 수준이었다.
"가자."
"넵."
두두두두.
철두의 짧은 한마디에 50기의 기마대가 말을 달렸다.
강을 넘기도 전에 세 명의 기마가 마중 나오듯 달려왔다.
"오는군."
제법 갑옷을 차려입은 녀석들로 보아하니 잘 쳐주면 기사고, 그보다 낮게 보아도 정예기병처럼 보였다.
"!@#@!"
크게 소리치며 달려오는 녀석들의 표정이 험악하다.
박준필이 슬쩍 혀를 차며 말했다.
"강 근처에만 나와도 저 지랄을 합니다."
"여태 어떻게 했나?"
"뭐 별수 있습니까? 대충 바디랭귀지 좀 하다가 돌아갔죠."
"후후후."
적들도 소통의 비약이 있을진대 그냥 그렇게 돌려보냈다?
"애초에 대화할 생각이 없었군."
그렇다면 맞춰 줘야지.
후우우우웅, 쩌걱!
냅다 던진 투척 도끼가 선두에서 달려오던 기병의 머리에 명중했다.
히이이이잉!
"!@$#@!#"
"@@@!"
적들은 당황해 말고삐를 급히 젖히며 동료를 살폈으나, 두개골이 쪼개져 이미 절명한 뒤다.
"기사는 아닌 모양이군."
시체가 남는 걸 보니 랭커에도 못 든 녀석인 모양이다.
철두의 태연한 말에 최준섭이 깜짝 놀랐다.
"이, 이, 이래도 됩니까?"
"안 될 건 뭐냐?"
"허."
"준섭. 몬스터는 잘만 잡아놓고 왜 그러나?"
"하지만 몬스터는 말 못 하는 짐승이지 않습니까?"
"후후후."
철두의 웃음이 짙어졌다.
말 못 하는 짐승?
흉측한 외모를 가진 아인이겠지.
오크도 마을을 이루고, 계급이 있고 사회가 있는 것은 똑같다.
철두에게 있어 제국 놈들과 오크는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그래서, 저놈들하고는 말이 통하나?"
"그야...."
최준섭은 쉬이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인간과 빼닮은 외형을 제외하면 저들은 외계인일 따름이다.
"하야!"
"히이이잉!"
철두가 소나따의 말고삐를 채며 더욱 속도에 박차를 가하자 유격대원들도 덩달아 속도를 올렸다.
기마 행군이 아예 기마 돌격처럼 변하자, 살아남은 두 명의 적 기병은 동료를 챙기지도 못하고 혼비백산해 도망쳤다.
참방, 참방!
강은 깊은 곳이 1미터 정도 수준이어서 하마하지 않고 그대로 들이쳐도 상관없을 정도라 돌격은 거침이 없었다.
때앵, 때앵, 때앵!
목책 너머 마을의 가장 큰 망루에 내걸린 종이 쉴 새 없이 비명을 지르고, 여기저기 농사짓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 사방으로 도망쳤다.
"하하하, 가자!"
"...형님. 우리 대화하러 온 것 아녔습니까?"
"도끼만큼 확실한 대화 수단이 어디 있나?"
"...."
이거 꼭 우리가 악당이 된 것 같은 기분인데?
'나는 군인이다.'
최준섭은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대장의 행동에 반대의견을 내는 것보다는 힘을 실어주는 게 유격대장으로서의 본분이리라.
"영주님을 따라라!"
"우오오오오!"
유격대원들이 저마다 호응하자 최준섭도 점점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소리쳤다.
"놈들은 외계 오랑캐다! 우리의 힘을 보여주자!"
"우오오오!"
그들의 응원에 철두는 피식 웃으며 목책 두른 마을이 다가오자 천천히 말고삐를 늦췄다.
"준섭이!"
"네, 대장!"
최준섭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있었다.
'좋아! 마인드셋 끝났어!'
명령만 해주면 당장에 흩어져 외계인 무리들을 모조리 도륙할 준비를 마쳤다.
"후후. 준섭, 약탈이라도 할 기세군. 우린 협상하러 온거다."
"예에? 이미 전쟁 아닙니까?"
"준섭이, 그렇게 안 봤는데 포악하군."
"...."
"저기 봐라."
철두가 슬쩍 고갯짓하니 목책 망루 위에 누군가 올라 소리쳤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소리치는 고함이 정확히 귀에 꽂히며 이해되자 최준섭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어?"
"소통의 비약을 쓴 거다."
"와, 말이 통하네요?"
철두는 이미 익숙한 아이템이지만 최준섭은 처음 겪어보는 의사소통 방법이다.
"역시 대화를 트는 데는 도끼만 한 게 없다."
"...."
철두가 저리 자신만만하게 말하고 결과가 이러하니 최준섭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야만의 시대에는 그에 맞는 대화 수단이 필요한 법이다.
"나는 아이언헤드 영주 강철두다!"
강철두가 배에 힘을 빡 주고 소리치자 주변이 쩌렁쩌렁 울렸다.
목책 너머에서 동요하는 게 보일 정도로 사기가 뚝뚝 떨어지는 게 보인다.
망루에 올라있던 자는 눈을 치켜뜨더니 소리쳤다.
"우리는 나트롱 백작님의 사람들이다! 건방지게 굴지 말고, 이곳은 제국령이니 독립영주는 돌아가라!"
"후후후. 여전히 대화할 마음이 없군."
철두는 허리춤에 매달린 투척 도끼를 빼 들고는 냅다 던졌다.
후우우웅.
"히익!"
쾅!
상대가 재빠르게 망루의 난간 뒤로 숨었으나 도끼는 그 난간에 부딪혀 망루 전체가 크게 휘청거렸다.
"무, 무슨 짓이냐! 전쟁이라도 하자는 것이냐!"
"좋다! 나서라!"
철두는 호기롭게 소리치고는 앞으로 나섰다.
끼이이!
철두의 예민한 귀에 목책 너머에서 여러 대의 활시위가 팽팽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후후."
철두는 작은 친구들을 불렀다.
"더, 더 다가오면 전쟁이다!"
"원하는 바다!"
철두를 태운 소나따가 점점 더 가까워지자 결국 목책 너머에서부터 화살이 날아올랐다.
휘이이이이!
백 대가 넘는 화살이 하늘 위로 솟구쳐 철두를 향해 날아왔으나.
후우우우웅!
날개 달린 작은 정령이 나타나 바람을 부리자, 높게 솟구친 화살이 그대로 되돌아가 목책 너머로 쏟아졌다.
제법 많은 바람을 다뤄서 그런지 철두의 마나가 숭덩 빠져나갔다.
투두두두두두!
"크아아아!"
비명이 난무했으나 목책으로 가려져 있어 마을 안의 상황은 보이지 않았다.
"준섭!"
"네, 대장!"
"준비해라!"
"넵!"
"후후후."
철두가 양날 도끼를 꺼내 손에 쥐며 돌격할 준비를 했다. 목책이 튼튼해 보이지만 철두 몸은 더 튼튼하다.
냅다 들이박으면 난입하는 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전투를 원한다면 응해줘야지!
철두가 막 들이치려는데, 상대의 망루 위에 하얀 깃발이 나부꼈다.
동시에 목책 문이 열리며 일단의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머, 멈추시오! 아이언헤드 영주는 멈추시오!"
"흐음."
막 돌격하려던 철두는 맥빠지는 얼굴로 상대를 보았다.
나온 사람은 열 명 정도였는데, 그중 정수리가 훤한 대머리 중년인이 철두의 앞까지 와 고개를 숙였다.
"뉴아 마을의 촌장 포멜입니다."
"갑자기 왜 항복이냐?"
"오해가 있으면 푸는 게 도리이지요. 저희는 싸울 의사가 없었습니다."
철두가 히죽 웃었고, 최준섭은 어안이 벙벙했다.
"와, 대응 사격해 놓곤...."
최준섭의 구시렁거리는 말을 듣고는 포멜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고슴도치도 위기에 처하면 가시를 세우는 게지요."
철두는 말이 번지르르한 포멜을 노려봤다.
"간단하게 말해라!"
"뉴아 마을은 전쟁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원한다!"
"...부디 가여운 영민들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포멜의 저자세로 허리를 넙죽 숙였으나, 그의 의견이 마을 전체의 의견은 아닌 듯, 그 옆에 선 갑옷 차림의 사내는 화를 참는 듯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다.
"포멜 행정관! 오랑캐 무리를 두고 이리 저자세를 취할 이유가...."
콰직!
철두가 던진 투척 도끼가 말을 쏟아내던 사내의 정수리에 막혔다.
털썩.
그대로 뒤로 넘어가 쓰러진 사내는 빛으로 화해 차츰 사라지며, 전리품 하나를 남겼다.
"웃차!"
소나따에서 뛰어내린 철두가 태연히 그곳으로 걸어갔다. 포멜을 위시한 뉴아 마을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넙죽 엎드렸다.
'진짜다.'
저 사내는 진짜배기다.
포악하고 잔인하며, 성급하다.
바짝 엎드리는 것만이 살길이다.
더 나아가 나트롱 백작에게 받은 임무를 완수하는 길.
잠깐의 굴욕은 아무것도 아니다.
"기사였군."
시체가 사라지고 전리품을 남겼다.
철두는 죽은 사내가 남긴 검을 쥐어 빼보았다.
스릉!
제법 좋은 검이지만, 보르텡 남작의 호위 기사에게서 얻은 검보다는 못해 보였다.
그래도 제국의 야금 기술이 뛰어나군.
이런 작은 마을의 기사까지 이 정도 검을 차고 다니니.
철컥!
검을 다시 검집에 넣고는 바닥에 엎드린 포멜을 보았다.
