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용살자(5)
시가지는 그다지 좋은 전장이라고 볼 수 없다.
은, 엄폐할 구조물이 많아서 방어하는 입장에서 유리하고.
화력 투사도 녹록하지가 않다.
대격변 이후 현대 병기 무용론이 들어선 이후에는 시가지 내에서 전투를 벌일 때 방어 측의 이점이 꽤 떨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현대 병기보다 사거리가 많이 짧은 마법.
고 성위 마법이야, 1킬로미터 이상 뻗어나갈 수 있다지만.
일반적인 마법은 방출한 포인트에서 끽해야 100 ~ 200미터 정도 나가면 분해되어버린다.
세계의 규칙을 인위적으로 비틀었기에, 발현 지점에서 멀어지면 재배열된 마력이 공중으로 흩어지기 때문.
마력 감지에 특화된 헌터도 있다 보니 기습하기도 쉽지 않아서 현대전만큼의 이점을 선사하진 않았다.
[일반적인 헌터라면 말이지.]
[오러]
[스트라토스 샷]
[초정밀 사격]
고층 빌딩 옥상에 자리를 잡은 메이 샤오가 시위를 놓았다.
패애애앵-!
그것은.
화살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했다.
나무 하나를 통으로 잘라서 만든 공성병기 급 화살.
파공음과 함께 허공에 기다란 사선을 남기며 구룡방 본대를 쑤셨다.
"커흑!"
다섯 명을 관통하고 지면에 푹 박힌 커다란 기둥.
상시로 발동해놓은 방어 마법으로는 오러를 일점으로 집중한 화살을 막지 못했다.
"저격이다!"
"위치를 특정해."
"남동쪽, 거리 약 4킬로미터."
"말도 안 돼. 그 위치에서 무슨 수로 오러를 유지해?"
"가능한 사람이 한 명 있지 않습니까."
"메이, 샤오."
구룡방 간부 한 명이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죽은 자를 수하로 부리는 기상천외한 능력.
김재우에게 들었지만.
이런 식으로 죽은 아군을 부리는 걸 체감하니, 소름이 우수수 돋았다.
'이래서는 지휘 계통이 성립되지 않아.'
본 드래곤들의 냉기.
길가 위로 솟아난 하얀 벽.
동시다발적으로 생긴 변수 때문에 1천이 넘는 구룡방 본대가 수십 그룹으로 쪼개졌다.
구룡 각자가 데려온 인원들이 진형을 짜고 있어서 실질적인 피해는 크지 않았다.
'문제는 이 상황이 지속되면, 이다.'
구룡방은 애초에 힘을 집결시켜본 경험이 별로 없었다.
중국 대륙은 넓었고.
구룡방이라는 거대 조직이 한 번에 움직일 만한 사태가 벌어진 일은 한 번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 조선인의 분석대로라면 시간을 끌수록 불리해.'
김재우는 인간사냥꾼과 네크로폴리스의 충돌, 그리고 아라한 길드와의 대전에서 발생한 데이터를 꽤 많이 조사해놓았다.
소모전에서 압도적인 상성을 자랑해서 한국의 길드들을 한반도 이남에서 못 올라오게 막았던 강자.
인간사냥꾼들의 장기였던 소모전을 역으로 시도한 유진은 몬스터들을 언데드로 만들어서 적을 압도했다.
'천유진이 노리는 건 소모전일거라고 했다.'
일룡이 소수 정예로 돌파하고.
구룡방 본대도 적 본대를 묶어내며 천천히 나아간다.
출발 전에 세운 계획이다.
'진형을 수습하려면 전선을 넓히기보단 수습해야겠군.'
판단을 마친 사룡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당황하지 마라. 메이 샤오는 6성, 방비만 하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
"사룡 님. 별동대를 차출해서 메이 샤오를 자르는 건 어떻습니까."
"말했잖나. 충분히 방비하면 된다고."
초장거리 저격.
적으로 마주하니 굉장히 까다로운 능력이다.
그렇지만.
구룡방 본대를 묶기에는 빈약한 화력이다.
쇄애애애액!
다시 한번 날아드는 화살.
사룡은 땅을 박차며 정면으로 돌진, 손에 쥐고 있는 사슬을 팽그르르 돌렸다.
마디마디에 깃드는 푸른 광채.
오러를 넘어 의형의 물질화에 이른 경지, 오러 블레이드가 통나무 크기의 화살을 어렵지 않게 튕겨냈다.
"태세를 바로잡는다. 적의 견제는 무시해."
그런 판단을 내린 건 사룡만이 아니었다.
본 월과 프로스트 브레스로 본대가 여러 갈래로 찢어졌지만.
그게 유진의 노림수라고 판단한 구룡들은 전력을 최대한 온존하며 진형을 재정비했다.
[다크 메가 플레어]
[피츠제럴드의 냉기]
암흑 마력으로 빚어낸 이형의 파장이 고층 건물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자잘한 견제는 무시해라."
"천유진이 노리는 대로 움직여주면 안 된다."
강력한 한방.
한국에서 유진이 싸워온 방식은 정면으로 승부를 내기보다 적을 깨작깨작 갉아먹어서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만드는 식이다.
적의 수작을 알면서도 함정으로 유도하는 악랄한 수법.
구룡방은 훤히 보이는 유진의 낚시질에 걸리지 않겠다는 듯이 무너진 태세를 빠르게 정비했다.
진형을 가다듬는 과정에서 넓은 도로로 이동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구룡방 본대의 위치가 시가지 중심부로 향했다.
"이제 일룡의 뒤를 따른다."
"천유진의 전력은 우리의 발을 묶느라 분산되어있다."
"본 드래곤들은 강하지만 원거리 공격만으로는 우리를 제압할 수 없다. 놈들이 내려오면 그때 화력을 집중하고, 그게 아니면 방어 위주로 대응해라."
이룡을 중심으로 내려온 지시.
본대 지휘계통이 회복되자마자 한 점으로 뭉친 구룡방은 다시 한번 전진을 시작하려고 했다.
[시체 폭발(改) x 1,527을 사용합니다.]
발 밑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
구룡방 본대의 발 아래에서 폭발이 일어나기 직전.
파프너는 느긋하게 공중을 배회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이야. 제대로 준비했는걸.]
아라한 길드나 인간사냥꾼 때하고는 완전히 달랐다.
사방에서 찔러주면 급해지기 마련인데, 당황하는 기색 없이 차분하게 전열을 가다듬는 모습.
지휘체계가 반쯤 무너졌음에도.
당황하지 않고 구룡들이 발 빠르게 움직여서 전선을 형성한다.
[주인은 이런 부분까지 어떻게 내다보고 있었을까.]
후방에서 몰려오는 언데드들은 어마어마하지만.
막상 시가지라는 방어 측에 유리한 진형을 제대로 활용하진 않았다.
부서져도 큰 손해가 아닌 중급 언데드들을 곳곳에 뿌려놓고.
메이 샤오만 안전한 위치에 배치해서 구룡방 본대의 균열을 유도했다.
[구룡방 본대가 태세를 정비하게끔 유도했어.]
유진의 목적이 시간을 끄는 것이라고 비쳐지게끔 행동.
구룡방에서 넓은 지형으로 이동해서 재정비를 하게 만들었다.
[뭐, 거기까진 그렇다 쳐도 위치까지 정확하게 맞추니까 좀 소름 돋네.]
구룡방의 성향을 이해해야 짤 수 있는 함정.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를 주인이다.
[너희는 지시받은 대로 외곽부터 압박해.]
[콰루루루!]
[죽을 것 같으면 바로 도망치고.]
본 드래곤의 약점은 빈약한 내구력이다.
유진이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보강 작업을 했음에도, 여전히 페널티가 심했다.
개조치의 보정까지 더해도 확연하게 떨어지는 내구력.
섣불리 접근전으로 들어갔다가 오러 블레이드라도 맞으면 날개가 찢어질지도 모른다.
[그럼 나도 제대로 해볼까.]
지면을 훑듯 낮게 비행하면서 매캐한 연기를 뚫고 들어간 파프너.
시체 폭발에 휘말린 구룡방 본대는 방금 전까지 단단했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크허헉."
"사, 살려줘."
"무우울!"
상시 발동 중이던 대규모 방어 마법은 완전히 박살났고.
폭발을 인지하는 순간에 각자 아티팩트나 스킬, 마법 등을 발동해서 몸을 보호하려 했지만 피해가 심대했다.
즉사한 인원이 약 200명.
당장 전투에 투입할 수 없을 만큼 중대한 상처를 입은 자가 300명 정도다.
한 번의 공격으로 절반에 가까운 구룡방 헌터가 무력화된 셈.
폭발을 버텨낸 이들도 공황에 빠진 건 마찬가지였다.
구룡들조차 당황해서 얼어붙었으니.
폭발 진원지에서 거리가 있어 비교적 피해를 덜 입은 헌터들은 추가 공격을 걱정하며 진형을 이탈했다.
"적이다!"
[오. 그래도 정신이 박혀 있는 사람이 있네.]
정신을 차리고 있으니 선물을 줘야겠군.
손톱 위로 번들거리는 암흑 강기가 그녀의 몸을 떠나 폭발에 휩쓸려서 고통 받고 있는 구룡방 헌터들에게 쇄도했다.
[케넥 전투술]
[2장 - 낙엽치기]
수 미터 길이로 방출된 오러 블레이드가 파프너의 접근을 경계하던 헌터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콰루루루!!]
본 드래곤들도 시가지 변두리로 흩어져서는 진형을 이탈 중인 헌터들을 차근차근 사냥했다.
콰직!
드레이크를 개조해서 빚어낸 언데드.
본신보다 높은 격을 부여해서 '용'의 이름을 받게 된 만큼.
8성이라는 성위에 걸맞은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었다.
본 드래곤이 꼬리를 한 번 휘두르자, 그 궤적에 휘말린 고층 빌딩이 폭삭 주저앉았다.
헌터들도 무사하지 않았다.
고층 빌딩의 허리를 일격에 동강내버리는 압도적인 힘!
본 드래곤의 꼬리에 휘말린 헌터들은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펑- 터져 나갔다.
구룡방 본대의 외곽에 자리 잡은 본 드래곤은 폭발의 진원지를 향해 다가가며 천천히 압박했다.
"여기까지도 예측했단 건가."
구룡방 본대의 후미를 맡았던 김재우가 신음을 삼켰다.
이만한 마법 폭발을 일으키는데 전조도 거의 느낄 수 없었다.
미리 함정을 세팅해두었단 말.
본 월이나 프로스트 브레스 같은 수작질은 모두 구룡방 본대를 이 광장으로 유도하려는 함정이었다.
구룡 중에서 유진에 대해 가장 많이 연구한 만큼, 상황 파악도 빨랐다.
"아직 결정적으로 패배한 건 아니다."
까드득-.
김재우는 손을 말아 쥐었다.
시가지를 향해 밀려오는 언데드를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유진이 정면 승부를 부담스러워해서 이런 함정까지 파놓은 것을 보면.
정면 돌파 중인 일룡과 합류하는 순간 구룡방이 승리할 수 있으리라, 라는 확신이 들었다.
"너. 일룡에게 가서 회군해야 한다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발 빠른 수하를 보내고는 진형을 재정비했다.
이만한 대규모 폭발을 연속으로 일으키지는 못할 터.
네크로맨시도 결국은 마법의 일종이다.
마법은 세계의 규칙을 비틀어서 이적을 행하는 능력이지만. 그럼에도 한계는 존재했다.
추가 폭발을 일으킬 수 있다면 한 번에 터트려서 구룡방 본대를 일격으로 몰살시켰겠지.
다른 구룡들도 마찬가지 판단을 했는지, 김재우를 따라 헌터들을 수습하려고 했다.
'구룡방은 이제 나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정도만 해도 공은 충분했다.
본대의 총 담당자인 이룡조차 자신보다 판단이 느리지 않았던가.
그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고 다른 말없이 따라하는 것을 보면 주도권도 자신에게 넘어온 셈이다.
'빠르게 전장을 수습하고 일룡과 합류하면....'
김재우의 생각은 더 이어질 수 없었다.
[쿠후후훅. 폭발. 예술이다.]
묵직한 사념의 파장과 달리, 왠지 모를 경박함이 느껴지는 말투가 귓가에 아른거린다.
시체 폭발의 범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나 겨우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건물이 돌연 폭삭 주저앉고.
그 위로 떠오른 검은 물체가 김재우를 향해 쑥 떨어졌다.
[마법 스크롤 - 윈디 밤 x 10]
본능적이었다.
한국을 떠나 구룡방에 투신하고, 이 자리에 서기까지 김재우를 살게 해준 생존본능.
품에 넣어놓은 비상용 스크롤을 한 번에 찢어버리고.
그것도 모자라 애병인 철퇴를 쥐고 온 힘을 다해 휘둘렀다.
응축되었던 공기가 한 번에 터지면서 괴물을 밀어냈지만, 검은 인영은 손짓으로 바람을 무효화했다.
콰직!
김재우는 두 팔이 뽑히는 것 같은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쿠훅. 막았나.]
"보스!"
근처에 있는 수하들이 오러 다발을 흩뿌리자 푸른 안광을 흩뿌리는 외눈의 괴물이 뒤로 물러났다.
[쿠후훅. 너희. 재밌겠다.]
시체 폭발 전까지 투입하지 않았던 괴물.
유진이 만든 현 시점에서 최강의 언데드, 애꾸눈은 신성 갑주로 전신을 강화하며 입맛을 다셨다.
231화 용살자(6)
바닥에 드러누운 유진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영력을 과도하게 소모했습니다.]
[집중력이 60% 감소합니다.]
[무기력증 상태에 빠집니다.]
눈은 팽팽 돌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다.
〔괜찮으냐?〕
'아니. 뒤질 것 같아.'
대규모 본 월과 부정 충격방패.
시체 폭발까지 사용했다.
모자란 영력은 가호와 신성 주문으로 채웠지만, 페널티까지 무효화할 순 없었다.
'마력 탈진. 오래간만이군.'
〔언제까지 그리 누워 있을꼬.〕
'10분은 기다려야 해.'
영력 회복 페널티는 역천의 가호와 라이프 드레인으로 커버한다 쳐도.
무기력증과 집중력 저해는 어찌 할 수 없다.
엘릭서 같은 아티팩트 급 포션을 먹어야 털어낼 수 있을 건데.
그런 게 있지도 않고.
있어도 지금 쓰고 싶진 않았다.
'컨디션이 돌아올 때까진 수하들한테 맡겨놔야지.'
〔그대는 모든 상황을 손 안에 넣고 제어해야 하는 성미 아니더냐.〕
'에이. 내 하수인들은 판 깔아줬는데 못 받아먹을 만큼 모자라지 않아.'
재능만 놓고 보면 회귀 전에 거느렸던 언데드들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았다.
파프너야 말할 것도 없고.
송명석, 이신우처럼 이미 완성되었거나 기량을 갖추어 가는 인재도 있다.
애꾸눈은 또 어떻고.
크로노스와 머리를 맞대어 제작한 신성 주문 덕에 생전의 능력을 상회하는 힘을 지녔다.
본 드래곤들은 내구력이 좀 많이.... 약하긴 해도 화력만큼은 어마어마했고.
'하자가 있어도 8성이야.'
구룡방 본대?
에이. 일룡이고 이룡이고, 순수하게 힘 대 힘으로 붙었어도 질 자신이 없었다.
회귀 전에 맞붙었을 때보다 훨씬 떨어지는 구룡방의 전력.
원 역사에서는 아라한을 탈퇴하고 구룡 중 하나가 되었을 송명석도 하수인으로 거두었다.
몇 가지 수작을 부린 것은 피해를 줄이기 위함일 뿐.
'구룡방이 공세를 택한 시점에서 패배는 확정된 거다.'
유진의 확신대로.
웨이하이 시가지의 분위기는 구룡방 측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웃기지... 마!"
차르르릉!
사룡은 양손에 쥔 사슬을 크게 휘둘렀다.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쌓아 올린 고층 빌딩의 밑동이 사슬에 동강 잘려나가고.
사선으로 기울면서 쿵, 하고 무너졌다.
무너진 건물 위를 덮는 새하얀 기운.
한 치 차이로 방출된 냉기가 무너진 빌딩을 금세 삼켜버리고는 피 냄새를 맡은 피라냐처럼 매섭게 몰려든다.
사룡은 오러 블레이드를 넓게 펼쳐서 냉기가 퍼져 나가는 것을 막아냈다.
