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되로 주고 말로 받기
중동 아덴만을 경유해서 두바이로.
두바이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넘어온 유진은 다음 행동에 나섰다.
"정보는 그게 전부인가?"
[그, 그렇습니다. 부디 형벌만은 면하게 해주십시오.]
LA 플랜트를 쓸어버리면서 제작한 데스 나이트들은 무릎을 꿇은 채, 굴욕적인 자세로 간청했다.
7성이 된 유진의 언데드 장악력은 훨씬 강대해졌다.
과거 변칙으로 성위를 초월해서 만든 송명석이나 일룡, 이룡, 그리고 파프너 같은 언데드들은 자의식이 뚜렷했지만.
이후에 제작된 망자들은 상급 언데드임에도 불구하고, 유진에게 완벽하게 종속된 채 제한된 생각만 가능했다.
〔그건 혼백을 꺾어 제 판단조차 못하게 만드는 행위라고 하지 않았느뇨.〕
'좀 다르거든? 예절을 주입하는 거야.'
굳이 따지자면.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존경심을 영혼에 쑤셔넣어주는 거지.
유진의 성위가 올라가면서 자연스럽게 언데드들의 충성심까지 올라갔다.
'초기에 만든 하수인들은 그게 안 되지만 말이야.'
상관없다.
조승철은 물론이요, 반골 기질과 자만심에 취해 살던 송명석도 유진에게 감복하지 않았던가.
'훌륭한 리더는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법이지.'
〔두 번 감복했다간 난리 나겠구나.〕
'무슨 뜻이지?
〔아무것도 아니니라.〕
사탄교는 철저하게 점조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지만.
LA에 판을 깔 정도로 담대한 놈들은 조금 달랐다.
전 세계 곳곳에 뿌리를 내린 사탄교 내부 조직들을 어느 정도 꿰고 있었다.
"마담에게 이 소식을 전해주도록."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여력이 있으면 판데모니엄을 조사해달라고 해줘."
"마경, 말씀입니까."
"어. 호주에 열린 마경 맞아."
10대 마경 중 하나.
판데모니엄은 암흑계와 유사한 환경을 지닌 마경이다.
〔그곳은 어인 일로 조사하느냐?〕
'회귀 전 사탄교의 본거지가 판데모니엄에 있었거든.'
지금도 그곳에 터를 잡았는지는 모른다.
원 시간선에서는 판데모니엄의 사탄교 본단이 토벌된 게 10년도 더 지났을 때의 일이니.
그렇지만.
혹시 하고 찔러봤는데 나오면 이득이잖아?
10대 마경 중 하나라서 조사 난이도가 어마어마하게 높긴 해도.
투자할 가치는 있었다.
"힘에 부칠 것 같으면 말해. 내가 직접 나선다고."
"그 또한 로드께 전하겠습니다."
유진과 마담 사이의 연결책으로 배당된 뱀파이어는 박쥐로 변해서 하늘로 날아갔다.
역시.
마담을 진조, 그것도 '흡혈귀의 시조'급으로 만든 건 최상의 선택이었다.
'그 능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사람이니까.'
〔계약자의 뒤를 칠 리도 없고.〕
'나한테 그런 맹약까지 하는 건 예상 외의 일이었지만, 좋은 게 좋은 거지.'
뱀파이어가 떠나간 걸 확인한 후, 개성에 정예 언데드들을 한 자리에 집결시켰다.
"생각보다 많이 왔군."
[네크로폴리스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망자들만 두고 모두 왔습니다.]
조승철은 정예 언데드 군대의 선두에서 보고했다.
8성급 – 일룡 / 이룡 / 블러드 드래곤 7구 / 카리크 / 애꾸눈 / 파프너 / 이신우
7성급 – 데스 나이트 157구 / 나이트헤드 3구 / 리치 2구
/ 엘드리치 드래곤(미완) 3구 / 송명석 / 메이 샤오
"허허."
유진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8성급만 14구다.
스펙은 높지만, 보유 특성과 스킬이 모자라서 전투력을 조금 낮게 잡아야 하는 블러드 드래곤을 빼고 봐도.
네임드급인 언데드만 일곱이나 되니.
이 정도면 회귀 전 네크로폴리스의 전성기와 비교해도 크게 꿀리지 않았다.
데스 나이트들의 숫자도 어마어마했다.
아라한과 구룡방 본대의 주력을 흡수하고.
최근 사탄교 고위 신자들 좀 털었다고 데스 나이트들이 대거 충원되었다.
리치는 자의로 만들 수 있는 언데드라 예외였고.
급이 한 단계 낮은 6성급인 블랙 메이지로 대량 생산을 했지만.
유진의 성위가 8성이 되면 추가 개조를 통해 7성급인 [블랙 위저드]로 개조가 가능하니.
마법 전력이 모자란 것도 어느 정도 충당이 되리라.
[그래서. 우리를 부른 이유는 무엇이지?]
둠 나이트 일룡이 삐딱한 투로 물었다.
"전력을 나누어 사탄교를 칠 거다."
[그 악마성애자들과도 싸우는 건가. 정말 싸움을 좋아하는 것 같다.]
"말씀이 심하시네. 세계의 평화를 위해 이바지하는 내 숭고한 뜻을 그렇게 폄하하면 안 되지."
[혹시 못 보던 사이에 개그맨으로 전직이라도 한 건가?]
유진은 손가락을 까딱였다.
[끄으으으윽.]
"거 자유분방한 건 좋은데 선은 넘지 맙시다. 할 것만 잘하면 내가 참견 안 하고 그렇잖아."
[염병.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하지.]
"메이 샤오. 오래간만에 보니까 많이 반가운가봐."
[...그렇다. 주인. 아주 건강해 보이네.]
유진이 손을 흔들어주니 메이 샤오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상급 언데드가 되면서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자유로워졌으니.
이번에는 그 솔직함이 해가 되었다.
[끄아아악! 나는 왜!]
"나처럼 진실된 사람을 거짓말쟁이로 만든 보답이다."
아무렴.
거짓말은 잘 하지 않는다고.
진실의 일부를 깜빡하고 말 못하는 것뿐.
"이제부터 각 조는 사탄교 근거지를 습격한다. 근거리는 항로를, 원거리는 블러드 드래곤을 통해 이동할 거다."
사탄교를 흔드는 목적은 두 가지.
첫 번째는 여태 그래왔듯, 강자의 시체와 혼백을 수거해서 언데드로 되살리기 위함이요.
두 번째 목적은 사탄교와 밀약을 맺은 로마노프 가문을 흔드는 것이다.
'룬 문자를 손에 넣지 못해도 상관없다.'
예상대로 로마노프 가문이 사탄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동시다발적으로 사탄교 근거지를 치면 타격을 좀 받을 거다.
당장은 카리만리스 가문과의 오해를 푸느라 외부에 신경을 크게 쓰지 못할 테니.
지금이야말로.
사탄교 근거지들을 칠 절호의 기회였다.
마침 동아시아 – 인도양에 이르는 해양 루트를 쥐고 있다 보니.
더더욱 병력 운용이 편해졌다.
"자. 다들 일하러 가보자고. 머리만 남겨오면 얼마든지 수리해줄 테니 몸 아끼지 말고 싸워라."
7대 명가 중 둘이 싸우는 동안.
유진은 대들보 하나를 빼낼 계획을 진행시켰다.
*
소말리아.
대 해적시대의 지평을 연 아프리카 중부의 국가다.
내가 후원한 아이가 해적이 되었다, 라는 풍문이 들릴 만큼.
이 나라의 핵심 사업은 '해적'이다.
국민의 잘못은 아니다.
이 땅을 식민지배했던 영국은 다민족을 하나의 테두리로 묶고, 각 부족끼리 갈등을 유발해서 이 땅을 다스렸다.
영국이 방을 뺀 후에도.
한 테두리 안에 묶인 다민족은 서로의 이권을 위해 총부리를 겨누었고.
내수경제가 완전히 콩가루 된 상황에서 기대할 수 있는 수입은 바다를 통해 오고가는 선박을 터는 것뿐이었다.
해양 루트를 개척하던 유진에게 혼쭐 나기는 했지만.
주춤한 것도 잠시뿐.
블랙 컴퍼니에서 확보한 루트를 뺀 곳은 여전히 해적이 바글바글했다.
"씁. 한 번 들어가봐?"
"오징어한테 뒤지고 싶으면 그러든지."
"이 무식한 놈아. 오징어가 아니라 문어다. 문어."
해적들은 언데드들이 주기적으로 순찰을 도는 해양 루트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블랙 컴퍼니 쪽 루트를 타고 가던 선박 하나가 갑자기 궤도를 홱 돌렸다.
해적선들이 있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배.
갑판 위에 선 해적들은 어, 어 하고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털어도 되나?"
"아무 대책 없이 올 리 없잖아. 피해야 해."
"모르고 오는 걸 수도 있잖아."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다는 욕망과 블랙 컴퍼니라는 이름값에 솟아나는 두려움이 서로 충돌했다.
갈등으로 인해 반응이 늦어진 상황.
아주 짧은 의견 충돌로 인해 해적선의 운명은 정해졌다.
차르르릉-!
먼 곳에서 날아드는 하얀 사슬이 해적선을 붙들었다.
고스트 드레드노트.
대형 군함을 개조해서 만든 전투 유령선은 해적들의 발을 묶어버렸다.
"어, 어, 언데드다!"
[너희는 붉은 해적들인가?]
"아, 아아아아 아닙니다."
[그럼 붉은 해적은 어디에 있나.]
"안내해드리면 살려주시는 겁니까?"
[그렇다.]
성공적으로 협상을 마친 일룡은 해적들의 안내를 받아 소말리아 인근의 섬으로 향했다.
[여기가 맞나?]
"그렇습니다. 원래 예맨 땅이었다고 하는데 대격변 이후 버려진 곳을 붉은 해적이 취했다고 합니다."
[알았다. 그럼 잘 가라.]
약속대로 해적들을 보내준 일룡.
"정말로 살려주네?"
"붉은 해적을 치러 오다니."
"블랙 컴퍼니가 붉은 해적의 영역을 노리는 건가."
"아. 몰라. 일단 도망가자고. 엮이면 우리 모두 죽은 목숨이야."
일룡의 자비에 목숨을 건진 해적들은 뒤도 안 보고 멀어졌다.
섬으로 접근하는 고스트 드레드노트.
[블랙 플레어]
[다크 쏜즈]
[게헤나의 불꽃]
....
일부러 비활성화 시킨 안개를 다시 흩뿌렸음에도.
섬에 다가가는 순간 갖가지 암흑 마법이 고스트 드레드노트를 노렸다.
[주인의 예측은 틀리질 않는군.]
불쾌감을 담은 일룡의 사념이 퍼져나가는 것과 동시에.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두 자루 도끼 중 하나가 빙글빙글 돌더니 허공에 큰 궤적을 그리며 날아갔다.
암흑 강기를 두른 도끼가 날아드는 마법을 모조리 분쇄했고.
남은 한 자루와 연결된 사슬을 가볍게 잡아당기니 크게 돌던 도끼가 회수되었다.
[주인에게 들은 것보다 적의 반격이 거세지 않다.]
이미 주력이 빠졌거나.
습격을 받을 거라고 예상을 못했거나.
아마 후자일 것이다.
유진의 과감한 행동은 과거 적이었던 일룡도 흠짓 놀랄 만큼 파격적이었으니.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휘하에 편성된 데스 나이트들이 일룡의 지시를 기다렸다.
공교롭게도.
이번에 배치된 데스 나이트들은 모두 구룡방 본대 소속 망자들이었다.
원활한 지휘를 위해서 붙여준 거겠지만.
일룡 입장에서는 씁쓸함과 편안함이 공존하는 느낌을 받았다.
[상륙과 동시에 사탄교 추종자들을 도륙한다.]
[예.]
[시체는 모두 회수. 영혼도 이 수정체에 보관해서 손실 없게 한다.]
[예.]
일룡과 데스 나이트 15구.
이 정도면 능히 일국을 도모해도 될 정도의 전력이었다.
사탄교 신자들의 무력이 보통은 아니라지만.
둠 나이트를 위시한 정예 언데드와 고스트 드레드노트의 보조가 함께하는 공세를 버텨낼 수 있을까.
[길게 끌면 귀찮으니 오늘 안에 정리하자.]
일룡의 스산한 사념이 데스 나이트들에게 전달되었다.
비슷한 시각.
전 세계 각지로 흩어진 블랙 컴퍼니의 언데드 정예 병력은 동시다발적으로 사탄교 근거지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271화
수확의 기쁨
[스트라토스 샷]
[초정밀 사격]
[암흑 강기]
투콰아앙!
그것은.
화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했다.
한 단계 강화해서 강제로 벽을 넘어선 메이 샤오.
그녀의 초장거리 저격은 이전보다 훨씬 길어졌고.
더 빨라졌으며.
강력해졌다.
공기를 찢어발기며 나아간 화살이 목적지에 도착하는 순간.
무지막지한 폭발음과 함께 반경 50미터 정도 되는 크레이터가 땅에 새겨졌다.
6성 이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소멸.
타깃인 7성급 마인은 한쪽 팔을 잃은 채, 겨우 숨이 붙은 채로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노려보았다.
"어떤 놈이냐아아아아!!!"
[한 방에 죽었으면 안 아팠을 텐데.]
수 킬로미터를 넘어서 전해지는 분노 섞인 외침.
메이 샤오가 딱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왜냐면.
마인이 노호성을 터트리고 있을 때.
두 번째 화살이 시위를 떠나 마인에게 날아들고 있어서였다.
쿠아아아앙!
다시 한번 커다란 폭음이 지축을 뒤흔들고.
괴성을 터트릴 입과 목이 사라져버린 마인은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지면에 누운 채 꿈틀거렸다.
[쳇. 질릴 정도로 효과적이야.]
메이 샤오 전용으로 만들어진 발리스타는 유진의 아이디어로 추가 개수를 했다.
활시위를 드레이크의 힘줄로 바꾸고.
축에 강화 회로를 대량으로 새겼으며.
화살은 대형 몬스터의 뼈 안에 갖가지 마법적인 가공을 했다.
그 덕에.
암흑 강기를 실어냈음에도 훨씬 더 오래 유지되었고.
파괴력과 사거리까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이렇게 된 김에 너희만 아파하자.]
인적이 드문 산자락에 자리를 잡고 있던 사탄교 근거지는 메이 샤오의 일방적인 공격에 반격 하나 못하고 토벌되었으며.
"죽다 만 언데드 따위가!"
[흐흐흐. 주인님께서 아주 기뻐하시겠어.]
조승철은 블러드 드래곤 위에서 포격을 쏟아 부었고.
[난 사탄교가 원래 싫었어.]
파프너는 원시 마법으로 시체의 원형이 남게끔 힘 조절하는 여유를 보이며 사탄교 지부를 박살냈다.
전 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습격.
"이쪽입니다."
마담이 보낸 뱀파이어들은 길안내를 맡았다.
진조의 무력은 6성급.
두 번째 커다란 벽을 앞에 둔 강자들이지만, 사탄교 근거지 습격 때 전면에 나서긴 모자랐다.
유진이 보낸 정보를 기반 삼아 미리 수하들을 파견.
해당 시설 존재 여부를 파악하고.
사탄교 신자들의 전력까지 확인해서 언데드 군대에게 알려주었다.
그 결과.
세계 각지에 흩뿌려진 사탄교 지부들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물론.
사탄교는 점조직으로 된 만큼, LA 플랜트에서 유진에게 죽고 하수인이 된 고위 신자도 모든 지부의 정보를 알진 못했다.
여전히 전 세계 곳곳에 암약한 자들은 많았지만.
무시 못 할 피해를 입은 것도 사실이었다.
보름 남짓한 시간 동안.
사탄교 지부 수십 개가 궤멸되었고.
