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암상 (1)
출렁- 출렁-.
파도가 칠 때마다 휘청거리는 어선.
일명 통통배라고 불리는 선박에 올라탄 사내가 동쪽을 바라봤다.
수평선에 걸친 육지가 망막에 아른거리고.
"X발."
붉은 거미의 보스였던 사내, 김재우는 나지막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끓어오르는 분노.
성격 같아서는 통통배고 뭐고 다 박살내고 싶은 마음이다.
6성의 극.
그럴 마음만 있으면 발길질 한 번으로 통통배 하나쯤은 가루로 만든 뒤, 육지로 돌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마담, 그 개 같은 X!'
더 이상 그라운드 제로에서 그가 돌아갈 장소는 남아있지 않았다.
"회장님. 이렇게 도망... 물러나도 되는 겁니까?"
둘로 줄어든 간부 중 한 명이 뒤따라나왔다.
"거기에 남아서 뒈지고 싶은 거냐."
"아, 아닙니다. 회장님."
"최형태 그 개X끼랑 죽은 헌터가 150이다. 15명이 아니라 150이라고!"
헌터 전력의 반절이 접경지역에서 허무하게 궤멸당했다.
소수의 생존자가 그 사실을 김재우에게 알렸을 땐, 이미 마담도 행동을 개시했으니.
"인간사냥꾼 소문도 마담한테서 나온 게 분명해."
"정말 개성 패거리였을까요?"
"이제는 중요하지 않은 거다. 문제는 그 X한테 놀아난 거지."
붉은 거미가 그라운드 제로를 장악할 수 있었던 건 압도적인 숫자.
마담이 자금을 풀어도 한 번에 동원 가능한 용병 숫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한데, 그 전력 차가 최형태의 실수 때문에 사라져버렸다.
"영역을 지키겠다고 발악했으면 개죽음이었을 걸."
그라운드 제로를 벗어나도 암담한 건 마찬가지였다.
붉은 거미 간부들은 모두 범죄자.
무법지대에서 왕처럼 떵떵거린 건 양지로 나아가기 어려워서다.
"회장님. 그래도 부산까지 내려가면."
"야. 마담이 우리가 빠져나가는 걸 잘도 봐주겠다."
붉은 거미 이상으로 음지의 영향력이 넓은 마담.
김재우의 영향력은 그라운드 제로와 인근에 한정되지만, 그녀는 훨씬 더 넓은 커넥션을 보유했다.
"부산? 경기도 벗어나기 전에 칼침이나 안 맞으면 다행이겠네."
"중국행이 최선의 선택이었군요."
"다른 애들한테는 네가 설명해라. 더 떠들기 귀찮다."
"예. 회장님."
선내로 들어가는 간부.
김재우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간부란 새X가 저렇게 멍청해서야.'
김재우라고 해서 그라운드 제로를 떠나는 게 달갑지 않았다.
모든 터전을 포기하고 중국으로 건너간다고?
살아남을 방법이 그 외에 하나라도 더 있었으면 구룡방의 손을 잡지 않았으리라.
'이제는 영락없이 놈들의 수하가 되어야 한다.'
김재우가 붉은 거미의 수장일 때하고는 입장이 달랐다.
붉은 거미가 힘이 있을 땐 형식상으로나마 동업자 포지션이지만, 빚을 진 채 중국으로 넘어가면 구룡방 산하로 들어가야 한다.
다른 선택지?
구룡방은 붉은 거미 잔당의 이탈을 뻔히 지켜볼 만큼 만만한 조직이 아니었다.
'이미 사태는 벌어졌다.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필요하면 구두라도 핥겠다.
구룡방 산하 조직으로 개처럼 구르다 보면 언젠가 기회가 올 것이다.
마담에게 복수의 칼을 꽂아넣을 날이.
'범죄 네트워크를 구축하려면 한국에도 손을 벌릴 테니까.'
그때가 되면 구룡방의 선봉을 맡아 그라운드 제로로 돌아갈 것이다.
김재우는 복수를 맹세하며 육지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동쪽을 바라보았다.
붉은 거미 몰락의 배후에 한 네크로맨서의 개입이 있었단 것을 모른 채.
*
영원할 것 같은 밤이 끝나고.
해가 지평선 너머로 솟아오르자, 간밤에 벌어진 참사가 드러났다.
땅바닥에 흩뿌려진 검붉은 얼룩.
모두 붉은 거미 조직원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다.
"축하드립니다. 마담."
정장을 입은 사내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아침부터 볼 줄은 몰랐네요. 지영만 씨."
"미스터 블랙이라고 불러주시죠. 공적인 관계 아닙니까?"
"노력해보죠. 지영만 씨."
사내의 입술이 살짝 꿈틀거렸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지만, 그는 본명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암상의 지도자가 된 후로는 미스터 블랙이라는 가명을 즐겨 썼으니.
그의 본명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신 분이 어쩐 일로 아침부터 저를 찾아오셨나요?"
"잘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붉은 거미의 영역도 삼키셨으니."
"호호. 잘 보일 생각은 있으신 건지 모르겠네요."
둘 사이에 감도는 차가운 공기.
정리되지 않은 전장의 열기조차 마담과 사내에게는 닿지 않았다.
"암상은 뭘 원하죠?"
"힘의 균형은 유지되어야 합니다."
사내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만약 붉은 거미가 주도하던 사업들을 먹으려고 한다면?"
"암상도 나설 겁니다."
"호호. 남의 밥그릇에 손을 대면 곤란하답니다."
"마담의 작은 입에 넣으시기는 좀 크지 않겠습니까?"
"그건 두고 보면 알 일이죠."
그라운드 제로의 균형이 무너진 상황.
붉은 거미는 혈석과 블랙허브 농장 말고도 이권이 되는 여러 사업들을 쥐고 있었다.
이북지역 밀입국.
불법 게이트 관리.
옛 북한 및 중국을 대상으로 하는 밀수까지.
유진이 건드린 두 사업이 가장 큰 자금줄이었지만 나머지 사업들도 마냥 무시하기 어려웠다.
사업 하나만 맡아도 그라운드 제로에서 떵떵거리면서 지낼 수준.
"원하시는 바를 말씀해주십시오."
"제가요?"
"마담께서 붉은 거미의 이권을 가져갈 생각 없으신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암상이 가져갈 건가요?"
"상황에 따라서는 그렇습니다만... 저희의 뜻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라운드 제로는 온갖 범죄자들과 사연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한 세력이 과하게 커지면 브레이크를 걸기 어려워진다.
온갖 불법적인 이권이 얽혀 있는 혼란의 구렁텅이.
마담과 암상, 그리고 붉은 거미가 각자의 분야에서 세력을 일군 뒤로는 그라운드 제로도 나름대로의 질서가 생겼다.
"호호. 제 생각도 마찬가지랍니다."
"그 말씀은...."
"붉은 거미의 영역을 관리해줄 분이 계시다면, 미스터 블랙도 만족하시겠죠?"
싱글거리며 웃는 마담.
그 한 마디로 모든 상황을 유추한 사내는 번뜩 떠오른 생각을 입으로 내뱉을 뻔했다.
'협력자가 있었나.'
붉은 거미와 마담의 신경전.
미스터 블랙은 둘 중 하나가 무너지는 상황까진 가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은하수 펍의 바텐더는 김재우와 마찬가지로 6성 헌터.
마담 역시 수완가였기에, 붉은 거미가 압박해도 큰 타격을 받지 않을 것이고.
반대로 마담이 붉은 거미와 정면으로 싸우려면 용병을 고용해야 하는데, 숫자를 채우는 것부터 어려웠다.
'허 참. 당했군.'
미스터 블랙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라운드 제로에서 한 조직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한 암상.
붉은 거미가 허무하게 무너진 것은 사내가 가장 반기지 않은 상황이었다.
'손 안의 패를 먼저 오픈한 게 문제였다.'
마담의 태도가 뜻하는 건 명확했다.
붉은 거미를 무너트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조력자가 있고.
거미가 관리했던 여러 이권들을 넘겨주는 것.
"군단입니까?"
"호호. 군단이라는 조직은 이틀 전에 김재우가 없애버렸답니다."
"그렇다면 유령? 아니면...."
"정 궁금하시면 셋이 차라도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나눠보세요."
마담은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허. 제대로 말렸어.'
정보의 불균형.
암상조차 파악하지 못한 사건의 전모가 있다.
붉은 거미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히고 마담조차 지분을 나눠줘야 할 만한 조력자.
'그라운드 제로 내부가 아닌가?'
한정된 정보.
붉은 거미 지분을 나누는 중대한 상황에서 데이터가 부족하니, 목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사내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좋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만남을 가졌으면 하는군요."
"오늘 정오. 은하수 펍으로 오세요."
등 돌린 마담의 입가 위로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
그라운드 제로 외곽에 위치한 은하수 펍.
해가 중천일 때에도 시끌벅적했던 매장이 오늘만큼은 고요했다.
[지금은 영업을 안 하는 것 같다.]
"안 하긴. 간판 불 들어왔잖아."
[햇볕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아. 밤에 끄는 걸 깜박한 게 아닐까?]
끼이익-.
문을 열고 들어온 거한.
뒤따라 들어온 사내, 유진은 곧장 라운지로 향했다.
"영업하죠?"
"마담이 고객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 노인은 펍 안쪽을 가리켰다.
VIP 회원만 이용할 수 있는 프라이빗 룸.
유진은 고개를 까딱인 후, 굳게 닫힌 철문에 손을 올렸다.
[주인의 힘으로는 못 열 것 같은데.]
"이 멍청아. 힘 가지고 여는 문 아니거든?"
구구구궁-!
육중한 소리를 내며 뒤로 밀려난 철문.
[뭐야. 나 모르는 사이에 영약이라도 먹었냐?]
"영약 같은 소리 하네."
성천 기업에서 받아낸 인형설삼도 못 먹고 묵혀두는 중이다.
파프너에게 줄 필요가 없어졌으니.
유진이 취하는 게 옳지만.
'그걸 먹었다가는 심장이 얼어서 죽을 것이다.'
네크로맨서 같은 음차원의 마력을 사용하는 자에게 최고의 영약.
유진도 마찬가지지만, 그 힘을 온전히 받아들일 만한 준비가 되지 않았다.
'최소 4성. 그리고 신체능력도 키워야 시도할 만하다.'
다행히 라이프 드레인의 효과 덕에 신체능력이 나날이 강해지고 있다.
곧 인형설삼을 섭취할 날이 올 터.
상념을 멈춘 유진은 뒤따라오던 파프너를 제지했다.
"파프너야. 넌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라."
[흠. 지시라면 따라야지.]
프라이빗 룸에 수하를 데리고 갔다간 마담한테 무슨 욕을 먹을지 모른다.
철문 앞에 선 파프너를 흘겨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4중? 아니 5중 결계군.'
방음과 도청 금지, 투시 방해, 마력 저항, 그리고 충격 흡수.
펍 안에 마련된 프라이빗 룸은 손님들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설치된 마법진들로 가득했다.
"오셨네요."
"시킨 대로 왔다. 그쪽은 누구지?"
정장을 입은 사내가 일어나더니 곧바로 명함을 내밀었다.
"암상이면 지하 경매장이군."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라운드 제로가 익숙하신 것 같습니다."
"떠보는 건 그만하지. 미스터 블랙."
이야. 저 양반을 여기서 만나게 되네.
암상의 주인. 미스터 블랙.
기억 속 모습보다 훨씬 젊어서 곧바로 알아보지 못했지만, 음색과 행동을 관찰하니 곧바로 떠올렸다.
의아한 눈빛으로 마담을 흘겨보자, 그녀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윙크했다.
'추진력은 예나 지금이나 남달라.'
의뢰 보상으로 요구했던 붉은 거미의 지분.
그라운드 제로의 흐름을 좌우하는 세 조직 중 하나가 무너졌고.
남은 두 단체의 수장이 한 자리에 모였으니, 판은 제대로 깔아준 셈이다.
'마담이 나를 지지해준다곤 했지만,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해.'
유진은 눈앞의 사내를 잘 알고 있었다.
회귀 전, 네크로폴리스를 건설할 때 교류가 많았던 인물이거든.
네크로폴리스의 위치는 개성.
그라운드 제로와 가까운 탓에 나름대로 사내에 대해 알고 있었다.
"말 돌릴 필요 없잖아. 내가 원하는 건 알고 있을 거고."
"붉은 거미의 영역과 지분 말씀이군요."
"다 먹겠단 건 아니다. 블랙허브 농장과 대북 사업 부분만 가져가지."
뻔뻔한 유진의 말에 사내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 재미있는 분이네요."
"웃기는 데 소질이 있는 건 처음 알았네."
"저희 암상이 왜 당신을 지지해야 하는지, 이유를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최형태를 포함한 헌터 150명을 내가 해치웠다."
눈가 하나 미동도 안 보이는 사내.
마담의 꾐에 넘어간 뒤로 상황을 조사한 터라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
"붉은 거미를 무너트린 것에 대한 지분을 요구하시는 겁니까?"
"잘 이해했네."
"마담한테는 요구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만. 암상하곤 관계가 없습니다."
사내의 눈동자가 유진의 전신을 빠르게 훑었다.
'붉은 거미의 절반을 날려버린 헌터. 6성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갑자기 튀어나온 무명의 강자.
붉은 거미가 무너지면서 발생한 공백을 채우기는 적합한 인물이다.
그렇다고 연원도 알 수 없는 사람한테 무턱대고 거미의 지분을 넘겨줄 순 없는 법.
'요구 중 일부만 들어줘서 그라운드 제로에 붙들어놓는다.'
계산을 마치고는 웃음을 삼키고 있을 때.
"인간사냥꾼을 지워주고 개성 쪽 길까지 열어주마."
"네?"
"이 정도면 그쪽도 괜찮은 거래 아닌가?"
태연한 유진의 말투에 사내의 눈썹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51화 암상(2)
미스터 블랙은 눈가에 드리웠던 동요의 빛을 지우며 잔잔하게 웃었다.
"흥미롭다, 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만."
"썩 구미가 안 당기나 봐?"
"마담의 조력자 되시는 분께선······."
"천유진이다. 명함은 딱히 없으니 이름으로 불러."
퉁명스러운 유진의 대꾸에 미스터 블랙이 더욱 진한 미소를 짓고는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유진 님. 붉은 거미가 쥐고 있는 이권을 관리하려면 인력이 얼마나 필요한지 알고 계십니까?"
"농장관리는 20명. 이북 쪽 사업이야 안내인 다섯 정도면 되겠지."
"블랙허브 유통에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유진 님께서 농장과 이북 쪽 사업을 모두 관리 가능할지 모르겠군요."
미스터 블랙은 담담한 투로 정론을 이야기했다.
팔짱 낀 유진이 콧방귀를 킁- 뀌고는.
"꽤 혀가 길군. 할 말이 뭐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암상 대표를 앞에 두고도 개의치 않는 태도.
미스터 블랙도 살면서 몇 번이나 마주한 강자의 여유로움이다.
'이 사람은 진짜다.'
태연함을 가장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마담 같이 심리를 감추는 재능을 타고났거나 고도의 훈련을 받지 않고서는.
미스터 블랙은 유진의 모습이 허세가 아니란 것을 직감했다.
붉은 거미 간부 둘과 100명도 넘는 헌터들을 도륙한 자.
그럼에도.
미스터 블랙은 동요하지 않았다.
"암상에서 그라운드 제로에 자리 잡는 것을 도와드리겠습니다."
"대신 원하는 게 있으시다?"
"블랙허브 유통 권리를 맡겨주시면 번거로운 일을 해결해드리죠."
마약 칵테일 '블랙문'의 주재료.
그램당 가격은 혈석보다 아래지만, 변수만 없으면 공급이 끊이지 않기에 장기적인 가치로는 농장이 더 높았다.
붉은 거미의 부두목이 직접 나선 데에는 모두 이유가 있는 법.
"아시다시피 그건 마약입니다. 수요를 찾긴 쉽지 않겠죠."
"마담에게 사람을 알선해달라는 방법도 있지."
"직접 하시겠다면 말리진 않겠습니다."
미스터 블랙은 아쉬움이 없다는 식으로 대꾸했다.
"아직 답을 못 들었군."
"네?"
"개성을 포함한 이북 쪽 거래 루트."
미스터 블랙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개성 쪽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고 말씀을 드렸······."
"싫으면 말고. 한반도 이북 쪽 거래 루트는 흑상에게 맡겨야겠다."
중간에 말을 자른 유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시게요?"
"협상이 결렬됐잖아. 새 거래처를 알아봐야지."
"호호. 저는 최선을 다했답니다."
"보상은 받은 걸로 치마."
한 줄기의 미련 없이 프라이빗 룸을 나서려는 유진.
저벅- 저벅-.
느린 걸음이 프라이빗 룸에 울려 퍼지고.
여태까지 감정을 내비친 적 없었던 미스터 블랙의 눈가가 처음으로 꿈틀거렸다.
철문 손잡이를 꽉 잡는 유진의 손.
"잠깐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미스터 블랙의 침착한 목소리.
그렇지만.
손가락 끝이 은은하게 떨리는 것까진 컨트롤하지 못했다.
풋-.
마담은 흔들리는 손끝을 흘겨보더니 짧게 미소 지었다.
*
몸을 돌린 유진.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든다.
"관심 없다면서. 생각이 바뀌었나?"
"허허허. 이렇게 뵌 것도 인연인데 벌써 떠나신다니 섭섭해서 그렇습니다."
"난 더 할 이야기 없다."
"그러지 마시고 말씀 좀 더 나누시죠."
빈자리를 권유하는 미스터 블랙.
유진은 그 모습을 빤히 보더니 느린 걸음으로 돌아왔다.
'네 녀석이 언제까지 버티나 했다.'
암상의 주인. 미스터 블랙은 회귀 전에도 연이 닿았던 사내다.
그라운드 제로에서 멀지 않은 개성에 네크로폴리스를 건설했으니, 저 사내를 모르는 게 더 이상한 일.
'암상은 한반도 이북 루트를 원한다.'
대격변 이후 바다는 더 이상 인간의 영역이 아니게 되었다.
해양에도 열린 게이트.
수심이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게이트를 폐쇄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고.
브레이크 사태가 일어나면서 바다 여기저기가 침식지대로 변했다.
'사람 사는 곳도 아니니. 문제는 괴물들이었지.'
침식지대에서 출몰하는 괴물들.
