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시로 레벨업하는 성자님
1화 회귀하다
불타고 있는 서울.
콘크리트 폐허 위로는 주홍색 불길이 쉼 없이 이글거리고.
무수한 시체들 가운데서 머리 둘인 검은 독수리를 수놓은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세계 7대 명가 중 하나이자 유라시아의 패권을 양분하는 헌터 가문, 마법명가 로마노프의 상징.
"빌어먹을 로마노프 가문."
유진은 펄럭이는 깃발을 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허전해진 오른팔.
복부 한가운데에 뚫린 구멍에서는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정신을 놓는 순간 곧바로 쇼크사할 만한 상처.
이를 악문 채, 흐려지는 의식을 붙들면서 목에 힘을 주었다.
"끌끌. 누워있는 게 편할 텐데 헛고생을 하는구먼."
콘크리트 폐허에 걸터앉은 노인이 허허로이 웃으며 유진을 내려다보았다.
"헛고생인지 아닌지는 해봐야 알지 않나. 드미트리."
"내 이름은 드미트리 안드레예비치 로마노프라네. 예를 갖추지 않겠나?"
"지랄. 그렇게 긴 이름을 어떻게 외우고 다니냐."
"그렇다면 마법왕이라고 부르게나."
아스가르드의 신왕(神王) 오딘의 화신(化身).
로마노프 가문의 수장.
또한 유진과 마찬가지로 9번째 성위(星位)에 도달한 초월자이며.
'서울을 지옥으로 만든 놈이지.'
퉤-.
유진은 피 섞인 침을 뱉었다.
"여덟 번째 초월자가 되었으나 채 날개도 펼치지 못하고 꺾였구나."
"그 날개를 부숴버린 게 누구시더라?"
"허허허. 어찌 하겠는가. 우리 로마노프 가문을 포함한 7대 명가는 기존의 구도가 무너지기를 바라지 않는다네. 불사왕."
9성에 도달했을 때 시스템이 부여하는 칭호.
불사왕은 유진에게 붙은 이명이다.
"그래도 왕이라고는 불러주네."
"자넨 그럴 만한 자격이 있으니 말일세."
드미트리의 입술 위로 떠오르는 조소.
"솔직히 다행이라고 생각하네. 만일 자네가 성좌의 가호를 받았더라면 가문도 큰 출혈을 강요받았을 게야."
"그 높으신 분들이 나를 외면한 건 모르나?"
"알다마다. 자넨 순리를 거스르는 자, 네크로맨서가 아니던가."
[네크로맨서]
죽은 자를 되살려서 종으로 부리는 직업.
유진은 최초이자 최강의 경지에 도달한 네크로맨서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뭇 별 위에 이름을 새긴 위대한 존재들은 순리를 역행하는 자에게 가호를 내려주지 않는다는 거지.
"그게 바로 자네와 이 늙은이의 차이라네."
드미트리를 휘감은 금색 아지랑이.
배후성의 가호를 최대로 끌어올린 신의 〔화신〕이 되었을 때 발현되는 아우라다.
'마력에 기반을 둔 모든 공격의 파괴력을 95% 이상 감소시키는 사기적인 이능.'
본 드래곤의 브레스도.
데스 나이트의 암흑 투기도.
궁극의 경지에 도달한 저주와 흑마법조차 통용되지 않는다.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처지.
유진은 한숨을 삼키면서 허리를 폈다.
후둑, 후두둑-.
뻥 뚫린 가슴에서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피.
리치로 변하지 않는 한 죽음을 피하긴 틀린 몸뚱이다.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나?"
"하수인이 없는 네크로맨서는 맨몸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나."
"내가 왜 당신의 헛소리를 쭉 듣고 있었는지, 이제부터 알려줄게."
[암흑마재생]
[월식(月蝕)의 술]
[초월기 - 데스 필드]
전장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뼈가 들썩이고.
스러져간 망령들의 귀기가 한데 뭉치면서 잿빗 회오리를 일으킨다.
한껏 진해진 음차원의 힘을 증폭시키는 주술진이 더해지니.
마법으로 궁극의 경지에 도달한 헌터조차 한순간 오싹함을 느낄 만큼 어마어마한 음기가 솟구쳤다.
"영혼을 담보로 한 초월기라."
드미트리는 유진이 던진 마지막 승부수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용솟음치는 잿빛 회오리를 보고 있자니 숨이 턱턱 막혀온다.
솜털이 쭈뼛쭈뼛 설 정도의 불안감.
그야말로 세계의 질서를 뒤흔들 만한 힘이다.
'아우라만으로는 대응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쪽도 최강의 마법을 준비하는 수밖에.'
번쩍-!
오딘의 눈.
드미트리가 〔화신〕이 되면서 허락받은 권능의 상징이다.
망막 위로 떠오른 룬 문자가 마력을 끌어당기고, 강제로 위계보다 더 높은 격을 부여했다.
세계의 근간인 [마력]보다 한 단계 위인 힘이자 세계의 법칙과 맞닿아 있는 〔신력〕.
성좌, 혹은 화신에게만 허락된 경계 너머의 힘이 구현되었다.
[절대주언(絶代呪言)]
[9중 룬(Rune)어 결합]
[트랜센던트 매직 - 로드 오브 버밀리온]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여러 광채.
오딘이 지배하는 아홉 왕국에서 순수한 파괴의 힘만을 끌어낸 룬 문자를 한데 엮어서 극대화시킨다.
서로 공명하면서 증대되는 신력.
한 대륙을 통째로 소멸시킬 만한 에너지가 일점으로 집중되었다.
"불사왕. 자네의 영혼마저 소멸시켜주마."
정수리 위로 폭포수처럼 쏟아진 적색 섬광은 잿빛 폭풍을 힘없이 찢겨 발겼다.
필멸자로서는 넘볼 수 없는 성좌의 힘.
목숨까지 바쳐서 펼친 비술이 파훼되는 순간.
그는 환하게 웃었다.
"이때를 기다렸다."
유진의 손에 들린 낡아빠진 회중시계가 검푸른 불꽃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성유물 - 크로노스의 회중시계가 발동됩니다.]
[신력을 감지합니다.]
드미트리가 구현한 〔이적〕이 시계로 빨려 들어가고.
째깍- 째깍-.
멈추었던 초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신 이상의 신력이 감지됩니다.]
[크로노스의 회중시계의 발동조건을 충족시켰습니다.]
[시간선이 되감아집니다.]
"무슨 짓을 벌인 건가. 불사왕!"
"왜. 뭐가 잘 안 돼?"
크로노스의 회중시계.
시간을 관장하는 권능을 구현한 아티팩트를 발동시키려면 사용자가 9번째 성위에 도달해야 했고.
두 번째로 성좌의 힘이 필요했다.
별빛에게 외면받은 유진으로서는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지만.
'내 힘으로 안 되면 남에게서 빌려오면 되잖아.'
유진이 씩 웃었다.
째깍- 째깍-.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가 점점 빨라지고.
세계의 시간선이 되감아졌다.
흐릿해지는 시야.
"또 보자. 빌어먹을 독수리 자식아."
유진은 중지를 들면서 드미트리에게 인사를 남겼다.
*
낯익은 천장이다.
두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가 떠도 같은 풍경이다.
노이즈가 낀 것처럼 몽롱한 정신.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서 초점도 잘 잡히지 않는다.
"커흑."
유진은 튕겨 나가듯이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두근- 두근- 두근-.
1분당 180회 이상으로 뛰는 심장.
급격하게 빨라진 혈류에 호흡이 거칠어지고 손발이 파르르 떨렸다.
'여긴 어디지?'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장면은 드미트리의 초월 마법에 크로노스의 회중시계를 밀어 넣은 것.
시계의 초침 소리가 귓가를 요란하게 울렸고, 직후 시야가 명멸했다.
그 순간.
[사용자 : 천유진]
[당신은 시스템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고유 특성과 자질을 고려하여 사용자에게 알맞은 직업을 선택하십시오.]
반투명한 창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과연. 이 날로 돌아온 건가.'
허공에 떠오른 상태창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중에 과거의 기억이 물밀듯이 떠올랐다.
보육원에서 나와서 자취방을 구하고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던 어느 날.
'이 메시지를 봤지.'
23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그 당시에 느낀 벅찬 감동은 유진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큭."
한 마디 조소가 굳게 닫힌 입술을 비집고 흘러 나왔다.
성공했다.
모든 것을 판돈으로 건 확률 낮은 도박.
성좌의 가호와 거리가 멀기에, 쓸 생각조차 못했던 크로노스의 회중시계가 제 역할을 완벽하게 해낸 것이다.
'시계는 어떻게 됐지?'
[망가진 크로노스의 회중시계]
등급 : 성유물
분류 : 유물
내구도 : 1/10
시간을 주관하는 옛 성좌가 여러 차원에 남긴 유물입니다.
한 세계에는 두 개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적을 시행한 대가로 이번 분기점에선 더 이상 시간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표면에 새겨진 커다란 금. 회귀 전에는 없었던 균열이다.
'두 번은 없단 말이지.'
유진은 망가진 시계를 조심스럽게 탁자 위로 올려놓았다.
회귀(回歸).
시간을 되돌려서 과거로 돌아오는 이적은 반복할 수 없다는 메시지다.
그럼에도.
유진은 크로노스의 회중시계를 버리지 않았다.
'부모, 인가.'
유진은 보육원에 맡겨지기 전의 기억이 거의 없다.
단 한 가지.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성유물인 [크로노스의 회중시계]를 손에 쥐고 있었다는 사실만은 뇌리에 박혀 있었다.
'이 물건이 성유물인 것은 한참 뒤에야 알았지.'
그가 초월의 영역이라 불리는 9성에 도달한 후에야 [크로노스의 회중시계]의 진가를 알아챌 수 있었다.
회귀를 시행한 후에는 무용지물이 되었지만.
굳이 버리진 않았다.
'뭐, 다른 곳에 쓸 데가 있으니까.'
회중시계를 주머니에 넣고는 휴대전화를 손에 쥐었다.
< 대격변 이후 40년. 세계는 어떻게 변했는가? >
< 한국 제1 길드인 아라한, 세계 7대 명가인 로마노프 가문과 제휴를 맺어.... >
< 한반도 최초 헌터 가문의 탄생? >
게이트와 몬스터, 그리고 헌터가 지구에 나타난 지 40년.
세계의 흐름은 헌터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각 나라의 국력은 헌터 가문 및 길드들의 무력에 따라 판가름되었고.
7대 명가라고 불리는 가문들은 국가를 넘어서 절대적인 권력과 자금까지 손에 쥔 초법적인 단체로 성장했다.
'마법왕이 나를 노린 이유도 그거였지.'
극동의 작은 나라인 한국에서 갑자기 9성의 실력자가 튀어나왔다?
만약 유진이 헌터 가문을 세운다면 기존의 질서를 위협하는 강대한 세력으로 급부상할지도 몰랐다.
'난 그럴 생각도 없었는데 말이야.'
까드득-.
드미트리, 그리고 로마노프 가문. 날 건드린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유진은 분노를 꾹꾹 삼키며 입술을 떼었다.
"상태창."
이름 - 천유진
성별 - 남
레벨 - 1(1성)
◎스테이터스
*힘 : 7
*민첩 : 6
*체력 : 7
*맷집 : 5
*마력 : 10
◎특성
클리어 마인드[고유]
어떤 상황에서도 정신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모든 정신공격에 면역됩니다.
▷아직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사용자의 고유 특성에 맞춰 선택 가능한 직업군은 3종류입니다.
무투 / 마법 / 신관
헌터가 되면 전직 가능한 기본 직업군이자, 나아가서는 전투 스타일 분류의 기준이 된 세 직업.
'예전에는 마법계를 선택했지.'
헌터 중 마법계와 관련된 특성은 약 10%.
신관도 비율이 낮은 편이지만 유진의 성격과는 맞지 않아서 고르지 않았다.
'꼭 기본 직업군만 있는 건 아니야.'
위계가 올라가면 특정 스킬이나 장비에 특화된 직업으로 강화도 가능하고.
특정 게이트에서 조건을 충족시키면 전직이 가능한 클래스도 있다.
연금술사나 소환사, 무인, 혹은 네크로맨서 등.
'시작점을 당겨보자고.'
이미 알고 있는 길을 돌아갈 필요는 없잖아.
네크로맨서가 되는 법은 이미 머릿속에 담겨 있다.
유진은 회귀 전에 취했던 기연을 떠올리며 외출을 준비했다.
2화 성좌가 없으면 만들면 된다(1)
용산 헌터 마켓.
구 전자상가 자리에 신설된 헌터 관련 물품 전문거래소다.
"메이거스 사에서 이번에 출시한 검 봤어?"
"한성은 갑주 브랜드를 새로 만들었다고 하더군."
"아. 노리에의 첨탑에서 나온 신 물질을 가공했다던...."
헌터 마켓을 오고가는 이들.
대부분이 시스템의 초대를 받고 각성자가 된 자, 일명 헌터다.
유진은 로비를 지나 장신구 매장으로 향했다.
반지, 목걸이, 팔찌 등.
마법으로 가공한 장신구들을 쭉 훑어보자, 직원 한 명이 유진의 곁으로 다가왔다.
"저, 고객님. 특별히 찾으시는 거라도?"
"흑암의 반지를 보고 싶은데요."
직원은 허- 하고 짧게 헛웃음을 내뱉더니 "이쪽으로 오시죠."라며 유진을 매장 안쪽으로 안내했다.
상가에서도 구석진 곳.
발걸음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유진이 찾고 있던 기연이 숨겨져 있었다.
갈색 얼룩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거무튀튀한 반지.
"가격은?"
"2천만 원입니다. 손님."
[KM 은행 - 32,590,160]
보육원에서 나올 때 받은 지원금.
그리고 3년 동안 뼈가 빠지도록 일해서 모은 전 재산이다.
'다음 일정을 감안하면 빠듯하군.'
유진은 망설이지 않고 흑암의 반지를 구매했다.
[흑암(黑暗)의 반지]
등급 : 레어
분류 : 반지
내구도 : 50/50
깊이를 알 수 없는 밤의 어둠을 담은 반지입니다.
착용하면 정신계열 저주가 사용자를 잠식합니다.
사용자를 강화해주기는커녕 온갖 디버프를 부여하는 저주받은 반지.
아이템 이름을 언급하자마자 직원이 짧게 웃은 이유다.
일반적인 레어 등급 아이템은 최소 억 단위인 걸 감안하면 거저나 마찬가지.
'누굴 엿 먹일 게 아니면 쓸 이유가 없는 아이템이다.'
흑암의 반지는 헌터 마켓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 백 개가 넘게 있다.
아이템의 효과는 공통적으로 정신계 저주를 퍼붓는 것.
숨겨진 비밀이 있을까 조사한 헌터들만 한 트럭이요. 저주를 풀면 진면목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해서 성력을 퍼부은 이들도 있다.
'그 누구도 답을 찾지 못했지만.'
저주를 씻어내면 평범한 반지로 돌아와 버렸고.
암흑 계열 주문의 촉매나 아이템 제작 재료로도 쓸 수 없었다.
누군가를 골탕 먹일 때가 아니면 쓸모가 없는 저주받은 아이템. 세간에 퍼진 흑암의 반지의 용도다.
'나는 다르지.'
유진은 검게 물든 반지를 세게 쥐었다.
세상 그 누구도 밝혀내지 못한 흑암의 반지의 비밀.
반지에서 쏟아지는 저주를 이겨낸 자는 죽음을 거스르는 능력, 다시 말해 강령술의 지식과 힘을 얻을 수 있다.
'설계가 잘못 됐다니까. 이 아이템.'
네크로맨서의 원천을 얻으려면 저주를 이겨내야 하지, 저항하면 안 된다.
저주를 풀어내는 것도 마찬가지.
그가 헌터 중 최초로 네크로맨서라는 직업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다.
흑암의 반지를 검지에 끼우는 순간.
[농밀한 저주가 들이닥칩니다.]
[혼란 Lv 32]
[광분 Lv 25]
[색....]
[고유 특성 - 클리어 마인드가 적용됩니다. 모든 정신간섭을 배제합니다.]
손가락에 반지를 끼자마자 몇 가지 저주가 유진의 마음을 흔들어놓으려 했다.
'이 정도쯤이야.'
시스템이 보장하는 완전 면역.
흑암의 반지에 내장된 저주가 강력하다 한들, 클리어 마인드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한참 동안 저주를 쏟아내던 반지가 잠잠해질 때 즈음.
[흑암의 반지의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반지 안에 깃든 진정한 힘이 깨어납니다.]
덕지덕지 묻어 있던 때가 벗겨지고.
한 줄기 광채가 반지의 표면을 은은하게 덮는다.
"됐다. 됐어."
유진은 히죽 웃었다.
그 순간.
