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eads / SANTOSUBEDENIVELCONNIGROMANCIA / Chapter 18 - 170-180

Chapter 18 - 170-180

170화 스네이크 아이

유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스네이크 아이를 다시 볼 줄이야.'

뱀처럼 쭉 찢어진 눈동자.

인상이 선하다는 말이 빈말로도 나올 수 없는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가 넝마를 뒤집어쓴 채로 자신을 바라봤다.

스네이크 아이.

라스베이거스의 지하 투기장에서 유진에게 거금을 안겨준 사내이자.

회귀 전, 남미행에 고용했던 길잡이다.

'이 아저씨가 무슨 일로 한국에 온 거지?'

〔전생에는 그대의 발목을 물었다고 하였지 않았느냐?〕

'맞아. 거울 사냥꾼을 상대했을 때만큼이나 위험한 적이었다.'

뱀 같은 자.

돈이 되면 고용주도 해할 수 있는 독종.

저 갸름한 눈만큼이나 속내를 알 수 없고, 신뢰도 안 가는 작자다.

"스네이크 아이."

"테렌스 D 스미스입니다."

"우리가 본명을 부를 만큼 친한 사이였나?"

지하 투기장에서 스네이크 아이의 능력을 100%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 건 변덕이었다.

손쉽게 돈도 딸 겸.

그 덕에 블랙 컴퍼니 운영 자금을 상당수 확보했으니.

회귀 전의 악연을 두 번째 삶까지 이어갈 생각은 딱히 없었다.

그렇지만.

"내가 누군지 어떻게 알아냈고. 왜 한국까지 왔는지. 모두 설명해줘야 할 거다."

유진은 삐딱한 눈으로 스네이크 아이를 노려보았다.

지하 투기장에서 만났을 땐 눈앞의 사내에게 그를 추정할 만한 것을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나름대로 조사를 한 끝에 유진의 앞에 섰다는 의미.

유진의 눈가에 감도는 경계심을 눈치챈 스네이크 아이가 후- 짧은 한숨을 쉬었다.

"갑작스러우시겠죠. 이해합니다."

스네이크 아이는 품속에 손을 넣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여자아이의 사진.

날카로운 눈매가 왠지 눈앞의 사내를 빼다 박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착각일까.

"제 딸입니다."

"아버지를 꼭 닮았군."

"귀엽지 않습니까?"

실례되는 말이 나올 뻔했다.

무의식중에 말을 내뱉으려다가 입술에 꾹 힘을 준 유진이 화제를 돌렸다.

"그 사진을 보여주려고 한국까지 온 건 아닐 테고."

"사실 제 딸은 얼마 전까지 목내이병이란 희귀 병에 걸려서 고생을 했습니다."

"목내이병?"

"예. 치료 방법도 없고 현 상태를 유지하는데만 엄청난 돈이 들었죠."

딸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투기장에서 떠나지 못했던 삶.

유진이 지나가면서 던져준 조언 한마디로 그의 인생은 역전되었다고 한다.

하나뿐인 딸의 연명치료가 가능해졌고.

양산을 시작한 목내이병 치료 기기를 구매해서 지금은 회복세로 접어들었다고.

"근데 성자의 휴식을 만든 분이 당신이더군요. 미스터 천."

"거기까지 조사하다니. 대단하군."

"성자 시리즈 하면 당신의 얼굴이 바로 나와서 알아볼 것도 없었습니다."

"...."

그러니까.

자신이 누구인지 여러 자료를 조사해서 찾아온 게 아니라, 목내이병 치료 기기를 알아보다 얼굴을 확인한 거라고?

〔크하하하핫! 그대의 의심이 발목을 붙잡았구나.〕

호탕하게 웃는 크로노스.

유진은 한마디 대꾸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미스터 천은 제 은인입니다. 감사드립니다."

"그럼 한국에 은혜라도 갚으러 왔단 말인가?"

"원래는 그랬습, 니다만."

스네이크 아이는 어울리지 않게 매서운 눈매를 누그러트린 채, 땅을 바라봤다.

이 양반은 말 잘하다가 갑자기 왜 이런대.

"고용 좀 해주시겠습니까?"

다시 고개를 든 스네이크 아이의 얼굴은 마치 사과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

"...그러니까 사기를 당했다?"

"예. 한국에 오고 나서 모아놓은 여윳돈을 모두 날렸습니다."

세상에.

남의 뒤통수치는 데 선수인 스네이크 아이가 사기를 당하는 세계관이라니.

유진은 새삼스럽게 회귀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이걸 믿어야 해. 말아야 해?'

〔저 작은 인간의 이야기에 모순은 없었느니라.〕

'상대가 상대잖아. 난 저 양반한테 딸이 있었단 이야기도 못 들었다고.'

〔목내이병에 걸렸으면 오래 살지 못했을 터. 앞뒤를 맞추어보면 진실에 가깝지 않느냐.〕

그건 인정.

설득력이 조금이라도 없었으면 바로 내쫓았을 거다.

같은 사람한테 두 번이나 뒤통수를 맞을 수는 없으니까.

"임 이사. 적당한 옷 사서 입혀주고 사옥에서 잠시 쉬시게 해."

"알겠습니다."

"감시도 좀 붙여놓고."

한국말을 모르는 스네이크 아이는 그저 유진의 말에 감사하다고 고개를 꾸벅꾸벅 숙였다.

우리나라 식 감사 표현은 언제 배운 건지.

임재백에게 스네이크 아이를 맡으라고 한 후, 은하수 펍으로 갔다.

"웬일로 문이 멀쩡하군."

"호호. 누가 보면 멀쩡한 문을 뜯어놓고 장사하는 줄 알겠어요."

"아니었나?"

"더 그러시면 진심인 줄 착각하겠는걸요."

"이상하군. 왜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다."

마담은 눈을 가늘게 떴다.

"진심이세요?"

"아니. 농담이다."

"호호호. 문은 제가 예민해서요. 신경 좀 써주세요."

회귀 전에는 자동문이라도 만들어야겠다며 호호, 하고 웃지 않았었니.

마담이 정색하는 보기 드문 진풍경을 본 유진은 허허허-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동행하신 분은 누구세요?"

"파프너."

"마법으로 변한 건가 보네요. 근데 왜 여인의 모습을 취했는지."

파프너는 킁, 콧김을 불었다.

"원래 내 모습이야."

"어머나. 화장기가 드리웠는데요. 그게 본모습인가요?"

"자연적인 거지. 생전의 내 모습을 100% 그대로 구현한 거다."

"호호. 재미있네요. 당신이 여인이라는 것도 꽤 놀라운데, 이렇게나 아름다운 분이었다니."

서늘해진 공기.

뭐야.

이 분위기?

유진이 뒤통수를 벅벅 긁자, 마담은 다시 한번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구룡방에서 유진 님께 현상금을 걸었답니다."

"얼마나?"

"100억이요."

"싸네. 놈들한테는 만주의 가치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호호호. 이미 날린 것은 어쩔 수 없잖아요. 장례비 대신으로 건 거랍니다."

놈들 시체는 모두 언데드로 일으켰는데 무슨 수로 장례를 치르려나.

되살린 망자들과 함께 장례식장을 가면 상주 취급을 해주지 않을까?

순수하게 궁금증이 들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대단하구나. 바벨탑의 마신들도 기립박수를 칠 아이디어로다.〕

에이.

그 친구들이랑 비교하면 선 넘는 거지.

"마담. 사람 한명 조사해줘."

"스네이크 아이. 본명은 테렌스 D. 스미스 말이죠?"

"벌써 조사를 마친 건가."

"라스베이거스 지하 투기장의 간판급 투사가 거지꼴로 천 대표님을 기다리는데 어떻게 참겠어요."

지하 투기장의 간판?

라스베이거스에 들른 지 3달 정도밖에 안 됐는데 이름값을 빨리도 키웠군.

마담이 넘겨준 자료를 차분하게 읽어본 유진이 쯧, 혀를 찼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군.'

〔하면 그 작은 인간에게 문제는 없겠구나.〕

'딸 이야기는 처음 듣는단 말이야.'

〔그대가 작은 인간을 알았을 때는 이미 세상을 떠난 것이지 않겠느냐?〕

'현재로써는 그럴 가능성이 제일 높아.'

돈이 없어서 딸을 잃고.

그 뒤로는 돈을 맹목적으로 모으는 자본주의 괴물이 되었다?

일리 있는 추측이지만 마음을 놓고 싶진 않았다.

〔앞뒤를 모두 맞추어보면 개연성도 충족되지 않느냐. 왜 그리 의심하느냐.〕

'회귀 전에 겪었던 위기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였거든.'

스네이크 아이의 배신 타이밍은 치명적이었다.

언데드 군대를 양성하려고 온갖 전장에 참여했던 유진조차 죽음을 떠올렸을 정도.

정말이지.

그땐 운이 좋았다

"뭘 고민하세요?"

"한국까지 쫓아와서 고용해달라고 하기에는 이유가 빈약하게 느껴져서."

"대표님답지 않게 의심을 하시네요."

"마법사는 어떤 현상을 마주해도 의심하는 시선으로 봐야 한다."

"신관이잖아요. 대표님 직업군."

"...."

마법사 겸 신관이라고 해주지 않을래.

신관 클래스는 어디까지나 덤이라고.

유진의 구겨진 표정을 보고 입을 가리며 웃던 마담이 상반신을 슬쩍 앞으로 숙였다.

가까워진 두 사람.

"그 사람. 못 써먹으실 것 같으면 저 주세요."

"스네이크 아이를?"

"테렌스 D. 스미스의 진가는 추격술이랍니다. 그는 뛰어난 사냥꾼이에요."

유진은 신음을 삼켰다.

조사 기간이 짧았을 텐데 용케 거기까지 유추했군.

스네이크 아이가 용병으로 활동하지도 않았으니 정보도 부족했을 거다.

모자란 데이터로 이만큼이나 진실에 다가가다니.

'역시 마담이다.'

신음을 삼킨 유진은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저었다.

"저한테 소개 안 해주실 건가요?"

"나중으로 하지. 스네이크 아이한테 시킬 일이 있어서."

"또 해외를 다녀오실 예정이군요."

"...어떻게 알았지?"

"호호. 영어에 능하며 추격에 뛰어난 사람을 쓸 일이 있다면 한국은 아니겠죠."

못 보던 사이에 독심술이라도 배웠니.

아니다.

마담은 원래부터 이랬던 사람이다.

'이래서 블랙 컴퍼니로 끌어들인 거지만 말이야.'

참.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되는 통찰력이다.

"당분간 내가 신경 쓸 일은 있나?"

"대표님의 목에 100억이 걸린 것만 해도 큰 걸요."

"겁 없이 달려들면 오히려 좋아."

"망자로 일으켜서 부려먹는 것도 적당히 해주세요."

푸념 섞인 마담의 말에 가볍게 웃어주었다.

*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유진은 컴퍼니 사옥에서 체류 중인 스네이크 아이를 만났다.

"당신을 고용해달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지하 투기장보다 못 벌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나?"

"미스터 천이 아니었으면 투기장에서 그만한 돈도 못 벌었을 겁니다."

"난 이해가 안 가는군. 은혜를 갚는답시고 타향에서 고생을 자처한다는 게."

스네이크 아이는 흉흉하게 웃었다.

"아무 조건 없이 고생만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3년. 그 정도면 미스터 천에게 입은 은혜를 청산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죠."

3년이라.

유진의 눈가에 감돌던 의혹의 빛이 수그러들었다.

"한 가지 제안을 하지. 그 3년,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보내지 않겠나?"

"다른 사람 말입니까?"

"마담이라고, 블랙 컴퍼니 이사 중 한 명이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스네이크 아이는 곧바로 수긍했다.

"아. 마담하고 일하기 전에 나랑 어디를 좀 다녀와 줘야겠어."

"어디입니까?"

"필리핀."

"알겠습니다. 출발은 언제 하실 겁니까?"

"1주일 뒤. 밀린 일을 처리할 시간이 필요하거든."

[메멘토]와 [크로노스의 회중시계]가 보여준 기연.

스네이크 아이의 능력은 필리핀에 숨겨진 것을 찾아내는데 큰 힘이 될 것이다.

'녀석이 배신만 안 한다면 더 좋을 텐데.'

회귀로 인한 변곡점이라.

크로노스의 조언도 일리가 있지만, 회귀 전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유진은 도무지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필요한 것은 임 이사에게 말하도록."

"알겠습니다."

뭐, 그래도 한번 써보자고.

틀려먹었다고 생각하면 그때 잘라내도 된다.

스네이크 아이에 대한 처분을 어느 정도 마무리한 후, 네크로폴리스로 넘어갔다.

아라한 길드에서 선발대를 통해 이쪽을 넘보려고 했던 정황이 있었으니.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방비를 충분히 해두는 게 좋겠지.

'추가로 만들어야 할 언데드도 있고.'

만주에서 획득한 메이 샤오의 시체와 혼백.

흔치 않은 원거리 무투계 헌터라는 소재를 얻었다.

〔이번에는 무엇을 만들려 하느냐?〕

'거기서 지켜보고 있어.'

양손을 쓱쓱 비빈 유진이 [흑암의 반지]에 넣어둔 시체를 꺼냈다.

생전 능력을 100% 발휘할 수 있는 언데드를 만들어보자고.

171화 데스 레인저

희끄무레한 안개로 뒤덮인 죽음의 영역.

네크로폴리스의 영력 농도는 1개월 사이에 한층 더 진해져 있었다.

무수한 죽음이 축적된 결과물.

-으어어.

[주인님께 영광을.]

네크로폴리스에 속한 망자들은 유진을 보자마자 고개를 푹 숙였다.

〔숫자가 꽤 늘어난 것 같구나.〕

'다크 미니언들 수련시켜 놨으니까.'

〔언데드 사역 숫자에는 제한이 있지 않느냐?'

'검은 방첨탑 네트워크 숫자도 늘려놨고. 각 개체도 수십 구 사역할 수 있다.'

틈만 나면 몬스터가 생성되는 접경지역.

네크로폴리스는 언데드 군대를 키우기 최적의 환경이다.

유진은 곧장 죽음의 전당으로 향했다.

[주인이시여. 돌아오셨습니까.]

"시킨 일은 잘했냐."

[언데드 군대를 양성하고 구조물을 지었습니다.]

"좋아. 얼마나 잘했는지 확인해주마."

[검은 방첨탑 네트워크]

[네트워크 수 - 10개]

[제어 중인 언데드 - 9,213/11,000]

죽음 용기병(1) / 브루탈(10) / 다크 미니언(37) / 듀라한(3) / 스켈레톤 나이트(12) / 타이런트(15) / 아머드 스켈레톤(1,327)....

(이하 내용은 접혀 있음.)

[네트워크 내 구조물]

*죽음의 전당(1) / 거인의 묘지(1) / 강령술 연구소(5) / 망자의 골탑(15) / 불경스러운 묘지(1)....

(이하 내용은 접혀 있음.)

처음 눈에 들어오는 건 10배 이상 늘어난 언데드 숫자였다.

"아머드 시리즈를 만들었어?"

[그겔, 저를 포함한 다크 미니언 일부가 주인님의 솜씨를 흉내 내었습니다.]

"생각보다 많군."

다크 미니언들의 심령은 유진에게 종속되어 있다.

스킬을 전수하면 그가 연구한 오리지널 비술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유진에게 [레이즈 언데드]와 [레이즈 데드]를 배운 망자들 중 일부가 언데드 개량에 성공한 것이다.

"언데드 강화는 3단계. 안개 농도도 꽤 짙어졌어."

[주인님께서 시키신 대로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잘했다."

[이제 몸을 돌려주십시오. 그겔.]

"전당에 있어도 강령술 연습은 할 수 있잖아?"

레이즈 언데드는 숙련도를 100까지 올렸고.

레이즈 데드도 72까지 상승했다.

조승철은 회귀 전 기준으로 7성에 도달했던 강력한 마법사.

그 재능이 이 순간에도 빛을 발한다는 거겠지.

[그게겔.]

"농담이다."

조승철의 두개골을 쏙 뺀 후에 주인 잃은 뼈다귀 위에 맞춰 주었다.

[그겔! 다시 몸이 돌아왔다!]

[비루한 몸에 집착하다니. 제 멋진 모습을 본받으십시오.]

[주인님께서 만들어주신 육체. 나도 곧 새로운 몸을 받을 수 있다.]

어?

그런 약속 한 적 없는데.

〔이 하수인은 더 시술할 의사가 없느냐?〕

'그건 아니야. 조승철은 쓸 만하거든.'

7성이 반쯤 확정된 인재(?)를 썩혀둘 순 없다.

다만.

본인도 준비가 안 되었고, 송명석처럼 환골탈태 급의 시술을 할 재료도 없다.

'소소한 추가 시술로 강화나 해줘야지.'

〔추가적으로 주문을 습득하게 하여 전력을 강화하진 않는 게냐?〕

'스킬 북이 없어.'

마법계 스킬북은 무투계보다 드랍률이 많이 나쁘다.

거기에다, 무투계는 벽을 넘으면 오러로 모자란 파괴력을 벌충 가능하지만.

