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eads / SANTOSUBEDENIVELCONNIGROMANCIA / Chapter 12 - 110-120

Chapter 12 - 110-120

110화 숨고르기

박하늘 씨의 헌신은 유진이 모아놓은 자료 덕에 증명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이 끝난 건 아니다.

"두 분께는 죄송한 이야기지만, 서류 결재를 받을 때까지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나중에 주인 휴대전화로 연락 줘도 된다.]

"그게 말입니다. 죽은 분이 돌아오는 경우는 없었으니까요."

헌터 협회는 정부 지원을 받은 공기업이다.

공무원만큼은 아니어도, 매뉴얼대로 일을 처리하는 관료제의 끝판 왕급 조직.

파프너 같은 케이스는 처음이라서 윗선에서도 곤란함을 내비쳤단다.

"행정이라."

유진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행정 처리 때문에 시간이 걸릴 줄은 생각도 못 했네.

파프너는 그 뒤로도 자신의 사망확인서를 작성하는 등, 서류 지옥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내 죽음을 인정하는 확인서에 서명을 할 줄이야.]

"보통은 가족이 해주는 거다. 내 덕에 진귀한 경험 했다 쳐."

[흠. 주인도 가족이 없는 건 마찬가지잖아.]

"와나. 갑자기 패드립은 좀 그렇네."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두 사람.

이렇게라도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 따분함이 가시지 않았다.

"양 부장님. 서류 작성은 파프너한테 맡겨둬도 되지 않겠습니까?"

"말씀드렸듯,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경우는 처음이다 보니 보호자가 필요합니다."

[들었지? 보호자 씨.]

"아오."

유진은 머리를 헝클었다.

할 일도 많은데 엉뚱한 곳에서 시간을 뺏기네.

그런데.

잠깐만요.

파프너가 작성 중인 서류를 보던 유진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왜 주민번호 뒷자리가 2로 시작해?"

[당연한 걸 왜 물어.]

"아니. 그러니까 2가 나오면... 여자란 말이잖아요."

[뭐야. 주인. 그것도 몰랐었어?]

"헐."

씨X.

이게 진짜라고요?!!!!

형, 아니 누나. 그게 무슨 말입니까 도대체!!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서 입술을 꾹 닫는 유진.

안 그러면 목구멍에서 아른거리는 비명이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말도 안 돼.'

〔크하하핫!!! 아주 흥미롭도다!!〕

'웃지 마! 이 양반아!!!'

〔그 잘난 회귀 전 지식으로도 이건 몰랐느냐?〕

'당연히 남자인 줄 알았다고.'

축축하게 젖은 등.

박하늘 씨가 여자였다고?

진짜 몰랐다.

〔그대의 대전사하고는 이미 두 번째로 인연을 맺었을진대, 정말 몰랐느냐?〕

'회귀 전에는 자의식이 거의 없었으니까.'

전생의 박하늘 씨는 과묵한 언데드였다.

복수심에 세상을 떠나지 못하고 땅에 붙들린 지박령.

감정 대부분이 휘발된 탓에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었다.

허.

이번만큼은 과묵했던 전생의 박하늘 씨가 1그램도 그립지 않았다.

〔걸작이로구나.〕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지 좀 마쇼.'

으.

머리 아파라.

유진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작은 해프닝(?) 후에도 작성해야 할 서류는 산더미처럼 많았고.

결국 모든 서류 처리가 끝난 건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후였다.

"보상금은 못 받았네."

짧게 투덜거린 유진.

박하늘 씨는 원칙적으로 죽은 자라서 공헌이 인정되어도 보상을 받을 수 없었다.

가족이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유진과 마찬가지로 고아 출신이라서 수령할 친인척도 없었다.

[됐다. 감사의 인사를 받은 걸로 충분해.]

"진짜야?"

[이미 죽어버린 몸. 노잣돈을 어디에 쓰겠어.]

"기념비라도 세워줄까 했지.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낸 의인, 박하늘. 여기 잠들다!"

[그,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

유진은 파프너의 격렬한 반응에 만족한다는 듯이 킬킬거렸다.

크흐흐흐.

이제야 속이 시원하네.

한 방 먹은 것을 이렇게 되돌려주는군!

〔짐이 보기에는 그대의 일방적인 오해였던 것 같구나.〕

'닥치세요.'

유진은 크로노스의 사념을 밀어냈다.

비겁하잖아.

팩트 가지고 사람을 패다니.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건 채, 헌터 협회 본관에서 나왔다.

*

다음 날.

유진은 뽀시래기 팀을 만났다.

"형님. 용병단 등록을 마쳤습니다."

"의외군. 하루 만에 통과를 시켜주다니."

"담당자가 블랙 컴퍼니 관련 기사를 이미 봤나 봅니다. 바로 통과되던데요."

누구는 하루 종일 서류 더미와 씨름을 하고 왔는데.

괜히 부러웠다.

"형님의 이름값 덕분에 번거로운 일을 모두 제친 거죠."

"잘했다. 용케 내 이름을 팔아먹을 생각을 했어."

"하핫, 감사합니다."

"오빠야. 그거 칭찬 아닌 거 같은데?"

"아니. 너희도 상황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내 이름 대든지 해."

유명세든 뭐든,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동원할 줄 알아야 한다.

손에 쥔 것을 활용하는 것도 능력이거든.

금전도 마찬가지다.

억만금이 있다 한들, 통장에 넣어두기만 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이자만 받잖아.

예금을 돌리든지.

부동산이라도 구매하든지.

어떤 식으로든 그 돈을 굴려야 불어나지, 가만 두면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형. 나 충격적인 이야기 들었다?"

"뭔데."

"그게 말이야. 형 나이가 23살이라고."

"말 안 했던가."

"으으음. 그럼 내가 형보다 더 누나인데."

"누나라고 불러줄까?"

시니컬한 유진의 대답에 강민영이 움츠러들었다.

"아니. 그럼 죽을 거 같아요."

"정 불편하면 너도 말 편하게 하든가."

"으으으음. 정중하게 사양할게요. 난 이게 편해. 형."

지금도 말투가 오락가락하는 거 같다만?

옆에 선 이성민이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다가 강민영에게 옆구리를 꼬집혔다.

"끄아아악!!"

"후배님. 많이 컸다?"

"말은 제대로 하시지 말임다. 원래 키는 제가 더 컸... 꾸에엑!!!"

시끌벅적한 분위기.

뽀시래기 팀에게 딸려 보낸 김미정이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내가 당신한테 붙어 있겠다곤 했지만, 애새끼들 뒤치다꺼리는 좀 아니지 않아?"

"싫으면 나찰 길드로 가든지."

"아. 난 6성 헌터라고. 밥값 해줄 테니 싸움터로 데려가줘."

김미정 씨.

뒤치다꺼리를 하는 건 당신이 아니라 뽀시래기 팀 같은데요.

일행이 늘어난 만큼 잡음도 늘어났다.

〔저 작은 인간은 차라리 험지에 두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

'눈에 안 보이면 다른 짓 할 거다.'

김미정을 붙들어 놓을 수 있는 것은 '흥미'다.

저 미친개를 써먹으려면 입맛에 맞는 먹이를 계속 주어야 한다.

〔하면 왜 뽀시래기 팀에게 미친개를 붙여두었느냐?〕

'김미정이 녀석들의 진면목을 알면 분명 흥미로워 할 거다.'

유진에 가려져서 티가 안 날 뿐.

뽀시래기 팀원들의 발전 속도는 일반적인 헌터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팀 리더인 강민호는 이미 마력을 제 수족처럼 다루고 있으니.

'레벨만 채우면 벽도 못 느끼고 4성에 도달할 거다.'

강민영과 이성민도 마찬가지다.

유진의 지도 덕분에 고유 특성이 지닌 가능성을 일깨웠고.

하루하루 정진하는 과정에서 벽을 두드리고 있었다.

'자기 자신은 모르고 있지만 말이야.'

〔벽이라는 것을 미리 부술 수도 있느냐?〕

'표현을 그렇게 한 것뿐이야.'

4성부터 존재하는 '벽'은 결국 마력을 운용하는 깨달음을 일컫는 표현방식이다.

극히 드문 경우지만 4성에 도달하기 전에 마력에 의념을 실어내는 방법을 깨우쳐서 레벨을 충족시키자마자 더 높은 성위로 올라간 케이스도 있고.

'천무문의 가주, 창 우페이가 대표적이지.'

중국을 대표하는 헌터.

또한, 7대 명가 중에서도 로마노프 가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력, '천무문'의 주인이기도 했다.

〔계약자의 대전사 또한 벽을 넘어서지 못했던 때에도 의념을 실어내지 않았더냐.〕

아.

멀리 갈 것도 없었네.

생전에 6성의 경지를 밟은 강자, 파프너.

그는, 아니 그녀는 [고대의 시험]에 맞춰서 능력치가 하락한 드래고니안 사체를 육신으로 삼은 후에도 암흑 투기를 펼칠 수 있었다.

'더럽게 적응 안 되네.'

말세로다. 말세야.

수십 년 만에 알게 된 파프너의 성별.

하루가 지났지만 충격은 여전했다.

유진은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마음에 남은 상념도 같이 털어냈다.

"성민아. 헌터넷에 용병단 광고 올렸냐?"

"예. 형님. 근데 별로 기대는 안 하고 있슴다."

"그건 가봐야 알 일이고."

뽀시래기 용병단.

어제 등록한 헌터 기업의 이름이자, 블랙 컴퍼니 산하의 용병 그룹이다.

용병단 이름치고는 너무 없어 보이지 않냐는 지적에.

"블랙 기업보단 낫지 말임다."

...라는 이성민의 뼈 있는 대답에 유진도 더 이상 뭐라고 할 수 없었다.

끙.

블랙 컴퍼니가 어때서?

〔이 시대의 작은 인간들은 사원들을 가축처럼 부리는 회사를 블랙 기업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만.〕

에잇.

크로노스, 당신은 언제 현대의 문화에 적응한 거냐!

이러다 조만간 스마트폰도 쓰겠어.

뽀시래기 용병단 발족식 및 채용 공고 장소는 어제 시연식을 치른 호텔 세미나 장소였다.

면접관들을 위해 마련된 테이블.

유진이 중앙에 앉자, 뽀시래기 팀은 양옆에 나란히 앉았다.

"제 눈이 잘못 된 거 아니지 말임다?"

"후배. 잘 본 거 맞아."

"지원자 숫자가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형님."

얼추 봐도 백 단위.

개중에는 '벽'을 넘어선 헌터 특유의 강인한 마력 파장을 내뿜는 이들도 섞여 있었다.

"쓸 만한 녀석들이 얼마나 있으려나."

[4성이 12명. 5성이 1명이다.]

"5성?"

이번에는 유진도 놀란 기색을 띄웠다.

블랙 컴퍼니.

뽀시래기 용병단의 배후에 존재하는 단체이자, 현재 국내 여론의 집중을 받고 있는 뜨거운 감자다.

지원자들이 몰려올 것은 짐작했지만 5성이나 되는 실력자가 올 줄이야.

"어억! 형님!"

"뭘 그렇게 놀라."

"저기, 저 사람. 그때 그 헌터입니다!"

"민호야. 주어 정도는 넣어서 말해주지 않을래."

"형님 영지에서 도망친 헌터 말입니다. 검은 늑대 용병대라고 했던 사람이요."

아.

줏대도 없이 도망쳤던 그 녀석?

네크로폴리스에서 도망친 녀석이 뭘 얻어먹으려고 여기까지 왔을까.

"면담 시작하자."

"예. 형님."

본인한테 직접 들어보면 알겠지.

유진은 팔짱을 낀 채, 대기 중인 헌터들을 나른한 눈으로 바라봤다.

"전 뽀시래기 용병단의 가능성을 보고 입사 신청을 했습니다!"

"다음."

"안녕하십니까. 변희영이라고 합니다. 현재 성위는...."

"다음."

미리 받아놓은 자소서 덕분에 지원자들의 고유 특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능성이 있는 자들은 받아들이고.

나머지 헌터들은 몇 마디 나눠보지도 않고 돌려보냈다.

"대체 무슨 기준으로 뽑으시는 걸까?"

"모르지. 형이 우리 키워준다고 한 이유도 모르잖아."

"사람 보는 기준이 따로 있으신 모양임다."

비치해놓은 과자를 축내는 뽀시래기 팀.

유진이 하는 일인 만큼, 무언가 깊은 뜻이 있는가보다 하고 상황을 관망했다.

그렇지만.

"아. 당신!"

"형씨. 다시 보니 반가워."

검은 늑대 팀의 리더, 민상진을 봤을 땐 가만히 있지 않았다.

접경지역에서 손속을 나눈 게 불과 며칠 전.

민상진이 용병단 지원 명단에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얼굴을 마주하니 뽀시래기 팀원들의 표정 위로 긴장감이 떠올랐다.

"너였군."

"당신이유? 그 언데드들을 다뤘던 헌터가."

"맞다."

"참, 그땐 얼굴 보려고 애를 써도 못 봤는데 이제야 인사하네."

"내 잘생긴 얼굴을 본 소감은?"

"비싸게 굴 만하긴 하네. 어쨌든 나 좀 받아주쇼."

유진은 손을 휘휘 저었다.

"글쎄. 싸운 지도 얼마 안 된 5성 헌터가 부하로 삼아달라고 하면 의심이 가지 않나."

"의뢰였으니까. 용병은 원래 그런 거 아니겠수."

"뽀시래기 용병단에 가입하려는 이유는?"

"당신도 대단한데 이 친구들도 만만찮더라고. 싹수 누런 곳에 빨리 붙으면 얻어먹을 것도 많아지잖아."

거친 말투와 달리, 그 내용은 굉장히 합리적이었다.

유진의 가능성을 보고 아래로 들어오겠다는 말.

며칠 전에 겨룬 상대에게 머리를 숙이는 과감한 판단력까지.

쓸 만하겠어.

"마음에 드는군. 합격이다."

"형님. 괜찮겠습니까?"

"난 상관 없지. 용병단 이끄는 건 너희잖아."

"...!"

강민호의 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떠졌다.

너무 걱정 마라.

자극이 되어야 더 빠르게 성장하지.

'검은 늑대라고 했던가. 저 녀석들이 용병단에 있으면 뽀시래기 팀도 더 자극을 받을 거다.'

먹히지 않으려면 강해져야 한다.

그 과정에서 땀깨나 흘리겠지만 말이야.

용병단에 가입한 헌터는 모두 20명. 뽀시래기 팀을 포함하면 23명으로 늘어났다.

"저, 형님. 일단 말씀하신대로 용병단을 차리긴 했습니다만."

"당장 굴리긴 어렵겠지."

"예. 번듯한 회사 건물도 없고 사무직을 맡아줄 직원도 안 뽑았으니까요."

"그건 임 이사한테 부탁해라. 간단한 체계는 잡아놨을 거다."

[성자의 눈물] 시연회 전에 지시해놨으니.

대략적인 준비는 끝냈을 것이다.

"언제 거기까지...."

"당장은 새로 가입한 헌터들 굴릴 생각 하지 마. 어차피 이름값 보고 발 걸친 친구들이니까."

"알겠습니다. 형님."

"뽀시래기 용병단을 제대로 굴리는 건 세 사람이 모두 4성의 벽을 넘어선 후다."

"더 노력해야겠군요."

"지금처럼만 해."

유진은 강민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형님. 저흰 그럼 접경지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어. 먼저 가라."

"아직 볼 일이 남으신 겁니까?"

"실험해볼 게 있거든."

나찰 길드와의 전쟁을 마친 후에 크로노스가 준 아이디어.

언데드 신관 제작을 연구해볼 계획이다.

〔다른 성좌들이 알면 경을 치겠구나.〕

'오히려 좋아.'

7대 가문과의 전쟁도 피할 수 없는데, 성좌들의 미움을 사는 것 정도야.

유진은 킬킬거렸다.

111화 불경한 시도(1)

신관의 주검을 언데드로 제작하는 행위.

전생에도 시도해본 적은 있었다.

'보기 좋게 실패했지.'

신관의 힘은 숭배하는 〔성좌〕나 별들의 집단인 〔성단〕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근데 말이야.

성좌라는 족속들은 하나 같이 언데드를 무지막지하게 혐오하거든.

'내가 9번째 성위를 완성했을 때조차 외면했다.'

하물며.

강령술로 자신들을 섬긴 필멸자의 육체를 욕보인다?

그 치졸한 양반들이 퍽이나 좋아하겠어.

'시체를 되살리려고 하면 성력이 반발을 일으킨다.'

영력으로 그 반발을 찍어 누를 순 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충격을 받은 신관의 육체가 붕괴한단 거지.

성좌들이 부여한 힘이 사라지기를 기다려본 후에 망자로 되살려보기도 했다.

'그렇게 만들어봐야 좀비 A 수준일 뿐.'

신관들의 육체능력은 마법계 헌터보다도 떨어진다.

특수한 힘.

그러니까 성력이 없는 시체는 오크보다도 못한 신세였으니.

전생의 유진은 신관의 능력을 보유한 언데드를 만들어보려고 다방면으로 시도해봤지만, 성과를 내지 못했다.

'안 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생각 자체를 포기했지.'

그런데.

이게 웬일.

크로노스의 조언 덕에 새로운 가능성을 찾았다.

당사자야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지만, 유진의 뇌리에는 그 말이 천둥처럼 큰 파장을 일으켰다.

〔모두 짐의 혜안 덕분이지 않느냐.〕

'가능성만 찾았단 거다. 직접 해보지 않으면 몰라.'

〔크하핫. 0에 몇을 곱하든 결과는 0이지만, 1이라도 되면 숫자가 무한하게 커질 수 있느니라.〕

이 양반은 현대적인 표현을 어디서 계속 배워 오는 거니.

'성좌님 살던 시대에는 0이라는 표현도 없었잖아.'

〔짐의 옛 흔적마저 버린 마당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을 가질 리 있느냐.〕

쓸데없이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양반일세.

유진은 휴대전화를 들었다.

뚜- 뚜-.

-축하드립니다, 블랙 컴퍼니의 천 대표님. 요즘은 대표님 이야기로 들썩거리는군요.

"미스터 블랙. 못 보던 사이에 농담이 꽤나 늘었네?"