"여긴 내 땅이다!"
"허면 어디까지가 그 영역인지 알 수 있겠나이까?"
"음?"
어디까지?
그런 건 생각 안 해봤는데?
평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해서, 대답할 말이 궁색한 건 아니다.
"내 발길이 닿는 모든 곳이 내 땅이다."
"...!"
광오하다.
제국의 황제도 담기 어려운 말을 아무렇게나 지껄이다니.
"마을을 폐하고 뒤로 물러나 터전을 잡겠습니...."
"날 쫌생이로 보는군."
철두는 포멜의 말을 잘랐다.
"이미 자리 잡은 마을을 굳이 철수할 필요가 뭐 있겠나?"
"허면...."
"임대료를 내라."
"...."
포멜의 얼굴이 굳었다.
"싸워도 좋고."
철두의 한마디 말에 포멜은 더 고민할 수 없었다.
"준비하겠나이다. 어느 정도를 생각하시나이까."
"음, 주화는 됐고."
주화는 몬스터 사냥만으로도 충분히 벌 수 있다. 그보다 모자란 것은 자원.
"마을에 수레가 몇이냐."
"서른 대이옵니다."
"직접 뒤져보면 다 나온다."
"...마흔아홉 대이옵니다."
마침 딱 좋군.
유격대가 50명이니 한 대씩 몰면 되겠다.
"수레 마흔아홉 대에 물자를 담아라."
"...."
"아니면 싸우든가."
"주, 준비하겠나이다."
"정성껏 담아라."
"...예에."
철두가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몰아 안으로 들어갔다.
"마, 마을은 어찌하여...."
"구경이다. 구경."
철두의 뒤로 바짝 붙은 최준섭의 유격대가 목책 문을 열었다.
"대, 대단하십니다. 형님."
"후후, 이게 협상이란 거다."
"...크으."
인정을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다.
최준섭은 그저 엄지손가락만 치켜들었다.
145화 제국이여
나트롱 백작령 소속 행정관 포멜.
그가 백작으로 받은 명령은 하나다.
'C614에 전진기지를 건설하라.'
이곳 뉴아 마을은 백작령의 확장 전쟁을 위한 전초기지다.
아이언헤드 성에 대해서는 진즉 알고 있었고, 우호적인 관계를 위한 사절도 미리 교환했다.
헌데, 자리를 비웠다던 영주가 나타났는데 그 성격이 폭급하기 이를 데 없다.
아주 막무가내가 따로 없다.
'참아야 한다.'
괜히 놈의 도발에 휘말리면 안 된다.
녀석이 원하는 게 그것이다.
'명분이 필요한 거겠지.'
어쩌면 아이언헤드 영주는 뉴아 마을 전체를 약탈하고자 할지도 모른다.
아니, 필시 마음속으로는 그러고 싶을 테다.
최대한 참고 굴욕을 감내해야 한다.
보급품을 좀 내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아직은 발톱을 숨겨야 한다.
오늘의 일은 모두 나트롱 백작에게 보고될 터다.
백작령에서 지원병력이 당도하는 순간.
저 건방진 아이언헤드 영주의 목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때를 위해 잠시 이 굴욕을 감내하리라.
"살필 수 있는 건 모두 살펴라."
"네, 대장."
점령군 행세나 다름없다.
포멜은 분통이 터졌지만, 꾹 참았다.
제 놈들이 보면 뭘 알겠는가?
"대장, 죄다 남정네들뿐인데요?"
"아이들도 없습니다."
"건물도 지나치게 커요. 꼭 죄다 창고 같네."
"가정집이라기보다는 기숙사 같은 곳이 많습니다. 아니, 병영이라 해야 하나?"
소통의 비약을 먹은 포멜의 귀에 여기저기 제집처럼 쏘다니는 적 병력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
예상외로 전문적이다.
직업 군인이라 해도 믿을 정도다.
'아 자식들 뭐지?'
산적같이 잔인하고 폭급한 성정의 우두머리와.
그렇지 못한 부하들.
적들의 정찰은 한동안 이어졌다.
"대장, 마을이 조금 이상한데요?"
"어디가?"
"뭔가 느낌이... 꼭 보급 진지 보는 느낌인데요."
"으음."
포멜은 식은땀을 흘렸다.
이 새끼들 진짜 정체가 뭐지?
"그렇군."
아이언헤드 영주가 자신을 쳐다본다.
"아주 부유한 마을이군."
"...그, 그렇습니까?"
"여관 같은 건 없나?"
"없습니다."
"왜?"
왜라니.
없는 걸 없다고 답했는데, 왜 없냐고 물으신다면.
"그, 그냥 없습니다."
"그럼 여행객들은 어디서 밥 먹고 자지?"
"마을에 외부인을 들인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폐쇄적인 마을이군."
아뿔싸!
"여관은 아직 건축 중입니다. 마을이 이제 정착 초기라 외부인들을 위한 배려가 적지요. 하하."
"배고픈데?"
"...?"
배고파서 물어본 거였어?
"...회관으로 모시겠습니다."
포멜은 얼른 지시해, 회관의 넓은 홀에 식탁이 놓이고 음식들이 하나둘 차려졌다.
귀족의 식탁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차린 음식이 적지는 않았다.
"다들 먹자고!"
철두는 태평하게 음식을 먹었고, 최준섭을 비롯한 유격대원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음식을 뒤적였다.
"하하, 많이 드십시오."
"왜 안 먹나?"
"아, 원래 작전 중에는 외부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후후, 독 없다."
"그래도 원칙은 원칙입니다."
"알아서 해라."
어차피 유격부대는 최준섭에게 맡겨뒀으니, 규율이나 군기는 그의 소관이다.
우적, 우적.
"너는 왜 안 먹나?"
"예에, 많이 드십시오."
포멜은 날카로운 눈으로 저들을 관찰했다.
'누가 보면 친구 집에라도 온 듯하군.'
영주란 녀석은 잔인하며 성급하고, 포악하다.
조심성도 없는데, 의심도 하지 않는지 태연히 적이 준 음식을 받아먹는다.
배포 하나는 정말 대단한 자다.
'저놈들이 더 깐깐해.'
문제는 그와 함께 온 다른 부하들이 더 유별나 보인다는 거다. 졸병들은 껄렁껄렁해 보이는 게 두목 따라 어디 산적 출신은 아닌가 의심 가는 녀석이 몇 있었지만.
'저놈이 문제다.'
포멜은 최준섭을 힐끗했다.
적의 중간 간부처럼 보이는 저놈이 깐깐하다.
부하들 통솔하는 걸 보면 저놈이 대장은 아닌가 의심될 정도다.
"이거 아주 맛이 좋군. 이름이 뭔가?"
"마라마스입니다. 졸인 양고기지요."
"오! 양이 있어?"
"예에."
"여기도 있나?"
"...있지요."
"후후후, 좋아."
"실어 놓겠습니다."
"성의껏 하라고, 성의껏!"
"예에."
도둑놈 새끼.
참아야 한다.
백작령의 정예 부대가 도착하는 날, 오늘 뺏긴 모든 물자에 더해 이자까지 쳐서 받아내겠다.
"임대료는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전달하면 될는지요?"
"으음, 너무 야박하게 구는 것도 좋지 않지."
철두가 고기를 씹으며 그리 말하자 포멜이 눈을 빛냈다.
'기분파군.'
중요 체크포인트다.
아이언헤드 영주는 백작령의 진출에 앞서 무조건 포섭하거나, 제거해야 할 요주의 인물.
'최대한 정보를 캐내, 손실을 줄인다.'
기회는 위기와 함께 온다.
어쩌면 오늘 뜯기게 될 재물은 정보 값으로 퉁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종종 들러서 오늘처럼 챙겨가지."
"...."
포멜은 속으로 다섯 마디쯤 욕을 뱉었다.
"허면, 기간은...."
"어허, 이웃끼리 너무 그리 깐깐하게 굴지 마라."
"아아, 예에. 물론입지요."
포멜은 급히 말을 주워 삼켰다.
시발, 인상 한번 더럽네.
단순히 인상만 쓰는 게 아니라 은근히 살기까지 내뿜으니 질식할 것만 같았다.
나름 강단 있는 행정관이지만, 이런 종류의 인간 앞에서는 조심하는 게 상책이다.
강짜도 어느 정도 상식이 있는 상대에게 부리는 게 맞다.
백작령인지 뻔히 알면서도 약탈을 강행하는 이런 놈들에게 그런 정도의 상식은 바라면 안 된다.
자연재해 같은 녀석이기에, 얼른 이 순간이 지나길 바라는 게 상책이다.
'다음에 이곳에 당도할 땐 그날이 네 제삿날이다.'
어쩌면 지금 최대한 방심을 유도해내는 게 낫겠다.
녀석이 방심하면 할수록, 함정에 빠질 확률이 높으니까.
다음 방문 전까지 반드시 백작령에서 지원 부대를 파견하도록 설득해야겠다.
"여봐라! 영주님 식사를 더 내어오너라! 술도 가져와라!"
"와하하. 네 녀석 마음에 드는군. 술은 내가 한 병 꺼내지."
철두는 인벤토리에서 지난번 상인에게 약탈한 독주를 꺼냈다.
"어?"
포멜은 눈을 비볐다.
"자, 한잔해라."
"그, 그, 그건 노쓰우드 아닙니까?"
"음? 알고 있나?"
"알다마다요! 허억!"
병을 자세히 살펴본 포멜이 기함했다.
"41년산이라니! 어허!"
"후후, 이거 비싼 거냐?"
