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eads / SANTOSUBEDENIVELCONNIGROMANCIA / Chapter 26 - 250-260

Chapter 26 - 250-260

250화 히드라(1)

괴수의 어머니.

에키드나는 신화시대에 무수한 괴물들을 잉태했다.

케르베로스.

네메아의 사자.

키마이라 등.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네임드 괴수 중 대부분은 에키드나의 배에서 나온 자식들이다.

여기서 문제.

에키드나가 낳은 괴물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유명한 존재는 무엇일까?

"크라라라라!!! X 9"

머리가 아홉인 지룡.

히드라다.

머리부터 꼬리까지는 약 70미터 정도 되었고.

강철보다도 단단한 녹색 비늘이 전신을 빼곡하게 감쌌으며.

살짝 벌어진 입에서 흘러나오는 독액이 땅에 닿으니 수 미터가 푹 꺼졌다.

지면을 녹이면서 피어난 연기에 닿기만 해도 살이 문드러지는 어마어마한 맹독.

"보아라! 이 아름다운 자태를!"

"우와. 너무 세 보이잖아. 우리는 상대가 안 되니 도망쳐야겠는걸."

국어책 읽듯 말하는 유진.

말과 반대로, 눈가에는 숨길 수 없는 욕망이 번들거렸다.

〔언행이 하나도 맞지 않는구나.〕

'히드라를 어떻게 참아.'

〔한데 그대의 발언대로라면 신화시대의 괴수, 아니 신수일진대. 도륙할 수 있겠느뇨?〕

'저 놈. 새끼 히드라야.'

신화의 원전.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에서 나온 히드라는 불사의 존재다.

올림포스 성단의 최종 병기라고 불리는 헤라클레스도 끝끝내 쓰러트리지 못했다.

목 8개는 상처에 불을 지지면 재생되지 않지만.

중앙의 하나는 죽지 않거든.

'얼마 전에도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가?'

〔구룡방을 소탕할 때 하였지.〕

어쩐지.

기시감이 들더라니.

'몸통과 중앙의 머리 하나는 불사. 헤라클레스도 봉인하는 데 그친 괴물이다.'

〔하면 그 신화 속 괴수가 아니란 확신은 어찌 하느냐?〕

'히드라 본인을 이 세계에 불러오려면 수십억은 제물로 바쳐야 할 거다.'

히드라도 별빛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존재다.

성좌보다는 신수라고 해야겠지?

성좌, 혹은 신수 본신이 직접 세계에 강림하려면 억지력이 발동할 게 분명한데.

고작 몬스터 수천, 수만을 제물로 바친다고 히드라 본인이 강림할 수도 없고.

어찌어찌 변칙을 부려서 하계에 내려 온다 쳐도 제 힘의 1%도 내지 못한다.

'그렇다 쳐도 약한 건 아니지만 말이야.'

사탄교 고위 신자가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도 이해가 갔다.

몬스터들을 제물로 바쳐서 소환된 히드라는 8성 끝자락에 도달한 괴물.

끝을 알 수 없는 어마어마한 마력이 몸에 내재되어 있고.

입 사이에 끓고 있는 독액에 맞으면 어지간한 존재는 몇 걸음도 못 걷고 죽어버릴 것이다.

그래도.

'못 죽일 정도는 아니다.'

아군이 만전의 상태라면.

그러니까.

파프너, 둠 나이트 둘, 그리고 애꾸눈까지 동원하면 승률은 100%다.

현재 전력으로는 반반 정도쯤 되려나.

마담과 뱀파이어들의 힘은 히드라에게 닿지 않는다.

"거리를 벌려. 태세를 정비해라."

"알겠어요."

피를 탐하고 있던 마담이 손을 털어내듯 뒤로 움직였다.

사탄교 신전 곳곳에서 신도들을 척살하던 뱀파이어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대단하군. 혈족들을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다.'

뱀파이어의 치명적인 페널티.

[피의 광증]은 흡혈 중이나 피를 봤을 때 올라오는 충동으로 판단과 절제력을 흐리게 만든다.

마담이 지시를 내리자 전장에서 이탈하는 것을 보면.

장악력이 어마어마하단 거겠지.

"신자들은 대부분 정리했답니다."

"남은 건 7성 다섯과 히드라 정도군."

"어떻게 할까요?"

"사냥한다."

여기서 빠지기는 아깝지.

정 안 될 것 같으면 블러드 드래곤을 타고 후퇴해도 된다.

히드라는 날개가 없는 지룡.

강력하지만, 비행 능력이 전무해서 유진 일행을 쫓아올 방법이 마땅찮았다.

〔하면 무리하지 말고 다음을 기약해도 되지 않느냐.〕

'기다려준다는 확신이 어디에 있어?'

여기서.

끝장을 낸다.

동남아시아 일대를 뒤덮는 커다란 해일은 3년 후의 일.

사탄교 신자들을 놓쳐도, 당장 해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남겨둘 바에는 뿌리를 뽑아버리는 게 낫지 않겠나.

"크라라라!"

"크라락! 배고파!"

히드라 머리들이 으르렁대며 떠들었다.

꽤 시끌벅적하군.

풍기는 위압감과 별개로, 아홉 머리의 분위기는 소풍 온 어린이들 같았다.

"위대한 분이시여. 고정하시옵소서."

"크락! 밥! 밥!"

"만족하실 만한 제물이 하늘 위에 있사옵니다."

"크라라라라! 언데드! 냄새나!"

"크라라! 싫어!"

사탄교 고위 신자들도 꽤 진땀을 빼는 듯 하고.

개판이야. 아주.

"저 후안무치한 자를 물리쳐주시면 저희가 만족할 만한 제물을...."

[에테리얼 폼 - 실체화]

[은신]

[데들리 임팩트]

푸욱!

날카로운 칼이 히드라를 진정시키던 고위 신자의 가슴팍을 뚫고 튀어 나왔다.

아니.

칼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나이트헤드의 손톱이었다.

신관계 헌터라서 신체능력이 떨어진 고위 신자는 7성이란 경지가 무색하게 신성 주문 하나 펼치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이! 죽다 만 버러지가!!"

[에테리얼 폼 - 영체화]

허공을 베고 지나간 오러 블레이드.

나이트헤드는 몸을 영체로 변형시켜서 순식간에 이탈했다.

영체화도 무적은 아니다.

오러 블레이드 같은 의념이 담긴 힘을 정면으로 맞으면 꽤 타격을 받고.

[아스트랄 스피어]처럼 영체에 피해를 입히는 주문에는 훨씬 더 큰 대미지가 들어간다.

그렇지만.

지금 같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는 은신하는 나이트헤드를 잡을 수 없었다.

'예상대로군.'

유진의 뺨이 살짝 흔들렸다.

〔또 그 웃음인 게냐. 참으로 품위가 없도다.〕

'계획대로 풀리는 건 즐거운 일이다.'

사탄교 신자들은 제물을 사용해서 편법으로 강해진다.

피의 발렌타인 사태의 원흉인 마누엘도 민간인들을 제물로 바쳐 성위를 올렸듯이.

그러면 뭐가 문제냐.

성위 상승을 통해 능력치는 올라가도.

정통파 헌터에 비해 기교와 힘을 다루는 역량 자체는 떨어지기 마련이다.

본격적으로 전투에 돌입하면 빈틈이 생길 줄 알았지만.

유진의 생각보다 더 잘 풀렸다.

"마담은 사탄교 신자들 견제를 맡아줘."

"알겠어요."

"히드라는 내가 쓰러트린다."

[신성 주문]

[호플리테스를 사용합니다.]

허공에서 떨어진 검은 물체.

아니.

물체라고 생각했던 데스 나이트, 애꾸눈이 지면에 착지한 후 몸을 일으켰다.

[부정한 축복을 사용합니다.]

[응징의 쐐기를 사용합니다.]

애꾸눈과 송명석, 그리고 블러드 드래곤들에게 버프를 걸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쿠후후. 큰 적이다.]

"만족스러울 거다."

[쿠후후훅. 역시 주인이다.]

[주군. 머리 많은 도마뱀을 치라고 명을 내려주십쇼.]

"넌 놀 생각이었어? 어서 뛰어내려라."

[존명!]

히드라라.

에키드나의 자식이면 히드라보단 케르베로스가 쓸 데 더 많은데.

'케르베로스는 분신이나 자식이라 해도 불러내지 못했겠지만 말이야.'

히드라처럼 어느 성좌에게 종속되지 않고 스스로의 위치를 유지하는 괴물이 있는가 하면.

케르베로스는 하데스에게 종속되어 있는 신수이니, 관련된 괴물도 부르지 못했을 거다.

말 그대로 최강의 패를 꺼낸 셈.

"브레스. 일제 발사."

[콰루루루!!]

[프로스트 브레스]

냉기의 숨결이 공중에서 사선으로 내리꽂힌다.

배고프다고 으르렁대던 히드라의 아홉 머리가 살기에 반응하고는.

입을 쩌억 벌리더니 보라색 독액을 토해냈다.

순수한 독정.

올림포스의 성좌들마저 두려움에 떨게 했던 독의 정수가 일부 담긴 타액이다.

혹한의 냉기도 저 독의 정수 앞에서는 힘을 내지 못하고 썩어 문드러졌다.

유, 무형을 가리지 않는 독의 개념.

모든 것을 썩어버리게 만들고 부식시키는 히드라의 독이 블러드 드래곤들의 숨결을 허공에서 상쇄시켰다.

1대 5의 브레스 싸움에서 동률이라.

역시.

원전에 비해 열화가 된 자손이라지만.

히드라는 히드라다.

"크라라락. 귀찮다. 뼈다귀."

"크라라. 저거부터 먹자."

좋아.

한 번 해보자고.

*

쿵! 쿵!

70미터의 거체가 발을 내딛을 때마다 지축이 크게 흔들렸다.

흡사 지진이 일어난 것 같은 진동에 이 근방의 괴물들이 생존본능에 따라 도망갔다.

6성의 무력을 보유한 진조 급 흡혈귀들도 히드라가 내뿜는 기백에 압도당해서 전장 주위를 빙글거릴 뿐, 섣부르게 날아들지 않았다.

[쿠후훅. 너. 마음에 든다.]

애꾸눈은 두 손을 펼쳤다.

[게헤나의 화염]

생전에 무투계와 마법 양쪽을 아우르는 실력자였던 애꾸눈.

마법 상당수는 암흑 마법으로 변질되었지만, 위력은 죽기 전과 비교해도 전혀 모자라지 않았다.

7성급 마법의 변형.

물리 + 화염 속성을 지녔지만, 대신 파괴력은 원형보다 떨어진다.

애꾸눈은 그 모자라는 화력을 다른 수단으로 대체했다.

[암흑 강기]

주문을 발현하는 동시에 끌어올린 암흑 강기.

검은 화염이 쏘아지는 순간에 맞춰 연이어 방출하니, '영력'이란 매개체와 '물리력'을 지닌 화염이 섞이면서 위력이 증폭되었다.

'저걸 어떻게 한 거지?'

유진도 놀랐다.

오러 블레이드와 마법을 부딪치면 같은 사람이 발현했어도 서로의 힘을 깎아먺기만 할 뿐이다.

마검사가 약한 이유이기도 했다.

〔무왕이란 작은 인간과 겨룰 때에는 못 보던 기술이다만.〕

'힘을 아낄 여유는 없었으니. 그 대련 이후 깨달음을 얻었나봐.'

파프너가 원시 마법을 응용하는 방법과 흡사하지만.

원시 마법과 현대의 마법은 구조 자체가 다르다.

정해진 틀보다 사용자의 의지가 마법 발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원시 마법.

발현자의 힘과 의지가 있으면 얼마든지 뒤섞일 수 있지만, 룬 / 4대 속성 / 암흑 분야 같은 현대의 마법은 달랐다.

63빌딩조차 몇 초도 안 돼서 한 줌의 재로 만들어버릴 정도의 화력에 세계의 섭리에 맞닿아있는 강렬한 의지의 힘, 암흑 강기(오러 블레이드)가 더해진다.

히드라의 몸통에 꽂힌 물리 + 화염 속성을 띤 검은 불꽃이 비늘을 뭉개버리고 속살까지 태웠다.

주춤거리며 뒤로 쭉 밀려나는 70미터의 거체.

근처에 있던 사탄교 신자들은 충격을 직접 받은 게 아닌데도 주춤거렸다.

"크라라락. 아프다."

"크라라. 언데드 맛 없다."

"크라라라! 그래도 먹는다."

3층 상가 건물 크기의 상처가 몸통에 새겨졌는데도.

히드라는 고통을 토하기보다 배고프단 말을 내뱉으며 전진했다.

[프로스트 브레스]

[포이즌 브레스]

블러드 드래곤들의 지원사격을 다시 한번 독으로 상쇄.

애꾸눈을 향해 접근한 히드라의 아홉 머리가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민첩한 속도로 날아들었다.

"크라라. 도망가지 마라."

"크라라락. 맞서 싸워!"

[쿠훅. 재밌다. 재밌어.]

한 치 차이로 공세를 흘려보낸 애꾸눈이 히드라의 머리 하나를 낚아채더니 암바를 걸었다.

암흑 강기를 휘감은 팔뚝이 히드라의 머리를 분쇄.

콰드드득, 감당하지 못할 힘에 뼈와 근육은 물론이요. 살점이 뭉개져버렸다.

[초재생]

시간을 역행하듯 되살아나는 머리.

"크라라. 배고프다."

막 재생한 머리는 태연한 소리를 내며 애꾸눈을 물어뜯었다.

[앱솔루트 실드]

방어 마법과 암흑 강기를 동시에 펼친 애꾸눈은 이빨이 박히는 꼴을 겨우 면했다.

치이이익!

이빨을 타고 흐르는 독액이 결계와 암흑 강기를 사정없이 부수니, 곧장 그 자리를 벗어났다.

[쿠훅. 이대로는 끝이 없다.]

"내가 한 팔 거들어주마."

[지박의 제물을 사용합니다.]

[피의 낙인 주문을 사용합니다.]

[골렘 연성을 사용합니다.]

[지박거인을 제작합니다.]

체급이 모자라면.

맞춰줘야지.

필요한 재료는 사탄교 신자들이 모두 제공해주었으니.

얼마나 좋아?

뼈를 엮어서 어설프게 만든 신전이 영력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251화 히드라(2)

촤라라라락!

허공에 솟구친 뼈가 막대한 영력을 토대로 재구성되었다.

땅에 스며든 피는 지박거인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양이었고.

구조물을 이루던 뼈에는 특별한 마법 술식 처리가 되어 있지 않아서 수월하게 제어할 수 있었다.

'미관 때문에 뼈로 건물을 지은 머저리들이 있을 줄이야.'

하다못해.

악신 성좌의 가호라도 받거나 했으면 이렇게 쉽게 뼈의 통제권을 빼앗아오지 못했으리라.

구조물의 중심부에 있는 '신전' 역할을 하는 메인 홀 빼고는 모든 뼈를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

〔한데 괜찮겠느냐? 이전에는 사전 작업을 벌여서 감당하였다 하였거늘.〕

'괜찮아. 이제 7성이잖아.'

성위가 오르면 단순히 영력만 상승하는 게 아니다.

제어 능력.

한 번에 다룰 수 있는 영력의 양.

수준에 걸맞은 힘을 다룰 수 있는 '격'에 이르기까지.

'내가 매번 싸움 전에 세팅을 하는 이유를 알아?'

〔피해를 최소함으로 하기 위함이지 않느뇨.〕

'그건 당연한 거고. 현재의 역량보다 더 높은 힘을 사용하려면 준비가 필요해.'

지박거인도 그렇다.

여기서 말하는 '세팅'이란, 재료만이 아니다.

회귀 후 처음으로 지박거인을 일으킬 땐 수많은 뼈에 마력 회로를 새겨 넣어 거인이란 형태로 일으킬 수 있게 준비했다.

무수한 영력의 흐름을 일일이 제어하는 건.

당시 5성에 불과했던 유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러니 보조를 받아야지.

'이젠 달라. 7성이 되었으니 충분해.'

당연한 이야기지만.

전직 9성인 유진이라서 가능한 일이지, 평범한 네크로맨서였다면 영력을 과다하게 운용해서 머리가 터졌을지도 모른다.

착한 네크로맨서는 따라하지 마세요.