세계 각지에 100개 이상 뿌려졌던 [흑암의 반지]가 불꽃을 내뿜으며 연소해버리는 사고가 벌어졌지만.
[해당 아이템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레어 -> 에픽(유일)
방금 전, 유진이 손에 넣은 기연의 무게감에 비하면 아주 작은 트러블에 불과했다.
*
칠흑처럼 시커멓게 물든 반지 위로 검푸른 광택이 감돈다.
표면 곳곳에 나타난 이세계의 언어.
제 모습을 되찾은 흑암의 반지가 서늘한 빛을 흩뿌렸다.
[흑암의 반지의 등급이 재조정되면서 옵션이 추가됩니다.]
▷내장 스킬 - 지식의 도서관이 생성되었습니다.
▷내장 스킬 - 죽은 자의 관이 생성되었습니다.
▷영력을 반지에 불어넣어서 마력이나 흑마력으로 치환할 수 있습니다.
[지식의 도서관] 스킬은 전대 사용자들의 강령술 관련 정보를 계승하게 해주며.
[죽은 자의 관]은 대상의 크기를 가리지 않고 시체 하나를 반지 내 아공간에 보관해주는 마법이다.
'우선 전직부터 하자. 그래야 스킬을 쓸 수 있으니.'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사용자의 고유 특성에 맞춰 선택 가능한 직업군은 4종류입니다.
무투 / 마법 / 네크로맨서 / 신관
흑암의 반지를 손에 끼고 상태창을 활성화하니 선택지가 하나 늘었다.
특수 아이템을 쥐었을 때 전직 가능한 직업.
'네크로맨서의 길을 걷겠다.'
◎직업 - 네크로맨서
▷시체나 영혼을 매개 삼는 직업입니다.
▷최초 직업 선택 보너스로 '죽음의 인도자' 특성이 추가됩니다.
▷능력치 마력 → 영력으로 바뀝니다.
[죽음의 인도자]
소환 계열 주문 발동 및 유지에 소모되는 영력 20% 감소.
"이 특성을 회귀하고 나서야 얻네."
각성 후 최초로 직업을 선택했을 때만 추가되는 특성.
마법계는 사출 계 마법의 위력 및 사거리가 늘어나는 [마력 방출]이라는 특성을 얻는다.
'나한텐 영력 소모 감소가 훨씬 좋아.'
유진도 [죽음의 인도자] 특성을 알게 된 건 5년 후에 나타난 '망자의 통곡' 게이트가 공략되면서였다.
꼭 흑암의 반지가 없어도 해당 직업군 관련 게이트를 공략하면 전직 루트가 열리거든.
'나야 고유 특성 덕에 빨리 전직한 케이스지.'
유진은 과거에도 우연찮게 습득한 흑암의 반지의 비밀을 풀어 네크로맨서로 전직했다.
마법계로 전직해서 [죽음의 인도자] 특성을 얻지 못한 게 흠일 뿐.
'이번에는 초기 전직 특전도 얻었다.'
네크로맨서는 끊임없이 망자를 일으키며 소모시키는 직업.
[죽음의 인도자] 특성은 영력 소모를 낮춰주어서 전투 지속성을 크게 늘려주니.
시간을 되돌리기 전과 비교하면 시작점부터 매우 앞서나가는 셈.
'그럼 반지도 써볼까.'
유진은 충만하게 차오른 영력을 반지에 밀어 넣었다.
철컥- 철컥-.
네크로맨서의 지식과 원천이 담긴 보물이 진정한 기능을 발휘하고.
[지식의 도서관을 사용합니다.]
[선대 죽음의 주인들이 남겨놓은 지식을 열람할 수 있습니다.]
[강령 / 암흑 / 저주 / 연금술 /······ 그 외 분야 중 하나를 열람할 수 있습니다.]
얻어야 할 건 정해져 있지.
'강령 분야의 지식을 열람하겠다.'
[강령 분야의 지식이 사용자의 혼에 새겨집니다.]
[영혼의 격이 낮습니다. 초급 주문 일부가 전승됩니다.]
"끄으으!"
유진은 비명을 토했다.
다리미로 머리를 꾹꾹 누르는 감각.
인지를 넘어서는 지식의 양에 뇌가 과부하를 일으켜서 그대로 익어버릴 것 같았다.
'빌어먹을. 이건 회귀를 해도 변하지를 않네.'
클리어 마인드의 효능은 정신공격에 면역을 부여하는 것.
반지의 지식을 머릿속으로 옮기는 건 공격이 아니기에, 고통을 경감시켜주진 않았다.
'X발. 더 아파.'
정신을 맑게 유지해준다는 공능이 오히려 독이 된 셈.
이를 악문 채 고통을 참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강령 분야의 지식이 일부 이전되었습니다.]
[사용자의 격이 늘어나면 나머지 지식들도 취할 수 있습니다.]
◎현재 개방된 스킬 : 2
▷레이즈 언데드[E] - Lv 1
▷본 컨트롤[E] - Lv 1
레이즈 언데드
분류 : 마법
제한 : 네크로맨서, 혹은 [강령] 특성 소유.
등급 : E
영혼이 떠난 시체를 언데드로 제작합니다.
제작한 언데드의 질은 베이스가 된 사체의 능력과 사용자의 역량에 따라 결정됩니다.
본 컨트롤
분류 : 마법
제한 : 네크로맨서, 혹은 [강령] 특성 소유.
등급 : E
마력을 뼈에 부여해서 사용자의 의지로 조종하는 주문입니다.
눈물이 찔끔 맺힐 정도로 아프다. 차라리 기절해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제길. 이 짓을 또 할 줄이야.'
뇌 주름이 쫙쫙 펴지는 느낌에 이가 절로 갈렸다.
유진은 회귀 전, 흑암의 반지에 저장된 모든 지식을 받아들이면서 죽음의 지배자가 되었다.
지식 대부분은 기억이 나기도 하고.
문제는 그의 능력이 [시스템]을 기반에 둔 것이다.
'내 수준으로는 시스템이 정한 규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최소 7성.
단순하게 몬스터를 사냥해서는 도달할 수 없는 경지.
헌터를 강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시스템이지만, 그 이상으로 넘어가려면 깨달음과 영혼에 쌓아올린 업이 필요하다.
'그때까지는 이 녀석에게 의지해야지.'
이미 걸어본 길이다.
더 빠르고.
더 강하게.
시작은 7대 가문의 수장들보다 훨씬 늦었지만 그 누구보다 앞서 나갈 자신이 있다.
[해당 스킬들의 숙련도가 최대입니다.]
[효율이 최대치로 보정됩니다.]
오호.
회귀했다고 이런 보정을 받네.
스킬 숙련도를 MAX까지 찍으면 힘 소모 값이 줄어들고, 위력이 올라간다.
그뿐이랴.
습득 조건을 충족시킨 자가 있으면 전수도 가능하지.
뜻밖의 이득에 뺨이 씰룩였다.
'첫 단추는 꿰었다만, 이걸로는 부족해.'
화신에게는 마력에 기반을 둔 공격이 거의 통하지 않는다.
신력 외에는 큰 피해를 입지 않는 존재.
드미트리도 화신 전용 스킬인 〔아우라〕를 믿고 최전선에서 유진의 공세를 받아내지 않았던가.
'배후성을 둬야 한다.'
네크로맨서로 전직하면서 일반적인 성좌의 후원을 받을 가능성은 0이 되었다.
회귀 전, 헌터의 정점인 9성에 도달했을 때도 순리를 거스르는 게 불길하다며 콧방귀를 뀌었던 놈들이었다.
그렇다고 바벨탑에 속해 있는 악신 성좌들에게 영혼을 팔 수도 없는 일이고.
'한 가지 방법이 더 있지.'
유진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금속 특유의 차가운 감촉에 확 가라앉는 마음.
"날 후원해줄 성좌가 없으면 만들어주마."
얼굴조차 모르는 부모의 유일한 흔적이자, 이적을 만든 아티팩트인 [크로노스의 회중시계]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
크레타 섬.
미노스 문명의 발원지이자, 유럽에서 손꼽히는 관광지다.
'하여간 직행은 더럽게 비싸요.'
대격변 이후 세계 곳곳에 침식지대가 생기면서 하늘도 마냥 안전하지 않게 되었다.
와이번이나 하피처럼 공중을 날아다니는 괴물들을 피하기 위해 목적지를 크게 돌아가거나.
비행 타입 괴물들을 요격 가능한 헌터를 대동하고 침식지대를 통과하거나.
유진이 탄 비행기는 직행이라서 항공료가 4배나 비쌌다.
[KM 은행 - 2,590,160]
다이어트를 얼마나 세게 한 건지 원.
이동 시간을 줄이기 위함이라지만 속이 쓰리는 것은 어쩔 수 없군.
'한국 가면 게이트 공략해서 지갑부터 채워야지.'
빠듯한 자금을 쥐어짜면서까지 유명 관광지에 왜 왔냐고?
그럴 만한 이유가 유진에게는 있다.
"크노소스 신전으로 가주세요."
택시를 타고 남쪽으로 20분 정도 이동.
섬의 유명 관광지인 크노소스 신전에 도착했다.
입구에서부터 바글바글한 사람들.
유진은 무심한 걸음으로 인파 사이를 가로지르며 유적에 들어갔다.
'미노스인들은 티탄을 숭배했다.'
티탄.
거인을 대표하는 '타이탄'의 어원이 된 신족들이다.
'제우스를 위시한 올림포스 신족과의 다툼에서 밀려나 빛을 잃어버린 옛 성좌들.'
낙성좌(落星座).
별빛을 잃어버리고 신화에서 영락해버린 성좌들을 일컫는 단어다.
티탄 신족 전부가 영광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정의의 여신 테미스나 태양신 헬리오스처럼 올림포스가 승리했음을 인정하고 휘하에 들어간 티탄들은 여전히 성좌로서 활동하고 있으니.
'이 시계의 주인은 다르지.'
크로노스.
티탄 신족을 지배했던 수장이자, 예정된 몰락을 피하려고 자식들마저도 삼켰던 비정한 존재.
결국에는 예언이 이루어져 모든 것을 빼앗기고 영락해버린 거인이다.
'티탄 신족을 숭배했던 미노스 문명의 유적이라면.'
분명 옛 성좌의 반응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만신전과 바벨탑 외의 장소에서 성좌의 계시를 받아내는 방법.
그건 바로....
"성유물을 매개 삼는 거지."
유진은 [망가진 크로노스의 회중시계]를 유적 바닥에 내려놓은 후, 세게 내리쳤다.
쩌어어엉-!!
〔어떤 시건방진 녀석이 짐의 어전에서 무례한 짓을 저지르느냐!!〕
회중시계에서 울려 퍼지는 천둥 같은 노호성.
봐봐.
이런 식으로 입질이 온다니까.
"만나서 반갑다. 폐위된 티탄의 왕."
유진은 방긋 웃었다.
3화 성좌가 없으면 만들면 된다(2)
공명 의식.
성유물을 가지고 해당 성좌의 연원이 깃든 땅에 가면 발동되는 숨겨진 현상이다.
'망가졌어도 여전히 성유물인 건 변하지 않아.'
회중시계를 타고 흘러나오는 쩌렁쩌렁한 음성.
반쯤 도박이었는데, 보기 좋게 성공했다.
〔작은 인간아. 회중시계는 짐의 성유물이니라.〕
"알고 있어. 그래서 당신을 불렀다."
〔감히 알면서도 그런 불경을 저지른 것이더냐!〕
"안 그랬으면 바로 말했겠어?"
유진은 성좌란 족속들을 잘 알고 있다.
필멸자들의 숭배를 받으며 영원무궁토록 살아가는 불멸의 존재.
크로노스처럼 영락한 성좌조차 인간하곤 겸상도 안 하려고 하는 자존심 덩어리다.
"이렇게 충격을 줘야 바로 튀어나오지."
〔그러다가 성유물이 부서지기라도 하면 어찌 하려고 하느냐!〕
"응. 이미 고장 났어."
〔...?〕
회중시계에 아른거리는 기이한 빛.
〔정말이로구나.〕
"당신이라면 시계가 고장 난 의미, 잘 알고 있겠지."
〔작은 인간. 그대는 정말로 시간을 돌렸느냐?〕
"보다시피."
유진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히 당신한테는 감사하고 있다. 이 성유물이 아니었으면 난 허무하게 죽었을 거야."
회귀라는 이적.
유진은 크로노스의 성유물에 담긴 안배 덕에 두 번째 기회를 얻었다.
"그러니까 너한테도 기회를 주마."
〔기회?〕
"내 배후성이 되어라."
〔작은 인간. 방금 그 말, 진심으로 한 건가?〕
"나는 언제나 진심이다."
잠시간의 침묵.
얼마나 지났을까.
분노했을 때보다도 더 큰 진동과 함께 크르노스가 박장대소를 했다.
〔크하하하하!!! 농담도 제법이로구나. 작은 인간아.〕
"뭐가 그렇게 웃기지?"
〔순리에서 벗어난 자를 후원하라니. 이렇게나 유쾌한 말이 또 어디 있겠느냐.〕
뭐, 그럴 줄 알았다.
성좌라는 놈들은 하나 같이 목에 깁스를 한 것처럼 뻣뻣하거든.
크로노스가 쇠락했다곤 해도 명색이 신왕(神王)이었던 존재.
제우스나 오딘과 동급인 성좌이니 거절당할 것쯤은 충분히 짐작했다.
"알았다."
〔꽤 순순히 물러나는구나.〕
"성좌가 없어도 난 꽤 강하거든. 시계를 작동시킨 걸 보면 모르겠나?"
〔과연. 배후성 없이 순수한 필멸자만의 힘과 지혜로써 9번째 성위를 달성했단 말이로구나.〕
"뭐, 그런 거다."
유진은 망가진 회중시계를 주머니에 넣었다.
〔잠깐. 어딜 가려느냐?〕
"대화는 끝났다. 배후성 제안을 거절당했으니 돌아가야지."
〔작은 인간아. 짐의 성유물은 놓고 가거라.〕
"왜?"
〔성유물이 있어야 다른 인간과 소통할 수 있지 않겠느냐!〕
유진의 입술 한쪽이 위로 말렸다.
"나한테 맡겨놓은 거라도 있나."
〔여 보아라. 그 시계는 본래 짐의 것이니라!〕
"그럼 직접 가져가. 내가 왜 이걸 돌려줘야 하지."
망설임 없이 크노소스 궁전의 유적에서 몸을 돌이킨 유진.
부우우웅-!
시계의 떨림이 더욱 심해지고.
〔작은 인간. 그러지 말거라.〕
"내 배후성도 아니면서."
〔짐과 세계의 유일한 연결점인 성유물을 가져가면 어찌 필멸자들과 소통을 나누겠느냐!〕
"거기까지는 내가 알 바 아니다."
〔참으로 악독하도다!〕
글쎄.
예언된 몰락을 피하려고 자식들을 삼킨 비정한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하면 좀 곤란하지 않겠나.
'이 땅에 남은 성유물은 이것뿐이군.'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약점을 떠벌리다니.
이러면 거래하기가 더 편해지잖아.
'너무 몰아붙였다간 튕겨 나갈지 모르니, 슬슬 당근을 줄까.'
유진은 다시 몸을 돌이켜서 크노소스 궁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복수하고 싶지 않아?"
〔설마 짐에게 묻는 것이더냐?〕
"의문문에 의문문으로 답하지 말고."
〔...짐은 찬탈자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몸이다. 이제 와서 복수 따윈.〕
마구 떨리는 음색으로 그렇게 말해도 설득력이 없거든요?
유진은 크로노스를 조금 더 자극했다.
"신왕이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고작 그 정도였군."
〔무엇이라?!〕
"난 적어도 당신이 복수심까지는 놓지 않았으리라 생각하고 여기에 찾아왔다."
티탄 신족이 몰락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자식들마저 먹어치운 비정한 아버지.
크로노스의 마음속에 빼앗긴 것을 돌려받고 싶은 욕망과 복수심이 사라졌을 리 없다.
〔원하는 바를 말하라.〕
"다시 한번 말하마. 나를 배후성으로 삼으면 네 복수를 돕겠다."
〔어리석구나. 짐이 그대를 돕는다고 한들 올림포스의 위광을 무슨 수로 끌어내리겠단 것인가.〕
복수에 관심 없으시다면서요.
솔직하지 못하긴.
"내 원수 중에는 제우스도 포함되어 있으니까."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그래."
직접적으로 유진을 해한 건 로마노프 가문.
하지만.
러시아에 자리 잡은 로마노프 가문이 동아시아의 나라인 한국에 전력을 투사할 수 있었던 건 7대 명가의 묵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7대 명가 모두 적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동유럽의 패자이자 7대 명가 중 하나인 카라만리스 가문.
가문 구성원들 다수는 올림포스 소속 성좌들을 배후성으로 두었으며.