-저흰 동업자 아닙니까. 그라운드 제로의 삼강 중 하나가 자리를 잡아가니 기뻐서 그렇습니다.

음지에도 발을 담그고 있으면서 대외 활동을 너무 크게 하는 게 아니냐는 질책.

픽-.

유진은 실소를 터트렸다.

"그렇게나 기뻐할 줄 몰랐네. 기념으로 물건 하나만 알아봐줘."

-...물건 말입니까?

"신관계 헌터나 몬스터의 시체."

-그, 저번에 말씀하신 의뢰의 연장선입니까?

유진은 미스터 블랙에게 종류 불문하고 강한 존재(몬스터, 사람)의 시체를 구해달란 의뢰를 했었다.

생각해보니 그 의뢰, 진척사항을 못 들었군.

"아니. 별개다. 신관이기만 하면 돼."

-1성이라도 된다면 바로 구해드릴 수 있습니다.

"꼭 사람 하나 죽여서 가져올 분위기다?"

-저는 상인입니다. 불필요한 일이 아니면 손에 피 묻히는 거 싫어합니다.

반대로 '필요하다'면 일에는 얼마든지 피를 묻힐 수 있다는 말.

참 재미있는 양반이야.

"얼마나 구할 수 있나?"

-흠. 21, 23, 아니. 27구 가능하군요.

"그럼 바로 구해줘. 대금은 내일 가는대로 치르지."

-알겠습니다.

"시체는 염을 해서 부패하지 않게 해주고. 배 하나도 준비해줘."

-요구사항이 갈수록 늘어나는군요.

"거, 적당히 금액 청구해. 얼마나 해먹으려고 밑밥을 깔아."

당신 수법 한두 번 보는 거 아니거든.

전생에는 개성에 물건 공급하는 게 어렵단 말로 엄청나게 해먹었던 녀석이다.

어떻게 말투 하나 달라진 게 없냐.

-크흠, 알겠습니다.

다음에도 그래봐.

그럼 국물도 없을 줄 알아.

통화를 끊은 후, 용산 헌터 마켓으로 이동했다.

〔바로 신전에 가지 않는 게냐?〕

'촉매들도 사놔야지.'

신관의 주검을 언데드로 되살리는 연구.

크로노스가 부여한 힘만 가지고 해결이 되면 좋겠지만, 그렇게 될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지식의 도서관]에도 기록되지 않은 새로운 언데드를 만드는 일이다.

회귀 전에 시도한 연구 데이터는 모두 머릿속에 두고 있지만.

연구에서 무슨 변수가 나타날지 알 수 없다.

'경우의 수가 많으니. 그에 맞춰 대응 가능한 재료들을 사는 거다.'

〔본격적이구나.〕

'나도 안 해본 일이야. 아니. 정확히는 실패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을 멈추지 않는 자세. 보기 좋도다.〕

'요새 칭찬이 과하네. 따로 원하는 거라도 있나?'

〔진심어린 칭찬은 그냥 받아들이어라.〕

투덜거리는 크로노스의 사념을 한 귀로 흘리며 헌터 마켓을 돌았다.

"하얀 백석은 없나요?"

"아이고야. 손님이 뭘 모르네. 하얀 백석은 부르는 게 값이여."

빛 속성 마력이나 성력을 증폭시켜주는 촉매, 하얀 백석.

회귀 전 기준으로는 안정된 공급처가 있어서 자금만 충분하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수준이 많이 떨어지는군.'

미간을 찌푸리는 유진.

[하얀 백석]만이 아니다.

옛 기억과 비교하면 시중에 풀려 있는 촉매나 시약, 마법 아이템들의 질이 훨씬 떨어졌다.

신준석을 부려먹으면 좋겠지만.

블랙 컴퍼니가 막 출범한 상황이라 연금술 노ㅇ... 아니, 동업자 양반도 바쁜 상황이란 말이지.

'모자라면 그것대로 대로 쓸 수밖에.'

언제는 100% 준비가 될 때를 기다렸던가.

그랬으면 전생에 9번째 성위를 완성시키지도, [크로노스의 회중시계]를 발동시키지도 못했을 것이다.

뭐든 임기응변이 중요한 법이다.

[흑암의 반지]의 이전 주인들이 쌓아 올린 방대한 정보와 유진의 경험을 합하면 어떻게든 대처가 가능할 터.

"그럼 붉은 흑석은 있습니까?"

"흐으음. 그건 1kg당 100만 원 정도 하네요."

"100kg만 주시죠."

"그럼 500 깎아서 9500에 해드리리다."

"흑마법사 말고는 쓰지도 않는 걸. 1500 깎아 줘요."

"젊은 양반이 못하는 말이 없어!"

"싫으면 말고."

....

최종 흥정가는 1천만 원 할인.

상인은 왠지 모를 분한 표정으로 붉은 흑석을 내주었다.

-흑석은 어떤 효능이 깃들어 있느냐?

'음차원의 마력을 증폭시켜준다.'

-그 말인즉슨, 흑마기와 관련된 촉매란 말이로구나. 성력과 대칭을 이루는 힘이건만.

'맞다.'

-백석과 정반대의 성질을 지녔거늘. 어찌 사용하려는 게냐?

'성좌님의 힘. 영력이랑 파장이 비슷하거든.'

파장이 비슷하다고 해서 같은 힘인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만일 두 힘이 같다면 [백야] 특성으로 성력/영력을 바꿔줄 필요가 없겠지.

평범한 신관계 헌터라면 [적색 흑석]을 성력 증폭 용도로 구매하지는 않았으리라.

'변칙적인 응용 방법이 필요해.'

-그대에게는 가능하단 말이로구나.

'아무렴. 초월의 경지는 포커로 딴 게 아니다.'

사야 할 아이템은 많다.

전생만큼 아이템의 종류와 양도 풍부하지 않으니, 부지런히 돌아다녀야겠어.

유진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

유진은 헌터 마켓 여기저기를 들쑤셨다.

"보관 상태도 안 좋네. 500만 원만 깎아줘요."

"아. 여기 먼지 봐. 나 아니면 살 사람도 없겠고만. 팔기 싫으면 말고."

"얼마나 깎아준다고요?"

아이템 가격 흥정은 기본이고.

매의 눈으로 구매하려는 촉매나 아이템의 흠집을 찾아내서 악착같이 물건 값을 깎아냈다.

〔계약자여. 혹, 자본이 충분치 않느냐?〕

'아니. 돈은 썩어 넘치는데요.'

거미 사냥 때 번 돈만 수십억이다.

최근에 나찰 길드 집단군을 몰살시키면서 획득한 아이템들까지 처분하면?

응용 가능한 예산이 100억은 넘을 것이다.

'이번에 쓴 돈이 30억 좀 안 되니까 자산은 여유가 있다.'

〔한데 왜 그리 지독하게 협상을 하느냐?〕

'우리나라에는 이런 속담이 있어요.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억지로 흠을 잡은 건 아니다.

그냥 마음 놓고 사려고 해도 아이템이나 촉매, 혹은 재료의 모자란 부분이 눈에 들어오는 걸 어떻게 하겠는가.

신준석만큼은 아니어도, 회귀 전 연금술에서 '장인'이라고 불릴 정도의 실력을 보유했던 몸이다.

보이는 것을 지적.

돈을 깎는 게 잘못된 것은 아니잖아.

〔그대의 일방적인 주장은 잘 들었도다.〕

'아. 제 값 받고 싶으면 보관이나 유통을 잘 하던지!'

크로노스의 핀잔을 못 들은 척하며 구매한 아이템들을 확인했다.

[포션 보관 용기 X 300]

[적색 흑석 100kg]

[화이트 허브 33kg]

[블루 슬라임의 점액질 45Kg]

[E급 마석 1,000개]

[미스릴 500g]

[혼철 5kg]

[로아힘의 깃털 10kg]

구매한 아이템은 모두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바로 가는 게냐?〕

'동업자 양반한테 시킬 일이 하나 있다.'

파주 공방으로 간 유진은 다짜고짜 공터에 E급 마석 1천 개를 쏟아버렸다.

"이건 뭡니까?"

"다 마석 융해액으로 만들어줘. 농도는 35%로."

"갑자기 쳐들어와서 하는 말 치고는 굉장히, 좀 그렇군요."

"새 연구에 필요하다. 내가 아는 연금술사 중에서 동업자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어서 온 거다."

"정말입니까?"

연신 씰룩거리는 연금술사의 뺨.

하여간 참 감정 읽기가 쉬운 사람이다.

"요즘 바쁘지? 안 해줘도 돼. 다른 사람 구해봐야지."

"동업자님 연구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되지 않습니까. 제가 이번만 특별히 도와드리겠습니다."

신준석은 E급 마석들을 순식간에 융해, 유진이 말한 비율대로 맞춰주었다.

"이제부터는 수작업 좀 해야겠군."

빈 포션 병 300개에 마석 융해액을 같은 비율로 담아둔 후, 마개를 꾹 닫았다.

뚜껑을 열어두면 융해액에 스며든 마력이 서서히 흩어진다.

밀폐 용기를 준비해둔 이유.

"나 며칠 동안은 연락 안 될 거니까 문제 생기면 마담한테 이야기해."

"어디 가십니까?"

"연평도."

신준석한테 행선지를 밝히고는 그라운드 제로로 향했다.

해안가에 정박된 작은 선박.

연평도 탐색 및 공략 때 수송을 담당했던 쾌속선이 유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말씀하신 것은 모두 배에 넣어두었습니다."

"좋아."

"강력한 몬스터의 사체도 조만간 그라운드 제로로 들어올 것 같습니다."

"오는 중에 썩거나 하진 않겠지?"

"실어놓기 전에 염 처리는 모두 했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인간사냥꾼과 정면으로 승부를 벌이려면 강력한 언데드가 훨씬 많이 필요했다.

"시체가 들어오면 연락해줘라."

"천 대표님. 잊으신 게 있지 않습니까?"

"알았다. 바로 입금해주마."

휴대전화를 몇 번 터치하니 미스터 블랙의 뺨 위로 한 줄기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

촤아아아-!

거센 파도를 가르며 나아간 쾌속선.

연이은 전투로 초토화 된 해안가에 어렵사리 정박한 후, 시체를 모두 하역했다.

"천 대표님. 언제 오면 됩니까?"

"1주일. 혹시 모르니 보급도 챙겨와."

"알겠습니다요."

쾌속선 선장은 군말 없이 뱃머리를 반대로 돌렸다.

보급품을 챙겨오라곤 했지만, 이왕이면 더 머무르지 않고 빨리 연구가 끝났으면 좋겠군.

〔그대의 능력이라면 가능하지 않겠느냐?〕

'너무 낙관하는 것도 안 좋아.'

해안가에 대기 중인 리터너들에게 지시.

신관계 헌터, 혹은 몬스터의 시체를 들게 하고는 섬 중심부로 이동했다.

대격변이 발생하기 전에는 예배당으로 활용된 건물.

이젠 새롭게 나타난 성좌, 〔역천의 거인〕을 모시는 신전 앞에 시체들을 내려놓았다.

〔마음이 편안해지는구나.〕

'당신 모시는 신전이잖아. 그럴 만 하지.'

〔흠. 짐의 위대함을 담아내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한 구조물이니라.〕

'기다려봐. 나중에 증축해준다니까.'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신전의 완성도가 높을수록, 성좌의 존재력과 영성도 강해진다.

'이용할 수 있는 건 모조리 활용할 거다.'

〔짐의 유일한 신도인 주제에 신실함 따윈 찾아볼 수 없는 발언이로구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신실한 신도 찾아보던가.'

〔짐의 대변자인 그대가 포교를 하지 않는데 어찌 합당한 자를 찾을 수 있겠느냐!〕

포교해도 신도 하나 못 받을 정도로 존재감이 약한 주제에.

하여간 말은 잘해요.

'이제부터 집중해야 하니까 말 걸지 마.'

[무한의 주머니]에 손을 넣은 유진이 푸른빛을 품은 병을 꺼냈다.

마석 융해액을 담은 용기.

탁- 탁-.

신전 바닥에 병 300개를 늘어놓은 후, 길게 심호흡을 했다.

'한 번 해보자고.'

[고유 특성 - 백야를 사용합니다.]

[마력 → 성력으로 치환됩니다.]

충만하게 차오르는 성력.

유진은 바닥에 손을 대고 신전의 기운과 자신의 성력을 동화시켰다.

[역천의 거인을 모시는 신전과 동화되었습니다.]

[해당 구조물은 신전의 기초 조건만 충족시켰습니다.]

[수행 가능한 명령 - 성수 제작]

[더 많은 이적을 행하려면 신전을 증축하거나 신도 숫자를 늘리십시오.]

괜찮아.

당장 필요한 기능은 있거든.

증축은 나중에 얼마든지 해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라.

'성수를 제작한다.'

스스스슷-!

영령지에 깃든 기운이 용솟음치면서 신전을 감싸기 시작했다.

112화 불경한 시도(2)

성수.

헌터들에게는 신전의 존재 의의라고까지 불리는 아이템이다.

'성수의 공통 효과는 정화.'

어느 성단이든 막론하고, 저주 같은 부정한 기운을 없애주는 능력.

부가옵션은 각 성단마다 차이가 있다.

〔성단 - 올림포스의 성수〕

추가 효과 : 반응 속도 10% 감소

〔성단 - 아스가르드의 성수〕

추가 효과 : 고통 내성 10% 증가

〔성단 - 베다의 성수〕

추가 효과 : 연산 속도 10% 감소

이외에도 성단마다 부여되는 능력이 여럿 있고.

또한, 성수의 등급에 따라 버프 효율도 크게 올라가기까지 한다.

〔성수와 포션만 충분하면 신관계 헌터가 없어도 충분히 사냥을 하겠구나.〕

'이론상으로는 그렇지.'

격렬한 전투 중에 부상을 입으면?

혹은 디버프에 걸려서 전투능력이 크게 하락하면?

싸움은 늘 변수로 가득하다.

포션이나 성수에 의지해서는 위기가 닥쳤을 때 즉각적으로 대응하기가 어려웠다.

'가격도 비싸.'

하급 포션은 개당 100만 원.

성수는 가장 낮은 등급을 기준으로 평균 250만 원이다.

신관 직업군으로 전직 가능한 '고유 특성' 보유 헌터들이 각광받는 이유이기도 했다.

〔명예롭게 여기어라. 그대는 짐이 은사를 내려준 덕에 신관의 능력도 손에 넣지 않았느냐.〕

'네네. 감사합니다. 위대하신 성좌 나으리.'

〔크하하핫! 이제 겸손함을 조금 학습했구나. 보기 좋도다.〕

이 양반은 비꼬는 것도 몰라요.

스으으으으-.

신전이 품고 있는 기운을 마력 융해액이 담긴 용기로 유도.

〔역천의 거인〕의 성질을 띤 축복을 불어넣는다.

회귀 전 · 후를 통틀어서 처음 시도하는 일.

그렇지만.

신전, 정확히는 신전과 연결시켜주는 [시스템]의 보조 덕에 큰 문제없이 축복을 부여할 수 있었다.

'기억해둬야겠어. 이 힘의 응용 방법.'

〔역천의 거인〕을 섬기면서 얻게 된 성력은 유진이 다뤘던 영력과 운용 감각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성수 제작 같은 세세한 부분으로 들어가니 마법하고는 응용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신성 주문이야 발동 매커니즘을 그럭저럭 이해했다만. 배울 게 많네.'

유진은 히죽거렸다.

얼마 동안 축복을 융해액에 부여했을까.

[성좌 - 역천의 거인의 성수를 제작했습니다.]

푸른빛을 띠던 액체가 원래의 색을 잃어버리고 우윳빛으로 물들었다.

유진은 조심스럽게 성수가 담긴 병을 들어 올렸다.

[역천의 성수]

등급 : 매직

분류 : 소모품

내구도 : 10/10

역천의 거인의 축복이 깃든 성수입니다. 완성도가 높습니다.

*복용 시 Lv 15 이하 저주 해제.

*복용 시 하급 언데드에게 선공을 당하지 않음.

"신기하네."

찰랑거리는 액체를 본 유진이 멍한 투로 중얼거렸다.

하급 언데드에게 선공을 안 당한다, 라.

언데드가 주로 출몰하는 게이트는 많지 않다.

그럼 실용성이 없냐고?

'뽀시래기 팀한테 주면 되겠어.'

유진은 뽀시래기 팀과 호흡을 맞출 때, 늘 언데드들이 세 사람을 공격하지 않게끔 의식적으로 컨트롤해야 했다.

산 자라면 눈 뒤집혀서 달려드는 게 언데드이니.

나름대로 심력 소모가 있었는데, 성수를 먹이면 언데드를 자제시킬 필요가 없어진다.

〔계약자. 성수에도 등급이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매직이면 하급. 레어면 중급. 유니크는 고급으로 분류해.'

유진은 곧바로 다음 작업을 개시했다.

늘어나는 성수 병.

18번째 병에 축복을 부여하는 순간, 신전을 휘감은 기운이 모두 소진되었다.

'하루 최대 18병인가.'

예상보다 적군.

조금 아쉽지만, 이 정도에서 만족해야겠다.

관점을 바꿔서 보면, 기초적인 구조물 수준도 못 되는 신전치고는 크게 활약한 셈.

"시체 하나를 가져와라."

-그우우.

리터너가 고블린 사제의 주검을 유진의 앞에 옮겨 놓았다.

고블린이라.

회귀 직후에 들어간 게이트, [고대의 정원]이 떠오르는군.

〔이제부터는 무얼 하려는 게냐?〕

'성수를 몸 곳곳으로 순환시킬 거다.'

멈춰버린 심장.

육체는 진즉에 사후강직이 진행되어서 굳어 있다.

그럼에도, 방법은 있지.

고블린 사제의 주검에 손을 얹고는 영력을 불어 넣었다.

영력으로 시체를 정련.

되살릴 때 보다 강력한 스펙으로 탈바꿈시키는 유진의 비의가 펼쳐졌다.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

전신을 순환하던 영력이 멈춘 심장으로 뭉쳤다.

그와 동시에.

[살점지배를 사용합니다.]

망자의 살점을 조종하는 기초 수준의 강령술로 심장을 움직였다.