지박거인의 크기는 20미터.

인간사냥꾼과 결전을 벌일 때보다 더 크게 만들었다.

재료도 충분했고.

당시보다 유진의 역량이 더욱 상승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크네.'

지박거인과 융화된 유진은 눈앞의 괴물을 보고 생각했다.

머리부터 꼬리까지가 70미터.

몸통 - 머리를 기준으로 하면 30미터는 되었다.

그래도.

지박거인이 된 유진이 올려다봐야 할 만큼 커다란 덩치였다.

[송명석아.]

[예. 주군.]

[나랑 애꾸눈이 히드라의 시선을 끌 거다.]

[하오면 속하는?]

[한 놈씩. 머리를 암흑 강기로 베어라.]

애꾸눈과 지박거인의 덩치는 기민한 움직임에 어울리지 않았다.

히드라가 관심을 가지지 않을 정도의 크기.

또한.

파괴의 권능이라 일컬어지는 암흑 강기를 [텐터클 블레이드]로 여럿 일으킬 수 있으니.

히드라의 머리를 쳐내는 데는 송명석이 적임자였다.

[주, 주군!]

송명석은 싸늘하게 얼어붙었던 마음이 불타올랐다.

애꾸눈과 블러드 드래곤, 거기에 뼈들을 조합해서 거인이 된 유진까지.

이 전장에서 그가 나설 곳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유진은 그에게 제일 중요한 역할을 맡겨주었다.

[맡겨주신 임무. 성공적으로 수행하겠습니다.]

비장한 송명석의 사념에 유진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어, 어. 그래.]

요즘 꽤 의기소침해보이던데.

잘 맡긴 거겠지?

유진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잡념을 털어냈다.

뼈로 된 거인이 전진을 시작했다.

히드라도 그에 뒤처지지 않겠다는 듯 네 다리를 움직이며 앞으로 돌진했다.

"크라라락. 이거. 먹을 거 맞냐!"

"크라라. 모른다."

"크락! 일단 먹어보자."

아홉 머리가 쩌억, 입을 벌리고는 지박거인의 전신을 물었다.

콰직!

뼈가 부러지고 으깨지는 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히드라의 독액이 퍼져 나가고.

특별한 가공 조치를 하지 않은 지박거인의 몸뚱이 일부가 깨어지고 녹아버린다.

〔가만 있으면 히드라에게 소화되는 운명이겠구나.〕

'누가 손 놓고 있는대?'

지박거인의 손을 물들이는 우윳빛 기운.

암흑 투기로 히드라의 목덜미를 감싸고는 우악스럽게 뜯어냈다.

카가가각-.

비늘에서 불똥이 튀었다.

엄청난 강도를 지닌 히드라의 비늘은 지박거인이 일으킨 암흑 투기로도 제대로 된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쿠후훅!]

애꾸눈이 크게 도약해서 암흑 강기를 흩뿌리니.

머리 중 일부가 지박거인에서 입을 떼더니 독액을 쏟아냈다.

'블러드 드래곤들의 공격을 상쇄하고도 독이 남아있다니.'

신화 속 히드라에 비교하면 열화 된 능력.

그럼에도.

데스 나이트와 신성 언데드의 능력을 동시에 보유한 애꾸눈도 경시하지 못할 위력을 지녔다.

허공에서 방어마법을 전개해서 독이 스며드는 것을 막고.

독 브레스가 완전히 마법을 삼키기 전에 자리를 이탈한 애꾸눈이 조금 뒤로 물러났다.

[이때를 기다렸습니다.]

[암흑 강기]

[텐터클 블레이드]

애꾸눈이 히드라의 시선을 빼앗는 동안.

지박거인의 몸을 발판 삼아 올라온 송명석이 쌍검을 휘둘렀다.

깨달음을 초과한 암흑 강기의 출력.

다섯 가닥으로 솟구친 검은 영력의 집결체가 아홉 머리 중 하나의 목덜미를 베어버렸다.

푸아아아악!

[해, 해냈습니다!!]

"크라라라라라!"

암흑 강기에는 어마어마한 열기가 실려 있다.

상처를 불로 지질 것도 없이.

히드라의 머리 중 하나가 재생하지 못하고 옆으로 고꾸라졌다.

〔영구적인 손실인 게냐?〕

'완전 봉인은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 회복은 돼.'

고위 성직자의 축복이라던지.

몇 가지 수단을 사용하면 지져버린 목도 재생이 가능했다.

사탄교 고위 신자들도 있으니 시간만 있으면 회복시킬 수 있을 거다.

〔과연 그 시간을 허용할지 의문이로구나.〕

당연히.

그럴 생각은 없었다.

"크라라라라!!"

목덜미 위에 올라탄 송명석을 한 발 늦게 발견한 여덟 머리가 입을 쩍 벌렸다.

[흑암의 반지 - 내장 스킬을 사용합니다.]

[용아병(송명석)을 회수합니다.]

콰직!

제 목덜미만 물어뜯게 된 히드라의 다른 머리들.

태세를 정비한 애꾸눈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어서 머리 하나를 더 베어냈다.

〔바실리스크를 쓰러트릴 때 사용한 전술이로구나.〕

'일격이탈은 기본이지.'

콰아아아!

정수리 위로 쏟아지는 새하얀 냉기.

히드라들은 머리를 두 개 잃은 걸 신경 쓸 틈도 없이, 다시 한번 독기를 토해내어 상쇄시켰다.

〔8성이면서 이리 약하도 되는 게냐?〕

'8성 여섯이 협공하고 있는데 버티고 있는 게 용한 거지.'

블러드 드래곤의 스펙은 8성 이상.

굳이 표기하면 8.5성 급이다.

스펙을 제대로 살려줄 특성과 스킬이 모자라서 실 전투력은 그만큼 나오지 않지만.

애꾸눈도 마찬가지다.

대형종이라는 이점과 무투 / 마법을 모두 다룰 수 있고.

성력이 깃든 갑주를 입혀주어 [호플리테스]의 강점까지도 취했다.

유진은 지박거인 주문으로 신체능력만 놓고 보면 8성에 육박하였으니.

무왕이나 마법왕이 직접 오지 않는 한.

지구상에서 이만한 전력이 펼치는 합공에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놈들이 잘 못 싸우기도 하고.'

히드라의 최대 강점은 재생력과 독.

독은 블러드 드래곤들이 지원 사격으로 꾸준히 소모시키는 중이고.

재생력도 가까이 붙어서 암흑 강기를 쏟아부으면 어느 정도 무력화되었다.

[흑암의 반지 - 내장스킬을 사용합니다.]

거두었던 송명석이 불쑥 튀어나와서 지박거인의 어깨에 올라탔다.

'좋아. 이대로만 가자고.'

유진은 지박거인을 다시 한번 움직여 히드라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

사탄교 고위 신자는 이를 갈았다.

'믿을 수 없어.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진단 말이냐!'

동남아시아 전역을 죽음으로 물들여서 강대한 힘을 손에 넣으려는 계획.

해일을 일으키고.

라미아를 대량으로 불러내어 사람들을 제물로 바쳐서 더 강한 힘을 손에 넣을 생각이었다.

반군과 정부군의 싸움, 그리고 침식까지 일어나서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민다나오 섬.

문명에서 멀어진 땅을 수시로 오가며 준비한 게 벌써 3년이다.

작업 진척도는 반절.

앞으로 3년만 있으면.

악신 성좌의 힘을 빌릴 만한 제물을 모아서 동남아시아 전역을 휩쓸어버릴 만한 해일을 일으킬 수 있었으리라.

한데.

갑자기 나타난 언데드들이 그의 계획을 모조리 망치고 있었다.

"어서 히드라를 지원해야 한다."

"빌어먹을. 이 상황에 무슨 지원입니까. 난 도망치겠어!"

고위 신자 한 명이 전장에서 이탈했다.

이 계획에 힘을 보태긴 했어도.

히드라의 머리가 둘이나 당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도무지 이길 것 같지 않았다.

'내가 여기까지 오려고 얼마나 땀을 흘렸는데.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죽을 것 같나!'

사탄교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나 신뢰로 운영되는 조직이 아니다.

콩가루 집안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조직.

전장에서 이탈한 고위 신자는 멀리 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꺼져라. 피나 빨아먹는 모기 새끼야."

"호호. 그건 곤란하답니다."

고위 신자의 앞을 가로막은 마담이 비음 섞인 톤으로 대꾸했다.

"천 대표님이 한 명도 돌려보내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남의 지시를 따르다가 죽고 싶으면 그러던가."

"아. 물론 제 뜻이기도 하답니다."

마담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악신 성좌를 숭배하는 버러지들을 놓치고 싶지 않거든요."

[블러드 캐논]

쇄도하는 핏빛 광선.

붉은 궤적이 휩쓸고 지나간 곳에는 나무고 돌이고 할 것 없이 모조리 가루가 되었다.

"고작 피 좀 쏜다고 나를 막을 수 있을 거라 보나?"

[무자비한 자의 가호 - Lv 2]

파츠츠츠츠!

순수한 암흑으로 이루어진 철퇴가 고위 신자의 손에 쥐어졌다.

모든 것을 꺾어버리는 압도적인 폭력의 힘.

바벨탑의 마왕 중 한 명.

8번째 악신 성좌인 바르바토스의 능력이 형상화된 철퇴다.

언뜻 보면 둔해 보이는 철퇴지만.

고위 신자가 오른손으로 휘두르니 블러드 캐논의 궤적이 홱 틀어졌다.

사용자의 의지대로 공격을 휘게 하고.

굴복시키는 능력.

모든 것을 압도하는 바르바토스의 권능이 실체화된 철퇴 앞에서 블러드 캐논이 파훼되었다.

"크하하하! 고작 이 정도로 나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전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답니다."

마담은 손을 살짝 깨물었다.

몽글몽글 솟아나는 핏방울을 허공에 흩뿌리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블러드 웹."

촤하하하학!

핏방울을 매개 삼아 발동한 혈마법.

무성한 열대 야자수와 땅바닥에서 솟구친 피의 그물이 바르바토스의 권능을 실체화한 철퇴를 휘감는다.

"그런 잔재주 따윈."

"끊어보세요. 할 수 있다면."

고위 신자가 흐으으읍! 하고 힘을 주며 철퇴를 잡아 당겼다.

태애애앵, 줄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꿈쩍도 하지 않는 시커먼 철퇴.

"당신 입으로 말했잖아요? 적의를 빨아들이는 권능이라고."

"내 의지로 얼마든지 해제할 수 있다. 이따위 것쯤은 얼마든지...."

"뜯어낼 수 없답니다."

마담은 확신했다.

피를 매개체로 한 혈마법은 유진이 히드라를 상대하는 동안 곳곳에 펼쳐져 있었다.

유, 무형을 가리지 않고 모두 옭아매는 블러드 웹.

상대의 힘이 강할수록.

구속력도 강해지는 능력이라서 여러 곳에 펼쳐놓았다.

이 그물로 상대를 어떻게 낚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고위 신자는 제 발로 블러드 웹에 걸려주었다.

바르바토스의 권능을 거두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미 그물이 침식을 시작한 상황. 그걸 떨쳐내려면 권능을 완벽하게 다룰 줄 알아야 했는데, 이 고위 신자는 숙련도가 모자랐다.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 친구들도 모두 따라갈 테니까요."

마담은 어느새 유진과 닮아버린 비틀어진 미소를 지으며 거리를 좁혔다.

252화 히드라(3)

8성.

걸어 다니는 전략 병기라고 불리며, 훼방을 받지 않으면 국가 하나를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경지다.

거기에.

초대형종인 히드라는 세게 땅을 밟기만 해도 인근에 지진을 초래했으며.

독액은 이 일대의 환경을 영구히 바꿀 만큼 지독했다.

히드라가 만약 한국에서 나타났다면.

국내 3강이 힘을 합쳐야 겨우 막아낼 수 있을 것이고.

토벌하는 과정에서 최소 시 하나는 죽음으로 물들어서 아예 접근조차 하지 못할 만큼 망가졌을 것이다.

'운이 나쁜 거지.'

유진은 킬킬거렸다.

네크로폴리스에서 단독으로 히드라와 맞설 수 있는 강자는 없다.

불로 지지지 않으면 끊임없이 회복하는 재생 능력.

블러드 드래곤 다섯의 브레스를 상쇄시키고, 연사까지 가능한 맹독.

70미터의 체고에서 나오는 어마어마한 파괴력까지.

마석을 먹고 진룡의 모습에 한층 더 가까워진 파프너도 히드라와 정면 싸움을 벌였다간 독기에 범벅이 되어서 죽을 것이고.

애꾸눈도 머리 한두 개를 없앨 순 있어도, 결정적인 화력이 모자란다.

〔그대는 어떠하느냐.〕

'7성 따리한테 뭘 기대해.'

회귀 전에는 오러도 못 다루었기에, 적이 군대를 돌파했을 때나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지금에야,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곤 있지만.

온전한 8성급의 힘을 낸다고 하긴 어렵지.

마법 봉인 페널티도 크고 말이야.

그렇지만.

히드라 단독으로는 모든 힘이 집약된 언데드들의 공세를 감당할 수 없었다.

"크라라라!!"

길게 뻗어진 히드라의 머리 하나가 애꾸눈을 노린다.

막 머리 하나를 터트린 찰나라서 회피가 불가능한 상황.

지박거인의 팔이 사이에 끼어들어서 대신 물렸다.

팔이 통째로 떨어져나가는 충격.

유진은 지박거인 유지에 소모되는 영력 일부를 지면에 흩뿌렸다.

[뼈는 많다.]

사탄교 신자들이 모아준 뼈들은 모두 지박거인의 예비용 육체가 되었다.

형상 유지에는 7성 수준으로 감당할 수 없는 영력이 소모되었지만.

유진은 평범한 네크로맨서가 아니었다.

[라이프 드레인]으로 늘려놓은 스탯이 빛을 발할 때.

단순한 영력 수치로는 8성에 가까운 덕에 강령술 주문 없이도 소모전에서 버틸 수 있었고.

[〔역천의 가호〕를 사용합니다.]

히드라가 준 충격을 영력으로 치환하니.

영력이 떨어질 일이 없었다.

'뭐? 영력이 복사가 된다고?'

가호는 마법 취급이 아니니, 지박거인의 페널티에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히드라가 재생할 때.

지박거인도 널려 있는 뼈를 계속 끌어들여서 신체를 복구하니.

소모전 양상으로 가도 유진 측에 불리할 일이 전혀 없었다.

[하압!]

송명석도 간간이 활약했다.

본래였으면 히드라의 공격 한 번에 산산조각 났을 정도의 수준.

이 전투에 끼워주기에는 송명석의 능력이 모자랐다.

유진은 그 한계를 [흑암의 반지]로 극복했다.

일명 회수와 방출 작전.

지박거인이 히드라를 붙잡고 있을 때 방출해서 안전하게 목을 노리고.

빈틈이 드러난 송명석을 곧바로 회수하기를 반복하며 히드라에게 충격을 누적시켰다.

지금까지 쓰러트린 머리는 5개.

그 중 4개가 송명석의 암흑 강기에 의해 잘려나갔다.

"크라라락! 이대로는 안 된다!"

중심에 위치한 머리가 비명을 토해냈다.

히드라의 아홉 머리는 각자 자아를 지니고 있다.

몸통은 중앙의 머리가 제어하지만, 나머지 머리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인다.

퍼즐처럼 딱딱 맞아 떨어지는 유진 일행의 공격과 달리.

아홉 머리들은 그저 허기를 채우기 위해 마구 물어뜯다가 허무하게 쓰러졌다.

"크라라. 내 명령을 따라라."

"크락, 왜 그래야 하냐."

"크라라라. 아니면 내가 널 죽일 거다."

중앙 머리가 반발하는 머리를 물어 뜯었다.

"크르락, 아프다."

여덟 머리의 힘은 동등했지만.

몸통까지 제어하는 중앙의 머리는 유독 힘이 강했다.

남은 두 머리도 중앙 머리에게 복종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살짝 숙이고.

"크라라라. 이제부터 합공한다."

머리가 넷으로 줄어들었지만.

히드라의 공세는 전보다 훨씬 더 위협적으로 변했다.

쿵! 쿵!

70미터의 거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막대한 힘을 아낌없이 발휘.

머리 둘이 지박거인을 잡은 채 전진하더니 그대로 넘어트리려 했다.