가문의 수장으로 군림 중인 '아덴 카라만리스'는 제우스의 화신체로 인정을 받은 강자다.
"카라만리스 가문을 몰락시키면 지구에서 올림포스 성좌들의 영향력도 떨어지겠지."
〔짐의 복수를 언급하는 것치고는 꽤 소소하지 않느냐.〕
"꼬우면 하지 말든가."
〔흠. 그대도 짐의 도움 없이는 복수를 이루기 어려우니 찾아온 것 아니더냐?〕
"당신처럼 빛을 잃은 낙성좌가 한둘도 아니잖아."
유진의 허세에 크로노스의 마음이 크게 요동쳤고, 그 심경의 변화에 따라 주머니에 들어간 시계도 파르르 떨렸다.
〔좋다. 그대의 말대로 짐이 후원을 해준다고 가정해보자꾸나.〕
가정이란다.
반쯤 넘어와 놓고는 자존심 때문에 말도 편하게 못하네.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는 크로노스의 다음 말을 차분하게 기다렸다.
〔본디 성좌의 가호를 베푼다는 것은 그대의 능력과 짐의 성질이 어느 정도 맞아야 하느니라.〕
"그렇지."
〔한데, 짐은 순리를 거스르는 힘과 연원이 전혀 없는데 후원을 베푸는 게 가능하더냐?〕
드미트리가 오딘에게서 마법을 배웠듯.
각 성좌는 자신의 기원이나 성질과 잘 맞는 헌터들을 후원한다.
단순히 강하다고 해서 배후성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
'내가 외면당한 것도 그 이유지.'
죽음을 관장하는 하데스나 오시리스 같은 성좌들조차 유진과 결이 맞지 않았다.
그렇기에.
"당신을 찾아온 거다. 수확과 시간을 주관했던 신."
그림 리퍼.
시커먼 옷을 뒤집어쓰고 기다란 낫으로 목숨을 수확하는 죽음의 화신.
유럽에서 흔히 '사신'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지닌 존재다.
"사신이라는 이미지는 결국 수확에서 나온 거다."
〔그게 짐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더냐?〕
"시간과 수확. 두 요소를 엮어내면 죽음을 거스른다는 개념으로 이어진다는 거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건 시간과 죽음이다.
과거 크로노스를 상징하는 영역.
〔짐이 주관했던 성질을 반전시키란 말이로구나.〕
"이해가 빨라서 좋네."
어느 누구도 주관하지 않는 순리를 거스르는 영역.
크로노스가 다스렸던 두 개념을 충돌, 뒤집으면 잃어버린 별빛을 되찾을 수도 있다.
"이론은 완벽하지 않나?"
〔거기까지 내다보고 짐을 찾아온 게로구나.〕
"싫으면 안 해도 돼."
하늘에서 떨어진 별을 다시금 승천시킬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나타났는데.
포기할 수 있을 리 없다.
비록 주관하는 영역이 모든 성좌들의 멸시를 받는 '순리를 거스르는' 개념일지라도.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지?'
유진은 침묵 중인 크로노스의 대답을 천천히 기다렸다.
하늘 위에 떠있던 해가 지평선으로 넘어갈 때 즈음.
〔그대의 배후성이 되어주마.〕
크로노스는 유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
[수확하는 자가 당신의 배후성이 되었습니다.]
[해당 성좌는 만신전에 등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떤 가호도 부여되지 않습니다.]
크로노스가 유진의 배후성이 되었어도 달라질 건 없었다.
가호의 핵심은 〔신력〕.
모든 힘과 권능, 그리고 신력을 박탈당한 크로노스한테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까지 언급하다니. 너무 잔인한 처사 아니더냐!〕
"내 성좌가 무능한 건 사실이잖아."
〔참으로 후안무치한 작자로다.〕
"됐고. 지금부터 내가 사용하는 기운을 받아들여라."
유진은 [망가진 크로노스의 회중시계]에 영력을 흘려보냈다.
〔호오. 순리를 거스르는 힘은 이런 개념이로구나.〕
"감탄만 하지 말고. 할 일이나 해라."
영력 총량은 10.
레벨을 올리면 모를까. 이 정도 소모량이면 1분 안에 유진의 영기가 모조리 바닥날 것이다.
〔짐을 보채지 말거라. 모름지기 왕이란 품위가 있어야 하는 법.〕
크로노스는 유진이 준 영감대로 〔시간〕과 〔수확〕을 충돌시킴과 동시에 영기를 새로운 '격'으로써 받아들였다.
쿠르릉-!
빛을 잃어버린 성좌의 내면에서 찾아온 변화.
그 누구도 주관하지 않았던 성질인 역행(逆行)의 개념이 크로노스에게 깃들었고.
영락해버린 성좌는 새로이 빛을 찾았다.
[배후성의 신명(神名)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수확하는 자 → 역천의 거인]
[만신전에 새로운 별이 떠올랐습니다.]
〔크하하!!! 드디어 길고 긴 밤이 끝나고 짐이 돌아왔노라!〕
"가호 하나 내려주지도 못하면서 큰소리치긴."
유진은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계획대로.
'성좌로 돌아왔다고 해도 숭배하는 사람 하나 없잖아.'
성좌(星座)
전설이나 신화 같은 위업으로 뭇사람들의 숭배를 받아 자신의 존재감을 별에 기록한 위대한 존재들.
각 성좌들은 위업에 따라 여러 성질을 주관한다.
태양이나 바다 같은 자연부터 힘이나 민첩 같은 육체의 성질, 혹은 사랑이나 분노처럼 추상적인 감정에 이르기까지.
'크로노스는 순리를 거스르는 개념과 엮인 일화를 하나도 쌓지 않았다.'
인간들의 숭배도.
해당 개념과 관련된 업이나 신화, 그리고 이야기 하나 없다.
중세시대에 전해진 '사신'이라는 이야기를 대입해서 가까스로 조건을 충족시킨 것뿐.
'놈의 유일한 후원자인 내가 그 업과 설화를 대신 만들어주는 수밖에.'
회귀 전의 경지를 되찾다보면 해당 개념과 관련된 업도 금방 채워질 것이다.
크로노스가 성좌로써 강해질수록.
유진에게 부여되는 〔가호〕 또한 강해질 터.
〔계약자.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웬 계약자?"
〔그대는 짐의 유일한 신도이자 계약을 맺은 필멸자이니, 그리 부르는 게 맞지 않겠느냐.〕
크로노스는 길게 헛기침을 했다.
〔짐이 그대를 도울 방법이 있을 듯하구나.〕
"가호를 줄 수 있는 건가?"
〔아니. 방금 전에 말했듯, 그대는 짐의 유일한 신도이니라. 그러니 계시도 받을 수 있겠지.〕
주머니에서 새어 나오는 강한 빛.
환한 빛의 진원지가 [망가진 크로노스의 회중시계]라는 걸 알아채긴 어렵지 않았다.
〔그대를 짐의 대리자, 곧 성자로 임명하노라.〕
성자, 라고?
크로노스의 선언이 뇌리에 꽂히는 순간.
전생에는 느끼지 못했던 강렬한 힘의 파장이 정수리를 타고 내려왔다.
"으, 으읏."
〔받아들여라. 짐이 새로운 개념을 주관하면서 생긴 힘의 정수이니라.〕
[배후성이 당신을 성자로 임명합니다.]
[고유 특성 - 백야가 추가됩니다.]
[직업군이 네크로맨서 → 백야의 성자로 변경됩니다.]
유진은 충만한 힘이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
두 눈을 감았다가 뜨니 무수한 별빛이 유진의 망막에 반사되었다.
〔필멸자의 몸이란 참으로 나약하구나. 그 작은 힘조차도 받기 버거워할 줄이야.〕
"누가 예고도 없이 그런 짓 하라고 했냐?"
성자라고?
그 명칭을 모를 리 없잖아.
신관 클래스의 최고 등급 직업.
멍청하고 자존심만 센 그의 성좌께서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쥐똥만큼 있는 힘을 쥐어짜서 유진을 신관으로 임명했다.
"네크로맨서가 신관이라니. 말이 되어야지."
유진은 바득, 이를 갈면서도 상태창을 켜서 추가된 사항을 확인했다.
◎직업 - 백야의 성자
▷역천의 거인이 고른 성자입니다. 역천의 거인의 힘을 빌린 신성 주문의 효율이 30% 상승합니다.
▷네크로맨서 직업군의 스킬을 사용할 때 직업 페널티를 받지 않습니다.
◎추가된 특성
▷백야(白夜)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성력 / 영력을 반전할 수 있습니다.
신관 및 마법계 직업군의 장비 및 스킬을 모두 익힐 수 있습니다.
◎스킬
▷라이프 드레인
분류 : 신성 주문
죽음의 성질을 띤 성력으로 대상의 생명력을 강탈합니다. 빼앗은 생명력은 흡수하여 육체강화에 응용하거나 축적해서 다른 대상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어?"
백야(白夜).
회귀 전에 모든 헌터의 정점에 섰던 유진조차 들어본 적 없는 이질적인 특성이다.
성력과 마력을 전환시키는 능력이라니.
잠깐.
'이러면 네크로맨서와 신관 계통 스킬을 모두 사용할 수 있단 거잖아?'
미친!
반사적으로 오른손으로 입을 틀어막지 않았으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성력을 보유해야 사용 가능한 신성 주문.
반면 네크로맨서의 주문은 영력을 기반에 두고 있다.
'말도 안 되는 특성이다.'
신성 주문을 전개할 때는 성력을.
네크로맨서의 능력을 펼칠 땐 백야의 능력으로 스탯을 치환하면 된다.
그의 능력을 100% 이상 발휘 가능한 고유 특성이 추가될 줄은.
〔마음에 드느냐. 짐의 대리자여.〕
"아무 대책 없이 성자로 임명한 게 아니었네?"
〔크하하하! 지금은 쇠락하였으나 한때는 신왕이었던 몸이니라.〕
워낙 대단한 걸 줬으니 지금은 참아주마.
[백야의 성자]라는 직업도 그렇다.
페널티를 완전히 0으로 만들어주는 효과.
물론, 페널티가 없다 뿐이지 일반적인 신관 직업군이라면 마법 계열인 [네크로맨서] 관련 스킬을 익히는 것 자체가 까다롭지만.
'그건 다 방법이 있다.'
뜻밖의 기연에 입술 한쪽이 자꾸만 위로 올라갔다.
'좋아. 그럼 신성 주문을 확인하자.'
그 다음으로 [라이프 드레인]의 설명을 읽었을 땐.
"신성 주문이 맞긴 해?"
타인의 생명력을 강탈하는 신성 주문. 이건 숫제 저주나 마찬가지다.
스킬 설명만 보면 [뱀피릭 터치] 같은 흑마법이 연상되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생명력을 축적했다가 힐처럼 활용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스탯을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건 직접 사용해봐야 알겠어.'
백야라는 고유 특성을 얻은 것만 해도 회귀 전보다 훨씬 좋은 조건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유진은 정체불명의 신성 주문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뭐, 신성 주문은 덤이니까.'
[백야]라는 전대미문의 특성으로 신관 계열 능력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본질은 네크로맨서다.
'보너스도 좋지만, 본질은 잊지 말아야지.'
준비도 끝났겠다.
이젠 강해져야 할 때.
헌터가 강해지는 일반적인 방법은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이다.
'이 시기면... 그쪽이 좋겠어.'
다음 행선지는 명동.
먼 훗날에 알려질 비밀을 품은 게이트, [고대의 정원]이다.
4화 이 맛에 네크로맨서 하지(1)
〔이 신전은 무엇이더냐. 어떤 성좌를 기리고 있기에, 이토록 커다랗고도 아름답다니!〕
"성좌 같은 소리 하네. 공항이다."
인천국제공항을 보고 연신 감탄사를 터트리는 크로노스.
크노소스 궁전 같은 유적이 당대의 시대상을 감안하면 훌륭한 구조를 띠었지만, 현대의 건축물에 비하면 모자랐다.
유폐된 뒤로 세상을 관찰할 수 없게 된 낙성좌 신세이니.
인천공항을 보고 놀라는 것도 당연한가.
〔오. 세상이 이렇게까지 바뀌었을 줄이야. 참으로 세월이 무색하도다!〕
"...1절만 하지?"
유진이 투덜거려도 크로노스의 감탄은 명동에 열린 게이트에 도착할 때까지 멈출 줄을 몰랐다.
명동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커다란 균열.
검푸른 구멍이 일그러진 공간 한가운데에서 아른거린다.
이차원으로 이어지는 통로, 게이트다.
[고대의 정원]
[유형 - 고정 타입]
[출입 조건 : 1성]
[게이트 면적 : 중]
[마나 밀집도 : 52%]
'기억대로야.'
유진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툭툭 건드렸다.
게이트의 유형은 둘.
영구적으로 유지되는 고정 타입, 그리고 보스 몬스터나 게이트 핵을 제거하면 소멸하는 유동 타입이다.
고대의 정원은 전자.
입장 제한이 1성인 만큼 초짜 헌터들이 애용하는 게이트다.
-무투 계열 헌터 1명 급구.
-13레벨(1성) 마법 계열이 팀 구함.
헌터 전용 어플리케이션, 일명 헌터넷에 뜬 구인 광고.
게이트 주변에는 삼삼오오 모인 헌터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막 꾸려지는 공격대. 일명 막공 인원을 구하는 자들이다.
'이맘때에는 게이트의 비밀이 알려지지 않았군.'
회귀 전에는 국내 3강을 포함한 10대 유력 길드에서 헌터들의 출입을 통제했을 만큼 인기가 있던 곳.
팀원을 구하는 헌터들을 보고 있자니 과거로 돌아온 게 실감 났다.
흐흐.
미래의 정보를 선점한다는 게 이렇게나 기분 좋은 거였구나.
"저. 혼자 가실 거면 저희 팀이랑 같이 하실래요?"
구인 중인 헌터 중 20대 중반쯤 되는 사내, 강인호가 말을 걸었다.
유진은 관심 없다는 듯 손을 휘휘 젓고는 균열로 향했고.
"아. 각성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오빠. 뭐 하러 걱정하냐? 알아서 하겠다잖아."
팀 동료들끼리 옥신각신하는 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면서 균열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몸이 붕 뜨는 감각과 함께 순식간에 바뀌어버린 풍경.
[고대의 정원에 입장했습니다.]
형형색색의 꽃들.
게이트 이름과 잘 어울리는 풍경이 유진의 눈앞에 펼쳐졌다.
'시작 지점은 중앙이군.'
고대의 정원은 세 구획으로 나누어진다.
안전지대이자 게이트의 시작점인 중앙의 꽃밭.
고블린이 출몰하는 남부 숲.
마지막으로 프로그맨이 출몰하는 북쪽 호수 지역.
하늘을 올려본 유진이 혀를 찼다.
'보름달이 되기에는 하루가 모자라네.'
고대의 정원에 숨겨진 기연을 이용할 수 있는 건 보름달이 떴을 때뿐.
내일이면 달이 완전히 차오를 것 같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첫 사냥감은 역시 고블린이지.'
1레벨 헌터의 신체능력은 일반인과 큰 차이가 없다.
호수 부근에서 프로그맨을 마주했다가는 회귀한 보람도 없이 두 번째 삶을 마감할 터.
얼마를 걸었을까.
숲에 진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걸렸다.
〔짐이 부여한 신성 주문을 사용해봐라.〕
"라이프 드레인 말인가."
안 그래도 신성 주문의 성능과 작동 매커니즘이 궁금했다.
설명만 보면 정말로 신관계 스킬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
'보통 신관이라면 말이지.'
〔올림포스〕
〔선택 시 부여되는 신성 주문〕
▷힐 - 치유 주문
▷블레스 - 능력치 증가 버프 주문
▷홀리 배리어 - 방어 주문
〔아스가르드〕
〔선택 시 부여되는 신성 주문〕
▷힐 - 치유 주문
▷버서크 - 광화 주문
▷블러드 레이지 - 공격력 증가, 방어력 하락 버프
이런 식으로 모시는 성단에 따라 치유 주문과 버프를 받거든.
크로노스 교단의 성자가 되면서 받은 스킬은 어떤 능력을 지녔을까.
[고유 특성 - 백야를 사용합니다.]
[마력 → 성력으로 치환됩니다.]
"키키키킷!"
수풀이 밟히는 건 고블린이 도약하면서 발생한 소음.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놈은 이를 훤히 드러내면서 유진의 허벅지를 노렸다.
손에 들린 녹슨 단검.
닿으면 파상풍 주사를 맞아야 할 것 같은 비주얼이다.
"먼저 다가와주면 고맙잖아."
마법사 직업군이라고 해서 근접전에 취약하다는 건 고정관념.
특히 유진은 홀로 사냥하는 경우가 많아서 근접전에도 어느 정도 재주가 있었다.