"말해 무엇합니까? 수량이 적어 부르는 게 값이지요. 물건이 나오기만 하면 대부분 1만 주화 이상에 팔리는 명주입니다."
"오!"
술 한 병에 1만 주화라니.
철두는 아직 여유로운 재고에 기분이 좋았다.
"후후, 한잔해라."
포멜이 저도 모르게 공손히 잔을 받쳐 들어 받고는 천천히 향을 음미한 후에 들이켰다.
"크으. 이런 감칠맛이라니."
산전수전 다 겪은 아저씨의 고뇌와 회한이 담긴 맛이다.
"이런 명주를 마시게 되다니!"
"후후, 맛있나?"
"이를 말입니까? 이건 돈이 있다고 하여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바리오 증류장은 물건을 소량으로 찍어내기로 유명하니까요."
"후후후."
철두와 포멜은 한 순배 두 순배 술을 나눴고, 독한 도수만큼이나 금방 벌게진 포멜은 기분이 한껏 고무되었다.
"와하하하하! 영주님처럼 호탕한 사람은 정말 오랜만입니다."
"후후후, 너도 내가 아는 대머리 중에서는 가장 착하다. 자, 더 마셔라!"
"예에, 크으! 억!"
시원하게 술을 마신 포멜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엎어졌다.
"...."
최준섭은 이 기이한 대작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장, 그거 비싼 술이라는데 그렇게 막 줘도 됩니까?"
"후후후, 괜찮다."
철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굴이 빨개졌지만, 취했다고 하기엔 철두는 너무 멀쩡했다.
"세 병을 마셨으니, 세 병 값을 더 챙기면 된다."
"예?"
"후후, 뒤져라."
"...?"
철두는 술에 취해 쓰러진 포멜을 뒤로하고 회관을 구석구석 뒤졌다.
"오! 이게 창고군."
영지엔 창고가 있다.
아이언헤드 성에도 창고 인벤토리가 있고, 창고관리인인 김진태가 그것을 관리하고 있다.
뉴아 마을이 노바로부터 인정받는 마을이라면 필시 인벤토리가 있을 텐데, 그것이 이 상자인 모양이다.
<접근 권한이 없습니다.>
"후후후."
철두는 술에 취한 포멜을 데려와 손을 짚게 했다.
"이봐, 열어봐. 안주 좀 더 꺼내야지."
"흐흐 좋치! 열려라."
"나도 보여줘 봐."
"봐! 보라고. 히끅."
"후후후."
철두는 인벤토리 안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물자들을 보며 미소지었다.
*
김진태는 다시 한번 되물었다.
"어? 누구시라고요?"
"사냥꾼이라 합니다."
"와, 어메이징 하네."
철두가 파수꾼을 잡고, 맵이 개방된 뒤로 외계인들과의 접촉이 늘었다.
일주일 전쯤에 온 뉴아 마을의 사절단이 대표적이다.
"혼자서 왔다고요?"
"예에."
"뭐지?"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이계인을 마주쳤다는 보고가 들려오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성에 찾아오는 개인은 처음이다.
어쨌든 정식으로 접견을 요청한 두 번째 이계인.
"직접 만나 보죠."
그때 주변에서 대기중이던 이은영이 끼어 들었다.
"같이 가죠."
"아, 소령님이 같이 가주면 든든하죠."
"예비역이라니까요."
"하하, 네. 친위대장님."
친위대 대장 이은영은 아이언헤드 성의 공식적인 무력 2짱. 영주가 없는 동안 영주 대리 업무를 훌륭히 수행해내고 있는 김진태 시종장을 호위하는 일은 그녀의 임무다.
영주성의 응접실로 들어서니, 설명하지 않아도 딱 사냥꾼 차림의 옷을 입은 사내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이언헤드 성의 영주님 되십니까?"
직설적인 녀석이다.
내뱉는 말이 외계어인데 속속 이해되는 것을 보니, 소통의 비약을 들이킨 모양이다.
"영주님은 지금 자리를 비웠고, 나는 그 대리요."
"아! 그렇습니까?"
"용무가 뭐요?"
사냥꾼은 김진태를 가만히 보았다. 그리곤 그 옆의 사람들도 천천히 보았는데, 이은영이 담담히 그 시선을 받으며 이죽거렸다.
"눈깔이 불손한 녀석이군."
"하하, 종종 듣는 말입지요."
"소속과 용건을 말하라."
김진태의 제법 위엄있는 말에도 사냥꾼은 히죽 웃었다.
"저는 떠돌이 사냥꾼이온데, 요 아랫마을에 정착해도 될는지요?"
"소속은?"
"없습니다요."
김진태는 이은영과 시선이 마주쳤다.
'이 새끼 어쩌죠?'
'나야 모르죠.'
김진태는 적잖이 당황해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용건이 정착인 녀석은 처음인지라, 그도 쉽게 결정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꺼림칙한데.'
시종일관 여유 있는 저 눈빛이 영 거슬렸다.
"저녁이면 영주님께서 돌아오실 테니, 그때까지 여기 머무르도록."
"예에."
공손히 인사한 사냥꾼은 김진태와 이은영이 나가자 히죽 웃었다.
"쉽네, 쉬워."
제법 마력이 많이 들긴 했지만 '조사'를 무사히 마쳐 상대의 역량을 파악해냈다.
"기사는 달인급, 영주 대리는 숙련자급이군."
저녁에 영주란 녀석까지 만나보고, 슬슬 병사들 수나 좀 파악한 뒤에 빠져나가야겠다.
146화 내가 왔다
두두두두두.
무려 49대의 마차가 행렬을 이뤄 나아가는 모습은 장관 그 자체였다.
대규모 상단 행렬을 방불케 하는 그 모습에 최준섭은 아직도 얼떨떨했다.
'이거 맞아?'
그동안 깐죽거리던 이계인 마을 하나를 겁주러 갔다가 잔뜩 약탈하고 와버렸다.
그 와중에 사망자는 딱 둘.
아니, 이건 어차피 적이니 전과라 해야겠지.
아군 중에는 사망자는커녕, 경상조차 없다.
모르긴 몰라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녀석도 있으리라.
부하들은 저마다 마차 한 대씩 몰고 오느라, 승마 중인 사람은 철두와 최준섭뿐이었다.
최준섭은 슬쩍 말의 방향을 틀어 철두의 옆에 따라붙었다.
"대장. 아니, 형님."
"왜?"
"진짜 궁금해서 그런데. 저 마을을 왜 그냥 내버려 둔 겁니까?"
"뭐가?"
"척 봐도 전진기지 역할이잖아요. 딱 봐도 보급기지던데요."
최준섭은 철두의 결정을 따르면서도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철두의 권위가 상하지 않도록 부하들과 따로 떨어져 있을 때 이리 묻는 거다.
"준섭아."
"네."
"맛있는 건 두고두고 먹는 거다."
"예?"
"보급기지면 더 좋다."
"왜요?"
"털 게 계속 생기니까."
농가 마을보다 군대의 보급기지가 자원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형님 천잰데요?"
최준섭이 철두를 다시 봤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 같아도 이리 손익계산이 빠르다. 하지만, 무조건 고려해야 하는 것이 있었으니.
"제국인지 머시긴지가 쳐들어오면 어쩌죠?"
"후후, 준섭이. 자신 없나?"
"아니, 자신감으로 하는 게 아니잖아요."
"내버려 두면 안 쳐들어오나?"
"어? 그러네."
어차피 전진기지를 건설 중인 녀석들이다.
우호니 외교니 해봐야 어차피 침략이 목적이라면, 놈들은 계속해서 시도할 것이다.
"최대한 많이 자주 턴다."
"오! 그 자원으로 우리도 최대한 빠르게 강해져야겠군요."
"후후, 그거다."
"역시! 크으!"
최준섭이 쌍따봉을 날렸다.
"언제부터 계획하신 겁니까?"
"후후, 계획 따위는 하지 않는다."
"예?"
"방금 생각한 거다."
"...."
일단 마음 가는 대로 털고 난 뒤에 끼워 맞추신 거구나.
선행동 후 생각.
"역시 형님이십니다. 아까 그럼 술도 의도하신 겁니까?"
"후후, 그냥 그놈 주량이 약한 거다."
"와아."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사람이 있다는데, 우리 대장님은 반대로 세상의 운을 타고난 것 같았다.
"아까 창고에서 몇 개 꺼내시는 것 같던데 뭔가요?"
"진태가 좋아하는 거."
"시종장님이요?"
뭐지?
"후후, 가서 봐라."
철두는 친구에게 딱 필요한 물건을 선물로 받게 되어 기분이 썩 좋았다.
*
"으으으."
포멜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눈을 떴다.
"물, 물을 내와라."
숙취로 인한 갈증이 심하다.
갈라진 목소리로 물을 찾았는데, 물벼락이 떨어졌다.
촤아악!
"어흑! 이, 이게 무슨 짓이야!"
머리에 끼얹어진 찬물세례에 정신이 번쩍 든 포멜은 몸을 일으키다가, 이내 팔을 잡아끄는 무언가에 가로막혀 중심을 잃었다.
촤르릉!
"으음?"
손목에 쇠고랑이 채워져 있다.
눈을 비비며 주변을 둘러보니 어둑어둑한 와중에 쇠창살이 눈에 들어온다.
지하 특유의 쿰쿰한 냄새까지 맡고 나니, 여기가 어딘지 유추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 무슨 짓이냐! 내가 어찌 여기?"
"왜겠어?"
고개를 돌려보니 험악한 얼굴의 기사가 보였다.
"라비안 경. 이게 무슨 짓이오!"
"흥! 변절자 주자에 아직도 시치미군."
"뭐? 내가?"