[곤란한 걸.]

히드라가 제 자리에 서 있을 땐 편했지만.

이젠 압도적인 스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오러를 두 다리에 끌어올려서 최대한 버텼지만 카가가각,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쭉 밀려났다.

송명석이 흑암의 반지에서 튀어 나와 목덜미를 노리려고 할 때.

"크라라라라!!"

중앙 머리가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곧바로 회수했다.

[죄송합니다. 주군. 속하의 능력이 모자라서....]

[아니. 이제까지 너무 쉬웠던 거다.]

악신 성좌급인 히드라의 근원을 이은 괴물이다.

이름까지 부여받은 걸 보면 직계 후손일 가능성이 높았다.

별자리에 이름을 새긴 신수의 이름을 물려받은 자식.

머리 다섯을 쉽게 줄인 게 어디냐.

히드라가 육신의 힘을 본격적으로 활용하면 유진 홀로 막아설 수 없다.

[블러드 드래곤. 모두 내려와서 전장에 합류해라.]

좋아.

한 번 해보자고.

*

"크라라라라!!"

지축이 흔들리고.

[독 브레스]

[프로스트 브레스]

한기와 독기가 충돌하더니 공기가 오염되었다.

이 근방의 야자수들은 이미 냉해나 독에 물들어서 죽어버린 지 오래.

마담을 위시한 뱀파이어들과 사탄교 고위 신자들도 전장에서 멀어져서 따로 전투를 벌였다.

"우리의 부름을 받고 온 존재가 어이하여 저리 날뛰는가."

"성좌께서는 우리를 버리셨나!"

고위 신자들은 날뛰기 시작한 히드라를 보며 탄식을 내뱉었다.

애초에 제대로 된 신자와 성좌의 관계도 아니고.

거래 상대나 마찬가지인 악신 성좌에게 무언가를 바란 것이 잘못이었단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사탄교 고위 신자들은 원망을 내뱉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호호. 당신의 피. 맛이 꽤 각별하네요."

뿔뿔이 흩어진 사탄교 고위 신자들은 뱀파이어들의 견제와 습격 앞에서 무기력하게 피를 헌납했다.

'쯧. 남 좋은 일만 해주는 기분인데.'

고위 신자 일부는 피를 부여해서 흡혈귀로 만들었으니.

시체가 필요한 유진은 배가 살짝 아팠다.

〔8성 괴물을 그대의 하수인으로 거둘 거면서 참으로 배부른 소리를 하는구나.〕

'케르베로스였으면 더 쓸모가 많았을 텐데. 아쉽다니까.'

히드라는 신수이며, 동시에 용족의 성질을 띠고 있다.

망자로 되살리면 최대 포텐이 본 드래곤인데.

신수 급을 본 드래곤으로 살리기에는 뭔가 조금... 아깝단 말이지.

"크라라라!!"

히드라의 포효에 유진도 손을 까딱거렸다.

그의 몸과 일체화된 지박거인이 양팔을 움직여 히드라를 붙들었다.

몇 시간 동안 이어진 전투.

신전을 꾸미는 용도로 모아놓은 뼈들도 대부분 소진되었고.

육탄전에 돌입했던 블러드 드래곤도 2마리가 파손되어서 전장을 이탈했다.

애꾸눈도 팔 한쪽이 소실된 채 마법 지원의 비중을 올렸으니.

협공을 펼쳤음에도, 네크로폴리스 측 전력이 꽤 소진되었다.

히드라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이제 남은 머리는 중앙에 자리 잡은 하나뿐.

나머지는 모두 터진 후에 암흑 강기로 지져서 재생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몸통에도 전투의 흔적이 가득했다.

깨어진 비늘 사이에서 피가 꾸역꾸역 새어 나왔다.

머리만큼은 아니어도, 재생력이 트롤보다 높은 몸뚱이일진대.

이미 체력을 많이 소진한 탓에 회복도 눈에 띄게 더뎌졌다.

[쿠후훅. 재미있었다.]

승기가 기운 것을 확신한 애꾸눈이 히죽거렸다.

야.

그런 사망 플래그 세우지 마.

이러다가 해치웠나, 같은 말 하겠어.

[곧 해치울 수 있겠습니다.]

하아.

유진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하여간 도움이 안 되는군. 다들.]

[예?]

[쿠후훅. 무슨 말인지.]

[됐다. 차라리 벽에 대고 말하지.]

주둥이 단속은 히드라의 숨통을 끊은 뒤에 해도 충분하다.

지박거인을 움직여 다시 거리를 좁히니, 파손이 덜 된 블러드 드래곤 3구도 히드라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유진이 먼저 공격해서 히드라의 주위를 끌면.

블러드 드래곤들도 달라붙어서 체력을 소모시키고.

송명석이나 애꾸눈이 목을 벤다.

지금까지 효과를 꾸준하게 본 차륜전이다.

히드라도 그 사실을 인식하고 있지만, 줄어든 머리로는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크라라라라!"

포효에 담긴 힘도 전보다 줄어들었다.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우쳤으면서도.

죽기는 싫으니 바동거리는 감정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이제 그만 끝내자.]

그래도 어쩌겠어.

히드라의 시체를 본 드래곤으로 살리면 족히 3마리는 나올 것이다.

머리가 아홉이나 되고 몸뚱이도 큰 덕에 쪼개서 제작해도 여럿 확보가 되니.

이야.

본 드래곤이 복제가 되네.

〔계약자여. 한 가지 청이 있구나.〕

'말씀하시죠. 성좌 나리.'

〔저 아이의 목숨을 반드시 거둬야 하는 게냐?〕

'어울리지 않게 자비라도 베푸는 거라면 사양하겠어.'

유진은 딱 잘라 말했다.

본 드래곤 셋.

아까는 평가를 낮춰 이야기했지만, 그래도 쉽게 얻을 수 있는 언데드가 아니다.

백두산 인근에서 드레이크가 생성되는 건 극히 드문 일.

7성급 용족은 1달에 1번 생성되어도 운이 좋다고 여길 만큼 쉽게 나오지 않았다.

'저 히드라를 가만히 두면 무슨 일이 있을지 알고.'

유진은 회귀 전에 벌어진 사태를 알고 있다.

사건의 전개 방식에 대해서는 몰라도, 그 피해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지나가다가 뉴스로 봤으니까.

사망 인원만 백만 단위요.

직, 간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은 억이 넘어갔다.

해안가와 밀접해 있는 동남아 국가들의 인프라가 초토화되었고.

그 여파로 침식지역이 어마어마하게 넓어졌다.

'여기서 히드라를 제거해야 확실하게 원흉을 제거했다고 할 수 있다.'

〔저 아이를 그대가 거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않느냐.〕

'내가? 무슨 수로.'

테이밍 스킬은 자신에게 없다.

좀비 스케어클로도 버프 능력에 치중되어 있지.

몬스터를 길들이는 능력 따윈 없었다.

〔짐에게 맡겨보아라.〕

'좋아. 한번 성좌 나리가 해보고 싶은 대로 하십쇼.'

〔그대의 육체를 빌려서 발언을 하려 하니. 몸에 힘을 빼지 않겠느뇨.〕

크로노스의 대리인이자 유일한 성자.

유진에게 '강림'하는 형태로 이 세상에 임하겠다는 말이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유진은 손해 볼 것 없다는 생각에 크로노스의 강림을 받아들였다.

'딱히 강림한다고 해서 극적으로 달라지는 건 없군.'

몸에 살짝 걸친 형태가 된 유진은 팔짱을 낀 채 크로노스가 강림한 육신을 관조했다.

성좌의 강림이라고 하면 거창한 걸 떠올리겠지만.

크로노스는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나쁘게 말하면 유진에게 붙어 있는 잡귀 수준.

크로노스가 강림을 핑계로 육체의 주도권을 빼앗으려 해도.

유진은 1분도 안 돼서 본래의 육체로 돌아갈 수 있을 정도다.

[신수의 후손이여.]

"크라라라?"

[짐은 역천의 거인이란 신명을 지닌 성좌이니라.]

"크라라라. 너처럼 약한 성좌가 어디 있냐."

[...모두 사정이 있어서 그러하거늘.]

뼈아픈 팩트가 크로노스를 가격했다.

[짐의 대리인이 그대를 사냥하려 하노니, 살기 위한 방도를 알려주겠노라.]

"크라라락. 말해봐라."

[그대가 짐의 성수가 되는 것은 어떠하느냐?]

253화 성수

성수.

직역하면 성스러운 짐승이다.

유진은 허- 하고 혀를 찼다.

'성좌 나리. 저 뱀을 성수로 거두려고?'

〔그러하니라.〕

'돼? 그게?'

〔불신자처럼 짐을 의심하는 게냐.〕

'신화의 원전인 히드라의 피를 이은 괴물을 무슨 수로 거두려고.'

마음에 드는 생물이 있다고 해서 개나 소나 다 성수로 거두면 그게 성수냐.

옆집 뽀삐랑 다를 바가 없는 이야기다.

성수란, 해당 성좌의 격을 어느 정도 공유해야 하고.

타고난 성질과 파장도 맞아야 한다.

'크로노스란 성좌가 뱀과 친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거든?'

유진은 크로노스에 대해 제법 많이 공부했다.

회귀라는 이적을 가능케 한 옛 신왕.

또한.

'시간'과 '추수'를 주관하는 성좌이니 그 상징을 뒤집어서 죽음을 거스르는 개념을 주관하게 할 수 있으며.

결정적으로 자신과 힘을 합칠 만한 이유가 있는 성좌였다.

그렇기에.

유진은 크로노스가 짐작하는 것보다 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과연. 짐의 성자다운 풍부한 식견이로다.〕

크로노스의 여유로운 사념에 유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니 지켜보아라. 짐은 그대가 모시는 성좌이지 않더냐.〕

'지켜보기로 했으니까. 가만히 있을 거야.'

본신이 위험해지면 곧바로 나설 생각이지만.

아직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또한, 육신을 잠시 넘겨주긴 했어도 언데드들의 제어 권한은 여전히 자신에게 있었다.

히드라가 수상쩍은 행동을 하면 애꾸눈이나 블러드 드래곤, 혹은 송명석에게 손을 쓰라고 지시할 생각이었다.

[가련한 동물이여. 그대를 불러낸 자들은 이미 다섯 갈래로 도망치고 없구나.]

"크라라라라."

[하니, 짐이 그대를 거두어주마.]

"크라락. 난 아무나 안 섬긴다."

[이리로 오라. 짐의 그릇을 가늠한다면 생각이 바뀔 터이니.]

촤라라락.

지박거인의 육신이 무너지고.

유진의 몸, 정확히는 그 안에 깃든 크로노스가 천천히 히드라에게 다가갔다.

입을 벌리면 그대로 유진을 꿀꺽 삼킬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지만.

히드라는 천천히 머리를 움직이더니 이마 끝을 유진(크로노스)의 손에 대었다.

그 순간.

히드라와 크로노스의 혼이 맞닿으며, 하나로 연결되었다.

"크라라라?"

〔파괴와 재생은 결국 죽음을 거스르는 행위. 그대의 성질은 짐이 주관하는 영역과 닮아 있느니라.〕

"크라라라!"

〔그러니 짐을 상징하는 수호자가 되자꾸나.〕

히드라의 속성은 용.

과거, 신화시대에는 용과 뱀이 같은 족속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뱀을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지혜요.

또한 허물을 벗음으로써 새로 나는 영속성이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뱀을 죽지 않는 불사의 존재라고 여겨서 숭배했고.

히드라도 그 성질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역천의 거인이 히드라를 성수로 삼았습니다.]

[만수의 어머니가 분노합니다.]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흥미를 드러냅니다.]

[올림포스의 대영웅이 관심을 가집니다.]

[죽지 않는 뱀이 놀라움을 표합니다.]

[여덟 머리의 뱀은 역천의 거인에게 호의를 드러냅니다.]

[세계를 먹은 뱀이....]

....

무수한 성좌들이 이 상황을 지켜보며 저마다의 감정을 드러냈다.

히드라와 연이 있는 성좌들은 흥미를 드러냈고.

이 히드라의 원전이자 어머니이기도 한 '신수' 히드라는 놀라워했으며.

사탄교 신자들에게 괴물을 내어준 에키드나는 분노를 토했고.

'뱀'이라는 성질을 공유하는 성좌나 신수들은 크로노스에게 직접 손을 건네었다.

크로노스가 히드라를 권속으로 거둔 직후.

"음."

유진은 시점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을 느꼈다.

〔짐은 쉬어야겠구나. 그대에게 현신하였더니 피로하여.〕

'얼마나 쉬어야 하나?'

〔짧으면 하루. 길면 1주는 걸리겠구나.〕

그 말을 끝으로 크로노스의 존재감이 옅어졌다.

성자인 유진의 몸을 빌렸고.

현신 후에 어떠한 힘도 발휘하지 않았지만.

성좌의 혼이 하계에 강림한 것은 엄청난 부담을 주는 일이었다.

'1주 만에 그 페널티를 떨쳐내는 게 비이상적인 일이지.'

크로노스가 유진에게 들러붙어있는 거나 마찬가지이니, 페널티가 덜한 것이다.

어쨌든.

크로노스의 기지 덕에 뜻밖의 전력을 획득했다.

"히드라. 내가 누군지 알겠나?"

"크라라라라! 잘 모른다."

"네가 섬기기로 한 역천의 거인의 성자이자 대행자. 천유진이다."

"크라라라. 기억하겠다."

"앞으로 성좌 나리를 대하듯 내 말에 따르도록."

"크라라라라라."

반발은 없었다.

크로노스의 성수가 된 덕일까.

히드라는 유진이 교단 내에서의 위치가 자신보다 높다는 것을 직감했다.

상태창으로 히드라의 능력치를 살펴본 유진은 입을 쩍 벌렸다.

'머리를 대부분 상실했는데도 이만한 스펙이라.'

8성의 끄트머리.

거기에, 성수라는 버프가 추가되면서 추가 성장 가능성까지 생겼다.

아홉 머리가 모두 재생하면 준 9성 수준이라고 해도 될 만큼 강력했으며.

계기만 있다면 진정한 9성에도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되는 신수 히드라를 생각하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겠어.'

히드라 시체를 언데드로 되살리는 것보다 몇 배는 남는 장사.

정말이지.

뜻밖의 수확에 웃음이 실실 흘러나왔다.

"남은 머리들을 회복시켜라."

"크라라라라. 먹을 것과 신성 주문이 필요하다."

재생에는 엄청난 칼로리가 소모되고.

목에 깃든 암흑 강기의 염을 떨쳐내야 하며.

소모된 치유력을 회복시키려면 신성 주문까지 필요하단다.

앞의 두 가지는 먹는 걸로 대체가 가능하지만.

마지막은 히드라의 힘만으로는 못 한다나.

"모두 도와줄 수 있는 문제군."

대격변 이후.

전 세계의 1/3 정도가 침식지역이 되었다.

히드라의 먹이로 던져줄 괴물은 넘치고 넘쳐났다.

'극동 공화국 인근에 풀어두면 되겠어.'

네크로폴리스를 더 확장하기는 부담스러워서 영역을 넓히지 않고 있었는데.

히드라가 있으면 그 고민이 말끔하게 해결되었다.

"앞으로 잘 부탁하지."

"크라라라라!"

히드라는 유진의 손이 다치지 않게끔, 조심스럽게 머리를 비볐다.

*

섬 중심부에 만들어진 악신 성좌의 제단은 산산조각 났다.

마담은 후련한 표정으로 제단에 침을 뱉었다.

"속이 시원하네요."

정말이지.

마담의 감정적인 모습은 영 적응이 안 됐다.

"왜 그런 표정을 지으세요?"

"아니야."

"사탄교 고위 신자들의 시체는 한 곳에 모아두었답니다."

"다 비쩍 말랐군."

"수수료라고 생각해주세요."

높은 성위일수록.

혈액을 타고 흐르는 마력과 혼백의 힘도 더 강해진다.

사탄교 신자들이 제물을 바쳐 편법으로 성위를 상승시켰다지만.

피에 흐르는 마력만큼은 진짜였으니.

마담은 그 혈액을 취해서 한층 더 강한 힘을 손에 넣었다.

'이 기세면 조만간 8성에 도달할지도 모르겠는데.'