악신 성좌에게 제물을 바쳐서 악마로 변이하는 데 성공한 마인들은 모두 언데드로 되살아나서 유진의 하수인 신세로 전락했다.
*
약 1달 간 전격으로 벌어진 사탄교 솎아내기.
추가로 룬 문자가 새겨진 비석을 확보했지만, 이송해오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할 수 없었지.'
유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룬 문자들은 이전과 달리, 습득하자마자 모두 사라져버렸다.
카리만리스 가문 영역에서 일을 벌였더니.
곧바로 대응에 나선 것 같다.
'이 정도면 충분해.'
사탄교는 원래부터 해충 같은 놈들이고.
그 음침한 놈들과 모종의 관계를 맺은 로마노프 가문의 행보에도 간접적으로 타격을 입혔다.
해충을 없애면서
병력까지 확보했으니 얼마나 이득인가.
다음 행보는.
극동 공화국이었다.
"크라라라라락!"
히드라가 울부짖었다.
아홉 머리는 모두 재생된 지 오래.
불사조 길드에 의뢰해서 꾸준하게 신성 주문을 불어넣었고.
이북에는 몬스터들이 바글거려서 체력 회복에 필요한 먹이도 넘쳐났다.
크로노스의 성수가 되면서 격이 성장함에 따라, 먹을 것을 충분히 먹으면서 덩치까지 커졌으니.
사탄교 신자들이 처음 불러냈을 때보다 명백하게 강해진 상태로 국경을 넘어 과감하게 북진했다.
[주인의 명이다.]
[로마노프 가문을 공격한다.]
극동 공화국과 협약을 맺고 몬스터들을 토벌하던 언데드들도 히드라의 움직임에 맞춰 행동을 개시했다.
목표는 로마노프 가문 휘하 제3 마법 병단.
나름대로 기밀 행동을 했지만.
숫자가 원체 많다 보니 마담의 정보망에 걸려든 지 오래였다.
"언데드? 그 망자들이 왜!"
"미친놈들. 로마노프 가문에게 선제공격이라니!"
제3 마법 병단.
1, 2 병단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지만.
병단 소속 마법사들은 전 세계 상위 1% 안에 드는 실력자들이었다.
단원의 수준은 최소 5성급.
일대 지형을 바꿀 만한 수준의 능력을 지닌 이들이었지만.
로마노프 가문 소속이라는 자긍심에 너무 눈이 흐려진 것이었을까.
진격을 시작한 언데드와 히드라의 공세를 앞에 두니 제대로 된 반격은커녕 전선을 물리기 바빴다.
[프로미넌스]
[일렉트릭 필드]
[거스트 윈드]
뜨거운 열기와 벼락이 쏟아지고.
거센 바람이 히드라의 몸통에 쇄도했다.
동 단위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화력이 몸뚱이에 박혔지만.
작은 산 크기의 히드라는 콧방귀 한 번 뀌고는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서먼 살라맨더]
[서먼 실피드]
[서먼 노움]
소환된 정령들도 온갖 수단으로 히드라를 붙들려 했지만.
쿵- 발길질 한 번에 역소환되거나 큰 타격을 입고 물러나야 했다.
"크라라락. 배고프다."
"크라라라라. 여기 맛있는 거 많다고 했다."
8성 끝자락의 무력.
거기에.
성수 보정을 받아 더욱 강해진 히드라는 제3 마법 병단의 산발적인 반격에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반대편에서 공세를 개시한 언데드 군대는 히드라가 시선을 끄는 동안 주요 포인트를 빠르게 점거했다.
[요새화를 진행시켰군.]
아덴만 쪽 일을 해결하고 복귀한 일룡.
곧장 전선에 투입되어 마법계 헌터들을 손쉽게 도륙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남의 땅에서 이게 무슨 짓인지.]
[로마노프. 정말 천유진과 한 판 붙어볼 생각이었나보다.]
[그 자들이 조금 더 빨리 움직였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일룡과 이룡은 가볍게 투덜거렸다.
구룡방이 블랙 컴퍼니와 정면 대결을 벌인 게 불과 반년 전의 일이다.
만약.
로마노프 가문이 조금만 일찍 의사를 밝히기만 했어도.
전면전을 벌이기보다 산둥반도 끄트머리를 봉쇄한 채 시간을 벌었을지도 모른다.
[후회는 만년 지각생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자조어린 이룡의 사념은 콰아앙- 이라는 폭발의 여파에 삼켜졌다.
이번 제3 마법 병단 기습에 동원된 언데드는 데스 나이트 20구와 나이트헤드 3구.
네크로폴리스의 전력에 비해서는 일부에 불과했다.
[이 전력으로 로마노프 가문의 마법 병단을 칠 생각을 하다니.]
[그러니 모르는 겁니다. 저 어리석은 자들은 말이죠.]
철컥- 철컥-.
일룡에게 답한 건 송명석이었다.
창 우페이와 벌인 대련을 관찰하고.
히드라의 목을 베어내면서 얻은 깨달음을 소화한 덕에.
송명석은 용아병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황금을 녹여내어 전신에 바른 형상.
금색 갑주 사이로 번쩍이는 푸른 귀화가 전보다 한층 더 심후해졌다.
[길은 제가 열겠습니다.]
투콰아앙!
땅거죽이 크게 뒤집어지고.
수십 미터 위로 떠오른 송명석의 신형이 마법 병단 헌터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렇게 반짝이는데.
못 보는 게 더 이상했다.
"침입자를 배제해라."
[라이트닝 스톰]
[이온 캐논]
[메일스트롬]
야산 하나를 녹여버릴 정도의 막대한 열이 쇄도하고.
하늘에서는 신이 분노하기라도 한 듯, 노란 번개가 연쇄적으로 내리꽂혔으며.
거대한 회오리가 송명석의 육신을 그대로 삼켜버렸다.
하나하나가 7성급 최상위 마법.
한반도 침공을 위한 초석으로 요새를 구축 중이던 제3 마법 병단은 완성된 마법 보조 탑을 활용해서 제 성위 이상의 주문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응축된 힘을 해방하면 작은 시 정도는 가루로 만들 정도의 마력이 송명석에게 쏟아졌으니.
번개 폭풍을 흡수해서 더욱 거대해진 회오리는 맹렬하게 회전했다.
"해치웠나?"
마법 병단 소속 마법사 한 명이 중얼거렸다.
기습적인 공격에 피해를 입은 상황.
적의 예봉을 꺾어야 재정비할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과연. 주군께서는 현명하십니다.]
[텐터클 블레이드]
[분광검 - 적광검 x 10]
촤아아아악!
번개를 휘감은 회오리가 반으로 갈라지고.
그 마력 폭풍에 담겨 있는 에너지가 사방으로 튀었다.
쾅! 콰콰쾅!
여기저기로 흩어진 뇌전 줄기가 지면에 기다란 상흔을 남겼고.
수목이 타면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말을 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다 있었습니다.]
해치웠나, 이 싸움만 끝나면... 등등 불길한 말을 내뱉을 때마다 유진에게 혼쭐이 났던 송명석은 깊은 뜻을 이제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메일스트롬을 베어냈지만.
여전히 뇌전 폭풍은 위협적인 기세로 떨어졌다.
[분광검 - 백광검 x 7]
이번에는 흰색 강기가 허공에 기다란 궤적을 남겼다.
피뢰침이라도 된 것처럼 자신의 머리 위로 쇄도하는 번개를 하얀 기운으로 낚아채고.
힘으로 없애는 대신, 그 궤도를 틀어 마법사들에게 돌려주었다.
암흑 강기가 더해진 벼락은 막 대규모 마법을 방출한 후 기진맥진하고 있는 마법계 헌터들을 집어삼켰다.
비명마저 먹어치우는 뇌전과 강기.
전선 일부가 순식간에 붕괴되었고, 데스 나이트들이 빠르게 전진했다.
"옐레나 비서관! 이, 이 일을 어찌 합니까."
"그걸 이제 와서 물으시나요?"
니콜라이의 비서이자, 임시 책임자로 임명된 옐레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카리만리스 가문과의 마찰 때문에 자리를 비운 상관 대신.
제3 마법 병단에게 블랙 컴퍼니의 습격을 주의해야 한다고 이야기했지만.
막 그녀에게 대책을 강구하는 병단장은 그럴 일이 있겠냐며 방비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로마노프 가문의 휘광을 너무 믿은 게 문제였다.
"남은 병단 소속 마법사들은 얼마나 되나요?"
"절반이 좀 안 됩니다."
"이 요새는 포기하고 전면 퇴각합니다."
"...로마노프 제3 마법 병단의 명예가 땅에 떨어질 겁니다."
"그럼 명예와 함께 죽으시던가요."
"물러난다 해도 저들이 그대로 놓아주겠습니까?"
"급행열차를 준비해두었어요. 그리고 키메라를 풀 겁니다."
키메라.
니콜라이가 블랙 컴퍼니와의 전면전을 위해 챙겨온 비장의 전력이다.
"그건 니콜라이님의 재가가...."
"책임은 제가 집니다."
극동 공화국에서 무사히 빠져나가기는 틀렸다.
키메라를 동원해도 전면전에서 이길 수 없는 상황.
블랙 컴퍼니에게 통행료를 지불하지 않으면.
이 극동의 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옐레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272화
태풍이 불기 전
극동 공화국 영역에서 벌어진 국지적인 전투.
시가지에서 꽤 떨어진 곳이라서 시민들은 분쟁이 있는 것조차도 모르고 지나갔다.
언뜻 보면 평온하기까지 한 분위기.
그렇지만.
수뇌부는 정반대였다.
"...예?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잘 들은 거요. 난 로마노프 가문을 축출할 겁니다."
로마노프 제3 마법 병단이 네크로폴리스의 기습을 받아 궤멸적인 피해를 입고 있을 때.
유진은 극동 공화국 수뇌부와 만남을 가지고 있었다.
극동 공화국의 수상.
세르게이 볼코프는 긴 한숨을 쉬었다.
"원하는 바를 말씀해주시죠."
"당신들은 모르는 겁니다. 강제적으로 나한테 협조하게 되겠지."
"블랙 컴퍼니의 전력이면 극동 공화국을 무력으로 점거하는 것도 가능하겠죠."
"뭐, 이 땅이 크게 욕심나는 건 아니고."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안심은 됩니다만."
"당신들에게 많은 걸 바라진 않아. 딱 하나, 뒤통수만 치지 말아달란 거요."
극동 공화국이 무력은 형편없다.
인구수가 적다 보니 헌터도 많지 않았고.
모자란 인프라 때문에 마도공학 및 헌터 병기 개발에도 뒤처졌다.
유진이 마음먹으면 순식간에 밀어버릴 수 있는 불안한 입지.
그렇지만.
피에 환장한 사이코도 아니고.
로마노프 가문과 전쟁을 벌이기로 마음먹었었다고 해서 관련 없는 민간인들을 모두 도륙할 생각은 없었다.
"블랙 컴퍼니가 패배하면 우리에게도 책임을 물 겁니다."
"그러니 우리한테 굴복했다는 형태로 하자는 거요."
"로마노프 가문이 속아 넘어갈 거라고 생각합니까?"
"싫으면 멸망 당하시든가."
유진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이 정도까지 사정 봐주면 됐지.
밥까지 떠먹여줄 생각은 없었다.
"간 보는 건 좋은데. 날 건드렸다간 곱게 물러나진 않을 거요."
"명심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됐다.
극동 공화국에 많은 것을 바라는 건 아니었다.
공화국의 전력은 있으나 마나 했고.
로마노프 가문에 협조하는 것도 한계가 명확했다.
경고만 남겨도 충분했다.
〔그대답지 않은 자비로구나.〕
'뭐래.'
극동 공화국 수뇌부와 협상을 마치고는.
[고스트 아이]로 전황을 살펴보았다.
휘하 데스 나이트의 시야가 유진과 동기화되었다.
〔저 흉측한 것은 무엇이더냐?〕
'키메라군.'
〔키마이라? 에키드나의 자녀는 이리 흉측하게 생기지 않았도다.〕
'그 친구의 이름에서 따온 생물병기야.'
창백하게 보이는 청록색 피부와 전신에 붙어있는 비늘.
굽어진 허리 위에는 팔 4개가 달려 있으며, 사마귀처럼 칼날을 접어둔 형태였다.
머리에는 흉측한 눈 여섯 개가 달려 있는데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전장의 정보를 머릿속에 욱여넣었다.
인공 괴물 키메라.
로마노프 가문의 역작이다.
'로마노프 가문은 몬스터들의 생체 물질을 추출하여 재조합,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괴물을 빚어내어 하수인으로 부렸다.'
개전 시기가 빨라져서 그런 걸까.
전장에 투입된 키메라는 초기 형태, 그것도 유진의 기억에 비해 완성도가 상당히 낮아 보였다.
"크리리리릭."
기괴한 울음소리를 토해낸 키메라가 갈고리처럼 휘어진 앞발을 휘둘렀다.
칼날보다도 날카롭게 벼려진 앞발에 드리우는 청광.
오러 블레이드였다.
채애앵!
시야를 공유 중이던 데스 나이트가 푸른 광채를 받아내더니 반대편으로 튕겨 나갔다.
〔그대의 하수인을 어렵지 않게 밀어내는구나.〕
'힘은 더 위니까.'
〔필멸자가 빚어낸 생물이라니. 참으로 혐오스럽지만 꽤 효율적이구나.〕
'빚어냈다는 표현은 맞지 않아. 베이스가 되는 인간이 있어.'
키메라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모체가 되는 무투계 헌터의 몸뚱이에 여러 몬스터의 인자를 불어넣고.
안정화시켜서 만든 생체병기다.
'이 시점에서 키메라의 모체가 인간이란 사실은 안 알려졌지만 말이야.'
키메라가 전선에 투입되었다는 소식도 듣지 못했으니.
최근에 초기 모델이 완성되었겠지.
키메라는 모두 셋.
도주 중인 제3 마법 병단의 생존자들의 뒤를 지키고 있었다.
[이 괴물은 제가 맡겠습니다.]
[하나는 나한테 넘겨주지.]
[이건 좀 손맛이 있겠군요. 저도 가세하죠.]
송명석과 일룡, 그리고 이룡이 키메라들을 마크.
남은 데스 나이트들은 전장을 우회해서 제3 마법 병단 추격을 재개했다.
〔그래도 저 하수인들의 상대는 되지 않는구나.〕
'8성을 상대로 이만큼이나 시간을 끈 게 대단한 거지.'
키메라까지 숨겨놓고.
로마노프 가문, 꽤나 본격적으로 준비를 했구나.
유진은 데스 나이트의 시선에 동기화를 쭉 건 채, 전장을 끝까지 살펴보았다.
'꽤 많이 살아서 돌아갔네.'
30% 정도인가.
예상 범위 내다.
네크로폴리스에서 병력을 더 빼왔으면.
안이함에 젖어든 제3 마법 병단이라고 해도 이변을 알아챘을 터.
"수완가가 있었나보네요."
마담은 입술을 샐쭉 내밀었다.
"니콜라이만 인물은 아니니까."
"그래도 후퇴 루트를 최대한 차단했는데 말이죠."
"7대 명가의 정점이라고 불리는 가문이야. 놈들의 교만함이 아니었으면 초전에서 이렇게까지 재미 못 봤을 거다."
"로마노프 가문을 고평가하시네요?"
"7대 명가잖아."
"늘 자신감이 넘치는 천 대표님답지 않아서 하는 말이랍니다."
음.
전생에 한번 발려봤거든.
회귀 전보다 충돌 시기가 빨라졌으니.
로마노프 가문의 저력도 그때만큼은 아니겠지만.
그게 상대의 전력을 평가절하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사탄교와 로마노프 가문이 연결되어 있을 줄은 몰랐어요."
"나도 몰랐다."
"그런 것치고는 후속이 꽤 신속하시던걸요."
"상대한테 시간을 주기 싫어서 몸을 비틀어본 것뿐이야."
룬 문자가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고.
