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전력 강화(2)
-그겔. 혼돈, 파괴, 망ㄱ....
퍼어억!
뼈만 남은 두개골이 외력을 받아 푹 숙여졌다.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그겔. 나. 살아났다. 주인께 감사한다. 그러니 적, 파괴한다.
턱뼈를 들썩이며 사념을 흘리는 조승철.
뼈만 남은 스켈레톤 메이지에게 발성 기관 따윈 없다.
생전의 습관 때문에 저러겠지.
〔이번에 만든 망자는 천박하구나.〕
'하급 언데드잖아. 얼마나 기대하는 거야?'
〔적어도 파프너급은 되지 않을까 생각하였건만.〕
'꿈도 크시네.'
크로노스를 타박하고는 상태창을 열었다.
[스켈레톤 메이지(조승철)]
종족 : 언데드
등급 : ★★
◎능력치
근력 : 74 / 민첩 : 87 / 체력 : 40 / 맷집 : 45 / 마력 : 601(+150)
◎특성
▷퀵 리로드[고유] / 불사의 존재[C+] / [C+]
◎스킬
▷파이어볼[C] / 레드 바인드[D+] / 플레임 비트[D] / 파이어 애로우[E]
마력에 편중된 극단적인 능력치.
〔마법사들은 이게 보통이지 않겠느냐?〕
'꼭 그렇진 않아.'
일반적인 마법계 헌터는 반응속도나 장비 착용을 위해 스탯 일부를 민첩이나 체력에 투자한다.
높은 성위끼리의 전투에서는 0.01초의 판단 차이로 승부가 나기도 하니.
합일로 인한 추가 능력치까지 넣으면 751.
2성 끄트머리에 도달한 마법계 헌터보다 조금 높은 수치다.
'의도한 대로 잘 만들어졌군.'
〔그대가 의도했다?〕
'내구력을 깎아내면서 두개골을 강화했다. 그래서 마력이 높게 나온 거지.'
머리만 무사해도 복원이 가능한 스켈레톤.
리치처럼 여벌의 목숨까지는 아니지만 완파만 되지 않으면 계속 굴려먹을 수 있다.
〔크하핫! 참으로 악독하구나. 죽은 뒤에도 고통 받게 하다니.〕
'날 위해 봉사할 수 있으니 영광일걸.'
〔작은 인간도 그리 생각할지 궁금하구나.〕
'알 반가.'
그래봐야 하급 언데드.
혼백과 육신을 동조시켜도 의사 표현 같은 건 한계가 있다.
지속적으로 개조해주면 모를까.
파프너, 아니. 정확히는 회귀 전의 박하늘 씨도 스켈레톤 나이트로 시작해서 틈날 때마다 개조한 덕에 둠 나이트까지 승급했다.
'이 녀석도 살아남으면 리치까지 갈 수 있을지 누가 알아?'
〔한데 이 작은 인간은 3성 아니었더냐.〕
'스켈레톤 메이지는 원래 2성이야. 하급 언데드의 숙명이지.'
뼈를 갈아주고 장비를 입혀주면 좀 더 강해지겠군.
그래도 놈의 잠재능력을 끄집어내려면 재료도, 현재 유진의 경지도 모자란다.
'최소 3성은 되어야 개조할 수 있어.'
〔더 분발해서 짐의 위명을 드높이도록 하라.〕
'예예.'
블러드 골렘에 스켈레톤 메이지까지 전력에 추가되었겠다.
파프너의 능력을 끌어올릴 방법도 찾았으니.
'네크로폴리스를 넓힐 때가 됐어.'
유진의 시선이 강가 아래쪽으로 향했다.
*
검은 방첨탑 앞에 모인 일행.
"이제부터 남쪽으로 내려갈 거다."
"형님. 그럼 관문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유진은 고개를 저은 후, 파주 인근이 그려진 지도를 펼쳤다.
"언제 이런 걸...."
"대격변 이전 지도다. 인터넷 검색만 해도 나와."
파주 북쪽에 자리 잡은 네크로폴리스.
물줄기를 따라 남쪽으로 가다 보면 임진강으로 합류한다.
거기서 서남쪽으로 더 가면....
"형. 거긴 그라운드 제로 아니에요?"
"맞다."
"그쪽은 무법지대잖아요."
움츠러든 강민영을 보고 피식 웃었다.
"접경지역에서도 잘만 다녔으면서 무서워하긴."
"몬스터보다 사람이 더 무섭죠."
"선만 안 넘으면 괜찮을 거다. 오히려 우리가 위험할 땐 그쪽으로 도망쳐도 되고."
유진은 강민영을 안심시켰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잘도 하는구나.〕
'티 나?'
〔그대가 도주 경로로 무법지대를 생각할 인간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도다.〕
묵묵히 듣고 있던 크로노스는 돌연 사념에 힘을 주었다.
〔계약자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가?〕
'난 말이야. 회귀 전에는 혼자 다녔다.'
1인 군단.
불사왕.
네크로맨서로 정점에 선 유진을 가리키는 호칭이다.
'근데 한 손이 열 손을 못 막더라.'
로마노프 가문에는 드미트리 말고도 강적이 많았다.
8성급 헌터만 다섯이요.
7성 이하는 셀 수도 없을 정도.
'이번에는 세력을 구축할 생각이야.'
회귀 전.
네크로폴리스의 영역은 고작해야 시 하나 크기였다.
도시 하나가 작다곤 못하겠지만.
어엿한 세력으로 자리매김하기는 어려운 규모였다.
'겸사겸사 변방 잡귀를 어엿한 성좌로 만들어줘야겠지.'
〔짐을 숭배하는 교단이라도 세울 셈이더냐?〕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쓰겠다고 했잖아.'
〔크하하핫. 맞도다. 짐의 궁전에서 그리 말했었지.〕
까득-.
드미트리의 재수 없는 면상을 떠올리니 이가 갈렸다.
"형님?"
"아. 다른 생각 좀 하느라."
빨간 펜으로 진로를 표시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호야. 우리 식량 얼마나 있지?"
"전투식량 포함하면 2주입니다. 형님."
"아슬아슬하겠네."
뽀시래기 팀의 눈동자가 사시나무처럼 흔들렸다.
'3주가 아슬아슬하단 말입니까?'
'제발 돌아가는 일정도 포함이라고 해주세요!'
'이번에는 텐트 잘 쳐야겠슴다.'
서로의 생각이 얽힌 채로 접경지역 남하가 결정되었다.
*
네크로폴리스를 떠나기 전.
유진은 파프너가 모아놓은 시체들을 언데드로 제작했다.
[사역 가능한 언데드 숫자가 최대에 도달했습니다.]
[40/40]
[아머드 스켈레톤 - 20]
[아머드 좀비 - 13]
[스켈레톤 메이지 - 5]
[스켈레톤 메이지(조승철)]
[파프너]
짧게 운용하려면 아머드 좀비가 더 낫지.
스켈레톤 메이지는 적합한 사체가 몇 구 없어서 많이 만들 수 없었다.
합일을 마친 조승철과 비교하면 2/3 정도의 스펙.
〔그 합일이란 게 생각만큼 대단하진 않구나.〕
'모르는 소리. 직접 보면 알아.'
〔흠. 어디 지켜보자꾸나.〕
선두를 맡은 파프너가 옆에 선 강민호를 보며 이죽거렸다.
[타이밍은 좀 감이 오나?]
"덕분에 고대의 시험장에서 버틸 수 있었습니다."
[좋아. 잘 부탁하지.]
언덕에서 내려온 일행은 기슭을 따라 천천히 남하했다.
검은 방첨탑의 범위는 1킬로미터.
안개가 자욱하게 드리운 강가를 쭉 내려가던 중.
[주인. 전방에 트롤이 있다.]
"우회할 수는 없나?"
[안 돼. 냄새를 맡고 왔을 거야.]
"반대로 가지 않는 이상에는 못 따돌리겠군."
강민영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형. 트롤이면 4성 게이트에서 나오는 괴물이잖아요."
"재생력 때문에 귀찮은 상대지."
갓 2성에 오른 헌터가 할 말은 아니지만, 유진이 내뱉으니 일행 중 누구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안 그래도 최근에 네크로폴리스 주위를 돌고 있더라.]
"시체 냄새를 맡은 건가."
[근처에 트롤이 더 있을 가능성이 높다.]
"네가 본 게 몇 마리라고 했지?"
[넷이다.]
트롤 4마리라.
유진이 턱을 만지작거리니 파프너가 되물었다.
[어떻게 하지?]
"정면 돌파."
고작 트롤 4마리에 돌아갈 거였으면 출발도 안 했지.
일행이 회색 기류에서 나오는 순간, 강가 근처에 머무르던 트롤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크오오오! 먹이!"
평균 신장 4미터.
2층 건물 높이의 괴물이 발을 구르자 쿵-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자갈이 사방으로 튀었다.
"맞으면 아플 것 같습니다."
"4톤 트럭 앞에 서는 거랑 비슷할 거다."
"...정면으로 받아치지 말란 이야기로 듣겠습니다."
자식.
솔직하기는.
[후후후. 내가 나설 차례인가!]
"아니. 대전사께서 나설 무대는 다음에 만들어줄게."
유진이 손가락을 까딱하자 가만히 있던 블러드 골렘의 눈가 위로 검은 구체가 떠올랐다.
"데뷔전이다. 실력 한번 보여줘 봐."
「명령을 따릅니다.」
트롤보다 머리 두 개만큼 작은 체구의 블러드 골렘이 정면으로 달려간다.
마주한 두 괴물이 충돌하는 순간.
퍼엉-!
"저, 형님. 소환수의 팔이 날아갔습니다."
"소환수가 아니라 골렘이다."
일격에 산산이 부서지는 골렘의 팔.
크게 휘청거렸지만 두 발에 힘을 주면서 넘어지는 것은 면했다.
"크오오오. 냄새 나는 괴물. 부순다!"
신이 난 트롤이 다시 한번 팔을 휘둘러서 블러드 골렘을 넘어트리려 할 때.
부서졌던 오른팔이 시간을 역행하듯 달라붙으면서 괴물의 팔을 잡았다.
「파손. 경미. 전투 지속 가능.」
"크오오오?"
이상하다.
분명히 팔을 뜯어버렸는데.
잠깐 동안 의구심이 든 트롤이었지만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고민이라는 걸 할 만한 지능도 없었고.
"크오오. 다시 찢는다."
퍼엉-! 퍼퍼퍼펑!
블러드 골렘의 두 팔이 핏방울로 화해서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몇 초 되지 않아서 회복되었다.
가면마수의 사체를 바탕으로 새긴 마력 회로.
엔진에서 솟구치는 마력은 각인시킨 피에 대해 지배력을 공고히 가져서 파괴되어도 금방 팔의 형태로 되돌아왔다.
[하나, 저런 식으로는 승기를 가져오지 못할 터.]
"지켜보면 알아."
완력은 4성 몬스터 중 상위인 트롤.
정면으로 힘겨루기를 하면 3성 끄트머리가 버틸 리 없었다.
트롤이 블러드 골렘의 오른팔을 또 뽑아버리는 순간.
[혈류 변환]
[블러드 웨폰 - 블레이드 모드]
촤라라락.
블러드 골렘의 왼팔이 소용돌이치더니 팔꿈치 아래가 날카로운 검으로 변했다.
흩날리는 핏방울이 트롤의 시야를 가리고 있을 때.
「공격 개시.」
무감정한 음색과 함께 시뻘건 칼날이 트롤의 복부를 촤악- 찢어발겼다.
"크오오?"
「피해 경미. 공격을 계속합니다.」
[블러드 웨폰 - 니들 모드]
재구성한 오른팔을 날카로운 송곳으로 변형.
막 벌려놓은 상처에 찔러 넣고는 마구 헤집었다.
"크오, 꺼져라!"
트롤은 팔을 허우적대며 블러드 골렘을 밀쳐냈다.
놀라기는 했지만 그뿐.
이깟 상처는 종족 특유의 재생능력으로 5초면 회복할 수 있다.
치명상을 입히기엔 부족했던 골렘의 완력.
"크오오?"
그랬어야 했는데.
벌어진 상처가 아물기는커녕 피가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혈독(血毒)]
재생을 방해하는 블러드 골렘의 독.
트롤 최대의 강점이 무용지물로 변했다.
[주인. 블러드 골렘의 덩치가 좀 커진 것 같다만?]
"오. 역시 눈썰미가 좋아."
피를 흡수함으로써 덩치를 키우는 골렘.
상처를 낼 때, 그리고 니들을 쑤셔 넣으면서 트롤의 피를 흡수한 것이다.
[회복 봉쇄에 흡혈까지. 트롤의 천적이 따로 없네.]
"일반적인 4성이었으면 고전했을 거다."
상성이 좋았지.
3성 스펙인 블러드 골렘을 단독으로 내세운 건 다 이유가 있어서다.
전투가 이어질수록 더 커지는 블러드 골렘.
반면 트롤의 눈가에는 거무스름한 색이 짙어졌다.
"크오오오오!"
트롤이 고통을 감수하며 날카롭게 변한 골렘의 팔을 붙들었지만.
[경화(硬化)]
충격이 가해지면 단단해지는 피 성질로 칼날의 형태를 유지하며 깊숙이 찔렀다.
"크오...."
피를 과도하게 헌납한 트롤은 결국 한쪽 무릎을 꿇었고.
우위를 점한 블러드 골렘은 양팔을 칼로 변환. 주저앉은 트롤의 목을 촤악- 베었다.
[블러드 골렘이 충분한 피를 흡수했습니다.]
[3성 → 4성으로 등급이 조정됩니다.]
[사용자의 직업이 연금술사가 아닙니다. 획득 경험치가 60% 감소합니다.]
쩝.
경험치 손실 빼고는 다 좋은데.
회귀 전, 유진이 골렘을 주력으로 삼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언데드 수용 제한에는 걸리지 않지만 제작 단가나 시간, 그리고 경험치 수급에서 손해 보거든.
"크오오오! 형제. 당했다."
"크오오. 먹을 거다."
"크옼. 죽인다. 먹는다."
수풀을 헤치고 나온 트롤 세 마리.
방금 전 싸움에서 발생한 소음이 원인인 듯했다.
"근처에 더 있었군."
[봐라.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니까.]
네크로폴리스로 안 들어온 게 다행이군.
파프너 홀로 대처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자욱하게 드리운 안개를 십분 활용하면 쫓아내는 정도겠지.
유진은 뽀시래기 팀을 바라봤다.
"셋 중 하나. 나랑 같이 사냥할 수 있겠나?"
"트롤 한 마리...."
"놈의 발만 묶어. 부족한 화력은 내가 채워주마."
2성 헌터 셋으로 트롤의 발을 붙들어놓는다?
말도 안 되는 지시지만, 뽀시래기 팀은 이유 모를 웅심에 마음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형님이 우릴 믿어주신다.'
'트롤. 무섭긴 해도 승산이 있으니까 맡긴 걸 거야.'
'1인분은 하겠슴다!'
뽀시래기 팀원들의 호승심에 유진이 킬킬거렸다.
"트롤 사냥 시작이다."
41화 전력 증강(3)
"파프너."
[가운데에 있는 녀석은 내가 맡지.]
"그럼 넌 왼쪽을 맡아라."
「명령을 수행합니다.」
[부정한 축복을 사용합니다.]
[응징의 쐐기를 사용합니다.]
[거인의 힘을 사용합니다.]
파프너에게 깃드는 신성 주문.
무생물인 블러드 골렘은 대상이 아니라서 버프를 걸지 못했다.
'언데드한테도 먹히는 게 골렘한테는 안 되네.'
이만 해도 전생에는 누리지 못한 호사다.
감지덕지해야지.
〔짐을 칭송하는 것을 허락하노라.〕
'안 그래도 바쁜데 헛소리 하지 마. 변방 잡귀야.'
크로노스의 사념을 밀어내곤 전장을 관찰했다.
파프너야 버프를 걸었으니 괜찮고.
블러드 골렘도 상성에서 앞섰고, 방금 전 싸움에서 전투력을 증명했다.
남은 한 마리의 발을 묶고 있으면 되겠어.
"할 수 있겠나? 나머지 언데드들은 투입 안 할 거다."
트롤 가죽이 원체 두꺼워서 유효타를 먹이기도 어렵고.
블러드 골렘처럼 재생력을 봉쇄하지도 못하니 금세 회복할 것이다.
"맡겨주십쇼."
[이동요새]
[강격]
푸른 섬광이 방패를 물들이더니 아무것도 없는 공기를 타격했다.
마력과 힘의 방향을 일체화시켜서 터트리는 기예.
정면으로 부딪치면 안 된다는 것을 인지한 강민호가 트롤의 팔이 닿기 직전에 마력을 터트린 것이다.
"그오오?"
막 팔을 뻗던 트롤이 허공에서 터진 힘의 파동에 자세가 무너졌다.
[동조]
[염력]
쇄애애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날아간 화살.
휘청거리던 트롤이 손을 들어 올려서 머리를 감싸려고 할 때.
직선으로 쏘아진 화살의 궤도가 틀어졌다.
손가락 사이를 지나치고는 미처 감지 못한 트롤의 왼쪽 눈동자를 관통.
"그오오오오!!!"
고통에 겨운 비명이 강가 인근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헤헤. 석궁만 동조를 걸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석궁에 장전한 화살에도 동조를 적용.
작은 움직임조차 놓치지 않고 충돌 직전에 궤적을 틀은 것이다.
화살에 실린 힘이 부족해서 관통까진 못했어도.
"그오! 그오오!"
트롤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다.
쾅! 쾅!
눈이 타버리는 듯한 아픔에 분노한 트롤이 왼팔을 마구 휘둘렀다.
강기슭에 널린 자갈이 사방으로 튀었고.
[공간]
시커먼 아공간에서 튀어 나온 방패가 일행의 몸을 보호해주었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연계.
스킬 운용이 한순간이라도 어긋났다면 큰 피해로 이어졌을 것이다.
'트롤을 상대로도 안 떨고 잘하네.'
이 정도면 시간을 끄는 선에서 만족하기 어려운걸.
뽀시래기 팀의 분전에 몸이 달아올랐다.
"조승철. 네 차례다."
-그겔. 파괴! 파괴! 파괴!
뼈만 남은 마법사. 조승철은 앙상한 팔을 들어 올리고는 턱뼈를 달싹였다.
재배력되는 마력.
마른 손뼈 앞에 재배열된 화염 속성 마력이 둥근 형태로 응축되었다.
"저, 저거 파이어볼 아님까?!!"
"맞다."
"스켈레톤 메이지는 2성이지 않슴까! 어떻게 성위를 넘어선 검까!"
경악한 이성민의 반응에 유진이 만족한 듯 웃었다.
합일을 이룬 덕에 조승철이 생전에 익힌 마법 일부가 계승되었기에 가능한 일.