게이트 바깥으로 튀어나온 해양 몬스터들은 선박이 지나갈 때마다 적대감을 드러냈다.
바닷길이 아예 닫힌 건 아니지만, 침식된 지역을 피하려면 더 많은 시간과 연료가 필요했고.
몬스터들의 습격에 대비해서 경비를 붙여야 해서 해외 무역 단가가 훨씬 올라갔다.
'한반도는 특히 육로가 막혀 있어서 피해를 더 보았다고 배웠다.'
대격변 이후 35년이 지나간 현재에는 꽤 안정을 되찾았지만.
접경지역 너머 이북지역 루트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은 지금도 심심찮게 있었다.
'미스터 블랙도 나한테 그 거래를 제안했었고.'
유진이 개성 일대를 죽음의 영지로 만들자, 가장 먼저 뇌물을 한 보따리 싸들고 온 게 눈앞의 사내였다.
이북 지역에 관심이 없다?
퍽이나 그러시겠어.
〔비겁하구나!〕
'왜. 뭐가 잘 안 돼?'
〔간악하게 상대의 약점을 미리 파악해두고 이용하다니!〕
'이런 건 지혜롭다고 하는 거다.'
미래의 지식을 활용하는 건 회귀자의 특권.
아.
참 달달하다, 달달해.
"흑상은 중국의 암거래상들입니다."
"안다."
"그런데도 흑상에 이북 쪽 루트를 넘기시겠다는 겁니까?"
"관심 없는 사람 어디 갔나."
유진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되도 않는 애국심을 구걸하지 말고 할 말 있으면 해."
"정말로 인간사냥꾼들을 몰아낼 수 있는지, 확신이 필요합니다."
"몰아내는 게 아니라 제거."
"어느 쪽이든 상관없습니다. 되느냐, 안 되느냐가 중요하죠."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늦어도 2년 안에는 가능할 거다."
인간사냥꾼들의 전력은 붉은 거미를 상회한다.
개성 서부와 연안군, 그리고 해주시로 이어지는 방대한 영역을 장악한 세력.
몬스터를 지배하거나 사육해서 병사로 활용하기에, 접경지역에서 더 강한 전투력을 보유했다.
유진이 말한 대로 인간사냥꾼들을 몰아낼 수 있다면.
'이북 쪽 루트만이 아니라, 경기도 해안 일대의 상권도 쥘 수 있다.'
빌어먹을.
미스터 블랙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참았다.
'대체 무슨 근거를 가지고 이북 루트를 언급한 건가?'
당근과 채찍이 모두 담긴 유진의 제안.
암상 내부에서조차 미스터 블랙이 이북 쪽 루트를 원하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다.
속내를 읽기라도 한 건지.
마음속에 퍼져가는 동요를 최대한 꾹 누른 채, 미스터 블랙은 질문했다.
"유진 님. 2년 안에 놈들을 몰아내지 못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투자에는 리스크가 따른다는 사실을 내 입으로 설명해야 하는 건가."
"믿든 말든 제 자유란 말씀이군요."
"선택지를 준 것에 감사하라고."
잠시 침묵한 미스터 블랙이 입술을 떼었다.
"개성 인근의 통행권을 보장받는 걸 조건으로, 암상은 유진 님을 지지하겠습니다."
그라운드 제로의 흐름을 쥔 삼대 세력.
은하수 펍에 이어 암상까지 유진의 손을 들어 주었다.
*
넋이 나간 얼굴로 프라이빗 룸을 나선 미스터 블랙.
마담은 철문이 닫히기 무섭게 호호- 하고는 크게 웃었다.
"감사해요. 덕분에 진귀한 걸 봤네요."
"뭐가 감사하지?"
"암상의 수장이 이렇게나 당황하는 건 처음 본답니다."
"자주 보게 될 거다."
유진은 무심하게 답하며 일어났다.
번거로운 일은 미스터 블랙이 도맡아준다고 했으니.
농장과 인근 접경지역에서 네크로폴리스의 지배력을 공고히 다져둘 때.
'혼자 일하려니 바쁘군.'
3성이 되면 더 강력한 언데드 제작 스킬을 얻을 수 있다.
파프너까진 아니어도 자아가 있는 언데드를 만들면 네크로폴리스 관리도 편해지겠지.
"잠깐만요."
"붉은 거미 잔당에 관해서는······."
"그쪽이 아니에요."
마담의 손가락이 유진을 가리켰다.
"나?"
"아라한이 당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
아라한 길드.
국내 1위 헌터 기업이자, 파프너의 숙적.
전생에는 목표였던 헌터 가문 설립을 달성하였고.
7대 명가 중 하나인 로마노프와 손을 잡아서 한국에 개입하는 명분까지 주었던 단체다.
"성천 기업에서 전해달라고 했어요."
"아라한 길드가 허술하게 움직이진 않았을 텐데. 용케 그 정보를 알아냈군."
"회장님도 유진 님의 동태를 늘 주시하고 계시니까요."
"성천 기업에 내 정보 넘긴 걸 잘도 포장하네."
대답하지 않고 그저 웃는 마담.
유진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이번 일. 성천 기업 회장도 알고 있나?"
"사안이 크다 보니, 따로 말씀은 안 드렸어요."
"암상 말고는 모르겠군."
"협상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몰랐으니까요. 아직은 통제 중이에요."
"그럼 조금만 더 통제해줘."
유진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또 그 품위 없는 웃음을 짓는구나.〕
'변방 잡귀는 조용히 계시지.'
〔이번에는 무슨 음흉한 계획을 생각하고 있는 건지.〕
'활용할 수 있는 건 모조리 써먹을 거다.
아라한이 그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야 뻔했다.
신입 담당 교관을 대련에서 꺾은 것.
그리고 양산형 중급 포션 관계자.
"아라한에서 접근하길 기다리시는 건가요?"
"조만간 입질이 오겠지."
"호호. 그럼 힘을 더 내보죠."
"성천에 알리는 건 좋지만, 큰 사안은 내 허락을 구해라."
"다른 분께 파는 것도 한번 여쭤볼게요."
"거 참 눈물 나게 고맙네."
유진은 씩 웃으면서 프라이빗 룸을 나섰다.
*
툭- 툭-.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두드리는 사내.
아라한 길드 부사장, 백성현이 고민에 빠지면 으레 하는 버릇이다.
그의 입가를 맴도는 한 사람의 이름.
"천유진, 천유진."
1성 주제에 신입 담당 교관인 정진호를 꺾은 유망주.
거기에 양산이 가능한 중급 포션 제조사와 연관이 있어 보이는 헌터.
백성현은 대련 결과를 보고받자마자 유진의 뒷조사를 지시했다.
"내가 지시를 내리고 1달 좀 더 됐던가요?"
"그렇습니다. 부사장님."
"모인 정보가 꽤 화려하군요."
"부사장님께서 왜 그를 주목하시는지 알 만했습니다."
1성 파티를 꾸려 접경지역을 드나들지 않나.
중급 포션 양산화의 핵심 소스를 연금술사에게 제공했고.
최근에는 목내이병에 걸린 성천 기업 회장의 막내딸을 치료하기까지 했다.
"킥. 이걸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교차검증을 했지만 모두 사실이었습······."
"의심하는 게 아닙니다. 이 자가 범상치 않으니 조사하라고 했으니까요."
백성현은 자료가 담긴 태블릿을 흘겨보았다.
"소속된 곳은 없는 게 확실합니까?"
"예. 접경지역에서 같이 움직였던 헌터 팀이 있습니다만, 그들도 소속 길드가 없었습니다."
"뽀시래기 팀이라."
"혹시 몰라 그들의 자료도 준비해두었습니다."
"볼 가치가 없는 버러지들이더군요."
차갑게 물든 음색.
뽀시래기 팀 정도의 헌터들은 길 가다 발에 걸리는 돌멩이마냥 널리고 널렸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잠재력이 높은 헌터뿐.
"신 연금술사 섭외 건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초도 생산된 중급 포션을 인계받는 것 말고는 어떤 제안도 받지 않습니다."
"300억에도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라."
싸늘하게 식은 백성현의 얼굴.
포션 제조법을 알려달라는 것도 아니다.
신준석의 연금술 공방에 투자할 요량으로 제시한 금액이었는데.
투자 제안조차 거절당할 줄이야.
"기개가 대단하군요. 신준석 연금술사."
"다시 한번 제안서를 넣겠습니다."
"됐습니다. 아라한이 두 번이나 고개를 숙이면 곤란하지요."
비서는 그 말에 담긴 진의를 파악했다.
"포션 유통 과정에서 압박을 넣겠습니다."
"이왕이면 불량이 나오는 편이 좋겠지요. 검증 사례가 모자라니 말입니다."
손에 넣지 못할 바에는 부숴버린다.
아라한의 2인자는 그 철칙을 관철해왔다.
"신 연금술사가 아라한을 필요로 하면 따뜻하게 위로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천유진 헌터를 섭외할 방책은 마련해두었습니까?"
"예. 섭외부에서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이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비서의 설명을 들은 백성현이 킥, 하고는 짧게 웃었다.
"이야. 버러지라고 해도 다 쓸모가 있군요. 괜히 조사를 한 게 아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사장님."
"그럼 진행하세요."
백성현의 축객령에 비서가 안도한 기색으로 물러났다.
"기대되는군요. 이토록 빛나는 인재를 거두면 얼마나 길드에 득이 될지."
태블릿 화면에 남은 사진.
유진이 한쪽 입술을 슬쩍 올린 모습이 백성현의 망막에 비쳤다.
52화 아라한은 무료로 기연을 줍니다(1)
미스터 블랙에게 협박, 아니 협상을 마친 후, 파주 공방으로 돌아왔다.
"형님. 오셨습니까."
"일찍들 왔네? 좀 더 쉬지 그러냐."
떨떠름한 기색으로 대답한 유진.
휴가 기간으로 제시한 2주까지는 아직 기간이 남아있었다.
네크로폴리스 영역을 넓힌다고 꽤 무리했었으니 푹 쉬라고 넉넉하게 시간을 줬건만.
"그러다 퍼지면 곤란해."
"에이. 형 없을 때 우리끼리 호흡도 맞춰봤어."
검지와 중지를 곧게 편 강민영이 자랑하듯 환하게 웃었다.
"엿 먹으라는 건 아닐 테고. 무슨 의미냐?"
"2성이 됐다고요. 우리!"
"그새 게이트에 들어간 건가."
유진은 헛웃음을 삼켰다.
뽀시래기 팀원들의 레벨은 40대 후반.
성위의 끝자락에 가까운 만큼 요구 경험치 양도 높다.
'한계레벨에 도달하려면 몬스터들을 줄기차게 사냥했을 거야.'
동일 성위 몬스터로는 안 됐겠지.
[잊힌 신전]처럼 출입 조건은 1성도 포함되지만, 그보다 높은 성위의 몬스터들이 출몰하는 게이트를 들어갔으리라.
"나랑 같이 다니면 피곤할 일이 많을 건데 알아서 힘을 빼고 왔네."
"형님께서 지도해주셔서 강해지는 법을 알았슴다. 어떻게 쉬고만 있슴까?"
이성민이 흥분한 기색으로 크게 말했다.
귀청 떨어지겠네.
"조금만 작게 말해라."
"아, 죄송함다."
투덜거리면서도 세 사람을 보는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기회를 잡는 것도 능력.
훗날 '거울 사냥꾼'으로 명성을 떨칠 두 사람은 몰라도.
이성민마저 강해지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이 유진을 흡족하게 했다.
'셋 다 키우는 맛이 있어.'
소피아처럼 온갖 아티팩트와 성유물을 저장하진 못해도.
활용 방법이 무궁무진한 [공간] 특성 소유자가 의욕에 차 있으니 만족스러웠다.
〔영웅들의 시작은 늘 이러했지. 참으로 보기 좋도다.〕
'그러면 가호라도 내려주든지.'
〔짐은 불완전한 성좌. 그대를 굽어 살피기도 버거우니라.〕
'말이나 못하면.'
우리 변방 잡귀께서는 참 요구하는 게 정말 많다.
매 순간마다 고난이나 역경을 강조하지 않나.
고전적인 영웅서사에 심취하기까지.
'옛날 취향만 고집하니 아들한테 진 거다.'
〔고, 고얀 것!〕
'마음에 안 들면 축복 거두시던가.'
〔두고 보아라. 짐이 두 번째 충복을 거두기만 하면 그대에게서 모든 능력을 회수할 터이니!!〕
'두 번째 신도는 언제쯤 생기려나.'
〔역천의 거인〕이 유진 외의 신도를 두려면 정식 성좌가 될 만큼의 위업을 쌓아야 한다.
글쎄.
최소로 잡아도 유진이 9성에 다시 도달하지 않는 한, 어렵지 않을까.
"형님. 말씀드릴 게 하나 더 있습니다."
"놀라게 할 게 아직 남았어?"
"아라한에서 저희 팀에게 게이트 공략 보조를 의뢰했습니다!"
어.
다른 의미로 놀랍긴 하네.
싸늘한 미소가 유진의 입가를 차갑게 물들였다.
"혀, 형님?"
"말해. 구체적으로 어떤 제안이었냐."
"그······ 아라한이 정부에 인계 받은 장기 미공략 게이트가 셋 있다고 합니다."
"셋 중 하나를 공략할 때 보조해 달라?"
"국내 1위 길드인 아라한이 저희한테 손을 벌리니 놀랄 일, 맞는 거죠?"
의문문에 의문문으로 답하지 마. 자식아.
차가운 유진의 반응에 세 사람 모두 긴장한 표정이 되어 눈치를 살폈다.
"그 일. 하기로 했냐?"
"아뇨. 형님한테 의견 여쭤보려고 기다렸습니다."
"팀 대표는 너잖아.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접경지대 들락거린다고 형님도 멤버로 넣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의견을 물어야죠."
오.
자식. 역시 의리 하나는 있단 말이야.
"형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거절하겠습니다."
"왜 거절해?"
"언짢으신 것 같아서요."
"됐어. 놈들이 먼저 손을 써주면 고맙지."
유진의 말에 섞인 뉘앙스를 알아챈 강민호가 짧게 탄식했다.
"처음부터 형님을 섭외할 생각이었군요."
"아. 그런 거였어?"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슴다."
두 사람이 감탄과 한숨이 섞인 투로 중얼거렸다.
뽀시래기 팀의 인지도는 0.
국내 1위 길드인 아라한이 먼저 접근할 이유가 없었다.
강민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형님의 가르침 덕에 좀 기고만장해졌나봅니다."
"세 사람 모두 그럴 자격 있다. 기죽지 마."
유진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너흰 말이야.
최강의 네크로맨서를 죽음의 위기에 빠트렸던 몇 없는 헌터들이다.
전 세계에서 9번째 위계를 달성했던 몇 없는 인물인 불사왕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겼을 만큼.
'목이 서늘하네.'
유진은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무의식적으로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그만한 재능의 소유자들이 눈앞에 있다.
얼마든지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크하핫. 계약자가 그런 말도 할 줄 알았구나.〕
'내가 매번 쪼기만 할 줄 알았냐?'
〔흠. 혈관에서 피 대신 윤활유라는 게 흐르는 줄 알았건만. 짐이 그른 판단을 내렸을 줄이야.〕
변방 잡귀의 헛소리를 수면 아래로 가라앉히고는 강민호의 어깨를 토닥였다.
"어쨌든 놈들의 제안을 구체적으로 말해봐."
"네. 형님."
아라한 길드의 제안은 브레이크가 임박한 게이트를 뽀시래기 팀과 함께 진입하는 것.
정부에서 의뢰하거나, 일전에 게이트를 선점했던 길드가 공략을 포기한 곳을 공략해야 한다.
수원 - 뒤틀린 구덩이
[유형 - 고정 타입]
[출입 조건 : 1 - 2성]
[게이트 면적 : 중]
[출입 제한 : 20명]
[마나 밀집도 : 84%]
충주 - 철의 무덤
[유형 - 고정(폐쇄) 타입]
[출입 조건 : 1 - 2성]
[게이트 면적 : 소]
[출입 제한 : 12명]
[마나 밀집도 : 91%]
춘천 - 장난감 공장
[유형 - 고정 타입]
[출입 조건 : 1 - 2성]
[게이트 면적 : 소]
[출입 제한 : 8명]
[마나 밀집도 : 87%]
호오.
유진의 눈가가 위로 올라가면서 호선을 그렸다.
〔쓸 만한 게 있나 보구나.〕
'이제는 말 안 해도 척척 알아보네.'
〔계약자의 표정만 봐도 명약관화이지 않겠느냐.〕
'아라한 놈들. 좋은 것만 다 먹어놨어.'
춘천 서부지역에 열린 '장난감 공장'은 연금술 효율을 높여주는 아티팩트, [파라켈수스의 매직실린더]가 발견된 게이트이고.
수원에 위치한 '뒤틀린 구덩이'는 유니크 등급 도구인 [무한의 주머니]를 얻을 수 있다.
〔그걸 용케 다 기억하는구나.〕
'배곯고 다니던 시절이라서. 기연을 얻은 사람들이 부러웠거든.'
마법계 헌터로 진로를 골랐지만, 하루 벌어서 겨우 먹고 살던 시절.
크로노스의 회중시계가 이 시간대로 유진을 회귀시킨 것도 그 이유이진 않을까.
유진은 막연하게 생각했다.
'근데 문제는 두 번째 게이트야.'
철의 무덤.
대규모 브레이크 사태가 벌어져서 수천 명의 피해를 촉발한 게이트의 이름.
〔본래 게이트 공략을 시도했던 작은 인간들이 실패했단 말이더냐?〕
'어. 그게 아라한인지는 몰랐지만.'
한 번 진입하면 게이트 핵을 부술 때까지 나올 수 없는 폐쇄형.
게이트 내부 구조나 공략 보상 등.
모든 데이터가 없는 미지의 공간이다.
'한 가지는 확실하겠네.'
〔다른 선택지보다 위험하다는 것.〕
'성좌님께서 좋아하는 위기 상황이 자주 나오겠어.'
〔흥. 그대가 불확실한 곳에 뛰어들 리 없으니 나머지 둘 중 하나를 고르겠지.〕
'아닌데?'
변방 잡귀라서 그런가, 감이 없네.
유진은 생각을 정리하고는 강민호에게 말했다.
"아라한에 셋 다 하자고 해."
"전부 다요?"
"안 될 것도 없잖아."
"그러면 일정을 잡아보겠습니다."