우리 성좌 나리 걸고 맹세해줄 수도 있어.
-망령되이 짐을 언급하지 말거라.
누구신지도 모를 부모님을 걸 순 없잖아.
"언론은?"
"대기 중이에요. 전화 한 통이면 국지전에서 벌어진 불행한 비극이란 기사가 쏟아질 거랍니다."
"좋아."
"로마노프 가문이 그 정도로 넘어가겠어요?"
"그쪽 위신이 걸린 문제니까. 당장은 가만 두었다가 후일 전면전의 명분으로 삼겠지."
제3 마법 병단이 사실상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로마노프 가문에서 전면전을 선포하면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
블랙 컴퍼니도 더 눈치 보지 않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면 되니.
전생하고는 여러 부분이 달라졌다.
개전 시기는 물론이요.
조력자들의 숫자.
네크로폴리스 규모.
그리고 동아시아의 세력 구도까지.
일부는 블랙 컴퍼니와 유진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겠지만.
대부분의 변동 요소는 그에게 웃어주고 있었다.
'이번에는 다를 거다.'
초토화된 서울.
무너진 도시 위에서 오연하게 자신을 내려다보았던 차가운 눈동자.
그를 오시했던 마법왕 드미트리를 다시 떠올리며.
유진은 손에 힘을 쥐었다.
*
[극동 공화국에서 벌어진 국제분쟁!]
[블랙 컴퍼니, 몬스터 토벌 중에 발생한 분쟁에 사과문 발표]
[로마노프 가문, 이번 유혈사태에 대해 조사 착수 예정?]
제3 마법 병단이 습격을 받았단 소식은 곧바로 마법왕 드미트리에게 들어갔다.
카리만리스 가문과의 합동 조사를 거의 마쳐가던 니콜라이도 급한 전보를 받아 본국으로 귀환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죄송합니다. 가주님. 제 불찰입니다."
"책임을 묻는 게 아니라네. 다음을 보는 거지."
제3 마법 병단.
대외 활동에 치중되어 있으며, 무력 수준은 가문 내에서 그리 높지 않다.
가문의 진짜 주력은 1, 2 마법병단.
웃어넘길 만큼의 피해는 아니지만, 마음만 먹으면 금세 복구가 가능했다.
"애초에 천유진은 우리 가문에 협조할 마음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 판단하는 연유는?"
"고의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내려서 눈을 흐리게 하고 세력을 키운 것."
"내 제안이 나쁘지는 않았을 터인데."
"네크로맨시를 독점하고 싶은 마음이지 않겠습니까."
"공동 연구로 만족하지 못한다, 라."
드미트리는 뒷말을 살짝 흐렸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로마노프 가문이 여차하면 네크로폴리스를 공격할 준비를 한 건 사실이다.
유진의 미적지근한 반응과 공격적인 확장성.
새 마법 지식을 원하는 로마노프 가문과는 대치되는 행보에 제3 마법 병단을 보내어 조심스럽게 터를 닦아 놓았다.
유진이 간파했다면 그것대로 경고의 의미가 되고.
모른다면 차후 한반도 토벌 때 거점으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한데.
사전포석을 알아채는 데 그치지 않고 과격하게 먼저 손을 쓰다니.
"본인의 견해는 좀 다르다네."
"가주님의 고견을 들려주십시오."
"천유진. 그 자는 처음부터 우리와 적대할 각오를 굳힌 거야."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가주님."
"세상만사가 이성으로만 돌아가던가. 어디."
마법의 정점에 도달한 존재.
이성적인 학문의 극을 맛본 인물이 내뱉는 말치고는 아이러니했다.
"훗. 재미있게 되었구나."
"제3 마법 병단은 귀환시키겠습니다."
"그리 하여라. 손해가 막심하니 다시 편성해야겠어."
"죄송합니다. 가주님."
"반복해서 말하게 하지 말아라. 마냥 잃은 것만 있지는 않으니."
안개에 가려져 있던 블랙 컴퍼니의 저력이 이번 습격에서 상당수 밝혀졌다.
데스 나이트 다수와 둠 나이트.
그리고 히드라까지.
"소피아. 제1, 제2 마법 병단을 소집해주게."
"2주일은 걸릴 거야."
"1주 안에 해결하도록."
"알았어."
제1, 제2 마법 병단.
로마노프 가문의 주력이 한 자리에 모인 적이 얼마나 있던가.
같은 7대 명가 중 하나인 카리만리스 가문과 국지전을 벌일 때도 일부만 동원되었던 핵심 병력이다.
드미트리의 지시는 유진과 전면전을 벌이겠노라고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공중항모 추가 건조는 얼마나 진행되었는가?"
"2척이 준비 중이야. 완성 자체는 곧 되지만 세부 조정이 필요해."
"그 부분은 이동하면서 내가 직접 조율하겠다."
"가주가 직접 한다면야."
"또한, 본인은 마법 병단이 집결될 때까지 키메라 제작에 집중한 후, 직접 지휘에 나서겠다."
친정.
로마노프 가문의 가주이자, 전 세계에서 첫 번째로 9번째 성위를 달성한 초월자.
시스템으로부터 '왕'이라는 칭호를 받은 강력한 존재가.
극동의 헌터를 토벌하기 위해 친정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가주님. 이번 사태에 대한 공식 입장은 어떻게 발표하는 게 좋겠습니까?"
"유감 표명, 정도로 하게. 구태여 로마노프의 이름값을 떨어트릴 필요는 없으니."
"알겠습니다."
로마노프 가문은 크게 책임을 무는 대신 입장을 표명한 후 블랙 컴퍼니에 어떤 압박도 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시류를 읽는 자들은 이 반응이 곧 들이닥칠 거대한 태풍의 전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273화
손님 맞을 준비 합시다(1)
극동 공화국과 협상도 끝냈으니.
두 번째로 이야기할 곳은 천무문이었다.
"본 문주가 참여하면 안 되겠는가?"
뭐라는 거야, 이 양반이.
"진심으로 하는 말씀입니까?"
유진의 되물음에 창 우페이가 껄껄거렸다.
"진심이고 말고. 본 문주 말고 9번째 성위의 초월자와 주먹을 맞댈 일이 얼마나 있을까."
"참아주시죠."
"왜지? 본 문주가 합류하면 블랙 컴퍼니에도 큰 힘이 될 터인데."
"천무문에 도움을 요청했다간 얼마나 큰 청구서를 받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군요."
"그건 뭐 본문의 장로들과 나눌 이야기 아니겠나."
"그리고 말입니다. 로마노프 가문은 제 먹이입니다."
천무문은 중립만 지켜줘도 된다.
회귀 전에도 관망한 건 마찬가지지만.
그때는 로마노프 가문 소속 마법 병단의 움직임을 가려주었으니.
정확하게 말하면 간접적으로 협조한 셈이지.
"응당 사내라면 그런 당당함이 있어야지. 마음에 드는군!"
창 우페이는 유진의 대답을 듣더니 더 크게 웃었다.
7대 명가와 전면전을 앞두고도 위축되지 않는 담대한 태도.
로마노프 가문의 공세를 버텨내기만 해도.
명가의 기준점이 하나 더 늘어날 것이라는 생각이 확고하게 들었다.
"버겁다고 여겨지면 본 문주에게 귀띔하게. 마법왕과 겨뤄보고 싶은 것은 진심이니."
유진은 창 우페이의 호의에 고개를 숙였다.
회귀 전에는 큰 연이 없었던 사내.
실질적으로 천무문을 운영하는 건 장로들이라서 더 엮일 일이 없었다.
직접 부딪친 것은 장로들이었는데.
그들은 무왕과 달리 가문의 이득을 최우선으로 삼았던 작자들이었다.
로마노프 가문과 유진 중, 누구의 편을 드는 것이 천무문에 이득이 될지는 뻔하지 않겠는가.
'천무문도 이제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어.'
〔그리 확신해도 되느냐?〕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양반은 아니야.'
만약.
천무문에서 뒤통수를 치면?
그럼 뭐 맞아야지.
어쩌겠나.
9성 헌터 둘은 〔아우라〕를 빼고 봐도 상대할 수 없다.
〔퍽이나 순순히 목을 내밀어줄 것처럼 말하는구나.〕
'누가 죽어준대. 도망쳐야지.'
전면전에서 언데드를 모두 잃어도 괜찮다.
파프너나 송명석, 혹은 조승철 같은 주력 언데드만 전선에서 빼내고.
마담과 뽀시래기 팀처럼 블랙 컴퍼니의 핵심 인력만 외국으로 피난 간 후에 재기를 노려도 된다.
〔암상이라고 하였던가. 그 단체의 작은 인간은 어찌 하려느뇨.〕
'미스터 블랙? 그 양반은 알아서 제 살길 찾아야지.'
암상과 함께 죽었으면 죽었지.
혼자 몸을 뺄 녀석이 아니다.
'망하지도 않았는데 쓸데 없는 가정은 하지 말자고.'
드미트리를 못 죽이면 내가 죽는다고 생각해야지.
뒤를 의식하면 못 이기는 법이다.
로마노프 제3 마법 병단을 패퇴시키고는 기세를 몰아 용의 계곡에 머무르고 있는 이들까지 쫓아냈다.
이로써.
전격적인 기습으로 동아시아에서 로마노프 가문의 영향력을 모두 걷어내버린 유진은 눈치 보지 않고 다음 계획을 진행시킬 수 있게 되었다.
*
초토화 된 제3 마법 병단의 거점.
[로마노프의 마법사들을 모두 도륙하지 못했습니다. 속하를 처벌해주십시오.]
"진짜 처벌 받을 거야?"
[...내리신다면 별수 없지 않습니까.]
"솔직하기는.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니 됐어."
마법계 헌터들의 시체는 한 곳에 모여 있었다.
[주군. 이걸 받으시옵소서.]
식어버린 몸뚱이를 떠난 혼백들이 갇혀 있는 구슬.
영혼석이다.
"갇힌 혼들을 석방해줘라."
[존명.]
시아아아악-!
영혼석에서 튀어 나온 희끄무레한 연기가 공중을 물들여간다.
-내, 내 모오오옴.
-흐으윽. 흐윽.
-사, 살려줘.
누군가는 식어간 몸뚱이를 보며 절규했고.
죽기 직전의 고통에 헤어나지 못하는 유령도 있으며.
현실을 인정한 혼백은 귀곡성을 흘렸다.
"미스터 블랙. 주문한 것은?"
"여기 있습니다."
차량에 싣고 온 컨테이너를 그대로 땅에 옮겨놓고는 문을 활짝 열었다.
[영혼석 x 100]
[혼철 500kg]
[블랙 허브 15kg]
[힘센 이끼 210kg]
....
"훌륭하군."
"가장 구하기 힘든 혼철과 블랙 허브야, 천 대표 거니 그대로 가져와서 어렵지도 않았수."
"사람이 칭찬하면 그대로 들어."
"킁. 로마노프랑 한 판 벌인다는데 어떻게 그냥 듣겠나."
"싫으면 빠지던가."
"안 빠질 거요. 당신이 벌인 일이니 승산은 있을 거 아닙니까?"
아닌데요.
전생의 케케묵은 원한과 상황 때문인데요.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붙어야 하니. 선택지가 없었다.'
물론.
그 속사정까지 사업 파트너에게 고지할 의무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왕 왔으니 개쩌는 거 하나 보고 가면 되겠군."
"로마노프 가문과의 분쟁에서 도움이 되는 겁니까?"
"아마도."
대기 중인 언데드들이 지시대로 영혼석을 시체의 이마에 푹푹 박아 넣었다.
숨이 끊어진 지 꽤 되어서 저항감 없이 들어가는 돌들.
"조승철. 나 좀 도와야겠다."
[분부대로.]
강령술에 재능이 있는 조승철을 불러내어 추가 작업을 했다.
힘센 이끼로 몸뚱이와 영혼석을 한데 엮어내고.
혼철을 곳곳에 박아서 영력 전달 효율을 증대시켰다.
강력한 촉매이기도 한 블랙 허브는 모두 가루를 내어 시체의 머리 위에 뿌려놓는 등.
사전 작업을 마친 후에야 허리를 펼 수 있었다.
"뭘 하려고 직접 발품을 파는 건지."
"보면 알아."
하수인들이 많아진 이후.
어지간한 일은 신준석이나 망자들에게 위임해놓았지만.
이번 일은 손수 집도하고 점검까지 해야 했다.
그래야.
일거리를 하나라도 줄일 수 있을 테니.
"내 부름에 답하라."
[애니메이트 데드를 사용합니다.]
[블랙 메이지 87구를 제작합니다.]
[시체에 모종의 조치가 되어 있습니다. 언데드 제작 완성도가 상승합니다.]
[틀을 벗어나 새로운 언데드로 제작됩니다.]
[블랙 메이지 → 블랙 위저드]
블랙 메이지의 강화 버전.
리치보다 한 수 아래지만, 제 의사와 관계없이 부리는 것이 가능한 마법 타입 언데드가 대량으로 몸을 일으켰다.
막 풀려났던 혼백들은 시체에 박아놓은 영혼석에 이끌려서 제 몸뚱이로 들어갔고.
유진의 심복이 되어 두 번째 삶을 부여받았다.
[허, 허허허.]
일룡은 경악 섞인 탄식을 내뱉었다.
비록.
유진에게 패배하고 저주받은 몸뚱이에 혼백이 묶여버려 원치 않은 봉사 중이지만.
그 마음까지는 꺾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한데.
무슨 마술을 부린 건지.
리치 한 마리를 대동해서 시체들을 손보더니.
순식간에 7성급 언데드를 대량으로 제작했다.
데스 나이트야 그렇다 쳐도, 마법계 언데드까지 붕어빵 찍어내듯 만들어내다니.
자신은 왜.
이 상식을 벗어난 인간과 싸워서 이런 꼴이 되어버린 것일까.
꺾이지 않을 것 같았던 마음이 훅 부러져버렸다.
[난 대체, 무엇을 위해.]
[일룡?]
곁에 있던 이룡이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일룡의 마음이 꺾이는 순간에도, 유진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막 일어난 블랙 위저드들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의 주인은 누구지?"
[천유진 님입니다.]
"좋아. 모두 일할 마음가짐이 되었어."
로마노프 가문에서 네크로폴리스로 이적한 망자들.
곧 벌어질 로마노프와의 전면전에서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주군. 이 시체들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아. 키메라."
[키메라? 처음 듣는 괴물입니다.]
"로마노프 가문에서 만든 생체병기다."
송명석에게 간단한 설명을 해주고는 손을 쓱쓱 비볐다.
키메라 자체는 쓸모가 없다.
저 강인한 몸뚱이는 온갖 생물의 요소를 조합해서 만든 것.
운동선수로 치면 약으로 도핑을 한 것이다.
일정 비율대로 만든 키메라 전용 안정제를 꾸준히 넣어줘야 전투력 유지가 되었고.
가만히 두면 몸을 유지할 힘이 없어지면서 붕괴되어버린다.
안정제를 꾸준히 넣어도 기대수명이 길어봐야 2년 정도 된다고 했으니.
말 그대로 '병기'이지. 생물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각 요소는 쓸 만 하지.'
오러 블레이드를 전개하는 날카로운 앞발.
그 외에도 여러 부위를 뜯어내서 언데드 강화에 쓸 수 있다.
'초기 버전이면 그 시체도 들어가 있을 거고.'
영력을 불어넣어 키메라를 가볍게 훑어보았다.
역시.
쓸모가 있겠어.
"조승철. 이 녀석들은 모두 네크로폴리스 운영 및 발전에 투입시킨다."
[알겠습니다.]
"방침은 기존과 같지만, 우선순위를 몇 가지 추가해야겠어."
유진은 조승철에게 몇 가지를 지시했다.
[또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손님을 맞이할 최고의 직원을 섭외하러 간다."
조승철은 유진의 두루뭉술한 대답에 해골을 좌우로 움직였다.