정확히는 심장을 구성하는 '근육'에 이완과 수축을 흉내 내는 식으로 움직이는 행위.

쪼르륵-.

고블린 사제의 혈관에 성수를 직접 들이붓자, 심장의 박동에 맞춰 전신을 순환했다.

이미 죽어버린 몸뚱이.

인위적으로 심장을 움직여도 세맥 여기저기가 훼손되어 있어서 성수가 흐를 리 없지만.

'내가 영력을 괜히 순환시킨 줄 알아?'

영력으로 닦아놓은 길.

방금 전에 만든 뜨끈뜨끈한 성수가 고블린 사제의 몸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성좌의 축복으로 빚어낸 성수라면 죽은 몸에 깃든 힘을 몰아낼 수 있다.'

허연 연기가 시체의 칠공에서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여기까지는 계산대로.

좋아.

그 다음으로 넘어가볼까.

"내 부름에 답하라."

힘 있는 음성과 함께 [레이즈 데드]를 사용했다.

대상은 방금 전에 성수로 온몸을 깨끗하게 씻어낸 고블린 사제의 주검.

재배열한 영력이 스며들자, 고블린의 몸뚱이가 들썩거렸다.

[해당 시체는 성좌 〔망각의 대적자〕의 소유입니다.]

[〔망각의 대적자〕가 남긴 염(念)이 강령술을 훼방합니다.]

〔자신만만하게 나섰건만, 결국 성좌의 염을 밀어내지는 못하였구나.〕

'훨씬 완화시켰잖아. 그 정도면 충분해.'

이 양반 보소.

무얼 모르고 하는 소리 하고는.

성수로 고블린 사제의 몸뚱이를 씻어내지 않았으면 [레이즈 데드] 주문이 파훼되면서 그 반동을 고스란히 감당했을 것이다.

이 정도만 반발이면 꽤나 성공적이라고.

바들바들 떨던 시체의 움직임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호오. 그야말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순간이로구나.〕

'글쎄다. 아직 낙관하기는....'

두둑-! 두두둑!!!

유진이 사념을 다 내보내기도 전에 고블린 사제의 주검이 각기 춤을 추듯 몸을 비틀면서 일어났다.

뼈가 꺾이는 섬뜩한 소리.

고장나버린 자동인형처럼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더니.

콰득, 도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대상을 찾을 수 없습니다.]

'보기 좋게 실패했군.'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표정이 꽤 좋아 보인다만?〕

'첫 시도에서 가능성을 봤잖아.'

새로운 언데드를 만드는 게 쉬운 일인 줄 아니.

전대 네크로맨서들도 자연 발생한 언데드를 연구하거나 무수한 실험을 거쳐서 강령술 이론을 정립했다.

유진도 [레버넌트]나 [아머드 시리즈] 등, 기존의 개념에 없는 언데드를 제작할 때 셀 수도 없는 시도를 했었고.

'이 정도면 빠르게 감을 잡은 거다.'

마력 융해액을 담은 용기는 300개.

그 중 하나만 쓴 것뿐이다.

남은 299번 안에는 어떻게든 되겠지, 뭐.

유진은 느긋한 마음으로 두 번째 성수 병을 들었다.

*

실험 1주일 째.

챙겨온 용기 중 1/3이 바닥을 드러냈고, 시체도 절반이나 소모했다.

'흠. 역시 쉽지가 않아.'

유진은 반발작용에 무너진 시체를 흘겨보았다.

첫 시도에서 가능성을 본 후, 의욕에 가득 차서 다시 한번 언데드 제작에 착수했다.

그렇지만.

두 번째 시도 때는 시체의 반발력이 줄어들기는커녕 원래보다 훨씬 강해져서 [시체 폭발]을 전개한 것 마냥 터져버렸다.

'비율 문제? 아니면 순환 문제인가.'

하루 생산 개수가 18개뿐이긴 해도, 성수는 계속해서 만들 수 있다.

그렇지만 신관계 몬스터나 헌터의 시체는 별개.

미스터 블랙에게서 공수한 27구를 모두 소모하면 다시 구해야 하는데, 이번처럼 빠르게 구해지리란 보장은 없다.

바로 3번째 시체를 되살리는 것은 포기.

유진은 성수의 구성과 성분, 그리고 비율을 차근차근 분석했다.

〔짐의 조력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크로노스가 주관하는 영역은 죽음을 거스르는 것.

언데드의 성좌라고 봐도 무방하다.

최근에 하나뿐인 신도이자, 크로노스의 대리인이기도 한 유진의 활약 덕에 존재감을 꽤 키운 상황.

마음먹으면 유진의 연구에 힘을 보탤 신성 주문을 부여하는 것도 가능했다.

'힘 아껴. 나한테 가호 내려주기로 한 거 잊지 말라고.'

〔자신만만하구나.〕

'9성은 포커로 딴 게 아니라니까. 몇 번을 말하게 하네.'

유진이 회귀 직후에 크로노스를 찾아간 진짜 이유.

성좌만이 내려줄 수 있는 강력한 능력, 바로 가호 때문이다.

'결국 신격에 닿을 수 있는 건 가호의 유무야.'

유진이 마법왕 드미트리와 동격을 이루었음에도.

그와 마찬가지로 9성에 도달했던 헬 나이트 박하늘이 그를 보좌했음에도.

드미트리를 넘어서지 못한 것은 〔화신체〕 때문이었다.

〔마력에 기반을 둔 공격은 격이 높은 존재에게 통용되지 않느니라.〕

'신력이 담기지 않은 공격은 90% 경감이었지.'

화신체가 두르고 있는 아우라는 모든 공격의 위력을 최소한으로 억눌러버린다.

놈은 그 효과를 믿고 마법계 헌터 주제에 최전선에서 탱킹을 했다.

방어마법에 아우라를 두르면 헬 나이트의 암흑 투기도, 본 드래곤의 브레스도 가볍게 막아냈으니.

'가호 내놓을 때까진 신성 주문 만드는 거 자제 좀 하쇼. 엉?'

〔알겠노라.〕

'그리고 말이야. 나도 자존심이 있어.'

매번 성좌님에게 의지할 순 없지.

신성을 지닌 언데드.

한 번 만들면 끝나겠는가.

개량하고 더 강화해서 주력으로 쓸 만한 전력까지 키워볼 생각이다.

'내 손으로 해내야 그 다음이 있는 법이다.'

유진은 마지막에 했던 작업을 떠올렸다.

그래.

성수의 구성 및 작용 과정을 모두 분석했지.

'신관계 헌터나 몬스터의 사체를 언데드로 만들려면 성수 하나만 가지고는 안 돼.'

뭐, 성수 하나로 해결되면 얼마나 쉬웠겠어?

유진은 천사 계열 몬스터인 [로아힘의 깃털]과 [화이트 허브]를 3.3대 1의 비율로 놓고 정성스럽게 빻았다.

그 후, 감으로 100그램을 측량해서 성수에 넣고 휘휘 저은 후 완전히 가루가 녹을 때까지 두었다.

〔호오. 다음 방책을 마련해두었더냐?〕

'배합비만 제대로 맞추면 성수의 효율을 늘려준다.'

[지식의 도서관]에 담긴 연금술 지식 중 일부.

다음으로는 [적색 흑석] 한 줌을 시체의 가슴팍 위에 올려두고.

작은 바 형태로 조형한 미스릴 30그램과 혼철 500그램을 몸 곳곳에 박았다.

〔이 재료들을 사용하는 근거가 궁금하구나.〕

'전생에 신관의 시체로 언데드를 만들어볼까 해서 연구했던 적이 있다고 했지?'

〔기억하는도다.〕

'미스릴은 성력과 궁합이 잘 맞아. 혼철은 기운을 도인하는 촉매이고.'

적색 흑석은 성력을 안정시켜줄 마스터 키.

원래는 [하얀 백석]이 그 자리에 들어가야 하지만, 궁여지책으로 넣었다.

〔호오. 조금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게 연금술이라고 들었다만.〕

'요령으로 때워야지. 어쩌겠어?'

방법은 동일했다.

[살점지배]로 죽은 자의 심장을 뛰게 하고.

미리 닦아놓은 길로 성수를 흘려보내어 전신에 순환을 시킨다.

'여기에 적색 흑석을 연결시키면...!'

쿵, 성력을 받아들인 돌덩어리가 크게 요동쳤다.

음차원의 마력을 증폭시키는 촉매에 성수를 끼얹으니 당연한 일.

유진은 성수의 파장을 최대한 적색 흑석과 동기화시켰다.

'난 할 수 있다.'

성력과 영력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고유 특성, 백야.

대칭되는 두 힘을 모두 다루는 유진이라면, 영력과 성질이 비슷한 크로노스의 성력을 적색 흑석과 맞출 수 있으리라.

파르르르르-!

크게 반발하던 적색 흑석의 움직임이 가라앉는다.

후우우- 긴 한숨을 내뱉는 유진.

'이 감각 익힌다고 성수를 얼마나 쓴 건지.'

적색 흑석으로 증폭된 성력이 죽은 자의 몸뚱이에 남아있는 〔성단〕의 존재감을 손쉽게 밀어냈다.

드디어.

유진이 기다리고 있던 순간이 찾아왔다.

"내 부름에 답하라."

몸을 일으키는 신관계 헌터.

눈가에 일렁이는 푸른 불꽃이 점점 선명해진다.

우우웅-!

막 일어난 시체의 두 손에서 우윳빛 기운이 아른거렸다.

경건함마저 느껴지는 기류.

그래.

신관을 상징하는 힘, 성력이다.

"이게 되네."

유진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113화 디파일러

겉보기는 좀비와 큰 차이가 없는 언데드.

손에 감도는 성력이 아니었으면 무심코 넘어갔을지도 모를 정도다.

유진은 막 일어난 언데드의 몸에 영력을 불어넣었다.

'신체기능은 63% 저하. 반발력을 완전히 해소하진 못했군.'

강령술을 사용하기 전, 여러 조치를 취했음에도 신체 훼손을 피해가진 못했다.

뭐, 괜찮아.

성단, 혹은 성좌의 간섭을 피해서 언데드로 되살리는 걸 해냈다는 것이 중요했다.

'다음으로 볼 것은....'

미스릴과 혼철, 그리고 영력으로 닦아낸 성력의 통로.

영력이 성력과 충돌하면 곤란하니 신중하게 힘을 운용해서 망자의 상태를 체크했다.

'몸에 깃든 성력은 안정화되었다.'

망자의 육신을 되살리고, 나아가서 움직일 힘을 부여하는 건 영력.

방금 만들어낸 언데드는 달랐다.

육신을 제어하는 힘은 바로 성력, 신관의 근원이다.

상태창으로 확인해보면 마력 대신 성력이 표시되어 있겠지.

〔드디어 성공한 게냐!〕

'샴페인을 따기는 아직 일러.'

영력에 비해 효율이 떨어지는 성력.

[레이즈 데드]로 만든 평범한 언데드의 능력이 100이라고 하면.

성력을 기반 삼아 일으켜 세운 망자는 30이나 40 수준에 불과한 스펙을 보유했다.

'이 정도로는 기초 수준의 신성 주문도 사용할 수 없어.'

제대로 기능하려면 여러 차례 조정이 필요하겠어.

유진은 되살린 망자의 육신 내부와 외부를 꼼꼼하게 점검, 모자란 부분을 보완했다.

"내 부름에 답하라."

15번째 시도.

재배열된 영력이 신관계 헌터의 몸에 천천히 스며들고.

상반된 두 에너지는 충돌하지 않고 시체를 순환하며 굳어버린 몸뚱이에 새 힘을 불어넣었다.

[신성을 지닌 좀비]

종족 : 언데드

등급 : ★★

◎능력치

근력 : 30 / 민첩 : 22 / 체력 : 35 / 맷집 : 21 / 성력 : 441

◎특성

▷불사의 존재[C+] / 역천[C+]

◎스킬

▷부정한 축복[D] / 라이프 드레인[D] / 응징의 쐐기[D]

두 손이 파르르 떨린다.

9번째 성위를 달성하고 초월의 영역에 도달했던 존재.

시스템이 인정한 8번째 군주, 불사왕(不死王)마저 해내지 못했던 신성을 지닌 언데드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

[신성을 보유한 언데드는 만신전의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존재입니다.]

[당신의 위업이 온 우주에 퍼져 나갑니다.]

[해당 위업은 세계의 규칙으로 인정받습니다. 해당 개념을 주관하는 성좌들은 새 규칙의 영향을 받습니다.]

유진이 제대로 된 '신성을 지닌 언데드'를 제작했다고 생각할 때.

기다렸다는 듯 시스템 음성이 무수한 메시지를 띄웠다.

시끄럽군.

지금.

이 순간만큼은 회귀 전에도 못 했던 연구의 성과를 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계약자여!!!!〕

'왜 그렇게 호들갑이야.'

〔보았느냐. 그대의 행위가 세계의 규칙을 트는 데 멈추지 않고 새로운 진리로서 인정받았도다!〕

아.

안 그래도 시스템이 규칙 어쩌고 하더라.

'그게 뭐 어째서.'

〔아직도 모르겠느냐! 그대가 이번에 벌인 일은 ■■■ ■■■의 ■■를 비틀 만큼....〕

뭉개지는 크로노스의 사념.

지직거리는 노이즈가 뒷말을 모조리 삼켜버렸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거냐?'

〔으으음. 이건... 세계의 억지력이구나.〕

'억지력?'

〔그대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저 너머의 규칙을 일컫는 것이로다.〕

똥 싸다 마는 것도 아니고.

말을 중간에 끊네.

유진이 투덜거리며 욕지거리를 내뱉으려는 순간.

〔죽음을 덮는 자가 당신에게 흥미를 가집니다.〕

〔부유한 아버지가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당신을 관찰합니다.〕

〔아비도스의 주인이 개정된 새로운 규칙을 천천히 곱씹습니다.〕

....

하늘 위에 드리운 무수한 별들이 강렬한 빛을 유진에게 비추었다.

실제로 낮에 별이 나타난 건 아니다.

만신전에 등록되어 있는 위대한 이들, 성좌들의 존재감이 유진에게 드리우면서 발생한 현상.

〔이, 이 후안무치한 자들이!!!!〕

크로노스가 노호성을 터트렸다.

저들의 노골적인 관심은 유진의 배후성이며, 동시에 그를 성자로 임명한 성좌. 역천의 거인을 무시하는 행위였다.

〔아비도스의 주인이 역천의 거인을 보고는 코웃음을 칩니다.〕

〔부유한 주인이 역천의 거인에게 익숙함을 느끼고는 의아해합니다.〕

〔죽음을 덮는 자가 무시합니다.〕

공교롭게도 유진에게 관심을 가진 성좌들은 모두 죽음에 연고를 둔 이들이었다.

언데드는 '죽음'이라는 순리에서 벗어난 존재.

죽음 관련 성좌들이 관심을 두는 건 당연하겠지.

'전생에는 순리를 어지럽힌다고 해서 경멸어린 시선으로 봤던 양반들이 말이야.'

회귀 전만 그랬던가?

시간을 되돌린 후, 처음으로 만신전에 갔을 때도 유진을 멸시했었다.

그런 작자들이 태도를 싹 바꾸니 희열감마저 들었다.

〔계약자여!〕

'왜 그렇게 불러?'

〔짐을 망각의 강 너머로 보내면 곤란하도다!〕

으휴.

명색이 티탄 신족의 왕까지 하신 양반이 왜 이리 심지가 작으신지.

그렇게까지 걱정 안 해도, 유진은 크로노스 말고 다른 성좌의 후원을 받을 수 없었다.

다수의 성좌에게 후원을 받는 헌터가 없는 건 아니지만.

배후성을 하나 더 두게 되면 '채널'이 연결될 테니 크로노스가 노출될 가능성이 올라간다.

'만약 역천의 거인이 크로노스라고 밝혀지면 곤란해.'

크로노스를 폐위시킨 게 누구인지 생각해보자.

제우스.

올림포스 성단의 지배자이자 천공의 신.

또한, 7대 가문 중 하나인 카라만리스 가문의 수호성이다.

낙성좌로 영락해버린 크로노스가 신위를 되찾았다고 하면 퍽이나 가만히 있겠다.

알면 카라만리스 가문에 유진을 죽이란 신탁이라도 내리지 않을까.

그래도 말이야.

'이번 기회에 다른 성좌의 가호를 받아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어.'

〔계약자!!〕

'뭐, 우리 성좌님 하는 거 보고.'

〔크으으으읏.〕

약 올리는 것쯤은 괜찮잖아.

성좌들 후원을 빌미 삼아 크로노스 기강도 잡아줬겠다.

만족감에 입술을 한번 씰룩이고는 신성을 지닌 언데드를 조목조목 살펴보았다.

'주목할 건 두 가지인가.'

특성, 그리고 스킬.

[역천]

역천의 거인의 신성을 지녔습니다. 마력(영력)이 성력으로 치환되며, 일부 신성 주문을 습득할 수 있습니다.

성력에 노출되어도 육신이 붕괴하지 않습니다.

크로노스의 성수로 만들어서 그런가.

〔역천의 거인〕이라는 성좌 명에서 따온 듯 한 특성이 추가되었다.

'회귀 전에는 못 본 특성이군.'

〔그대의 시선으로는 효용성이 있어 보이느냐?〕

'좋다. 그것도 꽤.'

성력에 기반을 둔 스킬이나 무장은 언데드에게 천적이다.

취약 속성인 화염보다 두 배는 치명적일 걸.

여태까지 그 약점을 공략당하지 않은 건 네크로맨서란 직업이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아서다.

'나찰 집단군과의 전투 때문에 정보로 이득을 보는 건 끝났어.'

앞으로는 그의 영지를 노릴 때 신성 속성 장비를 착용하거나 신관계 헌터들을 다수 동원하겠지.

신성을 지닌 언데드는 적의 의표를 찌르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리라.

'두 번째는 스킬, 인데. 다 아는 거니까.'

[부정 충격 방패]나 [메멘토]는 수준이 더 높아서 그런지 전승이 안 된 듯했다.

각 스킬들의 정보들을 살펴보니 차이점이 한 가지 더 있었다.

'라이프 드레인이 너프 되었네.'

