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한 판 붙어봅시다
[데스 나이트&호플리테스]
종족 : 언데드
등급 : ★★★★★★★★
◎능력치
힘 : 10,532
민첩 : 7,841
체력 : 9,476
맷집 : 10,189
영력 : 6,890
◎특성
▷불사의 존재[A+] / 신성 피조물[A] / 불사의 지휘관[A] / 암흑 강기[A] / 무영창[A] / 다중 연산[B]
◎스킬
▷전율의 일격[A] / 게헤나 플레어[A] / 죽음의 지휘[A] / 콜 슬레이브[A] / 피츠제럴드의 냉기[B+] / 강제 회복[B+] / 언데드 플레임[B+] / 파워 웨폰[B+]....
(이하는 접혀 있습니다. 확인하려면 해당 화면을 클릭하십시오.)
"젤나가 맙소사."
파프너의 목소리에서 경악감이 느껴졌다.
상태창을 보지 못해도 알 수 있었다.
늘 상식을 무너트리는 주인 놈이.
이번에도 괴물딱지를 만들어냈다는 것을.
"8성 맞지?"
"어."
"주인. 그 신성 주문은 술자보다 1성 높게 보정된다고 했잖아."
"그랬지."
신성 주문 호플리테스.
언데드 권속의 최대 능력은 술자 + 1성이다.
그렇지만.
애꾸눈의 성위는 8성으로 보정되었다.
"데스 나이트는 최소 7성이다."
뼈대는 데스 나이트의 힘.
살과 근육은 호플리테스의 능력이 깃들었다.
시체를 개조해서 영력과 성력이 충돌하지 않게 만듦으로써.
호플리테스 주문의 능력이 데스 나이트로 되살아난 애꾸눈의 힘을 증대시켰다.
"기분은 어떠냐."
[쿠훅. 아주 좋습니다.]
"널 쓰러트린 자한테 되살아났는데?"
[쿠후훅. 어차피 재미가 없는 삶이었습니다.]
애꾸눈은 고분고분하게 답했다.
상급 언데드는 굳이 '합일'을 쓰지 않아도 혼백과 몸뚱이가 결합되어 있다.
정확히는 혼백이 있어야 상급 언데드가 될 수 있다, 고 해야겠지.
보다 높은 힘을 다루려면.
혼백이 필수였다.
"죽기 전하고 얼마나 차이가 나나?"
[쿠후훅. 마법 주문 일부를 쓸 수 없습니다.]
"원소 마법인가."
[그 대신 암흑 마법과 강령술이 추가됐습니다.]
"조금 아쉽군."
유진은 혀를 찼다.
암흑 마법 다수는 흑마력으로 원소 마법을 흉내 낸다.
게이저드의 불이나 피츠제럴드의 냉기 등.
범용성은 높지만 위력이 떨어진다.
생전에 다중 속성 마법을 다루었던 애꾸눈의 입장이다 보니 약간의 페널티라고 봐야지.
대신이라고 해야 하나.
"강령술은 수준급이야."
[쿠훅. 감사합니다.]
데스 나이트는 일신의 무력도 대단하지만, 지휘관이기도 했다.
언데드 군대를 부리는 죽음의 장군!
준 8성도 아니고 정식 8성이다.
[신성과 영력이 공존하는 언데드를 만들었습니다.]
[만신전에 기록되지 않은 새로운 유형입니다.]
[세계의 규칙에 새 법이 추가됩니다.]
[죽음을 거스르는 개념에 새로운 존재가 기록됩니다.]
〔크하하하핫! 짐의 존재력이 더욱 늘어났도다!〕
'신성과 영력의 공존은 처음 있는 일이니까.'
디파일러를 제작했을 때도 시스템이 얼마나 호들갑을 떨었던가?
이제는 데스 나이트 + 신성 언데드다.
세계의 규칙이 개변되는 역사적인 순간이니.
크로노스가 새롭게 얻은 성좌명, 역천의 거인의 힘이 증대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와. 이건 못 이기겠는걸."
[쿠훅. 또. 싸웁시다.]
"좋아. 목숨 걸고 싸우는 게 아니면 괜찮지."
[당신은 죽어도 다시 살아납니다. 걱정 없습니다.]
"옛날 일이야. 이제는 목숨 원 코인밖에 없어."
접경지역에 숨겨진 기연을 획득했을 때의 일을 말하는 것이리라.
"생긴 게 다른데 어떻게 알았지?"
[쿠후훅. 말. 행동. 비슷합니다. 그걸로 짐작했습니다.]
오우거 답지 않게 머리도 좋아요.
애꾸눈이 흥미 위주로 움직이지 않고 전력을 다했다면.
접경지역에서 꽥 했을 거다.
'알고는 있었지만 참 무섭군.'
이젠 자신의 권속이다.
신성을 품은 이질적인 망자.
애꾸눈의 전투력은 회귀 전을 기준으로도 떨어지지 않았다.
8성 언데드가 흔한 줄 아니.
데스 나이트들을 수백 단위로 부렸지만, 8성인 둠 나이트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다 짐의 덕 아니겠느냐.〕
'내가 아니면 흉내도 못 낸다.'
네크로맨시에서 정점에 도달했던 실력.
크로노스가 신성 주문을 개발할 때 옆에서 조언해준 덕에 올라간 이해도.
두 주문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는 유진만이 가능한 이적이다.
'당장은 추가로 만들 수도 없고.'
호플리테스는 강력한 대신 하나만 권속으로 둘 수 있다.
낮은 수준의 주문에 여러 가지 옵션을 덕지덕지 붙일 수 없으니.
선택과 집중을 한 결과물이다.
'좀 더 연구하면 이 끔찍한 혼종을 여럿 만들 수도.'
디파일러에서 시작된 신성을 품은 언데드 제작.
개량하다 보면 회귀 전의 언데드 군대를 아득히 넘어선 강력한 군세를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
"애꾸눈을 동원하면 평양까지도 금방 밀겠어."
"당장은 안 쓸 거다."
"왜애애애애. 나 혼자 일하라고?"
"아라한의 눈은 많아. 마담이 최대한 정보를 차단하고 있지만, 그것도 완전하지는 않다."
데스 나이트&호플리테스로 되살아난 애꾸눈은 비밀병기다.
모체가 된 생전의 강함.
신성과 영력이 공존하면서 벽까지 넘어버린 8성의 괴물.
쓸 수 있는 패가 하나 더 늘어났으니.
결정적인 순간에 까야 하지 않겠어?
"이렇게 되면 전력에 여유가 생기는군."
준 8성인 이신우.
파프너가 놈을 붙들고 있는 동안 아라한 길드 본대를 쓸어버릴 계획이었다.
근데 진성 8성 괴물이 생겨버렸네.
"흐으응."
"걱정 마라. 네가 백성현을 처치하고 빨리 가면 된다."
"분발해야겠네."
애꾸눈이 이신우를 붙들어주면 파프너의 포지션도 바꿔야지.
부 길드 마스터인 백성현은 아라한 길드 정예를 이끌고 있을 것이다.
광화 특성인 이신우는 단독 행동을 할 터.
회귀 전에도 그랬으니까.
"국내는 이제 정리하자."
아라한아.
이제 승부를 내자.
*
통일대교 앞에 정렬한 헌터 부대.
아라한 길드 마크를 가슴팍에 붙인 이들이 모여 있다.
"오래간만이다."
광증이 심해지면서 공식 석상에 나오지 않았던 이신우.
그가 최근 입장문을 발표한 이후, 처음으로 대중 앞에 섰다.
척! 척!
이신우를 본 헌터들은 일제히 발로 땅을 가볍게 두드리고.
손을 45도 각도로 올려서 이마에 붙여 경례를 했다.
군기를 바짝 세운 부대를 보는 기분.
백성현의 작품이다.
"최근에 떠오르는 신성, 천유진과 블랙 컴퍼니가 모범을 보여 인간사냥꾼을 토벌했다. 그래서 북쪽으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찰칵! 찰칵!
기자들은 이신우의 말을 받아 적거나 셔터를 눌렀다.
"마침 나도 최근에 깨달음을 얻어서 대외 활동에 나서려던 찰나였으니. 아라한 길드도 이북 재건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고자 한다."
유진을 명확하게 지목함으로써.
이번 북진의 목표가 블랙 컴퍼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은유적으로 말한다.
기자들도 이신우의 말에 숨겨진 뜻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기사에 해석을 달아놓지는 않았다.
"아라한 길드의 정예는 개성을 경유, 해주를 탈환한다."
와아아아아!!!!
도열 중인 헌터들이 고함을 질렀다.
마력이 실린 목소리가 섞이면서 공기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일반인들은 듣기만 해도 정신을 잃을 정도의 강렬한 파장.
기자들은 아이템으로 보호받았지만, 그 기세 앞에 움츠러드는 것까지는 피할 수 없었다.
"가자."
임시로 만든 단상에서 내려온 이신우.
백성현이 옆으로 붙었다.
"훌륭하십니다. 마스터."
"네가 적어준 대본 아니던가."
"타인의 존경과 두려움을 끌어내는 건 대본이 아닙니다."
백성현에게는 그게 없다.
대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
"저는 그림자입니다. 마스터가 돋보일 때 드리우는 어둠."
음지에서 수를 쓰고.
함정을 파고.
단계적으로 계획을 짜서 원하는 상황이 나오게끔 할 순 있지만.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없으니, 부사장 직함이 최선이었다.
"네가 있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이신우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마스터."
"그러니 잘 부탁하마. 백성현 부사장."
"예."
두 사람은 아라한을 지탱하는 기둥.
하나가 빠지면 다른 한 명도 온전히 설 수 없다.
결국 아라한이라는 길드가 무너지겠지.
"계획에는 변화가 없나?"
"예. 개성 공단을 거쳐서 북서쪽으로 나아간 후, 우회해서 천유진을 공격합니다."
"목격자가 나올 수도 있다."
"천유진의 영역은 안개로 감싸여 있습니다. 통신 기기도 마비된다고 하더군요."
"대책은 마련해두었겠지."
"예. 재밍이 걸려도 통신이 가능할 만큼 성능을 강화했습니다."
아라한 길드에서는 지난 유진의 행보와 나찰 길드와의 싸움.
그 외에도 여러 라인을 통해 정보를 축적했다.
대응책은 몇 개나 마련해두었다.
국내 3강에서 첫째가는 길드.
아라한이 작정하고 대책을 준비했으니, 유진도 어쩔 수 없으리라.
통일대교를 넘어 개성으로 향하는 아라한 길드.
길가에 배치된 언데드들이 힐끗거린다.
백성현은 흥, 하고는 코웃음을 쳤다.
'숨길 생각은 없습니다.'
유진이 모를 리 없다.
나찰 길드에서 병력을 우회했을 때도 귀신 같이 알아채지 않았던가.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마담의 정보망에 걸리지 않고 전력을 비밀리에 모아봐야 한계가 명확하다.
'정면으로 오면 어떻게 할 겁니까?'
준 8성인 이신우 외에도 아라한의 전력은 막강했다.
7성 헌터만 열 명.
백성현은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마법계 헌터다.
국내에서 백성현보다 강한 마법계는 찾아볼 수 없으니.
이신우에게 가려졌을 뿐, 그 자신도 한국에서 손에 꼽히는 강자다.
'천유진. 반드시 제 손으로 죽여드리겠습니다.'
살기를 담아 언데드를 노려봐도, 멍청한 해골바가지는 턱뼈를 딱딱거릴 뿐 어떤 반응도 내지 않았다.
자잘한 전투가 일어나긴 했어도 개성 공단까지는 무사히 도착.
1시간 정도 쉰 아라한 길드 정예 헌터들은 다시 북상했다.
반나절을 멈추지 않고 전진.
몬스터 무리와 쉴 새 없이 조우했지만, 피해 하나 없이 격퇴했다.
"마스터."
"이쯤이면 되었나."
"북동쪽으로 살짝 우회. 아래로 내려가면 개성이 나옵니다."
"우리를 지켜보는 눈은 없군."
"준비하고는 있을 겁니다."
"시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렇게까지 번거롭게 움직였는데 말이야."
이신우의 눈동자 위로 붉은 광망이 아른거린다.
꾹 눌러놓은 분노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모습이다.
"투약을 실시한다."
백성현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마법계 헌터들이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성자의 정신.
블랙 컴퍼니에서 만든 약으로, 대중화가 되지 않아서 물량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아라한에서는 뒷 라인을 통해 최대한 확보했다.
이동하면서 마법을 쓸 수 있게 해주며 정신력을 고양시키는 능력.
"속도전으로 간다."
파파팟!
아라한 길드 정예.
100명의 헌터들은 스킬을 사용해서 빠르게 이동했다.
"쿠오오?"
"시끄럽다."
촤아아아악!
오우거를 반으로 찢어버린 이신우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흉흉한 살기가 퍼져 나가니 아라한 길드 정예를 막아서던 괴물들이 사방으로 도망쳤다.
"히익."
"길드장님의 능력. 역시 무섭다."
"우리가 적이 아니라서 다행이지."
본격적으로 이신우가 살기를 드러내자 괴물들도 적이 되지 않았다.
칼날이 향하는 방향은 개성.
네크로폴리스였다.
201화 당신은 모르실 거야
네크로폴리스 주변에는 눈이 많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키히히힛!
공중을 누비는 무수한 숫자의 망령들.
[다크 콜링] 같은 저주를 사용하지 않아도.
네크로폴리스의 영향을 받아 자연적으로 탄생한 망령들은 모두 유진의 눈과 귀가 되어주었다.
"손님 오신다."
[주군. 부디 선봉에 서는 영광을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있어봐. 간 먼저 본다고 말한 게 10분 전인데 벌써 까먹으면 어떻게 하냐."
[크읏!]
"급하게 나설 것 없다."
아라한 길드와의 전면전은 처음이 아니다.
회귀 전.
놈들하고는 이미 끝장을 봤었다.
'백성현이 어떤 수를 준비했을지도 뻔하단 말씀.'
당신은 모르실 거야.
모든 패를 깐 채로 게임 중이란 사실을.
이 상황에서 이긴다고?
판돈이 몇 배는 되어야 가능할 텐데, 유감스럽게도 이번 승부에서 자본이 빵빵한 것은 자신이다.
'네크로폴리스 영역 안에서는 망자들의 힘이 증대된다.'
모든 스탯 50% 보너스.
제한된 시야.
그 외에도 자잘한 버프까지 붙은 언데드들을 상대해야 한다.
안개 속에서는 하급 언데드들이라고 무시, 무작정 돌진하기가 어렵다는 의미.
"먼저는 소모전이다."
[주군다운 비겁ㅎ... 아니, 훌륭한 전술입니다.]
네크로폴리스에 속한 언데드는 2만 구.
개성 아래에 흐르는 영맥이 원체 강한 덕에 상비 병력을 두 배로 늘렸다.
유진의 지시에 맞춰 포위망을 갖추는 하급 언데드들.
이 근방은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읽고 있기에 진형을 짜기가 수월했다.
-그겔.
-그그극.
-으어어억.
개활지를 완전히 덮어버린 망자의 물결.
아라한 정예 헌터들은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바글바글한 언데드들 사이로 길을 냈다.
일직선으로 네크로폴리스를 향해 뛰어오는 아라한 길드 정예 100명.
돌파력만 놓고 보면 국내에서 제일이었다.
[이러다 금방 돌파당하겠습니다. 주군. 여기서는 제가....]
"2군. 아라한의 뒤를 쳐라."
[명을 받듭니다.]
최형태를 필두로 한 데스 카발리에 1천 구가 출동.
전장을 크게 우회했다.
하급 언데드 군집 한가운데를 억지로 비틀며 나아가고 있는 아라한 정예 헌터들은 갑작스러운 뒤치기에 당황했다.
"암흑 투기라고?!"
"후방에서 중급 언데드들이 수백 단위로 출현!"
"여기서 발이 묶이면 죽도 밥도 안 된다."
백성현은 냉정하게 판단했다.
"형식 팀장. 준영 팀장. 둘이 후위를 막아주세요."
"알겠습니다."
"전멸시키라고는 안 합니다. 천유진의 목을 베기 전까지만 버티면 됩니다."
말이야 쉽지.
언데드들이 바글바글한 개활지에서 후위를 맡으란 이야기는 죽으란 것과 마찬가지였다.
일곱 개의 별을 완성시킨 두 팀장조차.
망자의 땅에서는 무사 귀환을 장담할 수 없었다.
"우리에게는 선택지가 없어."
"앞으로 가냐. 아니면 죽느냐. 그 차이다."
두 팀장은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위험한 작전을 듣고도 반발하지 않았다.
아라한 길드가 국내 1위로 우뚝 설 수 있게 된 건 백성현의 날카로운 판단력과 이신우의 무력 덕분이다.
