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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9 - 280-290

280화 

봉화(2)

로마노프 제3 마법 병단이 터를 닦아놓은 산자락.

그곳을 점거한 언데드 군대의 머리 위로 암운이 드리웠다.

하늘 위에 나타난 공중항모.

수백 미터나 되는 강철의 배는 아무 방해 받지 않고 유유히 다가왔다.

"병단장님. 준비 끝났습니다."

"풀 한 포기 남기지 말고 태워버려."

여기서 의문점이 있을 것이다.

왜.

로마노프 가문은 '공중항모'를 하늘에 띄웠는가?

항모가 해상전에서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는 건 함재기 때문이다.

한데, 대격변 이후 재래식 비행기는 더 이상 제공권에서 절대적이지 않게 되었다.

마법계 헌터만 수송하려면 함재기를 띄울 만큼 커다란 갑판이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니.

포격에 특화되어 있는 전함을 비행용으로 개조하는 편이 훨씬 나았으리라.

"마법 무장 기간트. 기동합니다."

"갑판 위에서 대기 중인 인원은 모두 대피하라."

함재기 대신 올라가 있는 5미터 크기의 강철 갑주.

골렘이 아니다.

방어력이 취약한 마법계 헌터의 탱킹을 해주며.

동시에 마법 연산 및 마력 출력을 상승시켜주는 마법사 전용 탑승물.

기간트에 탑승한 마법계 헌터들은 갑판에 설치된 캐터펄트에 몸을 실었다.

-기간트 01. 발진합니다.

5미터의 쇳덩어리가 캐터펄트에 밀려서 수백 미터를 순식간에 날아갔다.

등 뒤에 달린 버니어에서 푸른 불꽃이 흘러나오고.

급격하게 하강 중이던 기간트가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제2 마법 병단이 저 벌레들한테 당했단 말이지."

기간트에 탑승한 마법사는 으득, 이를 갈면서 신경계로 연결되어 있는 강철 거인의 팔을 양쪽으로 뻗었다.

[연산 보조 시스템 작동]

[오토 타깃 완료]

[마력 부스팅]

[롱 레인지 시스템 적용]

....

피아를 구분, 빠르게 적을 선정하고 마법 목표로 삼았고.

마법사의 힘을 증대시켜주며.

동시에 마법 사거리까지 보정해주는 등.

로마노프 가문의 최신 병기인 기간트는 탑승자에게 성위를 넘어선 힘을 부여했다.

기간트 1기가 쏟아낸 마법은 숲 곳곳에서 대기 중인 언데드들에게 쇄도했고.

쿠아아앙!

충격음과 함께 곳곳에서 매캐한 연기가 동시다발적으로 솟구쳤다.

하급 언데드들은 공격의 여파에 휩쓸리기만 했는데도 산산조각 나버렸고.

스켈레톤 나이트나 좀비 프리즈너 같은 중급 언데드들도 직격을 맞으면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렸다.

[적습이다.]

[주인님께서 말씀하신대로다.]

정복한 땅을 지키던 데스 나이트들은 전의를 드러내는 대신 침입자를 한 번 보더니 반대편으로 향했다.

[모두 제 자리를 지켜라.]

중급 이하 언데드들은 현재 위치 사수.

동시에 뼈 화살이나 주문을 사용해서 먼 거리에 있는 기간트를 노렸다.

원체 거리가 먼 탓에 마법 대부분은 닿기도 전에 흩어져버렸고.

팅! 팅! 뼈 화살들이 갑주에 부딪쳤지만 흠집 하나 내지 못한 채 튕겨났다.

"고작 이 정도냐. 정정당당하게 싸웠으면 상대도 안 되었을 놈들아!"

기간트에 탑승한 마법사는 괴멸당한 제3 마법 병단을 떠올리며 울분을 터트렸다.

-기간트 02. 발진합니다.

-기간트 03. 발진....

공중항모에서는 추가 기간트를 발진, 전장에 투입시켰고.

단숨에 10기까지 늘어난 기간트들은 일제히 포격을 지상으로 퍼부었다.

붉은 광선이 산자락을 훑고 지나가자.

화르르륵, 방어 대열을 갖춘 중급 언데드들이 줄줄이 녹아내렸고.

하급 언데드 수천은 뼈마디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압도적인 파괴의 힘에 휩쓸려서 가루로 변했다.

"전투 개시 5분 만에 60% 가까운 적을 토벌했네."

"기간트는 역시 굉장합니다. 병단장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법왕이 직접 개발한 거잖아."

무게가 육중한 마법사 전용 무장을 옮기기 위해서는 그만한 하중을 버텨줄 수송기가 필요했다.

로마노프 가문에서 공중항모를 개발한 것은 기간트 실전 투입을 대비해서였고.

기간트 - 공중항모 조합의 첫 실전을 보니 마법왕의 판단은 옳았음이 다시 한번 증명되었다.

"근데 너무 약해."

"예?"

"명색이 제3 마법 병단을 괴멸시킨 적이야. 기습도 아니고 공중항모의 경로를 노출시켰는데 이 정도라니."

역시.

블랙 컴퍼니도 로마노프 가문의 역습을 어느 정도 상정해두었다고 해야겠지.

소피아는 나름대로 결론을 지었다.

"주 전력은 빼돌려놓고 시간을 벌겠다?"

"...그렇군요. 병단장님의 말씀대로일 것 같습니다."

"이러면 좀 손해인데. 우리는 병단 하나가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는데 잔챙이만 조금 덜어내고 끝이라니."

"이쪽 정리가 끝나는 대로 용의 계곡으로 향할까요?"

"아군의 진격을 예상했던 자다. 그쪽에 함정을 파고 있을 가능성이 커."

현장 사령관은 자신이다.

마법왕의 지시가 있긴 해도, 자율 판단을 우선시하라고 했으니 용의 계곡을 반드시 공략할 필요는 없다.

"공중항모를 마경에 밀어 넣기도 그렇잖아."

"맞는 말씀입니다."

"한 방씩 주고받았다 생각하자고. 이번 공세의 목적은 따로 있으니까."

공중항모의 위용을 전 세계에 알리는 퍼포먼스.

또한.

제3 마법 병단이 사전에 준비했던 로마노프 가문 본대를 맞이할 준비까지.

할 일은 너무나도 많았다.

"극동 공화국과 언론에는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면 되겠습니까?"

"몬스터 토벌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 블랙 컴퍼니와 사소한 충돌이 있었다 정도로 하자고."

유진과 동일한 답변.

이 메시지에 담긴 뜻을 모르는 바보 천치는 없을 것이라.

*

우우웅-.

아공간에서 은은한 진동음이 흘러나왔다.

"시작됐나보군."

"로마노프?"

"어. 제3 마법 병단을 밀어냈던 곳을 덮친 모양이다."

"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이미 주력은 다 빼놓았고. 지휘를 맡은 상급 언데드들도 싸움이 벌어지면 모두 빠지라고 했다."

데스 나이트 한 둘 정도는 내줄 생각은 하고 있다.

중급 이하 언데드들은 이북 지역을 포함하여 방대한 침식지역의 괴물들을 되살리면 얼마든지 충원이 가능했으니.

실질적인 피해는 크지 않았다.

봉화.

적의 침입을 알리기 위해 만들어놓은 완충지대에서 불길이 피어올랐다.

"마법왕이라는 양반도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지 않을까?"

"어느 정도는."

네크로맨시에 대해 잘 모르더라도.

병력 확충이 쉽다는 장점은 여러 번 비춘 적이 있었다.

마담이 휘하 뱀파이어들을 동원해서 아군의 전력 노출을 최대한 막고 있지만.

7대 명가 중 제일이라고 하는 로마노프 가문인 만큼 작정하고 유진에 대해 조사했으면 그 정도는 이미 알아냈을 것이다.

"그러니 대규모 회전을 바랄 거다."

"동아시아에 온 마법사들은 본대가 아니란 말이네."

"마법왕이 직접 행차할 텐데,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할 거라서 말이야."

용의 계곡에 들어온 뒤로 바깥과 완전히 차단된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유진은 회귀 전 정보를 기반 삼아 대부분의 상황을 유추했다.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좀 바빠질 테니 슬슬 나가볼까?"

[거절한다.]

명해룡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나를 주인으로 인정한 것하고는 별개의 문제인가."

[진룡이 태어날 요람에서 눈을 떴긴 하였으나, 아직 내 몸은 완성되지 않았다.]

유진은 의아한 표정과 함께 영력을 흘려넣었다.

잠시 후.

"네 코어의 출력이 80%밖에 안 되네."

[주인의 솜씨는 고강하나, 없는 개념을 빚어냈으니 완벽하다곤 할 수 없지.]

"그건 좀 자존심 상하는 걸."

[실력이 모자랐으면 나는 평범한 본 드래곤으로 태어났을 것이니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막 태어난 친구한테 위안을 받으니 참으로 힘이 되네요.

유진은 입술을 비죽였다.

'9성 하수인을 얻었는데 못 써먹는 건 좀 아니지 않나.'

턱을 만지작거리면서 고민했다.

완성도가 100%는 아니지만.

상태창에도 표기되었듯, 명해룡은 초월의 경지에 도달한 명백한 9성의 소환수다.

로마노프 가문과의 전면전이 코앞인 상황에서.

조금 더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명해룡을 두고 가는 게 맞는 걸까.

'내가 보조해준다고 해도, 아니야. 이제 와서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거다.'

이미 완성된 명해룡에게 추가로 마력 회로를 새긴다고 해서.

코어의 안정성을 빠르게 높일 순 없었다.

이 자리에 있는 게 신준석이라면 모를까.

세세하게 조정하는 건 유진에게 맞지 않았다.

'뭐, 할 순 있어도 효율적이지가 않아.'

머릿속으로 대충 생각을 정리한 후, 유진은 입술을 떼었다.

"얼마나 걸릴 것 같나?"

[필멸자들의 시간을 기준으로 하면 2주는 걸릴 것 같군.]

"그 안에 본격적인 싸움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야겠네."

[싸움이라.]

"초월의 영역에 이른 화신체가 오고 있거든."

[조율이 끝날 때까지 주인이 쓰러지지 않았으면 한다. 그래야 내 몫도 있지 않겠나.]

코어 조율에 대한 욕심은 버리지를 못하는구먼.

2주라.

그 정도는 예상 범위 내다.

"허락하지."

[주인의 호의에 감사하다.]

"단, 2주가 지나면 반드시 나와줘야 한다."

[약속하지. 주인이 붙여준 이름에 걸고.]

명해룡을 공터에 둔 채, 유진 일행은 마경을 빠져나왔다.

*

용의 계곡 입구로 돌아오니 호위로 데려온 상급 언데드 여럿과 뱀파이아 한 마리가 유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천 대표님을 뵙습니다."

"마담의 전언은?"

"극동 공화국에서 타전. 병단장은 소피아 안드레예비치 로마노프이며 공중항모 1척을 대동하였음, 입니다."

세르게이 씨.

시킨 대로 잘 해주었군.

정보를 흘렸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는 한, 극동 공화국은 블랙 컴퍼니와 로마노프 가문 중 어느 쪽이 승리하든 피해를 보진 않을 것이다.

"소피아라면 로마노프 가문 2인자잖아."

"어."

"그만한 거물이 왔으니 금방 알려질 이야기 아니야?"

"이런 상황에서는 며칠 차이가 엄청 커."

소피아가 지휘를 맡았다는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유진은 향후 로마노프 가문의 선발대가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극동 공화국의 처우를 달리 할 이유로는 충분했다.

"마담은 어디에 있지?"

"그라운드 제로에서 천 대표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담이 그라운드 제로로 돌아왔다는 건.

블랙 컴퍼니 간부들도 복귀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러면 우리도 빨리 움직여야겠네."

[데스 게이트를 사용합니다.]

둠 나이트를 포함한 상급 언데드들을 모두 데스 게이트에 수납한 후.

파프너를 힐끗 바라보았다.

"수련할 시간 없으니까 오늘은 평범하게 가자."

"쳇. 아쉽네."

[폴리모프]

본 모습으로 돌아온 파프너가 홰를 치며 하늘 위로 빠르게 날아올랐다.

281화 

영혼까지 끌어모으자

그라운드 제로.

대격변 이후 무법지대가 된 폐허이며, 과거에는 3대 세력이 균형을 이루었던 땅.

이젠 블랙 컴퍼니라는 이름으로 재편되어 한국을 넘어 동아시아 전역을 아우르는 블랙 네트워크의 중심지가 된 곳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라운드 제로를 삼분하는 세력으로 군림했던 조직, '붉은 거미'의 본산이었던 호텔.

유진으로 소유주가 이전된 뒤에는 블랙 컴퍼니 본사 건물로 운영되었다.

"다들 모였나."

유진은 느긋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뽀시래기 용병단 간부는 모두 왔습니다. 형님."

"맨날 사람 부려먹고. 본인이 제일 늦어."

뾰족한 김미정의 말이 뒤따라 붙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암상은 나 한 명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미스터 블랙은 천천히 말했다.

"은하수 펍은 모두 참여했답니다."

정 노인과 마담.

무수한 정보원들과 뱀파이어들을 굳이 부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핵심 인사들은 모두 모였다.'

대한제약이나 성천 그룹처럼 협력 관계인 회사들도 있지만.

그들에게는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이번 사태는 오롯이 블랙 컴퍼니가 감당해야 할 몫.

정확히는 회귀 전부터 이어진 로마노프 가문과 유진의 악연에서 시작된 일이다.

블랙 컴퍼니에 들어온 은하수 펍이나 암상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할지도 모르겠지만.

유진과 손을 잡으면서 얻은 이득이 많으니 그 정도는 이해해주겠지.

"상황은 대충 알고 있나?

"7대 명가 중 제일이라고 하는 로마노프 가문과 멱살 잡고 싸워야 한다면서요."

"멱살이면 다행이지 말임다. 그쪽은 사생결단 낼 기세지 말임다."

이성민이 푸념을 내뱉었다.

7대 명가 중 천무문과 함께 제일을 다투는 가문.

로마노프라는 이름값에 눌리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형님.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로마노프 가문에 선제공격을 가한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형님께서 벌이신 일이니 분명 무언가가 있겠지만 저희도 납득은 하고 싶습니다."

강민호가 흔들림 없는 눈빛을 띠었다.

녀석.

많이 컸네.

[고대의 정원]에서 봤을 때만 해도 코찔찔이였는데, 이제는 심지를 굳히고 유진에게 이유를 물어볼 만큼 성장했다.

흔들리지 않는 정신이야말로.

더 높은 성위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요소다.

유진은 강민호의 발전에 기꺼워하며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로마노프 가문은 사탄교와 결탁했다."

"그, 피의 발렌타인 사태의 주범 말씀이십니까."

"어. 속초에서 벌어진 비극에 관여한 건 아니지만, 관계가 0은 아니란 거지."

속초에 들이닥친 재난.

[메멘토]로 미래를 엿본 유진이 대비를 해놓았기에 망정이지.

회귀 전에는 만 단위의 인명 피해와 도시 하나가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유진이 나선 덕에 인명피해가 줄었다곤 하지만.

탑승객들은 모두 제물로 바쳐졌으니, 아예 피해가 없다고 할 수도 없었고.

"...믿기지가 않는군요. 7대 명가라는 작자들이."

