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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3 - 220-230

220화 다시 보니 반갑수다

철썩! 철썩!

해안가로 몰려온 파도가 방파제를 두드린다.

유진은 방파제 앞에 정박 중인 유령 함대를 둘러보았다.

크고 작은 유령선 사이로.

존재감이 유독 돋보이는 배 한 척이 있었으니.

"고스트 드레드노트."

[흑암의 반지]에도 기록되어있지 않은 유령선이다.

왜 그렇냐고?

드레드노트라는 명칭 자체가 이계에는 없으니까.

20세기에서 거함거포주의라는 용어를 탄생하게 한 배의 이름이자, 이후에는 군함을 분류하는 이름으로까지 쓰이게 된 배의 이름이 '드레드노트'다.

강철로 만든 바다의 성.

이전 시대에 건조한 배들의 공격에는 끄떡도 하지 않고.

압도적인 화력으로 상대를 부쉈던 배가 드레드노트다.

'회귀 전에도 운용은 해봤지만.'

-왜 그리 떨떠름해하느뇨?

'내가 저 배를 만들려고 얼마나 개고생을 했었는데.'

유령함대는 해안 전투에 한해서 성위를 넘어선 힘을 발휘한다.

수가 늘어날수록 각종 버프로 강화되고.

해안가에서는 전투력 보정까지 받으니, 어지간한 적은 격퇴가 가능했다.

그래.

어지간한 수준을 넘어선 진정한 강자 앞에서는 힘을 못 써서 문제이지.

'유령함대를 강화하려면 생전에 해적이나 제독이었던 자를 언데드로 만들어서 취임시키면 되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나.'

뛰어난 무력과 해상 지휘 능력을 겸비한 헌터가 이 시대에 얼마나 있겠어.

유령함대 전력 강화는 요원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흑암의 반지에 없는 개념인 군함을 유령선으로 만드는 것.

회귀 전.

[고스트 드레드노트]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내가 그 고생을 해서 만든 놈이 자연 출현했다고?'

억울하다.

고스트 드레드노트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아는가?

여러 환경에서 실험하고.

갖가지 마법과 주술을 사용해보았으며.

기존 유령선을 넘어 현대의 기술과 결합한 언데드를 빚어낼 최적의 조건을 알아내기까지 1년 넘게 걸렸다.

-전력이 강화되었으니 좋지 않느냐.

'억울하다고!!!'

후.

마음의 앙금은 덜어내자.

어찌 되었든 전력 강화는 호재니까.

"동남아시아 쪽 루트. 얼마나 가져올 수 있겠나."

"해안 루트는 50% 정도 가능합니다."

"싹 뺏어와."

"구룡방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놈들이 한국에 진출하려고 준비 중이다. 처맞을 때까지 기다려줄 도리는 없지."

상대가 나를 이유 없이 싫어하면, 그 이유를 만들어주는 게 우리나라의 훈훈한 정 아니겠는가.

"천무문이 나설지도 모릅니다."

"미스터 블랙. 천무문이 두렵나?"

"일곱 명가 중 하나를 안 두려워하는 건 천 대표님 뿐일 겁니다."

"아닌데. 나도 두려워."

"...."

그렇게 노려보지 마.

다 이유가 있다고.

"천무문은 나서지 않을 거다."

"무왕은 구룡방을 묵인해주고 있습니다."

"묵인이 아니야. 신경을 안 쓰는 거다."

묵인과 무신경.

둘은 결과적으로 같아 보일 뿐, 내부를 들여다보면 큰 차이가 있다.

"구룡방을 대체할 세력이 나타나서 천무문의 간지러운 곳을 긁어준다면 창 우페이도 신경 쓰지 않을 거다."

"누가 그 거대한 조직을 대체한답니까?"

"블랙 컴퍼니."

"농담이 과하시군요."

"그렇게 들리나?"

"아뇨. 제발 농담이라고 해주십쇼."

미스터 블랙은 눈을 질끈 감았다.

혹 떼려고 왔다가 역으로 혹을 붙이고 가는 느낌.

유령함대 좀 더 적극적으로 써먹자는 제안을 하러 왔다가 일 폭탄만 두들겨 맞은 기분이다.

"다른 건 다 그렇다 칩시다. 천무문에서 나서지 않는다는 건 믿기 어렵습니다."

"왜. 한국에서 중국에 발 뻗는 걸 묵과하지 않을 것 같나?"

"그렇습니다."

"안 그래도 해당 문제로 창 우페이와 만나기로 했다."

"농담이 과하시군요."

"데자뷰 같은데."

"그렇게 큰 안건을 밥 먹고 커피 먹자는 말처럼 내뱉지 말란 말입니다."

미스터 블랙은 담배를 물었다.

"저기 가서 펴. 냄새 밴다."

"그, 천무문하고는 어떻게 담판을 지으시려고 합니까?"

"무왕의 간지러운 부분을 긁어줘야지."

"간지러운 부분이 뭔데요."

"호호. 그건 저도 궁금하답니다."

못 알려줘.

이맘때의 무왕이 아직 온전한 9성에 오르지 못했단 사실을 어떻게 말해주겠니.

"뭐, 어쨌든 천무문은 블랙 컴퍼니의 행보에 큰 신경을 쓰지 않을 거다."

"구룡방과 흑상만 상대하면 된단 말씀이군요."

"할 만해?"

"전혀요. 중국의 음지를 쥐락펴락하는 게 구룡방인데 어딜 봐서 할 만합니까."

자신만만한 표정 지으면서 엄살 부리기는.

"무왕과 언제 만나기로 했습니까?"

"내일이었나."

"천 대표님의 담대함은 언제 봐도 적응이 안 되는군요."

죽으러 가는 자리도 아니고.

뭘 긴장해?

유진은 짧게 웃었다.

*

대격변 이후, 만주의 정세는 늘 불안정했다.

시베리아만큼은 아니어도 높다고 할 수 없는 인구밀도.

미처 처리하지 못한 게이트들은 모두 땅과 융합해서 괴물을 잡초처럼 무한하게 빚어냈고.

생활영역은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도 드넓은 땅을 지키지 못하고 여럿으로 분열하지 않았던가.

극동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자립한 이웃도 믿음직스럽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침공 우려?

그런 게 아니다.

몬스터 웨이브에서 밥값을 할지 말지에 대한 신뢰였다.

천무문에서 주기적으로 몬스터들을 토벌해주고 있지만, 안정적인 생활 영역을 확보하기에는 모자란다.

"남의 눈을 피하기에는 딱 좋은 장소야."

창 우페이는 혼잣말을 내뱉었다.

천무문에 펼쳐진 무수한 방어 수단들을 뚫고 찾아온 마담.

그녀가 전해준 말은 무왕의 발걸음을 만주로 향하게 만들었다.

'천유진이라.'

용의 계곡에서 마주했던 자.

구룡방과 적대관계라고 했지만, 창 우페이하고는 관련이 없는 일이다.

오히려 낮은 성위면서도 강력한 하수인들을 부렸던 유진에 대한 호기심만 있을 뿐.

부하들에게는 잠시 바람 좀 쐬겠다고 하고는 홀로 뛰어서 만주까지 왔다.

9성에 달한 스펙이다 보니 산책하듯 가벼운 발걸음만으로도 금세 수천 킬로미터를 주파할 수 있었다.

'혹시 아는가. 그 자라면 내가 잡지 못한 깨달음의 실마리를 제공해줄지.'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

약간의 기대감을 품은 채, 창 우페이는 약속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화아아악-!

나부끼는 머리카락.

강풍을 동반하며 날아온 5미터 크기의 용족이 창 우페이의 위에서 멈추었다.

느린 속도로 하강한 드래곤은 등 위에 타 있던 두 인영을 내려주었다.

천유진.

그때 봤던 자신만만한 얼굴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또 보게 되는군."

"여기까지 나와 주셔서 고맙군요."

[다시 보니 반갑수다.]

마지막은 송명석이다.

용의 계곡에서 1초 만에 제압당한 것을 아직 마음에 두고 있는 모양이다.

[폴리모프]

한 차례 섬광이 번쩍이고.

파프너도 인간의 형태를 취해서 유진의 곁으로 다가왔다.

"엄청나네. 무왕이라는 사람."

"전 세계에서 둘 뿐인 9성이니까."

"용족으로 거듭난 후로 이렇게까지 강한 마력은 처음 느껴봐."

파프너의 눈가가 창 우페이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호승심으로 이글거리는 눈동자.

창 우페이는 훗, 하고 짧게 웃었다.

"좋은 마음가짐이군."

"불쾌하지는 않으신지."

"내 기운을 100% 느끼면서 투지가 꺾이지 않으니, 담대한 자는 언제나 환영이지."

첫 단추는 잘 꿰었군.

"제안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돌려서 말하는 건 안 좋아할 것 같아서."

"그래.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있겠지. 부디 헛걸음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구룡방과 블랙 컴퍼니의 싸움을 관망해주시죠."

"한국 사람인 네 편의를 봐줘야 할 이유가 있던가?"

"무왕께서는 딱히 관심이 없으시지 않습니까. 누가 되었든, 천무문의 행보에 방해만 안 되면 상관없을 텐데."

"굳이 일 잘하고 있는 친구들을 밀어내고 새 협력자를 받아야 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이만하면 충분히 긍정적인 반응이다.

창 우페이의 구미를 당길 만한 '제안'이 있으면.

블랙 컴퍼니가 구룡방과 일전을 붙어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의미니까.

"무왕께서는 아홉 번째 성위를 완성시켰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

"온전하게 완성하셨다, 라고 할 수 있습니까?"

"무엇을 말하려는 건가."

"9번째 성위에 도달하였어도 전력을 발휘할 상황이 없다 보니 스스로 자신이 없으시지 않을지."

구구구구궁-!

창 우페이를 중심으로 강풍이 휘몰아쳤다.

의념상인.

생각만으로 누군가를 해할 수 있는 초월자의 기세가 유진에게 쏘아졌다.

숨이 막힌다.

호수에 빠진 것처럼 공기가 입에 들어오지 않고.

팔과 다리는 무형의 기에 짓눌려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이봐요. 주인을 핍박할 거면 내가 상대해줄게요."

유진의 앞에 선 파프너.

창 우페이는 신경 쓰지 않고 의념을 더 실어내어 압박했다.

[드래곤 피어]

"음?"

창 우페이의 눈가에서 의아함이 감돌았다.

의념은 생각의 힘.

더 정확히는 대기 중에 분포하는 마력에 자신의 살기를 담아 혼백과 물질에 간섭하는 능력이다.

보지 못한다고 해서 뜻을 꺾을 수 있겠는가.

창 우페이가 날린 의념은 주변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오직 유진을 압박하기 위해서만 발현했다.

파프너는 그 의념을 막아낸 것이다.

"하. 이제야 살겠네."

유진은 새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감사를 표했다.

"주인."

"괜찮아. 먼저 무례를 저지른 건 나다. 이 정도는 이해해야지."

[명을 내려주십시오. 주군.]

"그러다가 저번처럼 1초 컷 난다."

[크으읏!]

사실 1초도 많이 봐준 거다.

송명석의 위계는 7성.

창 우페이가 전력을 실어내면 0.5초도 못 버티고 산산조각 날 걸.

"무신의 눈. 아십니까?"

"알다마다. 모든 능력을 분석하고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강력한 이능이지."

"내 대전사는 무신의 눈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용족이?"

"본래 언데드였지요. 1년 전까지만 해도 지박령이었고."

"재미있는 농담이군."

"진짜야. 모두 주인 덕이지."

용은 거짓말을 할 수 없다.

배후성을 둔 헌터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용군단의 '제약'이다.

"1년 만에 지박령을 이렇게나 성장시켰다?"

"당신에게 제압당했던 이 녀석은 천골의 소유자요. 반년 전까지만 해도 3성에서 빌빌댔지."

[빌어먹을, 입니다.]

"천무문이 이번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면 이 녀석들을 당신과 스파링 할 수 있을 정도로 키워드리죠."

창 우페이가 벽을 온전히 넘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전력을 다할 상대가 없다는 것.

심상에서 수련하거나.

게이트 안에서 모든 힘을 쏟아 부어도.

모든 깨달음을 갈무리해서 펼칠 상대가 없으니, 온전한 9성에 서지 못한 것이다.

〔꽤 허무한 이야기로구나.〕

'강자의 고독 같은 거야.'

일곱 명가가 직접적으로 부딪치는 일은 많지 않다.

졌을 때 리스크가 너무 크기에.

창 우페이가 진심을 낼 만한 상대를 못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용의 계곡에 밀입국한 것도 그 이유지.

"어떻습니까?"

"당돌한 제안이다. 그렇기에 마음에 드는군."

파프너와 송명석.

두 하수인을 1년 만에 성장시킨 유진이라면.

아홉 번째 성위에 도달한 후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충족시켜줄지도 모른다.

"자네가 구룡방에게 패배하면?"

"그럼 애초에 거래할 자격도 안 되었던 거죠."

"큭큭큭. 옳은 말이다."

뭐가 되었든.

창 우페이에게 손해는 아니었다.

221화 훌륭하지만 미진하다

"어떻습니까?"

"훌륭하지만 미진하다."

"뭔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말을."

"자네와 하수인들의 놀라운 발전에는 경의를 표한다. 그렇지만 여태까지의 행보가 찬란한 미래를 보장할 순 없다."

창 우페이의 입장에서는 구룡방이 득세하든, 그 자리를 블랙 컴퍼니가 차지하든 큰 관심이 없었다.

유진의 거래 조건이 마음에 드는 것도 사실이고.

그렇지만.

"실망하고 싶진 않군."

파프너와 송명석이 자신과 겨룰 수 있을 만큼 성장하리란 보장.

창 우페이에게는 증명이 필요했다.

"파프너야. 용기사가 뭐라고 했었지?"

"음. 마정석만 충분히 섭취하면 8성까진 금방 오를거래."

"용군단의 대리인이 해준 말입니다. 이것보다 확실한 증거가 있을지."

파프너는 영양실조 걸린 드래곤이다.

용족의 정수를 축적해서 온전한 모습으로 거듭났음에도.

비정상적으로 작은 덩치 때문에 드래곤하트의 출력을 온전히 활용할 수 없었다.

저 몸을 키우려면 많이 먹는 게 최고다.

"마정석 공급만 충분하다면 8성은 시간문제, 라."

용군단의 보장.

그 말에 창 우페이는 마음이 확 기우는 것을 느꼈다.

"얼마나 필요한가?"

"다다익선이죠."

"그 마석. 천무문에서 제공하겠네."

이 양반.

어지간히도 애가 닳았나보다.

"감사합니다."

예의상 거절?

지금 그럴 여유가 어디에 있어.

돈 나갈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블랙 컴퍼니가 관할하는 사업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팽창해서 숨만 쉬어도 돈이 쭉쭉 빠져나갔다.

단순노동은 모두 언데드에게 맡겼는데도 자금 소모가 어마어마했다.

"더 바라는 건 있나?"

"없습니다."

"부디 내가 만족할 만한 성과가 빨리 나왔으면 좋겠군."

협상.

성공적.

*

탓- 탓-.

창 우페이는 가벼운 걸음으로 회담 장소를 벗어났다.

슬쩍 뒤를 흘겨보니.

파프너가 가볍게 손을 흔들고 있고.

과거 손속을 겨뤄본 적 있는 송명석은 불만스러운 사념을 감추지 않았다.

'재미있군.'

자신과 같은 천골의 소유자를 또 만나게 될 줄이야.

그뿐이랴.

파프너라는 용족은 유진에게 쏘아보낸 의념을 가볍게 흩어버렸다.

9성 헌터의 의념을 7성이 간섭하다니.

파프너가 용족이라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성체인 진룡도 창 우페이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데.

파프너의 기량과 마력 운용 능력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방증이었다.

'더 성장해라. 그래서 나에게 영감을 줄 정도가 되어라.'

구룡방에도 8성급 헌터가 없는 건 아니었다.

아홉 머리 중 둘.

일룡과 이룡은 여덟 번째 성위를 완성시켜 전 세계를 뒤져봐도 비견되는 이가 많지 않은 실력자였다.

그렇지만.

'저희가 어찌 무왕의 뜻을 거스르겠습니까.'

'천무문의 행보를 돕겠습니다.'

라는 간신배 같은 말만 내뱉으며 투지를 꺾었다.

창 우페이는 그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력을 다할 상대가 필요하다.'

유진의 제안은 창 우페이의 마음에 남아 있는 앙금을 시원하게 긁어냈다.

부디.

