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강화된 역천의 가호
[역천의 가호 Lv 2]
사용자를 중심으로 역천의 개념을 퍼트린다. 모든 파장에 간섭하여 순리를 반전시킨다.
순리 반전.
설명만 놓고 보면 감이 안 오는 능력이다.
'이전 능력도 그러더니. 하여간 폼 잡는 걸 좋아해.'
〔언어에는 힘이 담겨 있느니라. 시스템에 짐의 의지를 새기는 것이니 허투루 할 수 없지 않느냐.〕
'그러니까 설명을 잘 들으란 말이었군.'
들어도 이해가 안 가서 문제이지만 말이야, 라고 뒷말을 내뱉은 후 신전 밖으로 나왔다.
역시.
직접 사용해봐야 감이 오겠어.
신전 밖으로 나와서 [호플리테스]를 사용했다.
파프너도 호출했지만, 날아와도 30분 정도는 걸린다고 하니 빨리 부를 수 있는 녀석을 곧바로 소환했다.
[쿠후훅. 불렀나.]
"실드 마법을 펼쳐봐라."
[쿠훅. 알았다.]
흑색 막이 애꾸눈의 전신을 감쌌다.
암흑으로 물든 방어 마법, 다크 베일이다.
5성 이하 공격은 거뜬하게 막아내는 강력한 결계.
유진은 심호흡을 내뱉은 후, 막 부여받은 신성을 천천히 개방했다.
'흐읍. 영력 소모가....'
평범(?)한 7성 마법계 헌터의 배가 넘는 영력을 소유했는데도.
단계가 올라간 역천의 가호를 발동시키자마자 어마어마한 영력이 소모되었다.
'만전이라고 해도 30초면 영력이 바닥나버리겠어.'
〔저번에도 흡사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느뇨.〕
'역천의 가호를 처음 얻었을 때 말하는 건가.'
〔그러하니라.〕
믿고 써봐라, 라는 말이군.
유진은 짧게 웃은 후, 넓게 펼쳐진 역천의 가호 운용에 집중했다.
소모 값이 크면.
그만큼 효과도 강대하다는 방증일 터.
'전개 방식은 역장. 범위는 약 50미터 정도인가.'
애매한 거리다.
무투계를 상대하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겠지만.
상대가 마법계라면 유효 범위 안에 넣기까지 꽤 접근을 해야 한다.
뭐, 가호 1레벨처럼 일단 맞고 나서 반응하는 카운터 스타일은 아니니, 활용 면에서 좀 더 이득이긴 하다만.
대신 영력 소모가 엄청나게 늘어났으니 일장일단이 있다고 해야겠지.
'역장의 범위 안에 있는 마력의 파장이 모두 느껴진다.'
감지 수준이 아니다.
자신의 영력을 만지작거리듯.
대기 중에 분포되어 있는 마력은 물론이요, 애꾸눈이 전개한 마법의 구조를 완전히 읽어낼 수 있고.
몸속에 깃든 영력까지도 손에 잡힐 듯 훤하게 느껴진다.
'여기서 끝이면 재미없잖아.'
감지 능력?
영력을 무지막지하게 잡아먹는 것치고는 심심한 능력이다.
크로노스가 부여한 두 번째 능력의 진가.
간섭과 반전이다.
[쿠훅?]
애꾸눈을 감싼 시커먼 막이 파르르 떨린다.
물리적인 충격이나 마법을 해소하면서 내구도가 깎이는 것이 아닌.
마법의 구조에 이물질이 들어오면서 와해시키는 것에 가까웠다.
10초 만에 흩어져버린 흑색 방어막.
[쿠후후훅. 디스펠을 쓴 건가.]
"조금 다른데. 저항해보려면 한 번 해봐라."
[쿠후훅. 명이라면.]
애꾸눈은 다시 한번 영력을 끌어올려 주문을 사용했다.
재배열되는 영력.
손에 잡힐 듯 움직임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유진은 막 배열을 바꾸어가는 영력에 간섭했다.
파지지지직!
강렬한 반탄력과 함께 재배열되던 영력이 꼬이더니 애꾸눈의 코앞에서 펑- 하고 폭발을 일으켰다.
[쿠훅?]
"이런 거였군."
개념의 반전.
역장 범위 안에서는 세계의 법칙을 비트는 행위, 다시 말해 마법을 전개하려고 하면 배열 방식이 마구 비틀어진다.
가호를 펼치기 전에 전개한 마법에 대해서도 간섭이 가능하지만.
이미 구축된 배열을 틀어버리는 것보다는 효과가 덜했다.
그럼에도.
업그레이드 된 가호의 효용성이 떨어진다고 볼 순 없다.
주문 구조를 인위적으로 일그러트리는 디스펠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대(對) 마법 카운터.
역천의 가호 1단계가 온갖 능력에 대응할 수 있다면.
2단계는 오직 마법에 대항하는 능력으로 디자인 된 것이다.
"암흑 강기를 펼쳐봐라."
파츠츠츠!
검게 물든 애꾸눈의 팔에 역장의 능력을 집중해서 불어넣었지만.
반탄력과 함께 약화시킬 뿐, 마법을 무효화시키는 식으로 극적인 효과를 볼 수는 없었다.
'의념을 구현화한 힘에는 파고들 여지가 없다는 거군.'
충분하다.
범위 안에 들어온 모든 마법에 간섭하고, 전개할 때 무효화시키는 능력이라.
무지막지한 영력 소모도 납득이 갔다.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거라.〕
'다른 기능이 또 있나?'
〔성력에도 마찬가지이니라.〕
'그 말인즉슨, 아우라를 완전히 무효화시킬 수 있다는 건가.'
〔맞도다.〕
호오.
유진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배후성의 대리인에게 허락되는 강력한 이능.
신성을 제외한 모든 피해를 90%나 줄여주는 능력, '아우라'도 완전 무효화가 가능할 줄이야.
크로노스가 이 능력을 부여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러면 싸울 수 있겠느냐?〕
'해볼 만 하겠는데.'
시간을 끄는 정도가 아니다.
거리.
50미터라는 범위 안에만 마법왕을 끌어들이면.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상대가 마법왕인만큼 예비 수단을 준비해두었겠지만.'
일격에 끝내지 못해도 괜찮다.
마법왕은 유진을 만날 때마다 역천의 가호를 의식할 수밖에 없을 테니.
가호 2레벨을 발동했을 때 자신도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애초에 마법전에서는 드미트리를 넘어서기 어려웠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겨우 동수를 이룰 정도의 막강한 적이니.
또, 유진에게는 회귀 전과 달리 '오러'라는 비장의 수단도 생기지 않았던가.
'진짜 연습 더 해서 오러 블레이드라도 익혀야 하나.'
유진은 주마등 수련법을 자신도 써먹어야 할지, 진심으로 고민해보았다.
*
[나 왔어.]
"조금 쉬었다가 테스트 시작하자."
[테스트?]
"성좌 나리께서 새 능력을 주셔서 말이야."
[오. 나도 받을 수 있는 건가.]
"글쎄. 아직 역천의 가호 1단계도 100% 소화하지 못했잖아."
[신경을 쓸 게 너무 많아.]
오래간만에 만난 파프너는 볼맨 소리를 냈다.
놀라운 걸.
파프너한테 버겁다는 식의 불평을 들을 줄이야.
[내가 만능인 줄 알아?]
"아니었나."
[오러 블레이드 응용도 아직 마음대로 안 되지, 몸은 너무 강해졌지, 원시 마법 수행도 도돌이표이고. 으으으.]
파프너가 저런 소리도 할 줄 알았구나.
유진은 전생과 현생의 파트너가 처음으로 내뱉은 약한 소리에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나도 사람이야! 이젠 용이지만.]
"흠. 그래도 너라면 잘 해낼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해내긴 하지. 그래도 힘든 건 어쩔 수 없다고.]
걱정하지 마렴.
넌 회귀 전에는 생전에 쓰지 않았던 검을 들고 대성해서 헬 나이트로 성장하기도 했단다.
지금은 원래 주특기인 육탄전을 수련하는데다, [마투사] 능력까지 살려놓았으니.
육체 성장과 함께 강제로 올라간 성위에 맞는 깨달음을 금방 얻을 것이다.
'아니지. 파프너한테도 주마등 수련법을 권해야겠어.'
헬 나이트의 검법.
결은 다르지만 회귀 전의 파프너, 그러니까 박하늘 씨가 이룩한 궁극의 무예이니 깨달음을 얻을지도 모른다.
그 전에.
"파프너. 원시 마법을 사용해봐라."
[아무거나 상관없어?]
"어."
[그렇다면 나도 시험해볼 게 있으니, 잘 됐네.]
파프너는 홰를 치면서 날아오르더니 전신에서 마력을 뿜어냈다.
저 녀석.
도대체 무얼 준비하고 있는 거지?
온몸에서 솟구친 마력이 한 점으로 뭉치더니 서서히 크기를 불려나가기 시작한다.
이건.
위험하다.
정체 모를 마법이지만 완성되는 순간에는 막을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유진은 도약하면서 거리를 좁힌 후, 역천의 가호를 발동시켰다.
'뭐야. 이 구조... 마법과는 다르다.'
고대에 실전된 원시 형태의 주문이라서 그런 것일까.
애꾸눈의 마법처럼 손쉽게 흩어버릴 수 없었다.
추가로 영력을 불어넣자, 역장의 간섭 효과가 더욱 증대되었다.
마력을 담은 글자들이 뭉쳐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주문의 완성이 미루어졌다.
'원시 마법에도 효과가 있군.'
마법을 해제하는 과정에서 시간과 영력 소모가 클 뿐.
역천의 가호 2단계에서 자유롭지는 않았다.
파프너가 원시 마법에 더 숙련되었거나.
지금 같이 아성체가 아닌, 온전한 용족으로 거듭났다면 어찌어찌 마법을 완성시켰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효과가 있다는 건 확인했다.
'천상의 룬어로 펼치는 마법도 훼방을 놓을 수 있겠어.'
유진은 새 능력의 효과를 확인하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 마법에 간섭을 해?]
"새로 얻은 능력이다."
[이러면 멋진 걸 보여줄 수가 없잖아.]
"좋아. 한 번 써봐라."
유진은 역천의 가호를 거둔 후, 높이 떠 있는 파프너를 올려다보았다.
[좋아. 한 번 보여줄게.]
파프너를 중심으로 솟아난 어마어마한 마력이 다시 한번 일점으로 집중되었다.
시커먼 구체 위로 피어오르는 마력의 아지랑이.
마치.
달그림자에 삼켜져서 검어진 태양을 보는 것 같은 위압감이 느껴졌다.
[원시 마법]
[원시의 끝]
'뭐, 저런 마법이 다 있나.'
유진은 침을 꼴깍 삼켰다.
원시 마법은 의지를 마력에 부여해서 구현하는 것.
룬 마법보다는 오러에 가까운 능력이다.
한데.
저 구체에 담긴 염은 거리를 벌린 유진도 오싹해질 정도로 섬뜩했다.
"공룡을 멸종시킨 운석이라도 만들려는 건가."
[그런 느낌으로 만든 주문이야.]
"쏘지 마라. 그거 땅에 꽂으면 개성 일대는 초토화되겠다."
[보여준다고 했지. 쏜다곤 안 했거든?]
그런 것 치고는 눈에 흥분한 기색이 가득한데요.
어렵사리 완성한 마법의 위력을 확인해보고 싶은 눈빛이다.
"허튼 짓 말고 거둬."
[쳇.]
파프너는 원시 형태의 마력에 부여한 의념을 거두었다.
서서히 흩어지는 글자들.
유진에게 압박감을 주었던 패도적인 기백도 허공으로 스르르 사라졌다.
"그런 마법은 어떻게 배운 거냐."
[용기사 아줌마가 알려줬어.]
"아줌마?"
[생전 기준으로는 나보다 나이도 많으니까. 그럼 아줌마지.]
용기사 제인 앞에서는 그 말 하지 마라.
싸움 나기 딱 좋잖니.
[이미 했는걸?]
끙.
파프너의 거침없는 성격이 이럴 땐 독이었다.
[주인이 할 말은 아니잖아.]
"난 지극히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사람이다."
[세상에. 올해 들은 이야기 중 가장 충격적인 말이야.]
[쿠훅. 나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 놈들이.
주인을 두고 소환수들끼리 의견이 맞는다니.
통재로다, 통재야.
"파프너야. 헛소리 그만 하고 내려와라."
[또 할 일이 있어?]
"너한테 좋은 수련법을 알려주려고 한다."
[음. 주인이 추천하면 그럴 이유가 있겠지.]
파프너는 더 묻지 않고 땅으로 착지, 곧바로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주인. 못 보던 사이에 꽤 감각이 좋아졌네? 단련 열심히 했나봐."
"어떻게 아냐."
"그야 보면 느낌이 확 오지."
히드라 운송 수단을 기다리면서 실전을 겸한 오러 수련을 한 보람이 있다.
"참. 수련 끝나면 다음 일정 있으니 시간 비워놔."
"무슨 일정?"
"미국에 갈 일이 있다."
우리, 미국 간다.
261화 영원의 문
두 번째 미국 행.
이번에는 뽀시래기 팀을 대동하지 않았다.
"왜 혼자 가는 거야?"
"너도 있으니 둘이지."
엄밀히 따지면 반지 안에서 수련 중인 송명석까지 셋이요.
[호플리테스]로 애꾸눈까지 끼면 넷이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뽀시래기 팀은 아직 7성으로 올라서지 못했으니까."
"조건이 달린 걸 보면...."
"어. 세 번째 문장을 얻으러 간다."
고대의 시험장.
1성, 3성, 그리고 7성 때 치를 수 있는 시련이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그렇지."
"시험 장소 숨겨져 있잖아. 용케 정보를 입수했네."
"내가 정보에 밝잖아."
"이상할 정도로 많이 알지."
파프너의 예리한 말에 순간 말문이 탁 막혔다.
'이 녀석한테만큼은 털어놔야겠어.'
전생과 현생을 넘어 최고의 파트너이자 조력자로 그의 곁을 지켜준 동료.
아마.
무언가를 느끼고 있는데도 말로 표현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근데 비행기보다 나 타고 날아가는 게 더 빠르지 않아?"
"만 킬로가 넘는 거리다. 너도 쉬어야지."
"오오. 웬일로 나를 배려해준대."
"난 배려의 아이콘이다."
"푸흡. 올해 주인이 한 농담 중 제일 성공적이야."
파프너의 등 위에 올라탄 채 매국행?
수련이랍시고 몇 시간 동안 오러를 쉼 없이 운용해야 하는데.
그건 사양이다.
'이래서 눈치 빠른 소환수는 좋아할 수 없어.'
더 이야기하면 속내가 드러날 것 같아서 입을 꾹 다물었다.
흑흑.
기내식은 맛있었다.
현생에서 두 번째로 와본 LA.
"리틀 엔젤스에서 나온 존 스미스입니다."
"반갑습니다."
"미스터 천이 미국에 계시는 동안 수행을 맡았습니다. 필요한 건 뭐든 시키십쇼."
"앨리스 킴 부 길드 마스터께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대한제약을 통해 만들어놓은 인맥.
그러고 보니 첫 번째 미국행도 고대의 시험을 치르러 간 거였지.
회귀 후 워낙 많은 일이 있다 보니.
LA에 온 게 10년은 된 것 마냥 오래 전 일로 느껴졌다.
별 생각 없이 공항을 나서는 순간.
"미스터 천!"
"이번 LA행은 블랙 컴퍼니의 미국 진출과 관련이 있습니까?"
"로열 길드 부길드장 로버트입니다. 이번에 미스터 천과 안면을...."
시부럴.
이게 무슨 일이야?
공항 앞에 진을 친 인의장벽을 마주하니 아무 말도 안 나왔다.
"미스터 천은 리틀 엔젤스의 귀빈입니다. 저희 대변인을 통해 말씀해주십시오."
"그 발언은 블랙 컴퍼니가 리틀 엔젤스와 협업한다는 의미입니까?"
"방금 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정식 루트로 문의하십쇼."
존 스미스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인파를 헤치며 유진의 길을 내주었다.