깨달음이 동반되지 않았으니, 보유한 힘이 8성에 근접해도 실제 능력은 그에 미치진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마담의 가파른 성장세는 유진에게도 호승심을 불러 일으켰다.

"사탄교의 흔적은 조사했나?"

"으음. 그게 말이죠. 이상한 것을 발견해서요."

마담이 손짓하자, 붉은 회오리가 불면서 제단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쿵-.

제단 아래에는 빛나는 글자가 여럿 새겨져 있었다.

"이게 무엇인지 알고 계시나요?"

유진은 말문이 막혔다.

모를 수 없었다.

"룬 문자."

"...룬이요?"

"원시 마법을 제외한 모든 마법의 원형이 되는 글자다."

"전 처음 보는걸요."

"그럴 만 해. 이건 천상의 문자거든."

룬 마법은 현대 마법의 원형이 되는 술법이다.

현대의 마법도 룬 문자를 그대로 사용하기보다 나름 어레인지해서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기에.

마법계 헌터들도 룬 문자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우리나라 말에 한자식 표현이 섞여 있는 것처럼 말이다."

"네. 그건 알고 있답니다."

"여기에 써진 것은 현대에 퍼져 있는 룬 문자가 아니라, 신화시대에 사용된 것들이야."

룬 문자의 창시자, 오딘.

9일 동안 스스로를 찔러 생과 사의 경계에서 머무르다가 현실로 돌아온 후, 삼라만상의 이치를 담은 글자를 만들었다.

현세에 알려진 18개의 문자는 필멸자가 감당할 수 있는 것들이요.

남은 글자 6개는 천상의 글자라고 하여 오딘을 위시한 룬 마법에 능통한 성좌들만 사용했다.

마담은 짧게 탄성을 흘렸다.

"로마노프 가문이 이번 사태에 발을 걸치고 있다는 말씀인가요?"

"아마도."

"룬 문자만으로 그들을 엮어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랍니다."

"그렇겠지."

유진은 부정하지 않았다.

제단 아래에 새겨진 룬 문자가 오딘을 위시한 성좌들만 다룰 수 있다는 것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정보통인 마담조차 글자에 새겨진 마법의 힘만 읽어냈지.

기원까지는 알아내지도 못했다.

로마노프 가문에 이 일을 항의해도, 그들이 모르쇠로 일관하면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근데 로마노프 가문이 가만히 있을까?"

"항의하지 않는다면...."

"이미 사달이 났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을 거다."

로마노프 가문과 사탄교가 밀약 관계라는 결정적인 증거.

유진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이건 나도 몰랐는데.'

전생에도 밝혀지지 않은 정보였다.

어쩐지.

세계 곳곳을 들쑤시며 피해를 유발하는 사탄교가 그 세를 꾸준히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로마노프 가문이 배후에서 그들을 지원해줬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왜, 같은 질문을 할 필요는 없겠지.'

드미트리는 오딘과 비슷한 성정을 지녔다.

어떤 지혜든지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고.

갖가지 마법에서 자신이 정점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집광이다.

바벨탑의 악신 성좌들을 숭배하는 사탄교 신자들을 후원하다보면.

악신 성좌들에서 기인한 암흑 마법과 각종 기이한 주술들까지도 분석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겠지.

"유진 님."

마담은 천 대표란 말 대신,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그 말씀대로라면 로마노프 가문과 충돌을 피할 수 없겠네요."

"로마노프 가문은 강령술의 비밀도 탐하고 있을 테니. 어떤 식으로든 손을 뻗으려 할 것이다."

"죄송해요. 제가 괜히 사탄교를 뿌리 뽑자고 움직였다가 이런 일을."

"뭐가 죄송해? 틀린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유진은 마담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번 사태를 막아냄으로써 못해도 100만 이상의 목숨을 살린 거다."

"그런가요?"

"내가 장담하마."

회귀자가 말해주는 사실이니 믿어도 돼.

자아.

문제는 사탄교를 건드렸는데 로마노프 가문까지 자극했다는 거지.

놈들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원래 계획보다 조금 더 앞당겨지는 것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그걸 준비해야 하나.'

가능하려면 사용하지 않으려 했던 비장의 수단.

유진은 전력 강화를 위한 술법을 떠올리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254화 주마등 수련법(1)

필리핀 민다나오 섬에 오는 건 마음대로였지만.

나갈 땐 아니었다.

"크라라라라!"

주 원인은 블랙 컴퍼니의 마스코트(?)인 히드라였다.

몸무게만 수천 톤이요.

풍채유지비도 어마어마했으니.

히드라를 한국으로 옮길 배 + 이동하는 동안 먹을 식량을 실은 배가 필요했다.

"괴물에, 괴물 먹이까지 구해볼 줄은 몰랐습니다."

대형 선박과 함께 온 미스터 블랙은 늘 그렇듯 엄살을 섞어 투덜거렸다.

"할 수 있으면서 왜 그렇게 입이 나와 있나."

"배는 급히 섭외한다 쳐도 말씀하신 물량 확보는 쉽지 않았습니다."

"왜지?"

"그, 정말 몰라서 그러십니까."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요즘 몬스터 시체나 부산물의 가격이 엄청나게 올랐다고 한다.

확장된 네크로폴리스.

몬스터가 쓰러지면 언데드로 되살아나는 일이 빈번했다.

게이트 안에서 죽인 몬스터들이 있지 않느냐고?

"그걸 언제 다 챙겨옵니까."

헌터들은 돈이 되는 부산물이나 마석만 챙겨서 나온다.

일일이 매입하기도 번거롭고.

암상의 활동 영역이 음지 쪽 상권인데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 사체를 매입하려면 손이 많이 간다.

번거로워도 유진이 원하는 양을 마련할 수 있으면 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원체 요구량이 많다 보니 기각했다.

"알았다."

배가 올 때까지 히드라를 방치하면 안 되었냐고?

암흑 강기로 지져버린 머리를 회복시키려면 신성 주문이 필요했다.

송명석과 애꾸눈의 의념을 몰아내고.

완전히 지져진 상처를 회복시키려면 막대한 성력을 불어 넣어야 했으니.

유진은 섬에서 나타나는 괴물들의 생명력을 [라이프 드레인]으로 갈취해서 히드라에게 전해주었다.

"크라라라라. 배고프다."

라이프 드레인으로 치유 주문을 사용하고.

히드라가 먹을 것까지 마련해줘야 해서 애꾸눈과 블러드 드래곤, 그리고 송명석은 쉴 틈 없이 몬스터를 사냥해서 대령했다.

〔잘 먹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구나.〕

'누군 지금 뼈 빠지게 고생하는데. 아주 여유가 넘치십니다?'

〔그대에게 큰 힘이 되어줄 귀한 성수이지 않느냐. 사소한 고생은 감수하여라.〕

'사소해??'

이 성좌 나리가.

못하는 말이 없으시군.

1달 정도 체류하면서 히드라를 회복시켜주는 동안.

틈틈이 마담한테서 유럽 쪽 정보를 듣기도 했다.

'카리만리스 가문과의 분쟁이 끝났다, 라.'

두 가문이 물밑에서 협의를 시작한 지는 꽤 되었지만.

종전이 선언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담도 유럽 쪽까지는 정보망을 넓게 퍼트리지 못해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정보를 수집하는 정도였다.

'그게 어디냐만.'

인터넷 검색도 안 되는 오지에서는 그 정도만 해도 감사하다고.

대형 선박 둘과 여분의 식량을 준비하는 동안 히드라의 머리도 둘이 재생되었다.

"크라라라라. 왜 그런 걸 혼자 정했냐."

"크라라라. 성수라니."

"크라락! 싫으면 뒤지지 말던가!"

성수가 되라는 제안을 받은 건 중앙의 머리.

남은 머리들은 재생되자마자 동의 없이 결정했다며 항의했지만, 중앙 머리가 이를 드러내니 금방 수긍했다.

'저런 것도 합의를 봐야 하는 거야?'

히드라라는 생물체도 은근히 피곤하구먼.

"참. 내가 구해달라는 건?"

"여기 있습니다."

[기억의 거울]

등급 : 유니크

분류 : 잡화

내구도 : 100/100

원하는 기억을 불어넣어서 자신이나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정신 마법에도 활용이 가능합니다.

"역시 미스터 블랙이야. 날 실망시키지 않는군."

"어디에 쓰실 지는 모르겠지만 어렵게 구한 보람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묘한 어감은 뭐냐."

"기억의 거울을 엉뚱한 곳에 쓰는 사람들이 많아서 말이죠."

주로 엄한 짓을 할 때, 라는 뒷말을 붙인 미스터 블랙.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래서 믿고 구해드렸습니다. 어련히 쓸 데가 있으시겠거니 하고."

유진은 조소를 날렸다.

*

우여곡절 끝에 섬을 떠난 후에 평양으로 이동.

선착장까지 갈 것도 없이, 바닷가에 히드라를 내려놓았다.

"동쪽으로 가면서 다 먹어 치워라."

"크라라라라!"

네크로폴리스는 이북 기준으로 서쪽에 치우쳐져 있다.

북동부는 험준한 산맥이 대부분인지라, 최소한으로만 루트를 확보해놓았다.

바글거리는 몬스터들을 히드라에게 먹이로 주고.

소탕된 곳에 네크로폴리스를 추가로 펼치면 손쉽게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으리라.

"조승철아. 신입 받아라."

나이트헤드 둘과 데스 나이트 둘.

사탄교 고위 신자들의 시체로 제작한 상급 언데드들이다.

-주인이시여. 정말 이들을 제가 부려도 되겠습니까?

"손 가는 일 많잖아. 열심히 부려먹어라."

-감사합니다.

네크로폴리스 운영 전반을 맡고 있는 조승철.

행정 부분은 블랙 메이지들도 처리할 수 있지만 자율성이 모자라고, 성장 가능성도 없다 보니 종복으로 부리고 있다.

유진이 자리를 비울 때 영지를 관리해줄 수 있는 인재이니 힘을 더 보태줘야지.

〔리치 한 구가 더 있지 않느냐.〕

'아. 전직 육룡 씨.'

〔번거롭게 협박까지 하며 리치로 만든 이유가 있을 터.〕

'그 친구는 대연금술사랑 같이 있어.'

구룡방 아홉 머리 중 하나인 선화.

양지에서는 마도과학 병기 개발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현대 병기와 마법을 융합한 신병기를 개발했었다.

마침 신준석이 골렘을 상용화시키는 연구에 매진하고 있으니.

두 사람, 아니 망자와 사람은 꽤 합이 잘 맞을 것이다.

"그런데 무왕께서는 왜 여기 계시는지?"

"허허. 성수에 대한 소문이 무성해서 말일세."

하얀 무복을 입은 중년 사내.

창 우페이는 어울리지 않는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솔직하게 말하시죠."

"무엇 말인가?"

"히드라랑 한 판 붙어보고 싶어서 직접 오신 거 아닙니까."

"흠, 허흠. 본 문주를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는 건가."

"수련으로 하루 일과 대부분을 보내는 분이시니. 시간 비우는 건 어렵지 않았겠죠."

"안 되겠군. 천무문에 세작이 있는 것 같으니 내부를 단속해야겠어."

무왕이 천무문 운영에 크게 관여하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

유진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안 됩니다."

"단호하군."

"저거 보세요. 머리도 모자라는 애를 팰 생각이 나십니까?"

"자네가 그리 만들었나."

"성수 좀 하라고 설득하는 과정이 조금 격렬해서요."

"그렇다면 저 머리들은 언제쯤 재생할 것 같나."

"4달은 걸릴 겁니다."

신성 주문으로 치유를 걸어줘야 하는데.

유진이 계속 쫓아다니면서 할 수는 없었다.

주기적으로 평양에 들러서 디파일러들에게 치유를 받으라고 했지만.

그만큼 완전히 회복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걸릴 예정이다.

"좋네. 저 친구가 만전의 상태가 되었을 때 본 문주에게 연락을 주게나."

"마담을 통해 드리겠습니다."

"흐하하하핫! 마음에 드는구먼!"

무왕이 원래 이런 캐릭터였나.

회귀 전에 봤을 땐 좀 더 진중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세월의 흐름이라는 건 무시할 수 없는 모양이다.

조승철에게는 추가 하수인을.

히드라는 스스로 먹이 구하는 방법을 제시해준 후.

바로 개성으로 내려왔다.

"대표님. 언제 오시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른 곳으로 샜으면 가만히 안 있었을 것 같아서 말이야."

"제가 그쪽으로 가려고 했죠."

임재백의 눈 아래에 감도는 다크 서클이 한층 더 진해진 것 같다.

에이.

착각이겠지.

"이번에 직원을 대거 고용했습니다."

"잘했어."

"대신 임원급까진 아니어도, 어느 정도 위치가 되는 직원들은 대표님의 결재를 맡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기다렸습니다만."

"그런 건 임 이사가 알아서 하라니까."

유진은 투덜거리면서도 밀린 결재 서류를 빠르게 처리했다.

이왕 조직을 키우기로 마음먹었으니.

일을 미룰 순 없지.

사탄교 신전 아래에서 룬 문자를 발견하고.

로마노프와 카리만리스 가문이 종전을 선언했다는 이야기가 빚쟁이처럼 계속 압박해왔지만.

유진은 태연하게 마음먹기로 했다.

밀린 일을 처리하는 와중에도.

유진은 짬을 내어 아티팩트에 영력을 불어 넣었다.

잔잔한 호수에서 파문이 일 듯.

거울 표면에 스며든 영력은 이리저리 움직이며 아티팩트의 성질을 조금씩 바꾸었다.

약 1달간 틈이 날 때마다 영력을 불어넣은 후.

유진은 뽀시래기 팀을 불렀다.

"다들 바쁘게 사는군."

"형님에 비할 바가 있겠습니까."

"말이라도 고맙다."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은 후,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오늘 너희를 보자고 한 건 수련을 도와주기 위해서다."

전신거울을 가리키는 유진.

강민호는 의아한 듯이 거울을 흘겨보았다.

"이건 무엇입니까?"

"기억의 거울. 내가 좀 손을 봤지. 손을 대보면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제가 먼저 해보겠습니다."

유진이 위험한 일을 시킬 리 없을 거란 확신에, 강민호는 망설임 없이 거울 표면을 만졋다.

그 순간.

강민호의 의식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

강민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얀 눈으로 뒤덮인 산.

왜.

자신은 이런 곳에 서 있는 걸까.

'맞아. 형님이 거울을 만져보라고 하셨고, 그 직후에....'

게이트에 들어간 건 아니었고.

몸에 가해진 외력을 느끼지도 못했으니, 거울이 보여주는 환상일 가능성이 높았다.

침착하게 상황을 분석한 강민호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형님이 이 환상을 보여주신 건 이유가 있을 거다.'

차분하게 주위를 둘러보던 강민호는 양팔을 들어 올렸다.

가드 자세를 취한 건 본능적이었다.

무언가를 인식하기도 전에.

'막지 않으면 죽는다.'라고 몸이 느껴서 반응한 것이었다.

"어?"

본능적으로 움직인 몸에 의아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쿠아아아아앙!

숨이 턱 막히는 충격이 전신을 강타하면서 수십 미터 뒤로 튕겨났다.

"커흑!"

내장이 뭉개진 것 같은 고통.

두 다리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고.

충격파를 정면으로 받아낸 두 팔은 반대쪽으로 꺾여 나갔다.

꿈인데도.

너무 선명한 고통 때문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강민호는 초인적인 의지로 고개를 들어 방금 전 공격을 한 객체가 누구인지 확인했다.

'저건... 나?'

닮았다.

거울에 비쳐지는 자신의 모습과.

차이점이 있다면.

머리카락은 산을 하얗게 물들인 눈처럼 백발이 되어 있었고.

얼굴에도 숨길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난다는 것이다.

20년.

아니 30년이 지나면 저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주한 중년 사내가 양손에 든 방패를 충돌시켰다.

'가호? 오러?'

강민호의 주력기인 오러 + 가호 + 근력을 충돌시키는 합체기.

그런데.

조금 달랐다.

마력이 움직이는 패턴도.

가호와 마력이 뒤섞이는 타이밍도.

모두 강민호보다 월등하게 뛰어났다.

새하얀 빛이 수십 미터를 물들이고.

강민호는 비명 하나 지르지 못한 채, 빛에 삼켜졌다.