지금처럼 성장해서 전력을 다해도 쓰러지지 않을 상대가 되어주었으면.

뒤를 힐끗 본 창 우페이는 미련을 끊어내듯 다시 시선을 돌렸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거리.

그의 등을 보던 송명석이 적개심 섞인 사념을 흘렸다.

[다음에는 쉽게 당해주지 않을 겁니다.]

"저 양반도 그걸 바랄 거다."

[주군. 저를 더 개조해주십시오.]

"아서라. 넌 아직 멀었어."

용아병은 사람으로 치면 직업군이 아닌, 종족.

그러니까.

종족이 바뀌었지, 굳이 분류해보면 스켈레톤 나이트란 말이다.

"용아병으로 갈아탄 몸뚱이에 적응했으면 검사로서의 능력을 갈고 닦아라."

[이미 전 충분합니다.]

"파프너야. 네 생각은 어때."

"멀었지. 암흑 강기 일으킬 때 낭비가 얼마나 심한데?"

[압도적인 출력으로 적을 밀어붙이는 겁니다.]

"응. 손실이 반 가까이 되더라."

[이이익!]

의욕 넘치는 모습이 보기가 참 좋군.

휴대전화를 들어서 마담에게 회담 결과를 알려주었다.

-호호. 그럼 계획대로 진행할게요.

"미스터 블랙에게도 전해줘."

-천 대표님의 다음 계획은 무엇인가요?

"전력을 보강해야지."

이제부터는 구룡방과 전면전을 염두에 두고 움직여야 한다.

구룡방은 아라한 길드를 넘어선 거대 세력.

현 시점에서 8성급 헌터만 둘이요.

커다란 대륙의 음지 여기저기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정확한 세력을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이번 싸움은 더 힘들 거다."

-언제는 쉬운 일만 골라서 했던가요.

"잘 부탁하지. 파트너."

통화를 끊은 후, 곧장 파프너를 타고 남쪽으로 향했다.

창 우페이와 만나기 전.

이미 협상의 '성공'을 확신한 유진은 죽음의 요새를 신의주에서 백두산 근처로 이동시켜놓았다.

백두산.

대격변 이후 상급 용족인 드레이크들의 서식지가 된 지역이다.

몬스터들의 영역으로 전락했기도 했지만.

중국과 맞닿아 있는 곳이기도 해서 이북에 자리 잡은 군벌들도 백두산에 접근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불문율을 망설이지 않고 깬 유진은 죽음의 요새로 돌아오자마자 드레이크 사냥을 준비했다.

"용군단의 대리인 앞에서 드레이크 사냥을 해?"

"싫으면 가든가."

"아. 뭐 이 녀석들은 이지를 상실한 반쪽짜리니까 상관은 없지만."

용기사의 사소한 반발은 가볍게 눌러주었다.

"관점을 바꿔봐라. 파프너를 수련시키기에 딱 좋은 환경 아닌가."

"음. 그것도 그렇네."

납득 한번 빠르군.

"그러면 시작하지."

따악!

유진은 손가락을 퉁겼다.

[죽음의 요새 - 비가시 모드를 해제합니다.]

백두산 근처에서 커다란 성채가 갑자기 나타났다.

근방에 있는 생물들은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영력으로 빚어낸 안개로 빛을 반사시켜 존재감을 감추는 비가시 모드.

로마노프 가문에서 사용한 투명화 마법에 비해서는 성능이 떨어지지만, 마력 감지 결계만 아니면 쉽게 감지할 수 없다.

"콰우우우우!!"

죽음의 요새가 모습을 드러내고 5초도 지나지 않아 괴물의 포효가 대기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체고 20미터.

반들거리는 새빨간 비늘과 쭉 찢어진 동공, 그리고 두 갈래 뿔이 위협적인 기운을 흩뿌린다.

백두산 일대를 지배하는 종족, 드레이크 몇 마리가 불청객을 인식하고는 하늘 위로 날아오른 것이다.

"드레이크 사냥. 시작해보자."

[죽음의 요새 - 방어 모드로 전환합니다.]

안개를 뿜어대던 용 조각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극한까지 압축되는 영력.

드레이크들이 죽음의 요새 가까이로 다가오자 닫았던 아가리를 크게 벌렸다.

[파멸의 구슬]

보랏빛 구체가 초음속으로 날아간다.

구체 안에서 쉴 새 없이 소용돌이치는 영력.

용 조각이 응축시킨 영력을 해방시키고 0.1초 후, 맹렬하게 회전하는 영력은 주변의 공기를 빨아들였다.

드레이크 한 마리가 그 궤적에 말려서 회피기동에 실패.

날개 부위가 파멸의 구슬에 적중했다.

촤자자작!

피막 일부가 찢겨진다.

태풍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는 비닐하우스처럼.

드레이크의 부위 중 비교적 약하지만, 그래도 강철보다 단단한 날개 일부가 너덜너덜해졌다.

"콰우우우!"

일직선으로 죽음의 요새를 향해 날아가던 드레이크들이 급격하게 선회했다.

용기사 제인은 날개 일부를 상실한 드레이크를 보며 휘유, 하고는 휘파람을 불었다.

"이 흉물. 정체가 뭐래."

"강령술로 빚어낸 위대한 요새다."

"쓸데없는 수식어는 떼고."

진짠데.

"드레이크는 5성 이하 마법은 아예 피해를 안 받는다고."

"요새의 방위 능력이 6성을 넘어선다는 말이겠지."

"됐어. 말해주기 싫으면 말아."

토라진 용기사에게 신경을 할애할 시간은 없다.

드레이크는 분류상 7성으로 들어가지만.

실 무력은 준 8성에 해당하는 강력한 존재다.

대형종이기에 스펙이 어마어마하게 높고.

비행 속도도 빨라서 기동전에서도 우위를 점했고.

용족이라는 태생은 많은 부가 능력을 드레이크에게 부여했다.

'정면 승부가 가능한 건 애꾸눈과 파프너 뿐.'

애꾸눈이 뚜벅이인 것을 고려하면.

제대로 써먹을 수 있는 하수인은 파프너 뿐이다.

"한 번 날뛰어봐라."

[알았어.]

"무리하진 마. 죽음의 요새를 끼고 수비적으로 대응해."

[걱정은 무슨. 누울 곳은 보고 누워.]

누울 곳 보다가 파주에서 25년 동안 지박령으로 머무셨어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유진 일행을 죽음의 요새에 내려놓은 파프너가 다시 날아올랐다.

드레이크 한 마리가 파프너를 인식하자마자 아가리를 한껏 벌린 채 직선으로 쏘아졌다.

기차가 전속력으로 달려드는 것 같은 압박감.

파프너보다 덩치가 4배 정도 큰 드레이크인지라 더욱 아찔하게 느껴졌다.

[헹. 소용없지.]

제자리에서 빙글 돌며 드레이크의 돌진을 아슬아슬하게 흘려보낸 파프너.

동시에 원시 마법으로 전신을 강화하고는 방금 전에 달려든 놈의 뒤를 잡았다.

[케넥 전투술]

[낙엽 치기]

사선으로 그어지는 발톱.

암흑 강기가 드레이크의 비늘을 쫘악- 찢어발겼다.

"콰우우우!"

꼬리에 기다란 상흔을 새긴 드레이크가 몸을 홱 돌렸다.

파프너에게 드리우는 커다란 음영.

스펙은 동등했지만, 질량에서 나오는 힘 차이는 명백했다.

쾅, 서로 한 방씩 주고받은 드레이크와 파프너가 몸에 전해진 충격을 해소하느라 수십 미터 뒤로 밀려났다.

"콰우우!"

"콰우우우!"

죽음의 요새 주위를 맴돌던 드레이크들이 충격으로 비틀거리는 파프너를 향해 달려들었다.

[원시 마법]

[사룡의 비행]

이번에는 몸을 회전시키지 않고 한쪽으로 광선을 쏟아부었다.

드레이크의 마법 저항을 뚫기에는 한 수 모자랐다.

견제의 의미로는 충분했다.

한 녀석의 움직임이 굼떠지고.

그동안 중심을 되찾은 파프너가 회피기동을 하면서 막 달려든 드레이크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개싸움이네."

피 튀기는 혈전.

유진은 심드렁한 감상평을 남겼다.

[주군. 본 드래곤을 주시면 바로 합류하겠습니다.]

"아서라. 쟤 꺼냈다간 뼈도 못추려."

레리크들의 뼈를 조각모음해서 만든 3급 본 드래곤.

드레이크 한 마리 정도는 맡아줄 수 있겠지만, 적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죽음의 요새가 비가시모드를 풀자마자 5마리가 날아들었다.

파프너니까 화려한 공중 비행으로 공격을 흘려보내는 거지, 3급 본 드래곤은 얼마 버티지도 못할 거다.

〔너무 빠른 것 아니더냐.〕

'부정은 못하겠네.'

신의주에 이어 백두산 진출을 이렇게 빨리 할 줄은 몰랐다.

불과 3개월 전만 해도 말이야.

그렇지만.

'로마노프 가문이 본격적으로 주시하기 시작했는데 아낄 필요는 없잖아.'

공중항모 한 척을 겨우 만든 수준이라면.

네크로폴리스를 작정하고 키우면 정면 힘싸움에서 이길 만한 세력을 만드는 것도 꿈은 아니다.

"파프너. 요새 끼고 싸우라고 했잖아."

[혹시 주인 다칠까 그러는 거지.]

"이쪽 사정은 봐주지 않아도 된다."

[나 참. 알겠어.]

파프너는 드레이크 무리를 죽음의 요새의 공격 범위 안쪽으로 더 끌어들였다.

[파멸의 구슬]

펑! 펑!

절묘한 각도로 쏘아지는 보랏빛 구체가 드레이크들을 견제하고.

파프너도 원시 마법으로 전신을 강화해서 하나둘 상흔을 입혀가고 있었다.

〔이대로는 적을 쓰러트릴 수 없느니라.〕

'조금 기다려봐.'

유진은 죽음의 요새를 직접 제어하며 드레이크를 제압할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222화 용은 까야 제맛이지

"난 안 도와줘."

"누가 물어보기라도 했나."

용기사의 새침한 말에 유진은 쌍심지를 켰다.

"이대로 가면 질 건데?"

"남의 일에 참견하지나 마라."

"오. 알아주니 고맙네. 게이트가 빚어낸 반쪽짜리긴 해도 기분이 썩 좋진 않거든."

〔이 작은 인간은 먼저 시비를 걸어놓고 왜 화를 내느뇨.〕

'정치적인 문제지.'

용군단의 대리인 앞에서 드레이크를 사냥하니 문제가 될 여지가 있다는 말.

저 드레이크들이 진정한 용족과 거리가 먼, 게이트의 피조물이라곤 해도 언급은 해줘야 면목이 선다나.

'그래도 0고백 1까임은 좀 심하잖아.'

입술을 비죽 내민 채, 드레이크들의 움직임 을 주시했다.

[파이어 브레스]

불길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후끈하게 달아오른 공기가 일그러지면서 주위의 풍경이 왜곡되고.

인근의 수분이 모조리 증발한 탓에 솜털이 바짝바짝 섰다.

[주군. 공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속하가 나서겠습니다.]

"지켜보기나 해라."

주석궁을 통째로 삼킨 죽음의 요새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오랜 세월 동안 독재를 세습해온 김씨 왕조.

그 상징 같은 구조물에 쌓여 있는 한과 분노, 그리고 피의 무게는 절대로 가볍지 않다.

차르르릉!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를 벼려내어 만든 사슬 여러 개가 마찰음과 함께 용 조각들을 가까이 당겼다.

영력 구체를 던지던 조각들은 구조물에 착 달라붙더니 보랏빛을 전체로 확산시켰다.

[죽음의 요새]

[방어 술식 - 역류를 사용합니다.]

〔이 기운은?!〕

'바로 알아보네.'

〔모르는 것이 이상하지 않느냐. 짐이 하사한 가호를 응용하였음이니.〕

'나름대로 업그레이드를 해봤지.'

유진은 죽음의 요새를 직접 제어하며 성유물로 세세한 부분을 조율 중이었다.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을 상징하는 성유물.

[사신의 낫]과 동화하면서 가호를 확산 운용이 가능해졌다.

'그냥 방어만 해서는 답이 없으니까.'

드레이크는 준 8성의 괴물.

한 마리면 모를까.

비행종 여럿을 상대로는 유진의 언데드 군대도 재미를 보기 어렵다.

"가호를 응용해서 만든 새 결계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

흡수와 분석, 그리고 재구성까지.

직접 받아내는 게 아니라 구조물을 매개 삼은 탓에 모두 흡수하지 못하고 브레스 일부가 결계를 훼손했지만.

죽음의 요새의 압도적인 출력을 뚫어내지는 못했다.

다시 한번 분리되어 허공으로 둥실 떠오른 용 조각상들이 일제히 아가리를 벌렸다.

[파멸의 구슬 - 최대 출력]

슈아아악!

한껏 데워진 공기가 보랏빛 구체에게 끌려오더니 죽음의 요새 일대에 회오리 다발이 몰아쳤다.

[큰 거 쓴다고 하면 예고 좀 하라고!]

원시 마법까지 사용해서 죽음의 요새와 거리를 벌리는 파프너.

드레이크들도 불길함을 느끼고 벗어나려 했지만 휘몰아치는 바람이 움직임을 굼뜨게 만들었다.

"콰우우우우?!"

"콰우! 콰우!"

드레이크들의 화염을 거두어서 역으로 방출시킨 영력 탄.

음차원의 마력이 성질을 반전시켜서 항마력을 띤 비닐들의 파정을 무력화시켰다.

담금질 한 금속보다도 단단한 비늘이 영력 탄에 깨어지고.

날카로운 바람이 속살을 헤집으면서 피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드레이크들은 비명을 지르며 날개에 힘을 주었다.

"콰우우우!"

최대 출력으로 발사한 파멸의 구슬로도 드레이크 무리의 숨통을 끊지는 못했다.

비늘을 부수고 행동에 제약을 부여하긴 했어도.

결정적인 한 방이 되기에는 모자랐다.

"가라."

[크후후훅.]

한 순간 요새가 살짝 기우뚱거렸다.

온힘을 실어 뛰어오른 애꾸눈.

대형종다운 어마어마한 근력으로 죽음의 요새를 밀쳐내니, 그 힘을 온전히 받아내면서 국소적인 지진이 일어난 듯 한 느낌을 선사했다.

[암흑 강기]

[붕권]

애꾸눈은 바람에 휘말려서 발이 묶인 드레이크의 위로 정확하게 착지.

파괴의 권능이 깃든 주먹을 앞으로 내질러서 가슴팍을 가격했다.

50층 빌딩을 가루로 만들 정도의 위력!

그 힘이 고스란히 일점으로 집중되어 드레이크에게 내리꽂힌 것이다.

"콰우우우!!!"

[쿠훅. 질기다.]

비늘이 으깨지고 근육과 살점도 곤죽이 되었지만.

드레이크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온몸을 비틀었다.

힘으로 애꾸눈에게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빠르게 깨닫고는 땅으로 떨어트리겠다는 심산이었다.

[바람 계열 - 레비테이션]

애꾸눈은 추락하지 않았다.

10톤이 넘어가는 육신을 공중에서 지탱하려면 어지간한 마법 가지곤 소용이 없었다.

비행 속도가 느리지만 안정적으로 부유 가능한 마법.

드레이크가 만전이었으면 모를까.

[파멸의 구슬]의 영향력에 들어와서 운신이 자유롭지 못한데 이어 심장만 안 멈췄다 뿐이지 애꾸눈에게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다.

[쿠훅. 죽어라.]

우악스러운 손짓으로 드레이크의 두 날개를 꺾고.

다시 한번 암흑 강기로 심장이 있는 부위를 강타했다.

"콰우...."

정공법으로는 상대하기 까다로운 난적.

드레이크 한 마리가 긴 혀를 쭉 내밀고 고꾸라졌다.

"내 부름에 답하라."

[리바이브를 사용합니다.]

막 숨을 거둔 드레이크의 눈가에서 푸른 귀화가 솟구쳤다.

중급 네크로맨시 리바이브.

대상이 된 시체는 죽기 전의 능력을 고스란히 발휘할 수 있지만, 지속시간이 다하면 부패해서 재활용이 안 되는 디메리트가 붙은 강령술이다.

〔아깝지는 않느뇨?〕

'시간을 단축하는 게 나아.'

전에 말했잖아.

네크로맨서는 시체 한 구를 얻는 순간부터 달라진다고.

드레이크 같은 특수한 케이스일수록, 한 마리를 사냥하면 그 다음이 쉬워지는 법이다.

