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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5 - 240-250

240화 생태계교란

산둥반도와 백두산처럼 강력한 언데드를 제작하는 땅을 순회한 유진.

그 와중에 [메멘토]로 확인한 기연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필리핀의 작은 섬.

[내가 왜 그 자의 하수인 노릇을 해야 하는 건가.]

둠 나이트로 되살아난 일룡은 부정적인 사념을 쉬지 않고 터트렸다.

유진을 해할 수도.

그가 내린 명령을 어길 수도 없다.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기분이지만, 두 번째 삶을 얻으니 더욱 죽기가 싫어서 지시에 따라야 했다.

쩌억!

빌딩 크기의 사마귀 괴물, 맨티스가 반으로 쪼개졌다.

6성의 괴물이지만 생전 무력을 100% 가까이 낼 수 있는 둠 나이트 일룡에게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주인이 말한 것을 찾았소. 일룡.]

저 멀리서 모습을 드러낸 둠 나이트 2호.

이룡의 손에는 사람과 흡사하게 생긴 식물이 들려 있었다.

빼애애액!!!

숲을 뒤흔드는 괴성.

인간과 닮은 영물, 만드라고라의 비명은 듣는 이의 정신을 파괴하는 강력한 저주다.

불운하게도.

만드라고라를 낚아챈 둠 나이트의 강건한 정신에는 피해를 주지 못했다.

[시끄럽군요. 그냥 없애버리고 싶지만 명령이 있으니.]

[넌 그 자를 주인으로 불러도 괜찮나.]

[어쩌겠소. 자존심 세운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쉽게 납득하는군.]

일룡의 날선 말에 이룡은 푸른 안광을 살짝 누그러트렸다.

[난 2인자 자리에 익숙하오. 더 떨어진다고 하여 달라질 것도 없지.]

[원수에게 봉사한다고 해도 말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소. 또, 이 몸이 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깨우쳤다오.]

이룡은 일룡과 마찬가지로 8성의 실력자다.

그렇지만.

둘이 겨루면 10중 9는 일룡의 승리.

동일한 성위라고 해도 마력 운용 방식이나 전투 센스 등, 모든 부분에서 일룡이 자신을 앞섰다.

벽을 앞에 둔 기분.

우습게도.

죽은 뒤에야 그 벽을 넘어설 수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생겼다.

[주인이란 작자. 내 몸에 무슨 짓을 해 놓은지 모르겠지만 마력을 실을 때 한결 편해진 것 아시오?]

[흠.]

[파프너라고 했던가. 천유진의 대전사라는 자.]

[그 드래곤 말이로군.]

[원래는 용인과 흡사한 소환수였다더구려. 1년 전의 전투력은 3성 수준.]

[....]

[안 믿기겠지. 나도 그렇소. 근데 이왕 죽어버린 몸, 새로운 목표라도 정해야하지 않겠소?]

[너무 긍정적이다.]

빼액! 빽!

두 언데드가 사념을 내뱉는 와중에도 만드라고라가 시끄럽게 비명을 질렀다.

[조용히 하시오.]

손에 힘을 주자 꾸긱! 하는 비명과 함께 만드라고라는 입을 다물었다.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라오.]

이룡의 사념에 깃든 처연함.

한때 중국의 암흑가를 쥐락펴락했던 권력자들이었지만.

상대를 잘못 본 탓에 이렇게까지 쇠락하고 말았다.

어쩌겠나.

받아들이지 않으면 스스로가 미칠 것 같은데.

이룡의 현실적인 말에 일룡도 흐음- 하고는 신음을 내뱉었다.

*

일룡과 이룡이 기연을 찾아 헤매고 있을 때.

[콰루루루!]

거죽을 얻은 본 드래곤, 이름 하여 블러드 드래곤들은 백두산에서 파주를 경유하고는 남해로 향했다.

"으그그그. 좀 춥네요. 형님."

블러드 드래곤 위에 탑승한 강민호가 이를 부딪쳤다.

수백 미터 상공에서 초음속으로 이동하는 비행체에 탑승.

여객기처럼 바람을 막아줄 구조물도 없는 탓에 혹한의 추위와 정면으로 부딪쳐야 했다.

[마력을 끌어올려.]

태평한 파프너의 말에 강민영이 입술을 비죽였다.

"치, 친절한, 설명. 고, 고맙네요."

"서서서서선배. 저, 저, 저, 얼어 죽을 것, 같, 슴다."

"방어막이라도 쳐."

"지, 지, 집중이, 아, 안 되지, 말임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

촤아아악!

블러드 드래곤의 피부를 구성하는 피 일부가 솟아올라 이성민을 감쌌다.

"형! 나도!!"

"둘은 수련해라."

유진은 쯧, 하고 혀를 찼다.

바람 좀 맞는 걸로 마법도 못 사용하고 말이야.

수련을 위해 더 둘까 했는데 정말로 얼어 죽을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조치했다.

〔작은 인간 둘은 왜 가만히 두느냐?〕

'살 만 하잖아.'

무투계는 신체능력 자체가 탈인간급이다.

이성민처럼 약골이 아니니 버티다 보면 오러를 운용하겠지.

참고로 이 수련법은 파프너가 제시한 것이다.

즉.

유진도 이를 갈면서 추위에 맞서는 중이었다.

[주인. 오러로만 버티는 거 잊지 마.]

"알고 있다."

우우우웅-!

하얀 막이 전신을 코팅하듯 얕게 감싼다.

조금이라도 오러 유지에 신경을 쓰지 못하면.

한겨울의 추위가 피부를 자극했다.

[라이프 드레인] 덕에 7성 수준의 신체능력을 보유했지만.

추위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진 못하는 데다, 고통을 일부러 맞이하고 싶지도 않았다.

"형님. 근데 일본은 왜 가시는 겁니까?"

"사업확장."

남해를 빠르게 통과.

비행 방향을 남동쪽으로 틀어서 일본의 수도인 도쿄로 향했다.

[콰루루루!]

"드, 드래곤이다!"

"게이트 브레이크가 터진 건가?"

"뉴스에서 나왔잖아. 한국에서 넘어온 거라고."

"한국은 드래곤도 부리는 헌터가 있어?"

전시 효과 좋군.

유진은 킬킬거렸다.

[주인. 너무 화려한 것 아니야?]

"이 정도는 되어야 일본 정부에도 어필이 되지 않겠나."

[하여간 관심 끄는 거 참 좋아해.]

파프너는 툴툴거렸다.

"그런 거 안 좋아하거든."

과시하려는 게 아니다.

이쪽의 힘을 보여줌으로써 원하는 것을 쟁취하려는 목적이지.

[예. 예. 그러시겠죠.]

"안 믿는 눈치다?"

[제가 어느 안전이라고 대단하신 주인의 뜻에 의문을 품겠습니까.]

전혀 믿지 않는 눈치군.

유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블러드 드래곤 5구와 파프너는 공항에 착지.

기다리고 있던 정부 관계자와 바로 미팅에 들어갔다.

"방위성의 케이이치요."

"높으신 분이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은."

"일본어가 꽤 능숙하구려?"

"재주가 좀 많아서요."

회귀 한 번 해봐라.

4개 국어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러시아 말도 어설프게 할 줄 아니 5개 국어인가?

"대한민국 정부에서 홋카이도의 위협을 제거해주겠다, 라고 들었습니다만."

"그렇죠. 맨입으로 해드리는 건 아니지만요."

"어떤 식으로 홋카이도를 정벌할 생각입니까? 섬 전역이 침식된 상황이라."

"방위대신님이 우리나라 상황을 알지 모르겠네요."

유진은 헌터 협회에 요청해놓은 자료를 일본 측 관계자에게 내밀었다.

개성 인근 상황을 담아놓은 영상과 사진 자료.

몬스터들이 언데드에게 토벌되는 모습과 안전한 루트를 확보하는 과정이 담겨 있었다.

"망자를 부리다니."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재주가 좀 많습니다."

대격변이 벌어지고 나서 영토로써의 기능을 상실해버린 홋카이도.

일본 최북단에 위치해서 대응이 늦은 탓에 섬 주민을 피난시키는 게 고작이었다.

섬 안에 있는 몬스터들이 왜 걱정이냐고?

문제는 해안가에도 몬스터가 있어서 무역과 어업 등, 바다를 낀 활동에서 모두 방해가 되었다.

"홋카이도를 일본의 손에 다시 돌려주실 수 있습니까?"

"무리죠. 대신님. 침식된 땅에 사람들을 돌려보내봐야 위험해지기밖에 더하겠습니까."

"그건 그렇지요."

"바닷길의 안전은 확보해드리겠습니다."

유진은 헌터 협회를 통해 타진한 조건을 다시 한번 언급했다.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까지는 언제든지 엎어질 수 있는 부분.

홋카이도를 네크로폴리스로 만들어 태평양 진출의 교두보로 삼으려고 하는데, 일본 정부가 말을 바꾸면 곤란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지요."

"조건은 잊지 않으셨죠?"

"해상자위대의 군함들을 넘겨드리는 것, 말입니까."

방위대신은 유진의 눈을 천천히 관찰했다.

'이 젊은이는 무엇을 노리는 것일까.'

한국에서 기라성 같은 신인이 튀어나왔다는 소문이야, 진즉에 알고 있었다.

천유진.

언데드들을 부려 잃어버린 고토를 회복하고 옛 북한의 군벌들까지 토벌한 강자.

홋카이도?

땅을 넘겨주는 것도 아니고 몬스터가 나오지 못하게 '관리'만 맡긴 것이다.

그 대가로 몬스터들이 나타남과 동시에 쓸모가 없어진 해상 자위대의 군함들을 넘겨달라니.

정말로.

그 군함들을 쓸 데가 있어서 달라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노림수가 있는지를 파악하고 싶었다.

"저랑 협상하시려고요?"

유진은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방위대신이 무슨 생각을 할지는 뻔했다.

쓸모가 없어진 배를 주면서도, 무언가를 더 뜯어내려고 하겠지.

이 제안의 이면에, 자신들이 눈치 채지 못한 노림수가 있지는 않을까 고민하면서 말이다.

'그런 거 없는데.'

홋카이도를 교두보 삼아 태평양의 해양 몬스터들을 토벌해서 보다 강력한 언데드들을 확보하고.

군함들은 유령함대에 편입시킨다.

엄청난 이득 아닌가!

네크로맨서만이 계산할 수 있는 셈법.

방위대신이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야 유진의 노림수를 알 방법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리지요."

"참. 서명은 이 친구들이 할 겁니다."

"저요? 왜요?"

"이 계약. 뽀시래기 용병단의 이름 걸고 할 거니까."

형식은 어느 때든 중요한 법이다.

유진 일행은 뽀시래기 용병단 소속이니, 국가와 용병단이 계약했다는 형식으로 홋카이도 토벌에 나서는 것이다.

"중요한 부분은 형님이 다 하시지 않습니까."

"블랙 컴퍼니 이름으로 계약하면 애로사항이 좀 꽃필 거다."

용병단이 아닌, 기업으로 들어가게 되면 PMC가 아니라 기업 침식으로 비쳐질 수 있게 되거든.

일본은 그런 부분에서 예민한 나라라서 형식이 더더욱 중요했다.

"아, 알겠습니다. 형님."

강민호가 떨리는 손으로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군함들은 언제 수주하실 예정인지?"

"계약금이라고 치고. 구축함 둘만 먼저 넘겨주시죠."

방위대신과 정식으로 계약도 했겠다.

파프너와 뽀시래기 팀, 그리고 블러드 드래곤 6구는 먼저 홋카이도로 보낸 후 군함을 수령하러 나섰다.

항만에 정박해 있는 군함들.

그 중 둘을 고른 다음 멀찍이서 대기 시켜놓은 유령함대를 항구로 불러들였다.

[고스트 드레드노트 X를 제작했습니다.]

7성급 해양 언데드.

바다에서 전투를 벌이면 준 8성급 무력을 자랑하는 유령 전함을 이틀도 안 돼서 완성시켰다.

이로써 고스트 드레드노트는 총 3척.

해상자위대의 군함을 모두 유령선으로 만들면 해양 전력도 수십 배까지 늘어날 것이다.

"너희는 홋카이도로 천천히 올라와라."

[명을 따릅니다.]

유령함대를 지휘할 언데드도 만들어야겠는걸.

어디, 유명한 해적은 없으려나.

본신의 강함보다 지휘능력이 뛰어난 녀석이 있으면 좋겠는걸.

'기회가 되면 찾아봐야겠어.'

유령함대에 명령을 하달하고는 블러드 드래곤을 타고 홋카이도로 날아갔다.

[주인. 전진기지는 확보해뒀어.]

"잘했다."

파프너도 유진에게 강령술을 배운 경력자.

조승철처럼 깊게 수련하지 못해서 숙련도가 떨어졌지만.

검은 방첨탑 정도는 만들 수 있었다.

대격변 이전 홋카이도 최대의 항구 도시였던 하코다테에 자리를 펴놓은 파프너.

"1달 안에 정리하자."

일본 정부의 골칫거리로 자리매김했던 홋카이도와 인근 바다 문제가.

유진의 선포와 함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241화 변화하는 정세

홋카이도를 정리할 때 즈음.

[메멘토]로 보여준 기연을 사냥하라고 보낸 둠 나이트 1, 2호기가 돌아왔다.

"영약은?"

[만드라고라와 공청석유 50ml요.]

"잘 챙겨왔군."

침묵하는 일룡 대신 이룡이 답했다.

[그 오지에 영약이 숨겨져 있다는 건 어떻게 안 거요?]

"성좌 나리의 점지 덕분이다."

[말해주기 싫으면 차라리 침묵하시지.]

[이래서 신입은 안 돼.]

파프너가 옆에서 핀잔을 놓았다.

[저 허무맹랑한 말이 진실이란 말이오?]

[성좌가 대리인으로 고른 성자야. 네 주인에 대한 믿음을 가지렴.]

일룡은 그 말이 썩 마음에 안 들었는지 영력을 방출했다.

"타이밍이 딱 맞았네."

홋카이도 정벌도 이제 안정기에 들어섰으니.

잠시 쉬어도 괜찮으리라.

"너희들. 이리 와라."

뽀시래기 팀은 유진이 건네준 영약을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 만드라고라 아님까!"

"오냐. 마법계 헌터의 마력 양을 늘려주는 영약이지."

"어떻게 모르겠슴까. 이 귀한 걸 왜?"

"먹으라고 준 거지. 자랑하려고 너한테 내밀었겠냐."

"혀, 형님!!!"

만드라고라는 이성민의 몫.

전사계 헌터의 마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켜주는 공청석유야, 거울 사냥꾼 남매에게 돌아갔다.

"형님께서 드시지."

"그럼 만드라고라를 먹지. 왜 공청석유를 먹겠냐."

"정말로 이 귀한 걸 주셔도 되겠습니까?"

"아. 왜 그래. 형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 먹자고."

강민영이 보채자 강민호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형님."

"너희가 강해져야 더 굴리지."

"엑. 그건 좀 싫은데."

세상에 공짜가 어디에 있니.

[주인. 근데 정말로 양보해도 되겠어?]

"난 걱정 마라."

[라이프 드레인] 덕에 오버스펙을 지닌 몸이시다.

회귀 직후에는 천년설삼 같은 영약을 구해서 스펙 상승을 꾀하기도 했지만.

무수한 전장에서 다양한 괴물들의 생명력을 탈취.

능력치를 쌓은 덕에 영약을 먹어도 효과가 그렇게까지 높지는 않았다.

"내가 먹는 것보다 뽀시래기 팀이 먹는 게 효과가 더 좋아."

[주인이 효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야 알지만 이건 좀 의외네.]

파프너는 구시렁거리면서 거울 사냥꾼 남매의 뒤에 서서 폴리모프를 사용했다.

"이성민은 내가 맡을 테니. 넌 두 사람의 섭취를 도와줘."

"맡겨줘."

파프너는 남매의 등 뒤에 손을 얹었고.

유진도 이성민의 가슴팍을 가볍게 만졌다.

"형님?"

"헛소리하지 마. 남자 가슴 만지는 취향 따위 없으니까."

유진은 이를 악물었다.

"먹어라."

"옙!"

이성민은 만드라고라를 씹었고.

"너희도 어서 마셔."

"예."

"얍!"

쌍둥이도 공청석유를 반씩 나눠 마셨다.

유진과 파프너는 내부로 기운을 흘려보내 영약에 담긴 기운이 소실되지 않게끔 절묘하게 컨트롤했다.