"그래. 언제부터 내통한 거지?"
"무슨 소리요 그게!"
"흥, 네놈 때문에 기사 용크 경이 죽고, 마을의 보급품 절반이 털렸다. 마을 인벤토리에서는 또 무얼 꺼내줬지?"
"그게 무슨 소리요!"
포멜이 깜짝 놀라 소리치며 슬금슬금 떠오르는 기억에 불안한 마음이 되었다.
'시발, 설마.'
꿈인지 생신지 분간도 안 되는 상황.
서둘러 세력창을 열어 마을 인벤토리를 띄워봤다.
"어?"
"뭐가 사라졌지?"
"...."
시발, 사라진 게 한두 개가 아니다.
이거 어쩌지?
포멜은 순간 뇌 정지가 와서 마을 인벤토리를 열어놓고 가만히 멍을 때렸다.
"흥, 말을 못 하는 걸 보니 귀한 걸 넘겼나 보군."
"오해요!"
"오해는 시발, 무슨 오해?"
"아니, 시발. 진짜 억울하오! 술! 술이 문제요!"
"니미, 지랄은. 그렇게 핑계 대고 싶겠지."
"아니, 상황이 진짜 좆같긴 한데. 진짜 억울하오!"
"흥, 변명은 재판관 앞에서 지껄여라!"
기사 라비안의 눈에는 핏발이 섰다.
동료 기사가 죽었는데 저놈의 행정관은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적에게 항복하고, 또 마을 인벤토리의 물자를 아무 저항 없이 내주었다.
변절자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저놈을 잘 감시해라!"
"예."
깍듯이 대꾸하는 병사들의 눈도 흉흉하다.
"조졌네, 이거."
정신이 나간 것처럼 중얼거리는 포멜을 뒤로하고 라비안은 급히 보고서를 작성해 백작령으로 보냈다.
*
수레 행렬이 나타나자 가장 먼저 경계 서던 병력들이 헐레벌떡 말을 몰아왔다.
"아닛, 이게 다 뭡니까?"
"후후, 임대료다."
"예에?"
북쪽에 자리 잡은 외계인 마을에 갔다 왔는데 수레를 잔뜩 끌고 왔다.
철두는 버선발로 마중 나오는 진태를 보며 웃었다.
"아니! 철두야! 이게 다 뭐냐?"
"저 위에 마을에서 선물로 줬다."
"와! 진짜 친하게 지내고 싶은가 보다."
"후후, 착한 녀석들이더군."
"그러게. 이야!"
김진태는 철두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곤 수레를 하나하나 살폈다. 그의 눈에 희열이 가득했다.
영지 발전 게임이나 다름없는 세상이다.
자원이 넘쳐나는데 싫어할 유저가 없다. 보류했던 몇 가지 계획을 동시에 진행해도 될 정도의 자원이 아닌가?
"와! 시발, 닭이다. 좀 크긴 한데. 진짜 닭이야!"
이미 가축화가 완료된 닭들이 상자에 실려 수레에 가득 담겨 있었다.
"저기 양도 있다."
"와 시발!"
김진태는 신이 났다.
양에, 돼지에, 저기 마차 다섯 대는 아예 소가 끌고 왔다.
"미쳤다!"
지금 건설 중인 농장들도 좋지만, 앞으로 목장도 얼른 건설해야겠다.
"식량 포대는 왜 이렇게 많냐?"
"넉넉하게 주더라고."
"와아."
곡물 포대 몇은 종자로 쓰더라도, 족히 몇 달은 먹을 정도의 양이다. 앞으로 아이언헤드 성의 인구가 더 늘어나도 당분간 몇 달은 문제 없어 보였다.
"일단 창고에 넣어라."
"아, 그렇지."
시종장이자 창고관리인인 김진태다.
그는 영지의 인벤토리를 열어 하나둘 물품들을 수납하기 시작했다.
촤르르륵.
수납할 때마다 주화가 빠져나가지만, 상관없다. 병력의 훈련 겸 몬스터 사냥을 나서는 병사들이 주기적으로 벌어오니까.
"우와, 시발. 우리 부자야!"
자원의 다양성이 말도 못 하게 폭증해버렸다.
자원을 넣던 김진태와 철두의 앞에 세력창의 새로운 알림이 떴다.
<충분한 자원이 비축되었습니다.>
<충분한 기술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아이언헤드 성이 청동기 시대에 진입했습니다.>
창고에 자원이 가득해지자 문명 수준이 올라갔다.
세력창에 표기된 문명 수준이 석기에서 청동기로 바뀌었다.
"와씨! 우리 청동기 진입했어."
"음? 우린 이미 강철을 다룬다."
"이건 짭이고! 아니, 짭은 아니지만 공식? 인증? 으음."
김진태는 어울리는 단어를 찾다가 머리를 헝클었다.
"아, 몰라 아무튼 이 시스템이 인정했다고."
김진태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노바로부터 인정받느냐 아니냐의 차이는 크다.
손수 건물을 짓느냐? 게임처럼 뚝딱 건설하느냐의 차이.
더욱이 테크트리가 개방되며 추가로 건축 가능한 건물들이 추가되었고, 기존의 건물들도 업그레이드가 가능해졌다.
"연금술사 연구소 열렸어!"
마구간은 이미 짓고 있지만, 연금술사 연구소는 건축법을 몰랐는데 이번에 새롭게 지식이 전수되었다.
"철기! 철기도 조만간이다!"
김진태의 눈이 활활 타올랐다.
이미 기술 수준은 충분하다.
이제 대강 감이 잡히기 시작한 진태다.
이 세상은 정말 문명 발전 게임이나 다를 바가 없다.
"잔치다! 시발, 오늘 먹고 죽자!"
"후후후. 좋다."
김진태는 기분이 한껏 고무되었고, 영주의 귀환을 축하하는 잔치는 대규모 전리품을 획득한 승전 기념 잔치가 되어버렸다.
성에서 떠들썩하게 벌어진 저녁 잔치 소식은 곧 성 아랫마을까지 퍼졌다.
"다들 성으로 오세요! 음식 나눠 주신답니다."
"술도 준대요!"
성에서 나온 병사들의 외침에, 마을에 정착 중인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성으로 줄지어 갔다.
"오, 뭔 일이래?"
"영주님이 돌아오셨다는구만."
"그거야. 알지. 근데 이렇게 민간에도 막 퍼줄 정도로 큰일인가?"
"아, 오시자마자 저기 외계인 마을 하나 털어 오셨대."
"아까 그 수레가 그거여?"
"와아, 난 또 상단이라도 온줄 알았네."
"아 이유가 뭐든, 어서 가보자고! 오랜만에 한잔하는 거여."
철두가 파수꾼 사냥에 나서기 전까지만 해도 성 아랫마을의 인구는 고작 200명 수준이었다.
그 뒤로 꾸준히 늘어난 주민까지 합하면 모두 800명이 넘는다.
지구에 있는 IH 그룹의 도움으로 노바로 이주해오길 원하는 영지군의 가족들, 그리고 눈치껏 이주해온 한양의 주민 몇몇이 포함된 숫자였다.
"이거, 소문나면 마을 사람들 더 늘겠구만 그래."
"아, 너무 그리 야박하게 굴지 말어. 사람이 북적북적해야 사람 사는 것 같고 그렇지."
"아, 사람들이 괜히 놀부 심보랑가? 나눠줄 물자가 부족하니까 그러지."
"아, 그러니까 얼른 가보자고! 내가 보니까. 먹을 것만 나눠주는 게 아닌 것 같어."
영지민들이 영주성으로 모여들었고, 아이언헤드 성의 잔치는 축제가 되었다.
*
툭툭.
"으음?"
사냥꾼 잭은 자신을 건드리는 손짓에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깜빡 잠에 들었나 보군.
깨운 사람을 보니, 심부름꾼으로 보이는 소년이다.
"이것 좀 드세요."
"음? 제국어를 해?"
"네."
"어디서 배운 거냐?"
"...?"
이상한 질문이다.
어디서 배우다니?
"그냥 하는 건데요."
"음? 너, 지구인이 아니구나."
"전 제국인 출신인데요."
"오호!"
사냥꾼 잭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그가 가져온 그릇을 받아들었다.
"음? 작대기는 뭐냐?"
"젓가락이에요."
"응?"
"이렇게, 이렇게 드세요."
소년이 시범을 보이자 잭은 인상을 찌푸렸다.
"지구인들은 괴상한 막대기로 음식을 먹는군. 이건 뭐냐?"
"잔치국수요."
"...후루룹. 으음, 먹을 만하군."
"그럼 쉬세요."
꾸벅 인사를 하고 나서려는 소년을 급히 잡았다.
"자, 잠깐. 에헤이. 뭐 그리 바쁘냐?"
"축제니까요."
"축제?"
"네."
"무슨 축제?"
"영주님이 제국 마을 하나를 약탈해 오셨거든요."
"...어?"
사냥꾼 잭은 순간 본인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뭐, 뭘 약탈해?"
"제국 마을이요."
"...?"
너네 영주님 제정신이냐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삼켜졌다.
소년은 그 얼빠진 표정 변화가 재밌었는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이제는 제 주인이 되어버린 영주님은 누가 보더라도 놀라운 사람이긴 하지.
"우리 영주님은 제국의 남작 상대로도 승리했는걸요."
"어, 어?"
"크큭."
저 얼빠진 표정을 보라.
더 골려주고 싶다.
또 자랑할 게 뭐 있지?
"아, 최근에는 그리핀 라이더도 되셨죠."
"으음."
이번엔 손님이 놀라지 않았다.
"그렇구나. 이름이 무어냐?"