"애꾸눈. 되살린 드레이크에 탑승해서 나머지를 쓰러트려라."

[콰라락.]

[쿠훅. 알겠다.]

리바이브로 살아난 언데드 용은 애꾸눈을 태운 채 가까이에 있는 드레이크에게 득달같이 날아갔다.

〔그대의 대전사를 활용하면 충분하지 않았느냐.〕

'덩치 차이를 봐. 혹사시킨다고 욕먹지.'

파프너보다 큰 애꾸눈을 태우라고?

너무 양심이 없으시다.

현 시점에서 최강의 하수인인 애꾸눈을 전장에 안정적으로 투입시킬 수만 있으면.

드레이크가 10마리 이상 몰려들지 않는 이상에야, 무난하게 이길 수 있다.

용족은 본래 단체 활동과 거리가 먼 종족.

만신전과 협력 관계인 용군단도 한 테두리로 묶여 있지만, 성단처럼 관계가 탄탄한 편은 아니다.

드레이크도 마찬가지였다.

"한 놈도 놓치지 말고 사냥해라."

[쿠훅. 알았다.]

[주문이 깐깐한 걸.]

애꾸눈의 주먹이 시커멓게 물들고.

비행 중인 파프너는 원시 마법으로 재무장했다.

*

[콰우욱....]

드레이크 두 마리가 단말마를 내뱉으며 고꾸라졌다.

전투 중에 한 마리를 추가로 되살렸고, 2시간이 지나자마자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아깝군요.]

"별 수 있나. 쉽게 이겼으니 그걸로 된 거다."

드레이크의 사체는 모두 5구.

2구는 리바이브로 날려먹었지만 나머지 시체들은 모두 온전한 형태로 손에 넣었다.

"이제 어쩐담."

"본 드래곤으로 만들려는 거 아니었어?"

"맞아. 근데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시간이 꽤 걸리거든."

본 드래곤은 언데드 군대의 최종 테크.

1급 본 드래곤은 순수 무력만 8성에 비행도 가능하고 대형종이라 능력치 보정까지 빵빵하게 받는다.

〔진정한 용족에 비하면 모자라구나.〕

'당연하지. 드레이크 시체로 만들어놓고 진짜 용족이랑 비교하면 양심 없는 거 아니야?'

〔본 드래곤이라는 이름이 아까워서 그러느니라.〕

'이름으로 격을 보정하는 시스템이야.'

진짜 용족의 시체라.

드래고니안까지는 어찌어찌 손에 넣어봤지만, 진룡이라고 불리는 시체는 한 번도 얻어보지 못했다.

회귀 전에는 용기사가 9성에 도달하면서 필멸의 굴레를 벗어나 진정한 용이 되었다던데.

"왜 나를 봐?"

"아니. 그냥."

예리하군.

괜히 입맛을 다신 유진은 눈앞의 시체에 집중했다.

"파프너야. 방어는 너한테 맡기마."

"알았어."

"본 드래곤을 만들려면 죽음의 요새의 모든 출력을 이쪽으로 돌려야 해."

"개미 한 마리도 못 지나가게 할게."

지금부터는 편법을 사용할 거다.

인근 영토를 네크로폴리스로 물들이는 죽음의 요새의 능력.

거기에 [좀비 스케어클로]의 특성으로 능력을 강화하고.

이 근방의 영맥을 모조리 끌어와서 출력을 강제로 끌어올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요새의 방어 기능은 쓸 수 없다."

[주군. 제게도 명령을 주십시오.]

"파프너 말 잘 들어라."

[크으으읏!]

"대전사 호칭 뺏어오려면 아직 멀은 거 알잖냐."

[분발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좀 더 열심히 하렴.

방어는 하수인들에게 맡긴 채, 유진은 죽음의 요새를 매개 삼아 끌어온 어마어마한 영력을 조종했다.

조승철을 포함하여 무수한 다크 미니언들의 도움을 받아야 컨트롤 가능했던 힘.

이제는 죽음의 요새가 뒷받침을 해준 덕에 수월하게 사용할 수 있다.

'고생한 보람이 있다니까.'

온갖 변칙을 사용해서 훨씬 이른 시기에 만든 죽음의 요새.

밥값은 충분히 했다.

좀비 스케어클로들의 능력으로 죽음의 기운을 더욱 강화했고.

본래는 네크로폴리스 최종 단계에서 겨우 구축할 수 있는 [본 야드]와 흡사한 환경을 인위적으로 조성했다.

〔차라리 이 근방에 네크로폴리스를 건설하여 차근차근 쌓아올리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

'그것도 할 거야.'

근데 드레이크 시체들을 두고 어떻게 참아.

네크로폴리스를 최종 테크까지 만들려면 아무리 빨라도 1달은 걸린다.

그것도 모든 재원을 퍼부어야 가능한 일인데, 시체들은 어찌어찌 구한다 쳐도 영지 발전에 필요한 무수한 재료들을 어떻게 수송하겠어?

정석적인 방법으로 본 야드를 건설하려면 반년은 잡아야 할 걸.

그러니.

본 드래곤 제조에 필요한 술식 계산 및 영력 조절은 모두 죽음의 요새에서 처리하게 하고.

유진은 [흑암의 반지]를 통해 해당 지식을 중계하기만 하면 된다.

스스스슷!

막대한 영력이 드레이크들의 시체를 분해했다.

세포 하나하나에 스며든 영력은 그 정수를 녹여내서 뼈에 깃들게 했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드레이크들은 뼈를 훤히 드러냈다.

드득- 드드드득-.

뼈 마디마디가 떨리면서 맞닿은 지면까지 들썩인다.

급속도로 이루어진 숙성.

원래는 본 야드에 보관하면서 차근차근 숙성 과정을 거쳐야 했지만, 유진은 그 모든 과정을 생략해버렸다.

〔그럼 숙성 자체가 필요 없는 것 아니겠느냐.〕

'내구성이 떨어지지만 어쩔 수 없지.'

편법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구룡방과의 대전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본 드래곤을 확보하면 동아시아 일대의 패권 싸움에서 큰 도움이 될 터.

천무문이 방관해주겠다고 했으니, 전력으로 구룡방을 찍어 누르기 위해서는 더 많은 힘이 필요했다.

"내 부름에 답하라."

1개월 이상 걸릴 숙성 작업을 빠르게 마치고.

뼈만 남은 드레이크들에게 힘이 담긴 음성으로 외쳤다.

텅 비어버린 동공에서 스팟- 싸늘한 빛이 흘러나오더니 굳게 닫힌 입가가 위 아래로 벌어졌다.

[콰루루루루!!!]

20미터 크기의 골룡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키며 사념을 흩뿌렸다.

생전에 내던 소리에서 울림이 더해지면서 한층 기괴해진 드래곤의 포효가 백두산 일대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본 드래곤을 제작했습니다.]

[본 드래곤]

성위 : ★★★★★★★★

*제작 과정 일부가 생략되었습니다. 맷집 / 체력이 35% 감소합니다.

8성.

맷집과 체력에서 과한 페널티가 붙었지만.

성위 하락 없이 온전한 형태로 되살아난 골룡들은 으스스한 마력을 사방에 흩뿌렸다.

223화 용기병으로 만들어버리겠다

[콰루루루!]

본 드래곤들은 유진에게 정수리를 가까이 대고는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옳지. 잘한다."

"반려동물 대하듯 하면 화내지 않겠어?"

"왜. 본 드래곤은 이렇게 해야 좋아해."

"농담도 참."

[콰루루루!!!]

"...정말이네?"

파프너는 혀를 내둘렀다.

본 드래곤 6구는 서로 유진에게 얼굴을 비비려고 으르렁대거나 이를 딱딱 부딪쳤다.

"말세네. 말세야."

용기사의 불편한 감상에 유진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공감했다.

"사냥이 더 쉬워지겠어."

"이번 사냥은 여기까지다."

"백두산을 돌면 드레이크가 더 있을 것 같은데?"

"드레이크는 개체수가 많지 않아. 급속으로 만들면 페널티가 붙으니, 나중에 다시 사냥하는 게 낫다."

"드레이크 사냥을 주머니에서 물건 꺼내듯 쉽게 말하는 사람은 주인밖에 없을 거야."

"실제로 쉬웠죠?"

"누군 꽁지에 불 붙인 것처럼 돌아다녔는데."

파프너의 볼멘소리는 못 들은 척했다.

본 드래곤들도 추가되었으니 드레이크 사냥은 숟가락으로 민트초코 퍼먹듯 쉬운 일이다.

"그럼 돌아가는 거야?"

"드레이크는 사냥 안 한다고 했지. 다른 녀석을 잡으러 갈 거다."

부상하는 죽음의 요새.

본 드래곤 6구가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호위했다.

송명석은 본 드래곤들이 뿜어내는 강렬한 영력에 푸른 귀화를 파르르 떨었다.

[왜 경쟁자가 늘어나는 겁니까.]

"분발해. 대전사 칭호 가져가려면."

[빌어먹을. 그렇게 말 안 해도 알아서 할 겁니다.]

"난 또. 요새 발전이 없어서 생각이 없어진 줄 알았지."

얘 울겠다.

"주인. 근데 어디로 가는 거야?"

"본 드래곤으로 전력도 보강했으니 정면으로 갈 거다."

파프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면?"

"마담이 그러더군. 산둥반도에서 구룡방이 세력을 모으고 있다고."

"산둥반도면... 잠깐. 서해 너머잖아."

"어."

"바로 날아가는 거야? 적의 본거지로? 상대는 구룡방이잖아."

"무서운가?"

"신나. 어서 명령을 내려줘."

....

하여간 정상이 한 명도 없어요.

'나라도 제정신을 유지해야지.'

〔가장 큰 악은 그대이지 않느냐?〕

'누가 들으면 오해할라. 나처럼 이성적인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

〔오해의 주체가 잘못 된 것 같다만.〕

이 성좌 나리 보소.

엉뚱한 사람 음해하고, 모욕하고.

그러니까 자식 놈한테 왕위를 계승당하는 거다.

*

공중을 부유 중인 구조물.

죽음의 요새는 모든 동력을 이동에만 부여했을 때 시속 60킬로미터까지 속도를 낼 수 있다.

"나 혼자 날아가면 금방일 텐데."

"애초에 핵심 기능은 이동이 아니니까."

이 구조물의 포인트는 '요새'다.

네크로폴리스는 [검은 방첨탑] 하나만 무효화시켜도 연쇄작용이 일어나 방비가 극도로 취약해진다.

죽음의 요새에 이동 기능이 부여된 것은 구멍 난 방어를 보강하기 위함이지.

로마노프 가문이 제작한 공중항모처럼 공격에 동원하려는 게 아니다.

"그런 걸로 잘도 들쑤시고 다니네."

"꼭 본래의 용도대로만 쓸 필요는 없잖아."

코에 달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지.

평양을 조기에 함락시키고,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도 대량으로 손에 넣어서 죽음의 요새를 빠르게 제작할 수 있었다.

신의주를 경유해서 서해로 빠져나왔지만 배를 갈아탈 일 없이 편안하게 이동이 가능했으니.

아.

편하다. 편해.

[주군. 이동경로가 훤히 드러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평소에는 요새의 출력 상당 부분을 비가시화에 집중하고 있다. 신경 쓸 것 없어."

[역시 주군입니다!]

주변의 공기에 영력을 불어넣어 구름을 형성.

먼 거리에서는 죽음의 요새가 있는지 알아챌 수 없게 조치를 취했다.

기감이 뛰어난 헌터라면 이상한 점을 느끼겠지만, 그런 사람이 흔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이렇게까지 해도 걸리면 운명인가보다 해야 하지 않겠나."

태연하게 중얼거린 유진은 죽음의 요새로 들어갔다.

편법을 사용해서 만든 본 드래곤.

용의 정수를 뼈에 욱여넣은 탓에 내구력이 많이 떨어졌다.

사후조정이라도 하면 본 드래곤에게 붙은 페널티를 완화시킬 수 있으리라.

[애꾸눈.]

[쿠훅?]

[한 수 알려주십시오.]

[쿠후훅. 너. 약하다.]

[혹시 제가 당신보다 더 강해질 것을 의식해서 그러는 겁니까?]

[쿠후후훅. 농담. 재밌다.]

[그게 아니면 싸워봅시다.]

송명석은 애꾸눈한테 부딪쳐서 검법을 갈고닦았고.

파프너 역시 용기사의 훈련을 받았다.

각자 충실하게 시간을 보내다보니 금세 서해를 통과.

목적지인 산둥반도의 옛 도시, 웨이하이에 도달했다.

"저어, 혹시 백두산 쪽으로 돌아온 건 아니지?"

"뭘 물어. 바다 건너는 거 봤으면서."

"그런데 왜 바실리스크가 도시를 거닐고 있을까."

"왜. 구면이고 좋잖아."

6성급 괴물.

바실리스크 무리가 콘크리트 폐허를 돌아다니며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웨이하이는 대격변 때 무너진 곳이다. 우리가 판을 깔기에 딱 좋은 위치 아니겠어?"

[주군. 해안가에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룡방으로 보입니다.]

산둥반도에서 툭 튀어 나온 위치에 있는 웨이하이.

밀거래를 주도하기에 딱 알맞잖아.

"우리가 있는지는 못 알아챈 것 같은데."

"좀 더 가까이 가면 위화감을 눈치 챌 거다."

기습하려면 이 타이밍이 적기겠지.

유진은 손을 위에서 아래로 휙 내렸다.

"본 드래곤들. 첫 출진이니 멋진 모습 한번 보여줘라."

[콰루루루!!]

미세 조정을 마친 본 드래곤들이 선두를 맡아 하강한다.

영력으로 빚어낸 안개를 헤치고 위풍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애애애애앵-!

사이렌 소리가 무너져버린 도시의 적막함을 확 날려버렸다.

"적 출현!"

"갑자기 무슨 적이야?"

"하늘! 하늘이다!"

"본... 드래곤?"

"뭐가 되었든 요격해."

끼이이익- 끼익!

바다를 향해 있던 마법 포탑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일제히 회전했다.

본 드래곤들을 가리키는 포구.

[라이트닝 보텍스]

[블랙 플레어]

[트론]

마법 포탑들에 새겨진 마법들이 일제히 발현되면서 한순간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최소 4성급 마법이 수십 개나 방출된 여파로 인근의 마력 농도가 확 낮아졌고.

규칙을 비틀어서 만들어낸 이적이 본 드래곤들을 강타했다.

"어때? 바실리스크도 뼈를 못 추리는 공격이다!"

"해치웠나?"

수십 발이나 되는 마법 공격이 본 드래곤들에게 충돌, 그 여파로 매캐한 연기가 솟아나면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밀수 전용으로 만든 항구를 지키고 있던 구룡방 조직원들은 승리를 확신했다.

[콰루루루!!]

온 몸의 솜털이 비쭉비쭉 서는 괴성이 구룡방 조직원들의 희망을 배신했다.

매캐한 연기를 뚫고 나온 본 드래곤들은 터럭 하나 상하지 않은 모습을 자랑했다.

아래로 축 내려간 턱.

목구멍에서 아른거리는 불길한 영력의 파장에 구룡방 헌터가 크게 외쳤다.

"옘병할. 당장 그걸 써!"

"보스! 그렇게 되면 한국 침공을 하려고 모은 물자들도...."

"우리가 다 뒤지게 생겼는데 구룡이고 뭐고 알 바냐!"

덜컹- 덜컹-.

구룡방 조직원 한 명이 슬롯을 당기니 항구 맞은편의 바위가 양옆으로 밀려났다.

마법으로 위장한 입구가 모습을 드러내고.

비축해두었던 고깃덩어리들이 도심 쪽으로 쏟아졌다.

그 순간.

[포이즌 브레스]

사체가 되면서 발생한 시독을 응축한 숨결이 항구 위를 뒤덮었다.

파괴력은 아이스 브레스보다 떨어지지만, 범위가 훨씬 넓고 인명살상에 특화되어 있는 공격이다.

본 드래곤이 내뱉은 초록색 가스를 들이마시는 순간 "꺽, 꺽" 한 마디를 내뱉으면서 쓰러졌고.

마법이나 아이템으로 방어해도 원체 독기가 강해서 금방 녹아내렸다.

"드래곤이라니. 이게 무슨."

항구 안쪽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구룡방 간부가 신음을 삼켰다.

뼈만 남은 드래곤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누군가가 그런 괴물이 있다고 하면 엿이나 먹으라며 비웃었겠지.

그 악몽 같은 존재가 아가리를 크게 벌린 채,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지 않았으면 말이다.