일반 스켈레톤 메이지랑 비교하면 화력 면에서 훨씬 뛰어났다.
마법에서 성위 한 단계는 절대적인 차이.
[파이어볼]
후끈거리는 열풍이 휘몰아치고.
폭발의 진원지에 있던 트롤은 검게 탔다.
"해치웠나?"
"그 정도로 죽을 놈 아니다."
3성 마법 중에서 파괴력만 놓고 보면 수준급인 파이어볼.
일격으로 트롤을 불태울 화력은 아니었다.
눈에 부상을 입지 않았으면 폭발도 무시하고 달려들었을걸.
[퀵 리로드]
[파이어볼]
그래서 두 방을 준비했지.
조승철의 고유 특성. 마력 소모가 크지만 파괴적인 마법을 연달아 사용할 수 있다.
'이제는 합일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겠나?'
〔흠. 인정해주마.〕
콰아아아앙-!
연이은 폭발에 트롤이 주춤거리고.
강민영이 허공으로 띄운 석궁은 작은 틈 하나 놓치지 않고 제2사를 날렸다.
두 번째 화살의 목표는 남은 한쪽 눈.
연거푸 파이어볼을 맞으면서 둔탁해진 몸으로는 저격에 반응할 수 없었다.
"누님 잔인하심다."
"내 동생이지만 저건 좀...."
팀원들마저 외면하는 잔학함.
두 눈을 모두 잃어버린 트롤은 주저앉더니 괴성과 함께 발악했다.
"좋아. 안 알려줬는데도 약점을 잘 노렸어."
"다 들었어? 형이 나 칭찬해주셨잖아!"
의기양양한 강민영을 두고 나머지 언데드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트롤의 무서운 점은 돌파력.
어지간한 상처는 금방 재생되니 다소 피해를 감안하고 돌진하기도 하는데, 그 가능성이 사라졌다.
눈이 먼 녀석이 무슨 수로 일행을 노리겠어?
"화력을 전부 투사해라."
[아이시클 애로우]
[라이트닝 볼트]
[애시드 밤]
....
후방에 있던 스켈레톤 메이지들이 일제히 마법을 발사했다.
파이어볼을 두 번이나 맞은 탓에 벌게진 가죽.
마법 난타에 찢어졌다가 아물기를 반복했지만 점점 회복속도가 느려진다.
'역시 모자라군.'
재생능력만 보면 5성 괴물인 오우거를 뛰어넘는 괴물.
무력화에 성공했지만 뽀시래기 팀과 스켈레톤 메이지들만으로는 화력이 모자랐다.
"파프너."
선두에서 트롤 한 마리를 상대하던 파프너가 몸을 홱 돌리고는 암흑 투기를 발에 밀어 넣으면서 크게 도약했다.
콰직-!
암흑 투기를 휘감은 주먹이 바닥에 웅크린 트롤의 정수리에 내리꽂히고.
허여멀건한 뇌수와 살점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그오오오!!! 형제!!"
[이러니 꼭 악당이 된 것 같잖아.]
"네크로맨서의 대전사는 충분히 악당스럽지 않냐."
[제길. 그냥 지박령으로 머무를걸 그랬어.]
두 마리가 된 트롤은 한발 늦게 유진을 위험 요소로 판단.
안으로 파고들기 위해 무작정 돌진했지만.
「대상. 못 지나간다.」
[네 상대는 나다. 못생긴 트롤아.]
트롤의 피를 흡수해서 4성으로 승급한 블러드 골렘.
신체능력은 3성이지만, 버프와 뛰어난 무위를 지닌 파프너를 제치진 못했다.
"그오오...."
트롤의 서글픈 울음소리가 강기슭에 울려 퍼졌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현재 레벨은 4입니다.]
접경지역을 오가는 동안 쌓인 경험치.
거기에 성위를 두 단계나 뛰어넘은 강적을 쓰러트린 덕에 레벨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이 기세면 3성도 금방이겠어.'
전생에는 각성 후 언제 세 번째 성위에 도달했더라?
4년 정도 걸린 것 같은데.
이번에는 뻥 뚫린 고속도로를 질주하듯 파죽지세로 경험치가 오르는 중이다.
"트롤은 마석 채집하기가 보통 일이 아니네요."
강민호가 땀을 뻘뻘 흘렸다.
"형. 난 안 돼요."
"죄송함다. 저도 도움이 못 됨다."
머리를 부숴도 재생력이 곧바로 사라지진 않았다.
가뜩이나 트롤의 가죽은 질긴데 기껏 베어내도 금방 재생되어버리니.
"하는 수 없지. 파프너야."
[나한테 섬세함을 기대하진 마라.]
쫘아아악-!
파프너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찢어발겨진 트롤의 가슴팍.
그 사이로, 멈춰가는 심장과 일체화된 마석을 뽑아들고는 유진에게 내밀었다.
"왜 날 주냐?"
[B급 마석이다. 비싸지 않나?]
"이제부터 나오는 마석은 다 먹으라고 했잖아."
뽀시래기 팀도 동의한 사항.
-형님이 아니었으면 만질 수도 없는 돈이었는데요.
설득하려고 여러 가지 말을 준비했는데, 한 마디 꺼내자마자 흔쾌히 수락해서 어색하게 웃었었지.
파프너는 일행을 돌아보곤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까드득-.
[엘드리치 드래곤(파프너)이 마력을 흡수합니다.]
[드래곤 하트에 마력이 축적됩니다. 마력 총량과 신체능력이 상승합니다.]
와.
시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이러다가 배탈 나는 거 아닌가?'
〔크핫, 무언가를 잘못 먹기라도 했느냐.〕
'너무 날로 먹어서.'
라이프 드레인이 왜 사기적인 주문인가?
일반적으로는 영약 외에 올릴 방법이 거의 없는 '스탯'을 수급해주기 때문이다.
파프너가 마석을 섭취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상하구나. 헌터가 경험치를 취하는 것과 같아 보이거늘.〕
'쟤는 언데드잖아.'
성장하는 언데드가 얼마나 희귀한데.
데스 나이트나 리치 같은 상급 언데드도 틀을 깨고 더 높은 성위로 나아가기가 쉽지 않다.
전생의 박하늘 씨도 스켈레톤 나이트 시절에는 일일이 뼈를 바꿔주면서 강화했다니까.
'성장 방법도 쉬운데 폭도 높지.'
드래고니안 사체를 기반으로 만든 언데드.
용인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드래곤이니, 파프너도 마석을 취하다 보면 진정한 용족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야. 달달하다. 달달해.'
〔쯔쯔쯧. 짐의 금언은 귓등에도 두지 않는구나.〕
'아. 고생 싫다고요.'
변방 잡귀의 말은 안 들어야지.
네크로맨서로 9성까지 도달하기가 쉬운 줄 아나?
다른 직업군처럼 정보가 많지도 않고.
배후성을 둔 헌터들은 유진을 대놓고 적대시했다.
'고생은 이미 사서 많이 했어.'
창법이나 신관으로서의 능력은 예외다.
회귀 전에는 연이 없던 기예들이니 고생하면서 익힐 생각이다.
그렇지만.
취할 수 있는 이득은 모조리 취할 거다.
"나머지도 모두 먹어라."
[그럼 출혈이 심할 거다. 괜찮겠나?]
"트롤의 피가 귀하긴 한데... 나올 게 있을까."
두 마리의 피는 블러드 골렘이 흡수.
집단 린치를 당한 녀석은 강기슭에 피 대부분을 쏟아냈다.
나머지 한 마리만 신경 쓰면 되겠군.
"아. 그러고 보니 라이프 드레인 써야지."
너덜너덜해진 놈들은 이미 틀렸으니, 파프너가 마지막에 쓰러트린 트롤에게 다가가서 생명력을 빨아들였다.
[트롤의 생명력이 육체에 스며듭니다.]
[근력 1.5가 영구하게 증가합니다.]
[체력 2.1이 영구하게 증가합니다.]
[맷집 1.8이 영구하게 증가합니다.]
크으
달달하다. 달달해.
[그럼 나머지도 내가 취하마.]
남은 트롤들의 마석을 전부 섭취한 파프너.
4번째 마석을 털어 넣는 순간, 강렬한 기파가 솟구쳤다.
[엘드리치 드래곤(파프너)의 심장에 담긴 마력이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드래곤 하트가 한 단계 성장합니다.]
고오오-!
파프너의 어깨 위로 넘실대는 영력.
생전의 박하늘이 이루었던 마력의 유형화, 곧 오러 발현과 똑같은 형상이 전신을 통해 나타났다.
[이제 제대로 발현이 되네.]
죽기 전의 경험 덕에 전승된 [암흑 투기] 특성.
하지만.
4성으로 올라선 파프너의 투기는 전보다 훨씬 선명해졌고 위압감마저 느껴졌다.
"쉴 필요는 없을 것 같으니 출발하자."
"형님. 저 시체들은 언데드로 제작 안 하시는 겁니까?"
"트롤은 4성이잖아. 레이즈 언데드 가지고는 시체의 능력을 끌어낼 수 없다."
수준이 낮은 강령술로 제작 가능한 건 좀비나 스켈레톤 뿐.
대형 몬스터의 능력을 살리려면 더 높은 강령술과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했다.
이 녀석들을 언데드로 만들면?
잘 쳐주면 3성 언저리까지 나오겠지만 굼뜨고 재생력도 없다.
트롤 시체를 낭비하는 셈이지.
강민호는 설명을 듣더니 입맛을 다셨다.
"아깝군요."
"그건 내가 할 말 아니냐?"
"트롤의 시체면 강력한 전력이 될 줄 알았습니다."
"놓고 갈 생각은 없어."
유진은 이미 검은 방첨탑을 중계기 삼아 언데드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트롤 시체를 챙겨가서 불경스러운 묘지에 묻어라.
방첨탑의 주된 역할은 강령술 증폭기.
간단한 명령 정도는 원격으로 내릴 수 있다.
"뒤는 영지에 머무는 언데드들에게 맡기면 된다."
"그렇군요. 역시 형님입니다."
"아부한다고 해도 나오는 거 없거든?"
한층 강화된 유진 일행의 전력.
4성급 몬스터까지는 어렵지 않게 격퇴 가능했고.
5성 수준은 조우했을 때 무사히 빠져나갈 만한 정도까지 성장했다.
〔부디 6성이 넘는 괴물이 나와서 계약자에게 시련을 주었으면 하는구나.〕
'나 죽으면 진짜로 변방 잡귀 신세 된다?'
〔흠흠, 농이니라.〕
'이 근방은 애꾸눈만 조심하면 돼.'
파주 일대에서 폭군으로 군림하는 괴물, 변종 오우거 애꾸눈의 등급이 7성이다.
그 녀석만 조심하면 목숨 위험할 일은 없다는 거지.
〔애꾸눈이라는 피조물이 그대를 외면하길 기원하겠노라.〕
'반대로 생각하는 건 아니고?'
침묵하는 크로노스.
유진은 비틀린 미소를 짓곤 강기슭 아래로 남하를 시작했다.
42화 세력 확장의 첫 걸음(1)
[검은 방첨탑을 완성했습니다.]
[완성도가 높습니다. 성능이 50% 증가합니다.]
"드디어 다섯 번째."
하늘 위를 찌를 듯이 솟구친 검은 방첨탑.
유진은 뿌듯함을 감추지 않았다.
"형님. 진짜 마지막입니까?"
"내가 언제 빈말하는 거 봤냐."
"그거야 뭐."
"짐 싸고 있어. 금방 돌아갈 거다."
강민호를 보내고는 피륙으로 된 구조물에 손바닥을 대었다.
[인근에 설치된 방첨탑과 네트워크를 구축합니다.]
[네트워크 수 - 5]
[영지에 등록된 네크로맨서들의 영력 소모가 30% 감소합니다.]
[사역 가능한 숫자가 30% 증가합니다.]
[언데드의 능력치가 30% 증가합니다.]
[안개 안에서 통신 마법 재밍이 걸립니다.]
검은 방첨탑끼리 링크를 시킬수록, 네크로맨서와 언데드에게 부여되는 버프가 늘어난다.
'지금은 소환 제약과 전투력 상승 정도지만.'
검은 방첨탑의 숫자가 더 늘어나면 영역 안의 시체들이 자동적으로 언데드로 되살아나고.
불귀의 객이 된 망령들이 몰려들어서 귀기가 더욱 강화된다.
산 자에게는 디버프까지 주니.
죽은 자의 도시(네크로폴리스)라는 표현이 딱 알맞았다.
〔그렇다면 저 불길한 탑을 더 늘리지 그러느냐?〕
'지킬 수나 있을까.'
검은 방첨탑 한둘 정도는 포기해도 되지 않느냐고?
네트워크를 이으면 많은 혜택이 주어지는 만큼, 위험도도 늘어난다.
링크 된 방첨탑이 파괴되면 나머지 구조물들도 기능을 정지.
충격에서 회복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다섯 개면 2시간 정도겠네.'
〔위험도라고 말한 것 치고는 길지는 않구나.〕
'링크 숫자가 늘어날수록 기능이 멈추는 시간도 길어져.'
네트워크에 포함된 방첨탑이 늘어날수록 기능 정지 시간도 길어진다.
열 개를 연결하면 10시간.
네트워크 최대 숫자인 20개까지 연결하면 꼬박 삼 일 동안 깡통이 된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접경지역의 위험성을 감안하면 벌써부터 5개를 네트워크로 연결한 건 상당한 도박이다.
'로마노프 가문도 검은 방첨탑을 먼저 무력화시켰다.'
회귀 전에는 개성을 네크로폴리스로 만들었다.
사방이 트여 있는 데다 예성강을 끼고 있어서 방어에 적합하지 않은 입지.
비밀리에 강을 거슬러 올라온 마법계 헌터들이 강력한 마법을 쏟아 부어서 탑 하나를 무력화시켰고.
영지 전역에 드리웠던 버프 효과가 전부 무효화되었다.
〔크하핫. 어리석도다. 그리 중요한 구조물이라면 방비를 철저히 해야 하거늘.〕
'성유물까지 쓰는 놈을 어떻게 막냐.'
감반테인.
오딘의 성유물로 마법 무효화에 특화된 강력한 지팡이다.
'녀석들이 쓴 건 복제품이었지만 말이야.'
가품이라고 해도 오딘이 성유물의 개념을 덧씌운 아티팩트.
감반테인으로 네크로폴리스 전역에 설치해둔 온갖 침입 대비 술법들을 무력화시켰다.
그 때문에 개성에서 서울까지 밀려났지.
회귀 전 마지막 전투의 배경이 서울이 된 이유였다.
〔그렇다면 지금도 위험성은 존재한단 말이구나.〕
'난 같은 방법에 두 번은 안 당해.'
유진은 손에 힘을 꽉 쥐었다.
"준비 끝났으면 돌아가자."
뽀시래기 팀의 얼굴에 도는 화색.
"드디어 귀환하는군요."
"흑흑. 그리운 집밥을 드디어 먹을 수 있슴다."
"노숙이여. 안녕."
다들 얼굴이 폈네, 폈어.
[주인. 그럼 난 새로운 영지들을 지키겠다.]
"아니야. 너도 갈 거다.
[네크로폴리스를 비워두어도 괜찮나?]
"뭐, 털리면 털리는 거고."
네트워크 연결 페널티가 있지만, 크게 투자한 것도 없고 마음만 먹으면 금방 복원도 가능하다.
"근처의 몬스터 부락들도 정리 한번 했으니 별일 있겠어?"
[너무 안이한 말 같은데.]
"한두 개 정도는 부서져도 괜찮아."
거기까지는 예상 범주다.
애꾸눈 같은 오버 스펙의 괴물이 날뛰면 내줘야지. 어떻게 해?
파프너가 지켜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그 정도 변수가 아니면 괜찮을 거다."
[알았다.]
파프너가 고개를 끄덕였다.
*
강민영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형. 이번에는 짐이 적어서 좋네요."
"너한테 들라고도 안 했는데 왜 그러냐."
"언데드들이 짐 때문에 못 싸운다고 해서 개고생했거든요?"
"경험도 쌓고 좋았잖아."
"형은 섬세함이라는 걸 좀 배워야 해."
베에-.
혀를 내미는 강민영을 보고 있자니, 문득 감회가 새로웠다.
'전에 봤을 때는 무표정했었지.'
의뢰의 표적과 수행인.
서로 보면서 웃을 만한 사이는 아니잖아.
유진의 손으로 목숨을 거둔 이가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웃으니 묘했다.
'미래가 바뀌고 있다.'
허물없는 강민영의 태도에 확 와 닿는 변화.
아직 세상에 큰 영향을 끼칠 정도로 급격하진 않지만.
유진의 행보는 파멸의 미래를 차근차근 바꾸어나가고 있다.
〔교만해하지 말거라. 계약자가 투쟁해야 할 대적은 작은 인간만이 아니다.〕
'알아. 7대 명가, 그리고 배후에 있는 성좌들이지.'
꿀 빠는 미래를 위해서는 7대 명가와 버금가거나 그 이상의 힘을 얻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은 그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변화는 이제 시작이다.'
회귀 직전에 본 서울의 풍경을 되새김질하고는 뽀시래기 팀에게 말했다.
"수고했으니 2주 쉬고 와라."
"진짜임까?!"
"내 생각이 바뀌길 희망하는 건가?"
쌍둥이가 이성민을 노려보았다.
"형님. 그럼 2주 후에 파주 공방으로 모이겠습니다."
"무르기 없기예요?"
피식 웃은 유진이 손을 휘둘렀다.
"멀뚱멀뚱 서 있으면 농담이 진담으로 바뀔지 모른다."
"혀, 형님. 나중에 뵙겠슴다!"
혹시라도 붙잡을까 등을 돌리고는 빠르게 멀어진 세 사람.
어, 음.
그래도 좀 섭섭하네.
[후후. 주인 곁에는 내가 있지 않는가?]
"너라도 있어줘서 고맙다."
[솔직하지 못하긴. 더 고마워해도 된다.]
예예.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날 것 같네요.
뽀시래기 팀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쯤.
[이제는 슬슬 이야기해줘.]
"뭘?"
[뽀시래기 팀을 보내고 주인이 할 일.]
눈치챘나.
유진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거미 사냥."
*
지직- 지지직-.
싸구려 네온사인으로 써진 [Milky Way]가 반복적으로 깜빡이는 건물.
그라운드 제로에서 모든 의뢰가 오고가는 장소다.
"문은 다시 달아놨네."
끼이익-.
달팽이관을 괴롭히는 소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지난번과 달리 말끔하게 정리된 매장이 눈에 들어왔다.
은은하게 깔린 재즈 음악.
그 위에는 온갖 인간군상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토해냈다.
[불협화음이 따로 없어.]
"그게 우리 매장의 매력이랍니다."
바 안쪽에서 돌아온 대답.
마담은 고혹적인 미소와 함께 유진의 곁으로 다가왔다.