마법계 헌터는 마법 사용 횟수를 늘려주는 거라 극적으로 전투력이 향상되진 않았다.

'이승연은 생전에 익힌 주문이 꽤 있어서 괜찮지만, 얜 아니거든.'

〔차라리 이 하수인을 네크로맨서로 양육해 보지 않겠느냐.〕

'네크로맨서?'

〔제법 소질이 있지 않느냐. 두 달 만에 주문의 본질을 깨우쳤으니.〕

흠.

굳이 생전의 특기인 화염 분야에 함몰될 필요가 없겠군.

크로노스의 지적은 타당했다.

'생각 못 했던 부분을 짚어줘서 고맙다.'

〔크하하핫. 대리인의 모자람을 채워주는 것도 성좌의 덕목 아니겠느냐.〕

경박한 웃음만 아니었으면 성좌로써의 품위가 조금 살았을 텐데.

쯧, 유진은 혀를 찼다.

*

1달 동안 네크로폴리스는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망자들의 숫자는 10배 이상으로 늘어났고.

강령술 연구소에서 진행하는 기술 연구 속도도 훨씬 빨라졌다.

〔계약자가 없으니 더 잘 풀린 게냐?〕

'으휴. 검은 방첨탑 네트워크 덕분이지.'

네크로폴리스 발전의 핵심은 강령술을 다룰 줄 아는 네크로맨서의 유무.

괜히 다크 미니언들에게 강령술을 익히게 했을까.

연구소에 투입한 네크로맨서(다크 미니언)의 수준이 높아야 효율도 올라간다.

'네트워크 덕에 버프 효과가 늘었잖아. 강령술 수련에도 도움을 준 거다.'

언데드 수용 가능한 양이 증가하면서 하급 언데드들을 잔뜩 만들 수 있게 되었고.

스탯 증가치가 늘어나면서 한 번이라도 더 마법을 쓰니 숙련도가 부쩍부쩍 오를 수밖에.

"레이즈 언데드 숙련도 40은 모두 달성했군."

[예. 주인님.]

숙련도가 가장 낮은 녀석이 40을 넘겼으면 최소 조건을 충족시킨 셈.

곧 다음 주문을 알려줘야겠다.

'그러기 전에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지.'

흑암의 반지에 넣어둔 메이 샤오의 주검을 바깥에 꺼냈다.

-키이이이! 키이이!

"좀 닥치고 있으세요."

망령이 된 메이 샤오의 울부짖음을 영력으로 슬쩍 누른 후, 시체를 면밀히 관찰했다.

송명석이 녀석을 쓰러트리고 반지에 거두기까지의 텀은 약 10분.

사후강직도 일어나지 않은 싱싱한(?) 상태다.

"파프너, 조승철. 강령술 보조 좀 해줘."

"난 왜?"

"영력 컨트롤 능력이 제일 뛰어나잖아."

"흠. 자신 없지만 알았어."

[주군. 부디 제게도 역할을 부여해주십시오.]

"넌 물건 좀 챙겨와."

[조, 존명.]

허드렛일도 아무나 시키는 거 아니다.

똘똘해야 굴릴 수 있다고.

[합일]을 통해 생전의 모습을 각성한 언데드라고 해서 모두 자의식이 강하진 않다.

죽은 몸뚱이와 결합한 혼백이 얼마나 강인한가.

이승연처럼 죽기 직전 성위는 높아도 혼백의 기운이 강하지 않은 녀석은 수동적으로 움직이듯.

센스가 필요한 일은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으니 송명석이 딱 맞았다.

[오러를 사용합니다.]

시술용으로 챙겨온 메스에 오러를 불어넣으니 피부가 쭉 찢어졌다.

오.

꽤 편한 걸.

이럴 줄 알았으면 회귀 전에도 오러 한번 익혀보는 건데 말이야.

"오우거의 힘줄."

[여기 있습니다.]

"흑요석."

[예.]

"참. 그건 메이 샤오의 동공 크기에 맞춰서 잘라줘."

[죽어서 풀려 있는데요. 이 정도로 맞추면 되는 겁니까?]

"상관없어."

메이 샤오의 장기와 뼈, 힘줄 등 신체구조 일부가 몬스터나 특수한 광물로 대체되었다.

[연금술식 - 마나 오버드라이브를 사용합니다.]

질긴 오우거 힘줄에는 마려 과부하 주문을 새기고.

[연금술식 - 강화 회로를 사용합니다.]

이식한 뼈가 육체와 잘 맞게끔 회로로 조율했다.

쩍 갈라진 피부 안쪽에 새겨지는 무수한 연금술식.

신체의 내용물 일부를 바꾸고 술식도 새긴 후에는 메이 샤오의 머리카락 한 가닥을 뚝, 떼어서 오러로 가른 피부를 봉합했다.

[주인. 각성 전에는 의사였어?]

"내 나이가 몇인데 무슨 수로 의사가 됐겠어."

육군 병장 만기전역까지 한 몸이다. 잘 쳐줘도 의대생이라고.

파프너는 신들린 듯한 유진의 솜씨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제 육체를 조정할 때보다 더 섬세한 것 같습니다.]

"이런 걸로 질투하지 마라."

[따,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

"비싼 재료들을 갈아서 몸 만들어주니까 배부른 소리 하긴."

후-.

1시간 만에 시술을 마치고는 굽혔던 허리를 들었다.

기분 좋은 뻐근함에 미소를 지은 유진.

"둘은 영력을 시체에 불어넣어라."

[전력으로?]

"아니. 시체가 미세하게 진동할 정도로만."

[그게겔. 알겠습니다.]

메이 샤오의 시체를 중심에 두고 선 파프너와 조승철이 두 손에 영력을 끌어 올렸다.

재배열 과정을 마치지 않고 의념으로 일으킨 영력.

스며드는 영력에 시체가 미세하게 떨리니 조승철이 턱뼈를 딱딱거렸다.

[과하다.]

[엥? 조절은 네가 해야지.]

[그겔. 그럴 리 없다.]

[잘 봐. 내 기운은 완벽해.]

옥씬각씬하며 영력을 불어넣는 두 언데드.

크로노스는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그대가 솜씨를 발휘하는 편이 완성도 면에선 더 좋지 않겠느냐?

'당연하지.'

-한데 어이하여 저 둘에게 맡긴 게냐.

'성좌 나리가 후인 양성하라며.'

영력으로 시체를 담금질하는 행위.

네크로맨서의 수련법 중 하나다.

유진이 원격으로 시체를 개조, 보다 강령술에 적합한 형태로 만드는 행위도 일종의 담금질이다.

'담금질만 잘해도 시체의 효율을 50%까지는 끌어올릴 수 있다.'

-그대는 100% 이상으로 올리지 않느냐.

'난 천재면서 노력도 했으니까.'

-오만방자한 발언이로구나.

'하지만 맞았죠?'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크로노스.

영력으로 시체를 적당히 담금질한 후, 두 언데드를 뒤로 물렸다.

"적당하군."

[근데 이런 스타일은 처음 보는 것 같아. 주인.]

"처음으로 만드는 녀석이니 그럴 만해."

[뭘 만들려고?]

"데스 레인저."

데스 레인저는 궁술에 능한 엘프의 시체로만 제작 가능한 언데드다.

레버넌트가 용족의 인자를 필요로 하듯.

특정한 종의 시체로만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언데드들이 정해져 있다.

〔이 작은 인간은 그대와 같은 종족으로 보인다만.〕

'녀석의 귀가 크진 않으니까 그렇겠지.'

〔하면 무슨 수로 시체를 엘프로 둔갑시킬 게냐?〕

'시체를 손본 건 폼이 아니야.'

유진은 회귀 전, 온갖 종족의 시체를 직접 만져보고 해부했다.

네크로맨시의 기본은 해부.

시체를 매개체로 삼는 만큼, 종의 특성을 머릿속에 욱여놔야 술법 효율을 최대로 이끌어낼 수 있다.

〔하면 엘프의 시체처럼 바꾸어놓았단 말이냐?〕

'대충은. 생명 분야까지 쓸 수 있었으면 완벽했을 텐데.'

아쉬움을 뒤로 하고 영력을 끌어 올렸다.

"내 부름에 답하라."

[데드 라이즈를 사용합니다.]

[데스 레인저 1구를 제작합니다.]

[언데드의 완성도가 높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72% 상승합니다.]

'쩝. 역시 개조치가 100%도 안 되네.'

엘프의 시체가 아니라 내용물 바꿔치기로 만든 데스 레인저.

갖가지 촉매와 영력으로 담금질까지 충분히 했는데도 72%에 그쳤다.

"너는 이리 와라."

-키이이익.

주위를 맴돌던 메이 샤오의 혼백이 유진의 부름에 이끌려 제 육신으로 향했다.

희끄무레한 기류가 망자에게 깃들고.

육과 혼이 겹쳐지는 순간, 유진은 다시 한번 영력을 불어넣었다.

[합일을 사용합니다.]

숨이 끊어지면서 하나였던 것이 둘로 나누어졌고.

규칙과 섭리를 비트는 술법이 발현되면서 어긋났던 육과 혼이 하나로 합쳐졌다.

[크헉! 헉!]

산 자처럼 거친 숨소리를 내뱉는 데스 레인저.

메이 샤오의 눈두덩이 위로 떠오른 푸른 안광이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데스 레인저(메이 샤오)]

종족 : 언데드

등급 : ★★★★★

◎능력치

근력 : 1,193 / 민첩 : 1,254 / 체력 : 400 / 맷집 : 400 / 영력 : 754

◎특성

▷저격[고유] / 신궁[A] / 암흑 투기[B] / 불사의 존재[B] / 불사의 지휘관[C+]

◎스킬

▷스트라토스 샷[A] / 익스큐션 애로우[A] / 초정밀사격[B] / 스트레이프 애로우[B] / 멀티 샷[C] /속사[C] / 도약[C]

[내, 가. 왜.]

손을 쥐었다 펴는 메이 샤오.

그 모습을 보던 송명석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더니 어깨를 툭툭 쳤다.

[언데드 군대에 자진입대를 환영합니다. 후배.]

[자, 진입대?]

[저는 당신의 선배입니다. 이제부터 선배라고 꼭 부르십시오.]

벌써부터 서열 정리하니.

메이 샤오의 목숨을 끊은 녀석이 저렇게 말하니, 유진은 황당한 마음에 혀를 찼다.

172화 몰려드는 폭풍

우웅웅-!

은은한 진동음을 내며 수직으로 하강하는 비행선.

마도공학의 산물인 부유석이 빛을 발하면서 수십 톤의 쇳덩어리를 중력의 구속에서 자유롭게 만들어준다.

'역시 고향에 오면 마음이 편안하군요.'

니콜라이 안드레예비치 로마노프.

마법왕 드미트리의 배다른 동생이며, 로마노프 가문의 대외 활동을 맡고 있는 인물은 창밖의 풍경을 보며 생각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과거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으며, 현재는 로마노프 가문 소유가 된 도시를 바라보는 눈동자엔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서려 있었다.

'전통과 역사가 숨 쉬는 땅. 품위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여타 대도시들처럼 하늘을 뚫을 것처럼 높이 솟아오른 건물을 찾기가 힘들었다.

러시아 제국 시절의 잔향이 남아 있는 도시.

세계 각지를 돌며 화려함에 익숙해진 니콜라이는 과거를 간직한 도시가 더욱 마음에 들었다.

휘우웅-.

큰 소음을 내지 않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심부에 부드럽게 착지.

기존의 비행장은 이 · 착륙용 활주로 때문에 넓은 부지를 필요로 했지만.

부유석으로 수직 활강이 가능한 비행선은 격납고만 있으면 되기에, 도심 한가운데에 비행장을 세울 수 있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로마노프의 대변자님."

"가주님께서는 본가에 계십니까?"

"예. 대변자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바쁘신 분이 참, 시간 내주시니 감사하군요."

언뜻 듣기에는 니콜라이 특유의 비꼼 섞인 말처럼 보였으나, 그는 진심이었다.

마법왕 드미트리.

그와 배다른 형이며, 동시에 전 세계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

러시아 제국의 몰락과 함께 명맥만 유지하던 로마노프 가문을 다시금 우뚝 세운 위대한 자.

니콜라이는 살짝 구겨진 붉은 로브를 손으로 정성스럽게 폈다.

"안내하겠습니다."

저벅- 저벅-.

비행장 옆에 위치한 커다란 저택.

7대 명가 중 정점에 선 로마노프 가문의 본가다.

건물을 감싸고 있는 결계 숫자만 10개.

로마노프 가문의 수호령인 오딘의 가호까지 함께 하고 있다.

본가의 방어력은 세계에서 제일가는 수준.

핵병기를 수십 발 퍼부어도 티끌 하나 손상되지 않는 무적의 요새다.

똑똑-.

"가주님. 니콜라이입니다."

"들어오게."

좌우로 젖히는 고풍스러운 문.

그 사이로, 쌍두 독수리를 양각한 붉은 로브를 입은 중년의 사내가 보이기 시작한다.

니콜라이는 곧바로 한쪽 무릎을 땅에 대며 고개를 푹 숙였다.

"강녕하셨습니까. 가주님."

"됐네. 우리 사이에 무슨 인사를 그렇게 각별하게 하나."

"오래간만에 뵈었으니 예를 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됐네. 참, 가주 말고 형님이라고 부르게나."

드미트리는 상체를 숙여 니콜라이를 일으켜 세웠다.

"앉지. 나눌 이야기가 산더미처럼 많을 터이니."

"감사합니다. 가주님."

"그놈의 가주는. 방금 전에도 말했건만."

"본래 공적인 자리에서는 존중이 필요한 법입니다."

"딱딱하긴. 어릴 적에는 안 그랬는데 말이야."

소파에 앉은 두 사람.

드미트리가 손을 까딱이니 실론 잎이 바람 마법에 의해 가루로 변한 후, 드립용 종이 위에 수북이 쌓였다.

마법으로 생성한 물이 허공에 둥실 떠오르고는 팔팔 끓더니 아래로 떨어지면서 원액을 짜내고.

순식간에 완성된 홍차 두 잔이 테이블로 둥실 날아왔다.

'성질 변화를 무영창으로. 그것도 10개 주문을 동시에 사용하셨다.'

니콜라이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영역 제한.

성질 변화.

그 외에도 온갖 마법의 비의가 손짓 한 번에 담겨져 있었다.

"또 깨달음을 얻으신 겁니까?"

"거창한 건 아니라네. 무영창과 룬 마법의 새 응용 방법을 떠올려서 시험해보는 중이야."

"역시 가주님이십니다."

"금칠하기는. 차나 한잔하게. 조지아에서 얻어온 잎으로 만들었으니 맛있을 게야."

또다른 7대 명가.

신왕 제우스를 수호성으로 받드는 가문, 카리만리스 가문과의 마찰에서 우위를 거두었다는 증거다.

조지아는 두 가문의 분쟁지역 중 하나였으니.

니콜라이가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가주님이십니다."

"입 발린 소리는."

말과 달리 미소를 짓는 드미트리.

세간에서는 7대 명가를 동등한 위치로 놓고 있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마법왕 드미트리.

전 세계에서 최초로 시스템상으로 '왕'이라는 호칭을 부여받은 위대한 헌터.

9성에 도달한 절대자가 있는 가문과, 그렇지 않은 가문은 어마어마한 격차가 존재했다.

"카리만리스 따위는 가주님의 적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 나도 진정한 9번째 별을 완성하지는 못했다네. 마음을 놓을 순 없지."

"겸손이십니다."

"겸손 같은 게 아니야. 진실을 말하는 것이지."

드미트리는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9번째 별.

인간이 도달 가능한 궁극의 경지에 발을 걸쳤으나, 온전하다고는 할 수 없다.

배후성인 오딘의 가호로 장막 너머의 지식을 엿보았고.

그 덕에 깨달음을 얻어 9번째 별을 완성시켰으나, 실은 불안정했다.

"성좌께서 은혜를 거두시면 언제든 필멸의 굴레로 떨어질 운명 아니겠나."

"위대한 존재가 우리를 버리시겠습니까."

"그건 두고 봐야 할 일. 무엇이든 단정지어 말하는 것은 좋지 않다네."

니콜라이는 신음을 삼켰다.

전 세계에서 9번째 성위를 달성한 것은 아직까지 드미트리와 창 우페이뿐.

하지만.

천무문주 창 우페이도 그와 마찬가지로 성좌의 힘을 빌어서 초월의 경지에 도달했을 뿐.

진정한 초월자가 되지는 못했다.

"안 그래도 들었습니다. 용의 계곡에 들어갈 권리를 달라고 했다지요."

"천무문주는 권력 싸움에 관심이 없다."

천무문을 세운 것도 무의 끝을 보기 위해 제자들을 양성하기 위함일 뿐.

그의 관심사는 오직 초월에 도달하는 것이다.

"천무문주를 굳이 견제할 필요는 없다. 정치적인 행위로 무언가를 얻어낼 뿐."

"그가 중국에 자리를 잡고 있는 한, 동방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재미 없는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지. 동방에서는 무엇을 보고 왔는가?"