'틈이 생기면 바로 도망친다.'

웨이하이에 만든 항구는 끝이다.

본 드래곤들을 막아낼 무력 따위는 그들에게 없었다.

적이 누구인지.

무엇을 노리는지는 구룡방의 더 높으신 분들이 알아볼 문제 아니겠는가.

쿵! 쿵!

파괴된 도심에서 먹잇감을 찾아 돌아다니던 바실리스크들이 몰려온다.

방금 전에 꺼내놓은 고깃덩어리들은 항구가 공격당했을 때를 대비해서 준비한 비장의 수단!

6성 대형종에 용족이기까지 한 바실리스크를 유도하는 미끼다.

[석화의 마안]

항구로 달려오던 바실리스크들은 허공에서 배회 중인 본 드래곤들을 보더니 일제히 눈을 번쩍였다.

즉시발동형 스킬인 마안.

생명력을 역전시켜서 돌로 만드는 강력한 저주이지만.

본 드래곤에게는 통용되지 않았다.

"아니?!"

구룡방 간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6성 이하의 마법 방어로는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저주.

석화의 마안이 아예 통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

그럴 만한 것이.

언데드에게는 생명력이 존재하지 않아서 석화의 마안의 대상 자체가 아니었으니.

과거 유진도 그 이점을 알고 파프너를 대동해서 바실리스크를 손쉽게 사냥했던 경험이 있었다.

구룡방 간부의 수난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드디어 제가 나설 차례가 왔군요.]

허공에서 떨어지는 두 자루의 검.

암흑 강기를 휘감은 검들이 바실리스크의 목을 일격에 베어냈다.

송명석은 죽음의 요새의 안개에 몸을 숨겨 최대한 존재감을 가린 후, [텐터클 블레이드]까지 사용해서 바실리스크 여럿을 한 번에 도륙했다.

"시체는 최대한 원형을 유지하게 죽여라."

[존명.]

촤라라락!

바실리스크 다섯 마리가 순식간에 목을 잃은 채 고꾸라졌다.

남은 숫자는 배 이상 많았지만, 송명석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검을 휘둘렀다.

"저, 저 괴물들은 뭐야!"

구룡방 간부는 몰래 챙겨놓은 보물과 비자금만 챙긴 채, 부랴부랴 항구에서 벗어났다.

더 이상 안전한 타이밍을 간보다가는 도망치기도 전에 본 드래곤에게 살해당할 것이 분명했다.

조금 더.

그 판단이 빨랐으면 살 수 있었을까.

"어딜 도망가?"

정수리에 내리 꽂히는 음색.

동시에.

[데스 스피어]

쇄애애액!

뼈로 된 창이 구룡방 간부의 심장을 꿰뚫었다.

"끄으으윽."

"싸우다 죽지는 못할망정. 그냥 도망치면 섭하지."

죽음의 요새에서 내려온 유진이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중얼거렸다.

흐려지는 시선 속에서.

구룡방 간부는 이 사태의 원흉을 알아보고 손짓했다.

"너, 너. 블랙."

"블랙 컴퍼니를 알아봐주니 영광이군."

"끄으윽."

"그러게 싸우다 죽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을 것 아니겠냐."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죽은 뒤에 다시 싸울 기회를 얻을 테니.

"너희는 모조리 용기병으로 만들어주마."

바실리스크와 인간의 시체.

이들을 엮어내면 최형태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힘을 자랑하는 용기병을 제작할 수 있다.

싸우다 죽어라.

그리하면.

개쩌는 하반신을 얻어서 새로 태어날 수 있을 테니.

224화 선수 필승

"내 부름에 답하라."

[용기병을 제작했습니다.]

최형태 + 바실리스크의 사체로 용기병을 만들 때처럼 꼼수를 부릴 필요가 없다.

6성으로 오르면서 상급 강령술도 무리 없이 펼칠 수 있게 되었으니.

구룡방 조직원들의 시체와 바실리스크 시체를 엮어낸 후 주문 한 번으로 용기병들을 일으켜 세웠다.

용기병의 숫자는 47구.

폐허가 된 도심에 머무르던 바실리스크들을 모두 갈아 넣어서 만들었더니 규모가 상당했다.

"후우."

유진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상급 언데드를 단번에 수십이나 만들었다.

용기병으로 제작하려면 사전 세팅도 필요해서 영력 소모가 어마어마했다.

당연히 영력은 고갈나 버렸고.

중간 중간 성력으로 바꿔서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 모자란 힘을 보충했다.

[역시 주군이십니다!]

"사탕발림은 됐다."

전성기 때를 생각하면 한참은 모자란다.

푸드드득-.

박쥐 한 마리가 날아들더니 핏빛 기류와 함께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웨이하이 제압을 축하드립니다."

"너희 주인은?"

"클랜 마스터께서는 다음 계획을 준비 중이십니다."

"마담에게 전해. 내가 웨이하이에 상륙했다는 정보를 구룡방에 흘리라고."

"그럼 저희도 운신이 훨씬 쉬워지겠군요."

"뭐, 겸사겸사."

구룡방은 이미 한국 진출을 위해 여러 제원을 끌어오는 중이었다.

유진의 상륙 소식이 알려지면 전면전으로 번질 터.

그리 되면 마담도 음지에 세력을 뿌리기가 한층 편해지리라.

"타지에서 고생하는 파트너를 위해 이 정도 호응은 해줘야지 않겠나."

"천 대표님의 무운을 빌겠습니다."

진혈의 일족은 다시 박쥐로 형태를 바꾸어 서쪽으로 날아갔다.

"다들 일 좀 합시다."

"주인의 계획을 알려줘."

"여기까지 와서 계획이라고 할 게 있나."

유진은 주먹을 부딪쳤다.

"전면전이다."

서해에 대기 중인 유령함대를 곧바로 불러와서 해안가를 장악.

최형태를 포함한 정예 언데드들을 수송해서 막 제압한 웨이하이 시에 옮겨놓았다.

암상에 수배를 부탁한 재료들도 속속들이 하선했다.

"괜찮겠습니까?"

"이제 와서 걱정이라도 되나."

"산둥에서 위로 조금만 올라가면 베이징이 나옵니다. 정부에서 불편함을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대놓고 들어가지만 않으면 괜찮아."

중국 정부는 여러 갈래로 쪼개진 러시아 정도까진 아니어도, 행정 권한을 상당 부분 잃어버렸다.

웨이하이처럼 도시 전체가 침식지역으로 변해버린 땅은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웨이하이는 '시'로 분류되지만, 우리나라로 치면 '도'에 버금가는 규모다.

대륙의 기상이란 게 이런 건가?

한국사람 입장에서는 굉장히 큰 규모란 말이지.

앞마당에 멀티 깠는데.

제깟 놈들이 안 들어오고 배기겠어?

*

암상에서는 전 세계 각지의 암시장에서 사온 대형종의 뼈를 공급해주었다.

'이제야 좀 쓸 만한 부산물들이 들어왔군.'

〔망자들을 더 제작하려느냐?〕

'전력은 충분해. 지금 필요한 것은 정예 병력을 만드는 거다.'

〔무슨 수로?〕

'강화해야지. 용기병들을.'

유진은 대형종의 뼈 무더기를 보며 손을 쓱쓱 비볐다.

"조승철아. 손 좀 거들어야겠다."

[명을 받듭니다.]

"다크 미니언들의 지휘를 맡길 테니, 이 뼈들을 정해진 공정대로 벼려내라."

[예.]

1단계.

강화 회로 새기기.

연금술 스킬이지만, 연금술도 마법의 한 갈래이기 때문에 페널티를 감수하고 습득이 가능하다.

신준석이 굳어버린 다크 미니언들의 머리에 강화 술식을 박아 넣느라 고생 깨나 했지.

"내 참. 쉬지를 못하는군."

유진도 작업에 동참했다.

다크 미니언들과 조승철에게만 맡겨서는 제 시간 내에 작업을 마칠 수 없었다.

〔한가하게 뼈를 만지작거릴 시간이 있느냐.〕

'웨이하이는 넓어. 침공 루트도 한정되어 있으니, 구룡방이 움직이면 바로 알아챌 수 있다.'

육상 루트는 이미 망령들을 보내서 감시 중이다.

해상은?

유령함대가 해안가를 장악하고 있는데, 수송을 해내면 그것대로 대단한 거지.

그 어려운 걸 해낸다면 박수치며 물러나줄 생각도 있다.

〔허튼 소리.〕

'들켰나?'

유진은 시답잖은 대화를 하며 빠르게 강화 회로를 새겼다.

2단계.

숙성.

이제는 꽤 익숙해졌잖아?

강령술의 효율을 올리려면 매개체가 되는 시체 일부를 고농도의 영력에 담가놔야 한다.

[그, 그겔.]

[힘이 듭니다.]

[갈! 주인께서 명하셨다.]

이번에는 숙성의 포인트도 조금 달랐다.

강화 회로의 결에 맞춰서 영력을 불어넣어야 하기에.

단순히 영력이 높은 땅에 묻어놔서는 안 된다.

조승철과 다크 미니언들이 숙성을 하고 있을 때, 유진은 최형태를 포함한 용기병들을 한 자리에 모아 추가 술식을 새겼다.

〔이 또한 개조의 일환인 게냐?〕

'부가적인 거지. 술식 성공을 위한.'

유진이 제작한 용기병은 [흑암의 반지]에 기록된 방법이 아니다.

각성 후 초기에 응용했던 아머드 시리즈처럼 그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제작 방법.

용기병이라는 분류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최형태를 포함한 개체들은 변칙으로 만든 것이다.

'원래는 드래고니안이 있어야 만들 수 있는 부류라서.'

〔그댄 참으로 변칙을 좋아하는구나.〕

'발상의 전환이라고 해주지 않을래?'

어찌 되었든 시스템상으로도 완벽하게 '용기병'이라고 인식했으니 된 것 아니겠는가.

〔스스로 완벽하다 했으면서 개조 술식을 새기는 것은 왜인가.〕

'용기병으로써 완벽하단 거지. 업그레이드 요소가 전혀 없는 건 아니야.'

용기병 48구의 전신에 몇 겹의 저주 술식을 새길 무렵.

[숙성이 끝났습니다.]

"좋아. 확인해볼까."

전도율은 평균 86%.

나쁘지 않다.

직접 손을 봤으면 100%를 모두 달성했겠지만, 자잘한 일 하나하나를 유진이 참여하면 업무가 한도 끝도 없는 법이다.

[본 컨트롤을 사용합니다.]

둥실 떠오른 대형종의 뼈들이 용기병의 몸에 착착 달라붙었다.

중무장을 갖춘 기사의 형태.

크로노스는 묘한 기시감에 흐음- 하고는 신음을 흘렸다.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것 같구나.〕

'힌트 아까 줬잖아.'

〔힌트?〕

'아머드 시리즈랑 같다고.'

좀비와 스켈레톤의 몸뚱이에 술식을 새겨서 [본 아머]로 결합.

힘과 맷집을 증대시켜서 성위마저 끌어올린 개조 언데드가 바로 아머드 시리즈였다.

용기병을 강화하는 것도 원리 자체는 동일했다.

"술식 발동."

[아이언 메이든]

[본 콤비네이션]

[블러드 라인]

뼈 일부가 식어버린 몸뚱이에 파고들고.

말라붙은 피를 촉매로 강제 활성화, 서로의 조직을 하나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철컥- 철컥-.

뼈끼리 맞물리면서 결합.

저주 술식과 강령술을 절묘하게 운용해서 충돌하는 일 없이 손실을 막아냈다.

[크우우우우!!]

용기병 중 [합일]을 이루어 강력한 자아를 지닌 유일한 자.

최형태가 입을 벌리며 음침한 괴성을 토해냈다.

"아직 끝이 아니다."

[본 아머를 사용합니다.]

화룡점정은 기초 강령술인 본 아머.

과거 아머드 시리즈를 만들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뼈 갑주를 사용함으로써 개조 술식의 마지막을 선언했고.

용기병들의 눈가에서 흘러나오던 푸른 안광이 한층 짙어졌다.

[용기병 48구가 뼈 갑주와 완벽하게 융합하여 새로운 언데드로 탄생합니다.]

[불멸자를 제작했습니다.]

용기병 → 불멸자

성위 : ★★★★★★★

개조의 효과로 두 번째 벽을 넘어선 용기병.

아니.

이제는 불멸의 힘을 얻은 망자들이 귀기를 흩뿌렸다.

"주인. 본 드래곤도 그렇고, 참 무시무시한 괴물들을 척척 만들어내."

"내 실력이 좀 뛰어나긴 하지."

"실력이 뛰어난 정도가 아닌 것 같은걸?"

회귀자 특전이라는 치트키를 가졌으니 적극적으로 활용해야지 않겠나.

암상에서 적절한 타이밍에 촉매와 대형종의 뼈 무더기를 구해준 덕에 전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이번에 구해드린 물건. 마음에 드시는 모양이군요."

미스터 블랙은 개조를 마친 용기병, 이제는 불멸자라고 불리게 된 존재를 힐끗거리며 말했다.

"흑상. 밟을 수 있겠나?"

"전부는 무리여도 하북 쪽 루트는 꽤 빼앗을 수 있습니다."

"길은 내주겠다."

"웨이하이에서 침식이 이루어지지 않은 곳은 모두 구룡방에서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이쪽이 어웨이인 만큼, 개성 루트처럼 언데드를 배치하는 정도로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누가 그쪽 쓴다고 했어? 안 위험한 루트 내버려두고 험한 길로 갈 필요 없잖아."

아- 하고 미스터 블랙이 탄식을 내뱉었다.

"항구를 요새화해서 버티는 게 아니었습니까?"

"그건 심심하잖아. 여기서 부드러운 뱃살을 계속 찔러줘야 놈들도 무거운 엉덩이를 떼려 하지 않겠나."

유진은 불멸자를 가리켰다.

"이 친구들을 빌려주마."

"좋습니다."

미스터 블랙의 입가가 씰룩였다.

*

웨이하이 영역에 포함되는 작은 마을.

대격변 후에는 버려졌고, 이후 구룡방에서 관리 중인 곳이다.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전차라도 몰고 오나."

두두두두-.

지면을 쉴 새 없이 두드리는 육중한 소리에 구룡방 조직원들이 하나둘 바깥으로 나왔다.

"척후조에서는 말 없었나?"

"예. 아무것도."

"천무문이 순찰이라도 온 건가."

"에이. 천무문에서 왔으면 이렇게 요란을 떨었겠습니까."

"모르지. 정부와 협업하면 쓸데없이 일을 크게 벌리곤 하잖아."

웨이하이에서 해안가를 타고 북상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베이징까지 도달할 수 있다.

중국 정부에서는 안전 문제 때문에 주기적으로 천무문에 의뢰.

침식지역이 된 웨이하이의 몬스터들을 사냥했다.

해안 밀수 루트로 웨이하이를 즐겨 사용하는 구룡방.

몬스터 토벌 시기에는 활동을 최소한으로 줄여서 정부와 마찰을 피했다.

"그럼 뭡니까?"

"나라고 알겠냐. 자식아."

"점점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 같은데."

라는 말을 중얼거린 조직원은 소리의 진원지를 바라보았다.

그 말이.

인생에서 내뱉은 마지막 이야기라는 것도 모른 채.

[신속]

콰직!

눈 깜짝할 사이에 100미터가 넘는 거리를 달려온 불멸자가 구룡방 조직원을 짓밟았다.

새하얀 갑주로 전신을 감싼 반인반마의 기사.

몸 주위를 감싼 스산한 영력만 아니었으면 성스럽다고 느낄 정도의 외형이다.

"어?"

방금 전까지 잡담을 주고받던 선임은 급격하게 변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불멸자는 공평하게 남아 있는 구룡방 조직원의 목숨도 거두었다.

[모두 죽여라.]

최형태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불멸자들이 마을에 돌입했다.

무기를 휘두를 것도 없었다.

그저.

48구의 불멸자가 무리지어 전진한 것만으로 작은 마을이 있었던 터가 완전히 짓밟혀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비명도 없었다.

바실리스크와 결합해서 만들어진 불멸자가 걸음을 뗄 때마다 육중한 진동음이 울려 퍼졌고.

구룡방 조직원들의 비명은 모두 그 소리에 삼켜졌다.

"...정말 괴물이군."

최형태의 등 위에 올라탄 미스터 블랙이 혀를 내둘렀다.

웨이하이의 안전지대는 이미 파악해두었다.

길잡이 겸 구룡방을 압박할 인재로 발탁되어 불멸자들을 인솔했는데, 볼 때마다 전율이 솟구쳤다.