강민호가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릴 때, 크로노스는 의외라는 듯 사념을 보냈다.
〔위험을 무릅쓰고 작은 인간들을 구하려는 게냐?〕
'뭐, 겸사겸사.'
〔그대를 다시 보았도다. 이토록 영웅다운 품성이 잠들어 있을 줄이야.〕
어.
딱히 그런 건 아닌데요.
크로노스가 오해를 한 듯하지만, 굳이 정정해주진 않았다.
'철의 무덤이면 그걸 얻을 수 있겠어.'
강화된 언데드 제작에 필요한 물질.
머지않아 3성에 도달할 것 같은데 미리 확보해서 나쁠 건 없지.
아라한 길드 형님. 필요한 걸 입에 넣어주기까지 하니 정말로 감사합니다.
"크흐흐흐."
〔또 저렇게 웃는구나. 쯔쯧.〕
크로노스는 바뀔 줄 모르는 유진의 천박한 웃음에 혀를 찼다.
*
충주시를 관통하는 남한강.
강 북부에 위치한 자연 생태체험관 주차장은 아라한 배지를 단 사람들로 가득 찼다.
"사람이 엄청 많슴다."
"다 아라한에서 나왔나 봐."
"역시 국내 1위 길드는 다르군요. 형님."
뽀시래기 팀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요란하기도 해라. 실속도 없으면서.]
"쉿. 눈이 많다."
[젠장.]
파프너는 더 사념을 퍼트리는 대신 푸른 귀화를 사방으로 흩뿌렸다.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야."
[철의 무덤]에 투입 가능한 헌터는 최대 10명.
그중 넷이 뽀시래기 팀이니, 아라한에서 투입하는 헌터는 많아도 여섯뿐이다.
"치유 전담 팀은 그렇다 쳐도 무장 트레일러라니."
[트레일러?]
"길드 소유의 장비를 대여해주는 차량. 30명 이상은 되어야 나오는 거다."
그 정도에서 끝나면 다행이게?
즉석에서 파손된 장비를 수리하는 장인들.
게이트 외부에서 대기 중인 버프 요원.
모두 이번 게이트 공략에 동원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다.
"재보급이 불가능한 상황인데. 와서 밥만 축내고 갈 걸."
[아라한 길드는 왜 돈을 허공에 뿌리는 거지?]
"자랑하고 싶어서."
뽀시래기 팀원들 입 벌어진 거 봐라.
효과가 있으니 저러는 거다.
돈이 얼마가 들든, 원하는 게 있으면 손에 넣겠다는 의지.
이번에는 그 목표가 유진일 뿐이다.
[기가 막히군.]
파프너가 신음을 삼킬 때, 아라한 길드 측에 있던 헌터 한 명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반갑습니다. 천유진 헌터시죠?"
"응."
"철의 무덤 공략에 함께하게 된 송명석입니다."
성질을 긁어볼 겸, 초면에 반말을 해도 구김살 없이 인사를 하는 사내.
아.
네가 공략 담당이야?
유진의 눈가 위로 부정적인 기류가 스쳐 지나갔다.
*
"아라한의 초신성! 송명석 헌터님이라고요?!"
등 뒤에서 뾰족한 목소리가 울렸다.
강민영의 리액션에 슬며시 미소 짓는 송명석.
유진이 미간을 찌푸릴 때, 뽀시래기 팀 전원이 몰려왔다.
"천골 특성 소유자를 직접 뵐 줄이야. 영광입니다."
"호, 혹시 싸인 한 번 해주실 수 있슴까? 가보로 간직하겠슴다!"
눈이 벌게졌네. 아주.
그나저나 저 녀석, 초신성이라는 낯간지러운 칭호에도 부끄러운 기색이 전혀 없다.
유진은 슬쩍 뒤로 물러나서 강민호에게 귀띔했다.
"쟤 유명하냐?"
"형님. 장난하시는 건... 아닌 것 같네요."
강민호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불사조 길드 소속 유망주이자 차기 검성이라는 칭호를 얻은 장미선도 바로 못 알아본 사람이니.
송명석을 모르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그 있잖습니까. 중국의 무왕, 창 우페이."
"천무문의 문주가 왜 나와?"
"송명석 헌터는 무왕과 동일한 고유 특성을 보유했다더군요."
창 우페이.
중국에 위치한 7대 명가 중 하나인 천무문(天武門)을 세운 존재.
드미트리를 이어 두 번째로 9번째 성위를 달성해서 전 세계를 통틀어 최강자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거기에 헌터 신기록을 모조리 경신한 데다, 얼굴도 잘생겨서 팬클럽도 있습니다."
팬클럽까지?
으휴.
아주 개판이다. 개판이야.
송명석은 뽀시래기 팀의 결례에도 웃음을 지우지 않고 서명까지 해주었다.
"절 알아봐주시니 감사하네요. 다음에 밥이라도 사야겠습니다."
"방금 하신 말씀 안 까먹을 거예요."
"참. 인사를 나누던 중이었죠. 천유진 헌터님."
송명석은 다시 한번 유진에게 다가가더니 손을 내밀었다.
"철의 무덤 공략. 잘 부탁드립니다."
"뭐, 짐이 되지 않을 만큼은 힘써보지."
유진은 퉁명스레 대꾸하며 송명석의 손에서 눈을 떼었다.
"팔 떨어지겠네요."
"하나 정도는 떨어져도 되잖아."
"예?"
"농담이고. 잘 부탁한다."
손을 마주 잡자마자 홱 거두고는 몸을 돌이켰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눈빛.
칼을 뽑아서 찌르고 싶겠지. 일부러 도발했으니 말이야.
유진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53화 아라한은 무료로 기연을 줍니다(2)
〔저 작은 인간을 아느냐?〕
'알다마다.'
〔태도를 보아하니 회귀 전의 인연인가 보구나.〕
'악연이야.'
유진의 입가가 씰룩이며 조소를 피워냈다.
세상 참 좁아.
미래에 구룡방의 아홉 용(龍) 중 하나를 여기서 만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구룡방이라 함은, 옆 나라의 범죄 조직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어. 그랬지.'
〔한데, 이 작은 인간은 번듯한 길드에 소속되어 있다만.〕
'거기까진 나도 몰라.'
송명석이 구룡방의 머리 중 하나로 악명을 날린 것은 먼 훗날의 일.
회귀자라고 해서 모든 일을 머릿속에 넣고 다니진 않는다.
거울 사냥꾼이나 미스터 블랙 같은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엮인 적이 있어서 상세하게 기억하는 것뿐.
〔회귀자여. 미래의 지식을 떠올리기 위해 더 분발하여라.〕
'모르는 건 모르는 거야.'
〔짐의 성유물을 가진 자가 이토록 모자라서야.〕
'언제는 꿀 빠는 거 싫으니 고생하라고 난리 치더니.'
그래도 궁금하긴 하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마주친 구룡방의 아홉 머리.
아라한 소속 헌터가 구룡방으로 이적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당장 짐작하기도 힘든 많은 사연이 있었겠지.
〔타락인가. 참으로 흥미롭도다.〕
'그 영웅 타령을 또 하려는 건 아니지?'
〔숭고한 뜻을 품었다가 좌절하고 악에 투신하는 존재. 비극적이지 않느냐!〕
'저 새X는 숭고함 같은 거 품은 적이 없거든요.'
내추럴 본 개X끼.
송명석이 구룡방 전에 아라한을 거쳐 간 건 몰랐지만.
저 미소가 진심 1그램도 섞여 있지 않은 순도 100% 가짜인 건 알았다.
'동아시아 최대 범죄 네트워크의 우두머리 중 하나가 되려면 얼마나 독해야 하는지 알아?'
인신매매는 기본이요.
떠올리기조차 역겨운 수많은 범죄에 가담하거나 직접 행한 녀석이다.
한국 출신 헌터가 구룡방에서 높은 위치에 오르려면 얼마나 많은 짓을 벌였겠어?
〔그, 그런 것이더냐!〕
'신들 중에도 겉과 속이 다른 존재가 있잖아.'
〔저 후안무치한 작자를 보았나. 선한 인상으로 짐을 능멸하다니!〕
이런 건 속은 게 멍청이라고 불러야지.
사기를 친 사람은 없는데, 피해자만 있는 기묘한 상황.
유진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나저나 아라한도 꽤 강력한 패를 꺼냈는걸.'
회귀 전, 송명석이 도달했던 경지는 8성.
아홉 머리 중에서도 최강의 용으로 불린 실력자다.
지금도 아라한에서 초신성이라는 언론 플레이까지 하면서 띄워주고 있잖아?
〔그런 자를 위험한 곳에 밀어 넣으려 하다니. 담대하구나.〕
'나한테 무력시위도 할 겸, 확실한 패를 사용한 거다.'
회귀 전에는 공략되지 않았던 [철의 무덤].
그 말인즉슨, 아라한에서 투입했던 헌터들도 죽었다는 의미다.
'송명석이 들어갔다면 아홉 머리고 뭐고 없지 않았겠어?'
〔본래 공략에 참여하지 않았을 작은 인간이 끼어들었다... 미래가 바뀌었구나.〕
'고려할 수 있는 변수는 나밖에 없네.'
아라한이 자신을 포섭하기 위해 투입한 유망주.
그 가능성 말고는 송명석이 게이트 공략에 참여할 이유가 없다.
'미래가 바뀌기 시작하고 있다.'
원 역사에서는 몇 년 후에 조직 채로 소멸했을 붉은 거미가 후일을 도모하질 않나.
구룡방의 아홉 머리 중 하나로 기억했던 송명석을 아라한에서 마주치기까지.
〔크하핫. 인과가 비틀리고 있구나.〕
'인과?'
〔계약자가 시간을 되돌림으로써 인과가 바뀌는 건 필연적인 일이니라.〕
어떤 일이든, 발생하려면 반드시 원인이 존재한다.
뭇 별 위에 이름을 새긴 성좌들조차.
인과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크로노스의 회중시계〕
그 절대적인 명제를 비틀어버리는 이적.
유진이 크로노스의 성유물을 작동시킨 순간부터, 인과가 틀어지는 것까지도
'그게 중요한가?'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유진.
〔호오. 그대의 머릿속에 있는 지식들이 휴지 조각으로 변할지도 모른다만.〕
'바뀌는 게 있지만, 그대로인 것도 있다.'
구더기가 무서워서 장을 못 담그면 어떻게 되겠냐?
미래를 바꾸기 위해 돌아왔다.
비틀리는 인과가 걱정되었으면 회귀를 하지도 않았어.
'오히려 좋아.'
〔꽤나 긍정적이로구나. 그대가 알던 미래가 바뀌어 가는데 괜찮으냐?〕
'싹수가 노란 녀석을 일찍 만났잖아.'
송명석을 미리 쳐내면 구룡방의 아홉 머리 중 하나를 자르는 셈.
아라한하고는 계속 충돌해야 할 운명이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놈이 구룡방으로 이적하기 전에 숨통을 끊어버릴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네.
〔허. 계약자는 참으로 강한 존재로구나.〕
크로노스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는 굳건한 정신력.
영혼을 타고 느껴지는 강렬한 힘의 맥동.
한낱 필멸자에 불과했음에도, 성좌들의 도움 없이 9번째 성위에 도달한 초월자.
유진의 강렬한 의지가 크로노스의 혼백을 자극했다.
'뭐 잘못 먹었냐?'
크로노스의 심정을 알 리 없는 유진은 퉁명스레 쏘아붙이곤 뽀시래기 팀 곁으로 돌아왔다.
*
게이트에 진입하기 전.
아라한 길드는 유진 일행에게 간단한 브리핑을 진행했다.
"철의 무덤은 사전정보가 없는 게이트입니다."
아라한 측 공격대의 팀장인 송명석이 사근사근한 투로 말했다.
손을 든 강민영이 곧바로 질문했다.
"폐쇄형이라 그런 거죠?"
"맞습니다. 게이트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시군요."
"헤헤. 제가 공부 좀 했거든요."
"강 선배 지난 학기에 쌍권총 맞았다고 하지 않았... 읍읍."
태평하네.
유진이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자, 송명석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저거 봐봐.
뱃속에 구렁이를 아홉 마리나 감춘 녀석이라고.
"브리핑이라고 해도, 편제를 공유하는 것뿐이니 편안하게 들으세요."
"송명석 헌터, 아니. 팀장님.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강민호 헌터님이죠?"
"핫, 하핫. 기억해주시니 영광이네요."
멋쩍게 웃은 강민호가 뒷말을 이었다.
"철의 무덤에 진입하면 팀장님 지휘에 따라야 합니까?"
"그 부분은 자율적인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파격적인 대우.
실제로는 두 집단의 무력 차이를 실감시킬 의도였다.
유진은 뻔히 보이는 의도에 콧방귀를 낀 후, 손을 들어올렸다.
"전리품은 어떻게 배분할 거지?"
"양 팀이 사냥한 만큼 챙겨가는 방식입니다."
"다른 게이트도 배분 방식은 똑같나."
"그렇습니다. 모쪼록, 여러분들의 분투를 기원하겠습니다."
공헌도에 따른 배분이라.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유진은 빙그레 웃었다.
*
땅에서 30센티미터 위에 생성된 균열.
푸른빛이 갈라진 공간 사이로 은은하게 비친다.
[철의 무덤]
선행했던 헌터 공격대를 5팀이나 잡아먹은 폐쇄형 게이트.
두 팀은 살짝 거리를 둔 채, 입장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컨디션을 체크했다.
"팀장님.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습니다."
송명석은 팀원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하지만.
'야. 팀장 화났다.'
'하아. 게이트 들어가면 난리 나겠네.'
'천유진이라고 했나. 눈치 없는 놈 때문에 우리까지 고생하겠어.'
괜찮다는 말에도 몸서리를 치는 아라한 공격대 헌터들.
팀장인 송명석과 몇 번 합을 맞춰보았기에, 서글서글한 웃음 속에 감추어진 진정한 모습을 알고 있었다.
꾸득-.
칼자루를 쥔 손에서 흘러나온 마찰음.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 수 있나 보자. 건방진 녀석.'
아라한 공격대 헌터들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폐부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는 송명석.
시종일관 느긋한 유진의 태도를 보고 있자니 당장이라도 칼을 뽑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올랐다.
'부사장의 지시가 아니었으면 곧바로 주둥이를 베어버렸을 건데.'
게이트 공략 직전.
부사장실로 호출 받은 송명석은 한 가지 지시를 받았다.
-천유진 헌터에게 아라한의 힘을 보여주세요.
고작 1성 헌터 따위에게 힘을 보여주라?
백성현의 말에 담긴 뜻을 간파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신입 하나 꼬드기려고 나를 불러?'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아라한의 초신성.
이 길드, 아니 대한민국 헌터계를 이끌어 갈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듣도 보도 못한 헌터를 섭외하려고 아라한에서 공을 들이니 화가 날 수밖에.
[고유 특성 - 천골(天骨)]
무(武)와 관련된 스킬의 위력을 최대로 끌어내며, 레벨을 올리거나 영약 섭취 시 신체능력이 추가로 상승하는 능력이다.
'난 선택받은 자다.'
무왕 창 우페이와 동일한 고유 특성.
아라한조차, 송명석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한 발판인 것이다.
'부사장. 그리고 신입. 내가 얼마나 대단한 헌터인지 보여주마.'
송명석은 눈에 독기를 품은 채 균열 사이로 발을 밀어 넣었다.
푸른 광채가 전신을 휘감고.
주위의 풍경이 순식간에 고철더미의 산으로 변했다.
철그럭-.
땅바닥에 나뒹굴던 철 조각이 허공으로 부유하더니.
서로 덕지덕지 붙으면서 인간과 비슷한 형태를 취하고는 적대감을 드러냈다.
[리빙 아머]
때마침 송명석의 뒤를 따라 게이트에 진입한 아라한 공격대와 뽀시래기 팀.
'내 실력을 보여줄 절호의 기회다.'
똑똑히 봐둬라.
아라한의 초신성이라고 불리는 실력을!
스르릉-!
칼집에서 뽑혀 나온 검이 호선을 공중에 그려낸다.
0.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막 형태를 갖춘 리빙 아머가 무수한 검격에 베여서 산산조각 났다.
"대단해."
"역시 팀장님입니다."
감탄하는 아라한 공격대 헌터들.
2성 헌터라고는 믿을 수 없는 반응속도와 파괴력, 그리고 정확도였다.
송명석의 눈동자가 유진에게 향했다.
"별것 아니군요."
"그러게."
"평범한 헌터라면 몰라도, 저한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말하는 건 그쪽이 아닌데."
철그럭-.
귀를 어지럽히는 금속음.
유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생한 리빙 아머가 안광을 번뜩이고는 송명석에게 달려들었다.
"재생능력?"
"리빙 아머는 핵을 부수지 않으면 계속 되살아난다."
무생물한테 되살아난다는 표현이 맞으려나.
유진이 킬킬거리고 있을 때, 송명석이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어떻습니까?"
"뭐가 어떻긴. 내 말은 귓등으로 들었냐."
송명석은 불길함에 뒤를 돌아보았다.
두 번이나 산산조각 낸 리빙 아머.
본연의 형태인 쇳조각으로 돌아갔어야 할 몬스터가....
-끼, 이, 이.
다시 한번 일어나고는 금속을 마찰시켜서 생물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그 핵이란 게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모르지. 각 개체마다 핵의 위치가 다르거든."
"친절한 조언. 감사합니다."
저 고철 덩어리를 완전히 분해하지 않으면 핵을 적출할 수 없다는 뜻.
반어법을 내뱉은 송명석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철의 무덤에 들어간 공격대가 모조리 전멸할 만한 이유가 있다.'
터무니없이 높은 몬스터의 재생력.
리빙 아머를 공략하려면 전격 계열 마법사가 필수였다.
'그렇다고 해도, 난 할 수 있다.'
10번 베어서 못 죽이면?
100번을 휘두르면 된다.
천골의 소유자.
오러를 다루지 못할 뿐, 순수한 무력으로는 4성 초입 무투계와 맞먹었다.
"간ㄷ...."
[이야. 재미있는 몬스터네.]
귀가 아닌, 뇌리에 직접 들리는 사념.
송명석이 검을 휘두르기 직전, 그가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에 간격 안으로 들어온 존재가 있었다.
3미터의 거한.
파프너였다.
[거기에 핵이 있구나?]
솥뚜껑만 한 손이 리빙 아머의 겨드랑이를 파고들고.