'제대로 배운 건 아니지만 말이야.'
무작정 달려드는 고블린을 차분하게 노려본다.
고블린의 스펙은 인간보다 조금 아래.
초보자라면 괴물의 살기등등한 모습에 움츠러들겠지만.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몸이다.'
홰액-!
고블린의 손에 쥔 단도가 허공을 베었다.
몸을 살짝 트는 걸로 충분했다.
전력으로 달려들면서 휘두른 칼이 상대를 빗맞히면서 휘청거린 고블린.
유진은 허리를 살짝 숙이며 오른팔을 빠르게 뻗었다.
"켁!"
고블린의 목덜미를 붙든 유진.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합니다.]
희끄무레한 기운이 손을 감싸고.
호오- 유진의 입에서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영력과 흡사한 느낌이군.'
신성 주문이면서도 네크로맨서의 강령술과 비슷한 파장.
희끄무레한 기운이 고블린의 몸속으로 파고들더니 초록색 입자가 손을 타고 유진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고블린의 생명력이다.'
생기를 빼앗길수록 쭈글쭈글해지는 피부.
몇 초 만에 비쩍 말라버릴 정도로 생명력을 빠르게 흡수했다.
단전에 쌓인 고블린의 생명력.
'바로 흡수한다.'
[고블린의 생명력이 육체에 스며듭니다.]
[근력 0.1이 영구하게 증가합니다.]
[민첩 0.1이 영구하게 증가합니다.]
"미친."
고블린 한 마리 잡아먹었다고 스탯 포인트가 총합 0.2나 올랐다고?
레벨을 한 개 올릴 때 주어지는 보너스 스탯이 5.
단순 계산으로는 고블린 25마리를 사냥하면 레벨 하나가 올라가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크하하하핫! 계약자여. 마음에 드느냐?〕
"응. 엄청나네."
〔찬양하여라. 짐의 위대함을!〕
잘난 척하는 크로노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참아주마.
라이프 드레인은 그만한 가치를 지닌 신성 주문이다.
'지금이야 경험치 수급이 빠르지만 성위가 올라갈수록 힘겨워진다.'
몬스터의 생명력을 능력치로 치환하는 신성 주문.
레벨을 올리는 것 말고도 신체를 강화하는 방법이 전혀 없진 않다.
'제일 보편적인 방법은 영약이지.'
그 외에도 축복을 받아들이거나 게이트 여기저기에 숨겨진 조건을 충족함으로써 칭호를 받는 수단도 있다.
하나같이 쉽지 않은 방법이라 문제인 것.
유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정도면 교황이나 성녀급 신성 주문 아닌가?'
상식을 파괴하는 신성 주문.
배후성에게서 가호만 받아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의 기연에 입술이 씰룩였다.
'신관 쪽 능력도 기회가 될 때 연구를 해봐야겠어.'
유진은 상념을 끊고는 바닥을 내려다봤다.
생명력을 갈취당해서 말라버린 고블린의 사체.
온기가 사그라지는 몸뚱이도 유진에게는 쓸모가 있다.
[고유 권능 – 백야를 사용합니다.]
[성력 → 영력]
'그러면 슬슬 시작해볼까.'
죽은 자를 술법의 매개체로 삼는 네크로맨시.
유진의 손에서 피어난 희끄무레한 기운이 벌어진 고블린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쓸 만할 정도로는 만들어주마.'
목구멍을 타고 깊이 내려간 영력이 심장에 깃든다.
심장 안쪽에 자리 잡은 푸른 돌.
헌터의 주 수입원인 '마석'에 스며든 영력이 멈춘 심장을 자극했다.
두근-!
마석이 함유하는 마나와 섞인 영력이 혈관을 타고 고블린의 사체 내부를 질주하기 시작한다.
단단해진 뼈.
쭈글쭈글해진 피부는 고무처럼 질겨졌다.
영력에 물들어서 시커멓게 변하는 사체의 피부.
"내 부름에 답하라."
[레이즈 언데드를 사용합니다.]
뒤로 꺾였던 고블린의 머리가 두둑- 소리와 함께 용수철 튕겨 나가듯이 앞으로 젖혀졌다.
죽어버린 눈.
색이 바랜 동공 위로 푸른 안광이 번뜩인다.
"그르륵."
가래 끓는 소리를 내는 고블린 사체. 이제는 좀비가 되어버린 놈이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좀비의 완성도가 매우 높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97.2% 상승합니다.]
사체 본연의 능력보다 더 강한 힘을 끌어 내려면 가공 과정을 거쳐야 한다.
[지식의 도서관]에 연금술 지식이 포함된 이유.
유진은 그 생략하고 영력만으로 좀비의 능력치를 두 배 가까이 올린 것이다.
평범한 네크로맨서는 꿈도 꾸지 못할 시체 가공 기술.
'고작 97%냐. 마석까지 포기했는데 높지 않군.'
당사자는 전혀 만족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쯧- 혀를 찬 유진이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헌터는 왜 몬스터를 사냥하는가?
누군가는 강해지기 위해서라고 말하겠지만.
대부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돈 많이 버니까.
헌터가 고위험군 직군인데도 인기가 많은 건 그만한 수입이 뒤따르기 때문.
몬스터의 심장에 있는 마석은 헌터의 주 수입원이다.
수입을 포기하면서 강화한 언데드의 수치가 높지 않으니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제작 속도도 1초나 걸리고. 전성기에는 0.1초 안에 끝났을 거야."
유진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회귀 전의 자신과 비교하면 한도 끝도 없으리라.
[좀비]
종족 : 언데드
등급 : ★
◎능력치
근력 : 22 / 민첩 : 21 / 체력 : 17 / 맷집 : 13 / 마력 : 8
◎특성
▷불사의 존재[C]
◎스킬
▷시독[E] / 감염[E]
이 정도면 [고대의 정원]에서 1인분은 하겠군.
유진은 좀비를 앞세워서 숲을 나아갔다.
"키킷!"
수풀 위로 튀어 오른 고블린.
이번에는 숫자가 셋이다.
좀비의 전투력을 시험해볼 겸, 유진은 팔짱을 낀 채로 공격 지시를 내렸다.
"그르르륵!"
다리를 질질 끌면서 돌진하는 좀비. 영력으로 가공하면서 상승된 스펙 덕에 고블린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다.
가장 선두에 달려오던 고블린을 덮친 좀비가 아가리를 한껏 크게 벌리고는.
콰드득-!
날선 이빨로 고블린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고블린이 "키렛!"이라는 비명과 함께 양팔을 바동거리며 밀쳐내려 했지만.
유진의 기예로 두 배나 강해진 좀비를 이기진 못했다.
한 발 늦게 달려오던 고블린들이 손에 쥔 단검으로 마구 쑤시자 썩은 살점이 툭, 하고 여기저기로 떨어진다.
급소를 찔려도 끄떡없는 좀비.
고블린들이 좀비에게 시선이 끌리고 있을 때.
"난 안중에도 없나 봐?"
어느새 등 뒤를 점한 유진이 좀비에게 매달린 고블린의 뒷덜미를 잡았다.
다시 한번 백야의 능력을 발동.
영력에서 성력으로 치환하고는 라이프 드레인을 전개하자 고블린의 몸뚱이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는.
"킷."
힘없는 탄식을 내뱉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공격용으로도 유용해.'
수 초 만에 고블린의 생기를 모조리 빨아먹는다?
라이프 드레인의 생명력 갈취 능력은 어지간한 저주보다 뛰어났다.
네크로맨서라고 해서 근접전에 취약하다는 건 편견이다.
라이프 드레인으로 고블린 하나를 미라처럼 바짝 말릴 때 즈음.
"끼익!"
단말마의 비명소리와 함께 좀비한테 물린 고블린의 고개가 반대방향으로 꺾였다.
'이미 죽은 놈도 라이프 드레인의 대상이 될까?'
네크로맨시 분야에서는 이미 정점에 도달했던 유진이지만, 신성 주문을 익힌 건 처음이다.
숭배하는 성좌도 평범하지 않으니.
회귀 후 새롭게 얻은 능력을 완벽하게 파악해야 한다.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합니다.]
접촉면에 아른거리는 초록색 기운. 고블린의 생명력이다.
'되긴 되네.'
흑마법 중에는 생명력을 갈취하는 주문이 있지만 대상이 '산 자'로 한정된다.
뱀파이어의 흡혈도 마찬가지.
한데.
라이프 드레인은 허용 범위가 꽤 넓었다.
이게 의미하는 건....
'사냥속도를 올려도 되겠어.'
고블린 사냥에서 생사를 굳이 구분해둘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이다.
"내 부름에 답하라."
망자의 대열에 합류한 고블린 두 마리.
진짜 사냥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5화 이 맛에 네크로맨서 하지(2)
네크로맨서들 사이에는 이런 격언이 있다.
-시작이 반이다.
무슨 일이든지 처음 시작이 어렵지만 결심을 하면 착착 된다는 뜻이지만.
사체를 매개체로 사용하는 직업, 네크로맨서에게는 언데드 한 마리를 제작하는 게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뒤집어서 말하면....
"내 부름에 답하라."
[레이즈 언데드를 사용합니다.]
[좀비 4구의 완성도가 매우 높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97.5% 상승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98.1% 상승합니다.]
점점 늘어나는 좀비의 숫자.
유진은 더 과감하게 숲 안쪽으로 나아갔다.
"키키킷."
푸푹! 푹!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침.
고블린의 독낭과 잡초를 섞어서 제작한 마비독이 잔뜩 묻어있다.
수풀 곳곳에서 빗발치는 침을 맞으면서도 미동도 하지 않고 전진 중인 좀비들.
망자에게는 독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키륵. 썩은 사체. 안 쓰러진다."
"킥, 마비독. 안 통해."
대롱을 내려놓은 고블린 무리가 돌진을 선택했다.
사후경직으로 움직임이 둔해진 좀비에 비해 훨씬 빠른 고블린의 속도.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민첩성을 살려 목덜미나 아킬레스건 같은 급소를 노렸다.
"그르르륵."
반면 좀비의 행동은 단순했다.
양팔을 허우적거리거나 이빨로 물어뜯거나.
좀비들이 선전하는 것은 유진의 언데드 제작 기술이 뛰어난 덕분이다.
모든 능력치가 두 배로 늘어나지 않았으면 속도를 살린 고블린들의 공격에 두들겨 맞다가 쓰러졌을 터.
그리고.
"본 컨트롤!"
희끄무레한 기운을 휘감은 기다란 막대가 고블린의 가슴팍을 관통한다.
네크로맨서의 진가.
혼란한 전장이야말로 유진의 힘이 극대화되는 장소다.
수 미터 뒤로 튕겨 나가서 바위에 내리꽂힌 사체. 본 컨트롤에 담긴 힘은 고블린 따위가 감당할 만한 게 아니었다.
"이리로 오라."
바위 한가운데에 박혔던 뼈 막대가 쇄액- 하고는 술자의 곁으로 날아왔다.
뼈를 촉매 삼아 만든 창. 사출과 회수에도 마력이 소모되지만 새로 만드는 것보다는 낫지.
〔짐의 계약자라면 싸움에서 품위를 갖추었으면 하는구나.〕
"그 품위 찾다가 돌아가신 분들 내가 많이 봤거든?"
〔무릇 싸움이란 의지와 의지의 충돌이건만. 그대의 방식은 꽤나 무도하다.〕
"적응해. 이게 네크로맨서의 싸움이다."
의지의 충돌?
네크로맨서에게 있어 그런 전투는 사치다.
적이 싸우고자 하는 정신을 꺾어내고, 숨이 끊어진 몸뚱이를 일으켜서 고인의 죽음마저도 모독한다.
성좌 양반도 빨리 적응하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못 볼 꼴을 계속해서 직관하게 될 거거든.
[고유 특성 - 백야를 사용합니다.]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합니다.]
숲을 거니는 중에 틈틈이 라이프 드레인에 대해 연구한 결과, 몇 가지 성질을 알아냈다.
'죽는 순간부터 생기가 몸에서 빠져나간다.'
음식으로 치면 개봉하는 순간부터 유통기한이 빠르게 줄어드는 셈.
죽인 직후나 숨이 붙어있을 때가 적기이고.
사망한 지 1분 이상 되면 몸뚱이에 남은 생기가 10% 아래로 떨어진다.
또한.
생명력을 능력치로 치환하는 건 무한하지 않다.
고블린에게서 갈취한 생기를 흡수할수록 내성이 생긴 것마냥 능력치 증가가 더뎌졌다.
한 종의 생명력으로 올릴 수 있는 능력치에도 한계가 있는 모양이다.
'다른 몬스터한테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해보면 확실해지겠지.'
전투가 길어질수록 늘어나는 좀비의 숫자.
반면, 고블린 무리는 점점 수세로 몰리기 시작했다.
"키르륵...."
"내 부름에 답하라."
[사역 가능한 언데드 숫자가 최대에 도달했습니다.]
[20/20]
[더 많은 언데드를 사역하려면 경지를 올리거나 강령술 관련 아이템이 필요합니다.]
쯧-.
1성에서 다룰 수 있는 언데드의 한계치를 채워버렸다.
'네크로맨서 페널티가 없다고 해도, 이건 별개인가.'
따지고 보면 타 직업군 페널티가 아니라 경지에 따른 문제다.
설마 하는 마음에 실험해봤지만 결과는 보다시피.
쩝, 유진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실 때.
"키키킷. 도망치자."
"키킷. 썩은 내 나는 시체 못 이긴다."
고블린들이 등을 홱 돌리면서 유진과 반대 방향으로 뛰어갔다.
"쫓아라."
능력치가 2배 가까이 강화된 좀비들이다.
경직된 육신으로도 고블린과 비슷한 속도로 움직이고.
이미 숨이 멈춘 언데드라서 지칠 일도 없으니 결과야 뻔했다.
좀비들이 도망 중인 고블린들을 거의 따라잡은 순간.
[파이어 애로우]
도주 방향에서 날아든 불꽃 화살이 괴물의 목덜미를 꿰뚫었다.
케륵, 단말마의 비명을 흘리며 쓰러진 고블린.
"잠깐 멈춰라."
유진은 좀비들에게 추적 중지를 명령하고는 수풀 너머를 흘겨보았다.
"이 좀비들은 내 소환수다. 숨어있지 말고 나와."
"미안합니다. 헌터님이 쫓던 사냥감인지 모르고 그만...."
수풀을 헤치며 나온 헌터는 셋.
회귀 전에는 네크로맨서가 세간에 알려진 게 몇 년 뒤였으니.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경계 섞인 모습을 띠던 헌터 중 하나가 화들짝 놀랐다.
"아까 그 분?"
아.
그 녀석들이었나.
게이트에 진입하기 직전, 유진을 걱정해주었던 헌터다.
남자 둘에 여자 하나.
혼성으로 구성된 일행을 빤히 보던 유진은 허-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뭘 그리 놀라느냐?〕
'거울 사냥꾼이라고. 회귀 전에 본 녀석들이다.'
유진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
강민호와 강민영.
이란성 쌍둥이로 회귀 전에 명성을 떨쳤었던 프리랜서 헌터들이다.
한 몸인 것마냥 귀신 같은 합격술로 대상을 농락하는 사냥꾼.
'저 녀석들. 꽤 강해.'
〔흐음. 짐이 보기에는 형편없어 보인다만.〕
'그거야 쌍둥이의 경지가 1성이니까 그런 거지.'
출입조건이 1성인 게이트.
미래의 거울 사냥꾼도 지금은 초심자라는 거지.
회귀 전에 쌍둥이와 손속을 겨뤄본 적이 있어서 그들의 무서움을 잘 알았다.
회귀 전을 기준으로 드미트리를 제외하면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적.
그런데 말이야.
'셋이 아니라 둘이었어.'
반대편에서 마주친 헌터는 셋.
왜 게이트 입장 전에 마주쳤는데 바로 알아보지 못했나 했더니, 일행이 한 명 더 있어서였다.
후위에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헌터.
마법 계열 같은데... 턱을 괸 채 고민해 봐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미래의 적을 일찍 제거하는 것도 방법이겠구나.〕
'쟤들을 왜 죽여?'
〔방금 전에 한 말도 기억하지 못하느냐. 분명 까다로웠다고....〕
'날 암살하란 의뢰를 받았던 거지. 그렇게 악연은 아니었어.'
거울 사냥꾼하곤 공적으로 엮인 게 전부.
암살대상과 타깃이라는 극적인 사이라서 문제일 뿐.
사적 감정은 크게 없다.
'오히려 잘 됐군.'
〔뭐가 말인가?〕
'안 그래도 짐꾼이 필요했거든.'
다른 건 몰라도 '신용'만큼은 확실했던 게 거울 사냥꾼이다.
'헌터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돈이었지?'
파트너로 두기에 딱 알맞은 조건.