"증거는 확보했다."

"믿습니다. 형님 말씀인데, 굳이 없는 이야기를 만들면서까지 로마노프 가문과 마찰을 빚으려 하시겠습니까."

"오빠. 초 쳐서 미안한데 이 형이 정의감만 가지고 싸울 사람은 아니잖아."

예리하군.

"내가 니콜라이 안드레예비치 로마노프와 미팅을 가졌다는 건 알고 있지?"

"언론에서 나팔 엄청 불었잖아요. 모를 수가 없지."

"놈들은 강령술의 비법을 원한다."

로마노프 가문은 모든 마법의 종주가 되어야 한다는 비정상적인 집착.

마법왕 드미트리의 계약자인 오딘의 부추김도 있을 것이다.

전생에는 한반도에 자리 잡고 조용히 네크로맨시를 연구하던 유진에세 선제공격을 가하기도 했으니.

당시의 기억을 덧붙여서 로마노프 가문이 무엇을 노리는지 설명해주었다.

"로마노프에서 형님을 노린단 말임까?"

"저번에 공중항모도 날아오고 했잖냐. 그때 이야기 나눠보니 그러더라."

"와. 그거 완전 개자식들이지 않슴까."

"댁이 면전에서 그런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었다고?"

"김민정 고문. 9성 마법사한테 정면으로 들이박기라도 했어야 한다는 말인가."

"댁 성격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지."

물어봐야 이빨도 안 박히는 상대다.

이젠 나름대로 이를 벼려내서 피부를 상하게 할 정도는 되었지만.

당시에는 진짜 택도 없었거든?

"누굴 미친개로 보나."

"? 아니었어?"

"미친개 눈에 미친개만 보인다고. 나도 글허게 취급하지 마라."

김미정에게 한 마디 경고를 남겼다.

근데.

너희들, 왜 눈빛이 그러니.

"마담. 현재까지의 상황을 브리핑해줘."

"알겠어요."

마담은 커다란 화면 위에 동아시아 일대 지도를 띄워놓았다.

"극동 공화국은 천 대표님이 미리 말씀하신 대로 최소한의 인원만 모두 남긴 채 후퇴했어요."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을 물들인 붉은 색.

그 아래인 만주는 검은 색으로 덧칠되어 있었다.

"만주는 표면적으로 천무문의 관할이지만, 실제론 은하수 펍이 관리 중이랍니다."

구룡방 만주 지부에서 높은 자리에 있던 메이 샤오가 정보를 술술 말해준 덕에 암흑가를 장악할 수 있었고.

음지 쪽 분쟁을 마무리한 후에는 권력자들에게 선을 대어 영향력을 인정받았다.

"중국은 그 꽌시 문화가 있지 않나?"

"호호. 대격변 이후로는 힘이 질서인 시대인걸요. 특히 만주 같은 곳은요."

천무문은 화북, 그러니까 북경 일대를 근거지 삼았다.

세력을 넓히는데는 큰 관심이 없었고.

오직 가문 내 실속을 키우는 것과 문주 개인의 성취를 올리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다보니.

만주 쪽 권한은 손쉽게 얻을 수 있었단다.

"천무문은 이번 전쟁을 방조한다고 선언했어요."

"부탁한대로 잘 해주었군."

"문주는 블랙 컴퍼니의 손을 들어줘서 개입할 생각도 하던걸요."

"...그건 좀 곤란한데."

진심이다.

창 우페이가 참전하면 큰 힘이 되겠지.

그렇지만.

다른 가문들이 손가락 빨고 가만히 있을까?

무왕이 개입하는 순간, 전쟁을 관망하던 7대 명가 중 다수가 천무문을 명분 삼아 동아시아로 진출하려고 할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한반도는 7대 명가가 힘겨루기를 하는 각축전 무대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최후의 순간 때나 중재해달라고 말씀드렸답니다."

"역시 마담이야. 일처리가 깔끔해."

"별 말씀을."

그렇다면 안심이다.

창 우페이가 뒷배를 자처할 줄이야.

정확히는 강자와 겨룰 기회에 목이 말라있는 거겠지만.

어느 쪽이 되었든 벼랑 끝까지 몰려도 살아남을 방도는 있는 셈이다.

"그렇게 되면 주 전장은...."

"백두산이 되겠죠."

"역시. 그렇겠지."

만주 일대는 블랙 컴퍼니가 장악하고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천무문의 관할이다.

연변 쪽으로 남하한다고 했을 때.

한반도 동부는 산맥이 많아서 대규모 병력을 투사하기가 어려우니.

두만강을 따라 압록강으로.

신의주까지 길을 확보하고는 그대로 남하할 가능성이 크다.

그 전에 대규모 회전이 벌어질 만한 장소는 백두산 뿐.

〔자신은 있느냐?〕

'회귀 전하고는 달라.'

그렇다.

전생하고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회귀 전, 로마노프 가문과의 전면전은 느닷없는 기습으로 시작되었다.

네크로맨시 비술을 내놓지 않겠다고 하니 카리만리스 가문의 협조를 구해 '퀴빌레'의 열화 버전 아티팩트를 사용해서 네크로폴리스를 기습했고.

검은 방첨탑 하나를 무너트리자 링크되어 있는 모든 구조물이 먹통이 되었다.

언데드에게 버프를 제공하는 영역이 사라졌고.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공중항모들은 무수한 마법사들을 지상에 쏟아냈다.

초전에서 본 피해는 전체 전력의 40%.

홈그라운드의 이점도 살리지 못한 채, 개성을 포기하고 파주 인근 접경지역으로 병력을 물려야 했다.

'그땐 이쪽의 정보가 너무 많이 공개되었지.'

네크로맨서 전직이 가능해진 건 몇 년 후의 일이다.

당시의 유진은 [흑암의 반지] 덕에 지식을 쌓으며 빠르게 성장했지만.

어느 누구도 걸어본 적 없는 길을 독학하다보니 종종 한계에 부딪치고는 했다.

그래서 네크로폴리스의 문을 열어두었다.

더 많은 네크로맨서가 찾아와서.

지혜를 나누고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네크로폴리스의 구조, 약점 등 여러 정보가 유출되는 건 당연한 일.

로마노프 가문은 유진의 취약한 부분을 철저하게 분석하고는 일순간에 급습해서 주요 포인트를 대부분 무너트렸다.

'이번에는 반대지.'

정보의 부재.

유진은 회귀 전부터의 숙적인 로마노프 가문의 사정을 상당 부분 알고 있었다.

아니.

도리어 현 시점보다 발전된 적을 마주했기 때문에 강, 약점을 모조리 꿰뚫어볼 수 있었다.

반대로 로마노프 가문은 네크로폴리스와 유진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으니.

단편적인 정보만 취득한 탓에 전생과 달리 대회전을 준비했다.

그러니.

'유리한 건 블랙 컴퍼니다.'

두 번이나 패배하지는 않는다.

유진은 각오를 다졌다.

*

블랙 컴퍼니 간부들은 백두산에서 대규모 회전이 벌어질 것에 대비해서 여러 가지 의견을 냈다.

"공중항모가 우회할 가능성은 없을까요?"

"충분히 있을 겁니다. 아직 공중항모가 얼마나 건조되었는지는 파악하지 못했으니."

"넷에서 다섯 정도 될 거다. 그래도 병력을 모두 탑승시키는 건 무리이고 보급 문제도 있으니 주력은 백두산으로 올 거다."

로마노프 가문의 진군 예상 동선을 체크하고.

"용병들도 대기시키겠습니다."

"후방에 배치해두고. 정보 수집 위주로 돌려라. 개죽음 당하기는 싫어할 테니."

"알겠습니다. 형님."

"진조도 피를 마실 준비가 되었답니다."

"예비 병력으로 운용하자고. 난전으로 이어졌을 때 투입되면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거다."

가용병력 배치를 의논했으며.

"언데드라서 보급 걱정 없는 게 다행입니다."

"병기는 쥐어줘야지."

"예?"

"저주받은 무기와 방어구 위주로 알아봐줘. 데스 나이트한테 주게."

회전에 필요한 아티팩트와 물품을 주문하는 등.

블랙 컴퍼니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쥐어짜냈다.

그야말로 영혼까지 끌어모은 준비!

'이 정도면 내가 빠져도 되겠어.'

활발하게 의논 중인 블랙 컴퍼니 간부들을 슬쩍 본 후.

유진은 [주마등 수련법]의 매개체인 거울이 있는 방으로 왔다.

"파프너야. 너도 이거 한번 써보지 않을래."

"거울?"

"주마등 수련법이라고. 뽀시래기 팀도 이거 써서 실력이 확 늘었다."

유진이 끌어올릴 '영혼'에는.

전생과 현생을 함께하는 파트너의 역량을 끌어올릴 준비도 포함되어 있었다.

282화 

고백(1)

거울에 손을 댄 파프너는 풍경이 홱 달라졌음을 인식했다.

잿더미가 된 도시.

하늘은 검게 물들고.

주저앉은 콘크리트의 무덤 위로 솟구치는 화염이 모든 것을 불사르고 있다.

인세에 강림한 지옥이 이런 느낌일까.

'환상을 만들 거면 좀 예쁜 풍경으로 해줄 것이지.'

거울을 매개 삼아 발현된 마법.

진룡족인 파프너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환상을 깨부술 힘을 지녔다.

그렇지만.

유진이 이 환상을 보여주는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며 차분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철그럭-.

쇳덩어리가 부딪치는 소리.

콘크리트 무덤을 밟고 올라선 하얀 갑주의 기사가 파프너를 내려다본다.

헬멧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진한 귀기.

언데드 특유의 푸른 귀화에서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안광을 마주하는 순간.

파프너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동질감을 느꼈다.

마치.

거울을 보는 듯 한 느낌.

"너랑 붙어보라는 건가?"

순백의 기사, 헬 나이트는 대꾸하는 대신 오른손을 까딱였다.

[폴리모프]

[그럼 전력으로 간다.]

[원시 마법]

[죽음의 위상]

[원시 마법]

[사룡의 비행]

죽음의 위상으로 광선 궤적을 조정.

헬 나이트의 가슴팍을 향해 일제히 쏟아냈다.

빙글빙글 돌면서 마법 포격을 가하는 동시에 거리를 급격하게 좁히고는.

[케넥 전투술]

[4장 – 낙엽치기]

광선으로 일점사한 부위를 시간차로 공격했다.

포격과 오러 블레이드가 목표에 닿는 건 약 0.01초 간격.

서로 겹치지 않으면서 피해를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는 타이밍이었다.

[헛되다.]

바람 한 줄기가 볼을 스치는 순간.

파프너는 본능적인 두려움에 오러 블레이드를 외부로 방출하며 몸을 확 틀었다.

미풍이라고 느껴질 만큼 은은한 기세로 쭉 뻗어진 암흑 강기는 뭉쳐진 광선 다발 한가운데를 꿰뚫더니.

동여맨 끈을 풀어내듯 여러 방향으로 틀어버리고.

파프너가 방출한 오러 블레이드조차 가볍게 흩어내더니 그녀의 볼을 훑고 지나갔다.

순풍이 닿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찌이이익, 강철보다 단단한 비늘이 찢겨지면서 피가 몽글몽글 피어났다.

홰를 치며 날아오른 파프너는 크게 심호흡했다.

심장이 떨린다.

방금 전.

조금이라도 반응이 늦었으면 저 칼날이 목덜미를 서슴없이 꿰뚫었을 것이다.

'무슨 마술을 부린 거지?'

힘의 우열은 명백했다.

광선다발과 오러 블레이드.

마력 총량에서는 파프너가 헬 나이트를 앞섰었다.

한데, 결과는 반대였다.

'마력의 흐름에 간섭했어.'

어떻게?

한 번 공격을 주고받은 걸로는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파프너의 동공 위로 헬 나이트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어차피 환상으로 빚어낸 세상.

목이 꿰뚫려도 조금 아플 뿐.

진짜로 죽지는 않는다.

그러니.

저 힘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서 몇 번이고 도전할 수 있다는 거지.

'천천히 가보자.'

폐허가 된 도시를 배회하며 잽을 몇 번 날려보았다.

사룡의 비행을 시간차로 전개.

헬 나이트가 검을 한 번이라도 더 휘두르게끔 유도하고.

[원시 마법]

[태초의 비]

돌무더기 일부를 공중으로 이동시킨 후, 원시 마법으로 강화시켜서 헬 나이트 주변으로 낙하시켰다.

정패룡의 기예에서 영감을 받은 새 원시 주문.

아직 누구에게도 선보이지 않은 비기가 폐허였던 땅을 아예 형태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박살냈다.

[공허 브레스]나 마법 + 구결집합권에 비해서는 한 수 모자랐지만.

'매개체'와 '개념'을 실어내어 원시의 틀을 마련했으니.

위력은 충분했다.

[...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가보네.]

[보여줄 건 그게 다인가?]

태초의 비가 빚어낸 무수한 먼지가 한 번에 걷혀졌다.

칼을 가볍게 휘두른 것만으로.

강풍이 휘몰아치면서 먼지를 몰아내고.

그 여파로 하늘을 물들인 검은 먹구름마저 찢겨나갔으니.

제법 거리를 둔 채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부었지만, 역으로 파프너가 몰리는 기분을 받았다.

[그럼 돌려주지.]

어떻게, 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었다.

헬 나이트는 즉시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지면을 가볍게 차더니 순식간에 100미터 이상 도약.

허공에서 무언가를 밟듯 쿵, 짧은 진각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다시 한번 뛰었다.

수백 미터라는 거리가 0.1초도 안 되는 찰나의 순간에 좁혀졌다.

[누가 잡혀준대?]

파프너의 동공은 헬 나이트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헬 나이트가 발을 구르는 순간.

이미 그녀는 날개를 세게 퍼덕이며 자리에서 이탈했다.

7성급만 되어도 도약 한 번으로 백 미터 이상 도약할 수 있다.

못해도 8성은 되어 보이는 저 괴물이라면.

비행으로 수백 미터를 벌려놓아도 금세 좁힐 수 있을 터.

그렇지만.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비행하는 자신을 따라잡지는 못할 것이다.

[안이하군.]

[...?]

자신의 생각을 꿰뚫어보는 듯 한 대답.

파프너가 의구심을 드러냈을 때.

퍼어엉!

소닉 붐이 일어나더니 헬 나이트의 신형은 순식간에 파프너의 근처까지 도달했다.

[드래곤이랑 비행 실력이라도 겨뤄보게?]

날개를 휘저으며 대량의 영력을 방출.

디딜 곳이 없는 헬 나이트를 밀어냄과 동시에 더 높이 날아올라서 공격 포지션을 잡으려 했다.

그 순간.

한줄기의 섬광이 파프너의 시야를 빼앗고.

서걱-.

[어?]

왜.

추락하고 있지?

이상하다.

분명 헬 나이트를 밀어내고 우위를 잡으려고 했는데.

날개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은 왜일까.

[잘렸구나.]

한 순간 섬광을 봤다고 착각했다.

착각이 아니었다.

고통마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예리한 솜씨로.

헬 나이트는 검격 한 번으로 파프너의 날개들을 잘라냈다.

추락하는 드래곤의 동체.

[허.]

파프너의 입가가 쓴웃음으로 물들고.

헬 나이트는 여전히 감정 없는 안광을 흩뿌리며 가슴팍에 칼을 꽂았다.

