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언데드 개조 시술
악귀들의 망집이 스며들어서 언데드와 궁합이 좋은 쇠.
그 말인즉슨.
"개조 시술하기에 딱 좋다."
"시술이요?"
"개조나 강화, 둘 다 일컬어서 하는 말이야."
[흑암의 반지]에 영기를 불어넣자, 별개의 공간에 있던 스켈레톤 메이지가 튀어나왔다.
-그겔겔. 주인. 반갑다.
"나도 반갑다."
조승철.
회귀 전에는 7성의 경지에 도달했던 강력한 마법사.
이제는 2성급 언데드인 스켈레톤 메이지가 되어서 턱뼈를 들썩거렸다.
〔저 약골은 대체 어디에 쓰려고 하느냐?〕
'합일을 이루었으니 개조해줘야지.'
조승철은 혼백과 생전의 육체를 결합시킨 덕에 3성급 마법도 익힌 변종이다.
평범한 스켈레톤 메이지보다 몇 배 높은 화력을 지녔지만.
마력 소모가 커서 지속력이 모자란 게 단점.
'이제는 좀 쓸 만해질 거다.'
게이트를 공략하면서 얻은 대량의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
영기의 흐름을 원활하게 해주는 일종의 마력 패스 역할을 하고.
가공하기에 따라서는 강화 및 보조 역할도 해준다.
"동업자 양반. 마녀의 솥 화력 얼마나 나오지?"
"500도까지는 나옵니다."
"마석 융해액 3리터. 농도는 27%로 맞춰줘서 이거랑 같이 30분만 끓여줘."
"재료값은 당연히 주시죠?"
"뭔 사람이 의심을 그렇게 하냐."
떼어먹은 돈도 싹 챙겨줬잖아.
사람 섭섭하게 하네.
"우격다짐으로 그러시니 하는 말이죠."
"싫으면 말든가."
"아. 해요. 한다고요."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를 챙긴 신준석이 투덜대면서 공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럼 이쪽도 슬슬 작업을 시작해볼까.
"이리로 와라."
-그겔.
유진의 손이 조승철의 뼈를 천천히 훑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느린 동작으로 꼼꼼하게 만져보고, 때로는 손으로 툭, 툭 건들기도 했다.
〔계약자여. 취향이 좀 독특하구나.〕
'나 집중하고 있으니까 헛소리 지껄이지 말아줄래?'
〔뼈에 도착증이라도 있는 게냐. 손동작이 너무 끈적끈적하여.〕
'영력의 흐름을 체크하는 거잖아.'
쯔쯧.
이래서 변방 잡귀는 안 돼.
생각하는 게 불순하거든.
〔감히! 작은 인간 따위가 짐을 능멸하려 드느냐!〕
'아니꼬우면 천벌이라도 내리시든지.'
〔이, 이이!!!〕
분개하는 크로노스를 무시한 채, 조승철의 온몸을 주물럭거렸다.
'이 정도면 다크 후드로 개조하긴 아깝고. 다크 미니언까지는 되겠어.'
생전에 7성급 재능의 소유자라서 그런가.
영력 흐름이 꽤 민활하다.
스켈레톤 메이지가 되면서 본래의 마력 패스를 모두 상실했음에도.
영기를 흘려보냈을 때 전신을 도는 속도가 꽤 빨랐다.
"끝났습니다."
마력 융해액에 넣어서 팔팔 끓인 쇳덩어리.
신준석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외형과 성질 모두 차이가 없던데요."
"보면 알아. 그리고 손에 낀 장갑도 빌려줘."
열 저항이 강한 연금술용 장갑.
유진은 마력 융해액과 같이 끓인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를 집어 들더니 천천히 양쪽으로 잡아당겼다.
쯔아아악-!
"처, 철을 손으로 찢었어!"
"마력 융해액과 같이 넣고 끓이면 유연해지는 거다."
"제가 들고 왔을 때만 해도 딱딱하던데요?"
"느슨하게 힘을 줘야 해."
강하게 힘을 줄수록 단단해지지만, 천천히 밀거나 당기면 쉽게 형태를 변형할 수 있다.
물에 전분 가루를 타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봐야지.
고철을 한 움큼 덜어내고는 손으로 주물럭거려서 뼈와 흡사하게 빚어냈다.
"승철아. 거기 세 번째 갈비뼈 좀 빼라."
-그겔.
뚝, 망설이지 않고 갈비뼈를 떼어낸 스켈레톤 메이지.
유진은 휑해진 공간에 막 주물거린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 일부를 끼워 맞췄다.
스스스슷-!
과거 좀비의 개조 수치에 간섭해서 몸뚱이 구조를 변형, 역병 좀비로 바꾸었듯.
이번에는 영력으로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를 조승철의 뼈와 이어 붙였다.
[스켈레톤 메이지(조승철)의 신체구조에 이물질이 섞였습니다.]
언데드의 구성물이 아닌, 다른 물질과의 결합.
병균이 몸 안으로 들어오면 백혈구가 저항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라.'
유진은 뼈다귀에 깃든 조승철의 혼백에 영기의 파장을 맞추었다.
손바닥을 통해 흘러간 기운은 쇳덩어리를 지나서 스켈레톤 메이지의 전신, 그러니까 뼈들을 돌았고.
[영력 전도율이 올라갑니다.]
동화작용이 끝난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는 더 이상 스켈레톤 메이지의 몸에 박힌 이물질로 인식되지 않았다.
[힘이 5 증가합니다.]
[마력이 21 증가합니다.]
-그게게겔!
조승철의 턱뼈가 요란하게 움직이며 딱딱- 마찰음을 냈다.
"왜 저러는 겁니까?"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를 이식해서 스탯이 늘었거든."
"고작 뼈 하나 바꿨다고...."
"새 갈비뼈 달아준다고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2성 수준으로는 흉내조차 내지 못할 영력 컨트롤.
네크로맨서의 정점에 도달했던 유진만이 가능한 언데드 개조 시술이다.
'갈아야 할 곳이 모두 여섯 군데.'
쇠에 녹아낸 융해액의 마력이 사라지기까진 약 1시간 정도.
그 안에는 끝내야겠군.
유진은 미리 체크한 뼈들을 하나씩 제거,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로 교체했다.
*
"후, 오래간만에 하니 둔해졌어."
유진은 숨을 몰아쉬면서 투덜거렸다.
47분.
스켈레톤 메이지(조승철)의 뼈를 갈아 끼운 시간이다.
'감각이 전 같지 않으니 어쩔 수 없나.'
9성 때는 영기를 퍼트리면 손에 잡힐 듯 모든 걸 읽어낼 수 있었다.
영기 컨트롤의 정밀함이야 말할 것도 없고.
당시의 감각을 최대한 기억하면서 조승철을 개조했지만, 전성기 때와 비교하면 한참 모자랐다.
"동업자님. 방금 마력을 움직인 거 말입니다."
"조금 둔했지?"
"...네?"
넌 또 왜 의문문에 의문문으로 답하냐.
유진의 날선 눈빛에도 신준석은 제 할 말을 꿋꿋이 했다.
"마력으로 링크를 맞춰 강제 연결한 거잖아요."
"이 고철은 언데드랑 파장이 잘 맞거든."
"파장 좀 맞는다고 육체 일부를 갈아 끼우는 게 되면 사람도 혈액형 안 따지고 수혈하게요?"
뒤집어진 신준석의 눈동자.
광인의 눈빛에 유진은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 요령 저도 알려주십쇼."
"으음. 말로 설명할 부분이 아닌데."
"됐으니까 작업 끝나면 구두로든, 아니면 시연이라도 해요."
이 아저씨. 또 눈이 돌아가 버렸네.
하여간 연금술과 관련되었을지 모르는 일이면 정신을 놔버린다니까.
'생각해보면 아예 관계가 없진 않나.'
선대 네크로맨서들의 지식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기예.
망자들을 강화하기 위해 연금술 분야의 지식을 파던 중, 영감을 받아서 개발한 것이다.
시술이라는 이름도 그가 붙인 것.
"좋아. 나중에 알려주마."
"기대하겠습니다."
강화 시술이 연금술에 접목시킬 만한지는 모르겠지만.
본인이 원하는데 해줄 수밖에.
"그럼 작업은 끝난 겁니까?"
"1단계는."
여기서 시술을 마치면 개쩌는 스켈레톤 메이지 A 수준에 그친다.
조승철의 생전 재능을 살려주려면 하급 언데드의 틀을 깨고 더 높은 위계로 이끌어줘야 한다.
'강화를 위해서는 데드 라이즈 같은 상위 주문을 익혀야 한다만.'
회귀하고 나서 변칙을 쓴 게 한두 번인가.
1성 수준으로는 꿈도 꾸지 못할 막강한 언데드인 엘드리치 드래곤도 제작했다.
불완전한 상태지만, 시스템조차 유진의 묘기를 이적으로 받아들였으니.
조승철 강화 시술은 파프너 때보다 훨씬 쉬웠다.
'시술 성공률을 100%로 올리려면....'
고개를 돌린 유진.
"시킬 게 더 있습니까?"
"뼈 대신 고철 끼운 부위에 집속 회로 좀 새겨줘라."
"난이도 높은 걸 잘도 시키시네."
집속 회로는 마력을 인위적으로 모이게 한다.
현대의 연금술사들 중 한 번의 시도로 완벽하게 회로를 새길 수 있는 건 극소수.
신준석은 그 얼마 안 되는 연금술사였다.
"근데 회로를 여섯이나 새기면 마력 역류가 일어날지도 모르는데요."
"그 현상을 유도하는 거다."
이해가 가지 않는 지시.
신준석은 되묻는 대신 주문대로 뼈를 대체한 고철 위에 집속 회로를 새겼다.
'저 양반이 하루 이틀 그랬나.'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제멋대로 다니지 않았던가.
공방에 불쑥 들어와서는 포션 제조 비율을 척 하고 맞추지를 않나.
현 시대에는 알려지지 않은 레시피를 읊어주기도 하고,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툭 던지기까지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찰하자.'
유진이 팥으로 메주를 쑤라고 해도 믿으리라고 되새긴 신준석이 작업을 마쳤다.
"그럼 시작해볼까."
조승철의 뼈에 불어넣은 영기를 순환시키자, 집속 회로가 푸른빛을 냈다.
파르르-.
집속 회로를 새기는 목적은 골렘의 핵처럼 마력을 집중 및 공급하는 것.
스켈레톤 메이지(조승철)의 몸뚱이는 출력도 모자라는데 코어를 여섯 개나 달아둔 상황이다.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를 뼈 대신 끼워 넣었을 때만 해도 문제없이 순환하던 영기.
집속 회로 여섯을 새긴 후에는 갈 데를 잃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 그게게겔.
"아프지도 않잖아. 조금만 참아라."
산 자라면 피가 역류하고 근육이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을 느꼈겠지.
조승철은 망자.
파프너처럼 일부 감각을 되찾은 고위급 언데드도 아니고 스켈레톤 메이지 A에 불과했다.
고통?
그런 걸 어떻게 알아.
'합일을 이루었다고 감각이 돌아오진 않으니까.'
사시나무처럼 떠는 뼈다귀.
유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체내의 영기를 되는 대로 불어넣었다.
뽕-!
영력이 모자라면 포션을 마시고 라이프 드레인으로 치환.
대련 때 한 짓을 또 하네.
조승철의 뼈다귀에 스며든 영기가 한계치에 도달하는 순간.
[여섯 개의 코어가 충분한 영력을 흡수했습니다.]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가 스켈레톤 메이지(조승철)의 뼈를 강화합니다.]
시커멓게 물드는 뼈.
텅 비어있던 동공에서 푸른 귀화가 솟구치고.
가야 할 길을 못 찾고 뼈를 돌아다니던 영력이 마디마디에 스며든다.
시커멓게 물드는 전신.
뼈에 스며든 후에도 남은 기운은 주위로 방출, 시커먼 로브로 유형화해서 몸에 둘렀다.
[스켈레톤 메이지(조승철)가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다크 미니언으로 승급합니다.]
펄럭-.
시커먼 로브가 바람에 휘날리고.
그 사이로 거세게 타오르는 안광이 두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
"어, 어떻게 된 겁니까?"
"성공한 거다."
"그러니까 뭘 성공했냐고요."
놀라움과 경악, 그리고 기쁨이 혼재된 표정.
이렇게 다양한 감정이 한 사람의 얼굴에 떠오르는 걸 보면 신기했다.
"언데드 강화 시술."
"하. 진짜 동업자님은 듣도 보도 못한 지식을 어디에서 그렇게 얻는 건지."
"기연이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흑암의 반지]의 비밀을 풀지 못했으면 네크로맨서의 정점에 오를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테니.
"승철아. 내 말 들리냐?"
[예. 주인님.]
또렷하게 전해지는 사념.
턱뼈 들썩이는 소리를 요란하게 냈던 스켈레톤 메이지 때하곤 완전히 달랐다.
"죽는 순간은 기억하지?"
[그렇습니다.]
"날 원망할 텐데."
[이미 죽은 목숨을 되살려주신 분. 지금에 와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뼈를 타고 흐르는 영력은 본래 유진에게서 나온 것.
유진은 다크 미니언이 되면서 자의식이 생긴 조승철을 완벽하게 지배했다.
[다크 미니언(조승철)]
종족 : 언데드
등급 : ★★★
◎능력치
근력 : 74 / 민첩 : 180 / 체력 : 40 / 맷집 : 45 / 마력 : 1500(+150)
◎특성
▷퀵 리로드[고유] / 불사의 존재[B] / 마력 순환[B] / 냉철한 계산[C+] / 불사의 지휘관[C]
◎스킬
▷파이어볼[C] / 레드 바인드[D+] / 플레임 비트[D] / 파이어 애로우[E]
〔호오. 성장하더니 못 보던 특성 몇 개가 생겼구나.〕
'좀 전에 화내고는 아무 말 없더니.'
〔짐은 관대하다. 계약자의 실언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하마.〕
'시술로 변화된 언데드가 궁금한 건 아니고?'
〔흠, 흠.〕
혹시 해서 찔러본 건데 진짜였냐.
유진의 눈빛이 차게 식었다.
〔저 부정한 존재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솔직히 짐은 모르겠노라.〕
'이러니까 변방 잡귀인 거다.'
〔뭣이?〕
'잘 들어봐. 새로 추가된 특성 중에서 제일 중요한 건....'
유진의 입술이 달싹였다.
61화 뒤처리(1)
'특성 중에 불사의 지휘관 보이나?'
〔그렇다만.〕
'언데드 병사 지휘 특성이다.'
현재 유진이 제어할 수 있는 숫자는 40구.
아이템의 보조 없이는 성위가 하나 오를 때마다 두 배씩 오르는 구조.
영력이 넘쳐나더라도, 시스템이 제한한 숫자를 벗어날 순 없다.
7성 너머의 경지를 밟지 않으면 불가능하지.
'불사의 지휘관 C급이면 최대 50마리까지 지휘할 수 있다.'
〔저 검은 녀석이 그대보다 유능하단 말이로구나.〕
'다크 미니언은 중급 언데드다. 지금의 나보단 당연히 강해야지.'
쯔쯔쯧.
변방 잡귀가 뭘 알겠어?
[마력 순환]도 뛰어난 특성인 건 마찬가지.
-재배열 속도 25% 감소.
-마법 발현 위력 25% 상승.
심플 이즈 베스트라는 말이 어울리는 특성.
특수한 능력을 부여해주진 않지만, 마법계의 능력을 크게 상승시켜준다.
'일반적인 다크 미니언한테 없는 특성.'
합일 상태인 조승철의 잠재능력이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에 반응.
7성에 이를 만한 재능을 일깨운 것이다.
'넌 두고두고 키워서 리치까지 승급시켜주마.'
이식시킨 철이 닳고 닳아서 없어질 때까지 부려먹어야지.
붉은 거미의 행동대장보다는 불사왕의 수하로 사는 게 훨씬 영광스럽지 않겠어?
〔목숨을 빼앗긴 이후에도 고통 받는 삶이라. 참으로 끔찍하도다.〕
'이게 네크로맨서를 적으로 둔다는 의미다.'
죽음은 탈출구가 아니다.
숨이 끊어진 육체도.
몸뚱이를 떠난 혼백도.
네크로맨서에게 저당 잡힌 채, 이미 죽은 몸이 으스러질 때까지 일해야 한다.
'저기요. 위대하신 성좌님.'
〔크하하핫. 이제야 짐을 존경하고픈 마음이 드는 게냐?〕
'위업 하나 더 세웠는데. 나한테 줄 거 없나 해서.'
크로노스는 잠시 침묵했다.
〔흠. 짐이 그대의 노력을 가상하게 여기나, 이 정도 위업으로는 모자라다. 조금 더 분발하여라.〕
'으휴. 변방 잡귀 수준 하고는.'
〔곧바로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이 무도한 자여!〕
'내 위업 받아먹기만 했지. 돌아오는 게 없잖아. 무능 성좌야.'
〔짐이 더 분발하라 하지 않았더냐! 곧 새로운 힘을 내려줄 터이니 기다리어라!〕
회중시계가 요란하게 흔들렸다.
오늘따라 변방 잡귀의 반응이 평소보다 격렬하군.
'무능하다고 너무 많이 놀려댔나.'
앞으로는 적당히 약 올려야지.
크로노스에게 별빛을 되찾아 준 건 성좌의 가호를 얻기 위함이었다.
처음 목적이었던 가호는 아직 부여받지 못했지만.
네크로맨서와 신관 직업군의 장점만을 합친 [백야의 성자]로 전직했고.
성위에 어울리지 않는 강력한 신성 주문도 손에 넣었다.
'이미 많은 걸 얻었지만, 옵션은 많을수록 좋아.'
잃어버린 성좌의 격을 되찾고 싶다면서?
서로 분발하자고.
당신의 유일한 신자가 강해질수록, 옛 권위를 회복할 가능성이 올라갈 테니까.
*
다음 날 아침.
챙! 채앵!
공터에서 들리는 금속끼리의 충격음이 유진의 잠을 깨웠다.
"흐아암. 누가 아침부터 칼춤 추고 난리람."
차기 검성한테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맞고, 언데드 강화 시술까지 치렀다.
심신을 모두 혹사당해서 잠이나 깊게 자려고 했는데.
'어느 녀석인지 원.'
투덜거리면서 밖으로 나온 유진의 눈가가 크게 벌어졌다.
"컥."
짧은 비명과 함께 지면을 나뒹구는 강민호.
파프너가 막 뻗어낸 주먹을 거두려고 할 때, 장미선이 등 뒤를 점했다.
"하압!"
수직으로 떨어지는 바람검.
동시에 화살 세 발이 다각도에서 쏘아졌다.
[염력]과 [동화]의 연계.
강민영의 솜씨다.
[이야. 몇 번 안 겨뤄봤는데도 꽤 손발이 잘 맞잖아.]
태연하게 중얼거린 파프너가 발을 세게 구르고.
쿠웅-!
지축이 들썩거리면서 땅에 발을 딛고 선 이들의 중심을 흩트려놓았다.