"견습 요리사 렌이에요."
"그래, 너희 영주님은 참 대단하신 분 같구나. 그분의 발자취를 조금 듣고 싶은데 들려줄 수 있느냐?"
"네? 하지만 전 바빠서...."
챙그랑.
잭은 주화 10개를 꺼내 손바닥을 펼쳤다.
"아주 잠깐이면 된단다."
렌의 얼굴에 고민이 떠올랐다.
잠깐 늦어서 혼나는 것과 주화 10개 사이의 갈등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 그렇다면야."
그렇지!
돈 싫어하는 제국인이 있을 리가 없지.
사냥꾼 잭이 씨익 웃었다.
147화 전직의 돌
아이언헤드 성의 창고가 활짝 열렸다.
밥 짓는 솥이 수십 개 걸리고, 여러 찬도 만들어졌다. 병사들이고 성 밖의 마을 주민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함께 거들었다.
"여기 고기 더 넣어!"
문경 이모는 음식 만들기를 진두지휘하며 내내 얼굴에 활짝 웃음을 내걸었다.
"아이고, 우리 영주님이 최고여. 내 노바로 건너오고 오늘 같은 잔치는 처음인 기라."
문경 이모는 풍족한 식재료에 이것저것 욕심을 부렸고, 여러 음식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자자, 한 벌씩 받아가세요. 줄 서세요!"
한쪽에서는 김진태가 옷가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아, 밀지 말어."
"어, 자네 그거 너무 크지 않아?"
"흥, 줄여 입으면 돼. 걱정 말어."
노바에 건너온 노비스들에게 부족한 게 무엇이냐 하면 첫 번째가 옷가지다.
음식이야 무고구마라도 캐서 먹으면 되고, 잠이야 C 넘버의 맵은 밤낮으로 그리 춥지도 않아 대충 노숙할만하지만, 의복은 늘 부족이다.
종말 시험으로 노비스가 된 자들이야 초보자 의복을 구매해서 들어왔지만, 최근 들어 폭증하는 노비스들은 모조리 혈혈단신 알몸으로 들어온다.
자원은 한정적인데 인구가 늘어나니, 기존의 사람들 것을 나눌 수밖에 없었고, 요즘은 씻고 벗고 할 옷가지도 귀해지는 참이었다.
그나마 사정이 나은 아이언헤드 령이 이 정도니, 한양은 아예 헐벗고 빤쓰 차림으로 다니는 자들이 꽤 된다 들었다.
"후후, 진태. 이리 와 봐라."
"어? 여기 이거 좀 맡아줘."
"넵, 시종장님."
김진태는 병사들에게 옷가지 보급을 맡기곤 철두에게 다가갔다.
"왜? 왜? 뭔데?"
"놀라지 마라."
"어? 왜?"
"후후후."
"아씨, 뭐냐고."
철두는 김진태의 반응이 재밌어 더 놀리고 싶었으나, 이쯤에서 비장의 선물을 꺼내 들기로 했다.
"우리 영지에서 제일 필요한 게 뭐냐?"
"음, 자리 안 비우는 영주님?"
"흥."
철두가 홱 고개를 돌리자 진태가 엉겨 붙었다.
"아! 장난, 장난!"
"됐다. 안 준다."
"아, 삐지지 말고! 내가 얼마나 쌓였으면 이러냐? 너 없는 동안 부담돼서 뒈질 뻔했다니까?"
"흐음."
영주의 부재중에도 무사히 성을 건사하고 월식도 넘고 한 진태다.
"좋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지."
"음, 필요한 거면, 외성벽?"
성 아랫마을에 벌써 인구가 800을 넘어섰다.
아직까지는 월식이나 일식 같은 이벤트 때마다 성 안으로 대피시킬 만한 숫자지만, 금방 불가능한 때가 올 것이다.
안전과 더불어 가속화는 인구 유입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외성벽의 축조가 절실했다.
"땡."
"아오, 뭔데?"
"후후후."
철두의 웃음에 김진태는 인상을 팍 썼다가 문득 든 생각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렇게까지 야비한 웃음을 지을 정도면 정말 성에 꼭 필요한 재원일 것이다.
"전직의 돌?"
"음?"
"헐, 시발. 진짜야?"
"후후, 맞췄군."
철두의 인정에 김진태가 깜짝 놀랐다.
"와, 시발! 개쩐다! 얼른 꺼내봐!"
"후후, 설치형이다."
"저기에! 아니아니."
김진태는 성의 구조를 생각했다.
전직의 돌.
직업 퀘스트를 내려주는 성소와 같은 녀석이다.
앞으로 노비스들에게는 꼭 들러야 할 관문과도 같이 될 녀석이니까.
'잘하면 이용료도 먹고.'
내부인만 쓰고 말 시설이 아니다.
"성 밖에 가자!"
"좋다."
어차피 성의 건축이나 구조, 관리는 진태의 소관.
믿고 맡겨뒀기에 철두는 순순히 따랐다.
"이쯤이면 으음...."
성문을 나서 쭉 뻗은 대로를 내려오면 성 아랫마을이 위치한다.
진태는 길지 않은 길을 조금 걷다가 멈춰 섰다.
성문에서 고작 50여 미터 떨어진 거리다.
성의 병사들이 관리하며 세금 걷기도 편할 위치다.
"여기 설치하자!"
"좋다!"
철두는 인벤토리를 열었다.
파팟, 쿠우웅!
인벤토리에서 나온 사람 키만 한 거대 바위가 육중한 소리를 내며 공터에 자리 잡았다.
<해당 시설물을 설치하시겠습니까?>
"한다."
<전직의 돌이 활성화됩니다.>
파팟.
기묘한 빛이 어른거리다가 사라진 돌멩이는 비석 같은 모양새였다. 근처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저게 뭐야?"
"기념비인가?"
"허이구, 저 큰 걸 들다니. 진짜 영주님 힘이 엄청나긴 하구나."
이목이 집중된 와중에 홀린 듯이 다가온 진태가 돌멩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거, 미니 성소 같은데?"
"성소라.... 뭐, 비슷하긴 하군."
김진태의 손이 비석 같은 바위에 닿자 잠깐 반짝이던 빛이 진태에게 스며들었다.
<당신의 운명은 모험가입니다.>
<주화 12개로 견습 모험가로 전직할 수 있습니다.>
"와아!"
전직의 돌이다.
김진태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이거면 장 씨 아저씨도 이제 고집 그만 부리겠다!"
"응? 장씨?"
"아, 하하, 그런 게 있어. 아무튼 너는 뭐 떴어?"
"난 안 뜬다."
"어?"
철두가 비석에 손을 대어봤으나 아무런 빛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어? 정말이네? 왜 그렇지?"
"모르지."
철두의 손바닥 위에서 꿈틀거리던 슬라임이 고개를 쳐들었다.
"뀨우?"
"들어가라."
"뀨!"
녀석이 다시 납작해지며 손등 위에 얌전히 붙어 있었다.
"와, 어쨌든 이제 진짜 활성화 못 할 건물이 없겠다!"
철두가 데려온 30명의 하인들.
그들 모두 견습 농부, 견습 요리사 따위의 직업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들을 영지의 시설에 배치하자 영지 시설물이 활성화되었다.
지구인들의 등급은 세 부류.
노바에 진입하면 얻는 '노비스'.
세력에 속하며 얻은 '정착민'.
두 부류가 대다수고, 그 외에 다른 등급으로 분류된 자는 소수.
철두의 '자유 영주', 강용철의 '사제'.
단 두 명만이 노비스나 정착민이 아닌 등급을 얻었다. 시종장이나 영지 총대장 따위로 임명된 김진태나 오준환도 아직 등급 자체는 '정착민'이다.
"아! 넌 이미 등급이 영주라 반응 안 하는 거 아냐?"
"그럴지도 모르지."
"아무튼 알겠다. 흐흐."
김진태는 주변을 둘러보곤 실소했다.
모든 사람들이 미어캣처럼 고개를 빼 들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자자! 줄을 서시오! 전직의 돌입니다!"
김진태는 사람들의 직업 발현을 얼른 도와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 어? 직업?"
"가보자!"
<당신의 운명은 농부입니다.>
<주화 5개를 지불하여 견습 농부로 전직할 수 있습니다.>
"어? 나 농부의 길 퀘스트 떴어!"
"음? 난 목수라는데."
"난 상인이야."
"와, 뭐야. 요리사라는데?"
차례차례 줄을 선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전직의 돌이 정해주는 자신의 운명을 확인했고, 어떤 이들은 즉시 전직 퀘스트를 수주받았다.
줄을 선 사람들 중엔 장소철도 있었다.
다크서클이 가득한 그의 얼굴엔 오랜만에 희망이 가득했다.
'드디어, 내게도 기회가 왔다!'
그간 절치부심으로 쇠를 두들긴 장소철이다.
산채에서 구출되어 철두에게 은혜를 입어놓고, 튼튼하지 못한 곤봉을 주어 원수로 갚을 뻔하였다.
그 뒤, 그를 위해 부러지지 않는 쇠몽둥이를 만드는 것이 일생의 소망이 되었다.
아이언헤드 성에 와서 대장간을 맡게 되었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더 노력하여, 꼭 최고의 대장장이가 되겠다.
대장에게 꼭 부러지지 않는 무기를 만들어 바치겠다.
'대장간의 주인은 나다.'
오늘 낮에 갑자기 나타난 이계인 견습 대장장이에게 내어주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다.
철두를 위해 죽어줄 수도 있지만, 대장간을 빼앗기긴 싫었다. 대장간은 장인의 고집이자, 자부심이며, 전부였다.