기억에 없는 녀석이 더 끼어 있지만, 뭐 어떤가.
적어도 두 사람은 회귀 전의 행적으로 보건대 믿을 수 있다.
계약만큼은 확실하게 지켰던 헌터들이니까.
"너희. 나랑 일 하나만 하자."
"갑자기 무슨 일을 말씀하시는 건지...."
"마석 채집을 맡기마. 비율은 8대2."
마석.
대격변 이후 마력을 응용한 4차 산업의 핵심 원료다.
몬스터들의 심장에 자리 잡고 있어서 헌터 수입의 핵심 축이기도 하고.
'좀비들한테 맡기긴 어려운 작업이다.'
마석 채집은 나름대로 섬세한 손재주가 필요했다.
괴물의 가슴팍을 째고 그 안에서 광물을 끄집어내는 일.
그렇다고 사냥을 끝낸 몬스터 사체에 일일이 손을 대는 건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
라이프 드레인에 해부까지 하면 사냥 속도가 엄청나게 떨어지거든.
"사냥은 전적으로 내가 맡고. 너희는 돈을 버는 거지."
꽤나 좋은 제안이지 않니?
유진의 뒷말에 1성급 헌터 셋으로 꾸려진 팀, [뽀시래기]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
뽀시래기 팀의 일원, 강민경과 이성민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좀비를 힐끗거렸다.
"오빠. 저 사람, 뭐라고 하는 거야?"
"강 선배. 좀비를 사역마로 부리는 헌터는 듣도 보도 못했슴다."
동태 눈깔처럼 생기 하나 없는 동공.
벌어진 입에서는 침이 뚝뚝 흘러나오고 있다.
하급 언데드인 좀비.
생물에 대한 적의만으로 움직인다는 괴물들과 대치를 벌이다 보니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진이 쭉쭉 빠지는 기분이다.
"하자."
"진심임까?"
"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
강민호는 상황 판단이 빨랐다.
유진이 뽀시래기 팀을 덮치려고 했으면 번거롭게 제안 같은 걸 꺼낼 이유가 없었다.
'마석 채집은 손이 많이 가. 귀찮은 일을 우리한테 몰아주겠단 의도일 거야.'
강민호는 몇 마디 대화와 정황을 살펴보곤, 유진의 의도를 읽어냈다.
훗날 [거울 사냥꾼]이라는 이명으로 명성을 떨칠 만한 판단력.
떨리는 마음까진 어찌 할 수 없었지만, 태연함을 가장한 강민호가 입술을 떼었다.
"그 비율. 저희가 8입니까?"
"2."
"5대5로 해주시죠. 그래도 저희가 나눠 먹으면 1.7씩입니다."
"7대3. 그 이상이면 갈 길 가라."
"알겠습니다."
강민호가 유진의 제안을 받아들이니 이성민이 앞을 힐끗거렸다.
"선배. 이거 진짜로 괜찮은 검까?"
작은 목소리로 새어나온 불평.
사후경직으로 굳은 몸을 어색하게 움직이는 좀비들을 보고 있자니 아까 쓰러트린 고블린 무리보다 몇 배는 위험해 보인다.
"날 믿어. 우리를 덮칠 거였으면 진즉에 했을 거다."
강민호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제대로 된 장비 하나 없이 맨몸으로 게이트에 진입
실력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
유진의 제안대로 움직이면 평소보다 많은 돈을 벌 것이라고 생각했다.
30분 뒤.
"저 헌터. 고블린의 씨를 말릴 셈인가?"
"어때. 이번에 제대로 한탕 하는 셈치자고."
1시간 뒤.
"이야. 또 몰려오네. 고대의 정원이 인기가 없긴 하나 봐."
유진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고블린들을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반면 뽀시래기 팀의 얼굴은 20년 정도 늙어 있었다.
"······흐엑. 헥."
"차라리 죽여줘. 쉬고 싶어."
강민호는 팀원들을 보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경이로운 사냥 속도.
숨 돌릴 시간도 주지 않고 고블린들을 도륙하니, 뽀시래기 팀의 버텨나질 못했다.
"그러지 말고 조금만 쉬어가는 게 어떻습니까?"
"여기에도 마정석이 굴러다니네."
"...."
"아. 강조하는 건 아니고 그냥 돈이 땅바닥에 버려져 있어서 말이야."
히죽 웃는 유진.
뽀시래기 팀의 눈에는 그 웃음이 어떤 것보다도 두렵게 느껴졌다.
"당신들 압박하는 거 아니니까 천천히, 느긋하게 해."
그 순간에도, 고블린 사체는 하나씩 쌓여갔다.
*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합니다.]
유진은 바짝 마른 고블린 사체를 바닥에 던졌다.
"이 근방은 얘가 마지막이군."
사냥에 매진한 지 3시간.
그 짧은 기간 만에 능력치가 부쩍 상승했다.
[힘 : 7 → 13.1]
[민첩 : 6 → 15.3]
[체력 : 7 → 10]
[맷집 : 5 → 6.5]
[성력(마력) : 10 → 11.3]
도합 21.2!
치환하면 4레벨에 해당하는 수치를 라이프 드레인으로 획득했다.
"와우."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환호성.
회귀 전에도 온갖 경험을 쌓은 유진이지만, 감탄을 참기 어려웠다.
레벨을 올리면서 얻은 보너스 스탯은 투자하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라.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을지 궁금해지네.'
유진의 머릿속에는 회귀 전의 경험과 지식도 들어 있다.
스스로를 숭배한다는 허점을 파고들어서 세운 '죽음을 거스르는' 성좌.
그가 강해질 때마다 추가될 새로운 신성 주문들을 생각하니 마음속에서 웅심이 끓어올랐다.
반복적으로 고블린의 생명력을 흡수하다 보니 조금씩 효율이 떨어지긴 했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더 바라는 건 날강도 같은 심보였으니까.
고블린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면서 나아가니 숲 끝자락에 도달했다.
"저, 헌터 님."
"유진이라고 불러라."
"경계를 넘으면 보스 몬스터인 고블린 주술사의 영역입니다."
"물러나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물러나. 지금까지 일한 거 값은 쳐줄 테니."
숲 안쪽까지 온 건 레벨을 올리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고대의 정원]에 숨겨진 요소를 발동시키려면 주술사의 피를 손에 넣어야 한다.
"정말임까?"
이성민이 환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여기서 돌아가기만 해도 천만 원 단위의 정산금을 받을 수 있다.
지난 3시간 동안 사냥한 고블린의 숫자만 백 단위를 넘어섰으니, 10%만 먹어도 엄청난 이득!
고블린 주술사의 난이도는 1성급 게이트에서도 상위권이다.
위험부담 없이 발을 빼도 남는 장사.
하지만.
"따라가겠습니다."
강민호는 또렷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 분, 유진 님을 따라다니면 훨씬 큰돈을 벌 수 있다.'
그건 확신이었다.
1성만 출입 가능한 [고대의 정원.]
같은 성위인데 이렇게나 파격적인 힘을 다루는 헌터가 얼마나 있을까.
마석을 캐는 게 얼마나 어렵다고.
'그러니까 반드시 따라가야 해.'
유진은 그 생각을 읽곤 피식 웃더니 좀비들을 앞세웠다.
광장 한가운데에 모여 있는 고블린.
지금껏 마주친 놈들과 달리, 완전무장을 갖춘 놈들이 70마리 정도 모여 있다.
그 뒤에는 온갖 뼈로 치장한 고블린이 의자에 앉았는데, 자세히 보면 장신구도 모두 뼈 재질이다.
들고 있는 지팡이는 검은색인데, 멀리서 볼 때는 뭐로 만든 건지 통 알 수 없다.
[고대의 정원] 남부 지역의 보스 몬스터, 고블린 주술사다.
"보아라. 어리석은 인간이 왔구나."
"킥킥. 어리석은 고블린이 머릿수만 믿고 있구나."
"뭣이?"
"거기에 뭐냐. 뼈 페티시라도 있냐? 좀비보다도 더 썩은 내가 나겠네."
유진은 오른손으로 코를 틀어막았다.
"거, 건방진 인간!"
"건방진 고블린아. 넌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주둥이로 싸우려고 하냐?"
고블린 주술사는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뻐끔거리다가 이내 자리를 박차며 일어났다.
"저 인간을 무릎 꿇려서 내 앞으로 데려와라."
"키키킷!"
앞다투어 뛰어오는 고블린 부대.
말싸움 못 하는 애들이 꼭 저렇게 먼저 화를 낸다.
"뼈 채로 씹어 먹어라."
유진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좀비 20마리가 흉성을 터트렸다.
6화 이 맛에 네크로맨서 하지(3)
콰드득! 좀비가 고블린의 살점을 물어뜯는다.
허벅지를 물린 고블린 전사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칼을 휘둘러서 좀비의 팔목을 잘라냈다.
피와 살이 튀는 난전.
유진은 눈동자를 좌우로 돌리면서 전장의 흐름을 읽어냈다.
"내 부름에 답하라."
좀비 한 구가 파괴되면 즉시 근처에 있는 사체를 일으켜 세웠다.
한 번에 유지 가능한 최대 수는 20.
수적으로 불리했지만 한 구가 쓰러지면 곧바로 좀비를 제작해서 전선을 유지했다.
"큼 마우소라 칼라!"
두개골을 위에 달아놓은 말뚝이 고블린 군대 사이에 푹 박혔다.
[용맹의 토템이 고블린의 정신을 고취시킵니다.]
빈 동공에서 새어나온 음산한 빛.
고블린들의 눈가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보아라. 우리 용맹한 고블린의 모······."
콰득,
"모가 뭐. 어쨌다고?"
"이 명예도 모르는 건방진 인간!"
유진이 날린 뼈 막대는 정확하게 토템의 윗부분, 그러니까 두개골을 박살냈다.
순식간에 무력화된 토템.
"예예. 그러시겠죠. 명예로운 고블린이라서 참으로 좋으시겠습니다."
"저 인간은 반드시 죽여라!"
고블린 주술사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저러다가 혈압이 올라 제풀에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구나.〕
'계약자부터 챙기시죠. 성좌님.'
고블린 주술사를 공략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건 토템이다.
호위 부대에게는 각종 버프를.
침입자들은 각종 디버프와 환각을 맛봐야 한다.
"토템이 쌓일 틈을 줄 것 같나."
콰직! 콰직!
토템을 설치하는 족족 유진이 조종하는 뼈 막대에 파괴되었다.
주술사의 술법이 아무 힘도 쓰지 못하는 사이에 고블린 무리의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분노로 일그러진 고블린 주술사의 얼굴.
"키륵, 키르륵!"
"왜. 뭐가 잘 안 돼?"
"광기의 화신이여. 이리 오너라!"
팽그르르-.
고블린 주술사의 손에 쥐어 있던 지팡이가 돌연 손에서 빠져나가더니 땅으로 푹 꽂혔다.
지팡이에서 퍼지기 시작하는 음울한 마력 파장.
"어림없지."
허공을 가르며 날아드는 뼈 막대. 죽음의 정수를 부여해서 원본 마법보다 몇 배로 강화되었다.
집채만 한 바위에도 구멍을 새길 정도의 파괴력.
기다란 뼈가 가까워지는 순간. 캉! 보라색 기운이 일어나면서 투척한 뼈를 튕겨냈다.
[광기의 주술이 적용됩니다.]
[고블린의 근력 · 민첩이 50% 상승합니다.]
"비장의 수가 그 지팡이인가?"
"내 지팡이는 같잖은 공격으로 부서질 만큼 약하지 않다."
"그런 것 같네."
"흐흐흐. 고블린의 원혼을 갈아서 가공한 뼈 지팡이다. 인간 따위가 손을 댈 만한 물건이 아니지."
고블린 주술사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뼈에 영혼을 갈아 넣었다고?"
"그렇다. 수백의 원혼이 담긴 지팡이가 네 영혼을 탐하는구나."
키에에에-!
뼈 지팡이에서 흘러나온 귀곡성이 헌터들의 정신을 흩트린다.
"두려워서 말문이 막힌 게냐?"
"아니. 이렇게 날로 먹어도 되나 싶어서."
유진은 마력을 길게 늘어뜨렸다.
본 컨트롤.
사체의 뼈라면 무엇이든, 마력만 충분하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
'그게 적의 무장이나 토템이라고 해도!'
뼈 지팡이를 손에서 떨어트린 거.
후회할걸?
드드득!
땅에 박혀 있던 지팡이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영력으로 고블린 주술사가 부여한 주력(呪力) 몰아내고 지배 권한을 손에 넣는 것쯤.
하품이 나올 정도로 쉬운 일이다.
[광기의 주술이 구심점을 잃습니다.]
[고블린들이 이성을 되찾습니다. 후유증으로 근력 · 민첩이 30% 하락합니다.]
"이, 인간!"
"덕분에 일이 쉽게 풀렸네. 고맙다."
고블린 주술사의 숨겨진 패턴.
일반적인 헌터 파티나 공격대라면 대처하기 힘들었겠지만.
유진은 아니었다.
"호오. 평범한 뼈가 아니잖아."
원혼이 깃들어서 그런지, [본 컨트롤]의 반응 속도나 위력 모두 일반적인 뼈보다 훨씬 뛰어났다.
주술사가 비장의 수단으로 아껴둔 이유가 있군.
"그런 의미에서 너한테 돌려주마."
유진은 뼈 지팡이 끝을 고블린 주술사에게 겨누었다.
피융-! 허공을 격하며 날아든 지팡이.
고블린 주술사가 황급히 팔을 휘저었지만, 지팡이는 신묘한 움직임으로 피하면서 놈의 목젖에 파고들었다.
"끄으, 끄으으······."
"너한테 원한이 많은가 봐. 이런 걸 인과응보라고 하던가?"
흐흐.
비릿한 미소가 유진의 입가를 물들였다.
치명상을 입은 고블린 주술사.
[광기의 주술] 후유증으로 약해진 고블린들의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이,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고블린 주술사는 바닥에 쓰러진 채, 팔다리를 바동거렸다.
"왜. 뭐가 잘 안 돼?"
유진은 본 컨트롤로 지팡이를 쭉 당겼다.
목덜미를 반쯤 관통당한 채, 같이 들려서 날아오는 고블린 주술사.
놈의 이마에 손을 얹고는 라이프 드레인을 펼쳤다.
"끄으으...."
고블린 주술사는 한참 동안 신음을 흘리다가 고개를 푹 꺾었다.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합니다.]
[근력 0.4를 흡수했습니다.]
[민첩 0.5를 흡수했습니다.]
[마력 1.3을 흡수했습니다.]
우드득- 막 빨아들인 주술사의 생기가 신체를 변화시켰다.
보스 몬스터라 그런지, 일반 고블린보다 생명력을 많이도 토해냈다.
'이 놈은 마력을 많이 주잖아?'
몬스터 종류에 따라 상승하는 능력치, 그리고 폭이 다르다는 예상이 증명되는 순간이다.
"이크."
생명력을 가장 많이 담는 매개체는 피.
무심코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하다가 고블린 주술사의 피를 모조리 바닥낼 뻔했군.
놈의 목덜미에 상처를 내고 게이트 출입 전에 챙긴 PT병을 바짝 붙였다.
졸졸졸-.
얼마 남지 않은 피를 겨우 담아내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게 바로 의지를 꺾는 싸움, 인가.〕
'새삼스럽기는. 적응 못하겠으면 눈 감고 있던지.'
〔짐을 얕보지 말거라. 계약자.〕
예. 예.
왕좌를 지키기 위해 자식들도 삼키신 분인데 이 정도는 참아줘야지.
고블린 주술사를 격살하니 남은 고블린들의 사기가 눈에 띄게 저하되었다.
그 뒤로는 일방적인 학살.
적막감이 드리운 부락 여기저기에는 고블린 사체가 널려 있었다.
"마무리는 너희에게 맡기마."
"아, 예. 그게 계약이긴 하니까요."
강민호는 사색이 된 얼굴로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다.
대충 봐도 100마리는 되어 보이는 수.
'마석을 언제 다 채집하나?'
돈이 바닥에 굴러다니는데도, 강민호는 웃음이 나오지를 않았다.
*
저벅- 저벅-.
게이트에서 나온 유진.
뽀시래기 팀이 그 뒤를 따라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뭘 저렇게 들고 나온 거야?"
"잠깐. 마석이잖아."
"4명이서 저 많은 괴물들을 죽이고 마석까지 캐왔다고?"
"미친. 그게 말이 되나."
유진과 뽀시래기 팀에게 쏟아지는 시선.
경악.
놀라움.
그리고 감탄.
'이 정도 가지고 놀라긴.'
유진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눈빛이다.
"뭐해. 안 따라오고."
"아, 예. 갑니다."
뽀시래기 팀은 유진의 퉁명스러운 말에 화들짝 놀라더니 멈췄던 걸음을 다시 떼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십니까?"