"이 정도로 넘어질 만큼 약하진 않아요."
[집중이 깨질 정도면 된다.]
쇄액-!
시시각각 다가오던 화살촉들이 순간적으로 방향을 잃고 비틀거린다.
[동조]와 [염력]으로 화살까지 지배.
파프너의 움직임을 견제하려고 했던 강민영이 진각의 여파에 휩쓸려서 집중이 깨어진 것이다.
"그쪽을 노릴 줄이야."
세 사람의 연계는 무너졌다.
단독으로 파프너를 노리는 건 위험했지만, 먼저 가까이 접근한 마당에 회피는 불가능했다.
망설임 없이 바람검에 힘을 더하는 장미선.
[좋은 판단이다.]
파프너가 씩 웃으면서 출수했다.
채애앵!
다시 한번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고, 충격을 해소하지 못한 장미선은 수 미터 뒤로 날아갔다.
[공간]
[충격 방지 쿠션]
허공에 생성된 균열에서 나온 초록색 쿠션이 장미선을 받아냈다.
[별걸 다 준비했네.]
"정면은 안 됨다. 그래서 준비했슴다."
별도의 공간에 물건이나 마법, 현상 등을 저장하는 능력.
이성민은 전처럼 방패 같은 물질을 불러내지 않고 일행 지원에 집중했다.
"뭐하고 있냐?"
[부지런한 새가 아침부터 대련하는 법이다.]
"아니. 그러니까 왜 쌈박질을 벌이냐고."
[저 친구들이 원해서.]
유진은 무의식적으로 강민호를 바라봤다.
"하, 하하. 그게 말입니다. 형님."
"설명이 필요하지 않겠니."
"어제 두 분의 대련, 그리고 파프너 님을 보니 저희도 가만히 있기 어렵더라고요."
댓바람부터 파프너를 찾아가서 훈련을 요청.
그걸 들은 장미선까지 끼어서 4대 1 모의 전투를 벌였단다.
"네 사람이 덤벼봐야 4성인 파프너한테 상대가 되겠나."
"그래서 오러 사용 금지와 한 번이라도 유효타를 성공시키면 이기는 걸 조건으로 걸었습니다만."
"실패했군."
"하, 하하하. 그렇게 됐네요."
아주 부지런들 해.
뽀시래기 팀이야 그렇다 쳐도, 장미선이 합을 같이 맞추는 건 의외였다.
"유진 헌터님. 동료 분들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요?"
"내가 키운 애들이니까."
"다음에도 기회가 되면 불사조랑 같이 일해보시는 건."
"아라한 놈들도 같은 오퍼 넣었거든."
"거긴 동기가 불순했잖아요. 전 그럴 일 없어요."
불사조 길드하고는 회귀 전에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지.
아라한이라는 공동의 적을 둔 덕에 나름대로 교류를 주고받았다.
'길드장의 한계가 명확해서 그렇지.'
본래 역사에서 용린갑의 주인이었던 불사조의 마스터, 김영수.
아라한의 라이벌로 자리매김한 인물이나 끝끝내 8성이라는 벽을 뛰어넘진 못했다.
차기 검성으로 불리며 기대를 모았던 장미선은 허무하게 죽어버렸고.
불사조와 유진이 손을 잡으면서 아라한 길드를 무너트렸지만.
막상 그 뒤에 국내 1위를 차지한 건 신유승이 속해있는 새벽 길드였다.
'접점을 만들어둬도 나쁘지 않겠어.'
새벽 길드가 아라한보다는 나았어도, 유진을 경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국내에서 1위 길드가 되면 뭐하나.
유진이 있는 한, 최강의 헌터 자리는 그에게 내줘야 했다.
'알게 모르게 나를 꽤 견제했지?'
그러고 보니 회귀하고 나서 국내 길드들의 정세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네크로폴리스를 건설하고.
그라운드 제로에서 자신만의 세력을 일구어가곤 있지만.
생각해보니 국내 헌터들의 동향을 손 놓고 구경만 할 필요는 없잖아.
'아라한을 몰아내도 누군가는 그 자리를 차지할 거다.'
유진이 붉은 거미 사냥의 전리품으로 사업체 몇 개를 뜯어갔듯이.
아라한이 무너진 뒤도 상정해야 한다.
'중요한 걸 알려주는군.'
차기 검성께서 찾아와주신 덕에 얻은 게 아주 많군.
유진은 생각을 갈무리하곤 손을 내밀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다음에 볼 일 있으면 잘 부탁드려요."
두 사람은 손을 마주 잡았다.
*
"나 없는 동안 과로사하지 마라."
"저보다 동업자님이 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다음 목적지는 그라운드 제로.
컴퍼니 설립 브리핑 때 이야기를 들었지만, 무법지대의 악명은 쉽게 잊을 수가 없었다.
"나 죽으면 컴퍼니 이야기는 없던 걸로 하라고."
"동업자님한테 배울 게 얼마나 많은데요!"
"그럼 기도나 하든지."
"저번에도 모시는 성좌님 알려달라니까 아무 말도 없어 놓곤."
아.
우리 성좌님이 어디에 내놔도 부끄러운 분이라서 좀 그래.
〔무엄하구나.〕
'이제야 좀 마음이 풀리셨어?'
〔짐은 관대하다. 그대가 아무리 능욕하여도 아무렇지 않다.〕
아. 그러세요?
하마터면 덜 약 올려야겠다는 맹세를 저버릴 뻔했네.
위험한 유혹을 겨우 떨쳐낸 유진은 파주 공방을 떠나 그라운드 제로로 향했다.
"형님. 소문은 역시 소문인가 봅니다."
"그렇지?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야. 좀 과장됐어."
"음. 과장보다는 실상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것 같은데요."
멀리서부터 보이는 시커먼 연기.
콘크리트 폐허에 자리 잡은 무법지대, 그라운드 제로 곳곳에선 산발적인 전투가 일어나고 있었다.
유진도 강민호의 지적을 더 반박 못했다.
"그러게. 왜 이렇게 막장이 됐대."
"원래 저런 거 아님까?"
"······무슨 상황인지 알아보마."
일행은 콘크리트 폐허 안으로 진입했다.
폐허 곳곳에서 쏟아지는 경계의 눈빛.
[분위기가 좀 다른데?]
"너 보고 무서워하는 거 아니냐."
[이렇게 멋진 언데드 본 적 있나. 그럴 리 없다.]
파프너는 드래고니안의 모습에 제법 익숙해졌는지, 장난스런 포즈를 취했다.
"거미 사냥 결과가 알려졌을 거다."
[아. 그렇군.]
붉은 거미의 주력 헌터 절반을 괴멸시킨 의문의 강자.
유진과 파프너에 대한 소문은 은하수 펍과 암상 덕에 그라운드 제로에 쫙 퍼졌다.
[주인 성격에 안 맞는 짓을 했네.]
"거미의 영역을 먹으려면 입소문은 내야지."
은하수 펍과 암상이 권리를 보장해주는 건 소문도 포함이었다.
무법지대에서는 힘을 과시하는 것보다 효과적인 게 없으니.
폐허 사이에서 일행을 주시 중인 이들도 적대감보다는 두려운 기색이었다.
"마담. 나 왔다."
"오늘은 일행이 많으시네요?"
이번에는 검은 드레스를 입은 묘령의 여인.
마담은 신비한 미소와 함께 유진 일행을 맞이했다.
"와······."
"오······."
넋 나간 표정을 짓는 두 사람.
강민영이 양손으로 둘의 귀를 꽉 잡았다.
"악! 아아악!"
"아주 잘하는 짓이다. 어?"
"강 선배! 죄송함다!"
초면부터 제대로 멍청이 인증을 하는군.
유진이 고개를 좌우로 젓자, 마담은 호호- 짧게 웃었다.
"뽀시래기 팀이시죠? 명성은 들었어요."
"정말입니까?"
"아라한의 초신성에게 쓴맛을 보여준 신예 헌터분들이잖아요."
으휴.
아라한 때도 정신 못 차리더니, 아직 멀었네. 멀었어.
가만 두면 4절까지 갈 기세.
유진은 더 기다리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됐고. 왜 이 꼴이 난 거야?"
"삼강이라곤 해도, 가장 큰 힘을 보유한 건 붉은 거미였으니까요."
"은하수 펍과 암상의 확인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건가."
"그라운드 제로 주민들이잖아요."
마담은 질렸다는 듯이 조소를 내뱉었다.
"생각만큼 일이 풀리진 않았나 봐."
"붉은 거미가 상황을 꽤 꼬아놔서요."
"놈들에게 수작을 벌일 만한 여유는 없었을 건데."
"본래는 유진 님이 차지한 사업체 외에는 적당히 양도할 계획이었지만······."
유진이 거미 사냥을 나설 때 즈음.
붉은 거미 보스인 김재우는 최근 관할지역을 자극하는 군단과 유령을 본보기 삼아 몰살시켰다.
"문제는 붉은 거미가 패퇴하면서 힘의 공백이 생겼단 거죠."
"어중이떠중이들도 거미의 사업에 욕심을 내고 있나?"
"그 덕에 암상도 꽤 고생하는 눈치랍니다."
유진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생각만큼 나쁜 상황은 아니다.'
〔이 상황을 예견하고 그 작은 인간들에게 중재를 맡긴 게 아니더냐?〕
'맞아. 근데 상황이 바뀌었잖아.'
규모가 있는 조직들은 붉은 거미가 미리 쓸어버렸다.
남은 조직이나 단체라고 해도, 어중이떠중이.
시간이 지나면 무법지대에 생긴 힘의 공백을 채울 조직이 또 나오겠지만.
이 타이밍에는 붉은 거미를 대체할 세력이 없다.
'그라운드 제로의 새로운 삼강이 데뷔하기에 적절한 무대 아니겠어?'
〔두뇌를 민활하게 사용하는구나.〕
'칭찬으로 받아들일게.'
쾅-!
폭음과 함께 뜯겨나간 은하수 펍의 문.
"마담. 거, 듣도 보도 못한 놈 말고 우리 스콜피온을 인정······."
전갈무늬를 새긴 남자가 당당하게 외치고 있을 때, 파프너가 살기에 반응해서 주먹을 내질렀다.
퍼엉-!
제 자리를 잃어버리고 증발한 머리.
[죽일까, 마스터?]
"이미 저질러놓고 물어보지 마."
유진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62화 뒤처리(2)
"너, 넌 누구냐!"
"일처리가 좀 시원찮네. 모르는 애들도 있고."
언짢은 대꾸에 마담이 픽, 실소를 흘렸다.
"하루살이들이 관심이나 있을까요."
"그것도 맞는 말이군."
바텐더인 정 노인의 수준은 그라운드 제로 내에서 알음알음 알려져 있다.
그녀가 아무 기반도 없었으면 은하수 펍을 꾸릴 수 없었겠지.
붉은 거미도 정 노인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마담을 노리지 않았던가.
"이, 개자ㅅ...."
"파프너야."
[너흰 가치를 물을 것도 없는 자들이다.]
퍼서석.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한 명씩.
펍의 문을 박살낸 이들은 변변한 저항도 못하고 파프너에게 목숨을 헌납했다.
주먹을 피하거나.
손에 쥔 무기를 휘두르는 자도 있었지만.
파프너가 출수하면 마치 스스로 머리를 들이밀 듯, 권격에 빨려 들어오듯이 와서 쓰러졌다.
"욱, 우웁."
"내가 뭘 본 거지?"
"서, 선배님들. 괜찮슴까."
인간의 목숨이 사그라지는 광경.
뽀시래기 팀에게는 너무 큰 자극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두 눈으로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파프너의 무위에 감탄했다.
경외심.
세 사람은 평생 동안 처음 느껴본 감정에 두 눈을 떼지 못했다.
"ㄲ...."
비명조차 틀어막는 일격. 마지막 불청객을 쓰러트린 파프너가 주먹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머리를 다 터트리면 어떻게 하냐."
[음?]
"네크로맨시를 못 써먹잖아."
[압도적인 실력 차이를 보여주면 항복할 줄 알고.]
"그럴 시간도 안 줬거든."
유진은 투덜거리다가 뒤를 힐끗했다.
"소문만큼은 아니라고 했는데. 더한 꼴을 보여줬네."
"...아닙니다. 저희도 헌터인걸요."
"주, 죽는 건 늘 생각했슴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런 말을 잘도 하네.
'두 사람은 그렇다 쳐도, 이성민도 꽤 강인하군.'
눈앞에서 벌어진 살인.
앞에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를 떠나, 마음이 흔들리는 건 당연했다.
미래의 거울 사냥꾼이야, 굳은 심지를 지녔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았지만.
이성민은 무슨 생각을 품고 있을까.
'당장 몸을 돌리지 않는 것만 해도 높게 쳐주마.'
인간은 두려움이나 혐오스러운 장면을 보면 무의식적으로 외면한다.
그 본능을 이겨내고 현장을 직시하는 모습.
의지만큼은 충분히 강했다.
"그라운드 제로에서 세력을 일구신다는 것은...."
"맞아. 이런 의미다."
유진은 부정하지 않았다.
세 사람을 컴퍼니로 끌어들이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이런 상황을 피할 순 없었다.
예상보다 빨랐지만 말이야.
〔무릇 영웅이란 동서를 막론하고 도덕적 관념에 고민하며 좌절을 경험하는 법.〕
'거 변방 잡귀 양반. 눈치 좀 챙기세요.'
뽀시래기 팀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건 뭐라고 안 하겠는데.
나설 타이밍을 몰라요.
"그래도 함께 하겠습니다."
"형이 과분한 기회를 주셨잖아요."
"컴퍼니에서 일하고 싶슴다."
말은 저렇게 해도, 마음이 엄청 흔들릴 거다.
유진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본인들이 곁에 있겠노라고 각오를 다졌는데 모욕할 필요는 없지.
"컴퍼니?"
"아.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재미있어 보이네요. 꼭 들려주세요."
마담 녀석.
뽀시래기 팀이 흘린 정보를 놓치지 않고 곧장 언급했다.
'잘 됐어. 어차피 끌어들일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암흑가의 정보를 꽉 쥐고 있는 마담.
향후 유진의 계획에는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다.
타이밍을 봐서 말하려고 했는데, 알아서 떡밥을 물어주니 고맙군.
"정리해야 할 패거리 이름, 연락처, 그리고 위치."
"유진 님 휴대전화로 보냈답니다."
"그렇게 오래는 안 걸릴 거다. 암상한테도 전해."
"호호. 미스터 블랙의 표정이 기대되네요."
마담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이 친구들은 맡아주고."
"형님. 저희도...."
"미성년자 관람 불가다. 수위가 좀 세서."
휴대전화에 찍힌 붉은 점이 꽤 많군.
뜯겨나간 문을 지나 밖으로 나서니, 중천에 떠오른 해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 좀 바쁠 거다."
[간만에 몸 좀 풀겠네.]
해가 지기 전에 끝내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겠어.
제일 가까운 곳은 은하수 펍에서 500미터 정도 떨어진 4층 건물이었다.
유진은 그 앞에서 휴대전화를 들었다.
*
마담이 알려준 전화번호는 모두 7개.
첫 번째 번호를 눌렀다.
뚜- 뚜-.
신호음 두 번 만에 연결된 전화.
"독사파, 박영길 씨 맞지?"
-...처음 듣는 목소리인데.
"붉은 거미 영역에 관심이 있다고 해서."
-누구냐. 넌.
"거미 영역의 새 주인이다."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먼저 전화를 걸어주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비아냥거리는 목소리.
유진은 묵묵히 다음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라고 할 줄 알았냐. 앙?
"은하수 펍과 암상의 보증을 못 믿겠다는 건가."
-그라운드 제로 출신도 아닌 놈 하나 내세워서 사업체 뜯어먹겠다는 속셈을 모를 줄 알아!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붉은 거미 간부 절반을 죽였다고? 그 실력이면 우리 목도 따보든가.
"거기에 있는 친구들도 네 의견에 동의했나?"
-이야. 자신감 보소.
-할 수 있으면 해봐. 병X아!
....
욕지거리 섞인 목소리 여럿이 수화음에 잡힌다.
시끌벅적해진 건물.
헛걸음은 안 하겠군.
"후회 안 하겠어?"
-지랄. 그런 거 하려면 시작도 안 했다. X신아. 어디서 허세를 부려!
더 들을 필요가 없군.
놈이 여기 있는 건 전화로 확인했고.
모두의 의견이 통일되었다고 하니, 존중해주는 게 예의겠지?
상가 건물로 들어서니 헐벗은 사내가 앞을 막아섰다.
"무슨 일로 왔... 천유진?"
"암상이 내 얼굴은 제대로 알려줬나 봐."
"큰 형님!"
사내가 몸을 돌이켜서 외치려는 순간.
방패만큼이나 큰 손이 우악스럽게 머리를 콱 잡았다.
"웁! 우웁!"
[떠드는 것만큼의 실력은 없네.]
퍼석-!
저항감 없이 뭉개진 사내의 머리.
뼈 중에서 가장 튼튼한 두개골이지만, 파프너의 악력을 버티진 못했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오는 붉은 액체.
건물 근처에 있던 조직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뭐야!"
"천유진이라고?"
"빨리 큰 형님 불러!"
달려오는 조직원들.
가장 앞에 선 남자가 방망이를 휘두른다.
마력의 파장이 느껴지는 게, 이름 모를 공방에서 만든 모양이다.
파프너는 손을 뻗었다.
저항감 없이 손아귀에 잡힌 방망이.
콰직-.
남자가 당황해서 힘을 주고 있을 때, 쭉 뻗은 파프너의 수도(手刀)가 가슴팍을 관통했다.
"내 부름에 답하라."
[레이즈 언데드를 사용합니다.]
[역병 좀비를 제작합니다.]
들썩거리는 사내의 육신.
"사, 상철이 형!"
"아직 살아있어!"
파프너는 손에 걸린 사내, 아니 좀비를 무리에게 던졌다.
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망자를 조직원들이 받아내는 순간.
퍼엉-!
부패해버린 독이 사방으로 튀었고.
"끄악!!"
"커, 컥!"
맹독 좀비의 체액을 뒤집어쓴 사내들은 갖가지 비명을 질렀다.
"짖지 마라. 시끄러우니까."
사내들의 목울대를 꿰뚫는 저주받은 이빨.
건물 입구가 침묵에 삼켜졌다.
"나머지는 다 위에 있나."
[연장 챙기라는 소리가 들리네. 꽤나 시끌벅적해.]
"혼자서 정리할 수 있겠나."
[우문이군. 신성 주문이나 줘라.]
파프너에게 깃드는 신성한 힘.
3중 버프에 용린갑까지 더하면 5성의 극에 도달한 헌터도 맞상대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진다.
버프를 모두 받은 파프너와 겨룰 수 있는 강자는 그라운드 제로에서도 얼마 없으니.
[천천히 와라.]
2층에서 울리는 소음.
쾅- 으악- 컥- 윽-.
인간 관악기들의 합주가 잦아들고.