"으아아아아아!"

"뭘 봤지?"

불쑥 들려온 유진의 목소리.

눈꺼풀을 한 번 내렸다가 올리니 설산 대신 유진의 모습이 보였다.

"저 같은데요. 근데 좀 다른...."

성공이군.

유진은 얼떨떨한 강민호의 반응에 미소를 지었다.

거울이 비추는 기억은 자신의 것.

정확히는 회귀 전, 거울 사냥꾼이 보여준 능력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8성의 헌터.

두 사람의 능력이 완전히 개화한 모습이자, 나아가야 할 이상향.

이성민은 로마노프 가문의 2인자인 소피아의 기억을 참고용으로 새겨놓았다.

"앞으로는 이 녀석으로 수련을 할 거다."

죽다 보면 깨달음이 오겠지.

일명.

주마등 수련법이다.

부디 뽀시래기 팀과 잘 맞았으면 좋겠다.

255화 주마등 수련법(2)

거울을 마주한 강민영도 마찬가지로 설원을 보았다.

왜 배경이 겨울인 걸까.

답은 간단했다.

유진이 거울 사냥꾼과 목숨을 걸고 싸웠던 건 피부가 베일 것처럼 차가운 바람이 부는 한겨울이어서였다.

"또 무슨 엉뚱한 걸 가져온 거야. 이 형은."

강민영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눈으로 뒤덮인 산에 발자국을 남겼다.

얼마 정도를 걸었을까.

목덜미와 심장을 자극하는 살기에 몸이 곧바로 반응했다.

바닥에 몸을 던진 직후.

화살 두 발이 그녀가 서 있던 장소를 스쳐 지나갔다.

0.01초라도 판단이 늦었으면.

저 화살은 뒤에 서 있는 나무 대신 자신의 몸을 쪼갰으리라.

[동조]

[염동력]

[다중 병기]

최근에 새로 얻은 특성까지 더해.

레어 등급 석궁 20개를 동시에 다루어낸 강민영은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동시 사격을 했다.

파파파팟!

'걸리는 게 없어?'

화살에도 [동조]를 걸어 명중 여부를 알 수 있었다.

곧바로 반격을 시도했는데도.

넓게 펼친 화망에 걸리는 적이 없을 줄은 몰랐다.

'이상해. 무언가....'

기시감.

혹은 데자뷰라고 해야 할까.

어느 쪽이 되었든, 강민영은 이 상황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왜, 라는 생각을 할 때.

무언가가 허공 위로 떠올랐다.

"하."

어이가 없네.

강민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허공에 떠오른 석궁은 모두 20개. 자신이 다루는 것과 동일한 숫자다.

"우리 형은 거울 속 자신이랑 싸워보라는 거야?"

강민영은 확신했다.

쭉 느껴온 기시감.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사격했는데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던 일 등.

이 정도면 못 알아채는 게 이상한 거다.

"좋아. 나라도 이 정도쯤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질 만큼 허술한 헌터 생활을 하지 않았다.

용병단 관리는 물론이요.

고문으로 있는 미친개, 아니 김미정한테 죽는 게 나을 정도로 굴렀다.

쉴 틈 없이 의뢰를 받다보니 레벨도 부쩍 올라갔고.

최근에는 영약까지 선물 받아서 6성의 벽을 넘기까지 했다.

성위가 올라갔다는 건 단순히 스펙이 상승했다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마력 응용 능력.

스킬에 대한 이해도.

그 모든 것들이 뒷받침이 되어야 비로소 다음 성위로 나아갈 수 있다.

강민영은 저 거울을 통해 빚어낸 가짜가 자신보다 능력 이해도 면에서 높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어디에 있는지는 저 병기들을 무력화시킨 후에 찾아봐도 충분해.'

탱! 태태탱!

싱크로를 한 석궁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았다.

첫 공격부터 전력을 다하기로 한 강민영은 화살에 오러를 실어냈다.

화살 20발에 오러를 모두 담아낸 탓에 마력이 쭉 빠졌지만, 저 병기들을 초장에 제압하면 대응할 방법이 없을 테니 무리를 했다.

한 발 늦게 장전된 화살을 쏘아내는 반대편 석궁.

강민영을 의식하기라도 하듯, 마찬가지로 오러를 담아내었다.

'먼저 쏜 건 나야.'

장전을 마친 석궁을 재차 쏘아서 후발대에 붙였다.

이길 수 있다.

더 밀어붙여서 가짜를 쓰러트리고 유진에게 코웃음을 쳐주리....

콰직- 콰직-.

"어?"

오러와 오러의 충돌.

거울 속 자신이 동 스펙이라면.

반드시 상쇄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석궁에서 나온 화살들이 공중에서 충돌하는 순간.

그녀의 예상과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일방적으로 뭉개지거나 관통, 혹은 부러지는 자신의 화살.

반면 가짜 녀석이 쏘아낸 화살은 궤도 하나 흐트러짐 없이 일직선으로 나아갔다.

개중 일부는 튕겨나기도 했다.

20발 중 3발만 상쇄.

나머지 17발은 강민영이 [동조]로 조종 중인 석궁들을 향해 나아갔다.

'피해야... 아.'

2차 공격을 쏘아낸 반동으로 석궁들을 바로 움직일 수 없었다.

푸른 기류를 휘감은 화살들이 강민영의 석궁을 가격했고.

우지끈, 대부분의 무기가 쓸 수 없어질 정도로 망가져서 아래로 떨어졌다.

"아직 끝이 아니야!"

석궁이 3개로 줄었지만, 반대로 말하면 집중해서 다룰 수 있다.

손에 들린 무기가 없다고 주저앉을 성격이었으면 유진의 뒤꽁무니를 쫓는 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강민영은 셋으로 줄어든 석궁들을 회수해서 곧장 자리를 옮겼다.

'가짜의 위치를 모른다면 알 수 있는 곳으로 끌어내면 돼.'

[동조]와 [염동력]의 사거리도 무한하진 않다.

위치를 바꾸면 유효한 거리 안에 넣으려고 가짜도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 순간.

'저격한다.'

부지런히 이동하던 강민영은 저격 포인트로 떠올린 장소에 도착했다.

"아. 씁."

허공에 떠올라 있는 석궁 10개.

장전되어 있는 화살촉들이 그녀를 노렸다.

"무승부로 하지 않을래?"

파파팟!

전신을 강타하는 고통과 함께, 강민영은 눈을 떴다.

*

눈을 뜨자마자 그 빌어먹을 형이란 작자의 얼굴이 보였다.

"어때?"

"형. 나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

"말해봐라."

"죽빵 한 대만 치게 해주라."

"안 돼. 무투계가 신관을 치면 살인 난다. 난 아끼는 동생이 감옥 가는 꼴은 못 봐."

유진은 표정 하나 안 바뀌고 말했다.

〔참으로 가증스럽구나. 짐이 하사한 능력으로 육체 능력자를 상회하는 스펙을 얻어놓곤 변명을 늘어놓다니.〕

'이래서 눈치 빠른 성좌 나리는 좋아할 수가 없어요.'

크로노스의 푸념을 유진 말고는 듣지 못해서 다행이었다.

유진이 진실(?)이 폭로될까 신경 쓰고 있을 때, 거울 사냥꾼 남매는 그가 한 말에 꽂혀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끼는 동생?!'

'형님. 저희를 그렇게까지 생각해주시다니!'

잠깐 동안의 침묵.

강민영이 따질 틈을 놓치자, 유진이 바로 말을 이었다.

"맞서보니까 어때."

"형. 이거 미러전인 거죠?"

"그렇지."

"나랑 같은 스킬에 동일한 마력 양을 다루는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거지."

유진은 호오, 하고 감탄사를 짧게 흘렸다.

'스펙 부분은 반신반의였는데, 잘 적용되었나보군.'

아티팩트를 통해 구현한 미래의 거울 사냥꾼의 모습.

그렇다 한들.

스펙 차이가 너무 크면 수련이 되지 않는 법이다.

유진은 그 부분을 아이템 사용자와 링크시켜서 상대의 능력이 자신과 맞추어지도록 조정했다.

'될 줄은 몰랐는데 성공했군.'

강민영이 거울을 이용하는 동안.

먼저 사용했던 강민호에게 소감을 들어보니 비슷했다.

기억으로 구현된 미래의 자신들이 오버 스펙을 지니진 않았단 말.

'쓸 만하겠어.'

원래는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해온 뽀시래기 팀의 수련 방법이다.

기억이라는 것은 불완전한 법.

유진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거울 사냥꾼은 당시 모습을 그대로 옮긴 것이 맞을까?

불확실한 요소가 있다 보니 사용자와 링크시켜서 모자란 부분은 보완하게끔 만들었다.

"어떻게 같은 오러의 양인데 내 화살이 일방적으로 뚫린 거지?"

"나도 당했다. 힘의 운용 원리는 같을 텐데, 위력 차이가 워낙 크더라."

"벌집이 돼서 죽었다니까. 가짜 놈. 엄청 독하네."

"네 거울이면 놈이 아니라...."

"오빠. 맞을래요?"

쌍둥이 남매는 으르렁대면서도 방금 전 거울에서 마주친 서로의 환영과 상대하면서 느낀 점을 피드백했다.

"씁. 이렇게 당하고는 못 살아. 한 번 더!"

"아니. 한 명 더 남았잖냐."

유진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그, 형님. 전 안 해도 되지 말임다."

"헛소리하지 말고 와."

거울 앞에 강제 소환된 이성민도 유진의 기억을 바탕 삼아 만든 환영한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나왔다.

"윽, 엑. 으으윽."

"어떠냐."

"상대는 대체 뭐임까? 아주 돈을 그냥 바른 것 같슴다."

예리하군.

거울 사냥꾼과 달리, 이성민은 회귀 전의 역사에 남아있지 않은 인물이다.

그렇지만.

이성민과 동일한 계통의 능력을 사용하는 헌터가 있었다.

소피아 안드레예비치 로마노프.

로마노프 가문의 2인자이자, 이성민처럼 [공간]을 다루었던 강적이다.

'온갖 마법을 아공간에 담아두고 필요할 때마다 방출했지.'

이성민의 수준에 맞춰 저장해놓은 마법을 최대한 조절해놓았지만.

기본 씀씀이 자체가 다른 소피아의 기억인 만큼, 녀석이 상대하기에는 버거웠을 것이다.

"너도 할 수 있겠나?"

"가능은 함다. 할 순 있겠는데."

"왜 말이 길어지나."

"너무 아깝지 말임다."

"반대로 생각해라. 네 목숨 값보다는 싸다고."

유진은 손가락을 퉁겼다.

"이 거울 안에서는 아무것도 소모되지 않는다. 그러니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험해보고 적과 부딪쳐봐라."

"아공간에 축적해놓은 주문을 막 써도 된단 말임까?"

"현실이 아니잖아. 거울 속 공간은."

"아!"

"너보고 돈을 뿌리라는 게 아니다. 그렇지만 그런 감각 자체에는 익숙해져야겠지."

소피아는 전투 한 번을 벌일 때마다 한 나라의 1년 예산을 불태운다는 이야기까지 나왔었다.

1년이라는 수치는 좀 과장됐고.

1개월 정도는 되겠네.

"공간 능력 활용법도 더 익숙해지고."

"알겠슴다!"

주마등 수련법의 효과.

기대해보마.

*

뽀시래기 팀에게 비장의 수련법을 전수해준 후.

유진은 백두산으로 향했다.

천지 위에 떠 있는 커다란 구조물.

죽음의 요새는 드라이아이스를 연상시키는 희끄무레한 기류를 사방에 흩뿌리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별 일은 없었나?"

[크읏. 별 일이 있을 리 있나.]

"그냥 예, 없습니다. 하면 될 걸 말이 기네. 이 아저씨가."

손가락을 퉁기니 끄아악- 이라는 사념이 튀어 나왔다.

네크로폴리스에 저당 잡힌 혼백.

과거 아라한 길드의 2인자로 있으면서 무수한 수작질을 부려온 흑막, 백성현이었다.

유진은 구룡방을 정리한 후에 백성현의 두개골을 죽음의 요새로 옮겨와서 내부 조율에 써먹었다.

"거기에만 있으니 좀이 쑤시지?"

[제길. 나를 이런 꼴로 만든 작자가 누구인데!]

"아. 그래서 좀 풀어주려고."

쿵-.

죽음의 요새에 나타난 용족의 머리.

필리핀에서 거둔 히드라의 머리 8개가 요새 위에 나타났다.

〔그걸 어디에 사용하려느냐.〕

'뭐기는. 두 번째 엘드리치 드래곤을 만들려는 거다.'

백성현의 혼백은 강인하다.

재능도 뛰어나서.

만일 그가 아라한의 2인자에 만족하고 내정에 신경 쓰지 않았더라면.

이신우와 마찬가지로 8성을 노려봄직한 인재상이었다.

'쓸 수 있는 건 다 써먹어야지.'

〔엘드리치 드래곤이라는 건 그리 쉽게 만들 수 있는 게 아닐 터인데.〕

'맞아. 변칙을 여럿 사용해야 한다.'

파프너를 통해 이미 검증한 방법이 있다.

용족의 사체에 혼백을 이식.

둘이 링크만 되면 불완전한 형태일지언정, 엘드리치 드래곤으로 제작할 수 있다.

'네크로폴리스 조율과 죽음의 요새 연산 보조를 시켜보니 견적 나오더라고.'

괜히 두개골만 뽑아서 안치시킨 것이 아니다.

히드라의 머리는 용족의 성질을 띠고 있으니 엘드리치 드래곤으로 재구성할 수 있었고.

이야.

본인만 괜찮다면 주기적으로 머리를 잘라서 언데드로 만들고 싶네.

〔아서라. 단순한 껍데기에는 혼백의 격이 깃들지 않느니라.〕

그건 좀 아쉽군.

히드라의 머리가 잘려나가니 격도 줄어든 게 그 이유인가.

언데드 복사의 가능성이 사라졌지만 크게 아쉽진 않았다.

"지루하다고 했지? 더 일하게 해주마."

[꺼져! 꺼지란 말이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 했잖아. 네 마음 다 알아."

이렇게 착한 상사가 또 어디에 있을까.

전 상사인 이신우도 좋아할 거다.

아마도.

256화 냄새를 맡다

로마노프와 카리만리스 가문.

7대 명가 중 두 가문의 패권 다툼은 결국 로마노프 가문의 승리로 끝났다.

"참으로 번거로운 일이 이제야 끝났구나."

드미트리는 전용 의자에 몸을 푹 묻은 채 중얼거렸다.

7대 명가는 모두 '신왕'을 수호성으로 모시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카리만리스 가문을 힘으로 짓뭉갤 수 있었음에도, 수호성인 제우스의 면목을 살려줘야만 했다.

"그 놈의 체면이 뭔지. 성좌란 양반이 쩨쩨하게."

"우리 가문의 수호성께서도 듣고 계신다. 자중해라, 소피아."

"가주가 더 열 받아 있는 것 같은데?"

로마노프 가문의 2인자, 소피아는 드미트리를 바라보며 조소를 흘렸다.

카리만리스 가문 수장이 직접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찾아와서 협정을 시작할 때만 해도.

종전까지 1달 넘게 걸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한데, 수호성인 제우스가 문제였다.

종전협상 내내 자존심을 부리면서 튕기고.

카리만리스 가문에 조금이라도 손해가 나는 제안은 어떤 식으로든 안 받으려고 몸부림을 쳤다.

"알렉산더가 수작질을 부린 건 아닐까?"

"그도 난감해 하는 것 같더구나. 만약 그 태도가 연기라면 헌터 대신 연기자로 전형하는 편이 낫겠지."

드미트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중부 유럽과 동유럽의 패권을 놓고 벌인 두 가문의 갈등.

카리만리스 가문도 7대 명가이긴 해도, 가문끼리의 격차는 압도적이었다.

일단.

로마노프 가문에는 '왕'으로 군림 중인 드미트리가 있다.

전 세계에서 둘 뿐인 9성의 초월자.

손짓 한 번으로 도시를 지우고.

마음먹으면 나라조차 하루 안에 지워버릴 수 있는 강자.

그가 전면에 나서지 않더라도, 로마노프 가문의 전력은 카리만리스 가문을 압도했다.

몬스터를 개조해서 만든 키메라.