[콰루루루!]
얼어붙은 건물의 잔해를 짓밟는 커다란 발.
뼈만 남은 용이 푸른 안광을 번쩍이더니 머리를 짓쳐들었고.
막 오러 블레이드를 전개한 직후인 사룡을 대신해 부하들이 앞으로 나섰다.
[데들리 어택]
[파산격]
[블레이드 스톰]
형형색색의 오러가 본 드래곤의 상체를 두들긴다.
쩌억, 쩌적-.
빗발치는 오러를 맞은 뼈 여기저기에 금이 새겨진다.
"통한다!"
"더 몰아붙여!"
"보이는 것과 달라. 놈은 약골이다."
무투계 헌터들은 신이 나서 오러를 더욱 거세게 피워 올렸다.
한 순간, 사룡도 빠르게 본 드래곤을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품을 정도.
[콰루루루!]
분개한 해골 용은 몸을 사리라던 파프너의 지시도 잊고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쿵! 쿵! 네 다리로 지면을 밟으며 기어드는 속도는 비행을 할 때보다 떨어졌지만, 지근거리까지 다가간 무투계 헌터들이 대응하기에는 너무 빨랐다.
발에 짓눌린 헌터는 제 형태도 남기지 못한 채 터져버려서 고깃덩어리로 화했고.
돌진궤도에서 살짝 벗어난 헌터들은 팔이나 다리가 찢겨나갔다.
사룡은 본 드래곤의 괴력에 놀라 반사적으로 외쳤다.
"모두 거리를 벌려라!"
[콰루루루루!!!]
한 발 늦었다.
내구력이 약한 본 드래곤을 빨리 쓰러트리겠답시고 거리를 좁혔던 무투계 헌터들.
돌진한 본 드래곤이 상체를 추켜세우더니 꼬리를 크게 휘두르자.
쿠카카카카칵! 지면에 기다란 고랑이 새겨지면서 수십 명의 헌터가 한 줌의 핏물로 변했다.
충격파에 휩쓸린 건물 몇 채가 지면에 폭삭 주저앉고.
마법계 및 신관계 헌터들은 방어 마법으로 충격파를 상쇄하는 게 고작이었다.
8성의 괴물.
속성으로 만들어서 내구력이 약했지만.
유진이 일깨운 본 드래곤으로써의 전투력은 그 흉명에 어울렸다.
"...이게 무슨."
10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사룡이 데려온 부하 중 1/3이 증발해버렸다.
저게 7성이라고?
오판이었다.
인간사냥꾼과 아라한 길드와의 전쟁에서 보여준 신위.
망자 군대의 수준을 가늠해서 본 드래곤의 능력이 7성이라고 계산했건만.
'벽'을 넘은 헌터 수십을 10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휩쓸어버리는 건 7성의 극에 도달한 자신도 불가능했다.
'8성을 쓰러트릴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구룡방의 기둥인 일룡을 상대한다고 가정하면.
자신과 수하 전원이 달려들어도 쓰러트릴 수 없다.
그렇지만.
'아니. 저 괴물은 일룡 수준이 아니다.'
본능적인 감이었다.
7성 끄트머리에 도달한 헌터.
손짓 한 번으로 고층 빌딩을 절단 낼 수 있는 강자의 감은 어느 객관적인 데이터보다도 뛰어났다.
사룡의 짐작대로.
본 드래곤은 8성이긴 해도 일룡이나 이룡, 혹은 애꾸눈에 비해선 능력치가 많이 모자랐다.
방어력 페널티는 물론이요.
그 막강한 스펙을 활용할 스킬도 많지 않고.
특성과의 연계도 부족했으며, 무엇보다 전투 감각이 떨어졌다.
공중전이라면 모를까.
두 다리를 땅에 딛고 있는 상황에서는 본신의 전투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었다.
'방금 전 폭발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저 괴물을 쓰러트리면 수습할 수 있다.'
아라한 길드 공격대와 비교해도 질적으로 떨어지지 않는 구룡방 본대.
수적으로도 훨씬 많으니, 숨만 붙어있으면 회복 포션이든 치료 주문이든 퍼부어서 살려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수단을 사용한 유진은 구룡방의 분노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괴물을 붙드는 동안 화력을 모두 퍼부어라. 그럼 반드시 이길 수 있다."
사룡의 침착한 지시에 구룡방 헌터들은 전의를 불태웠다.
[콰루루루루!!!]
영혼을 쥐어짜는 듯한 괴성.
사룡에게 잘못이 있었다면.
본 드래곤은 하나가 아니란 사실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먹잇감을 찾아 날아온 본 드래곤이 추가로 전장에 난입해서는 입을 크게 벌렸다.
목에 아른거리는 독기.
구룡방 본대를 붕괴시킨다는 초기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젠 살상력이 높은 독무를 뿌리려는 것이다.
"두 마리는 무리인데."
차르릉.
쥐고 있던 사슬이 아래로 축 처지면서 힘없는 소리를 토해냈다.
*
본 드래곤들이 페어를 이루어 구룡방 본대 여기저기를 찌르고 있을 때.
후위에 있던 김재우도 거친 숨을 내뱉었다.
'죽을 것 같다.'
양팔이 후들후들 떨린다.
한쪽 눈, 아니 안광을 불태우고 있는 괴물이 히죽거렸다.
[쿠후훅. 더 없나?]
"애, 꾸눈."
첫 공방을 주고 받았을 때부터.
애꾸눈을 절대로 이기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자신의 오러 블레이드는 사시나무처럼 마구 흔들리는데, 놈의 암흑 강기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고고하게 형태를 유지했다.
사용자의 의지를 그대로 담아내는 오러 블레이드.
첫 수를 나누자마자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니 추가로 힘을 끌어내기조차 어려웠다.
그렇지만.
애꾸눈은 혼자였고, 김재우에게는 수하들이 있었다.
[아쿠아 블래스트]
[윈드 제일]
[라이트닝 웹]
공격 마법과 디버프 스킬 여럿이 쇄도한다.
애꾸눈의 마법 저항을 뚫어낼 순 없지만 발을 묶기에는 충분하리라.
'일단 버티면 폭발의 여파에서 회복한 다른 구룡들이 나를 도우러 올 것이다.'
김재우도 마찬가지 오판을 했다.
그에게 들이닥친 적이 가장 센 언데드일 것이며.
다른 구룡들이 상황을 수습하는 대로 지원을 올 것이라는 착각.
그렇지만.
김재우에게 드리운 위험은 다른 구룡과 본질적으로 달랐다.
두두두두-!
전차 수십 대가 몰려오는 듯한 소리와 함께 저 멀리서 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죽음의 돌진]
[신속]
용기병에서 불멸자로 전직한 최형태와 기병들.
더욱 매서워진 기세를 내뿜으며 초음속의 속도로 달려들더니 애꾸눈을 견제하던 김재우의 부하들을 먼지 터는 것처럼 큰 힘 들이지 않고 고깃조각으로 만들었다.
"어?"
천하의 김재우도 급격한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힘 빠진 소리를 내뱉었다.
광장 아래에 묻어놓은 시체들이 일제히 폭발할 때보다도.
불멸자들이 무리 지어 한 번 돌진했을 때 입은 피해가 훨씬 컸다.
[원시 마법]
[사룡의 비행]
하늘에서 쇄도하는 검은 광선.
불멸자 무리가 헤집고 지나가서 무너져버린 대열의 위로 순수한 파괴의 힘이 내리꽂혔다.
콰콰콰콰!
원시 마법으로 전신을 강화.
마법의 발현 지점도 훨씬 넓히고는 빙글빙글 회전해서 화력까지 집중시켰다.
발칸 기관총이 회전하면서 초당 수천 발의 탄환을 쏘듯.
진형이 붕괴된 헌터들은 빗발치는 광선 앞에서 모조리 가루가 되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다시 고도를 높인 파프너가 못마땅한 투로 중얼거렸다.
[이거야 원. 대화조차 성립이 안 되네.]
8성이라고 알려진 일룡이나 이룡이었으면 상황이 좀 달랐을까.
유진이 시킨 대로 후방을 빠르게 무너트린 후, 본대에 남아있는 이룡과 겨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건 말도 안 된다."
[뭐가?]
"그라운드 제로에서 전면전을 피했던 약자가, 단기간에 이만한 힘을 얻다니!"
[주인이 남다르긴 해.]
"인간사냥꾼 따위에게 고전하지 않았더냐! 어떻게 가능해! 이런 게!!"
누군가가 수십 년 동안 노력해서 쌓아올린 거대한 산물을.
유진은 고작 1년 만에 무너트렸다.
부조리라는 표현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지 않는가.
그라운드 제로에서 벗어날 때에도.
다음을 기약하며 좌절하지 않았던 김재우였다.
이 압도적인 부조리 앞에서는.
자신의 안위와 욕망을 위해 살아오던 남자조차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나도 그건 동감해.]
유진의 기적 같은 행보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대전사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근데 부조리하다고 우겨서 달라질 건 없잖아.]
"뭐?"
[비가 오면 처마에서 피해가는 것도 방법이지만, 너는 손으로 머리를 가리고 나아가기를 선택했어.]
그러면 어떻게 해.
젖어야지.
[쿠훅. 할 말은 끝났나?]
"제, 제길."
[애꾸눈아. 시체는 멀쩡하게 둬.]
[쿠훅. 최대한 노력하마.]
죽음은 탈출구가 아니다.
가끔 유진이 내뱉은 말을 떠올리며, 파프너가 입술을 씰룩였다.
*
대규모 폭발이 일어나고.
공중에서 기회를 엿보던 본 드래곤들이 난입하면서.
구룡방 본대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각 머리들은 자리를 지키며 수하들을 독려하고 전열을 가다듬었지만.
단 한 사람.
이룡만은 다르게 행동했다.
'첫 단추부터 잘못 꿰었어.'
전선을 넓게 퍼트리는 건 유진의 계획이 아니었다.
이미 압도적인 힘을 보유하고 있던 만큼.
구룡방 본대를 최대한 밀집시킨 다음 한 방을 먹이고.
남은 주요 전력을 빠르게 투입해서 몰살시키는 것.
여기서 승리하려면.
무너져버린 구룡방 본대를 수습하는 게 아니라, 일룡에게 힘을 더해 언데드 군대의 머리를 치는 것이었다.
"저희만 빠져나와도 됩니까?"
"이미 틀렸다."
소수의 정예 인원만 대동한 채 시가지를 빠르게 돌파.
항구 쪽으로 가던 이룡은 접전 중인 일룡을 발견했다.
"일룡, 지금...."
그렇지만.
이룡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더 말을 잇지 못했다.
232화 넌 날 이길 수 없다
8성.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초월이라는 위대한 영역에 발을 디뎠다는 경지다.
완전히 인간을 탈피한다, 까지는 아니어도.
단독으로 세계의 규칙을 비틀어버리는 전능함을 일부나마 손에 넣는다는 것이다.
그 지고한 경지에 도달한 이후로.
이렇게까지 고전한 적이 있던가.
일룡은 숨을 가다듬었다.
[불편하군.]
이신우는 태평하게 중얼거렸다.
생전에 일룡과 마찬가지로 8성에 도달했던 강자.
데스 나이트로 되살리면서 성위가 하락했지만, 그 신위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방해됩니다.]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일룡은 무의식적으로 이신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발칙하게도 쌍검을 다루는 용아병.
송명석의 경지는 7성이지만, 실제로 공방을 주고 받아보면 온전하게 성위를 이룩하지는 못했다.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은 느낌.
'모자란 능력을 압도적인 출력으로 커버하고 있다.'
용아병으로 재탄생한 송명석은 그 힘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강점도 확실하게 깨우쳤다.
파프너에 미치진 못해도 어마어마한 영력 총량과 회복력.
검으로 이길 수 없으면 영력을 있는 대로 끌어올려서 적을 분쇄한다!
송명석의 판단은 옳았다.
"그런 방식에 익숙해지면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갈 수 없을 텐데."
[여유가 넘치는군요. 적에게 그런 충고를 하다니.]
[네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명색이 제 예전 길드장이라면 더 분발하십시오.]
실력은 모자라지만 압도적인 출력으로 극복하는 송명석.
원 기량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전직 8성의 능력을 십분 활용하는 이신우만 해도 상대하기 까다로운 난적이다.
이기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전력으로 부딪치면.
둘의 합동공격도 몇 합안에 무너트릴 자신이 있다.
[파멸의 쌍부 - 내장 스킬 : 체인 아티팩트를 사용합니다.]
처음부터 한 쌍으로 만들어진 도끼의 아래부분에서 사슬이 돋아나더니 서로 연결되었다.
한쪽 손잡이를 잡은 일룡이 사슬을 빙글빙글 돌리며 나머지 도끼를 회전시켰다.
전장에 들이닥친 강풍.
차릉- 사슬이 맞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일룡의 손을 떠난 도끼가 허공에 기다란 궤적을 그렸다.
도끼날이 향하는 방향 끝에 서 있는 건 송명석.
검에서 솟구친 여러 갈래의 암흑 강기가 도끼날을 휘감으려 했다.
[조금 더 위를 노려라.]
[위?]
의아한 기색을 비추면서도 송명석은 지시대로 암흑 강기 다발을 위로 올렸다.
거의 동시에.
맞은편에서 쌍을 이루는 도끼를 쥔 일룡은 손에 힘을 주어 사슬을 가볍게 흔들었다.
파르르 떨면서 궤적이 흐트러졌고.
그 과정에서 위력은 줄어들었지만 원래의 궤적에서 벗어나 크게 각도를 틀어 이신우의 옆구리로 쏘아졌다.
카가가각!
사슬을 긁어내는 암흑 강기만 아니었다면.
노출되어 있는 이신우의 빈틈을 파고들거나, 아니어도 피해를 입힐 수 있었을 터.
암흑 강기의 여파로 궤적이 틀어진 도끼가 근처에 있는 고층 빌딩을 할퀴고 지나갔다.
쿠르르릉, 콘크리트와 강철로 된 뼈대가 두부처럼 으깨지고.
도끼에 실린 힘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항구 뒤에 자리 잡은 야산 일부에도 기다란 고랑을 남겨놓았다.
스친 공격만으로 지형을 바꾸어버리는 능력.
일룡의 공세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정면.]
[나도 보고 있습니다.]
쿠아아앙!
도끼 두 자루에서 솟구친 푸른 광채가 한순간 시야를 빼앗는다.
일룡이 출력을 끌어올린 것만으로 한순간 눈이 멀 정도의 빛이 나온 것.
날을 맞대고 있는 두 언데드는 빛이 얼마나 세든, 이미 '물리학적인' 눈은 사라졌으니 부실 일도 없었다.
그 대신.
한순간이라도 암흑 강기 출력을 낮추면 온몸이 뭉개질 것 같은 압박감을 감당해야 했다.
힘과 힘의 대결.
두 번째 벽을 넘어선 7성의 강자 둘이 최대 출력으로 힘을 짜냈음에도.
일룡 하나를 감당하지는 못했다.
조금씩 뒤로 밀려나는 송명석과 이신우.
변칙이나 기교가 아닌, 단순한 힘겨루기에서는 둘이 힘을 합쳐도 일룡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 순간.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날아든 투사체가 일룡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채앵! 회전 중인 사슬을 옆으로 흘려내며 뼈 포탄을 막아낸 일룡.
대신에 정면으로 쏟아 붓던 힘이 옆으로 새는 탓에 송명석과 이신우를 짓누르던 압박도 적어졌다.
'여기서 승부를 내야 한다.'
다시 한번 힘을 집중하는 일룡.
8성이 되면 오러 블레이드를 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공격에 '의념'을 실어낼 수 있다.
그가 새긴 의념은 상대를 짓눌러버리는 것이다.
압도적인 힘으로.
베고 으깨며 분쇄하겠다는 의념.
단순한 오러 블레이드나 암흑 강기로는 의념의 힘에 대항할 수 없다.
오러 블레이드를 상대할 수 있는 게 오러 블레이드이듯.
의념의 힘에 맞서려면 어마어마한 출력 차이로 커버하거나 의념을 부여해야 한다.
두 언데드는 쓸 수 없는 수단이었다.
푸른 빛무리에 조금씩 삼켜지는 검은 파동.
이신우가 전직 8성이었다지만, 그 경지에 머무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반면 일룡은 여덟 번째 성위에 오른 지 수 년이나 된 헌터.
강제로 성위 하락까지 겪은 데다, 숙련도 면에서도 차이가 났으니 송명석이라는 파트너가 더해져도 이길 수 없었다.