사아아악!

"형님. 저 별이 여섯 개가 되었지 말임다?"

"어? 너도?"

"잠깐. 나도 그런데."

기운 흡수를 마친 세 사람의 눈동자가 희열에 젖어들었다.

영약에 담긴 마력을 체내에 녹여내는 과정에서 찾아온 깨달음.

뽀시래기 용병단을 운영하면서 시간 날 때마다 몬스터들을 도륙했고.

1달 동안 홋카이도라는 마경을 토벌하면서 한계 레벨에 도달했으니, 깨달음이 떠오르니 곧바로 6성에 올라섰다.

"이것도 주인의 계획대로인가?"

"당연하지."

얘들아.

조금만 더 구르자.

7성까지는 올라가야 편하게 굴릴 수 있지 않겠니.

음흉한 미소를 짓는 유진.

파프너는 그 웃음을 뽀시래기 팀이 보지 못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홋카이도 정벌 후, 유진의 행동은 좀 더 과격해졌다.

"너희 이름 좀 빌린다."

"용병단이라는 형태로 계속 활동하실 모양이십니까?"

"그래야지. 잘못 비춰지면 주권 찬탈이네 뭐네 해서 말 나오기 좋아."

태평양 너머로 향하는 길을 확보하고.

침식 때문에 버려진 동남아시아의 섬 몇 개를 토벌했다.

그 과정에서 해당 국가의 바닷길 안전을 확보해준다는 조건을 걸어두었기에.

더더욱 해양 언데드 양성에 용이한 상황이 되었다.

[생체 재구성을 사용합니다.]

생명 계통의 마법인 '생체 재구성'으로 죽은 해양 몬스터들을 엮어내고.

[애니메이트 데드를 사용합니다.]

[데스 크라켄을 제작했습니다.]

상위 언데드이자, 바다에서만 활동할 수 있는 강력한 괴물인 데스 크라켄으로 되살려냈다.

"너희는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라."

"가까이에서 형님을 더 보필하겠습니다."

"할 일은 거기가 많다."

침식된 섬들을 정리하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시간 날 때마다 일본에서 거래 대가로 넘겨준 군함들을 유령함대로 개조.

이름을 부여받은 정예 언데드들을 배에 싣고 다니다보니 전력이 수직상승했다.

그렇지만.

동남아시아에 교두보를 마련하는 데만 2달 넘게 걸렸으니, 용병단 일이 엄청나게 밀려있을 거였다.

"알겠습니다. 형님."

"형. 무사히 돌아와."

"영약 하나 더 주시면, 케켁!"

"후배야. 눈치 챙겨."

수십 척으로 늘어난 고스트 드레드노트 중 절반을 뽀시래기 팀에게 넘겨주고.

나머지 배들은 인도네시아를 경유해서 인도양으로 향했다.

태평양에 이어 인도양에도 거점을 하나씩 만든 후.

데스 크라켄들은 바다를 지키게 하고 서쪽으로 향했다.

아프리카 대륙의 동쪽.

대격변 이전에는 대해적시대의 표본이라고 알려진 소말리아에 상륙하기까지 약 4개월 정도 걸렸다.

[주인. 너무 무분별하게 세력을 넓히는 거 아니야?]

"잃어도 된다고 생각하고 일 벌리는 거다."

인간사냥꾼을 토벌할 때가 기억이 나는군.

불타는 산에 검은 방첨탑을 건설.

적을 도발하는 동시에 아군에게 버프를 주어 싸움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개성을 쉽게 탈환한 것은 절묘한 알박기의 도움도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싸워야 할 적이 있는 것처럼 말하네.]

유진은 말을 하지 않았다.

아직.

맞서 싸워야 할 진정한 적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는 게 현명했다.

〔그대의 하수인이 전의를 꺾을까 우려하는 게냐?〕

'왜 로마노프 가문과 싸워야 하는지 설명하는 것부터 문제라고 생각 안 하십니까.'

저 새끼 순 나쁜 놈이에요!

...라고 말하기는 개연성이 너무 부족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만 세력을 키우기에는 로마노프 가문에 맞설 힘을 키울 수 없었다.

회귀 전의 유진이 왜 세력 확장에 열성적이지 않았던가.

그때는 안이한 마음을 먹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세력을 펼치기가 어려운 환경이어서다.

러시아 극동 공화국과 중국.

극동 공화국은 대격변 이후 수 갈래로 쪼개진 구 러시아 소속이다.

로마노프 가문의 비호를 받진 않지만, 잘못 건드리면 7대 명가에서 최고봉에 선 가문을 자극하는 꼴이 된다.

중국은 또 어떻고?

'무왕 창 우페이가 버티고 있지.'

〔그 작은 인간은 딱히 그런 세력구도를 의식하지 않는 듯하다만.〕

'당시에는 몰랐어.'

무왕 창 우페이의 심리를 진즉에 알았더라면.

만주에서 침식이 일어난 지역을 유진이 관리하는 대신 박하늘 씨와 대련하게 해준다고 협상했을 것이다.

'어쨌든 단군할아버지의 스타팅 포인트가 썩 안 좋단 말이야.'

강대한 이웃을 맞대고 있는 건 대격변 이전이나 후나 큰 차이가 없었다.

회귀 전처럼 손가락만 빨고 있으면 마도공학을 발전시킨 로마노프 가문에게 압도당하겠지.

유진은 같은 결과를 맞이하지 않기 위해 바닷길을 열었다.

"유령선이다!"

"막아!"

대격변 이후에도 해적들의 바다 영업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현대 무기로는 해할 수 없는 헌터들이 나오면서 해적질하기가 한결 편해졌다.

장거리 항행에 참여한 헌터는 많지 않으니, 대륙에 자리를 잡은 소말리아 해적들한테는 훨씬 유리한 환경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상대가 나빴다.

[모두 잡아라.]

[너희들도 우리에게 합류해라.]

고스트 드레드노트로 원거리 포격을 하지 않고.

해적들을 충분히 유령함대와 가까운 위치까지 끌어들여서 백병전으로 옮겼다.

바다 영업에 익숙한 헌터들.

이거는 귀하거든요.

차르르릉!

유령함대에서 쏘아낸 흰색 사슬들이 소말리아 해적들의 배를 묶어버렸고.

배에 속박된 망자들은 해적들을 자비 없이 사냥했다.

"오. 이 녀석은 좀 쓸 만 하잖아."

[애니메이트 데드를 사용합니다.]

[데스 캡틴을 제작했습니다.]

생전의 무위가 6성 이상.

배를 탄 경험도 풍부해야 만들 수 있는 언데드, 데스 캡틴은 회귀 전에도 겨우 1구 만들었던 만큼 희귀한 언데드다.

[꺽, 꺽.]

"숨 쉴 필요 없으니 애써 쉬려고 하지 마라."

[나, 나는. 분명 죽었.]

"그래. 이제는 내 배의 항해사가 되어 일할 팔자가 되었다."

해병대는 자진입대를 환영한단다.

마침 너랑 어울리는 배도 있으니 더더욱 좋지 않니?

데스 캡틴으로 부활한 소말리아 해적 선장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는 으- 라는 신음을 짧게 흘렸다.

*

유진이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복잡다난했던 유럽의 정세도 급격하게 변하고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재정 러시아의 수도이자, 대격변 이후에는 로마노프 가문을 상징하는 도시에 방문자 여럿이 찾아왔다.

천으로 어깨부터 상반신을 가로지르는 고대 그리스 방식의 옷차림.

푸가를 입은 헌터 수십이 로마노프 가문의 저택으로 향했다.

"알렉산더 카리만리스. 본인의 저택에 온 것을 환영하네."

"마법왕 드미트리 안드레예비치 로마노프. 반겨주니 영광이구려."

7대 명가의 수장.

카리만리스 가문의 수장인 알렉산더가 수하들을 이끌고 직접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찾아온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갈등을 빚었던 두 가문.

그 수장이 직접 로마노프 가문의 본거지에 찾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듯.

두 가문의 우열이 결정되었다는 의미였다.

"공중항모. 참으로 재미있는 병기를 준비하셨소."

"허허. 본인의 능력이 출중한 덕 아니겠나."

"스스로의 얼굴에 금칠을 하시고. 마법왕께서는 참 에고가 남다르시군."

"능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뿐이라네."

찬바람이 쌩쌩 부는 대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럽의 패권을 두고 겨루었던 두 가문이다.

"올림포스 성단의 신왕께서는 뭐라고 하셨소?"

"과한 탄압만 아니라면 협상에 응하라고 하시더군."

"우리의 신왕께서는 자비로우시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요."

로마노프 가문은 아스가르드의 신왕, 오딘을 수호성으로 두었고.

카리만리스 가문은 제우스를 뒷배로 두고 있다.

어느 한 쪽이 완전히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면, 해당 성단의 위신마저 깎이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렇기에.

카리만리스 가문은 전세가 더 불리해지기 전에 '휴전'이라는 명목으로 이권 다툼을 종식시키려 했다.

협상 시간은 지난했지만.

전세가 기울어졌다보니 카리만리스 가문에서 많은 것을 양보해야 했다.

끼이익-.

로마노프 가문의 대외 활동을 담당하는 니콜라이가 드미트리의 곁에 다가갔다.

"가주님."

"무슨 일이지? 중요한 협상 중이거늘."

"극동에서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드미트리는 잠자코 니콜라이의 말을 듣더니 미소를 지었다.

"언데드, 그리고 강령술이라."

유진이 '신성 주문'이라고 얼렁뚱땅 넘겼던 힘의 진원지.

네크로맨시의 진면목을 파악한 니콜라이의 말에 드미트리는 호기심을 감추지 않았다.

242화 탈피

뽀시래기 용병단의 이름을 빌려 단기간에 맡은 어마어마한 토벌 임무.

유진은 각 나라에 걸쳐 있는 침식지역과 해안가의 몬스터들을 어렵지 않게 정벌했다.

섬 곳곳에는 언데드 수용 및 좌표가 되어줄 검은 방첨탑을 건설.

자연 발생하는 몬스터를 죽인 후 언데드로 되살려서 영토의 안전을 도모했고.

각 나라 정부들과 협상 재료로 받아낸 군함들은 모두 유령함대에 편입.

소말리아의 해적들을 언데드 선원으로 만들어 탑승시키니 해양 전력도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거기에.

대형 해양종의 시체들을 엮어서 만들어낸 데스 크라켄도 있으니.

서해에서 동남아시아 - 인도양, 그리고 수에즈 운하까지의 안전 루트를 확보한 것이다.

[그 바닷길은 대격변 초기에도 있었잖아.]

"정확히 말하면 가장 짧은 루트를 재개장한 거지."

언데드들이 득실득실한 바다.

블랙 컴퍼니가 허용한 선박만이 그 길을 이용할 수 있다.

시간과 재화를 모두 아낄 수 있는 루트.

이건 못 참거든요.

"빌어먹을. 우리 대표님은 참 사람을 험하게 부리는군."

미스터 블랙은 유진이 몇 개월 간 확보해놓은 바닷길을 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해앙 밀수 루트 확보?

당연히 기쁜 일이다.

미스터 블랙의 소망은 흑상을 넘어선 아시아 최대 규모 밀수 네트워크 조직.

밀수 하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대격변 이후에는 마냥 그렇지도 않았다.

한국이나 중국, 그리고 일본처럼 정부의 권한이 어느 정도 남아있는 국가는 생각만큼 많지 않았다.

필리핀처럼 다수의 섬으로 된 나라는 행정력이 닿지 않는 땅이 많았고.

옛 북한처럼 군벌이 자치를 선포하거나.

혹은 반란군이 들고 일어나서 내전 중인 나라도 많았다.

밀수는 정부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곳에도 거래의 손길을 내미는 유일한 통로였다.

"누가 들으면 봉사라도 하는 줄 알겠네요."

"흥. 필요악이라는 거다."

"사랑과 어둠, 진실을 뿌리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마담은 코웃음을 쳤다.

"당신. 조금 변했어."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은 거랍니다."

뱀파이어가 된 후로는 이따금 갈증이 솟구쳤다.

굶주림 같은 게 아니다.

흡혈귀가 됨으로써, 피를 갈구하는 본능이 불쑥불쑥 나오는 것이다.

유진이 변칙으로 그녀를 최고위 뱀파이어로 만들어주었지만.

피의 갈증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마담은 이전까지 드러내지 않았던 감정을 조금씩 방출하며 갈증을 일부 해소했다.

"흑상도 몰아낸 마당이니 천천히 하는 건 어때요?"

"그게 더 문제다. 놈들의 영역을 완전히 접수하지도 않았는데 일거리가 쏟아지니."

암상과 경쟁 관계인 흑상.

구룡방에게 선을 대고 있던 흑상은 웨이하이 시에서 구룡이 몰살당한 시점에서 패권을 상실했다.

상인들은 무력에 큰 투자를 하지 않는다.

그쪽에 쓸 돈이 있으면 물건을 하나라도 더 사서 팔겠지.

무력이라는 힘은 결국 '파괴'만을 낳을 뿐, 건설적인 능력은 아니다.

암상과 흑상 모두 호위 병력은 최소한으로만 고용하고, 나머지는 용병이나 구룡방에 맡기는 이유다.

그런데.

최근 흑상의 뒤를 봐주던 구룡방이 갈기갈기 찢겨졌고.

은하수 펍의 힘을 등에 업은 암상이 세력을 펼치니 흑상은 시장에서 영향력을 빠르게 상실했다.

"흑상을 먹어치우는 것만 해도 머리가 빠개질 것 같단 말이다."

살인적인 업무량.

은하수 펍과 마담의 조력, 그리고 정예 언데드들이 호위에 동원되었다.

그럼에도 쉽지 않았다.

흑상이 확보한 루트를 빼앗는 것도 언데드나 뱀파이어만 보낸다고 해서 모두 해결되진 않았다.

"근데 왜! 여기서!!!"

"안 할 건가요?"

"해야지. 먹고 뒤지는 한이 있어도."

미스터 블랙은 손에 힘을 꽉 쥐었다.

아슬아슬한 줄타기와 같은 상황의 연속이지만.

어느 것 하나 놓칠 순 없다.

유진의 손을 잡고 나서 쏟아지는 기회.

평생 동안 한 번이나 올까 말까 한 행운의 연속이 미스터 블랙의 근로 의욕에 불을 붙였다.

"흑상 쪽 정리. 은하수 펍에 의뢰해도 되겠나."

"당신이 원하는 만큼 깔끔하게 할 자신은 없는걸요."

"그 정도로도 충분해. 부탁하지."

아시아 전역과 아프리카, 그리고 중동에 이르는 대규모 밀수 루트.

지금부터는 미스터 블랙이 신뢰할 수 있는 상회 인원들을 대동하고 직접 발품을 팔아야 한다.

길은 누군가가 이용해야 의미가 생기는 법이다.

유진이 망자들을 활용해서 무식하게 길을 뚫어놓더라도.

그 해양 루트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미스터 블랙 같은 상인들이다.

"사람을 험하게 부리는 작자 같으니라고."

"언데드처럼 잠을 안 재우지는 않으니 그 정도로 만족하세요."

"천 대표가 그렇게 말했으면 협박처럼 들렸을 거다."

마담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참. 그러고 보니 천 대표가 부탁한 게 있었지."

"대표님이요?"

"마석 좀 구해달라던데."

"몬스터들을 그렇게 도륙내는 분이 마석을 필요로 하다니."

"그게, 좀 양이 많아."

미스터 블랙은 뺨을 일그러트렸다.

*

인도네시아의 한 섬.

소말리아에 건설한 네크로폴리스를 안정화시킨 후, 유진은 파프너를 대동한 채 동남아시아로 돌아왔다.

파프너의 등에 탄 유진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섬에 정박 중인 선박들.

해골을 그려놓은 검은 천이 바닷바람에 마구 펄럭거린다.

[나 해적선이요, 라고 아주 자랑스럽게 밝히고 있네.]

"유령선의 기원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

죽음을 거스르는 개념.

언데드의 탄생 기원에는 여러 신화나 전설들이 엮여 있다.

돌아온 망자의 이야기는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으니 말이다.

유령선도 마찬가지다.

죽은 해적들의 원혼이 배에 달라붙어 망망대해를 돌아다닌다는 소문.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소문은 이윽고살을 붙이면서 이야기로 화하고.

그 이야기가 전설이 되는 건 시간문제다.

유령선의 탄생 배경이다.

섬에 정박 중인 건 유령함대만이 아니었다.