현대 전차에 마법 공정을 가해 개조한 마도전차.

거기에.

마법병단을 태운 공중항모까지 전장에 투입되니 카리만리스 가문은 일방적으로 피해를 봐야 했다.

힘의 격차가 확실한데도.

종전협상이 지지부진하게 되었으니, 가문 내에서 잡음이 나오는 건 당연했다.

"이미 끝났다. 더 언급하진 말도록."

"쳇."

"그것보단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로마노프 가문의 대외 행사를 도맡은 니콜라이에게 시선이 향했다.

"주목받는 건 안 좋아하는데."

"뜸 들이지 마."

"고모님도 참. 성격 좀 죽이시라니까."

"나이 들어 보이니까 하지 말라고 했지!"

니콜라이는 크흡, 짧게 웃었다.

"다음 안건은 천유진 조사 건입니다."

"천유진? 그게 누구야."

"이모님. 보고서 좀 보십쇼."

"야!"

"한국에서 언데드를 부리는 신관이 나타났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한국? 거긴 어디에 박혀 있는 나라인지."

"극동의 나라입니다."

니콜라이는 싱글거리며 소피아의 투정을 넘겼다.

"근데 신성 주문이라며?"

"가주님께서 직접 방문하셨을 땐 마력의 흔적을 찾으셨다더군요."

"천유진이 다루는 능력은 네크로맨시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조사한 것입니다."

소피아의 머리 위로 의문 부호가 떠올랐다.

"가주가 몸소 행차하셨으면 제압이라도 하지 그랬어."

"용군단에서 주목하고 있더군."

"하. 그 자존심만 센 족속들."

"오딘께서는 그들과 적대하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완성된 공중항모가 외부에 모습을 드러낸 첫 사례.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유진을 압박하고.

네크로맨시와 관련된 비밀까지 얻어낼 생각이었지만, 그는 당돌하게도 '빼낼 수 있으면 빼내봐라.'라는 태도를 유지했다.

그뿐이랴.

니콜라이가 말한 대로 용군단까지 관심을 가지는 탓에 더 압박을 줄 수 없었다.

"카리만리스와 분쟁 문제도 있었으니. 크게 압박할 순 없었지."

"예. 그래서 조사한 것도 최근 일이지요."

"뜸을 들이는 이유가 있는가?"

"천유진이라는 자. 사업을 크게 확장했습니다."

"말해보게."

드미트리는 개의치 않았다.

천유진이 아무리 뛰어난다 한들, 결국은 개인이다.

네크로맨시로 제작한 언데드들?

언데드 병사는 매력적이지만 세력을 확장함에 있어서 유용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상급 언데드인 데스 나이트를 붕어빵처럼 찍어내면 모를까.

한계가 명확하다고 생각했다.

"동남아시아와 인도, 아프리카에서 수에즈 운하에 이르는 최단 루트의 안전을 확보하고 군데군데에 거점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농담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니콜라이는 유진이 점거한 땅과 해양 루트가 표기된 지도를 띠웠다.

"방대한 해양 루트의 판로에 대해서는 산하 단체인 암상에 맡ㄹ겨두었다고 합니다."

"해양 몬스터들은 상대하기가 까다로울 텐데."

"유령선고 해양 언데드들을 부려서 안전을 확보했다더군요."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시간이 빨리 흐르기라도 했단 말인가?"

드미트리는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정보에 계속 되물었다.

이복 동생의 일처리에 빈틈이 없음을 알면서도.

그가 한 말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한국에 갔을 때만 해도 천유진의 세력은 미약했다."

"그 부분은 저도 익히 아는 바입니다만...."

니콜라이도 떨떠름한 건 마찬가지였다.

유럽의 패권을 두고 카리만리스 가문과 분쟁을 겪으면서.

몇 개월 동안 유진에 대해 시선을 뗐었다.

물론.

가문의 주력 정보원들을 투입시키지 않았다 뿐이지, 다른 루트를 통해 꾸준히 정보를 수집해왔다.

"그런데 말이죠. 마담이라고 했던가, 수완이 대단하더군요."

니콜라이는 혀를 내둘렀다.

정보 수집에 외부 인력을 사용했다지만.

그들의 활동을 역이용해서 필요한 정보만을 흘렸고.

블랙 컴퍼니의 확장을 최대한 숨겼다.

그 때문에 블랙 컴퍼니의 사업 규모가 얼마나 확장되었는지 파악하기까지 꽤 딜레이가 발생했다.

"정보에 혼선을 주어 이쪽의 오판을 자연스럽게 유도했습니다."

"뭐야. 그 작은 땅덩어리에도 인재가 있네?"

"구룡방을 무너트리고 아시아에서 제일가는 블랙 네트워크를 구축했을 뿐 아니라, 극동 공화국과도 손을 잡았다고 합니다."

드미트리는 허, 하고 짧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천유진. 그 자가 각성한 지 2년 조금 넘었다고 했던가?"

"예. 그건 틀림이 없습니다."

"2년 동안의 행적만 놓고 보면 나보다도 더 파격적이군."

"마법왕께 비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타인이 닦아놓은 길을...."

"굳이 깎아내리지 말게. 우리와 겨룰 상대의 수준을 내릴 필요는 없지 않는가."

니콜라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전쟁.

마법왕이 내뱉은 말에 담긴 뜻을 모르면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었다.

드미트리는 유진과의 대담을 떠올렸다.

"그때 허세를 부리나 했더니, 정말이었군."

네크로맨시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

그땐 젊은이의 오기라고만 생각했는데, 결과를 보니 자신감을 가질 만 했다.

또한.

이렇게까지 규모를 키웠으니 로마노프 가문의 아래로 들어올 리 없다는 것까지도.

"니콜라이."

"예. 가주님."

"극동 공화국 쪽으로 제3 마법병단을 파견하도록."

"명분은 자국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함이라 발표하겠습니다."

"천무문에도 거래를 하자 전하게."

"예의 건, 말씀이십니까."

"그래. 용의 계곡 출입권한을 원한다고 하였지."

"무왕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런 때를 위해 아껴둔 것이다."

용의 계곡 관리는 로마노프 가문에게 그리 큰 건수가 되지 않았다.

가문의 본단인 상트페테르부르크와 거리도 멀어서 관리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무왕이 출입하기를 희망했을 때 간을 본 건 '거래'할 때가 올 것 같아서였다.

"알겠습니다. 제3 마법병단과 함께 극동 공화국을 경유하여 무왕과 접선하겠습니다."

"그쪽은 맡겨두지."

카리만리스 가문과의 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로마노프 가문에는 다시 한번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

그라운드 제로의 명물.

은하수 펍은 오랫만에 개점 휴업을 맞이했다.

[봄맞이 대청소]

마스크를 쓴 마담이 매장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걸레로 먼지를 훑었다.

"이렇게 청소하는 건 오래간만이네요."

정 노인이 흐뭇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땀도 안 나면서 엄살 피우긴."

"기분이라도 내자는 거죠. 꼭 초를 치셔야겠어요?"

"바쁜 사람 불러놓고 청소하는 건 무슨 예의냐."

"큰일을 치르기 전에는 집을 청소해놔야죠."

유진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니콜라이 안드레예비치 로마노프가 극동 공화국에 방문할 예정이랍니다."

"혼자서 오는 건 아닐 테고."

"제3 마법병단과 같이 온다고 하네요."

"견제와 경고의 의미인가."

"아마, 그렇겠죠."

"로마노프 가문에서 원하는 게 뭘까."

"어머. 그걸 저한테 물어보시는 거예요?"

마담의 눈가가 세모꼴로 바뀌었다.

"아니. 뭐, 질문하는 것도 안 되냐."

"원인제공자가 그렇게 말씀하시면 곤란하답니다."

"누굴 역병 취급하네."

니콜라이라.

이미 구면이기도 한 양반이다.

로마노프 가문의 대외 활동을 책임지는 자의 극동 공화국행.

한국을 비롯하여 동아시아의 국가들은 이미 주판을 두드리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니콜라이는 수완가예요. 무슨 수를 쓸지 모른다고요."

"아마 천무문을 움직이려고 할 거다."

"무왕을 설득할 수 있을까요?"

"용의 계곡 통행권을 거래하려고 하겠지."

"좀 세 보이는 조건인걸요."

"그래도 무왕이 흔들리지는 않을 것 같지만 말이야."

창 우페이가 용의 계곡 출입권에 목숨을 매달았던 건.

온전한 9성에 오르지 못하였기에, 사투를 벌일 만한 곳을 찾아서였다.

근데.

이제는 그 욕구를 채워줄 사람이 생겼네?

"고작 그 이유... 때문에요?"

"말씀이 심하시네. 8성급 소환수 여럿이랑 목숨 걸고 싸울 수 있는 기회가 흔한 줄 아나."

언데드는 핵만 부숴지지 않으면 얼마든지 되살릴 수 있다.

평범한 8성급 헌터는 부상 때문에 몸을 사리는 일이 부지기수.

네크로폴리스의 언데드만큼 창 우페이의 수련에 도움을 줄 만한 세력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니콜라이도 그런 조건은 못 해준다고."

"정말이지. 물에 빠트려도 주둥이는 떠다니실 것 같아요."

요즘 들어서 말씀이 과해지신 것 같은데요.

착각이겠지?

"제3 마법병단은 메시지이자, 시선을 돌릴 용도이기도 해."

"로마노프 가문의 노림수가 따로 있다는 말씀?"

"중국의 암흑가."

호오- 마담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일리가 있네요."

"최근 물밑에서 움직이는 자들이 있을 거다."

"혈족들에게 말해둘게요."

로마노프 가문이 할 행동이야 뻔하지.

회귀 전에 목숨을 걸고 싸워봐서 지긋지긋하게 알고 있다.

'너희들의 수작. 내가 모두 파헤쳐주마.'

유진은 킬킬거렸다.

"또 저렇게 웃으시네."

257화 강철의 거인(1)

로마노프 가문과의 전면전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결이 흐트러졌구나.〕

'마냥 안 좋은 것도 아니야.'

아군의 전력은 회귀 전과 비교했을 때 모자랐다.

당시 네크로폴리스의 전력은.

9성 – 천유진, 박하늘

8성 – 본 드래곤 20마리, 둠 나이트 5구.

7성 – 데스 나이트 67구.

이 정도였다.

〔6성 이하는 언급하지 않는 게냐?〕

'6성 아래는 지금이 훨씬 많은 걸.'

〔호오?〕

'그때는 세력 확장에 소극적이었으니까.'

네크로폴리스는 개성 인근과 접경지대 일부가 전부.

한국의 자주권을 어느 정도 보장해주어서 세력 확장을 최대한 억제했다.

〔용케 그 정도로 만족하였구나.〕

'몬스터들의 시체는 암상을 통해 매입했으니까. 연구할 정도는 됐어.'

〔전생에도 구룡방과 전쟁을 벌였다 하지 않았느뇨?〕

'맞아. 구룡방을 박살내긴 했어도, 지금처럼 중국의 암흑가를 장악하진 않았지.'

그때는 천무문의 눈치를 많이 살폈다.

무왕 창 우페이가 정쟁에 큰 관심이 없는 성향인지도 몰랐고.

천무문 운영의 실권을 쥔 장로들은 유진이 구룡방의 공백을 파고들길 원하지 않았다.

'이젠 달라.'

무왕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데.

장로들이라고 별 수 있겠나.

천무문 장로들의 권세는 무왕이 부여해주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회귀 전처럼 천무문이 로마노프 가문의 편을 들진 않을 거다.'

〔천무문 이야기는 없지 않았느냐.〕

'직접 도운 건 아니야. 내 정보망을 차단하고 로마노프 가문의 주력이 숨어드는 것을 도왔지.'

기습적으로 시작된 로마노프 가문과의 전쟁.

검은 방첨탑 네트워크가 무력화되고.

언데드들은 전투력이 감소된 상태에서 적을 맞이해야 했다.

로마노프 가문의 마법 병단은 방비가 덜 된 네크로폴리스에 어마어마한 화력을 쏟아부었고.

개전 초기에 전 병력 중 40%가 허무하게 잿더미로 변했다.

'습격만 안 당했어도 해볼 만 했을 걸.'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못 이겨. 마법왕을 무슨 수로 막아.'

해볼 만 하다는 건 어디까지나 '버틸 수 있다.' 정도일 뿐.

전쟁이 길어지면 필패다.

그렇지만.

로마노프 가문의 주력을 오래 붙들어놓으면 다른 7대 명가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으니.

시간을 끌어서 전선이 고착화되면.

로마노프 가문도 계속해서 전력을 투사할 순 없었다.

'쭉 버텼으면 협상 테이블에 앉힐 수 있었을 텐데.'

이미 지나가버린 일이다.

전생과 달리, 천무문이 로마노프 가문을 비호할 일이 없다는 것에 만족해야겠지.

'상급 언데드 숫자가 모자란 것도 괜찮아.'

전생보다 수십 년이나 앞당겨진 전쟁의 초읽기.

공중항모의 시제품이 이제 막 나오고 있는 시기다.

로마노프 가문의 전력도 회귀 전과 비교하면 훨씬 뒤떨어질 터.

'해볼 만 해.'

7성 이상 고급 전력만 충원하면.

전력은 로마노프 가문을 앞지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너도 분발해라."

[끄으, 끄으으.]

"파프너, 아니지. 박하늘 씨는 금방 정신 차리고 팔팔하게 움직이더만."

[제, 제길.]

"욕할 정신이 있으면 힘 좀 내봐."

잘린 히드라의 뼈와 살점을 기반 삼아 만든 엘드리치 드래곤 2호기.

백성현은 죽음의 요새 바닥에 엎드린 채 부들거렸다.

"역시 다르네. 재능은 어쩔 수 없나."

[나, 난. 아직, 제 힘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누워서 쉬고 있으니까 당연히 힘을 안 냈겠지."

[제길. 크아아아!!]

힘겹게 일어나던 백성현은 바닥에 다시 한번 고꾸라졌다.

〔저래서야 쓸 수 있겠느뇨.〕

'시간이 필요할 거야. 적응할 때까진.'

벡성현은 파프너하곤 조금 다른 케이스다.

2성으로 너프된 드래고니안 사체에 깃든 박하늘 씨는 금세 육체의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었다.

거기에, 모체가 된 시체는 온전한 형태이니 더더욱 적응하기 쉬웠을 거고.

[마투사] 특성도 궁합이 잘 맞았다.

반면 이 녀석의 몸뚱이는 히드라의 머리를 마개조해서 빚어낸 것이다.

온전한 용족의 기운을 담아내지도 않았고.

머리를 잘라내어 엮어냈으니 손과 발, 꼬리 같은 신체는 있지도 않았다.

[생명] 분야 마법으로 세포와 뼈를 개조.

인위적으로 빚어내었지만 온전한 몸뚱이라고 할 순 없었다.

'팔과 다리를 묶어놓고 서보라는 거랑 마찬가지일 걸.'

〔쉽지가 않음을 알면서도 그리 자극하는 게냐?〕

'충격요법이지. 다 잘하라고 해주는 말이야.'

〔참으로 못되었도다.〕

이 꼴 당하기 싫었으면 안 죽었어야지.

백성현 말고도 엄선해놓은 인재 둘을 추가로 엘드리치 드래건 3, 4호기로 개조.

재활 훈련은 조승철에게 일임해두었다.

[주인이시여. 맡겨주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얘들 빨리 성장시키면 분담할 수 있겠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잘 키워봐라.

그래야 네 일이 줄어들지 않겠니.

*

콰루루루!

붉은 용이 홰를 치며 천천히 지면으로 하강한다.

"블러드 드래곤이다!"

"성자 천유진이 온 게 분명해."

"개성공단에 무슨 일로 오신 거지?"

"뭔 소리야. 천유진 대표가 개성공단 권한을 쥐고 있으니 감사차 오셨겠지."

대표, 성자 등 유진을 지칭하는 표현은 많았다.

그렇지만.

어느 표현을 사용하든 간에.

굳건해진 유진의 위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성자님!! 제 언데드를 봐주세요!!"

"호플리테스 강화 방법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이번에 공물을 바치려 하는데...."

개중에는 역천의 교단 소속이 된 신관들도 있었다.

"사전 일정이 있어서요. 교단 관계자분들은 일정 후에 찾아갈 생각이니, 그때 마저 이야기를 나누죠."