[다음 목표는 어디인가.]

"아. 여기서 북서쪽으로 가면 됩니다."

[알았다.]

무뚝뚝한 사념을 퍼트리는 최형태.

천무문이나 중국 정부를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구룡방의 거점을 철저하게 농락하면 그 자들도 나설 수밖에 없으리라.

미스터 블랙은 유진의 전략 목표를 철저하게 달성했다.

225화 전속전진이다

김재우는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보고서를 힐끗 본 후 눈을 파르르 떨었다.

'만주, 그리고 웨이하이에 집결시킨 물자와 인력을 모두 털렸다.'

인력이야 중요하지 않았다.

주력은 아직 웨이하이에 도달하지 않았다.

미리 대기시킨 조직원들은 2군 수준. 인력 손실은 인구가 넘쳐나는 중국이니만큼 금방 채울 수 있다.

문제는 장비나 보급품이다.

서해 일대는 스산한 안개와 함께 나타나는 유령선 때문에 오고가기가 힘들어진 상황.

대규모 물량을 한 번에 투입하려고 비축해놓았는데.

고스란히 털려버렸다.

'오히려 좋나?'

아홉 번째 용.

구룡방의 머리 중 하나가 되었지만, 여전히 김재우의 세력은 불안정했다.

한국 재진출을 통해 세력을 확고하게 다지려고 했지만.

다른 구룡의 지원을 받는 형국이라 성공해도 입지를 확실하게 굳히기 어려웠다.

그런데.

역으로 선제공격을 당해서 찔렸다?

'다른 구룡들도 구경만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

보급품과 인적 자원을 꽤 날려 먹었지만, 본진인 중국 대륙에 적의 침입을 허용하면서 구룡방 전체가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음지의 조직은 특히 영역 관리에 민감했다.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이빨을 드러내는 하이에나들이 바글바글했다.

구룡방은 특히 연합체라는 느슨한 형태의 조직이라 위신이 상하는 순간에 돌아오는 리스크도 훨씬 컸다.

'이렇게 되면 명분과 실리 모두 취할 수 있게 되었어.'

김재우는 판단을 마치자마자 휴대전화를 들었다.

-자기야? 웨이하이 일.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는. 그 간교한 자가 먼저 나선 거다."

-하북 쪽 루트가 모두 끊겨나가고 있다고. 가만히 보고 있을 거야?

"구룡 회의를 요청한다."

판은 깔렸다.

겁 없이 중국에 발을 들이민 유진.

그가 먼저 행동에 나선 덕에 김재우도 많은 것을 얻을 기회가 생겼다.

'다시는 오지 않을 찬스다.'

김재우의 눈가 위로 욕망의 빛이 번들거렸다.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할까.

유진의 개입으로 모든 것을 잃고 중국으로 피난 왔지만, 절박한 마음으로 현장에 뛰어들면서 7성에 올랐다.

그뿐이랴.

애인의 조력이 있었다곤 해도 구룡 중 하나가 되었으며.

이번 일만 잘 넘기면 허울뿐인 아홉 머리 중 하나가 아니라 실권까지 손에 넣을 수 있다.

'이번에는 그 낯짝을 볼 수 있겠구나.'

천유진.

새 기회를 주었다고 해서 원한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러니.

죽일 때 고통 없이 숨통을 끊어주는 정도로 감사를 표하마.

김재우는 손에 힘을 주었다.

*

넓디넓은 중국.

특히 웨이하이처럼 주민이 몬스터로 대체된 곳은 주파하기가 까다롭다.

[돌진하라.]

불멸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용기병의 강화판.

불멸자의 행군 속도는 시속 200킬로미터였다.

어지간한 차량이 풀 액셀을 밟아야 나는 속도를 상시 유지 가능했고.

전투에 돌입하면 초음속으로 돌진해서 추가로 가속했다.

미스터 블랙이 웨이하이 곳곳에 퍼져 있는 구룡방 지부를 들쑤시고 다녔다면.

[콰루루루!]

본 드래곤들은 하늘을 누비며 몬스터들을 소거했다.

유진의 목표는 구룡방을 완전히 먹어 치우는 것.

중국 내륙은 웨이하이를 빼면 굉장히 안정되어 있는 상황이다.

무왕과 천무문이라는 존재.

이번 싸움에서 무왕이 관여하지 않겠다고 약조를 받았으니, 대 중국 무역... 정확히 말하면 음지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거점이 필요했다.

'알박기란 거지.'

〔그 인간사냥꾼이란 자들을 상대할 때도 같은 표현을 쓴 것 같구나.〕

'용케 그걸 기억하고 있네.'

산둥반도의 끄트머리.

베이징과 가깝지만, 막상 중국 내륙을 주파하기에는 걸리는 게 많은 지역이다.

욕심 내는 건 여기까지.

무왕이 별 생각을 하지 않아도 천무문을 자극하는 건 현명하지 않았다.

〔천무문은 무왕의 소유물 아니더냐.〕

'창 우페이는 운영에 관심이 없어. 실제로 천무문을 굴리고 있는 건 장로들이다.'

이권에 눈이 벌게져 있는 노괴들.

창 우페이는 구룡방과의 싸움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지.

유진의 중국 진출까지 비호해준다고는 안 했다.

아슬아슬한 줄타기.

웨이하이 시를 넘어가면 그 밸런스가 무너질 것이다.

"전속전진이다."

[검은 방첨탑을 건설했습니다.]

독기에 범벅이 된 땅 위에는 어김없이 불길한 탑이 들어섰다.

둘로 나누어진 일행.

유진과 본 드래곤 3구는 서쪽으로 향했고.

파프너와 조승철, 그리고 본 드래곤 2구는 남쪽을 순회하며 네크로폴리스의 영역을 넓혔다.

남은 세 구와 죽음의 요새는 항구 수비로 돌려놓았고.

'고스트 드레드노트도 있으니 어지간한 적은 쉽게 격퇴하겠지.'

대격변 이후, 인류는 바다의 상당 부분을 몬스터에게 넘겨주었다.

헌터가 아무리 능력을 쌓아 올려도 발 디딜 곳 없는 해양에서는 모든 힘을 발휘하기가 어려웠다.

탑승 중인 배가 침몰하면 전투력도 급감되니.

침식이 일어난 지역에 헌터들이 쉽게 접근하지 않는 이유였다.

'몬스터들은 제 영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아서 해양무역 자체가 막히진 않았지만.'

-그 몬스터 웨이브란 것도 있지 않느냐.

'맞아. 그래서 해양 무역 루트도 주기적으로 바뀐다더라고.'

바다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그 말인즉슨.

해양 언데드를 다루는 유진에게 대적할 자는 많지 않다는 의미였다.

미스터 블랙이 유령함대를 빌린 후로 암상의 규모를 확 키울 수 있었던 비법이기도 했다.

웨이하이 곳곳에 깃발을 꽂아놓고 오니 미스터 블랙이 유진을 맞이했다.

"대표님 덕에 일을 빨리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웨이하이에서 놈들의 눈을 모두 걷어냈나?"

"90%는 거둬냈습니다. 저희 정보도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으니 숨겨진 세력이 더 있을 수도 있습니다만."

"됐어. 그 정도면 암상의 루트는 확보된 셈이잖아."

"예."

"구룡방에서 행동을 개시하면 정면으로 올 거다. 신경 안 써도 돼."

여기서 구룡방의 선택지는 셋.

만주 쪽을 토해서 남하하느냐.

웨이하이에 돗자리를 깐 유진을 노리느냐.

〔혹은 그대의 본진을 우회해서 공격하느냐, 가 되겠구나.〕

'가능성은 희박해도 0은 아니니까.'

그라운드 제로는 뽀시래기 용병단에게 맡겨두었다.

네크로폴리스 방어 병력도 꽤 남겨놨고.

따지고 보면 산둥반도에 넘어온 블랙 컴퍼니 세력은 기존의 전력에서 많이 빼오지 않았다.

죽음의 요새는 평양을 함락시키면서 제조했으며.

본 드래곤들도 최근에 제작했으니.

언데드 군대에서 간부급인 파프너, 송명석, 최형태, 그리고 조승철을 빼면 전력 대부분이 한국에서 대기하는 중이다.

〔병력을 온존시킨 것은 자신감의 발로인 게냐?〕

'현지 징발인 겁지요. 성좌 나리.'

〔죽어서 그대를 섬기는 망자들 말이로구나.〕

'이젠 감이 좀 오시네.'

전장이야말로 네크로맨서의 독무대.

상대의 의지를 무시하고 입대시키는 흉악한 언데드 군대는 어디서든지 충원이 가능했다.

"천 대표님. 항구에 물자가 꽤 많습니다."

"구룡방 녀석들. 배가 아프겠어."

"분류하는 데만 한세월이겠군요."

"30%는 암상 몫으로 해."

"흐흐흐. 감사합니다."

꼭 입에 뭘 넣어줘야 일을 재깍재깍 하지.

미스터 블랙은 유진에게 지분을 약속받자마자 직원들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했다.

"리스트. 여기에 있습니다."

"대충 넣어둬. 어차피 파는 것도 댁 통해서 할 건데."

"천 대표님께서 쓸 만해 보이는 것이 있어서 말입죠."

미스터 블랙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확인이나 해볼까.

"오. 꽤 괜찮은 물건이잖아."

"그렇죠?"

"이번에 쓸모가 있겠어."

묵색을 띤 철을 보며 유진이 킬킬거렸다.

*

구룡 회의.

구룡 중 둘 이상 안건을 상정하면 아홉 머리가 한 자리에 모이는 회의다.

최근에 구룡이 된 김재우가 구룡 전부를 모으기는 힘들었고.

그가 아홉 머리 중 하나에 오르기까지 도와주었던 다른 구룡의 힘을 빌어서 회의를 치를 수 있었다.

"다들 들으셨으리라 생각하오."

"그 한국인이 더러운 발을 대륙에 디딘 것?"

"알고 계시는군."

"한국에 진출하는 건 구룡, 당신이 맡은 일이었을 텐데."

"구룡방의 정보가 새나갔다는 말이지."

김재우는 담담하게 책임을 돌렸다.

"정보가 샜단 말로 무마하려고 하나?"

"현 상황에서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않을 것 같소만."

"뭐가 중요하단 건가!"

"어머나. 우리 구룡 씨 이야기도 좀 들어보자고."

"넌 애인이라고 감싸지 마라. 애초에 근본도 없는 작자를 구룡으로 받아주니 이 사달이 난...."

"그만."

나지막한 음성이 구룡들의 언쟁에 끼어들었다.

"일룡. 이번 일은 묵과할 수 없소."

"그렇지 않으면 어쩔 건가? 적이 코앞에 와 있는데 아군의 목부터 치잔 말인가."

"...아니. 그런 뜻은 아니오."

"좋군. 책임을 무는 것은 블랙 컴퍼니를 제거한 후에 해도 충분하지."

일룡.

구룡방의 시초이자, 8성에 도달한 강자가 교통정리를 하니 김재우에게 따지던 아홉 머리도 더 따지지 못했다.

"구룡. 블랙 컴퍼니와 천유진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알겠소."

김재우는 과거 그라운드 제로에서 경험한 일과 최근까지 파악한 정보를 짧게 브리핑했다.

"시체를 다룬다, 라."

"과거 내 수하들도 죽고 나서 천유진이란 자의 부하가 된 것 같소."

최형태와 이승연.

다크 미니언으로 되살린 이승연은 외부 활동이 적어서 몰랐지만, 용기병이 되어 최전선에서 날뛰는 최형태를 못 알아볼 리 없었다.

"그런가."

"인간사냥꾼도 소모전으로 가려다가 된통 당한 모양이니, 힘을 집중해서 일점돌파를 해야 할 것으로 보이오."

"옳은 분석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 홀로 감당할 수 없소."

"구룡 중 얼마나 나서야 된다고 보나?"

"전부."

김재우의 의견에 구룡 전부가 서로를 둘러보았다.

"미친 소리."

"저 작은 땅에서 넘어온 작자 하나 때문에 구룡이 모두 나서야 한다고?"

"웃기지 마라. 자신의 과오를 이런 식으로 덮으려 하다니."

"난 사실을 말한 것뿐이오. 조직원을 나누어 투입하면 천유진을 강하게 해주는 꼴밖에 되지 않소."

미리 준비한 말을 내뱉었지만, 김재우는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애초에 안 될 줄 알고 베팅을 세게 한 셈.

"모두 준비를 마치면 얼마쯤 걸릴 것 같나."

"일룡! 이 자의 헛소리에 마음이 흔들리는 거요?"

"무왕에게서 전언이 있었다. 이번 일에 대해 관여하지 않겠다더군."

이번에는 구룡 전원의 눈가 위로 당혹감이 감돌았다.

무왕이 어떤 존재인가.

로마노프 가문의 마법왕과 더불어 전 세계에서 둘 뿐인 왕의 칭호를 받은 자요.

초월의 영역이라고 불리는 9성에 도달한 강자다.

구룡방이 이렇게 성행할 수 있던 것도 무왕의 묵인 덕분이란 사실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무왕은 우리를 시험하고픈 모양이다."

"블랙 컴퍼니."

까드드득.

구룡 중 하나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블랙 컴퍼니가 대두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렇게 정면에서 도전장을 날리질 않나.

천무문에서는 묵인하기까지 했다.

"전력으로 블랙 컴퍼니를 뭉개버린다."

일룡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226화 용살자(1)

일룡이 선언한 지 얼마 안 되어 동아시아 음지의 거대 세력이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김재우가 단독으로 준비할 때하고는 물량부터 달랐다.

드르르르륵-.

바퀴에 걸린 쇠 패드가 바닥을 짓누르면서 묵직한 소리를 찍어낸다.

전장 30미터.

높이는 약 5미터.

기존 전차보다 4배 정도 큰 전차가 비포장도로를 망설임 없이 밀고 전진한다.

포구가 향하는 방향은 웨이하이 시.

구룡 중 여섯 번째 머리로 불리는 사내, 선후는 흐흐- 하고 나지막이 웃었다.

"멋지지 않나?"

"현대 병기 따위는 몬스터나 헌터 모두에게 안 통하지 않습니까."

"정부에서 만든 최신 마도병기다."

"이름은 무엇입니까?"

"무한기동 구스타프."

"2차 세계대전 때의 열차포에서 따온 이름이군요."

"정부는 이 강철의 요새가 몬스터 토벌에 큰 역할을 할 거라 기대하더군."

로마노프 가문이 마도공학의 1인자라지만, 다른 나라들도 손가락만 빨고 있지는 않았다.

대격변 이전에는 G2라고 불렸던 국가.

미국, 그리고 중국에서는 현대병기와 마법을 결합하는 연구에 많은 투자를 했다.

두 나라는 공통적으로 영토가 굉장히 넓었다.

헌터들이 발품을 파는 것만으로는 모든 영토를 지킬 수 없었다.

무한기동 시리즈가 개발된 배경이다.

"근데 마법을 쓸 거면 굳이 포대의 형태를 갖출 필요가 있습니까?"

"장약은 화약식이지만, 포탄에 마법 처리를 했다."

마법은 강력하지만 현대 병기만큼 사거리가 길지 않다.

인위적으로 마력을 재배열해서 현실에 없는 기현상을 만들어내는 능력.

발현 지점에서 멀어질수록 마법을 구성하는 마력이 대기 중에 흩어지는 탓에 초장거리 공격에 활용할 수 있는 주문은 한정적이었다.

정부에서는 근접전에 응용 가능한 전차 겸 자주포의 역할을 모두 수행할 수 있는 병기를 개발했다.

구룡방 만주 지부의 간부였던 메이 샤오의 초장거리 저격 능력이 희소성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포탄이 명중하는 순간 새겨놓은 마법이 발현해서 쾅."

"사거리가 비약적으로 늘었겠군요."

"그래. 이론상 15킬로미터까지는 사정거리 내다."

자주포의 사거리는 40킬로미터 정도.

그보다 포신의 길이가 더 길고 큰 무한기동급 전차이지만, 포탄에 새긴 마법의 효과 적용 범위가 그에 따라가지 못해서 사정거리도 한정되었다.

물론.

어지간한 헌터라면 반격조차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거리인 건 확실했다.

"용케 그런 최신 병기를 빼돌리셨습니다."

"정부에서도 실전 테스트를 하고 싶어 했으니까. 서로 합이 맞은 거지."

중국 정부는 대격변 이후 종이호랑이 수준으로 전락했다.

양지에서는 천무문이.

음지쪽은 구룡방이 꽉 잡고 있는 입장이다.