번쩍!
저 빌어먹을 섬광이 끼어들지만 않았다면.
구스타프 전차를 뜯어서 개조한 사이클롭스.
이제는 철판으로 전신을 감싼 데다 머리에 기다란 포구까지 달아놔서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한 괴물은 먼 거리에서 연신 광선을 쏘아 보냈다.
뼈 포탄은 브루탈의 각질을 가공, 부 포탑에 달린 포신에서 발사한 것이다.
거기까지는 버틸 만했다.
6성 몬스터까지는 일격에 치명상을 입을 정도로 위력적이지만.
고강한 일룡의 능력을 뚫어내고 위협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저 빔포는 달랐다.
원거리 전 특화로 개발한 대형 언데드 사이클롭스.
마도공학으로 추가 개조를 한 포 일부를 유진이 간섭해서 마력 회로를 뜯어고친 결과.
포탄을 쏘는 것보다는 사거리가 확 줄어들었지만.
원래 사이클롭스의 공격 거리보다 훨씬 긴 거리까지 공격해도 광선이 자연분해되지 않았다.
위력이 상승한 것은 덤.
마치 오러 블레이드를 응축시킨 것 같은 광선의 파괴력은 일룡도 경시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도끼 하나를 거두어서 광선을 흘려보내니, 지면에 긴 고랑이 새겨졌다.
번쩍! 번쩍!
연속으로 쇄도하는 광선 다발에 일룡도 공세를 이어갈 수 없었다.
'이 자들을 돌파해서 파고들 순 없다.'
추려서 대동한 부하들도 발이 묶인 건 마찬가지.
중급 이상 언데드들은 제 몸을 헌신짝처럼 버리며 전선을 유지했다.
초조하지는 않았다.
구룡방 본대는 단단했다.
적의 원거리 화력이 생각 이상으로 대단하지만.
노림수가 시간을 버는 것이라면.
'잘못 판단한 것이다.'
일룡은 차분하게 도끼를 쥐었다.
그 순간.
"일룡!"
들리면 안 되는 음성이 그의 뒤에서 아른거렸고.
몸을 돌이키니, 산발 된 이룡이 소수의 부하들을 이끌고 항구 근처까지 와 있었다.
왜.
어째서.
구룡방 본대의 총 지휘를 맡아야 할 그가 이 자리에 있는 걸까.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기 무섭게.
모골이 송연해지는 영력의 파장이 전장 일대를 휘감았다.
[지박의 제물]
[피의 낙인]
[본 컨트롤]
[강화 회로]
[골렘 제작]
[융합기 - 지박거인 제작]
구구구구궁!
인간사냥꾼들의 사기를 꺾어버린 이형의 괴물.
마치 추가 지원이 합류하기를 기다렸다는 듯, 지박거인이 다시 한번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고.
막 최전선에 도달한 이룡의 눈가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
전고 30미터.
개성에서 만들었던 지박거인보다 2배 이상 불어난 덩치다.
'역시 성위가 올라가니 제 위력이 나온단 말이야.'
유진은 전신을 타고 흐르는 전능감에 젖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5성 수준의 마법사가 지박거인을 만들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십분 양보해서 어찌어찌 만든다 해도.
그 막대한 에너지를 손발처럼 다루고 제어하는 건 별개의 일이다.
당시 유진은 회귀 전에 부렸던 [지박거인]보다 수준을 낮추어서 제작을 했다.
조정을 하지 않았으면 지박거인의 막대한 출력을 조정하다가 뇌가 터져버리던지 마력 폭주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이보다도 더 힘을 키울 수 있단 말이로구나.〕
'7성이 되면 제 위력을 낼 수 있어. 50미터까지는 가능할걸.'
〔차라리 그대가 전선에 나서는 편이 나아보이는 것이 짐의 착각인게냐?〕
'이걸 사용하면 마법을 못 쓰잖아.'
네크로맨서는 군단의 지휘관이다.
어느 지휘관이 앞장서서 적을 무찌르겠는가.
장수가 할 일이지, 장군이 할 일은 아니지.
뿌려놓은 안배 대부분을 소모했으니, 이제 직접 나서는 것뿐이다.
'아직 익숙하지는 않지만 말이야.'
회귀 전에는 오러를 다룰 줄 몰랐기에, 오직 신체적인 힘만 사용했다.
지박거인의 용도는 어디까지나 비장의 한 수.
유진의 몸을 보호할 수단이 없을 때만 사용하는 방어적인 마법이다.
회귀하고나서는 조금 달라졌다.
[내가 이 녀석을 다루는 게 좀 익숙하지 않아도 양해해주길 바란다.]
쿵! 쿵!
고층 빌딩에 준하는 덩치의 거인이 발을 내딛는다.
발바닥에 아른거리는 우윳빛 기운.
영력에 기반을 둔 오러가 맹렬한 기세와 함께 구룡방 헌터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최전선에 있던 일룡은 왼손에 든 도끼를 있는 힘껏 투척했다.
고층 빌딩도 어렵지 않게 쪼개버리는 오러 블레이드가 시시각각 지면을 향해 다가가는 지박거인의 발을 베어냈다.
살점과 피, 그리고 흙더미로 만들어진 피부가 잘려나가고.
마력 회로로 강화시킨 데다, 영력을 머금어서 단단해진 뼈도 파괴의 힘 앞에서는 버티지 못했다.
[기공파]
뜻밖의 변수에 한 발 늦게 정신을 차린 이룡도 곧바로 합류했다.
두 손에 응축시킨 오러 블레이드를 충돌.
일거에 방출해서 지박거인의 발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8성은 역시 다른가.]
쿵, 뒷걸음질 친 지박거인이 살짝 휘청거린다.
발목까지 날아가 버려서 중심 감각이 달라진 탓이었다.
유진은 파프너의 단련을 떠올리며 흔들리는 중심을 빠르게 잡아냈다.
꾸물꾸물.
으깨진 뼈가 시간을 역행하듯 다시 지박거인의 발에 달라붙고.
살, 피, 그리고 흙더미가 치덕치덕 붙어서 피해를 순식간에 회복시켰다.
[송명석의 암흑 강기까지는 그냥 뭉개버릴 수 있었는데. 다르긴 달라.]
유진의 사념에서는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웨이하이 시에 넘쳐나는 한.
몬스터 웨이브 때 벗어나지 못하고 스러져간 이들의 원념이.
지박령으로 붙들려버린 이들의 한이 지박거인에게 끊임없는 힘을 부여했다.
오러 블레이드?
닿는 것을 모조리 분쇄하고 파괴하는 순수한 힘의 정수마저도.
지박거인을 소멸시킬 순 없다.
힘의 근원을 없애든지, 아니면 재생하기 전에 압도적인 화력을 퍼부어서 핵이 된 유진을 제거하지 않는 한.
지박거인은 쓰러지지 않는다.
'신관계가 좀 있었으면 상황이 많이 달랐겠지만.'
지박거인의 천적은 성력을 사용하는 신관계.
모든 언데드들의 천적이기도 하나.
지박거인한테는 특히 상성에서 어마어마하게 앞섰다.
근데 범죄자들 중 신관계가 얼마나 있겠는가.
접경지역을 덮쳤던 나찰 길드가 처했던 불합리함이.
구룡방 본대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걸 위해 시간을 번 건가."
[상상력이 빈약하네. 난 애초에 시간을 끌 생각도 없었어.]
"뭣이?"
[내 목표는 하나. 구룡을 한 자리에서 제거하는 거다.]
다시는 재생하지 못하도록 말이야.
그 말을 덧붙인 유진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233화 어쨌든 자진입대인 듯
지박거인의 무력은 8성급.
마법을 봉인 당한다는 단점과.
육탄전에 소질이 없는 네크로맨서한테는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수준의 스펙이란 단점이 존재하지만.
회귀 후의 유진에게는 큰 페널티가 되지 못했다.
쿵!
쿵!
지박거인이 발을 뗄 떼마다 지축이 크게 흔들린다.
손 뼈 일부가 분리되더니 기다란 낫의 형태로 변화되었고.
낫을 든 거인은 땅을 훑으면서 구룡방 헌터들의 목숨을 가볍게 수확했다.
비명은 없었다.
압도적인 힘의 파도를 마주한 헌터들은 변변한 저항 한번 못하고 휩쓸려갔다.
〔크하하하핫!〕
'왜 그렇게 웃으세요.'
〔작은 인간을 쓸어버리는 것이 예전의 짐을 보는 것 같구나.〕
'표현이 좀 그렇다?'
〔티타노마키아 말이니라. 못돼먹은 아들에게 붙은 작은 인간들을 토벌할 때가 떠오르니 어찌 흥이 나지 않을꼬!〕
'그건 성좌 나리가 잘못했지.'
〔천륜을 저버린 아들 편을 드는 게냐?〕
'먼저 자식들을 먹어버린 건 당신이거든요.'
천륜을 언급하면 불리한 건 성좌 나리라고.
유진이 핵심을 찌르자 크로노스가 잠시 헛기침을 했다.
네크로폴리스를 발전시키는 와중에.
틈틈이 파프너한테 단련을 받았다.
-주인은 오러 응용력은 대단해. 몸을 움직이는 센스도 있고. 근데 경험이 압도적으로 부족하단 말이야.
파프너의 해답은 간단했다.
죽기 직전까지 맞다 보면 답이 나올 거라나.
'씨부럴. 한 번은 진짜로 죽는 줄 알았지.'
안타깝게도.
파프너의 시선은 틀리지 않았다.
몇 번이고 죽기 전까지 몰리다보니 손과 발의 움직임도 보다 자연스러워졌다.
회귀 전에도 근접전 경험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으니.
성위가 낮을 땐 언데드 무리를 돌파해서 온 적들한테 맞서 싸우면서 원치 않게 근접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봐. 역시 굴리니까 되잖아.
정말로 되니까 할 말이 없었다.
그 결과.
유진은 지박거인의 힘을 100% 발휘할 수 있었다.
[기탄]
비눗방울처럼 흩뿌려진 마력의 구가 일제히 퍼퍼퍼펑- 터졌다.
구룡방 정예를 헤집던 낫이 폭발에 휘말려서 증발.
1/3 정도가 가루가 되어버렸다.
"덩치가 크면 노릴 곳도 많아진다는 거다. 천유진!"
[이 때를 기다렸어.]
[역천의 가호를 사용합니다.]
유, 무형을 가리지 않고 모든 에너지를 흡수하여.
마음대로 재구축할 수 있는 능력.
오러 블레이드보다는 마법 상대에 더 효과적이지만.
그렇다 한들, 무투계 헌터에게 못 쓸 정도냐 하면 아니었다.
유진은 크로노스가 내려준 가호를 비장의 수단으로 즐겨 썼고, 인간사냥꾼이나 아라한 길드와 대결을 펼칠 때에도 결정적인 때에 최고의 효과를 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지박거인의 진가는 바로 어마어마한 맷집이다.
막강한 스펙.
이 땅에 깃든 원념이 있는 한 쉽게 쓰러지지 않고 재생능력도 뛰어나다.
내구성은 물론이요.
단순히 뼈만 뭉쳐놨다면 방금 전 이룡이 퍼트린 오러 충격파에 전신이 터져 나갔을 것이다.
그 충격을 모두 역천의 가호로 거두었고.
순식간에 재생시킨 뼈 낫에 오러 블레이드로 일으킨 충격파를 집중시켰다.
[선물을 받았으니, 이쪽도 하나는 줘야겠지?]
날 끝에 응축된 충격파가 한 번에 해방.
순간 지이이잉- 이라는 커다란 이명이 퍼지며 전장의 소음을 모조리 삼켜버렸다.
이명을 뒤따르는 균열 소리.
저적거리는 음과 함께 기탄이 빚어낸 충격파가 일제히 퍼져 나가면서 닿는 모든 것을 가루로 만들었다.
"내 능력을 되돌렸다고?"
까득.
이룡의 눈동자 위로 분노의 빛이 아른거렸다.
고작 마법사 따위가.
무투계 헌터의 의념을 실어낸 공격을 받아낸 건 둘째 쳐도.
되돌리는 퍼포먼스를 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드레이안 파괴술]
[5장 - 기뢰]
이룡의 손에서 발현된 오러 블레이드가 기탄을 일으킬 때처럼 둥글게 뭉치더니 1미터 크기로 커졌다.
그 안에서 오러 블레이드의 파편이 수천 조각으로 쪼개지더니 맹렬하게 회전하며 파괴력을 증폭시켰다.
기로 만든 번개.
손바닥을 펼치자, 회전을 거듭하며 폭발적으로 기세를 불린 오러 블레이드가 충격파와 부딪쳤다.
세계가 비틀린다.
[역천]으로 재구축된 기탄의 오러 블레이드는 본래의 성질에서 음차원의 에너지, 곧 영력의 개념까지 더해지며 규칙을 비틀고 반전시키는 힘이 생겼다.
이룡이 기탄을 펼치면서 실어낸 폭(爆)이라는 의념을 비틀어 부순 것을 삼켜버리는 개념으로 변질.
지박거인의 영력까지 불어넣어서 흡수했던 기탄보다 훨씬 강해진 충격파를 발산했다.
이룡이 쏘아낸 기뢰도 만만치 않았다.
본신 마력 대부분을 소모해야 펼칠 수 있는 비기.
거듭해서 마력을 회전, 번개처럼 파괴적인 힘을 내는 무투계 스킬에 의념을 더해 충격파에 맞섰다.
"휘말리지 마!"
"가까이 가면 죽어!"
얼마 남지 않은 구룡방 헌터들이 지박거인과 이룡의 충돌 지점에서 멀어졌다.
콰지지직!
충격파에 튕겨난 기뢰 한 줄기가 등 돌려 도망치고 있던 구룡방 헌터의 정수리에 꽂혔다.
비명은 없었다.
정수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 절명해버린 헌터.
6성의 강자였지만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튕겨나간 공세를 맞아 허무하게 숨을 거두었다.
"흐아아아아압!!!"
이룡은 기합을 터트렸다.
기합 자체에는 어떤 의미도 없다.
하지만.
의념으로 세계에 간섭할 수 있는 8성의 헌터에게는 효과가 있었다.
기합을 터트리는 행위에서 정신을 고양시키고.
방출시킨 오러 블레이드의 파괴력도 덩달아 늘어난다.
웨아하이 시의 중심부.
항구를 낀 도시를 일거에 가루로 만들 수도 있는 막대한 에너지의 파장이 상쇄되면서 기세가 사그라졌다.
"큭."
[이게 되네.]
굴욕감으로 물든 이룡의 표정.
반면 유진의 사념에서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흡수한 기탄을 재구축하며 지박거인의 힘까지 더해 증폭시켰다.
그런데도.
이룡이 펼친 비장의 수단을 밀어내지 못하고 서로의 공격이 완벽하게 상쇄되었다.
기탄보다 훨씬 고등한 기예를 펼쳐서 가능한 일이겠지.
유진은 8성의 헌터가 최대까지 끌어올린 힘과 정면으로 충돌해서 밀리지 않은 것에 감탄했지만.
그 대상이 된 이룡은 마법계 헌터한테 오러 블레이드에서 밀렸다는 사실에 자괴감마저 들었다.
"허억. 헉."
분노와 함께 몰려드는 피로감.
마력 대부분을 회전시키고 일거에 방출했다.
아티팩트와 본신의 능력으로 소모한 마력을 충당하고 있지만.
직후의 피로까지는 어찌 할 수 없었다.
[애꾸눈. 지금이다.]
[호플리테스를 사용합니다.]
하늘에서 수직 낙하하는 시커먼 형체.
전장 뒤에서 분탕을 치던 애꾸눈이 지척으로 소환되었다.
〔지박거인을 탑승하면 주문을 사용할 수 없지 않느냐!〕
'그건 마법이지.'
신성 주문은 메커니즘이 다르다.
[백야]로 스탯을 바꾸면 지박거인도 잠깐 동안 조종할 수 없지만.
마력 대부분을 소진해서 헉헉대는 이룡이 그 빈틈을 노릴 수 있을 리 없었다.
[쿠후훅.]
이룡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애꾸눈.
꽉 말아 쥔 손에서 피어난 암흑 강기가 쇄도했다.
*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이룡.
애꾸눈이 전개한 암흑 강기를 막아내려 급히 기폭을 시도했지만.
넓게 퍼진 기의 막을 찢어발긴 암흑 강기가 이룡의 허리를 동강내버렸다.
두 눈을 부릅뜬 채로 쓰러진 이룡.