"오, 오오오!!"

"성자님이 교단에 오신다!!"

"성자께서 나를 보셨어!"

"멍청한 놈. 네가 아니라 호플리테스를 보셨겠지."

어.

으으으음.

유진은 낯뜨거운 신관들의 반응에 할 말을 잃었다.

누가 보면 교주라도 되는 줄 알겠어.

〔역천의 교단의 종주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 않느냐.〕

'그리 말하면 맞긴 한데.'

떨떠름한 기색으로 대꾸하고는 개성공단 한쪽에 자리 잡은 신준석의 공방으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동업자님."

"먹을 것 좀 먹으면서 해. 살 빠진 거 봐라."

"일거리나 덜 주고 그런 말씀 하시죠."

"내가 뭘."

"저 양반 보내놓고는 모르는 척 하시는 겁니까?"

샐쭉한 표정으로 공방 한쪽을 가리키는 신준석.

그곳에는 앙상한 뼈 주위로 사슬을 두른 채, 연구에 매진 중인 리치가 있었다.

[흐음. 이 정도로는 모자라.]

"저 놈은 잠도 안 잔다고요. 얼마나 독한 지 몰라."

"언데드는 원래 잠이 없다만."

"자기만 안 잘 것이지. 나를 들들 볶는단 말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데려가겠다. 마침 네크로폴리스도 인력난이 심해서."

"아. 그건 아니고요."

신준석은 리치 앞을 가로막으면서 유진의 시선이 닿지 않게 하려고 바동거렸다.

그렇게 한다고 안 보이겠니.

입으로는 싫다고 해도 몸은 솔직하군.

"그래서 골렘 개발은 잘 되어가고 있나?"

[내가 설명하지.]

리치가 된 육룡은 푸른 안광을 흩뿌리며 유진의 곁으로 스르르 다가왔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냐. 해골바가지야."

[연금술사의 방만함을 토로하려면 주인에게 해야 하지 않겠나.]

주인이라.

처음 리치로 만들었을 때보다 고분고분해진 태도가 영 적응이 안 됐다.

〔저 망자에게도 예의를 가르쳤느냐?〕

'그건 아니고.'

신준석에게 소개시켜줘서 근로 의욕을 북돋아준 것뿐인데.

새 직장이 꽤 마음에 들었나보다.

[골렘 술식과 양산 체제는 꽤 마음에 들더군. 연금술사 한 명이 만들었다고 하기엔 믿을 수 없는 수준이야.]

"의외로 고평가를 하는군."

[거기까지다.]

육룡은 못마땅한 기색을 풀풀 풍겼다.

[이 자는 도무지 체계라는 걸 모른다. 실력은 뛰어나지만 낭비가 많고, 사람을 부리고 가르침을 주는 과정도 효율적이지 않아.]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마. 이 해골바가지야!"

[당신도 조만간 머리는 나랑 비슷한 꼴이 될 것 같은데?]

"이, 이, 이이이이!!!"

앗.

아아앗.

유진은 진지하게 머리 숱을 자라게 하는 신성 주문을 개발해야 하나, 라는 고민을 했다.

"왜 동업자님은 그런 눈으로 제 머리를 흘겨 보십니까!"

"아냐. 내가 미안해. 잘못했어."

"그렇게 보지 말라고!!!"

죄송합니다.

그, 제가 미래를 보고 와서요.

'미래 지식 좀 알려주고 더 부려먹었다고 머리까지 빨리 후퇴할 줄은 몰랐지.'

정말로.

회귀자인 유진조차 이 부분은 예상하지 못했다.

나쁜 건 나비 효과다.

차라리 나비를 욕하십시오. 대연금술사님.

'아무튼 내 잘못은 아닌 듯.'

조금 휑해진 신준석의 머리를 외면하던 중, 육룡과 눈이 마주쳤다.

"결론만 말해."

[내 뛰어난 지성과 경험으로 이 비효율적인 공장 체계를 완전히 뜯어고쳤다.]

신준석은 몇 번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대답을 포기했다.

'효과 확실하네.'

대연금술사의 입을 틀어막다니.

육룡.

그 능력 하나는 대단했다.

적절하게 회유해서 리치로 만들기를 잘했다.

"이 작자가 도움이 된 건 맞습니다만. 그래도 연구라는 건 원래 영감이 중요한 것...."

[체계적이지 않은 것을 영감으로 포장하지 마라.]

"으으으."

신준석 호. 5초 만에 침몰!

더 두면 우리 대연금술사의 머리가 후퇴하다 못해 전멸할 것 같으니 화제를 돌려야겠다.

"진척은 얼마나 됐지?"

"아. 마침 시제품이 나왔습니다."

신준석의 표정은 언제 어두워졌냐는 듯, 환하게 변했다.

"이리 오시죠."

경쾌한 발걸음에 맞춰 천천히 뒤를 따랐다.

영력으로 몸을 살짝 띄운 채로 따라오는 육룡.

두 사람과 언데드 한 구는 커다란 창고 앞에 섰다.

"여기에 보관한 건가?"

"예. 산업스파이가 많아서 보안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내가 볼땐 이미 좀 뚫린 것 같다만.]

"부정 타는 소리 하지 마. 이 해골바가지야."

괜찮다.

회귀 전에도 골렘이 양산된 것은 수 년 뒤니까.

스파이가 공정 일부를 빼갈 순 있어도.

핵심인 [골렘 제작] 주문의 요체를 얻지 못하면 말짱 황이다.

골렘 제작 스킬북을 얻든지.

신준석이나 유진을 납치해서 스킬을 전수받던지.

둘 중 하나가 아니면 스파이가 정보를 빼가더라더 핵심에는 다가갈 수 없다.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기이이이이익-.

철로 만들어진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양옆으로 밀려났다.

그 사이로 드러나는 커다란 실루엣.

"오."

유진은 무의식적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강철 거인.

신준석은 그 반응이 마음에 드는 듯, 히죽 웃었다.

"어떻습니까. 강화 골렘의 시제품이."

258화 강철의 거인(2)

전고는 10미터.

3층 건물 크기의 거인은 미동 하나 없이 우뚝 서 있었다.

전신 갑주를 착용한 기사와 흡사한 형태.

오른손에 쥐고 있는 장검.

왼팔 옆에는 타워 실드가 붙어 있다.

"엄청나군."

가만히 있다고 해서.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건 아니었다.

강철로 된 몸뚱이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마력의 파장.

7성에 도달한 유진도 마음을 놓을 수 없을 만한 기세를 내뿜었다.

[강화 골렘 - 시제품]

등급 : ★★★★★★★

힘 : 3,462 / 민첩 : 2,580 / 체력 : 4,154 / 맷집 : 5,265 / 마력 : 5,419

*특성

강철의 혼[A] / 인공 신체[A] / 기계 최적화[A] / 미지의 기술[A] / 자동 학습[B] / 정밀사격[B] / 마력 강화[B]

"어떻습니까?"

"...대단하군."

벌써.

7성급 골렘을 만들어내다니.

회귀 전보다 얼마나 빨라진 거지?

골렘 제작 스킬을 전수해준 덕에 몇 년이나 시간을 앞당긴 건 둘째 치자.

아무리 그래도 말이야.

못 보는 사이에 7성 골렘을 뚝딱 만들어낼 줄은 생각도 못했다.

[양산은 불가능하다.]

"기대하지도 않았다. 7성 급이 양산되면 그게 7성이냐."

[아쉬운 기색을 보이기에.]

"한 개도 안 아쉽거든."

실은 1그램 정도는 아쉽다.

전생에도 7성 이상 전투 골렘은 양산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다.

대연금술사가 공정 내내 관여해야 하는 건 기본이고.

골렘의 전투력을 올려줄 각종 촉매와 엔진, 그 외에도 값비싼 재료가 엄청나게 소모되었다.

시제품으로 나온 녀석도 마찬가지일 터.

"제작 시간과 단가가 어떻게 되지?"

"1달은 꼬박 매달려야 합니다. 단가는, 그게 말이죠."

"왜 말을 돌려."

"6, 600억 정도 됩니다."

"생각보다는 적네."

"예? 동업자님. 금전감각이 어떻게 되어버린 겁니까?"

"말씀이 좀 심하셔. 난 정상이거든."

구룡방과 사탄교 신자들을 토벌하면서 상급 언데드 수십을 만들었지만.

평범한 상황에서는 7성 이상 언데드를 그렇게 붕어빵처럼 찍어내지 못한다.

"대격변 이전 전투기 값이 얼마였는지 알아?"

"그걸 어떻게 압니까."

"4천억이야."

7성 능력자는 대격변 이전 최신 전투기보다 더 강력한 전략병기다.

물론.

강화 골렘의 스펙이 7성 수준이어도 동일 성위 급 실력자와 맞붙으면 숙련도 문제가 있어서 쉽지 않겠지만.

전선유지만 해줘도 1인분 몫은 한다고 봐야한다.

"근데 저 방패. 생긴 게 조금 이상한데."

[이제야 관심을 가지는군.]

"네 작품이냐?"

[그렇다. 당신이 언데드 개조에 이용했던 방식을 일부 활용했지.]

타워 실드 안쪽에 달려있는 기다란 포신.

왼팔을 정면으로 들면 곧바로 사격이 가능한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20초에 한 번씩 사격 가능. 최대 사거리는 30킬로미터. 위력은 6성 마법인 플레임 스트라이크 급이다.]

"골렘 본체의 마력을 끌어다 사용하는 모양이군."

[그 위력을 내려면 당연한 일이다. 초중전차처럼 포탄 비축분이 많지 않아서 장전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최대 3발 사격 가능하다.]

"최대 사거리에서도 플레임 스트라이크 급 위력이 나오나?"

[그렇진 않다. 최대 위력이 보정되는 거리는 약 5킬로미터 정도다.]

"사거리를 낮추는 대신 파괴력을 올리는 방법은?"

[그럼 견제의 의미가 없지 않나.]

"이 골렘은 장거리 공격이 메인이 아니다. 성능을 낭비하는 꼴이야."

유진은 혀를 찼다.

타워 실드에 포신을 달아놓느라, 방어력이 낮아졌고.

장거리 타격이 가능하지만 여분의 포탄이 떨어지면 재미 보기 어렵다.

[적이 다가오기 전에 포탄을 충전하면 되는 일!]

"그 포탄은 땅 파면 나온다냐."

제일 중요한 건 포탄을 제작하는 것도 상당한 노동력이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골렘을 제작하기도 바쁜데.

포탄까지 따로 만든다고?

"네 초중전차들 뜯어서 개조한 사이클롭스들이면 충분해."

[크으으윽!!]

너무 속 쓰린 표정 짓지 마.

그래도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다.

회귀 전에 신준석이 만들었던 전투 골렘은 근접전 특화 병기였거든.

방어력이 낮아졌지만 순간적으로 화력을 쏟아 부을 수 있는 수단이 생겼으니.

일장일단이라고 해야겠지.

"차라리 이건 어때. 이 골렘 전용 사격 무기를 만드는 거다."

[그게 이 병기와 무슨 차이가 있다고.]

"실체가 있는 포탄이 아니라 마력으로 된 탄환을 쏘자고."

[...?]

"그 로봇 만화 보면 총을 쓰다가 근접전 돌입하면 칼도 뽑고 그러잖아."

[제정신인가. 마도공학을 감히 만화 따위와 비교를....]

육룡은 사념을 멈추고 골똘히 무언가 생각했다.

[마력 탄환? 골렘의 출력을 끌어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야. 사거리는 떨어지겠지만 위력 보정도 충분히 가능하고.]

그 뒤로도 혼잣말을 막 내뱉던 육룡이 푸른 안광을 흩뿌렸다.

[방금 전 아이디어. 되겠는데?]

아무렴.

그거, 원래 당신이 써먹었던 아이디어다.

마도공학으로 개선된 출력을 전용 병기에 보내서 중거리 견제로 사용하는 것.

사격을 많이 하면 본체의 마력 수치가 크게 떨어지니 적당히 조절해야겠지만 원거리 견제인 만큼 이쪽에서 페이스 조절이 충분히 가능하다.

골렘은 초중전차보다 출력도 더 높은 편이니 효과적일 터.

"근데 얘 정식 이름이 뭐야? 강화 골렘이라고 쭉 부르진 않을 거잖아."

"생각 안했는뎁쇼."

[그렇게 한가한 곳에 머리 쓸 시간이 없다.]

이 무신경한 사람들.

개쩌는 골렘 만들었으면 근사한 이름 정도는 붙여줘야지.

〔짐이 첨언해도 되겠느냐?〕

'말해봐.'

〔탈로스라 부르면 좋겠구나.〕

호오.

꽤 괜찮은 이름이군.

"동업자 양반. 우리 성좌께서 계시를 주셨어."

"오, 오오오!"

"강화 골렘의 제품명은 앞으로 탈로스라고 하지."

"힘이 느껴지는 이름이군요."

[올림포스의 성좌인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청동거인이군.]

"맞다. 이 골렘과 잘 어울리지 않나?"

[주인의 성좌. 꽤 센스가 훌륭하다.]

그렇다고 하는데요?

〔크하하하핫! 이 작은 인간.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쓸 만하구나.〕

호탕한 크로노스의 웃음소리가 유진의 머리를 크게 울렸다.

"그럼 테스트나 하자고."

"테스트요?"

"스펙 상 능력만으로는 부족하지."

실전에서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 미리 파악해둘 필요가 있다.

마침 탈로스의 특성 중 [자동학습]도 있으니, 전투 경험은 쌓을수록 도움이 된다.

"알겠습니다."

신준석은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

개성공단 위에 자리 잡은 네크로폴리스.

죽음의 영지 서쪽은 아라한 길드와 전쟁을 벌였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깊게 패인 고랑.

녹아버린 땅.

그 외에도 온갖 마력이 뒤엉켜 있어서 평범한 사람은 접근하기 어려운 환경이 되어버렸다.

"일부러 방치하는 겁니까?"

"뭐, 그렇지."

예전에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경험이 있어서.

본진으로 향하는 통로를 활짝 열어두기보다 저지선을 만들어두는 것이다.

쿵- 쿵-.

강철의 거인.

이젠 [탈로스]라고 불리게 된 전투 골렘은 육중한 몸을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개성 앞마당에 나왔다.

[흠. 출력 손실이 12% 정도 있군.]

"그러게 말입니다. 마력 전달 과정에서 비효율적인 움직임이 있네요."

[마력 회로를 추가로 배치해야겠어.]

"그렇게는 안 됩니다. 출력을 올리려다가 안정성이 떨어진다고요."

[다른 방법이 있나?]

"마력 전달 과정에서 손실이 있으면 이 주문으로...."

전문가들 이야기는 나중에 해주시지.

유진은 [흑암의 반지]에 보관 중인 송명석을 꺼냈다.

[싸움입니까. 주군?]

"어. 저 친구랑 스파링 좀 해라."

[골렘이군요.]

"어때. 해볼 만 하지 않겠냐."

[몸 풀기로 딱 좋은 상대입니다.]

송명석은 자신만만하게 칼 두 자루를 뽑았다.

"내 위대한 발명품을 몸 풀기용으로 취급하는 거냐!"

[나도 참여했다.]

"아. 그건 아는데요. 아무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연금술사와 리치는 크게 반발했다.

"탈로스. 저 어리석은 언데드한테 네 힘을 보여줘라."

「명을 받듭니다.」

탈로스의 헬멧 위로 붉은빛이 떠올랐다.

[마력 방출]

[돌진]

등 뒤의 버니어에서 푸른 불꽃이 솟구쳤다.

마력을 압축.

버니어를 통해 분사하면서 강한 추진력을 얻고.

동시에 스킬을 사용해서 10미터 크기의 거체인데도 민첩한 움직임으로 거리를 빠르게 좁혔다.

[이 거리를 한 순간에 좁힌 겁니까?]

F = MA

힘은 질량 + 속도다.

마력이라는 이형의 힘이 더해졌어도, 저 진리는 달라지지 않는다.

아니.

도리어 서로의 마력이 엇비슷하면 질량이 높은 쪽이 유리했다.

[오러]

[체인 소드]

칼날 위에 맺힌 상어 이빨 모양의 오러들이 맹렬하게 회전하면서 위이이잉- 공기를 울렸다.

[개나 소나 오러를 사용하는 겁니까!]

송명석은 분노를 터트렸다.