"극동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 흥미로운 자를 보았습니다."

"호오. 동생의 입에서 흥미롭단 단어가 나올 줄이야."

니콜라이는 유진을 만났을 때를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언데드를 다루는 신관.

분명 성력을 다루고 있지만 사역 중인 망자들에게서는 마법의 흔적이 느껴졌다.

"신기하군. 기록만으로 존재하는 네크로맨시인가?"

"그렇기에는 제가 스캔했을 때 느껴진 기운은 성력이 확실했습니다."

"내 아우가 실수를 할 리는 없겠으니. 신성 주문의 일종으로 봐야겠구나."

"그래도 조사할 가치는 충분해 보입니다."

"흐음. 잘하면 온전한 9번째 별의 성취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어."

후르릅-.

목을 타고 넘어가는 붉은빛의 액체.

드미트리는 콧털을 씰룩였다.

"그 이유만은 아니겠지?"

"예. 천유진이라는 자. 굉장히 흥미롭더군요."

각성 1년차라고는 보기 어려운 어마어마한 성장 속도.

8성(7.5성)인 자신을 보고도 긴장하지 않는 담대함에 투자를 거부하는 단호함까지.

니콜라이는 유진에 대해 조사한 내용을 자세하게 읊었다.

"꽤 정성스럽게 조사했구나."

"흥미가 가다보니 저도 모르게...."

"좋아. 천유진이라는 자, 앞으로 관심 있게 지켜보게."

드미트리는 배다른 동생의 감을 믿었다.

또한.

개인적인 흥미도 생겼다.

'언데드를 다루는 신관이라. 최근 천기가 흐트러졌다 했더니 그자였나 보군.'

만신전에 들이닥친 커다란 폭풍.

여태 없었던 새로운 영역, '죽음을 거스르는' 개념이 생기면서 무수한 성좌들이 놀라움을 드러냈다.

배후성인 오딘조차 흥미를 가졌으니.

한번 조사해서 손해 볼 것은 없다.

혹시 아는가.

유진과 접촉하다 보면 온전한 초월의 경지에 도달할 힌트를 얻을지도.

"그럼 한국에 이미 투자해놓은 길드는 어찌 하려고 하느냐?"

"버려야지요."

니콜라이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아라한 길드를 쳐냈다.

*

니콜라이가 마법왕을 접견하고 있을 때.

용의 계곡에서 사냥을 마친 창 우페이는 마경 밖으로 나왔다.

"이번에도 헛수고인가."

7대 마경.

인간이 머무를 수 없는 극한의 환경과 괴물들이 바글거리는 땅에 들어간 이유는 간단했다.

극한까지 자신을 몰아붙여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려는 시도.

"이 정도로는 모자라다."

그렇지만.

인외마경조차 9성에 도달한 위대한 무인에게는 위협이 되지 않았다.

성체가 된 정룡들의 공격은 전신에 오러를 두르는 정도로 막아낼 수 있었고.

그다음 단계인 '진룡'조차 무왕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번거롭긴 했지만 그뿐."

피로감이 어깨를 지그시 누르지만, 그가 기대했던 한계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다른 곳을 찾아봐야 하나."

창 우페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천무문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마경을 찾아가는 데만 해도 번거로운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7대 명가의 가주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감.

타국을 방문하려고 해도 걸어 다니는 핵폭탄 취급을 받아서 처리해야 할 절차만 해도 한가득이다.

"그보다는 재미있는 친구가 있었지."

천유진이라고 했던가, 라고 중얼거리는 무왕.

구룡방의 안내를 받아 용의 계곡에 들어가려고 하던 순간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눈빛이 마음에 들었어."

전사의 눈.

저항하기를 포기한 것 같으면서도 쉼 없이 승산을 가늠하고.

최선의 판단을 마친 모습이었다.

"성장하면 좋은 맞수가 되겠군."

구룡방하고는 사이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지만.

창 우페이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동아시아 최대 범죄 조직?

천무문 앞에서는 그 이름값이 의미가 1그램도 없었다.

"그런 잡배들도 이기지 못하면 의미가 없지."

유진의 성취는 고작해야 4성.

헌터업계에서는 벽을 넘은 자라고 불리며 강자의 커트라인에 들어서지만, 창 우페이에게는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자신의 맞수가 되어 주려면 더 성장해야 한다.

"기대해보마. 천유진."

로마노프 가문과 달리, 어떤 근거도 없는 감 뿐인 결론.

그렇지만.

창 우페이는 자신의 감을 100% 신뢰했다.

비슷한 시기에 7대 명가 중 첫 번째와 두 번째를 다투는 가문의 수장이 그를 떠올린 것은 우연일까.

또한.

주목을 받게 된 유진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수천 킬로미터라는 거리를 초월해서, 두 절대자는 비슷한 생각을 품었다.

*

"...시부레!"

철퍽!

지면 아래로 빨려 들어가는 발.

유진은 두 다리에 힘을 주어 중심을 겨우 잡았다.

[슬로우 Lv 35]

[늪지 Lv 41]

[움직임이 둔해집니다.]

[중심을 잡기 어렵습니다.]

....

쏟아지는 디버프에 둔해진 몸뚱이.

반면 늪을 가로지르며 다가오는 괴물들은 제 집처럼 자유롭게 움직였다.

"크레렉!"

"뒈져!"

[데스 스피어를 사용합니다.]

마법 무장을 매개체 삼아 발동한 융합 마법이 괴물의 머리를 꿰뚫었다.

[시체 폭발(改)를 사용합니다.]

쿠아아앙!

커다란 폭발과 함께 늪지가 크게 솟구치고.

초록 비가 후두둑, 떨어지면서 유진의 몸을 뒤덮었다.

[슬로우 Lv 35 → 43]

[늪지 Lv 41 → 45]

"은인. 폭발 마법은 자제해달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서거걱-.

악어 괴물의 머리를 참수한 스네이크 아이가 나무라듯 말했다.

그들이 있는 곳은 필리핀의 오지.

브레이크 현상으로 게이트와 현실이 섞여버린 곳에 기연을 찾으러 왔다.

173화 정글 탐험(1)

...어째서 늪지에 발을 디딘 채 고생을 자처하는 중일까.

유진이 허우적대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려면, 1주일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야 한다.

[주인. 할 일도 많다면서 필리핀은 가려는 거야?]

"알다시피 내가 성자잖아."

[새삼스럽기는.]

"성좌 나리께서 계시를 주거든. 여기에 가면 귀중한 물건이 숨어있을 것 같다, 라고."

매번 우연을 빙자하기도 귀찮으니, 성좌의 계시라고 대충 둘러대며 일정을 짰는데 아무도 의심하는 기색이 없었다.

음.

우리 성좌 나리는 그렇게까지 유능하지 않은데.

성자라는 직업 덕인지 다들 납득하는 기색이라, 도리어 유진이 그 말이 바로 이해가 가냐고 되물었지만.

"형 하는 거 보면 가끔 신들린 것처럼 보여. 성좌님의 계시면 납득되는걸?"

"가끔은 미래를 아는 게 아닌가 두렵기도 합니다."

"저도 같은 생각이지 말임다."

묘하게 정곡을 찌르는 답만 듣고 입을 꾹 다물었다.

왠지 말할수록 손해 보는 기분이군.

"파프너야."

[다녀와. 주인. 여긴 내가 맡고 있겠다.]

"오냐."

지난 한 달 동안의 평화가 끝나기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만주에서는 구룡방과 충돌했고.

아라한 길드도 잠시 몸을 웅크렸을 뿐, 노골적으로 자신을 노리고 있다.

필리핀을 오가는 데만 해도 2주는 걸릴 터.

기연을 최대한 빨리 수습해도 보름 정도를 비워둬야 한다.

[주군을 모시게 해주십시오.]

"넌 가야지. 빠지려고 했어?"

[보십시오. 파프너. 이젠 주군의 대전사로 누가 더 어울리는지 판단이 됩니까!]

[그래.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이이익! 두고 보십쇼. 당신을 꺾고 주군의 대전사로써 인정받는 것은 내가 될 겁니다!]

송명석과 메이 샤오, 그리고 스네이크 아이를 대동해서 갈 곳은 정해져 있었다.

메멘토가 보여준 기연.

[크로노스의 망가진 회중시계]는 필리핀 동부에 위치한 사마르 섬을 비추어주었다.

'말이 섬이지. 엄청 넓지만 말이야.'

필리핀은 섬 여럿으로 구성된 군도(群島) 국가다.

사마르 섬은 필리핀에서 세 번째로 큰 섬. 한반도의 반을 점유하고 있는 대한민국보다 크다.

반면, 섬의 인구는 100만 정도에 불과했으니.

〔그 말인즉슨, 침식된 땅이 많다는 이야기로구나.〕

'이제는 척하면 척이네.'

〔짐의 통찰력을 얕보지 말아라.〕

'예. 예. 그러시겠죠.'

섬 면적의 90% 이상이 괴물의 땅으로 전락해버린 곳.

필리핀은 제2의 섬인 민다나오를 대격변 때 괴물들과 반군들에 의해 상실했다.

정부 입장에서는 사마르 섬까지도 빼앗길 수 없기에.

남아 있는 인간의 영역을 지키려고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코리아? 미스터 천?"

"예스."

"들어가세요. 그 배들도?"

"가능한 선까지는."

"우리 책임은 없습니다."

유령선 10척.

선단 중 절반을 끌고 내려왔는데도 필리핀 공무원들은 사마르 섬 내부 출입을 용인했다.

[숫제 몬스터랑 다를 게 없어 보이는 걸 잘도 들여보내주네.]

"그만큼 상황이 안 좋단 말이지."

효자손이라도 빌려서 몬스터를 막고 싶은 게 필리핀 정부의 입장.

별다른 절차 없이 유령선단을 대동한 채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은인. 그래서 목표는 어디입니까?"

"지도를 보면 이쪽일 거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유령선단.

몬스터들의 습격이 빈번했지만 배 위에 오르기도 전에 태반이 고꾸라졌다.

[멀티 샷]

파파파팟!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 세례.

새로 영입(?)한 하수인, 메이 샤오는 다가오는 괴물들에게 화살을 아낌없이 선물해주었다.

[제기랄.]

"고운 말 좀 써라."

[다, 당신이 내 입장이면 고운 말이 나오겠어?]

"그러면 혀 깨물고 죽든가."

[제길. 그래도 안 죽잖아!]

"그러면 네 영혼을 해방시켜주마."

[....]

메이 샤오는 입을 달싹거릴 뿐, 아무 사념도 내뱉지 못했다.

아무렴.

이미 '죽어 본' 경험이 있으니 두 번 죽는다는 선택지를 못 고를 거다.

죽어본 적은 없지만 경험자들의 말에 따르면 썩 달갑지 않은 감각이라 하더라고.

〔당연한 소리를 하는구나.〕

'죽어보지도 않은 양반이 무슨 소리를.'

〔별빛을 잃고 떨어졌으니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몸이었느니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메이 샤오의 안광.

조소를 머금은 유진은 그 모습을 못 본 척 시선을 돌렸다.

〔가만 두었다가 역심이라도 품으면 어찌 하려느냐.〕

'내 지배력을 얕보는 거야?'

〔그대의 등에 화살을 꽂지는 못하겠지. 하나, 소극적인 반항은 가능하지 않겠느냐.〕

'합일을 한두 번 써본 것도 아니다. 그 정도 대책은 있어.'

별걸 다 걱정하시는군.

[너, 도. 해적, 에, 입대해라.]

-입대를 환영한다.

-입대를 환영한다.

배에 다가온 괴물들은 베거나 찢어도 끊임없이 재생하는 언데드들에게 붙들린 채, 유령선 선원으로 강제 전직했다.

"...누가 괴물인지 모르겠군요."

떨떠름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스네이크 아이.

그는 시끌벅적한 전장을 힐끗 본 후, 다시 지도에 집중했다.

"20km만 더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말씀하신 장소가 나옵니다."

"운이 좋군. 안 걸어도 되니까."

길 하나 없는 밀림을 주파해야 하나 걱정했는데.

손가락 빨고 구경만 해도 기연을 얻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질퍽-.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던 유령선이 무언가에 붙들린 듯, 움직임을 멈추었다.

〔계약자의 주둥이가 화를 불러왔구나.〕

'내가 뭘, 어쨌다고.'

해치웠나? 같은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래.

미간을 찌푸리며 갑판 밖을 바라본 유진의 입가가 쩍 벌어졌다.

"왜 강이 늪으로 변한 거지?"

"자연적인 현상은 아닙니다. 게이트와 땅이 융합하면서 생긴 일이겠죠."

언뜻 보기에는 맑아 보이는 물이지만.

유령선에 들러붙은 건 습기를 잔뜩 머금은 흙이었다.

물처럼 위장한 늪이라니.

쯧, 유진은 한껏 표정을 구기며 혀를 찼다.

"더 이상 배로 나아가는 건 무리일 것 같군요."

"그러게. 20km라고 했던가."

"예. 길은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초행인데 괜찮겠나?"

"나름 길 찾는 데는 자신이 있습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스네이크 아이.

질문을 던지긴 했어도, 유진도 그의 길잡이 솜씨를 신뢰했다.

처음 가보는 곳도 빠르게 길을 찾아내는 능력.

스네이크 아이가 괜히 '추격자'라고 불렸겠는가.

한 번 정한 사냥감은 무슨 수를 쓰든 반드시 쫓아가는 능력.

"그럼 부탁하지."

"이제부터는 제 이야기를 잘 따라주시길 바랍니다."

스네이크 아이는 갑판을 훌쩍 뛰어내려서 늪에 거침없이 발을 디뎠다.

*

그로부터 3시간 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털어낸 유진이 한숨을 쉬었다.

"끝이 없네."

게이트와 땅의 지맥이 뒤섞이면서 바뀐 환경.

이 경우에는 밀림이 지닌 성질과 게이트 핵이 결합하면서 시너지를 일으켰다고 해야 맞는 말이겠지.

땅과 강이 늪지대로 변했지만, 막상 지형 자체는 원래의 성질을 유지하고 있다.

[뭐. 이런 곳이 다 있지?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곳을 밟았다 생각했는데 늪으로 변했어.]

"신기하군요."

"게이트와 본래의 성질이 잘 맞으면 이런 일도 생긴다고 하지."

남극에 생성된 마경, [극지의 설원]이 그런 경우다.

지구에서 가장 추운 지역에 열린 마경은 평균 온도가 -100도 아래였고.

숨을 쉬기만 해도 폐가 꽁꽁 얼어붙는 한기로 뒤덮였다.

지난번에 방문했던 마경, 용의 계곡은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이지만.

극지의 설원은 입장 후 숨을 쉬는 것부터가 생존의 문제였다.

"여긴 숨이라도 편하게 쉴 수 있잖아."

[제기랄. 숨도 못 쉬는 꼴이 된 나를 조롱하는 거냐?]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힘이 드는 건 망자인 너보다 내가 더 많이 들거든."

[후배는 불평이 너무 많습니다. 주군의 깊은 뜻을 이해하려 하십시오.]

[네 같잖은 말 때문에 더 화가 나거든?]

송명석과 메이 샤오는 쉬지 않고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메이 샤오에게 최후를 안겨준 이가 송명석이었으니.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크라우우욱!"

[시끄럽습니다. 조용히 하세요.]

적광으로 번쩍이는 칼날.

암흑 투기를 휘감은 검이 악어 괴물의 몸뚱이를 반으로 갈랐다.

철퍼덕, 좌우로 갈라지면서 쓰러지는 악어 괴물.

칼에 실은 힘이 생각보다 강해서인지 괴물을 도륙낸 붉은 빛이 거기서 멈추지 않고 늪지대를 훑었다.

그 순간.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솟구친 늪이 하늘로 비산하더니 비처럼 쏟아졌다.

[슬로우 Lv 43 → 46]

[늪지 Lv 45 → 48]

"또 사고 쳤네."

[주, 주군! 이건 실수입니다!]

"나도 똑같이 실수했으니까 퉁 치자는 말로 들리는 게 왜일까."

[아닙니다. 제가 어찌 주군께 그런 불경한 말을!]

이 늪지대에는 한 가지 특징이 더 있다.

과한 충격을 받으면 폭발해서 인근에 피해를 입히고.

공중으로 솟구친 진흙이 비처럼 쏟아지면서 몸에 묻어서 디버프 효과를 강화하는 것이다.

[멍청한 것. 이래서 무식한 작자들은 안 돼.]

메이 샤오는 다가오는 악어 괴물의 미간에 화살을 선물해주었다.

정식명칭은 라이코다일.

4성 괴물이지만 늪지대에서 머무를 때 한정으로 스탯 버프를 받아 준 5성급 전투력을 지녔다.

단단한 비늘을 일격에 꿰뚫어버리는 화살.

데스 레인저로 강제 전직(?)하면서 능력치가 떨어졌음에도.

메이의 활솜씨는 생전과 비교해도 크게 모자람 없이 느껴졌다.

'이 빌어먹을 늪지대에서는 최적의 소환수군.'

유진의 자랑거리인 시체 폭발도 강제적으로 봉인된 상황.