"용산. 그거 다 처분하려면 거기가 빠르지."
"제 값을 받으려면 발품을 파는 게 낫습니다. 맡겨주시면...."
"오늘 처음 본 너희를 믿으라고?"
강민호의 말문이 닫히자, 유진이 짧게 웃었다.
"농담이다. 그것보단 시간을 조금이라도 아끼는 편이 나아."
자잘한 돈에 매일 필요는 없다.
손에 쥔 자금을 불릴 방법은 넘쳤으니까.
'기초수준의 투자금만 있으면 돼.'
용산 헌터마켓에 들어간 유진 일행은 게이트 공략에서 얻은 물건들을 빠르게 처분했다.
-원념의 지팡이(레어).
-크라치의 독검(매직).
-E급 마정석 1개
-F급 마정석 358개.
"마석 개수가 꽤 나왔군."
"그렇게나 무식... 아니 열심히 사냥을 했으니까요."
뒤에 선 이승진과 강민영이 어설프게 웃었다.
'손목이 아파.'
'일하다가 뒈지는 줄 알았슴다.'
괴물과 싸우는 것보다 더 힘들 줄 누가 알았는가.
유진의 사냥 속도는 여태 평범하게 헌터로써 활동해온 뽀시래기 팀이 쫓기 어려울 만큼 대단히 빨랐다.
"다 처분하면 얼마쯤 나올 것 같나?"
"저한테 모두 처분하면 깔끔하게 6천으로 쳐드리죠."
6천만 원이라.
각성 후 첫 사냥치고는 괜찮은 수입이다.
유진이 3년 동안 뼈 빠지게 일해서 모은 돈이 3천만 원.
무려 2배나 되는 돈이 하루 만에 벌렸다.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액수이지 않나?
'뭘. 이 정도로.'
네크로맨서로 전 세계 헌터들의 정점에 서기도 해봤다.
앞으로 그가 해낼 일들을 생각하면 이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또한.
쓰러트려야 할 적들도.
"독검도 꽤 인기 있는 무기라서 2천은 받을 수 있을 거고요. 그 대신...."
상인은 원념의 지팡이를 흘겨보았다.
고블린 주술사가 사용했던, 그리고 주인의 숨통을 끊어버린 비운의 무기다.
"그 지팡이는 값이 별로 안 나올 겁니다."
"왜지?"
"옵션을 직접 확인해보면 아실 거요."
묘한 표정을 짓는 강인호.
유진은 뼈 지팡이의 특성을 확인했다.
[원념의 지팡이]
등급 : 희귀[R]
분류 : 지팡이
제한 : 신관
내구도 : 67/200
고블린의 원혼 수백으로 제련한 저주받은 지팡이다.
착용 시 마력을 증대시켜주는 대신 사용자의 정신을 좀먹는다.
*마력 + 30
*마력 소모량 12% 감소.
*낮은 확률로 혼란의 저주에 걸린다.
"제한은 신관 직업군인데 마력이라니. 이걸 어디에 쓰겠습니까."
"만약에 판다고 하면 얼마쯤 할 것 같아요?"
"700이나 나올 겁니다."
강민호는 상인의 말에 허허- 하고 아쉬운 듯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보스 레이드에서 나온 최고 등급 아이템의 가치가 생각만큼 높지 않았다.
오히려 고블린 전사가 사용한 독검이 더 상품가치가 높으니.
"흐흐."
유진도 미소를 지었다.
한데, 둘의 웃음은 의미가 전혀 달랐다.
'괜찮은 걸 얻었군.'
신관 클래스 전용이면서도 마력을 늘려주는 기묘한 옵션.
유진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영력도 마법 계 헌터의 능력. 마력 증가 옵션은 [백야]로 능력을 치환하면 고스란히 적용되었다.
지팡이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이것도 팔 거요?"
"내가 받을 정산에서 빼고 가져가지."
강민호의 눈가에 의아함 섞인 빛이 감돌았다.
"원념의 지팡이를 챙겨 가시려고요?"
"700만원 주고 팔 바에는 내가 쓰는 게 낫겠다 싶어서."
"어차피 헌터님 아니었으면 못 벌 건데 정산에서 아예 빼고 계산하시죠."
강민호는 일행을 둘러보았다.
"다들 어떻게 생각해?"
"선배님 뜻대로. 어차피 값도 치른다고 했으니 거절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함다."
"오늘 한 일이라고는 마석 채집밖에 없는걸. 편하실 대로."
녀석들.
강민호만큼은 아니지만 눈치가 쓸 만하군.
〔이래서 저들을 거둔 것이더냐?〕
'뭐, 그런 셈이지.'
본 적 없는 녀석이 껴 있긴 해도... 데리고 다닐 만 하겠어.
들고만 있어도 몇 배나 뛸 예정인 우량주가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
이걸 놓치면 멍청한 짓이잖아.
전생에서 상대해본 헌터 중 기억에 남는 강적.
거울 사냥꾼을 아군으로 끌어들이면 향후 계획에 큰 힘이 될 것이다.
'아니지. 당장에도 꽤 도움 되잖아.'
잡무 겸 일꾼으로.
안 그래도 게이트에서 사냥을 하려면 지원해줄 헌터들이 필요했다.
뽀시래기 팀이 제대로 된 지원 팀은 아니지만.
그의 수족이 되어서 번거로운 일을 해줄 노예... 아니, 팀원 역할은 맡길 만했다.
"뽀시래기라고 했지?"
"예. 유진 님."
"나랑 일을 더하면 주머니는 꽤 풍족해질 거다."
5,300만 원에서 유진의 몫으로 떨어지는 건 3,700.
남은 1,600만 원을 셋으로 나눠도 하루 일당이 5백을 넘어갔다.
전원이 1성인 뽀시래기 팀 헌터들에게는 꿈도 꾸기 힘든 어마어마한 수입.
'선배. 어떻게 함까?'
'오빠가 결정해. 우린 몰라.'
두 사람의 속삭임에 강민호가 한숨을 삼켰다.
솔직하지 못하긴.
이런 기회가 흔치 않다는 것을 모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나랑 같은 생각이지?"
침묵하는 두 사람.
하지만.
약속이라도 한 듯, 뽀시래기 팀원들은 눈빛을 교환하더니.
"맡겨만 주십쇼!"
입 맞춰 크게 외쳤다.
7화 고대의 시험장(1)
다음 날.
유진과 뽀시래기 팀원들은 [고대의 정원]에서 사냥을 이어갔다.
"주술사가 없어져서 고블린들이 난폭해졌을 겁니다."
"오히려 좋아."
"네?"
"그럼 좀비들을 봐도 안 도망칠 거 아니냐."
고블린 쫓아가는 게 얼마나 귀찮은데?
강민호는 유진의 뒷말을 듣더니 어설프게 웃었다.
한 차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고요해진 숲.
고블린이 보이는 대로 사냥했더니 아예 씨가 말라버렸다.
땀범벅이 된 뽀시래기 3인방.
"헉, 헉."
"이러다 숨 넘어가겠네."
지치지도 않는 좀비 무리의 속도에 맞춰 걸으랴.
고블린 사체에서 마석 꺼내랴.
적지 한가운데인 게이트에서는 체력을 안배하는 게 중요했지만, 유진의 살인적인 사냥 속도에 맞추다 보니 녹초가 되어버렸다.
"더 할 수 있겠나?"
"유진 님. 저희는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벌써부터 빼면 곤란한데."
"가방이 꽉 차서요."
강민호가 난감한 표정으로 웃었다.
휴대용 가방을 가득 채운 마석. 더 사냥을 해도 담아두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핑계 하고는. 너희 먼저 돌아가라."
"몬스터를 더 사냥하실 겁니까?"
"이 녀석들. 팔팔하잖아. 밤을 새워도 괜찮을걸."
그르륵-.
가래 끓는 소리에 뽀시래기 팀원들이 질색했다.
강인호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쪽지 하나를 유진에게 내밀었다.
"제 번호입니다."
"남자 연락처에는 관심 없다만."
"정산금 받으실 계좌번호는 알려주셔야죠."
....
그렇군.
쓸데없이 정직한 녀석 같으니라고.
노예 1호로 선정될 만큼 선한 인성을 지닌 사내다.
"나가는 대로 연락 주마."
"저흰 그럼 처분하러 가보겠습니다."
멀어지는 뽀시래기 팀을 흘겨본 유진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일부러 보낸 것이로구나.〕
'티 났나?'
〔그야 의도가 너무 투명하지 않느냐.〕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누구에게 보여줄 만한 게 아니다.
회귀 전의 지식.
그러니까, 수 년 후에 밝혀질 미래의 정보를 일찍 꺼내어 쓰는 것이다.
나비 효과 같은 어려운 표현 때문은 아니다.
기연을 남에게 나눠주기 싫은 것뿐.
숲의 보스 몬스터인 고블린 주술사를 쓰러트린 후에도 한동안 뽀시래기 팀원들을 굴린 이유다.
'프로그맨의 심장과 고블린 주술사의 피.'
유진은 과거의 기억을 되짚었다.
몇 년 뒤.
비인기 게이트인 [고대의 정원]이 각광받게 된 것은 숨겨진 요소 덕분이다.
촉매들을 정해진 위치에 두면 비밀 공간인 [고대의 시험장]으로 이동.
시험을 이겨내면 영구적인 버프를 부여하는 '문장'이 새겨진다.
전 세계에 열린 수많은 게이트를 뒤져도 찾아보기 힘든 희소성 있는 보상.
회귀 전에는 유망주로 불린 헌터들이 줄지어 고대의 정원을 들렀다.
'가볼까.'
좀비들을 앞세워서 호숫가 근처로 이동했다.
[고대의 정원]의 북쪽 지역.
호수 주위에는 푸른 피부의 양서류 괴물인 프로그맨들이 포진해 있다.
정확히는 호수 아래에서 먹잇감을 노리고 있는 중.
"그륵."
좀비 한 마리가 유진의 명령을 받고 호수 근처로 다가갔다.
그 순간.
"아르르르르!"
목청을 울리는 것 같은 기괴한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퍼지고.
잔잔했던 호수 곳곳이 파문으로 일그러지더니 프로그맨 여러 마리가 튀어 나왔다.
콰직!
삼지창이 좀비의 목덜미를 꿰뚫었다.
"아르르!"
"그륵, 그르르륵."
머리가 파괴되지 않으면 소멸하지 않는 좀비. 유진이 공을 들여 제작한 만큼 방어력도 올라가서 일격에 파괴되지 않았다.
목덜미에 삼지창이 박혀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프로그맨에게 접근.
그대로 물어뜯었다.
"아르르르!"
게거품을 문 프로그맨. 첫 사냥이 실패로 돌아가자 아까 호응했던 동족들이 연달아 튀어 올랐다.
시체 폭발이라도 익혔으면 한 방에 소탕하는 건데.
유진은 쩝- 입맛을 다시면서 남은 좀비들을 연달아 투입했다.
순식간에 난전으로 바뀐 싸움의 양상.
호수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프로그맨들은 좀비들을 하나씩 파괴했다.
"아르르. 냄새나는 거. 약하다."
그러겠지.
프로그맨은 고블린보다 신체 능력이 3배 이상 높다.
유진의 솜씨로 강화된 좀비들로도 어찌 할 수 없는 스펙 차이.
"내가 그걸 몰랐을까?"
공중으로 솟구친 원념의 지팡이.
희끄무레한 기운이 전보다 몇 배나 진해져서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해졌다.
죽음의 정수를 지팡이에 더 부여해서 강화한 모습.
쇄애애액!
반대로 뒤집힌 뼈 지팡이의 날카로운 끝부분이 조롱하던 프로그맨을 향해 쏘아졌다.
[오일 샤워]
피부를 적시는 미끈미끈한 기름.
프로그맨의 종족 스킬로 찌르기의 위력을 경감시킨다.
"아르륵, 그런 거 소용 없... 컥!"
가슴팍에 닿기 직전.
원념의 지팡이의 속도가 조금 줄어드는 대신 빠른 속도로 회전했다.
회전축이 되는 지팡이의 끄트머리는 프로그맨의 기름을 흘려내며 피부를 찢어발겼고.
피부와 근육으로 보호 받는 내부로 어렵지 않게 파고들었다.
바로.
심장이 있는 위치까지.
'너무 상하면 제단에서 안 받아주니 신중하게.'
촤아아악!
원념의 지팡이가 밖으로 나오면서 찔렸던 프로그맨의 심장도 덩달아 뽑혀 나왔다.
구멍 사이에서 폭포수처럼 거세게 흘러나오는 초록색 피.
프로그맨 하나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레이즈 언데드를 사용합니다.]
초점 잃은 동공이 파르르 떨리고.
죽음의 정수를 받아 두 번째 삶을 누리게 된 프로그맨 좀비가 으으으- 짧게 신음했다.
고블린보다 두 배 가까이 커다란 체구.
원본이 더 강한 만큼 스펙도 눈에 띌 정도로 크게 상승했다.
"그어어어어!"
"아르르."
삼지창이 좀비 프로그맨을 저지하지만 뼈가 부러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달려들었다.
고블린처럼 체구가 작고 힘이 부족하면 모를까.
유진이 죽음의 정수로 뼈와 살을 강화시킨 덕에 원본보다 강해진 프로그맨을 저지하기는 어려웠다.
"아륵, 히, 힘이."
흔들거리는 삼지창. 좀비를 붙든 프로그맨이 힘겨운 소리를 내고 있을 때.
쇄애애액!
다시 한번 뼈 지팡이가 허공을 갈랐다.
"왜. 구경만 할 줄 알았나?"
유진의 히죽거리는 목소리가 프로그맨들의 귓가에 아른거렸다.
두 번째 심장이 뽑히고, 좀비도 늘어났다.
'원념의 지팡이가 아니었으면 공략하기가 어려웠을 거야.'
프로그맨 종족 스킬인 오일 샤워.
화염 계열 공격에 취약해진다는 단점을 빼고는 굉장히 까다로운 스킬이다.
움직임에 방해되기는커녕 민첩을 올려주고.
칼이나 창 같은 날붙이에 대한 저항력을 대폭 상승시켜주니.
일반적인 뼈로는 오일 샤워로 매끈해진 프로그맨의 가죽을 찢어내기도 어려웠을 거다.
운이 좋군.
'영력 소모가 심하긴 해도 버틸 수 있다.'
프로그맨 좀비를 일으키고.
죽음의 정수를 지팡이에 과충전시키다 보니 영력이 물밀듯이 빠져나갔다.
[단기간에 많은 영력을 소모했습니다.]
[집중력이 감소합니다.]
윽-.
흐려지는 눈동자. 영력 고갈의 후유증으로 손과 발이 파르르 떨렸다.
'이 정도쯤이야.'
영력 과다 사용의 페널티는 버틸 수 있다.
그리고.
모자라는 영력을 회복시킬 방법도 이미 준비해두었고.
단전에 자리 잡은 기운. 라이프 드레인으로 축적한 고블린의 생명력을 영력으로 치환했다.
"후. 이 맛이지."
초점이 흔들리고 속이 울렁거릴수록.
알 수 없는 고양감이 끓어오르면서 유진의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렇게 무리하다가 쓰러지면 짐은 어찌 하라는 건가!〕
'안 쓰러져. 겁은 많아가지고.'
〔계약자의 목숨은 짐의 것이다. 그 몸뚱이를 함부로 굴리지 말거라.〕
'언제 그런 계약을 했다고 그러세요?'
〔짐과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게 그대일진대, 허무하게 죽으면 곤란하니 하는 말이니라!〕
걱정하지 마라.
이 정도는 무리하는 축에도 안 끼니까.
"아르륵!"
"아르!"
잠잠했던 호숫가는 어느새 프로그맨의 비명소리로 뒤덮이고, 초록색 피가 지면을 적셨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현재 레벨은 6입니다.]
'이 속도로 가다 보면 회귀 전의 경지를 밟는 것도 금방이겠어.'
마법왕, 그 개자식의 얼굴에 한 방 먹여주려면 하루라도 빨리 강해져야 한다.
잠재적인 위협 요소인 7대 명가의 위협도 무시할 수 없고.
유진은 끓어오르는 마음을 꾹 누르며 사냥을 이어갔다.
"아르르륵...."
호수 근방에 있던 마지막 프로그맨이 신음소리와 함께 고꾸라졌다.
고블린 좀비는 점멸.
새로 제작한 프로그맨 좀비 20마리가 풀린 눈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바로 움직일 건가?〕
'조금은 쉬어야지. 나도 사람이야.'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유진이 숨을 골랐다.
지끈거리는 머리. 허용 영력량을 한참 초과해서 다룬 후유증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합니다.]
백야로 영력과 성력을 치환. 그나마 멀쩡한 프로그맨 사체에서 생명력을 추출해서 치유력으로 돌렸다.