덜컥-.
차문을 닫은 후에야 유진은 푸- 하고 크게 숨을 쉬었다.
"제가 이렇게까지 인기가 많았습니까?"
"동아시아에 떠오른 죽음의 별을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해석하면 죽음의 별이고.
원문은 데스 스타다.
흠.
왠지 행성을 부술 것 같은 병기가 떠오르는 건 착각이겠지.
더 깊게 이야기했다간 저작권 펀치를 맞을 것 같으니 생략하겠다.
"미국의 헌터 업계도 저한테 관심을 가질 줄은 몰랐군요."
"동양인들은 겸손을 미덕으로 알던데 저한테도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푸핫. 우리 주인은 그런 미덕 없으니까 신경 안 써도 돼."
"나처럼 겸손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
"겸손? 겨어어어엄손?"
왜.
뭐요.
전생에 9번째 성위를 달성한 것치고는 너무 겸손하게 사는 거 아닌가.
'하긴. 파프너는 내 회귀 사실을 모르니 어쩔 수 없나.'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느뇨?〕
'내가 좀 잘나긴 했지만 너무 티내고 살진 않잖아.'
〔착각도 유분수로구나. 하긴 그대가 믿는 것을 관철하는 것도 강력한 의지의 단면일 터.〕
성좌 나리가 비꼬는 것 같지만 반박하진 않았다.
지금은 안내역의 말에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성자의 정신 말입니다. 유력 길드들 사이에서 웃돈 주고도 구할 수 없는 물건이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생산양이 적긴 하죠."
"생산 문제도 있습니다만, 수요가 너무 많은 게 더 큽니다."
블랙 허브를 메인 재료로 만든 마법 보조제.
먹기만 하면 재배열 시간이 단축되고.
움직이면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특성, [무브 캐스트]와 흡사한 효과까지 부여된다.
물론 원본에 비해 열화 된 능력이지만.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상황을 뒤집을 비장의 수단으로 활용할 만 했다.
'하긴 파급적인 효과이긴 해.'
어지간한 신관의 버프를 능가하는 효과.
유진은 금방 납득했다.
"근데 좀 이상하네요. 스미스 씨."
"무엇이 말입니까?"
"내 주인이 만든 약이 대단한 건 맞아요. 그래도 저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열광할 정도는 아니거든요."
"파격적인 효과이니...."
"돌려 말하는 건 안 맞으니까 직접적으로 말할게요."
파프너는 허리를 살짝 숙이며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인도양의 안전 루트 공유. 그리고 태평양 루트 추가 확보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죠?"
잠깐.
왜 이야기가 그쪽으로 튀는 거니?
유진이 멍한 표정으로 파프너를 볼 때.
"맞습니다. 다 알고 계시니 숨겨도 의미가 없겠군요."
왜 당신은 맞장구를 쳐주는 거야.
가까스로 표정 관리를 했지만 여전히 멍했다.
-요새 세계정세에 영 관심이 없나봐.
-웬 세계정세.
-주인이 뚫어놓은 해양 루트. 눈독 들이는 사람들이 많아.
해상 전투는 지상보다 훨씬 까다롭다.
상륙작전도 까다로운데.
갑판 위 말고는 모두 적진이나 마찬가지인 바다에서의 싸움은 얼마나 버겁겠는가.
인간사냥꾼이 연평도를 침공하려고 오우거를 바다에 던졌을 때, 스칼라들이 달려들어서 우위에 섰던 것을 떠올리면 된다.
-태평양의 해양 루트도 몬스터들 때문에 꽤 꼬였다고 해.
-내 협력을 얻길 바라겠군.
-주인이라면 이 정도는 바로 꿰뚫어볼 줄 알았는데. 의외야.
미국 길드들의 동향 같은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로마노프 가문에게 직접 압박을 줄 수 있는 건 같은 7대 명가뿐이고.
전면전까지 불사할 수 있는 세력은 없다고 봐야했다.
미국에도 7대 명가 중 하나가 있지만, 그 가문은 아메리카 대륙 외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고립주의 성향이라서.
드미트리와 전면전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에서 크게 신경을 쓸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안내역을 맡은 양반이 말 돌리느라 바빴군.'
현 시점에서 유진과 선을 대고 있는 것은 리틀 엔젤스 뿐이다.
유진이야, 더 많은 인맥을 늘리기보다 편하게 쓸 수 있는 쪽을 이용한 것이지만.
다른 단체들의 입장에서는 애가 탈 만 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유진이 히죽 웃었다.
"그렇군요."
"저흰 미스터 천의 편의를 봐드린 것뿐입니다."
"압니다. 제가 뭐 탓하는 것도 아니고."
대신.
이름값을 빌려가는 대가는 좀 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진의 입가를 물들인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
캘리포니아 동쪽에 위치한 네바다.
거기서 한 번 더 주 경계선을 넘어가면 유타 주가 나온다.
"하아암. 이제야 도착한 거야?"
"잠도 안 오면서 하품하는 척 하지 마라."
"지루해서 그래. 차라리 날아갈 걸 그랬나봐."
"목적지도 모르면서."
"주인이 알고 있으니 대충 지도 어플 보고 찾아가면 되겠지."
파프너에게 핀잔을 주긴 했지만, 유진도 좀이 쑤시는 건 마찬가지였다.
주를 3개나 이동하다 보니 한나절 가까이를 차에서 보내야 했다.
"갈 때는 비행기를 탈 걸 그랬나."
미국의 분위기를 두 눈으로 살펴볼 겸, 차량을 이용했는데 괜한 짓을 한 것 같았다.
"어디로 모셔드리면 되겠습니까?"
"블루 존 캐넌으로 가주시죠."
"그곳이라면... 영원의 문 게이트가 목적이시군요."
"예."
[영원의 문]
출입 조건이 최소 6성인 고난이도 게이트다.
고정 타입 게이트라서 폐쇄하지도 못하고 유력 길드들이 주기적으로 내부를 소탕하는 식으로 유지되고 있다.
"길드에 보고를 올려도 되겠습니까?"
"무보수로 일하지 않을 건데. 괜찮다면요."
"길드 마스터께서 섭섭지 않게 대접해주실 겁니다."
고난이도의 고정형 게이트.
유진이 들어가서 몬스터를 사냥하면 브레이크가 그만큼 늦춰지는 거니.
리틀 엔젤스에서 공로를 가져오는 대신 값을 지불하겠다는 의미였다.
"내 몸값은 좀 비쌀 건데."
유진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에도 안내역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재미없기는.
그 뒤로도 몇 시간을 더 간 차량은 계단처럼 보이는 커다란 협곡 앞에서 멈추었다.
블루 존 캐년.
영화의 배경으로도 나온 웅장한 협곡 한쪽에는 푸른빛으로 물든 균열이 있었다.
"한나절 정도 걸릴 테니 커피나 마시고 와요."
"기다리겠습니다."
"뭐, 그건 댁들 자유이니 마음대로 하시고."
유진과 파프너는 게이트 안으로 서슴없이 발을 내디뎠다.
"그러고 보니 주인이랑 게이트 공략한 게 얼마만이야?"
"침식지역 위주로 돌아다니다 보니 게이트를 갈 일도 없었지."
지금.
이 순간에도.
유진의 하수인들은 이북과 만주 일부, 그리고 극동 공화국 영역과 해양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 퍼져서 괴물들을 사냥하고 있다.
거리가 거리인만큼.
하수인들이 사냥한 경험치를 온전히 습득할 수 없지만.
숨만 쉬어도 경험치가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어서 경험치를 얻으려고 게이트 공략에 나설 일이 없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문장은 어디서 얻을 수 있어?"
"나도 이야기로만 들어서 좀 찾아봐야 해."
회귀 전.
[고대의 시험장] 최종 단계가 숨겨져 있던 유일한 게이트가 바로 '영원의 문'이다.
이 게이트는 다른 고정형 게이트와 구조가 조금 달랐다.
블루 홀 캐년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협곡.
도무지 끝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길게 솟아오른 양쪽 산맥 아래로는 몬스터들이 끊임없이 생성된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영원의 문].
쉬지 않고 몰려드는 괴물들을 쓰러트려야 하는 게이트였다.
"여기서는 비행 능력에 제약을 받는다."
정확히 말하면 협곡 위로 올라갈 수 없다.
파프너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지형의 이점은 못 살린다는 말이네."
게이트로 헌터가 진입하는 순간부터.
영원의 문이 생성한 괴물들은 침입자를 감지하고 입구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한다.
"음무우우우우!"
소머리에 근육질의 괴물.
인간사냥꾼이 소수로 운용했던 대형종, 미노타우루스가 무리를 지어 나아오기 시작한다.
그 뒤에도 바글거리는 몬스터들의 그림자.
파프너가 목을 좌우로 돌리니 뚜둑, 이라는 자극적인 소리가 울렸다.
"어떻게 하면 돼?"
"정면 돌파. 다 죽일 필요는 없다."
"쉽네."
"전속력으로 달려가야 하는데. 할 수 있겠어?"
"나를 뭘로 보고."
[폴리모프 해제]
20미터의 거구로 돌아온 파프너가 뺨을 일그러트렸다.
[떨어져도 모르니까 잘 잡고 있으라고.]
262화 고대의 시험Ⅲ
유진이 출입했던 게이트 중 가장 흉악한 곳은 어디일까?
회귀 후를 기준으로 한다면 당연히 용의 계곡이다.
집채만 한 바위조차 하늘에 띄워버릴 만큼 강렬한 바람이 휘몰아치는 곳이 있는가 하면.
공기방울을 찾아 돌아다녀야 하는 수중 지형도 있고.
서 있는 것조차 힘든 지형이니 할 말 다 했다.
새끼 정룡은 4성 수준이니 싸울 만하지 않았냐고?
'아성체를 피해 다니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정룡은 순수한 자연체의 화신.
강령술도 통하지 않아서 전력 증강에 써먹을 수 없었다.
값비싼 정룡의 핵으로 골렘을 만들어야 했고.
그마저도 7성급인 아성체한테서 도주하는 용도로만 사용했다.
험난한 지형과 용족이란 환장의 콜라보.
그에 비해 [영원의 문]은 아주 간단한 구성이었다.
뒤는 볼 것도 없이.
정면으로 몰려오는 괴물들을 돌파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되니까.
그렇다고 해서.
[영원의 문]의 난이도가 낮은 건 절대 아니다.
[난다. 날아!!]
[원시 마법]
[원시의 위상]
전에도 사용한 적 있는 갑주 형태의 방어 마법.
파프너는 날개를 말더니 허공에서 빙글빙글 회전했다.
[꼭 잡고 있으라고!]
씨부럴.
그런 건 진즉에 말해주란 말이다.
욕지거리를 내뱉었다간 혀를 깨물 것 같아서 속으로 불평을 토해냈다.
[원시 마법]
[원시의 비행]
개틀링 포를 쏘듯 원형으로 발사된 광선들.
여기까지는 전에 봤던 것과 비슷한 형상이었다.
[원시 마법]
[시초의 바람]
파프너가 회전하는 방향에 맞춰 부는 잿빛 바람.
단순한 회오리가 아니다.
닿는 것을 모조리 분쇄하는 파괴의 바람이 검은 광선을 휘감으며 정면에 선 적들을 모조리 갈아버렸다.
'미친.'
유진은 경악했다.
수백, 아니 천 단위의 괴물들이 추풍낙엽처럼 휩쓸리는 모습은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평범한 괴물도 아니다.
최소 6성.
미노타우루스처럼 대형종 보정을 받는 괴물은 맷집이 훨씬 강한데도.
잿빛 바람과 시커먼 광선에 닿으니 분자 단위로 분해되었다.
7성급 괴물인 바루스도 형태만 겨우 유지할 뿐 휩쓸리는 건 마찬가지.
파프너의 능력이 8성에 도달했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브레스 같은 비장의 수단이 아니라면.
몰려드는 6 - 7성급 괴물들을 손쉽게 쓸어버릴 순 없다.
'힘 응용이 더 자연스러워졌다.'
빙글빙글 회전하는 통에 제대로 살펴볼 순 없지만.
확장된 기감으로 파프너의 마력이 안정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약한 소리 하던 사람은 어디 간 건지 모르겠네.
눈 깜짝할 사이에 수백 미터를 전진했고.
파프너의 궤적에 휘말린 몬스터들은 모조리 분쇄되었다.
많이 어지러운 것 빼고는 흠 잡을 데가 없구먼.
"ㅆ, 싹 죽일, 필요는."
[걱정 마. 돌파에만 중점을 두고 있어.]
"시, 시간. 최소화."
[걱정 붙들어 매라고!]
협곡 한가운데에 생긴 기다란 죽음의 선.
미국 서부의 유력 길드들도 파프너처럼 손쉽게 몬스터들을 휩쓸어버리지는 못할 터였다.
고정형 게이트라서 폐쇄는 불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금 재생하겠지만.
이 정도만 해도 [영원의 문]이 브레이크 상태가 되지 않도록 유지하고 있는 유력 길드들의 일거리를 한 달은 줄여주었을 것이다.
[슬슬 끝이 보이는걸?]
"그대로 전진해."
[알았어!]
협곡 끝에 파프너의 신형이 닿는 순간.
[영원의 문에 숨겨진 비밀을 풀었습니다.]
[고대의 시험장Ⅲ로 이동합니다.]
강렬한 빛이 시야를 메웠고.
유진 일행은 그 빛에 삼켜져서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
[자격을 확인합니다.]
[시험장에 들어온 인원은 고대의 시험장 Ⅱ을 통과했습니다.]
[다음 시험을 치를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시험 장소는 콜로세움을 연상시키는 전장이었다.
훙- 훙- 훙-.
관객석에는 사람이 아닌 허깨비 같은 것들이 나타나서 유진과 파프너를 관찰했다.
[저 양반들. 기운이 심상치 않은걸.]
"맞아. 모두 성좌들이다."
고대의 시험장은 뛰어난 자질을 가진 헌터를 발굴하기 위함이다.
배후성을 둘이나 셋 두는 헌터도 있으니.
유진 같이 후원하는 성좌가 있다 한들, 관심을 안 가질 이유는 없다.
'뭐, 내가 네크로맨서인 걸 알면 관심을 끄겠지만.'
쓴웃음이 입가를 물들였다.
"시험을 치르러 왔나."
둠 가드.
헐벗은 새빨간 피부에 두 가닥의 뿔, 그리고 샛노란 화염검을 들고 있는 악마종 몬스터가 유진 일행을 노려보았다.
[고대의 시험장Ⅲ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둠 가드를 쓰러트리십시오.]
[도전을 원하지 않으면 뒤에 있는 통로로 돌아가면 됩니다.]
첫 번째 시험은 항거할 수 없는 적을 상대로 버텨내기.
두 번째는 팀 단위의 무력을 시험하는 것이요.
마지막은 첫 번째와 흡사하지만, 같은 성위에 맞춘 강적을 쓰러트리는 것이 시험의 목적이다.
[동격이라고?]
"넌 애초에 시험 대상이 아니니까."
파프너는 용족.
거기에, 유진하고는 아직 종속관계가 이어져 있다.
첫 번째 시험 때와 마찬가지로 반쯤은 '소환수'로 엮여 있기에.
이런 꼼수도 사용할 수 있었다.
[흐응. 시시한 적은 상대하기 싫은데.]
"둠 가드는 만만한 적이 아닐 거다."
[그건 붙어봐야 알지.]
파프너는 공중으로 높이 날아오르려 했다.
높은 고도를 유지하며 타격하면, 상대의 기량이 얼마가 되었든 일방적인 싸움이 될 테니.
[인핸스드 그랩]
무시무시한 속도로 솟구치던 파프너의 육체가 미증유의 힘에 당겨지면서 강제로 고정, 강제로 끌려갔다.
[재미있는 스킬이네.]
[원시 마법]
[원시의 비행]
[원시 마법]
[시초의 바람]
영원의 문의 괴물들을 휩쓸어버렸던 마법 연계.
둠 가드는 검을 크게 휘둘렀다.
[불의 장막]
불길이 넓게 펼쳐지면서 쇄도하는 검은 광선들을 감싸 안았다.