고철 몇 개가 뜯어져 나오자,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더니 우수수-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송명석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어, 어떻게 한 겁니까?"
[마력이 뭉친 곳이 있잖아. 집중하면 보이는데.]
"그러니까 방법을 묻는 겁니다."
[너도 명색이 헌터면 감각 정도는 끌어올릴 수 있잖아.]
막연하게 느껴지는 파프너의 대답.
감각을 끌어 올려?
마력 핵 위치를 파악하라고?
'특수한 스킬 같은 걸로 파악해놓고 잘난 척을 해!'
송명석은 목구멍에 걸린 욕지거리를 내뱉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참 쉬운데. 그걸 못하네.]
유진의 대전사는 아무렇지 않은 투로 송명석의 자존심에 기다란 상흔을 새겼다.
54화 아라한은 무료로 기연을 줍니다(3)
S급 특성인 [무신의 눈]으로 리빙 아머의 핵을 찾는 것쯤, 어렵지 않았다.
와르르-.
떼거리로 몰려온 리빙 아머들이 손짓 몇 번에 우수수 무너졌고.
[에이. 꽤 기대했는데 시시하잖아.]
파프너의 푸념이 아라한 공격대의 뇌리에 꽂혔다.
분노로 일그러진 송명석의 표정.
천골 특성을 얻은 후, 면전에서 굴욕을 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제기랄!!'
칼자루에 얹어놓은 손이 부르르 떨린다.
잔잔한 소음.
리빙 아머들이 무너지는 소리에 묻혔지만, 유진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크흐흐흐. 약 오를 거다.'
〔한데 계약자여. 이건 불공평하지 않느냐?〕
'갑자기 뭔 헛소리래.'
〔작은 인간의 성취는 고작해야 2성. 반면 그대의 대전사는 4성 초입이니 말이다.〕
'수준을 맞춰놓고 대결하자고 한 것도 아니잖아.'
누가 변방 잡귀 아니랄까.
아라한에서 짠 판에 발을 들이밀었는데 정정당당함 같은 걸 왜 찾고 그러냐.
자.
그럼 녀석을 조금 더 비참하게 만들어볼까.
"민영. 동조를 파프너에게 사용해라."
[동조]
지정한 상대와 감각을 공유하는 능력.
강민영의 입에서 아- 하는 탄성이 새어나왔다.
"형. 느껴져요."
"앞뒤 잘라먹고 말하면 좀 그러잖아."
"아. 죄송."
강민영은 배시시 웃곤 석궁을 염력으로 조종했다.
"동조 대상을 늘려도 괜찮은 건가?"
"연습했더니 셋까지는 충분히 견딜 수 있어요."
피융-!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팽팽하게 당겨졌던 줄이 화살을 힘차게 밀어내고.
날선 촉이 고철 사이로 파고들더니 마력의 중심부를 꿰뚫었다.
"야호! 형. 저 성공했어요."
경악한 눈이 된 아라한 공격대.
"봤어? 팀장님도 못 쓰러트린 걸······."
"일격으로 가능한 건가. 저게."
"목소리 좀 낮춰. 팀장님 듣겠다."
송명석은 이제 표정관리를 할 힘조차 없어졌는지, 얼굴에 분노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래.
솔직하게 표현하면 좋잖아?
유진은 히죽거리면서 다음 지시를 내렸다.
"민호. 방패에 기운을 넓게 퍼트려라."
"이렇게 말입니까?"
"리빙 아머의 전신을 뭉갠다고 생각해."
[이동요새]
[강격]
방패 안쪽을 어깨에 밀착시킨 강민호가 두 힘을 충돌시켰고.
진원지에서 발생한 충격파가 리빙 아머의 내부를 사정없이 진탕시켰다.
「기, 이. 이.」
털썩 주저앉는 리빙 아머.
전신에서 연기가 새어나온 후에 몸을 구성하던 철 조각들이 널브러졌다.
"형님! 저도 해냈습니다!"
"체력이랑 마력 관리해. 호들갑 떨지 말고."
수북하게 쌓인 철 조각들 전부가 리빙 아머다.
정확히 따지면 사그라진 영혼들의 망집이 철 조각에 깃든 불완전한 놈들이지만.
리빙 아머의 핵심 특성인 [초재생]과 [마력핵]만큼은 제대로 발휘되어서 까다로운 상대다.
"전 뭘 하면 됨까?"
"팝콘이나 가져와라. 우린 할 게 없다."
"예······."
화염 속성 주력인 놈이 어딜 나서려고 해.
전격계열이면 모를까.
단단한 쇳덩어리 안에 핵을 보관하는 놈하고는 상성이 맞지 않았다.
[공간] 능력도 쓸모가 없고.
〔손 놓고 있는 건 그대도 마찬가지 아니더냐.〕
'파프너가 열심히 일하고 있잖아.'
유진은 너스레를 떨었다.
시체 폭발도 못 쓰고 언데드를 제작할 수도 없다.
본 스피어?
핵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 찌르지.
'소용없는 일 하면서 힘 뺄 필요 없지.'
〔쯔쯧. 짐의 계약자면서 이도록 패기가 없으면 어찌 하나.〕
'현실적인 거다.'
그리고 말이야.
마냥 손을 놓고 있지도 않는다고.
[거인의 힘을 사용합니다.]
[응징의 쐐기를 사용합니다.]
[부정한 축복을 사용합니다.]
응징의 쐐기는 공용으로.
생기 소모가 전제인 거인의 힘은 팀원들에게 걸어주고.
망자에게 버프로 적용되는 부정한 축복은 파프너에게 사용했다.
"힘이······!"
"체력이 너무 빠지면 말해라. 채워주마."
힘 스탯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나지만, 체력이 소모되는 페널티.
라이프 드레인이면 얼마든지 커버가 가능했다.
[본 컨트롤을 사용합니다.]
유진은 미리 챙겨놓은 뼈를 꺼내어 길게 늘였다.
바깥에서 압축해놓은 터라 2미터 넘게 뻗어나가도 내구성은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놀 수 있는 것도 아니야.'
발아래에서 몸을 일으키는 리빙 아머.
유진은 베르디안 식 창법의 묘를 담아 덕지덕지 붙는 철 조각들을 튕겨냈다.
소멸시키진 못해도 시간은 벌 수 있는 실력.
파프너가 막 조립 중인 리빙 아머의 핵을 푹 찔렀다.
[꽤 잘하잖아.]
"나름대로 연습은 꾸준히 했어."
손 놓고 있는 이성민을 빼면 선전 중인 유진 일행.
"무슨 수를 쓴 거지?"
"핵 위치가 눈에 보일 리도 없잖아."
반면 아라한 공격대는 번번이 되살아나는 리빙 아머를 상대로 졸전을 면치 못했다.
무투계 셋.
마법계 둘.
신관 하나.
밸런스가 좋은 팀이지만, 혼란한 전장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도, 도와줘!"
신관계 헌터의 비명.
유진처럼 리빙 아머를 쳐낼 신체능력도, 재주도 없다.
전위와 후위를 가리지 않고 생성되는 적.
원치 않게 난전이 벌어지자, 당황한 기색으로 뒷걸음질 쳤다.
마법계 헌터들도 비슷한 처지.
[아이스 볼트]
[윈드 커터]
재배열 구조가 단순한 마법 위주로 리빙 아머를 견제했으나, 핵의 위치를 모르니 마력만 헛되게 소모했다.
"이쪽도 지금 고생한다고!"
"좀만 도망치든지 버텨봐라."
무투계 헌터들은 이를 악문 채 리빙 아머들을 몰아냈다.
파프너처럼 핵의 위치를 파악할 방법도 없고.
리빙 아머의 전신에 균일한 타격을 주는 강민호의 수단도 흉내 내지 못했다.
계속해서 재생하는 리빙 아머들한테 버티는 것뿐.
오로지 송명석만 분전을 벌였다.
"으아아아아!!!"
[분광검(分光劍)]
[듀얼 블레이드]
양손에 쥐어진 두 자루의 검이 허공에 무수한 빛의 궤적을 만들어낸다.
무리하게 움직일수록.
한계에 가까워진 만큼.
천골(天骨)은 내재된 육체의 가능성을 끌어올린다.
'내가 이런 굴욕을 당하다니!'
분노에 잠식된 송명석은 근육이 찢어지면서 나는 통증조차 못 느낀 채로 검을 휘둘렀다.
수십 조각으로 잘린 리빙 아머.
곧바로 재생하려고 하지만, 뒤이어 몰아치는 검격에 핵이 파괴되었다.
'죽인다. 죽인다!'
아라한의 초신성이라는 별칭에 어울리는 모습.
심지어.
극한까지 올라온 감각 덕분에 리빙 아머의 갑주 안에 흐르는 마력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다.
'이······ 느낌은?'
미래에는 여덟 번째 성위를 이룩할 초인.
분노로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그 가능성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조금 더 검을 휘두르면 새로운 영역에 진입할 것 같은 고양감에 희열을 느낀 순간.
[뭐야. 아직도 싸우고 있는 거야?]
콰지직-!
파프너가 리빙 아머를 찢어발기면서 신들린 듯한 송명석의 칼춤도 끝이 났다.
무의식적으로 휘두른 검은 커다란 손에 붙들린 채 나아가지 못했고.
송명석의 뇌리에 아른거렸던 깨달음도 자취를 감추었다.
"아."
[고마워 할 것 없어. 약한 사람은 도와야지.]
"이······ &*%#$@!!!"
무지막지한 욕설.
유진 일행 앞에서 처음으로 송명석의 본심이 튀어나왔다.
[왜 도와줘도 지랄이람?]
파프너가 어리둥절해하는 모습에 유진도 킬킬거리며 웃었다.
*
끊임없이 일어나는 리빙 아머.
얼추 수백 기를 파괴한 뒤에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흐에엑."
"웩. 우욱."
거친 숨을 몰아쉬거나 소화가 안 된 음식을 토하는 등, 아라한 공격대는 한계에 도달한 모습이었다.
송명석도 마찬가지.
한 순간의 깨달음이 사라지고.
전투마저 끝나니 무리하게 움직인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끅, 끄으윽. 끅."
"아라한의 미래. 그 실력 잘 봤다."
유진의 입술 한 쪽이 위로 올라가면서 기괴한 호선을 그려낸다.
"시시해서 죽고 싶어졌다."
"이, 개자······."
"숨이나 돌려라. 그러다가 기도가 막혀서 죽을 수도 있으니까."
이 자리에서 송명석을 죽이는 건 간단하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마법 무장이 움직여서 무기력증에 빠진 놈의 심장이나 목젖을 관통할 수 있겠지.
〔한데 왜 실행에 옮기지 않느냐?〕
'아라한 길드한테 뜯어낼 게 많이 남았잖아.'
남은 두 게이트 공동 공략.
아라한 길드 헌터들이 몰살당하면 [장난감 공장]과 [구덩이]를 놓칠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어도 기회는 많이 있을 거다.'
실력행사가 무위로 돌아간 것을 알면 가만히 있을까.
아라한 길드는 유진을 섭외할 수 없다고 판단하는 순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를 몰락시키려 할 것이다.
'부사장이 그런 쪽으로 머리가 잘 돌아가거든.'
〔그대의 대전사를 함정에 빠트렸다던?〕
'차기 에이스도 굴욕을 당했으니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이겠지.'
크흐흐흐.
아라한 길드가 수작을 부려봐야 모두 유진의 손바닥 안에 있다.
음지 쪽 정보는 마담이라는 전문가가 있고.
바깥의 흐름은 성천 기업과 인연을 만들어두었기에 경계가 가능했다.
'무슨 방법을 쓰든, 결국 나한테 이득이 될 거다.'
감사장이라도 써야겠어.
유진은 상념을 정리한 후, 일행을 고철더미의 언덕에서 물러나게 했다.
"너희도 뒈지기 싫으면 빠져라."
"헥, 헤엑. 명령, 하지 마라."
"게이트 공략이 벌써 끝났으면 출구가 나타나지 않았겠어?"
송명석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구구궁-!
말이 끝나기 무섭게 흔들리는 바닥.
아라한 공격대 헌터들은 지친 몸을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6명 모두 내려왔을 때.
들썩거리던 철 조각들이 한데 뭉치면서 6미터 크기의 거인으로 변했다.
[고철 망령]
철 조각 사이에서 이글거리는 푸른 귀화.
회귀 전, 충주시 북부를 초토화시킨 원흉이 모습을 드러냈다.
'철에 간섭하고 부하를 늘리는 능력.'
건물을 지탱하는 철근.
차량.
그 외에도 쇠가 들어가 있는 것은 현대 도시에 넘쳐났다.
지금이야 2성 게이트의 보스 수준이지만.
브레이크가 일어난 직후, 인근의 구조물에서 철근을 빨아먹은 고철 망령은 성위를 벗어난 힘을 얻어서 큰 피해를 끼쳤다.
"케, 켁."
"답답한 소리 내지 말고 조용히 쉬어라."
송명석에게 경고를 날리고는 고철 망령을 마주했다.
10미터 정도의 간격쯤은 순식간에 좁힐 정도로 덩치가 큰 괴물.
〔여기까지도 그대의 예상대로라면, 향후의 전개도 이미 생각해두었겠지?〕
'물론.'
미래의 지식으로 이득을 보는 게 하루 이틀은 아니잖아.
주머니에서 나온 붉은 구체.
달걀처럼 타원형으로 생긴 물건을 허공으로 던지자, 한계까지 압축되어 있던 피가 사방으로 퍼졌다.
[골렘 연성을 사용합니다.]
연성의 사용방법은 골렘 제작에만 있지 않다.
물리법칙을 비틀어서 골렘을 보관하거나 원래의 형태로 만드는 것.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덩치 좀 키우고. 저 고철덩어리를 쓰러트려라."
「지시. 확인.」
[혈류 변환]
동체를 구성하는 피가 더 넓게 퍼지면서 블러드 골렘의 신장이 5.5미터까지 자라났다.
[호오. 더 커졌으니 힘도 세지나?]
"억지로 출력을 끌어올려서 풍선근육이나 마찬가지야."
지금처럼 시선 끌기에나 적합하지.
힘과 맷집은 몸뚱이를 불리기 전보다 떨어진다.
[한 마디로 허세용이네.]
"그럴 필요가 있잖아."
유진은 막 피난을 마친 아라한 공격대를 흘겨보았다.
떡 벌어진 눈동자.
과도하게 몸집을 키운 블러드 골렘한테서 시선을 못 떼고 있잖아.
"당분간 같이 일할 친구들인데. 좋은 인상을 남겨야지."
[어떤 의미로든, 뜻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 같다.]
"그렇지?"
고철 망령이 2성 보스 몬스터치고는 상식을 넘어선 능력을 지녔다지만.
블러드 골렘은 트롤의 피를 흡수함으로써 4성 초입 수준으로 업그레이드가 되었다.
과도하게 몸을 불린 탓에 페널티가 붙었어도.
"충분하다는 거다."
쿵- 쿵-!
고철로 된 거인과 핏빛 괴물이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
블러드 골렘을 구성하는 혈액에는 독성 물질도 섞여 있기에, 고철 망령의 철을 조금씩 깎아냈다.
피가 스며들 구멍이라도 없으면 모를까.
넝마나 마찬가지인 고철 망령은 마주 잡았던 손을 떨쳐내려고 발악했다.
[도와줄까?]
"아냐. 블러드 골렘으로 충분해."
쾅! 쾅!
2층 건물 크기의 괴물들이 원시적인 박투를 벌였고.
한 시간 후, 블러드 골렘이 뒤로 넘어진 고철 망령을 짓밟고는 가슴을 탕탕 쳤다.
"개털이군."
허물어진 고철 망령은 흔한 마석 하나 떨어트리지 않았다.
남은 거라고는 흉물스럽게 주저앉은 고철 더미뿐.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
등급 : 매직
분류 : 잡화
스러져간 영혼들이 남긴 원한과 망집이 깃들어 있습니다.
*무게 - 23.5t
"그 고생을 시켜놓고. 보상이 이따위라고?!"
송명석이 화를 내자 유진의 고개가 좌우로 움직였다.
"전리품 분배는 공헌도에 따라. 기억하나?"
"이딴 고철. 줘도 안 가지니 당신이 다 가져라."
"23톤이나 되잖아. 옮기는 것 정도는 도와줘야지."
쐐기를 박는 유진.
송명석의 눈가가 굴욕감으로 물들었다.
〔크하하하핫. 저 작은 인간을 제대로 도발하는구나.〕
'내가 진짜로 필요해서 그러는 건데.'
〔뭣이라?〕
'한이 깃든 금속이 있으면 할 수 있는 게 굉장히 많다고.'
네크로맨서에게 있어서는 금보다도 더 귀한 재료.
저 금속이 얼마나 쓸데 많은지.
눈앞의 멍청한 녀석은 평생 알지 못하리라.
'전생에도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를 수 톤 단위로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모를걸.'
산더미처럼 수북이 쌓인 금속.
이걸 활용하면 언데드 군대를 어느 정도까지 강화할 수 있을까!
[철의 무덤]의 기연은 유니크 등급 아티팩트 둘을 합친 것보다도 더 큰 포상이었다.
유진은 피가 끓어오르는 느낌에 힘을 꽉 쥐었다.
55화 두각을 드러내다
철의 무덤을 공략한 후에도 동상이몽을 꾸는 두 팀의 협력은 이어졌다.
[파라켈수스의 매직실린더]
등급 : 유니크
분류 : 연금술 도구
내구도 : 50/50
전설의 연금술사 파라켈수스가 마력을 극한으로 압축시키기 위해 만든 실린더입니다.
◎마력 압축률 - 523%
춘천 쪽에 열린 게이트에서는 보스 몬스터를 격살한 후, 연금술 장비를 획득했고.
[무한의 주머니]
등급 : 유니크
분류 : 잡화
내구도 : 100/100
아공간 술식이 새겨진 주머니입니다. 최대 1,000kg까지 보관할 수 있습니다.
◎용량 : 0/1,000kg
[뒤틀린 구덩이]를 공략한 보상으로는 용량 제한이 1톤이나 되는 아공간 주머니를 손에 넣었다.
아라한 공격대 헌터들은 어떻게 됐냐고?
"...."
"...."
공헌도에 따라 전리품을 취한다는 조건은 남은 두 게이트를 공략할 때도 유효했다.
유진은 [철의 무덤] 때 쓰지 못했던 강령술을 아낌없이 전개.