"잘 도착했군."

암상에서 보낸 선박.

적재용 컨테이너 수천 개를 실어도 끄떡하지 않는 커다란 수송선이 해안가와 거리를 살짝 두고 있었다.

대형 언데드들은 컨테이너를 하나씩 바다에 떨어트린 후, 섬으로 이송했다.

[그런데 뭘 주문한 거야?]

"보면 안다."

해안가로 착륙한 파프너.

유진은 모래사장에 발을 디뎠다.

"컨테이너를 모두 뜯어라."

[으우우우.]

브루탈들은 통짜 쇠로 된 컨테이너를 우악스러운 손길로 찢어버렸다.

파도에도 찌그러지지 않는 적재함이 제 형태를 잃어버렸고.

그 안에 들어있던 내용물이 햇빛에 노출되었다.

[마석?]

"널 위한 거다."

구룡방 본대를 토벌한 후.

파프너에게 신경을 쓸 틈이 거의 없었다.

용기사 제인이 그녀를 알려준답시고 붙어 있었지만.

"이 칙칙한 곳에서 너무 오래 있었어."

...라는 말과 함께 구룡방 본대를 쓰러트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국으로 돌아갔다.

용군단에서 필요한 정보는 모두 습득했다는 의미겠지.

제인의 도움이 없다고 파프너가 길을 잃진 않았다.

파프너는 유진이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서 가장 빛나는 재능을 지닌 자.

또한.

꺾이지 않는 불굴의 정신까지 보유했다.

제인한테 배운 용족의 힘 운용 방법을 끊임없이 갈고 닦았고.

암흑 강기도 수족처럼 다루었다.

문제는 파프너의 성장 방법이다.

"배고프잖아. 너."

[에이. 내가 얼마나 잘 먹고 다닌다고. 식도락 있는 거 몰라?]

파프너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유진의 곁에서 동남아시아 - 인도양 - 아프리카 루트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먹을 것은 꼭 챙겼다.

죽기 전에는 맛있는 음식을 찾으러 다니는 것에 낙을 느꼈던 사람이다.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맛집 투어까지 했는데.

유진이 그렇게 말하니 아리송했다.

"그게 아니고. 네가 성장하려면 마석이 필요하잖냐."

[에이. 몬스터한테서 나온 마석은 나한테 싹 양도했잖아.]

"모자라. 그 정도로는."

시스템이 인정한 진룡족.

진정한 용족 치고는 너무나도 덩치가 작다.

[마투사] 특성 덕에 마력 수치가 높기는 해도.

용군단이 주목하는 '사룡족'이라고 하기엔, 너무 모자란 스펙이다.

"넌 여기서 먹방을 한다."

[하는 건 상관없는데. 주인이 굳이 지켜볼 필요는 없잖아.]

"먹방은 원래 관객이 필요한 법이지."

[미션이라도 걸어주게?]

"원한다면."

[마석 1천개를 한 시간 안에 먹으면 주인이 한국으로 돌아가게 해주세요.]

파프너의 장난에도 유진은 웃지 않았다.

[왜 이렇게 진지해.]

"마석을 단기간에 먹으면 반드시 문제가 생길 거다."

[급속성장을 이루어서?]

"아마도."

[나 걱정되니까 옆에서 지켜보려고 그러는 거야?]

"걱정은 무슨."

[에이. 우리 주인. 언제부터 그렇게 착한 사람이었어.]

유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가장 귀한 전력을 허무하게 잃으면 곤란하다."

[예이. 그렇겠지요.]

"헛소리하지 말고 마석이나 먹어."

[알았어. 그만 보채.]

파프너는 투덜거리면서 마석을 한 움큼 앞발로 쥐었다.

후두둑-.

쩍 벌어진 입으로 들어가는 마석들.

턱을 위 아래로 움직이니 빠그그극, 마석들이 뭉개지고는 파프너의 목구멍 아래로 내려갔다.

두근- 두근-.

마력의 정수를 받아들인 용의 심장이 바쁘게 뛰었다.

녹아내린 마력은 순식간에 흡수. 파프너의 힘이 되었다.

컨테이너 2개 분량을 모두 먹어치운 파프너가 배를 탕탕 두드렸다.

[오. 스탯이 75나 올랐어.]

"좋군."

[고마워. 주인. 이만한 양을 마련하려면 돈 좀 썼을 건데.]

"돈을 좀, 아주 많이 썼지."

[웬일로 주인답지 않게 생색을 내?]

"음. 최근에 번 돈을 모두 써버렸으니 좀 감성적이 되었나보다."

[그런 것 치고는 양이 적은 걸.]

유진은 풋, 하고 짧게 실소를 내뱉었다.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쿵! 쿵!

선박 위에서 바다로 떨어지는 컨테이너.

브루탈들은 쇳덩어리로 된 궤짝을 쉬지 않고 해안가로 옮겼다.

[설마.]

"그래. 저 배에 싣고 온 컨테이너에 마석을 꽉꽉 채워 놨다."

수천억에 해당하는 금액.

개성 공단 개발 이후에는 돈에 초연해진 유진조차 결제하기 전에 한 번 고민했을 정도의 돈이었다.

"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빨리 먹어라."

[이, 미친 주인아!]

"먹방한다고 했잖아. 벌써부터 포기하는 건가?"

[내가 진짜. 미친다. 미쳐.]

마석을 쉬지 않고 흡수하는 파프너.

컨테이너가 하나하나 비워졌지만.

하선하는 속도가 더 빨라서 줄어드는 느낌이 나진 않았다.

[아오. 물려. 조금만 쉬면 안 돼?]

"파프너 선수. 아직 멀었습니다."

[제길.]

군대에서 초코파이 사주는 느낌이구먼.

유진은 과거에 당했던 가혹행위를 떠올리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꼬박 이틀을 쉬지 않고 턱을 움직인 파프너.

마석을 하도 씹어 대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턱에 감각이 없는 느낌이다.

마침내.

섬에 도착하고 세 번째로 동이 떠오르는 순간, 마지막 컨테이너의 마석을 입에 털어넣을 수 있었다.

[안 해! 더 안 먹어!!]

"수고했다."

[마력 늘어나는 건 좋은데 이게 무슨 고생이야!]

"용기사의 조언을 그대로 들은 것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막 바로 강해지거나 하진....]

저저적- 저적-.

흑색 비늘에 생긴 기다란 균열.

파프너의 눈빛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243화 내 가호 좀 살려주라

슈아아아악!

파프너의 껍질에 금이 가는 것과 동시에.

거대한 마력 폭풍이 섬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어?"

불과 1분 전까지만 해도 맑았던 하늘이 시커멓게 물들고.

섬 곳곳에 세워놓은 검은 방첨탑이 만들어낸 안개가 강풍에 휘말리더니 소용돌이치며 위로 솟구쳤다.

용오름 치는 커다란 회오리.

평범한(?) 자연재해가 아니다.

인근의 마력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재난이었다.

〔괜찮으냐?〕

'아니. 가만히 있으면 뒤질 것 같은데요.'

유진은 파프너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맹렬하게 회전하는 소용돌이.

둘의 거리가 멀지 않은 탓에 다리에 오러를 두르지 않으면 휘말릴 것 같았다.

주문을 두르면 버틸 수는 있겠지.

신체능력도 7성, 그러니까 두 번째 벽을 넘어선 무투계 헌터와 비슷한 수준이니 저항은 가능하리라.

문제는 저 회오리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란 것이다.

'내 영력도 빨아들이고 있어.'

마력의 블랙홀이라도 된 것처럼 인근의 기운을 모조리 흡수하고 있다.

저 회오리에 말려드는 순간.

응축된 마력이 유진의 피부를 마구 헤집을 것이다.

죽진 않아도 치명상을 입겠지.

〔그대답지 않게 약한 소리를 내뱉는구나.〕

'내가 적극적으로 움직여도 문제야.'

파프너에게 찾아온 변화.

아마.

마력을 충족시킴으로써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유진이 저 마력 회오리에 간섭했다간.

자칫하면 파프너의 성취 과정에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

〔꽤 조심스럽구나.〕

'나도 경험 안 해봐서 모르니까.'

엘드리치 드래곤을 만들어본 것도 처음인데.

그 드래곤이 진정한 용족으로 거듭나기까지 했다.

용기사의 조언대로 영양(?)을 채워준 후에 발생한 변화까지 예측은 불가능했다.

'결론은 안 휘말리면 돼.'

슈아아악!

회오리에서 뻗어 나온 손 같은 형태가 막 컨테이너를 뜯은 브루탈을 낚아챘다.

6미터의 괴물.

그것도 수 톤이나 되는 대형종이 갈대처럼 좌우로 흔들리더니 오래 버티지 못하고 회오리 안으로 날아들더니.

콰득, 콰득.

각질과 뼈, 그리고 사후경직으로 굳어버린 살까지 분자 단위로 분해되었다.

어.

으으으음.

'저런 식으로 흡수한다고?'

마력만 빨아들이는 게 아니었다.

순식간에 가루로 변해버린 브루탈의 육신이 회오리 아래로 내려가서는 균열이 일어난 비늘 사이로 스며들었다.

이거.

빨려들면 진짜 뼈도 못 추리겠는데?

"브루탈들은 작업을 멈추고 모두 회오리 쪽으로 가라."

브루탈을 가루로 만들어버리고 흡수했으니.

파프너에게 찾아온 변화를 촉진시키는 행동이라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먹이를 더 줘야겠지.

밥 적게 줘서 파프너가 폭주라도 하면 정말 큰일 날 것 같다.

"유령함대는 섬에서 거리를 둬라."

브루탈은 대형종의 시체만 있으면 붕어빵처럼 찍어낼 수 있다.

고스트 드레드노트는 아니었다.

대격변 이후 현대 병기에 투자되는 예산은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다.

중국이나 로마노프 가문처럼 마도공학과 결합한 신병기라면 모를까, 현대 병기는 물리 공격에 저항력을 지닌 몬스터에게 효과를 보기 어려웠다.

기껏 만들어놓은 전함도 군축한다고 해체하는 판국.

고스트 드레드노트의 조건을 충족시킬 만한 전함을 찾기란, 갈수록 힘들어질 게 분명했다.

'이런 식으로 잃으면 허무하잖아.'

브루탈에 이어 근처에 있는 하급, 중급 언데드들도 파프너 곁으로 보냈다.

우드드드득-.

뼈와 근육이 붕괴된다.

무시무시한 마력의 소용돌이 앞에서는 그 어떤 망자도 제 형태를 유지하지 못했다.

검게 물든 하늘에서 비가 후두둑 떨어지고.

휘몰아치는 바람에 야자수 잎이 마구 뜯겨나갔다.

얼마가 지났을까.

파프너를 중심으로 몰아치던 바람이 잦아들고는.

저어어어억!

한 줌의 빛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진한 어둠이 섬 전역을 물들였다.

유일하게 빛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둠을 토해낸 파프너였다.

일식처럼 하얀 빛으로 제 모습을 드러내는 흑색 용.

신화시대에 멸종했다고 알려진 사룡족이 현대에 되살아나고는.

모자란 힘을 채워서 과거 영광된 모습을 일부나마 구현한 것이다.

[파프너의 성위가 올라갔습니다.]

시스템이 말해주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꿀꺽.

유진은 침을 삼켰다.

웅크리고 있는 파프너에게서 막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천 단위의 컨테이너에 실어온 마석을 소화했고.

섬에 분포된 마력을 모조리 삼킨 데다.

영역을 지키기 위해 배치해놓은 언데드들까지 파프너에게 빨려 들어갔다.

그 어마어마한 힘의 총량을 압축해놓은 듯 한 존재감.

데스 나이트 + 호플리테스로 강화된 애꾸눈조차 이렇게까지 흉흉한 기세를 퍼트리지는 않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변화는 덩치였다.

머리에서 꼬리까지 약 30미터.

이전과 비교하면 6배 정도 커졌다.

"파프너. 정신이 드나?"

[으음. 아니.]

"대답은 왜 하는데."

[좀 오락가락해. 취한 기분이거든.]

파프너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희열에 물들어 있었다.

비늘을 한 꺼풀 벗고.

진정한 사룡에 한 발자국 더 가까워졌다.

심장이 맥동할 때마다 어마어마한 영력이 전신을 순환했고.

기침 한 번이면 섬을 평탄화 할 수 있을 것 같은 전능감이 혼백을 뒤흔들었다.

이렇게나 막대한 힘을 단기간에 얻다니.

그 힘에 취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이해 좀 해줘. 내가 안 억누르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걱정하지 마라. 충분히 이해한다."

유진이라고 그 느낌을 왜 모를까.

회귀 전.

아홉 번째 성위를 완성했을 때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세계의 섭리와 이치를 받아들이고.

나아가서는 필멸의 굴레에서 벗어나 저 하늘 위 별에 이름을 새긴 위대한 존재와 가까워지는 게 9성이다.

적절한 업만 쌓으면.

과거 전설 시대의 영웅들이 그리하였듯.

뭇 별 위에 성좌로써의 업적을 새겨서 위대한 존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도 있는 게 시스템이 인정한 '왕'이다.

마법왕이나 무왕.

혹은.

불사왕 같은 호칭을 시스템이 괜히 부여하는 게 아니다.

필멸자로서 만신전에 입성할 수 있다는 증명패인 셈.

"넌 힘에 적응해라. 멀리서 관찰하지."

[미안해. 주인. 이해해줘.]

유진은 차분하게 상태창을 켰다.

[파프너]

종족 : 사룡(진룡족)

등급 : ★★★★★★★★

▷능력치

힘 : 23,250

민첩 : 20,235

체력 : 22,847

맷집 : 23,004

마력 : 62,459

▷특성

마투사(고유) / 무신의 눈(S) / 진룡(S) / 원시의 계승자(S) / 마법의 종주(S) / 용왕의 후예(S) / 드래곤 스케일(S) / ....

"헐."

어마어마하게 늘어난 특성.

도대체.

S급만 몇 개가 생긴 거니.

'무신의 눈은 원래부터 있던 거고. 진룡도 용의 정수를 흡수하면서 생겼다만.'

두 특성은 그렇다 치자.

원시 마법의 마력 절감 및 파괴력을 증대시켜주는 원시의 계승자.

마력을 완벽하게 제어하게 해주는 마법의 종주.

그 외에도 어마어마한 특성이 추가되어서 진짜 용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믿는 게 아니라 실제로 드래곤이 맞느니라.〕

'아. 묘하게 현실감이 없네.'

마석 좀 먹였다고.

변칙으로 만든 최강의 전력인 애꾸눈보다도 단번에 스펙이 올라갈 줄이야.

물론.

애꾸눈과 정면으로 싸울 경우에는 승률이 100%라고 자신할 순 없었다.

파프너의 약점은 빈약한 스킬.

본 드래곤들에 비하면 화려하지만.

용인의 시체를 기반 삼아 만들어진 덕에 생긴 A급 무투술, 케넥 전투술 말고는 주력기가 딱히 없었다.

원시 마법의 위력이 대단하긴 해도.

실전되었던 고대 주문을 파프너가 복원 중인만큼 활용도가 제한적이고.

반면에 애꾸눈은 생전의 기예를 대부분 보유하고 있다.

검과 마법을 모두 다룰 줄 아는 데스 나이트.

마법 중 일부는 암흑 마법으로 대체되었지만, 무투계 스킬은 동일하게 보유하고 있었다.

'스펙은 대단해도 그걸 제대로 살리는 건 또 다르니까.'

아.

한 가지 전제를 더 붙여야겠네.

파프너가 공중전을 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하늘을 날며 일방적으로 딜을 넣으면 애꾸눈이 아니라 애꾸눈 할아버지가 와도 이길 방법이 없었다.

쉽게 패배하지도 않겠지만.

〔그대에게는 참으로 잘 된 일이로구나.〕

아시아 - 아프리카 루트를 확보하며 본격적으로 세력 확장에 나선 블랙 컴퍼니.

이렇게까지 대놓고 움직였으니, 로마노프 가문도 유진을 다시 한번 인식할 것이 분명했다.

크로노스의 말에 담긴 뜻을 이해한 유진이 빙그레 웃었다.

'아직 한참 모자라.'

〔오랫동안 패권을 잡은 가문이니. 그대는 사상누각 같은 입장이지 않느냐.〕

'그것도 그건데. 중요한 게 해결이 안 되었잖아.'

〔또 무엇이 중요하기에.〕

'성좌 나리의 활약상이죠. 뭐긴.'