빨아들인 생명력을 능력치로 치환시키는 능력이 사라졌다.

하긴.

그 옵션은 좀 사기였지.

〔이제야 짐이 그대에게 베푼 은총이 얼마나 큰지를 실감하느냐?〕

'성좌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그대여. 방금 품은 마음을 잊지 말고 쭉 마음 한켠에 담아두도록 하여라.〕

예예.

누가 보면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줄 알겠어.

[지식의 도서관에 기록되지 않은 새로운 방식으로 언데드를 제작했습니다.]

[언데드 제작 - 신성을 품은 좀비]

[사용자의 위계를 뛰어넘는 위대한 업적! 해당 지식이 지식의 도서관에 기록됩니다.]

'이름이 좀 그렇다.'

처음으로 만든 신관계 언데드.

신성을 품은 좀비 같은 이름은 좀 밋밋하잖아?

강령술의 새 지평을 연 망자인 만큼 그럴싸한 명칭을 붙여줘야겠다.

유진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언홀리 좀비? 너무 직관적이잖아. 아, 뭐 그럴싸한 게 없나.'

〔디파일러. 모독하는 자는 괜찮지 않느냐?〕

'오. 좋은데. 우리 성좌님. 신경 좀 쓰셨나봐.'

크로노스가 툭 던진 이름.

입에 착착 감기며 멋까지 챙기는 단어다.

더 고민하지 않고 추천 받은 명칭을 언데드의 '이름'으로 정했다.

[디파일러의 제작 방법이 지식의 도서관에 등록됩니다.]

*

디파일러를 만든 후에도 연구는 끝나지 않았다.

〔더 완성도를 높이려느냐?〕

'아니. 지금 내 수준으로는 이게 최선이야.'

더 많은 미스릴.

그리고 하얀 백석은 있어야 성능 업그레이드를 시도해볼 만 했다.

하급 언데드인 디파일러에 그만큼을 투자하는 건 과하지.

〔연구 주제가 궁금하구나.〕

'성수로 언데드를 강화해보는 거다.'

크로노스가 부여한 힘은 일반적인 성력과 다르다.

파장만 놓고 보면 영력에 가까웠고.

신성 주문은 언데드에게도 페널티 없이 적용되었다.

오히려 [부정한 축복] 같은 경우에는 산 자에게 디버프를 부여하기까지 한다.

〔호오. 꽤나 다방면으로 고민하였구나.〕

'성수의 효능은 이 녀석 덕에 확인을 했으니까.'

스켈레톤이나 좀비 같은 기초 수준의 망자.

리터너, 그리고 스켈레톤 워리어처럼 하급이면서도 강화된 언데드.

스켈레톤 메이지 같은 마법계.

그 외에도 [지식의 도서관]에 없는 유진 특제 오리지널 언데드까지도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

-좀비 : 신성 저항이 생겼음.

-스켈레톤 : 변화 없음.

-아머드 시리즈 : 성수가 스며들면서 방어력이 약화. 대신 수복 옵션이 추가됨.

....

실험 난이도는 꽤 높았다.

각 언데드마다 혼철 일부와 강화 회로를 새긴 후, 영력과 겹치지 않는 마력 패스를 추가해서 성력이 흐르게끔 작업해야 했으니.

조금이라도 오차가 발생하면 성력과 영력이 반발을 일으켰다.

'그래도 데이터가 차곡차곡 쌓였어.'

〔쓸 만해 보이지는 않는다만?〕

'나중에 다 쓸데가 있어요.'

하급 언데드를 강화하면서 축적된 데이터.

지금이야 투자 대비 결과물이 썩 좋지 않지만, 더 강력한 언데드를 개조할 때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마냥 허탕만 친 것도 아니고 말이야.

[레버넌트가 새로운 동력원을 발견했습니다.]

[성력이 레버넌트의 심장을 축 삼습니다.]

리터너를 개조해서 만든 상위 개체.

하급 용족의 사체를 엮어내어 만든 언데드, 레버넌트는 성력과 궁합이 좋았다.

[해당 개체의 모든 능력치가 50% 상승합니다.]

[저주의 숨결 스킬의 위력이 100% 증가하며, 영력 소모가 50% 감소합니다.]

[특성 - 미숙한 경계자(C+)에서 '미숙한'이 사라집니다.]

암흑 투기 응용에 마이너스가 되는 특성.

강제로 '벽'을 넘은 페널티로 붙어버린 옵션이 사라졌다.

이 정도면 준5성을 넘어서서 5성 초입의 무력이라고 해도 되겠는걸.

'성수로 강화한 레버넌트를 양산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마침 성수 제작 가능한 신전도 연평도에 있겠다.

틈 날 때마다 레버넌트를 제작 및 강화해서 실어오는 것도 괜찮은 선택지다.

네크로폴리스에서 제작한 대형 언데드도 강력한 전력이지만.

덩치가 크다 보니 섬세한 부분은 모자라거든.

성수로 강화한 레버넌트는 정예병 역할에 딱 알맞았다.

〔한데 재료가 다 떨어졌구나.〕

'그러게.'

디파일러 제작과 성수로 언데드를 강화하는 연구를 이어서 하니, 챙겨온 재료를 모두 소진했다.

3주도 안 돼서 이만한 양을 다 써버리다니.

좀 과했군.

회귀 전에도 내지 못한 성과에 너무 흥분해버렸나.

'뭐, 본토의 상황도 보러 갈 때가 됐지.'

〔이런 식으로 그대의 미숙함을 포장하려는 게냐?〕

'아. 그래. 흥분 좀 했다. 이왕 흥분한 김에 조금 더 해봐?'

〔흐으음. 진정하여라. 짐의 계약자여.〕

섬에 들어오고 3주가 되는 날.

유진은 정기적으로 섬에 오는 쾌속선을 타고 육지로 돌아갔다.

114화 새해, 그리고

연평도에 들어간 유진이 3주 동안 성수를 붙들고 씨름을 벌이는 동안.

블랙 컴퍼니에 소속된 이들도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보냈다.

"훅, 후욱."

기다란 대검을 든 중년의 헌터.

임재백은 거친 숨결을 내뱉으며 칼날 위에 아른거리는 푸른 기류를 흘겨보았다.

"제가 해낸 겁니까?"

[보다시피.]

"2주 만에 벽을 넘다니."

오러.

마력에 의념을 부여해서 한계 이상의 힘을 내게 하며, 강철조차 찢어발기는 능력.

'벽'을 넘어선 헌터만이 발현할 수 있는 푸른빛이 임재백의 검에 맺혀 있었다.

[다 스승이 뛰어난 덕이지.]

"감사했습니다."

[마음 놓기는. 의념이 흐트러지니까 빛도 약해지잖아.]

"아... 그렇군요."

타박하는 사념을 내보내는 파프너였지만, 마음속으로는 꽤 많이 놀랐다.

'모두 주인의 말대로야.'

임재백의 주 무기는 대검.

긴 리치와 강력한 파괴력을 지녔지만 한 번 칼을 휘두르거나 찌른 후에 회수하기까지 딜레이가 길다.

'임 이사는 검을 휘두를 때마다 힘을 과하게 쥐는 습관이 있다.'

한데, 유진은 연평도로 떠나기 전에 임재백에게 검법을 지도해주라면서 그의 마력 특성을 귀띔했다.

-마력이 유연하거든. 동작 좀 교정해줘.

유진의 조언을 듣고 보니 정말이었다.

물론.

희대의 사기 특성, [무신의 눈]을 지닌 파프너라면 조언을 듣지 않았어도 몇 시간 안 돼서 알아챘겠지만.

'그러니까 더 신기한 거야.'

냉정하게 보면 유진의 무위나 타인의 실력을 파악하는 '눈'은 대단하지 않다.

의념을 다스리는 능력이 비정상적으로 뛰어날 뿐.

무슨 수로 임재백의 마력 특징을 파악해서 딱 맞은 지침을 내려준 걸까.

회귀라는 비밀을 알지 못하는 파프너로선 의아함을 마음속에 품을 수밖에 없었다.

[벽을 넘었다는 건 새로운 벽 앞에 섰다는 의미야.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기억하겠습니다."

뽀시래기 팀 세 명도 각각의 성취를 이루었다.

한계 레벨인 50에는 도달하지 못해서 벽을 넘거나 하진 않았지만.

세 사람은 짧은 기간에 무수한 싸움을 경험하며 고유 특성의 활용법을 발전시켰다.

"하압!"

[이동요새]

[강격]

[아테네의 가호 - 아이기스 Lv1]

방패에 깃든 푸른 기류.

그 위로 육각형 형태의 반투명한 파장이 나타났다.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증발한 사티로스의 머리.

충격파에 휘말린 주변의 괴물들 중 일부는 즉사, 나머지도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그 참상을 만들어낸 장본인은 으으, 짧은 비명을 내뱉었다.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0.01초 빨랐다며 아쉬움을 드러냅니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다음에도 기회가 있다며 당신을 위로합니다.〕

아테나.

[고대의 시험장Ⅱ]에서 강민호를 후원하기로 한 성좌다.

올림포스 12신 중 한 명인 만큼 성좌들 중 랭크는 최상위.

높은 격과 명성에 비해, 아테나는 필멸자에게 굉장히 친절한 성좌였다.

"감사합니다. 성좌님."

힘 풀린 목소리로 대꾸하는 강민호.

[마력]과 힘, 그리고 아테나가 부여한 〔가호〕를 동시에 방출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0.01초 차이로 어긋난 방출 타이밍.

그 대가로 세 에너지를 결합하면서 생긴 반발력을 상당 부분 자신의 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실전에서 이만큼 활용하는 게 대단하다며 당신을 위로합니다.〕

아테나가 필멸자에게 자비로운 편이기도 하지만, 강민호의 적응력은 그만큼 대단했다.

한계 레벨에 도달하기만 해도 곧바로 벽을 넘을 정도의 감응력.

위대한 여신은 후원하기로 한 필멸자가 머지않아 4성에 도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 멍청아! 탱커가 몬스터 좀 잡고 퍼지면 어떻게 해!"

날카로운 강민영의 음색.

동시에 석궁 10개가 하늘 위로 둥실 떠올랐다.

나찰 집단군과의 싸움 때보다 3배 이상 늘어난 원거리 공격 수단.

[염력] + [특성 - 공명]

[고유 특성 - 동조]

빗발치는 화살 세례가 뒤이어 오던 몬스터들을 고슴도치로 만들었다.

"염력을 얼마나 썼으면 관련 특성까지 생긴 거야."

강민영은 짧게 푸념했다.

[공명]의 효과는 염력으로 '물건'을 들 때 정신력과 마력 소모를 대폭 줄여주는 것.

염력이 공통 계열 스킬이지만, 실제론 마법계 헌터들이 보조용으로 많이 익히는 편이라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와 별개로, 실전에서 활용도는 엄청났지만.

"선배야말로 왜 손 놓고 계심까!"

외마디 비명을 지른 이성민이 [공간] 세 개를 동시에 열었다.

[공간 - 방출]

[간이 마법 포탑 x 3]

기관총 크기의 포탑.

말 그대로 '간이'형으로 만든 구조물이라서 포탑 셋이 연산을 해야 마법을 겨우 펼칠 수 있다.

[쇼크웨이브]

바람 계열 2성 마법.

전방에 퍼져 나간 충격파에 괴물들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후배. 넌 어떻게 구조물을 넣어서 다닐 생각을 했어?"

"무게가 가벼우니 된 거지 말임다."

매 전투에서 비싼 마법 스크롤을 사용할 순 없다.

신준석에게 부탁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고.

대신.

이성민은 저장 용량이 300kg까지 늘어난 [공간]을 활용할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

"굳이 거창한 마법만 고집할 필요가 없슴다."

관점의 전환.

설치 후에는 이동할 수 없는 '포대'의 특징을 역이용.

[공간]으로 삼켰다가 방출, 특성에 없거나 미처 익히지 않은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고유 특성으로 보관 가능한 중량이 엄청나진 않아서 통상적인 포탑은 담아두지 못하지만.

두 팀원을 지원하기에는 충분했다.

"하여간 선배님들은 나 없음 아무것도 못하시지 않슴까."

고유 특성으로 포탑을 설치하는 와중에도.

이성민은 집중력을 발휘, 마력을 재배열했다.

세 명 중에서 가장 넓은 눈으로 전장을 살펴보는 헌터.

[윈드 밤]

2성의 바람 속성 마법.

응축시킨 공기가 일시에 해방되면서 괴물들의 진열을 무너트린다.

"좋아. 다시 간다."

"으으으. 이성민한테 잔소리 들었어."

회귀 전에는 '거울 사냥꾼'으로 불렸던 남매가 의기투합해서 몬스터들을 도륙했다.

번외로.

블랙 컴퍼니 소속은 아니지만 나름의 성과를 거둔 인물이 있었으니.

"스승님!! 드디어 저도 벽을 넘었어요!!"

불사조의 차기 검성.

원 역사에서는 그 재능을 다 피우지 못하고 스러져간 헌터, 장미선이 환하게 웃었다.

그녀가 쥔 칼에도 임재백과 동일한 푸른 기류가 아른거렸으니.

파프너는 영력으로 굳어버린 혀를 내둘렀다.

[허 참. 천재들이 주인의 곁으로 오는 건가, 아니면 주인이 섭외를 하는 건가.]

무심결에 진실을 말한 것도 모른 채, 파프너는 괴물 같은 신인들의 성장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렇게 새해가 찾아오고.

연평도에서 1차 연구를 마친 유진이 본토로 돌아왔다.

*

육지를 밟자마자 네크로폴리스로 온 유진은 곧바로 다크 미니언들을 집합시켰다.

"다들 머리통은 잘 닦고 있었나."

[주인님의 명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더 많은 피!]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하.

누가 산 자를 증오하는 언데드 아니랄까.

폭력과 죽음, 그리고 피를 부르짖으면서 두 눈 시퍼렇게 눈 뜬 거 보소.

〔망자들의 안광은 원래 저 색 아니더냐?〕

크로노스의 지적을 못 들은 척 넘긴 유진은 본론을 꺼냈다.

"너희는 이제부터 내 주력 마법인 강령술을 배울 거다."

[주인님의 힘!]

[우리도 강해진다!]

"아. 그렇다고 너희가 나처럼 강해질 순 없다."

다크 미니언들은 생전과 달리 영력을 다루게 되면서 [강령] 분야 스킬도 익힐 수 있었다.

조승철이나 이승연처럼 말이야.

'네크로맨시의 기본을 알려주마.'

강령 주문의 핵심은 본능을 자극하는 것이다.

영력으로 망자의 몸뚱이에 힘을 부여하고.

산 자에 대한 증오와 식욕 같은 부분만을 남긴 채로 되살린다.

본능을 모조리 거세하면?

기껏 일으켜 세운 언데드가 무기력하게 서 있겠지.

"너희가 배울 스킬은 레이즈 언데드다."

모든 네크로맨서라면 기본적으로 익히는 스킬.

그렇기에.

어느 스킬보다도 '기초'에 충실해 있으며, 강령 분야를 이해하기 적합한 주문이다.

유진은 다크 미니언 무리한테 차근차근 [레이즈 언데드] 스킬을 알려주었다.

얼마 정도가 지났을까.

"무능한 놈들. 레이즈 언데드 하나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

"나 때는 말이에요. 주문 발현이 안 되면 잠도 안 자고 연구를 했어요. 어?"

[....]

"너희는 잠도 안 오잖아. 그럼 뼈가 닳도록 공부를 해야지."

독설을 퍼붓는 유진.

다크 미니언 49구는 푸른 귀화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억울한 마음을 표현했다.

[주인님. 저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가르침을 주는 분의 문제는 아닐지.]

생전의 육체에 혼백을 불어넣음으로써 언데드의 한계를 뛰어넘는 술법.

일명 '합일'을 치른 녀석들은 이래서 문제다.

'능력이 강해지지만, 자의식도 그만큼 또렷해진단 말이지.'

합일 의식의 부작용(?)이다.

영혼을 본래의 육체와 동기화시켜놓곤, 자의식을 억제시키면 제 능력이 나오지 않거든.

〔저치들이 그대의 등에 칼을 꽂을 수도 있겠구나.〕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으로 보여요?'

〔...실언하였다.〕

제깟 것들이 아무리 강한 자의식을 붙들고 있다 한들.

네크로맨서가 추구하는 궁극의 영역에 도달했던 유진인 만큼, 그의 제어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좋아. 납득을 못한다면 조교의 시범을 보여주마."

[숙련된 조교! 조! 승! 철!]

지목하지도 않았는데 자진해서 나온 조승철이 신나는 기색으로 영력을 재배열했다.

덜그럭- 덜그럭-.

뼈만 남은 시체가 재조립되더니 몸을 일으켰다.

레이즈 언데드로 제작한 스켈레톤.

조승철은 턱뼈를 들썩이며 요란하게 웃었다.

[그게게게겔! 주인님. 제가 해냈습니다.]

"완성도가 낮군."

[그겔?]

"영력의 분포가 고르지 않다. 이런 식으로 만들면 스켈레톤의 전투 지속력이 떨어질 거다."

스켈레톤의 뼈 마디마디에 불어넣은 영력이 과해서 힘이 상승했지만, 내구력이 떨어지는 역효과가 생겼다.

이런 식으로 변주를 주는 건 좀비한테나 어울리지.

[그게겔....]

냉정한 평가에 조승철의 턱뼈가 힘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자식.

그래도 저번보다는 실력이 꽤 늘었어.

역시 회귀 전에 7성까지 도달했다는 소문은 틀리지 않았나보다.

"너희의 재능과 근성은 조승철보다 아래인 모양이군."

[아닙니다. 주인님!]

"너희도 이름을 받고 싶으면 조승철처럼 열심히 해라."

[네!!!]

추가로 만든 다크 미니언들은 앞서 만든 두 녀석과 달리, 이름을 따로 주지 않았다.

본래 '이름'이라는 건 자아를 확립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다.

이름을 가지면 판단력과 지능, 그리고 힘이 올라가지만.

그와 동시에 자의식이 강렬해지는 부작용도 있다.

'이제는 부릴 수하들도 많아졌으니 아무한테나 이름을 줄 수 없지.'

자.