곧이어 3층에서도 같은 소음이 튀어나왔다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모두 정리하기까지는 1분도 안 걸리겠군.
시선조차 안 주고 마지막 층으로 올라온 유진.
굳게 닫힌 철문이 그를 반겨주었다.
"두더지처럼 숨어있겠다?"
전화했을 때 보여준 패기는 다 어디로 팔아먹은 건지.
철문을 중심으로 펼쳐진 방어 마법이 4중으로 덧대어져 침입자가 들어오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파프너가 3층을 모두 정리할 때까지 손가락 빨고 있을 순 없지.
[흑암의 반지에 보관 중인 시체를 꺼냅니다.]
검은 로브로 온몸을 감싼 망자.
이제는 다크 미니언으로 승급한 조승철이 뼈를 딱딱 부딪쳤다.
"저 문을 파괴해라. 화력 조절은 필요 없다."
[주인님의 명대로.]
[파이어볼]
이글거리는 화염 구체가 철문에 부딪치고, 귀가 먹먹해지는 폭발이 일어났다.
반경 3미터를 초토화시키는 범위 마법.
구조물 일부를 뻥 뚫어버릴 만큼의 위력이었지만, 파이어볼을 맞은 내부는 의외로 멀쩡했다.
방어 마법이 충격 대부분을 흡수했기 때문.
[건방진 놈들.]
[퀵 리로드]
[파이어볼]
1초도 안 돼서 연달아 쏘아진 화염 구체.
조승철의 고유 능력이 발현되면서 무영창에 가까운 속도로 펼친 것이다.
콰앙- 쾅!
연이은 폭발에 결계의 마력 파장이 흩트러지고.
세 번째 파이어볼이 터지자, 철문을 휘감은 방어 마법들이 깨지면서 억눌린 폭발 에너지가 건물 전체를 흔들었다.
폭발의 여파로 날아가 버린 철문.
"미, 미친 새X야! 건물 안에서 파이어볼을 날려?!"
"너희가 결계 잘 쳐준 덕에 멀쩡하잖아."
무너지지 않았으면 됐지.
안 그래?
뜯겨나간 철문 사이로 일그러진 표정의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반갑다. 독사파 두목 박영길."
"처, 천유진."
"우리. 못 나눈 이야기가 좀 많지?"
"당신의 영역, 인정하면 되잖아. 그러니까 여기까지만 합시다."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렇게 할 필요 없어."
저저저적-!
바닥을 무너트리면서 튀어나온 시커먼 인영.
푸른 귀화를 흩뿌리는 망자. 파프너의 양손이 움직이고.
근처에 있던 조직원들의 상반신이 펑- 터져 나갔다.
"이왕 시작했으니 끝을 봐야지. 안 그러냐?"
박영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다, 당신이 이러는 거. 다른 조직들이 알면 가만히 있을 것 같습니까?"
"응. 가만 안 있으면 어떻게 할 건데."
"모두 힘을 합치면 붉은 거미를 물리친 힘으로도...."
"그렇게 사이가 좋은 친구들이라서 거미한테 고개 숙이고 살았나 봐."
유진은 킬킬거렸다.
"걱정 마. 그 친구들 모두 네 곁으로 보내줄 거다."
"미친 자식!"
박영길의 팔뚝을 뒤덮는 회색 기운.
고유 특성인 [강체화]로 방어력을 강화하고는 그 위에 오러까지 둘렀다.
4성 헌터.
바깥세상에서는 중소 길드의 마스터를 맡을 정도의 실력자가 전력을 쥐어짜냈다.
[볼링 배시]
연달아 힘을 방출해서 상대의 방어를 뚫어내는 강력한 스킬.
최근 습득해서 아는 사람도 거의 없다.
박영길이 지닌 비장의 수단!
퉁- 투투투퉁-!
파프너는 그 주먹을 한 손으로 받아낸 후, 짧게 평가했다.
[오러 운용에 군더더기가 많아.]
"뭐, 뭣이?!"
[10의 힘을 나눠봐야 총합은 같잖아.]
볼링 배시의 매커니즘에 오러를 동화시켜서 충격을 누적하려는 의도.
파프너는 주먹을 낚아채는 순간, 층층이 암흑 투기를 펼쳐서 연달아 들이닥치는 오러를 중화한 것이다.
더 많은 양을 쓸 필요도 없었다.
공격을 상쇄시키는 데는 박영길이 쏟아부은 힘의 절반이면 충분했다.
"거짓말 치지 마!"
[믿기 싫으면 말아라.]
반대편 손을 뒤로 젖히는 파프너.
그 행동이 의미하는 건 뻔했다.
"저를 살려주면 그라운드 제로 통합에 도움을...."
"응. 도와주게 될 거다."
죽어서.
그 몸뚱이로 말이야.
푸하아아악-!
독사파 보스의 고개가 반대로 꺾였다.
"큰 형님!!"
"이 개자식이!!"
욕지거리와 분노 섞인 말을 내뱉으면서도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조직원들.
"참 훌륭한 우애야."
[내가 볼 땐 자기 목숨 아까워서 몸 사리는 것 같은데.]
"에이. 설마 그러겠어."
유진은 엄지를 들었다가 아래로 푹 내렸다.
"저 친구들도 형님 곁으로 보내줘. 외롭지 않게."
[알았다.]
푸른 귀화가 4층을 휩쓸고 다니고.
몇 분 후에는 언데드로 되살아난 독사파 조직원들이 건물 입구로 나왔다.
[남은 건 얼마나 되나?]
"여섯 군데."
[저번처럼 나를 긴장시킬 강자가 있었으면 좋겠네.]
그날 오후.
해가 막 서쪽으로 넘어갈 때 즈음.
붉은 거미의 사업체를 노리던 조직들이 모두 정리되었다.
63화 오늘만큼은 변방 잡귀가 아니다
"정말로 하루 만에 모든 조직을 쓸어버리셨군요."
초토화된 일곱 조직의 터.
폐허 위를 거니는 망자의 행렬.
그라운드 제로에서 유진이 벌인 학살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었다.
놀라움 섞인 마담의 반응에 유진이 쯧, 혀를 찼다.
"도망치면 귀찮아지잖아."
후환은 남겨서 좋을 게 없다.
가뜩이나 붉은 거미 보스인 김재우가 중국으로 도망쳐서 뒷맛이 찝찝했는데.
이왕 힘을 쓰기로 한 이상, 뒷말 나오지 않게 해야지.
"암상에서 붉은 거미 사업체들을 관리해드리겠다고 전했답니다."
"그 놈들이 맨입으로?"
"저번 회담에서 약조한 걸 지키지 못했으니까요. 서비스라고 하던걸요."
그라운드 제로의 삼강.
은하수 펍과 암상은 붉은 거미를 물리친 유진의 지위를 인정, 그라운드 제로 내에서 그의 영역을 보전해주기로 했었다.
"부나방들이 많은 건 알았지만. 자기 목숨 귀한 줄을 모르네요."
"그 부나방들 상대로 장사하는 사람이 할 말인가?"
"호호. 그것도 맞네요."
"그러면 마담은 나한테 뭘 해줄 수 있지?"
잠시 고민하는 마담.
은근하게 다리를 꼬면서 고혹적인 표정을 짓는다.
"나중에 답해드려도 될까요?"
"그런 짓 안 통한다."
"재미가 없다니까요. 당신이란 분은."
"뭐, 빚 하나 달아뒀다고 치자. 당장은 필요한 게 없네."
장미선한테 심장석에 해당하는 값어치의 물건을 뜯어낼 기회도 있고.
마담의 역량과 인맥을 감안하면 바로 대가를 요구하는 것보다 빚으로 묶어두는 게 훨씬 이득이지.
"블랙허브와 이북 관련 루트는 직접 관리하실 건가요?"
"어. 일꾼만 보내달라고 해."
"나머지 사업에서 거둬지는 수입은 인건비 빼고 약... 20억 정도 될 거랍니다."
헉-.
뒤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강민호가 신음을 내뱉었다.
"생각보다 적군."
"혈석 공급처를 날려버렸잖아요. 그리고 알짜배기는 따로 있고요."
블랙허브 농장을 돌려서 언급하는 마담.
20억이 개인의 입장에서는 큰 자금이지만, 수백 명이나 되는 조직원을 둔 붉은 거미한테는 푼돈 수준이다.
이러니까 블랙허브 농장이 위험해지니 조직 내 헌터들을 절반이나 데려오지.
'당분간 사업체에 욕심내는 녀석은 없을 거고.'
오히려 좋아.
피를 여럿 보긴 했지만, 다 먹으면 배탈이 날까 봐 포기했던 사업체들까지 손에 넣었다.
암상에서 파견 나온 사람들이 관리를 해주니, 월급만 따박따박 주면 되고.
7개 조직을 부수면서 힘 자랑까지 했으니, 당분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라운드 제로에서는 유진 님의 경지를 6성으로 추정하던걸요."
"엄청 고평가해주네. 영광스럽게."
"새빨간 위장을 공략할 때만 해도 1성이었던 분을 말이죠."
"그건 마담만 조용히 해주면 돼."
마담이 정보를 팔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붉은 거미의 습격에서 그녀를 구해주고.
새빨간 위장까지 공략한 시점에서 둘은 한 배를 탄 입장이 되었다.
거미 사냥을 통해 그라운드 제로의 삼강까지 갈려버린 상황.
암상과 결탁해서 유진을 거미의 대체 세력으로 끌어올린 입장이니.
'어느 쪽이 손해일지는 분명하잖아.'
마담은 유진의 생각을 짐작하곤 흥- 고개를 홱 돌렸다.
"우리 사이가 그것밖에 안 되나요?"
"훌륭한 비즈니스 관계지."
"너무 정확하네요. 냉정하기도 하셔라."
아쉬운 척하지 마라.
말은 저렇게 해도 눈가에 온기가 하나도 없잖아.
하여간 마음 놓을 수 없는 상대다.
"특이점이 발생하면 언제든지 알려줘."
"유진 님을 호출하는 일이 생기지 않길 바라야겠네요."
마담의 엄살을 뒤로 하고 뽀시래기 팀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옮겼다.
눈이 퀭한 세 사람.
"괜찮냐?"
"어, 으음. 네."
"억지로 노력할 필요 없다. 마음은 누르려고 한다고 해서 눌리는 게 아니니까."
"...대단하시네요. 형님은. 몸도 마음도 강하세요."
강민호는 어두워진 낯빛으로 중얼거렸다.
7개 조직의 궤멸.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을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헌터란 죽음과 가까운 직업.
매 순간마다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고.
살기 위해 타인의 생명을 빼앗아야 할 때도 종종 온다.
"그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만. 직접 보니 마음이 흔들리네요."
"약한 게 아니다. 솔직하게 받아들여야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법이다."
유진은 진솔하게 답했다.
테이블을 감싼 형태로 앉은 나머지 일행도 후- 크게 한숨을 쉬었다.
'뭐, 우리나라 쪽 헌터들은 그럴 만도 해.'
대격변과 함께 전 세계는 변혁을 거쳤다.
한국은 그나마 사회체계가 무너지지 않고 안정기에 접어들었지만.
당장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북한만 해도 국가가 붕괴되었고.
중국이나 인도 등 여러 나라들은 군벌이 난립하면서 정부기관의 행정력이 닿지 않는 지역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원래 내전지역이었던 곳들은 헌터가 몬스터보다 사람을 더 죽이는 게 일상이니까.'
실컷 고민해라.
그리고 이겨내야지.
유진이 볼 때, 뽀시래기 팀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크하하핫! 역경과 고민, 그리고 성장이야말로 영웅이 되기 위한 과정이니라.〕
'이제 좀 말문이 트이셨나? 변방 잡귀 양반.'
〔곤란하구나. 짐을 배알하는 영광을 허락하였거늘 이런 태도라니.〕
평소처럼 길길이 날뛰지 않고 차분하게 대꾸하는 크로노스.
뭔가 있군.
'성좌님. 못 보던 사이에 위업이라도 좀 쌓았나?'
〔계약자가 벌인 학살극 덕에 짐의 위광 또한 한층 강해졌느니라.〕
'사람 많이 죽였다고 위업이 쌓이는 건 좀 그렇지 않나.'
〔100명을 죽이면 살인자이지만, 1만 명을 죽이면 영웅이라고 하지 않느냐.〕
그런 표현은 또 어디서 주워들었대.
유진은 한숨을 푹 쉬었다.
'헛소리는 그만 하고 본론으로 갑시다.'
〔만신전에서 짐의 별자리를 찾아라. 그리하면 새로운 길을 열어줄 터이니.〕
'꽤 자신만만한데?'
〔그대한테 꼭 필요한 능력일 것이다.〕
호오.
크로노스의 호언장담에 유진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얼마나 대단한 신성 주문을 빚어냈기에, 이렇게나 자신만만한 건가.
'기대해보마. 변방 잡귀.'
〔크하핫. 만신전에 가면 짐을 향한 불충을 후회하게 될 것이니라.〕
크로노스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유진의 뇌리를 연신 울렸다.
*
그라운드 제로의 일을 마무리하고 서울로 돌아온 유진.
뽀시래기 팀은 며칠 동안 휴가를 더 줬다.
〔계약자답지 않구나.〕
'나다운 게 뭔데?'
〔피도 눈물도 없이 그 작은 인간들을 착취하는 것.〕
'제련할 때 무작정 내려친다고 단단한 철이 완성되지는 않아.'
유진은 킬킬거리며 눈앞에 펼쳐진 계단의 산을 천천히 올라갔다.
108개의 계단.
회귀 후 처음 방문했을 땐 올라가느라 숨이 차서 고생했는데.
'이제는 힘들지도 않네.'
라이프 드레인으로 올린 스탯 덕분이다.
2성 무투계 헌터의 신체능력은 프로급 운동선수보다 뛰어났다.
108개나 되는 계단을 산보하듯 가벼운 걸음으로 등반.
기둥 사이로 오른발을 밀어 넣는 순간, 사방이 검게 물들면서 바깥과 격리되었다.
'여전하군.'
정수리로 쏟아지는 부정적인 파동.
돔 위에 새겨진 무수한 별자리들이 유진에게 적대감을 드러냈다.
높으신 분들이 하루 이틀 이런 것도 아니고.
다만.
예전처럼 모든 성좌들이 유진을 무시하거나 경멸하는 투로 보진 않았다.
[지혜의 관조자가 의아한 듯 당신을 관찰합니다.]
[종말을 부르는 자가 당신을 주목합니다.]
....
'오딘?'
지혜의 관조자.
로마노프 가문의 수호령이자, 드미트리에게 가호를 부여한 신왕급 성좌인 오딘의 성좌명이다.
〔종말을 부르는 자〕는 수르트일 거고.
'크로노스의 존재를 인지한 건가?'
오딘은 삼라만상의 지혜와 이치를 모두 깨달았다고 알려진 마법사.
수르트는 거인족 중 얼마 남지 않은 성좌다.
관심의 방향성이 다를지언정, 둘 다 크로노스를 지켜볼 이유는 있었다.
〔크하하핫. 보아라. 짐의 위대함을 알아보는 자들이 있도다.〕
'그러다 정체가 드러나면 제우스가 참 좋아하겠어.'
〔커흠. 조용히 하여라.〕
쌓은 위업이 적은 탓에 존재감조차 희미한 반쪽자리 성좌.
올림포스 성단의 신왕이 알면 크로노스를 소멸시키는 것쯤은 어려운 일도 아닐걸.
점점 멎어드는 성좌들의 빛.
관심을 두었던 오딘과 수르트, 그 외에도 몇몇 성좌들도 금세 떠나갔다.
〔이제 조용해졌구나.〕
'그러게 말이야.'
〔짐도 언젠가는 저들과 다시 어깨를 나란히 하는 때가 올 것이다.〕
'그래야지.'
〔어인 일로 짐의 포부를 능욕하지 않는 게냐?〕
'당신이 세져야 나도 혜택을 받잖아.'
그러니까 더 열심히 하라고.
유진의 퉁명스러운 사념에 크로노스가 박장대소했다.
〔크하하핫. 과연 짐의 계약자답도다.〕
'됐고. 아까 말했던 거나 줘봐.'
〔놀라지 말거라.〕
[신성 주문 - 메멘토, 부정 충격방패가 추가됩니다.]
◎스킬
▷메멘토
분류 : 신성 주문
등급 : D
사물의 기억을 읽습니다. 한 번 대상으로 지목한 물체는 30일 후에 재사용할 수 있습니다.
▷부정 충격 방패
분류 : 신성 주문
등급 : C
근접 공격을 받으면 충격 일부를 상대에게 돌려주며, 원거리 공격은 방어합니다. 방어막 사용 중에 쌓인 충격은 응징의 쐐기의 충격 스택에 적용됩니다.
괜찮은걸?
'부정 충격 방패라. 연계용으로 딱 좋네.'
근거리 공격은 대미지 반사.
원거리는 충격을 막아주는 방어 계열 신성 주문이다.
충격이 누적될수록 효과가 올라가는 버프, [응징의 쐐기]하고도 연계가 되고.
방어 계 주문은 강령술에도 많지 않으니 더욱 괜찮은 스킬이다.
크로노스 녀석. 진짜로 쓸 만한 걸 줬잖아?
〔놀라긴 이르다.〕
'뭐가 더 있나 보네?'
〔크하하핫. 짐이 심혈을 기울인 것은 전자이거늘. 그 가치를 아직 모르나 보구나.〕
메멘토.
라틴어로 '기억'이라는 의미였지.
그 이름대로, 사물의 기억을 읽는 '사이코메트리' 계열 신성 주문이다.
'쓸 만하긴 하다만. 심혈을 운운할 것까진 아닌 것 같다.'
〔기억하느냐. 짐은 본래 시간과 수확이라는 개념을 주관했던 성좌라는 것을.〕
'그 개념을 뒤집어서 역천의 힘을 주관하라고 한 게 나잖아.'
죽음을 거스르는 영역을 크로노스가 주관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지.
그걸 이제 와서 강조하는 이유가 뭘까.
'...모르겠군.'
〔크하하핫. 그대는 시간을 되돌리지 않았더냐.〕
'어. 그랬지.'
〔미래에 벌어질 일조차, 그대에게는 한 번 경험한 과거일 터.〕
부우우웅-!
주머니에 넣은 회중시계가 진동음을 냈다.
〔짐의 유물. 어릴 적부터 지녔다고 하지 않았느냐?〕
'얼굴도 모르는 부모가 남겨준 거다.'
〔계약자와 동일한 시간선에 있었던 물건. 미래와 과거, 두 기억이 모두 남아있다는 의미니라.〕
설마.
유진은 계속해서 진동음을 내뱉는 회중시계를 손에 쥐었다.
[망가진 크로노스의 회중시계]
등급 : 성유물
분류 : 유물
내구도 : 1/10
시간을 주관하는 옛 성좌가 여러 차원에 남긴 유물입니다.
이미 지나간 시간선의 기록 중, 현재와 비슷한 시점에서 벌어진 사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건... 을 기억하고 있다?'
〔일전에 말하였지. 회귀자라고 해도 모든 것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고 말이다.〕
아라한 길드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게이트를 공동으로 진입했을 때 말이군.