집중된 화력이 불길의 흐름에 따라 좌우로 흩어지고.
굴절되어버린 광선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경기장 여기저기를 부쉈다.
한결 약해진 화망으로는 둠 가드의 공격을 뚫어내지 못했으니.
[너 좀 한다?]
[케넥 전투술 - 4장]
[낙엽 치기]
사선으로 휘두른 발톱이 둠 가드의 칼날에 막혀 저지되었다.
마투기의 강화판인 투마강.
순수한 파괴력으로는 오러 블레이드나 암흑 강기를 앞섰다.
앞선 스펙으로 화염검을 쳐내고, 몸을 크게 회전시켜 꼬리에 오러 블레이드를 방출한 채 휘둘렀지만.
[강체화]
[철벽]
둠 가드는 터프하게 몸으로 받아냈다.
크게 휘청거렸지만.
투마강까지 일으켜서 받아낸 덕에 몸뚱이가 짓눌리는 건 피했다.
[악의 경계]
지이이잉-!
파프너에게 스며드는 검은 기류.
둠 가드를 쓰러트리지 않는 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대상 지정 결계다.
[귀찮은 짓을.]
"7성 보스 몬스터다. 속초 때 본 악마보다 세다."
인신공양으로 악마가 된 놈은 스펙만 7성이었지,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지도 못했다.
그에 비해.
둠 가드는 자신의 능력을 십분 활용할 줄 알았으니, 그 악마 추종자보다 훨씬 강적이었다.
다만.
상대가 안 좋았을 뿐.
[다중 연산]
[부패의 사슬]
[헬 플레어]
[게헤나의 불꽃]
푸른 불꽃과 시커먼 화염이 서로의 기세를 해치지 않으며 천천히 나아온다.
두 암흑 마법 모두 기원은 둠 가드의 암흑 마력.
게헤나의 불꽃은 일직선으로 직진하는 성질을 지녔지만, 방사 형태로 넓게 퍼지는 헬 플레어가 그 성질을 제어해서 광범위하게 퍼트렸다.
청염과 흑염은 충돌하지 않고 파프너를 향해 차근차근 다가오며 운신의 거리를 좁혔다.
"비켜봐. 해볼 게 있어."
[시켜볼 게 아니고?]
유진은 못 들은 척하며 앞으로 나섰다.
[역천의 가호 Lv 2를 사용합니다.]
우우우웅!
희끄무레한 역장이 유진을 중심으로 퍼져 나간다.
둠 가드가 방출한 마법의 기운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느껴진다.
1단계로는 저걸 직접 맞아봐야 구조를 이해하고 재구성할 수 있지만.
강화된 역천의 가호는 범위 안에만 들어와도 간섭할 수 있다.
'전장을 한정하려 한 것이 네 실수다.'
암흑 마력에 끼어든 역천의 가호가 스멀스멀 다가오는 불길을 하나하나 해체했다.
허무하게 꺼지는 불꽃들.
각각 7성, 6성급 마법이지만 유진의 털끝을 스치기도 전에 모조리 사그라졌다.
"신관? 아니. 마법사?"
"둘 다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둠 가드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의 장기인 암흑 화염 마법이 모조리 파훼당했다.
차라리.
정면으로 충돌해서 힘으로 꺾었다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해제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필멸자 따위가 내 암흑 마법에 간섭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고 말았ㄲ습니다."
"날 능멸하려 드느냐!"
둠 가드가 성을 내는 순간
[나는 보이지도 않나봐?]
[공허의 숨결]
[케넥 전투술 - 10장]
[구결집합권]
이미 선보인 적 있던 기예.
드래곤의 브레스와 오러 블레이드를 한 점으로 모아서 파괴력을 증대시키는 비장의 수단이 둠 가드의 가슴팍에 내리꽂혔다.
한 발 늦게 화염검을 들어 올려서 몸을 보호하지만.
압도적인 출력 차이에 뒤로 밀려나며 피부가 찢겨나가고 근육이 뭉개졌다.
수십 미터 뒤로 튕겨나간 둠 가드.
[악의 경계]를 발동해놓은 탓에 충격을 해소할 틈도 없이 파프너에게서 멀어지지 못하고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
"크아아아!!"
[잘도 버티네.]
글쎄요.
곧 숨지실 것 같긴 한데.
너무 시간이 끌리면 곤란하니 한 손 거들어볼까.
아공간 주머니에서 커다란 뼈 하나를 꺼냈다.
저주받은 이빨에 이은 새로운 마법 무장.
저번에 만든 본 미사일 전용 임시 무장과 달리, 신준석 휘하 도제한테 맡겨서 제대로 만든 아이템이다.
[원한 깃든 뼈]
등급 : 레어
분류 : 촉매
내구도 : 50/50
대형 몬스터의 뼈에 영력을 새기고 마석을 꽂아 강화한 뼈입니다. 네크로맨시 촉매로 사용됩니다.
저주받은 이빨과 마찬가지로 레어 등급.
그렇다고 해서 위력도 같진 않다.
B등급 마석.
그리고 영혼을 쑤셔 박아 만든 일회용 무장.
단순 출력으로는 저주받은 이빨의 수십 배를 낼 수 있는 병기다.
[레어] 등급 판정을 받은 건 일회용이라는 것과, 제작에 들어간 재료가 고급이 아니어서 일 뿐.
시스템 판정과 아이템의 위력이 반드시 일치하는 건 아니었다.
[본 컨트롤]로 [원한 깃든 뼈]를 둠 가드에게 투척.
"뼈 폭풍."
네크로맨시에서 얼마 없는 공격 주문, 7성급 마법인 뼈 폭풍을 사용했다.
3미터 크기의 뼈가 쪼개지면서 폭발.
말 그대로 폭풍을 일으키면서 둠 가드의 몸에 꽂혀 들어갔다.
원래는 대량의 뼈를 사용해야 제 위력이 나오는 주문.
유진은 본 미사일 때와 마찬가지로 뼈가 잘게 쪼개지게끔 미리 세팅해둔 후.
[원한 깃든 뼈] 안에 박아놓은 마석으로 위력을 증대시켜 모자란 촉매를 커버했다.
"마, 말도 안...."
브레스와 오러 블레이드의 결합 공격.
거기에.
지근거리에서 일어난 뼈 폭풍에 휘말린 둠 가드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제대로 된 활약 하나 못하고 너덜너덜해진 채 쓰러졌다.
263화 미국에서 생긴 일(1)
[고대의 시험장 Ⅲ을 통과했습니다.]
[용사의 문장이 새겨집니다.]
◎용사의 문장
-분류 : 문장
모든 시험을 통과한 용사에게 부여되는 문장입니다.
*모든 능력치 20% 상승.
*모든 스킬 효과 20% 상승.
심플 이즈 베스트.
올 스탯은 어느 직업군을 막론하고 최고 옵션으로 취급하고.
유진처럼 모든 포지션을 소화하는 헌터에게는 더더욱 값어치가 있는 옵션이다.
거기에 스킬 위력 보정 10% 증가까지.
올 스탯까지 고려하면, 실질적인 위력 증가 폭은 더 크다고 해야겠지.
무투계 헌터는 강화된 신체능력이 공세의 위력에 그대로 반영되고.
마법계나 신관계는 늘어난 스탯만큼 주문이 강해지진 않아도, 전개 속도 등에서 보완이 되니 무조건 이득이다.
"크흐흐흐."
정말이지.
회귀는 정말 최고야. 짜릿해.
〔경박하게 웃지만 않으면 딱 좋으련만.〕
왜.
뭐요.
이왕이면 솔직한 거라고 해주시죠.
번쩍! 번쩍!
경기장에 머무르던 하얀 불덩이들이 광채를 토해냈다.
[부유한 아버지가 당신의 활약상에 찬사를 보냅니다.]
[헬의 지배자가 당신의 주문에 관심을 드러냅니다.]
[지혜의 관조자는 당신을 차분하게 관찰합니다.]
[시바세계의 관리자가 당신의 배후성이 되고 싶다고 합니다.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까?]
....
인기가 많은 것도 피곤하구먼.
〔이 후안무치한 작자들! 계약자는 짐의 성자이니라. 어딜 감히 넘보느냐!〕
'내가 워낙에 출중하잖아.'
〔이 작은 인간은 그대들이 혐오하는 망자를 부리는 족속이니라. 그만 넘보고 저리 꺼져라!〕
'그건 좀 너무한데.'
혐오라니요.
안 그래도 회귀 전에 그 문제로 엄청나게 고생했구먼.
'그렇게 말하면 정말 갈아탄다?'
〔운명공동체를 버려두고 어딜 가려 하느냐!〕
'누가 사람 상처 푹푹 찌르랬나.'
전생과는 달라진 성좌들의 반응.
이 또한 크로노스가 '죽음을 거스르는' 영역을 주관하여서 생긴 변수일 것이다.
존재한다고는 알았지만.
어느 누구도 주관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미지의 영역.
순리에서 어긋나기에 악신 성좌들의 권역일 것 같지만, 막상 악마 군주들 중에서 언데드를 적극적으로 부리는 이는 많지 않았다.
일부 마신들이 언데드를 하수인으로 부렸지만 주력은 아니었으니.
그렇기에.
죽음을 거스르는 영역은 성좌들에게 금기처럼 여겨졌다.
어느 누구도 밟아본 적 없는 전인미답의 영역을 주관하는 성좌가 나타나면서.
그 상황은 달라졌다.
'나를 통해 죽음을 거스르는 영역까지도 넘보고 싶다는 의미일 터.'
배후성을 늘릴 생각은 없다.
나중이라면 모를까.
지금 같이 크로노스가 1인분 몫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배후성을 늘리면 제 영역을 뺏길 가능성이 높았다.
'빨리 좀 크십쇼. 성좌 나리.'
〔그대가 분발하여야 하느니라.〕
물에 빠진 성좌 건져줬더니 보따리까지 달라고 하네.
〔그래도 멀리 날아온 보람은 있구나.〕
'아직 챙길 건 하나 더 있는데?'
〔저 악마의 시체를 데스 나이트로 살리려느냐.〕
'그 정도로는 아쉽지.'
둠 가드는 훌륭한 소재다.
모체의 성위는 7성이나, 악마종에 암흑 마법 중 '화염'에 한정해서는 마법계 헌터보다도 뛰어난 능력을 보유했다.
검법도 수준급이고.
그러니까.
약간만 손을 보면 된다.
"파프너. 이 뼈를 메스처럼 다듬어줘."
[예리하게 만들어야겠네?]
"대충 형태만 잡아줘도 돼."
[그 정도야 금방 해.]
큼지막한 뼛조각 하나가 순식간에 작은 칼로 다듬어졌다.
오러를 부여하니 강철도 벨 수 있는 명검 같은 예리함을 지녔다.
"네 덕을 이런 식으로 보네."
[그런 의미에서 갈 때는 내 등에 타고 갈래?]
"...알았냐."
[왜 몰라. 편하게 가려고 온몸 비틀던데.]
"염병."
이래서 눈치 빠른 소환수란, 쯧.
쯔아아악-.
둠 가드의 피부를 가른 후에 영력을 불어넣고.
칼을 내려놓은 후 주문을 사용했다.
[생명 분야]
[강제흡수]
[생명 분야]
[경계 구축]
갈라낸 세포에 간섭해서 성질을 변화시켰다.
'무식하게 영력을 밀어 넣으면 안 된다.'
영력과 암흑 마력은 성질이 다르다.
일반적인 마력보다 반발력은 약한 편이지만, 그래도 100% 동일한 파장이 아니니 부딪치면 서로의 힘을 깎아내기 마련이다.
그러니.
생명 분야로 둠 가드의 육체에 간섭해서.
유진의 힘과 시체에 남아 있는 암흑 마력이 충돌하지 않게끔. 조정해야 한다.
[자. 여기.]
"고맙군."
[다음부터는 필요할 때 메스, 라고 말해줘.]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냐?"
[이럴 때 로망 좀 채워야지.]
파프너의 보조(?)를 받아가면서 둠 가드 시체를 개조하고.
마지막으로 피의 발렌타인 사태 때 획득한 마인의 심장을 둠 가드의 시체에 올려놓았다.
이걸로 준비는 끝났다.
두 기운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고.
인간 – 악마의 성질을 모두 지니고 있는 심장을 매개 삼아.
강령술을 발동시킨다.
"애니메이트 데드."
힘 있는 음성으로 외치자.
[시체에서 이형의 파장이 감지됩니다.]
[주문과 충돌하지 않습니다. 언데드 제작에 반영됩니다.]
[둠 나이트를 제작했습니다.]
몸을 일으킨 10미터 크기의 괴물.
악마에서 망자가 되어버린 둠 가드, 아니 나이트는 푸른 귀화를 흩뿌렸다.
[나는 되살아난 건가.]
"그렇다."
[당신이 내 새로운 주인이군. 충성을 맹세하겠다.]
"상황 파악이 빨라. 원망은 없나?"
[힘이 약했으니 죽은 것. 불만을 품을 이유가 있는가. 오히려 두 번째 기회를 주었으니 기꺼울 뿐이다.]
쓸 만한 수하가 하나 더 생겼네.
"암흑 마력은 최대한 온전해두었다. 영력을 암흑 마력으로 치환해서 쓸 수도 있을 거다."
[주인의 솜씨가 보통이 아니군.]
"아무렴. 내가 누군데."
[언데드로 되살아났는데 생전보다 강해질 줄은 몰랐다.]
둠 나이트로 되살아난 악마는 샛노란 화염을 넓게 펼치면서 신기한 듯이 중얼거렸다.
'꽤나 긍정적이잖아.'
상급 언데드는 모두 자의식이 있다.
개중에는 일룡처럼 반발심을 품는 소환수도 나오기 마련.
유진의 제어 능력으로는 충분히 커버할 수 있지만, 공연히 힘을 쓰는 상황은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악마교 놈들 더 없나?
언데드 – 악마 하이브리드로 성위를 끌어올리거나.
흑암의 반지에도 없는 새 언데드를 만들어서 전력 강화를 할 수 있을 텐데.
필리핀에서 히드라를 손에 넣긴 했지만.
유진은 아직 배고팠다.
*
"볼 일은 다 보신 겁니까?"
"예. 그럭저럭. 게이트 내 마력 분포 확인해주시죠."
"알겠습니다."
존 스미스는 특수 장비로 게이트의 마력 수치를 확인했다.
"5, 5%?!"
삑! 삐빅!
몇 번이나 다시 검사를 한 존 스미스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유진을 바라봤다.
"영원의 문의 괴물들을 절멸시키신 겁니까?"
"다는 아니고. 거치적거리는 놈들만 조금 치웠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수치를 놓고. 조금이라니."
역시 동양인들은 겸손 떠는 게 문화인가, 라고 중얼거린 종 스미스가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귀빈을 앞에 두고 실례를."
"아닙니다. 킴 부 길드 마스터에게도 전해주십쇼."
"당연하지요. 길드 차원에서 상응하는 보답을 해주실 겁니다."
끊임없이 몬스터가 재생성되는 영원의 문.
협곡 위로 올라가지도 못해서 우직하게 힘을 겨뤄야 했다.
몬스터들의 구성이 다양하고.
스펙이 높은 대형종들도 많이 있어서 담당 길드들도 협곡 초입까지 괴물이 쌓였을 때 간간히 토벌하고 마는데.
유진 일행은 단 둘이 진입하더니 몇 시간도 되지 않아 95%에 해당하는 몬스터를 도륙해버린 것이다.
'이래서 죽음의 별이라고 하는구나.'
존 스미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미국에도 퍼져 나간 유진의 파격적인 행보.
직접 보니 소문보다 훨씬 대단했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 내에 유진만 한 속도를 낼 수 있는 헌터가 없진 않다.
7대 명가 중 하나인 록펠러나.
용기사 제인 같은 인재들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어떤 헌터들도 유진처럼 단기간 내에 강력한 무력과 명성을 모두 손에 넣은 이는 없었다.
'부 길드 마스터께서는 죽음의 별과 어떻게 연을 맺으신 건가.'
궁금한 마음이 치솟았지만 금방 생각을 끊었다.