급한 상황이면 늪의 페널티를 더 껴안을 각오로 쓰겠지만, 메이 샤오의 원거리 견제 능력 덕분에 그럴 일은 없었다.

"이쪽입니다."

스네이크 아이의 길 찾기 능력도 빛이 되었다.

유진도 지도만 보고 어느 정도 방향을 유추해서 나아갈 정도의 경험과 감각이 있지만.

늪지대처럼 몸을 가누기조차 어려운 곳에서 척척 목적지를 향해 갈 만큼의 실력은 되지 않았다.

'둘을 데려오지 않았으면 고전깨나 했겠어.'

〔대전사가 함께 했다면 곧장 날아갈 수 있었을 터인데.〕

크로노스의 날카로운 지적.

유진은 허흠, 하고는 헛기침을 했다.

'안 되는 것 가지고 고민하기보다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는 게 더 건설적이다.'

〔크하하핫. 많이 고민해보아라. 작은 인간들은 이런 걸 보고 젊을 때 사서 고생한다고 하더구나.〕

'난 안 젊거든요?'

〔회귀 전을 언급하여도 짐의 기준으로는 어린아이니라.〕

이 양반. 말빨이 왜 이렇게 좋아졌지.

능글거리는 말투가 자신을 닮아간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유진은 고민했다.

2시간 정도를 더 나아가니 늪지대 중심부에 자리 잡은 커다란 나무가 일행 앞에 나타났다.

"은인. 이 나무가 맞습니까?"

"어. 계시에서 보여준 게 얘가 맞는 것 같다."

용의 계곡에서 [메멘토]가 보여준 환영.

고층 빌딩 높이의 나무에 달린 열매, [생령의 과실]은 그냥 먹어도 체력과 맷집을 늘려주는 영약으로 작용하고.

연금술 촉매 등으로 사용되는 희귀한 약재료다.

그 열매가 딱 보기에도 수십 개는 매달려 있으니.

'회귀 전에는 필리핀의 헌터 팀이 생령의 과실을 손에 넣었다지.'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면.

메멘토로 본 환상보다 과실의 개수가 훨씬 많았다.

의아하다고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찰나.

스네이크 아이가 주먹을 들어 유진을 제지했다.

"저 나무. 살아있습니다."

번쩍-!

스네이크 아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무 표면 위로 떠오르는 두 개의 눈동자.

동시에, 유진의 허리보다도 굵은 나뭇가지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174화 정글 탐험(2)

[주군. 그 성좌님께서 보여주신 계시에는 이런 건 없었습니까?]

"있었으면 다가가려고 안 했지."

흐느적거리는 무수한 가지들.

고층 빌딩 크기의 나무가 흉성을 드러내자 스네이크 아이가 저도 몰래 뒷걸음질 쳤다.

[변종 생장목]

"생장목이라니. 저런 괴물은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세계수의 열화 버전이다. 순수한 마력을 주변에 부여해서 숲을 번성하게 하는 나무지."

"저 모습을 보면 숲을 번성하게 하는 거랑 180도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변종이잖아."

이제 감이 오는군.

물이나 땅까지 형상을 변화시킨 것은 게이트 핵 융합 현상이 아니었다.

변종 생장목의 마력이 인근의 자연에 간섭.

죽어가는 시체들의 정기를 흡수해서 성장한 것이다.

'얼마 후였으면 말라 죽었을 운명, 이었을 텐데.'

말라버린 나무에서 열매를 손에 넣는 헌터들의 모습.

유진이 본 환상과 다르다는 건, 그 몇 주 사이에 변수가 발생했다는 의미겠지.

'일찍 와서 안 해도 될 고생을 하는 건가.'

〔크하하하핫. 걸작이로구나.〕

낭창낭창 흔들리던 수천의 나뭇가지가 사라라락, 일행 쪽으로 일제히 날을 세웠다.

[거리가 100미터도 넘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 억!]

송명석을 비웃듯이 길이를 연장하며 날아드는 나뭇가지들.

개수가 수천이나 되다 보니 한순간 태양이 가려지면서 기다란 음영이 일행의 머리를 뒤덮었다.

"이래서 주둥이가 문제지."

[부정 충격 방패 X 10을 사용합니다.]

유리창이 깨지듯 산산이 부서지는 신성 결계.

나뭇가지의 비를 0.1초도 막을 수 없었지만 유진의 표정에는 당혹감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다.

"송명석은 백광을 전개해라"

[존명.]

암흑 투기로 구현된 새하얀 빛이 따다당, 나뭇가지들을 쳐낸다.

빽빽하게 몰아치는 나뭇가지의 기세에 비하면 바람 앞 촛불과도 같은 모습.

검을 쥔 송명석이 [텐터클 블레이드]로 출력을 올리려는 찰나.

"그대로 있어. 메이 샤오는 30미터 위로 익스플로전 애로우."

마력을 응축시킨 화살이 나뭇가지들 사이로 파고들더니 정확한 지점에서 폭발.

변종 생장목의 가지들이 양 옆으로 밀리면서 길이 열렸다.

[어떻게 된 거지? 약해진 내 힘으로는 받아낼 수 없는 공격이었는데!]

"변종 생장목의 공격 타입은 직선. 수천이나 되는 걸 모두 쳐낼 필요는 없다."

사람으로 치면 길게 자란 머리카락을 낭창낭창 흔드는 꼴.

조작 범위나 세세함은 그보다 더 뛰어나기야 하다만, 지금처럼 한 번 쏘아낸 후에는 반드시 회수해야 다음 공격으로 이어갈 수 있다.

"궤도를 살짝 틀어주기만 해도 최소한의 힘으로 받아내는 게 가능하다."

네 활을 받아냈을 때처럼 말이지, 라며 뒷말을 중얼거리는 유진.

메이 샤오는 생전에 벌인 최후의 싸움을 떠올리며 제기랄, 하곤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생장목이 가지를 회수하는 순간을 노려라."

[말 안 해도!]

[스프레이트 샷]

가지가 원래 위치로 돌아가는 것보다 한 수 빠르게 쏘아진 화살.

무방비하게 노출된 생장목의 몸뚱이에 푹, 박혔다.

[공격한 거 맞습니까?]

늪에 발을 들이민 것처럼 쑥 들어가버린 화살.

미동도 없는 생장목을 보면 타격이 1그램도 있어 보이지 않았다.

"생장목은 일점으로 힘을 집중하기보다 넓게 타격해야 한다."

[제길. 일찍 말해주라고.]

"내 지시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나?"

[.....]

메이 샤오는 굴욕감에 고개를 숙였다.

구룡방의 아홉 머리를 노릴 정도의 실력자이자, 6성 절정의 헌터였던 자신이.

망자로 쇠락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유진의 명령을 의지하고 있었다.

'아냐.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니야.'

유진의 통찰력과 지휘 능력은 6성 절정에 도달했던 자신보다 더 뛰어났다.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을 다시금 인식하게 되니 자괴감이 들 뿐.

"생장목은 6성 절정급의 무력. 거기에 대형종이라 스펙은 우리보다 위다."

[주군. 무적의 강령술로 어떻게든 해주십쇼!]

"늪에서 쓸 만한 언데드는 많이 없거든?"

라이코다일의 시체들로 언데드 군대를 꾸리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타이런트나 스켈레톤 나이트를 여럿 만들어도 늪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해서다.

리바이브 주문은 지속시간이 최대 2시간이라서 남발하지 않았고.

'이렇게 되면 상황이 달라지는군.'

메이 샤오의 공격은 생장목에게 큰 피해를 주지 못한다.

초장거리 저격은 되어야 유의미판 타격을 입힐 수 있을 텐데, 전용 화살이 없어서 쓸 수 없고.

송명석이라면 접근해서 생장목을 도륙낼 수 있겠지만.

[으아아앗!]

먼 거리에서 쳐내는 것조차 버거워 하는 송명석을 날려보낼 방법이 마땅찮다.

유진의 공격 마법으로도 저 거대한 나무를 쓰러트리기는 요원했고.

지닌 패를 모두 살펴봤지만 결정타를 먹일 수단이 없다.

"스네이크 아이. 물러날 수 있겠나?"

"늪지 일부가 꿈틀거리는군요. 놈의 뿌리일 겁니다. 대책 없이 후퇴했다간 양면으로 공격을 받겠군요."

꿀렁꿀렁-.

생장목이 일행의 존재를 인지하는 순간부터.

등 뒤의 땅이 은근하게 들썩거렸다.

결정적인 순간이 오거나 등을 돌려서 벗어나려고 하면 늪 아래에 묻어둔 뿌리를 들어서 공격하리라.

"대책은?"

"생장목이 공격을 퍼부은 직후에 후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비슷한 답이군.

역시 길잡이로 이 사내를 데려온 것은 정답이었다.

"들었지? 다음 공격이 오면 물러난다."

[이번에는 물러나드리겠습니다.]

푸른 안광을 불태우며 분한 마음을 드러내는 송명석.

반면에 메이 샤오는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화살을 시위에 걸어 놓았다.

콰콰콰콰-!

"지금."

[부정 충격 방패 X 10]

[분광검 - 2식 백광검]

[익스플로전 애로우]

최소한의 힘으로 나뭇가지 세례의 궤도를 비틀어낸 후,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이킨다.

쿠드득,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늪지대에서 솟구치는 굵은 뿌리.

몰랐으면 치명적인 타이밍이었겠으나.

이미 대비 중이던 유진 일행에게는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다중 연산을 사용합니다.]

[데스 스피어 X 4를 사용합니다.]

마법 무장 넷을 모조리 동원한 마법이 뿌리 다발을 찢어발긴다.

생명과 대칭을 이루는 죽음의 힘.

진한 생기를 머금은 생장목의 뿌리는 상성 상 데스 스피어에 한 수 접어줬어야 했으니.

뿌리의 내구력이나 실린 마력에 비해 손쉽게 뚫려버렸다.

-으오오오오!!!

일행의 등 뒤에서 울리는 흉흉한 소리에는 먹잇감을 놓친 아쉬움이 섞여 있었다.

*

"이쪽에 라이코다일의 흔적이 또 있군요."

"송명석아. 앞장 서라."

[예. 주군.]

서걱-!

라이코다일이 늪에서 버프를 받아도 6성인 송명석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처음에는 암흑 투기 출력 조절에 실패해서 진흙을 뒤집어 쓰는 일이 빈번했지만, 한나절 넘게 머무르면서 영력 조절도 제법 세심해졌다.

고유 특성- 천골.

가혹한 환경에서 싸울수록, 송명석의 감각이 더 날카롭게 벼려졌다.

"라이코다일의 시체를 나무 위에 걸어놔라."

[제길. 내가 왜 이런 잡일을.]

"화살이 얼마 안 남았다고 한 건 너였으니까."

화살은 일회용 소모품이다.

전투 중에 소모된 마력이야 휴식을 취하면 회복할 수 있지만.

떨어진 화살을 수급하려면 전장을 벗어나야 한다.

[유령선에 화살 많이 있잖아.]

"그럼 혼자 돌아가든가."

[제기랄.]

그러게 누가 화살 막 쓰랬니.

유령선에 보급 물자를 두었지만, 도보로 반나절 넘게 걸리는 배로 돌아갈 마음은 1그램도 없었다.

질척거리는 늪을 통과해서 보급을 마치고 다시 공략하자고?

"여기서 승부를 봐야지."

"제가 큰 힘이 되지 못하는군요."

스네이크 아이는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4성 절정인 그의 무력으로는 라이코다일을 상대하는 게 고작.

변종 생장목에게 다가가려고 했다간 10미터도 못 다가가고 몸에 수십 개의 구멍이 뚫릴 것이다.

"라이코다일 위치를 추적해주고 있잖아. 충분히 잘하고 있다."

"나무에 괴물들 시체를 널어두는 건 왜입니까?"

"늪에 두면 변종 생장목이 냠냠하거든."

저 나무의 이름에 괜히 변종이라는 타이틀이 붙겠어?

본래의 생장목은 저렇게 흉포하지도, 나뭇가지로 창처럼 찌르거나 휘두르지 않는다.

몬스터나 인간의 피를 자양분 삼아 과대 성장한 몰골.

이 늪지대는 생장목의 영역이나 마찬가지다.

시체를 그대로 두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거죽과 뼈 빼고 모두 빨아먹겠지.

"그러니까 잘 걸어놔."

[제길.]

5미터에 달하는 라이코다일.

수백 kg나 되는 괴물의 사체를 나무에 걸어두는 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몇 시간이나 그 일을 반복하면 더더욱.

"이 정도면 대충 준비는 끝났나."

변종 생장목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라이코다일을 사냥.

시체들은 모두 나무 위에 올려놓았다.

조금 멀리 있는 놈들은 스네이크 아이가 발품을 팔아 안쪽으로 끌어들였고.

백 단위의 라이코다일 시체가 나무에 널려 있는 모습은 사교도의 제사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내 부름에 답하라."

[리바이브를 사용합니다.]

나무 위에 걸린 라이코다일 시체들이 흐느적거리면서 일어난다.

우지끈, 개중 일부는 몸을 일으키다가 나무를 부수고 바닥에 고꾸라지기도 했다.

온통 늪으로 되어 있어서 큰 타격을 입지는 않았지만.

"내 부름에 답하라."

시체들을 널어둔 포인트는 한두 군데가 아니었기에, 유진은 질척대는 늪을 허우적대며 연달아 강령술을 사용했다.

-크우우우.

음울한 소리를 내며 전진하는 라이코다일 무리.

총 131구까지 늘어난 망자의 군대를 앞세워서 다시 한번 변종 생장목에게 도전했다.

[주군. 제게 선봉의 영광을.]

"메이 샤오랑 손 잡고 뒤에서 기다려라."

[크으읏!]

"걱정 마라. 이번 싸움에서는 너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마."

[정말입니까?]

"믿어라. 너의 주인을."

-으오오오오!

시야를 까맣게 물들이는 나뭇가지들.

앞장서던 라이코다일 몇 구가 제대로 된 대항조차 못 하고 꼬치로 전락했다.

그 순간이야말로.

유진이 기다리던 때였다.

[시체 폭발(改)을 사용합니다.]

쿠아아아앙!

공기를 찢을 듯한 굉음.

라이코다일의 시체를 꿰뚫은 나뭇가지들이 한계를 넘어선 충격에 바스라지고 가루로 화했다.

폭발에 휩쓸린 나뭇가지는 전체 양 중 1/3 정도.

[해치운 겁니까?]

"아주 부활하라고 고사 지내지 그러냐."

사라라락.

나뭇가지를 회수한 변종 생장목은 폭발에 휘말려서 날아가버린 부위에 생기를 불어 넣었다.

싹이 돋아나고 자라나서 다시금 싱그러운 잎사귀와 곧은 가지가 자리 잡기까지는 1초.

시간을 역행한 것 같은 모습에 스네이크 아이가 신음을 삼켰다.

"이래서는 끝이 없겠군요."

"아니. 그렇진 않다."

망자의 군대는 이 순간에도 멈추지 않았다.

두려움을 모르는 죽은 자들의 행진.

나뭇가지를 재생한 변종 생장목이 이번에는 빗자루로 바닥을 쓸듯 크게 휘둘러서 라이코다일 시체들을 후려쳤다.

0.1초 만에 수십 미터의 거리를 좁히는 나뭇가지들.

시체를 터트릴 틈도 주지 않겠다는 변종 생장목의 의도가 훤히 보였다.

"머리도 없는 나무 치곤 괜찮은 판단이다만."

따악!

[시체 폭발(改)을 사용합니다.]

나뭇가지들이 라이코다일 사체를 멀리 쳐내기 전에 연쇄적으로 일어난 폭발.

유진의 반응 속도는 평범한 4성 헌터를 초월했으니.

변종 생장목이 다시 한번 나뭇가지를 재생시킬 때, 라이코다일 시체들이 더 가까이 접근했다.

리바이브로 되살아 난 라이코다일.

폭발의 여파로 진흙이 덕지덕지 묻어도 종족 특성 덕에 디버프를 받지 않았다.

100미터.

70미터.

50미터.

그리고 30미터에 도달했을 때 즈음.

[주군. 나무의 재생 속도가 더 빨라졌습니다.]

[거리가 좁혀지니 대응 속도도 빨라졌어.]

라이코다일들 시체를 폭발시키며 접근해도 더 이상 좁혀지지 않는 거리.

유진은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신호를 주면 메이 샤오는 익스플로전 애로우 2발을 45도 각도로. 송명석, 광뇌보로 접근해서 텐터클 블레이드를 사용해라. 화력은 최대."

[다중 연산]

[시체 폭발(改)을 사용합니다.]

[데스 스피어 X 4를 사용합니다.]

힘들게 다가간 라이코다일 무리가 일제히 폭발.

그와 동시에 쏘아진 데스 스피어 4개가 변종 생장목의 밑동에 박혔다.

영력의 침범으로 순간 재생이 느려진 변종 생장목.

메이 샤오는 지시받은 대로 화살을 연속으로 쏘아 보냈고.

한 발 늦게 재생하려던 나뭇가지들이 폭발에 휘말려서 불타올랐다.