지시대로 버티는 게 생환률을 조금이라도 올릴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파프너."
"정면으로 말고 간만 보라는 거지?"
"어. 내려가면 뼈도 못 추리고 당할 거다."
"자존심 상하지만 그건 주인 말이 옳겠지."
[폴리모프]
본신으로 돌아온 파프너는 홰를 치며 개활지로 향했다.
[원시 마법]
[사룡의 비행]
날개에서 생성된 수십 개의 원시 마법진에서 일제히 검은 광선이 빗발쳤고.
아라한 길드 정예는 방어 마법과 신성 주문으로 거뜬히 막아냈다.
[헹. 역시 대단하네.]
7성 헌터만 열 명.
두 사람은 후위로 돌려서 견제로 투입한 최형태와 데스 카발리에를 상대하고 있지만.
아라한 길드의 정예 헌터들은 여전히 강력했다.
〔이래서야 소모전은 틀렸구나.〕
'적의 돌파력은 예상했던 수준이다.'
회귀 전보다 몇 년 이르게 벌어진 아라한과의 전면전.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의 경이로운 돌파력도 눈에 차지 않는다.
〔예상하였다?〕
'일점 돌파하려던 병력을 쪼갰어. 이미 목적은 달성했다.'
공중에서는 파프너가 쉼 없이 견제했고.
진형 후방에서 물어뜯는 데스 카발리에도 무시할 수 없었다.
공격에 대응하려고 병력을 분산시킨다?
이미 그 시점에서 목표를 이루고도 남은 거지.
"송명석아."
[주군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커피 좀 끓여 와라."
[...존명.]
아라한아.
대등한 싸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니?
'내 옷자락도 못 보고 끝날 거다.'
데스 나이트와 호플리테스의 성질을 동시에 보유한 희대의 괴물.
애꾸눈을 되살리면서 마지막 한 조각까지 맞춰졌다.
유진이 제일 신경 쓴 것은 아라한 길드의 최고 전력인 이신우였다.
단독으로 어마어마한 돌파력을 지녔고.
부상을 입거나 다수의 적을 상대하면 더 강해지는 능력까지 있으니.
다수 병력 운용에 특화된 네크로맨서한테는 천적 같은 적이다.
'이신우가 나서는 순간이 이번 전쟁의 승부처다.'
차라리.
아라한 길드에서 정예만 추리지 말고 휘하 길드원들을 모두 데려왔으면 상황은 달라졌으리라.
소모전으로 가면 패배가 확실하니 일점으로 돌파해서 자신의 목을 따겠다?
'바라는 바다.'
절대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서 허우적대다가 쓰러지는 것.
유진이 짜놓은 아라한 길드의 미래였다.
*
쾅! 콰앙!
정수리 위로 빗발치는 시커먼 광선.
백성현은 지팡이로 바닥을 탁, 탁 쳤다.
[카드게의 지팡이 - 내장 스킬 : 파운틴 배리어 x 5]
아티팩트에 내장된 방어 주문이 허공에 전개되고.
광선 다수가 방어막에 튕겨나서 사방으로 튕겨나 언데드들에게 쏟아졌다.
[제법인 걸. 내 마법 방향에 맞춰 방어마법을 전개해서 도탄을 시킬 줄이야.]
파프너는 감탄하면서도 원시 마법을 연달아 전개했다.
그녀의 마력 양은 방대했다.
미완성된 엘드리치 드래곤 시절 때부터 [마투사]의 능력으로 영력 스탯을 어마어마하게 쌓았고.
진정한 용족으로 거듭난 후에는 드래곤 하트가 생성되면서 영력 회복량이 말도 안 되게 늘어났다.
동일 성위 마법계 헌터를 아득하게 상회하는 영력 양.
백성현을 포함해서 7성 마법계가 셋이나 되었지만, 총량에서는 파프너가 앞섰다.
"천유진이 드래곤을 부린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마스터. 진정한 용족은 못해도 8성입니다. 저 도마뱀은 그렇게까지 강하지 않습니다."
백성현은 침착하게 대응하며 상황을 분석했다.
"적은 소모전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부사장의 예상대로군."
"초반에 무리하면서 전진한 덕에 개성까지 거리를 최대한 좁혔습니다."
"이제 남은 건 내 몫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마스터."
헌터 숫자가 극소수인 인간사냥꾼을 왜 밀어내지 못했는가?
소모전에서 압도적으로 강하기 때문이다.
아라한 길드야, 작정하고 북진을 계획했으면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인간사냥꾼을 쫓아낼 만한 힘이 있었다.
반대로 보면 '피해'를 입지 않고는 몰아내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천유진은 그런 인간사냥꾼을 소모전으로 이겼습니다."
"시간을 주면 불리하다는 건 알고 있다."
"적은 우리를 상대하기 위해 소모전을 선택했습니다."
"병력을 분산시켰지."
네크로폴리스에서 쏟아져 나온 언데드 병력은 아라한 길드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버프를 받은 하급 언데드들은 무시하지 못할 만큼 강력했고.
기동력에서 앞선 죽음의 기병이라던지.
공중에서 일방적으로 공격을 쏟아 붓는 파프너 등.
유진이 이번 전쟁을 위해 준비한 언데드들은 너무나도 강력했다.
그렇기에.
"지금이야말로."
"머리를 노려야 할 때."
아라한 길드는 처음에 수립한 계획대로 움직였다.
투쾅!
지면을 거세게 차면서 아라한 본대에서 이탈한 이신우.
하급 언데드들이 그를 막아보려고 허우적대지만, 돌진에 휘말리기만 해도 뼈와 살이 뭉개지면서 산산조각 났다.
"우리는 천천히 나아간다."
백성현은 아라한 본대를 지휘했다.
가만히 서 있으면 유진이 강력한 언데드들을 빼서 이신우를 마크할 테니.
아라한 본대도 전진해야 유진의 시선을 빼앗을 수 있다.
쉴 새 없이 울리는 폭음.
이신우는 그 소리를 무시하고 오로지 앞만 바라봤다.
'내가 할 일은 하나 뿐이다.'
천유진.
늘 빛나야 할 아라한의 광채를 빼앗은 가증스러운 자.
유진을 생각하면 25년 전에 흔적까지 지워버린 박하늘이 떠올라서 더 기분이 안 좋았다.
'네가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다.'
우드득- 우득-.
길을 막은 하급 언데드들이 모조리 분쇄되었다.
싸움을 거듭할수록 부풀어 오르는 근육.
타오르는 분노가 정신과 몸을 잠식하면서 벌어진 현상이다.
[근력 10% 상승.]
[민첩 10% 상승.]
[맷집 12% 상승.]
....
싸울수록 더 강해지는 특성.
광화의 단계가 올라가면서 붉은 기류가 솟구쳤다.
'분노를 다스리려 하면 안 된다.'
이신우가 얻은 깨달음.
폐관수련을 하던 중, 유진의 행보와 아라한 길드가 입은 피해를 듣고 나서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너무 화가 나서 수련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 얼마를 발광했던가.
게이트 내부를 초토화시킨 후, 그는 분노를 다스리는 게 답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분노와 혼연일체가 되는 것. 억누르지 않고 지배해야 한다.'
회귀 전에 이신우가 그 깨달음을 얻은 것은 2033년 즈음,
유진과 아라한 길드의 충돌 시기가 빨라졌고.
이신우도 더 빨리 분노를 지배하게 되었다.
크로노스가 심심할 때마다 경고했던 회귀의 나비 효과인 셈.
언론에는 8성으로 가는 실마리를 잡았다고 했지만.
개성 원정 직전.
이신우는 그토록 원하던 여덟 번째 별을 손에 넣었다.
아라한 길드에서 준비한 비장의 수.
'천유진도 이건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이번 전쟁.
승리하는 것은 아라한이며, 자신이다.
그렇게 확신한 이신우가 살기어린 눈으로 네크로폴리스를 바라봤다.
[광화의 단계가 상승합니다.]
1.5배 가량 부풀어 오른 이신우의 전신이 이제는 붉어졌다.
움직이면서 생기는 붉은 잔상.
그 궤적에 휘말린 언데드들은 모조리 가루로 화했다.
[본 월 x 10]
스켈레톤 메이지들이 뼈로 만든 벽을 일으켰지만.
짜악!
박수 한 번에 성채처럼 높이 솟아올랐던 벽들이 허물어진다.
언데드 군대 곳곳에 배치해둔 스켈레톤 나이트들이 암흑 투기를 휘두르기도 했지만, 근육을 뚫지 못하고 칼과 암흑 투기가 소멸되었다.
"흐흐흐, 흐하하하!!!"
이신우는 즐거웠다.
마음 놓고 분노를 터트려본 게 얼마던가.
피.
그리고 파괴.
더 많은 살육만이 그의 허기짐과 갈증을 채워줄 수 있다.
언데드 군대를 10분도 안 돼서 돌파한 이신우는 네크로폴리스에 발을 디뎠다.
[쿠훅. 저리 가라.]
쩌어엉!
아니.
디뎠었다.
커다란 괴물의 풀스윙을 무방비하게 허용한 이신우의 신형이 수십 미터 뒤로 튕겨났다.
"흐흑, 흐흐흐흐."
피해는 경미했다.
고유 특성인 광화와 오딘의 가호가 동시에 발동된 상황.
어지간한 공격은 이신우에게 생채기 하나 입힐 수 없었다.
그런데.
힘으로 나를 밀어내다니, 라는 의혹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쿠훅. 너. 아는 얼굴이다.]
"애꾸눈?"
[너 때문에 나 죽었다. 복수할 때다.]
데스 나이트 + 호플리테스로 되살아난 접경지역의 폭군.
애꾸눈은 과거에 진 빚을 갚을 생각에 기뻤다.
202화 악연의 끝(1)
붉은 거한이 세게 땅을 구르자, 일대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크게 흔들린다.
근처에 있는 언데드들은 충격의 여파에 휩쓸려서 모두 가루가 되었다.
[쿠! 오! 오! 오!]
물리력을 지닌 망자의 사념이 충격파를 해소했다.
쩌어엉!
충격파와 사념이 부딪쳐서 그대로 상쇄되었지만.
혈투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에 불과했다.
"흐흐흐흐, 크흐."
이신우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걸쭉한 타액.
반쯤 돌아버린 눈동자 위로 섬뜩한 살기가 솟구쳤다.
붉어진 피부 위로 떠오르는 룬 문자.
아스가르드의 신왕 오딘이 부여한 [베르세르크], 그러니까 광전사의 능력이 최대로 발휘되었다.
0.01초.
평범한 사람이라면 인지하지도 못할 찰나의 순간에 거리를 좁히고는.
3층 건물 크기의 괴물의 다리를 붙들더니 번쩍 들어서 땅에 그대로 내리꽂으려 했다.
[쿠훅. 재미있다.]
애꾸눈조차 한 순간 반응하지 못했을 정도의 속도.
몸이 슬쩍 들리는 순간.
허벅지와 다리에 암흑 강기를 둘러서 이신우의 힘을 살짝 해소하며 무영창으로 주문을 사용했다.
[피츠제럴드의 냉기]
저저적!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즉시 대상을 얼려버리는 지옥의 추위.
암흑 마법으로 빚어낸 냉기는 원류인 빙결 마법에 비해 위력이 조금 떨어졌지만.
상대의 원소 저항력을 뚫고, 즉발 효과까지 유발하는 장점이 있다.
얼어붙은 이신우의 발.
그가 힘을 주니 금세 얼음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애꾸눈은 상대의 행동이 굼떠진 틈을 놓치지 않고 반대쪽 다리에 힘을 주어 중심을 잡고.
살짝 들린 다리를 그대로 쭉 뻗어 이신우를 걷어찼다.
콰아앙!
발차기에 실린 힘은 6성 마법을 응축시킨 것보다 훨씬 강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단단한 광물인 다이아몬드도 한 순간에 산산조각 낼 정도의 위력.
"흐헤헤헥!"
수십 미터 위로 치솟아 오른 이신우가 고통 대신 괴성을 터트렸다.
[카타스트로피]
[오러 블레이드]
허공에서 내리 꽂히는 붉은 점.
마치 운석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이신우가 지상으로 떨어지는 순간, 정말로 운석이 아닐까 생각되는 충격파가 개성 일대를 뒤흔들었다.
암흑 강기를 두른 애꾸눈이 백 미터 넘게 튕겨났고.
개성을 빙 두르고 있는 뼈의 장막 일부가 확산된 오러 블레이드에 휩쓸려서 산산조각 났다.
말이 좋아야 일부이지.
개성을 감싼 뼈 성벽은 길이만 수십 킬로에 달했다.
약 1킬로미터가 순식간에 철거.
방어 포탑들도 충격에 휘말려서 완전히 소멸했다.
[쿠후훅. 재미있다.]
애꾸눈의 팔은 멀쩡했다.
암흑 강기에 코팅하듯 성력을 둘러서 [호플리테스]의 능력을 발휘.
성력으로 만든 중장갑을 십분 활용, 피해의 상당 부분을 떨쳐내어 몸에 가해지는 부담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무영창]
[게헤나 플레어]
지옥 화염이 땅거죽을 훑고 지나가자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매캐한 연기가 솟구쳤다.
순식간에 녹아버린 지면은 거품을 보글보글 토해냈고.
그 종착역에 선 이신우는 불꽃과 용암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쿵!
다시 한번 지면을 타고 퍼져 나가는 충격파가 화염과 주황빛의 용암을 몰아냈다.
[쿠후훅.]
발로 지면을 가격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은 애꾸눈.
거리를 좁히고는 암흑 강기와 성력으로 강화한 주먹을 내질렀다.
이신우도 마주하며 정권을 내질렀고.
충돌만으로 땅이 푹 꺼지며, 서로의 힘을 해소하지 못하고 정반대로 튕겨났다.
말 그대로 지도를 새로 쓰는 전투.
개성 일부가 실시간으로 바뀌어갔다.
*
[제가 뭘 본 겁니까?]
"뭐기는. 8성끼리의 싸움이지."
8성은 초월의 영역에 반쯤 발을 걸친 경지다.
충격파만으로 지형이 바뀔 정도.
저 힘을 온전히 땅에 투사했으면 진도 6.0 정도의 지진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고도로 발전한 힘은 마법과 구분이 안 되는 법이다."
[과학 아닙니까?]
"그거나 이거나."
쯧.
이건 좀 예상 밖이군.
한 치도 밀리지 않고 격돌하는 이신우.
회귀 전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여덟 번째 별을 완성시킨 것이다.
〔크하하핫. 짐이 경고하지 않았느냐.〕
'그 놈의 나비 효과 타령은.'
인정해야겠다.
이번만큼은 크로노스의 말이 옳았다.
〔한데 그대가 잘 몰랐을 수도 있지 않느냐.〕
'그럴 리 없어.'
회귀 전.
아라한 길드와 전면전을 벌였을 때만 해도 이신우는 7성이었다.
격돌 중에 깨달음을 얻어 8성으로 경지가 올라갔고.
유진은 생애에서 몇 없는 죽음의 위기를 경험했다.
'나 때문에 너무 빡친 건가.'
제길.
이신우랑 직접 엮일 일이 없다 보니 이유가 짐작도 안 가네.
하마터면 대참사가 일어날 뻔했다.
'애꾸눈 아니었으면 큰일 났겠어.'
〔계약자는 이미 성위가 훨씬 위인 적을 상대로도 여러 번 승리를 거두지 않았느냐.〕
'8성은 좀 달라요.'
성위가 올라갈수록.
단계 별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난다.
파프너가 전력을 다하면(상대가 저항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달고) 서울시를 초토화시키기까지 이틀 정도 걸린다.
개성 앞마당에서 날뛰고 있는 둘이라면 얼마나 걸릴까?
'한나절도 안 돼서 가능할 거다.'
8성끼리 싸우면 일대의 지도가 바뀐다는 건 괜한 말이 아니다.
걸어 다니는 전략병기.
마법계 헌터는 '파괴'란 면만 놓고 보면 이신우나 애꾸눈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8성 광역 마법을 영창하면 반나절도 안 돼서 서울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다.
'이신우는 맡겨둬야겠어.'
섣불리 개입했다간 역으로 우리 쪽 이빨이 뽑히게 생겼다.
"송명석아."
[예. 주군.]
"드디어 네가 활약할 때가 왔다."
[맡겨주십시오.]
원래는 송명석을 조금 더 늦게 투입시킬 생각이었다.
근데 개성 앞마당에서 날뛰고 있는 이신우를 보니, 빙 돌아서 투입시켜야겠다.
[제가 자리를 비워도 괜찮겠습니까?]
"왜. 이신우가 눈 돌아서 여기로 달려올까 걱정되냐."