존 스미스가 고려해야 할 사항이 아니었고.
도리어 유진과의 친분 덕에 성세가 더 커질 리틀 엔젤스에서 오래 근속하려면 신경을 안 쓰는 편이 나았다.
LA로 돌아온 유진은 리틀 엔젤스에서 마련해준 호텔 방에서 여독을 풀었다.
"주인은 내가 지켜야 하니 한 방을 써야 한다니까."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했다."
"못 볼 거 다 본 사이끼리 너무 박한 거 아니야?"
"눈에 장난기 빼고 그런 말해라."
아주 사소한 해프닝이 있는 것 빼고는 모두 좋았다.
〔정말로 해프닝이 맞느뇨?〕
'또 이상한 소리 하신다.'
유진은 침대에 뒹굴거리면서 기사를 몇 개 찾아보았다.
검색 대상은 죽음의 별,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었다.
'내 인지도가 생각보다 높구나.'
미국에서 그가 어떻게 비추어질지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회귀 전에는 미국 내 헌터 길드들과 사이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어이하여?〕
'네크로맨서 전직 게이트가 미국에서 발견되었으니. 충돌이 계속 있었지.'
유진은 회귀 전에도 [흑암의 반지]에 깃든 비밀을 풀어내면서 정식 루트보다 몇 년 빨리 네크로맨서로 전직했다.
평범한 네크로맨서들처럼 스킬 북을 구할 필요 없이, 고통 좀 참으면 필요한 주문들을 그때그때 얻을 수도 있었으니 발전 속도도 훨씬 빨랐다.
전직 게이트가 미국에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네크로맨서의 숫자가 미국 출신 헌터들이 많았는데.
유진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일부 헌터들은 길드의 휘광을 힘입어 압박을 넣기도 했다.
〔그 작은 인간들은 어찌 하였느냐?〕
'엿이나 먹으라고 했지.'
대격변 이후에는 헌터의 힘 = 패권이 되었다.
미국의 헌터 전력이 대단하긴 해도, 신화라는 홈그라운드 이점을 낀 유럽은 성좌와 계약한 헌터 비율이 훨씬 높은 덕에 전체 수준에서는 떨어졌다.
세계정세의 중심이 다시 구대륙으로 옮겨갔고.
미국은 반쯤 고립주의를 표방하며 내부 게이트들을 관리하는 식으로 국정운영을 전환했고.
요즘 들어서야 슬슬 세를 회복하고 유렵의 헌터 길드들과 패권 다툼을 슬슬 시작하는 중이었다.
전생에는 네크로맨시 연구에 바빠서 신경 쓸 틈이 없었고.
힘을 좀 얻었다 싶었을 땐 로마노프 가문에서 침을 바르려고 해서 미국 쪽과 콘택할 틈이 아예 없었지.
'근데 내 이름값이 꽤 커졌단 말이야.'
이대로 귀국을 할까.
그게 아니면 리틀 엔젤스와 좀 더 심도 깊은 이야기를 해서 미국 내 지분을 늘려볼까.
미국 내 길드들이 블랙 컴퍼니의 행보를 관심 있게 지켜볼 줄은 몰랐기에.
이 부분은 생각 정리가 필요했다.
수십 년이나 앞당겨진 로마노프 가문과의 갈등.
오랫동안 네크로폴리스를 비우면 위험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들지만.
미국 내 인지도를 활용할 방법이 있으면 좋잖아?
똑똑-.
"파프너야. 아직 장난 덜 쳤니?"
"은인. 접니다."
중년 사내의 음색.
유진은 잠시 후에 입을 떼었다.
"스네이크 아이?"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잠깐.
당신이 왜 여기서 나오는 건데?
264화 미국에서 생긴 일(2)
날선 눈매가 인상적인 중년의 백인.
스네이크 아이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은인."
"잘 있는 것 같아서 반갑긴 하다만."
유진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손에 넣은 인재.
정확히 말하면 전생에서 악연으로 엮인 사내였다.
신용보다 돈을 중요시하는 믿을 수 없는 인물.
회귀 전에는 고용주인 유진의 뒤통수를 쳤었고, 그 때문에 죽었다.
배신자가 희희낙락하며 돌아가는 것을 지켜볼 만큼.
유진은 자비로운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그렇지만.
회귀 후의 그는 꽤 바뀐 것처럼 보였다.
'당장은 말이야.'
〔이 작은 인간이 그토록 변한 것은 혈육의 죽음 때문이라고 짐작하지 않았느냐.〕
'그건 그거고. 100% 신뢰할 순 없잖아.'
기연 사냥에서 길잡이로 써먹은 후.
유진은 스네이크 아이를 마담에게 보냈다.
스네이크 아이의 추적술은 용병업계에서 비할 자가 거의 없었다.
회귀 전에 그의 배신 이력을 알고 있음에도 고용했었던 이유다.
정보를 다루는 마담에게는 어느 누구보다 큰 힘이 되어줄 만한 위인이니.
혹시 모르니 배신 가능성까지 언급해서 보냈는데, 아직까지는 마담이나 유진의 등 뒤에 칼을 꽂지는 않았다.
"여기는 무슨 일로 온 거지?"
"저 원래 샌프란시스코 사람입니다. 거리가 좀 있지만 못 올 곳도 아니죠."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지.
"실은 마담의 지시를 받아 흔적을 쫓던 중인데 은인이 LA에 오셨다고 하여."
"보고 겸 해서 온 건가?"
"그렇기도 하고 은인의 힘이 필요할지도 몰라서입니다."
"내 힘이라."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흥미는 생겼다.
딸의 은인을 섬기겠다고 하며 스스로 와서 머리를 조아린 스네이크 아이가.
무슨 일로 유진한테 힘을 보태달라고 하는 것일까.
"그 전에 마담의 의뢰를 말씀드려야겠군요."
스네이크 아이는 출력해놓은 사진 몇 장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사탄교."
"그렇습니다."
"놈들의 흔적을 쫓던 건 네 솜씨였나."
"모두는 아닙니다만."
스네이크 아이가 사탄교를 추적하고 있었다, 라.
적임자에게 맡겨두었군.
역시 마담이라고 해야 하나.
"슬럼가에서 아이들 실종 사건이 빈번하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사탄교가 배후에 있단 말이군."
"예."
"아이들을 납치하면서 어떻게 안 들켰지?"
"갱을 이용했습니다."
스네이크 아이의 건조한 목소리 가운데에 섞여 있는 한 줄기의 혐오감.
"아이를 건드린 게 싫은 건가?"
"그 놈들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건넜습니다."
"의외네. 당신은 가족과 돈 말고는 관심이 없는 줄 알았거든."
가족이란 키워드는 회귀 후에 안 거지만 말이야.
뒷말을 삼킨 유진이 스네이크 아이를 빤히 바라봤다.
"솔직하게 물어보마. 당신은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없어졌다고 해서 분개할 사람은 아니잖아."
"그렇습니다, 만. 아이는 조금 다릅니다."
"댁의 딸과 겹쳐 보여서?"
"아니라곤 못하겠지만, 좀 그렇지 않습니까. 아이를 손대다니."
스네이크 아이의 발언은 아이를 소중하게 여기는 미국 사람들의 보편적인 정서였다.
인종차별은 실컷 하면서 슬럼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흑인들이 사라지는 것에 분노하는 것이 이해가 가진 않았지만.
유진 입장에서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죄송합니다. 은인 앞에서 실례를 저질렀군요."
"됐어. 댁의 그런 모습도 나쁘지 않아."
전생에 스네이크 아이한테 맞은 뒤통수가 꽤 아팠거든.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니 얼마나 좋아.
그의 약점인 딸을 스스로 공개한 마당이니, 이런 인간미는 보여줄수록 좋았다.
〔훌륭한 악인의 생각이로구나. 아이를 인질로 잡다니.〕
'아직 안 잡았거든?'
〔그럴 여지는 열어두지 않았느뇨.〕
'지킬 게 있으니 전처럼 맥락 없이 뒤통수를 치진 못할 거란 의미다.'
하여간 뭔 말을 못하겠어요.
사람 하나 쓰레기 만들기 참 쉬워.
"그러면 슬슬 움직이지."
"예?"
"빨리 움직이면 피해자를 한 명이라도 줄일 수 있지 않겠나."
"게이트 공략을 마치고 막 돌아오시지 않았습니까."
"별로 안 피곤해."
진짜다.
태평양을 건너오면서 쌓인 여독.
게이트 공략 때 생긴 피로.
그 외에도 이것저것 더하면 만전의 상태는 아니었다.
"엉덩이가 무거워질 정도는 아니야."
7성.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초인에 들어섰다고 하는 영역이다.
유진은 마법 + 신관계이긴 해도, [라이프 드레인] 덕에 무투계 헌터와 비교해도 스펙이 모자라지 않았다.
목 뒤가 좀 뻑뻑하긴 한데.
당장 드러누워서 자야 할 만한 정도는 아니란 말이지.
-파프너야. 너도 괜찮지?
"물론."
텔레파시를 보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벌컥 열리면서 파프너가 들어왔다.
"노크는 좀 해라."
"당장 가자. 아이들 구하러 가는데 피곤한 게 대수야?"
스네이크 아이의 마른 표정 위로 감정의 빛이 번져나간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
대격변 이후 전 세계 각국은 대부분 영토 일부를 소실했다.
크든, 작든.
미국은 인구 대비 영토가 넓은 축이라서 침식된 영역이 꽤 많은 축에 속했다.
도외지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은 몬스터들에게 밀려 삶의 터전을 잃었고.
큰 도시에 밀려나서 새로운 생활의 터전을 마련해야 했다.
원래도 세가 적지 않았던 슬럼가가 확장된 배경이다.
"슬럼가가 커져봐야 뭐하겠소. 갱단의 영향력만 커질 뿐이지."
"슬럼 안에서 그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군."
"내 목소리는 은인밖에 들리지 않을 거요."
호오.
마력으로 목소리가 퍼져 나가는 것을 막아낸 건가.
못 보는 사이에 스네이크 아이의 마력 운용 능력이 꽤 많이 올라갔다.
〔텔레파시와 다를 게 무엇이라고.〕
'공기의 마력을 조정해서 내 방향으로만 흐르게 만들었다는 거니까.'
텔레파시보다 펼치기 어렵고.
효과는 덜하다.
고오오오급 잔재주인 셈.
스네이크 아이는 잔재주를 통해 자신의 성취가 올라갔음을 표현한 것이다.
"갱들은 구획을 나누어서 가족이라고 칭합니다."
"서로 돕기라도 하나?"
"비슷합니다. 돈을 버는 사람이 못 버는 사람한테 일방적으로 나누어주는 식이지만."
"21세기 미국에서 공산주의라니."
"갱은 그마저도 자유라고 하지만요."
"그 사람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싶진 않아. 사탄교의 행방이나 찾지."
"사탄교와 연관이 있는 건 최근에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갱들입니다."
갱, 이 아니라 들이란다.
복수형이라는 걸 보면....
"적이 하나가 아니군."
"갱단만 21개입니다."
"하루 안에 끝낼 수 있으려나."
유진은 목을 주물럭거렸다.
너무 의욕적으로 나섰나.
"한 두 개만 제쳐도 우리의 행적이 금방 밝혀지겠어."
"이미 사탄교의 지원을 받는 갱단과 대척하는 이들과 입을 맞췄습니다."
"그, 다른 갱들?"
"예. 신호를 주면 패싸움을 벌일 겁니다."
"근데 갱들이라고 해봐야 피라미들일 텐데."
"양동이 필요합니다."
스네이크 아이는 아이들이 납치된 장소를 이미 파악했다고 한다.
그곳에 접근하기 위해.
갱단 내에 뿌리를 내린 사탄교 신자들을 정리하면서 혼란을 유도하고.
아이들을 납치해서 모아놓은 본진을 쳐야 한단다.
"이중, 아니 3중인가."
"갱단들끼리 싸우는 건 가만히 둬도 돼?"
"그 친구들이 싸우는 건 늘상 있는 일입니다."
대수롭지 않은 스네이크 아이의 말에 파프너가 혀를 내둘렀다.
"우와. 아이들 때랑 태도가 완전 달라."
무익한 피해가 발생하는 걸 꺼려하는 눈치.
유진은 흠-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리틀 엔젤스에 연락해서 용병 좀 붙여 달라고 하마."
"무리하지 않아도 돼. 주인."
"알선만 부탁하는 거다. 돈은 네 몫에서 떼갈 거야."
아쉬운 소리 한 번 하는 것쯤이야.
파프너가 불편한 마음을 품는 것보다는 낫지.
"갱단에 없는 멤버가 끼면 어색할지도."
"이미 총력전 수준인데. 용병 정도는 고용할 수도 있지."
"사탄교에서도 그런 방식으로 신자들을 스며들게 했습니다."
스네이크 아이의 부연설명에 파프너가 고개를 끄덕였다.
"댁은 파프너와 함께 움직여서 갱단의 사탄교 신자들을 걸러내라."
"은인께서 단독으로 움직일 겁니까?"
"나름 재주가 있거든. 그렇지 않니. 파프너야."
"주인도 이제 쓸 만은 해졌지."
오러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게 쓸 만한 정도인 겁니까.
못 보던 사이에 조건이 꽤 상향되었네.
"본단의 위치만 알려주면 된다."
"휴대전화로 좌표를 보내놓았습니다."
"다른 변수는 없나?"
"사탄교 본단 정보는 알 수 없습니다."
"그쪽 정리 끝나는 대로 파프너랑 바로 와줘."
안 그래도 성이 안 찼는데.
사탄교 놈들이 제발로 걸어 들어온 걸 어떻게 놓칠 수 있겠나.
로마노프 가문과 전면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전력을 강화할 기회는 마다할 이유가 없다.
"주인. 몸 적당히 사리면서 움직여."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네가 와줄 거잖아."
"흥. 그 오우거부터 부를 거면서."
"잊지 마라. 내 대전사는 예나 지금이나 너뿐이다."
"그 마음 쭉 유지하라고."
파프너&스네이크 아이가 인파 속으로 몸을 감추고.
유진도 휴대전화에 전송된 주소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이 사건도 회귀 전에 있었던 일이더냐?〕
'나도 모르지. 미국 쪽은 통 관심을 안 두었거든.'
확실한 건.
사탄교가 가장 많이 정착한 곳은 바로 아메리카 대륙이었다.
남아메리카는 대격변 이전에도 치안이 엉망이었고.
북아메리카, 특히 미국은 기독교가 국교인 나라면서 (장난이든 진심이든) 사탄 추종자들이 음지에 깔려 있는 나라였다.
대격변과 함께 바벨탑이 솟아올랐고.
악신 성좌한테 제물을 바치면 손쉽게 힘을 얻을 수 있게 되면서.
사탄교 신자들은 본격적으로 신대륙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쪽은 사탄교 관련 사건사고가 워낙 많아서 일일이 헤아리는 게 우스울 거다.'
짧은 불평과 함께 건물 옥상에 날아오른 유진이 영력을 거두었다.
존재감을 최대한 억누른 채.
휴대전화로 받은 좌표 근처를 천천히 살펴보니.
인위적인 마력의 파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좌표를 안 봤으면 모르고 지나쳤을지도 모르겠네.'
기감만큼은 9성급인 유진마저 놓쳤을 만큼 희미한 마력의 파장.
슬럼가 한가운데에서 이만한 마법진을 전개해놓다니.
보통 녀석이 아닌 모양이다.
〔준비 없이 들이밀어도 괜찮겠느뇨.〕
'나 7성이야.'
오러 블레이드는 못 써도.
무투계로 전투 수행도 가능하고.
역천의 가호를 사용하면 마법계 헌터들을 먹통으로 만들 수 있다.
'일단 상대의 전력부터 파악해볼까.'
〔결계를 해제하지 않으면 침입자의 존재를 알아채지 않겠느냐?〕
'없애버리면 그것대로 자기 PR은 확실하겠지.'
〔그리 자신하는 걸 보면 방법을 이미 마련해둔 모양이로구나.〕
'성좌 나리 덕분에.'