*

파프너가 감았던 눈을 떴다.

"소감은?"

"와. 이런 거지같은 건 어떻게 만든 거야?"

"의문문에 의문문으로 답하지 말고."

"겁내 실감나는 환상이야. 심장에 칼 박히는 기분을 또 느낄 줄은 몰랐어."

극찬이구먼.

"용족한테 환상이 온전히 통용될 줄은 몰랐는데."

"마음을 먹으면 깨긴 하겠지만 그럴 필요는 없잖아. 이렇게 좋은 훈련 방식이 어디 있다고."

파프너의 눈이 불타올랐다.

음.

의욕이 꽤... 넘치시는군요.

방금 전에 칼빵 맞아서 아프다는 사람, 아니 용 어디 가셨습니까.

"기다려봐. 내가 그 해골바가지 사골국으로 만들어놓을게."

파프너는 유진의 대꾸도 기다리지 않고 아티팩트를 사용, 다시 환상에 빠져들었다.

'이럴 줄은 알았지만.'

죽자마자 바로 리트라이라고?

하여간.

대단하다, 대단해.

뽀시래기 팀도 처음 사용했을 땐 꽤 충격 받은 표정을 지었다.

반면 안색 하나 변하지 않는 파프너를 보면 심지부터가 다르다는 게 다시 한번 체감되었다.

〔한데 대전사에게는 비출 만한 과거가 없지 않느냐.〕

'없기는. 9성인 헬 나이트가 있는 걸.'

크로노스가 의아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 미래는 이제 다시 올 수 없는 환상 같은 것. 지금의 대전사하고는 방향성이 다르지 않느냐.〕

'나도 그래서 고민했어. 준비는 했지만 쓸 일이 있을까 하고.'

헬 나이트 박하늘 씨와 파프너는 별개의 인물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났다.

수다스럽고 긍정적이며 매사에 쾌활한 파프너.

반면 헬 나이트 박하늘 씨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감정표현은 최대한 절제하고.

오직 분노를 토해내며 적을 처단했다.

전투 스타일도 차이가 많이 났다.

헬 나이트의 주력 무기는 검.

영력을 섬세하게 컨트롤해서 적의 공격을 해체하고 흩어버린 후 숨통을 끊는 화려한 검법을 사용했다.

용족이 된 파프너의 전투 스타일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상대를 짓누르는 방식.

일명 '딜찍누'라고 부르는 스타일이다.

그 안에도 섬세함이 깃들어 있지만, 헬 나이트 박하늘 씨에 비해서는 디테일이 조금 많이 모자랐다.

'공통점은 투쟁을 즐긴다는 것 정도겠네.'

〔한데 전생의 자신을 보고 무엇을 배울 수 있겠느뇨.〕

'난 파프너의 재능과 끈기를 믿어.'

전혀 다른 방향성으로 초월의 경지에 도달했던 박하늘 씨.

파프너가 전생의 그녀처럼 될 수는 없다.

아니.

되면 오히려 문제다.

진룡의 장점을 모조리 버리게 되는 꼴이 될 테니.

그렇지만.

해답을 보고 과정을 복기하다보면.

분명.

다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리라.

'문제는 다른 부분이지.'

박하늘 씨가 이루어낸 무의 궁극.

결국 그 주체가 박하늘 = 파프너인 만큼, 손속을 겨루다보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아니지.

100% 발견할 것이다.

〔만일 그리 되면 계약자의 비밀이 탄로날 가능성이 크구나.〕

'어지간하면 거울을 파프너에게 안 보여주려고 했어.'

근데 상황이 달라졌잖아?

한 번 격파한 로마노프 가문의 선견대가 극동 공화국에 다시 진출했으니.

전쟁은 이제 초읽기 단계에 들어섰다.

〔그대가 먼저 공격하여놓고는.〕

'원래 선빵 필승이라고 했어.'

앞마당에서 수작질 부리는 걸 가만히 두고 있다간 더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유진이 한 행위는 그저 시간을 조금 앞당긴 것뿐.

피할 수 없으면.

주도권이라도 가져와야 한다.

〔만일 대전사가 그대의 비밀을 알아챘다면 어찌 하려느냐.〕

'어쩌기는. 맞다고 이실직고해야지.'

전생과 현생을 함께 하는 믿음직한 동료.

파프너가 진실을 원하면.

유진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을 이야기해줄 생각이었다.

그로부터 얼마가 지났을까.

해가 떨어지고 땅거미가 지면에 드리울 때 즈음.

"컥!"

마른 비명을 토해내며 파프너가 눈을 떴다.

"얼마나 죽은 거냐?"

"53번."

"...대단하다. 참."

환상이라곤 해도.

저 안에서 경험하는 '죽음'은 실제와 동일하다.

하루 동안 53번이나 죽음을 경험하고도 저렇게 해맑은 표정을 짓다니.

이 녀석. 진짜다, 진짜야.

"근데 겨루다보니까 좀 이상한 게 느껴지더라."

"뭐?"

"익숙하다고 해야 하나."

파프너는 흠, 하고는 짧게 신음을 흘렸다.

"해골 바가지. 처음 보는 건데 너무 익숙한 느낌이 들더라고. 그립다고 해야하나."

"그러냐."

"안 그래도 주인한테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음.

유진은 내심 긴장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 환상 말이야. 50번 넘게 죽어보니까 느껴지는 게 있거든."

"뭔데?"

꿀꺽-.

파프너의 뒷말이 유진의 귀에 쏙쏙 들어왔다.

283화 

고백(2)

"해골바가지. 정체가 뭐야?"

"옛 기록에서 복원한 언데드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거짓말은.

회귀 전 기억도 옛 기록인 건 사실이잖아.

괜히 찔려서 두루뭉술하게 답하니 파프너의 고운 미간이 일그러졌다.

"옛 기록이라."

"문제라도 있나?"

"좀 문제가 많지."

정말로 눈치챈 건가.

꿀꺽,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겁내 세더라."

"응?"

"이야. 53번 죽었는데 한 번을 못 건드리겠더라고."

"...그렇겠지. 9번째 성위를 완성시킨 초월자이니."

"어쩐지!"

눈치챈 거 아니었니?

"좋아. 100번 안에 한 번 때리는 걸 목표로 해야겠어."

"환상에서 싸우는 건 괜찮나."

"마음만 먹으면 주문 깨트리는 거야 일도 아닌데. 신경 안 쓰면 괜찮아."

현실이 아닌, 환상 속 세계라는 것을 인식하고도 몰입해서 싸우다니.

참, 파프너다운 모습이다.

〔크하하하. 조마조마한 모습이 아주 볼 만하구나.〕

'닥쳐주십쇼. 성좌 나리.'

유진이 내적 갈등을 겪고 있을 때 파프너는 다시 거울을 사용했다.

거울 속 환상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바깥보다 빠르게 흐른다.

정확히 말하면.

체감시간을 확 늘려서 그렇게 '느껴진다'고 해야겠지.

10배 빠르게 시간이 움직인다면, 100번의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이래서 파프너한테는 거울을 안 쓰려고 했는데.'

로마노프 가문에서 제3 마법 병단을 파견한 때부터.

이 순간은 피해갈 수 없었을지 모른다.

박하늘과 파프너.

다른 지향점을 향해 걸은 한 인물이 계속해서 부딪치다 보면.

위화감을 느끼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 전에.

진실을 이야기해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대가 즐겨하는 기만과 위선과 거짓으로 넘겨도 되지 않겠느냐.〕

'아. 그런 거 안 즐긴다고요.'

〔어찌 되었든 부정하기만 하면 대전사는 크게 생각하지 않을 거라고 본다만.〕

'나도 알아. 그 정도는.'

파프너의 소망은 이미 달성되었다.

용의 정수를 받아들인 후.

진룡족이 되면서 독립된 개체가 되었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자신을 주인이라고 섬기며 혼백의 구속을 강화했다.

휘하 언데드가 아님에도.

질문을 받았을 때 얼버무리기만 해도 지배력의 영향을 받아 더 의구심을 품지 않으리라.

유진은 그 쉬운 방법을 두고 고민했다.

'파프너를 속이고 싶지 않다.'

〔전생과 현생의 인연 때문인가?〕

'글쎄.'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일까.

스스로의 마음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이런 적이 얼마나 있었나.

〔크하하하. 이럴 땐 참으로 필멸자답구나.〕

'뭔 의미야.'

〔마음이 향하는 방향대로 움직이면 될 것을. 무얼 가지고 이리저리 고민하느뇨.〕

'마음 가는 대로?'

〔그렇도다.〕

쉬운 방법을 두고 고민하는 이유가 왜일까.

'그러기 싫어서.'

전생과 현생을 함께한 가장 믿을 수 있는 동료.

파프너가 먼저 '이질감'을 느끼고 추궁하는 상황을 원하지 않았다.

차라리.

크로노스 말고는 누구도 알지 못한 비밀을 먼저 알려주면 모를까.

〔드디어 자신의 마음에 솔직해졌구나.〕

'조언 고맙다.'

〔크하하하핫. 그대의 입술에서 감사의 표현이 나오다니. 오늘은 길일이로구나.〕

'내가 뭘 어쨌다고. 양심이 없진 않아.'

〔진실로 그리 생각하느뇨?〕

'1그램 정도는 남아있어.'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야 할까.

손을 거울에 댄 채, 환상 속 자신과 싸우고 있는 파프너를 바라보며 고민했다.

*

초월의 영역에 들어선 헬 나이트.

파프너도 진룡의 힘을 더욱 끌어낸 덕에 8성의 경지에 도달했지만.

그 한 단계 차이는 절대적이라고 해도 될 만큼 컸다.

붉은 거미 토벌전 때 유진이 성위를 세 단계나 뛰어넘은 적도 있지만.

성위는 오르면 오를수록, 더욱 격차가 심해지다 보니 당시와 같은 기적을 바랄 순 없었다.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의 차이.

그렇기에.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한 파프너는 죽음을 기꺼워하며 연거푸 도전했다.

'무왕도 몸이 근질근질해서 못 버텨 하잖아.'

창 우페이가 왜 파격적인 제안을 건넸겠는가.

8성 소환수들과 원 없이 싸우게 해주는 사람은 전 세계를 통틀어서 유진 한 명뿐이었다.

거기에.

유진의 편을 들면 세계 최초의 초월자이자 '왕'의 칭호를 얻은 마법왕과 겨룰 수 있으니!

파프너도 무왕과 같은 생각이었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니.

월등하게 강한 상대와 겨루면서 스스로의 능력을 갈고닦고.

운이 좋으면 상대의 심득을 일부나마 배울 수 있을 테니, 죽을 때의 엿 같은 고통 빼고는 모든 게 좋았다.

[월드 브레이크]

하늘조차 꿰뚫어버리는 암흑 강기에 심장이 박살 나고.

[데스 섀도우]

인지하지도 못한 공격에 날개가 잘려났으며.

[데스 블로우]

모든 힘을 쥐어짜낸 브레스가 묵직한 검격에 양단되는 와중에도.

파프너는 더 효율적인 영력 운용 방법을 찾아갔다.

추가로 30번 정도 죽었을까.

고통조차 잊고 헬 나이트에게 보다 효율적인 공격을 하기 위한 생각에 몰입해서 무아지경에 빠지는 순간.

파프너의 뇌리에 다른 정보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

마치.

헬 나이트가 자신이 된 것 같은 느낌.

검을 휘두르는 힘 배분이나.

영력을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등.

저 몸뚱이와 일체화를 이룬 것처럼 호흡(언데드라 숨은 안 쉬지만) 하나까지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의식적으로.

자신도 헬 나이트처럼 암흑 강기를 다룰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파프너는 영력을 방출했다.

콰지직!

[윽.]

헬 나이트가 이룩한 깨달음과 망자의 몸뚱이에 최적화된 영력 운용 방식을 그대로 따라했다가.

드래곤 하트에서 뿜어내던 영력의 흐름이 꼬여서 속이 진탕되었고.

훤히 드러난 틈을 놓치지 않은 헬 나이트가 검을 휘둘렀다.

다시 한번 죽음을 경험한 파프너는 유진이 그랬던 것처럼 턱을 만지작거렸다.

'익숙한데. 아니야.'

모든 무의 원리를 파고드는 [무신의 눈].

파프너는 방금 전 뇌리에 스며든 헬 나이트의 경험과 심득을 그대로 자신에게 적용시킬 수 없음을 인지했다.

'안 쓸 생각은 없어.'

초월의 영역에 도달한 기사의 심득.

안 써먹으면 아쉽다.

다만.

자신에게 알맞은 형식으로 어레인지가 필요했다.

'과감할 땐 과감하게. 흐름을 이어갈 땐 해골의 방식을 따라해 보자.'

케넥 전투술의 핵심은 과감함.

용족은 필멸자들과 달리 압도적인 마력 양과 강인한 신체능력을 보유했다.

헬 나이트가 초월의 영역에 도달한 방식은 필멸자의 것.

파프너가 그 방식을 똑같이 해도 제 능력을 스스로 제한하는 꼴이다.

50번을 더 죽었을 때 비로소 헬 나이트의 심득 중 일부를 몸놀림에 녹여낼 수 있었고.

100번째 죽는 순간에는.

카가각!

드디어 헬 나이트의 갑주에 스크래치를 낼 수 있었다.

[....]

헬 나이트는 어깨에 생긴 발툽의 흔적을 빤히 바라보았다.

인간으로 치면 얇은 자상 수준.

피가 좀 흘렀겠지만.

따끔한 것 말고는 지장이 없을 만한 정도다.

[그 공격이 닿을 줄은 몰랐다.]

헬 나이트는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이글거리는 푸른 귀화.

그건.

분노가 아니었으니.

성위 차이를 극복하고 유효타를 먹인 파프너에 대한 호승심이었다.

[아. 타임.]

[?]

[말본새가 이제 진심을 다하겠다, 뭐 이런 느낌이잖아.]

파프너는 손을 휘휘 저었다.

[기분 좋은 거 깨트리기 싫으니까 여기까지 할 거야.]

거울 속 세계는 유진이 빚어낸 환상.

진룡족인 파프너는 언제든지 현실로 돌아갈 수 있다.

그녀가 생각을 굳히고 영력을 분출하자.

호승심을 불태우고 있던 헬 나이트의 모습이 흐려지고 시야가 확 바뀌었다.

"돌아왔나."

"뭐야. 기다리고 있었어?"

"그렇게 오래 안 기다렸다."

파프너가 100번 넘게 죽음을 당했다지만.

바깥에 비해서 시간의 흐름이 빨랐고, 한 번 죽기까지의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아서 그녀의 체감보다 훨씬 짧은 시간이었다.

"나 할 말 있어!"

유진은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주인 먼저 해봐."

헬 나이트한테 한 방 먹여줬다는 말을 참으려니, 입이 근질근질했다.

9성의 초월자한테 유효타를 먹여줬다고 하면 놀라겠지?

"나는 사실 미래에서 왔다."

"읭?"

놀란 건 자신이었다.

*

크로노스를 제외하면 누구도 알지 못한 비밀.

유진은 고해성사를 하듯, 파프너에게 회귀 전의 인연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해골바가지가 시간을 되돌리기 전의 나라고?"

"맞다."

"주인은 시간을 되돌려서 과거로 돌아온 거고?"