불신감과 허망함, 그리고 분노가 뒤섞인 눈동자는 원망을 떨쳐내지 못했다.
"허허."
일룡은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믿기지가 않았다.
구룡방을 처음 세울 때부터 함께했던 파트너.
두 번째로 여덟 번째 성위에 도달한 뒤로는 좀처럼 맞설 상대를 찾지 못했던 동료가.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채로 땅바닥에 누워 있는 모습은 몇 번을 봐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착각했군. 넌 처음부터 전면전을 원했다."
[맞아.]
"구룡방과 맞서 싸울 만한 힘을 모으다니. 각성 2년차 헌터가 말이야."
[내가 보다시피 재주가 많거든.]
"타인에게 부조리함을 느낀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일룡은 모든 것을 내려놓았는지, 투기가 팍 꺼진 힘없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창 우페이. 그 자를 처음 봤을 때가 떠오르는군."
[무왕과 나를 비교하는 건가? 영광이네.]
"그 무왕조차도 각성하고 2년도 안 되는 시간 만에 8성이 되지는 못했다."
[오해하지는 마. 난 7성의 벽도 넘지 못했다.]
"8성과 정면으로 맞설 힘을 가졌으니. 구태여 성위만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나."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지박거인은 커다란 덩치로 팔짱을 꼈다.
[싸우다 말고 잡담이라도 나누자는 건가?]
"이미 승부는 정해졌다. 구룡방이 웨이하이에 진격한 시점에서 우리의 패배가 확정되었던 것 같군."
유진은 부정하지 않았다.
회귀 전과 비교했을 때, 구룡방의 전력은 훨씬 약했다.
당시에는 8성만 넷이었고.
새 구룡이 된 송명석은 두 자루의 검으로 언데드 군대를 압도할 만큼의 실력을 지녔었다.
육룡인 선후가 개발한 무한기동 시리즈는 어쩌고?
유진이 그 구조를 파악해서 언데드 강화에 써먹을 정도로 강력한 병기다.
무한기동 시리즈는 꼭 헌터가 운용하지 않아도 되었다.
숙련된 병사만 있으면 몬스터에 맞설 수 있는 힘이 생기는 셈.
언데드 군대도 특기인 소모전을 발휘할 수 없어서 무한기동 시리즈 앞에서는 고전을 면하지 못했다.
'그때를 생각해서 준비했으니. 과하긴 했지.'
본 드래곤들이 없었더라면.
정면승부는 위험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대륙으로 넘어오기 전에 급히 만든 본 드래곤들이 합류하면서 패배할 수 없는 전력차이가 만들어졌다.
"거래를 하지 않겠나?"
[보통 거래라는 건 대등한 입장끼리 하는 거지.]
"구룡방은 날 죽인다고 해서 끝나지 않는다."
[다른 머리들도 다 모였잖아.]
"중국의 어둠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작지 않아."
빛이 강해질수록.
그림자의 색도 짙어진다.
10억이 넘는 인구가 있는 나라의 어둠은 얼마나 짙을까.
"구룡방이 사라지면 본국의 음지에 커다란 혼란이 찾아올 것이다."
[내가 걱정할 필요는 없는 부분이야.]
"블랙 컴퍼니의 이름으로 중국의 음지를 먹어치우려고 하지 않았나?"
[아. 그거야 덤이지. 당신네들이랑은 어차피 싸워야 했으니까.]
"...."
구룡방의 영역을 덤 취급하다니.
일룡은 지박거인 안에 있는 유진의 정신구조가 궁금해졌다.
"너를 일룡으로 추대하고 구룡방의 영역 상당 부분을 넘겨주겠다."
[어떻게 믿지?]
"계약서를 쓰든 제약을 걸든. 어느 방법이든 상관없다. 신전에서 약조를 받아도 된다."
[꽤 적극적이네.]
"현실적이라고 말해주지 않겠나."
일룡의 제안은 일견 타당하게 느껴졌다.
구룡방의 간부 중 하나로 임명해서 기존의 영역 일부를 넘겨준다?
또한.
일룡에게 제약을 걸면 구룡방 운영에서 주도권까지 얻는 것이다.
합리적인 인물이라면.
그의 제안을 거절할 리 없었다.
[이야기는 잘 들었지만, 거절하지.]
"...어째서?"
[넌 못 믿거든.]
아무렴.
회귀 전에도 일룡의 끈질김에 휘말려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저 제안대로 구룡방을 통째로 꿀꺽 하면 좋겠지만.
어떻게든 계약의 빈틈을 만들어서 회피, 뒤통수 칠 생각을 품을 게 분명했다.
"구룡방이 사라지면 큰 혼란이 찾아올 것이다. 내가 도와주면...."
[걱정 마. 대신해줄 사람은 있어.]
시조 급 흡혈귀의 능력을 얻은 마담.
진혈의 일족들이 밤의 세계에 풀리면 구룡방의 영역을 상당부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빌어먹을."
[언데드 군대에 입대한 것을 환영한다.]
제 발로 걸어들어왔으니.
자진입대 아닐까?
아님 말고.
234화 약속은 지켰다
죽음의 도시가 된 웨이하이.
구룡방에 속해 있는 자들은 한 명도.
웨이하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때 붉은 거미라는 단체를 이끌었던 수장이자.
그라운드 제로에서 밀려난 뒤로는 권토중래를 꿈꾸며 구룡방에 의탁했고.
이방인이면서도 구룡 중 하나까지 성장한 인물.
김재우도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이런 곳에서 죽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살아온 게 아니란 말이다!"
한 섞인 그의 외침은 본 드래곤의 독기에 삼켜져서 바깥으로 퍼져 나가지 못했다.
7성의 강력한 육체는 독기를 뒤집어 쓰고도 버틸 수 있는 힘을 주었지만.
말 그대로 형체를 유지할 만큼 '버티는' 것만 가능했다.
독이 몸에 스며들면서 피부와 장기가 썩고, 피가 탁해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끼면서.
김재우는 죽어버린 검은 피를 온 몸의 구멍에서 다 게워낸 후에 쓰러졌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볼품없는 최후였다.
다른 구룡들도 처지는 마찬가지였다.
본 월과 부정 충격방패, 그리고 시체 폭발까지.
연이은 강령술과 신성 주문의 맹공으로 본대의 전열은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구룡들은 각자가 데려온 수하들을 챙기기에 급급했다.
힘을 합쳐도 대적하기 어려운 망자들의 공세.
뿔뿔이 흩어졌으니 결과는 뻔했다.
"제길! 뒤져라!"
"날 만지지 마!"
병장기끼리 충돌하는 소리와 폭발음은 구룡방 헌터들의 비명을 집어삼켰다.
앞장서서 돌출되었던 일룡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불의의 기습으로 허무하게 죽은 이룡.
힘의 균형이 무너진 후, 일룡도 금세 그 뒤를 따라갔다.
모든 힘을 소진한 채, 도끼들을 아래에 내려놓은 일룡이 허탈한 눈으로 위를 올려다 보았다.
"무왕! 여기 있는 것 알고 있소!"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
선두도 제압을 당한 건 마찬가지여서, 그 흔한 잡음 하나 나지 않았다.
그 덕에 목소리에 오러를 싣지 않았는데도 널리 퍼져 나갔다.
메마른 일룡의 외침이 버려진 건물들 사이로 메아리 쳤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우릴 버리고 외세를 받아들이려는 게요!"
지박거인의 몸 안에 콕 박힌 유진은 팔짱을 낀 채 일룡을 내려다 보았다.
무수한 푸른 귀화가 노려보는 상황에서.
일룡은 마지막 힘을 짜내어 소리쳤다.
"한국인에게 조국의 영역을 넘기려 하다니. 당신은 매국노요!"
"넘긴다고 하지 않았다."
무복을 입은 사내가 붕괴된 건물 위에 삐죽 솟아있는 철근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일룡의 눈동자 위로 불꽃이 튀었다.
"무왕!"
"그래. 난 여기에 있다."
"어째서 지켜보기만 하는 거요!"
"내가 구룡방의 편을 들어서 싸워야 하는 이유라도 있나?"
"매국노 같은 말을 하는구려."
"글쎄. 감당하지 못할 적을 불러들여놓고 뒤처리를 맡기는 행위가 애국이라면 그 말이 옳겠지."
무왕 창 우페이의 눈동자 위로 멸시의 감정이 아른거렸다.
"궤변이오!"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네 잣대로 본인을 판단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야기를 듣던 유진이 피식, 하고 조소를 흘렸다.
중국의 암흑가를 지배하는 단체의 수장이 애국심 타령이라니.
"구룡방이 사라지면 천무문도 꽤 귀찮아질 거요."
"본인을 겁박하려는 건가?"
"어디까지나 사실을 말하는 것뿐. 나 따위가 어찌 무왕을 핍박할 수 있겠소."
"구룡방은 그 주둥이로 세웠나보군."
"정말... 지켜만 볼 것이오?"
"그렇다."
일룡은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할 말은 끝났나?]
"어차피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런 것치고는 꽤나 구구절절하던데.]
"일말의 가능성을 놓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럼 잘 가라.]
푸욱!
송명석의 검이 일룡의 심장을 꿰뚫었다.
일룡의 최후를 마지막까지 지켜본 창 우페이가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약속은 지켰다."
[무왕께서 중립을 지켜준 덕에 이쪽도 전력으로 나설 수 있었습니다.]
"신묘한 기예를 사용하더군."
[직접 본 소감은 어떠신지?]
"자네의 발언. 아무 근거 없이 내뱉은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기대해도 좋을 겁니다. 이 친구들을 키워서 무왕과 겨룰 정도의 실력자로 만들 테니.]
"부디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군."
무왕은 건물 잔해를 밟고 크게 도약했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신형.
10초 만에 육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거리가 벌어져버렸다.
'하여간 대단해.'
문득 파프너가 떠올랐다.
회귀 전에도 언데드의 한계를 넘어 9성에 도달한 진짜베기 강자.
조금만 기다려보쇼.
당신 목이 섬뜩해질 정도의 실력자를 데려갈 테니.
*
초토화 된 웨이하이 시.
송명석은 중급 언데드들을 대동하고 멀쩡한 시체들을 수습했다.
푸드득-.
전장에 날아든 박쥐 한 마리가 유진의 옆에 앉았다.
"왔나."
"호호호. 승리를 축하드려요."
"당연한 일 가지고 축하는."
"솔직하지 못하긴. 그냥 사람이 축하하면 고맙다고 끄덕이시면 된답니다."
"워딩 센 거 보소."
유진이 투덜거렸지만 마담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계획대로 시행하면 되나요?"
"어. 접수해."
"말처럼 쉽진 않답니다. 준비하느라 한숨도 잠을 못 잔 걸요."
"원 계획이 휴지조각으로 변하는 것보단 낫잖아."
"당연하죠."
블랙 컴퍼니 본대가 웨이하이 시에서 대놓고 어그로를 끄는 동안.
마담은 중국 각지에 수하를 심어두었다.
"사랑과 진실, 어둠을 뿌리고 다니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원."
"...뭔가 이상한 것들이 있는데?"
"봐요. 야근해서 피부 엄청 상했잖아요."
"하얗기만 하고만."
뱀파이어가 피부 상하는 소리를 하시네.
"피라도 줄까?"
"그건 좀 매력적인 제안이네요."
"농담이었는데."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렇지 않답니다."
"음. 참아줄래."
마담의 신체 능력은 7성 수준.
전력으로 달려들면 말릴 방법이 없다.
애꾸눈 부르긴 폼이 안 살잖아.
'근데 마담의 태도가 조금 달라진 것 같단 말이야.'
유진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배교자의 심장]으로 시술을 한 뒤에, 좀 더 내적 친밀감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도통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마담이 최근 들어서 달라졌다.
딱 뭐라고 할 순 없는데.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대를 흠모한다고 조언하지 않았느냐.〕
'지랄하지 마십쇼. 성좌 나리.'
우린 비즈니스 파트너 그 이상이 아니라니까.
크로노스의 헛소리를 무시하고 있을 때.
미스터 블랙이 불쑥 나타났다.
"마담. 언제 온 건가?"
"어머나. 미스터 블랙. 아직 안 돌아갔어요?"
"해야 할 일이 산적해서."
"호호호. 중국 쪽 루트 확보, 열심히 해봐요."
"꼭 약 올리는 것 같군요."
"어머. 티가 났어요?"
"조금... 바뀌었어. 사람이."
미스터 블랙도 같은 감상을 내놓았다.
'봐.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거 아니잖아.'
〔사랑의 멋짐을 모르는 그대가 가련하구나.〕
'응. 그래서 자식들 먹었죠?'
요즘 들어 자주 크로노스의 흑역사를 꺼내게 되는 것 같다.
본론도 못 찾을 이야기는 하지 마시죠.
"마담. 중국 암흑가의 분위기는 어떻지?"
"아직은 별 움직임이 없어요. 구룡방이 전멸했다는 소식이 퍼져 나가진 않아서."
"곧 알려지겠지."
"바로 각축전이 시작되지는 않을 거랍니다. 껍데기만 남았어도 구룡방은 구룡방이니까요."
"흑상에서는 어떻게 나설 것 같나?"
"새 루트를 확보하려면 돈을 풀겠지요."
"이쪽도 풀어아겠군."
두 사람은 중국이라는 커다란 시장을 어떻게 파고들지 의논하기 시작했다.
유진도 할 일은 많았다.
최우선으로 해결해야 할 일은 전후처리.
일반적인 군대처럼 사상자 후송이나 소모된 병기를 정리하는 일이 아니다.
전장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종류별로 구분.
어떤 망자로 되살릴지 분류하는 작업을 일컬었다.
"잘 날라라."
일룡과 이룡의 시체는 [불경스러운 묘지]에 안치해두었다.
이신우는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 데스 나이트로 되살려서 성위가 감소했지만.
두 사람은 급히 언데드로 만들 필요가 없으니 묵혀둘 것이다.
〔호오. 여유가 넘치는구나.〕
'구룡방을 밀어버렸잖아.'
천무문 외에는 단독으로 블랙 컴퍼니를 막을 만한 단체나 조직이 없다.
괜히 본 드래곤을 급히 만들어서 결전에 임했겠는가.
7성에 오른 뒤에 데스 나이트의 강화판인 둠 나이트로 일으켜도 충분했다.
〔여태까지는 잘도 개조해놓고.〕
'쉽게 갑시다. 개조도 쉬운 일이 아니야.'
혼백과 죽은 육신의 밸런스를 맞추어서 강화하는 게 뚝딱 되는 건 줄 아나.
유진처럼 강령술을 극한까지 익힌 네크로맨서라 가능한 거지.
또한.
개조는 언데드의 등급이 올라갈수록 손이 훨씬 많이 갔다.
구룡방 헌터들 중 실력자들은 모두 데스 나이트가 되었고.
마법계는 다크 미니언의 상위 개념인 블랙 메이지들로 제작했다.
블랙 메이지의 수준은 6.5성 정도.
리치보다 마력과 사용 가능한 주문의 폭 등, 여러 부분에서 떨어졌다.
〔왜 이들을 모두 리치로 만들지 않고 하위 개념으로 제작한 게냐.〕
'리치는 이미 죽은 녀석으로 만들 수 없다니깐.'
조승철을 리치로 개조하는 것도 얼마나 번거로웠는데.
더불어, 리치는 주인에게 종속되어 있지 않은 별개의 객체로서 존재한다.
선후처럼 특출 난 능력이 있어서 협상(?)을 하지 않는 한.
리치로 꾸역꾸역 만들 필요는 없었다.
"마담. 이 녀석들을 써먹어라."
"어머나. 험하게 다루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팔 다리 날아가도 괜찮아."
"하긴. 언데드들이니 상관은 없겠네요."
"소멸해도 된다. 이 정도는 잃어도 괜찮으니."
데스 나이트만 수십 구.
두 번째 벽을 넘어선 강자들이 바글바글해졌다.
어지간한 군벌쯤은 손짓 한 번에 쓸어버릴 수 있는 전력.
하지만.
중국의 암흑가는 너무나도 방대했고, 온갖 권모술수가 판치는 곳이다.
구룡방이라는 울타리가 없어졌으니 당분간은 혼란한 상황에서 벗어나지를 못할 터.
"적당히 굴릴게요. 7성급 전력은 그래도 아깝잖아요."
"나도 말만 그렇게 한 거다."
"허세부리신 거예요?"
"그렇다 치자고."
데스 나이트는 강력한 전력이다.