사탄교가 쳐놓은 인식 저해 결계 앞에 서서는.
[역천의 가호 Lv 1을 사용합니다.]
피부와 닿은 부위만 흡수, 결계 전체 구조를 손대지 않고 국소적인 부분만 재구성했다.
일그러진 결계 틈으로 보이는 한 폭의 지옥도.
'어느 녀석들인지 면상이나 보러 가자고.'
유진은 길게 늘인 성유물, 죽음의 낫을 들고 결계 안으로 들어갔다.
265화 미국에서 생긴 일(3)
장막 너머.
왜곡된 풍경 대신 진실한 모습을 드러낸 내부는 꽤나 살풍경했다.
아스팔트 도로고 건물이고 할 것 없이 마구잡이로 뻗어 있는 붉은 선.
암흑 마력으로 빚어낸 실들은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퍼져 나가서 온 땅을 물들여가고.
그물망 사이사이마다 꽃봉오리 같은 것이 맺혀 있다.
"허."
기가 찬 유진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왜 그러느뇨?〕
'미친 놈들. 도시에 플랜트를 만들어 놓다니.'
직역하면 식물을 배양하고 자라나게 하는 장소.
여기서 '배양'이란 의미는 꽃봉오리 같은 고치에 맺힌 악마를 의미한다.
저 악마들을 배출하기 위해서.
무수한 피를 먹였겠지.
'최소 천 단위인가.'
〔그렇게나 많은 아이들이 사라졌는데 누구도 의심을 품지 않다니.〕
'아이들은 다른 곳에 썼을 거다.'
플랜트 생장을 위해 갱단끼리 일부러 트러블을 일으키고.
아이들은 '악마'로 탈태시키는 모체로 삼았을 것이다.
과거 사탄교 신자가 악마의 힘을 빌어 마인이 되었듯.
이들도 그리 변이할 터.
〔역겨운지고. 중단시킬 방법은 없느냐?〕
'마인으로 변이가 끝난 사람은 이미 손쓸 수가 없어. 숨을 끊어주는 게 최소한의 자비야.'
유진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이상했다.
LA 같은 큰 도시에서 플랜트라니?
너무 비상식적이다.
왜곡 장막도 절대적이지는 않다.
장기간 유지하면 반드시 티가 나게 되어 있고.
헌터들이 바글거리는 대도시에서 꼬리를 잡히는 순간, 투자해놓은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플랜트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제원을 생각하면... 치고 빠질 만한 게 못 돼.'
이만한 규모라면.
회귀 전, 아무리 미국 쪽 소식에 어두웠다지만 모를 리 없었다.
전생에는 없었던 일이라고 받아들이는 게 낫겠지.
근데.
사탄교가 난데없이 LA에 플랜트를 까는 무리수를 왜 두었는지, 통 짐작이 가지 않았다.
'뭐, 중요한 건 아니야.'
나비효과든 무엇이든.
유진의 눈에 들어왔으니 부수면 그만이다.
[데스 게이트를 사용합니다.]
7성급 네크로맨시.
언데드를 보관하는 전용 아공간 마법, 데스 게이트를 펼치니 시커먼 문이 나타났다.
쿵- 쿵-.
10미터 크기의 괴물.
악마에서 망자로 전직한 둠 나이트가 푸른 귀화를 흩뿌렸다.
"싹 불태워버려라."
[명을 따르겠다.]
샛노란 화염이 커튼처럼 넓게 펼쳐진다.
둠 나이트가 생전에 운용했던 투마강의 운용 방식과 동일한 방법.
유진이 매개체와 각종 시술로 육신을 개조한 덕에 영력과 암흑 마력을 모두 다룰 수 있게 되었고.
둠 나이트는 생전 기술을 어떤 패널티도 없이 펼치는 게 가능했다.
넓게 펼쳐진 화염의 장막은 촘촘하게 퍼져 있는 암흑 마력의 거미줄을 불태우며 영역을 넓혀나갔다.
투마강과 화염의 성질을 동시에 가진 불의 기운.
헌터가 펼치는 정련된 오러 블레이드와 달리, 변화무쌍하게 움직였다.
[다 불타버려라!]
거미줄처럼 퍼진 암흑 마력이 화염에 불살라진다.
매캐한 연기가 사방에서 피어 오르고.
붉은 실에 매달려 있던 꽃봉오리 모양의 고치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안에서 꿈틀거리는 사람의 형태.
납치되었던 아이가 켈록- 기침을 하면서 나왔다.
볼록 솟아난 피부.
피부는 붉게 물들었고.
눈동자도 쭉 찢어져서 악마처럼 변했다.
그렇지만.
"변이가 아직 덜 됐군."
이 정도면 되돌릴 수 있겠어, 라고 뒷말을 중얼거린 유진이 손을 펼쳤다.
[집결된 희망을 사용합니다.]
사아아악!
회색으로 물든 빛이 소년의 몸을 물들이더니.
붉게 변했던 피부가 원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아, 아으으."
"조금만 기다려라."
마인으로 완전히 변이하지만 않으면.
종류를 불문하고 성력을 불어넣어주기만 해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
30초 정도 주문을 사용하니 후유증 없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한 명 한 명을 원래대로 되돌리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겠구나.〕
'나중에 해도 충분해. 지금은 테스트해본 거야.'
〔하나, 민간인들이 저 불길에 휩싸이지 않게끔 일일이 손을 쓰긴 어려워 보인다만.〕
'그렇겠지.'
[데스 게이트를 사용합니다.]
시커먼 영역 너머에서 추가로 소환된 언데드.
인간과 동물을 섞어놓은 듯한 모습의 망자, 비스트보그 10구와 말라비틀어진 좀비 스케어클로였다.
"쿠거 비스트보그들은 장막을 크게 돌면서 고치를 떼어내라."
[크르르륵. 예.]
평양의 수인 군대를 되살려서 만든 언데드, 비스트보그.
그 앞에 '쿠거'라는 호칭이 붙은 이들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를 마친 언데드들이다.
능력은 6성의 끝자락.
준 7성급 무력을 지녔다.
쿠거 비스트보그의 전투력은 불과 반 년 전만 해도 네크로폴리스 1군에 꼽힐 만한 수준.
구룡방 본대를 무너트리고 상급 언데드를 대량으로 확보한 지금에는 정예라고 부르긴 한 수 모자랐다.
그럼에도.
유진이 쿠거 비스트보그를 풀어놓은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컹! 컹!]
그건 바로 엄청난 기동력이었다.
지면을 뛰어오르는 것은 기본이요.
중력에 구애받지 않는 것처럼 콘크리트로 된 건물 옆면을 능숙하게 타고.
몸을 뒤집으면서 빠르게 나아갔다.
〔이 정도는 그대의 하수인들도 충분히 낼 수 있지 않느뇨.〕
'추적 능력도 있어.'
수인들은 타고난 사냥꾼들이다.
그 성질을 온존한 망자가 비스트보그.
전투력은 동 성위 언데드보다 조금 떨어져도, 기동력과 추적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한 단계 강화시킨 쿠거 비스트보그는 그 능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개조해놓았다.
[무욱. 무욱.]
좀비 스케어클로는 광역 버프로 망자들의 능력을 보충해주었다.
〔이렇게나 유용한 주문이 있었으면 진즉에 사용할 것이지.〕
'데스 게이트 구축에는 돈이 많이 들어가.'
우선 7성이라는 성취를 이루어야 하고.
망자를 보관하는 전용 아공간 구축을 위해 여러 촉매와 몬스터들의 뼈가 필요했다.
일곱 번째 성위를 이룩했음에도.
이토록 편안한 망자 전용 아공간을 이제야 꺼낼 수 있었던 이유다.
'아직 면적이 좁아서 많은 언데드를 챙겨올 수 없었지만.'
급해지면 [호플리테스]를 사용해도 되니.
여유는 있다.
[언제까지 태우면 되나?]
"모조리."
[그건 마음에 드는군.]
둠 나이트가 일으킨 불길은 더욱 거세게 타오르며 지면과 건물을 녹이고.
엮여 있는 암흑 마력까지 모조리 태웠다.
도시를 불태운 지 얼마나 되었을까.
쿠르르릉!
시커먼 뇌전이 땅 아래로 꽂히면서 확산 중인 불길의 기세를 꺾었다.
"불청객이 있었군."
번개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마인들.
속초, 그리고 필리핀에서 마주했던 이들과 달리 벼려진 암흑 마력을 품은 자들이 살기를 드러내며 천천히 하강했다.
*
보라색 피부와 노란 눈동자.
등 뒤에 붙은 기다란 날개를 감싼 시커먼 기류.
한때 인간이었지만 악신 성좌에게 제물을 바쳐 마인이 되었고.
더 큰 공로를 쌓아 완벽한 악마가 된 사내, 미하일은 오만한 눈으로 유진을 내려다보았다.
"암흑 마력이 느껴져서 다른 종파의 놈들인가 했더니."
"망자라서 실망했나?"
"그럴 리가. 요즘 성좌들께서 주목하시는 인재를 뵙게 되니 영광이지."
악신 성좌들의 주목이라.
전생에서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썩 기분이 좋진 않았다.
〔짐이 입찰한 권속을 손대려 하지 마라. 이 숭악한 것들아!〕
그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질색하는 양반도 있었다.
"우리가 통성명을 할 만한 사이는 아닐 텐데."
"네가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플랜트에서 불장난을 한 것쯤은 눈감아주겠다."
"악신과 계약이라도 하란 말인가."
"대화가 빨라서 좋군. 그래서 대답은?"
유진은 중지를 들었다.
"그럴 줄 알았다. 인간."
"욕먹는 취미라도 있나?"
"계약을 맺은 성좌께서 워낙 시끄럽게 말씀하셔서. 예의상 권한 것뿐이다."
인간에서 악마가 된 자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혼돈의 쌍익]
[암흑 마법]
[다크 볼텍스&블랙 썬더 x 10]
시커멓게 물든 날개에서 마법을 방출했다.
암흑 마력으로 변질된 뇌기가 소용돌이치고.
하늘에서 떨어진 검은 번개가 그 와류에 휩쓸리며 강화되더니 한 줄기로 변했다.
인근의 공기가 일그러지고 콘크리트가 녹아버릴 정도의 강렬한 열기.
필리핀에서 마주했던 사탄교 고위 신자보다 훨씬 암흑 마력을 다루는데 익숙했다.
7성 끝자락.
유진도 전력을 다해야 맞상대가 가능한 강적이다.
그렇지만.
네크로맨서의 진가는 1대1이 아니다.
"가라. 둠 나이트."
[나한테는 카지크라는 이름이 있다. 다음부터는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겠나?]
"좋아. 그렇게 하지, 카지크."
[마음에 드는군.]
지면을 박차면서 솟구친 전직 악마 카지크는 화염검을 크게 휘둘렀다.
하늘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한 줄기 뇌전과 충돌하는 불꽃.
강대한 힘이 충돌하면서 생긴 파장만으로 이 근방에 붙은 화염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망자 따위가 암흑 마력을 다루다니. 건방지다!"
[곧 너도 같은 신세가 될 텐데. 왜 그렇게 악을 지르고 그러나.]
카지크 녀석.
이 정도면 망자가 된 것을 즐기고 있는 게 아닐까.
플랜트화가 된 슬럼가.
적은 악마화를 마친 사탄교 신자 하나만이 아니었다.
건물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내는 악마와 마계의 주민들.
유진은 무한의 공간에서 마법 무장을 꺼냈다.
〔하수인은 더 없는 게냐?〕
'준비한 건 다 풀었어.'
쿠거 비스트보그들은 부르지 않았다.
이왕이면.
구할 수 있는 사람은 구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힘이 부치면 모를까.
잡병들 따위는 언데드가 없어도 충분했다.
쇄애애액!
악마의 군세 한가운데로 날아간 [원념 깃든 뼈].
혼백 여럿과 마석을 안에 넣은 뼈가 적진 한가운데에서 폭발하고.
[뼈 폭풍을 사용합니다.]
새하얀 폭풍이 몰아치면서 악마와 괴물들을 휩쓸었다.
"크게게겍!"
"잔재주 따위는 버틸 수 있다."
마투기로 급소를 보호한 악마들이 폭풍을 찢어발기며 달려든다.
[특성 - 백야를 사용합니다.]
[영력 → 성력으로 치환됩니다.]
[부정 충격 방패 x 10을 사용합니다.]
와장창!
신성 결계를 찢어발긴 마투기가 역류하고.
기세 좋게 달려들던 악마가 주춤거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서거걱-!
오러 블레이드가 깃든 죽음의 낫으로 목을 베었다.
바닥에 데굴데굴 구르는 악마의 머리통.
[특성 - 백야를 사용합니다.]
[성력 → 마력으로 치환됩니다.]
"내 부름에 답하라."
[애니메이트 데드를 사용합니다.]
[데스 나이트 1구를 제작합니다.]
[완성도가 높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52% 상승합니다.]
베이스가 악마라서 그런지.
성위가 모자라도 유진의 역량으로 커버하니 상급 언데드 판정으로 되살아났다.
급히 만든 탓에 능력치 상승 폭은 크지 않지만.
전위가 하나 생긴 것만으로 충분했다.
[성자의 정신을 복용합니다.]
여기에 도핑까지.
[다중 연산을 사용합니다.]
[이블 아이를 사용합니다.]
[주시의 저주....]
애꾸눈을 부를 필요도 없다.
유진은 즉석에서 수하들을 늘려나가며 전위와 후위를 오갔고, 전장을 마음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266화 견제(1)
전장은 혼란했다.
온전한 악마로 거듭난 전직 인간, 미하일이 화염을 몰아냈지만.
둠 나이트 카리크가 붙인 투마강의 화염은 구석으로 번지더니 다시 한번 기세 좋게 타올랐다.
매캐한 연기가 사방에서 솟구치는 아비규환의 상황이야말로.
네크로맨시의 진가가 드러났다.
[뼈 폭풍을 사용합니다.]
두 번째 뼈 폭풍이 악마와 마물들을 휩쓸었다.
성위가 낮은 괴물들은 뼛조각의 폭풍에 휩쓸려서 넝마가 된 채 숨이 끊어졌다.
"킥. 약한 놈들은 신경 쓰지 마라."
"놈의 숨통을 끊으면 돼."
사탄교 신자들은 자잘한 피해를 무시했다.
플랜트에서 빚어낸 마인만 백 단위.
간이 차원문을 열어서 소환한 마물은 천 단위가 넘는다.
유진이 시체를 언데드로 부활시키든 말든.
어떻게든 거리만 좁히면 승부는 끝이 난다고 생각했다.
폭발 맛을 보기 전까지는.
[시체 폭발(改) X 23을 사용합니다.]
쿠아아아앙!
2성 때부터 주력 마법으로 사용한 시체 폭발.
개수를 거쳐 4성 절정 수준의 파괴력을 지니게 되었고.
'시체'라는 매개체만 있으면 한 번에 대량으로 전개가 가능했다.
뼈 폭풍의 궤도를 움직여서 범위 안의 적들을 조금씩 가까이 붙여놓은 후.
폭발을 일으키자 모두 뼈와 피, 그리고 살점을 고스란히 뒤집어썼다.
"끼요오오옷!"
"아직 살아남은 녀석이 있었나."
오히려 좋아, 라고 뒷말을 붙인 유진이 다시 한번 손가락을 퉁겼다.
[시체 폭발(改) X 42를 사용합니다.]
화력이 모자라면.
더 많은 화력을 들이부으면 그만.
폭발에 휩쓸린 사탄교 신자들이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비틀거릴 때.
[데스 스피어 X 4를 사용합니다.]
마법 무장 위에 덧씌운 죽음의 창으로 마인이 된 신자들의 목이나 심장, 머리를 꿰뚫었다.
"내 부름에 답하라."
[애니메이트 데드를 사용합니다.]
[데스 나이트 3구를 제작했습니다.]
[듀라한 1구를 제작했습니다.]
상급 언데드가 넷으로 늘어났다.
아낌없이 주는 사탄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작은 인간들이 더 몰려오느니라.〕
'알아.'
[피츠제럴드의 냉기]
[트리슈라의 손톱]
하나는 애꾸눈이 주력으로 사용하는 냉기 마법.