"어. 복수하려고."

"복수 대상은 마법왕과 로마노프 가문이라."

"어차피 싸우게 될 적이었지만 그래서 선제 공격을 한 거였지."

유진의 표정에서는 회귀하고 나서 거의 드러내지 않았던 초조함이 드러났다.

이 사실을 말했을 때.

파프너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렇지만.

아티패트로 그녀의 전생을 보여주는 순간부터, 이 사실을 말해주는 상황이 벌어질 거라고 내심 각오하고 있었다.

단지 걱정되는 건.

'날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마치 처음 알았던 것처럼 파프너에게 이야기했던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걱정이었다.

"주인이 시간을 거슬러온 거라면 이해가 되네."

"뭐가?"

"미래를 아는 것처럼 행동했잖아. 성좌님의 계시라고 하기에는 자잘한 부분까지 맞춰서 이상했거든."

하긴.

파프너는 그런 부분에서 종종 묘한 반응을 보였지.

"하. 이건 좀 그렇네."

"배신감을 느껴도 할 말이 없다."

"그거 말고. 환상 속 해골바가지가 내 미래였다며."

쓰읍-.

"내 두상은 그놈보다 훨씬 예뻤거든?"

"...."

"그 못생긴 두개골이 내 몸일 리 없다고!"

뭐야.

'내가 회귀자라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 따질 게 그거라고?'

어질어질했다.

파프너의 격한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유진은 멍한 가운데에도 성실하게 답했다.

"네 몸은 이미 풍화된 거 알잖냐. 저 몸뚱이는 혼백과 링크가 잘 되는 뼈들을 맞춰서 만든 거다."

"끄으응.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우락부락한 몸은 좀."

전생에도 등을 맡길 수 있는 파트너였지만.

성별이 여자인 줄은 몰랐다고!

알았다고 해서 뼈 형태 같은 디테일은 살려주지 않았을 것 같지만.

"그래도 뼈 모양을 가지고 따질 줄은."

"왜. 미래를 알고도 그랬네 하면서 멱살이라도 잡을 줄 알았어?"

"뺨은 맞을 줄 알았다."

"전생과 현생. 날 두 번이나 파트너로 선택해준 거잖아. 그거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먼저야."

파프너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복수를 위해서라고 해도, 주인은 계약 내용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어."

악한 인물이 아닌 사람을 건들 땐 자신을 부리지 말 것.

가장 가까이에서 유진을 지켜본 바에 의하면, 여태까지 무의미한 피를 흘린 적은 없었다.

묘한 부분에서 고집을 부리고.

적에게는 한없이 집요했지만.

유진은 늘 파프너를 존중하며 신뢰했고, 그녀와의 계약을 지켰다.

"도리어 고맙지. 난 아무것도 눈치 못 챘는데 먼저 비밀까지 말해줬잖아."

파프너의 인정.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진다.

울컥거리는 감정에 입술이 떼어지지 않았고.

눈가에 습기가 감돌아서 시선을 홱 돌렸다.

"어? 주인. 우냐? 울어?"

"아잇, 싯팔."

감동 좀 하려니까 초 치네.

284화 

게임 체인저

"참. 그럼 뽀시래기 팀도 전생부터 알던 사이였어?"

"잘은 몰랐다."

"그런 거 치고는 조언이 섬세하던데."

"거울사냥꾼, 그러니까 쌍둥이랑 목숨 걸고 싸웠거든."

"아."

그래도 사감은 없다고.

안 그랬으면 정성 들여서 키웠겠니.

"그런 거 아니었어?

"뭔 소리야."

"돈을 왕창 벌어도 유흥에 한 푼도 안 쓰고 강해지는 데만 투자했잖아."

"마법왕 멱 딸 준비할 시간도 부족한데 뭔 유흥이야."

"하도 기계같이 움직이니까 하는 말이지."

파프너는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늘 주인이 무언가에 쫓기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거 때문이었구나."

무심한 한마디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누군가가 자신을 이해해주는 게.

이렇게까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거였구나.

〔짐을 무시하는 게냐!〕

'성좌 나리는 공범이지. 굳이 따지면 쌍무적 계약관계라고.'

크로노스는 잃어버린 별빛을 회복하고.

유진은 복수할 힘을 얻는다.

계약으로 엮인 거지, 이해자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쯧. 짐이 그대를 대리인을 삼았단 건 자녀와 같이 생각한다는 의미니라.〕

'자식들 삼킨 양반이 그런 이야기하면 소름 돋거든요?'

〔....〕

이 양반은 어울리지 않게 섭섭한 티를 내네.

조금 더 놀렸다간 진노를 토해낼 것 같다.

'나도 성좌 나리는 신뢰하지. 그러니까 모든 걸 이야기하잖아.'

〔진심이더냐?〕

'두 번째 기회를 얻은 것도 따지고 보면 성좌 나리 덕분이고.'

〔크하하하하. 맞는 말이로구나.〕

그러고 보니.

크로노스의 회중시계는 누가 맡겨놓은 걸까.

얼굴도 모르는 부모가 같이 놓고 갔다고 들었지만.

성유물을 놓고 갈 만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군.

문득 솟아오른 의구심을 내려놓았다.

당장 신경 쓸 일이 한가득이다.

크로노스의 회중시계를 어떻게 입수할 수 있었는가, 는 마법왕을 족친 후에 알아보자고.

*

로마노프 가문이 블라디보스토크 아래에 진을 치고 남하를 준비 중이었지만.

의외로 언론은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를 크게 다루지 않았다.

"누가 예상하겠어요? 7대 명가한테 이를 드러낸 사람이 있다는 걸."

"안 드러냈으면 먼저 처맞았을 거다."

"호호호. 그 생각이 상식을 벗어났다는 말이랍니다."

마담의 웃음에 주름이 지어졌다.

"꼭 비정상 같다고 돌려 까는 거 같다?"

"저는 천 대표님을 지지하는 입장인걸요. 이미 한배를 탄 입장이니."

"누가 보면 등 떠민 줄 알겠어."

마담의 목표는 사탄교 근절.

로마노프 가문이 룬 글자를 제공해서 사탄교의 활동을 지원해준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두 사람은 같은 목표를 공유한 상황이 되었다.

"급하게 전할 소식 있으면 알려줘."

"어디 가시게요?"

"레벨 올리러 가야지."

이 순간에도.

유진 휘하 망자들은 침식지역에서 생성되는 괴물들을 도륙하며 경험치를 헌납하고 있다.

착착 쌓여가는 경험치.

그렇지만.

거리가 멀어서 획득 경험치에 페널티가 붙고.

7성 만렙은 요구량이 확 늘어나서 단기간에 달성하기가 어렵다.

"8성은 되어야 그 괴물과 비벼볼 수라도 있다."

"와. 레벨만 올리면 벽을 바로 넘을 수 있다고 자신하세요?"

"족보가 있거든."

유진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선대 네크로맨서 마스터들의 지식이 담긴 아티팩트. 정말 사기적이네요."

사실은 회귀자 특전이랍니다.

마담에게는 그 사실을 말해줄 수 없었다.

파프너와 달리, 그녀와 유진은 철저하게 공적인 사이니까.

〔이 작은 인간은 달리 생각할 수 있지 않느냐.〕

'진짜. 아니라니까.'

드높은 천상에서 굽어살피는 성좌 나리께서 필멸자의 마음을 어찌 알겠니.

크로노스의 어림짐작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부탁하지."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진 마세요. 로마노프 가문 본대가 곧 행동을 개시할 것 같아요."

쓸데없이 부지런하기도 하군.

"주인. 어디로 갈 거야?"

"영원의 계곡."

"거긴 미국이잖아. 차라리 가까운 용의 계곡으로 가는 건 어때."

"필드가 워낙 넓어서. 효율적으로 사냥하려면 영원의 계곡이 낫다."

"뭐, 주인이 말하면 그게 맞겠지."

평소에도 유진의 말을 그대로 믿었던 파프너.

그가 회귀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 더더욱 그 말을 신뢰했다.

"수련할 여유 없으니 전속력으로 가자."

"쳇."

[폴리모프]

드래곤으로 변한 파프너의 등 위에 올라탔다.

[꽉 잡아.]

화아아악!

날개를 몇 번 퍼덕이자마자 음속을 돌파했다.

그 여파로 지면에 충격파가 퍼져 나가고 흙먼지가 일어났고.

올라탄 유진은 떨어지지 않으려고 모든 힘을 쥐어짰다.

"으아아아... 아... 아...."

메아리치는 비명을 남긴 채.

파프너와 유진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사히 다녀오시길."

마담은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본 후, 다시 업무를 시작했다.

블랙 컴퍼니 운영 전반은 임재백의 소관이지만.

정보를 쥐고 있는 마담의 업무도 산처럼 쌓인 건 마찬가지였다.

몇 시간 만에 태평양을 가로질러 유타 주에 도착.

"저 천유진입니다."

-미스터 천?

"영원의 문. 며칠 동안은 제가 맡아드리죠."

-그건 어렵지 않은 부탁인데요.

"한 가지 더. B급 이상 마석 1천 개만 구해주시죠."

리틀 엔젤스 부 길드 마스터인 앨리스 킴에게 요구사항을 랩처럼 내뱉은 후.

곧바로 영원의 문에 입장했다.

[주인. 여긴 내가.]

"내 먹이니까 손대지 마."

댁은 하수인 신세도 벗어났잖아요.

경험치 손실 온다고!

[데스 게이트를 사용합니다.]

둠 나이트로 되살린 악마 카리크가 흑색 공간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도륙하면 되는 건가?]

"할 수 있으면 시체는 남겨두고."

[주문사항이 많군.]

"못할 것 같으면 말해라."

[날 얕보지 마라. 주인이라고 해도 용납할 수 없다.]

파프너의 뺨이 씰룩거렸다.

웃음 참기 챌린지라도 하는 거니.

둠 나이트의 칼날이 길게 늘어나더니 채찍처럼 크게 요동쳤다.

이글거리는 화염.

생전의 능력을 고스란히 살려서 투마강과 지옥화염을 섞은 변화무쌍한 기운이 몰려드는 괴물들을 향해 쇄도했다.

짜아악!

화염 채찍이 한 번 궤적을 그리니 달려들던 괴물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음무우우!"

화염 채찍을 맞고 쓰러진 괴물들을 짓밟는 몬스터 웨이브.

유진은 손가락을 /퉁(튕)/겼다.

[시체 폭발(改)을 사용합니다.]

쿠아아아아앙!

계곡을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태생 2성 주문인 시체 폭발.

개량에 개량을 거듭했고.

매개체인 시체의 마력이 원체 높아서 마법의 위력도 절륜해졌다.

폭발 하나하나가 가히 6성 화염 마법에 버금가는 수준.

영력도 그만큼 소모되었지만.

[라이프 드레인] 덕에 영력 양만 놓고 보면 8성에 준하는 유진 입장에선 크게 부담되지도 않았다.

[이래서 시체를 온존하라는 거였나.]

몬스터 웨이브 전열이 시체 폭발에 휩쓸려서 무너졌다.

"한 가지 경우의 숫자가 더 있었다."

몬스터의 수가 이렇게까지 많지 않았다면.

바로 네크로맨시를 사용할 생각이었다.

[리바이브를 사용합니다.]

지속시간 동안 생전의 능력을 발휘하는 상태로 되살리는 중급 강령술.

전력 확충보다 경험치가 필요한 입장에선 최적의 마법이었다.

"오늘 안에 싹 밀어버린다."

[명을 받들겠다.]

자주 찾아오지 않는 경험치 복사 이벤트잖아.

손님이 곧 찾아온다니 빨리 움직이자고.

*

차아아악!

둠 나이트 카리크의 채찍질에 몬스터들이 고꾸라지고.

"시체 폭발."

폭발과 함께 솟구친 열기가 계곡을 후끈하게 달구었다.

파프너가 일직선으로 돌파할 때보다는 느린 속도.

그렇지만.

경험치 획득 양은 전보다 훨씬 높았다.

[주인. 벌써 계곡 끝부분이야.]

"그러게."

[다음 날에 올 거야?]

"자정이 되어야 재생되니. 어쩔 수 없지."

[이 계곡이 몬스터를 많이 생성한다곤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죽이면 얼마 안 나올 것 같은데.]

"방법은 있다."

게이트 밖으로 나가니 리틀 엔젤스에서 온 사람이 유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스터 천. 또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존 스미스 씨였나?"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석은 준비되었나요."

"예."

차량에 가득 실려 있는 푸른 광물.

몬스터의 시체에서 얻을 수 있는 마석이다.

[내 몫이야?]

"아니. 따로 쓸데가 있어."

[쳇.]

마석들을 게이트 안으로 옮겨놓았다.

[역천의 가호 – Lv 2를 사용합니다.]

마석 구조에 간섭.

배열을 흩트러놓아서 마석에 담겨 있는 마력을 흩어버렸다.

마석더미에서 피어나는 푸른 기류가 공기에 스며든다.

[이거 불량 아니야?]

"내가 했다."

[이 아까운 걸. 왜.]

"게이트의 마력을 인위적으로 늘리는 거다."

게이트 마력 분포가 올라갈수록 괴물 생성 양도 많아진다.

[그런 방법이 있었어?]

"20년 뒤에 알려지는 꼼수다."

[미래 지식 최고네.]

"효율이 썩 좋진 않아. 마석 값만 10억 넘게 들었을걸."

필요한 몬스터의 부산물을 얻기 위해 사용되는 꼼수.

투자 대비 효과가 썩 좋은 편은 아니다.

그렇지만.

단기간에 물량을 확보하기에는 이만한 방법이 없다.

그리니치시 기준으로 오전 00:00.

현지 시간으로는 6시가 되는 순간 게이트의 몬스터들이 재생성되었다.

[효과가 있네?]

"말했잖아. 미래의 지식이라고."

[이렇게 재미난 걸 혼자만 알고 있었어.]

"너도 같이 움직여놓고. 왜 재미는 홀로 본 것처럼 말하냐."

[약 오르잖아. 왠진 몰라도.]

게이트에 진입하고 5일 동안 몬스터 토벌과 마석 녹이기를 반복.

통장 잔고가 꽤 깎여 나갔지만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 와중에 몬스터 시체 중 쓸 만한 것들은 언데드로 되살려서 '네임드' 급 망자도 꽤 챙겨놓았고.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으려고 휴식 시간까지 철저하게 활용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현재 레벨은 50입니다.]

[한계를 넘어 새로운 경지로 나아갑니다.]

[주인. 혼백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달라졌어.]

"이제야 8성인가."

[깨달음도 없이 레벨만 올렸다고 바로 성위가 올라가?]

"새삼스럽기는. 늘 그랬잖아."

[그땐 별생각 안 했지. 회귀 치트 너무하네.]

"다 고생하면서 얻은 깨달음이거든요?"

누가 보면 날로 먹는 줄 알겠어.

각성 후 3년 조금 안 된 시점에서 여덟 번째 성위에 도달했다.

유진이 회귀라는 특전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음에도.

쉽지 않은 길이었다.

[마법왕은 9성이잖아. 8성이 되면 감당할 수 있어?]

"아니. 내가 9성일 때도 마법전에서 그 양반한테 밀렸는데 무슨 수로 감당하냐."

유진은 피식 웃었다.

그래도 말이야.