유진은 먹구름 사이를 뚫고 내려온 한줄기 햇살을 보며 생각했다.

*

회귀 전.

로마노프 가문에게 패배를 당한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일까.

세력이 부족해서?

아니다.

로마노프 가문에서 주력을 이끌고 한반도에 침공했지만.

정예 헌터들을 극동에 장기간 파견할 순 없었다.

로마노프 가문은 넓은 세력을 유지하는 만큼, 적도 많았다.

7대 명가는 경쟁관계.

세력을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헌터들을 놔둬야 했으니, 한반도 공략에 투입된 인원은 전력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하면 더 위험한 것 아니겠느냐.〕

'반대로 생각해야지. 로마노프 가문은 전력을 동원할 수 없다고.'

그럼 할 만 했다.

유진은 아직 성위가 모자라지만.

회귀 전과 비교했을 때 전력 자체는 상당부분 따라잡았다.

본 드래곤도 빠르게 모은 덕에 개체수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고.

8성급 전력은 파프너를 포함해서 넷이요.

이신우와 송명석 같은 언데드는 강화만 하면 곧바로 8성에 오를 수 있다.

해양 언데드는 오히려 전생보다 훨씬 강력했다.

각 국가에서 받아낸 전함을 고스트 드레드노트로 제작한 덕에 수십 대를 확보했고.

데스 크라켄까지 해양 전력에 충원되면서 회귀 전을 아득히 상회했다.

'전에도 말했잖아. 내가 결정적으로 패배한 이유.'

〔아우라로구나.〕

'그래. 화신이 됨으로써 부여받는 강력한 이능, 아우라 때문이다.'

성좌의 가호를 최대로 받았을 때.

그 헌터는 '화신'으로 임명되어 성좌와 모든 것을 공유하고.

나아가서는 어떤 공격도 90%까지 상쇄할 수 있는 무적의 능력인 '아우라'를 부여받는다.

그걸 해할 수 있는 건 오직 다른 성좌의 가호 뿐.

'우리 성좌 나리. 최근에 일을 너무 안 했지?'

〔...교세를 확장한다고 열심히 고생한 건 기억도 나지 않는 게냐?〕

'나 좋자고 한 건가. 성좌 나리를 위해 한 거잖아.'

그러니까.

가호 좀 살려주시죠.

파프너까지 8성에 도달했으니, 이제는 가호 Lv 2를 내려받을 때다.

〔왜 하필 지금인게냐?〕

'나 혼자서는 마법왕을 막을 수 없어.'

9성에 오르더라도.

룬 마법에 능통한 드미트리는 상성에서 유진을 앞섰다.

한데.

원시 마법이라는 카운터 능력을 지닌 파프너가 합류하면?

〔그대의 대전사에게도 가호를 내려주란 의미로구나.〕

'어. 그러니까 지금 말하는 거야.'

파프너의 배후성이 되어.

유진과 파프너, 둘에게 강화된 가호를 내려줘야 한다는 의미.

크로노스는 유진의 주문에 신음을 흘렸다.

244화 산처럼 쌓인

성좌의 가호.

회귀 전, 유진이 로마노프 가문에게 패배한 결정적인 요소다.

'X나게 억울했다고. 일방적으로 쳐 맞았단 말이다.'

9성에 도달함으로써 펼칠 수 있는 궁극의 능력.

초월기조차 거의 먹히지 않았다.

유, 무형을 따지지 않고 모든 간섭을 90% 경감시켜주는 사기적인 힘.

아우라를 뚫어내야 마법왕을 쓰러트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생긴다.

〔그대답지 않구나.〕

'뭐가요?

〔가능성만 운운하는 것이, 마치 자신 없는 태도로 보여서 말이니라.〕

'자신 없지.'

기습공격으로 네크로폴리스가 마비되지 않았다면.

마법왕의 아우라가 없었다면.

이길 수 있었을까?

유진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었다.

'마법왕은 강해. 아우라를 빼고 붙어도 1대1이라면 내 승률이 3할 정도였을 거다.'

〔호오.〕

'박하늘 씨도 발이 묶였었고.'

로마노프 가문의 2인자, 소피아를 위시한 마법 병단.

당시 소피아의 성위는 8성이었고.

박하늘 씨는 둠 나이트조차 초월하여 아홉 번째 성위를 완성시킨 존재, 헬 나이트였다.

통상적으로는 상대가 안 되겠지.

그렇지만.

소피아는 말 그대로 돈지랄을 해서 간극을 메웠다.

바티칸 표 신성 주문들을 수십 조 단위로 구매.

[공간] 특성으로 비축해놓고는 박하늘 씨 한 명에게 모든 화력을 퍼부었다.

〔9성이라 함은 초월의 영역에 발을 디딘 존재일진대. 고작 그런 잡스러운 행위에 고전한 게냐?〕

'드미트리의 마법도 비축해두었거든.'

바티칸과 마법왕의 콜라보레이션.

퇴마 안 되고 무슨 수로 버티겠어.

'아우라 때문에 박하늘 씨가 합류했어도 달라질 건 없었겠지만 말이야.'

〔하면 왜 그 당시의 일을 언급하느뇨.〕

'마법왕만 적이 아니란 말이야.'

마법왕은 유진과 파프너가 묶고.

남은 로마노프 가문 소속 헌터들은 정예 언데드들이 맡아줘야 한다.

유진이 생각하는 최상의 상황이다.

'그걸 위해서는 다음 레벨의 가호가 필요해.'

〔돌고 돌아 가호 타령이로구나.〕

'안 하게 생겼습니까. 내가.'

역천의 가호는 뛰어나다.

제 위력을 내기 위해 충족해야 하는 조건이 많고.

응용하기가 굉장히 어렵지만.

까다로운 만큼 능력 하나는 기가 막히게 강력했다.

'마법왕은 오딘의 가호를 최대까지 끌어낸 상대다. 우리도 그에 준하는 능력을 갖춰야지.'

〔그대의 대전사를 포함하여 말이더냐.〕

'어. 나 혼자는 못 이겨.'

유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크하하핫. 그대가 부족함을 인정하다니. 참으로 진귀한 장면이로구나.〕

'누울 데랑 안 누울 데는 구분하면서 살거든요?'

〔하나 그대가 놓친 진실이 있느니라.〕

크로노스는 한껏 거드름을 피웠다.

〔그대. 어이하여 대적의 기준을 회귀 전으로 잡고 있느냐?〕

'...?'

〔회귀 전에 그대가 목도했던 대적의 무력은 수십 년 동안 쌓아올린 능력의 결정체일 터.〕

'아. 그야....'

〔묻자꾸나. 계약자가 현재의 세력을 구가하기까지 회귀 전에 얼마나 걸렸느냐.〕

'15년.'

〔그대는 이미 15년이라는 시간을 앞선 것이니라.〕

'알고 있어. 그래도 의식이 될 수밖에 없잖아.'

유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짐의 계약자라면 더 당당하게 가슴을 피도록 하여라. 과거의 그림자에 삼켜지지 말고.〕

'...좋은 충고. 고맙다.'

크로노스의 일침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지.'

〔대전사의 배후성으로 임하는 것은 될 것 같으니라.〕

'가호 2레벨은 무리인가?'

〔최근에 힘을 꽤 많이 소모하지 않았느뇨. 조금 시간이 필요하니라.〕

교세 확장에 힘을 쓴 게 컸다.

유진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어쩔 수 없지. 해야 하는 투자였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니라. 혹, 원하는 능력이라도 있느냐?〕

'이제는 사용자 의견도 듣는 건가.'

〔짐이 주관하는 성질과 업을 반영해야하나, 최대한 반영을 해보려 하느니라.〕

'음. 당장은 뭐가 딱히 안 떠오르는데.'

〔그리하면 짐의 재량으로 할 터이니, 불만을 토하는 일은 없도록 하여라.〕

'알겠어.'

하여간.

까다로운 양반 같으니라고.

가호에 대해 구상을 나눈 후, 파프너에게도 크로노스의 가호를 내려주었다.

[역천? 말도 안 되는 가호잖아.]

"성좌 나리께서 특별히 신경 써서 만든 가호라더라."

[공격을 흡수해서 내 마음대로 방출할 수 있다니. 모든 능력의 천적인 것 같은데.]

"실전에서는 그렇게까지 만능의 능력은 아니더라고."

타인의 기운을 온전히 흡수하려면 그만큼 출혈을 감수해야 한다.

유진도 본 아머로 방어력을 강화하거나 적의 공격을 상쇄하며 그 힘을 빨아들여 재구성했다.

그러다 보니 몸에 상당한 부하를 감수해야 했다.

[나는 몸이 단단하잖아.]

"아."

8성의 드래곤을 두고 뭘 걱정한 거니. 대체.

사실 〔역천의 가호〕는 자신이 아니라 파프너에게 더 궁합이 잘 맞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파프너야. 몸은 좀 괜찮냐."

[솔직히 아직 적응은 안 됐어.]

강한 힘에는 강한 책임, 아니. 제어 능력이 필요한 법.

마석들을 흡수해서 급속 성장을 이룩한 건 파프너가 품고 있는 사룡의 모습이 반영된 결과물이다.

쉽게 풀어서 말하면 영양실조 걸린 사람한테 링거 꽂고 밥도 산더미처럼 퍼준 셈이지.

문제는 건강을 회복해도, 파프너의 기준점은 이전에 맞춰져 있어서 힘을 컨트롤하기가 어려웠다.

[아기 코끼리한테 족쇄를 채워놓으면 어른이 되어서도 못 푼대잖아.]

"덩치가 커진 걸 보면 코끼리도 틀린 말은 아니네."

[좀 그렇다. 말이.]

"뭐가?"

[숙녀한테 못하는 말이 없어.]

숙녀.

하.

정말이지, 유진은 몇 번이고 그 단어를 곱씹었지만 적응이 되지 않았다.

'과묵했던 박하늘 씨가 그립습니다.'

속으로 투덜거리고는 파프너를 타고 한국으로 향했다.

*

오래간만에 밟는 개성의 대지.

유진이 점령지들을 둘러보고 올 때쯤에는 뜨거운 여름을 지나 단풍잎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제 2년이 지났구나.'

〔시간이란 참으로 쏜살 같아서 인지하지 않으면 금세 지나가곤 하지.〕

'수천 년 동안 산 티탄 신왕께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크하하핫. 짐이 주관하는 성질을 잊지 말아라.〕

아.

그렇지.

크로노스는 본래 농경과 시간의 신이었다.

이젠 '죽음'을 수확하는 의미로 변질되었지만, 본래 크로노스가 들고 있던 낫은 곡식을 자르는 용도요.

반복되는 시간의 흐름은 곡식이 나고 자라는 것만이 아닌, 모든 필멸자의 생로병사에도 관여하는 개념이다.

감상에 젖는 것은 여기까지.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임 이사. 좀 수척해졌네."

"하하하. 일이 좀 많아서 그렇습니다."

뜨끔.

전에는 그런 말을 해도 '괜찮다'라며 힘든 티를 내지 않았던 양반이었다.

인사말에 진심을 담아 공격하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오셨어요. 대표님."

"아. 임 이사 동생."

"직원을 더 뽑아야 해요. 아니면 저희 형제가 과로사할 것 같아요."

매번 은인이라고 추켜세우던 친구조차.

유진을 보자마자 일거리가 많다며 독설을 쏟아냈다.

〔살고자 하는 비명이니라.〕

'누가 보면 무보수로 노예 부리는 줄 알겠어.'

〔보수는 있되, 사실상 노예 신세 아니더냐.〕

'거 말씀이 심하시네.'

무인도에서 노예로 지내던 임재백 씨를 구해준 게 누구인데?

저 양반.

원래는 동생의 죽음으로 완전히 흑화해서 범죄자에게 사적 제재를 가하는 무법자가 된다고.

블랙 컴퍼니 운영을 맡길 만한 사람을 찾던 유진은 회귀 전의 기억을 되살려서 임재백과 동생을 구출했었다.

'그것도 슬슬 약발이 떨어지는 것 같네.'

임재백 형제가 유진의 품을 떠나려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전과 같이 마구 부려먹을 수 있는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블랙 컴퍼니가 어마어마하게 확장하고, 유진이 물어오는 일거리에 지친 모습이 역력했으니.

"알았어. 사람 좀 더 뽑자."

"자잘한 업무에 동원할 사람들은 이미 여럿 뽑았습니다만."

"주요 업무를 책임질 중간관리직이 턱없이 모자라요."

"임 이사가 뽑아도 되는데."

"제가 그런 부분까지 결정하기는 좀 그렇지 않습니까."

"다 일임했잖아. 책임지라고 안 할게."

임재백은 하아- 긴 한숨을 내뱉었다.

"다음부터는 그렇게 하겠습니다만, 이번에는 참관해주십쇼."

음.

아무래도 튀기는 틀렸군.

유진은 사장실에 앉아서 결재 및 인사현황을 살펴야 했다.

블랙 컴퍼니 본사 쪽 업무만 밀렸으면 좋았을 텐데.

"형니이이이임!!!"

벌컥-.

사장실에 들이닥친 강민호가 일거리를 한아름 더 안겨주었다.

"말레이시아에서 추가 요청을 했습니다."

"그쪽은 파프너 보냈어."

"인도네시아는 어떻게 할까요?"

"잠깐. 그쪽은 조승철을 보내야 하나."

"일본에서...."

"잠깐. 한 번에 하나씩만 말해라. 조오오옴!!!"

동아시아 - 동남아시아 - 인도양 - 아프리카에 이르는 거대한 무역 네트워크.

군함을 뜯어낼 겸, 중간거점을 마련하려고 벌린 일의 스케일이 너무나도 커져버렸다.

정부의 영향력이 증발해버린 섬들 위주로 노렸으면 모르겠지만.

군함들을 양도받는 대가로 무역 네트워크의 축이 되는 루트를 다수 확보했으니.

각 나라에서 유진에게 추가 의뢰가 들어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크하하하하. 모두 그대의 업보 아니더냐.〕

'난 그저 적당히 벌고 놀고 싶은 것뿐인데. 왜! 어째서!'

야근 싫어요.

뽀시래기 용병단의 이름으로 진행한 계약.

추가 요청사항도 강민호에게 들어왔다.

외국의 몬스터 토벌은 일본 외에 관여한 적이 없다 보니 제대로 된 답변을 해줄 수 없었는데.

그 타이밍에 유진이 귀국했다.

강민호는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형님."

"아. 또 왜애애애애애."

"불사조 길드에서 용의 계곡 이용 관련해서 문의한다던데요."

"그건 알아서 하라고 해."

극동 공화국의 서부 치안을 관리해주는 대신 획득한 용의 계곡 입장 권한.

불사조 길드에서는 길드원들의 단련을 위해 용의 계곡에 들어가려고 했다.

"미선 씨가 기뻐하겠네요."

"...미선 씨?"

"곧 6성에 오를 것 같더라고요. 엄청 경쟁심을 불태우는 게 좀 무섭습니다."

"꽤나 자세히 알고 있다???"

"아. 저희랑 호흡을 같이 맞춰서 수련하다 보니 친해졌습니다."

흐으으으으으으으음.

수상한데.

유진의 눈매 위로 묘한 빛이 아른거렸다.

불사조에서 키운 인재.

차기 검성으로 불린 장미선은 어느새 뽀시래기 팀한테 추월당했다.

영약의 도움이 컸다지만.

자존심이 엄청 상해서 하루도 수련을 빼놓지 않는 중이었다.

밀린 서류 작업과 블랙 컴퍼니 운영에서 굵직한 안건들을 처리할 때 즈음.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누구신데?"

"그... 무왕이십니다."

무왕 창 우페이가 단신으로 개성에 넘어왔다.

전에도 그랬듯.

무복 하나만 달랑 입은 채.

"이제는 슬슬 약속을 이행할 때가 되지 않았나?"

중년의 사내가 기대감을 숨기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하.

그래요.

당신도 있었지.

"좋습니다. 한 번 붙어보시죠."

유진은 창 우페이의 덕에 결재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245화 9성의 힘(1)

개마고원.

한반도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고원이며, 대격변 이후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불모지다.

별명은 한반도의 시베리아.

싸늘한 공기가 유진의 피부를 훑고 지나간다.

"진짜 춥네."

가을인데도 한겨울처럼 온도가 낮다.

유진이 7성 무투계 헌터급의 스펙이라서 담담하게 말하는 거지.

비각성자였으면 양팔을 끌어안은 채 벌벌 떨고 있을 것이다.