구룡방의 아홉 머리 중 하나인 송명석.
유진은 그가 과거 아라한의 초신성으로 불렸던 사실을 몰랐다.
〔회중시계가 계약자의 곁에 쭉 있었다면, 그대를 중심으로 한 사건을 읽어낼 수도 있단 것이니라.〕
'그 말인즉슨....'
〔회귀 전과 겹쳐지는 시간대의 기억.〕
'내가 놓쳤던 기연을 회중시계로 찾아내란 말이야?'
〔그러하다.〕
와.
유진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 자리에 선 채 두 눈을 몇 번이고 껌뻑일 뿐.
"완전 대박이네."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은 훨씬 더 강렬하고 벅찼으나.
그에 어울리는 표현을 찾지 못해서 간결하게 말했다.
〔보아라! 짐의 위대한 능력이!!!〕
'이번 건 인정할 수밖에 없군. 위대한 티탄의 왕.'
순순히 크로노스의 위업을 인정하는 유진.
회중시계를 축 삼아 회귀 전 시간대의 기연을 탐색하는 신성 주문까지 연계로 만들어내다니!
시간을 다스렸던 성좌.
크로노스만이 할 수 있는 발상이자, 능력이다.
'이 주문과 회중시계만 있으면 내가 모르는 기연들도 챙길 수 있다.'
회귀를 준비할 때, 나름대로 취해야 할 기연들을 정리해두었다.
그렇다고 해도, 유진이 모든 일을 기억하는 것도 아니고 일부 정보는 공개되어 있지 않거나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메멘토]를 사용하면?
'놓칠 수 있는 기연들의 정보까지 모두 얻을 수 있어.'
심장이 빠르게 뛴다.
답안지를 옆에 놓고 시험 보는 거랑 다를 게 없잖아.
[메멘토] 자체도 쓸 만했지만, 크로노스가 성유물에 손을 대면서 권능에 가까운 사기적인 능력으로 탈바꿈했다.
〔한 번 사용해 보는 것이 어떠한가?〕
'좋아. 기념 삼아 해보자.'
[메멘토를 사용합니다.]
[대상 - 크로노스의 망가진 회중시계]
째깍째깍-.
멈춰 있던 분침과 초침이 돌아간다.
드미트리가 방출했던 신력을 흡수, 시간을 되감았을 때와 흡사한 상황.
유진의 뇌리로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어?"
잠깐.
이 장소는... 거기잖아?
64화 연평도 공략(1)
[망가진 크로노스의 회중시계]로 읽어낸 기억.
메멘토가 보여준 첫 장면은 섬이었다.
침식의 여파로 몬스터들의 영역이 되어버린 땅.
그 사이로, 넝마에 가까운 후드를 뒤집어쓴 이들이 화물선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개성 인간사냥꾼들.'
몬스터를 사역하고 부리며, 인간은 가축처럼 부리는 집단.
섬 중앙으로 걸어간 인간사냥꾼들은 무너진 성당 터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투박한 돌로 쌓아올린 제단 앞에 선 이들.
-우리가 바치는 공물을 받으시고, 위대한 힘을 나누어주소서.
한 사내가 외치자, 다른 자들도 따라했다.
제단에 놓인 수많은 시체.
얼핏 봐도 백 단위가 넘는 인간의 시체에서 피가 흘러나오더니, 제단 아래로 스며들었다.
화아아악-!
제단 중심에서 솟구친 초록색 기운.
[아우라]라고 부르는 성좌의 힘이 퍼져 나오면서 이윽고 제단 전체를 감쌌다.
[2027/12/5일]
[연평도의 기억을 읽었습니다.]
툭-.
원래대로 돌아온 시야.
만신전 내부라서 어두운 건 여전했지만, 유진은 묘한 여운에 눈을 몇 번이고 감았다가 떴다.
〔계약자. 짐에게 소감을 들려주어라.〕
'앞으로는 변방 잡귀라고 안 하마.'
〔크하하하핫! 충분히 만족스러운 대답이로구나!〕
호탕하게 웃는 크로노스.
다시 한번 별빛을 되찾은 순간보다도 더 기뻐 보인다.
'그 말이 엄청 싫었나 보구나.'
너무 쉽게 약속해버렸나.
크로노스의 격렬한 반응을 보니 놀릴 거리 하나 더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신전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어?'
〔호오. 기억하고 있었구나.〕
'성자잖아. 나름대로.'
〔크하핫. 짐에게 찬미와 공물을 바칠 신전이 있으면, 별빛이 더욱 강렬해질 터.〕
'잘 됐군.'
유진은 빙그레 웃었다.
변방 잡, 아니. 우리 성좌님한테 봉헌할 신전 지으러 가야지.
〔그 뜻은 갸륵하나 신전을 아무 데나 세울 수는 없느니라.〕
'성좌 나으리도 풍수지리 같은 거 따지나?'
〔우선은 성좌의 기운을 받을 수 있는 영령지인지 아닌지가 중요하도다.〕
'그 다음은?'
〔짐의 기원, 성질, 그리고 주관하는 영역을 고려해야 하고.〕
[메멘토]가 보여준 장면은 1달 후의 미래이자, 아직 일어나지 않은 현실.
'성좌님이 엉덩이 붙일 만한 곳 알아놨으니까 나만 믿어라.'
유진은 킬킬거리면서 만신전을 떠났다.
*
그라운드 제로로 돌아간 유진은 폐허 중심부로 향했다.
비교적 멀쩡한 건물들.
정확히는 그라운드 제로가 생긴 이후에 지어진 건물들이 우뚝 서 있다.
암상이 자리를 잡은 후에 건축한 빌딩들이다.
"또 뵙는군요. 유진 님."
"신수가 훤해진 것 같군. 미스터 블랙."
"허허. 덕분에 일거리가 많아져서 말입니다. 야근 좀 했죠."
미스터 블랙은 유진의 농담에 뼈 있는 답변을 했다.
"일은 부하들이 하는데 생색내긴."
"그 친구들을 뽑은 것도 저입니다. 그럴 권리 정도는 있죠."
"나한테서 권리를 찾는 건가?"
유진은 허리를 의자 쪽으로 붙이면서 느긋하게 앉았다.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신수가 훤하단 말 하나를 받아쳤다고 뒤끝 부리기는.
회담 이후의 실책만 아니었어도 더 양보하진 않았을 텐데, 미스터 블랙은 입가가 썼다.
"바쁘실 텐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회담 때 말한 거 있잖아. 슬슬 시동을 걸려고."
"그 발언은 인간사냥꾼을 치시겠다, 는 말씀으로 들립니다만."
"벌써부터 시비 걸진 않고. 간만 볼 거다."
유진은 테이블에 놓인 지도를 가리켰다.
손가락이 향하는 곳.
"연평도라니. 이미 소문을 들으셨나 봅니다."
소문?
그런 거, 유진이는 모르는데요.
"인간사냥꾼들이 탐낸다지."
"맞습니다. 안 그래도 연평도 문제로 골치가 아프던 차였습니다."
메멘토로 엿본 회귀 전 사건을 떠올리며 냅다 던져본 건데 정답인 모양이다.
"놈들의 움직임은?"
"아무래도 바다를 건너야 하니, 쉽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개성 인간사냥꾼들의 주력은 오우거와 트롤.
한 덩치 하는 괴물들이라서 통통배 정도로는 수송이 불가능하다.
오우거 한 마리만 해도 무게가 수 톤.
화물선은 되어야 안정적으로 수송이 가능한데, 인간사냥꾼 측에 그런 재원은 아직 없다.
"아직, 인가."
"구룡방에서 접촉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여간 도움이 안 되는 놈들이군."
"너무 신경 쓰실 건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영역이니까요."
아니야.
이 친구야.
'가능성이 아니라 진짜다.'
[메멘토]랑 [크로노스의 망가진 회중시계]로 본 미래에는 화물선이 떡- 하고 정박해 있더라.
시간을 지체하면 인간사냥꾼들이 본격적으로 행동에 나서겠군.
그 전에 연평도를 손에 넣어야겠어.
"연평도까지 갈 배가 필요하다."
"밀수에 사용하는 쾌속선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내줘."
"알겠습니다."
미스터 블랙은 군말 없이 배를 대여해주었다.
날렵하게 생긴 쾌속선.
임진강 하류에서 벗어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다에 진입, 파도를 가로지르며 서쪽으로 향했다.
"저기 보이는 섬이 연평도입니다."
서해 5도 중 하나.
대격변 이전에는 구)북한에게서 서해 일대를 지킨 요충지다.
섬의 면적이 꽤 넓어서 2천 명 정도의 주민과 1개 단(2,000 - 3,000)급 군인이 상주가 가능했고.
위로는 황해도와 맞닿아 있어서 지리적으로도 굉장히 전략적인 섬이다.
"다 옛말이죠. 대격변 이후 몬스터들의 섬이 되어버렸습니다."
쾌속선을 모는 선장이 투덜거렸다.
"몬스터들은 얼마나 되나?"
"해안가에 바글바글하니 짐작도 안 되죠."
면적을 감안하면 최소 천 단위.
1만 이상 넘어가지는 않아도, 굉장한 숫자인 건 여전했다.
"가까이 붙여줘."
"알겠습니다."
촤아아악-!
파도를 가르며 나아간 쾌속선이 섬 남부로 다가갔다.
"칵, 카라락."
"카칵. 먹이다."
해안선에 바글바글한 파충류 괴물.
녹색 비늘 사이로 쭉 찢어진 노란 동공이 흉흉한 빛을 흩뿌린다.
신장은 2.5미터.
무장 하나, 갑주 하나 없이 맨몸으로 활보 중인 괴물들이 유진을 노려봤다.
"레리크인가. 용족의 하수인을 여기서 만나네."
"으, 으으."
"겁먹지 마라."
"저 괴물들은 원거리 공격도 한다고요."
선장이 말을 내뱉기 무섭게 레리크 중 비늘 색이 더 진한 놈들의 복부가 크게 부풀어 올랐다.
[파이어 브레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드는 화염 덩어리들.
수십에 달하는 원거리 포격이 쾌속선 위로 쏟아졌다.
"꼭 복선 까는 친구들이 있어."
쯔쯧.
해치웠나, 나 이걸 맞고 산 녀석은 없어! 같은 말은 왜 하는 건지 모르겠다.
[용족도 아닌 주제에 불길을 내뿜다니.]
"뭐, 그렇게 세진 않아."
화염의 위력은 2성 마법 수준.
[본 컨트롤]로 허공에서 격추시킬 수 있는 수준이다.
마법 무장의 내구력이 많이 깎이겠지만.
"정확도도 안 높잖아."
[하긴. 이대로 떨어지면 쾌속선에 닿을 만한 건 많아 봐야 세 개가 전부겠다.]
사거리가 긴 대신 형편없는 명중률.
지금도 날아드는 화염 덩어리의 개수가 50개나 되는데, 3개밖에 안 맞잖아.
태평하게 이야기 중인 둘.
선장이 화를 냈다.
"지금 불덩이가 떨어지는 중인데 말만 할 겁니까!"
"걱정하지 마라."
이런 상황에 어울리는 신성 주문을 배워왔거든.
손가락에 응집된 성력.
[부정 충격 방패를 사용합니다.]
육각형을 여러 개 덧댄 형태의 각진 방어막.
성력에 기반을 두었지만, 불길함마저 느껴지는 회색을 띠었다.
'방어 범위는 3미터. 구체형이 아닌 한 면을 막는 식이군.'
유진은 [부정 충격 방패]를 연속으로 시전.
머리 위에 세 장을 추가 생성해서 쾌속선 위를 덮었다.
'시전 속도는 민첩, 그러니까 반응속도에 따라 달라지고. 여럿을 사용해도 부담이 없네.'
여기까지는 꽤 유용했다.
방어 쪽 신성 주문은 여럿을 유지하기 어렵거나, 동시에 전개 가능한 숫자가 정해져 있다.
단점이라면 수비 범위가 다방면이 아닌, 한 면에 치우쳐졌다는 것?
'그 정도는 물량으로 커버해도 돼.'
신성 주문 가성비도 뛰어날뿐더러, 유진에게는 성력을 채울 수단도 있다.
앞에서 언급한 단점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
'제일 중요한 방어력만 확인하면 되겠어.'
팔짱을 낀 채,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불덩어리를 바라봤다.
방어막과 충돌한 새빨간 불꽃.
색이 조금 흐려졌지만, 한 번으로는 깨지지 않았다.
쾅- 쾅-!
뒤이어 떨어진 불덩어리들이 막 피격당한 [부정 충격 방패]를 사정없이 두들겼지만.
연속 공격에도 색이 흐릿해지기만 할 뿐.
크로노스가 부여한 신성 주문은 불덩어리 셋을 완벽하게 막아냈다.
"우리 성좌님께서 쓸 만한 걸 주셨어."
〔크하하핫. 짐의 위대함을 이제야 체감하느냐!〕
시끄럽게 웃는 크로노스를 무시하고는 전장을 바라봤다.
첫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레리크들은 당황한 기색 없이 배를 부풀렸다.
"선장. 배를 더 가까이 대."
"괜찮은 겁니까?"
"방금 전에 봤잖아. 아무 문제 없다."
"알겠습니다."
침을 꼴깍 넘긴 선장이 쾌속선을 해안가로 접근시켰다.
상륙이 가능한 지점까진 약 70미터.
레리크들은 다시 한번 불덩어리를 내뱉었다.
[이번에는 적중률 22% 정도 되겠다.]
"친절하기도 해라."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부정 충격 방패]를 꼼꼼하게 전개했다.
쾌속선이 가라앉으면 이쪽도 곤란하거든.
물에 젖는 건 사양이다.
펑- 퍼펑-.
허공에 고정시킨 방어 결계가 불덩어리 세례를 막아내고.
쾌속선은 방해 받지 않고 거리를 좁혔다.
"네가 활약할 시간이다."
[맡겨주십시오. 주인님.]
조승철의 손에 들린 지팡이.
[GB(그레이베이스) - R5]에서 맺힌 화염구가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귀가 먹먹해지는 폭발.
해안가에 밀집해 있던 레리크 몇 마리가 폭발에 휩쓸려서 까맣게 타버렸다.
[오. 제법이잖아. 해골.]
[내겐 조승철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투덜거리면서 [퀵 리로드]를 사용한 조승철이 2차, 3차 공격을 퍼부었다.
유진의 성위가 모자라서 능력치 제한을 받는 입장.
그럼에도, 조승철의 파이어볼은 4성 마법계 헌터에 비견되는 위력을 지녔다.
'높은 스탯과 마력 순환 덕이지.'
퀵 리로드로 재배열 속도 및 파괴력 보정까지 더하니, 화력만 보면 [다중 영창]이 가능한 4성 헌터에도 꿀리지 않는 수준.
콰앙-! 콰아앙-!
한시도 멈추지 않고 파이어볼을 쏟아 붓던 조승철이 팔을 축 내렸다.
[주인님. 모든 마력을 소진했습니다.]
[뭐야. 이게 끝이야?]
[퀵 리로드를 사용하면 마력 소모가 늘어납니다.]
[에이. 주인, 영 못 써먹겠는데.]
왜.
그 정도면 밥값은 했지.
직격을 당해서 숨이 끊어진 레리크만 30마리가 넘는다.
부상 당한 숫자를 더하면 짧은 기간에 엄청난 피해를 입힌 셈.
그리고 말이야.
"네크로맨서한테 시체가 생겼잖아."
[시체 폭발을 사용합니다.]
쿠콰콰콰콰!
해안가 여기저기서 터지는 폭발음.
뼛조각과 살점이 사방에 흩뿌려지고, 레리크들이 비명을 질렀다.
100이 넘는 숫자가 폭발에 휘말려서 쓰러지고.
"이제 내려주면 되겠네."
"ㄴ, 네."
새하얗게 질린 선장이 쾌속선을 부두에 대었다.
연평도 남부에 발을 디딘 유진과 하수인들.
시체 폭발에 휩쓸리지 않은 레리크들이 눈을 부라리며 달려들었다.
[주인. 승리의 주문을 부탁해.]
"있어봐."
유진은 능숙하게 응징의 쐐기와 부정한 축복을 사용.
[케넥 전투술]
[7장]
[10발 난타]
버프에 용린갑의 능력치 추가 보정까지 받은 파프너가 레리크들을 몰아붙였다.
"씨X. 내가 뭘 본 거야?"
쾌속선 선장은 벌벌 떨면서 중얼거렸다.
레리크는 3성급 몬스터 중에서도 상대하기가 까다로운 괴물.
비무장이라고 무시한 헌터들은 모두 낭패를 봤다.
'단단한 비늘은 창칼로도 잘 깨지지 않고, 민첩하기까지 하다.'
몸이 가벼우니 행동도 빠르고.
손톱의 날카로움은 어지간한 도검 이상이다.
개체 중 일부는 장거리 공격까지 펼치니, 어떤 상황에서도 대응 가능한 괴물인 셈.
'암상이 연평도를 포기한 것도 레리크 때문인데.'
그 악명이 자자한 괴물들을 손쉽게 학살하는 헌터.
붉은 거미의 주력 반절을 괴멸시켰다는 건 헛소문이 아니었다.
"선장 아저씨."
"옙!"
"전투식량만 놓고 가봐. 5일 뒤에 보자고."
"옙!"
바짝 군기가 든 선장은 배에 담아둔 식량을 옮긴 후, 부리나케 연평도를 떠났다.
65화 연평도 공략(2)
"끄륵."
파프너의 손에 잡힌 레리크의 목이 반대로 꺾였다.
[이 근방은 정리 끝났어.]
"마음 놓지 마. 곧 2파가 올 거다."
[끈질기군.]
"제 영역을 침범 당했잖아. 가만히 당해주는 게 등신이지."
영력을 눈가에 불어넣는 유진.
2성으로 올라간 덕에 '영안'의 변칙적인 운용도 한결 편해졌다.
'피눈물은 안 흘리겠어.'
영맥의 흐름을 쫓아 해안가 인근에서 적합한 부지를 선정했다.
영력 농도는 고작 1.
뭐, 건설에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을 충족시킨 것에 만족해야지.
유진은 바로 검은 방첨탑 건설에 착수했다.
구조물에 들어가는 재료야, 해안 여기저기에 널렸으니.
어렵지 않게 네크로폴리스의 초석을 세웠다.
"웁. 넘어올 것 같아."
[그러다가 약물 중독에 걸리는 거 아니야?]
"제길. 빨리 영력의 양을 늘려야지."
아니.
실은 좀 어려웠다.
보너스 스탯과 라이프 드레인 덕에 영력을 꾸준히 올려도.
검은 방첨탑 건설에 소모되는 영력이 원체 많은 탓에 포션을 물처럼 마셔야 한다.
다음에는 신준석한테 딸기 맛이라도 첨가해달라고 해야겠어.
[그런 것도 돼?]
"방법은 동업자 양반이 연구할 거다."
[되는 게 아니잖아.]
"아이디어 줬으면 됐지."