*
용의 계곡.
10대 마경 중 하나이자 로마노프 가문에서 관리해온 금지(禁地).
유진은 극동 공화국 인근에서 진을 치던 제3 마법 병단을 패퇴시킨 후, 곧바로 용의 계곡 통제권까지 빼앗았다.
〔그곳에서 볼 일은 모두 끝난 것이 아니었느뇨?〕
'파프너 때문에 좀 일찍 온 거였지. 할 일이 하나 더 있어.'
용의 계곡은 자연의 속성을 품은 용을 탄생시키고 힘을 축적할 수 있는 환경까지 조성하여, 궁극적으로는 진룡으로 부화시키는 용족의 요람이다.
이 안에서 생성되는 용족은 정령과 용의 성질을 공유하고 있으니.
그래서 정룡이라고 불렸다.
유진은 과거 용의 계곡에서 새끼 정룡들을 집요하게 사냥했고.
얼마 나오지도 않는 뼈와 거죽을 모아 송명석에게 새 육신을 선사했으며.
파프너에게 용족의 정수를 부여하여 사룡족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그때의 변수를 다시 한번 만들어보려는 게냐.〕
'해볼 만은 하지. 근데 그건 본 목적이 아니야.'
백성현을 포함한 아라한 길드의 세 마법사.
단순히 리치로 만들기에는 이미 몸뚱이가 잿더미로 변해서 불가능했고.
연평도에서 공수해온 레리크 시체들을 이용해서 새로운 육신을 부여, 변칙으로 엘드리치 드래곤을 만들었다.
제대로 써먹으려면 용족의 정수를 부여해서 온전한 엘드리치 드래곤으로 만드는 것이 좋겠지.
그렇지만.
블랙 위저드만 87구가 추가된 시점에서, 불완전한 엘드리치 드래곤을 온전하게 만드는 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전쟁이라도 벌이는 거야? 무슨 준비를 이렇게 해."
"곧 전쟁이 있겠지. 그 전에 합을 맞추는 거라고 생각해라."
파프너의 볼멘소리에 유진이 피식 웃었다.
전 세계 각지에 자리 잡은 사탄교 거점들을 박살낸 후.
유진의 진짜 힘인 '네임드 언데드'들이 용의 계곡 앞에 모였다.
"합을 맞춰?"
"이번에 상대할 놈은 강하거든."
유진은 크라라라라- 울부짖고 있는 히드라를 흘겨보았다.
8성 절정이라고 불리는 신대의 괴물.
저 녀석과 맞먹거나.
혹은 그 이상의 힘을 지닌 괴물이.
마경의 안쪽에 자리를 잡고 있다.
"진짜 본 드래곤. 만들어보자고."
274화
손님 맞을 준비합시다(2)
다시 돌아온 용의 계곡은 최악이었다.
[정면으로 와도 혹독한 건 매한가지군요.]
불의 영역.
물 대신 마그마의 강이 흐르고.
지면에서 솟구치는 열기와 화염 줄기가 피부의 수분을 앗아간다.
"피부 다 상하겠네."
유진이 신성 주문을 사용하려는 순간.
"주인. 여기 완전 좋다."
"네 취향에 맞는다면 다행이다만."
"그런 거 말고. 수련에 딱 좋잖아."
"?"
아.
그러니까.
오러로 몸에 파고드는 열기를 잘 막아내라 그 말씀이죠?
"전에도 해봤어."
"마법이나 신성 주문의 도움을 받았을 거 아니야."
"이러다 장비까지 싹 벗기고 맨몸으로 버티라 하겠어."
"오. 그거 좋다."
시부럴.
이 주둥아리가 문제다.
파프너의 엄중한 감시에 무장을 하나하나 벗어두고는 몰려드는 열기를 몸으로 받아냈다.
"제길."
[훌륭합니다. 파프너야말로 대전사의 재목이 확실하군요.]
"언제는 내 자리 뺏는다며?"
[주군을 이렇게까지 굴릴 수 있, 아니지. 직언을 망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건 파프너뿐입니다.]
"남들은 그렇게 고생시키면서 본인만 꿀 빨려고 하면 안 되지."
[맞습니다. 주군은 너무 시행착오 없이 모든 일을 척척 해내니 이런 과정도 필요합니다.]
이 자식들아.
회귀자 특전이라고!
〔그대의 하수인들이 마음을 맞춰가는 듯하니 참으로 보기 좋구나.〕
'내가 구르는 게 보기 좋겠지!!'
〔짐 또한 그대에게 시련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것은 익히 공감하는 바니라.〕
억울했다.
회귀 전에 고생했으니 이번 삶에서는 꿀 좀 빨아도 되지.
부하고 성좌고, 그가 고생하는 꼴을 조금이라도 더 보겠다며 눈을 부라리고 있으니.
통재로다. 통재야.
[이곳이 마경인가.]
[정말 엿같은 환경이군요.]
일룡과 이룡은 투덜대며 유진을 응시했다.
쿵- 쿵-.
마지막으로 진입한 히드라까지.
네크로폴리스의 최대 전력이 한 자리에 모인 진귀한 상황에서, 유진은 화염이 솟구치는 곳을 가리켰다.
"우린 계곡 최심부로 들어갈 거다."
노리는 것은 용의 계곡의 보스 몬스터.
진룡에 가까운 존재이되.
온전하게 '승천'하지 못하고 마경의 섭리를 지키는 가디언으로 남은 드래곤, 정패룡이 목표였다.
"본 드래곤이라고 했잖아. 그건 이미 여러 마리 만들지 않았어?"
"원래 본 드래곤은 진짜 용의 시체로 만들어야 된다."
유진이 파프너를 쓱 보자, 그녀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수련 좀 시켰더니 사람을 박제하려 들어?"
"넌 사람 아니다."
"그런 의도로 본 건 맞잖아!"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용은 죽어서 뼈를 남기지."
"좋아. 한 판 붙어보자고."
이제야 속이 좀 풀리는군.
남을 불구덩이 가운데에 던져놓고 웃은 벌이다.
"정패룡의 시체면 아룡이 아닌, 진짜 본 드래곤을 만들 수 있다."
회귀 전.
유진의 최강 전력은 둘이었다.
먼저 종의 한계를 뛰어넘어 [흑암의 반지]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최상급 언데드인 '헬 나이트'로 거듭난 박하늘 씨가 있었고.
다음으로 정패룡의 시체를 이용해서 만든 본 드래곤이었다.
[보스 몬스터가 어디 있는지는 아나?]
"계곡 안으로 가면 영묘가 나온다. 정패룡은 그곳에 있다."
[외람되오나 주군, 그 보스 몬스터가 강력하다면 전력을 온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페이스 조절은 적당히 할 생각이다. 정룡들 사냥도 겸해서 온 거라."
미완성 된 엘드리치 드래곤들을 강화시킬 겸.
본 드래곤 강화 재료도 겸사겸사 구할 생각이었다.
"로마노프 가문 앞마당에서 쥐불놀이 거하게 해놓고는 너무 여유로운 거 아니야?"
"당장 움직이지는 못할 거다. 전면전을 벌이려면 준비할 게 많을 거니까."
파프너는 잠깐 동안 입을 다물었다.
"전면전?"
"새삼스럽게 왜 되물어."
"주인도 그걸 각오하고 공격한 거야?"
"선전포고 없이 선빵 쳤는데 그 정도는 각오했지."
"로마노프면 나 죽기 전에도 이미 명성이 자자했던 마법 명가잖아."
"그렇지."
"지금도 7대 명가 중 가장 세가 큰 곳이고. 그런 녀석들과 전면전을 벌이는 거야?"
"두려운가?"
"아니. 당장이라도 싸우게 해줘."
눈 돌아간 거 보소.
얘는 매번 말리는 척하면서 싸움판만 벌어지면 눈이 돌아가니.
"뭐, 당장 싸우는 건 아니니까 참아줘."
"쳇."
"그리고 당장은 본체로 변하지 마. 히드라로 이동할 거니까."
"크라라라?"
"크라라. 내 몸에 올라타라."
무릎을 굽힌 히드라.
원체 덩치가 큰 탓인지 몸을 숙였는데도 야트막한 동산처럼 보였다.
[탑승감이 좋지 않군요. 주군의 옥체를 상하게 할까 염려되니 더 신경 쓰십시오.]
"크라라라라라. 불만이면 당장 내려라. 냄새나는 언데드."
[충심어린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다니. 그러고도 성수란 말입니까!]
"크라라. 한 판 더 붙어보든가!"
"크라라락. 안 그래도 배고픈데 잘 됐다."
[좋습니다. 제가 최근에 얻은 깨달음으로 당신들의 목을 베어드리겠습니다.]
빠아아악!
"헛소리 말고 그냥 타."
[속하를 타격하기 위해 오러까지 두르시다니.]
"나 덥거든? 성질 긁지 마라."
[죄송합니다. 주군.]
유진의 목소리에 깃든 살기에 송명석이 바로 고개를 숙였다.
*
히드라의 몸 위는 빈말로도 편하다고 할 수 없었다.
블러드 드래곤이나 파프너의 등이 버스라면.
히드라는 군용 5톤 차량에 탑승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지면의 고르기가 엉덩이에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은 탑승감에 유진이 혀를 찼다.
"차라리 날아갈 걸 그랬나."
"아냐. 수련 효과가 더 좋겠어."
"시부럴."
"힘내라고. 주인. 오러 블레이드 쓰려면 지금 수준으로는 안 돼."
"난 마법계 겸 신관이란 말이다."
"지박거인이 되어서 오러 블레이드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아."
음.
그건 좀 탐이 나는군.
지박거인과 일체화를 이루고.
[역천의 가호 Lv2]로 마법 무효 역장을 펼친 후 접근전을 벌이면?
드미트리를 제외한 마법계 헌터한테는 치명적일 것이다.
"끙."
유진은 볼멘소리를 내뱉고는 열기 차단과 중심 잡기에 힘을 썼다.
"콰우우우!"
7미터 크기의 화룡이 히드라의 앞을 막아섰다.
염정룡 블래스터.
새끼 정룡과 달리, 불의 정수를 충분하게 흡수하여 자라난 아성체다.
처음으로 용의 계곡에 왔을 땐 일회용으로 만든 골렘을 던져주고는 도망치기에 바빴지.
"송명석. 한 번 해볼 거냐."
[제게 기회를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주군.]
스르릉-.
쌍검을 쥔 송명석이 히드라의 몸에서 내려와 불꽃을 휘감고 있는 용을 바라보았다.
[기나긴 모멸과 핍박의 시간. 지긋지긋했다.]
"길긴 무슨. 한 번 와놓고."
파프너의 지적을 못 들은 척하며 검 끝을 염정룡에게 겨누었다.
염정룡은 7성.
제대로 된 8성이 아닌, 경지에 걸쳐 있는 송명석이 단시간 내에 쓰러트릴 수 있을까.
유진은 팔짱을 낀 채 지켜보았다.
[광뇌보]
섬광이 한 차례 번쩍이고.
둘 사이의 거리가 급격하게 좁혀졌다.
염정룡의 시선이 한 템포 늦게 송명석의 잔상을 쫓았다.
전광석화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속도.
눈으로 송명석을 쫓는 데 실패했지만 당황하는 기색 없이 앞발로 지면을 내리쳤다.
[퀘이크]
[용암분출]
반경 수십 미터가 쪼개지고.
지면을 흐르고 있던 용암이 분출되면서 일대를 순식간에 화염 지옥으로 만들어버렸다.
송명석이 어디 있는지 알 바 아니냐는 듯한 태도.
실제로 광뇌보를 사용해서 거리를 좁혀오던 용아병은 솟구치는 용암에 삼켜져버렸다.
"데스 나이트였으면 뼈도 못 추렸을 것 같은데?"
"여기가 화염의 기운이 충만해서 그래."
용의 계곡은 자연을 구성하는 4대 요소의 힘이 충만한 곳.
화염이 넘실거리는 '불의 계곡'에서는 불 관련 스킬의 위력이 증대된다.
염정룡이 사전 준비 없이 펼친 스킬은 7성 마법에 준하는 위력을 지녔으니.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살린 공격이었다.
촤아아악!
그 화염의 파도를.
붉은 광채가 좌우로 베어낸다.
홍해가 갈라지듯.
솟구치는 용암이 양옆으로 밀려나며, 송명석이 푸른 귀화를 불태우며 앞으로 나아갔다.
한 번 벤다고 해서 용암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순식간에 메워지려 하는 구멍.
양손에 들린 검이 허공에 기다란 궤적을 남기더니.
[듀얼 블레이드]
[분광검 - 백광검]
노도와도 같이 몰려오던 용암이 하얀 장막에 막혀 송명석을 삼키지 못했다.
전에도 자주 본 모습.
그렇지만.
조금 달라졌다.
"영력을 꽤 효율적으로 소모하잖아."
파프너가 흥미로운 듯이 중얼거렸다ㅓ.
용아병으로 몸을 갈아탄 후.
송명석은 새 육신이 지닌 막대한 영력을 흩뿌리는 전투 스타일을 선호하게 되었다.
마침 유진이 내어준 [텐터클 블레이드]는 모자란 실력을 출력으로 커버하기에 유용한 스킬이었고.
압도적인 화력으로 적을 제압하는 싸움 방식을 익혔다.
그렇지만.
송명석의 기질인 '천골'은 힘의 이해도가 높을수록 빛을 발하는 특성이었다.
[흑암의 반지]를 들락날락하며 히드라의 목을 베면서.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힘 운용 방식을 다시 한번 고민하게 된 결과.
[필요한 순간에 압도적인 힘을 쏟아붓는다, 그게 정답입니다.]
송명석은 달라졌다.
한 층 더 강인해졌고.
정교해졌으며.
또한.
과감해졌다.
"콰우우우우!"
진각과 용암을 조종함으로써 송명석의 움직임을 조금이나마 붙든 데 성공한 염정룡.
그 작은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그의 위치를 확인한 후.
입을 한껏 크게 벌렸다.
용족의 상징.
브레스였다.
초장부터 필살기를 사용하는 염정룡의 과감한 결단.
거리를 충분히 좁히지 못했으니.
살짝 물러나서 브레스를 회피한 후에 접근하는 것이 올바른 대응법이리라.
[그래선 의미가 없습니다.]
송명석은 양팔을 뒤로 젖히면서 쏜살같이 나아갔다.
화르르르륵!
목구멍을 타고 넘어온 순수한 불의 정수가 쇄도한다.
발사 직전이었으면 모를까.
정면으로 달려드는 중에 쏘아진 브레스는 피할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차칵!
뒤로 젖혀두었던 쌍검을 앞으로 내밀면서.
송명석은 칼날 끝을 모으듯이 부딪쳤다.
"어? 저 자세는?"
파프너의 입에서 당혹감 섞인 목소리가 흘러 나왔고.
그에 반응하듯 송명석의 등 뒤에서 솟구친 암흑 강기 다발이 소용돌이치듯 휘감기며 칼 끝에 모였다.
백(白), 녹(綠), 청(靑), 자(紫).
그리고 적(赤)
분광검의 다섯 색깔이 소용돌이치면서 한점으로 모이더니.
일거에 방출되었다.
구결집합권.
케넥 전투술의 마지막 장과 흡사한 형태였다.
"허."
히드라를 베면서 얻은 깨달음이 그것이었냐.
창 우페이한테만 영감을 얻은 줄 알았는데, 결정적인 건 다른 곳에 있었구먼.
주홍색 브레스 한가운데에 뚫린 커다란 구멍.
일점으로 모인 암흑 강기는 염정룡의 머리통을 펑- 뚫어버렸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고꾸라진 붉은 용.
반 년 전, 이곳에서 고전하던 걸 생각하면 비약적인 발전이었다.
[주군. 앞으로도 제게 맡겨주십시오.]
"앞으로도 그렇게만 해라."
[파프너. 대전사의 칭호, 곧 저한테 양보하게 될 겁니다.]