즉석에서 언데드 군대를 만들고는 아라한에서 나설 기회를 빼앗아버렸다.
[후후. 속이 시원하다.]
망연자실한 아라한 공격대 헌터들을 본 파프너가 흡족하게 웃었다.
"이 정도로 만족하면 곤란해."
[그런가?]
"진짜 복수는 시작도 안 했잖아."
이번 일을 획책한 부사장의 성질을 긁는 데는 성공했지만.
국내에서 최대 규모인 길드의 입장에서는 작은 해프닝에 불과했다.
"자존심깨나 상했을 테니. 어떤 방식으로든 보복하겠지."
[그 또한 주인의 계산 범위 내인가?]
"맞아. 그렇게 놈들의 전력을 깎아먹고 성장하다보면 아라한의 심장에 칼을 꽂을 날이 올 거다."
유진은 단호하게 말했다.
회귀 전에도 이미 해본 일.
그때보다 훨씬 빠르게 강해지고 있으니, 또 못하리란 법이 어디 있어?
[주인한테는 신세만 지는구나.]
"신세 같은 소리 할 거면 마석이나 열심히 먹어라."
유진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한 수 배웠습니다."
마지막 게이트까지 폐쇄한 후, 송명석은 다시 존대를 썼다.
"배운 게 있으니 다행이군."
"다음에는 저도 한 수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럴 만한 실력이 있다면 말이야."
아무렴.
다시 볼 날이 언제일진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열심히 이를 갈고 있어라.
'조금이라도 강해져야 언데드로 만들었을 때 쓸 만하지.'
원 역사에는 7성의 실력자였던 조승철도 스켈레톤 메이지 꼴이다.
뼈를 강화하고 신체 구성 물질들을 바꾸다보면 그에 준하는 능력을 얻을 수도 있겠지.
그래도 말이야.
'이왕이면 고생 덜 하고 싶다고.'
기존에 만든 언데드를 개조하는 게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데?
동화시킨 사체와 혼백의 균형이 무너지지 않는 선에서 강화 재료를 끼워 맞춰야 하고.
아이템이나 재료의 파장 및 시너지까지 감안해야 한다.
'그러니까 더 강해져라. 빨리.'
유진의 눈가 위로 떠오른 욕망의 빛.
송명석은 그 눈빛을 직시하고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아. 고철들 보내주는 거 잊지 마라."
"모두 파주 공방으로 배송하면 됩니까?"
"23.5톤. 무게가 조금이라도 달라지면 아라한테 따질 거다."
"그 쓸모 없... 아무튼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아라한 녀석들.
남은 게이트 둘을 공략하는 동안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를 조사한 모양이군.
〔곤란하게 되었구나. 그 작은 인간들이 노림수를 알게 되었으니.〕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아라한이라는 단체에도 연금술사는 있지 않겠느냐.〕
'그렇지. 신준석보다 능력도 뛰어날 테고.'
신준석이 각성한 시기는 약 2년 전.
미래의 대연금술사라고 해도, 이 시간대에는 그저 손재주와 감이 좋은 연금술사 A에 불과했다.
스킬 숙련도와 마력 응용능력만 놓고 보면 더 뛰어난 연금술사도 많다는 뜻.
〔고철더미의 사용처를 알게 되면 순순히 넘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라한 소속 연금술사들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모를걸.'
백날 조사하고 분석해봐라.
오한이나 생기지. 어디에 쓸지 파악하진 못할 거다.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는 연금술보다 네크로맨시와 친한 금속이거든.
'뼈를 강화하거나 리빙 아머 같은 언데드를 제작할 수도 있지.'
활용도는 그야말로 무궁무진.
철 같은 무생물에 한이 맺힐 만한 조건은 흔치 않아서, 유진도 구하려고 애를 썼던 광물이었다.
'20톤이면 몇 년은 쓸 정도의 양이야.'
참 운이 좋아.
아라한 길드가 [철의 무덤]을 통으로 먹었으면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텐데.
저 고철들은 두고두고 유진의 전력 강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형님. 정말로 해냈네요."
"너희는 괜찮냐?"
"좀 피곤하긴 해도 크게 다치진 않았습니다."
"그런 거 말고. 아라한이랑 척을 졌잖아."
유진의 질문에 이성민이 뜨악- 하고는 비명을 질렀다.
"왜 그렇게 된 검까?!"
"공동 공략을 제안한 건 아라한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엿 먹인 꼴이다."
"후배는 그런 것도 몰랐어?"
쌍둥이가 이성민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두 사람은 역시 예상했군.
처음에는 멍한 모습을 보였지만, 눈치가 제법 빠르단 말이야.
미래의 거울 사냥꾼은 역시 다르다.
"괜찮습니다. 형님을 안 만났으면 이런 기회도 없었을 건데요."
"나도 형 덕분에 많이 배웠어. 송명석 헌터가 허둥지둥할 때 한 방 먹였잖아!"
강민영은 당시의 짜릿함을 잊지 못하는 듯,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동조로 파프너의 감각을 읽어내고.
화살 한 방으로 리빙 아머를 멋지게 쓰러트린 일.
두 사람은 이미 강해지는 맛에 중독되었다.
"이번 공략의 정산은 나중으로 미루자."
파라켈수스의 매직실린더는 이미 주인이 정해져 있다.
다만, 뽀시래기 팀과 같이 활동하면서 얻은 아티팩트이니 적당한 가격을 일행에게 지불해야겠지.
유진도 그만한 지출은 부담스러웠다.
주 수입원인 마석은 이제 파프너의 식사로 던져줘야 하니.
"알겠습니다. 형님."
"그리고 무한의 주머니는 성민이가 챙겨라."
"누구? 저요?"
"주머니의 술식을 관찰하다 보면 고유 능력의 이해도가 올라갈 거다."
"가, 감사함다!"
눈물을 글썽이는 이성민.
이 정도로 울 것까지는 없지 않니.
"저는 아티팩트 때문에 필요 없어진 줄 알았슴다!"
"...애초에 몇 kg 담지도 못하는 녀석이. 짐꾼으로만 쓸 거였으면 안 데리고 다녔다."
"앞으로도 계속 충성을 바치겠슴다!"
오냐.
앞으로도 분골쇄신할 각오로 일해라.
너희들, 할 일이 엄청 많거든.
〔쯔쯧, 차라리 악신 성좌에게 영혼을 파는 게 나아 보이는구나.〕
크로노스가 못마땅한 듯이 혀를 찼다.
*
콰득-.
산산조각 나버린 팔걸이.
백성현은 한 발 늦게 수백 조각으로 부서져버린 의자의 구성품을 흘겨보았다.
"나도 참. 답지 않게 흥분을 해버렸습니다."
가루가 된 팔걸이와 자신을 겹쳐본 것일까.
막 보고를 마친 비서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송명석 헌터는 뭐라고 합니까?"
"그, 사전 정보만 있었어도 결과가 이렇게 나오지 않았을 거라고...."
"한심하군요."
비서의 말을 자른 백성현이 습관처럼 팔걸이에 손을 뻗었다가 허전함에 쯧, 혀를 찼다.
'두 사람이 충돌할 건 계산대로. 근데 일방적으로 질 줄은 몰랐습니다.'
송명석의 야망쯤은 진즉에 간파했다.
제 딴에는 나름대로 잘 숨긴다고 여겼겠지만, 백성현의 눈을 피해가기는 어려웠다.
부사장실로 호출해서 유진을 섭외하라고 지시한 것도 계획의 일부.
'왜 이런 결과가 나온 걸까요?'
송명석이 패배하는 것은 계산에 없던 변수였다.
고유 특성인 천골도 대단하지만, 전투 센스와 마력을 다루는 감각은 길드장인 이신우에 맞먹는 헌터.
오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4성 무투계 헌터와도 비등하게 겨룰 만한 실력자가 송명석이다.
그런 녀석이.
무참하게 패배했다.
"이거 참.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백성현이 내뱉은 혼잣말에 비서의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렸다.
"아. 당신에게 한 말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생각할 게 있으니 나가보세요."
끼익-.
부사장실에 홀로 남은 백성현은 머릿속으로 주판을 두들겼다.
'이번 일로 가능성이 낮아졌지만, 더 확실해졌군요.'
송명석마저 꺾은 인재.
유진은 반드시 아라한의 품으로 거두어야 한다.
만약 그를 포섭하지 못한다면....
'불사조나 새벽이 나서기 전에 없애버리는 수밖에.'
서늘한 살기가 백성현의 눈가에 아른거렸다.
*
유진 일행은 게이트 공략 배분 문제를 마무리한 후, 파주 공방으로 돌아왔다.
"형. 우리가 잘못 온 건 아니야?"
강민영의 물음에 유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람이 너무 많슴다."
"혹시 연금술사님이 공방을 옮긴 건 아닐는지."
늘 한산했던 신준석의 공방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울타리 앞에는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신 연금술사님! 오성 기업에서 왔습니다!"
"제일 기업의 투자 제안서를...."
"이번에...."
드레스 코드를 정해놓기라도 한 듯, 정장을 입은 이들이 목청을 높였다.
신준석의 공방이 읍내에서 조금 떨어졌기에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주민들한테 항의깨나 받았겠어.
"우리도 정장 입고 올 걸 그랬나."
"지금이라도 준비함까?"
"농담이니 참아줘."
유진은 손을 휘휘 저으며 공방 앞에 모인 인파를 헤치고 지나갔다.
"좀 들어갑시다."
"아니, 당신. 뭔데 갑자기?"
가볍게 밀쳤는데도 쭉 밀려나는 사람들.
동일 성위 무투계 헌터와 비슷한 힘 수치 덕분에 지나가기가 편리했다.
그 과정에서 욕은 좀 먹었지만.
"잠깐. 혹시 천유진 헌터?!"
"천유진 헌터라고!"
"아라한과 공동 공략을 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 송명석을 압도했다던데."
웅성웅성-.
각 기업이나 길드에서 나온 관계자들이 유진을 알아보았다.
장기 미공략 게이트를 연달아 셋이나 폐쇄했으니.
아라한이 정보를 제한했지만 소문이 퍼지는 것을 완전히 막진 못했다.
"예예. 제가 그 천유진입니다."
설렁설렁 대답하며 유진이 나아가자, 뽀시래기 팀도 부리나케 뒤를 따라갔다.
"같이 좀 실례합니다."
"어, 그 공략 저도 참여했어요. 강민영이라고 해요!"
"선배. 부끄럽슴다."
작은 소동 끝에 무사히 공방으로 진입한 일행.
신준석은 부산해진 바깥 상황을 알아보려다가 막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유진과 눈이 마주쳤다.
"동업자님!"
"이야. 못 보던 사이에 인기가 많아졌어."
"다 유진 님 덕분...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저렇게 많잖아. 좋은 거지."
유진은 태연하게 말했다.
"제가 아라한의 투자도 거절한 거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 그랬던가?"
"남의 일이라고 아주!"
욕지거리를 내뱉은 신준석이 땅에 화풀이를 했다.
전생이나 현재나 괴팍한 건 여전하네.
〔이번 사안은 그대의 과오가 빚어낸 사건이지 않느냐?〕
'갑자기 웬 과오 타령이야.'
〔중급 포션을 홍보한답시고 작은 인간의 정보를 아라한에게 알리지 않았더냐.〕
'시끄럽고. 난 모르는 일이야.'
훠이, 훠이.
잡귀야. 물러가라.
크로노스의 사념을 구석으로 밀어 넣고는 신준석의 어깨를 두드렸다.
"근데 포션 공급 이야기는 대충 끝난 거 아니야?"
"초도생산만 아라한에게 넘기는 겁니다."
"아. 다음 생산 분 이야기구나."
"투자도요."
"얼굴 좀 펴. 실력을 인정받은 거잖아."
"제 실력입니까? 동업자님이 알려준 덕분이지."
신준석의 얼굴에 비친 자괴감.
회귀 전에는 본 적 없었던 모습에 신음을 삼켰다.
'포션의 비율을 내가 알려줘서 그런 건가?'
쓸 만한 노ㅇ... 아니, 동업자를 구하려고 미래의 지식 좀 풀었더니.
이런 식으로 부작용이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군.
〔보아라. 인과를 비튼 여파가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하는구나.〕
아주 신났네. 신났어.
'또 고난이나 시련 같은 헛소리 하면 시계 놓고 다닌다.'
〔짐의 발언에 오류가 있더냐? 슬슬 인정하여라.〕
'잘 봐봐. 내가 어떻게 해결하는지.'
유진은 뒤에 선 이성민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무한의 주머니요?"
"어. 장난감 공장에서 얻은 거 꺼내줘."
붉은 톤을 띤 유압 실린더.
신준석의 눈앞에 슬며시 내밀자, 흐려졌던 눈빛이 선명해졌다.
"도, 동업자님. 이건?"
"파라켈루스라고 전설적인 연금술사인데. 그 양반이 쓴 물건이다."
"어떻게 그 이름을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이 귀한 것을 왜 저한테...."
"내 주변에서 가장 뛰어난 연금술사는 당신이거든."
유진의 칭찬에 신준석의 얼굴이 환해졌다.
"동업자님!"
"그거 연구해서 결과랑 활용방법 좀 알려줘."
"아무렴요. 제가 이 실린더의 구동원리부터 구축 술식까지 모두 파악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거 봐.
얼마 이야기 안 했는데도 금방 기운 차리잖아?
〔참으로 가볍구나. 저 작은 인간이란.〕
'방금 전에 인과 타령하던 성좌님은 어디로 가셨을까?'
주머니에 있는 회중시계가 요란한 진동음을 내고는 오랜 시간 동안 침묵했다.
56화 컴퍼니
[파라켈수스의 매직실린더]를 끌어안은 신준석이 둥근 표면에 볼을 마구 비볐다.
"형. 저거 괜찮은 거예요?"
"천재 중에는 괴짜가 많은 법이다."
"아. 그래서 형도."
"뭐라고 했지?"
"혼잣말이에요. 신경 쓰지 마. 형."
느닷없이 휘파람을 부르는 강민영.
싱겁긴.
〔인과의 비틀림으로 생긴 변곡점이 이토록 쉽게 무마가 되다니.〕
'너무 거창한 말만 쓰지 마. 약해 보인다고.'
〔계약자여. 짐을 능욕하는 게냐!〕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다보면 아무것도 못하거든?'
신준석의 본질은 연금술에 미친 인간.
유진이 한 말이나 상황에 따라서 영향을 받을지라도.
근본 자체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핵심을 봐야지.'
한참 동안 실린더에 볼을 문대던 신준석이 뒤늦게 이성을 찾았다.
"어디서 구한 겁니까?"
"오다 주웠다."
"농담하지 마시고요."
"송명석이라는 녀석이랑 게이트를 공략해서 얻었다."
낯익은 이름에 고개를 주억거리던 신준석이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아라한의 초신성이잖아요!"
"말 안 했던가? 아라한 길드가 이 친구들한테 공동 공략 제안했거든."
"국내 1위 길드가 용케 전리품을 양보했네요."
"양보는 무슨. 공헌도대로 따낸 거다."
신준석은 [파라켈수스의 매직실린더]와 유진을 번갈아 보더니.
"Shit!!!!"
"왜 사람 면전에 대놓고 욕을 해."
"아라한의 초신성이라고요! 태연하게 할 이야기가 따로 있지."
"너는 돈 보따리 들고 온 사람들이 한가득이면서."
"그거랑 이게 같습니까?"
"아라한이 제안한 300억을 걷어찼잖아."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던 것을 듣고 있던 뽀시래기 팀이 헉- 하고 비명을 질렀다.
"3, 300억 말입니까!?"
"혀, 형. 아니. 오빠라고 부를게요!"
"경비라도 좋슴다. 저도 좀 써주십쇼."
눈에서 꿀 떨어지는 거 보소.
"거절했다는데 뭘 달라붙고 있어."
"아. 그렇슴까."
"진즉에 말씀하시지. 아저씨.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빛만큼이나 빠른 태세전환 속도.
특히 아저씨라는 단어를 들을 땐 울컥한 듯 목젖이 거세게 요동쳤다.
울지도, 웃지도 못한 우스꽝스러운 신준석의 표정.
"그 도구를 연구하다 보면 이계의 연금술 비의도 알 수 있을 거다."
"동업자님 말씀 중에 틀린 게 없으니 믿습니다."
아무렴.
절대 틀릴 일 없으니 걱정하지 마라.
원 역사에서 [파라켈수스의 매직실린더]에 숨겨진 비의를 알아낸 게 당신이거든.
"밥은 먹었나?"
"좀 이따 먹을 겁니다. 공장의 자동 배합기계가 말썽이라서."
"그러다가 또 굶을 거면서."
"또라니요. 제가 밥 안 먹는 거 보셨습니까?"
응.
회귀 전에는 지긋지긋하게 봤지.
유진은 옛 기억을 떠올리면서 신준석을 몰아붙였다.
"그러면 어제 저녁은 먹었나?"
"아, 그건."
"3일 전에도 안 먹었잖아."
"공방에 CCTV라도 달아 놓으셨습니까?"
안 달아놔도 훤히 보이거든요.
당신 생활 패턴이야 안 봐도 VOD니까 생각나는 대로 말한 건데.
"회식이다. 할 이야기도 있고."
"식사는 몸에 에너지를 충전하는 귀찮은 행위에 불과한데...."
짜악-!
유진의 스매시에 크게 휘청거린 신준석이 두 눈을 부라렸다.
"잔말 말고 의자나 챙겨와."
"알겠습니다."
못마땅한 기색을 지우지 않은 채, 공방 안으로 들어가는 신준석의 뒷모습에 쯔쯧- 혀를 찼다.
*
일행은 공방 앞에 있는 마당에 모였다.
평소에는 관리를 하지 않아서 이름 모를 잡초로 가득한 곳.
[참 너무하군. 집주인이 관리를 안 하나.]
-그겔, 그게게겔.
조승철이 화염 마법으로 풀을 연소시켰고.
불똥과 연기, 그리고 타면서 나온 재는 파프너가 암흑 투기로 밀어냈다.
"이성민아. 무한의 주머니에서 5번 배낭 꺼내라."
"그거 접경지역에서 쓰는 거 아님까?"
"회식용으로 산 거다."
"알겠슴다!"
냉장 상태로 가져온 소고기를 탁자 위에 올리고는 손을 걷어붙였다.
[바로 굽는 게 아닌 거야?]
"오래간만에 솜씨 좀 발휘해 봐야지."
도마에 살치살을 올려놓고 한입에 들어갈 정도로 썰고.