[광뇌보]

[텐터클 블레이드]

[쌍수호박]

[듀얼 블레이드]

[분광검 - 4식 적광검 x 10]

한순간의 틈을 놓치지 않고 늪지대를 누비며 돌진한 송명석.

쌍수호박으로 기운 제어 능력을 최대로 끌어올리고.

두 자루의 검으로 암흑 투기를 방출.

10배까지 출력을 늘린 검법으로 변종 생장목의 몸뚱이를 난도질했다.

-으, 오오. 오오.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수십 조각이 난 변종 생장목은 신음을 흘리며 아래로 쏟아졌다.

175화 시체 나무 (1)

후두두둑.

수십 조각으로 잘려 나간 변종 생장목이 무너져 내린다.

땅으로 추락하는 금색 과일들.

"한 개도 놓치지 마라."

[존명.]

[제길.]

두 언데드는 붕괴하는 생장목의 파편을 민첩하게 피하며 생령의 과실들을 낚아챘다.

변종 생장목이 품고 있는 과실은 모두 14개.

유진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메멘토의 환상보다 3배 가까이 많은 숫자다.'

〔어째서 차이가 발생한 거지? 짐의 안배는 완벽했을 터인데.〕

'이 녀석이 변종이라서 그래.'

생물의 피와 살을 자양분 삼는 변종.

그 덕에 과대 성장이 가능했지만, 비대해진 몸을 유지할 정수가 모자라졌다.

회귀 전, 생령의 과실을 손에 넣은 헌터 팀이 방문하는 것은 몇 주 후.

'변종 생장목은 말라 죽은 거다. 그 시간 동안.'

〔그런 것 치고는 꽤나 팔팔하지 않았느냐.〕

'먹잇감이 없어진 거지.'

변종 생장목의 공격 범위는 고작해야 100미터를 조금 넘는 정도.

녀석을 사냥하는 입장에서야 꽤 골치 아프지만, 피하려고 마음먹으면 회피가 어렵지 않은 범위다.

이러면 생령의 과실의 개수 차이가 3배 가까이 나는 것도 설명이 되었다.

'고생 조금 더 한 보람은 있단 말이지.'

유진은 두 언데드가 회수한 과일의 정보를 확인했다.

[생령의 과실]

등급 : 유니크

분류 : 소모품

제한 : 없음

내구도 : 10/10

자연의 생기를 듬뿍 머금은 과일입니다. 먹으면 활력이 솟구칩니다.

*체력 + 200

*최대 체력, 생명력 + 10%

천년설삼과 같은 등급의 영약.

마력 증강 효과보다는 한 수 아래지만, 전투 지속력을 늘려주는 효과가 있다.

"스네이크 아이. 경계를 좀 서주겠나?"

"알겠습니다."

"너희 둘도 마찬가지다."

1주 간의 항해.

늪지대에서 허우적대면서 고생하기까지 했다.

힘겹게 얻은 기연이니, 바로 섭취해야지.

아그작-.

"음. 맛있네."

과일을 잘게 씹으니 사과를 몇 개는 농축시킨 것 같은 단 맛이 입가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꿀꺽,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생령의 과실의 진액.

한 방울도 놓칠 순 없다.

영력으로 생령의 과실의 기운을 이끌어서 전신에 회전시켰다.

[체력 스탯이 영구적으로 200 상승합니다.]

[체력, 맷집 스탯이 10% 영구적으로 상승합니다.]

후, 긴 한숨을 내뱉은 유진이 눈을 떴다.

저물어버린 해.

눈을 잠시 감았다가 뜬 것 같은데 어느새 2시간 이상 지나갔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보다시피."

[너무 눈을 안 뜨셔서 해라도 입은 줄 알았습니다.]

"충신 나셨네. 아주."

혹, 영약을 섭취하던 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자신이 소멸할까 두려운 거겠지.

유진이 그런 의미를 담아 지그시 바라보자, 송명석은 푸른 안광을 슬쩍 옆으로 돌렸다.

〔남은 과실들은 어찌 할 셈이더냐?〕

'동료들 줄 거다.'

뽀시래기 팀과 임재백, 마담, 그리고 신준석만 챙겨주면 되겠지.

추가로 연금술 촉매로 쓰라고 2개 정도는 넘겨줘야 하나.

'그렇게 해도 5개가 남잖아.'

천년설삼 하나 얻으려고 성자 팔이까지 했던 과거를 생각하면 참으로 감개무량했다.

〔누가 보면 고생 깨나 한 것으로 알겠구나.〕

닥치세요. 성좌 나리.

회귀 전 지식이 아니었으면 치료도 못 했을 거라고.

미래의 지식이라는 치트키까지 사용해서 얻은 영약과 동급의 물건을 열 개 넘게 얻었는데 감격 안 하고 배기겠어?

〔짐이 하사한 주문으로 본 환상도 결국 미래의 지식인 건 마찬가지일 터인데〕

이래서 눈치 빠른 성좌 나리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크로노스의 사념을 애써 못 들은 척 하고 있을 때, 송명석이 다가와서 나뭇가지를 내밀었다.

[심상치 않은 마력을 품고 있어서 가져왔습니다.]

"변종 생장목의 묘목이군."

송명석한테 별 모양으로 썰리기 직전에 정수를 응축시킨 건가.

일반적인 생장목과 달리, 이 녀석은 생에 대한 집착이 생물처럼 강렬했다.

[땅에 심으면 그 괴물처럼 자란단 말입니까?]

"그렇겠지."

[큭. 빨리 버리겠습니다.]

"아니. 잘 챙겼다."

변종이라도 생장목은 생장목.

그렇다면 쓸 데가 있다.

이 경우에는 도리어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영지 강화에 도움이 되겠어.'

유진의 눈동자가 흥분으로 번들거렸다.

[메멘토]가 보여주지 않은 기연.

이번 원정은 참 얻어가는 게 많은 것 같다.

*

"수고하셨습니다."

"귀하의 활약 덕에 필리핀은 조금 더 안전해졌습니다."

필리핀 공무원들은 라이코다일 사체에서 뽑아낸 어금니들을 확인하고는 그 공을 치하했다.

딱히 보상이 나오는 건 아니다.

몬스터 사체의 부산물 등을 세금 없이 가져가는 정도.

유니크 등급 영약인 생령의 과실을 10개 넘게 챙겨가는 입장에서야, 세금 혜택만으로도 배가 불렀지만 말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유진은 블랙 컴퍼니 간부진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았다.

"...그렇게 됐으니 다들 하나씩 먹어라."

꿀꺽-.

강민호가 침을 꿀꺽 삼켰다.

영약이라니.

이 형님이 갑자기 필리핀을 다녀온다고 했을 때도 그러려니 했지만.

국내 3강 길드도 손쉽게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주렁주렁 들고 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호호호. 영약을 무슨 건강식품처럼 말씀하시네요."

"먹기 싫으면 말던가."

"천 대표님의 성의를 봐서 한 번 먹어드리겠답니다."

마담도 영약 앞에서는 곧장 꼬리를 말았다.

헌터에게 스탯을 올릴 수 있는 통상적인 방법은 레벨 업 뿐.

그렇지만 벽에 부딪치면 스탯 상승이 더뎌지기에, 먹기만 해도 능력치가 오르는 영약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다.

"동업자 님. 이렇게나 귀한 것을 막 주셔도 되는 겁니까?"

"아껴봐야 똥 돼. 다들 고생하니까 보상이라고 생각하고 잡숴라."

유진은 더 설명하기 귀찮다는 듯 손을 털면서 대꾸했다.

"저어, 그러면 말입니다. 동업자 님."

"안 먹고 연구한다는 헛소리 말고. 당신 건 2개 더 빼놨으니까 그냥 먹어."

"으히이잇!"

"체력이 되어야 연구도 오래오래 한다."

영약 말이야.

아무 대가 없이 주는 거 아니야.

'제대로 부려먹으려면 다들 체력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

유진의 흉계(?)도 모른 채, 미스터 블랙을 제외하고 한 자리에 모인 블랙 컴퍼니 간부들은 생령의 과실을 섭취했다.

"우와. 맛 끝내줍니다."

"형. 나 하나 더 먹으면 안 돼?"

"같은 영약은 중복으로 섭취하면 효과가 10%도 나지 않는다."

"쳇."

입을 삐쭉 내미는 강민영.

겉으로야 싫은 척 했지만,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의 마음은 같았다.

'영약을 명절 선물처럼 돌려주다니. 이 형님 곁에 꼭 붙어 있어야 한다.'

'천 대표는 이런 정보를 무슨 수로 얻은 걸까? 아, 궁금하다.'

'동업자 님한테서 멀어지면 안 돼. 그래야 하나라도 더 얻어먹지!'

영약 복지까지 확실한 사업체.

이름만 블랙 컴퍼니지, 부려먹는 만큼 보상은 확실한 곳이었다.

*

명절 선물 돌리듯이 블랙 컴퍼니 간부들을 챙겨준 후, 유진은 곧바로 네크로폴리스로 향했다.

[주인. 못 보던 사이에 얼굴이 반들반들해졌네?]

"필리핀 늪지대에서 고생만 잔뜩 하고 온 사람한테 무슨 소리야."

[아니. 진짜, 그 뭐라고 해야 하나. 생기가 감도는 게 딱 보기 좋다니까.]

"...."

영약 먹은 것도 감지하는 거냐.

어엿한 드래곤이 된 파프너의 감지 능력은 전보다 훨씬 예민해져 있었다.

유진은 못 이기는 척 생령의 과실 하나를 던졌다.

"먹어봐라. 넌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섰으니, 영약 빨 좀 받을 거다."

[만약 효과가 없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면 내 이론이 틀린 거지."

유진의 쿨한 대꾸에 망설이지 않고 생령의 과실을 먹는 파프너.

송명석이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엉뚱한 사람이 타간다'며 투덜댔지만, 못 들은 척 넘겼다.

[오. 오오오오.]

"효과가 있나?"

[기운 일부가 영력에 깎여나가긴 했어. 그래도 70%는 소화했네.]

"손실률은 30% 정도인가."

그 정도면 감안해도 될 만한 수치다.

유진은 손뼉을 짝- 마주쳤다.

"좋은 거 먹었으니 일 좀 하자."

[언제는 먹을 거 챙겨주면서 부려먹은 것처럼 그러네.]

"몬스터들 시체들 좀 모아와."

[종류는 상관 없고?]

"어. 다만, 죽은 지 1시간이 안 되는 것들로."

[여기까지 가져오려면 직접 사냥해서 날라야 가능하겠어.]

파프너를 지목해서 시킨 이유다.

네크로폴리스 중심부까지 싱싱한(?) 시체를 공급하려면 비행 능력이 있는 그녀의 능력이 필요했으니까.

펄럭-!

두 장의 날개를 펴며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파프너를 힐끗 본 후, 아공간에 넣어둔 나뭇가지를 꺼냈다.

송명석이 챙겨온 변종 생장목의 묘목.

유진은 죽음의 전당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땅에 묘목을 정성스럽게 심었다.

〔이번에는 무슨 기행을 벌이려는 게냐?〕

'시체 나무를 만들 거다.'

시체 나무.

말 그대로 '시체'를 만들어내는 나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건 아니고, 엄밀히 말하면 시체 비슷한 것을 찍어내는 구조물의 일종이라고 해야겠지.

〔시체 비슷한 것? 꽤 모호한 표현이로구나.〕

'성좌 나리는 산 자와 시체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나.'

〔크하하핫. 짐과 문답이라도 하자는 게냐. 당연히 영혼의 유무를 말하는 것이겠지.〕

'맞아. 시체 나무는 영혼이 없는 육체만 만드는 것이다.'

강령술은 언데드 하수인을 만들거나 뼈를 조종하는 등, 시체란 매개체가 있어야 사용할 수 있다.

네크로맨서의 사냥은 첫 번째 시체를 구하는 것부터가 시작이라고 말했듯.

하지만.

시체 나무가 있으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지맥이나 대기 중의 마력을 흡수해서 재조립, 술자가 원하는 시체를 만들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시체 대용품을 찍어내는 셈.

기계화된 공장에서 일정한 틀에 주물을 넣어서 프레임을 찍어내듯.

시체 나무는 시체 비슷한 것을 만들어내서 강령술의 매개체를 공급해준다.

〔꽤 편리한 구조물이지 않느냐. 한데 그걸 왜 여태 만들지 않았을꼬.〕

'접경지역에서는 몬스터가 계속 공급되니 당장 필요하진 않았어. 그리고 시체 나무가 될 만한 매개체도 없었다.'

시체 나무는 엄연히 '나무'의 틀에 들어간다.

강대한 힘을 버틸 수 있는 나무. 혹은 그에 준하는 괴물인 엔트는 되어야 시체 나무의 뼈대가 될 수 있다.

'시체 나무가 있으면 번거롭게 시술을 하지 않아도 된다.'

여러 재료를 나무에 거름으로 준 다음 재조립하면 원하는 시체로 재탄생되니.

번거로운 일을 나무 하나로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급 언데드의 전력도 크게 상승하겠지.'

〔과연. 일일이 손볼 필요 없이 시체 나무가 재조립한 시체를 하수인들이 일으키면 되겠구나.〕

생령의 과실을 얻으러 간 곳에서 변종 생장목의 묘목을 얻다니.

녀석이야 마지막 힘을 짜내어 후손을 남긴 거겠지만.

운이 좋았다.

[주인. 이 정도면 되나?]

30분 만에 돌아온 파프너가 몬스터 사체 수십 구를 등에 업어왔다.

깔끔하게 급소만 뚫린 채 절명한 몬스터들.

손상 부위가 많지 않은 것은 파프너의 세심한 힘 컨트롤 덕분이었다.

"딱 좋아. 그걸 묘목 주위에 널어줘."

변종 생장목의 주위에 원을 그리듯이 배치된 몬스터들의 시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파프너가 시체들을 빙 둘러서 놓는 동안 죽음의 전당으로 간 유진은 네크로폴리스 상태창을 켰다.

'시체 나무를 제작한다.'

후우우웅-!

영력을 한껏 머금은 희끄무레한 안개가 변종 생장목 주위로 몰려들더니 빙글빙글 회전하며 압축되었다.

176화 시체 나무 (2)

땅에 심은 변종 생장목이 꾸드득, 뿌리를 늘려간다.

생장목의 기원 및 묘목에 깃든 생명력을 인위적으로 활성화시킨 것이다.

[포식(捕食)]

[변이(變異)]

죽음의 전당을 매개 삼아 부여되는 각종 술식.

파도처럼 몰려드는 영력에 물든 변종 생장목이 뿌리를 촉수처럼 사용해서 원형으로 깔아놓은 시체들에게 꽂혔다.

꿀렁- 꿀렁-.

생명체의 피와 살점을 포식하는 변종 생장목.

유진은 시체를 먹어 치우는 나무를 보면서 턱을 만지작거렸다.

'딱히 변이를 안 시켜도 됐었나?'

세계수의 아종인 생장목.

말이 좋아서 아종이지, 본류인 세계수와 비교하면 먼지 정도로 능력이 떨어졌다.

그 먼지 수준조차 인근의 자연 환경을 뒤바꿀 정도의 힘이라는 것.

어쨌든 저 생장목 묘목은 이미 피를 탐해서 변이된 지 오래였다.

'뭐, 다음 단계를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었으니.'

빠르게 줄어드는 시체들.

생장목에 충분한 피가 축적된 것을 확인하고는 다음 공정으로 넘어갔다.

[강제생장(强制生長)]

비틀어버린 생장목의 기원을 네크로폴리스와 연결.

축적한 피와 살점을 자양분 삼아 시간을 빨리 감듯이 성장시킨다.

쿠득, 쿠드득. 섬뜩한 소리와 함께 자라나는 변종 생장목.

팔뚝보다 조금 큰 길이였던 묘목이 순식간에 아름드리나무 수준으로 커졌다.

-으오오오오!

귀기 어린 울음소리를 토해내는 변종 생장목.

강제로 성장시킨 탓일까.

혹은 영력에 침식당한 영향일까.

필리핀에서 쓰러트린 변종 생장목의 포효와 비슷하면서 미묘하게 다른 톤이다.

[시체 나무가 완성되었습니다.]

[변종 시체 나무]

▷등급 - 1

▷면적 - 소

▷내구도 - 300/300

망자의 피와 살점을 흡수해서 재조립하는 나무입니다.

피와 살점을 탐하는 본능이 있어, 충분히 배를 불려주지 않으면 재조립 과정에서 손실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모체로 삼은 나무의 특이점으로 인해 변이되었습니다.

적대감을 품은 존재가 다가오면 본능적으로 방어를 합니다. 대신 굶주림에 대한 갈망이 더욱 강해집니다.

'변종 시체 나무라고?'

〔이 또한 그대의 안배더냐.〕

'그럴 리가. 회귀했다고 해서 변수 하나하나를 모두 예상할 수 있겠냐고.'

유진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변종 생장목도 놀라운데, 그 묘목을 기반으로 삼았다고 시체 나무까지 변이를 일으킬 줄이야.

차분하게 생장목의 기운을 살펴본 후, 비로소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일장일단이 있군.'