이제부터 서로 죽, 아니 경쟁해라.

〔한데 왜 저 뼈다귀들에게 강령술을 알려준답시고 고생을 자처하느냐?〕

'강령술 연구소는 인원을 많이 배치할수록 효율도 올라간다.'

대학교 교수도 연구 결과를 내기 위해 노ㅇ... 아니, 대학원생들을 굴리지 않던가.

네크로폴리스의 구조물도 마찬가지다.

구조물의 효율을 올리려면 강령술을 익힌 마법사를 배치해야 한다.

'강령술 연구소는 한 번에 최대 10명까지 배치가 가능해.'

그뿐이랴.

연구 성과가 어느 정도 축적되면 비로소 '마탑'으로 업그레이드를 할 수 있다.

네크로맨서 전직 루트가 아직 나오지 않았으니.

이 녀석들을 부리는 게 최선이다.

〔북쪽의 작은 인간들과 전쟁을 대비함이더냐?〕

'겸사겸사.'

인간사냥꾼들을 토벌하는 것도.

1달 후에 벌어질 '피의 발렌타인' 사태를 막아내는 것도.

모두 '복수'를 이루는 과정이다.

'전생에는 영지를 적당히 관리하는 데서 만족했다.'

박하늘 씨의 복수를 마치고 개성 일대에 세력을 꾸린 뒤.

네크로맨시를 연구해서 초월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 외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알고 있다.

손 놓고 가만히 있다 한들, 순리에서 벗어난 힘을 혐오하는 성좌들이 유진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는 것을.

'본격적으로 세력을 키울 거라고 말했잖아.'

〔이들은 그 초석이로구나.〕

'초석, 어감 좋네.'

〔크하하핫. 그대도 짐의 품위를 배우는 것이 어떻겠느냐.〕

아.

그건 좀.

전 그냥 편하게 살래요.

크로노스와 잡담을 나누며 다크 미니언 수련을 봐주고 있을 때.

"형님. 그라운드 제로에 손님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웬 손님? 바쁘다고 해."

"저어, 그게...."

뒤이어진 강민호의 말을 듣던 유진의 눈이 부릅떠졌다.

잠깐.

뭐라고?!

115화 반갑지 않은 손님(1)

검은 쌍두 독수리를 수놓은 붉은 로브.

음영이 드리운 후드 안쪽에서 푸른 눈동자가 섬뜩하게 번뜩인다.

"냄새가 고약하군요."

니콜라이 안드레예비치 로마노프.

마법왕 드미트리의 배다른 동생이자 로마노프 가문의 3인자는 그라운드 제로를 거닐던 중에 코를 씰룩거렸다.

안내역을 맡은 임재백은 꿀꺽- 침을 삼켰다.

"죄송합니다. 몬스터 웨이브 이후로는 방치된 곳이다 보니."

"어쩔 수 없지요. 간단한 조치라도 취해야겠습니다."

"예?"

니콜라이는 가볍게 손가락을 퉁겼다.

[윈드 블레이드 x 5]

[윈드 밤]

[윈드 커튼]

무영창으로 사용한 마법.

바람의 칼 다섯 자루가 콘크리트를 베어내고.

그 아래에 고여 있던 썩은 물과 쓰레기들이 광풍에 휩쓸려서 허공으로 떠올랐다.

무분별한 패턴으로 날아가던 파편들이 이윽고, 바람으로 된 벽에 걸려서 한 곳에 모였으니.

니콜라이는 손가락 한 번 퉁기는 것으로 일대의 환경미화를 마쳤다.

'이게... 마법 명가의 저력!'

갓 4성에 진입한 임재백은 마력의 파장을 읽어낼 수 있었다.

빠른 속도로 재배열되는 마법.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발현되어 인명 피해 없이 냄새와 그 진원마저 깔끔하게 처리했다.

국내 최고의 마법계 헌터가 와도 니콜라이처럼 마법을 숨 쉬듯 자연스럽게 사용하지는 못하리라.

임재백의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7대 가문 중 하나인 로마노프에서 왜 대표님을?'

로마노프 가문의 명성은 저 먼 극동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아스가르드 성단의 지배자, 오딘을 가문의 수호령으로 삼고.

가문의 수장인 드미트리는 세계에서 최초로 9번째 성위에 도달한 초월자였으니.

로마노프라는 네 글자를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니콜라이는 로마노프의 얼굴이라고 알려진 인물. 그런 사람이 왜지.'

로마노프 가문의 대외적인 활동을 총괄하는 헌터.

공식적으로는 서열 3위이긴 해도, 2인자인 소피아가 외부에 얼굴을 거의 비추지 않아서 '로마노프의 입'이라고까지 불렸다.

가문의 상징인 검은 쌍두 독수리를 수놓은 로브까지 입었으니.

이번 방문은 로마노프 가문의 의사가 반영된 공식적인 행위라는 뜻.

'짐작이 가지 않아.'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임재백은 마음을 붙잡으며 애써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유진이 부재인 상황.

그가 올 때까지는 자신이 블랙 컴퍼니를 대표하는 얼굴이다.

'천 대표님이라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거다.'

무심코 내뱉는 말 한 마디.

작은 행동마저도 자신감이 넘치는 유진의 모습을 떠올리며 심지를 굳게 다졌다.

그 모습을 힐긋거린 니콜라이의 눈매가 살짝 풀렸다.

'괜찮은 인물이다. 벽을 넘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마력도 안정되었고.'

이런 자를 수하로 거두었다니.

니콜라이는 유진에 대한 평가를 내심 상향조정했다.

얼마 정도를 걸었을까.

임재백은 그라운드 제로에 몇 없는 멀쩡한 건물로 니콜라이를 안내했다.

"오. 깔끔하군요."

"블랙 컴퍼니 본사입니다."

과거에는 붉은 거미의 본거지로 사용되었던 호텔.

거미 사냥 이후, 암상에서 관리를 하다가 유진이 '블랙 컴퍼니' 창립을 선언하면서 소유권을 넘겨받았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천 대표님이 곧 오실 겁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방문을 협의한 것도 아니었으니 기다리겠습니다."

느긋한 표정으로 의자에 등을 기대는 니콜라이를 확인한 후, 임재백은 천천히 문을 닫고 나왔다.

후우- 입가에서 나온 커다란 한숨.

긴장감이 확 풀렸다.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임재백은 늘어지려 하는 몸을 채찍질했다.

"형. 괜찮아?"

"그럭저럭."

"손님맞이할 준비는 끝났어."

"차라도 내드려. 아니, 전달하는 건 내가 해야겠군."

"아냐. 숨 좀 돌리고 있어. 차 정도는 나도 대접할 수 있어."

임재백은 미련 섞인 눈으로 동생을 흘겨보았다.

사업에 실패한 이후, 모진 고생을 한 혈육.

유진에게 구출된 뒤로는 블랙 컴퍼니에서 일을 배우는 중이었다.

"고맙다."

"뭘. 나도 월급 받은 만큼은 해야지."

임씨 형제가 뜻밖의 손님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

소식을 전달 받은 유진도 그라운드 제로로 돌아왔다.

"대표님. 오셨군요."

"나 없는 동안 수고해줘서 고맙다."

"아닙니다. 손님 응대가 모자라지는 않았을지 걱정이군요."

"누추한 분이 귀한 곳에 왔는데 그렇게 느끼겠어?"

임재백은 순간 두 눈을 끔뻑였다.

농담 같지?

유진은 진심이었다.

"로마노프 가문의 손님은 어디에 있지?"

"가장 좋은 방을 내드렸습니다."

본래는 호텔 라운지였으나, 붉은 거미가 자리를 잡은 후에는 회장(보스)실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유진이야 늘 접경지역을 오가느라 잘 꾸며놓은 공간을 쓸 틈이 없었고.

관리만 하던 장소가 오래간만에 제 역할을 다했다.

"별 일 없을 테니까 다들 쉬고 있어."

굳게 닫힌 문.

이 문을 미는 순간, 전생의 숙적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방문자는 그 드미트리란 작은 인간이 아니라고 들었다만.〕

'말이 그렇단 거지.'

하여간 분위기 깨는 데 도사야, 도사.

니콜라이.

그 음흉한 인간이 자신을 보러 왔는데 그렇게 초를 치면 어떻게 합니까.

〔음흉하다?〕

'로마노프 가문에서 수작을 벌였다 하면 다 그 인간의 손을 거쳤다고 봐도 돼.'

마법계 헌터로서의 역량도 대단하지만.

니콜라이의 진짜 무서운 점은 책략을 꾸밀 때 나온다.

회귀 전.

유진도 녀석이 암중에 쳐놓은 그물에 낚였다는 것을 한참 뒤에 알아챌 정도.

'검은 방첨탑을 파괴, 네크로폴리스 무력화를 계획한 것도 니콜라이였다.'

〔오히려 잘됐구나. 흉계를 꾸미는 작은 인간이 제 발로 나타났으니, 여기서 제거하면 되지 않겠느냐.〕

'그건 영웅답지 않은 행위인데?'

〔흉계와 모략도 영웅과 거리가 먼 짓이니라.〕

크로노스는 단언했다.

뭐,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긴 한데.

'기각.'

〔어째서더냐?〕

'지금의 내 수준으로는 절대 못 죽여.'

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기파.

본인은 나름대로 갈무리하고 있다지만, 회귀 전에 9번째 성위를 완성했던 유진의 감각을 속이진 못했다.

'7성, 아니 7.5성인가.'

〔그 애매한 표현은 왜 붙인 게냐?〕

'편법으로 8성 수준의 힘을 내고 있다. 드미트리의 짓이겠지.'

마법왕 드미트리.

룬 문자 하나로 세계의 규칙을 비틀어버리는 괴물 중의 괴물.

유진도 그 천외천의 영역에 발을 들이밀었기에, 마력의 기파만 느낀 것만으로도 대략적인 매커니즘을 읽어낼 수 있었다.

〔만일 저 작은 인간이 그대를 해하려 하면 어찌 하려느냐?〕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정말 그렇게 나온다면 뒤도 안 보고 도망쳐야지.'

대답은 그렇게 했어도 니콜라이가 갑자기 덤벼들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 작자가 유진을 해하려고 했으면 직접 나서기보단 암중에서 손을 썼을 테니.

'노림수가 뭘까?'

검은 쌍두 독수리을 수놓은 로브.

로마노프 가문의 상징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방문 자체를 숨기지 않았다.

조만간 국내 전역으로 소문이 퍼져나가겠지.

저 음흉한 녀석이 별 생각 없이 가문의 상징을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일단 부딪쳐봐야겠군.'

당장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없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니콜라이의 노림수를 간파할 수 있을 터.

유진은 힘을 주어 호텔 최상층 문을 열어 젖혔다.

*

창문 너머를 내려다보던 금발의 사내가 고개를 돌린다.

허공에서 얽히는 시선.

중년 사내의 입가가 먼저 움직였다.

"господин 천?"

새끼.

한국에 왔으면 한국말을 해야지.

처음 내뱉은 러시아를 모르는 척하며 인사를 건넸다.

"니콜라이 안드레예비치 로마노프. 처음 보는군."

"편하게 니콜라이라고 불러도 됩니다."

봐봐.

한국말 잘 하잖아.

마법 중에는 상대방의 뜻을 해석하는 번역 주문도 있다.

대외활동에 익숙한 녀석이 안 익혔을 리 없지.

'오래간만이다. 이 개자식아.'

놈의 푸근해 보이는 얼굴 뒤로 온갖 흉계가 도사리고 있음을, 유진은 꿰뚫어보고 있었다.

일부러 말을 놓았는데도 동요하는 모습 하나 없네.

뭐, 오히려 좋아.

마음에도 없는 존대를 안 해도 되니 말이야.

"제가 변덕을 부려 왔는데, 블랙 컴퍼니에서 융숭하게 대접을 해주더군요."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다. 임 이사에게 전해두지."

테이블을 슬쩍 봤다.

넘칠 것처럼 가득 차 있는 찻잔.

유진은 곧바로 시선을 돌리며 비어 있는 자리를 바라봤다.

"주인 된 입장이니 먼저 앉겠다."

"그러시죠."

두 사람의 거리는 그야말로 지척.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웠으나, 유진의 표정에는 감정의 조각 하나 비쳐지지 않았다.

니콜라이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0.01초.

극히 짧은 시간 동안에 맺힌 룬 문자가 자취를 감추었다.

[통찰의 룬]

마력 파장을 읽어내는 관찰의 문자.

유진의 심장을 중심으로 뭉쳐 있는 '성력'이 여과없이 감지되었다.

'정말 신관계 헌터란 말입니까?'

유진이 망자를 부린다는 정보.

현 시점에는 존재만 증명되었을 뿐, 나타난 적 없는 '네크로맨서'와 관련된 건 아닐까.

만일 신체에 마력을 담고 있으면 니콜라이의 가설이 옳았겠지만.

[통찰의 룬]으로는 마력은커녕, 물과 기름처럼 섞일 리 없는 성력이 깃들어 있었다.

아쉬움을 꾹 감춘 니콜라이는 차분하게 입술을 떼었다.

"господин 천.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각성한 지 3달밖에 안 되었다면서요?"

"뭐, 내가 잘 나가긴 하지."

뭐지, 이 새끼는.

동양인들은 하나 같이 예의를 중시하지 않았나.

처음에 말을 놓는 것도 그렇고, 겸손 따위는 저세상으로 보내버린 대답에 니콜라이가 뺨을 일그러트렸다.

"소문대로 꽤나 솔직하신 듯합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물어보지. 무슨 일로 온 거지?"

"친애하는 형님, 아니. 가주님께서 당신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계셔서 한국에 왔습니다."

유진은 실소를 삼켰다.

그 콧대 높은 양반이 퍽이나 그러겠어.

드미트리가 극동의 작은 땅에 관심을 둘리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정보의 불균형.

'회귀'라는 이적으로 시간 축을 비튼 유진은 니콜라이가 왜 한국에서 알짱거리고 있는지를 간파한 지 오래였다.

'아라한 길드와 접촉할 목적으로 한국에 왔겠지.'

증거?

이중 게이트에서 발견된 [쐐기돌]보다 더 확실한 물증이 어디에 있을까.

현 시점에서 게이트의 핵을 비틀어서 내부 구조 및 몬스터에게 간섭하는 행위가 가능한 단체는 로마노프 뿐이다.

'그로부터 꽤 시간이 지났는데 말이야.'

니콜라이 녀석.

이중 게이트 사태를 기준으로 보면 1달 넘게 한국에서 머물렀나보다.

〔작은 인간의 노림수가 무엇이라고 보느냐?〕

'거기까진 모르겠네.'

유진은 솔직하게 답했다.

놈이 한국에 온 목적은 알아도, 지금까지 남아있을 만한 이유를 찾진 못하겠다.

천무문 견제를 위해서인지.

그게 아니면 한국과 일본에 진출할 교두보를 마련하려는 건지.

'더 긁어내봐야겠어.'

유진은 직설적으로 물어보았다.

"마법왕이 어디를 보고 그렇게 흥미를 가졌는지 모르겠군."

"죽은 자를 되살리는 술법이 흔한 것은 아니니까요."

"소문이 벌써 로마노프 가문까지 났나?"

"제가 귀가 좀 밝습니다."

니콜라이가 장난스럽게 귀를 만지작거렸다.

"내 직업이 뭔지는 알고 있지?"

"신관이라고 하셨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성 주문을 마법에 접목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온 것입니다."

"그으래?"

유진은 [흑암의 반지]에 보관 중인 파프너를 꺼냈다.

[주인. 이번에는 무슨 일이야?]

"오, 오오오."

[뭐야. 이 아저씨. 기분 나빠.]

직설적인 말에 니콜라이의 표정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크.

보기 좋네.

저 재수 없는 면상이 일그러지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들거든.

"...이 언데드를 당신이 만들었다는 말이군요."

"그렇다."

"훌륭합니다."

"내가 좀 바빠서. 구경도 했겠다, 이제 됐지?"

축객령을 내리는 유진.

니콜라이는 일그러졌던 표정을 원래대로 돌려놓은 후,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господин 천. 로마노프 가문에서는 당신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싶습니다."

"마법왕이 관심을 가지는 건 알겠다만. 본인도 없는 자리에서 그런 제안을 던져도 되는 건가."

"가주님께서 맡겨주신 직인이 있습니다. 제게 전권을 맡긴다는 의미로 주신 거죠."

유진은 도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래. 이제야 알겠군.'

언데드를 되살리는 '신성 주문'에 흥미가 있다는 건 사실일 거다.

그렇지만.

놈이 그 요소만 가지고 직인까지 꺼내면서 후원을 운운하진 않겠지.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친 유진이 대답했다.

"너무 좋은 제안이다."

"제 마음을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오해 안 하도록 말해두지. 난 그 제안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다."

"...예?"

"겸손하게 말하니 못 알아듣는군. 확실하게 말해주마."

유진은 한 템포를 쉬었다가 다시 입을 떼었다.

"거절한다고. 그 제안."

니콜라이의 입에 드리운 미소가 한층 더 진해졌다.

116화 반갑지 않은 손님(2)

니콜라이는 유진의 정중한(?) 거절에 더욱 진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패기가 느껴지는군요. господин 천."

"난 누가 쥐고 흔들려고 하는 걸 못 참거든."

"로마노프 가문은 당신이 원하는 거라면 무엇이든 구해줄 겁니다."

"네크로맨시는 아예 모른다면서? 무슨 수로 날 도울 테냐."

"원하는 재료. 몬스터. 그리고 시체."

마지막 단어가 꽤나 의미심장하군.

"어떻습니까? 로마노프 가문의 자원을 받으면 원하는 걸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당신들이 얻는 이득은?"

"새로운 마법 분야가 자리 잡는 것만으로도 마법 명가에게는 득이지요."

"웃기지도 않는군."

킁- 면전에서 코웃음을 친 유진이 미소를 거두었다.

"일방적으로 한쪽이 이득 보는 걸 거래라고 하지는 않아."

"그럼 투자라고 해두죠."

"몰랐네. 로마노프 가문이 그렇게나 관대한 가문이었다니."

"거절하시는 겁니까?"

"투자에 조건도 안 달아놓은 가문. 믿을 수가 있어야지."