팬 위에 올려서 드럼통으로 만든 간이 화덕의 불꽃을 이용, 몇 번 휘적거리더니 고루고루 익혔다.
"큐브 스테이크는 소스가 필수다."
레드 와인에 굴 소스, 다진 마늘 등을 졸여서 만든 특제 소스.
드럼통 위로 솟구치는 열기가 어마어마했지만, 유진은 한 치의 실수 없이 소스와 고기를 모두 최상의 상태로 조리했다.
레시피만 안다고 흉내 낼 수 없는 솜씨.
"혹시 요리 전공이심까?"
"전공은 무슨. 난 고졸이다."
"캠핑 동호회 애들도 이렇게는 못 함다!"
이성민이 흥분해서 크게 소리쳤다.
요리의 핵심은 불 조절.
드럼통에 불을 피우면 가스레인지나 인덕션처럼 온도 조절을 할 수 없다.
믿을 건 오로지 감과 타이밍.
캠핑을 자주 가본 덕에 유진의 솜씨가 비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로 놀라기는.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다."
크흐흐흐.
유진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내 유일한 취미를 공유하는 날이 올 줄이야.'
〔크하하핫. 어울리지 않는 취미로다. 영웅답지 않구나.〕
'영웅도 배 곯고는 못 살거든?'
회귀 전에는 타인과의 교류가 별로 없었다.
네크로맨서의 특성 상 홀로 게이트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고.
개성에 네크로폴리스를 설립한 후에도 망자들을 자주 봤지, 장기적으로 머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가르침을 구하는 녀석들도 있었지만, 오래 있을 곳은 아니었지.'
개성 일대를 통과하는 암상한테 식량을 매입하던가.
아니면 그라운드 제로까지 가서 밥을 먹어야 하는데 이게 좀 귀찮아야지.
'처음에는 끼니 때우는 정도였는데 하다 보니 재밌더라.'
〔작은 인간들은 이런 상황을 놓고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하더구나.〕
'변방 잡귀한테는 헛소리를 하는 재주가 있고.'
지글지글-.
안창으로는 스테이크를.
그 외에도 고기를 활용한 여러 요리들을 만들어서 일행 앞에 척척 내놓았다.
"맛있슴다!"
"형. 나 반할 거 같아."
"...에너지 보급도 나쁘진 않을지도."
"기회가 되면 요리 좀 알려주십쇼."
쏟아지는 극찬.
유진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파프너야. 너도 먹고 싶지?"
[죽은 자를 모독하려는 의도라면 성공이다.]
고개를 홱 돌린 파프너.
드래고니안의 격과 성질을 최대한 살린 언데드라지만, 맛을 느끼는 감각까지 살릴 순 없다.
뭐, 그래도 방법은 있는 법.
"강민정아. 파프너한테 동조 걸어줘."
"옙."
서로의 감각을 연결하는 고유 특성.
무생물이나 생물을 가리지 않고 사용 가능하고.
사용자인 강민영이 필요한 만큼 감각 동조가 가능하다.
[철의 무덤] 공략 땐 파프너의 '눈'을 공유했었지.
[그렇게 한다고... 아!?]
"와. 이게 되네요."
우적우적-.
팡팡 터지는 육즙.
입안에 감도는 진한 고기의 향에 푸른 불꽃이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맛이야.]
"직접 씹게는 못해주니까 대리만족이라도 해라."
[참 과분한 보상이다. 주인.]
"나한테 고마워하지 말고. 강민영한테 이야기해."
파프너는 강민영 앞에 가더니 허리를 90도 각도로 접었다.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다.]
"형이 시킨 대로 한 건데요. 뭐. 신경 쓰지 마요."
전생에는 목숨을 걸고 싸웠던 적.
거울 사냥꾼의 목숨을 거둔 건 유진의 대전사인 파프너였다.
회귀와 함께 완전히 바뀌어버린 관계지만.
'나쁘지는 않잖아.'
유진은 회귀 전의 일을 떠올리면서 빙그레 미소 지었다.
*
식사를 마칠 때 즈음에는 해가 서쪽으로 넘어갔다.
"형님. 근데 접경지역에서는 왜 요리를 안 하셨던 겁니까?"
"몬스터들이 요리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진 않잖아."
"하긴 접경지역은 위험하죠."
게이트와 현실이 뒤섞여서 반쯤 이계화가 된 공간.
시시때때로 몬스터들이 생성되고.
등급을 넘어선 변종도 심심찮게 출몰하는 곳이다.
몇 번이나 사선을 넘나든 탓에 감각이 둔해졌지만, 어지간한 헌터들은 발길조차 주지 않는 위험지역.
"근데 네크로폴리스 영역 내부는 비교적 안전하지 않습니까?"
"아. 그건 좀 귀찮아서."
강민호가 넋 빠진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봐라.
취미도 너무 많이 하다 보면 일이 되어버린다고.
"잘 먹었습니다. 동업자님."
"만족했나?"
"대성 그룹 구내식당보다 훌륭했습니다."
"칭찬으로 듣지."
국내 최대 규모 기업의 식당을 앞선다는 평.
유진은 싱글벙글 웃었다.
"형. 그런 산뜻한 분위기는 안 어울려요."
강민영이 질색했지만 알바인가.
흠흠.
짧게 헛기침을 하고는 테이블에 앉은 일행을 둘러보았다.
"기분 좋게 배도 채웠으니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마."
유진의 말에 집중하는 사람들.
그를 안 지 오래 되진 않았지만, 저렇게까지 분위기를 잡은 건 처음이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
'음. 스테이크 맛있었다.'
'동업자님은 새로운 연금술 아이디어를 확보한 건가?'
'으으. 말씀 끝나면 물건 채워야 함다.'
각자의 생각이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고 있을 때.
낮게 가라앉은 유진의 목소리가 네 사람의 의식을 한데 엮어냈다.
"컴퍼니를 만들 거다."
"회사 말입니까?"
"직역하면 그렇게 되겠지. 내가 생각하는 건 조금 더 넓은 틀이다."
컴퍼니.
미국 쪽 헌터 업계에서 유행이 시작된 개념으로, 한 [컴퍼니]라는 테두리 안에서 헌터 관련 업종들이 모인 것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기업의 계열사, 혹은 자회사들을 묶은 거랑 비슷한 느낌이지.
"제 공방은 동업자님 아래로 들어가는 겁니까?"
"엄밀히 따지면 그렇지만, 컴퍼니 창립 멤버한테 그럴싸한 직함은 달아줄 거다."
"큭, 크큭. 엄청 재미있네요."
신준석이 배를 쥐어 잡고는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크하핫. 저 작은 인간이 신랄하게 비웃는구나.〕
'흥미로워 하는 건데.'
〔뭣이라?〕
'변방 잡귀가 사람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
아까도 말했잖아.
천재들은 나사가 하나씩 빠져 있다고.
굴지의 대기업에서 퇴사하고 연구에 매진하려고 빚까지 지면서 개인 공방을 만든 녀석이다.
'나랑 더 깊은 관계가 되면 연금술 지식을 더 얻어낼 줄 알고 좋아하는 거다.'
〔저 작은 인간. 멀쩡한 줄 알았건만 생각보다 광인이로구나.〕
'머릿속으로 계산기도 두들겨봤겠지.'
아라한의 초신성, 송명석을 압도적으로 꺾은 헌터.
발전 가능성은 넘쳐나잖아.
[컴퍼니]라는 한 지붕 식구가 되면 어떤 식으로든 이득이 될 것이라는 계산까지 마쳤을 거다.
대성에서 수석 연구원까지 한 녀석이니.
"참고로 나는 강령술에 기반을 둔 가문을 세울 거다."
접경지역에 세운 네크로폴리스.
그리고 얼마 전에 붉은 거미의 사업체 일부를 획득한 것까지.
"형님은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군요."
"붉은 거미는 암흑가 쪽 단체다. 위험한 일이었어."
"다음부터는 의향이라도 물어봐주십쇼."
어럽쇼.
강민호 녀석, 목덜미까지 붉어진 걸 보니 꽤 화가 난 것 같군.
배려 차원에서 뽀시래기 팀을 뒤로 물린 건데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크하하핫. 참으로 아름다운 동료애로다. 이 또한 영웅의 행보 아니겠느냐.〕
'그 놈의 영웅 타령은 언제 나오나 했다.'
중요한 이야기 하는데 튀어나와서 생각 흩트리지 좀 마쇼.
"전 연금술 공방이겠군요."
"동업자 양반은 하던 대로만 하면 된다."
"근데 저 친구들도 컴퍼니에 포함하는 겁니까?"
유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신준석의 눈매가 변했다.
처음 공방에 왔을 때 날이 섰던 모습.
가라앉은 눈으로 냉정하게 뽀시래기 팀의 가치를 판단하고는.
"동업자님의 뜻은 알겠지만, 공과 사는 구분해주었으면 합니다."
유진이 세울 [컴퍼니]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자존심을 긁는 말.
뽀시래기 팀은 화를 내는 대신 침묵했다.
'기회를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버겁다.'
'형 곁에 붙어있는 게 우리의 최선 아닐까.'
'욕심을 너무 크게 내면 안 됨다.'
앞서 신준석이 300억 투자를 걷어찼다는 말을 듣고 [컴퍼니] 이야기까지 나오니, 선뜻 하겠노라고 할 수 없었다.
자칫하면 유진의 발목을 잡는 꼴이 될 테니.
"걱정 마라. 이 친구들은 내가 보증하지."
"컴퍼니의 일원으로써 제 역할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너만큼 대단한 인재들이니 걱정하지 마라."
진심이다.
쌍둥이 남매의 미래인 '거울 사냥꾼'은 수십 년 후에도 몇 없는 8성 헌터로 성장한다.
이성민의 능력은 또 어떤가.
제대로 쓰는 방법만 알고 있으면 활용도가 무궁무진하다.
"혀, 형님!"
"앞으로도 충성을 맹세함다!"
"저, 오빠라고 부를게요. 형!"
사소한 것에 감동하지 마라. 좀.
뽀시래기 팀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유진을 바라보니, 신준석도 짧게 한숨을 쉬었다.
"동업자님이 그렇게 판단하셨다면 이유가 다 있겠죠."
"어차피 컴퍼니라고 해도 당장 뭔가를 하려는 건 아니니까."
신준석과 뽀시래기 팀을 두고 [컴퍼니] 이야기를 한 것은 미래를 위함이다.
유진이 머릿속에 넣어둔 커다란 그림.
[컴퍼니]는 그 시작점이었다.
"그래도 이름은 있어야 하지 않슴까?"
"이미 생각해두었다."
"오. 역시 우리 형이야. 어서 말해주세요."
기대감으로 빛나는 눈빛이 쏟아지고.
유진은 미리 생각한 [컴퍼니]의 이름을 읊었다.
"블랙 컴퍼니."
휘이이잉-.
싸늘한 바람이 일행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57화 불사조 길드
"아니. 형. 그... 뭐 없어요?"
"왜! 뭐!"
차갑게 식은 분위기에 유진이 소리를 질렀다.
"형님.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이름만 보면 블랙 기업처럼 들립니다."
"컴퍼니를 직역하면 그 뜻 아님까."
솜씨를 발휘해서 든든하게 먹여줬더니.
이 배은망덕한 것들!
잠시 침묵했던 유진이 느릿하게 입술을 떼었다.
"진짜로 아니야?"
""네!""
너희들.
밥 먹는 동안 작당모의라도 한 거냐.
이구동성이 된 일행을 보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블랙이 어때서!'
턱을 괸 유진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졌다.
큰일이군.
다른 이름은 생각도 안 했단 말이다.
"누아르는 괜찮나?"
"총 들어야 할 것 같슴다."
"그것보다 형, 그건 프랑스어로 검은색이잖아."
"동업자님한테 색깔놀이 취미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제길.
프랑스어로 검다는 뜻을 바로 알아채다니.
"부정만 하지 말고 아이디어를 내봐."
"성이 넷이니까 사성 어때요?"
"나중에 다른 사람은 안 받을 생각이냐."
"연맹은 어떻슴까."
"기각. 신문 이름 같다."
그 뒤로도 몇몇 아이디어가 나왔지만 일행 전부는 고사하고 유진조차 설득하지 못했다.
"의견 더 없냐? 그럼 원안대로 가자고."
하-.
신준석이 한숨을 쉬었고, 강씨 남매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영락없이 블랙 기업인데."
"형도 인간미가 있었어. 작명센스가 영 아니구나."
[블랙 컴퍼니]
결국에는 일행 모두가 질색했던 이름으로 컴퍼니 구성이 끝났다.
*
다음 날.
공방에서 쉬고 나온 유진은 웅성거리는 소리에 바깥을 흘겨보았다.
"아주 문전성시야."
"저 인간들은 밤낮이 없더군요. 유능한 것도 참 피곤한 일입니다."
보통은 그런 말, 자기 입으로 내뱉지는 않잖아.
아리송한 유진의 시선을 보지 못한 듯, 신준석은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투자는 생각 없는 거지?"
"동업자님한테 받은 게 있어서 괜찮습니다."
"공장 규모를 크게 만드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
"능력의 한계는 알고 있어요. 욕심을 크게 부렸다간 고꾸라질 겁니다."
오.
뭐야.
신준석 씨, 이렇게까지 자기 객관화가 잘 되는 사람이었어?
회귀 전에 만났을 땐 그야말로 나르시시즘의 화신이었는데, 이때만 해도 정상인 범주였군.
"뭡니까. 그 눈빛은."
"아니. 신경 쓰지 마라."
신준석의 미심쩍은 눈빛을 모르는 척 넘기고는 다시 입술을 떼었다.
"초도생산한 포션은 아라한에 넘겼나?"
"네. 모두 해서 101개입니다."
"생각보다 적네."
"당초 목표는 200개였습니다만. 생각만큼은 안 되네요."
자동 생산이라고 해도 완전 무인화는 불가능했다.
기계가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는 건 마석 융해액을 정해진 온도까지 가열시키거나 재료 세팅 같은 단순작업뿐.
"동업자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연금술이 좀 예민한 분야여야죠."
미세한 온도 차이나 재료의 양, 혹은 순서나 투입 타이밍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지는 게 연금술이다.
결국 최종 조율은 신준석의 몫.
무인화 공장이라고 해도 생산량을 확 늘릴 수 없는 이유다.
오히려 처음 생산목표의 반이나 채운 게 대단한 일.
"그건 그렇지."
"어쨌든 2차 생산을 해야 하는데 밖이 저 꼴이라. 번거롭군요."
"저 녀석들을 언제까지 밖에 세워둘 순 없잖아."
"투자제안을 받으란 말입니까?"
"아니. 2차 생산 분량을 넘길 곳이라도 선정해두라고."
신준석이 300억 투자 제안을 거절한 이야기는 길드나 기업 할 거 없이 퍼져있는 상황.
밖에서 목청 높이고 있는 사람들 중 다수는 투자 제안보다도 포션 2차 생산 분량을 원하고 있다.
"아라한이 양산형 중급 포션의 효능을 열심히 홍보해줬으니까."
"그런 이유로 사람을 귀찮게 하다니."
"운 좋게 네가 투자 제안을 받아들이면 더 좋은 거잖아."
어느 쪽이든 무조건 이득인데 목소리를 안 높일 이유가 없지.
2차 생산 분량을 소화할 단체를 선정하면 저 중 상당수가 돌아갈 것이다.
"생각해두신 곳이 있습니까?"
"딱히. 불사조나 새벽 중 하나면 어때."
"아라한은 아니군요."
"내가 그쪽 초신성을 담가버렸는데 왜 도움 될 일을 해?"
양산형 중급 포션 홍보에 아라한을 끌어들인 건, 당시 쓸 수 있는 수단이 많지 않아서다.
현 시간대의 신준석은 무명의 연금술사.
양산형 중급 포션의 효능을 입증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렸을 거다.
굳이 아라한을 끌어들인 건 '시간'을 줄이기 위함이다.
"이제는 필요 없어."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군요."
"크흐흐. 비즈니스 관계라는 게 그렇잖아."
두 사람은 울타리 근처로 향했다.
"신 연금술사님!"
"옆에는 천유진 헌터도 있다!"
웅성웅성-.
"동업자님도 인기가 제법 많아지셨습니다?"
"유능한 것도 참 피곤한 일이야."
아까 내뱉은 말을 그대로 돌려주자, 신준석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놀리시는 겁니까?"
"와. 어떻게 알았대. 중급 포션 양산화에 성공한 연금술사님이라서 그런가."
"됐습니다. 말을 말아야지."
유진이 낄낄거리고 있을 때, 한 여인이 그를 보더니 화들짝 놀랐다.
"당신. 혹시 잊힌 신전?"
최근에 들어본 목소리에 유진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단정하게 묶은 긴 머리카락과 말끔한 피부.
검 한 자루를 허리에 맨 여인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유진이 흠- 짧은 신음을 흘렸다.
'장미선이라고?'
차기 검성이라고 불리는 헌터이자, 불사조의 희망.
전생에서는 [잊힌 신전]을 공략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덕분에 용린갑은 잘 쓰고 있다만.'
장미선의 인터뷰 내용을 떠올리지 못했다면, [잊힌 신전]의 비밀도 못 풀었겠지.
[새빨간 위장] 공략이나 거미 사냥 때 모자라는 전력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용린갑 덕분이다.
〔크하하핫. 그대가 낚아챈 기연의 원 주인이로구나.〕
'어차피 쟤는 용린갑 안 썼어.'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자유자재로 모습을 변환하는 갑주.
그 힘을 최대로 끌어내려면 중갑 형태를 취해야 하는데, 속도 위주인 장미선하고는 맞지 않았다.
결국 용린갑의 주인은 불사조 길드의 마스터인 김영수가 되었고.
'파프너한테 더 잘 어울리잖아.'
아무렴.
남의 기연을 낚아챈 게 아니라 더 필요한 사람한테 준 셈이다.
〔참으로 파렴치하구나.〕
'아니꼬우면 저 친구도 회귀시켜 주든가.'
변방 잡귀 주제에 말이 많군.
뜻밖의 인물과 마주쳤지만, 그렇기에 더 확실해졌다.
"거기 불사조 담당자가 있나?"
"여깁니다."
장미선 옆에 있던 사내가 오른팔을 번쩍 들었다.
꽤나 긴장했는지 굳어있는 모습.
신준석의 입가 위로 조소가 떠올랐다.