"괜찮은 장소로군."

창 우페이는 느긋한 투로 고원을 훑어보았다.

"힘을 크게 조절할 필요 없겠어."

"조금은 참아주시죠. 개마고원을 모두 날려버릴 생각이 아니라면."

"그건 자네 하기 나름대로 아니겠나."

9성 무투계의 전력이라.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회귀 전 박하늘 씨의 무위도 엄청났는데 말이야.

〔그러고 보니 그대는 이미 무투의 극한에 도달한 하수인을 부리지 않았느냐.〕

'가호 빼고 붙어도 창 우페이한테는 안 됐을 거다.'

초월의 영역.

필멸자가 위대한 영역에 발을 딛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

불완전함을 버리고 온전한 모습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문제는 '언데드'라는 종 자체가 온전함과 거리가 매우 멀다는 사실.

'온전한 9성이라고 할 수 없었지.'

둠 나이트나 아크 리치로는 9성에 도달할 수 없다.

지고한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선.

불완전성을 버려야 하는데, 언데드는 태생부터가 섭리를 거스르는 존재이니 아홉 번째 별을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그대의 대전사는 전생에 그 위업을 해냈다 하지 않았느냐.〕

'박하늘 씨가 특별한 거니까.'

[흑암의 반지]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언데드 타입.

헬 나이트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는 유진도 해명하지 못했다.

만약.

그 비법을 밝힐 수 있었다면.

언데드 전력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겠지.

〔기적과도 같은 일이란 말이구나.〕

'뭐, 근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

〔호오.〕

'해답은 성좌 나리에게 있다.'

〔회귀 전의 짐도 그대와 연을 가졌더냐?〕

'아. 그런 의미가 아니야. 성좌 나리가 주관하는 개념을 말하는 거다.'

죽음을 거스르는 개념.

분명 존재하되.

그 어떤 성좌들도 주관하지 못했던 개념이다.

'박하늘 씨는 본인의 노력과 재능만으로 그 개념에 다다른 것이다.'

〔성좌가 되었다?〕

'그 자격을 얻었다, 라고 봐야지.'

필멸자가 성좌로 나아가려면 아홉 번째 별을 가져야 한다.

이 경우는 반대라고 해야겠지.

주관하지 않는 개념에 닿은 덕에 성좌까진 아니어도 초월의 가능성을 얻었고.

그 덕분에 9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가정이다.

'확실하진 않아. 어디까지나 가정이다.'

〔근거는?〕

'성좌 나리지.'

죽음을 거스르는 개념이 실존하며.

그 성질을 주관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크로노스라는 이형의 성좌 덕분에.

신대에는 신왕으로 군림하였으며.

추수와 시간을 주관하여 죽음과도 맞닿아있는 성좌.

제우스가 왕위를 계승한 이후로는 모든 능력을 잃었으나.

크로노스에게 남아있는 격의 흔적과 이전에 커졌던 신왕으로서의 그릇이 사라지지는 않았으니.

어느 성좌도 손에 넣지 못했던 이질적인 개념을 주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창 우페이를 앞두고 이 이야기를 하는 저의가 무엇인가, 하면.

'무왕도 마찬가지다.'

〔호오. 꽤 흥미로운 이야기로구나.〕

'9성에 오르긴 했어도 불완전해. 본인도 그걸 알고 있고.'

과거 초월의 경지에 발을 디뎠던 유진은 창 우페이가 지닌 불완전성을 느낄 수 있었다.

회귀 전에 본 창 우페이는 이렇게까지 투쟁에 목말라 하진 않았다.

물론 강함에 대한 집착은 예나 지금이나 같지만.

이 시간대의 창 우페이는 무언가에 조급해 있고, 또한 갈망했다.

〔그게 무엇인지도 아느냐?〕

'내가 그 문제를 알면 무투계 했지.'

해결방법은 몰라도.

도와줄 순 있지 않겠는가.

[떨리는걸.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왕과의 대련이라니.]

[쿠훅. 강하다. 소름 끼치게.]

[....]

[무왕. 다시 보니 반갑습니다.]

[이번에야말로 빚을 갚겠습니다.]

8성 언데드 넷과 송명석은 창 우페이를 마주하며 기운을 끌어 올렸다.

고원의 온도가 10도는 더 떨어진 것 같다.

얼어 뒤지겠네.

"일룡과 이룡, 오우거, 그리고 드래곤이라."

"저도 가만히 있진 않을 것이니 심심하진 않을 겁니다."

"기대되는군."

비웃음이 아니다.

정말로.

창 우페이는 유진과의 대련을 기대하고 있었다.

8성 넷에 7성 한 명을 동시에 상대할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힘 조절은 하겠지만.

시스템이 인정한 '왕'이 된 후로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짜릿한 경험이 되리라.

"그럼 시작하지."

"좋습니다."

창 우페이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의지를 벼려내는 자신만의 의식.

아홉 번째 성위를 완성시킨 초월자는 생각과 의지만으로 세계의 규칙을 비틀어낸다.

[심검]

의념으로 만든 검이 상대의 혼백을 찌른다.

어떤 보검도.

뛰어난 방어구로도.

창 우페이의 심상을 비추어 만든 마음의 검을 막을 순 없다.

피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오직.

자신의 의념을 굳건하게 다지고 영력을 끌어올려 무왕의 심상을 버텨내고 해소하는 것이 유일한 대처법이었다.

[오오. 사념을 이런 식으로도 쓰는구나.]

사룡이 되면서 [드래곤 피어]를 쓸 수 있게 된 파프너는 심검을 어렵지 않게 받아냈고.

[쿠후후훅.]

애꾸눈은 호플리테스의 능력으로 혼백을 강화.

영혼에 직접 간섭하는 심검을 버텨냈다.

언데드이며 신성한 힘을 지닌 하이브리드 괴물이라 가능한 대응 방법이었다.

일룡과 이룡은 사정이 조금 안 좋았다.

가까스로 혼백이 상하는 것을 버텨냈지만.

그 충격이 워낙 커서 팔과 다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

[이, 이 힘. 역시.]

마지막으로.

언데드 중 유일하게 7성인 송명석은 미동도 없었다.

버틴 건 아니었고.

서서 기절한 것이었다.

무왕의 심검은 한낱(?) 7성이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강대했다.

"멀쩡하군. 자네는."

누구? 저요?

에이. 회귀 전에는 9성에 도달했던 몸인데 심검 정도는 버텨줘야죠.

'그래도 참 사기적이야. 심검은.'

성위가 낮은 상대로는 확실하게 이점을 가져가는 심검.

마음먹기만 해도 혼백에 상처를 주어 움직임을 제한하거나 송명석처럼 서서 기절하기까지 하니.

높은 성위에 도달할수록.

단계가 낮은 헌터와의 싸움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건 심검 같은 능력 덕분이다.

'이 천금 같은 기회를 그냥 날려버릴 순 없지.'

[부정한 축복을 사용합니다.]

송명석의 몸에 깃든 성력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혼백을 일깨웠다.

[컥.]

"정신 차렸냐."

[주군. 방금 전은 대체.]

"심검이다."

[불찰입니다. 적을 앞에 두고 정신을 잃다니.]

"앞으로 잘해."

송명석은 무왕과 동일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다른 8성 언데드에 비해 전투력이 한참 모자람에도.

녀석을 이번 대련에 끼워 넣은 이유다.

'뭐 하나라도 깨달으면 높은 성위에 도달할 실마리를 잡을 수 있겠지.'

파프너는 괜찮다.

생전에 이미 6성에 도달했었고.

용의 정수를 흡수하고 본질을 깨우치면서 7성을.

최근에는 사룡에 깃든 힘, 그러니까 본질을 자극해서 8성에 도달했다.

아홉 번째 별을 완성시킬 방법은 나름대로 고안해두었고.

송명석은 별개다.

회귀 전 역사에서 8성에 도달했던 인물이니 재능은 확실한데.

무엇이 계기가 될 줄은 알 수 없다.

'같은 특성 보유자가 무왕이니. 싸우다 보면 느낌이 오겠지.'

창 우페이의 입가가 부드러워졌다.

"심검을 모두 받아낼 줄은 몰랐다."

"이게 끝입니까?"

"시작이지."

창 우페이의 무복이 펄럭인다.

미증유의 기세가 휘몰아치면서 일대의 공기가 파르르 떨렸다.

"그럼 가겠네."

[산왕보]

무왕이 발을 딛는 순간.

태산 같은 기세가 발출되며 유진 일행을 압박했다.

*

빠르지 않은 속도.

두 눈으로 쫓을 수 있을 정도의 움직임이다.

그렇지만.

무왕의 움직임을 눈에 담아두고 있는데도.

대응할 수가 없다.

산왕보는 대지에 마력을 흘려보내 기세로 적을 제압하는 기예.

심검과 차이가 뭐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직접 마력을 방출해서 간섭하는 것이니 물리력이 있다.

[공허의 숨결]

콰아아아!!

파프너의 입에서 뻗어 나온 검은 광채가 무왕을 삼켰다.

모든 것을 압제하는 파괴의 숨결.

사룡의 정수가 담긴 궁극의 힘은 닿는 것을 모두 가루로 만들었다.

[태산권]

심연 한가운데서 피어 오른 황금빛.

이윽고 그 빛은 어둠을 반으로 가르며 파프너에게 향했다.

[블링크]

금색 빛이 도달하기 직전.

30미터 크기의 용이 자취를 감추더니 하늘 위에서 나타났다.

"과연. 마법을 다루는 솜씨가 수준급이야."

[칭찬해줘서 고맙네요.]

파프너는 자존심이 상했다.

다른 기술도 아니고.

브레스가 막혔다.

무왕의 산왕보가 더 일행에게 간섭하지 못하도록.

브레스를 집중해서 쏘기보다 넓게 퍼트려서 마력의 압박을 지워냈다.

[그래도 그렇지. 주먹 한 방에 깨질 정도는 아닌데.]

브레스는 용족이 지닌 비장의 무기.

어떤 마법도 브레스에는 한 수 접어줘야 한다.

견제를 막으려고 넓게 퍼트렸다지만.

주먹 한 방으로 파프너의 기예를 무너트렸으니.

기분이 좋으면 거짓말이리라.

[블랙 플레어]

물리력을 지닌 시커먼 화염이 무왕의 전신을 휘감는다.

애꾸눈은 파프너의 개입으로 구속력이 약해진 틈을 타 마법을 사용.

천천히 움직이던 무왕을 화염으로 감쌀 수 있었디.

[쿠훅. 이대로 타버려라.]

[호신강기]

창 우페이를 감싸고 있는 금색 막이 수 미터로 퍼지더니 시커먼 화염을 밀어냈다.

순식간에 확장했던 호신강기가 다시 축소되어 무왕을 감싼다.

자유자재로 호신강기를 다루는 능력.

신성 주문으로 심검의 피해를 떨쳐낸 일룡과 이룡도 한 발 늦게 영력을 방출했다.

[기탄]

[길로틴 어택]

퍼퍼퍼펑!

호신강기 근처로 다가간 기의 방울이 폭발하고.

사슬로 연결한 도끼 중 한 자루가 수직으로 떨어진다.

브레스에 기탄, 그리고 도끼 투척.

어느 것 하나 모자람이 없는 기예들이다.

우리나라 헌터 중에는 이만한 공격이 한 번에 쇄도할 때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정도면 인사는 다 받아준 것 같군."

[파랑각]

무왕의 발이 움직였다, 라는 인식이 드는 순간.

조금 뒤에서 싸움을 관망하던 유진의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뭐... 지?'

한 발 늦게.

방금 전에 느낀 감각이 '죽음'을 마주했을 때의 경고라는 사실을 깨우쳤을 땐.

무왕의 발에서 솟구친 금색 빛이 도끼를 쳐내며 애꾸눈을 노리고 있었다.

애꾸눈은 신성 주문으로 갑주를 강화하는 동시에 방어 마법을 여럿 전개, 암흑 강기까지 끌어 올렸다.

찰나의 순간에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콰아아아악!

지면 일부가 평탄화 작업을 한 것처럼 깔끔해졌고.

금빛이 훑고 지나간 산이 반으로 잘렸다.

그래.

발길질 한 번으로 수백 미터 높이의 산이 비스듬히 잘려서 옆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애꾸눈은 죽지 않았다.

대신 베어진 산에 박힌 채, 몸을 천천히 일으키는 중이었다.

"허 참."

이게 적당히라니.

유진은 실소를 내뱉었다.

246화 9성의 힘(2)

산이 무너진다.

대각선으로 잘려나간 봉우리가 아래로 스르륵, 미끄러지면서 뿌리를 깊게 내린 나무가 쏟아지고.

바위와 토사가 아래로 내려오면서 흙먼지가 마구 흩뿌려졌다.

[쿠후후훅.]

오러 블레이드의 잔향을 떨쳐내며 몸을 일으키던 애꾸눈이 흙더미에 묻혀버렸다.

'소환은 아껴두자.'

호플리테스 소환과 역소환권을 쓰기는 아깝다.

좀 더 결정적인 순간에.

무왕에게 한 방 먹여줄 타이밍이 오지 않을까 생각하며 애꾸눈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저 정도는 알아서 나오겠지.

[주인. 괜찮겠어?]

"난 신경 쓰지 마라."

[알았어.]

창 우페이가 유진을 쓰러트리려고 작정했으면.

8성 넷이 방어에만 치중해도 막을 수 없다.

지금은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실전이 아닌, 대련이다.

'무턱대고 나를 노리진 않을 테니. 견제 정도는 참아주겠지.'

[부정한 축복을 사용합니다.]

[이블 아이를 사용합니다.]

[....]

[대상이 저항합니다.]

신성 주문인 '부정한 축복' 빼고는 대부분의 저주가 튕겨나거나 효과가 크게 반감되었다.

9성의 무인에게 통용되는 저주라.

최소 수십 단위의 목숨을 제물로 바쳐야 효과가 있지 않을까.

그래도 손가락 빨고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마력으로 저주를 튕겨낸다는 건.

창 우페이의 마력 운용에 조금이라도 간섭한다는 의미다.

'그래도 너무하네.'

저주 효과는 90%가 반감되었고.

[부정한 축복]도 50% 정도만 효과가 있다.

7성 따위의 주문은 소용없다, 그거지?

주문의 수준도 문제지만, 시전자와 사용자의 격 차이가 워낙 압도적이다 보니 감소 퍼센트가 컸다.

"이게 끝인가?"

"그랬으면 당신한테 제안도 안 했겠죠."

거 참. 섭섭한 말을 하시네.

이쪽은 지닌 패도 아직 다 까지 않았다고.

"파프너."

[알았어.]

[케넥 전투술]

[10장 - 구결집합권]

[원시 마법]

[용의 분노]

케넥 전투술의 정수.

모든 개념을 끌어 모아 빚어낸 암흑 강기를 전면에 집중시킨 파프너가 수직으로 하강했다.

동시에 펼친 원시 마법, 용의 분노는 거센 불꽃처럼 영력이 타오르더니 소용돌이치며 창 우페이에게 쇄도했다.

마법과 체술의 결합.

일반적인 마법이라면 불가능했지만.

규칙을 벗어난 원시 형태의 마법은 파프너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며 자유로이 섞였다.

일룡과 이룡도 푸른 안광을 불태웠다.

[무왕. 당신을 이길 거라 생각하진 않소만. 이 정도 분풀이는 이해해주겠지.]

양쪽으로 갈라진 둠 나이트 둘도 암흑 강기를 봅아냈다.

[익스팅션]

[기폭]

두 자루의 도끼에 맺힌 흉맹한 기운에 공기가 파르르 떨리고.

이룡이 빚어낸 기의 막 여러 개가 창 우페이의 근처를 빼곡하게 메웠다.

"좋구나."

창 우페이가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운.

그래.

힘과 힘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순간이 얼마만이던가.

살아있다는 느낌과 함께.

육신에 자리 잡은 어마어마한 마력이 용틀임을 내며 외부로 방출되었다.

[지뢰진]

말아 쥔 주먹으로 땅을 가격.

푸른빛이 원 형태로 퍼져 나가더니 지면과 땅 아래를 모두 뒤흔들었다.

쿠콰콰콰콰!

[오러 블레이드를 저렇게 넓은 범위로 펼친다고?]

기탄이 밀려나기 직전.

이룡은 급히 기로 빚어낸 방울들을 폭발시켰다.

파괴의 정수를 담아낸 폭발이지만, 창 우페이의 피부에 상흔 하나 내지 못했다.