"자주 보네요. 이러다가 정들겠어."
"마담도 그런 마음이 생기기는 하나?"
"호호, 저도 사람인걸요."
입을 가리며 웃는 마담.
한겨울처럼 차가운 눈동자로 저런 이야기를 잘도 내뱉는군.
유진은 대꾸하지 않고 바텐더 앞에 앉았다.
"또 뵙는군요. 손님."
"이번에도 같은 걸로 부탁드릴게요."
"허허. 다음에는 실력 발휘할 기회를 한번 주시죠."
노인은 푸근한 미소와 함께 우유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 모습을 보고 짧게 탄식하는 마담.
"멋이라는 것을 모르시는 분이네요."
"술 맛은 잘 몰라."
"은하수 펍은 술집인걸요. 그럼 곤란하답니다."
"특히 일이야기 할 땐 안 마시는 편이라."
유진이 툭 던진 말에 마담의 눈가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그건 좀 흥미롭네요."
"뭔 이야기를 할 줄 알고?"
"글쎄요. 손님은 늘 재미있는 주제를 가지고 오잖아요."
이야기를 먼저 꺼내보란 거군.
좋다.
돌려서 말하는 건 취향도 아니고 말이야.
"붉은 거미랑은 잘 지내나?"
"건전한 교우관계를 맺기에는 틀렸죠. 아시면서."
"녀석들이 은하수 펍 근처를 많이 어슬렁대는 거 같아서."
"뭐어, 일촉즉발이에요."
마담은 '붉은 거미'라는 단어가 나오니 말을 돌리지 않고 순순히 대답했다.
"생각만큼 풀리지는 않았나 봐."
"그거 아세요? 거미는 발이 8개랍니다."
"하나만 잘라서는 소용없단 건가."
"이쪽에서 동원 가능한 숫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마담의 포지션은 중개인.
인맥이야 많지만, 대부분 금전관계로 이어진 족속들이다.
붉은 거미 전체를 뿌리 뽑으려면 전면전을 벌여야 하는데, 용병으로 그 숫자를 채울 수는 없다.
"국지전으로 가면 이쪽이 불리하니까요."
"대신 붉은 거미가 정면으로 들이받진 않겠어."
"유진 님 덕분이죠."
혈석 공급원이던 새빨간 위장의 조기 공략.
동일한 무게면 금보다 더 값어치가 높은 광물이 사라짐으로써, 붉은 거미는 재정에 큰 타격을 받았다.
조직 전체가 흔들릴 정도는 아니지만, 막힌 돈줄을 확보하려고 진땀을 뺐다.
"도와주지."
"진심인가요?"
"여기까지 와서 농담이나 할 만큼 한가하지 않아."
유진의 말에 놀란 마담이 두 눈을 깜빡였다.
"새빨간 위장 때하고는 다를 거예요."
"알아. 붉은 거미 보스가 6성 무투계 헌터라면서."
유진은 바텐더를 슬쩍 봤다.
지금이야 칵테일을 만들고 있는 노인이지만, 그 진면목은 6성 끝자락에 다다른 헌터다.
붉은 거미가 마담을 공격한 것도 노인의 빈자리를 노린 거였으니.
"그 자도 섣부르게 움직이지는 못하겠지."
"붉은 거미는 다리가 여덟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절반을 떼버리면 훨씬 편하지 않겠어?"
후-.
마담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이 사람. 한계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어.'
1성 헌터면서 새빨간 위장에 배치된 3성 헌터들을 모조리 도륙하고.
전 세계를 뒤져봐도 얼마 없는 '성자'로서 기적까지 베풀었다.
'거미 다리 절반을 잘라준다, 라.'
유진이 그라운드 제로까지 와서 허언을 할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그가 선언한 의뢰 내용에 맞는 전략을 구상할 시간이다.
"거미 사냥을 의뢰해도 될까요?"
"보상은?"
"이미 생각해두신 게 있으실 건데. 말씀해주세요."
"거미의 빈자리."
전생과는 다른 선택.
보다 적극적으로 세력을 키워서 한반도 내 영향력을 넓혀갈 것이다.
그라운드 제로는 그 시작점이고.
"확답을 드릴 순 없어요. 그라운드 제로는 세 조직이 균형을 유지하고 있으니까요."
붉은 거미 / 암상 / 은하수 펍
크고 작은 조직들이 있지만, 그라운드 제로가 유지되는 건 세 단체가 흐름을 꽉 쥔 덕분이다.
"일단 한 쪽은 내 편을 들어줄 거잖아?"
"물론이죠."
거래 성립.
유진은 슬쩍 미소를 드러냈다.
"평소에 음흉하다는 말 듣지 않나요?"
"실례되는 말이군."
"그 웃음을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걸요."
크로노스에 이어 마담까지.
유진은 멋진 미소를 탄압하는 이들의 횡포에 볼 근육을 떨었다.
"개성의 사냥꾼들은 요즘 분위기가 어때?"
"그 작자들은 여전하죠."
"잘 됐군."
개성 인간사냥꾼.
북한이 무너진 후, 개성에 터를 잡은 헌터 집단이다.
구성원들은 스스로를 '제5 혁명단'이라고 부르지만, 외부에서는 인간사냥꾼이라는 멸칭을 많이 사용했다.
"인간사냥꾼들이 붉은 거미를 노린다고 소문을 내."
"접경지역 쪽으로 유인할 생각인가요?"
"맞아. 적당한 방법을 찾아줘."
"거미가 관리 중인 농장이 접경지역에 있어요."
"그쪽 주변을 노리면 되겠군."
"진짜로 인간사냥꾼을 섭외한 건... 아니겠죠?"
유진은 대답하는 대신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검은 방첨탑을 여럿 건설하면서 남하한 진정한 목적.
그리고.
뽀시래기 팀에게 휴가를 준 이유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그게 목적이었나. 주인.]
사태의 전말을 알고 있는 파프너만이 신음을 삼킨 채, 가라앉은 사념으로 중얼거렸다.
"1성 헌터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일이에요."
"최근에 2성이 됐다."
"둘 다 큰 차이는 나지 않지만 당사자가 그리 말씀하시니 문제는 없겠죠."
*의뢰인 ; 오현정
*의뢰 종류 : 붉은 거미 사냥
*난이도 : A
*보수 : 그라운드 제로 세력 재분배 때 천유진을 지지할 것
*세부 사항
붉은 거미의 세력을 1/3 이상 소모시킬 것.
"이 정도면 될까요?"
"마음에 드는군."
"계약 이행 보수는 산 자에게만 유효하답니다."
뼈 있는 마담의 대답에 킬킬거리며 웃었다.
"걱정하지 마. 두 발로 직접 걸어올 테니."
남은 우유를 들이마신 유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 붉은 거미 간부진에 대한 자료. 휴대전화로 보내줘."
"명단 전부를요?"
"5성 헌터까지."
서서히 멀어지는 유진의 뒷모습.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던 마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저씨. 준비해줘요."
"괜찮겠습니까?"
"본인이 하겠다는걸요. 그리고... 왠지 저 사람은 해낼 것 같아요."
성위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사람.
마담 오현정은 잡념을 떨쳐내듯 홱 몸을 돌이켰다.
'더 바빠지겠네.'
유진이 부탁한 소문.
붉은 거미를 움직이려면 그녀도 수완을 최대로 발휘해야 했다.
'당신을 믿어보겠어요.'
만약.
의뢰를 수주한 대로 풀리기만 하면 마담은 그 이상도 유진에게 쥐여 줄 생각이었다.
43화 세력 확장의 첫 걸음(2)
콘크리트의 무덤.
땅거미가 드리우며 한층 더 을씨년스러운 폐허에도 원 형태를 유지하는 건물들이 몇 있다.
20층 높이의 호텔.
대격변 이전에는 3성급 호텔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붉은 거미의 아지트로 더 알려진 건물이다.
외벽 여기저기에 주렁주렁 달아놓은 조명들이 현란한 빛을 흩뿌리고.
그 아래로 거미 문신을 새긴 이들이 광란의 파티를 벌이고 있다.
"즐겨! 오늘 뒈지나 내일 뒈지나!"
"이히히히!"
술과 약, 그리고 단순한 비트의 기계음이 한데 섞여서 빚어낸 혼돈.
라운지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본 반라의 사내가 입술을 비죽였다.
"킥. 하여간 단순한 새끼들."
훤히 드러낸 등에 새겨진 흉터.
그 형상이 마치 거미의 여덟 다리처럼 생겼다.
[붉은 거미]라는 조직명을 탄생시킨 상흔.
그라운드 제로를 삼분하고 있는 세력의 보스, 김재우가 흉흉하게 눈동자를 부라렸다.
"보스. 식량 비축분이 10일 남았습니다."
"회장님."
"아, 예. 회장님."
"형태야. 우리가 조폭 새끼들도 아니고. 그 보스란 말은 언제까지 할 거냐?"
드드드드-!
라운지의 유리창이 강풍을 만난 것처럼 요란하게 흔들렸다.
6성 헌터의 살기.
마력을 섞은 흉포한 기세에 민머리 남자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죄, 죄송합니다. 회장님."
"우리 애들 기 좀 살려줘야지. 요새 좀 우중충했잖아?"
김재우가 과장되게 팔을 허우적거렸다.
은하수 펍에서 정 노인의 부재를 알아채고는 습격을 기획했지만.
마담 오현정의 목줄을 잡기는커녕 돈줄 하나가 끊겼다.
"하. 개 같은 X."
붉은 거미는 조직원만 수백 명에 달하는 대형 단체.
[새빨간 위장] 하나 없어졌다고 해서 무너질 만큼 약하지 않다.
문제는 은하수 펍 정리도 못했고, 주요 자금 루트가 잘려나가면서 붉은 거미의 위상까지 금이 간 것.
"요즘 목 빳빳한 놈들이 누구냐?"
"군바리 놈들이랑 파란셔츠가 인원을 모으고 있습니다."
"내일까지 조져 놔라."
은하수 펍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붉은 거미의 지배력을 의심하는 자들도 늘어났다.
주요 자금 루트 중 하나가 무너졌는데도 곳간을 푼 이유였다.
재정이 더 빠듯해지겠지만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선 허세를 부릴 필요가 있는 법.
"10일이라고 했냐?"
"예."
"임 회장이랑 보기로 했다. 애들 몇 준비해놔."
"구룡방의 지원을 받는 겁니까?"
"은하수 못 밀어서 일이 꼬였잖냐."
구룡방은 홍콩을 근간으로 둔 대규모 범죄단체다.
최근 서해를 교두보 삼아 동아시아 범죄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해 붉은 거미와도 접촉했었다.
"구룡방은 너무 큰 조직입니다. 회장님."
"알아. 빌어먹을 거! 나라고 그쪽이랑 덜컥 손잡는 게 달가운 줄 알아?"
말이 좋아야 동업 제안이지.
반 정도는 구룡방의 하위 조직으로 들어가는 꼴이다.
서로의 체급이 맞아야 동등한 거래가 되지.
원래 시간을 끌면서 협상하거나 파투 낼 생각도 했었다.
"조승철 그 등신 새X가 게이트만 잘 지켰어도."
김재우의 눈동자가 살기로 번들거렸다.
[새빨간 위장]이 예정보다 빠르게 폐쇄되면서 자금 운용에 구멍이 확 뚫렸다.
조직유지를 위해서는 급전이 필요했고.
그라운드 제로 출신 단체에게 자금을 출자해줄 곳은 많지 않았다.
회귀 전에는 구룡방의 제안을 거절했던 붉은 거미였지만, 유진이 개입함으로써 미래가 바뀐 것이다.
끼익-.
"보스! 큰일 났습...."
"회장님이라고! 개자식아!!"
김재우가 던진 유리컵에 맞은 헌터가 컥,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찢어진 이마에서 철철 흐르는 피.
4성 무투계 헌터였지만 김재우의 완력을 버텨내진 못했다.
"죄, 죄송합니다. 회장님!"
"됐고. 용건이나 말해."
"개성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있다고 합니다."
"인간사냥꾼?"
개성 인간사냥꾼.
정식명칭은 '제5 혁명군'이지만 어느 누구도 그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괴물을 사육해서 전력으로 삼는 조직.
소속 인원은 적지만 부리는 괴물들의 숫자와 전투력이 상당해서 괄시할 수 없는 세력이다.
"개성 패거리는 또 왜!"
"접경지역으로 내려오는 중이라는데요."
"개먹이로도 못 쓸 놈들."
"인간사냥꾼들이면 저희를 먹이로 주지 않겠습니까."
붉은 거미마저 학을 떼는 인간사냥꾼.
그들은 '제5 혁명군' 외의 사람들을 괴물의 먹이로 던져주거나 강제노역을 시켰다.
김재우도 한때는 인간사냥꾼과 손을 잡아볼 생각을 했지만.
"우리가 그때 얼마나 당했지?"
"25명입니다. 회장님."
협상 테이블에 앉자마자 괴물들을 동원해서 붉은 거미를 습격.
서로가 큰 피해를 입고 협상이 불가능한 족속들이란 사실만 깨우쳤다.
크게 충돌을 일으킨 후로는 잠잠했는데.
"놈들도 소문을 들은 건가?"
김재우는 주먹으로 책상을 후려쳤다.
콰직-!
주먹자국이 새겨진 채 푹 주저앉은 책상.
'무서운 괴력이다. 철로 만든 책상을 일격에....'
꿀꺽- 방금 전에 이마가 깨진 수하가 김재우의 눈치를 살폈다.
"구라는 아니겠지?"
"예. 출처는 확실합니다."
"인간사냥꾼들이 뭘 노리는지는 모르고?"
"확실하진 않지만 블랙허브 농장 쪽으로 향하는 중이라던뎁쇼."
김재우는 입을 꾹 닫았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분노.
눈에 보이는 걸 모두 때려 부수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가까스로 참아냈다.
"경비 인원을 세 배로 늘려."
"그러면 마담 쪽 감시 인원을 줄일 수밖에 없는데요."
"생각이란 게 있냐? 여기서 블랙허브까지 털리면 조직 유지가 안 되잖아!"
퍼어어억-!
다시 한번 날아든 유리컵에 부하의 고개가 반대로 꺾였다.
"형태야."
"예. 회장님."
"군바리 X끼들은 내가 손봐야겠다."
"그럼...."
"농장 일은 너한테 맡길 테니 잘 처리해라."
붉은 거미의 2인자.
최형태는 어깨를 누르는 부담감에 몸을 짧게 떨었다.
*
붉은 거미가 마담의 가짜 정보에 낚여서 헌터들을 동원하고 있을 때.
유진은 접경지역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멀진 않군."
[붉은 거미가 관리한다는 농장 말인가?]
"어. 방첨탑에서 2킬로미터만 가면 돼."
안개가 퍼져나가는 범위까지 감안하면 1킬로미터 조금 안 되는 거리.
마지막으로 세운 검은 방첨탑의 위치가 절묘했다.
[농장으로 가는 길에 안개가 살짝 걸치겠어.]
"붉은 거미 사냥하기 딱 좋아."
[한 가지 물어봐도 되나.]
"얼마든지."
[농장 말이다. 굳이 위험한 접경지역에 만들 필요가 있나?]
"품종에 따라서는 있지."
유진은 킬킬거렸다.
"전생 영웅님은 블랙허브라고 들어봤어?"
[모른다.]
"고밀도 마력이 깃든 땅에서만 자라는 식물이야."
산삼이 비정상적으로 지기가 강한 땅에서만 자라듯.
블랙허브도 특정 조건이 충족된 땅에서만 재배 가능한 희귀식물이다.
"몇몇 약재랑 섞으면 블랙문이라는 칵테일을 만들 수 있지."
[칵테일 하나 만들려고 그 고생을 하나?]
"설마."
블랙문은 복용한 사람이 떠올린 환상을 꿈꾸게 해주는 강력한 마약이다.
상상 속 이미지들이 현실처럼 느껴지는 약.
"중독성은 있지만 후유증이 크지 않아서 꿈의 묘약이라고 불린다나."
[허. 꿈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싸구려처럼 쓰다니.]
"너무 그러진 마. 높은 성위에 오른 헌터들도 명상용으로 가끔 쓰거든."
자신만의 심상을 구축하는 일.
보다 높은 경지를 꿈꾸는 헌터들이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무투계는 자신의 심상을 외부 세계에 관철하며.
마법계 헌터는 마음에 새긴 스스로의 규칙으로 세계의 섭리를 희롱하고 제 의지대로 비틀어낸다.
"어느 쪽이든 심상을 구축해야 7성 너머를 바라볼 수 있다."
[그 경지를 밟아본 것처럼 말하네.]
"내가 주워들은 건 많아서."
[뭐, 틀린 말은 아니야. 나도 실전 속에서 심상을 구축하던 중이라.]
죽기 전까지는, 이라는 뒷말에 유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더럽게 비싸다는 게 핵심이다."
[붉은 거미가 버선발로 달려들 수밖에 없겠네.]
"우리도 손님 맞을 준비 해야지."
후-.
짧게 한숨을 쉰 유진은 지난 2주간의 성과를 돌아봤다.
'23레벨이라.'
영맥의 흐름을 쫓던 중에 몬스터들과 조우했고.
검은 방첨탑의 재료인 살점과 뼈를 구하기 위해 싸우기도 했다.
구조물을 세운 뒤에는 새 이웃을 반기러 온 녀석들까지 격퇴했으니.
레벨이 부쩍 오를 수밖에.
〔한데 레벨이 꽤 올랐는데 새 주문은 왜 전승받지 않았느냐?〕
묵묵히 듣고 있던 크로노스가 물었다.
'전에 말했잖아. 한둘 정도는 일부러 두는 거다.'
〔여유의 발로인 건가?〕
'무슨 상황이 닥칠지 모르니까 그러는 거지. 여유 같은 소리.'
흑암의 반지에 담긴 지식은 방대하지만, 시스템 제약 때문에 전승받을 수 있는 구간이 있다.
10레벨당 둘.
위기 상황에서 필요한 주문을 곧바로 습득하려고 일부러 전승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안 그러지 않았느냐.〕
'쓸 마법이 없었잖아.'
누가 변방 잡귀 아니랄까.
속 편한 소리 하고 있네.
네크로맨서로서 필수 주문은 익혀놔야 레벨을 올리지.
'이번에 쓸 건....'
본 스파이크
분류 : 강령 마법
등급 : D
뼈를 매개 삼아서 위로 솟구치는 가시를 생성합니다. 최소 5cm 크기의 뼈가 필요합니다.
〔매개체가 필요한 공격 주문인가? 본 스피어보다 안 좋아 보이는구나.〕
'어. 발동 속도가 빠르고 빈틈을 노릴 수 있다는 거 빼고는 본 스피어보다 나을 게 없지.'
주문 파괴력도 본 스피어가 한 수 위.
실용성이 모자란 주문을 익힌 건 모두 이유가 있다.