둔화 및 냉해 디버프까지 거는 성가신 암흑 마법이다.
그렇지만.
진짜 공격은 [피츠제럴드의 냉기]를 뒤따르는 커다란 얼음창이었다.
창대를 휘감은 막대한 암흑 마력.
섭리조차 비틀어버리는 마법의 정수가 창 끝에 담겨 있다.
정제를 안 하고 그대로 해방해버리면.
LA 전역에 드리운 더위를 일순간 몰아내고 온도를 10도 정도 낮출 만한 힘이.
저 창에 담겨 있었다.
7성 끝자락의 마법.
펼쳐지는 순간에서야 알아챈 것을 보면 사용자가 꽤나 신중한 모양이다.
암흑 마력의 수준도 남다르다.
인위적으로 마법의 위력을 증폭시켜서.
8성에 준하는 파괴력이 얼음 창에 실려 있다.
'제 부하들로 시선을 가린 후에 필살의 일격이라.'
잔꾀 좀 부렸어.
시체 폭발로 상쇄시키는 것은 불가.
매개체가 될 만한 시체들을 이미 많이 써버렸고.
에너지 분사 방식도 퍼져 나가는 형태라서 일점돌파에 특화된 적의 공격을 쳐내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
데스 스피어도 기각.
막 쏘아낸 마법 무장들을 회수하고 재방출하려면 시간이 걸리고.
기대치도 높지 않다.
데스 스피어의 위력은 5성급.
저주받은 이빨이란 매개체를 더해도 6성에 조금 못 미친다.
넷을 투척해서 막아낼 가능성은 0에 가깝다.
〔하면 손 놓고 당할 셈이더냐?〕
그럴 리 없잖아.
[흑암의 반지]에 기록되어 있는 무수한 주문들.
암흑 마법이든, 네크로맨시든 사용하면 어떤 식으로든 저 공격을 막아낼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지.
주도권을 뺏기는 건 싫단 말이야?
그러니.
좀 더 확실한 방법을 쓸 거다.
[역천의 가호 Lv 2를 사용합니다.]
창이 날아드는 속도는 초속을 넘어섰다.
가호의 범위는 50미터.
얼음창에게 간섭할 수 있는 시간은.
0.3초 뿐.
가호 범위 안에 얼음으로 된 창이 들어오는 순간.
유진은 모든 신경을 집중해서 암흑 마력의 구조를 해제하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창끝이 뭉툭해지고.
창대를 축 삼아 맹렬하게 회전하던 암흑 마력이 흩어진다.
'이 속도로는 안 돼.'
빠르다.
역천의 가호 2단계의 진가는 '발현 전' 마법에 간섭하는 것이지.
한 번 방출된 마법을 해주하는 건 시간이 걸린다.
1초에서 2초 정도만 더 시간이 있으면 좋겠지.
그 안에 유진의 몸뚱이가 도넛으로 바뀌겠지만 말이야.
0.2초가 지났을 때.
유진은 [역천의 가호 Lv 2]를 거두었다.
[본 월을 사용합니다.]
지척까지 다가온 얼음 창을 막아서는 뼈 벽.
[백야] 특성으로 치환해서 [부정 충격 방패]를 사용할 여유는 없다.
예리함을 잃은 창 끝일지라도.
암흑 마력으로 빚어내어 극한까지 압축한 냉기는 급조한 벽 따위를 순식간에 쪼개버렸다.
'충분해.'
쪼개지는 뼈 벽에 손을 얹고.
[역천의 가호 Lv 1을 사용합니다.]
피부에 전해지는 암흑 마력 기반의 냉기를 흡수한다.
역천의 가호 1단계의 전제조건은 힘의 파장과 맞닿아야 하는 것.
급히 세운 본 월로 맞닿는 면적을 넓히며, 직접 맞닿는 순간에 피해를 최소화했다.
'시부럴. 그래도 겁나게 시리네!!!'
오러를 일으켜서 최대한 충격을 중화시키고.
암흑 마력을 흡수, 재구성한다.
냉기를 휘감은 창의 1/3이 증발했지만.
남은 부분은 여전히 맹렬한 기세를 살려서 유진을 꿰뚫으려했다.
'충분해.'
창의 암흑 마력을 분해하면서 획득한 마력 일부를 쏘아 보내어 잠깐 동안 틈을 만들고.
[특성 – 백야를 사용합니다.]
[영력 -> 성력으로 치환됩니다.]
[이적을 사용합니다.]
[트리슈라의 창]을 흡수, 재구축해서 얻은 막대한 에너지를 성력으로 바꾼 후.
유진이 동원할 수 있는 성력의 몇 배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모조리 밀어 넣어 '이적'으로 발현했다.
콰아아아아!!
노리는 것은 마법의 주체.
모든 힘을 짜내고.
[역천의 가호]로 재구축한 성력까지 부어서.
본래 낼 수 있는 출력의 몇 배에 해당하는 힘을 반대로 쏘아냈다.
1/3 정도 남은 창이 빛줄기에 삼켜져서 증발해버리고.
날아온 방향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솟구친다.
먹구름에 숨어 있던 악마(전직 인간)는 주위에 있는 마물과 마인들을 끌어들였다.
"키에에에엑!"
"꺄아악!"
광채에 노출된 마물과 마인, 그리고 괴물들이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그럼에도.
이적에 담긴 힘은 모두 해소되지 않았고.
유진에게 불의의 일격을 날린 악마에게 닿았다.
[쥬데카의 방벽]
저저저저저적!
암흑계의 일부인 얼음 지옥, 쥬데카의 기운을 구현해서 만든 얼음 방벽.
미스릴보다도 강한 순백의 벽이 깎여나간다.
한 점으로 모인 광선이 방벽 일부를 뚫어내고.
"크아아악!"
혹한을 다루던 악마에게 기다란 상흔을 남기는 데 성공했다.
'마무리는 못하겠어.'
유진은 악마에게 추가 피해를 주는 대신 이적을 넓은 형태로 퍼트렸다.
먹구름에 숨어 있던 악마들이 하얀 빛에 의해 더 숨어있지 못하고 나타났으니.
"덩치 큰 쥐들이 잘도 숨어 있었네."
7성급 악마만 다섯.
주위에는 무수한 마물과 마인들이 포진했고.
땅에도 몸을 감추고 있던 괴물들이 바글바글했다.
포션을 입에 문 유진은 [라이프 드레인]으로 소모된 체력과 영력을 채웠다.
"아까 그 놈들은 시간 벌이었다, 그거지?"
[데스 에어리어를 사용합니다.]
걱정하지 마라.
이쪽도 적절한 피와 시간이 필요했거든.
"네크로맨서의 싸움을 알려주마."
수업료는.
너희 목숨이다.
*
LA 플랜트의 2인자, 악마 잭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몸뚱이에 새겨진 기다란 상흔.
방금 전, 유진이 쏘아보낸 이적에 당한 상처다.
"빌어먹을. 인간 따위가 감히."
상흔에 남아 있는 성력의 흔적이 그를 괴롭힌다.
암흑 마력과 대척점에 선 힘.
유진이 흩뿌린 이적의 잔향은 악마로 변한 사탄교 고위 신자들과 마물, 그리고 아이들을 변이시킨 마인들의 감각을 교란시켰다.
"미하일은 뭘 하고 있는 건지."
LA 플랜트의 책임자.
미하일과 둠 나이트의 전장은 이미 타인이 간섭할 수 없게 화염으로 불타는 중이었다.
사탄교 신자들은 내부 상황을 알 수 없었으니.
둠 나이트는 미하일에게 맡겨두고 다른 침입자를 치는 게 최선이었다.
"상대는 죽음의 별이다."
"필리핀의 머저리들과 우린 달라."
LA 플랜트의 사탄교 신자들은 이미 악마로 변이를 마쳤다.
충분한 제물을 바쳐서 능력을 일깨웠고.
7성급이라고 하지만, 실질적인 전투력은 준 8성 수준에 이르렀다.
그들이 암흑 마력을 잭스에게 몰아주어서 날린 비장의 공격은 유진조차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였으니.
첫 공격은 실패했지만 수적 우위를 앞서 차륜전으로 가면 무난하게 이기리라고 생각했다.
-으우우우우.
-구억. 구어어억.
고꾸라진 마물과 괴물들이 언데드로 되살아나며.
수준 있는 마인들은 데스 나이트가 되어 다시 전장으로 난입하만 않았다면.
사탄교 신자들의 예측은 맞아 떨어졌을 것이다.
"가라. 악령들아."
[키히히힛!]
스펙터들도 전장을 한층 더 어지럽게 만들었다.
괴물의 생기를 빼앗거나.
정신력이 약한 마물에게 빙의해서 내분을 유도하는 등.
마물 군대의 공세를 늦추며 진흙탕에 빠트렸다.
"구경만 하고 있어도 되는 건가?"
"언데드들이 더 많아지고 있다."
"방금 전에 못 봤나. 대책 없이 접근했다간 몸에 구멍이 뚫려버릴 거다."
잭스가 제 몸에 난 상처를 가리키니 다른 악마들은 더 떠들지 않았다.
이적을 함부로 난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으니.
둘 사이의 정보가 균등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소소한 이점이었다.
유진은 허둥지둥 거리는 악마들을 보며 웃음을 참았다.
'무리해서라도 한 방 먹여준 보람이 있군.'
사탄교 신자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제 분수를 벗어난 힘에 취해있다는 것.
속초에서도.
필리핀 때도.
LA에서도 다를 건 없었다.
고행과 수련 끝에 얻어지는 깨달음이 아닌.
악신 성좌가 부여하는 힘을 받아 인간의 굴레를 벗어남으로써 강해지는 이들.
그러다보니 능력에 비해 힘을 다루는 요령이 떨어졌다.
지금도 봐라.
언데드들이 늘어나고 있으면 피해를 감수하고 자신을 치려고 해야지.
처음에 보여준 퍼포먼스 때문에 위축되어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정신 차리기 전에 최대한 피해를 입힌다.'
데스 나이트들은 어느새 10구까지 늘어났다.
전면전을 벌여도 밀리지 않을 수준.
하지만.
유진은 그 과정에서 시체가 훼손될 것을 염려해서 차근차근 악마들을 압박했다.
망자들이 늘어나면서 전장도 점점 왜곡 장막의 중심부로 옮겨갔고.
기세 좋게 나아가던 유진은 발아래에 깔린 마법 문장을 보고 순간 표정을 굳혔다.
'우연... 일 리는 없겠지?'
룬 문자.
필리핀에서도 본 적 있는 글자가 LA 플랜트에 떡하니 박혀 있었다.
267화 견제(2)
룬 문자.
필리핀에 이어 LA에서도 발견되었다.
첫 번째는 우연이라 쳐도.
두 번은 필연이겠지.
문장 얻으러 왔다가 사탄교의 냄새를 맡게 되었으니, 이 정도면 운명이 아닐까.
유진은 전장 한가운데에서 느긋하게 턱을 만지작거렸다.
[데스 에어리어]의 효과로 망자가 쉼 없이 불어났고.
고급 병종인 데스 나이트도 꽤 늘려두어서 전선을 한 번에 돌파당할 리는 없었다.
그 덕에 여유롭게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회귀 전에 LA에서 이만한 규모의 준동은 없었단 말이야.'
소규모 도시 크기의 플랜트에 7성급 사탄교 신자, 그러니까 악마로 변이한 놈들이 다섯이나 몰려 있는 상황.
이만한 플랜트가 충분히 마인들을 찍어낸 후에 모습을 더러냈다?
몬스터 웨이브 수준의 재난 사태가 벌어졌을 것이다.
네크로맨시 연구에 매진하느라 외부 소식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유진이라도.
이 정도 규모의 사태는 모를 수 없었을 터.
'미래가 달라졌다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겠지.'
LA에 사탄교가 멀티를 차린 것이 로마노프 가문과 연관이 있다면.
이 변곡점은 유진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으리라.
〔점점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미래가 변모하는구나.〕
'뭐, 아직도 써먹을 수 있는 회귀 전 정보들이 있으니까 괜찮아.'
일단은.
저 인두겁을 쓴 악마 놈들을 정리하는 것부터 생각하자.
답을 해줄 녀석들은 저기에 많이 있다.
〔모두 도륙해버리면 어찌 답을 들으려 하느뇨.〕
'꼭 숨이 붙어있어야만 대답할 수 있나.'
망자로 되살리면 그만이지.
안 그런가.
[특성 - 백야를 사용합니다.]
[성력 -> 영력으로 치환합니다.]
[언홀리 커맨드를 사용합니다.]
라이프 드레인으로 소모된 힘을 어느 정도 보충하고.
광역 지휘 및 영력 회복 수단을 사용했다.
"내 부름에 답하라."
[애니메이트 데드를 사용합니다.]
데스 나이트들은 어느새 20구까지 늘어났다.
정말이지.
아낌없이 퍼주는 녀석들이다.
전장이 넓어질수록.
사탄교에서 많은 병력을 투입할수록.
언데드 군세는 늘어날 뿐,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개전 초기부터 압도적인 화력을 퍼부었으면 몰라도.
소모전으로 유진의 능력을 파악하려고 한 시점에서 인간사냥꾼과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이상하다. 슬슬 놈의 힘이 빠질 때가 되었는데."
잭스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 순간에도.
상흔에 깃든 성력은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다섯 악마의 암흑 마력을 일축시켜서 펼친 암흑 마법, [트리슈라의 손톱].
준 8성 수준인 마법을 파훼하고.
자신에게 큰 상처를 입힐 만한 성력을 쏘아보냈으니.
유진은 힘을 대부분 소진했어야 했다.
실제로도 그의 계산은 맞아 떨어졌지만.
이미 전개해놓은 [데스 에어리어]는 유진의 마력을 소모하지 않았기에.
잭스는 오판을 눈치 채기까지 꽤 오랜 시간을 들여야 했다.
"데스 나이트가 늘어나고 있다."
잭스와 마찬가지로 악마가 되어 7성의 힘을 손에 넣은 신자 하나가 당황한 기색으로 외쳤다.
카강!
격돌하는 암흑 강기와 투마강.
막 제조한 데스 나이트들의 출력은 악마에 비해 한 수 모자랐다.
본래 7성의 벽을 넘어선 시체도 아니었고.
유진이 악마종의 성질을 최대까지 끌어 올려서 만든 데스 나이트라서 순수 무력은 7성에 조금 미치지 못했다.
그렇지만.
숫자가 문제였다.
전초전에서 유진의 힘을 빼겠답시고 어정쩡하게 병력을 투입했다가 데스 나이트들의 숫자가 늘어났고.
사탄교 → 언데드 군대로 편을 갈아탄 마인들은 서슴없이 전 직장 상사에게 칼을 휘둘렀다.
LA 플랜트의 책임자인 미하일도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악마 흉내를 내는 망자 주제에!"
[실락의 벽력]
갑자기 몰려든 먹구름에서 뇌전 줄기가 가닥가닥 튀더니.
일점으로 모여 하늘에서 수직으로 낙하.
둠 나이트 카리크의 정수리에 꽂혔다.
암흑 마력으로 섭리를 비틀어서 만든 벼락.
그 위력은 7성 끝자락에 도달했으며.
틀을 벗어난 암흑 마법은 순수한 번개 마법의 위력을 상회하고.
섭리마저 비틀어 현세에 영향을 끼쳤다.
뇌전에 담긴 심후한 힘은 반경 1킬로미터 일대에 정전기를 일으켰으며.
극히 일부의 힘이 새어나갔음에도.
플랜트에 먹힌 건물들에 튄 스파크로 인해 불똥이 튀었다.
그렇지만.
섭리를 벗어난 건 미하일의 암흑 마법만이 아니었다.
[암흑 강기 - 확산]
[지옥 화염]
둠 나이트가 되면서 생전보다 올라간 출력.
이면으로 나누어진 암흑 마력으로 빚어낸 지옥 화염과 강기가 시간차를 두고 뇌전을 밀어낸다.
두 에너지가 충돌하자 어마어마한 열기가 사방으로 확산되었고.
"끼익!"