'여유 생명력을 축적해놓으면 힐러 역할도 할 수 있겠어.'
성력은 신관계의 전유물.
네크로맨서의 능력을 드러내고 싶지 않을 땐 라이프 드레인으로 신분(?)을 위장할 수도 있겠다.
치유 능력만 놓고 보면 기초 치유 주문보다 훨씬 효율이 뛰어나기도 하니.
'심장도 넉넉하게 모았다.'
전투 중에 프로그맨 심장을 일일이 적출하고 언데드로 제작하는 건 번거로운 일이었다.
넓은 시야로 전장의 흐름을 완벽하게 읽어내야 가능한 정밀한 작업.
유진이 아니었으면 시도조차 하기 어려웠다.
영력 과다 사용 후유증을 어느 정도 떨쳐낸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비는 끝났다.'
회귀 전에는 그토록 얻고 싶어도 손에 넣지 못했던 성좌의 가호.
이번에는 다르리라.
유진의 걸음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정원으로 돌아오는 길.
팀을 꾸려서 진입한 헌터들이 묘한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본다.
"그어어어."
정확히 말하면 바람 빠진 신음소리를 흘리는 좀비들에게 쏟아지는 관심이지만.
마법 종파 중 하나인 소환계 마법사도 흔치 않은데.
언데드를 다루는 헌터는 이 시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으니 놀랄 만도 했다.
'좀 귀찮아도 감수해야지.'
유진은 쏟아지는 눈빛에 도리어 두 눈을 부라려주었다.
낭중지추라고.
힘을 가진 존재는 언제나 두각을 드러내는 법이다.
전생에도 그랬고.
두 번째 삶에서는 더 빠르게 강해질 것이니 피할 수 없는 결과다.
유진이 노려보자 시선을 피하는 헌터들.
'숨긴다고 가려질 것도 아니고.'
큭.
짧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사후경직이 온 몸뚱이를 흔들면서 어색하게 움직이는 좀비들을 이끌고 정원 중심부까지 왔다.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시선.
언데드를 소환수로 다루는 헌터에 대한 궁금증이 밥을 먹여주지는 않으니, 본래의 목적을 찾아 떠난 것이다.
'슬슬 준비해도 되겠어.'
유진은 보따리에 싸놓은 프로그맨의 심장을 하나 꺼냈다.
멈춘 지 오래 된 푸른 살덩어리에 고블린 주술사의 피를 한 방울 흘리니.
두근- 두근- 두근-!
멈췄던 프로그맨의 심장이 크게 맥동하며 펄떡거렸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을 벌이려고 그러느냐?〕
'미래에 밝혀질 기연.'
〔과연. 회귀의 이점을 살릴 셈이로구나.〕
'집중해야 하니까 조용히 있어.'
주술사의 피가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드는 건 일시적일 뿐.
2분 안에 세팅을 마쳐야 한다.
나머지 심장들도 피를 먹여서 움직이게 한 후, 좀비들의 손에 쥐여 주었다.
"절대 떨어트리지 말고. 저기에 서라."
유진은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하급 언데드인 좀비.
사념이라고는 오직 식욕뿐인 뒤떨어진 언데드다.
한 순간이라도 제어를 느슨하게 하면 손에 쥔 푸른 심장을 입으로 넣어버릴 터.
좀비 9마리가 정해진 위치에 도달한 것을 확인한 뒤, 마지막 심장에 피를 한 방울 떨어트렸다.
[고대의 정원에 숨겨진 비밀을 풀어냈습니다.]
[고대의 시험장으로 이동합니다.]
화아아악!
정원 중심부로 떨어진 강렬한 섬광.
0.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 동안 빛이 번쩍이고는.
유진과 좀비들은 눈부신 섬광과 함께 고대의 정원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8화 고대의 시험장(2)
화르륵!
벽 곳곳에서 일렁이는 마법의 불이 내부를 환하게 밝혀준다.
유진의 눈동자가 좌우로 몇 번을 움직이더니.
'듣던 대로야.'
호선을 그리며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약 50미터 크기의 공동. 중앙에는 원형으로 새긴 마법진이 있다.
'특정 게이트에 감추어진 시련.'
전 세계를 모두 뒤져봐도 몇 없는 희귀한 곳이다.
"구어어어."
섬광에 같이 휩쓸려서 이동한 좀비들.
반쯤 벌어진 입에서 침을 뚝뚝 흘린 채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고대의 시험장Ⅰ에 입장한 것을 환영합니다.]
[이 시험은 혼자만 도전 가능합니다.]
[시험장에서 당신의 용기와 가능성을 증명하십시오.]
'소환수는 내 능력으로 취급되니 인원 제한에 걸리지 않아.'
흐흐.
전생에 들었던 정보와 동일했다.
'이 게이트의 비밀이 밝혀졌을 땐 이미 2성을 넘겨버렸지.'
고대의 정원에 감추어진 비밀을 들었을 때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른다.
1성 헌터만 출입 가능한 게이트.
유진의 실력이었으면 [고대의 정원]의 기연을 취할 수 있었겠지만.
입장 자체가 안 되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나.
'프랑스에도 고대의 시험장이 있다만.'
거긴 이미 유력 길드들이 소유권을 놓고 분쟁을 벌이는 데다, 타국이라서 꿈도 꾸지 못했었다.
유진의 입장에서는 회귀 전후를 통틀어서 처음 도전하는 셈.
[60초 후, 드래고니안이 강림합니다. 정해진 시간 동안 살아남으십시오.]
[제한시간 - 10:00]
[도전을 원하지 않을 경우에는 고대의 시험장 끝에 있는 통로로 돌아가십시오. 원래의 공간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드래고니안.
용족의 피가 섞인 반인반룡의 괴물.
시험 과제는 최소 6성급으로 분류되는 강력한 몬스터다.
몸 어느 부위에서든 오러를 자유자재로 발출할 수 있으며 마법에도 능통한 존재.
〔드래고니안을 상대하라니. 그대의 수준으로는 10초도 버티지 못하겠구나.〕
'용족이긴 해도 1성 게이트에 맞는 수준으로 조정된다고 들었다.'
출입제한이 1성인 게이트다.
갑자기 6성급 괴물이 튀어나오면 밸런스가 안 맞잖아?
시험 대상으로 불려온 드래고니안은 게이트의 영향을 받아 능력치에 제한이 걸린다.
'그렇다고 해서 얕볼 순 없지.'
회귀 전의 정보대로라면 드래고니안의 전투력은 2성의 끝자락.
유진의 능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막강한 적이다.
'그럼 준비해볼까.'
양손을 쓱쓱 비비고는 가까이에 있는 좀비를 불러들였다.
"그어어어?"
"가만히 있어라."
오른손을 좀비의 이마에 얹고는 죽음의 정수로 몸 구석구석을 관조했다.
[좀비]
종족 : 언데드
등급 : ★
강화 수치 ; 100%
죽음의 정수로 뼈와 근육 등을 강화해서 두 배에 달하는 힘을 얻은 좀비.
'그 강화 수치를 좀 이용하자고.'
언데드의 구조에 도가 튼 유진이다.
신체를 강화하면서 스며든 영력을 다른 방향으로 유도하면 이미 완성된 언데드라도 개조가 가능했다.
'일단은 근력부터 돌려볼까.'
2배가 된 근력 수치를 시독으로 치환했다.
꾸득- 꾸드득-.
몸서리치는 좀비의 육신.
"가만히 있으라니까. 형 집중하게."
괜히 좀비를 타박하고는 늘어난 민첩 스탯도 시독에 불어넣으니.
피부 곳곳에 오목한 포자가 보글보글 솟아나면서 좀비의 피부가 한층 더 흉측하게 변했다.
[시독 → 역병 피]
[언데드 개조에 성공했습니다.]
[해당 개체가 역병 좀비로 변했습니다.]
[레이즈 언데드 사용 시 조건을 충족한 개체는 역병 좀비로 제작됩니다.]
근력과 민첩 스탯이 줄어들었지만, 더 강해진 독을 품게 되었다.
드래고니안을 공략할 비장의 수단.
회중시계가 우웅, 하고 요란한 소리를 냈다.
〔망자를 즉석에서 개조하다니.〕
'이런 걸로 일일이 놀라지 마. 난 9성의 네크로맨서였다고.'
개조에 소모되는 죽음의 정수는 많지 않다.
대신 언데드의 구조에 대해 해박한 지식이 있어야 하고.
개조과정에서 힘이 손실되지 않으려면 죽음의 정수를 완벽하게 제어해야 하기에, 극한의 집중력을 요구했다.
평범한 네크로맨서라면 한 구를 개조하는 데 꼬박 10분 이상이 걸렸을 터.
'고작 좀비 개조하는 걸로 극한은 무슨.'
유진은 그 어려운 작업을 25초 만에 끝마쳤다.
한 구를 추가로 개조하니 남은 건 10초.
좀비 무리를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하고 나니 공동 중심에 있는 원에서 빛이 새어나왔다.
화아악-!
소환진에서 광채가 솟구친 후, 3미터 크기의 드래고니안이 새하얀 빛줄기를 뚫고 나왔다.
[드래고니안이 강림했습니다.]
[10분 동안 버티십시오.]
『크라라라!』
드래고니안이 괴성을 토해냈다.
*
고대의 시험장.
만신전의 성좌들이 뛰어난 헌터를 고를 심산으로 용 군단에 의뢰하여 만든 공간이다.
시련을 주관하는 이들은 용 군주 휘하에 있는 용 군단의 일원.
용인 제르카덴은 강신을 마치자마자 코를 벌렁거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냄새나는 족속을 부리는구나.』
프랑스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린 [고대의 시험장Ⅰ].
여태 수십이나 되는 헌터들을 상대했지만, 망자를 부리는 술자는 처음이다.
"평생 씻지도 않는 족속한테 냄새난다는 소리는 듣기 싫은데?"
싱글거리는 낯으로 대꾸하는 유진.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한 줄기 조소가 공동을 울린다.
진짜냐고?
아무렴.
상위 게이트에서 출몰하는 용족을 사냥하면서 알아낸 쓸데없는 상식이다.
봐라. 저 용인 녀석도 반박하지 못하잖아.
『망자를 다루는 것도 모자라서 경박하기까지 하군.』
제르카덴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
그렇지만,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용족이다 보니 유진의 비난에 대꾸하지 못했다.
『여태 시험장에서 본 자들 중에 가장 천박한 자로다.』
고대의 시험장Ⅰ은 어느 게이트에서 진입하더라도 같은 장소로 연결된다.
제르카덴이 테스트를 한 헌터의 숫자만 수십.
모두 유력 길드의 유망주였으며, 개중에는 독일의 랭커 미하일 드라이스트나 프랑스의 유망주인 기욤 슈나이더도 포함되어있다.
『그들처럼 10분을 버틸 수 있을지 내 눈으로 지켜보마.』
아마 불가능하겠지만.
뒷말을 붙인 제르카덴이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쿵- 쿵-.
발을 뗄 때마다 울리는 묵직한 소음.
유진은 그에 맞춰 자신을 축 삼아 U자 형태로 좀비들을 세웠다.
양쪽으로 날개를 편 형상.
제르카덴은 눈을 가늘게 떴다.
'네 수작질에 넘어가주마.'
직선 코스로 가면 양옆에 줄지어 배치한 좀비들이 달라붙으리라.
포위망을 향해 제 발로 걸어가는 꼴.
너무 투명하게 보이는 수단이지만, 제르카덴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숫자가 많다 한들 1성급의 좀비.
드래고니안의 견고한 비늘은 잘 벼려진 철제 갑주보다 단단하다.
『고통은 길지 않을 것이다. 필멸자.』
"네 고통은 조금 길 건데. 미안하게 되었네."
『언제까지 그 주둥이를 나불댈 수 있을지 지켜봐주마.』
제르카덴이 U자 형태로 퍼진 좀비 무리 한가운데로 들어오자, 따악- 손가락이 퉁기는 소리가 울리면서 좀비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우드득, 우득.
손을 말아 쥐자 근육이 팽창하면서 팔뚝이 한껏 부풀어 오르고.
오른팔을 세게 휘두르자 막 달려들던 좀비의 상반신이 펑-! 하고 터져버렸다.
『고작 좀비 따위...?』
이상하다.
너무나 가벼운 손맛. 사후경직이 온 좀비를 일격에 부순 것치고는 주먹에 전해지는 충격이 적다.
불길한 예감이 제르카덴의 뇌리를 스쳤을 땐.
"이미 늦었어."
촤아아악!
역병 좀비의 몸뚱이에 담겨 있던 독액이 폭발하면서 팔뚝과 어깨, 그리고 몸 일부에 튀었다.
시체에서 나오는 독성 물질.
일명 시독(屍毒)을 극대화해서 만든 산성 액체가 드래고니안의 견고한 비늘을 녹이기 시작한다.
[산성 독 Lv 12]
『허.』
간헐적으로 떨리는 오른팔.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다.'
본체였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공격.
지금은 [고대의 시험장] 시험 수준에 맞춰 신체능력이 약화되었다.
산성 액체가 닿은 부위에서 허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지지직,
비늘이 하나둘 녹아내린다.
"그어어어어!"
『잔재주를 부리는구나!』
시독을 뒤집어써서 둔해진 오른팔 대신 크게 뒤로 젖힌 왼팔을 전력으로 뻗어서 좀비의 몸뚱이를 으깨버렸다.
몸 일부가 마비되면서 동작도 그만큼 커진 상황.
따악-!
유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좀비들을 빠르게 전진시켜서 바짝 붙였다.
『좀비들을 모두 소모하면 어떻게 버티려고 하느냐?』
"글쎄. 난 버틴다고 한 적이 없었는데."
좀비들에게 지시를 내린 유진이 지면을 박차면서 전력으로 뛰었다.
『필멸자여. 설마....』
"이제 알아챘어?"
『가, 감히 나를 쓰러트리겠다는 허황된 생각을 하는 것이더냐!』
[지면 강타]
왼발을 들어 올린 제르카덴이 전력으로 땅을 내리쳤다.
발과 땅이 닿는 순간에 마력을 방출.
충격파가 퍼져 나가면서 좀비들의 몸을 흔들었다.
『이따위 좀비들 따위한테 쓰러질 만큼 나, 제르카덴은 약하지 않다.』
"응. 아니야."
제르카덴은 있는 힘껏 몸을 비틀면서 좀비들을 뿌리치려 했다.
2배로 강화된 좀비들이지만, 강신한 드래고니안에 비해서는 능력치가 모자랐다.
'조금 더 움직이면 벗어날 수 있다.'
제르카덴의 눈동자에서 희망의 빛이 아른거리는 순간.
퍼어어엉!
유진이 준비한 두 번째 역병 좀비가 지근거리에서 폭발했다.
제르카덴의 육체로 쏟아지는 독액.
본연의 색을 잃어버리고 거무죽죽하게 변한 비늘은 더 이상 몸을 보호해주기 어려울 만큼 물러졌다.
"왜. 뭐가 잘 안 돼?"
[본 컨트롤을 사용합니다.]
원념의 지팡이를 감싸는 희끄무레한 기류.
콰직!
유진은 날카로운 지팡이 끝을 치켜세우고는 물러진 비늘을 마구 헤집었다.
'제약으로 인해 약해졌다 한들, 용인을 압도하다니.'
크로노스는 탄성을 삼켰다.
한때는 티탄 신족의 정상에 군림했던 신왕.
이 싸움이 얼마나 불합리한지는 유진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둘의 마력 보유량.
신체능력 차이.
어느 것 하나, 유진이 앞서가는 게 없었다.
'조잡한 언데드 따위로는 용인의 신체를 해하기 어려울 터.'
크로노스가 유진에게 경고한 건 진심이었다.
누구도 관장하지 않는 영역을 파고들어서 성좌가 되었다지만.
만신전에 등록조차 하지 않았기에 별자리조차 없다.
유진이 허무하게 죽어버리면 낙성좌에서 그치지 않고 크로노스라는 존재가 소멸할 것이다.
노파심에 장황한 말을 늘어놓은 게 좀 전.
'괜한 말이었구나.'
크로노스는 느긋해진 마음으로 전투를 지켜보았다.
『으아아아앗!』
핏발 선 눈으로 바동거리는 제르카덴.
독액에 연속으로 노출되어서 몸 절반이 말을 듣지 않았지만.
초인적인 정신력을 발휘해서 유진을 노렸지만, 돌아오는 건 사각을 파고든 지팡이였다.
『케흑.』
비늘을 깨트리고 추가 피해를 입히자 제르카덴의 기력이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놈의 움직임이 둔해진 것을 확인한 유진은 원념의 지팡이를 회수.
망설이지 않고 손을 뻗었다.
[마력 → 성력]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합니다.]
드래고니안의 생기가 빨려 들어온다.