마도공학 병기 개발에 음지의 조직인 구룡방이 대놓고 선을 댄 것만 해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실제로 여섯 번째 머리인 사내는 중국의 병기개발청 국장을 겸직하고 있었으니.

음지 - 양지에 모두 발을 딛고 있어서 최신 병기를 빌리기 한결 수월했다.

"아이언 골렘 발견! 전방 3킬로미터 지점입니다!"

"5성급 괴물이군요. 방어력이 높아서 마법계 헌터들의 연계 공격으로 쓰러트려야 합니다."

"우리한테는 구스타프가 있지 않나."

"아이언 골렘한테도 통용될까요?"

"그건 해보면 알지."

끼릭, 끼릭, 끼릭.

직각으로 누워 있던 포신이 조금 위로 올라갔다.

3킬로미터면 곡사보다 직사로 응전해야 할 만 한 거리.

초대형 전차의 포구가 저 멀리 있는 아이언 골렘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쿠아아아아앙-!

천지를 뒤흔드는 포성.

긴 포신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고.

화약이 터지면서 발생하는 막대한 에너지가 포탄을 밀어냈다.

1초도 안 돼서 아이언 골렘에게 착탄한 포.

그 순간.

[매직 레지스트 다운]

[브레이크 아머]

[임팩트 오버드라이브]

3중으로 걸어둔 마법이 아이언 골렘의 마력 저항력을 깎아내고.

방어력 감소와 충격 강화 마법이 연달아 적용, 괴물이면 누구나 품고 있는 물리 능력 저항을 모조리 날려버렸다.

「...!」

아이언 골렘의 가슴팍에 생긴 커다란 구멍.

5성 괴물.

그것도 물리 내구력에 특화된 강철의 몬스터가 반항 하나 못하고 쓰러졌다.

"우오오오오!"

"통했다!"

전차를 운용하는 군인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대격변 이후, 현대 병기가 몬스터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상식이 엎어지는 순간이었으니.

환호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엄청나군요. 이제 본국은 다시 세계의 판도를 좌우할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저 포탄 하나 만드는데 50억이 드는데도?"

"허억."

"연구하다보면 단가가 떨어지겠지."

이번 실험 때 소모되는 금액은 구룡방에서 모두 대주기로 했다.

정부에서는 실전 테스트에 들어가는 자금이 줄어들고.

구룡방은 막강한 화력을 지닌 병기를 투입해서 전력이 증강되었으니.

윈 - 윈인 셈이다.

"블랙 컴퍼니라고 했던가. 너무 시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야 데이터를 더 뽑아내지 않겠나."

"그러게 말입니다. 하하핫."

"웃지 마라."

"옙."

선후는 무한기동 시리즈를 자부심 가득한 눈으로 흘겨보았다.

그 뒤로도 5성이나 6성급 괴물들이 관측되었지만 먼 곳에서 발사한 포격에 맞아 반격조차 못하고 짓이겨진 고깃덩어리가 됐다.

"예산을 더 얻어낼 수 있겠어."

선후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중국 정부와 구룡방의 의도가 맞아 떨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일룡의 선언도 있겠다.

정부에서도 순순히 병기 대여를 해준 덕에 화끈하게 신 병기 실전 테스트를 할 수 있었다.

애애애애앵-!

전차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

선후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무슨 일이냐."

"강대한 마력이 감지되었습니다."

"어디에서?"

"공중, 공중입니다!"

"당황하지 마라. 구스타프 전차는 대공 방어 능력도 지녔다."

정확히 말하면 대공포처럼 각도를 높이 올려서 쏘는 것이 가능하다.

2차 세계대전 때는 대공포의 포신을 아래로 내려서 자주포처럼 사용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구스타프 전차도 다용도로 사용할 것을 전제로 만들었기에, 이론상으로는 어느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적의 마력이 왜 느껴지지 않는 거지?'

선후 역시 7성의 마법사.

구스타프 전차에 달아놓은 감지 능력을 믿고 특별한 마법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7성 마법계 헌터의 기감을 피해 지근거리까지 접근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구스타프 전차의 감지 능력이 증명되어서 기쁜 마음이 반이었다면.

남은 반절은 의구심이 들었다.

끼리리릭-.

70도까지 올라간 포신에서 주홍색 화염이 솟구쳤다.

아이언 골렘을 한 방에 쓰러트린 포탄이 하늘 위로 쏘아졌다.

현대 기술과 마도공학이 결합된 타깃 보정 시스템.

포탄이 보이지 않는 적에게 쿵, 하고 부딪치면서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다.

"해치웠나?"

선후의 외침과 함께 포탄에 맞은 괴물의 정체가 드러났다.

[콰루루루루!!]

영혼을 쥐어짜는 것 같은 괴성.

뼈만 남은 용족이 푸르스름한 귀기를 흩뿌리며 매캐한 연기를 꿰뚫고 지상으로 하강했다.

본 드래곤.

용족의 시체를 기반으로 만든 괴물이었다.

"이야. 벌써 무한기동 시리즈의 초기 버전이 나왔을 줄이야."

"...천유진. 어떻게 여길 온 거지?"

"내가 좀 재주가 많거든."

죽음의 요새.

방금 전까지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건만, 하늘 위에 떠 있는 커다란 구조물에서 흉흉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유진은 비가시화로 존재감까지 감춘 채로 구스타프 전차 무리에게 접근.

본 드래곤들을 강습해서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콰아앙!

"부수진 말고 무력화만 시켜라. 그건 쓸데가 많다."

아이언 골렘조차 한 방에 쓰러트릴 수 있는 병기가 180도로 뒤집힌 채, 지면에 고꾸라졌다.

본 드래곤이 슬쩍 밀기만 해도 수십 톤의 전차가 1초도 버티지 못하고 데굴데굴 구르는 신세로 전락했다.

"구룡방도 참. 전력을 다하기로 했으면 뭉쳐서 와야지."

"네놈. 그건 어떻게!"

"우리나라에는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단 속담이 있거든."

아.

이 경우에는 새와 쥐 다 포함인가?

박쥐를 떠올린 유진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콰루루루!]

오러를 휘감은 병기도.

여러 속성의 마법도.

(변칙이지만) 용족의 정수를 녹여낸 본 드래곤의 뼈를 해하기에는 한 수 모자랐....

콰직.

아. 아니구나.

급하게 만든 페널티로 내구력이 떨어진 것을 잊고 있었다.

8성.

걸어 다니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인 본 드래곤들이지만 구스타프 전차 호위에 투입된 헌터들의 반격을 맞아 뼈에 금이 가는 등 소소한 피해를 입었다.

"전차 빼고 사람은 모두 죽여라."

내구력이 좀 떨어지면 어떤가.

본 드래곤의 압도적인 스펙 앞에서 구룡방 소속 헌터들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나도 죽일 건가."

"당장은 아니지만, 그럴 거다."

"날 고문해도 쓸 만한 정보는 못 얻을 거다."

"걱정하지 마라. 죽은 뒤에는 알아서 불게 될 것이니."

아무렴.

무한기동 시리즈를 개발한 인재를 놓칠 순 없지.

리치로 만들어서 우려낼 사골이 없을 정도로 부려 먹어주마.

〔그 언데드는 자신의 의지로 되는 거라 하지 않았더냐.〕

'납치해서 지장 찍어도 자의는 자의야.'

아무튼 자신의 의지는 맞는 듯.

착한 유진이는 아무것도 모른답니다.

*

구룡방이 전력을 다해 블랙 컴퍼니를 쓰러트리겠노라 천명했지만.

전력을 일점으로 모으기는 쉽지 않았다.

우선 행군 루트가 문제였다.

대규모 게이트 브레이크로 멀쩡한 도로를 찾기가 힘들어진 웨이하이 시.

밀수 루트를 이용해서 웨이하이 시로 진입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니 대규모 인원을 한 번에 투입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아홉 머리가 각자 목표지점으로 이동하는 것.

웨이하이 시는 넓고, 유진의 방어 기동에도 제약이 있다고 판단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문제는 [죽음의 요새]를 계산하지 못했다는 것.

"비가시화로 이동하면 어떻게 알 건데?"

시속 60킬로미터.

속도 자체는 빠르지 않지만, 지형을 무시하고 공중으로 이동할 수 있으니 그렇게 느린 편도 아니었다.

첫 번째로 여섯 번째 머리와 구스타프 전차를 격파 및 노획했고.

웨이하이 북쪽에서 내려오는 여덟 번째 머리도 본 드래곤들을 동원해서 순식간에 으깨버렸다.

"나, 날 살려주면 구룡들을 설득해보겠다!"

"아니. 그냥 죽어서 봉사해라."

유진은 여덟 번째 머리를 포함한 헌터 수백을 모두 불사의 군대에 편입시켰다.

그렇지만.

아홉 머리 중 둘이 당한 것을 파악한 일룡은 곧바로 병력을 일점으로 모았다.

더 이상 기습 공격은 무리.

공중 공격이 가능하단 이점이 있지만, 본 드래곤들의 빈약한 내구력 때문에 기습 대신 항구로 돌아왔다.

"연구할 것도 있고 말이야."

"그 전차 말입니까?"

"중국에서 개발한 구스타프 전차, 라더군. 무한기동 시리즈의 첫 번째 모델이라나."

마침 구룡방의 보급품 중에서 괜찮은 물건도 얻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마도공학 병기까지 손에 쥐었으니, 계획을 앞당겨도 되겠다.

〔또 이번에는 무엇을 만들려고 그리 웃느냐.〕

'지켜보면 알아.'

크흐흐흐흐.

구룡방의 아낌없는 베풂에 뭘 안 먹어도 배가 불러왔다.

227화 용살자(2)

-아홉 머리 중 셋이 당했다.

웨이하이 시로 집결 중인 다른 구룡들에게 향한 경고의 메시지.

김재우는 조소를 날렸다.

"이럴 줄 알았다."

구룡방에서 낮은 김재우의 입지.

유진의 전술과 대응책을 분석해서 알려주었지만, 셋이 선행했다가 모조리 잡아먹히고 말았다.

당연하게도.

김재우는 이 상황을 예측하고 있었다.

"구룡 중 셋이 당했으니 사장님의 입지도 더 탄탄해졌겠군요."

"내가 등을 떠민 것도 아니고. 자기들이 멋대로 일룡의 뜻을 무시하고 나섰다가 당했으니 책임을 질 것도 없다."

유진이 먼저 공세를 나서준 덕에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모든 상황이 자신에게 웃어주고 있다.

구룡방의 머리 셋이 증발해버려서 김재우를 축출할 수도 없고.

아홉 머리가 모였을 때 경고를 남긴 덕에 발언권도 크게 확보했다.

"천유진, 그 작자를 쓰러트리는 건 이제 내 손을 떠났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먼저 출발한 세 용을 각개격파하기까지 한 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최소 8성은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구룡방에 존재하는 8성은 둘.

일룡과 이룡이다.

둘을 제외하면 유진과 정면승부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의미.

"충돌은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사장님과의 악연 때문에라고 말이 나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따지려면 따지라지. 그럴 여유가 있다면."

머리 셋을 하루 만에 정리해버린 유진.

그 능력만큼은 인정해야 했다.

구룡방 내부 권력 다툼은 유진을 쓰러트린 이후의 문제.

유진과의 전쟁에서 얼마나 큰 피해를 입을지도 모르는데, 벌써 그 뒤를 생각할 여력이 있을까.

"구룡. 유쾌해 보이는군."

일룡이 다가오자 김재우의 부하가 굳은 표정을 지었다.

"머리가 셋이나 당했다는데 그럴 리 없잖소."

"자네에게는 그 편이 더 낫지 않나."

"이거야 원. 솔직해지기를 바라는 거요, 나한테?"

"불안정한 입지를 다지기에는 작금의 상황이 호재일 것 같으니 묻는 거지."

"다 알면서 불편한 부분은 뭐하러 긁는 건지."

김재우의 불평에 일룡이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선을 넘지 말라는 의미다."

"난 살기 위해 발악하는 것뿐이오."

"부디 그 마음이 변치 않기를 바라마."

몸을 홱 돌려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일룡.

차갑게 가라앉은 김재우의 눈동자가 그의 등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

본 드래곤의 강습을 받아 조기에 탈락한 머리 셋.

진격 속도를 높인답시고 병력 규모를 간소화한 탓에 격파당하는 속도가 더욱 빨랐다.

"그 등신들. 일찍 나갔다가 뒤지기나 하고."

오룡은 죽어간 이들을 비웃었다.

[구룡방 측 전력]

8성 헌터 2.

7성 헌터 4.

6성 헌터 170.

5성 이하 2,000.

대륙 각지에 있는 정예 헌터들을 박박 긁어서 만든 전력이 한 자리에 모였다.

여기서 더 대단한 것은 앞에 언급한 전력이 보급대로 편성한 인원을 포함하지 않은 숫자라는 것이다.

웨이하이 시의 면적은 한국의 일개 도 수준.

쉼 없이 재생성되는 괴물이나 언제 습격할지 모르는 망자들을 감안하면.

하루 이틀 만에 끝날 전쟁이 아니었다.

'일룡은 차근차근 적을 압박해 들어간다고 했으니.'

최소 1주 이상으로 잡은 원정.

식량은 물론이요.

회복 포션이나 마법 스크롤 같은 소모품도 보급해야 한다.

보급대로 빼놓은 헌터들의 전력도 얕볼 수 없다는 것.

항구 근처에 도달하면 보급으로 돌린 인원들도 공세 측으로 포함시킬 테니, 아군의 전력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그러면 추가 보급은 어떻게 합니까?"

"원정에서 바다를 장악 중인 블랙 컴퍼니의 유령함대를 전멸시키면 되잖아. 이 멍청아."

구룡방의 본진은 상해다.

바다와 맞닿은 불야성의 도시.

해상 전투에서 압도적인 상성을 지닌 유령함대 때문에 바다 쪽 루트를 쓸 수 없지만.

이 원정에서 유령함대를 모조리 파괴하면 해안 쪽으로 보급이 가능했다.

"근데 왜 오룡께서 최전선에 계시는지."

구룡방 조직원 한 명이 눈치를 슬슬 살폈다.

본래 높으신 분이란 그 존재만으로 아랫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법.

오룡은 알 바냐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 잘나신 일룡께서 경비를 보란다. 희생을 줄여야 한다며."

"아앗, 그렇습니까."

"나라고 해서 앞장서고 싶은 줄 알아?"

노기 섞인 오룡의 목소리에 조직원이 꼬리를 말았다.

"저, 저기 괴물이 나타났습니다."

"나도 알아."

5성 몬스터인 킹글러.

식용 게를 수십 배 확대한 후, 한쪽 집게만 거기서 3배 이상 확대하면 저런 모습일지 않을까 싶은 괴물이다.

단단한 갑피는 오러에도 잠깐 동안 버틸 수 있고.

입에서 쉼 없이 나오는 거품에는 독성이 있어서 접근전에서 피해를 강요하는 까다로운 몬스터였다.

"사람 귀찮게 하긴."

[다중 연산]

[바람 계열 - 윈드 캐논]

[바람 계열 - 윈디 밤]

[융합계 - 디스트럭션 빔]

바람을 압축시켰다가 폭발을 일으키는 [윈디 밤]으로 윈드 캐논을 인위적으로 붙들어놓고.

한계 이상으로 응축과 회전을 시켜서 순수한 플라즈마 에너지를 발생, 일점으로 쏘아보냈다.

최소한의 마력으로 6성 이상의 파괴력을 빚어낸 솜씨.

하얀 광선은 킹들러의 가슴팍에 구멍을 뻥 둟어버렸다.

"키, 키륵."

"안전지대고 뭐고. 이젠 의미가 없잖아."

오룡은 귀찮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웨이하이 시 전역이 침식된 것은 아니기에.

구룡방에서는 안전지역을 밀수 루트로 확보해서 주기적으로 관리했다.

한데, 유진이 웨이하이에 진주하면서 기껏 관리해놓은 루트의 균형이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정확히는.

구룡방 주력이 몰려올 정도로 넓은 루트에 한해서 인위적으로 균형을 무너트려놓았다.

"모두 이 모양인가?"

"그것까지는 잘."

"아아. 차라리 냄새나는 언데드들이나 나와주지."

덜그럭, 덜그럭.

막 눈이 아래로 처졌던 킹들러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오룡의 말에 답하기라도 하듯.

축 처진 눈가 위로 기묘한 안광이 번뜩이고.

움직임을 멈추었던 집게발이 위로 크게 올라가더니, 그대로 오룡의 정수리를 향해 쏘아졌다.