저기요.
그거 포기한 거 아니었어요?
송명석의 활약 덕에 불의 영역을 금세 돌파, 마경 중심부를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275화
손님 맞을 준비 합시다(3)
용의 계곡 최심부.
마경이라는 흉명이 무색하게도.
일행은 큰 어려움 없이 계곡 안쪽까지 진입했다.
[어려움이 없다고 하셨습니까?]
"누구도 안 죽었으면 없는 거지. 부상도 크게 안 입었잖아."
[팔 다리 잘려나가는 게 경상이면 두개골은 부서져야 중상이라고 하시겠습니다.]
"걱정 마. 머리가 쪼개지지 않는 한은 수리해줄 수 있어."
산재를 당하면 100% 회복 보장시켜주는 직장.
크.
진짜 꿈의 일터 아니니?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
파프너가 힐난조로 대꾸했다.
아니.
왜.
뭐요.
[역시 주군이십니다. 사명대로 피도 눈물도 없는 운영방침이라니.]
"그래서 내가 블랙 컴퍼니 반대했잖아. 이름 따라간다고."
[이번에는 당신의 혜안을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더 정진하겠습니다.]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지, 라고 유진이 자조적인 투로 중얼거렸다.
〔하수인들이 아주 지혜롭구나. 현명하게 양육하였도다.〕
크하핫- 호탕한 크로노스의 웃음소리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오긴 왔는데. 뭘 하면 돼?"
"느껴지지 않나. 저 안쪽에 웅크린 강력한 마력의 파장이."
"여기서 그거 못 느낄 만한 사람이 어디에 있어."
[강한 기운? 무슨 말씀인지.]
한 놈 있네.
일룡과 이룡도 계곡 최심부에 똬리를 튼 강력한 존재를 알아챈 듯, 전투 준비를 갖추었다.
"그럼 공략 브리핑을 하겠다."
"저 괴물. 브리핑까지 해야 할 강적이야?"
"강하기도 하고. 패턴을 숙지하지 않으면 못 죽이니까."
진정한 의미의 '용'이 되면 9성, 그러니까 초월의 영역에 진입한다.
용의 계곡을 지키고 있는 보스 몬스터.
정패룡은 초월의 영역에 진입하지 못한 채 마경에 붙들린 수호자.
굳이 따지면 준 9성급, 8성 절정보다 조금 위라고 봐야겠지.
히드라도 크로노스의 성수가 되면서 격이 비슷해졌지만.
아직 성장을 다하지 못해서 정패룡에 비해 한 수 모자랐다.
[합공하면 어렵지 않게 사냥할 수 있겠군요.]
"뭐, 그렇지. 다른 문제가 없다면."
용의 계곡 최심부는 4대 속성의 시발점.
정패룡이 자리 잡고 있는 중앙은 안정적이지만.
사방에 배치되어 있는 4대 속성석 주변은 그야말로 인세의 지옥도 같은 환경이다.
"속성석을 억눌러야 정패룡에게 유효타를 먹일 수 있다."
최소 넷은 주 전장에서 이탈.
공터를 감싼 네 포인트를 점거하고 힘을 억눌러야 한다.
일룡과 이룡, [데스 게이트]에서 대기 중인 둠 나이트 카리크.
마지막으로 송명석까지.
정예 언데드들이 각 포인트의 몬스터를 해치우고.
속성석의 힘을 억누르는 동안.
"너희는 나를 도와 정패룡을 쓰러트린다."
"맡겨달라고."
"크라라락."
"시체를 먹는 건 금지다."
"크락...."
말 안 들으면 네놈을 본 드래곤으로 만들어버린다?
유진의 뒷말에 히드라가 입맛을 다셨다.
[먼저 출발하지.]
일룡과 이룡, 그리고 둠 나이트 카리크와 송명석이 각 지점으로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공터 근처로 몰려오던 마력 파장이 순식간에 잦아들었고.
"콰우우우우!!!"
공터의 심처에서 괴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정패룡 레이드, 시작이다.
*
스르륵-.
감긴 눈을 뜬 정패룡이 사념을 내뱉었다.
『누구인가?』
자연의 기운이 흘러들어오지 않는다.
그가 눈을 뜬 직후부터 한 번도 끊어지지 않았던 마력.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흐름을 차단했다.
언제나 충만하게 몸을 채워주던 힘이 사라지니, 불쾌감이 들었다.
정패룡은 몸을 일으켰다.
"콜록, 콜록. 어우 먼지. 청소 좀 하고 지내지."
『누가 기침소리를 내었어?』
"손님이다."
쿵- 쿵-.
머리부터 발끝까지 100미터.
발 - 머리를 기준으로 해도 15층 높이 빌딩 높이인 히드라 위에 올라탄 유진이 마른 목소리로 대꾸했다.
히드라가 발을 뗄 때마다 공터에 쌓인 먼지가 들썩거리며 뿌연 연기를 빚어냈다.
『내 안식을 방해하는 자가 너희인가.』
"조금 방해 받으면 어때. 곧 영원히 잠들 텐데."
『침입자여. 겁도 없구나. 내가 누군줄 알고 경박하게 주둥이를 나불대는 것인가.』
"정패룡인거 알고 왔으니까 그만 떠들고 싸우자고."
유진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싸우기 전에 아이엠 그라운드라도 할 기세인데.
그러다가 정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겠어.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크로노스의 사념은 못 들은 척 넘겼다.
『겁 없는 도전자로구나. 네게 허락된 것은 죽음뿐이다.』
날개를 활짝 펼친 정패룡.
몸 여기저기에 박힌 구슬 네 개가 눈에 들어온다.
4대 속성력을 담는 드래곤하트.
마력이 집결되는 핵이 넷이나 되다 보니 출력도 남달랐다.
"파프너."
히드라의 등을 박차며 뛰어오른 파프너가 곡선을 그리며 정패룡에게 쇄도했다.
[폴리모프]
섬광과 함께 본 모습으로 돌아온 파프너는 가슴을 활짝 편 정패룡에게 돌진했다.
둘의 덩치 차이가 거의 두 배나 되다 보니 어린아이가 어른에게 안기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정패룡은 킁, 하고 콧김을 내뿜었다.
『무례한지고. 예고도 없이 기습이라니.』
"다짜고짜 브레스 쏘려고 했으면서 기습은 무슨."
유진은 킬킬거렸다.
정면에서 달려들었는데 기습 운운하는 것이 코메디 아닌가.
이러니 개그 코너가 망하지.
정패룡의 심장 중 푸른 색 코어가 환한 빛을 뿜어냈다.
저저적!
돌진 궤도에 맞춰 생성된 견고한 얼음이 파프너를 받아내더니 쾅, 소리와 함께 반으로 갈라졌다.
현저하게 느려진 파프너의 움직임.
완전히 제지하지는 못했어도.
충격 상당부분을 흡수하여 돌진의 위력을 낮추고, 냉기까지 전달해서 디버프까지 적용시켰다.
7성 냉기 마법 수준의 위력.
그런 마법을.
재배열이나 영창 없이 곧바로 발현시킨 것은 정패룡의 속성 지배력이 어마어마하다는 방증이었다.
푸른빛을 토해낸 코어의 색이 조금 연해졌고.
그 다음으로 하얀 코어에서 강렬한 빛이 솟구쳤다.
망치와 흡사한 구조를 띤 바람.
빛이 왜곡될 만큼, 한계 너머로 응축된 바람의 둔기가 휘둘러진 순간.
야트막한 산을 일거에 무너트릴 정도의 물리력이 파프너의 전신을 강타했다.
오러 블레이드로 충격을 완화했음에도.
처음부터 본신 상태로 달려든 게 아닌, 중간에 변신해서 돌진력을 최대로 살리지 못해 기세가 확 꺾였다.
정패룡은 눈살을 찌푸렸다.
『용족이면서 필멸자를 섬기다니. 긍지를 어디에 둔 것인가.』
지면에 기다란 그림자를 드리운 날개가 크게 퍼덕인다.
본래였으면 가장 취약한 부위였을 용의 날개.
마력과 용족의 권능으로 강화되면서 막대한 힘을 실어낼 수 있을 만큼 내구력이 올라갔고.
기세가 꺾인 파프너는 어마어마한 마력이 실린 날갯짓에 튕겨나 하늘 위로 나풀거리며 올라갔다.
깨진 비늘 사이에서 흘러나온 핏방울이 허공을 수놓는데도.
[여기까지는 주인 말대로네.]
파프너의 목소리에서는 고통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언제 틀린 말 했냐."
정패룡이 파프너의 돌진을 막아내고 튕겨내기까지.
묘사는 길었지만 실제로 걸린 시간이라고 해봐야 1초도 되지 않았다.
한 쪽은 초월의 영역에 발을 걸치고 있는 괴물이었고.
대적하는 이 또한 8번째 성위를 완성시킨 초인, 아니 용이었다.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진 힘 대결.
한 가지 변수는.
파프너가 뛰쳐나간 순간에 맞춰, 히드라도 전진했다는 것이다.
"크라라라라!"
정패룡보다 2배 가까이 큰 히드라.
덩치가 커다란 만큼 속도가 느리다는 단점이 있었다.
유진은 미리 전개해놓은 신성 주문으로 모자란 민첩성을 최대한 보충해두고.
[부정 충격 방패 x 30을 사용합니다.]
히드라의 발밑에 신성 결계를 펼쳤다.
물리 충격을 반사시키는 능력.
그 반사 각도를 정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다.
주문을 막 얻었을때면 모를까.
일곱 번째 성위를 완성함으로써 신관계 헌터의 능력까지 상승했으니.
유진은 반사 각도를 교묘하게 옆으로 전개해서 돌진의 부스터 역할로 활용했다.
쿵! 쿠웅!
본래의 능력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달려든 히드라.
막 파프너를 쳐낸 정패룡을 향해 아홉 머리가 일제히 아가리를 벌렸다.
『긍지를 모르는 짐승이 한 마리 더 있음은 숙지하고 있다.』
빛나는 적색 코어.
이번에는 화염 줄기가 맹렬하게 휘몰아쳤다.
도시 크기의 호수를 모조리 증발시킬 정도의 화력이 히드라를 덮쳤고.
"크라라락. 맛 없다."
"크라라. 몸으로 버티자."
화염 줄기를 뜯어먹어보려던 머리들이 퉤, 하고 침을 뱉었다.
이글거리는 불은 등 위에 올라탄 유진조차 경시할 수 없는 위력을 자랑했으나.
상대가 히드라라는 것이 문제였다.
재생능력과 타고난 맷집.
차라리.
돌진 궤도를 막는 빙벽이나 응축시킨 바람으로 저지했으면 모르겠거니와.
공격으로는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고.
움직임을 봉쇄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긍지를 잃은 짐승과 손을 섞는 건 위대한 종족이 할 짓이 아니니.』
번지르르하게 말을 내뱉었지만.
정패룡은 육탄전에서 히드라를 상대로 우위를 점할 자신이 없었다.
곧장 날개를 펴서 공중으로 이동하려는 순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날갯짓으로 튕겨냈던 파프너가 자세를 잡더니 원시 마법으로 정패룡을 공격했다.
공세 자체는 위력이 강하진 않았다.
그렇지만.
비행 직전이라는 취약점을 파고들었기에, 정패룡은 날아오르지 못하고 날개를 방어하는데 급급했다.
위이이잉-!
마지막으로 갈색 코어가 빛을 토해내니.
땅이 푹 꺼진 후 점액질처럼 변해서 히드라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크라라라락!"
한 순간 발이 묶였어도.
히드라는 목을 쭉 늘려서 정패룡의 육신을 물어뜯었다.
콰직! 콰직!
강력한 마력으로 보호받는 육신.
히드라가 전력을 다해 물어뜯어도 비늘에 흠집 내기가 어려웠다.
머리 하나만 있었으면 유효타를 주기 힘들겠지.
하지만.
아홉이나 되는 머리 중 다섯이 정패룡을 붙들면서 운신의 폭을 좁혔다.
"좋아. 비행은 막았군."
정패룡을 상대하는 건 두 번째.
회귀 전에는 저 놈이 날아오르는 것을 막지 못해서 피해가 컸다.
하늘이 주 전장으로 되면 아군의 화력은 반감되고.
정패룡의 능력은 극대화되었다.
거기에.
불리해지면 4대 속성석의 기운을 잡아두고 있는 아군을 공격해서 무적 기믹을 회복하기도 했다.
정패룡 공략의 핵심은 비행을 막는 것.
여기까지는 계획대로다.
[이런 정보는 다 어떻게 알아낸 건지.]
"성좌 나리께서...."
[그 분. 그렇게까지 전지전능하지는 않으신 것 같던데.]
예리하기는.
"나중에 알려주마."
[진짜?]
"일단 눈앞의 적부터 해치우자고."
날아오르는 걸 막았지만.
정패룡은 여전히 강했다.
서로 가볍게 잽을 주고받은 상황.
진정한 보스 레이드는 지금부터였다.
276화
손님 맞을 준비합시다(4)
정패룡은 불완전한 초월자다.
용의 계곡이 마경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빚어낸 '격'을 지닌 용족이나.
동시에, 자격을 갖추었음에도 승천하지 못하고 마경에 매여 있는 가련한 수호자다.
마경의 규칙에 묶인 바 되었으되.
정패룡의 힘은 약하지 않았으니.
9성에 이르지 못하였으나, 초인을 넘어서 초월까지 넘보는 8성의 필멸자가 상대하기에는 버거운 강자.
『그런 날 도모하려 들다니. 겁도 없는지고.』
쿵!
진각을 밟자 온 땅이 들썩거린다.
땅아래에서 맥동하는 마력이 잠잠했던 지면을 거세게 달구었고.
날카롭게 벼려진 돌기둥들이 히드라와 유진을 향해 솟구쳤다.
대지의 마력을 진하게 품어서 어마어마한 물리력과 관통력을 겸비한 땅의 창이었다.
[부정 충격 방패 X 125를 사용합니다.]
주문의 질이 떨어지면 양으로 커버하는 극단적인 대응책.
일반적인 마법은 비슷한 좌표에 같은 마법을 여럿 쓴다고 해서 효과가 중복되지 않는다.
마법 자체가 근간을 비틀어서 발현하는 능력인 만큼, 무식하게 여러 겹을 덧대었다간 효과가 반감될 뿐이다.
그렇지만.
신성 주문은 달랐다.
뭇 별 위에 제 이름을 새긴 성좌들은 이 세계를 유지하는 법칙 같은 존재가 되었으니.
그들의 힘을 일부 구현하는 신성 주문은 의지만으로 여러 개를 동시에 전개하는 것이 가능했으며.
덧대었을 때 페널티도 없었다.
우지지지직!
그렇다고 해서.
낮은 단계의 주문을 백 번 넘게 전개해도.
고등한 수준을 지닌 마법을 버텨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
카가가각-.
히드라의 비늘을 뚫어내지 못할 정도.
충격을 완화해서 기동력이 묶이지 않을 만큼만 사용했으니.
기동력을 잃자 히드라는 더욱 성을 내며 정패룡의 몸뚱이를 물어뜯었다.
『건방진!!』
정패룡은 방금 전까지 마력을 폭포수처럼 쏟아내던 것과 달리, 순수한 완력으로 히드라를 밀쳐내려 했다.
목을 할퀴고 발길질로 몸뚱이를 걷어차도 꿈쩍하지 않는 히드라.
반격은 도외시하고 오직 정패룡에게 달라붙어서 몸을 옭아매고 물어뜯는 데만 집중했다.
'모든 코어의 힘을 소진했으니 앞으로 1분 동안은 마법을 쓸 수 없다.'
네 코어가 모두 광택이 사라지면.
육탄전을 벌여야 하는 신세로 전락하는 정패룡.
코어의 마력이 회복되려면 반드시 소진 -> 재충전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 재충전이란.
'모든 코어가 광택을 잃은 시점에서 1분이 걸리지.'