이 세상 수많은 공돌이들이 들으면 피눈물을 흘릴 말을 내뱉고는 숨을 돌렸다.
방첨탑 끄트머리에서 서서히 퍼져나가는 희끄무레한 연기.
언데드의 능력치를 올려주고.
반대로 산 자들은 가시거리를 제한당하는 디버프를 부여하는 안개다.
[적을 맞이할 준비는 끝난 건가?]
"끝나긴 무슨. 이제 시작이다."
속 편한 소리 하네.
검은 방첨탑을 제작하고 남은 사체들은 모조리 아머드 좀비로 만들었다.
[그 망자들 가지고는 레리크에게 맞서 싸울 수 없다.]
"알아. 2성인 아머드 좀비로는 전선을 유지하는 게 고작이다."
레리크에 비해 성위가 낮은 아머드 좀비.
파프너 같은 괴물이나 성위가 높은 적에게도 이기는 거지.
공들여서 만들었다 해도, 하급 언데드한테 그만한 활약을 기대하면 도둑놈 심보다.
[조승철 같은 망자를 더 만들지 그러나?]
"잊고 있나 본데. 나도 2성이다."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를 이용해서 변칙적으로 시술.
합일을 마친 조승철의 잠재능력을 일깨운 덕분에 중급 언데드로 강화할 수 있었다.
레리크의 시체 따위로는 시도조차 불가능하다고.
[주인도 못하는 게 있군.]
"나도 만능은 아니다. 한계점은 늘 인지하고 있어."
유진은 늘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판단했다.
회귀 후 매 상황마다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보여도.
냉정하게 가능성을 매겨본 후에 나서는 것이다.
찌릿-.
링크한 검은 방첨탑에서 신호를 보냈다.
"준비해라. 방문객 왔다."
[수는 얼마나 되나?]
"약 300."
[네크로폴리스 영업 후 첫 손님이니 먼저 가서 맞이해주마.]
"적당히 해줘."
싸움에서 이기는 건 문제가 안 된다.
핵심은 [검은 방첨탑]을 지키면서 레리크 무리들을 격퇴하는 것.
파프너가 전위로 나서서 전력을 소모시켜주고.
너덜너덜해진 레리크들을 아머드 좀비들과 블러드 골렘으로 방어하는 게 기본 방침이다.
[후후. 무리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안개를 향해 거침없이 돌진하는 파프너.
잠시 후.
희끄무레한 연기 사이로 붉은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
*
연평도 중심부에 위치한 봉화대.
그 앞에는 평범한 레리크보다 2배나 큰 파충류 괴물들이 모여 있었다.
"침입자가 섬에 들어왔다."
"얼마 만이지? 인간 따위가 우리의 영역에 발을 디딘 것이."
"10일 만이다."
"뭐야. 얼마 안 됐잖아."
"므리안의 기억력이야 늘 그 모양이지."
"카라라라락!"
레리크 다섯 형제.
진짜 '형제'는 아니고, 20년 넘게 생성된 레리크들 중에서 탄생한 변종들을 일컫는 표현이다.
"탐색으로 300마리를 보냈다."
"그 정도나? 오래간만에 들어온 인간이 덜컥 죽어버리면 어떻게 하나."
"설마 그렇게나 약하겠어. 조금 기다렸다가 배가 추가로 오면 그때 죽여 버리자."
레리크 다섯 형제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연평도는 대륙과 분리된 공간.
섬을 벗어나기 위해선 하늘을 날거나, 바다를 통과할 수단이 있어야 했다.
지성을 지닌 괴물들은 이 상황이 너무나도 답답했다.
"더 많은 피. 살육!"
"여기서는 만족할 수 없다. 카라락!"
레리크 다섯 형제의 경지는 5성.
3성 게이트에서 나오기 어려운 고등급이다.
섬이라는 한정된 공간.
연평도를 침식지대로 만든 게이트는 20년 넘게 괴물들을 생성했고.
먹을 게 없어진 레리크들은 동족포식으로 개체수를 유지했다.
그 과정에서 탄생한 다섯 변종.
접경지대의 애꾸눈처럼 종을 벗어난 강함과 능력마저 지니게 되었으니.
대륙으로 시선을 돌리는 건 당연했다.
"같은 실수는 안 된다."
"섣부르게 인간을 모두 죽여버리면 나갈 방법이 없어."
"카락, 알고 있다."
대륙의 인간들이 연평도를 탐낸 건 처음도 아니다.
암상.
구룡방.
붉은 거미.
그리고 제5 혁명군(인간 사냥꾼)까지.
"더 많은 인간을 먹으려면 밖으로 나가야 한다."
"알겠다. 참는다."
레리크 5형제는 섬에 상륙한 인간들을 모조리 도륙하고 뼈 채로 씹어먹었다.
난생처음 느껴본 별미.
그렇지만, 섬을 방문하는 인간의 숫자는 줄어들었고.
5형제는 별미를 더 즐기려면 바다 너머 땅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큰 배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
5형제 중 가장 강력한 레리크.
발타크가 입맛을 다시면서 나머지 형제들에게 경고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자신만만하게 웃은 파프너가 레리크 사체 하나를 바닥에 던졌다.
[후후후. 별 것 아니네.]
"딱 300마리군."
[주인의 감이 이렇게까지 정확했나?]
"아니. 그렇진 않아."
유진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뭘 고민하는 거지?]
"300마리쯤, 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1의 오차도 없다는 건 인위적이지 않나."
몬스터들은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
게이트가 빚어낸 반쪽짜리 생명체. 의지를 거세당하고 인간에 대한 증오와 식욕만이 괴물들의 행동원리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딱 300마리가 맞춰서 온 건 누가 지시라도 하지 않는 이상에야······!]
"이제 눈치챘어?"
[개성에서 이미 손을 쓴 건가.]
"아냐. 그랬으면 배가 선착장을 들락거렸을 거다."
상륙 전에 남부 선착장을 힐끗 봤지만 인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메멘토로 본 날짜하고는 아직 차이가 있고.
'그렇다 한들, 마음 놓을 순 없어.'
인간사냥꾼들이 제단에서 성좌의 '가호'를 내려 받는 건 1달 뒤.
제단을 세웠다는 건, 연평도에 있는 레리크들을 포섭하거나 밀어냈다는 의미다.
'빠르면 1주, 늦으면 2주 안에 놈들이 올 거다.'
그 안에 연평도를 손에 넣고 인간사냥꾼들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대비를 갖춰야 한다.
전면전으로 가면 유진의 필패.
최선은 인간사냥꾼들이 상륙하지 못하게끔 섬을 요새화하는 것.
'이럴 경우에 떠올릴 수 있는 가정은······. 변종뿐이군.'
회귀 전에 쌓은 무수한 경험을 바탕 삼아 추리만으로 진실에 근접했다.
레리크 변종의 숫자가 5마리라는 것까진 알 수 없지만.
방금 전 습격의 배후에 '지성'을 보유한 괴물이 있다는 사실은 확실해보였다.
"계획을 바꿔야겠어."
[주인. 어떻게 하려고?]
"상대가 간만 보려고 하니, 우리가 적극적으로 나서야지."
파프너를 공격수로 사용.
유진과 조승철은 검은 방첨탑을 끼고 방어하면서 네크로폴리스의 영역을 넓힌다.
[본래 계획은 네크로폴리스를 끼고 방어하면서 괴물들의 전력을 깎는 거였잖아.]
"그렇지."
[내가 영지를 벗어나면 주인이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하지 마라. 방법은 다 있어."
아머드 좀비는 레리크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수적으로도.
질적으로도.
모두 열세인 상황이지만, 이럴 때일수록 네크로맨서의 진가가 발휘되는 법이다.
'전승할 수 있는 스킬 슬롯은 4개.'
거미 사냥에서 레벨이 37까지 오르고.
아라한 공격대와 게이트를 공략했으며, 연평도 상륙 때 벌인 전투에서 경험치를 얻은 덕에 막 40레벨을 돌파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어울리는 주문이라면······.
[본 월을 습득했습니다.]
[강화 회로를 습득했습니다.]
"끄, 끄으으."
여전히 X나 아프다.
고유 특성 [클리어 마인드]가 고통을 줄여주기는커녕 더 선명하게 느끼게 해주니.
눈가에 고인 이슬 한 방울을 떨쳐내고 주문들을 확인했다.
[본 월]
분류 : 마법
등급 : C
영력으로 강화한 뼈를 수 겹으로 덧대어 단단한 벽으로 만듭니다.
제작 형태에 따라 효과가 달라집니다.
[강화 회로]
분류 : 연금술
등급 : E
연금술의 기초인 강화 회로를 새기는 주문입니다.
좋아.
유진이 기억하는 내용에서 한 글자도 틀리지 않은 설명이다.
'새 신성 주문이 더해지면 얼마든지 방어할 수 있다.'
유진은 진녹색을 띤 사체들의 뼈와 살을 분리해준 후, [레이즈 데드]를 사용했다.
스켈레톤 메이지로 되살아난 진녹색, 아니 뼈만 남은 레리크.
불을 내뿜는 놈들은 '마법' 적성도 있어서 마법계 언데드로 제작 가능했다.
"이 녀석들은 네가 통제해라."
[감사합니다. 주인님.]
스켈레톤 메이지 50구를 모두 조승철에게 넘기고 아머드 좀비 40구까지 추가로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영력을 모두 소모.
탈진 직전까지 가서 몇 번이나 포션을 먹었는지 세어지지도 않았다.
"우우우웁."
빨리 4성이 되어서 인형설삼을 먹어야겠다.
라이프 드레인으로 대체가 가능하다지만, 어디까지나 편법이다.
이 짓도 계속하다 보면 몸에 이상이 생길 거란 말이지.
'포션에도 내성이 생기니까.'
급할 때가 아니면 포션을 생명력으로, 그 다음으로는 마력으로 치환하는 짓을 안 해야 하는데.
[메멘토]로 살펴본 미래의 장면을 생각하면 무리할 수밖에 없다.
다시 한번 각오를 되새기고는 입가에 묻은 포션을 옷소매로 닦아냈다.
[괜찮아?]
"아니. 그래도 해야지."
[다음에는 싱싱한 놈들 좀 잡아다주마.]
"아. 그렇지. 스탯도 흡수해야 하니까 부탁할게."
상륙한 뒤에도 여유가 없다 보니 레리크의 생명력을 갈취하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시체는 터트리거나 언데드로 제작했으니.
틈틈이 생기를 강탈해서 스탯으로 바꿔야지.
[그러면 해안가부터 탐색을 해볼까?]
"아니. 섬 중심부로 가."
[변종이 있을지 모른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변종이 있을 만한 곳을 살펴봐야지."
지성을 보유한 객체, 변종 레리크는 섬 중심부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검은 방첨탑을 세운 지 얼마 안 됐을 때, 레리크 무리가 산을 타고 내려왔으니까.
"지시를 내린 놈도 그 방향에 있을 거다."
[후후. 주인은 통찰력이 대단해. 이 짧은 시간 동안 거기까지 파악하고.]
"죽지나 마. 네가 없으면 섬 공략은 무리다."
파프너의 [라이프 포스 베슬]이 있긴 해도, 완파되면 재생에 시간이 꽤 걸린다.
부활에 필요한 생명력도 어마어마하고.
[여유가 되면 그 변종이란 놈도 잡아오마.]
"거, 말이나 못하면."
유진은 피식 웃었다.
파프너가 네크로폴리스에서 떠나고 30분 정도가 지났을 때.
검은 방첨탑에서 다시 한번 경고음을 울렸다.
'이번에는 해안가 쪽이군. 또 300마리 정도라.'
크흐흐흐.
역시 생각대로 흘러가는군.
파프너를 일부러 전위로 빼고 레리크들이 어떻게 나오나 살펴봤는데,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쳐들어왔다.
숫자가 많으면 또 모르겠는데.
처음 습격 때와 비슷한 숫자를 보낸 걸 보면 레리크 중 변종이 섞여있는 게 확실했다.
'내 전력과 대응 방법을 알아보려는 거겠지.'
아머드 좀비와 스켈레톤 메이지를 만든 후에도, 아직 100구 이상 남은 시체.
거미 사냥 때처럼 원격 폭발을 준비하긴 늦었다.
뭐, 그래도 시체만 있으면 어떻게든 방법이 다 있는 법.
네크로맨서가 왜 1인 군단이라고 불리는지 너희들 눈에 새겨주마.
"놈들 사체를 여기로 옮겨놔라."
유진은 진격 방향에 맞춰 레리크 사체들을 길게 늘여놓았다.
"카라라락!"
"카락!"
회색 기류를 헤집으며 검은 방첨탑 근처까지 다가온 레리크 군집.
파충류답게 열 감지와 촉각이 발달한 탓에 안개가 시야를 혼란시켜도 진격 속도를 크게 늦추진 못했다.
[본 월을 사용합니다.]
콰드드드득-!
레리크들의 시체를 뚫고 솟구친 뼈가 영력을 받아들여 수십 배로 커진다.
가시처럼 날카로운 형태로 부푼 뼈들이 서로 엇갈리는 식으로 덧대어지고, 4미터 높이의 벽으로 재탄생했다.
시간이 있으면 강화 회로로 내구력까지 올려주겠지만.
'지금은 다른 걸 테스트해볼 거다.'
[백야를 사용합니다.]
[영력 → 성력]
[부정 충격 방패를 사용합니다.]
본 월에 덧씌워진 신성 방패.
스켈레톤 메이지들은 뼈로 쌓아 올린 벽 뒤에서 마법을 난사했다.
[아이스 애로우]
[윈드 커터]
······.
군데군데 틈이 나 있는 뼈의 바리케이트.
벽의 높이가 스켈레톤 메이지보다 높으니, 일부러 마법 공격용으로 만든 구멍이다.
"카락, 벽 부순다."
일방적인 공격에 화가 난 레리크들이 본 월을 향해 달려들었다.
잘 벼려진 도검만큼이나 날카로운 손톱.
고작해야 뼈 따위는 가볍게 부수고 벽 안쪽에 있는 시체들도 부숴버리리라.
으르렁대며 팔을 휘두른 레리크.
콰직-!
손톱이 본 월에 닿는 순간.
[부정 충격 방패]가 토해낸 빛과 함께 본 월에서 송곳 모양의 뼈가 튀어 나오고.
푸아아악-!
본 월의 영력과 부정 충격 방패의 반사 피해가 겹쳐지면서 레리크의 팔뚝을 꿰뚫었다.
"카라라락?!"
피를 뚝뚝 흘리면서 뒷걸음질 치는 레리크.
"성능 확실하네."
계산대로군.
유진은 그 모습을 보고 킬킬거렸다.
66화 3성
[부정 충격 방패]의 특성은 둘이다.
근거리 공격 – 반사
원거리 공격 – 완전방어
완전방어 능력은 상륙 때 이미 실험해봤고.
'근거리 공격을 받았을 때, 얼마나 되돌려주느냐가 중점인데.'
효과는 뛰어났다.
본 월과 부정 충격 방패를 일체화시킨 후 레리크의 공격을 유도했더니.
영력으로 강화한 방어력에 시너지 효과가 더해지면서 반사된 충격으로 팔이 꺾여버렸다.
"카라라락!"
"카락!"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비명 소리.
기세 좋게 몰려왔다가 당황한 레리크들이 주춤거렸다.
'본 월에도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수비형과 반사형.
이번에 전개한 것은 반사형으로, 충격이 가해졌을 때 뼈가 튀어나오면서 상대에게 피해를 되돌려주는 구조다.
대신 본 월의 내구력이 소모되는 단점이 있지만.
'부정 충격 방패를 덧대면 반사형의 장점이 극대화된다.'
본 월만 사용해서는 팔을 꿰뚫을 만한 위력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정 충격 방패만 단독으로 펼쳤으면 약간의 피해를 되돌려주는 데서 끝났겠지.
'내 계산보다 시너지 효과가 더 좋아.'
파프너가 없어도 충분했다.
[죽어라. 이 잡것들아.]
[파이어 볼]
[퀵 리로드]
[파이어 볼]
....
본 월을 방패 삼아 거침없이 투사되는 스켈레톤 메이지들의 마법 공격.
특히 조승철은 상륙 때 소모했던 마력을 모두 회복한 후, 다시 한번 엄청난 화력을 퍼부었다.
"카라락. 한쪽을 뚫는다."
레리크들도 가만히 서서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검은 방첨탑 주위를 빼곡하게 두른 본 월.
수비 범위가 넓은 만큼, 스켈레톤 메이지의 화망에도 얕은 부위가 있기 마련.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레리크들이 무리의 후방으로 빠지더니.
[파이어 브레스]
상륙 때처럼 불덩어리를 토해냈다.
명중률이 낮은 것도 목표가 작거나 멀리 있을 때 의미가 있지.
40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높이 솟구친 본 월을 못 맞출 리 없었고.
[부정 충격 방패가 소멸합니다.]
[부정 충격 방패....]
수십의 불덩이를 두들겨 맞은 결계가 소멸.
본 월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한쪽이 무너졌다.
"카락! 돌격!"
푹 주저앉은 쪽으로 몰려온 레리크들.
붉은 점액질의 거인이 무너진 틈새를 가로막고는.
「너희. 못 지나간다.」
양팔을 칼날로 변형, 좌우로 휘두르면서 레리크들을 베어냈다.
촤락-.
레리크의 성위는 3등급.
앞서 흡수했던 트롤보다 한 수 아래지만, 흔치 않은 하위 용족의 피라서 블러드 골렘의 능력을 한층 강화시켰다.
"왜. 뭐가 잘 안 되니?"
[시체 폭발을 사용합니다.]
스켈레톤 메이지들의 마법을 상회하는 위력!
전장 여기저기서 터지는 폭발과 함께 레리크의 팔과 다리, 그리고 핏방울도 허공을 비산했다.
후방으로 빠진 레리크들이 다른 쪽 벽에 구멍을 냈지만.
-그어억.
-그억.
무너진 곳을 메워버린 아머드 좀비들을 돌파할 힘이 없었다.
난전이면 모를까, 좁은 공간에서 방어에 전념하는 아머드 좀비들을 밀쳐내기에는 레리크의 힘이 모자랐으니.
[본 월]과 [부정 충격 방패]의 시너지.
수비에 동원된 아머드 좀비와 블러드 골렘의 맷집.
모든 요소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면서 레리크 무리의 공세를 완벽하게 무력화시켰다.
[본 컨트롤을 사용합니다.]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합니다.]
기진맥진한 레리크를 마법 무장으로 꽂은 후, 안으로 데려와서 생기를 갈취할 만큼 여유로운 상황.
레리크 300마리는 변변한 피해도 주지 못하고 안개 속에서 쓰러져갔다.
*
검은 방첨탑을 낀 방어전은 그 뒤로도 수시로 벌어졌다.
하루가 지났을 때 즈음.
안개 속에서 죽어간 레리크의 숫자는 물경 4천에 달했다.
"네크로맨서를 상대로 차륜전이라."
유진은 무미건조한 투로 중얼거리면서 밥을 입에 밀어 넣었다.