"대성 다닐 때도 아라한이나 불사조 쪽 사람들은 고개가 빳빳했는데 말이죠."
"소속되어 있는 단체의 이름값이 곧 자신의 무게잖아."
"그래서 더 신기하다는 겁니다."
대성 그룹에서 수석 연구원으로 종사하던 때에도 이만한 대접을 받지는 못했다.
결과물을 도둑질당한 후, 사표를 냈을 때 동료들이 모두 뜯어말렸던 게 엊그제 같은데.
'다 유진 님 덕이다.'
신준석은 내심을 꾹 감춘 채, 손을 올린 불사조 인원들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
공방 한쪽에 마련된 접객실로 안내 받은 불사조 소속 두 사람.
폐공장을 개조했다 보니 말만 접객실이지,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것 같은 방이었다.
"공방이 이 지경이라. 그래도 편하게 있으시죠."
"반겨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불사조 측 영업직원은 고개를 땅에 박을 것 같은 기세로 푹 숙였다.
아라한에서 [양산형 중급 포션]을 구했다는 소문은 이미 업계 전체에 파다한 상황.
화제의 중심부에 선 인물을 독대한 것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근데 동행하신 분은 누구시죠?"
"장미선 헌터예요."
"차기 검성을 공방에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영광이군요."
신준석은 마냥 그녀를 환대하진 않았다.
차기 검성이라는 명성과는 별개로, 포션 거래하고는 관련이 없는 인물.
말 속에 담긴 가시를 인지한 장미선이 배시시 웃었다.
"무례를 범해서 죄송해요. 그래도 저한테는 이 공방에 올 이유가 있었어요."
"그 목적이 뭔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예전에 송명석 씨랑 대련을 벌였다가 진 적이 있거든요."
아-.
신준석의 입에서 새어나온 탄식.
"마침 파주 공방에 천유진 헌터님도 계신다고... 했는데 말이죠."
세 사람의 눈동자가 약속이라도 한 듯,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킁-.
태연하게 콧방귀를 끼는 유진.
"저어, 그러니까 천유진 헌터님."
"한 번 본 사이인지를 묻는 거라면 맞다."
"그렇죠? 잊힌 신전!"
"스친 거나 마찬가지인데 용케 기억하고 있군."
"그때 느낌이 팍! 오더라니까요! 평범한 분은 아니라고 생각했다니까요. 진짜, 와. 우연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잠깐만.
이 친구, 원래 말이 많은 성격이었나?
게이트 공략 중에 시선이 마주친 게 전부인 인연.
회귀 전에도 유진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때에는 이미 고인이었던지라 접점이 아예 없다.
그래서일까.
'좀 많이 수다스럽잖아.'
〔크하하핫! 당황이라니. 그대답지 않구나.〕
'이런 캐릭터인 줄은 몰랐다고.'
가만히 두면 2절, 3절을 넘어서 4절까지 가겠다.
흠흠, 짧게 헛기침을 내뱉으니 쉼 없이 떠들던 장미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날 보자고 한 이유가 뭐지?"
"송명석 씨를 꺾은 헌터를 보고 싶었어요."
"그럼 목적은 달성됐네."
"여기에 오니까 한 가지 이유가 더 생겼어요."
유진의 머리 위에 떠오른 의문부호.
"그, 송명석 씨를 이긴 건 잊힌 신전에서 부렸던 소환수인 거죠?"
"용케 거기까지 기억을 하는군."
"초면, 아니지. 두 번째 뵙는 입장에서는 실례지만 대련을 부탁드려요."
"나한테 그 말을 들어줘야 할 의무가 있던가?"
유진은 등을 의자에 기댄 채, 팔짱을 꼈다.
"동업자님. 그래도 불사조에서 오셨는데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뇨. 천유진 헌터님을 찾아온 건 개인이에요. 불사조 길드가 아니라."
장미선은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이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불사조 길드에서 보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
호오-.
유진은 반쯤 눕다시피 했던 허리를 살짝 폈다.
'말이 좀 많긴 해도 심성은 괜찮아 보이네.'
장미선에 대해서는 깊게 알지 못했다.
-차기 검성으로 주목받았던 인재.
-미공략 게이트 잊힌 신전의 비밀을 푼 헌터.
떠오르는 일화는 두 개가 끝.
차기 검성으로 불린 찬란한 재능을 꽃피우기도 전에, 아라한 길드가 판 함정에 빠져서 불귀의 객이 됐다.
'재능은 꽤 있을 터.'
삐딱하게 앉거나 팔짱을 끼는 등, 일부러 성질을 긁어도 방실방실 웃기만 한다.
길드의 위광도 내세우지 않고 선 긋기까지.
〔작은 인간 주제에 영웅의 품성을 지녔구나!〕
'한 번 봤다고 단정 짓지 마.'
가만히 두면 보증 서달라는 말에 도장도 찍겠네.
필멸자들의 세상은 변방 잡귀가 살아남기에 너무나도 혹독한 곳이다.
〔짐을 능멸하려 드느냐!〕
'순진한 건 맞잖아.'
〔아무 근거 없이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그으래?
어디, 변방 잡귀가 왜 그런 판단을 내렸는지 들어나 봅시다.
〔저 작은 인간이 그대를 기만하려면 상응하는 이득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으음. 그럴싸하군.'
〔포션 계약과는 선을 그었으니, 이만하면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어라.〕
'...그렇게 편하게 마음먹을 순 없다만. 성좌님의 말이니 노력하지.'
크로노스의 말은 정론이었다.
늘 영웅 찬가를 부르면서 궤변만 늘어놓던 때와 다르기에,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 님?"
"미안하군. 잠시 생각 좀 하느라."
그래.
정보가 없다고 해서 밀어낼 필요는 없다.
이 상황에서 얻어낼 수 있는 걸 요구하는 편이 낫겠지.
'어떤 녀석인지 관찰한 후에 대처해도 늦지 않아.'
송명석도 살생부 리스트에 적어놓았지만, 곧바로 멱을 따러 가진 않듯.
회귀 전에는 보지 못했던 변수 또한 시간을 들여서 지켜보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대련을 해주면 내가 얻는 게 뭐지?"
"제가 가지고 있는 심장석을 드릴게요."
"시, 심장석!!!"
가만히 듣고 있던 신준석이 비명을 질렀다.
[새빨간 위장]에서 채굴되는 혈석과 마찬가지로 에너지 증폭 효과를 지닌 촉매.
동일 무게면 금보다도 더 비싼 게 혈석이었지만.
심장석은 혈석의 몇 배에 달하는 증폭 효과를 지닌 강력한 촉매였다.
"나한테 필요 없는 물건이다."
"도, 동업자님!!!"
[파라켈수스의 매직실린더]도 구해줬잖아.
심장석은 강력한 촉매지만 당장 쓸 일이 없다.
"그 말씀은 비슷한 가치의 물건이라면 괜찮다는 거죠?"
"눈치가 빠르군."
"제 능력 안에서 구할 수 있는 건 뭐든 드릴게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온 대답.
너.
조금 마음에 드는데?
유진은 비로소 흡족하게 웃었다.
58화 하얗게 불태웠다
[대련?]
"어. 차기 검성께서 송명석을 꺾은 실력을 견식하고 싶다네."
둘이 겨뤄본 건 아니지만.
송명석이 이끌었던 공격대를 좌절시키는 데 가장 큰 공훈을 세운 게 파프너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호칭 말고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싫어. 친하게 느껴지잖아."
친하거나 막말을 해도 되는 사이, 그러니까 적이 되어야 편하게 이름을 부르지.
유진은 눈앞의 여인을 둘 중 어느 쪽으로도 분류하지 않았다.
'조만간에 어느 쪽으로든 결론이 날 터.'
아니면.
원 역사대로 교류할 새도 없이 죽어버릴지도 모르고 말이야.
"할 거지?"
[조건이 있다.]
"안 돼. 대가는 내가 받기로 했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 조건을 받아들일 사람은 주인이니.]
뭐지?
유진의 머리 위로 떠오른 의문 부호.
[주인이 먼저 장미선 헌터와 겨뤄봐라.]
"이야. 갑자기 웬 농담이야."
묵묵히 서 있는 파프너.
고요하게 타오르는 푸른 귀화 사이로 황당함에 물든 유진의 표정이 비쳐졌다.
"진심, 인 거냐?"
[요즘에 창법 수련을 너무 소홀히 했다.]
"시간 날 때 나름대로 휘둘렀거든?"
[내 지론은 한결같다. 형(形)을 익혔으면 실전을 겪어야 늘어난다고.]
"바빴잖아. 그리고 당시 상황에서 창 휘두른다고 설쳤으면 뼈도 못 추렸을 거다."
유진은 격하게 반발했다.
거미 사냥 때 접경지역에 몰려온 헌터들은 최소 3성.
용린갑까지 파프너에게 쥐여준 마당이라 근접전을 벌였으면 필패였다.
[적이 언제 주인의 사정을 봐주겠나? 그래서는 나한테 배웠다는 말, 어디서 하지 마라.]
굽히지 않는 파프너.
와.
진심이네. 이 녀석.
〔크하하하하핫!!!!〕
웃지 마라. 변방 잡귀야.
파프너에게 창법을 알려달라고 한 건 자신이다.
유진의 실력이 빠르게 늘지 않는 부분에 대해 책임감을 느꼈던 건가.
"끙. 어쩔 수 없네."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요?"
"잘 부탁해. 설마하니 약해빠진 신관을 전력으로 패진 않겠지."
"대련에서 힘 조절하는 방법은 안 배워서요."
스르릉-.
유니크 등급 무기, [바람검]을 쥔 장미선.
잊힌 신전 공략 때 슬쩍 본 무기다.
"진검이잖아. 그거."
"네. 가검은 안 들고 다니니까요."
"대련용 보호막도 없는데 그걸 휘두르겠다고?"
[걱정 마라. 위험해지면 내가 막아주마.]
시부럴.
퍽이나 위로되는 말이다.
"대전사님. 나중에 따로 이야기 좀 합시다."
[지금 해도 되는데.]
"이따가 할 거다."
계획에도 없는 대련.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회식을 했던 공터로 걸어갔다.
*
유진과 장미선은 공터 양 끝에 섰다.
두 사람의 간격은 약 50미터.
마음먹고 달리면 3초도 안 돼서 붙을 수 있는 거리다.
'여기서 몸을 풀 줄은 몰랐군.'
생각지도 않은 대련.
마냥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파프너의 말대로, 힘 조절을 할 필요가 없는 상대와 겨뤄보는 건 좋은 경험이 될 거다.
'새빨간 위장 땐 공격을 막아내기에 급급했으니.'
붉은 거미 헌터와 수준 차이가 원체 많이 났다 보니 한 번 흘려내는 게 고작이었다.
그것도 큰 성과지만.
어찌 되었든, 동일 성위의 헌터와 겨뤄보는 건 처음인 셈.
"적당히 할 생각은 없지?"
"검을 든 이상, 매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는 게 신조예요."
빡세네.
송명석한테 패배했다곤 해도, 그에 버금가는 재능의 소유자인 건 확실했다.
잊힌 신전에서는 [바람검]으로 저주를 베었었지.
마력의 결을 확실히 읽어낸다는 증거.
"파프너야. 신성 주문 좀 걸고 시작하자."
[전투 중에 상대가 버프 쓸 때 가만히 구경할 거라고 생각하나?]
"신관이 무투계 헌터랑 싸우는데 그 정도 혜택은 줘야지."
[흠. 일리가 있군. 그렇게 해라.]
아주 상전 나셨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아쉬운 건 자신이니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부정한 축복을 사용합니다.]
[거인의 힘을 사용합니다.]
[응징의 쐐기를 사용합니다.]
성력이 스며들자 전신에서 끓어오르는 힘.
그와 동시에 숨이 조금씩 거칠어진다.
'체력소모가 이런 느낌이군.'
나쁘진 않다.
아니.
도리어 솟구치는 용력에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마저 생긴다.
[백야를 사용합니다.]
[성력 → 영력]
"준비 끝났다."
그 말을 내뱉는 순간.
파프너가 위로 올렸던 손을 휙 내렸다.
[시작.]
오른손이 내려오기 무섭게 땅을 박찬 장미선이 바람검을 수평으로 추켜세웠다.
신관 계가 근접 공격에 취약하다는 것은 상식.
[팔라딘]이나 [크루세이더] 같은 특수 직업군이 아닌 이상에는 말이다.
[본 스피어를 사용합니다.]
카가각-!
정면으로 쇄도하는 투사체가 눈에 들어오자마자, 장미선은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시큰한 손목.
투사체의 속도가 꽤 빠른 탓에 쳐낸 후에야 뭐가 날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뼈?"
잘도 막아내잖아.
신관은 마법계처럼 파괴적인 주문이 거의 없다.
낮은 성위에서는 특히나 그랬고.
장미선이 곧장 달려든 것도 유진이 신관 계라는 것을 알아서였다.
그 심리를 역이용했지만 보기 좋게 튕겨내 버렸다.
[주인. 그건 마법이잖아!]
"대련에서 창만 쓰라고는 안 했잖아."
그리고.
아직 끝난 거 아니거든?
[본 컨트롤을 사용합니다.]
처음에 투척한 [저주받은 이빨]을 튕겨내느라 장미선의 발이 멈추었을 때.
남은 3개를 조종해서 허공으로 띄웠다.
'한 번의 검격에 휩쓸리지 않게 간격을 유지한다.'
바람검은 정확한 타이밍에 휘두르면 마나도 잘라내는 아티팩트.
마법 무장에 부여한 영력도 예외는 아니다.
'검 휘두르는 속도는 이미 파악했으니까.'
사방에서 날아드는 저주받은 이빨.
본 스피어보다 위력과 속도가 현저히 떨어져도, 맨몸으로 버틸 정도는 아니다.
[유성검(遊星劍)]
[별빛 장막]
화아아악-!
수십 미터 떨어진 유진의 머리카락이 나부낄 정도로 강렬한 바람.
마나를 함유해서 은은한 빛을 흩뿌리는 바람의 장막이 저주받은 이빨들을 밀어냈다.
"유성검이라고? 저건 오러를 다룰 줄 알아야 제 위력이 나잖아."
[바람검으로 공기의 흐름을 건드려서 오러와 비슷한 효과를 낸 것이다.]
시바.
에너지에 간섭하는 바람검의 능력을 그런 식으로 활용할 줄이야.
당연히 오러로 사용하는 검법과 비교하면 위력이 1/10도 나지 않았다.
그 모자라는 위력만으로도 저주받은 이빨들을 밀어내기 충분한 것이 문제일 뿐.
[유성검(流星劍)]
[혜성 질주]
등골이 오싹하다.
처음 달려오는 속도보다 몇 배나 빠른 움직임.
유진의 민첩으로는 반응조차 하기 어려운 쾌속으로 쏘아진 검이 심장을 노린다.
그러니까.
[베르디안 식 기초 창법]
[제4식 – 창대 치기를 사용합니다.]
눈으로 보고 의식적으로 반응한 게 아니다.
장미선의 날카로운 찌르기에 몸이 움직인 것은.
회귀 전, 9번째 성위를 달성하기까지 겪은 무수한 싸움을 토대로 얻은 '감' 덕분이었다.
터어어엉-!
유진의 손에 들린 뼈창이 기다란 궤적을 그리면서 쇄도 중인 바람검을 쳐냈다.
뼈와 금속이 부딪치면서 나는 커다란 울림.
상승의 묘리를 품은 [유성검]의 찌르기를 완전히 받아치진 못했고.
정확하게 쳐낸 유진이 도리어 휘청거렸다.
'어떻게?'
놀라움으로 물든 장미선의 눈동자.
그렇다고 움직임이 둔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창에 흔들리는 찌르기의 궤도를 슬쩍 틀어내며 힘을 온존.
처음 노렸던 가슴팍 대신 복부를 내질렀다.
'와. 이걸 어떻게 한 거냐.'
유진은 두 가지 의미로 놀랐다.
늘 의식적으로 사용했던 창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펼쳐진 것과.
창대로 검신을 쳐냈음에도 검 끝이 크게 흔들리지 않은 것이다.
[용린갑의 형태를 변형합니다.]
[형태 - 중갑(重鉀)]
[타격 저항 Lv 45]
[관통 저항 Lv 37]
[민첩 -5%]
이번에는 무의식으로 행한 게 아니다.
창대를 쥔 손아귀에서 짜릿한 통증이 올라온다.
그 덕에 검격의 방향을 인지할 수 있었고.
용린갑의 형태 중에서 가장 방어력이 높은 모습으로 바꾸었다.
쿵-!
마른기침과 함께 수 미터 뒤로 튕겨난 유진.
붕 떴던 육체가 지면과 충돌하기 전.
가까스로 발에 힘을 주어 땅바닥에 착지, 고꾸라지는 것은 면했다.
[호오.]
감탄사 내뱉지 마.
손목이랑 발목이 저릿저릿하고만.
검 끝이 찌른 복부는 용린갑 덕에 상흔이 나진 않았지만, 힘을 모두 흡수하지 못해 진탕되었다.
창대를 잡고 있던 손아귀에서는 피가 뚝- 뚝- 떨어졌고.
'이렇게나 차이가 난다고?'
유진의 근력은 2성 초입의 무투계 헌터급.
버프 삼중첩까지 더하면 성위의 끄트머리와도 맞먹는다.
장미선이 어떤 고유 특성을 가진지 몰라도, 스탯 차이가 압도적으로 나진 않을 터.
'상승 검법. 그리고 힘을 쓰는 요령 차이.'
동일한 힘이라도 어떻게 주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파프너가 늘 이야기했던 것.
같은 성위인 장미선과 겨뤄보니 그 말이 실감되었다.
"오. 진짜 신관 맞아요?"
장미선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유진의 창대를 받아냈을 때, 그녀도 상당한 힘을 느꼈다.
창을 휘두르는 자세는 형편없지만.
거기에 실린 힘은 신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강했다.
타탓-.
"쉴 틈을 안 주는군."
유진은 혀를 차면서도 영력을 움직였다.
검에 찔려 밀려나는 순간부터.
저주받은 이빨들은 다시 한번 그의 제어 하에 들어와 있었다.
쇄액!
달려드는 장미선의 뒤에 바짝 붙은 마법 무장.
그에 맞춰 유진도 정면으로 뛰어들었다.
'어차피 피해서는 승산이 없어.'
네크로맨서의 주력은 시체.
언데드를 제작하든, 영력으로 주검을 폭발시키든 하며 적을 몰아친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상황.