[그렇습니다.]
"이미 눈이 돌아버려서 괜찮아."
이신우는 폭탄이다.
비유적이며, 동시에 직설적으로 말해도 통하는 말이다.
몸에서 끊임없이 증기를 뿜어내고.
1.5배 정도 커져서 혈류가 전신을 붉게 물들일 정도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으로 진화(?)를 완료했다는 의미다.
"애꾸눈 말고는 들어오는 게 없을 거다."
[알겠습니다.]
만약 이신우가 팔 하나 정도는 줄 각오를 하고 강행돌파하면?
어떻게 되긴.
주옥 되는 거지.
네크로폴리스의 방어 포탑들과 유진이 남긴 모든 수를 동원해도.
이신우라는 폭주기관차는 막을 수 없다.
'흑탑 위를 벗어나면 지휘가 어려워진다.'
그러니.
자신은 이 곳에 있어야 한다.
공들여서 만든 수하들을 믿으며.
[주군께 승리를 바치겠습니다.]
"오냐."
송명석은 정예 언데드들을 대동해서 개성을 벗어났다.
*
아라한 본대는 망자들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차근차근 나아갔다.
'계획대로다.'
백성현은 승리를 확신했다.
8성에 도달한 길드 마스터.
이신우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대한민국을 통틀어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가 여덟 번째 성위에 오른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경이로운 돌파력만큼은 전 세계를 통틀어도 이신우보다 뛰어난 헌터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마스터께서 천유진만 쓰러트리면 된다.'
오히려 걱정해야 할 것은 폭주 상태인 이신우를 말리는 것이지.
백성현은 유진이 이 위기를 벗어날 방법이 없을 거라고 내심 확신했다.
'그래도 액션은 필요하다.'
아라한 본대가 곧바로 철수하면 유진의 전력이 이신우에게 모일 것이다.
혹시.
만약에라도 이신우가 쓰러진다면?
가능성은 크지 않았지만, 백성현은 마음을 놓지 않았다.
유진한테는 '가능성'이란 말이 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길을 열겠다."
"알겠습니다."
이왕 시선을 분산시켜줄 거면.
탐스러운 미끼처럼 보이게 해줘야지.
백성현은 지팡이에 마력을 집중, 빠르게 재배열했다.
[화염 마법]
[7성 - 오버 카타스트로프]
지팡이 끄트머리에 응축된 극한의 열기가 일순간 번쩍- 강렬한 빛을 토해냈다.
샛노란 광선이 일직선으로 뻗어나갔고.
빛무리에 휩쓸린 언데드들은 가루 하나 남기지 못하고 소멸되었다.
쿠콰콰콰콰!!!
7성 화염 마법 중에서 수위에 꼽히는 파괴력!
오버 카타스트로프는 망자의 파도를 반으로 갈라버렸다.
"쯧. 2천 정도인가."
백성현은 못마땅한 투로 중얼거렸다.
오버 카타스트로프는 발군의 파괴력에 사거리도 수 킬로미터는 되어서 단일 / 범위 마법 양쪽으로 모두 활용이 가능하다.
그 대신 마력 소모량이 어마어마했으니.
넓게 퍼져 있는 언데드들을 일소할 수는 없었다.
[거기에 있었군요. 부사장님.]
채앵!
지근거리에서 들린 섬뜩한 사념.
용족의 비늘을 전신에 두른 기묘한 생김새의 언데드가 아라한 본대로 다가와서는 칼을 휘둘렀다.
"당신. 나를 알고 있습니까?"
[알다마다요. 따로 뵙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누구신지."
[아라한의 초신성이라고 하면 기억이 나실 것 같군요.]
"...설마."
[그렇습니다. 부사장님. 지옥에서 돌아왔습니다.]
"역시 천유진의 장난질이었군요."
대구 이중 게이트.
불사조 길드의 신예인 장미선을 겨냥해서 만든 함정.
그때 총 지휘를 맡았던 송명석은 시체도 남지 않고 죽었다, 고 했었다.
"천유진이 시체를 다룬단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저도 참, 이런 실수를 할 줄이야."
[상관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이제 곧 죽으실 텐데요.]
"벽도 넘지 못한 당신이 어떻게 날 죽일 수 있다는 건지 궁금하군요."
[벽 말입니까?]
파츠츠츠츠!!!
쌍검을 물들이는 흑색의 기류.
암흑 투기보다 상위 개념이자, 무투계 헌터라면 누구나 꿈꾸는 파괴의 권능인 암흑 강기(오러 블레이드)였다.
아라한 길드와 결전을 벌이기 직전.
송명석은 파프너에게 조언을 구해 몸을 구성 중인 용족의 기운에 적응했다.
무투계 헌터로써의 깨달음은 모자랐지만.
변칙으로 만들어낸 용아병의 개념을 이해함으로써.
그는 7성의 벽을 넘을 수 있었다.
[암흑 강기]
[텐터클 블레이드]
[분광검 - 4식 적광검 x 5]
수 미터로 솟구친 암흑 강기가 무투계 헌터들을 마구 몰아붙였다.
"오러 블레이드를 5미터 넘게 뽑아냈다고?!"
"버텨라. 놈의 마력이 금방 고갈될 거다!"
암흑 강기의 완성도는 높지 않았다.
결국은 변칙.
정석적인 방법으로 벽을 넘어선 게 아니기에, 송명석이 일으킨 암흑 강기는 형태를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다.
동일 성위 헌터가 펼친 오러 블레이드에는 미치지 못하는 위력.
[제가요? 마력이 고갈난다고요?]
송명석은 비웃음을 흘렸다.
새 몸뚱이로 갈아타면서 가진 장점은 어마어마한 영력 양.
머리 위에서 폭격 중인 파프너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일반적인 무투계 헌터의 5배에 해당하는 영력을 보유하고 있다.
전선에 투입되기 직전, 유진에게 버프도 몽땅 받았고.
네크로폴리스의 버프 효과 덕에 실질적인 영력 수치는 7배에서 8배 정도.
암흑 강기의 완성도가 낮은 건 텐터클 블레이드로 출력을 올려서 극복했다.
[그리고 말입니다. 당신들이 신경 써야 할 건 나만 아니지 않습니까?]
[좋은 지적이야.]
하늘 위에서 들리는 쾌활한 사념.
어울리지 않게 발랄한 음색과 함께 수직 낙하한 파프너가 아라한 길드 정예를 향해 쇄도했다.
낙하 중에도 원시 마법을 사용.
소용돌이치듯 회전하는 광선 다발이 아라한 정예의 방어를 두들겼고.
[암흑 강기]
[케넥 전투술 - 1장 낙엽치기]
사선으로 그어지는 암흑 강기가 헌터 몇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오래간만이야. 백성현 씨.]
"...당신은 또 누군데."
[현생의 이름은 파프너. 생전은 박하늘이라는 이름을 썼지.]
백성현의 눈이 부릅 떠졌다.
203화 악연의 끝(2)
"...재미있는 농담이군요."
[남 이름 가지고 농담 취급 하지 마.]
"당신은 죽었습니다."
[25년, 아니. 이제는 26년 됐네.]
"이 세상에서 당신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인이 날 기억해주더라고.]
파프너는 씩 웃었다.
그래.
세상은 그녀의 희생을 기억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눈앞의 원수가 벌인 공작으로 인해 모든 기록이 지워졌고.
박하늘을 알고 있던 사람들의 기억도 시간이 지날수록 바래졌다.
오직.
유진만이 그녀를 기억해주고.
빼앗긴 것을 대부분 찾아주었다.
"그 복수 하나 때문에 26년 동안 구천을 맴돈 겁니까?"
[군자의 복수는 10년을 기다려도 늦지 않다잖냐.]
"큭큭. 고귀했던 박하늘 씨도 결국 타락했군요. 그런 말을 서슴없이 지껄이다니."
백성현은 그 답지 않게 거친 말투로 대꾸하며 당황한 마음을 감추었다.
'언제부터였지?'
유진이 각성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파프너는 늘 그의 곁을 지켰다.
아라한 길드 신입 헌터와 시비를 붙었을 때만 해도.
신관 직업군인 유진에게 성좌가 내려준 대전사라고 판단했을 정도였으니.
그렇지만.
파프너 = 박하늘이라고 한다면.
계산은 완벽하게 틀어진다.
'천유진은 박하늘의 혼백을 손에 넣고 언데드로 되살렸다.'
무슨 방법으로 지박령을 되살렸냐고?
이 순간에 와서 뭐가 중요할까.
핵심은 1년 전부터, 파프너와 유진이 아라한을 적으로 규정하고 이 순간을 위해 칼을 갈아왔다는 것이다.
'시작부터 잘못 되었다.'
중급 포션 제작 방법으로 입질을 했을 때부터.
유진은 칼날을 아라한 길드의 목에 겨눈 채, 날을 세우고 있었다.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만약에.
조금이라도 이 사실을 빠르게 알았다면....
'의미는 없군요.'
백성현은 모든 것을 이해했다.
파프너.
아니, 생전에 가장 큰 적이었던 박하늘이 제 정체를 드러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다는 말.
다른 말로는 승리를 확신했기 때문이다.
[사실 복수는 나한테 있어 부차적인 문제가 됐어.]
"구태여 박하늘이라는 이름을 밝혔는데.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너희가 왜 죽는지는 알아야 하니까 말해준 거고.]
파프너의 어조는 평온했다.
[사실 주인한테는 말 못한 게 하나 있어.]
"양심고백이라도 하는 겁니까?"
[고백까지야. 내가 죽기 전에는 고백도 많이 받았지.]
"그런 건 궁금하지 않습니다."
진짜인데, 라고 중얼거린 파프너는 다시 싱글벙글 웃었다.
[난 복수보다 주인의 소망을 들어주는 게 중요해.]
아라한과 결전을 벌이기 전.
유진이 그녀를 걱정했지만, 실은 복수를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다.
아라한과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니.
유진을 도와 싸우다보면 복수란 생전의 목표는 달성될 것이 분명했다.
[천유진의 대전사로써. 너희를 죽이겠다.]
이건 사사로운 복수가 아니다.
섬기는 이의 뜻을 따라 행동하는 것.
송명석이 그토록 목매다는 '대전사'라는 칭호에 신경 쓰지 않는다던 말과 달리.
그녀는 유진의 대전사라는 것에 자긍심을 느꼈다.
"우린 적입니다. 달라질 건 없습니다."
[내 마음가짐의 차이야.]
"그러면 볼품없는 자존심과 함께 죽어버리십시오!"
[무영창]
[화염 마법]
[라이트닝 인페르노]
기습적으로 쇄도화는 벼락 다발.
전방을 모두 뒤덮어서 회피 기동도, 뒤로 물러날 수도 없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온 번개를 무슨 수로 피하겠는가.
파프너는 킁, 하고 콧김을 내뿜고는 두 날개를 거세게 퍼덕였다.
[암흑 강기]
피막을 뒤덮는 시커먼 기운이 크게 펼쳐지면서 뇌전을 사방으로 튕겨냈다.
파직- 파지지직!
강기와 마법의 충돌에 애먼 헌터들과 언데드들이 휘말렸다.
아라한 정예 헌터들은 오러를 전개하거나 방어 마법으로 어찌어찌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다들 체력도 좋아.]
"부질없군요. 당신이 여기에 더 매여 있을수록, 천유진이 위험해질 텐데."
[정말 그렇게 생각해?]
"천유진에게 숨겨진 수가 있다, 란 블러핑은 통하지 않습니다."
[응. 그렇게 생각하려면 많이 해.]
[다중 영창]
[거스트 윈드 x 블레이즈 캐논]
[융합기 - 피닉스 어택]
동시에 마력을 재배열해서 완성된 주문.
두 성질을 엮어내어 성위를 넘어선 파괴력을 지닌 새 주문을 펼쳤다.
야트막한 산 정도는 녹여버릴 정도의 위력!
맞서길 포기한 파프너는 신묘한 기동력으로 불사조의 궤적에서 멀어졌다.
[타깃 고정]
[윈드 제일]
하늘에 불꽃의 길을 남기며 유턴하는 불사조.
타깃 고정으로 마법의 좌표를 파프너에게 지정하고.
바람의 감옥을 만들어 움직임을 제한했다.
[26년 전보다 실력이 많이 늘었네?]
[원시 마법]
[사룡의 비행]
흑색 광선들이 번쩍이고.
바람으로 만든 창살이 산산조각 나며, 불사조가 힘을 잃었다.
"대단하게 말해놓고 할 줄 아는 건 도망뿐입니까?"
[헹. 그럴 리 없잖아.]
판은 모두 깔렸다.
콰우우우우!!!
파프너의 용울음이 전장의 소음을 모두 뭉개버렸다.
용족의 존재감을 담은 포효.
그 울음소리를 신호탄 삼아, 언데드들의 움직임이 기민해졌다.
[기다렸습니다.]
채챙!
겨우 형태만 유지하던 송명석의 암흑 강기에 예리함이 더해졌다.
정면에서 상대하던 7성 헌터의 오러 블레이드가 한순간 흔들리고, 그 충격을 해소하지 못한 헌터가 뒤로 밀려났다.
"실력을 숨기고 있었나?"
[제 실력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같군요. 그렇다 칩시다.]
땅 아래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시커먼 기류.
드라이아이스처럼 낮게 깔린 힘은 산 자들의 힘을 빼앗고.
망자에게는 능력을 부여했다.
"이토록 광범위한 디버프라니. 해제할 방법이 있을 겁니다."
백성현은 당황하지 않았다.
곧바로 신관계 헌터들을 부려서 지면에 깔린 기운이 더 퍼지지 못하게 막고, 원인을 파악하려고 했다.
[신성 주문 - 이블 서칭]
"부사장님. 원인을 찾았습니다."
"그럼 빨리 정리합시다."
"문제가 있습니다만."
"어서 말하십시오. 당신들의 능력이 모자라면 내가 하겠습니다."
"디버프의 근원이 지하 200미터 아래입니다."
"...."
백성현의 표정이 물을 다 먹고 구긴 종이컵처럼 일그러졌다.
*
"신호는 받았다."
전장 한가운데서 울린 용울음.
유진은 곧바로 좀비 스케어클로의 능력을 활성화시켰다.
망자들의 능력을 증대시켜주는 광역 버프.
산 자들은 체력 소모를 강요받는다.
〔한데 왜 초장부터 허수아비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은 게냐?〕
'충분히 끌어들여야 했다.'
좀비 스케어클로의 버프 효과는 강력하다.
테이머 시체로만 만들 수 있는 언데드.
대신이라고 해야 하나.
전투 능력은 성위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수준이라, 전장에 노출시키면 금방 파괴될 게 분명했다.
'아라한 길드의 돌파력은 대한민국 최고 수준이니 말이야.'
〔그 치들을 200미터 아래로 묻은 이유이지도 않느냐.〕
아라한 길드의 침공 예정지에는 모두 좀비 스케어클로를 묻어두었다.
지하 200미터.
마음먹고 땅을 파지 않는 이상, 찾기 어려운 깊이까지.
'백성현의 마법은 얕보지 못해.'
7성 마법사가 작정하고 화력을 때려 넣으면 200미터고 뭐고 뻥 뚫린다.
불사조 어택만 해도 땅을 모조리 녹여버려서 좀비 스케어클로에게 닿을 정도의 화력이니 말이야.
〔하면 왜 신호를 기다린 게냐?〕
'위치를 특정해도 팔 수 없을 만큼 혼란한 상황이 되었으니까.'
버프 주는 언데드 박살내자고 아군이 밟고 있는 땅을 200미터나 팔 수 있겠는가.
거기에.
디파일러들도 빼꼼 모습을 드러내서는 신성 주문을 사용했다.
[응징의 쐐기]
[부정한 축복]
신전 규모가 커진 덕분일까.
연평도에서 데려온 디파일러들도 스탯이 상당히 올라갔다.
성위에 어울리는 능력치를 갖추어서 나름 신관이라고 할 만한 스펙은 보유했으니.
중급 언데드들에게 버프를 부여하거나, 산 자에게 디버프로 작용하는 [부정한 축복]을 아라한 정예 헌터들에게 걸어주었다.
〔궁금한 게 있구나.〕
'뭐, 대답해줄 수 있는 거라면.'
〔그대의 동료들은 이번 전쟁에서 왜 배제한 게냐?〕
'이 싸움은 나와 파프너의 몫이야.'
파프너가 26년 동안 품어온 한.
그걸 온전히 해소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힘만으로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틸성이 뛰어난 뽀시래기 팀이라면 아라한 정예 헌터들을 무너트리는데 큰 힘이 되었겠지.'
4성 따위가 낄 싸움이 아니라고?