도리어 기탄으로 발생한 열기마저 원형으로 퍼져 나가는 오러 블레이드에 휘말려 쭉 밀려날 뿐.

일룡도 도끼 하나를 회수해서 넓게 퍼진 오러 블레이드를 해소했고.

유진 곁에 선 송명석은 [텐터클 블레이드]로 출력을 올린 암흑 강기를 펼쳐 주인을 보호했다.

[2파가 올 겁니다.]

이룡의 경고가 떨어지기 무섭게.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하로 스며든 오러 블레이드가 인근의 지축을 완전히 헤집어놓았고.

몇 초 지나지 않아서 그 여파가 유진 일행에게 들이닥친 것이다.

이룡은 대각선으로 방향을 틀어서 정면으로 다가가고는 기막을 펼쳤다.

세 방향을 고집했다간 이도저도 안 될 상황.

공격을 포기하고 일룡을 보조했다.

"좋은 판단이다."

[당신은 늘 내려다보듯 하는구려.]

지축이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달려온 일룡이 도끼를 크게 휘둘렀다.

오러 블레이드를 해소하느라 한쪽 도끼에 깃든 암흑 강기가 옅었지만.

여전히 경시할 수 없는 위력이 담겨 있었다.

하늘에서 대각선으로 내리꽂히듯 날아드는 파프너의 존재까지.

반격인가.

아니면.

방어에 전념할 것인가.

[자. 골라보시지.]

"굳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있는가."

위이이이잉!

창 우페이의 양팔을 중심으로 솟구친 오러 블레이드 수십 층이 맞물리듯 정반대로 맹렬하게 회전했다.

오러 블레이드의 회전력만으로 강풍이 휘몰아칠 정도.

양 팔뚝에 담긴 가공할 정도의 오러 블레이드에 파프너의 눈이 부릅떠졌다.

[투기폭풍]

반대로 회전하는 오러 블레이드의 링을 충돌시키는 순간.

서로 반발하듯 밀어내는 푸른 링 수십이 정면으로 해방되었다.

닿는 것을 모조리 가루로 만드는 파괴의 회오리.

그 어떤 마법이나 이적도.

눈앞의 푸른 회오리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파프너의 돌진과 일룡이 휘두른 도끼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공격.

넓은 범위인데도 파괴력은 떨어지지 않아서 [지뢰진]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한 위력의 오러 블레이드가 둘을 덮쳤다.

살짝 뒤에 있는 이룡이 급하게 기막을 다시 펼쳤고.

도끼에 실어놓은 암흑 강기를 모조리 소모한 일룡도 반대쪽 도끼를 급히 들었다.

파프너는 힘의 발현 매개체를 몸뚱이로 삼아서 더 빠져나가기 어려웠다.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가는 파괴의 향연.

궤적에 휩쓸린 것은 모두 가루가 되었고.

쭉 나아간 폭풍은 수 킬로미터 넘게 전진하면서 고원 동쪽에 기다란 협곡을 만들었다.

일룡과 이룡은 오러 블레이드의 폭풍을 모두 해소하지 못하고 걸레짝이 된 몰골로 튕겨나갔다.

[크아아아앗!!]

오러 블레이드 폭풍에 더 근접해 있던 파프너는 전신의 비늘이 깨어진 채, 피를 뚝뚝 흘렸다.

"이것도 버티는가. 과연 8성은 다르군."

[끝이 아니야.]

"흠?"

피로 목욕한 듯한 모습으로 달려드는 파프너.

창 우페이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무모함과 용기를 구분하는 지혜는 있어주면 하는군. 난 오랫동안 손속을 겨루고 싶은데 일찍 쓰러지면...."

〔역천의 가호〕

그 순간.

파프너의 전신을 매개 삼아 솟구친 암흑 강기가 무수히 회전했다.

방금 전에 창 우페이가 보여준 것과 흡사한 모습.

기세는 조금 뒤쳐졌지만, 파프너가 내뿜고 기백은 무시할 수 없었다.

[당신 공격. 돌려줄 테니 한 번 받아보라고!!]

흡수 – 이해 – 재구축 – 발현으로 이어지는 역천의 가호의 작동 방식.

케넥 전투술과 원시 마법으로 강화한 몸뚱이로 직접 창 우페이의 공격을 받아내고.

[무신의 눈]으로 [투기폭풍]의 원리를 이해했으며.

받아들인 오러 블레이드를 암흑 강기로 재구축해서 다시 발현한 것이다.

투기폭풍처럼 오러 블레이드를 끌어올리는 데 시간이 걸리는 기예는 쓸 수 없다.

창 우페이는 다시 한번 주먹을 말아 쥐었다.

[투신권]

쩌어어어어엉!

흑색 드래곤의 발톱이 푸른빛을 밀어내지 못하고 튕겨나간다.

제 힘을 돌려주는 공격에도 밀리지 않고 그 자리를 고수한 창 우페이.

파프너도 공격이 상쇄된 것을 확인하고는 남은 힘을 모조리 방출한 후 망설이지 않고 날아올랐다.

촤학-.

팔뚝에 새겨진 작은 상처.

창 우페이의 눈가 위로 만족감이 스쳐 지나갔다.

"가호인가?"

[그래. 주인이 모시는 성좌님이 하사해준 능력이다.]

"흥미롭군. 단순히 반사시키는 게 아니라 이해와 재구축을 통해 자신의 능력으로 바꾸다니."

그걸 한 번에 간파해?

유진은 혀를 내둘렀다.

'이래서 재능 많은 놈들은 좋아할 수가 없어.'

〔타인의 눈에는 그대도 같은 종으로 비칠 것이니라.〕

'난 예외지. 회귀 특전이잖아.'

회귀 전에 아홉 번째 성위를 완성한 것은 온전한 그의 노력과 재능 덕분이지만.

[흑암의 반지]의 덕도 꽤 봤다.

전대 네크로맨서들이 남겨준 지식으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으니.

파프너와 창 우페이는 그런 특전도 없이 자신만의 길을 개척했다.

'이게 재능이 아니면 뭔데?'

유진이 투덜거리고 있을 때.

산사태로 무너진 땅이 불쑥 솟구치더니 거대한 괴물이 튀어 나왔다.

[쿠훅. 아직 끝 아니다.]

"훌륭하군!"

창 우페이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

창 우페이와 유진의 대련은 며칠 동안 이루어졌다.

대련의 승자는 당연히 무왕이었다.

압도적인 힘차이.

대련 초기에는 〔역천의 가호〕로 상처를 입히는 데 성공했지만.

두 번은 통하지 않았다.

"뭐든 요령이 중요한 법이라네."

파프너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힘을 쏟아붓거나.

혹은 충격을 흡수해서 되돌려줄 만한 틈을 주지 않았다.

애꾸눈이 합류했어도 전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음.

전제가 틀렸군.

애초에 창 우페이가 힘을 조절하지 않았으면 금방 끝났을 싸움이었다.

[빌어먹을, 입니다.]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송명석이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일대의 지형이 바뀌는 어마어마한 힘의 향연.

자칫 튕겨나간 오러 블레이드가 유진을 덮치면 큰일이니.

이 중에서 제일 약한 송명석이 그의 곁에 머무르면서 가드 역할을 했다.

"투덜거리지 말고 잘 봐."

[그러고 있습니다.]

"형이 다 네 발전을 위해서 그러는 거 아니니. 특등석까지 마련해주었으니 입 집어넣고."

무왕의 싸움을 지켜보기만 해도.

같은 특성을 지닌 송명석은 발전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으리라.

며칠 동안 이어진 대련의 여파로 진도 8.0의 지진이 몇 번이나 개마고원을 덮쳤고.

고원에서 함흥, 그리고 동해로 이어지는 직통 길이 나지를 않나.

산 곳곳에 생긴 계곡들로 인해 고원 일대의 생태계가 완전히 뒤집힐 정도였다.

지형조차 바꿔버리는 초월자의 전투.

"아. 참으로 좋구나."

막상 지도를 다시 그리게 만든 원흉은 개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자신감을 가질 만 하군. 자네의 능력."

"크흐흐. 만족하셨으면 다행이군요."

"이리 되었으니. 주기적으로 나랑 손속을 겨뤄주어야겠네."

"맨입으로 말입니까?"

파프너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유진을 바라보았다.

전 세계에서 둘 뿐인 왕급 헌터.

9성의 초월자를 상대로 딜을 걸어도 되는 걸까.

그녀의 우려와 달리, 창 우페이는 호쾌하게 웃었다.

"하하하핫. 천무문과 블랙 컴퍼니가 동맹을 맺는 건 어떠한가."

"동맹... 이요?"

"자네의 언데드들. 치안 유지에도 꽤 도움이 되는 것 같으니 북부 지역의 방어를 부탁하지."

"거기에 주기적으로 싸우는 조건으로 동맹을 맺자는 말이군요."

흠.

이건 좀 놀라웠다.

전생에는 천무문하고 동맹 관계로 나아가지 못했거든.

창 우페이가 이번 대련이 엄청나게 마음에 들었나보다.

"좋습니다. 대신 살살 좀 해주십쇼."

둠 나이트 둘과 애꾸눈은 말 그대로 산산조각 났다.

대련 중에 몇 번이고 전손돼서 유진이 솜씨를 부려 수리했는지 모른다.

파프너는 사룡이 되면서 고칠 수도 없으니, [라이프 드레인]으로 치료하느라 고생 깨나 했고.

"그럼 대련이 되겠나."

"우리 애들 쥐어터진거 보십쇼."

"뭐, 다음에는 힘을 조금만 빼보도록 노력하지."

신용이 안 가지만, 유진은 피식 웃었다.

천무문을 동맹으로 두는 것.

이렇게 되면.

진형 후방의 안전을 확보한 셈이 되니.

블랙 컴퍼니 입장에서는 완벽하게 이득을 거두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야말로."

두 거인은 손을 맞잡았다.

247화 악마의 흔적

창 우페이와 종종 대련을 벌이는 대신, 블랙 컴퍼니의 이권을 보장해주는 계약.

회귀 전에도 해내지 못한 커다란 딜을 성사한 후.

유진은 개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일이 너무 많다.'

문득 유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이다.

"대표님."

"응?"

"다른 생각하지 마시고 서명해주십쇼."

책상 위에 쌓인 서류의 산.

임재백은 날카로운 눈으로 유진과 서류를 번갈아보았다.

"임 이사. 솔직하게 말해봐. 나 없을 때마다 일감 물어오는 거 아니지?"

"그럴 리가 있습니까. 대표님께 결재 받는 건 최대한 거르고 걸러서 올리는 것뿐입니다."

"왜! 근데! 일이 끝나질 않냐고오오!!!"

"대표님이 사업을 계속 확장하시니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럴 리 없다.

유진은 마음속으로 임재백의 지적을 부정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러는 건데!'

〔회귀 전의 자신을 돌아보아라. 과연 죄가 없다고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겠느냐.〕

'흥! 그런 거 없는데요!'

〔양심의 삼각형이 이미 모두 닳아서 사라졌구나.〕

아니.

그런 예시는 도대체 어디서 주워들어서 써먹는 거냐고.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무엇 말이더냐.〕

'나 회귀 전에는 이렇게까지 안 바빴거든?'

〔당연하지 않느냐. 그대가 이미 언급하였듯, 전생에는 이렇게까지 세를 넓히지 않았으니 감당할 업무도 적었을 수밖에.〕

맞네. 맞아.

유진은 아- 하는 탄성을 내뱉었다.

크로노스의 날카로운 지적.

왜.

자신이 이렇게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가.

회귀 전보다 인재 풀도 많아졌다.

전생에야 업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인재가 박하늘 씨를 포함해도 두 손에 꼽았지만.

지금은 뽀시래기 팀과 임재백이 추가 되었을뿐더러.

뱀파이어가 된 마담은 혈족을 늘려서 조직을 빠르게 확장하고 있고.

미스터 블랙도 원래의 역사보다 빠르게 흑상을 정리, 그 영역을 접수하면서 조직을 확대했다.

'아니지. 그건 반대구나.'

그래.

인원이 늘어나서 일거리가 줄어들 게 아니고.

사업 규모가 커졌으니 일도 더 많아지는 게 당연했다.

왜 그렇게나 간단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을까!

〔그대의 안일함 때문이지 무엇이겠느냐.〕

'왜. 뭐요.'

〔회귀 전에 기억하는 인재들을 넙죽 주워 온 것은 칭찬할 일이니라. 한데,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역사를 비틀었으니, 응당 대가를 치러야 할 터.〕

'대가라고 하면 좀 느낌이 이상하잖아.'

일거리가 많아진 것도 나비효과라고?

제발.

그 놈의 나비 타령은 이제 그만 좀 해줬으면 좋겠다.

'이미 회귀 전이랑 역사가 어마어마하게 틀어졌거든요?'

유진이 기억하는 회귀 전 흐름은 반 이상이 쓸모가 없어졌다.

회귀 전에는 천무문과 데면데면한 사이였지만.

창 우페이와 조기에 안면을 트고.

나아가서는 간지러운 부분을 먼저 긁어주어서 구룡방까지 일찍 토벌할 수 있었다.

회귀 전, 후를 통틀어서 구룡방이 지닌 입지를 생각하면.

유진이 듬성듬성 기억하고 있는 미래의 흐름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틀어질 것이다.

'말했잖아. 흐름에 끌려가는 게 아니라 내가 끌고 가겠다고.'

〔하면 마음을 비우도록 하여라. 공사가 다망한 것은 그대의 업보일지니.〕

젠장.

간헐적으로 천재가 되는 크로노스의 이야기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노ㅇ, 아니. 인재가 더 필요해.'

유진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전생에도 인재 확보는 늘 어려운 문제였다.

네크로폴리스는 살아있는 사람이 오랜 기간 머무르기가 어려운 환경이다.

강령술 지식을 배우러 오는 네크로맨서들이라면 모를까.

평범한 헌터들은 네크로폴리스에 머무르고 싶어하지 않았다.

비각성자는 더더욱 올 이유가 없었고.

'그래서 인재 풀은 대부분 언데드로 채워놨지.'

유진은 전생에도 그와 대적했던 자들을 언데드로 만들어서 뼈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부려먹었다.

〔지금도 그리 하고 있지 않느냐.〕

이 순간에도.

조승철은 이북과 웨이하이를 순회하며 네크로폴리스 확장 작업에 열중이었다.

둠 나이트 둘은 곧바로 기연 탐색에 투입시켰고.

이신우를 포함한 아라한 정예 헌터들은 만주 쪽 안정에 투입되었다.

그뿐이랴.

생전에 마법계 헌터였던 이들은 블랙 메이지로 되살려져서 조승철을 따라다니며 노동의 참맛(?)을 느끼고 있었으니.

'커버할 곳이 너무 많아졌어.'

유진은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었다.

서류 작업만 해도 그렇다.

임재백 이사한테 대부분의 권한을 넘겨주었음에도.

굵직굵직한 일이 이만큼이나 쌓였으니.

'본사 업무는 사람들을 더 구하면 어떻게든 해결될 문제다만.'

문제는 외부 확장이다.

회귀 전보다 너무나도 넓어져버린 네크로폴리스.

이북의 상당 부분을 잠식했고.

산둥반도의 '도시' 하나를 영역으로 만들었으며.

극동 공화국의 양해를 받아 치안을 맡아주는 대가로 만주 일부를 할양받았다.

만주야, 완전한 점거가 아닌 몬스터들이 쳐들어오지 못하게 관리하는 정도이지만.

몬스터의 시체를 언데드로 되살릴 수 있는 유진 입장에서는 세력으로 포함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쓸 만한 하수인을 어디서 구해야 하나.'

유진의 미간이 川 자로 구겨질 때.

부우우웅-.

휴대전화가 몸을 가볍게 떨었다.

[발신자 - 마담]

"전화 받았다."

-반가운 기색이라도 좀 해주고 그러세요.

"내가 공사가 다망한 몸이라."

-어머나. 누구는 안 바쁜 줄 아시나봐.

"시답잖은 이야기 할 거면 끊는다."

유진은 평소보다 조금 날카롭게 대꾸했다.

탁자 위에 쌓인 서류의 산을 보라.

마음의 여유가 생기다가도 푹 꺼지지 않겠는가.

네크로폴리스 안정화도 더뎌지고 있는 판국이라 마음이 썩 편하지 않았다.

-부탁드릴 게 한 가지 있었는데 타이밍이 안 좋았네요.