독 계열 주문은 익히지도 못했고, [그림자 가면]에 새겨진 저주는 쓸 틈조차 없었다.
'써도 잘라내겠지.'
바람검으로 가면수의 저주를 베어낸 솜씨.
구울의 손톱 같은 촉매를 사용해서 주력을 증폭시키지 않는 한.
초급 저주로는 장미선을 해할 수 없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베르디안 식 기본 창법]
[제5식]
[돌진하기]
전신의 힘을 창끝에 실어서 빠르게 나아간다.
파프너와 대련을 할 때에는 사용하지 않은 창법.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상황에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선택지를 고를 순 없었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같은 성위?
아니지.
두 사람의 스탯 차는 크지 않겠지만.
상승 검법을 능숙하게 다루는 장미선에게는 몇 합 버티지 못한다.
'저주받은 이빨들로 합공한다.'
챙! 채채챙!
[유성검(流星劍)]
[유성우]
빗발치는 검격.
여러 방향에서 쏘아진 [저주받은 이빨]들을 모두 쳐낸 후, 칼날이 정면으로 향한다.
어마어마한 반탄력에 손목이 꺾여버릴 것 같군.
'모든 힘을 실었는데도 안 된다고?'
눈물이 찔끔 나올 만한 통증.
그럼에도.
다음 수를 위해 끊임없이 영력을 움직였다.
[본 스피어를 사용합니다.]
유진의 근처로 튕겨난 [저주받은 이빨]을 재차 쏘아 보내고는.
[백야를 사용합니다.]
[영력 → 성력]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합니다.]
미리 축적해놓은 생명력으로 뻐근한 손목과 체력을 회복했다.
'느낌이 달라.'
회귀 전에는 직접 움직여서 싸울 일이 거의 없었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어서 체술도 대충 익힌 것이지.
네크로맨서가 왜 전위에 나오겠나?
그렇기에.
창법과 강령 마법을 동시에 운용하며 싸우니, 여태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 유진을 자극했다.
'더 해볼까?'
간질거리는 피부.
조금 더 겨루다 보면 새로운 영감이 떠오를 것 같은 느낌이다.
카가각-!
"후. 제법이네요. 당신."
유성우를 사용한 직후, 연달아 본 스피어를 튕겨낸 장미선이 숨을 거칠게 내뱉으면서 말했다.
"정말 신관 맞아요? 뭘 이렇게 잘 싸워요."
"밑천도 다 안 까놓고 약한 척하긴."
"그건 유진 헌터도 마찬가지잖아요."
아닌데요.
시체 없는 네크로맨서한테 뭘 얼마나 기대하는 거냐.
챙! 채채채챙!
[본 컨트롤]과 [본 스피어], 그리고 [베르디안 식 기본 창법]를 동시 활용해서 다각도로 공격하는 유진.
장미선은 검 한 자루로 시간차, 혹은 동시공격을 모조리 쳐냈다.
태앵-!
두 사람이 손속을 겨룬 지 5분째 되었을 때.
유진의 손에 들린 뼈창이 허공으로 튕겨나더니 빙그르르 회전하다가 땅에 푹, 박혔다.
목을 겨누는 칼날.
"좋은 대련이었어요."
"덕분에 많은 걸 배웠다."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순간이었지만.
두 사람의 표정에는 그림자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다.
59화 새로운 경지
"와. 낮인데도 별이 보이네."
바닥에 드러누운 장미선이 헛소리를 내뱉었다.
10초.
파프너와 검을 맞대고 쓰러지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사고가 반사 신경을 따라가지 못하는군.]
"아. 그래요?"
[주인과의 대련 때 반응을 하고 나서 공격을 인지했지.]
"맞아요. 휙 날아오는 것 같아서 판단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었는데."
[본능대로만 휘두르지 말고 의지로 통제해라.]
아-.
파프너의 조언에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장미선이 탄성을 내뱉었다.
훈수를 둔다고 화 안 내는 게 용하군.
'난 반응속도를 보고 놀랐는데. 파프너는 다른 걸 봤구나.'
무신의 눈.
어떤 무예나 현상, 그리고 마력까지도 분석하고 읽어내는 S급 능력.
파프너는 슬쩍 본 것만으로 장미선의 문제를 분석했다.
"천유진 헌터님. 저 환수님은 성위가 어떻게 되나요?"
"4성이다."
"대박. 모시는 성좌님께 사랑받나보네요."
유진이 신관계인 것은 업계에서 알음알음 퍼져 있다.
어느 성단, 그리고 어떤 성좌를 모시는지 알 수 없지만 파프너를 소환수로 받았다는 건 정설로 굳어진 상황.
〔크하하핫. 짐의 자비를 깨닫고 있다니. 참으로 괜찮은 작은 인간이로구나.〕
'변방 잡귀가 할 줄 아는 게 얼마나 된다고.'
〔짐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위업을 달성하여라.〕
'그게 시킨다고 해서 될 일이냐?'
운명공동체로 엮인 성좌와 인간.
〔역천의 거인〕의 유일한 교인이자 성자인 유진이 격과 업적을 쌓을수록.
그를 성자로 임명한 크로노스도 힘을 되찾는다.
〔하루라도 빨리 짐이 과거의 위상을 되찾는 것이 계약자에게도 좋지 않겠느냐?〕
본래는 티탄 신족을 지배하는 신왕.
제우스에게 폐위된 후 낙성좌 신세가 되어 현계를 머물렀지만.
성좌로써 업을 쌓다 보면 옛 위세를 회복하는 것도 마냥 꿈은 아니었다.
'뭐, 그건 그렇지.'
〔그러니 어서....〕
'위업이라는 게 단기간에 쌓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전에 말했을 것이다.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갈수록 자신만의 심상을 구축해야 한다고.
직업군에 따라 심상을 맺는 방식은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본인의 혼백이 얼마나 굳건하며, 많은 업을 쌓았는지에 따라 심상 구축 난이도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최소 7성은 되어야 격을 운운하든 하지.'
당장은 크로노스가 성좌로써 제대로 힘을 발휘하기는 어렵다는 의미.
그러니까 잔소리 하지 말고 쓸 만한 신성 주문이나 재깍재깍 뱉어내란 말이다.
'신경 쓸 거 많으니까 그만 투덜대라.'
지금은 신성 주문보다 더 중요한 사안이 눈앞에 있다.
방금 전 대련에서 느낀 감각.
'의식적으로 반응한 게 아니었어.'
장미선이 돌진에 가속을 더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는 순간.
그 실루엣만 보고 위험하다고 생각하자, 검의 방향을 육안으로 확인한 것도 아닌데 몸이 반응했다.
[느낌이 와?]
"아주 조금.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다."
[주인한테 해줄 말은 반대야.]
파프너는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장미선을 가리켰다.
[너무 의식하지 말고 본능에 맡겨.]
"본능이라."
[주인은 늘 상황을 냉철하게 보고 판단하지. 그래서 몸이 둔해진다.]
"무투계라고 해서 멧돼지처럼 앞만 보진 않잖아."
[그건 좀 달라.]
"확 와 닿지는 않는걸."
파프너는 후후, 하고 나지막하게 웃었다.
[걱정 마라. 내가 본능으로 움직인다는 느낌을 확실하게 일깨워줄게.]
"어쩐지 좀 불안한데요. 파프너 님."
[누워 있는 친구야.]
"네. 환수님."
[우리 주인이랑 대련해주면, 나도 얼마든지 상대해주마.]
저기요.
내가 당신 주인인데 왜 마음대로 정하는 거지?
[억울하면 나 말고 대련해줄 언데드 찾아보시든가.]
시부럴.
유진은 목구멍에 걸린 욕지거리를 내뱉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
헉, 허억.
땀으로 샤워를 한 것마냥 젖어버린 유진이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이, 개...."
"콜록. 저한테 욕하는 거 아니죠?"
"후우욱. 빌어먹을, 소환수, 한테 하는 거다."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태양.
아침부터 지금까지, 최소한으로만 쉬고 대련을 벌였다.
[둘 다 조금은 쓸 만해졌네.]
"씨X."
[극찬으로 받아들이마.]
으그그.
장미선한테 뜯어낼 것만 아니면 고생도 안 했을 거다.
〔크하하핫! 보기 좋구나.〕
'저리 좀 가쇼. 나 힘드니까.'
〔진심이니라. 계약자가 땀을 흘리면서 무언가를 배워가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더냐.〕
'변방 잡귀는 땀 흘리면서 수련한 적이 있어?'
〔크하핫. 유쾌한 농담이로다. 태어나면서부터 왕의 길이 예비 되었던 짐이 그런 천박한 행위를 왜 하겠느냐.〕
염병.
태생부터 신이시다, 그거지?
〔그래. 땀을 흘린 보람은 좀 있느냐.〕
'...좀 늘긴 했어.'
얻은 건 있다.
파프너가 말한 '본능'에 따른 움직임이 뭔지, 감이 조금 왔거든.
모든 걸 통제하기보다 흐름에 맡기는 것.
〔흐름에 맡긴다?〕
'마법하고 정반대야.'
네크로맨시 또한 마법의 일종이다.
마력의 한 갈래이자 음차원의 힘인 영기를 통제.
이 세상의 규칙과 섭리를 비틀어서 죽은 자들을 부린다.
〔호오. 마력을 사용하는 방법이 다르니, 심상 구축 방식도 다른 것이로구나.〕
'그렇지. 용케 그런 쪽으로 머리가 돌아가네?'
〔짐은 소싯적에 앉아서 삼라만상을 내다보았도다. 그쯤이야.〕
'예. 변방 잡귀님.'
무의식을 배제하는 마법계.
반면, 무의식과 의식의 통합을 이루어야 하는 무투계.
두 가지를 양립한다는 것은 오른손으로 세모를 그리는 동시에 왼손으로 네모를 그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설프게 시도했다가는 그대의 장기마저 퇴색될지 모르겠구나.〕
'그래도 해볼 만하지 않겠어?'
〔자신하는 이유가 있느냐.〕
'이미 해낸 녀석이 내 앞에 있거든.'
유진의 시선이 파프너에게 향했다.
스켈레톤 나이트로 시작해서 데스 나이트까지 승급.
거기서 멈추지 않고 무의 궁극을 추구한 끝에 둠 나이트마저도 넘어서고 9성에 도달했다.
〔계약자의 대전사에게는 마투사 특성이란 게 있지 않았더냐.〕
'특성만 가지고 9성 될 거면 난 뭔데.'
클리어 마인드?
나름 괜찮은 특성이긴 해도 헌터 협회 기준 S급은 아니다.
용병으로 이름을 떨친 거울 사냥꾼, 강씨 남매도 마찬가지였고.
'고유 특성이 재능의 척도라지만, 그게 절대적이진 않아.'
파프너처럼 무예의 달인이 될 필요는 없다.
스스로를 지킬 정도면 충분해.
[영기를 눈에 집중했던 때. 기억하나?]
"접경지역 때 말인가."
영맥을 찾기 위해 편법으로 영안(靈眼)을 썼던 것 말이군.
[마력에 의념을 싣는 건 오러의 첫 단계다.]
"그때도 말했잖아. 단순한 잡기술이라고."
[후후. 과연 그럴까?]
파프너는 누워 있는 유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왜. 나 힘들어."
[지금이 딱 좋아. 감각이 날카로워졌잖아.]
뭘 시키려고 하는 건지.
유진은 속으로 투덜대면서 파프너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저번처럼 영기를 끌어올려봐라.]
"눈에?"
[아니. 쥐고 있는 창에.]
유진은 별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뼈창에 영기를 불어넣었다.
희끄무레한 기운이 일렁이는 창대.
"봐봐. 아무 일도 없잖아."
그 순간.
파프너한테서 솟구치는 어마어마한 살기.
솥뚜껑만 한 주먹이 유진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베르디안 식 기본 창법]
[제6식]
[전력 찌르기를 사용합니다.]
갑자기 무슨 짓이냐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솜털 하나하나가 삐죽 설 정도로 강렬한 살의.
눈앞에 아른거리는 커다란 주먹.
장미선과의 대련에서 한껏 예민해진 감각이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우웅-!
살기에 반응한 유진의 정신.
의념으로 창대에 불어넣은 영기.
그리고 본능대로 펼친 베르디안 식 기본 창법.
심기체(心氣體)를 이루어낸 순간, 창에 깃든 영기가 시커멓게 물들었다.
"오러라고요?!"
장미선의 입에서 튀어나온 비명.
유진은 뒤늦게 창대를 휘감은 시커먼 기류를 직시했다.
"이건...."
[마력의 흐름과 의지, 그리고 육체가 합일을 이루었다는 증거다.]
"오러, 아니. 암흑 투기인가."
[후후후. 정확히는 그 흉내를 낸 수준이다.]
파프너의 말은 정확했다.
4성에 도달하지 못한 유진이 심기체를 이룬다 한들, 제대로 된 암흑 투기를 일으킬 순 없다.
원본의 1/3도 못한 수준.
"잠깐. 이거 영기 소모가 어마어마하잖아."
유진은 기겁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보유 영력 중 반 가까이가 소모되었다.
허락되지 않은 경지를 넘본 대가.
[그래도 느낌이 좀 오지?]
"빌어먹게 고맙군."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도 입가가 씰룩였다.
세상에.
암흑 투기(오러)라니.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하겠지만, 이게 어디야.'
가능성을 본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유진이 뼈창에 깃든 영기를 막 회수했을 때.
"동업자님. 대련은 이제 끝났습니까?"
거슬리는 하이톤의 음색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더 하란 말로 들리는데."
"그런 건 아니고요. 설마 동업자님 바닥에 구르는 꼴을 보고 좋아하겠습니까."
저기, 연금술사 양반아.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그런 말해도 설득력 없거든?
"남 고생하는 거에 관심 없다면서 왜 왔냐."
"아라한 길드에서 고철을 한 무더기 가져다줘서요."
배송이 생각보다 빠르군.
공략 건으로 앙심 좀 품었을 건데, 이런 부분은 뒤끝이 없다.
"하급 포션 있으면 하나 줘."
"타박상이나 뼈에 스며든 충격에는 효과가 없을 건데요."
"다른 방향으로 쓸 거다."
유진은 힘겹게 일어나서 포션을 낚아챘다.
팔과 다리가 쑤시고 복부에서는 싸한 감각이 느껴진다.
이대로 두면 골병들겠지.
뽀옹-!
하급 포션을 목에 넘기니, 응축된 생기가 몸 안으로 들어온다.
유진은 흉부 위에 손을 얹고는 성력을 집중.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합니다.]
막 뱃속으로 들어온 회복의 기운을 빼앗아서 단전에 축적했다.
검은 방첨탑을 만들 때 주구장창 했던 짓.
사아아악-!
축적시킨 생명력을 다시 한번 회복의 힘으로 바꿔서 전신에 불어넣었다.
"아, 아니. 하급 포션을 먹었는데 멍이 왜 사라지지."
"방법이 있다고 했잖아."
숨 쉬기가 한결 편해졌다.
유진은 내친김에 널브러져 있는 장미선에게도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했다.
"지금 사용한 거. 하급 치유 주문 맞아요?"
"아마도."
"길드 지원팀 언니보다 더 효과가 좋은 것 같은데요."
탓-!
지면을 박차면서 몸을 일으킨 장미선이 팔을 붕붕 흔들었다.
파프너한테 고기 다지듯이 두들겨 맞았는데도, 통증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저랑 나중에 게이트 공략이나 같이 하실래요?"
"일 없다. 가봐."
"대련해야죠."
"놀 시간 없어. 일거리 왔으니까."
아라한 길드에서 보낸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
대장장이나 연금술사한테는 쓸모없는 고철덩어리에 불과하지만.
'나한테는 혈석만큼이나 소중해.'
크흐흐.
유진은 씩 웃으면서 신준석을 바라봤다.
"뭐, 뭡니까. 불길하게."
"나랑 힘 좀 쓰자."
"또 무슨 일을 시키려고 그래요."
"아라한이 배송한 고철. 어디에 쓸지 궁금하잖아."
신준석의 동공이 좌우로 흔들렸다.
"하기 싫으면 말던가."
"그렇진 않은데 말이죠. 그래도 좀...."
"난 간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떼자, 신준석이 허겁지겁 뒤따라왔다.
[가버렸군.]
"갔네요."
[이제 뭘 할 건가?]
"괜찮으면 저랑 한판 더 붙어주세요."
[뭐, 주인이 하지 말라고는 안 했으니.]
파프너는 흥겹게 웃었다.
*
공방 한쪽에 쌓인 고철더미의 산.
아라한 길드에서 옮겨놓은 게이트 공략 전리품이다.
"20톤이면 몇 년은 쓰겠네."
"미약한 한기를 내뿜는 거 말고는 특이점이 없던데요."
"나 부르기 전에 분석할 시간은 있었나 봐?"
커흠-.
헛기침하는 신준석을 보며 킬킬거린 후, 고철 하나를 들었다.
"귀철이라고 들어봤어?"
"에고 아티팩트 제작에 필요한 광물이죠."
"그 전 단계가 여기 고철들이다."
귀철(鬼鐵)
이름대로 귀신이 스며든 철이다.
혼백이 제 집으로 삼은 광물.
다른 영혼을 불어넣어도 링크가 잘 되는 게 특징이다.
"귀철은 엄청나게 비싸지 않습니까!"
"말했잖아. 귀철 전 단계라고."
혼령이 내뱉는 원한이 스며들었을 뿐.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는 혼백을 담아낼 만한 그릇까지는 되지 못한다.
"더 숙성을 시켰으면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도 시키시죠."
"안 돼. 못해도 수천 이상 죽은 전장에서나 가능하다."
귀철이 발견되는 곳은 과거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역사적인 장소나 게이트뿐이다.
인위적으로 그 조건을 만들기가 얼마나 까다로운데?
"그건 효율이 엄청, 엄청나게 안 좋아. 그냥 안 된다고 하자."
"좋다 말았군요."
"돈 복사는 포션으로 충분하면서."
"저는 연구할 게 더 필요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 고철들은 연금술에 못 쓰니까 관심 꺼."
신준석이 미련 가득한 눈으로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를 바라봤다.
그거, 대연금술사 시절의 너도 연구했다가 포기했거든.
욕심내봐야 자기만 손해인데.
'말린다고 들어먹을 녀석은 아니지.'
유진은 피식 웃은 후, 고철 하나를 손에 쥐었다.
60화 언데드 개조 시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