코를 자극하는 죽음의 향.
매캐한 연기와 피 냄새에 후각이 마비될 것 같지만.
신경 쓰지 않고 전투식량에 남은 쌀 한 톨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비위가 쓸데없이 좋다고 해야 할지.]
파프너는 유진의 담담한 모습을 보며 황당한 투로 말했다.
걱정 마라. 대전사님.
회귀하기 전에는 이보다 더한 꼴도 많이 봤다.
비위나 위생 같은 걸 따지다가는 9번째 성위에 도달하기는커녕 진즉에 숨졌을걸.
〔짐이 부여한 신성 주문을 받고도 꽤나 고전하는 듯하구나.〕
크로노스의 핀잔에 유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번 공략은 변수가 꽤 많아.'
〔크하하핫. 그대가 변명을 내뱉는 건 처음 있는 일이로구나. 참으로 흥미로워.〕
'....'
변방 잡, 아니지.
그 별명은 더 안 내뱉기로 했으니 참아야한다.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별명을 떠올려야겠어.
'변종 레리크는 최소 셋. 그것도 5성으로 짐작되는 괴물들이다.'
〔그대가 직접 목격한 것도 아니지 않느냐. 확신하는 근거가 있느냐?〕
'레리크들에게 내려진 지령의 숫자.'
섬 중앙으로 보냈던 파프너는 레리크들의 공세에 더 전진하지 못하고 검은 방첨탑으로 돌아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복귀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고.
'놈들이 앞뒤를 막아서 고생 좀 했다지.'
레리크는 포위망을 형성할 만큼 지혜로운 괴물이 아니다.
지시를 내린 변종이 최소 둘은 있다는 뜻.
해안가를 경유한 무리도 있으니, 셋 이상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렇다 한들, 변종이 5성이란 법은 없지 않느냐?〕
'원래 가정이란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법이다.'
준비는 철저할수록 좋다.
판단력을 지닌 레리크라면 4성의 극, 혹은 5성에 도달한 존재일 가능성이 높기도 하고.
〔크하하하핫. 거미 사냥 때보다 훨씬 불리한 상황이로구나.〕
'맞아. 그땐 방어하는 입장이기라도 했지.'
유진은 부정하지 않았다.
거미 사냥 때 동원된 헌터들의 숫자는 100명 정도.
5성은 간부인 두 명이었다.
'연평도에 있는 레리크는 못해도 수천. 거기에 5성으로 짐작되는 괴물이 최소 셋.'
〔이 상황을 멋지게 뒤집을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영웅에 걸맞은 위업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성좌님은 뭘 원하시나?'
〔짐이 원하는 것이야 당연하지 않느냐.〕
크로노스는 단언했다.
〔계약자가 시련을 극복하는 것.〕
'그럴 줄 알았어.'
유진은 짧게 웃었다.
근데 말이야.
놈들은 한 가지를 착각하고 있다.
차륜전에 강한 것은 자신들만이 아니라는 것.
[현재 레벨은 49입니다.]
유진의 전력을 살펴볼 겸, 계속해서 미끼를 던지는 것 같은데.
그 덕에 목표였던 한계레벨까지 한 계단만 남았다.
"파프너야. 해안가 쪽 한 번 더 정리하고 와라."
[너무 험하게 부려먹는 거 아니냐?]
"곧 50레벨이야."
[어쩔 수 없군. 모자란 주인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종의 역할이니.]
파프너를 내보내고 얼마 정도가 지났을까.
[레벨이 올랐습니다.]
[현재 레벨은 50입니다.]
[한계를 넘어 새로운 경지로 나아갑니다.]
[모든 능력치에 +20% 보정을 받습니다.]
[경험치 요구량이 4배로 늘어납니다.]
우우웅-!
시스템의 보조로 한 단계 상승한 격.
유진은 충만하게 차오른 힘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새로운 학파의 지식을 열 수 있겠구나.〕
'뭐, 그렇지.'
독 분야를 해금하면 시체 폭발에 시독을 더하거나 언데드 하수인에게 독 부여 등으로 강령 쪽과 연계가 가능하고.
암흑 분야는 매개체(뼈나 시체)가 없으면 손가락만 빨아야 하는 네크로맨서에게 중, 원거리 공격을 가능하게 해준다.
저주는 온갖 디버프를 부여하거나 혼백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게 해주니.
'스탯 상승도 좋지만, 성위가 오를수록 대응 범위가 넓어진다.'
유진은 한때 네크로맨서의 정점에 도달했던 헌터.
한 단계씩.
성위가 오를수록, 발휘할 수 있는 힘은 무궁무진해진다.
'단, 지금은 중요한 게 따로 있지.'
〔호오. 위기를 극복할 방안이 따로 있다는 발언으로 들리는구나.〕
'내 경지가 3성으로 올랐다는 그 자체가 핵심이다.'
스으으으으-!
조승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시커먼 기류.
텅 빈 동공에 맺힌 푸른 귀화가 한층 더 진해졌다.
[당신의 경지가 상승함으로 인해 다크 미니언(조승철)이 지닌 힘이 완전히 해방됩니다.]
[3성 → 4성]
[마력이 800 상승합니다.]
[특성 - 다중 영창이 추가됩니다]
[다중 영창]
등급 : B
3성의 벽을 넘고 경지에 도달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능력입니다.
사용자의 연산 속도에 따라 마력을 동시에 재배열 할 수 있습니다.
[제 힘이 올라갔습니다. 주인님.]
"오냐. 더 뼈 빠지게 수고해라."
[충심을 다해 주인님을 섬기겠습니다.]
봐라.
유진이 3성에 오르자마자 조승철의 위계가 한 단계 성장하지 않았던가!
〔한데, 굳이 다른 분야를 배제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
'습득할 수 있는 주문 개수에 제한이 있잖아. 지금은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독이나 저주, 암흑 분야도 좋지만.
결국 네크로맨서의 주력 기술은 시체를 매개 삼는 강령술이다.
3성에 도달하는 순간을 위해 비워둔 스킬 슬롯.
검은 방첨탑을 지키느라 두 개를 소모했지만, 레벨이 초기화되면서 다시 늘어났으니 총 4개의 주문을 익힐 수 있다.
'뭘 익힐지는 이미 정해두었다.'
[데드 라이즈를 습득합니다.]
[분석을 습득합니다.]
[언홀리 커맨드를 습득합니다.]
▷데드 라이즈
분류 : 마법
등급 : C
영혼이 떠난 시체를 언데드로 제작합니다.
제작한 언데드의 질은 베이스가 된 사체의 능력과 사용자의 역량에 따라 달라집니다.
▷분석
분류 : 연금술
등급 : E
지목한 대상을 분석합니다.
▷언홀리 커맨드
분류 : 강령 마법
등급 : C
영력을 소모하여 사용자의 지배하에 있는 언데드 하수인들의 능력치를 10% 증가시키며, 피해를 입힐 시 영력 일부가 사용자에게 들어옵니다.
언홀리 커맨드의 영향 범위는 사용자를 중심으로 100미터입니다.
"됐다."
이제 숨통이 좀 트이겠어.
자신만만한 유진의 모습에 크로노스가 의구심을 드러냈다.
〔이걸로 되겠느냐?〕
'물론. 재료가 모자라는 게 아쉽지만, 그럭저럭 할 만해.'
〔강령술과 관련된 주문은 그렇다 치자꾸나. 한데, 연금술은 왜 익힌 게냐.〕
'보면 알 거다.'
유진은 레리크의 사체를 향해 외쳤다.
"내 부름에 답하라."
[데드 라이즈를 사용합니다.]
고꾸라진 레리크의 사체가 벌떡 일어나더니 으스스한 비명을 내뱉었다.
망자가 토해내는 최후의 단말마.
빛이 꺼진 동공이 툭, 바닥에 떨어지고.
텅 빈 공간에서 푸른 귀화가 일렁이기 시작한다.
[리터너를 제작했습니다.]
[완성도가 높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71.4% 상승합니다.]
하급 언데드 리터너.
스켈레톤이나 좀비와 마찬가지로 하급 수준이지만, 전투력은 하늘과 땅 차이다.
'같은 하급이어도, 리터너는 태생 3성이거든.'
장점이라고는 단단한 몸뚱이뿐이지만, 아머드 좀비&스켈레톤도 1대1로는 리터너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변종 레리크의 경지가 5성이라면 한참 모자라지 않겠느냐.〕
'다 끝난 거 아니거든요.'
유진은 레버넌트의 옆에 널브러진 사체에 다가갔다.
눈에 아른거리는 마력.
연금술의 기초 스킬, 분석이다.
[지정한 물질을 분석합니다.]
[해당 물질은 하위 용족의 비늘로 추정됩니다. 마력 패턴을 파악합니다.]
[구조물을 완벽하게 분석했습니다.]
마력의 결을 분석으로 읽어내고, [살점지배]로 훼손되지 않게 비늘을 떠낸다.
리터너의 몸을 뒤덮는 레리크의 비늘.
유진은 촘촘하게 덮인 비늘에 강화 회로를 새겨 넣었다.
'연평도를 차지한 괴물이 레리크라서 다행이야.'
다시 한번 [살점지배]로 곤죽이 된 사체에서 힘줄을 일일이 분리.
[분석]의 도움 덕에 원격으로 세세한 작업이 가능했다.
살점 위로 돌출된 힘줄들을 낚아채고는 [강화 회로]를 새겨서 리터너의 몸뚱이 곳곳에 쑤셔 넣었다.
"다시 눈을 떠라."
스스스슷-!
리터너에게 영력을 불어넣는 순간.
몸 여기저기에 심어둔 힘줄과 비늘에 새긴 강화 회로가 반응.
회전에 회전을 거듭하며 영력이 불어났다.
-그오오오오!!!
[해당 개체가 하위 용족의 부산물과 완벽하게 융합하여 새로운 언데드, 레버넌트로 탄생했습니다.]
[데드 라이즈의 하위 스킬로 레버넌트 제작이 추가됩니다.]
[레버넌트]
종족 : 언데드
등급 : ★★★★
◎능력치
근력 : 570(+200) / 민첩 : 398(+150) / 체력 : 519(+180) / 맷집 : 534(+180) / 마력 : 304(+110)
◎특성
▷불사의 존재[C+] / 재생[C+] / 미숙한 경계자(C+)
◎스킬
▷저주의 숨결[B] / 암흑 투기[B] / 돌진[D]
'죽음에서 돌아온 자'라는 의미를 지닌 언데드.
굳이 언급하면 '리터너'와 비슷한 뜻이지만, 둘의 전투력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암흑 투기라고?!〕
'4성이잖아. 그 정도는 기본이지.'
〔망자 따위가 어떻게 그런 힘을 발휘한단 말이더냐!〕
'그래서 특성에 미숙함이 붙잖아.'
조승철에게는 추가되지 않은 특성.
오러(암흑 투기) 발현 시 위력이 떨어지는 불필요한 특성이다.
편법으로 벽을 넘어선 존재라서 생긴 페널티.
'놈을 사역하려면 정신력 소모도 커.'
3성이 되면서 사역 가능한 숫자가 두 배로 늘어났지만.
레버넌트는 벽을 넘어선 강력과 산 자, 그러니까 주인인 유진조차 증오하는 망자라서 제어 권한 숫자를 10이나 소모했다.
'내가 4성이 되면 없어질 페널티지만, 어쩔 수 없잖아.'
연평도의 변종 레리크를 상대하려면 어쭙잖은 망자보다 강한 놈 하나가 필요했다.
유진이 사역 가능한 언데드의 숫자는 80.
〔그대의 종복 둘을 빼면 78구를 더 운용할 수 있으니 최대 7구로구나.〕
'잊어버렸어? 조승철에게도 지휘 권한이 있다는 걸.'
50구를 지배할 수 있는 조승철.
레버넌트를 휘하에 배치하면 지휘는커녕 유진을 적대하지 못하게 억제하는 게 전부겠지만.
'산 자는 나 말고도 많잖아.'
굳이 레버넌트를 제어할 필요가 있을까.
미친개의 목줄을 풀어주기만 해도 알아서 날뛸 텐데.
〔참으로 대단하도다. 흑암의 반지에도 없는 지식일진대, 어찌 그런 발상을 할 수 있었을꼬.〕
'괜히 아홉 번째 성위에 도달했겠어?'
유진은 킬킬거리며 으스댔다.
자.
이제 몸도 적당히 풀었고.
전력까지 확충했겠다.
개성 인간사냥꾼들이 오기 전에 승부를 내러 가보자고.
67화 이제 섬의 지배자는 누구지?
유진을 적당하게 압박.
추가 지원이 오기를 느긋하게 기다린 레리크 5형제.
"그 새카만 놈만 조심하면 된다."
"레리크를 추가로 보내다 보면 한계가 오겠지."
"카락, 배가 오면 그때 덮친다."
희희낙락하며 다음 선박이 도착하는 순간을 노리고 있을 때.
검은 방첨탑을 끼고 수비적인 행동만 취하던 유진이 돌연 안개를 뛰쳐나왔다.
이동루트는 섬 중심부.
레리크 5형제가 머무는 곳이다.
"카락, 놈이 미치기라도 한 건가?"
"카라락. 막내. 가서 알아보고 와라. 여차하면 직접 놈을 쫓아내도 좋다."
"알겠다."
변종 레리크 한 마리가 성큼성큼 남쪽으로 향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철퍽- 철퍽-.
물기에 젖은 발자국 소리가 레리크 5형제의 청각을 자극했다.
"카락. 인간을 꽤 일찍 쫓아냈...."
"어. 내가 좀 일찍 왔지?"
데구르르.
핏기 빠진 레리크의 머리가 바닥을 나뒹군다.
강력한 힘에 뜯겨나간 듯, 찢겨진 근육에 맺힌 남은 피가 여기저기로 튀었고.
머리 없는 몸통을 어깨에 멘 파프너가 거칠게 내려놓았다.
"변종이 다섯, 아니지. 넷이나 돼? 많기도 해라."
"카라라락. 네놈이 동생을!"
"무슨 형제애야. 게이트가 만들어낸 반쪽짜리 생물 주제에."
"이 노오오오옴!!!"
레리크 5형제.
이젠 넷으로 줄어든 변종 레리크 중 둘이 분노를 터트리고는 크게 도약했다.
"봐. 효과 있지?"
[주인. 아무리 그래도 말이다. 고인 능욕은 좀 그렇다.]
"몬스터한테 고인이라는 단어가 아깝지."
유진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짐도 대전사의 발언에 동의하도다.〕
'성좌님은 또 왜요. 내 영웅적 행보가 마음에 든다면서?'
〔구태여 모욕을 줄 필요는 없다는 말이니라.〕
'다 이유가 있어.'
유진은 파프너를 힐끗거렸다.
[처음 계획대로 행동하겠다.]
"변수가 생기면 내가 맞춰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날뛰어라."
[그렇다면야.]
전진하는 파프너.
등 뒤에 선 블러드 골렘에게도 손가락을 까딱하고는.
"너도 가라."
「명령을 수행합니다.」
쿵- 쿵-.
전보다 무거워진 블러드 골렘이 육중한 발걸음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레리크의 피를 마음껏 흡수해서 강해진 블러드 골렘.
스펙은 4성 끄트머리까지 올라갔고.
약 5미터까지 성장한 덩치는 변종 레리크와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우우우웅-!
레리크 형제 둘의 손톱에 일렁이는 푸른 기운.
벽을 넘은 존재에게만 허락되는 의념의 힘, 오러다.
"카라라락! 죽어라!"
변종 레리크는 승리를 자신했다.
거리가 이만큼이나 가까워졌는데도, 파프너나 블러드 골렘에게 오러가 방출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5성인 레리크들도 오러를 전개하려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으니.
파프너와 블러드 골렘이 대응할 방법은 없다고 확신했다.
[부정 충격 방패를 사용합니다.]
격돌하기 직전에 생성된 회색 방벽.
손을 거둘 순 있었지만, 변종 레리크는 멈추지 않았다.
'기운도 강하지 않다. 그대로 찢어버린다!'
한층 진해진 푸른 기류.
방어주문을 사용하면, 그보다 더 큰 힘으로 뚫어버리면 그만!
쩌어어엉-!
"카락?!"
...이라고 생각했던 변종 레리크의 눈가가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역류하는 마력.
손톱에 맺힌 오러가 거세게 흔들린다.
"오러가!"
"왜. 뭐가 잘 안 돼?"
히죽거리는 유진.
오러는 벽을 넘어선 자들에게 허락되는 힘이지만, 유형화한 마력의 파장이 동일하지는 않다.
사용자의 전투 스타일이나 성격, 그 외에도 여러 요소가 반영되는 힘.
당연히.
강한 의지와 마력 운용능력에 따라 오러의 숙련도 및 파괴력도 천차만별로 갈린다.
'3성짜리 괴물들한테 오러를 전력으로 펼칠 일이 있었을까?'
변종 레리크의 목을 뜯어내고.
놈들에게 보란 듯이 던져준 것은 이때를 위함이었다.
오러를 최대 출력으로 낸다?
안 그래도 오러의 심오함을 이해하기보다, 있는 대로 휘둘렀을 게 뻔한 괴물들인데.
'부정 충격 방패로 오러를 되받아치면 제대로 대응 못하겠지.'
〔거기까지 내다보고 판을 짠 게냐?〕
'다 이유가 있다고 했잖아.'
오러를 더 끌어올릴수록.
[부정 충격 방패]의 효과로 역류하는 마력을 제어하기 힘들어할 거다.
뒷걸음질 치는 변종 레리크.
푸른 기류가 일렁이는 손톱이 파르르 떨리고, 끝에서는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게 증거지.
'엄청난 신성 주문을 주셨어.'
〔크, 크하하핫. 짐을 더 찬양하도록 하여라.〕
호기롭게 외치는 것과 달리, 크로노스는 당혹감을 떨쳐내지 못했다.
공을 들여 조형한 신성 주문은 [메멘토].
성유물과 같이 사용하는 것을 전제로 두고 회중시계도 차근차근 개조했다.
'한데, 덤으로 만든 주문을 이렇게나 잘 활용하다니.'
작은 인간 주제에 스킬 하나도 허투루 사용하지 않는 모습.
크로노스는 경악에 찬 사념을 유진에게 내비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억눌렀다.
[2단계로 넘어가겠다.]
투팟-!
파프너는 마력을 안정화시키느라 주춤한 변종 레리크를 지나쳐서 뒤에 있는 두 마리를 향해 돌진했다.
"카락. 우리를 노려?"
"웃기는군. 후방에 있다고 해서 근접전에 약할 줄 아나!"
[어스 브레이크]
[쇼크웨이브]
땅이 좌우로 갈라지면서 널찍한 균열이 생기고.
공기를 매질 삼아 발생한 충격파가 파프너의 움직임을 제한, 균열로 밀어 넣으려고 했다.
[둘의 연계가 나쁘진 않은데.]
양팔을 휘감는 검은 기류.
파프너는 암흑 투기로 충격파를 무력화시키곤, 균열 사이에 솟아있는 바위를 짓뭉개며 나아갔다.