8성에 오르면 나름대로 대응할 수단은 있거든.

크로노스의 가호까지 더하면.

승률이 0은 아니었다.

285화 

간보기(1)

위이이잉!

반중력 엔진이 용틀임을 내니, 금속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배가 하늘 위로 둥실 떠오른다.

구 소련 시대 때 건조되었던 항공모함 셋.

또한.

영국과 긴밀한 협상 끝에 건네받은 퀸 엘리자베스 급 항공모함까지.

총 4척의 배가 수 킬로미터 높이로 부상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드리운 짙은 그림자.

"우와! 로마노프 가문의 공중항모야!"

"정말이지. 이 도시를 로마노프 가문이 수호해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러시아에 영광 있으리라."

"근데 어디로 가는 거랍니까?"

"최근에 극동의 정세가 불안정하다고. 가주께서 직접 행차하신다던데."

"어디에 붙은지도 모르는 그런 곳을 위해서?"

"극동 공화국 있잖아. 거기도 엄연히 우리나라의 영역이라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은 위풍당당한 공중항모의 자태에 환호와 감탄을 보냈다.

아직.

그들은 전쟁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모르고 있었다.

"다들 태평하구먼."

"그러지 말라고. 마법왕께서 일부러 알리지 않은 거니."

"네크로맨서를 붙잡아 지식을 얻고, 동아시아의 패권과 태평양 장악의 발판으로 삼는 게 목적이잖아."

"7대 명가는 알면서도 가만히 있어야 하지."

"명분은 그쪽이 먼저 주었으니 말이야."

천유진.

7대 명가의 가주들 말고 이토록 단기간에 존재감을 드러낸 헌터가 있었던가.

그렇지만.

잘나도 너무 잘났으며.

마법왕이 원하는 보물까지 쥐고 있었다.

한때는 '성자'라는 타이틀을 앞세워서 로마노프 가문의 관심을 피해갔지만.

이젠 그럴 의도조차 없이 해양 루트를 중심으로 전 세계에 영향력을 끼치며 로마노프 가문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각성하고 3년도 안 된 헌터가 제3 마법 병단을 패퇴시키다니."

"그건 기습 때문이었다. 충분히 준비했으면 제3 마법 병단이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거다."

"선제공격을 떠올린 것 자체가 이상한 거잖아."

그건 그렇지, 라고 마법 병단 소속 헌터가 대꾸했다.

이제 와서 그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명분도 섰겠다.

로마노프 가문은 수십 년 동안 집대성한 힘을 7대 명가에게 보여줄 생각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공중항모 4척이 출정하고 있을 때.

한 발 먼저 움직인 특급 열차가 화물들을 싣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달했다.

"크우우우우."

마법왕이 직접 조율한 키메라들.

한 기 한 기가 7성 무투계 헌터를 능가하는 힘을 지녔으며.

오러 블레이드를 긴 시간 동안 방출해도 괜찮은 마력까지 보유했다.

소피아는 화물칸에 실린 키메라들을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모. 병단 소속 마법사들이 볼까 두려우니 너무 크게 웃지 말아주십쇼."

"이모라고 하지 말랬지!"

"제2 마법 병단장님. 부탁드립니다."

"니콜라이야. 넌 나이를 먹어도 귀여운 구석이 없니."

"연세가 있으시다보니….. 악!"

"너. 계속 그런 식이면 재미없어."

구두굽으로 깔 것 까진 없지 않습니까, 라고 중얼거린 니콜라이가 눈가에 맺힌 수분을 닦아냈다.

"근데 왜 본대로 합류 안 하고 바로 왔어?"

"가주의 의지입니다."

"이거, 이거. 간 좀 보라는 말로 들리잖아."

"제2 마법 병단장님께서 그렇게 받아들이셨다면, 그게 맞겠죠."

"하여간 두루뭉술하게 말하긴. 네가 책임지기 싫다는 걸 참 고상하게 말한다."

소피아의 푸념에도 니콜라이는 그저 웃었다.

마법왕 드미트리의 배다른 동생.

그의 입지는 좁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겠는가.

늘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수밖에.

지금이야 로마노프 가문의 대외적인 입장을 대표하는 자리까지 올라왔지만.

이 가문에서 인정받기까지는 참으로 지난한 노력이 필요했다.

"병단장님. 저희도 참여하게 해주십시오."

"원수를 갚고 싶습니다."

블랙 컴퍼니의 기습 공격에 70%의 인명 피해를 내고 물러난 제3 마법 병단.

생존자들은 심신의 상처를 치유하자마자 전장으로 돌아왔다.

그뿐이랴.

수습한 제3 마법 병단만으로는 숫자가 모자라니, 병단에 포함하지 않았던 마법사들까지 넣어서 재편성했다.

니콜라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가주께서는 이번 일까지도 미리 안배를 해놓으신 모양이니."

"그 말씀은?"

"가주님께서 내어주신 어드미럴 쿠즈네초프급 항모에는 기간트가 적재되어 있습니다."

로마노프 가문에서 마법사용 병장으로 제조한 강력한 병기.

마법 증폭과 다중 연산, 그리고 방어력 제공과 준수한 근접전 능력까지 부여해준다.

주문서를 찾지 못해서 만들지 못한 '골렘' 대신 마법사에게 여러 능력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개발된 유인병기.

"가문에서 전력으로 생산했음에도, 아직 모든 마법사에게 제공할 순 없는 병기죠."

단가는 한 개체당 천억이요.

생산 과정도 녹록치 않아서 로마노프 가문에서도 150기 정도만 확보할 수 있었다.

말이야 150기지.

개발비용에 생산 라인 확보에 소모된 금액을 감안하면 한 국가의 1년 치 예산을 상회하는 금액이 들어갔다.

.

충분한 숫자를 확보하지 못한 기간트.

그 중 일부가 니콜라이에게 내어준 공중항모에 적재되어 있다?

무슨 의미인지는 뻔한 이야기였다.

"제2 마법 병단장님. 선봉은 제게 맡겨주시죠."

"으음. 그래라. 어쩔 수 없네."

제3 마법 병단에게는 갚아야 할 빚이 있다.

소피아는 아쉬운 투로 대꾸했다.

"옐레나. 병단이 출진하려면 얼마나 걸립니까?"

"5."

"5시간입니까?"

"4, 3."

"준비가 되었다고 말씀해주시면 될 걸."

"이미 전쟁 물자는 옮겨놓았습니다. 마법사들만 승선하면 바로 출발할 수 있어요."

"마음에 드는군요."

니콜라이는 진심으로 웃었다.

*

휘이이잉-.

한풍이 광산 도시를 훑고 지나간다.

"으, 더럽게 춥군."

"뱀파이어가 되었는데도 추위가 느껴지는 동네라니."

진혈의 뱀파이어 둘이 투덜거렸다.

함경북도 경흥군에 위치한 탄광, 아오지.

한국에서는 정치범 수용소로 잘 알려진 곳이다.

뱀파이어 두 마리가 아오지 근처에 머무는 이유는 간단했다.

극동 공화국과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마을.

로마노프 가문의 움직임을 파악하기에 제격인 위치였다.

박쥐와 늑대를 동원해서 정보를 수집하는 두 뱀파이어.

대격변 이후에는 버려진 마을인데다, 공간이 꽤 널찍해서 사역마 부리기가 수월했다.

"음?"

뱀파이어 하나가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옆에 있던 뱀파이어도 1초 간격을 두고 미간을 찌푸렸다.

"너도?"

"어."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일단 물러나서 어머니께 보고를..."

-좀 곤란합니다. 그건.

정수리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두 뱀파이어의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어떤 존재감도 감지하지 못했는데.

두 뱀파이어의 이목을 속이고 나타난 건 쇠로 빚어낸 거인이었다.

"골렘?"

"생긴 게 다르다."

뱀파이어들은 눈빛을 한 번 교환하고는 남쪽을 향해 내달렸다.

마담이 내린 명령은 정보 수집.

적에게 발각당했을 땐 후퇴하는 것이다.

호승심보다 명령이 우선인 뱀파이어 클랜.

두 뱀파이어가 도망치는 것을 본 기간트는 한 손을 올렸다.

「그건 곤란합니다.」

[엘메키아 베일]

빛의 장막이 두 뱀파이어의 이동 루트를 막아섰다.

"무영창?"

"그래봐야 위력은 강하지 않을 거다."

마담의 피를 조금 더 부여받아 일곱 번째 성위에 오른 뱀파이어들.

도망치는 건 일신의 무력에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명령을 지키는 것을 우선시했다는 것을 증명하듯.

피를 뽑아 만든 창과 칼로 빛의 장막을 거침없이 베었다.

쩌어어엉!

"큭."

"우리의 혈강기를 튕겨냈다고?"

무영창은 사용자보다 2단계 낮은 주문까지만 전개할 수 있다.

정체 불명의 빛살이 몇 성위인지는 모르지만.

상대가 9성이라도 되지 않는 한.

두 뱀파이어의 공격을 이토록 쉽게 튕겨내지는 못할 것이라.

"방심해서 그런 거다."

"고작 마법사의 수작질 따위."

해가 떠 있을 땐 페널티를 받아도.

이들은 진혈 중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였다.

방금 전 공격이 통하지 않았던 것을 방심한 탓으로 돌리며 전의를 가다듬었다.

「마음이 빨리 꺾이지 않아서 좋군요.」

기간트에 탑승한 니콜라이는 흐릿하게 웃었다.

엘메키아 베일.

마법왕 드미트리가 대(對) 언데드 용으로 개발 및 기간트에 추가한 주문이다.

마도 병기에 방출 아티팩트를 추가한 행위.

드미트리조차 여러 주문을 새기는 건 무리였기에.

역할에 맞는 주문들을 하나씩 추가하는 게 전부였지만.

그 위력은 확실했다.

"카아아악!"

[혈마법]

[블러드 캐논]

[혈강기]

측면으로 부상한 뱀파이어는 오러 블레이드에 필적하는 위력의 핏빛 마력을 방출했고.

정면에서는 붉은 광선이 쇄도했다.

기간트와 충돌하는 순간 붉은 폭발이 허공을 뒤덮었고.

"해치웠나?"

뱀파이어 하나가 중얼거리니, 근접해서 혈강기를 펼친 다른 녀석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 단단하다."

「제법이지만 소용없습니다.」

흠집 하나 나지 않은 기간트.

니콜라이는 기간트 안에 축적된 마력으로 방어막을 전개,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두 뱀파이어의 협공을 막아냈다.

[다중 연산]

[프로미넌스&라이트닝 블래스트]

[결합의 룬]

[융합 마법 - 프로비던스]

마법왕 드미트리에게 직접 마법을 사사받은 자.

드미트리와 마찬가지로 아스가르드의 신왕 오딘을 배후성으로 두었기에.

천상의 룬어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다.

이글거리는 화염과 고열의 번개가 융합되어 한 자루의 검으로 변화.

근접한 뱀파이어의 심장을 꿰뚫었다.

7성 무투계 헌터와 동급의 능력을 보유한 진혈의 일족.

경험이 모자랐지만, 스펙만큼은 대단한 뱀파이어인데도 반응하지 못했다.

"커어억!"

「걱정 마십시오. 동료분도 같이 보내드릴 겁니다.」

[다중 연산]

[디스인티그레이트 x 20]

기간트 앞에 나타난 20개의 마법진.

6성 마법인 소멸 광선이 지면을 향해 빗발친다.

진혈의 일족도 무방비하게 맞으면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위력.

"큭. 일단 자리를 벗어나야...."

뱀파이어가 후퇴하려는 순간.

[엘메키아 베일]

이동 경로에 드리운 빛의 장막이 다시 한번 뱀파이어를 감쌌다.

"끄아아악!"

[부여 - 성질 변환]

찰나의 방심이 만든 경직.

니콜라이는 직선으로 쏘아진 광선의 성질을 즉각적으로 조작했다.

곡선으로 휜 소멸 광선들은 뱀파이어의 전신을 꿰뚫었다.

비명조차 삼켜버리는 파괴의 빛.

「근처를 감시하는 눈은 제거했습니다. 신속하게 이동하죠.」

은신 중인 공중항모는 백두산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남하했다.

286화 

간보기(2)

공중항모를 개수한 로마노프 가문은 현대전의 전술을 일부 도입했다.

전투기와 폭격기의 역할은 기간트에 탑승한 마법사가 계승.

항모에 설치된 은신 마법으로 시야 및 기척을 차단한 후 강하하면 상대하는 입장에선 대응하기도 전에 선제공격을 맞아야 했다.

기간트의 보조로 성위를 뛰어넘는 힘을 지닌 마법사들의 선공은 굉장한 위협이었다.

7성급 진혈의 뱀파이어 둘이 소식도 전하지 못한 채 소멸할 정도였고.

국경선 인근에 깔아놓은 블랙 컴퍼니의 정보망을 걷어내기까지는 채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병단장님. 이번 출정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백두산 인근에 모여 있는 적 전력을 알아보는 것입니다만 상황에 따라선 점거도 고려 중입니다."

"알겠습니다."

니콜라이는 마법왕이 부여한 룬 문자 덕에 조건부 8성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기간트에 탑승하면 훨씬 안정적으로 마법을 펼칠 수 있으니.

8성 절정의 실력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거기에 최소 6성급 마법사만 백 단위요.

마법 병장 기간트의 보조가 더해지면 7성 이상 전투력을 지닌 마법사가 수십이니.

어지간한 가문 따위는 하루도 안 돼서 가루로 만들어버릴 만한 전력이 백두산을 향해 쾌속으로 나아갔다.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상대의 저항이 거세면 바로 물러날 것이라."

니콜라이가 부드럽게 말했지만 휘하 마법사들은 결의어린 표정을 지었다.

제3 마법 병단이 왜 재편되었던가.

블랙 컴퍼니의 기습 공격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던 만큼, 이번에는 돌려주겠다는 마음이 가득했다.

국경선의 정보망을 걷어내고 백두산 근처까지 접근하기까지는 1시간이면 충분했다.

"안개가 많군요."

"마법적인 안개입니다. 관찰 마법로도 내부가 투영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가볍게 인사나 합시다."

[쿠즈네초프급 공중항모]

[동력 32% 투입]

[무장 -승리의 천둥포]

항모 앞부분이 좌우로 살짝 밀리면서 개방되었고.

승무원들이 머무르던 방들을 뜯어고쳐서 적재한 대형 포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본래 수천에 달하는 승무원이 있어야 유지가 가능한 공중항모였지만.

마법으로 상당 부분을 대체하면서 탑승 필수 인원이 크게 줄어들면서 무장까지 적재가 가능하게 되었다.

구 러시아 제국의 국가에서 따온 무장.

웅장한 이름에 걸맞게, 7성 마법 둘을 합친 것과 비슷한 위력을 지닌 병기다.

"발사."

니콜라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새파란 섬광이 포구 밖으로 토해져 나왔고, 쿠르르릉- 굉음이 공기를 찢어발겼다.

여러 기계 장치와 마도공학, 그리고 룬어의 보조를 받아 사거리면 10킬로미터가 넘는 광선!

일순 구름이 좌우로 밀려나고.

하늘을 칼로 자른 것 같은 형상과 함께 푸른 번개로 이루어진 광선이 백두산 주위를 잠식한 안개를 마구 헤집었다.