뽀시래기 팀의 세 사람은 단순히 성위로 가늠하면 안 된다.
순간 화력은 오러 블레이드 뺨치는 강민호의 합성기.
견제와 원거리 공격에 특화된 강민영.
미리 저장해놓은 주문을 마음껏 꺼내 쓸 수 있는 이성민까지.
뽀시래기 팀의 능력이 더해지면 전장의 흐름을 유진이 원하는 대로 가져올 수 있었을 것이다.
'파프너에게 있어서 필요한 의식인 거다.'
정작, 배려를 받는 당사자는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유진은 조금 더 힘이 들더라도 자력으로 아라한 길드를 무너트릴 생각이었다.
크로노스도 그 각오를 이해한 것일까.
더 묻는 대신 전장을 관조했다.
〔변수는 하나뿐이로구나.〕
'이신우.'
〔나비 효과를 체감하니 기분이 어떠하느냐?〕
'뭘 물어. 아주 주옥같죠.'
빡쳐서 각성한다고?
지가 무슨 소년만화의 주인공인 줄 알아요.
실시간으로 바뀌는 지형을 보며 유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가 보기에는 누가 승리의 영광을 쟁취할 것 같으냐?〕
'반반.'
〔모르겠단 표현을 고급스럽게 하는구나.〕
'둘 다 8성에 오른 지 얼마 안 됐어. 온전한 8성의 능력을 쓰진 못하고 있다.'
오러 블레이드는 의지의 발현이자 힘.
8성에 오르면.
오러 블레이드를 펼치는 데 그치지 않고 내면에 쌓아 올린 심상의 힘을 외부에 강요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애꾸눈과 이신우, 양쪽 모두 8성의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누가 먼저 익숙해질까. 아니면 그 전에 싸움이 끝날 수도 있고.'
그런데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는 늘 운이 없었거든.
대책 없이 상황을 지켜보다가 이신우의 의념 활용 능력이 올라가버리면?
파프너가 날아와도 막을 수 없다.
〔방도가 없구나.〕
'없긴. 둘의 싸움에 개입할 거다.'
〔그대가 저 곳으로 진입하면 10초도 안 되어서 산산조각이 날 터.〕
맞는 말이다.
이신우와 애꾸눈이 충돌할 때 빚어지는 충격파만으로 땅이 들썩인다.
그 에너지는 능히 오러에 버금가는 수준.
방어 마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전신이 짓눌리는 진귀한 경험을 할 게 분명했다.
'틈 한번이면 돼.'
유진은 흑탑 아래로 천천히 내려왔다.
이번 전쟁에서 마지막 안배였던 좀비 스케어클로들도 활성화시켰다.
정예 언데드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모두 제 역할을 해주고 있으니.
변수를 창출할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이 전쟁을 끝내러 가자.'
연신 흔들리는 지축의 움직임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두 다리에 힘을 주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204화 악연의 끝(3)
콰지지지직!
의념과 의념의 충돌.
한쪽은 대한민국에서 오랜 세월 동안 최강으로 군림한 헌터였고.
그와 마주한 괴물은 전직 접경지역의 폭군이었다.
"으르르르르!!"
분노에 사로잡힌 이신우는 더 이상 사람의 목소리도 내지 않았다.
녹음해서 짐승의 소리라고 하면서 들려주면 100% 믿을 것 같은 숨을 내뱉었다.
한껏 부풀어 오른 몸뚱이.
어느새 4미터 정도까지 커져서 트롤이랑 동족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물론.
콰아아앙!
마력과 가호를 근육 한 올 한 올에 꽉꽉 담아낸 괴력은 트롤과 비교를 불허했다.
[쿠훅. 인간. 힘을 숨겼냐.]
애꾸눈의 사념에는 불쾌감이 섞여 있었다.
고작 인간한테 힘겨루기에서 밀렸다.
생전보다 더 강해지고.
각종 버프까지 받았는데도 오러 블레이드끼리 충돌했을 때 더 멀리 튕겨나 버린 것이다.
[베르세르크의 가호]
룬 마법의 창시자.
아스가르드의 신왕.
모든 지혜를 손에 넣은 자.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칭호를 지닌 위대한 존재.
신왕 오딘의 가호가 최대까지 끓어올랐다.
〔오딘이라. 짐의 백부를 살해하고 신위를 강탈한 자였지.〕
'이미르 말이군.'
최초의 거신, 이미르.
티탄 신족과 혈연이었나?
〔한데 이상하구나. 오딘의 성좌명은 지혜의 관조자일 터인데.〕
'오딘은 마법으로 섭리를 비트는 자다. 만신전의 규칙에 개입해서 변칙으로 더 가지는 건 일도 아니지.'
성좌명은 곧 해당 신이나 영웅의 아이덴티티.
오딘은 변칙으로 자신의 성질을 둘로 분리, 후원하는 헌터의 스타일에 따라 다른 능력을 부여해주었다.
'베르세르크는 현대에서 광전사의 어원이 된 단어다.'
동물 가죽을 입은 사내라는 의미.
오딘을 숭배한 바이킹들은 두려움을 모르고 큰 부상에도 쓰러지지 않고 적과 맞서 싸웠다고 한다.
죽기 직전까지 도끼를 휘두르는 광전사!
오딘은 그 개념을 분리해서 두 개의 성좌명을 둔 것이다.
〔과연. 찬탈자다운 사고방식이로다.〕
'칭찬이지?'
〔못돼먹은 아들놈과 같은 작자이니라. 어찌 칭찬을 하겠느뇨.〕
게임 X같이 하네, 랑 동급인 칭찬처럼 들리는데.
더 자극했다간 화낼 것 같으니 조용해야겠다.
여유를 부릴 상대도 아니고.
'좀 더 일찍 아라한을 끌어들이길 잘했군.'
원래의 역사보다 더 빨리 8성에 오른 이신우.
저 능력에 완전히 익숙해졌더라면.
팔이나 다리 하나 내줄 각오로 달려드는 놈을 막을 방법이 없었을 거다.
〔전장에서 벗어나 있으면 되지 않겠느냐.〕
'날 쫓을 방법 정도는 찾아놨겠지.'
아직은 그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조금 더 시간을 주었더라면.
이신우는 폭주 중인 혈기를 다스려서 자신의 분노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방법까지도 터득했을 것이다.
'시한폭탄의 타이머를 어떻게 맞추느냐의 차이지만.'
폭탄이 언제 터질 줄 알면, 그 시간에 맞춰 상대에게 던지면 그만이다.
이신우가 전장에서 스스로를 활용한 방법이다.
지금은 애꾸눈에게 막혀서 조기에 폭발해버린 거지만.
만약 이신우의 성취가 조금 더 높았더라면 애꾸눈을 무시해서 유진이 있는 쪽으로 달려들었을 것이다.
'문제는 저 눈 돌아버린 놈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인데.'
붉은 몸 여기저기에서 돋아난 룬 문자.
갖가지 마법에 대한 저항력을 어마어마하게 올려주고.
이신우를 대상으로 하는 온갖 간섭에서 자유롭게 해줄뿐더러.
온갖 버프에 방어력까지 늘려주는 강력한 룬이다.
누적되는 피해가 클수록 강해지는 이신우의 능력과 궁합이 아주 좋은 가호지.
'딱 한번. 빈틈을 만들어서 끝내야 한다.'
쉽지 않다.
혈기를 최대로 끌어낸 이신우의 공격.
한 방만 맞아도 죽는다.
기회를 만들려면 유진도 목숨을 걸어야 했다.
〔구태여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
'아니. 그래서 더 하는 거다.'
쓸 수 있는 패는 모조리 꺼냈다.
아라한 측도 마찬가지일 터.
그렇다면.
서로의 킹을 쓰러트리는 것만 남았다.
'백성현이라면 이 타이밍에 무리수를 두더라도 나를 노릴 가능성이 있다.'
그 전에.
이신우를 끝장낸다.
〔무슨 수로?〕
'해봐야지. 뭐든.'
만반의 준비를 마친 유진은 입술을 달싹였다.
"스펙터. 이리로 오라."
물리 면역에 생명력을 빨아 먹어서 힘을 증대시키는 중급 망령.
스펙터들이 유진의 부름을 받아 근처로 날아들었다.
"메이 샤오."
[제기랄.]
메이는 욕지거리와 함께 캐터펄트... 아니, 초장거리 저격용으로 제작한 대형 화살의 시위를 놓았다.
암흑 투기에 여러 스킬들을 엮어낸 초장거리 저격.
전용으로 만든 화살이 마하 9를 뛰어넘는 속도로 이신우에게 쇄도했다.
콰직!
본능적이었다.
이성을 완전히 놓아서 화살이 날아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지만.
팔을 크게 움직여서 오러 블레이드를 흩뿌리는 것으로 메이 샤오의 초장거리 저격을 받아냈다.
[다중 영창을 사용합니다.]
"내 눈을 바라봐. 넌 불행해지고. 내 눈을 바라봐. 넌 힘이 빠진다."
-피할 수 없는 세월이여.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에는 무색할지니.
-피할 수 없는 세월이여. 모든....
저주는 반드시 의미를 부여하는 말을 내뱉어야 한다.
영력 재배열은 전개 과정의 일부.
대상의 몸뚱이와 혼백을 꺾는 저주가 발현되려면 반드시 목소리를 통해 주문 발동에 확정을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유진은 그 '목소리'를 내기 위해 스펙터들의 사념을 빌렸다.
[디크리피파이를 사용합니다.]
[이블 아이를 사용합니다.]
....
초장거리 저격을 쳐내느라 이신우가 빈틈을 드러내는 순간.
스펙터들의 입을 빌려서 전개한 수십의 저주가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으아아아아앗!!!"
[디크리피파이가 해주됩니다.]
[이블 아이가 해주됩니다.]
이신우의 몸에서 끓어오르고 있던 혈기가 방출되었다.
삿된 기운을 모조리 찢어발기고.
규칙마저 일그러트리는 강대한 신력의 파동.
방금 전까지 이신우와 맞상대를 하고 있던 애꾸눈도 그 힘을 모두 받아내지 못해서 쭉 밀려났다.
〔꽤 분발하였지만 소용 없어 보이는구나.〕
수십이나 되는 저주 주문 중 대부분이 소멸했다.
일부가 뿌리를 내리는 데 어렵사리 성공해도.
붉은 피부 위에 새겨진 룬어가 저주를 곧바로 뭉개버렸다.
[부정한 축복]
[부정한 축복]
[부정한 축복]
저주들이 씻겨나가자마자 들이닥치는 신성 주문들.
유진의 솜씨가 아니다.
망자 보조를 위해 투입한 디파일러들을 모조리 후위로 빼고.
적당한 거리에서 신성 주문을 연달아 사용하게 했다.
생명체에게 디버프 효과를 부여하는 신성 주문.
같은 성질로 버프 / 디버프를 사용하면 효과가 감소하는 만큼, 여럿이 주문을 사용한다고 해서 이신우의 능력치가 막 깎이지는 않았다.
'중요한 건 가호를 약화시키는 거다.'
성좌의 가호를 받은 적을 상대하는 것에는 이골이 났다.
그 빌어먹을 로마노프 가문과 전면전을 벌였을 때, 오딘의 가호를 받은 건 마법왕 드미트리 말고도 여럿 있었다.
배후성까지는 아니고.
오딘이 가문의 수호성으로 있어준 덕에 능력 일부를 사용하는 마법사들이었다.
모든 속성에서 우위를 점하는 신력과 가호.
유진은 그 힘을 꺾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고안해냈고.
한 번에 저주를 몽땅 걸어버려서 힘을 소진시킨 후, 다른 능력으로 몰아치는 수법을 고안해냈다.
'나니까 할 수 있는 일이다.'
암. 암.
유령들과 링크해서 단독으로 저주 수십을 사용하는 건 대주술사도 불가능하다.
[달의 주술]이라는 주술 계 끝판왕 급 기술을 익힌 마담도 이건 못한다고.
'이번 삶에서는 신관계 언데드도 있으니 더 좋아.'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기분이 어때.
정신 못 차리겠지?
이신우가 8성에 도달한 것은 예상외지만, 그를 상대할 방침은 이미 생각해두었기에 당황하지 않았다.
"크앗! 으아아앗!"
짐승처럼 울부짖던 붉은 거한은 시선을 좌측으로 돌렸다.
유진이 서 있는 곳.
저주 수십을 동시에 전개하느라 거리를 좁혔고.
혈류를 방출한 후에 들이닥친 신성 주문들의 여파로 한순간이지만 이성이 돌아온 그의 눈에 유진이 들어온 것이다.
둘의 시선이 정확하게 교차했고.
"이런."
"으아아아아아앗!!!"
애꾸눈을 지나치며 맹렬하게 돌진했다.
[쿠훅. 나 두고 어디 가냐.]
암흑 강기로 뒤덮인 손이 이신우의 팔을 붙들었다.
우지지직-.
팔을 감싸고 있는 기운을 모두 거둔 이신우.
변종 오우거의 육신에 데스 나이트의 힘, 그리고 호플리테스의 버프 능력이 더해지면서 어마어마하게 강해진 애꾸눈의 힘이다.
거기에 암흑 강기까지 방출했으니 왼팔이 그대로 뽑혀버렸다.
철철 흐르는 피.
이신우는 그 고통마저도 분노로 치환해서 유진에게 쏟아 부었다.
산하를 뒤흔드는 어마어마한 살기.
파프너가 방출한 용울음보다도 더 진한 살의에 강풍이 불고 지면이 들썩거렸다.
"너만 죽으면!!"
이성을 되찾은 이신우가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
유진은 굳은 표정을 지었다.
'역시. 이럴 줄은 알았다만.'
두 눈으로 이신우의 움직임을 쫓을 순 있어도, 반응하기는 어렵다.
유진의 스펙은 6성 무투계 헌터보다도 높지만.
직접 무기를 쥐고 싸운 경험은 별로 없다 보니 대응력이 떨어졌다.
상대는 8성!
두 단계 차이면 정석적인 무투계 헌터도 반항 한번 제대로 못하고 일격에 사망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
어디로 올지, 놈의 움직임을 강제하면 된다.
〔강제라고 하기에는 저 작은 인간의 행동에서 어떤 억압도 찾아볼 수 없구나.〕
'음. 다른 표현을 쓰면 행동의 선택지를 제한한다는 말이다.'
뒷탈 없이 이신우를 쓰러트리려면.
확실한 일격을 꽂아 넣어야 한다.
팔 하나?
에이.
그것 가지고는 부족하지.
요즘은 숨만 붙어있으면 신성 주문으로 모조리 회복시킬 수 있는 세상이다.
자.
여기까지는 처음 생각한대로인데.
문제는 신성 주문으로 가호를 약화시키고, 이성도 돌아온 이신우의 공격을 한 방이라도 막아낼 수 있느냐다.
인간사냥꾼 대장 김봉효(가 부린 괴물)의 공격은 받아냈지만.
이신우의 오러 브레이드를 괴물의 오러 따위랑 비교하면 좀 섭섭하거든.
[고유 특성 - 백야를 사용합니다.]
[영력 → 성력]
[부정 충격 방패 x 50을 사용합니다.]
소용없다.
우윳빛 방어막을 덧댄 벽은 새빨간 오러 블레이드 앞에서 0.5초 정도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아니지. 0.5초나 버틴 거야.'
시간은 충분히 벌었다.
〔무엇이든 빨리 해보아라! 저번에 보인 거인을 불러내든지!〕
지박거인이요?
그거, 무리.
지박거인을 만들려면 [데스 에어리어]를 먼저 전개해야 하고.
충분한 피가 땅에 뿌려져 있어야 그 시체들을 조합해서 하나로 엮을 수 있다.
개활지에 망자가 엄청나게 있어도 인간사냥꾼 토벌 때처럼 흘린 피가 그렇게 많지 않아서 지박거인을 만들 수 없다.
"으히히히힉!"
지척까지 다가온 이신우.
부정한 축복으로 약화시켜도.
충격 일부를 되돌리는 부정 충격 방패를 수십 겹 사용해도.
8성 무투계 헌터를 붙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애꾸눈도 놈의 팔을 뽑아버리느라 그 자리에서 주춤거렸으니.
[으히히힛!]
[너. 맛있게 생겼다.]
스펙터들까지 달라붙어서 이신우의 생기를 빨아먹고 몸을 둔하게 했지만.
그의 돌진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죽어! 죽어!"
지척까지 드리운 주먹.
유진의 목덜미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205화 악연의 끝(4)
[신성 주문]
[호플리테스를 사용합니다.]
백 미터 넘는 거리에 서 있던 애꾸눈의 신형이 허깨비처럼 사라졌다.
사라진 애꾸눈은 유진의 곁으로 소환.