〔그 장점이란 게 무엇인지 알고 싶구나.〕

'거점 방어에 활용할 수단이 하나 더 늘어난 거다.'

필리핀에서 쓰러트린 변종 생장목을 떠올리면 된다.

무수한 나뭇가지를 창처럼 내지르거나 휘둘렀던 강력한 몬스터.

리바이브로 되살린 시체들이 아니었으면 6성 언데드인 송명석을 대동하고도 공략하기 난감했던 괴물이 네크로폴리스를 보호해준다면?

'당장 그만한 힘을 기대하긴 어렵겠지만, 시간문제다.'

어지간한 방어 포탑보다 훨씬 강력한 구조물이 들어선 셈이다.

필리핀에서 쓰러트린 정도까지 성장시키려면 시체를 꾸준히 먹여야겠지만 말이야.

〔하면 단점은?〕

'재조립 과정에서 시체 손실률이 올라갔다는 점.'

시체 나무를 만든 목적을 생각하면 본말전도일지도 모르겠지만.

배부르게 먹여준 후에 재조립을 맡기면 괜찮으니, 크게 신경 쓸 정도의 페널티는 아니다.

"네크로폴리스의 방어력이 올라갔으니, 도리어 환영해야 할 일인가."

유진은 강제 생장을 마친 시체 나무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

조승철을 포함한 다크 미니언 집단을 한 곳에 모은 유진은 시체 나무의 기능에 대해 설명했다.

"알아들었지? 이 녀석을 활용하면 너희의 강령술 숙련도도 빠르게 늘어날 거다."

[그겔, 그게겔.]

[잘 모르겠지만 알겠습니다.]

시체 나무의 기능을 이해한 것은 절반.

나머지는 머리통을 좌우로 움직이며 난해하다는 기색을 드러냈다.

"조승철. 대형종의 시체 여분이 있나?"

[예. 주인이시여. 한 구 있습니다.]

"시체 나무로 가져와라."

쿵- 쿵-.

전신이 뿔 같은 각질로 뒤덮인 대형 언데드, 브루탈이 오우거 시체를 들고 왔다.

시체 나무 만큼이나 커다란 괴물의 주검.

유진이 손가락을 퉁기자 나뭇가지들이 오우거 시체를 감쌌다.

〔시체가 나무에 비해 너무 크지 않느냐?〕

'보면 알아.'

쩌어어억!

반으로 갈라진 시체 나무는 오우거 시체를 꿀꺽, 삼켰다.

뼈와 살이 짓뭉개지는 섬뜩한 소리.

담대함으로는 언데드 하수인들 중 최고인 파프너도 시체 나무의 기행에 흠, 짧은 신음을 흘렸다.

얼마 정도 지났을까.

퉤에엣-!

시체 나무가 삼켰던 오우거 시체를 도로 뱉었다.

둘이었던 동공이 하나로 줄어들고.

골격이 눈에 띠게 바뀌는 등, 눈에 띠게 바뀌었다.

[엑. 디러.]

"거인의 묘소에 옮겨놓아라."

브루탈은 점액질에 감싸여 있는 변이 시체를 묵묵히 들었다.

드르륵, 거대한 관처럼 생긴 구조물 천장이 옆으로 밀려나고 안치되는 대형종의 시체.

[거인의 묘소 제어실과 연결되었습니다.]

[사용자의 능력을 확인합니다.]

[묘소 제어에 적합한 스킬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사용자가 제작하길 원하는 언데드를 선택하십시오.]

새 대형 언데드를 만드는 기념비적인 순간.

유진은 직접 거인의 묘소에 들어가서 패널을 조작했다.

[사이클롭스를 선택했습니다.]

[해당 언데드 제작에 필요한 시체와 촉매를 모두 확인했습니다.]

[제작을 시작합니다.]

브루탈을 제작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네크로폴리스의 영력을 끌어온다.

시체 나무로 구조를 개변한 오우거 시체.

적절한 타이밍에 영력을 정해진 만큼 투입해서 언데드를 빚어낸다.

[사이클롭스가 성공적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그우우우.

음산한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키는 오우거 시체.

새 이름을 부여받은 망자, 사이클롭스가 하나로 줄어든 눈을 번들거렸다.

[사이클롭스]

종족 : 언데드

등급 : ★★★★★★

◎능력치

근력 : 2,547(+1,203) / 민첩 : 502 / 체력 : 2,305(+1,122) / 맷집 : 2,031(+1,049) / 영력 : 3,346(+1,676)

◎특성

▷불사의 존재[B+] / 대형종[B+] / 광란[B] / 불완전한 거인[B]

◎스킬

▷안광[B+] / 정교한 투척[C+]

〔고작해야 죽다 만 망자 따위에게 위대한 거인종의 후예의 이름이 붙다니!〕

'뭘 그렇게 흥분해.'

〔짐은 거신의 왕이었느니라. 어찌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있겠느냐!〕

'사이클롭스는 제우스한테 토벌당해서 사멸했거든. 그 개념만 따온 언데드야.'

사이클롭스의 어원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거인족이다.

지금은 사멸당해서 역사에 이름이 남아있는 정도.

[흑암의 반지]의 전대 주인들은 대형 언데드에게 그 이름을 붙여서 능력을 강화시켰다.

〔그리 되었구나.〕

회한이 섞인 크로노스의 사념.

거신 티탄의 왕이다 보니 사이클롭스가 멸절되었다는 사실이 꽤 울적한 듯했다.

[그 언데드, 밸런스가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파프너의 지적은 타당했다.

비대칭적으로 굵은 팔뚝과 다리.

반면 몸뚱이는 크지 않았고, 머리도 너무 컸다.

[근접전을 벌이면 브루탈보다 약할 거야.]

"맞아. 그쪽 관련 스킬도 없으니 브루탈한테 제압당할 거다."

[그런데도 만든 거라면 이유가 있겠지?]

"사이클롭스는 원거리에 특화되어 있거든."

장거리 투척에 걸맞은 형태로 개조된 몸뚱이.

사이클롭스는 걸어 다니는 공성병기다.

"투척하는 바위에 영력을 불어넣을 수도 있고. 영력을 집중시켜서 빔으로 쏘는 것도 가능하다."

[잊힌 신전에서 상대했던 악마의 눈처럼?]

"위력은 천지차이지만 말이야."

알박기와 함께 전력을 빠르게 증강한 네크로폴리스.

한 가지 약점이 있다면 원거리 공격에 특화된 언데드가 모자란다는 것이다.

원거리 대응 가능한 언데드는 다크 미니언이나 스켈레톤 메이지가 전부인 상황.

다크 미니언은 네크로폴리스 운영에 돌리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실질적인 원거리 특화 언데드가 매우 빈약했다.

'시체 나무가 생긴 덕에 원거리 대응책이 생겼다.'

메이 샤오의 초장거리 저격 능력도 있지만, 홀로 전장을 모두 커버할 수는 없다.

사이클롭스를 10구까지만 만들어도 적을 견제할 정도의 화력은 충분히 낼 수 있으리라.

"파프너."

[말 안 해도 알아.]

파프너는 사이클롭스의 모체가 될 대형종의 시체를 더 구하기 위해 날아올랐다.

*

개성 직할시.

대격변 이전에는 남한과 북한의 가교 역할을 했던 도시였지만.

이젠 사람들을 괴물의 먹이로 던져주는 인간사냥꾼의 본거지가 되어버린 땅이다.

"대장 동무. 여기 있디요."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

제5 혁명군 3대장 주영민은 노르스름한 광석을 내밀었다.

"수고했네."

"긴디 남조선 아새끼래 살려 보내도 됐수?"

"이야기 정도는 들어줘야 하지 않겠나."

혁명군 대장을 자칭하는 사내, 김봉효는 전달 받은 광석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광석 안에 새겨진 룬 문자.

로마노프 가문에서 가공을 한 양방향 통신 장비다.

"아라한이라고 했나."

"기맇십니더. 대장 동무. 문뎨 맀을지 모르니 뎨가 써보겠수."

"괜찮다. 이 물건에 함정을 팔 거였으면 복잡한 수단을 쓸 필요 없었을거다."

김봉효는 룬 문자가 새겨진 광석에 마력을 불어 넣었다.

파르르 떨리는 노르스름한 광석.

룬 문자가 푸른빛을 흩뿌리더니, 중계기 하나 없이 수백 킬로미터를 뛰어넘어 아라한 본부에 있는 광석과 링크를 만들었다.

-제5 혁명군 맞나?

"넌 누구냐."

-아라한 길드 마스터. 이신우다. 부하가 일을 잘 처리한 모양이군.

선발대를 보내 접경지역 탐색을 시행했던 아라한 길드.

진정한 목적은 개성의 패자로 자리매김 한 인간사냥꾼과 접촉하는 것이었다.

애꾸눈의 영역에 들어가서 궤멸 직전에 내몰렸던 아라한 선발대였지만, 끝까지 살아남은 헌터는 인간사냥꾼 무리와 접촉에 성공했다.

"재미있는 물건을 넘겨주었더군."

-훗. 넌 북한 식 사투리를 안 쓰는 건가?

"나는 백두혈통을 이었다. 너희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남조선 말을 하는 것이다."

-핏줄 자랑을 들어줄 생각은 없다.

"그러면 이 귀한 돌덩이까지 주면서 왜 연락한 건가?"

-제안 하나 하지. 우린 공동의 적을 두고 있는 동지 신세이니.

김봉효는 칵, 하고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공동의 적?"

-언데드를 부리는 자. 천유진 때문에 골치가 아프지 않나.

"우리 제5 혁명군의 힘만으로 충분하다. 외인은 나서지 마라."

-직접적으로 도와주겠다는 건 아니다. 힘을 조금 보태주려는 것뿐.

"어떤 식으로 돕겠다는 건가."

-애꾸눈을 제5 혁명군에게 선물하지.

잠시간의 침묵.

옆에 있던 주영민이 두 눈을 끔뻑거렸다.

"대장 동무. 믿디 말디유."

애꾸눈이 누구던가.

7성 절정의 괴물로 파주 인근 접경지역에서 왕처럼 살고 있는 존재다.

대형종이며 오러 블레이드와 마법을 동시에 다루기까지 하니.

인간사냥꾼들도 정면 승부보다는 놈의 영역을 존중하고 충돌을 피하는 게 고작이었다.

"무슨 수로?"

-내가 나서서 애꾸눈의 힘을 빼주겠다. 그 뒤에 길들이면 될 터.

"좋아. 믿어보겠다."

-시원시원해서 좋군. 자세한 건 추후에 다시 의논하지.

파직.

사그라드는 빛.

주영민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대장 동무. 뤼험합니다."

"괜찮다. 놈이 뒤통수를 칠 수도 있다는 것쯤은 고려해두었다."

가라앉은 김봉효의 눈매.

룬 문자가 새겨진 광석을 바라보는 동공 위로 무수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177화 다섯 번째 별

필리핀에서 돌아온 후, 유진의 관심사는 시체 나무를 향했다.

변종 생장목의 영향을 받아 변이된 나무.

유진은 '단점'으로 꼽을 수 있는 시체 나무의 과한 소화력과 포식 욕구에 주목했다.

'많이 먹이는 것 말고는 시체 나무를 성장시킬 방법이 없지.'

네크로폴리스 전력을 한 단계 끌어 올릴 수 있는 시체 나무의 재조립 능력.

피의 발렌타인 사태에서 얻은 [불사자의 관]까지 조합하면 강력한 언데드를 붕어빵처럼 찍어낼 수 있다.

문제는 재조립에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

시체 나무가 성장하면 재조립에 소모되는 에너지와 시간을 꽤 줄일 수 있다.

[결론은 더 열심히 사냥하란 말이네?]

"나도 함께 한다."

검은 방첨탑에 귀속시킨 언데드들이 사냥해봐야 경험치가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

유진이 자리를 비운 후에도 쉬지 않고 몬스터들을 사냥했지만, 경험치가 많이 오르지 않은 이유다.

시체 나무도 성장시킬 겸, 레벨도 올리려는 계획.

[알았어. 나도 협조할게.]

"넌 쉬어라."

[왜?]

"더 이상 언데드가 아니잖아. 넌 이제 독립된 개체다."

사룡이 되면서 언데드가 아닌, 진룡으로 종이 바뀌어버린 파프너.

종속 관계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지만 괴물을 사냥하면 별개로 경험치가 그녀에게 들어가기 때문에 방해만 되었다.

[역시 주군을 보필할 적임자는 저뿐입니다.]

"알았으면 빨리 따라와라."

조승철과 메이 샤오, 그리고 영지에서 대기 중인 브루탈과 이제 막 제작한 사이클롭스의 권한도 가져왔다.

시체 나무야.

배 터지도록 먹여주마.

[애들 더 안 데려가?]

"내 영력이 무한하진 않아."

스켈레톤이나 좀비 같은 하급 언데드들은 움직임이 굼뜨고.

중급 언데드는 전투에 돌입했을 때 영력 소모가 너무 과해서 힘이 든다.

대형종 몇과 송명석 같은 네임드 언데드를 부리는 게 유지력과 속도 모두 잡을 수 있거든.

"그럼 가자."

사냥할 몬스터들은 넘쳐났다.

네크로폴리스의 영역은 개성 인근부터 파주 북쪽, 그리고 연천군까지 걸쳐 있었다.

경기도 북쪽을 감싸듯이 펼쳐진 죽음의 영토.

편의점 앞에 굴러 다니는 담배꽁초처럼 바글거리는 게 몬스터들이다.

-그루루우우욱.

[안광]

검은 광선이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더니 오크 수십 마리의 상반신을 깔끔하게 날려버렸다.

영력을 극한까지 응축시켜서 방출한 사이클롭스의 기술.

걸어 다니는 공성병기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은 위력이었다.

"시체를 모으라니까 다 날려버리면 어떻게 하나."

-그루우욱.

"으휴. 내 지시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무능한 녀석 같으니라고."

-그루욱....

2층 건물 크기의 언데드가 고개를 푹 숙였다.

쯧, 혀를 찬 유진은 입술을 달싹였다.

"내 부름에 답하라."

안광에 직접 닿지 않아서 사지 중 한두 군데만 증발하고 곱게(?) 죽은 시체들이 좀비나 레버넌트로 되살아났다.

"남은 시체들을 네크로폴리스로 옮겨라. 그 뒤에는 영지를 지켜라."

몬스터들을 사냥할 때마다 일일이 돌아가서 시체 나무에 먹이를 주긴 번거로웠다.

유진은 사냥한 괴물 일부를 하급 언데드로 되살려서 자동 귀환 및 네크로폴리스에 귀속되는 두 가지 명령을 내렸다.

[주군. 하급 언데드들만으로는 시체를 무사히 운반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겠지. 손실률이 20%는 되니까."

하급 언데드가 네크로폴리스에 도달하지 못하고 파괴되는 경우도 꽤 있었다.

강령술의 주체인 유진은 언데드들이 파괴될 때마다 시스템의 메시지를 전달받았으니, 그 수치도 가늠하는 중이었다.

[차라리 속하가 돌아가는 길을 호위하는 것이.]

"몬스터는 어차피 넘쳐난다.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사냥 속도 올리는 게 나아."

사이클롭스와 브루탈.

대형 언데드는 현대전으로 치면 전차 같은 거다.

강력한 돌파력으로 적 진형을 부수는 역할.

보병들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버텨도 전파가 밀고 들어오는 것을 막지 못하듯.

한 번 돌진하기 시작한 브루탈의 돌진은 낮은 성위의 몬스터들이 감당하지 못했다.

[이만 죽어 주십시오.]

[제기랄!]

오우거나 트롤 같은 대형종이 출몰했을 땐 송명석과 메이 샤오 같은 [합일]을 마친 네임드 언데드들이 나섰다.

해변을 덮치는 파도처럼.

유진이 몰고 다니는 언데드들은 산 자들의 목숨을 자비 없이 쓸어버리며 생기 하나 남겨두지 않았다.

*

[시체 나무의 등급이 올랐습니다.]

[원형이 된 생장목의 성향 일부가 유전됩니다. 방어기제가 작동됩니다.]

[시체 재조립에 소요되는 시간이 1/3으로 감소합니다.]

[유지에 필요한 자양분 소모량이 3배로 늘어납니다.]

3배 가량 커진 시체 나무.

필리핀에서 쓰러트린 녀석에 비해서는 작았지만, 단기간에 5층 건물 크기까지 성장한 걸 보면 입이 쩍 벌어졌다.

'생장목 가지고는 이런 성장 속도가 안 나오는데 말이야.'

유진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1주 동안 경기도 북쪽 일대의 몬스터들 씨를 말릴 기세로 움직인 결과물.

이렇게까지 빠르게 성장하면 회귀 전에 키운 시체 나무 수준에 도달하는 것도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현재 레벨은 50입니다.]

'레벨을 올린 건 덤이지만.'

용의 계곡과 만주에서 벌인 추격전.

그리고 변종 생장목을 쓰러트리면서 얻은 경험치 등.

일반적인 헌터라면 몇 년은 족히 게이트를 들락거려야 할 정도의 사냥을 2달 남짓한 시간 동안에 했다.