공기 중에 스며든 고농도의 영력이 재배열을 마친 뇌기에 밀려 소멸된다.

시야를 차단하던 안개 일부가 순식간에 걷어지고.

그 안에 똬리를 틀고 있던 거대한 구조물의 정체를 몇 초도 안 되어서 드러내버렸다.

[죽음의 요새]

[방어 술식]

[망령의 외침]

스아아아앗!

요새를 감싸고 있던 안개가 소용돌이치면서 모이고.

진한 영력을 돌파하는 동안 전진하는 속도가 더뎌진 뇌전을 휘감았다.

뱀이 먹잇감을 뱃속에 밀어 넣듯.

천지를 진동시킨 새파란 광선이 요새를 감싼 영력 결계에 삼켜진다.

"과연. 믿고 있는 수가 있었단 말이군요."

니콜라이는 조소했다.

안개 한가운데서 고고하게 떠 있는 구조물.

크기만 놓고 보면 공중항모보다도 거대했다.

구조물에서 느껴지는 영력까지 고려하면.

출력 면에서도 상대가 앞서겠지.

죽음의 요새가 건조된 건 평양 공략 때였다.

구룡방과 전면전을 벌이거나.

유진이 병력 이동 수단으로 몇 번 사용했지만.

영력 섞인 안개를 몰고 다닌 덕에 외부에 유출된 적은 거의 없었다.

"위력정찰을 강행한 의미가 있습니다."

"병단장님. 적이 반격을 개시합니다."

"천천히 물러나지요."

느긋하게 대꾸할 때.

콰루루루루!!

철판을 긁는 것 같은 소음이 고막을 강타했다.

죽음의 요새에 머무르고 있던 블러드 드래곤들이 방금 전 충격으로 자극을 받아 뛰쳐나온 것이다.

"고속 이동을 사용해야겠군요."

"천둥포를 사용한 직후라서 출력이 떨어져 있습니다."

"언제쯤 전개할 수 있습니까?"

"5분은 주셔야...."

"몸 풀기로 좋은 시간이군요."

본 드래곤에 블러드 골렘을 섞어서 강화한 형태.

블러드 드래곤은 스펙만 놓고 보면 8성 절정을 넘어선 괴물이다.

보유 특성과 스킬이 모자라서 막강한 위력을 모두 살리지 못하기는 해도.

사람으로 치면 보디빌더가 맨손으로 싸우는 거나 마찬가지다.

쿠즈네초프급 공중항모의 전력이 가문 하나 정도는 하루 안에 지워버릴 만큼 강했지만.

죽음의 요새에 배치해둔 유진의 전력은 그보다도 월등한 수준이었으니.

니콜라이는 휘하 마법사들 중 정예만 추려서 블러드 드래곤 5구의 공세에 대응했다.

「데이터 뽑다가 죽지 마십시오.」

[콰루루루루!]

혹한의 숨결이 쏟아지고.

마법으로 빚어낸 뇌전과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블러드 드래곤들은 빠르게 날아들어서 접근전으로 끌고 가려 했지만.

니콜라이를 포함한 마법사들은 능숙하게 회피 기동을 하거나 점멸 마법으로 위치를 이동, 거리를 좁혀주지 않았다.

"준비되었습니다!"

「귀환하지요.」

5분을 번 니콜라이와 마법사들이 공중항모에 안착하는 순간.

[쿠즈네초프급 공중항모]

[동력 41% 투입]

[고속 이동을 사용합니다.]

선미에 달린 엔진이 커다란 불을 뿜었고.

평소 이동속도의 10배.

그러니까 마하 3에 가까운 속도로 수만 톤의 공중항모가 쏘아지며 자리를 이탈했다.

[콰루루루?]

블러드 드래곤들이 부리나케 그 뒤를 쫓았지만.

[라이트닝 보텍스]

[무영창]

[엘메키아 베일]

공중항모 갑판 위에 선 니콜라이는 고위 마법으로 블러드 드래곤들을 쳐내어 추격을 방지했다.

그렇게.

첫 정찰 및 소소한 격돌은 로마노프 가문이 웃는 방향으로 결론 났다.

*

"이 무능한 놈들."

[....]

"죽음의 요새를 맡겨두면 뭐하나.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당하는데."

[상대는 로마노프 가문이다. 언데드로 영락해버린 우리한테 상대하라고 한들!]

"혀가 길다?"

유진이 손에 힘을 주자 5미터 크기의 언데드 드래곤은 바닥을 나뒹굴었다.

[끄아아악!]

비명을 토해내는 백성현.

언데드가 되었음에도 고통에서 초탈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유진이 힘을 주고 있는 건 그의 영혼을 담아낸 라이프 포스 베슬이었으니.

조금 더 힘을 주면 산산조각 나서 영원히 소멸될 운명이었다.

[주인이시여. 모두 제 잘못입니다.]

옆에 선 조승철은 안절부절못했다.

네크로폴리스 전역을 관리하는 건 조승철의 사명.

죽음의 요새는 평소 백두산에 머무르지만, 맡겨진 업무에 따라 조승철도 자주 이용했었다.

백성현이 죽음의 요새 관리를 명받았지만, 굳이 책임을 따지면 자신도 완전히 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미리 고백해야 저 꼴을 면하지 않겠는가.

조승철도 라이프 포스 베슬이 유진에게 쥐어져 있다 보니 더더욱 전전긍긍했다.

"됐어. 그 자리에 있던 것도 아니잖나."

[감사합니다! 주인이시여!]

"백성현이 구르는 건 보기 좋은데. 지금은 급한 일부터 해결하는 게 먼저 아니야?"

파프너가 유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급한 일이라."

"로마노프 가문이 블랙 컴퍼니의 전력을 어느 정도 확인했잖아."

"죽음의 요새에 블러드 드래곤까지. 알차게 파악했지."

"근데 너무 태평한 거 아니야?"

파프너의 지적은 일리가 있었다.

본대가 출정했다는 소식이 들린 지 하루도 되지 않아 위력정찰을 감행했다.

극동 공화국에 있는 공중항모가 움직였단 소식은 듣지 못했으니.

이 기습을 위해 빼돌린 전함이 한 척 더 있었단 말이겠지.

유진은 느긋하게 대꾸했다.

"우리 전력이 100% 까발려진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로마노프 가문은 이미 전력을 동원했어. 이제 와서 죽음의 요새가 드러난다고 해서 추가 병력을 투입할 수도 없다."

"대응책 정도는 마련할 거야. 공중항모에 대응할 방법이 있다는 걸 확인했잖아."

"에이. 그런 방침은 이미 세워놨을걸."

상대는 그 로마노프다.

마법왕까지 나섰는데 얼마나 더 철저하게 준비하겠어.

"오히려 좋아."

아군도 공중전력이 된다는 점을 어필하면.

공중항모를 이용해서 게릴라전을 벌이려고 하기보다 전면전을 택할 것이다.

즉, 유진이 처음에 계획했던 백두산 인근을 전장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각개격파를 하는 것도 쉽지 않아. 공중항모의 은신 능력과 기동력을 카운터 치려면 이쪽도 준비할 게 많다고."

고속 이동은 사용 후 엔진 과부하라는 페널티가 붙지만.

이 시기에도 마하 3에 준하는 속도로 이동이 가능한 사기적인 능력이다.

수만 톤으로 음속을 돌파하려고 하니 추진력도 어마어마하게 소모되고, 선체를 보호하는 과정에서 마력 소모가 엄청 커서 그렇지.

작정하고 도망치면 쫓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야금야금 피해를 입을 바에는 영혼의 한타를 벌이는 게 낫다.

상대도 어설프게 기습공격을 하려다가 공중항모를 잃을 바에는 전력을 하나로 집중하는 쪽을 선택할 것이니.

이번 위력정찰은 서로의 선택지를 하나로 좁히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럼 왜 백성현을 그렇게 괴롭히는 거야?"

"실수한 건 혼나야지."

"괴롭히는 게 좋아서 그런 건 아닌지."

"정답."

[이, 으으으으아아아악!!!]

원래 상과 벌은 확실해야 하는 법이란다.

〔정말로 그리 태연자약하게 있어도 되는 것이더냐.〕

'음. 아주 약간 곤란하긴 하지.'

죽음의 요새도 공중항모와 마찬가지로 은신 능력이 있다.

영력을 뿜어내기에 위화감이 느껴지긴 해도.

고도를 높이 올리면 구름에 동화되어 상대의 눈을 속이는 것도 가능하다.

로마노프 가문에서 그 사실을 파악했으니.

이쪽도 전략의 폭이 좁아지는 건 조금 아쉬웠다.

'뭐, 그래도 로마노프 가문이 간만 보고 가서 다행이잖아.'

전면전으로 비화되지 않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자.

기껏 8성이 되었는데 가용 전력을 잃어버리면 눈물 흘렸을 테니 말이야.

'내가 왜 8성에 오르려고 미국까지 다녀왔는데.'

〔마법왕이란 작은 인간에게 맞설 힘을 얻기 위함이지 않았느냐?〕

'저번에 말했잖아. 마법 싸움으로는 그 인간 못 이긴다고.'

[아우라]를 빼고 봐도 마법전에서는 유진이 불리했다.

그럼에도.

8성에 오르려고 아득바득 노력한 이유는 따로 있다.

'정예 언데드들의 수준을 끌어올려야지.'

둠 나이트와 데스 나이트들.

그리고 블러드 드래곤까지.

결전 전에 모조리 손봐주마.

287화 

태풍이 불기 전

로마노프 가문의 위협이 턱 끝까지 다가온 상황에서.

레벨을 올리기 위해 자리를 비운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아프면 손 들어주세요."

[데스 리콘스트럭션]

죽음 재구성.

이미 '틀'을 얻어서 완성된 망자의 껍질을 사용자의 의지대로 개조하는 8성 주문이다.

설명만 보면 그리 대단하지 않아 보이지만.

'한계를 벗어나게 해준다는 게 중요하지.'

언데드의 완성도에 따라 추가되는 능력치.

일명 개조치는 본래 100%를 넘길 수 없다.

네크로맨시의 정점에 도달한 유진이야 100%를 붕어빵처럼 찍어내고, 기량이 다소 회복된 뒤에는 110 ~ 120%까지 찍기도 했지만.

회귀 전 한계수치였던 150%를 찍으려면 [데스 리콘스트럭션] 주문이 필요했다.

첫 시술 대상은 리치 조승철이었다.

[주인이시여. 망자가 된 이후로 고통은 잊은 지 오랩니다만.]

"그러니까 아프면 손 드시라고요."

죽음 재구성은 몸뚱이만 손대는 게 아니다.

합일을 이룬 혼백과 동조를 끌어올려야 언데드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

그러니까.

개조 과정은 반드시 아픔이 동반되었다.

[으고고고고곡?!!!]

말했잖아.

아플 거라고.

조승철의 앙상한 손이 거친 기세로 들렸다.

"아프세요?"

[주인! 영혼이! 몸이! 찢기는 것 같습니다!]

"예. 조금만 참으세요."

"이번에는 치과 의사 컨셉이야?"

"메스는 필요없어요."

"아. 너무하네."

선생님은 왜 그런 데에 몰입하세요.

사실 칼도 필요하지만 파프너가 시무룩해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대에게 청춘의 모습은 어울리지 않느니라.〕

'왜. 뭐요. 무슨 청춘 타령이야.'

〔정말로 모르겠느냐?〕

요즘 우리 성좌 나리께서는 왜 시비를 못 걸어서 안달이실까.

상념을 지워내며 다시 개조에 집중했다.

리치에게 필요한 건 두 가지.

연산 속도 상승과 영력이다.

영력 총량은 재구성 과정에서 악마종의 심장을 빻아 넣어주면 되고.

마법 연산 속도는, 어디 보자.

'이거면 되겠군.'

마인의 뇌.

정확히는 인간에서 악마로 변하면서 변질된 마력 회로를 뜯어내었다.

끙.

발언을 이렇게나 빠르게 철회해야 하다니.

"메스."

"오. 오오오!"

그렇게 기대하지 말라고.

파프너가 건네준 뼈칼로 마인의 뇌를 베었다.

[생명 분야]

[재구축을 사용합니다.]

정패룡의 코어에 붙은 마력 회로를 뜯어낼 때처럼 과감하면서도 세밀한 동작.

두개골에 이식하고는 죽음 재구성으로 엮어낸다.

순식간에 부패해서 말라비틀어지더니 달라붙은 마력 회로.

그 외에도 여러 부분에 손을 대어 조승철의 성능을 개선했다.

[죽음 재구성으로 리치(조승철)의 완성도가 올라갑니다.]

[100% -> 146%]

[주군이시여! 머리가 맑아졌습니다.]

"무능한 것."

[예?]

"내 개조는 완벽했다. 네 혼백이 아직 그만한 힘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돼서 효과가 덜 난 거다."

유진은 자존심 상한 표정으로 씩씩댔다.

[제가 뭘....]

감정이 거의 사라진 리치인데도, 조승철의 사념에는 억울함이 느껴졌다.

X나게 아픈 걸 열심히 참아냈는데 어째서 욕을!

*

일룡과 이룡, 이신우 등 네임드 언데드들을 백두산으로 호출하고는 언데드 개조에 박차를 올렸다.

"이번에는 네 차례다."

[크라라....]

"왜 도망치세요. 아프면 손 들면 된다니까."

"이럴 땐 온전한 육체를 얻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

파프너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승철에 이어 블러드 드래곤 개조에 들어간 유진.

첫 타자가 된 3급 블러드 드래곤, 그러니까 레리크 시체들로 만든 소형종은 [죽음 재구성]을 시행하자마자 괴성을 질렀다.

[크라? 크라라라!!!]

"아프면 손 들라고 했지?"

[크라! 크라라!]

"어. 곧 끝나."

손을 들라고 했지 아픈 게 없어진다곤 안 했잖니.

그리고 말이야.

지금 들고 있는 건 앞발이지 손이 아니랍니다.

블러드 드래곤한테 손이 어디 있어.

"너어어어는 진짜..."

파프너는 한숨을 쉬었다.

첫 번째 블러드 드래곤은 연평도에서 공수해온 레리크의 뼈를 사용해서 골밀도 및 덩치를 키웠다.

[블러드 드래곤의 성위가 상승합니다.]

[7성 -> 8성]

"자. 또 와라."

나머지 블러드 드래곤들은 개조 포인트가 달랐다.

드레이크가 베이스인 블러드 드래곤.

진룡족을 제외하면 본 드래곤에 가장 걸맞은 몬스터로 만들었다.

급조한 탓에 내구도가 떨어지는 단점이 있지만.

모체 자체는 문제가 없단 말이야.

덩치를 더 키웠다간 밸런스가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

골밀도는 용족 사체에서 추출한 뼈를 흡수시켜서 늘려주고.

용의 계곡에서 모은 정수를 일부 풀어서 영력에 섞은 후 천천히 스며들게 했다.

[블러드 드래곤의 완성도가 올라갑니다.]

[특성 – 용골(S-)이 추가됩니다.]

[특성 – 대체 심장(S-)이 추가됩니다.]

[스킬 – 드래곤 레이지(S-)가 추가됩니다.]

...

스펙은 충분했다.

드레이크라는 훌륭한 모체.

블러드 골렘과 결합시켜서 추가 능력치도 올려주었다.