"컥!"
근처에 있던 마인이나 괴물, 혹은 마물들이 비명 한 번 지르고는 숯으로 화했다.
플랜트의 영향권 안에 있는 건물들도 순식간에 녹아버려서 용암으로 변해버렸고.
악마와 망자가 격돌하는 곳은 더 이상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흉측하게 일그러져버렸다.
변화무쌍한 화염이 번개를 살라먹고.
광풍처럼 몰아친 뇌전 줄기가 다시금 불꽃의 기세를 잠재우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이것도 받아보아라!"
[지옥의 속죄]
불꽃을 동반한 노란 번개가 비처럼 쏟아졌다.
다중 속성의 대단위 마법.
잭스의 암흑 마력에 기반을 둔 화염을 전개해서 카리크의 힘을 빼앗으려는 계책이었다.
[감히 나한테 화염으로 싸움을 걸려는 건가!]
서거걱!
번개 끝에 휘감고 있는 불꽃이 샛노란 화염에 반응해서 역류.
둠 나이트 카리크가 발산한 투마강이 수십 갈래로 쪼개지면서 암흑 마법으로 빚어낸 뇌우를 모조리 베어버렸다.
쪼개졌던 암흑 강기들은 번개를 잘라내고도 기세가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고.
다음 수를 준비하고 있던 잭스의 온몸을 난도질했다.
"커으윽!"
[번개. 베었다고.]
온몸에서 피를 뿜어내며 쓰러지는 잭스.
둠 나이트는 음산하게 웃으면서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잭스가 쓰러졌다."
"뭣? 고작 망자 따위와 1대1 대결에서 패배했다고?"
"에잇. 천유진의 언데드는 괴물인가!"
악마들은 기겁하며 뒷걸음질쳤다.
지금은 후퇴해야 한다.
도망 같은 것이 아니다.
전략적으로 물러난 후 후일을 도모해야....
[어딜 도망가?]
악마들의 배후에 드리운 시커먼 그림자.
별도 행동에 나섰던 파프너가 유진이 남긴 흔적을 따라 전장에 합류.
악마들 뒤를 잡은 채 여유롭게 웃었다.
철컥- 철컥-.
데스 나이트들도 포위 진형을 갖춘 채 악마들을 노려보았다.
유진은 그 뒤에서 느긋하게 뒷짐을 졌다.
"내가 좀 물을 게 많아요."
"무엇이든 물어봐라. 내가 답해줄...."
푸아아아악-!
죽음의 낫이 악마의 머리와 몸통을 분리시켜주었다.
"걱정 마. 너희는 원하지 않더라도 성실하게 답하게 될 거다."
바로.
죽어서 말이지.
"내 부름에 답하라."
[애니메이트 데드를 사용합니다.]
[데스 나이트 1구를 제작합니다.]
[물으시는 건 뭐든 대답하겠습니다.]
거 봐.
그럴 거라고 했지?
*
LA 외곽에서 벌어진 사탄교 플랜트 사태.
악마가 된 사탄교 신자들을 쓰러트린 후에도, 수습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불의 심판을 받아라!]
둠 나이트 카리크는 신이 나서 여기저기에 불을 질렀고.
[크르르릉.]
버프에 힘을 입은 쿠거 비스트보그들은 꽃망울처럼 생긴 고치를 일일이 수거해서 유진 앞에 놓았다.
개수는 약 500개.
"피해자가 얼마나 되지?"
"...1천 명이 조금 넘습니다."
"절반은 구했군."
스네이크 아이의 말에 쓴웃음이 절로 지어졌다.
유진이 나섰기에 반절이나 구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사탄교의 수작질 때문에 아이들이 희생된 것은 뒷맛이 꽤 씁쓸했다.
플랜트를 쓸어버리는 중에 스러져간 마인 중 다수는 납치당한 아이들이었을 터.
[주인은 최선을 다했어.]
"어. 이게 최선이야."
[뭐야. 우울한 줄 알고 위로하려는데 그렇게 말하기야?]
"꿍하고 있을 순 없잖냐."
회귀 전에는 이보다 더한 꼴도 여럿 봤다.
유진이 정의를 지키기 위해 힘을 쌓은 것도 아니고.
모든 비극을 막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속초에서 벌어진 [피의 발렌타인] 사태도 어찌 보면 방관하지 않았던가.
물론.
막으려고 하면 다른 곳에서 사태가 발발될 게 분명해서 구경할 수밖에 없던 거지만.
더 고민했으면 최선의 수단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난 그렇게까지 정의로운 성격은 아니야.'
그럼에도.
희생자들의 숫자를 들으니 찝찝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파프너. 불장난의 피해가 결계 바깥으로 확산되지 않게 지켜봐줘."
[알았어.]
"스네이크 아이. 바깥은 어떻지?"
"갱단 본부를 모두 급습하고 증거를 확보했습니다."
"리틀 엔젤스에 넘겨줘."
"알겠습니다."
왜곡 장막이 걷히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린다.
그 동안 플랜트에 뿌려진 사탄교의 흔적들을 모두 제거하면 되겠어.
파프너와 둠 나이트 카리크가 있으니 금방 해결될 것이다.
〔그대의 새 하수인들을 심문할 시간이로구나.〕
'심문이라니. 심도 깊은 대화야.'
유진은 데스 나이트로 되살아난 악마이자, 전직 사탄교 신자를 불렀다.
"이리 와봐라."
[예. 주인님.]
"바로 주인 소리가 나오는 걸 보니 사탄교 때부터 훌륭한 노예였나봐."
[....]
"내가 말이에요. 여기서 재밌는 걸 봤어."
유진은 발로 땅을 툭툭 건드렸다.
발바닥에 깔려 있는 룬 문자.
데스 나이트의 눈두덩이에 붙은 푸른 귀화가 좌우로 흔들렸다.
"이게 뭔지. 설명 좀 해주실까?"
[천상의 룬 문자입니다.]
천상의 룬 문자.
현대 마법의 기초가 된 18개의 룬 문자가 아닌, 이적을 빚어내는 6개 문자다.
"그건 나도 알고요."
[왜곡 장막과 암흑계로 향하는 균열을 열 수 있었던 것은 이 룬 문자 덕분입니다.]
"원리는... 됐다. 물어본다고 알 것 같지도 않고."
[악신 성좌께서 내려주신 글자입니다. 이걸 새기기 위해 어린아이 100명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자랑이다. 아주 자랑이야."
데스 나이트는 억울한 듯 안광을 꺼트렸다.
설명하라고 해서 한 것뿐인데.
다른 망자들에게도 설명을 들었지만 알고 있는 건 비슷했다.
〔쓸 만한 정보는 없는 듯하구나.〕
'없기는 왜 없어? 룬 문자의 출처를 알았잖아.'
〔룬 문자의 창시자는 오딘일진대, 악신 성좌한테 제공을 받았다 하니 의미가 없지 않느냐.〕
'그러니까 더 있지.'
로마노프 가문이 사탄교를 움직여서 LA에 플랜트를 건설했다는 증거.
더 정확히 말하면.
오딘이 모종의 수단으로 바벨탑과 선을 대고 있고.
악신 성좌를 부추겨서 LA에 플랜트를 건설한 것이다.
'본격적으로 전쟁을 벌이기 전에 지원 세력부터 깎아내겠다는 의도다.'
과연.
로마노프 가문다운 수작질이다.
유진은 뺨을 일그러트렸다.
시작도 안 했는데 견제부터 시작한다, 그 말이지?
몰랐으면 두 손 놓고 당했으려니와.
알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조금 다를 거다.
함정도 모르고 걸려야 치명적이지.
알면 대비가 가능하거든.
'드미트리. 나도 재미있는 선물 하나 보내주마.'
유진은 히죽 웃었다.
268화 반품합니다.
미국 LA 슬럼가에서 벌어진 사탄교의 준동.
일명 '폴른엔젤스'라 불린 사태는 유진이 사전에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인명 피해를 유발했다.
플랜트에 납치되거나 마물의 먹이로 던져진 사람들.
쿠거 비스트보그들을 별동대로 운영, 최대한 많은 이들을 구출했지만.
완전히 마인으로 변해버린 희생자들은 되돌릴 수단이 없었다.
대격변 이후 확장된 슬럼 갱들끼리 전면전을 벌인 쪽도 피해가 큰 건 마찬가지였다.
사상자의 숫자는 천 단위였고.
완전히 타버린 플랜트 구역까지 고려하면 물적 피해도 엄청났다.
"이번 사태에서 미스터 천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더 큰 피해가 일어났을지 모릅니다."
"미스터 천이 조기에 발견하지 않았으면 LA는 지도에서 사라졌을 수도 있습니다."
동양인.
그것도 미국 출신이 아닌, 극동의 나라에서 온 헌터를 향한 극찬이 이어졌다.
황색 언론에서 떠드는 게 아니다.
LA 시장이 직접 기자회견을 열어서 한 말이었고.
기자들은 더 과장된 표현을 쏟아 부으며 미국 판 용비어천가를 불렀다.
[한국의 구원자, 이번에는 LA를 구하다.]
[미스터 천. 그의 영웅신화는 어디까지 이어지는가?]
[리틀 엔젤스와 시작된 영웅의 인연.]
....
"이야. 떡값이라도 뿌렸어?"
"돈 없다."
"블랙 컴퍼니 수입 대충 들어서 알거든. 엄살 부리기는."
"파프너야. 네가 먹는 마석 값만 얼망니지 아니."
"아. 비겁하다."
블랙 컴퍼니 수입 중 일부는 파프너의 사료(?)값으로 꾸준히 소모되는 중이었다.
드래곤하트의 출력을 올리려면 마력을 흡수하는 게 제일이니.
본래 용족은 나이를 먹으면서 드래곤하트와 신체가 같이 성장하지만.
파프너는 진룡족에 해당하는 '격'을 지녔으되, 육신이 그 격을 따라가지 못했다.
마석을 퍼먹으면 성장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
대신 돈이 좀 많이 들었다.
"연고지도 아닌 곳에서 떡값 뿌릴 돈 있으면 마석을 더 사겠지."
"그럼 왜 주인을 찬양하는 데 혈안이 된 거냐?"
"나 하나를 영웅 만들어줘서 자기들이 무능했던 사실을 묻을 수 있으면 좋잖아."
LA는 캘리포니아 주 최대 도시이자, 뉴욕 다음으로 큰 곳이다.
그런 도시에서 사탄교의 준동을 알아채지 못했다?
대격변 이후 외곽에서 규모가 팽창된 슬럼가라고는 해도 감당 가능한 실책을 넘어선 일이다.
"그러니까 주인을 띄워주는 거구나."
"다른 이유도 있지만 말이야."
"그건 또 뭔데?"
"내 무력."
사태가 진정되고 조사에 나선 시 관계자들과 헌터 길드들은 싸움의 흔적을 살펴본 후 유진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7성급 악마가 다섯, 아니 여섯?'
'이 파괴의 흔적은 8성 수준의 무력이다.'
'만약 시가지에서 싸움을 벌였다면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을 거야.'
'미스터 천. 이게 개인의 무력이 맞는 건가.'
'각성하고 2년이 조금 안 되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둠 나이트 카리크를 비롯한 망자들의 강함.
그리고 유진 본연의 능력까지.
사탄교 신자들의 무력은 LA 유력 길드인 리틀 엔젤스도 단독으로 상대하기 어려울 만큼 뛰어났다.
유진 단독으로 그런 적을 도륙해버렸으니.
셈법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리틀 엔젤스 주가가 며칠 만에 5배까지 뛰었어."
"헐. 대박."
"나랑 연이 닿았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호재라는 거다."
저 수많은 찬양 기사들은.
유진과 연을 만들고자 하는 여러 기업들의 구애인 셈이다.
실제로도 '폴링 엔젤' 사건 이후 불이 난 것처럼 연락이 쏟아져서 아예 휴대전화를 꺼버렸다.
"차후 블랙 컴퍼니 미국 진출을 위해서 기업에 연을 만들어두는 편이 좋지 않아?"
"그러면 내 몸값이 좀 떨어지지 않겠나."
"아. 더 유명해지면 접촉하겠다는 말이구나."
"역시 파프너야. 눈치가 빨라."
눈치 빠른 소환수는 이래서 싫어할 수가 없다.
말이 바뀐 것 같지 않느냐고?
착각입니다. 착각.
생각을 척척 읽어서 먼저 행동에 나서주는데 어떻게 싫겠어.
퉁- 퉁-.
굳게 닫힌 유리문을 무언가가 두드렸다.
"주인."
"어. 괜찮아."
유진은 기다렸다는 듯 창문으로 다가갔다.
달칵, 문을 열자마자 박쥐 한 마리가 호텔 안으로 들어오더니 얌전히 착지했다.
박쥐는 이내 시커먼 연기를 내뿜더니 말끔한 백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마담이 보냈나?"
"예."
"부탁한 건 어떻게 됐지."
"내일 오전 10시까지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으로 가시면 됩니다."
사내는 공손하게 비행기 티켓을 내밀었다.
"음. 주인아. 비행기도 그렇고, 설명이 좀 필요하지 않겠어?"
"안 그래도 말해주려고 했다."
"그래. 어디를 가려고 그렇게 비밀스럽게 티켓을 받은 거야."
"아테네."
유진은 티켓을 가볍게 만지작거렸다.
"블랙 컴퍼니 식구들 모르게 해외여행이라도 다녀오려는 건 아닐 테고."
"업무지. 업무."
"근데 왜 티켓은 하나야?"
"나 혼자 다녀올 거다."
"거기는 위험해. 로마노프 가문은 카리만리스와 휴전을 맺었다며."
"어. 그래서 네가 해줄 일이 있어."
폴리모프.
주문 사용자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하는 마법이다.
파프너는 생전의 모습을 선호했지만,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면 그 형태로도 변할 수 있다.
"나보고 주인 행세를 하라?"
"맞아."
"그, 난 일단 생물학적으로 여자거든요."
"디테일한 부분까지 재현하라는 건 아니다. 옷맵시와 얼굴 정도면 충분하지."
"아니, 그래도, 하아."
파프너는 한숨을 쉬었다.
카리만리스 가문이 지배하고 있는 그리스에 홀로 가겠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고.
유진의 행세를 하라는 지시도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너라서 맡길 수 있는 거다."
"사탕발림은 됐네요."
"진심이야. 나를 가장 오랫동안 본 너야말로, 내 생각과 행동을 가장 잘 따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진짜?"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사실은 [폴리모프]를 제약 없이 쓸 수 있는 게 파프너라서였지만.
굳이 그 부분까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흥. 좋아. 그렇게까지 주인이 나를 신뢰하면 어쩔 수 없지."
파프너의 볼이 씰룩였다.
"참. 화물은 다 실어놓았나?"
"말씀하신대로."
"좋아. 마담에게 감사 인사를 전해줘."
"로드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박쥐로 변한 흡혈귀가 다시 창밖으로 나갔고.
유진은 잠들기 전에 몇 가지 준비를 했다.
*
유진이 회귀 후 그리스에 온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크레타 섬.
그에게 빌붙어 있는 성좌 나리를 영입하기 위해서였다.
〔하면 이번에는 무슨 연유로 이 땅에 온 것이더냐.〕
'왜 그렇게 불편해하십니까. 성좌 나리.'
〔그리스에는 찬탈자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느니라.〕
'에이. 제우스가 바로 알아채는 것도 아닌데. 너무 겁먹어 있는 거 아니야?'
〔건방지구나! 짐이 제우스에게 두려움을 품을 것 같으뇨!〕
'응. 왕위 계승 당했죠? 영락해서 낙성좌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죠?'
〔끄으으으으으.〕
아테네 공항에 내리자마자 옛 생각이 난 크로노스는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러니까 누가 아들내미한테 왕위 물려주기 싫다는 이유로 기원전 시절 먹방을 하라고 했니.
유진은 크로노스의 투덜거림을 한 귀로 흘리며 버스에 탑승했다.
'두 번은 환승해야 하나.'
지도 앱으로 루트를 확인한 후, 몇 시간 동안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아테네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택시를 이용해도 되지만.
이왕이면 흔적이 남지 않는 편이 좋으니까.