장소철을 보곤 김진태가 알은체를 했다.
"오! 장 씨 아저씨."
"시종장님."
"하하, 어서 해보세요. 아저씨가 대장간을 활성화하셔야죠."
김진태의 얼굴엔 기대감이 가득했다.
장 씨 아저씨가 대장장이로 전직하면 단번에 철기시대로 진입할지도 모른다.
장소철의 개인 기술은 강철을 합금할 정도로 뛰어나다. 그의 제련 대장 기술은 영지 내 제일이다.
유일한 문제라면 아직도 등급이 대장장이가 아니라 정착민이라는 것뿐.
"예, 그럼."
드디어 장소철의 차례가 되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목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당신의 운명은 사냥꾼입니다.>
<주화 17개를 지불하여 견습 사냥꾼으로 전직할 수 있습니다.>
"...!"
심장이 멈춘 듯하다.
숨이 턱 막힌다.
털썩.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진 장소철을 보고 김진태가 뛰어왔다.
"어어? 장 씨 아저씨."
가혹한 운명 앞에 장소철이 혼절했다.
*
희미해진 의식이 점점 또렷해진다.
"...."
장소철이 눈을 깜빡이며 뜨자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깨어났는가?"
"어르신."
"어어, 누워있게나."
"아, 아닙니다."
장소철이 얼른 몸을 일으켰다.
사람 좋게 웃는 강용철을 보니 장소철은 다시 한번 울컥했다.
"못난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하, 아닐세. 그럴 수도 있지."
"...."
"...."
강용철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장소철도 쉬이 말문이 떨어지질 않았다.
"...사냥꾼이 떴습니다."
"그런가?"
"...."
어렵게 한마디를 꺼내고는 장소철은 다시 말문을 닫았다.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어째서 대장장이가 아니라 사냥꾼인가?
"흐흑,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대장장이 기술이 3인데, 어찌 사냥꾼 같은 게 뜰 수 있습니까?"
"흐음."
강용철은 굳이 대꾸하지 않고 그저 들어 주었다.
굴곡진 삶.
운명 앞에 절규하는 인생들을 많이 만나보았다.
"으허어어어."
장소철은 한참을 꺼이꺼이 울었다.
미친 사람처럼 울고 웃던 장소철은 이내 마음을 다잡은 얼굴이 되었다.
"조금 나아졌는가?"
"아닙니다."
"후련한가?"
"아닙니다."
강용철은 비장한 얼굴의 장소철을 보며 직감했다.
'죽기를 각오한 얼굴이군.'
뭐라 말해줘야 할까?
운명을 받아들여 사냥꾼으로 살라 해야 할까?
"노바인지 뭐시긴지, 이 세상이 인정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저는 쇠쟁이 입니다."
장소철이 벌떡 일어섰다.
시발, 까짓거.
대장장이 말단이라도 상관없다.
자신보다 기술적으로 못하는 견습 대장장이 밑으로 들어가도 괜찮다.
"죽을 때 죽더라도, 쇠 두들기다 죽을 겁니다."
전직의 돌?
시발, 내 운명은 내가 정한다.
굳게 각오한 그때, 장소철의 앞에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장인의 길>
운명을 거부한 자.
뒤따르기보다 개척하기를 선택한 자의 길은 어둠을 더듬어 걷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당신은 도전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수락/거절>
장소철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148화 무한결투장
운명.
모든 미래가 정해져 있다고 믿는 자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인 것이고, 그 반대라면 이것은 굴레이며, 도전이며, 넘어야 할 장애물이다.
전직의 돌이 제시한 직업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사람의 재능과 흥미가 항상 일치하지는 않기에, 언제나 재능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진로를 개척하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시벌, 농부가 웬 말이야? 농활 몇 번 가본 게 단데. 난 무조건 사냥꾼이야."
"난 상인이래. 이 피지컬에 상인은 무슨. 차라리 영지군 지원한다."
"운명은 개뿔. 이거 그냥 랜덤 아냐? 난 아예 상관도 없어. 양 구경도 해본 적 없는데 양치기래."
전직의 돌로 자신의 운명을 확인하고는 퀘스트를 받는 자들과 거부하는 자들의 비율이 절반 정도로 갈렸다.
거부한 자들 중에서도 소식이 빠른 자들은 영주성의 기도원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신이 있다면 제 말 좀 들어주십시오! 음치보고 음유시인이 웬 말입니까? 다른 거 좀 하게 해주세요."
"전 라면밖에 못 끓이는데 요리사라니요!"
무턱대고 비는 자들로 기도원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영지병들은 그들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냥 직업 안 가지면 되는 것 아닌가?"
"그게 또 아닌가 봐. 우리는 영지병 되면서 정착민 됐잖아? 저 사람들은 아직도 노비스야."
"그게 왜?"
"음, 이민 가서 영주권 나왔냐 아니냐 정도 차이래."
"그래? 그럼 노비스는 쫓겨날 수도 있는 건가?"
"그건 모르지. 그냥 소문이 그래."
시중에 근거 없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한편, 퀘스트를 받고 견습이 된 자들은 썩 만족하는 자들이 많았다.
"오, 이건 이렇게!"
곡괭이질 하는 김씨의 손놀림이 무척 능숙해졌다.
"이야, 김 씨. 전직하고 나서 아예 전문 농부 다 됐구만."
"하하, 이게 꽤 재밌어. 꼭 게임 같지 뭔가?"
노바의 신비로운 힘은 여기서도 발휘되어, 직업을 가지게 되면 머릿속에 그와 관련된 기술을 습득하는 법과 특성을 얻는 법 등이 테크트리처럼 하나둘 새겨졌다.
"앞으로 물주기 50번 곡괭이질 30번만 더 끝내면 나도 '파종' 기술을 배울 수 있어."
그렇게 기술을 배우게 되면, 또 다음 기술을 위한 수행과제가 주어질 터다.
전직 퀘스트가 주는 이점이 그것이다.
마치 운명처럼.
퀘스트를 받은 이들에게 인생의 답안지를 보여주듯 나아갈 방향을 일러 주는 것.
까앙, 까앙!
오늘도 여전히 망치질 소리가 들려오는 영지의 대장간은 초상집 같던 어제와 분위기가 딴판이었다.
"흐흐."
"오늘 많이 웃으십니다."
장소철은 조수의 말에 더 크게 웃었다.
"하하, 왜 안 그렇겠나? 하마터면 내가 대장님의 걸림돌이 될 뻔하였는데."
지금은 대장간이 활성화 상태다.
"어? 시종장님 오십니다."
곧 대장간 밖이 부산스럽더니 김진태가 모습을 보였다. 그는 작업을 멈추려는 장소철을 만류했다.
"아, 계속하세요! 그냥 체크할 게 있어서 온 거니까."
"예에."
"뭐 하고 계셨어요?"
"벌목용 도끼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아하! 계속하세요."
까앙, 까앙!
대장간의 작업 모습을 보면서 김진태는 세력창을 띄워 활성화된 대장간의 건물 상황을 보았다.
<대장간>
생산 - 도검, 창, 농기구
수리 - 기능이 비활성화 중입니다.
강화 - 기능이 비활성화 중입니다.
연구 - 연구 항목이 비었습니다.
활성화된 건물은 게임처럼 세력창에서 컨트롤할 수 있었는데, 지금 가능한 건 생산뿐이었다.
'도검에 한손검이랑 장검, 창은 기창, 농기구에 괭이랑 삽....'
생산 가능한 목록이 총 7가지다.
대부분이 농기구고 무기는 달랑 셋.
따앙, 땅.
쇠를 힘껏 두들기던 장소철이 허리를 폈다.
푸시시시시!
쇳덩어리를 기름통에 담그자 들끓는 소리가 났다. 그대로 한 김 식힌 뒤, 눈치 빠른 조수가 대령한 도끼자루를 손수 결합했다.
툭툭.
순식간에 벌목용 도끼가 만들어졌다.
<대장간에 '벌목 도끼'가 등록되었습니다.>
"오! 방금 하나 추가되었네요."
"예에, 아무래도 농기구가 급한 듯해 그것들부터 등록 중입니다."
어젯밤부터 밤새 쇠를 두들겨 방금 것까지 8개나 생산 가능한 품목을 늘렸다.
"무리하지 말고 쉬엄쉬엄하세요. 수리나 강화는 아직이죠?"
"송구합니다."
장소철이 죄인이라도 된 듯 두 손을 모으고 꾸벅 고개를 숙이자 김진태가 손사래를 쳤다.
"아뇨, 아뇨. 차차 열리겠죠. 대장간 활성화된 것만 해도 어딘가요?"
"그래도 죄송합니다."
"하하, 정말 아닙니다. 장 씨 아저씨가 그래도 히든 직업을 뚫으셔서 기대가 큽니다."
빈말이 아니다.
장인은 길을 개척해서 걷는 자.
그는 지금처럼 무기나 기구를 제작해 생산 목록에 등록할 수 있었다.
여태 그들이 어설프게 만들어 쓰던 무기가 아니라 노바의 시스템으로부터 인정받는 공인 무기를 제작 생산할 수 있는 직종인 것이다.
한쪽 구석에서 풀무질 중인 이계인 견습 대장장이는 흉내 낼 수 없는 장인만의 능력이다.
견습 대장장이는 어디까지나 '제작설계도'를 입수하거나 스승으로부터 배워 만들어본 기구만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진태는 갓 만들어진 도끼를 확인했다.
<벌목 도끼>
- 체력 소모 감소
장인 장소철이 만들어낸 벌목 도끼
균형이 잘 잡힌 도끼는 적은 힘으로도 큰 효율을 낸다.