남은 건 내실.

그러니까 스킬과 특성을 채워줘야 했다.

"손 들라니까 왜 발을 들어?"

[크라라라!]

꼬박 이틀 동안 밤을 샜다.

블러드 드래곤들의 면적이 원체 커서 재구성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주군! 부름을 받자마자 달려왔습니다.]

[또 무슨 해괴한 짓을 하려고.]

[일룡. 생각을 입으로 꺼내면 또 혼이 날 것이오.]

[....]

일룡과 이룡, 송명석, 그리고 이신우가 백두산에 도착했다.

데스 게이트 안에 수납해놓은 카리크까지 하면 재구성할 녀석이 넘쳐났다.

"쉴 틈을 안 주네."

유진은 히죽 웃으면서 손을 뻗었다.

*

백두산에서 불법(?) 시술이 성행하고 있을 때.

블랙 컴퍼니 본사도 쏟아지는 업무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아오! 내가 왜 이걸 해야 하는데!!"

왕년의 미친개이자 이젠 목줄에 잡혀 사는 김미정 고문이 시시때때로 으르렁거렸다.

"대표님이 내린 지시사항입니다. 별 수 없으니 협조해주십쇼."

"왜 용병단장이랑 간부들은 다 빠지고 나만 이러냐고!"

김미정의 불만은 일견 타당해보였다.

용병단 핵심 간부인 뽀시래기 팀은 업무가 과중되는 상황에서 코빼기 하나 비추지 않았다.

"자세한 건 대표님께 문의하십쇼."

"야. 임재백 이사! 넌 독박 쓰고 안 힘드냐!"

"은인께 도움이 될 수 있으니 다행 아닙니까."

"내가 말을 말지. 몰라! 못 해! 안 해!"

"그러면 어쩔 수 없군요."

철그럭- 철그럭-.

임재백에게 붙여준 데스 나이트가 푸른 안광을 흩뿌렸다.

"이러다 사람 치겠다?"

"네."

"친다고??"

"대표님께선 이럴 때 매가 약이라고 하셨습니다."

김미정은 말문이 막혔다.

'이래서 데스 나이트를 붙여준 거야?'

너무한다, 너무해.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까지 지독할 수 있어.

"대표님께서 이번 사안이 그만큼 중대하니 힘내달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시부럴. 목에 칼 겨누고 협박하면서 힘내긴 무슨."

"이번 사태만 끝나면 계약도 해지해주신다고 하던데요."

"...진짜?"

김미정의 눈빛에서 처음으로 화색이 돌았다.

"왜 그 말을 마지막에 한 거야."

"그것도 대표님 마음입니다."

"거지같네."

투덜대면서도 다시 업무에 집중하는 김미정.

임재백은 한숨을 삼켰다.

'그래도 그렇지. 좀 일이 많긴 하군요.'

비대해진 블랙 컴퍼니의 사업을 총괄한다는 건 쉽지 않았다.

암상과 은하수 펍과 수시로 정보를 교환하고.

때론 조율하며 사업의 방향성을 맞춰야 했다.

간부도 어디 호락호락한 성격이던가?

뽀시래기 팀이야 고분고분해도.

용병단 중추인 김미정이나 민상진 같은 사람들은 임재백도 다루기가 어려웠다.

마담은 꽤 협조적이지만, 미스터 블랙은 손해 보기 싫어서 매번 만날 때마다 눈을 부라렸고.

하부 조직들 관리도 신경 쓸 게 많았다.

'그래도 이번 일만 끝나면 휴가 주신다고 했으니까.'

좀만 참자, 참아.

임재백은 스스로를 세뇌하듯 다짐했다.

*

"로마노프랑 전면전이라니. 하."

미스터 블랙은 하루에도 12번씩 유진을 욕했다.

블랙 컴퍼니 간부 모임 때 그 이야기를 들은 뒤로부터.

암상은 사업 확장도 잠시 중단시키고 필요한 물자를 한반도에 공급했다.

희귀한 몬스터의 사체.

언데드 개조에 필요한 촉매 등.

유진이 부탁한 물건들을 구하려고 발품을 팔았다.

'이번 거래에서 본 손해는 천 대표한테 메워달라고 할 거야.'

아이템과 시체를 급히 구하느라 웃돈을 얹어야 했다.

불만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당사자한테 직접 말할 수는 없었다.

일단 한국을 떠나 있다는 게 첫 번째요.

두 번째는 로마노프 가문과 전쟁을 한다는 무게감에 압도당했다.

만약.

로마노프 가문이 유진의 군세를 무너트리면?

블랙 컴퍼니라는 테두리로 묶인 암상도 로마노프의 진노에서 피해갈 순 없다.

몰살시키기야 하겠냐만, 지금까지 확장한 사업들 다수를 포기해야겠지.

'그럴 순 없다.'

중국의 흑상을 밀어내고 동아시아 최고의 상단을 만들겠노라는 맹세를 이제 막 이루었다.

불가능한 목표라고들 말했지만.

미스터 블랙은 기회를 잡아 암상을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모두 유진의 뒷배가 있기에 가능한 일.

'이번에도 기적을 보여주실 거라고 믿는다.'

그러니.

제자리에서 흔들리지 않고 철저하게 준비한다.

미스터 블랙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어머나. 짐 싸고 있을 줄 알았는데."

"사람 마음 긁지 마라. 마담."

"호호호. 지영만 씨한테 의리가 있는 줄은 몰랐답니다."

"아오! 본명 부르지 말랬지!"

미스터 블랙의 표정에서 노골적인 불쾌감이 드러났다.

"실수."

"실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가녀린 여인을 핍박하는 건가요?"

"그 손가락 하나로 날 죽일 수 있으면서 무슨."

"제가 그럴 리 없잖아요."

"천 대표의 뒷덜미를 노리려고 하면 죽일 생각이었나?"

마담은 그저 빙그레 웃었다.

"당신. 안 그랬는데 변했어."

"종족이 바뀐 지는 꽤 되었네요."

"그 말이 아닌 거 알잖아. 하여간 매번 빠져나가기만 하는군."

"저만 바뀌었나요? 미스터 블랙도 달라졌답니다."

그라운드 제로의 세 축.

붉은 거미는 유진의 성장을 위한 제물로 바쳐졌고.

나머지 둘은 손을 잡아 동아시아 암흑가를 장악하게 되었다.

극명하게 달라진 운명.

두 사람은 유진의 가능성을 엿보았고.

지금에 와서는 목표했던 것을 이루었거나, 이루어가는 중이었다.

"난 할 일 완벽하게 하고 있으니 당신이나 잘해. 마담."

"호호호. 저도 분발해야겠네요."

잘려나간 정보망 복구.

실시간으로 로마노프 가문의 움직임을 체크하는 등.

마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혈족을 다루며 다가올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288화 

개전(1)

매서운 한파가 거칠게 휘몰아치는 12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위풍당당하게 출발한 공중항모 네 척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수고했다. 귀중한 정보를 얻어왔군."

"다 가주님의 안배 덕분입니다."

니콜라이는 공을 돌렸다.

"소피아. 준비는 끝났나?"

"예. 가주. 명하신 대로 국경선 근처의 정령들을 복속시켰어요."

제2 마법 병단의 임무는 거점 마련 말고도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정령 지배]

본래 정령을 다룰 수 있는 건 해당 고유 특성을 가진 일부 헌터뿐이다.

마법으로 굴복시킬 순 있어도.

고위 정령일수록 억지로 지배하는 건 어렵고.

그마저도 지속시간이 길지 않았다.

제2 마법 병단은 니콜라이가 마담의 정보망을 걷어내는 동안 두만강까지 남하.

외부에서 정령을 소환하지 않고 이 땅에 머무는 정령들을 붙들었다.

마력이 자연 어디에나 존재하듯.

정령 역시 자연지기가 충만한 곳에서는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대격변이 일어난 뒤에는 마력 분포도가 올라가면서 정령들의 힘도 강해졌고.

사람이 별로 살지 않아 자연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있는 땅은 더욱 원초적인 존재감이 강렬해졌다.

"최상급 둘과 상급 열 마리를 잡아두었어요."

최상급 정령은 준 8성급.

상급 정령은 7성급이다.

중급까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으나, 100 단위로 확보했으니 전력 상승에 소소한 도움이 될 터.

"수고했소. 기대만큼의 성과로군."

준 8성이란, 조건만 맞춰주면 8성에 필적하는 힘을 낼 수 있다는 의미.

7대 명가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일컬어지는 로마노프 가문조차 여덟 번째 성위를 완성한 헌터는 손에 꼽을 정도다.

기간트 같은 마법 무장의 힘을 빌리면 조금 더 늘어나지만.

어찌 되었든 한시적이나마 조건부 8성 정령을 둘이나 전력에 포함하는 건 큰 성과였다.

드미트리는 공중항모 위에서 마법을 사용했다.

위이잉!

하늘 위에 나타난 마법왕의 얼굴.

마법으로 빚어낸 환상이 구름을 모두 가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모두 알겠지만 최근 이 땅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우리의 형제가 도살당하고 위대한 조국의 땅이 침략자에게 짓밟혔지.

웅혼한 기세를 담은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진다.

지상과 하늘에서 도열 중인 마법사들은 드미트리의 존재감에 전율했다.

-이번 전쟁은 응징이다.

-다시는 로마노프 가문의 이름이 짓밟히는 일이 없게끔 확실하게 보여줄 것이다.

-저 어리석은 자들에게 알려주자. 우리의 분노가 얼마나 거센지를.

쿵! 쿵! 쿵!

드미트리의 마력 파장이 퍼져 나가자, 로마노프 가문 마법사들도 그에 맞춰 마력을 발산했다.

특별한 마법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그저.

파장에 맞춰 마력을 동조했을 뿐인데.

천지가 진동하고 대기가 비명을 질렀다.

'이게 전능감이란 건가?'

'마법왕께서 손에 넣은 마법의 비의가 이런 느낌이구나.'

'이 전쟁에서 활약하면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지도?'

진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로마노프 가문의 위세와 비빌 수 있는 건 천무문뿐.

그렇지만.

무의 극의를 보는 것 말고는 관심이 없는 창 우페이는 천무문 세력 확장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결국.

로마노프 가문 외에 '최강'을 논할 가문이나 헌터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극동의 나라를 토벌하는 것?

가문에서 기여도를 쌓아 더 높이 올라갈 생각에 다들 희희낙락했다.

어느 누구도.

로마노프 가문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는 상황에서.

-출정한다.

드미트리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지상 병력과 공중항모가 일제히 전진을 개시했다.

*

[그억, 억.]

휴, 이제야 끝났군.

유진은 소매로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마지막으로 재구성을 마친 데스 나이트가 기괴한 비명을 흘렸다.

[다시는 해보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그 모습을 흘려본 일룡은 낮게 주억거렸다.

정말이지.

이만한 고통은 죽기 전에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화가 나는 건 유진이 호언장담한 대로 인고의 시간을 보내니 더욱 강해졌다는 것.

생전의 경지는 확실하게 넘었고.

흐릿하게만 느껴졌던 9성의 벽이 손에 잡힐 듯 보였다.

감만 잡았을 뿐, 확실하게 넘을 자신은 들지 않았지만 말이다.

망자가 되고 나서 다음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맛보다니.

더 강해져봐야 생전의 원수에게 이득이 될 뿐인데.

아이러니했다.

[일룡.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맙시다.]

[그대는 만족할 수 있나.]

[주인에게 복수도 못 하는데. 이렇게 된 삶이라도 만족해야 하지 않겠소?]

망자가 된 전직 구룡방의 아홉 머리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이해한 일룡은 쓰게 웃었다.

푸드드득.

"로마노프 가문이 행동을 개시했어요."

"본대가 도착했나."

마담의 보고에 유진이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안 어울리게 왜 그렇게 진지해."

"파프너야. 주인님 심기 건들지 마라."

"건들지매래."

하.

로마노프 잡기 전에 서열정리부터 해야 하나.

"그럼 계획대로 움직이자고."

"정말로 합니까?"

백두산까지 납치, 아니 정중한 초대를 받은 신준석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대꾸했다.

"엄청 고생했는데 써먹어봐야 하지 않겠나."

[재미있군. 정말 재미있어.]

신준석의 파트너로 자리매김한 육룡이 킬킬거렸다.

"탈로스 배치는 맡기겠다."

"첫 실전이 롬노프 가문이라. 참 심장이 벌렁벌렁합니다."

투덜거린 신준석이 죽음의 요새를 나갔다.

"형님. 지시를 내려주십쇼."

"너희는 별동대다."

뽀시래기 용병단.

아니, 팀인 세 사람은 변수 창출에 용이한 조커 같은 패다.

성위를 뛰어넘는 힘을 발휘할 수 있고.

변화무쌍한 강민정의 능력과 소피아의 아류 수준이지만 그녀와 동일한 특성을 사용하는 이성민까지 있다.

"로마노프 가문은 소수의 유격대를 굴릴 가능성이 높아."

"그때 나서란 말씀이군요."

"어. 대규모 전쟁이라고 해도 결국 승패를 가르는 건 손에 든 패의 숫자거든."

누가 먼저 쥐고 있는 카드를 써버리느냐.

유진은 뽀시래기 팀이란 카드를 최대한 느리게 내려놓을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전장 기웃거리지 말고."

"형. 그렇게까지 우리를 생각해주는 거야?"

강민영의 눈가 위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아니.

뭔 말을 했다고 가습기처럼 물을 내뿜니.

"이성원아. 내가 말했던 건 준비했지?"

"그, 그렇슴다!"

"좋아. 최대한 아꼈다가 꼭 써야 할 때가 오면 써라."

고유 특성 [공간]에는 생물만 아니면 무엇이든 비축할 수 있다.

유진은 회귀 전 소피아가 써먹었던 방법을 떠올리고 같은 조언을 해주었다.

"미스터 블랙. 주문해놓은 건?"

"준비 마쳤습니다."

"후. 쉴 틈이 없구먼."

유진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천 대표님. 잠시 괜찮으실까요?"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마담."

"두만강을 타고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했답니다."

이 타이밍에 몬스터들이 몰려온다, 라.

부자연스럽다.

"로마노프 가문이겠군."

"그렇겠지요."

"송명석. 지휘를 맡기겠다."

[맡겨주십시오. 주군!]

전생에는 몬스터를 부리진 않았는데 말이야.

온갖 변수가 생긴 판국이라 어디서부터 역사가 바뀌었는지 짐작도 안 간다.

달라질 건 없다.

이미 서로가 칼을 꺼냈고.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는 사실은 같았으니.

'나만 아니면 돼.'

굳어버린 목을 가볍게 풀어주고는 미스터 블랙을 따라갔다.

*

국경을 나누는 두 개의 강.

그중 하나인 두만강 하류는 몬스터들의 대이동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컹! 컹!"

몬스터 군집 뒤에서 으르렁대는 커다란 늑대.

아스가르드 성단의 지원으로 이 세상에 현신한 영수(靈獸) 와르그가 짖을 때마다 몬스터들이 움찔거린다.

펜리르의 후손들.

그 피가 영락되어 신수의 모습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늑대들이지만 몬스터들한테 공포의 대상인 건 매한가지였다.

"리쪽이라우."

와르그 위에 타 있는 건 로마노프 가문 소속 헌터가 아니었다.