다음에 습득할 마법의 선행조건이거든.
시체 폭발
분류: 강령 마법
등급 : C
시체에 영력을 불어넣어서 폭발시킵니다. 뼈와 살점이 비산하면서 주변에 피해를 입힙니다.
'드디어 이 마법을 전승하는구나.'
네크로맨서 공격 마법의 꽃.
3성 이하 주문 중에는 가장 파괴력이 높은 데다, 위력에 비해 영력 소모도 크지 않다.
시체만 있으면 즉시 발동 가능하다는 장점까지.
〔망자를 조롱하는 행위 아니더냐?〕
'본인 허락도 안 맡고 일으켜 세우는 시점에서 이미 틀린 것 같은데.'
〔반드시 사체가 필요하다는 조건이 까다로워 보인다만.〕
'글쎄. 보면 알아.'
고스트 아이
분류 : 강령 마법
등급 : E
사용자의 지배 하에 있는 언데드와 시야를 공유합니다.
세 번째 주문은 시야 공유 마법.
망령에게 사용하면 정보 습득에서 이점을 얻을 수 있다.
'나머지 하나는 연금술 쪽으로.'
점화 회로
분류 : 연금술
등급 : E
특정 파장에만 반응하는 마력 회로를 새깁니다.
'이 정도면 사전준비는 됐다.'
본격적으로 싸움을 준비하기 전.
유진은 상태창을 활성화해서 스스로를 점검했다.
이름 - 천유진
성별 - 남
레벨 - 23(2성)
◎스테이터스
*힘 : 107.5
*민첩 : 100.1
*체력 : 85.2
*맷집 : 79.4
*영력 : 493.5
◎특성
클리어 마인드[고유] / 백야[고유] / 죽음의 인도자[고유]
◎스킬
시체 폭발[C] / 골렘 연성[C] / 본 스피어[D] / 본 스파이크[D] / 본 아머[E] / 살점지배[E] / 점액화[E] / 레이즈 언데드[E] / 레이즈 데드[E] / 강화 회로[E] / 베르디안 식 기본 창법[E]
◎문장
인내의 문장
'각성 2달도 안 돼서 이만한 스펙이라.'
신체능력은 2성 초입의 무투계급.
영력 수치도 동급 마법계 헌터 중에서는 최고 수준이다.
'늘어난 수치를 모두 합치면 3성은 되겠어.'
모두 라이프 드레인으로 몬스터들의 생명력을 착취한 덕분이다.
습득한 주문도 착실하게 늘어나는 중이고.
'해볼 만하다.'
붉은 거미?
네크로폴리스 안에서 싸우면 100명도 감당할 자신이 있다.
6성 무투계 헌터인 김재우가 직접 와도 한 몸 건사하는 거야 문제도 아니고.
-키히히힛!
먼 거리에 있는 망령 하나가 귀곡성을 내질렀다.
즉시 [고스트 아이]를 사용.
망령과 시야를 공유하니 수풀 사이를 걷는 헌터들이 흐릿하게 보였다.
"야. ...장...."
"인... 꾼...."
입모양을 보니 인간사냥꾼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곧바로 시야 공유를 해제했다.
"첫 손님 왔다."
[성대하게 맞이해야겠군.]
아무렴.
손님맞이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한 명도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안 들게끔 해야지.
44화 거미 사냥(1)
이마나 쇄골, 혹은 어깨에 거미 문신을 한 무리.
붉은 거미 소속 헌터들은 수풀에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 북쪽으로 향했다.
"접경지역은 올 때마다 지랄 맞네."
"야. 길 벗어나면 더 엿 같으니까 감사하게 생각해."
대격변 이전에는 수색대 군인들이 들락거렸던 길.
비무장지대 전역이 몬스터들의 땅으로 넘어간 뒤로는 붉은 거미가 유용하게 사용했다.
"씨X. 인간사냥꾼 놈들은 왜 내려오고 난리야?"
"너처럼 야들야들한 인간 잡아서 몬스터들 먹이로 던져주려고 하지."
"이 새끼가. 나랑 싸우자고?"
서로를 보며 으르렁대는 헌터들.
앞서 가던 선임 헌터가 침을 퉤- 뱉었다.
"힘 빼지 마라."
선임 헌터는 3성 끄트머리의 헌터.
10년 넘게 괴물들을 사냥한 프로다.
깨달음과 자질이 부족해서 4성의 벽을 넘지 못했지만.
스탯도 제법 쌓았고, 전투 경험도 많아서 으르렁대는 헌터 둘을 동시에 상대할 만큼 강했다.
"아, 안 싸워요."
"무슨 힘을 뺀다고 그럽니까."
선임자의 눈총에 목소리를 낮추는 두 헌터.
"전방에 안개가 있다."
"이 근방에서 안개가 꼈었나?"
"강이 멀지 않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지."
스르릉-!
앞장서던 선임 헌터가 환도를 빼들었다.
"이제부터 잡담은 금지한다. 떠드는 놈은 입을 꿰매줄 테니 기대해도 좋다."
경고를 내뱉은 선임 헌터가 전위를 맡고.
남은 헌터들은 둘씩 줄을 지어 블랙허브 농장 쪽으로 전진했다.
'안개는 처음 본다. 불길하군.'
블랙허브 농장을 몇 번이나 들락거린 선임 헌터.
이 근방은 주기적으로 몬스터들을 정리한 터라 위험도가 높지 않다.
그렇지만.
개성 인간사냥꾼들이라면 주변 기상을 바꾸는 것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엿 같군. 이런 탐색 임무에 동원되다니.'
은하수 펍 습격 실패와 새빨간 위장 폐쇄.
거기에 인간사냥꾼들의 남하 소식까지.
조직 내 분위기는 툭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활화산처럼 끓어올랐다.
'뭐, 거미가 망할 리는 없지만.'
선임 헌터는 현 상황을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거미의 다리는 여덟 개.
다리 한둘이 잘려나간 적은 있지만 조직 전체가 무너지진 않았다.
그라운드 제로에서 20년 넘게 패권을 쥐는 동안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음에도.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것은 붉은 거미였다.
'난 돈만 받으면 된다.'
선임 헌터는 잡념을 떨치고 최형태의 지시를 다시 한번 상기했다.
인간사냥꾼이 나타나면 신호탄을 쏘거나, 혹은 그 녀석을 역으로 사냥하거나.
'보수가 쏠쏠한데. 이왕이면 직접 죽이고 싶군.'
선임 헌터가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
자욱한 안개 너머로 시커먼 음영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수찬. 확인해라."
[독수리의 눈]
후위에 붙은 헌터가 눈을 부릅떴다.
시야 방해 효과 무효화와 수백 미터 너머까지도 꿰뚫어볼 수 있는 고유 특성.
"드래고니안?!"
"제대로 봐라. 용족이 접경지역에 왜 있나."
"이, 인간 사냥꾼일지도."
"병X. 개성 놈들이 용족을 테이밍 했으면 진즉에 그라운드 제로로 내려왔겠지!"
선임 헌터의 질책에 다시 눈을 부릅뜬 헌터가 허- 탄식을 내뱉었다.
"언데드입니다. 눈이 푸르게 타고 있네요."
"그놈뿐이냐?"
"핏덩이 같은 괴물. 그리고 사람입니다."
"히야. 운도 좋네. 우린."
인간사냥꾼은 성위가 높을수록 길들이는 몬스터의 숫자도 많았다.
그런데 고작 두 마리라고?
"보너스 챙길 시간이다."
붉은 거미 헌터들의 눈동자 위로 살기가 아른거렸다.
전원이 3성이지만, 무장의 수준이나 스킬 활용도가 높아서 4성 몬스터도 어렵지 않게 사냥할 수 있는 전력.
설령 5성 몬스터가 튀어 나와도 몸을 뺄 수 있는 실력자들이다.
'족보도 없는 언데드 따위가 얼마나 강하겠나?'
개성과 파주 일대에는 언데드 몬스터가 출몰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간사냥꾼이 몰고 다니는 언데드는 자연 발생한 망자일 건데, 높게 쳐도 3성 수준이다.
"수찬. 네가 신호해라."
조금씩 짙어지는 안개 너머의 음영.
[독수리의 눈]으로 불청객의 위치를 정확하게 포착한 헌터가 손을 휙 내리니.
[라이트닝 쇼크]
[아이스 자벨린]
넓게 펼쳐진 전격이 바닥을 훑으면서 불청객들에게 쇄도했고.
한기를 날카롭게 벼린 창이 드래고니안을 닮은 언데드의 몸통에 박혔다.
"해치웠나?"
헌터 한 명이 중얼거리니 답변이 반대편에서 튀어나왔다.
[뭐야. 우리를 제대로 노렸어.]
"독수리의 눈 특성이다."
[쳇. 기습한다고 살금살금 걸었는데.]
"안개가 짙어도 네 덩치까지 가려줄 만큼은 아니야."
희끄무레한 기류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일행.
유진과 파프너는 산책 나온 것마냥 편안한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
툭- 툭-.
손짓 한두 번에 떨어져 나간 얼음 창.
번개도 넓게 퍼트린 탓에 위력이 떨어져서 비늘조차 통과하지 못하고 흩어졌다.
[안 그래도 몸이 허했는데 침도 놔주고 자극까지 주네.]
"내가 마사지라도 해줘?"
[후후후. 주인의 악력으로는 느낌도 안 날 거다.]
만담을 나누는 주인과 언데드.
붉은 거미 헌터들은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다.
"이 개자식들이."
붉게 물든 선임 헌터의 안면.
유진이 자신들을 업신여긴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파프너야. 너 때문에 화난 거 같다."
[흠. 그럼 더 화를 내지 못하게 만들어 줘야겠어.]
"내가 좀 도와주지."
유진은 킬킬대면서 신성 주문을 사용했다.
[거인의 힘을 사용합니다.]
[응징의 쐐기를 사용합니다.]
[부정한 축복을 사용합니다.]
삼중 버프로 강화된 파프너의 눈이 흉흉하게 타올랐다.
[주인. 이번에는 혼자 해봐도 되겠나?]
"마음대로."
[성장한 내 힘을 보여주마.]
무릎을 굽힌 파프너.
상체까지 앞으로 살짝 숙이고는 발에 암흑 투기를 집중시키더니.
투콱-!
강가에서 트롤의 머리를 부순 때와 마찬가지로 발아래에 힘을 방출하면서 도약했다.
"저, 적이 날아듭니다!"
"눈깔 안 써도 알아."
빛살과도 같은 속도.
성인이 전속력으로 달려도 20초 정도 걸리는 거리가 1초도 안 돼서 좁혀졌다.
붉은 거미 헌터들이 파프너의 폭발적인 돌진력에 놀라고 있을 때.
[고유 특성 - 감지영역]
선임 헌터만이 반응.
앞으로 나서면서 시커먼 음영의 돌진 궤도를 막아섰다.
'감지영역 안에서 기습은 통하지 않는다.'
[풀 카운터]
[나리만 발도술]
[메이거스 제 환도 - 내장 스킬 : 파워 웨폰]
인식한 상대의 공격을 반드시 쳐내는 스킬에 발도술을 조합.
칼집에서 뽑힌 환도에서 스파크가 번쩍이고는 일순간이지만 푸른 섬광이 번쩍였다.
두 스킬과 아이템의 성능까지 끌어 올린 일격.
'4성의 오러도 받아낸 기술이다.'
벽을 넘지 못한 선임 헌터가 자신의 능력과 아이템 궁합을 최대로 계산해서 만든 필살의 일격이었다.
인간사냥꾼의 언데드가 생각보다 빠르긴 했지만 그것뿐.
'한 번에 베어내고 인간사냥꾼까지 죽인다.'
암흑으로 휘감긴 거한과 한 줄기 섬광이 충돌하고.
콰득-.
"어?"
몸이 붕 뜬 것 같은 감각과 함께 선임 헌터의 시야가 확 뒤집어졌다.
한 박자 늦게.
부러져버린 칼과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은 파프너가 눈에 들어왔고.
죽음의 그림자가 자신에게 드리웠음을 인지했다.
이게 아닌데.
[방금 전 공격. 마력을 0.1초만 빨리 움직였으면 2배는 더 셌을 거야.]
저 언데드.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공중 부양 중인 선임 헌터가 입을 뻐금거렸지만.
충돌과 함께 박살 난 성대에서는 바람 새는 소리만 허무하게 맴돌았다.
"씨, 씨ㅂ...!"
"조져!"
선임 헌터의 죽음을 본 헌터들은 숨겨온 비기를 아낌없이 사용했다.
최대로 출력을 끌어올린 전격.
집채 만 한 바위도 쪼개버리는 풀 스윙.
방어를 관통하는 치명적인 일격까지.
[어째 처음 녀석보다 못하네.]
[암흑 투기]
전신을 감싼 시커먼 기류.
비늘 하나하나에 암흑 투기를 불어넣어서 손 까딱 한번 안 하고 붉은 거미 헌터들의 공격을 받아냈다.
[이번에는 내 차례다.]
[케넥 전투술]
[7장]
[10발 난타]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허공에 맺힌 잔상.
"컥!"
"크...."
붉은 거미 헌터들은 파프너의 공격을 일합도 제대로 받아치지 못했다.
그야말로 압도!
〔저들은 게이트 공략 때 마주한 작은 인간들보다 약한 모양이구나.〕
'약해? 쟤들이?'
고개를 좌우로 저은 유진.
파프너를 막아섰던 선임 헌터의 참격은 조승철의 화염 마법보다 더 위협적이었다.
'3성에서 10년 넘게 구른 녀석일걸.'
다른 헌터들도 새빨간 위장을 지키고 있던 이들에게 뒤처지지 않았다.
약 1달 전만 해도 총력을 쥐어짜내야 할 만한 적.
〔한데 이리도 압도한다는 말인가.〕
'그만큼 강해진 거다.'
〔마치 거인이 작은 인간 손을 비틀 듯이 쉽게 싸우는구나.〕
비유하고는.
유진도 내심 크로노스의 말에 동감했다.
'암흑 투기 운용법도 달라졌어.'
전신으로 암흑 투기를 방출함으로써 출력을 더 올렸다.
마력 소모가 훨씬 많겠지만.
그만큼 돌진의 파괴력도 올라갔다.
'드래고니안의 몸에 어울리는 방법을 개발하고 있잖아.'
전생에 [헬 나이트]까지 승급했던 박하늘 씨하고는 완전히 다른 전투 스타일.
드래고니안의 몸뚱이에 적응한 데서 그치지 않고 체구에 맞는 암흑 투기 운용 방법까지 깨우치는 중이었다.
아라한 길드에서 두들겨 맞던 게 엊그제 같은데.
역시 천재는 달라.
"제, 젠장!"
[독수리의 눈]을 썼던 헌터가 품속에서 긴급 통신 스크롤을 꺼냈다.
찌익-.
"너희 모두 X 됐어. 이제 신호를 보고 다 몰려올...."
"왜. 뭐가 잘 안 돼?"
시커먼 불꽃과 함께 타버린 마법 스크롤.
네크로폴리스의 영향권에서는 통신 마법에 재밍이 걸린다.
차라리 전파를 사용하는 무전기였으면 문제없이 작동했을 터.
"하. 인생."
콰득-.
반항조차 포기한 헌터의 목을 파프너가 반대로 꺾었다.
"생존자는?"
[그 녀석이 마지막이다.]
"4성으로 올라갔다고 실력이 늘었네."
[이젠 암흑 투기가 생각대로 움직여주더라고. 3성 땐 좀 그랬거든.]
"경지에 맞지 않는 힘을 억지로 써서 그랬을 거다."
[후후. 원래의 경지를 찾는 날이 기대되네.]
1달 만에 경이로운 성장을 이뤄낸 파프너.
단순히 성위가 올라간 데서 그치지 않고 새 육체의 힘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전생에는 헬 나이트까지 승급했었지.
드래고니안의 육체를 바탕으로 했을 땐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을까?
'기대되는걸.'
유진은 혀로 입술을 핥았다.
*
유진 일행은 며칠 동안 블랙허브 농장 인근을 배회했다.
오솔길을 따라 움직이는 건 한 팀만이 아니었다.
[몇 번째였지?]
"일곱."
[다들 고만고만해서 싸울 맛이 안 나네.]
막 전투를 마친 파프너가 아쉽다는 듯 허공에 잽을 날렸다.
앞에 널브러진 헌터들이 들으면 피눈물을 흘리겠는걸.
'이미 죽어서 듣진 못하겠군.'
4성 헌터들도 파프너의 적이 되진 못했다.
드래고니안 사체를 기반으로 제작한 엘드리치 드래곤.
말이 좋아서 4성이지.
준 5성급 스펙을 지닌 괴물에, 죽기 전에는 6성의 벽을 넘은 혼백인데 무슨 수로 이기겠어?
-키히히힛!
울부짖는 망령.
붉은 거미 헌터 무리가 근방에 하나 더 있었다.
"일부러 거리를 둔 건가."
[놈들. 협공 생각을 했나 보네.]
"이렇게 빨리 정리가 될 줄은 몰랐겠지만 말이야."
[남은 헌터들도 제거할까?]
"오늘은 이만 물러나자."
파프너의 눈, 아니 그 기능을 대체하는 푸른 불꽃이 크게 일렁였다.
[난 하루 종일도 할 수 있어.]
"참아둬. 싸울 녀석들은 아직 많으니까."
[저번에도 여력이 있는데 물러나지 않았나. 이유가 있나?]
"흔적을 남기는 거다."
파프너의 족적.
그리고 전투 흔적을 보면 '인간'이 아니란 것쯤은 금방 알 수 있다.
"인간사냥꾼 짓이라고 생각하게 둬야지."
[호오. 그래서?]
"전력도 꽤 소모됐겠다. 이제 전면전을 생각할 거다."
[붉은 거미 두목은 6성이라고 들었다만.]
"녀석은 못 나와."
유진은 확신했다.
정 노인의 성위는 두목인 김재우와 같은 6성.
그가 자리를 비우면 마담의 행동을 저지할 수 없게 된다.
[세상일이 늘 뜻대로 풀리진 않던데?]
"놈이 오면 그것대로 좋아. 마담이 움직이기 편해지니까."
김재우가 직접 와도 도망칠 자신은 있다.
대신 검은 방첨탑 하나 정도는 내줘야겠지만.
붉은 거미가 어느 쪽을 선택하든, 유진에게 있어서 손해는 아니다.
[꾀어내는 건가.]
"놈들은 미끼를 물 수밖에 없어."
유진은 레이즈 언데드로 헌터들의 시신을 일으켰다.
개성 인간사냥꾼들의 목적은 인육.
흉내를 내려면 시체까지도 치워야 했다.
"그럼 돌아가자고. 준비할 것도 있고."
몇 분 뒤.
붉은 거미 헌터들은 땅바닥에 새겨진 전투의 흔적을 발견하곤 기겁하며 후퇴했다.