동일 속성 마법은 연속으로 사용할 수 없다.
막대한 마력을 숨 쉬듯이 다루는 정패룡의 유일한 약점이다.
이때아말로.
유진 일행이 총공세를 퍼부을 시간이고.
[이때를 기다렸어.]
"크라라라라!"
맹공을 퍼붓는 히드라와 파프너.
유진도 손가락만 빨고 있지는 않았다.
[부정한 축복을 사용합니다.]
[응징의 쐐기를 사용합니다.]
쉼 없이 신성 주문으로 두 권속의 힘을 북돋아주고.
"셋째 머리. 너무 나왔다. 빠져라."
"파프너. 잠시 상승. 놈이 히드라를 떨쳐낸 후 비행하려고 하니 견제해라."
시기적절한 지시로 정패룡의 다음 행동을 봉쇄했다.
화아아악-.
코어의 광택이 모두 돌아왔을 땐 공세의 힘을 빼는 대신 견제로 전환.
정패룡이 헛되이 마법력을 낭비하게 유도하며 대응 수단을 제약했다.
『여간내기가 아니구나.』
처음에는 비늘을 파고들지도 못했던 히드라의 이빨이 점점 둔탁한 충격을 쌓아갔다.
정패룡도 히드라에게 유효타를 여럿 먹였지만.
경상 정도는 눈 깜짝할 사이에 회복해버리는데 피해를 입혔다고 할 수 있을까.
재배열 과정 없이 7성급 마력을 속성별로 다루는 건 강력한 권능이었다.
그저.
상대가 나빴을 뿐.
원리는 비슷하나 더 고등한 능력인 파프너의 원시 마법은 어렵지 않게 해주해버렸고.
히드라에 탑승한 유진도 역천의 가호를 간간히 사용해서 마력 구조를 흩어버렸다.
쿠웅!
"크라라락. 간지럽다."
히드라는 어지간한 공격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이대로 가면 안 되겠다.'
정패룡의 마음 속에 한 줄기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용의 계곡]이 이 세계에 자리를 잡는 순간부터 마경의 심처에서 자리를 지켜온 수호자.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생소한 감정에 먼저 승부수를 꺼냈다.
키이잉!
코어 셋이 동시에 눈부신 광채를 뿜어내고.
이전까지의 기세가 순풍처럼 느껴질 정도의 마력이 용틀임하더니 빌딩 크기만 한 바위들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
유진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2페이즈다."
과부하.
둘 이상의 속성을 부딪쳐서 보다 강력한 마법을 발현하는 능력이다.
밀물처럼 몰려든 마력이 위로 솟구치더니.
하늘을 물들인 뭉게구름이 소용돌이 치며 하강한다.
노을빛으로 물드는 구름.
공기에 섞인 불의 성질이 확산되며 뇌운을 빚어냈고.
솟아오른 바위들은 맹렬하게 하강하며 그 기세를 더했다.
세 코어의 빛이 동시에 사그라지면서 빚어낸 막대한 에너지.
일대 지형을 뒤바꿀 정도의 어마어마한 힘이 와류의 끄트머리에 응집되기 시작한다.
[주인. 이건 좀 위험해 보이지 않아?]
"막아봐."
[말은 쉽지.]
불과 바람, 그리고 대지 속성 코어에서 사라진 광택.
세 속성을 방출.
서로의 기운을 절묘하게 엮어내어 증폭시키니 거의 무영창 수준으로 8성급 마법이 완성되었다.
극대마법인 [프로비던스]나 [광뢰]에 버금가는 위력.
8성 마법사도 아무 방해 받지 않고 60초 이상 집중해야 펼칠 수 있는 주문에 비견되는 마력을 영창 없이 빚어낸 시점에서.
정패룡의 강함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런 걸 몸으로 받아내라니.]
파프너는 투덜거리면서 비상했다.
저 와류의 창끝이 지상으로 떨어지면 곤란했다.
히드라는 버티겠지만.
연약한 그녀의 주인은 열풍에 1초만 노출되어도 뼛조각 하나 남기지 못하고 타버릴 것이다.
강령술에 정통한 7성 네크로맨서여도.
제 능력을 발휘하려면 시체가 필요한데, 이 무대는 유진이 힘을 내기 어려웠다.
'용족이 된 후로 출력에서 압도 당하는 건 처음이네.'
모골이 송연해지는 마력의 폭풍.
입꼬리가 씰룩거린다.
정패룡의 마법 발동 원리는 평범한 마법계 헌터와 다르다.
그녀가 사용하는 [원시 마법]과 닮아있는 모습.
현대 마법처럼 정해진 패턴대로 마력을 재배열해서 발현하는 게 아닌.
의념을 마력에 부여해서 현실을 비튼다.
원시 마법보다 가성비 면에서 떨어지긴 해도.
정패룡의 어마어마한 마력 양을 생각하면 큰 의미는 없다.
'다중 속성이라 다행이야.'
[원시 마법]
[죽음의 위상]
갑주처럼 단단한 형태로 전신을 감싸는 흑색 마력.
평소에는 [사룡의 비행]의 포대 역할로 삼아서 화력을 일점으로 쏟아붓는 데 사용했다.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화력 대 화력으로는 정패룡을 이길 수 없다.
그러니.
[베어낸다.]
필요한 건 힘이 아니다.
원초적인 형태로 뒤섞인 매듭을 풀어내어 증폭된 마력을 분리시킨다.
와류 끝에 접근하는 순간.
콰아아아악!
화염 쐐기가 직접 닿지 않았는데도 전신이 뭉개지는 느낌을 받았다.
뒤지겠네, 라는 말을 삼킨 파프너는 몸을 감싼 영력이 깎여나가는 와중에도 침착하게 오러 블레이드를 방출했다.
손톱 끝에 모인 오러 블레이드가 노을빛에 삼켜지지 않고 섬뜩한 광채를 흩뿌리더니.
[케넥 전투술]
[4장 – 낙엽치기]
서걱!
소용돌이치며 내려오는 쐐기를 파헤치며 위로 솟구쳤다.
'한 번으로는 안 돼.'
양팔을 번갈아가면서 휘둘렀다.
[케넥 전투술]
[4장 – 낙엽치기]
쩌어어억-.
무언가가 어긋나는 소리가 울리며 노을빛으로 물들은 구름 일부가 좌로 밀려나더니 끝내 두 속성이 좌우로 갈라졌다.
섞여진 불과 바람의 마력을 분리해서 끝은 아니었다.
파프너는 더욱 높이 상승.
좌우로 나뉜 구름 사이에 끼어들고는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회전했다.
[원시 마법]
[사룡의 비행]
사방으로 방출된 흑색 광선이 구름을 파헤친다.
광선에 깃든 파프너의 염은 정패룡이 부여한 의념을 지워내고.
푸하하학- 김 빠지듯 구름이 해체되며 땅의 마력을 듬뿍 함유한 바위가 산산조각 났다.
'또 깨달음을 얻었다고?'
정말이지.
천재란 족속들은 다 이런 건가.
유진이야 회귀자 특전에, 전생에도 [흑암의 반지]란 치트키가 있었지만.
깨달음을 식후 커피처럼 마셔대는 파프너를 보면 감탄만 나왔다.
투툭.
"소나기 예보는 없었잖아."
[돌쪼가리 정도는 알아서 막아. 뭘 다 해달래?]
파프너가 투덜거릴 때, 히드라는 아홉 머리들을 민활하게 움직이며 정패룡의 몸에 흠집을 냈다.
"크라라라. 단단하다."
"크라라. 조금 베어 먹었다."
"크락? 맛은 어떠냐."
"크라라라라라.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르겠다."
용의 계곡을 수호하는 운명으로 태어난 정패룡.
본래였으면 '격'을 쌓아 틀을 깨고 진룡이 되었어야 할 능력을 지닌 만큼.
히드라한테는 좀처럼 먹기 힘든 별미였다.
『우둔하고도 천박하구나!』
이번에는 푸른 코어가 빛났다.
물 속성의 변형인 냉기 주문이 전방을 하얗게 물들인다.
앱솔루트 제로에 버금가는 강력한 냉기가 마력 재배열과 영창 없이 발현되어 히드라의 전신을 잠식했고.
『그러나 나를 구속하기에는 모자라니.』
정패룡은 얼음상이 된 히드라를 밀치며 날아올랐다.
천 톤이 넘는 몸뚱이였지만 금세 허공 위로 둥실 떠올랐다.
바람 속성을 끌어와서 생긴 부력으로 상승한 후 단번에 추진력을 얻어 노예가 된 진룡을 풀어주리라.
"크라라라라. 먹이야. 어디 가냐."
와장창-.
살얼음이 부서지고.
중앙 머리가 길게 뻗더니 정패룡의 날개를 휘감았다.
『꾸에엑!』
볼썽사나운 소리와 함께 정패룡이 고꾸라졌다.
[갑자기 약골이 되었잖아?]
"과부하를 하면 능력치가 떨어진다. 마법 봉인 시간도 길어지고."
2분 동안 마법 봉쇄 + 스탯 감소.
다중 속성으로 출력을 끌어낸 페널티다.
맷집도 떨어졌으니 남은 건 뭐다?
"모든 화력을."
[때려붓는다.]
역시.
생각이 통하는 파트너가 있어서 다행이다.
『내가 그런 것도 예측하지 못할 줄 알았느냐!』
정패룡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브레스.
용족 공통 필살기이자, 속성력을 최대 출력으로 뿜어내는 비장의 카드다.
"키우는 용만 둘인데 그걸 모를까."
[나랑 저 히드라를 같은 선상에 놓는 건 좀.]
파프너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입을 벌렸고.
아홉 머리 역시 타이밍을 맞춰 독 브레스를 분사했다.
4대 속성을 뒤섞은 브레스와 두 용족의 숨결이 허공에서 충돌.
한 치도 밀리지 않고 격돌했다.
"페널티까지 끌어안고 이길 생각을 하다니."
비장의 수는 무슨.
마법 못 쓰는 패널티를 브레스로 커버하려고 한 발상이 실수였단다.
우리는 뭐, 브레스 가지고 국 끓여먹을 일 있나.
정패룡이 발악적으로 사용하는 순간을 기다리며.
유진은 마지막 패를 꺼냈다.
『마, 말도 안....』
"돼!"
서서히 밀리는 브레스
히드라의 독액은 견고했던 정패룡의 비늘을 부식시키고.
몸을 둔하게 만들었으며.
종래에는 감각을 망가트렸다.
빈틈투성이인 정패룡의 머리 위로.
파프너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케넥 전투술]
[10장 – 구결집합권]
[덕분에 하나 더 배워간다. 곧 다시 보자고.]
콰지직!
이해할 수 없는 파프너의 말과 함께.
정패룡의 의식이 끊어졌다.
277화
승자의 권리
혀를 내민 채 쓰러진 50미터의 거체.
파프너는 저보다 2배 이상 큰 정패룡을 흘겨보았다.
[이렇게 쉽게 이길 상대는 아니었는데.]
"그야 그렇지."
[4대 속성을 번갈아가면서 쓰는 줄 몰랐다면 고전했을 거야.]
상대가 파프너와 히드라라서 큰 재미를 보지 못한 것이지.
일반적인 8성 헌터 둘이었으면 버티기도 급급했을 터.
물론.
8성이라는 단어에 '일반적인'이나 '평범한' 같은 수식어가 어울리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정패룡은 그만큼 강적이었다.
다만.
회귀자 특전이라는 사기로 무장한 유진이 상성에서 너무 많이 앞섰을 뿐.
〔쯔쯧. 모름지기 영웅이란 고난과 역경을 즐겨야하거늘.〕
'전 그런 취미 없다고요.'
〔영웅의 시대에는 여러 필멸자들이 어려움을 극복하며 위업을 달성하였느니라.〕
'그런 건 헤라클레스한테서 찾으시고.'
요즘 추세는 날로 먹는 거라니까요.
이래서 옛날 사람들은 안 돼요. 쯔쯧.
〔말세로다. 말세야.〕
'지구에 게이트가 나타났을 때부터 이미 충분히 말세였거든.'
인류의 지혜를 짜내어 만든 현대 병기가 통용되지 않는 적의 등장.
헌터들이 나타나며 위기를 넘겼다지만.
전 세계 곳곳에는 침식되어 있는 땅이 어마어마하게 생겨났고.
인류는 더 이상 지구의 주권을 쥐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정도면 훌륭한 말세지.
크로노스의 사념을 옆으로 밀어낸 후, 유진은 정패룡의 시체를 관찰했다.
회귀 전과 동일한 상태.
써먹을 수 있겠어.
[어떻게 할까. 주인.]
"구경이나 하고 있어. 내가 집도한다."
정패룡 시체의 가치를 최대로 끌어올리려면.
시체 분해부터 신경 써야 한다.
[폴리모프]
"어서 그 말 해줘."
"...정말로 해야 하는 거냐?"
"약속했잖아."
그런 약속은 안 했다만.
유진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메스."
파프너는 날카롭게 벼려낸 뼈칼을 공손하게 내밀었다.
"크. 이거지!"
제발 상황극은 다른 곳에서 해주지 않을래.
"그러면 분위기가 안 산다고."
"집중해야 하니 더 말 안 한다."
"네엡."
뼈칼 위에 아른거리는 오러가 섬뜩한 빛을 흩뿌린다.
뼈와 살은 [살점 지배]와 [본 컨트롤]로 낭비 없이 추려낼 수 있다.
문제는 코어.
신경 가닥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고.
정패룡이란 특수종의 '드래곤하트'를 대체하는 기관이라서 섬세하게 다뤄야 한다.
"걘 무슨 심장을 밖에 내놓았대?"
"심장 같은 기관이란 거지. 실제 심장은 아니야."
표면은 미스릴보다도 단단하니.
노출되었다고 해서 흠이 될 것도 없지.
파프너의 오러 블레이드로도 일격에 파괴할 수 없는 경이로운 내구도를 자랑했다.
"그럼 힘으로 확 뜯어도 되지 않나."
"몸뚱이와 연결되어 있는 부위를 잘 제거해야 해."
섣불리 연결을 끊어내면 코어의 출력도 덩달아 떨어진다.
회귀 전에는 멋모르고 해체했다가 네 코어의 출력이 형편없이 떨어져서 제대로 쓰지 못했지.
'같은 실수를 두 번 하면 그땐 실수가 아니야.'
집채만 한 코어 옆으로 달라붙은 유진은 뼈칼을 신중하게 다루었다.
푸욱, 서걱-.
영력을 흘려보내 코어 주변의 마력 회로를 감지하고는.
[생명 분야]
[재구축을 사용합니다.]
회로에 간섭해서 구조 변형으로 위치를 이동.
적출 과정에서 손실을 최소화했다.
정패룡의 덩치가 덩치이다 보니.
코어 연결 부위를 도려내는 과정에서 피로 목욕을 한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누가 보면 혼자 싸운 줄 알겠어."
"이 작업이 더 고생스러울걸."
"말이라도 못하면."
파프너가 샐쭉거릴 때 중앙 머리가 유진에게 다가오더니 혀로 전신을 핥았다.
"으에엛?!"
"크라라라라. 맛있다."
깜박이는 켜고 들어오라고!
"다음에 그러면 목 하나를 뽑아주마."
"크라라라. 첫째 뽑아라."
"크라락?"
으휴. 됐다.
말을 말아야지.
"고기와 피 절반은 너한테 줄 테니 욕심내지 마라."
"크라라라. 주인 몸에 묻은 피 아깝다."
"안 빨아도 되거든?"
피도 시체의 일부다.
옷이나 머리카락에 좀 묻어도 추출 가능하다고.
[파이어 코어]
등급 : 에픽
분류 : 마력 핵
내구도 : 2,971/3,000
순수한 불의 정수를 담는 중추입니다.
후.
성공했다.
내구도가 아주 살짝 깎였지만.
성능이 하락할 정도는 아니니 적출은 완벽하다고 봐야겠지.