검은 머리카락과 갈색 눈동자, 그리고 연한 갈색의 피부.

동양인의 모습을 한 사내는 이북 방언을 사용하며 와르그에게 지시했다.

과거 유진에게 패배했던 인간사냥꾼.

세 대장을 포함하여 간부들이 모조리 살해당했지만.

일부는 살아남아 복수를 꿈꾸었다.

-복수하고 싶습니까?

그들에게 손을 건넨 것이 니콜라이였다.

몬스터를 길들이고 사역하는 직업, 테이머.

마법 계통 능력이 아닌, 직업이 지닌 고유하 힘에 가까워서 로마노프 가문에서 써먹을 일은 없었다.

그렇지만.

드미트리는 다른 방식으로 테이밍의 활용 방법을 연구했다.

몬스터의 기질을 읽고.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

양치기 개의 역할만 해줘도 충분했다.

"내래 고만한 능력은 없소."

"와르그를 내려주지."

로마노프 가문에서는 7성급 영수를 제공.

몬스터 군집을 모으고 한 방향으로 보내는 정도만 요구했다.

괴물 군대로 유진을 무릎 꿇릴 수 있다고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체력을 소모시키기만 해도 충분했다.

인간사냥꾼 잔존 세력도 로마노프 가문의 의도를 대충 눈치챘지만.

복수를 위해 무슨 일을 못 하겠는가.

양을 치든 몬스터를 몰든.

무엇이라도 기쁘게 할 생각이 있었다.

"냄새나는 망자들이 있소!"

인간사냥꾼 하나가 와르그의 목덜미를 슬슬 긁으니 컹! 컹! 외침 소리가 더 커졌다.

더 빨라지는 몬스터들의 진격 속도.

맞은편에 선 송명석이 양손에 검을 쥐었다.

[모조리 도륙을 내겠습니다.]

파츠츠츠!

[텐터클 블레이드]

[분광검 - 적광검 x 10]

두 배로 늘어난 암흑 강기 숫자.

붉은빛이 허공을 가르고.

줄지어 달려오던 몬스터들의 육신이 반으로 쪼개지면서 쓰러졌다.

푸하하학!

무수한 피가 솟구치면서 허연 김이 시야를 물들였다.

[시작하십시오.]

[내 부름에 답하라.]

송명석의 뒤에 서 있는 블랙 위저드 무리가 데드 라이즈를 사용했다.

중급 언데드로 되살리는 네크로맨시.

소수로 몬스터들의 앞을 막은 근거였다.

[왜 다시 일어나지 않는 겁니까?]

[주문이 통하지 않습니다.]

블랙 위저드들은 재차 주문을 사용했다.

영력이 시체에 스며들었지만.

태앵! 강한 반발력과 함께 튕겨났다.

와르그에 새긴 룬 문자.

영력 재배열을 교란하는 파장이 퍼져 나가면서 강령술 발동을 막았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 유진이었다면 단번에 간파했겠지만, 송명석에게는 그만한 안목이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대로 보내드릴 순 없습니다.]

모자란 전력에도 굴하지 않는 태도.

송명석은 유진의 기대를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다른 주문을 사용하십시오.]

[어떤 주문을?]

무언가를 주문한 송명석은 블랙 위저드 무리를 뛰쳐나와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289화 

개전(2)

송명석은 유진을 따라다니며 많은 것을 보았다.

네크로맨시를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지.

단순한 주문 하나도 변화무쌍하게 응용해서 변수를 만들어냈다.

또한.

송명석도 한때 네크로맨시를 배웠던 입장이다.

마법 이해도가 높지 않아서 초급 주문을 익히는데 그쳤지만.

특성을 이해하고 지시에 활용하는 건 별개다.

푸하하학!

암흑 강기 다발로 몬스터들을 쓸어넘기는 중에 지시를 내렸다.

[살점 지배와 본 컨트롤로 분리하십시오.]

블랙 위저드 무리는 지시대로 강령술의 대상이 되지 않는 시체들을 분해해버렸다.

'시체 폭발의 촉매로 사용하기에는 아깝습니다.'

유진의 시체 폭발은 개수를 거듭해서 원형보다 열 배 이상의 파괴력을 지녔다.

블랙 위저드들이 익힌 건 기본형.

영력 소모가 적고 즉발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그런 식으로 소모하긴 아쉽다.

그러니.

다른 방식으로 사용해본다.

유진이라면 어떻게 할까, 라고 생각하며.

[어보미네이션을 만드십시오.]

[저 시체에는 강령술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해봐서 손해 볼 건 없지 않습니까.]

블랙 위저드의 반발은 무시했다.

시도할 가치는 충분했다.

주문 한 두번 무효화되었다고 밀릴 전선도 아니고.

몬스터들 좀 지나간다고 결정적으로 패배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네크로맨시가 통하지 않는 적에게 여러 가지를 시도해보는 것이 그의 주인인 '유진'이 할 만한 행동이었다.

[크리에이트 아나테마]

꾸물꾸물.

살점 지배와 본 컨트롤로 분리된 시체, 아니 이제는 그저 무기질이 된 것들이 춤추듯 들썩거린다.

영력의 흐름에 이끌려 하나로 뭉치는 뼈와 살.

송명석은 크게 웃었다.

-보십쇼. 시체가 대상이 아니니 먹히지 않습니까.

해냈다!

유진과 같은 방향에서 생각했고.

별 것 아닌 방법으로 상대의 준비를 파훼했다.

이 정보를 가지고 돌아가면 주인도 분명 칭찬하겠지.

생전의 대적에게 충심을 증명하는 꼴이 우습지만,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았다.

"컹! 컹!"

인간사냥꾼 생존자를 등에 업은 와르그 여럿이 아가리를 크게 벌리며 달려왔다.

-합체하는 순간을 방해하는 건 매너가 아닙니다.

[분광검 – 백광검]

카가가각!

오러 블레이드와 암흑 강기가 격돌하고.

기세좋게 달려들었던 와르그의 몸뚱이에 기다란 상흔이 새겨지면서 수십 미터 뒤로 튕겨났다.

힘을 흘려내고 역으로 돌려주는데 특화된 수비적인 기예.

상식에서 벗어난 와르그의 힘이 역으로 자신을 찔렀다.

송명석이 와르그들을 쳐내고 있을 때.

[으구어어어어아아!]

목소리 수십이 겹쳐진 것 같은 괴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흉물이라는 이름의 언데드.

어보미네이션은 산지직송(?) 시체들을 엮어서 빚어낸 망자다.

시체 골렘이나 블러드 골렘처럼 시체를 재료로 삼아서 만들었을 뿐, 별개의 존재라고 봐도 무방했다.

다만, 앞에서 언급한 존재들처럼 코어가 없다 보니 장기적으로 유지는 불가능했고.

피아를 구분할 만한 지능도 없어서 쓸 수 있는 상황에 제약이 따랐다.

[지금 같은 상황이야말로 적재적소 아니겠습니까.]

송명석은 자신의 판단을 자화자찬했다.

10미터 크기까지 자라난 어보미네이션은 다섯 개의 팔을 휘둘렀다.

우당탕, 그 흐름에 휘말린 몬스터들이 사방으로 튕겨나가고.

핏방울이 허공에 비산했다.

다리에 힘을 주어 버텨낸 괴물도 일부 있었지만.

그게 더 불행한 일이었다.

접촉면에서 솟아난 작은 팔 여러 개가 그 자리에 선 괴물들을 몸뚱이 안으로 초대했고.

"크레렉!"

"뀌익!"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살덩어리에 파묻힌 괴물들은 우드득, 섬뜩한 소리를 내며 짓뭉개졌다.

잘 다져진 고기가 된 괴물의 살점과 뼈는 어보미네이션에게 고스란히 흡수되었고.

순식간에 13미터까지 신장이 자라났다.

[배, 고, 파아아!!!]

블랙 위저드 20구가 동시 영창으로 빚어낸 대규모 술법.

어보미네이션의 몸뚱이를 구축하는 영력은 [지박거인]을 빚어내는 양에 필적했다.

술법의 정교함이나 묘리가 떨어지는 탓에 그만한 위력은 나오지 않지만, 더 성장할 여지는 남아있었다.

콰득! 콰득!

큰 덩치를 이용해서 괴물을 집어삼키고 계속 몸을 불려나가는 어보미네이션.

"막으라우!"

"뎌 괴물을 듁이디 않으면 모두 뒤지는기라!"

와르그에 매달린 인간사냥꾼들의 주문이 빗발쳤다.

각 개체의 전투력은 7성급.

몸을 충분히 불리지 않은 어보미네이션쯤은 순식간에 찢어발길 수 있다.

[누가 그렇게 둔다고 했습니까?]

허공을 격하며 솟구친 강기 다발이 와르그 무리의 접근을 막아낸다.

[먹, 을, 것!]

어보미네이션이 등 뒤에서 손을 뻗었지만 암흑 강기 한 가닥으로 가볍게 잘라냈다.

[피아를 구분 못하는 어리석은 자를 보호하는 것도 일이군요.]

송명석의 보호를 받으며 꾸역꾸역 괴물들을 삼킨 어보미네이션.

어느새 30미터까지 커져서는 천변을 틀어막고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여기서 적의 예봉을 꺾으면 주군께서 기뻐하실....]

[강의 분노]

콰아아아아!

고고하게 흐르던 강물이 중력을 거스르며 위로 솟구치더니.

어보미네이션보다 2배 정도 큰 거인의 형태로 변하고는 오른손을 크게 휘둘렀다.

퍼엉-! 크게 휘청거린 어보미네이션이 제 자리를 겨우 지켰다고 생각하는 순간.

발아래에서 솟아난 흙으로 된 손이 재차 어보미네이션을 밀어내어 두만강에 빠트렸다.

[정령이군요.]

송명석은 쌍검을 칼집에 수납했다.

기세는 8성급.

히드라와의 싸움에서 깨달음을 얻고, 용아병으로서의 능력을 더 진일보시켰지만.

8성 수준의 정령 둘을 동시에 상대할 자신은 없었다.

블랙 위저드들도 마찬가지.

화력은 엄청나지만.

전위가 되어줄 언데드가 어보미네이션과 송명석 뿐인데, 한 녀석은 강에서 물장난하느라 정신이 없으니.

[여기서는 물러나겠습니다.]

제대로 된 전쟁은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

서로 간을 보는 것뿐.

로마노프 가문의 패를 하나 확인한 것만으로도 유진의 칭찬을 받을 수 있으리라.

송명석은 블랙 위저드 무리를 이끌고 전장에서 빠르게 이탈했다.

*

[이상입니다. 주군.]

"꽤 발전했네. 우리 명석이."

어보미네이션이라.

좋은 판단이다.

네크로맨시 발동을 저지하는 게 '시체'인지, 혹은 '고깃덩어리'인지를 확인하고.

로마노프 가문의 수단을 우회해서 망자를 일으켜세우다니.

전략적 안목이 이만큼이나 성장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최상급 정령이 둘이라고 했지?"

[예. 주군.]

"머리 좀 썼군."

회귀 전에는 정령을 부리지 않았다.

수단이야 짐작이 갔다.

자연지기가 풍부한 곳에 깃든 정령을 포박해서 부리겠지.

영구적으로는 부릴 수 없을 거다.

기껏해야 1달 정도?

[그 안에는 승부가 날 것 같습니다만.]

"숨길 생각 없이 바로 동원한 거 보면 그러겠지."

인간사냥꾼의 생존자에 아스가르드의 영수.

그리고 정령.

전생과는 달라진 전쟁의 양상에 흥미가 솟아났다.

〔미래가 너무 틀어져버린 건 아니더냐.〕

'아니. 전쟁의 양상이 달라져서라고 보는 게 합당할 거다.'

기습으로 시작된 전생의 싸움.

로마노프 가문에서는 카리만리스의 힘을 빌려 '퀴에네'의 복제품을 사용, 네크로폴리스에 깔려있는 방어 수단을 회피해서 안으로 파고들었다.

검은 방첨탑을 무효화시키면 영력 안개에 의한 버프가 무효화되니.

언데드들이 약화된 틈을 놓치지 않고 단번에 강습, 네크로폴리스의 전력 상당수를 파괴했다.

'개성은 수비에 적합한 도시가 아니니까.'

강을 거슬러 올라온 별동대.

서해를 건너온 본대까지.

양면에서 공격을 당했고, 네크로폴리스의 기능 상당수가 무력화되어서 큰 피해를 입고 남부로 후퇴해야했다.

〔그게 이 상황과 관계가 있느뇨.〕

'정령을 복속시키려면 시간이 꽤 걸려. 마력 파장도 크고.'

〔괴물 사역 건도 말이더냐?〕

'뭐, 그건 좀 다르긴 하네. 인간사냥꾼 생존자들이 붙은 적은 없었으니.'

어찌 되었든.

로마노프 가문은 기습으로 유진의 전력 상당수를 깎아낸 후, 본격적으로 한반도를 침공했다.

전투 골렘과 키메라, 기간트 등.

압도적인 전력으로 이북을 하루도 안 되어 초토화시키고 개성에 이어 파주까지 밀어버렸지.

'뭐, 상관없는 이야기야.'

회귀 전보다 십 년 넘게 빨라진 전쟁.

로마노프 가문은 그때보다 준비가 덜 되었고.

유진은 착실하게 전쟁을 대비했다.

"물과 대지의 정령을 복속시킨 모양이니 강 쪽은 조심해라."

[주군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몬스터 웨이브는 어디까지 진행되었지?"

[대홍단을 넘었습니다.]

거기가 어디더라.

아, 백두산에서 직선거리로 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군.

몬스터들의 진격 속도를 감안하면 약 하루 정도의 거리.

공중항모 선단은 몬스터 군집과 살짝 거리를 둔 채 간을 보고 있을 터.

충분히 괴물을 밀어 넣은 후에 본격적으로 공격을 개시할 것이다.

"송명석아. 아직 로마노프 가문은 확인 못한 거지?"

[그렇습니다. 주군.]

회귀 전에 비해 전력이 모자란 로마노프 가문.

그럼에도.

적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확실하게 파악할 수 없으니, 정보가 모자랐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으면 좋을 텐데.'

정패룡의 시체로 만든 본 드래곤.

'명해룡'이라고 이름 붙인 언데드가 전장에 합류하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

로마노프 가문을 자극한 건 명해룡 제작을 염두해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9성급 하수인을 써먹을 수 있으면 극동 공화국 공격을 조금 늦췄겠지.

이틀, 아니 삼일 정도인가.

그 정도만 시간을 끌어주면 될 것 같은데 조금 애매했다.

"차라리 한 방 먹여줘."

"무슨 수로?"

"주인이 안배해놓은 것들로 세게 나가면 로마노프 가문도 어찌 못하지 않을까."

"그건 적을 충분하게 끌어들여야 써먹을 수 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다.

적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끌어들인다는 모순.

그럼에도.

파프너의 의견은 유진에게 영감을 던져주었다.

"미끼를 써보는 건 어때."

"뭘 던져야 로마노프 가문이 낚일까."

"가장 맛있는 떡밥이 여기 있네."

"뭘 말하는 거지?"

"주인."

파프너가 히죽 웃었다.

호오.

이건 좀... 괜찮은 듯.

파프너의 아이디어를 들은 유진이 눈을 반짝였다.

290화 

백두산 대전(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