[딱 그 정도야. 좋지도 않네.]
거리를 좁힌 파프너의 손이 현란하게 움직인다.
3중 버프와 용린갑으로 강화된 신체.
신체능력은 5성의 헌터와 동급이나 전투경험에서 밀린 변종 레리크들이 급하게 팔을 바동거렸다.
"카락, 너희도 저 놈을 덮쳐!"
"이 놈. 소환수다. 인간만 죽이면 끝나."
둘 다 5성의 괴물.
오러보다 마법에 익숙한 거지, 신체능력은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다.
두 레리크가 파프너를 붙들고 있을 때.
유진을 공격하면 승기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오옷.
-그오오오오.
레리크의 비늘을 뒤집어 쓴 망자, 레버넌트가 달려드는 것을 보기 전까진.
*
레버넌트의 개조 전 언데드.
리터너는 탱킹에 특화된 언데드다.
속도는 3성치고 느린 축이지만 단단한 몸뚱이와 힘으로 적을 붙들면서 전열을 유지하는 데 최적화된 망자.
그 언데드를 기반으로 업그레이드한 만큼, 맷집 하나는 대단했다.
[암흑 투기]
[미숙한 경계자의 페널티로 암흑 투기 위력 30% 감소]
"카라락락, 오러, 라고?"
"암흑 투기다. 발현방식은 동일하니, 오러라고 불러도 상관없어."
"카라락. 내 오러보다 약하다. 이깟 것쯤은 얼마든지...?"
레버넌트의 암흑 투기 출력이 떨어지는 건 알고 있었다.
변종 레리크가 5성이라고 예측했는데.
놈들을 사냥하면서 그 부분도 고려하지 않았을까.
-그오오오오.
-그오오. 산 자다.
수풀 뒤에서 줄지어 나오는 레버넌트.
총 12구가 역류한 마력을 다스리는 중인 변종 레리크를 붙들었다.
"카라락!!"
"한 손으로 열 손 못 막는다고 하지."
블러드 골렘은 [혈류변환]으로 양팔을 그물처럼 변환.
변종 레리크들을 옭아맸고.
출력이 30% 모자라도 오러(암흑 투기)를 두른 레버넌트들의 공격은 피해를 조금씩 누적시켰다.
"카라라락!"
분노 섞인 괴성과 함께 오러를 최대까지 끌어 올린 변종 레리크.
[부정 충격 방패를 사용합니다.]
쩌어어엉-!
"카락!"
"몬스터들은 이래서 안 돼. 학습능력이 없어요."
변종 레리크가 전력으로 오러를 방출한다?
오히려 좋아.
타이밍에 맞춰 부정 충격 방패를 전개, 놈의 힘을 역이용했다.
상대가 오러 응용에 도가 튼 헌터였다면.
혹은 전투 경험이 많은 괴물이라면 이야기가 달랐겠지.
'접경지역의 애꾸눈처럼.'
그 놈은 진짜배기 괴물이다.
몬스터 웨이브 때부터 살아남아서 접경지역의 왕으로 군림 중인 변종.
변종 레리크들은 그 녀석과 비교하기도 민망한 수준.
'파프너는... 조금만 도와주면 되겠네.'
마법에 특화된 두 변종 레리크를 상대하면서도 주도권을 잃지 않았다.
거미 사냥 때 고전했던 것과 다른 모습.
상대가 5성 둘이어도, 붉은 거미 간부인 최형태보다 전투 경험이 모자랐다.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을 최대한 피하면서 마력을 재배열하는데.
높은 신체능력으로 하는 짓이 회피뿐이니, 파프너의 맹공에 싸움의 흐름이 넘어가버렸다.
'이 순간인가.'
[응징의 쐐기를 해방합니다.]
퍼엉-!
파프너를 중심으로 터져 나온 충격파가 변종 레리크들을 마구 흔들었다.
전투 동안 누적된 충격만큼 버프 효과가 증대되고.
그 에너지를 해방하면 일시적으로 충격파를 발생시키는 [응징의 쐐기].
[다중 영창]
[파이어 볼 x 2]
[퀵 리로드]
[파이어 볼 x 2]
....
조승철은 유진의 신호에 맞춰 자세가 무너진 변종 레리크에게 화염구를 던졌고.
성위 차이가 무색하게도, 증폭된 마법이 비늘을 녹였다
"카라락!"
[이제 빈틈을 보이네.]
[케넥 전투술]
[4장]
[정권 찌르기]
팔뚝을 타고 맹렬하게 회전하는 암흑 투기.
녹아내린 비늘을 부수고.
그 안에 감추어진 변종 레리크의 근육과 살을 찢어발기고는 심장까지 펑- 터트려버렸다.
[막대한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현재 레벨은 2입니다.]
변종답게 경험치도 어마어마하게 주는군.
"둘째야!"
"걱정 마. 너도 곧 따라갈 거다."
"빌어먹을! 인간!"
후우웅-.
변종 레리크를 스치고 지나가는 암흑 투기.
파프너는 욕지거리를 내뱉는 틈도 놓치지 않고 더 거세게 압박했다.
"말 좀! 하자!"
[그렇게 떠들 시간이면 주인은 레리크를 53마리나 더 죽였을 거다.]
도발하는 거 보소.
회귀 전, 박하늘 씨는 과묵해서 심심했는데.
파프너의 도발 실력은 동일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일품이었다.
〔그대는 변화의 시발점이 어디인지 모르겠나?〕
'좀 더 일찍 계약해서 그런가.'
〔크하하핫. 기가 막힌 오답이로구나. 아주 창의적이도다.〕
'....'
뭔가.
기분이 아주 묘한데.
크로노스의 웃음을 뒤로 밀어버리고는 전투에 집중했다.
이번 싸움에서 맡은 역할은 서포트.
폭발시킬 시체도 없고.
본 컨트롤로는 5성 괴물에게 상처 하나 못 입힌다.
영력을 집중한 본 스피어면 모르겠지만.
'그럴 바에 신관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게 맞지.'
다른 성단 소속하고는 명백하게 이질적인 신성 주문들.
유진은 그 특색을 십분 활용해서 동일 성위의 신관들을 압도할 정도의 활약을 선보였다.
"내, 내가 고작 망자 따위에게...."
레버넌트 무리에게 파묻힌 변종 레리크가 암흑 투기 세례를 받아 고꾸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머지 두 마리도 형제들의 곁을 따라갔다.
[5성 넷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둘 줄은 몰랐어.]
떨떠름한 기색으로 중얼거리는 파프너.
유진이 킬킬거렸다.
"멍청아. 난 승산 없는 싸움은 안 한다고 했다."
[갓 3성이 된 주인이 승률을 가늠하는 행위 자체가 이상한 거다.]
당연하지.
9번째 성위에 도달하기까지 거쳐 간 수라장만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다.
어설프게 지성에 눈을 뜬 변종 따위.
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허 참. 생전에 주인 같은 헌터가 있었다면 한국이 지금보다 더 안정되었을 텐데.]
파프너는 어지간하면 꺼내지도 않는 과거까지 언급했다.
방금 전 싸움에서 받은 충격이 크다는 방증이었다.
이 정도로 놀라기는.
놀랄 일은 앞으로 많이 있으니, 청심환이라도 먹어두는 게 좋을 거다.
부우우웅-!
좌우로 요동치는 회중시계.
크로노스가 다급함 섞인 투로 외쳤다.
〔메멘토가 일러준 기연은 어디에 있느냐?〕
'성당 아래에.'
〔크하하핫. 혹시 허, 아니지. 짐의 안배를 놓치지 않을까 우려되어 물어본 것이니라.〕
티탄 신족의 왕이라면서 은근히 새가슴이란 말이야.
유진은 짧게 웃은 후, 땅에 머리를 처박은 변종 레리크들을 직시했다.
성당 지하에 숨겨진 물건도 탐나지만.
네크로맨서한테는 강한 존재의 시체야말로 보물 아니겠는가.
"하위 용족은 쓸 데가 많지."
츄릅-.
유진은 혀로 입술을 핥았다.
[주인. 부탁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말해봐."
[그....]
파프너가 이야기하기를 망설이자, 유진이 버럭 외쳤다.
"어울리지도 않게 말을 왜 하다 말아?"
[저 시체들. 나한테 줄 수 있나.]
끔뻑- 끔뻑-.
유진은 간만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두 눈만 감았다가 떴다.
68화 역천의 신전
"변종 레리크의 시체는 왜?"
[흠. 이 감각을 뭐라 말해야 할까.]
파프너의 복잡한 생각을 반영하듯, 푸른 귀화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래. 정의하자면 허기다.]
"여기에는 동조 걸어줄 민영이도 없다."
[맛을 느끼는 감각이 아니다. 근본적인 허기, 굶주림. 모자란 것을 채우려는 본능적인 갈망.]
어럽쇼.
파프너가 언제부터 고상한 표현을 줄줄이 늘어놓는 사람, 아니 망자가 되었지?
유진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흥미롭군."
좀비나 스켈레톤이 느끼는 허기를 최상급 망자인 엘드리치 드래곤이 느낀다, 라.
여태 보인 적 없는 반응이 나왔다면 정답은 간단했다.
"부족한 것을 채우려는 것일 터."
[내게 부족한 것?]
"레리크는 하위 용족이다."
게이트가 만들어낸 반쪽짜리 생물일지라도, 그 몸뚱이 안에는 용족의 인자가 스며들어 있다는 것.
변종 레리크에게는 더 강한 기운이 내재되어 있다.
"식욕을 느끼는 건 엘드리치 드래곤으로서 불완전한 부분을 채우려는 본능일 거다."
[다른 레리크들은 시체를 봐도 큰 생각이 안 들던데.]
"그 놈들의 인자는 도움이 안 될 만큼 미약하니까."
변종 레리크가 성위를 넘어선 힘을 깨우친 건, 용족의 인자가 반응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흠. 그래서 이 시체, 나한테 주는 거 맞지?]
"일단 하나만 먹어봐라."
[쩨쩨하기는.]
파프너는 짧게 투덜거리고는 입을 쩍 벌렸다.
콰드득- 콰득-.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찢겨지는 섬뜩한 소리.
5미터에 달하는 거체가 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듯 파프너의 입속으로 사라져간다.
[엘드리치 드래곤(파프너)이 용족의 인자를 흡수합니다.]
[엘드리치 드래곤의 완성도가 올라갑니다.]
[흡수한 용의 인자 – 6.7%]
[모든 능력치가 12.5% 상승합니다.]
들썩거리는 파프너의 육체.
스며든 용의 인자가 뼈를 확장시키고, 나아가 더 커진 골격에 맞춰 육체도 성장했다.
이미 죽은 자에게 성장이라는 표현이 맞을까 싶지만.
'그 외에는 떠오르지가 않아.'
전신이 쉴 새 없이 들썩거리는 파프너를 보면서 생각했다.
"나머지도 싹 먹어라."
[그래도 괜찮나? 언데드로 제작하면 강한 전력이 될 거라고 했잖아.]
"네가 강해지는 게 훨씬 이득이다."
[주인······!]
성큼성큼 다가온 파프너가 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
[고맙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다!]
"아, 아야야야!"
[미안하다. 힘이 과했네.]
"뼈 부러진 거 같아."
덜렁거리는 손목.
유진은 짧게 한숨을 쉰 후,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했다.
[6.7% → 9.3 → 10.9 → 12.1 → 12.5]
변종 레리크를 먹을수록 흡수되는 용족의 인자가 줄어들었다.
엘드리치 드래곤을 완성시키려면 더 강한 놈을 사냥하라는 의미겠지.
용족의 인자가 상승하면서 스탯 보정도 45%까지 늘어났고.
다섯 번째 변종을 먹으면서 추가된 특성 하나가 유진을 더 기쁘게 했다.
[특성 – 불멸의 지휘관이 추가됩니다.]
조승철이 습득한 것과 동일한 특성.
당장은 지휘 가능한 숫자가 많지 않지만.
파프너가 용족의 인자를 더 축적하면 휘하에 둘 수 있는 언데드도 늘어날 것이다.
'하급 용족의 시체보다 훨씬 귀한 걸 얻었어.'
원래는 불경스러운 묘지에 변종 레리크들의 시체를 묻어둘 계획이었다.
드래그너 같은 중급 언데드를 만들려면 유진의 경지도 4성 이상이어야 하니.
'전력 강화에 병력 운용 숫자까지 늘어났다.'
당장에 쓸 수도 없는 드래그너 다섯과 비교하면, 훨씬 큰 이득을 본 셈이다.
〔계약자여. 이제 기연을 취하러 가자꾸나.〕
크로노스가 보채니 유진도 생각을 멈추고는 고개를 돌렸다.
[메멘토]를 통해 본 과거, 아니 미래의 현장.
다 무너져가는 성당이 눈앞에 있다.
'그럼 메인 디쉬를 먹어볼까.'
유진은 성당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
섬 중심부에 위치한 성당.
말이 좋아서 성당이지, 마모되어서 겨우 형태나 알아볼 수 있는 성모상 말고는 예배당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쯤이었지?'
[메멘토]로 본 장면을 떠올린 후, 레버넌트에게 땅을 파라고 지시했다.
푹- 푹-.
암흑 투기를 휘감은 손으로 흙을 퍼올리니 그 기세가 포크레인과 맞먹었다.
5미터 가량을 쭉 내려갔을 때.
"흠."
구덩이에서 느껴지는 심상찮은 기운에 본능적으로 흘러나온 신음.
유진은 푹 파인 땅으로 망설임 없이 내려갔다.
〔메멘토가 보여준 기연이······.〕
'그래. 이 돌을 가리킨 거다.'
레버넌트의 손톱 끝에 걸린 주먹 크기의 회색 광물.
유진은 조심스럽게 그 돌을 쥐었다.
[공허의 파편]
등급 : 에픽
분류 : 촉매
내구도 : 56/100
질서와 대칭을 이루는 공허의 파편입니다.
부정적인 성질의 힘이나 감정을 증폭시켜줍니다.
유니크보다 높은 등급.
가공 이전의 순수한 광물인데도 에픽 급이면, 아티팩트 제작에 활용하면 초월 등급 결과물을 얻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초월이면 용린갑과 흑암의 반지와 같은 등급!
'뭐, 어디까지나 가능성이지만.'
유진은 피식 웃었다.
굳이 가능성의 영역을 살펴보지 않아도, 공허의 파편은 쓸모가 많다.
네크로맨서에게는 초월 등급 아티팩트만큼에 비견되는 광물.
부정적인 에너지 하면 악마종이나 흑마법사들의 힘인 '흑마력'을 떠올리지만.
영력, 다른 표현으로는 음차원의 마력도 부정적인 매질을 지녔다.
〔크하하핫! 보아라. 이게 바로 짐의 능력이니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한데 그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돌멩이가 기연인 건 알겠다만, 사용처가 어찌 되느냐?〕
'제대로 써먹으려면 최소 7성의 연금술사와 마이스터급 장인이 있어야 한다.'
현 시점에서는 전 세계를 뒤져봐도 몇 없는 마이스터급 장인.
7성의 벽을 넘어선 연금술사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뭣이?! 그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로구나!〕
'약식으로 쓸 방법은 있어.'
[뇌기를 품은 떡갈나무 스태프].
붉은 거미 간부 이승연을 쓰러트리고 획득한 아티팩트다.
'지팡이에 꽂는 촉매에 따라 성질도 변화하는 게 핵심 옵션이지.'
촉매를 가공하지 않아도, 그 힘을 끌어낼 몇 없는 수단.
생각해보니, 저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은 '화염옥' 장착 상태인 지팡이를 보고도 했었지?
지팡이 끝에 붙어 있는 화염옥을 뺀 후, 공허의 파편을 빈 소켓에 꽂았다.
[새 촉매를 장착합니다.]
[기존의 옵션이 제거되고, 촉매 '공허의 파편'에 맞춰 새 옵션이 추가됩니다.]
[뇌기를 품은 떡갈나무 스태프]
등급 : 유니크 → 에픽
분류 : 지팡이
내구도 : 87/150
번개를 맞아서 겉과 속이 다른 색을 띠게 된 나무로 만든 지팡이입니다. 소켓에 마법 증폭 촉매를 장착시켜 원하는 속성의 파괴력을 증대시킬 수 있습니다.
*마력(영력) + 150 → 450 증가
*재배열 속도 30% → 45% 감소
*화염 마법 위력 74% 상승.
*언데드 지배 숫자 100% 증가
*언데드 유지에 소모되는 영력 50% 감소
*소켓 - [1/1]
공허의 파편 장착 중
영력 증가 수치는 3배로 늘었고.
재배열 속도도 무려 15%나 더 줄어들었다.
〔기본 옵션부터 차이가 꽤 많이 나는구나.〕
'화염옥은 유니크 등급 촉매야. 공허의 파편보다 질이 떨어지니 당연하지.'
중요한 건 삭제된 화염 마법 관련 옵션 대신 추가된 언데드 관련 능력이다.
지배 숫자 2배.
소모되는 영력 절반으로 감소.
'운용 가능한 망자의 숫자는 늘어났어도, 페널티가 전혀 없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옵션.
이 기세면 1인 군단이라고 불리던 시절의 언데드 군세를 재현할 날도 머지않았으리라.
'붉은 거미한테 고마운 마음이 들 줄은 몰랐군.'
[뇌기를 품은 떡갈나무 스태프] 덕분에 공허의 파편을 가공하지 않고 활용하게 되었다.
지팡이의 원래 등급이 [유니크]인 만큼, 촉매가 지닌 힘을 100% 끌어올리지 못하는 게 단점이지만.
아예 못 쓰는 것보다는 훨씬 낫잖아.
'공허의 파편을 가공할 만한 장인이 나타나면 그때 빼도 무방하다.'
내구력이 좀 깎이겠지만, 보석을 가만히 놓는 것보단 어떤 식으로든 써먹는 게 이득이다.
유진은 흡족한 표정과 함께 지팡이를 꽉 쥐었다.
*
구덩이에서 나온 유진.
을씨년스러운 성당의 터가 눈에 들어온다.
〔혹, 놓친 거라도 있느냐?〕
'아니. 메멘토로 본 기연은 공허의 파편이 전부다.'
〔한데 주위를 꽤 유의 깊게 보는구나.〕
'말했잖아. 신전 하나 지어주겠다고.'
유진은 눈가에 영력을 불어넣은 채로 성당을 훑어보았다.
과거에는 섬의 주민들이 기도를 올린 곳.
또한, 남한과 북한이 시시때때로 대립했던 분쟁 장소.
영험한 기운과 전쟁에서 쌓인 한, 그리고 주민들의 소망이 한데 뭉치면서 신전의 터로 삼기에 알맞은 장소, 〔영령지〕가 되었다.
〔과연. 집중해보니 영적 기운이 충만하구나.〕
'여기면 충분하겠지.'
〔그러하도다. 한데, 그대는 이 섬이 신전을 건설하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나?〕
'메멘토가 보여준 환상 덕분이다.'
인간사냥꾼들은 허물어진 성당 터에서 악신 성좌의 가호를 받았다.