'오러 응용력이 더 발전한 덕이야.'
회귀 전에는 적출 작업을 타인에게 맡겨야했다.
정패룡의 육신은 너무나도 단단했고.
살점 지배나 본 컨트롤로 모두 드러내기에는, 코어와 연결된 회로가 너무 민감했다.
영력을 흘려보내어 투사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해체를 그가 할 수 없으니.
코어의 성능을 제대로 살리기는 요원했다.
'이젠 달라.'
코어 넷을 병렬로 연결.
정패룡의 육신으로 본 드래곤을 만들어내면.
회귀 전보다 강한 언데드로 탄생하리라!
'과거의 날... 뛰어넘을 수 있는 건가.'
회귀 후 지금까지는 미래의 지식과 깨달음을 따라가기에 바빴다.
그렇지만.
과거의 행적을 밟으면서도.
오러 응용과 성자로서의 능력 계발 등, 전생에는 다루지 않은 힘을 연구하고 수련하는 데 힘을 썼다.
그 덕분에.
유진은 전생을 넘어서 그 다음 경지로 나아갈 가능성을 손에 쥐었다.
심장이 거세게 두방망이질했다.
〔새삼스럽기는.〕
'초 치지 마쇼. 성좌 나리.'
전성기 너머의 영역에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새 가능성을 본 것만으로도 얼마나 기쁜지.
'후. 작업할 게 많이 있으니 진정하자.'
나머지 코어들도 모두 적출.
4개 코어가 영롱하게 빛나는 걸 보니 밥 안 먹어도 배가 부르는 기분이다.
불 물 땅 바람에 마음만 있으면 캡X 플래닛인데.
대신 네크로맨서의 마음을 합해 개쩌는 본 드래곤으로 만들어주마.
"크흐흐흐흐."
〔또 격조 없는 웃음을 흘리는구나.〕
"개가 똥을 끊지."
아.
왜 저한테만 그러시는 건데요.
*
코어를 적출한 후.
남은 시체 분해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살점 지배를 사용합니다.]
[본 컨트롤을 사용합니다.]
한 점도 낭비할 수 없지.
세세하게 분해하고는 대부분 히드라에게 넘겨주었다.
"크라라라라."
"크라라. 혼자 다 먹지 마라."
정패룡의 고기를 먹다가 서로를 깨무는 히드라 9머리.
싸울 시간에 더 먹는 게 이득일 텐데.
중앙의 머리만 고고한 표정으로 느릿하게 고기를 씹었다.
이래서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가만히 있으면 반은 간다.
〔짐의 성수에게 너무 많은 것을 베풀지 않아도 되느니라.〕
'정패룡의 힘과 격이 깃든 고기다. 먹이면 더 성장하겠지.'
〔사용처를 따로 생각해둔 것이 아니느뇨?〕
'회귀 전에는 언데드 강화에 써먹었다만. 지금은 이 편이 나아.'
강화의 핵심 재료는 비늘이다.
견고하며.
마력 전도율이 뛰어나서 방어력 향상에 써먹을 수 있다.
'뼈를 가공하면 무기를 만들 수 있겠지만, 그건 불가능하니까.'
히드라에게 정패룡의 몸뚱이를 먹이로 주면.
9성에 올라갈 가능성이 조금 더 올라간다.
로마노프 가문과 전쟁을 앞둔 상황.
언데드 군대의 허리를 맡아줄 상급 언데드는 아라한 길드오 구룡방, 그리고 사탄교 지부들을 털면서 충당해놓았다.
지금 더 신경 써야 할 것은 군대의 축이 되는 '주요 전력'의 강화다.
'성수는 아우라를 어느 정도 경감할 수 있다.'
크로노스가 히드라를 성수로 삼은 덕에.
비장의 수가 하나 더 늘었다.
모든 피해를 90% 경감하는 [아우라].
발동 조건은 성좌의 가호를 최대로 이끌어낸 '화신'이다.
그런데.
성수는 다른 의미로 성좌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이니.
히드라에게는 아우라의 피해 감소 효과가 통용되지 않는다.
〔호오. 짐의 성수에게 그대의 대적을 맡기려느냐?〕
'그랬다간 머리 아홉 개가 금방 뽑히겠지.'
정패룡의 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9성에 오를 가능성은 낮다.
거기에, 히드라는 기동력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는데 마법왕은 원거리 공격을 선호하니.
마법왕을 전담하라고 하면 덩치 큰 샌드백이 되어 농락당하다가 끝날 거다.
'상대해야 할 게 마법왕만 있는 건 아니니까.'
로마노프 가문의 2인자인 소피아.
3인자 니콜라이.
그 외에도 로마노프 가문 제1 마법 병단에 속해 있는 강자들까지.
히드라는 훌륭한 탱커가 되어줄 것이다.
"코어들을 속성에 맞춰 네 방점에 두고 와라."
"알겠어."
폴리모프한 상태로 폴짝 뛰어오르는 파프너.
저 상태로도 유진보다 스펙이 높으니, 순식간에 공터 위 절벽 위로 올라갔다.
"히드라야. 넌 저쪽에서 먹어라."
공터 구석으로 히드라가 물러난 것을 확인한 후, 유진은 길게 심호흡을 했다.
후우우욱-.
"시작할까."
혼잣말과 함께 박수를 짝- 쳤다.
용의 계곡 최심부.
본래는 네 방점을 통해 쏟아지는 4대 속성력이 충만하게 감돌았을 공간이나.
하수인들이 네 속성의 마력을 차단해준 덕에 한 톨의 마력도 느낄 수 없는 공백과 적막감이 감돌았다.
진룡을 빚어내기 위한 요람의 중심부.
본 드래곤을 빚어내기에는 참으로 적절한 장소였다.
'드레이크의 사체로 만들 때하고는 다르지.'
아무렴.
유진은 지면에 손을 얹은 후, 재배열 과정 없이 영력을 방출했다.
텅 빈 공간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희끄무레한 기류.
네크로폴리스 때와 마찬가지로 영력을 함유한 안개였다.
'내가 이 짓을 또 하다니.'
〔이런 행위는 처음이지 않느냐.〕
'검은 방첨탑을 만들 때랑 비슷해.'
지금부터 할 일은 영력이 매우 많이 필요하다.
[라이프 드레인]으로 평범한 7성 마법사보다 월등한 영력(마력)을 보유한 유진조차 버거울 정도.
그러니까.
검은 방첨탑을 처음 만들었을 때처럼.
도핑이 필요하다.
한 차례 영력을 들이부은 후, 남겨놓은 정패룡의 살덩이에 손을 얹었다.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합니다.]
돌고 돌아 옛 방식을 쓰는구먼.
살에 깃든 마력을 흡수해서 영력으로 치환, 다시 방출했다.
목표는 이 공터를 영력으로 젖게 만드는 것.
본 드래곤을 만들기 위한 기초 작업이다.
-깨진 독에 물 붓는 꼴이로구나.
'그런 표현은 대체 어디서 배워오는 거냐고.'
유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지루한 작업을 이어갔다.
278화
명해룡
"흐엑, 헥."
아.
X나게 힘들다.
이 무식한 짓거리를 다시 할 줄이야.
쉬지 않고 [라이프 드레인]을 전개.
영력을 미친 듯이 흩뿌린 지 한나절 이상 지났다.
용의 계곡 최심부.
공간도 넓을 뿐더러 담을 수 있는 마력 양도 어마어마했다.
무식하게 영력을 흩뿌렸는데도 꼬박 하루 가까이 투자해야 겨우 공터를 영력으로 충만하게 채울 수 있었다.
〔이제 끝인 게냐?〕
'시작이지. 무슨 끝이야.'
〔지금껏 본 드래곤을 만들 땐 이렇게까지 번거롭진 않았을 터인데.〕
'죽음의 요새를 끼니 영력 보정이 되잖아.'
용의 계곡 최심부에 죽음의 요새를 불러올 순 없다.
그나마 가능한 수작질이라면.
[데스 게이트를 사용합니다.]
[좀비 스케어클로 10구가 소환됩니다.]
"각 방위에 자리 잡아라."
-그우우욱.
검은 방첨탑 없이도 네크로폴리스의 '영역' 선포와 흡사한 효과를 내는 좀비 스케어클로들을 배치해두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영력이 흩어지지 않고 대기 중에 안정적으로 머무르게 되지.
본 드래곤 제작의 안정성을 올려주는 보험이다.
-파프너. 코어의 광택은 돌아왔나?
-그럭저럭.
-모두 회수해서 가져와.
-방점에 있는 애들도 회수해?
-아니. 각 속성 마력이 심처로 못 들어오게 막으라고 해.
-송명석이 힘들어서 죽으려고 하던데.
-머리만 남기라고 해. 다시 만들어줄 테니.
-와. 역시 블랙 컴퍼니 사장님.
이렇게 복지가 좋은 직장이 어딨다고 그래.
밥도 줘.
능력치도 향상시켜줘.
주거지(흑암의 반지/데스 게이트)도 제공해줘.
살려줘.
뼈만 남은 정패룡의 몸뚱이에 파프너가 회수한 코어를 재배치했다.
[연금술식]
[강화 회로를 사용합니다.]
뼈 위로 새겨지는 술식.
덩치가 원체 크다 보니 강회 회로를 연결하는 데만 한세월이 걸렸다.
[연금술식]
[리버스 마나 플로우를 사용합니다.]
"주인. 그렇게 하면 마력이 역류하잖아."
"본 드래곤의 근원은 영력이다. 네 속성을 제대로 써먹진 못해."
"그럼 4대 속성을 다 모으는 의미가 없는걸. 아깝네."
성미도 급하긴.
조금 더 지켜봐라.
캡틴 플X닛, 아니 개쩌는 본 드래곤을 만드는 건 지금부터가 시작이니.
정패룡의 뼈대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기관.
심장 쪽으로 리버스 마나 플로우를 연결시킨다.
"그 녀석. 심장은 아무 기능 없잖아. 코어가 심장 역할을 대체한다며."
"용족의 개념을 이용해야지."
불사자의 관.
피의 발렌타인 사태 때 획득한 유니크 등급 아티팩트다.
그러고 보니 사탄교 녀석들, 참 아낌없이 베풀어주는 좋은 놈들이구나.
멈춰버린 심장을 관에 넣어두고.
리버스 마나 플로우로 역류된 마력을 연결해서 관 안으로 스며들게끔 조치했다.
말은 쉬워도 조정하는 데 엄청 어려웠다고.
신준석을 데려왔으면 훨씬 쉽게 풀렸을 텐데.
"이 연금술 노예는 무료로 해줍니다, 같은 이야기 하는 거 보면 훌륭한 블랙 기업이잖아."
"계속해서 내 사업체에 나쁜 프레임을 씌우려고 하네."
"프레임이 아니라 팩트야."
신준석도 이 자리에 왔으면 행복했을 거라니까?
자신은 업무를 줄여서 좋고.
미래의 대연금술사께서는 연금술의 새로운 지평을 보게 되어 좋고.
이런 걸 보고 누이 좋고 매부 좋다고 하지.
"와. 주인은 진짜... 됐다."
이제야 납득하는군.
수하들의 마음을 사는 건 언제나 어려운 법이다.
〔그대는 공감 능력에서 문제가 있는 것 같도다.〕
'파프너도 내 마음을 잘 이해했는데 왜 그래.'
〔크하핫. 정말이지. 짐은 대단한 계약자를 두었어.〕
뭔데.
크로노스의 사념을 무시하고 불사자의 관에 마력이 쌓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5, 4, 3... 지금.'
4대 속성이 충만하게 채워지는 순간.
관 뚜껑을 옆으로 밀어서 개봉했다.
두근- 두근-.
정패룡이 숨을 거두면서 멈췄던 심장이 못 보던 사이에 생기를 얻어 다시 뛰기 시작했다.
한데.
색이 변했다.
선홍색이었던 살점은 거무죽죽해졌고.
혈관들은 희끄무레한 영력을 쉬지 않고 펌프질했다.
"전에 내가 진룡으로 거듭났던 상황을 응용한 거지?"
"어. 바로 알아보네."
용의 계곡 심처까지 오면서 모아놓은 용족의 정수로 심장을 숙성시키고.
네 코어와 연결시켜서 속성을 반전.
다섯 번째 코어 겸 드래곤하트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물론.
여기서 끝이 아니다.
미리 깔아놓은 마력 회로를 타고 영력이 뼈 곳곳을 순환하고 있을 때.
"내 부름에 답하라."
[애니메이트 데드를 사용합니다.]
스스스슷!
공터를 자욱하게 물들인 영력의 안개가 힘 있는 외침에 반응하면서 크게 떨렸다.
*
용의 심장 안쪽.
최심부에 자리한 공터가 웅혼한 울림을 토해내며 진동한다.
본래 진룡이 탄생하기 위해 만들어진 요람이었지만.
이 순간에는.
용군단이 막대한 영성과 자금을 풀어 만든 '마경'이 조금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
번쩍!
섬뜩한 푸른 안광이 희끄무레한 안개를 찢어발기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귀화가 피어오른 것은 비어있는 안구 부위만이 아니었다.
마치.
전신에 불이라도 붙인 듯.
뼈 마디마디에서 솟구쳐 나온 불길이 이글거리더니 이윽고 몸 전체를 집어삼켰다.
고오오오-.
모골이 송연해지는 감각.
정패룡이 다중 속성을 부딪쳐서 마법의 위력을 극대화시켰을 때와 비슷한 느낌에 솜털이 비쭉 솟았다.
'뭔가 달라.'
유진은 본능적인 두려움을 억누르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용의 계곡.
생각보다 효과가 좋은걸?
제대로 뚜껑을 열어 확인해본 건 아니지만.
본 드래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여간내기가 아니었으니, 대단한 결과물이 나올 거라는 기대가 절로 들었다.
〔전생에도 이리 하였느뇨?〕
'아니. 처음 해보는 거다.'
그때는 네크로폴리스의 보조를 받아 만들었다.
준 8성급의 준수한 능력치를 보유했지만.
스킬셋이 모자라서, 압도적인 스펙을 써먹기가 쉽지 않았지.
푸른 화염을 뒤집어쓴 것과 흡사한 형상의 본 드래곤이 고개를 들었다.
[그대가 나를 되살린 자인가.]
"천유진이다. 네 주인이기도 하고."
[주인이라.]
이 녀석.
꽤나 말이 불순하군.
유진은 회귀 이후 한 번도 흔들린 적 없었던 언데드 장악력이 본 드래곤한테 제대로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다.
물론.
본 드래곤이 자신을 해하진 못하겠지만.
일룡이나 이룡처럼 반감을 품고 있는 이들에게도 강제로 명령을 내릴 정도의 제어는 불가능했다.
'뭐가 만들어진 건지. 원.'
유진은 낮게 혀를 차며 본 드래곤의 능력치를 확인했다.
[???]
등급 : ★★★★★★★★★
종족 : 언데드
-특성
불사의 존재[S] / 초월자[S] / 자연의 지배자[S] / 이면 존재[S] / 불완전한 용[S-] / ...
음.
'존재'를 정의하는 이름이 물음표라.
처음 본 건 아니다.
[흑암의 반지]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새 언데드를 빚어냈을 때마다 봤던 상태다.
아머드 시리즈를 시작으로.
레버넌트나 지박거인 등 새로운 언데드 개발에 성공했을 때면 일일이 이름을 붙여주었다.
문제는.
유진이 만든 건 본 드래곤이라는 거지.
'특성 화려한 거 보소.'
S급이 대체 몇 개람.
처음 눈에 띄는 건 초월자 특성이다.
아홉 번째 별을 완성한 존재에게 붙는 특성.
전생의 유진도 손에 넣은 능력이다.
상태창에서도 표기되어 있지만.
정말로.
이 본 드래곤은 9성의 벽을 넘어선 진정한 초월자가 되어 있었다.