유진은 제르카덴의 모든 것을 갈취할 생각이었다.
생명력이 통째로 뜯겨 나가는 감각.
『끄, 끄으으.』
제르카덴의 움직임이 점점 더 둔해지더니 마침내 고개를 아래로 떨어트렸다.
[고대의 시험장Ⅰ을 통과했습니다.]
[인내의 문장이 새겨집니다.]
◎인내의 문장
분류 : 문장
고통을 받아도 몸에 경직이 완화되며 집중력을 올려줍니다.
*경직 효과 40% 감소
*마력 재배열 속도 20% 감소
성좌의 축복이나 보조마법과는 궤를 달리하는 영구적인 버프.
무투 / 마법계 헌터 모두 효과를 볼 수 있어서 문장 중에서도 최상위로 손꼽히는 강력한 능력이다.
〔가호하고는 다른 매커니즘이구나.〕
'시스템의 축복이다.'
〔만신전, 그리고 시스템. 짐이 세상을 주관할 때만 해도 없었던 개념이건만.〕
아리송한 투로 중얼대는 크로노스.
그 말에 대꾸하는 대신, 유진은 쓰러진 드래고니안 사체를 흘겨보았다.
'진짜 보상은 따로 있지.'
용인의 사체.
네크로맨서라면 눈이 돌아가지 않고는 못 배길 강력한 재료다.
'손상이 거의 없는 용인의 사체라니.'
정말이지.
참을 수가 없군.
유진의 눈동자가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9화 너, 내 연금술 노예가 되어라(1)
바닥에 고꾸라진 드래고니안 사체.
숨길 수 없는 탐욕의 빛이 유진의 눈동자 위로 번들거렸다.
〔꿀 떨어지겠다. 아주.〕
'문장도 좋지만 나한테는 이게 진짜 보상이거든.'
스스스슷!
농밀한 영력이 파고들어서 사체의 골격부터 뼈의 강도 같은 주요 부분에 스며들었다.
고꾸라진 드래고니안 사체를 오밀조밀 살펴본 유진.
'훌륭해. 예상 이상이잖아.'
웃음이 절로 새어 나오네.
뼈 경도와 근육의 질긴 정도, 피에 담긴 마력까지. 어느 것 하나 흠잡을 게 없는 훌륭한 언데드의 재료다.
〔언데드는 생전의 수준에 따라 강함이 결정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렇지.'
〔한데, 이 용족은 시험에 맞추어 능력치를 제한당한 상황이었느니라. 그 이론대로라면 망자로 만들어도 강하지 않을 것 같다만.〕
'중요한 건 이 녀석의 몸뚱이에 담긴 용족의 격이다.'
용족.
만신전에 등록되어 있는 신들의 세계, 일명 '성단' 중 하나를 차지하는 종족이다.
여섯 용군단은 성좌들조차 경시할 수 없는 단체.
게이트가 빚어낸 반쪽짜리 괴물이 아닌.
만신전에서 정식으로 계약을 맺고 능력치 제한을 건 채 시험관으로 임한 드래고니안은 용족의 격을 품은 진짜배기다.
〔하면 드래고니안의 사체로는 어떤 언데드를 만들 수 있느냐?〕
'최대로 잡으면 용아병이겠지.'
용아병(Σπαρτοί).
검과 방패를 든 언데드로 둠 나이트조차 대적하기 어려운 강력한 전사다.
드래곤 고유의 마법저항력은 물론이요.
암흑 투기를 수 미터 이상 뿜어낼 뿐 아니라, 재생능력까지 있다.
'근데 용아병도 조금 아깝단 말이야.'
좀처럼 구하기 어려운 용족의 사체.
게이트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종족이기에 욕심이 났다.
드래고니안 사체에 깃든 용족의 격이 유진의 생각 이상으로 강했으니.
유진은 턱을 괸 채 고민하다가 아- 하는 탄성을 내뱉었다.
'한 번 엘드리치 드래곤을 제작해볼까.'
〔엘드리치 드래곤?〕
'리치 같은 거다.'
엘드리치 드래곤(Eldritch Dragon).
생기를 봉인구에 묶어두고 언데드가 된 죽음의 용이다.
인간으로 치면 리치 같은 존재.
드래곤 사체로 제작한 언데드는 본 드래곤도 있지 않느냐고?
'같은 언데드여도 다르지. 암.'
본 드래곤은 원본이 되는 용족을 절대로 넘어설 수 없다.
마력기관인 드래곤 하트도 없고.
가공 과정에서 살점이 모두 떨어져나가기에 신체능력도 떨어진다.
값비싼 시약으로 드래곤의 사체를 가공하고 온갖 술식을 뼈에 새겨 넣어도 본신의 신체능력을 따라잡는 게 최선.
드래곤을 상징하는 용언(龍言) 마법은 고사하고 강대한 마력조차 다루지 못하는 반푼이다.
'어디까지나 원본을 흉내를 내는 정도.'
드래곤의 격.
그리고 드래곤 하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막대한 출력.
두 가지는 강령술의 극의에 도달한 유진조차 살리기 어렵다.
반면에 용족 스스로가 생기를 봉하면서 언데드가 된 존재, 엘드리치 드래곤은 생전보다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지.
드래고니안의 몸뚱이로 시작해서 성룡급 드래곤까지 성장시킨다면?
이야.
생각만 해도 엄청나네.
'제작하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엘드리치 드래곤 제작에 소모되는 시약만 어림잡아 수십억.
뼈와 근육, 비늘에도 영력을 불어넣어 술식 하나하나를 새겨야 한다.
〔한데 이상하구나. 리치와 흡사하다면 혼백도 있어야 할 터.〕
'꼭 드래곤의 영혼일 필요는 없어.'
엄밀히 말하면 드래고니안도 완벽한 '드래곤'은 아니지 않은가.
반인반룡.
절반은 인간의 형질을 지닌 만큼 용족의 몸뚱이를 감당할 만큼 강인한 영혼을 불어넣으면 된다.
'그건 적당한 녀석이 있으니까.'
전생의 유진이 부렸던 최강의 심복.
그 혼백이라면 드래고니안 사체와 파장이 맞을 거다.
유진은 드래고니안 사체 위에 재차 손을 얹었다.
"보관."
흑암의 반지에서 새어나온 희끄무레한 기류가 드래고니안의 몸뚱이를 휘감더니.
스르르륵, 옷깃이 흘러내리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빨아들였다.
[흑암의 반지에 시체를 보관합니다.]
[보관 한도 : 1/1]
드래고니안의 사체도 수습했겠다.
고대의 시험장에 더 머무를 이유는 없다.
몸을 돌이켜서 하얀 빛이 아른거리는 통로로 향할 때.
〔계약자여. 잠시 멈추어라.〕
'무슨 일이지?'
〔그대의 활약상이 짐의 업으로 고스란히 쌓였도다.〕
[역천의 거인]의 유일한 추종자이자 성자.
유진이 강대한 적을 쓰러트린 '일화'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크로노스의 존재력을 올린 것이다.
〔만신전에서 짐의 별을 정식으로 등록하면 더 많은 신성 주문을 내려줄 수 있을 것 같구나.〕
재미있군.
라이프 드레인만 해도 효용성이 얼마나 높던가?
더 많은 업을 쌓으면 새로운 신성 주문도 추가될 터.
신관으로서의 능력이 얼마나 발전할지는 유진도 쉽게 짐작이 가지 않았다.
'너무 얻어가는 게 많잖아.'
유진의 입가가 호선을 그리면서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
유진은 게이트에서 나오자마자 휴대전화를 찾았다.
[KS 은행 - 잔액 : 52,741,700]
두둑해진 계좌.
회귀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지난 3년 간 모은 돈보다 더 많은 금액이 입금되었다.
'반지 사느라 2천도 썼는데.'
유진은 습관적으로 흑암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반지 안에 보관해둔 드래고니안의 사체. 이걸 강력한 언데드로 가공하려면 수많은 시약을 투입해야 한다.
전 재산을 다 털어 넣어도 엘드리치 드래곤으로서의 최소치만 겨우 충족시킬걸.
'시약을 만들 도구는 예산에 포함하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그 부분은 크게 걱정이 되진 않았다.
연금술 도구를 제공해줄 녀석을 이미 생각해두었다.
턱을 괸 유진은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맘때면 여전히 파주에서 연금술 공방을 차리고 헛짓거리하는 중이겠지?'
서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한 태양.
밤이 되기 전에는 파주에 도착해야 한다.
쉴 틈이 없구먼. 짧게 투덜거린 유진은 곧바로 택시를 잡았다.
*
파주는 대격변 이후에도 최전선으로 분류되는 지역이다.
북쪽 김씨 왕국이야 연쇄적으로 터진 게이트 브레이크에 제때 대응하지 못해서 폭삭 망해버렸지만.
그 영역에 자리 잡은 괴물들이 심심하면 옛 휴전선을 넘어서 남하했다.
'치안도 안 좋고.'
파주 일부는 대격변 때 초토화된 이후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복구되지 않았다.
토착민 대신 콘크리트 무덤에 스며든 건 불법에 발을 담근 이들이니.
파주 서쪽은 해가 넘어가면 무법지대로 변했다.
유진이 급하게 움직인 까닭.
"젊은 양반. 오자고 한 데가 여기 맞수?"
내비게이션대로 운전한 택시기사가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물었다.
눈에 띄는 건물은 곧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버스 정류장뿐.
나머지는 플레이트 재질로 된 옛날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읍이다.
파주시 적성면.
세월의 흐름에서 빗겨나간 것처럼 보이는 시골이 유진의 목적지였다.
"네. 감사합니다."
결제를 마치고는 한적한 시골 동네에 발을 디뎠다.
'여긴 10년 뒤나 지금이나 똑같군.'
전생의 유진이 처음으로 여길 방문한 건 각성 10년 차 때였다.
언데드를 강화하려면 연금술은 필수.
사체를 가공해서 재료 이상의 힘을 발휘하게끔 만들거나 시약으로 강력한 언데드를 제작하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나갈 연금술사가 머무르는 곳이지.'
아직은 미래형이지만.
곧 그렇게 될 거다.
수십 년 동안 변화가 없는 마을이다 보니 공방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버스 정류장에서 뒤로 이어지는 한적한 도로.
10분 정도 걸으니 잡초가 무성해서 반쯤 버려진 샛길이 나왔다.
'관리를 안 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야.'
기분 좋은 기시감에 잡초를 옆으로 젖히면서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콰아아앙-!
공기를 찢어발기는 굉음이 고막을 사정없이 흔들고.
한 발 늦게 피어오른 검은 연기가 허공으로 솟구치면서 한 줄기 기둥을 만들었다.
"이런 것까지도 똑같으면 좀 그렇잖아."
흐흐흐.
전생 때와 비슷한 기시감에 웃음이 흘러나왔다.
검은 연기의 진원지는 이 근방 건물들과 흡사한 슬레이트 방식의 지붕으로 된 커다란 폐공장이었다.
"켁! 켁! 콜록!"
"거기. 괜찮나? 안 다친 데는 없고?"
"저기요. 누구신지는 몰라도 보통 반대로 묻지 않습니까."
"대답하는 거 보면 멀쩡하군."
연기를 뚫고 나온 건 3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사내였다.
볼 아래쪽에 있는 작은 흉터와 살짝 굽은 허리.
새치 가득한 머리카락은 족히 며칠 동안 감지 않은 듯이 떡이 져 있다.
'저렇게 순박한 표정도 지을 줄 알았나?'
크큭.
한 줄기 웃음이 새어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대연금술사 신준석.
회귀 전에 한국에서 가장 실력 있는 연금술사로 명성을 날린 인물이다.
전 세계에서 최초로 [양산형 중급 포션]의 공식을 수립하기도 했고, 그 외에도 수많은 약과 마법 술식을 개발한 실력자.
'나도 시체 강화 관련해서 조언을 얻으려고 왔었지.'
추억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으니 신준석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남의 땅에 무슨 일 때문에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실없는 소리 할 거면 빨리 나가쇼."
"아. 볼 일이 있긴 하지."
"공방에 말이요?"
"내 이름은 천유진. 당신 연금술 도구 좀 쓰려고 왔다."
신준석의 머리 위로 떠오른 의문 부호.
잠시 후.
유진의 말을 뒤늦게 이해한 듯 새빨개진 얼굴로 일갈을 터트렸다.
"미친 소리!"
"아. 그냥 빌려달라는 건 아니고."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헛소리할 거면 빨리 꺼져."
존댓말도 때려치우고 으르렁거리는 신준석.
그래.
유진이 기억하고 있던 대연금술사는 늘 저렇게 독기 어린 표정을 지었다.
'좀 낫네.'
연금술 도구.
초 · 중학교 과학시간에 볼 법한 비커 같은 도구부터 미세한 중량도 체크하는 저울, 그리고 마법의 불을 피우는 아궁이까지.
연금술사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장비다.
네크로맨서로 치면 시체 같은 건데 그걸 빌려달라고 하니.
불같이 화를 내는 게 당연했다.
'댁의 도구는 나도 써봐서 어떻게 다루는지 알아.'
회귀 전.
유진은 국내 1위 연금술사와 자주 교류했다.
네크로맨시를 강화하려면 연금술에도 능통해야 했고, 그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인재는 거의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중급 힐링 포션."
"...뭐?"
"양산이 가능한 포션 조합식을 연구하고 있잖아."
"당신. 그걸 어떻게."
이맘때의 신준석이 뭘 개발하고 있는지.
그 배합 과정에서 어느 촉매가 모자랐는지도 모조리 알고 있었다.
당사자한테 모두 들었으니 말이야.
유진은 막 폭발이 일어났던 폐공장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거긴 내 연구소다."
"포션이 완성되는 걸 보고 싶으면 가만히 있어."
원 역사에서는 1년 뒤에 완성될 포션 공식.
유진은 그 시기를 앞당길 생각이다.
'이 시절에도 도구 욕심 하나는 기가 막혔구먼.'
마녀의 솥.
가드 실린더.
다크니스 에버 스톤.
그 외에도 현 시대에 구하기 힘든 연금술사 전용 장비들이 한가득 있다.
허름한 폐공장 내부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장비들.
값진 촉매와 허브도 여기저기에 널려 있다.
유진은 폐공장을 둘러보다가 거품을 내뿜는 불그스름한 액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중급 힐링 포션.
거품이 올라오는 걸 보면 언제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마석 농도를 4% 올리고 오드람의 풀 5g으로 중화하면 되겠어.'
오드람의 풀을 쥐자 신준석이 버럭 성질을 냈다.
"그건 마력을 안정시키는 용도다. 포션 효과가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데 오드람의 풀을 넣었다간!"
"일정한 마력 수치를 맞추면 증폭과 치유력 향상에 도움을 준다. 연금술사면서 그것도 모르나?"
"...."
모를 만 하지.
현 시대에는 알려지지 않은 연금술 지식이니까.
'그걸 알아낸 게 당신이거든.'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포션 제작에 집중하는 유진.
쓱쓱쓱-.
거침없는 손길로 잎사귀를 가공하고.
쪼개진 마석 가루를 포션에 망설임 없이 넣는다.
멍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본 신준석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정말로 되는 거 아니야?'
말도 안 된다.
자신의 연구 과제를 알고 있는 것도 이상하고.
마치 제집처럼 공방 도구와 재료를 쓰는 것도 수상했다.
그럼에도.
'오드람의 풀에 그런 효과가 있었다고?'
한 치의 망설임 없는 모습.
유진의 작업에 말 못 할 '근거'가 있다는 예감이 들어서 멍하니 구경만 했다.
얼마 정도가 지났을까.
부그르르-!
기포가 더 올라오지 않고 불그스름한 액체가 안정화되었다.
"한 번 시험해볼까?"
유진은 태연하게 조제용 나이프로 팔뚝을 사악- 긁었다.
"다, 당신. 피가!"
"알아. 효과를 보려면 상처 내는 게 최고잖아."
피가 철철 흐르지만 살짝 미간을 찌푸릴 뿐, 신음 하나 안 내고는 중급 포션으로 상처를 치유했다.
허여멀건 연기가 올라오고.
팔뚝에 생긴 상처 위로 새살이 돋아났다.
두 눈을 깜빡이면서 포션과 유진의 팔뚝을 번갈아본 신준석의 입이 쩍 벌어지고.
"성공이다. 성공이라고!!!!"
충혈 된 눈으로 달려오더니 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
환희에 가득 찬 음색.
이제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었군.
"궁금하지 않아?"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신준석. 처음 드러냈던 불쾌감은 사라진 지 오래다.
연금술의 경지를 올리려면 수단과 방법을 고려하지 않는 인간.
그게 신준석이라는 연금술사의 본질이다.
"너. 나랑 일 하나만 하자."
유진의 입술 한쪽이 위로 말려 올라갔다.
10화 너, 내 연금술 노예가 되어라(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