니콜라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앉았다가 기상했음에도 흐트러짐 하나 없는 옷매무새.

"다음에는 господин 천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제안을 준비해서 오겠습니다."

"그러든가."

니콜라이가 물러나자, 유진은 암암리에 끌어 모았던 성력을 흩뜨렸다.

만일을 대비해서 언제든 신성 주문을 펼칠 수 있게 준비했지만 별 일 없이 대담이 끝났다.

〔그대답지 않구나.〕

'뭐가 나답지 않아?'

〔꽤 긴장하지 않았느냐. 그 사내를 목도하고서.〕

'7.5성 앞에서 허세 부리기가 쉬운 줄 아나 본데. 눈에 힘주느라 힘들었다고.'

어휴.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다른 사람이면 모르겠지만, 유진을 찾아온 이가 니콜라이라서 문제였다.

로마노프 가문의 대외적인 행사를 도맡는 얼굴마담.

가문 내에서 사람을 만날 일이 가장 많은 인간이기도 한데다 모략을 꾸미는 데도 탁월했다.

'조금만 틈을 보여도 물어뜯을 각 쟀을걸.'

〔하면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아니하였을 터.〕

'그러면 정말로 목줄 잡히는 거야.'

네크로맨시를 익히려면 관련 특성이 있거나 망자처럼 영력을 다룰 줄 알아야 한다.

그도 아니면 [흑암의 반지] 같은 반칙을 쓰든지.

마법왕 드미트리가 옆에서 강령술을 살펴본들, 요체는 이해할 수 있어도 본인이 네크로맨서가 될 순 없었다.

'이미 담은 게 많으니까.'

〔그러하면 더 두려워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드미트리다. 패턴을 분석해서 영력 다루는 방법쯤 스스로 만들어낼 놈이야.'

7성부터는 시스템의 제약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다.

애초에 '가문' 설립 조건 중 하나가 시스템이 부여한 스킬이 아닌, 독자적인 마력 운용 방법을 만드는 것이니.

강령술의 매커니즘과 영력을 분석하다 보면 [지식의 도서관]이나 시스템이 허용한 네크로맨서가 아닌, 자신만의 방법으로 새로운 학파를 세울 수도 있다.

〔하면 위험하지 않겠느냐. 그대의 모든 것을 분석하려 든다면!〕

'마법왕 본인이 오지 않는 이상에야. 보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어.'

유진이나 드미트리 수준의 천재가 아니라면.

네크로맨시의 진가와 구동 매커니즘을 알아보긴 어려울 것이다.

〔본인을 천재의 범주에 넣다니. 참으로 파렴치한지고.〕

'난 진심인데?'

〔그대의 마음에 거짓됨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한탄스럽구나.〕

크로노스는 길게 투덜거렸다.

〔한데 기존의 시간 축에도 있었던 일이더냐. 로마노프가 그대에게 제안을 건네는 것 말이니라.〕

'몇 년 뒤에.'

〔이 또한 시간을 되돌림으로써 발생한 나비 효과로구나.〕

'구더기 무섭다고 장 안 담글 순 없지.'

로마노프 가문과 엮이는 건 피할 수 없었다.

놈들은 아라한 길드와 밀약을 맺은 사이. 이중 게이트를 빚어낸 [쐐기돌]이 그 증거다.

피할 수 없으면 받아들여야지.

그리고.

'마법왕이 직접 나서지만 않으면 괜찮아.'

〔호오. 그리 자신하는 근거가 있느냐?〕

'카리만리스 가문과 영역 다툼 하느라 정신이 없거든.'

7대 명가라고 해서 마냥 사이가 좋진 않다.

오히려 서로 견제하기 바쁘지.

로마노프 가문과 카리만리스 가문은 근거지도 명가들 중 제일 근접해 있어서 충돌이 잦았다.

'이맘때쯤이면 루마니아에서 충돌했겠군.'

〔과연. 그대는 다 계획이 있구나.〕

글쎄올시다.

로마노프 가문에서 접촉해 올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임기응변으로 대응한 것뿐.

회귀의 여파가 점점 더 피부로 와닿는군.

그렇다고 더 변화가 생기기를 두려워해서 움직이지 않을 순 없다.

'변화는 이미 가속화되고 있다. 그 안에서 취할 것만 빼가야지.'

〔모두 그대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응. 내가 모르는 곳에서 또 다른 변수가 생겼을 수도 있어.'

〔그럼에도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느냐?〕

유진은 킬킬거렸다.

'그 정도로 두려울 거였으면 시작도 안 했다.'

〔담대한 마음이야말로 영웅의 풍모지. 참으로 마음에 드는구나.〕

싱겁기는.

나름 대화를 통해 니콜라이의 방문 목적도 대략이나마 파악이 됐다.

강령술에 흥미를 가진 것도 사실이지만.

아라한이라는 카드 말고도 동아시아에 로마노프의 영향력을 투사할 수 있는 '카드' 하나를 더 확인하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당분간 간 좀 봐야겠어.'

꽤 흥미진진하게 돌아가는군.

기지개를 펴며 복잡해진 머릿속을 빠르게 정리했다.

*

"어떠셨습니까?"

"꽤나 당돌하더군요. 그 젊은이."

니콜라이는 불쾌한 기색 없이 유진과 나눈 대화를 일행에게 짧게 이야기해주었다.

"겁 없는 노란 원숭이 같으니라고."

"조심하세요. 눈이 많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니콜라이 님."

"그 의견에는 동의하지만 말은 주의해서 내뱉어야 하는 법입니다."

니콜라이의 경고에 로마노프 가문 출신 마법사가 입을 꾹 다물었다.

고요해진 호텔 방.

침묵을 벗 삼은 니콜라이는 방금 전에 나눈 대화를 몇 번이고 곱씹었다.

'이거 참. 정말로 재미있게 되었습니다.'

천유진.

죽은 자를 되살리는 술법, '네크로맨시'를 사용할 거라고 추정 중인 헌터.

몇 마디 대화를 나눠보니 만만찮은 상대임을 느꼈다.

'자신의 능력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으며, 가치도 잘 파악하고 있군요.'

강령술은 대격변 이후 수십 년 동안 문헌에만 있을 뿐, 아직까지 나타난 적 없는 마법 분야다.

만일 유진이 관련 특성을 보유했거나 전직을 했다면.

그 파급력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마냥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모습.'

손 안에 쥔 패를 깔 듯 말 듯 하면서 이득을 취하려 했다.

그뿐이랴.

로마노프 가문의 후원 제안의 이면에 도사린 바늘도 알아챈 모양이고.

'이 정도는 되어야 진정한 후원을 할 맛이 나지 않겠습니까.'

우수한 패다.

니콜라이가 유진과 대화를 나눈 후에 든 판단이다.

당장의 성취는 보잘 것 없으나.

시간을 들여 물을 주고 햇볕만 받아도 크게 자라나서 만개할 아름다운 꽃과 같은 인재다.

'왠진 모르겠지만 형님이 생각나기도 하고 말입니다.'

로마노프 가문의 기둥.

전 세계에서 제일 강력한 헌터이자, 세계의 섭리마저 주무르는 절대적인 존재.

드미트리의 모습이, 갓 1년 차 헌터에게서 보인 것이다.

근거는 없다.

니콜라이의 직감일 뿐.

'만약 적이 될 것 같으면 지금 손을 쓰는 편이 나을지도.'

이 또한 예감이었다.

사람을 보는 눈은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니콜라이.

방금 전, 유진과 대화를 나누면서 '재능'이 뛰어난 인재란 생각 이상으로 무언가가 느껴졌다.

마치 자신을 가늠하는 듯한....

'설마요. 그럴 린 없습니다.'

유진은 고작해야 각성 1년차에 불과하다.

누가 누구를 가늠하겠는가.

단순히, 자신의 가치를 잘 알고 있으며 자신감이 넘치는 것뿐.

그렇기에.

지켜볼 가치가 있는 자다.

'이자를 산하로 거두는 것도 고려해봐야겠습니다.'

로마노프 가문에는 몇 가지 과제가 있다.

1년 내내 얼지 않는 항구를 확보하는 것과 동방에 영향력을 투사하는 것.

한국은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땅이다.

'아라한도 나쁘진 않지만 말이죠.'

블랙 컴퍼니와 아라한 길드.

당장은 같은 선상에 놓기도 민망할 만큼 체급 차이가 컸다.

그렇지만.

니콜라이는 유진의 포부와 당당함, 그리고 능력에서 가능성을 보았다.

"그럼 아라한 길드에는 지원을 끊습니까?"

"아니요. 거절당하기도 했으니, 아라한에는 계속 접촉하세요."

니콜라이는 일부러 그라운드 제로에 올 때 가문의 상징을 드러냈다.

지금쯤 아라한 길드에서 자신의 행보를 알아챘을 터.

로마노프 가문의 지원을 바라는 입장에서는 입이 바짝바짝 마를 것이다.

"서로 경쟁하게 두어야지요. 우린 그 안에서 솎아내면 됩니다."

"여, 역시 니콜라이 님입니다. 그 혜안. 저희는 따라갈 수 없군요."

고작 이 정도로 혀에 금칠하기는.

니콜라이는 실소를 삼켰다.

*

니콜라이 안드레예비치 로마노프가 블랙 컴퍼니를 방문했다!

해당 소문은 만큼 빠르게 퍼져 나갔다.

로마노프 가문의 상징을 입고 그라운드 제로를 거닌 데다, 대놓고 마법을 사용했으니.

"블랙 컴퍼니와 로마노프 가문이 손을 잡는 건가?"

"에헤이. 그건 너무 많이 나갔다."

"그 니콜라이야. 로마노프의 얼굴이라고 하는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방문했을 리 없잖아."

"로마노프 가문에서도 천유진을 주목하고 있다니."

[성자의 눈물] 시연식 때 주목을 받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니콜라이가 그라운드 제로에서 유진과 만났다는 소문이 퍼진 뒤로는 온통 블랙 컴퍼니 이야기뿐이었다.

"미리 손을 내밀길 잘했어."

불사조 길드의 마스터, 김영수는 흐뭇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니콜라이가 무슨 의도로 그라운드 제로에 갔느냐?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아라한의 발목을 잡을 기회가 생겼다.'

김영수라고 해서 아라한 길드와 로마노프 사이의 밀약을 알진 못했다.

확실한 건.

로마노프 가문에서 유진을 주목하고 있으니, 당분간 아라한이 수작질을 벌이기 어려워졌다는 사실이다.

'나찰과 밀월 의혹을 해명하느라 고생 중이던데. 악재가 겹쳤다.'

블랙 컴퍼니의 기반은 약하다.

유진이라는 이름값 하나로만 기댓값이 올라가는 기형적인 단체.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기까진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김영수는 생각했다.

'미선이가 가 있는 걸로 우리 길드의 의사 표명은 충분하다.'

김영수는 과거 유진을 보면서 느낀 '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저 자는 불사조에서 품기에 너무나도 컸다.

'나라면 로마노프 가문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까.'

두 눈을 감은 채로 생각하던 김영수의 고개가 무심결에 좌우로 움직였다.

아니.

불가능하다.

7대 명가에서 1, 2위를 다투는 강력한 가문.

로마노프가 지원을 약속한다면... 한 치의 고민 없이 그 손을 잡았으리라.

독이 든 성배면 어떤가.

일단은 먹고 봐야지.

그렇지만.

유진은 그 달콤한 제안을 너무나도 쉽게 밀어냈다.

지닌 능력도 뛰어나지만, 마음에 담은 포부가 얼마나 컸으면 그럴 수 있었을까.

김영수는 어설프게 유진을 섭외하기보다, 파트너로서 함께하겠단 의지를 밝히길 잘했다며 스스로를 칭찬했다.

'아라한의 공백을 어떻게 활용하는지가 관건이구나.'

아라한 길드에서 차지하고 있는 수많은 이권을 빼앗아 올 절호의 기회.

지금쯤이면 새벽 길드도 소식을 접했을 것이다.

국내 3강 중 1강이 흔들리는 상황.

불사조와 새벽이 아라한의 이권을 빼앗기 위해 경쟁하는 구도가 되리라.

'이번은 나도 욕심 좀 부려야겠어.'

니콜라이와 유진의 만남이 일으킨 커다란 파랑.

불사조와 새벽 길드는 각자 계산기를 두드리며 거센 파도를 어떤 식으로 탈지 고민했다.

117화 미친개 길들이기(1)

"내 빈 자리를 잘 채워줬다."

"손님맞이가 충분했는지는 모르겠군요."

"주인 허락도 안 맡고 왔잖아. 이 정도면 레드카펫 깔아놓은 거지."

임재백은 붉은 거미가 비우고 간 호텔을 암상에게서 넘겨받자마자 대규모 리모델링에 착수했다.

블랙 컴퍼니 구상안을 들었을 때부터, 그는 본부로 삼을 건물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유진이 넘겨준 자본 중 상당수가 보수 및 다시 꾸미는 데 들어갔지만.

그 덕분인지, 니콜라이가 방문할 때 즈음에는 나름대로 멋을 낸 호텔의 외형으로 돌려놓을 수 있었다.

"임 이사 덕에 체면치레했어."

"믿고 맡겨주신 덕분입니다."

"그 동생도 꽤 일을 잘 처리하던데?"

"예전에 사업할 때에도 많이 도와줘서 수완은 괜찮습니다."

"잘 교육시켜 봐."

"동생도 의욕적입니다. 대표님한테 받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더군요."

본래 역사에서는 죽었을 인물. 그의 개입이 없었으면 동일했겠지.

낯간지러움에 절로 볼을 살짝 긁었다.

"참. 대표님. 사람을 더 채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건 이사가 알아서 해."

"저, 사무직에 10명, 관리에...."

"실무는 자세히 말해봐야 몰라. 그러니까 맡아서 해줘."

전권 위임.

임재백을 믿는 것도 있지만, 번거로운 일에 머리 쓰고 싶지 않았다.

"절 그렇게까지 신용하시다니."

듣는 입장에서는 포인트를 다른 곳으로 잡은 것 같지만 말이다.

임재백이 감격에 찬 표정으로 입술을 오물거리자, 크로노스가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저 작은 인간은 그대의 생각을 알까.〕

'우리나라 속담 중에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다.'

〔참으로 알맞은 표현이로다.〕

과정이야 어쨌든, 본인만 만족하면 되는 거 아닐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아. 그리고 뽀시래기 용병단 자리는 비워줘야 해."

"미리 만들어놓았습니다."

봐.

얼마나 일 잘해?

이러니까 전권 위임하고 맡길 수 있는 거다.

〔분명 귀찮다고 하지 않았더냐.〕

'겸사겸사.'

니콜라이의 방문으로 이름값이 더 뛰어버린 블랙 컴퍼니.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유진은 로마노프 가문이 쥐여준 기회를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뽀시래기 애들 좀 호출해주겠나?"

"알겠습니다."

"그리고 용병단에 가입한다고 했던 친구들도."

"본격적으로 용병단을 운영하실 겁니까?"

"그래야지."

임재백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음에 품은 생각을 입으로 내뱉었다.

"대표님. 아직 시기상조가 아닐까 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대표님의 재능과 역량은 제가 감히 측정할 수 없을 만큼입니다."

"뽀시래기 팀은 아니란 말이군."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킬킬거린 유진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옳은 말 하면서 왜 그렇게 기를 못 펴요."

"...네?"

"임 이사. 난 그렇게 속이 좁진 않아. 맞는 이야기는 수긍해."

"아, 예. 예."

믿는 눈치가 아니군.

누구를 꼰대로 아나 본데, 정말로 아니라고.

예스맨은 언데드들로 충분했다.

'합일을 시킨 녀석들은 마냥 예스맨도 아니잖아.'

언데드가 자아를 확립하는 건 못해도 중급부터. 그마저도 제한적인데, 합일을 시키면 더 강해지는 대신 자의식도 강해진다.

[레이즈 언데드] 하나 알려주는데도 목뼈에 힘 빳빳하게 주는 녀석들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데?

괜히 속으로 푸념을 하다가 임재백에게 시선을 옮겼다.

"당분간 뽀시래기 팀은 바지사장이야."

"천 대표님께서 직접 관리하실 겁니까?"

"나는 아니고. 고문으로 경력직 한 분 모셔왔지."

누구를 데려온 걸까 고민하던 임재백이 순간 헐- 하고는 탄식을 내뱉었다.

"알겠어?"

"그 미친, 아니. 용병이 고문역을 맡으려 들겠습니까."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미스터 블랙한테 물건 하나만 구해달라고 해."

주문 목록을 들은 임재백의 눈 위로 이채가 떠올랐다.

*

큰 박스티에 짧은 청바지를 입은 여인이 두 눈을 부라리며 투덜거렸다.

"으아아. 지루해!"

"그, 김미정 님. 여긴 접경지역입니다."

"존대하지 마. 엄청나게 나이 들어 보이잖아. 아앙?"

"음. 그래도 몬스터가 나올지 모르니 조용히 해주시면...."

부스럭- 경고가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괴물 한 마리가 수풀을 헤치며 튀어 나왔다.

김미정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곤봉.

말이 곤봉이지, 나무 하나를 뽑아서 그대로 휘두르는 거라서 흡사 건물이 무너지는 것 같은 박력이었다.

"하. 트롤 새끼가."

촤아아악!

곤봉이 반으로 갈라지고, 손잡이를 잡고 있던 트롤의 팔도 찢겨나갔다.

긴 궤적을 허공에 그려내는 칼날.

단검 길이는 트롤의 손가락 크기에 불과했지만, 날에 맺힌 푸른 기류가 어깻죽지까지 베어냈다.

"누나가 기분이 안 좋거든?"

"그오오오!"

"얘가 떠들지 말라고 하잖아. 너도 닥쳐."

막 어깨를 베고 지나갔을 푸른 궤적이 다시 한번 회전.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힘찬 연어마냥 견갑골을 베더니 그대로 트롤의 목을 썩둑- 잘라냈다.

비명조차 잡아먹는 오러.

트롤은 자기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인지하지 못한 채, 어리둥절한 눈을 한 채 머리가 아래로 떨어졌다.

"시킨 대로 조용히 시켰어."

"...아. 예. 잘하셨습니다."