최근 시체 나무를 성장시키겠다고 열을 올린 덕에 경험치를 충족.

대격변 초기 때에도 찾아보기 힘든 고속 성장을 이루었다.

[한계를 넘어 새로운 경지로 나아갑니다.]

4성 이후에는 반드시 마주하는 '벽'.

그렇지만.

회귀 전에 아홉 개의 별을 완성시킨 유진은 레벨을 충족시킴과 동시에 다음 성위로 나아갈 수 있었다.

[모든 능력치에 +50% 보정을 받습니다.]

[경험치 요구량이 5배로 늘어납니다.]

성위를 올릴 때마다 추가되는 능력치 보정.

레벨 업 요구 경험치도 올라가지만 한계 레벨에 부딪쳐서 스탯을 조금밖에 못 올리는 것보다는 낫다.

'저 레벨 때는 금방 금방 오르니까.'

한계 레벨 땐 49 → 50에 필요한 경험치를 꾸준히 쌓아야 1/5에 해당하는 스탯을 얻을 수 있으니.

성위를 한 단계 넘어설 때마다 벌어지는 능력치 차이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낮은 성위의 헌터가 보다 높은 성위에 도달한 헌터를 쓰러트릴 수 없다는 건 기초 스펙부터 다르기 때문이지.

〔여태까지 계약자가 보인 행보와 정반대되는 이야기로구나.〕

'난 다르잖아.'

회귀한 지 얼마 안 돼서 페널티로 약화되었긴 해도 드래고니안 사체를 얻었고.

7대 명가의 가주들과 버금가는 재능을 지닌 박하늘 씨의 혼백과 계약해서 그 몸뚱이에 불어넣었다.

1성일 때도 준 4성급 소환수를 부렸는데, 당연한 일이다.

[지식의 도서관을 사용합니다.]

[선대 죽음의 주인들이 남겨놓은 지식을 열람할 수 있습니다.]

[저주 / 생체 분야 중 하나를 열람할 수 있습니다.]

드디어 둘만 남은 지식 분야.

'저주 분야를 계승한다.'

1그램도 망설이지 않고 계승할 분야를 선택했다.

독 분야는 강령술과의 시너지 효과 때문에 고민을 해야했지만.

생체와 저주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당연히 후자였다.

〔생체 쪽은 왜 필요하다고 하였지?〕

'키메라 공학.'

〔그러고 보니 티폰의 아이 중에 비슷한 이름을 가진 딸이 있었을 터인데.〕

'키마이라겠지.'

〔오. 맞도다.〕

'티폰은 어떻게 알아? 제우스가 성좌 나리 자리를 강탈한 후에 나타난 녀석이잖아.'

〔티폰 역시 거신의 피를 이은 존재이다. 어이하여 모를꼬.〕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신좌를 차지한 뒤로 오만해진 제우스를 견제하고자 낳은 거신이자 괴물.

낳은 목적이 목적인만큼, 정상적인 성좌는 아니었다.

'키마이라는 사자와 염소와 뱀이 섞여 있는 모습이었다고 해.'

〔흠. 그 말이 옳도다.〕

'키메라 공학은 그 이름을 따와 생물들의 특징을 섞어 인공적으로 바꾸는 지식이다.'

마법으로 하는 유전자 공학이라고 하면 좀 이해가 되려나.

생명 분야는 연금술과도 밀접해 있어서, 배워두면 연금술 효율을 올릴 수 있다.

'내 주력은 네크로맨시이니 급한 건 아니지만 말이야.'

〔하면 생명 관련 지식이 반지에 남아 있는 게냐?〕

'저번에도 말했듯이 시체도 피와 살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생명 분야로 미리 손을 대놓은 뒤에 언데드로 제작하면 강해지거든.'

[흑암의 반지]에 새겨진 지식은 키메라를 만드는 게 주가 아니다.

시체에 간섭해서 망자로 되살렸을 때의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목적.

'근데 시체 나무가 있으니 생명 분야도 어느 정도 대체할 수 있어.'

시체를 재조립하는 구조물.

오우거의 시체를 마개조해서 원거리 특화로 만들 수도 있다.

생명 분야의 힘을 빌리기보단 디버프나 혼령을 다루는 저주가 더 좋은 선택지였다.

5성에 올랐겠다.

바로 상위 주문과 새로운 분야 쪽 지식도 계승했다.

[데스 필드]

분류 : 강령술

등급 : A

제한 : 5성 이상

일정 범위를 죽음의 지역으로 선언합니다. 마법의 영향권 안에 들어온 산 자들은 체력 소모가 심해지며, 언데드들은 추가 버프를 획득합니다.

또한 데스 필드에서는 햇볕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범위 - 300미터

[본 미사일]

분류 : 강령술

등급 : B

제한 : 5성 이상

뼈에 영력을 담아 날립니다. 충돌 시 쪼개지면서 인근을 초토화시킵니다.

[데드 릴리스]

분류 : 강령술

등급 : B

제한 : 5성 이상

사역 중인 망자의 유지에 들어가는 영력이 감소되며 어둠에 거하고 있을 때 모든 능력치를 상승시킵니다.

먼저 익힌 것은 네크로맨시 주문 3종.

본 미사일은 시체 폭발 이후로 처음 생긴 광역계 공격 마법이고.

데스 필드는 범위 지정 방식의 버프&디버프 스킬이다.

'진정한 네크로맨서의 상징 격 주문 중 하나다.'

추가 체력 소모 유발 및 언데드 버프가 효과의 전부라고 생각하겠지만.

마지막으로 익힌 [데드 릴리스], 풀어 쓰면 해방된 죽음이란 패시브 스킬이 더해지면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

'햇볕이 닿지 않는 상황은 곧 어둠이니까.'

데드 릴리스와 연계된 데스 필드는 언데드에게 신성과 불 저항력을 부여하거든.

그래.

데스 필드는 언데드의 천적인 신성 주문과 화염 마법 대비책이다.

〔대단하다고 한 것 치고는 썩 와 닿지 않는 이점이로구나.〕

'몬스터 상대로는 그렇지.'

이제부터는 몬스터보다 인간이 더 큰 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개성 인간사냥꾼이나 아라한 길드.

바다를 건너면 구룡방이 이를 드러내고 있으며.

저 대륙 너머에서는 7대 명가라는 적이 유진을 기다리고 있다.

'회귀 전에는 교황청도 나를 썩 반겨하지 않았다고.'

7대 명가와 이미 대립각을 세우고 있어서 딱히 나서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르잖아.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를 일찍 걱정하지는 말아라.〕

'예. 예.'

남은 주문 슬롯은 꽤 있지만, 아무 스킬이나 막 전승할 수는 없다.

유진이 [흑암의 반지]를 통해 계승할 수 있는 분야는 다섯 가지나 된다.

7성까지는 10레벨 구간 당 2개씩 추가로 주문을 익힐 수 있으니, 필요한 것 위주로 골라서 익혀야 했다.

〔기껏 열어놓은 저주 분야는 안 익히는 게냐?〕

'뭘 익힐지는 이미 결정했어.'

유진은 반지를 어루만지며 다음으로 계승할 주문을 떠올렸다.

178화 저주

유진은 허리춤에 껴 놓은 가면을 만지작거렸다.

저주 액막이 겸, 새긴 주문을 방출할 수 있어서 유용하게 사용한 [그림자 가면]이다.

〔이제는 효용을 다하였구나.〕

'더 쓸모가 있어졌지.'

〔어이하여?〕

'강력한 저주에는 반동이 따르는 법이다. 그걸 막아주는 게 액막이고.'

[그림자 가면]의 원래 사용처는 액막이.

새겨놓은 저주를 방출하는 것은 부가적인 옵션이다.

회귀 전 지식을 활용해서 역으로 가면에 필요한 저주 술식을 새겨서 응용한 것이 변칙일 뿐.

'이만한 성능의 액막이는 회귀 전에도 찾아보기 어려웠어.'

〔호오. 용케 소문이 나지 않았구나.〕

'저주에 능한 헌터는 많지 않거든. 흑마법사 자체가 비주류라서.'

흑마력을 기반 삼아 발동하는 암흑과 저주 분야.

제일 이질적인 마력인 탓에 숙련도를 쌓기 어렵고 스킬 북도 잘 나오지 않으며, 결정적으로 애매했다.

유틸성이 뛰어난 건 장점이지만.

시전 속도가 느리고 파괴력도 뛰어나지 않으며 신성 주문이라는 확실한 카운터까지 존재한다.

저주도 마찬가지.

디버프 효과가 뛰어나지만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반동을 신경 써야 하고.

액막이가 감당 못할 정도의 충격을 받으면 도리어 술자가 해를 입는다.

'게이트 공략에서 제일 중요한 건 안정성이다.'

〔호오. 그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발언을 태연하게도 내뱉는구나.〕

'드러누울 곳이 어떻게 생긴 지는 보고 하거든?'

다 계획이 있는 거라고.

짧게 투덜거린 유진은 뒷말을 이었다.

'반동을 걱정해야 하는 흑마법사보단 안정적인 신관계가 환영받는 이유야.'

〔그렇구나. 치유와 보조가 가능하니.〕

'모시는 성단에 따라 디버프 효과도 꽤 쏠쏠한 편이고.'

〔이해했도다.〕

저주 스킬도 안 익힌 채, 아이템 하나로 입맛에 따라 필요한 주문을 사용한 유진이 특이 케이스인 것이다.

'어쨌든 저주를 본격적으로 활용하려면 액막이가 중요해.'

유령선을 만들 때 아래가 깨져서 영구한 내구력 손실이 생긴 그림자 가면.

획득한 뒤로 딱히 관리도 하지 않았으니 그럴 만 했다.

액막이처럼 특수한 아이템은 수리 방법이 까다로워서 손보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던 것에 가깝지만 말이야.

'그럼 주문을 익혀볼까.'

〔무엇을 익힐 지는 이미 생각해두었느냐?〕

'5성도 되었겠다. 강력한 저주 위주로 습득할 거다.'

강령술을 제외한 분야는 대부분 기초 술식만 습득한 상황.

대부분 강령술을 보조하는 목적이었고, [점화 회로]처럼 임기응변을 발휘하려고 익힌 주문이다.

저주 술식은 다르다.

단독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고, 분야도 겹쳐지지 않으니 단숨에 높은 성위의 주문을 익힐 생각이다.

[디크리피파이]

분류 : 저주

등급 : B

제한 : 5성 이상

노화의 저주를 사용합니다. 유, 무형을 가리지 않고 대상에게 먼 미래의 모습을 강제로 투영시킵니다.

[이블 아이]

분류 : 저주

등급 : B

제한 : 5성 이상

저주의 시선으로 상대를 옭아맵니다. 한 대상을 오래 바라볼수록 저주의 효과가 증대됩니다.

[다크 인베이전]

분류 : 저주

등급 : B

제한 : 5성 이상

혼백에게 저주의 낙인을 찍습니다. 저항에 실패한 영혼은 타락하여 스펙터가 됩니다.

〔그대가 자랑한 것치고는 썩 대단하지 않아 보이는구나.〕

'왜 그렇게 생각하지?'

〔노화란 필멸의 굴레에 속한 자들에게나 의미 있는 법. 짐과 같이 별빛에 그 이름을 새긴 존재는 늙지 않느니라.〕

허-.

유진은 황당한 기색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나도 필멸자거든요?'

〔아. 그러하였지.〕

'지금까지 싸운 적 중에서 필멸자 아닌 녀석이 얼마나 있다고.'

〔하긴. 그대의 상대를 과대평가하였구나.〕

'더 떠들어보시죠.'

〔이블 아이는 실전에서 봐야겠다만, 마지막 주문은 다크 콜링과 겹치지 않느냐.〕

혼백에게 낙인을 찍어 망령으로 타락시키는 주문, 다크 콜링.

[합일]의 선 조건이기도 해서 그림자 가면에 새긴 이후로 지금까지 유용하게 사용한 저주다.

'스펙터는 망령이랑 비빌 바가 안 되거든요?'

〔짐이 듣기에는 같으니라. 고작해야 작은 인간의 혼백이 영락한 모습 아니더냐.〕

'우리 성좌 나리는 꼭 보여줘야 이런 말을 안 하더라.'

마침 잘 됐다.

스펙터는 향후 계획에도 필요했으니.

'망령하고는 다르다. 망령하고는!'

강한 어투로 크로노스에게 어필한 후, 발걸음을 북쪽으로 돌렸다.

[주군. 여기서 더 올라가면 애꾸눈의 영역입니다.]

"슬쩍 들렸다가 올 거다."

[흔적이 남으면 녀석이 영지를 노릴 수도 있습니다.]

"넌 애꾸눈이 두렵나?"

[신납니다.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그 버릇 없는 괴물과 싸울 수 있게!]

허세 부리기는.

파프너를 쓰러트린 강적과 싸운다는 말에 흥분한 송명석을 못 본 척하며 괴물을 찾아 북상했다.

*

애꾸눈의 영역으로 들어선 지 얼마나 되었다고.

"쿠륵!"

100마리가 넘는 오크들과 조우했다.

등 뒤에 있는 대형 언데드들을 보고도 전의를 꺾지 않는 괴물들.

유진은 귀찮은 듯이 지팡이를 휘둘렀다.

"시끄럽군."

순식간에 재배열된 영력.

후열의 브루탈이 들고 있던 여분의 뼈가 들썩거리더니 하늘 위로 붕 떠오르고는 오크 무리 한가운데로 쏘아졌다.

[본 미사일을 사용합니다.]

본 스피어보다 두 배 이상 빠른 속도로 날아간 뼈.

오크 무리의 머리를 기준으로 3미터 정도 위에 위치하는 순간.

[점화 회로를 사용합니다.]

사전에 작업해놓은 회로가 본 미사일을 조금 일찍 폭발했고.

통나무 크기의 뼈가 수천, 수만 조각으로 쪼개지면서 오크 무리를 벌집으로 만들었다.

〔출발 전에 번거롭게 작업을 한 이유가 이것이더냐?〕

'새 주문들의 위력을 보여 달라며.'

〔한데 직접 충돌시켰으면 위력이 더 강했을 것 같구나.〕

'그 대신 범위는 좁아진다.'

본 미사일의 모체에 점화 회로를 새기는 건 [흑암의 반지]에 기록되지 않은 유진 식 오리지널 기술이다.

포탄 중에는 장약 폭발 시간을 미리 기입해놓는 VT 신관이라는 물건이 있다.

허공에서 포탄을 터트려서 범위를 늘리는 형식.

그걸 유진 식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이 주문은 그대의 마법 무장을 매개로 삼으면 위력이 더 증대되겠구나.〕

'1회용 주문에 마법 무장을 태우라고?'

본 미사일은 회수가 불가능하다.

점화 회로로 터트리지 않아도 지면에 닿는 순간 매개체인 뼈를 포함해서 주위를 쑥대밭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야 할 순간이 올지도 모르지 않느냐.〕

'재수 없는 소리 하지 좀 마쇼.'

이러다간 조만간 "해치웠나?" 라고도 하겠어.

그러고 보니 송명석이 그랬구나.

'넌 나중에 교육 좀 하자.'

유진의 가라앉은 눈빛을 흘겨본 송명석이 왠지 모를 불길한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본 미사일의 효용성은 익히 보여주었지만, 나머지 두 저주를 사용할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쿠오오오!"

제 영역을 침범당한 괴수의 울음소리.

오우거의 포효가 반갑게 들린 적이 얼마나 있는가.

유진은 [그림자 가면]을 얼굴에 쓴 채 직선 코스로 돌진하는 오우거를 노려보았다.

'저주의 시작은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다.'

〔인식?〕

'본래 저주를 쓰려면 준비할 게 엄청나게 많아.'

사극에서 괜히 대상의 머리카락이나 피를 구하는 게 아니다.

저주의 대상과 연관이 되는 매개물이 있어야 하고.

그 당사자에게 저주를 부여할 혼령을 불러오기 위해 굿판을 벌이는 등, 사전 작업이 엄청나게 필요한 일이다.

마법 분야 중 하나인 저주는 술식으로 그 복잡한 과정을 대폭 축소한 것.

'그러니 제대로 보기라도 해야지.'

본다, 라는 행위로 저주의 대상을 완벽하게 지정.

다음은 입술을 달싹여 저주의 언어를 내뱉는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세월이여.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에는 무색할지니."

말 자체에는 힘이 실리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저주를 발현하기 위한 사전 작업.

그림자 가면을 매개로 쓸 때와 달리, 술식으로서 발동시킨 저주는 대부분 앞의 두 과정을 거쳐야 한다.

마지막으로 영력을 재배열하니.

[디크리피파이를 사용합니다.]

오우거의 피부가 윤기를 잃고 쪼글쪼글해지기 시작했다.

1초 만에 20년은 늙어버린 것 같은 모습.

마력 저항력이 높은 오우거지만, 숙련도 100인 유진의 저주를 떨쳐내진 못했다.

〔눈에 띄는 변화는 없구나.〕

'저렇게 늙었는데?'

〔계약자가 자랑한 만큼 직접적인 능력 하락으로 이어진 않아 보이니라.〕

'저주에 잠식당하면 모든 능력치가 10% 감소한다.'