그렇지만 은밀하게 기동하는 것과는 180도 정도 차이가 있다.
중국 암흑가의 주도권을 놓고 싸우기에 적합하지는 않다는 말이지.
강력한 전력이니 어디에든 써먹을 수 있겠지만.
[나도 보내줘.]
잠자코 있던 메이 샤오가 불쑥 사념을 내뱉었다.
"구룡방을 잇겠다는 건가?"
[잇기는. 구룡이 모두 죽었으니 거기도 끝이야.]
"그럼 왜 보내달란 거지."
[이왕이면 내가 먹고 싶어서.]
메이 샤오는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유진의 목을 바쳐 구룡 중 하나가 되려고 했었던 생전 목표.
그걸 이루지 못하게 되었으니.
차라리 구룡방의 껍데기를 먹어치우고 새로운 조직을 꾸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대신 내 지분. 인정해줘.]
"괜찮겠나. 마담?"
"좋아요. 메이라는 분 덕에 만주에서 꽤 편했답니다."
"그럼 비율은 알아서 조정하도록."
메이 샤오의 안광이 한층 짙어졌다.
"참. 가기 전에 작업 하나만 하자."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나?]
"너. 약하잖아. 맞고 다니면 곤란하니 개조 좀 해주마."
5성급 무력을 지닌 데스 레인저를 한량 취급하다니.
그 모습을 보던 마담이 풉, 하고 짧게 웃었다.
235화 스노우볼
스노우볼이라는 말이 있다.
눈덩이가 구르면서 더 커진다는 의미.
유진은 그 단어를 매우 좋아했다.
'네크로맨서랑 잘 맞는 단어잖아.'
투쟁을 거듭할수록 세가 줄기는커녕 더욱 강해지는 언데드 군대.
인간사냥꾼을 쓰러트린 후에는 대규모 버프 토템인 좀비 스케어클로가 전력에 추가되었고.
아라한 길드를 무너트린 후에는 이신우를 포함한 상위 언데드들을 다수 제작했다.
짐승 군벌과의 싸움에서는 토벌전과 추격에 특화된 비스트보그 다수와 죽음의 요새를 획득.
마침내 구룡방의 뿌리를 털어내며 데스 나이트만 수십 구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중급 언데드가 전력에 추가되었다.
'감개무량하네.'
회귀 직후에는 중급 언데드 하나 겨우 만들어서 뼈가 닳을 때까지 굴렸는데 말이야.
송명석을 개조하기 전까지는 파프너 원툴이었지 뭐.
아. 블러드 골렘도 있었군.
전력이 모자란 것을 온갖 꼼수와 변칙으로 채워서 꾸역꾸역 언데드 군대를 굴렸다.
회귀 후 고작 1년이 조금 넘어간 시점에서.
상급 언데드의 상징인 데스 나이트 수십 구를 손짓 한 번으로 부릴 만큼 전력을 키워내다니.
'역시 회귀는 최고야.'
아.
달달해서 이가 녹아버릴 것 같다.
조금 녹으면 어때.
틀니를 하더라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단 맛이다.
-그만큼 대적의 관심도 빨리 끌게 되지 않았느냐.
'마법왕은 이쪽 신경 쓸 틈이 없어요.'
로마노프 가문은 유럽의 패권을 놓고 카리만리스 가문과 분쟁을 벌이는 중이다.
둘 다 7대 명가이니 전면전으로 비화되진 않지만.
물밑에서는 이권을 두고 치열하게 겨루고 있을 터.
〔카리만리스. 찬탈자가 후원해주는 가문이지 않느냐.〕
'맞아. 제우스를 수호성으로 모시고 있어.'
〔한데 마법왕이 그대의 영역을 침략했을 땐 카리만리스 가문의 조력이 있었다고 하였거늘.〕
'그때쯤에는 이미 반쯤 종속되었거든.'
올림포스와 아스가르드 성단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두 성단의 신왕이 굽어살피는 7대 명가의 우열을 말하는 것이다.
'걱정하지 마. 내 목표를 달성하려면 카리만리스 가문도 제쳐야 한다.'
〔짐은 관대하다. 그런 사소한 부분은 마음에 담아두지 않느니라.〕
물어보는 거 보니 아니던데요.
관대는 무슨.
그런 의미에서.
[컥. 크헉.]
유진이 바쁜 가운데에도 시간을 쪼개 개조를 해주었으니.
메이 샤오는 매우 기뻐해야 할 것이다.
"괜찮나?"
[분쇄기에 던져져서 온몸이 조각조각 나는 기분이었어.]
"말하는 걸 보니 정신은 있군."
[염병. 겁나게 아팠다고.]
"그래야 정상이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면 혼백이 영락했다는 의미거든."
메이 샤오의 외형은 전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데스 레인저로 되살렸을 때도 외형을 크게 손대지 않았었으니.
창백한 피부색과 푸른 귀화를 빼면 산 사람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만한 외모였다.
[데스 레인저(메이 샤오) 개조를 마쳤습니다.]
[데스 레인저 → 데스 헌터]
죽음의 사냥꾼.
궁술 특화 쪽 상급 언데드는 회귀 전, 후를 통틀어서 거의 만들지 않았다.
아니지.
못했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겠어.
'엘프의 시체가 있어야 제작이 가능하니까.'
게이트에서 엘프가 나오는 경우는 굉장히 적었다.
끽해야 다크 엘프 정도인데.
그마저도 흔하지가 않아서 시체를 구하기 어려웠다.
막상 어렵게 구해서 제작해도 노하우가 부족해서일까, 아니면 장비가 모자라서인지 모르겠지만 고생한 만큼의 성과가 나오지 않아 금방 포기했다.
지금은 달랐다.
'메이 샤오의 능력을 극대화하면 전장에서 큰 도움이 된다.'
초장거리 저격.
이번에 구스타프 전차를 뜯어서 대형 언데드들을 개조한 덕에 압도적인 사거리란 표현은 쓰기 어렵지만.
대형 언데드는 적에게 포착되기 쉬운 반면, 메이 샤오의 저격은 은밀 기동이 가능했다.
'구룡방 덕에 개조에 필요한 재료를 공수했어.'
[데스 에어리어] 제어를 위해 심어놓은 혼철.
일부는 회수해서 메이 샤오의 뼈에 임플란트를 해서 영력 전도율을 올렸다.
그 외에도 필요한 촉매나 재료를 아낌없이 부어서 무난하게 개조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
'이 녀석. 판단력도 괜찮으니까.'
중국 암흑가를 집어삼키는데 큰 도움이 될 터.
만리타향에서 고생할 마담에게 주는 선물인 셈이다.
[남을 물건 취급하지 마라.]
메이 샤오의 투덜거림은 가볍게 넘겼다.
그러면.
스노우볼 더 굴리러 가보자고.
*
산둥반도의 끝자락.
웨이하이 시에서 구룡방의 주력 인원들이 증발해버리고 2달이 훌쩍 지나갔다.
[주인님께 이 땅을 바쳐라.]
두두두-!
용기병을 개조해서 만든 강화 언데드, 불멸자들이 백두산 인근을 누볐다.
백두산 주변은 강력한 괴물들이 바글거리는 땅.
김씨 왕조가 무너진 뒤로 여러 군벌들이 들어섰지만, 백두산 인근만큼은 누구도 접근하려 하지 않았던 금역이었다.
언데드 군대는 그 상식을 마구 짓밟았다.
"크라라락!"
[발악을 멈춰라.]
푸아아악!
오우거 같은 5성 급 괴물들이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하고 불멸자들의 돌진에 휩쓸려 피를 땅바닥에 흩뿌렸다.
한 마리만 풀려도 마을 하나는 금방 초토화시킬 수 있는 괴물들이지만.
강화된 언데드 군대에는 대적하지 못했다.
[여기. 시체를 쌓아라.]
조승철은 언데드들을 부려 검은 방첨탑을 비롯하여 네크로폴리스의 구조물 건설에 들어갔다.
개성 - 평양 - 신의주에 이르는 영역.
침식이 덜 되어 거주구역으로 활용할 수 있는 땅은 정부에 넘겨주고.
남은 부분들은 모두 네크로폴리스를 건설했다.
10개 단위로 연결된 검은 방첨탑들은 언데드 강화 버프를 제공해줘서 운영 부담을 한결 줄여주었다.
[죽음의 전당]
[거인의 묘지]
[희생의 제단]
그 외에도 무수한 건물들이 이북 땅 곳곳에 지어지고.
영맥을 따라 흐르는 영력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여기에는 본 야드를 지으면 되겠어."
백두산 천지 바로 아래에 있는 커다란 분지.
드레이크가 생성되는 지역이 이 근방이니, 재생성되는 대로 죽여서 본 드래곤으로 만들면 되겠다.
회귀 전에는 천무문의 눈치를 살피느라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지만.
창 우페이의 본질을 알고 있고, 또한 협상까지 마친 지금에는 거리낄 게 없었다.
유진은 내친 김에 시베리아 인근을 총괄하는 세력, 극동 공화국과도 직접 교섭을 진행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서부 쪽은 내가 관리해드리죠."
"뭘 원하는 거요?"
"용의 계곡을 이용하게 해주시죠."
"흠, 그건 본국의 의견을 들어봐야 하는 부분이라."
"싫으면 접으십쇼. 난 손해 볼 것 없으니."
"허 참. 젊은 사람이 성미가 급하긴."
극동 공화국 관료는 불쑥 찾아온 유진의 요구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옛 북한 땅에 자리 잡은 군벌들을 1년도 안 되어 모조리 토벌했고.
전투를 거듭할수록 숫자가 늘어난 언데드 군대는 북쪽에 위치한 극동 공화국의 입장에서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한데.
폭풍의 주인공이 먼저 와서 손을 내밀 줄이야.
'나쁠 건 없는 제안입니다.'
'그런데 왜 마경으로 접근하려는지 모르겠군요.'
'로마노프 가문에서도 주시하는 인물이라고 합니다.'
'그 높으신 분들이 극동의 땅에 얼마나 관심을 가질지 모르겠지만, 천유진 이야기를 흘리면 불의의 사태에 대응할 수 있겠어.'
극동 공화국 관련자들은 빠르게 의견을 나누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제안."
"언데드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들어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타국의 군대가 자국 영토에 진주하는 상황.
대격변이 벌어지기 전이었으면 어느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을 제안이었지만.
틈만 나면 재생성된 몬스터들이 거주구역을 위협하는 극동 공화국에서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부하가 늘어나니 쓸 수 있는 수단도 많아졌어."
유진은 히죽 웃었다.
극동 공화국 쪽 몬스터들을 정리하는 건 송명석에게 맡겨두었다.
[개미새끼 하나 새나가지 않게 막겠습니다.]
"극동 공화국 쪽에는 네크로폴리스 못 세우니까 버프도 없어. 무리하진 마라."
[존명.]
생성되는 몬스터들이 강하다고?
오히려 좋아.
더 강한 언데드를 만들 수 있잖아.
이북 재개발.
두만강과 압록강에 걸쳐 있는 연변 같은 도시도 슬쩍 간을 보고.
블라디보스토크 인근까지 손을 뻗었으며, 용의 계곡도 합법적으로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중급 언데드까지는 강령술을 익힌 다크 미니언들을 부려서 제작했고.
생전에 강인했던 자들은 유진이 직접 나서서 상급 언데드로 만들어서 새로 획득한 영토 안정화에 투입했다.
네크로폴리스가 마구 확장되는 동안.
중국 암흑가도 대격변 직후를 떠올리게 하는 격변의 시기를 보냈다.
"구룡방은 망했어! 이제 더는 없어!"
"하지만 내 등에! 이 가슴에! 하나가 되어 살아간다!"
구룡방은 본디 여러 조직들의 연합체로 시작되었다.
일룡의 수완과 강인한 능력 덕에 하나로 묶여졌고, 아홉 머리라는 체계가 갖추어지면서 하나로 뭉쳐진 것 뿐.
주력 헌터들이 몰살당했단 사실이 알려지자 구룡방에 고개를 숙였던 암흑가 조직들이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내가 새로운 용이다!"
"건방진. 넌 장유유서도 모르나! 흑룡문이 이 곳에 뿌리를 내린 지 10년도 넘었는데!"
"흑룡이 아니라 지렁이겠지."
천무문은 왜 구룡방의 존재를 묵인해주었을까.
구룡방이라는 커다란 울타리 안에서 적당히 욕심 부리며 살았던 승냥이들이 모두 풀려나버리니 중국 각지가 시끄러워졌다.
마담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새로운 권속을 계속 늘려나갔다.
"이제부터 당신도 은하수 펍의 일원이랍니다."
"예. 마담. 충성을 맹세합니다."
구두에 묻은 피를 핥는 사내.
미스터 블랙은 한숨을 푹 쉬었다.
"취향이 그쪽이었나?"
"어머.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를. 본인이 원해서 그러는 거잖아요."
마담도 살짝 억울했다.
휘하 뱀파이어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지닌 건 사실이지만.
구두를 핥는 건 끓어오르는 충심을 이기지 못한 혈족의 마음이지, 그녀가 시킨 게 아니었다.
"이 근방에 자리 잡은 흑상은 어떻게 되었나요?"
"도망쳤다."
"괜찮으세요?"
"필요한 건 손에 넣었어."
흑상의 거래처와 밀수 루트, 거래 품목 등.
미처 파기하지 못한 주요 서류들은 모두 접수했다.
"은하수 펍에서 도와주면 밀수 루트는 바로 복구가 가능하다."
"좋은 소식이네요. 일 부분은 이 친구들이랑 상의하세요."
"또 이동하려는 건가?"
"중국은 넓고 가야 할 곳은 많으니까요."
만주에서 권속으로 삼은 진혈의 일족은 모두 10마리.
더 만들자니, 그녀의 힘과 정기를 소모해야 해서 포기했다.
진혈의 일족은 이 순간에도 중국 각지로 흩어져서 기존의 조직을 접수하고 흡혈귀로 만드는 중이었다.
[이쪽도 모두 처리했다.]
"고마워요."
현지 조력자인 메이 샤오는 기억에 남은 자료들을 최대한 활용해서 구룡방 휘하 조직들을 소탕했다.
뱀파이어의 숫자를 무한정 늘릴 순 없으니.
구룡방은 이미 개선이 불가능할 정도로 사이가 틀어져버려서 회유보다 박살내기를 선택했다.
"이제 하북과 상하이까지는 장악했네요."
[홍콩까지는 접수해야 해.]
"천무문과 약조했다지만, 혼란이 길어지면 입장을 바꿀 수 있으니 서둘러야겠네요."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하듯.
마담은 권속들을 보채며 암흑가를 빠르게 장악했다.
236화 포교(1)
역천의 거인을 모시는 신전.
개장 직후에 소문을 냈을 때만 해도 수십 명이나 되는 헌터들이 방문했지만.
1주가 지나자 그 열기도 금세 꺼졌다.
"미안하군. 다른 신관계 헌터들의 반발이 심해서 우리 팀에 끼워줄 수 없을 것 같네."
"우리 길드에 들어오고 싶다고? 음. 역천의 거인을 숭배하는 신관은 좀 어려울 것 같군."
헌터 길드, 혹은 팀들은 역천의 거인에게 세례를 받은 신관들을 배척했다.
그들도 딱히 악감정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요즘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인물, 천유진이 모시는 성좌가 역천의 거인 아니던가.
막강한 언데드 군대를 부리고.
신성 주문으로 보조해주는 것도 기대할 수 있으니, 기회만 되면 받아보고 싶었다.
문제는 다른 신관들의 반발이었다.
신관으로 전직한 헌터들은 모시고 있는 성단에서 능력을 받는다.
역천의 거인을 모시는 신전.
정식 명칭 – [역천의 교단]이 출범한 직후, 여러 성단에서는 의견을 모았다.
-역천의 교단의 확장을 저지한다.
죽음을 거스르는 개념, 다시 말해 '영력'과 '언데드'를 주관하는 미지의 영역을 꽉 잡은 게 역천의 거인이다.
그 정체도.
기원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수상한 성좌가 불쑥 나타나서 이질적인 개념을 주관하고.
이제는 본격적으로 교세를 펼치려고까지 하니.
견제해야 한다.
적어도.
역천의 거인이 어떤 신화를 쌓아 왔으며.
힘의 기원은 어디인가.
심연에 잠겨 있는 성좌의 본질을 이해하기까지는.
더 성장하지 못하게 직, 간접적으로 견제해야 한다.