무려 특수기능이 붙은 아이템이다.
이제 루팅한 것에만 붙던 특수한 옵션이나 효과가 장소철이 만들어낸 장비에도 붙는다.
"농기구 쪽 다 되시면, 오 대장님이랑 최 대장님 의뢰부터 최우선적으로 해주세요."
영지병과 유격대의 무기를 각자 부대 사정에 맞게 통일하기로 하였다. 앞으로 두 사람과 뻔질나게 회의하고 시제품을 만들어가야 할 터다.
"예에,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하하, 장 씨 아저씨만 믿고 갈게요."
"예에, 헌데...."
"네, 말하세요."
"대장님은 필요로 한 게 없으시답니까?"
"으음, 철두는 아직. 아, 목수 할아버지가 그리핀 안장 만들고 있는 것 같던데요."
장소철의 눈이 반짝였다.
"저도 돕...고 싶지만 영지군 무기가 먼저겠지요."
"하하, 네. 그쪽이 더 급하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조만간 견습 대장장이들 대거 보내 드릴게요."
마을 사람들 중에서 견습 대장장이로 전직한 이들이 꽤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을 대거 채용하면, 연구개발이 끝나 생산 목록에 등록된 장비의 양산제작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터다.
"그럼 수고하세요."
"살펴 가십시오."
김진태는 대장간을 시작으로 차례차례 건물들을 훑었다.
마구간은 거의 다 지어가고 있었고, 연금술사의 연구소도 이제 터 잡아 건축 퀘스트만 내면 된다.
*
샤샤샥!
사냥꾼 잭은 수풀을 헤치며 달렸다.
떠들썩한 축제 와중에 왕래하는 마을 주민들이 많아 어수선한 틈을 타 성을 빠져나온 참이다.
한참 달린 그는 약속장소에 다다르자 주변을 살폈다.
동료 사냥꾼이 남긴 표식을 발견하곤 따라가자 곧 은신처가 나왔다.
"알아봤나?"
"아이고, 숨 좀 돌립시다."
다짜고짜 물어오는 기사 지롤의 질문을 넘기며 잭은 물을 꺼내 마셨다.
"후우, 이거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소."
"얼른 말해봐라. 적의 전력은?"
"전력이 중한 게 아니오. 저쪽 영주가 보통내기가 아닌데...."
잭은 자신이 알아온 정보를 하나하나 늘어놓기 시작했다.
대부분 아이언헤드 영주 강철두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그 출처가 보르텡 남작의 밑에 있던 견습 요리사였으니, 정보의 시작은 그때부터였다.
보르텡 남작을 해치우고, 성을 뺏고, 하인도 뺏었다. 그 이후, 길을 돌아 돌아 성으로 돌아온 이야기, 와중에 그리핀을 만나 길들여온 이야기 등을 모두 들었다.
기사 지롤은 씩 웃었다.
"놈이 제국과 이미 원수를 졌군. 잘됐다."
이건 이간질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문제는 어떻게 그리핀을 다시 찾아오느냐 하는 것인데.
"성의 병력은 얼마 정도더냐?"
"대충 200에서 300 사이쯤 되는 것 같았소."
"기사급은?"
"들어보니 네댓 명 되는 것 같던데...."
직접 눈으로 확인한 정보가 아니라 알 수가 없다.
"확실히 본 건?"
"하나요."
잭은 친위대장 이은영을 떠올렸다.
"수준은?"
"달인급이오."
지롤은 생각에 잠겼다.
확실한 정보는 달인급 기사 하나와 추가로 기사 네댓 명.
최악의 경우 달인급 기사 5명으로 상정하면.
"좋지 않군."
아무리 왕실 근위기사 지롤이라 해도 달인급 다섯을 동시에 상대할 자신은 없다.
더욱이 그 영주의 무력도 문제다.
"힘으로 뺏는 건 무리군."
방법 하나를 포기했다.
"성격은 어떻더냐?"
"만나보질 않아서 잘 모르겠소."
지롤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정작 중요한 정보는 쏙 빼놓고 조사하고 왔다.
"헌데, 협상을 생각한다면 포기하는 게 빠르오."
"어째서?"
"괴팍하다고 하더이다. 그리고 그리핀을 꽤 마음에 들어 한다고 하고."
"순순히 내놓진 않겠군."
독자적인 무력으로의 탈취도 무리.
협상도 무리다.
지롤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나트롱 백작과 아이언헤드 영주가 싸우는 틈을 노릴 수밖에 없어 보인다.
"외유가 길어지겠군."
당장 능동적으로 작전을 주도하기 어려워졌다.
"일단 제국령으로 간다."
심부름 보냈던 기사들과 합류하는 게 먼저다.
기사 지롤이 사냥꾼 셋을 데리고 북쪽으로 향했다.
*
철두는 영지 인벤토리를 보곤 혀를 내둘렀다.
"많이도 굴렸군."
스탯석과 주화가 가득 쌓여 있었다.
그간 훈련을 빙자한 몬스터 사냥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노력이 가상했다.
"아니, 월식 때문인가?"
월식 덕에 철두도 주화를 쏠쏠히 벌어봤으니 이해 못 할 금액은 아니지만, 어쨌든 성을 가진 영주라는 자리가 새삼 와닿았다.
이제 성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재산이 불어나는 수준에 이르렀다.
"후후후."
보기만 해도 배부르군.
"꾸이."
"뀨?"
철두의 부름에 손등에 붙어있던 푸른 슬라임이 폴짝 뛰어 젤리 같은 형상을 했다.
"업그레이드 시간이다."
철두는 영지 인벤토리에서 체력의 구슬 100개를 꺼냈다.
"대기실 입장 활성화해라!"
"뀨!"
<전령 꾸이가 주화 1만 개를 요구합니다.>
<추가로 체력 스탯석 100개를 요구합니다.>
파파팟.
체력의 구슬 100개가 사라지고, 추가로 철두의 손등에서 1만 개의 주화가 차감되었다.
푸르르르.
전령은 부르르 몸을 떨더니, 이내 촤르륵 하고 덩치를 크게 키웠다.
쭉쭉 늘어나 빨랫줄에 걸린 이불처럼 커진 꾸이가 입을 쩍 벌렸다.
쯔아아앙!
벌어진 입은 사람이 드나들 정도의 크기였는데, 그 모양이 오묘한 빛을 내는 문과 같았다.
"드디어 가는군."
오래 걸렸다.
철두는 꾸이가 만들어 준 문으로 걸어갔다.
<무한결투장에 입장합니다.>
149화 미니언
소통의 비약을 먹은 진태는 제국인 출신의 하인들과 대화하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이제 그 수량이 얼마 남지 않은 소통의 비약을 만들어내려면 연금술사의 연구소는 필수.
"여기가 좋겠죠?"
"예에, 충분합니다요."
견습 연금술사 돌랑은 넙죽 고개를 숙였다.
"좋아요. 자재는 충분하고."
가장 중요한 재료인 연금술사의 항아리도 철두와 돌랑이 떼어왔다.
빈 공터에 영역을 지정하고, 홀로그램처럼 떠오른 건물을 요리조리 돌리더니 이내 확정했다.
<건축>
아이언헤드 성에 연금술사 연구소를 짓기 위해 인부를 모집합니다.
발주 - 시종장 김진태
범위 - 영지령 전체
모집 인원 (0/10)
하루 수당 – 30주화
빠르게 지을 필요가 있는 건물이기에 모집 인부는 최대로, 수당도 30주화로 높게 설정해 퀘스트를 등록했다.
영지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모두에게 퀘스트가 날아갔으니, 성 아랫마을 사람들도 모두 이 퀘스트를 확인했을 터다.
<인부 모집이 마감되었습니다.>
"이야, 순식간이네."
건물은 이틀 정도면 다 만들어질 테니, 연금술 재료는 상시로 미리 모아둬야겠다.
무엇보다 소통의 비약은 꽤 많이 필요했다.
"재료 모집 퀘스트는 상시로 하고...."
발주 - 시종장 김진태
범위 - 게시판 게재
이건 재료 모집 퀘스트라 영지민에게 발송할 필요는 없고, 게시판에 상시 퀘스트로 발주했다.
게시판은 성문 밖에 하나, 저 아랫마을 중앙 광장에 하나 설치해 두었다.
오며 가며 사람들이 원하는 퀘스트가 있으면 수주해 성으로 가져다줄 터다.
"크크. 편하다, 편해."
아이언헤드령에서 실무를 보는 행정관이라고 하면 시종장 김진태가 유일한데도, 문제없이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이유가 이 퀘스트 발주에 있었다.
신서울도 의뢰소를 설치해 이용했으나, 모두 수기로 하고 책자로 엮는 등 행정 인력이 많이 필요한 일이었다.
노바로부터 '공인'받았느냐 아니냐의 차이는 이렇게나 크다.
펫주머니를 만들 때 필요한 가방도 그렇다.
지구 출신의 노비스들이 만든 것은 '가방'으로 인정받지 못하지만, 견습 무두장이가 만든 것은 '가방'으로 인정받는다.
이제 마력이 담긴 포츠네만 구해오면 펫주머니는 찍어내는 게 가능한 수준이다.
이제 아이언헤드령에는 견습 직업인들이 많았으니까.
그들이 만들어내는 모든 것이 공식 '아이템' 판정을 받는다.
"슬슬 외성벽 축성 가야겠네."
석재와 목재 등의 재료는 충분하다.
무려 남작성 하나를 해체한 자원이 남았으니까.
일단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월식을 대비해야 하니, 외성벽이 급하다.
영주성으로 돌아와 차근차근 계단을 올랐다.