막 이신우가 내지른 주먹의 앞에서 기척도 내지 않고 나타났다.
〔크하하핫.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구나.〕
크로노스가 호탕하게 웃었다.
붉은 오러 블레이드와 새카만 암흑 강기가 다시 한번 충돌한다.
예고도 없이 불려온 애꾸눈은 힘을 온전하게 끌어내지 못해서 쿵, 뒤로 크게 밀려났다.
그 뒤에 선 유진도 충격 일부를 받고 튕겨났다.
'대비했는데도 아프네.'
온몸이 욱씬거린다.
이신우의 주먹을 맞았으면 통증을 느낄 새도 없이 죽었겠지.
개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낫단 말이 있잖아.
〔권속을 불러올 거였으면서 비장한 척은 다 하였구나.〕
'두 번은 안 통할 수법이야.'
이신우는 모지리가 아니다.
정신을 놓았으니 괜찮지 않느냐, 하겠지만.
폭주 상태에서는 본능적으로 승리할 방법을 찾아 움직인다.
애꾸눈이 소환되는 속도
주문 전개 타이밍 등.
방금 전 상황을 기억해서 치명적인 타이밍을 노리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한 방 먹여줘야 한다는 거다.'
마지막 패를 깠는데 재미 못 보면 죽어야지.
팔 하나 정도면 나쁘지 않군.
두 다리에 힘을 서며 자세를 잡는 유진.
〔작은 인간은 팔 하나를 잃었도다. 그대가 나서지 않아도 충분하지 않겠느뇨?〕
'그렇겠지. 시간이 좀 오래 걸리겠지만.'
〔호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승부를 내려는 게로구나. 계약자에게 이러한 영웅의 풍모가 있을 줄은.〕
'오래간만이네. 그 놈의 영웅 타령.'
어째 조용하다 싶었다.
유진은 짧게 투덜거리면서 전투를 준비했다.
'내가 6성이 되었다는 의미를 보여주마.'
공허의 돌이 영력을 충만하게 머금는다.
[다중 영창]
[본 미사일 x 10을 사용합니다.]
허공을 가르며 쇄도하는 뼈 미사일들.
사각은 없다.
이신우는 혈기와 오러 블레이드를 얇게 펼쳐서 뼈 미사일들을 산산조각 냈다.
"그럴 줄 알았다."
[사우전드 본 제일을 사용합니다.]
튕겨나면서 쪼개진 뼈들이 날카롭게 변해서 이신우의 곁으로 날아든다.
N극과 S극이 서로 달라붙듯.
칼날처럼 날 선 뼛조각들이 척척 붙어서는 이신우의 피부를 갉아먹었다.
오딘의 가호와 오러 블레이드로 강화된 몸뚱이.
영력을 잔뜩 담은 뼛조각들로도 해할 수 없다.
차라라락-.
유진은 뼛조각들의 구조를 바꾸었다.
관절 이음새에 파고들어 운신을 방해한다.
직역하면 '천 개의 뼈로 만든 감옥'이라는 주문.
대상을 속박하는 6성 강령술의 진가는 이제부터다.
콰직, 콰직, 콰직, 콰직, 뼈가 계속해서 쪼개지고 부서지지만.
모래처럼 작아진 뼈 알갱이들은 다시 결합되어서 이신우의 행동에 제약을 걸었다.
"으, 으아아?"
[마르코시아스의 화염을 사용합니다.]
거세게 타오르는 회색 불꽃.
암흑 마력으로 피워 올린 거짓된 화염이 이신우를 뒤덮었다.
"으아아아!"
이신우는 고함을 터트렸다.
회색 불꽃이 전신을 감쌌지만 물리적인 충격만 조금 받았을 뿐.
하나도 뜨겁지 않았다.
보기에는 매우 뜨거워 보이지만.
화염 줄기가 지나간 곳에는 열기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 대신.
저저적-.
마르코시아스의 화염으로 바싹 구워진 뼈들이 단단하게 굳어버렸다.
석화 저주를 담아낸 불꽃.
불이라는 형태만 빌렸을 뿐, 실제로는 닿는 것을 굳게 만드는 지독한 맹독이다.
"암흑 마법이 다 그런 부류지."
거짓된 형(形)과 태(態)로 상대의 눈을 현혹하고.
실제로는 다른 피해를 유발한다.
말 그대로 거대한 기만.
암흑 마법 쪽 특성을 깨우친 헌터들이 기피되는 이유다.
파괴력은 원소 마법에 밀리고.
디버프 효과는 신관들의 주문만 못하다.
다재무능이라고 불리는 학파.
그렇지만.
뭐든 쓰기 나름이라고.
유진은 회귀 전, 암흑 마법을 자유자재로 부리며 적을 농락했다.
[코퀴토스의 바다]
[토로메아의 손]
빙결 지옥에 감도는 한기를 구현하는 주문이 드리우고.
얼어붙은 손들이 이신우를 붙잡았다.
강철보다도 단단한 피부를 할퀴다가 얼음 손이 부서지고.
냉기조차 그의 몸을 파고들지 못했다.
6성 암흑 마법으로도 해할 수 없는 강인한 신체.
분노에 눈이 멀었지만.
이신우의 몸과 정신은 어지간한 환영이나 암흑 마법으로 흔들리지 않을 만큼 강인했다.
〔어폐가 있지 않느냐? 광기에 휘둘리는 자의 심지가 굳건하다니.〕
'그냥 미쳐서는 8성에 못 올라.'
헌터가 되면서 타고난 특성.
축복 받은 자를 광전사로 만드는 오딘의 가호.
두 가지 요소가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면서 광기에 휘둘리는 것뿐.
오히려 그 상황에서도 대략적으로나마 자신의 행동 방향을 정하는 걸 보면 이신우의 정신이 얼마나 강인한지를 알 수 있다.
'나 혼자서는 무리야.'
하지만.
네크로맨서의 진가는 사역 중인 언데드에 있다.
[쿠후후훅!]
애꾸눈의 사커킥에 이신우의 신형이 붕 떠올랐다.
8성끼리의 싸움.
0.01초 반응 속도 차이가 승패를 가를 정도인데.
저주 - 신성 주문 - 암흑 마법을 순차적으로 뒤집어쓰면서 몸이 둔해진 이신우는 오러 블레이드를 온전히 끌어올리지 못하고 붕 떠올랐다.
수십 미터 뒤로 밀려난 붉은 거한.
"아직, 끝. 아니다."
"맞으니까 정신이 좀 드나 보네."
"으아아아앗!"
"근데 내 생각은 좀 달라."
따아아악-!
유진이 손가락을 퉁기는 순간.
발아래에 깔려 있는 점화 회로가 빛을 발했고.
이 전쟁이 시작되기 전.
며칠 동안 유진과 신준석, 그리고 다크 미니언들이 준비한 안배가 펼쳐졌다.
[시체 폭발(改) x 1,756을 사용합니다.]
[리버스 마나 플로우를 사용합니다.]
영력을 듬뿍 먹여서 재워놓은 시체들.
시체 하나하나마다 점화 회로를 연결해서 외부로 이어놓았고.
유진이 신호를 주는 순간, 바로 폭발할 수 있게 준비를 해놓았다.
땅 아래에서 솟구치는 어마어마한 파괴의 에너지.
이신우가 진각을 밟았을 때보다 훨씬 더 큰 진동이 개성 일대를 뒤흔들었고.
마력 역류진의 영향을 받아 일점으로 모인 파괴의 에너지가 땅을 찢고 솟구치며 이신우를 집어삼켰다.
*
"...!"
살점과 뼈, 그리고 폭발로 인해 생겨난 붉은 에너지의 기둥은 이신우의 비명마저 삼킨 채, 수백 미터 위로 솟아올랐다.
[아, 아아아.]
메이 샤오는 흐느낌 같은 사념을 흘렸다.
두렵다.
이미 죽어서 두려움이란 감정을 상실했을 터인데.
이신우에게 들이닥친 막대한 파괴의 에너지를 보니 혼백이 비명을 질렀다.
'저게. 인간에게 허락된 힘이 맞아?'
범위는 넓지 않았다.
파괴의 빛줄기에 휘말린 것은 고작 100미터 정도.
시체 폭발의 에너지가 리버스 마나 플로우의 효과 덕에 일점으로 집중.
오로지 하늘을 향해 솟구친 탓에 직접 파괴한 것은 많지 않았다.
폭발 여파로 새어나온 힘이 일으킨 지진이 더 위협적으로 느껴질 정도.
그렇지만.
메이 샤오는 본능적으로 체감했다.
저 빛무리에 휩쓸리는 순간, 자신은 0.1초도 버티지 못하고 소멸해버릴 것이란 사실을.
'6성 마법사가 이런 힘을 다룬다고?'
거짓말.
미리 준비를 했다지만, 이 정도 파괴력이면 7성을 넘어선다.
한때는 구룡 중 하나가 되기 위해 절치부심 노력했던 만큼 7성 헌터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았다.
여덟 번째 별.
그래.
8성은 되어야 이만한 파괴의 힘을 제 수족처럼 다룰 수 있으리라.
'빌어먹을 주인 놈은 6성이다.'
유진에게 복속되어 있어서 더 잘 알았다.
한데.
무슨 수로 성위를 뛰어넘는 힘을 다루 수 있는 걸까.
죽는 순간에도 크게 느끼지 않았던 두려움이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계산이 조금 빗나갔군."
유진은 태연하게 중얼거리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이번 함정의 핵심은 시체 폭발과 리버스 마나 플로우다.
그렇지만.
저 폭발을 일으키기 위해 두 주문만 응용하지는 않았다.
성위를 초월한 힘을 내기 위해 무수한 연금술식과 주술, 그리고 저주를 사용해서 폭발 에너지를 조율했다.
조금이라도 더 계산이 어긋나면 폭발 에너지가 새어나갔겠지.
그럼 8성 헌터를 묻어버릴 만한 화력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송명석이 없어서 다행이야. 녀석이 있었으면 해치웠나 같은 말을...."
앗.
제길.
송명석을 생각하다가 절대 말해선 안 될 부활 주문을 읊어버렸다.
[내 부하도 그 말을 했었지.]
"그래서 내가 죽었다가 살아났잖아."
촤악!
사그라지던 폭발 에너지가 좌우로 갈라진다.
저벅, 저벅.
무겁게 발걸음을 떼는 사내.
이신우가 핏발 선 눈으로 유진을 노려보았다.
"이걸 사네."
"...."
"말할 기운도 없나 봐."
이신우는 묵묵부답하며 천천히 걸었다.
오직.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인생의 목적인 것처럼.
[쿠후훅, 제가 마무리하겠습니다.]
"아니. 가만히 둬."
부활 주문에 힘입어 생존했지만.
이신우의 몰골은 끔찍했다.
까맣게 탄 전신.
팔이 뜯겨나간 어깨도 지져진 탓에 피가 더 나오진 않았지만.
갈라진 피부에서는 붉은 열기가 용암처럼 펄펄 끓어오르고, 매캐한 연기가 피시시 올라왔다.
오러 블레이드를 일으킬 힘도 없는지, 오러로 전신을 둘렀지만 몸뚱이가 붕괴하는 것을 막는 게 고작이었다.
"손가락으로 쳐도 쓰러질 것 같네."
방심하진 않았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자신을 노릴 가능성도 있다.
부정 충격 방패를 정면에 수십 겹 덧대고.
애꾸눈도 배치해서 이신우가 발악해도 막을 수 있게 준비했다.
"걱정 마라. 너를 해할 힘은 남아있지 않다."
가라앉은 음색.
분노, 혹은 광기의 조각은커녕 감정 자체를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다.
"그러면 거기서 뒈지지 그랬어?"
"이 어깨에 진 것이 많은 입장이라. 쉽지 않더군."
"당신 따라왔다가 곧 미국 갈 친구들?"
"그들은 모두 죽겠지. 나와 같은 운명이니 어깨에 졌다는 표현은 안 어울리지 않겠나."
아라한.
이신우와 백성현이 반석 위에 올리고자 노력했던 길드를 말하는 것이었다.
"보복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건가?"
"그래. 애원이 아니라 구걸이라고 해도 좋다."
"아라한 길드 마스터의 자존심은 어디에 버리고 그런 말을 하나."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몸. 자존심이 중요할까."
유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자존심을 놓지 못해서 박하늘을 함정에 빠트렸고.
회귀 전에도 끊임없이 충돌해서 결국 아라한이 멸망했다.
국내 1위라는 타이틀을 포기하지 못해서 일을 그르친 게 누구인데.
'이것도 회귀의 나비 효과인가.'
저 광전사가 현자 흉내를 내는 것을 볼 줄이야.
〔그대를 해하려는 수작은 아닐지.〕
'성좌 나리는 영웅의 모습을 원하잖아. 그럼 기다려줘야지.'
〔계약자의 입에서 그런 발언이 나올 줄이야. 참으로 기묘하구나.〕
크로노스는 묘한 투로 중얼거렸다.
아.
물론 크로노스를 배려해서 놈의 숨을 안 끊은 것은 아니다.
"그 답을 해줄 사람은 따로 있다."
"누구냐."
"파프너, 아니 박하늘. 당신들에게 희생당한 사람이다."
이신우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파프너에게 고백(?)을 들었던 백성현처럼.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졌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마침.
콰아아아아-!!
공중에서 지면으로 떨어지는 공허의 숨결이 아라한 정예 헌터들을 휩쓸고 있었다.
206화 악연의 끝(5)
7성.
무투계는 파괴의 권능이라 불린 오러 블레이드를 펼칠 수 있고.
마법계 헌터는 본신의 성위에서 2성 아래 주문을 즉시 발동 가능한 무영창 능력을 얻게 된다.
4성에 이어 두 번째 벽이라고 불리는 이유.
성위 하나 차이는 큰 터울이라고들 많이 하지만.
그 중에서도 3 - 4성 구간과 6 - 7성 구간은 벽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차이가 컸다.
대한민국을 통틀어 50명도 안 되는 위대한 헌터!
'아라한 길드, 한국 최강 아니었어?'
'천유진은 각성한 지 1년밖에 안 됐다고 했잖아!'
'X발. 이건 부조리해!'
그들의 자긍심이.
수십 년 동안 쌓아올린 힘의 결정체가.
유진에 의해 농락당하고 짓밟히고 있었다.
[너희. 죽어라.]
두두두-.
최형태의 지휘 하에 들어온 데스 카발리에들이 한 몸처럼 움직였다.
수백 기나 되는 죽음의 기마대가 오러를 일제히 방출.
앞장선 최형태에게 힘을 몰아주었다.
그야말로 죽음의 돌진!
[파산격]
[오러 블레이드]
도끼날 위로 생성된 오러 블레이드.
산을 부술 것 같은 기세를 담아내어 있는 힘껏 휘두른다.
새파란 오러 블레이드의 끝이 향하는 것은 데스 카발리에 수백과 최형태의 힘이 일점으로 집중된 죽음의 폭풍.
"크, 으으으으."
순수한 힘의 결정체, 파괴의 권능이라고 불리는 오러 블레이드가 밀려난다.
들썩거리는 육신.
오러 블레이드가 찬란하게 빛나는데도, 적을 쪼개기는커녕 무언가에 가로막힌 것처럼 힘을 쓰지 못했다.
압도적인 출력 차이.
준 7성급인 최형태에 모든 힘이 집중되면서, 오러 블레이드를 상쇄하진 못해도 버틸 순 있게 된 것이다.
"마, 말도 안 돼."
파도를 가르는 느낌.
분명.
오러 블레이드로 암흑 투기를 베어냈음에도.
계속해서 밀고 들어와서 자신을 삼키려 들었다.
"조금만 더 버텨!"
방어막을 친 채 마법을 준비하던 헌터가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빙결 마법]
[아이스 블리자드]
하늘 위에서 떨어지는 무수한 얼음 파편들.
각 덩어리마다 4성 마법에 준하는 위력이 담겨 있다.
콰직! 콰직!
못해도 수백이 넘는 얼음 파편들이 언데드들을 사정없이 뭉갰다.
7성 마법, 아이스 블리자드.
마법의 여파로 개성 일대를 휘감고 있는 7월의 더위가 한순간에 사라지고.
반경 1킬로미터 안에 있는 언데드들은 저항할 수 없는 자연재해에 휘말려서 태반이 몰살당했다.
[시원하군.]
"어째서 블리자드를 맞았는데도 버틸 수 있는 거야?"
"이 멍청아! 힘을 집중해야지. 광역 마법을 사용하면 어떻게 해!"
"적을 일시에 쓸어버리려면 이 방법이 최선이었단 말이야!"
최형태와 데스 카발리에.
그 외에도 수많은 언데드들이 후위를 맡은 두 사람을 노렸다.
분명.
최선의 선택이었을 아이스 블리자드.