성당에 묻힌 공허의 파편과 영령지라는 특수성.
두 가지 요소가 모두 충족되었기에 벌일 수 있는 기적이다.
'바벨탑도 아닌 곳에서 악신 성좌의 가호를 받기가 쉬운 줄 알아?'
유진은 [메멘토]로 본 미래의 광경 덕분에 무너져가는 성당 터가 영령지라고 확신했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섬.
크로노스를 위한 신전을 짓기에 딱 알맞은 조건이다.
〔어폐가 있구나. 짐의 유일한 신도여.〕
'뭐가 또 불만이세요?'
〔더 많은 이들이 신전을 찾아와야 짐의 존재력도 강해질 터.〕
'그러면 제우스도 네 정체를 금방 알아내겠지.'
〔아······.〕
크로노스가 신음을 삼켰다.
하여간 욕심은 많아가지고. 눈앞의 보상에 욕심을 내다간 큰 걸 놓치기 마련이다.
〔계약자가 할 말은 아닌 듯하구나.〕
'나는 다 먹을 자신이 있으니까 욕심내는 거다.'
크로노스의 사념을 밀어내고는 레버넌트들을 불렀다.
"기둥 싹 무너트리고. 저기에 있는 큼지막한 돌 하나 가져와라."
쿵- 쿵-.
반쯤 무너진 채로 세월의 흐름을 정면으로 맞은 건물이 역사에서 사라진다.
대격변 이후, 구전이나 문헌으로만 전해지던 신들이 별빛으로 존재한다는 게 알려졌고.
그 뒤로는 어떤 형태로든 성좌를 모시는 건물을 훼손하는 건 금기가 되었다.
'성좌가 직접 벌을 내리니까.'
연평도의 성당 같은 경우는 예외다.
게이트 브레이크 이후 성당을 오가던 주민들은 섬을 떠나거나 죽었기에.
더 이상 성좌가 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성좌 나으리. 내가 건축 쪽은 잘 모르니까 약식으로 짓는다?'
〔형식이 중요하겠느냐. 결국 마음에 달린 것임을.〕
웬일이래.
티탄 신족의 왕께서는 허례허식을 좋아하지 않았나?
크로노스가 말을 바꾸기 전에 신전 건축을 마무리해야겠다.
유진은 널찍한 바위를 정성스럽게 닦았다.
크로노스를 위한 제단.
신전의 핵심이 되는 구조물이다.
[주인. 뭐하고 있나.]
"모시는 성좌를 기념하기 위해 신전 만드는 중이다."
[역천의 거인이라는 분이었지?]
"맞아. 꽤 검소한 양반이거든. 이 정도만 해도 이해해줄 거다."
파프너와 대화하면서 크로노스를 추켜세워주자, 박장대소가 뇌리를 가득 메웠다.
〔크하하하하핫!!!〕
좋아.
약 빨이 좋군.
[그래도 신전치고는 너무 허전한데.]
"내가 건축 쪽은 잘 몰라. 네크로폴리스는 반지 덕에 구축이 가능한 거다."
[주인. 그렇다면 실력 발휘 한번 해봐도 되겠나?]
"마음대로."
유진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파프너는 근처에 있는 나무로 옛 성당 터에 기둥을 세웠다.
부서진 건물 잔해를 활용해서 쌓은 벽.
신전까지는 아니어도, 나름대로 '건물'의 형태 정도는 겨우 갖추었다고 해야 할까.
"1시간도 안 됐잖아. 어떻게 한 거야?"
[각성 전에는 봉사활동을 많이 나갔다. 그때 붙은 요령이지.]
파프너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약식으로나마 완성시킨 소박한 제단.
그 앞에선 유진은 한쪽 무릎을 꿇고, 성력을 피워 올렸다.
"역천의 거인이시여. 이곳을 당신에게 헌상하나이다. 부족함이 많으나 갸륵하게 받아주소서."
화아아아악-!
영령지를 중심으로 솟구친 희끄무레한 기운.
죽음을 거스르는 영역의 주관자, 〔역천의 거인〕의 성력이 허름한 집을 감싸기 시작했다.
69화 최고의 조수
[성좌 '역천의 거인'을 모시는 신전을 건설했습니다.]
[해당 성좌를 모시는 첫 제단이 완성되었습니다. 성좌의 격이 상승합니다.]
[당신은 '역천의 거인'의 성자입니다. 위대한 업적을 달성함으로써 신앙의 문장이 부여됩니다.]
◎신앙의 문장
분류 : 문장
성좌에게 믿음을 인정받은 신관에게 부여되는 문장입니다.
*성력 10% 증가.
*신성 주문 효과 30% 증폭.
키야.
문장을 이런 식으로도 얻네.
오직 배후성한테만 받을 수 있는 가호와 달리, 문장은 시스템이 하사하는 능력이다.
'고대의 시험장에서 받았던 것처럼 말이야.'
드래고니안한테서 정해진 시간 동안 생존해야 하는 미션.
10분을 버티면 [인내의 문장]을 받았다.
근데 여기서 문장을 추가로 얻는 건 계획에 없었으니.
'성좌를 직접 옹립하고 신전까지 짓는 게 보통 일은 아니다만.'
네크로맨서로 온갖 기행과 위업을 달성했을 때도 거의 본 적 없는 게 문장이다.
시스템에서 문장을 부여하는 판정이 얼마나 빡빡한데?
왜 [고대의 시험장] 같은 장소를 대형 길드들이 독점하고 있겠나.
'확정적으로 문장을 얻을 수 있어서.'
문장을 얻는 조건은 회귀자인 유진조차 아는 게 거의 없다.
아홉 번째 성위에 도달하여 '불사왕'이라는 칭호를 받았음에도, 그때까지 얻은 문장이 5개가 전부였으니.
신전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볼품없, 아니 조촐한 건물 하나 지었다고 귀하디귀한 문장을 하나 획득했다.
'신관 특화 옵션이지만 그게 어디야?'
크로노스가 선사한 주문들은 동급 신관 계 헌터들이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효과가 강력하다.
D급 버프 주제에 힘을 70%나 증폭시켜주는 [거인의 힘].
충격이 누적될수록 효율이 올라가며 방출해서 적에게 피해도 줄 수 있는 [응징의 쐐기]
[부정 충격 방패]는 오러가 실린 공격도 1회 막아주고 피해를 되돌려주기까지 한다.
'나사가 조금 빠져있긴 해도.'
체력 소모 페널티나 대미지 누적이 안 되면 쓸모가 없다든지, 아니면 단면만 방어해주는 등.
효과가 뛰어난 대신 모자란 부분이 하나씩 있다.
'뭐, 적재적소에 활용하면 페널티 따위야.'
도구는 누가 쓰느냐에 따라 성능도 천지차이로 달라진다.
회귀 전 초월의 경지에 도달했던 유진은 장점을 극대화해서 활용할 자신이 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면 신관 쪽 문장도 수집해야 한다.'
로마노프 가문.
마법왕.
그리고 유진을 밀어내는 데 찬동했던 나머지 7대 명가들.
네크로맨서의 능력만으로는 모자라다.
가호를 최대까지 끌어내어 성좌 본연의 힘인 [신력]을 다루는 '왕'급 헌터들을 상대하려면.
'성자로서의 능력도 올려놔야 해.'
유진의 눈매가 차가워졌다.
〔계약자도 마음에 차지 않는 모양이로구나.〕
'뭐가?'
〔이 누추한 곳을 짐에게 헌상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 그리 눈을 뜬 것 아니더냐?〕
'그렇다 칩시다.'
〔크하하하핫. 짐은 개의치 않느니라. 중요한 건 진실된 마음이지, 형식 따위가 무엇이 중하겠느냐!〕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난리네.
유진은 굳이 크로노스의 오해를 풀어주지 않았다.
〔오늘은 참으로 기념비적인 날이다. 축일로 삼고 싶은 마음이구나.〕
'근데 말이야. 우리 성좌님.'
〔진언을 허락하마.〕
'존재감도 더 강해졌는데 나한테 가호 같은 건 못 내려줘?'
방금 전까지 호탕하게 웃던 크로노스가 돌연 사념을 뚝 끊어버렸다.
저런.
안 되는구나.
'괜히 기대했네.'
〔조, 조금만 기다리어라. 위업을 조금만 더 쌓으면 되느니라.〕
'애초에 기대를 하니까 배신당하는 거지. 내 잘못이다.'
〔어허! 짐은 허언을 내뱉지 않음을 모르느냐!〕
우리 성좌님. 더 힘내서 가호도 내려주고 하셔야죠.
드미트리는 이미 제우스를 수호성 삼아서 가문까지 설립하고 휘하 인재들에게 올림포스 성단의 가호를 퍼주고 있는데.
분발하지 않으면 이쪽도 곤란하다고.
크흐흐흐.
유진은 숨죽여 웃었다.
*
신전 건축을 마친 후에도 처리해야 할 일은 넘쳐났다.
"카라라락!"
[죽어라. 위대하신 주인님께서 명하셨다.]
콰앙-!
연평도 내부에는 여전히 괴물이 가득했다.
상륙 후 도륙한 놈들보다 섬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레리크의 숫자가 더 많았으니.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원래 마무리가 더 힘든 법이다."
투덜거리는 파프너를 쏘아본 후, 레리크 사체를 내려다보았다.
"내 부름에 응하라."
이번에는 [살점지배]로 뼈와 살을 분리한 후에 주문을 사용.
리터너 말고 다른 언데드를 일으켰다.
[스켈레톤 워리어를 제작합니다.]
[완성도가 매우 높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00% 상승합니다.]
[스켈레톤 워리어]
종족 : 언데드
등급 : ★★★
◎능력치
근력 : 217 / 민첩 : 241 / 체력 : 160 / 맷집 : 154 / 마력 : 85
◎특성
▷불사의 존재[C+]
◎스킬
▷가속[C] / 전력 베기[D+] / 암습[D+]
〔이상하도다. 분명 같은 3성일진대, 리터너보다 스펙이 떨어지다니.〕
'두 언데드는 제작 용도가 달라.'
맷집이 좋은 리터너는 전위에서 탱킹 담당.
스켈레톤 워리어는 특유의 민첩함을 살려서 적을 몰아치는 근접 딜러다.
'용도가 다르다곤 해도, 솔직히 리터너가 더 쓸 만하지.'
〔계약자가 아무 생각 없이 전력을 약화시킬 행동을 취하지는 않을 터.〕
'맞아. 이제 좀 감이 오나 봐?'
리터너는 좀비와 같은 약점을 공유한다.
염을 하지 않으면 부패한 살점과 피부, 근육이 썩어버리는 것.
장기적으로 유지하기엔 적합하지 않다.
'또 한 가지 약점은 속도가 느리다는 거지.'
연평도에서 한세월 머무를 것도 아니고.
레리크 토벌에는 발이 느린 리터너보다 스켈레톤 워리어가 훨씬 나았다.
언데드로 만들 시체는 도처에 널렸으니까.
전투능력이 떨어지는 것쯤, 큰 흠도 되지 않는다.
〔차라리 레버넌트를 더 만들지 그러느냐.〕
'그 녀석들은 제어가 어렵다.'
변종 레리크처럼 높은 성위의 적을 상대로는 물량이 큰 의미가 없다.
스켈레톤 워리어가 뼈칼을 수백 번 휘둘러야 단단한 비늘에 금이라도 갈 텐데.
놈들이 두 손 놓고 당해줄 리 있겠어?
레버넌트 제작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사항이었다.
'잔당처리는 이 녀석들이 나아.'
3일 밤낮 동안 쉴 새 없이 벌어진 전투.
연평도에 자리를 편 레리크들은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좋아. 여기까지 하자."
파프너가 의아한 듯 푸른 귀화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레리크들이 아직도 남았다만?]
"여긴 침식지대다. 시간이 지나면 또 재생성될걸."
접경지역과 마찬가지로 게이트와 일체화된 섬.
땅과 융합한 게이트는 마력을 충분히 빨아들이면 레리크를 다시금 뱉어낼 것이다.
완전하게 박멸하는 건 불가.
[하긴. 접경지역에 머무를 때도 괴물들이 주기적으로 땅에서 솟아났었다.]
파프너는 홀로 남아 네크로폴리스를 지켰던 상황을 떠올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남아있으면 위험하겠지. 근데 여긴 다 망자들만 있잖아."
[레리크들을 주기적으로 청소해주기만 하면 되겠네.]
"귀찮지만 어쩔 수 없다. 연평도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섬이니까 지켜야 해."
성당 아래에 묻힌 공허의 파편을 회수했으니, 인간사냥꾼들은 섬을 점령해도 가호를 받을 수 없다.
영령지와 공허의 파편.
악신 성좌와 채널이 연결된 건 두 조건이 충족되었기에 가능한 '이적'이었으니.
'그래도 넘겨주긴 싫어.'
인간사냥꾼의 주 전력은 몬스터.
해양 괴수라도 길들이지 않는 한, 연평도에 전력을 투사할 순 없다.
서해의 주도권 싸움에서 큰 역할을 할 요충지를 순순히 헌납하기는 그렇잖아?
"파프너야."
[역시 주인이 제일 신뢰하는 충복은 나인가?]
"...어. 맞긴 한데.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그러는 거냐."
[연평도 수비를 맡아달라는 거잖아.]
눈치 한번 빠르네.
조승철이 턱뼈를 위 아래로 거세게 움직였다.
[위대하신 주인님. 제게도 그 영광을.]
"넌 또 왜 그러냐."
생전의 조승철이 보면 아주 피눈물을 흘리겠네.
아니. 그 혼백도 깃들었으니, 본인 맞잖아.
"파프너가 내 하수인 중에 가장 세니까 여기에 남는 게 맞다."
[후후후. 보아라. 뼈만 남은 것아. 이게 바로 주인과 나의 유대감이다.]
[크윽, 분하다.]
두 언데드의 푸른 귀화가 거세게 타올랐다.
파프너야.
전생의 박하늘 씨는 과묵하고 참 든든했는데, 넌 대체 왜 그러는 거니.
[바로 떠날 건가?]
"네크로폴리스 좀 확장해놓고."
섬 지하에 흐르는 영맥은 셋.
영력 농도가 1이라서 검은 방첨탑을 축조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해야 하는 일이다.
"네크로폴리스의 안개로 섬을 뒤덮을 거다."
[그럼 연평도에 상륙을 시도하는 자들을 금방 알아채겠네.]
"수비하기도 한결 편해지지."
산 자들의 시야를 제한하는 네크로폴리스의 안개.
언데드에게는 버프까지 더해주니,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셈이다.
'망자의 골탑이나 영혼의 탑을 세우면 더 좋겠지만.'
네크로폴리스의 방어를 전담하는 구조물.
망자의 뼈 / 혼백을 탄환으로 삼아 적을 요격한다.
사거리도 길어서 지어놓기만 하면 인간사냥꾼이 섬에 발도 못 붙일 텐데.
'재료도 없고. 네크로폴리스 등급도 낮으니 어쩔 수 없나.'
아쉬움에 입맛을 한번 다셨다.
지금 만들 수 없는 걸 떠올려서 어디에 쓰겠어.
유진이 제일 신뢰하는 하수인이 섬을 지킬 테니, 큰 문제는 없으리라 믿어야지.
[주인. 부탁 하나만 하자.]
"더 이상 변종 레리크는 없는데?"
[그건 아니고. 네크로맨시를 알려줄 수 있나 해서.]
네크로맨시?
뜻밖의 부탁에 유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 될 건 없지. 근데 왜 네크로맨시에 관심이 생긴 거냐?"
[변종 레리크들을 먹으면서 언데드 지휘 특성도 추가되었잖아.]
"그러니 직접 만들어서 지휘하겠다는 건가."
[연평도에서 혼자 머물러야 하니, 네크로맨시 연습할 시간은 많을 거 같아서.]
파프너에게 네크로맨시를 전수한다?
흠-.
유진은 짧게 신음을 흘렸다.
'그 좋은 생각을 왜 이제까지 못했지?'
파프너의 특성 중에는 [마투사]가 있다.
어떤 스탯을 찍든 마력도 동일하게 오르고, 무투와 마법 양쪽 재능을 공유하는 사기적인 고유 특성.
'그러고 보면 데스 나이트가 되면서 암흑 마법도 줄곧 잘 다뤘었지.'
드래고니안 사체를 획득했을 때 엘드리치 드래곤 제작을 마음먹은 것도 파프너의 재능을 염두에 두어서다.
그럼 네크로맨시도 습득 못할 이유가 없잖아.
'나 대신 잔업해줄 사람, 아니 하수인이 옆에 있었다고?!'
세상에.
이렇게나 멍청할 수가!
아냐.
파프너의 재능이 뛰어나다지만, 네크로맨시에도 통용될지는 미지수다.
"그럼 테스트 한번 해보자."
[테스트?]
"이제부터 네크로맨시의 기본인 레이즈 언데드를 알려주마."
[주문을 익히는 속도를 보고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 보는 건가.]
파프너의 말에 긍정하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스킬을 전수하는 방법은 두 가지.
첫 번째는 깨달음을 정리한 [비급]을 상대에게 주는 것이고.
두 번째 방법은 숙련도를 100%까지 채운 스킬을 직접 설명하고 지도해주는 것이다.
'조건은 충족되었으니 바로 시작할까.'
네크로맨시 관련 스킬들은 계승만 받으면 숙련도가 100%다.
회귀 전의 경험이 반영되기 때문.
연금술이나 네크로맨시 분야는 누군가를 지도해본 경험도 많아서 파프너에게 알려주기도 쉬웠다.
"먼저 레이즈 언데드의 발동 원리부터 알려주마."
[경청하겠다.]
집중하는 파프너.
유진은 레이즈 언데드 주문의 특징 및 영력 재배열 방식을 쉽게 풀어주었다.
모든 설명을 들은 파프너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과연.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군.]
우우우웅-!
곧바로 영력을 손에 끌어올리더니 재배열해버렸다.
잠깐만요.
"거기서 영력을 비틀어버리면...."
재배열 과정에서 꼬여버린 영력이 강제로 풀어 헤쳐지고.
마법 주문이 폭주하면서 발생한 충격을 몸으로 받아낸 파프너가 손가락을 떨었다.
[그렇게 안 아프네.]
"야이."
사람 놀라게 하긴.
욕지거리가 목구멍 언저리에서 근질거렸지만 꾹 참았다.
평범한 마법 계 헌터였으면 주문의 반동으로 내상을 크게 입었을 터.
"내가 몸뚱이 튼튼하게 만들어줘서 버틴 줄 알아."
[잘 봐라. 이번에는 된다.]
파프너는 자신만만하게 외치면서 영력을 재배열했다.
어휴.
그러니까 설명 듣고 바로 한다고 될 거였으면 누구나 네크로맨서를 하....
[내 부름에 답하라.]
들썩거리는 레리크의 사체.
잠시 후, 좀비 한 마리가 침을 질질 흘리면서 일어났다.
"이게 되네."
유진은 허탈한 투로 중얼거렸다.
70화 새로운 무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