[바람 계열 - 윈드 대시]

살상력이 갖춰지지 않은, 단순히 강하기만 한 바람.

그럼에도.

차량 하나를 손쉽게 밀어낼 만한 압도적인 힘이 집게발의 궤도를 홱 틀어버렸다.

"가슴에 구멍 뚫어줬는데도 안 죽어?"

[다중 영창]

[바람 계열 - 윈드 블레이드 x 10]

[융합기 - 스톰 블레이드]

4성 바람 마법 열 개를 결합해서 만들어낸 녹색 검이 빙글빙글 돌더니 킹들러의 전신을 17조각으로 토막 냈다.

철퍼덕, 땅에 고꾸라진 킹들러의 조각에서 기이한 흰색 연기가 솟구쳤다.

그와 함께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다시 붙는 시체.

"씨X?"

오룡은 불쾌감 섞인 욕지거리와 함께 손을 휘 저었다.

공중에서 떨어지는 초록색 망치.

[스톰 블레이드]의 형태를 변형해서 막 붙고 있는 킹들러의 시체를 완전히 뭉개버렸다.

"저 잡졸 하나 상대하는 데 마력을 얼마나 쓴 거야."

"괴물이 더 있습니다!"

"이 놈들도 방금 전처럼 막 되살아나고 하는 건 아니겠지?"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다고.

제 입으로 업보를 쌓은 오룡은 [애니메이트 데드]로 살아난 킹들러들을 모두 짓이긴 후에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문제는 선두에서만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고, 길게 늘어진 구룡방 병력이 비슷한 현상을 경험했다는 것이었다.

"언데드다!"

콰직!

되살아나던 트롤 시체, 그러니까 [타이런트]를 수십 조각으로 찢어발긴 김재우가 외쳤다.

처음부터 언데드는 아니었다.

구룡방 병력을 향해 달려들 때만 해도 숨을 쉬는 생명체였지만.

죽인 순간에 언데드로 되살아나서 다시 한번 달려드니, 곳곳에서 피해가 속출했다.

[데스 필드]

저주와 술법, 그리고 네크로맨시를 절묘하게 결합시켜 만든 강력한 마법.

구룡방의 진군 루트 곳곳에는 유진이 미리 설치해둔 죽음의 영역이 깔려 있었고.

그 안에서 죽어간 이들은 곧바로 언데드가 되어 산 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러니 머리 셋이 저항 하나 못하고 당했겠군."

전선으로 나선 일룡은 브루탈로 되살아난 오우거를 한 손으로 찢어버린 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사실과 먼 이야기였지만.

구룡방의 남은 머리들은 유진의 능력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확실하게 깨달았다.

"일룡. 어떻게 합니까?"

"진군속도를 올린다."

"보급에 차질이 생길 수 있습니다. 언데드들도 나오는 판국인데."

"안전 확보를 위해 느리게 가면 놈이 원하는 바대로 될 뿐이다. 더 많은 언데드를 사역하기 전에 천유진의 숨통을 끊는다."

[데스 필드]로 쉼 없이 되살아나는 언데드들?

번거롭긴 했다.

실제로 구룡방 본대도 조금씩 피해를 보고 있는 상황.

피로감도 배로 쌓이고, 소모품이 줄어드는 속도도 훨씬 빨라졌다.

"그러니 속도를 올려야 한다."

"죽은 자들을 되살리는 마법이 있을 겁니다. 차라리 그걸 파훼하면...."

"그만큼 지체가 되겠지."

"아, 알겠습니다."

"대신 진형을 바꾼다. 구룡은 모두 최전선에서 몬스터와 언데드를 요격한다."

전력을 온존하기 위해서는 무력이 강한 구룡들을 동원해야 한다.

쉬는 건 적진과 충분히 거리를 좁힌 후에 해도 충분했다.

일룡은 동쪽 끝에 있을 유진의 뜻대로 놀아나지 않겠다며 차분하게 말했다.

*

[고스트 아이를 종료합니다.]

"역시 쉽지 않네."

먼 곳에서 구룡방 본대를 관찰하던 스펙터에게서 시야를 거두었다.

일룡.

유진이 노리는 바를 어렴풋이 읽어내고, 천천히 전진하기보다 진군속도를 올렸다.

〔자신만만했던 그대의 계책이 수포로 돌아갔구나.〕

'수포는 무슨. 반절의 성공이라고 해줘.'

데스 필드는 여러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 강력한 마법이다.

인간사냥꾼과 전쟁을 벌일 때도 초기에 쓰지 않고, 무수한 피가 땅을 물들인 후에 비로소 펼칠 수 있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지금 펼친 마법은 조금 달랐다.

〔혼철이라고 하였던가.〕

'그래. 구룡방에서 재미있는 선물을 주었어.'

혼철.

구룡방의 보급품을 모두 정리한 미스터 블랙이 유진에게 건넨 물건이다.

〔그 작은 인간은 쇳덩어리가 계약자에게 도움이 될 줄 어찌 알고.〕

'이름 보면 느낌이 오잖아.'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의 상위호환 격 금속인 혼철.

벼려내면서 혼 자체를 깃들게 하거나 혼백의 힘을 불어넣어 사용자에게 공명시킬 수 있는 희귀 금속이다.

네크로맨서한테는 조금 다른 의미로 쓸 수 있는 광석이고.

〔혼철을 매개 삼아 강력한 네크로맨시를 지속시킬 줄은 몰랐구나.〕

'대격변 이후에 깃든 원한이면 데스 필드의 발동 조건을 어떻게든 맞출 수 있으니까. 혼철로 붙들어놓기만 하면 되지.'

영구적인 건 아니다.

혼철에 깃들어있는 힘이 모두 소진되면 데스 필드도 자동으로 해제된다.

구하기도 힘든 희귀 광물을 너무 허무하게 써버리는 거 아니냐고?

[불경스러운 묘지]에 묻어놓고 숙성시키면 다시 쓸 수 있으니 괜찮다.

〔만일 그 작은 인간들이 혼철을 발견하면 어찌 되는 게냐?〕

'어찌되기는. 데스 필드도 쫑이지, 뭐.'

〔대책이 없구나.〕

'그거 찾느라 시간을 끌어주면 그것대로 괜찮아.'

이쪽도 손님을 맞이할 시간이 필요했다.

구룡방이 진격 속도를 올린 탓에 조금 촉박해졌지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유진은 히죽거리면서 구슬을 손에 쥐었다.

생명력이 농축되어 있는 구체.

라이프 포스 베슬이었다.

228화 용살자(3)

[크으읏. 으으으으.]

보라색으로 물든 피부.

물기를 짜낸 것처럼 쪼글쪼글한 주름이 빼곡하게 자리를 잡았고.

원래 동공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푸른 안광이 감돌았다.

리치.

변칙으로 만든 조승철과 달리, 피부색만 빼면 노인처럼 보일수도 있는 외형이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구룡방 중 여섯 번째 머리였던 자.

선후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감히, 나를, 추악한 언데드로 만들다니.]

"왜. 도장 찍은 건 너잖아."

[이건 무효다! 고문을 해서 내 의지를 꺾은 거 아니냐!]

"당사자의 뜻이 그렇다면 무르고 싶은데. 난 언데드로 만드는 방법은 알아도 되돌리는 수단은 모르거든."

이걸 어쩌나.

바티칸의 이적이라면 죽은 자를 되살리는 것도 가능하다던데.

음.

언데드라서 안 되려나?

유진은 킬킬거리며 손에 힘을 살짝 주었다.

파르르르, 라이프 포스 베슬이 비명을 토하듯 흔들렸다.

[크허허헉!]

"처신 잘해. 뒤지기 싫으면."

라이프 포스 베슬에 힘을 주면 누군가가 심장을 주물럭거리는 느낌이라고 한다.

회귀 전에 리치들을 대상으로 실험해봤으니, 선후에게 전해지는 통증도 비슷하지 않을까.

〔그런 실험은 대체 왜 하는 게냐?〕

'얼마나 아픈지 알아야 굴종시킬 수 있잖아.'

〔악취미로다.〕

'리치는 단독으로 활동이 가능한 언데드다. 완전 굴복이 불가능하니 이렇게라도 부려먹어야지.'

리치 제작 메커니즘은 일반적인 망자와 완전히 다르다.

본인의 동의하에 생명력을 짜내어 구슬에 봉인, 원 몸뚱이와 혼백의 끈을 연결하면 끝.

그러니까.

육체는 분신 같은 거고 본체가 라이프 포스 베슬인 것이다.

'통증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압박도 효과적으로 하지 않겠나.'

라이프 포스 베슬이 유진에게 있는 한.

죽기 싫으면 명령을 따라야 한다.

〔과연. 블랙 컴퍼니라는 사명에 어울리는 행위로다.〕

'왜. 뭐가요.'

〔본인만 모르는구나. 한데 채찍질로 치리하면 효율이 떨어질 터인데.〕

'뭐, 당근도 준비해두었지.'

선후하고는 회귀 전에도 인연이 있었다.

악연도 인연이니까.

구룡 중 하나이며 정부에도 끈을 대고 있는 연구자.

마도과학에 눈이 돌아간 매드 사이언티스트다.

'놈이 주도적으로 만든 무한기동 시리즈 때문에 언데드를 얼마나 잃었는지, 원.'

〔꽤 후한 평가로구나.〕

'실력이 있으니까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언데드로 만들었지.'

리치로 만들기 위해 동의(?)를 구하는 과정도 쉽지 않단 말이야.

다 쓸모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으우우우우.]

오우거를 베이스 삼아 만든 대형 언데드, 브루탈 한 구가 [거인의 묘소]에서 몸을 일으켰다.

항구 인근에 구축한 네크로폴리스.

죽음의 요새 보정 덕에 이전 테크트리인 [죽음의 전당]을 건너뛸 수 있고, 건설 속도 보정까지 받아서 필요한 구조물 위주로 먼저 지을 수 있었다.

"솜씨 좀 발휘해볼까."

[지식의 도서관을 사용합니다.]

[선대 죽음의 주인들이 남겨놓은 지식을 열람할 수 있습니다.]

남은 전승 슬롯은 10개가 넘어간다.

네크로폴리스의 보조가 있으면 어지간한 망자 쯤은 추가 주문 없이도 만들 수 있었다.

그 덕에 늘 슬롯을 아껴두고 있어서 필요할 때마다 주문을 하나씩 익히는 게 가능했다.

이래서 사람은 여유가 있어야지.

[연금술 - 재구축 주문을 습득했습니다.]

▷재구축

분류 : 연금술

등급 : 6성

기존의 마력 회로나 구조물에 간섭해서 원하는 형태로 바꿉니다.

[흑암의 반지]에 기록되어 있는 연금술 중 최상위 주문.

왜 6성이면서 최상위냐고?

네크로맨서에게 있어, 연금술은 주력이 아니라 언데드 강화에 참조하는 수준이다.

대학교로 치면 부전공 같은 것.

누가 부전공에 목숨 걸려고 하겠어?

〔그대는 대학이란 곳에 진학도 안 하였거늘. 참 묘한 예시로구나.〕

'성좌 나리도 대학 안 가본 건 마찬가지잖아.'

대학생이 죄를 지으면 투옥되는 대학원 따위, 관심 밖이라고.

유진은 노획한 [무한기동 - 구스타프 전차] 위에 손을 얹었다.

[연금술식]

[재구축을 사용합니다.]

구스타프 전차는 이름만 들어도 모티프가 어디인지 확실히 알 수 있다.

나치 독일이 굴렸다고 하는 구스타프 전차포.

모티프에 비해서는 작은 크기지만, 대형 몬스터보다 몇 배나 큰 덩치는 이름값 한다는 느낌을 물씬 풍겼다.

'주포 하나에 보조 포신 둘.'

참 무식한 전차다.

체급이 어마어마하게 크다 보니, 해양 전함처럼 주포와 부포를 따로 두고 운영했다.

그래서 유진이 손을 데기에도 상당히 편한 구조였다.

"브루탈. 이리로 와라."

[으우우우.]

쿵- 쿵-.

구스타프 전차 옆에 브루탈을 두고 [재구축]을 사용.

보조로 달아둔 포신 하나와 장갑, 그리고 내부 마력 회로를 그대로 뜯어서 이식했다.

'재구축의 핵심은 마력 회로를 건들지 않는 것이다.'

유진은 구스타프 전차의 구조를 모두 꿰고 있진 않았다.

주요 메커니즘은 이해했지만.

복제품을 만들라고 하면 고개를 좌우로 저어야 했다.

근데, 군 기밀이나 마찬가지인 마도공학 병기의 구조를 어떻게 아냐고?

'구룡방하고 붙어봤다고 했잖아. 회귀 전에.'

〔적의 병기를 활용하는 과정에서 연구한 게로구나.〕

'쓸 수 있는 건 뭐든 써봐야 했으니까.'

회귀 전에도 구룡방과의 충돌은 피해갈 수 없었다.

4차까지 개발을 마친 무한기동 시리즈는 엄청난 강적이었지.

포탄 한번 쏘면 언데드가 백 구 단위로 쓸려나갔고.

맷집도 엄청나게 단단해서 중급 언데드들로도 쉽게 부술 수 없었다.

거기에, 생명체도 아니라서 망자로 되살릴 수 없으니.

전차를 모는 사람이야 평범한 군인이라서 소모전이 되었을 때 손해를 보기까지 했다.

'그때 든 생각이 병기를 뜯어서 아군의 강화 재료로 쓰면 어떨까였다.'

쉽지는 않았다.

전쟁 중에 노획한 무한기동 시리즈를 뜯어서 신준석의 도움을 받아 일일이 분석했고.

[재구축] 술식으로 원형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이식하기까지 무수한 연구를 했다.

그 덕이라고 해야 할까.

유진은 좀처럼 강화할 방법을 찾지 못했던 대형 언데드의 업그레이드 수단을 발견할 수 있었다.

끄드드득-.

쇠가 비틀리면서 나는 신경을 긁는 소리와 함께 브루탈의 피부 위에 강철이 덧씌워진다.

[무, 무슨 짓을.]

"보고 있어라."

회 뜨듯 내용물 훼손 없이 그대로 옮겨놓은 마력 회로를 브루탈과 연결시킨다.

부포는 오른손에 장착.

벌거숭이었던 브루탈은 순식간에 강철의 갑주로 무장한 기사와도 같은 모습을 띄었다.

[브루탈을 개조했습니다.]

[성위가 한 단계 상승합니다.]

마력 회로를 연결해서 출력 자체가 올라갔고.

어마어마한 방어력과 장거리 공격 수단도 획득했다.

[대체 내가 만든 아름다운 병기로 무슨 짓을.]

"이걸로 끝이 아니다."

브루탈 한 구를 추가로 개조하니, 주포와 미처 뜯어가지 않은 부위가 조금 남았다.

추가 제작한 사이클롭스를 주포 옆에 세우고 다시 한번 [재구축]을 사용했다.

"주포가 진짜인데. 써먹어야 하지 않겠나."

사이클롭스의 눈과 주포를 연결.

포대를 머리 위에 얹어놓은 형태로 개조했다.

[사이클롭스를 개조했습니다.]

[성위가 두 단계 상승합니다.]

7성 만들기, 참 쉽죠?

주포는 사이클롭스와 합이 잘 맞는다.

눈에 영력을 집중해서 멀리 투사하는 공격 방식에 주포의 보조가 더해지면 사거리를 몇 배로 늘릴 수 있다.

화약을 사용해서 50킬로미터 씩 쏘는 것보다야 사거리가 짧지만.

원본보다 수배 먼 곳에도 레이저를 쏠 수 있으니, 훨씬 강해진 셈이지.

"직접 확인해보겠나?"

선후는 개조한 브루탈과 사이클롭스를 만져보고 마력을 불어넣어서 투사했다.

[...완벽한 결합이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내 강령술과 네 능력이 합해지면 보다 완벽한 병기를 만들 수 있다."

[진짜인가?]

"보면 알잖아."

선후의 전문 분야는 신준석과 다르다.

병기 전문.

마도과학과 현대 기술을 접목해서 만든 신병기 연구에 특화되어 있는 마법사다.

회귀 전에는 설득하지 못하고 죽였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일찍 낚아채서 다행이야.'

크흐흐흐.

구룡 중 하나인 건 알고 있었지.

단독으로 나선 덕에 빠르게 확보가 가능했다.

〔이럴 거면 언데드로 만들지 않고 설득해도 되었겠구나.〕

'확실하게 해야지.'

당근과 채찍은 번갈아가면서 줘야 하는 법이다.