영지 전체를 조망하자면 영주성의 꼭대기 옥상이 제일이다.
"어?"
김진태는 영주성의 집무실에 덩그러니 홀로 있는 푸른 슬라임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넌 뭔데 혼자 있냐?"
"뀨?"
"철두는?"
"뀨? 뀨?"
"...아니다. 됐다."
바보같이 슬라임에게 대화 시도라니.
"수련실 갔나?"
김진태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어디든 가 있겠지 뭐.
영지발전에 그다지 관심 없는 영주를 대신해 김진태는 오늘도 열심히 일했다.
*
파파팟.
영웅의 전령이 만들어낸 차원문을 열고 들어가자,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일전에 기록측정실처럼 온통 하얀색의 세상은 아니다.
"음?"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고, 앞으로 쭉 뻗은 대로와 옹기종기 지어진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가 지구 채널 대기실인가?"
노바의 지식 전수 체계가 그렇듯이 문을 통과하면 대기실 공간으로 이동하는 건 알았지만, 그 형태가 이런 마을인지는 몰랐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일렁이는 빛으로 만들어진 성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군."
저 성문을 통해 나가면 다시 꾸이를 통해 노바로 가는 거다.
"후후후."
철두는 기대감에 들떴다.
대로를 걸으며 마을을 구경해보니 아직 휑하다.
"아무도 없나!"
소리쳐봤으나 응답이 없다.
아직 아무도 무한결투장에 입성하지 못한 건가?
파수꾼을 잡은 나라가 꽤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계돌파 스크롤도 그만큼 많이 풀렸을 텐데, 아직도 4가지 스탯 모두 랭커가 된 자가 없는 건가?
"흐음."
아니면 접속 시간이 맞지 않은 건가?
철두는 휑한 대로를 걸으며 건물들을 구경했다.
<주인 없는 대장간>
<주인 없는 술집>
<빈집>
<주인 없는 갑옷상점>
....
성내의 마을은 쭉 뻗은 대로를 따라 양옆으로 늘어선 건물 십여 채가 전부라 구경하는 데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재미없는 마을이군."
대기실이라더니, 대기하면서 할 게 없다.
길을 다 따라 걸으니 막다른 곳에 성문이 하나 있다.
"저기도 문이네."
철두가 빛으로 만들어진 문에 손을 댔다.
<출전 자격이 없습니다.>
"음?"
문 너머로 가려고 해도 자격이 없다.
"뭐야?"
철두의 얼굴이 와락 찌푸려졌다.
잔뜩 기대하고 들어왔더니 이름값도 못 하는 곳이다.
"무한결투장은 개뿔."
철두는 화가 나 소리를 내질렀다.
"우어어어어!"
쩌렁쩌렁한 함성이 인적없는 마을에 메아리로 맴돌다 사라졌다.
"쳇."
철두는 발길을 돌려 가장 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등록소>
'주인 없는'이 붙지 않은 유일한 건물.
끼익.
문을 열고 들어간 철두는 흠칫 놀랐다.
"뭐야? 있으면서 왜 대꾸를 안 해?"
"어서 오십시오."
철두는 휑한 건물의 카운터에서 방긋 미소 짓는 사람을 향해 다가갔다.
"여기 사람인가?"
"사람은 아니지요."
"그럼?"
"호호."
철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정상으로 보이는 여자는 아니다.
"여기 결투장이 맞나?"
"맞습니다."
"근데 왜 마을에 사람들이 없어?"
"다녀가신 분은 몇 분은 계세요. 마주치기엔 시간이 맞지 않으셨네요."
"흐음."
철두는 더 생각하려다가 관뒀다.
중요한 것은 이유 따위가 아니다.
어차피 여기 온 목적은 하나다.
"결투는 어떻게 하지?"
"제게 등록하시면 됩니다. 출전자로 등록 처리해 드릴까요?"
"좋다."
"닉네임은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닉네임?"
"네. 불리고 싶은 이명이 있습니까?"
"으음."
생각해 보지 않은 주제다.
"이름으로 하면 되지 않나?"
"그러신 분들이 있긴 하죠.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귀찮은 일이 생기실 거에요."
"뭐? 그럼 여긴 현실이 아닌가?"
"아니죠."
안내원의 확언에 철두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더 이상 생각하면 안 된다.
현실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인가.
"다른 사람들은 무슨 이름을 짓나?"
"보세요."
<출전 대기자>
옥산동백돼지
낙일
대중화민국만세
섹시가이
민호문방구
사쿠라사무라이
지존짱피시방
....
"어질어질하군."
"그냥 닉네임이니까요."
철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나름 신중하게 골랐다.
"한산이동 강철주먹."
"한산이동 강철주먹으로 등록하겠습니다."
"네, 되었습니다. 출전에 앞서 투구를 쓰시는 걸 추천드려요."
"으음, 사양한다."
"그럼 닉네임의 의미가 없어지지 않을까요?"
"흐음."
철두가 턱을 쓰다듬었다.
어차피 얼굴 보고 알아볼 녀석이면 근처에 있는 놈일 텐데, 현실세계에서 은원이 꼬일 일이 있을까?
"참고하지."
지금 순간 황금투구를 쓰고 다니는 공작 굴단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이제 다 된건가?"
"네. 다 되었습니다."
"이제 밖에 나가서 문을 통하면 결투장으로 가는 건가?"
"네, 훈련과 출전, 대련 중의 하나를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등록원은 재빨리 설명을 이어나갔다.
"현재 지구 채널에 접속 중인 자가 없어 대련은 불가능합니다. 출전은 최소 소울 포인트 100을 모으기 전까지 불가합니다."
철두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까다롭군."
"손을 내밀어 주시겠어요?"
파팟.
등록원이 악수하자, 철두의 오른쪽 손등 위 주화 주머니가 빛을 내더니 손목 위에 동그라미 하나가 더 만들어졌다.
<소울 포인트 : 0>
"무한결투장에서의 모든 경제활동은 소울포인트로 이뤄지니 열심히 훈련해서 쌓으세요."
"알겠다."
철두는 친절한 등록원을 뒤로하고 다시 성문으로 향했다.
<훈련> - 훈련으로 소울포인트를 수집할 수 있습니다.
<출전> - 최소 보유 포인트 미달.
<대련> - 대련 상대가 없습니다.
철두는 훈련을 선택했다.
파팟.
성문을 통과한 철두는 눈을 깜빡였다.
차원의 문은 순식간에 주변 환경을 변하게 하기에, 제 아무리 철두라도 잠깐의 어질어질함은 어쩔 수 없었다.
주변을 둘러본 철두가 미소지었다.
"후후후."
주변 풍광이 꽤 마음에 든다.
운동장에 서 있다.
길쭉한 타원형의 운동장 주변엔 벽이 높게 서 있고, 그 위에 계단 같은 의자들이 빼곡하다.
<무한훈련장>
소울포인트를 수집하기 위한 콜로세움에 입장했다.
<미니언을 소환합니다.>
철두는 결투장 반대쪽에 희끗한 빛과 함께 나타난 것들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후."
이제 결투장에 온 기분이 드는군.
소환된 미니언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독기 가득한 눈빛을 하고 있었는데, 어쩐지 낯이 익었다.
"후욱, 후욱."
소환된 미니언은 갑옷과 칼을 쥔 전사 차림의 사내였는데, 잔뜩 흥분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죽어라!"
녀석은 손에 쥔 칼을 치켜들고 대뜸 달려들었다. 철두는 인벤토리에서 도끼를 꺼내려다 흠칫했다.
"어?"
손에 착 감기듯 소환되어야 할 도끼가 잡히지 않는다.
후우웅!
적의 공격은 그리 빠르지 않아 가볍게 회피해내곤 발을 뻗어 배를 찼다.
퍼억!
"끄윽."
소환된 전사는 멀찍이 날아갔다. 잠깐의 여유를 얻은 철두는 인벤토리를 열어보곤 인상을 팍 썼다.
"뭐야?"
무기고로 쓰고 있는 인벤토리의 칸마다 놓여 있는 도끼와 창은 모두 락이 걸려 있어 꺼내질 못했다.
"이것만 되는군."
유일하게 꺼낼 수 있는 것은 보르텡의 호위기사에게서 획득한 검뿐.
촤릉.
검을 빼 드는 사이 전사는 다시금 저돌적으로 돌진해왔다.
"이야야아아!"
촤악!
철두가 검을 내리긋자 어깻죽지부터 옆구리까지 단번에 양단되었다.
츠츠츳.
빛으로 화해 전사의 시체가 사라지고.
<소울포인트 1을 획득합니다.>
포인트를 벌었다.
<훈련을 계속하시겠습니까?>
"한다."
<미니언을 소환합니다.>
파팟.
"후후, 둘이군."
한 마리씩 상대해서 언제 100포인트를 모으나 걱정했는데, 단계를 넘어갈 때마다 하나씩 더 나와주면 오히려 고맙다.
"음?"
칼을 치켜들던 철두는 소환된 미니언의 얼굴을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익숙하다.
아니, 아는 얼굴이다.
"장호철?"
자신의 손에 죽은 산적 두목 장호철이 왜 여기에?
"음? 강철두!"
정체를 알아본 건 철두만이 아니었다.
장호철은 두 눈을 번뜩 뜨고는, 이내 울상이 되어 소리쳤다.
"시발! 나 진짜 아니라고! 용수 어머니 누군지도 몰라!"
"후후후."
죽어서도 변명이군.
철두가 칼을 겨눴다.
"와라."
"시발새끼!"
장호철이 독기 가득한 눈을 하곤 함께 소환된 미니언 전사와 함께 달려들었다.
150화 저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