강민호는 아연실색했지만, 그래도 대꾸했다.

[미친개. 왜 엉뚱한 사람한테 화풀이하고 그래?]

[그렇습니다. 목줄이라도 채워줘야겠군요.]

"너희 주인 때문에 그러잖아. 왜 사람을 그런 곳에 처박아놔."

두 언데드의 힐난에 김미정의 눈동자가 뒤집어졌다.

나풀거리는 머리카락.

유형화된 살기에 반응한 공기가 파르르 떨렸다.

"에휴. 형은 왜 저런 사람을 붙잡아 놓은 거야."

"그래도 적응되지 않슴까. 선배."

"이런 거에 익숙해지는 건 더 싫어."

"다 뜻이 있겠지. 그래도 형님이 파프너와 송명석을 붙여줘서 큰일은 안 났잖아."

"오빠. 그건 너무 긍정적이다."

김미정의 살기가 등 뒤에 꽂히니, 뽀시래기 팀은 죽을 맛이었다.

등이 축축하게 젖고.

살기에 반응한 근육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육신을 지치게 만들었다.

"에휴. 내가 벽에다가 소리치고 말지."

살기를 거둔 김미정이 투덜거리며 칼날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유진에게 투항했을 때만 해도 즐거운 일이 많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망자를 일으켜 세우는 헌터라니!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 얼마나 재미가 있을까.

또한, 유진이 부리고 있는 언데드들은 얼마나 강력한지. 싸울 맛도 있었다.

"싸움은 무슨. 3주 동안 저 X밥들 봐주는 거만 구경했잖아!"

"그, 김미장 님. 그래도 X밥은 어감이 안 좋네요."

"내가 틀린 말 했어?"

"형님의 지도를 받았으니 곧 강해질 겁니다. 벽도 금방 넘겠죠."

"뭐, 그래. 너희가 3성 치고 강한 건 인정하는데. 그래도 내 기준에서는 X밥이야."

원망 섞인 김미정의 말을 듣고도 강민호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엄지를 척 세우는 강민영과 이성민.

강민호는 한숨을 삼켰다.

'저 불평은 자업자득 아닌가.'

김미정은 6성 절정의 헌터다.

무장 대부분을 빼앗았지만, 여전히 손 한 번 흔드는 것만으로 일격에 트롤을 쓰러트리는 강자였다.

물리적으로 구속하기도 마땅찮으니, 유진은 파프너와 송명석에게 관리를 맡겼다.

'그 때문에 파프너 씨가 활동을 할 수 없게 됐어.'

따지고 보면 파프너가 네크로폴리스에 머물게 한 원흉인 셈.

정작 당사자는 책임감을 1그램도 가지지 않았지만.

팀 리더인 강민호는 으르렁대는 김미정을 어르고 달래며 유진이 기다리고 있는 옛 호텔 건물까지 왔다.

"고생했다."

"저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표정 보면 알지."

"형. 우리 모두 고생했어."

"오냐. 너희 쓸 방은 비워 놨으니 씻고 와라."

뽀시래기 팀을 먼저 보내니, 남아 있던 김미정이 으르렁거렸다.

"너랑 있는 거. 재미없어."

"그러면 다른 곳으로 가던가."

"나찰이랑 아라한 관계를 까발리게 해놓고 이제 와서?"

"고용해달라고 했던 건 너다."

"아오. 재미있는 일을 달라는 거야!"

넌 언제나 흥미 있는 일만 추구했던 녀석이지.

그래서 다루기 어렵기도 하지만.

'흥미' 자체만 충족시켜줄 수 있으면 얼마든지 부려먹을 수 있다.

"파프너야. 저번에 못 냈던 승부. 더 길게 갔으면 누가 이겼을 거 같냐?"

[흠. 백중세였다. 나도 가늠이 안 되네.]

"송명석. 넌 어떻게 생각하지?"

[저 건방진 혀를 벨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렇다고 하는군."

"히야. 저 쌍검 든 녀석 주둥이만 살았네."

김미정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도발을 하면 곧바로 넘어오니 참 손맛도 좋구나.

"네게 제안하지. 그때 매듭짓지 못한 싸움을 다시 한번 하는 거다."

"갑자기 당신네 소환수랑 싸우자고?"

"대신 조승철의 빈자리는 내가 채울 거다."

츄릅-.

입맛을 다신 김미정이 몸을 가볍게 떨었다.

"추워서 못 싸우겠어."

"네 장비는 돌려줄 거다. 엄살 그만 피워라."

"좋아. 무장을 찾으면 해볼 만하지."

"아. 그냥 싸우자는 건 아니다. 서로 조건 하나씩은 걸어야 하지 않겠나."

"그게 본 목적이었어?"

"싫으면 여기서 관둬도 된다."

글쎄.

싸움을 포기할 수 있을까.

이미 두 언데드와 겨뤄본 후로 그들에게 '흥미'를 가진 네가 말이야.

"로마노프와 접촉했다고 했지?"

"그렇다."

"위대하신 7대 명가라면 나 하나쯤은 신분세탁 해줄 수도 있을 거 아니야."

"난 그쪽의 제안을 거절했다만."

"로마노프에 아쉬운 소리 정도는 해줘야겠어. 내가 이긴다면."

유진은 잠시 턱을 만지작거렸다.

"좋아. 그렇게 해주마."

"넌 뭘 걸 거냐?"

"복종."

"너한테 복종하라고?"

"일단. 표현은 그렇게 했지만, 지금처럼 날뛰지 않는 선에서의 협력자라고 해두지."

"목줄을 걸어보시겠다."

철컥- 철컥-.

무장을 다 착용한 김미정이 씩 웃었다.

"좋아, 네가 이기면 그렇게 해줄게."

[생각도 못한 싸움이군.]

"너도 아쉽지 않아? 당시에 승부를 내지 못했던 거."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주인의 목숨을 걸고 도박까지 할 정도는 아니야.]

파프너의 안광이 좌우로 흔들렸다.

민첩 중심으로 스탯을 분배한 김미정의 돌파력은 경이적이다.

스킬셋도 돌파와 극딜에 치중되어 있어서 작정하고 둘을 제치면 유진을 보호할 방법이 마땅찮았다.

[겁도 많군요. 주군의 곁에 오지 못하게 막기만 하면 되는 일입니다.]

[응. 넌 내 서포트나 잘해.]

[까드드득.]

송명석이 턱뼈를 으스러져라 문댔지만 파프너는 그 모습을 보며 후후, 짧게 웃었다.

둘이 제법 쿵짝이 잘 맞는군.

팀워크를 한 번 맞춰봤으니 일일이 오더를 내릴 필요는 없어졌다.

"순간마다의 판단은 둘에게 맡기마."

[알겠다.]

[존명.]

흐아암- 과장되게 하품을 한 김미정이 단검 두 자루를 느슨하게 쥐었다.

"오늘 안에 시작하는 거 맞지?"

"버프만 걸고."

[부정한 축복을 사용합니다.]

[응징의 쐐기를 사용합니다.]

두 언데드에게는 버프 주문 둘을 걸고.

[거인의 힘을 사용합니다.]

지속시간 동안 생명력을 소모해야 유지되는 신성 주문은 자신에게만 걸었다.

"임 이사가 신호 줘."

"싸움 말입니까?"

"어. 숫자를 세든, 요호홋 이라고 외치든. 하고 싶은 대로 해."

[요호홋은 뭐냐.]

"옛날 해적들의 신호."

파프너가 그런 건 어떻게 알았냐는 눈빛으로 유진을 흘겨보았다.

당황한 기색으로 유진 일행과 김미정을 번갈아보던 임재백이었지만, 이내 결심한 듯 외쳤다.

"3, 2, 1. 시작!"

시자아아아악! 정도는 해줘야지.

아니면 그 뒤에 "하겠습니다!"라도 붙여주든지.

[질풍 걸음]

한 번의 걸음으로 수십 미터를 주파.

순식간에 지척까지 다가온 김미정이 단검을 휘두르려 했다.

"날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해?"

다른 생각이란.

실례되는 말이군.

'네가 어디를 노릴지는 뻔하니까.'

유진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미리 끌어올린 성력을 전방에 펼쳤다.

118화 미친개 길들이기(2)

[부정 충격 방패를 사용합니다.]

X 5

와장창-!

희끄무레한 기운을 뭉쳐 만든 육각형 방패가 유리창 부서지듯 산산이 흩어진다.

몇 겹이나 덧댄 결계가 모두 부서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0.3초.

기세 좋게 방어막들을 꿰뚫은 단검이지만 더 나아가지 못하고 파르르 떨렸다.

"씨X. 이거 뭐야! 힘을 역류시킨다고?"

욕지거리를 내뱉는 김미정의 등 뒤로 기다란 음영이 진다.

[고유 특성 - 도적의 7가지 도구]

[⑤. 무엇이든 휘게 하는 스프링]

한 발 늦게 뒤따라온 파프너가 암흑 투기를 실어 내지르자, 기묘한 각도로 몸을 틀며 흘려보내곤 거리를 재차 벌렸다.

과거 송명석의 공격을 흘려보냈던 도구.

이번에는 '특성'을 몸에 적용시켜서 기괴하게 비튼 것이다.

'역시 미친개인가.'

[부정 충격 방패]의 효과는 둘.

원거리 공격에는 단단한 벽 역할을 하고.

근거리는 충격의 일부를 상대에게 되돌려준다.

방금 전, 일부러 자신에게 달려들 수 있게 길을 열어준 후 결계를 펼쳤지만.

김미정은 단검에 실은 힘 일부가 뒤집히자마자 오러를 층층이 전개해서 반전시킨 에너지를 상쇄시켰다.

"이거야 원. 쉽게 가나 했더니 안 되네."

[주인. 회 좋아하나?]

"꽤 좋아하지. 사주기라도 하게?"

[날로 먹는 걸 좋아해서.]

"으. 아재스럽군."

[생전 포함이면 60살은 되는데 이해해줘야지.]

파프너는 태평한 소리와 어울리지 않게 흉맹한 기세로 주먹을 내질렀다.

[케넥 전투술]

[7장]

[10발 난타]

태태태탱!

콩을 기름에 볶는 소리를 100배 정도로 확대하면 이런 느낌일까.

서로의 의념을 벼려낸 오러가 부딪칠 때마다 굉음이 터져 나오고, 크고 작은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작은 상처쯤은 무시한 파프너가 우직하게 주먹을 휘두르자, 김미정도 양손에 든 단검을 현란하게 움직이며 쳐냈다.

'파고들어서 일격에....'

[분광검]

[2초식 - 백광검]

짓쳐드는 검에 기껏 좁힌 거리를 다시 내준 김미정이 으르렁거렸다.

"아. 조오옴! 너흰 달라진 게 없냐."

[별모양으로 예쁘게 잘라주려고 했습니다. 가만히 계십쇼.]

"너는 대가리만 똑 따서 술잔으로 만들어줄게."

살기 어린 말을 내뱉으면서도, 김미정의 마음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미 손속을 섞어본 적 있는 상대.

버프가 적용되면서 힘과 속도 모두 강해졌지만, 허용범위 내다.

'흥. 너희 움직임은 꽤 적응했어.'

지난 3주 동안 손가락만 빨면서 놀고 있던 게 아니다.

파프너가 임재백을 지도하던 중에 무의식적으로 드러낸 습관들이나.

네크로폴리스 곳곳에서 몬스터들이 생성되었을 때, 신을 내며 달려들었던 송명석의 검법을 관찰했다.

'언데드한테 버프를 사용하는 건 예상외지만 그 정도까진 괜찮아.'

천유진.

저 인간이 신기한 걸 보여준 적이 한두 번이던가.

미리 익혀두었던 적의 몸놀림에서 버프로 늘어나는 정도만 추가로 가늠하면 된다.

당연하게도.

직접 버프를 받은 게 아닌 김미정은 손속을 겨루는 중에 늘어난 스탯을 유추해야 했다.

'이래야 재미있지.'

김미정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생각 못한 변수로 인해 한 수 뒤처진 상황.

등골이 오싹하고 피부에 소름이 돋는다.

'목숨'을 건 싸움도 아닌데 전율이 이렇게나 솟구치다니.

여태 쌓아온 불만이 한 번에 해소되는 기분이다.

"벌써부터 만족하면 곤란한데."

그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유진이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영력을 재배열했다.

[블랙 스피어]

[본 스피어]

인간사냥꾼 서열 3위, 주영민한테 상처를 입힌 마법 조합.

두 손바닥을 세게 부딪치며 영력과 흑마력을 섞어내어 회전시켰다.

1성(본 스피어)과 3성(블랙 스피어) 마법의 융합.

각자 놓고 보면 김미정의 터럭도 건들지 못할 수준이지만.

'위험해.'

본능의 경고에 단검을 크게 휘둘렀다.

검에 맺힌 붉은 오러가 [저주받은 이빨]을 베는 순간.

손목을 타고 전해지는 강렬한 반탄력에 오러를 추가로 불어넣어 마법 무장에 실린 힘을 완전히 뭉개버렸다.

"뭐, 이딴 게 다 있어."

[주군의 해괴한 짓은 나조차도 적응이 안 됩니다.]

한 순간 빈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한번 짓쳐드는 송명석.

김미정의 입이 씰룩거렸다.

마법을 쳐내면서 드러낸 빈틈.

탐스럽게 느껴졌다면, 그게 네 마지막이 될 거다, 라고 생각하며.

"오. 저 도마뱀 새끼 뒤에 안 숨고 정면 승부하는 거야?"

[고유 특성 - 도적의 일곱 가지 도구]

[①. 꿰뚫는 송곳]

일점으로 감기는 오러. 거듭 회전할수록 위력이 늘어났다.

고유 특성의 원래 효과는 사용자의 힘을 집중하는 거지만, 김미정은 그 감각을 오러 운용에 적응시켜서 위력을 극대화시켰다.

'저 해골 녀석의 머리를 꿰뚫어서 파괴하기만 하면!'

[무신의 눈]과 [천골]을 보유한 두 언데드의 합공은 경시할 수 없다.

파프너와 송명석의 움직임에 적응했다고 해서, 위협적이지 않다는 것은 아니니.

흥분한 스켈레톤 나이트를 부숴버리면 전황을 유리하게...?

[특성 - 육감]

뇌리를 관통하는 불길한 감각.

셀 수도 없이 사선을 넘나든 자에게 생기는 '특성'이 경고음을 울렸다.

김미정은 육감의 경고를 듣자마자 손에 실린 힘을 빼려 했지만.

"늦었어."

[부정 충격 방패를 사용합니다.]

[부정 충격 방패를....]

집중된 오러가 성력으로 짜낸 방패들을 어렵지 않게 꿰뚫는다.

그 순간.

일점으로 향하던 오러의 날카로운 끝이 뭉툭해지며 역류하더니 김미정을 해하려 했다.

"씨X!"

흥분한 건 자신이었다.

저 녀석의 방어 결계가 힘 일부를 되돌린다는 것을.

스켈레톤 나이트, 송명석은 무리한 게 아니다.

모두 김미정을 꾀어내기 위해서였음을.

전력으로 오러를 방출하는 순간에 알 수 있었다.

'되돌린 힘을 해소해야 해.'

오러 발현에 제일 중요한 것은 사용자의 의념.

김미정은 역류하는 오러에서 살기를 빠르게 지워냈다.

손목이 저리고 팔뚝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댔지만, 되돌려진 힘을 받아내는 것치고는 손실이 크지 않았다.

6성 절정.

오러의 운용 능력이 극한에 달한 헌터의 솜씨였다.

[승부는 났습니다. 미친개.]

[벌써 끝이야?]

목덜미에 겨누어진 칼.

등 뒤로는 바위만큼이나 단단하게 느껴지는 주먹이 겨누어져 있다.

"한 번 더 해."

"방금 전 싸움으로는 패배를 못 받아들이겠나?"

"난 몸도 제대로 못 풀었다고."

"좋아.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덤벼봐라."

그렇다고 이길 수 있을까.

유진의 뒷말에 김미정의 표정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

"다시 해!"

"너 못 싸우잖아."

"야!! 다시 하자고!!"

피와 흙먼지로 범벅이 된 김미정.

산발한 머리카락 사이로 번들거리는 살기가 솟구쳤다.

반면 유진은 바람에 걸린 옷자락이 펄럭이는 것 말곤 그대로였으니.

연이은 대련에서 승패의 향방을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씨. 뭐야.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네가 못 싸우니까 그렇지."

"염병할. 어? 내가 소환수들 움직임 정도는 다 파악했다고!"

김미정은 악을 내질렀다.

10패.

처음에 충격적인 패배를 경험한 후, 연속으로 달려든 결과물이다.

'분명 이길 수 있단 말이다!'

가슴이 답답해서 터져 버릴 것 같다.

두 언데드의 힘과 민첩, 그리고 반응 속도는 이미 적응한 지 오래다.

3주 동안 관찰하기도 했고.

연속으로 10번이나 겨루었으니 버프로 인한 스탯 증가치에 대응하는 것도 익숙해졌다.

'버프를 고려해도 한 놈은 6성. 쌍칼 든 해골은 5성 정도야.'

파프너의 스탯이 경지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높지만, 오러 총량과 발현 속도는 김미정을 따라잡지 못했다.

모자란 부분은 오러 운용으로 충당하고.

변수 창출에 유리한 [도적의 일곱 가지 도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승리하는 것은 자신이어야 했다.

'근데 어째서...!'

원인은 알고 있었다.

두 언데드를 방패막이 삼아 히죽거리고 있는 녀석.

"어유. 눈빛으로 사람 씹어먹겠어."

너스레 떠는 유진을 보니 속에서 천불이 났다.

처음 빈틈을 보여준 건 일부러였는지, 그 뒤로는 파고드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뿐이랴.

두 언데드의 행동 패턴도 이전과 많이 달라져서 도통 예측이 되질 않았다.

'조금만 더 하면 이길 것 같은데!'

으그그그그, 윗니와 아랫니가 맹렬하게 비벼댔다.

너무 분했다.

분명히 공략 방법을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어째서인지 계속해서 유진에게 닿지를 않았다.

"이제 승복할 건가?"

"퉤. 내가 졌다."

"약속은 까먹지 않았겠지."

"그래. 노예 계약인지 복종인지, 해보자고."