그래서 성단 휘하 신관들에게 [역천의 교단] 출신을 견제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우린 어떻게 사냥하라고."
"호플리테스 데리고 혼자라도 사냥할 거다."
"제길. 신관계가 무슨 솔로잉이야."
배척받은 역천의 교단 출신 신관들은 이를 악물고 게이트에 들어갔다.
믿는 것도 하나 있었으니.
호플리테스.
유진과 크로노스가 머리를 맞대어 제작한 신성 주문은 아무리 약한 시체라도 능력치를 강화시켜주었다.
+1성 보정.
시체 한 구만 어찌어찌 구하면.
다음부터는 신성 주문으로 보조해주기만 해도 충분히 게이트를 공략할 수 있었다.
"소환과 역소환도 되잖아."
"한 마리만 어떻게든 구하면 돼."
역천의 교단 소속 신관들은 정보를 공유하며 호플리테스 활용법을 연구했다.
추가 무장으로 능력치를 강화해주고.
더 뛰어난 시체가 생기면 기존의 호플리테스한테 불어넣은 성력을 회수, 다시 제작해서 전력을 강화했다.
"언데드가 왜 몬스터랑 싸우지?"
"호플리테스다."
"그게 뭔데?"
"천유진이 성자로 활동 중인 교단에서 준 신성 주문이래."
"저 언데드. 너무 세지 않나."
"나도 소문으로만 들은 건데. 성력으로 강화해서 일반적인 언데드랑 다른가 봐."
역천의 교단의 활약상은 낮은 성위의 헌터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역천의 교단에 들어가면 천유진처럼 강해질 수 있다더라.
-사역하는 언데드의 전투력이 성위를 넘어선다더라.
-신관계 헌터면서 성기사처럼 혼자 사냥이 가능하더라.
.....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소문이 퍼져 나가면서 역천의 교단의 평가가 역으로 크게 상승했다.
물론.
소문이 날개 돋친 듯 퍼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마담의 배려 덕분이었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라는 말이 있듯이.
실제로도 역천의 교단에 투신한 신관들의 활약상이 대단한 덕에 소문을 빠르게 퍼트릴 수 있었다.
유진이 구룡방 본대를 격파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가 그 시점이었다.
'다들 알아서 잘 하고 있네?'
〔그런 것치고는 쌓인 신성이 얼마 되지 않느니라.〕
'성단들이 한 마음으로 견제할 줄은 몰랐으니까. 어쩔 수 없지.'
교세를 확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신도의 숫자를 늘려야 한다.
'명성은 올라갔지만 디메리트도 그만큼 있으니, 쉽게 입교를 생각하진 못할 거야.'
이야.
신관계 헌터들에게 일제히 계시를 내릴 줄이야.
정말이지.
만신전의 성단이 이렇게 목소리를 하나로 합친 적이 있었던가.
'아. 하나 있구나.'
〔무엇이더냐?〕
'나를 후원하지 말라고.'
지구에서 여덟 번째 왕의 칭호를 받고, 초월의 영역에 도달했음에도.
만신전에서는 총의를 모아 유진에게 후원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땐 네크로맨서를 멸시한다고만 여겼는데.
'죽음을 거스르는 개념에 손을 대지 못해서, 혹은 엮이지 않으려고 그랬던 걸까.'
어찌 되었든.
지금은 상관없는 일이다.
〔하면 교단은 무슨 수로 성장시키려느냐?〕
'다 방법이 있어.'
확장한 네크로폴리스도 안정화를 어느 정도 해두었다.
몬스터들이 계속해서 재생성되니, 100% 안전하다고는 못하겠지만.
검은 방첨탑을 중심으로 세운 네크로폴리스 거점들은 모두 방어 병력과 수비 포탑을 설치해놓았고.
혼철 일부는 몬스터들이 많이 생성되는 지역에 두어 [데스 에어리어]를 상시 발동하게 조치를 취했다.
'거기서 만들어진 언데드들은 검은 방첨탑 네트워크에 들어와서 상비군이 된다.'
뭐?
언데드가 복사가 된다고?
시기적절하게 얻은 혼철 덕에 언데드 군대는 나날이 숫자가 늘어났다.
인근 대지와 결합한 후, 공기와 땅에 분포되어 있는 마력을 흡수해서 몬스터를 빚어내는 게이트 핵.
한 번 침식된 지역에서는 괴물이 주기적으로 튀어나오는 탓에 사람들이 거주하기엔 마땅치 않았다.
네크로폴리스 운영에서는 그게 오히려 호재였다.
이북 곳곳에 혼철을 박아두고
[데스 에어리어]를 사용하니 언데드가 자연적으로 불어났다.
'2달 만에 100만까지 불어났네.'
대부분은 하급 언데드.
중급도 만 단위이지만 유진이 직접 만든 언데드에 비해서는 전투력이 확연히 떨어졌다.
-언데드는 동일 성위의 몬스터나 헌터보다 전투력이 떨어진다.
...라는 상식이 이제야 들어맞는 셈.
갖가지 변칙으로 언데드의 질을 향상시킨 유진이 기형적이었다.
〔회귀 전에는 언데드 군대로 무엇을 획책하였느냐?〕
'아무것도 안 했어.'
〔허어. 짐에게 또 비밀을 만드려는 게냐.〕
'진짜야. 네크로폴리스 확장은 최소한으로만 했고, 그나마도 연구를 위해서였지.'
앞으로 5년 뒤.
땅과 하나 된 게이트 핵을 추출하는 방법이 개발되면서 침식지대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된다.
마법계 헌터 다수와 여러 촉매가 필요해서 마구잡이로 핵을 없애진 못했지만.
진정한 의미로의 국토 회복은 그때부터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가 어엿한 네크로맨서로 활동할 때 즈음에는 핵 제거 방법이 상용화되었다.'
〔무분별하게 영토를 늘릴 수 없었단 말이로구나.〕
'그렇지.'
개성에 자리 잡은 네크로폴리스.
한 구 한 구 정성을 들여 제작하거나 개조해서 수준이 높았지만.
전체 숫자는 100만도 안 됐다.
'따지고 보면 회귀 전보다 더 많은 병력을 부리는 셈이야.'
참.
회귀 전에는 멍청하게 살았네.
적당히 배려한다는 명목으로 타인에게 많은 것을 양보했다.
로마노프 가문이 총력전을 펼쳤을 땐 큰 도움도 되지 않았는데.
'미스터 블랙에게 혼철을 더 구해달라고 해야겠어.'
〔네크로폴리스가 수용 가능한 숫자에도 한계가 있지 않느뇨.〕
'더 촘촘하게 발전시키면 돼.'
네크로폴리스의 랭크는 발전도에 따라 결정된다.
지금까지는 필요한 구조물 위주로 먼저 짓다 보니 들쑥날쑥했지만.
위협이 되는 요소들을 모두 제거했으니, 이제부터는 차근차근 발전시키면 된다.
〔그럼 언제 짐의 위광을 세상에 떨칠 수 있겠느냐.〕
'내정은 조승철에게 맡겨둘 거다.'
조승철은 과거 유진이 짐작했던 대로, 화염 마법보다 네크로맨시에 더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인물이었다.
이북 곳곳에 그물망처럼 퍼진 네크로폴리스를 관리할 최적의 인물.
구룡방 본대를 쓸어버리면서 얻은 블랙 메이지들도 있으니 자신의 빈자리가 그렇게까지 티 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시작해보자고.'
*
개성으로 돌아온 뒤, 곧바로 성천 그룹과 대한제약에 연락해서 미팅을 잡았다.
"무탈하니 다행이네."
"제 소식은 마담을 통해 늘 전달해드렸지 않습니까."
"껄껄. 이야기야 늘 듣고 있지만, 직접 보는 건 다르지 않나."
진성현 회장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따님은 괜찮습니까?"
"이제 재활도 모두 끝나서 일상을 되찾았네. 다 자네 덕이지."
"별 말씀을."
"그러고 보니 목내이병 치료 기기가 날개 돋힌 듯이 팔린단 소식을 말해주지 않았구먼."
성자 시리즈 중 하나.
순수한 생명력을 주입해서 목내이병을 치료해주는 아이템이다.
유진은 진성현 회장의 딸을 치유해준 후, 설계 사상을 읊어주어 성천 그룹에서 목내이병 치료 기계를 생산하게 하고 로열티를 받아냈다.
"목내이병 환자가 그렇게 많았나요?"
"아니. 순수하게 휴식 목적으로 많이 쓴다네."
아.
그런 식으로도 쓸 수 있겠네.
생명력을 충만하게 채워둔 공간에서 머무르면 피로감도 모두 사라지고 피부도 탱탱해진다.
한 번 작동 금액이 어마어마할 건데.
돈이 있으면 뭐든 못하겠어.
"성자님 덕에 저희도 덕을 꽤 봤어요."
"음. 새로운 성자 시리즈가 안 나와서 섭섭하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요."
"성자의 눈물과 정신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양산형 중급 포션과 마법계 헌터의 정신 보정 및 무브 캐스팅을 가능하게 해주는 버프용 환약.
대한제약에서 판매를 맡은 덕에 주가까지 많이 올랐다나.
정순임 회장은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다음 상품은 천천히 준비해도 됩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다행이군요."
다음 성자 시리즈를 내놓기에는 버거웠는데 다행이다.
유진은 네크로폴리스와 교단의 확장을 1순위로 움직이고 있으며.
신준석도 연금술 공방에서 도제를 육성하고 골렘의 성능을 끌어올리느라 새 의약품을 개발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둘을 왜 보자고 한 건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블랙 컴퍼니 대표의 부탁이라면 당연히 들어줘야지."
"은혜를 갚을 때가 이제야 왔네요."
두 사람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성자 시리즈.
개성공단을 포함한 이북 개발 권한.
그 외에도 유진의 뒷배가 되어준 덕에 받은 것이 어마어마했다.
너무나도 많이 받다 보니 소화가 안 되어서 협력사에게 나누어줘야 할 정도.
유진이 직접 도움을 요청하니 빚진 것을 갚을 수 있어서 기쁜 마음마저 들었다.
"아시겠지만 전 역천의 거인을 모시는 성자입니다."
"교단 관련 이야기군요."
"네. 제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교단에 견제가 꽤 들어온 모양이더라고요."
"흐으음. 각 성단들이 계시를 내렸다곤 들었다네."
"뭐, 기존의 신관계 헌터들을 이쪽으로 끌어들이는 건 생각도 안 합니다."
섣부르게 개종을 하면 교단끼리 전면전으로 비화될 수도 있다.
대격변 직후에는 각 성단에서 후원해주는 교단끼리 꽤 충돌이 잦았기도 했으니.
"새로 각성한 신관계 헌터들을 끌어들이는 수밖에 없겠구먼."
"예. 그래서 말인데요. 이걸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유진은 미리 구상해놓은 계획을 두 사람에게 이야기했다.
237화 포교(2)
크로노스의 신격은 강대하다.
비록.
왕위를 강제로 계승당해서 모든 업을 강탈당한 채 영락했지만.
한때 신왕의 위(位)에 앉아서 만물 위에 군림했던 만큼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그릇' 자체는 엄청나게 컸다.
유일한 계약자이자 배후성, 그리고 성자이기도 한 유진이 활약할 때마다 크로노스의 신격이 회복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계약자의 활약 덕에 짐에게는 꽤 많은 업과 영성이 쌓였느니라.〕
'요즘 말이 없어서 생각도 못하고 있었네.'
유진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신성 주문. 얼마나 만들 수 있겠어?'
〔호플리테스 같은 주문이라면 10개는 가능하니라.〕
'오. 자신만만한걸.'
〔그렇다면 묻자꾸나. 신도를 늘리기 위해서는 어떤 주문이 필요하겠느냐.〕
'영업용 주문.'
크로노스는 유진의 답을 이해하지 못했다.
영업?
그게 뭔가, 대체.
'이래서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성좌 나리는 안 돼.'
쯔쯧-.
혀를 찬 유진은 머릿속에 있던 구상을 천천히 읊어주었다.
〔정말... 그런 식이면 되겠느냐?〕
'아무렴. 믿어보라니까.'
〔흐으으음.〕
크로노스는 못 미더운 기색을 드러내면서도 유진이 말한 대로 신성 주문을 추가 제작했다.
*
[블랙 컴퍼니, 역천의 교단과 협력 관계를 맺기로 결정!]
[평양에 추가 신전 건설에 들어가는 역천의 교단.]
[역천의 교단, 본격적으로 신도 늘리기에 들어가....]
[지금이 아니면 다시 만날 수 없는 혜택! 신규 각성자들은 주목....]
대한제약과 성천 그룹은 유진과의 약속을 곧바로 이행했다.
성천 그룹은 개성 때와 마찬가지로 블랙 컴퍼니와 정식으로 계약.
유진이 되찾은 옛 한국의 고토, 평양에 [역천의 교단]의 신전을 짓겠노라고 대대적으로 알렸고.
그에 맞춰 역천의 교단에서 신규 신도를 모집한다며 홍보를 했다.
"웬 혜택?"
"아파트 청약 받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나. 아직 성단을 안 정했는데 이번에 가볼까?"
마담에게도 개성에 지은 신전 썰을 풀어달라고 했지만.
이번에는 개념이 아예 달랐다.
신문과 방송, 그 외에도 우리나라에서 손에 꼽히는 대기업 둘이 손을 잡고 나팔을 불었으니.
과거에는 헌터 업계에 종사 중인 이들만 관심을 가졌다면.
유진이 전력으로 '홍보'해달라고 한 후에는 정, 재계를 비롯하여 각성하지 않은 일반인들의 관심을 확 끌었다.
먼저 행동에 나선 것은 이미 역천의 교단에 투신한 초보 헌터들이었다.
"그 혜택. 우리도 해당되는 거겠지."
"없으면 때려친다."
"길드에도, 팀에도 못 들어가는데 뭐라도 주겠지."
입으로는 투덜대지만.
그들 중 진심으로 다른 교단에 투신할 생각을 품은 이들은 거의 없었다.
성단들의 연합으로 배척당한다 할지라도.
역천의 교단을 섬기면서 얻은 능력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성위 + 1 보정?
호플리테스만으로도 1인분 이상을 할 수 있으니.
벽을 넘지 못해도 어지간한 헌터들보다 강한 셈이다.
정통파에서 거리가 한참 떨어진 이단이지만.
신관계 헌터가 아닌, 무투계 헌터를 구하는 파티에서는 충분히 활약이 가능했다.
그렇지만.
이왕에 교단에서 홍보를 했으니, 자신들에게도 뭐 하나 정도는 떨어지지 않겠는가.
개성으로 돌아온 신관들은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새 주문을 보고 두 눈을 부릅떴다.
[집결된 희망]
분류 : 신성 주문
등급 : E ~ S
모든 능력치를 상승시켜줍니다. 사용자 휘하의 신도가 많으면 등급이 상승합니다. 최대 200%까지 늘려줍니다.
*휘하 신도 - 1/1,000
*신도로서 인정받는 방법은 교단의 증표를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휘하 신도를 최대치로 만든 신관이 100명이 되는 순간, 다른 신관들은 해당 주문을 소실합니다.
효과는 단순했다.
모든 스탯 증가.
발전형 스킬이며, 최대 상승률은 200%.
이 정도면 기적이나 이적 수준에 비하는 강력한 신성 주문이다.
등급도 최대 S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렇게나 강력한 주문을 아무나 익힐 수 있다고?
그렇지만.
[집결된 희망]이 최대로 발전하려면 전제조건이 필요했다.
신도 수 확보.
1천 명이라는 숫자를 채워야 S급 수준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그나마도 '교단의 증표'라는 것을 챙긴 사람에 한정했다.
"교단의 증표는 또 뭔데?"
신관 한 명은 눈이 벌게진 채 신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교단, 의 증표. 뼈, 깎는다.
-깎아낸 뼈. 신전에서, 축성. 받는다.
-그게. 교단의. 증표.
-하나. 만들면. 경험치. 아니면. 돈. 일부. 헌납한다.
신전에서 축성 받은 뼛조각이면 모두 '교단의 증표'로 인정되지만.
그걸 위해서는 경험치나 금전 등 소소한 기부를 해야 한다.
"소소하다고? 경험치 1%를 고르거나 100만 원을 쓰라는 건데 어떻게 소소해."
헌터 한 명이 투덜거리면서 뼛조각 하나를 축성했다.
[역천의 교단의 증표]
등급 : 매직
분류 : 잡화
죽음을 거스르는 개념을 주관하는 성좌의 증표입니다.