45화 거미 사냥(2)
-43명 실종.
조직의 2인자인 최형태는 두 눈을 부릅떴다.
"이 병X들. 뭐하다 다 뒈져버렸어!"
개성 - 파주 일대 접경지역은 과거 비무장지대였던 장소.
울창한 삼림지대인데다 인간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아서 큰 길도 없다.
많은 인원을 동원하기 어려운 만큼.
인간사냥꾼들의 장점도 접경지역에선 바래졌다.
"괴물 머릿수만 믿는 놈들이잖아! 발견하면 신호탄 쏘는 게 그렇게 어려워?"
인간사냥꾼이 여럿 움직였다면 반드시 전조가 있기 마련.
현재까지는 그런 징후를 찾아볼 수 없었다.
블랙허브 농장 근처를 배회 중인 인간사냥꾼은 소수.
각 무리에게 신호탄과 통신 스크롤을 쥐여줘서 인간사냥꾼을 발견하면 사용하라고 했지만.
"어떻게 한 놈도 그걸 못해서 다 나자빠진 거냐고!!"
최형태는 속사포처럼 욕을 내뱉었다.
붉은 거미 조직원이 수백 명이라지만, 모두 헌터는 아니다.
헌터의 비율은 절반.
그 중 43명이나 당했다?
'보스가 알면 난 죽은 목숨이다.'
지난 번 인간사냥꾼 무리와 충돌했을 때 사망자가 20명이 조금 넘는다.
블랙허브 농장을 지킨 것도 아니고.
그저 인간사냥꾼의 흔적을 찾으려고 한 건데 두 배 가까운 희생을 낸 것이다.
'아직은 수습할 수 있어.'
붉은 거미 보스는 그라운드 제로에서 반기를 든 조직들을 짓밟느라 현 상황을 모르고 있다.
그러니.
더 큰 피해를 보기 전에 인간사냥꾼을 잡아서 만회해야 한다.
"그래서 놈들의 흔적은 어땠나?"
"놈들, 이 아닙니다. 형님."
전투의 흔적을 조사한 헌터는 시선을 아래로 깐 채 말을 이었다.
"사람 한 명. 그리고 중형 몬스터 둘로 짐작됩니다."
"허. 일곱이나 되는 수색대가 신호탄 하나 못 쏘고 고작 한 명한테 당했다고?"
믿기지 않지만 인정해야 했다.
이미 접경지역에서 43명이나 실종되지 않았던가.
"빌어먹을. 말이 좋아야 실종이지."
최형태는 이를 부득 갈았다.
시체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진 헌터들.
발자국이 안개 속으로 이어진 걸 보면 제압 후 끌고 가서 몬스터의 먹이로 던져졌을 것이다.
"보스가 데려간 애들 빼고 나머지 모두 불러라."
"예?"
빠악-!
"시키는 대로 하지. 누가 물어보래!"
"죄, 죄송합니다. 형님!"
"연장 챙겨서 인간사냥꾼 새X 조지러 가자."
블랙허브 농장 근처를 배회 중인 인간사냥꾼은 한 명.
놈은 모종의 수단으로 스크롤을 못 쓰게 하고 붉은 거미 수색대를 각개격파했다.
인간사냥꾼이 소수로 움직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가 허를 찔린 것.
"포위망을 펼치면 놈도 어쩔 수 없을 거다."
이미 사태는 벌어졌다.
김재우한테 책망을 덜 받으려면 성과라도 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최형태가 분노한 보스의 손에 죽을지도 모르니.
"혀, 형님. 놈이 도망치면 어떻게 합니까?"
"머리를 써라. 좀! 적당하게 거리를 두고 놈을 유인하면 되잖아!"
"아.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하여간 무능한 것들.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해."
최형태는 으르렁대면서 장비를 챙겼다.
*
"후. 이제야 좀 쉬겠네."
유진은 눈에 띄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며칠 동안 제대로 쉰 적이 없어서 눈이 빠질 것처럼 뻐근했다.
〔지시만 실컷 해놓고 생색내는 게냐?〕
'꼭 몸을 움직이는 것만 노동이라고 하지 않거든.'
농장 근처에 뿌려놓은 망령들을 통해 정보를 수집.
붉은 거미 헌터들을 사냥했다.
〔그 작은 인간들을 쓰러트리는 건 그대의 대전사가 한 일이지 않느냐.〕
'통신 차단하려면 포지션 잡는 게 중요하거든?'
블랙허브 농장으로 가는 길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다.
안개에 들어오지 않으면 통신 스크롤이나 신호탄을 못 막으니 전투를 벌이는 위치도 중요했다.
'몬스터들은 또 가만히 있어?'
까먹지 말자.
이곳은 접경지역. 몬스터들의 영역이다.
검은 방첨탑을 수호할 목적으로 아머드 스켈레톤들을 만들어두었지만.
유진이 지휘하지 않으면 무작정 돌격해서 피해가 속출하니, 구경만 할 수 없었다.
〔바쁘다고 말한 것치곤, 계속 바닥에 낙서하는 데 여념이 없더구나.〕
'변방 잡귀 눈에는 그렇게 보이겠지. 다 일하는 거다.'
〔문신한 작은 인간들은 모조리 내쫓아놓고 더 할 일이 있더냐?〕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쉴 수 있을 때 최대한 휴식을 취해야 한다.
라이프 드레인 덕에 체력은 상시 최대를 유지했지만.
정신적인 피로감까지 사라지진 않았다.
'빨리 성위를 올리든 해야지.'
유진이 9번째 성위를 이룩했던 초월자이긴 해도, 그때와 같은 정신력을 지니지는 않았다.
심상 구현.
더 높은 성위에 오를수록, 헌터는 자신의 심상을 세계에 강요할 만큼 정신력이 강해진다.
그때의 '감각'은 여전히 살아있지만.
회귀 전에 구축했던 심상까지 남아있진 않았다.
바위에 걸터앉아서 쪽잠을 자고 있을 때.
-키히히힛!
망령의 외침이 침전되었던 정신을 일깨웠다.
곧장 [고스트 아이]를 사용하려고 할 때.
[망령이 소멸되었습니다.]
"어쭈."
반응이 빠르군.
여태 농장 쪽으로 접근하던 헌터들은 망령을 바로 알아채지 못했다.
살기를 내비치지만 않으면 혼백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거든.
"감이 좋군."
[지치지도 않네. 붉은 거미 놈들.]
"이번은 조금 다른 것 같다."
[고스트 아이를 사용합니다.]
[종속되어 있는 망령과 시야를 공유합니다.]
유진 휘하의 망령은 모두 10마리.
아머드 스켈레톤 10구를 흙으로 되돌리면서까지 만든 녀석들이다.
'전투에서 이기려면 정보 수집이 먼저거든.'
소소한 디버프를 걸 뿐, 직접적인 무력은 0인 망령.
그렇지만.
먼저 살기를 드러내지 않는 한, 눈치채기 어렵다는 장점이 있어서 전장을 넓게 보는 데는 최적의 하수인이다.
[얼마나 몰려왔나?]
"잠깐. 숫자 좀 세어보고."
[허. 적의 수를 헤아려야 할 만큼 많다는 말인가.]
"그것도 맞고. 띄엄띄엄 있기도 하고."
망령의 시야로 보이는 적의 규모는 상당했다.
언뜻 노출되어 있는 헌터만 보면 대여섯쯤인 것 같지만.
100미터 정도 간격을 두고 비슷한 규모의 헌터들이 안개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망령 여럿에게 번갈아가면서 시야를 공유하지 않았으면 전체적인 규모를 알아내지도 못했겠지.
"이제야 미끼를 물었네."
[호오. 그럼 김재우라는 자도 온 건가?]
"그렇진 않은 거 같아."
붉은 거미 보스인 김재우의 인상착의는 이미 확인했다.
6성 무투계 헌터는 유진에게도 부담스러운 적.
여차하면 검은 방첨탑을 포기하고 물러날 생각도 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무리 속에 섞여 있진 않았다.
[아쉽군. 현 시대의 6성 헌터는 얼마나 강한지 궁금했는데.]
"1분이나 버티면 다행일 거다."
[쳇.]
생전에 6성의 벽을 깨서 그런 건지, 파프너가 엉뚱한 호승심을 불태웠다.
"대신 부두목인 최형태가 왔군."
[5성이라고 했던가.]
"그 녀석 말고 마법계 간부도 하나 있고."
5성이 둘이라.
현 수준으로는 버겁지만, 수를 쥐어짜면 해볼 만했다.
[마중 나가지 않아도 되겠어?]
"이 정도로 몰려왔잖아. 승부를 낼 생각인 거다."
43명.
붉은 거미의 전력을 상당 부분 깎아냈다.
죽어간 헌터들은 최소 3성.
개중에는 4성의 벽을 넘어선 이들도 섞여 있었다.
접경지역의 위험성을 고려하면 당연한 인선.
"마담 때문에 총력을 동원하진 못해도, 가용인원 대부분을 끌고 왔을 거다."
접경지역에 들어와서 그라운드 제로 내 상황을 알 방법이 없었음에도.
유진은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최형태의 심리를 읽었다.
그럼 손님들도 입장했겠다.
'어이. 변방 잡귀.'
〔오만방자한 것이. 짐은 왜 부르느냐?〕
'낙서 말이야. 왜 했는지 지금부터 알려주려고.'
유진은 [고스트 아이]를 사용하고는 땅바닥에 손을 대었다.
'저쯤이면... 이 회로군.'
파직-!
접촉면에서 불똥이 튀더니 미약한 전류가 땅바닥 위를 질주했다.
〔아주 미약한 마력이로구나. 간지럼을 태울 용도더냐.〕
'내 시야. 당신도 공유되지?'
〔그렇도다.〕
'잔말 말고 보고 있어.'
수백 미터를 질주한 스파크가 안개 속에 들어온 헌터 무리 근처에 도달했고.
"어? 방금 뭐가 번쩍했...."
[시체 폭발을 사용합니다.]
쿠아아앙-!!!
땅에 묻어놨던 시체가 헌터 무리의 발아래에서 폭발했다.
흙더미를 뚫고 나온 뼈와 살점.
영력을 품은 피륙 하나하나는 날카로운 흉기만큼이나 위험했다.
폭발 진원지에 선 헌터는 즉사.
나머지 인원들도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씨, X발!"
"왜 땅이 터지고 X랄이야?"
망령과 시야를 공유한 유진이 혀를 찼다.
'조금 더 빨리 점화했어야 했네.'
〔계약자여.〕
'왜? 바쁘니까 본론만 말해.'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인 건가? 방금 전 마력 양으로는 저런 폭발을 일으킬 수 없지 않느냐!〕
'시체 폭발이다.'
유진은 붉은 거미 헌터들을 사냥하면서도 틈틈이 시체들을 땅에 묻어두었다.
시체 폭발을 언제든 발동할 수 있게끔 영력을 불어넣어서.
〔주문 사정거리가 있을 터인... 아!〕
'이제야 변방 잡귀도 감이 오시나?'
〔그렇구나. 점화 회로였어. 지면에 미리 새겨놓고 발동 트리거로 삼는 것이로구나.〕
'꼭 보여줘야 알아요.'
점화 회로는 특정 마력 파장에만 자극을 받고 감지하기도 어렵다.
네크로폴리스 여기저기에 묻어놓은 시체를 점화 회로와 연결.
유진이 걸터앉은 바위 앞까지 라인을 깔아 놓았다.
[폭발 소리?]
"아. 넌 안 보이겠구나."
[계속 작업하던 것과 관련 있나 보네.]
봐.
파프너는 직접 보지도 않았는데 몇 마디 말로 눈치채잖아.
이러니 변방 잡귀는 안 되는 거다.
〔고얀 것. 짐이 계약자에게 준 것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폭언을 내뱉다니!〕
'아. 그러니까 모르면 조용히 계시라고요.'
유진은 크로노스를 타박하면서 간간이 점화 회로를 건드렸다.
쿠아앙-! 쾅-!
주기적으로 울리는 폭발음.
시체 썩은 내와 타는 향이 섞이면서 발생한 악취가 삼림을 휘감는다.
'독 분야를 열었으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었을 건데.'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잠시.
지금 없는 걸 떠올려 봐야 의미는 없다.
뭐, 이런 기세면 조만간 새로운 분야의 지식을 전승하는 것도 가능할 테니.
'2/3은 해치웠군.'
즉사했거나, 곧 죽을 예정인 숫자.
팔이나 다리가 날아가서 전투 수행이 불가능한 이들을 더하면 궤멸되었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일반적인 싸움이라면 말이다.
"파프너."
[난 이미 준비가 끝났다.]
지근거리 폭발로도 피해를 입히지 못한 두 사람.
붉은 거미 간부인 5성 헌터들을 쓰러트려야 진정한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 상대할 적은 5성의 극에 닿은 헌터야. 얕보면 안 돼."
[후후. 주인의 대전사를 믿어라.]
파프너가 준 5성급 스펙을 지녔다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싸움 자체가 성립이 안 될 만큼 차이가 컸다.
"이거 가져가."
차르르륵-!
[그건 주인의 갑주잖아. 왜 나를 줘?]
"나보다는 더 어울리는 사람이 쓰는 게 낫다."
용린갑.
장기 미공략 게이트 [잊힌 신전]에서 획득한 에픽 등급 아티팩트다.
새빨간 위장 공략 때는 이 녀석 덕을 많이 봤지.
'어울리지 않는 근접전도 용린갑이 있어서 커버가 가능했다.'
그 뒤로 최전선에서 창을 휘두를 일은 없었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늘 착용했었다.
[만일의 사태를 감안하면 주인이 입는 것이 나을 텐데]
"네가 죽으면 나도 끝이야."
최형태는 5성의 극에 달한 무투계 헌터.
그런 녀석이 작정하고 달려들면 유진도 대책이 없다.
지금부터 도망친다고 해도 무투계를 따돌릴 방법이 어디 있겠어?
"이기진 못해도 발 정도는 묶어줘야 해."
유진이 가용할 수 있는 최고의 전력.
파프너의 전투력이 올라갈수록 승리의 가능성도 높아진다.
차라락-!
[엘드리치 드래곤(파프너)이 용족의 파장을 지닌 무장을 착용했습니다.]
[용족의 잠재능력이 추가로 깨어납니다. 모든 능력치가 20% 상승합니다.]
"...어?"
[힘이 넘쳐흐르는구나!]
잠깐만.
용린갑에 이런 기능이 있었다고?
"미친."
[왜 그러냐. 주인.]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줄 걸."
드래고니안의 잠재력과 [마투사] 특성 덕에 성위보다 높은 능력치를 보유한 게 파프너다.
여기에 올 스탯 20%라고?
진짜 해볼 만할지도.
"최형태를 맡아줘. 나머지 헌터들은 내 선에서 처리하지."
[까짓거 한번 해보마.]
파프너는 생전의 습관대로 입술을 움직였다.
46화 거미 사냥(3)
"이 개자식. 당장 나와!!!"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삼림을 뒤흔들었다.
땀에 젖어서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번쩍이는 살기 어린 눈빛.
최형태가 발을 뗄 때마다 족적이 깊이 파였다.
쿠아아앙-!
한 맺힌 외침에 돌아오는 답변은 폭발.
코앞에서 터진 시체의 피륙이 최형태의 전신을 덮쳤다.
[아이언 바디]
피와 살점, 그리고 뼈가 부딪치지만 최형태의 육신에 찰과상 하나 내지 못했다.
5성의 극에 달한 신체.
시체 폭발이 강력한 마법이어도 성위 차이가 너무 커서 제대로 피해를 주지 못한 것이다.
"제길!"
어두운 기색이 가득한 최형태의 얼굴.
시체 폭발을 정면으로 뒤집어써도 멀쩡했지만, 부하들은 아니었다.
"혀, 형님! 살려주십... 컥."
"끄르륵."
붉게 물들어가는 안개.
수목에 튄 핏방울이 아래로 뚝- 뚝- 떨어진다.
최형태가 이끌고 간 헌터들 중에서 멀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망 다섯.
중상 셋.
"치, 치유 주문 좀."
"신관 뒈졌다. 이거나 써라."
쏟아지는 내장을 붙들고 있는 헌터에게 포션을 던졌다.
힘겹게 포션을 받은 헌터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마개를 따지만.
상처보다 바닥에 흘리는 양이 더 많았다.
'얼마나 뒈졌는지 짐작도 안 간다.'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시체 폭발.
3성 이하는 즉사, 혹은 전투 불가 수준의 상처를 입었고.
4성 헌터들도 무사하진 못했다.
안개가 시야를 가려서 정확한 피해가 얼마인지 알 수 없지만.
"끄아아악!"
"흑, 흐으으윽."
사방에서 들리는 신음소리.
붉은 거미 헌터들이 제대로 된 전투도 벌이지 못하고 괴멸 직전에 내몰렸다는 것은 확실했다.
파르르 떨리는 최형태의 입술.
턱에 힘을 주지 않으면 한숨이 새어나올 것 같았다.
"하. 이거 X 됐는데."
이제는 수습 가능한 단계를 넘어갔다.
김재우가 이번 사태의 전말을 알면 본보기 삼아 그를 죽일지도 모른다.
남은 선택지는 도망뿐.
최형태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도망치더라도 나를 엿 먹인 새X 얼굴은 좀 보고 가야겠다.'
방금 전 폭발로 한 가지를 알아냈다.
지면에 깔린 마력 회로.
무슨 회로인지는 몰라도 원거리에서 조종해서 폭발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상대의 트릭을 알아냈을 땐 이미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상황.
"그래도 네놈이 어디 있는지는 알았다고!"
마력 회로들이 향하는 방향.
그 끝에 빌어먹을 인간사냥꾼이 있다.
이제 와서는 놈이 정말로 개성 패거리가 맞는지도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사태의 원흉을 찢어발겨서 분을 풀고 그라운드 제로를 떠야 했다.
[전광석화(電光石火)]
있는 힘껏 땅을 박찬 최형태가 마력 회로를 쫓았다.
"네 놈의 팔과 다리를 뽑아서 몸통만 남겨주마."
[그건 좀 곤란해. 내 주인이거든.]
불쑥 튀어나온 시커먼 음영.
[케넥 전투술]
[1장]
[낙엽치기]
암흑 투기를 휘감은 손날이 비스듬히 떨어지자, 최형태도 그 기세를 무시하지 못하고 오러를 두른 팔뚝으로 막았다.
격렬하게 충돌하는 흑색 기류와 푸른빛.
"흐아압!"
최형태가 팔뚝에 힘을 더 쥐자 파프너가 저항하는 대신 흐름에 몸을 맡기면서 살짝 물러났다.
'얼얼하군.'
분노로 일그러졌던 눈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시체 폭발에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던 최형태의 피부.
파프너와 손속을 한 번 겨룬 후, 그의 팔뚝에는 손목 길이와 동일한 붉은 선이 새겨졌다.