마담의 입에서 '부탁'이란 단어가 나오다니.

회귀 전에는 빚 지는 게 싫다고 저런 표현도 잘 쓰지 않았는데.

들어도 들어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급한 사항인가보군."

-천 대표님의 힘이 꼭 필요한 일이랍니다.

"뭔지는 들어보고 결정하지."

-피의 발렌타인 사태. 기억하고 계시나요?

갑자기 웬 피의 발렌타인이 나오지.

흠, 흠.

유진은 짧게 헛기침을 했다.

'불사자의 관에 대해 냄새라도 맡은 건가?'

마담을 진조 이상의 존재, 흡혈귀 여왕으로 불리는 〔바토리〕의 개념을 빌려와서 그에 준하는 존재로 만들어준 것도 [불사자의 관]이다.

마음 한구석이 찔렸지만 최대한 평온한 투로 대답했다.

"모를 리 없잖아."

-그 사태의 주범이 사탄교인 건 유진 님도 잘 아실 테고요.

"인신공양으로 악신 성좌의 가호를 받는자들."

-이번에 그들의 흔적을 발견했답니다.

사탄교.

마담에게 있어, 같은 하늘 아래에 살 수 없는 천인공노할 적이다.

유진도 사탄교를 좋아하진 않았다.

〔그대 또한 망자를 부려 힘으로 삼지 않느냐.〕

'말씀이 좀 심하시네. 사탄교랑 나랑 비교하면 좀 그렇다.'

죽은 자를 언데드로 되살려서 부리는 입장이라지만.

유진은 불필요한 살생을 최대한 피했다.

지금 부리는 자들도 모두 그와 적이 되었던 이들이며.

전생에도 온갖 악행을 저질렀던 자들이니 양심의 가책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사탄교는 달랐다.

힘없는 자들을 착취해서 성좌의 가호를 내려 받는 뼛속부터 갱생 불가능한 악당들.

로마노프 가문하고는 다른 의미로 불쾌한 작자들이다.

잠깐.

'사탄교면 쓸 만한 애들이 많잖아?'

이건... 인재 영입 기회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마담의 성위는 7성.

휘하 뱀파이어들도 무시 못할 전력이다.

그런데도 자신에게 손을 벌려야 할 정도의 수준이라.

사탄교 교인들이 약하지 않다는 방증이다.

"어디로 가면 되나."

-도와주시는 건가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담의 부탁이다. 당연히 들어줘야지."

마담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너무 노골적인 립 서비스였나?

-어머나. 살짝 감동 받았답니다.

"형식적인 리액션은 필요 없어. 장소나 알려줘."

-이틀 후, 필리핀 민다나오 섬으로 오시면 된답니다.

통화를 끊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표님?"

"잠시 출장 좀 다녀오지."

"일이 이렇게나 쌓였는데 어딜 가신다는 겁니까."

"마담이 도움을 요청했다."

임재백은 입을 크게 벌렸다가 뭐라 말하지 못하고 입술을 오물거렸다.

마담이 어떤 사람인지는 그도 잘 알았다.

누군가에게 빚을 지우면 지우는 사람이지, 본인이 지려고 하지 않는다는 성향이라는 것을.

갑자기 유진한테 전화를 걸어서 도움을 요청했다는 건.

꽤나 급박하다는 말일 터.

임재백은 더 이상 강하게 말하지 않았다.

"...다녀오십쇼."

"나 없는 동안 잘 부탁해."

유진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무실을 벗어났다.

*

[콰루루루!]

바다 위에 드리우는 기다란 그림자.

블러드 골렘과 융합해서 더 강력한 존재가 된 언데드, 블러드 드래곤이 기분 좋은 울음을 터트렸다.

"너도 좋냐? 나도 좋다."

블러드 드래곤의 등 위에 올라탄 유진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주군. 괜찮으시겠습니까?]

"호위는 너 하나면 충분해. 번복하게 하지 마라."

[속하를 신뢰해주시니 감사하지만, 파프너가 주군께 더 힘이 되지는 않을지.]

"너. 요즘 따라 기가 많이 죽었다?"

[죄송합니다.]

송명석이 고개를 수그렸다.

이번 필리핀 행은 인원을 최소한으로 했다.

둠 나이트 둘은 기연 사냥에 투입해서 데려올 수 없었고.

파프너도 무왕과의 싸움에서 얻은 심득을 정리해야 한다고 시간을 달란다.

그러니 남은 건 송명석뿐.

용아병으로 개조된 후 변화한 육신에 적응해서 7성의 힘을 손을 넣었지만.

송명석은 여태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약한 모습을 내비쳤다.

"넌 목에 힘을 주고 재수없게 굴어야 돼."

[욕하시는 겁니까?]

"마음이 꺾이면 안 된다는 거다. 네 심상에도 영향을 끼치잖아."

[...조언 감사합니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녀석이 풀 죽어있는 모습이라니.

적응이 안 되는구먼.

이번 필리핀 행에는 블러드 드래곤 5구를 동원했다.

유령선을 이용하지 않고 날아가니 하루도 안 돼서 약속장소에 도착.

먼저 섬에 넘어온 마담을 볼 수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빠를수록 좋잖아. 인재 영입, 아니. 사탄교 놈들의 낯짝도 빨리 볼 겸."

"호호호. 여긴 햇볕이 세서 피부가 탈 것 같은데.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 나누시게요."

백옥 같다 못해 창백한 피부가 햇빛에 닿으니 타오를 것처럼 붉어졌다.

저급한 흡혈귀처럼 빛 좀 쐰다고 가루가 되진 않지만.

본 능력을 모두 낼 수 없으니, 계속 해안가에 머무르고 싶지 않아했다.

"사탄교의 목적과 전력을 알고 싶다."

"목적까지는 알 수 없어요. 저희도 꼬리만 겨우 잡은지라."

"놈들이 아무 목적 없이 모였을 리는 없는데."

"다른 계획을 추진하기 위한 교두보, 정도로 추정중이랍니다."

이 시간대에 무슨 일이 있던가?

기억을 되짚어봤지만 떠오르는 건 없었다.

국내에서 벌어진 사건이 아니다보니 모두 기억할 순 없었다.

"사탄교 놈들은 어떻게 칠 예정이지?"

"그건...."

마담은 입술을 달싹이며 다음 계획을 천천히 설명했다.

248화 스카우트 (1)

"이 섬은 대격변 이후 반군이 점거했답니다."

"반란군을 치면 되나?"

"아뇨. 반군에게 밀린 이들이 사탄교와 손을 잡았어요."

그런 설명은 빨리 해주지.

원망 섞인 유진의 눈빛에 마담이 호호, 짧게 웃었다.

"한국말은 원래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고 하잖아요."

마담이 사탄교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피의 발렌타인' 사태를 조사하면서였다.

희망호의 승객들을 제물로 바쳐 악마로 변한 추종자. 마누엘.

끈질긴 조사 끝에 마누엘이 필리핀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아냈고.

민다나오 섬에 뿌리 내린 악마들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반군을 제물로 바쳤더군요."

"아깐 반군이 섬을 점거했다며."

"그래서 과거형으로 말씀드린걸요."

"아."

"마누엘이란 자가 천 대표님께 토벌된 후에는 오히려 사탄교가 활발하게 움직였더라고요."

동남아시아 바닷길의 허브.

사탄교는 '피의 발렌타인' 사태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민다나오 섬을 해양 거점으로 삼았다.

"지금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사탄교의 추종자라고 생각하세요."

"민간인도?"

"네."

"반란군이 어지간히 싫었던 모양이군."

"수십 년 동안 분쟁이 일어났다고 하니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죠."

말 그대로 복수에 영혼을 팔아버린 셈.

"주민들은 어떻게 할까."

"여기에 주민은 없답니다. 적과 아군만 있죠."

보기 드문 마담의 단호한 음색.

자의든 타의든, 혹은 생존을 위해서든.

사탄교에 발을 들이민 주민은 용서하지 않겠다는 집요함이 느껴졌다.

"준비는 끝났나?"

"네. 밤이 되면 바로 공격을 개시할 거랍니다."

뱀파이어는 햇볕이 없을 때 제 능력을 낼 수 있다.

그렇지만.

마담이 대동한 흡혈귀는 모두 진혈 급이라서 햇빛도 충분히 버텨낼 만한 힘이 있었다.

사탄교가 아직 침입자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을 때.

빨리 몰아치는 편이 좋을 텐데.

유진은 밤으로 습격 시간을 정한 이유가 뭔지 알아챘따.

"달의 주술이군."

"보조용으로만 사용할 거예요. 언데드와 뱀파이어, 둘 다 남한테 보여주기는 그렇잖아요."

"필리핀 정부가 태클을 걸 수도 있으니 말이야."

역시 철두철미하다.

유진은 해가 떨어질 때까지 느긋하게 오러를 수련했다.

아니.

사실은 느긋하진 않았다.

[주군. 빈틈이 많습니다.]

"아오오오. 파프너 떼놓고 오니까 왜 네가 그러냐."

[속하는 주군께서 무도를 추구하다가 사마외도로 빠지려 하는 것을 가만히 볼 수 없습니다.]

사마외도라니.

말이 심하네.

7성에 올랐지만, 오러 블레이드 특성이 추가되지는 않았다.

4성 때는 오러를 다룰 수 있었는데.

파프너는 이 문제를 '깨달음'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주인은 무기에 의념을 실을 수 있었어. 그러니까 오러를 피워 올리는 건 바로 됐을 거야.

오러 블레이드는 더 고차원적인 힘이다.

형상화한 오러를 극한까지 압축해서 빚어낸 파괴의 권능.

오러의 정수를 깨우치지 못하면 오러 블레이드는 절대로 만들지 못한단다.

〔한데 그대의 능력은 이미 충만할진대. 오러 블레이드 수련까지 할 필요가 있겠느냐.〕

'성좌 나리. 근접전에서 써먹을 수 있는 가호를 줘놓고 너무 무책임하게 말하는 거 아니야?'

〔꼭 그러할 필요는....〕

'어쨌든 몸으로 받아내려면 일단 버텨야지.'

〔매번 단련하는 것이 싫다고 하면서도 몸은 솔직하구나.〕

거, 말씀이 좀 심하시네.

누가 보면 수련 광인 줄 알겠어요.

'나 바쁘거든요?'

네크로폴리스 새 사원 영입, 아니. 사탄교 놈들을 사냥하기 전에 할 일이 없으니 단련하는 것뿐.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고.

어두움이 섬을 물들이기 시작할 때.

"시작할까요?"

"그러지."

누군가는 복수를 위해.

어느 누구는 종신토록 부려먹을 노예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사탄교를 박멸하기 위한 칼날을 뽑았다.

*

틱- 틱-.

"더럽게 불이 안 붙네."

중년 사내는 헛돌아가는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며 투덜댔다.

더 강한 힘을 추구하며 사탄교에 입단한 지 5년이 지났다.

그렇지만.

사탄교 생활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늘 잔혹한 음모를 꾸미며 세계의 어둠에 암약하진 않았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혹자는 신념이라고 답하겠고.

다른 사람은 돈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사탄교 신자는 확실하게 답할 수 있었다.

'밥. 밥은 먹고 살아야지!'

사탄교는 좋게 말하면 자유분방하고.

나쁘게 말하면 중구난방에 질서가 없는 조직이다.

악신 성좌의 가호를 얼마나 많이 받았느냐에 따라 조직 내 서열이 정해지지만.

딱 거기까지다.

신자끼리 상하관계도 명확하지 않고.

필요에 의해서 서로 힘을 합쳤다가 뒤통수 치기를 반복하는 게 사탄교였다.

일반적인 조직이라면 콩가루 같은 조직도를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졌으리라.

'이 빌어먹을 땅에서 언제까지 머물러야 하나.'

대격변 이후 거주 가능한 영역을 대부분 상실한 섬.

겨우 자급자족이 되는 수준의 경제력을 보유한 섬에서 무엇을 구할 수 있겠는가.

담배에 불을 붙일 라이터 하나 구하기도 어려웠다.

중년 사내는 무투계라서 화염을 만들어낼 수도 없으니.

망가져버린 라이터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조만간 한탕 크게 한다는데. 그때 여길 떠나든 해야지.'

중년 사내가 투덜거리고 있을 때.

"곤란해보이네요."

고혹적인 음성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불쑥, 어둠을 찢고 나온 것처럼 하얀 손이 나와서 중년 사내의 얼굴 근처로 다가왔다.

가느다란 손에 들린 라이터.

중년 사내의 눈이 크게 떠졌다.

"불. 필요하세요?"

"좋지."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칙- 칙-.

부싯돌이 마찰을 일으키고.

한 줄기 불이 피어올라서 중년 사내가 물고 있는 담배 끄트머리를 태웠다.

"크으. 이 맛이지."

"혼자서 경비를 서고 계신 건가요?"

"보다시피. 우리가 언제부터 막 의리를 챙기고 하진 않잖아."

"고되겠네요."

"크흐. 저 놈들도 그걸 알아주면 좋겠네."

모락모락 올라가는 담배 연기.

여인의 달콤한 목소리가 희끄무레한 향을 이리저리 흐트러놓았다.

"당신 동료는 몇 명이나 있나요?"

"동료가 아니다."

"호호. 그럼 신도 분들이라고 여쭤볼게요."

"53명."

"와. 많이 계시네요. 다들 강하시겠어요."

"나보다 강한 놈들은 많지 않아. 7성 둘에 6성 넷밖에 없다고."

중년 사내는 담배의 향에 취한 건지, 갑자기 불을 붙여준 여인에게 취했는지 모른 채 물어보는 것을 모두 대답해주었다.

이야기가 끝날 때 즈음에는 중년 사내의 입에 물려 있던 담배가 모두 타서 필터만 남았다.

"이야기를 나눠주셔서 고마워요."

"불도 줬잖아. 보답은 해야지."

"그러면 한 가지만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뭔데."

"이만 죽어주세요."

무슨 부탁이, 라는 말을 하려는 순간.

사내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끅, 끄으윽."

목에 그어진 붉은 실선.

가벼운 마담의 손짓에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었다.

"들으신대로랍니다."

"7성 하나만 주의하면 되겠어."

"주의라니. 대표님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네요."

"난 늘 이기는 싸움만 한다."

유진은 짧게 투덜거렸다.

남들이 무모하다고 생각하는 싸움도.

실은 밑 작업을 모두 해놔서 반드시 이기는 상황으로 만들어놓은 후에 펼치는 것이다.

누구를 계획 없이 날뛰는 사람처럼 보고 있니.

[달의 주술]

[호접지몽(胡蝶之夢)]

[혈마법]

[블러드 케이지]

[모든 통신 및 이동 관련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강력한 피의 결계가 발동합니다. 결계 내부에서 바깥으로 나가려면 큰 피해를 입습니다.

뱀파이어의 전용 기예인 혈마법이 마담의 주술과 결합되었다.

마을 일대를 뒤덮는 커다란 핏빛 감옥.

"들어오는 건 마음대로지만 나가는 건 아니겠어."

"어머. 그 표현 마음에 드네요."

글쎄다.

왠지 뒤를 조심해야 할 것 같은 말이라서 달갑지 않다고.

유진은 괜한 말을 내뱉었다고 투덜거렸다.

[콰루루루!]

신호와 함께 날아오른 블러드 드래곤들이 일제히 아가리를 크게 벌렸다.

입에 아른거리는 차가운 기운.

[프로스트 브레스]

혹한의 숨결이 마을을 덮친다.

호접지몽과 블러드 케이지를 결합해서 만든 결계는 외부의 공격을 그대로 투과 시킨다.

마담의 결계를 파괴하는 일 없이.

블러드 드래곤들이 내뱉은 새하얀 기운이 사탄교 신자들을 덮쳤다.

브레스를 정면으로 맞은 사탄교 신자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얼어붙었고.

직접 맞지 않은 이들도 양손으로 팔뚝을 잡은 채 덜덜 떨었다.

"추, 추워."

"여긴 겨울에도 이렇게 안 추운데."

"적이다!"

상황 판단이 느린 신자들이 느긋한 소리를 할 때.

블러드 드래곤들의 소행이라는 것을 확인한 신자가 크게 외쳤다.

"이미 늦었어."

유진은 손가락을 따악, 퉁겼다.

[주군의 검은 저입니다.]

파팟!

매서운 기세로 신자들 한가운데에 진입한 송명석이 검 두 자루를 쥐었다.

[텐터클 블레이드]

검에서 솟구친 암흑 강기가 좌우로 흔들리면서 춤추었다.