자신이 오러를 다루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죽은 뒤에야 겨우 펼칠 수 있었고.

그마저도 익숙해지기까지 피나는 노력이 필요했다.

한데, 저런 영혼도 없는 고철 덩어리 따위가 오러라니!

[암흑 강기]

[텐터클 블레이드]

뒷걸음질 치며 암흑 강기 다섯 가닥을 뽑아내어 회전 중인 오러 소드를 휘감았다.

카가가가각-.

의념을 실체화한 힘.

암흑 강기 앞에서는 탈로스의 고출력 오러도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톱날처럼 회전하며 엄청난 출력을 자랑하던 푸른빛이 암흑 촉수에 휘감겨서 깎여나가고.

오러를 일으킨 칼날에도 손상이 갔지만 탈로스는 검을 멈추지 않았다.

송명석을 쫓는 칼날.

[피해가 얼마든 상관없다, 그 말입니까?]

[분광검]

[5초식 - 적광검]

암흑 강기로 펼치는 분광검 최후 초식.

극한까지 압축된 강기가 탈로스의 칼날을 옆으로 쳐냈다.

동시에 앞으로 전진하는 송명석.

땅에 박힌 거검을 회수하기도 전에, 강철의 거인에게 파고들어서 쌍검을 휘둘렀다.

[듀얼 블레이드]

[분광검]

[5초식 - 적광검 x 2]

텐터클 블레이드로 강기를 대량 운용하는 게 아닌.

정밀도와 초식 완성도를 늘려서 일점으로 타격하는 것.

우지지지직- 합금 갑주가 일그러지면서 10미터의 거체가 눈에 띠게 휘청거렸다.

"스펙은 압도하고 있을 텐데!"

[싸움이라는 건 능력치로 하는 게 아닙니다!]

불의의 공격을 받아 기울어지는 탈로스.

샤아아아악-!

등 뒤의 버니어에서 다시 한번 푸른 불꽃이 분사되었고.

무너진 균형을 순식간에 되찾더니 방패를 들었다.

[그 무식한 방패로 치기라도 할 것입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

대답은 육룡에게 돌아왔다.

방패 뒤에 달려 있는 기다란 포구.

포신이 반짝 빛나고.

송명석의 푸른 귀화가 좌우로 흔들렸다.

[저기에 왜 총이 있는 겁니까?]

그것보다.

총이 맞기는 한 건가.

콰아아아앙!

송명석의 물음은, 곧이어 발사된 포탄 덕에 바로 해결되었다.

공중에 떠 있는 적을 향한 영거리사격.

못 맞추는 게 이상했다.

[빌어먹을, 입니다.]

수 미터 뒤로 튕겨나간 송명석은 텐터클 블레이드로 겨우 포탄을 막아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서로 한 방씩 주고 받은 상황.

'역시 송명석이 한 수 위인가.'

몇 합 더 주고받으면 탈로스를 고철로 만들 수 있겠지.

그건 곤란하다.

"동업자 양반. 조율할 수 있지?"

"물론입니다."

"방금 전 부분 피드백해서 추가로 학습시켜. 10분 준다."

[주군. 이런 적은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봐. 너한테도 좋은 상대가 될 거다."

요즘 벽을 앞에 두고 답답한 마음이지?

이 녀석이랑 스파링 뛰다 보면 금세 해결될 거다.

259화 업그레이드가 완료되었습니다.

육중한 발걸음과 금속끼리 나는 충돌 소리.

푸시이이익! 이라는 엔진음과 마력을 분사하면서 나오는 증기음 비슷한 소리가 뒤섞인다.

[무생물 주제에 건방집니다.]

[텐터클 블레이드]

[분광검]

[적광검 X 5]

일점으로 모인 붉은 강기.

한층 움직임이 자연스러워진 강기 다발들이 합금 강판을 꿰뚫는다.

마력으로 강화한 타워 실드도 암흑 강기 다발을 집중시킨 적광 앞에서는 제 형태를 유지하지 못했고.

우자지지직!

방패 한가운데에 구멍이 나는 것을 허용했다.

「예상 범위 내입니다.」

탈로스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골렘은 무뚝뚝한 기계음을 내뱉으며 한가운데가 뻥 뚫린 방패를 어깨에 견착.

두 다리에 힘을 주어 송명석을 들이박았다.

[이런 잔재주를!]

암흑 강기를 전개하면 마력으로 강화한 탈로스의 동체도 금방 베어버릴 수 있었다.

그 대신.

베다가 압도적인 질량과 힘에 짓뭉개져서 산산조각 나겠지.

뭉개지더라도 반격하거나.

피해를 좀 입더라도 회피하거나.

[무생물 주제에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겁니까?]

송명석의 푸른 귀화가 한층 진해졌다.

붉은 광채가 회수된 직후, 하얀 강기가 팽그르르 회전했다.

백광검.

분광검의 초식 중에서 가장 방어적인 기예를 다섯으로 펼쳐서 맹렬하게 움직이며 방패를 밀어낸다.

쩌어엉!

강한 반탄력에 휘청거리는 탈로스의 신형.

둘 사이의 질량 차이를 감안하면.

얼룩말이 코끼리를 밀어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대의 하수인에게 이런 재주도 있었더냐?〕

'아니. 방금 깨우친 것 같은데.'

이전까지는 [텐터클 블레이드]로 암흑 강기를 방출하기에 급급했던 송명석이다.

그렇지만.

무왕의 대련을 목도하고.

히드라의 목덜미를 베어내면서 얻은 강기 운용의 깨달음이 더해지더니.

탈로스라는 훌륭한 샌드백(?)을 상대하면서 힘을 아낌없이 낸 덕에.

암흑 강기를 보다 능숙하게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하루 종일 치고받은 언데드와 골렘.

둘 다 생물이 아니라서 지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대련을 벌이다가 파손 부위가 생기면 유진이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하거나 신준석의 솜씨로 골렘을 수리.

바로 대련을 이어갔다.

"이 정도면 데이터는 충분히 쌓였나?"

"개선점을 여럿 확인했습니다. 역시 전투에 투입해봐야 문제점이 눈에 들어오는군요."

[효율 개선. 주인이 말한 대로 독립 무장으로써의 포 개발 등.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늘었다.]

말은 불만스러웠지만.

신준석과 육룡에게는 불편한 기색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저럴 줄 알았지.'

이러니까 신준석한테 일 주는 걸 멈출 수 없다는 것이다.

눈 벌게진 거 봐.

일을 저렇게 사랑하는 사람이니.

과제를 계속 주는 거야말로, 최고의 선물 아닐까?

-참으로 후안무치하구나.

'왜. 누구나 행복한 세계의 완성인걸.'

모두가 행복하면 그걸로 된 거 아닐까요.

*

[주군. 속하에게 잠시 시간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 그래라."

[감사합니다!]

송명석은 연이은 접전과 대련에서 얻은 깨달음을 정리하러 흑암의 반지에 들어갔다.

거긴 고요해서 생각을 정리하기가 딱 좋다나.

당분간은 급한 일도 없고.

정말 급박한 상황이 되면 [호플리테스]로 애꾸눈을 불러내든 하면 되니.

어지간하면 송명석을 소환할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다음 일정은 신전.

신관들은 유진이 오기를 목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다.

"성자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축복 하나 내려주십쇼!"

거, 축복이 주문만 하면 툭툭 나오는 줄 아는고만.

"기여도가 높아지면 성좌님께서 눈여겨보실 겁니다."

"역천의 거인께서 주신 계시입니까?"

"그렇지요. 역천의 거인은 신자들을 모두 굽어살피고 계십니다."

유진은 자비로운 표정을 지었다.

〔욱, 우우욱.〕

'무슨 일이야?'

〔짐이 육신을 잃어서 망정이지. 제위를 강탈당하기 전이었다면 구역질을 참을 수 없었을지 모르겠구나.〕

'말씀이 심하시네.'

〔또한 이 작은 인간들에게 공수표를 남발하는 것도 그러하니라. 짐은 성좌로서의 격이 모자라니 이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을 수 없느니라.〕

유진에게 들러 붙어 있는 것은 변칙.

'성자'란 매개체와 더불어, 온전한 성좌가 되지 못하여서 임시로 들러붙은 것이다.

변방 잡귀라고 놀린 것도 그 이유다.

'신도들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거지. 다른 성단에서 신자를 펴본다고 해서 뭘 해주는 것도 아니잖아.'

〔그건 그렇다만.〕

'어차피 신도들의 공헌도는 신전에서 확인할 수 있어.'

그러니까 직관하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

결과는 같았다.

'일 좀 하시죠. 성좌 나리.'

신자들의 공헌도에 따른 정산.

축복을 내려주든.

새 주문을 하사하든.

교단의 확장에 기여한 만큼 보답을 해줘야 한다.

마침 신전에는 크로노스가 거할 수 있으니 딱 좋지 않은가?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구나.〕

'반쯤은?'

신관의 숫자가 많지 않으면 나중을 기약할 생각이었다.

근데 판이 제대로 깔려버렸네.

유진에게 붙어서 늘 잔소리만 내뱉는 크로노스가 밥값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밥값이라니. 짐을 무어라 생각하는 게냐!〕

'변방 잡귀?'

〔가아암히! 짐에게 그런 모욕적인 언사는 다시 하지 않기로 약조하지 않았느냐!〕

'생각은 할 수 있잖아. 물어본 건 성좌 나리라고.'

〔고얀 것!〕

무전취식은 곤란합니다. 성좌 나리.

공짜로 격과 업만 먹으면 그게 변방 잡귀지, 성좌인가요?

그 뒤로는 정산 시간.

신성 주문과는 별개로, 소소한 축복을 내려주거나 신성이 깃든 아이템을 내려주는 등 각 신자마다 합당한 보상을 내려주었다.

〔어디까지 짐의 밑천을 털어버리려고 이러느냐!〕

'성좌 나리 힘만 쓰는 거 아니거든?'

성유물까진 아니어도, 크로노스가 직접 신성을 부여하는 작업이다.

평범한 물건으로는 효율이 떨어지니.

미리 암상에 주문해서 신성과 잘 맞는 재료들을 구해서 신전에 비치해두었다.

'나도 출혈 없는 거 아니니까 너무 투덜거리지 마쇼.'

〔그깟 재화와 짐의 은총을 동일 선상에 놓는 것은 너무 과하지 않느뇨.〕

'돈 한 푼 직접 벌어본 적도 없는 양반이 무슨.'

〔짐은 티탄의 왕. 공물을 받으면 받았지, 직접 손을 뻗을 일은 없느니라.〕

'이래서 성좌들이란.'

그 누구보다도 재화에 관심이 많으면서.

정당한 노동의 대가는 폄하한다.

잘난 분들은 다 그 모양인가.

〔크흐흠.〕

크로노스는 더 말하지 않았다.

'우리도 정산할 게 하나 있잖아.'

〔무얼 말하려는 게냐?〕

'가호.'

〔흐으으음. 이번에 신성 소모가 커서 윗 단계의 가호를 빚어낼 힘은....〕

'그거 하려고 힘 비축해놓았다고 한 게 언제인데.'

〔쓸데없는 건 잘 기억하는구나.〕

크로노스는 못마땅한 듯이 중얼거렸다.

'그래서. 답은?'

〔신전 중심으로 와라. 새로운 힘을 부여하기에는 그곳이 알맞을 터이니.〕

호오.

그냥 찔러봤는데, 진짜로 뭘 준비해놓은 모양이네?

유진은 경쾌하게 신전 안쪽으로 걸어갔다.

*

어둠에 잠긴 공간.

빛이라고는 등불 몇 개가 전부요, 바닥에는 드라이아이스 같은 기류가 깔려 있어서 음산한 느낌이 물씬 났다.

'처음 만들었을 땐 안 이랬는데?'

〔죽음을 거스르는 개념과 어울리는 분위기로 인테리어를 추가한 것뿐이니라.〕

'좋은 아이디어군.'

〔웬일로 짐의 행위를 쓸모없다 탓하지 않느뇨?〕

'성좌 나리가 바뀐 위상과 성질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잖아.'

크로노스의 본질은 티탄 신족.

지금도 사람을 보면 말버릇처럼 '작은'이란 수식어를 붙이는 게 증거다.

한데, 신전 내부를 죽음과 맞닿은 식으로 꾸미면 '죽음을 거스르는' 개념에 더욱 밀접해지니.

크로노스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티탄'이라는 개념보다 새로운 성좌의 이름에 적응해간다는 뜻이다.

〔그대답지 않게 왜 그러느냐. 평소처럼 깎아내리고 폄하하지 않으니, 다른 사람의 혼령이라도 빙의한 게냐?〕

'칭찬을 해줘도 난리야. 빨리 가호나 내려주쇼.'

〔더욱 깊이가 있어진 가호를 받아들이려면 먼저 짐의 고뇌를 이해해야 하느니라.〕

유진은 팔짱을 낀 채 신상을 바라보았다.

말해보라는 액션.

크로노스가 천천히 운을 떼었다.

〔역천의 가호는 순리에서 벗어난 것에 초점을 둔 힘. 강력하나 계약자 같은 마법계나 신관계는 다루기 힘들단 약점이 있느니라.〕

유진이 회귀하면서 근접전을 부전공 개념으로 익혔고.

[지박거인] 같은 술법으로 가호를 활용할 수 있으니 망정이지.

강력한 건 사실이나 양날의 칼 같은 개념이 〔역천의 가호〕였다.

〔현재의 가호로는 마법왕이란 작은 인간을 대적하기 어려울 터. 그렇기에, 짐은 그를 겨냥한 두 번째 가호를 어떤 식으로 만들지 고민했느니라.〕

'파격적인 옵션을 넣으려면 그만큼 다른 부분을 희생해야 하니까.'

뭐든 반작용이 따르는 법.

가호도 마찬가지다.

〔역천의 가호〕 - Lv1 이 강력하긴 해도.

사용하기가 까다로운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뭐, 여기까지는 다 아는 내용이잖아.'

〔그렇지.〕

'우리 성좌 나리께서 내린 답을 듣고 싶다.'

〔짐이 새롭게 획득한 개념, 그러니까 죽음을 거스르는 영역의 본질은 반전이다.〕

삶과 죽음.

필멸자는 물론이요, 불멸자라 지칭하는 성좌들이나 위대한 존재들조차 죽음을 피해가진 못한다.

그럼 왜 불멸자라고 부르는가?

늙지 않고 평범한 방법으로는 해함을 받지 않기에, 필멸의 운명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이다.

그렇지만.

진정한 의미의 '불멸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짐의 영역은 순리를 뒤집는 것. 죽음이란 필연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니라.〕

'그렇지. 어느 성좌도 주관하지 못했던 개념을 손에 넣었으니.'

〔하면 그 개념을 넓게 퍼트려서 간섭하는 것도 되지 않겠느냐?〕

우우우웅-!

바닥에 깔려 있던 기류 형태의 성력이 유진을 중심으로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그에 공명하듯 신전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잘게 떨렸고.

막대한 기운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유진은 거부하지 않고 크로노스의 신성을 받아들였다.

〔짐은 이 고뇌를 통하여 죽음을 거스르는 영역을 더 깊게 이해하게 되었느니라.〕

'그러니까 내 덕이란 말이네?'

〔산통 깨지 말고 듣기나 하여라.〕

지분은 확실하게 따져야죠.

유진이 투덜거렸지만 크로노스는 개의치 않았다.

〔짐의 깨달음이 더해진 새로운 힘을 받아들이어라. 유일한 대행자인 천유진이여!〕

스아아아앗!

임계까지 차오른 신성이 유진의 전신에 스며들었다.

세포 하나하나에 깃드는 신성.

크로노스가 부여한 새로운 힘은 9성에 도달했던 초월자에게도 영감을 부여할 만큼 강렬했다.

'이 느낌. 대체 뭐지?'

조금만 더.

크로노스가 언급했던 '죽음을 거스르는 영역'의 개념의 신기원을 맛보고 싶다.

그렇다면.

더 완성도 높은 네크로맨시를 펼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유진의 마음을 물들였다.

[역천의 가호가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갑니다.]

[역천의 가호 Lv 1 → Lv 2]

[역천의 영역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아.

유진은 새 힘을 깨우쳤다는 쾌감과 아쉬움이 공존하는 탄성을 내뱉었다.

260화 강화된 역천의 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