광역 범위로 적을 타격하고.
디버프 효과까지 부여하는 7성 마법이야말로 현 상황에 가장 어울릴 거라 판단했다.
실책이었다.
최형태의 언데드 명은 용기병.
용족과 기병의 합성어이며, 동시에 '기병'이라는 역할을 수행했을 때 제 힘을 낼 수 있다.
전장에서 기병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돌진.
우직하게 앞으로 나아가며.
막는 적을 분쇄하는 것이 기병의 역할이다.
[내 진정한 힘. 이것이었다.]
유진은 두 달 전 인간사냥꾼을 토벌할 때 데스 카발리에를 아껴두었다.
최형태와 소수의 데스 카발리에만을 동원.
치고 빠지며 적 병력을 묶어두는 용도로 부렸다.
그렇지만.
두 달이라는 시간은 짧고도 길었다.
개성 일대까지 장악하면서 영역과 마주한 괴물들의 종이 늘어났고.
적성에 맞는 시체를 찾기 어려워서 많이 제작하지 못했던 데스 카발리에도 충분히 늘릴 수 있었다.
[깨작거리는 거. 나랑 안 맞는다.]
최형태는 데스 카발리에들을 이끎으로써 '용기병'의 본질을 깨달았다.
드득, 드드드득.
바실리스크와 타이런트를 엮어놓은 괴이한 형태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탈피.
유진이 변칙으로 만들어낸 반쪽짜리 용기병.
거듭되는 전투 속에서 얻은 깨달음이 최형태를 생전보다 훨씬 높은 경지로 끄집어 올려주었고.
흉측한 모습이었던 용기병은 진정한 형태를 갖추었다.
[용기병(최형태)]
[6성 → 7성]
유진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빠르게 이루어진 승급.
변칙으로 만든 괴물이 아닌.
진정한 용기병으로 스스로를 인식한 최형태가 손을 꽉 쥐었다.
우우웅!
극한까지 응축된 암흑 투기가 창의 형태로 구현되었다.
"아, 암흑 강기?!"
"사기도 적당히 치라고!!!!"
후위를 맡은 두 사람은 비명을 질렀다.
소년만화도 아니고.
싸우는 중에 깨달음을 얻어 각성이라도 했단 말인가.
고작 언데드 따위가?
믿고 싶지 않았다.
자신들이 이룩한 모든 것을 눈 깜짝할 사이에 손에 넣는 괴물을 보니.
싸울 의지조차 꺾이는 기분이었다.
[모두 죽어라. 그게 주인의 명이다.]
데스 카발리에 부대의 영력이 암흑 강기로 빚어낸 창에 집중되었다.
소용돌이치는 막강한 힘.
두 헌터가 발악적으로 오러 블레이드와 마법을 흩뿌렸지만.
흑색 소용돌이 앞에서 금세 사그라졌다.
*
같은 시각.
아라한 본대도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부사장님. 어떻게 합니까."
"저 용부터 처치합시다."
"공중에 있는 적을 무슨 수로 떨어트립니까?"
"내 지시를 따르십시오."
[무영창]
[윈드 실드 x 47]
허공에 생성한 바람의 막을 딛고 껑충껑충 올라가는 무투계 헌터들.
병장기에 오러 블레이드를 두른 채 파프너를 향해 접근했다.
[아이디어 좋네.]
윈드 실드를 발판 삼는다는 발상.
바람으로 만든 벽이라 마력을 실어서 차야 하고.
조금만 힘이 과하도 방어막이 부서져서 추락할 위험까지 있지만.
7성 헌터 셋은 묘기와도 같은 도약을 어렵지 않게 하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왔다.
[다중 영창]
[바람 계열 - 6성 인핸스드 윈드 스톰]
[공간 계열 - 6성 그래비티 바인드]
회오리를 일으키는 광역 마법.
거기에 중력의 그물을 형태 변환으로 적용해서 바람이 멀리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둘 다 즉시 발동형 마법이었으니.
파프너가 대응하기도 전에 변형된 중력의 그물이 덮쳐들었고.
안에서 생긴 바람의 회오리가 그녀를 마구 흔들었다.
"지금이다."
"한 번에 끝낸다!"
파프너의 신형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동안, 중력의 그물 근처까지 다가온 헌터들이 병장기에 힘을 주었다.
[제노사이드 커터]
[데모닉 어택]
[익스큐션]
오러 블레이드가 쇄도할 때에 맞춰 중력의 그물과 돌풍이 사라졌다.
마법의 주체인 백성현이 마력 구조를 흩트려서 걸리는 것도 없는 상황.
겨우 몸을 가눈 파프너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갈 땐 가더라도 혼자 안 간다?]
[암흑 강기]
[케넥 전투술 10장 - 구결집합권]
엘드리치 드래곤에서 진정한 용족으로 다시 태어난 파프너.
새로운 힘에 적응하면서 용족 전용인 케넥 전투술의 비기를 온전하게 소화했고.
바람과 중력의 감옥에서 허우적대는 척하며 암암리에 암흑 강기를 끌어 올렸었다.
파츠츠츠츠!
안 그래도 검었던 파프너의 동체가 새벽의 어둠처럼 깜깜해졌다.
모든 빛을 빨아들인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전신을 던지듯이 앞으로 돌진하며 구결집합권의 에너지를 둘렀다.
암흑 강기와 오러 블레이드가 허공에서 격돌하는 순간.
"으, 으아아악!"
"어째서 오러 블레이드가!?"
푸른빛이 어둠에 삼켜졌고.
7성 헌터 둘은 허공에서 소멸해버렸다.
전력을 다한 공격.
그렇지만.
장소가 안 좋았다.
바람 막을 치고 올라오느라 허공에서 제대로 자세를 잡지 못했고.
온전한 힘으로 쏟아내지 못한 공격은 구결집합권의 적수가 되지 않았다.
헌터 한 명만 겨우 살아남은 채 아래로 추락.
백성현이 마법으로 받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얼굴에는 근심이 드리웠다.
"날 속였군요."
[헤헹. 그런 걸로 나를 묶으려고 했어?]
용은 마법 저항력을 타고 난 종족이다.
6성 주문 둘을 엮어서 파프너의 운신을 방해해도.
빈틈까지 만들어내는 건 불가능했다.
[제 활약을 빼앗아가지 마십시오!]
송명석이 노성을 터트렸다.
7성 헌터 셋이 전장을 이탈하면서 그의 검격도 더욱 예리해졌다.
스켈레톤 나이트들이 사방에서 몰려들고.
-스켈레톤 로얄가드 들창코.
-좀비 제너럴 넓적뼈.
데스 에어리어를 펼쳤을 때 탄생한 네임드 언데드들도 전장에 투입되었다.
[그게겔.]
[주인. 승리. 원한다.]
사방에서 암흑 마법이 쏟아지고.
머리를 안 부수면 다리라도 잡으려고 언데드들이 허우적댄다.
전장 곳곳에 섞인 5, 6성급 강화 언데드도 위협적이었다.
"끅, 끄르륵."
"커흑!"
하나 둘.
아라한을 지탱해온 이들의 목숨이 사라진다.
수적으로도 열세였으며.
피가 혈관을 타고 흐르는 인간인 이상, 전투를 벌이다 보면 체력과 마력을 소진했다.
퇴로는 이미 막혔다.
진형 후위를 맡아주기로 했던 7성 헌터 둘은 버티는 게 고작이었으니.
'이것만은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만.'
백성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단독 행동에 나선 이신우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한 팔을 잃은 채로 제압당했단 사실은 몰랐지만.
끊임없이 몰려오는 언데드 군대야말로, 이신우가 유진을 제압하지 못했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화력을 모아 용을 쓰러트리겠습니다."
"부사장님의 마법으로도 끄떡 없는 녀석이지 않습니까."
"가만히 당하고 있을 겁니까?"
"아, 아닙니다."
"닥치고 준비하십시오."
7성 마법사는 셋.
한 명은 최형태를 막고 있으니, 본대에 있는 것은 둘이다.
추가로 6성 마법사 다섯을 차출했다.
'이 정도로는 안 쓰러질 겁니다.'
백성현도 알고 있다.
7성 헌터 셋을 밀어낼 정도의 힘.
구결집합권을 보는 순간, 온 몸에서 소름이 돋았으니 말이다.
저 힘이 자신에게 들이닥쳤다면.
어느 것도 시도하지 못하고 죽음을 받아들였으리라.
'모든 수를 동원하면 피해는 입힐 수 있습니다.'
한 번.
파프너를 떨어트려서 발만 묶어주면 충분하다.
그 동안 자신은 빠르게 전장을 관통.
이신우가 하지 못한 일을 수행하면 된다.
바람 마법을 극한으로 응용하면 무투계 헌터보다 더 속도를 낼 수 있다.
전장에서 차출한 마법계 헌터들이 일제히 주문을 외운다.
땅에 새겨지는 마법진.
룬어들이 푸른빛을 내며 백성현에게 힘을 더해주었다.
무수한 계산을 나누어서 하고.
부족한 마력도 벌충해준다.
이런 순간을 위해 준비해온 단체 마법진이었다.
'로마노프 가문에서 하사해준 주문을 여기서 쓸 줄은 몰랐습니다.'
[절대주언(絶代呪言)]
[5중 룬(Rune)어 결합]
[폴리머제이션 매직 - 스톰 가스트]
다중 속성을 융합해서 발현하는 마법.
유진이 회귀 전에 맛보았던 드미트리의 주문에 비하면 훨씬 격이 떨어졌지만.
백성현은 그 덕에 경지를 넘어선 힘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순백의 기둥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
그에 맞춰 수직으로 하강하는 파프너.
전신이 검게 물든 것이, 구결집합권을 사용하기 전의 모습이었다.
"그 정도로는 소용없습니다!"
[나도 알아.]
구결집합권으로는 안 된다.
그러니.
[합치는 건 너희 전유물이 아니야.]
[공허의 숨결]
[케넥 전투술 - 10장 구결집합권]
구결집합권의 힘을 일시에 방출.
동시에 브레스까지 내뿜었다.
극한까지 회전시킨 바람에 무수한 속성을 곁들어 뭐든 갈아버리는 순백의 기둥을 만들어냈지만.
하얀 빛은 삼켜지고.
그 발원지였던 백성현은 뭐라 입술을 빵끗했지만.
소리조차 어둠에 먹혀버렸다.
207화 사자(1)
뼈도 못 추리고 증발해버린 백성현.
파프너도 무사하진 않았다.
[큭.]
구결집합권만 사용해도 몸에 부하가 걸린다.
용인 시절에는 말 그대로 필살의 공격이었고.
사룡이 되면서 후유증도 줄어들었지만, 연속으로 사용하기는 힘들었다.
브레스까지 더해서 쏘아낸 탓에 항상 충만했던 영력이 한순간 바닥 가까이로 떨어졌고.
뼈 마디마디가 시려왔다.
전투를 이어가는 것은 더 불가능했다.
[뒤는 맡길게.]
백성현의 죽음을 확인하자마자 두 날개를 퍼덕이며 전장을 이탈.
검을 휘두르던 송명석이 위를 올려다 보았다.
[파프너? 어디 갑니까!]
[맡긴다고 했잖아.]
[비겁합니다!]
[적 머리 잘라줬으면 나머지는 알아서 해야지.]
7성 마법사 셋과 6성 마법사 10명의 합공을 홀로 이겨냈다.
파프너는 충분히 제 역할을 한 셈.
언데드 군대 지휘를 하며 최전선에서 싸우는 송명석에게는 와 닿지 않았다.
[빌어먹을, 입니다.]
욕지거리와 함께 암흑 강기를 흩뿌리는 송명석.
검을 맞대는 아라한 정예 헌터들도 욕하고 싶은 건 마찬가지였다.
'부사장이 죽었다고?'
'살아서 돌아갈 수는 있는 건가.'
'다 틀렸어.'
하나씩 쓰러지는 동료들.
언데드들은 끝이 없다.
후위를 맡아준 두 헌터들도 언데드들에게 묻혀버렸고.
백성현마저 어둠에 묻혀서 사망했다.
만약.
시기적절하게 오더를 내려줄 만한 인물만 있었으면.
남은 아라한 정예 헌터들은 일부라도 살아서 돌아갈 수 있었으리라.
그렇지만.
진퇴를 결정해줄 사람은 없었고.
설령 있었어도 백성현 만큼 전황을 살피지 못했으니.
백성현이 쓰러진 시점에서 모두 죽는 것은 확정된 사실이었다.
[적. 더 있다.]
최형태가 후미를 덮치자 아라한 정예 헌터들의 기세가 한풀 더 꺾였다.
죽음의 돌진.
데스 카발리에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일점으로 달려드니 방어 마법과 무투계 기술로도 막아서지 못했다.
"이대로는 진형이 붕괴 돼!"
"제 자리를 지켜!"
"가만히 있는다고 뭐가 되기는 해?"
"나, 난 살고 싶어!"
지휘체계가 무너진 집단의 끝은 정해져 있었다.
일부는 도망치려다가 언데드들에게 붙들려서 죽었고.
제 자리를 고수하던 헌터들도 쓰러져갔고.
"부, 분하다."
철퍼덕.
결국 마지막 아라한 정예 헌터가 고꾸라졌다.
[이게 마지막입니까?]
송명석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딱딱거리는 스켈레톤 나이트들의 뼈 부딪치는 소리만 들릴 뿐.
[죽은 척 했을 수도 있습니다. 확실하게 숨통을 끊으십시오.]
서슬퍼런 명령에 스켈레톤 나이트들이 검을 들고 시체들을 들쑤셨다.
[거기! 너무 시체를 훼손하지 마십시오. 주군께 진상해야 하는데 과하지 않습니까!]
[그게겔. 주문. 어렵다.]
[목을 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럼 듀라한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어설프게나마 강령술을 배운 송명석.
성취는 초급 네크로맨서 수준이지만, 그래도 시체를 보존하는 개념 정도는 머릿속에 두었다.
그래서일까.
언데드 군대를 지휘하는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흩뿌려진 시체의 팔과 다리를 맞추고.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것들은 따로 분류해두었다.
[돌아갑시다.]
[좋다.]
위풍당당하게 개선하는 송명석.
파프너를 쏘아붙여줄 생각에 히히덕거리던 중.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에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저건...?]
*
개성으로 날아온 파프너.
유진은 손을 휘휘 흔들었다.
"마침 잘 왔다."
왼팔을 잃은 채, 뼈 감옥에 구속되어 있는 이신우.
파프너는 곧바로 수직 하강했다.
[폴리모프]
광채와 함께 용의 형상이 사라지고, 흑발의 여인이 지면에 강림했다.
"정말 해낸 거야?"
"어. 이신우가 8성에 올라서 고생 좀 했다만."
"포획할 줄은 몰랐어."
"놈의 처분은 네게 맡기마."
울컥, 따뜻한 유진의 배려에 감정이 솟아오른다.
사룡으로 변하면서 되살아난 감정.
그녀는 잠시 하늘을 올려보며 끓어오르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고마워."
"별 말씀을. 우리가 보통 사이는 아니잖아."
현생과 전생을 함께 하는 전우.
그 말은 할 수 없지만.
유진은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묻어두었다.
"으, 응?"
"대전사 님의 복수는 스스로 마무리 짓게 해야지."
"아, 아아아. 그렇지. 당신의 대전사지. 난."
"갑자기 왜 멍하니 그러냐."
"이렇게나 빨리 이신우를 보게 될 줄 몰라서 그래."
파프너는 황급하게 말을 내뱉었다.
랩에도 소질이 있는 줄은 몰랐군.
"박하늘이냐."
"그래. 26년 만이야."
"내 눈이 잘못되지 않았으면 그때 모습과 똑같군."
"폴리모프니까."
이신우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그래.
첫 단추부터 잘못 꿰었던 것이다.
너무나도 찬란하게 빛나는 별을 강제로 땅에 떨어트렸다.
자신이 더 빛나기 위해서.
그 별을 땅에 떨어트렸다고 생각했지만.
어둠에 묻어버린 별은 더 큰 흑암을 품은 채로 돌아왔다.
"왜 그랬어?"
"질투했다. 너를."
"너무 순순하게 말하는 걸."
"난 모든 것을 잃었다. 마지막에는 솔직해져도 되지 않겠나."
유진은 흠- 하고 짧게 신음을 흘렸다.
회귀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추하다고 생각될 만큼 끝까지 발악했다.
팔이 부러지면 다리로.
다리가 없어지면 이빨로 적을 잘근잘근 씹어 먹었다.
광전사의 귀감이 될 만한 모습이었지.
'박하늘 씨를 본 게 그만큼 충격이었나?'