어마어마한 출력을 자랑하지만, 암흑 투기를 전개했을 때보다 힘겨워 보이는 모습이다.

송명석은 제어를 벗어나려 하는 암흑 강기를 최대한 유지했다.

암흑 강기 다발이 한순간 꿈틀거리더니 반경 10미터 이내에 있는 적들을 도륙했다.

사탄교 신자들은 제물을 통해 쉽게 강해지는 종자들.

그렇기에.

마을에 있는 신자들은 최소 4성 이상이었다.

무투계는 오러를.

마법계 헌터는 다중 연산을 사용할 수 있는 실력자들이지만.

송명석은 양떼 안에 뛰어든 늑대처럼 그들을 손쉽게 도륙했다.

[죽으십시오!]

"역시 대표님의 하수인답네요."

"손가락 빨고 구경만 할 텐가?"

"에이. 정보를 듣느라 그런 거잖아요. 너무하시네."

"내가 여기에 온 건 네 부탁 때문이니까."

"그러면 이쪽부터 빠르게 정리하시죠."

마담이 박수를 짝- 치니 그림자에 숨어 있던 뱀파이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의 아이들아."

"예. 여왕님."

"가서 저들의 어리석은 선택을 후회하게 만들어주렴."

하늘에서는 블러드 드래곤들이 눈을 부라리고 있으며.

전장 한가운데에 들이닥친 송명석은 사탄교 신자들의 진형을 무너트렸고.

은밀하게 투입된 진혈족들은 마음껏 피를 마시며 기울어진 전세를 완벽하게 굳히고 있었다.

"어느 놈이 감히!"

사탄교 무리 중 대표로 보이는 7성 헌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전 중요(?)한 일을 치렀는지 바지를 제대로 입지도 않은 모습이다.

"저 친구는 나한테 양보하도록."

"으으음. 드릴게요."

좀 생긴 건 비호감이어도.

언데드로 만들어서 살을 모두 발라내면 볼 일도 없다.

아.

물론 개중에는 뼈도 못생긴 사람들도 있으니, 그때는 얼굴뼈 수술을 해줘야지.

그로부터 1시간 후.

민다나오 섬에 자리 잡은 사탄교 거점 한 곳이 잿더미로 변했고.

유진은 자의식이 있는 상급 언데드 하나를 제작했다.

249화 스카우트 (2)

4미터 크기의 시커먼 거한.

머리 위에는 두 갈래의 뿔이 붙어 있고.

전신에서 흘러나온 검은 연기는 주위를 어둡게 물들였다.

그 존재만으로 공간을 탁하게 만들며 혼백에 두려움을 전하는 괴물.

상급 언데드, 나이트헤드다.

'이 녀석을 드디어 만드네.'

유진은 뿌듯함을 드러내며 나이트헤드를 훑었다.

〔늘 그렇듯 어렵지 않게 만드는 것 같더니. 왜 그리 감명 깊어하느뇨.〕

'나이트헤드는 영체면서 실체를 가진 괴물이야.'

여러 저주로 혼백을 조작하고.

마(魔)의 인자를 품은 육신과 결합시켜야 비로소 나이트헤드가 된다.

악마종이든.

혹은 악마 추종자의 시체가 있어야 만들 수 있는 희소한 언데드였다.

〔하면 데스 나이트보다 강한 게냐?〕

'일장일단이 있지.'

데스 나이트는 상급 언데드의 대표 격인 존재다.

일신의 무력은 더할 나위 없이 대단하고.

흑마법과 기초적인 강령술, 그리고 지휘 능력까지 보유해서 언데드 군대 운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언데드다.

'나이트헤드는 암살이나 1대1 싸움에 특화되어 있어.'

영체와 물질의 성질을 모두 보유하고 있는 언데드.

[에테리얼 폼]을 사용하면 어떤 물질이든 투과하며 상대의 혼백에 직접 타격을 입힐 수 있다.

실체화했을 때의 무력도 강력했다.

데스 나이트와 정면으로 대결하면 살짝 약세.

스펙은 좀 더 높지만 암흑 강기의 숙련도가 모자라서 전투가 길어질수록 나이트헤드에게 불리했다.

'얜 기습에 특화되어 있어서. 큰 문제는 아니야.'

은밀 기동과 순간 화력에 집중된 극단적인 스킬 셋.

마담이 유진의 눈과 귀가 되어주지 않았다면.

[불사자의 관]을 이용해서 변칙으로 나이트헤드를 제작, 정보전 및 암살에 활용했을 것이다.

"새 몸은 어떠냐."

[....]

"입에 풀이라도 발라놨니."

[....]

"말하기 싫으면 말아라."

대신이라고 해야 하나.

마를 품은 육신으로만 제작할 수 있으며.

영체와 물질에 겹쳐 있는 탓인지 모르지만 제어가 쉽지 않았다.

나이트헤드는 명색이 상급 언데드라 자의식과 판단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유진의 말에 답하지 않은 건 끊임없이 지배력에 반발하기 때문이었다.

〔반기를 들면 어쩌려고 하느냐.〕

'나이트헤드를 10마리 이상 사역하면 모를까. 그럴 일 없어.'

누굴 아마추어로 보시나.

"꽤 섬뜩한 친구를 만드셨네요."

"거기. 피 좀 닦아."

"아. 실례."

혀를 슬쩍 내밀어서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낸 마담이 배시시 웃었다.

으으음.

좀 무섭군.

당신. 그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 아니었잖아.

전생과 명백하게 달라진 모습에 유진은 침을 꼴깍 삼켰다.

"대화는 잘 나누었나?"

"네. 많은 것을 알려주더라고요."

"상대가 순순히 답해주었나?"

"피에 대고 직접 물었으니까요. 거짓을 말하진 않았을 거랍니다."

뱀파이어의 능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마담.

흡혈귀가 된 지 1년이 조금 안 되었는데도 풍기는 기운과 능력 활용은 이미 수십 년은 된 것처럼 완숙하게 느껴졌다.

"사탄교 신자 중에 강자는 더 없나?"

"7성 마법사로는 부족하신가봐요."

"다다익선이라고 하잖아."

"시체가 많을수록 좋다는 표현은 부적절하게 느껴지지만, 그게 사탄교 교인이라면 괜찮을 것도 같네요."

왜 그걸 타협하는 건데.

마담의 사탄교에 대한 증오야 회귀 전에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감정에 충실한 모습은 봐도봐도 적응이 안 되었다.

"섬에 남은 잔당은 얼마나 되나?"

"외곽에 거점이 몇 있지만 잔챙이들이랍니다. 제 권속들이 다 정리했어요."

"고작 이 정도 가지고 날 부른 건 아니겠지?"

"아무렴요. 제가 대표님을 실망시킨 적 있나요."

"그건 아니지."

"섬 중심부에는 사탄교의 신전이 있답니다."

신전이라.

아주 가지가지 하는군.

사탄'교'라고 부르지만, 바벨탑의 악신 성좌들을 모시는 놈들은 제대로 된 신관이 아니었다.

제물을 바쳐서 힘을 받는 계약관계지.

마담이 언급했던 신전도 성좌나 특정 성단을 모시는 평범한 구조물과 거리가 멀었다.

'그러고 보니 동남아에서 큰 일 하나가 있었지?'

유진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회귀 전.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말레이시아 일대가 쑥대밭이 된 사건이 있었다.

해일이 일어나서 섬 여러 개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뱀 괴물 라미아가 군대를 이루어서 해안가 근처 나라들을 침공했다.

〔사탄교와 관련이 있느냐?〕

'어. 라미아는 악신 성좌의 하수인이거든.'

에키드나.

올림포스 신화에서 모든 괴물들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태고의 괴수이며.

또한 악신 성좌이기도 했다.

라미아들이 대량으로 나타난다거나, 해일이 우리나라보다 커다란 섬들을 집어삼킬 만큼 거세게 일어났다?

악신 성좌의 힘을 빌린 대규모 술법이라면 설명이 된다.

'그 밑밥이 여기에 깔려 있었군.'

유진도 동남아 일대를 휩쓸어버린 재앙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현 시간대를 기준으로 3년 뒤에나 일어나는 일.

당시에는 네크로맨시를 연구하는데 바빠서 굵직한 사건들을 곁다리로 들은 게 전부였다.

대규모 해일의 배경에 사탄교가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원래 흐름대로였으면 신전이 발각되는 일이 없었을 터인데.'

마담이 유진의 도움으로 흡혈귀 시조의 힘을 일부나마 손에 넣었고.

사탄교의 행적을 본격적으로 추격하면서 역사의 흐름이 바뀌어버렸다.

'나비효과 타령하지 마쇼.'

〔고얀 것. 짐의 발언을 가로채다니.〕

이미 본래의 역사는 많이 틀어졌다니깐.

나비효과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그리고 말이야.

'이건 긍정적인 상황이다. 나쁘게 생각할 필요가 어디에 있어.'

유진이 필리핀까지 날아온 이유가 무엇이던가.

네크로폴리스와 블랙 컴퍼니 운영에 도움이 될 만한 인재를 섭외(?)하기 위함 아니던가.

대규모 재앙을 일으킬 만한 이들이라면.

최소 7성.

운이 좋으면 8성의 실력자가 있을수도 있다.

〔만전이 아닌 전력일진대. 감당할 수 있겠느뇨.〕

'블러드 드래곤에 나이트헤드, 그리고 송명석도 있는걸.'

블러드 드래곤은 8성급 언데드.

지닌 특성과 스킬이 많지 않고 인스턴트로 만들어서 스펙에 비해 전투력이 조금 떨어지는 편이지만.

어지간한 적은 공중에서 일방적으로 때릴 수 있다.

송명석도 7성 절정의 수준이고.

은밀 기동에 능한 나이트헤드에, 마담까지 있으니.

사탄교에서 8성급 괴물이라도 꺼내지 않는 이상, 일행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저 나이트헤드였던 친구도 손 하나 제대로 못 썼잖아.'

국내 3강 길드 마스터 중 둘이 아직까지 7성에 머무르고 있다.

7대 명가 중 로마노프 가문과 천무문을 뺀 가주들은 현 시점에서 모두 8성에 머무르고 있고.

8성이 개똥밭에서 굴러다니는 것도 아니니.

걱정할 이유는 없다.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어찌 하려고.〕

'왜 걱정해.'

오히려 좋지.

*

울창한 삼림.

널찍널찍한 이파리들을 단 야자수가 빼곡하게 드리웠다.

블러드 드래곤들은 유진과 마담, 그리고 뱀파이어 몇을 태운 채로 녹색을 띤 정글 위를 스치듯이 날았다.

"새벽인데 괜찮겠나?"

"이미 사탄교는 섬 외곽이 습격당한 것을 알아챘을 거예요."

"그렇겠지."

"더 방비를 굳히든, 아니면 발을 빼기 전에 습격하는 편이 나을 거랍니다."

"나도 그 부분은 동의한다만."

뱀파이어는 햇빛을 맞으면 제 힘을 발휘할 수 없다.

마담과 진조들이 페널티를 덜 받는 편이지만, 그래도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

달의 주술도 밤에만 쓸 수 있으니.

마담과 뱀파이어들의 전투력은 평소의 50% 정도로 계산해야 한다는 의미.

"대표님께서 해주시지 않겠어요?"

"나보고 해달라는 거냐."

"여기까지 행차하셨으니 실력 발휘 좀 하셔야죠."

"빚으로 달아둔다."

"연락 드릴 때부터 생각해둔 거랍니다."

내 참.

부탁같은 건 거의 안 하는 사람이 이렇게 말을 하니 당혹스럽군.

마담이 저렇게까지 말했으니, 어떻게든 보은을 할 생각이니 어떤 식으로 빚을 받아낼지 고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슬슬 목적지예요."

"마담의 안내가 없었어도 저긴 알아볼 수 있겠네."

섬 한가운데에 세워진 궁전.

몬스터들의 뼈로 쌓아 올린 구조물이 눈에 들어온다.

"대표님. 혹시...."

"네크로맨시는 아니다. 그냥 미적 취향이 저런 거야."

"보기 흉하네요."

"그러게 말이다."

마법적인 가공을 하지 않은 몬스터의 뼈.

그럴싸하게 쌓아두었지만, 구조물로써는 영 아니었다.

실용성도 없고.

방어 기능도 모자라니.

송명석이 칼로 툭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았다.

그 안에는 무수한 괴물들의 사체가 나뒹굴었는데.

명백한 '제물'의 용도였다.

"먼저 가볼게요."

마담과 뱀파이어들은 수백 미터 상공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너도 가라."

[존명.]

송명석도 마담의 뒤를 따라갔다.

〔그대는 가지 않는 게냐?〕

'상황 좀 지켜보려고.'

단편적인 기사로만 봤던 동남아의 재앙.

해일의 피해 규모는 '피의 발렌타인' 사태와 비교하기도 민망할 만큼 엄청났다.

사태가 벌어진 게 현 시간대에서 조금 뒤의 일이라지만.

그 정도 의식을 벌이는 중심지의 전력이 만만치 않으리란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실은 정확한 날짜가 기억이 안 난단 말이야.'

회귀자라고 해서 만능은 아니다.

유진은 뼈로 만들어진 구조물을 내려다보았다.

"너희는 공중에서 견제를 맡아라."

[콰루루루.]

블러드 드래곤 5구는 하늘을 빙빙 돌며 브레스를 내뿜었다.

엉성하게 지어진 궁전을 감싸는 방어막이 혹한의 숨결을 막아냈고.

"침입자다!"

"누가 신성한 의식을 방해하는가."

사탄교 신자들은 각종 암흑 마법과 소환수, 혹은 암흑 정령을 동원해서 블러드 드래곤을 공격했다.

블러드 골렘과 결합되어 강화된 터라 어지간한 공격은 흘릴 수 있었지만.

적당하게 거리를 둔 채 견제에 치중했다.

[달의 주술]

[개기월식(皆旣月蝕)]

[혈마법]

[블러드 캐논]

은은하게 비추던 달빛이 사라지고.

붉은 광선이 사탄교 신자의 가슴팍에 커다란 구멍을 뚫었다.

"컹! 컹!"

-키르륵. 키륵.

혈마법으로 빚어낸 사역마들은 암흑 계약으로 불러낸 소환수와 뒤엉킨 채 싸움을 벌였다.

[모두 죽어버리십시오.]

송명석은 과감하게 중앙을 돌파.

정면에 모인 사탄교 신자들을 도륙하며 앞장섰다.

'너무 쉬워.'

유진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기억 속 재앙의 진원지는 여기가 아닌 걸까.

방어에 나선 신자 중에서 눈에 들어오는 강자도 딱히 없었다.

쓸 만 한 건 6성급 헌터 셋 정도.

"송명석아. 놓치지 마라."

[존명.]

유진이 손 쓸 것도 없이, 수하에게 지시해서 6성 헌터 셋의 주검을 챙겼다.

빠른 속도로 제압되는 사탄교 신전.

외성이 무너지고 벽 안쪽으로 진입하는 순간.

"불신자들이여. 어느 안전이라고 신성한 땅에 흙 묻은 발을 들이대는 건가!"

역오망성이 그려진 새빨간 옷을 입은 노인이 고함을 쳤다.

뒤이어 나타난 자들도 범상치 않은 기운을 흩뿌리고 있는 것이, 7성 헌터가 다섯이나 모여 있었다.

'와. 7성이 다섯 명이나 되다니. 너무 무서운 걸.'

〔조금은 영혼을 담아서 말하여라.〕

아군은 블러드 드래곤만 5구가 있는 걸.

사탄교 고위 간부들도 하늘을 배회 중인 블러드 드래곤들을 보더니 굳은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그 안배를 발동시켜야 할 것 같소."

"저 악적의 힘이 보통이 아니니. 어쩔 수 없구려."

자기들끼리 논의하던 사탄교 고위 신자들은 암흑 마력을 땅에 불어넣었다.

구구구궁-!

"어?"

심상치 않은 기운.

회귀 전에 본 적 있는 마법이다.

"이거. 혹시...."

"모든 괴수의 어머니여. 당신의 아이를 청하노니, 부디 우리 곁으로 보내주소서!"

뼈로 세운 궁전에서 새빨간 빛이 솟구치고.

기다란 그림자가 땅에 드리웠다.

차원을 뚫고 나타난 존재를 본 유진의 표정은.

"크흐흐흐."

꿈에 나올까 무서운 웃음으로 물들어 있었다.

250화 히드라(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