"우리 애들 다 조진 게 너였군. 언데드."
[뭐, 대부분은 그렇지?]
"자연 발생한 언데드가 이렇게 강할 리 없어. 넌 누구냐."
[천유진의 대전사. 파프너다.]
천유진?
처음 듣는 이름이다.
"상관없지. 어차피 죽을 놈이니까."
[난 보내준다고 안 했는데?]
"걱정 마라. 일단 네놈부터 두 번 죽여준 뒤에 주인이라는 작자도 곁으로 보내줄 거니까!"
퍼엉-!
최형태와 파프너의 손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
'시작되었나.'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점화 회로라는 건 더 쓰지 않는 게냐?〕
'이미 쓸 만큼 썼어.'
매립해둔 시체 중 약 70%.
남은 건 붉은 거미 생존자들이 더 안쪽으로 파고들어서 쓸 수 없다.
〔헛되이 노동을 했구나.〕
'뭘 모르시네. 70% 정도면 엄청 많이 맞춘 거다.'
붉은 거미 헌터들이 밀집대형보다 점 형태로 올 것을 예측.
시체에 영력을 불어넣고는 광범위하게 묻어놓았다.
그뿐이랴.
망령과 시야를 공유했다지만, 점화 회로를 발동시키자마자 시체가 폭발하는 게 아니라 적의 진로를 반쯤 예측해야 했다.
철두철미한 계산.
유진이 아닌, 평범한 네크로맨서였다면 매립한 시체 중 50%도 쓰지 못했을 것이다.
'뭐, 나 말고는 누가 이런 짓을 준비하겠나 싶다만.'
〔그런 준비를 미리 다 해놓다니.〕
'싸움에서 이기려면 적의 수를 읽어내야지.'
회귀를 성공시킨 것도 치열한 수 싸움에서 이긴 덕.
[크로노스의 회중시계] 작동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드미트리가 전력을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남은 5성은 어떤 식으로 요리를 해야 할까.'
〔그대가 자랑하는 시체 폭발이란 주문을 받아내고도 건재하지 않느냐?〕
'꼭 상처를 입혀야 대미지를 준 게 아니야.'
[고스트 아이]로 관찰 중인 붉은 거미 간부.
붉은 로브로 전신을 가린 채, 지팡이에 기댄 채 걷고 있다.
'마력을 소모시킨 것만으로도 충분해.'
간부의 전신을 감싼 푸른 막.
지근거리에 있는 시체를 폭발시키기 직전, 점화 회로 반응을 감지하더니 방어 마법을 전개했다.
시체 폭발에 대응하지 못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유진은 싸움의 향방을 운에 기대지 않았다.
'네크로맨서의 싸움법을 알려주마.'
〔꽤나 자신 있는 모양이로구나. 그대보다 성위가 세 단계나 높은 적을 상대하거늘.〕
전장에서 네크로맨서가 왜 두려운 존재인가.
붉은 거미 간부는 그 몸으로 직접 배우게 될 것이다.
학습한 지식을 쓸 일이 없어서 그렇지.
-병사들을 내보내라.
유진은 검은 방첨탑에 지시를 내렸다.
절그럭- 절그럭-.
뼈가 부딪치면서 나는 딱딱한 소음이 안개 여기저기서 울리기 시작했다.
'소모전으로 가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크흐흐흐.
유진이 입술을 씰룩였다.
*
산발이 된 여인이 두 눈을 부라리며 주위를 흘겼다.
"야. 다 죽었냐?"
돌아오는 건 끙끙대는 신음소리뿐.
여인의 입에서 하- 기다란 한숨이 흘러나왔다.
"염병. 빚만 안 졌어도 안 오는 건데."
이승연.
붉은 거미 간부 중 홍일점이자, 5성의 극에 도달한 마법계 헌터다.
[마나 배리어]
사용자의 마력을 원시의 형태로 방출하는 방어 마법.
동일 성위의 방어 마법, [매직 실드]보다 마력 소모가 5배 이상이지만, 위급한 상황에서는 제격인 주문이다.
'객지에서 허무하게 죽을 뻔했잖아.'
점화 회로를 발화했을 때 퍼지는 희미한 마력 파장.
뛰어난 마법사인 이승연은 불길함을 느끼자마자 곧장 발동 가능한 방어마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폭발이 일어났지.'
방어마법으로 몸을 보호한 이승연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하지만.
같이 움직이던 헌터들은 큰 부상을 입어서 전력에서 배제.
마법계 헌터임에도 전위에 나서게 되었다.
'다른 녀석들을 찾기도 틀렸어.'
자욱한 안개.
가시거리를 대폭 줄이는 데다 통신 재밍 효과까지 있다.
헌터들을 여럿으로 나누어서 적당한 간격을 유지했지만, 연이은 폭발로 대열이 무너져버렸다.
'이제 어찌 한다?'
전위도 없이 앞으로 나아가긴 싫고.
안개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을 부하들을 규합할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에 손톱을 물어뜯고 있을 때.
-그겔. 그겔겔.
시커먼 갑주로 무장한 스켈레톤들이 안개를 가르며 이승연의 앞에 나타났다.
"하. 나도 얕보였네."
찌푸려진 이승연의 미간.
방금 전까지 손톱을 물어뜯던 사람은 온데간데없이 없어졌다.
산발한 머리카락이 재배열 중인 마력 파장에 휘말려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플레임 웨이브."
지팡이를 한 번 휘두르자 불의 파도가 솟구쳐서 아머드 스켈레톤들을 집어삼켰다.
"어떤 놈인지 몰라도 내가 허접으로 보였나 봐? 앙?!"
이승연도 무법지대에서 잔뼈가 굵은 헌터.
과한 스트레스와 어지러운 상황으로 인해 히스테릭을 부렸을 뿐, 전투력은 결코 낮지 않다.
셀 수 없는 실전을 겪었고.
동급 성위 마법계 헌터들을 압도하는 실력자.
[파이어 윕]
"꺄하하하! 죽어! 죽으라고!"
멘탈이 약하고 감정기복이 심한 게 흠일 뿐, 붉은 거미 간부에 어울리는 능력을 보유한 인물이었다.
[파이어 월]
[윈드 밤]
여인의 앞에 솟구친 화염장벽.
한계까지 응축시킨 바람을 정면에 터트리자, 불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겔!
-그, 겔.
불 속성은 언데드의 천적.
아머드 스켈레톤 수십 마리가 몰려들었지만 이승연의 옷자락 하나 건들지 못했다.
화르르륵-!
광범위하게 펼친 화염 마법이 수풀에 옮겨 붙었다.
습기를 함유한 안개 때문에 불이 쉽게 번지진 못했지만, 여기저기서 솟구치는 연기 때문에 더욱 혼란해졌고.
불을 지른 이승연의 시야마저 가렸다.
그렇기에.
"나의 부름에 답하라."
근처까지 다가온 유진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레이즈 언데드를 사용합니다.]
[역병 좀비를 제작했습니다.]
전장에 널린 게 시체였다.
시체 폭발에 휘말려 쓰러진 붉은 거미 헌터들의 주검.
네크로폴리스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몰려든 괴물들의 시체들까지.
땅에 묻힌 시체들 중 영력을 심어서 폭발의 기폭제로 삼은 건 일부에 불과했다.
"이번에는 또 땅이야?"
쌍심지를 켠 이승연.
입술을 달싹이니 수정체에서 다시 한번 광채가 새어나왔다.
"파이어볼."
이글거리는 화염 구체가 역병 좀비들에게 닿는 순간.
콰앙-!
폭발과 함께 역병 좀비의 몸뚱이에 축적된 독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아얏!"
막 주문을 펼친 이승연은 방어마법을 펼칠 겨를도 없이 독액에 노출되었다.
닿은 것은 그저 몇 방울뿐.
접촉한 부위가 얼굴이라는 것만 빼면 문제가 없었다.
치이익-.
"악! 아아아악!"
독액에 녹아서 아래로 처지는 볼살.
급한 마음에 독이 튄 부위를 맨손으로 만진 이승연은 손가락마저 뭉개지는 경험을 했다.
[마나 배리어]
"포, 포션. 포션!"
급히 방어막을 치고는 값비싼 상급 포션을 발랐지만.
일반적인 상처가 아니라서 독에 닿아 녹은 부위는 그대로 남아서 주름처럼 자리 잡았다.
[레이즈 언데드를 사용합니다.]
다시 한번 지면에서 몸을 일으키는 역병 좀비들.
"가, 가만 안 둬어어!!!!!"
[윈드 커터]
이번에는 상성 및 파괴력에서 아래인 바람 속성을 선택.
역병 좀비들이 다가오기 전에 베어내서 독액이 튀는 것을 방지했다.
〔곧바로 대처하는구나.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어.〕
'웃는 거 다 티 나거든?'
〔크하하핫. 역경은 그대를 성장시키는 밑거름이니라.〕
'다 계산대로야.'
〔무어라?〕
'내가 처음에 말했잖아. 네크로맨서의 싸움 방식을 보여주겠다고.'
붉은 거미 간부 중에서 이승연이 온 건 행운이었다.
무투계가 상대면 대처할 방법이 없지만.
마법 전투는 유진이 쓸 수 있는 수가 무궁무진했다.
〔하수인들이 붙지도 못한 채 맥없이 쓰러지는데도 그리 말하는 게냐?〕
'언데드가 소멸해도 다시 일으키면 된다.'
네크로맨서가 왜 전장의 지배자라고 불리는가?
전투에서 발생하는 시체 = 힘이기 때문이다.
'시체 폭발을 쓰든, 망자로 일으키든.'
매개체만 있으면 일반적인 마법계 헌터보다 마력(영력) 소모가 적은 편.
초심자 때야 사냥 때 시체를 구하려고 진땀을 흘리지만.
제 실력을 발휘할 무대만 갖추어지면 어느 직업군보다 강력한 게 네크로맨서다.
"이이이, 으아아!!"
냉정함을 잃은 채 마법을 난사하는 걸 봐라.
5성 헌터도 마력이 무한한 건 아니다.
'소모가 심한 마나 배리어를 두 번씩이나 전개했지.'
언데드에게 효율이 좋은 화염 마법도 역병 좀비 때문에 봉인된 거나 마찬가지.
시커먼 연기 사이에 몸을 감춘 유진을 쓰러트리지 않는 한.
계속 튀어나오는 언데드들을 상대해야 했다.
〔그대의 영력도 무한하진 않을 터. 대책은 있느냐?〕
'다 준비해놨지.'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합니다.]
빨아들인 생기를 마력(성력)으로 치환 가능하다는 건 성천 기업 의뢰 때 확인했다.
'마력 회복 아이템은 꽤나 비싸거든. 이런 꼼수라도 부려야지.'
포션으로 영력을 채울 수 있는 유진.
반면에 소모한 마력을 회복할 수단이 이승연에게는 없었다.
'자.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이승연의 눈에 띄지 않게 몸을 숨긴 유진이 히죽 웃었다.
47화 거미 사냥(4)
푸른 귀화와 살기 어린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한다.
최형태는 팔뚝을 어루만지며 생각했다.
'완력은 엇비슷했단 말이지.'
충돌 때 억지를 부려서 밀어냈지만, 파프너가 저항했으면 쉽게 밀리지 않을 것을 알았다.
힘보다는 다른 부분에서 최형태가 유리했으니.
'오러 출력.'
암흑 투기는 순수한 파괴력 면에서 오러보다 한 수 뒤처졌다.
음차원의 마력, 영력이 지닌 특성 때문이다.
베는 대상의 체력을 앗아가는 디버프를 유발하지만.
정순한 마력에 의념을 불어넣은 오러가 힘겨루기에서 유리했다.
[흠.]
파프너도 마침 최형태와 같은 생각을 했다.
같은 힘으로 부딪치면 열세.
심지어 파프너의 경지는 적보다 한 단계 낮았다.
[요령만으로는 이길 수 없는 상대군.]
생전의 경험 덕에 경지를 넘어선 출력을 뽑아내는 것뿐.
5성 끄트머리에 있는 최형태와 정면으로 겨루면 결과는 뻔했다.
[긴 리치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야겠네.]
3미터의 거구.
드래고니안 사체에 깃든 파프너는 인간보다 팔 길이가 훨씬 길었다.
검이나 창 같은 병기를 쥐었다면 팔 길이가 길다는 장점이 크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겠지만.
최형태도 격투가 특기인 무투계라서 파프너가 유리했다.
'그러면 슬슬.'
[움직여볼까.]
불과 2초 동안 벌어진 탐색전.
이야기는 길었지만, 둘의 거리가 좁혀지기까지는 찰나의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케넥 전투술]
[4장]
[정권 찌르기]
우월한 팔 길이를 활용한 정면 공격.
꽉 말아 쥔 주먹이 최형태의 머리 쪽으로 떨어진다.
"보통은 물러나거나 받아쳐야겠지만."
최형태의 입에 맺힌 으스스한 미소.
주먹을 뻗는 순간 확신했다.
힘은 엇비슷할지라도, 속도는 자신이 앞선다는 것을.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어서 간격을 좁히고.
[헤비 피스트]
마력으로 강화한 완력을 실어내어 빠르게 내질렀다.
[후발선지라고?]
늦게 공격했는데도 먼저 닿는다는 의미.
민첩이 낮은 드래고니안 사체의 약점을 제대로 노렸다.
최형태의 공격에 당황하면서도 내지르던 정권을 거두며 왼팔로 가슴팍을 방어.
[큭.]
암흑 투기를 온전하게 끌어올리지 못한 채로 방어해서 전완근에 금이 갔다.
파프너는 신음을 흘리면서도 왼발을 전진.
회수 중인 오른팔을 굽히면서 최형태의 등을 노렸다.
[아이언 바디]
시체 폭발을 완벽하게 막아낸 오러 방어법.
파프너도 암흑 투기를 손톱 끝에 전개. 푸른빛을 뚫어냈지만 힘 소모가 커서 방어구에 스크래치를 새기는 정도에 그쳤다.
"그 정도 출력이 전부란 말이지?"
파프너의 품 안에 들어온 형국.
손을 뻗을 간격조차 애매했지만, 최형태는 억지로 빠져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방어에 집중했던 오러를 능숙하게 손으로 치환.
[발칸 펀치]
기계적으로 양팔을 움직이며 파프너의 가슴팍에 주먹질했다.
투콱-! 투콱-!
"거리는 주지 않는다."
공격 범위가 모자라면 바짝 붙을 뿐.
제대로 힘을 실을 수 없는 거리지만 모자라는 파괴력은 오러로 벌충했다.
1초 동안 10번 넘게 주먹을 날리고는 어깨로 파프너를 밀치면서 재차 거리를 벌렸다.
"이 정도면 곤죽이 되었을...?"
[매서운 주먹이다. 내 공격을 역이용할 줄도 알고.]
파프너의 동체 여기저기가 움푹 들어갔지만 눈가에 아른거리는 귀화는 더욱 선명해졌다.
"그 갑주. 평범한 게 아니었나."
[주인이 선사한 방어구다. 나한테는 과분한 물건이지.]
최형태가 난타할 때, 암흑 투기를 전개하니 용린갑도 파프너의 의지대로 움직여주었다.
그가 타격할 곳에 방어를 집중.
피해를 최대로 흡수함으로써 파프너에게 가는 부담을 줄여주었다.
후둑, 후두둑-.
충격으로 깨어진 갑주 일부가 떨어져 내린다.
에픽 등급 아티팩트이나, 성장형인 탓에 실질적인 성능은 유니크급보다 조금 아래.
그럼에도.
파프너의 의지와 암흑 투기가 더해진 덕에 근거리 오러 연타를 버티고도 내구도가 바닥나지 않았다.
"맷집 좋은데?"
[이 몸이 단단하긴 하다.]
"칭찬하는 거 아니다. 이 개자식아!"
[흐음? 육신이 튼튼하면 전투를 더 오래 즐길 수 있잖나.]
다시 붙은 헌터와 언데드.
완전히 밀착한 채로 박투가 쉴 새 없이 벌어졌고.
내구도가 떨어져가는 용린갑의 방어를 뚫어낸 최형태의 오러가 비늘까지도 뭉갰다.
"더 이상은 못 움직이겠지?"
[아니. 멀쩡한데.]
"사람이었으면 넌 벌써 뒈졌을 거다."
[언데드잖아.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장점 하나는 있어야지.]
너덜너덜해진 파프너.
반면 최형태는 방어구에 흠집이 난 것 빼고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
몰아세우는 건 분명 자신일 텐데.
어째서 저렇게까지 여유를 부리는 거지?
'저 머리를 뭉개버려야겠다.'
언데드의 공통 약점은 머리.
드래고니안을 닮은 기괴한 망자도 그 규칙에서 자유롭진 못하리라.
최형태는 왠지 모를 초조함에 도약하며 정권을 내질렀다.
[이런 느낌이었네.]
그 순간.
푸른 귀화가 최형태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읽어냈다.
후우웅-.
처음으로 빗나간 공격.
딱 한 치 차이였지만, 주먹에 맺힌 푸른 기류가 파프너의 복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운이 좋군. 그 느린 몸뚱이로 잘도 피하고 말이야."
[정말로 운이라고 생각하나?]
"망자. 네 몸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최형태가 푸흐흐- 웃음을 터트렸다.
이미 승부는 기울었다.
공교롭게도 둘 다 주먹을 사용하는 무투계였지만.
파프너의 장점을 살릴 틈을 주지 않고 맹공.
일방적으로 타격해서 쓰러트리기 직전까지 왔다.
[그럼 운이 맞는지 확인해보든가.]
"안 그래도 그럴 참이다."
최형태는 흉흉한 눈을 빛내며 천천히 다가갔다.
서로의 거리는 이미 숙지했다.
팔이 긴 파프너에게 선공권이 있지만, 보고 반응해도 늦지 않았으니.
그렇지만.
간격 안으로 들어왔는데도 선제공격을 하지 파프너.
'내 공격을 받아칠 생각이라도 하는 거냐.'
멍청한 놈.
오러 출력을 최대로 끌어 올리면 파프너의 암흑 투기 따윈 적수가 아니었다.
정면으로 부딪치면 누가 더 유리한지 모르는 건가?
"이제 그만 시체로 돌아가라."
[전광석화]
[엘리멘탈 피스트]
[오러 방출]
발에 오러를 집중해서 한달음에 파고들고.
대지의 속성력을 부여해서 굳건함을 강화하고.
최대치로 발현한 오러를 주먹에 실어서 강하게 내질렀다.
[감 잡았다고 했잖아?]
미끄러지듯 뒤로 물러나는 파프너의 신형.
공격을 보는 순간 반응했으면 절대로 피하지 못할 만큼 빨랐다.
최형태가 확신을 가지고 쏟아낸 일격.
후웅-!
다시 한번 주먹이 허공을 갈랐고.