회귀 전의 파프너, 그러니까 박하늘은 감정을 대부분 잃어버리고 원한만 남은 복수귀였다.
외형은 데스 나이트 A.
검은 갑주로 완전무장을 했고, 드러난 부분은 뼈만 보였다.
박하늘이라고 말해줘야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정도.
"넌 쓰레기야."
"안다."
"사람들의 목숨을 미끼삼아 날 노려?"
"그렇게 안 했으면 나는 한국 최강의 헌터가 되지 못했다."
"미안하지는 않아?"
"죗값은 치르고 있지 않나. 지금."
둘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너무나도 찬란하게 빛났던 파프너는 이신우에게 드리운 어둠을 볼 수 없었고.
이신우 역시 구겨진 곳 하나 없는 파프너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주인."
"고문이라도 해줄까? 네가 원한다면 저주 풀 세트를 걸어서 제발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만들어주마."
"됐어. 그만 끝낼래."
"파프너. 한을 남겨두지 않을 자신이 있나."
"응. 차라리 변명이라도 내뱉었으면 모르겠는데. 저거 진심이잖아."
평행선을 걷는 대화.
거짓 하나 없는 이신우의 솔직한 말을 들으니 파프너는 불쾌감도 들지 않았다.
"큭. 죽여라."
"어감이 좀 그렇다?"
"우리 사이에 대화가 더 필요할까."
"그건 맞는 말이야."
파츠츠츠!
구결집합권과 브레스를 동시에 쏟아내서 삐걱거리는 육신.
파프너는 고통을 참으며 암흑 강기를 일으켰다.
적어도.
이신우의 마지막 순간을 결정지을 자격은 그녀에게 있었다.
"앞으로 그러지 마."
"죽을 사람한테 그런 말을 해도."
"아니야. 죽음은 끝이 아니거든."
"그건 내 대사다."
유진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말에 담긴 뜻을 한 발 늦게 이해한 이신우가 눈을 부릅 떴다.
"나, 나를 언데드로!"
"맞아. 네 죄는 죽어서 갚도록 해."
푸우욱!
송곳처럼 벼려진 암흑 강기가 이신우의 심장을 꿰뚫었다.
"끅, 끄으윽."
핏발 선 눈으로 파프너와 유진을 노려보던 이신우는 고개를 푹 숙였다.
"상상력이 빈약하군."
"그러게. 주인의 특기가 뭔지 뻔히 알면서."
"이신우를 되살리면 네 부하로 배속해주마."
"정중하게 사양할게."
"뼈가 닳도록 굴리는 편이 낫지 않겠나?"
"저 인간이랑은 더 엮이고 싶지 않아. 내 마음만 탁해지는 느낌이거든."
원한의 고리를 끊겠다는 결심.
회귀 전과 달라졌다.
'바뀌었다.'
더 일찍 만나서일까.
자신을 잃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는 파프너의 모습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아. 후련하다."
"백성현도 네 손으로 끝장냈나?"
"조금 힘은 들었지만. 어찌어찌 해냈어."
"시간만 끌어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만."
"난 주인의 대전사잖아. 그 정도도 못하면 송명석한테 호칭 줘야지."
언제는 욕심 없다면서요.
호승심을 은근히 드러내는 파프너를 보니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참. 시체를 가루로 만들어버렸네."
"혼백이라도 거두면 쓸 수 있다."
"나처럼 적당한 시체에 빙의시키게?"
"비슷하지."
6성도 되었겠다.
이제 만들 수 있는 언데드의 카테고리가 훨씬 늘어났다.
마법계 언데드 하면 바로 떠오르는 존재.
리치.
원래는 시술자의 생명력을 봉인해야 리치로 될 수 있는 만큼, 편법을 써야겠지만 말이야.
〔이제 한 고비는 넘겼구나.〕
'한국은 상황 정리가 얼추 끝났다.'
회귀 후 1년.
아라한 길드를 조기에 뿌리 뽑음으로써 많은 것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로마노프 가문에 맞서 싸우려면 더 많은 힘이 필요했다.
개성 이북, 그리고 대륙.
세력을 넓히면서 군세를 키우고 크로노스의 신자들이 많아지면.
반석 위에 올린 것처럼 굳건해 보이는 로마노프 가문이라도 무너트릴 수 있으리라.
[주군!]
먼 거리에서 들리는 송명석의 사념.
유진도 영력을 소모해서 텔레파시를 보냈다.
-무슨 일이야?
[하늘을, 하늘을 보십시오!]
하늘이 왜, 라고 중얼거리던 유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왜 이걸 몰랐지?'
하늘을 뒤덮은 위화감.
식은땀이 등허리를 타고 내려간다.
목덜미에 칼을 드리운 것 같은 서늘함에 꿀꺽, 하고 침을 삼켰다.
파프너 역시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주인."
"아무래도 손님이 하나 더 있었나보다."
후욱-.
길게 숨을 내뱉은 유진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크게 외쳤다.
"손님이면 모습을 드러내시지."
〔오. 술식 없이 감만으로 위장을 간파한 건가?〕
서라운드 음향 장비를 쓴 것처럼 사방에서 울리는 중후한 목소리.
까드득.
턱에 힘이 들어갔다.
저 음색을 어떻게 잊으랴.
회귀라는 도박을 하게 만든 원흉의 목소리다.
"모습을 드러내라."
〔객으로 온 입장에서 모습을 숨기는 것은 안 될 일이지.〕
[카모플라쥬 해제]
[방호 모드]
아이스 블리자드의 여파로 흐려진 하늘이 일순 환해졌다.
강한 빛이 먹구름을 몰아내고.
찬란한 태양이 제 모습을 다시 드러내며, 그 빛 아래에는 커다란 배가 위풍당당하게 떠 있었다.
"군함이 왜 여기에 있어?"
"정확히는 공중항모다."
"내 눈에는 그게 그것처럼 보이거든."
쿠즈네초프급 항공모함.
과거 러시아 군의 해양을 수호하는 유일한 항공모함이다.
'로마노프 가문에서 매입. 개수를 거쳐 비행이 가능한 공중요새로 가동하게 되었지.'
빌어먹을.
2030년도 안 되어서 공중항모를 개발했다고?
'그 빌어먹을 나비 효과 이야기는 집어쳐.'
미래가 바뀐 게 아니다.
로마노프 가문이 해당 정보를 은닉하고 있었겠지.
유진이 회귀했다고 해서 수만 톤이나 되는 항모를 띄울 만한 기술력이 느닷없이 튀어나올 리는 없으니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저기에 타고 있는 놈이지.'
수우우우웅-.
천천히 하강하는 공중항모.
개활지에 사뿐하게 앉은 항모에서 붉은 로브를 입은 노인이 내려왔다.
로브 중심에 수놓은 검은 쌍두 독수리.
저주받을 로마노프 가문의 상징이 바람에 나부낀다.
"드미트리 안드레예비치 로마노프."
"껄껄. 자기소개를 하지 않아도 되니 참으로 편하구먼."
빌어먹게도 긴 이름.
외우고 싶지 않았지만 뇌리에 새겨지고 말았다.
세계 7대 명가 중 하나인 로마노프 가문의 수장이자.
아스가르드의 신왕 오딘의 화신.
그리고.
전 세계에서 최초로 아홉 번째 성위를 완성시킨 초월자.
"마법왕이라고 부르게나."
드미트리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208화 사자(2)
마법왕.
아홉 번째 성위에 오른 초월자에게만 부여되는 영예로운 호칭이다.
평온하게 서 있는 드미트리.
마력을 느끼지 못한 사람은 별 감흥이 없겠지만.
이 자리에 있는 사람(혹은 언데드) 중에 감이 둔한 자는 없었고.
모두 소용돌이치는 마력의 흐름에 경악하고 있었다.
'소름이 돋습니다. 무왕하고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몇 초나 버틸 수 있을까? 싸운다고 하면 차라리 주인을 데리고 도망치는 게 낫겠어.'
'쿠훅. 배고프다.'
팽팽해진 공기.
아라한 길드와의 전쟁이 막 끝난 시점이라 그런지, 부풀어 오른 긴장감은 말 하나만 잘못 해도 터져버릴 것 같았다.
왜.
무슨 이유로.
동유럽의 패자이자 세계 7대 명가의 수장, 그리고 왕이라는 칭호를 얻은 절대자가 개성에 찾아온 것일까.
파프너는 유진을 힐끗했다.
'일단 주인의 판단이 중요해.'
싸우라고 하면 몸이 부서질 때까지 싸울 것이요.
도주를 명하면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유진을 개성에서 이탈시킬 것이다.
저벅- 저벅-.
마법왕을 향해 걸어가는 유진.
잠깐 동안 그를 빤히 보더니, 갑자기 큰 소리를 외쳤다.
"정말 마법왕이 맞군요!"
"허허허. 그렇다네."
"아스가르드의 신왕, 룬 마법의 창시자인 오딘의 계약자이자 최초로 아홉 번째 성위에 오른...."
"본인에 대해 잘 알고 있구먼."
"알다마다요. 모든 마법사의 지향점이자 꿈 아니겠습니까."
저기요.
주인?
파프너는 이렇게 묻고 싶었다.
'갑자기 왜 캐릭터를 바꾸고 난리야?'
언제부터 유진이 저런 캐릭터였나.
드미트리를 보고 호승심을 불태우면 불태웠지.
저렇게 꼬리를 흔드는 사람은 아니었다.
송명석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푸른 귀화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계약자. 이 작은 인간이 그대의 숙적이 아니더냐?〕
맞습니다.
지금은 눈앞의 상대에게 집중해야 하니 조금만 닥쳐주십쇼. 성좌 나리.
"혹시 신왕 오딘께서 화해를 주관하라 하셨습니까?"
"젊은데도 심려가 깊군. 그렇다네."
"이거 참. 곤란하게 됐군요."
유진은 가슴팍이 뚫린 이신우의 시체를 가리켰다.
"승부는 이미 끝났습니다."
"너무 개의치 말게. 우리 성좌는 자비로우시니. 이미 벌어진 일을 책망하시진 않을 거라네."
농담도 잘하는군.
자비라는 단어가 오딘과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회귀 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오딘을 배후성으로 둔 존재가 이신우와 드미트리만은 아니다.
최강, 그리고 최흉의 계약자이자 대리인으로 인정받은 건 마법왕이지만.
전 세계를 모두 뒤져보면 오딘의 후원을 받는 헌터가 10명 정도는 되었으니 말이다.
이신우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공중항모를 끌고 한국까지 온다?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를 먼저 알아봐야 했다.
'그 놈의 나비효과 운운하면 진짜 화낸다.'
〔진실을 일러주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둔함이라니.〕
유진은 크로노스의 사념을 차단했다.
"근데 반중력 엔진이 벌써 실용화가 된 겁니까?"
"오. 마도 공학에 대해 관심이 있나?"
"논문은 몇 개 읽어봤습니다."
"성자라고 들었건만. 참으로 박학다식한 친구로군."
"반은 맞는 말이지요. 저는 신관과 마법을 모두 다룰 수 있습니다."
유진은 보란 듯이 백야 특성을 사용했다.
순식간에 반전되는 성질.
드미트리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성력을 영력으로 바꾼 겐가?"
"그렇습니다. 제가 모시는 성좌께서 하사하신 능력입니다."
"믿기지 않는구먼. 기적 같은 일일세."
아무렴.
회귀 전에도 이런 능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특정한 아티팩트를 활용해야 에너지의 변환이 가능했고.
그마저도 손실이 많아서 실전 활용도는 높지 않았다.
한데.
유진의 특성인 [백야]는 성력 / 영력 변환 과정에서 조금의 손실도 발생하지 않았으니.
드미트리가 놀랄 만도 했다.
"천유진이라고 하였나?"
"그렇습니다."
"니콜라스가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한 이유가 있구먼."
"좋게 봐주시니 영광이군요."
"목적은 달성하지 못한 것 같지만. 그래도 개안을 하게 되었구먼."
드미트리는 공중항모를 가리켰다.
"이야기가 길어질 듯 하니. 어떤가? 우리 가문의 역작을 구경해보는 건."
"마도공학에서 가장 앞선 로마노프 가문의 기술이라니. 억만금을 주고도 볼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가치를 알아주니 참으로 기쁘구먼."
"두 명만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그리 하게."
드미트리는 허허로이 웃었다.
*
개성 공단에서 불려온 연금술사.
신준석은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감탄사를 터트렸다.
"정말 아름답군요!! 반중력 엔진이 실용화 단계라고는 들었습니다만. 이 막대한 마력 하며 중력을 역전시키기 위해 적용 중인 마법만 도대체 몇 개인지...."
연금술이나 마도공학 관련 이야기만 나오면 래퍼라고 해도 믿을 만큼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유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마법왕께 인사부터 하시죠."
"누구요?"
"마법왕 드미트리. 로마노프 가문의 수장이십니다."
두 눈을 껌뻑이던 신준석이 경악했다.
"마마, 마마마마마마."
"저 공중항모 구경 좀 할 겁니다."
"진짭니까?"
동업자님, 사랑합니다. 충성충성! 이러는 신준석을 말리느라 한참을 걸렸다.
"진리를 추구하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구먼."
드미트리의 안내를 받은 유진 일행은 공중항모로 들어갔다.
적의 본진이나 마찬가지인 곳.
유진은 허리를 펴며 겸손한 척 하지만 비굴하지 않은 태도로 걸었다.
〔짐이 하사한 능력을 막 보여주어도 되는 게냐?〕
'녀석을 낚으려면 패 하나는 까야 한다.'
니콜라스를 독대했을 때하곤 다르다.
당시는 언데드의 숫자도 이렇게까지 많지 않았고.
어떻게든 속여 넘길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강령술로 빚어낸 언데드들이 바글바글해서야.
마법의 극한에 다다른 마법왕을 속일 수 없었다.
'그럴 바에는 먼저 드러낸다.'
이 대화에서 주도권을 가져오려면 임팩트가 큰 패를 까야 했다.
드미트리가 다른 생각을 품을 수 없도록.
'그리고 말이야. 저 놈이 왜 왔는지도 알 것 같다.'
〔호오.〕
'신성 주문으로 만들어낸 언데드. 그리고 성좌 나리.'
〔여기서 짐이 왜 나오느냐?〕
'회귀 전에는 역천의 거인이란 성좌가 없었잖아.'
티탄 신족의 왕.
크로노스.
본래의 역사에서는 제우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후, 낙성좌로 영락해서 성좌로써의 힘을 모두 잃었다.
그렇지만.
유진은 [시간]과 [수확]을 주관하는 크로노스의 개념을 반전시켜서 새로운 개념을 주관하게끔 만들었다.
죽음에서 되돌아온 자.
언데드.
죽음을 거스른다는 개념을 발견하고 담당하게 되면서 성좌로써의 격은 모자랐지만, 잠재력만큼은 신왕 급에 버금가게 된 것이다.
'성좌 나리를 구슬러서 죽음을 거스르는 개념의 비밀을 파헤치고 싶은 거다.'
〔필멸자가 손에 넣기에는 과분한 힘일진대.〕
'드미트리의 소망이자, 오딘의 바람이기도 하겠지.'
마법왕과 신왕 오딘.
둘은 상성이 굉장히 잘 맞았다.
오딘은 스스로 심장을 찔러서 9일 동안 죽음을 경험함으로써 진리를 깨우쳤다는 일화를 가지고 있다.
모든 지식을 손에 넣겠다는 욕망.
크로노스가 대두되면서 존재감을 높여가는 '죽음을 거스르는' 영역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할 것이다.
'드미트리도 마찬가지다.'
회귀 전.
유진이 공격받은 이유이기도 했다.
마법이라는 분야 전체를 놓고 보면 로마노프 가문의 위상을 따라잡을 곳이 없었지만.
강령술에 한정해서 보면 유진의 성취가 훨씬 높았다.
'나한테 그 비밀을 빼앗고 싶어했지.'
〔지식욕이라. 참으로 옹졸한 이유로구나.〕
'왕좌 뺏기기 싫어서 자식들을 먹은 분이 할 말은 아닌 듯?'
크로노스가 분개했지만 무시했다.
호랑이 굴에 들어온 상황.
드미트리가 회귀 전처럼 강령술에 관심을 가진다면....
'곤란하군.'
니콜라스를 접견했을 때만 해도 이런 상황은 예측하지 못했다.
-그래도 다행이잖아. 주인. 이신우를 쓰러트린 후에 도착해서.
유진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동행한 파프너가 사념을 보냈다.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이신우는 로마노프 가문이 이번 사태에 개입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다.
그래도.
명분이 되는 이신우가 죽기 전에 도착했으면 아라한을 뿌리뽑을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오, 오오오오!"
복잡한 자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준석은 연신 감탄사를 터트리며 공중항모에 설치된 마법진들을 분석했다.