10%.

당장에 정면으로 달려드는 오우거를 보면 큰 차이라고 느껴지지 않겠지만.

직접 손속을 겨루는 순간, 확연하게 체감되는 수치다.

'더 중요한 건 시간이 지날수록 노화 현상이 심해진다는 거다.'

이블 아이처럼 효과가 누적되는 저주.

오우거의 생명력이라면... 1시간 정도 뒤에는 지팡이가 필요하겠군.

그 전에 숨을 거두겠지만 말이야.

〔노화의 저주는 영구한 게냐?〕

'설마. 발현자인 나한테서 거리를 벌리거나 축복을 받으면 돼.'

태생적으로 마력 저항이 높은 오우거조차 벗어날 수 없는 노화의 저주.

송명석이 검을 들고 오우거와 손속을 겨루고는 훗, 자신 있게 사념을 흘렸다.

[조금 약해졌습니다. 저주의 효과는 확실합니다.]

"확인해줘서 고오맙다."

[독립한 파프너 따위는 잊으시고 저를 대전사로 삼아주십시오.]

"하는 거 봐서."

종속관계는 여전하단다.

경험치를 자동으로 납부하는 하수인 신세에서 벗어난 것뿐인데.

굳이 송명석의 착각을 잡아주기보단 즐기게 두었다.

"내 눈을 바라봐. 넌 불행해지고. 내 눈을 바라봐. 넌 힘이 빠진다."

바라볼수록 디버프가 중첩되는 저주.

이블 아이를 사용하니 유진의 동공이 일순 붉게 물들었다.

[이블 아이를 사용합니다.]

중첩된 저주.

둘 다 시간이 지날수록 효과가 강해진다는 공통점을 지녔지만.

송명석은 굳이 시간을 들이지 않고 칼을 휘둘렀다.

서걱-.

[이 목을 주군께 바칩니다.]

"저주 효과 좀 보려니까 목을 따버리네."

[ㅇ, 예?]

"넌 돌아가서 보자."

[주군?]

떨리는 송명석의 사념을 못 들은 척 넘기고 오우거의 사체를 바라봤다.

숨이 끊어진 육신에서 흘러나오는 한 다가의 영혼.

게이트에서 빚어낸 반쪽짜리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혼백의 형태를 띤 기운이라 '저주'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다.

'합일로는 써먹을 수 없지만, 이게 어디야.'

아무렴.

혼백 타입 언데드를 늘리려고 사람을 해할 순 없잖아.

"대적이여. 그대는 안식에 들지 못할지니. 내 어둠이 그대의 혼백을 침범하리라."

[다크 인베이전을 사용합니다.]

오우거의 혼백에 찍힌 낙인.

다크 콜링과 비슷한 현상이지만, 낙인에서 솟구치는 영력은 차원이 달랐다.

[불길해.]

후방에서 지원 사격을 담당한 메이 샤오마저 느낄 만큼 선명한 기운.

낙인이 찍힌 오우거의 혼백이 시커멓게 물들더니, 커다란 해골 같은 형상으로 변하더니 킬킬거리며 웃었다.

[스펙터를 제작했습니다.]

4미터 크기의 귀신.

이승에서 떠나지 못한 오우거의 혼백이 스산한 기운을 흩뿌리며 유진의 곁으로 다가왔다.

"고개 숙여라."

[크힛!]

"어디서 주인을 물으려고 들어?"

[크힛, 크힛.]

"제대로 말해라. 정제되지 않은 사념 뿌리지 말고."

[죄송합니다. 나리.]

스펙터는 망령 같은 저급한 령이 아니다.

현 수준에서는 10마리 넘게 사역하기 힘든 강력한 유령체.

평범한 네크로맨서라면 한 번에 셋 이상을 부릴 경우, 도리어 스펙터에게 씌일 지도 모를 만큼 강력한 녀석이다.

'그럼 제대로 만들었는지 확인이나 해볼까.'

유진은 주위를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스펙터의 능력을 확인했다.

179화 북벌

[스펙터]

종족 : 언데드

등급 : ★★★★★

◎능력치

근력 : 502 / 민첩 : 1,350 / 체력 : 832 / 맷집 : 358 / 영력 : 2,013

◎특성

▷불사의 존재[B+] / 영체[B+] / 의념 저항[B+] / 침식[B]

◎스킬

▷드레인[B+] / 빙의[B]

무언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특성과 달리, 간결한 스킬 창.

스펙터는 심플 이즈 베스트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악령이다.

'무투계의 천적.'

의념 저항 특성은 마력에 의지를 부여함으로써 구현되는 힘, 그러니까 오러 저항을 의미한다.

영체라서 물리 공격이 통하지도 않고.

마력을 유형화한 기술인 오러에 상당한 저항력까지 보유했다.

〔드레인이라 함은 짐이 부여한 주문과 흡사해 보이는구나.〕

'발동 대상을 저 영체 안으로 모두 넣어야 한다는 제약이 있어. 그 대신 속도가 훨씬 빠르지.'

저항할 여지가 있는 빙의와 달리, 드레인의 대상이 된 상대는 확실하게 무력화된다.

스펙터가 무투계의 악몽으로 불리게 된 이유다.

'인간사냥꾼한테 선물로 주면 좋아서 죽겠지?'

〔진실 된 의미로 죽을 것 같구나.〕

마법계도 스펙터를 퇴치하기는 어렵다.

영체를 한 번에 소멸시킬 만한 화력을 내려면 시전 시간이 필요했고.

그 안에 스펙터가 몸을 빼버리면 그만이니.

마법계보다 신관계가 필요한데, 몬스터가 주력인 인간사냥꾼들이 어디에서 신관계 헌터를 구하겠는가.

게이트가 빚어내는 몬스터 중에 신관계는 잘 나오지도 않았다.

'스펙터 4기만 더 만들고 돌아가야겠군.'

최소 오우거급의 혼백은 되어야 스펙터로 제작할 수 있다.

애꾸눈의 영역 근처는 오우거 재생성이 많이 되니, 조금만 발품을 팔면 되겠지?

〔시간 조금 줄이자고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느냐.〕

'아. 그거 말고도 이유가 하나 더 있어.'

〔무엇이더냐?〕

'보면 알아.'

〔또 안 좋은 습관이 도졌구나.〕

크로노스는 쯧, 하고 혀를 찼다.

어느새.

매번 타박하기만 했던 유진의 모습을 닮아가는지도 모르는 채.

*

시체 나무 업그레이드와 5성 달성.

전력은 충분히 모였다고 생각한 유진은 곧바로 블랙 컴퍼니 간부진을 한 자리에 모았다.

"요즘 되게 자주 부르시는 거 알죠?"

"바쁘면 안 와도 돼."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인가요?"

"아니. 마담 빠지면 나 굉장히 섭섭하고 삐질 거야."

"...."

마담은 손에 들어간 힘을 빼기 위해 팔목을 털었다.

그 모습을 힐끗 보던 미스터 블랙이 허헛, 하고 짧게 웃었다가 그녀의 곁눈질에 얼굴을 싹 굳혔다.

뽀시래기 용병단 세 명과 고문인 김미정까지 한 자리에 모였을 때.

"블랙 컴퍼니의 저력만으로 개성을 토벌하려고 한다. 어느 정도까지 지원이 가능한가?"

유진은 곧바로 본제를 꺼냈다.

"형님. 깜빡이는 좀 켜고 들어오시면 안 됩니까?"

"팀 회식도 그렇게는 안 정할 것 같아."

"제가 잘못 들은 건 아니지 말임다."

재잘거리는 뽀시래기 팀.

임 이사나 그라운드 제로의 두 축을 맡은 두 사람은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생각이 복잡해진 건 마찬가지였다.

"요즘 정상적이다 했더니 약이 떨어졌냐?"

김미정은 아예 폭언을 내뱉었으니.

미스터 블랙의 고개가 살짝 위 아래로 움직인 것은 착각이었을까.

"거 말씀이 심하군."

"남의 목숨 걸고 노예 계약 찍은 사람한테 듣고 싶지 않은 말이야."

"계약조건은 후했다. 너도 만족하지 않나?"

김미정은 뒷말을 삼켰다.

빵빵한 월급.

흥미로운 능력을 지닌 뽀시래기 팀과 활동하면서 채워지는 욕구.

용병단 자문은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썩 나쁘지 않았다.

"진심이네요."

"난 언제나 진심이지. 거미를 사냥하던 때에도 그랬잖아."

"호호호. 그때는 자살을 희망하는 분인 줄 알았죠."

마담은 오른손을 슬쩍 올려 입을 가리고 웃었다.

"정보망을 좁히면 파주 일대는 개미새끼 움직이는 것까진 가능해요."

"접경지역도 범위에 넣어야 한다."

"그럼요."

"적은 인간사냥꾼만이 아니야."

"아라한의 움직임은 마킹 중이에요. 선발대가 괴멸한 후, 특별한 움직임은 없답니다."

유진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흠.

회귀 전의 아라한은 개성 인간사냥꾼과 손을 잡고 인위적으로 분란을 조장했지.

시간선이 달라졌다고 해서 같은 일이 또 없으리란 보장은 없다.

"성천 그룹에 투자를 받는 건 어떨까요?"

"웬 투자."

"개성을 탈환하면 재개발, 하실 거잖아요."

당연하다는 듯 반문하는 마담의 이야기에 유진이 흠, 신음을 삼켰다.

재개발은 생각도 안 했다.

회귀 전에는 인간사냥꾼을 궤멸시킨 후, 개성 일대를 죽음의 영역으로 선포해서 언데드 연구에 매진했다.

망자가 주민인 땅을 어떻게 개발하겠어?

〔지리적인 이점이 꽤 있는 곳이지 않느냐. 용케 정부가 그걸 허용하였구나.〕

'힘이 있었으니까.'

옛 북한의 땅으로 이어지는 주요 길목 중 하나.

네크로폴리스 외곽 쪽을 재개발하려는 시도가 몇 번이고 있었지만 길가에 넘쳐 있는 언데드 때문에 모두 포기했다.

그렇지만.

'같은 일을 또 반복할 필요는 없다.'

마담의 지적은 시기적절했다.

간과하고 있던 부분을 정확하게 짚은 덕에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대한제약에도 귀띔을 해둬야겠어."

"그럼 보안 유지에 어려움이 생길 거예요."

"오히려 좋아."

"네?"

"숨길 필요 없다. 이미 개성 탈환을 공표했는데 굳이 감춰서 되겠나."

"천 대표님. 전략적인 부분에서 이의를 거는 건 조심스럽지만,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뭔 말을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인대.

유진이 손을 휘휘 젓자, 미스터 블랙은 차분하게 반대 의견을 개진했다.

"대표님도 아시겠지만 아라한 수준의 길드가 원정을 꾸리면 반드시 티가 나기 마련입니다."

"물류가 움직이니까."

"예. 2주 이상 일정을 잡으면 소모품이 엄청나게 필요하지요."

장비 내구도 소모.

마법의 촉매.

포션 등.

대규모 원정은 돈을 잡아먹는 하마다.

많은 자본이 들어가는 만큼 준비를 할 때 어느 쪽에서든 티가 난다는 의미.

"대표님의 언데드 군대는 다르지 않습니까?"

"아라한 길드가 수작질을 부릴 요소를 아예 없애자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원정 결과만 브리핑해도 충분합니다."

뽀시래기 팀 쪽에서 아, 오- 흠. 이라는 탄성이 흘러 나왔다.

보급이 필요 없는 언데드 군대.

병력 손실이 발생해도 즉석에서 추가 증원이 가능하고.

소모품이나 음식도 필요 없으니 병력만 집결시킨 후에 바로 출발시키면 된다.

"마담의 능력이라면 아라한 길드의 눈을 가리는 것도 가능합니다."

"호호. 과대평가, 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가능은 해요."

"아라한이 알아챘을 때면 대업을 이루시고도 남을 겁니다."

언데드 군대의 이점을 정확하게 파악.

현 상황에 가장 알맞은 조언이 미스터 블랙의 입에서 나왔다.

듣고 있던 뽀시래기 팀은 이미 그 논리에 넘어가서 고개를 끄덕이고.

임재백도 아무 반응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내심 동감했다.

"좋은 의견이다. 미스터 블랙."

"감사합니다."

"하나 거절한다."

"ㅇ, 예?"

한 템포 늦은 미스터 블랙의 황당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

유진은 소파에 등을 푹 묻었다.

"도둑놈처럼 몰래 거사를 진행할 필요는 없잖아."

"상대는 국내 1위 길드입니다."

"그렇지만 이 일대는 내 영지다. 싸우면 절대로 지지 않아."

5성에 오르면서 새로운 지식 분야를 열었고.

시체 나무 덕에 업그레이드 된 네크로폴리스의 역량을 총동원하면 강력한 언데드도 붕어빵처럼 찍어낼 수 있다.

'이쪽이 생령의 과실보다 더 큰 기연으로 느껴진단 말이야.'

메멘토로 보여준 환상에서는 말라 비틀어져 있었던 변종 생장목.

놈이 최후의 생기를 짜내어 만든 묘목 덕에 더 이상 파주 인근에서 허리를 숙이고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언제는 참긴 했더냐.〕

크로노스의 핀잔을 못 들은 척 넘기며 미스터 블랙을 바라봤다.

언데드 군대의 강점을 이해하고 대책까지 마련하는 시야.

회귀 전에 동아시아 일대를 주름잡았던 거상에 어울리는 날카로운 분석이다.

"내 판단을 믿지 못하겠나?"

"아닙니다. 대표님께서 그리 결정하셨다면 이유가 있겠죠."

"방금 전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다음에도 그런 생각이 나면 바로 말해주도록."

"알겠습니다."

이견 없이 곧바로 제안을 포기하는 미스터 블랙.

마담이 의아한 듯 흐응, 짧은 콧소리를 냈다.

"괜찮겠어요, 미스터 블랙?"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표님이니 계획이 있으시겠죠."

블랙 컴퍼니의 저력은 아라한 길드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

아라한 길드가 괜히 국내 1위라고 불리는 것도 아니고.

결정적으로 7성 절정이자 곧 8성의 벽을 넘을지 모른다는 강자, 이신우가 있다.

'그 사실을 모르진 않을 터.'

미스터 블랙은 고정관념을 버렸다.

지금까지 유진이 보여준 믿을 수 없는 행보.

어떤 데이터나 이성적인 판단도 유진 앞에서는 의미가 없어진다.

"전 대표님을 믿습니다."

면피용이 아닌, 진심을 담은 말.

유진도 미스터 블랙한테서 그런 반응이 나올 줄 몰랐기에 흠, 하고는 헛기침을 내뱉었다.

"형님. 용병단에도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다 동원하지 말고. 너희랑 김 고문만 움직이자."

"알겠습니다."

"좀 쑤셔서 죽는 줄 알았네. 이제야 제대로 싸우는 거야?"

"네크로폴리스를 칠 때처럼 단독행동 하면 재미없을 줄 알아라."

나찰 집단군을 상대할 땐 김미정의 개별 행동으로 재미를 봤지만.

반대의 입장이 되면 경계하는 게 당연했다.

"임 이사는 대북 관련 사업 당분간 정리해."

"알겠습니다."

"동업자 님. 포션은 필요 없습니까?"

"여분으로 200개 정도면 될 것 같군. 그리고 당신도 필요해."

신준석의 연금술은 전장에서도 유용하다.

네크로맨시 보조로 쓰거나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함정을 팔 때 큰 힘이 된다.

"저, 저는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 그러니까 같이 가자."

"아! 왜! 난 실전이랑 거리가 멀다고요!!"

"골렘 제작은 국 끓여먹게?"

"저 없으면 공장들도 안 돌아가요!"

"도제도 뽑고 대한제약 사람들도 있잖아. 괜찮아."

넌 자유의 몸이 아니야.

여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저희 암상은 무얼 준비하면 됩니까?"

"개성을 탈환하면 구역 하나 내줄 테니 개발할 준비나 해둬라."

진심이다.

방금 전 발언을 통해,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유진이 어떤 방식으로든 개성을 탈환할 것임을 확신했다.

마담은 긴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 넘겼다.

"구룡방을 주시하는 건 제게 맡겨주세요."

"구룡방?"

"새로 9룡이 된 김재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답니다."

"거미 녀석. 귀소본능이라도 있나."

그라운드 제로의 옛 삼강.

붉은 거미 보스였던 김재우가 세력을 집결시키고 있다나.

개성을 탈환하려 한다는 소문이 나면 구룡방에서 움직일 가능성도 0은 아니었다.

"마담. 회의 끝나는 대로 연기 좀 피워줘."

"호호호. 감당하실 수 있겠어요?"

"폰 꺼놔야지."

"알겠어요. 대한제약에도 제가 말씀드려놓을게요."

블랙 컴퍼니 간부진의 회의가 끝나고 1시간 뒤.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에 [개성]과 [블랙 컴퍼니]가 나타났고.

그 뒤로 무수한 기사들이 쏟아지면서 한국 전체를 뜨겁게 불태웠다.

180화 폭풍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