CCTV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스펙터를 몸에 깃들게 하면 인식을 저해할 수 있으니.
카리만리스 가문에서 작정하고 유진을 쫓으려 해도 특정인으로 단정 짓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쯤 왔으면 됐으려나.'
〔무엇을 하려 이리 불편하게 이동한 건지, 원.〕
'보면 알아.'
[데스 게이트를 사용합니다.]
시커먼 공간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5미터 크기의 언데드, 나이트헤드였다.
필리핀에서 제작한 망자로 오우거에 비견되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기습에 능한 언데드였다.
[키힉. 부르셨습니까.]
"근처에 헌터가 있는지 경계해라. 접근하면 죽여도 좋다."
[명을 받듭니다.]
나이트헤드는 망자 특유의 영력을 감추는 데 익숙했다.
데스 나이트를 배치했다간 '나 천유진이요'라고 광고하는 꼴이니.
기습과 은신에 능한 나이트헤드라면 지금처럼 은밀하게 행동할 때 경계를 맡기기에 최선이었다.
'그럼 써볼까.'
쿵-.
아공간 주머니에서 나온 돌덩이 하나가 지면 아래로 떨어졌다.
필리핀 민다나오 섬에서 발견했던 룬 문자.
이번 '폴링 엔젤' 사태 때 획득한 문자까지 해서 둘이었다.
〔돌판을 부수지 않고 도려내어 보관한 연유가 이것이었느냐?〕
'뭐, 이런 식으로 쓸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천상의 룬 문자.
전대 네크로맨서 마스터들의 지식이 담겨진 [흑암의 반지]로도 이 문자를 온전히 해독할 순 없었다.
말 그대로 유진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힘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문자 자체를 해독할 순 없어도.
쓸 수는 있다.
어린아이가 글자의 의미를 알고 쓰는 게 아니라.
모양을 따라서 쓰며 배워가듯.
사탄교 신자들도 룬 문자의 의미나 그 안에 깃든 힘을 이해하진 않아도.
모종의 루트로 획득한 글자의 힘을 응용해서 플랜트를 건설했듯이 말이다.
"이렇게 손을 대면...."
파직, 파지지직.
필리핀과 LA에서 뚝 떼어온 룬 문자들이 공명하기 시작한다.
지면에 스며드는 시커먼 기운.
암흑계의 힘, 암흑 마력이 공간을 허물면서 스멀스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조금만 있으면 마물들이 튀어 나오겠어.'
〔호오. 이이제이라도 할 셈이더냐.〕
'그런 한자성어는 어떻게 아셨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플랜트를 만드는 재주 따위는 유진에게 없다.
악신 성좌와 정식으로 계약한 것도 아니고.
[흑암의 반지]에 암흑 마법과 관련된 지식이 있긴 해도.
룬 문자를 응용하는 재주까진 없었다.
'필리핀 때 사탄교 신자들이 히드라를 불러냈잖아?'
〔그리하였지.〕
'룬 문자를 제공한 건 오딘이 확실해. 근데 왜 히드라가 나왔을까.'
오딘이 모종의 수단으로 바벨탑과 선을 대고 있으며.
카리만리스 가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라는 추론이 유진을 아테네로 오게 한 배경이었다.
〔그건 비약이 아니느뇨?〕
'뭐, 그렇긴 한데. 전혀 모르진 않을 거야.'
〔전생의 지식이 근거더냐.〕
'어.'
회귀 전.
네크로폴리스에 침투해서 검은 방첨탑을 무너트린 이들은 [퀴에네]의 열화 된 버전을 사용했었다.
그것만큼 확실한 증거가 어디에 있을까.
'룬 문자로 수작질을 부렸다는 게 카리만리스 가문에 들어가면 어떻게 반응할까.'
휴전한 지 얼마 안 됐잖아.
꽤.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지 않겠나?
"크흐흐흐흐."
〔이젠 말하는 것조차 지치는구나.〕
크로노스의 푸념이 유진의 귓가에 맴돌았다.
자.
이제 서로 죽여
269화 수신자를 찾을 수 없습니다
로마노프 가문의 3인자이자 대외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인물.
니콜라이는 새벽에 날아온 항의 전화에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과 할 말 없소. 가주를 부르시오.
"카리만리스 가주님. 언짢으신 것은 알겠으나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순서? 수우우운서?
성난 짐승처럼 거친 호흡이 수화기 너머로 아른거렸다.
-당신네 수작질로 민간인 피해만 100명이 넘어갔소.
"가주님께서 노하신 것은 알겠습니다만, 저희한테도 상황을 일러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발뺌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가주와 연결해주시오.
명목상 휴전이라는 이름을 걸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로마노프 가문의 승리로 끝난 분쟁이다.
카리만리스 가문이 큰 소리를 낼 상황이 아닐진대.
대외 활동을 도맡은 자신을 패스하고 가주에게 직접 연결해달라니.
니콜라이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으나 노성을 내진 않았다.
대신 비서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10초 뒤.
비서가 내민 태블릿을 확인한 니콜라이가 신음을 삼켰다.
[LA에 이어 아테네? 사탄교의 만행은 어디까지 가는가?]
[잇따른 사탄교의 준동에 불안함 증가해]
[카리만리스 가문. 이권 다툼 때문에 사탄교 발호를 신경쓰지 못했나?]
[흔들린 안보. 로마노프 가문의 도움이 필요....]
"우리가 아닙니다."
-현장에서 룬 문자가 발견되었소.
"....저희도 상황을 파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잠시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좋소. 가주님께도 안부 전해주시구려.
뚝-.
"본가에 소식을 전하였습니까?"
"예. 아테네에 개입하진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겠죠. 내가 허락하지 않았으니."
사탄교와 접촉하는 건 니콜라이의 소관이었다.
총괄은 마법왕 드미트리가 하고 있지만, 그는 신경 쓸 일이 많다 보니 니콜라이에게 대리 권한을 허용해주었다.
손등에 새긴 룬 문자가 그 증표였다.
"곤란하게 되었군요."
니콜라이는 두 눈을 슬쩍 감았다.
극동 공화국에서의 일도 마무리되지 않았다.
'무왕. 흉중에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군요.'
천무문과는 [용의 계곡] 통제 권한을 넘겨주는 대가로 블랙 컴퍼니 견제를 부탁하려고 했었다.
그렇지만.
물밑에서 용의 계곡 출입 권한을 협상할 땐 언제고, 무왕은 관심을 거두어버렸다.
-썩 매력적인 제안이 아니군. 더 할 말은 없나?
무왕의 냉랭한 반응에 대화를 이어가기보다 물러나기를 선택.
그를 움직일 만한 조건이 무엇일까 알아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블랙 컴퍼니와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 같긴 하다만, 그게 로마노프 가문의 손을 뿌리칠 정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7대 명가 중 가장 큰 성세를 자랑하는 로마노프 가문.
무왕도 드미트리와 마찬가지로 9성에 오른 유이한 헌터이지만.
로마노프와 천무문을 비교하면, 당연히 로마노프 가문의 압승이었다.
'우릴 견제하려는 거라면 차라리 이해하겠습니다만.'
다르다.
적의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무왕의 태도.
그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무왕의 마음을 돌리거나, 혹은 우회해서 한반도를 신속하게 공격할 루트를 확보해야겠습니다.'
천무문과의 협상을 타개시킬 방법을 찾아내면서.
제3 마법 병단을 지휘해서 다가올 전쟁을 위해 사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테네에 다녀와야겠습니다."
"가주님의 지시는 어찌 하시려고요."
"카리만리스 가문에 양보하는 티를 내려면 최소한 저 정도는 움직여야 합니다."
알렉산더 카리만리스가 왜 자신에게 연락을 주었을까.
휴전 직후에 벌어진 트러블.
로마노프 가문에게 무언가 양보를 얻어내야겠지만, 직접 마법왕을 찌를 수 없으니 우회해서 자신을 자극한 것이다.
외교적인 수사를 빼면.
-야. 니들 우리 영역 침범했더라?
-아니야. 다른 놈이 그랬어.
-휴전하자마자 이러면 우리도 드러눕는다.
-우리가 조금 양보할게. 그러지 마.
...라는 대화를 나눈 것이었다.
마법왕이 직접 행차하면 급이 맞지 않으니.
니콜라이가 움직이는 게 맞았다.
"마법 병단 지휘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당신이 맡아주십시오."
"제 말을 들을지 모르겠는데요."
"이미 맡겨놓은 업무가 있으니 현상유지만 하면 됩니다. 오래 걸리진 않을 터이니."
니콜라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가 뜨지 않은 새벽이지만.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잘 부탁합니다. 옐레나."
"다녀오세요. 니콜라이."
니콜라이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었다.
*
유진이 쏘아올린 작은 공, 아니 룬 문자는 동유럽에 다시 한번 전운을 불러들였다.
로마노프와 카리만리스 가문의 갈등.
가까이는 동유럽의 실질적인 지배자를 가리는 싸움이요.
더 크게 보면 유럽 전역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명가를 가리는 신경전이었다.
대격변 이후 헌터의 힘 = 국력이 된 시대.
세계 7대 명가 중 둘의 패권 다툼은 유럽의 정세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연 단위로 벌어진 국지전이 멈추고.
이제야 정상화가 되었나 싶었는데, 카리만리스 가문은 사탄교의 발호에 자극을 받아 가문 소속 헌터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근데 왜 로마노프 가문을 견제하려는 것 같지?"
"종전은 했어도 얼마 전까지 다투었던 상대잖아. 혼란한 틈을 타서 치고 들어올지 모른다는 거 아닐까."
"그러기에는 좀 과한데."
부풀어 오르는 전운.
니콜라이의 보고를 받은 드미트리가 흠, 하고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냥 밀어버리자. 가주."
"이모님. 체통을 지키시죠."
"아. 왜 가주도 이모 타령을 하는 거야!"
"카리만리스 가문을 없애면 이점보다 손해가 더 크다는 것을 알지 않으시오?"
"그야 설명은 들었다만. 버러지 같은 것들이 발목을 잡으려 들잖아."
"진정하시오. 니콜라이가 해결할 터이니 기다리면 된다오."
카리만리스 가문은 아테네에서 벌어진 사탄교의 발호에서 '룬 문자' 이야기를 언론에 흘리지 않았다.
이번 사태를 확산시켜 서로 끝장을 보자는 의미가 아닌, 양보를 바란다는 의미다.
"놈들이 수작을 벌였단 가능성도 있잖아."
"그럴 확률은 0에 가깝다, 라고 봐야한다오."
카리만리스 가문은 룬 문자에 간섭할 수 없다.
천상의 룬 문자.
필멸자에게 허락되지 않은 룬 마법의 정수이며.
마법에 능통한 성좌들이나 겨우 다룰 수 있는 강력한 권능이다.
사탄교의 협력자들에게 나누어준 룬 문자는 모두 드미트리가 새긴 것들.
필멸자 된 입장에서 마법의 정점에 도달했으며, 오딘의 대행자인 자신만이 새길 수 있었다.
"조작은 별개잖아?"
"카리만리스 가문은 룬 문자에 간섭할 만한 능력이 없소."
평가절하하는 것이 아니다.
카리만리스 가문의 주력은 무투계.
마법에 능통한 헌터도 있지만, 로마노프에 비해서는 한참 모자랐다.
룬 문자를 손에 넣는다 쳐도 임의로 그걸 조작해서 암흑계의 마물을 불러낼 수는 없었다.
"그럼 대체 누가."
"찾아봐야지."
카리만리스 가문의 영역에 룬 문자의 힘을 해방시켜서 마물을 불러냈다.
그 행동으로 가장 이득 보는 자가 누구인지를 되짚어보면.
범인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천유진이라는 꼬맹이?"
"아닐 거요."
드미트리는 곧바로 부정했다.
각성한 지 2년 밖에 안 된 신관계 헌터가 룬 문자에 간섭할 수 있을 리가 없고.
설령 그럴 능력이 있다 쳐도 LA 플랜트를 토벌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룬 문자를 옮겨서 폭주시켰겠는가.
아테네 근처에서 마물들이 출현해서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있는 시각에는.
리틀 엔젤스에서 마련해준 호텔 근처에서 먹방을 찍는다는 정보까지 들어왔다.
"카리만리스와 천무문을 제외하고 조사를 해봐야겠소."
"하긴. 그 무투계에 푹 빠진 멍청이가 그런 수작을 부리겠어."
"연이 닿아 있는 사탄교 신자들의 등도 가볍게 떠밀어주어야겠군."
"이럴 땐 사려야 하는 거 아닌가?"
"어차피 버러지들이오. 분에 넘치는 힘을 얻은 대가를 치러야지."
상대의 목적이 로마노프 가문의 발을 묶으려는 것이라면.
더 큰 혼란을 일으켜서 음모를 꾸민 당사자도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게 만들면 된다.
이번 사태의 범인이 7대 명가 중 하나라고 생각하였기에.
드미트리는 과감한 수를 두었다.
완벽한 헛발질이라는 것도 알지 못한 채.
*
인도.
남아프리카 공화국.
페루.
그 외에도 여러 국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사탄교의 준동.
불과 1주일 사이에.
전 세계는 악마로 변한 사탄교 신자들의 난동으로 일대 혼란에 빠졌다.
〔계약자여. 혹, 전생에도 이런 일이 있었느뇨?〕
'아뇨. 없는데요.'
아테네에서 몰래 빠져나온 후.
해상 루트를 이용해서 중동 아덴 만까지 유유히 나온 유진은 급변하는 정세에 혀를 찼다.
'누가 건들었는지 모르겠으니 몽땅 휘저어버리겠다?'
〔로마노프 가문 말이더냐.〕
'그 놈들 말고 어디를 말하는 거겠어.'
필리핀과 LA.
두 번이나 마주한 룬 문자를 보고 확신했다.
로마노프 가문은 사탄교와 선을 대고 있다.
아테네에서 깽판을 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사탄교 신자들이 날뛰는 거 봐라.
누군가의 지령을 받지 않는 한.
짠 것처럼 우후죽순 튀어나오지는 않겠지.
〔그리하여 얻어지는 것이 무엇이 있다고.〕
'상대가 누군지 모르니까. 어느 쪽이든 찔러보면 나온다는 생각이겠지.'
로마노프 가문의 전력은 막강하다.
사탄교 따위, 소모품으로 얼마든지 던질 수 있을 만큼.
어떤 방식으로 선을 댄지는 모르겠지만.
로마노프 가문이 스스로 패를 소모하게끔 만든 것만으로도 큰 이점이었다.
부우웅-.
"전화 받았습니다."
-어울리지 않게 존대 하는 거예요?
"국제전화잖아. 누군지도 모르니 일단 공대는 해야지."
-호호. 평소에도 그렇게 해주시면 고맙겠네요.
능글맞은 목소리가 유진의 귓가에 아른거린다.
마담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로마노프 가문이 천무문에게 거래를 제안했다고 해요.
"길을 열어달라거나 블랙 컴퍼니를 견제해달라, 정도였겠지."
-도청기라도 달아놓으셨어요?
"천무문을 직접 움직일 순 없을 테니까."
회귀 전에도 이미 당해봤거든.
-천무문주께서는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고 해요.
"그 양반이야 나랑 스파링하는 게 훨씬 매력적일 거다."
-로마노프 가문에서 거래를 제안하면 일단 거절한 후, 천 대표님의 의향을 여쭤본다고 전해달라시네요.
화끈하군.
엄청난 배려다.
로마노프 가문에서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8성 소환수들과 전력으로 대련하는 게 꽤나 마음에 들은 모양이다.
"극동 공화국 쪽은 어떻지?"
-수하들을 보내고 있지만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네요.
"무리 안 해도 된다. 당분간은 움직이지 못할 것 같으니 말이야."
카리만리스 가문과의 외교 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천무문과 협상도 해야 하니.
로마노프 가문이 전면에 나서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리리라.
그 동안.
"사탄교 사냥이나 더 하자고."
-듣던 중 반가운 말이네요.
로마노프 가문 덕에 사냥감들이 모습을 드러냈으니.
모두 죽여서 수하로 거두어주마.
27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