목숨줄을 쥐고 있으니, 놈도 경거망동할 수 없지 않겠는가.

'구룡을 잡을 준비가 대충 끝나간다.'

유진은 킬킬거렸다.

*

유진은 구스타프 전차를 뜯어내어 개조한 대형 언데드들을 전선에 배치했다.

개조 과정에서 상당한 시간과 체력을 소모한 탓에, 배치를 마칠 때 즈음에는 구룡방 본대가 웨이하이 시가지에 진입해있었다.

"빌어먹을 언데드들."

"몇 번을 죽여도 되살아나다니."

뛰어난 무력을 보유한 아홉 머리들마저 치를 떨었다.

게이트의 핵이 만들어낸 괴물이야 그렇다 쳐도, 쓰러트리자마자 모종의 힘에 의해 언데드로 되살아나니 두 번 싸워야 했다.

1천이 넘는 숫자가 줄지어 이동하는데 국지적인 싸움을 계속 벌이다보니 전진도 늦어졌고.

직접적인 피해는 입지 않았지만 체력과 정신력 모두 소모되었다.

"일룡. 곧 목적지입니다."

"알고 있다."

일룡은 하늘 위를 노려보았다.

그의 기감을 건드리는 혼백의 존재.

'이쯤이면 알아챌 만도 하지.'

유진은 [고스트 아이]로 상황을 확인한 후, 스펙터를 바로 회수했다.

"사이클롭스. 방향은 서쪽, 각도 50도로 포격 개시."

우우우웅- 번쩍!

눈 위에 달아둔 주포의 홈을 타고 회전한 고농도의 영력이 허공을 격하며 날아간다.

처음에는 직선으로 뻗어나간 광선이 포물선을 그리며 아래로 추락.

막 시가지에 진입한 구룡방 본대를 향해 떨어졌다.

콰아아앙!

지축을 뒤흔드는 폭음.

송명석이 두 손을 말아 쥐었다.

[명중입니다.]

"그 정도로 좋아하기는 일러."

광선 다발이 구룡방 본대의 머리 위로 떨어졌지만, 피해는 경미했다.

장약으로 쏘아보낸 포탄과 달리 사거리가 멀어질수록 광선의 위력도 떨어진다.

대규모 방어 마법으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는 수준.

"2차. 발사."

지이이잉-!

광선 다발이 또 한 번 쏘아지고.

구룡방 본대는 더 이상 천천히 움직이지 않고 진격 속도를 올렸다.

"이제부터는 총력전이다."

일룡은 총 지휘를 삼룡에게 맡기고 선두를 맡았다.

그 뒤를 따르는 이룡.

언데드 군대를 쳐부수려면 머리를 쳐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였다.

"다 죽여!"

"으아아아!!"

구룡방 본대의 사기도 굉장히 높았다.

여태까지 고생이란 고생을 다 하면서 웨이하이 시를 주파했다.

그 원흉인 유진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분노를 터트리며 전력으로 돌진했다.

"기세가 좋은 걸?"

"한가하게 이야기할 때가 아니지 않니."

"주인 명이 없어서 기다리고 있던 것뿐이야."

[폴리모프]

본 모습으로 돌아온 파프너가 본 드래곤들을 이끌고 하늘 위로 날아올랐고.

송명석도 웨이하이 시에서 제작한 중급 언데드들을 지휘하며 시가지로 진입했다.

구룡방.

아홉 머리를 가진 용을 사냥할 순간이다.

229화 용살자(4)

히드라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화적인 괴물이다.

올림포스의 비밀병기라고 불리는 강대한 성좌.

헤라클레스가 치른 12가지 과업 중, 두 번째 시련을 주관했던 괴물.

머리는 아홉이요.

쓰러트려도 곧바로 재생해서 헤라클레스를 몰아붙인 몇 안 되는 강력한 존재다.

왜.

이 타이밍에 히드라 이야기를 하냐고?

'구룡방도 마찬가지다.'

〔그 아이처럼 강하단 말이더냐?〕

'아니. 머리를 쳐도 완전히 마무리하지 않으면 재생한다는 거다.'

중국은 넓다.

또한, 사람도 많다.

인구수가 한국의 수십 배이니 헌터도 그만큼 많겠지.

구룡방은 한 번에 모조리 머리를 베어내지 않으면, 금세 다른 실력자를 충원해서 조직의 빈틈을 메워버린다.

'원체 가지고 있는 게 많으니 실력자를 구하는 건 일도 아니야.'

천무문은 인원을 가려서 받는다.

창 우페이가 입단자들의 실력과 잠재능력을 일일이 확인해서 받기에, 유명세에 비해서 가문에 들어간 인원은 그렇게까지 많지 않았다.

반면 구룡방은 달랐다.

천무문이 암묵적으로 음지의 지배자라고 인정해주었으며.

일룡과 이룡은 무왕 창 우페이를 제외하고 중국에서 최고 수준의 헌터였다.

'특히 일룡을 잘라내지 않으면 구룡방과의 싸움은 끝낼 수 없어.'

모든 판돈을 걸고 건곤일척의 승부를 낸다.

유진도 바라는 바였다.

"이리로 오라."

웨이하이 시 곳곳에 세워놓은 검은 방첨탑.

방첨탑 아래에 묻어놓은 혼철들이 일제히 공명한다.

모두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는 상황.

유진이 의념을 퍼트리자, 혼철을 매개로 발동해놓은 융합기 [데스 필드]의 술식이 조금 변경되었다.

'데스 필드로 만든 언데드들을 모두 지배할 순 없지. 하지만 방향을 지시하는 건 가능하다.'

구룡방의 진격 루트에 깔아놓은 데스 필드는 절반.

나머지 반절의 영역에서는 몬스터들의 시체를 쉼 없이 언데드로 만들어서 숫자를 꾸역꾸역 불려놓았다.

물경 수십만에 달하는 언데드 군대가 유진의 지시에 따라 웨이하이 시가지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 전쟁을 위해 준비한 건 이뿐만이 아니었다.

콰아앙! 쾅!

강가에서 폭음이 울려 퍼지고.

하늘 위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 뼈 포탄이 시가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물의 흐름을 거스르며 올라온 고스트 드레드노트가 비축해놓은 뼈 포탄을 쉼 없이 쏘아냈고.

유령함대는 빼곡하게 서서 군함을 보호했다.

"일룡. 어떻게 해야 하요?"

"수작질에 넘어갈 필요는 없다. 적의 목적은 아군을 분산시키는 것이다."

구룡방 본대는 우직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안 낚이는군.'

괜찮아.

손에 챙겨놓은 패는 이쪽이 훨씬 많다.

[본 월을 사용합니다.]

쿠드드드득!

도로 여기저기서 솟구치는 하얀 뼈의 벽.

어마어마한 영력이 한번에 빠져나간다.

미리 땅 아래에 심어놓은 것들이 일시에 올라오면서 구룡방 본대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당황하지 마라. 천유진의 함정이다."

"뼈는 그렇게 단단하지 않아. 신중하게 부숴라."

본 월은 초급 네크로맨시.

오러를 사용해서 부술 것도 없다.

구룡방에서 데려온 인원들은 최소 5성의 무력을 지닌 이들.

신체능력만 발휘해도 뼈로 된 벽을 쉽게 부술 수 있다.

[고유 특성 - 백야를 사용합니다.]

[부정 충격방패 x 257을 사용합니다.]

추가적인 개입이 없었더라면 말이다.

본 월을 매개로 발현된 신성 주문.

구룡방 소속 헌터들은 진을 분리시킨 벽을 부수려다가 역류한 힘에 당해서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허억, 헉."

유진은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본 월을 대규모로 전개.

거의 동시에 [부정 충격방패]도 100 단위로 사용했다.

6성에 오른 데다 라이프 드레인 덕에 훨씬 높아진 성력(영력)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역천]의 가호를 사용합니다.]

모든 힘과 에너지를 원하는 대로 재구성할 수 있는 능력.

라이프 드레인으로 생기를 마력으로 치환하는 것보다 효율이 더 뛰어났다.

그 대신이라고 해야 하나.

죽을 만큼 아프긴 하지만, 별 수 없지.

수단을 가릴 상황이 아니다.

"조승철. 쏴라."

[파이어볼]

이글거리는 화염구를 손으로 잡고 역천으로 흡수와 재구성의 과정을 거쳤다.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 파이어볼.

그 대신 유진의 영력이 조금 차올랐다.

포션으로 화상 입은 손을 치유하며 같은 방법으로 영력을 채우고는.

"파프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무모한 짓은 적당히 하지. 그러다가 몸 상해. 주인.]

파프너는 짧은 핀잔과 함께 본 드래곤들과 편대를 이루어 구룡방 본대의 위를 덮쳤다.

[프로스트 브레스]

[원시 마법]

[사룡의 비행]

독기 대신 한기를 내뱉는 본 드래곤들.

살상력은 떨어지지만 대상에게 극저온의 냉기를 씌워서 얼어붙게 만드는 숨결이다.

대량의 본 월로 흐트러진 구룡방 본대의 진형.

본 드래곤들의 브레스가 흩뿌려지니 더 이상 밀집 대형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송명석은 정면을 막아라."

[존명.]

"최형태. 불멸자들을 이끌고 구룡방의 측면을 돌파해라."

[예.]

선후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초급 주문만으로 구룡방의 진형을 흩트려놓다니.]

영력의 양만 놓고 보면 초급 주문이라며 얕볼 수준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폄하할 순 없다.

마력, 혹은 영력을 무작정 많이 사용한다고 해서 초급 주문의 위력이 강해지면 높은 성위의 스킬이 필요 없지 않겠는가.

유진은 상황에 맞춰 최선의 주문을 사용했고.

천 단위의 구룡방 본대가 6성 헌터 한 명의 의도에 놀아나서 뿔뿔이 흩어졌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사격을 멈추지 마라."

[으우우우.]

사이클롭스와 브루탈들은 포신을 조금 아래로 내렸다.

구스타프 전차의 주포와 부포를 개조해서 달아놓은 장거리 포격 기능.

원본보다는 사거리가 떨어졌지만.

파괴력은 더 강해졌으면 강해졌지, 내려가지는 않았다.

"어때. 나를 따르고 싶은 마음이 막 샘솟지 않나?"

[라이프 포스 베슬을 돌려주고 그런 말을 했다면 설득력이 있었을 거다.]

"그건 무리."

뭘 믿고 그러겠니.

유진이 조소를 짓자 선후가 까득, 이를 갈았다.

*

일룡이 길게 숨을 내뱉으니 새하얀 김이 입가에 아른거렸다.

본 드래곤이 내뱉은 브레스에 직격.

주변의 온도가 -100도 아래로 떨어진 탓에 숨을 뱉을 때마다 쩍쩍 얼어붙는 소리가 났다.

"고작 이런 수로."

본 월과 신성 주문.

규모가 엄청나게 클 뿐, 스킬 자체는 강하지 않았다.

본 드래곤들의 브레스와 파프너가 쏘아낸 광선은 조금 위협적이었지만.

구룡방 본대의 수준이라면 충분히 대응 가능했다.

"진형을 분단시켜서 무엇을 하려는 건가."

"예?"

"천유진의 노림수를 알 수 없군."

"일단 태세를 가다듬겠습니다."

"구룡들이 각자 제 수하들을 다독이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시간을 줄 때가 아니니 전진한다."

일룡 휘하의 헌터들은 구룡방에서도 최정예 인원이었다.

아라한 길드에서 엄선한 이들과 비교해도 질적, 수적에서 모두 밀리지 않는 강자들.

지휘관인 일룡은 이신우처럼 광증도 가지고 있지 않아서 헌터들과 단체행동을 해도 문제가 없다.

상황만 놓고 보면 아라한 정예 헌터들을 마주했을 때보다 일룡을 상대하는 게 더욱 위협적이었다.

[이 앞으로는 못 갑니다.]

스르릉-.

검 두 자루를 쥔 송명석이 일룡의 앞을 막아섰다.

"나도 갈 데까지 갔군. 죽다 만 존재한테 무시를 당하고."

[그러면 퇴직이나 하십쇼. 주군에게 덤비다가 괜한 목숨 날리지 말고.]

"흠. 자네에게 그럴 실력이 있을지 모르겠다만."

[뭣이라...?!]

채애앵!

송명석은 사념을 내뱉다가 검 두 자루를 교차하며 지척까지 날아든 오러 블레이드를 막아냈다.

100미터 넘는 거리를 좁히며 순식간에 날아든 시퍼런 광채.

반월 형태의 오러 블레이드를 겨우 막아냈지만, 칼날이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인사는 충분한 것 같군."

[데들리 레이브]

상체를 앞으로 내민 채 빠르게 전진.

일룡의 등 뒤에 생긴 잔상들이 무수히 흩어지며 송명석의 시야를 현혹한다.

두 손에 쥔 도끼 두 자루가 형형색색으로 빛나고.

잔상과 함께 폭풍처럼 들이닥친 수십 가닥의 광채가 송명석의 전신을 난도질했다.

[모두 진짜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기감으로도 알아챌 수 없다.

송명석은 진짜를 간파하기를 포기, 텐터클 블레이드로 뽑아낸 오러 블레이드 다발로 도끼들의 궤적을 받아쳤다.

태태탱!

손맛이 느껴지는 것은 둘 뿐.

근데.

힘이 모자랐다.

텐터클 블레이드로 대량의 오러 블레이드를 뽑아낸 것은 좋았지만.

각 개체의 완성도는 그에 미치지 못했고.

급하게 발현한 오러 블레이드들은 8성 헌터의 돌진 공격 앞에서 한 순간도 버티지 못하고 모조리 파훼되었다.

"이제 그만 비켜주겠나? 자네를 부리는 주인을 봐야겠으니."

[빌어먹으으으을!!!]

투앙!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송명석의 목덜미까지 다가갔던 푸른 광채가 강한 반탄력과 함께 뒤로 밀려났다.

[안 늦었나.]

도끼를 거두게 한 주인공.

데스 나이트 이신우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푸른 귀화를 천천히 흩뿌리며 일룡을 노려보았다.

"그 솜씨. 들은 적이 있지. 아라한의 마스터, 이신우인가."

[알아봐주니 영광이군.]

"과연. 천유진이 망자를 부린다는 건 사실이었나."

[죽어서도 죽지 못하는 신세일 뿐이다.]

"흐. 자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지. 여기서 비켜주면 복수를 해주겠네."

[나에게 자유의지는 없다. 날 되살린 자의 명령대로 적을 막을 뿐이다.]

8성의 경지에 도달했던 이신우.

되살아난 후에는 데스 나이트가 되어서 역보정을 받고 7성에 머무르고 있지만, 죽기 전의 능력 덕에 송명석보다 뛰어난 무력을 지녔다.

선두를 맡은 송명석이 위기에 처했을 때 나서라는 지시를 내려둔 상황.

[빌어먹을, 입니다.]

유진이 몰래 내린 지시를 읽어낸 송명석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저 자. 강하다.]

[알고 있습니다. 전 길드장 나리.]

[합공으로 붙들어야 한다.]

[전직 8성이면서 이길 자신이 없는 겁니까?]

[못 이긴다. 이 상태로는.]

이신우는 생전의 광기가 느껴지지 않는 청아한 사념으로 대꾸했다.

"내 수하들이 가만히 있어줄 거라 생각하나?"

[부하들은 이쪽도 있습니다.]

"좋다. 그럼 어울려주도록 하마."

시간을 끌겠다는 명백한 의도.

무리해서 돌파하려고 하면 송명석과 이신우가 뒤를 잡을 게 분명했다.

'둘 중 하나를 부순 후에 강제로 뚫고 간다.'

유진이 시간을 벌려고 한다면.

더 빠르게 몰아쳐서 계획을 무너트려야 한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법은 주도권을 쥐는 것.

이 자리에 서기까지 무수한 싸움을 치렀던 일룡은 시가지 너머에 있을 유진에게 휘둘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남은 자들은 알아서 잘 해줄 터이니."

구룡 중 다섯이 본대에 남아있다.

자신이 발을 빼도.

남은 이들이 분전하면 큰 문제없이 언데드 군대를 막아낼 수 있으리라.

결정을 내린 일룡은 두 팔에 힘을 주었다.

[기어 체인지]

[빅 웨폰]

도끼 두 자루를 하나로 겹치고는.

그대로 날을 덧대어 합친 후에 높이 들었다.

맹렬하게 회전하면서 거듭 증폭되는 오러 블레이드.

도끼가 사선을 긋자, 풍압만으로 폐건물 몇 채가 두 동강나면서 쓰러졌다.

"빠르게 돌파한다."

230화 용살자(5)