전력을 실었던 만큼 최형태도 크게 휘청거렸다.
"어, 어떻게!"
[내가 눈이 좀 좋아.]
파프너는 손가락으로 푸른 귀화를 슬슬 건드렸다.
[무신의 눈]
어떤 무학이든 금세 익히고, 타인의 움직임까지도 읽는 고유 특성.
최형태의 전투 스타일은 인파이터로, 파프너가 지향하는 방향과 동일했다.
[네 스타일. 참 배울 데가 많더라.]
실전은 최고의 스승이라고 했던가.
파프너는 두들겨 맞는 와중에도 최형태의 근육과 마력이 움직이는 것을 눈에 담아냈다.
[덕분에 효율적으로 접근전을 하는 방법을 알았어.]
"내 움직임을 읽었다고?!"
[의심스러우면 직접 확인해보든가.]
파프너는 손을 까딱였다.
[덤벼.]
*
연신 부딪치는 푸른빛과 흑색 기류.
최형태의 동공은 붉은 거미 헌터들이 몰살당했을 때보다 더 크게 흔들렸다.
'이게 말이 돼?'
후발선지.
더 빠른 속도를 활용해서 적의 공격을 유도. 파고들어서 타격을 입혔었다.
상대의 무력 수준은 5성 초입에서 중반 즈음.
힘은 거의 동등했지만 나머지 스탯에서 최형태가 모두 앞섰다.
'그런데 왜 내 행동이 읽히는 거냐!!'
더 빠른 속도로 공격해도.
끝에는 파프너의 반격이 기다리고 있다.
마치 귀신한테 홀리기라도 하듯.
[후후후. 이 싸움. 아주 즐겁다. 배울 게 많아.]
파프너는 웃음기 가득한 사념을 쏟아냈다.
생전의 자신.
그러니까 박하늘 때는 거리를 유지한 채 상대에게 피해를 강요하는 아웃파이팅 스타일을 구사했었다.
[아라한 길드에서 잘못을 처음 인지했지.]
쾌검 사용자와의 대결.
육체의 장점을 떠올리지 못하고 생전 기억대로 움직였다가 전신을 난도질당했다.
그 뒤로는 새로운 육신에 어울리는 스타일이 인파이터라는 것을 깨달았고.
[나름대로 전투 스타일을 만들어가던 중이었다만.]
최형태라는 교보재를 만났다.
5성의 극에 달한 헌터.
운(?) 좋게도 파프너가 추구하는 인파이팅 스타일의 격투 전문가였으며.
붉은 거미 2인자로 머무를 만큼 뛰어난 실력을 지녔다.
[덕분에 내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었어.]
최형태가 무수한 경험을 토대로 쌓은 인파이팅의 요체.
무신의 눈으로 읽어내고는 실전에서 적용해보니 효과가 확실했다.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 충분하지 않을까?]
다시 평평해진 전투의 균형.
행동을 모두 읽힌 최형태의 육신에도 상흔이 하나 둘 생겼다.
누적 피해는 여전히 파프너가 많았지만.
주도권을 빼앗긴 최형태는 심리적으로 크게 흔들렸다.
"씨X! 이게 말이 되냐!!!"
몇 번 두들겨 맞았다고 자신의 움직임을 읽어내?
그리고 자기 스타일로 체화한다고?
죽다 만 시체 따위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한단 말인가!
"개소리 집어쳐!"
최형태는 본능적인 두려움에 비명인지 고함인지 모를 소리를 내지름과 동시에 진각을 세게 밟았다.
[오러 버스트]
족적에서 솟구친 오러가 반경 수 미터를 뒤덮었다.
강한 마력 파장을 느낀 파프너는 더 깊이 들어가는 대신 뒷걸음쳤고.
비늘이 좀 깨지는 정도에 그쳤다.
잠시간의 소강상태.
[흠. 쉽지가 않네.]
파프너는 작게 중얼거렸다.
무신의 눈으로 최형태의 전투 스타일을 익혔다 한들.
둘 사이의 스펙 차는 여전했다.
[응징의 쐐기]와 [부정한 축복]을 받지 않았으면 쉽게 밀렸을 것.
[용린갑까지 착용을 안 했으면 지금까지 못 버텼겠지.]
올 스탯 20% 상승.
거기에 충격이 누적될수록 [응징의 쐐기] 버프 효과도 상승하면서 뒷심도 생겼다.
[어찌 되었든 내 목표는 저자를 붙들어놓는 것.]
그는 유진의 검.
명령을 받았으니 수행할 뿐이다.
까드드득-.
한편 최형태는 이를 갈면서 동요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제기랄. 너무 오래 시간을 끌렸다.'
붉은 거미에 어마어마한 손실을 입힌 이상, 그라운드 제로를 벗어나야 한다.
이 사태의 주동자를 해치워서 원한이라도 풀 생각이었지만.
파프너에게 발이 잡혀버리고 말았다.
'더 이상 손속에 여유를 두었다가는 위험하다.'
복수를 포기하거나.
혹은 전력을 쥐어짜내어 파프너를 격파하거나.
'여기까지 와서 포기한다고?'
최형태는 마음속에 타오를 것 같은 분노를 완전히 해방했다.
['자투리의 수호자'의 가호 - 복수자(Lv1)]
뚝- 뚝-.
눈에서 쏟아진 핏줄기가 몸 여기저기로 흩어지더니 기묘한 문장을 그렸다.
〔자투리의 수호자〕
우스꽝스러운 성좌명이지만, 그 주인은 복수의 신으로 알려진 비다르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원동력 삼아 힘과 민첩을 상승시켜주며, 고통조차 잊게 만드는 가호가 발동되었다.
[음. 힘들지도 모르겠는데.]
파프너는 난감한 투로 중얼거렸다.
심리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밟았는데도 버티는 게 고작.
이제는 눈이 뒤집히고, 성좌의 가호 덕에 더 강해진 적을 상대해야 했다.
"크아아아아!!!!!"
폐부를 쥐어짠 것처럼 찢어지는 목소리.
비다르의 가호를 사용하는 순간, 복수심에 집어삼켜진 최형태가 흉성을 터트리고는 지면을 박찼다.
[빠르....]
콰앙-!
10미터 넘는 거리를 튕겨나간 파프너가 발에 힘을 주었다.
최형태를 묶어두라는 명령.
아직 쓰러질 순 없다.
지면에 기다란 고랑을 새기면서 버텨냈지만, 그 뒤로도 수 미터 뒤로 밀려나버렸다.
"크아! 크아아!"
한달음에 거리를 좁힌 최형태.
쩍 벌어진 입 사이로 침이 질질 흐르고 붉어진 동공은 초점도 잡히지 않았다.
성좌가 부여한 힘에 취해서 반쯤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형상.
[이건 무신의 눈으로도 안 보이네.]
방금 전 공격을 버텨내느라 남은 영력도 모두 소모해버렸고.
두 다리는 덜렁거려서 서는 것도 힘들었다.
[최선은 다했다만 주인이 만족할지는 모르겠어.]
"잘 했어. 기대 이상으로 버텨줬다."
익숙한 목소리가 파프너의 혼잣말에 답해주었다.
그와 동시에.
[부정한 축복을 사용합니다.]
[엑토플라즈마를 사용합니다.]
[오염된 피부를 사용합니다.]
[....]
피부 위에서 기포가 솟아오르고.
이형의 성력이 스며들면서 비다르의 가호를 약화시켰다.
신성 주문과 저주.
양립할 수 없는 힘이 조화를 이루며 최형태의 능력치를 깎아버렸고.
따악-!
[응징의 쐐기를 해방합니다.]
한계까지 채워진 응징의 쐐기 스택이 거친 기세로 폭발을 일으켰다.
큰 충격에 튕겨나서 바닥을 나뒹구는 최형태.
"크, 크아아아."
두려움을 잊은 것 같았던 입에서 새된 비명이 튀어 나왔다.
48화 거미 사냥(5)
파프너가 최형재를 붙들고 있을 때.
유진도 포션을 입에 문 채, 차근차근 이승연의 마력을 갉아먹었다.
"염병!"
매캐한 연기 사이로 튀어나온 뾰족한 소리.
지팡이에 몸을 지탱한 채, 이승연은 마력을 재배열했다.
-그어어.
-그억.
주위를 감싼 시체들.
역병 좀비들은 허연 눈을 끔뻑이며 쉼 없이 전진했고.
[윈드 블레이드]
서거걱-!
고밀도로 압축한 바람의 칼날이 언데드들을 도륙했다.
화염 폭발 때 튄 핏방울을 빼면 이승연의 몸에 유효타 하나 내지 못한 상황.
"헉, 허억."
이승연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직접 입은 피해가 없을 뿐.
유진은 착실하게 그녀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이게 말이 되냐고!'
개성 인간사냥꾼?
이 놈은 그딴 녀석들하고는 결이 완전히 다르다.
'듣도 보도 못한 언데드를 소환, 아니면 직접 만드는 거야.'
인간사냥꾼들이 몬스터들을 계속 보낸다?
매연과 안개가 섞여서 가시거리가 극도로 좁아졌지만, 그 정도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둔하지 않다.
수풀 여기저기에 숨겨놓은 시체.
그리고 붉은 거미 헌터들의 주검까지.
'방금 전에 들이받으려던 놈은 폭발에 휩쓸려서 죽었었다고.'
이승연은 안개 너머에 도사리는 미지의 적이 네크로맨서라고 확신했다.
과거 마법 서적을 읽던 중, 비슷한 문헌을 본 기억이 떠올랐으니.
문제는 그 판단을 너무 늦게 내렸다는 것.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마법을 신중하게 썼지!'
효율이 떨어지는 마나 배리어를 두 번이나 전개했고.
교전 초기에는 인간사냥꾼을 빠르게 제압하려고 과한 화력을 퍼부었다.
그뿐이랴.
역병 좀비가 출몰한 뒤로는 바람마법 사용을 강요당했으니.
'저 터지는 좀비도 일부러 준비한 거였어!'
이승연은 비명을 꾹 참았다.
바람 마법은 상당수가 단일 타깃을 노리는 데 특화되어 있다.
고작해야 1성 몬스터인 좀비를 범위 공격으로 쓸어버리지 못하는 상황.
'염병. 잔여 마력이....'
5성 마법계 헌터도 마력이 무한하지는 않다.
마력을 재배열 할 때마다 정신력과 마력을 소모해야 했고.
지팡이에 기대지 않으면 다리가 풀려서 주저앉을 만큼 힘겨웠다.
힘이 빠져서 잠시 비틀거리는 순간.
[시체 폭발을 사용합니다.]
지긋지긋한 폭음이 귓가에 아른거리고.
이승연은 곧바로 방어 마법을 전개해서 비산하는 살점과 뼈를 막아냈다.
'조금 달라.'
날카롭게 벼려진 감각.
극한의 상황에서 집중력이 고조된 덕에 여태까지의 폭발과 차이점을 알아챘다.
'폭발 직전의 마력 파장이 없어졌어.'
여태까지 했던 것처럼 원격 폭발이 아니다.
5성의 극.
수많은 사선을 넘나들었던 이승연은 상대가 근처에 있음을 꿰뚫어보았다.
"거기 있는 거 알아. 이 쓰레기 자식아. 당장 튀어 나와!"
공허하게 맴도는 외침.
대답은 없었다.
"그래. 나오기 싫겠지. 비겁한 새X."
탁-!
지팡이를 바닥에 세게 친 이승연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갑자기 불어닥친 바람에 펄럭이는 로브 자락.
대단위의 마력이 움직이면서 대기에도 영향을 끼친 것이다.
수정체 위에 맺히는 마법진.
"계속 숨어 있어봐. 내가 날려줄게."
접근해온 역병 좀비들이 손을 뻗었지만 반투명한 막에 가로막혀서 나아가지 못했다.
대규모 마법을 사용할 때 펼쳐지는 간이 마력방어.
재배열 중인 마력 일부가 사용자의 몸을 보호한 것이다.
거세게 불던 바람이 멈추고.
이승연은 마침내 시동어를 내뱉었다.
"익스플로전!"
콰아아아아아앙-!
시동과 동시에 터진 폭발음으로 한순간 귀가 먹먹해지고.
이승연을 중심으로 솟구친 주홍색 광채가 반경 50미터를 덮어버렸다.
수풀이나 나무는 강대한 폭발 에너지에 닿자마자 완전히 타버려서 잿더미로 변했고.
땅 여기저기에 묻어둔 시체.
붉은 거미 헌터들의 무장과 주검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큿."
한 줄기 비명과 함께 주저앉은 이승연.
익스플로전은 마지막까지 숨겨둔 비장의 수단이었다.
5성 공격마법 중 파괴력만 보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화염 주문.
운석이 떨어진 것마냥 커다란 크레이터가 지면에 생성되었다.
'이 마법을 구하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붉은 거미의 보스인 김재우도 그녀의 비장의 수를 알지 못했다.
그라운드 제로에서 모은 돈을 아낌없이 투자.
비밀 루트를 통해 구매한 마법서다.
'개고생한 보람이 있어.'
강력한 마력 파장 때문에 안개마저 밀려났다.
코를 괴롭히는 매캐한 연기도.
발길에 계속 차여서 기분을 망친 잡초도.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파괴의 빛에 삼켜졌다.
"속 시원하다!"
"그러게. 아주 시원하게 날려버렸어."
등 뒤에서 나온 건조한 목소리.
낯선 사내의 음색에 이승연의 표정이 싹 굳었다.
힘겹게 고개를 뒤로 돌리니.
피로 된 괴물의 보호를 받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너, 너!"
"예상대로 움직여줘서 고맙다."
피눈물을 흘리는 검은 가면.
[그림자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유진이 킬킬거렸다.
"남은 시체가 간당간당했거든. 한 번 낚아본 건데 월척이네."
"어, 어떻게 익스플로전을."
"마담이 알려주더라고."
"비, 빌어먹을 X이! 내가 어떻게 숨긴 건데 그걸!"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나."
마담의 정보력을 얕보면 곤란하지.
붉은 거미와 대립 관계이니 간부진 조사도 철저하게 해놓았다.
"내가 근처에 있으면 그 주문을 쓸 줄 알았어."
붉은 거미 간부 중 유일하게 승산을 가늠할 수 있는 5성 헌터.
고스트 아이로 이승연을 확인한 순간부터 이 전투의 승리를 확신했다.
"뭐, 이 녀석이 아니었으면 나도 통구이가 되었을지도."
유진은 블러드 골렘을 보고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마력 소모에 따라 범위가 넓어지는 익스플로전.
이승연이 비장의 패를 꺼내게 유도하고는 거리를 벌렸지만, 만일을 대비해서 블러드 골렘의 형태를 변환시켰다.
"마력이 생각보다 더 있었나 봐. 얘가 지켜줬는데도 꽤 뜨끈뜨끈하더라고."
"나, 나한테 가까이 오지 마!"
"걱정 마라. 네 육신과 혼백은 모두 잘 써줄 테니."
"다가오면 죽여 버릴 거야!"
"이제 마력 완전히 바닥났잖아."
그리고 말이야.
꼭 가까이 안 가도 죽일 방법은 많았다.
[본 스피어를 사용합니다.]
마법 무장 '저주받은 이빨'이 이승연의 목덜미와 심장을 관통했다.
"끅, 끄륵."
"많이 아프진 않을 거다."
아마도 말이야, 라고 뒷말을 중얼거린 유진이 고꾸라진 시체에 다가갔다.
'잘 봤나?'
〔이게 네크로맨서의 싸움이란 건가.〕
'감상이 어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흉악함. 적의 마음을 꺾는 잔혹함. 그리고 모든 변수를 읽어서 유리하게 끌고 가는 교활함.〕
'칭찬이지?'
〔크하하하핫. 짐을 감탄하게 하였으니 칭찬이니라. 감사하게 받거라.〕
호탕하게 웃는 크로노스.
전처럼 영웅이 되기 위해선 이렇네 저렇네, 할 때보다는 낫지만 왜 박장대소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됐고 내 할 일이나 하자.'
혼백은 [다크 콜링]으로 굴복시켰고.
껍데기만 남은 시체는 흑암의 반지에 보관했다.
〔해골로 만든 그 작은 인간보단 이 여인이 낫지 않느냐?〕
'당장 언데드로 만들기는 그렇지.'
5성 헌터의 시체.
어떻게 써먹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
'너무 늦지 않게 처리해서 다행이다.'
〔장기전으로 가면 그대가 유리하다고 하지 않았더냐.〕
'난 괜찮은데 다른 쪽이 문제지.'
챙길 것도 챙겼겠다.
유진은 파프너의 영체가 느껴지는 방향으로 발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
파프너를 중심으로 해방된 시커먼 기파.
대련 때 사용했던 것보다 수십 배 강해진 성력이 최형재를 멀리 튕겨냈다.
[주인!]
"딱 알맞은 타이밍에 왔군."
유진은 넝마가 된 파프너의 등에 손을 얹었다.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합니다.]
시간을 되감듯 원상복구 되는 파프너의 몸뚱이.
크로노스의 신성 주문은 언데드에게도 효과가 굉장히 잘 들었다.
[다른 쪽은 정리를 한 건가?]
"아마도. 한둘이야 살아남았겠지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야."
붉은 거미는 이미 궤멸적인 피해를 받았다.
4성 수준 헌터 중 일부는 경상을 입는 데 그쳤지만.
한 치 앞도 보기 힘든 안개를 돌파해서 원흉까지 잡을 용기를 내기는 어려웠다.
"최형재는 언제 가호를 쓴 거지?"
[방금 전이다.]
"운 좋네. 초장부터 썼으면 계획이고 뭐고 끝장이었는데."
[버티는 것도 어렵나?]
"어. 네 능력이면 1분이나 버텼을까."
[쳇. 점수 한번 짜군.]
"성위도 위인데 장비도 차이가 나잖아."
[그리 말한 것 치곤, 주인은 3성이나 위인 적을 쓰러트리지 않았나.]
유진은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비다르의 가호는 힘이랑 민첩 200% 상승. 물리와 마법 저항력도 올려준다."
[무시무시한 수치잖아. 그럼 왜 그걸 안 쓴 거지?]
"보다시피 이성이 거의 나가거든."
백 미터 가까이 튕겨나간 최형재가 비적대면서 일어났다.
여전히 초점을 잃은 눈동자.
파프너와 싸우던 중이라는 것은 잊지 않았는지, 튕겨난 방향으로 곧장 걸어왔다.
[내가 전력을 다해도 1분밖에 못 버틴다며?]
"그랬지."
[여길 올 게 아니라 도망쳤어야지. 그럼.]
"우리가 함께 하면 이길 수 있다."
호선을 그리는 파프너의 안광.
주머니에 넣은 회중시계가 파르르 떨리더니 크로노스가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꽤나 자신만만하구나. 무투계 쪽은 승산이 없다고 할 땐 언제고.〕
'비다르의 가호를 썼으니 없던 가능성도 생긴 거다.'