"임 이사. 그걸."

임재백이 조심스럽게 문서 한 장을 내밀었다.

[셀프 기아스 스크롤]

분류 : 소모품

등급 : 유니크

내구도 : 10/10

아스가르드 성단과 보증하는 계약서입니다. 사용자에게 제약을 선언하고, 해당 계약을 어겼을 때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스크롤에는 유진이 미리 적어놓은 글자가 나열되어 있었다.

내용은 전형적인 갑-을 관계.

당연하게도.

유진은 갑이요, 김미정이 을이었다.

"뭐야. 이 개 같은 종이쪼가리는!"

"로마노프 가문에서 만들었으니 효과는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와. 진짜로 날 노예로 부려먹겠다고?"

"노예라고는 말 안 했다만."

"복종하는 게 노예가 아니면 뭐야!"

사용자가 '진심'으로 서명해야 발동하는 스크롤.

강제로 지장을 찍어봐야 발동이 안 되기 때문에 협박 같은 수단으로는 타인을 옭아매지 못한다.

사용처가 굉장히 제한적이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이보다 더 어울리는 아이템이 없지.

"약속하지 않았나? 싸움에서 지면 복종하겠다고."

"그래도 그렇지. 이건 좀."

"좋아. 내가 인심 썼다."

-목숨이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임무는 거절 가능.

-1달에 10일은 자율 활동 보장. 단, 장기간 업무에 대해선 강제력 발동. 대신에 자율 활동 시간은 다음 달로 이관.

"됐지?"

"되기는 뭐가 돼!"

"왜. 급여는 제대로 챙겨줄 거고. 일도 빡세게 안 시킬 거다."

한 달에 10일이나 쉬게 해주면 엄청난 거지.

주5일도 안 되잖아.

이만큼 워라밸 존중해주는 회사가 어디 있냐고!

[6성 절정의 헌터를 저렇게 부려먹겠다니. 내 주인이지만 참 악독해.]

[주군은 원래 저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나를 되살려서 뼈가 닳도록 써먹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놈들 보소.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감이 안 와?

유진이 매섭게 노려보자 두 언데드가 시선을 홱 돌렸다.

〔위정자가 진실된 자를 탄압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구나.〕

'과거에 위정자였던 분이 할 말은 아닐 텐데?'

〔크하하핫. 짐도 자식들을 그만 먹으란 간언을 들었지만 모조리 무시하였도다.〕

'나도 똑같이 당하란 악담처럼 들리는데.'

따지고 보면 그렇게 부려먹는 것도 아니라고.

꼬박꼬박 월급도 줘.

워라밸 보장도 해줘.

밥도 잘 챙겨줘.

살려줘.

...마지막은 좀 아닌가?

'아니. 맞는 말이지. 죽이고 언데드로 되살릴 수 있는 걸 봐주는 거잖아.'

유진의 눈가에 아른거리는 살기를 보자, 김미정이 곧바로 펜을 들었다.

빈자리에 이름을 쓰는 순간, 스크롤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고.

화르륵-.

푸른 불꽃에 휩싸이면서 완전히 연소했다.

[계약서의 내용을 확인했습니다.]

[계약 대상 : 천유진 - 김미정]

[계약 내용]

....

"환영한다. 블랙 컴퍼니의 일원이 된 걸."

"내가 어쩌자고 말도 안 되는 노예 계약에 서명을 했나."

김미정은 하- 깊은 한숨을 쉬며 미간을 찌푸렸다.

〔한데 거절하리란 생각은 왜 하지 않은 게냐?〕

'말했잖아. 쟨 흥미 위주로 움직인다고.'

10번 연속으로 겨룬 거?

다 떡밥을 흔든 거지.

김미정은 아슬아슬하게 졌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은 여력을 충분히 두었다.

'본인은 고유 특성 덕에 변수를 창출하기 좋다고 생각하겠지만 말이야.'

[도적의 일곱 가지 도구]

사용자의 육체에 부하를 줘서 여러 성질을 부여하는 특성이다.

썩 대단한 고유 특성은 아니지만, 녀석은 오러에도 그 성질을 부여함으로써 변화무쌍한 전투 스타일을 구사했다.

〔그럼에도 여력을 두었느냐?〕

'알면 문제가 안 돼.'

정보의 불균형.

회귀자의 특전을 이런 데서 써먹어야지. 아니면 어디에 쓰겠는가.

탐이 나는 먹잇감(유진)에 낚인 미친개.

그녀는 이 순간에도 무언가에 홀린 듯한 눈으로 유진을 흘겨보았다.

119화 뽀시래기 용병단

정식으로 계약서도 썼겠다. 유진은 지시를 바로 내렸다.

뽀시래기 용병단 고문.

첫 지시를 들은 김미정의 표정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고무우우우운?"

"오냐. 잘 들었네."

"나보고 저 코찔찔이들 옆에서 챙기라고?"

"조언하는 거지. 뭘 챙겨주는 거야."

"그게 그 말이지!"

콰아아앙-!

땅에 새겨진 커다란 족적.

오러로 신체를 강화한 후, 지면에 충돌하는 순간 2차로 발출까지 하면서 이 일대를 뒤흔들 만한 충격파가 일어났다.

"화를 내는 것도 아주 세세하네."

"염병할 소리 하잖아."

"큰 거 바라는 거 아니야. 용병단장한테 선 넘으려고 하는 녀석들만 밟아주면 돼."

"내가 코찔찔이들 뒤치다꺼리나 해주는 신세라니."

아무리 투덜대봐라.

셀프 기아스 스크롤에 제 이름을 적었으니, 거절 못할 거다.

이제는 블랙 컴퍼니 본사가 된 건물로 들어가서 준비를 마친 뽀시래기 팀에게 새 고문을 소개해주었다.

"형. 그 고문이 막, 꼬집어서 비명 나오게 하는 걸 말하는 거야?"

"너희가 용병단 운영하다가 힘든 부분이 있으면 조언해주는 역할이다."

"어, 어어. 그건 좀."

아연실색하는 강민영.

흥, 김미정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콧김을 불었다.

"감사한 줄 알아야지. 나 같은 헌터를 고문으로 구하기가 쉬운 줄 알아?"

"왜 어려운지는 알 것 같네요."

"주둥이는 살았네. 한 번도 안 지고 말이야."

으르렁대는 두 여인.

김미정이 살기를 드러내자 움찔거리긴 해도,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 유진은 구경 중인 쌍둥이 남매에게 슬쩍 귀띔했다.

'언제부터 저렇게 간이 커진 거냐?'

'형님 계셔서 믿고 저러는 것 같습니다.'

'원래는 안 그랬어?'

'죽고 싶어 환장했게요. 그 악명 높은 미친개한테 시비를 걸 만큼 강심장은 아닙니다.'

그 강심장.

댁의 쌍둥이 동생인 것 같은데요.

'셀프 기아스 스크롤에 대해서 말해주지도 않았는데. 간도 크군.'

〔용감한 건지 무모한 건지 모르겠구나.〕

크로노스도 이번만큼은 영웅의 자세니 어쩌니 같은 헛소리 대신 현실적인 답을 했다.

흠흠, 짧은 헛기침으로 두 여인의 시선을 이쪽으로 돌렸다.

"김 고문."

"웨엑. 느낌 진짜 이상해."

"이 녀석들. 잘 관찰해 봐. 재미 있을 거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벽도 못 넘은 코찔찔이들이라고."

"네 기준에 맞춰 보면 나도 코찔찔이다."

씨, 굴욕감에 무의식적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려던 김미정이 별안간 입을 만지작거렸다.

"어어. 뭐야. 왜 이래!"

"나하고 있을 땐 욕 금지다."

"야잇, 씨. 그딴 게 어디에 있어!"

"계약서를 자세히 보면 나와 있다. 아, 이미 발동돼서 재가 돼버렸군."

"이건 무효야!!!!"

그러니까 약관은 구석구석 꼼꼼하게 살펴봐야지.

악덕 업주였으면 씨X 같은 욕 금지 대신 어마어마한 조항들을 숨겨놓았을 거다.

"내가 자비로운 고용주인 걸 다행으로 여겨."

"아, 아잇 시······! 아오! 개같네!"

김미영이 욕도 못 내뱉고 성질만 내고 있을 때.

용병단 발족식 때 가입했던 헌터들이 삼삼오오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다들 입단속해. 품위는 지켜야지."

"형님이 품위 말하니까 좀 그렇지 말임다."

"내가 뭐?"

"저어어엉말 잘 어울린다는 검다."

처신 잘해라. 이성민 씨.

가볍게 째려봐주고는 장내를 채워가는 용병들을 빤히 봤다.

"그라운드 제로 안에 있는 용병단이라."

"어때. 우리 하는 일도 그렇게 떳떳하진 않잖아."

"흐으음. 뭐, 그렇지."

블랙 컴퍼니, 그리고 산하 조직인 뽀시래기 용병단의 위치에 큰 불만을 드러내지 않는 용병들.

헌터가 대 몬스터 직업군을 통칭하는 거라면, 용병은 그보다 범위가 좀 더 넓었다.

기본적인 형태는 PMC(민간군사기업)지만, 실제 활동 영역은 사설 탐정이나 흥신소까지도 아우르고 있으니.

헌터 겸 용봉 일을 하는 이들 치고 불법적인 일에 발을 거치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다.

도리어 그라운드 제로에 영역을 선포할 만한 힘을 지녔다며 반겼으면 반겼지.

"그 붉은 거미를 제쳤다며."

"소문이 반만 사실이어도 블랙 컴퍼니에 엉덩이 붙이는 게 낫지."

"나찰 길드도 당분간 못 움직일 테니."

장밋빛 전망을 꿈꾸며 모인 용병들.

미리 고지한 시간이 되자, 유진은 뽀시래기 팀을 대동한 채 용병들 앞에 섰다.

"반갑군. 천유진이다. 그리고 이 친구가 용병단장이다."

"아, 안녕하십니까. 강민호 용병단장입니다."

쭈뼛거리면서 인사하는 강민호.

갑작스러운 인물 소개에 장내 분위기가 얼음물을 끼얹은 것 마냥 싸늘하게 굳었다.

*

"천유진이 아니고 듣도 보도 못한 놈이 단장이라고?"

"저 인간은 뭐하는 놈이야?"

"이중 게이트 사태 때 일행 같은데."

"우라질. 뭔 개소리인지."

장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는 욕지거리.

얼음이 깨어지듯.

한 번 깨어진 침묵은 무수한 파편으로 조각나면서 잡음을 만들어 냈고.

차가웠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반전되어 거세게 타올랐다.

장내의 분위기를 관망하던 유진이 시선을 옆으로 슬쩍 옮겼다.

'생각보다 굳어있진 않군.'

입술을 꾹 만 강민호가 장내에서 시선을 고정한 채로 서 있다.

대담하군.

옆에 있을 땐 늘 낮은 자세로 유진을 대해서 간과했지만, 회귀 전에는 8번째 별을 완성했던 강자였다.

강건한 의지와 신념을 지니지 않으면 달성할 수 없는 드높은 경지.

아직 빛을 온전히 발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래서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고 하나.'

〔계약자여. 언제까지 관망하려느냐?〕

'이제 슬슬 나설 거다.'

강민호가 모욕을 당하는 건 유진도 달갑지 않았다.

회귀 후 처음으로 생겨난 인연.

당시에는 가능성을 보고 영입했지만, 같이 다니면서 나름대로 정이 붙었다.

〔그대는 이리 될 줄 알았을 터. 한데 왜 그리했느냐.〕

'필요했으니까'

신준석의 공방에서 고기를 구워 먹던 때하고는 다르다.

나찰 길드와의 전쟁.

전투원 150명과 용병 100명을 물리친 순간부터, 블랙 컴퍼니가 외부에 알려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아니.

유진은 소문을 막기는커녕 마담의 정보망을 사용해서 더욱 크게 키웠다.

'블랙 컴퍼니를 알릴 기회를 놓칠 순 없었지.'

〔그러하나, 이 작은 인간들은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구나.〕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뽀시래기 팀.

회귀 후, [고대의 정원]에서 우연히 마주친 후, 지금까지 이어온 인연.

쌍둥이 남매는 후일 '거울 사냥꾼'이란 호칭과 함께 용병업계에서 전설을 썼던 이들이고.

이성민도 로마노프 가문 서열 2위와 동일한 고유 특성을 지닌 만큼 굉장한 가능성을 품었다.

'난 단순히 가능성만 보고 이 녀석들을 내몬 게 아니야.'

굳센 바위와도 성정을 지닌 강민호.

대칭을 이루듯, 강민영은 능청스러우면서 여유가 있었고.

마지막으로 이성민은 늘 위축되어 있는 모습과 달리 굳은 의지를 품고 있다.

'봐. 어느 누구도 시선을 피하지 않잖아.'

〔과연. 짐이 이 작은 인간들을 과소평가한 모양이로구나.〕

크로노스는 담담하게 실책을 인정했다.

아무렴.

용병 수십 명의 욕지거리를 받아내는 와중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 해도 칭찬받을 만했다.

'그래도 불쾌하군.'

〔새삼스럽기는. 이 모든 상황을 예측하였으면서 왜 그러느냐?〕

'내가 욕하는 건 괜찮지만, 다른 놈들이 욕하게 둘 순 없다.'

〔······흠?〕

한 템포 늦은 크로노스의 대꾸.

유진은 대답하는 대신 한 발자국을 앞으로 내디뎠다.

슬슬 분위기를 전환해볼······.

"다들 주둥아리로 싸우나? 왜 이렇게 시끄러워!"

좌석에서 일어나 단상 앞까지 나온 거한.

불평을 토하던 용병들은 중년 사내의 등장에 입을 꾹 다물었다.

"민상진?"

"검은 늑대잖아."

"저번에 모집할 때 있긴 하던데."

"와. 진짜 왔네."

용병업계에서 나름대로 명성(혹은 악명)을 쌓은 검은 늑대 팀.

민상진은 단상에 선 강민호를 가리켰다.

"처음 뵙겠수다. 용병단장 나리."

"······예?"

그럴 리 없다.

두 사람은 접경지역에서 손속을 겨뤄본 사이.

블러드 골렘을 낀 채, 검은 늑대 팀의 발목을 잡고 늘어진 것에 불과하지만 얼굴을 못 보고 지나칠 정도는 아니었다.

강민호가 뭐라 말하려고 할 때, 민상진이 대뜸 외쳤다.

"천유진 대표 이름 보고 왔는데. 벽도 못 넘은 헌터가 단장이랍시고 서 있으면 곤란하지."

"아, 그건······."

"그러니까 실력 좀 보여주면 납득하겠어. 알겠나?"

호오.

지켜보던 유진이 민상진의 말에 숨겨진 뜻을 이해하고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

장내 분위기는 어수선해졌다.

유진의 폭탄선언과 풋내기 용병단장의 등장.

마지막으로 [검은 늑대] 팀의 리더, 민상진의 항의까지.

"검은 늑대의 지적이 맞다."

"용병단장이라면 실력을 보여줘야지!"

"싸워라! 싸워라!"

민상진이 꺼낸 제안은 용병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벽'을 넘지 못한 헌터가 용병들의 대표가 될 수는 없다!

합당한 실력을 보여주면 납득하리라.

"좋은 의견이군."

"천 대표도 동의하는 거요?"

"블랙 컴퍼니 산하에 둘 용병단이다. 단장이라면 모두가 납득할 만한 실력은 지녀야지."

"흐, 테스트는 내가 정할 거요. 그 정도는 양해해주쇼."

민상진이 으스대자, 뒤에 있는 용병들도 호탕하게 웃으며 의견에 힘을 더했다.

〔가만 두어도 되겠느냐?〕

'민호를 도와주고 있잖아. 굳이 제재할 필요는 없어.'

〔짐의 눈에는 작은 인간들을 선동하는 것처럼 보인다만.〕

'초면이라고 선 그어놓고 실력 발휘하라고 등까지 떠밀어주고 있잖아.'

굳이 초면이라는 단어를 강조한 이유가 무엇이겠어.

용병들을 대표하는 척 하면서 강민호가 나설 만한 판을 깔아주겠다는 의미다.

"우리 팀 동생이 4성 헌터요."

"그래서?"

"사내답게 제일 센 걸로 부딪쳐보기. 이거면 다들 납득할 거요."

민상진이 뒤를 바라보자, 용병들이 삼삼오오 떠들다가 금세 수긍했다.

'벽'을 넘느냐, 넘지 못했느냐.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벽도 못 넘었으면서 무슨 수로 오러를 받아내?"

"덤볐다가 몸이나 안 썰리면 다행이지."

"만약 그게 되면 인정한다."

의견이 일치한 것을 확인한 민상진이 손을 까딱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사내.

허리에 매달아놓은 검집에서 스르릉- 칼을 꺼내자마자 푸른 기류가 날을 휘감았다.

"가봐."

"예. 형님.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단상 아래로 내려온 강민호가 오러를 일으킨 사내와 마주했다.

서로의 거리는 5미터.

도약 한 번이면 금세 좁혀질 거리다.

"마지막으로 확인하겠수다. 용병단장이 공격을 받아내면 인정하는 거. 다들 동의하는 건가?"

"동의한다."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이거, 괜히 그라운드 제로까지 왔어."

민상진은 투덜거리는 용병들을 힐끗거린 후, 강민호만 알 수 있게 히죽 웃었다.

'역시 초면이라는 말은 거짓말이었어.'

후, 짧게 심호흡한 강민호가 마음을 다잡았다.

왠지는 몰라도.

접경지역에서 대치했던 무서운 용병은 자신에게 기회를 주고 있다.

또한.

유진도 기대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실망시켜드리지 않을 겁니다.'

뽀시래기 팀, 아니 용병단장으로서 내딛는 첫 걸음.

자신을 믿어준 유진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당신을 응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여신님.

마음으로 심호흡을 한 강민호가 마력과 신력, 그리고 육체를 동시에 움직였다.

[이동요새]

[강격]

[아테네의 가호 - 아이기스 Lv1]

푸른 기류와 하얀 섬광이 동시에 터졌고.

콰아아아앙-!

폭발의 여파로 휘몰아친 커다란 바람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120화 똑바로 일해라, 기연 탐색기(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