'회귀 전 정패룡의 시체로 만든 본 드래곤은 8성이었다.'
스펙이 높아서 준 9성이라고 봐도 무방했지.
9성이라는 벽을 넘은 건 아니다.
종이 한 장 차이 수준이긴 해도.
강자들끼리의 싸움에서는 그 한 장 차이가 절대적이거든.
그 간극을.
코어 넷을 병렬로 연결하고.
용족의 정수까지 흡수해서 만들어진 본 드래곤은 넘어서버렸다.
9성급 언데드이니.
유진의 제어 능력이 완전히 통하지 않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불만 있냐? 용족의 자긍심이 목을 뻣뻣하게 만들어주니?"
[흠.]
"형이 너처럼 목에 힘 주고 다니는 친구를 100명은 봤거든. 어떻게 한 줄 아니?"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계속 자존심 세우면 예절 주입해주겠다고."
어디서 눈을 부라리고 있어.
9성?
명령을 안 들어?
유진이 전력을 다해서 구속하면 저 압도적인 능력치를 제한할 수 있다.
정패룡 레이드를 위해 동원한 8성급 하수인만 여섯.
본 드래곤의 능력을 제한하고 8성 여섯으로 합공하면 뼈 마디마디에 예절을 주입해줄 수 있다.
"눈이 돌아버렸네."
파프너가 에휴, 짧게 한숨을 쉬며 본 드래곤을 바라봤다.
"너도 용이라고 불러야 하나?"
[솔직히 내 정체성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규정되지 않았다.]
"뭐가 됐든. 선배 입장에서 말해주는 건데 주인 눈 돌면 뒷감당 안 되거든?"
[위대한 존재인 용족의 관점에서 봐도 그리한가.]
"어. 고집 피우지 말고 네 창조주를 인정하는 게 좋아."
안 그러면 험한 꼴 당할걸, 이라는 뒷말을 붙이는 파프너.
본 드래곤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대를 내 주인으로 인정하겠다.]
성위는 자신보다 낮지만.
진룡으로서의 존재감을 풍기는 파프너의 조언에 마음이 확 꺾였다.
유진은 두 눈에 쌍심지를 켰다.
"이 새끼. 마지못해 머리 숙이는 거 보소."
예로부터 이럴 땐 매가 약이라고 했다.
손을 까딱이려고 할 때.
파프너가 저지했다.
"얘도 이해했어. 엉뚱한 데서 힘 빼지 말자고."
"쩝.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9성 하수인.
유진의 제어 능력이 온전하게 통하지 않는 상대이니만큼 한 번은 꺾어줘야 할 것 같지만.
방금 전 본 드래곤이 자신을 주인으로 인정하면서 제어 능력이 강해졌다.
참교육을 할 명분도 사라졌으니.
유진은 입맛을 다셨다.
[한 가지 부탁이 있다.]
"뭐냐."
[이름을 지어다오.]
이름이라.
그래.
존재를 정의하는 게 '이름'이니, 그럴싸한 것을 붙여줘야겠구나.
"넌 스스로를 어떤 종으로 여기나?"
[위대한 용족이다.]
"네 특성에는 불완전한 용이 붙었는데도?"
[내가 태어난 곳은 진룡의 요람. 용을 자처해도 될 자격은 있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본 드래곤은 아니다, 란 말이군.
좋아.
유진은 잠깐 고민하고는 한 마디를 툭 뱉었다.
"명해룡 어떠냐."
[그 의미를 알 수 있는가?]
"나는 죽음을 거스르는 영역의 주관자인 '역천의 거인'을 모신다."
진룡의 탄생을 위해 준비된 요람에서 죽음을 거스른 용이 만들어졌으니.
명계와 닿아있으며.
몸은 뼈로 되어 있으니, 이름하야 명해룡이라.
[마음에 드는군.]
[???의 이름이 명해룡(冥骸龍)으로 정해졌습니다.]
[당신의 위업으로 인하여 역천의 거인의 격이 상승합니다.]
[흑암의 반지에 새 지긱이 기록됩니다.]
회귀 전의 경지를 넘어선 새로운 언데드 창조.
유진은 두 손에 힘을 꽉 쥐었다.
279화
봉화
유진이 마경에서 정패룡과 두근두근 소개팅을 하고 있을 때.
기상 나팔 소리에 눈을 뜬 로마노프 가문 역시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그루지야 미네랄 광산의 이권을 넘겨드리겠습니다."
"통 큰 양보군. 원하는 건 후방의 안정인가?"
"이미 다 아실 테니 돌려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진심인가 봐."
"가주께서 친정하실 예정입니다."
알렉산더 카리만리스는 흐음- 짧은 신음을 흘렸다.
같은 7대 명가의 가주.
세간에서는 각 가문의 가주들을 동일선상에 놓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렉산더 본인이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 극동에서 얻어먹을 게 무엇이 있다고."
"로마노프 가문 제3 마법 병단이 괴멸되었습니다. 더 이상 이유가 필요하겠습니까?"
니콜라이는 늘상 보여주던 예의바른 모습 대신 드물게 분노를 토해냈다.
언제나 웃던 사람이 화를 내면 더 무서운 법.
로마노프 가문에서 온건파로 알려진 니콜라이가 거침없이 노를 드러내는 모습은 로마노프 가문을 대변한다고 봐도 무방했다.
휴전 조약을 맺은 상대한테 광산 채굴 이권까지 양보하는 걸 보면.
로마노프 가문이 이번 사안을 얼마나 무겁게 여기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유럽 쪽은 신경 쓸 일 없게 만들어주겠다."
"가주께서도 만족하시겠군요."
두 사람은 손을 마주잡았다.
회담장에서 먼저 나온 니콜라이는 가볍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뒤따라온 비서, 옐레나가 곁에 섰다.
"오늘은 니콜라이님 답지 않았네요."
"내가 화 낸건 처음 보던가요?"
"예."
"저는 감정소모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방금 전에 격노를 드러낸 사람 치고는 평온한 투로 말했다.
"외교적인 수사이지요."
"가주님께서 그만큼 분노하셨다는 표현이군요."
"맞습니다. 카리만리스 가문은 이권을 양보 받은 만큼, 우리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줘야 합니다."
이번 극동 원정에는 로마노프 가문의 전력을 투사할 것이다.
대규모 힘의 공백.
카리만리스 가문은 로마노프가 힘을 뺐을 때 가문을 지켜줄 번견 신세가 된 것이다.
미네랄 광산이라는 큰 먹이 때문에.
"제가 화를 냈으니 더욱 중하게 여길 수밖에 없지요. 카리만리스 가주도."
"그렇다고 해도 미네랄 광산을 통으로 넘겨준 것은 너무 큰 대가 아닌가요?"
"이번 원정은 로마노프 가문의 힘을 과시할 프로모션 무대입니다."
로마노프 가문을 대적하는 자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마법왕의 친정과 공중항모, 키메라, 그 외에도 가문이 드러내지 않았던 힘까지.
극동 원정에서 모두 쏟아내면 다른 7대 명가들도 알게 될 것이다.
로마노프의 진정한 힘을.
"앞으로 다른 가문들은 우리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을 겁니다."
블랙 컴퍼니를 철저하게 짓밟고.
전 세계에 로마노프 가문의 힘을 과시하는 퍼포먼스.
니콜라이는 그 퍼포먼스의 효과를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 전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7대 명가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을 때.
가문에 남아 전쟁을 준비 중인 소피아는 푸념했다.
"전화 한 통 하면 될 것을. 귀한 전력인 공중항모를 노출시키면서 돌아다닐 필요가 있어?"
"필요한 일이요. 이모."
"가주. 그 이모란 말은 좀 빼달라니까."
"공중항모를 대동함으로써 가문의 힘을 과시하고. 극동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으니. 그만큼 공을 들여야 하지 않겠소?"
마법왕 드미트리는 키메라를 조정하며 느긋하게 말했다.
"키륵."
"옳지. 조금만 참으렴."
부풀어 오르는 키메라의 근육.
드미트리는 마력사로 과다하게 범핑 된 조직을 안정화시켰다.
"1mm만 더 넣었으면 그대로 붕괴해버렸겠군."
무투계 헌터를 베이스 삼아 여러 몬스터의 조직을 합쳐서 만든 생체병기.
극동 원정 때 투입할 키메라들은 드미트리가 직접 조정을 했다.
"번거롭게 가주가 직접 나설 필요까지야."
"그렇지 않소. 소문에 따르면 구룡방이란 무뢰배들 중 실력자들을 데스 나이트로 되살렸다더군."
"데스 나이트면 7성급 언데드잖아."
"그렇소. 확인된 숫자만 30구 정도라더군."
소피아는 흐응, 짧게 코웃음을 쳤다.
"7성 무투계 30마리를 사역하다니. 제법이잖아."
"정보수집에 난항을 겪은 걸 고려하면... 실질적인 전력은 60구 정도로 예상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그 정도면 가문 급 아닌가?"
"직접 키메라를 조율하는 이유라오."
"데스 나이트 60구 정도라면 우리 쪽 전위로는 조금 모자라겠네."
마법계 헌터들의 약점은 근접전이다.
마법 명가인 로마노프도 그 문제에서 자유롭지는 않았다.
오죽하면 마법사의 싸움은 '간격을 내주지 않는 것'이라는 표현까지 나왔을까.
데스 나이트 60구가 접근하기 전에 화력으로 몰살시키는 게 베스트.
그렇지만.
접근을 허용하면 아군도 피해를 강요받아야 한다.
"골렘 개발만 완료되었으면 전력에 도움이 되었을 텐데."
"스킬북이 나오지 않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로마노프 가문은 연금술에도 조예가 깊다.
애당초 마법과 연금술 분야는 서로 떼놓을 수 없었으니.
공중항모 개발에도 무수한 연금술 요소가 들어갔다.
미래의 대연금술사인 신준석도.
현 시점에서는 쌓아올린 지식과 경험이 적고, 인력도 모자라서 로마노프 가문의 성과에는 한 수 모자랐다.
그럼에도.
[스킬북]이 없어서 골렘 제작에 난항을 겪고 있었다.
생명 분야의 금술(禁術)인 키메라에 손을 댄 것도 그 이유였다.
"소피아. 공중항모는 얼마나 준비되었나?"
"니콜라이가 몰고 간 항모 빼고 3척 더 동원 가능해."
"그럼 1척을 선행시켜야겠구려."
"어디로 보내려고?"
"극동 공화국을 탈환하고 다가올 전쟁을 준비해주시구려."
"가주의 명이라면야."
"제2 마법 병단과 함께 움직여주시오. 가능하면 용의 계곡까지는 되찾고 싶군."
유진이 마경에 입장했다는 건 이미 패밀리어를 통해 확인했다.
마담과 진혈의 뱀파이어들이 하수인들을 부리는 탓에 정보 획득에 난항을 겪고 있지만.
로마노프 가문이 본격적으로 힘을 쓰기 시작하니 차단되었던 정보가 하나둘 그들의 귓가에 들어오고 있었다.
"블랙 컴퍼니와 전면전으로 비화될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본인이 워프를 열어 직접 참전하겠소."
"뭐, 가주가 직접 온다면 걱정은 안 되네."
공중항모와 제2 마법 병단.
그리고 8성의 실력자인 소피아.
[공간] 능력 활용자인 소피아는 단순 화력만 놓고 보면 드미트리와도 견줄 수 있었다.
비축해놓은 주문을 모두 사용하면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지만.
급한 상황에서는 그녀만큼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 없었다.
"잘 부탁하겠소."
드미트리는 키메라를 다시 조정하며 흐릿하게 웃었다.
*
민스크.
구 소련 시절에 만들어진 '키예프급 항공모함'이자, 로마노프 가문에 의해 두 번째 공중항모로 개조된 거대 선박이다.
또각- 또각-.
구두 굽 소리를 내며 걸어온 소피아가 민스크에 올라탔다.
"전원. 모였나?"
"예. 소피아 님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좋아. 혼낼 일 없어서 좋네."
제2 마법 병단은 로마노프 가문 소속이나, 반쯤은 소피아의 사병처럼 다루어지는 마법사들이었다.
극동 공화국에서 괴멸당하시피 한 제3 마법 병단하고는 질적으로 다른 이들.
로마노프 가문 2인자인 소피아는 가문에 들어온 실력자들을 쏙쏙 뽑아내어 직접 훈련시켜 제2 마법 병단의 수준을 극한으로 끌어 올렸다.
소피아가 한 마디 내뱉으니 마법 병단 소속 헌터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럼 출발. 극동의 원숭이들을 혼내주러 가자."
쿠아아아아앙-.
육중한 엔진 소리와 함께 공중항모의 선미에서 푸른 불꽃이 솟구쳤다.
반중력 엔진으로 선체를 띄우고.
고농도의 마력을 밀어내어 시속 300킬로미터 속도로 허공을 항해하는 거대한 쇳덩어리.
첫 번째 공중항모인 '쿠즈네초프급' 항공모함이 시속 100킬로미터가 조금 안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몇 개월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추진력이 엄청나게 상승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여기에는 한 가지 비밀이 있었는데, 쿠즈네초프급보다 '키예프 급'의 무게가 덜 나가서 속도를 내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했고.
마력 엔진도 강화되어서 훨씬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드미트리가 소피아에게 선행을 맡긴 이유이기도 했다.
"병단장님. 은신 마법을 활성화합니까?"
"됐어. 그러면 속도 떨어지잖아."
"은밀한 기동을 위해서라면...."
"우리가 가는 거 자랑하려고 가는 거야. 왜 숨겨."
드미트리의 뜻은 확고했다.
극동에서 벌어진 트러블을 빌미 삼아 로마노프 가문의 저력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것.
전장도 아닌 곳에 찾아가는 니콜라이가 비행기보다 속도도 느린 공중항모를 꾸역꾸역 이용한 이유이기도 했다.
첫 목표는 극동 공화국의 수도인 블라디보스토크.
"어? 어어?"
"항공모함이 떠 있어."
"로, 로마노프 가문이다!"
"전쟁이라도 하려고 온 건가?"
로마노프 가문이 '유감'을 표한 지 보름 정도 되었다.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리라 생각했던 시민들은 공중항모를 보자마자 혼란에 빠졌다.
-아. 아. 우리는 잠시 거쳐 가는 것뿐이니 시민들은 생업에 종사하기 바란다.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소피아의 음성.
이어서 극동 공화국 대표인 세르게이와 만남을 가졌다.
"블랙 컴퍼니에게 협조는 딱히 안 하셨더군."
"저희야 로마노프 가문에 대한 충심을 늘 지키고 있습니다."
"내가 당신들을 신뢰해도 되겠어요?"
"협조할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씀해주십시오."
고분고분한 세르게이의 태도에 소피아가 누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난 여기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당신들이 블랙 컴퍼니와 손을 잡았을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럴 리가요."
"아니면 로마노프 가문 제3 마법 병단을 괴멸시킨 후 극동 공화국을 그대로 놔두었을 리 없으니까."
소피아는 호호, 하고 낮게 웃었다.
"근데 조사해보니 딱히 블랙 컴퍼니에 협조하진 않은 것 같더라고."
"저희의 결백을 믿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아직 100% 믿는 건 아니야. 로마노프 가문에 협조하는 것을 보고 신뢰 여부를 결정하겠어."
세르게이는 한숨을 삼켰다.
여기까진.
유진이 예측한대로 풀렸다.
'정보만 흘려달라, 고 했었지.'
로마노프 가문에 협조를 하든, 어떻게 하든 간에 극동 공화국을 유지하며 정보만 흘려주면.
유진은 극동 공화국에 보복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물론.
로마노프 가문이 공중항모를 끌고 오는 등 대대적으로 나선 이상 블랙 컴퍼니가 이길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였다.
그럼에도.
만일의 하나를 대비해서 선 하나 정도는 대놓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세르게이는 미리 준비해놓은 공기계 버튼을 눌러 메시지 하나를 전송했다.
280화
봉화(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