〔가호를 사용했기에?〕
'비다르는 지금이나 나중에나 인기가 많은 성좌거든.'
아스가르드 성단 휘하의 성좌.
자비로운 마음씨를 지녀서 배후성 계약 조건이 까다롭지 않고, 버프 유형 가호도 성능이 출중한 덕에 무투계 헌터들이 선호했다.
〔그게 승리와 연관이 있느냐?〕
'인기가 많다는 건 잘 알려졌다는 말과 동의어다.'
비다르의 가호가 지닌 장점.
그리고 약점까지도.
[부정한 축복을 사용합니다.]
최형재의 머리에 끼얹어진 회색 기류.
〔계약자여. 뭘 하는 겐가?〕
'디버프 걸잖아.'
〔같은 성질의 주문 효과는 중복되지 않을 터.〕
크로노스의 말은 타당했다.
예를 들어 [부정한 축복]은 모든 스탯을 20% 늘려주고, [거인의 힘]은 힘을 70%까지 상승시킨다.
버프에서 '힘' 스탯이 겹치는 상황.
이 경우에는 신성 주문의 근본이 동일하기에, [부정한 축복]의 효과가 힘에 한해서 반감된다.
〔디버프 효과도 마찬가지이지 않느냐.〕
'뭐, 일반적인 경우라면.'
힘, 민첩, 물리 방어력, 그리고 마법 저항력까지 올려주는 강력한 버프.
유일한 약점은 '다른 신'의 힘, 그러니까 성력이다.
〔크, 크아?〕
회색 기류를 뒤집어 쓴 최형태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비다르의 가호를 갉아먹는 크로노스의 성력.
유진은 디버프 효과보다 성력 자체를 충돌시켜서 가호의 힘을 약화시켰다.
"왜 그러지? 휘청거리고 있지 않나."
"크아."
"제정신이 돌아오려면 아직 멀었군."
연달아 [부정한 축복]을 최형태에게 부여.
신성 주문을 사용할 때마다 움직임이 눈에 띠게 둔해졌다.
[부정한 축복이 자투리의 수호자의 가호 - 복수자(Lv1)에 간섭합니다.]
[부정한 축복이....]
[....]
10번째 신성 주문을 부여하는 순간.
최형재의 망막에 드리운 붉은 기운이 증발했다.
"으으읏."
힘 빠진 신음을 흘린 최형재가 지면에 고꾸라지고는 몸을 꿈틀댔다.
〔작은 인간은 왜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는 게냐?〕
'비다르의 가호가 지닌 사소한 페널티.'
〔복수자〕가 해제되면 어마어마한 근육통이 몰려와서 1분간 움직일 수 없다.
힘과 민첩을 200%나 끌어올린 반동.
'효과를 생각하면 사소하지. 전장 한복판만 아니라면 말이야.'
파프너한테 발목이 잡힌 게 어지간히 초조했나보다.
1분.
아니, 10초만 빨리 사용했어도 너덜너덜해진 파프너를 쓰러트릴 수 있었을지도.
'운이 좋군.'
〔크하하핫. 이제야 좀 겸손함을 배웠느냐?〕
"뭔 겸손이야."
〔그대가 운까지 지배하지는 못하였으니. 스스로의 힘만으로 모든 게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 게 아닌가.〕
'변수 없는 싸움은 없어.'
유진은 짧게 일축하고는 최형태의 앞에 섰다.
"걱정하지 마라. 너만 이런 꼴 당하지는 않을 거다."
"...."
"동료는 많을수록 좋잖아?"
"...?"
"아. 내가 시체를 부하로 다루는 재주가 있거든."
네 동료는 알아챘던데.
유진의 뒷말에 최형태가 눈을 부르르 떨었다.
"파프너야."
[고통 없이 보내주마.]
꽉 말아 쥔 주먹이 수직으로 꽂히고.
최형태의 육신이 크게 한번 들썩이고는 움직임을 멈췄다.
49화 승자는 모든 걸 갖는다
자욱한 안개에 삼켜진 전장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었다.
움푹움푹 파인 땅.
수목 일부는 여전히 불타고 있고.
몬스터와 언데드, 그리고 사람이었던 것의 파편이 여기저기에 튀었다.
"아쉽군. 생각보다 건질 만한 게 적어."
[주인. 너무 피도 눈물도 없는 건 아닌가?]
"나한테 이를 드러낸 놈들이잖아. 죽을 각오 정도는 해야지."
원격으로 시체 폭발을 얼마나 써댔는지.
폭발에 휘말려서 곤죽이 된 붉은 헌터 시체들은 망자로 되살릴 수도 없었다.
나름 멀쩡한 것들은 대부분 역병 좀비로 제작했고.
"뭐, 5성 시체 둘로 만족할까."
둘의 혼백은 망령으로 거둬서 합일도 가능했다.
현 수준으로는 5성이라는 잠재력을 끌어낼 만한 주문을 익힐 수 없어서 그렇지.
'조만간 3성에 오를 것 같으니 그때까진 묵혀둬야겠어.'
이런 상황이 발생할 것 같아서 불경스러운 묘지를 건설했지.
본래는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구조물이지만, 미리 지어놓은 보람이 있다.
"그래도 아이템은 멀쩡한 게 상당히 있네."
[하나하나 수거하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
"손은 늘리면 되지."
[레이즈 언데드를 사용합니다.]
소수이긴 해도 일으킬 수 있는 시체가 곳곳에 있었다.
유진은 급히 만든 좀비들로 붉은 거미 헌터들의 아이템들을 긁어모았다.
-유니크 등급 : 2개
-레어 등급 : 32개
-매직 등급 : 17개
[허 참. 매직보다 레어가 더 많다니.]
"새빨간 위장에서 돈을 그렇게 쓸어 담았으니 그럴 만해."
[격세지감이 느껴지는구나.]
대격변 초기 땐 몬스터들이 사용했던 아이템들을 빼앗아 쓰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메이거스나 그레이베이스 같은 아이템 전문 회사가 출범한 것은 한참 뒤의 일.
"마도공학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몇 년 안 됐으니까."
[어쨌든 좋은 아이템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쉽게라고 하기에는 아직도 가격이 비싼데요."
[나 때는 말이다. 레어 아이템만 해도 기본이 십억 단위였다고.]
예예.
그 시절에는 그러셨겠죠.
"많이 모으긴 했지만 어째 쓸 만한 게 하나도 없냐."
폭발에 휘말렸는데도 용케 부서지지 않은 아이템들은 대부분 무기였다.
내구력이 더 뛰어났을 방어구들은 왜 멀쩡한 게 별로 없냐고?
"제 주인 보호하다가 박살났겠지."
[그렇군. 일리 있는 답이다.]
"파프너야. 마음에 드는 무기가 있냐?"
[이 육신이야말로 최고의 흉기 아니겠나. 왜 묻는가.]
"쓸데없으면 팔려고."
[나 말고 다른 언데드에게 무장시켜도 되잖아.]
파프너의 지적에 유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야."
아머드 스켈레톤한테 레어 무기를 쥐여준다 한들 제대로 다루질 못한다.
레어 등급의 위력을 제대로 내려면 중급 언데드는 되어야지.
"널 성장시키는 것도 중요하고."
[레어 아이템이 나하고 상관관계가 있나?]
"너 먹을 마석 사야지."
파프너의 심장을 성장시킬 때 반드시 사냥으로 획득한 마석만 먹을 필요는 없다.
반드시 구매해야 할 아이템이나 촉매, 혹은 시체가 아니라면 파프너에게 투자하는 편이 나았으니.
[아. 그건 생각 못했다.]
"으휴."
유진은 탄식했다.
저 마석 먹는 하마를 어찌할꼬.
레어 등급 대부분이 유진과 맞지 않았지만, 개중에도 쓸 만한 아이템은 있었다.
[마나 링]
등급 : 레어
분류 : 반지
내구도 : 30/30
착용자의 마력을 보충해주는 반지입니다.
*마력 + 15
*총 마력량 + 5%
반지는 두 개.
마력 추가 옵션은 자동적으로 영력으로 치환되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예전에 획득한 마나 이어링과 흡사한 옵션.
'스탯은 적어도 총 마력량이 늘어나니 괜찮네.'
네크로맨서 전용 마법이 가성비가 좋은 편이지만.
그래도 연전에서는 소모가 큰 편이다.
회귀 전, 낮은 성위일 때는 영력 관리에 애를 먹기도 했고.
'이런 장비는 무조건 이득이다.'
라이프 드레인이 있지만 포션을 모두 소모했을 때도 감안해야 한다.
수수하게 생긴 귀걸이를 양쪽에 차는 순간 정신이 맑아졌다.
영력이 늘어나면서 생긴 현상.
흐흐.
쓸 만하군.
[지팡이는 왜 빼놓았나?]
"아. 조승철 주려고."
[GB(그레이베이스) - R5 타입]
분류 : 레어
등급 : 지팡이
내구도 : 51/70
그레이베이스 사의 R 시리즈 5번째 지팡이입니다.
마력 응집율과 투사체의 위력을 증대시켜줍니다.
*마력 + 50
*재배열 속도 15% 감소.
*투사 형식 마법의 위력 15% 증가.
마법무기의 명가, 그레이베이스의 작품.
소위 말하는 양산형 장비지만, 안정성이 뛰어나서 마법 계 헌터라면 누구든 원하는 아이템이다.
"그러면 하이라이트를 볼까."
거미 사냥에서 얻은 최고의 보상.
유니크 아이템들의 성능을 확인할 시간이다.
[뇌기를 품은 떡갈나무 스태프]
등급 : 유니크
분류 : 지팡이
내구도 : 87/150
번개를 맞아서 겉과 속이 다른 색을 띠게 된 나무로 만든 지팡이입니다. 소켓에 마법 증폭 촉매를 장착시켜 원하는 속성의 파괴력을 증대시킬 수 있습니다.
*마력 + 150
*재배열 속도 30% 감소.
*화염 마법 위력 74% 상승.
*소켓 - [1/1]
화염옥 장착 중
첫 번째 유니크 아이템은 이승연의 지팡이.
레어 등급인 GB - R5 타입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스펙이다.
"재배열 속도 감소에 마력 증가. 마음에 드네."
[화염 마법 증폭은 필요 없지 않나?]
"소켓을 바꾸면 돼."
소켓 옵션은 일부 장비에서만 나타나는 특이점이다.
특정한 속성만을 담은 보석.
예를 들면 지팡이 위에 달려있는 화염옥 같은 걸 장비에 끼워 넣을 경우 추가 옵션이 붙는다.
"이 지팡이는 소켓 옵션이 메인이나 마찬가지지만 말이야."
지팡이에 결합시킨 촉매의 위력을 극대화시키는 용도.
이 지팡이를 만든 사람은 소켓을 갈아 끼워서 여러 상황에 대응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주인이 그 지팡이를 제대로 쓰려면 촉매가 필요하단 말이잖아.]
"어. 그렇지."
[그럼 당장은 빛 좋은 개살구네.]
"꼭 말을 해도."
파프너의 묵직한 팩트에 유진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헛소리 말고 이거나 봐."
[피에 젖은 오우거 건틀릿]
등급 : 유니크
분류 : 장갑
내구도 : 500/500
오우거의 피로 무두질한 가죽으로 만들었습니다. 탄성이 있으며 사용자에게 용력을 불어넣어줍니다.
*힘 + 100
*민첩 + 100
[박투 Lv 65]
[타격 Lv 48]
오크 족장한테서 획득한 블러드 액스도 그렇고.
피 관련 아이템들이 참 많이 나오네.
[최형태가 쓴 장비군.]
"바로 알아보네."
[내 몸을 다져놓은 장갑을 어떻게 못 알아보겠어.]
파프너가 투덜거렸다.
"이건 네가 써라."
[농담도 잘하네. 손에 들어가기나 하겠다.]
"탄성 있잖아. 잘 맞을걸?"
미심쩍은 안광을 띤 파프너가 장갑에 손가락을 넣는 순간.
[오호.]
장갑이 손 크기에 맞춰 저항감 없이 늘어났다.
[주인은 이럴 줄 알았나?]
"탄성이나 사용자에게 맞춰준다는 설명이 붙어 있으면 그래."
승자는 모든 것을 가져가고.
패자는 그 목숨과 사후세계의 안식마저 빼앗긴다.
이게 네크로맨서의 싸움이다.
[농장이란 곳은 어떻게 할 것이냐?]
"당장은 가만 둬야지."
[붉은 거미에게 타격을 주려면 불사르는 편이 낫지 않은가.]
"돈 되는 걸 왜 태워 버리냐?"
유진의 핀잔에 파프너가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붉은 거미에게 타격을 주려면 그게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놈들이 거기에 신경 쓸 틈이나 있을지 모르겠다."
의뢰대로 다리 절반을 잘라주었다.
정확히 4개를 뗀지는 모르겠지만, 그에 준하는 피해는 입었겠지.
어마어마한 손실을 보고도 몬스터들의 세력권 내에 위치한 농장을 관리할 수 있을까?
[흠. 그래도 마약이라니.]
"명상용으로도 쓰인다고 했잖아. 특성을 활용한 영약도 있어."
[허. 설마 거기까지 내다본 거냐.]
"겸사겸사."
블랙허브는 수년 뒤에 개발될 영약, [천단환]의 핵심 재료로 각광받게 된다.
이 지식도 타이밍을 봐서 미래의 대연금사한테 슬쩍 흘려놔야지.
"마담한테 농장 쪽 상황을 알려주면 재미있을 거야."
유진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
그라운드 제로의 주도권을 쥔 3대 단체.
암상, 은하수 펍, 그리고 붉은 거미.
10년 가까이 유지된 균형은 불과 1달 만에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주 수입원인 혈석 공급원 폐쇄.
-헌터 전력 1/2가 날아가 버린 접경지역 몰살 사태.
연달아서 발생한 사건들로 인해 붉은 거미의 지배력이 의심받고 있을 때.
기회를 노리던 마담이 곧바로 칼을 빼들었다.
[달의 주술]
[환야요마경(幻夜妖魔鏡)]
밤하늘에 맺힌 시커먼 얼룩이 넓게 퍼지더니 붉은 거미 본부 주위를 뒤덮었다.
마담 오현정의 고유 특성. 달의 주술이다.
"자. 이제 서로 죽이세요."
빌딩 주위에 모인 붉은 거미 조직원들이 돌연 서로를 노려보더니.
"이 개자식! 언제 마담 편으로 붙은 거냐!"
"개소리. 그건 네놈이잖아!"
콰직- 퍽- 쿵-!
서로에게 무기를 휘둘렀다.
"이게 마담의 힘."
"밤 한정으로는 적수가 없다던...."
꿀꺽-.
마담에게 고용된 헌터들이 침을 삼켰다.
*붉은 거미 퇴치
*의뢰인 ; 은하수 펍 마담
*의뢰 종류 : 척살
*난이도 : B
*특이사항
붉은 거미 보스 김재우는 담당할 헌터를 따로 배정함.
접경지역에서 붉은 거미 헌터들이 전멸한 지 반나절이 지났을 때.
마담은 은하수 펍과 거래 관계인 그라운드 제로의 무법자들과 접경지역을 드나드는 헌터들을 고용했다.
몇 시간 만에 모인 200명의 헌터.
그녀의 섭외 능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우리 필요 없었던 거 아니냐?"
"뭐, 일 안 하고 돈 챙기면 이득이지."
용병들은 희희낙락했다.
마담의 주술 하나로 자중지란에 빠진 붉은 거미 조직원들.
칼 한 번 안 뽑고 돈 버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어디에 또 있을까.
하지만.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음. 느낌이 좋지가 않아요."
마담은 정 노인의 질문에 답하며 머리카락을 빙빙 꼬았다.
"일반인이 많군요."
"80%는 비능력자. 헌터의 수준도 높지 않아요."
달의 주술이 강력하다곤 해도, 성위를 초월하는 위력을 내진 않는다.
기본적으로 성위가 올라갈수록 정신력도 강해지는 법.
마담의 성위인 4성 아래로는 주술에 저항하기 어렵지만, 동급만 되어도 단번에 이성을 잃거나 하진 않는다.
"붉은 거미의 주요 전력을 빼돌렸군요."
"생각보다 포기가 빠르네요."
"예? 그 말씀은...."
"김재우는 붉은 거미를 버리기로 결심했다는 거죠."
한 방 먹었네, 마담은 짧게 중얼거렸다.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정 노인.
"믿기지 않습니다. 그 탐욕스러운 작자가 어찌 그런 선택을 한 건지."
"유진 님이 의뢰를 너무 성실하게 수행해준 덕이겠죠."
"접경지역에서 본 피해가 그만큼 컸단 겁니까?"
"간부 중 둘이 사망했고, 헌터들은 수도 없이 죽었으니까요."
마담은 김재우의 본질을 꿰뚫어보았다.
붉은 거미 보스로 군림하면서 호탕한 척하지만, 실은 자신의 안전을 제일로 여기는 겁쟁이.
조직의 헌터 중 정예 인원만 추려서 그녀가 나서기 전에 도망쳐버렸다.
"판단 자체는 옳았죠. 가만히 있었으면 잿밥이나 먹는 신세가 되었을 테니까."
정 노인과 김재우의 성위는 동일했다.
하지만.
숙련도와 마력 컨트롤, 그 외에도 여러 요소들을 가늠해보면 정 노인이 승리할 확률이 높았다.
"간부들을 맡아줄 분들도 섭외했는데."
마담은 아쉬운 투로 중얼거렸다.
"그럼 쫓아야겠군요."
"아니에요. 지금쯤 서해로 빠져나갔을 거랍니다."
"서해라면... 아!"
정 노인의 입에서 새어나온 탄식.
붉은 거미와 구룡방이 접선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린 것이다.
"김재우도 이 상황을 염두에 둔 걸까요?"
"호호. 운이 좋았던 거죠."
구룡방의 목적은 동아시아를 아우르는 범죄 네트워크 구축.
붉은 거미가 무너지면 김재우의 가치도 없어진다.
그러니 휘하 헌터 중 정예만 따로 빼서 그라운드 제로를 빠져나간 거겠지.
"참 약삭빠른 남자입니다."
"교활하기도 하고요."
"아가씨 후환을 남기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무리예요. 붉은 거미 잔당들을 소탕하는 게 먼저랍니다."
김재우가 발을 뺀 건 아쉽지만, 구룡방 산하로 들어갔으니 추적은 어려웠다.
오히려 붉은 거미를 완전히 도려내서 놈이 돌아올 장소를 없애버리는 편이 후환을 제거하는 법이리라.
"알겠습니다."
마담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붉은 거미 조직원들을 오연하게 바라봤다.
이번 승리는 유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
'거미의 빈자리. 당신이 감당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마담은 유진이 내걸었던 의뢰 보상을 떠올리며 빙그레 웃었다.
50화 암상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