다른 신앙과 충돌되지 않고, 지니고 있으면 건강을 지켜줍니다.
크로노스의 신력으로 축성해서 부가 능력을 지닌 뼛조각이 은은한 성력을 흩뿌렸다.
"건강... 이라고?"
매직 등급 아이템치고는 너무나도 소소한 능력이다.
하지만.
방금 전 축성을 마친 신관은 뼛조각을 쥐더니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비각성자도 괜찮은 거잖아."
그러니까.
100만 원으로 건강 부적을 사는 셈인데.
다른 조건 없이, 이 아이템을 나누어주기만 해도 능력이 상승한다는 것이다.
단순하게 계산해보면 1억 원으로 S급 스킬을 구매한다는 뜻.
어느 성단에서 이런 파격적인 능력을 부여할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100명?"
"선착순이라는 말이잖아."
막강한 능력을 부여하는 것과 별개로.
해당 신성 주문을 S급까지 업그레이드 한 신관이 100명이 되는 순간.
나머지 신관들은 이 주문의 혜택을 더 볼 수 없게 되었다.
'이 인간들도 모두 내 경쟁자다.'
'증표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누어줄 사람도 구해야 해.'
'내 휴대폰에 있는 전화번호가 100개는 되던가?'
'당장 사람들부터 섭외하자!'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역천의 교단에 입교한 신관계 헌터는 아직 100명도 안 된다.
그렇지만.
[집결된 희망]이라는 말도 안 되는 주문이 공표되는 순간부터.
경쟁자는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게 될 것이다.
신관계 헌터들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10억이면 살 수 있는 S급 신성 주문?]
[역천의 교단. 교세 확장에 열을 올리다.]
[지니기만 해도 건강을 유지하게 해주는 아이템이 단돈 10만 원.]
신관계 헌터들만이 아닌, 일반인들도 관심이 가질 만한 기사가 우후죽순 쏟아졌다.
[누군가가 역천의 교단의 증표를 소유합니다.]
[신도가 늘어납니다.]
[중복 신앙으로 효과가 반감됩니다.]
....
신관계 헌터만이 아닌.
일반인이나 다른 헌터들도 증표를 입수하려고 애를 썼고.
역천의 교단에 신앙을 보내는 사람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왜... 이게 되는 게냐?〕
떨떠름한 투로 말하는 크로노스.
처음 유진이 [집결된 희망]이라는 주문의 청사진을 꺼냈을 때.
크로노스는 이런 전략이 통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신도란 무엇인가?
진심으로 신을 경외하고 따르는 이들이다.
고작 증표를 나누어준다고 해서 마음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거늘.
또, 신관계 헌터들이 돈이나 경험치를 헌납해서 영업에 나서는 것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크로노스의 판단은 오답이었다.
이 순간에도.
증표를 구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계속 나왔고.
미리 침을 발라놓았던 역천의 교단 출신 신관들은 경험치나 돈을 바쳐서 축성 받은 뼈를 사람들에게 뿌렸다.
갓 헌터로 각성한 신관계 헌터들도 개성에 와서 크로노스의 세례를 받았으니.
[역천의 교단 소속 신관이 200명을 돌파했습니다.]
[만신전에 해당 교단이 정식으로 등록됩니다.]
증표를 받은 신도가 5만을 돌파하고.
신관들도 빠르게 늘어났다.
'이대로 가면 10만도 금방 채우겠어.'
유진은 킬킬거렸다.
먼저 사면 이득인 상품.
자본주의와 결합된 교단은 이래서 무서운 것이다.
〔하나 출혈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느니라.〕
'주문 10개는 만들 수 있는 업을 이거 하나에 갈아 넣었으니까.'
E에서 S급까지 성장하는 신성 주문?
그런 걸 쉽게 만들 수 있었으면 다른 교단들도 모두 시도했을 것이다.
유진도 구태여 숫자 제한을 둘 이유가 없었을 것이고.
혹자는 만신전의 성좌들이 전지하며 전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별빛 위에 이름을 새긴 위대한 존재들도 무한한 힘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더 강한 힘을 가진 만큼 규칙에 얽매여있다고 해야겠지.
물론.
세계의 규칙과 섭리를 부수는 '이적'과 '기적'을 행할 만큼의 능력을 지녔지만.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전능과는 거리가 조금 있었다.
대격변 이전에 인류의 지혜가 빚어낸 최강의 병기로 핵병기가 꼽혔지만.
사소한 분쟁에서도 핵을 사용했다간 모두에게 상처만 남기 때문에 쉽게 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강한 힘에는 강한 책임이 따르는 법.
'아. 그 이상 말하면 왠지 쫄쫄이 옷을 입어야 할 것 같아.'
〔쫄쫄이?〕
'그런 게 있어.'
〔어쨌든 그대의 계획대로 손해를 감수하였다만. 가치가 있느냐?〕
'성좌 나리는 필멸자에 대한 관심이 너무 없어.'
이래서야 훌륭한 영업 직원이 되기는 틀렸군.
쯔쯧, 하고 혀를 차는 유진.
크로노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해.'
크로노스의 신성.
그 중 조각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티끌만을 부여했는데도 건강에 탁월한 증표가 생성되었다.
증표를 찍어내는 건 큰 손해가 아니다.
경험치가 되었든, 돈을 헌납하든.
신관이 '헌납'했다는 행위 자체가 크로노스의 격을 상승시켜주기에.
역천의 증표를 만들면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인 셈이다.
'어느 종교를 믿든, 증표는 챙길 만하다는 거다.'
〔그러면 무슨 소용이 있다고.〕
'건강해지고 싶다는 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일이야.'
개종?
거기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증표를 쥐고 건강을 빌기만 해도.
원래 믿고 있는 성단에게로 갈 신앙이 크로노스에게 일부 향할 것이다.
증표라는 매개체가 있고.
건강이라는 희망이 있으니.
10만 명은 시작에 불과하다.
실제로 효과를 본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역천의 교단으로 와서 증표를 얻어가려는 사람들도 늘어날 것이다.
'단순 계산으로 레어 아이템이 100만 원이면 엄청 싸기도 하고.'
마진 없는 장사.
그 대신.
물건을 구매한 사람들을 확보하는 것만으로도 이득이다.
스킬 강화를 위해 발품 파는 신관계 헌터들은 영업사원이요.
유진은 그들 위에 서서 배당금만 따박따박 타먹는 피라미드의 정점인 셈.
새 신성 주문, [집결된 희망]을 만든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S급까지 신성 주문을 강화한 신관계 헌터가 100명이 나왔고.
그 이상의 [역천의 증표]가 한국 전역에 뿌려졌다.
238화 7성(1)
개성, 평양, 그리고 신의주.
유진의 주문을 받은 성천 그룹은 탈환한 이북의 주요 도시들마다 역천의 신전을 건설했다.
〔크하하하하! 힘이 넘쳐나는구나!〕
'성좌씩이나 되면서 너무 경박하게 웃지 마쇼.'
〔그대가 할 말은 아니니라.〕
왜.
뭐요.
〔스스로를 돌아보려무나.〕
유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결집된 희망]이라는 영업용 주문 외에도 한 가지 신성 주문을 추가로 만들었다.
[팔랑크스]
분류 : 신성 주문
등급 : C ~ S
신성한 힘으로 망자를 일깨웁니다. 사용자의 숙련도와 시체의 수준에 따라 강함이 결정됩니다.
최대 10구까지 사역할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방진.
팔랑크스다.
〔보아라. 계약자여. 짐의 권능이 증대되었으니,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니라.〕
'정말 대~ 단하십니다.'
〔크하하하하. 더 찬양하도록 하여라.〕
비꼬는 것도 모르고 크로노스가 호탕하게 웃었다.
'대단하긴 하네.'
크로노스가 잘난 척하는 모습에 심통이 나긴 했지만.
그와 별개로 이번에 성좌 나리가 만든 신성 주문은 정말 대단했다.
[집결된 희망]과 마찬가지로 성장형 스킬.
영업(?)만 잘 하면 되는 집결된 희망과 달리, 성장 조건을 매우 까다롭게 설정한 탓에 영성을 많이 소모하지는 않았다.
'시체와 영력, 신성 주문 등 여러 가지에 대한 이해와 숙련도.'
딱 봐도 애매하게 느껴지지 않나?
그러니까.
오러처럼 매 순간마다 깨달음을 얻어야 등급이 올라간다는 의미다.
가능성은 열어두지만.
실제로 그 계단을 올라가서 S급까지 성취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
'어찌 되었든 호플리테스 말고도 추가 언데드 사역이 가능해졌다는 게 중요한 거다.'
팔랑크스와 호플리테스.
모두 고대 그리스 병종과 진형에서 따온 이름이다.
호플리테스는 한 기만 운용할 수 있는 대신 정예화 + 방어구 착용 시 능력 상승 효과가 있고.
팔랑크스는 최대 10마리까지 운영하며 진형을 짜면 능력치가 강화된다.
네크로맨시보다야 좀 모자란 느낌이지만.
성력에 취약하다는 단점도 없고.
언데드들이 제어에서 벗어나려고 꿈틀대지도 않으니 주문의 안정성도 올라갔다.
신성 주문에 의한 버프도 가능하니 얼마나 좋아?
'내가 쓸 일은 없겠지만.'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 때, 급히 시체를 되살릴 상황이 아니라면.
상급 강령술을 사용하는 게 훨씬 이득이리라.
〔야박하구나. 짐의 정성을 이리 무시하다니.〕
'현실적인 거지.'
크로노스의 타박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넘겼다.
*
개성 공략 이후 급격하게 확장된 네크로폴리스.
아래로는 파주 접경지대가 있고.
위로 올라가면 백두산을 거쳐 만주 일부까지 스멀스멀 잠식했다.
바다를 건너면 산둥반도 일부까지 장악했으니.
이쯤 되면 하나의 국가 소리를 들어도 될 만큼 영역을 확장한 셈이다.
그 중 대부분은 인간이 살기 어려운 침식지역.
한국과 이북을 분단하는 '접경지역'을 비롯하여 옛 북한 땅 상당수가 게이트 핵의 침식으로 인해 몬스터들이 튀어나오게 되었고.
산둥반도 웨이하이 시도 게이트 브레이크 때 초동 대처에 실패해서 중국 정부도 복원을 포기한 땅이 되었다.
몬스터들이 계속 생성된다는 건.
"쿠륵! 죽어라!"
-으어어어.
싸움도 끊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막 생성된 오크가 둔중한 도끼로 좀비의 어깨를 박살냈지만.
곁에 선 스켈레톤이 뼈칼로 복부를 사정없이 쑤셨다.
바닥에 튀는 초록색 피.
파주 북부의 이름 모를 산에서 벌어진 전투는 약과였다.
[드레이크가 나타났다.]
[원형을 훼손하지 않고 사냥해라.]
"크라라라?"
백두산 인근에는 진을 치고 드레이크를 사냥 중인 불멸자 무리가 있었고.
[주인께서 시체를 더 필요로 하신다.]
조승철은 이북 곳곳을 돌아다니며 꼼꼼하게 검은 방첨탑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싸움.
그리고 또 싸움.
네크로폴리스가 들어선 곳에서는 바람 잦는 날이 없었고.
유진에게 종속된 이들은 경험치 일부를 헌납했다.
본래는 경험치 중 60%가 전송되어야 하지만, 거리가 먼 탓에 상당 부분이 손실되었고.
매일, 매 순간 쓰러지는 괴물의 숫자에 비해 얻는 경험치가 적었다.
그럼에도.
너무 많았다.
네크로폴리스 링크에 묶어놓은 언데드들이 사냥하는 건 포함되지 않으니 아예 뺐지만.
유진이 직접 사역 중인 언데드들만 해도 수천이요.
그 중 대부분이 중급이고 일부는 데스 나이트 같은 상급 언데드였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뭐?
레벨이 복사가 된다고?
6성으로 오르면서 레벨 업에 필요한 경험치가 어마어마하게 늘었지만.
여러 지역에서 행해지는 사냥은 갑절로 늘어난 경험치 요구량을 빠르게 채워버렸다.
그 결과.
"형. 첫 눈이 내려요."
강민영이 하늘에 손을 뻗을 때 즈음.
[레벨이 올랐습니다.]
[현재 레벨은 50입니다.]
[한계를 넘어 새로운 경지로 나아갑니다.]
일곱 번째 별.
각성자들이 겪는 두 번째 커다란 벽을 넘어섰다.
*
헌터에게 있어 4성과 7성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4성 때는 오러와 다중 연산 능력을.
일곱 번째 별을 완성시키면 오러 블레이드 / 무영창이라는 능력을 얻기 때문이다.
[특성 - 무영창이 추가됩니다.]
[무영창]
등급 : A
분류 : 특성
사용자의 성위에서 2단계 이하 주문을 무영창 및 재배열 과정을 생략해서 전개할 수 있습니다.
이때 소모되는 마력이 20% 증가합니다.
마법사의 의지만으로 세계의 규칙에 간섭하는 특성.
추가 마력 소모가 있지만, 감수할 만한 페널티다.
무투계 헌터는 권능의 영역에 도달한 파괴의 힘을 얻지만.
마법계는 응용력이 높은 능력으로서 사용하기에 따라 무수한 변수를 만들 수 있다.
'사실 네크로맨서한테는 그렇게까지 의미가 크진 않아.'
〔왜 그러느냐?〕
'강령술은 애초에 대단위 주문이라, 무영창으로 쓰면 영력 감당이 안 돼.'
유진은 1성일 때에도 [언데드 레이즈]로 10구가 넘는 좀비를 일으켰다.
회귀 전 지식 덕에 마법의 이해도가 높았으며.
영력을 제어하는 능력도 초월의 영역에 도달했으니 쉽게 보이긴 했지만.
그 부분은 차치하더라도, 강령술은 시체 여럿을 대상으로 지정하기에 무영창과 궁합이 좋지는 않았다.
'다른 부분에서는 활용이 가능하지만 말이야.'
암흑이나 저주 분야 등.
[흑암의 반지]에 기록되어 있는 무수한 주문들을 써먹기 좋지.
〔그럼 반드시 무용하다곤 할 수 없겠구나.〕
'말했잖아. 네크로맨서한테는 별로 쓸모없다고.'
요즘 네크로맨서는 복수전공이 기본이란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흑암의 반지]에 깃들어 있는 마지막 지식 분야를 곧바로 전승했다.
[생명 분야의 지식을 전승합니다.]
[7성에 도달함으로써 흑암의 반지의 주인으로 완전히 인정받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슬롯 제한 없이 원하는 지식을 바로 획득할 수 있습니다.]
[강한 주문을 익히고 사용하려면 그만한 역량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늘 경계하고 조심하십시오.]
"됐어."
흑암의 반지에 담긴 지식은 7성이 끝이냐고?
그렇지는 않다.
본 드래곤 제작 방법이나 강화 등, 여러 비술을 다루려면 8성에 올라야 한다.
〔지금 부리는 하수인들은 그럼 무엇인 게냐?〕
'네크로폴리스의 보조를 받아서 만든 거잖아. 즉석 징발은 안 돼.'
8성에 도달하면.
손짓 한 번으로 용족 시체를 본 드래곤(1 - 3급)으로 만들 수 있다.
지금은 무리지.
"무슨 일 있으십니까. 형님?"
유진이 짧게 뇌까리자, 술을 마시던 강민호가 그를 바라보았다.
"아. 별거 아니야."
7성에 올랐다고 하면 이상한 눈으로 보겠지?
때로는 비밀을 가지는 게 원만한 친분관계 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하니.
당분간은 7성에 올랐다는 사실을 비밀로 해야겠다.
〔후일에 들어도 억울해 할 것 같다만?〕
'그렇게나 억울하면 자기들도 회귀를 하든가.'
회귀는 언제나 최고야.
짜릿해!
첫 눈이 내리는 날.
블랙 컴퍼니 간부진들은 바쁜 일정 가운데에도 한 자리에 모였다.
"임재백 이사. 중국 쪽 물량이 소화가 어려운데 컴퍼니 본사에서 도움을 줄 수 있습니까?"
"어느 정도로 지원을 해드려야 할지요."
"그러니까...."
업무 이야기에 몰두하고 있는 미스터 블랙과 임재백.
모임의 취지는 얼굴도 보고 한 해 동안 쌓인 피로를 털어내는 건데.
왜 저 양반들은 파티장에서도 일하고 있는 걸까.
"호호.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게 두 사람이니까 그렇죠."
"난 아무 말도 안 했다."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하시는지 안답니다."