"가문의 비밀을 이렇게 보여주셔도 되겠습니까?"
"걱정 말게. 이렇게 자잘한 부분은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으니."
드미트리의 목소리에는 마법왕 다운 자부심이 가득했다.
글쎄.
일반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강령술로 9성에 도달한 초월자인 유진조차, 스쳐 지나가는 정도로는 공중항모에 깔려 있는 회로와 마법진을 분석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미래의 대연금술사를 빠르게 모셔왔지.'
신준석은 다르다.
이 양반.
엄청난 천재다.
공중항모를 만들지는 못해도.
여기서 살펴본 마법진의 원리를 분석하면 반중력 기술 상용화도 금방 해낼 걸?
공중항모 여기저기를 보여준 드미트리는 함장실로 안내했다.
"어떤가?"
"훌륭하군요."
"로마노프 가문에서는 반중력 기술을 여러 방면에서 활용하려고 연구중이라네."
그러시겠지.
한국을 침공할 때에도 유용하게 사용했으니까.
반중력 기술은 지금으로부터 25년 쯤 뒤에는 작은 섬 크기의 땅을 들어 올릴 정도로 발전 된다.
로마노프 가문의 공중요새는 본 드래곤들을 동원해야 겨우 막아낼 수 있었지.
"공중항모를 보여주신 걸 보면 이신우 길드장과의 화해를 주선하러 오신 것만은 아닌 것 같군요."
"이해가 빠르군. 젊은이답지 않은 노련함이 엿보여."
"눈치 조금만 있으면 알 겁니다."
옆을 힐끗 보자, 그저 마법진을 분석하며 환호 중인 미래의 대연금술사가 보였다.
정정하겠다.
눈치가 좀 많이 필요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껄껄. 저리 몰입하는 모습을 보니 내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구먼."
"대단한 재능을 가진 동업자입니다."
"이 연금술사가 중급 포션을 양산했다는 소식은 들었다네."
역시.
사전에 정보는 모두 조사해놓고 왔군.
신준석이 나름대로 뛰어난 연금술사란 것을 알면서도 공중항모를 보여준 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방증이라.
"죽은 자를 되살리는 방법에 대해 알고 싶으신 겁니까?"
"곧바로 본론을 꺼내다니. 혈기가 넘치는구먼."
"이 정도면 충분히 뜸 들였다고 생각해서."
"그렇다네. 여기 있는 언데드들 대부분에게서 마법의 흔적이 남아있더군."
"네크로맨시로 언데드를 사역할 수 있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성자로 임명된 후로부터, 란 말로 해석하면 되겠는가."
"예."
니콜라스가 헛물을 켠 이유를 슬쩍 끼워 넣으니 드미트리는 납득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묻지. 기록상으로만 있는 네크로맨시를 어떻게 복원하였나?"
"역천의 거인. 제가 모시는 성좌의 조력 덕분입니다."
"신성 주문과 관련이 있는 건 데스 나이트 오우거 뿐으로 보이더군."
"영감으로 주문을 얻어낸다, 고 보시면 되겠군요."
당연히 믿지 않는 눈치다.
마법이란 학문은 성좌의 가르침이나 깨달음으로 척척 나오는 게 아니었다.
오딘이 룬 마법을 창시했다고 해서 모든 마법에 능통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흠. 참으로 흥미로운 이야기야."
"흥미롭다면, 이 제안은 어떠십니까?"
"말해보게."
"로마노프 가문에서 한 명을 네크로폴리스로 보내주시죠."
"유학이라도 보내란 말인가?"
"예. 저도 강령술에 대한 지식을 정리할 필요가 있으니, 서로 도우면서 네크로맨시 연구를 하는 겁니다."
유학.
참 어감 좋네.
〔감시역을 두어서 어찌 하려는 게냐!〕
'놈이 할 말을 먼저 하는 거다.'
회귀 전에도 그랬듯.
드미트리가 생각하는 게 뭔지는 뻔했다.
그렇다면.
역제안으로 선수를 뺏어오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지 않아?
209화 사자(3)
드미트리의 망막 위로 유진의 모습이 비쳐진다.
언뜻 보면 경박하다고 생각될 만큼 가벼운 태도지만.
그 모습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거지?'
뛰어난 통찰력.
마법 지식에 대한 갈망.
젊었을 때의 자신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먼저 손을 내밀고 연구하자고 할 품성이 아니다.'
반응을 떠 보려고 하는 듯한 느낌.
재미있군, 이라고 짧게 뇌까린 드미트리는 홍차를 마셨다.
"니콜라스의 제안은 거절했다고 들었다만."
"그때만 해도 성직자의 영역이었지. 마법은 아니었으니까요."
"홀로 강령술을 연구하자니 한계를 느낀 건가?"
"뭐, 그렇다고 봐야죠. 로마노프 가문은 세계 최고의 마법사 집단이니.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유진은 커피를 한 번에 들이켰다.
"로마노프 가문에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마탑을 지었다지요?"
"마도를 추구하는 이들은 가문 외 사람이라도 문을 열어주고 있다네."
정확히는 가입이 자유롭지만 탈퇴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로마노프 가문의 마탑이다.
재능 있는 자들을 선별하고.
가문으로 흡수하기 위해 마탑을 운영했으니.
지원자들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로마노프 가문과 연을 만들기 위해 기라성 같은 마법계 헌터들이 마탑의 문을 두드렸다.
"저도 흑탑이라는 것을 지어보았습니다."
"흑탑이라. 네크로맨시를 연구하는 탑인가보군."
"예. 집단지성이라는 표현이 있듯, 머리를 맞대면 지혜가 더 나오지 않겠습니까?"
로마노프 가문에서 사람을 빼가겠다는 말을 당당하게 하는 유진.
드미트리는 실소를 흘렸다.
"차라리 이러는 게 어떤가?"
"말씀하시죠."
"내가 연구를 돕겠네."
"마법왕께서 직접?"
"극동의 땅에서 오래 머무를 수는 없겠으나, 나름 마법에 대해서는 자신 있다네.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된다만."
마법사를 빼가시겠다?
그건 곤란하니 내가 밑천 좀 털어가도 될까, 라는 말로 응수했다.
〔능구렁이구나. 작은 인간을 후원하는 성좌와 판박이로다.〕
오딘의 특기 중에는 말재간이 있다.
세 치 혀로 필멸자들은 물론이요, 성좌들마저 이간질시킨다지.
괜찮다.
여기까지는 허용 범위 내다.
유진은 안면 근육을 최대한 움직이며 밝게 웃었다.
"진짜입니까? 그럼 영광이지요!"
"흠."
"얼마나 머무르실 수 있겠습니까?"
이게 아닌데.
드미트리는 종잡을 수 없는 유진의 반응에 혼란함을 느꼈다.
'투자를 경계하고 사람은 빼가려고 하면서 난 경계하지 않는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드미트리는 홍차를 마저 들이마신 후,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군."
"알겠습니다. 모쪼록 네크로맨시 연구에 힘을 보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걸세. 공중항모를 더 구경하시게나."
그래.
유진을 잠시 배에 묶어두고 결정을 내면 된다.
드미트리는 판단을 유보했다.
*
"동업자 님! 저길 보십쇼!"
"6성급 출력의 레이저 포대군."
"그 대단한 것을 너무 무심하게 말씀하시면 곤란합니다! 저 포대를 발동시키기 위해 결합된 마법진만...."
신준석은 물 만난 고기처럼 신나게 떠들었다.
그래.
이래야 당신을 데리고 온 보람이 있지.
"내가 알려준 기술은 절대, 뻥끗도 하지 마."
"그럼요."
골렘 생산 기술은 아직까지 상용화 되어 있지 않다.
게이트에서는 관련 스킬북이 나오지 않았으니.
실제로 골렘 제작 분야만 놓고 보면 회귀 전에도 대연금술사인 신준석이 미세하게 앞섰었다.
'우리 대화도 모두 드미트리가 듣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적의 본진에 들어온 상황.
한 토씨라도 정보를 줄 수는 없다.
"저 기술. 결합할 수 있겠어?"
"어렵습니다. 당장은."
시간과 돈만 있으면 된다는 의미.
역시 미래의 대연금술사야.
〔마법왕이란 자가 체류하면 감당할 수 있겠느냐?〕
'털어갈 밑천도 없어.'
흑탑이라고 해봐야 초 · 중급 강령술 책자만 몇 개 있다.
진짜는 유진의 손에 끼워져 있는 아티팩트.
[흑암의 반지]다.
'스킬북을 반출할 수도 없으니 흑탑에서 머물러야 하는데. 그래서는 네크로맨시를 분석할 수 없을 거다.'
〔그리 장담하는 이유는 무엇이더냐?〕
'직업군.'
네크로맨시를 사용하려면 영력을 다룰 줄 알아야 한다.
마력의 갈래 중 하나인 영력.
자연에 분포되어 있는 마력에서 영력을 추출할 수는 있다.
'근데 효율이 너무 떨어지지.'
드미트리가 괜히 [백야] 특성을 보고 놀란 게 아니다.
성질 변환이 쉽지도 않고.
갖가지 수단을 동원해서 성질을 변환해도, 그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마력 손실이 일어난다.
'주문 해독은 가능해도 실전 활용도는 높지 않을 거다.'
본인이 네크로맨서가 되지 않는 이상.
기초 주문인 레이즈 언데드를 사용하는 것도 어려울 거다.
어렵사리 발동시켜도 효율이 떨어질 거고.
〔로마노프 가문과 엮이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느뇨.〕
'사달은 났잖아. 어쩔 수 없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빨리 엮이게 되었다.
이미 벌어진 상황을 놓고 원망하기보단 그 다음을 생각해야지.
크로노스를 성좌로 삼는 순간부터, 피해갈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좋아.'
네크로맨서 전직 루트가 밝혀지는 것은 4년 뒤.
직업 보정 없이 강령술을 써봐야 효율이 떨어지고.
수준이 높은 주문은 발동 자체가 안 된다.
로마노프 가문이 본격적으로 네크로맨시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도 전직 게이트가 발견되면서였으니.
'매달릴수록 시간만 뺏기는 꼴이야.'
4년 뒤라면 모를까.
당장은 연구해도 성과를 낼 수 없을 것이다.
〔정녕 방법이 없는 게냐?〕
'흑암의 반지에는 있지요. 크흐흐흐흐.'
근데 왜 알려줘.
안 알랴줌!
드미트리가 직접 온 덕에 수확도 있었다.
제일 큰 성과는 공중항모.
수박 겉핥기식으로 보는데도 무수한 영감을 받아 황홀경에 빠진 신준석을 보라.
앞으로 제작할 골렘의 성능이 비약적으로 향상될 것은 물론이고.
공중요새 급은 무리여도 항모 정도는 띄울 수 있지 않을까.
'우리도 공중 병력을 빨리 마련해야겠어.'
7성이 되거나.
혹은 네크로폴리스의 규모를 성장시키면 본 드래곤도 생산이 가능하다.
〔명색이 드래곤일진대, 그럼 시체가 필요하지 않겠느뇨?〕
'진짜 용으로만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야.'
용족.
그러니까 와이번이나 드레이크의 시체로도 본 드래곤을 만들 수 있다.
'이름은 드래곤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용족을 모두 통칭하는 거라고 보면 돼.'
〔하면 섬에 있는 피조물들로도 만들 수 있단 말이더냐.〕
'음. 가능은 한데.'
레리크가 지닌 용의 인자는 정말, 아주 미량이다.
하위 용족의 시체라면. 어디 보자... 산을 쌓을 정도로 있어야 가능할 것 같군.
'그래도 되긴 되니까. 시도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레리크라.
회귀 전, 연평도를 토벌할 때 즈음에는 땅과 융합한 핵을 추출할 수 있게 되어서 써먹는 게 불가능했다.
운이 좋으면 본 드래곤을 더 빨리 생산할 수 있게 될지도?
'어쨌든 평양을 빨리 손에 넣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네.'
이북으로 가는 길을 열면 중급 이상 용족의 영역도 꽤 있다.
평양의 짐승 군벌 말고도 자치 중인 세력이 꽤 있지만, 위협이 되는 수준은 아니니까.
왜애애애앵-!!!
갑자기 울리는 커다란 사이렌.
진원지는 공중항모였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누군가가 공중항모 근처에 다가왔나 보군."
"너무 여유로우신 건 아닌지."
"로마노프 가문의 배다. 어지간한 적은 갑판에 기스 하나 못 낼걸."
한때 로마노프 가문과 대적해봐서 잘 안다.
7대 명가라고?
세간에서는 로마노프 가문과 나머지 6대 명가를 같은 선상에 두고 있지만, 실제로는 달랐다.
회귀 전을 기준으로 보면 로마노프 가문 홀로 6대 명가와 붙어도 밀리지 않을 정도.
〔그리 차이가 많이 나느냐?〕
'가문의 수장들을 뺀 셈법이지만, 과장은 아니야.'
화신체가 된 9성 초월자들은 예외다.
모든 공격을 90% 경감하는 〔아우라〕만으로도 전황을 뒤집을 만한 힘이 있으니.
〔계약자가 그런 가문과 정면으로 대결할 정도의 힘을 지녔다니.〕
'로마노프도 전력을 붓진 않았어.'
한 70% 정도는 동원했지.
로마노프 가문의 영역을 지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병력을 두고 한반도를 짓밟았다.
"구경이나 갈까?"
"주인. 왠지 익숙한 느낌이 나."
"익숙하다니."
"음. 그러니까... 자매가 온 것 같은?"
"외동이라면서."
"느낌이 그렇다고."
어차피 갑판 위로 나가보려고 했으니까.
텅- 텅-.
쇠로 된 복도를 통과해서 갑판으로 나오니, 갑판 일부가 그림자로 뒤덮였다.
"용 아닙니까?"
신준석이 넋을 잃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전신을 물들이고 있는 붉은 비늘.
두 장의 날개에 붙은 커다란 피막이 햇볕을 가리며 음영을 만든다.
드레이크.
상위 용족, 그러니까 '진정한 용족'이라고 불리는 진룡을 제외하고는 가장 등급이 높은 괴물이 공중항모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이러니 공중항모에서 사이렌이 울리지.
"귀빈들은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이 공중항모는 괜찮은 겁니까?"
"7성급 방어 마법만 다섯 겹을 두르고 있습니다. 어떤 공격에도 끄떡하지 않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에게.
생각보다 낮은 스펙이다.
반중력 엔진을 개발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말이 사실이군.
승무원이야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겠지만, 유진에게는 큰 단서가 되었다.
로마노프 가문과 전면전을 벌이면 어떻게 해야 할까.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파프너가 드레이크를 가리켰다.
"나를 부르고 있어."
"드레이크가 상급 용족이긴 해도 지성은 높지 않아."
"아니야. 저길 봐."
파프너의 손가락이 향하는 방향을 봤다.
"동업자님! 사람이 있습니다!"
"나도 보여."
허리까지 닿는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려서 마구 나부낀다.
목 아래쪽에는 파충류에게나 자랄 법한 비늘이 붙어 있고.
번들거리는 마름모꼴 눈동자가 위협적인 빛을 흩뿌렸다.
"용기사 제인."
유진의 중얼거림에 신준석이 화들짝 놀랐다.
"그 자가 왜 여기에 온 겁니까?"
"나도 모르지."
"용기사는 누구인데?"
"용군단의 계약자. 만신전과는 별개의 세력이지만, 모종의 거래를 통해 이 세계에 간섭하는 녀석들이다."
용.
여러 신화나 전설에서 신들의 대적자로 나오는 존재.
전설의 시대가 끝이 날 무렵.
개인 성향이 강한 용들은 시간이 지나면 성좌들에게 토벌 당해 사멸할 운명이라고 판단해서 하나의 사회를 이루었다.
"그게 바로 용군단이지."
"용들의 사회라. 어째 감이 안 오는걸."
"전설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중국 신화에 나오는 응룡의 최후가 어떠했는가.
그리스 신화의 용, 이스메니오스는 반신에게 죽임을 당했고.
박하늘 씨에게 붙여준 용의 이름.
파프너만 해도 전설에서 토벌당한 악룡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니.
"그건 좀 그렇다."
파프너는 미간을 찌푸렸다.
용군단 소개는 여기까지 하고.
'로마노프 가문에 용군단의 대리자까지. 난리도 아니군.'
녀석이 왜 왔는지는 뻔했다.
뒤를 힐끗 보니 파프너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새롭게 탄생한 용족.
파프너의 소식을 듣고 용군단에서 사자를 파견했겠지.
용군단 내에는 사룡족이 없었으니까.
'쩝. 인기가 너무 많은 것도 피곤한 일이야.'
유진은 한숨을 쉬었다.
210화 용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