나름 표정 관리에는 자신이 있는데.
유진이 뺨을 일그러트리니 마담은 호호, 하고 짧게 웃었다.
"오래 자리 비워도 되겠어?"
"메이를 남겨두고 왔으니 괜찮을 거예요."
"꽤 불만이 많을 텐데."
"그래도 은하수 펍 중국지부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를 약속했답니다."
"2인자라고 부르면 될 걸. 길게도 말하는군."
"중국이잖아요. 현지에 맞춰서 해줘야죠."
무협 소설 보는 줄 알았네.
구룡방 주력이 몰살당한 후, 중국 암흑가에는 혼란기가 찾아왔다.
동탁 사후 군웅들이 들고 일어선 삼국지를 연상시키듯.
각 지역에서 힘깨나 쓴다는 단체들이 구룡방의 후계를 자처하며 각축전에 들어갔다.
마담은 진혈의 일족들을 중국 각지로 퍼트려서 그들을 제압하거나 포섭.
혹은 이간질 시켜서 일을 크게 벌린 후에 제3자를 섭외해서 충돌한 두 조직 대신에 해당 지역을 접수하게끔 했다.
"거기서 둘이 뭐 하고 있어요!"
"일 이야기."
"형이 업무 이야기 금지라고 해놓곤. 잔도 비었네!"
이야기 중에 끼어든 강민영은 술잔을 불쑥 내밀었다.
"내가 술 마시는 거 본 적 있니?"
"없으니까 주는 거죠."
"못 마시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면 내가 먹지 뭐."
"아니. 가져다준 정성이 있으니 한 잔 하마."
그러고 보니 회귀하고 나서는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은하수 펍에서는 늘 긴장을 유지하느라 우유만 마셨고.
다른 곳에서 술을 마실 일이 있던가.
접경지역을 오가고.
다가오는 싸움을 준비했고.
네크로폴리스 확장에 열을 올렸다.
한 순간도 쉴 틈이 없었으니.
술을 입에 대는 것도 사치라고 생각했었다.
유진은 맥주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취하지도 않네."
"와. 형. 엄청 잘 마시네요."
"술이 약하진 않는다. 마실 일이 없어서 그런 거지."
"오빠아아! 후배!!! 어서 와!!! 형이랑 한 잔 하자!!"
"형님이 술을?"
"그건 못 참지 말입니다."
유진의 앞에 모여든 뽀시래기 팀.
옆에 있던 마담도 은은한 미소와 함께 잔을 채웠다.
'어쩌다 보니 7성 기념주를 받게 됐네.'
챙겨주는 이들은 모르겠지만.
유진은 편안한 표정으로 건배를 했다.
블랙 컴퍼니 간부들끼리 모인 소소한 파티가 끝나고.
유진은 곧장 산둥반도로 향했다.
7성으로 올랐으니.
전에 거둬놓은 시체들을 망자로 되살릴 때가 되었다.
[오셨나.]
이신우는 존대도 반말도 아닌 애매한 말투로 유진을 맞이했다.
"일룡과 이룡의 시체를 꺼내라."
[알겠다.]
순식간에 파헤쳐진 무덤.
땅 아래에 묻어놓은 시체 두 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흑암의 반지를 사용합니다.]
'죽음은 탈출구가 아니란다.'
스스스슷-!
유진이 쥔 지팡이의 끝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239화 7성(2)
7성이 되면 [흑암의 반지]에 담긴 모든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건.
성위 제한마저 풀린다는 의미다.
[애니메이트 데드 주문을 전승했습니다.]
[애니메이트 데드]
등급 : S
분류 : 네크로맨시
제한 : 8성 이상
죽은 대상을 최상급 언데드로 제작합니다. 이때 제작한 언데드의 수준은 시체의 질에 따라 달라집니다.
8성급 주문인 애니메이트 데드.
본디 유진은 익힐 수 없는 주문이지만, 제한이 풀린 [흑암의 반지]의 능력을 활용해서 성위를 벗어난 주문을 습득했다.
〔그래도 되느냐?〕
'안 되지. 당연히.'
변칙으로 제한을 벗어났다고 해서 주문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냐?
그건 또 아니다.
주문의 메커니즘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재배열 때 영력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운용해야 한다.
한 순간이라도 실수하면?
'리바운드가 그대로 술자에게 들이닥치겠지.'
운이 좋으면 사지 중 하나를 잃는 선에서 무마될 테고.
나쁘면 심장이 터져서 죽거나 정신이 나가서 백치가 될 것이다.
〔위험한 행위를 잘도 하려는 구나.〕
'날 누구라고 생각하나.'
네크로맨서의 정점.
필멸의 굴레를 짊어지고 초월한 존재.
성좌들이 모두 외면했음에도 9번째 성위에 도달한 왕.
8성?
이미 가본 길이다.
자신의 성위보다 높은 주문이라고 해서 못 다룰 줄 아나!
유진은 지팡이 끝에 모은 영력을 재배열하기 시작했다.
후욱.
심장이 떨린다.
'성위'란, 단순한 수치가 아니다.
혼에 쌓아 올린 업과 깨달음, 그에 맞춰서 발전한 육체까지.
정신과 육신, 그리고 혼백의 성취가 하나를 이루어야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
"끄으으으."
한 치의 오차도 내지 않고 영력을 재배열하며.
모자라는 영혼의 격은 [흑암의 반지]에 깃든 전대 네크로맨서들이 새긴 혼의 흔적으로 극복한다.
〔괜찮느뇨?〕
'안 괜찮아.'
숨질 것 같다.
조승철과 다크 미니언들을 동원했을 땐 집단지성의 힘으로 이겨냈지만.
홀로 성위를 벗어난 능력을 발휘하려고 하니 버거웠다.
그렇지만.
유진은 지닌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끝끝내 주문을 완성시켰다.
"내 부름에 답하라."
[애니메이트 데드를 사용합니다.]
[둠 나이트 2구를 제작했습니다.]
[완성도가 매우 높습니다. 능력치가 120% 상승합니다.]
땡그랑-.
지팡이를 바닥에 내던진 유진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매번 이 난리를 피워야 하나.'
〔저번처럼 하수인들에게 분담해서 위험을 줄이지 그러느냐.〕
'일이 얼마나 많은데. 조승철이랑 블랙 메이지들 대륙으로 돌리면 일정이 3주 이상 늦어져.'
〔고작 그런 연유로 위험을 부담한 게냐?〕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건데요.'
유진이 크로노스와 드잡이질을 하고 있을 때.
철그렁, 철그렁.
파헤쳐진 묘지 위로 불쑥 솟아오른 갑주가 부딪치면서 마찰음을 요란하게 냈다.
영력으로 빚어낸 갑주.
풀 플레이트의 이음새 사이로 검은 연기가 푸시시- 새어 나오고.
헬멧에서 눈이 있어야 할 위치에는 푸른 안광이 섬뜩하게 번뜩인다.
갑주 여기저기에 달려 있는 뿔은 단단한 쇠도 종이처럼 찢어버릴 만큼 날카로웠으며.
전신을 타고 흐르는 충만한 영력은 사용자가 의념을 품기만 해도 무엇이든 분쇄할 수 있을 만큼 강렬했다.
데스 나이트보다 한 차원 강력한 최상위 언데드.
둠 나이트의 기세가 퍼져 나가자 땅에 살얼음이 끼고, 대기의 온도도 10도 이상 낮아졌다.
"몸은 좀 괜찮나?"
[너, 당신.]
"주인한테 높임말을 써야지. 친구야."
[난 너를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꾸욱.
생전에 다루었던 도끼들을 쥔 일룡.
두 자루 사이를 체인으로 연결해서 빙글빙글 돌렸다.
회전하면서 발생한 풍압으로 인해 머리카락이 마구 나부끼고.
이 일대가 태풍이 들이닥친 것처럼 강풍이 휘몰아쳤다.
"죽기 전의 원한이라도 풀려고?"
[그렇다.]
"네 혼백은 나한테 구속되어 있다"
[이따위 구속쯤.]
"구속쯤은?"
[큭, 크으으윽.]
금방이라도 도끼를 날릴 것처럼 돌리던 일룡이 비명을 질렀다.
쿵-.
사슬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지자마자 관성에 의해 지면으로 향했고.
땅을 쪼개면서 수 미터 아래로 꺼졌다.
[으아아아!]
뒤이어 올라온 둠 나이트 2호기, 이룡은 생전의 버릇대로 오러 블레이드를 방울처럼 만들어서 방출했다.
[여기에서 터트려주마!]
지근거리에서 기탄을 폭발시키면.
유진도 무사하지 못하리라.
"그래. 해봐."
[흐으읍!]
그렇지만.
터지지 않았다.
분명 자신의 마력(영력)으로 방출한 오러 블레이드일 텐데.
아무리 의념을 가해도 폭발하기는커녕 유진의 곁을 빙글빙글 돌기만 했다.
"너희들이 누구의 힘으로 되살아났는지. 아직 모르겠어?"
따악!
유진이 손가락을 퉁기자 둠 나이트 2구가 무릎을 꿇었다.
[커흑!]
[크으으으!]
혼백을 옥죄는 고통.
뇌를 적출한 다음 바늘 수천 개를 꽂는 것과 비슷할 만큼의 통증이 두 언데드의 정신을 흔들었다.
"너희는 나를 해할 수 없다."
다시 한번 손가락을 퉁기니 둠 나이트들의 들썩거림이 잦아들었다.
"내 명을 거스르는 것도 불가능하지."
[이 가오리방쯔가!]
"그거. 욕이잖아?"
따악!
[크아아악!!!]
"주인님한테 험하게 말하면 안 되지 않겠니."
유진은 그 뒤로도 1시간 넘게 둠 나이트 교육을 실시했다.
"자신들의 처지를 이제 좀 받아들였나?"
[....]
"처신 잘하라고."
혼백으로 연결된 종속의 끈.
일룡과 이룡의 마음에서 타오르는 적대심이 여전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유진은 더 교육하는 대신 두 언데드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여태 부려온 하수인들과 다르게 부리는구나.〕
'둠 나이트는 솔직히 버거워.'
8성이면 초월의 영역에 발을 걸쳤다고 볼 수 있다.
일룡과 이룡은 숙성까지 해놓고, 생전의 장비까지 모두 챙겨온 덕에 죽기 전과 비교해도 전투력 손실이 없었다.
지금까지 흔들림이 없었던 유진의 망자 지배 능력도.
두 언데드한테는 절대적이지 않았다.
〔여태까지 그대는 혼백과 육신의 일치를 이룬 언데드들을 억누르지 않은 채로 부리지 않았느냐.〕
'그렇긴 하지.'
〔차별성을 두는 연유가 있나보구나.〕
'저 친구들한테는 호감작이 불가능해.'
혼백과 육신이 일체화된 언데드들은 사역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유진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반골 기질이 다분했던 송명석이 왜 유진한테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하겠는가.
본인의 성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배자인 유진에게 알게 모르게 친근감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철저하게 밟아놔야지.'
호감작이 안 된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선순위를 설정하면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누는 일은 없을 것이다.
첫 번째로 유진을 해하지 못하는 것.
두 번째는 그가 내린 명령을 반드시 수행할 것.
〔부리는 데는 하등 지장이 없겠구나.〕
'파프너나 송명석처럼 자발적으로 판단하고 움직이는 건 불가능하지만 말이야.'
대규모 전장에서는 마이너스가 되겠지만.
당장 부릴 때는 괜찮다는 의미.
〔그래도 불편함이 있을진대.〕
'다른 저주들로 추가 조정하면 괜찮아.'
아.
그래도 지금 당장은 무리다.
[애니메이트 데드] 쓰느라 뇌가 녹아내리는 줄 알았다.
'조금만 쉽시다.'
땅바닥에 드러누운 채, 유진은 달궈진 머리를 식혔다.
*
둠 나이트 2구를 일으키고 나서 반나절이 지나갔다.
느긋하게 머리를 식힌 유진은 작업을 재개했다.
[콰루루루루!!]
"옳지, 옳지."
본 드래곤들 중 유독 작은 덩치를 지닌 녀석이 유진에게 머리를 비비려고 했다.
반려동물로 키우는 강아지처럼 보이는 모습.
덩치가 10미터만 아니었으면 위화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 녀석만 7성급이지.'
레리크들의 사체를 긁어모아서 만든 3급 본 드래곤.
낮은 전투력을 다른 수단으로 보정해줘야 주력으로 굴릴 수 있을 것이다.
유진은 아공간에 넣어둔 촉매를 꺼냈다.
[골렘 소환]
푸하하학!
압축시킨 피가 터져 나오면서 수 미터 크기로 팽창했다.
〔호오. 골렘은 오래간만이로구나.〕
'최근에는 부릴 일이 없었지.'
MIS - 04 마력 엔진을 기반 삼아 제작한 블러드 골렘.
양질의 피를 아무리 압축시켜도, 엔진 출력의 한계 때문에 6성 수준이 최대라서 주 전력에 넣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유진은 블러드 골렘을 네크로폴리스 수비에 배치하지 않고 촉매를 늘 들고 다녔다.
"골렘. 몸을 최대한 넓게 펼쳐서 본 드래곤을 감싸라."
[혈류변환]
6미터 크기의 붉은 거인이 해체되었다.
몸을 구성하던 피가 커튼처럼 넓어지더니 체구가 작은 본 드래곤의 몸을 감쌌다.
[과도한 변형으로 인해 형태 유지가 불가능합니다.]
[혈류변환으로 구조를 바꾸십시오.]
[현재 상태를 오래 유지하면 블러드 골렘이 소멸합니다.]
시끄럽기는.
조금만 기다려 봐라.
[지식의 도서관을 사용합니다.]
[생명 분야 - 블러드 바인딩을 전승합니다.]
[블러드 바인딩]
등급 : C
분류 : 키메라 공학
피와 뼈를 결합합니다.
네크로맨시와 비슷한 메커니즘으로 생체에 간섭하는 생명 분야의 주문.
유진은 곧바로 [블러드 바인딩]을 사용해서 골렘과 본 드래곤을 이어 붙였다.
"좋아. 잘 붙었군."
더 이상 메시지는 들리지 않았다.
블러드 골렘이라는 객체를 유지하는 대신 본 드래곤과 결합됨으로써 붕괴를 면한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지.
MIS - 04 엔진을 본 드래곤의 갈비뼈 근처로 이동.
원래 심장이 있었던 위치에 두었다.
우우우웅-!
마력 엔진이 시동한다.
[콰우우우우!!]
[본 드래곤과 블러드 골렘이 서로를 한 객체로 인식합니다.]
[자아가 결합됩니다.]
[본 드래곤과 블러드 골렘의 성질이 동화되어 새로운 언데드로 탄생했습니다.]
[성위가 한 단계 상승합니다.]
가죽 대신 피를 뒤집어 쓴 본 드래곤.
이제는 본 드래곤 대신, 다른 이름으로 불러줘야겠지.
"블러드 드래곤."
유진은 회귀 전에 붙여주었던 이름을 똑같이 말했다.
[콰우우우!!]
기분 좋은 울음을 터트리는 블러드 드래곤.
블러드 골렘을 거죽 삼으면서 한 단계 강해진 존재감을 아낌없이 흩뿌렸다.
〔저 마력 엔진이 심장을 대체하는 게냐?〕
'개념만.'
본 드래곤의 본질은 용족.
용족의 상징은 심장이다.
MIS - 04의 출력은 용족의 심장과 비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부족했다.
그렇지만.
블러드 골렘을 매개체 삼아 '심장'이라는 관념을 부여함으로써.
본 드래곤은 이전보다 더 완전해졌다.
〔그럴지언정, 성위의 상승이라니. 참으로 믿기지가 않는구나.〕
'다 그렇진 않아. 쟤가 유독 스펙이 떨어져서 성위가 올라간 거고, 나머지 애들은 그 정도 효과는 없을 걸.'
굳이 따지면.
8.5성 정도 되겠군.
내구력이 모자라다는 단점도 피로 만든 거죽이 어느 정도 보완해줄 것이다.
정말이지.
7성이 되자마자 할 일이 쏟아지는구먼.
유진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추가 골렘 제작에 들어갔다.
이젠 신준석의 조력 없이도 골렘 정도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전력을 강화한 다음에는....'
〔다음에는?〕
'이걸 써야지.'
크로노스의 망가진 회중시계.
최근 바쁘다는 이유로 통 사용하지 못했던 기연 사냥을 다시 시작할 때다.
240화 생태계교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